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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女검사 85% “업무 배치 등 불리”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 조사 결과 여성 검사의 85%가 근무평정, 업무·부서배치에서 여성이 불리하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전체 검사의 30% 이상이 여성이지만 간부는 8%도 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책위는 15일 이러한 실태 개선을 위해 성평등정책관 신설과 인사제도 개선 등을 법무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대책위에 따르면 전체 검사 2158명 중 여성은 650명(30.12%)이다. 하지만 부부장급 이상 여성 간부는 52명(7.98%)에 불과했다. 검찰의 꽃이라고 불리는 검사장의 경우 여성은 48명 중 단 1명(2%)이다. 먼저 대책위는 남녀가 평등한 순환보직 체계를 마련하고 일정 기간 대표성 제고를 위해 검찰, 교정, 보호, 출입국 영역의 인사, 예산, 감찰 등 주요 보직에 여성을 우선 배치하라고 권고했다. 특히 법무부, 대검찰청, 서울중앙지검의 여성 검사 비율을 전체 여성 검사 비율인 30%에 맞출 것을 제시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여검사장 15명 시대 오나···“검찰 주요보직 여성 비율 30% 맞춰라” 권고 나와

    여검사장 15명 시대 오나···“검찰 주요보직 여성 비율 30% 맞춰라” 권고 나와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 법무부 장관에 권고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 조사 결과 여성검사의 85%가 근무평정, 업무·부서배치에서 여성이 불리하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전체 검사의 30% 이상이 여성이지만 간부는 8%도 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15일 대책위는 이러한 실태를 개선하기 위해 성평등정책관 신설과 인사제도 개선 등을 법무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대책위에 따르면 전체 검사 2158명 중 여성은 650명(30.12%)으로, 이 가운데 부부장급 이상 간부는 검사장 1명을 포함해 52명(7.98%)에 불과했다. 현재 검찰 내 검사장은 모두 48명으로 여성은 1명(2%)에 불과하다. 먼저 대책위는 인사 과정에서 평등한 순환보직체계를 마련하고 일정 기간 동안 대표성 제고를 위해 검찰, 교정, 보호, 출입국 영역의 인사, 예산, 감찰 담당 등 주요 보직에 여성을 우선 배치할 것을 권고했다. 특히 검찰의 경우 주요보직인 법무부, 대검찰청, 서울중앙지검 여성검사 비율을 전체 여성검사 비율인 30%에 맞출 것을 제시했다. 또 법무부 장관 직속 성평등위원회를 구성해 성평등 추진전략 및 시행계획 수립·이행을 점검하라고 권고했다. 또 법무부 기획조정실 안에 국장급인 성평등정책관을 신설해 성평등정책담당관, 성희롱고충처리담당관 등을 배치하라고 했다. 성평등위원회는 성평등 인사기준 마련, 일·돌봄·쉼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정책 수립 등을 맡게 된다. 이와 함께 지난 7년간 회의 개최 실적이 3회에 불과한 성희롱 등 고충처리 시스템을 개선하라고 권고했다. 법무부 및 소속기관에서 발생한 성적 침해행위 사건은 성희롱고충처리담당관으로 처리를 일원화하고 산하기관별 내부결재를 폐지하도록 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여덟번의 오르내림 … 인생이다

    여덟번의 오르내림 … 인생이다

    해발 327.4m 단출한 듯 가파른 봉우리… 숨이 차오르면 쉼과 절경을 내준다오… ‘8폭 병풍’ 아래 홍천강은 더없는 벗이라오등산로에서 인생을 보았다고 한다면 거창한 해석일까요. 아득한 봉우리를 목표 삼아 길을 오르고, 정상에서 청량한 바람 한 줄기에 좋아라 하다가, 넘어질세라 노심초사하며 길을 내려옵니다. 평탄한 지형에서 숨을 고르기도 잠시, 또다시 육중한 암벽이 앞을 막아섭니다. 암벽과 씨름하다가 걸음이 멈칫할 때도 있지요. 몇 걸음 앞에 보이는 건 제 몸집만 한 바위뿐. 길을 잘못 들어섰나 싶은데 가까이 다가가면 바위 뒤로 철 계단이 있습니다. 막다른 길인 줄 알았는데 길이 이어질 때의 안도감이란. 이 모든 게 어찌 산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일까요. 오르락내리락을 여덟 번 되풀이하는 홍천 팔봉산은 고되다 즐겁다 파고를 이루는 인생과 닮았습니다.팔봉산은 해발 327.4m다. 높이가 동네 뒷산처럼 낮지만 2002년에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팔봉산이 명산이 된 건 홍천강 위로 봉우리들이 솟은 풍경과 암봉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산을 타는 재미 때문이다. 봉우리 여덟 개를 오르는 일은 만만치 않다.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낑낑대며 옮겨가거나 밧줄을 잡고 오르거나 손바닥만 한 철 발판에 몸을 맡겨야 한다. 여덟 번의 정상에서 맞는 초여름 바람은 선풍기 바람보다 시원하다. 산을 감싸 흐르는 홍천강에선 산행의 땀과 더위를 씻어낼 수 있다. 여름날 풍류를 즐기기 위한 조건들을 두루 갖춘 셈이다. ●롤러코스터처럼, 클라이밍처럼 역동적인 산 봉우리가 여덟 개여서 팔봉산이다. 흙이 아니라 바위 봉우리다. 300m를 조금 넘는 산이라고 우습게 봤다가는 큰코다친다. 1봉에서 8봉까지는 2.6㎞. 길이는 짧지만 암벽 사이로 등산로가 난 데다 오르내림이 많은 산세다. 바위 타기를 하거나 밧줄을 잡는 일의 연속이다 보니 등산객들의 얼굴에는 암벽 등반에 나선 산악인이 된 듯 비장한 기운마저 감돈다. 클라이밍을 방불케 하는 팔봉산 등산로는 단출하다. 오르는 길은 등산 들머리에서 1봉으로 가는 길뿐이다. 길도 일방통행이라 봉우리까지 올랐다가 내려오고 다시 다음 봉우리로 오르기를 반복하면 된다. 그에 비해 하산로는 네 개나 된다. 8봉으로 내려오는 게 정석이지만 2봉과 3봉, 5봉과 6봉, 7봉과 8봉 사이에도 하산로가 있다. 바위를 잡을 일이 많으니 등산 장갑은 필수다. 1봉까지 오르는 시간은 40여분. 안내 표지판에는 여덟 봉우리를 오르는 데 2시간 30분, 먼저 다녀간 이들의 인터넷 후기에는 3시간이 걸린다고 나와 있다. 첫 봉우리부터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나 싶지만 평지부터 올랐으니 이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하다. 앞으로 마주할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는 15분 내외면 오를 수 있다. 지척에 있는 듯 보여도 다음 봉우리까지의 여정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바위 절벽에 밧줄과 발 받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팔봉산 최고봉인 2봉 정상에는 아담한 당집, 삼부인당이 있다. 조선 선조 때인 1590년대부터 팔봉산 일대 사람들이 마을의 평온을 빌며 당굿을 해오던 곳이란다. 당집 맞은편 전망대에 서면 속이 트이는 정도가 아니라 뻥 뚫린다. 바람을 가로막는 바위가 없어 강바람에 땀이 식는다. 3봉은 철제 계단이 정상까지 이어져 있어 오르기 편하다. 지나온 2봉과 가야 할 4봉이 양옆에 우뚝 솟아 있고 곡선을 그리는 홍천강이 보인다. 지금까지 언뜻언뜻 보이던 홍천강이 제 모습을 확 펼쳐 보이는 구간이 이곳이다. 홍천강 일대를 완상하기에 최고의 장소다. 300m가 조금 넘는 산에서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한 풍경 그 이상이다. 물은 여기에 산은 저기에, 누군가 정성껏 배치한 듯 짜임새 있는 경치가 아름답기도 하다. 겹겹이 이어진 능선은 진초록, 산 따라 흐르는 강물은 연청빛이다. 한껏 물오른 초록과 파랑에 눈이 시원하다. ●보물찾기하듯 숨은 비석 찾기 ‘인증샷’ 4봉은 봉우리보다 오르는 길에 난 굴 때문에 유명하다. 바위틈 구멍을 빠져나오는 어려움이 출산하는 고통과 같다고 ‘해산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람 하나 들락날락할 정도로 비좁아 밑에서 받쳐주고 위에서 끌어주지 않으면 산행 초보자는 빠져나오기 어렵다. 굴을 통과할 엄두가 안 난다면 옆에 난 우회 다리를 건넌다. 5봉부터 7봉까지도 해 볼 만하다. 길이 험하긴 하지만 도저히 닿지 못할 난공불락의 요새는 아니다. 산을 오르는 또 다른 즐거움은 보물찾기하듯 각 봉우리의 비석을 찾아내는 것이다. 크기가 크지 않아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잘 살펴야 한다. 비석 앞에서 ‘인증샷’을 남기는 이도 여럿이다. ●고통스럽던 오르막도 쉬어가는 내리막도 인생길 8봉 앞에서는 많은 등산객이 머뭇거린다. 8봉은 가장 위험한 코스니 등산 경험이 적다면 하산하라는 경고판이 발목을 붙잡는다. 이 악물고 마지막 봉을 오른 이에게는 고생한 만큼의 보상이 주어진다. 수직 절벽 아래로 홍천강이 돌아나가는 수려한 풍경도 그러하지만, 지나온 봉우리를 돌아보며 드는 성취감은 아찔한 쾌감에 가깝다. 내려갈 때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끝까지 긴장을 놓지 말 것. 내리막길이 급경사이긴 하지만 밧줄과 발판, 철 손잡이가 있어 위험하진 않다. 산행은 숨찬 오르막과 가파른 내리막을 반복한다. 길이라고 할 수 없는 바위 사이를 더듬어 가며 오르고, 밧줄이 있으니 이 길이겠거니 짐작하며 내려온다. 이 길과 저 길 사이에서 헤맬 때는 앞서간 이들의 리본이 길잡이가 돼 준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에는 누군가의 도움도 받는다. 팔봉산 등산로가 인생길의 축소판 같다고 하면 과장된 해석일까. 인생길은 혼자만의 등정이 아니라 길 앞에서 머뭇대고 누군가와 함께 가는 여정일 수 있다. 외려 그 편이 삶의 아름다움을 찬찬히 살펴보기에 더 낫지 싶다.●물놀이·낚시… 홍천강서 즐기는 여름날 풍류 등산으로 땀을 흠뻑 흘렸다면 차가운 강물에서 쉬어 갈 차례다. 강에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산로에서 마주하는 강을 가로지르거나, 팔봉교를 건너 주차장 쪽으로 걸어와 강변으로 내려가거나. 방법이 어찌 됐든 산을 오른 뒤 땀을 식히기에 이만한 곳도 없다. 여덟 개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진 팔봉산 아래, 강물이 휘감아 돈다. 고개를 들면 산자락이 펼쳐지고 앞을 보면 물줄기가 유유히 흘러가니 산 좋고 물 좋은 강원도에서도 이만하면 풍경으로 뒤지지 않는다. 홍천강이 인기 있는 건 풍경 때문만은 아니다. 물고기가 잘 잡히는 낚시터이자 수심이 얕아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에게 훌륭한 물놀이장이다. 팔봉산관광지 앞쪽 강물은 어른 허벅지 정도 깊이라 아이들도 몸을 풍덩 담글 수 있다. 강변에는 손맛을 느끼고픈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운다. 견지나 투망 같은 간단한 낚시 도구로도 메기, 쏘가리, 모래무지 같은 민물고기가 잘 낚인단다. 강줄기를 따라 팔봉산, 밤벌, 반곡 등 10여 개의 오토캠핑장이 늘어서 있어 캠핑족도 많다. 강을 찾은 이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경치를 즐긴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탁족하는 이들, 물가에 돗자리를 펴고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 강변 조약돌이 내는 달그락달그락 소리에 푹 빠진 사람들…. 산자락 아래, 홍천강에서 여름날 풍류가 한창이다. 글 이수린(유니에스 여행작가) 사진 권대홍(사진작가)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서울양양고속도로 남춘천IC삼거리에서 ‘양평, 춘천, 비발디파크’ 방면으로 우회전, 광판삼거리에서 ‘양평, 남산’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팔봉산로에서 팔봉산 방면 왼쪽 길로 향하면 주차장 입구다. 팔봉산 매표소와 들머리는 팔봉교 건너편에 있다. →맛집:팔봉산 관광지에 식당이 몰려 있다. 주차장 옆 팔봉산 오뚜기식당(434-7666)은 쏘가리, 송어 등 민물고기 회와 잡고기 매운탕을 판다. 팔봉산 매표소 옆 오동나무집(434-0537)은 막국수와 산채비빔밥을 낸다. 홍천 하면 화로구이를 빼놓을 수 없다. 고추장 양념을 버무린 삼겹살을 참나무 숯불로 구워낸 음식이다. 중앙고속도로 홍천IC에서 차로 5분 거리에 화로구이 골목이 있는데, 양지말 화로구이(435-7533)가 원조다. →잘 곳:홍천강 물길을 따라 펜션과 캠핑장이 즐비하다. 펜션푸름(432-9411)은 리조트형 풀빌라 펜션으로 야외 수영장, 스파, 개별 바비큐 시설을 갖췄다. 밤벌 오토캠핑장(434-8971)은 밤나무가 많아 여름에도 무덥지 않은 오토캠핑장이다. 휴토피아 글램핑(1599-7130)은 깨끗한 시설을 자랑하는 글램핑장이다. 침대형 글램핑과 온돌형 글램핑, 두 가지 타입의 객실이 있다.
  • YS·DJ의 ‘킹메이커’… 5·16쿠데타 이끈 ‘영원한 2인자’

    YS·DJ의 ‘킹메이커’… 5·16쿠데타 이끈 ‘영원한 2인자’

    ‘쿠데타의 주역’, ‘풍운아’, ‘영원한 2인자’, ‘처세의 달인’…. 수많은 수식어에서 보듯 지난 23일 별세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2004년 정계 은퇴까지 40여년간 영욕과 부침을 거듭했다.●박정희 정권 2인자… 처삼촌 혹독한 견제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교사를 꿈꾸며 서울대 사대에 진학했지만, 부친의 죽음이 인생행로를 바꿔 놓았다. 가세가 기울면서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한 것. 1949년 6월 육사를 졸업한 JP는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됐고, 작전정보실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박 전 대통령의 조카딸 박영옥(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을 알게 됐고, 결혼했다. 이로써 상사와 부하인 동시에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연을 맺었다. 1960년 9월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해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정풍(整風) 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의 주모자로 몰려 강제예편됐다. 그러나 이듬해 5·16 쿠데타로 일약 권력의 정점으로 떠올랐다. 5·16의 전면에는 박정희 소장이 나섰지만, 뒤에서 쿠데타를 치밀하게 기획하고 밀어붙인 이는 JP였다.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2인자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박정희 정부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었으나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려 1963년 2월 공화당 창당을 하루 앞두고 외유에 나서야 했다. 1963년 11월 6대 총선에서 당선되면서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 등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또 외유길에 올랐다. JP 공과(功過)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 1965년 한·일 협정과 산업화다. JP는 8억 달러의 경제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 보상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일본의 식민 지배 범죄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 협정을 근거로 일본은 지금도 피해자들의 대일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그는 산업화 시대의 선구자로도 평가받는다. 박 전 대통령을 도와 산업화를 이끌었다. 1960년 79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1980년 1645달러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가 ‘매국노’란 비판을 들으며 받아온 8억 달러의 식민지 배상금은 산업화의 기반이 된 포항제철·소양강댐·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사용됐다.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JP는 45세의 나이에 최연소 총리로 임명됐다. 1979년 10·26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포스트 박정희시대’를 이끌 대중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까마득한 육사 후배들인 신군부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돼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으로 떠났다.●충청맹주로 고비마다 캐스팅보트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중심으로 35석을 확보, 화려하게 재기했다.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보수대연합’인 3당 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변신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가 되는 듯했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2선 후퇴 압력을 받았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임에도 1993년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으로 강등됐다.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키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지역 정서를 자극해 제3당(55석)으로 재기했다. 1997년 내각제를 고리로 ‘킹메이커’가 됐다. 그해 11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DJ) 총재와 극적인 DJP 단일화를 이뤄 낸 것. 보수 성향이 짙은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정권의 축이 됐다. 박정희 정권 시절 정적(政敵)으로 탄압했던 DJ와 손을 잡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6개월간의 총리 서리 등 국민의정부의 한 축을 이뤘던 그는 1999년 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정부를 깼다.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17석에 그치며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결국 다시 DJ와 손잡았다. 민주당에서 의원 3명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다. 그러나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자 공동정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선거 참패로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으로 10선 등정에 실패했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꿈 많았던 JP, 영원히 잠들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 선생도 해보고 싶었고, 군에서는 정풍(整風)도 해보고 싶었고, 제대해서는 혁명도 해보고 싶었으며,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해 도전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92세.●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 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 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 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2008년 말 뇌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2010년 초인적인 재활운동 끝에 회복하기도 했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 김종필 떠나다

    ‘영원한 2인자’ ‘정치 풍운아’로 통하며 반세기 한국 정치사를 풍미해온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92세. 그는 꿈많은 사나이였다. 어려서는 선생을 하고 싶었다. 군에서는 정풍(整風)을, 제대해서는 혁명을 원했다. 혁명한 뒤에는 대권을 향한 도전도 했다. 그러나 그가 애송하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싯구인 ‘잠들기 전에 가야할 몇 마일’을 끝내 가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박정희의 2인자로 출발한 정치 인생 1926년 1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에서 그 당시 규암 면장이던 김상배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중학교 재학 당시 급장과 검도부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검도는 4학년 때 입단을 했고, 승마와 그림도 즐기는 낭만의 소년이었다. 그러나 서울사대 2학년 때 맞은 부친의 죽음은 인생 행로를 바꿨다. 가세가 기울면서 3학년 때인 1947년 교사의 꿈을 접고 육사에 입학했다.육사를 졸업한 뒤 맡은 첫 보직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다. 육본이 대구에 피난했을 당시 중령이던 박 전 대통령 곁에와 하숙하던 조카딸 박영옥도 알게 됐다. JP가 메모를 보내 프로포즈를 하고 박 중령이 권하여 결혼을 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과 부대에서는 상사와 부하, 인척으로는 처삼촌과 조카사위라는 인연을 맺게 됐다. 전쟁이 가고 휴전이 왔다. 4.19가 오고 이승만이 갔다. 그도 당시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 맞물려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결정적인 사건은 1960년 9월에 일어났다. 당시 중령이던 JP는 박정희 소장과 교감을 가진 뒤 육사 8기 동기생 11명과 함께 3·15 부정 선거에 연루된 정치군인들과 부정부패 장성들의 자진 사퇴를 주장하는 국군 정풍운동을 일으켰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이듬해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2인자 시대를 열었다. 이 때 JP의 나이 35세였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인생 항로는 순탄치 않았다. 그해 6월 10일 박정희 의장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초대정보부장을 지내고, 공화당 창설을 주도하면서 실세 2인자로 부상했으나 창당 과정에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에 휘말린다. 그 여파로 1963년 2월 창당을 하루 앞두고 박 의장의 권유에 따라 외유길에 나서야 했다. 그 유명한 ’자의반 타의반‘의 첫 번째 시작이다.1963년 11월 6대 총선 때 고향인 부여에서 당선되면서 옛 공화당 의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과정에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이 불거져 굴욕 외교를 비판하는 6·3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또다시 외유길에 올랐다. 1966년 다시 공화당 의장에 복귀했고, 1969년 3선 개헌 때는 반대 의견을 주장하다가 결국 박 전 대통령에 설득되어 개헌 작업에 앞장섰다. 이어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1년 45세의 나이로 총리에 임명, 75년까지 국내 최연소 총리로 활약했다. 총리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그는 1979년 10·26 사건이 터지면서 공화당 총재로 복귀, 박정희 이후 시대를 이끌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5공 신군부의 5·17조치와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되면서 재산을 압류당하고 미국 유랑 생활을 떠났다. 그는 10.26 직후 어느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태평양 한 복판에 내놓고 가셨다.”고 술회한 바 있다. ●고비 마다 캐스팅 보트로 영향력 1986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일어났다. 13대 대선에 출마해 득표율 8%로 4위에 그치며 고배를 마셨으나 1988년 13대 총선에서 원내교두보를 확보, 정치 무대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면서 주요 정치 세력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이윽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과의 3당 합당을 도모하면서 다시 여당으로 변신했고,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여권의 2인자 자리도 확보한다.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에게 극도의 예를 갖추며 ’굴신(屈身)‘의 정치를 폈으나 YS와 민주계 진영으로부터 ’정치 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음으로써 다시 위기를 맞는다. 지분을 가진 창업주였음에도 불구하고 1993년 그는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에서 대표위원 강등된다. 1995년 민자당을 돌연 탈당, 같은해 소리소문없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해 치른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4명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킨 데 이어 이듬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핫바지론‘으로 상징되는 충청권의 지역 정서를 업고 55석의 제3당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다. 그의 제 2 황금기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1997년 두 번째 대선 고지 등정에 나서면서 내각제를 고리로 다시 한 번 킹메이커가 된다. 그해 11월 3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극적인 DJP 야권후보 단일화 합의를 이뤄낸 것. 합의문 서명식장에는 ‘단일후보로 정권교체, 내각제로 정치발전’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그는 여권 성향이던 충청표를 끌어모아 공동 정권의 한 축이 됐다. 비록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로 1998년 2월 총리 임명 뒤 6개월 동안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기도 했으나 ’DJ대통령, JP 총리‘ 시대의 ’2인자‘로 자리매김했다.그러나 이후 잇딴 갈지자 행보를 보이면서 충청권도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9년말 내각제 개헌 약속 파기를 이유로 공동 정부 파기를 선언했다. 2000년 4·13 총선 대비용이라는 말이 나왔다. 총선 결과는 참패. 17석에 그치며 원구성에 실패하자 다시 DJ와 손잡았다. 당시 17인을 원내교섭단체로 인정해달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민주당으로부터 의원 3인을 빌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어 이듬해인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요구를 김대중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결국 공동 정부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와 함께 그도 ’서산의 지는 해‘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2년 6.13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자민련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고 그 해 대선에선 후보도 내지 못하며 ’충청 맹주‘의 위상을 잃기 시작했다. 2004년 4·15 총선에서 재기를 노렸으나 탄핵 역풍을 맞아 17석은 급기야 4석으로 줄었다. 단 한 석의 비례대표 의석도 배분받지 못하면서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10선 고지 등정에 실패하면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합 당시에는 경선 이틀 전 YS와 전격 회동을 갖고 5촌 조카인 박근혜 후보 대신 “경제 살리기를 할 수 있는 유능한 후보가 선출돼야 한다”고 주장,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며 정계 원로로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듯 했으나 뇌경색이 발병하면서 입원하기에 이른다. 이후 건강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아호를 딴 ‘운정회’를 창립하고, 회고록을 내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JP는 ‘3김’ 가운데 가장 오래 현실 정치에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영호남의 대립구도 속에 충청도가 캐스팅 보트를 쥘 수 밖에 없었던 특수한 한국적 정치 상황과 항상 힘있는 쪽과 손을 잡는 그의 현실감각 어린 처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치적 장수가 가능했다. 기회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소수의 힘을 극대화한 실용주의자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온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에베레스트산, 등반객 버린 쓰레기와 대소변으로 몸살

    에베레스트산, 등반객 버린 쓰레기와 대소변으로 몸살

    해발 8848m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가 '세계서 제일 높은 쓰레기장'이라는 오명을 쓰고있다. 최근 AFP통신 등 외신은 에베레스트 산이 세계 각국 등반객이 버린 쓰레기로 곳곳이 쓰레기장이 되고있다고 보도했다. 전세계 산악인들의 로망이 쓰레기장이 된 것은 등반객들이 가져왔다가 그냥 버리고 간 쓰레기가 원인이다. 텐트, 각종 등산장비, 빈가스통, 포장지 등이 대표적으로 등반객이 아무 곳에나 싸놓고 간 대소변 역시 주요 쓰레기다. 특히 최근에는 지구온난화로 일부 눈이 녹으면서 수십 년간 파묻혀 있던 쓰레기가 밖으로 노출되는 일도 허다하다. 보도에 따르면 한해 최소 600명 이상의 등반객이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기 위해 찾아와 베이스캠프에서부터 정상에 이르는 4곳의 캠프를 쓰레기로 오염시키고 있다. 18차례나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펨바 도르제 셰르파는 "산이 수백 톤의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있다"면서 "눈으로 보기에 역겨울 정도"라며 몸서리를 쳤다. 점점 상황이 악화되자 산을 관리하는 네팔 당국도 팔을 걷고부치고 나선 상태다. 네팔 당국은 5년 전 부터 각 팀당 3000달러의 쓰레기 보증금 제도를 시행 중이다. 모든 등반객이 1인당 8㎏의 쓰레기를 갖고 하산하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또 지난해에는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 25톤에 달하는 쓰레기와 15톤의 인분도 수거했다. 에베레스트 등반로를 관리하는 사가르마타 오염통제위원회(SPCC)는 "올해에도 많은 등반객이 이곳을 찾을 것으로 예상돼 더 많은 쓰레기가 쌓일 것"이라면 "그러나 쓰레기 수거는 할당량의 절반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文복심’ 최재성, 송파에 깃발… 윤준호, 부산서 ‘洪측근’ 꺾어

    ‘文복심’ 최재성, 송파에 깃발… 윤준호, 부산서 ‘洪측근’ 꺾어

    최, 한국당 텃밭 송파을서 파란 MBC 앵커 출신 배현진 고배 김성환, 노원병서 이준석 눌러 민주당 14년 만에 지역구 탈환이변은 없었다. 전국 12곳에서 치러져 ‘미니 총선’으로 관심을 모은 20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은 후보를 내지 못한 경북 김천을 제외한 11곳을 석권했다. 가장 많은 관심이 쏠린 송파을에선 ‘문재인의 복심’을 슬로건으로 내건 최재성 민주당 후보가 MBC 앵커 출신 배현진 자유한국당 후보를 꺾고 4선 고지에 올랐다. 2015년 문재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를 할 때 사무총장을 맡는 등 ‘복심’으로 꼽혔던 그는 3선을 했던 경기 남양주를 떠나 서울에서 4선 등정에 성공했다. 8월로 예정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노원병에서 이준석 바른미래당 후보를 누른 김성환 민주당 후보는 1995년 노원구 구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해 서울시의원과 민선 5, 6기 노원구청장을 지냈다. 참여정부 정책조정비서관으로 비서실장이던 문 대통령과 호흡을 맞췄다. 이곳은 안철수 바른미래당 서울시장 후보의 전 지역구로 민주당으로선 2004년 임채정 의원 이후 14년 만의 탈환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부산 해운대을은 서병수 한국당 부산시장 후보가 내리 4선을 했고 2008년, 2012년 총선에선 민주당이 후보도 내지 못했던 ‘30년 보수 텃밭’이다. 하지만 ‘문재인 변호사’와 30년 민주화운동 동지인 윤준호 민주당 후보가 홍준표 한국당 대표의 측근 김대식 후보를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이 지역이 워낙 척박한 ‘밭’이란 점을 감안해 오랫동안 이 지역에 공을 들인 윤 후보를 단수공천했다. 김경수 민주당 경남지사 후보의 출마로 공석이 된 경남 김해을에서도 김정호 후보가 당선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인 봉하마을이 속한 곳인 만큼 여권에선 ‘1석’을 방어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참여정부 총무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을 시작으로 기록관리비서관까지 지낸 김 후보는 문 대통령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박남춘 의원의 인천시장 출마로 공석이 된 남동갑에서는 맹성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다. 맹 후보는 참여정부 민정수석실 행정관과 현 정부의 국토교통부 2차관을 역임했다. 양승조 민주당 충남지사 후보의 출마로 선거가 치러진 충남 천안병은 문 대통령 자문의 출신인 윤일규 민주당 후보가 심대평 전 지사 비서실장을 지낸 이창수 한국당 후보를 누르고 국회에 입성하게 됐다. 충남 천안갑은 민주당 이규희 후보가 KBS 사장 출신 길환영 한국당 후보에게 승리했다. 현대차 울산공장을 비롯한 대형사업장이 집중된 울산 북구에서는 이상헌 민주당 후보가 박대동 한국당 후보를 꺾었다. 광주 서구갑에서는 송갑석 민주당 후보, 전남 영암·무안·신안에서는 서삼석 민주당 후보가 나란히 당선됐다. 민주당은 두 곳의 승리로 이개호(담양·함평·영광·장성) 의원과 함께 호남 의석을 3곳으로 늘렸다. 이철우 한국당 경북지사 당선자의 지역구인 경북 김천에서는 송언석 한국당 후보와 무소속 최대원 후보가 초접전을 벌였다. 한국당의 텃밭이나 다름없는 대구·경북(TK)인 만큼 이 같은 상황 자체가 이변이다. 출구조사에선 송 후보가 10% 포인트 앞섰다. 보수 성향이 짙은 충북 제천·단양에선 개표 초반 이후삼 민주당 후보와 엄태영 한국당 후보가 초접전을 벌였지만, 오후 11시 20분 현재 이 후보가 3000여표 앞선 것으로 나왔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에베레스트서 기적 생환한 美산악인, 계단서 떨어져 사망

    에베레스트서 기적 생환한 美산악인, 계단서 떨어져 사망

    에베레스트산에서도 극적으로 살아남은 여성이 집안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31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워싱턴포스트 등 현지언론은 유명 여성 등산가인 샬럿 폭스(61)의 사망 소식을 일제히 전했다. 콜로라도 주 텔류라이드에 살던 그녀는 지난달 24일 집안 계단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이 더욱 어처구니 없는 이유는 폭스가 에베레스트산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기적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사연은 지난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녀는 총 10명의 등반대와 함께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올랐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은 하산할 때 였다. 극한의 눈보라 속에 갇히면서 산 속에 그대로 조난당한 것. 이 사고로 총 10명 중 8명이 숨졌으나 그녀는 기적같이 살아남아 무사히 구조됐다. 당시 그녀는 "추위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참을 수 없었다"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은 보이지 않았고 그저 빨리 죽기만 바랄 정도였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보도에 따르면 그녀는 8000m 이상 고산을 3개 이상 등정한 미국의 첫번째 여성일 만큼 현지에서는 유명 여성 산악인이었다. 특히 사망 21일 전에도 네팔 동부에 위치한 히말라야 바룬체(7129m)를 막 등정하고 돌아온 상황이었다. 현지언론은 "경찰 조사 결과 용의점은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남편은 지난 2004년 패러글라이딩 사고로 숨졌으며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다"고 보도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업무 차별에 뿔난 여성 경찰관...“여경이라는 표현도 성차별”

    업무 차별에 뿔난 여성 경찰관...“여경이라는 표현도 성차별”

    “필요할 때만 찾지 말라. 우리는 땜빵이 아니다.” 여성을 상대로 한 범죄가 급증하면서 피해자 보호 업무 등 여성 경찰관의 역할이 커지고 있지만 밀려드는 업무에 견줘 턱없이 모자란 인력 탓에 여성 경찰관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특히 성폭력, 가정폭력 등 여성폭력 범죄를 수사하는 경찰서 내 여성청소년과 소속 여성 경찰관들이 단단히 뿔이 났다. 여성과 관련된 모든 사건에 자신들을 동원하려고 한다는 것이다.28일 경찰청에 따르면 한 여성 경찰관이 최근 경찰 내부 게시판인 현장활력소에 올린 ‘여청과는 호구입니까’란 제목의 글이 경찰관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날 조회 수는 3만 7000건이 넘었고 댓글도 450개 이상 달렸다. 여청수사팀에서 4년째 근무 중이라고 밝힌 이 경찰관은 “가정폭력, 아동학대, 노인학대, 성폭력, 학교폭력, 신상정보관리, 실종업무까지 어느 것 하나 예민하지 않은 사안이 없고 날마다 떨어지는 112 신고 대부분을 여청과 특히 여청수사팀에서 맡고 있다”면서 “최근 한창 민감한 데이트폭력과 스토킹까지 ‘젠더폭력’으로 묶어서 (형사과에서) 여청과로 넘어온다는 계획을 듣고 여청과 너네가 죽어라 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적었다. 이어 “현재 여경 비율이 10%가 넘었는데도 형사당직, 강력팀, 교통사고 조사에는 여경 없는 곳이 대부분이고, 필요시에만 여청수사팀 여경을 찾는다”고 썼다. 이 글이 올라오자 다른 여성 경찰관들도 “당직 근무 중 관련자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청 소관 업무가 아닌데도 현장에 출동하는 일이 종종 있다”, “여경은 서로 안 받으려고 하면서 여경이 필요할 때면 여경 찾아 일 시킨다”는 등 그동안 참았던 불만을 터뜨렸다. 내부 반응이 거세자 경찰청 성폭력대책과에서는 “데이트폭력 수사의 여청과 이관은 검토된 바 없다. 여청수사팀 인력 증원을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다”는 해명성 답글을 올렸다. 그런데 “답글이 성의가 없다”며 일선 경찰관들의 분노는 더욱 커진 상황이다. 경찰청은 지난해 행정안전부에 여청수사팀 인력 증원을 요구했지만 단 한 명도 배정받지 못했다. 지난달 20일 재차 행안부에 600여명의 수사 인력 증원을 요청해 둔 상태다. 이는 미투, 여성 악성범죄 등 사회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경찰청이 단기 해법을 내놓으면서 문제를 키운 측면이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3월 경찰청은 미투 대응을 위해 여청수사팀 소속 여성 경찰관(632명)을 성폭력 피해 전담인력으로 활용하겠다고 했다. 이날도 여성 악성범죄 관련 계획을 내놓으면서 형사과 소속 여성 경찰관(235명)이 피해자 상담, 사후 관리를 실시한다고 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여성 경찰관은 “성별을 특정해 업무를 배정하는 것은 성차별”이라며 “경찰 내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여경’이란 표현 자체에도 거부감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모두 똑같은 ‘경찰관’(Police Officer)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청 성평등정책담당관실 관계자는 “(여경 용어 수정을) 아직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손가락 앗아간 에베레스트 다시 오른 日산악인 끝내…

    손가락 앗아간 에베레스트 다시 오른 日산악인 끝내…

    6년 전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하다 동상으로 아홉 손가락을 잃은 일본 산악인이 여덟 번째 도전 끝에 목숨을 잃었다.구리키 노부카주(35)가 21일(현지시간) 아침 세계 최고봉 정상(8848m)으로부터 1400m 아래에 있는 ‘캠프 2’ 텐트에서 숨을 거둔 채 셰르파들에게 발견됐다고 영국 BBC가 네팔 관리들을 인용해 전했다. 전날 마케도니아 산악인이 고소 증세로 사망한 지 하루 만에 두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올 시즌 350여명이 500여 네팔 가이드와 포터들의 도움을 받아 정상 도전 중이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 목숨을 거뒀는지는 교신 상황이 좋지 않아 파악하지 못했다고 네팔 관광청 관리가 로이터 통신에 밝혔다. 구리키는 2012년 에베레스트 도전 중 심각한 동상에 걸려 손가락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3년 뒤 다시 도전에 나섰다. 그는 이번 도전 여정을 페이스북에 동영상으로 남기고 있었는데 전날 “난 이 산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실감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의 비극은 1975년 도전 때 두 다리를 동상으로 잃은 중국 산악인 샤보위(69)가 등정에 성공한 사례와 겹쳐 안타까움을 더한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6년 전 아홉 손가락 잃은 일본인 여덟 번째 에베레스트 도전했다가 절명

    6년 전 아홉 손가락 잃은 일본인 여덟 번째 에베레스트 도전했다가 절명

    6년 전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하면서 동상으로 아홉 손가락을 잃은 일본 산악인이 여덟 번째 도전 끝에 목숨을 잃었다. 구리키 노부카주(35)가 21일(현지시간) 아침 세계 최고봉 정상(8848m)으로부터 1400m 아래에 있는 캠프 2 텐트에서 숨을 거둔 채 세르파들에 의해 발견됐다고 영국 BBC가 네팔 정부 관리들을 인용해 전했다. 전날 마케도니아 산악인이 고소 증세로 사망한 지 하룻만에 올 시즌 350여명이 500여 네팔 가이드와 포터들의 도움을 받으며 정상 도전 허가를 받고 시도 중인 가운데 두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그의 등정 도전을 기획한 등반 회사는 시신을 수도 카트만두로 옮길 조처를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가 어떤 상황에서 목숨을 거뒀는지는 교신 상황이 좋지 않아 파악하지 못했다고 네팔 관광청의 갸넨드라 슈레스타가 로이터 통신에 밝혔다.구리키는 2012년 에베레스트 도전 중에 심각한 동상으로 손가락이 하나 밖에 남지 않았지만 3년 뒤 다시 정상 도전에 나섰다. 그는 이번 도전 여정을 페이스북에 동영상으로 남기고 있었는데 전날 “난 이 산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실감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가 목숨을 잃은 것은 1975년 도전 때 두 다리를 동상으로 잃은 중국 산악인 샤보위(69)가 다섯 번째 도전 만에 두 다리 절단 장애인으로는 두 번째로 정상 도전에 성공한 사례와 겹쳐 안타까움을 더한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월드피플+] 에베레스트 22번 정복 세계新…한 셰르파의 무한도전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오르는 것을 꿈꾸는 그 곳,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무려 22번이나 등정한 사람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지난 17일(현지시간) AP통신 등 외신은 카미 리타(48)가 16일 오전 8시 30분께 세계 최초로 22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한 번도 등정하기 힘든 세계 최고봉을 무려 22번이나 올랐지만 그의 이름이 생소한 것은 직업이 셰르파이기 때문이다. 티베트어로 ‘동쪽 사람’을 뜻하는 셰르파(Sherpa)는 등산안내자이자 도우미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유명 산악인에 가려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히말라야 등산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존재가 바로 셰르파다. 이번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으로 리타는 세계 최초이자 최다의 기록을 모두 갖게됐다. 기존 기록인 21번은 리타를 포함 역시 셰르파인 푸르바 타시(47), 아파(58)가 갖고 있었지만 이들은 은퇴해 이제 신기록은 리타의 발끝에 달려있다. 보도에 따르면 그가 처음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선 것은 1994년인 24세 때다. 고산지대에서 태어나 살아온 덕분에 리타는 고소 적응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산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직감적으로 느낀다. 천부적인 자질과 불굴의 의지 덕에 전세계 산악인들이 그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로 현재 미국의 상업 등반회사 소속으로 일하고 있다. 이번 역사적인 등반 도전은 전세계에서 온 29명의 대원들과 함께했으며 짐 운반과 루트 개척 등은 모두 그의 임무였다. 리타는 출발 전 인터뷰에서 “이번 등반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5월 말 경 22번째 깃발을 꽂을 것”이라면서 “계속해서 에베레스트 등정에 도전해 올해 내 25번 째 기록을 세우는 것이 목표”라고 밝힌 바 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43년 전 두 다리 앗아간 에베레스트 정상 오르다

    43년 전 두 다리 앗아간 에베레스트 정상 오르다

    43년 전 에베레스트 첫 도전 때 동상에 걸려 두 다리를 잘라낸 중국 산악인이 다섯 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정상을 발아래 뒀다.주인공은 1975년 첫 도전 때 해발 고도 8000m ‘데스 존’에서 폭풍설에 갇혀 사흘 밤을 헤매다 끙끙 앓는 동료에게 침낭을 건네주는 바람에 동상에 걸려 두 다리를 잘라낸 샤보위(69). 그는 곧바로 다리를 잘라냈고 1996년에는 림프종 때문에 다시 무릎 위마저 잘라냈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세 차례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샤보위가 14일(현지시간) 오전 10시 40분 꿈에 그리던 세계 최고봉의 정상을 발아래 뒀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그는 지난달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에베레스트 등정은 나의 꿈”이라며 “이뤄내야만 한다. 개인적 도전이기도 하고 운명에 맞선 도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2년 전 도전 때는 폭풍설을 만나 정상을 94m 남겨두고 돌아서야 했으니 이날 감격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조차 없다. 지난해에는 네팔 관광당국이 두 다리를 절단한 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 단독 등반을 막는 안전 조치를 취하는 바람에 도전하지 못했다. 세계 각국의 많은 이들이 차별이라고 항의했고 네팔 법원도 올 초 이를 받아들여 등반을 허용하라고 판결했다. 그의 에베레스트 등정은 두 다리를 절단한 장애인으로는 2006년 마크 잉글리스(뉴질랜드)에 이어 두 번째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월드피플+] 두다리 없는 69세 노인, 43년 도전 끝에 에베레스트 정복

    [월드피플+] 두다리 없는 69세 노인, 43년 도전 끝에 에베레스트 정복

    두 다리를 잃은 69세 노인이 43년간 5번 도전한 끝에 마침내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우뚝 섰다. 14일 오전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달한 샤보위(夏伯渝, 69) 씨의 사연을 펑파이신문(澎湃新闻)이 전했다. 그는 중국 최초의 산악대원으로 1975년 5월 처음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 당시 그는 침낭이 없는 동료에게 자신의 침낭을 내어주고, 영하 30도 이하의 설원에서 밤을 보냈다. 이튿날 그의 두 다리에는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각한 동상으로 피부가 괴사하여 결국 두 다리를 절단했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에게 외국 전문가는 의족을 권유했고, 그는 의족을 끼운 채 날마다 혹독한 훈련에 돌입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강도 높은 훈련을 했다. 1주일의 3일은 베이징 향산(香山, 해발557m)을 등정했고, 나머지 3일은 도보 훈련을 했다. 그러나 고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96년 그는 림프암 선고를 받았다. 여러 번의 수술과 치료를 거쳐 퇴원했지만, 그는 훈련을 이어갔다. 그리고 2011년 이탈리아 암벽 등반 세계 장애인 선수권 단체 대회에서 속도 및 난이도 항목에서 2관왕을 차지했다. 그에게 이것은 에베레스트 등정을 위한 출발점에 불과했다. 이윽고 2014년 두 다리를 잃은 지 39년 만에 그는 에베레스트산에 재도전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도착했지만, 당시 네팔에는 사상 최악의 산재해가 발생해 네팔 정부는 그해의 모든 등정 계획을 취소했다. 1년 뒤인 2015년, 그는 다시 한번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하지만 당시 8.1규모의 네팔지진으로 눈사태가 발생했고, 또다시 에베레스트 정복의 꿈은 좌절되었다. 2016년 그는 또 다시 도전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불과 94m 남겨둔 시점, 한시간 가량 뒤면 일생의 소원이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작스레 폭풍설이 불어 닥쳤다. 예측 불가능한 자연의 힘 앞에서 그는 결국 ‘하산’을 결정했다. 폭풍설을 뚫고 나갈 경우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그는 “그래도 살아야 기회가 온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산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고지를 눈앞에 두고 돌아온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올해 2월, 그는 5번째 도전을 결심했다. 당시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이건 극복하지 않는다면 ‘진전’은 영원히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베레스트 정복이 일생의 꿈이기 때문이다”라고 다짐했다. 마침내 14일 오전 10시 40분, 그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43년 동안 두 다리를 잃는 고통을 감내하고도 포기하지 않은 그의 집념에 마침내 자연도 ‘승리’라는 이름으로 화답한 듯하다. 사진=펑파이신문 이종실 상하이(중국)통신원 jongsil74@naver.com
  • 43년 전 에베레스트 도전 때 두 다리 잘라낸 중국인 등정 성공

    43년 전 에베레스트 도전 때 두 다리 잘라낸 중국인 등정 성공

    43년 전 에베레스트 도전 때 동상에 걸려 두 다리를 잘라낸 중국 산악인이 네 번째 도전 만에 마침내 정상을 발 아래 뒀다. 주인공은 1975년 첫 도전 때 해발 고도 8000m, 이른바 데스 존에서 폭풍설에 갇혀 사흘 밤을 헤매다 끙끙 앓는 동료에게 침낭을 건네주는 바람에 자신은 동상에 걸려 두 다리를 잘라낸 샤보유(69). 그는 정상을 밟지 못하고 하산해 목숨을 구했지만 곧바로 다리를 잘라냈고 1996년에는 림프종 때문에 다시 무릎 위마저 잘라냈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세 차례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샤보유가 14일(현지시간) 마침내 꿈에 그리던 세계 최고봉의 정상을 발 아래 뒀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그는 지난달 AFP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에베레스트 등정은 나의 꿈”이라면서 “이뤄내야만 한다. 개인적 도전이기도 하고 운명에 맞선 도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마지막 2년 전 도전 때는 폭풍설을 만나기 전까지 거의 정상 근처에까지 이르렀다. 지난해에는 네팔 관광당국이 두 다리를 절단한 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 단독 등반을 막는 안전 조치를 취하는 바람에 도전하지 못했다. 전 세계 많은 이들이 차별이라고 항의했고 네팔 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등반을 허용하라고 판결했다. 이렇게 올여름 등반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쾌거를 이뤄낸 것이다.그의 세계 최고봉 등정은 두 다리를 절단한 장애인으로는 2006년 마크 잉글리스(뉴질랜드)에 이어 두 번째다. 잉글리스 역시 2주 동안 얼음동굴에 갇혀 있다가 동상으로 두 다리를 잘라냈다. 샤보유는 또 정상 도전이 상대적으로 쉬운 중국이 아니라 네팔 쪽으로 오른 첫 두 다리 절단 장애인이기도 하다. 스티브 플레인(호주)도 이날 등정에 성공해 목숨을 잃을 뻔한 시련을 극복하고 의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에베레스트를 마지막으로 7대륙 최고봉을 4개월이 안되는 117일 만에 등정해 기존 기록을 9일 단축하며 최단 기간 기록을 경신했다. 그는 서핑 사고로 목을 부러뜨린 뒤 4년 만에 이런 쾌거를 이뤄냈다. 샤보위나 플레인이나 지난 등반 시즌 마지막에 설치했던 고정 로프를 새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이용해 유리한 점이 있었다. 믿기지 않는데 플레인은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선 날 곧바로 발 아래 뒀다고 방송은 전했다. 플레인은 등정 후 페이스북에 “3년 반 동안이나 병원에 누워 지내면서 의사들로부터 다시 걷기도 힘들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부러진 목을 부여잡으며 목표를 정해 마침내 이뤘다”고 적었다. 그는 부상 후 많은 도움을 받은 ‘Surf Life Saving Association’과 ‘SpinalCure Australia’를 위한 자선 기금 모금도 병행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서울의 명품 봉우리 인수봉, 이것만으로 4개층 전시회라니

    서울의 명품 봉우리 인수봉, 이것만으로 4개층 전시회라니

    맨아래 지하 2층에선 김민기의 저유명한 ‘봉우리’ 동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가슴을 저미는 노랫말과 선율, 인수봉의 아름다운 자태가 6분여 몰아친다. 북한산 인수봉 아래 자리한 백운산장 주인 내외가 현관에서 환한 미소를 짓는 사진도 반가웠다. 서울대 동양화과 출신인 작가가 손수 그린 동양화 작품도 눈에 띈다. 11일 막을 올려 30일까지 사진작가 임채욱(48)의 개인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 금보성아트센터를 지난 10일 찾았더니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미 설악산과 인왕산, 낙산, 해인사, 백운산장 등을 주제로 개인전을 개최했던 임 작가는 북한산의 많은 봉우리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인수봉만 주제로 하는 전시회를, 그것도 도심이 아닌 북한산 형제봉 아래 자리한 이곳에서 열고 있다.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임 작가는 웬일인지 보이지 않고 산악인 유학재(57)씨와 금보성(52) 관장만 바쁘다. 2007년 한국산악회 황금피켈상 수상자인 유씨는 임 작가의 옹골찬 전시회 구상에 많은 도움을 줬다. 인수봉을 세계에 알린 미국 산악인이며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창업자인 이본 취나드의 흔적과 배낭, 당시 썼던 자일과 같은 제품을 찾아내고 지하 2층에 만들어지는 아카이브가 거의 그의 손끝에서 매만져진다.유씨는 “30년 이상 인수봉을 비롯해 북한산 곳곳의 바윗길을 다녔는데 임 작가가 참 대단한 일을 했다”며 “1935년 김정태 선생의 한국인 인수봉 초등 8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를 기획했다가 힘이 부쳐 포기했는데 3년만 일찍 임 작가를 만났더라면 좋았겠다”고 기쁨과 아쉬움을 반반 섞어 털어놓았다. 한 층 올라오면 인수봉 초상이다. 취나드를 비롯해 인수봉 바윗길을 냈던 10명이 인수봉을 배경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까마귀가 인수봉을 향해 날아드는 순간, 웃음을 터뜨리는 이도 있고 최석문-이명희(이상 노스페이스) 부부, 취나드의 인수봉 등정을 안내했던 재미교포 산악인 선우중옥 선생, 나중에 장애를 얻은 어느 산악인이 멀리 인수봉이 올려다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웃는 사진도 뭉클함을 선사한다.1층에는 천만 도시 서울을 낀 인수봉이 도시의 풍경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다. 지난달 18일 임 작가와 인터뷰했을 때 가장 의외였던 것이 도시와 산의 어우러짐에 대한 그의 넓은 아량이었다. 산을 가린 빌딩 숲이나 아파트 굴뚝 사진을 바라보며 참 거슬린다고 기자가 어줍잖은 소리를 했더니 임 작가는 “그것도 인수봉의 모습이다. 도시와 사람들과 어우러지면서도 온전한 맛을 잃지 않는, 그래서 그런 사진들도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중랑천 어디쯤에서 촬영한 것으로 짐작되는 인수봉이 남미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처럼 물 속에 비치는 풍경을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눠 세운 작품이 시선을 붙들어맨다. 그가 대학 시절 한지를 구겨 만들었던 인수봉 작품을 크게 만든 작품도 눈길을 붙들어맨다.그리고 맨 위 2층 인수봉 사진들. 유학재씨는 인수봉을 동서남북 네 지점에서 촬영한 시리즈 작품 앞에서 “맨왼쪽 동쪽에서 찍힌 사진은 수백번 넘게 인수봉을 올랐던 나로서도 난생 처음 보는 장면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기자는 출입문 바로 뒤쪽 벽에 오롯한 작품에 꽂혔다. 미국 요세미티의 어느 바위를 찍은 듯한 풍광에 압도됐다. 지하 2층에서 그 사진이 떠올라 단숨에 2층으로 올라가 손전화에 저장했다.임 작가가 자랑하던 ‘스마트 인수봉’은 아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지를 구겨 인수봉 자태를 만들어 손전화 음악에 맞춰 시시각각 색채를 달리하도록 만든 작품이었는데 앞으로 제품으로 만들어 판매도 할 계획이란 포부를 밝혔던 것이다. 이렇듯 층을 달리해 회화, 사진, 입체, 멀티미디어 등으로 다채롭게 전시회 즐기는 맛을 들였다. 5월 화창한 날, 전시회를 일람하고 임 작가의 작품집을 출간하는 다빈치 출판사의 박성식(54) 대표와 함께 형제봉에 올랐다가 정릉으로 내려왔다. 인수봉이 눈에 들어오는 능선은 아니었지만 그러면 어떻겠는가? 마음 속에는 수많은 인수봉이 박혀 있었는데...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월드피플+] 美 7세 소녀, 해발 5,895m 킬리만자로 산 등정

    [월드피플+] 美 7세 소녀, 해발 5,895m 킬리만자로 산 등정

    이제 초등학교 2학년에 불과한 7살 소녀가 아프리카 최고봉에 올라 세상을 향해 포효했다. 지난 6일(현지시간) 미국 ABC뉴스는 킬리만자로 산을 정복한 텍사스 주 오스틴 출신의 초등학생 몬타나 케니(7)의 감동적인 사연을 소개했다. 몬타나는 지난달 중순 총 6일 간의 악전고투 끝에 해발 5,895m로 아프리카 대륙 최고봉인 킬리만자로 산 정상에 올라섰다. 킬로만자로 산 역사상 최연소 등정 기록. 이번 산행에 절대적인 도움을 준 것은 바로 트라이애슬론 선수 출신인 엄마 홀리(45)다. 엄마 홀리는 "친구와 킬리만자로 산 등반에 대해 통화 하던 중 갑자기 딸이 자신도 가고싶다고 졸랐다"면서 "그곳이 차를 타고 올라가도 힘들다고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며 웃었다. 이후 모녀는 등반을 위해 매주 트레킹을 하는 등 맹훈련에 들어갔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마쳤으나 10살 이하는 킬리만자로 산에 오를 수 없다는 규정이 발목을 잡았다. 엄마 홀리는 "지난해 플로리다의 8세 소녀가 킬리만자로 산 정상에 올랐다는 기사를 우연히 보게됐다"면서 "이를 통해 킬리만자로 공원 측에 특별허가를 받아 산에 등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몬타나가 건장한 성인도 쉽지않은 킬리만자로 산을 오르게 된 계기도 감동적이다. 몬타나는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하늘에 계신 아빠에 가까이 다가갈 것이라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안타깝게도 몬타나의 아빠는 4년 전 세상을 떠났다. 엄마 홀리도 "구름 위로 올라갔을 때 딸은 마치 하늘과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면서 "정상을 향해 올라갈 수록 아빠의 채취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월드피플+] 에베레스트 21번 등정 세계新…한 셰르파의 무한도전

    [월드피플+] 에베레스트 21번 등정 세계新…한 셰르파의 무한도전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한번 쯤 오르는 것을 꿈꾸는 그 곳,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무려 21번이나 등정한 사람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지난 1일(현지시간) 영국 BBC는 세계 최다 에베레스트 등정 기록을 갖고있는 카미 리타 셰르파(48)가 22번 째 도전에 나선다고 보도했다. 한 번도 등정하기 힘든 세계 최고봉을 무려 21번이나 올랐지만 그의 이름이 생소한 것은 직업이 셰르파이기 때문이다. 티베트어로 '동쪽 사람'을 뜻하는 셰르파(Sherpa)는 등산안내자이자 도우미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유명 산악인에 가려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히말라야 등산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존재가 바로 셰르파다. 현재 리타의 에베레스트 등정 기록은 총 21번으로 다른 두 명의 셰르파와 함께 세계 공동 1위다. 그러나 나머지 두 명이 은퇴하면서 이제 새로운 기록은 그의 발끝에 달려있다. 리타는 "내 조국의 영광과 셰르파 공동체를 위해 세계 신기록 경신에 나선다"며 지난달 31일 22번째 도전을 향해 베이스캠프로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보도에 따르면 그가 처음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선 것은 1994년이다. 고산지대에서 태어나 살아온 덕분에 리타는 고소 적응 능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산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직감적으로 느낀다. 천부적인 자질과 불굴의 의지 덕에 전세계 산악인들이 그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로 현재 미국의 상업 등반회사 소속으로 일하고 있다. 이번 역사적인 등반 도전은 전세계에서 온 29명의 대원들과 함께할 예정으로 짐 운반과 루트 개척 등은 역시나 그의 임무다. 리타는 "이번 등반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면 5월 29일 정상에 올라 22번째 깃발을 꽂을 것"이라면서 "계속해서 에베레스트 등정에 도전해 올해 내 25번 째 기록을 세우는 것이 목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에베레스트 21차례 등정 성공 48세 셰르파 “25번은 채워야지요”

    에베레스트 21차례 등정 성공 48세 셰르파 “25번은 채워야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을 준비하는 것은 너무 힘들어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카미 리타 셰르파(48)에겐 아니다. 이미 21차례나 정상을 밟아 다른 네팔인 둘과 함께 세계 최다 에베레스트 등정 기록을 갖고 있는 그가 지난달 31일 베이스캠프를 향해 출발해 22번째 등정에 나섰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다른 둘은 모두 은퇴해 이제 그가 내딛는 발걸음은 그때마다 세계 최다 기록 경신으로 이어진다. 카미 리타는 지난 주 EFE 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체 셰르파 공동체와 우리 조국을 자랑스럽게 만들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또다른 시도를 하려 한다”고 밝혔다.1994년 처음으로 에베레스트를 발 아래 뒀던 그는 지난해 5월에 21번째 등정에 성공했으며 현재 정상에 도전하는 미국의 상업 등반회사 소속 가이드로 일하고 있다. 이번에 전세계에서 모인 29명의 대원들을 이끌어 루트를 개척하고 로프를 고정시키고 등반 장비 등을 옮기는 일을 하게 된다. 이들은 2주 뒤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본격적인 정상 도전에 나서는데 날씨 여건에 많이 의존하게 된다. 카미 리타는 카트만두 포스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만약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된다면 5월 29일쯤 마침내 정상 도전에 나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번에 성공하더라도 다음 번에 또전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면서 25번은 채우는 게 자신의 목표라고 밝혔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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