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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올해 조용한 구정 예고/1천년 전통 폭죽행사 금지

    ◎재앙쫓는 세시풍습… 당국선 안전이유 불허 올해 중국의 구정은 여느 해와는 달리 매우 조용할 것으로 보인다.1천년만에 처음으로 중국 도시민들의 폭죽 터뜨리기가 금지됐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 대도시에서는 개가 추방돼 「개의 해」이지만 개짖는 소리조차 들을수 없게 됐다. 지난해 12월1일 폭죽을 금지하는 새로운 규정이 발효된 이후 이를 어길 경우 최고 2천원(18만4천원상당)까지 벌금을 물거나 경찰서에서 수일간 구류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구정전야에 새해의 재앙을 쫓아내기 위해 연례적으로 실시하는 전통행사인 폭죽터뜨리기가 금지된 것은 단지 「안전」문제 때문이라고 북경시 관리들은 말한다. 지난 3년동안 폭죽터뜨리기로 인해 6백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일어나 북경과 광주,그리고 다른 수개 도시에서 법으로 이를 금지하기로 결정했던 것. 이와함께 중국에서는 지난 49년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한 뒤부터 대도시에서 개의 사육이 금지돼왔다. 개방화물결에 따라 북경의 신흥부자들은 특히 푸들개를 신분의 상징으로 여기는등 개사육 금지규정은 공공연히 위반되고 있지만 개가 마음대로 짖어대는 소리를 듣기란 아직은 어려운 실정이다. 개가 짖어대면 곧장 주인이 벌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중국인들의 전통관습에 대한 당국의 제한으로 도시민들의 감정은 매우 상해 있다. 권위있는 중국과학원의 한 고참연구원은 『개의 해는 일반적으로 중립적인 해이다.그러나 이번에는 하늘도 화가 나서 으르렁거릴지 모른다』고 예언하기도 했다. 승용차를 가질만큼 운이 좋은 도시민들은 폭죽 금지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교외로 나가려 들 것이다. 그러나 자전거만을 소유하고 있는 다수의 시민은 폭죽대신 바늘로 고무풍선을 「뻥」하고 터뜨릴 계획이라는데 재앙을 구축하는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 한국화가 송수남씨(이세기의 인물탐구:34)

    ◎화폭에 시정 가득… “시인같은 화가”/수묵현대판화 개척… 「남천산수」는 독보적 경지/유연하면서도 예리한 운필로 화력 30년 빛내/가장 한국적인 소재에 집착… “동서양 넘나드는 화격” 꿈꿔 남천은 시인같은 화가다.그는 그림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다.그의 그림만 봐도 알 수 있다.먼산 먼강 안개 서린 먼동,잔잔한 금강이며 섬진강 얼어붙은 겨울산하까지도 그의 그림속에는 교교한 시정이 담겨있다.공간에 뜬 몇개의 산이 담묵 농묵으로 꿈결같은 원근을 이루거나 또는 보석처럼 빛나는 수묵채색일 때도 아름다운 여백을 살려 화면전체에 서정시가 흐르는 듯한 향수를 품고 있다. 그가 쓰는 먹은 모든 색의 출발이자 모든 색깔을 포함한 색채다.어둠이 흩뿌리는 혼묵,비내리는 잿빛하늘의 회묵일지라도 단순한 검은색인가 하면 전혀 검은 색깔이 아닌 현묘 심묘의 먹색일색이다.그는 눈부시게 하얀 백지위에서 먹으로 백색을 백답게 살리고 먹색을 가장 먹답게 표현할 줄 아는 화가다. 색깔과 색깔을 배합해서 얻어지는 효과와는 달리 물과 먹의 비율은그 농도를 계산할 수는 없으나 모필이 한지에 닿는 순간의 유연성과 날카롭고 경쾌한 선조,그 번짐이 내는 의외의 조형에 흠뻑 빠져든듯 그는 지난 수년간 수묵을 매재로 하는 긴 실험과 모색의 시기를 거쳐왔다. 그리고 수묵추상 발색산수 동양화판화에서 다시 발묵산수로 이어지는 그의 수묵작업은 이제 포만과 방출의 단계를 통과하여 그만의 독자적인 「남천산수」를 이루고 있음을 인정받고 있다. ○충격던진 첫 개인전 그의 이런 실험정신은 그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할 때도 일관되게 지켜지던 그만의 방법이다. 이대입구 신촌 하숙집 골방에 틀어앉아 낙엽이란 낙엽은 모조리 주워다가 수북하게 쌓아놓고는 이를 화면에 이리저리 꼬아 붙이는 나뭇잎 콜라주,켄트지에 유화 한지에 수채화등 그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를 스스로 모색하고 타진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때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고향의 뒷동산」과 「강언덕 버들개지 꽃샘바람에 한바탕 춤추고 나면 온산은 진달래가 물들어」샤갈과 드가를 변주한 듯한 영롱한 색채는 그가 범상치않은 화가로 탄생될 것을 그의 주변에 일찍이 예감시켰다. 화력 30년의 화가로서나 대학교수로서나 그는 이제 중진의 위치다. 그러나 스승의 문하에서 스승의 화풍을 이어받은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혼자서 자신의 세계를 암중모색으로 성취한 편에 속한다.이에대해 그 자신도 「누구에게 배운 적도 영향을 받은 바도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초기 「한국화」전이란 타이틀로 그가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는 한지와 먹,탑이나 기와지붕등 동양화재료와 한국적 테마를 택하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의 동양화에서의 설채와 운필을 벗어나 서양추상화를 보는듯한 충격을 던졌다. 원로미술평론가 이경성씨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은 송수남 한국화는 새로운 공간예술을 실천한 예로서 70년대 화단에서 독보적인 위치로 우뚝 설것임』을 다짐했었다. 70년대후반 실경산수가 한창 붐 일때도 그의 산은 진채표현의 중량감을 과시하여 적묵산수의 특징을 강조했고 담백한 여운을 느끼게 하는 수묵과는 달리 강렬한 발색산수에서 중성적 느낌을 안겨주는 다채로운 채색과분방한 화풍을 구사해 보였다. 야트막한 구릉과 하천을 부드러운 선과 극도로 절제된 간결한 구성으로 암시하는가 하면 상상을 초월하리만큼 거대한 산봉은 휘염의 범람인듯 화면을 압도하기도 한다. 그곳에는 시의 빛과도 같은 섬세한 장식이 둥우리를 틀고 우뚝한 삼각형,묵취와 묵광,산정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빨갛고 동그랗고 자그마한 해만으로 먹구름같은 화면에 눈시린 청량감을 뿌렸다. ○동양화서 추상 시도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양화가로서는 드물게 「산」을 주제로한 판화를 제작,목판·석판·실크스크린·모노타입등 4종류를 찍어 수묵화의 수묵현대판화로서의 새로운 화경을 열었고 88년 「자연과 도시」전도 빼놓을수 없는 탁발한 전시로 손꼽힌다. 굵거나 묽은 선으로써 시작과 끝을 흐려뜨리면서 드로잉적인 필선과 발묵의 번짐으로 독특한 도시의 서정을 구현,울창한 잡목숲과도 같은 어지러운 도시의 여러 풍경을 특징적으로 묘사해 냈다. 도시나 산하외에 그가 즐겨 그리는 미루나무는 먹으로 화면을 가득채운 동양화의 현대추상을 시도한 선시리즈와 고향으로 가는듯한 휴식을 살린 첨단과 향수의 두면을 대비적으로 선보여주고 있다. 붓끝에 힘을 주어 사군자를 치는듯한 한계를 자유하여 그는 이제 모필만이 갖는 유연성으로 동서양을 넘나드는 그만의 화격을 이루는것이 꿈이다. 남천으로서는 어느구석에도 그 겉모습에선 화가의 티는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그런 「티」는 그에게는 지난 시절의 치기일지도 모른다.문학과 철학에 빠져 세상을 온통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니힐리스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이른바 가난이면 가난, 슬픔이면 슬픔, 외로움이면 외로움이었던 회오리가 한바탕 지난후 거추장스러운 껍질을 훨훨 벗고 「평범」과 「무심」을 과장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굵은테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 그런거지 세상이란 그런거지」털털 웃으면서 술잔을 기울이는 그를 바라보노라면 지난 날이 흔적없이 허무하게 느껴진다는 수류운공이 떠오른다. ○단체활동 개입 안해 그러나 그는 여전히 어눌하고 치밀하지 못하여 지난 90년 한 신문사가 주는 예술대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상을 제정해주신 신문사에 감사한다」는 인사말을 여러차례 연습까지 해놓고는 막상 단상에 올라 다른 신문사 이름을 들먹이며 중언부언하는 바람에 관계자와 좌중을 난처하게 했었다. 또 두주불사로 학생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사심없이 놀다가도 갑자기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한국적이란 무엇일까.중국하면 도가 떠오르고 인도하면 명상이 떠오르듯이 「한국」하면 뭐가 먼저 생각나지?』심각하게 추궁하여 주위를 당혹케하기 일쑤다.이런 한국적인데 대한 집착은 75년 스웨덴 스톡홀름국립박물관 초대전이후 수십차례의 세계미술전에 참가하면서 생긴 징후다. 그는 전북 전주에서 농가 송대석씨의 3남매중 외아들.조부가 쓰던 먹과 벼루가 있는 환경에서 자라나 일찍이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그의 소원은 언제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성취하는 일이었다.소원대로 지금은 서교동 그의 집에 마련된 80여평의 드넓은 화실에서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고 바로 이를 이루기 위해 그는 끝없이 노력해왔다고 할 수 있다.가족은 부인 백명희교수(이대사대학장·54)와 1남2녀.그림을 그리는 자녀는 없다. 화가친구보다는 옛날 신촌하숙방에서 함께 뒹굴던 소설가 이제하 시인 강위석 등과 즐겨 어울리고 80년대 수묵화운동을 함께 했던 후배 제자들이 있지만 화단에서의 단체활동등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 화가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남천을 소탈하고 소박하다고 말한다.대체로 자신의 일에만 충실할뿐 그는 만사에 서툴고 머뭇거리는 형이다. 그러나 가까이 화단일부에서 그의 후배들이 말하는 남천은 뚝심과 정열,실험정신이 투철하여 기왕에 있어온 타성을 묵살하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도전적 욕망이 꿈틀대는 야심파다.또는 감정이 격하고 제스처가 명확하며 일을 벌이면 끝장을 내고 한번 눈밖에 난 사람은 끝끝내 돌아보지않는 독선적인 면이 지나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림의 완성을 설계 어느것이나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일면일 것이다.사람이 나이들면 환경과 시대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듯이 아마도 남천 역시 그런 여러 측면을 복합적으로 지닐 수도 있다.그래선지 그는 다른 예술과는 달리 미술은 음악처럼 세계도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서슴없이 긍정한다.그리고 한때 지나치게 탐닉했던 화려한 색채를 단순하게 저버린것이 아니라 이를 오채의 먹으로 종합한다는 의지다. 그는 결국 시와 철학으로 살찌운 마음속에다 그의 수많은 붓들을 담가두었다가 어느날 하얀 한지위에 먹만의 조형으로 세계화단에 발돋움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그는 그림의 완성,그의 그림의 끝을 알고있는 이시대 소중한 화가의 한사람임에 틀림없다. □연보 ▲1938년 전북 전주출생 ▲전주중앙국교 서중­공고졸업 ▲1956년 홍대 서양화과 입학 ▲군복무후 1961년 동양화과로 전과 ▲1963년 홍대 졸업 ▲1962년 국전입선후 신광여고­이대부고교사 ▲1967년 제9회 동경국제비엔날레 출품(동경) ▲1969년 송수남 「한국화」전(신문회관화랑) ▲1970년 인도 트리엔날레 출품(뉴델리) ▲1972년 한국현대작가7인전(샌프란시스코 아시아재단화랑) ▲1973년 송수남 개인전(신세계화랑) ▲1973년 상파울루 국제비엔날레(상파울루)한국 동양화10인전(동경) ▲1974년 양지화랑 초대개인전 ▲1974년 현대 화랑 기획전(현대화랑)현대한국동양화전(나고야) ▲1975년 스웨덴 스톡홀름국립박물관 초대개인전 ▲1976년 한국현대 동양화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77년 한국 미술대상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78년 맥향화랑 초대전 ▲1978년 뉴욕 한국화랑 초대개인전 ▲1978년 한국미술20연 동향전(국립현대미술관) ▲1979년 한국미술­오늘의 방법전(문예진흥원 미술회관) ▲1980년 하와이대 한국학센터 개관기념 초대전 ▲1981년 백상미술대전 한국현대작가 드로잉전(뉴욕 브루클린미술관) ▲1983년 송수남전(현대화랑) ▲1983년 초대 송수남 개인전(뉴런던 코네티컷대,뉴욕브루클린대 시카고 스코키시립미술관) ▲1984년 송수남 개인전(뉴욕 한국문화원) ▲1985년 송수남 판화전(조선화랑) ▲1986년 한국화,오늘과 내일 전망(워커힐미술관) ▲1986년 한국화 100연전(호암갤러리) ▲1986년 동양화 초대전(강남현대화랑) ▲1986년 송수남 초대전(부산진화랑) ▲1988년 자연과 도시전(동산방화랑) ▲1989년 남천 판화전(청작미술관)해마다 국립현대미술관 주관 현대미술초대전,한국의자연전,서울미술대전,현대작가초대전 등 단체전 수회출품 동아미술제심사위원,문예진흥원 미술대전심사위원,운영위원 역임〔현재〕서울 미술대전 운영위원,서울시 예술위원,홍대교수(홍대박물관장) 중앙예술대상수상 「수묵화」「동양화」「자연과 도시」「남천사군자(상·하)」
  • “백제사 바로 알자” 연구활동 활발

    ◎신형식교수,국내외 학자 저술 정리한 「백제사」 출간/공주·충남·원광대 등 대학부설연 발굴작업도 한몫 우리 고대사의 하나인 백제사를 바르게 인식하려는 역사연구가 최근 활기를 띄고 있다.백제는 강력한 전제왕권및 독자적인 통치구조 확립과 선진영농기술등 찬란한 문화를 일본에 전파시킨 선진 고대국가.삼국통일 후에도 통일신라로 그대로 이어져 한국고대사회 형성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백제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최근 간행된 신형식교수(이화여대)의 저서 「백제사」(이화여대출판부)에 체계적으로 정리됐다.신교수는 이 저서를 통해그동안의 국내학자들의 백제사 연구성과를 객관적으로 종합·분석,백제사의 내면적 성격과 문화적 특성을 규명했다.또 국내외에서 지난해까지 발표된 9백여편의 저서및 논문을 주제별로 나눈 문헌목록을 실어 명실공히 백제연구의 지침서 역할도 하고 있다. 신교수는 우리의 백제사 연구가 그동안 주로 고분·토기·성지등 고고·미술사분야에 치중해온 사실에 주목했다.그까닭은 백제사연구의 유일한 문헌이다시피한 삼국사기가 갖고 있는 기술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했다.이러한관점은 19 71년 무령왕릉의 발견이 전환점이 됐으며 이에 앞서 김원용박사의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고고학적 관점에서 규명한 선구적인 연구와 천관우박사의 백제초기복원이 새로운 연구의 시발점이 됐다는 것이다. 신교수는 이번 저서에서 철저하게 우리문헌(삼국사기)과 중국문헌(주로 주서,당서)에 나타난 백제사회를 비교했다.따라서 그 차이점을 통해 백제사를구명하였으며 특히 북한에서의 백제사 서술을 비판,남북한 역사인식 차이의 비교도 시도했다.그는 기존의 백제사 시대구분을 비판,▲초기국가시대(온조왕­사반왕) ▲집권국가발전시대(고이왕­삼근왕) ▲전제왕권시대(동성왕­의자왕)의새로운 시대구분을 시도했다.또 웅진·사비시대의 전제왕권확립과정을 재조명,웅진시대가 단순한 과도기가 아니라 전제왕권의 전단계로 파악했다. 그는 특히 최근 백제사연구가 다양화하고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 것은 관련 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밝히고 그들개개인의 업적을 평가했다.백제초기사 해명에 큰 도움을 준고고학및 문헌과의 접목은 김정배 노중국 최몽용 이도학등의 연구에서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또 백제사 해석의 폭을 넓혀준 고분발굴및 연구자로는 안승주 강인구를 꼽았다.특히 백제사 이해에 새로운 계기를 이룩케한 특수사연구는 성주탁 도수희 장경호 김삼용 홍윤식등의 업적으로돌렸다.그리고 연구의 단계를 높여준 문헌연구는 이기동 노중국 양기석 이종욱 김주성등의 짜임새 있는 연구결과라는 점을 덧붙였다. 이와같이 백제사연구가 활기를 띠게 된데는 백제사관련학술단체의 업적도 컸다.백제문화연구소(공주대),백제연구소(충남대),마한·백제문화연구소(원광대)등 대학부설기관의 꾸준한 발굴·연구와 동아그룹이 설립한 백제문화개발연구원의 재정지원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충남대 백제문제연구소는 최근 백제연구국제학술회의를 열어 백제사의 새로운 위상을 모색했다.「백제사의 비교연구」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는 일본 중국 대만의 학자들이 참석,▲백제와 고구려·신라의 비교연구 ▲백제와 일본의 비교연구 ▲백제와 중국의비교연구등 세가지 테마로 모두 12편의 논문이 발표됐다.이번 백제학술대회는 백제문화의 독자성과 당시 고구려 신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과의 국제관계규명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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