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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들의 땅, 히말라야를 품다

    신들의 땅, 히말라야를 품다

    마음 속의 찌든 때까지 모두 버릴 수 있는 땅, 히말라야에 대한 기대는 여행을 넘어섰다. 그러나 신들이 살고 있다는 거대한 산을 첩첩이 품고 있는 히말라야는 좀체 인간의 발길을 허락할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더욱 가보고 싶은 곳이다. 그래서일까. 한해 히말라야로 가는 국내여행객도 1만명을 넘어섰다. 자연을 경배하고, 욕심과 분노덩어리인 삶을 돌아보게 하는 히말라야는 트레킹마니아들의 천국이다. 차갑고 날카로운 눈과 얼음, 드넓은 초원과 에메랄드빛 빙하가 흘러내린 호수, 야생화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는 셰르파족 등…. 히말라야에서 지낸 20여일은 지난 삶에 대한 반성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글·사진 히말라야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서,‘히마’는 빙설(氷雪),‘말라야’는 살고 있는 곳, 즉 ‘눈의 거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쿰부 히말라야(KHUMBU HIMALAYA)는 히말라야산맥(약 2800km)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가 우뚝 솟은 지역 일대를 말한다.원래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은 영국인이었던 측량국 관리의 이름을 본떠서 붙인 이름으로서 네팔어 정식 명칭은 사가르마타(SAGARMATHA)이다. ■ 마칼루·바룬 - 쿰부히말라야 26일간 대장정에 오르다 에베레스트의 이름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란 권위가 담겨있다. 높이에 대한 감탄뿐이 아니라 범접하기 어려운, 우러르는 마음을 갖지 않고선 감히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경외감까지 포함돼 있다. 또한 로체, 마칼루, 초오유 등 8000m이상의 산들이 즐비한 지역으로 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꿈, 그리고 죽음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히말라야는 전문 산악인들만을 위한 산은 아니다. 이곳에도 초등학생부터 70세의 어르신들까지 히말라야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트레킹 코스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히말라야의 또다른 미덕이다. 배타적이지 않은, 열려있는 산 히말라야가 오라고 손짓해서, 그래서 떠났다. ‘동네 뒷산처럼 쉽게 갈 수 있다’는 쿰부 히말라야코스, 산에 다녀 본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주로 가는 에베레스트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코스 등 자신의 능력이나 실력에 맞는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전국 대학과 고등학교 산악부원 12명, 해외원정 경험이 많은 단장, 대장, 지도위원 4명. 그리고 1년에 고작 한두번 뒷산에 오르는 나까지 모두 16명으로 구성된 ‘2005 한국청소년오지탐험’ 마칼루팀은 7월23일, 서울을 떠났다. 우리팀은 히말라야 지역을 한바퀴 도는 트레킹을 계획했다. 히말라야에 머무는 날은 20일정도, 오가는 비행길까지 포함해서 26일간의 여정은 시작됐다. 옛날 광부들이 다니던 길로 5000m의 패스(고개)를 2개나 넘어야 하는 준전문가들용 코스인 마칼루와 바룬지역을 지나, 일반인들의 여행코스인 쿰부히말라야쪽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여기에서 하이라이트는 전문가들이라야 갈 수 있다는 6461m의 메라피크 등반이었다. 산을 전문적으로 타는 산꾼들과 함께 히말라야로 떠나게 된 초보의 심정, 막상 떠나려니 가슴이 무겁고 두려웠다. 준비할 것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가진 장비는 3년된 등산화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히말라야를 향한 꿈을 접고 싶지는 않았다. 장비를 구입하고, 빌렸다. 사용법도 모른 채 장비를 카고(등산용 커다란 가방)에 쑤셔넣고 떠났다. ●아름답고 낯선 관문 루클라 히말라야로 가는 가장 편한 방법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국내공항에서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날개 양쪽에 프로펠러가 있는 장난감 같은 20인승 경비행기에 올라 루클라로 향한다. 가뿐하게 하늘로 날아 오른 비행기는 몇 번을 날라가다 뚝 떨어지고 옆으로 밀려가는 통에 자이로드롭을 탄 듯하다. 마음을 졸이며 50분을 날아 루클라 비행장에 도착했다. 의 산악지대에 위치한 비행장으로 서울의 편도 4차선 크기의 달랑 하나뿐인 활주로가 눈에 띄었다. 경사가 15도 정도 기울어져 착륙을 돕는다. 반대로 경사면을 미끄러져 내려가며 이륙한다. 활주로 끝은 천길 낭떠러지, 아찔했다. 이렇게 도착한 비행장은 내전 때문에 가 제법 삼엄하다. 아직도 포카라지역은 마오이스트들(마오쩌둥을 추종하는 무리)이 제법 많아 정부군과 교전이 잦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총멘 군인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손에 잡힐 듯한 산들, 어디선가 쏟아지는 물소리, 파란 하늘과 구름들. 히말라야의 첫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오후에 접어들자 날씨가 흐려지더니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장맛비처럼 주룩주룩 내린다. 별을 보며 저녁산책을 하리라는 꿈을 접고 롯지(산장)에 앉아 창문을 거세게 때리는 비구경을 했다. 히말라야는 9월말까지 몬순기간이라 거의 매일 비가 온다. 내리는 비를 뚫고 산을 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 밀려왔다. 마침 셰르파가 다가왔다. 이름은 왕추, 나이는 31살.5명의 셰르파와 60여명의 포터의 대장인 ‘사다´로 에베레스트를 무려 8번이나 올라갔단다. 내 걱정을 알겠다는 듯 그는 “내일은 날씨가 좋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잠자리에 들라.”고 말해줬다. 산사나이의 말을 믿고 습기로 축축한 침대에 올랐다. 두런두런 사람들의 이야기소리에 잠을 깼다. 먼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럴 수가. 간밤의 오던 비는 꿈이었던가. 파란 하늘이 내 눈으로 빨려 들어온다. 아침을 먹고 드디어 히말라야에 첫발을 내딛는다. ●오후만 되면 비내리는 몬순의 고산지대 우리는 쿰부히말라야 일반적인 트레킹코스와 반대로 간다. 마칼루와 바룬지역으로 해서 쿰부히말쪽으로 돌아서 루클라로 다시 돌아오는 일정이다. 마칼루와 바룬지역은 한국사람으로서는 우리가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다. 루클라부터는 을 해야 한다. 휴대전화는 물론 전화, 전기도 들어 오지않는다.(큰 롯지에만 자가발전기를 쓴다.)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도 무용지물이다. 가진 자나 그러지 못한 자 할 것 없이 공평하게 오직 자신의 두 다리로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도 걸었다. 여기서는 우리의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가는 포터나, 집을 고치기 위한 나무를 지고 가는 주민들처럼 우리도 히말라야를 한발 한발 내디디며 마음이 아닌 온몸으로 히말라야를 느껴간다. 루클라를 떠난 지 1시간이 지나자 스티마 쿠알라계곡으로 들어섰다. 그곳의 자연미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집채만한 바위 위를 파랗게 덮고 있는 이끼. 조그만 씨앗 하나가 몇백년동안 저렇게 바위에서 자신의 몸집을 키워나갔을 것이다. 그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콸콸콸’하고 산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엄청난 양의 물에 압도당한다. 그런데 이곳을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없다. 등산화를 벗고 맨발로 스틱에 의지하며 건너간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자 ‘찌릿찌릿’전기처럼 다가오는 차가움. 몇 발을 떼자 아예 통증이 된다. 루클라를 떠난 지 4시간30분만에 캠프사이트인 추탕가에 도착했다. 첫날인데 벌써 다리가 아프고 힘이 든다. 오늘도 어김없이 오후가 되니 비가 내린다. 몬순기간에 고산지대는 오후가 되면 기온이 상승하며 구름을 만들어 비가 내리고 새벽에는 기온이 내려가 날씨가 맑아진다. 히말라야에 머문 20일 동안 단 이틀을 제외하고는 한결같은 날씨였다. 그래서 히말라야 트레킹은 봄과 가을이 제철이다. 비로 눅눅해진 텐트에 몸을 눕혔다. 무엇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반갑지 않은 손님, 고소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고소’, 즉 고산병이다. 고도를 갑자기 올리는 것이 원인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생긴다. 몸속에 산소가 부족해서 혈액순환이 저하돼 두통이나 소화불량, 불면증, 무기력증, 손발 저림, 실어증 같은 것을 동반하며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고소증세는 단 몇백m만 아래로 내려가도 언제 그랬냐 싶게 씻은 듯이 낫는단다. 그래서 일반적인 트레킹에서는 고소적응 기간을 두며,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지만 우리는 짧은 일정탓에 바로 4000m이상 올라 갔다. 4610m의 체트라고개를 넘어 4300m의 틸리 카르카에서 캠핑을 한다.3시간을 걷자 3910m까지 올라갔다. 앞에는 하얀 봉우리를 날카롭게 드러낸 커리륭이라는 7500m의 산과 여기저기 부서져 있는 바위들, 파란 초지, 이름 모를 야생화까지. 히말라야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4000m를 넘자 이젠 숨이 목까지 차오른다. 아니 이 숨막히게 한다. 가도 가도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셔터를 누를 때 숨을 잠시 멈추면 바로 ‘헉헉’하고 몇 번 숨을 몰아 쉬고 걸어야 한다. 사진 한장 찍는 것이 고통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배낭에 넣어버렸다.1시간 전에 웃고 떠들던 대원들도 단한마디 말이 없다. 국어시간에 배웠던 양사헌의 시조가 생각난다.‘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그래 가자 가. 그렇게 5시간을 넘게 오르자 체트라정상에 섰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이름모를 산들. 마치 양탄자처럼 떠 다니는 구름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체트라 정상 구석에서 덩치가 제일 큰 원준희(춘천대 3)대원이 하얗게 변한 얼굴로 구토를 한다.“괜찮아?”하고 묻자 손만 내저을 뿐, 말을 하지 못한다. 몇 명의 대원들이 고소로 정신을 못 차린다. 말로만 듣던 고소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수천년 이어져온 자연의 힘 너덜지대를 걷는다. 돌들이 바닥에 깔려 있는 지대로 평지보다 걷기가 힘들다. 돌을 밟고 미끄러져 한바퀴 구른다. 아예 일어나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어떻게 4000m가 넘는 곳에 이렇게 돌들이 많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바람에 날려 왔을 리도 만무하고…. “이게 자연의 힘이에요. 여름에 물기를 머금은 바위산이 겨울에 얼면서 갈라져 저렇게 커다란 바위가 생기고 또 바위가 여름에 물기를 머금고 겨울에 팽창을 하는 물 때문에 갈라져 이런 바위 너덜지대가 생겨요. 수 천년동안 이런 현상의 반복으로 바위가 없어지기도 해요.”라고 옆에 있던 서병란(43)지도위원이 대원들에게 설명한다. 자연의 위대함에 머리를 숙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오후 4시 캠프사이트에 도착했다. 오늘 무려 9시간을 걸었다. 다리에 감각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 좀 할 걸. 때늦은 후회가 가슴을 친다. 서울 가면 반드시 운동하리라, 지키지 못할 맹세도 했다. 간밤에 내리던 비도 어느덧 멈추고 그토록 괴롭히던 고소도 상당히 좋아졌다. 오늘은 3690m로 내려가 모솜 카르카에서 캠핑을 한다. 변변한 길도 없이 하루종일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정말 때묻지 않은 자연이란 말은 이럴 때 어울린다. 커다란 고목이 쓰러져 있고 고목을 뒤덮고 있는 이끼들을 보니 정글에 들어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정말 깨끗하고 아름답다. 고도를 내리자 고소가 씻은 듯이 사라진다.4356m의 탕낙을 지나 5045m의 카레캠프까지 걷고 또 걸었다. 이젠 5000m를 넘어서자 기온이 달라진다. 날씨가 초겨울 날씨같다. 이젠 5400m의 메라베이스 캠프다. 가파른 오르막과 험준한 산을 넘는다.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터져나가는 것 같다. 확실히 산소가 희박해짐이 느껴진다. 호흡을 일정하게 가지고 가야 한다. 간혹 기침을 한번 하면 자리에서 서서 숨을 고르고 가야한다. 사진을 찍는 것뿐 아니라 수통에 있는 물을 마시기조차 힘들다. 아니 0.1초라도 숨을 멈추고 있으면 바로 죽어버릴 것 같다. 모 등산화광고에서 엄홍길씨가 에베레스트를 오르며 숨을 몰아 쉬는 것을 보고 연기인 줄 알았는데,5000m를 넘어서자 비로소 그 장면을 이해하게 된다. 3시간을 걸으니 이젠 거대한 설산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메라라’ 라는 만년설로 덮힌 언덕. 보는 순간 그 거대함에 압도당한다. 안전을 위해 등산화를 벗고 이중화와 안전띠를 착용한다. 난생 처음 신어 보는 이중화. 스키부츠와 비슷하다. 겉면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설산에서 며칠을 있어도 방수가 완벽해 동상을 막아주는 신발이다. 그러나 정말 무겁다. 거기에 아이젠을 끼웠다. 그리고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띠를 착용하고 자일을 잡고 메라라를 오른다. 이마에 땀이 흐른다. 숨은 가쁘지만 가슴이 뻥 뚫린다. 몸속에 있는 독소와 스트레스가 히말라야의 기운으로 바꿔 채워진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날 것 같다. 수천만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거대한 얼음절벽 위에 서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베이스캠프에서 메라픽 정상을 가는 길과 홍구를 거쳐 추쿵을 가는 갈림길이다. 어디를 갈지는 자신의 선택이다. ●히말라야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 메라 베이스캠프부터 홍구, 판치 포카리까지는 거의 평지이며 바위 너덜지대로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번 트레킹의 마지막 고비인 5800m의 암푸랍체가 우리를 기다렸다. 더구나 눈까지 내려 생각보다 힘들었다. 산은 오르기보다 내려가기가 힘들다는 말이 실감난다. 길이 좁고 눈이 계속 내렸기 때문에 미끄러운 암푸랍체의 하산길은 두고두고 머릿속에 남았다. 이제부터는 정말 편안한 여정이 우리를 기다리는 쿰부히말라야다. 히말라야 마을 중 가장 오지이며 비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4730m의 추쿵. 왼쪽으로 8500m의 로체, 정면에는 6160m의 아일랜드피크, 오른쪽에는 6812m의 아마다블람은 거칠고 황량하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성스러움을 만들어 낸다. ‘어머니의 목걸이’라는 뜻을 가진 아마다블람은 히말라의 보석으로 불린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길게 늘어선 하얀 허리를 가지고 있는 산. 그 선이 매우 날카롭지만 웅장하고 고왔다. 역시 많은 산사나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으로 손 꼽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기서 보는 일몰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하지만 추쿵은 셰르파족이 사는 마을이 아니다. 몇 개의 롯지가 모여 트레킹족의 안식처가 되는 곳이다. 이제 진짜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향한다. 여기 추쿵부터는 일반인들이 쉽게 트레킹을 하는 곳이다. ●히말라야 하이웨이 추쿵부터 루클라까지를 히말라야에선 ‘하이웨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고속도로란 뜻이다. 길이 잘 이어져 있고 마을을 거쳐가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오갈 수 있다. 일단 여기부터는 롯지가 계속 있고 마을에 가게도 있어 콜라며 맥주, 과자 등을 사서 먹을 수 있다. 천국이 따로 없다. 일단 300루피(약 70루피가 1달러. 한화로 4000원)를 주고 시원한 산미구엘 맥주를 사서 한 모금을 마셨다.‘우∼ 세상에 맥주가 이런 맛이었나. 이렇게 맛있다니’ 히말라야에서 먹는 맥주는 입에 쫙쫙 붙는다. 어제와 오늘은 단순한 하루 차이지만 나의 느낌은 지옥과 천당의 차이처럼 느껴진다. 걷기도 편하다. 집들이 이어지고 돌담이 쳐진 밭에서는 감자와 보리들이 자라고 있다. 정말 즐거운 트레킹이다. 이제 며칠동안 햇빛을 못 본 카메라를 꺼내 사진도 찍을 만큼 마음도 몸도 여유가 생긴다.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트레킹족들은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히말라야를 다녀온 것인데, 나는 지옥훈련을 택한 셈이다. 2시간을 걷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올라가는 딩보체가 닿는다. 마을 입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라마의 문구를 새겨 놓은 돌을 쌓아서 만든 돌탑인 스투파. 포터들은 발길을 멈추고 스투파에서 기도를 하고 지나간다. 셰르파족인 그들은 그렇게 고단하고 힘든 삶을 이겨간다. 우리들이 감히 엄두도 못내는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은 아무 욕심없이 라마교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고 있다. 머리에 40㎏의 무거운 짐을 지고 우리를 따라 다니는 락기리(17) 또한 아버지의 직업인 포터를 대물림하며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아무리 고산지대에 사는 셰르파족이라도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다는 것은 고통일 것이다. 슬리퍼를 신고 무거운 짐을 지고 우리를 따라 오는 락기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해한다. 자연에 순응할 줄 알고 종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그들의 인생은 우리의 잣대로 가르는 것은 옳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소년 락기리가 좀더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살기를 빌었다. ●희망의 깃발이 나부끼는 곳 딩보체, 팡보체를 지나 탕보체 가는 길에 히말라야의 웅장한 산 못지않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바로 험준한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다. 이 지역을 걷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길고 짧은 다리를 만난다. 그런데 다리에 여러 색깔의 깃발이 걸려있다. 처음에는 ‘멋으로 했겠지.’하고 지나쳤지만 다리마다 걸려 있는 오색천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이곳 사람들은 다리를 신성시하여 카타와 룽다(기도 깃발)를 걸어놓는 것은 물론 지날 때마다 ‘부디 하는 일 잘 되고 가족 모두 아무 탈 없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 오늘도 사람들의 희망과 바람을 가득 담은 오색깃발은 바람에 따라 춤을 춘다. 3860m의 탱보체는 라마사원으로 유명하지만 에베레스트, 로체, 아마다블람 등 유명한 산들을 같은 방향에서 조망할 수 있는 히말라야의 전망대이다. 또한 우리나라 조계종에서도 후원을 한다는 티베트사원인 콤파를 만나게 된다. 탕보체의 콤파에는 많은 스님들이 거주하는 콤부히말에서 가장 큰 사원이다. 화재로 사원이 전소되었다가 붉은색 벽돌로 다시 지었지만 중후한 분위기와 차분함이 여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잔뜩 흐린 날씨에는 제1전망대에서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일정상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남체 바자르로 향했다. 계곡의 물소리 정겨운 작고 아담한 마을, 우거진 숲.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쿰부히말라야의 명동 쿰부히말라야의 제일 번화가는 당연히 남체 바자르다. 해발 3440m에 위치한 쿰부 히말라야의 상업적 요충지이며 등반과 트레킹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곳이다. 또 이 마을은 매주 토요일마다 장이 열린다. 쿰부히말라야에 사는 모든 셰르파족들이 생필품을 여기서 구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시장과 상점들이 모여있는 지역으로 빵집과 레스토랑, 클럽, 당구장 등이 밀집해 있어 깊은 히말라야의 산중이란 생각을 잠시 잊게 만든다. 이 마을 뒷산 꼭대기에는 히말라야의 설산 풍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와 네팔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박물관도 있다. ●그래도 새벽은 온다. 이번 탐사의 하이라이트는 메라피크 정상에 서는 것이다. 메라피크는 해발 6461m로 히말라야 트레킹피크 중에서 제일 높다. 윤대장이 은근히 나를 떠본다.“베이스에서 쉬시지?”내가 등반대장이라 해도 걱정이 되겠다. 장비라고는 제대로 된 것 하나 없지, 자일을 타 보길 했나, 설산 경험이 있나. 하지만 나는 큰소리쳤다.“해발 6000m, 자신있습니다.” 큰소리 지만 긴장과 두려움으로 뒤척이다 새벽을 맞았다.5800m의 메라 하이캠프로 올라간다.3명의 대원은 고소가 심해 베이스에 남았다. 눈부신 설원을 밟으며 걷는 대원들을 뒤에서 보고 있노라니 마치 파란 하늘을 향해 걷고 있는 천사들 같다. 하얀 천국의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온통 하얀색뿐이라서 그런지 1시간을 걸었는데도 제자리인 것 같다.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 오를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일단 하이캠프에서 결정하기로 하고 무거운 다리를 옮겼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다음날 새벽 2시.8명이 정상으로 향했다. 서로 몸을 자일로 묶고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며 오르기 시작했다.8명중 4번째 내가 섰다. 앞뒤 사람과 보조를 맞춰야 걸을 수 있다. 내가 못가면 앞뒤 사람이 다 못간다. 처음 1시간은 잘 걸었지만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자 나도 모르게 “잠시 대기”라는 외침이 입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3∼4발자국을 걷기가 힘들다. 얼마나 걸었을까. 뒤로 거대한 설산에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자 이젠 마지막이야. 여기만 오르면 정상이야.”라는 외침에 정말 젖먹던 힘까지 다해 걸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간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속을 가득 메울 때 “정상이야. 메라픽 정상이야.” 하는 외침이 들린다. 나는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보다는 앉아 쉴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상은 정상이다. 그런데 표지 하나 없다. 약간 허탈했다. 그때 셰르파가 다가 오더니 저기 보이는 산이 에베레스트라고 가르쳐 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랬다. 신기루처럼 구름 위로 우뚝 솟은 봉우리가 에베레스트. 불가능 같았던 산이 거기에 있었다. 신기루처럼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가 금방 사라지고 마는 에베레스트, 로체, 마칼루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는 것으로 모든 고통이 잊혀진다. 마치 짝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만봐도 행복해지듯…. 눈앞에 드러낸 웅장함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이런 감상도 잠깐, 서둘러 사진을 찍고 하산한다. 햇볕에 눈이 녹으면 발이 빠져 걷기 힘들기 때문이다. ‘잘 있거라. 언제 다시 만나리라는 기약은 없지만 안녕!’ 13시간을 눈밭에서 구르다 베이스에 도착했다. 정말 평생 기억에 남을 길고 힘든 하루였다. ■ 네팔 가려면 네팔은 우리나라의 3분의2 정도 크기의 면적에 인구는 약 2500만명이다. 시차는 한국보다 3시간15분 늦다. 화폐는 인도와 마찬가지로 루피(Rupee).1달러가 69루피 정도. 신용카드가 되는 곳이 드물며 한화는 환전을 할 수 없으므로 출국하기 전에 달러로 바꿔야 한다. 환전은 공항이나 카트만두에 있는 타멜시장의 시설 환전소를 이용하면 된다. 네팔은 비자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미리 네팔 비자를 받고 싶으면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명예 네팔영사관(02-555-9040)’에 전화예약 후 방문하면 된다. 발급은 보통 이틀 걸린다. 비자수수료는 32달러. 카트만두 공항에서도 비자 발급이 가능하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한국에서 준비하는 것이 낫다. 단 비자수수료는 한국보다 2달러 싼 30달러. 비행기는 직항노선이 없다. 홍콩, 방콕, 상하이에서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다.www.nepal.pe.kr,www.nepaltour.pe.kr에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트레킹 하려면 혜초여행사(02-6263-3330,www.hyecho.com)는 네팔 트레킹의 선두주자. 한 해에 3500명 이상이 혜초여행사를 통해서 히말라야 트레킹에 나선다. 초등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코스를 알려주며 네팔 현지 지사에서 셰르파나 포터뿐 아니라 필요한 물품도 공급해준다. 셰르파의 고향 남체로 찾아가는 9일 일정의 에베레스트 하이라이트 트레킹은 205만원, 쿰부 히말라야 트레킹의 완성인 17일 일정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260만원. 푼힐전망대에서 아름다운 안나푸르나를 바라보는 9일 일정의 로얄 트레킹은 185만원,180도 펼쳐지는 히말라야의 파노라마를 느낄 수 있는 13일 일정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220만원. 또 10월쯤이면 루클라에서 출발, 추탕가와 메라베이스, 암푸랍체를 거쳐 쿰부 하말라야인 추쿵, 남체를 거치는 20일 일정의 히말라야 일주 트레킹 상품도 나올 예정이다. 이밖에도 개인이나 단체의 일정에 맞춘 다양한 트레킹 여행도 가능하다. 네팔 트레킹은 여행기간이 길고 오지로 떠나기 때문에 전문여행사를 통해서 가야 한다.
  • “여성 직장생활 성적보다 인간관계”

    여대생들이 취업 후 회사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도서관에서 토익책이나 전공서적과 씨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다양한 인간관계를 쌓는 게 더 절실한 것으로 지적됐다.연세대 여성인력개발연구원은 26일 ‘여대생의 재학 중 직업체험 효과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오경자 여성인력개발연구원장은 “사법고시를 포함한 각종 국가고시에서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여성 취업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시험에서 고득점을 얻는 것 외에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란 사실이 연구에서 확인됐다.”고 말했다. 연세대 재학 여학생 50명을 대상으로 올초 ‘인턴십’ 프로그램을 진행한 뒤 이 중 12명을 심층면접한 결과 이들은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과 조직 구성원 간 의사소통법을 익히는 것이 직업현장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꼽았다. 이들은 ▲‘언니’‘오빠’가 아닌 조직내 구성원들에게 공식적인 호칭 부르기 ▲공식적인 호칭이 의미하는 사회적 책임감 인식 ▲구성원간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공동의 목표를 수행하는 과정 연습 ▲주어진 임무에 대한 부담감 의식 ▲외부에서 보는 기업 이미지와 실제 조직문화의 차이 인식 ▲조직내 리더십과 상황 판단력 훈련 등이 취업 준비에 동반돼야 한다고 답했다. 인턴십 프로그램에서 국내 모컨설팅 회사의 고객관리 업무를 담당했던 정모(경영학과 3학년)씨는 “7명 남짓한 팀 구성원이 기획에서부터 영업까지 일을 완수하려면 조직 구성원 간의 갈등이나 오해를 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구성원간의 관계를 잘 맺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고 전했다. 이들은 또 자신의 취업준비 방법에도 변화를 줘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학점이나 시험점수만 관리하며 혼자 공부하기보다는 선·후배와 교수 등 주변 인맥을 동원하는 것이 취업 준비에 훨씬 이로울 것이라고 답했다. 장서영 책임연구원은 “남성들이 20대 초반 군대에서 사회를 경험하는 것과 달리 여성들은 취업과 동시에 사회에 첫발을 내디디기 때문에 잘못된 취업 준비로 입사 후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면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직무능력 중심의 취업 교육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관한 교육도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학술·종교플러스]

    ●멕시코 한인 이주 100주년을 기념해 재외동포재단과 단국대 아시아아메리카문제연구소가 주최하는 ‘멕시코이민 100주년, 회고와 향후전망’이 29∼30일 이틀 동안 서울 프레스센터 19층에서 열린다.1905년 일군의 조선인들이 멕시코 유카탄 반도 끝에 있는 에네켄 농장에 첫발을 디디면서 시작된 멕시코 이민의 배경과 한인들의 독립운동, 그리고 후손들의 생활에 대한 한·멕시코 양국 학자들의 발표가 이어진다.(02)709-2350.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여성위원회와 한국여신학자협의회 등 기독교 여성단체들이 구성한 ‘주기도 새번역안 여성연구특별위원회’는 오는 30일 서울 명동 기독교회관에서 ‘주기도 새번역안 공청회’를 개최한다. 발제자로 최영실 성공회대 교수, 송순열 한신대 교수, 박혜숙 새문안교회 집사, 이근복 새민족교회 목사 등이 나선다. 앞서 KNCC 여성위는 K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새 번역을 추진 중인 주기도문에서 가부장적인 이미지인 ‘아버지’라는 호칭을 빼자고 제안한 바 있다.(02)745-4943. ●천주교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는 다음달 3일 서울 동성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제2회 청소년을 위한 순교자 현양 문화축제’를 개최한다. 사회와 교회의 미래인 청소년들을 위해 교회의 전통인 순교 신심을 신앙 유산으로 계승하고자 마련한 행사로,‘자 일어나 가자! 그대들도 순교자처럼’이라는 주제로 열린다. 공연과 애니메이션 발표, 콘서트 등으로 구성된다.(02)2269-0413∼4.
  • 현대통신 고성장 비결은 ‘3先’

    현대통신 고성장 비결은 ‘3先’

    “먼저 생각하고, 먼저 출발하고, 먼저 정복하라.” 9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현대통신 본사. 이내흔(69) 회장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3先’(세번 먼저)을 강조한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단순히 현대맨 출신답게 저돌성과 추진력을 강조한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 회장을 인터뷰하러 가는 동안 내내 궁금했던 의문의 해답이 바로 그 속에 들어 있었다. 평생을 건설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어떻게 최첨단 정보기술(IT)회사를 맡아 몇년새 시장 1위로 끌어올렸을까. “이제는 큰 것과 작은 것, 강한 것과 약한 것의 싸움이 아니다. 속도의 싸움이다. 쏟아지는 지식정보사회에서 누가 먼저 흐름을 잡고, 한발 앞서 내디디며, 이것을 기반으로 창조를 해내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현대통신의 비약적인 성장의 비결은 바로 3선에 있었던 셈이다. 현대통신은 쉽게 말해 ‘똑똑한 집’을 만드는 회사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바깥에서 휴대전화로 미리 에어컨을 켜고, 보일러를 작동시키는가 하면, 명절이나 휴가때 빈집에 도둑이 들면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경비업체로 자동 연결시켜준다. 이같은 시스템을 상품으로 개발해 아예 브랜드로 내놓은 게 현대통신의 ‘이노바’(홈오토메이션) ‘이마주’(홈네트워크)다. 지난해 매출액은 664억원. 평균 시장점유율 40%로 업계 1위다. 덕분에 주주들에게는 은행 이자의 5배인 18%를 지난해 배당했다. 국내 부품소재 회사를 인수하는 방안도 9월이면 가시화될 예정이다. 올초에는 일본 현지법인을 설립, 일본 최대의 경비회사와 손잡고 내년초 첫 상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이 회장은 이 회사의 최대주주(지분율 41%)이자 대표이사다.1998년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만 해도 120억원에 불과했던 연간 매출액을 불과 7년새 5배 이상 올려 놓았다. 이 회장이 이 회사를 인수한 것은 99년 5월. 물론 인수 결심은 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한 어느 날,“오래 했어. 이제 그만해.” 왕 회장(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이 한마디에 평생을 함께해 온 현대건설에서 물러나 쉬고 있을 때, 김영환 당시 현대전자 사장을 통해 MH(고 정몽헌 회장)측에서 인수 의향을 타진해 왔다. 나름대로 시장 조사를 해보니 꼴찌에서 두번째였다.“노느니 한번 해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퇴직금과 아내의 저금을 털어 15억원 가까운 인수자금을 마련했다. “취임후 2∼3년은 온갖 국내외 콘퍼런스를 쫓아다녔다. 흥미롭게도 이 업종이 건설과 매우 흡사했다. 자동차는 A에게 못 팔아도 B에게 팔면 되지만 건설은 A 수주를 못 따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 업종도 마찬가지다. 원리가 같으니 자신감이 생겼다. 부단히 상품을 개발하고 마케팅에 힘썼다.” 그래도 왕 회장과 건설현장을 누빌 때에 비하면 지금의 업무 부하량은 일 축에도 못 낀다는 그는 지금도 왕 회장과 “무섭게 일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느슨해졌던 끈이 바짝 조여진다고 회고했다. 신입사원 때부터 지켜봤던 고 정몽헌 회장에 대해서는 “데드 웨이트 톤(Dead Weight Ton·DWT, 배가 가라앉아 죽음에 이르는 무게를 가리키는 조선업계 용어)이 없는 큰 사람”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대전고와 성균관대 법학과를 나와 “고시를 준비하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뒤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70년 현대와 첫 인연을 맺어 ‘건설업계의 대부’로 불리기까지 오랫동안 현대건설 사장을 지냈다. 지금은 대한야구협회 회장, 아시아야구연맹 회장 등 이 회장 표현대로 “돈버는 명함보다 돈쓰는 명함”이 더 많다. 전문 경영인에서 오너 경영인으로 변신한 그는 점심식사후에 반드시 30분 쪽잠을 즐기고, 하루도 빠짐없이 손·발 전용 크림을 바른다는 게 건강 비결이라고 소개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살신성인’ 전우애 영원히…

    ‘살신성인’ 전우애 영원히…

    임진강에서 전술훈련 중 급류에 휩쓸려 순직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대대 장병 4명에 대한 합동 영결식이 29일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에서 사단장(葬)으로 거행됐다. 이날 영결식에는 유가족을 비롯해 윤광웅 국방장관, 이상희 합참의장, 김장수 육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와 손학규 경기지사, 김명자ㆍ황진하·고조흥 의원 등 1000여명이 참석, 동료를 구하려다 순직한 장병들의 희생정신을 기렸다. 고인들의 유해는 영결식 이후 성남시립 화장장에서 화장된 뒤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황중선(육사 32기) 사단장은 추도사에서 “수마와의 사투에서 전우를 살려내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숭고한 희생정신은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쉴 것”이라고 말했다. 군 당국은 고인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려 1계급 진급을 각각 추서했다. 한편 앞서 지난 26일 오전 10시50분쯤 경기도 파주시 전진교 인근 장깨 도하훈련장에서 전술훈련 중이던 JSA 경비대대 소속 안학동 병장이 발을 헛디디며 임진강 급류에 휩쓸리자, 소대장 박승규 중위와 강지원 병장, 김희철 상병 등 동료 3명이 그를 구하기 위해 강물에 잇따라 뛰어들었다가 함께 변을 당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인간시대] 서울시 새주소추진팀 이용선 주사

    [인간시대] 서울시 새주소추진팀 이용선 주사

    “일본 가보니 나무 한 그루 살리려고 호텔 벽에 구멍을 팠더라고요.” 서울시 행정국 새주소추진팀 이용선(52·토목6급) 주사는 도쿄에서 겪은 경험을 이렇게 감탄하며 말했다. 그는 토목직 사이에서는 삐딱한 시선(?)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함께 근무하는 팀 동료들과 그의 부지런함을 아는 이들로부터 “불타는 사명감에 감탄할 정도”라는 말을 듣는다. 토목분야에서 잘못된 것들을 파헤치며 누비고 다니기 때문이다. 국내는 물론 가까운 일본 등 외국에 나갈 기회만 생기면 우리나라와 금방 비교되는 사례들을 사진으로 찍어오고 슬라이드로 만들어 서울시 안팎에서 강의를 한다.“휴일이면 카메라를 둘러메고 자료수집에 나서서 아내로부터 핀잔을 듣는데, 워낙 미친 듯 쫓아다녀 이젠 가족들이 포기했다.”고 스스로 털어놓는다. 토목 전공자로서 서울시에 들어와 “대한민국이 외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실제 가질 수 있으려면 보도블록 하나 만드는 일에도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지론을 갖게 됐다. 특히 1993년 5월과 97년 7월 일본으로 출장을 가서 현장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아 우리나라 현실과 비교하는 작업을 시작했다.“나 혼자만 보고 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동료 직원과 감리·감독자 및 시공자들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눈을 뜨게(?) 만들어야겠다는 굳은 다짐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10여년 동안 자비를 털어 촬영하고 직접 편집한 슬라이드만 830여장에 이른다. 슬라이드 사진은 일본 현장을 담은 것 370여장, 국내 현장을 담은 것 460여장이다. 철저한 일본과는 달리,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궂은 날씨에 행인이 발을 디디면 고인 빗물을 튀기는 우리나라 보도블록 등은 부끄러운 현실이다. 이씨의 열성이 입소문을 타면서 강의요청이 들어왔다. 공사 한 가지를 하더라도 시민들을 우선시 하는 습관, 정교한 시공, 사회약자층 배려 등 철저한 프로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기 위해 ‘도로 및 시설물의 시공·관리실태’ 슬라이드 교육에 들어갔다. 도로 색깔이나 무늬 등과 잘 어울려 언뜻 예술품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도쿄의 맨홀, 뒷골목 공사구간에서 지나가는 시민이 있으면 작업을 멈췄다가 안전하게 건너가도록 안내한 뒤 작업을 재개하는 사려 깊은 인부들 등이 그 좋은 사례다. “자치구와 시 산하 기관 등 14차례 강의를 했는데,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현장에서는 실천하기 쉽지 않은 것 또한 현실입니다. 공공이든 민간이든 정책을 결정하는 윗분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같은 지적에 일부 토목직들은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서 뭐하자는 얘기냐.”는 볼멘소리도 내뱉는다. 하지만 이씨는 “세계 일류도시 수준의 도로 및 시설물을 갖추려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분명하게 알고, 잘못을 고쳐나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씨는 “완벽한 공사를 위해서는 발주처·감독부서·시공사·제품생산자·시민의식 등 ‘5위 일체’가 돼야 한다.”면서 “이같은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일류국가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시설관리공단에서 이씨의 강의를 들은 A건설사의 한 직원은 “너무나 대조적인 공사현장 모습에 같은 직종의 종사자로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는 한편으로는 “그러나 하청에 다시 재하청, 재재하청을 주는 등 우리나라 특유의 구조적인 현실에 비춰 윗선부터 깨우쳐야 그 꿈이 이뤄질 것”이라고 귀띔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역동적 亞시장서 제2도약”

    ‘삼성의 미래는 아시아에 달려 있다.’ 삼성이 아시아와 동반성장을 통한 ‘제2의 도약’을 선언했다. 삼성은 13일 베트남 호찌민에서 이건희 회장과 구조조정본부·삼성전자 사장단 등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전략회의를 열고 세계 인구의 60%가 살고 있는 아시아 지역과 동반성장 하기 위해 지역별 특성을 고려한 ‘타깃 마켓별 세분화 전략’을 전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날 회의에는 이 회장과 장남 이재용 상무, 구조조정본부 이학수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기태 사장(정보통신), 이현봉 사장(생활가전), 최지성 사장(디디털미디어), 김순택 삼성SDI 사장, 강호문 삼성전기 사장, 송용노 삼성코닝 사장, 김인 삼성SDS 사장 등 전자계열사 사장단이 참석했다. 박근희 중국본사 사장, 박상진 동남아총괄 부사장, 오석하 서남아 총괄 전무, 이병우 중동·아프리카총괄 상무 등 아시아지역 총책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삼성은 아시아 경제발전이 가속화되고 전체가 단일시장으로 통합되는 추세에 맞춰 아시아지역이 원가절감 목적의 단순 생산기지가 아니라 주요 시장이라는 인식을 갖고 상호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기로 했다. 베트남과 인도 등 국토·인구·자원 측면에서 잠재력이 큰 국가들에 대해서는 연구개발(R&D)을 확대해 기초기술과 소프트웨어 등 유망기술을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키로 했다. 프리미엄 전략을 통한 고급 마케팅을 전개해 초기 단계에서부터 일류기업 이미지를 확고히 구축하는 한편 아시아 각 지역에 정통한 우수 인력을 확보, 양성하는 데도 역점을 두기로 했다. 이 회장은 “아시아는 인종·국가·종교 등이 다양하고 복잡한 데다 국가간, 지역간 소득 격차가 심하지만 잠재력이 세계 어느 지역보다 높다.”면서 “삼성의 미래가 아시아와의 동반성장 여부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서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 회장은 또 “아시아 각국이 경제발전에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관심과 도전이 필요한 시점이며 역동적인 아시아 시장에 긴 안목으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삼성 관계자는 “단순히 제품만 팔겠다는 생각으로는 복잡한 아시아시장 공략이 어렵기 때문에 중장기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게 이 회장의 판단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 회장은 지난 12일 하노이에서 판 반 카이 베트남 총리와 접견, 베트남 투자확대 등을 논의했고 13일 회의에 앞서 삼성전자 베트남 사업장을 방문했다. 이 회장은 14일 인도네시아로 떠난다.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진짜’ 판타스틱한 영화를 만난다

    리얼판타스틱영화제(운영위원장 김홍준)가 새달 14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종로구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와 필름포럼에서 열린다. 올해 상영될 작품은 총 61편. 개막작으로는 1924년 소련이 제작한 SF 무성영화 ‘아엘리타’가 선정됐다. 전체주의 국가인 화성으로 우주선을 타고 날아간 남자가 독재자의 딸 아엘리타와 사랑에 빠지고, 노예 반란으로 혁명이 일어난다는 줄거리. 야코프 프로타자노프 감독의 작품으로 개막식에서는 작곡가 송현주가 영화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음악이 함께 선보인다. 부천국제영화제의 대안적 성격을 띤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주목해볼 부문은 ‘마르크스의 침공!!! 동구권 SF영화 특별전’. 개막작을 비롯해 ‘오존 호텔에서의 8월말’(얀 슈미트·1966년),‘섹스미션’(율리우스 마슐스키·1983년) 등 13편이 상영된다. 또 다른 주요 부문인 ‘판타스틱 영화세상’ 섹션에서는 일본영화 ‘느린 남자’(시바타 고)와 ‘휑’(빈센조 나탈리),‘노는 회사, 라이엇’(킴 핀) 등 15편을 만날 수 있다.‘코리안 판타지’ 섹션에는 ‘달콤한 인생’(김지운),‘혈의 누’(김대승),‘말아톤’(정윤철),‘알 포인트’(공수창),‘브레인 웨이브’(신태라) 등 7편이 선보일 예정. 단편 섹션 ‘짧지만 판타스틱’에서는 ‘사다리를 들고 다니는 남자’(안드레아스 리이저),‘기적’(고수진),‘영원한 일상’(디디에 퐁탕) 등 국내·외 작품 24편이 소개된다. 올해 초 발견된 해방 전 기록영화 ‘조선’과 ‘해방뉴-쓰’가 특별상영작으로 선정됐다. 지난해 연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김홍준 집행위원장이 해촉되면서 영화제의 스태프들이 따로 떨어져 나와 대안적 성격인 리얼판타스틱영화제 개최를 추진해왔다. 이 영화제는 부천국제영화제와 같은 기간에 열린다.www.realfanta.org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척추클리닉 ‘우리들 병원’ 제약그룹으로 ‘승승장구’

    노무현 대통령의 허리디스크 수술로 유명해진 척추전문 클리닉 ‘우리들병원’이 ‘그룹’의 위용을 갖추고 있다. 지난해 상장기업인 수도약품을 인수한 뒤 계열사가 무려 17개로 늘어났다. 지난 16일에는 KT 계열사인 ‘한림창업투자’ 지분 10%를 7억원에 인수하며 주요주주로 부상했다. 수도약품은 지난해 4월 우리들병원 이상호 원장과 부인 김수경씨, 이들 소유의 아스텍창업투자로 최대주주가 변경된 뒤 대주주 소유의 개인회사들을 속속 계열로 편입시켰다. 40년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약품이 병원에 인수된 것은 제약업계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졌다. 석연치 않은 인수과정 때문에 김수경씨를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하는 문제를 놓고 여야가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들병원과 노 대통령의 ‘인연’은 허리수술 외에도 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우리들병원의 자문변호사로 활동했고 이상호·김수경씨 소유의 아스텍창업투자가 안희정씨에게 1억 9000만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한 데다 아스텍창투가 한 때 노 대통령이 운영했던 ‘장수천’ 주식 1000만원어치를 보유하는 등 남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이후 3년 연속 적자에 허덕이던 수도약품은 지난해 초 제3자 배정방식으로 400만주를 유상증자하면서 최대주주가 한국디디에스제약·장시영씨에서 김수경씨 등으로 바뀌었는데 유상증자로 조달된 자금 224억원은 김수경씨 등 소유의 닥터즈메디코아 인수에 고스란히 투입됐다. 수도약품은 액면가 1만원인 닥터즈메디코아를 주당 36만원에 인수했다. 때문에 김수경씨 등은 한푼도 들이지 않고 자산규모 420억원에 달하는 중견 제약회사를 인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주주였던 한국디디에스제약과 장씨가 신주발행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며 ‘저항’하기도 했지만 소송은 곧바로 취하됐다. 수도약품그룹은 현재 의료용품 도소매업체인 닥터즈메디코아, 건강식품 도소매업체인 우리들생활건강·메디썬트, 의약품원료업체 수도정밀화학 등 유관업종 외에도 아스텍창업투자, 지아이그룹(부동산 개발), 클릭엔터테인먼트(게임소프트웨어 개발), 우리들홀딩스(홍보대행), 디지털수다(영화·방송제작), 제이앤에스월드(스포츠용품 도소매) 등 전방위 사업을 벌이고 있다. 부산고와 부산대 의대를 나온 이상호 원장이 지난 1982년 부산에서 시작한 ‘이상호 신경외과의원’이 전신인 우리들병원은 현재 부산, 서울 강남, 김포공항에 병원을 두고 있다. 수도약품 회장과 닥터즈메디코아, 지아디그룹, 우리들웰니스리조트(레저타운 개발), 수도정밀화학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김수경씨는 이 원장의 부산대 1년 선배(영문과)로 72년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시인·소설가로 활동하다 최근 여성경영인으로 대변신했다.76년 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 원장도 의학서는 물론 3권의 시집을 내는 등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부부는 지난 2월 ‘우리는 함께 시간속을 걸어가네’라는 공동시집을 내기도 했다. 아들인 이승렬씨는 엔에이치에스(소프트웨어 개발)·우리들홀딩스의 대주주다. 수도약품도 김수경 회장(16.33%), 이 원장(15.67%), 김 회장의 동생인 김수진(2.49%)·김대수(0.41%)씨가 지분을 나눠 갖고 있다. 한편 수도약품은 올 1·4분기 매출 77억원, 영업이익 12억원을 내며 지난해 같은 기간(매출 38억원, 영업손실 19억원)에 비해 탁월한 경영성적을 거뒀다. 류길상기자 ukelvin@seoul.co.kr
  • ‘기록의 사나이’ 장종훈 그라운드 굿바이

    “20년전 첫 발을 내디디던 연습생의 마음처럼 최고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새롭게 시작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전설’ 장종훈(37·한화)이 지난 20년간 정든 그라운드를 떠난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는 15일 “장종훈이 김인식 감독과 면담을 가진 뒤 은퇴를 최종 결정했다.”고 공식발표했다. 또한 “은퇴경기 일정은 결정되지 않았지만 20년동안 팀 공헌도를 고려해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에 걸맞은 예우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86년 세광고를 졸업한 뒤 프로와 대학팀으로부터 외면을 당해 입단테스트를 거쳐 빙그레(현 한화)에 입단한 장종훈은 한국프로야구의 역사를 바꿔 놓은 ‘연습생 신화’의 주인공. 배성서 감독에게 발탁돼 87년부터 1군에서 뛰면서 홈런·타점왕 3연패(90∼92년) 및 최우수선수(MVP)를 2년연속 거머쥐는 등 90년대 최고의 슬러거로 군림했다. 특히 개인통산 최다인 1949경기에 출장해 6290타수 1771안타로 통산 타율 .282에 340홈런 및 1145타점을 남겨, 홈런·타점·득점·출전경기·타수 등 타율과 도루를 제외한 공격 전부문에서 통산 1위에 올라 움직일 때마다 역사가 바뀌는 ‘기록제조기’였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는 ‘영웅’도 거스를 수 없었다. 국내 유일의 15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뿜어낸 장종훈은 2003년부터 2년연속 6홈런에 그쳤고, 올시즌 재기를 위해 구슬땀을 흘렸지만 6경기에 나서 9타수 1안타(1홈런)에 그쳐 지난 4월20일 2군으로 내려갔다. 장종훈은 남은 시즌 2군 타격 보조코치로 후배들을 지도한 뒤 내년 시즌 코치로 계약하거나 해외연수를 떠날 계획이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이젠 눈물이 말랐어요

    이젠 눈물이 말랐어요

    나는 학사기생(學士妓生) S각(閣)일기 학사기생 - 어느「멜로드라마」의 제목 아닌 생생한 현실속의 이야기다. 역경을 디디고 일어선 방년 24세, 한 아가씨의 의지가 오히려 믿음직스럽기까지 하다. 신파조(新派調)의 눈물보단 냉엄한 현실이 새삼스레 느껴지는 이 아가씨의 일기장을 뒤져 보면 - 67년 7월 ○일 집에 돌아오니 11시 20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건너왔다. 옷을 갈아 입으니 벗어놓은 옷이 마치 뱀껍질처럼 징그럽다. 왈칵 울음이 솟구쳤다. 울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지만, 끝내 울어버리고 말았다. 선운각(仙雲閣) - 흔히들 기생「하우스」라고 하는 곳의 기생이 되어버린 내 자신이 초라하다. 내일 아침 학교에 어떻게 나가나? 이제 여섯달이면 졸업이다. 하지만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의 차이가 몸서리치도록 무섭다. 오늘로 내 삶은 또 하나의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다. 성도 이름도 낯설기만 한 박은숙(朴恩淑) 세 글자 - 나에게 붙여진 이 새 이름 뒤엔 그림자처럼「기생」이란 두 글자가 따라다닐 걸 생각한다. 어쩌면 그렇게도 떨렸을까? 아까 처음으로 곱게 단장하고「유니폼」인 하늘색 한복 치마 저고리를 입고 손님방엘 들어설 때, 방안에 몇 사람이나 있는 줄도 몰랐었지. 그저 두렵고 떨리기만. 푹 고개를 숙인 채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모두 동문서답. 손님들은 또 어째 그럴까? 나이 지긋한 분들이 딸 같은 내게 그렇게 짓궂은 질문을. 또 눈물이 날 것 같다. 언니들 이야길 들으니 처음 나오는 애들한텐 대개 그렇단다. 몸 둘 곳 모르고 앉아 있기 두어 시간. 얼떨결에 받아 쥔「팁」이 2천원. 돈 때문에 나왔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기생충같이 여겨지는 이 불결함. 낮엔 부업 피아노 선생님 밤에는 본업 박은숙 아씨 67년 8월 ○일 아침에 S가 찾아왔다. 밉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계집애. S는 자상히 지난 한 달 동안의 일을 묻고 선배다운 충고를 몇 마디 했다. 생각해보면 묘한 인연이다. 대학입시 공부하러 그 절에 가지 않았던들 S와 만나지 못했을 거고. 그럼「여대생 기생」이 되지도 않았을 걸. 서로 외로우니 공부하다 쉬는 틈에 사귀고 보니 정이 들고 서울에 돌아와서도 언니, 동생이 되어 버렸다. S가 기생「하우스」에 나가고 있는 걸 알기는 대학교 3학년 때. 그리고 석 달 전 학교를 그만두느냐 마느냐 할 때 이 집을 제의한 게 바로 S였으니. 한 달이나 망설였다. 천하고 밑바닥 인생이라는 느낌이 강박관념처럼 머리에서 뱅뱅 돌았다. S와 두어 시간 얘기를 하고 나니 한결 가슴이 후련하다. S는 역시 좋은 계집애다. S에게서 그녀의 의지 같은 걸 더 배워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레슨」시간이 됐기에 S를 보내고 아이네 집으로 갔다. 모여대 기악과 졸업반 학생이란 것만 알 뿐「그 집」얘길 모르는 아이 어머니는 그저 상냥스럽기만 하다. 좀 극성이긴 하지만. 두 시간 아이와「피아노」앞에서 실랑일 하다 보니 전에는 몰랐던 즐거움이 느껴졌다. 전엔 신경 쓰이고 피곤하기만 하더니 이젠 오히려 아이와「피아노」치는 시간이 뭔지 모르게 즐거웠다.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아이는「레슨」이 끝나자 한 곡 쳐달라고 자꾸 조른다. 어젯밤 마지 못해 마신 두어 잔 술 때문인지 머리가 무겁긴 했으나 꼬마의 청을 들어주었다. 「모짜르트」를 한 곡. 오래간만에 속이 후련해진다. 집으로 돌아오는「버스」속에서도 연방「모짜르트」를 흥얼거리던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67년 10월 ○일 꼭 석 달째다. 이젠 손님방에 들어가도 떨리는 버릇은 없어졌다. 모르는 사이에 나도 동화되어 가는 것일까?「레슨」을 끝내고 미장원엘 다녀오니까「마이크로·버스」가 떠날 5시가 다 되었다. 통근「버스」속에서 나는「핸드백」속에 든 세 아이의「피아노·레슨」값 1만 5천원과 오늘 받을 월급 5만원의 지출 내역을 곰곰히 생각한다. 생각하던 것보다 늘어난 내 쓰임새를 좀 줄여야겠다고 생각하며-. 「팁」으로 받은 1~2천원은 미장원 가고「택시」타고 하면 하루 용돈으로 다 없어지고 어쩌다 좀 두둑한「팁」을 받아도 공돈이란 생각 때문인지 친구들과 구경가고 점심 먹고 나면 그만. 손님이 적어 월급만 받고 일찍 돌아왔다. 어머님에게 가니 8살짜리 막내와 어머니가 반겨 맞는다. 다 큰 딸년이 내놓은 3만원에 어머니는 또 치맛자락으로 얼굴을 가리신다. 『얼마나 고되냐』는 엄마의 말에 찔리는 듯 가슴이 아프다. 아이들「레슨」을 위해 할머니와 방을 따로 얻어 나가 살고 있는 것으로만 아는 어머니. 아무리「피아노」를 가르쳐도 7식구의 생활비는 못 된다는 걸 모르시는 선량한 엄마가 사실을 알아 버린다면? 생각만 해도 무섭다. 철없는 막내가 20가지 색나는「크레용」사게 2백원 달라기에 내주었더니 좋다고 매달리며『큰 언니가 최고』란다. 그「최고」의 말 뒤에 숨은 이야길 언젠가 저 애가 알게 되면 언니를 어떻게 생각할까? 집에 돌아와 할머니에게 생활비로 2만원을 내놓았다. 할머닌 이 큰 손녀가 자랑스러워 동네방네 효녀라고 떠들고 다니신다. 이부자리 속에 누워 곰곰히 생각했다. 이젠 눈물이 나지 않는다. 누가 무어라 손가락질 해도 나는 떳떳하고 그래서 오늘 같은 날은 보람을 느낀다.「백」속에 남아 있는 1만 5천원은 내일 아침 우선 은행에 달려가 예금해야지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화려한「리사이틀」에 나가「모짜르트」를 치고 있었다. 68년 2월 ○일 졸업이다. 내 생의 가장 즐거웠고 슬펐던 기억들이 담긴 4년의 맺음이다. 검은「가운」을 입은 이 많은 동창들이 저마다 숱한 사연이 담긴「캠퍼스」를 떠나길 서러워 한다. 엄마와 몇몇 이웃들의 축하인사를 받으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끝없이 울었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외쳤다. 『은숙아 - 잘했어』 각(閣)에서도 아줌마랑 한바탕 축하연을 벌여 주었다. 그러면서 이젠「여대생 기생」이 아니라 어엿한「학사 기생」이란다. 아직 학교에 나가고 있는 아이들은 내 졸업이 무척 부러운 모양이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언젠가 S가 내게 들려주던 식으로 마음을 굳게 가지라고 일러주었다. 이젠 나도 제법 고참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단골 손님이 두 패가 왔을 땐 아직도 쩔쩔매지만 웬만한 농이나 유혹은 적당히 넘겨버리는 여유가 생겼다. 어쩌다 단골 손님들과 낮에「데이트」를 할 정도로 -「데이트」라야 점심을 먹거나 영화구경을 하는 게 고작이지만 - . 외국손님이 60%가 넘는 이 곳 생활에도 익숙하고 영어회화도 자신이 붙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를 관광요원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에 알맞은 마음가짐과 자세를 갖기에 무척 노력도 하고 혹시 몸에「기생티」가 밸까 제일 두려워 한다. 이제 졸업했으니 목표는 하나. 외국유학을 가는 거다. 그래서 맘껏「피아노」공부를 할 테다. 그래서 박은숙이란 이름이 결코 천하지 않았던 것임을 언젠가 알려 주리라. <Z> [ 선데이서울 68년 9/29 제1권 제2호 ]
  • [2006 독일월드컵] 독일 월드컵 이들이 뜬다

    월드컵은 지구촌 축구 ‘별들의 향연장’이다.9일로 정확히 1년 앞으로 다가온 2006독일월드컵을 빛낼 새로운 별들은 과연 누가 있을까. 일본, 이란에 이어 세번째로 본선진출을 확정지은 한국에는 ‘축구천재’ 박주영(20·FC서울)과 ‘아시아의 별’ 박지성(24·PSV에인트호벤)이 있다. 박주영은 월드컵 예선 2경기에서 한국을 수렁에서 건지는 2골을 뽑아내며 전세계가 주목하는 스타로 떠올랐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행이 유력해지고 있는 박지성 역시 9일 쿠웨이트전에서 마무리골을 터뜨리며 그라운드를 지배, 월드컵 본선에서의 맹활약을 예고했다. 유럽에서는 포르투갈의 ‘천재’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20·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예선에서 6골로 득점 공동선두를 달리며 팀을 3조 1위로 이끌고 있다. 호나우두는 5일 슬로바키아전,9일 에스토니아전에서 잇달아 골을 터뜨리며 한껏 물오른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각각 5골씩 터뜨리고 있는 ‘우크라이나산 득점기계’ 안드리 셰브첸코(29·AC밀란)와 ‘스웨덴의 뉴 히어로’ 즐라탄 이브라모비치(24·유벤투스)도 주목해야 할 스타. 남미에서는 5골을 터뜨리며 득점 공동 3위를 달리고 있는 ‘브라질의 신성’ 히카르도 카카(23·AC밀란)가 눈길을 끈다. 카카는 미드필더에서 경기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도 많은 골을 터뜨리며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예고했다.3골을 넣은 아르헨티나의 플레이메이커 파블로 아이마르(26·FC발렌시아)와 ‘제2의 마라도나’ 하비에르 사비올라(1골·24·AS모나코)도 빠지면 섭섭해할 별들. 아프리카에는 프리미어리그와 프리메라리가 챔프 첼시와 FC바르셀로나의 ‘특급 골잡이’들인 디디에 드로그바(27·코트디부아르)와 사무엘 에투(24·카메룬)가 각각 5골과 4골을 터뜨리며 눈길을 끌고 있다. 중남미에는 팀 동료 하레드 보르게티(11골·멕시코)에 이어 10골로 득점 2위를 차지하며 팀의 독주를 이끌고 있는 하이메 로자노(26·우남 푸마스)가 떠오르는 스타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스포츠 포커스] 전덕형 10초34 ‘마의 벽’ 깬다

    [스포츠 포커스] 전덕형 10초34 ‘마의 벽’ 깬다

    지난 3일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남자 100m 결승. 경기장을 찾은 팬들과 대한육상경기연맹 관계자들의 눈길이 185㎝,74㎏의 한 건장한 청년에게 온통 쏠렸다.‘탕’ 소리와 함께 스프링처럼 튀어나간 그는 잔뜩 상체를 숙인 채 초반 30여m를 질주하더니 탄력이 붙자 경쟁자들을 멀찍이 따돌리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시선은 일제히 전광판으로 옮겨갔고, 순간 여기저기서 ‘와∼’하는 탄성이 쏟아졌다.10초51. 한국 육상 단거리의 꿈이 영글고 있다. 그 주인공은 21살의 기대주 전덕형(충남대)과 스승인 일본 육상의 대부 미야카와 지아키(58·도카이대) 교수다. 이들은 무려 26년간 깨지지 않는 육상 남자 100m 기록을 무너뜨리기 위한 ‘꿈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이 단거리의 사활을 걸고 전덕형에 ‘올인’하는 초유의 지원 프로젝트다. 현재 남자 100m 한국기록은 1979년 9월9일 멕시코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서말구(49·해군사관학교 체육과) 교수가 작성한 10초34. 팀 몽고메리(미국)가 2002년 9월 세운 세계기록(9초78)과 일본의 이토 고지가 98년 12월 수립한 아시아기록(10초F)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은 물론 가장 오래된 부끄러운 기록이다. 불명예를 깨기 위해 ‘한국 단거리의 희망’ 전덕형이 지난해 10월 일본 도카이대로 건너가 기록과의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 이토와 ‘일본 단거리의 샛별’ 수에쓰구 신고(25·10초03) 등을 키워낸 ‘명장’ 미야카와 교수에게 1대1 교습을 받으며 구슬땀을 쏟고 있는 것. 초반 미야카와 교수는 전덕형에게 가벼운 조깅을 시켰다. 주법을 지켜본 교수는 대뜸 지적했다. 스타트부터 끝까지 앞꿈치로만 콕콕 찍듯이 달리지 말고 뒤꿈치부터 디디면서 발바닥 전체로 가속도를 붙여야 한다고 혼냈다. 전덕형은 그대로 따라 훈련했고, 뭔가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감지했다. 또 파워가 월등한 서양선수들처럼 무턱대고 무릎을 높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쭉 뻗으며 스피드를 살리는 주법도 병행됐다. 게다가 전덕형의 떡 벌어진 가슴도 문제였다. 무턱대고 근력을 키우느라 가슴 근육이 필요 이상으로 커져 앞뒤로 팔을 흔드는 데 방해가 됐던 것. 미야카와 교수는 단거리 뜀박질에 필요한 날개 근육만 새롭게 단련시켰다. 점차 새 주법이 몸에 익고 뜀박질에 적합한 근육만 몸에 남게 되면서 전덕형의 스피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야카와 교수는 전덕형에게 기록에는 신경쓰지 말라고 강조했다. 게다가 대구 육상선수권을 앞두고 보름동안 스파이크도 신지 못하게 했다. 새로운 스피드 감각을 몸에 익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기대 이상. 전덕형은 4년 전 세웠던 자신의 100m 최고기록 10초62를 0.11초나 앞당겼고 이튿날 열린 200m 경기에서는 한국기록 보유자 장재근(20초41) 이후 20년만에 20초대 기록인 20초98을 끊기도 했다. 이 페이스대로 가면 한국기록 경신 가능성은 짙다. 전덕형의 100m 기록 경신 도전에 한국 육상계가 몹시 들떠 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日육상 대부 미야카와 지아키 교수 “가까운 시일 안에 한국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될 겁니다.”일본 육상의 대부 미야카와 지아키(58) 도카이대 교수는 요즘 대한해협 너머의 한 청년에게 푹 빠져 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군소리 하나 없이, 가르침 하나를 익히지 못하면 일과도 끝내지 않는 전덕형이 바로 그 청년이다. 때문에 미야카와 교수는 지난해 10월부터 하루 5시간씩 꼬박 전덕형과 씨름하고 있다. 미야카와 교수는 “신체조건이 아시아 수준을 넘어선 데다 성실성까지 갖춰 앞으로 계속 기록을 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아직 복근력이 부족해 일본으로 돌아가면 체조 코치를 초빙해 복근을 강화하고 자신보다 빠른 경쟁자들과 연습시키며 스피드를 끌어올려갈 것”이라고 밝혔다. 1970년대 일본 국가대표로 뛰며 10초30을 기록했던 미야카와 교수는 “당시에는 한국 육상이 아시아 최고였었다.”면서 “동양인들이 9초대를 돌파해 세계 기록을 세우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 노력해 성공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제대로 알고 걸어야 ‘진짜 웰빙족’

    제대로 알고 걸어야 ‘진짜 웰빙족’

    ‘웰빙에는 걷기가 최고’ 뛰기와 함께 한참 인기 상한가를 치고 있는 생활체육은 ‘걷기’다. 무리하지 않고도 탁월한 운동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른 걷기’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부족한 편이다.9일 ‘하이서울 2005 건강엑스포’의 걷기 강좌는 ‘워킹족’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소중한 ‘건강 선물’이다. ●9일부터 ‘걷기 강좌’ 시작 서울시는 이날부터 나흘 동안 올바른 걷기의 방법과 효과를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걷기 강좌를 시작한다고 6일 밝혔다. 건강엑스포가 열리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서울무역전시관에서 오후 2시부터 30분 동안 진행된다. 특히 서울시의사회의 협조로 전문의들이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걷기 운동에 대해 강의하게 된다.9일 가톨릭의대 염근상 교수의 ‘걷기와 대사증후군’ 강좌를 시작으로 ▲10일 인제대의대 이우천 교수의 ‘올바른 걷기’ ▲11일 연세대의대 허갑범 명예교수의 ‘걷기와 당뇨병’ ▲경희대의대 장성구 교수의 ‘걷기와 관절염’ 등이 준비돼 있다. 매일 만보계 1000개도 선착순으로 지급할 계획이다. ●30분 이상 3㎞가 적당 미리 알아보는 걷기 운동의 표준은 어느 정도일까. 전문가들은 ‘한번에 30분 이상 3㎞ 정도,1주일에 5회 이상’이 적당하다고 말한다. 숙달되면 좀 더 빠르게, 그리고 주당 횟수를 늘려가도 된다. 체력이 약하거나 나이가 많은 이들은 시간보다는 속도를 줄이는 게 낫다. 공복 상태인 새벽에 걷는 게 체중 조절에 더 효과적이다. 걷기 전 준비운동은 필수다. 걸을 때 등과 허리를 똑바로 펴고 배를 등쪽으로 집어넣는다. 보폭은 조금 넓게 가져가고, 발뒤꿈치부터 내디디는 게 좋다. 턱은 당기고 시선은 10∼15m 앞쪽을 향한다. 걷기의 효과는 ▲다리근육 단련 ▲척추·뼈 기능 강화 ▲다이어트 ▲저혈압·빈혈·고혈압 완화 등 셀 수 없이 많다.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질환 해소에도 좋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儒林(359)-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9)-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16살 때 지은 퇴계의 오도송이 주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를 모방하고 있을 정도로 퇴계는 주자를 자신의 사표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퇴계의 태도는 언행록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그 내용을 대충 헤아려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학문에 힘쓴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밝은 스승과 벗을 얻지 못하여 의혹된 것을 질문하여 풀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리에 있어서 진전을 본 것이 없고, 또 학문이 성취되기도 전에 문득 벼슬길에 오르게 되어 또 학문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읽고 조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 ‘문장’이 길고 그윽한 것이야 어찌 감히 엿볼 수가 있겠느냐.” 퇴계가 말하였던 문장(門墻)이란 ‘대문과 울타리’를 말하는 것으로 일찍이 논어에 나오는 자공의 말에서 비롯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공을 빗대어 스승 공자보다 더 낫다고 빈정거리자 자공은 다음과 같은 말로 스승의 위대함을 증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문과 울타리는 겨우 어깨에 미치는 정도라 바깥에서 들여다 볼 수가 있지만 부자(夫子:공자)의 문장은 높이가 두어 길이라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못하면 그 안의 모든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퇴계는 스승의 위대함을 칭송한 자공의 말을 인용하여 주자의 ‘길고 그윽한 경지’를 찬탄하고 있는 것이다. 퇴계는 이 ‘주자전서’를 자신의 교본(敎本)으로 삼았다. 일찍이 한여름에 ‘주자전서’를 구해 읽다가 누가 더위로 몸을 상할까 걱정하면 ‘이 글을 읽으면 가슴속에서 문득 시원한 기운이 생기는 것을 깨닫게 되어 저절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라고 대답하였던 것은 이미 상기한 내용이고, 언행록에 보면 퇴계가 이 주자전서를 얼마나 정독하였는가를 알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을 정도이다. “선생의 집에 ‘주자전서’수사본(手寫本:손으로 일일이 베껴 쓴 책)이 한 질이 있었는데, 매우 오래된 것으로 글자의 획이 거의 희미하여졌으니 선생이 읽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뒤에 사람들이 ‘주자전서’를 인출(印出)한 것이 많았는데, 선생은 새 책을 얻을 때는 반드시 교정하면서 다시 한 번 읽음으로 장(章)마다 환하고 구(句)마다 익숙해져 그것을 몸과 마음에 수용(受用)함이 마치 직접 손으로 잡고 발로 디디듯,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 있어서 말하고 침묵하며, 동(動)하고 정(靜)하며, 사양하고 받으며, 취하고 주며, 나아가 벼슬하며(進), 들어와 집에 있고(退) 하는데 있어 ‘주자전서’의 글에 들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쩌다 남이 질문하는 일이 있으면 선생은 반드시 이 책에 의거해서 대답하여 사정(事情)과 도리(道理)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은 모두 자기가 실제로 알고 실제로 믿어 정신이 융합(融合)된 소치로써, 한갓 책에만 의지하고 귀와 입으로만 따르는 자의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수사본으로 베껴서 책을 만들만큼 금과옥조로 삼았던 ‘주자대전’. 너무나 정독해서 글자의 획이 희미할 정도로 닳아졌던 ‘주자대전’. 이러한 스승에 대해서 제자 우성전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선생의 학문은 대게 주자로써 근본을 삼았으니 공리(攻利)에도 그 뜻을 빼앗기지 않으셨고, 이단에도 현혹되지 않으셨다. 널리 알면서도 잡되지 않았고, 간략히 잡아도 고루하지 않았다. 학문을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성현을 근본으로 하면서 자신이 얻은 바의 진실을 참고하였다.…”
  • 佛 나체여성 쇼 싱가포르 진출

    나체 여성 무용수가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한 파리의 카바레 쇼 ‘크레이지 호스’가 오는 12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싱가포르에서 선보인다. 싱가포르 현지 설립자인 엥와는 18일(현지시간) “‘크레이지 호스’가 문을 여는 클라크 퀘이는 싱가포르의 새로운 오락거리가 될 것”이라며 “이 쇼는 여성의 아름다움이 장관을 연출하는 누드 예술의 극치”라고 말했다.50년 역사를 자랑하는 ‘크레이지 호스 파리’는 지난 2001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도 진출, 성공을 거뒀다. 작은 섬 국가로 자연 관광지가 없는 싱가포르 정부는 2009년까지 두 곳의 카지노를 건설하겠다고 지난달 발표하는 등 성장하는 아시아의 관광산업에 편승하기 위해 인공 관광지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미디어에 누드가 노출되는 것을 검열할 정도로 철저하게 음란물을 통제하기 때문에 ‘크레이지 호스’가 파리 현지 버전 그대로 공연될지는 불확실하다. 크레이지 호스 창업자의 아들인 디디에 베르나르댕은 “도쿄·홍콩·싱가포르가 관심을 보였는데 아시아의 관문이고 유럽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싱가포르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2) 호찌민家 사람들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2) 호찌민家 사람들

    1945년, 베트남이 8월혁명을 통해 독립국가를 수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중부 응에안성의 킴리엔 마을로 청년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 청년이 찾아간 집은 오딴(O Tan)이라는 할머니의 집이었다. 오딴 할머니의 원래 이름은 응우옌 티 딴(Nguyen Thi Tan).1884년 태어난 그녀는 젊은 시절, 베트남 중·북부를 누비며 활동한 항불 독립운동가였다. 미모에 키가 훤칠했지만 결혼은 안했다. 프랑스 경찰에게 심한 고문을 당하고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청춘은 지나가버렸다.1916년에 체포됐을 때는 불에 달군 동세숫대를 타고 앉아야 했다. 엉덩이 살이 타들어갔지만 동지들을 팔아넘기지 않았다.1918년 노역형 9년을 선고받고 꽝응아이성에서 출감했을 때 이미 마흔이 훌쩍 넘었다. 감옥에서 나왔지만 여전히 관숙인(보호관찰대상자) 신세였다. 조국은 독립했지만 지나간 그녀의 청춘은 되돌릴 수 없었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에도 몇번씩 엄습하는 견디기 어려운 통증에 시달리던 그녀 앞에 청년이 불쑥 내놓은 것은 사진 한 장이었다. 낯익은 사진의 주인은 독립정부의 주석 호찌민이었다. “이 얼굴은 틀림없는 응우옌 탓 딴입니다.” 오딴은 그 청년이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브엉 툭 오안(Vuong Thuc Oanh), 이 청년 역시 옥살이하다 8월혁명으로 출감한 항불혁명가였다. 그는 자기 동생 딴이 배운 스승의 아들이기도 했다. “사실 제가 1940년 중국의 광저우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거기서 그가 세운 베트남혁명청년회의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왜 제가 모르겠습니까.” “나도 내 동생일 거라고 생각은 했다. 이 눈매는 세월이 흘렀지만 틀림없는 내 동생이다. 그리고 여기 이 귀를 봐.” 오딴은 사진 속 인물의 귀를 가리켰다. “동생 귀는 한 쪽이 유난히 크지. 그렇지만 함부로 말을 꺼내 나라 일에 바쁜 주석을 욕보이게 할까봐 입을 다물고 있었네. 너무 많은 세월이 흘러서 자신이 서지 않기도 하고. 외국으로 떠난 뒤 3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까.” 브엉 툭 오안은 오딴의 동생이 고향을 잊지 않았다며 중국에서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이 얘기를 듣고 오딴은 하노이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오딴은 평소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집에서 기르던 오리 두 마리를 광주리에 담아 마을을 출발했다. 동네 사람들은 옷차림이 그게 뭐냐며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누나로서 엄마와 같은 마음으로 동생을 만나러 가는 것일 뿐이다. 왕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다.”호찌민이 10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그 뒤 호찌민에게 그녀는 곧 어머니였다. 또 주변에서 가는 동안에 죽고 말 것이라며 놓고 가라던 오리도 기어코 챙겼다. “가져 갈 만한 이유가 있어서 가지고 가는 것이네.” 미국이나 프랑스 연구자들은 오딴이 닭 두 마리와 달걀 20개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가난한 시골의 누나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리를 챙긴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며칠만에 하노이에 도착한 오딴은 곧바로 주석관저로 바뀐 옛 프랑스 총독부로 갔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뒤 주석에게 동생을 만나러왔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경비원은 오딴을 이상한 눈빛으로 봤다. 경비원이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있음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화가 난 그녀는 경비원을 나무랐다. “내 동생은 어려서부터 착하고 총명했지만 우리 집은 가난했다. 나도 좋은 옷이 있지만 이렇게 가난한 누이를 반겨 맞을 것인지 아닌지 보기 위해서 이렇게 입고 왔다. 당장 연락을 해라. 동생이 나를 맞지 않겠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경비원은 비서실에 연락했다. 곧 비서가 나와 오딴에게 어느 집의 주소를 일러주며 그곳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오딴은 발끈해서 오리가 든 광주리를 들고 일어섰다. 늙었다지만 프랑스 경찰의 혹독한 고문에 맞서던 결기가 그대로 나타났다. “나는 돌아가겠네. 수십년 만에 누나가 왔는데 내일 보자는 말인가.” 비서가 당혹스러워하며 오딴을 붙들었다. “사실은 제가 아까 응우옌 티 딴이라는, 누이란 분이 찾아왔다고 말씀드렸을 때 주석께서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석께서는 장제스군대에 쌀 1만t을 주는 업무를 처리하고 계신 중입니다.” 당시 베트남에는 일본군 무장해제를 핑계로 남쪽에는 영국군, 북쪽에는 장제스군이 들어와 있었다. 이들의 행패는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뿐 아니라 완전한 독립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이었다. 호찌민은 장제스군을 하루빨리 내보내기 위해 어르고 달래느라 애쓰고 있던 참이었다. 오딴은 비로소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이것이 관리가 백성을 대하는 태도라면 나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나라 일로 그러하다면 내가 기다리겠다.” 오딴은 당 티 마이 교수 집으로 갔다. 당 티 마이교수는 호찌민과 동향으로 베트남의 전쟁영웅 보 응우옌 잡 장군과 함께 교사생활을 했다. 호찌민정부의 초대 교육부장관을 맡고 있기도 했다. 당 티 마이 교수의 집에 간 오딴은 오리를 내놓으며 요리를 부탁했다. “두 마리 오리를 그대로 삶아서 내주세요. 발 4개도 잘라 버리거나 으깨지 말고 꼭 통째로 내놓아야 합니다.” 다음날 아침 호찌민은 당 티 마이 교수 집에 들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오딴은 벽을 바라본 채 돌아앉지 않았다. 호찌민은 오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찌어이(누나), 이 순간에 누이는 왜 이렇게 동생에게 화를 내고 계세요?” 그제서야 오딴은 돌아서 일어서 호찌민을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오딴은 호찌민의 뺨과 턱을 쓰다듬으며 안쓰러워했다. “왜 이렇게 늙었니. 어릴 때 그렇게 잘 생겼던 내 동생의 볼이 왜 이렇게 홀쭉하니. 그래도 눈빛만큼은 여전히 빛나는구나.” 감격적인 상봉 뒤에 아침식탁이 차려졌다. 물론 식탁 가운데에는 오리 두 마리가 놓여졌다.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오늘 너무 푸짐하게 차렸군요. 그런데 어쩌자고 오리를 이렇게 많이 올렸어요?” 그렇게 묻는 호찌민에게 당 티 마이 교수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오리는 제가 준비한 것이 아니고 누이께서 응에안에서부터 가지고 온 것이랍니다.” 그 말을 듣고 호찌민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리의 다리를 집어 들었다. “찌어이(누나), 오늘 이렇게 내 잘못이 낱낱이 드러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식탁에 앉았던 당 티 마이 교수의 가족들은 모두 의아한 눈으로 오딴을 쳐다봤다. 한동안 가만히 앉았던 오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오늘 아주 기쁘네. 내 동생이 40여년 동안 세계 각국을 떠돌다 돌아왔는데 우리 집안의 가르침을 잊지 않은 것을 확인했으니, 얼마나 기쁜가.” 호찌민은 어려서 오리발 때문에 외할머니에게 매맞은 적이 있었다. 외할머니댁 제삿날, 외할머니는 제삿상에 올리고 남은 오리발을 오딴의 남자동생들인 키엠과 호찌민에게 하나씩 주었다. 형인 키엠은 자기의 오리발을 들고 동생을 놀렸다. “내 오리발이 더 크∼다.” 약이 오른 호찌민은 자기 오리발은 내려놓고 형의 오리발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 오리발을 마주잡고 서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동생들을 오딴이 나무랐다. “키엠, 형인 네가 양보해야지.” 그 말에 키엠은 잡아당기던 오리발을 놓았고 호찌민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바람에 밥상 위에 있던 할머니의 사기 밥그릇이 깨지고 말았다. 평소에 인자하기 그지없던 외할머니가 회초리를 집어 들었다. “깍자우(손자들아), 잘 들어라. 너희들이 아무리 총명하고 학교에 다니며 문자를 배워도 남의 것을 탐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커서 탐관오리밖에 될 것이 없다. 그러니 남의 것을 탐하는 마음은 어려서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종아리를 걷어라.” 누이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호찌민은 겸연쩍은 얼굴을 하고 옆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호찌민은 틈틈이 당 티 마이 교수 집에 들러 누나와 식사했다. 열흘 정도 머물던 오딴은 호찌민 비서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내가 그동안 열흘을 지내면서 동생이 식사하고 생활하는 것을 지켜봤다. 주석이면 다른 나라로 치면 대통령이고 왕인데, 비서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식사하는 것을 보니 이제 내가 돌아가도 될 것 같다. 마음의 근본을 잃지 않았으니, 내 동생이 탐관오리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게야.” 당 티 마이 교수가 오딴을 말렸다. “왜 동생을 돌봐주시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세요.” 허리 굽은 시골 노인네는 교육부장관인 교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내 동생은 이미 큰 사람이 됐네. 내가 여기 있으면 내가 동생을 돌보는 게 아니라 동생의 그늘에 내가 기대는 것이 되네. 우리 조국이 프랑스 식민지가 됐을 때 가족들은 찢겨지고, 심지어 왕도 아프리카로 쫓겨났지 않았나.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되찾았고 나는 여한이 없네. 그리고 나는 권력 가까이에서 행세하는 사람이 아닐세. 내 동생은 여기에서 나라를 돌봐야 할 사람이고 나는 고향에 돌아가서 내 집을 돌봐야 할 사람이네.” 당 티 마이 교수는 그래도 한 번 더 오딴을 붙잡았다. “고향에 돌볼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지. 난 자식이 없지. 그렇지만 내 마을 아이들은 모두 내 자식이라네.” 그렇게 킴리엔으로 돌아간 호찌민의 누이는 1954년 7월20일 고향집에서 혼자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다시는 하노이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 호찌민이 형 키엠과 누나 오딴을 챙기지 않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사실, 특히 엄마와 같은 누나 오딴의 장례식에 전보 한 장도 보내지 않은 것을 두고 사가들 사이에는 온갖 억측이 많았다. 특히 호찌민을 비정한 전쟁광으로 묘사하려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강조했다. 그러나 1945년 8월혁명 직후부터 키엠과 오딴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던 작가 썬뚱은 전혀 다른 얘기를 들려줬다.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오딴이 죽었을 때 호찌민은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어요. 디엔비엔푸에서 승리한 뒤 제네바협정을 두고 주언라이와 입장을 조율했지요.” 호찌민은 중국에서 돌아와서야 누이의 죽음을 전해들었다. 볼펜을 떨어뜨린 채 책상다리를 꽉 움켜쥐고 겨우 몸을 지탱하던 호찌민은 한참 뒤에야 비서에게 조전이라도 보냈는지 물었다. “박(아저씨)이 돌아오면 의견을 여쭈려고 기다렸습니다.” 호찌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고향 킴리엔이 있는 남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 주이 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UEFA 챔피언스리그] AC밀란, 폭죽수난 속 4강행

    ‘오일 매직’ 첼시(잉글랜드)가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2차전 패배에도 불구,4강에 선착했다.AC 밀란(이탈리아)도 관중 소동으로 ‘밀라노 더비’가 중단되는 홍역 끝에 준결승에 합류했다. 50년 만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정상을 노리는 부자구단 첼시는 13일 새벽 독일 뮌헨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 8강 2차전 원정경기에서 바이에른 뮌헨(독일)에 2-3으로 패했지만 1차전 4-2 승리를 바탕으로 종합점수에서 6-5로 앞서 4강 티켓을 움켜쥐었다. 사령탑 조제 무리뉴 감독이 2경기 출전 정지로 벤치를 비운 첼시는 전반 30분 미드필더 프랭크 램파드(27)의 25m 중거리슛이 상대 수비수의 몸을 맞고 올리버 칸(36)의 거미손을 뚫으며 기세를 올렸다. 홈 팬들의 함성을 등에 업은 뮌헨은 후반 20분 페루 특급 클라우디오 피사로(27)가 동점골을 터뜨렸지만,35분 디디에 드로그바(27)에게 헤딩골을 얻어맞으며 다시 리드를 내줬다. 대반격에 나선 뮌헨은 후반 45분과 후반 인저리타임 4분 등 4분 동안 공격수 호세 파올로 게레로(21)와 수비수 메메트 숄(35)이 재동점골과 역전골을 작렬시켜 홈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종합 전적을 뒤집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이탈리아 밀라노 산시로스타디움에서 2년 만에 재현된 챔프리그 ‘밀라노 더비’는 폭죽 난동으로 얼룩졌다.‘득점 기계’ 안드리 셰브첸코(29)의 중거리 슛으로 AC밀란이 1-0으로 앞서던 후반 28분 인터 밀란의 팬이 던진 폭죽에 AC밀란 골키퍼 디다(32)가 맞는 사고가 발생하며 경기가 중단된 것. 앞서 미드필더 에스테반 캄비아소(25)의 헤딩골이 반칙으로 인정되지 않자, 인터 밀란의 열혈팬들이 흥분해 불을 붙인 폭죽을 던졌고, 그라운드는 30여개의 폭죽과 플라스틱 병들이 날아들어 전쟁터로 변했다. 주심은 20분 뒤 경기를 재개했으나 다시 폭죽이 뜨자 30초 만에 경기를 완전히 중단시켰다. 경기 중단은 지난해 9월 AS로마(이탈리아)-디나모 키예프(우크라이나)전 ‘심판 테러’ 이후 두 번째. 경기는 중단됐으나,UEFA는 1차전에서 2-0으로 승리한 AC밀란의 잠정적인 승리를 인정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흡연여성, 가임기간 10년 줄어든다

    흡연이 여성의 가임기간을 10년이나 줄인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네덜란드 연구진이 시험관아기 시술을 받은 평균연령 32세의 20·30대 여성 8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흡연자의 경우 가임기간이 10년 가량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설사 임신을 해도 유산될 확률이 높았다고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7일 보도했다. 연구 결과는 유럽인간생식태생학학회의 학술지 ‘인간생식’에 발표됐다. 보도에 따르면, 치료 중에도 계속해서 담배를 피운 43%의 여성들은 정상 분만율이 전체 평균 15.2%보다 28% 낮은 10.9%에 그쳤다. 조사 대상자 대부분에서 불임 원인이 의학적으로 구명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원인 구명 불가자’의 정상분만율은 17.8%였다. 그 가운데 비흡연자의 정상분만율은 20%였지만 흡연자의 경우 13%에 불과했다. 비흡연자는 16%가 유산을 경험했지만 흡연자는 21%가 아이를 잃었다. 연구를 이끈 라드부드 의과대학 디디 브랏 교수는 “흡연은 스무살 여성의 가임기간을 10년 가량 줄인다.”고 말했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UEFA 챔피언스리그] AC밀란 ‘더비V’ 쐈다

    AC밀란이 ‘밀라노더비’에서 라이벌 인터밀란을 꺾고 먼저 웃었다. 이탈리아 세리에A 선두를 달리고 있는 AC밀란은 7일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에서 인터밀란을 2-0으로 꺾고 4강 고지에 성큼 다가섰다. 통산 7번째 우승을 노리는 AC밀란의 승리의 주역은 야프 스탐과 안드리 셰브첸코. 파울로 말디니와 네스타 등이 ‘빗장 수비’를 짠 AC밀란은 전반 인저리타임 공격에 가담한 장신 수비수 스탐이 안드레아 피를로의 날카롭게 휘어진 프리킥을 방향을 트는 헤딩으로 꽂아넣으며 선제골을 터뜨렸다. 이어 광대뼈 부상에서 회복한 ‘우크라이나산 득점기계’ 셰브첸코는 후반 29분 오른쪽 코너에서 올라온 피를로의 크로스를 돌고래처럼 솟구친 뒤 방아찧기 헤딩으로 찍어넣어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인터밀란은 만회골을 터뜨리기 위해 총공세를 폈지만 AC밀란의 철벽수비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인터밀란으로서는 부상으로 결장한 스트라이커 아드리아누의 빈자리가 너무나 아쉬운 한판이었다. 한편 프리미어리그 1위 첼시는 영국 런던 스탬포드브리지구장에서 열린 홈경기에서 조 콜, 프랑크 람파드(2골), 디디에 드로그바가 골 릴레이를 펼치며 바스티안 슈바인스타이거, 미하엘 발라크(페널티킥)가 1골씩을 만회한 바이에른 뮌헨(독일)을 4-2로 제압했다. 조제 무리뉴 감독이 2경기 출전 정지를 받아 벤치를 비운 가운데 홈 그라운드에 나선 첼시는 잉글랜드 올해의 선수 후보 0순위로 꼽히는 람파드가 후반 15분과 25분 연속골을 터뜨리며 홈관중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바이에른 뮌헨은 오는 13일 홈에서 열리는 2차전에서 4강 진출을 위한 대역전을 노린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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