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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말화제] “우리 노래가 사회 밝히는 등불 된다면”

    “아카라카 칭 아카라카 쵸∼” 연·고전도 끝났는데 웬 응원구호? 연세대 출신 연예인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연세자원봉사단 창단 1년을 기념해 14일 열리는 ‘연세 나눔콘서트’에서다. 그동안 학교축제나 친선경기 때 개별적으로 교내 무대에 선 적은 있었지만 뜻을 모아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처음이다.●연세자원봉사단 창단 1년 기념 연세자원봉사단은 지난해 10월 학생, 교직원, 교수들로 구성돼 장애아동 돌보기, 극빈아동 공부방 도우미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 왔다. 콘서트 아이디어를 낸 것은 정치외교학과 김기정 교수. 자원봉사단에 대한 구성원들의 관심을 이끌어 낼 방법을 궁리하다가 8년 전 대학원 제자였던 가수 박진영(지질90)씨를 떠올렸다. 당시 박씨는 “기회가 되면 학교를 위한 동문 콘서트를 열고 싶다.”고 자주 말했었다. 김 교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박씨가 이번 행사를 위해 미국에서 귀국했고 가수 김광진(경영82), 클래지콰이의 호란(심리98)씨도 기꺼이 동참을 결정했다. 콘서트 총연출은 KBS ‘열린음악회’를 이끌어 온 오세영(성악76) PD가 맡는다.1980년대 인기곡 ‘연’을 작사·작곡한 그룹 라이너스 출신 조진원(생물77) 생물과학부 교수도 사적인 자리에서만 보여줬던 노래솜씨를 뽐낸다. 조 교수는 “이렇게 큰 무대는 거의 20년 만에 처음”이라면서 “연습은 별로 못했지만 목청껏 불러보겠다.”고 말했다.●이은미·신효범·고음불가 등도 참여 동문은 아니지만 가수 이은미, 신효범, 별, 파란, 임정희씨와 개그팀 ‘고음불가’도 콘서트의 취지에 공감해 자선공연에 나선다. 콘서트에 앞서 13일에는 아나운서 강수정(아동가족96), 탤런트 박진희(행정대학원06), 가수 박진영, 소설가 공지영(영문81)·김영하(경영86)씨 등 5명의 동문 및 재학생이 연세 자원봉사단 홍보대사로 임명됐다. 콘서트는 오후 7시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리며 입장은 무료다. 현장에서 소년소녀 가장돕기 성금 모금이 이뤄진다.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한게임배 마스터즈 서바이벌-2006년 하이라이트(5라운드)] 흑진 속에서 요석을 잡다

    [한게임배 마스터즈 서바이벌-2006년 하이라이트(5라운드)] 흑진 속에서 요석을 잡다

    박영훈 9단과 허영호 5단은 한국바둑리그에서 같은 영남일보 소속으로 주장과 5장을 맡고 있다. 애당초 영남일보는 강팀으로 분류됐지만 작년 한국바둑리그 전승의 주인공인 박영훈 9단이 반타작밖에 못 거두는 예상 외의 부진 때문에 9라운드까지 1승도 거두지 못하고 꼴찌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9월16,17일 벌어진 10라운드 신성건설과의 경기에서 4대0 전원 승리, 목마르던 1승을 거두고 꺼져가던 포스트시즌 진출의 마지막 등불을 켰다. 그 다음날인 9월18일 박9단과 허5단이 이번에는 마스터즈에서 적군으로 만났다. 단체전에서는 동지이지만 개인전에서는 모두가 적이다. 장면도(58∼65) 우하귀 일대는 흑의 세력이 좋지만 상변 흑 진영은 어딘지 어설프다. 백58부터 64까지 흑의 약점을 찔러왔을 때 흑65로 버틴 장면이다. 실전진행(66∼72) 결론부터 설명하면 흑▲는 무리수였다. 백66으로 움직이자 흑 넉점을 살릴 방법이 없다.72까지 흑진 속에서 잡혀 있던 백돌 두점이 흑의 요석을 잡으며 살아와서는 사실상 승부가 결정됐다. (참고도) 상변 흑 진영은 뒷맛이 나쁜 정도가 아니라 당장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에 흑1로 지키는 것이 정수였다. 백2와 흑3의 곳은 맞보기. 백2로 틀어막혀도 흑3으로 좌변을 갈라치면 아직 긴 승부였다. 유승엽 withbdk@naver.com
  • [이 한권의 책] 세상을 바꾼 법정/마이클 리프·미첼 콜드웰 지음

    1955년 미국에서 매카시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 존 헨리 폴크는 라디오 DJ로서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송연예계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블랙리스트’의 존재에 격분했고, 이에 대항하다가 그 자신도 모든 것을 잃게 된다. 폴크는 변호사를 구해 소송에 나섰고,6년간의 재판 끝에 결국 승소를 이끌어냈다. 재판은 공판중심주의에 의해 이루어졌고, 최종 판결은 배심원이 내렸다. 당시 이성이 마비된 사회분위기 속에서 이같은 판결이 내려질 수 있었던 것은 공판중심주의란 틀에서 변호인이 엄청난 세력을 등에 업은 원고측과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일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배심원들이 양심과 상식에 의거, 판결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꾼 법정’(마이클 리프·미첼 콜드웰 지음, 금태섭 옮김, 궁리 펴냄)은 미국사회에서 공판 중심주의와 배심제 하에서 이루어진 판결이 어떻게 세상을 바꿨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둘러싼 안락사 논쟁, 매카시 광풍속의 언론자유 투쟁, 여성의 투표권 행사를 가져온 사건 등 세상에 변화를 가져온 8가지 판결들을 선별해서 그 최종 변론을 모아놓았다. 역사적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 시초는 대부분 작고 일상적 사건이었다.1872년 여성운동가 수전 B 앤서니는 선거에서 투표했다는 죄로 경찰에 체포됐다.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지 않던 당시, 수전은 여성 참정권을 부여하는 헌법개정안을 위해 싸웠고, 이는 재판으로 이어졌다. 앤서니 변호인은 법정에서 ‘피고인의 투표행위가 위법하다는 유일한 이유는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참정권을 빼앗긴 사람은 노예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며 원고측과 뜨거운 공방을 벌였다. 수전은 결국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미국사회에서 여성의 권리와 지위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재판 50년 뒤 비로소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1975년 벌어진 카렌 앤 퀸란의 안락사 논쟁은 지금도 유사한 상황에서 길잡이로 작용하는 사건이다. 친구 생일파티에 갔다가 쓰러져 식물인간이 된 카렌에 대해 가족은 ‘치료법을 주지 못하고 깨어날 가망성이 없는 사람의 생명을 억지로 연장시키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산소호흡기 떼기를 거부하는 주치의측과 법정 공방을 벌여 승소했다. 이 판결 이후 안락사를 희망하는 생전 유언과 생명유지장치를 거부하는 사전 지시가 가능해졌으며, 병원과 의료시설에 윤리위원회가 설치됐다. 책은 이밖에도 19세기 스페인 선박에서 선상반란을 일으킨 뒤 미국땅을 밟은 노예들을 둘러싼 재판에서 이들을 위한 변호인으로 나선 존 퀸시 애덤스 전 대통령이 탁월한 변론으로 승소를 이끌어내는 이야기,18세기 초 영국 식민지 시절 뉴욕에서 잡지를 발간해 무능력한 총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선 사람의 변호인으로 나서 무죄판결을 받아낸 해밀턴의 빼어난 변론 등이 소개된다. 현재 우리 법조계도 공판중심주의와 배심제가 화두다. 사법의 민주화로 일컬어지는 이러한 공개된 법정 중심의 재판이 이룩되면 전관예우, 유전무죄·무전유죄 같은 논란도 많이 줄어들지 모른다. 이 책이 보여주는 배심제에서 이루어진 판결과 변론 중심의 생생한 재판과정이 혁신적인 변화가 요구되는 우리 사법체계에도 중요한 시금석이 되지 않을까.2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사설] 민주화의 취약성 보여준 태국 쿠데타

    20세기 말 아시아 여러 나라와 함께 민주화의 문턱을 넘었던 태국에 다시 쿠데타가 발생했다. 태국은 1932년 이후 19차례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마지막 쿠데타는 14년 전에 발생한 친위 쿠데타였으며 실패한 쿠데타였다. 당시 쿠데타를 막아낸 것은 시민들이었고, 민중의 힘에 의한 민주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번 쿠데타는 아시아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쿠데타를 불러들인 것은 탁신 총리 자신이었다.CEO형 총리인 그는 2001년 집권후 강력한 리더십으로 정치 안정을 이뤘다. 태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지난해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경제사정의 악화, 가족과 측근의 비리, 반대 세력에 대한 독선적 태도 때문에 곧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됐다. 태국 경제는 지난해 4%의 저성장에 머물렀다. 무역수지 적자는 과거 9년동안 최대인 86억달러를 기록했다. 가족보유 회사 주식을 외국에 팔아 1조 8000억원을 챙기고도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 비판 언론에는 소송을 남발했다. 사임 발표와 번복을 일삼는 오만함도 시민들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민주화가 걸음마 단계인 많은 나라들처럼 태국도 정책대결보다는 상대편의 도덕적 실수가 정쟁 대상이 되곤 했다. 그만큼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태국의 정변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더 성숙해가기 위해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 [김종면기자의 시사 고사성어] 영書燕說(영서연설)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말하다. 춘추시대 초나라 수도 영()에 사는 사람이 어느날 밤 연나라 재상에게 편지를 쓰는데 주위가 어두워 촛불을 든 이에게 거촉(擧燭), 즉 “촛불을 높이 들라.”고 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만 그 두 글자를 편지에 써넣고 말았다. 물론 편지 내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편지를 받은 연나라 재상은 거촉이란 글자를 보고 무척 기뻐했다.“등불을 들라고 하는 것은 밝음을 존중한다는 뜻이고, 이는 곧 현명한 사람을 천거해 요직에 쓰라는 말이겠다.” 연의 재상이 왕에게 아뢰자 왕 또한 매우 기뻐하며, 그대로 행하니 선정이 펼쳐졌다고 한다.‘한비자’ 외저설좌(外儲說左) 상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바다이야기’ 파문과 관련,KBS와의 회견을 통해 대 국민 사과를 하며 “비싼 수업료라고 생각하고 인내해달라.”고 했다. 그 말의 대담무쌍함이라니…. 많은 사람들은 허탈을 넘어 분노를 토해내고 있다. 대통령은 왜 애먼 국민에게 수업료 비싼 ‘경험의 학교’를 다니라고 하는가. 영서연설의 고사는 제멋대로 해석의 전형으로 통하지만, 어쨌든 연나라 재상의 오해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자의적인’ 말씀은? 국민의 도덕적 해이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jmkim@seoul.co.kr
  • 전남 무안 백련지 가다

    전남 무안 백련지 가다

    ‘백련의 고장’ 무안을 가다 법정스님은 아름다운 무안 회산 백련지와 처음으로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이 읊었다.“한여름 더위 속에 회산백련지를 찾아 왕복 2000리를 다녀왔다. 아, 그만 한 가치가 있고도 남았다. 어째서 이런 세계 제일의 연지(蓮池)가 알려지지 않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마치 정든 사람을 만나고 온 듯한 두근거림과 감회를 느꼈다.” 예기치 않은 장대비가 전국을 물바다로 만들더니 섭씨 30도가 넘는 폭염이 연일 찜통으로 만들고 있다. 살아 있는 생물들이 힘들고 지쳐갈 때 이 더위를 반기는 것이 있다. 바로 ‘연꽃’이다. 멀리 서역에서 건너와 진흙땅에 꽃을 피우는 기이한 연(蓮). 비록 뿌리는 진흙에 박고 있어도 고귀하고 깨끗한 꽃을 피우는 연꽃. 그 향기는 멀어질수록 향기로워 송나라 학자 ‘주돈이’가 꽃 중의 군자라 노래하기도 했으며 이미 불가에서는 가장 신비하고 고귀한 꽃으로 알려져 있다. 물결치는 초록의 연잎들과 하얗고, 연분홍의 청초한 연꽃을 만나러 전남 무안으로 떠나보자.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폭염을 기다리던 연꽃이 드디어 그 고운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연꽃은 대부분이 분홍빛의 홍련으로 희고 맑은 백련이 아주 드물다. 전남 무안의 회산 백련지는 동양 최대의 백련 자생지로 둘레 3㎞, 넓이 약 10만평의 연못을 백련이 뒤덮고 있다. 바로 여기서 오는 11일부터 15일까지 ‘8월의 연풍연가(蓮風蓮歌)’란 주제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백련 축제가 열린다. # 연꽃의 바다 서울에서 폭염을 뚫고 4시간을 달려 도착한 전남 무안. 무안에서 백련지까지 자동차로 20분. 계속되는 무더위로 차창을 내리기가 겁이 난다.‘정말 이런 무더위에 연꽃을 보러 사람들이 올까.’라는 의문이 든다. 갑자기 차창 너머로 초록의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끝도 보이지 않고 넘실대는 연잎의 바다. 또 초록의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주먹만한 흰 연꽃. 참 놀랍다. 아니 신기하다.8월의 이글거리는 태양도, 섭씨 35도를 넘는 폭염도 잊은 채 차를 세우고 내렸다. 이렇게 전남 무안의 회산백련지와 처음 만났다.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푸른 연잎으로 뒤덮인 백련지. 넓은 잎방석을 깔고 앉아 청초하게 고개를 내민 연꽃은 마치 어둠을 몰아내는 등불처럼 환하게 백련지를 수놓고 있다. 둑방 앞 평상에 앉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파리를 들썩거리며 꽃대를 흔드는 연꽃의 모습은 꿈속에서 본 선녀들의 군무 같다. 자연이 만든 황홀함 그 자체이다. 폭염을 뚫고 여기까지 온 고생은 어느새 사라진다. 온 나라를 가마솥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뜨거웠던 불볕 더위를 이겨낸 백련은 송이가 탐스럽고 잎도 건강한 쪽빛이 그만이다. 연꽃은 7월 초순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서 9월말 서리가 내릴 때까지 꽃이 피고 진다. 꽃이 가장 크고 아름다우며 그 향기가 그윽하며 개화기간도 길다. 하지만 절정기는 이맘때이다. 2001년에는 아시아권에서 가장 큰 연꽃밭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무안의 회산 백련지.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일로읍 아래 영산강 유역에 간척사업을 벌이면서 750만평의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저수지이다. 하지만 1980년대 영산강 하구언이 생기면서 물 공급이 원활해졌고 회산지는 잊혀져 가는 저수지였다. 이런 회산 백련지가 화려한 변신을 준비한 것은 대략 60년 전.1979년 작고한 정수동씨가 옮겨 심은 12포기의 연꽃이 번져나가 이렇게 커다란 연꽃 군락을 이루었다. 인근 주민들이 마을 삼아 다녀가던 연꽃방죽은 90년대 들어서 유명해졌다. 회산 백련지에는 이제 백련뿐 아니라 홍련, 왜개연, 개연, 어리연, 가시연도 자생한다. 하지만 워낙 백련이 많아 다른 연꽃은 잘 보이지 않는다. 특히 진입로 주차장 옆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가시연은 멸종위기의 희귀식물로 물이 맑은 곳에서만 산다. 가시가 돋친 잎을 찢고 솟은 자색 꽃도 신비스럽기만 하다. ■ 연꽃만 보고 오면 정말 ‘무안’ 하지요 # 연꽃의 화려한 변신 회산 백련지에는 백련이 가장 많다. 백련은 꽃송이가 크고 탐스러울 뿐만 아니라 뿌리가 매우 굵고 실하다. 꽃과 잎은 연차로, 뿌리는 연근(蓮根)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식물이 바로 연이다. 또 연꽃이 지고 난 뒤 생기는 열매인 연실(蓮實)은 집안을 치장하는 데 사용하거나 염주, 목걸이 등 장신구나 한약재로도 사용한다. 연꽃과 조우하며 마음의 편안함을 찾았다면 백련지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유리온실’을 찾아 땀도 식히고 맛있는 연꽃 음식을 맛보자. 아이들이야 연꽃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이 단연 인기지만 더위의 갈증을 풀어 줄 ‘백련차(白蓮茶)’를 권하고 싶다. 무안의 특산품인 분청사기로 만든 커다란 찻그릇에 연잎을 우려낸 연차를 넣고 얼음을 동동 띄운다. 거기에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연꽃을 하나 올리면 백련차 완성. 시원한 연차를 찻잔에 담아 입안에 넣으면 그윽한 연꽃의 향과 시원함이 더위를 잠시 잊기에 그만이다. 배가 출출하다면 연잎으로 만든 칼국수를 ‘강추’다. 꽃 중의 군자(君子)라는 연꽃. 무더위의 끝자락에서 만난 아름다운 모습과 시원하고 다양한 먹을거리에 무더위와 속세의 때를 씻기에 충분한 여행이다. # 무안에는 볼거리 무한해요 마늘밭과 바다, 그리고 하늘이 맞닿은 용정리 월두마을은 달머리라는 우리말 지명을 가진 갯마을이다. 마을 앞 갯벌은 전국 최초로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곳으로 생물 다양성과 자연 상태의 원시성이 그대로 보전되어있다. 뜨거운 땡볕을 맞으며 갯벌에 발을 디뎠다. 그런데 햇살이 부서지는 갯벌에 낯선 이방인의 모습을 경계하며 무엇인가 ‘통통’ 뛰며 사라진다. 분명 게는 아니고 무엇일까. 뻘에 푹푹 빠지는 발로 어렵사리 잡아보니 말로만 듣던 ‘짱뚱어’. 어른 손가락만 한 짱뚱어가 뻘을 뛰어다니는 생태계의 보고. 게와 조개 등은 기본으로 아이들의 살아있는 자연학습장으로 그만이다. 마을에서 화장실과 간단한 샤워시설을 만들어 놓아 아이들과 하루를 즐기기에 좋다. 월두마을 어촌계장 김해중(011-633-2713)씨에게 문의하면 장화, 호미 등도 빌려준다. 또한 해송과 갯벌의 아름다운 톱머리 해안도 좋다 전남 무안에는 맛있기로 소문난 음식들이 자자하다. 무안의 양파를 먹인 암소 한우를 맛볼 수 있는 승달가든(061-454-3400)의 소고기 육회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신선한 고기가 아니면 먹을 수 없다는 생고기를 고추장, 다진마늘, 참기름을 섞어서 만든 양념장에 찍어먹는 그 맛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쫄깃하고 담백한 고기의 육질과 맛이 그대로 느껴진다. 고소한 소고기 샤부샤부도 일품. 사골을 고은 육수에 고기를 살짝 담가 식초간장에 절인 무안 양파와 함께 먹으면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무안의 최고 명물은 산낙지. 젓가락에 말아서 먹기가 좀 그렇다고 해서 나온 것이 ‘기절낙지’. 여러 식당이 기절낙지 간판을 걸고 있지만 그 중에서 동촌(061-452-0745)이 유명하다. 산낙지를 살살 빨래판에 문질러 낙지가 살짝 정신을 잃었을 때 먹는데 그 맛 또한 놓치면 후회한다. 또한 머리 부위는 살짝 삶아 숯불에 구워 같이 내는데 그것 또한 별미. ■ ‘고흐의 다리’ 밑 연꽃 충남 태안의 청산수목원(041-675-0656)은 주변의 풍경과 빼어난 조화를 이룬 연꽃밭으로 알려진 곳이다.1만 5000평의 연못에 백련, 홍련은 물론 색색의 아름다운 수련이 활짝 꽃을 피웠으며 부레옥잠 물양귀비 등 수생식물도 함께 즐길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즐겨 그린 랑그루아 다리를 본떠 만든 ‘고흐의 다리’가 운치 있고, 다리 건너 만(卍)자 2개를 겹쳐놓은 듯한 꽃길도 재미있다. 수목원은 연꽃 축제가 열리는 25일까지만 일반에 개방된다. 충남 부여의 궁남지는 부여를 도읍지로 한 백제 무왕이 634년 별궁에 조성한 것으로 문헌상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궁남지를 보고 경주에 안압지를 만들었으며 일본서기에 일본이 궁남지의 조경기술을 받아들였다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볼 때 일본 정원 조경의 원류로 볼 수 있다. 현재는 당시의 3분의1 정도의 규모로 복원됐다. 궁남지의 1만여평 연못에서는 홍련, 백련, 수련 등 여러 종류의 연꽃을 한번에 만날 수 있다. 특히 수련이 아름다워 연꽃철이 되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몰려드는 명소이다. 부여관광안내소 (041)830-2523 경기도 양평 세미원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평 양수리에 거대한 연꽃단지이다. 2만 9000평 규모의 세미원은 연꽃 가득한 대형 연못이 6개. 마음을 닦자는 의미로 빨래판이 산책로의 보도블록을 대신하고 꽃밭 주변에는 한국의 시들을 적은 갓을 쓴 등이 저녁이면 불을 밝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이들 연꽃단지는 경기도가 연꽃을 통해 팔당상수원의 수질을 정화하고 연 재배 확대를 통해 농가소득도 향상하기 위해 조성한 곳.230종의 연꽃과 수련에 이어 창포·물달개비·부들 등 200종의 수생식물도 자라고 있다.(031)577-3855,www.semiwon.or.kr
  • [깔깔깔]

    ●묘비명 한 남자가 사랑하는 아내가 숨을 거두자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넣었다. ‘내 인생의 등불은 꺼졌도다.’ 몇 년이 지나 뒤 재혼할 여자가 생긴 그 남자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죽은 아내의 묘비에서 그 구절을 없애는 게 좋겠지.” 친구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다만 다음 구문을 덧붙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뭔데?” “‘그러나 또 새로운 등불이 켜졌도다.’라고….”●깜찍한 유치원생 교사:여러분,10년 전에는 없었는데, 지금은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유치원생 :저요! 교사:그래, 말해보렴. 유치원생 :그게 바로 저라니까요.
  • ‘연개소문’ 주연 유동근 · 이태곤

    ‘연개소문’ 주연 유동근 · 이태곤

    안으로는 180여 명의 대신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한 뒤 보장왕을 옹립해 정권을 장악한 쿠데타의 장본인. 밖으로는 당나라의 침입을 네 차례나 막아내며 바람 앞에 등불이었던 조국을 구해낸 영웅. 고구려 말기 최고 권력자였던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입장에 따라 분명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두 남자가 연개소문을 만난다. 관록파 배우 유동근과 새내기 연기자 이태곤이다. 새달 초 막을 올리는 SBS 100부작 대하사극 ‘연개소문’(연출 이종한, 극본 이환경)에서다. 유동근은 중·장년 연개소문을, 이태곤은 젊은 시절 연개소문을 연기한다. # 부드러운 남자 이태곤, 거친 장군으로 변신하다 내용적으로는 비판이 많았지만 주말극 가운데 최고 인기를 끌고 있는 SBS ‘하늘이시여’에서 남자 주인공 왕모 역할을 했던 이태곤이 부드러움을 털어내고 갑옷을 챙겨 입는다. 모델 활동과 광고 외에 연기 경력이 일천했던 그는 드라마 첫 출연에 주인공이라는 행운을 잡았고, 스타덤에 올랐다. 쉬지 않고 같은 시간대 드라마에 얼굴을 내미는 것이 부담스러울 터인데 “기회가 왔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영화 ‘글래디에이터’나 ‘브레이브 하트’를 50번이나 넘게 봤다고 한다.‘장희빈’,‘용의 눈물’,‘태조 왕건’ 등 국내 사극도 즐겨 보기는 마찬가지. 무엇보다, 왕모는 부드럽고 착한 남자의 전형이었으나 연개소문은 강한 남자로 전혀 다른 색깔의 캐릭터라 강행군을 결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당당한 로맨스도 있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다만 지금 대한민국 남성상은 ‘닭살 애교’가 더 먹히는데 연개소문은 상당히 거친 이미지라 시청자들이 어색해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역시 사극 대사가 어렵다. 새로운 용어도 많아 사극 재방송을 열심히 보며 연습하고 있다는 이태곤은 첫 사극 분장에 “머리에 아령을 얹어놓은 것 같다.”고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감독님이 선물한 책으로 연개소문을 차츰 알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전쟁 영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 중후한 남자 유동근, 새로운 인물 창조에 나서다 사극 전문 연기자라고 해도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 사극으로 잔뼈가 굵은 유동근은 먼저 연개소문의 오검(五劍)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자신도 멋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오행에 근거를 뒀다. 상대가 쓰는 검에 따라 사용하는 검을 달리했고, 때문에 연개소문은 언제나 이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갑옷 무게만 18㎏이다. 오검까지 합하면 27∼28㎏ 정도 나간다.”면서 “너무 무거웠고 말도 힘들어했다.”고 미소를 띠었다. 그러더니 불쑥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일견 그냥 꺼낸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영웅을 제대로 창조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감이 있는데, 한순간 갑옷 무게가 무겁다고 한 것에 대해 시청자들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사극이 방영될 때마다 나오는 왜곡 문제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만큼 연개소문은 문제적인 인물이다. 유동근은 “당 태종과 라이벌 관계였고, 지략가였던 면모를 긍정적으로 그려 나가겠지만, 부정적인 면도 다뤄지기 때문에 미화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경쟁적 관계에 있는 MBC 퓨전 사극 ‘주몽’에 대해서도 살짝 견해를 물었다.“앞다퉈 고구려 드라마가 나오는 것은 반가운 일이며 ‘주몽’도 흥미롭고 재미있다.”면서 “드라마 ‘연개소문’은 멋을 앞세우기보다 조심스럽고 진실하게 영웅의 발자취를 쫓아가는 정통 사극이 될 것”이라며 차별점을 분명히 했다.“항상 작품에 임할 때마다 떨린다.”고 자세를 낮춘 유동근이 자신의 바람대로, 여느 드라마보다 힘이 있고 남성적인 작품을 일궈낼지 주목된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녹색공간] 녹색 아래 생긴 여유/이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오늘은 몇 가지 서로 떨어져 있는 이야기를 섞어 보려고 한다. 얼마 전에 생면부지의 치과의사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글을 받았다. 사연은 아주 오래 전에 내가 해양미생물학자의 얘기를 들으며 얻었던 착상에 대한 글로부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인터넷을 떠다니는 어느 시간관리 전문가의 강연 내용과 그리고 도종환 선생의 틈에 대한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통하는 구석이 있다. 또한 여름날 홍수를 막는 숲의 기능에도 이 사연과 연결되는 끈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나씩 해보려고 한다. 치과의사의 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교수님의 이러한 가설이 치아의 플라그를 구성하는 미생물에게도 적용될 것 같은데 가설이 적용된 관련 자료가 있으면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해양미생물학자는 바다에 떠다니는 알갱이를 긁어모으는 물질을 미생물이 분비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필요한 자원을 알갱이와 알갱이 사이에 저장하여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는 노력이라 했다. 나는 토양 미생물이 토양 알갱이를 모으는 것도 같은 이치리라 보았다. 치과의사는 이빨의 플러그도 미생물이 그런 사연으로 만들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성가신 치아의 플러그가 미생물 입장에서 보면 살아남기 위한 사투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알 듯 모를 듯. 솔직히 나도 그것이 치과의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른다. 시간관리 전문가의 강연 내용은 좀 길지만 줄여보면 이렇다. 초대 받은 연사는 항아리에 굵은 돌을 가득 채우고 채워졌느냐고 청중에게 묻는다. 청중은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한다. 그는 항아리 안으로 작은 모래를 채우고 다시 묻는다. 대답을 주저하는 청중 앞에서 그는 다시 항아리 안에 물을 부어넣는다. 그의 교훈은 이렇다.“굵은 일부터 먼저 하라. 이것이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간관리의 원칙이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큰 틈은 굵은 일 사이에나 생긴다. 토양 미생물이 알갱이를 모아 굵은 떼알을 만들면 틈이 늘어나는 것과 뭔가 통하는 데가 있을 듯하다. 도종환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창 반쯤 가린 책꽂이를 치우니 방안이 환하다/눈앞을 막고 서 있는 지식들을 치우고 나니 마음이 환하다/어둔 길 헤쳐간다고 천만근 등불을 지고 가는 어리석음이여” 다시 내가 꽤 공부를 한답시고 시간을 보낸 식물과 흙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식물은 유기물을 만든다. 미생물은 유기물을 먹고 삶을 꾸려간다. 유기물을 잘게 부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아주 가늘고 긴 분자 크기의 물질을 만들어 몸 밖으로 내보낸다. 아니, 그 귀중한 물질을 왜 밖으로 보낼까? 그렇게 빠져나온 긴 분자는 흩어져 있는 흙 알갱이를 서로 이어 떼알을 만든다. 굵어진 떼알 바깥 부분과 떼알들 사이에 생기는 틈은 영양소와 물 등 자신의 자원이 들어설 자리가 된다. 미생물과 식물 뿌리, 심지어 작은 동물들은 그 틈과 물질을 이용한다. 더없이 넓은 녹색 공간의 흙에는 이렇게 작은 틈들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비가 내리면 물이 틈 속으로 흘러들 여지가 있다. 떼알 사이에 있는 틈의 크기를 모은 부피가 크면 클수록 많은 물이 흙 속에 저장된다. 그렇게 하여 하류로 흘러가는 물의 양이 줄어든다. 이것이 숲이 있으면 홍수를 줄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가 된다. 땅 속에 생긴 여유 공간 덕분에 더 많은 물이 저장되어 하류로 몰려가는 물의 양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녹음 아래 여유 공간이 땅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땅 속에도 있다. 그 틈 안과 위에서 사람의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그 틈 안에서는 미물도 여유를 가진다. 이것을 나는 “녹색 아래 생긴 여유”라고 말한다. 지난번에 내가 “삶은 오직 틈 속에 내리건만”하며 뇌까린 까닭은 이런 이야기들을 밑바탕에 두고 있다. 이도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능소화/김완하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능소화/김완하

    몇 줄기 비 뚫고 닿은 영랑 생가 모란은 지고 은행나무 하늘 찌르고 있었다 은행 나뭇가지 끝마다 드리운 꽃등 붉디붉게 번지고 있었다 능소화 은행나무 허리 껴안고 하늘 오르며 빗속 등불 굳게 지키고 있었다 허공으로 가는 능소화 사랑, 저토록 가파른 길 트고 있었다
  • 儒林(581)-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7)

    儒林(581)-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7)

    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7) 따라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알성시의 책제(策題)들은 대부분 정치와 관련된 질문들이었다. 예를 들면 ‘그대가 공자라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하고 조광조에게 물었던 중종의 책문을 위시하여 세종대왕은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은 무엇인가.’, 혹은 ‘어떻게 하면 좋은 인재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정치적인 질문을 알성시를 통해 묻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명종은 ‘육부의 관리를 어떻게 개혁하여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가 하면 ‘교육이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라고도 묻고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치른 후 선조는 ‘(일본과)화친하는 것이 좋으냐, 정벌하는 것이 좋으냐.’는 나라의 생사가 걸린 양자택일의 책문을 던지고 있고, 가장 책문을 즐겨했던 임금은 조광조를 총애하다가 마침내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던 중종으로 알려져 있다. 중종은 ‘그대가 공자라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하는 책문 이외에도 ‘외교관은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처음부터 끝까지 잘 하는 정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정치적인 질문을 던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광조를 발탁하였던 이듬해 1516년 ‘별시문과’에서는 다음과 같은 시험문제까지 내고 있다. ‘술의 폐해는 참으로 오래되었다. 술의 폐해가 문제되었던 것은 어느 시대부터인가. 우임금은 향기로운 술을 미워했고, 무왕은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으며, 위나라의 무공은 술 때문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는 시를 지었다. 이토록 오래 전부터 술의 폐해를 염려했으나 아직까지 뿌리를 뽑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술의 폐해를 논하라.’는 내용의 책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임금이 내린 책문 중에서 가장 유니크하고 독창적인 것은 광해군이 내린 책문이다. 훗날 반정으로 폐위가 된 광해군은 그로 인해 후세의 사가들로부터 변덕스러운 군주로 낙인찍혀 죽은 후에도 임금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폭군 연산군과 더불어 ‘군(君)’으로 격하하였지만 광해군은 실제로 개혁에 투철한 선각자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지금 가장 나라에 시급한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1616년 겨울 증광회시에서는 조선 역사상 가장 돌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면 반드시 돌아오니 해이고, 밝으면 반드시 어두워지니 밤이로다. 그런데 섣달그믐밤에 꼭 밤을 지새우는 까닭은 무엇인가. 또한 소반에 산초를 담아 약주와 안주와 함께 웃어른에 올리고 꽃을 받치는 풍습(椒盤頌花:두보의 시에 나오는 노래의 한 구절)과 폭죽을 터트려 귀신을 쫓아내는 풍속은 섣달 그믐밤에 밤샘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침향나무를 산처럼 얹어서 쌓고 거기에 불을 붙이는 화산(火山)풍습은 언제부터 생긴 것인가. 섣달그믐 전날 밤 하던 액막이행사인 대나(大儺)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함양의 여관에서 주사위놀이를 한 사람은 누구인가.(두보는 今夕行이란 시에서 홀로 긴 밤을 지새우며 여관에서 주사위놀이를 하며 자신의 고독을 달래었다고 노래한 적이 있다.) 여관에서 쓸쓸하게 깜빡이는 등불을 켜놓고 잠을 못 이룬 사람은 왜 그리하였을까.…”
  • [사고] 재소자들의 ‘등불’을 모십니다

    서울신문사와 KBS가 공동으로 마련하고 법무부가 후원하는 교정대상 시상식이 5월19일 서울신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립니다. 올해로 24회째를 맞은 교정대상은 수용자들이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고, 선량한 시민으로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교정교화 업무에 헌신한 교정공무원과 교정위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교정행정 부문은 교정공무원, 사회참여 부문은 참사랑을 실천한 스님·신부·목사·독지가 등 교정위원들이 그 대상입니다. 대상 1명, 본상 8명, 특별상 9명 등 모두 18명에게 시상합니다. 특히 올해부터는 상금이 대상은 500만원에서 1000만원, 본상은 300만원에서 700만원, 특별상은 2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크게 올랐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상의 내역 ●대상 1명 1000만원 및 부상 ●본상 교정행정부문 면려상·성실상·창의상·교화상 각 1명 700만원 및 부상 사회참여부문 박애상, 자비상, 자애상, 공로상 각 1명 700만원 및 부상 ●특별상 교정행정부문 면려상·성실상·창의상·교화상 각 1명 500만원 사회참여부문 박애상, 자비상, 자애상, 공로상 각 1명 500만원 교정발전특별상 1명 500만원 ■ 시상식 2006년 5월19일(목) 오전 11시, 서울신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 문의처 서울신문 문화사업부 ☎(02)2000-9753 ■ 후원 법무부 ■ 주최 서울신문·KBS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환그룹-최종환 명예회장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환그룹-최종환 명예회장家

    올해로 건설 외길 60주년을 맞는 삼환기업은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1세대 건설기업이다. 대림산업·삼환기업·삼부토건 3개사만 명맥을 잇고 있지만 창업주가 살아 있는 곳은 삼환뿐이다. 대부분의 건설기업은 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전후에 부도가 나 좌초됐다. 삼환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린다.70∼80년대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빌딩을 지은 주인공이자 중동에 처음 진출해 중동 붐을 일으킨 기업이지만, 최근엔 80년대에 비해 해외 수주액이 급감하는 등 예전보다 인지도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부침이 심한 건설업계에서 꾸준한 수익성을 유지하며 ‘환갑’의 값진 전통을 이어간다는 데 이견이 없다. 삼환은 올해 창업 60년을 맞아 국내외로 외형을 확장, 건설 명가로서 제2의 도약을 꾀하고 있다. ●창업 60년 맞아 제2의 르네상스 꿈꾸는 삼환 삼환기업은 올해를 제2 해외 르네상스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공항 확장공사 입찰에서 최저가를 써 1순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돼 계약을 협의 중이다. 건축비가 지난해 삼환기업 해외 매출(600억원)의 4배 규모인 2500억원이다. 해외유전 사업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연 100억원대 수익을 올린 마리브 유전 투자에 이어, 지분투자(4.9%)로 참여한 베트남 가스전 개발사업이 올해 하반기부터 수익을 낸다. 이밖에 지분투자(1.6%)를 한 예멘 마리브 LNG 개발사업도 오는 2009년부터 수익을 낼 전망이다. 국내에서는 3조원대 규모의 대우건설 인수전에도 참여, 건설기업 전통 명맥을 잇기 위해 전력을 쏟고 있다. 창립자인 최종환(82) 삼환그룹 명예회장은 1924년 12월29일 최상림씨와 김림자씨의 5남2녀 중 4남으로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종로의 종(鍾)자에 돌림자인 환(煥)자를 붙여 지은 이름이다. 양반이 광화문 중심에서 사대문 밖으로 쫓겨나 사는 것을 몰락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사대부 출신인 그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면서 광화문 중심에서 다동으로, 이어 효자동, 종로4·5가 등으로 밀려났고 그는 종로 4가에서 태어났다.‘종환’이란 이름에는 사대문 안은 벗어나지 않았다는 안도의 뜻이 담겨 있다는 회고다. 훗날(1980년) 창덕궁이 내려다 보이는 종로구 운니동에 20층 규모의 삼환사옥을 세운 것을 두고 그가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제 점령기에 초등학교(어의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를 다닌 그는 글재주가 뛰어나 졸업할 때까지 각종 작문 대회에서 1등을 휩쓸었지만 학업에 뜻을 두진 못했다. 열 살이 되던 해에 궁핍한 살림에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일찌감치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건설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형들과의 연관이 깊다. 큰 형인 고 명환씨와 둘째 형인 고 영환씨가 졸업 이후 수도·난방공사 자재를 생산·시공하는 스기야마 제작소에 들어갔는 데 회사에서 쓰다 남은 자투리 파이프를 집에 가져와 가공, 다시 납품하는 식으로 돈을 벌면서 1933년 경동기계제작소를 설립했다. 그는 어의보통학교에 이어 2년제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뒤 18세가 되던 1940년 형들의 회사인 경동에 합류했다. ●약관의 나이에 창업…미군 공사로 국내 기반 삼환은 설립 이후 60년대 초반까지 줄곧 주한미군에서 수주한 공사에 전념했다.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국 공병대에서 크고 작은 공사를 발주했는데 토목·수도·난방 등 업종별로 공사를 따로 주지 않고 한 업체에 모든 공사를 맡기는 식이었다. 그는 경동기계제작소안에 공사부를 설립해 영업부장으로 뛰며 미군 공사를 수주했다. 한발 더 나아가 하청업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물 한 살이던 1946년 3월15일 오늘의 삼환그룹 효시인 삼환기업공사를 설립했다. 큰 형과 둘째 형, 그리고 최 명예회장 삼형제가 합심해 만든 회사란 뜻에서 지은 이름이지만 실질적인 소유주나 최고경영자는 최 명예회장이다. 회사 설립후 8개월 동안 이룬 공사실적만 총 26건 130만원이다. 당시 공무원 월급이 1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액수다.1948년 가을 을지로 2가 119번지 53호를 매입해 신사옥도 마련했다. 1949년에 착공한 강원도 영월 등 7개 광산지역의 미국인 광산기술자용 주택공사는 당시 업계의 부러움을 산 초대형 공사였다.1950년 6·25로 공사는 중단됐고 건물은 불에 타버렸지만 이 공사는 훗날 새옹지마격으로 그에게 전쟁 이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됐다. 서울 수복후 미군 공사 관계자는 그를 반도호텔(현 롯데호텔)로 불러내 큰 궤짝 하나를 내놓았는데 그 속에는 당시 2000만원이 들어 있었다. 불에 타버려 흔적조차 사라진 건물의 공사비를 뒤늦게 받은 것이다. 주식회사로 전환한 것은 전란 이후 1952년 9월의 일이다. 서울 수복후 전후 복구공사에 힙입어 사세를 키워나가던 중 삼환은 당시 주주 10명이 총 주식 2만주를 발행하면서 주식회사가 됐다. 그 중 최 회장이 1만주, 둘째 형 영환씨가 5000주, 큰 형 명환씨가 500주를 가졌다. ●국내 ‘중동 붐’ 조성…횃불신화로 국제 명성 쌓아 1961년 ‘5·16’은 새 전기를 가져왔다. 수의계약으로 이뤄지던 관급공사가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신문에 종종 입찰공고가 나는 일이 생겼고 삼환은 국내 주요 공사를 맡는 ‘건설 명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5·16 이후 삼환이 따낸 최초의 관급 공사는 1962년 발주한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 호텔이다. 이어 경부·호남·영동·남해·동해고속도로 등 각종 토목 공사에 참여했고, 국립극장, 삼일빌딩, 조선·프라자·신라 호텔, 지금은 사라진 남산외인아파트, 여의도 전경련 회관, 국립묘지 현충탑, 포항제철(현 포스코) 공장 등을 지으며 주택·오피스빌딩·토목·플랜트 등 각 분야에서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삼환은 국내사업에 만족하지 않았다. 해외진출 가능성을 계속 탐색하던 최 명예회장은 1963년 월남 사이공(호찌민)에 지사를 설립하면서 첫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정국 혼란으로 4개월 만에 철수했지만 이후 196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한국 업체 최초로 지사를 설립한 데 이어 1973년 국내 업계 최초로 중동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했다. 삼환은 사우디에서 네번 연거푸 고배를 마신 뒤 다섯번째 카이바∼알울라고속도로(175㎞) 입찰에서 2400만달러 규모의 공사를 따내며 국내 중동 진출 1호 기업이 됐다. 완공 때까지 3년간 자재 공급난, 종교 문제 등 시행 착오로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어 사우디 최대 규모인 제다시(市) 전체를 뜯어고치는 미화사업을 맡으면서 행운을 잡았다. 미화공사를 메카순례기간 전까지 끝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횃불을 켜놓고 야간공사를 강행하던 것을 파이잘 국왕이 보고 감동을 받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삼환은 6000만달러 규모의 대형 공사를 수의계약하게 됐고 ‘횃불신화’라는 말을 남기며 국내 건설업체의 중동 진출 붐을 조성하는 등 명성을 널리 알리는 개가를 올렸다. ●해외 프론티어의 꿈…정체된 90년대 80년대 들어서는 해외시장에 더 집중했다.1978년 미수교국이던 예맨에 진출했고 이를 계기로 1984년 북예맨 마리브 유전개발에 참여하면서 원유사업을 시작했다. 이어 요르단, 파푸아 뉴기니아, 알래스카, 방글라데시, 사할린 등 시장을 개척했다. 국내 기술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국제 모임에 적극 참여,1982년 아시아 서태평양 건설연합회인 아이포카(IFAWPCA) 5대 회장에 추대됐고 재임시절 세계건설인대회도 제창했다.1990년대 들어서는 회사 일 보다 민간 외교에 시간을 쏟았다.1992년 한·소 경제협력회 2대 회장으로 선임됐고 재차 연임됐다. 러시아의 정치·경제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성과를 이루지 못한 점은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아 있다. 이런 탓에 90년대 들어 삼환의 해외 실적은 급감했다. 건설협회에 따르면 삼환의 해외공사 수주액은 1982년 당시 5억 8834만 8000달러(한화 6000억원)였지만 10년 후인 1992년에는 10분의1 수준인 624만 4000달러에 그쳤다. 국내 건설 업계의 주요 테마인 아파트 실적도 많지 않다.90년대 후반부터 업계가 경쟁적으로 환상을 담은 아파트 브랜드와 광고에 집중하며 수주전에 열을 올릴 때에도 삼환은 아파트 광고를 하지 않았다. 최 명예회장은 오히려 당시 시류에 대해 자서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를 통해 “안쓰럽다.”는 평을 내놓았을 뿐이다. 한 때 9개에 달하던 계열사는 현재 6개로 정리됐다. 키친아트로 유명한 양식기 제조업체 경동산업(60년)과 코카콜라 등 청량음료 제조업체인 우성식품(69년)은 모두 1990년대 말 정리됐다. 태양관광(관광·77년)은 삼환엔지니어링(기술용역·76년)에 통합돼 삼환기술개발이 됐지만 설계 업무는 거의 하지 않고 관광업도 계열사 직원 출장을 위한 발권 업무 정도만 한다. 이밖에 우성개발(67년), 삼환까뮤(78년), 삼환종합기계(79년), 신민상호신용금고(78년), 회현상사(78년) 등은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건설 명가로서의 국내 입지와 안정적인 매출은 줄곧 유지하고 있다. 건설 계열사를 가진 한화그룹의 1000억원대 대한생명 리모델링 공사를 지난해 수주했고,2007년 준공되는 건축비 595억원 규모의 팬택계열 서울 상암동 R&D센터도 짓고 있다. 삼환기업은 2005년 기준 매출 6612억원, 당기순이익 500억원을 기록했다. 올해 종합 수주액은 1조 5000억원 규모다. 삼환그릅 기준 2005년 매출은 1조 1000억원, 당기순익은 650억원이다. ●교사 부인과 1남1녀의 단촐한 가정 1947년 봄. 삼환기업공사의 30대 청년 사장으로 뛰면서 당시 숙명여학교 교사이던 고 채광영 여사와 2년여 열애 끝에 1949년 4월 결혼했다. 최 명예회장은 부인을 만났을 당시 “‘아!이 여자다.’라는 느낌이 퍼뜩 들어 프러포즈를 했다.”고 언론을 통해 회고한 바 있다. 부인 채씨는 그를 홀로 남겨둔 채 1999년 노환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부인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가업을 승계한 외아들 최용권(56) 회장은 동갑내기로 고 한정대 전 대한페인트잉크(DPI) 회장의 3녀인 봉주(56)씨와 1974년 결혼해 슬하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 보스턴대를 나온 용권씨는 미 유학중 같은 유학생 신분이던 봉주씨를 만나 결혼했다.1975년 삼환기업 기획조정실장으로 입사해 8년 만인 1982년 32세 나이에 삼환기업 사장에 취임했다. 이어 삼환이 창립 50주년을 맞은 1996년 9월 회장으로 등극,2세 경영 체제를 굳혔다. 선친인 최종환 명예회장은 ‘바늘로 찌를 구멍’은 있어 보였던 데 비해 최용권 회장은 ‘찌를 구멍’조차 없는 사람이란 평이 임원들 사이에서 나온다. 최 명예회장의 손녀이자 최용권 회장의 장녀 영윤(31)씨는 이준용 대림산업 회장의 며느리가 됐다. 이 회장의 3남 해창(35)씨와 1999년 3월 결혼하면서 국내 두 전통 건설기업은 사돈관계를 맺게 된 것. 대림의 창업주인 고 이재준 선대 회장과 최 명예회장은 건설 1세대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해창씨는 현재 대림산업 계열사인 종합물류회사 대림H&L의 이사로 재직 중이다. 아는 사람 소개로 만나 2년여 교제끝에 결혼했다. 다른 손녀·손자들은 아직 모두 학생이다. 장손주 최제욱(29)씨는 예일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컬럼비아대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고, 최지연(26)씨는 세계 최고의 미술대학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 RSID에서 공부 중이다. 막내 최동욱(22)씨도 콜롬비아대에서 학부 과정을 밟고 있다. ●형제들과의 인연…삼환에 친인척 1명도 남아 있지 않아 삼환은 인척들의 경영 참여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없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친·인척이 맡았던 경동산업과 우성식품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리고 지금은 친·인척 중 단 한 명도 삼환에 적을 두는 이가 없다. 맏형 고 최명환씨는 6·25 당시 자신이 설립한 삼환기업의 모체인 경동기계가 잿더미로 변하자 동생 최 회장과 함께 삼환기업공사를 설립한 뒤 주주와 이사로 활동했다. 그의 아들인 동국대 출신의 용근(67)씨는 계열사인 우성식품 이사, 삼환기업 사장 등을 맡다가 1996년 삼환까뮤 사장직을 끝으로 삼환을 떠났다. 둘째 형인 고 최영환씨는 국내 최초 강관회사인 한국강관의 3인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삼환을 떠났는데 한국강관의 부회장까지 맡은 바 있다. 이대 영문과를 졸업한 그의 차녀 계자(64)씨는 18대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권숙일씨와 결혼했다. 장남 용재(56)씨는 1993년 삼환의 계열사로 지금은 사라진 키친아트 등 양식기를 제조했던 경동산업의 사장을 맡은 바 있다. 차남 용진(53)씨는 ㈜유창 사장으로 삼환과는 무관한 사업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셋째 형 고 최경환씨는 1958년 삼환의 관계사로 설립된 양식기 제조업체인 경동산업의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이 회사가 정리되기 직전인 1999년까지 재직했다. 그의 아들 최용철(60)씨도 이 회사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경동산업은 인건비 상승과 경쟁 심화로 자금난을 겪다 94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0년 다시 법정관리 퇴출 명령을 받으면서 정리됐다. 그의 장녀 최형인(57)씨는 한양대 인문과학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고 최경환씨의 사위이자 최형인씨의 남편이 삼성의 반도체 신화를 이끌어온 이윤우(60) 삼성전자 기술총괄부회장이다. 막내 동생인 최정환(73)씨는 삼환이 코카콜라 부산·경남지역 판매권을 가진 우성식품을 1969년 창립하면서 이 회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연간 매출 1300억원대로 한 때 부산지역 대표 식품회사로 명성이 높았지만 방만경영과 과다 부채를 이유로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최정환씨는 형인 최 명예회장으로부터 1997년 4월 경질됐다. 이 회사는 1997년 코카콜라 부문을 매각한 뒤 같은해 말 부도처리됐다. 최정환 전 회장은 서울대 상대, 산업은행을 거쳐 1968년 삼환에 입사했다. 이 회사 사장을 지낸 최정환 회장의 장남 최용석(47)씨는 회사가 문을 닫은 뒤 새천년민주당 창당발기인으로 활동하는 등 한 때 정치에 뜻을 두기도 했지만 지금은 정리하고 지성산업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장녀 영혜(45)씨는 건설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지낸 고 장예준씨의 차남 동욱(48)씨와 결혼했다. jhj@seoul.co.kr ■ 故 정주영 명예회장과 ‘형님-아우’ “아, 이리도 황망히 가셨습니까? 아직도 회장님이 하셔야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 데 무얼 그리 급히 가셨습니까? 여든 여섯의 춘추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경제의 영원한 등불로 언제나 함께하시기를 기도했는데 이리 가시니 이별의 안타까움과 아픔이 너무도 시리게 느껴집니다. 정주영 회장님.” 최종환 명예회장은 2001년 3월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타계한 직후 당시 서울신문을 통해 이같은 조사를 남긴 바 있다. 두 사람은 생시에 형님-동생으로 서로를 부르며 경쟁보다는 조언을 구하고, 돕고 의지하는 형님과 아우로서의 정이 돈독했다. 그는 건설 1세대 중에서도 특히 고 정 명예회장, 고 이재준 대림산업 명예회장, 그리고 조정구 삼부토건 명예회장을 존경하면서도 가깝게 지낸 인물로 꼽았다. 자서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이’에서 고 정 명예회장에 대해 “타고난 능력과 자질 이외에 뛰어난 판단력과 결단력, 저돌적인 돌파력에 감탄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평했다. 고 정 명예회장은 전경련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최 명예회장에게 부회장을 역임토록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최 명예회장에게 처음 소개시켜준 사람도 고 정 명예회장이라고 덧붙였다. 고 조정구 삼부토건 회장에 대해서는 “나는 상대방의 잘못이 보이면 즉석에서 쏘아대는 성격이지만 그 분은 어떤 경우에도 참고 있다가 나중에 조용한 목소리로 상대방이 스스로 깨닫도록 설명해 주는 등 깊은 인내의 미덕을 갖춘 분”이라고 회고했다. 고 조 회장이 건설협회 회장을 맡을 때 최 명예회장은 이사로 그를 도왔다. 최 명예회장은 이들과 함께 황무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서 건설업을 일궈냈다.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 남은 건설 1세대로 원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 가회동 자택에서 지내고 있으며, 건강이 예전같지 않다. 수십년간 매일 30분씩 해온 ‘대나무 밟기’를 건강 비결로 소개했던 그였지만 요즘은 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1996년 아들에게 모든 경영을 물려주고도 일주일에 최소한 사흘은 회사에 나왔지만 올들어선 일주일에 병원가는 날 하루 정도만 오전에 회사에 들른다. 평상시처럼 직원들과 지하 구내 식당을 찾는 등 검소한 모습은 그대로라는 평이다. ■ ’60년전통’ 삼환을 만든 사람들 삼환이 60년 건설 명가의 전통을 지켜올 수 있었던 데에는 전문경영인들의 공이 컸다는 평이다. 최종환 명예회장이 꼽는 최고의 CEO는 경성공업학교(현 경기공고) 출신의 고 이창호 사장이다. 부사장직으로 순직한 뒤 사장으로 추서됐고, 최 명예회장으로부터 ‘고락을 함께한 벗’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 명예회장은 지난 1977년 회사장으로 치러진 고 이 사장의 영결식 조사에서 “지금 내 오른팔이 떨어져 피가 흐르고 여며드는 것만 같은 아픔이 밀어 닥치는군요. 그러나 당신의 유지를 받들어 나는 기어코 우리 삼환을 세계 속의 삼환으로 만들고야 말겠습니다.”라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격무로 일관하다 신병을 갖게 되어 휴양을 하다가도 중동 현장으로 달려가는 등 투철한 사명감은 지금도 귀감이 되고 있다. 그가 사망한 이듬해에는 ‘회사를 위해 노력한 사원에게는 응분의 보상이 꼭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연금제도와 사원주택단지조성사업이 시작되기도 했다. 전동진(74) 사장도 삼환에서는 전설로 불리는 CEO중 한 사람이다.1975년 월남이 패망할 당시 월남지사장으로 근무하던 중 하청업자 공사대금 지불 등 잔무 처리를 위해 남아 있다 8개월간 공산 치하에 억류된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68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삼환기업 중기부 과장으로 입사한 이후 1996년까지 삼환기업·삼환엔지니어링·삼환까뮤 등 계열사 사장을 두루 역임했다. 지금은 삼환의 육영재단인 우성문화재단에서 이사로 재직중이다. 행정고시 출신의 최석원(75) 고문은 내무부 치안본부장, 노동청장, 부산시장, 건설부 차관 등을 역임한 뒤 삼환의 해외사업이 꽃을 피우던 1982년 사장대우 상임고문으로 영입됐다. 지금도 우성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노년까지 삼환과의 인연을 지키고 있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송두율 칼럼] 하이네를 생각하며

    [송두율 칼럼] 하이네를 생각하며

    독일은 올해 열리는 월드컵 경기로 떠들썩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큼직한 문화행사로 연초부터 바쁘다. 고전음악의 정점이던 모차르트의 탄생 250주년이기에 많은 연주회의 프로그램도 그의 음악으로 꽉 차있다. 또 2월17일은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서거 150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는 크고 작은 행사도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우리는 대개 “옛날부터 전해오는 쓸쓸한 이 말이 가슴 속에 그립게도 끝없이 떠오른다.”는 소절로 시작하는 독일노래 ‘로렐라이’를 음악시간에 배웠다. 하이네의 시에 질허(Silcher)가 곡을 부친 이 서정적인 노래는 라인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유람선이 로렐라이 암벽 밑을 지날 때면 으레 선내의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온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온 관광객들에게는 아주 친숙한 곡이기도 하지만 이 노래를 통해서 그들은 또 독일정신사에서 큰 줄기의 하나인 낭만주의가 전하는 분위기까지 쉽게 접할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독일사람들도 어느정도 이 노래에 관해 알고 있지만 곡과 가사를 모두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치 때 이 노래 자체는 금지되지 않았지만 ‘작사자 미상’으로 되어 있었다. 개신교로 개종했지만 하이네는 원래 유대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프러시아제국의 배타적 민족주의와 권위주의를 신랄하게 조롱하고 비판했기 때문에 그의 저작은 기존질서와 관습을 파괴했다는 이유로 금서목록에 올랐다. 나치 패망후에도 서독에서는 하이네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었는데 그가 태어난 도시인 뒤셀도르프의 대학을 그의 이름을 따서 ‘하인리히 하이네 대학교’로 명명하는 문제도 근 20년을 끌다가 1989년에야 겨우 해결되었다. 비록 그에게 많은 고통을 준 독일이었지만 하이네는 “밤에 독일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네/ 눈 부칠 수도 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네.”라고 조국을 향한 심정을 노래하였다. 하이네는 두번에 걸친 짧은 조국방문을 빼놓고는 공화주의 혁명의 본거지였던 파리에서 오랜 망명생활 끝에 59세를 일기로 사망, 몽마르트 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그의 시 ‘어디에’가 새겨져 있다. “방랑에 지친 나그네의 마지막 안식처는 어디에/남쪽의 야자수 아래에 있을지/라인강가의 보리수 그늘 아래에 있을지/어떤 사막에서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매장될는지/어떤 해변의 모래 속에서 안식처를 찾을지/그 곳이든 이 곳이든 어디에 있든지 하늘에 둘러싸여 있겠지/별들은 나의 무덤을 비추는 등불이 되겠지.” 파란만장한 하이네의 삶의 뿌리에는 여러 경계선이 서로 엉켜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유럽, 혁명과 반동, 계몽과 반계몽,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를 가르는 경계선은 물론,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시와 산문의 경계선까지도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경계선이 부딪치는 긴장을 항상 예리하게 느끼면서도 그는 얽매이지 않는 자유스러운 정신과 착취 없는 평등한 사회를 갈구하고 투쟁했으며 그 깊은 고뇌의 흔적들을 주옥같은 작품으로 남겼다. 살아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이 죽은 후에도 그를 박해한 프러시아제국과 나치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동·서독 통일후 ‘인간성의 해방을 위한 전쟁의 용감한 전사’이자 탁월한 ‘혁명시인’인 하이네를 위해 기념조형물을 복원해서 그가 한때 공부한 훔볼트 대학교의 근처에 다시 세웠다. 여기에는 “우리가 이념을 거머쥔 것이 아니네. 오히려 이념이 우리를 거머쥐고 있네, 이념을 위해서 싸우도록 강요된 검사(劍士)로 우리들을 단련시켜 투기장 안으로 밀어넣은 것이야.”라는 그의 시적인 경구(警句)도 새겨져 있다. 이념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거꾸로 인간이 이념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이네의 이 경고는, 민족분단의 골과 사회적 갈등을 여전히 확대 재생산하는 과잉된 이념의 시대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우리들에게도 깊은 뜻을 담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 [책꽂이]

    ●죽은 시인들의 사회(우대식 지음, 새움 펴냄)김민부, 임홍재, 원희석, 기형도 등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요절 시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2005년 5월부터 지난 1월까지 ‘현대시학’에 연재했던 글에 기형도 시인에 관한 미발표 원고를 더해 단행본으로 묶었다.9800원.●사랑의 마음, 등불 하나(윤후명 글·김원숙 임민혁 그림, 랜덤하우스중앙 펴냄)저자의 문학사숙에서 공부한 제자들이 등단 40년을 맞은 스승에게 바치는 시·소설 그림집.‘비단길-서울문학포럼’회원들이 일일이 고른 시와 산문에 화가 김원숙, 임만혁이 그린 52점의 그림을 입혔다.8500원.●제인 오스틴 북클럽(커렌 조이 파울러 지음, 한은경 옮김, 민음사 펴냄)제인 오스틴의 책을 읽기 위해 모인 여섯 명의 남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을 유쾌하고 따뜻하게 그렸다. 지난해 출간 직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화제작.1만원.●돌뗏목(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해냄 펴냄)이베리아 반도가 유럽을 떠나 대서양을 떠돈다는 환상적인 장치를 통해 유럽통합을 앞두고 갈등하는 유럽의 변방 포르투갈의 고민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소설.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저자의 1986년작.1만 1000원.●공기의 아이(고현정 지음, 천년의시작 펴냄)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의 첫 시집.‘두 발에 땀이 찰 염려가 없다 젖지 않는다 연인과 헤어져도 변함없다’(‘통통 튀는 펑키한 젤리슈즈의 강점’중)등 발랄한 상상력과 어법이 돋보이는 시들이 실렸다.6000원.
  • [데스크 시각] 21세기형 최치원을 기대하며/박현갑 사회부 차장

    ‘하버드 대신 베이징으로 가라’ 며칠전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서울 덕수궁 옆 중국 어학원 입구에 내걸린 문구다. 5년 전으로 기억된다. 당시 여의도에서 만난 한 금융권 인사는 기자에게 자녀가 있다면 미국 대신 중국으로 유학보내라고 권했다.21세기 세계는 극동아시아, 그 중에서도 중국을 중심국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으나 그다지 의미있게 받아들이진 않았었다.2010년에 중국이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미 중앙정보국 보고서도 봤으나 먼나라 얘기로 치부해버리는 인식의 한계였다. 요즈음 중국은 어떤가? 미국 영국 등 세계 어디를 가든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상표가 달린 물건이 즐비하다. 지난해 중국의 국내총생산이 전년보다 9.9% 늘어나 영국과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4위로 올라섰다는 중국 국가통계국 리더수이 국장의 지난 1월 발언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선진국을 휩쓰는 중국어 학습 열풍도 마찬가지다. 미국 대학에는 중국학과 개설 붐이 일고 있고 영국 고교에서는 제2외국어로 그동안 채택해오던 불어 대신 중국어를 택하는 학생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최근 중국 베이징대학 등을 둘러본 한 공무원은 “베이징대학에는 방학 때 교수들이 없더라.”는 이상한 진단을 했다.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미국이나 유럽대학은 3학기제라 2학기를 운영하는 중국 교수들의 경우, 여름방학 때 외국에서 한달여 남짓 특강하는 게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국학과를 개설한 미국 대학에서 중국 문화 강의를 해달라 요청하는 식이다. 전공 분야에 대한 강의 요청이지만 나날이 발전하는 중국미래 탐구라는 측면이 적지 않아 보인다. 요즈음 우리 부모들의 중국유학 관심도 이에 못지않다. 중국으로 유학간 국내 대학생은 2001년 1만 6000여명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에는 2만 8400명으로 늘었다. 초·중·고생도 2000년 378명에서 2004년에는 1223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한국인 유학생 급증 추세에 중국 교육부에서는 한국 유학생 비율을 일정 정도 제한할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베이징대 중문학부의 경우, 학부와 대학원생을 합친 재학생 1000명 가운데 외국 유학생이 250명이며 이 중 한국 학생이 60명이나 된다고 한다. 하지만 학업 스트레스에 자살하는 학생, 부모 등쌀에 못 이겨 술을 친구삼아 엉뚱한 길로 빠지는 학생 등 무분별한 유학에 따른 폐해도 적지 않다. 때문에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유학은 차라지 하지 않는게 좋다고 본다. ‘늦가을 여관에 비내리고/차가운 창문에는 고요한 밤의 등불이 비추네/가련한 나, 근심 속에 앉았는데/정녕 참선에 든 중이로구나´ 우정야우(郵亭夜雨)라는 최치원(857∼?)의 시다. 그는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대학자였다. 낯 설고 물 선 이국 땅에서 잠못 이루며 뒤척였을 10대 소년 유학생 최치원을 떠올려 본다. 그가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것은 신라 경문왕 8년인 868년.12살 때다. 요즈음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이다.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엄한 격려를 뒤로 하고 유학길에 나선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4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10살 때에는 사서삼경을 읽었다는 그는 유학 7년째인 18세 때 외국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빈공과)에 합격, 부모와의 약속을 지킨다. 하지만 29세에 신라로 귀국한 그는 잠시 공무원 생활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야인으로 생을 마감한다. 쇠락해가는 신라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 때문이었는지 그가 중국에서 체득했을 지식과 경험은 국가발전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셈이다. 유학을 결정했다면 유학생 최치원이 지녔을 번민일랑 떨쳐 버리고 오로지 학업에만 매진, 동북아 시대 주역으로 일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박현갑 사회부 차장 eagleduo@seoul.co.kr
  • 儒林(537)-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7)

    儒林(537)-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7)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27) 그런 의미에서 금강산에서 환속하여 이듬해 봄 한성시에서 장원급제할 때까지의 한겨울은 율곡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던 것이다. 이때 지은 율곡의 시 한수가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등불 아래서 글을 본다(燈下看書)’라는 제목의 이 짧은 시는 율곡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간 어디에 진정한 광거(廣居)가 있단 말인가. 백년의 이 몸, 잠깐 쉬어 갈 뿐이로세. 모처럼 해외의 유산몽(遊山夢)에서 깨어나, 외로운 등불 아래 옛 책(古書)을 보누나(何處人間有廣居 百年身世是廬 初回海外遊山夢 一盞靑燈照古書).” 이 시 속에는 금강산에서의 유산몽에서 깨어나 또다시 미뤄 두었던 옛 책을 꺼내들고 유학에 전념하는 율곡의 심정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율곡이 ‘광거(廣居)’, 즉 ‘광활한 집’에 대해서 운위하였다는 점이다. 이 ‘광거’란 문구는 맹자의 ‘등문공(藤文公)하편’ 제2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로서 맹자의 핵심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명구 중의 하나이다. 즉 유세가였던 경춘(景春)이 맹자를 찾아와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와 같은 당대의 종횡가(縱橫家)들을 ‘그들이야말로 진실로 대장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한번 화를 내면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그들이 조용히 거처하면 천하가 잠잠합니다.’라고 말하자 맹자가 단호하게 ‘그들이 어찌 대장부일 수 있겠는가.’하고 꾸짖은 데서 비롯된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훈계한다. “그대는 예를 배우지 않았는가. 장부가 관례를 행할 때에 아버지가 훈계를 하고, 여자가 시집을 갈 때 어머니가 훈계를 하는데,‘시집을 가거든 반드시 공경하고 조심하여 남편을 어기지 말라.’하니 순종함을 정도로 삼는 것이 첩부(妾婦)의 도가 아니겠는가.” 맹자는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가 제후들을 설득하여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는 변절을 반복하면서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게 하는 무도한 행위를 여염집의 여인에 비유하여 질타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맹자는 진정한 의미의 대장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천하의 넓은 집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리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것을 행하여 부귀가 방탕하지 못하고, 빈천(貧賤)이 뜻을 바꾸지 못하게 하며, 위무가 절개를 굽히게 할 수 없는 것, 이것을 바로 대장부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곡의 시에 나오는 ‘인간 어디에 진정 광거가 있단 말인가(何處人間有廣居).’하는 문장은 바로 맹자가 부르짖었던 ‘천하의 넓은 집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바른 도리를 행한다(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라는 구절에서 인용하여 따온 것. 이를 통해 율곡은 완전히 불교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옛 고서에서 읽었던 대로 맹자가 부르짖었던 유가의 ‘넓은 집(廣居)’에서 바른 자리에 서며, 바른 천하의 도리를 행할 것을 새삼 결심하는 것이다.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6) 다종교 국가 한국의 전도 문제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6) 다종교 국가 한국의 전도 문제

    우리는 과학기술의 폐해에 대하여 즐겨 이야기한다. 그러나 종교의 폐해를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인생에서 종교가 지닌 유익함에 대하여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이중적이어서 양면성을 동시에 고려해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앞 글에서 말했다. 지혜는 우리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을 일컫는다. 그 이익은 이기배타적인 탐욕이 아니라, 모두에게 복락을 주는 불의 따뜻함과 물의 시원함을 가리킨다. 그런데 노자가 한 말로 복락과 재앙이 종이 한 장의 양면성과 같다는 것을 앞 글에서 언급했다.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종교가 인간으로 하여금 특정 교조와 교리의 노예가 되게 하여 인간 본성이 보는 지혜를 막아 눈을 멀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종교가 자기 종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배척하거나 적대시하게 하는 어리석음을 조장하는 독이 되기도 한다. 종교는 사회적 약이지만 독이 될 수 있다. 종교가 사회적 독이 안 되게끔 하는 것이 지혜다. 지혜가 없으면 종교를 바보처럼 맹목적으로 믿고, 정치를 해도 바보들의 행진처럼 무식하게 떠들고 단순하게 미쳐 날뛴다. 그런데 한국처럼 다종교 국가인 경우에는 그 다종교가 한국인의 정신문화로 하여금 어떤 한 종교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게끔 하는 자극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종교 현상이 우리의 마음을 일심(一心)으로 뭉치게 하는 역할보다 갈기갈기 찢어 놓는 정신의 분열을 조장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이중성 앞에서 종교가 독이 안 되게끔 하는 것이 지혜다. 우리의 미래적 지도자는 지역, 정치이념, 세대, 성별, 사회계층, 문무, 종교간에 이미 깊이 쪼개진 마음의 틈을 어루만져 일심으로 보살피는 지혜인이 되어야겠다. 다종교로써 어떻게 일심으로 한국인의 마음을 뭉치게 할 수 있나? 무엇보다 먼저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탐욕을 알아차려야 한다. 종교인들의 탐욕은 일반인들의 탐욕보다 더 지독하다. 종교인들은 스스로 진리의 화신이라는 강한 자의식 때문에 자기들의 생각이 탐욕적이라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탐욕은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형이하학적 탐욕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형이상학적 탐욕이다. 전자는 종교가 진리의 말씀이므로 세상을 온통 그 말씀을 믿는 사람들로 채워야 하겠다는 강한 전도신념이 소유적 탐욕으로 이어져, 그들의 강한 신앙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려는 권력의지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것이 형이하학적 탐욕이다. 무신론 철학자 니체가 예수님을 거의 공격하지 않고, 다만 진리전도를 겉으로 내세우나 안으로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의지를 숨긴 종교인들과 그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예사롭게 봐서는 안 된다. 종교가 권력의지를 감춘 전도에 몰입하는 경우에 필연적으로 종교간에 신자들의 수를 양적으로 넓히기 위한 충돌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인들의 형이상학적 탐욕은 그들이 믿는 진리가 세상을 장악해야 한다는 구원의지로서의 진리의지를 말한다. 형이하학적 탐욕은 권력의지를 안으로 숨기고, 형이상학적 탐욕은 진리의지를 밖으로 외친다. 밖으로 외치는 진리의지가 권력의지보다 더 무섭다. 왜냐하면 진리의지는 자기 종교에 대한 명분적 정당성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 이대(二大)종교의 교조(敎祖)인 부처님과 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전에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나를 의지하지 말고, 법과 마음의 등불을 의지하라.’고 유언하셨다. 예수님은 또 ‘요한복음’에서 ‘진리가 너희들을 자유롭게 하리라.’고 가르치셨다. 두 구절은 다 교조님들이 가르친 것이 진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겠다. 그런데 진리가 무엇인가?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스스로 설법하신 것을 제자들이 뗏목에 비유하는 것을 인정하시고,‘진리의 법이라는 뗏목도 강을 건너면 버리는데, 하물며 진리가 아닌 것을 어찌 버리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셨다. 그리고 제자인 수보리에게 ‘이른바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설파하셨다. 이것은 말해진 진리를 진리라고 여기는 생각에 고착된 사고방식이 얼마나 반(反)진리적인가를 역설적으로 가르치는 말이다. 이 점을 예수님도 암시하셨다. 로마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예수님은 묵묵부답이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진리에 대하여 어떤 정의를 내리지 않고, 묵언으로 끝내신 것은 대단한 의미를 후세에 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부처님이 ‘진리라고 언명된 것은 진리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예수님이 빌라도의 물음에 묵언으로 대처하신 것은 다 진리를 말에 의하여 고착시키려 하는 어리석음을 후대에 남기지 않으시려는 배려에서겠다. 만약 진리가 어떤 것으로 정의상 고정되었더라면, 진리는 이미 결정이 났고 남은 것은 행동 뿐이라고 여기는 전투적 행동주의자들의 유치한 광기만이 전부가 됐으리라. 부처님이 ‘금강경’에서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하셨다. 예수님도 ‘요한복음’에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고 언명하셨다. 두 구절 다 가시적인 부처님과 예수님이 은적의 불가시적인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불가시적인 은적의 존재는 모든 가시적인 것의 무상함을 암시하면서 가시적인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더구나 예수님은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의지가 없음을 알리기 위하여 그의 나라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님을 역설하지 않았던가? 빌라도는 예수님이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했으므로 로마황제의 수위권과 충돌하지 않기에 그를 처벌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부처님이 설법하신 ‘공(空)’사상이나, 예수님이 설교하신 ‘마음의 가난’은 진리의 이름으로도 세상을 지배해서는 안 되는 반(反)소유론적 사유의 정상을 말하는 것이리라. 은적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을 다 차지하려는 인간들의 무한 탐욕을 인간들의 무한 희망으로 전회시키는 계기를 이룬다. 탐욕은 나 중심이나 우리 중심의 소유욕이지만, 희망은 나와 우리 중심의 생각을 비워 거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다 안심시켜 주는 평정심으로 가득 채우려는 원력을 뜻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설파하신 세상을 ‘화평케 하는 자’이겠다. 탐욕은 닫힌 마음이나, 희망은 열린 마음이다. 우리는 종교가 나 중심이나 우리 중심의 파당성을 부채질하는 사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모든 종교의 교조는 모두 세상에 교조의 가르침을 전도하라는 말씀을 하였다. 진리를 전파하라는 전도의 말씀과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종교적 진리의 본질과는 상충하는가? 더구나 한국과 같은 다종교 국가에서 이 종교의 전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다종교의 전파는 결국 한국을 심대한 종교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지 않을까? 더구나 종교의 광신자가 많을수록 종교의 해독은 더 크다. 그 해독은 세상을 온통 자기 종교의 권력의지와 진리의지로 가득 채우려는 소유욕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 모든 교조가 말씀하신 전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는 두 번째 글에서 본능의 욕망과 본성의 욕망을 나누어 설명했다. 인간의 마음은 욕망의 기(氣)인데, 본능의 이기배타적 욕망과 본성의 자리이타적 욕망으로 마음의 욕망이 이중적으로 나누어지는 갈래를 이야기했다. 인간의 사회생활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한 이기배타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소유적 탐욕이 이글거리는 곳이 곧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옥을 뜻하는 한자인 獄(옥)자는 개 두 마리가 먹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 짖어대는(言) 아귀다툼을 형용한 것이다. 종교가 전도를 하는 까닭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기배타적 본능의 욕망을 버리고, 자리이타적 본성의 욕망으로 세상을 살게끔 가르치려는 것이 아닌가? 종교가 신도 수만을 증가시켜 세력있는 권력으로 군림하기를 기약한다면, 그것은 진리의지의 명분 아래 안으로는 권력의지로써 세상을 점유하려는 정치적 소유욕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종교적 권력의지가 더 위험한 것은 겉으로 권력의지가 아닌 것처럼 내숭을 떨면서 안으로 진리의지에 대한 불퇴전의 독점욕으로 세상을 사로잡으려 하는 그 독선 때문이다. 독선은 자기 신념과 신앙만이 세상의 선이라고 착각하는 열광의식이다. 독선의 열광의식은 이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과 손잡고 흥분하여 미쳐 날뛴다. 종교적 열광분자와 종교적 현자의 차이는 크다. 전자는 사유가 단순하고 얕아서 남의 것을 배타적으로 공격하려는 닫힌 마음의 소유자라면, 후자는 사유가 깊고 식견이 높아서 종교의 벽을 넘어 누구에게도 영혼의 감동을 주는 열린 마음을 말한다. 전도는 자기 것을 확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마음에 있어 온 본성을 꽃피우는 방편일 뿐이다. 모든 종교는 약이고 동시에 독이다. 우리는 종교가 늘 약이라고만 여기는 단순소박한 관념에서 벗어나자. 이 세상에 어떤 가치도 이중적인 것이 아닌 것은 없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약이 되게 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것을 독이 되게 한다. 더구나 한국 같은 다종교 국가에서 전도행위는 지혜로워야 한다. 우리처럼 사회생활이 빡빡하여 여유가 없는 곳에서는 본능적 탐욕이 팽배해지기 일쑤다. 이런 사회적 조건 아래에서 종교는 자기 땅을 더 확장하려는 심사보다, 본능적 욕망에서 본성적 욕망에로 한국인의 사회생활을 전회시키는 회심(回心)의 정신운동이 되어야 하겠다. 지옥은 사회생활에서 생긴다. 한국의 사회생활이 모든 곳에서 아귀다툼이라면, 우리는 공멸한다. 우리가 서로 화합하는 지혜만 살린다면, 아마도 한국은 세계가 깜짝 놀랄 나라로 변할 것이다. 화합은 본성이 욕망하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봄밤/문성해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봄밤/문성해

    빈집 앞에서 쓴다 젖빛 할로겐 등을 켜 단 목련에 대하여, 창살 박힌 담장에 하얗게 질려 있다고, 엉큼한 달빛이 꽃잎 벌리려 애쓴다고, 나뭇가지를 친친 감은 가로등이 지글지글 끓는다고, 촛농처럼 떨어진 꽃잎들 창살에 꽂힌다고, 봉오리들 아우성치며 위로 위로 도망친다고, 추억의 등불 켜 다는 약한 꽃들이 나 같다고
  • [토요일 아침에] 소태산에게서 배우자/ 박맹수 원광대 원불교학과장

    소태산 박중빈은 1891년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대는 한 마디로 고난의 시대 그 자체였다.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고, 안으로는 조선왕조 지배체제가 파탄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의 민중들을 더욱 위기로 몰아간 것은 서세, 즉 서구적 가치의 만연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부정하는 서학의 만연은 조선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을 뿌리째 뒤흔드는 가공할 만한 사태였다. 이같은 시대상황 속에서 동학이 등장하여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불을 댕겼다는 것은 우리들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소태산의 청소년기 일화를 담고 있는 ‘원불교교사’는 그가 7세부터 벌써 깊은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우주자연 현상 등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소태산을 둘러싼 주변 환경은 그의 열렬한 탐구심을 충족시켜주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그는 주로 산신과 도사 등 초인적 능력을 가진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술한 ‘원불교교사’에 의하면, 이같은 그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하여 소태산은 결국 사색과 명상, 기도생활 등 자신의 내면적 세계로 침잠하는 커다란 방향전환을 통해 1916년 4월28일에 ‘큰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소태산의 ‘큰 깨달음’은 그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큰 깨달음’을 이루기 전의 소태산의 삶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개인적 고난 해소에 필요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큰 깨달음’ 이후의 소태산의 삶은 개인적 고난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시대적 고난 해소를 위한 새로운 정신운동의 실천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큰 깨달음’ 직후 소태산이 전개했던 정신운동으로는 저축조합운동(1917), 간척지개척운동(1918∼1919), 기도결사운동(1919) 등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운동은 모두 전라남도 영광이라는 특정 지역에 국한된 운동이었다는 점, 조직적 기반이 전혀 없이 전개된 운동이라는 점, 무단통치로 대변되는 식민지시대에 비밀결사 형태로 전개되었다고 하는 점 등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었다. 이에 소태산은 마침내 1919년 가을에 전라남도 영광에서 전라북도 부안 변산반도로 입산,1924년 봄까지 약 5년에 걸쳐 그간의 운동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종교운동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가 바로 1924년의 불법연구회(현 원불교의 전신)라는 새로운 종교조직의 창설이다. 전라북도 익산을 무대로 창설된 불법연구회는 9년 전 ‘큰 깨달음’을 계기로 치열한 사회변혁운동을 전개해왔던 소태산이 그동안 전개했던 여러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총괄하는 가운데, 기왕의 운동을 넘어서는 새 차원의 종교운동을 열어가기 위한 결사체, 즉 새로운 종교공동체 조직이 정식으로 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우리는 불법연구회 창설에 따른 소태산의 기쁨이 어떠했으며, 불법연구회에 거는 기대가 어떠했을까를 한번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불법연구회라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새롭게 전개하고자 했던 사회변혁운동의 구체적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표어로 상징되는 ‘정신개벽운동’이었다. 소태산은 1943년 6월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평생토록 파란고해에서 헤매는 중생들의 ‘정신개벽’을 통한 낙원 건설에 모든 것을 바쳤다. 태극기와 애국가를 마음껏 보고 부를 수 있었던 날이 단 하루도 없던 암울한 식민지시대에 물질개벽을 선도할 수 있는 정신개벽운동을 통해 민중들의 앞길을 비추는 ‘등불’로서의 삶을 살다 간 것이다. 21세기 우리 민족에게는 지금 헤쳐가야 할 숙제가 참으로 많다. 그 숙제를 푸는 지혜를 소태산의 생애와 사상에서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길이 되지는 않을까. 소태산의 꿈과 실천이 구석구석 배어 있는 솜리 땅에서 소망해 본다. 박맹수 원광대 원불교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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