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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토] ‘광복군 군복’으로 새단장한 서울도서관 꿈세김판

    [포토] ‘광복군 군복’으로 새단장한 서울도서관 꿈세김판

    광복절 76주년 앞두고 9일 서울시 중구 서울도서관 외벽 꿈세김판에 ‘광복군 군복 편’이 걸렸 있다. 이 군복은 한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광복군 군복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460호로 등재돼있다. 육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1972년 1월 13일 서울시청 4층 한 금고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2021.8.9 뉴스1
  • [향토문화] 인천시 옛 시장관사 등 4건 등록문화재 1호 선정

    [향토문화] 인천시 옛 시장관사 등 4건 등록문화재 1호 선정

    인천시가 옛 시장관사, 자유공원 플라타너스, 수인선 협궤 객차, 수인선 협궤 증기기관차 등 4건을 시 등록문화제 1~4호로 등록고시했다. 시·도 등록문화재 제도는 2019년 12월 25일 부터 시행 됐으며, 인천에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8일 인천시에 따르면 이번에 등록고시된 4건은 인천의 역사성·상징성·정체성 등을 대표하는 근현대문화유산 발굴을 위해 50년 이상된 후보작을 대상으로 관계전문가의 현지조사, 문화재위원회 심의, 시민의견 수렴 등을 통해 선별했다.시 등록문화재 제1호 송학동 옛 시장관사(현 인천시민愛집)는 1901년 일본인 사업가의 별장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광복 후 서구식 레스토랑, 사교클럽으로 사용되다가 1966년 현존하는 건축물을 신축해 민선 초대 최기선 시장까지 17명의 인천시장이 사용하던 근대주택이다. 제2호로 등록고시된 ‘자유공원 플라타너스’는 국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플라타너스로, 수령이 130년 이상된 것으로 추정된다. 개항기와 인천상륙작전의 포화 속에서도 현재까지 버텨온 상징성이 고려됐다.제3호로 등록된 ‘수인선 협궤 객차’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공장인 인천공작창에서 1969년 제작돼 수인선 열차로 운행되다가 1995년 운행이 중단된 후 2018년 보전처리를 통해 복원됐다. 인천의 근현대 지역사를 보여주는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제4호로 등록된 ‘증기기관차’는 1952년 수원 기관차사무소에서 조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8년까지 수인선에서 운행하다가 2008년 보수정비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실제 운행되었던 소래역과 소래철교 인근에 전시되고 있어 소래포구의 독특하고 지역적인 정서를 내포하는 가치가 있어 이번에 시 등록문화재로 결정했다.백민숙 시 문화유산과장은 “근대문화유산의 보고인 우리 인천시는 전국 지자체 중 서울에 이어 2번째로 등록문화재 제도 정착에 모범적이고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진해·서천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 국가등록문화재 된다

    진해·서천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 국가등록문화재 된다

    문화재청은 경남 창원 진해구 화천동·창선동 일원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7만 1690㎡)과 충남 서천 판교면 현암리 일대 ‘서천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2만 2965㎡)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2일 밝혔다. 근대역사문화공간은 근대 시기에 형성된 거리, 마을, 경관 등 역사문화자원이 집적된 지역을 일컫는다.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은 1910년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계획도시이자 일본이 제국주의 열강과의 전쟁을 목적으로 주민들을 강제 이전시킨 아픔을 지닌 곳이다. 19세기 중반 서구 도시경관의 개념이 도입된 군사도시로서 방사상 거리, 여좌천, 하수관거 등 도시의 뼈대를 이루는 기반 시설이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태백 여인숙, 황해당인판사, 일광세탁, 육각집 등 11건의 문화유산이 있다.서천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은 1930년 장항선 판교역 철도개통과 함께 근대기 서천 지역 활성화의 중심지다. 양곡을 비롯한 물자 수송과 정미, 양곡, 양조산업, 장터가 형성되어 한국 산업화 시대에 번성기를 맞았다. 2008년 철도역 이전으로 본격적인 쇠퇴의 과정을 거친 근·현대기 농촌 지역의 역사적 흐름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문화재청은 “정미소, 양조장, 방앗간, 극장, 구 중대본부 등 근대생활사 요소를 잘 간직한 문화유산 7건은 별도의 문화재로서도 가치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개별 건축물 등 점(點) 단위로만 지정했던 등록문화재 체제를 선(線)과 면(面) 단위로 확장해 근대문화유산을 입체적으로 보존·활용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근대역사문화공간은 2018년 목포·군산·영주 일대 3곳이 처음 문화재로 등록됐고, 이어 익산, 영덕, 통영 등 6곳으로 늘었다.
  • 통영시, 등록문화재 김상옥 시조시인 생가 매입

    통영시, 등록문화재 김상옥 시조시인 생가 매입

    경남 통영시는 통영시 항남동 일대 국가등록문화재 제777호 근대역사문화공간 안에 있는 개별등록문화재(제777-8호)인 시조시인 김상옥(1920∼2004) 생가를 사들였다고 24일 밝혔다.초정 김상옥은 통영 출신 시조 시인이면서 삼절(三絶)로 불릴만큼 시 창작 외에 붓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경남 통영시 항남동에 있는 김상옥 생가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2층짜리 일본식 목조 건물로 지금까지 여러 번 소유주가 바뀌었다. 내외부 모두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평가다. 통영시는 매입한 김상옥 생가를 역사적·예술사적 가치를 고려해 기념관이나 초정 문학관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앞서 통영시는 2008년 김상옥 생가가 있는 항남 1번가 골목을 초정거리로 명명했다. 김상옥 생가가 있는 항남동 일대는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까지 통영시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근대건축물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3월 항남동, 중앙동 일대를 국가등록문화재 제777호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했다. 해당 부지안에 있는 김상옥 생가를 비롯한 근대건축물 9점도 개별 문화재로 등록했다. 통영시는 개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나머지 근대건축물도 사들여 정비할 계획이다. 통영시는 근대역사문화공간을 통영만의 특화 명품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해 통영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활성화 사업을 문화재청 공모사업으로 지난해 3월 부터 추진하고 있다. 2024년까지 5년간 국·지방비 500억원이 투입된다 현재 시는 근대역사문화공간 보수·정비 및 활용계획을 마련하기 위한 학술조사 및 종합정비계획 수립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 [근대광고 엿보기] “1원어치 사면 황소 한 마리” 경품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1원어치 사면 황소 한 마리” 경품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전조선화신연쇄점연합 춘기 대매출’이라는 제목 아래 경품 행사를 한다는 광고다. 미국에서 시작된 연쇄점은 점포를 여러 곳에 두고 운영하는 경영 형태를 말한다. 지금 유통 재벌들이 전국 각지에 점포를 내고 경영하는 대형마트나 편의점, 슈퍼마켓도 연쇄점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연쇄점 사업을 처음 시작한 것은 화신백화점 창업주 박흥식이다. 1934년 박흥식은 백화점과는 별도로 전국에 연쇄점 1000개를 내겠다는 야심한 계획을 세웠다. 박흥식은 부동산을 담보로 내면 상품을 공급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신청자들이 3000여명이나 쇄도했고, 담보를 제공하고 은행에서 3000만원, 현재 가치로 3700억원에 이르는 돈을 융통했다. 이렇게 해서 이듬해 전국에 350여개의 연쇄점을 여는 놀랄 만한 성과를 거뒀다. 연쇄점에서 취급한 품목은 석유, 종이, 식료품, 양품, 철물, 수예품, 문방구, 화장품, 완구 등으로 오늘날의 대형마트나 대형슈퍼마켓과 비슷하다. 박흥식은 유통 구조를 단순화하고 일본에서 물건을 들여와 값싸고 질 좋은 제품을 팔아 일본 유통업체들을 물리치고 상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전국에 있던 화신연쇄점 건물은 거의 다 사라졌지만, 전남 목포에 하나 남아 있다. 2층 콘크리트 건물에 건평이 411㎡(약 124평)인 옛 목포화신연쇄점은 등록문화재 제718호로 지정돼 있다. “일 원어치 사시면 황소 한 마리!” 광고 첫머리는 이렇게 돼 있다. 당시 1원은 쌀 한 말 정도 값이니 지금 값으로는 대략 5만원 정도로 봐도 무방하다. 황소 한 마리는 특등상이고, 1등상은 양복장ㆍ자전거ㆍ반상(盤床), 2등은 화장품, 3등은 양말 등이다. 등수 안에 들지 않더라도 작은 상품을 응모자 전원에게 주었다. 당첨자는 신문지상과 연쇄점에 게시한다고 돼 있다. 광고를 통해 연쇄점에서 어떤 물건을 팔았는지 알 수 있다. 와이셔츠, 넥타이, 내의, 핸드백, 파라솔, 각종 모자, 운동화, 유아용품, 부인용품, 만년필, 연필, 화장품, 과자, 양말, 기성복, 학생복 등으로 의류와 학용품, 잡화가 주류를 이룬다. 이를 보면 당시 화신연쇄점은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유통업체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목포 사람들은 화신연쇄점을 백화점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재벌들이 대형마트를 전국에 개점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이니 그보다 60년 앞선 시기에 대형 유통업체를 세운 박흥식은 대단한 사업가였다고 할 수 있다. 박흥식은 사업을 하면서 일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친일반민족 행위자로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 한국 속 지구촌의 대혁신… “용산 르네상스 시대”

    한국 속 지구촌의 대혁신… “용산 르네상스 시대”

    서울 용산구는 문화관광 인프라가 풍부한 도시다. ‘한국 속 작은 지구촌’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외국인이 찾을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공관이 몰려 있기도 하다. 또 국내 대표 박물관인 국립중앙박물관 등 9개의 박물관과 4곳의 미술관이 자리잡은 곳이다. 최근에는 전국적으로 화제를 모은 ‘이건희미술관’의 최종 건립 후보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군이 떠난 자리에 들어설 국가 공원인 ‘용산공원’까지 조성되면 용산은 그야말로 문화와 휴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서울의 대표 도시로 변신한다. 용산이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한 것은 성장현 용산구청장의 구정 철학 덕분이다. 민선 2기에 이어 5~7기, 용산을 이끌고 있는 성 구청장은 ‘지방정부의 경쟁력은 문화관광에 있다’고 늘 강조해 왔다. 12일 성 구청장에게 ‘용산이 꿈꾸는 문화도시’ 비전에 대해 들었다. -지난 4월 용산구 한강로3가 일대 57만㎡가 중소벤처기업부 지역특화발전특구로 신규 지정됐다. “특구 명칭은 ‘용산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다. 2024년까지 510억원을 투입한다. 특구 지정을 계기로 역사문화 르네상스 사업을 본격화하려고 한다. 주요 4대 특화 사업으로 ▲도심 역사 거점 구축 ▲삶 속에 스며드는 역사문화 ▲역사문화 콘텐츠 확장·연계 ▲역사문화 일자리 발굴 등을 추진한다. 구는 우선 용산역사박물관(한강대로14길 35-29) 등 도심에 역사 거점을 구축하는 데 행정력을 집중할 예정이다. 용산역사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 등 관련 시설을 묶은 투어 프로그램도 만들 계획이다. 또 역사문화 전문 해설사와 역사박물관 청년 인턴, 한국 전통 공예품 홍보·판매 인력 등 관련 일자리도 430여개 마련할 계획이다. 문화 관련 서비스업을 다수 창출하고 외부 투자를 활성화해 지속적인 경제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겠다.”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로 지정되기까지 자체적으로 문화 역사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투자를 해 왔는데. “우선 2015년 유관순 열사 추모비를 건립했고, 2018년에는 용산공예관을, 작년에는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의 문을 열었다. 특히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용산공예관은 개인적으로 관심을 많이 기울인 공간이다. 이태원과 한남동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지역 상권을 활성화하기 위해 마련한 문화복합시설이다. 전국의 우수 명장과 젊은 공예가들의 작품을 전시·판매하고, 공예가들과 강좌를 듣는 수강생들을 위한 창작 공간도 운영한다. 더불어 전통 공예 방법을 전수하는 것에서부터 판매하는 것까지 지역 어르신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일자리도 제공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을 인정받아 용산이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로 지정됐다고 본다. 향후 지역에 있는 박물관 인프라를 연계해 ‘박물관 도시’로서의 도시 브랜드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현재 용산역사박물관도 한창 준비 중인 것으로 안다. “등록문화재 제428호인 옛 용산철도병원 건물 내부 일부를 개·보수해 지역사 박물관으로 용도를 바꿨다. 내년 상반기에 개관할 예정이다. 구민들의 참여와 관심 속에 용산 환삼주조장 백자 술동이, 경성 용산시가도 등 유물 3000여점을 이미 확보한 상태다. 시설을 개관하기 전까지 매입, 기증, 복사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추가 자료를 확보해 나가겠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에 이어 용산역사박물관까지 서빙고로 일대에 ‘박물관 클러스터’를 만들 계획이다. 용산역사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국제빌딩4구역에서는 서울시에서 규모가 가장 큰 청년 커뮤니티 공간인 ‘청년지음’과 청년창업지원센터 등 구민 편의시설이 이미 문을 열고 운영하고 있다. 박물관이 조성되면 미래 세대에게 지역에 대한 관심을 환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와의 시너지 효과를 위해 남은 임기 동안 용산역사박물관 건립에 주력할 계획이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이건희미술관’ 건립 후보지로 용산과 송현동을 꼽았다. “구는 지난 5월 문체부에 이건희미술관 용산 유치를 제안했다. 용산가족공원 내 문체부 소유 부지를 활용하는 방안도 함께 제출했다. 용산은 국내외 관람객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면서 한국의 문화 부흥을 꿈꾼 고인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과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 이태원 관광 특구를 찾은 관광객들이 함께 방문해 즐길 수 있도록 이건희미술관이 용산에 자리잡는 것이 좋다고 본다. 향후 미술관이 들어서면 ‘국립중앙박물관(고미술)~이건희미술관(근대미술)~삼성미술관 리움(현대미술)’로 이어지는 ‘이건희 컬렉션 투어 프로그램’도 개설해 운영할 예정이다. 향후 남북 철길이 연결되면 용산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더욱 급증할 것이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미술관을 만들어야 한다. 이건희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용산공원 일대를 묶어 대한민국 대표 문화관광 벨트로 가꿔 나가겠다.” -용산미군기지 일부에 최초의 국가 공원인 용산공원이 생긴다. “지난해 임오군란 이후 138년 만에 용산미군기지 일부가 실질적으로 반환됐다. 미군기지가 용산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던 만큼 감회가 새롭다. 이곳이 최초의 국가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단순히 공원을 조성하는 것을 넘어 공간적 주권 회복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본다. 용산구가 관할 자치구로서 온전한 용산공원을 조성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공원 내 잔류시설을 이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인지 설명해 달라. “서울 광화문에 있는 주한미국대사관이 용산기지의 북쪽 캠프코이너 부지로 이전하는데 미대사관 측은 현재 용산기지 남쪽 사우스포스트 구역에 있는 직원 숙소도 함께 옮길 계획이었다. 이렇게 되면 향후 용산기지에 조성되는 용산공원 북측 통로가 막혀 주민들이 불편할뿐더러 국가공원으로서의 의미 또한 반감된다. 직원 숙소를 공원 밖으로 이전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 끝에 미대사관, 서울시와 협의해 한강로3가에 있는 아세아아파트 부지를 대안으로 제안했다. 2018년 서울시에 이를 공식 제안했고, 이후 미대사관 직원 숙소 이전이 공식화됐다. 남영·후암동과 이어지는 용산공원 북측 통행로 3만㎡를 추가로 확보한 만큼 앞으로 온전한 공원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와 더불어 이제는 용산기지 중심에 있는 드래곤힐호텔을 이전할 때까지 우리의 목소리를 높여 나갈 것이다. 용산공원이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공원으로 조성되도록 용산구의 몫을 제대로 해 나가겠다.”-민선 7기를 돌아볼 때 성과로 꼽고 싶은 것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국가적 지원이 부족한 청년·장애인 복지 정책을 강화했다. 2019년 용산구 청년 기본 조례를 제정한 이후 청년정책자문단(215명)도 구성·운영했다. 올해는 기존 자문단을 청년 정책 네트워크로 변경했다. 지난달 발대식을 열었는데 일자리, 문화예술, 복지, 제도 등 각 분야에 걸쳐 청년 정책을 함께 논의할 예정이다. 또 청년들을 위한 110억원 규모의 일자리 기금을 조성해 일자리 사업에 투입한다. 관내에 있는 7개 장애인 단체가 참여하는 장애인복지단체협의회를 구성한 것도 성과다. 옛 창업지원센터를 리모델링해 지난해 11월 장애인커뮤니티센터도 준공했다. 앞으로 발달장애인 평생교육센터와 장애인 작업장 등 장애인 시설도 곧 확충할 예정이다.”
  • [기획] ‘수탈과 분단‘, 질곡의 역사 한눈에… 철원 ‘소이산’

    [기획] ‘수탈과 분단‘, 질곡의 역사 한눈에… 철원 ‘소이산’

    국내에서 아주 멀리 무한대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온통 산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지에서조차 초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어 이 거대한 문명(?)의 벽을 뚫고 저 멀리까지 내다볼 도리가 없다. 최근엔 미세먼지까지 극성을 부려 맑은 날씨가 아니면 이마저도 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 ‘소이산’ 정상 무한감동 쓰나미…웅장한 평강고원, DMZ 한눈에 무의식 속, 이런 기회에 대한 체념이 굳게 자리 잡아가던 어느 날 남북 분단의 아픔과 긴장감을 실감할 수 있는 접경지역, 강원 철원의 한 나지막한 산에 다다랐다. 거친 호흡과 함께 제법 가파른 산길 오르기를 20여분, 정상에 서는 순간 홀연히 맞이한 놀라움에 온통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정도 높이에서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수십 리가 뻥 뚫린 평야의 경이롭고 장쾌한 광경은 퇴화하던 눈마저 번쩍 뜨이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동시에 체화(體化)됐던 체념의 벽도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막 정상에 오른 찰나였지만 감정의 흐름은 마구 요동쳤다. 예기치 못한 신선한 충격에 온통 정신이 혼미하고 멍해지기를 잠깐, 이젠 무한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그 순간이 지나 겨우 정신을 차리자 비로소 말문이 트이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 대단하다. 멋지다! 굉장하다!” 온갖 머리를 짜내 지금까지 살아오며 익히고 써왔던 모든 표현 중에 적절한 말을 찾아보려 애쓰지만 궁색하기 그지없다. 이런 대형 사고를 친 범인(?)은 민통선 바로 옆에 위치한 야트막하고 보잘 것 없는 ‘소이산’(362m) 이었다. 400m가 채 안되는, 이름조차 생경한 이곳 정상에서 바라본 드넓은 산야의 모습은 감동적이고 웅장했다. 거대한 대지와 무한의 하늘이 맞닿은 평강·철원고원의 경이로운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막힌게 하나 없어 사방 수십리가 탁 트인,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은 마치 만주 벌판에 온 듯한 착각에 빠트린다. 이런 감동의 맨 끝엔 ‘분단’이란 현실이 만들어 낸 오묘하고 복잡한 감정이 은연히 솟구친다. -사철 자연 옷 갈아입는 ‘멋쟁이’…열하분출 드넓은 용암대지 형성면적 600여㎢, 평균 해발 320m의 거대한 평강·철원평야 일대를 두루 조망할 수 있는 특별한 곳 소이산. 그 정상에서 바라본 드넓은 평야는 철따라 자연의 옷을 갈아입는 ‘최고 멋쟁이’였다. 봄철이면 가둬 놓은 논물이 반사돼 은빛 세계를 이루고, 모내기가 끝난 드넓은 평야는 푸른 물결 일렁이는 바다가 된다. 한여름 한껏 무성해진 벼는 가을 접어들어 알알이 영글은 나락으로 바뀌며 황금 물결 친다. 겨울철 눈이 내려 순백의 세상으로 변한 들판은 월동을 위해 찾아온 멸종 위기종 재두루미 등 철새들의 천국으로 변한다. 이런 감동을 주는 거대한 용암대지는 언제, 어떻게 탄생했을까? 수천만 년 전 북녘땅 평강, 세포군 두 지역에서 일어난 미약한 화산 중심분출(中心噴出)은 그 형성의 시작이다. 평강 오리산(458m)과 세포 검불랑 북동쪽 680봉이 바로 그 폭발의 중심지역이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서 평강, 철원 지역 추가령 열곡(길게 갈라진 틈)에서 열하분출(裂罅噴出)이 이어졌다. 검붉은 용암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흘러 수백리에 이르는 지역을 뒤덮고 서서히 식어 광활한 대지를 형성했다. 화산 중앙에서 솟구치는 폭발이 아닌 길게 갈라지 틈에서 나온 용암이 대지를 뒤덮은 것이다. 기존 하곡이 용암에 묻히면서 하계망(河系網) 혼란과 분수계(分水界)에 변화가 일어났다. 중심분출이 있었던 두 곳은 북한 안변 남대천 그리고 임진, 한탄, 북한강 분수계의 중심지역이 됐다. 아주 오랜 세월 내린 비와 눈은 낮은 곳을 찾아 흐르며 침식작용을 일으켰고 마침내 하계망을 재편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임진, 한탄강의 멋진 주상절리다. 중심분출이 일어난 평강에서 철원 방향 평야지대 경사는 2~3° 정도로 점차 낮아지는 지세를 이뤘다. 이 복잡하고 긴 과정이 평강·철원고원이 형성된 지리, 지형학적 역사의 대략이다. -북녘땅 평강, 철의 삼각지대 격전지 한눈에 조망60여년간 일반인 출입이 통제됐던 소이산 정상에 서면 북녘땅 평강 오리산과 읍 소재지 중심에 있는 호암산(574m), 한탄강 분수령을 이루는 백암산(1110m), 낙타고지(565m) 등을 조망할 수 있다. 궁예가 새 도읍 진산으로 정했던 일명 김일성고지 고암산(780m)도 또렷하다. 소이산에서 평강읍까지 직선거리로 대략 20km, 평야 지대여서 맑은 날이면 지척에서 보듯 북녘땅을 관찰할 수 있다. 갈래야 갈 수 없는 미지의 땅 언젠가는 꼭 가야 할 우리의 또 하나의 소중한 영토다. 남녘땅 철원 지역에도 볼거리는 다양하다. 일제 때 축조한 산명호저수지, 경원선 단절로 폐역사가 된 철원·월정리역, 최북단에 있어 비무장지대를 코앞에서 볼 수 있는 평화전망대를 정상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한때 철원역은 금강산행 기차를 타려는 관광객들로 붐볐던 곳이다. 철원에서 장안사가 있는 내금강역까지 운행하던 금강산전기철도 시발역이었던 까닭이다. 1924년 일제 강점기 때 개통했으나 6.25전쟁 발발 이후 군사분계선이 설치되면서 운행 중단됐다.동족상잔 비극의 현장인 철의 삼각지대, 6.25전쟁 주요 격전지도 살펴볼 수 있다. 6.25전쟁 당시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던 백마고지가 정상 왼쪽에 선명하게 보인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의해 10여일간 지속된 전투는 30만발의 포탄을 퍼부었고 고지 주인은 무려 20번이 넘게 바뀔 만큼 치열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 3000여명, 중공군 1만 4000여명이 전사했다. 백마고지 동쪽 8km 지점엔 또다른 격전지 아이스크림 고지가 있다. 높이가 223m였으나 집중포격으로 표고가 3m나 깎여 나갈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야생동물만 오가는 군사분계선‥무거운 정적만소이산 정상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비무장지대(DMZ)의 생생한 모습을 가까이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금단의 아픔을 지난 비무장지대는 울창한 숲으로 뒤덮혀 넓고, 긴 녹색 띠를 형성하고 있다. 드넓은 평야지대를 두 동강 낸 비무장지대에는 젊은 남북의 초병들이 총부리를 들이대고 대치하고 있는 비극의 현장이다. 한민족의 아픔과 생채기를 간직하고 있는 분단의 상징은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비무장지대는 남북의 군사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지대로 오랫동안 야생 상태로 방치(?)돼 왔다. 덕분에 자연환경과 생태계가 완벽하게 보전되는 특혜(?)를 누려 생명의 공간이 됐다. 2700종이 넘는 야생동식물과 80여종의 멸종위기종이 서식하고 있다. 하천과 습지가 잘 발달한 이곳에는 이념과 사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야생동물들만이 먹잇감을 찾아 자유롭게 군사분계선을 오갈 수 있을 뿐이다.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일촉즉발 긴장감이 반세기가 훨씬 넘게 무겁게 흐르고 있다. 남북 경계초소(GP)에 내걸린 태극기와 인공기가 서로 마주보고 노려보는 듯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DMZ 내 철원성 전각 사라지고 군 시설이 대체정상에 서자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이 새삼 와닿는다. 역사, 지리, 인문학적 소양이 없다면 정상에서 바라본 전망은 그저 기념사진과 동영상을 찍기 위해 필요한 아름다운 풍경일 뿐이다. 비무장지대 한가운데 태봉국 군주인 궁예가 세웠다는 궁궐터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모른다며 말이다. 둘레가 무려 13km(내성 7.7km)에 달하는 태봉국 도성 철원성은 무성한 숲에 덮여 방치된 채 비무장지대에 남아있다.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했던 궁예가 철원으로 천도하면서 당시 풍천원(현 홍원리)에 건설한 대규모 도성이다. 이처럼 평지에 쌓은 성은 발해나 중국에서나 볼 수 있다. 해방 당시 내성에는 궁궐터 포정전지와 국보 118호였던 석등이, 외성 남벽에 남대문지와 석탑, 귀부 등이 남아 있었으나 지금으로선 확인할 방법이 없다. 도성 위치는 절묘하게도 비무장지대 안에 있으며 그 중간을 군사분계선이 지난다. 일제 강점기에 건설한 경원선은 외성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통과한다. 현재 철재 궤도는 모두 제거되고 제방만 남아 있다. 남북이 양분하고 있는 도성의 조사와 연구는 한민족 공통 과제다. 하나 남북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선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요원해 보인다. 궁궐 내 전각은 온데간데없이 모두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엔 군사시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안타까움만 더해진다. -질곡의 근현대사 지닌 철원‥일제 강점기, 6.25전쟁 아픔 간직민통선 내에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지은 근대 건축물이 여럿 있다. 저수지 산명호 얼음을 저장했던 콘크리트 구조물 ‘얼음창고’, 수탈적 성격의 식민 금융기관인 ‘제2 금융조합’, 해방 직후 북한 통치하에 지역주민 노동력과 자금을 강제해 지어진 ‘노동당사’ 등 건축물과 터가 구 철원 시가지 민통선 안팎에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한국전쟁) 당시 수탈과 만행의 현장이자 사라진 도시 철원의 자취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전쟁의 상흔까지 남아 있어 역사적 의미가 크다. 점철된 질곡의 근현대사를 지닌 철원은 일제 강점기 경원선 개통과 근대적인 수리시설 축조로 교통·물류, 농업생산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제대로 된 관개시설이 없던 철원평야는 알려진 바와 다르게 한탄강 수량 한계 때문에 척박했던 곳이다. 평강에 수리시설 ‘봉래호저수지’를 준공한 이후 비로소 땅이 비옥해져 농업 생산력이 한층 높아졌으나 일제의 수탈과 착취가 이어졌다.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철원은 북한에 편입되면서 주민에 대한 노동력 착취, 사상통제와 감시 등 고통은 계속됐다. 이후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구 철원은 휴전협정으로 땅이 두 동강 나는 아픔까지 겪는다. 오래전 이곳에서 터전을 일궈온 주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뿔뿔이 흩어졌고 그 고통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글·사진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서윤복 보스턴 마라톤 우승 메달 문화재 된다

    서윤복 보스턴 마라톤 우승 메달 문화재 된다

    1947년 4월 19일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광복 이후 처음으로 ‘KOREA’(코리아)라는 국호와 태극기를 달고 출전해 우승한 서윤복(1923~2017) 선수의 메달이 국가등록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2일 ‘서윤복 제 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 메달’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 미 군정 시기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KOREA’와 우리 민족의 역량을 세계에 알렸던 사건으로 매우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서 선수는 당시 24세의 나이로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동양인 최초 우승자가 됐다. 그의 쾌거는 그해 6월 우리나라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정식회원국으로 승인받고, 이듬해 1948년 런던올림픽과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 참가하게 되는 초석을 마련하는데 이바지했다.아울러 ‘공군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 첫 출격 서명문 태극기’도 문화재로 등록 예고됐다. 6·25전쟁 중인 1952년 12월 14일 첫 출격을 앞둔 환송행사에서 공군사관학교 제1기 졸업생 천영성에게 제2기 후배들이 응원의 내용과 서명문을 담아 전달한 태극기다. 문화재청은 “자체 정규과정을 통해 조종사를 배출하려는 공군의 의지와 노고가 상징적으로 집약된 첫 출격의 기록“이라고 소개했다. 문화재청은 30일 예고 기간 동안 의견 수렴과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로 최종 등록할 예정이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옛 용산철도병원, 역사박물관 재탄생

    옛 용산철도병원, 역사박물관 재탄생

    1928년에 지어진 옛 용산철도병원(등록문화재 제428호)이 용산역사박물관으로 재탄생한다. 서울 용산구는 내년 상반기 개관을 목표로 조성 공사에 착수했다고 2일 밝혔다. 구는 용산철도병원 건물을 복원하고 개보수하는 작업을 거쳐 박물관으로 용도를 바꾼다. 100년 가까이 된 근대건축물의 가치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건립 당시 모습을 참고해 붉은색 외벽 벽돌 성능을 회복하고 병원 내부의 창호와 스테인드글라스를 복원한다. 또 박물관 용도에 맞춰 구조를 보강하고 냉난방 설비와 재난·소방시설, 노약자·장애인 편의시설 등을 새로 설치한다. 구 관계자는 “기존 건물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만큼 복원과 재생을 동시에 할 계획”이라면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등 전문가 자문을 거쳐 작업을 신중하게 이어 가겠다”고 말했다. 건물 총면적의 40%를 차지하는 전시실은 1·2층 상설전시실, 2층 기획전시실로 나뉘며 ‘보더리스(Borderless·경계없는) 용산’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전시할 예정이다. 건물 옥상과 2층 테라스는 방문객을 위한 녹색 쉼터로 바꾼다. 수장고는 건물 내외부에 들어선다. 대부분 유물은 박물관 남측 신축 건물 지하에 조성되는 외부 수장고에서 보관할 예정이다. 구는 현재까지 전시 유물 3000여점을 모았다. 구는 2017년 말 박물관 건립 계획을 세운 이후 박물관 건립추진자문단 구성, 박물관 자료 공개 구입, 전시 기본계획 수립 등의 절차를 이어 왔다. 지난해 착공 전 최종 단계로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공립 박물관·미술관 설립 타당성 사전평가’를 통과했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박물관을 통해 근현대 격변의 세월을 거쳐 지금의 용산이 되기까지 용산 사람들의 생활사를 중심으로 한 ‘사람과 도시 이야기’를 종합해서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이건희 기증 미술품 이중섭 작품은 통영으로’...통영시 문광부에 요청

    ‘이건희 기증 미술품 이중섭 작품은 통영으로’...통영시 문광부에 요청

    경남 통영시가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소장 기증 미술품 ‘이건희 컬렉션’ 가운데 통영과 인연이 깊은 이중섭(1916~1956) 작가의 작품 확보에 나섰다.통영시는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현대미술관측에 이건희 회장 기증 미술품 가운데 이중섭 작품을 통영시로 기증해 줄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고 15일 밝혔다. 통영시는 이건희 컬렉션 1488점 가운데 이중섭 대표작 ‘황소’를 포함한 작품 104점(회화 19점, 엽서화 43점, 은지화 27점 포함)이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기증된 것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통영시의 이중섭 작품 기증 요청은 이중섭이 통영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데 따른 것이다. 이중섭은 염색공예가 유강렬(1920~1976)의 권유로 1952년 부터 1954년까지 2년간 통영에 거주하며 미술 활동 전성기를 보냈다. 이중섭의 유명작품 ‘황소’, ‘흰소’를 비롯해 대표작 대부분은 그가 통영에 거주하는 시기에 그린 그림들이다. ‘세병관 풍경’,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통영충렬사 풍경’, ‘선착장을 내려다 본 풍경’, ‘통영풍경’, ‘욕지도풍경’, ‘통영수원지’ 등 통영에서 그린 그림은 통영의 아름다운 풍광이 담긴 풍경화를 비롯해 모두 40여점이 있다. 2016년 6월 3일부터 10월 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 당시에 통영시절 작품을 별도로 ‘통영관’에 모아 전시했을 정도로 통영과 관련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중섭은 통영시 항남동 경남도립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서 기거하며 많은 작품활동을 하고 학생들에게 데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경남도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는 인간문화재 송방웅, 이형만, 김성수(현 통영옻칠미술관장), 이성운, 정병호, 양유전 등 걸출한 공예인들을 배출한 우리나라 나전칠기공예산업 산실이었다. 통영시는 2019년 경남도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를 매입해 문화재 등록 신청을 했다. 경남도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는 지난해 12월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등록문화재 제801호로 둥록됐다. 통영시는 이중섭이 통영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며 많은 유명 작품을 남긴 것을 기념해 중앙동 거리를 이중섭 거리로 지정하고 이중섭 화보판과 아트타일을 설치해 놓았다. 통영시는 이중섭 작품을 확보해 통영시립박물관에서 이중섭 작품 특별기획전을 개최할 방침이다. 또 경남도립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를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개·보수해 특별기획전시 등 이중섭의 통영시절 발자취를 기념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통영시 관계자는 “통영에서 많은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하며 얻은 예술적 영감과 통영시민들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탄생한 이중섭의 걸출한 작품을 확보해 예술도시 통영의 위상을 높일 수 있도록 온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통영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서울광장] 문화유산 핵심 가치, ‘진정성’과 ‘접근성’/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문화유산 핵심 가치, ‘진정성’과 ‘접근성’/서동철 논설위원

    정약용 선생의 강진 유배 시절 거처인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오른 사람들은 이름처럼 초가집이 아닌 기와집인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마련이다. 워낙 많은 사람이 지적을 하니 강진군이 기와를 걷어 내고 초가를 올리겠다고 한 것도 10년이 훨씬 넘는다. 하지만 초당은 여전히 와당(瓦堂)이다.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은 것이 1957년이라고 한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불리는 등록문화재 기준도 50년이라지 않는가. 그렇게 60년 넘는 세월이 흐르며 새로운 역사가 쌓인 지금의 초당도 가치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강진군의 고민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다산초당만 새로운 역사가 된 것이 아니다. 얼마 전 강진군은 다산초당을 찾는 관광객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어지럽게 파헤쳐진 오솔길을 정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오솔길의 일부가 ‘뿌리의 길’이라 불리게 된 것은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로 시작하는 정호승 시인의 같은 제목 작품이 발표된 이후일 것이다. 어디선가는 ‘밟히는 뿌리의 아픔’을 말하는 글도 읽은 적이 있는 듯하다. ‘뿌리의 길’을 어떻게 정비할 것인지도 초당 복원 이상으로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다산초당과 ‘뿌리의 길’에 대해 완전히 다른 접근을 보면서 세상이 얼마나 다양하고, 따라서 마음을 다시 먹어야 할 것도 많은지 새삼 깨닫게 됐다. 우연히 방문한 장애인문화관광센터 블로그에는 다산초당 안내도 있었다. ‘장애인의 여행 욕구를 해소하고 관광 상품을 발굴하여 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알리고자’ 광주·전남·전북에서 활동하는 단체라고 했다. 초당으로 오르는 길을 소개하는 대목은 이랬다. ‘마을 공터 주차장에서 계단 시작 지점까지 250m 구간은 양호. 하지만 계단에서 초당까지 300m는 계단과 흙길을 이용해야 하므로 휠체어 이동 불가. 경사각이 높거나 노면이 좋지 못하므로 관광 약자가 이동할 때 반드시 동반자와 동행할 것 권유함’이라고 했다. 기능적이고 사무적이어서 감수성과는 거리가 먼 문장이었지만, 다산초당 접근이 아예 차단된 사람들에게는 초가집이니 기와집이니 하는 논란이나 뿌리의 길이니, 뿌리의 아픔이니 하는 표현들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릴까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었다. 내친김에 고창 선운사도 찾아봤다. 평지 사찰이니 장애인 시각에서는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했다. 짐작처럼 ‘진입로는 양호하며, 일부 경사로 있으나 통행에 어려움 없음. 주 출입구인 사천왕문은 턱이 있으며, 보조 출입구로 경사각이 있는 이동로가 있음’이라고 했다. 휠체어 진입이 가능하도록 보조 출입구에 경사로를 만들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장애인의 평점’은 별 5개 만점에 별 3개 반이었다. ‘사찰 내부 화장실은 장애인이 이용하기 어렵다’는 대목이 감점 요인인 듯했다. 장애인 화장실이 있는 주차장에서 절은 1㎞나 떨어져 있다. 무엇보다 장애인문화관광센터가 소개하는 관광지에 역사 유적은 거의 없었다. 호남 지역의 무수한 명산대찰 가운데 휠체어 사용자에게 어렵게나마 접근이 허용된 장소는 극소수라는 뜻이다. 경주장애인관광도우미센터의 추천 장소도 무수한 문화유산 가운데 불국사, 첨성대. 월정교, 동궁과 월지, 황룡사터뿐이었다. 석굴암은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어렵지 않지만, 본존불이 모셔져 있는 석굴은 계단으로 접근 불가’라고 했다. 이 대목을 읽는 휠체어 이용자들의 마음은 감히 짐작을 하기 어렵다. 그러고 보니 문화체육관광부의 ‘열린 관광 조성 사업’에도 현대적 관광지가 대부분으로 역사문화유산은 손에 꼽을 정도다. 장애인, 고령자, 영유아 동반 가족이 편리하고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무장애 관광지’를 조성하는 사업이라고 했다. 문화유산의 핵심 가치는 말할 것도 없이 진정성이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이 현장에서 진정성을 체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시대정신이 되고 있다. 장애인들의 방문 후기를 읽으며 많은 역사 유적이 지형상 접근이 어렵고 문턱과 계단도 많아 둘러보기 어렵다는 현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모든 문화유산을 예외 없이 방문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요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제는 문화유산을 다루는 비장애인들이 무엇을 양보할 수 있는지 고민을 시작할 때가 된 것 같다. 휠체어 관광객이 크게 늘어날 노령화 시대에 대응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접근성 향상’이 ‘진정성 회복’에 이은 문화재 정책의 새로운 핵심 가치로 떠오르는 것은 시간문제다. sol@seoul.co.kr
  • 부산한 비탈길 골목길 하늘길…테스형 경규형 맛있는 이바구

    부산한 비탈길 골목길 하늘길…테스형 경규형 맛있는 이바구

    서울신문은 13일부터 ‘이우석의 미시(微視)여행’을 3주에 한 번 연재합니다. 국내 여행지를 매우 좁게 설정해 현미경처럼 샅샅이 훑어보자는 취지의 코너입니다. 연재를 담당할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은 ‘언어유희의 달인’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여행전문가입니다. 글 곳곳에 심어 놓은 저자 특유의 ‘유머 코드’에 즐겁고 놀라운 경험을 하시게 될 겁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부산에 초량동이 있다. 부산역 바로 앞이다. 서울로 따지면 서울역 앞 청파동, 아니 산비탈로 올라서야 하니 후암동쯤 되겠다. 가파른 건 비슷하다. 생각해 보니 목포역 앞에도 유달산이 있다.(왜 역 앞엔 늘 산이 있을까.) 아무튼 초량에 올라가면 부산 역사를 볼 수 있다. 부산역 역사(驛舍)도 보인다. 지명에 산(山)자가 들어가는 부산의 속살이 초량이다. 목포가 항구라면, 부산은 산이다. 부산은 도시 곳곳이 바다에서 수직으로 치솟은 산들이 빼곡하기 때문이다. 부산 산복도로는 그 산(山)의 배(腹)를 가른다. 천국의 계단(stairway to heaven)이랄까. 고개를 들고 엉덩이는 빼고 하늘을 향한 계단을 딛고 하염없이 걸어야만 오를 수 있던 동네에 차로 오르내릴 하늘길이 생겨났다. 산복도로는 멀리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을 휘휘 감으며 마을을 가르고 하늘과 땅을 나누고 있다. 약 반세기 전 생겨난 부산의 허리띠 산복도로, 그중에서도 초량의 이야기다. ●왜구 침입 잦던 목초지서 19세기말 개항도시 초량은 부산의 원도심이다. 근대도시 부산이란 곳이 생겨나면서 가장 먼저 발달한 마을이다. 지금이야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자 국제도시로 위용을 당당히 과시하고 있지만 부산은 확실히 조선시대까지는 변방이었다. ‘가마메’란 이름의 부산이 조선 성종 때 부산(釜山)이란 이름으로 문헌에 처음 등장했고 동래(동래, 해운대, 수영 등)와 동평(지금의 부산 도심), 기장현으로 나뉜, 그야말로 촌구석 취급을 당했다. ‘왜구’랬을까? 잦은 왜구의 침입 탓이었다. 16세기 동래도호부로서 경상좌수영과 왜관이 부산포에 설치된 다음에야 부산(사실은 동래)은 뭔가 그럴싸한 도시 기능을 하게 됐다. 조선 후기 들어 조정은 사중면 초량에 왜관과 객사를 세웠고 이곳에서 왜와 외교를 했다. 초량은 그저 교통이 좋은 목초지대일 뿐이었지만 19세기 말 갑자기 주목받았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장에 속했던 까닭이다. 일제(메이드 인 재팬이 아니다)와 청(효녀 아니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초량은 국제도시의 이미지를 줄곧 지켜오고 있다. 팽창을 노렸던 일제는 철도와 선박편으로 한반도, 대륙과 연결하기 위해 부산을 주목했고 교통 주거 인프라 등 도시개발을 서둘렀다. 간척을 통해 넓어진 초량 일대는 항만(북항)과 철도를 연결하는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가 됐다. 청 역시 중앙부두와 철도 건설로 생겨난 일자리를 찾아온 자국민 ‘쿨리’(苦力)를 위해 청관을 세웠다. 지금도 초량 부산역 앞에는 차이나타운이 남아 과거 조계지 시절의 근대사를 엿볼 수 있다. 처음엔 ‘남의 문화유산답사기’였지만 지금은 우리 역사가 됐다. 한국전쟁은 부산에 인구가 대거 유입되는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10만여명에 불과하던 부산에 피란민이 몰려들며 무려 140만명이 모여 사는 대한민국 임시수도가 되니 당장 거주지가 태부족이었다. 산기슭밖에 없었다. 너도 나도 산에 올라가 판잣집을 지었다. 물론 초량 뒷산에도 올라갔다. 하늘까지 층층 이어진 달동네가 생겨나게 된 사건이다.●백제병원·남선창고… 사람·돈 돌던 이바구길 높이 올라가면 그 역사가 자세히 보일까 싶어 초량을 올랐다. 해발 0m 근처인 부산항, 부산역에서부터 400m 남짓한 구봉산으로 오르는 길. 그 옆이 초량(草粱)이다. 부산역에서 길을 건너면 ‘초량 이바구길’이 시작된다. 부산시와 동구청이 부산의 옛 ‘이바구’(이야기의 사투리)를 들으며 시티투어를 하는 관광 코스로 지정했다. 재미나고 놀라운 이야기가 많이 숨어 있다. 지금 하늘을 찌를 듯한 마천루가 득실한 해운대와 비교하자면 낡은 원도심 마을이겠지만 애초 초량은 사람도 돈도 돌던 곳이다. 한국전쟁 전에는 함흥과 원산 바다에서 내려온 배가 초량(그때는 이 일대가 바다였다) 앞에 대고 명태며 고등어를 쏟아냈다. 그래서 이곳에 있던 수산물 창고를 북선(北船) 창고라 불렀다. 선창 일거리만 해도 넘쳐났다. 전국에서 생선 장수들이 몰려들고 청요릿집엔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다. 전쟁 후 북선 창고는 남선 창고로 이름이 바뀌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최대 수산물 유통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일제가 물러가고 미군이 상륙하면서 ‘빠’니 ‘비어-홀’이라고 부르는 술집들이 가득한 ‘텍사스촌’이 초량에 생겨났다. 말하자면 서울 이태원 격이다. 이곳을 통해 나온 달러와 군수물자가 부산 국제시장은 물론 전국을 돌았다.‘이바구길’은 초량 외국인 골목에서부터 출발한다. 차이나타운 아래로 러시아 키릴문자와 필리핀 간판이 가득한 유흥가를 그냥 지나치려고(정말이다) 했지만 이곳에 ‘이바구’가 숨어 있다. 1927년 최용해가 지은 첫 근대식 개인종합병원 구 백제병원(국가등록문화재 제645호)이 초량 외국인 거리에 있다. 김해 출신인 최용해는 일본에서 의대를 나와 일본인 아내와 함께 부산으로 건너왔다. 동양척식회사로부터 돈을 빌려 당시 부산에서 최고 높은 5층 벽돌건물을 짓고 백제병원(그런데 왜 신라병원이 아닐까?)을 열었다. 처음엔 병원이 잘됐지만 돌연 사건이 터졌다. 관리들이 데려온 행려병자 시체를 병원 4층에 보관했던 것이 들통났다. ‘돈 없는 환자가 가서 죽으면 시체를 병원에 두고 표본으로 쓴다’는 소문이 돌았다. 겁을 먹은 환자들이 외면하며 급격히 상황이 어려워졌다. 결국 최용해는 일본으로 야반도주했다. 이후 백제병원은 대형 청요릿집과 예식장 등으로 바뀌었지만 모두 사라졌다. 그나마 여지껏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차라리 다행이다. 현재는 1층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건물은 일부 허물어진 역사의 잔흔 그대로이지만 그 안을 채우는 커피향만큼은 세련되고 파릇하다. 부산시는 백제병원을 문화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한때 부귀영화를 누렸던 남선 창고는 현재는 사라지고 없다. 창고를 가득 채웠던 명태처럼 온데간데없지만 상업과 물류의 지력(地歷)만큼은 여전하다. 우연인지 그 자리엔 현재 할인마트가 생겼는데 옛 창고의 담벼락 일부만 남았다. 1900년대 생겨난 국내 최초의 근대 물류 창고였던 남선창고는 노르웨이 베르겐의 ‘브뤼겐’(한자동맹 중심지)처럼 당시로선 엄청난 규모의 물류조합을 운영하며 명성을 떨쳤다. 전국에 명태를 공급하던 곳이지만 직접 명태를 서울로 공급하는 경원선이 개통되고, 초량 앞바다가 매립된 후 해운 물류 중심이 부산항으로 옮겨가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 누가 알았으랴, 바다가 사라질 줄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반대가 되니 좋은 뜻만은 아닌 듯하다. 여기까지만 평지다. 이제 산길을 올라야 한다. 초량초등학교 담벼락에는 옛 마을의 서정성을 노래한 이야기들이 그려져 있다. 초량초교는 전통이 오랜 곳이다. ‘소크라테스의 아우’인 가수 나훈아와 코미디언 이경규, 음악감독 박칼린이 이 학교를 다녔다. 아, 나훈아의 ‘테스형’은 다른 곳을 나왔다. 아테네 아고라에서 토론을 통해 공부했다. 초량초교 동문 선후배인 이들은 각각 1947년생, 60년생, 67년생이니 시대는 달랐지만 초량의 변화 속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며 꿈과 재능을 키웠을 것이다. 대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초량에는 ‘명태 눈깔을 빼먹으면 노래를 잘한다’는 말이 전해진다. 남선 창고가 있던 곳이니 예능인을 많이 배출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노래를 잘 부르는 미래의 가수를 위해 누군가는 눈깔이 없는 명태를 먹었다.●168계단 줄기 삼아 작은 골목 가지처럼 연결 길가에는 1893년 지어진 초량교회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 반대를 이유로 죽임을 당했던 주기철 목사가 있었던 교회로 개신교에선 뜻깊은 장소로 알려졌다. 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로 무려 130년 가까이 됐다. 초량은 얼마나 신식 문물이 빨리 들어온 곳이었나. 길은 가파르지만 그리 힘들지는 않다. 이따금씩 부는 바닷바람이 땀을 식혀 준다. 제주 올레길처럼 이바구길에는 곳곳에 쉼터가 있다. 쉼터 역시 옛 분위기가 오롯이 남아 있다. 딱 추억 속 ‘점빵’ 풍경이다. ‘이바구 정거장’에선 국수나 음료를 팔고 ‘168 도시락국’에선 시락국밥과 추억의 도시락을 판다. 쉬어 가며 감성도 충전할 수 있다. 168이란 숫자의 의미는 가게에서 나오면 바로 알 수 있다. 하늘까지 뻗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높은 계단길이 쉼터 앞에 펼쳐진다. 고개를 끄덕여야 할 만큼 눈에 꽉 들어찬다. 우물가부터 산복도로까지 이어진 계단이 아찔하다. 168개의 계단이다. 페루 마추픽추의 계단과 닮았다.계단을 큰 줄기 삼아 양옆으로 작은 골목이 가지처럼 이어진다. 초량사람들이 물을 긷기 위해 오르내리던 168계단은 초량 마을을 이어 주는 동맥이며 소통의 통로다. 지금은 모노레일이 생겨나 ‘도가니’에게 미안하지 않다. 기계 레일 탓에 정취는 덜하지만 인정은 여전하다. 이곳에서 만나는 이웃들은 어김없이 인사를 나눈다. 관광객들도 인사를 하지 않으면 어색할 만큼 모노레일 캐빈 속 공간은 따스하다. 소통이란 이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중간에 내리면 168빵카페가 있다. 고소한 빵과 커피 향에 이끌려 저절로 내리게 된다. 일명 ‘홍신애빵집’이라 불리는 곳이다. 요리연구가 홍신애씨가 차렸다. 홍씨는 초량 여행을 많이 다닌 듯하다. 테라스에 의자를 놓고 갓 구워 낸 빵 조각을 씹는 그 순간이 초량 이바구길 여행의 딱 중간쯤 된다. 영락없는 전망 휴게소 역할이다. 옆길로 새면 김민부 전망대가 나온다. 고교 1학년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천재 시인 김민부를 기린 이름이다. 그는 이 집에 살았다. 전망대는 실로 근사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푸른빛을 띠는 바다를 두고 아래에 다닥다닥 이어진 작은 집들의 지붕을 통해 ‘부싼 싸람’의 진면목을 내려다볼 수 있다. 그는 지금 보이는 저 바다를 그리며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라고 ‘기다리는 마음’을 노래했을 것이다.●블록 쌓아 올리듯… 만화같은 산동네 지붕들 옥상마다 놓인 파란색 물탱크, 허공을 가르는 목욕탕 기둥들 사이로 하늘을 향해 난 계단, 블록을 쌓아 올린 듯 차곡차곡 이어진 집들이 만화 같은 산동네 풍경을 이루고 있다. 우리 집 지붕이 남의 집 마당이 되고 또 우리 마당은 아랫집 지붕으로 이어진 길이 되는 반도체처럼 집약된 집 더미. 전란을 피해 내려와 산에 살기 시작한 사람들, 반세기가 지나니 말씨도 마음씨도 진짜 부산 사람이 되었다. 높이 오르니 부산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보였다. 여기서 좀더 오르면 산복도로가 나온다. 수직적인 길로 이뤄진 산동네를 모두 수평으로 꿰는 넓은 신작로. 비행기처럼 높은 길을 달리는 버스는 뒤뚱뒤뚱거리며 부산의 허리를 연결한다. 산복도로 곳곳에 수려한 전망이 펼쳐진다. 산복도로에서 바라본 경치란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매력이 가득하다. 바다와 항구, 마을과 철도, 교량과 배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란 것은 어디서 또 찾을 수 있을까. 여기다 ‘유치환의 우체통’ 등 곳곳에 깃든 이야깃거리는 서정성과 낭만까지 곁들여 있다. “여봐요, 백신은 맞았나요?” 1년 후 나의 미래로 보내는 편지를 썼다. 과거 추억이 서린 풍경을 바라보며 현실 속 걱정을 함께 적었다. 세상을 내려다보며. 좀더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마음속 무엇이 현실에 투영돼 겹쳐 보인다. 산복도로에서 보는 세상은 초고층 마천루 호텔방에서 담는 ‘근사한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우체통 앞에선 상상의 나래가 활짝 펴진다. 늘 힘들게 오르내리지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먼 바다를 바라보며 꿈을 키웠을 어느 이름 모를 초량의 아이를 떠올려 본다. 그 아이는 어떤 감상을 마음속에 쌓아 가며 자랐을까. 부산에 대한 추억이란 것이 전혀 없다 할지라도, 무슨 영화 속 이야기일지라도 상관없다. 연인과, 가족과 함께 이곳 이바구길을 함께 걸으며 초량이 지켜온 반세기의 이야기들을 듣고 살며시 뭔가를 상상해 본다면? 그 포근한 이야기란 차가운 유리투성이 도시의 것보다는 썩 좋을 듯하다. 바다로 열린 청마의 우체통에선 많은 상상들이 미래로 전송되고 있다. 글 사진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초량 여행 체크리스트 뭘 먹지? 50년 부산 중심지 초량엔 먹거리가 많다. 부산에 사는 이도 부산을 오가는 이도 초량을 찾아 대선 소주잔을 기울여 온 세월이 켜켜이 쌓인 까닭이다. 산복도로에서 더 올라가면 360도 전망의 구봉산 초량공원, 길을 따라 내려오면 돼지불고기를 파는 기사식당 거리와 만난다. 일명 ‘불백거리’인데 값싸고 푸짐한 식사를 즐길 수 있어 택시 기사뿐 아니라 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찾는다. 좀더 내려오면 이름난 초량 돼지갈비 골목도 있다.은근히 잘하는 고깃집이 많은 곳도 부산이다. 그렇다. (서울 사람들이 생각하듯) 부산 사람은 아침에 회를 먹고 점심에 생선구이, 저녁에 곰장어 등 생선만 먹고 살진 않는다. “집이 부산이세요? 그럼 집에 배 있겠네요?” 식으로 사고하는 것에 대해 부산 시민들은 매우 어이없어 한다. 구석구석에는 돼지국밥집, 시락국밥집, 유명한 밀면집도 있다. 전국 민물 양식장에서 ‘부산 갈메기’들을 죄다 쓸어 왔는지 문전성시를 이루는 메기탕집도 있다.168빵카페=부산 동구 영초길 191번길 8-1. (010)9330-8544. 168도시락국=부산 동구 영초길 191. (051)714-2619 소문난불백=부산 동구 초량로 36. (051)464-0846 초량밀면=부산 동구 중앙대로 225. (051)462-1575. 은하갈비=부산 동구 초량중로 86 (051)467-4303. 우리돼지국밥=부산 동구 초량로 27-1번길 (051)468-5623. 초량메기탕=부산 동구 초량로 15. (051)464-3398. 어딜 가지? 초량은 범일동, 보수동, 중앙동 등과 이어진다. 영화 ‘아저씨’ 촬영지로 유명한 범일동 매축지 마을은 좌천역에서 나와 육교를 건너면 된다. 격렬하게 매운 떡볶이와 조방낙지로 유명한 곳도 범일동이다. ‘범죄와의 전쟁’ 촬영지인 중앙로는 부산역 쪽으로 건너면 나온다. 어쩐지 익숙하다 할 거다. 맞은편에는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등장한 보수동 계단이 있다. 헌책방 거리와 자그마한 카페들이 있어 요모조모 둘러볼 것이 많다. 여행상품은? 반값 할인을 뜻하는 ‘반할부산’은 열차와 연계한 다양한 부산여행상품 ‘진짜부산트레킹’을 판매한다. 원도심투어를 비롯해 흰여울마을과 달맞이고개, 황령산 등 다양한 지역 투어 프로그램이 있다. 1899-2550. 초량 이바구길 투어는 부산여행특공대(busanbustour.co.kr)에서 당일(반나절) 버스투어 상품으로 판매한다. 일정은 오전 9시 50분 부산역 이바구버스 정류소 앞 집결 후 증산전망대, 유치환의 우체통, 초량 168계단&모노레일 탑승, 초량 1941, 초량전통시장(불백골목) 경유 낮 12시 30분 부산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2만원. (051)469-4113.
  • 제주 이색 건축물 ‘테시폰’ 문화재 된다

    제주 이색 건축물 ‘테시폰’ 문화재 된다

    아치 형태의 독특한 건축물인 제주도의 테시폰 주택이 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제주 이시돌 목장 테시폰식 주택’과 ‘동학농민군 편지’를 국가등록문화재로 예고했다고 밝혔다. 이시돌 목장은 1954년 부임한 아일랜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 신부가 조성한 곳으로, 명칭은 스페인 천주교 성인인 ‘이시도르’에서 유래했다. 테시폰은 이라크 고대도시 유적인 크테시폰의 아치 구조물을 참고해 창안한 건축물이다. 국내 다른 지역의 테시폰식 건축은 모두 사라졌고, 제주에만 테시폰 건축 24채가 남아 있다. 나무로 아치 모양 틀을 세우고 시멘트 모르타르를 덧발라 골격을 만든 뒤 내부에 블록으로 벽을 쌓아 지었다.이시돌 목장의 테시폰식 주택은 한림읍 금악리 77-4번지와 135번지에 한 채씩 있으며, 건물 규모는 30∼40㎡이다. 맥그린치 신부가 목장을 개척할 때 건축 자재가 부족하자 이런 형태를 도입했다. 문화재청은 “1961년 지어져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근대기 집단 주택의 한 흐름과 제주 지역 목장 개척사 등을 보여주는 소중한 근대건축유산”이라고 설명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한 ‘동학농민군 편지’는 양반가 자제였던 유광화(1858∼1894)가 1894년 11월 동생 광팔에게 보낸 한문 서한이다. 동학농민군 지도부에서 활동한 유광화는 왜군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군자금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문화재청은 “동학농민혁명에 양반층도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료이자, 농민군이 전투 과정에서 직접 작성한 매우 희귀한 편지 원본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고 평가했다. 예고기간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 등록 여부를 확정한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조선 독립 나선 고종 외교고문 데니, 관저 터에 표석이라도”

    “조선 독립 나선 고종 외교고문 데니, 관저 터에 표석이라도”

    “데니 고문이 머물렀던 관저 자리에 작은 표석이라도 세워 그의 활동을 기억하면 좋겠다. 데니 태극기와 조선 외교 상황에 대한 역사 찾기 의미도 있다.” ●미국인 변호사 데니, 청나라 내정 간섭 비판 송명호(70)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은 22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35년 전인 구한말 고종의 외교자문을 맡았던 오언 데니(1838~1900) 고문이 조선에 거주했던 ‘관저’를 최초로 확인했다고 공개했다. 미국인 변호사인 데니는 1886년 3월~1890년 4월 18일 고종의 외교고문으로 활동했다. 그가 조선을 떠날 때 고종이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데니 태극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2008년 태극기 중 처음 국가등록문화재(제382호)로 지정됐다. 데니는 청나라가 천거했지만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비판하는 ‘청한론’을 저술했고 1888년 조러수호통상조약 당시 조선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자주 독립에 나섰다가 파면됐다. ●송 위원, 기록에 없던 135년 전 관저 첫 발견 송 위원은 각종 자료를 통해 고종이 데니를 가까이했고, 4년간 조선에 거주했는데 어디에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궁금증을 갖고 나홀로 조사에 나섰다. 각종 문헌과 미국인이 기록한 데니 관련 문서에도 관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우연히 1981년 데니 태극기 기증 당시 후손들이 우리 정부에 보낸 편지와 동봉한 낡은 사진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궁금증이 해소됐다. 송 위원은 “오래된 사진을 디지털 복원한 결과 관저가 경희궁 끝자락에 위치했고 주변에 국기 게양대도 설치돼 있었다”며 “궁내 숙소를 제공한 점에서 데니에 대한 고종의 신뢰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저와 게양대는 귀국 후 일제가 총독부 관사를 지으면서 사라졌다. 송 위원은 당시 관저 위치가 서울 종로 새문안로3길 15 동원빌딩 자리로, 게양대는 새문안로5길 19 로얄빌딩으로 추정했다. 그는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것보다는 구한말 조선의 외교 전면에 섰던 이방인을 기억하자는 취지”라고 밝혔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구한말 고종 외교자문 데니 관저 자리에 표석이라도…”

    “구한말 고종 외교자문 데니 관저 자리에 표석이라도…”

    “데니 고문이 머물렀던 관저 자리에 작은 표석이라도 세워 그의 활동을 기억하면 좋겠다. 데니 태극기와 조선 외교 상황에 대한 역사 찾기 의미도 있다.”송명호(사진·70)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은 22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35년 전인 구한말 고종의 외교자문을 맡았던 오언 데니(1838~1900) 고문이 조선에 거주했던 ‘관저’를 최초로 확인했다고 공개했다. 미국인 변호사인 데니는 1886년 3월~1890년 4월 18일 고종의 외교고문으로 활동했다. 그가 조선을 떠날 때 고종이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데니 태극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2008년 태극기 중 처음 국가등록문화재(제382호)로 지정됐다. 데니는 청나라가 천거했지만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비판하는 ‘청한론’을 저술했고 1888년 조러수호통상조약 당시 조선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자주 독립에 나섰다가 파면됐다.송 위원은 각종 자료를 통해 고종이 데니를 가까이했고, 4년간 조선에 거주했는데 어디에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궁금증을 갖고 나홀로 조사에 나섰다. 각종 문헌과 미국인이 기록한 데니 관련 문서에도 관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우연히 1981년 데니 태극기 기증 당시 후손들이 우리 정부에 보낸 편지와 동봉한 낡은 사진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궁금증이 해소됐다. 송 위원은 “오래된 사진을 디지털 복원한 결과 관저가 경희궁 끝자락에 위치했고 주변에 국기 게양대도 설치돼 있었다”며 “궁내 숙소를 제공한 점에서 데니에 대한 고종의 신뢰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저와 게양대는 귀국 후 일제가 총독부 관사를 지으면서 사라졌다. 송 위원은 당시 관저 위치가 서울 종로 새문안로3길 15 동원빌딩 자리로, 게양대는 새문안로5길 19 로얄빌딩으로 추정했다. 그는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것보다는 구한말 조선의 외교 전면에 섰던 이방인을 기억하자는 취지”라고 밝혔다. 태극기 연구가인 송 위원은 태극기의 아픈 역사를 강조했다. 국기가 제정·공포된 것은 1883년이지만 당시 국기 제작 방법을 명시하지 않아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됐다. 현재의 태극기는 1949년 10월 15일 ‘국기 제작법 고시’를 통해 정해졌는데 당시 파악된 태극기만 48종에 달했다. 송 위원은 “일제가 국기 사용을 막다 보니 국민들이 듣기만 했을 뿐 태극기를 본 적이 없어 발생한 현상”이라며 “태극기 역사를 알릴 박물관이 필요하지만 6·25전쟁 등을 거치며 많은 유물이 사라져 아쉽다”고 말했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경남도·창원시, 조선시대 거제 관아 보물 지정 추진

    경남도·창원시, 조선시대 거제 관아 보물 지정 추진

    조선시대 경남 거제 지역 행정·군사를 총괄하던 거제 관아(官衙) 중심건물 ‘거제 기성관’이 국가문화재 보물 지정이 추진된다. 정부의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 활성화 사업’ 대상지로 선정된 진해 중원광장 일대 건축물은 국가등록문화재 등록이 신청됐다.경남도는 사적 제484호로 지정돼 있는 거제 기성관이 문화재청에서 국가문화재 보물로 추천돼 경남도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보물 신청을 했다고 13일 밝혔다. 도는 진해 중원광장 일대 근대 건축물 공간과 건물 9곳에 대해서도 도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등록문화재 등록을 신청했다. 보물로 신청된 거제 기성관’은 거제현 객사로 중심 역할을 하던 곳으로 1664년 현재 위치로 읍을 옮길 때 같이 옮겨 왔다. 정면 9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로 조선시대 중기 객사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객사에 어울리는 화려한 단청과 규모뿐만 아니라 당시 각종 기록들이 건축미와 역사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 보물 지정 가치가 높다. 진해 중원광장 일대 근대 건축물 국가등록문화재 신청 구역은 화천동에서 창선동 일대 14만 7818㎡이다. 개별 등록문화재 9곳에는 건축물 외형이 일부 변형됐으나 보존상태가 좋은 근대상가주택, 여인숙, 요리집, 단층구조집 등이 포함돼 있다.경남도와 창원시는 주민 대상으로 사업 설명과 서명운동을 진행해 소유자들로부터 동의서를 받아 국가문화재 등록을 신청했다. 문화재청 현지심사와 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되면 ‘근대역사문화공간 재생 활성화 사업’ 대상 범위와 규모가 확정되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이 추진된다. 정영숙 경남도 문화재관리담당 주무관은 “진해 근대역사문화공간과 거제 기성관이 국가문화재등록 및 보물로 지정되면 지역문화재 경쟁력을 높이고 지역주민과 문화가 상생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용산구에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 생긴다…“지역소득·일자리 창출”

    용산구에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 생긴다…“지역소득·일자리 창출”

    서울 용산구에 ‘역사문화 르네상스 특구’가 생긴다. 구는 한강로3가 65-154 외 181필지(57만 7866.7㎡)가 중소벤처기업부 지역특화발전특구로 지정됐다고 9일 밝혔다. 구는 오는 2024년까지 총 510억원을 투자해 용산 만의 역사 문화 콘텐츠를 개발한다. 이번 사업을 통해 지역 소득과 신규 일자리도 창출한다는 계획이다. 우선 용산역사박물관 등 도심에 역사 거점을 구축하는 데 힘을 쏟을 예정이다. 등록문화재 제428호인 옛 용산철도병원 건물 내부 일부를 개·보수해 지역사 박물관으로 용도를 바꾼다. 올 상반기에 착공해 내년 상반기에 문을 열 예정이다. 구 관계자는 “2017년 박물관 건립계획을 수립한 이후 학예사 채용, 박물관 건립추진자문단 구성, 박물관 자료 구입, 문체부 타당성 평가 등 절차를 진행해왔다”면서 “전시 설계 용역도 모두 마무리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용산역사박물관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한글박물관, 이봉창 의사 역사울림관 등 관련 시설을 묶어 투어 프로그램을 개설한다. 테마별 특화거리를 조성하는 등 역사문화 콘텐츠 연계 사업도 진행 중이다. 기존 이태원 세계음식거리, 베트남 퀴논길, 한남동 카페거리처럼 서빙고로 일대에 박물관 특화거리를 새롭게 조성할 예정이다. 구는 역사 문화와 관련한 양질의 일자리도 만든다. 역사문화 전문 해설사를 비롯해 역사박물관 청년 인턴, 한국 전통 공예품 홍보·판매 등 다양한 분야에서 430여명을 뽑을 예정이다. 구는 이번 사업에 따른 생산유발효과는 662억원, 소득유발효과는 94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문화관광 사업에 지역의 미래가 있다”며 “문화 관련 서비스업을 다수 창출해서 외부 투자를 활성화하고 지속적인 경제 선순환을 이끌겠다”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꽃길 여수, 선홍빛 꽃물결 넘실넘실

    꽃길 여수, 선홍빛 꽃물결 넘실넘실

    11개월 10여일 동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가 딱 보름 정도 시선을 휘어잡는 산이 있다. 전남 여수의 영취산이다. 여수의 4월 풍경을 대표하는 곳. 산의 규모는 작아도 산정의 진달래 무리가 펼쳐 내는 선홍빛 꽃물결은 나라 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빼어나다.남녘에서 번져 올라오는 꽃물결엔 차례가 있다. 예년엔 그랬다. 올봄은 다르다. ‘꽃달력’보다 이르게, 그것도 두서없이 피고 지는 중이다. 영취산 진달래도 마찬가지. 보통 3월 말부터 피기 시작해 4월 둘째 주에 절정을 이뤘다. 올봄엔 예년보다 족히 일주일 이상 앞섰다. 꽃이 제 나갈 시기를 알아서 꽃을 틔운다던데, 변덕스런 올해 봄 날씨가 꽃들의 짐작을 무색하게 만든 거다. 심지어 일찍 꽃술을 내밀었다가 냉해를 입어 후드득 지고 만 봄꽃 명소들도 허다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일제히 피었다 지는 가로수와 달리 산에 피는 까닭에 다소나마 위아래에 시차가 있다는 것이다. 산정은 지는 중이어도 영취산 아래는 아직 분홍 물결이다.●검은 바위·연두 신록 버무린 ‘찐분홍’ 하모니 영취산 진달래 산행의 들머리는 돌고개 주차장이다. 흥국사, 상암초등학교 등 산행 코스는 여럿이지만 외지인의 경우 돌고개 주차장에서 오르는 게 대부분이다. 주차가 편하고, 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은 데다, 코스 초입의 깔딱고개를 제외하면 구간 대부분이 완만해 오르기가 수월하다. 갈 길이 바빠 진달래 군락지만 보고 오겠다면 가마봉(457m)까지 다녀오면 된다. 들머리에서 1.3㎞ 정도 떨어졌다. 진달래 군락지는 더 가깝다. 1㎞ 남짓 오르면 된다. 봄바람 맞으며 설렁설렁 걸어도 2시간 남짓이면 충분할 거리다. 암릉 사이로 핀 진달래를 보겠다면 영취산 정상인 진례봉(510m)까지 가면 된다. 거리는 1.9㎞다. 왕복 서너 시간 이상 잡아야 한다. 가파른 시멘트 임도와 계단을 따라 40분 남짓 오르면 진달래들이 꽃잎을 내밀기 시작한다. 산 사면이 온통 분홍빛이다. 역광으로 햇살을 받은 꽃술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선 듯하다. 연둣빛 신록은 추임새로 모자람이 없다. 진달래 군락 사이로 길이 나 있다. 그야말로 꽃길이다. 가마봉 정상에 서면 사방이 툭 트인다. 여수 산업단지와 다도해의 수많은 섬이 어우러져 있다. 진례봉 쪽 먼 능선도 물감을 뿌린 듯 곳곳이 분홍빛이다. 검은 바위들과 어우러져 붉은 기운이 더욱 또렷하다. 진달래꽃 하면 대부분의 장삼이사들은 슬퍼도 내색하지 않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정한을 떠올릴 터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라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이 심장 언저리에 단단하게 똬리를 틀고 있어서다. 한데 영취산 진달래는 ‘영변의 약산’(가보지는 않았지만)과 다소 다른 듯하다. ‘모진 三冬(삼동)을 기어이 딛고 절정으로 다가오는 순정한 눈물’(김종안의 시 ‘진달래꽃’ 중)에 좀더 가까워 보인다. 글쎄, 이 역시 추측일 뿐 꽃들의 속내를 사람이 무슨 수로 알까.●영취산 아래 흥국사엔 300년 넘은 무지개다리 영취산 아래 흥국사는 산행의 들머리, 혹은 날머리 노릇을 하는 절집이다. 절집 초입, 홍교(보물 563호)의 자태가 우아하다. 조선 인조 17년(1639년)에 화강석을 쌓아 만든 무지개다리다. 치밀하고 단단해 보이는데, 통행은 불가다. 붕괴의 우려가 있어서다. 절집 안에도 대웅전(보물 396호), 후불탱화(보물 578호) 등 볼거리가 많다. 이웃한 만성리 해변은 검은 모래로 이름난 곳이다. 여수 시내에서 가까워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다. 만성리 해변을 가려면 마래 제2터널(등록문화재 116호)을 지나야 한다. 신호등이 있고, 최고와 최저속도가 각각 규정된 독특한 터널이다. 마래 제2터널은 1926년 일제강점기에 군사용으로 건설됐다. 바닷가 쪽의 자연 암반을 뚫어 만들었다. 거리 640m, 폭 4.5m로 차량 한 대가 지날 수 있다. 사람도 오갈 수 있다. 만성리 해변 외에도 여수 동쪽 해안에 독특한 해변이 많다. 모사금 해변은 왼쪽은 모래, 오른쪽은 몽돌로 이뤄졌다. 영취산 끝자락과 맞닿은 신덕해변도 숨은 보석이다. 고즈넉한 해변과 살풍경한 여수국가산업단지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글 사진 여수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한센인 인권 자료, 문화재 된다

    한센인 인권 자료, 문화재 된다

    전남 고흥 소록도 한센인들의 인권과 의료에 관한 자료가 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5일 ‘고흥 소록도 4·6 사건 진정서 및 성명서’와 ‘고흥 소록도 녹산의학강습소 유물’을 국가등록문화재로 예고했다. 1954년 일어난 4·6 사건은 소록도 갱생원장 김상태의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운영체제에 대한 반발로 원장 불신임을 요구하며 벌였던 대규모 시위다. 수용자들은 비인권적 현황과 원장의 비위 사실을 적은 진정서와 증빙자료를 작성했고, 이후 성명서를 발표하며 항거했다. 녹산의학강습소는 1949~1961년 의료인이 부족했던 소록도에서 환자를 훈련해 의료인력으로 양성한 독특한 제도로, 제1기 수료생에게 지급한 청진기와 당시 해부학책, 수료증(2점)이 문화재 지정 대상이다. 문화재청은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소록도만의 독특한 의학교육제도와 자활 노력을 보여 준다는 점 등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1935년 일섭(1900~1975) 등이 조성해 삼각산 삼각사(三覺寺)에 봉안됐던 서울 진관사 소장 괘불도 및 괘불함도 문화재 등록예고했다. 문화재청은 예고기간 30일 동안 전문가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화재로 최종 등록할 예정이다.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도시개발로 사라질 근대문화유산 부천 ‘죽산박씨 고택’ 보존해야”

    “도시개발로 사라질 근대문화유산 부천 ‘죽산박씨 고택’ 보존해야”

    “역곡동 안동네에 있는 죽산박씨 고택은 수직과 수평선, 휘어진 지붕선이 우리 전통한옥 모습입니다. 이처럼 130여년간 잘 유지·보존된 고택은 역사적 가치가 충분해 반드시 보존해야 합니다.” 경기 부천의 향토사학자 A씨는 역곡일대 공공주택 개발예정으로 선조들이 지켜온 전통 한옥 고택이 사라질 위기에 있다며 안타깝다고 말했다. 부천시 역곡동 165번지에 자리한 127년 된 죽산박씨 고택은 1894년에 건축된 근대 문화유산이다. 주변에 5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으며 540여 년을 지켜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최근 이 역곡동(역곡 안동네~까치울역) 일대 71만 7000㎡ 부지에 공공주택이 건설될 예정이어서 마을전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고택이 위치한 벌응절리(역곡 안동네)는 죽산박씨 종손(고택 주인 박희자)이 5대째 살고 있으며, 가옥도 큰 변형 없이 1894년 건립된 후 지금까지 잘 보존돼 왔다. 이 마을은 역곡동의 주산인 원미산 동쪽 날개에 해당하는 산 끝자락에 있다. 고택은 ‘ㄴ’ 자형 안채와 ‘ㄱ’자형 문간채, ‘ㄷ’자형 바깥채, 후원 및 경계 등 배치와 건물 골격은 건립 때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다만 안채의 창호와 바닥, 바깥채의 기와 등 마감 부분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보수했다. 50년 전부터 살아온 이 마을 한 어르신은 “문화특별시라는 부천시가 획일화된 아파트 건립으로 마지막 남은 유서 깊은 전통 한옥마을이 옛 정취를 잃어가고 있다”며, “이곳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선조들의 지혜와 풍속이 담겨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후세에 물려줘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조선말기의 전통건축양식인 이 고택은 부천뿐만 아니라 경기도내에서도 원형 유지와 보존상태가 양호해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와 희소성이 있다. 이에 시민들은 개발 주체인 부천시와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신도시 조성만 몰입할 게 아니라 유서 깊은 안동네마을을 존치·보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부천역곡 지주협의회와 대책위원회, 부천시자연호보협의회를 중심으로 고택영구보전 범시민서명운동을 펼쳐 이미 4만 여명이 참여했다. 고택주인인 종손 박희자(81)씨는 “여생을 바쳐 전통유산을 복원하고 스토리텔링이 있는 고택으로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주민들의 기억과 경험을 소중히 기록할 계획”이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올해 향토문화재 지정 등록을 신청하고, 수용시 고택 전체를 부천시에 기부채납하겠다”고 밝혔다. 박명혜 부천시의원은 지난 시정질문을 통해 “부천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높이기 위해 문화적 자산 현황을 철저히 파악해 향토문화와 도시유산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고 정책을 마련해 역곡고택 보존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시에 주문했다. 이와 관련해 부천시 관계자는 “문화재를 발굴·보존하기 위해 관련 조례를 내실 있게 정비하고, 문화 산업화에 대한 중장기적 계획을 수립하며 유관기관과 경쟁력 있는 문화도시로 나아갈 수 있도록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역곡동 고택은 경기도에 등록문화재 지정을 신청(2011년 11월)한 바 부결 통보돼 도를 상대로 이의신청(행정심판 소송)한 상황이다. 시는 “경기도에서 향토문화제 등록 심의를 보류하고 있다”며 “소송이 마무리되면 ‘부천시 향토문화재보호조례’에 의거 향토문화제로 등록할 수 있는 방법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전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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