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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찬 총리후보 지명] ‘실패한 교육개혁’ 격론 벌일듯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이해찬 의원을 새 총리후보로 지명하면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정부가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면 국회는 20일 안에 인사청문회 등을 거쳐 본회의 인준투표를 진행해야 한다.여야는 열린우리당 7명,한나라당 5명,비교섭단체 1명으로 인사청문위원을 배분하는 문제에는 합의했지만 위원장 몫을 놓고 벌써부터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등 험로를 예고하고 있다.특히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무난한 통과를 예상하고 있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은 철저하게 검증하겠다고 벼르고 있어 긴장도가 높아지고 있다.‘전교조’가 9일 지명 반대 논평을 내고 학부모 단체들이 거센 반대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변수다.청문회에 앞서 이 지명자의 공과와 정치권 안팎의 움직임을 짚어봤다. 이해찬 국무총리 후보 지명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교육부장관 때 도입한 각종 교육정책이 핵심 이슈가 될 것 같다.열린우리당의 ‘방패’와 한나라당·민주노동당의 ‘창’이 맞서면서 치열한 논쟁이 예상된다. 한나라당은 드러내 놓고 반대의사를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이 지명자의 공과를 철저히 파헤치겠다고 벼르고 있다.이 후보 개인에 대한 ‘점검’은 물론 노 대통령의 ‘코드인사’와 ‘개혁지상주의적 집권2기 구상’을 집중 공략하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한나라당은 인사청문회 때마다 여론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인신공격성 흠집내기보다는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는 정책적 판단력을 갖고 있는지를 검증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방침이다. 한나라당의 주된 공격 ‘메뉴’는 ‘이해찬 세대’로 상징되는 교육개혁 정책들이다.특히 이 지명자가 지난 1998년 교육부장관으로 이 정책들을 추진하면서도 정작 딸에게는 과외를 시킨 게 뼈아픈 약점일 수밖에 없다.2002년 8월 대선을 앞두고 ‘검찰이 병풍 유도발언을 요청했다.”고 말해 5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받는 등 설화(舌禍)도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전여옥 대변인은 논평에서 “교육부장관 때 무모한 개혁의 후유증이 지금 교육현장에서 배움에 대한 경시와 교권 추락으로 남아 있는 점을 우려한다.”면서 “이 지명자가 교육개혁 실패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상생의 정치를 펼칠 의지가 있는지,뚜렷한 국가관이 있는지 냉정하고 엄격하게 평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나라당 청문위원은 당내 경제·교육·통일안보 전문가들로 구성된다.특히 교육분야 전문가인 초선의 이군현·이주호 의원 등을 전진 배치할 계획이다.이날 오전부터 인사청문위원 인선에 들어갔다.충분한 시간을 갖겠다는 전략이다.현 경제상황에 대한 이 지명자의 상황인식도 점검대상이다.‘경제는 위기가 아니다.’라는 노무현 대통령과 인식이 같은지,경제회생을 위한 복안이 뭔지 등을 추궁할 것으로 알려졌다.아울러 주한미군 감축에 대한 입장과 향후 대응방안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질문공세가 이어질 것 같다.민주노동당도 인사청문회를 단단히 준비하겠다는 입장이다.김종철 최고위원은 “이 지명자가 현 시대가 요구하는 빈부격차 해소나 한반도 평화 등 주요 개혁과제 수행에 적임자인지,특히 교육부장관직을 수행할 당시 업무의 책임성 여부를 철저히 검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이해찬 총리후보 지명자 약력 ▲1952년 7월10일 출생 ▲5선 의원(13∼17대) ▲덕수중,용산고,서울대 사회학과 졸 ▲민청학련 사건 투옥(1974)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투옥(1980) ▲민청련,민통련 등에서 민주화운동(1983∼1987) ▲서울시 정무부시장(1995)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의장(1996) ▲15대 대선 기획수석 부본부장(1997) ▲교육부 장관(1998) ▲새천년민주당 남북정상회담지원 특위위원장(2000) ▲16대 대선 기획본부장(2002)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 기획단장(2003)▲가족 부인 김정옥,장녀 이현주 ▲재산 6억 8776만원 ▲저서 ‘사회학적 상상력’,‘민주와 통일의 길목에서’ ▲취미 바둑,독서 ▲e메일 lhc21c@assembly.go.kr ˝
  • [5일 TV 하이라이트]

    ●수요예술무대(밤 12시45분) 영국 출신의 마이클 코플리와 이안 무어에 의해 1988년 창단되어 전세계 어린이들과 어른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아온 ‘클래식 버스커스(The Classic Buskers)’가 출연한다.싱어송라이터 하림과 솔로 활동으로도 사랑을 받고 있는 김윤아,밴드 롤러코스터의 무대도 준비되어 있다. ●스페셜,정통부장관 초청특강(오후 1시25분) 휴대 인터넷과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 등의 8가지 신규서비스와 광대역 통합망,지능형 로봇 등 3가지 네트워크,그리고 9개 신기술 개발을 목표로 하는 ‘839프로젝트’. 진대제 정통부 장관을 초청해 ‘839프로젝트’의 모든 것을 직접 들어본다. ●연중기획〈미래의 조건〉(오후 9시40분) 한 부모가정,재혼복합가정,입양가정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해 가는 가정에서 과연 아이들의 인권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살펴본다.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가정을 인정하고 아이들의 권리와 인격이 침해받지 않는 사회를 위한 방법과 우리의 자세는 무엇인지 모색한다. ●인생극장 오마이갓(오후 10시50분) 다방 마담이었던 어머니.철없던 시절에 진우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다.점점 반항만 하던 진우는 집과 가족이 싫어 연락을 끊고 군에 입대를 해버린다.그리고 모르고 있었던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 진우는 그제서야 어머니로부터 감추어진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소풍가는 여자(오후 8시50분) 병태는 나이트클럽에서 쏘냐를 구하려다 싸움이 붙는다.혜숙은 경찰서로 달려가고, 병태를 데리고 나온 혜숙은 정신 좀 차리고 살라며 화를 낸다.혜숙은 합의금을 주려고 딸의 적금 통장을 깬다. 찬미의 통장이 해약된 것을 알게 된 조 여사는 미심쩍어하며 윤호에게 돈을 받았냐고 묻는다. ●4월의 키스(오후 9시50분) 고향에서 혼자 돌아온 정우는 채원에게 다시 만난 건 우연이 아니라며 과거 편지 이야기를 꺼내지만 채원은 지난 일이라며 정우를 밀어내기만 한다.채원의 흔들리는 모습을 본 재섭은 채원과의 결혼을 서두르고 정우를 신규사업팀에 자신의 직속으로 발령을 내겠다고 한다. ●낭독의 발견(오후 11시35분) 소설가 김훈의 작품 ‘칼의 노래’,‘밥벌이의 지겨움’,‘자전거 여행’을 영상과 낭독으로 만나본다.또한 김훈이 낭독하는 다른 이의 작품,서정주의 ‘수대동시’를 들어본다.늘 신인으로 살고 싶은 동시에 이 시대 최고의 문장가가 되고 싶다는 그에게서 문학 열정을 확인하는 시간을 갖는다. ˝
  • “막오르기전 여전히 새색시처럼 떨려요”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갈한 자태가 상대방을 압도한다.평생을 바쳐 한길을 걸어온 예인(藝人)들이 대개 그렇듯 범접하지 못할 강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저 작고 갸날픈 체구 어디에 그토록 강렬한 무대 열정이 숨어있을까,새삼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원로배우 백성희(79).국립극단의 최고령 배우이자 한국 연극의 산 역사로 불리는 그가 올해로 연기 인생 60주년을 맞았다. “연극이 무작정 좋아서 시작했고,연극의 매력에 빠져 살다보니 어느새 그 만큼의 세월이 흘렀네요.자동차 헤드라이트처럼 옆도,뒤도 안돌아보고 오직 앞만 보며 달려왔지요.이젠 연극이 나인지,내가 연극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예요.” ●배우인생 담은 자전극 ‘길’ 평소 ‘무슨무슨 기념공연’식의 행사성 무대를 꺼려온 그이지만 ‘이번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후배들의 성화에 조촐한 판을 벌였다.4월14일부터 19일까지 문예진흥원 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길’이 그 무대.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여배우로서,또 배우 이전에 한 여성으로서 그가 걸어온 지난 60년의 인생길을 반추하는 자전극이다.그는 못내 쑥쓰러운지 홍보 포스터에서 ‘60주년 기념공연’이라는 문구는 기어이 뺐다. 연극 ‘길’은 올초 국립극단 예술감독이 된 연출가 이윤택이 대본을 썼고,미국 뉴욕 오프브로드웨이에서 20년간 배우와 연출가로 활동하다 최근 귀국한 김혜련이 연출을 맡았다.백성희가 그동안 출연했던 ‘메디아’‘뇌우’‘달집’‘베니스의 상인’‘갈매기’ 등 5개 작품을 극중극으로 보여줌으로써 ‘연극이란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메타연극의 형식을 취했다. 인터뷰 기록을 바탕으로 쓴 대본에는 남편(소설가 나도향의 동생 나조화)이 외도를 하다 사망하자 빈소조차 찾지 않았던 일화 등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생활도 진솔하게 담겨있다.국립극단 후배인 권성덕,손숙 등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백성희가 처음 배우의 꿈을 품은 건 소학교 5학년 때.일본에서 유학하던 외삼촌이 가져온 일본 소녀가극단의 팸플릿에 나와있는 소년 배우의 멋진 모습에 반했다.나중에 그 배우가 여자인 것을 알고는 ‘그럼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그는 “백지에 떨어진 먹 한방울이 점점 번지듯 그때 내 가슴 속에 새겨진 강한 인상이 나이를 먹으면서 같이 자랐다.”고 회고했다.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에 들어선 계기는 동덕여고 3학년 때 신문에 난 ‘빅타무용연구소 단원모집’광고였다.한달음에 연구소로 달려갔고,5대1의 경쟁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연구소에 들어간 이듬해 대역으로 부민관 무대에 선 것이 인연이 돼 43년 극단 현대극장에 정식 입단했다. 데뷔작은 44년 함세덕 작·연출의 ‘봉선화’.당시 무명의 신인이 일약 주인공을 따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47년 이해랑 선생이 대표로 있던 극단 신협으로 옮긴 그는 50년 극단 신협이 국립극장의 전속 극단이 된 이후 지금까지 한시도 국립극단을 떠나지 않고 든든한 버팀목 노릇을 해왔다. ●아버지 몰래 연극하다 매맞기도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집안의 반대는 너무나 당연했다.‘이어순’이란 본명을 버리고 서항석 선생(2대 국립극장장)이 지어준 ‘백성희’라는 예명으로 가족 몰래 지방 순회 공연을 다니다 아버지에게 들켜 매를 맞기도 했다.“아버지께서 결국 ‘넌 내 딸이 아니다.’라며 포기하셨지요.요즘 대학입시에서 연극영화과의 인기가 높고,부모들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걸 보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껴요.그때 한이 남아서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이 생기자마자 1기로 입학했어요.”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은 대략 400여편.극성 맞고 대사가 많은 힘든 역할을 단골로 해왔다.이번 ‘길’연극에서도 “혀에서 쥐가 날 정도로 대사가 많다.”며 웃었다.1시간40분 공연에서 그가 등장하지 않는 분량은 20분에 불과하다. 그는 연극에서 정직함을 배운다.더도 덜도 아닌,딱 노력한 만큼만 보여주는 무대가 그의 천성과 잘 맞는다고 했다.그는 “정직하게,어쩌면 경직되게 한평생을 살아왔다.”면서 “융통성 없고,순발력 없는 외고집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말했다.72∼75년,91∼93년 두차례에 걸쳐 국립극단 단장직을 맡았을 때도 무대에 몰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두번이나 사표를 썼다. 60년 연기 인생에서 ‘유전의 애수’(53년)‘봄날은 간다’(2001년)등 단 2편의 영화에만 출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그는 “배우는 무대에 서면 관객과 자웅을 겨루는 재미가 있지만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 재미가 없다.”고 했다.출연 분량은 적었지만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봄날은 간다’는 허진호 감독이 맘에 들어 두달 고민 끝에 어렵사리 출연을 결정했다. ●“연극에는 관객과 자웅 겨루는 재미 있어” 50년 넘게 술과 담배를 즐겨왔지만 타고난 건강 체질에다 채식위주의 식습관 덕에 체력에는 아직 문제가 없다.‘완벽주의자’‘강철 여인’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강한 신념과 정신력이 신체의 허술함도 용납 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무대에 오르기 전 항상 두 손을 모으고 수도자같은 모습으로 대기하는 그를 후배 연극인들은 ‘교과서적인 배우’라고 칭한다.‘백성희 화술’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연기에 있어서 일가견을 이룬 그이지만 정작 스스로는 “배우로서 부족한 점이 말할 수 없이 많다.”며 겸손해했다.그토록 오래 무대에서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막이 오르기 전에는 새색시처럼 떨린단다. “연극을 가볍게 다루지 마세요.연기에는 배우의 인격까지 드러납니다.품격있는 연기를 위해 노력하고,연극을 생명처럼 아껴야 합니다.” 후배 연극인들에게 주는 충고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정성으로 인해 한층 울림있게 다가온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백성희씨는… ●1925년 서울 출생 ●1942년 동덕여고 졸업 ●1943년 극단 현대극장 단원 ●1947년 극단 신협 단원 ●1972∼75년,91∼93년 국립극단 단장 ●1992년 연극협회 부이사장 ●2001년∼현재 국립극단 원로 단원,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수상 경력) 동아연극상(66년)대통령표창(80년)대한민국문화예술상(94년)백상예술대상(98년)대한민국예술원상(99년)예총예술문화상(2002년) (출연작품) 베니스의 상인,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무의도 기행,나도 인간이 되련다,무녀도,산불 등 400여편.˝
  • ‘1000만’ 태극기 꽂은 강제규감독

    강제규(42) 영화감독은 하마터면 ‘태극기를 휘날리지 못할 뻔’했다.지난 2001년 6월 강 감독은 매우 중요한 기로에 선다.영화 ‘쉬리’ 이후 새로운 아이템으로 SF장르를 선택한 그는 몽골을 다녀오는 등 칭기즈칸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KBS-TV에서 제작한 6·25특집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우연히 접했다.그의 시선에 찰나처럼 스쳐간 장면은 이러했다.육군본부가 주도한 유해발굴사업단의 연락을 받고 50년 만에 남편의 유해와 마주하는 아내(75)와 딸(33)의 모습이었다.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어떤 예술가적 고통이 그의 가슴에 파고 들었다.곧,‘그래,한국전쟁이야!’라는 직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단박에 ‘칭기즈칸’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로 방향을 확 틀었다.이때부터 1000만 관객에게 다가서는 긴 여정이 시작됐던 것이다. ● 태극기는 휘날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주말 서울 강남구 포이동 ‘강제규 필름’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머리는 80년대의 대학생처럼 길었고, 헐렁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대작 영화의 역량이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우선 최근 미국 샌타모니카에서 가진 영화 ‘태극기∼’ 시사회의 현지 반응을 먼저 물었다. “아메리칸 필름마켓(AFM) 전용극장에서 미국과 유럽 각국의 영화관계자 200여명이 관람했지요.그런데 이례적일 만큼 한 사람도 중간에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다들 눈물이 글썽한 채 나오면서 ‘쇼킹하다’고 입을 모으더군요.” 특히 그는 “시사회때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상황을 소개하는 것이 관례지만 ‘태극기∼’는 시사회 기준인 1시간40분 러닝타임보다 더 길어 그냥 진행했다.”면서 “그럼에도 다들 감동적으로 영화를 감상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도 충분히 도전해볼 만하다는 찬사도 아끼지 않았다. ● “영화는 철학적 메시지 담아야” 관객 1000만돌파의 비결에 대해 그는 “영화 ‘태극기∼’가 우리의 모든 상황을 종합해볼 때 시대적으로,정서적으로 중요한 위치에서,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면서 “영화는 보고,즐겁고,기뻐하고,철학적 감동의 메시지를 줘야 한다.”고 자신의 영화철학을 피력했다. 제목을 ‘태극기∼’로 정한 특별한 까닭이 있는지 물었다.그는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 제목을 ‘W프로젝트’로 명명했으나 막상 보도자료를 내려고 하다 보니 마땅한 제목이 없어 고민했다.”고 토로했다.또한 한국전쟁을 떠올리면 강렬한 이미지가 한가지 연상된다는 그는 “그건 군인들이 총신 끝에 태극기를 묶고 휘날리며 고지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또 ‘태극기∼’가 커보이고 역설적으로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듣고 제목을 그렇게 확정지었다.“모든 게 당초보다 커졌지요.영화를 찍고 나니 필름길이만 해도 33만자(1자가 약 30㎝)였습니다.서울∼부산을 왕복해도 남을 거리이지요.또 전국 67군데 흩어진 촬영장소를 돌아다닌 거리도 15만㎞에 이릅니다.” 영화관련 인터뷰 기사는 많이 보도돼 그의 과거시절로 얘기방향을 돌렸다. 그는 마산에서 2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부친이 마산 시내에서 조그마한 장사를 했는데 마침 집 근처 강남극장(지금은 없어졌지만)의 주인과 친하게 지냈다.덕분에 어릴 적부터 극장을 공짜로 자주 드나들 수 있었다.이때 즐겨 본 영화가 ‘아톰시리즈’‘로봇태권V’‘독수리요새’ 등이었다.흑백 영사기 돌리는 모습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다.영화 ‘시네마천국’의 꼬마 주인공 ‘토토’처럼. 중학교때 학교 성적은 3년 줄곧 전교 1등을 차지했다.특히 수학·과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해 주변에서 ‘신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때마침 형이 비행기 조립을 무척 좋아하는 바람에 집안을 온통 비행기 조종석처럼 꾸며놓았다.그의 과학적 재능을 더욱 개발하는 바탕이 됐다(형은 나중에 공군사관학교로 진학한다.지금은 대한항공 조종사로 근무중이다). 이같은 주위의 칭찬과 배려속에 중학을 마친 그는 고교에 진학하면서 사춘기를 맞아 비뚤어지기 시작했다.철학자들이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인생이 뭐꼬?’라는 물음표를 하루종일 떠올리며 거리를 마냥 쏘다니기 일쑤였다.하루는 ‘불선천지 팔양신주경’을 우연히 접하면서 불경에 푹 빠지기도 했다. 또 ‘어린왕자’와 ‘갈매기의 꿈’을 읽고 생텍쥐페리와 리처드 바크의 철학사상에 탐닉하기도 했다.학교성적은 거의 꼴찌수준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진촬영’에 취미를 가졌다.카메라 하나를 둘러메고 바다로,시내로,산으로 가서 닥치는 대로 셔터를 눌러댔다.필름현상은 집 근처의 사진관 아저씨한테 직접 배웠다.이때 배운 촬영기술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선배들과 곧바로 단편영화에 제작에 나서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 영화감독 꿈을 펼치기 시작한 고2 이뿐만 아니었다.사진촬영을 하면서 동시에 문학서클에도 가입했다.주로 표현주의 기법의 시를 창작하면서 문학적 자질을 키워 나갔다.이때 쓴 습작시만 수백편에 이른다고 했다.그가 ‘태극기∼’ 촬영을 끝마치고 영화제작의 전 과정을 담은 책을 쓰게 된 것도 그의 문학적 재능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며 “참,괴기하게 보냈다.”고 표현했다.그러나 그런 행동들이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영화감독을 할 수밖에 없는 ‘동물적 토양’이었다고 술회했다. 그가 영화감독의 꿈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것은 고2때.어느 겨울날 마산 시민극장에서 ‘닥터 지바고’를 관람했다.극장문을 나서면서 ‘영화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하는 찡한 감동을 느꼈다.이때부터 사진 찍는 것을 중단했다.오로지 영화공부였다.마산에는 개봉극장이 거의 없어 주말이면 부산으로 달려가 개봉영화를 감상하고 막차로 돌아오곤 했다.이때 본 영화가 ‘사학비권’‘철수무정’‘하노버스트리트’‘새벽의 7인’등이었다. “고교때는 술도 마시고 좀 이상한 짓을 많이 했지요.고3때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하겠다고 했더니 ‘딴따라’라고 만류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또 당시만 해도 마산고에서 예체능계를 진학하는 예가 거의 없었지요.”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그는 선배들과 어울려 단편영화를 미친 듯이 찍어대기 시작했다.흔하던 미팅은 딱 한번.그것도 미팅 선약을 펑크낸 선배 대신이었다. ● ‘태극기~’는 다시 시작합니다 이때 만든 단편영화들은 ‘침묵’‘땅밑 하늘공간’‘깰수 없는 겨울잠’ 등이었다.제목에서 풍기듯 실험적인 작품에다 이미지 표현 중심의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16㎜영화는 10여편.특히 대학 2년때 같은 학과 동료인 탤런트 박성미씨와 함께 단편 ‘가을오후’를 제작하면서 친해져 결혼에 골인했다. “89년에 결혼했지만 한동안 먹고 사는 것이 걱정이 돼 아이를 5년만에 낳았습니다.‘은행나무 침대’를 만든 후 첫째 아들 윤원이,그리고 ‘쉬리’ 이후에 둘째 지완이를 낳았지요.” ‘태극기∼가 대박을 터뜨렸으니 부인한테 보너스를 두둑히 주었느냐는 질문에 올 여름에 가서야 결산이 될 것 같다고 대답했다.그후에는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 물었다. “‘태극기∼’는 겨우 끝났고 다시 시작합니다.세계인들이 한국영화를 보고 울고 웃고 해야 합니다.끊임없이 그 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김문기자 km@ 강제규 감독 프로필▶1962년 11월 마산 출생 ▶81년 마산고졸 ▶85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졸 ▶90년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시나리오 데뷔 ▶96년 ‘은행나무 침대로’로 영화감독 데뷔▶99년 미국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아시아 개혁을 주도할 개혁 50인에 선정.강제규필름 대표 ?99년 영화 ‘쉬리’제작▶2004년 영화 ‘태극기휘날리며’ 제작 ▶수상기록=백상예술대상 각본상,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백상예술대상 각본상,아시아스타 50인 등˝
  • ‘셔틀콕 황제’ 박주봉 씨

    “박주봉 선수죠? 사인 좀 해 주세요.” 지난달 29일 말레이시아의 수도 콸라룸푸르 ‘코리아타운’ 근처의 한 호텔 로비.40대의 중국계 말레이시아 남성이 미소년처럼 마냥 즐거워하며 전 배드민턴 국가대표 선수인 박주봉(40)씨 곁에 다가서 있다.물론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있다.이 남자의 딸인 듯한 10세 남짓한 아이도 양볼이 상기된 채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20년 전,영국 버밍엄 국립체육관에서 세계 최고 권위의 전영오픈배드민턴대회 우승컵을 끌어안었던 약관의 청년은 어느새 흰머리가 듬성듬성한 불혹의 중년이 돼 있었다.‘셔틀콕 황제’ 박주봉이다.역시 황제 칭호를 얻은 골프의 타이거 우즈와 농구의 마이클 조던도 이곳 동남아시아권에서는 그의 명성을 결코 능가하지 못한다.개인 최다인 국제대회 71회,세계선수권 7회 우승으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그는 배드민턴이 국기인 말레이시아에서 ‘살아있는 신화’다. ●국제대회 71회, 세계선수권 7회 우승 그가 말레이시아에 정착한 것은 지난 1999년.97년 1월부터 영국에서 배드민턴 국가대표 코치를 맡고 있다 연봉 2억원에 고급 주택과 승용차가 제공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말레이시아 대표팀 수석 코치로 스카우트됐다.2000년 말부터 대표팀을 떠난 2002년 12월까지는 총감독까지 지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행에는 한국에서 겪은 비인기종목의 설움이 결정적인 몫을 했다.“우리나라에서는 금메달을 딴 직후 반짝 뜨고,수개월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냉랭해지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며 “배드민턴 코치의 한마디가 신문의 스포츠 1면을 장식하는 이곳이야말로 배드민턴인들의 천국”이라고 말한다.한국인으로서 국위 선양의 자긍심도 크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언제나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는 법.대표팀이 ‘박주봉 체제’로 변화한데 따른 말레이시아 국민들의 지나친 기대와 관심이 그의 어깨를 짓누른 것이다.결국 2000시드니올림픽과 2002부산아시안게임에서 ‘노메달’의 수모를 겪으며 ‘박주봉호’는 일단 닻을 내렸다. 그는 현재 말레이시아 배드민턴협회 자문위원이다.아직도 배드민턴계에서는 막강한 입김을 행사한다.지난해 초부터 배드민턴광인 화교 사업가와 손잡고 스포츠센터 ‘박주봉 아카데미’사업을 추진중이다.다만 사업허가가 늦어지는 게 고민이다. 그는 “계속 말레이시아에 남아 있느냐,대표팀 감독직을 제안한 캐나다 미국 등으로 떠나느냐를 두고 숙고하고 있다.”면서도 해외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 시드니올림픽에서의 한국 ‘노골드’의 부진을 터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생각도 내비쳤다. ●셔틀콕 즐긴 전직 대통령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전직 대통령들은 배드민턴을 즐겼다.실력도 평균치를 웃돈다. 이들 가운데 배드민턴에 각별히 애정을 쏟은 이는 전씨.국내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인 코리아오픈에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낼 정도였다. 박주봉은 이종동서가 전씨의 비서관이었던 게 인연이 돼 가깝게 지냈다.“92바르셀로나올림픽 이후 무려 7년간 서울 연희동 전씨 집 인근의 외국인학교에서 주말이면 경기를 함께 했다.”고 회상했다. 전씨와 유사하게 권위주의적인 지도자로 오명을 남긴 마하티르 전 말레이시아 총리도 박주봉을 좋아했다.마하티르 전 총리의 부인이 배드민턴협회 고문이었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총리 관저를 종종 방문했고,마하티르 전 총리는 그때마다 경호원도 없이 직접 관저를 안내하며 격의없이 대해줬다. 반면 똑같은 배드민턴 애호가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체육인들 사이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다.박주봉은 “김씨는 호탕했던 전씨와는 달리 체육계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박주봉은 최근 한국 아마추어스포츠 침체에 대해서도 격앙된 목소리를 냈다.그는 “정부가 사회체육 육성은 커녕 한국의 국가이미지 제고에 가장 효과적인 올림픽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라며 체육정책의 실종이 체육계 침체로 이어졌다고 질타했다. ●배드민턴 중흥 돕는 지도자 될 터 오랜 외국생활 탓일까.그의 가슴 속에는 어느덧 향수병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영국 생활 대신 말레이시아를 ‘제2의 고향’으로 택한 데는 콸라룸푸르의 비교적 큰 코리아타운도 한몫했다.콸라룸푸르 생활 내내 코리아타운 근처를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한국을 그리워했다. 그는 두 아이를 둔 한국인 답게 교육열 또한 남다르다.일찍부터 국제 대회에 출전하면서 언어의 장벽을 절감한 탓이다.초등학교 교감을 지낸 부친 박명수(72)씨가 ‘공부도 잘해야 운동도 잘한다.’는 믿음을 굳게 가졌기 때문에 중학교 시절 과외까지 받았다.캐나다 등 미주행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것도 현대판 ‘맹모삼천지교’의 일환이다.그는 “처음에는 외국 생활을 끔찍이 싫어하던 아내(이수진·35)가 요즘은 아이들 교육 때문에 더 적극적”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셔틀콕 황제’의 인생이었지만 좌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요즘은 누구나 다 치는 배드민턴도 20여년 전에는 생소한 종목이었다.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기 전 테니스로 ‘이직’할 뻔 했다. 팀 후배인 김동문 길영아와 맞붙은 96애틀랜타올림픽 혼합복식 결승전에서의 패배도 아쉬운 기억이다. 후배들을 꺾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며칠 동안 연습 한 번 못했다.결승전 전날 가볍게 몸이라도 풀기 위해 웨이트트레이닝 장에 내려갔다가 후배에게 “얼라들이랑 할 건데 뭐하러 왔느냐.”는 핀잔까지 들었다.그는 “작전도 없이 경기에 나선 데다 운도 안 따랐다.”면서 “생전 지는 것을 못본 아내가 눈물을 많이 흘려 가슴이 아팠다.”고 씁쓸해했다. 그는 평생의 절반 가까운 15년 동안 ‘태극마크’를 달고 살아왔다.때문에 “고국에 받은 만큼 되돌려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98년 안락한 한국체대 ‘교수님’ 자리를 박차고 영국행을 결정한 것도,정체된 생활 대신 유럽이라는 스포츠의 중심지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고 싶어서였다.어느 나라에서 대표팀을 맡게 되건,박사 과정을 마치는 게 일단의 목표다.현장과 이론의 접목을 위해서다.박씨는 “정신력을 중시하는 우리 풍토에 외국의 합리적인 선수 지도 방법이 결합된다면,세계 체육계를 선도할 새로운 지도법이 창출될 것”이라면서 “선수로서의 영광은 다 누렸으니,이제는 지도자로 한국 배드민턴 중흥을 위해 일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며 밝게 웃었다. 글 콸라룸푸르(말레이시아) 이두걸특파원 douzirl@ ■ 그가 걸어온길 ▲1964년 12월 5일 전북 전주 출생 ▲ 80년 전주농고 1년때 국가대표 발탁 ▲ 82년 덴마크오픈 복식 우승 ▲ 85년 캘거리세계선수권·전영오픈 우승 ▲ 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 ▲ 88년 서울올림픽 혼합복식 우승(시범종목) ▲ 91년 전영오픈 3연패,국제대회 복식 71회 우승, 세계선수권 7회 우승으로 기네스북 등재 ▲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남자복식 우승 ▲ 94년 한체대 전임강사 ▲ 96년 애틀랜타올림픽 혼합복식 준우승 ▲ 97년 영국대표팀 수석코치 ▲ 99∼2002년 말레이시아 대표팀 수석코치,총감독 ˝
  • [발언대] 아동학대 방지는 사랑과 관심으로/이정민 부산보호관찰소 사무관

    20대 계모가 의붓자녀를 마구 때려 딸은 죽고 아들은 중태에 빠진 사건이 최근 발생하자 아동복지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정부가 2000년 1월 아동복지법을 제정,아동학대 사범에 대한 처벌 규정을 신설했으나 그 정도로는 가정내 아동 학대를 막는 데 역부족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아동학대 사범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미국·영국처럼 교사·간호사 등이 아동학대를 목격하고도 신고 의무를 무시할 경우 처벌 규정을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처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아동복지법’을 개정하자는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아동복지법은 아동이 건강하게 출생해 행복하고 안전하게 자라나도록 복지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아동학대자를 처벌하기 위한 법률은 아니다.아동학대자 처벌은 아동복지법이 아닌 ‘형법’과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된다.그리고 ‘특례법’은 비록 미약하지만 이미 그 절차와 조치를 마련하고 있다. 다만 문제되는 것은 아동 학대자 등 가정폭력의 가해자에게 벌금형이 선고될 수 있다는 점이다.아동 학대에서 가해자에 대한 벌금형은 그 해악이 고스란히 피해자에게 되돌아간다. 따라서 ‘특례법’ 제9조를 개정해 아동학대 가해자는 반드시 가정법원에 송치하도록 하자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아울러 가정법원이 가정보호사건 조사관에게 가정폭력 범죄의 동기·원인 및 실태 등의 조사를 명하기에 앞서 보호관찰소에 판결 전 조사를 의뢰해 신고자 및 이웃의 진술도 동시에 조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례법’에는 아동학대 가해자에 대한 처분이 여러가지 규정돼 있는데 이 가운데 ‘보호관찰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한 수감과 보호관찰을 적극 활용한다면,아동 학대자의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그의 심성에 변화를 일으키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또 적어도 6개월 또는 1년 동안은 아동 학대자의 재범여부를 감시할 수 있다.가해자에게 보호관찰을 명할 때 법원은 가해자의 특성을 고려,특별히 준수해야 할 사항을 따로 과할 수 있도록 돼 있으므로,가해자에게 피해자를 반드시 동행하여 보호관찰 상담에 임하게 하거나 의사의 소견을 첨부하도록 한다면 더욱 안전한 장치가 될 것이다. 사회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관련 법의 미비를 입에 올리는 것은 관계자들의 궁색한 변명에 불과할 수 있다.우리는 이웃들이 문제를 극복하고 ‘기적’을 이룬 사례를 많이 듣는다.그 사람들이 말하는 기적은 결코 제도나 법률의 문제가 아니다.새로운 법률의 제정 및 관련법 개정에 앞서 우리에게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만 있다면 이미 존재하는 법률로도 아동학대는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이정민 부산보호관찰소 사무관˝
  • 인천시립극단 신임 예술감독 정진씨

    “‘한명회’로 출연한 게 요즘 말하는 대박이었지.인생역전이라고나 할까.나이 마흔 세살에 처음 생긴 목돈 5000만원을 탈탈 털어 소극장을 열었으니 집사람이 좋아했겠어.망했지.모처럼 돈 좀 만지나 기뻐했던 집사람에게 미안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무대에서 까먹고 있어.세상 물정을 모르는 거지.”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홀 분장실에서 만난 연극배우 정진(63)씨는 연극 ‘아름다운 사람들’의 마지막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헐렁한 바지춤 사이로 비집고 나온 내복을 추스르는 모습은 막걸리 한사발을 마시면서 구수한 입담을 막 쏟아낼 듯한 영락없는 시장 상인이었다.연극에서도 그는 재개발의 위기 앞에서 혼란을 겪는 영등포시장 상인들의 상처와 아픔을 보듬어 안는 상조회 회장 역을 맡았다. 방송 드라마에서 맡았던 조선의 모략가 ‘한명회’로 올드팬들에게 기억되는 그는 이 무대를 마지막으로 예순을 넘긴 나이에 새로운 인생 도전에 나선다.고향인 인천의 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것이다.40여년 연기 외길을 걸어온 그에겐 무대에서 하는 일이지만 일종의 외도인 셈이다.시립극단에서는 연출뿐만 아니라 행정 책임까지 맡는다.평생 단 한번도 월급을 받아본 적 없는 그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월급쟁이 공무원’직이다.정씨는 인생 2막을 축하해줄 ‘커튼콜’을 듣고 싶어한다. ●시립극단에 실험정신의 물길 열겠다 어느새 원로배우가 된 정씨는 사실 70년대부터 소극장 활동을 해 왔다.극단 신협과 원방각,현재 몸담고 있는 제작극회에 이르기까지 그는 연극배우의 고향 같은 소극장을 지켜왔다.그가 지난 84년 인천에 자비를 털어 만든 연극 전문소극장은 인천 지역 연극계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지금도 인천 구월동에서 공연전용 카페인 ‘진 씨어터’를 운영하고 있다. 시립극단 예술감독직 지원 마감일까지 그는 꽤 망설였다.연기자로서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시립극단을 지휘하면서는 고집을 버릴 생각이다.예술감독이라고 해서 자신의 색깔만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오히려 더 많은 연출가들을 초빙해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겠다고 한다. 정씨는 “실험적인 무대부터 중후한 무대까지 다양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면서 “나를 벗어날 수 없는 작품은 만들지 않겠다.”고 말했다.또 “내가 추구하는 예술적 개성만 강요할 게 아니라 세상의 흐름을 좇아 도랑을 치고 물길을 열면서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감각의 스타일을 창조할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연극판의 세태에 대한 아쉬움은 감추지 못했다.자본의 논리가 연극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 불만을 표시했다.관객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정씨는 “경제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연극판에 흥행이란 좀처럼 없어요.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죠.90% 이상이 공짜 관객이죠.따지고 보면 연극을 만드는 사람이 관객인데 이런 현실에서 작품성보다 돈이 되고 안 되고의 기준이 무대를 지배합니다.” 그는 시류와 인기만을 좇는 연기자들도 반성해야 한다고 말한다.지난해 9월 노숙자 문제를 다룬 창작극을 연출했던 그는 후배 연기자의 모습에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꼈다.무대에 오르기로 했던 연기자가 TV 드라마에 섭외된 뒤 펑크를 낸 것.그는 “연기자는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는 공인이라고 생각해야 돼요.개인의 삶에 제약이 될지 몰라도 받아들여야죠.연기자니까요.연출자와 작가,배우가 관객들과 만남을 약속한 것이 바로 연극이에요.” ●미완성 인생이라 연기에 더욱 집착 60학번인 정씨는 동국대 연극영화과 1기 출신이다.79년 TV 드라마에 처음 단역으로 출연할 때까지 20여년 동안 연극무대를 전전했다.무일푼 연극쟁이로 청춘을 보내던 정씨는 서른 아홉살에야 동네에서 얼굴을 익힌 부인 김현규(58)씨와 결혼했다. 배우로 이름을 처음 알리기 시작한 것은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 ‘김희갑’ 역할을 맡고부터였다.그러다 지난 84년 ‘설중매’에서 개성있는 한명회를 소화해 내면서 배우 생활의 전환기를 맞았다.각종 단막극에서 개성있고 선 굵은 연기를 선보였다.예상치 못한 인기를 얻게 됐지만 정씨는 연기자로서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그는 “배우는 끝없이 변신해야 하는데 한명회라는 고정 이미지를 깨지 못한 건 반성할 부분”이라고 말했다.희곡도 직접 집필하고 있다.그가 쓴 ‘일요일의 마네킹’은 창작극으로 공연되며 호평을 받았다. 그의 아들 한별(25)씨와 딸 한울(24)씨는 연극을 전공하며 아버지의 길을 잇고 있다.“부모님한테 허락받고 내 길을 걸어가지 않았는데 내 허락이 중요합니까.” 그는 자녀들의 인생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갖고 있다. 늘 미완성 인생이어서 더욱 연기에 집착하게 된다는 그는 예술에 정년이 따로 없다고 말한다.그는 “평생 서민의 모습을 연기했고 나 역시 서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서 “그들의 애환을 다루는 인물극으로 밑바닥 인생들의 아픔을 달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밝혔다. 그는 현재 인천문화예술회관 개관 10주년 기념작을 준비하고 있다.예술감독 ‘정진’으로 보여줄 첫 작품은 1947년에 처음 공연됐던, 해방 이후 밑바닥 서민들의 삶을 그린 ‘혈맥’이라는 시대극이다. ■ 프로필 ▲41년 인천 출생 ▲60년 인천 동산고 졸업 동국대 연극영화과 제1회 입학 ▲66년 월남전 참전 ▲68년 이해랑 이동극장 순회 공연 ▲72년 극단 원방각 활동 ▲73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사람 출연,햄릿 다시 태어나다 연출 ▲84년 인기 사극 설중매와 베스트극장 등 TV드라마 출연 ▲2002년 연극카페 진씨어터 운영 ▲2004년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 내정 안동환기자 sunstory@˝
  • “4년여만에 ‘자유인’이 되었습니다”/민노총 수장자리 떠나는 단병호 前위원장

    “하루도 긴장을 풀지 못하다 이제야 ‘자유인’이 된 느낌입니다.” 4년 5개월 동안 민주노총 수장자리를 지켰던 단병호(55) 전 위원장은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임기만료를 하루 앞둔 지난달 30일 민주노총 위원장실에서 만난 그는 오랜만에 평온한 모습이었다.‘한국노동운동 1세대’‘열혈투사’ 등의 수식어와는 거리감을 갖게 했다. 집무실에는 미처 옮기지 못한 짐꾸러미들이 박스에 포장된 채 한켠에 쌓여 있었다.성급하게 향후 거취문제에 대해물은 탓일까, “아직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쉬면서 동료나 주변의 의견을 들어 움직이겠다.”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40줄 가까워 노동운동 시작… 가족에 늘 죄책감 그는 “앞으로의 포부랄까 커다란 계획 같은 것은 좀더 두고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그러면서 국내 최대 노동조직으로 꼽히는 민주노총 위원장으로서 역할을 무사히 마칠 수 있다는 점에 만족감을 표했다. 그는 87년 40줄에 가까운 늦은 나이에 노동 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올해로 17년이 됐다.하지만 지금까지 노동운동에 투신한 것을 후회하거나 다른 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앞으로는 가족들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징역살이와 수배생활을 하면서 가족은 언제나 뒷전이었기 때문이다.그는 대학생인 딸과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들이 아버지가 걸어온 길의 의미를 나름대로 이해하는 것 같아 대견스럽다고 자랑한다. 노동운동을 벌이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아주 우연히’라고 답했다.청년시절은 험난하기만 했다며 먹고 살기 위해 행상까지 나서야 했다고 밝혔다. 직장다운 직장을 갖게 된 것은 83년 ㈜동아콘크리트에 입사한 것이 처음이다.전신주를 만드는 회사로 동아건설 창동공장으로 이름이 바뀐 뒤 87년 7월 노조가 결성됐다. 당시 이 회사는 휴일도 반납한 채 일을 했지만 보수가 형편없어 근로자들이 뭉칠 수밖에 없었다.”며 “마음씨 좋다는 이유로 떼밀려 위원장이 된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4월 총선때 노동자 정치세력화 힘 보탤 것” 실제 그는 동아건설 창동공장노조위원장이 된 이후 서울지역노조협의회 의장이 됐고,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1∼4대 위원장을 거쳐 민주노총 위원장이 됐다. 그는 ‘푹 쉬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노동운동의 중요한 과제이자 여망인 4월총선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힘쓰겠다는 심정은 숨기지 않았다.그러나 본인의 출마여부에 대해서는 끝내 말을 아꼈다. 앞으로 민주노총에 기여할 방법에 대해 “다양한 통로를 열어놓고 고민해 보겠다.위원장직을 떠난다고 해서 노동운동을 접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 다른 위치에서 힘을 보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위원장으로서 보람과 아쉬운 심경도 토로했다.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주요과제로 삼아 활동했던 것이 보람이었지만 제도개선으로까지 끌어올리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한 주5일 근무제 도입도 사회의제로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국회가 중소영세업체나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배제한 방향으로 입법화된 것도 마찬가지다.손해배상 가압류 등으로 목숨을 끊은 일도 두고두고 마음에 걸릴 것이라고 했다.이밖에 노동자들의 염원대로 민주노총 합법화를 이뤄낸 일이나 민주노총 조직이 70만명에 육박할 만큼 거대해진 점 등은 노동자와 국민들의 공으로 돌렸다. ●새 집행부 변화 원한다면 정치·자본부터 바뀌어야 새집행부 구성을 놓고 노동운동의 연성화나 큰 변화가 될 것이라고 예단하는 것에 대해 과도한 기대에 따른 편의적인 해석일 따름이라고 비판했다. 변화와 혁신은 필요하지만 신임 위원장이나 집행부도 그 동안 민주노총을 세우고 강화하는데 함께 힘써왔던 사람들이다.새집행부 역시 전혀 동떨어진 외인부대가 아니라 민주노총 조합원임을 강조했다. 신임 집행부 당선을 전후해서 “언론들은 마치 민주노총이 이전과 완전히 다른 조직으로 변할 것처럼 진단하고 심지어 무쟁의 선언을 하라는 등 무책임한 말을 하고 있는데 모두 과도한 기대에 따른 주관적 바람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아울러 “민주노총의 투쟁노선은 노동운동을 배제하고 탄압해온 정권과 기업의 탄압에 따라 불가피하게 택하게 되는 것”이라며 “이에 대한 노력없이 민주노총운동의 큰 변화를 예단한다는 것은 우스운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민주노총 노선의 변화를 바란다면 정치와 자본의 태도부터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새 집행부에 대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해결과 정부의 ‘노사관계선진화 방안(로드맵)’을 저지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주문했다. 정부가 올해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자리 창출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업률을 낮추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일자리 문제의 핵심인 ‘안정된 정규직 일자리 늘리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어려운 고비 때마다 관심을 갖고 성원해 준 분들에게 감사한다.”며 “나쁜 이미지는 모두 잊고 좋은 것만 기억했으면 좋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유진상기자 jsr@ ▲1949년 경북 포항 출생 ▲1967년 포항 동지상고 중퇴 ▲1983년 동아건설창동공장 입사 ▲1987년 동아건설창동공장 초대 노조위원장 ▲1988년 서울지역노조협의회 의장 ▲1993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공동대표 ▲1996∼98년 금속연맹 위원장,민주노총 부위원장 ▲1999년 9월 민주노동 위원장 보궐선거 당선 ▲2001년 1월 민주노총 위원장 ▲2004년 1월31일 민주노총 위원장 임기 만료
  • “가진 사람이 나눠야 살맛나는 세상되죠”/‘나눔경영’ 실천 최진순 청풍 회장

    ▲41년 강화 출생 ▲65년 한양대 섬유과 졸업 ▲68년 임성직물 설립 ▲79년 삼우전자 설립 ▲92년 국제전자 신제품경진대회 우수상 ▲93년 독일 뉘른베르크 국제발명품대회 환경부문 금상 ▲94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발명품대회 환경부문 금상 ▲94년 미국 LA 국제신기술발명전시회 대상 ▲97년 기네스북 등재 ▲97년 ㈜청풍 회장 취임 ▲2000년 신지식인 선정 ▲2002년 100대 우수특허제품 대상 최우수상 ▲2002년 청풍에너지워터 설립 및 대표이사 취임 ▲2002년 ㈜라이프플러스TV 인수 중풍과 2차례에 걸친 심장수술,부단히 활동을 제약하는 당뇨,그리고 기업가에게는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부도와 화재….그의 인생 역정은 시련의 연속이었다.그러나 지금은 세계 유수의 대기업조차 넘볼 수 없는 첨단기술 기업을 일군 기업가요,한국의 신지식인이자,세계적인 발명왕으로 불린다. 그래서 그에게는 단순히 성공한 기업인이라기보다 ‘오뚝이 인생’이란 평가가 더 어울리는 듯하다. 세계 최초로 음이온 공기청정기를 내놓았던 최진순(63) ㈜청풍 회장.몸은 불편하지만 일을 향한 열정은 여전해 보인다. ●아픈 사연있는 사람에겐 공기청정기 무료로 서울 강서구 등촌동 그의 사무실 맞은편에는 4층짜리 아담한 빌딩이 있다.독거 노인과 장애인들을 위한 식당과 놀이시설이 들어서 있다.돈을 번 만큼 베풀겠다는 그의 뜻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것이었지만 주변에서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쇼’를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제 돈은 그냥 열심히 해서 번 게 아닙니다.목숨을 건 대가로 얻은 것입니다.못먹고 고생했던 어린시절 경험 때문에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나섰는데….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외부 시선이 너무 싫었습니다.이런 몸으로 정치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러나 주위 시선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느날 암 투병 중인 어린 아들을 위해 말단 공무원이 공기청정기를 사러 왔더군요.어디서 음이온이 몸에 좋다는 얘기를 들은 모양이지요.돈 받지 말고 그냥 주라고 했습니다.” 최 회장은 아픈 사연을 간직한 사람에게는 공기청정기를 무료로준다.이렇게 해서 나눠준 공기청정기가 어떤 달에는 돈 받고 판 것보다 더 많았던 적도 있다고 직원들은 말한다. “가진 사람들이 나눠주고 베풀어야지요.그래야 어려운 사람들도 세상사는 맛이 조금이나마 생기지 않겠습니까.내 물건 내가 주니까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나도 하고 싶은 일 해서 좋고요.” 최 회장은 골프를 배우지 않았다.매일 연구에 파묻혀 사는 사람에게 골프는 시간 낭비이자 사치일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속내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경영인이 골프를 치면 직원들도 골프를 치고 싶을 텐데,자신만 골프를 치고 직원들은 못치게 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직원들과 거리감을 두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골프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그렇지만 이미 회사 경영을 딸에게 물려준 만큼 건강을 위해 앞으로 골프장에 다닐 작정이다.예순을 넘긴 나이지만 늦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는 기업인치고는 텔레비전을 즐겨 보는 편이다.밤을 꼬박 세울 때도 있다.“발명가들이 그렇듯이 저도 호기심이 무척 강해요.특히 텔레비전을 보면 자꾸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합니다.이렇게 해보고 싶고,저렇게도 해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그러다보면 시간가는 줄 몰라요.” ●세 딸 유학갈 때 돈 한푼 안준 구두쇠? 딸만 셋을 뒀다.시집 보내기 전에는 이들의 귀가 시간을 일일이 챙길 정도로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했다.돈에 대해서도 엄청난 구두쇠(?)였다.딸 혼수 비용은 500만원을 넘지 않았다.세 딸 모두 각자 벌어 대학교 등록금을 마련했다. “아이들이 유학갔을 때도 돈 한푼 내놓지 않았어요.다들 알아서 해결하더라고요.당시에는 딸들이 서운했지만 지금은 제 결정이 옳았다고 합니다.” 음이온 공기청정기는 그의 집념과 끈기의 산물이다. 음이온 공기청정기를 처음 접한 것은 1983년.일본 바이어로부터 음이온이 중풍에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다. 당시 음이온이란 것은 일반인들에게 개념조차 생소하던 때였다.전문가들로부터 귀동냥을 해가며 열심히 배웠지만 개발과정에서 실패를 밥먹듯이 해야 했다.부수고 다시 만들고,그러기를 10여년 동안 반복한 끝에 음이온 공기청정기는 첫선을 보였다. 최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닥치는 대로 기계를 분해·조립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면서 “잠을 자도 오직 음이온만 생각했고,늘 개발에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았다.”고 회고했다. 문제는 판매였다.아무리 음이온의 효과를 말해줘도 누구 하나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그러자 해외로 눈을 돌렸다.전세계 발명품 대회에 나가 마침내 음이온 공기청정기의 우수성을 입증해 냈다.지금의 청풍을 키워낸 발판이 됐다. ●10년 연구 끝 음이온 공기청정기 개발 최 회장은 “발명가는 호기심과 끈기만 있으면 되지만,기업가는 여기에 덧붙여 미래에 대한 안목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 그는 공기청정기 시장에 불만이 많다.자신이 창출해 낸 시장인데도 대기업의 물량 공세에 중소기업이 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억울하다. 그는 “한때 특허소송을 내기도 했지만 대기업들의 자금력에 질렸다.”면서 “최종 판결 때까지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이 너무 아까워 이제는 기술력으로 승부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정부의 중소기업 정책에도 섭섭함이 적지 않다.말로는 중소기업을 우대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각종 규제 탓에 사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지난해 제품개발에 50억원을 투자했습니다.그 돈을 저축했다면 여생을 편히 지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그래도 기업하는 것은 보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정부가 제발 그런 맛에 찬물을 끼얹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최 회장은 앞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올해 매출액 목표 550억원 가운데 70% 수준인 380억원을 수출에서 달성할 예정이다. ●‘소사장제' 실시… 직원 각자가 사장 마음가짐 최 회장의 기업관은 중소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중소기업일수록 아웃소싱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최 회장은 “뱁새(중소기업)가 황새(대기업)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지는 것은 뱁새뿐”이라며 “모든 것을 갖출 생각을 버리고 회사의 짐을 최대한 가볍게 할 때 경쟁력은 극대화된다.”고 설명했다. 청풍은 거의 모든 부분을 아웃소싱으로 해결한다.대신 소수 정예화에 힘을 기울인다.청풍의 연구인력은10여명에 불과하지만 기술력은 어느 대기업보다 우수하다.특히 비정규직을 포함,130명대의 직원이 지난해 400억원대의 매출액을 기록했다.또 청풍은 결재라인을 없애고 직원 각자가 사장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일할 수 있도록 소사장제를 실시하고 있다. “청풍은 판매를 책임지는 영업 인력이나 대리점 등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그렇다고 판매가 대기업에 뒤떨어진다고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최 회장은 대신 독특한 판매방식을 고집하고 있다.대리점을 통해 팔지 않고 대부분 통신판매를 하고 있다. 그는 “유통 단계를 최소화해야 고객이 그만큼 이득을 취할 수 있다.”면서 “기업도 소비자의 불만과 의견 등을 바로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
  • [농촌경제 비상구가 없다](3)노모와 이별하는 농촌가장-아기 울음 끊긴 농촌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13일 새벽,대구의 한 재래시장.채소가게 한 모퉁이에 짐꾼 서너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옷도 제대로 입지 못해 무척 추워 보이는 40대 후반의 한 남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지난해 2월 인근 농촌에서 빚 때문에 이곳으로 피신해 온 김모(49)씨였다. “참,뭐라고 말할 수가 없죠.빚 때문에 가정이 산산조각났고,정든 고향 친구와 선후배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요.돌아가신 어머니를 제 손으로 모시지도 못….” 김씨는 지난 2년여간의 처참했던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그의 짐꾼생활은 빚 독촉을 이기지 못해 야반도주한 뒤부터 시작됐다. “하늘이 캄캄했어요.당장 먹고 잘 곳이 있어야 말이죠.막무가내로 시장을 찾았지요.” 김씨는 2∼3년전만 해도 부자는 아니었지만,어머니를 모시고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며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인건비를 줄이려고 농협에서 영농자금을 빌려 거액의 농기계도 구입했다.그러나 태풍으로 농사를 연거푸 망친 데다 빚보증 때문에 전 재산을 날렸다.아내와다툼이 잦아졌고,술로 날을 지샜다.그렇게 보낸 허송세월이 1년.아내와 이혼도 했다.결국 빚 독촉을 이기지 못해 남몰래 고향을 등졌다.자신의 빚 5000여만원 전액을 보증서 준 고향 친구들에게 떠넘긴 채.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할머니와 함께 살던 고등학생 딸은 가출했다.아들은 구미에서 직장생활을 하지만 연락할 길이 없다.지난 여름에는 어머니가 숨졌으나,고향 사람들 뵐 면목이 없어 장례식에도 못갔다.“어느 날 한밤중에 어무이 산소를 찾아가 목놓아 울었어요.못난 자식이라 그 옆에 계신 아부지도 뵐 면목이 없었어요.”라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하루 수입 3만∼4만원으로 끼니를 때우며,쪽방에서 근근이 산다는 김씨는 “제발 고향 사람들에게 내 소식을 전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특별취재팀 대구 김상화 대전 이천열 광주 남기창기자 ■한마을 46명중 44명 환갑넘어 농촌에서 희망과 미래를 뜻하는 갓난 아기 울음소리가 멎은 지 오래다.대신 상여꾼들의 구슬픈 소리는 더 높아만 간다. 농촌이 출산율 급감과 노령·사망률 증가로텅 비어가고 있다.적은 수나마 농촌을 지켜왔던 젊은이들도 폐농으로 정처없이 하나 둘 떠나고 있다.농촌은 이제 풍전등화다. ●26년째 아기 없어 27세가 막둥이 2002년 말 기준 주민 평균연령이 44.8세로 전국 최고령 지자체인 경북 의성군의 구천면 청산2리는 아기울음 소리가 사라진 지 벌써 26년이 넘었다.이 마을 박종하(55) 이장은 “우리 마을에서 태어난 막둥이가 올해로 27살이 됐다.”고 말했다. 군위군 산성면 무암리도 신생아 출생이 20여년 전의 까마득한 일이 됐다.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00여명이 넘던 주민이 해마다 줄어 지금은 46명만 남았다.그것도 노인들밖에 없다.50대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60대 이상이다. 지난해 말 현재 인구 2만 9762명인 군위군의 주민 사망자 수는 연간 411명으로,출생 143명을 3배 가까이 웃돈다.이런 현상은 해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박영언 군수는 “계속되는 농촌 인구 감소로 지자체의 존립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며 “농촌발전을 위한 정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축사·사육하던 소까지 경매 인구 감소에다 빚을 감당하지 못한 농촌 일꾼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 일용직 근로자로 전락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그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극단의 야반도주를 택한다. 의성군 점곡면 김모(50)씨는 빚으로 2개월 전 자신의 축사와 먹이던 소들이 몽땅 경매처분되자 가족과 함께 마을을 몰래 빠져 나가 지금은 도망자 신세로 살고 있다. 김씨는 한때 알부자였다.1995년 축협에서 5000만원을 대출받아 축사를 짓고 소도 들여왔다.빚을 추가로 내 소를 계속 불려 나갔다.소가 새끼를 낳으면서 금세 50여마리로 늘었다.남부러울 게 없었다.그러나 98년부터 외국산 쇠고기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소값이 하루가 다르게 폭락했다.결국 6억원의 빚더미에 깔려 신음하다 보따리를 싸고 말았다.군위군 효령면 박모(34)씨도 2년전 어느날 갑자기 도시로 사라졌다.1000여평에서 오이 시설농사를 짓던 그는 면내 지인들의 대출보증을 섰다 전재산을 날렸다.보증서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야반도주해 버렸기 때문이다.자신의 빚 5000여만원에다 이들의 빚 1억여원까지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농사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된 그는 정든 땅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이런 이유로 지난 한해 동안 의성·군위·고령군에서만 고향을 등진 농민회원만도 2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파악됐다.충남 청양군 비봉면 한모(48)씨도 쌀농사와 돼지 등을 기르며 진 빚 2억원이 부도로 이어지자 연대보증을 서 함께 망가진 장인을 남겨둔 채 사라졌다.‘농촌의 보루’라는 영농후계자들도 속속 농촌을 떠나고 있다.80년대 중반 농민후계자로 선정됐던 이모(44·군위군 군위읍)씨는 2년 전부터 농사를 포기했다.의성군 금성면 김모(50)씨도 마늘 등 복합영농을 하면서 진 빚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대구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IMF때 귀농인 다시 도시로 IMF사태 이후 농촌으로 몰려 들었던 도시 실직자들도 다시 농촌을 떠나고 있다.경북도에 따르면 97년 이후 지난해 상반기까지 도시근로자 1028가구가 농촌으로 돌아왔다.그러나 영농 경험부족에다 영농비 폭등,농산물 가격 하락 등 열악한 농촌환경을 극복하지 못한 이들이재이농 행렬을 이루고 있다. 4년 전 고향인 영양군 석보면으로 돌아와 부모와 함께 고추,배추,벼 등 복합영농을 하던 전모(47)씨는 지난해 가을 다시 대구로 돌아갔다.기상이변과 농산물값 하락으로 2년 연속 ‘쭉정이 농사’만 지었다.경북도 및 군 관계자들은 “도시 귀농인들이 정착에 실패,지난해 하반기부터 농촌을 떠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군위군의 한 관계자는 “비록 때늦은 감은 있지만 정부는 농민들이 삶의 터전인 농촌에 머물 수 있도록 희망을 심어주고 적극 뒷받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별취재팀 ■‘나홀로 농사' 팔순의 母情 “큰 아들이 도회지로 달아나다시피했지.제발 잘 살아 줬으면 해.여기 일은 하루빨리 잊고….” 경북 의성군 금성면에 사는 박분순(83) 할머니.돈 때문에 곁을 떠난 아들식구 생각에 자나깨나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그래서 언제부턴가 늘 염주를 손에 들고 다닌다.노령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거의 매일 절에도 간다.아들(50)이 잘 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고 또 빈다. 박 할머니의 기도생활은 1년 전부터 시작됐다.함께 살던 큰 아들 부부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감당하지 못해 대구로 도망치듯 떠난 뒤부터다.애지중지하던 손자·손녀도 ‘할머니,할머니…’라고 울먹이며 따라갔다. 할머니는 농사짓는 것 밖에 모르던 아들에게 빚이 그렇게 많아진 게 못내 답답할 따름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농산물 개방이니,농가부채 탕감이니 하는 말은 잘 몰라.하지만 농사지으면 빚만 는다는 게 말이 되냐고….” 늘 재롱을 피우던 손자·손녀들이 아른거리는지,할머니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할머니를 더 안타깝게 하는 건 연락이 뜸한 나머지 세 아들과 딸들.울산 사는 둘째 아들 내외도 지난 추석 때 잠깐 얼굴 본 게 마지막이다.구미에 사는 딸도 생활이 어려운지 좀처럼 기별이 오질 않는다.모두들 살기가 바빠 그런 줄 알지만,섭섭한 속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 할머니는 아들이 넷이나 돼 국민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선정되지 못해 최소한의 생계비도 지원받지 못한다.살기가 고달플 땐 면사무소에 가서 기초생활수급자로지정해 달라고 떼도 써 보지만 ‘그저 알았다.’고 할 뿐 별 소식이 없다.매월 교통비로 나오는 8400원과 이웃들이 틈틈이 도와주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고 있다.손수 밥을 지어 먹는 일도 고달프기만 하다.병마와도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신경통,고혈압,위장병….병이란 병은 다 달고 다닌다.그래서 요즘엔 자신이 어찌될까봐 늘 불안하다. “이웃들 보고 매일 아침 우리 집에 와서 내가 죽었는지,살았는지 봐 달라고 하지….” 할머니는 추운 날씨 때문인지 최근 들어 부쩍 자식들보다 이웃들이 소중하다고 말한다.그래도 할머니는 큰 아들 내외,손자·손녀와 다시 오순도순 사는 게 소원이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하루빨리 농사꾼들이 잘 사는 세상이 돼 큰 아들이 돌아와 같이 사는 게 내 마지막 소원이야.” 특별취재팀
  • 사랑·평화 담은 “메리 크리스마스”/샴쌍둥이 가족애 소개등 방송사마다 성탄특집

    성탄절을 맞아 방송사마다 각종 특집 프로그램이 풍성하다.그중에서도 가족 사랑과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두편의 프로그램이 눈길을 끈다. 먼저 지난 7월 분리수술에 성공한 샴쌍둥이 자매 사랑이와 지혜 가족을 25일 오전 9시 SBS ‘한선교 정은아의 좋은 아침(사진)’에서 만날 수 있다.성탄 특집으로 90분간 방송될 이 프로그램에서 아버지 민승준(34)씨와 어머니 장윤경(32)씨는 사랑이와 지혜의 출생부터 분리수술까지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준다.자매는 건강상의 문제로 지난 22일 녹화 스튜디오에는 나오지 못했다. 둘이 합쳐 몸무게가 3.7kg에 불과했던 사랑이와 지혜는 엉덩이가 붙은 채 태어났다.샴쌍둥이가 장애아의 범주에 들지 않아 정부 지원도 받기 힘든 상황에서 부부는 경영하던 PC방을 처분하고 해외 난치병 학회 등을 찾아다니며 딸 살리기에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다.지난 6월 싱가포르로 떠난 이들은 50여명의 의사가 협력한 9시간의 대수술 끝에 7월22일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고,온국민의 관심속에 지난 11월13일 귀국했다.2ㆍ3차수술과 재활치료 등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사랑이와 지혜 부모는 그동안 보여준 국민적 성원에 감사하고,딸들을 더욱 잘 키우겠다는 결심을 다진다. 25일 오후 10시에 방송되는 KBS1 ‘평화의 성지,로피아노에서 만난 사람들’은 세계 182개국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을 소개한다.로피아노는 이탈리아의 중부에 위치한 인구 900명의 작은 이방인 도시. 로피아노는 가톨릭 정신과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형성된 공동체지만 불교,이슬람,힌두교 등 다른 종교 신자들도 받아들인다. 지난 1943년 평화와 일치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한 로피아노는 매년 4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성지가 됐다. 이순녀기자 coral@
  • 답안지 바꾸고 무자격자 뽑고 농수산물공사 채용비리

    농림부 장관을 지낸 허신행(사진) 전 서울농수산물공사 사장이 현역 국회의원의 청탁을 받고 ‘답안지 바꿔치기’ 등의 수법을 통해 국회의원 후원회 회장 아들 등 2명을 공사 직원으로 부정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허 전 사장은 지난 99년,2000년 두 차례에 걸쳐 신입사원 선발 과정에 개입했으며,사장실 운영경비 조달 명목으로 사업비를 부풀려 수천만원을 횡령한 혐의도 받고 있다. 서울지검 특수3부(부장 郭尙道)는 15일 서울농수산물공사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 인사 담당자에게 부정채용을 지시한 허 전 사장을 업무방해 및 횡령 혐의로 사법처리하기로 했다. 검찰은 허 전 사장이 청탁을 받고 부정채용을 지시했으나 금품을 받지 않은 점을 참작,불구속기소할 방침이다. 허 전 사장은 지난 99년 10월 민주당 A의원의 청탁을 받고 고모 총무과장에게 “행정직 선발시험에 응시한 K씨를 잘 챙겨라.”고 지시했다.A의원은 자신의 후원회 회장 아들인 K씨의 채용을 부탁했다.K씨의 성적은 토익 85점,일반상식 70점,군복무 가산점 6점을 포함해 평균 80.5점으로 합격선 밖에 있었다. 총무과장은 K씨의 OMR카드 답안지를 합격선 안에 있던 응시자의 답안지와 바꿔치기해 답안지를 평균 83.5점으로 재작성했으며 같은 해 12월 K씨를 최종 합격시켰다.99년 농수산물공사 신입사원 선발시험에는 모두 150명이 지원해 13명을 선발했다. 허 전 사장은 2000년 1월 공사 사서직 채용시험에도 개입했다.대학 은사인 S대 명예교수 B씨의 청탁을 받고 1명을 선발하는 사서직 채용시험에 B씨의 딸을 합격시켰다. 농수산물공사는 응시자격을 ‘70년 1월1일 출생(만 30세) 이하’로 공고했다.모두 40명이 지원해 B씨의 딸이 선발됐다.당시 B씨의 딸은 제한연령을 초과해 응시자격이 없는 상태였다.검찰은 이같은 부정채용 사실이 진정사건으로 접수되자,그동안 수사를 벌여왔다. 검찰 관계자는 “IMF 외환위기 직후 최악의 취업난 속에서 개인회사도 아닌 공사가 조직적인 채용비리를 저지른 것은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허 전 사장이 사장실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편법으로 자금을 조성한 정황도 포착했다.허 전 사장은 지난99년 창립 15주년 기념행사 경비와 결혼축의금 지출 명목으로 허위 매출전표 등을 발행해 지난해 1월까지 110여차례에 걸쳐 2500여만원을 횡령했다. 허 전 사장은 지난 93년 농림부 장관을 역임했으며,공채로 지난 98년 10월부터 지난 3월까지 서울농수산물공사 사장으로 재직했다. 허 전 사장은 임기를 6개월 남겨두고 돌연 사표를 내 주변의 궁금증을 자아냈었다.허 전 사장이 부정채용한 직원들은 현재도 근무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안동환기자 sunstory@
  • 딸들의 반란 / 대법, 18일 사상 첫 공개변론 -여성 宗員 배제 관습? 차별?

    “출가한 여성을 포함해 남녀노소 누구나 종원(宗員)이다.” “출가 여성은 종원이 아니다.” “성인 남성만 종원이다.” 대법원은 오는 18일 여성도 종원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민사사건을 심리하며 사상 처음으로 공개변론을 듣는다.공개변론에서는 원·피고측 변호인이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이는 데 이어 대법원이 선정한 이덕승 안동대 교수,이진기 숙대 교수,이승관 전 성균관 전례연구위원장 등 참고인 3명도 각각 다른 견해를 발표할 예정이다.호주제 변화에 이어 부계혈족주의 제도에 대한 또 하나의 논란을 대법원이 연구한 결과를 중심으로 정리한다. ●종원과 종회 구별않아 문제 이번 심리의 최대 쟁점은 여성이 종원에서 배제되는 관습이 헌법상 보장된 평등권에 위배되는지 여부다.합헌론자들은 종중은 수백년 동안 내려온 전통관습이라 주장한다.이승관 전 전례연구위원장은 “종중이란 성과 본을 중심으로 부계 조직으로 성인 남성만이 구성원”이라고 주장했다. 위헌론자는 “헌법은 물론 현행 민법도 지난 90년 개정된 뒤 가족 내에서 딸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반박하고 있다.민법상 딸은 호적을 시가로 옮기지만,신분상 단절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특히 상속권이나 친정 부모에 대한 부양의무도 아들과 같으며,제사도 주제할 수 있다. 이덕승 교수는 “대법원 판례는 종원과 종회 구성원을 구별하지 않아 문제”라고 지적했다.종원이란 공동선조의 자손으로 남녀노소 구별없이 인정해야 한다는 것.반면 종원 협의 모임인 종회는 구성원 자격을 성년으로 제한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이 교수는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혼인 여부에 상관없이 성년여성에게 종회 참석권을 부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했다. ●딸 허용하면 ‘외가 친입’ 우려 시집간 딸이 친가의 제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보편적인 관습이란 점을 합헌 근거로 내세우기도 한다.일부에선 남녀노소 모두 종원으로 인정하되 시집간 딸들은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이진기 교수는 “시집간 딸에게 종중원 자격을 부여하면,성이 다른 외손이 제사에 참여하게 돼 공동선조에 봉사하는 종중의 고유의무가 훼손된다.”고 지적했다.또 시집간 딸에게 재산을 분배할 경우 다른 집안에 종중재산이 넘어가게 돼 종중의 본질에 반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위헌론자들은 “종중재산을 배분할 때 이미 종중재산의 고유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시집간 딸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고 맞섰다.또 시집간 딸을 종중으로 인정해도 부계혈족집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어서 외손까지 종중 지위가 확대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이 여성을 종원으로 인정하면 앞으로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우리나라 3349개 본관별 종중 가운데 종중재산을 차등 지급한 곳 대부분이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손배소멸시효(3년)가 지나지 않았다면 종중은 재산을 재분배해야 한다. ●종중재산 불평등 분배에 ‘반란’ 용인이씨 사맹공파는 99년 3월 용인시 수지읍 성복리 일대 종중소유 임야를 매각했다.현금 350억원을 아들·딸들에게 불평등하게 배분하면서 소송에 휘말렸다. 성년 남성은 1억 5000만원,미성년 남성은 연령에 따라 1650만∼5500만원,미혼여성은 3300만원,시집간 여성은 2200만원을 받았다.시집간 딸인 이모(62)씨 등 5명은 “종중규약에 회원을 남성으로 제한하지 않았다.”며 2000년 종회회원 확인 소송을 냈다.그러나 1심,2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대법원 방청객 130명 선정 대법원 홈페이지 등을 통해 방청권을 접수한 결과 475명이 방청을 신청했고 전자추첨을 통해 130명을 선정했다.대법원은 촬영을 위해 언론에 5∼10분간 법정을 공개한다. 대법원은 지난 10월부터 40일 동안 대법정을 공개변론에 적합하도록 개·보수했다.법정 내 소리울림을 줄이기 위해 흡음벽을 마련하고,원고·피고·참고인 발언대를 새로 설치했다. 또 사방 벽에 부착된 카메라 4대로 법정 모습을 생생히 촬영,기록으로 남길 계획이다.비상사태에 대비해 대법관 자리엔 비상벨을 설치했다. 정은주 기자 ejung@ ■원고측 / 황덕남 변호사 법원에서 선언한 종중원에 관한 관습은 전통적인 관습과 일치하지 않으며 사회 변화에 따라 현재의 관행 및 법질서에도 부합하지 않는다.종원의 범위를 명백히 하기 위한 족보에서 미성년자 또는 딸을 제외하는 경우는 없다.가족관계의민주화와 민법 개정을 통해 개개인의 인격이 중시되고 성 차별은 사라지게 됐다. 이제 여자들이 성묘와 제례에 참여하는 것이 예외적인 일이 아니다.그럼에도 여성에게 종중원의 자격이 없다는 판례가 유지돼,여성이 증조부 이상 선조의 성묘와 제례에 참여하는 것이 제한되고 있다.과거에는 매장이 일반적이었으나 화장률이 2000년에는 33.7%가 됐고,더욱 증가할 것이다.그만큼 분묘 수호에 관한 종중의 역할은 축소될 것이다. 종중원들 사이에서 종중재산의 관리 및 처분,수혜의 범위가 법적으로 문제되면 이는 상속재산의 다툼이다.이런 경제적 이해관계는 전통적인 개념 또는 법원이 최초로 종중에 관한 관습을 선언하던 당시의 종중에서는 예정된 것이 아니다. 여성도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이들이 시가의 혈연으로 거론되지 않는 점,성과 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점 등 제도 및 관행의 변경을 감안하면 피고들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피고측 / 민경식 변호사 종중에 관한 이번 사건은 여성의 지위향상이나 양성평등 문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종중은 고유의 전통 관습으로 선조의 분묘 수호와 제사,종원 상호간의 친목에 목적이 있다.종중제도의 전통은 논어(論語)에서 효(孝)와 예(禮)의 중요성을 천명한 신종추원(愼終追遠·돌아가신 부모를 신중하게 모시고,먼 조상을 이어가며 추모한다)의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국민적 추앙을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여성(또는 남성)을 기리기 위하여 남편(또는 아내)과 아들,딸,손자,외손자들이 모여서 ○○○기념회라는 단체를 만든다면 종중이라고 할 수 없다.분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이어간다는 본질적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호적법 제15조 4호에는 “호적에는 호주 및 가족의 성명,본,성별,출생연월일 및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현행법상 처는 결혼하면 원칙적으로 남편의 호적에 입적하고 자녀들도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호주제를 폐지하는 민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됐지만 통과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설령 호주제를 폐지하는 법령이 공포되더라도 종중제도 관습이 쉽게 변할 리 없고,종중제도는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변화하며 존속할 것으로 생각한다. ■종중 관련 대법판례 종중(宗中)은 고려 말,조선 초부터 부계혈족 중심의 가족제도와 조상숭배사상을 중심으로 발생한 개념이다.종중 개념이나 구성원 자격 등은 성문법에 없어 대법원 판례로 정해진다. 종중에 대한 첫 판례는 일제시대인 194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조선고등법원은 당시 한국의 관습을 판례로 정리했다.“한국 종중은 공동선조의 제사를 목적으로 한 종족단체”라면서 “종회 참석자는 호주”라고 명시했다. 해방 후 대법원은 비슷한 맥락의 판결을 내놓았다.66년에 공동선조의 후손 중 성년 이상의 남성을 종원으로 구성하는 자연발생적인 종족집단이라고 판시한 것이다.다만 “호주뿐 아니라 가정을 이룬 성인남자가 종회에 참석하는 것이 관습”이라고 범위를 다소 확대했다.또 선조의 사망과 동시에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기에 성인 남성이면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종원이 되고,탈퇴나 축출이 불가능하다고 규정했다. 대법원은 지난 92년 “여자나 다른 집안에 출가한 자,그 자손은 종중 구성원이 될 수 없다.”고 판결했다.게다가 여성 참여를 보장한 종중규약에 대해서도 “종중의 본질에 반한다.”며 무효를 선언했다. 종중의 전통적인 역할인 조상의 제사를 모시고,묘소를 관리하는 것이 성인 남성이란 이유다.거주지역에 따라 의결권을 부여하는 규약도 무효로 간주했다.따라서 한국국적을 포기하더라도 성인 남성이라면 종원으로서 자격은 유효하다.종중은 ‘자연발생적 단체’이기에 조직화 과정에서 종원 자격을 제한하거나 확대한 것은 위법하다는 해석이다. 한편 대법원은 고유 의미의 종중이 아닌 종중 유사단체의 경우 구성원 자격이나 가입·탈퇴를 특별히 제한하지 않고 있다.유사종중은 단체규약에 따라 회원자격이 결정되는 것이다. 유사단체로 판단될 경우 규약에 따라 여성에게도 회원자격을 부여한다.지금까지 대법원이 유사단체로 인정한 사례는 4건.이러한 대법원 판례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도 높다. 이재성 전 대법관은 “대법원이 우리 관습을 직접 조사하지 않고,일본사람들의 잣대를 그대로 수용했다.”고 지적했다.정귀호 전 대법관은 “출가하지 않은 성년 여성에겐 종원 자격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은주기자 ■1994년 40곳 종중 조사 안동지역 종중(宗中) 40곳 가운데 19곳이 여성을 종중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공개변론에 참고인으로 나올 이덕승 안동대 교수가 지난 94년에 이같은 결과를 논문집 법사학연구에 발표했다. 특히 안동권씨 대종회의 경우 20세 이상의 남녀뿐 아니라 안동권씨에 입적한 며느리도 종원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공개변론할 용인이씨 사맹공파도 종중규약 제3조에 “회원자격은 용인이씨 사맹공의 후손 가운데 성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 미성년자도 나이가 어리다고 종중사업에서 제외시키는 일은 없었다.안동지방의 한 종중은 족보 편찬·대종회 회관 건축 등을 위해 돈을 모으면서 결혼한 사람에겐 6만원,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겐 3만원을 받았다.차별을 두지만,종원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 교수는 “아무리 어려도 종손으로 인정하는 관습에 따르면,성년 남성만을 종원이라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종중의 장래성에 관한 물음에 종중 19곳이 “쇠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반면 11곳은 “지속될 것”,6곳은 “발전할 것”이라고 응답했다.“모르겠다.”는 답변은 4곳이었다. 정은주기자
  • [스포츠 라운지] 돌아온 ‘컴퓨터 세터’ 김호철 감독

    가르마가 잘 타지지 않는 더벅머리에 처진 눈썹,썩 잘 나지 않은 치아를 하얗게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탈리아 배구 코트를 호령하다 16년 만에 돌아온 ‘컴퓨터 세터’ 김호철의 겉모습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컴퓨터의 날카로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애써 날카로운 이미지를 찾는다면 신기의 토스를 뿜어낸 손가락일 것이다.앞서가는 그를 보며 오른손등이 자꾸 엉덩이에 붙는 것을 발견했다. “30년 동안 세터를 하면서 얻은 버릇이지요.왜 세터들이 엉덩이에 손등을 붙이고 손가락을 펴 공격사인을 내잖아요.‘직업병’일지도 몰라요.” ●“팀에 도움이 안되는 선수는 떠나라” 지난 24일 귀국과 동시에 친정팀 현대캐피탈의 감독이 된 김호철은 그날로 용인에 있는 팀 숙소로 달려갔다.아침에서야 새 감독이 부임한다는 소식을 접한 선수들은 오후부터 곧바로 시작된 연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김 감독은 26일까지도 짐을 풀지 않고 있었다.“필요한 옷은 그때 그때 꺼내 입으면 그만”이라는 그는 “침체된 팀을 하루 빨리 일으키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간신히 짬을 낸 인터뷰 와중에도 10여차례나 코트로 달려나가 쓴소리를 하고 돌아 왔다. ‘배구 명가’ 현대가 ‘동네북’으로 전락한 지는 오래됐다.라이벌 삼성화재를 언제 이겼는지 가물가물하고,지난달 실업대제전에서는 예선 탈락했다.지난 4월에는 선수들이 반기를 들고 숙소를 이탈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김 감독의 일성은 “수도승이 돼라.”는 것이었다.면벽수련을 하는 수도승처럼 하루에 하나라도 배우기 위해 어깨가 빠지도록,몸이 부서지도록 연습하라는 것. 그는 “배구는 이름으로 하는 게 아니다.”면서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는 누구든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무섭게 몰아쳤다.대선배의 의중을 읽은 듯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졌다.주장 후인정은 “제2의 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177㎝ 단신, 세계 배구계 호령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배구를 시작한 김 감독은 중학교에 들어가며 세터로 자리잡았다.중3 때 키(177㎝)가 평생의 키가 돼버린 그는 한밤에 달을 보며 점프 연습을 했다.휘영청 밝은 달은 그가 잡아야할 배구공이자 꿈이었다. 부단한 연습 때문인지 타고난 탄력 때문인지는 모르나 27년 선수생활 동안 그가 블로킹을 잡지 못한 선수가 없다고 한다.전성기 때 서전트점프는 90㎝였다.서전트가 80㎝이면 탄력 좋은 배구선수라는 말을 듣는다.한양대 재학시절인 지난 1978년 김 감독은 강만수 장윤창 등과 로마세계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최초로 4강 신화를 일궜다.광복 이후 한국배구가 일본을 꺾은 것도 그때가 처음.김 감독은 최우수 세터로 뽑혔고,당시 이탈리아 언론은 “작은 원숭이가 재주를 넘듯 세계 배구를 농락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더이상 무기력한 패배는 없다” 올해 초 4년 임기의 이탈리아 청소년대표팀 감독에 오른 그가 무리를 하면서까지 귀국한 것은 현대와의 약속 때문이었다.김 감독은 87년 두번째 이탈리아행 당시 팀이 필요하면 꼭 다시 오겠다고 했다.현대는 7년 전부터 매년 러브콜을 보냈고,김 감독은 더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배구 최강국 이탈리아에서 ‘데이터 배구’를 배웠다.“데이터가 얼마나 중요한지 뼛속 깊이 느꼈다.”는김 감독은 이탈리아에서 활용하던 데이터분석 프로그램을 현대에 적용할 계획이다.일부 선수를 선발해 분석 전문요원으로 양성할 계획도 세웠다.“현대가 무기력하게 지는 모습은 이제 볼 수 없을 겁니다.배구 제대로 한 번 합시다.” 부인(45)과 배구선수인 딸(20),골프선수인 아들(16)을 남겨놓고 바람처럼 돌아온 김호철은 지금 자신에 넘쳐 있다. 글 이창구기자 window2@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 ·1955년 경남 밀양 출생 ·서울 대신중·고,한양대 졸업.대학 1학년 때 국가대표 발탁 ·7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로마세계선수권 4강 ·79년 맥시코시티 유니버시아드 금메달,금성통신(현 LG화재) 입단 ·81년 이탈리아리그 파르마 진출 ·84년 귀국 및 현대자동차써비스 입단,86∼87년 대통령배(현 슈퍼 리그) 우승 ·87년 이탈리아리그 트레비소 입단 ·90년 스키오로 이적,최우수 외국인 선수상 ·95년 은퇴,파르마 감독 데뷔,트레 비소 라벤나 거쳐 2002년까지 트리에스테(98년 리그 우승) 감독 ·2003년 이탈리아 청소년대표팀 감독 ·2003년 11월 현대캐피탈 감독
  • 호주제 폐지되면/재산상속·족보 등재 지금과 똑같아 姓 바꾸어도 나중에 되찾을수 있어

    흔히 호주제 찬성과 폐지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한다.전혀 모르면 ‘찬성’,조금 알면 ‘반대’,정확하게 호주제 폐지의 의미를 알게 되면 다시 ‘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올초 국가인권위원회는 호주제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의견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하면서 폐지를 촉구했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전통적인 관습에 어긋난다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몇 가지 대표적인 궁금증을 알아본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가족이 해체된다는데? 호주제가 폐지되면 그동안 민법상 가족에 포함되지 않았던 분가한 차남이나 혼인한 딸도 새로운 신분등록부에 등재되게 된다.그런 점에서 가족유대감이 오히려 생길 것으로 보는 측면도 있다. ●성불변의 원칙이 파괴되면 형제자매가 성이 달라져서 근친혼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성씨가 달라 가까운 친족간 혼인할 수도 있다면 지금도 이종 사촌과 외종·고종 사촌 등 성이 다른 모계친족과는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다.이혼한 부모로 인해 성이 달라진다고 해도 새로 마련되는 신분등록부에 생부와 생모가 함께 등재되므로 이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반대가 만만치 않은데 호주제 폐지보다는 일부 문제조항만 보완하면 안되나? 호주제는 호주와 나머지 가족,남성과 여성을 차별하는 위헌적 제도로서 처의 부가(夫家)입적,자의 부가(父家)입적 등 부성강제조항에 따른 개인의 존엄과 부부평등권,행복추구권 위반으로 부분 수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더욱이 호주제로 인해 남성중심의 가계계승은 남아선호를 심화시켜 여아낙태 및 출생성비불균형을 심각하게 초래하고 있는 현실이다. ●상속도 달라지나? 현행법상 호주에게 재산상속에서 우월한 권리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호주제가 폐지되어도 상속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법정상속과 피상속인의 의사에 따라 이뤄진다.또 호주제가 폐지되더라도 종중재산의 유지와 관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달라진다면 호주제 때문이 아니라 여성들이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될 것이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족보도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아니다.호적은 국민 개개인의 신분사항을 증명하는 국가의 공문서이고 족보는 문중의 가계(家系)를 기록하는 사적인 기록부다.그러므로 호주제가 폐지돼도 족보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또 호주제가 폐지되면 호적편제의 기준과 범위를 새로 정해 집안에 따라서는 딸의 이름은 물론 사위도 함께 기록하는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신분등록 제도를 만들 수도 있다. ●어릴 때 성을 변경한 아이가 나중에 자라서 친부의 성을 되찾으려면 할 수 있나? 물론이다.자녀의 성은 2가지 차원 즉,자녀의 복리와 출생의 계통 기능으로 이해될 수 있다.그러므로 민법개정안은 자녀의 복리를 위해 성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면서 동시에 자녀의 정체성 및 인격권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복성(復姓)할 수 있도록 민법 개정안은 마련됐다.학교를 다니는 동안 아이들을 보호하고,성장해서 원한다면 본래의 성을 되찾을 수도 있게 했다. 허남주기자
  • [시론] 누가 이 엄마에게 돌을…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위대한 성현으로서 예수의 인상 깊은 가르침을 기억한다.안식일에 밀이삭을 훑어 먹은 그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교조주의자들에게 던진 한 말씀.“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더불어 맹자를 읽을 때 감명 깊었던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양혜왕이 올바른 정치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자 특유의 비유법으로 맹자는 가르치셨다.사람을 죽이는 데 지팡이나 칼로 하는 것이 다른가,칼이나 정치로 하는 것이 다른가,지팡이로 죽이든 칼로 죽이든 또 정치로 죽이든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있어서는 같다는 말씀이다. 하물며 오늘날에 이르러 법과 제도와 관습과 정치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새삼 물어야 하는 현실이 답답할 따름이다. 여기 한 엄마가 있다.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홀로 어린 두 딸을 3년 간 키웠다.그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인생을 함께할 자신의 배우자인 동시에 두 딸의 아빠가 되어줄 사람이었다.그런데 새로 만난 아빠와 아이들은 성이 달랐다.아이들이학교에 가면 듣게 될 “너는 왜 아빠하고 성이 달라?”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지만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되고 그늘이 될 이야기였다.얼마나 긴 시간을 고민했을까.결국 허위로 딸들의 출생신고를 했고,아이들의 입학 과정에서 경찰에 적발되었다. 호적조작(공정증서부실기재)이라는 죄명이 붙고,자신의 직책을 남용했다는 비난도 있다.일단 이 비난을 수긍하더라도 우리는 물어야 한다.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개인의 존엄을 존중받고 싶다면 누가 무엇이 이 엄마를 그렇게 몰고 갔는지 모두 아파하며 되돌아보아야 한다. 올해 초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는 재혼가정의 행복할 권리를 위한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다.그 때 아이들을 데리고 재혼한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이 있었다.전혼 자녀를 데리고 재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으나 아빠와 성이 달라 고통받는 아이를 지켜보는 심정을 이야기하며 그 여성들은 이야기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그런데 현행법과 제도와 관습이 수많은 재혼가정과 한부모가정과 비혼모가정의 평화를 짓밟고 있다. 가정문제에 관한 상담을 하다 보면 이런 내담자들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된다.아이를 사망신고하고 다시 출생신고하는 방안을 너무 절실하게 물어오는 그들에게 그것은 법을 어기는 것이어서 권할 수 없다고 대답해야 하는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호적조작이라는 위법을 감행한 엄마는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 것이다.그이를 그렇게 몰아간 것은 다름 아닌 법과 제도이며 좀더 분명하게 말하면 재혼가정 자녀의 성과 본을 바꿀 수 있는 길을 터 놓은 ‘친양자 제도’를 포함한 민법개정안을 몇 번의 회기 동안 한 번도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은 국회이다.이들이 현행 민법 가운데 가장 독소조항인 호주제의 폐지를 담고 있는 법무부 민법개정안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나아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 책임을 나누어 져야 한다.왜냐하면 저들은 바로 우리가 선출한 국회의원들이기 때문이다.구성원에게 편법과 위법을 강구하도록 만드는 사회에 우리 모두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재혼한 새 아버지의 성을 따를 수 있도록 하자는 것도 사실은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이다.‘아버지’만 성을 물려줄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불합리하다.자녀는 부모의 사랑의 결실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의 성이든 어머니의 성이든 선택적으로 따를 수 있는 법적 개정을 이루는 것이 시대적 요청일 것이다. 곽 배 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장
  • 두딸 姓 바꾼 ‘엄마의 눈물’

    “어린 두 딸이 당할 고통을 면해주고 싶었어요.” 사별한 전 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두 딸을 성과 이름을 바꿔 재혼한 남편에게 입적시킨 30대 여성 공무원이 호적법 등 위반 혐의로 형사처벌과 함께 징계를 받을 처지에 놓였다. ●발단은 호주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에 사는 A(37·여·7급 공무원)씨는 지난 1995년 1월 3살 연하 동료 공무원 B씨와 결혼,96년과 97년 연지·연희(가명) 두 딸을 연년생으로 낳아 호적신고를 했다. A씨는 98년 1월 남편 B씨가 심장마비로 급사한 뒤 2년 가까이 두 딸을 돌보며 지내다 현재의 남편 C(36·회사원)씨와 2000년 12월 재혼했다. A씨는 2001년 6월,서울 성북구청에 두 딸을 새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것처럼 출생신고를 했다.출생증명서 대신 시어머니가 인우보증을 섰다.나이를 각각 각각 두 살씩 줄여 98년과 99년생으로 했고,이름도 바꿨다.출생신고 법적기한을 지키지 못한 데 따른 과태료도 물었다. A씨의 두 딸은 새 주민등록번호도 부여받았다.이중 호적과 이중 주민등록을 갖게 됐다.지난 2월 큰딸이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A씨는 자신이 근무하는 동사무소에서 나이를 본래대로 고친 뒤 행신동으로 다시 전입했다.그러나 두 딸의 주민등록상 나이가 수정된 사실이 전산자료에 의해 확인됐고,고양시 감사부서는 이를 경찰에 고발했다. ●왜 이런 일이 민법은 자녀는 반드시 아버지의 성을 따르고,또한 성을 바꿀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어머니와 함께 친부를 떠나 새 아버지와 가정을 이뤄도 아이의 성은 고칠 수가 없다.아버지가 아이를 유기한 경우에도 예외는 없다. 그러므로 많은 재혼가정에서는 아이를 사망신고하거나,잃어버렸다고 신고를 한 뒤 입양하는 형식을 빌려 새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편법을 쓰고 있다.입양시에는 성을 바꿀 수 있도록 입양특례법에서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민법을 개정,양자를 들였을 때 입양한 부모의 성을 따르도록 친양자제를 도입했다. ●당국도 고민 일산경찰서는 지난 14일 A씨를 호적법과 공정증서 부실기재 및 동행사 혐의로 입건,검찰에 송치했다.담당 김정국 형사는 ‘본인이 혐의를 모두시인하고,공무원 신분이며 딱한 정황임을 참작’해 불구속 의견을 냈다.사건을 송치받은 검찰도 실정법과 동정론 사이에서 고민 중이다. A씨는 “아이들이 아빠와 성이 다르다고 학교에서 놀림 안 받게 하려 했다.”며 눈물로 선처를 호소했다.A씨는 “공무원 신분으로 불법으로 호적과 주민등록을 바꾸고 마음 고생이 심했었다.”며 “아이들을 전 남편 호적에 재입적시키기 위해 법원에 호적정정 신청을 냈으나 막상 호적이 정정되면 또다시 성과 이름이 바뀔 큰딸이 지금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겠느냐.”며 울먹였다. 이경숙 여성단체연합상임대표는 “A씨는 전형적인 호주제 피해자”라면서 “정부는 호주제 폐지를 서두르고,검찰도 호주제가 폐지된 다음 이 사건을 처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양 한만교기자 mghann@
  • [먹고 사는 이야기] 딸꾹질엔 설탕물을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딸꾹질을 할까.지난주 동창모임에서 이 문제로 한참동안 입씨름을 하다가 경험자의 증언으로 끝이났다. 보통 임신 6개월이 되면 태아에게도 횡격막이 형성되기 때문에 아가의 딸꾹질이 가능하다.이렇게 출생 전 뱃속의 아가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딸꾹질 때문에 고생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이러한 딸꾹질은 대개 수분 이내에 저절로 멈추지만,재발이 잦거나 딸꾹질이 오래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딸꾹질이란 횡격막의 불수의적운동(근육 경련)에 의해 성문이 갑자기 닫히면서 특징적인 소리가 들리는 것을 말한다.갑자기 음식이나 술을 많이 먹은 다음 위가 확장되어 횡격막을 자극해 딸꾹질이 나기도 한다.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미주신경과 같은 신경체계가 강한 자극을 받았을 때도 생긴다.한의학적으론 주로 폐나 위의 기운이 역류해서 생긴다고 보며 주원인으로는 차가운 기운을 꼽는다.갑자기 찬물에 들어가거나 차가운 것을 먹었을 때 딸꾹질이 나와 괴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이러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급작스런 운동이나 스트레스와 같은 감정변화도 원인이 될 수 있다.마치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어린이가 실제로 복통을 일으키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딸꾹질의 정확한 완치법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증상을 덜어주려면 갑자기 놀라게 하거나 손가락을 입안에 넣어 목젖을 자극하기도 한다.또 숨이 차게 함으로서 멈추게 할 수 있다.재채기를 유발하는 것도 좋은 방법.레몬을 빨아 먹거나 식초 한 스푼을 삼키기도 하며,설탕물을 마시기도 한다.지속적으로 많은 양의 물을 마시거나,한꺼번에 많이 마시기도 한다. 그래도 잘 멎지 않으면 감꼭지를 달여 마시면 좋다.물 300㏄에 감꼭지 10개 정도를 넣고 약 10분 정도 끓인다.이때 생강을 두 쪽 가미해도 좋다.솔잎 15g을 넣어도 좋다.감의 올소릭산과 오리아릭산이 근육을 평온하게 해 주는 까닭이다. 마늘 한쪽을 입에 넣고 씹다가 딸꾹질소리가 나려고 할 때에 삼키기도 한다.이는 마늘의 소화,건위작용에 의하여 음식을 잘못 먹어서 생기는 딸꾹질을 곧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무를 채판에 갈아 즙을 낸 다음 꿀을 적당히 섞어 먹어도 효과가 있다.도라지를 짓찧어 그 즙을 한두 숟가락씩 하루에 3번 빈속에 먹는다.그래도 딸꾹질이 멈추지 않으면 껍질 벗긴 생강을 짓찧어 가제나 얇은 천에 짜 즙을 내 한 숟가락에 꿀 한 숟가락을 풀어먹으면 효과적이다. 그러나 한시간 이상 딸꾹질이 지속되어 호흡이 곤란하거나,딸꾹질이 너무 자주 일어날 때와 딸꾹질과 더불어 흉통,속쓰림 등의 증상이 나타날 때는 의사를 찾아가야 한다.인체의 다른 심각한 질환으로도 딸꾹질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장동민 하늘땅한의원 원장
  • 우동가게 아줌마가 소설집 냈다/강순희씨 ‘행복한‘ 펴내

    “초등학교 시절부터 꿈꿔 온 소설가의 꿈을 이제야 이뤘어요.” 충북 충주시 연수동에서 ‘행복한 우동가게’ 식당을 하고 있는 강순희(姜順熙·46·여)씨가 최근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행복한 우동가게’란 단편소설집을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 전남 강진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광주에서 여고까지 마친 뒤 1982년 결혼과 함께 충주에 정착한 강씨는 남편이 큰 사업을 해 부러움없이 아들 딸을 낳고 살면서 틈틈이 책도 읽고 글도 쓰며 소설가의 꿈을 키워 왔다. 1996년 평화신문 평화문학상과 이듬해 ‘문예사조’에 단편소설이 각각 당선돼 등단,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려 했으나 곧 외환위기로 남편의 사업이 부도나면서 그에게도 시련이 닥치기 시작됐다.살던 집을 경매로 내주고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 되자 친구의 소개로 연수동의 23㎡ 짜리 허름한 우동집을 인수,우동과 김밥을 만들어 팔며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그러나 문학에 대한 열정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식당을 찾아 오는 각양각색의 손님들로부터 듣는 넋두리와 음식을 배달하는 사이 느끼는 단상,가게 앞의 공원에 앉아 있다가 떠오르는 상념 등을 메모해 두고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여기에 살을 붙여 ‘끓는 물에 비친 얼굴’ 등 41편을 만들었으며 이를 다듬고 또 다듬어 옴니버스 형식의 첫 단편소설집을 낸 것. 그가 등단했다는 사실과 우동이 맛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신경림·도종환·강승원씨 등 많은 문인들은 물론 일반인들이 찾아와 남긴 쪽지들이 가게 벽면에 빽빽이 붙어 있다. 강씨는 “혼을 담은 소설을 쓰고 싶다.”며 “연말쯤 또다른 단편소설집을 펴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들려준다. 충주 연합
  • [씨줄날줄] 한 탈북여성과의 대화

    탈북자,귀순자로부터 듣는 북한 생활 체험담은 북쪽 체제의 문제점을 생생히 알려주기도 하지만 남쪽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냉정히 반성해 보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최근 관훈클럽 주최 모임에서 만난 평양 출생 탈북 여성 L(39)씨의 얘기도 폐부를 찌르는 내용이 많았다. 그는 6·25때 서울에서 월북해 북한에서 의사가 된 인텔리 여성의 딸로 약사 직업을 갖고 있었다.정치적 성분 불량자로 낙인 찍혀 온 가족이 함흥으로 추방당한 후 약사가 되기까지 과정은 남북 교육체제를 선명하게 대비시켜 준다.그는 중학교 6학년(고3) 때까지 학교에서 이름을 날린 우등생이었으나 성분 문제로 대학 진학이 좌절돼 노동자의 길을 간다.교사들은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우수 학생 특별 지도에 열을 올리게 되는데 그는 6학년 때 이 대열에서 갑자기 제외됐다.그러나 워낙 뛰어났던 그는 노동 현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3년 이상 실적 우수자에게 주는 진학 추천 케이스로 약대에 진학했다고 한다.비록 좌절이 있었으나 평등한 교육 기회의 수혜자가 된 셈이다. 노모와초등학생 두 딸을 이끌고 탈북한 그는 장차 아이들의 학원비가 큰 걱정이라고 했다.아직은 과외를 받지 않고도 선두 그룹에 들어 있으나 중학 진학을 하면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학원 교육은 북한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라는 것이다.그는 약대와 의대의 좁은 문에도 놀랐다고 했다.그는 목숨을 건 탈출에 자격증이나 다른 증빙 서류를 갖고 오지 못해 이쪽에서 약사로서 활동하자면 다시 약대에 입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현행 대입 제도는 탈북자를 뽑는 특별 전형이 있지만 약대와 의대만은 거의 문호를 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꼭 약사직을 고집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남한에 와서 사람들이 얼마나 정년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는지 알게 됐습니다.그러나 약사는 정년이 없지 않습니까.” 자녀 교육,정년에 대한 불안은 하루 아침에 해결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다.그러나 10년 이상 약사로 일해 온 탈북 여성이 약대 재입학을 원할 때 우리 교육 제도는 정말 이를 수용해 줄 방법이 없는 것일까.탈북여성을 통해 우리 교육의 허점을 다시 보는 느낌이었다. 신연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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