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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연리뷰] 평생 기억되는 누군가와의 ‘한 끼’

    [공연리뷰] 평생 기억되는 누군가와의 ‘한 끼’

    인간은 죽어가면서도, 죽기 직전까지도 먹는다. 무언가 먹는다는 건 의무이자 즐거움이지만 때론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섭식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음식은 특별하다. 먹는 행위이지만 동시에 기억하(되)는 행위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별안간 눈가가 촉촉해지며 상실이나 아픔, 상처를 떠올리게 만드는 ‘한 끼’가 있다.한국계 미국인 작가 줄리아 조의 연극 ‘가지’는 그 한 끼에 대한 얘기다.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소환하는 음식에 얽힌 기억들이 한데 버무려지며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에만 머물지 않고, 가볍고 경쾌한 일상과도 균형을 맞춘다. 시한부 삶을 살다 미국 땅에서 죽어 가는 ‘아버지’(김재건)와 아들인 재미교포 2세 요리사 ‘레이’(김종태) 간의 화해 과정은 푹 우려낸 사골 육수에 청양 고추를 송송 베어 넣은 된장찌개처럼 칼칼하고 맵고 깊다. 그들이 밥상 한가운데 놓인 국이라면 주변 인물들은 제각각 음식의 추억이 담긴 맛깔난 반찬 역할을 한다. 응봉 박씨 23대 장손인 형님과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위해 미국에 온 한국인 ‘삼촌’(김정호), 고향 집에서 먹던 가지 스튜를 그리워하는 난민 출신의 호스피스 간호사 ‘루시앙’(신안진), 고등어구이만 보면 아버지가 떠오른다는 ‘코넬리아’(우정원)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맛있고 향기로운 순간들이 되살아난다.제54회 동아연극상에서 작품상과 연기상을 수상한 ‘가지’는 2016년 미국 버클리 레퍼토리 시어터에서 초연됐다. 지난해 한인 작가 5인의 작품전으로 개막된 ‘한민족 디아스포라전’에서 국내 비평가들로부터 ‘한민족의 뿌리를 재발견한 수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작가는 두 나라의 ‘중간인’으로 사는 교포들의 현실 세계를 세밀히 그려낸다. 미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영어와 한국어, 제3의 언어로 대변되는 서로 다른 문화 간의 소통과 충돌을 언어가 아닌 ‘음식’을 통해 풀어나간다.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건 허기를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상대와 ‘소통’하려는 시도이자 기억하는 노력이고, 때로는 서로에게 품어 온 ‘상처’를 치유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소식이 끊긴 삼촌이 쇠고기와 달달한 무의 향이 어우러진 ‘뭇국’을 통해 아버지의 숨겨진 아픔을 환기하는 대목에서 유독 눈가가 뜨거워진 이유이기도 하다. 수많은 요리 재료 중 하나일 뿐인 ‘가지’에 담긴 마법의 레시피는 이런 게 아닐까.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내 곁에 없지만 난 당신이 만들어 준, 당신과 함께한 음식을 통해, 당신을 사랑했던 기억을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49년간 연극 무대를 지켜 온 김재건, 동아연극상 연기상에 빛나는 김정호, 김종태, 우정원, 신안진, 김광덕, 이현주 등 지난해 초연 무대의 호흡을 더욱 숙성시킨 ‘믿고 보는 배우’들의 열연이 빛난다. 연극 ‘가지’를 통해 특별하고 풍성한 ‘한 끼’를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는 18일까지. 서울 백성희장민호극장, 전석 3만원. 1644-2003.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강변길 옆 소확행

    강변길 옆 소확행

    촉촉한 봄바람이 귀밑머리를 날릴 때면, 우리는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집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경기 양평의 강변길은 수도권에 사는 이들이 가장 빠르게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지요. 아담하고 예쁜 갤러리와 박물관 등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강을 따라 문화의 향기를 솔솔 피우는 갤러리들을 찾아가는 여행은 어떨까요. 요즘 소소한 행복이 화두라지요. 거창한 갤러리는 아니지만 소소한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캐보는 것도 남다른 즐거움일 듯합니다.양평에서 남한강 너머에 있는 강하면 쪽으로 먼저 간다. 이름을 날리는 갤러리가 밀집돼 있다고 해서다. 이 가운데 기흥성 뮤지엄은 예술의 경지에 이른 축소 모형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설립자 기흥성 관장이 50여년간 제작한 모형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기흥성 뮤지엄은 매우 독특하다. 지하에서 우연히 보물 창고를 만났을 때의 기분이랄까. 난데없는 눈의 호사에 횡재를 했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기흥성 뮤지엄은 한국 전통의 고건축과 근대 건축물의 모형이 전시된 지하 1층 주전시실과 세계 유명 건물 등의 모형이 전시된 2층 기획전시실 등으로 이뤄졌다. 1층은 레스토랑이다. 지하 1층의 문을 열면 황룡사 9층 목탑이 객을 맞는다. 우리나라에 단 한 점 있다는 고증 모형이다. 4m가 넘는 모형의 규모도 대단하지만 우아한 자태가 무엇보다 압도적이다. 긴가민가하던 눈이 미륵사지 9층 목탑 등 이어서 전시된 모형들을 둘러보고 나면 막사발만큼 커진다. 역사학자들의 고증을 토대로 제작됐다는 모형들은 그야말로 디테일이 ‘문화재급’이다. 어찌나 정교한지 그래픽을 보는 듯하다.경복궁 모형도 인상적이다. ‘어마어마한’ 규모가 특히 그렇다. 근정전, 교태전, 경회루 등 몇몇 이름난 건물 외에도 수많은 전각들이 궁궐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박물관 큐레이터는 “경복궁 규모가 자그마치 중국 자금성의 5분의3에 달했다”고 했다. 동방의 작은 나라 궁궐이 대륙의 강대국 궁궐에 견줘 조금도 뒤지지 않았던 거다. 현재 남은 경복궁의 몇몇 건물만 보고 자금성과 규모를 비교했던 행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기흥성 뮤지엄 바로 옆은 강하예술공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름만 예술공원일 뿐 다수의 설치미술 작품들이 방치돼 있다. 겨우 목재 덱을 활용해 산책이나 즐기는 정도다. 강변을 끼고 있는데다 주변 풍경도 수려해 관리가 제대로 이뤄진다면 꽤 많은 이들이 ‘즐겨찾기’할 듯하다.정크아트 작품들도 종종 눈에 띈다. 특히 강상·강하면의 강변도로 주변에 유난히 많다. 길가에 내놓은 단순 철제 구조물조차 설치미술 작품으로 오인할 지경이다. 마나스아트센터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독특한 조각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실외의 쇼나조각 공원과 실내의 마콘데조각 전시장으로 이뤄져 있다. 쇼나는 짐바브웨 인구의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부족의 이름이다. 대를 이어 돌조각 기법을 전승하고 있다. 이들 부족이 만든 돌조각을 쇼나조각이라 부른다. 마콘데는 나무로 만든 조각 작품이다. 모잠비크의 마콘데족이 흑단 등의 목재를 이용해 만든 것을 일컫는다. 둘 모두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조각 작품이다. 현장에서 소품 등의 작품 판매도 이뤄진다. 서종면 쪽으로 넘어오면 구하우스가 볼 만하다. 건물 자체가 콘셉트인 곳이다. 독특한 외관의 건물도 인상적이지만 전시 작품들은 한술 더 뜬다. 구하우스는 ‘열린’ 수집가의 집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매매와 동시에 개인의 집 안으로 자취를 감추는 것과 달리 예술 작품에 갈증이 난 이들을 위해 집의 문을 활짝 열었다. 물론 입장료는 받는다. 1만 5000원이니 그리 적은 금액은 아니다. 한데 둘러보고 나면 ‘본전 생각’은 들지 않는다.건물은 ‘ㄷ’ 자 형태다. 2층 건물로 외벽에 창이 별로 없어 실제 규모보다 작게 느껴지지만 안으로 들면 생각이 확 바뀐다. 대체 이 많은 작품들이 어떻게 자리를 잡았을까 의아할 정도다. 영화 ‘해리 포터’의 마법 텐트처럼 공간이 끊임없이 확장되는 듯하다. 전시 콘셉트는 ‘리빙 위드 아트’다. ‘집 속 미술관’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거실, 침실은 물론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집 구석구석으로 미술을 끌어들였다. 침실에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가구 디자이너라는 장 프루베의 침대가 놓이고 벽면을 따라 앤디 워홀과 ‘포스트모던 키치의 왕’이라는 제프 쿤스 등의 팝아트 작품이 걸려 있다. 너른 거실 천장에는 프랑스 작가 자비에 베이앙의 설치 미술 작품 ‘모빌’이 매달렸다. 관람객 누구나 ‘스티브 잡스 의자’로 유명한 조지 나카시마의 벤치에 앉아 내 집처럼 편안하게 책을 들춰 볼 수도 있다.각각의 전시물도 인상적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사진작가 어윈 올라프의 ‘더 키홀’(열쇠 구멍)은 꼭 들여다 보는 게 좋겠다. 타인의 사생활을 궁금해하는 현대인의 관음증을 은근히 꼬집는 작품이다. 이어폰을 끼고 열쇠 구멍에 눈을 대면 야릇한 영상물이 상영된다. 등장인물들의 숨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귀에 좀더 신경을 집중하면 열쇠 구멍 너머를 살피는 이, 그러니까 ‘나’의 거친 숨결도 나지막하게 들린다. 스릴러 영화에서 흔히 쓰이는 범인의 숨소리처럼 욕망을 잔뜩 감춘 소리다.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면 따뜻한 차 한 잔이 기다린다. 관람객 모두에게 무료로 제공된다.잔아문학박물관은 문학과 테라코타(점토를 구워 만든 조각)가 어우러진 곳이다. 책을 만지기만 해도 절반은 읽은 것이란 게 설립 모토다. 현재 활동을 하고 있는 문인들과 세상을 뜬 유명 문인들의 테라코타, 오래된 책 등이 전시돼 있다. 작은 왕자 등의 이벤트 공간도 마련됐다. 인증샷 찍기 딱 좋다. 대지는 넓어도 박물관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책이 사람들 곁에서 멀어져 가는 시대인데다 커피숍 등 크고 화려한 건물 틈바구니에 끼어 더욱 왜소해 보인다. 봄이 되면 스토리북 만들기, 생활 공예 강연 등의 이벤트도 열린다. 서종타워 카페는 전망이 좋다. 말 그대로 서종면사무소 뒤에 타워처럼 불쑥 솟은 건물이 인상적이다. 갤러리는 지하 1층에 소규모로 마련됐다. 수능리 쪽엔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이 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모티브로 조성됐다. 3층 규모의 황순원 문학관과 소설 속 소년, 소녀의 오후 한때를 재현한 수숫단 오솔길 등의 체험 공간으로 구성됐다. 수능리에선 운 좋게 달집태우기 장면과 마주할 수 있었다. 정월대보름에 열리는 행사다. 문화를 좇다 보면 이렇게 보기 힘든 풍경이 운 좋게 얻어걸리는 법이다. 올해 달집태우기 행사는 지나갔지만 메모해 뒀다가 내년에 꼭 찾길 권한다. 매달 셋째 주말, 문호리 강변에선 리버 마켓이 열린다. 일종의 벼룩시장이다. 유기농 재료를 활용한 음식, 옷, 수공예품 등 다양한 상품들을 판다. 매장에 나온 물품의 종류엔 제한이 없지만 ‘반드시 손으로 만든 것’이라야 한다. 가래떡에 조청을 얹은 ‘가래떡 콘’ 하나 사들고 설렁설렁 장 구경하기 딱 좋다. 글 사진 양평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지역번호 031) →가는 길:기흥성 뮤지엄은 매주 화요일 휴관이다. 현재 무료 입장이지만 추후 유료로 전환될 예정이다. 그전까지 부지런히 가서 봐 두길 권한다. 강상·강하면 일대의 갤러리들 가운데 한시적으로 문을 닫은 곳들이 꽤 많다. 닥터박 갤러리, 갤러리 와, 갤러리 서종 등은 수리 중이거나 휴관 중이다. 마나스아트센터는 병산리에 있다. 무료로 야외, 실내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맛집:문호리 리버 마켓에서 ‘가래떡 콘’ 등의 주전부리와 유기농 재료로 만든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옥천면옥(772-9693)은 평양식 냉면집이다. 굵고 쫀득한 면발이 맛있다. 국수리 국수집(772-2433)은 된장 칼국수로 이름난 집이다. 양수추어탕(773-5995)은 진한 남도식 추어탕을 내는 집이다. 두물머리밥상(774-6022)은 유기농 음식점이다. 세미원에 인접해 늘 사람들로 붐빈다.
  • [지금, 이 영화] 아이, 토냐

    [지금, 이 영화] 아이, 토냐

    美 피겨선수 토냐 하딩 삶 조명‘경쟁자 폭행’ 두고도 다른 시선 내 얼굴이 온전히 내 것일 수 있을까. 그렇다고 쉽게 답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우리가 우리 얼굴을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다. 엄밀히 말해 내가 내 얼굴을 아는 까닭은 거울에 비치거나, 카메라에 찍힌 ‘내 얼굴의 이미지’를 봤기 때문이다. ‘내 얼굴 자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 얼굴이 온전히 내 것일 수 없다는 명제는 이런 의미에서 성립한다. 이것은 인생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우리는 인생을 살지만 ‘내 인생 자체’를 직접 보진 못한다. 그것은 자기의 기억과 다른 사람의 증언 등 뭔가로 재구성된 ‘내 인생의 이미지’를 통해서만 흐릿하게 보인다. 다시 말해 내 얼굴이나, 내 인생이나 있는 그대로 내 것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바로 그런 이야기를 ‘아이, 토냐’(8일 개봉)가 담아낸다. 이 영화는 제목처럼 1990년대 미국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던 실존 인물 토냐 하딩(마고 로비)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여러 관점을 취해 입체적으로. 어떻게 했는가 하면 토냐를 비롯해 엄마(앨리슨 제니)와 전 남편(서배스천 스탠)과 같이 그녀와 관련된 사람들의 인터뷰를 모아 극 형식으로 편집했다. 그리고 크레이그 질레스피 감독은 오프닝 화면에 한 문장을 써 넣었다. “직설적이고 반박의 여지가 가득한 실제 인터뷰를 바탕으로 함.” 예컨대 토냐의 경쟁자 낸시 캐리건(케이틀린 카버)이 폭행을 당한 사건을 두고도 그들의 말들이 그려 내는 ‘토냐의 이미지’는 서로 어긋나기 일쑤다.그러니까 이 영화는 제목과 달리 명확한 ‘나(I), 토냐(Tonya)’, 즉 ‘토냐 자체’는 누구에 의해서도 제대로 파악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당연히 토냐 스스로도 모른다. 이 작품이 자신의 삶을 다루고 있을지언정 여기에서는 그녀도 한정된 시각을 가진 인터뷰이 중 한 명으로 나올 뿐이다. 풀스크린 화면은 등장인물들의 개별 인터뷰 장면이 나올 때만 양옆이 좁아진다. 전체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안 보인다는 예증이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도 (관객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납득할 만한 토냐의 진실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녀의 말대로 “모두에겐 각자 자신만의 진실이 있다”고 할 수밖에. 물론 거기에는 거짓도 많이 섞여 있다. 진실 또한 ‘진실 자체’가 아닌 ‘진실의 이미지’로만 우리에게 받아들여져서다. 이미지는 허상이다. 그런데 그 허상은 분명 나를 반영하고 있다. 내가 되고 싶었거나, 내가 되고 싶지 않았던, 혹은 내가 감히 상상도 못했던 나를 말이다. 토냐만 그랬다는 것이 아니다. 딸을 강하게 키우려고 했다고 말하는 (하지만 딸을 학대한 것처럼 보이는) 엄마, 아내를 열렬히 사랑했다고 말하는 (하지만 아내를 상습적으로 때린 것처럼 보이는) 전 남편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 이 작품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 얼굴과 내 인생의 진실은 내 생각보다 훨씬 이상하다고.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 文, 검정 두루마기 입고 만세 재현… ‘건국의 어머니‘ 첫 호명

    文, 검정 두루마기 입고 만세 재현… ‘건국의 어머니‘ 첫 호명

    대형 태극기와 백범 김구, 유관순 열사, 도산 안창호 등 독립운동가의 초상을 든 행렬의 선두에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섰다. 문 대통령은 1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열린 제99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뒤 김구 선생이 즐겨 입었던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고 역사관 정문에서 독립문까지 약 400m 구간을 행진하며 3·1절 만세 운동을 재현했다. 대통령이 3·1절에 직접 거리로 나서 시민과 교감하며 행진한 건 처음이다.문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안중근·강우규·박재혁·최수봉·김익상·김상옥·나석주·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이름을 부르며 “모두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밝혔다. 이어 ‘건국의 어머니’를 호명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더이상 잊혀진 영웅으로 남겨 두지 말아야 한다”며 독립운동가 5명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문 대통령이 기억해야 할 인물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는 의식은 지난해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부터 시작됐다. 이번에 호명한 ‘건국의 어머니’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 끝에 사망한 유관순 열사, 함경북도 명천 만세시위대를 이끌다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받다 17살에 순국한 동풍신 열사로 이어진다. 최초 여성 의병장으로 1907년 직접 ‘안사람의병대’를 이끈 윤희순 의사, 백범 김구 선생의 ‘강직한 어머니’로 1940년 중국 충칭에서 순국한 곽낙원 여사도 호명했다. 3·1운동 직후인 3월 9일 46세의 나이에 압록강을 건너 서로군정서에 가입한 남자현 여사는 ‘독립군의 어머니’로 호명됐는데 영화 ‘암살’의 등장인물 안옥윤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다. 근우회 사건을 주도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 활동을 한 박차정 열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마련하려고 국경을 6차례나 넘나든 정정화 의사도 건국의 어머니에 올랐다. 이날 문 대통령은 박차정 열사가 나온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밤을 지새우며 태극기를 그렸다”고 소개했다. 1919년 3월 11일 부산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시작한 것을 기억해 달라는 주문과 같은 것이다. 3·1절 기념식은 매번 관례처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등에서 개최했으나 이번엔 이례적으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개최됐다. 형식적인 행사를 탈피해 3·1절 기념식을 개최하라는 문 대통령의 뜻에 따른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8월 국가보훈처 업무보고에서 “3·1절, 현충일, 8·15가 정부의 3대 보훈행사인데 국민 관심은 거의 없는 정부 행사가 돼 버렸다”며 “의례적이고 박제화한 기념식 대신 3·1절은 탑골공원이나 아우내장터 등 실제 기념비적 장소에서 국민도 참여하도록 현장성을 살려 재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준공된 이후 독립운동가를 잡아넣고 고문하고 사형한 민족 수난의 현장이다. 3·1운동 때는 하루에만 3000명이 수감되는 기록을 세웠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창극으로 꽃 피운 발칙한 빨간 망토

    창극으로 꽃 피운 발칙한 빨간 망토

    흔히 아는 서양의 구전 동화 ‘빨간 망토’ 이야기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할머니 집으로 가던 소녀가 음흉한 늑대의 꾐에 넘어가 할머니와 함께 늑대에게 잡아먹히거나, 또는 사냥꾼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구출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소리꾼 이자람·이소연이 들려주는 빨간 망토 이야기는 좀 다르다. 성에 대해 눈뜨기 시작한 빨간 망토는 호기심 넘치고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독립적인 소녀다.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하며 늑대가 먼저 도착해 있는 할머니의 집을 노크하는 요염한 표정의 소녀는 발칙하기 그지없다.국립창극단이 올해 기획한 신(新)창극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소녀가’가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이자람이 연출하고, 이소연이 주연을 맡았다는 소식만으로도 공연은 이미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배우이자 소리꾼, 인디밴드 보컬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자람은 ‘소녀가’에서 연출뿐만 아니라 극본, 작창, 작곡, 음악감독 등 1인 5역을 소화했다. 창극 ‘소녀가’는 소녀의 호기심과 욕망은 건강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늑대의 꾐을 간파하고 골려 주는 명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자람은 2010년 프랑스 작가 장 자크 프디다가 ‘빨간 망토 혹은 양철 캔을 쓴 소녀’라는 제목으로 다시 쓴 빨간 망토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전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과정에서 동시대의 관점과 해석이 더해지는 구전 동화의 특색을 기가 막히게 살렸다. 특히 이 작품은 국립창극단에서 처음 시도하는 모노드라마 형식의 창극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한 명의 소리꾼이 내레이션과 등장인물들의 역할을 하며 전체 이야기를 끌고 가는 판소리 형식에서 여러 소리꾼이 나와 여러 배역을 나눠 맡는 것으로 파생된 창극이, 다시 역으로 한 명의 배우가 여러 역할을 겸하는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원형 무대에는 배우와 조명, 그리고 빨간 망토 외에는 어떤 장치도 없지만 소리꾼이자 배우, 이야기꾼의 역할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이소연의 변화무쌍한 연기는 70분간 빈틈없이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철로 만든 옷, 빨간 망토, 늑대, 꽃밭 등 다양한 은유 속에 함축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다. 예컨대 소녀는 조금씩 성숙해지면서 철로 만든 옷과 신발을 신게 된다. 소녀의 몸을 ‘철컹철컹’ 감싸는 철로 만든 옷은 소녀에게 철이 들 것, 즉 조신함을 강요하는 사회적인 규범으로 읽힌다. 마침내 철옷과 철신발을 벗고 빨간 망토를 걸치게 된 소녀는 그토록 궁금해하던 숲속으로 가게 되는데 이때 마주치는 늑대는 어린 소녀를 유혹하는 남자를 의미한다. 또 소녀가 꽃밭에서 발견하고 황홀해하는 꽃은 막 피어나는 소녀의 여성성으로 은유된다. 고수 이준형의 전통 소리북 장단에 대중음악계 최고의 건반연주자 고경천, 베이시스트 김정민 등 정상급 연주자들이 만들어내는 선율과 다양한 음악적 효과는 극의 작품성과 대중성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린다. 공연은 4일까지.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책장 펼치니 봄내음 ‘솔솔’… 마음에도 꽃향기 피워볼까

    책장 펼치니 봄내음 ‘솔솔’… 마음에도 꽃향기 피워볼까

    페이퍼가든 ‘라곰’ 이 책은 ‘라곰’(Lagom)이라는 신행복주의 열풍을 몰고 온 책이자 아마존UK 베스트셀러로, 라곰이란 무엇이고 왜 중요하며 라곰이 중요하다면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또한 라곰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잡고,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을 라곰화할 수 있을지 그 준비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저자는 삶에 대해 야심 찬 목표를 갖기보다는 평범함과 별스럽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삶, 저녁이 있는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자기애는 높이고 스트레스는 낮추는 것이 라곰이 지향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라곰은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함’을 지향하며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 여긴다. 또한 나를 확대시킨 사회적인 책임과 공동이 이루려는 선, ‘환경 보호’, ‘재활용’, ‘안전한 먹을거리와 장난감’ 등에 대한 믿음과 동참에도 접근한다.문학사상 ‘2018 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이상문학상에 선정된 작품들이 수록돼 있다. 이상문학상은 한 해 동안 발표된 중·단편소설 중 최고의 작품을 뽑는 상이다. 대상작인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탄탄한 서사와 실험적인 문체의 힘을 이용해 여러 등장인물들의 시점을 교차시키는 서사적 진행 방식을 선보였다. 작가는 소통의 어려움이라는 주제를 인물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기법으로 재현했다. 현재에서 과거로 진행되는 방식을 활용해 경험적 과거는 기억 속의 회상이 되지만 일종의 환상으로 처리되고 있으며, 이런 기법적 고안을 통해 작가는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절망한 이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이 작품집에는 대상 수상작인 손홍규의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와 자선 대표작 ‘정읍에서 울다’ 외에 우수상 수상작인 구병모의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방현희의 ‘내 마지막 공랭식 포르쉐’ 등이 수록돼 있다.북산 ‘팝 레슨 121’ ‘팝 레슨 121’은 팝을 알고 싶지만 쉽게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팝을 사랑하지만 더 깊은 매력에 빠져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집필됐다. 저자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FM 라디오와 방송에서 DJ로 활동하며 50년간 팝 문화를 알려온 ‘원조 팝 칼럼니스트’다. 이 책은 팝 장르를 크게 재즈와 로큰롤 등을 탄생시킨 ‘미국의 팝’과, 샹송·화두·칸소네 등과 같은 ‘세계의 팝’으로 나누고 있다. 121개의 장르를 역사적 뿌리와 발전 과정에 따라 주류장르, 주류에서 파생된 지류장르, 그 이하 하위 장르로 나눠 각 장르를 소개하고 대표적인 가수와 참고 곡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북산 출판사 관계자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아온 곡과 팝 뮤지션, 귀에 익숙한 곡들로 팝 장르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읽어나갈 수 있다”며 “팝을 시작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한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나무생각 ‘내 아이의 자존감을 높이는 프랑스 부모들의 십계명’ 한 아이를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게 하는 마법의 재료는 바로 ‘자존감’이다. 자존감은 아이가 사회와 국가의 건강한 일원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항목이다. 경쟁이 치열하고 개인주의가 강한 현대 사회에서 낮고 불안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늘 불안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높고 안정적인 자존감을 구축한 사람은 자신의 판단과 자신감으로 꿈을 향해 매진하며 시련을 극복하고 행복을 가꿔나갈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이들을 제각기 다른 빛을 내는 ‘양초’와 ‘다이아몬드’에 비유한다. 아이가 고유한 빛을 발하며 인생을 자신의 힘으로 개척해가길 원한다면 먼저 높고 안정적인 자존감을 구축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저자는 아이의 자존감을 키우기 위한 열가지 실천사항인 ‘부모의 십계명’을 제시하고 있다. 김태곤 객원기자 kim@seoul.co.kr
  • ‘슬감빵’ ‘비밀의 숲’ 몰아보세요... 설 연휴 풍성해진 안방극장

    ‘슬감빵’ ‘비밀의 숲’ 몰아보세요... 설 연휴 풍성해진 안방극장

    설 연휴를 맞아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재미는 TV 드라마 몰아보기다. 케이블 채널을 중심으로 ‘비밀의 숲’, ‘슬기로운 감빵생활’ 등 마라톤 편성이 예정돼 있다. 두고 두고 회자될 인기 드라마들은 지금 봐도 늦지 않다. 우선 가장 최근에 방영한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OtvN을 통해 15~16일 이틀에 걸쳐 오전 8시부터 8회씩 연속 방영된다.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교도소를 배경으로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각종 에피소드와 등장인물 개개인의 스토리에 초점을 맞춰 웰메이드 휴먼 드라마로 인기를 끌었다. 4.6%(유료플랫폼 기준)로 출발한 시청률은 지난달 18일 마지막회에서 11.2%까지 올랐다. 탄탄한 극본과 연출, 연기로 장르드라마의 수작(秀作)으로 꼽히는 ‘비밀의 숲’은 온스타일에서 15~16일 오전 9시부터 8회씩 연속 방영한다. 검찰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권력의 암투와 자본의 논리, 선악의 대결을 긴장감 넘치게 그렸다. 지상파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조승우, 배두나를 비롯해 유재명, 이준혁, 신혜선의 연기도 빛난다. 넷플릭스에서 부분 투자한 덕에 이미 해외 시청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해 말 미국 뉴욕타임스가 꼽은 ‘베스트 인터내셔널 쇼’ 10편 중 한국 드라마로는 유일하게 뽑힌 작품이다. 다시 봐도 잘 만든 드라마 ‘도깨비’는 올리브를 통해 15일 오전 8시부터 1~8회, 16일 오전 8시부터 9~16회를 연속 방영한다. 케이블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시청률 20%를 돌파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예능 방송 다시 보기도 인기다. MBC에브리원은 최근 5%까지 돌파하며 히트친 효자 상품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를 테마별로 묶어 15~17일 오후 9시 방송한다. ‘어서와~’는 국내 거주하는 외국 방송인의 친구들을 한국으로 초대해 그들이 느끼는 한국의 이모저모와 문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관찰 예능 프로그램이다. 15일에는 ‘이색여행’, 16일에는 ‘먹방’, 17일에는 ‘친구Day’를 테마로 지금까지 방송한 8개국 친구들의 여행기를 재편집해 보여준다. 최근 시청률 16%를 넘기며 최고 인기 예능 프로그램으로 떠오른 tvN ‘윤식당2’도 몰아볼 수 있다. 16일 오후 2시 50분부터는 1~3회, 17일 낮 12시 40분부터는 4~6회를 연속방송한다. ‘윤식당’을 패러디한 ‘강식당’은 XtvN에서 16, 17일 오후 1시 30분부터 각각 3회씩 연속 방송된다. 최신 미드도 놓칠 수 없다. 수퍼액션에서는 16일 밤 12시부터 미국 수사물 ‘NCIS 15’ 1~12회를 연속 방송한다. 지난해 9월부터 OCN을 통해 방송 중인 ‘NCIS’ 시리즈 최신판이다. 해군과 해병대에 연루된 범죄들을 해결하는 특수수사팀의 이야기를 그렸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사랑의 주파수 맞추려는 소동, 미묘한 남녀심리… 스릴ㆍ반전

    사랑의 주파수 맞추려는 소동, 미묘한 남녀심리… 스릴ㆍ반전

    일본 ‘추리소설의 대가’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는 국내 독자들이 반가워할 만한 책이 나왔다. 범죄의 진실을 좇는 과정을 날카로운 시선과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그려온 그가 내놓은 첫 연애소설 ‘연애의 행방’(소미미디어)이다. 미스터리의 대가답게 평범한 남녀 간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미묘한 심리를 스릴 있게 그려냈다. ●인생의 짝 찾아 스키장에 온 8명‘연애의 행방’은 동계 스포츠를 좋아하고 평소 스노보드를 즐겨 타는 것으로 알려진 작가가 스노보드 전문지 ‘스노보더’의 의뢰에 따라 연재한 소설이다. 스키장과 겨울 스포츠를 소재로 한 ‘백은의 잭’, ‘질풍론도’, ‘눈보라 체이스’에 이은 ‘설산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작품의 배경은 광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이다. 눈 쌓인 스키장을 배경으로 스노보드를 좋아하는 8명의 평범한 남녀가 인생의 짝을 찾는 이야기를 7편의 에피소드로 펼쳐낸 연작 소설이다. ‘곤돌라’, ‘리프트’, ‘프러포즈 대작전’, ‘겔팅’, ‘스키 가족’, ‘프러포즈 대작전 리벤지’, ‘곤돌라 리플레이’라는 각 에피소드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등장인물들은 각 이야기에서 서로 스치듯 만나고 헤어진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랑의 화살표 앞에서 속절없이 꼬이는 인물들의 연애 전선을 지켜보고 있자면 절로 웃음이 난다.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와 스키장에 놀러 왔다가 곤돌라에서 마주친 약혼녀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양다리남(‘곤돌라’), 여자친구에게 깜짝 프러포즈를 하려다가 돌발 상황에 맞닥뜨리는 남자(‘프러포즈 대작전’), 스키장 단체 미팅에서 인연을 찾은 남과 여(‘겔팅’) 등 소소한 연애 소동이 흥미롭다. ●흉악한 범인 안 나와도 ‘짜릿 ’ 작가의 전작과는 달리 미스터리한 범죄 사건도 흉악한 범인이나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연애와 결혼을 앞둔 평범한 남녀의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이지만 반전의 서사를 즐겨 쓰는 작가답게 짜릿한 반전을 결말에 숨겨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덕분에 추리소설을 읽는 듯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지금, 이 영화] 탠저린

    [지금, 이 영화] 탠저린

    탠저린(tangerine)은 귤을 뜻하는 영어 단어다. 왜 과일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삼았을까. 감독 션 베이커의 말을 들어 보자.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이 영화는 아이폰으로 찍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촬영 톤에서 오렌지 사탕 느낌이 났다.” 화면 색감이 귤빛을 띠어서 탠저린을 타이틀로 삼았다는 설명인데, 내가 보기에는 등장인물과 그들이 만들어 내는 내러티브에서도 오렌지 사탕―귤 느낌이 난다. 상큼하고 통통 튀기 때문이다. 중심 캐릭터는 두 명의 트랜스젠더 신디(키타나 키키 로드리게즈)와 알렉산드라(마이아 테일러)다. 이들을 연기한 키타나와 마이아는 전문 배우가 아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진짜 트랜스젠더라는 이야기다.그렇다고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탠저린’은 엄연한 극영화다. 캐릭터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실제 트랜스젠더를 캐스팅한 것인데, 결과를 놓고 보면 이런 시도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신디와 알렉산드라가 빚어내는 (불협)화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준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짧은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신디는 남자친구 체스터(제임스 랜스)가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에 휩싸인다. 신디의 애인 찾기에 엉겁결에 동행하게 된 알렉산드라. 이렇게 영화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크리스마스이브 LA에서 벌어지는 하루 동안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담아낸다.어쩌면 주인공이 트랜스젠더라는 ‘탠저린’의 설정 자체가 당신을 불편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매춘과 마약 관련 장면도 나오니까 누군가에게는 이 작품이 이른바 ‘불온한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정말 그런지는 곰곰 따져 봐야 한다. 이를테면 똑같이 LA가 배경인 ‘라라랜드’와 비교해 보면 어떨까. 나는 ‘라라랜드’가 꿈의 (비)현실성을 포착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그 작품이 또한 LA를 백인만의 공간으로 전유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 서 있다. LA에는 인종적 다수자인 백인뿐 아니라 흑인·황인을 포함한 인종적 소수자도 살고 있다. 물론 성적 소수자도. 이때 ‘소수’라는 의미가 숫자의 개념이 아님을 당신도 잘 알 것이다. 여기서 소수는 사회적 비주류와 동의어다. 소수자는 너무 적게 발언권을 얻고, 너무 상투적으로 재현된다. 거의 항상 그래 왔다. ‘탠저린’은 그러지 않아서 볼만한 영화다. 감독 션은 분명 이곳에 존재하고 있되 배제된 사람들에게 주목한다. 투박한 면이 없지 않지만 진솔한 태도다. 그것은 정의롭고 아름다운 형상화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왜 자기 권리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소수자만 완벽한 인간이 돼야 하는가? 다수자처럼 소수자도 서로 미워하고 싸우며 화해하기도 한다.’ 이것이 이 작품이 가진 문제의식이자 부끄러워할 것 없는 우리 삶의 민낯이다.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 “암세포도 생명” 드라마 속 무리수 설정 갑 1위

    “암세포도 생명” 드라마 속 무리수 설정 갑 1위

    누리꾼들이 드라마 속 무리수 설정 갑으로 드라마 ‘오로라 공주’의 “암세포도 생명”을 뽑았다. 커뮤니티 포털사이트 디시인사이드가 지난 18일부터 22일까지 ‘ “시청자와 장난하나?” 드라마 속 무리수 설정 갑은?’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암세포도 생명”이 1위에 올랐다. 총 5984표 중 1019표(17%)로 1위에 오른 “암세포도 생명”은 임성한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 ‘오로라 공주’에 나온 대사다. 등장인물인 설설희가 항암치료를 포기하면서 했던 대사로, 방송 후 암환자 비하 논란과 함께 말도 안 되는 대사라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대사의 주인공인 배우 서하준 역시 “그 대사를 받고 5분간 얼음이 됐다”라고 심경을 전했다. 2위로는 627표(10%)로 드라마 ‘신기생뎐’의 ‘빙의’ 설정이 선정됐다. ‘신기생뎐’ 역시 임성한 작가의 작품으로, 등장인물인 ‘아수라’가 할머니, 장군 등 귀신에 빙의 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때 장군 빙의 시 배우 눈에서 초록색 불꽃이 나오는 효과가 있었는데, 이 장면은 아직도 인터넷 웃음 짤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3위에는 554표(9%)로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결말이 꼽혔다. 김은숙 작가가 쓴 이 작품은 가난한 여성과 재벌 2세가 사랑에 빠지는 내용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방송된 모든 내용이 여주인공 역할을 맡았던 김정은의 소설이었고, 현실에 이와 비슷한 커플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끝나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 밖에도 웃찾사 보다가 사망하는 캐릭터를 담은 ‘하늘이시여’, 점 하나 찍었다고 사람을 못 알아보는 ‘아내의 유혹’, 상상암이 등장한 ‘황금빛 내인생’ 등이 뒤를 이었다. 영상팀 seoultv@seoul.co.kr
  • 마크롱, 10대 시절 자전적 내용 담긴 에로틱 소설 집필

    마크롱, 10대 시절 자전적 내용 담긴 에로틱 소설 집필

    에마뉘엘 마크롱(40) 프랑스 대통령이 고교 재학 시절 교사였던 현재의 부인과 연애할 당시 에로틱한 내용의 소설을 쓴 것으로 전해졌다.마크롱 대통령의 부인 브리지트 마크롱(65) 여사는 오는 17일(현지시간) 출간되는 전기에 25세 연상의 가정이 있던 여교사와 사랑에 빠진 소년 마크롱의 고교 시절 얘기를 자세히 담았다. ‘브리지트 마크롱, 해방된 여성’(Brigitte Macron l‘affranchie)이라는 제목의 이 전기에서 마크롱의 고향인 아미앵의 한 이웃은 당시 자신이 소년 마크롱이 쓴 육필원고 300여 페이지를 타이핑했다고 말했다. 잡지 클로저가 일부 사전에 공개한 내용에서 마크롱은 당시 연극 담당 교사 브리지트 선생님을 사랑하게 되면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을 소설로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이 이웃은 마크롱 여사의 전기작가 마엘 브룅에게 “동네에서 알고 지낸 마크롱이 당시 300쪽에 가까운 원고를 타이핑해달라고 부탁했다. 대담한 내용이었고, 조금 외설적인 소설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등장인물들이 물론 현실의 인물들은 아니었지만, 당시 마크롱이 본인이 느끼던 감정을 글로 표현하려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마크롱은 고교 재학 시절인 16세 때 교사로 만난 브리지트 여사와 후에 결혼에 골인했다. 브리지트는 마크롱을 처음 만났을 당시 남편과 아이들이 있었지만, 마크롱의 끈질긴 구애를 결국 받아들였다. 마크롱은 작년 주간지 르푸앙과 인터뷰에서 그는 “미발표 원고가 몇 개 있는데, 나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출판사와 접촉하지 않았다”면서 당시 작가가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에 “내 삶은 아직 진행 중”이라며 작가로서의 가능성도 열어놓았다.25살 나이 차 뛰어넘은 러브스토리 마크롱 대통령 부부는 25살차로 첫 만남은 학교에서 시작됐다. 프랑스 북부 아미앵의 예수교 소속 10학년 학생이던 15세 마크롱은 3명의 자녀를 둔 당시 40세의 프랑스어 교사 트로뉴를 만났다. 조숙한 마크롱은 트로뉴가 지도한 연극에서 주역을 맡았고 11학년이 된 마크롱이 트로뉴에게 자신을 위한 희곡을 써 달라고 요청하면서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트로뉴는 “매주 금요일 대본을 갖고 만나면서 믿기 힘든 친밀한 사이가 됐다”고 밝혔다. 당시 트로뉴의 자녀 가운데 한 명은 마크롱과 같은 학급이었다. 마크롱의 부모는 이를 알고 그를 파리로 보냈다. 마크롱은 파리에서 프랑스 최고 명문인 앙리 4세 고교에 다니게 됐고 트로뉴에게 “결단코 다시 돌아와 당신과 결혼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파리로부터 장거리 전화공세에 시달린 트로뉴는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파리에서 교사 자리를 구했다. 트로뉴는 나중 “당시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내 인생을 놓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2007년 결혼식에서 마크롱은 트로뉴의 자녀들에게 자신을 받아준 데 감사를 나타냈고 현재까지 돈독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누드화도 인격체… 인권의 잣대로 본 예술

    누드화도 인격체… 인권의 잣대로 본 예술

    불편한 미술관/김태권 지음/국가인권위원회 기획/창비/276쪽/1만 6000원1년 전 인상파 화가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작품 ‘더러운 잠’을 두고 격한 논란이 일었다. 여성의 누드에 대통령의 사진을 합성한 것이었는데 이를 두고 한쪽에서는 여성 비하라고 비난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했다. 그림 속 등장인물만 바뀌었을 뿐인데 어찌하여 하나는 현대미술을 태동시킨 명작으로 꼽히고, 다른 하나는 불쾌감을 일으켰던 것일까. ‘불편한 미술관’에는 이 같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저자는 미적 가치를 중요하게 보는 예술 작품에 인권이라는 기준을 적용해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래서 새롭고, 때때로 불편하다. 인권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표현의 자유는 과연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우리가 무심코 넘어가는 왜곡된 시선들까지 구석구석 파헤친다. 고대 그리스 조각부터 앤디 워홀의 메릴린 먼로 판화까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다양한 작품을 끌어와 장애인, 이주민, 성소수자, 여성 혐오,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동물권 등의 주제를 명쾌하고 알기 쉽게 풀어놓는다. 어떤 작품은 아름답지만 인권 감수성이 부족해 약자를 차별하거나 대상화하고 있고, 어떤 작품은 시대를 뛰어넘는 인권 감수성을 담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여성의 누드 작품을 대할 때 특히 남성들이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며 “외설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노출이 아니라 여성을 인격체로 대했느냐 성적으로 대상화했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앞서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더러운 잠’이 비난받았던 것은 풍자의 주인공뿐만 아니라 여성의 몸 자체를 인격체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만평으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목표가 되기도 했던 프랑스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풍자와 혐오의 경계를 구분 짓기가 쉽지 않고, 어느 쪽이 옳거나 그르다고 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지만 그럼에도 표현의 자유에 지켜야 할 선이 있음을 저자는 암시한다. 인권은 어디에나 적용되는 기본 가치이기 때문이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지금, 이 영화] 애니물 리메이크 ‘쏘아올린 불꽃…’

    [지금, 이 영화] 애니물 리메이크 ‘쏘아올린 불꽃…’

    하늘로 솟구치는 불꽃을 밑에서 볼지, 아니면 옆에서 볼지 고민해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에 어쨌든 불꽃이 잘 보이는 자리를 맡자는 입장이지만, 적어도 이 영화의 소년들은 불꽃을 옆에서 보고 싶어 한다. 그럴 때 불꽃이 둥글게 보이는지 납작하게 보이는지 내기했기 때문이다. 남학생들은 들떠 있지만, 같은 반 소녀 나즈나는 마음이 편치 않다. 엄마의 재혼으로 갑작스레 전학을 가게 됐기 때문이다. ‘이럴 바에야 집을 나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혼자서는 말고.’ “사랑의 도피”라는 표현을 떠올린 그녀는 불꽃놀이 축제날 가출을 감행한다.나즈나는 누구와 같이 떠나려고 했을까. 두 명의 후보가 있다. 그녀를 좋아하는 소년 유스케와 노리미치다. 나즈나는 이들과 수영 시합을 한 뒤 승자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사람은 그녀다. 대망의 2등은? 바로 유스케다. 노리미치를 이긴 그에게 나즈나는 불꽃놀이 축제에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유스케는 황홀하다. 한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그녀와의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상대에게 호감이 받아들여진 경우를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일까. 사랑이라는 사건은 이에 대한 충실성 없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확인한다. 이때 노리미치가 나즈나와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그녀는 그에게 같이 이곳을 떠나자고 말한다. 앞서 밝힌 대로, 누구와 동행하느냐는 나즈나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리미치에게 이것은 실로 중요한 문제였다. 그녀가 엄마에게 붙잡혀 집에 가는 모습을 허망하게 지켜보면서, 그는 나즈나가 떨어뜨린 불꽃구슬을 힘껏 던진다. 그녀가 엄마에게 붙잡히지 않았더라면 하는 소망을 담은 것은 물론이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당신 짐작이 맞다. 이 영화는 타임루프물이다. 노리미치가 불꽃구슬을 던질 때마다 시간은 거꾸로 흘러 새로운 에피소드가 펼쳐진다.애니메이션인 이 작품은 1993년 일본에서 방영됐던 텔레비전 드라마 ‘If 만약에’(이와 유사한 형식의 프로그램이 동시대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이휘재의 인생극장’이다)의 한 편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때 각본과 연출을 맡았던 인물이 영화 ‘러브레터’ 감독 이와이 ?지다. 그는 리메이크작에 이런 소감을 표했다.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어떨까 하고 궁금했습니다. 전혀 다른 것이 된다고 해도 그 다름을 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눈에 띄는 변화는 원작에서 초등학생이던 등장인물들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중학생으로 바뀌었다는 설정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달라졌든 핵심은 내적 완성도, 특히 내러티브에 달려 있다. 이 영화는 정작 거기에 신경 쓰지 못한 것 같다. 타임루프물도 최소한의 서사적 개연성은 필요한 법이다. 허희 문학평론가·영화칼럼니스트
  • “쓸쓸한 사람 한 명이라도 있다면 소설가는 소설 쓰기 멈춰선 안 돼”

    “쓸쓸한 사람 한 명이라도 있다면 소설가는 소설 쓰기 멈춰선 안 돼”

    “지금의 저에게 소설 쓰기는 ‘마음의 구조’를 탐색하는 작업입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인 공사장 잡부 영택과 그의 아내이자 식당 급식조리원 순희의 마음을 들여다본 이유 역시 마음이라는 게 어디에서 나오는지 왜 지금 이런 마음인지를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소설가는 소설 쓰기를 멈추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가 더는 비참한 곳이 아니게 될 때까지 소설가의 운명을 앞으로도 기꺼이 감당하겠습니다.”노동자 부부의 삶을 통해 폭력의 기원을 더듬는 손홍규(43) 작가의 중편소설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가 제42회 이상문학상 대상작으로 뽑혔다. 8일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난 손 작가는 “소설가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증명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분노, 증오, 슬픔, 기쁨, 고통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를 들여다보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 이유로 내 소설을 읽은 이들은 나와 더불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물어야 했다”면서 이번 수상 소식이 “혼자 아파하지 말라, 혼자 무서워하지 말라, 아프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 여기에도 있다”는 대답이 되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소설을 집필할 때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오늘까지 여성 노동의 역사를 다룬 ‘나, 여성 노동자2’(그린비)와 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이 산업재해와 직업성 질환에 대해 밝힌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나름북스)을 참고했다. 파업의 현장과 그 현장을 단속하는 용역업체 사람들이 노동자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한 내용이 작품 속에 서술되어 있지만 그것 자체가 부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와중에서도 인간적인 가치를 지켜 나가려고 하는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했다. 심사위원인 권영민 문학사상 편집주간은 “기존의 리얼리즘 소설이 정면에서 비리의 현실이나 폭력의 현장을 치열하고 냉혹하게 비판했다면 이 소설은 오히려 폭력적인 장면을 단편적으로 언급한다”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 문제가 다른 방법이 아닌 인간의 가치에 대한 확인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작가의 신념이 드러난 작품”이라고 선정 배경을 설명했다. 심사위원회는 지난해 주요 문예지에 발표된 중·단편소설들 가운데 수상작을 가려냈다. 우수작 후보에 오른 11편 가운데 구병모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 방현희 ‘내 마지막 공랭식 포르쉐’, 정지아 ‘존재의 증명’, 정찬 ‘새의 시선’, 조해진 ‘파종하는 밤’이 우수작으로 선정됐다. 대상 상금은 3500만원, 우수작 상금은 300만원이다. 수상작품집은 오는 19일 발간되며 시상식은 11월에 열린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눈물 터진 강동원…문재인 대통령 영화 ‘1987’ 관람평 화제

    눈물 터진 강동원…문재인 대통령 영화 ‘1987’ 관람평 화제

    문재인 대통령이 영화 ‘1987’을 관람했다. 관람 뒤 무대에 올라 영화를 본 소감을 말할 땐 함께 한 배우 강동원과 장준환 감독까지 눈물을 흘렸다.문 대통령은 7일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서울 용산 CGV를 예고 없이 찾았다. 전혀 모르고 있던 관객들은 연신 환호성을 질렀다. 문 대통령 부부 양쪽에는 박종철씨의 형 박종부씨와 배우 김윤석이 앉았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조국 민정수석, 윤영찬 국민소통수석, 김수현 사회수석,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배우 문성근씨 등도 함께 관람했다. 영화가 끝난 뒤 문 대통령은 감독과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문 대통령은 영화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문 대통령은 “영화를 보는 내내 울면서 아주 뭉클한 마음으로 봤다”고 겨우 말문을 열었다. 문 대통령은 “영화를 보면서 울림이 컸던 대사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였다”면서 “민주화 투쟁 시기에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말인데 오늘 이 영화는 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문 대통령은 “우리가 함께 힘을 모을 때, 연희(영화 속 등장인물)도 참가할 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영화가 보여주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장준환 감독의 등을 두드리며 “정말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셨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관람 소감을 말하는 중 배우 강동원은 감정이 북받쳤는지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강동원은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지금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많은 빚을 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이런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심정으로 참여했다. 아직도 마음이 많이 아프다. 열심히, 앞으로도 좋은 영화를 찍으면서 보답하겠다”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앞서 이한열기념사업회 측은 “강동원이 2016년 여름 JTBC의 태블릿PC 보도 전, 박근혜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 배우로서 불이익을 감수할 각오로 제일 먼저 달려와 배역을 수락해줬다”면서 감사를 표한 바 있다. 영화 ‘1987’은 이날 오후 관람객 400만명을 돌파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영화 ‘1987’ 관람한 문재인 대통령은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영화 ‘1987’ 관람한 문재인 대통령은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

    일요일인 7일 오전 서울 용산 CGV. 영화 ‘1987’ 상영을 기다리던 극장 안이 한 일행의 등장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의 ‘깜짝 방문’이었다. 객석에서는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문 대통령 내외 양쪽에는 1987년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고(故) 박종철 열사의 형 종부씨와 주연 배우 김윤석이 앉았고,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조국 민정수석, 윤영찬 국민소통수석, 김수현 사회수석,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배우 문성근 등도 동행했다. 부인 김정숙 여사와 두 시간여 동안 영화를 보고 배우들과 함께 인사차 무대에 오른 문 대통령은 영화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것처럼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영화를 보는 내내 울면서 아주 뭉클한 마음으로 봤다”며 힘겹게 입을 뗐다.문 대통령은 “영화를 보면서 울림이 컸던 대사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였다”라면서 “민주화 투쟁 시기에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말인데 오늘 이 영화는 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이어 “우리가 함께 힘을 모을 때, 연희(영화 속 등장인물)도 참가할 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영화가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한 뒤 장준환 감독의 등을 두드려주면서 “정말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셨다”고 격려했다.영화에서 고(故) 이한열 열사를 연기한 배우 강동원은 문 대통령이 영화 관람 소감을 밝히는 동안 옆에서 뒤돌아 많은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포착됐다.영화 관람에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한 인사들도 함께해 의미를 더했다. 박 열사의 형 종부씨 외에도 6·10 민주화운동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한재동씨, 최환 전 검사 등도 함께 영화를 봤다. 한씨는 영등포교도소 교도관으로 일하던 중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돼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이 작성한 쪽지를 외부에 전달해 사건의 진상을 알렸고, 최 전 검사는 박종철 열사 시신 화장을 막고 부검을 명령한 인물이다.문 대통령은 이들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관객들에게 소개했다. 문 대통령은 영화를 관람하기 전 상영관 옆에 마련된 별도의 공간에서 이들과 20분가량 비공개로 간담회를 진행했다. 문 대통령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피해가 컸을 텐데 6월 항쟁, 박종철 열사와 관련한 영화를 만들고 이에 흔쾌히 참여해 준 배우들을 만나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 87년에 박종철 열사의 집을 자주 찾아갔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대화를 이어갔다.박종부씨는 ‘박종철과 우리, 30년의 기억, 그대 촛불로 살아’라는 책을, 간담회에 함께한 이한열 열사의 모친 배은심 여사는 ‘1987 이한열’이라는 책을 각각 선물했다. 배 여사는 “이 영화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영화는 관람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영화 관람을 마친 문 대통령은 근처 식당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피해를 본 예술인들과 오찬 간담회도 가졌다. 문 대통령은 “제가 듣기로 (블랙리스트 피해가)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서 심지어 자살을 생각했던 분들도 계셨다고 들었다”고 말하고는 옆에 앉은 배우 김규리(전 김민선)를 보며 “못 견뎌서 예명을 바꿨죠”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진 이유는 그만큼 문화의 힘이 크기 때문일 텐데 지난 촛불집회 때도 문화가 결합해 큰 시너지를 발휘했다”라면서 “앞으로도 문화예술인들이 많은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가난 포르노 (최고나)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가난 포르노 (최고나)

    무대 쪽방촌 느낌의 골방. 원근감을 주기 위해 사선으로 놓인 방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관객석에서 앞쪽 방은 들어찰 곳 없이 빽빽한 쓰레기(보기에 따라서 생활용품으로 보일 수도 있다)가 들어차 있으며 몸 하나 간신히 뉘일 정도로 좁은 공간이 쌓아 놓은 물건들을 중심으로 둥그렇다. 그 옆방은 그에 비해 제법 집의 형태를 갖추었다. 티브이도 있고 버너도 있고 조그만 냉장고와 작은 침대도 있다. 앞쪽 방 위쪽으로 CCTV가 연결되어 있다. 그 화면은 뒷방 티브이를 통해 볼 수 있다.남자, 휴대폰을 귀에 대고 옆집을 살피는 듯 창밖을 힐끔 본다. 남 (통화 중) 모르긴 해도 강남에 빌딩 두어 채는 가지고 있을 거라니까. 구라 아니야. 몇 달간 이 몸이 뭐빠지게 고생해서 알아낸 거지. 원래 있는 사람들이 지 꺼 꽉 쥐고 안 쓰잖아. 그 할매 골골거리는 꼴이 길어봐야 두 달이야, 두 달. 두 달 후면 여기 청산하고 우리 가족 넷이서 알콩달콩…. 만삭의 여, 양손 가득 짐을 가지고 들어선다. 손이 모자라 휴대폰은 어깨로 귀에 댄 채다. 여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남 얘기 다 끝났잖아.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거든? 그냥 우리 지금은(여자의 배 내려다 보며) 알콩이랑 달콩이만 생각하자. 여 알콩하고 달콩한 그 기간이 두 달 남았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구? 남 그럼! 당연하지! 여 (짐 내려놓고) 당연은 무슨! 지금 상황만 봐도 그래. 너랑 나랑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어라 살펴봐도 삼시세끼 꼬박 챙겨 드셔, 새벽기도 빠짐없이 참석하셔, 아침마다 정정하게 일 나가셔,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너랑 알콩달콩인데? 남 너 오빠, 못 믿어? 여 응. (사이) 그러다 천수해로 하면 어쩌려고? 남 확실하다니까. 걷는 폼이 골골한 게 먹는 약도 확연히 늘어났고, 새벽에 잔기침도 엄청나게 심해졌어. 길어봐야 올해 설까지야. 여 그래도…. 남 (여자의 말 막으며) 어쩔 수 없잖아. 여 (흘겨보며 짐 내민다) 이거나 받아. 남 (물건 받아들며) 이게 뭐야? 생활비도 없다면서. 여 복지관에서. 겨울이라고 이것저것 챙겨주네. 확실히 강남이 좋긴 좋아. 나눠주는 것부터가 격이 달라. 쌀 하나를 줘도 꼭 이천 쌀만 준다니까. 남, 문 옆으로 쌀가마니랑 받아 온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여, 봉투 안을 뒤적거리다 과자 봉지를 꺼내든다. 여 (과자를 우적거리며 바닥 짚는다) 아직 한 겨울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바닥이 냉골이네. 남 수도관 동파가 올해는 좀 빨리 됐어. 그래도 나는 여기 몇 년 살았다고 금방 적응되는 거 있지. (걱정스러운) 자기, 많이 불편해? 여 아냐. 나도 전에 살던 고시원보단 백밴 나은데 뭐. 거긴 주방을 공동으로 썼는데, 꼭 내가 사놓은 김치만 훔쳐가던 놈이 있었어. 의심 가는 놈이 있긴 한데 확실하게 단정은 못 짓겠구. 그렇다구 무턱대고 범인으로 몰수도 없고. 그래서 나중엔 김치를 아예 안 샀었지. 자기, 김치 없는 라면 먹어 봤어? 진짜 (고개를 저으며) 사람이 할 짓이 못 돼. 남 그 자식은? 가만 뒀어? 여 가만 두긴. 나중에 여자 속옷 훔치다가 덜미 잡혀서 개망신 당하고 쫓겨났어.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남 미친놈이네. (침대 가리키며) 자기야, 여기 앉아. 여긴 좀 나을 거야. 여 (침대 위로 올라간다.) 할머닌 괜찮을까? 뜨거운 물은 고사하고 입 안에서 김이 나와. (호호 불며) 자기야, 이거 보여? 남 (옷장을 뒤적거려 커다란 점퍼를 뺀다. 이때 짐이 쏟아져 문 앞에 약간의 옷들이 쌓이게 된다. 자신도 입고 여자에게도 두꺼운 점퍼 하나를 건넨다) 이거 입어. 괜히 감기 걸리지 말구. 여 (점퍼를 입으며 침대 위 이불 안으로 들어간다.) 내가 워낙 건강 체질이라 웬만한 추위에는 꿈쩍도 안 하는데 자기랑 살림 합치고부터 몸이 약해졌어. 임신 때문인가 아침부터 삭신도 쑤시고 목도 아프고 머리도 지끈거리는 게 조만간 감기가 올 것 같아. 남 (버럭) 감기? 그러게 독감예방접종 하랬잖아! 여 삼만 팔천 원이야. 그걸 어떻게 맞아? 남 그러다 약값이 더 나는 거 몰라? 그깟 돈 몇 푼 아끼려다가 병원비, 약값 더 나가는 거라고! 진짜 짜증 나게! (바닥에 쌓인 비닐봉지를 걷어찬다) 여 야! 남 뭐! 여 너 지금 뭐 하는 짓거리냐? 남 짓거리? 짓거리? 다시 한번 말해 봐. 남편한테 짓거리? 여 그래. 짓거리라 했다. 남 말하는 본새하곤. 그러니까 네가 어디 가서 고등학교 중퇴자란 소릴 듣는 거야. 여 고졸인 넌 뭐 얼마나 그렇게 대단한데? 남 이거 왜 이래? 나 전문대까지 휴학했어. 너하곤 완전 급이 달라. 이번에 네가 임신만 안 했어도 나 학교 복학했다. 여 얼씨구? 등록금은 있냐? 남 …. 까짓것 벌면 되지. 여 (코웃음 친다) 퍽이나 벌겠다? 지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게. 남 으이구! (자신의 머리 때리며) 그날 밤 내가 왜 술을 마셨는지 그날 밤이 내 인생 천추의 한이다, 한! 이래서 몸 굴리는 애들하곤 함부로 노는 게 아닌데. 여 (벌떡 일어나 노려본다) 그 몸은 나 혼자 굴렀냐? 애는 나 혼자 만들었고? 한 번만 자달라고 졸라 될 땐 언제고. (배 만지며) 알콩아, 달콩아, 봤지? 네 아빠가 저렇게 병신 같은 놈이란다. 남 (애써 누르며) 됐다, 됐어.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내가 저 고등학교도 못 나온 년이랑 무슨 얘길 하냐? 남, 옷을 추려 입고 밖을 나가려는데, 기계음이 들린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기계음은 내내 남과 여의 집에서만 들린다) 여, 재빠르게 리모컨 집어 티브이를 켠다. 남, 언제 그랬냐는 듯 잽싸게 달려와 티브이 앞에 선다. 티브이 화면 가득 노파의 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 (티브이 화면에서 시선 떼지 않는다. 언제 싸웠냐는 듯) 다리를 절고 있네. 남 (티브이 화면에서 시선 떼지 않는다. 언제 싸웠냐는 듯) 빙판길에 넘어졌나? 노파, 문을 열고 들어선다. 머리 위에 짐을 얹고 양손에도 한 가득 짐을 들고 있다. 다리를 절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여 (티브이 화면에서 시선 떼지 않는다.) 양 손에 짐이 한 가득이야. 남 (티브이 화면에서 시선 떼지 않는다.) 어디 폐지 같은 거나 주워 오는 거지. 남, 눈치 보며 슬금슬금 여의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여, 기다렸다는 듯 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과자를 우적거리며 영화 감상하듯 나란히 모니터에 집중하는 두 사람 여 저런 건 도대체 어디에서 줍는 거야? 남 아파트 쓰레기통, 상가 앞, 식당 뒤, 구석구석 뒤지겠지. 여 저게 진짜 돈이 될까? 남 진종일 쌔빠지게 고생하면 끽해야 하루 5천 원 정도? 여 그렇게나 적어? 남 몸만 죽어나는 거지. 노파, 가져온 물건들을 겹겹이 쌓아 올린다. 금방이라도 쌓인 물건들이 넘어질 듯 위태하다. (혹은 넘어져도 무방하다) 여 저러다 정말 큰일 나시겠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남 저런 게 바로 궁상이야. 사는 거 자체가 민폐 인생. 여 너무 그러지 마. 찾아오는 가족도 없다는데 안 됐잖아. 남 아들이 하나 있긴 한데 연 끊은 지 꽤나 된 거 같아. 여 하나밖에 없는 자식새끼, 금이야 옥이야 길렀는데 머리 커서 귀찮다고 외면하고? 남 뻔한 스토리지. 여 사람들은 왜 늘 뻔한 것에 속는 걸까? 남 견디려고 그러는 거지. 그래야 견딜 수 있거든. 여 그래서 수집하나? 헛헛한 마음을 물건으로. 남 마음이 물건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그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거야? 여 오빠. 남 응? 여 난 저렇게 살기 싫어. 남 (여자의 배 쓰다듬으며) 내 자식도 저렇게는 살면 안 돼. 천장에서 쿵쿵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여 (하늘 올려보며 남자의 곁으로 바짝 붙는다) 뭐지? 남 저놈의 쥐새끼들. 여 쥐야? 남 사람 없을 땐 내내 조용하다가 꼭 들어오면 저 난리지. (둘러보다 빗자루를 집어 천장을 하늘로 쿵쿵 찌르면 이내 조용해진다) 조용히 해, 새끼들아! 여 (번뜩 뭔가 생각난 듯 남자의 빗자루를 빼앗는다) 오빠, 줘 봐. (천장 환기구를 열어 그 안을 기웃거린다.) 남 뭐해? 여 (이내 뭔가를 손에 쥐고 내려온다) 잡았다! 남 (여자에게 멀찍이 떨어지며) 잡았다구? 쥐를? 여 (의기양양) 응. 남 뭐하려고? 여 할머니 갖다 주게. 남할머닐? 여 적을 알고 나를 알면 그때부터 백전백승! 게임 끝이야. 여, 남자가 말릴 새도 없이 후다닥 밖으로 나간다. 남 야! 자기야! 여, 어느새 옆집으로 넘어갔다. 노파 집 대문을 두드린다. 남, 티브이를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본다. 여 할머니! 노파 목소리 뉘슈? 여 저어, 옆집인데요. 잠깐 문 좀 열어주실래요? 노파, 절룩거리며 느리게 현관 앞을 걸어간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외출하셨습니다. 노파 (문 살짝 열고 고개만 삐죽 내민다. 경계하는 느낌이다.) 뭔디 그랴? 여 수도관이 동파 돼서 걱정 돼서 한 번 와봤어요. 많이 추우시죠? 노파 겨울인디 추운 건 당연하지. 여 그래서! (쥐 내밀며) 이거라도 가지고 계시라고요. 만져보세요. 노파 (떠밀리듯 받아들며) 이게 뭔디? 여 쥐요. 노파 쥐? 여 살아있어요, 아직 따뜻하구요. 노파 (의심스러운) 애기 엄만 안 춥가니? 똑같이 사람으로 태어난 몸땡아리, 애기 엄마도 솔찬히 추울 텐디. 여 전 괜찮아요. 옆에 남자친구도 있구, (배를 내려다보며) 뱃속에 아기도 있잖아요. (돌아가려면) 노파 (문을 처음보다 조금 활짝 연다) 저기, 색시! 여 (돌아보면) 네? 노파 나 그런 사람 아녀! 여 뭐가요? 노파 선물을 받았으면 은혜를 갚아야지. 쪼매만 기다려. 뭐라도 줄 거 없나 찾아 볼랑게. 난 천성이 신세 지곤 못 사는 성격이여. 노파, 집 안으로 들어간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노파, 물건들 사이를 뒤지기 시작한다. 둘러보다 한 묶음의 짐 보따리를 내밀며,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외출하셨습니다. 노파 이불 있어? 여 네? 노파 새댁 집에 이불 있느냐고? 여 (생각하다) 하나 있긴 한데 그게 사계절용이라 그렇게 따뜻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쓸 만해요.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잖아요. 추우면 우리 자기랑 꼬옥 껴안고 있기도 하고…. 노파 (자랑스럽게) 날도 추운디 한 사람당 두 개 정돈 덮어야지. 우리 집엔 이불 엄청 많아. 이것 말고도 여덟 개나 더 있는디? 여 (받아들며 감동이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할머닌 정말 마음이 따뜻하시네요. 노파 세상 혼자 살간? 서로 돕고 사는 기 세상이지. 추워. 얼른 가. 노파, 먼저 들어간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여, 자신만한 커다란 이불을 가지고 들어온다. 여 (한숨 길게 내쉰다) 아후, 안 되겠어. 도저히 못하겠어. 남 (이불을 받아들며) 왜 또 그래? 여 백퍼센트 코튼 마크잖아. 오리털도 아닌 거위털이야. 이게 얼마나 비싼 건지 오빠가 알기나 해? 남 할머니가 주신 거야? 여 그래. 저쪽 집에 엄청 많대. 남 자기야,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강하게 다져야 해. 생각해 봐, 저 할머니 돌아가시면 그게 전부 우리 거야. 이불 깔고 덮고 지지고 볶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니까. 여 몰라. 암튼 기분이 안 좋아.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서 도저히 그 일은 못하겠어. 이건 옳은 짓이 아냐. 우리도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취직 같은 거 해 보는 거 어때? 남 아니. 구직은 더이상 희망이 없어. 여 오빠, 그러지 말고 일용직이라도 구해 보자. 남 (여자의 배를 내려다보며) 이 몸을 해 가지고? 여 우리 사정 얘기하면 받아주는 데가 있을 거야. (남자의 손 잡으며) 오빠…. 남 …. 여 제발…. 남 …. 넌 그럼 빠져. 이번 일은 나 혼자서 할 테니까. 여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우린 한 몸이야. 이 아이들 낳기로 결정한 날 잊었어? 뭐든 함께하기로 약속했었잖아. 남 그랬었지. 여 우린 그때 너무 힘들었어. 남 알아. 여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부모도 없고. 빽도 없고. 남 아무것도 없었지, 우린. 여 그래도 행복했었잖아. 남 사랑만이 전부였던 시기였지. 여 극복하자. 할 수 있어. 노력하면 어떤 일도 다 이뤄낼 수 있다니까. 남 개소리야. 여 오빤 옆집 할머니 보면 친할머니 생각 안 나? 오빠도 할머니가 키워 주셨다며? 남 그때 생각 따윈 하고 싶지 않아. 여 난 가끔 그 시절이 그립던데….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절,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가 나았던 거 같아. 너무 많이 아는 지금은…. 남 할머닌 나를 학대했어. 여 학대? 남 어린 꼬마였지. 아빠 손에 이끌려 왔던 날, 아빠 등 뒤로 숨었던 날, 할머니의 우악스런 손아귀가 나를 질질 끌고 갔어. 그리곤 내가 아빠 인생을 망쳤다며 끝없는 폭언과 폭력을 휘둘렀지. 여 오빠, 옆집 할머닌 오빠네 할머니와는 달라. 이렇게 이불도 주고 정말 좋으신 분이라고. 남 아무리 그래도 나쁜 점은 분명 있을 거야. 옆집 할머니의 나쁜 점을 한 번 생각해 봐. 여 할머니의 나쁜 점? (생각하다가) 예를 들면…? 남 예를 들면…. (생각났다) 저장강박! 저렇게 쓰지도 못할 거 쟁여만 놔서 이웃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잖아. 저것도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티비에서 본 거 같아. 기억 안 나? 전에 복지관에서 도배 새로 해준다고 했을 때…. 여 (조금 솔깃하다) 아, 그때! 난리부르스도 아니었지. 문 앞에 대자로 쫙 드러누워가지고. 남 그래! (좀 장황하게) 물건들 좀 치우려고 그러면, “차라리 날 밟고 가라! 이것들아!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저 물건들 못 뺏는다!” 아니, 지가 무슨 이순신이야? 잔다르크야? 저 중에 쓸 만한 물건이 어디 있다고 저 난린지. 저런 건 욕심이 많다는 반증이야. 여 욕심? 남 그래. 스크루지보다 더 지독한 짠순이. 집에 물건들은 숨기면서 정작 중요할 땐 나 몰라라 외면하지. 저러다 결국 저 쓰레기 더미에 깔려 돌아가실 거야. 자기 꺼 꽉 움켜쥐고 남의 거 야금야금 훔치면서. 여 (놀라) 저 물건들이 훔친 거야? 남 훔친 거지. 박스 뒤지고, 남의 물건 뒤지고, 더 가난한 사람들 기회 뺏으면서. 여 (동조됐다) 몰랐어. 할머니가 그런 사람인 줄. 남 (여자의 손 잡으며) 자기야, 그러니까 마음 약해지면 안 돼. 우리도 남들처럼 살아야지. 혼인신고도 제대로 하고, 애들 호적도 제대로 올리고. 남들 사는 만큼 딱 그만큼만 살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외출하셨습니다. 노파 (노크 소리) 색시, 안에 있어? 여 누구지? 남 할머니다! 노 파색시! 여 왜 온 거지? 혹시 우리의 계획을 눈치채신 건가? (남자를 쿡 찌르며) 오빠! 오빠가 나가봐. 얼른. 남 (경계하며 문 쪽으로 다가선다.) 누구시죠? 노파 옆집이외다. 색시 있슈? 여,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남 잠깐 이 앞에 나갔는데요. 왜 그러시는지…? 노파 구청에서 라면 한 박스를 선물로다 줬는디. 내가 밀가리를 먹으면 위가 쓰려. 남 (여전히 경계하며) 그래서요? 노파 색시 먹을랑가 물어볼라고 그러지. 남 무슨 라면인데요? 노파 진라면이랑 너구리랑 짜파게티랑 뭐 이것저것 섞였는디? 남, 여자를 바라보면 여,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남 (찜찜하지만 문을 살짝 연다) 뭘 이런 걸 다 주시고…. 노파 (고개 들이밀며) 애기 엄만 어디 멀리 갔수? 여 (잽싸게 이불로 머리를 덮는다) 남 슈퍼 갔어요. 라면 사러. 노파 아이고, 잘 됐고만. 내가 그 시간에 딱 맞춰 왔네. 얼른 전화혀서 라면 사지 말고 오라 그랴. 신혼부부들이 무신 돈이 얼마나 있다고. 얼른 전화혀. 남 네에. 그럴게요. 노파 (가려다가 돌아본다) 임신했을 땐 특히 남자가 잘해야 혀. 먹고 싶다는 거 있담 다 멕이구, 짜증내도 것도 일절 받아주고. 남편이 잘해야 그 기운에 평생 살아. 늙은이 말이라고 무시허지 말구 새겨들어. 알겄지? 남 네, 그럴게요. (하다가) 근데 겨울엔 딸기를 못 구하잖아요. 노파 색시가 딸기가 먹고 싶대? 남 네에. 노파 딸인가 보네. 딸기가 땡기는 걸 보니. 남 (헤벌쭉, 딸 생각에 기분 좋다) 딸이래요, 딸. 것도 쌍으로다. 노파 둘씩이나 들어 있어? 남 (헤벌쭉) 네에. 그렇다네요. 노파 아이고, 장해라. 장해. 참말로 장하네 그려. 남 (꾸벅 인사하며) 할머니, 라면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남, 라면박스를 입구 옆에 놓는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여 (뒤집어쓴 이불 밖으로 빠져나오며) 갔어? 남 (복잡하다) 응. 여 할머니 정말 나쁜 사람 맞아? 남 (찜찜하다) 그렇다니까. 여 이렇게 이불에 라면까지 주셨는데도? 남 (멈칫) 의도를 생각해야지. 왜 이런 조건 없는 나눔을 베푸는지. 여 조건 없는 나눔? 남 세상엔 공짜란 없는 법이야. 본디 그렇게 세상은 굴러가게 돼 있어. 근데 이거 봐봐. 할머니가 주신 것들. 이게 뭘 의미하는 건지 모르겠어? 여 (생각하다 머리를 쥐어 잡으며) 정말 모르겠어. 남 중졸인 네가 이해하기엔 좀 어려운 문제일 거야. 좀더 깊게 생각해 봐. 여 (생각하다) 할머니에게 실망했어. 남 (환희에 차) 생각났어? 여 임산부에게 라면을 먹으라니. 딸기는 못 줘도 라면을 먹으라고 권하는 건 아니잖아. 라면은 성인병 고혈압의 원인이야. 과다한 나트륨 함량으로 내 아이들이 아토피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지. 남 그래! 바로 그거야! 여 (여자 뭔가를 깨달은 듯 놀라 입을 막는다) 설마 할머니가 이 모든 걸 꾸민 거야? 남 그, 그런 거지. 여 꼴랑 라면 하나 주면서 생색은 있는 대로 다 내면서? 남 드디어 깨달았구나. 여 오빠 말이 맞았어. 저 할머닌 나쁜 사람이야. 남 그럼. 난 언제나 네 편이야. 여 내 앞에선 위해주는 척, 순진한 척하면서 뒤로는 엄청난 계략을 꾸미고 계셨던 거야. 남 이제 말이 통하는구나. 여 할머니 재산이 얼마라고? 남 한 십억쯤 되려나? 여 확실한 거야? 남 (당황스러운) 그냥, 사람들 얘기가…. 그러지 않겠느냐. 풍문이지, 풍문. 여 강남에 빌딩이 두 개라며? 설마 그것밖에 안 되겠어? 아아, 할머니가 빨리 뒈져버렸음 좋겠어. 남 걱정 마. 조만간 그렇게 될 테니까. 그전에 우리는 먼저 선수 치고 튀자. 할머니 재산 홀라당 챙겨가지고. 여 몇 주 후에나 발견되시겠지? 이참에 단단히 한몫 챙기자고. 남 우리가 먼저 발견한 걸 고마워할지도 몰라. 여 무연고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남 장례식은 고사하고, 저 많은 짐들 정리하려면 국가도 고생이지. 여 맞아. 저 중에 쓸만한 건 전부 처분하고 할머니 통장이랑 국가보조금 남은 거랑 이것저것 모아서 한몫 단단히 챙기자고. 남 그 돈으로 알콩이랑 달콩이 피아노랑 발레를 가르치는 건 어때? 여 피아노랑 발레? 남 내 오랜 로망이거든. 알콩이는 피아노를 치고 달콩이는 그 옆에서 발레를 하고. 나랑 넌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완벽하지 않니? 여 (상상하다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죽이자! 남 (놀라) 뭐? 여 할머니가 죽을 때까지 도저히 못 기다리겠어. 지금 당장 죽이자! 시간이 얼마 없어. 좀 있으면 알콩이와 달콩이가 태어날 거라고! 남 그래도 지금은 너무 이르잖아. 여 이르긴 뭐가 일러? 당장에 실행에 옮겨야지. (찬장을 뒤져 식칼을 꺼낸다. 금방이라도 실행에 옮길 듯 위협적인 표정이다) 남 자, 자기야. 왜 그래? 여 시간이 얼마 없다니까. 우리 애들은 우리처럼 자라게 할 순 없잖아. 오빠. 남 그래도…. 여 일단, 최고급 산후조리원부터 예약해줘. 거기에서 인맥을 쌓아야지. 남 결심이 선거야? 여 응! 남 양심의 가책 같은 건 사라지고? 여 그딴 거 개나 주라 그래! 남 그래도 좀 그렇잖아. 살인과 고독사는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여 (비장하다) 아니, 나는 해야겠어. 이제는 행동으로 옮길 때야. 여, 성큼성큼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데 남, 급하게 현관문을 막아선다. 남 자! 잠깐! 여 왜 이래? 비켜. 남 어쩌면 우리 할머니보다 옆집 할머니가 조금은 더 나은 사림일지도 몰라. 여 무슨 소리야? 언제는 나쁜 사람이라며.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 등쳐 먹는. 남 그건…. 그냥 내 생각인 거고. 여 아니. 아무리 자기가 진실을 외면해도 그건 명백한 사실이야. 남 자기야. 진정하고 조금만 기다리자. 여 뱃속의 아이가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 한다니까. 남 알아! 그건 나도 알지. 하지만 얼마 안 남았어. 금방 돌아가실 거야. 여 알콩달콩이도 시간이 없어. 남 그래도 애들은 어리니까 아직 세상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어쩌면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을지도 몰라. 여 위선 좀 그만 떨어. 알콩이 달콩이도 우리처럼 살게 할래? 우리처럼 거지 같은 옷 입고 거지같은 방 안에서 지내면서. 입에서 김 나와서 겨울이면 끔찍하고. 여름이면 뜨거운 선풍기 끌어안고 지내면서. 거지 같은 학교 졸업해서 쥐꼬리만 한 월급 못 받을까 전전긍긍하고. 외식은커녕 맨날 돈돈 거리면서 지내겠지. 남들 다 다니는 학원 한 번 못 보내고, 학교도 간신히 졸업하고, 어쩜 못할지도 몰라. 그렇게 눈치 보며 살게 할 거야? 남 돈만 있다고 행복한 건 아니잖아. 우리 둘이 사랑하는 모습 보여주고 우리가 떳떳하면 자식들도 언젠간 알 거야. 언젠간 부모의 노력과 수고를 이해하는 날이 오겠지. 여 떳떳해? 우리가 뭐가 떳떳한데? 복지관에서 공짜밥 얻어오는 게 떳떳한 거야? 예방접종비용 비싸 못 맞는 게 떳떳한 거야?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떳떳한 지 알려줘 봐. 내 손에 싸구려 반지라도 하나 끼워주고 남들 하는 만큼 결혼식도 제대로 올리려면 그 망할 놈의 돈이 필요하다고 난! 네가 뭐라고 떠들던 간에 난 오늘 저 할머닐 죽여야겠어! 여, 남자를 밀어낸다. 남, 막았던 자리 무너지듯 자리를 비켜선다. 여, 밖으로 성큼성큼 걷는다. 거칠게 현관문을 두드린다. 한 손엔 칼을 숨기듯 쥐고 있다. 여 할! 머! 니! 노파, 느리게 현관으로 다가온다. 노파 옆집 색신가? 기계음 김분임 할머니가 외출하셨습니다. 노파 (문을 활짝 열며) 색시, 마침 잘 왔어. 들어와 봐, 어여. 여, 무시무시한 얼굴이다. 성큼성큼 노파 집 안으로 들어간다. 좁은 집 안, 서로를 마주 보고 간신히 선 노파와 여자 그 가운데 딸기 한 팩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여, 칼을 빼들고 찌르려다 딸기를 보고 멈칫하는데, 노파 먹고 싶었다며? 여 네? 노파 신랑한테 다 들었어. 딸기 먹고 싶다 그랬다며. 여 (냉랭한) 그런데요? 노파 요리하다 온겨? 여 뭐여? 노파 지금 칼 들고 서 있잔여. 여 (칼을 숨기며) 대파 있으세요? 노파 대파? 여 라면에 넣으려고 보니 대파가 마침 똑 떨어져서요. 노파 글씨. 대파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겄네. 혼자 사는 노인네라 집 안에 마땅한 게 없어. 배고프면 먹고 안 고프면 굶고 그러니께. 노파, 쭈그려 앉아 냉장고를 연다. 이것저것 뒤적거린다. 여, 딸기 팩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노파 (냉장고 뒤지며) 찬물에다 밥이나 말아먹지. 음식이 변변찮해. 대파가 있을라나 모르겄네. (돌아보며) 대파 대신 양판 안 되야? 여 그거라도 주시면 고맙구요. 노파, 양파를 한 망 건네준다. 계란, 버섯 이것저것 한 움큼 들려 있다. 여, 얼떨결에 받아든다. 노파 딸이라매? 여 네? 노파 남편이 많이 좋아하드라고. 여 그 자식이 임신한 걸 좋아해요? 노파 가장의 위치가 원래 그런 거여. 좋으면서 티도 못 내고 맘속 복잡허고. 섭섭하고 서운한 게 있더라도 자네가 넓은 맴으로다 이해혀야지. 여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노파 한 인간을 다른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제. 용기 잃지 말구 악착같이 살어잉. 여 …. 노파, 딸기를 까 여자의 입에 넣어준다. 노파 어뗘? 맛이? 여 달아요, 아주. 노파 내가 샥시가 딸기 좋아하는 걸 우찌 알았겠어? 신랑이 챙겨주고 싶은디 맘처럼 되지 않응게 속상한 겨. 색시도 알지? 신랑이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거. 여 네에. 노파 겨울엔 딸기가 없어. 비싸기도 하고. 우리 같은 사람은 먹기 쉽지 않제. 맴이야 그렇지 않겄지만 그래도 너무 서운해하덜 말어. 여 (맛있게 딸기를 먹는다) 할머닌 안 드세요? 노파 난 늙어서 식욕도 읍서. 뭐가 맛난지도 모르겄고 배만 차면 그만이여. (딸기 팩 건네며) 가져가서 신랑이랑 맛나게 나눠 먹어. 여 자꾸 이렇게 주시기만 하면 제가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잖아요. 노파 아녀, 아녀. 내가 뭐 바라고 그런 것도 아닌디. 여, 딸기 팩 챙겨들고 느리게 돌아서면, 노파 샥시. 여, 멈춰 선다. 노파 내가 쪼매난 부탁 하나만 혀도 될까? 여 (다시 경계한다) 부탁이요? 노파 뭐 거시기한 건 아니고. 내가 만약 죽거들랑 내 시신 처리 좀 해돌라고. 그냥 보다가 요 며칠 안 보이면 구청 같은데다 연락 좀 햐줘. 그 짝에서 알아서 잘 해줄 텐게. 여 할머니. 그런 말씀 마셔요. 오래오래 사셔야죠. 노파 암만 그래도 아가들도 있는디 시체 냄시 풍기며 마무릴 할 순 없지 않겄어? 죽는 날을 내가 택할 수 있으면 좋겄지만 살아보니 그것도 내 맘대로 안 되고. 시상에서 제일 나쁜 게 지 목숨 지가 끊는 거라 그럴 수도 없고. 얼마 안 되지만 이 콧구녕만한 집구석도 여기저기 뒤져보면 쓸 만한 게 있을 거여. 마지막 부탁 들어준 보답이다 생각하고 부담 갖지 말고 가져. 보니께 나도 이제 얼마 안 남은 거 같더라고. 세상천지 아는 사람이라곤 자네가 준 요 쥐새끼랑 자네 집안 식구들이 전부니께. 여 할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러면 저희가 너무 죄송하잖아요. 노파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내가 오히려 미안허지. 나, 한 번만 만져 봐도 되나? 노파, 여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여자의 배에 손을 지그시 댄다. 노파 꼼틀거리는구만. 생명이. 한 생명이 가믄 또 다른 생명이 오겄지. 그것이 자연의 섭리니께. (여자의 배에 대고) 환영하네. 이 세상에 온 걸. 여, 노파가 준 딸기 팩을 가지고 도망치듯 그 집을 빠져나온다. 여, 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선다. 남 어떻게 됐어? 여, 딸기 팩을 남자에게 집어 던진다. 너부러진 딸기들 남 뭐야, 이게? 여 입양 보내. 남 뭐? 여 그렇게 해. 남 뭔 소리야? 여 막달이라 지우진 못하겠구, 그냥 입양이나 보내자구! 남 지긋지긋하다, 정말. 또 그 소리냐? 여 네가 듣고 싶어 했던 말이잖아! 남 난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그런 거야. 여 (노려보며) 미친 새끼. 할머니가…. 할머니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기계음 김복임 할머니가…. 김복임 할머니가…. 김복임 할머니가…. 김복임 할머니가…. 김복임 할머니가…. (반복 재생된다) 남과 여, 동시에 옆집을 돌아본다. (암전) >>등장인물 남자 여자 노파
  • 용산 참사 생존자들의 엇갈린 기억…‘공동정범’ 메인 예고편

    용산 참사 생존자들의 엇갈린 기억…‘공동정범’ 메인 예고편

    용산 참사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공동정범’ 메인 예고편이 공개됐다. ‘공동정범’은 2009년 1월 20일, 불타는 망루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함께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범죄자로 낙인찍힌 이들의 아픈 기억을 추적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공개된 메인 예고편은 2009년 1월 20일, 그날의 현장으로 시작한다. “뛰어! 뛰어!”라는 다급한 목소리와 “다섯 명만 살았어, 다섯 명만!”이라고 외치는 생존자들 모습은 아비규환의 그날을 재생한다. ”2009년 1월 20일, 그날 이후 우린 공범이 되었다”라는 카피에 이어 생존자들의 회상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구성은 당시 망루 안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궁금케 한다. “그 안에서도 살라고 줄 서 있었어요, 뛰어내리려고”, “옆에서 누군가 당겨서 내가 튕겨져나갔다고 그랬잖아요”, “제 뒤에 있었어요, 지금은 말 못합니다”라는 생존자들의 조각난 인터뷰들은 9년간 감춰졌던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수면 위로 오를지 주목케 한다. 또 “저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죠. 머릿속에서 그게 계속 맴도는데, 제정신으로 살 수 있겠어요?”라며 눈물을 흘리는 생존자의 모습 뒤로 참사 현장과 관련자들의 모습이 빠르게 재생되면서 그들의 악몽을 예상케 한다. 영화 ‘공동정범’은 2011년 화제의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 스핀오프(기존 작품에서 등장인물이나 설정을 가져와 새로 만든 영화)다. 전작에 연출과 구성, 촬영 등을 각각 담당한 김일란 감독과 이혁상 감독이 공동 연출을 맡았다. 영화는 오는 1월 25일 개봉 예정이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인생, 설계도 그리듯 뜻대로 되는 게 아닌 걸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인생, 설계도 그리듯 뜻대로 되는 게 아닌 걸

    연말이 되면 늘 지난 한 해 동안 읽은 책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낸다. 책에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다 보니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책을 좀더 많이 읽는 편이다. 돌이켜 보니 올해도 거의 200권이나 되는 책을 읽었는데 매년 한두 권 정도는 작품성과는 별개로 상당히 오랫동안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는 책이 있다. 올해 내게 그런 책은 ‘모눈종이 위의 생’이라는 장편소설이다. ‘조선작’이라는 작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헌책방을 찾은 손님들에게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한다. 심지어 그 이름은 성별조차 짐작하기 어려워서 이미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기억 속에서 끄집어 올리기 어려운 작가다.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사람에게 “그럼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영화는 아시죠?”라고 물으면 또 열에 아홉은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 영화를 본 적은 없어도 제목만큼은 널리 알려져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다. 영화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데, 그 작품을 쓴 작가가 바로 조선작이다.1940년 대전에서 태어난 조선작은 1960년에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까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교사로 일하며 신춘문예에 여러 번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신춘문예 심사를 자주 했던 김동리 작가가 말하길, 조선작이 글 솜씨는 뛰어났는데 작품의 소재가 건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해 당선작에서 제외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 한국전쟁을 맞았고 그때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생사도 모르고 가난에 찌들어 자란 청년이 명랑하고 건전한 소설을 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71년 월간 ‘세대’ 잡지에 ‘지사총’으로 등단한 후에 펴낸 그의 작품 속엔 이렇듯 가난, 억압, 방황, 소외, 부조리 같은 암울한 느낌이 가득했다.‘모눈종이 위의 생’은 조선작이 ‘영자의 전성시대’로 일약 스타 작가가 된 1970년대를 마감한 직후에 써낸 작품이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제목으로만 보자면 꽤 건전하고 긍정적인 내용인 것 같다. 하지만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하다가 버스 차장으로 일하던 중 사고로 한쪽 팔을 잃은 영자에게 전성시대라는 게 찾아올 수 있을까? 영자는 결국 사창가로 흘러들어 밑바닥 인생을 살게 되는데 여기서 약간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영자를 좋아하는 청년이 나무를 깎아 만들어 준 의수 덕분에 손님이 늘어 돈을 좀 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창가 골목에 화재가 나서 영자는 거기서 허망하게 죽고 이야기는 끝난다. 그의 작품이 대개 이런 식이다.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인생들은 끝까지 피로한 삶을 살다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끝나버린다. 그것이 1970년대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정권이 바뀐 1980년대는 여러모로 분위기가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1981년에 조선작은 한국일보에 소설을 연재했는데 그것을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 ‘모눈종이 위의 생’이다. 소설은 내용과 설정 면에서 그전까지 써 오던 조선작의 작품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주요 등장인물들이 밑바닥 계층이 아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 ‘안종희’는 전형적인 중산층으로 6년 전 어떤 사건 때문에 결혼식 직전 실패를 경험한 일이 있다. 그녀와 결혼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은 다른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있는 ‘한민일’은 인기 있는 소설가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안종희가 한민일의 행적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하는 내용으로 흡사 추리소설과 같은 구성을 가진 특이한 작품이다. 안종희는 치밀한 작전을 바탕으로 한민일의 심리상태마저 이미 손바닥 위에 놓고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 행동하는데 그 시작은 북악에 있는 ‘P호텔’에서부터다. 사실 P호텔은 주인공의 어머니가 이혼한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던 커피숍이 있는 곳이다. 어머니는 여기서 만나주지 않는 남편을 며칠 동안이나 같은 시간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P호텔은 소설 속에서 “세검정에서 정릉으로 넘어가는 터널 입구에” 위치해 있고 5층이라는 단서로 미루어 보아 1980년대 북악터널 근방에 있던 ‘북악파크호텔’이 그 모델일 것으로 추측한다. 소설 초반에 잠깐 나오는 P호텔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장(章)의 제목이 ‘북(北)호텔’이기도 하고 주인공 자신도 호텔 근처에서 어머니를 관찰하면서 어느 시인이 쓴 같은 이름의 시집을 떠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정확한 이름을 밝히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책은 1979년에 민음사에서 초판을 펴낸 김영태 시인의 시집 ‘北호텔’일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북호텔’은 1938년 마르셀 카르네 감독이 연출한 프랑스 영화로 이어지며 조선작의 소설이 영화의 내용과 연계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이 영화는 외젠 다비가 1929년에 발표한 소설 ‘북호텔’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P호텔은 소설 초반에 한 번 등장했다가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운명적으로 다시 한 번 나온다. 모든 희망을 잃은 안종희가 이 호텔에 투숙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죽을 장소로 첫 장에서 어머니와 만났던 P호텔을 선택한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첫 장 제목이 ‘북호텔’이기는 하지만 소설 속에서 P호텔의 정식 명칭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가 마지막에 주인공이 수면제를 먹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어머니를 떠올리며 쓰는 유서에서 느닷없이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 이름을 ‘북호텔’이라고 쓴다는 점이다.외젠 다비의 소설 ‘북호텔’ 역시 죽음과 관계가 있다. 파리 10구 운하 근처에 있는 4층짜리 호텔은 온갖 인간 군상들이 머물다 떠나는 곳이다.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줄거리 없이 그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주기만 할 뿐이다.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은 극적인 사건을 중심에 두고 있다. 한 쌍의 연인이 동반자살을 하려는 목적으로 북호텔에 투숙한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상대에게 총을 쏘고 뒤이어 자신에게도 총을 쏘는 방법이었지만 먼저 방아쇠를 당긴 쪽이 나중에 겁이 나서 도망가버리면서 사건은 복잡해진다. 그런데 ‘모눈종이 위의 생’에서 북호텔에 투숙한 사람은 연인이 아니라 혼자다. 당연히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다. 죽기로 결심하기 전 안종희는 과거의 연인 한민일을 조사하면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치밀하게 준비했고 완벽하게 실행했다. 모든 게 완벽함을 추구하는 안종희의 뜻대로 되는 듯했다.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그런 것이 적용될 수 없었다. 이것이 안종희가 절망한 이유다. 삶의 모든 것을 자신이 계획하고 마치 건축가가 모눈종이 위에 완벽한 설계도를 그리는 것처럼 사랑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실상 인간의 삶이란 거대한 모순 덩어리임을 깨달았다. 나중에 가수가 된 주인공의 동생 안세호는 이런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서로 모순의 별들. 한동안 우리의 길을 잃은들 어떠랴.”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설계하며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매번 실수하고 상처도 받는다. 그것이 거름이 되어 또 조금씩 발전한다. 조선작은 신문 연재가 끝난 후 ‘모눈종이 위의 생’을 단행본으로 펴내기 위해 자신이 직접 ‘신작사’(新作社)라는 출판사를 만들었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고 나중에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여전히 이 소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작의 여러 작품을 알고 있지만 정작 조선작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손님들을 많이 만난다. 작가가 소설에서 쓴 것처럼 이것도 굳이 애써서 풀지 않아도 될 하나의 모순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 ‘핵’공감할까…神 통할까…史 퍼즐 맞출까

    ‘핵’공감할까…神 통할까…史 퍼즐 맞출까

    제작비 100억원 이상을 쏟아부은 대작들이 올해 마지막 출사표를 던진다. 14일 양우석 감독의 ‘강철비’를 시작으로 20일 김용화 감독의 ‘신과 함께’, 27일 장준환 감독의 ‘1987’이 개봉한다. 세 편의 제작비를 합치면 500억원에 달한다. 손익분기점이 관객 500만명을 오르내릴 정도다. 세 편 모두 주인공 외에도 조연과 카메오까지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한다. 세 편을 모두 보면 웬만한 한국 배우들을 모두 볼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지난여름 ‘택시운전사’에 이어 올해 두 번째 천만 영화가 나올지 관심이다.■강철비 ‘강철비’는 잘 알려진 대로 한반도 핵전쟁 시나리오를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톰 클랜시의 밀리터리 스릴러 소설과 이를 영화화한 ‘붉은 시월’, ‘패트리어트 게임’, ‘긴급 명령’ 등 잭 라이언 시리즈를 좋아하는 영화 팬이라면 이번 겨울 최상의 선택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南北 두 철우의 감칠맛 나는 케미 핵 전면전이라는 일촉즉발 상황의 이면에서 이를 막으려는 두 남자, 북의 엄철우(정우성)와 남의 곽철우(곽도원)를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남쪽은 대통령 선거 직후 정권 이양을 앞둔 크리스마스 즈음. 남으로 침투한 북한군은 미군의 다연장 로켓 탄두를 탈취해 국제 행사가 열리는 개성공단을 향해 발사한다. 북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 쿠데타 세력을 제거하라는 은밀한 임무를 부여받고 개성공단을 찾았던 전직 특수부대 요원 엄철우는 큰 부상을 당한 ‘북한 1호’를 구출해, 남으로 긴급 피난하는 중국 관료와 기업인 행렬에 몸을 숨긴다. 쿠데타 세력은 북한 1호의 행방을 쫓으며 세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엄철우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곽철우와 운명적으로 공조하게 된다. ●서로를 향한 가감 없는 시선 전달 정우성이 액션 장면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원맨쇼를 벌이지 않는다는 점이 작품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북과 남의 이질감에서 비롯되는 코미디는 정우성과 곽도원이 일궈내는 케미가 또 다른 감칠맛을 관객에게 선사하다. 군사적 전문 용어와 지식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감상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주변국 행보까지 생각할거리 가득 ‘강철비’를 전형적인 오락물로만 즐길 수 없는 것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의 도발이 현재진행형인 상황에서 영화는 이 땅에서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한다. 장르 문법에 충실하게 이야기를 진행하는 사이사이 전쟁 위기에도 무덤덤한 남한 사회의 분위기를 우회적으로 꼬집거나 북한을 바라보는 남쪽의 두 가지 시선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북을 섬멸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입장과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은 빌리 브란트의 말처럼 원래 하나였기 때문에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 충돌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의 초침이 긴박하게 째깍거리는 순간 우방, 혈맹을 자처하던 미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등이 저마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모습 등 곱씹어볼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전작 ‘변호인’으로 데뷔작에서 천만 감독으로 등극한 양우석 감독은 “지난 역사와 각종 기밀문서, 자료, 전문가 의견을 통해 객관적이고 개연성이 높은 시나리오를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15세 관람가.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신과 함께 20일 개봉하는 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은 원작의 만화적 상상력이 스크린에 안정적으로 안착된 한국형 판타지 블록버스터다. 총제작비 400억원(1·2편 합산)이 투입됐다. ●전통신화 세계관 등 원작과 차별화 영화는 원작과는 꽤 거리가 있다. 주호민 작가의 웹툰이 그리고 있는 한국 전통 신화의 세계관을 차용하면서도 주요 캐릭터들이 영화적 시점으로 변주되고 재창조됐다. 원작에서 과로사로 숨진 회사원 김자홍(차태현)은 아이를 구하다 사망하는 살인성인의 소방관으로 바뀐다. 원귀인 유성연 병장은 자홍의 동생 수홍(김동욱)으로 등장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축은 자홍의 가족사가 된다. 액션 판타지에 머물지 않고 공감도를 높일 수 있는 가족이라는 드라마적 요소를 강력하게 결합한 건 전 세대로 관객층을 확대하고 싶은 야심으로 보인다. 원작에 없는 ‘귀인’이라는 영화적 장치를 만들고, 세 명의 저승차사(하정우·주지훈·김향기)의 활동 무대를 캐릭터의 변화에 맞춰 저승과 이승으로 확장한다. ●권선징악·가족애 과도한 신파 우려도 러닝타임 139분 내내 스크린에 펼쳐지는 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천륜 지옥까지 칠지옥을 구현하는 시각적 특수효과(VFX)와 컴퓨터그래픽(CG)의 완성도는 합격점을 줄 만하다. 화면 질감도 뛰어나고, CG가 몰입감을 방해하지 않는다. 각 지옥마다 세련되고 차별화된 비주얼을 구사하고 있는 데다 칼이 숲을 이루고 있는 검수림이나 수직낙하 액션 장면, 지옥 괴물들과의 전투 장면 등은 역동적이고 스펙터클한 영상미를 과시한다. 나름 ‘지옥 모험물’이라는 한국형 어드벤처 장르에 기대 이상으로 충실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흠이라면 권선징악적인 주제 의식과 가족애가 감정 과잉으로 치달으면서 빚는 과도한 ‘신파’가 아닐까. 켜켜이 쌓인 자홍의 이야기는 후반부에 다 털어진다. 특히 막판 20~30분은 소시오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가 아닌 이상 눈물을 참기 어려운 최루성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쟁쟁한 배우들 카메오 출연도 볼만해 출연 배우로 보면 한국 영화의 잔치판이다. 특별 출연이라고 하기엔 비중이 큰 염라대왕 역의 이정재부터 코믹 조합인 두 판관 역을 맡은 오달수, 임원희 등 조연뿐 아니라 김해숙, 이경영, 김하늘, 김민종, 유준상, 장광, 마동석 등 쟁쟁한 배우들이 카메오로 힘을 보탰다. 전작 ‘미스터 고’(2013) 이후 절치부심해 온 김용화 감독의 한국형 판타지 도전이 관객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아울러 천만 영화를 단 한 편도 내지 못한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이 작품으로 숙원을 해소할지 기대된다. 12세 관람가.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1987 오는 27일 개봉하는 ‘1987’은 이 겨울에 야외 상영을 해도 관객들로 하여금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 영화다. 그만큼 관람 내내 가슴속에서 뜨거운 그 무엇인가가 꿈틀거린다. 영화의 제목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과 용기가 모여 우리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1987년, 그해를 조명한다. 1월 14일 박종철 열사의 죽음으로부터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내는 6월 항쟁까지다. ●박종철 열사부터 6월항쟁까지 ‘1987’은 웃음과 반전, 향수와 서스펜스 등 상업적인 요소를 적극 활용하면서도 진정성을 끝까지 견지해 나가는 보기 드문 작품이다.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황당한 기자회견이 상징하는 은폐와 조작, 꼬리 자르기의 중심에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이 서서 영화를 관통한다. 이에 맞서 최검사(하정우), 윤기자(이희준), 교도관 한병용(유해진), 이부영(김의성), 대학 신입생 연희(김태리), 재야인사 김정남(설경구) 등이 차례차례 바통을 이어 가는 과정에서 진실의 퍼즐 조각이 하나둘씩 꿰맞춰지고, 결국 거대한 물줄기로 이어지게 된다. ●그 시절 노래, 건물 등 고스란히 자칫 캐릭터별로 파편화할 수 있는 이야기는 주요 등장인물 중 유일한 허구 캐릭터인 연희의 투입으로 짜임새를 갖춘다. “데모한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말하던 연희는 관객을 1987년의 한복판으로 이끌어 심리적인 간격을 좁히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연희가 마이마이 카세트로 즐겨 듣는 노래가 ‘보일듯 말듯 가물거리는 안개 속에 쌓인 길’이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이며, 연희가 거리를 내달려 올라간 버스 위에서 시청광장의 거대한 함성과 마주하는 엔딩 장면을 장식하는 노래가 민중가요 ‘그날이 오면’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악명 높았던 남영동 대공분실과 백골단이 활개치던 시위 현장, 불심검문이 판을 치던 그 시절의 종로 거리와 명동거리, 유네스코 빌딩 코리아 극장, 연세대 정문 앞, 그리고 인기 운동화였던 타이거까지 1987년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는 것도 ‘1987’을 보는 즐거움이다. ●30년 넘어 지난해 촛불 떠올려 영화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관객들에게는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난겨울 광화문 광장과 겹쳐지는 느낌이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이후 4년 만에 복귀한 장준환 감독은 “두려움 속에서도 온기와 양심을 저버릴 수 없어 한마디라도 내뱉어야 했던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었던 그해를 담고 싶었다”며 “지난해 겨울 우리가 촛불을 들고 나올 수 있었던 것도 1987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5세 관람가.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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