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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개 군, 자매결연 10돌 행사 ‘풍성’

    고려시대 당시 삼별초가 몽고에 대항해 싸운 근거지였던 제주도 북제주군과 경기도 강화군,전남 진도군 등 3개 군이 자매결연 10주년을 맞아 각종 행사로 형제애를 쌓아가고 있다. 26일 북제주군에 따르면 이들 3개 자매 군은 지난 89년 5월 결연한 이후 매년 군민의 날 등 주요 행사가 있을 때면 군수나 부군수급의 상호 교환방문을 실시하며 관내 농협지부에 자매군 지역특산물 판매코너를 설치해 감귤,쌀,화문석,흑미,구기자차 등을 서로 팔아주고 있다. 특히 결연 10주년이 되는 올해는 북제주군 정월대보름 들불축제(2월)와 진도군 영등축제(4월),강화군 고인돌 축제(8월)에 각각 축하사절단을 보내 서로를 격려했고 3월에는 제주에서 항몽유적지 답사와 삼별초 항몽호국정신 계승발전을 위한 합동세미나를 개최했다. 지난 8월에는 수해를 입은 강화군에 북제주군과 진도군이 의연금을 전달해위로했고 지난 24일에는 강화군과 진도군 공무원 40여명이 제주에 와 북제주군 공무원들과 친선 축구경기를 가졌다. 오는 11월중에는 각 군이 2명씩의 공무원을 차출,1주일동안 상호 교환근무를 실시할 예정이며 삼별초를 보다 폭넓게 연구하고 이해하기 위해 올 연말까지 3개군이 함께하는 가칭 ‘삼별초학회’도 설립할 계획이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북제주, 행사·축제 대폭 구조조정

    제주도 북제주군(군수 申喆宙)은 올해부터 군민의 날 행사 등 각종 행사를통·폐합하거나 격년제로 열기로 하는 등 행사 횟수를 25% 줄여 9억원을 절감하는 효과를 올렸다고 22일 밝혔다. 매년 6,600만원의 예산을 들이면서 개최하던 군민의 날 행사와 해변축제를격년제로 열기로 하고 올해 행사를 갖지 않은 대신 이 예산을 공무원 외국어 전문인력 육성사업에 투자했다.현재 남녀 공무원 66명이 영어 등 외국어교육을 받고 있고 이중 10명은 오는 10월 15일부터 9박10일 일정으로 미국을돌아보게 된다. 읍·면 단위 어버이날 기념식도 과감히 없애 군수가 마을 단위 경로행사장을 방문,격려하는 것으로 끝냈으며 군 노인의 날 행사도 도 단위 행사와 통합하고 연2회 개최하던 노인 게이트볼 대회도 1회로 줄였다. 매년 2억원의 예산으로 치렀던 정월대보름 들불축제도 올해는 1억5,000여만원 규모로 축소해 남은 예산을 지역개발 사업에 투자했다. 이밖에 군수기 배구대회 등 3개 체육대회와 33개 마을체육대회 등도 격년제로 넘겼으며 중복성있는 21개 자연마을단위 경로잔치도 7개 마을 단위 행사에 통합시켰다. 군은 행사 축소로 체육행사비 6억9,100만원,기념행사비 6,000만원,축제행사비 8,500만원,경로행사비 3,600만원,기타 2,300만원 등 8억9,500만원을 절감해 다른 용도에 재투자,절감액 이상의 효과를 얻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中종교인구 실태

    미신과 사이비 종교 신봉자 등 중국의 종교인구는 개혁개방의 진전속에 봇물처럼 불어나고 있다.중국정부의 공식통계는 1억명 가량이 각종 종교를 믿고 있는 ‘종교인구’라고 밝히고 있다.그러나 신도수는 들불이 번지듯 빠르게 늘고 있다.정확한 통계도,정부의 통제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개신교 신자수는 중국정부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1,500만명가량.그러나 실제론 9,0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거대한 지하조직망을 통해 교세와 신도를 넓혀가고 있다. 중국정부는 자생적인 ‘독자교회’만을 인정하고 있다.법으로 외국 선교사의 입국 및 활동을 금지하고 있다.90년대 들어 교회 등록 등 통제의 고삐를죄고 있지만 외국교회와 종적·횡적인 관계를 가진 지하 교회조직이 더욱 몸집을 불리고 있다.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가톨릭신자수도 수백만명으로 추산된다.주교도 6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정부는 ‘중국천주교 애국회’,‘천주교 주교단(主敎團)’등 두 공식단체를 통해 가톨릭계의 장악을 시도해 왔지만 지하교회의 성장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슬람신도도 신장 위그르 지역의 1,600만명 등 3,000만명에 달하고 있다. 라마교라 불리는 티벳 불교도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2,000만명가량의 신봉자를 갖고 있다.불교 인구만도 5,000만명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도교의 경우 정부는 중국도교협회를 중심으로 도교인구를 관리하고 있지만각 지역마다 토속신앙과 결합,사이비 종교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믿음을 통해 길흉화복을 선택할 수 있고 건강과 사회적 성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과학적 사회주의’와 ‘유물론’을 대체하면서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특히 8억의 인구가 산재해 있는 농촌지역에선 전통 토속신앙의 현대판인 신흥종교가 중앙정부의 권위를 훼손할 지경까지 확산되고 있다.부적과 점을 통해 액운을 물리치고 복을 얻겠다는 태도가 광범위하게 민중들의 가슴속으로파고 들고 있는 것이다.급격한 사회변동,공산주의 이념의 퇴색 등으로 인한종교가 민중들의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분석이다. 중국 중국의 민속학자들은 도교와 구복신앙 등을 결합한 토속종교인 “즈푸첸녠지아오(至福千年敎) 등 일부 신흥종교의 경우 강력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지방정부의 통제력을 위협하는 수준”이란 평이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에 대한 헌법적 보장에도 불구,중국공산당과 정부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란 기본 관념은 크게 바뀌지 않고 여전하다.헌법도‘종교를 믿지 않을 권리’도 보장, 포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신흥종교뿐아니라 이슬람교,라마교 등이 중국정부와 공산당에 사실상 적대적이라고 보고 순치에 노력해 왔다.중국정부는 미신과 사이비 종교를 비롯,각종 종교의 확산이 사회문제를 넘어 권위와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며 대책마련에 전전긍긍하고 있다.그러나 빠른속도로 퍼지고 있는 종교열풍을 막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이석우기자 swlee@
  • [21세기 내고장 역점사업](25)전북 임실군/이형로군수

    술에 취한 채 들판에 쓰러져 잠든 주인을 들불로부터 구하고 자신은 불에타 죽은 ‘오수의 개’.이 전설의 발상지이자 ‘의견(義犬)의 고장’인 전북 임실군 오수면에 개를 주제로 한 세계적인 테마관광지가 조성된다. 보신탕의 나라’ ‘동물학대의 나라’로 국제사회에서 비난받는 우리나라에국내·외 애견가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애견 관광지가 탄생되는 것이다.임실군은 이곳에 국내 최초로 경견장과 투견장을 건설하고 저자거리를 조성하는등 ‘오수의 개’ 문화관광지를 만들어 오수면을 세계적인 애견 관광지로 육성할 방침이다. 애완견 사냥견 등 각종 우량견을 사육·훈련·판매하고 애견 공동묘지인 명견동산을 조성해 오수를 명실상부한 명견과 애견의 고장으로 자리매김한다는 야심찬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군은 ‘오수의 개’ 문화관광지가 조성되면연간 3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와 최고 90억원의 관광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견장 건설 개들이 달리기 솜씨를 겨루는 경견장을 국내 최초로 짓는다.경주용 개인 그레이하운드 8마리가 트랙을 달린다.외국에서는 인기가 매우 높은 관광산업이다. 오수면 오수리 4만5,000평 부지에 수용인원 5,000명 규모로 건설된다.57억원의 사업비 가운데 국·지방비에서 19억원을 투자하고 외자 유치로 38억원을 확보할 계획이다. 애견대회장 건설 경견장 옆에 1,200평 규모의 애견대회장이 조성된다.53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람석도 만들어 진다. 이곳에서는 국내·외 애견 콘테스트와 애견쇼,훈련경연대회 등이 열린다. 군은 이곳에 전국 규모의 애견대회를 수시로 유치해 오수를 명견의 메카로육성할 계획이다. 우량견 사육·훈련·판매 사냥견 경찰견 사역견 등 각종 개를 생산·판매하고 훈련시키는 사업도 추진한다. 우량견 생산·판매를 위해 6,000평 규모의 훈련장을 갖추고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종견 540마리를 사육할 계획이다. 이 사업은 임실지역 영농법인에서 우량견을 계약사육해 판매함으로써 농가소득 증대에 도움이 되도록 할 방침이다. 애완견으로는 푸들 퍼그 미니핀 파피용 치와와 등 소형견을 생산·판매할계획이다. 사역견으로는도베르만 셰퍼드 마스티프 시베리안허스키 콜리 등 대형견을훈련,판매한다. 조렵견으로는 포인터 블러드하운드 세터 스파니엘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냥개를 생산,훈련시킬 계획이다. 오수의 개 사적지 복원 자신의 몸을 태워서 주인을 구한 ‘오수의 개’ 사적지가 복원,공원화된다. 기존 시설인 의견비 일주문 팔각정 등은 새롭게 정비한다.사적지 부지도 700평에서 1,000평으로 확장하고 주변을 이조식 담장으로 단장할 계획이다. ‘오수의 개’ 주인인 김개인의 생가를 복원하고 의견상(義犬像)도 고증을거쳐 새로 건립하기로 했다. 명견동산 조성 오수면 오수리에 1만3,500평 규모로 조성된다. 이곳에는 애견 충견 의견 등의 묘지와 비,조각 등이 설치된다. 전국의 애견가들이 자신의 애견이 죽으면 이곳에 묘지를 만들어줄 것으로기대된다. 부대시설로는 ‘오수의 개’ 역사관,주차장,관리사 등이 들어서며 애견관리 요령 등을 교육하는 시설과 휴식공간도 조성된다. 저자거리촌 조성 1930년대의 옛 거리를 조성해 관광객들을 유치한다. 특히 오수리옛 시장통에 최명희의 소설 ‘혼불’에 나오는 초가집 판잣집기와집 관가 등을 재현한 ‘혼불의 거리’를 조성한다.이 거리는 문화탐방로 코스와 영화 촬영장으로 활용하도록 할 계획이다. ‘혼불의 거리’는 길이 250m 폭 35m 규모이다. 초가집에는 주막 찐빵집 팥죽집 떡집 대장간 어물전 엿집 등을 입주시켜 먹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한다. 판잣집에는 방물장사집 청요리집 기름집을 입주시키고 기와집에는 포목점옷가게 책방 다방 옹기전 등을 입주시킬 계획이다. 과거와 현재의 오수역 오수리 일원에 고려·조선시대 역과 근대역,현대역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과거와 현재가 만나 살아 숨쉬는 오수역’을 조성한다. 고려·조선시대 역은 1930년 이전의 찰방역으로 700평 규모이다. 찰방역은 역사와 마굿간,가마,마차 등을 고증을 거쳐 복원한다. 근대역은 일제시대 지어진 기존의 오수역을 보존하고 현재 건설중인 오수역은 현대역으로 단장해 철도 발달사 교육장과 관광코스로 활용하기로 했다. 임실 임송학기자 shlim@- 이형로군수 인터뷰 “즐길수 있는 애견 관광지로” “애견(愛犬)의 모든 것을 보고 즐길 수 있는 테마관광지를 만들겠습니다” 이형로(李瀅魯) 임실군수는 ‘오수의 개’ 전설의 발상지인 오수면에 국내처음으로 개 관련 경기와 문화탐방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복합 테마관광지를 조성하겠다고 의욕에 찬 청사진을 펼쳐 보였다. 애견 관광지 조성사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임실은 예부터 ‘의견의 고장’으로 잘 알려진 고장이다.‘오수의 개’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올 정도다.지방화시대를 맞아 지역특색에 맞는 관광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애견을 테마로 한 문화관광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건립을 추진중인 ‘경견장’이란 무엇인가. 경주용 개인 그레이하운드가트랙에서 모조 토끼를 좇아가며 달리는 경기장이다.이 경기는 경마처럼 내기 게임을 할 수 있어 미국과 유럽에서는 매우 인기가 높은 관광산업이다.아시아에서는 마카오에만 있다.이들 자치단체는 많은 흥행수입을 올리는 것으로일고 있다. 사업 추진상황은.13억4,800만원을 들여 경견장 조성에 필요한 부지를 매입하고 의견상(義犬像)을 복원했다.오수 의견비(碑) 고증자료를 수집,연구하고 의견비를 전북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했다.‘오수의 개’ 기본 모델을 고증을 거쳐 확정하고 모형을 제작했다.수익사업을 위해 캐릭터도 개발했다. 사업 추진에서의 어려운 점은. 군으로서는 다소 벅찬 200여억원의 사업비가 들어간다.문화관광분야의 ‘신지식 기반산업 발전대책’에 경견장 조성사업을 포함시켜 국비를 지원해 줄 것을 중앙부처에 건의했다. 기대 효과는. 애견사업이 활성화되면 국내·외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와 관광수입이 늘어나고 지역개발이 촉진된다.경기도 과천경마장과 같이 산촌인임실 오수가 경견장에 힘입어 새로운 관광도시로 발돋움할 것으로 기대된다. ‘오수의 개’ 관광지 개발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보신탕을 먹는 나라’에서 ‘동물 애호국가’로 이미지를 쇄신하는 효과도 거둘 것이라 확신한다. 임실 임송학기자- '오수의 개' 고증 거쳐 복원한다 충직하고 영리한 전설속의 애견인 ‘오수의 개’가 복원돼 육종된다. 임실군은 ‘오수의 개’를 육종하기 위해 지난 97년 4월 동물학 육종학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학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오수의 개 연구위원회’를 구성했다.연구위원회는 고증을 거쳐 기본 모델을 확정하고 생명·유전공학을 이용해 ‘오수의 개’를 탄생시키기는 작업을 하게 된다. 연구사업에는 한국동물보호연구회장 윤신근박사가 위원장을 맡았고 서울대수의대 한홍율교수,고려대 생명공학원 지규만교수,전북대 수의대 최익현교수,국립중앙박물관 이원복연구관 등이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사이버상에 만들어 본 ‘오수의 개’는 마스티프보다 약간 작고 진돗개보다 큰 대형견이다.근육과 체격이 균형잡혀있고 털이 긴 편이며 후박한 인상을주고 있다. 귀는 크고 처져 있으며 꼬리는 긴 편으로 올라가 있다.어깨 높이도 수컷이60㎝ 내외,암컷은 58㎝정도 이며 털색은 갈색 황색 흑색을 원칙으로 한다. 군은 ‘오수의 개’를 마스티프,풍산개,진돗개 등과 교배해 기본형에 가까운 모형을 육종한다는 구상이다. 군은 5년후인 오는 2003년에는 혈통보존 및 지속률 65% 이상의 ‘오수의 개’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군은 ‘오수의 개’가 탄생하면 이를 국내·외 학계에 발표하고 세계축견연맹,영국애견협회,미국애견협회 등에 등록해 세계적인 견종으로 육성할 방침이다. 임실 임송학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17)-봇물터진 통일론:上

    제2공화국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분단 이후 통일논의가 가장 활발한 시대였다는 점이다.‘반공으로 동이 트고 해가 저무는’이승만(李承晩)정권 때나 5·16후 한세대 동안 지속된 군부권위주의 정권 때는 물론이고,그후에도 2공(共)시기처럼 남북통일이 국가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활기찬 이슈로 떠오른 적은 없었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지면서 ‘북진통일’로 대표되는 무력통일론은 자연히 도태된다.허정(許政)과도정부가 1960년 5월3일 국가의 근본방침을 밝히면서 “과거보다 더 견실하게 반공정책을 펴 나가겠지만 허장성세하는 물질적·정신적 낭비를 없애는 대신 유효하고 구체적인 대공(對共)방위태세를 확립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이로써 집단이건,개인이건 통일방안을 자유롭게 발표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특히 내각책임제 개헌에 따라 민·참의원을 새로 뽑는 ‘7·29총선’이다가오자 통일론은 주요한 선거 이슈가 되었다. 통일론을 먼저 제기해 이를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킨 정치세력은 혁신계였다.하지만 혁신계의 분열을 반영하듯 그 무렵의 주장은 다양했다.한국사회당(대표 錢鎭漢)은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하되 통일조국은 민주주의를 견지해야 한다”고 했고,혁신동지연맹(張建相)은 “민주적인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통일위원회를 구성해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정치적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사회혁신당(高貞勳)은 “김일성(金日成)괴뢰가 타도돼 자유로운 정권으로 바뀌면 남북교류를 허용하고 그 다음에 남북 총선거로 평화통일을 기한다”는 일정을 발표했다.혁신계라고는 하지만 통일정책은 이처럼 ‘반공’의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보수·혁신 양 진영을 대표하는 민주당과 사회대중당도 총선 직전 통일정책 공약을 내놓는다.사회대중당(徐相日)은 7월22일 성명에서 ▲정당·학계를망라한 협의기구를 설립하고 ▲유엔이 선정해 우리가 승인한 국가로 감시단을 구성,자유총선거를 치러야 하며 ▲경제건설 및 대외정책이 국토통일의 성취를 뒷받침해야 한다는 원칙을 공개했다. 민주당도 나흘뒤 ▲유엔 감시하의 남북 자유선거 ▲선거감시단은 자유선거를 실시하는 회원국으로 구성할 것을 제의하면서 일부에서 주장하는 ‘선거전 남북연합위원회 구성’과 ‘통일 전 남북교류’는 반대함을 분명히 했다. 총선이 민주당 압승으로 끝난 뒤 윤보선(尹潽善)대통령은 8월13일 취임사에서 ‘유엔 감시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원칙을 다시 한번 천명하면서 “이보다 앞서 이루어야 할 근본문제는 남한이 혼란에서 벗어나 국력을 부강케 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장면(張勉)총리도 민의원에서의 첫 시정연설에서 같은 통일방안을 밝힌다.‘선(先)건설,후(後)통일’이 장면정부의 기본정책으로 확립된 것이다. 장면정부가 ‘선건설 후통일’을 내세운 데는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다.4월혁명 뒤처리를 맡은 정부로서 당면과제가 산적한 마당에 어차피 단기간에 해결하지 못하는 통일문제를 우선순위에 두기는 어려웠다.따라서 장면정부는통일논의에서 소극적·방어적일 수밖에 없었다. 장면 내각에서 내무부 정무차관을 지낸 김영구(金永求·고려대 법학과교수출신)는 “그때 시급한 과제는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어떻게 먹여살리느냐와,4·19이후 쏟아진 각계의 욕구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였다”면서 “솔직히 통일에 신경 쓸 겨를이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김 전차관은 “통일문제는 형식상 외무부에서 관장했지만 사실은 주무부처가 따로 없었던 셈”이라면서중요한 일이 발생하면 장총리가 그때그때 처리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7·29 총선’에서 참패해 원외 세력으로 남은 혁신계는 돌파구를 통일논의에서 찾는다.총선 당시의 애매모호하던 통일논리를 강화해 ‘선통일후건설’을 내세웠다.장면정부의 ‘선건설 후통일’이란 결국 통일을 하지않겠다는 뜻이라고 비판하면서 통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통일지상주의를 강조했다. 혁신계 정당·단체들은 통일에 관한 이념과 행동을 통합하고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를 구성한다.9월15일 준비위원회를 발족한 민자통은 사회대중당·사회당 등 혁신정당,천도교·유도회 등 종교단체,민주민족청년동맹·4월학생혁명연합회 등 청년단체가 참여했다고 발표했다. 이 무렵 혁신계가 새로 가다듬은 ‘무기’가 남북교류운동,그리고중립화통일운동이었다.남북교류운동이란 사람·편지·문화예술·체육 교류를 가져민족의 동질성을 살리자는 것과,남는 경제재(經濟財)를 주고 필요한 것을 받아오는 물물교환을 하자는 두가지였다.이는 국민의 감성과 경제난에 호소하는 바가 커 큰 호응을 얻었다. 중립화운동은 더욱 관심을 끌었다.민자통은 9월 말 발표한 ‘통일문제에 관한 견해’에서 ▲즉각적인 남북협상 ▲남북대표들의 ‘민족통일 전국최고위원회’구성 ▲외세 배격 ▲통일을 협의하는 남북대표자 회담 개최를 주장했다.그리고는 “통일 후 오스트리아식 중립 또는 영세중립을 택할 것이냐,아니면 다른 형태를 택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중립화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한달쯤 뒤인 10월22일 미국에서 중립화론이 터져나왔다.마이크 맨스필드 상원의원이 ‘극동보고서’에서 “오스트리아를 중립화한 것처럼 미국이 여러강대국들과 협의,한국을 중립화해 통일시켜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맨스필드의 제안이 알려지자 혁신계는 크게 고무돼 혁신동지연맹·사회대중당·사회당 등이 잇따라 지지성명을 발표한다.이어 부산대 학생들이 11월5일 ‘통한(統韓)궐기대회’에서 ‘외세의존적인 통일을 배격한 중립적인 무혈(無血)통일’을 제의하고 나섰다.학생들은 또 “현 정부와 국회는 실천 가능성이 없는 통일방안을 주장하지 말고 국민투표로써 통일방안을 결정하라”고 촉구했다. ‘중립화 바람’은 통일논쟁이란 불씨를 거대한 들불처럼 번지게 했다.그불길은,남북대치의 냉전구조에 토대를 둔 장면정부의 통일정책을 뿌리까지태울 기세로 밀려왔다. 이용원기자 ywyi@*북한의 대남정책 제2공화국 시절 통일논의의 세 축은 장면(張勉)정부,혁신계와 일부 학생 등 급진주의자들,그리고 북한이었다.이 가운데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던 쪽은당연히 북한이다. ‘3·15부정선거’로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두차례 발생하자 북한 당국은 이를 ‘인민봉기’로 규정했다.지난 97년 모 주간지가 공개한 푸자노프(당시 평양주재 소련대사)비망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비망록에 따르면 1960년 4월11일 김주열(金朱烈)의 시신이 발견돼 제2차 마산시위가 일어나자 조선노동당은 이를 ‘인민대중의 진정한 민주화운동’으로 평가한 데 이어 “시위가 인민봉기 유형을 띠고 서울 부산 대구 마산 등대도시를 휩쓸고 있다”고 판단했다. ‘4·19’이틀 뒤 노동당은 “파국에 처한 남조선의 현사태를 수습할 대책을 토의하기 위해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의 연합회의를 긴급 소집하자”고 제의한다.아울러 “평화적 통일은 어떠한 외국의 간섭도 없이 전체 조선인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남북조선 총선거를 통해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한이 ‘7·29총선’국면에 들어가자 북한은 혁신계 정당·단체의 창설을적극 지지하고 나선다.6월13일 푸자노프를 만난 김일성(金日成)은 “우리는단 하나의 (혁신계)대중정당이 아니라 여러 당을 지지하며 현재 그런 당으로는 한국사회당·대중사회당과 기타 정당이 있다”고 말한다. 북한은 ‘7·29총선’결과에 큰 기대를 걸어 “혁신계에서 35명 가량이 당선될 것같다“고 전망하지만 실제로 당선자는 민·참의원 합해 7명에 그쳤다.게다가 그들은 북한이 보수파로 분류한 인사들이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듯 북한은 전략을 바꿔 ‘남북연방제’를 제안한다.김일성은 8월14일 열린 ‘해방 15주년 경축대회’에서 “남조선 당국이 아직 자유로운 북남(北南)총선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먼저 민족의 긴급한 문제를해결하는 과도적인 대책이라도 세워야 한다”면서 남북연방제를 처음 내놓는다. 김일성은 “우리가 말하는 연방제는 남북조선의 현 정치제도를 당분간 그대로 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보존하면서,두 정부 대표들로 최고민족위원회를 조직해 남북조선의 경제·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을 실시하자는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남북연방제’제의는 과도적이자 단기적인 성격을 가졌다.연방을형성하면 곧바로 남북한 총선거로 넘어가는 수순이었다.북한이 연방제를 제의하며 통일공세를 적극 강화한 이유는,혁신계의 평화통일 주장에 발맞춰 전략적으로 유연한 통일방안을 내놓기 위해서였다. 북한의 남북연방제 안은 50년대후반 북한학계가 전체적으로 동원돼 벌인‘과도기논쟁’을 이론적으로 수렴한 것이기도 했다. 북한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반대하고 김일성의 남북연방제를 재확인하는 내용의 각서를 11월11일 유엔에 제출한다. 남북 총선거의 전단계 또는 대안으로 북한이 마련한 ‘과도적 연방제’안은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다. 이용원기자
  • [굄돌]짝꿍족 사랑

    우리사회를 한동안 떠들썩하게 했던 X세대에 이어 새로 Y세대가 등장했다.Y세대의 특징은 슈퍼스타가 등장하는 광고를 싫어한다.나이키 대신 스케이트보드 신발로 인기가 있는 밴스를 좋아한다.X세대는 이미지 광고,슬로건 광고를 좋아했지만,Y세대는 개그맨 김국진의 재미있는 광고,사실을 전달해 주는광고를 즐겨보고 있단다. Y세대의 등장이 이미 소비문화와 상품판매의 패턴을 바꿔놓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자동차화사는 연료 효율성이 높고 값이 싼 소형차들을 계속 선보이고 있다. 그뿐아니다.지금은 바야흐로 짝꿍 시대.두 사람의 관계가 짝꿍이라는 것을드러내는 각종 패션이 Y세대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이들 짝꿍족은패션 잡화를 서로 같이 맞추는가 하면 확 튀는 찬란한 머리염색을 하고 당당히 활보하기도 한다. Y세대의 필수품인 핸드폰에 같은 장식을 달거나,두 사람의 사진을 넣은 열쇠고리를 똑같이 가방에 달고 다니기도 한다.패션시계도 으레 남녀 세트로나오고 있다.짝꿍 반지,심지어 하트가 그려진 짝꿍 팬티까지 등장했단다.Y세대들의 그런 현상을 접하며 동문인 소설가 이원규씨 내외가 모임에 즐겨 입고 나오던 황토빛 생활한복이 떠오른다.이 천생연분 짝꿍의 한복 차림새가 그렇게 상큼히 어울릴 수가 없었다.나는 산행을 할 때에 때로 안식구와똑같은 무늬의 티셔츠를 맞춰 입고 가기도 한다.그때에는 어떤 끈끈한 일심동체(一心同體)의 사랑을 느끼기도 한다.일체화에의 갈망과 고통도 사랑의한 과정이자 방법일 것이다.짝꿍 패션에는 그런 마력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 앞선 인생의 선배로서 염려되는 것이 있다.그렇게 요란히 짝꿍의 사랑을 겉으로 드러내지만 한 잔의 커피 마시듯 젊은이들은 쉽게 헤어지고 헤어져도 가슴 아파하지 않는 것 같은 풍조가 걱정된다.이제는 드러내는 몸의겉모양 동체도 필요하지만 마음의속모양 동체도 절실하다.한용운의 시구처럼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은 아닌 지,우리 Y세대들이여! 홍희표 목원대 교수 시인
  • ‘조PD 음반’ 파문

    지난 16일 공연예술진흥협의회(공진협)가 음반 ‘조PD 인 스타덤’에 대해청소년 유해판정을 내리자 당사자인 조PD(사진)측이 법적 대응을 검토하는등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특히 이번 공진협의 결정은지난해 7월 청소년보호법 시행이후 청소년보호위원회(청보위)가 첫 심의요청을 낸데 따른 것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공진협의 이번 청소년 유해판정이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음반이 처음 PC통신 등 통신망을 통해 청소년층에 확산된 여세를 몰아 음반으로 제작돼나온데다 청소년보호위원회의 심의요청에 따른 첫 유해판결이란 데 있다.실제로 지난해 PC통신에 이 음반에 수록된 ‘브레이크 프리’가 올려진뒤 청소년들에겐이 음악이 들불처럼 확산돼 제2의 서태지돌풍을 연상시킬 정도였으며 PC통신 게시판 등엔 이 음악과 조PD와 관련된 글이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올랐다. 결국 가사내용을 문제삼은 청보위측이 심의요청으로 치달았고 공진협 결정과정에서도 “이 노래만 빼면 문제 없을 것이란 주문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다.공진협과 청보위의 입장은 음반 ‘조PD 인 스타덤’의 수록곡 ‘브레이크프리’에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비속어가 7번이나 들어있고 저속한 표현과 비어가 상당수 포함됐을 뿐만 아니라 내용 자체가 청소년 선도의지를 부정적으로 폄하해 유해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에대해 조PD측은 “노래 전체의 흐름을 무시한채 가사의 일부분을 문제삼는 것은 청소년 보호란 명목아래 창작의 자유를 무시한 처사”라고 맞서고 있다. 양측의 이같은 대립은 PC통신에서도 청소년들의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청소년 유해환경 차단 측면에서 바람직한 일”이란 주장과 “청소년들의 입장과 생각을 도외시한 전근대적인 발상”이라는 견해차가 그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PC통신에 오른 글들은 이용자들이 대부분 청소년층인 때문인지 이번 결정을 비난하는 글들이 압도적이다. 청보위는 이같은 결정을 행정자치부에 요청해 관보에 고시할 예정인데 이렇게 되면 청소년보호법에 따라 18세 미만 청소년에겐 이 음반을 팔 수 없으며 이를 어길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된다.이에대해 조PD측은 “과거 가사가 더욱 문제가 된 음반도 유통됐다”면서공문을 받는대로 즉시 이의신청을 할 예정이다.그러나 공진협 재심에선 원심 판결의 적법성을 주로 다루는 만큼 청소년 유해판정이 번복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따라서 조PD의 음반은 청소년보호법 시행이후 청소년 유해판정을 받아 유통금지를 당하게 된 첫 사례로 기록됐는데 재심에 따른 음악인들의 반발이 예상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 내고장 단체장 새해 설계-申喆宙 북제주군수

    북제주군은 행정체제의 정보화 등 올해 10대 핵심시책을 정해 군정을 꾸려나갈 방침이다. 군이 제시한 핵심시책은 ●문화예술 진흥 ●관광산업 발전 ●감귤 경쟁력확보 ●선진 수산환경 조성 ●축산업 발전 ●환경시설 확충 ●완벽한 복지대책 ●여성지위 향상 ●군민역량 결집 등이다. 다만 어려운 재정여건을 감안,신규사업을 지양하는 대신 기존 투자사업과시책을 내실있게 마무리하는 것이 목표다. 申喆宙군수는 “올해는 지방행정 체제를 일신하는 21세기형 신 행정문화 정착의 해로 삼겠다”고 말하고 “읍·면공무원의 이(里)사무소 파견제 확대등 군민에 대한 친절서비스 행정과 조직의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추진,경쟁력 있는 지방행정조직으로 육성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각종 위원회의 여성 참여율을 올안에 25%로 확대,군정 추진과정에 주도적역할을 부여하려는 것도 주목받을만한 일이다. 申군수는 “여성공무원 수도 20% 수준으로 높이고 여성이 창업하거나 운영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창업자금과 운전자금을 우선 지원하는 등 여성지위를한껏 높이겠다”고 말했다. 1차산업분야는 그동안의 농업용수 개발사업과 농로 포장사업 등 밭기반 정비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전천후 영농기반을 구축하고 농산물포장센터와간이집하장시설 등 유통시설을 크게 확충할 계획이다.수산부문도 최첨단 육상양식 수출단지 조성사업과 소규모 어항개발 사업,지역특화산업 육성을 통해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키워 나갈 방침이다. 도시와 농촌이 조화롭게 기능을 하고 동·서지역을 균형있게 발전시키는 것,하수종말처리장과 축산분뇨 처리시설 등 환경 기초시설을 권역별로 확충해배출오염원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일 모두 申군수가 올해 할 일이다. 申군수는 특히 관광문제와 관련,“돌박물관을 중심으로 제주종합문화공원조성사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해 고산 선사유적지와 당처물동굴,항몽유적지등과 함께 관광자원화하고 들불축제와 해변축제를 세계적인 축제로 발전시키는등 올해를 문화관광 개발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 ‘사람 사랑’ 시인으로 거듭난 박노해씨(올해의 인물:4)

    ◎이념투쟁 오류 인정 ‘얼굴있는 제2인생’ 시작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과 관련,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된지 7년만에 지난 8월15일 특사로 풀려난 박노해씨(41).석방직후부터 종교계와 문화계 대학 등 갈만한 곳이면 마다않고 찾아 그동안 가슴에 묻었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노동의 새벽’‘시다의 꿈’ 등 현장성 강한 노동시로 80년대 문단을 뒤흔들었던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에게 올해는 잊혀질 수 없는 한해다.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얼굴없는 시인은 충격으로 다가왔다.올해 하반기 대학 강당에서,성당에서,허름한 무대에서 들불처럼 번져간 ‘박노해 신드롬’은 어찌보면 오래전부터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시동인지 ‘시와 경제’에 열악한 노동현장의 비애감을 실감나게 담아낸 ‘시다의 꿈’을 발표한게 지난 83년.군 제대직후 안양 시내버스 정비공으로 입사해 작업장과 기숙사에서 틈틈이 적어두었던 시 모음이 바로 84년 세상에 나온 ‘노동의 새벽’이다.본격적인 노동운동가로 변신해간 것은 ‘노동의 새벽’을 발표한 바로 그 이듬해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86년 5·3인천사태 배후인물로 지목돼 추적을 받다가 89년 세상을 뒤흔든 사노맹 사건의 핵으로 등장,마침내 91년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얼굴없는 시인이 마음을 바꾼 것은 감옥에서 동구권의 몰락을 바라보면서다.한때 노동운동의 한 이데올로기로 택했던 사회주의의 실패를 주저없이 인정했고 세인들에 대한 사죄에도 거침이 없었다. 노동현장에 몸담으면서 탄압에 맞서 가열찬 시어들을 쏟아냈던 정열은 이제 사람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사랑으로 바뀌었다.경주교도소에서 준법서약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가 출옥직후 힘주어 밝힌 말 ‘사람만이 살길이다’는 그의 인생향로를 담은 선언이다.사상과 이념에 온몸을 던져 투쟁하다 갇힌지 7년만에 햇빛을 보게된 그의 모습은 지난 91년 구속때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올 겨울 6년만의 시집을 준비하고 있고 내년 여름엔 이 시대의 역할과 비전에 대한 산문집을 낼 계획이다.오랜 산고끝에 세상에 나올 그의 새 작품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 대한매일 역사성과 새 좌표 세미나­주제발표 내용

    ◎국난때 정론 편 대표적 민족지 오는 11일 ‘대한매일’로 역사적인 새 출발을 하는 서울신문이 3일 오후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대한매일의 역사성과 새 좌표’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갖고 그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했다. 이날 발제자들은 대한매일신보가 창간 당시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한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항일구국의 기치를 드높였던 민족정론지였다고 평가하고 오늘날 또 다른 국난기를 맞아 그 같은 정신의 부활은 시의적절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특히 새로운 천년,새 세기의 지평에서 공익언론·구국언론으로서 대한매일의 부활은 1세기 전 선각자들이 이루지 못했던 꿈과 도전을 실현시킬 계기가 될 것임을 전망했다. 이날 발표된 ‘대한매일신보 창간 당시의 민족운동과 시대적 상황’(신용하),‘대한매일신보의 논조와 민족 독립운동’(정진석), ‘대한매일의 정체성과 새 좌표’(김삼웅) 세 편을 요약 소개한다. ◎창간 당시 시대적 상황/애국세력 신민회 본부 사내에 설치/국채보상 일어나자 전국적 캠페인/愼鏞廈 서울대 교수·사회학 구한말 ‘을사5조약’의 늑결(勒結)로 외교권 등 국권을 상실한 뒤 가장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한 신문이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이하 대한매일)였음은 학계의 연구에 의해 잘 알려졌다. 그 요인과 조건을,외국인 명의로 발행돼 일제의 탄압과 검열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왔다. 이런 외적 조건은 일면에 불과한 것이어서 대한매일이 과감한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할 수 있던 내적 조건을 밝힐 필요가 있다.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 전개 대한매일은 영국인 裵說을 사장으로 고용추대하고 梁起鐸은 총무가 되어 합작으로 1904년 7월18일 창간했다. 원래 대한제국 정부가 한국의 처지와 한국정부의 주장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영어를 사용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궁내부 예식원 관리인 양기탁 등이 배설을 고용해 창간했다. 예식원 영어통역관인 양기탁은 고종의 내탕금과 李容翊·閔泳煥 등의 자금지원을 받아 신문사 시설을 설치하고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지 임시통신원 배설을 사장으로 고용해 신문을 창간했다. 따라서 대한매일은 양기탁의 주도로 창간됐으며,양기탁은 ‘총무’로서 신문사의 편집과 업무를 총괄했다. 대한매일이 가장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하게 된 내적 조건의 특징은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돼 그 본부를 대한매일 안에다 둔 사실과 직접 관련돼 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초 다섯가지 애국세력이 연합해 창립했는데 그 첫째가 대한매일 집단이다. 양기탁이 총무로,申采浩가 주필로,張道斌(일시 주필)玉觀彬 李章薰 梁寅鐸 金演昶 兪致兼 李晩稙 등이 기자로,林蚩正 姜文秀 등이 회계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신민회 창립 직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이밖에 서울 상동교회,구한국 무관 출신,민족자본가,미주(美洲)에 있는 공립협회(共立協會)등이 참여했다. 신민회에서는 특히 대한매일이 그 핵심세력이 되었다. 신민회 총감독(당수 또는 회장)이 양기탁이었고 본부를 대한매일 내에 두었다. 장도빈은 주도회원에 신민회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 간부였다. 신민회 조직을 발의한 것은 안창호 중심의 공립협회였으나 미주에서는 효과가없으니 본국에서 설립해야 한다고 판단해 안창호를 파견했다. 안창호는 1907년 2월 귀국 즉시 대한매일로 양기탁을 찾아갔고 두달 후 다시 만나 신민회를 비밀결사체로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신민회 창립 제의는 안창호가 냈으나 창립은 양기탁 중심으로 되었다. 당시 그는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국내 애국인사들과 긴밀한 유대를 가졌을 뿐아니라 민중에게서도 큰 존경을 받았다. 아울러 양기탁이 신민회 총감독으로 추대된 것은 그가 대표하는 대한매일의 조직과 세력이 중시됐기 때문이다. 신민회는 전국에 지국을 가진 대한매일을 중핵으로 하여 단기간에 비교적 용이하게 지방지회를 설치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신민회 본부는 대한매일에 있었고 대한매일 영업국장인 임치정과 직원 김홍서가 비밀사무를 보았다. ○安昌浩 중심 신민회 조직 발의 1909년 대한매일의 지사 숫자는 51곳으로 일제가 후에 파악한 신민회 지회 세력과 분포가 거의 일치한다. 신민회는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의 실행방법으로 ‘신문·잡지·서적의 간행’을 최우선으로 설정했는데 창립 후 독자적으로 신문을 간행하지는 않았다. 대한매일이 신민회의 기관지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이는 장도빈,일제 관원,독립운동가의 자료들에서 확인된다. 대한매일이 신민회 기관지로 전화한 1907년 4월 이후 논설·편집·보도는 매우 열렬하고 전투적으로 되었다. 일제는 1908년 4월 ‘신문지법’을 개정해 외국인 명의 신문이 가진 특권을 모두 없앴으며 대한매일을 해체하려고 배설·양기탁을 고소·구속했다. 그럼에도 대한매일은 굴복함 없이 더욱 적극적으로 의병운동을 지원했다. 이는 대한매일 종사자들이 굳게 단결,신민회 노선에 따른 과감한 언론구국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의 민족운동에서의 애국적 전통은 21세기를 맞이하는 오늘 우리 한국 신문에서도 면면히 계승·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논조와 독립운동/李 침략 본격화 맞서 대항논리 제공/직필 논설 통해 항일의병투쟁 고무/鄭晋錫 한국외대 교수·정책과학대학원장 대한매일신보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부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까지 나라 안팎의 정세가 몹시 복잡하던 시기에 발행된 대표적인 민족지였다. 일본과 영국은 대한매일이 창간된 때로부터 한일합방까지 대한매일을 외교적인 현안문제로 다루었다. 따라서 대한매일은 언론사,독립운동사,한국문제에 관한 영·일 양국의 외교사,국제사법사 등의 핵심이 되는 연구과제이다. ○한일합방때까지 6년간 발행 대한매일의 항일 언론이 한국의 언론사와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요약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주목할 것은 이 신문의 발행시기다. 이 신문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한일합방이 공포되던 날까지 약 6년 동안 발행되었다. 이 시기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한반도에서의 독점적인 우위를 확보하고 침략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던 때였다. 대한매일은 이와 같은 민족사적 전환기에 발간되면서 항일운동의 논리를 제공했고 항일운동을 확산시키는 동시에 한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둘째 대한매일의 외교사적인 중요성이다. 이 신문에는 한국 영국 일본 세나라의 각기 다른 입장이 한반도의정치적 문제와 연관되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 이 신문은 소유주가 영국인이었으나 한국의 황실과 민족진영이 뒷받침하고 있었으며 논조는 항일이었다. 일본 입장에서 볼 때는 이 신문이 침략정책에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다. 일본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裵說을 한국으로부터 추방하거나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게 만들려 했고 그 교섭 상대국은 영국이었다. 영·일간 교섭 과정에서 외교정책,사법 절차상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들이 야기되었음은 물론이다. 셋째 이 신문은 한반도문제에 있어 영국과 일본의 기본적인 입장과 양측의 외교정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들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은 영국이 영일동맹으로 맺어진 우호관계라는 점을 내세워 일본의 대한정책을 방해하는 영국 시민 배설에 대해 만족할 만한 제재를 가해달라고 요구했다. 때문에 영국 정부 자체에서도 이 문제의 처리에 고심했다. 처음에는 영국과 일본이 다같이 배설을 한국의 법률과 일본의 군율 등으로 간단히 처리해 보려 했지만 결국은 영국의 재판에 회부하게 되었다. 다섯째 한국민족운동사에서 본 대한매일의 중요성이다. 이 신문은 소유주가 영국인이었으므로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았다. 이로 인해 일본의 한국 침략정책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고 한국 국민들의 저항운동을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었다. 많은 의병들이 이 신문의 영향을 받아 무장항일투쟁에 가담했으므로 이 신문은 한국 민족독립운동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었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여섯째 언론사에 있어서의 중요성이다. 이 신문은 발행되고 있던 기간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최대의 민족지였다는 점만으로도 연구의 필요성은 크다. 발행부수도 당시로서는 최고였지만 국한문 한글 영문의 3종을 동시에 발행한 신문은 한국 언론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대한매일이 벌인 국권수호운동은 1차적으로는 지면을 통해 전개되었다. 대한매일은 일본 침략을 규탄하고 항일무장 의병투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면서 한국 언론사에 가장 빛나는 항일 언론의 역사를 기록했다. 대한매일은 항일의 필봉만으로 일제와 싸운 것이 아니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온나라에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던 때에 의연금을 수합하는 총본부격인 국채보상의연금총합소가 되었고 梁起鐸 朴殷植 申采浩 등은 논설로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한편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의병들의 무장항일투쟁도 대한매일의 논조에 고무된 바 컸다. 대한매일은 한국 언론사의 주류를 형성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이 신문이 세운 민족 언론의 전통은 일제 치하를 거쳐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다. 대한매일은 결국 한일합방 직전에 일본측으로 넘어가 합방 후에는 총독부의 기관지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대한매일 발행 당시의 언론사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언론 연구에도 그 선행연구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정체성과 새 좌표/굴종과 오욕의 역사 치열하게 자성/원래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가 국난극복·21세기의 비전 제시 노력/金三雄 본사 주필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국민적 목소리가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면서 거세게 일어났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구조화된 적폐들을 청산하자고 정권교체라는 시민혁명을 이룬 국민 절대다수의 요청에 따라 가장 추한 모습을 지닌 우리 언론을 바로잡자는 언론정화운동과 언론개혁시민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이는 역사의 기승전결 법칙을 교과서적으로 무섭게 반영한 결과라고 본다. 서울신문이 제호를 변경하면서 출생의 뿌리를 찾고 그 정신을 새로이 하면서 새 출발의 전기를 확립하려는 의지는 바로 기승전결의 역사법칙이라 할 것이다. 서울신문은 이러한 역사발전의 전기로,국운이 기로에 처한 1900년대 초의 절망적인 시대 상황에서 민족의 긍지를 일깨우고 자주의 주권회복 기치를 높이 들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제호를 회복함으로써 우리가 처한 국난을 이기고 새로운 천년의 21세기에 앞장서고자 한다. 제호 변경은 서울신문이 단순히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이었다는 인연만으로 막연히 옛이름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백색독재와 군사독재정권의 홍보지로서 본의 아니게 걸어왔던 갖가지 형태의 굴종과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원래의 출발점이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제호를계승함으로써 구국활동·개화운동·애국정신·민족사상·독립정신을 이어받는 제2창간의 역사적 동기를 부여코자 하는 것이다. 서울신문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대한매일신보는 당대의 대표급 애국지사들이 참여하여 만든 민족지였다. 신문 경영의 주체는 배설이지만 실질적 신문 제작은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등 민족사상이 투철한 항일 언론투사인 우리 선각자들이 맡았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 구국활동의 전위였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이 한반도의 영구 식민지화를 꾀하려는 책동임을 지적하면서 그 부당성을 널리 폭로하고,의병 항거를 대서특필했다. 일진회의 합병 주장을 사흘에 걸쳐 통박하고,황성신문과 공동 보조를 취하면서 민족지의 방향을 주도했다. 정간 2회,압수 45회라는 일제의 폭압적 상황 아래서 고종황제의 퇴위 기도를 폭로,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의 실질적 본부 역할을 한 것을 비롯,항일구국운동의 총본산으로서 시대적 사명에 충실했다.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격때는 이들이 반포한 격문을실었으며 군대해산 조치에 저항하여 일제를 통렬히 비난했다. 국권 상실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도 그 정신을 상실하게 되었다. 일제는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과 함께 눈엣가시와 같았던 대한매일신보를 탈취하여 ‘매일신보’라는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었다. 강압에 의한 합병조약이나 을사조약이 원천적으로 불법이기 때문에 무효이듯이 대한매일신보의 강탈도 원천 무효인 것이다. 제작을 처음부터 도맡았던 총무 양기탁은 이 신문의 발행인 명의가 친일 인사로 바뀐 그날부터 자신은 이 신문에서 손을 떼었다는 광고를 게재하고 신문사를 떠났다는 사실에서도 대한매일신보사가 매일신보로 이어질 수 없음을 역사에 밝혀준다. 양기탁 선생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지사들이 매일신보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서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결코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새롭게 태어나는 대한매일에서 그 지령을 승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 대한매일은 대한매일신보의 지령 1651호와 서울신문의 지령을 합산하여 승계하고,창간기념일은대한매일 재창간일인 11월11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서울신문의 제호 변경과 뿌리찾기는 서울신문이란 한 언론사의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굴종과 오욕의 역사로 점철된 현대 한국 언론계가 반성,회개하며 거듭나고 기회를 마련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모든 언론이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되새겨 21세기 참언론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대한매일은 ‘대한매일의 다짐’을 통해 다음의 4가지를 지향하고자 한다. 첫째,공공이익을 앞세우는 신문. 둘째,국민복지에 앞장서는 신문. 셋째,민족화합을 앞당기는 신문. 넷째,2000년대에 앞서가는 신문. 대한매일은 1세기 전 대한매일신보가 실천하고자 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한 꿈과 비전을 새로운 시대,변화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국가이성(國家理性)’으로 집약,표현하고자 한다.
  • 민주열사 열전:8/金永哲 5·18시민군기획실장(정직한역사되찾기)

    ◎‘광주 고통’안고 18년 투병끝 숨져/‘투사회보’ 제작… 계엄군 잔학상 시민에 알려/좌수족 마비·정신질환 앓다 지난 8월 영면 5·18 광주 민중항쟁도 18년이 지난 올 8월19일 광주시 전남도청 5월 추모탑 앞에서 ‘5월 시민군’ 金永哲 열사의 민주시민장이 치러졌다. 영결식에서 시인 文炳蘭은 영면한 고인을 다음과 같은 조시로 추모했다. …여기 한 사나이는 무너진 도시 캄캄한 절망을 안고 18년을 앓으며 살았다 18년을 죽으며 모질게 살았다. …꽃도 한 줄기 빛도 없이 어둠이 흐르는 정신병동 쇠창살에 18년을 죽어온 당신의 신음소리는 18년을 앓아온 광주의 고통이었다.… 5·18 당시 시민학생 투쟁위에서 기획실장을 맡았던 金永哲은 계엄군 진압대에 체포된 후 모진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되고 말았다.질환 초기 몇몇 순간을 제외하곤 사망할 때까지 18년간 대부분을 가족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과거와 현재를 분간하지 못하는 정신병자로 지내야 했다. 5·18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계엄군들은 많은 무고한 인명을 비롯해 숱한사람들의 육신과 정신에 회복할 수 없는 파괴를 가했다.이들은 32세의 金永哲을 18년간의 정신병동 폐인으로 내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 金永哲은 광주항쟁의 시민군 기획실장 이전에 최하층 빈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온갖 애를 쓴 빈민운동가로서의 면모가 먼저 빛난다.의사였던 아버지가 일찍 작고한 후 어머니가 고아원 보모를 하게 되어 목포의 고아원에서 고아들과 형제처럼 지내며 성장했다.지역 명문인 광주 서중,광주일고를 졸업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학에 가지 못하고 5급 공무원이 됐다.그러나 면사무소와 농협의 비리에 통탄하고 공무원 생활을 그만뒀다. 군복무를 마친 金永哲은 신문배달 과일행상 목장잡부 우산팔이 등을 하면서 소외받는 사람들과 평생을 같이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실현하겠다는 결심을 한다.결혼한 지 1년도 못된 77년 부터 광주의 빈민지역인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와 주민들과 직접 부딪혔다.시가 피난민 부랑민들에게 지어준 후 판자촌이나 다름없게 황폐해진 이곳에 청년회를 재조직하고 마을청소와 어린이 주말학교를 이끌었으며 신용 협동조합을 정립하고 아파트의 개조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빈민들 삶 개선위해 혼신 78년 7월 이곳 빈곤 청소년들을 상대로 尹祥源과 朴寬賢 등 전남대생들이 강학으로 나선 ‘들불’야학이 시작되고 金永哲은 민주시민 양성을 목표로 한 이 야학의 교장이 됐다. 80년 5·18이 터지자 공수부대원들의 무자비한 만행을 목격한 金永哲은 19일 저녁부터 尹祥源 등 들불야학 팀과 논의하여 공수부대의 잔학상과 이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투쟁 소식을 알리는 ‘투사회보’제작에 나선다.투사회보는 광주시민들이 한데 뭉치는 데 큰 힘을 발휘했으며 고아로서 金永哲과 의형제를 맺고 같이 살던 박용준과 광천동 야학생들이 제작과 배포에 중요한 역을 맡았다.20일 金永哲은 금남로 시위 도중 계엄군이 던진 돌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이 부상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 좌수족 불구로 고생했다. 金永哲은 22일 자신이 신용조합 참사로 있던 YWCA의 여성 회원들과 함께 포목점에서 검정 천을 사와 수천개의 검정 리본을 만들어 시민 학생들이 가슴에 달도록 했다.그는 계엄군이 철수한 후 열린 23일의 1차 시민궐기대회에서 투쟁 경과보고를 했다.계엄군에게 무기반납을 주장해오던 기존 수습위가 물러나고 25일 金宗培·尹祥源 등이 주도하는 새 시민학생 투쟁위가 도청에 들어서자 金永哲은 조직 업무를 총괄하여 차량과 유류 통제,도청출입 통제,무기 및 보급품을 관장하는 기획실장 일을 했다. 계엄군이 도청에 재진입해온 27일 새벽 金永哲은 尹祥源 등과 도청을 사수하다 尹祥源이 총탄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붙잡히면 죽음 이상의 고통을 받을 것을 직감하고 자결하려 했으나 계엄군에 체포됐다. ○간첩으로 몰려 자살 시도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그는 계엄수사대가 모진 고문을 가하며 자신을 간첩으로 몰고 가자 다시 자살을 결심한다.그는 화장실 콘크리트 모서리 벽에 있는 힘을 다해 이마를 여러 차례 찍었다.이를 발견한 헌병은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려 바지까지 흥건히 젖은 金永哲을 군화발로 밟고 밖으로 끌어냈다.그들은 그를 긴 곡괭이 자루로 사정없이 내리쳤다.그리고 나서 두 손과 두 발을 포승으로 묶고 국군통합병원으로 실어 갔다.그러나 수술한 이마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상무대 영창으로 끌고왔다.심한 환각과 환청 증세에 시달리며 80년 10월 1심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다.81년 12월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지만 이미 金永哲은 왼쪽 다리와 팔을 쓰지 못할 뿐 아니라 머리의 통증을 참지 못해 엉엉 울면서 사방에 머리를 찧고 이상한 소리만 되풀이하는 정신질환자였다.석방된 뒤 몇 차례의 수술에도 불구,정신이상 증세가 더욱 심해져 84년부터 나주 정신병원에서 투병생활을 계속해왔다.그러나 끝내 온전한 정신을 되찾지 못하고 지난 8월16일 세상을 떴다. ◎金永哲 열사 연보 1948년 전남 순천 출생 55년 목포에서 광주로 이사 64년 광주서중 졸업,광주일고 입학 68년 5급 지방 공무원 76년 결혼 77년 광주 광천동 시민아파트 개발운동 78년 광천동 들불야학 80년 5·18 ‘투사회보’제작 참여,시민학생 투쟁위 기획실장 80년 10월 ‘내란중요임무 종사’혐의로 1심 12년 선고 81년 12월 특사 석방 84년 나주정신병원 입원 98년 8월16일 영면 ◎부인 金順子 여사/병수발 18년… 세자녀 키우느라 안해본 일 없어/“야학교장 등 즐겁고 보람된 생활 못내 그리워” 金永哲 열사가 계엄군에 끌려갈 때 당시 26세였던 부인 金順子 여사는 임신 8개월 만삭의 몸이었다.아버지가 상무대에 갇혀 있을 때 태어난 막내딸은 지금 고3이고 그 위의 1남1녀는 나란히 대학2년생이다.18년간 정신이상의 남편을 병수발하면서 없는 살림에 세 자녀를 키우기 위해 金여사는 안해본 일이 없다. 우유배달원,구멍가게,옥수수 행상,과일·채소장사,공장 일,파출부,사글세 음식점 등. “병원에 10여년 입원했었지만 최근에야 정부로부터 기초적인 의료지원을 받았다.부상자에 대한 의료지원 카드도 뒤늦게 발급됐다”고 부인은 말한다.이번 민주시민장도 조의금으로 치러야 했다고 한다. 자녀들과 앞으로 살 일이 막막하기만 하다면서도 金여사는 80년 당시 남편이 ‘광천동 삼화신협 이사장,새마을 지도자,반장,조기 축구회 회장,야학 교장’ 등으로 활동하던 “즐겁고 보람된 생활”이못내 그립다고 말한다. ◎吳壽成 전남대 교수가 분석한 정신손상 유형/기질적 장애­총상·몽둥이 등에 머리다쳐 사고기능 단계적으로 와해/정신분열증­계엄군에 무차별 폭행 당해.감정 통제·현실적 판단 마비/외상후 스트레스­공수대원 고문 후유증으로 군인 공포·모든 일에 무관심 5·18 항쟁의 진압이 잔혹했던 만큼 金永哲 열사 같은 참혹한 정신 손상자들이 많다.전남대 5·18연구소 소장인 吳壽成 교수(심리학)에 따르면 5·18로 인한 정신장애는 3가지로 대별된다. 첫번째는 기질(器質)적 정신장애로 항쟁 와중에 직접적으로 두뇌에 총상을 입었거나 개머리판이나 몽둥이에 머리를 다쳐 뇌의 손상을 갖게 된 경우로 金永哲 열사가 대표적 사례다.그의 병증은 외상(外傷)성 성격장애,정신분열증,간질 및 뇌수종에 의한 기질적 정신장애,기질적 정신병으로 심화됐다.한 마디로 인간이 단계적으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사고기능이 와해되어 있고 사고 자체가 지리멸렬된 상태다. 두번째는 정신분열증.5·18 당시 아침운동을 하려고 운동복 차림으로 집밖에 나갔다가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붙들려 눈을 가리운 채 지하실로 끌려간 시민이 있었다.깜깜한 속에서 여러날 전신을 구타당한 뒤 승용차에 태워져 외곽도로에 버려졌다.그후 그는 계속 감시당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혔고 집에 있으면 무섭다고 하면서 밖으로 뛰쳐나가 여러 날 후에 초라한 몰골로 돌아오곤 했다.집안 사람들을 폭행하고 난동을 부리며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말에 조리가 없으며 연상 장애,비현실적 판단이 두드러진다. 세번째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시위대에 참가했던 한 시민은 공수부대원에게 잡혀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깨어나 보니 여러 명이 같이 손을 묶인 상태로 고개를 땅에 처박힌 채 군화발에 차이고 곤봉으로 맞고 있었다.같이 있던 사람이 저항하다 죽는 것을 보고 제정신이 아니었다.조사과정에서 무수히 맞아서 이빨이 나가고 코뼈가 부러졌다.20여일 만에 석방됐다. 이후 그는 후유증으로 7개월 동안 몸져 누웠고 10여년 동안 직장 한번 제대로 갖지 못했다.당시의 일이 자꾸 기억나고 같이 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군용트럭의 군인들만 보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아직도 두려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못한다.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으며 모든 일에 관심을 잃게 되었다.
  • 민주열사 열전:7/朴寬賢 前 전남대 총학생회장(정직한역사되찾기)

    ◎시민 민주역량 결집한 ‘광주의 아들’/5·18 당시 특유의 지도력으로 평화 시위 주도/교도소내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 단식중 사망 역사는 검은 음모를 뿌리치지 못하지만 가끔 환한 광장으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음모의 시대가 갈듯말듯 하던 1980년 봄 사람들은 광장을 찾았다. 1980년 봄 광주의 도청앞 광장은 일개 지리적 점에서 드넓은 역사적 공간으로 빠르게 변신하고 있었다.이 변신은 朴寬賢이란 촉매제 덕분이었다. 80년 5월14일 박관현이 주도하는 ‘민족민주화 성회(聖會)’가 도청앞 광장에서 개시될 때 1만명의 참가자 중 대학생 아닌 시민은 소수였다.박관현을 아는 시민은 더더구나 적었다.성회 마지막날 5월16일 야간 횃불시위를 마치고 다시 광장에 모였을 때 참가자는 5만명이 넘었고 시민 수가 학생 못지 않았다.그리고 50만명 이상의 광주 시민들이 朴寬賢을 ‘광주의 아들’‘무등의 아들’로 부르고 있었다. 朴寬賢은 광주의 희망으로 우뚝섰다.그러나 도청앞 광장은 그의 존재보다 더 큰 부피로 살아나고 있었다. “민주화의 성스런 횃불이 꺼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꺼진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활활 타오르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朴寬賢은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앞 광장에 모이자”고 당부했다.광장은 광주 시민을,역사를 안을 태세가 되었다. 80년 4월9일 직선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에 뽑혔던 朴寬賢은 5·18 광주민중항쟁이란 역사의 핏빛 숲으로 똑바로 난 푸르른 길이다.광주에 박관현이 있음으로 해서,박관현의 결집력과 지도력이 있음으로 해서 5·18의 야만적 폭거와 승화된 공동사회체의 대조적인 두 측면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민주화운동에 남다른 열정 그는 한달이 약간 넘는 짧은 기간에 전남대 학생들과 광주 시민들에 잠재된 민주역량을 깊은 속까지 파내고 정연한 모양새로 다듬었다. 광주 시민들은 이 민주역량의 판석들을 꺼내 비록 가장 불행한 형태이긴 하지만 거대한 항거의 피라미드를 구축했던 것이다. 79년 10월26일 朴正熙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유신철폐와 민주화에의 기대가 드높기만 했으나 崔圭夏 과도정부는 애매한 이원집정제의 정부주도 개헌을 고집하고 있었다.무엇보다 全斗煥 중앙정보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는 비상계엄 상태를 유지하면서 정권찬탈의 야욕을 구체화해 갔다.분열과 대립으로 내닫는 정계보다는 대학이 민주화의 기수로 나섰으며 특히 광주의 전남대가 그러했다.박관현이 4월 27세의 나이많은 법대 3년생으로 총학생회장에 당선할 때 그의 사회 및 학원 민주화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탁월한 대중지도자 자질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소수였다. 고시 합격을 통해 사회정의 실현을 강력하게 꿈꾸었던 그는 1학년 말 야학운동에 뛰어드는 일대 방향전환을 한다.‘들불’ 야학을 통해 박관현은 尹祥源,金永哲 등 광주 빈민·노동 운동의 선구자들을 만나는데 박관현과 깊은 신의를 맺은 이들은 5·18 때 시민투쟁군의 중추로 활약했다. ○현상금 눈먼 동료 공원이 고발 朴寬賢은 5월 중순 단 며칠새 민주화를 희원하는 모든 광주 시민의 가장 믿음직한 아들로 자리잡았다.변혁에 대한 갈망은 리더에 대한 갈구를 깊게했고 민주화 변혁 갈망이 유달랐던 광주에 때마침 청중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력의 박관현이 등장한 것이다.전남대와 박관현의 주도로 계엄령 아래 3일 연속 도청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성회는 비상계엄 즉각해제를 요구했으나 평화스럽게 마무리되었다.朴寬賢은 이때 방관자,구경꾼으로 머물러 있던 시민들을 민주화 희원의 역군으로 동참시키는 자력을 발휘했다. 그의 이같은 능력은 세계 역사상 드문 5·18 항쟁의 일반시민 주도 사실과 맞물려 전설이 되다시피 했으나 정작 박관현은 5·18 때 현장에 있지 못했다.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확대 쿠데타로 민주 인사들을 사전검거하자 18일 아침 격렬한 논쟁 끝에 학생회장 박관현의 피신이 결정됐다. 인간의 야수적 본성을 그대로 드러낸 만행과 함께 사람들의 더불어 같이 사는 소질이 꽃처럼 만개한 열흘간의 항쟁 상황을 여수 앞바다 돌산섬에서 전언으로만 듣게된다.몇번 잠입을 시도하다 실패한 박관현은 항쟁이 진압된 뒤 6월6일 서울로 도피한다.항쟁후 ‘공수부대원들이 조각조각내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던 朴寬賢은 82년 4월 서울 편물공장에서 현상금을 탐한 동료 공원의 고발로 체포돼 광주로 압송됐다. “도청앞 광장에서 만나자”는 자신의 ‘말’을 금쪽같이 지켜줬던 광주에 23개월 만에 발을 디딘 박관현은 드디어 ‘행동’한다.내란 중요임무 종사 죄목으로 5년형이 선고됐으나 朴寬賢의 눈은 다른 곳을 천착하고 있었다.그는 광주교도소 수감 3개월 후인 7월부터 교도소 내의 비인간적 처우에 항거하는 단식을 실시한다.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로 육신을 택한 그의 단식은 철저한 것이었고 3개월 동안 3차에 걸쳐 50여일에 달했다. ○단식중 외부진료 한번 못받아 교도소 당국은 처우개선 약속을 조롱하듯 파기하면서 점점 한계 상태로 빠져드는 그를 외부진료 한번 없이 방치했다.10월10일 온 신경이 돌처럼 굳어 도무지 음식을 음식으로 여기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급성 심근경색증에다 급성 폐부증 증세로 12일 새벽 숨지고 말았다.만 29세였다. 朴寬賢의 젊고 강한 넋은 5·18의 핏빛 숲 뒤꼍에 언제나 푸르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朴寬賢 열사 연보 ▲1953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출생 ▲70년 광주동중 졸업 ▲73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74년 군입대 ▲78년 전남대학교 법대 입학 ▲78년 12월 광주공단 노동자실태 조사작업에 참여 ▲79년 광천 들불야학 강학 활동 ▲80년 4월 전남대 총학생회장 당선 ▲80년 5·17조치로 서울 피신 ▲82년 4월5일 체포,12일 광주교도소 수감 ▲82년 7∼10월 3차례에 걸쳐 50여일 간 단식투쟁 ▲82년 9월 ‘내란중요임무종사자’로 5년형 선고 ▲82년 10월12일 전남대 병원에서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사망 ◎누나 朴幸順 여사/어머니는 아들 검거된뒤 생존 사실 알아/동생 죽기전 “전면 단식” 조언 지금도 恨 朴寬賢 열사의 셋째 누나인 朴幸順 여사(49)는 광주대에서 구내매점을 열고 있다. 항쟁이 끝난 후 寬賢이 죽지 않고 서울에 은신한 사실을 서울의 큰언니를 통해 알았지만 寬賢의 부탁대로 아들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어머니에겐 체포 때까지 비밀에 부쳤다.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래도 어머니의 안색이 달라져 당국의 주의를 끌까 우려해서였다. 체포된 뒤 단식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간 그에게 寬賢은 새벽 2시 무렵에 고문하는 소리가 수시로 들리고 수형자의 부식비를 빼먹는 비리와 함께 생명 유지도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는 음식만 지급한다며 “안에서 이런 악을 해결하지 못하면 바깥에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누나는 자신의 잘못된 조언이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지금도 가슴아파한다.단식이 30일째에 가까웠을 무렵 재소자 폭행 근절,주·부식 정량 지급,정치범 부당 차별대우 개선 등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다며 다시 전면 단식을 강행할 것인가,부분 단식으로 나갈 것인가를 寬賢이 자신에게 물었다는 것이다.이때 누나는 다소라도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있으면 ‘전면’으로 나가라고 말했는데 동생이 죽기 열흘 전쯤 한 이 ‘매정한 조언이 두고두고 한이 된다는 것이다. ◎동료 宋善泰씨 회고/결벽 심해 현실적 타협 거부/뜻 정하면 끝장보는 성격… 自身에 철저/검정고무신 신고 술·노래 잘하던 학생 朴寬賢 총학생회장 아래서 제2선의 비공식 기획실장 역을 맡았던 宋善泰 현 광주 시의회 전문위원은 “결벽증이 있을 만큼 자신에게 철저했던 朴寬賢은 뜻을 정하면 끝장을 보고 말지 결코 어설프게 하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학생회장 취임 직후 학원민주화 현안으로 어용교수들의 퇴진 문제가 대두됐을 때 朴寬賢은 타협안이나 다른 이슈와 함께 추진하자는 의견에 반대,어용교수의 발본색원과 문제의 완전해결을 강력 주장했다.또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들어간 후 몇몇 집행부 학생들이 투쟁 지도를 위해 김밥을 먹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이를 빼앗아 내팽겨쳐 버렸다고 한다. 소금장수,모기장 행상,편물공장 공원 등으로 서울에 피신하고 있을 때 광주 민주인사들에게 연락을 해 고향에서 잠적하거나,자수를 해서 형을 살고 나와 ‘내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다고 본 宋위원도 그의 강직한 성품이 이런 현실적 타협책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학생회장이 되기 전까지 쭉 검정 고무신 차림으로 학교에 다녔던 朴寬賢은 술도 잘 먹고 노래도 곧잘하는,놀 줄아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 민주열사 열전:6/尹祥源 5·18시민군 대변인(정직한역사되찾기)

    ◎‘폭동’ 아닌 ‘민중항쟁’ 자리매김 큰몫/은행원서 노동운동가로… 광주야학 주도/5·18 鬪士 회보 제작·배포… 막힌 언로 틔워 80년 5월28일자 미국 일간지‘ 볼티모어 선’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있었지만,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80년 5월26일 있었던 광주도청에서의 최초이자 마지막 내외신 기자회견의 모습을 마틴 브래들리 기자는 이렇게 그렸다.기사에서의 ‘그’는 항쟁지도 부인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 尹祥源이었다.그는 다음날 아침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상반신이 불탄 시신으로 공개됐다.계엄군은 그를 성명불상자로 처리했지만 주머니에서 나온 10여개의 외신기자 명함은 그가 대변인 尹祥源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尹祥源은 5월 항쟁이 터지자 ‘분노한 시민들의 민주화의지를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죽음을 무릅쓴 투쟁을 어떻게 조직화하고 가속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그리고 그가 이끌던 ‘들불야학’ 강학(교사)들과 함께 각종 유인물을 대량 제작해 뿌렸다.19일 항쟁관련 첫 호소문 ‘광주시민 민주투쟁회보’를 비롯,9호까지 나온 ‘투사회보’의 편집·제작·배포를 밤을 새워 지휘했다.언론이 눈을 감고 있던 당시 투사회보는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됐다.시민들은 항쟁의 의미를 깨달았고 투쟁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시종일관 무기반납을 주장하며 투항적 자세를 보여온 5·18 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견제하기 위해 도청앞 광장에서 매일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이끈 이도 그였다.그는 각계 각층이 참가한 광주항쟁에 질서를 부여했으며 이것은 당시 신군부와 얼어붙은 언론에 의해 규정된 ‘폭동’이 ‘민중항쟁’으로 새로 자리매김되는데 실마리가 됐다. 대변인 尹祥源은 26일 밤 총을 달라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설득했다.“우리들이 싸울테니 집으로 돌아가라.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마틴브래들리 기자는 이때의 尹祥源 모습에서 “세계 어느 무장조직에서도 볼수 없었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진정한 투사의 진면목을 발견했다”고 회고했다.그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봤던 이양현씨의 말대로 그는 “광주항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민주투사’란 수식어가 의아스러울 정도로 尹祥源 열사는 지극히 평범한 학교생활을 했다.어려운 살림에 중학교때부터 광주시내에서 하숙을 했지만 부모님 기대에 부응치 못했고 고등학교때는 ‘에덴클럽’이라는 질이 안좋은 서클에 가입해 술과 담배를 하기도 했다.삼수끝에 전남대 정외과에 입학,공부보다는 연극활동과 친구들 사귀는데 1학년을 보내고 군에 입대했다. 그의 삶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한 선배를 만나고부터였다.복학후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그는 친구 소개로 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15년형을 받았던 전남대 2년 선배 金相允(50·하실의료기상사 대표)을 만났다.그때부터 尹祥源은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대학인의 정당한 삶 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金相允과 학습모임을 꾸려가며 한국현대사에 대한 시각을 재정리했다.“5·18이 터지자 마자 예비검속으로 끌려간 후 상무대 영창에서 상원의 죽음을 알았어요.그후 오랫동안 祥源이가 도청옥상에서 총을 맞고 저를 부르며 죽어가는 환시현상을 겪었습니다” 金相允씨의 회고다. 졸업후 현실에 떠밀려 주택은행에 입사해 서울서 근무하던 은행원 尹祥源은 6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돌아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자신만을 바라보던 부모님과 동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지만 그의 마음은 확고했다.그는 “부정과 불의가 판치는 이 나라 이 민족의 현실을 좌시할 수 없어 그만두려 하니 용서해 주십시요”란 편지를 부모님께 썼다.그리고 광주 한남플라스틱공장에 일용노동자로 취업하고 광주 광천공단 지역 야학인 ‘들불야학’에 적극 참여하면서 한 사람의 완숙한 노동운동가가 된다. 들불팀은 야학 운영 외에도 광천공단의 노동자 실태를 조사해 언론을 통해 폭로하기도 했으며 지역 주민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그리고 이들은 5·18이 터지자 항쟁 내내 시민들의 눈과 귀가 되는역사적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尹祥源 열사는 들불에서 후일 천상(天上)의 부부가 될 박기순씨와의 운명적 만남을 이룬다.전남대 휴학생이던 그녀는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토대를 마련해보고자 들불야학을 연 당찬 여학생이었다.그와 함께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자’로 불리기도 한다.그러나 박기순씨는 선배 尹祥源이 들불의 중심이 될 무렵 연탄가스 중독으로 78년 12월 꽃다운 청춘을 마감한다.몇군데가 얼룩져 있는 12월 27일 일기장에 尹祥源은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여…아무리 쳐다보아도 넌 아직 살아 있을 뿐이다…”라고 기순에 대한 애타는 추모의 마음을 적어놓았다. 82년 2월,5·18 항쟁에서 살아남은 후배들은 유족들과 함께 尹祥源 열사와 박기순씨의 영혼을 불러 혼례의 예식을 치렀다.이 영혼결혼식을 위한 노래굿 ‘넋풀이’가 만들어졌고 그 마지막 소품에 黃晳暎씨가 노랫말을 붙였다.그것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이 노래와 함께 두 젊은 넋은 80년대 이후 노도와 같은 민주화투쟁 현장에 언제나 있었다. ◎그의 가족들/공장다니며 학비 대던 동생들 모두 출가/맏아들 가슴에 묻고 부모님만 생가 지켜 尹祥源 열사는 역사적 영광을 얻었지만 그의 죽음은 육친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아픔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570­1번지(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룡리에서 87년 광주광역시로 편입됨) 尹열사 생가.그가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자란 이곳에는 부모님이 2남4녀의 자녀를 모두 출가시키고 구순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아드님이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물음에 어머니 金仁淑씨(67)는 그저 말없이 눈물만 글썽였다.아버지 尹錫同씨(72)도 몇차례나 재촉한 끝에 말문을 열었다. “은행을 그만두고 내려오자 기가 막혔지요.동생들은 형을 공부시키기 위해 낮에 공장에 다니며 야간고를 다녔는데 노동운동이라니….자식취급을 안하겠다고 나무라기도 하고 돈을 벌어 남을 도우면 되지 않느냐고 달래기도 했지요.그랬더니 ‘그래서 몇사람이나도와주겠느냐.구조적 모순을 고쳐야한다’고 하더군요” 尹씨는 “오히려 동생들이 공장에 다니며 터무니없는 착취를 당하는 모습이 祥源이를 부채질한 것 같다”고 했다. 尹열사 대학 시절 광주시내에서 함께 자취를 했던 남동생 정원씨는 “형은 제 갈길을 훌륭히 갔다”고 담담히 말했다.역시 같이 자취를 했던 여동생 현희씨는 “늦게나마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 위안이 된다”고 했다.정원씨는 당시 조대부고 야간부에 다니며 낮에는 자전거 배달을 했고 현희씨는 야간상고에 다니며 맥주안주 공장에서 돈을 벌었다.이들은 대학생인 祥源에게 용돈까지 주고 밤을 새워가며 시위 유인물 제작을 돕기도 한 착한 동생들이었다. ◎들불야학 동료 林洛平씨/“독재 뿌리뽑는게 산자들의 참된 의무” “도망갔던 사람이 무슨…” 林洛平씨(41·광주 전남 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는 아주 겸연쩍어 했다. 들불야학 때부터 尹祥源 열사와 고락을 같이했던 그지만 항쟁이 터지던 80년 5월18일 광주 인근 친구집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그는 尹열사의 평전 ‘들불의 초상’을 정리했다.“18일 공수부대가 들어와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시내를 장악하자 사실 모든 상황이 끝난 것으로 보았지요.27일까지 거기 있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林씨는 尹열사를 비롯한 들불팀이 5·18이 ‘사태’나 ‘폭동’이 아닌 ‘항쟁’ 이게끔 계기를 만든 사람들이라고 했다.항쟁초기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 조직적인 홍보·선전활동은 간접적인 지도부가 됐고 너나 없이 무기를 든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尹열사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 그는 “민중적 품성이 물씬 풍기는 사람”이라고 평했다.원칙을 존중하는 그였지만 누구도 싫어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친화력이 돋보였다고.“방년 29세 尹祥源입니다”란 첫 인사로 7·8세나 어린 들불 강학들에게 스스럼 없이 녹아들어 이내 그들과 혼연일체가 됐다고 한다.그가 뽑아대는 현대판 판소리 ‘소리내력’의 구성진 가락은 모든 이들의 넋을 빼놓았다고 했다. “祥源이형은 5·18이 부마항쟁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죠.결과를 뻔히 예측하면서도역사적 사건의 마지막 증거로 남기를 바랐던 겁니다” 林씨는 그가 남긴 역사적 증거를 토대로 다시는 독재가 발을 못붙이게 하고 민족통일을 앞당기는 것이 산자들의 참된 의무라고 했다. ◎尹祥源 열사 연보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에서 출생 ▲63년 임곡초등학교 졸업 ▲69년 광주 사레지오고 졸업 ▲71년 전남대 정외과 입학 ▲72년 군입대.상주에서 일반하사로 복무 ▲75년 복학 ▲78년 주택은행 입사.6개월만에 그만두고 광주 광천공단내 한남플라스틱공장 취업.들불야학 참여. ▲80년 4월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중앙위원 피선 ▲80년 5월19일 들불야학팀들과 함께 항쟁 호소 유인물 제작·배포 시작 ▲80년 5월25일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 ▲80년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 민원실 2층 회의실에서 계엄군에 항전중 사망
  • ‘행복의 나라’ 한대수(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5)

    ◎“물좀 주소 물좀 주소 목마르오/시대의 갈증 노래했는데…”/68년부터 명동·대학가 활동/통기타·청바지 문화 선도/2집 앨범 “체제전복” 낙인찍혀/75년 渡美… 음악활동 계속/지난달 일시 귀국 에세이 출간/“개인무대 갖는게 작은 소망” 1975년 한 해를 마감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무렵인 12월 어느날 김포공항 대합실.긴 머리에 청바지 차림의 한 청년이 초췌한 모습으로 뉴욕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한국 가요계에 파문을 일으키며 청년문화를 주도하던 가수 韓大洙(50)였다.미국 유학후 숨가쁘게 살았던 한국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지나갔다.자신의 음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 땅의 분위기가 한스럽기만 했다.채 피어나기도 전에 꺾여진 꽃처럼 자신의 음악을 가슴에 묻은 채 한대수는 그렇게 훌쩍 한국을 떠났던 것이다. 짧은 활동기간에 비해 뚜렷한 인상을 남긴 이색적인 경력의 싱어 송라이터.통기타와 자유의 청년문화를 생겨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당시 트로트와 사랑타령 일색이던 대중가요를 뿌리째 뒤흔들며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던 가수 韓大洙.그는 왜 한국을 떠나야만 했을까. 어린시절부터 남달리 굴곡이 많은 개인적인 삶을 살았던 그였다.핵 물리학자인 아버지의 실종으로 7살때부터 줄곧 조부모와 함께 살았다.10살때 미국으로 이주해 3년간 미국생활을 한뒤 돌아와 한국에서 중학교를 마쳤다.17세때 미국에 사는 아버지의 소재가 확인돼 다시 미국으로 옮겨 고교를 다녔지만 적응하지 못한채 방황의 10대를 보냈다.韓씨의 재능은 이때 발견된다.상담교사의 도움으로 시와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나중에 국내에서 히트했던 ‘행복의 나라’‘그날까지’‘옥의 슬픔’같은 노래들이 모두 이때 쓴 것이다.고교졸업후 뉴햄프셔 대학 축산과에 진학했으나 적성이 맞지않아 중퇴,뉴욕 사진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귀국한 게 1968년 초.이때 한국의 가요사는 다시 쓰이게 된다.당시 국내 가요계는 트로트가 지배하던 시기.국내에선 처음으로 싱어 송라이터로 데뷔한뒤 발로뛰는 음악인의 생활로 접어든다.서울 무교동의 ‘세시봉’과 명동의 ‘오비스캐빈’에서 청바지,가죽장화 차림에 통기타 하나들고 포크록을 소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이듬해인 69년 이렇다할 공연무대에 서기엔 아직 무명가수였던만큼 대학가를 돌기 시작했다. 총학생회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공연을 의뢰해 축제기간중 이화여대와 서울대,서강대,부산대 강당공연을 통해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이때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인상지워지게 됐다.그리고 그해 겨울 그 유명한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 공연.그때만해도 드라마센터는 고상한 장르의 유명인들에게만 공연이 허용되던 곳.무명의 대중가수가 무대에 오른 것 자체가 화제거리였다.평소 韓씨의 음악에 매료된 팬들이 어렵게 마련한 데뷔 콘서트였다. 벼르고 별렀던 무대였던 만큼 혼신을 다한 공연이었다.이틀 공연 모두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대성공이었다. 74년 군에서 제대하고 나니 유명해져 있었다.자신이 곡을 쓰고 金敏基가 부른 ‘바람과 나’,楊姬銀이 부른 ‘행복의 나라’가 인기곡으로 불려지고 있었다.신세계레코드사에서 앨범제작 의뢰가 들어왔다.그래서 만든 첫 앨범이 ‘멀고 먼 길’이다.너무나도 반가운 제의라 하루만에 녹음을 모두 마쳤다.‘물좀 주소’‘행복의 나라’‘바람과 나’등 수록곡들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그리고 1년도 채 안돼 시련이 닥쳐왔던 것이다. 75년 가을 두번째 앨범을 만들었다.코리아헤럴드 기자로 재직중일 때였다. 기자로 일하면서 오후엔 남모르게 레코드 취입을 하느라 코피를 쏟기가 일쑤였다.마침내 레코드가 나왔다.이제 자신의 음악을 인정받는 뿌듯함에 마냥 들떠 있었다.기쁨은 채 2주가 못돼 좌절로 바뀌었다.당시 문공부에서 레코드 수거령이 떨어졌다.체제전복적 음악이란 낙인이 찍혔다.첫 앨범 ‘멀고 먼 길’도 함께 묶였다. “‘물좀 주소’등 히트곡들이 대학생들 사이에 번져가면서 정치·사회상 황에 맞물려 당국의 곱지않은 시선을 받았던게 사실입니다.당국이 ‘물좀 주소’에선 물고문을 연상했던 것 같아요.두번째 앨범은 표지가 문제였지요.녹슬은 철조망에 고무신이 걸려있는 모습인데 한국적 정서와 민중을 상징한 것이지요.죄수(철조망)가 흰 고무신을 신으니 박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었지요” 동양방송과 기독교방송 음악프로 출연도 막혔다.어쩔 수 없이 명륜동 자취방에서 직접 노래하고 녹음한 테이프를 만들어 매장에 내다 팔았다.테이프는 열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이 테이프는 첫 앨범 취입 전부터 하나 둘씩 만들었던 것으로 이렇게 만든 테이프만도 100여개가 넘는다.하지만 그것도 잠시뿐.감시망이 좁혀지면서 테이프 제작도 할 수 없게 됐고 더이상 설 땅이 없어졌다.마침내 미국행을 결심했다.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면서 시·사진·음악활동을 계속했다.89년 ‘무한대’,90년 ‘기억상실’,91년 ‘천사들의 담화’ 등 레코드도 세 집을 냈다.종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자신의 삶을 담은 노래들이다.지난해 가을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록그룹 10개가 참가한 록페스티벌에도 참가했다.80년 일시 귀국해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약식 공연을 가진지 17년만의 무대였다.그리고 지난달 잠시 귀국해 자전적 에세이집을 냈다.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기록이다. 75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는 韓씨는 이렇게말한다.“그 시대 정책 자체에 반감을 가진 적은 없습니다.어느 나라나 국가정책과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정신은 엇갈리기 쉽지요.당시 정부의 목적의식을 흐리는 활동이 제재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문화예술인들이 심한 갈증을 느끼는건 당연했구요. 오랫동안 나를 못봐온 팬들을 위해 개인무대를 갖고 싶습니다” ◎사연들/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세상을 더 보자/철조망 유신압제 상징 이유/‘고무신’·‘첫 앨범 잇따라 판금/‘행복의나라’ 희망 메시지 가득한데 68년 귀국후 세시봉과 오비스캐빈에서 시작된 韓大洙의 국내 음악활동은 불과 7년만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귀국전 미국 생활에서 반문화운동(카운터 컬쳐 무브먼트) 경향의 포크록에 심취했던 만큼 국내에서의 활동도 자연스럽게 자유와 젊음으로 대변되는 이 음악으로 시작됐다.미국 고교시절 답답한 생활을 노래에 담은 노래들이 70년대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금지곡이 된 것은 우연의 일치다.대학가를 돌면서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인상지워지고 금지문화의 한 주역이 된 것도 사실상 노래말의 상징성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물좀주소’와 ‘행복의 나라로’는 그의 대표적인 노래.“물좀 주소 물 좀 주소/목마르요 물좀 주소/물은 사랑이요 나의 목을 간질며/놀리면서 밖에 보내네/아 가겠소 난 가겠소/저 언덕위로 넘어 가겠소/여행도중에 그 님 만나 본다면/난 살겠소 같이 살겠소”(물좀 주소).“장막을 걷어라/나의 좁은 눈으로 이세상을 더 보자/창문을 열어라/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가벼운 풀밭 위로/나를 걷게 해주세/봄과 새들의 소리/듣고싶고 울고 웃고 싶소/내마음을 만져줘/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행복의 나라로) 유신정권의 압제 아래서 자연스럽게 현실 비유적인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었고 대학가에선 더욱 인기가 좋았다.물은 갈증을 해결하는 그 무엇이며 행복의 나라는 답답한 상황으로부터의 탈출과 희망의 의지가 역력한 상징임에 틀림없다.특히 金敏基 楊姬銀 등 사회성짙은 노래를 주로 불렀던 이들에 의해 불려지면서 자연스럽게 화살이겨냥됐고 마침내 철조망과 흰 고무신을 표지 사진으로 쓴 ‘고무신’ 앨범으로 피할 수 없는 족쇄가 채워진 것이다.‘자유의 길’‘병든 고아’‘술 취한 여자’‘물좀 주소’ 등 노래마다 일일이 검열을 당했고 레코딩까지 허락됐던 앨범 몰수는 韓씨를 떠나게 만들고야 말았다. ◎그의 길 ▲48년 부산출생. ▲64년 부산 경남고교 입학. ▲65년 미국 롱아일랜드 고교로 전학. ▲66년 뉴햄프셔 대학 수의학과 입학. ▲67년 뉴욕 사진학교에서 사진 전공. ▲68년 귀국.작사·작곡가·가수로 데뷔. ▲69년 드라마센터 공연. ▲70년 군입대. ▲74년 첫 앨범 ‘멀고 먼 길’ 발표. ▲75년 두번째 앨범 ‘고무신’ 발표,금지.미국으로 돌아감. ▲89년 ‘무한대’ 발표. ▲90년 ‘기억상실’ 발표. ▲91년 ‘천사들의 담화’ 발표. ▲98년 현재 뉴욕에서 사진작가및 창작활동중.자전적 에세이 출간.
  • ‘아래아한글’ 넘어선 한글 살리기를(임영숙 칼럼)

    ‘아래아한글’ 파동이 열흘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지난 15일 한글과컴퓨터사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사로 부터 2000만달러를 지원받는 대신 ‘아래아한글’을 포기했다고 발표한 이후 ‘아래아한글’ 살리기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벤처업계는 물론 시민단체와 학계까지 참여해 1만원 내기 운동·국민주 운동등을 펼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보통신부가 외자(外資)유치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입장을 표명해 논란을 불러 오기도 했다. 이같은 관심과 열정이 ‘아래아한글’에 국한되지 않고 국어 정보화 전반으로 확산된다면 ‘아래아한글’의 몰락은 전화위복의 계기를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 정보화 환경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컴퓨터에 우리 말이 없다는 점이다. 영어를 모르면 컴퓨터를 다루기 어렵고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에도 한국어로 된 정보는 빈약하다. 컴퓨터가 모든 것을 규정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가다가는 필기도구라 할 ‘아래아한글’ 정도가 아니라 우리말 자체가 사라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미 세계의 소수민족 언어들은 줄어들고 있고 컴퓨터가 영어 이외의 언어를 무력화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온 바 있다.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는 지난 96년 음성으로 작동되는 컴퓨터 출현을 예고했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일본에서는 20여년 전부터 자기네 말을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는 자연언어 처리 시스템을 연구,개발해 거의 실용화 단계에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자연언어 처리 시스템의 기초가 될 전자국어사전 개발을 포함한 ‘21세기 세종계획’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문화관광부가 주관하는 이 국어정보화 계획은 올해부터 10억원을 투자해 오는 2007년까지 10년에 걸쳐 155억원을 투입해 우리 말로 된 정보를 디지털화하여 구축,가공,검색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고급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도록 한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그러나 거대한 목표에 비해 예산이 너무 빈약해 얼마나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수 있을지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게다가 비슷한 사업이 과학기술처(STEP 2000)와 정보통신부(우리말 정보처리 기술 개발)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 인력과 예산이 분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의 정보화 정책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밖에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있다. 국어학자나 언어학자보다 이공계 출신들이 중심이 돼 국어 정보화 연구가 표류하기도 하고 연구비만 예산에 책정돼 있어 이미 개발해 놓은 소프트웨어를 연구기간이 끝나는 1년후에 구입하는 꽉 막힌 정책이 시행되기도 한다. 자유로움과 창의성이 생명인 이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형식적인 서류보고를 요구하는 국가 프로젝트는 외면당하기도 한다. 또 정부예산에 의한 위탁연구가 담당공무원이 바뀌면 더 이상 진전되지 않고 끝나버리기도 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한 연구자는 재벌그룹 산하의 컴퓨터 제작회사를 찾아갔다가 경영자의 검토 지시가 말단직원에게 이르기까지 5개월이 걸리는 것을 보고 외국회사로 발길을 돌렸다. 아이디어가 있으면 빌 게이츠와 직접 대화가 가능한 MS사와 우리 컴퓨터 회사의 경쟁이 어떻게 끝날지를 짐작케 하는 사례이다. ‘아래아한글’ 살리기 운동이 국어 정보화 전반의 문제점들에 대한 총체적 재점검으로 이어져야 진정한 한글 살리기가 이루어질 것이다.
  • ‘아침이슬’ 양희은(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

    ◎“나는 가수일뿐… 결코 운동권 못돼”/암울한 독재정권 아래 서정적 노래 통해 정신적 탈출구 제시 했을뿐/‘늙은 군인의 노래’ 부르고 78년 쓸쓸히 노래판 떠나 70년대 청년문화를 주도했던 ‘아침이슬’의 통기타 가수 楊姬銀씨.독재정권의 잇단 금지곡 딱지로 70년대를 ‘금지인생’으로 살아야 했던 그가 이제 아픈 세월을 딛고 우리 앞에 다시 우뚝섰다.세월은 흘렀지만 그때 그 시절 그 노래들은 어두운 시절의 기억과 함께 더욱 강한 행명력으로 살아난다. “긴 밤 지새우고/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아침이슬처럼/내 맘에설움이/알알이 맺힐때/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1994년 8월,무더위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밤.서울 동숭동 음악전문 공연장 ‘라이브’­.20년의 시공을 초월한 ‘청년가수’ 楊姬銀(46)의 열창에 공연장을 가득 메운 30∼40대의 관객들은 70년대 어두운 기억의 편린들을 떠올리며 숙연한 분위기에 빠져 들었다.가수생활 23년을 결산하는 첫 개인무대였던 이 자리에서는 ‘아침이슬’ 등 70년대의사연 많은 시대곡들이 이어졌다.시간이 흐를수록 관객들의 침묵은 한계에 달했고,급기야는 모두 목이 터져라고 함께 불렀다. 71년 서강대 사학과 1년 재학중 ‘아침이슬’로 데뷔한 뒤 70년대 청년문화의 대명사로 자리매김돼 온 통기타 가수 양희은.가난했던 어린시절과 사랑의 상처,연속되는 금지곡 행진,한창 나이의 투병생활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독재정권의 서슬퍼런 압제의 칼날 아래서 젊은이들에게 노래를 통해 정신적인 탈출구를 제시했던 그녀는 한때는 ‘운동권 가수’로 인식되기도 했다.그러나 楊씨는 자신이 결코 운동권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암울한 시절 시대상황이 노래까지 어둡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지금은 가정주부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매일 하오 2∼4시 SBS 라디오방송(2시의 친구 楊姬銀입니다) 진행도 맡고 있고 연말로 예정된 콘서트 준비를 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그러나 문득 문득 떠오르는 20대의 아팠던 추억,즉 자신이 불렀던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묶여야만 했던 힘겨운 70년대를 결코 지울 수가 없다.양씨의 ‘금지 인생’은 그 유명한 ‘아침이슬’로부터 시작됐다.金敏基씨가 작사·작곡한 곡을 받아 71년 발표,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 노래가 같은 타이틀의 앨범에 수록된 ‘엄마 엄마’‘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그날’과 함께 74년 어느날 느닷없이 방송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72년 새음반 ‘서울로 가는 길’에 실린 ‘작은 연못’‘백구’‘서울로 가는 길’‘새벽길’ 등 10곡도 이때 모두 금지곡 딱지를 받았다.그 외에도 78년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늙은 군인의 노래’ 등 부른 노래중 금지곡만 30여곡에 이른다. 이 노래들이 해금된 것은 지난 84년.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레퍼터리들이지만 오히려 이 노래들에 실린 무게는 더해만 갔다.대학생들의 시위현장에서,소외된 노동현장에서,젊은이들의 술자리에서….노래를 방송이 원천봉쇄하면 음반도 막히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젊은이들은 이들 금지곡들을 용케 찾아서 불렀다. 楊씨는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 이렇게 말한다. “한마디로 우스꽝스런 해프닝의 연속이지요.‘가사퇴폐’‘시의부적합’‘허무주의 조장’이란 명분인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늙은 군인의 노래’만 하더라도 국방부장관이 금지를 명령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느냐는 꼬투리를 잡아 금지곡 판정을 당했을 정도니까요” 노래가 금지곡으로 묶이고 나니 가수의 생활도 곤궁 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요주의 인물’로 낙인받은 뒤 본격적으로 도청에 시달렸고 하루 종일 따라붙는 감시의 눈도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아침이슬 발표 후부터 계속해온 방송도 순탄치만은 않았다.방송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정보부 요원들에게 잡혀 빵집에서 추궁받던 일은 지금도 진저리가 쳐진다고 회고했다.그중에서도 가장 견딜 수 없던 일은 71년부터 계속 맡아오던 방송활동의 중단이었다. “77년 당시 6년째 기독교방송 음악프로 ‘우리들’을 진행하고 있었어요.요원들이 항상 뒤따르던 시절이지요.어느날 느닷없이 사장으로부터 ‘당분간 쉬라’‘네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을땐 눈물이 핑 돌더군요”.그때부터 방송출연 교섭이 뚝 끊겼다.결정적으로 노래판을 떠나게 된 것은 78년 MBC TV ‘토토즐 사건’이었다.어렵게 출연한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프로그램에서 ‘늙은 군인의 노래’를 불렀다. “‘늙은 군인의 노래’는 평생을 군에서 복무하다 전역한 한 직업군인의 나라사랑을 순수하게 담은 노래였는데 국방부장관이 ‘군 사기 저하’를 이유로 봉쇄하더군요.레코드사 사장이 불려가고 전국 매장에 깔려있는 음반을 모두 수거해 파기시킨뒤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요” 이후 83년 ‘하얀목련’이 나올 때까지 일체의 노래활동을 중단해야 했다.87년에는 결혼했고 남편과 함께 훌쩍 미국행을 결행,지난 93년 돌아올 때까지 드문드문 고국을 드나들며 서정성 짙은 맑은 노래를 모은 음반도 몇 집을 냈다.자신의 노래·방송 인생을 자전적으로 풀어낸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라는 책도 펴냈다. 처음부터 줄곧 어떤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살아 왔다는 楊씨.그는 자신이 받았던 팬들로부터의 사랑을 되돌려주기 위해 다시 노래를시작했다고 말한다.“20대엔 밝은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철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노래는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데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요즘 신세대들이 흔히 부르는 노래들은 나름대로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모자란 느낌입니다.노래는 서정성이 담겨야 합니다.70년대의 금지곡들도 저에겐 모두 서정이었지요”. ◎사연들/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냐고/퇴폐·허무·時宜 부적절 우스꽝스런 해프닝 연속/“네 잘못 아니다” 듣고 눈물/‘붉은태양’이 북측 인사라니… “태양은 묘지위에/붉게 떠오르고/한낮에 찌는 더위는/나의 시련일지라 /나이제 가노라/저 거친 광야에/서러움 모두 버리고/나 이제 가노라.” 이 노래에서 문제가 된 것은 ‘태양은 묘지위에/붉게 떠오르고’부분.붉은 태양이 북쪽의 인사를 암시한다는 억지해석이 금지곡으로 이어졌다.그러나 금지곡 이후 들불처럼 번져 지금까지도 애송되고 있는 걸작이다. “나 태어나/이 강산에/군인이 되어/꽃 피고/눈 내리길/어언 삼십년/무엇을 하였느냐/무엇을 바라느냐/나 죽어/이 강산에/묻히면 그만이지/아 다시 못올/흘러간 내 청춘/푸른옷에 실려간/꽃다운 이 내 청춘.” 평생을 군인으로 살다 전역하게 된 실제 인물의 순수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이 노래 는 금지곡으로 결정된뒤 대학가와 노동현장에서 개사돼 투쟁가로 변질된 대표적인 노래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느냐는 이유아닌 이유로 금지됐다면 ‘작은 연못’은 당시 대립되는 두 세력들을 빗댔다는 이유로 방송에서 사라진 노래들이다. “너의 침묵에/메마른 나의 입술/차가운 네 눈길에/얼어붙은 내발자욱/돌아서는 나에게/사랑한단 말 대신에/안녕 안녕 목메인 그한마디/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깊은 산 오솔길옆/자그마한 연못엔/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먼 옛날 이 연못엔/예쁜 붕어 두마리/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깊은산 작은 연못…” 이들 역시 금지 이유와는 달리 서정적인 분위기가 농후하다.◎그의 길 ▲52년 서울 출생. ▲70년 경기여고 졸업. ▲71년 서강대 사학과 입학. ▲71년 ‘아침이슬’ 발표. ▲72년 앨범 ‘서울로 가는 길’ 발표. ▲74년 ‘아침이슬’‘서울로 가는 길’ 금지. ▲77년 기독교방송 음악프로 ‘우리들’ 진행 도중하차. ▲78년 MBC TV‘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출연뒤 ‘늙은 군인의 노래’금지. ▲84년 ‘하얀목련’으로 대한민국 가사대상 수상. ▲87년 결혼,도미. ▲93년 귀국. ▲94년 첫 개인 콘서트. ▲현재 SBS 라디오 ‘2시의 친구 양희은입니다’ 진행.
  • TV드라마/복고풍도 좋지만… 가부장제 미련 너무하네

    ◎방송개발연,MBC ‘보고 또 보고’ 등 분석 IMF관리체제가 가져온 변화중 하나가 복고주의 바람이다.들불처럼 번지고있는 60∼70년대식 ‘허리띠 졸라매기’구호가 방송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이런 시점에서 일일 드라마에 나타난 가족주의 회귀현상과 그로 인해 남성중심의 보수주의 사회로 퇴행할 우려를 지적하는 보고서가 나왔다. 방송개발연구원 박웅진 프로그램연구실 연구원은 KBS­2TV의‘결혼 7년’ MBC­TV의 ‘보고 또 보고’ SBS­TV의 ‘서울탱고’등 주요 방송사의 일일드라마를 분석한 글에서 “진부하다고 할 만큼의 전형적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획일화된 가족 이미지를 끊임없이 주입시키는 역기능이 커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우선 주요 등장인물과 그들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가부장적 전략의 유형을 처벌 전략,보상 전략,성역화된 스테레오 타입화 전략 등으로 구분했다. 먼저 처벌전략의 경우로 ‘보고 또 보고’를 들었다.정사장(정욱)은 가족으로부터 소외되고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그 이유가 경제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박웅진 연구원은 “이런 묘사는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 위반이 불행으로 귀결됨을 암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를 정반대로 뒤집어 구사되는게 보상전략.이는 가부장적 제도에 순응하면 어떤 형태로든 보상이 주어진다는 메시지로,예로서 KBS-1TV의 ‘살다보면’과 SBS-TV의 ‘서울탱고’를 들었다.‘살다보면’의 최복만(주현분)과 ‘서울탱고’의 조평달(김무생분)은 극중에서 경제적 능력으로 가족을 부양하는데 성공한 가장으로 나온다.결과적으로 경제력 있는 가장이 존경받는 부권의 상징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역화된 스테레오타입의 예는 MBC 드라마 ‘보고 또 보고’.검사인 기정(정보석)과 간호사인 은주(김지수)의 관계에서 남성을 선택자로여성을 피선택자로 이분화시켜 남성이 사랑의 선택권을 지닌 우월한 존재라는 그릇된 관념을 무의식적으로 주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연구원은 또 여성의 역할을 과거의 순종·인고형에서 경제능력도 갖추어야 함을 암시하는 드라마의 등장도 비판했다.그에 따르면 이는 여성의 역할을 공적영역으로 끌어내는 듯하지만 실상은 가사노동에다 가계도 책임져야한다는 점을 부각시켜 여성의 입장을 더욱 고달프게 하는 고등전술로 파악해야 한다.어려운 경제를 빌미로 우리 사회가그동안 각 분야에서 이뤄온 진보가 무너져서는 안된다는 조그마한 경고에 드라마 제작진들이 귀기울여야 할 듯하다.
  • 인명구조견(외언내언)

    개가 영특하다는 것은 개를 둘러싼 수많은 일화들이 이를 증명한다.외국에 가면 시각장애인을 안내하는 골든 리트리버를 어렵지않게 볼 수 있다.개는 또 척추장애자의 휠체어를 끌어줄 뿐만아니라 전화를 받거나 음료수를 가져오고 장을 봐오기도 한다.셰퍼드는 세겹으로 포장된 곰인형의 뱃속에서 대마초나 폭탄장치를 찾아내고 알프스지방의 세인트버나드는 인명구조견으로 명성이 드높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보다 차라리 마음을 알 수 있는 개가 낫다는 말은 공연한 헛소리가 아니다.전서울대 김경탁 교수의 ‘견의 윤리’는 제 새끼를 귀엽다고 핥아주는 천성은 인간의 부자유친과 닮았고 주인을 보고 짖지 않는 불폐기주는 임금과 신하사이의 의를 지니며 젊은개가 늙은개를 상대로 싸우지 않는 것은 장유유서,하나가 짖기 시작하면 온동네가 다같이 호응하는 일폐군응은 붕우유신에 비유된다고 했다.인간에 대한 개의 희생정신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은 고려때 학자인 최자의 ‘보한집’에 나온다.주인이 술취해 길에 쓰러져 잠든 동안에 들불이 번지기 시작하자 주인이 불에 탈 것을 염려하여 냇물에 몸을 적셔 주인을 살려내고 죽은 ‘견분곡’이 그것이다.오스트리아의 동물학자 콘라드 로렌츠는 “개는 만일 주인이 죽으면 적어도 1년이상 자신을 보호해줄수 있는 어떤 다른 대상도 찾지 않는다”고 했다.실제로 일본 도쿄대 유노 이사부로교수의 애견 하치코는 아침마다 시부야역까지 교수를 전송하고 저녁이면 역으로 마중나오곤했으나 교수가 학교에서 과로로 숨진 줄도 모르고 9년간이나 역에서 기다리다 죽었다.당시 개의 수명에 비쳐볼때 하치코는 죽을 때까지 주인을 기다린 셈이다. 이번에 젊은 생명을 구해낸 3살짜리 셰퍼드 ‘번개’는 국제공인 1급자격증을 딴 인명구조견으로 승용차를 몰고 커브길을 달리다 계곡에 떨어져 죽을뻔한 대학생을 극적으로 살려냈다.인간보다 후각이 1만배,청각 40배이상에다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복종은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일편단심의 차원이다.
  • 학교폭력 보며 그 뿌리를 생각한다(박갑천 칼럼)

    역사에 악명을 남기는 유자광은 어려서부터 망나니였던 듯하다.부윤 유규의 서자인그는 몸이 날쌔고 힘도 세었다.밤낮없이 쏘다니며 도박을 하고 여자를 만나면 욕보이니 그 아버지는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해동야언〉 유자광전) 이같은 유자광의 개다리질은 서얼출신에 대한 당시사회의 차별대우에 울화통을 터뜨린 짓이었다고 할수도 있다.하지만 고려의 정승 한종유의 분대질은 그것도 아니었다.그또한 어려서부터 수십명 망나니들과 패거리지어 다니면서 시망스럽게 굴었으나 명문의 자제고보면 누가 함부로 했겠는가(〈용재총화〉3권).경우가 조금 다르긴해도 유자광이나 한종유나 요즘으로 말하자면 유족한 집안의 비행청소년이었던 셈이다. 흔히 비행청소년이다 하면 어려운 집안의 경우를 떠올린다.하지만 옛날에도 그랬듯이 잘사는 집안 자제인 경우가 적지 않다.그리고 오늘날에는 그 몹쓸짓이 더 다양해지고 모지락스러워지면서 살인에 이르기도 한다.문명화에 따르는 상승작용의 이징가미라 할까.그래서 이른바 학교폭력이라는 것도 이젠 여중고교에서 초등학교로까지 번져 나간다.일본은 14살짜리 중학생의 엽기적 살인사건으로 떠들썩한 터이지만 우리도 중학생의 스승폭행사건이 충격을 준다. 걱정들을 많이 한다.그러나 뾰족한 대안이 있는것은 아니다.“나쁜것이 번져나는 것은 마치 들불이 번져나는 것과 같다.가까이 가지 못할 정도로 세차다”(〈서경〉·반경)고 했듯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나빠질대로 나빠져있는 현실.치안력에는 한계가 있는것 아닐지.땅에 떨어진 윤리도덕·인성교육부재·전도된 가치관·금전만능주의·학벌중시 풍조… 등등 사회전반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현상이지 학교나 학생의 문제만 떼어놓고 생각할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은 우리사회 병리의 한가닥일 뿐이다.삼풍사건이네 수서·한보사건에 대선자금문제… 등등과 같은.뭐니뭐니해도 맑은 윗물만이 근원을 다스려 나가는 길.“근원이 맑으면 그흐름도 맑고 근원이 흐리면 그흐름 또한 흐리다”(〈순자〉 군도편)고 하지 않았던가.한데 우리 윗물들의 현실은 어떤 것인고. 바르고 맑은 위라야 아래한테 대고 하는설득도 떳떳해지는 법.잘못에 대해 나무랄 자격 있 는사람 갖지 못한 사회는 불행하다고 했는데….병리는 고황에 들고 있는가.〈칼럼니스트〉
  • 「경제살리기 저축」 불붙었다

    ◎새마을협 “하루 1천원씩 절약” 가두 캠페인/잇단 동참에 9일새 10만계좌·1,156억 계약 『하루에 1천원씩을 저축합시다』 지금의 어려운 경제를 극복하기 위해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회장 조해령)가 벌이고 있는 「경제살리기 국민저축운동」이 봄바람을 탄 들불과 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17일 상오 10시30분 서울 종묘공원에서는 3천여명의 새마을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규모 경제살리기 결의대회가 열린다. 18일에는 대구 시민회관에서 그리고 21일엔 인천·광주,22일 전북,23일 경기 등 각 시·도별로 통장발매식과 결의대회가 이어진다. 지난 7일 시작된 이번 저축운동은 3백만 새마을가족들이 1인 1일 1천원씩 저축해 총 3조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과소비를 자제하고 절약과 저축을 통해 자본을 형성,생산적인 분야에 사용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외채를 줄이기 위한 「신 국채보상운동」의 일환인 셈이다.15일 현재 1만203명 가입해 단숨에 9만8천58구좌 1천1백56억7천8백만원의 계약고를 올렸다. 시민들과 공공기관·학교·사회단체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잇따르고 있다. 문의 (02)600­37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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