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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후 첫 사형수 시인 兪鎭五(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1)

    ◎詩 낭독 탁월한 분단시대 최고 저항시인/중학생때 일본아이 자주 때려 형사 등살에 渡日/1946년 ‘국제청년데이’ 축시 낭독 10만 군중 갈채/지리산 문화공작대장 활약중 압송돼 사형 언도/‘아내와 월북했다’ 가설 바로잡는일 ‘국민의 몫’ 변혁기 문학은 사회와 역사 발전의 거울로서의 역할을 맡아왔다.해방의 공간에서 또 독재와 민주화의 공간에서 우리 문학이 줄곧 본연의 자리를 지켜왔느냐에는 많은 평가들이 엇갈리고 있다.그 가운데 새로운 세기는 다가오고 이제 우리 문학의 새좌표 설정이 요구되고 있다.이를 위해 그동안 우리 문학에 새겨져온 숱한 갈등과 번뇌의 흔적들을 문학평론가 任軒永 교수를 통해 재조명한다.주1회씩 연재될 任교수의 글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우리 문단의 비사들이 많이 포함될 예정이어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 시인이,“아아,사랑은/가고 돌아오지 않네!… 허공으로 사라졌네”라고 애절하게 노래하던 한 시인이 총탄의 이슬로 사라졌다.때는 1936년 8월19일,무대는 스페인 그라나다 근교 어느 과수원이었다. ○‘한국판 로르카’ 시인 투사 ‘1927세대의 샛별’이란 별명을 가진 민요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는 스페인 내전중 38세의 젊음을 피살로 마감했다.이 비참한 최후는 그의 시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어 일약 세계적인 서정시인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노도 같았던,광풍 같았던,홍역 같았던 우리의 해방 공간과 분단의 틈새에는 ‘한국판 로르카’가 없었을까.독특하고도 마력을 지닌 시 낭독으로 청중을 열광시켰다는 그 로르카에 못지 않게 10만 참석자들을 뜨겁게 달궜던 한 시인이 있었다.바로 유진오(兪鎭五)였다. 활동으로 본다면 유진오가 ‘한국의 로르카’가 아니라 로르카가 도리어 ‘스페인의 유진오’가 됨직할 만큼 28세에 문학적 생명을 총살당한 이 시인은 세계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투사였다. 이제 통일을 향한 민족문학사는 분단의 장막에 가려졌던 문학인과 문학적 사건들을 21세기적 가치관으로 재조명할 처지에 있다 바로 그 첫 대상이 1950년 6월29일 긴급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분단시대 최고의 저항시인 유진오이다. 이 시인의 생애에 대한 연구자료는 문학사가 정영진의 ‘육탄시인 유진오의 비극’(저서 [통한의 실종문인] 게재)과 작가 강준식의 중편소설 ‘어둠을 찾아서’(문학사상 1990.3)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이 어딘지 조차도 미궁에 있었는데,이 두 자료와 증언에 의하면 유진오는 서울사람이라고 보는게 옳을 것 같다.아버지 유치구(兪致九)와 어머니 양만선행(梁萬善行·전주 출신)의 4남중 막내로 논산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노량진에서 서울시내 전체를 공급지로할 규모의 지물포 도매점을 경영했었는데 사업차 잠시 논산에 가있을 때 유진오가 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넉넉한 집안으로 맏형은 검사,둘째는 외교관,셋째는 일본에 귀화,그리고 막내가 시인인데,그는 겉보기에는 얌전했으나 중동중학 시절 음악 미술 스포츠 등 다방면에 재능을 가졌으며 특히 기타를 잘 쳐 부민관의 어떤 음악회에 찬조출연할 정도였다고 전한다. ○사업가 집안의 서울사람 큰 키에 좋은 체격이었던 그는 중학생 때부터 일본사람들을 너무나 증오하여 일본아이들을 때리다가 경찰서에들락날락 했었다고 전한다.이런 행동 때문에 계속 고등계형사의 시달림으로 국내에서의 진학이 어려워 1941년 도쿄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에 입학했으나 역시 형사의 등살에 못이겨 메이지(明治)로 옮겼지만 여전해 일본의 저명한 국수주의자가 만든 분카가쿠인(文化學院)에 들어가 동양문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제 말엽 징병기피를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해방직전에 밀입국했다.1945년 9월 그는 오장환의 추천으로 등단,당시 패기있는 젊은 시인들(金光現 金尙勳 李秉哲 朴山雲 兪鎭五)과 ‘전위시인집’(노농사 1946.10)을 내 화제를 일으켰다. 1946년 9월1일,국제청년데이(International youth day) 기념행사가 훈련원 (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1915년 10월3일에 제1회 대회를 가진 국제청년데이란 진보적인 청소년들의 세계적 조직으로 이듬해부터는 9월 첫 일요일에 하던 행사를 1932년 이후 9월1일로 바꿔 실시했다. 한국에서는 해방후 처음 열린 이 청년축제에 10만명이 운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이날 식전에서는 평론가김오성(金午星)이 구속되는 등 이미 파란이 예상되었는데,시인 유진오는 축시낭독을 위해 특별초청을 받았다.문장 한토막씩을 띄어가며 격정적으로 특유의 몸짓을 해가며 청중을 사로잡는 것으로 이미 명성이 나있던 유진오로서는 가장 많은 독자 앞에 서게 된 기회이기도 했다. ○친일파를 ‘망령영감’ 야유 “눈시울이 뜨거워지도록/두 팔에 힘을 주어 버티는 것은/누구를 위한 붉은 마음이냐?”고 서두를 꺼낸 유시인은 “왜놈의 씨를 받아/소중히 기르던 무리들이/이제 또한 모양만이 달라진/새로운 점령자의 손님네들 앞에/머리를 숙여/생명과 재산과 명예의/적선을 빌고 있다/누구를 위한/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고 포효하면서 “썩은 강냉이에 배탈이 나고/뿌우연 밀가루에 부풀어 오르고도/삼천오백만불의 빚을 걸머지고”있다면서 미군정을 정면으로 매도함과 동시에 보수세력(친일파)을 “망령한 영감님”이라 야유하면서 “지옥으로 쫓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여 참석자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그의 시낭독 기교가 탁월하다는 말은 곧 미군정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여,행사 이틀뒤인 9월3일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피검,분단문학사의 첫 필화사건의 주인공으로 부각된다.이 낭송의 투사시인에게 문학가동맹측은 ‘인민의 계관시인’이란 찬사를 보내면서 석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나 10월 군사재판에서 이 시인은 1년 징역형을 선고 받아 약 9개월 복역한 뒤 석방(1947.5)되었다. 문학가동맹의 문화공작대 제1대 소속으로 경남지방을 순회(47.7)하고 돌아온 이듬해 그는 행운의 해를 맞는다.시집 ‘창’(정음사,48.1)을 낸데 이어 5월,창경국민교 여교사 김금남(金今男)과 결혼,1년 뒤 딸(香濬)을 얻는다.겉보기로는 이 시인에게 가장 행복했던 이 순간은 너무나 짧았다. 그는 조직으로부터 지리산 문화공작대장 파견 지령을 받고 입산(49.2.28), 여순병란(麗順兵亂)사건의 주모자 김지회(金智會)부대에 합세하나 ‘싸우다 쓰러진 용사’란 시를 낭독하는 등 한달간 머물다가 하산명령으로 내려오던 중 남원지역 민보단(民保團)에 피체(49.3.29)돼 서울로 압송,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49.9.30)를 받는다. 집안 어른이 앞장서 안재홍 신익희 등 정계 거물들의 탄원 서명과,시인과 이름은 같으나 전혀 다른 유명한 헌법학자 유진오(兪鎭午)를 동원하여 무기감형(49.11.7)에 성공,서대문교도소에 복역 중 그는 운명적인 전주로 이감된다(50.3).그 석달 뒤 일어난 6·25는 서울의 모든 죄수들이 석방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대전 이남지역 교도소 수감자들 중 특수한 사람들은 ‘긴급처형’ 되었는데,유진오는 6월29일 새벽 30여명과 함께 총살당했다고 기록들은 전한다. “아,솔직히 말하면 나는 살고 싶다.살아서 내 생존의 확인인 시를 쓰고싶은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사시나무 떨리듯 엄습해 오는 이 공포는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어째서 어머니의 자애로운 얼굴이 보고 싶으냐? 어째서 밤이면 두고 온 아내와 딸아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어지는 것이냐?” ○신익희 등 거물 탄원 서명 논픽션에 가까운 강준식의 소설 ‘어둠을 찾아서’에서 인용한 유진오의 옥중수기중 한 부분이다.이렇게 해서 한 시인,민주주의와 자유를 사랑하던 한 시인은 사라졌고,분단체제는 그의 모든 미학과 사랑까지 불온시해 버렸다. 참고로 그의 작품은 평론가 오성호의 노력으로 ‘창’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음을 덧붙인다. “시인이 되는 것은 급하지 않다.먼저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겠다”던 이 시인의 불온성은 해방공간의 홍역이었을 따름이지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로 전이될 성질은 아니다.지금은 오히려 역사적 진실의 복원이 절실한 시기가 아닌가.여기까지가 문학평론가의 몫이다.왜냐 하면 아직도 유진오의 이야기는 끝이 안났기 때문이다. 그와 약간의 인척관계에 얽혀있는 작가 강준식의 소설에 따르면 유진오는 처형의 순간을 교묘히 넘겨 살아남아 어린 딸을 형수에게 맡기고 아내와 월북했을 수도 있다는 설득력있는 가설을 제공하고 있다.이쯤되면 대체 비평가의 글이란게 하잘 것 없는 거짓부렁이일 수도 있음을 통감한다.누가 문학사를 바로 잡을수 있는가.국민과 정부와 연구자 모두의 협력이 절실하다면 과장일까.
  • 친일의 군상:11/여자 밀정 裵貞子(정직한 역사 되찾기)

    ◎伊藤博文의 꼭두각시로 매국·배족 선봉에/1885년 도일… 이등박문 만나 ‘스파이 교육’ 받아/러 견제·고종퇴우 막후활동… 만주지역서 독립운동가 탄압/태평양전쟁때 韓人 부녀자 100여명 위안부로 내몰아/해방후 반민특위에 체포된뒤 후회의 눈물/시골 아전의 딸로 출생 대원군 실각후 집안 몰락/어릴때부터 조정에 반감/한때 官妓여승으로 전전 1949년 2월 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姜明珪 조사관 일행이 서울 성북동 언덕길을 급히 오르고 있었다. 한 양옥집 앞에 다다른 姜조사관 일행은 백발의 한 노파를 끌어내 수갑을 채우고 남대문로 반민특위 사무실로 연행했다. 그 노파의 나이 79세. 겉으로 보기엔 여느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가 반민특위로 잡혀오자 특위 요원들이 이 노파의 얼굴을 보려고 姜조사관 주위로 모여들었다.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그 나이에 수갑에 채워져 끌려왔을까? 과연 이 노파는 누구인가? 裵貞子(1870∼1952). 흔히 이름 앞에 ‘요화(妖花)’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배정자가바로 그 노파였다. 정사(正史)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는 한국근대사의 이면사(裏面史)에 ‘일제의 앞잡이’로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배정자급(級)에 드는 친일파는 몇 안된다. 한말 일제의 ‘을사조약’ 강제체결에 협조하였고 ‘한일병합’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조선인 항일세력 탄압에 앞장섰었다. 친일파 가운데 우두머리급에 드는 친일파였다. 해방후 반민법 위반으로 반민특위에 잡혀온 여성피의자는 총 6명. 그들중 첫번째로 잡혀온 사람이 바로 배정자였다. 흔히 ‘여자 스파이’의 대명사로 ‘마타 하리’를 든다. 고급창녀 출신의 마타 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스파이로 활동한 혐의로 1917년 프랑스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됐다. 배정자를 바로 이 ‘마타 하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배정자는 1870년 경남 김해 고을에서 아전노릇을 하던 裵祉洪의 딸로 태어났다. 아명은 분남(粉男). 부친은 1873년 대원군 실각후 그 졸당(卒黨)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서 처형되었다. 모친은 이 충격으로 눈이 멀어버렸다. 그가 세살때의 일이었으니 그의 초년은 순탄치 못했다. 이후 그는 모친과 함께 유랑 생활을 하다가 밀양에서 관기(官妓)로 팔렸으나 도중에 뛰쳐나와 양산 통도사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우담(藕潭)이란 승명(僧名)으로 목탁을 두들기던 그는 2년만에 다시 절을 뛰쳐나와 배회하다가 밀양 관청에 체포됐다. 여기서 우연히 은인을 만났다. 당시 밀양 부사 鄭秉夏는 그의 부친과 알고 지내던 사이로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일본으로 가서 살도록 주선해주었다. 1885년 15세 되던 해 그는 일본인 밀정 마쓰오(松尾彦之助)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에게 뜻밖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배정자는 갑신정변 실패후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사 安경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를 통해 金玉均과도 알게 되었다.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물굽이를 틀어준 사람은 바로 이 김옥균이었다. 김옥균은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 그의 빼어난 미모에 끌린 이토는 하녀 겸 양녀로 자기 집안에들여앉히고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라는 일본이름을 지어주었다. 裵貞子의 ‘貞子’는 여기서 생겨났다. 이토는 재색(才色)을 겸비한 그를 장차 고급 밀정(스파이)으로 키울 요량으로 수영·승마·사격술·변장술 등을 가르쳤다. 소위 ‘밀봉교육’을 시킨 셈이다. 일본으로 간지 9년만인 1894년 배정자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공식적으로는 신임 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하야시(林權助)의 통역이었으나 본분은 일제의 밀정. 첫 임무는 당시 조선황실 내의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공사관에 머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엄비(嚴妃·고종의 계비)의 친인척을 통해 황실과 선을 댔다. 고종(高宗)은 미모에다 출중한 일본어 실력을 갖춘 그를 총애하였다. 당시 한 신하가 고종에게 “비기(秘記)에 가로되,갓 쓴 여자가 갓 쓴 문(門)으로 출입하면 국운이 쇠한다 하였습니다. 통촉하옵소서”라고 아뢴 바 있다. 양장에 모자(갓)를 쓴 그가 대안문(大安門·덕수궁의 정문으로 현재 명칭은 ‘大漢門’임)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러일전쟁 직전 친러파는 고종의 신변안전을 위해 ▲평양 천도 혹은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 천거(遷居)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비밀이 누설돼 일본측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고종으로부터 이 정보를 빼내 일본공사관에 제공한 장본인은 바로 배정자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 3월 이토가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자 배정자는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오빠 裵國泰는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으로,동생은 경무감독관(현 경찰청장)으로 승진하였다. 이토를 등에 업은 그는 밀정이자 막후 권력자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일제와 함께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넣기도 했다. 이 무렵 그는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기세는 1909년 이토가 통감자리에서 물러나고(6월) 다시 4개월 뒤 하얼삔에서 安重根 의사에게 살해됨(10월26일)으로써 한풀 꺾이고 말았다. 이토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구세주로 등장한 사람은 ‘한일병합’후 부임한 조선주둔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元二郞)였다. 아카시는 배정자의 과거 밀정경력을 높이 평가하여 헌병대 촉탁으로 채용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자 그는 일본군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서는 이 지역에서 수년간 군사첩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봉천(奉天·현 瀋陽)주재 일본영사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만주지역 거주 조선인들의 동향을 정탐,귀순공작을 담당했었다. 배정자는 1920년 일제가 옛 일진회(一進會)의 잔당들을 규합,만주지역 최대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를 창설할 때 배후인물로도 활동하였으며 나중에 이 단체의 고문을 맡았다. 이 단체는 일제가 독립운동가 탄압과 체포를 위해 조직한 무장 첩보단체로,초대회장 崔晶圭는 대한제국 시절 참위(소위)출신이었다. 매국노 李容九의 한일합방 청원을 지지했던 崔는 보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나중에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한편 만주지역에서의 맹활약(?)으로 독립투사 진영에서 처단대상자로 지목하자 배정자는 1922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가 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가 경무국 촉탁으로 다시 고용하였다. 나중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600여평의 토지를 받기도 했는데 은퇴한 뒤에도 총독부로부터 월급을 받으며 지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본군 위안부 송출업무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70 노구에도 불구하고 조선여성 100여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까지 끌고 가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강요하였다. 해방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취재차 형무소를 찾은 한 기자에게 그는 “따끈한 장국밥 한 그릇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 애걸하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정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한낱 늙은 죄수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제와서 전비(前非)를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신대도 달게 받고 가겠습니다. 다만 제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법정 최후진술을 통해 뒤늦게 자신의 죄과를 후회했다. 배정자의 형량과 얼마동안 징역을 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의 죽음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종로구청에 보관돼 있는 호적에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2월27일 서울 성북동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묘하게도 그가 죽은 날짜는 그의 출생일과 같은 날이었다. 어릴 때 조정(朝廷)에 대한 증오 때문에 조국을 배반,매국녀(賣國女)가 된 배정자는 해방후 조국에서 8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裵貞子의 남성편력/빼어난 미모에 화려한 경력 소유/결혼·동거 등 거쳐간 남자 7∼8명 裵貞子는 빼어난 미모와 화려한 경력에다 연령·민족을 불문한 ‘남성편력’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첫남자’는 田在植. 한 때 관기로 있을 때 대구 중군(中軍) 田道後의 아들 전재식을 만나 사랑에 빠졌었다. 배정자의 일본행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면서 재회,결혼했다. 이 사이에서 田有和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경응의숙(慶應義塾)에재학중이던 전재식이 병사하자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 두번째 남편은 일본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玄暎運. 1895년 당시 외부(外部·현 외무부) 번역관(주임관 6등)이던 현영운은 배정자의 도움으로 10년만에 육군 참장(종2품·현 준장)으로 승진,농공상부 협판(차관)직을 맡았다. 배정자는 현영운과 1년 가까이 살다가 이혼하였다. 그리고는 현영운의 후배인 朴榮喆(일본육사 15기 졸업,함북도지사·중추원 참의 역임)과 결혼하여 5년간 동거하다가 또 이혼하였다. 이후 일본인 오하시(大橋),은행원 崔모,전라도 갑부 趙모,대구 부호의 2세 鄭모 등과도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대륙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중국인 마적 두목과 동거한 적도 있다. 1924년 57세로 밀정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민주열사 열전:5/金景淑 YH무역 사원(정직한 역사 되찾기)

    ◎자본·독재 억압에 처절히 항거/빈농의 딸… YH무역 폐업 맞서 몸던져/노동자 권리 확보 ‘값진 희생’으로 빛나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던 79년 8월 11일 새벽 2시.세번의 자동차 경적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깼다. 순간 마포 신민당사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1,000여명의 경찰들이 4층 농성장으로 진입,곤히 잠들었다가 깨어 황망히 대피하려던 YH노조원들을 에워쌌다. 경찰은 여공들과 신민당 당직자들을 무차별 구타하며 한명씩 대기중인 ‘닭장차’에 쑤셔넣었다. 그러나 2시간여 전까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결의문을 읽던 金景淑 노조 상임집행위원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후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을 거뒀다. 경찰은 그녀가 전경들이 진입하자 왼팔동맥을 끊고 투신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확한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경찰은 도시산업선교회를 사건 배후세력으로 지목하고 文東煥·印名鎭·徐京錫 목사,李文永 전 고대교수,시인 高銀씨 등을 구속했다. YH사건은 70년대 노동운동의 정점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金景淑 열사가 있었다. 70년대를 열며 全泰壹 열사가 노동운동의 암흑기를 깨고 그 싹을 틔웠다. 그 위에 70년대 노동운동의 기틀이 다져졌고 이를 지키려는 민주노조의 치열한 저항의 절정이 바로 YH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여야의 극한 대립을 불러와 당시 金泳三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부산·마산사태,10·26사건이 터지며 유신독재는 막을 내렸다. YH노조 농성의 직접적 원인은 회사의 일방적인 폐업방침을 철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YH무역은 66년 재미교포 張龍虎씨가 100만원의 자본금과 10명의 종업원으로 시작한 가발수출업체였다.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70년 4,000여명의 종업원을 둔 국내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했다. 한 밑천 잡은 張씨는 동서 秦東輝씨에게 사장자리를 물려주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미국 지사를 통한 무역을 구실로 여공들이 피땀흘려 만든 가발 300만달러어치를 미국에서 처분,그 대금으로 현지에서 백화점과 목장,빌딩 등을 구입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秦씨도 YH무역에서 얻은 수익금으로 해운회사를 차려 회사를 떠났다. 거기에 가발수출업이 사양화하고 석유파동이 겹치면서 회사는 79년 4월 폐업공고를 내기에 이르렀다. 76년 결성된 YH노조는 청계피복노조,동일방직노조 등과 함께 몇 안되는 ‘민주노조’중 하나였다. 당시 사회운동의 큰 쟁점거리이기도 했던 ‘민주노조’는 대부분의 산별·단위노조가 어용화한데 비해 노동자 권리를 위해 독자적 활동을 하는 노조를 의미했다. 金景淑씨는 YH무역에 민주노조가 있는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景淑이처럼 똑부러지게 일하고 노조활동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어려운 생활중에도 항상 명랑했고 후배들이 무척 따랐지요” 당시 노조사무장이던 朴泰連씨(44·주부)의 회고다. 그녀는 전형적인 빈농의 딸이었다. 세마지기의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빚보증을 잘못 서 그나마 날려버리고 광주시내에서 행상을 하다 그녀가 8세때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가 날품을 팔아야 했기에 그녀는 세살 터울의 남동생 俊坤씨(38)를 돌보며 자랐다. 국민학교 5학년부터 방학때면 누에고치 공장에 다니며 돈을 벌다가 73년 15세가 되던 해 상경했다. 그녀는 일기에서 “내가 배우지 못한 공부를 가르쳐서 동생만은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었다”고 당시의 심경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기대했던 서울생활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 지독한 저임과 그나마도 떼어먹는 악덕기업주들이 많았던 것. 그때부터 모순덩어리의 사회에 눈을 뜨기 시작한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젊고 싱싱한 나이에 우리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공장 안에서 여러 형태의 억압을 받으며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혼탁한 먼지 속에 윙윙거리는 기계소리를 들으며 어언 8년동안 남은 것은 병밖에 없다.…” 20여년이 지난 오늘 YH사건과 金景淑 열사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당시 석유파동으로 인한 극심한 불황과 오늘의 IMF사태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경제적 고통의 터널은 닮은 꼴이다. 그때 자본세력과 결탁한 독재정권은 폐업·해고 등으로 그 부담을 주로 노동자들에게 지우려 했다. 金景淑씨는 그것에 저항한 격렬한 투쟁 속에 희생된 ‘한떨기 꽃’이었다. IMF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오늘의 자본세력도 임금을 낮추고 정리해고를 실시하고 있다. 고도성장을 위해 희생한 노동자들은 오늘의 IMF위기에서도 가장 큰 희생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YH사건과 金景淑 열사의 죽음은 결코 지나간 과거의 일일 수만은 없다. ◎유가족·동료들은 지금…/모친 최영자씨=아직도 딸 가슴에 묻고 ‘회한’/동료 최순영씨=법률상담소 내 권익보호 앞장 “아무것도 모르고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해부렀지” 어머니 崔英子 여사의 회한의 넋두리다. 崔여사는 딸이 죽고 이틀후 강남시립병원에서 죄인마냥 ‘3분만’에 장례를 치러야 했다. 뼛가루마저도 무등산자락에 뿌렸다. ‘딸이 큰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한 것. “너무 억울하고 불쌍하게 갔어요. 야무지고 착해 모두들 며느리 삼고 싶다고 했는데…” 崔여사는 지금도 돈많이 벌어 동생 학비 대려면 서울로 가야한다고 말하던 딸의똘망똘망한 눈망울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야 딸이 월급을 제대로 못받아 풀빵으로 끼니를 때우며 동생학비와 생활비를 보냈다는 것을 알고 통곡했다고. 누이가 보내준 돈으로 전남기계공고를 다녔던 俊坤씨는 “그때는 잘 몰라 누이가 불쌍하기만 했지만 지금은 자랑스럽다”고 했다. 결혼해 딸 셋을 두고 있으며 광주 금호타이어에 다니고 있다. 당시 구속됐던 노조지부장 崔淳永씨와 사무장 朴泰連씨는 부천지역 여성노동자회 회장을 차례로 맡는 등 노동운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崔씨는 또 부천시의회 의원을 지내고 현재 가정법률상담소를 내 여성노동자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강제 귀향조치됐던 230여명의 여공들은 대부분 가정주부가 됐고,87년부터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있다. 당시 배후 ‘불순세력’으로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던 徐京錫·印名鎭·文東煥·高銀·李文永씨는 그 이후에도 활발하게 인권·통일·민주화 운동을 벌였으며 다시 감옥에 가기도 했다. ◎동료 崔淳永씨 인터뷰/“모순된 시대상황 고발”/독재정권에 우리 힘 과시… 민주노조 존재 확인/“폐업 철회 아니면 죽음을” 혈서 보고 모두 놀라 “景淑이의 죽음은 모순적 시대상황에 대한 고발이었고 민주노조의 존재 확인이었지요” 당시 노조지부장이었던 崔淳永씨(46)는 “독재정권이 그렇게도 깨뜨리려는 민주노조의 힘이 결코 약하지 않음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YH사건에 의미를 부여했다. 崔씨는 당시 농성하는 노조원들도 이미 폐업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면서,“그러나 민주노조를 깨뜨리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金景淑 열사의 투혼은 무서웠다고 한다. 4월 농성을 처음 시작할 무렵 그녀는 ‘폐업철회 아니면 죽음을’이란 혈서를 써서 노조회의에 들고 나와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또 “어차피 깨지는 싸움이지만 우리를 주목하고 있는 다른 민주노조들을 위해 순순히 물러나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농성장소를 신민당사로 옮긴 것도 사건을 최대한 공론화하여 정권에 큰 부담을 주려는 의도였다고 했다. 崔씨는 경찰이 배후세력으로 도시산업선교회를 지목하고 그들의 지시를 받아 자살조까지 만들었다는 등 터무니 없는 사실을 조작해 순수한 여공들을 욕보였다고 분개했다. 또 여공들을 각 도별로 버스에 태워 강제 귀향시키고 부모에게는 협박조로 ‘딸조심’을 시켰다고. 이로 인해 얼마간 대다수 여공들이 ‘가택연금’을 당했고,부모에 의해 ‘강제로’ 결혼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崔씨는 뒷얘기를 소개했다. □金景淑 열사 연보 ▲1958년 전남 광산군 비야면에서 출생 ▲1965년 아버지 김용귀씨 병으로 사망 ▲1972년 광주 남국민학교 졸업. 누에고치 공장에서 일함 ▲1973년 상경. 한풍섬유 태진산업 등 봉제공장에서 미싱사로 일함 ▲1976년 YH무역 입사 ▲1977년 노조가 세운 야학 ‘녹지중학’입학해 2년후 졸업. 검정고시 준비 ▲1978년 노조 소그룹 ‘차돌이’ 그룹장으로 활약 ▲1979년 8월11일 새벽 농성 진압중 신민당사 뒷편 지하실 입구에서 쓰러진채 발견돼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2시30분 쯤 숨짐.
  • 金大煥 타악기 연주자(이세기의 인물탐구:180)

    ◎드럼연주·미각 일가이룬 ‘자유인’/자신의 북 여섯개 북채로 풀어낸 천상의 리듬/한해 절반 연주여행중에도 하루 8시간 연습/쌀 한톨에 새긴 반야심경 283자 기네스북 올라/주문제작 오토바이를 악기 사용 퍼포먼스도 인사동에 가면 金大煥이 있다.검은 모자에 검은 옷차림,그는 언제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깡마른 체구에 안광이 빛나고 두눈에는 이상을 추구하는 열정이 담겨 있다. 그의 집이 있는 압구정동에서 새벽 4시면 일어나 세서(細書)·미각(微刻)에 골몰하고 하오에는 인사동 연습실에 나와 북연습에 파묻힌다.일년의 절반이상을 뉴욕과 도쿄,유럽무대를 누비는 세계적인 타악기 연주자에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세서의 달인이다. ○이슬·번개를 닮은 음악 먼저 그의 음악은 ‘이슬과도 같고 번개와도 같다’는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의 세계다.가장 빨리 사라지는 이슬에서 가장 크게 번뜩이는 천둥번개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섭리를 쳐내기 위해 그의 손가락은 마디마다 부르트고 피멍이 맺혀 있다.그러나 그의 북연주는 물이 흐르듯이 흐르는 유장한 여운이 일품이다.처음에는 징과 챔벌,로토톰과 대고를 한꺼번에 쳤으나 지금은 그가 만든 북하나에 여섯개의 북채로 다양하고 현란한 리듬을 형성한다. 인간의 귀로 잡아낼 수 없는 침묵의 소리,마음의 눈으로나 들을수 있는 천상의 멜로디는 두번다시 재현되지 않는 즉흥연주로서 ‘가슴속의 추억’으로 남을 뿐이다.민속학자 심우성은 ‘그것은 전율과 경이로움의 연속이며 그 속에는 거문고 소리까지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일본의 권위있는 음악전문지 ‘무신조’도 ‘약속된 악보없이 형식과 틀을 파괴한 그의 연주는 연주자의 마음가는대로 연주되는 프리 뮤직’이 강점이라고 평한다. 어떤 음악과 도 어울리고 어떤 장단도 구사하는 그의 테크닉은 ‘소리는 사라져버린다는 원리를 실천하는 행위’로서 공연기획자 강준일에 의하면 ‘그것은 눈부신섬광’일 수 밖에 없다. 그런가하면 그가 쌀 한톨속에 써넣은 ‘반야심경(般若心經)’ 283자는 세계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그의 붓글씨는 책상이나 바닥에서 쓰는 것과는 달리 선 채로 왼쪽에서부터 거꾸로 쓰는 좌서(左書)가 특징이다.현미경으로 봐야만 알아볼 수 있는,먼지보다 작은 세서도 글자마다 반듯하게 균형이 잡혀있고 획이 살아 있다.이 글씨를 쓰기 위해 바늘보다 더 가늘고 첨예한 세각도(細刻刀)를 직접 갈고 닦는 등 그의 손은 찔리고 베이고 성할 날이 없다. 바람에 흩날리듯,한바탕 춤추듯이 극(克)과 극(劇)이 극치에 다다른 그의 글씨를 보고 동양철학의 김용옥은 ‘왕휘지의 서법보다 더 분방하다’고 감탄했고‘그의 작품앞에선 타이베이 고궁 속의 세각도 빛을 잃는다’고 쓴 적이 있다.그가 미각에 빠지게 된 것은 지난 68년 중국에 가서 세서 전시를 보고 나서다.과연 ‘인간의 한계’란 어디까지인가.나도 해낼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한국에 돌아오자 쌀알에다 글씨를 쓰기 시작했고 수백 수천개의 쌀알을 깨트린후 5년만에야 반야심경을 완성했다. 그에게는 두가지 호가 있다.음악을 할 때는 흑우(黑雨)이고 글씨를 쓸 때는 여수(如水)다.우(雨)와 수(水)는 두드린다,때린다(beat)는 뜻이다.노자에 의하면 ‘여수’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는 의미이고 ‘흑우’ 역시 감추어진 소리를 찾아내는 소리의 탐구자로서 북을 치지 않아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극소·극대의 경지를 터득하려는 극기 훈련이랄 수가 있다.그러나 그가 글씨를 쓰던 북을 치던 그것은 그의 음악을 위한 한 도정에 불과하다. ○“왕휘지 서법보다 분방” 20세기를 살아온 모든 예인들의 역정이 그러하듯 그에게도 ‘비천과 허영이 엇갈린 역사의 뒤안길’에서 외롭게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다.인천 동산중학교에 다닐때 그림과 조각,악기연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북소리가 좋아서 밴드부에 들어가 북을 치기 시작했다.졸업후 공군군악대를 거쳐 제대하자 이번엔 미8군 무대에서 이봉조 길옥윤 등과 연주,신중현과 재즈클럽을 만들기도 했으나 70년대에 들어서자 트럼펫의 강태환트리오와 공간사랑 무대에서 재즈 활동을 펼쳤다. 10년 이상 신나게 북을 두드리다가 어느날 ‘모든 박자는 일박(一拍)에 통섭(通涉)된다’는 것과‘한번의 때림으로 음악의 완성’을 깨닫자 지금까지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연주를 위해 도쿄로 진출했다. 그 곳에서 아프로­아프리칸음악의 선구자격인 미국의 세계적인 트럼펫주자 레오 스미스,일본의 정상급 프리재즈 피아니스트 야마시타 요스케 등과 유럽 각지의 축제와 미국 인디언페스티발에 참가하면서 세계가 알아주는 대스타가 되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특별주문 제작된 오토바이 하레이 데이비슨을 타고 미국 동서횡단,남북종단의 연주에 나서는가 하면 오토바이를 악기로 사용하는 퍼포먼스는 세계 음악인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올해도 일본 시코쿠에서 출발하는 2,000㎞의 대장정과 이탈리아 아비뇽 예술제에 다녀왔고 중국과 미국연주를 남기고 있다.이른바 섬세의 극치인 미각에 신기원을 세우면서 역동적 드럼연주로 정상에 오른 상반된 두 분야의 거목인 셈이다. 절대로 매스컴을 타지 않고 포스터에도 자신의 사진을 싣지 않으며 낯가림이 심해서 남앞에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을 사랑하는 지식층 사이에는 그의 추상회화적 음악,첨단음악은 오래전부터 ‘신화적 존재’로 회자되어 왔다.연주여행을 하면서도 반드시 8시간의 연습을 감행한다. 가족은 내조에 극진한 부인 權明姬씨와 딸하나. ○‘一拍에 通涉’ 섭리 깨쳐 재능있는 사람을 찬양하기를 꺼리지 않는 김용옥은 ‘이 땅에서 나와 같이 숨쉬고 있는 이만한 예술가’가 있음을 경탄하면서 ‘그의 기(氣)의 아름다움은 공부의 완성이며 완성으로 발출하는 심미적 세계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다’고 경의를 표한다.보이지 않은 ‘흑우’와 들리지 않는 ‘묵우(默雨)’를 음악으로 성취한 그의 득도(得道)는 북이나 글씨가 아니더라도 그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가장 자유로운 예술가’로서 우리의 가슴속에 이슬같고 파도같은 긴 여운을 언제까지나 울려주게 될 것이다. ◎그의 길 ▲1933년 인천 출생 ▲1946년부터 인천 동상중 브라스밴드 ▲1952년부터 북 연주활동 ▲1953­57년 공군군악대 ▲1961년부터 미8군 무대활동 ▲1968년 세서각(細書刻) 시작 ▲1968∼72년 월남전 참가 ▲1975년 한국그룹사운드협회 회장 ▲1978부터 강태환트리오멤버 활동 ▲1985년부터 일본무대 진출 ▲1985년 ‘반야심경(般若心逕) 전문 백미실물(白米實物) 세서 완성 ▲1988년 북 개인발표회(동숭아트센터), LA에서 산타페까지 2천㎞ 대장정 연주,인디언 페스티벌 참가 ▲1990년 세각 세계 기네스북 인정 ▲1991년 ‘흑우(黑雨)’ 1집(일본출반) 기념콘서트(학전소극장) ▲1992년 김대환 미각반야심경전 ▲1993년 김대환북잔치(신라호텔),회갑기념 ‘울타리굿’(예술의전당),‘프리재즈페스티벌­블랙비트’(서울 연강홀 및 도쿄 산토리홀)연주 ▲1994년 흑우 김대환박물관 개관 ▲1995년 CD ‘흑우’ 2집,‘묵우(默雨)’1,2집 출반,하레이데이비슨 파이프사운드 연주(문화일보홀) ▲1997년 아시아 라이더스 발족,일본 시코쿠 페스티발및 오사카 서예라이브전 ▲1998년 그로벌 라이더스와 인디언 페스티벌 연주,이탈리아 아비뇽예술제, 오사카 간사이 페스티벌,일본 시코쿠 오토바이 연주 등 해마다 200여회 이상 일본·미국·유럽 연주
  • 무용평론가 李丙姙(이세기의 인물탐구:178)

    ◎백조의 나래접고 무대비평 30년/애정어린 패러독스로 무용계 ‘미운오리’/평론 1,000여편… 시들지 않는 필력 자랑/1年 3∼4회 태평양 넘나들며 세계화 앞장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을때 무리 중 아무도 여자에게 돌을 던진 사람은 없었다. 60∼70년대를 거쳐 무용계를 독주하면서 악명을 떨치던 무용평론가 李丙姙. 아마도 그의 이름을 들으면 지금도 손사래를 흔드는 이가 더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투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사물의 핵심을 투철하게 꿰뚫는 이병임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그의 정의를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당시 한국예술분야 중 무용은 가장 뒤떨어진 분야로 치부되어 음악과 무용을 평론하는 원로 박용구씨마저 ‘평론할만한 의욕을 일깨워주는 무용공연이 없어서’ 무용평론에서 손떼게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비평에 생소한 무용계와 그와의 사이는 갈등이 심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의 평론활동은 시작부터가 우여곡절의 반복이었다. 지난 75년 ‘한국문학’지에 실린 수필에 보면 그는 “나는 무용계의 생태같은것은 전혀 감안하지 않고 젊은 혈기만으로 기성세대에 항거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나의 당돌함은 무용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고 쓰고있다. 예절과 겸허가 없는 그의 패기는 무례로 간주되었으며 종횡무진의 이 맹랑한 문제아 출현에 논리부재의 무용계는 긴장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전국무용협회 회원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한동안 ‘바위밑에서 영원히 사멸되는듯이’ 보였으나 사나운 파도속에 휩쓸리면서도 끝내 가라앉지 않았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저력을 보였다. 그렇다면 그의 어떤 점이 비난받아 마땅한가. ○“창작력 없는 춤에 분노” 예를들어 그는 남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한 원로의 춤을 보고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전통도 제대로 답습하지 못한 저런 춤을 추느냐. 창작력이 없이 추는 춤은 부끄러움에 앞서 분노가 느껴진다”고 비난했다. 지난 74년 문공부가 주최한 한국무용용어 통일위원회에 한 중견 무용인이 위원으로 입회를 희망할때도 ‘실력이 없다’는 이유로 노골적으로 거부하는가하면 국립무용단 창단때는 “왜 기라성같은 스타들이 많은데 권력있는 자가 국립산하에 들어오려고 하느냐”고 한 특정인을 가리켜 몰아붙이기도 했다. 더이상 분노를 참을수 없는 무용계는 ‘곡필(曲筆) 평론가’‘소피스트케이션’을 내용으로한 투서와 전화로 신문사에 그의 평문을 싣지 말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고 이때 한 신문은 “집단이 한 개인을 놓고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다. 최근 평론가는 있고 창작이 없는 상황에서 이병임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일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평론을 쓸때마다 ‘코피가 터지고 옷이 찢어지는’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그는 ‘논쟁은 대화’이며 ‘무용에 대한 애정’임을 매몰차게 강변했다. 협회에 사과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중재하려 했으나 그는 “사실을 말한것뿐이다. 절대로 굽힐수 없다”고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다녔다. 온갖 비난의 화살이 빗발치는 속에서 앙칼지게 일어서려는 그의 ‘용기’를 가상히 여긴 碧史 한영숙씨는 “우리 무용계에도 재인(才人)이 있다”고 그를 두둔했고 연극 ‘햄릿’의 연출가이며 예총회장이던 고 이해랑씨는 “날카로운 필봉을 완강하게 견제하려는 세력때문에 그의 카리스마와 패러독스는 계속될수 없었으나 매너리즘에 허덕이던 무용계에 활기와 자극을 준건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우리 무용계 才人’ 높이 평가 이병임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태어나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 상임이사를 지낸 李命九씨와 白世鉉씨의 6남2녀중 둘째. 신교육을 받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학교보다는 연극과 무용공연에 따라다니거나 비를 맞고 거리를 방황하면서 ‘최승희같은 무용가’가 될것을 꿈꾸기도 했다. 이화여대 입학후 김보남 김천흥 한영숙을 사사, 졸업후 부모의 강요로 60년에 결혼, 2년만에 남편과 헤어져 68년 조흥동 개인발표회 무용평을 쓰면서 평단에 데뷔했다. 서울에서만 600여편, 지금까지 1,000여편을 발표하고 있다. 미국에 가서 그는 영국의 무용평론가 리처드 버클이 영국의 유력지 더 타임스에 ‘니진스키 평전’을 기고한 것을 보고 스승인 벽사등 원로무용가의 평전에 손대기 시작했고 지난 88년 LA타임스에 국립무용단 미주공연평을 비롯, ‘한국의 멋’을 기고하기도 했다. 미주 한국무용협회 발족에 이어 85년 미주 예총 창립, 미주 무용단을 이끌고 한국전통문화연구원이 주최하는 고궁 공연에 참가하는가 하면 격년으로 고국의 인간문재인 김천흥 한영숙 이매방 강선영씨와 육완순 김말애 박명숙등을 미국에 초청,공연을 갖기도 한다. 특히 100만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문화단체로 성장한 미주 예총이 있기까지는 ‘언제나 공격적인 이미지’와 ‘마치 투쟁이나 하듯이 굴하지 않는 용기와 진취성’으로 그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우리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역설한 결과다. 그의 대학선배이자 오랜 무용의 동반자인 현대무용가 육완순씨는 “그의 정의감과 무용이 성장할수 있게 뼈아픈 조언을 해온것은 사실”이라고 조언한다. 자녀는 USC에서 연극을 전공한 아들 김정구씨와 UCLA를 나온 화가 딸 유나씨가 있다. ○민주한인사회에 긍지 심어 누가 뭐래도 그는 한때 ‘이병임시대’를 독주한 여류다. 여전히 시들지 않은 가시돋친 장미꽃같은 필력을 지키고있으나 이제는 상대방의 가슴에 못을 박는 비평이 아니라 말속에 뼈를 감춘 담예논도(談藝論道)로 무용계의 발전을 모색하는 문제제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무용과 함께 한평생을 살아왔고 ‘미주 한인사회에 우리 예술의 긍지를 심어준 공로가 지대하다’는 점에서 혼자 외롭게 투쟁하는 그에게 조국이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무용계는 말하게 되었다. 쉴새없이 움직이면서 살아있는 흔적을 그때마다 확고히 남기는 그는 더이상 소피스트케이션이나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다. 우리 무용의 확대와 세계화에 앞장서기 위해 한해에도 서너차례씩 태평양을 넘나들면서 민간 사절의 몫을 해내는 역동적인 메신저로 높이 발돋움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길 1936년 서울 서린동 출생 1958년 이대 체육과 졸업 1958­64년 풍문여고 교사 1968년부터 무용평론 활동 1968­74년 한양대강사및 전임강사·이대대학원강사 1973년 대한무용학회창립,상임이사 1975년 세계무용가회의 참가 1981년 도미 1983년 미주 한국무용협회창립 1985년 미주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미주예총) 창립및 부회장 1985년부터 인간문화재 미주초청 1986년 이병임 자전적 무용공연 1988년 진달래어린이무용단 창단 1989­현재 미주 예총회장 1989년 88올림픽1주년기념 세계 한민족예술제미주예술단 예술감독, MBC주최 이산가족찾기운동예술제 참가 1991·98년 우리춤보존회 회장 1993년 대전엑스포 전야제 참가 1994·98년 LA한인회 자문위원 1997­현재 민주평통 고문 1997년 한국전통문화연구원초청 ‘한국전통문화예술제’ 예술감독 1998년 국립민속박물관공연 참가 LA시장 감사패(87·88·91·92·95년) 서울시 주최 ‘세계를 빛낸 한국인’ 선정(95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감사패(91·92·95·96년) LA시의회의장 감사패(92·94·97년) ‘한국무용교육의 재검토’‘해방30년 한국 현대무용의 정리’‘전통문화의 올바른 정립’등 다수
  • 서양화가 李大源(이세기의 인물탐구:175)

    ◎빛을 데생하는 화단의 신사/때묻지 않고 따뜻한 성품 작품에 그대로/화폭마다 생명력 약동 축제분위기 넘실/‘물방울처럼 영롱한 화경’… 독자 영역 이룩 만약 벚꽃이 만개한 눈부신 봄날에 함박눈처럼 떨어지는 꽃잎을 본 사람이라면 서양화단의 원로 李大源 화백의 그림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쏘는듯한 붓길은 비로드에 싸인 보석더미와 그 보자기를 펼치는 순간의 차갑고도 투명한 광채(光彩)의 이미지다. 겨울에는 오색 찬란한 꽃망울이 예감되고 무더운 장마에는 무지개빛 서광이 번뜩인다. 눈송이도 빗방울도 온통 색채의 의장(意匠)이 장식되어 못위에 내리는 빗줄기가 송곳처럼 수면에 꽂히는가하면 색채의 향연이 옥구슬처럼 농원에서 굴러다닌다. 광활한 공간에 만약 그의 그림이 한점만 걸려 있어도 그곳에는 생명의 결실과 축제의 분위기가 넘칠 것이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그림은 미술’ 임을 확고히 지켜나간다. 아무리봐도 지루하지 않고 아무리 봐도 행복감에 젖어 그림속에서 흘러나오는 탐미적 향기에 도취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초기의 여거도(與居島)등 섬이나 산그림을 보면 웅걸(雄傑)한 호방함과 분방함이 도사리지만 그림의 내면은 오늘의 별빛 미래를 산뜻하게 예고했다고 할수 있다. 예를 들어 야트막한 산야와 그 아래 펼쳐진 과수원풍경,수목에서 솟아나는 활기와 생동감은 하루의 아침과 저녁이 다르듯이 ‘늘 같은 것을 보아도 화가의 눈에는 항상 다르게 보인다’는 말대로 가장 신선한 그림을 탄생시킨다. 그가 그림을 통해 추구하려는 것은 자연의 일부를 화폭에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지니고 있는 생명의 가능성과 미묘한 조율(調律)을 변주로 뿜어내는 것이다. ○자연의 생동감 變奏 그러기 위해서 그때마다 떠오르는 영감과 감상에 의존하기보다 다시한번 새롭게 사물을 관찰하여 이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관용으로 작가의 내면까지 화면에 담아낸다. 이른바 살아있는 힘으로서의 자연을 포착하기 위해 스스로 나뭇잎에 스치는 바람, 연못에 이는 잔물결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자연은 무의미하게 멀리 서있는 부동의 풍경화가 아니라 햇빛에 찰랑거리고 바람에 나부끼는 살아숨쉬는 소우주로서 재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만큼 그의 붓길은 속도감과 운동감으로 쉴새없이 움직이고 짧은 사선과 직선과 곡선이 그때마다 의외성을 다양하게 표출해 낸다. 평론가 박래경은‘상식적이지 않은 시선과 범상치않은 구도설정은 단순하면서도 참신한 맛을 추가하여 추상화된 그림세계에 연결되고 있다’고 예언한바 있다. 예를들어 지난 60년에 그린 ‘담쟁이’는 불꺼진 창과 밋밋한 벽으로 기어오르는 메마른 덩굴에 머물고 있으나 그로부터 2년후인 62년에는 같은 벽으로 기어오르는 덩굴이라도 빨강과 황금색등 색채의 축연을 조직하는 것이 남다르다. 이른바 12계절이라해도 좋을만큼 시절따라 시간따라 환상적인 보랏빛이 발휘되고 같은 유형의 색깔이 변조되어 맨 마지막 단계에서 오리지널리티의 완결성과 정신적 탐구를 성취해낸다. ○59년 첫 개인전 열어 이경(二耕) 이대원, 가장 흔히 회자되기는 그는 화단의 신사요 멋쟁이다. 그의 그림세계에는 예술가들이 자칫 가질수 있는 퇴폐적인 낭만이나 고뇌나 파토스 대신 아파테이아의 초연(超然)이 깃들여 있다. 그와 경복고 동문에다 절친했던 고고학자 김원룡박사에 따르면 ‘말쑥한 성품으로 태어나서 평탄한 청춘시절을 보내고 만년소녀로 소문난 아름다운 미인의 내조를 받으며 정상의 예술가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의 총장을 거쳐 집에서는 딸들과 훌륭한 사위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과연 이대원은 팔자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에다 ‘항상 멋있는 옷을 입어 화단의 드레서로 소문나 있고 미식가애 주가에다 집과 학교와 파주농원에까지 화실이 세군데나 되어 화단의 귀족’ 같은 존재지만 그의 어느 일면에도 ‘속물취(俗物臭)’는 찾아볼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예술가적 면모는 어느장소에서나 시와 정취와 인간미를 잃지 않는다. 지성적 풍모에 단정한 매너로 인해 언뜻 보기엔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그와 사귄 사람들은 ‘볼수록 때묻지 않고 따뜻한 성품’ 에 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평소에는 화단의 김흥수 권옥연과 잘 어울리고 최기원과 이만익, 삼성문화재단의 손기상 상무와도 각별한 사이다. 경기도 문산에서 농림회사에다니면서 그 일대 꽤큰 과수원을 가지고 있던 一耕 李鍾林씨와 金善伊씨 사이에서 삼남중 막내. 파주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서울로 이사해서 청운공립보통학교에 다닐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중학교 3학년때 선전에 연속 입선, 경복고를 졸업할때까지 미술공부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던 부친이 미술학교만은 강경하게 반대하여 지금의 서울대인 경성제국대 법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림만을 그렸고 59년에 첫개인전, 한때는 우리나라 화랑의 효시로 기록되는 반도화랑을 운영한 적이 있다. 가족은 의사이던 부인 李鉉金 여사와의 사이에 딸 다섯, 63년간 살고 있는 유명한 혜화동집은 지난 89년 출간된 ‘혜화동 50년’의 바로 그 무대다. ○한때 반도화랑 운영 그의 미술역정은 파리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에 의하면 ‘출중하고도 예외적인 인물’로서 ‘이대원은 빛을 그린다기보다 빛을 데생하는 화가’란 말로 압축된다. ‘선과 점과 조직을 사용해서 그것으로부터 그의 붓은 그가 창출한 수많은 색채로 형태를그려내기’ 때문이다. 그의 엄청난 재능들은 레스타니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의 그림속에 있는 모든 것은 화사함과 고요함과 기쁨’에 틀림없다. 현대작가중에서 이러한 자연적인 교훈을 자신의 창작으로 성취한 사람은 별로 흔치않다. 물방울처럼 튀기는 영롱한 화경에서 그가 이룩한 이대원식 표현이란 바로 ‘이대원 자신의 화창한 인생의 음률’일 것이다. 거기에는 국경이 없으며 범우주적인 진솔한 정서와 삶의 즐거움만이 투영되어 날이 갈수록 싱싱하고 청청한 빛을 발한다. 사람을 반기는 그의 색채점묘화는 보는 이의 가슴에 루비나 사파이어같은 보석의 광채를 언제까지나 눈이 부시게 비춰주게 될것이다. ◎그의 길 ▲1921년 경기도 문산 출생 ▲1938­40년 선전 출품 ▲1945년 경성제대 법과졸업 ▲1959년 첫개인전(중앙공보관화랑) ▲1959­60년 국제자유미술전출품 ▲1962­68년 신상전·동인전출품 ▲1967­86년 홍대 미술대 교수·대학원장·학장·총장 ▲1971년 개인전(반도화랑) ▲1973년 한국근대미술 60년전·한국현역화가 100인전(국립현대미술관) ▲1975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위원 ▲1977년 개인전(현대·신세계) ▲1978년 중화민국 중화예술원 명예철학박사,영국국제하계미술전 출품 ▲1979년 뉴욕 한국화랑초대개인전 ▲1981년 회갑기념전, 성균관대 명예철학박사, 파리 살롱도톤느 출품 ▲1983·85년 현대화랑 개인전 ▲1986년부터 홍대 명예교수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한국박물관회회장,개인전(강남현대) ▲1988년 부산개인전 ▲1988­91년 국제현대미술제 및 아시아국제미술전 출품 ▲1989년 개인전,대한민국예술원회원 1993년 대한민국 예술원회장 ▲1995년 ‘이대원 1990­95년’개인전(갤러리 현대) 국민훈장목련장(73년) 5·16민족상(88년) 대한민국예술원상(9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94년) 오지호미술상·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95년) 역서 柳宗悅저 ‘한국과 그 예술’(74년)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96년) 화집 ‘이대원’(81년) ‘이대원,혜화동 50년’(89년)
  • 첼리스트 鄭明和(이세기의 인물탐구:173)

    ◎사색을 길어올린 웅숭깊은 음색/선율마다 무르익은 서정성과 넉넉한 여유/테크닉보다 음의 조화 이뤄내는 경지 터득/80년대 음악 멀리하다 “삶의 목적” 깨달아/드로브자크 협주곡 백미… 제자양성에 보람 첼리스트 鄭明和의 손은 남자손보다 크다. 어깨도 남자처럼 넓다. 잘 생긴 용모에다 목소리도 밝고 건강하다. 시원시원하고 밝은 성격때문인지 음악도 스케일이 크고 넓고 심오하다. 단순히 넓고 클뿐만 아니라 톤에는 힘이 살아있고 음의 마디마다엔 유연하고 확고한 뼈대가 꿈틀거린다. 그에게선 발톱을 세운것 같은 독이나 과시감은 찾아볼수 없다. 단지 무르익은 서정성과 육화된 음악의 포도주가 내면에서 출렁거릴 뿐이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는 타인에 대한 포용력과 너그러움으로 남의 잘못을 가려줄 줄 안다. 초면이라도 구면같이 굴고 좋은 환경에서 잘자란 숙녀답게 반듯한 예의와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다. 만사에 대범한 편이지만 음악에 관해서만은 치열성과 철저성이 대단하다. 승부근성이 투철하여 그가 이화여중에 다닐때는 친구 하나도 사귀지 못한채 낮과 밤은 온통 첼로연습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전국남녀음악경연대회에서 첼로부문 1등상, 서울예고 재학중에 이미 두번의 개인독주회를 가졌고 고2때인 60년에는 한국학생문화사절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도쿄와 오사카 순회연주등 그의 이름은 ‘첼로의 천재’로서 소녀시절에 음악계의 중앙에 우뚝서는 존재였다. 오랜 연주경력탓에 그의 음악은 언제부턴가 외형보다 내면을 추구하게 되었고 테크닉보다는 음과 음의 연결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내는 능란한 경지를 터득하고 있다. 음악평론가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장인 이강숙씨는 ‘정명화의 음악은 팽팽한가 하면 느슨하고 여유로운가 하면 팽팽한 긴장감이 돋보이는 가운데 자신감에 찬 연주로 청중의 마음을 움직인다’고 평한다. 그는 과연 무리와 과장이 없이 음악의 ‘순리’를 존중하며 음악의 도리에 순종한다는 자세를 지킨다. 기교에 침몰하거나 장식음으로 청중을 혼도시키기보다 음과 음으로 보석타래를 꾸미듯이 장구하고도 값진 음악을 그때마다 선사해준다. 화사하게꽃가루를 뿌려대는 바이올린의 변화무쌍과는 달리 첼로만의 사색과 철학은 마치 동굴에서 길어올린 갖가지 원석처럼 장중과 비장미마저 풍긴다. 정명화를 새삼 설명할 필요는 없다. 서울 명동의 유명한 음식점이었던 고려정의 정준채씨와 이원숙씨 사이의 7남매중 딸로 둘째. 줄리아드음악원에서 첼로의 거장 피아티골스키를 사사했고 60년대 중반 뉴욕 링컨센터에서 첫연주를 가졌을때 뉴욕타임스는 ‘멋과 재능 그리고 기교의 연주가’로 평했고 워싱턴포스트는 ‘가장 보배로운 첼리스트’로 표현하여 지금까지도 이 찬사는 그를 따라다니는 대명사가 되고 있다. 그때까지 동생인 바이올린 정경화나 피아노를 치던 정명훈보다 정명화의 이름은 그들을 리드하고 있었고 그만의 음악적 매력으로 해 세계 첼로계에서도 선두그룹을 달리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명성을 쌓던 시기인 66년, 고국에 돌아와 첫리사이틀을 열었을때 음악계의 대부이던 평론가 유한철씨는‘예의 타고난 활달함과 연주가다운 낙천성이 몸에 배어 다이내믹한 역성감(力性感)을 실감시켜주는 연주’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세계에 내놓아 자랑할수 있는 젊은이’로 정명화의 장밋빛 미래를 예고한 것도 그 무렵이다. 제네바국제음악콩쿠르에서 첼로부문 1등상을 수상하던 71년에 전세계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당시 AP통신 기자이던 具三悅씨와 결혼, 부군은 유엔 50주년 총괄국장으로 있다가 최근에는 유니세프총재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자녀는 꽃별과 꽃샘. 장녀 꽃별이 지난주 뉴욕에서 결혼했다. 80년대 로마에 머물던 시기에는 잠깐이지만 첼로연주를 멈춘 적이 있으며 가장 자신있게 연주하던 드보르자크 첼로협주곡마저 낯설게 느껴지자 문득 ‘좌절의 시간이 오히려 음악적으로 가장 성숙한 시기’, ‘첼로야말로 무덤까지 끌고갈 동반자이자 삶의 목적 자체임을 깨달을수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94년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교수로 재직하면서 같은해 8월 그는 실로 12년만에 고국에서의 독주회를 가졌고 작곡가 이영조가 그를 위해 작곡한 ‘첼로와 장구를 위한 도드리 1’ 연주는 또한번 음악계에 센세이셔널한 화제와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농현을 뜻하는 피치카토와 글리산도, 높은 음역에서 낮은 음으로 급격히 낙하하는 소리의 대비, 명상적인 지속음과 장식음등 우리만의 얼이 담긴 가야금과 거문고, 해금과 아쟁이 할수 있는 음악적 요소를 첼로로 펼치면서 우리의 소리를 세계음악언어의 반열에 올려놓는 계기를 만들었다. 과연 한국 첼리스트의 자존심과 실력을 마음껏 과시한 자리로 그가 연주를 끝냈을때 객석에서 길게 이어지는 박수갈채는 그칠줄을 몰랐다. 조용하게 데뷔한 연주자가 있는가하면 센세이셔널하게 등장하는 연주자도 있을 것이다. 조용한 강이라고 해서 모두가 깊은 것은 아니며 센세이셔널은 그만한 화제성과 가치성을 지닌다. 일찍이 세계의 매스컴으로부터 ‘발군의 테크닉과 명쾌한 해석, 특히나 그의 드보르자크 첼로협주곡은 보헤미아의 향수가 사무친 연주’라는 평과 함께 그의 연주는 지금도 고국의 땅을 밟는 순간의 탄성과 향수와 사랑이 간절하게 얼룩져 듣는 이의 심금을 뜨겁게 울린다. 어릴때는 피아노 성악 바이올린 사이에서 무엇을 전공할 것인가를 방황했고 20대에는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들으면서 자신의 음악성과 장래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도 했으며 30대에 이르자 명성을 지키기에 급급했고 40대가 넘자 비로소 모든 치열성과 명성에서 벗어나 그는 진정한 음악인의 자유로움을 구가하고 있다. 그래선지 한국예술종합학교 객원교수가 되어 조국과의 연대를 끈끈히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게된것을 어느때보다 감사하고 행복과 희열을 느낀다고 말한다. 음악을 관조하고 무르익은 예술성을 내면에 삭이는 시기에 서서 그는 물이 흐르는 듯한 유연함과 여유로움으로 그만의 서조와 광채를 여전히 잃지않고 있다 □그의 길 ▲1944년 서울출생 ▲1961년 서울예고 졸업, 도미 ▲1961부터 줄리아드음악원 및 남가주립대졸업, 거장 레오나드 로즈, 그레고르 피아티골스키 사사 ▲1969년 미 닉슨 대통령 초청 백악관연주,로스앤젤레스필하모닉 협연 ▲1971년 제네바국제음악경연대회 최우수연주상 수상 ▲1972년부터 런던 BBC교향악단을 비롯, 런던필, 베를린 R IAS, 스위스로망드, 로테르담 워싱턴교향악단등과 협연(지휘 주빈메타 루돌프 켐페 안탈 도라티 줄리니등) ▲1976년 뉴욕 링컨센터 바이올린 정경화, 피아노 정명훈과 ‘ 3남매’연주,전미순회연주, 파블로 카잘스탄생 100주년기념연주 1982년 KBS교향악단초청 협연(세종문화회관 대강당) ▲1991년부터 정트리오 음악축제 ▲1994년 국악과의 만남독주회 ‘장구와 첼로를 위한 도드리1( 이영조작곡)’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1995년 UN창설 50주년 UN마약퇴치 친선 사절로 세계순회 연주 ▲1997년 뉴욕에서 유니세프주최‘북한 어린이돕기 모금음악회’ ▲1998년 워싱턴 케네디홀 뉴욕 카네기홀서 ‘나라사랑’음악회, 미국 버몬트 국제음악제연주, 이착펄먼 서머프로그램 참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빙교수 미국 ‘엑설런트 2000’상(92년) 청소년 차이코프스 키콩쿠르 최고지도자상(97년) 아름다운 소리 ‘한·꿈·그리움’(96년 CMI음반레이블 )출반
  • 발레리나 金純晶(이세기의 인물탐구:170)

    ◎‘동양적 발레’ 자신만의 이미지/타고난 연습벌레… 고난도 테크닉 모두 소화/안무하고 춤춘 ‘신화의 끝’ 발레팬 사로잡아 지난 해는 발레리나 金純晶에게 여러가지로 의미있는 해였다. 87년 국립발레단 창단 25주년 기념으로 무대에 올렸던 ‘노틀담의 꼽추’를 10년만에 다시 춤춘 것과 그가 몸담고 있는 동덕여대에 무용과가 정식 출범한 것.거기다 제자들과 ‘공기의 정(精)’을 공연했고 그가 안무하고 춤춘 창작발레 ‘머물며’가 민속춤제전에서 안무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그중에서도 ‘노틀담의 꼽추’는 표현영역의 확장과 무용수로서의 도약(跳躍)을 보여준 결정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이 무대에서 그는 에스메랄다의 야성과 순결한 여심을 생기발랄과 스며드는 슬픔으로 표현하여 관객을 감동시켰다. 그의 요염함은 이미 86년 ‘튜닉 팬터지’에서 발휘되기 시작하여 그가 춤추었던 우아한 ‘백조의 호수’와는 달리 클래식의 베일을 활짝 벗고 ‘깨끗하고 담백한 느낌과 탄탄한 춤집’을 각인시켰다. ○‘머물며’로 안무상 수상 또한 쌍꺼풀이없는 고전적인 눈매와 긴 팔다리는 ‘동양적 발레’라는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무리가 없었다.이후 ‘돈키호테’를 마지막으로 프리마의 지위와 호칭,주어진 공간에서는 자신의 내부에 숨겨진 철학과 사색을 쏟아놓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87년 발레단을 떠나 그는 자신만의 창작발레에 몰두하게 되었다.만약 그가 지금까지 대극장무대에 머물러 있었다면 오늘의 변화된 김순정의 창작발레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타를 만들지 않는 국립발레단에서 명실공히 5년간의 프리마시대를 마감하고 이번엔 부군인 朴丙煥씨(외교통상부 근무)를 따라 발레의 본고장인 영국에 유학,런던 라반센터와 로열발레 아카데미에서 마치 춤추지못해 한이라도 된 듯이 밤낮없이 연습에 매달렸고 몸을 회전시키는 필루에트와 푸에테,아티튀드와 바느질 스텝인 부레에 이르기까지 난이도가 높은 갖가지 테크닉들을 몸의 일부처럼 익혀나갔다. ○발레 본고장 런던 유학 그리고 2년만에 영국에서 돌아와서 선보인첫작품 ‘빛깔’은 ‘그의 모든 것이 그속에 다 들어있다’는평을 받을 수있었다.그때도 여전히 무용수로서 특출했던 프리마의 매력을 상실하지 않았고 격조와 힘과 꿈틀대는 생의 갈망이 춤속에 건재하고 있었다.백색 의상에 꽃을 들고 유년기의 환상을 다스리는 그의 빛깔은 거의 발레작품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었으며 국립발레단의 클래식발레를 사랑하던 팬들은 더이상 김순정만의 순백의 감수성과 정결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안무하고 춤춘 작품중에서 ‘신화(神話)의 끝’도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간주곡과 비제의 ‘카르멘’ 전주곡에 의존한 이 작품은 ‘강렬한 음악으로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 드라마틱한 분위기’로 젊은 발레팬들의 눈길을 일시에 사로잡았다. 맨발과 토슈의 대비,발끝에서 튕기는 힘의 배분은 ‘감정처리의 성숙함’과 ‘신성(神性)에서 벗어나려는 인간다운 갈망’을 보여주었고 결국은 신과의 대결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으로 겸허하게 마무리짓는 것이 특징이다.평론가 김경애는 ‘몸선의 지시언어(指示言語)’는 시종 아름다움을 동반하면서도 필요이상으로 덧칠하지 않고 사유와 성찰,자신의 기질탐구를 세세히 제시하기를 잊지않았다’고 평한다. ○신선한 현대적 무대 창출 과연 정열적이고도 순발력있는 싱그러움으로 그는 젊은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끊기듯 이어지는 감정의 전이는 불협화음적인 파괴미(破壞美)마저 창조하는 가하면 억압속에서 자유롭고 싶은 의지를 스타의 카리스마로 온몸에 담아낸다.이 역시 뛰어난 기교없이는 불가능한 표현이며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일상적인 모습은 어느때보다 신선한 현대적 무대를 창출해낸다.이른바 성격을 연출하는 춤에서 고난도의 기교를 무기로 하는 고전발레에 이르기까지 전천후로 춤추는 김순정의 기량은 나이에 비해 이미 모든 것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한 차원이라고 할수 있다. 그가 무용을 하게된 것은 어머니 김남숙씨가 딸의 남다른 재능을 발견하여 10살되던 해 남산어린이회관에 있던 부설 무용반에 데려가면서 부터다. 그곳에서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를 배울수 있었고 고3때 이화여대가 주최하는 전국무용콩쿠르에서 최우수상,서울대 사대 체육과에 진학하면서 이대와 경희대로 이어지는 무용계의 인맥에서 다소 소외되는 감이었으나 피나는 연습으로 외로움을 달래면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최고의 발레리나가 될 것을 굳게 다짐했다’고 말한다.대학 3학년때 무용협회가 주최하는 신인무용콩쿠르에서 글라즈노프 작곡의 ‘사계’로 문공부장관상,다음해 동아무용콩쿠르 대상을 수상하면서 교사자격증을 반납한채 지체하지않고 그는 국립발레단에 입단했다. 별로 커보이지 않는 체구에 작고 야무진 얼굴,억척스럽다고나 할만큼 노력에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그는 화려한 세트나 기괴한 몇개의 동작만으로 창작성을 부르짖는 주변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신에서 땀이 배어나는 춤’으로 삶의 절규를 간절하게 춤추어 낸다.‘일상의 지루함으로부터,정의가 죽어버린 부당함으로부터,위선과 가증스러움이 포장된 이중인격이 판을 치는 속에서’ 오로지 탈출하기 위해 그의 온몸은 솟구쳐 오르는 열기로 무대에서 언제나 활활 타오르고 있다. ○자신의 단점 보완 극복 그런 중에도 끊임없이 자기를 지키고 남의 장점을 존중하며 자신의 단점을 보완,극복하기를 잊지 않는다.가족은 그의 예술을 이해하여 역사와 철학 등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는 부군과의 사이에 아들(재영·10) 하나.부친은 서울대 경영대 김원수 교수다. 긴 명상속에서 작품을 분석하고 기획하는 그는 디베르시티망과 트릭까지도 철저히 연구하는 학구파로서 내면에 깔린 심성을 건드려 김순정의 춤을 이룩하려는 야심에 차있다.그의 꿈은 러시아의 마야 풀리체스카야나 스승이던 이시다 다네오,불멸의 폰테인 마곳처럼 70세가 넘어서도,아니면 그 이상 무대에서 춤추는 영원한 현역으로 남고 싶은 것이다. □연보 ▲1960년 서울출생 ▲1978년 이대주최 전국학생무용콩쿠르 최우수특기상 ▲1979년 서울예고졸업 ▲1982년 신인무용콩쿠르 발레부문 특상 및 문공부장관상 ▲1983년 서울대사대 체육과졸업(임성남 박혜련 진수인 사사),동아무용콩쿠르 대상,국립발레단초청 ‘백조의 호수’및 ‘세헤라자데’출연 ▲1983­87년 국립발레단에서 ‘처용’‘배비장’‘춘향의사랑’‘고려 애가’외 ‘호두까기인형’‘카르멘 조곡’‘노틀담의 꼽추’등 주역 ▲1985­92년 충남대 한성대 숭의여전등 출강 ▲1987년 이대 교육대학원졸업 ▲1987­89년 영국 라반센터 및 R·A·D(로열 무용아카데미)연수 ▲1990­91년 국립발레단 주역 ▲1991­95년 청주대 동덕여대강사 1993­현재 한국발레연구회이사, 바탕 춤전 ‘빛깔’안무 출연 ▲1994년 개인발표회, 한일댄스 페스티벌 ‘일상의 꿈’안무·출연 ▲1995­현재 동덕여대무용과 교수 ▲1997년 국립발레단 ‘노틀담의 꼽추’,민족춤제전 ‘머물며’안무출연 올해의 안무가상(97년) ‘몽유(夢遊)’‘공주무덤’‘길위에서’‘풀피리의 춤’외 다수
  • 존 F.케네디(美國의 대통령 문화:19)

    ◎뉴 프런티어정책 편 美 상징적 지도자/평화봉사단 창설… 후진국 교육·영농지도/蘇의 쿠바 미사일 배치 기도 ‘힘’으로 봉쇄 【보스톤(美 메사추세츠주)=羅潤道 특파원】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수 있는가를 묻지 마십시요.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수 있는가를 물으십시요.” 1961년 1월20일,43세의 나이로 미역사상 최연소의 기록을 세우며35대 대통령에 취임한 존 F.케네디 대통령(1917­1963)의 취임사는 냉전체제에 대한 염증 때문에 강한 개인주의적 성향을 보이던 미국민들에게 신선한충격으로 다가왔다. 63년 11월21일 댈러스에서의 총성으로 최고의 전성기에 역사의 뒤안으로 물러서게 된 케네디는 불과 2년10개월(1천37일)의 짧은 집권기간에도 불구하고 미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그래서 그는 죽어서도 포토맥강 건너 알링턴 국립묘지 한복판,워싱턴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중앙 언덕에 ‘불멸의 불꽃’(eternal flame)으로 살아 미국민들의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다. 첫 20세기 출생 대통령인 그는 많은 업적을남겼다.‘뉴 프런티어’라고 불린 그의 정책은 루즈벨트의 ‘뉴 딜’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평화봉사단’을 창설,미국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세계 구석구석 후진국을 찾아가 교육과 영농을 지도케하는 인류애적 차원의 일에 적극 나섰다.흑인인권 보호를 위해 흑백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안도 만들었다.소련보다 한발늦기는 했지만 선구자적인 의지로 우주개발계획을 추진,미국이 최초의 달정복 국가가 되도록 했다. ○흑백차별금지법 제정 대외적으로도 소련의 베를린 봉쇄에 대한 강력한 대처,쿠바내 소련의 미사일 배치를 저지키 위한 쿠바 봉쇄 등 ‘힘’으로 소련을 굴복시킨 그의 강력한 대외정책은 미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물론 국제적인 관심또한 불러 일으켰다.비록 쿠바침공 실패로 국제적 망신을 하기도 했지만 60년대 들어 대중문화의 급속한 확산과 함께 미국적 이상을 실현할 젊고 용기있는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던 미국민들에게 케네디는 ‘미국의 상징’으로까지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는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도 아니고 강력한 의지력을 갖춘 인물도 아니었다.더우기 정계 입문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정치적 성장과정이 백만장자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의 금권을 앞세운 적극적 개입에 의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그러나 그가 강력하고 진보적인 정책을 펼수 있었던 것은 겸손하고 노력하는 자세 때문이다.그는 사려깊고 여러 사회문제들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민주주의 원칙의 수호자로 이미지를 심었다. 1917년 보스턴 교외의 브루클린에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으로 백만장자가 된 조지프와 로즈 케네디 사이의 9남매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케네디는 병약하고 그다지 학교성적은 좋지 않았으나 사람을 사귀기 좋아했고 스포츠를 좋아했다.부친이 루즈벨트 행정부때 영국대사를 지내 런던대학에도 잠깐 재학한 일이 있는 그는 하버드에 입학,광범위한 여행을 즐겼다. 그러나 상급 학년으로 올라가면서 그는 점차 학업에 흥미를 보였다.영국의 나치 독일에 대한 대응 실패를 다룬 그의 졸업논문은 ‘왜 영국은 잠을 잤는가’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이어 1942년 진주만 폭격 직전 미해군에 입대해 PT(어뢰정)지휘관으로 활약,일본군과 싸운 공로로 은성훈장을 받기도 했다.45년 디스크 수술로 전역한 그는 부친의 권고로 46년 민주당 소속으로 연방하원에 출마,당선됐다. ○57년 퓰리처상 수상 52년 3선의원인 케네디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상원의원에 당선됐다.이듬해 그는 조지워싱턴대를 나오고 워싱턴타임스­헤럴드의 런던특파원 이던 24세의 재클린 부비어와 결혼했다.지성과 미모를 갖춘 재클린과 미남 총각 상원의원과의 결혼은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켰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두사람의 결혼생활은 케네디의 바람기로 원만치 못했다. 57년 미의회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의원들의 이야기를 엮은 ‘용기있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저술,퓰리쳐상을 받은 케네디는 바른 이상을 가진 정치인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TV토론이 처음 실시된 60년 대통령선거에서 닉슨을 근소한 차이로 따돌릴수 있었다. 백악관에 들어간후 재클린은 훌륭한 참모이자 동반자 역할을 했으며 특히 63년 8월 2살바기 아들 패트릭이 죽은 후에는 두사람의 금슬이 상당히 좋아진 것으로 전해졌다.그러나 이 좋은 금슬도 케네디의 피격으로 3달밖에 지속되지 못했다.케네디 가문은 대통령과 3형제 상원의원을 내는 등 미역사상 가장 번성한 집안의 대명사가 됐지만 두아들이 총에 맞아죽고 아들과 딸들이 사고로 죽는 비운의 가문으로도 남아 있다. 서거 35주년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그는 미국민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으로 남아있으며 보스턴항 남부의 컬럼비아 포인트에는 케네디도서관이 우뚝 서 케네디 대통령 당시 각종 자료 및 유물을 집대성하고 있다.또 브루클린에는 그의 생가,히아니스항 인근에는 하계별장 등이 잘 보존돼 있다.
  • 서예가 楊鎭尼(이세기의 인물탐구:165)

    ◎물 흐르듯 힘찬 ‘友竹 서체’ 창출/10살때 쓴 ‘송매루’ 현판·경복궁 ‘경성전’ 편액 유명/‘서예교육 정상화안’ 제기,대학에 학과 신설 주도 友竹 楊鎭尼의 서예는 글자를 생성할 때의 의상(意象)이나 미적 요소를 이미 함축하는 것이 특징이다. 글씨의 점이나 획, 글자의 짜임과 장법에서 ‘생체리듬, 음악의 리듬’같은 율동성으로 한순간에 대작을 이루어내고야 만다.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명필 종요가 연못에다 붓을 찍어 글씨연습을 했듯이 우죽은 그가 어렸을때 종이가 귀해서 청마루에 물을 떠놓고 먹물 대신 물을 찍어 마룻바닥에서 대필(大筆)을 훈련했다. ○남성적 호흡­맥박 특징 이른바 그의 행필은 한획을 긋는데 붓의 모든 털이 사용된다는 남성적인 만호제착(萬毫齊着)과 호흡과 맥박이 뛰는 옥루흔(屋漏痕)으로 필획의 원활함이나 생동감을 표현해낸다. 어릴때부터 신동소리를 들었고 지금도 고향인 창녕에 가면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오여정(吾與亭)이라는 정사(精舍)에 그가 10살때 쓴 ‘송매루(松梅樓)’ 현판, 7살때 쓴 이의재(二義齋)가 남아있고 최근에는 경복궁 복원에 따라 TV드라마 ‘용의 눈물’의 배경으로 비치는 ‘경성전(慶成殿)’이 그의 글씨다. ‘차고 오묘한 서체는 전통서체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조형예술로 승화되었다’는 평을 듣는다. 우죽이라고 하면 먼저 지난 74년 글씨 한두개의 해석차이로 국전을 벌집쑤신듯 뒤흔들어놨던 ‘대통령상수상’소동을 빼놓을수 없다. 대통령상수상이있기 전까지 그는 14차례의 연입선과 두차례의 연특선으로 이제는 국전 추천작가가 되기 위한 한번의 ‘특선’만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날 아침 조간신문은 ‘대통령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고 일생에 한번 올까말까한 대행운에 놀라 그는 하루 동안 플래시 세례와 축하전보 전화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기쁨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에 다음날 신문은 ‘국전대통령상에 오자(誤字)가 있었다’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서릿발을 퍼부었다. ‘대통령상 수상’과 ‘대통령상수상 취소’라는 극단적인 좌절과 허탈감에 시달려 그는 졸지에 벼랑끝으로 내몰릴 수밖에없었다. ‘노래를 부를때 리듬이 틀리고 가사만 맞으면 무슨 소용이냐’는 반박과 ‘내용이 틀린데 글씨만 잘쓰면 대수냐’는 비난, 심지어는 서예계의 원로요, 당시 국전운영위원장이었던 소전 손재형을 빗대놓고 ‘심사위원들이 글을 해득하지 못하고 글씨만 뽑았다’는 폭언을 서슴지 않기도 했다. ○대통령상 수상 시비 그가 써낸 작품은 두보(杜甫)의 곡강(曲江)의 시 2수중 한수를 ‘초서칠언절(草書七言絶)’이란 제목을 붙여 출품한 것이었으나 원문과 비교해본 결과 둘째행의 ‘酒債尋常(隨)處有’의 ‘수’가 ‘행(行)’자이고 넷째행의 ‘傳(與)風光共流轉’의 ‘여’는 ‘어(語)’자가 돼야한다는 지적이었다. 서단이 발칵 뒤집혔으나 당시 현대미술관장 尹致五씨는 서예에 능통한 月灘 朴鍾和, 한학자 安朋彦씨며 대만대사관의 한문학자들의 자문을 구하고 의견을 수렴한 결과 臺北판도 무방하며 우리나라의 목판대로도 얼마든지 무관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와 비슷한 서적은 여러 출판사에서 간행되어 ‘따를 수’와 ‘다닐 행’은 같은 뜻으로 가능하고 ‘더불 여’와 ‘말씀 어’도 해석이 같다는 해명이었다. 황망중에 소전이 몸져 눕게되자 月田 장우성이 우죽이 보고 쓴 臺北판 ‘천가시(千家詩)’를 문공부에 제출하도록 권유해주었고 ‘칠언율(七言律)’이나 ‘칠언절(七言絶)’등 우리 서단의 해석이 단적이었음을 입증할수 있었다. 이 대통령상에 대한 시시비비는 결국 ‘오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그동안 국전을 가운데 둔 국전비리에 얽힌 것이며 ‘서예계의 풍토쇄신’을 위한 호된 비판이었다고 할수있다. ‘대통령상 수상’시비는 싱겁게 수면밑으로 가라앉아버렸고 그의 작품은 현재 역대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품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충격을 받고 몸져 누웠던 소전은 6년여만인 81년에 타계했다. ○안진경 등 각체 두루 섭렵 그와 소전과의 관계는 학맥이나 지맥, 인맥과도 관계가 없는 순수한 사제간이다. 부산 동아대학이 주최하는 전국 민전서화전람회에 소전이 심사위원으로 내려왔다가 우죽의 ‘흐르는듯 힘찬 웅필’을 보고 ‘앞날이 촉망되는 사람’으로 격려하여 제자를 삼았고 그는 스승을 따라 중앙서단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오죽하면 주변에서 ‘어떻게 부산사람이 소전 선생의 제자가 되어 총애를 받을수 있느냐’고 질문할 정도였다. 그는 본래 창녕에서 한학자인 楊孝周씨의 딸만 넷이던 집안의 만득자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공자를 만난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孔子의 자인 중니(仲尼)의 ‘니’를 이름에 넣게 되었고 부친은 사십을 넘겨 늦게둔 아들을 귀하게 여긴 나머지 6살이 되기전에 서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20대 후반부터 부산의 명필이던 오제봉 김광업을 사사, 본격적으로 글씨를 배우는 과정에서 스스로 혹독한 수업을 자처하고 안진경(顔眞卿)체와 서체의 유사성이 많은 하소기(何紹基)에 의존하여 각체를 두루 섭렵하고 있다. 59년부터 국전에 출품하는 동안에는 소전의 체본을 가지고 초서체를 공부하긴 했지만 스승의 ‘만족한 얼굴을 보지못해’ ‘눈물을 흘린일도 한두번이 아니었고’ 자신만의 글씨체를 갖기 위해 ‘밤을 낮삼아’ 팔뚝이 붓도록 글씨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그가 서예계에 끼친 공로는 문공부에 ‘서예교육의 정상화안’을 제기하여 대학에 서예과를 신설한 일이다. 부인 金玉姬씨도 같은 서예가로 93년 미국 시애틀에서 부부전을 연 바 있다. 그는 79년부터 종로구 인사동의 우죽서실에 머무르면서 한·중·일교류전 등 주요 단체전에 출품하고 하오에는 후학을 가르친다. 연약해보이나 날카로운 안광은 지금도 칠순이라고 보기엔 지칠줄 모르는 정열이 가슴속에 살아있다. 아프고 잡다한 인생사를 거친 그의 글씨는 이제 법의 한계를 떨쳐버리고 짜임과 운(韻)과 품(品)을 갖추면서 자연스러운 획으로 우죽체인 청려경(淸麗境)을 곡강이 흐르는듯 써내려가는 시기다. □연보 ▲1928년 경남 창녕출생 ▲1946년 초등교원검정시험 합격 ▲1948년부터 부산경남상업중 및 부산한성여대·교육대,서울한성여대강사 ▲1959­73년 연12회 국전입선및 연2회(65·68년)국전특선 ▲1965년 전국교육자 휘호대회특선 ▲1968년 서예개인전(부산) ▲1971년부터 소전 孫在馨 사사 ▲1974년 국전 대통령상수상 ▲1981년 국전 초대작가 ▲1982­88년 국립현대미술관초청전 ▲1983년 국전및 전국대학미전 서예부문 심사위원·심사위원장 ▲1988년 국전 심사위원장, 88국제서예올림픽전(예술의 전당)·한국서예100년전 출품, 부산개인전 ▲1990­96년 대한서예대전 운영위원장, 한국서예국전 30년전 ▲1994년 한국서예협회 이사장 ▲1997년 한·중문화교류전 ▲1998년 예술의전당 초대 초서전 ◇수상 예총회장상(65년) ◇작품 충렬사 ‘昭萃堂’휘호 및 효창공원 ‘彰烈門’‘道義門’ 경복궁‘慶成殿’ 대편액 등 현판비문 다수
  • 영 윈저 왕가의 내밀한 이야기/미 전기작가 키티 켈리의‘로열스’

    ◎1917년부터 80년간의 다큐멘터리 왕실사/찰스­다이애나의 파경 등 가감없이 기록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공립학교에 다니지 않았다.가정교사에게 하루 한시간씩 영국사와 문장학을 배웠을 뿐이다. 때문에 수학이나 과학에 약했고 자연계에 관해서는 개와 말밖에 몰랐다.그녀는 러드야드 키플링과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를 제외한 그밖의 모든 시들을 싫어했다.어느날 그녀는 이탈리아 시인 단테에 대해 ‘단테란 말(마)의 이름?’이라고 물었다” 영국 윈저 왕가의 내밀한 이야기를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 ‘로열스’(전2권,키티 켈리 지음·이종인 옮김)가 도서출판 동방미디어에서 나왔다. 키티 켈리는 ‘낸시 레이건:비공식 전기’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베스트셀러 전기작가.켈리는 금세기 들어 윈저 왕가는 비영웅적일 뿐아니라 결손가정화해 ‘미디어를 위한 인형극’으로 전락했다고 꼬집는다. 이 책은 1917년에서 1997년에 이르기까지 80년의 영국왕실사를 다룬다.1917년,독일을 미워하는 영국의 국민정서를 잘 알고 있던 영국왕 조지 5세는 자신의 독일 뿌리를 감추기 위해 왕가의 이름을 하노버에서 윈저로 바꿨다.그는 하룻밤 사이에 바텐베르크,메클렌베르크­스트렐리츠,헤세,베틴 등 독일계 가문의 이름을 왕가의 계통에서 박탈해버리고 영국 이름과 타이틀을 만들어 넣었다. 켈리는 이 책에서 훗날 윈저 공작이 된 에드워드 8세의 느닷없는 양위와 그 뒤를 이어 동생 앨버트 왕자가 조지 6세로 등극하는 과정을 그린다.그리고 영국 왕실에 커다란 안정을 가져온 엘리자베스 왕비를 묘사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곧 현재의 ‘퀸 마더(Queen Mother)’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 중의 하나다.켈리는 우아한 미소에 강철같은 성품을 지닌 퀸 마더의 생생한 초상을 제시한다. 퀸 마더는 비록 평민 출신이지만 2차대전 당시의 런던 공습때 대피하지 않고 런던에 그대로 체류,왕가의 체통을 지켜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켈리는 퀸 마더의 출생을 둘러싼 신비를 밝히고 인공수정으로 두 딸을 낳게된 내막도 폭로해 눈길을 끈다. 켈리는 또 조지 6세의 장녀인 엘리자베스 2세의 외로운 유년시절과에든버러공 필립과의 결혼,1952년 아버지의 급서로 인한 갑작스런 등극 등을 상세히 다룬다.켈리가 엘리자베스 2세의 생활에 대해 밝힌 구체적인 사항들 중에는 여왕이 냉정하고 무심한 어머니였다는 내용도 있어 자못 충격적이다.그에 의하면 윈저 왕가의 파탄은 여왕이 기능부전한 어머니였다는 사실에 상당부분 그 원인이 있다. 여왕의 네 자녀 중 셋은 이혼했고 나머지 한명인 막내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바람둥이 남편인 필립 공,속만 썩이는 동생 마거릿 공주, 우유부단한 아들 찰스 왕세자,뻣세기가 남자 못지않은 앤 공주,왕족이 아닌 평민계급에서 데려온 두 며느리 다이애나 스펜서와 사라 퍼거슨….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 모든 풍상을 헤치고 이제 2002년 대망의 즉위 50주년을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은 여왕의 부군으로 여왕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왕궁내의 실세’ 필립 공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묘사한다.켈리는 필립공이 아직도 가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고 말한다.이 책의 후반에서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의 파경,둘째 며느리인 요크 공작부인 사라 퍼거슨의 이해할 수 없는 음란한 행동 등을 가감없이 다룬다.이 책은 영국 왕실도 이혼과 결손가정의 증가라는 영국적 사회현상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윈저 왕가는 또다시 위기의 시대를 맞았다.왕가를 ‘재창건’해야하는 과업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엘리자베스 여왕­찰스 왕세자­윌리엄 왕세손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영국 왕실 상황은 빅토리아 여왕­에드워드 왕자­조지 왕세손으로 이어지는 1900년의 빅토리아 말기와 비슷하다.모후인 빅토리아 여왕 사후 에드워드 7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그는 이미 59세의 나이로 평생 여자들의 품에 안겨 샴페인이나 마시며 인생을 탕진한 사람이었다.그가 즉위한지 10년도 못돼 죽자 조지왕자는 조지 5세로 등극,윈저 왕가를 창건했다.영국 왕실은 이제 100년 세월의 간격을 두고 똑같은 운명을 맞고 있다.영국 왕실은 과연 ‘스캔들의 궁전’인가. 그러나 영국 왕실은 그 많은 스캔들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역경과 비난을 견뎌내는놀라운 능력을 보여왔다.켈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1천200년 역사의 영국 군주제는 이제 신과 같은 광휘가 부식되었고 또 위축될대로 위축돼 수모를 겪고 있다.그렇지만 장엄함에 대한 매혹과 새로워진 왕권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영국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다”
  • 태평무 이현자씨(이세기의 인물탐구:162)

    ◎45년간 전통무용 외길 걷는 ‘명무’/“춤꾼은 춤으로…” 정중동속 현란한 춤사위 매혹적/육순넘긴 나이에도 스승 섬기는 일편단심은 극진 ‘태평무’는 어떤 춤인가.‘태평’이라는 큼직한 수식때문에 얼핏 궁중정재로 착각하기 십상이다.그러나 탐스러운 큰 머리에 떨잠,색동을 달아지은 화려한 녹원삼속에 당의를 입고 왕과 왕비,태평성대를 축원하는 춤이긴 하지만 정재와는 다르다.이 춤은 전설적인 명무이던 한성준옹이 1920년대 경기무속중 진쇠장단에 맞춰 끌어낸 것으로 손녀인 한영숙과 제자이던 강선영에게 전수되었고 지금은 강선영의 후계자인 이현자가 이어받고 있다. ○93년에 준문화재 올라 ‘태평무’는 지난 88년 12월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된 후 이현자는 긴 조교생활과 이수자 전수조교를 거쳐 93년에 준문화재에 올랐다.같은 스승에게 배운 춤이면서도 한영숙의 춤은 깨끗하고 단정한 데 비해 강선영의 춤사위는 눈부시게 화려하여 방만한 거드름이 곳곳에 뿌려진다.잔걸음과 겹걸음,남치마를 슬쩍 걷어올릴때 홍치마가 드러나는 순간은 어떤 춤에서도 느낄수 없는 ‘경이감의 극치’로서 느린 동작에선 우아한 정중동의 절도를 지키고 잦은 장단에서는 멋과 흥과 교태가 번쩍인다.이현자의 춤은 스승으로부터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폭이 넓고 화사하여 현대에 맞춘 새로운 구성으로 꾸며지고 있다. 이현자.그의 인내심과 미동이 없는 ‘일편단심’은 무용계에서는 ‘바위같은 과묵’으로 통한다.멀리서 지켜보노라면 육십을 넘긴 나이에도 스승을 받들어 앞세우는 자세가 언제나 반듯하고 정성스럽다.풍문여고 1학년때인 15세에 강선영 고전무용연구소에 들어와서 만 45년동안 단한번도 낯을 붉힌 적이 없고 스승에 대한 존경과 충성심은 날이 갈수록 극진한 것으로 소문나 있다. 당시 학교연극에서 필요한 춤사위를 배우러 다가 창가에 앉아있던 스승을 보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인 줄 알았고 막상‘승무’를 보자 ‘한눈에 경도되어’ 스승의 춤추는 모습을 한번이라도 더 바라보기 위해 연구소에 다니게된 경우이다.실제로 그는 다른 예술가들처럼 춤에 대한 재능을 타고났거나 집안에서춤을 가르치려는 열의를 보인 사람은 없었다. 순서울토박이로 어릴때는 공업연구소에 다니던 부친(이춘만씨)덕분에 어려움 모르고 자랐고 부친 타계후 어머니 혼자서 딸만 넷을 키우는 힘겨운 사춘기를 보냈다. 그래서 집이 있는 성북동에서 안국동의 학교,다시 학교에서 을지로에 있던 연구소에까지 걸어다니면서 돈을 모아 레슨비를 충당했다.스승에게 배운지 3년만에 연구생들을 지도하면서 뒤늦게 ‘태평무’를 배우게 됐으나 가락을 익히고 발짓을 소화하는 데만 수년이 걸렸다. ○75년 개인무용단 운영 고교졸업후 스승의 조교로 남아 그는 연구소에서 발디딤과 발구르는 동작연습으로 밤을 지새울 때가 많았다. 이후 연구소가 을지로 3가와 7가,광화문과 서대문에서 홍은동에 정착하기까지 그는 스승의 그림자가 되어 검무 장검무 즉흥무와 무당춤을 섭력했고 지난 59년에 원각사에서 첫 무용발표회,75년에는 자신의 무용단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언제나 스승이 먼저이고 그의 일은 뒷전으로 미루었다. 그의 활동을 지켜본 무용평론가 정병호씨는 ‘한국전통무용을 잇는 수많은 후계자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너그러운 인간성과 심오한 예술성이 돋보이는 이현자의 춤은 큰 키때문에 태평무만의 멋을 시원하게 살린다’고 호평했다.그러나 어떤 찬사에도 불구하고 ‘일평생 내 스승의 춤만이라도 제대로 배우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고 했고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는 없다’고 호평을 사양하려 들었다. 스승인 강선영씨의 제자사랑도 친부모이상으로 다감하여 자신을 대신할사람은 ‘이현자밖에 없다’는 것이며 지난 77년 ‘무용한국’ 창간10주년 기념공연과 80년 춤지도자공연에 이현자를 내세워 춤추게했고 ‘무대를 꽉 채우는 풍성함과 능란감의 매혹’이라는 평을 이끌어 냈다.그때 스승이 무대뒤로 찾아와 ‘참으로 잘추었다’는 칭찬한마디가 어떤 찬사에도 비교할 수 없이 ‘너무나 기뻐서 하늘로 날아갈 듯’하다던 이현자의 감동은 누구나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35년만에 개인발표회 심성이 곱고 착한 만큼 그의 지난 세월은 시련과 파란곡절의 중첩이었다.1주일이면 4,5일씩 스승댁이나 연구소에 머물러도군소리 한마디 없었던 부군(최이영씨)이 지난 84년 사업실패로 앓다가 타계하자 그는 혼자서 가족 생계를 꾸려나갈 수 밖에 없었다.어떻게 살아갈지 앞길이 막막할 때 스승은 곁에서 ‘나역시 수많은 고초를 혼자서 겪었다’고 끝없이 격려하면서 용기와 힘을 주었다.덕분에 자녀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킬 수있었고 위로 남매는 결혼,지금은 차녀(보경·일본유학중)차남(원준·명지대)과 살고있다. 요즘도 스승의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것을 확인해야만 그는 성북구 동선동에 있는 자신의 연구소로 돌아온다.‘춤추는 사람은 춤으로 말한다’는 신조를 굳건히 지키면서 중요무형문화재공연과 ‘명무전’공연에 참가하고 얼룩진 세월에 시달려 그동안 연기해오던 개인발표회를 실로 35년만인 지난해 겨울에 선보였다.무용계는 ‘과연 스승을 능가하는 무르익은 춤’으로 최대의 극찬을 보냈으나 그때도 그는 ‘스승의 후계자’라는 자리만으로도 ‘이 세상의 어떤 행운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겸손을 잃지 않았다.‘배우기 힘들지만 배우지 않으면 안될 춤을 스승 가까이에서 배울 수 있었고 그런 큰 스승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그의 춤은 스승이 계셨기 때문에 한층 ‘내실’을 다질수 있었다고 강조하기를 잊지않았다. 흰버선발이 겹걸음으로 디딜 때,그리고 긴소매를 슬쩍 들어올려 어깨에 얹었다가 뿌리칠 때의 흔들림속에서 그의 춤의 한끝은 언제부턴가 눈부신 광채가 장식되고 ‘정중정’속에서도 예술의 연륜이 묻어나는 ‘현묘의 동’을 절묘하게 춤춘다.지금 가장 정상에서 능라금수를 수놓는 시기로서 그는 비로소 춤인생에서의 태평성대를 맞고있다. □연보 ▲1936년 서울출생 ▲1951년 강선영고전무용연구소 입소이후 현재까지 무용단 경영 ▲1955년 풍문여고졸업 ▲1956년 ‘태평무’사사, 풍문여고및 경기여고 무용강사 ▲1958년 이현자고전무용학원개설 ▲1959년 제1회무용발표회(원각사) ▲1960년 제2회 무용발표회 ▲1962년 이현자무용발표회(국립극장) ▲1963년 미국‘세계민속예술제’참가 ▲1965­67년 이대강사 ▲198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이수자 선정 ▲1990년 ‘태평무’전수조교 ▲1993년 중요무형문화재 ‘태평무’후보지정,대악회이사,강선영춤 55주년 기념공연,대전엑스포공연 ▲1996년 LA공연 및 ‘태평무’ 지부 선정,KBS전통무용 심사위원 ▲1997년 이현자무용공연(경복궁), 동아무용콩쿠르·전국국악제·서울시립무용단·인천시립무용단 심사위원,이대및 한성대출강.일본 고베와 미국 시카고 등 수회공연, 한국예총 예술문화대상(97년)
  • 서양화가 서양순(이세기의 인물탐구:159)

    ◎화폭마다 혼담긴 ‘꽃과 여인’의 화가/초창기 ‘발레리나’ 시리즈로 국전 3회 입선/한국여류화가회장으로 작품활동도 활발 서양순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과 여인’의 이미지를 과시하면서 밀턴의 ‘꽃피는 시트론의 숲’을 향유하는 시기다. 최근의 그의 회화세계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유랑의 필치’로 포비즘의 요소를 포함시키는 새로운 조형방법에 접근하고 있다. 이른바 색채의 의장을 중시하는 큐비즘과 구상을 지우는 특유의 기법으로 ‘꽃이 여인이며 여인이 꽃’인 팬태스틱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화려한 파스텔조의 꽃의 향연은 캔버스의 한정된 공간이 아닌 드넓은 벌판에 마음껏 펼쳐진채 바람에 흩날리듯 꽃향기 퍼트릴 듯 송이송이마다가 싱싱하게 살아숨쉰다. 그래서 일찍이 그의 스승인 박득순은 ‘서양순의 그림은 삶에 대한 힘찬 도약과 환희의 축제’라고 표현했다.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면 아름다움을 그릴수 없듯이’ 그의 눈부신 인물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인간적인가를 한눈에 알게 된다’는 것이다. ○‘환희의 축제’로 표현 그의 꽃들도 동양적 정서와는 거리가 먼 목련과 장미, 국화와 해바라기,튤립과 서양란같은 화판이 확실하고 탐스러운 꽃중의 꽃들로 화면을 채운다. 언제나 꽃과 여인이 공존하는 가운데 여인의 눈동자는 신비와 미지의 소망이 반짝이고 목걸이와 팔찌 등 서구적 연출은 때때로 베르사유의 앙트와네트, 정열의 카르멘, 르누아르의 청신한 이렌느와 어느때는 마농레스코같은 퇴폐적인 쓸쓸함과 메마른 사색을 풍겨낸다. 이른바 밀집한 꽃의 형상과 풍부한 무희들이 제시하는 회화세계는 그것이 ‘미술’이기 때문에 철두철미 ‘아름답다’는 것을 지키면서도 해맑은 아름다움의 이면속에 엄격한 결벽증이 도사리는 것이 이채롭다. 서양순은 그의 그림이 설명하는 것처럼 내면으로부터의 열망과 열정이 끓어넘치는 화가다. 타고날 때부터 솔직하고 활달한 성격이어서 무슨 일에든지 쉽게 좌절하거나 체념하지 않는다. 단지 가파르지 않은 후덕한 인간성을 지녔으나 남에게 폐끼치기를 싫어하고 만사에 빈틈없는 완벽주의로 대인관계에서의 신의를 중시한다. 그러한 성격형성은 그가 성장한 철없던 어린시절과 다양한 예술적 체험들이 정신적 성장을 준 때문일 수도 있다. 어릴때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의사’가 될것을 꿈꾸었으나 화가가 된 지금 심신장애자를 위한 국제 시비탄클럽의 멤버가 되어 그들을 돕고 있다. 전북 정읍에서 과수전지를 지도하던 서갑준씨와 이말예 여사의 3남3녀중 막내, 넉넉한 집안의 막내답게 부족함없는 환경에서 그림도 잘그리고 공부도 잘하는 우등생이었다. 정읍여고시절 전라북도 고교미술실기대회에서 정물화로 도지사상을 수상하자 당시의 교장과 담임이 권유하여 의대가 아닌 미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심신장애자 돕기도 대학졸업후 박득순 스승의 명동 화실에 나가 학생지도를 보조하는 동안에도 언제나 드가의 ‘발레리나’시리즈에 심취해 있었고 발레리나의 율동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속도감에 매혹되어 한 시기에는 오로지 발레리나만을 그린 적도 있다. 이른바 ‘한줄기 빛이 물체에 닿는 순간, 그 빛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것’이라는 르누아르의 말대로 공간이동을 시키듯이 대상을 생명감 자체로 화면에 옮기는 방법이 그것이다. 그래서 그의 ‘무희’나 꽃들은 마치 토슈를 신고 필루에트를 추는 발레리나의 움직임을 알레그로 콘브리오의 리듬감으로 생생하게 재현해낸다.박득순외에도 변종하 최덕휴 김창락 김원등 기라성같은 스승들을 사사.그중에서도 까다롭기로 유명한 변종하씨는 서양순을 향해 ‘장래를 확실히 보장할 수 있는 화가’로 손꼽았고 그때부터 자신감을 갖고 ‘인물에서의 최고봉’이 되기 위한 야망을 불태웠다. 65년부터 국전에 ‘발레리나’를 출품해서 3회 연속입선, 특선을 향한 집념을 불태우던 무렵에 박득순 화실에서 만난 서양화가 강길원씨(공주대 교수)와 결혼, 77년 부군이 제주대에 근무하던 제주시절에는 섬만의 독특한 풍광과 제주여인을 그리면서 초기의 화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중간톤을 창출할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언제부턴가 남청 담청 군청과 감청속에서 선록)과 선홍이 흘러나오고 전에는 점하나를 찍는데도 구도를 계산했으나 그림에서의 형상과 색깔은 오랜 관념과 관습에 불과할뿐 ‘어떤 위대한 예술도 죽음이나 삶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삶의 욕망 화폭에 점화 지난 91년 일곱번째로 가진 개인전에서도 ‘선명한 터치와 화면마다 생동하는 생명감’으로 다시 한번 화단의 호평을 모았고 그의 그림을 아끼는 사람들은 최근의 ‘꽃과 여인’을 향해 ‘검은 비로드에 싸인 한아름의 금강석’, ‘허화가 없는 사치의 극치’로 찬사하기도 한다. 그는 항상 아름다움만을 추구할뿐 ‘문학성’과 ‘작품성’이 의식된 어질러진 도시의 뒷골목이나 초라한 낭인의 모습은 체질에 맞아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의 화제는 화려한 ‘꽃’들과 눈이 크고 서구적인 ‘여인’이 될것이다.지난해엔 한국여류화가회 회장에 선임, 결코 쉽지않은 승부였으나 평소의 스케일과 덕량이 주변을 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전혀 연고지가 아닌 강남구 신사동에 정착한지 20년. 화단의 중진인 부군과의 사이에 딸(보나양)하나가 있다. 낯설고 새로운 수많은 미학적 체험과 깊은 모색의 과정을 지나 그는정미를 끌어내기 위해 생의 욕망을 화폭에 점화하려는 시기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선보이려는 100종의 꽃과 100인의 미인은 지나온 족적을 되돌아보는 화가 자신의 심상의 그림자에 틀림없다. 긴 휴식과 사색을 끝내고 그의 여인은 탐색직전의, 비상직전의 긴장속에서 간결·절제의 수직구도로 만개의 향기를 미래를 향해 내뿜고 있다. □연보 ▲1940년 전북 정읍출생 ▲1961년 세종대 미술과졸업 ▲1965­67년 국전 서양화입선 ▲1966년 제1회 개인전(정읍) ▲1969­72년 신기회회원전 출품 ▲1972­현재 한국미술협회회원전 ▲1973년 한국여류화가회 창립전 ▲1978년 개인전(제주 한라미술관) 1981년 프랑스 아카데미 드 라 그랑 쇼미에르수학, 스페인국제미술제 특별상수상 ▲1982년 서울 개인전, 도쿄 아시아현대미술전및 한·불여류작가전(파리) ▲1983년 뉴욕및 상파울루 개인전 ▲1986년 현대작가 100인전 ▲1990­현재 한국구상작가 회화제 ▲1991년 제7회 개인전(현대미술관) ▲1992년 동북아 여성문화교류전 ▲1995년 북방8개국 우수작가초대전, 한국현대미술 뉴욕초대전, BESETO미술제 서울전, 광주비엔날레기념 한국여류화가회 광주전, 인도풍물 스케치전,목우회전 ▲1997년 썬화랑개관 20주년기념전, 한·중수교5주년기념전 ▲1998년 관훈미술클럽창립전, 한국여류화가회전(2월10일부터 서울갤러리) ◇현재:한국여류화가회회장, 군자회자문위원, 회화제운영위원
  • 경기민요 이춘희(이세기의 인물탐구:157)

    ◎맑고 고운 목소리 타고난 명창/어느 대목 불러도 막힘없는 소리 절창 경지/스승 안비취명창 뒤이어 인간문화재 올라 ‘유상앵비는 천천금이요/화간접무는 분분설이라(버들위를 나르는 꾀꼬리는 조각조각 금과 같고 꽃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는 펄펄 날리는 눈과 같다)’ 경기민요에는 12잡가가 있고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씨가 4곡씩을 나누어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받았으나 2년전 안비취명창 작고후 유산가 제비가(연자가) 소춘향가 십장가는 경기민요 준문화재이던 이춘희가 뒤를 이어 인간문화재로 새로 등극했다. ◎산간석경의 계율처럼 이춘희의 경기소리는 슬픈 소리는 한없이 구슬프지만 경쾌하고 화려한 가락은 마음속에 드리운 검은 시름을 일시에 씻어내린다.그의 미성의 특징은 푸르른 수목을 넘나드는 원앙인양,마른 대지위에 내리는 차가운 빗줄기인양,어느 대목을 불러도 막힘이 없이 산간석경 계류처럼 청청하다. 또 자진모리 장단에 맞춘 불투명한듯한 유절(마루)형식과 방울목을 울릴때 애간장을 녹이는 애원성은 ‘가히 절륜’이라는 말을 듣는다.이보형 문화재위원에 의하면 ‘경기민요의 보석이자 큰별’로서 손색이 없는 존재다.특히 경박하게 날릴 수 있는 경기민요의 가풍에 깊고 그윽한 기품을 주기위해 판소리 독공과 같은 맹훈련을 펼쳐온 것으로 유명하다.거의 30년이 가깝게 강원도 회령산 보령계곡에 올라 혼신으로 소리공부에 매달렸고 자신의 소리에 부족함을 느낄때마다 장대한 폭포수 앞에 의연하게 마주 선다.그러한 과정에서 경기민요의 대중성을 극복하고 격조를 높이는데 일조한 ‘박수를 치고싶은 명창’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가 태어난 한남동은 50년대만 해도 한적한 시골동네로 집에서는 채소농사를 짓고 있었다.5남매중 아무도 특출난 재주를 타고나지 않았으나 ‘별쭝나게도’ 그만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란 노래는 한번에 따라부르고 특히 황금심에 반해서 ‘왠지 가수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그러나 부친 작고후 어머니(안명옥씨) 혼자서 광주리장사로 어린자녀를 돌보는 상황에서는 그가 ‘가수’가 된다는 것은 꿈도 꿀수없는 언어도단이자 불효막심이었다. 이를 감히 입밖에 꺼내지못하는 노심초사가 마침내 마음의 병이 되었으나 어머니에게 매를 맞아가면서까지 ‘노래를 부르고 싶은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그렇게 찾아간 곳이 선소리 산타령의 인간문화재 이창배 선생이었고 그때부터 어두운 골방구석에서 장구장단 하나만으로 긴밤을 낮삼아 ‘창부타령’이며 ‘베틀가’,경기 12잡가를 섭렵해나갔다. 스승은 그의 ‘타고난 맑고도 고운 목소리’를 소중히 여겨 ‘반드시 큰 재목’될 것을 믿어주었고 상중하성을 자유자재로 구사할수 있을때까지 철두철미 모든 것을 가르쳤다. 과연 그의 목소리는 아무리 오랜시간 노래를 불러도 목이 쉬거나 변한 음성을 내지않는다.단지 혼자서는 어느 대목을 불러도 유창하게 넘어가지만 무대에 서면 ‘온몸이 떨려’ 실수를 범하는 일이 많았다.그 한 예로 76년,전주대사습놀이에서 ‘가사와 몸짓이 흔들려 2등’에 머문적이 있고 2등도 과분하여 얼굴을 들고 다니지못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후로 극단적인 수줍음을 극복하기 위해 하루 5시간 이상 한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하는 맹훈련을 거듭한 끝에 능란한 사체발림과 너름새를 구사하는 관록의 무대인이 된 것이다.어렵게 얻어진 결과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그는 대회나 콩쿠르에서 ‘예술성과 실력위주’를 따지는 까다로운 심사위원으로 정평이 나있다.실력이 있으면서도 불이익을 당하는 이가 없도록 설혹 스승이나 선배가 추천을 해도 실력이 딸리는 편에는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그리고 노래를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방황하는 학생들을 한남동 자택에 마련한 학원에 데려다가 무료로 양성하는 인정을 베푼다. ○딸도 대이어 국악공부 이창배 스승에게 사사한지 10년만에 제자 대물림으로 안비취문하에 입문하자 이수자,전수조교를 거쳐 89년 경기민요 준보유자가 된것은 골방에 갇힌피나는 훈련과 간단없는 독공에서 얻어진 ‘야멸찬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스승이 노령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후에는 그를 부르고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지 달려가서 노래를 부르고 94년 연강홀에서 열린 경기국악축제와 ‘묵계월소리인생 60’에도 스승대신으로 나가 일세를 풍미하던 거목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더구나 결혼과 예술 사이에서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군과 헤어져 딸하나만을 데리고 만단 파란을 혼자서 감내해왔다.경기민요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 못하던 시절이라 고작 환갑잔치나 화수회에 불려 다니면서 판소리를 하는 이들이 수십벌씩 한복을 가지고 화려하게 무대에 설때 단벌로 버스를 타고 공연장을 찾아다니는 삭연한 서름을 겪었다.그 딸(서정화 이대 국악과)이 자라나서 그의 뒤를 잇고 있다. 몇년사이 경기민요는 다른 예술분야와 마찬가지로 국악의 한 장르로 당당히 대열에 올라서게 되었다.정악(정요)만을 연주하던 국악원 정기공연과 국악의 향연은 물론 텔레비전에도 출연하고 국악과가 있는 대학에도 출강하게 되었다.그는 자신의 모자라는 부분을 위해 국악관련의 이론서를 찾아 읽고 경기민요의 계보와 유래에 대한 연구에도 남다른 열의를 보이고 있다. ○탁월한 오관청음 빛나 그러나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칠때 이론이 정연한 것을 앞세우기 보다 구전심수의 뼈에 사무치는교습이 그들에게 산교육이 된다는 것을 투철하게 각성시킨다. 예술적 차원의 격조이전에 경기민요는 그 옛날 서민들의 삶의 기록이자 정서자체로써 그들의 삶속에 진하게 파고들었을 때만이 무르익은 생명력이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신중하고 진지하면서도 정교하고 깊은 이춘희의 ‘옥쟁반에 큰구슬 작은구슬을 떨어뜨리는(대주소주락옥반) 탁월한 오관청음’은 이제 이상과 예술의 신념을 유유로히 성취시키는 절창입신의 경지다. □연보 ▲1947년 서울출생 ▲1964년부터 이창배·정만득 사사 ▲1966년 한성고등공민학교졸업 ▲1969년 KBS라디오민요백일장장원 ▲1987년 제1회 경기12좌창 및 민요발표회,LA국악협회초청 공연 ▲1988년 제2회 민요발표회 ▲198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준보유자 ▲1994년 경기12좌창 발표회, KBS라디오 ‘우리가락배우기’지도 ▲1995­현재 국립국악원 지도위원, 이화여대·중앙대·추계예술대 출강 ▲1997년 무형문화제 제57호 경기소리 보유자지정, 만정 김소희 선생 추모공연, 중앙일보주최 ‘명인명무전’, 광주비엔날레 축하무대, 문체부주최 동남아순회공연, 무형문화제전수회관 개관 기념공연 등 70여회 경기12좌창 CD(93년) 경기12잡가완창·민요가락 CD(96년) 한라문화재대통령상(86년) KBS국악대상(88년) 한국방송대상 국악부문대상(96년)
  • 살인부른 현대판 씨내리/무정자증 남편,아내 ‘타인과 관계’ 권유

    ◎남매 얻고난뒤 의처증 증세… 비극의 종말 자녀를 얻기 위해 아내를 외간 남자와 동침하도록 허락했다가 의처증에 걸려 아내를 살해한 40대 남자에게 징역 4년이 선고됐다.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우의형 부장판사)는 6일 아내 박모씨(당시 39세)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 7급 기술직 공무원 이모 피고인(42·서울 성동구 마장동)에 대해 살인죄를 적용,이같이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살인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지만 피고인이 피해 망상으로 인한 심신 불안정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점을 감안,형량을 낮춘다”고 밝혔다. 이씨는 83년 박씨와 결혼했으나 무정자증으로 5년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아이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이씨는 아내에게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서라도 아이를 갖자”고 권유했다.아내는 우연히 알게 된 남자와 관계를 맺어 89년에 아들,92년에 딸을 낳았다. 그러나 이씨는 막상 아이를 얻고난 뒤 아내가 자기 몰래 계속해서 외도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칠수 없었다.그러던 중 지난해 4월 이씨는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한 아이들의 출생 경위를 처가 식구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아내에 대한 의심이 겉잡을수 없게 일기 시작했다.급기야 이씨는 아내가 아이들의 실제 아버지와 결합하기 위해 처가 식구들과 합세해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피해 망상에 빠졌고 자주 부부 싸움을 벌였다. 지난해 12월3일 상오 6시쯤 이씨는 잠자는 박씨를 깨워 “애들 아버지가 누구냐”고 추궁했다.견디다 못한 박씨가 “차라리 정신병원에 입원해 버리라”고 대들었고,이에 격분한 이씨는 박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고 경찰에 자수. 이씨는 검찰에서 생전에 박씨가 어떤 남자를 만났는지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으며,처가쪽으로부터 캐나다로 이민을 간 연하의 남자라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 무용가 김말애(이세기의 인물탐구:149)

    ◎혼 깃든 춤사위… 한국춤의 선도자/“한국춤은 얼굴과 체구가 작아야 한다는 종래의 통념을 깨고 그는 후리후리한 키에 긴팔 수려한 용모·풍부한 감성으로 한국춤을 개척하는 타고난 춤꾼이다” 무용가 김말애가 사진집 ‘춤’을 출간했을때 무용평론가 김경애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김말애는 끝없이 춤추는 이 시대 서정시인”이라고 했다.흑백사진속에서 그는 마치 수평선을 넘나드는 한마리 새가 되어 ‘살을 푸는 떨림과 한을 푸는 흐름’으로 장면장면마다 선명한 춤선을 그려내고 있다.지난 여름 LA예총 초청으로 ‘회귀선’공연을 가졌을때는 그곳에서 활동하는 시인 고운씨가 ‘아득한 꿈길 돌아오는 배’란 즉흥시를 지어 능란한 춤꾼인 김말애에게 헌사했다.‘아득히 끝도없이/꿈이 철철 넘치게/출렁이는 배 하나/지구가 돌아가는 선을 가르고/지금은 어디쯤 어느 물길에/덩실덩실 춤을 굴리나…’로 시작되는 이 장시는 망망대해에 뜬 한척의 배를 인생행로에 비유하여 ‘인간의 삶은 출발도 끝도 없는 원점으로 되돌아간다’는 김말애의 무일물사상을 실감있게 담아내고 있다. ○“끝없이 춤추는 서정시인” 평론가들에 의하면 그는 ‘우리 무용계에서는 흔치않은 대형무용가’다.한국춤은 얼굴이 작고 체구가 작아야 한다는 종래의 통념을 깨고 후리후리한 키에 긴팔,잘생긴 얼굴과 풍부한 감성으로 한국춤에서의 ‘정중수로’와 ‘동중백학’을 성취해 보인다.그중에서도 한국춤의 정신을 되살린 창작무 ‘춤을 위하여’는 ‘무엇이 나를 춤추게 하는가’ ‘왜 춤추게 하며 어떻게 추어야 하는가’를 빠르게 돌아가는 리듬과 함께 가벼운 움직임,강철같은 강인함을 엇섞어 내딛는 보폭마다 절륜의 백태를 연출해낸다.또 누구보다 전통춤을 잘 가꾸고 보존시키는 무용가이기도 하다.음악이 춤을 능가하거나 음악을 따라가기보다 음악을 몰고가는 쪽으로 작품을 구성하여 다른 무용가들이 간과하기 쉬운 현대성과 참신도를 간직하면서 ‘역동성의 균형’을 포착하는 안무실력이 특징이다. 그는 “춤추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는 어머니 장종숙여사로 인해 춤추게 되었고 그어머니는 지금도 여전히 딸의 후견인이자 열렬한 열성팬이다.여섯살되던 해 삼척읍에 있던 심덕진무용연구소에 데려갔고 “너는 반드시 훌륭한 무용가가 돼야 한다”는 지상명령에 따라 초등학교 2학년때 서울에서 열린 ‘전국아동무용경연대회’에서 입상,어머니는 너무 좋아서 삼척의 택시들을 총동원하여 딸을 태우고 시내퍼레이드를 벌인 일도 있다.이로 인해 “딸을 광대로 만들거냐”고 춤을 반대하던 부친 김태규씨(수산업·89년 타계)마저 딸의 재능을 인정하게 되었고 초등학교 5학년되던 해 서울로 전학,당대 최고의 무용가이던 조택원·김문숙씨 댁에 머물수 있게 도와주었다.그러다가 김백봉의 ‘부채춤’에 반해 묵정동에 있던 김백봉무용연구소에 찾아갔으나 스승은 “아무도 너를 추천해준 사람이 없는데 내가 남의 제자를 훔쳐온 줄로 알겠다”면서 받아주지 않았다.후에 김문숙씨와 ‘춤’지의 조동화씨가 적극 권하여 상명여중 시절에 김백봉 문하에 정식 입문했다. ‘어찌나 춤을 잘추던지’ 무용계의 거봉 조택원씨는 66년,일본에서 발행되는 ‘문예춘추’에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제하로 ‘너는 최승희를 능가하는 무용가가 되라’는 격려의 글을 발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김백봉 스승은 공연때마다 그를 언제나 센터에 세워주었고 고교 2학년되던 해 이화여대가 주최한 ‘전국고교무용콩쿠르’에서 특상하여 장학생 특전을 받았으나 ‘김백봉’이라는 거대한 스승의 그늘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스승이 몸담고 있던 경희대에 진학했다. ○6살때부터 무용 배워 그는 우리 무용사의 신화적인 존재들인 최승희와 조용자,그리고 김백봉을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아마도 외모 이전에 예술에 대한 치열성과 자신감때문일 것이다.편협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타악기·구음 등의 생음악으로 춤의 활력을 작동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지난 20년동안 대학교수로서 예술현장을 지키는 춤작가로서 그리고 무대에 서기를 서슴지않는 춤꾼으로서 그의 역할은 두드러졌으나 오로지 무대에서만 ‘끼’를 펼칠 뿐이며 ‘예술가는 무대에서 빛나야 한다’는 고집을 굳건히 지킨다.그러나 ‘예술가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여러 도정에 늘 함정이 도사린다’는 것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고 ‘나에게는 스승만 있는줄 알았는데 어느틈엔가 나의 제자들이 나와 같은 길을 걷고있음’을 깨달을수 있었다.그래서 제자들이 설 땅을 만들어주기 위해 전에 없이 사회 각층과의 다양한 교분을 트는가 하면 춤공연을 펼칠수 있도록 춤·타래무용단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무대에서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수많은 춤중에서도 김백봉스승에게 전수한 ‘부채춤’을 빼놓을수 없다.전립의 패영을 늘어뜨린 장삼차림에다 두 부채를 편채 열정적으로 춤추고 나서 호흡을 가다듬는 모습은 ‘범접할 수 없는 깨끗한 기상을 보이면서 지음실력으로 인위(인위)와 자연의 극치를 조화시킨다’는 평을 듣는다.지난 8월 LA 윌셔 이벨극장에서 그가 재구성한 일련의 전통춤공연을 펼쳤을때 재미 무용평론가 이병임은 “그의 춤스타일과 그가 구사하는 무용언어가 전혀 새로운 영역의 한국무용이라는 점에서 이런 류의 우리무용을 미국사회에 소개하고 싶었다”고전제하고 “미국의 관객들에게 부채춤이나 장고춤이 행사나 형식무용이 아닌,화려하고 아름다운 동양예술로 재인식됐다”고 극찬했다.가족은 사업을 하는 김효영씨와 남매. ○여중때 김박봉 문하생 입문 그는 때때로 솟구쳐 오르는 흥과 청으로 마치 무당처럼 춤추고 억제할 수 없는 벅찬 감동때문에 춤을 추는 동안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남보기에 행복하고 순탄한 역정을 지나친 것 같지만 모든 고통스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뿐 예술적 파란과 시행착오를 이긴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이다.평론가 김태원이 “극적인 연기로 관객의 시선과 환호를 휘몰아갈수 있는 특이한 스타적 재능을 가진 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그는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춤을 추는 춤의 완결앞에서 어느때보다 당당하고 의연한 의지를 지금 만인에게 과시할 수 있는 시기다. □연보 ▲1950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71년 경희대 무용과 졸업 ▲1972년 김말애 작품발표회 ▲1973년 경희대 대학원 졸업 ▲1976∼현재 경희대 교수 ▲1983년 김말애 창작무용발표회 ▲1985년부터 대한민국무용제 참가 ▲1986년 뮤지컬 ‘양반전’ 안무 ▲1988년 서울올림픽개막식 ‘차일춤’ 안무,주불대사관 초청 서울올림픽 유럽 홍보공연 ▲1988년 창작무용 ‘애장터’ 안무 ▲1989년 일본 오사카예술대 교환교수,우시마도국제예술제 공연 ▲1990년 춤·타래창단공연 ▲1995년 한국무용제전 참가 ▲1996년 김백봉춤 보존회 열린무대 ▲1997년 ‘아,김백봉무용’ 공연출연,LA한국예총 초청 미주 공연 ▷수상◁ 대한민국무용제 안무상(85년) 서울국제무용제 대상·안무상·음악상(92년) ▷저서◁ ‘춤’(94년)‘한·중·일 궁중무용의 변천사’(96년)외 논문집 ▷현재◁ 대한무용학회 이사·한국무용협회 부이사장·스포츠무용철학회 부회장
  • 플루트 연주자 김기순(이세기의 인물탐구:148)

    ◎무리속 섞인 진주… ‘미성 연출가’/“연주자는 무대서 악기로 기도” 음악철학 굳건히/국내외 수십회 독주·협연… 한국플루트의 개척자 천상의 피리를 부는 김기순.숱많은 단발머리에 화장기없는 외모는 시간을 멈춘듯 프레시한 분위기다.66년 이대 중강당에서 독주회를 가졌을 때나 중견교수인 지금도 행동과 말씨에서 싱그러운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의상도 마찬가지다.편안한 슬랙스와 터틀넥의 티셔츠를 즐겨입고 테가 둥근 선글라스를 목걸이처럼 걸고 다닌다.무대에서도 심플라인의 검은색 드레스,그때마다 난곡들을 정복해 나가면서 자신의 예술에 천착할줄아는 탐미주의자다.‘만약 내가 교수가 된다면 나이를 앞세워 거드름을 피우거나 권위의식으로 군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대로 그는 제자들을 가르칠때 ‘나에겐 플루트밖에 없다’든가 ‘플루트에 목숨을 건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자신과 싸우면서 자기의 심정을 이중적으로 분리하여 또하나의 나를 관조할 수 있을때까지 끈질기게 추구해 나가라’고 충고할 뿐이다.그 자신도 해마다 독주회와 수많은 국제·국내연주에 참가하면서 데뷔하는 신인처럼 ‘연주자는 무대에서 악기로 기도한다’는 자세를 지킨다. ○‘음반언어’로 감정총괄 지난 93년 호암아트홀에서 스위스의 저명한 알렉산더 메닌과 ‘투 풀루트 리사이틀’을 가졌을때도 청중들이 ‘작품이 가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노련한 유연성’과 ‘섬세하고 투명한 엘레지(비가)의 조화’로 김기순 신비의 절조를 이룩해 내었다.생전에 그의 연주를 빠지지 않고 감상했던 평론가 유신씨는 열의에 찬 그의 연주를 보고 ‘플루트의 색채로 악상을 정밀하게 표현하면서 자신만의 음악언어로 감정을 총괄하고 통제한다’고 호평해왔다.그리고 ‘우리 음악사에서 플루트가 독주악기로 우뚝 서기까지 그의 다양한 활동은 뚜렷한 업적을 주었다’고 부언한다. 지난 88년 스위스 빌라 쉔베르그공원에서 열린 ‘세레나데 88’에서도 그곳의 신문들은 ‘어느 누구도 논박할 여지없는 전문적인 노련함과 유려한 선율로 극장을 가득 메운 청중을 압도하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특히텔레만연주에서는 ‘치밀한 폴리포니(다성)와 이탈리아식으로 노래하는 칸타빌레,프랑스식 에스프리와 폴란드의 생기가 융합된 개성적 스타일’로 긴 박수갈채를 끌어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욕심은 난감의 기색이나 소진을 보이지 않는다.이미 85년에 바흐소나타 8개 전곡을 연주했고 텔레만 프랑크 모차르트소나타 전곡완주에 이어 힌데미트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적 도정은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알피니스트’에 비유될 정도다.특히 바흐에 관한한 92·93년과 지난 6월에 재도전을 시도하여 오래 다듬고 숙고한 서사시적 풍모를 풍부하게 과시했다.이를 위해 독일의 베렌라이터 카셀과 브라이트코프·헤르텔판 악보를 사용했고 미처 캐내지못한 음의 보석을 공략하기 위해 새로운 탐험을 위한 준비를 끝내고 있다.이러한 김기순의 음악의 조형성은 원로평론가 박용구씨에 의하면 ‘아티스틱한 음악의 철학성이 모래위에 탑을 세우고야 말았다’는 말이 잘 대변해준다. ○음악가정서 태어나 김기순은 원로 작곡가 김성태씨와 윤선항여사의 2남4녀중 딸로 막내다. 위로 두 언니(기숙·기옥씨)들은 성악,바로 손위언니(기정씨)는 첼로를 하는 음악적 가정에서 태어나 음악과의 인연은 숙명적인 셈이다.어릴때는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치다가 이화여중에 진학하면서 부친의 조언에 따라 플루트로 돌았고 61년,서울예고 재학중 부산일보가 초청한 ‘천재소년소녀 음악회’에 바이올리니스트 김민 등과 참가한 것이 본격적인 첫무대다.천성적으로 천진하고 순수하면서도 철저한 완벽주의를 동반하는 그의 성격은 하나의 일에 파고들면 ‘끝장을 내고야 마는 극기심’이 대단하다.음악을 살찌우기 위한 종교 철학 문학과 심리학서적 섭렵도 광범위하다.또 ‘인간의 영혼을 구하는 종교와도 같은 예술의 신비’앞에 그는 절대적으로 겸허를 지키면서 연주하기 전에는 반드시 기도에 들어간다.작곡가가 하나의 곡을 작곡할 때의 심경이 내부에 승화되기를 소망하면서 ‘자아도취란 결국 스스로를 파멸할 뿐이며 균형적인 사고와 독자적 예술영역을 소유하는 것만이 연주자 최상의 목표’라고 말한다. 부친 김성태씨가 서울대 음대교수인 덕분에 종로구 동숭동 서울대교수 사택의 쾌적한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부친의 끊임없는 격려와 충고가 음악에서 최선을 다하는 정신력을 기를수 있었다.반드시 완성에 다다른다는 결심때문에 연주가 없을때도 하루 5∼6시간씩 연습,그러나 연주가 없는 때란 거의 없는 편이어서 일년 내내 연주와 연주를 위한 연습이 되풀이 될 뿐이다.가족은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부군 박기웅씨(전문경영인)와 두 아들이 있다. ○부친의 격려·충고 큰힘 그는 전형적인 도시기질로 지나친 자기과시는 절제하는 편이다.그래서 여가에는 혼자서 인사동 골동품가게를 기웃거리고 시공을 초월하는 앤틱들 사이에서 그옛날의 향취를 혼자서 즐긴다.그것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생각하는 연습의 연장이기도 해서 남에게 이런 취미를 공개하거나 방해당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만사에 구구하게 매달리지 않고 똑바로 자신의 할일에만 정진하는 그를 보고 첼리스트 전봉초씨는 ‘무리속에 섞인 진주같은 예술가’‘세잔의 피리부는 소년같은 천진성’이 어릴때부터의 ‘미점’이라고 조언한다. 우주를 통과하는듯한 저 맑은 바람소리,특히 바흐 소나타 전악장에서 창조자로서의 작곡가의 모든 것을 찬란하게 펼쳐보인다.갈란테(우미)나 풍부한 칸틸레나(서정성),우주의 저편에서 울려오는 공기와 달빛과 녹색이 물든 자연 그대로가 그의 플루트 선율이다.지금 그의 음악은 마음껏 무르익어 남과 견줄수 없는 정점에 와있다.‘이노슨트’라는 특별한 훈장을 달고 세속의 허명에 흔들리지 않은채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인으로서 바로 ‘미국 플루트의 비루투오소인 킨케이드의 분위기가 그의 음악에서도 번져 나온다’는 것에 누구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연보 ▲1944년 서울 출생 ▲1961년 부산일보 초청 천재소년소녀음악회(부산시민회관) ▲1966년 이대 음대 관현악과 졸업,제1회 플루트독주회(이대 중강당) ▲1968년 이대 대학원 졸업 ▲1967년 제2회 플루트독주회,국립극장 ‘플루트음악의 밤’ 독주 ▲1969년 제1회 서울음악제 참가,‘대음악제’ 독주(서울시민회관) ▲1970년부터 이대·서울대 출강,제3회 독주회(국립극장) ▲1974년 제4회 독주회(예술극장) ▲1975년 바로크합주단 협연 ▲1978년 제5회 독주회(세종문화회관) ▲1979년 한국 플루트창립연주회 ▲1980∼93년 브라스앙상블 지휘 ▲1980·83·85년 ‘바흐소나타의 밤’(세종문화 소강당) ▲1987∼현재 이대 음대 교수 ▲1987·88년 ‘투 플루트 리사이틀’(호암아트홀),88세레나덴(스위스빌라 쉔베르그공원) ▲1988년 독주회(호암아트홀) ▲1990∼97년 독주회(예술의 전당,세종문화회관,예음홀,춘천종합예술문화회관,강릉·삼척문화예술회관) 등 20여회와 플루트대축제·청소년음악제·대음악회·서울국제현대음악제 출연 및 각 교향악단협연다수
  • “액취증 아내 구박 남편에 이혼책임”/서울 가정법원 판결

    ◎시부모와 함께 ‘아이에 유전’ 낙태 강요/“위자료 3천만원·양육권 아내에 줘라” 서울가정법원 가사2부(재판장 박희수 부장판사)는 20일 액취증(겨드랑이 냄새)을 이유로 아내를 구박해온 남편 L모씨(32·회사원)와 부인 K모씨(30)가 낸 이혼 및 위자료 청구소송에서 “두 사람은 이혼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위자료 3천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파탄의 주된 책임은 액취증을 문제삼아 부모와 함께 원고를 정신적으로 괴롭히고 낙태를 강요한 남편에게 있으므로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밝혔다.아이의 양육권도 부인에게 주었다. L씨는 결혼한 지 1년이 지난 94년 6월에서야 화장대 서랍에서 냄새 제거제를 발견하고 비로소 아내에게 액취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연애시절에는 분말용 냄세제거제를 바르고 다닌 것으로 확인했다. 이후 L씨는 부모와 함께 K씨가 옆을 스쳐가거나 팔을 쳐들때 마다 냄새가 난다고 불평을 했다.심지어는 무친 나물에서도 냄새가 난다며 K씨를 괴롭혔다.견디다 못한 K씨는 친정 부모와 의논한끝에 수술까지 받았다. 그러나 수술 후에도 구박은 계속됐다.이듬해 2월 K씨가 이미 임신 5개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시부모는 액취증이 유전될 수 있다며 낙태를 강요하고 아들에게는 이혼을 종용했다.속이 상한 K씨는 결국 친정으로 가버렸다. 그해 7월 아이를 낳은 K씨는 시가에 출생 신고를 요구했으나 시부모는 아이에게 액취증이 있는지 검사부터 하라며 거부했다.더욱이 L씨는 장인에게 냄새제거제를 들이대며 “왜 나를 속이고 냄새나는 딸을 시집보냈느냐”는 폭언까지 일삼아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까지 가버렸다.
  • 건축가 조성렬(이세기의 인물탐구:145)

    ◎한국 인테리어 디자인의 개척자/수직과 45도의 사선·정원과 반원 원칙 고수/칙칙한 도심 구석구석 화려하게 변모시켜 서구적 모더니즘과 큐빅운동으로 일관된 작업을 해온 건축가 조성렬은 60년대 중반 어둡고 칙칙했던 도심의 뒷골목을 밝고 빛나는 모습으로 바꿔논 선두주자의 한사람이다.당시 우리 건축물의 삭막한 현실을 돌아보면 그의 큐빅 사고력은 ‘한국 인테리어 디자인의 프론티어’라는 표현이 결코 무색하지 않다.큐빅운동을 구체적으로 분출시킨것은 70년대초 서울 중구 저동 백병원건너편에 자신의 파인힐 레스토랑 건물을 지으면서부터다.‘모던하다’는 호평에 걸맞게 파인힐은 오픈즉시 서울의 명소로 떠올랐고 그것은 다음에 전개될 큐빅운동의 효시이기도 하다.이후 드럼통과 막걸리 냄새로 찌들었던 관철동 명동을 아기자기한 커머시얼타운으로 탈바꿈해 놓았고 바로 청바지와 생맥주와 생음악이 있는 ‘청년문화’의 온상으로 정착되는데 기여했다. ○큐빅운동 효시 ‘파인힐’ 건립 지금의 중장년층이라면 ‘전설의 언덕’‘숲속의 빈터’‘밀밭’과 ‘태양의 길목’‘달마음’같은 시심을 자극하는 상호와 세련되고 아늑했던 휴식공간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이 장소들은 외부는 화려하고 내부는 간결하게 절제되어 즐거움과 낭만이 흘러넘쳤고 큐빅을 모듈로하면서도 대중속에 파고드는 프로젝트를 세운것이 특징이다.이른바 지붕면은 감추어진듯 수평선에 맞닿아 있고 수퍼그래픽으르 처리된 벽면과 하프의 선을 연상시키는 스페이스 파티션은 검정 빨강 흰색으로 전체 이미지를 순화시키고 있다. 7년간의 작업끝에 그는 72년 신세계화랑에서 ‘조성렬건축전’을 열었고 ‘조성렬작품집(실내+건축)’을 출간하기도 했다.그의 스승인 김수근은 서문에서 ‘자기작품을 한권의 책으로 출간한 최초의 작가’임을 전제하고 ‘순수한 작가로서의 자세에서 흐트러짐이 없이 철저하게 자기세계를 관리를 해온 완벽주의자’로 쓰고 있다. 건축계의 리더로 정상에 서기까지 그가 걸어온 과정은 남보다 두배의 정열과 노력의 결정임을 알수 있다. 전남 벌교 척영리에서 가난한 농가에 태어나 독실한 크리스찬인 부모덕분에 유아영세를 받았고 교회에서 준 장학금으로 순천에 있는 매산중고를 졸업했다.그림그리기를 좋아해서 서울대 미대 중등학교 교사양성소에 다니면서 건축가 이희태씨를 만난 것이 건축이 ‘종합미술’이라는 인식에 눈뜨게된 동기다.그때부터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다는 목표로 그래픽디자인과 도학에 빠져들고 ‘프린트’‘그래픽스’ 등의 외국잡지를 읽으면서 수준높은 디자인 감각을 깨우쳐 나갔다. ○그래픽디자인·단학에 심취 뒤늦게 60년에야 소망했던 홍대 건축과에 입학했고 정인국 엄덕문 김수근 김중업 등 한국건축을 주도하는 기라성같은 스승들로부터 ‘건축에대한 이지와 질서의 엄숙함’,‘조형의 낭만성과 아름다움의 감성적인 측면’을 답습했으며 일본에서 돌아온 김수근씨에게 ‘공학적 구조와 예술적 창조가 조화와 균형으로 합쳐진다’는 원리를 터득했다.특히 김수근씨는 ‘행동하는 지성,창조하는 감성’과 ‘공간사를 능란하게 운영하는 경영술의 귀재’로서 그는 김수근씨를 ‘미래의 자신의 자화상’으로 정하기도 했다.그러나 대학졸업후 취직이 쉽지않아 을지로에 있던 영광인쇄소에 다니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악보를 그리거나 포스터와 신문광고 우표디자인에 이르기까지 해보지 않은 일이란 없었다.다음해 신세계백화점 공채에 합격하여 쇼윈도 디스플레이와 그래픽일을 담당하다가 68년 한국무역박람회의 삼성관설계에서 ‘본구적인 질서의식과 미의식을 적용한 건축’으로 건축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또 신세계측의 신임을 받아 69년 일본 미스코시 인테리어 연수,70년엔 오사카 EXPO연수에 참가하여 인테리어 디테일과 테크닉에 대한 안목을 높였다.수직과 45도의 사선,정원과 반원의 원칙은 그때부터 지켜진 그만의 방법이다. 그런 한편으로는 이미 활동하고 있는 동료들보다 뒤쳐지고 있다는 안타까움에서 사보이호텔 골목에 있던 여동생이자 의상디자이너인 트로아조의 매장 2층을 빌려 큐빅공방을 만들었고 퇴근후 이곳에 와서 불모지인 실내건축과 디스플레이 영역에 몰입했다.이때 디자인 한것이 명동일대의 점포와 상업환경분야의 신조류를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파인힐은 그렇게 탄생된 노력의 산물이자 뼈를 깎는 고통의 결과다.새벽 6시에 나와 회의를 하고 메뉴상품까지 개발하면서 9시에 신세계에 출근,다시 파인힐로 돌아와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유니폼 의자 탁자 광고전단을 직접 구상하고 지시해 나갔다.‘어설프게 하면 혼탁해지거나 지탄을 받기 쉽지만 철두철미한 상업주의’는 파인힐시리즈를 탄생시키는데 어떤 장애도 받지 않는다는 자신감에서다. 그는 자신의 건축의 길은 우연이자 필연이라고 말한다.건축을 하게 된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정된 운명에 의해 건축과 관련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으며 지난날의 고생이 밑거름이 되어 자연발생적으로 토탈건축에 다다르게 됐다고 말한다.집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최명숙씨와의 사이에 남매,딸(현이씨)이 뉴욕 플랫미술학교에서 인테리어를 전공했다. 88년 강남구 삼성동에 지은 6층규모의 트로아조아트(TCA)빌딩에 그의 큐빅디자인연구소가 들어있다.3층까지는 의상전시실이고 4층은 건축관련 라이브러리,보는이의 각도에 따라 ‘새로운모습을 수반’하는 이 건물은 건축평론가 박암종에 의하면 ‘환경친화적인 측면에 맞추면서 내부는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는 능률적인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그는 전쟁기념관 독림기념관전시실에 이어 최근에는 국제공항고속도로 전시관과 박영덕화랑등의 전시관시리즈에 손대면서 강남일대의 골목들을 활성화하기 위한 장고에 들어가 있다.하고싶은 일만을 하기 때문에 모험과 도전은 배제되어 있으나 어떤 일에든 집요하게 파고드는 완벽성으로 인해 그에게선 작은 실수나 미흡함은 찾아볼수 없다.항상 녹슬지 않는 번뜩이는 디자인센스를 보여주면서 도시 구석구석의 질척한 모습을 화창하고 눈부시게 변모시키는데 그의 빛나는 두뇌는 멈추지 않게 될 것이다. □연보 ▲1936년 전남 벌교 출생 ▲1964년 홍대 건축학과 졸업 ▲1972년 조성렬건축전(신세계화랑),대한건축학회 정회원 ▲1976년 대구 조성렬건축디자인전 ▲1979∼81년 한국인테리어디자인 협회 초대회장 ▲1981∼85년 홍대 환경대학원 강사 ▲1982∼84년 독립기념관 기획위원,독립기념관전시 설계 사위원 ▲1991년 전쟁기념관 전시설계 ▲1992년 개인건축전(예술의 전당) 〈현재〉 큐빅디자인연구소 대표·미국 ASID(인테이러디자이너협회)정회원 ▷수상◁ 서울올림픽 유치공로 대통령표창· 서울올림픽 뉴델리국제전시회 특별상· 한국건축가협회 건축상(88년) ▷저서◁ 조성렬작품집(72년) 인테리어디자인(83년) 세계의 인테리어디자인(85년) 인테리어디자인의 실재(88년) 큐비즘의 조형세계(92년)
  • 서양화가 김형근(이세기의 인물탐구:144)

    ◎한시대의 미감 바꾼 ‘은백의 화가’/사물을 눈으로 보지않고 마음으로 ‘내면 터치’/한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도 지낸 ‘화단의 리더’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퇴색한 과녁에 박힌 세개의 화살,나뭇결이 선명히 드러난 과녁에 두개의 화살은 힘차게 박혀있으나 하나는 과녁을 맞추고도 힘에 부친듯 사선으로 그 끝을 떨어뜨리고 있다. 지난 70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차지한 김형근의 ‘과녁’은 싱싱한 박진감과 치열한 묘사력으로 인해 당시 이 작품을 뽑은 원로화가들은 “이는 일찍이 우리 화단사상 보지 못했던 현장감”이며 “한 시대의 미감을 바꾸어 놓았다”고 찬사해 마지 않았다.한장의 그림에 담긴 만감이 엇갈리는 진한 메시지는 작품의 의취를 일순간에 짐작할수 있게 하는 명작이기 때문이다.과연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는가.그러나 실패와 좌절의 되풀이속에서도 낙선의 고배를 패배로 치부하지 않았고 시련은 아프지만 오히려 치솟는 힘이 되었다. ○70년 국전서 대통령상 수상 만일 김형근의 ‘여인상’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극단적인 미추구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영롱한 보석타래와도 같은 그의 여인상은 눈부신 치장과 황홀감으로 인해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멈추게 하는 혼도직전의 전율을 던져준다.미적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색채와 조형적인 균제·비례와 조화와 함께 장미향기와 라일락바람이 넘나들고 어느 때는 오베른 언덕같은 천상의 노래가 가슴을 후비기도 한다.여인과 꽃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재현하기 위해 극사실적인 표현기법으로 독특한 미감을 절묘하게 살리면서도 작가의 천부적 감수성은 실제에서 지각할 수 없는 내면의 지성미까지도 붓끝으로 일궈놓고야 만다.그래서 여인의 볼에서는 발그레한 생명감이 피어나고 실크처럼 고운 살갗은 조금만 건드려도 상처가 날듯 섬세하고 연연하다.여기에 그치지 않고 극미와 화미에 다다르기 위해 보일듯 말듯한 미소에 귀족적 기품과 첨단적인 세련미를 담아내어 평자들은 “테크닉을 극복한 지점에 작가 자신을 세우고 있다”고 표현한다.‘사물을 눈으로 보지않고 마음으로 읽는 관조미의 극치’가 그것이다. 미술평론가 신항섭은 ‘김형근의 은백색 공간’이란 한 미술평론에서 “엄격한 의미에서 한국 사실주의 회화는 김형근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단정한 바 있다.“지금까지의 사실적인 표현양식이 순수미와 자연주의를 재현하는데 그쳤다면 김형근은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극사실적인 작품을 통해 작가적 입지를 구축했다”고 했다. 이러한 평가를 받는데는 남보다 특이한 환경에서 자라나 전혀 뒤늦게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그의 고향은 산자수명한 경남 통영.한의사이던 하범 김전수씨의 무녀독남으로 다섯살때부터 글씨를 쓰거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그러나 통영수산고에 다닐때까지 학교에 바래다주고 데리러 오던 부친은 외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고 부친의 뜻과는 달리 그림의 길을 선택하게 된 이상 그는 지금까지 예상치 못했던 혹독한 고독과 고생스러운 수련의 길을 모색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70년대 미 화단과 인연 그는 군인대학인 정치대 법정과를 나왔고 10년간 장교의 신분으로 있으면서 화가를 지망했으며 화단에 인맥이나 학맥이 닿을 리 없었다.오죽하면 대통령상 수상이후 그는 “심사위원들의 아집과 편견과 독선으로 인해 15년간의 국전도전시대는 까마득한 험난준급”이었으나 혼자서 어둠속을 걸어가는 듯한 극한 상황에서도 “그림을 그릴때만은 언제나 행복에 넘쳐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또한 그가 ‘은백의 화가’로 불리는 이유는 ‘동양의식의 세계화’를 목표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불생불사’의 세계를 형상화한데 있다고 할 수 있다.은백색과 흔적의 무한성,화면을 장식하는 꽃과 여인에서 그는 직선의 유리화병에 꽂힌 백합다발과 구름을 타고 비상하는 동자,다른 한쪽엔 남색 유리컵과 옛날의 종을 등장시키기도 한다.여기에 아득한 시간속에 가리워진 옛날을 현대에 용해시켜 유구하게 이어져온 역사와 생의 긍정과 환희를 절묘하고도 신비롭게 연출해낸다. 대통령상 수상이후 그는 미국 아메리칸 아트스쿨에 다니면서 70년대 이후 미국화단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고 오랜 작업실이던은평구 녹번동을 떠나 석촌 올림픽선수촌아파트로 옮기는가 하면 경기도 양평과 일본의 지바(천엽),뉴욕에 각각 대작을 위한 아틀리에를 둔 국제적 화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이김복여사와의 사이에 딸만 넷,모두 출가했고 그의 그림의 모델이던 차녀(성희씨)가 중년에 접어들자 최근에는 손자들을 데려다 모델로 삼고 있다. ○그의 그림선 숨결과 향기가… 시각적인 포만감뒤에 은은히 감도는 절제미는 특유의 긴장감을 극으로 끌어올리면서 그의 여인은 순정적인 정령의 서조를 당당하게 지켜나간다.그리고 어떤 어려운 일에 부딪혀도 반드시 이겨내고 슬픔이나 분노보다 작가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을 부여한 빛나는 화면을 성취한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은 다이아몬드같은 흰빛을 뿌리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이상화된 현실을 만끽하기에 이른다.그를 아끼고 깊이 연구하는 평론가들은 이를 두고 “심신을 정화시키는 미의 공간에 우리가 들어서고 있다”고 표현한다.미의 사절인 김형근의 세계는 그림에서의 숨결과 향기와 음악과 함께 황폐한 현대인들로 하여금미의 극치앞에 감탄을 금치못하게 하고 결국 행복과 사랑을 깨닫게 하는 구원의 암시를 함축하고 있다. □연보 ▲1930년 경남 통영 출생 ▲1955년 국전 입선 ▲1968년 국전 특선 ▲1969년 국전 문공부장관상 ▲1970년 국전 대통령상 ▲1971년 도미기념전(신세계미술관) ▲1972년 아메리칸 아트스쿨수학 ▲1975년 역대국전 대통령수상작가 초대전, 김형근초대전(부산호텔화랑) ▲1977년 현대화랑초대 개인전 ▲1978∼81년 수도여사대교수 ▲1979년 김형근도화전(선화랑) ▲1981년 서독미술전초대전 ▲1983년 국전 심사위원 ▲1988년 뉴욕 웰리F 화랑 전속,알파인화랑초대전 ▲1991년 시가 있는 그림전(서림화랑) ▲1993년 현대미술 100년의 열정전 초대(현대화랑) ▲1995년 대한민국미술대전심사위원장 ▲1996년 현대리얼리즘회화 초대전(한국 포스코갤러리) ▲1997년 현대작가 1호전(선화랑) ▷수상◁ 경상남도문화상(68년) 서울시문화상(81년) 통영시문화상(95년) ▷작품소장◁ ‘과녁(관혁)’ ‘우리의 슬기’ ‘영원의 장’(청와대) 벽화 ‘여명의 비상’(한국외환은행) ‘한려수도’(경남도청)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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