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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세계 ‘1호 유니폼’ 입고 귀국… 추신수 “한국야구 배울 각오”

    신세계 ‘1호 유니폼’ 입고 귀국… 추신수 “한국야구 배울 각오”

    20년간의 미국 생활을 접고 신세계그룹 야구단에 합류한 추신수(39)가 마침내 한국 땅을 밟았다.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25일 입국한 추신수는 “20년 만에 한국에 들어왔는데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왔다”고 밝혔다. 새로운 도전에 임한 만큼 각오도 남달랐다. 추신수는 “한국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어렵게 결정한 만큼 잘한 결정이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했다. 이날 추신수는 구단이 준비한 ‘INCHEON’과 등번호 17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었다. 구단명이 정해질 때까지 입을 신세계 야구단의 임시 유니폼이다. 이 유니폼을 입은 선수는 추신수가 처음이다. 추신수는 절친 정근우가 한국행에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추신수는 “속마음을 나누는 정근우와 얘기하며 한국행 의견을 물었더니 처음에 우려했다”면서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줄 기회가 있어서 좋을 거라는 조언을 듣고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메이저리그 통산 1652경기 타율 0.275(6087타수 1671안타) 218홈런 782타점 157도루로 화려한 커리어를 남겼지만 한국 무대는 낯설 수밖에 없다. 추신수는 “한국 야구가 트리플A 수준이었으나 이제는 수준이 올라왔다. 한국 야구는 처음이라 배운다는 생각으로 하겠다”면서 “올해 나로 인해 신세계가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으면 한다”고 말했다. 추신수가 미국을 떠나기 전 아내 하원미씨가 공항에서 배웅하며 애틋한 글을 남겨 화제가 됐다. 추신수 역시 “한국에 오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아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는 게 나도 힘들었다”며 가족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토로했다. 신세계 야구단은 개막전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한다. 자연스럽게 이대호와의 맞대결에 관심이 쏠린다. 추신수는 “언제든 친구를 만나는 것은 좋다”면서도 “미국에서도 상대했었는데 한국에서 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추신수는 방역 절차에 따라 2주 격리 후 다음 달 11일 팀에 합류할 예정이다. 류재민 기자 phoem@seoul.co.kr
  • 차별의 담장 넘긴 ‘진짜 홈런왕’

    차별의 담장 넘긴 ‘진짜 홈런왕’

    애틀랜타·밀워키서 755홈런 대기록신기록 근접 땐 백인이 살해 협박도바이든 美대통령 “미국의 영웅” 추모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의 전설적인 홈런왕 행크 에런이 22일(현지시간) 8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는 소식에 각계의 추모가 이어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3일 트위터를 통해 “에런은 베이스를 돌 때 기록만 좇지 않았다. 에런은 편견의 벽을 깨는 것이 하나의 국가로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 줬다”며 “미국의 영웅”이라고 추모했다. 개인 통산 762개의 홈런을 친 배리 본즈는 “에런은 경기장 안팎에서 매우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 그는 상징이자 전설, 진정한 영웅”이라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들은 당신을 롤모델로 삼고 꿈을 꿀 수 있었다”고 기렸다. 개인 통산 홈런은 본즈가 더 많지만 ‘금지약물 복용 파동’ 이후 많은 사람이 에런을 ‘진짜 홈런왕’이라고 부른다. ‘아시아 홈런왕’인 일본의 오 사다하루(왕정치) 소프트뱅크 호크스 구단 회장도 “에런은 홈런, 타점 등 당시 세계기록을 세운 대단한 선수였다”며 “훌륭한 인생을 살았다.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현역이던 1974년 도쿄에서 열린 대결에서 에런은 홈런 10개를 쳐 9개의 오 회장을 눌렀다. 은퇴한 뒤인 1984년 재격돌했을 때도 홈런 4개로 2홈런에 그친 오 회장을 제쳤다. 에런은 1974년 4월 9일 개인 통산 715번째 홈런을 치며 MLB 홈런 역사를 새로 작성했다. 에런은 13시즌 MVP 투표에서 상위 10명에 들었지만 MVP로 선정된 것은 밀워키 브레이브스가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1957년이 유일하다. 특히 에런과 가족들은 백인 우월주의자의 협박에 시달렸다. 베이브 루스(1895~1948)의 714개 홈런 기록 경신 즈음에는 잇따른 살해 협박으로 연방수사국(FBI)의 보호를 받았다. MLB닷컴은 “당시에 ‘더그아웃에서 에런 옆자리는 늘 비어 있다. 총을 맞을 수 있으니까’라는 농담이 들릴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에런은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1982년 8월 삼성 라이온즈의 초청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에런은 홈런왕 비결과 관련해 “내 손목과 팔은 남보다 강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훈련 외에 홈런왕이 된 특별한 비결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만수(당시 삼성), 윤동균(당시 OB) 등 현역 거포와 홈런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1934년 2월 앨라배마주 모빌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에런은 1954년부터 1976년까지 23시즌 3298경기에 출전해 1만 2364타석, 3771안타(타율 0.305), 755홈런, 2297타점, 240도루를 기록했다. 애틀랜타와 밀워키 브루어스는 그의 등번호 4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앞서 에런의 딸은 애틀랜타에 살던 그가 22일 오전 별세했다고 밝혔다.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미모로 흔든 팬심 실력으로 흔들 날 꿈꾸는 오승인

    미모로 흔든 팬심 실력으로 흔들 날 꿈꾸는 오승인

    출전은 단 3번. 득점은 단 2점. 평균으로 따지면 4분 8초, 0.67득점에 불과한 성적이지만 우리은행 오승인은 올해 여자농구계 최고의 스타로 떴다. 각종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는 것은 물론 우리은행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도 오승인의 출전을 간절히 기다릴 정도다. 단박에 팬심을 훔친 미녀 농구선수의 등장에 여자농구 팬들은 환영 일색이다.오승인이 깜짝 스타로 뜬 것은 이번 시즌 두 번째 출장 경기였던 1월 1일 청주에서 열린 KB전에서였다. 4쿼터 4분 21초를 남기고 56-70으로 뒤져 있던 상황에서 위성우 감독은 오승인을 포함해 4명의 선수를 교체 투입했다. 더는 추격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당시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보다 중계화면에 눈을 돌린 기자의 눈에 오승인의 등장에 술렁이는 채팅창이 포착됐다. 팬들은 승부를 떠나 대동단결해 오승인의 활약을 응원했다. 매치업 상대였던 박지수의 벽에 가로막혀 득점은 실패했지만 오승인은 이 경기에서 첫 블록을 기록했다. 1월 2일자 서울신문 기사(‘미모 폭발’ 교체출전 4분 만에 팬심 훔친 오승인) 이후 오승인은 특급 스타가 됐다. 오승인은 3일 BNK전에서 첫 득점을 기록했다. 인기를 증명하듯 오승인의 첫 득점은 상당한 화제가 됐다. 이날 오승인은 6분 21초 동안 2득점 1어시스트 1블록을 기록했다. 팬들에겐 아쉽게도 이후 오승인의 출전 기록은 없다. 15일 우리은행농구단 숙소에서 만난 오승인은 “인기가 많을 정도로까지 생기진 않은 것 같다”고 겸손해하며 “기대를 너무 크게 해주시는데 아직 거기에 못 미치고 있다”는 말부터 꺼냈다. 폭발한 인기에 기사가 쏟아져 주변에서 기사 링크를 보내주지만 정작 오승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담담하게 반응한다.오승인은 선수 출신의 농구 코치인 아버지의 권유로 농구에 입문했다. 사직초-청주여중-청주여고를 나왔다. 188㎝의 아버지, 168㎝의 어머니 유전자를 물려받아 어려서부터 키가 컸다. 183㎝의 오승인은 여자농구에서 귀한 4, 5번 자리를 오갈 수 있는 재원이다. 절친 박지현이 팀의 베스트5로 완전히 자리 잡은 것과 달리 오승인은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고등학교 때 왼쪽 무릎 전방십자인대를 두 번이나 다쳐 재활에 오래 매달렸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체전 첫 게임에서 온양여고랑 시합하는데 볼 잡으러 뛰어가다가 점프 도중에 밀려서 착지를 잘못해서 다쳤어요. 다치고 나서 유급을 했고 20살이 돼서 5월에 대회가 있었는데 인터셉트를 하다 또 다쳤어요. 어린이날에 다쳐서 어버이날에 수술하고 생일(5월 10일)에 퇴원했습니다.” 첫 번째 다쳤을 때는 쉬어간다고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다쳤을 땐 힘들었다. 오승인은 “가족들도 슬퍼했고 주변에서 먼저 걱정을 많이 해줬다”면서 “그래도 농구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까진 안 들었다”고 말했다. 학교 코치 선생님의 도움으로 좋은 재활 병원을 소개받은 덕에 재활을 잘 진행할 수 있었다. 다만 프로 진출에 필수인 대회 참가에 제약이 있었다. 오승인은 “다친 것 때문에 실력을 보여줄 기회를 놓쳤다”고 당시를 떠올렸다.오승인은 지난해 1월 9일 열린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우리은행에 1라운드 5순위로 지명됐다. 누구도 예상 못 한 깜짝 지명이었다. 오승인은 “다른 구단은 한 번씩 얘기가 나왔는데 우리은행은 전혀 얘기가 없었다”면서 “어느 한 군데는 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우리은행에 이렇게 일찍 지명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깜짝 지명인 이유는 또 있었다. 눈에 띄게 드러나는 신체적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구단 관계자는 “당시 오승인이 무릎 부상으로 근육이 짝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오승인은 “지금은 어느 정도 근육이 붙었는데 당시는 왼쪽 무릎 위에 근육이 거의 없었다”면서 “그땐 정말 맞는 옷도 없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우리은행은 훈련이 힘들기로 유명하다. 훈련량을 못 견디고 중도 이탈하는 선수도 가끔 나온다. ‘우리은행 입단이 걱정되지 않았느냐’ 묻자 오승인은 “청주여고가 훈련량이 만만치 않다”면서 “우리은행도 훈련량이 가장 많은 팀으로 알고 있어서 ‘내가 운동 복은 있구나. 계속 열심히 해야 되는구나’ 생각했다”고 웃었다. 호랑이 감독으로 유명한 위성우 감독도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오승인은 “어렸을 때부터 감독님 스타일처럼 무서운 코치님들을 만났어서 크게 걱정되진 않는다”고 했다. 이쯤되면 천상 우리은행 체질이다.지난 시즌 재활에 매진한 오승인은 지난해 11월 열린 퓨처스리그에서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같은 달 25일 신한은행전에서 1군 무대에 데뷔했다. 김정은이 빠지면서 출전 기회가 조금 더 생겼고 지난 1일 KB전, 3일 BNK전에 투입됐다. “신한은행전은 아예 준비를 안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오라고 하셨어요. 리바운드를 하나 하긴 했는데 너무 정신이 없어서 기억이 안 나네요. KB전은 미리 말씀해주셔서 몸을 풀고 있었고 집중했죠. 블록도 생생해요. 타이밍이 잘 맞았고 ‘이건 무조건 블록이다’ 생각하고 찍었어요. BNK전도 미리 말씀해주셔서 열심히 준비했는데 파울을 4개나 해서… 주변에서 다독여준 덕에 득점도 하고 어시스트도 하고 좋은 기회를 만들었어요.” 실전 경기를 뛰면서 오승인은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다. 고등학교와 프로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오승인은 “고등학교 땐 4번 포지션에 자신이 있었는데 지금은 뭘 잘할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도 오승인에겐 확실한 롤모델이 있다. 바로 부상으로 빠진 김정은이다. 오승인은 “고1 때까지는 딱히 롤모델이 없었는데 고2 때 청주에서 정은 언니가 경기를 하는 걸 보게 됐고 궂은 일 하면서 선수도 챙겨주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면서 “그때부터 언니 기사도 찾아봤다. 언니가 수술도 하고 아픔도 많았는데 이겨내서 올라가는 거 보고 반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 단 등번호 13번도 김정은의 등번호를 따라 달았다. 같은 팀에 있어 13번을 달 수 없는 오승인은 “해보고 싶었던 등번호이기도 하고 9번에 꽂혔다”며 지금의 등번호를 설명했다.친구들이 대학 생활을 누리고 남자친구를 사귀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오승인의 1순위는 운동이다. 아직 남자친구도 없고 코로나19로 외출도 어려운 상황은 운동에만 매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날도 오승인은 점심을 먹고 웨이트를 한 시간 넘게 한 뒤 전주원 코치가 이끄는 오후 체력 훈련까지 소화했다. 박지현은 올스타 선정 기념으로 제작한 여농티비 콘텐츠에서 김소니아에게 ‘가냘프다’의 뜻을 수수께끼로 내면서 “승인이한테 가냘프다고 쓴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오승인은 말랐다. 오승인은 “다른 선수와 비교해도 정말 많이 먹는데 살이 안 찐다”면서 “일반인이었으면 좋은 거지만 운동선수로선 아쉬운 것 같다”고 했다. 몸을 키우기 위해 요즘은 프로틴도 하루에 네 번 챙겨 먹는다. 농구적으로는 자세 낮추는 일을 신경 쓰고 있다. 오승인은 “밖에서 보기에 불안해 보이는 것 같다”면서 “몸싸움을 하기 전에 자세를 잡아야 하는데 아직 많이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지현을 보면서도 자세 낮추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다.높아진 인기에 코트에서 경기를 준비하는 다른 선수들까지 신경이 쓰일 정도의 밀착 취재도 들어오는 상황이지만 오승인은 미모보다는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은 꿈을 숨기지 않았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잘해보고 싶어요. 농구가 싫은 적도 없었고 프로가 돼서 농구가 힘든 건 다들 가진 고충이니 괜찮아요. 갑자기 관심을 많이 받게 됐지만 부모님도 여기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겸손하라고 말씀해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다 잘하고 싶지만 결국 궂은 일부터 시작해야죠. 화려하진 않지만 그게 가장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라고 생각해요. 그런 선수가 있기에 빛나는 선수가 있는 거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가 그 자리를 갈 수도 있는 거니까요.” 글·사진 류재민 기자 phoem@seoul.co.kr
  • ‘박찬호 은사‘ 토미 라소다 전 LA 다저스 감독 93세로 타계

    ‘박찬호 은사‘ 토미 라소다 전 LA 다저스 감독 93세로 타계

    한국인 1호 메이저리거 ‘코리안 특급’ 박찬호의 은사인 토미 라소다 전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 감독이 지난 7일(이하 현지시간) 93세로 별세했다고 AP 통신이 다음날 보도했다. 다저스 구단은 라소다 전 감독이 캘리포니아주 풀러턴 자택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병원으로 긴급 이송되는 도중에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고 전했다. 고인은 지난해 11월 건강 문제로 입원한 뒤 두 달 가까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며칠 전 건강을 회복해 퇴원했는데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76년 다저스 사령탑으로 부임한 라소다 전 감독은 1996시즌 중에 심장병을 이유로 사퇴할 때까지 21년 동안 다저스를 지휘했다. 1994년 다저스에 입단해 한국 선수로는 처음 메이저리거가 된 박찬호를 지도하며 남다른 인연을 쌓았다. 라소다 전 감독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뒤 이듬해 명예의전당에 올랐고, 다저스 구단 부사장과 고문으로 그라운드를 자주 찾는 등 많은 애정을 드러내 왔다. 다저스와의 인연은 무려 71년 이어졌다. 1954년 브루클린 다저스 시절 투수로 데뷔한 고인은 빅리그 마운드에서 세 시즌만 던지고 은퇴한 뒤 다저스 스카우트로 시작해 감독까지 올랐다. 총 3040 경기를 지휘하며 1599승 1439패 승률 .526를 기록했다. 월드시리즈 우승 2회, 준우승 2회, 내셔널리그 우승 4회, 서부지구 우승 8회의 굵직한 업적을 쌓으며 다저스의 레전드가 됐다. 등번호 2번은 다저스에서 영구결번됐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대표팀 감독을 맡아 우승을 일궈내 미국에 금메달을 안겼다.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열정적 리더십과 선수들과의 스스럼없는 소통으로 팀을 강하게 만들었다. 마이너리그의 많은 선수를 발굴해 메이저리거로 키워내고,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아홉 명이나 길러냈다. 다저스 구단주 마크 월터 회장은 “라소다는 훌륭한 야구 홍보대사였고, 선수들과 코치의 멘토였다. 그는 항상 팬들을 위해 시간을 내 사인을 해주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며 “(모두가) 그를 몹시 그리워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스탠 카스텐 다저스 사장은 “라소다만큼 다저스 정신을 구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며 “그는 결정적 순간에 팀을 승리로 이끄는 챔피언이었다”고 말했다. 박찬호가 처음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았을 때도 물심 양면으로 지원하며 그의 정착과 성공에 든든한 배경이 됐다. ‘박찬호의 양아버지’를 자처해 국내 야구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일년 중 가장 슬픈 날은 야구가 끝나는 날”, “내 몸에는 파란 피가 흐른다” 등의 명언을 남겼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을 달성한 박찬호도 지난해 6월 미 비영리 단체인 코리아소사이어티가 개최한 온라인 간담회에서 “할아버지뻘인 라소다 감독은 마치 동년배처럼 친구같이 대해줬다”고 회고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월드피플+] “꿈은 이루어진다”…사상 첫 트랜스젠더 여자프로축구 선수 탄생

    [월드피플+] “꿈은 이루어진다”…사상 첫 트랜스젠더 여자프로축구 선수 탄생

    브라질과 함께 남미축구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아르헨티나에서 사상 첫 트랜스젠더 여자프로축구선수가 탄생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축구선수 마라 고메스(23, 비야 산카를로스)는 7일(이하 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여자축구 1부 리그 경기에 공식 출전했다. 데뷔전을 치른 뒤 가진 인터뷰에서 고메스는 "꿈을 꾸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제야 믿게 됐다"면서 "앞으로 축구선수로서 무제한 성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여자축구 1부 리그는 지난달 30일 공식 개막했다. 2020~2021시즌 2주차를 맞아 고메스가 소속된 클럽 비야 산카를로스는 라누스를 상대로 홈경기를 벌였다. 등번호 7번을 달고 출장한 고메스는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볐지만 팀은 1대7로 대패했다.하지만 축구계의 시선은 경기보다 데뷔한 고메스에 쏠렸다. 원정경기에서 대승을 거둔 라누스는 여자축구 1부 리그에 데뷔한 사상 첫 트랜스젠더 선수 고메스에게 등번호 10번이 찍힌 유니폼을 특별 제작해 선물했다. 고메스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라 깜짝 놀랐다"면서 "진정한 스포츠 정신이 실감한 것 같아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15살 때부터 축구를 시작한 고메스는 지난달 28일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로부터 여자축구리그에 데뷔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선수등록 행정절차가 늦어지면서 지난달 30일 열린 시즌 첫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여자선수로 등록을 완료하기까진 난관이 많았다. 생물학적으로 남자인 그가 여자선수로 뛰어도 되는가를 놓고 축구계에선 갑론을박이 많았다. 그런 그에게 아르헨티나 축구협회가 데뷔의 길을 열어주기로 한 데는 2012년 제정된 성정체성에 대한 아르헨티나 연방법이 결정적이 역할을 했다.성정체성에 대한 아르헨티나 연방법에는 생물학적 성을 떠나 개인이 선택한 성정체성을 인정해야 하며, 이로 인한 불이익이 있어선 안된다고 규정돼 있다.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는 이 법을 근거로 고메스에게 여자선수 자격을 인정했지만 정기적으로 테스토스테론(남성 성호르몬)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에 따라 고메스는 매 시즌 개막 직전과 중간에 테스토스테론 검사를 받아야 한다. 그는 "공정을 보장하기 위해 협회가 제시한 조건"이라면서 "전혀 기분 나쁜 일이 아니라 흔쾌히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고메스는 "트랜스젠더가 여자리그에서 뛸 수 있게 된 건 개인의 경사일 뿐 아니라 사회적 사건이라고 본다"면서 "성소수자 사회가 또 하나의 큰 진전을 기록하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쌍둥이 이름은 ‘마라와 도나’…마라도나 이름 나눠가진 자매

    쌍둥이 이름은 ‘마라와 도나’…마라도나 이름 나눠가진 자매

    이젠 진짜 전설이 된 아르헨티나 '축구의 신' 디에고 마라도나의 성을 사이좋게 나눠 가진 쌍둥이 자매가 있어 화제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살고 있는 9살 쌍둥이 자매의 이름은 각각 '마라'와 '도나'다.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아빠가 이런 이름을 지어두면서 쌍둥이 자매는 타의로 마라도나와 숙명적인 인연(?)을 맺게 됐지만 자신들의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한다. 언니 마라는 "의미를 모르고 그냥 불러도 정말 예쁜 이름인 것 같다"면서 "이런 이름을 갖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마라도나의 성을 절반으로 나눠 쌍둥이 딸들에게 나눠준 아빠 왈테르 로툰도(38)는 일명 마라도나교회에 다닐 정도로 마라도나의 열성 팬이다. 왈테르 로툰도는 쌍둥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1990년 일찌감치 딸들의 이름을 지었다. 그가 불과 8살 때였다. 그는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결승전에서 석연치 않은 페널티킥으로 독일에 0대 1로 패하자 엉엉 울어버린 마라도나를 보면서 앞으로 딸들이 태어나면 꼭 마라와 도나라는 이름을 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마라도나교회를 다니면서 열심히 기도를 한 탓일까? 2012년 기적처럼 쌍둥이 딸이 태어나면서 그는 어릴 적 꿈을 이루게 됐다. 그는 "쌍둥이 엄마를 만나 연애를 할 때 미리 동의를 얻었다"면서 "아내 또한 딸들의 이름에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라도나의 이름을 절반씩 나눠 가진 쌍둥이 자매는 상표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이건 불가능하다. 쌍둥이 자매가 가진 건 단순히 이름일 뿐 상표권 소유자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마라도나'의 상표권은 그의 생전 고문변호사였던 마티아스 모를라가 설립한 법인이 소유하고 있다. 이 법인은 마라도나와 관련된 주요 표현을 모두 상표로 등록,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 회사가 등록한 상표는 '마라도나' '디에고' '(등번호) 10번' '신의 손' 등이다. 현지 언론은 "마라도나가 그에게 상표 등록을 어떤 식으로 허용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라면서 "앞으로 유가족이 권리를 주장하면 법적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 우승,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준우승을 이끈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마라도나는 지난달 2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
  • 마라도나 추모의 힘...옛 소속 클럽 대거 승전보

    마라도나 추모의 힘...옛 소속 클럽 대거 승전보

    세기의 축구 천재 디에고 마라도나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지난 주말 마라도나가 과거 몸 담았던 클럽들이 대거 승리를 거둬 눈길을 끈다. 마라도나가 프로 커리어에서 절정기를 보냈던 이탈리아 나폴리는 30일 새벽 스타디오 산 파올로에서 열린 세리에A 홈 경기에서 로렌초 인시녜, 파비안 루이스 페냐, 드리스 메르턴스, 마테오 폴리타노의 연속골을 앞세워 AS로마를 4-0으로 대파했다. 6승 3패를 기록한 나폴리는 5위에 자리했다. 이날 산 파올로에는 마라도나의 대형 그림과 사진이 내걸렸다. 나폴리 선수들은 경기 전 마라도나의 사진 앞에 헌화하기도 했다. 특히 인시녜는 선제골을 넣은 뒤 마라도나의 등번호 10번 나폴리 유니폼을 손에 들고 세리머리를 펼쳤다.나폴리는 1986년 6월부터 7년간 마라도나가 몸담았던 팀이다. 이 기간 마라도나는 세리에A 첫 우승 등 스쿠데토 2회, 코파 이탈리아 1회 UEFA컵 1회,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회 우승을 나폴리에 안기며 이탈리아 북부에 견줘 상대적으로 빈곤했던 이탈리아 남부의 영웅으로 대접 받았다. 등번호 10번은 나폴리의 영구 결번이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4강에서 마라도나가 이끈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이탈리아를 꺾은 일이 빌미가 되어 이탈리아축구협회의 미움을 산 끝에 결국 이탈리아를 떠나게 됐지만 나폴리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마라도나의 인기가 높다. 나폴리에 앞서 마라도나가 최초로 몸 담았던 유럽 클럽 FC바르셀로나(스페인)도 전날 밤 라리가 경기에서 오사수나를 4-0으로 격파했다. 마르틴 브레이스웨이트, 앙투안 그리즈만, 필리페 쿠티뉴가 연속 골망을 흔들었고, 마라도나의 후계자로 각광 받았던 리오넬 메시가 쐐기골을 터뜨렸다. 메시는 유니폼 상의를 벗고 안에 받쳐 입은 아르헨티나 뉴웰스 올드 보이스의 유니폼(등번호 10번)을 드러내며 하늘을 향해 손 키스를 날렸다. 뉴웰스는 마라도나가 현역 말년을 보낸 팀이자 메시가 유소년 시절을 보낸 팀이다. 메시는 이 세리머니로 옐로 카드를 받았다. 나폴리를 떠난 마라도나가 한 시즌 머물렀던 마지막 유럽 팀 세비야도 전날 새벽 우에스카를 1-0으로 제압했다.한편, 마라도나가 숨지기 직전까지 감독으로 지휘봉을 잡고 있던 힘나시아는 마라도나를 기리기 위해 ‘코파 디에고 마라도나’로 명칭을 바꾼 리그 컵 대회 경기에서 벨레스 사르스피엘드를 1-0으로 물리쳤다.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뛰던 시절 몸 담았던 보카 주니어스와 뉴웰스 올드 보이스의 맞대결에선 보카 주니어스가 2-0으로 완승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축구의 신‘ 떠나는데 마지막으로, 아르헨티나에 마라도나 추모 인파

    ‘축구의 신‘ 떠나는데 마지막으로, 아르헨티나에 마라도나 추모 인파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통령궁 일대가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려는 팬들로 가득 찼다. 조문 시간 마감을 앞두고 미처 작별 인사를 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경찰이 최루탄과 고무탄을 동원하며 통제에 나서기도 했다. 26일(현지시간) 마라도나의 시신이 안치된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 주변에는 수만 명의 추모 인파가 3㎞ 넘게 줄을 늘어섰다. 아르헨티나인들은 전날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60세 나이에 세상을 뜬 마라도나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도심의 카사 로사다로 몰려들었다. 오전 6시 조문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전날 밤부터 카사 로사다 앞에서 자리를 잡고 기다린 팬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줄은 더욱 길어졌다. 아르헨티나 일간 클라린의 생중계 영상엔 인근 도로에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린 조문객들이 커다란 검은 리본이 걸린 카사 로사다에 차례로 들어서는 모습이 담겼다. 내부에는 아르헨티나 국기와 등번호 10번이 적힌 유니폼이 덮인 고인의 관이 놓여 있고, 추모객들이 그 앞을 지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성호를 긋거나 힘차게 손뼉을 치기도 하고, 유니폼이나 꽃을 던지면서 키스를 날리기도 했다. 눈물을 흘리며 마라도나의 이름을 외치는 팬도 있었다. 목발을 짚은 채 일찌감치 빈소를 찾은 팬 나우엘 델리마(30)는 AP 통신에 “그(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를 세계에 알렸다”며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준 위대한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 마라도나가 뛰던 아르헨티나 프로축구 보카 주니어스의 팬인 크리스티안 몬텔리(22)는 로이터에 “마라도나를 아버지만큼 사랑했기 때문에 마치 아버지를 잃은 것 같다”며 울먹였다. 이날 일반 조문객을 맞기에 앞서 가족과 지인들이 먼저 고인을 배웅했다. 전 부인과 자녀들, 그리고 아르헨티나가 우승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고인의 팀 동료를 비롯한 축구선수들이 함께 했다고 AP는 전했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도 부인과 함께 관저에서 헬기를 타고 카사 로사다에 도착해 조문했다. 그는 현지 라디오 인터뷰에서 “(고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고맙다는 것뿐이다. 국민에게 이렇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얼마나 될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일간 라나시온은 전했다. 이날 아르헨티나 안팎의 언론은 “신이 죽었다” “이제 신이 하늘로 갔다”는 등의 헤드라인으로 ‘축구의 신’을 추모했다. 마라도나는 ‘신’을 뜻하는 스페인어 ‘디오스’(Dios)에 등번호 10을 넣어 ‘D10S’로 불렸다. 국민 영웅을 배웅하려는 팬들의 열기는 코로나19 공포도 넘어섰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강도 높은 전 국민 격리를 장기간 시행해 왔지만, 마라도나 추모 인파를 막지 않았다.이날 대통령궁 앞에 모여 고인을 추모한 팬 중엔 마스크 없이 노래하거나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당국은 카사 로사다에 100만명의 추모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팬들의 인사를 받은 후 마라도나는 먼저 세상을 뜬 부모가 잠들어 있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 공원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한편 마라도나가 전성기를 보낸 이탈리아 나폴리 축구경기장 ‘스타디오 산 파올로’에 마라도나의 이름이 붙을 것으로 보인다. 루이지 데 마지스트리스 나폴리 시장은 26일 라디오 ‘안키오 스포르트’와의 인터뷰에서 나폴리 경기장이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로 명명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누구도 마라도나를 넘어설 수 없다. 그는 나폴리 시와 나폴리 클럽의 영원한 연대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나폴리 시민들이 경기장을 그렇게 부르고 싶어 한다고 강조했다. 나폴리 구단의 아우렐리오 데 라우렌티스 회장도 클럽 홈페이지에 공개한 추모 글을 통해 “파올로 경기장을 당신의 이름을 따 명명하는 게 옳다고 믿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팀이 걸어온 훌륭한 길의 목격자로서 당신을 계속 우리 곁에 둘 수 있을 것”이라며 이에 호응했다. 마라도나는 1984년부터 1991년까지 7년을 나폴리에서 뛰는데 1987년 창단 첫 리그 우승과 함께 1989~90년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두 차례 우승을 이끌었다. 나폴리 구단은 물론 본인의 축구인생에서도 황금기로 꼽힌다. 해서 고인의 고국 아르헨티나 못지 않게 나폴리 시민들의 추모 열기가 뜨겁다. 이 경기장에 이틀째 애도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경기장 밖 한쪽은 수많은 촛불과 꽃다발, 사진, 유니폼 등으로 수놓였다. 경기장에는 마라도나 얼굴 이미지에 ‘더 킹’(The King)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대형 걸개그림도 등장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이젠 하늘에서 드리블…마라도나 심장마비로 타계

    이젠 하늘에서 드리블…마라도나 심장마비로 타계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마오.’‘신의 손’이 신들 곁으로 갔다. 아르헨티나가 배출한 세계 축구 전설 디에고 마라도나가 25일(현지시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60세. 아르헨티나 현지 언론들은 마라도나가 이날 오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 티그레의 자택에서 숨졌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그는 뇌경막하혈종 수슬을 받고 11일 퇴원해 회복 중이었다. 구급차 9대가 출동했으나 끝내 그를 소생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60번째 생일이던 지난달 30일 지난해부터 지휘봉을 잡아온 힘나시아 라플라타의 경기가 열리기 앞서 생일 축하 인사를 받은 게 공개 석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 됐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사흘간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이 기간 마라도나의 시신은 대통령 궁에 안치된다. 마라도나는 브라질 펠레(80)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로 꼽힌다. 그는 경제 위기와 정치 혼란, 포틀랜드 전쟁 등으로 상처가 깊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축구공 하나로 위로한 불세출의 천재였다. 작지만 탄탄한 체격과 지칠줄 모르는 체력, 수비수 서너 명은 쉽게 제치는 현란한 드리블, 위치를 가리지 않고 왼발로 쏘아 올리는 동물적인 슈팅에 아르헨티나는 물론 세계 축구 팬들은 탄성을 질렀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5살 때부터 공을 자유자재로 다뤘던 마라도나는 16세에 프로에 데뷔했고, 17세에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정상을 밟았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잉글랜드와의 8강전에서 손으로 골을 넣어 세계 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와 관련 마라도나는 “나의 머리와 신의 손이 함께 만든 골”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조국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탈리아 세리에A 나폴리에서 7년 간 프로 최고의 시절을 보내던 마라도나는 당시 4강에서 이탈리아를 꺽은 일로 하루 아침에 비난 대상이 되며 나폴리를 떠나는 비운을 겪었다. 그의 등번호 10번은 나폴리에서 영구 결번이다.네 번째 출전이던 1994년 미국월드컵 도중 도핑에 적발돼 대표팀 유니폼을 벗으며 내리막을 걸었고, 사생활에서 약물 중독, 음주, 폭행, 탈세 등으로 구설이 끊이지 않았다. 1997년 그라운드를 떠난 마라도나는 2001년 11월 아르헨티나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세계 올스타팀과 은퇴 경기를 치렀고, 프로 통산 588경기 312골, A매치 통산 91경기 34골의 기록을 남겼다. 이후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8강까지 이끌기도 했으나 선수 시절에 견주면 크게 빛나지는 못했다. 마라도나는 한국 축구와도 인연이 깊다. 월드컵 무대에서 두 번 겨뤘다.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선수로 마라도나를 전담 수비하며 ‘태권 축구’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감독으로 마라도나와 지략 대결을 펼쳤던 허정무 대전하나시티즌 이사장은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제가 반딧불이라면 마라도나는 태양이나 환한 달 같은, 감히 기량을 견줄 수 없는 존재였다”고 돌이키며 “조금 일찍 타계한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아공 때를 보면 우리와 경기를 앞두고 ‘태권 축구’를 언급하며 심판 판정을 압박하는 등 심리적인 면에서도 수가 뛰어난 승부사라는 걸 느꼈다”고 덧붙였다.축구계는 물론 전 세계에서 애도 물결이 일고 있다. 펠레는 트위터에 마라도나의 사진을 올리며 “나는 위대한 친구를 잃었고 세계는 전설을 잃었다”면서 “언젠가 하늘에서 함께 축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썼다. 메시도 마라도나와 함께한 사진을 게시하며 “그는 떠나가지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디에고는 영원하다”고 인사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마법사였다”고 기리며 마라도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도 마라도나를 추모하며 기도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교황청 대변인을 인용해 보도했다. 교황청은 마라도나를 ‘축구의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마라도나 60세 일기로 눈 감아, 펠레 “언젠가 하늘에서 함께 공을”

    마라도나 60세 일기로 눈 감아, 펠레 “언젠가 하늘에서 함께 공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디에고 마라도나가 60세를 일기로 생을 접었다. 아르헨티나의 미드필더로 1986년 월드컵 우승을 조국에 바쳤고 감독으로도 이름을 떨친 그는 25일(현지시간)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 티그레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숨을 거뒀다. 이달 초 뇌에 혈전이 발견돼 수술을 받아 성공한 뒤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을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현지 일간 라나시온은 이날 아홉 대의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으나 마라도나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마라도나는 60세 생일이던 지난 10월 30일 자신이 이끌던 팀 힘나시아의 경기를 앞두고 생일 축하를 받았는데, 그것이 공개 석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 됐다. 등번호 10번의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 축구 전설이자 영웅이다. 브라질의 축구 황제 펠레와 더불어 아르헨티나를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96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주에서 태어나 1976년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 프로에 데뷔했으며, 아르헨티나 보카 주니어스, 스페인의 FC바르셀로나, 이탈리아 나폴리 등을 거쳤다. 작지만 단단한 몸에 화려한 드리블, 위력적인 왼발 킥으로 그라운드를 평정했다. 일찌감치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A매치 91경기에 출전해 34골을 넣었다. 34년 전 월드컵 우승 때 잉글랜드와 준준결승 때 이른바 ‘신의 손’으로 득점했던 일은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어쨌든 우승했고 대회 최우수선수(MVP)는 그의 차지였다. 은퇴 후에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지휘하기도 했다. 이후 아르헨티나와 중동, 멕시코 등에서 프로팀을 이끌다 지난해부터 아르헨티나의 힘나시아 라플라타 감독을 맡았다. ‘악동’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 마라도나에겐 약물 스캔들도 이어졌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도중 도핑 테스트에 적발돼 중도 귀국해야 했고 마약 중독 치료도 여러 차례 받았다. 마약과 알코올 복용, 비만 등으로 과거에도 심장 문제를 겪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았다. 이런저런 기행이나 논란을 일으키는 발언들로 언론을 장식하고 사생활을 둘러싸고도 말들이 나왔지만, 이같은 논란 속에서도 천재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한 축구 실력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었다. 축구 레전드의 비보에 아르헨티나와 전 세계 축구계가 슬픔에 빠졌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사흘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선포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통령궁 카사로사다에 시신을 안치해 26일부터 28일까지 일반인들이 추모할 수 있게 했다. 펠레는 “분명히 언젠가 하늘에서 우리가 함께 공을 차게 될 것”이라고 애도했고 고인이 몸 담았던 팀 나폴리도 작별을 전했다. 이날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에 앞서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도 마련될 예정이다.같은 아르헨티나 출신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는 “모든 아르헨티나 사람들과 축구계에 아주 슬픈 날이다. 그는 떠나지만 영원하기 때문에 떠나지 않는다. 난 그와 함께 산 아름다운 순간들을 간직하고 있으며 유족과 친구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고 페이스북에 적었다. ‘신의 손’에 당했던 잉글랜드의 레전드 개리 리네커는 “우리 세대 선수 가운데 최고였으며 모든 시대에 가장 빼어난 선수였다”고 돌아봤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토트넘에 몸담았던 아르헨티나 출신 오시 아르딜레스는 “우정과 축구, 비교할 바 없이 최고를 베풀어준 것이 고맙다. 간단히 말해 축구 역사에 최고의 선수다. 함께 한 즐거운 순간들이 너무 많았다. 그 중 어떤 것이 최고였다고 말하기 불가능할 정도다. RIP(영원한 안식을) 내 친구여”라고 애도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오늘 난 친구에게 작별을 고하게 됐고, 세계는 한 영원한 천재에게 작별을 고하게 됐다. 역대 최고 중 한 명이었다. 필적할 이가 없는 마술 같은 존재였다. 그가 너무 일찍 떠난다. 끝을 모르는 업적을 남기고, 결코 다른 이가 채울 수 없는 틈을 남기고 떠난다. 에이스여 영원한 안식을. 결고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추모의 글을 남겼다. 네이마르, 해리 케인, 마커스 래시포드 등도 천재의 떠남을 슬퍼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라이언킹’의 마지막 투혼… 8번째 별 품고 전설이 되다

    ‘라이언킹’의 마지막 투혼… 8번째 별 품고 전설이 되다

    ‘고별전 선발 풀타임’ 이동국 기쁨의 눈물홈팬들 전반 20분 2분간 기립 박수 화답98년생 팀 막내 조규성 2골… 전설 합작 울산, 광주 이기고도 9번째 준우승 눈물부산, 2부로 강등… 인천·성남 극적 잔류제주, K리그2 우승 확정… 내년 1부 복귀프로축구 전북 현대가 K리그 사상 첫 4연패를 달성하며 역대 최다 8회 우승 기록까지 세웠다. ‘라이언킹’ 이동국(41)은 8번째 별을 품으며 그라운드에 작별을 고했다. 전북은 1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0시즌 K리그1 파이널A 최종 27라운드에서 멀티골을 터뜨린 조규성의 활약에 힘입어 대구FC를 2-0으로 꺾었다. 승점 60점을 쌓은 전북은 이날 26호골을 넣은 주니오 등을 앞세워 광주FC를 3-0으로 제압한 울산 현대와 승점 3점 차를 유지하며 리그 정상에 섰다. 2017년부터 4년 연속 우승이다. 통산 우승에서도 성남FC를 제치고 최다 8회로 우뚝 섰다. 이날 경기는 이동국을 위한 90분짜리 은퇴 잔치였다. 그는 후반 막판 투입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선발 출장해 올 시즌 첫 풀타임을 소화했다. 전북의 자신감이 드러난 대목이었다. 1만 251명의 관중은 전반 20분이 되자 2분간 기립 박수를 보냈다. 20은 이동국의 등번호다. 맏형을 위한 축포는 막내의 몫이었다. 이동국이 프로 데뷔한 1998년 태어난 조규성은 전반 26분과 39분 거푸 골망을 갈랐다. 이동국은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뛰었으나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하고 K리그 548경기 228골 77도움으로 23년간의 사자후를 끝냈다. 이겨야 할 때 이기는 법을 아는 ‘승리 DNA’가 다시 한번 빛나며 전북의 역전 우승으로 이어진 시즌이었다. 전북은 15년 만에 통산 3번째 우승을 노린 울산에 견줘 스쿼드가 못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공수 전력에서 울산에 밀리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올 시즌 19승(3무5패) 중 10승을 1골 차로 따내며 승점을 챙겨 울산과 박빙의 경주를 펼쳤다. 또 울산과 3차례 격돌해 모두 이겼다. 18~20라운드에서 1무2패로 부진해 5점 차로 뒤졌을 때가 가장 큰 고비였으나 25라운드에서 따라잡더니 26라운드 맞대결에서 순위를 뒤집었다. 이동국은 은퇴식을 아버지, 어머니와 아내, 4녀 1남 자녀들과 함께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진 기자회견에서는 그는 “더는 이런 경기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가 가진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고 마지막 경기를 자평했다. 또 “은퇴식 내내 다리 경련과 추위에 힘들었지만 모두가 지켜보고 있어 내색 안 했다. (끝까지) 정신이 몸을 지배했다”며 웃었다. 전북은 이동국의 등번호를 영구 결번했다. 울산은 2013년과 지난해에 이어 또다시 막판 역전을 허용하며 눈물을 뿌렸다. 또 준우승만 9회를 기록하며 ‘준우승왕’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털어내지 못했다. 전날 파이널B 최종전에서는 인천 유나이티드와 성남이 극적으로 잔류하고, 부산 아이파크가 강등됐다. 개막 15경기 연속 무승(5무10패)에 그쳤던 인천은 5시즌 연속 생존 드라마를 썼다. 5연패로 위기에 몰렸던 성남은 마지막 2경기에서 거푸 역전승하며 잔류했다. 반면 부산은 마지막 2경기에서 거푸 역전패, 한 시즌 만에 2부 리그로 떨어졌다. 한편 1일 K리그2 경기에서는 제주 유나이티드가 서울 이랜드를 3-2로 물리치며 남은 한 경기에 상관없이 우승을 확정, 2부 강등 한 시즌 만에 1부로 돌아가게 됐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날개 접는 ‘20년 황금독수리’ 김태균

    날개 접는 ‘20년 황금독수리’ 김태균

    한화 이글스의 레전드 타자 김태균(38)이 20년간의 프로 생활을 접는다. 한화는 21일 “김태균이 최근 성장세를 보이는 후배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고 싶다며 은퇴를 결정, 구단에 현역 은퇴 의사를 밝혀 왔다”고 발표했다. 김태균은 내년 시즌 단장 보좌 어드바이저 역할을 담당할 예정이다. 김태균은 “좋은 후배들이 성장하고 있다. 후배들에게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은퇴를 결정했다”며 “팀의 미래를 생각할 때 내가 은퇴를 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구단을 상징하는 선수인 만큼 한화는 최고 예우로 은퇴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다만 코로나19로 제한적 관중 입장이 이뤄지는 점을 고려해 은퇴식은 내년에 열기로 했다. 한화는 김태균의 등번호 영구결번도 검토하고 있다. 한화 관계자는 “영구결번은 상징성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며 “기존 3명(장종훈, 송진우, 정민철)의 영구결번 선수와 견줘 내부적으로 검토가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태균은 올해 부상에 시달리며 67경기밖에 소화하지 못했고 타율 0.219 홈런 2개로 기량이 급격히 하락했다. 지난 시즌까지 지켜 온 11년 연속 3할 타율 기록이 깨진 것은 물론 역대 가장 적은 홈런이다. 김태균은 2001년 데뷔 첫해 타율 0.335(245타수 82안타) 20홈런으로 신인상을 차지하며 ‘홈런왕’ 장종훈을 잇는 한화의 4번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던 2010~2011년을 제외하고 18년을 한화에서 뛰며 통산 2014경기 0.320의 타율과 2209안타(역대 3위), 311홈런(11위), 1358타점(3위) 출루율 0.421 장타율 0.516을 기록했다. KBO리그에서 3000타석 이상에 선 타자 중 김태균보다 높은 출루율을 찍은 선수는 고(故) 장효조(출루율 0.427) 전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뿐이다. 2000안타 300홈런을 넘은 우타자는 김태균이 유일하다. 2005, 2008, 2016년엔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그러나 그가 있는 동안 팀이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것은 커리어의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류재민 기자 phoem@seoul.co.kr
  • 농구장에 나타난 펭수 등번호는 동글동글 8번

    농구장에 나타난 펭수 등번호는 동글동글 8번

    직장인들의 아이돌 펭수가 농구장에 나타났다. 펭수는 16일 경기 부천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부천 하나원큐와 용인 삼성생명의 경기에 시구자로 나섰다. 선수들의 격한 환영을 받으며 등장한 펭수는 “경기장이 선수들의 땀방울과 열정으로 가득차있다. 열정이 끓어오른다”는 첫 소감을 남겼다. 펭수는 “승리와 패배를 떠나서 모든 선수들이 다치지 않고 멋있는 경기 보여주면 감사할 것 같다”고 당부했다. 하나원큐 홈 개막전임에도 눈치를 챙기지 못한 펭수는 “양팀 모두 가자”고 외쳤고 사회자가 ‘여기 하나원큐 경기장이다’라고 알려주자 “하나원큐 가자”고 다시 외쳤다. 시구 행사는 단순 자유투 시구가 아닌 하나원큐 선수들과의 3X3대결로 이뤄졌다. 펭수는 공을 넘겨받은 뒤 페인트존 바깥쪽에서 던졌지만 에어볼이 나왔다. 하나은행 김두나랑이 다시 패스를 해 던졌지만 2구째도 에어볼. 펭수는 2전3기 끝에 골을 넣으며 포효하고 코트를 떠났다. 부천 류재민 기자 phoem@seoul.co.kr
  • 골~ 골~ 골~ 골~ 화끈했다… EPL 첫 4골 원맨쇼

    골~ 골~ 골~ 골~ 화끈했다… EPL 첫 4골 원맨쇼

    ‘슈퍼 손(Son) 데이’였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토트넘의 손흥민(28)이 커리어 첫 한 경기 네 골을 폭발시키며 축구 팬들에게 잊지 못할 일요일을 선물했다. 7년 만에 토트넘으로 복귀한 가레스 베일(31)에 대한 환영 인사도 거하게 한 셈이다.20일 밤(한국시간) 영국 사우샘프턴의 세인트 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0~21시즌 프리미어리그(EPL) 2라운드 사우샘프턴과의 원정경기는 토트넘으로서는 쉽지 않은 경기였다. 지난 14일 EPL 개막전 에버턴 전에 이어 18일 유로파리그 2차 예선 플로브디프 전 불가리아 원정을 다녀왔기 때문이다. 손흥민 역시 두 경기를 풀타임으로 뛰어 체력적으로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손흥민은 앞서 사우샘프턴을 상대로 11경기에서 6골 4도움을 뽑아냈던 천적으로서의 면모를 유감 없이 발휘했다. 토트넘은 전반 해리 케인이 두 차례나 골망을 갈랐으나 케인에게 패스가 건네지는 과정에서 손흥민과 루카스 모라의 오프사이드 반칙 판정이 나와 득점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토트넘은 전반 32분 카일 워커-피터스로부터 단 한 번에 공간 패스를 연결받은 대니 잉스에게 선제골을 두들겨 맞았다. 밀리던 분위기를 바꾼 것은 손흥민이었다. 전반 47분 상대 왼쪽 진영에서 탕귀 은돔벨레의 패스를 받은 케인이 대각선으로 공을 뿌렸고, 전력 질주해 이를 잡아낸 손흥민이 파포스트를 향해 강한 오른발 슛을 날려 골망을 갈랐다. 손흥민은 또 후반 2분 만에 상대 뒷공간을 허무는 케인의 패스를 받아 왼발로 재차 골망을 흔들며 승부를 뒤집었다. 손흥민은 후반 19분에도 케인의 전진 패스를 받아 오른발로 해트트릭을 완성했다. 토트넘에 입단한 2015년 8월 이후 5년 만에 EPL 경기에서 첫 해트트릭을 작성한 것. 앞서 손흥민은 2017년 3월 밀월과의 잉글랜드축구협회(FA)컵 8강전에서 잉글랜드 무대 첫 해트트릭을 기록한 바 있다. 그러나 손흥민은 이에 그치지 않고 9분 뒤 케인이 꺾어준 크로스를 가슴으로 받아 놓은 뒤 왼발로 차 넣어 자신의 정규리그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다. 이날 경기는 후반 37분 케인이 추가골을 넣고 후반 45분 잉스가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만회하며 토트넘의 5-2 승리로 끝났다. 이날 경기에 앞서 토트넘은 웨일스의 축구 스타 베일을 레알 마드리드(스페인)로부터 1년 임대 영입했다고 발표했다. 베일의 등번호는 9번이다. 영국 언론은 토트넘이 베일의 1년 급여와 임대료로 약 2000만 파운드(약 302억원)를 쓴다고 보도했다. 60만 파운드(약 9억원)에 달하는 베일의 주급 중 상당 부분은 레알 마드리드가 책임진다. 토트넘은 또 지난 시즌 세비야에 임대돼 뛰었던 레알 마드리드의 측면 수비수 세르히오 레길론(24)을 5년 계약으로 영입했다. 베일로서는 7년 만의 친정 복귀다. 베일은 2007~08시즌부터 6시즌 동안 토트넘에서 203경기를 뛰며 55골을 터트린 활약을 바탕으로 2013년 9월 레알 마드리드에 입성한 바 있다. 토트넘은 최전방에 케인을 놓고 좌우에 손흥민과 베일을 배치, 공격력을 극대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KBS 라인’이다. 다만 베일이 최근 유럽 네이션스리그에서 웨일스 대표로 뛰다 무릎을 다쳐 KBS 라인이 본격 가동하려면 다소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토트넘은 “10월 A매치 기간 뒤 경기에 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100패 보이는 한화, 타선 새 얼굴이 안 보인다

    100패 보이는 한화, 타선 새 얼굴이 안 보인다

    ‘99.’ 팀의 걸출한 에이스(류현진)가 달았던 등번호이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승했던 해(1999년)를 상징하는 이 숫자는 한화 이글스가 7일까지 치른 경기 수다. 그리고 이번 시즌 한화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둬야 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혹독한 시즌을 보내는 한화는 올해 27승1무71패 승률 0.276의 성적을 남기고 있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한화는 이번 시즌 40승을 거둘 수 있다. 정규시즌은 144경기. 이는 곧 역대 첫 100패가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99패를 하면 그나마 다행일까 싶지만 그래도 역대 최다인 97패(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2002년 롯데 자이언츠)를 넘는다. 시즌 초반부터 성적이 곤두박질치다 보니 한화는 강력한 리빌딩의 명분이 생겼다. 그러나 시즌 막바지를 향해 가는 시점에서 리빌딩의 속도와 결과물이 기대보다 뚜렷하지 않아 고민이 크다. 특히 노쇠화됐다고 지적받는 타선에서 성과가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출전 경기 수가 많은 10명의 선수 명단을 보면 이용규(35) 91경기, 최재훈(31) 88경기, 정은원(20) 79경기, 정진호(32) 72경기, 김태균(38) 67경기, 노수광(30) 61경기, 노시환(20) 61경기, 오선진(31) 58경기, 송광민(37) 56경기, 최진행(35) 56경기 순이다. 2년 전 국가대표 2루수 정근우(38) 자리를 꿰찬 정은원은 예외로 하더라도 기존에 주축이 아니었던 선수로 그나마 노시환이 새 얼굴로 주전 기회를 얻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0.198의 타율에 그쳤던 그는 올해도 0.211의 타율로 아쉬운 성적을 보이고 있다. 장타력에 가능성은 보이지만 트레이드나 자유계약선수(FA) 영입 등이 이뤄진다면 언제든지 밀려날 수 있는 성적이다. 기회를 줘도 확실하게 잡는 선수가 없다 보니 한화는 결국 돌고 돌아 기존 선수를 활용하고 있다. 꾸준한 기회 속에 성장세가 돋보이는 선수가 있어야 리빌딩의 의미가 있지만 한화에게는 아직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마운드에선 그나마 희망이 보인다. 김민우(25)가 96과3분의2이닝 평균자책점(ERA) 4.10의 성적으로 확실한 선발카드로 자리매김했다. 1군 첫 시즌을 보내는 윤대경(26)이 최근 16경기 연속 무실점 행진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1군 첫 시즌인 강재민(23)도 31경기 1패7홀드 ERA 3.00으로 핵심 불펜으로 떠올랐다. 이 선수들에겐 꾸준함이 관건이다. 성적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상황에서 한화의 지상과제는 리빌딩만 남았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구단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받아온 리빌딩이 또다시 흐지부지돼 내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문제로 남게 된다면 한화로서는 상처만 남는 2020년이 될 수 있다. 류재민 기자 phoem@seoul.co.kr
  • 1185원, 1조원… 스포츠 ☆들 ‘☆의☆ 이적료’

    1185원, 1조원… 스포츠 ☆들 ‘☆의☆ 이적료’

    1달러(1185원)부터 1조원까지…. 프로선수의 몸값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좋은 선수 영입을 위해 구단은 천문학적인 액수를 선수 몸값으로 지불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치가 떨어지면 몸값이 수직 하락하기도 한다. 미국 프로야구 최고 부자 구단 뉴욕 양키스가 최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1달러’를 지불했다. 금액의 정체는 포수 롭 브랜틀리를 영입하기 위한 것. 양키스는 게리 산체스, 에릭 크래츠 등 2명의 포수로 시즌을 치르는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샌프란시스코가 전력 외로 분류한 브랜틀리를 데려왔다. 1달러는 메이저리그(MLB)에서 상징적인 금액으로 구단은 활용이 어려운 선수를 다른 구단에 보낼 때나 해외 선수를 자국으로 돌려보낼 때 이적료 1달러를 활용한다. 실제로 윤석민이 KIA 타이거즈로 복귀할 때도 볼티모어 오리올스 구단은 ‘다른 미국 구단에서 뛰지 않는다’는 조건과 함께 KIA에 이적료 1달러를 요구했다. 해외 선수를 영입하고자 MLB 구단은 원 소속 구단에 이적료 개념인 포스팅 금액을 지불하는 데 상징적인 숫자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2012년 LA 다저스는 류현진 영입을 위해 2573만 7737달러 33센트의 이적료를 적었다. 당시 현지 언론은 ‘7’과 ‘3’이 한국에서 행운의 의미로 풀이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앞서 2006년 보스턴 레드삭스는 ‘1’을 행운의 숫자로 여긴 구단주의 뜻에 따라 마쓰자카 다이스케 영입에 5111만 1111달러 11센트의 금액을 책정했다. 2011년 텍사스 레인저스는 다르빗슈 유 영입에 5170만 3411달러의 금액을 적었다. 3411은 구단 최고경영자이자 텍사스의 전설 놀런 라이언의 현역 시절 등번호 ‘34’와 다르빗슈의 일본 등번호 ‘11’을 조합한 숫자다. 축구는 이적료가 가장 잘 발달한 종목이다. 한국 축구선수 중 최고 몸값을 자랑하는 손흥민의 이적료는 7560만 유로(약 1023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리오넬 메시가 소속팀 FC바르셀로나에 이적을 요청해 축구계가 들썩이는 가운데 바르셀로나가 책정한 바이아웃 금액이 1조원에 가까운 7억 유로(약 9823억원)에 달해 화제가 됐다. 네이마르 영입을 위해 파리 생제르맹이 바르셀로나에 지불한 역대 최고액 2억 2200만 유로(약 3087억원)의 3배가 넘는 금액이다. 이적료의 개념은 좁게 한정하면 축구에만 있다. 야구나 농구는 자유계약(FA)이나 트레이드 제도가 발달해 있어 이적료 없이 팀을 옮기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수 영입을 위한 구단 간의 자본 거래’로 범위를 넓히면 이적료는 스포츠 비즈니스의 세계에 폭넓게 퍼져 있다. 한준희 KBS 축구 해설위원은 27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축구의 이적료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네이마르나 음바페가 이적료를 천문학적으로 올려놓은 케이스인데 여기에는 오일머니의 영향이 크다. 요즘은 완전히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고 말했다. 류재민 기자 phoem@seoul.co.kr
  • 축신이여 쿼바디스…메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축신이여 쿼바디스…메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올시즌 종료 뒤 자유 이적’옵션 해석 두고 입장 대립올시즌 팀 수뇌부와 불화뮌헨전 2-8 대패로 방아쇠연봉 1300억 감당 가능한 맨시티·파리 등 관심 집중‘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33)와 스페인 축구 명가 FC바르셀로나의 20년 동행이 파국을 맞으며 세계 축구계가 들썩이고 있다. 메시가 바르셀로나에 계약 해지를 전격 요청했다고 AP·로이터 통신 등이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계약 기간이 내년 6월까지이지만 메시는 자유계약선수(FA) 신분으로 즉각 팀을 떠나고 싶다는 문서를 내용증명 팩스로 보냈다고 한다. 향후 법적 다툼까지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구단은 메시의 요청에 절대 불가 입장과 함께 “은퇴까지 함께하면 좋겠다”는 뜻을 팩스로 회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열세 살 때 바르셀로나에 입단한 메시가 이적 의사를 공식화한 것은 처음이다. 7억 유로(약 9821억원)까지 치솟은 바이아웃(최소 이적료) 조항을 두고 분쟁이 뒤따를 예정이다. 메시는 2017년 계약 기간을 4년 연장하며 시즌 종료 시점에 자신이 원하면 바이아웃 없이 이적할 수 있다는 옵션을 추가했다. 구단은 옵션 발동 시한이 지난 6월 10일 만료됐다고 보고 있지만 메시는 코로나19 여파로 시즌이 늦게 끝나 유효하다는 입장이다. 2000년 말 레스토랑 냅킨에 휘갈겨 쓴 계약으로 인연을 맺은 양측은 운명 공동체와 마찬가지였다. 메시는 2004년 프로 데뷔 이후 라리가 우승 10회, 컵대회 우승 6회, 챔피언스리그 우승 4회, 발롱도르 6회 수상 등 영광의 역사를 바르셀로나와 함께 써 왔다. 또 이적설이 불거질 때마다 “커리어를 바르셀로나에서 마치는 게 꿈”이라고 했다. 날벼락 같은 소식에 바르셀로나 팬은 홈구장 캄노우에 몰려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메시의 이적 움직임은 조짐이 있었다. 2019~20시즌 들어 구단 수뇌부와 마찰이 잦았다. 네이마르 재영입 등 메시가 원하는 방향의 전력 보강이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 1월 감독 경질, 코로나19로 인한 연봉 삭감 과정에서도 불화가 일었다. 급기야 바르셀로나는 2007~08시즌 이후 처음으로 단 한 개의 우승 트로피도 품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지난 15일 바이에른 뮌헨(독일)과의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당한 굴욕적인 패배(2-8)가 메시의 결심에 방아쇠를 당긴 것으로 보인다. 맨체스터 시티(잉글랜드)가 메시의 차기 행선지로 우선 꼽힌다. 세계적인 거부 만수르 구단주가 메시에 대해 가진 애정은 대단하다. 게다가 바르셀로나에서 트레블을 함께 일군 페프 과르디올라 감독이 맨시티 지휘봉을 잡고 있다. 네이마르 등 슈퍼스타를 여럿 거느린 파리 생제르맹(프랑스)도 1300억원을 웃도는 메시의 연봉을 감당할 만한 팀이다. 중국 유통 재벌 2세 장캉양이 구단주인 인터밀란(이탈리아)도 메시에게 관심이 있다. 소셜미디어도 뜨겁다. 메시의 옛 동료 카를로스 푸욜은 트위터에 “존중과 존경을 보낸다”며 지지 글을 남겼다. 로날드 쿠만 바르셀로나 신임 감독에게 방출 통보를 받은 루이스 수아레스는 푸욜의 글에 ‘박수 이모티콘’을 남겼다. 이탈리아 삼프도리아는 “팀에 등번호 10번이 비어 있다”며 이루기 힘든 구애를 펼쳤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축신이여 쿼바디스…메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축신이여 쿼바디스…메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올시즌 종료 뒤 자유 이적’옵션 해석 두고 입장 대립올시즌 팀 수뇌부와 불화뮌헨전 2-8 대패로 방아쇠연봉 1300억 감당 가능한맨시티·파리 등 관심 집중‘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33)와 스페인 축구 명가 FC바르셀로나의 20년 동행이 파국을 맞으며 세계 축구계가 들썩이고 있다. 메시가 바르셀로나에 계약 해지를 요청했다고 AP·AFP·로이터 통신 등이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계약 기간이 내년 6월까지지만 메시는 팩스로 자유계약선수(FA) 신분으로 즉각 팀을 떠나고 싶다는 문서를 보냈다고 한다. 구단은 메시의 이적 요청에 절대 불가 입장과 함께 “은퇴까지 함께하면 좋겠다”는 뜻을 팩스로 회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 유소년 선수로 바르셀로나에 입단한 메시가 이적 의사를 공식화한 것은 처음이다. 7억 유로(약 9821억원)까지 치솟은 바이아웃(최소 이적료) 조항을 두고 법적 다툼도 예고됐다. 메시는 2017년 계약 기간을 4년 연장하며 시즌 종료 시점에 자신이 원하면 바이아웃 없이 이적할 수 있다는 옵션을 추가했다. 구단은 옵션 발동 시한이 지난 6월 10일 만료됐다고 보고 있지만 메시는 코로나19 여파로 이번 시즌이 늦게 끝나 유효하다는 입장이다. 2000년 말 레스토랑 냅킨에 휘갈겨 쓴 계약으로 인연을 맺은 양측은 운명 공동체와 마찬가지였다. 메시는 2004년 프로 데뷔 이후 라리가 우승 10회, 컵대회 우승 6회, 챔피언스리그 우승 4회, 발롱도르 6회 수상 등 영광의 역사를 바르셀로나와 함께 써 왔다. 이적설이 불거질 때마다 “커리어를 바르셀로나에서 마치는 게 꿈”이라고도 했다. 날벼락 같은 소식에 바르셀로나 팬은 홈구장 캄노우에 몰려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메시의 이적 움직임은 조짐이 있었다. 2019~20시즌 들어 구단 수뇌부와 마찰이 잦았다. 네이마르 재영입 등 메시가 원하는 방향의 전력 보강이 이뤄지지 않았다. 사령탑 교체,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연봉 삭감 과정에서도 불화가 일었다. 급기야 바르셀로나는 2007~08시즌 이후 처음으로 단 한 개의 우승 트로피도 품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 지난 15일 바이에른 뮌헨(독일)과의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당한 2-8의 굴욕적인 패배가 메시의 결심에 방아쇠를 당긴 것으로 보인다. 메시가 이적 의사를 밝히면서 맨체스터 시티(잉글랜드)가 차기 행선지로 우선 꼽힌다. 세계적인 거부 만수르 구단주가 메시에 대해 가진 애정은 대단하다. 게다가 바르셀로나에서 트레블을 함께 일군 페프 과르디올라 감독이 맨시티 지휘봉을 잡고 있다. 네이마르 등 슈퍼스타를 여럿 거느린 파리 생제르맹(프랑스)도 1300억원을 웃도는 메시의 연봉을 감당할 만한 팀이다. 중국 유통 재벌 2세 장캉양이 구단주인 인터밀란(이탈리아)도 메시에게 관심이 있다. 소셜미디어도 뜨겁다. 메시의 옛 동료 카를로스 푸욜은 트위터에 “존중과 존경을 보낸다”며 지지 글을 남겼다. 로날드 쿠만 바르셀로나 신임 감독에게 방출 통보를 받은 루이스 수아레스는 푸욜의 글에 ‘박수 이모티콘’을 남겼다. 이탈리아 삼프도리아는 “팀에 등번호 10번이 비어 있다”며 이루기 힘든 구애를 펼쳤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故 고유민 선수 어머니, “악성 댓글, 우리 딸 비관 극단 선택 원인 아니다”

    故 고유민 선수 어머니, “악성 댓글, 우리 딸 비관 극단 선택 원인 아니다”

    지난달 31일 경기 광주 오포읍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여자프로배구 현대건설의 고유민 선수의 유족과 소송 대리인이 고 선수가 의도적 따돌림을 당하고 구단의 사기 계약이 선수를 좌절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고 선수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악성 댓글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라는 것이다.“악플 극단 선택 원인 아냐” VS “악플로 심신 지쳤다는 의사 확인”고 선수 유가족과 고 선수 측을 대리하는 박지훈 변호사는 20일 국회 정론관에서 송영길·박정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고유민 선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간 건 악성 댓글이 아니라 현대건설 배구단의 의도적 따돌림과 사기 갑질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고 선수 어머니도 “제 딸은 강한 아이라 악성 댓글만으로 비관 자살할 정도가 아니다”며 “제 딸이 얼마나 한이 깊었으면 죽어서도 눈을 못감고 있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박 변호사는 이날 경찰이 포렌식 수사로 고인의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에서 찾아낸 자료를 제시하며 “코칭스태프의 의도적인 따돌림은 훈련 배제로 이어졌다”며 “고유민 선수는 숙소에서 자해를 한 동료를 감싸다가 눈 밖에 난 뒤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들 수 있을 정도로 힘들어했다”고 밝혔다. 현대건설은 이날 기자회견 직후 밝힌 입장문에서 “고 선수는 지난 19~20시즌 27경기 중 25경기, 18~19시즌은 30경기 중 24경기에 출전 하는 등 꾸준히 경기에 참여했고, 과거 시즌 보다 더 많은 경기를 출전했다”며 “경기 및 훈련을 제외 시켰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또 현대건설 관계자는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자해 사건은 이도희 감독 부임 전에 있었던 일이다”라며 “그 선수도 악성 DM(인스타그램 개인 메시지·Direct Message) 때문에 힘들어 했다고 들었다”고 해명했다. 현대건설은 또 고 선수와의 합의가 ‘계약 해지’가 아닌 ‘계약 중지’라고 설명했다. 현대건설은 “고인은 2019~2020 시즌이 진행 중이던 2020년 2월 29일 아무런 의사 표명없이 팀을 이탈했다”며 “이탈에 대한 본인의 의사를 확인한 결과, 고인은 인터넷 악플로 심신이 지쳐 상당 기간 구단을 떠나 있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구단에서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상호합의 하에 3월 30일자로 계약을 중단했다”고 발표했다.고유민 선수, 구단과 트레이드 약속 뒤 계약 해지 합의해또 유가족 측은 고 선수와 구단이 타 구단으로의 트레이드를 전제로 한 계약해지 합의가 있었음에도 임의탈퇴를 강행했다고 주장했다. 박 변호사는 “현대건설은 고 선수에게 ‘트레이드를 시켜주겠다’며 ‘선수 계약 해지 합의서에 사인하라’고 요구했고 고 선수는 구단의 말을 믿고 3월 30일 사인했다”며 “한달 뒤인 5월 1일 현대건설은 일방적으로 고 선수를 임의 탈퇴 처리했다”고 밝혔다.유가족 측이 이날 공개한 ‘선수계약합의서’에는 3월 30일자로 양측의 도장과 사인이 있다. 1항에는 “선수는 구단과의 2019년 4월 1일 체결된 현대건설 배구단 선수 계약서 계약조건 제 22조 제1항, 훈련태만 및 불참 등에 따른 선수 계약 해지를 아래와 같이 합의하기로 한다”고 나온다.고 선수는 임의 탈퇴 소식을 접하기 전인 4월 20일 현대건설 사무국장에게 트레이드가 가능한지 물어보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이때 현대건설 사무국장은 “FA 끝나고, 5~6월 사이에 트레이드가 가능하다”고 답했다. 이에 고 선수가 “트레이드 가능한 팀 알아봐주실 수 있냐”며 “전 제가 필요한 곳에 있고 싶다”고 답했다. 그러자 현대건설은 “끝나고 감독님하고 상의할게”라고 답했다.하지만 고 선수가 갑작스러운 임의탈퇴 소식을 접한 뒤 가족, 지인, 동료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는 “어제 연맹에서 임의 탈퇴가 맞냐고 확인 차 전화왔다”, “계약 해지 합의서 들고 올 때는 좋은 조건으로 해준다고 해놓고 말도 없이 임의 탈퇴 공시했다”는 내용이 있다.게다가 유가족 측은 “현대건설은 고 선수에게 2020년 2월분 급여까지만 지급했다”며 “원래 지급해야할 7월까지의 급여는 이후 일절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즉, 이로 인해 고 선수가 구단과 계약이 해지됐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현대건설, 임의 탈퇴 후 고유민 의사 한번 더 확인했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임의 탈퇴 공시를 한 뒤에도 다른 팀들과 이해관계가 맞으면 트레이드를 할 수 있다”며 “다만 트레이드가 성사되지 않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한국배구연맹(KOVO) 관계자는 “규정 상 선수 계약이 유지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임의 탈퇴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즉, 계약 해지를 하도록 합의서를 받은 것이 임의 탈퇴를 위한 통상적인 절차가 아니라는 것이다. KOVO 관계자는 “트레이드는 임의 탈퇴를 해제한 뒤에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선수 입장에서는 선수와 상의 없이 임의 탈퇴를 공시했다면 트레이드 의사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현대건설은 “구단에서는 임의탈퇴 공시 후 배구에 대한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6월 15일 고인과 미팅을 하며 향후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고인은 배구가 아닌 다른 길을 가겠다는 의사가 확고해 배구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이 없음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고유민 등번호 받은 A선수 배번, 유족 말 듣고 발인 다음날 바꿔현대건설은 또 입장문에서 고유민 선수의 등번호 7번을 현대건설 배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7번은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임의탈퇴 직후 다른 선수에게 주어졌다가 다시 해당 선수가 다른 번호로 바뀌며 논란이 된 바 있다. 고 선수의 어머니는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초등학교 때 배구를 시작할 때부터 등번호 7번을 유지했던 유민이에게 7번은 이름보다 중요한 거였다. 그런데 유민이가 임의탈퇴 신분이 되니까 구단에선 곧바로 유민이 등번호를 다른 선수에게 내줘버렸다. 유민이가 그걸 보고서 충격이 컸다. 등번호 얘기 듣고서 얘가 갑자기 무너졌던 거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현대건설 관계자는 “5월 11일날 A선수에게 7번을 줬다”며 “이후 8월 3일 고 선수 발인하는 날 장례식 현장에서 어머니로부터 등번호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날인 8월 4일 구단 내부적으로 상의해서 배번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최영권 기자 story@seoul.co.kr
  • 다시 서울 유니폼 입은 기성용… 등번호 8번

    다시 서울 유니폼 입은 기성용… 등번호 8번

    한국 축구의 전 캡틴 기성용이 프로축구 K리그 FC서울로 복귀했다. FC서울은 21일 기성용과 입단 계약을 맺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계약 기간은 3년 6개월이다. 기간 외 자세한 조건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팀 내 최고 수준인 7억원 이상의 연봉을 보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등번호는 8번이다. 기성용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느낌”이라며 “FC서울은 축구 인생에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만들어 준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팀”이라고 말했다. 또 “기다려 준 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1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잘 성장해서 돌아왔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기성용은 22일 공식 기자회견을 갖는다. FC서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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