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탤리스,라틴교회음악(명반과 함께하는 음악여행:2)
◎20세기,멸망과 화해하는 법
1.가장 인간적인 것은 멸망이다.인간이 죽음을 알았다.그리고 모든 인간적인 행위가 눈물겹고 아름답다.그렇게 노동이,종교와 역사가,예술의 생애가 시작된다.종교는 죽음을 삶 속에 끌어들이고 죽음 이후를 유토피아로 제시한다.그것은 멸망과의 화해를 좀체 용인하지 않는다.그리고,그렇게 종종 광신으로 치닫는다.
우리는 멸망의 시대를 살고 있다.두 차례의 참혹한 세계대전,좌우냉전과 절멸전,동유럽 제국의 거대한 몰락을 가슴에 품은 20세기가 바야흐로 저물고 있다.
세기말 천년말의 낭떠러지 앞에 우리는 나침반 없이 서 있다.오늘의 경제난국과 가난연습은 사실 고마운 선물인지 모른다.생계 걱정이야말로 세기말의 광란을 극복하는 말짱한 정신의 교량일 것이므로.
2.그러나 그것 뿐인가.이 현기증나는 흔들림의 의미를 그렇게 무마하고 망각하면 그만인가.16세기 영국 작곡가 탤리스의 라틴 교회 음악이 지금 우리에게 그렇게 묻는다.그대 죽음을 아는가.그대 멸망을 아는가…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그 질문,그 흔들림이,악기 반주 없이 인간의 목소리 만으로,절망을 넘어선 화해의 경지를 구성한다.절망이 아름다운 공의 건축물로 들어선다.스펨 인 알리움 하부이…내 희망은 오로지 당신 뿐…광신인가? 아니다.음악은 흔들림을 매개 삼아 더 드높은 아름다움의 경지를 연다.그리고,그렇게 더 우월한,이성과 이성 바깥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는 음악예술 이성의 길이 펼쳐진다.
유토피아? 아니다.그 길은 절망을 머금은 길이므로 실패가 없고 시각의 독재를 벗어나 귀의 상상력을 무한 자극한다.그 상상력은 펼쳐질 뿐 아니라 온몸을 적신다.그래서,어떻게? 비데테 미라쿨룸(보라 기적을)…호모 쿠이담(어떤 사람이)…아우디비 보쳄(목소리 들린다)…칸디디 파크티 순트(휘황한 백열로)…탤리스의 라틴 교회음악은 그렇게 이어지다가,가사의 종교성을 벗으며 잠시 침묵이 더 무겁다가,에 도달한다.
이 음악에 이르러 우리는,귀를 가진 우리의 몸은 벌써 고통의 비(우)에 흠씬 젖은 세상으로,드러난다.20개 성부가 주선율을 모방하면서 연속적으로 등장,그 세상이 여러겹의 아름다움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마치 끊임없이 펼쳐질 것처럼.선율이 끊임없이 목소리를 닮아가고 목소리가 끊임없이 선율을 닮아간다.음악의 몸과 우리의 몸이 구분되지 않는다.
끊임없이,끊임없이…그러는 사이 어느새 또다른 20개 성부가 새로운 주제를 갖고 들어선다.그,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신선하고 충격적이지만,음악도 우리 몸도 음악의 세계이므로,단절일 수 없고 단순한 이어짐일 수 없다.아나는 역사 속에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모든 유토피아들의 절규들이 단절을 넘어 위대한 공을 이루는 광경을 보고있는가…고통이 의미로,의미가 의미 충만의 세계로 펼쳐진다.
그렇다.삶은,끊임없이 살만한 것이다.죽음이,멸망이,흔들림이 있으므로 더욱 아름답게.음악은 현실 속을 파고 들면서 좌절하지 않는다.오로지 슬픔을 형상화하는 까닭이다.유토피아는 언제나 실패한다.기쁨의 환각을 위해 현실보다 못한 까닭이다.
3.40성부 모테트 은 영국음악이 이룩한 종교음악의 최고봉이다.탤리스는 영국사 중 가장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흔들리면서,그 흔들림을 가장 영롱한 음악으로 전화시켰다.
그는 헨리 8세,에드워드 6세,메어리 여왕,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 등 모두 4명의 군왕을 섬겼다.이들은 종교에 대한 태도가 각각 달랐다.탤리스는 어떤 때는 영어로 어떤 때는 라틴어로 작곡을 해야했고 음악양식도 그때마다 달라졌다.그리고 그는 때때로 군왕의 명령을 어겼다.그렇다.그는 끝내 음악의 명령을 따랐다.숭고한 비탄이 아름다움의 뼈대로 들어선다.그리고 아름다움은 다시 그 숭고한 비탄이 열려가는 통로로 작용한다.
그러나 탤리스의 음악은 당시 영국의 정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룩된 업적이 아니다.사실,베토벤의 음악에서조차 완벽한 ‘불구하고’는 없다.그것은 음악이 지닌 진혼과 평화지향의 성격에 위배된다.특히 탤리스의 은 크게 보아 음악에 대한 영국민의 깊은 사랑,그리고 다른 나라보다 깨인 정치의식의 소산이고,그러므로,베토벤이 독일적이듯,영국적이다.
역대 군왕은 모두 탤리스의 음악을,종교적 신념과 무관하게 존중해 주었다.엘리자베스 여왕은탤리스와 버드에게 21년 동안의 음악출판독점권을 주었다.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독일프랑스의 그것과 달리,왕족 몇몇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백성 전체를 기아와 공포,그리고 살륙의 장으로 내몬은 종교전쟁으로 치닫지는 않았다.그리고 그것이 향후 300년 동안 영국의 부강을 보장하는 것이다.그렇게 탤리스의 슬픔은 낙관적인 희망의 그것이다.
탤리스가 살던 16세기 말,영국은 서정적 선율의 극치로써 서양음악의 주도권을 꿈꾸고 있었다.그 소원은 이루어지지만,기간이 너무 짧았다.그리고 곧 언어가 따따부따한 이탈리아 음악의 ‘일상적인’ 대공세가 시작된다.프랑스는 가까스로 감미로운 비무장지대를 형성한다.그리고 ‘더 크게 흔들린’ 바흐 음악이 강한 성으로 구축된다.이 전쟁은 사상자가 없는,아름다운 전쟁이다.어쨌거나,그렇게 영국음악은 역사속으로 사라진다.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야 다시 세계성을 되찾는다.
4.오늘 소개하는 음반은 정격연주로서 탤리스 당대의 ‘흔들림 속 영롱함’을 정밀하게 재현하면서 그 후의 질문들을 더욱 영롱하게,마치 촉촉한 눈동자처럼 덧붙인다.연주자와 작곡가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게 질문은 영국음악 자체의 그것으로 확대된다.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멸망을 맞는,아니 멸망을 한없이 슬퍼하는 자들의 고통 대신 들어서는 것이다.
흔들려라,끊임없이.흔들림이야말로 고요와 평정의 요람이나니.그대 죽음을 아는가.그대 멸망을 아는가?…
그것은 이미 말(언)이 아니다.음악도 아니다.음악과 말에 존재하면서,그 ‘사이’로써 세계를,멸망의 낙관적 희망을 담지하는 어떤 것이다.
1989.EMI CDC 7 49555 2
테버너 콘소트/태버너 합창단
지휘:앤드류 패럿
◎왜 명반인가/토머스 탤리스(1505∼1585)/짧은 무반주합창/당대 악기 연주 존중/정격연주의 절정
모테트는 길이가 짧은 무반주 합창곡.16세기 종교음악의 최절정을 구현했다.바흐에 이르는 역대 음악 거장들이 모두 모테트 걸작을 남겼다. 정격연주는 작곡자 당대의 악기와 연주 관행을 최대한 존중하는 음악 해석 방식이다.
콘소트는 ‘콘서트’(협주)의 옛말.통(통,whole) 콘소트는 관악기,현악기등 같은 그룹의 악기들로 만 구성되며 분산(분산,broken)콘소트는 혼합 구성이다.
앤드류 패럿(1947∼ )은 영국태생의 지휘자.16,17세기 음악 연주 관행을 연구하면서 1973년 정격연주단체 테버너 합창단을 창단하고,테버너 콘소트와 연주단을 추가했다. 데뷔는 1977년 몬테베르디의 .그후 바흐 ,,,헨델 ,모짜르트 등 대작을 포함한 숱한 정격연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