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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인정/정자:중(서울 6백년만상:57)

    ◎풍은 부원군 조만영의 필동 정자서 유래/명문대가·고관·문인들 모여 풍류 즐겨/마포 「망원정」은 임금도 자주 드나들어 갈데없는 도시노인들이 모여 심심파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노인정.아파트지하실에 차려졌건,아니면 공원모퉁이에 지은 가건물이건 노인들을 위한 휴식장소를 두고 사람들은 정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이를 노인정으로 부르는데 이는 서울에 실제로 있던 「노인정」에서 유래됐다고 전해 진다. 1800년대초 풍은부원군 조만영이 중구 필동2가 남산 북쪽기슭에 세운 「노인정」이라는 정자가 바로 그것. 주변은 숲이 울창하고 계곡이 깊어 많은 노인들이 몰렸다.특히 당대 명문가이던 풍양조씨 일가의 고관들을 비롯,안동금씨·동래정씨등의 문인·대관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다. 한말의 풍운이 불어닥치던 시절에 선비들이 세상일을 등지고 풍류에만 젖어 있다 하여 뜻있는 사람들은 이를 풍자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노인정위에 어린이가 노나/삼월의 복사꽃이 물을 어지럽히는데/평생토록 세상일도 모르고/날마다 풍류로 늙어가네.」 노인정은 역사적인 한일간 회담이 열려 더욱 유명하다.1894년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은 내정간섭을 본격화할 목적으로 5가지 내정개혁안을 들고 일반백성이 눈치챌세라 인적드믄 노인정에서의 회담을 제의했다. 그해 6월8일부터 3차례에 걸쳐 회의가 열렸으나 3차회담에서 우리측이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회담은 결렬됐다.그러자 일본은 군대를 이끌고와 경복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입궐시켰다.이 사건은 이른바 갑오경장으로 이어진다.말하자면 노인정은 일본침략의 도화선이 된 불쾌한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였던 것이다.노인정은 일제시대에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해방후에는 불교부인회에서 사용했다가 지금은 개인주택이 들어서 있다. 마포구 망원동에 있는 「망원정」은 조선시대 임금들이 자주 드나들며 세상사를 논하던 곳으로 유명하다.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이 별장삼아 지은 망원정의 본래 이름은 희우정.효령대군의 아우인 세종이 바깥에 시찰을 나갔다가 정자에 들려 가뭄걱정을 하며 얘기를 나누던중 때마침 비가 내렸다는데서 유래되었다. 성종때에 이르러 희우정은 다시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별장이 됐으며 월산대군은 정자를 크게 수리하고 이름을 망원정으로 바꿨다.정자에 올라 앉으면 먼 경치까지 전부 바라볼수가 있다고 해 붙여졌다.성종도 역시 세종때의 일을 본따서 매년 봄이면 망원정에 나가 농사일등 세상 돌아가는 일을 살피고 여러 문신들에게 시를 짓게해서 현판에 걸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서깊은 망원정도 연산군에 의해서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궁중에서의 향락만으로는 부족해 각 명승지를 찾아 연회를 베풀던 연산군은 망원정의 절경에 취해 1천명이 들어앉을수 있도록 새로 지으라고 했다.그리고 연산군 12년 7월 망원정에서 바라다 보이는 곳은 공사 건물을 막론하고 모두 철거하라고 해 양화진에서 마포에 이르는 일대가 허허벌판이 될 판이었다.그러나 그해 9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 공사는 즉각 중지되고 망원정은 살아남을수 있었다.망원정은 조선말기에 없어졌다가 88올림픽이후 한강변유적 복원사업으로 정자로는가장 먼저 복원됐다.
  • “자식들 냉대·생활고로 모실 곳 없다”/60대아들,90대노모 살해

    【광주=최치봉기자】 90대 노모를 생활고와 건강악화로 모시지 못하게된 60대 아들이 노모를 살해해 암매장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전남 고흥경찰서는 9일 김홍두할아버지(69·무직·경기도 시흥시 거모동)를 존속살인혐의로 구속했다. 김할아버지는 지난달 24일 상오 2시쯤 어머니 임유수씨(94)를 고향인 전남 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속칭 노루맥 야산에서 목졸라 숨지게한뒤 이곳으로부터 5m쯤 떨어진 능선에 가매장한 혐의다. 김할아버지는 경찰에서 『생활능력이 없는데다 거동조차 불편할만큼 건강이 악화됐는데도 자식들이 나와 노모를 홀대해 12년전 지병으로 숨진 아내의 무덤을 찾아 어머니를 부여안고 통곡을 하다 목을 졸랐다』고 말했다. 김할아버지는 5남3녀의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고향인 전남 고흥에서 노모를 모시고 살다가 12년전 부인이 지병으로 죽으면서부터는 서울과 경기도 안산등지의 아들,딸집과 여수의 여동생집을 전전해왔다. 그러다 지난해 8월 셋째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울화를 못이긴 폭음으로 위장이 파열되는등 건강이급격히 악화되자 김할아버지는 지난 5월말부터는 전남 여수의 여동생(64)집에서 노모와 함께 기거해왔다는 것이다. 여동생집에 한동안 머문 김할아버지는 범행 이틀전인 지난달 22일 경기도 안산에 사는 큰아들(47·노동)집으로 갔으나 큰아들과 서울 영등포에 사는 둘째아들(42·사진관경영)등 자녀들이 박대하자 지난달 23일 하오 11시쯤 큰아들집을 나와 부인의 무덤앞에서 노모를 살해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황실은 살아 있다」 발간/안천 서울교대교수(저자와의 대화)

    ◎“대한제국 황실/“일제때 독립투쟁 본거지”/“의왕이 손병희에 민중궐기 촉구/3·1운동은 고종독살에 대한 민중의 분노로 발발” 「대한제국의 황실은 결코 무기력하지 않았다.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뒤 황실은 독립투쟁의 본거지였다」 서울교대 안천교수(정치학·47)가 잊혀진 역사,대한제국 황실의 독립투쟁사를 발굴해 「황실은 살아있다」(전2권·인간사랑간)란 책을 출간했다.이 책은 나온지 10여일만에 초판 6천부가 매진돼 재판에 들어가는등 상당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 이유를 안교수는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조선왕조(대한제국)에 대한 향수와 그 후예에 대한 궁금증이 아직도 국민 정서속에 짙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몇해전 발표한 글에서「우리나라는 입헌군주제를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적이 있는데 그 글을 보고 고종황제의 손자인 가수 이석씨가 찾아왔다』면서 『그분에게서 황실의 독립투쟁 얘기를 듣고 그 발자취를 추적하게 됐다』고 밝혔다.「노래하는 황손」으로 알려진 이석씨는 고종의 둘째아들인 의왕(흔히 일본식 명칭인「의친왕」으로 알려졌음)의 아들로「비둘기집」등 여러 히트곡을 갖고 있다. 안교수는 이후 이석씨와 함께 4년여동안 전국을 돌며 황실과 연계된 유적지와,관련인물들을 찾았다.안교수가 주요 증언자로서 책머리에 소개한 인물은 48명에 불과하지만 이 기간동안 실제 만나본 인물은 수백명에 달한다는게 그의 얘기이다. 안교수가 발굴한 새로운「황실의 역사」는 엄청나다.그가 수집한 증언에 따르면 대한제국 황실의 인물들은 일제에 국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최대한 애썼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이를 되찾기 위해 적극 나섰다는 것. 안교수는 대표적인 예로 3·1운동이 일어난 과정에 대해 새 해석을 내렸다.그는『지금 학계에서는 3·1운동을 독립운동,또는 민중해방운동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고종이 일제에게 독살된 것에 대한 백성의 분노 표현이자 대한제국을 회복하려는 염원을 담은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는 고종이 독살된 직후 의왕이 이 사실을 손병희에게 알려 백성의 궐기를 촉구한 것이 3·1운동으로 나타났다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고종이 만주에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유동렬장군을 만주로 보내 군대양성을 지시했다 ▲일제 말년 의왕의 둘째 아들인 이우공이 강원도 금화지역에 비밀군사기지를 마련했다는등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황실의 독립운동 비사를 증언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그는 정치학자로서 황실의 역사를 추적한 이유를 『우리사회에 입헌군주제가 알맞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밝혔다.대학 강단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면서「구미의 정치제도가 우리 몸에 맞는 옷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그 대안으로서 입헌군주제를 추구하게 됐다는 것.또 영국·일본·스페인·태국의 예로 보더라도「왕이 사회의 구심점으로서 기능하는 제도가 우리 현실에 훨씬 바람직하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안교수는 황실을 복원해 입헌군주제를 되찾자는 주장이 비현실적이 아니라는 이유로『첫째 황실은 독립투쟁에 앞장선 만큼 도덕적으로 자격이 충분하며,둘째 남아있는 고종의 후손들이 그 역활을 감당할 만한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승용차 트렁크서 남아 숨진채 발견

    4일 하오1시쯤 서울 마포구 아현1동 608 동네놀이터옆에 주차해있던 서울 1드1309호 프레스토승용차 트렁크안에 이 동네 김모씨(30)의 둘째아들 재선군(4)이 숨져있는 것을 차 주인 최모씨(41·여)가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최씨는 『지난달 30일 하오 이곳에 승용차를 주차한 뒤 4일만인 이날 물건을 꺼내기 위해 트렁크를 열어보니 김군이 옷과 머리가 물에 젖은 채 엎드려 숨져있었다』고 말했다. 김군의 가족들은 김군이 지난 1일 하오 4시쯤 놀러나간다며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2일 경찰에 가출신고를 했다. 경찰은 승용차가 낡아 트렁크문이 잘 잠기지 않았다는 최씨의 진술과 김군의 사체에 외상이 없고 지난 1일 밤 집중호우가 내린 점으로 미뤄 김군이 비를 피하러 열린 트렁크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숨졌을 것으로 보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사체부검을 의뢰했다.
  • 신변이상설 김평일/북한군 요직에 기용

    【북경 연합】 북한주석 김일성의 둘째아들로 장남이자 후계자인 김정일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온 김평일이 최근 군관계의 주요직책을 맡은 것으로 14일 알려졌다.
  • 전총장 횡령혐의 고발/청주대교수협

    【청주=김동진기자】 청주대교수협의회(회장 박정규·신문방송학과교수)는 23일 전 청주대총장 김준철씨(72)가 재단의 토지를 횡령하고 김씨의 아들인 현 청석학원 상무이사 김윤배씨와 둘째아들 상배씨가 석사학위를 위조했다며 청주지검에 고발장을 접수시켰다. 박교수는 고발장에서 『김씨는 지난 91년 8월 자신의 명의로 돼 있는 청주시 수동 414 일대 부지 1천5백평과 재단명의의 청주시 북문로 3가 1찬8백여평을 맞바꾸는 등 2차례에 걸친 부지교환으로 2백억원의 재산상 이득을 챙겼다』고 주장했다. 박교수는 또 『윤배씨가 지난 85년 군복무기간중에는 일반대학원에 진학할 수 없음에도 이 대학 경영학과 대학원에 입학,87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 우리를 훈훈하게하는 효심/어버이날을 더욱 값지게한 사람들

    ◎경로당 운영 이병수씨 부부/외로운노인 2년째 뒷바라지/작은식당 수입 쪼개 80명 돌봐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외롭게 지내던 할머니들이 기쁜 마음으로 함께 지내는 것을 보면 힘이 절로 솟아 납니다』 서울 성동구 성수2가 1동에 할머니들을 위한 무료 경로당인 「신라 경로정」을 마련,2년째 동네 할머니들을 돌보고 있는 이병수(57)·박녀순씨(49)부부. 동네 한켠에서 조그마한 식당을 경영하는 이씨부부는 식당 수익금으로 80여명이 모이는 노인정 경비까지 대느라 언제나 빠듯한 생활을 하면서도 노인들을 마치 친부모처럼 정성껏 뒷바라지하고 있다. 전북 장수군 산서면이 고향인 이씨부부는 77년 상경,성동구 성수2가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내고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들은 집근처에 있는 가게에 나갈때면 동네 골목어귀나 공터에 모여 종일 할일없이 무료하게 앉아있는 노인들을 보기가 안타까웠다.궁리끝에 매일 따뜻한 점심식사를 지어 노인들에게 갖다드렸다. 그러나 노인들이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없는 것이 못내 박씨부부의 가슴에 걸렸다. 그러다 92년 10월 1천만원을 빌리고 이 돈에다 월세 30만원을 얹어 25평짜리 2층을 임대해 지금의 노인정을 마련했다. 이씨부부의 생활은 이후 더욱 바빠졌다.한달에 1백여만원쯤되는 노인정유지비를 마련해야 함은 물론 명절이나 어버이 날 행사등 각종행사도 챙겨야 했기때문이다. 올해도 어버이 날을 앞두고 6일 뚝섬 고수부지 잔디밭에서 신라경로정을 비롯,인근 구립·중앙·정안경로정등 모두 4개 경로정 할아버지 할머니 3백여명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열었다. 『비좁은 노인정에서 답답해하시던 노인들이 활짝 트인 고수부지 잔디밭 위에서 달리기를 하고 덩실덩실 춤추는 것을 보니 참으로 좋다』며 즐거워하는 이씨부부의 모습에서 잊혀져가는 「효자효부」의 모습을 되찾는 듯 했다. 이씨부부는 『어버이 날 하루 부모님께 반짝 효도하는 것보다 평소 노인들을 위하고 보살피는 미풍이 생겨나야 한다』면서 『앞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함께 지내실 수 있는 더 큰 경로정을 마련하는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동백장 받는 효부 기분도씨/고령의 시어머니 40여년 수발/남편 병사후 가장역 꿋굿하게 40여년간 가장 노릇을 하며 고령의 시어머니를 수발해온 시골아낙네가 가정의 달을 맞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는다. 경북 상주군 함창읍 척동리24에 사는 기분도씨(56)는 「효부」일 뿐만아니라 남편 병구완에 헌신하고 온갖 역경 속에서도 아들 2명을 훌륭한 사회인으로 키운 모범 어머니이기도 하다. 재산이라곤 논 3마지기(6백평)가 고작인 장영철씨(91년 사망)와 17세 되던 해 결혼한 기씨는 시어머니 김은이씨(1백5세·결혼당시 65세)를 모시며 새살림을 시작했으나 남편이 결혼 2년뒤에 결핵을 앓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농사일은 물론,과일 노점상·옷가지 행상등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밤잠을 설쳐가며 일해 집안을 이끌어 왔다. 그러던중 지난 85년 시어머니 김씨가 중풍으로 자리에 눕자 전 재산인 논 3마지기마저 팔아 병 치료비에 털어 넣었으며 4년동안 대·소변을 받아내는등 지극한 정성으로 간호해 시어머니의 건강을 회복시켜 1백세를 넘도록 봉양하고 있다. 남편 장씨는 발병초기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한데다 그 이후는 몸이 너무 쇠약해져 30여년간의 간호에도 불구,91년 사망했다. 기씨는 남편과 시어머니 병간호의 와중에서도 아들 2명을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켜 맞아들 세훈씨(29·서울 거주)는 중소기업체의 기능공으로,둘째아들 석훈씨(26)는 함창농협에서 맡은바 직분을 충실히 다하는 사회의 일꾼으로 키워냈다. 『사람으로 당연히 할일을 했을뿐인데 과분한 상을 주시고 대통령께서 격려해 주시니 정말로 고맙다』며 지난날의 고생을 떨쳐내는듯 기씨는 모처럼 깊게 파인 주름살위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 해금 인간문화재 김천흥옹 손녀 바이올리니스트 신경씨

    ◎할아버지 예술혼 대이어 빛낸다/22일 예술의 전당 초청독주회 통해 국내무대 데뷔/독 유학,베를린심포니와 3차례 협연/김옹 “최선 다하는 예술가 되어라” 당부 할아버지의 해금과 손녀의 바이올린,동·서양을 대표하는 이 두 찰현악기의 명인기가 대를 뛰어넘어 전수되고 있다.해금의 인간문화재 심소 김천흥옹(86)과 22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유망신예초청연주회」를 통해 국내 음악계에 데뷔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김신경씨(27).이들이 바로 「음악의 동서화합」을 이룬 화제의 주인공이다. 김옹은 독일로 유학을 떠난뒤 10년만에 만난 손녀가 그동안 올곧게 예술가의 길을 갔는지를 지켜보겠다며 연주회 날을 벼르고 있다.신경씨는 신경씨대로 『가진 것 만큼은 남김없이 보여주겠다』며 각오가 대단하다. 서양음악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선대에서 풍류가락깨나 잡아보았던 경우는 크게 드물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이들 조손이 유독 화제를 모으는 것은 김옹이 전통예술계에 우뚝한 거봉인데다 신경씨 또한 국제음악계에서 탄탄한 경력을 쌓은뒤 국내음악계에 화려하게 데뷔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옹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에서 일무와 해금으로,제39호 「처용무」에서 춤으로 각각 지정된 유일한 2종목 보유자.김옹이 해금을 처음 접한 것이 13살때 이왕직아락부에 들어가면서 부터라고 하니 70년 이상을 말총활과 함께 살아온 셈이다. 그러나 김옹의 3남3녀 가운데 예술로 대를 잇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신경씨의 아버지인 둘째아들 정완씨(60) 또한 사업가로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따라서 신경씨의 이번 연주회는 2대에서 사그라질뻔 했던 김옹의 예술혼이 3대에서 다시 환한 빛을 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의미도 있다. 신경씨는 『할아버지는 음악을 통해 도가 트이신 분』이라고 말한다.그런 그도 어릴때는 할아버지의 공연을 보러가서는 졸기가 일쑤였다고 한다.「예술가로서 할아버지의 존재」는 독일에 유학해 연주자로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인식되기 시작했다.할아버지처럼 평생토록 공부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았다는 것이다.할아버지의 「피」와 함께 「정신」까지 이어받은 신경씨는 그뒤 베를린음대대학원을 졸업하던 지난해 봄부터 3차례나 베를린심포니와 협연하고 올가을에도 초청을 받아놓고 있는등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김옹은 『유행가는 몇번 들으면 염증이 오지만 베토벤같은 클래식음악은 들을수록 좋아진다』고 토로한다.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의 경지가 높아지면 한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곡이라도 음악적인 우열을 판단할수 있다는 것이다.이때문에 신경씨는 요즘 「국악인」 할아버지가 자신의 연주에 내릴 평가가 두렵다. 신경씨는 얼마전 그런 할아버지로 부터 아주 큰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할아버지는 설겆이를 하던 그에게 『예술가는 그런거 안해도 된다』고 말했다는 것.설겆이를 면케 해주어서가 물론 아니다.예술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엄격한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자신을 「예술가」로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그 할아버지의 손녀이어선지 신경씨는 앞으로 「무엇을 위해서 음악을 하는가」를 평생 고민하는 연주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 무너지는 생지옥 시베리아 북한벌목장:1

    ◎서울신문 왕상관·이도운특파원 그 현장에 가다/“나는 이렇게 탈출했다” 김호씨 증언/도주­피체반복 6년만에 러거주증 획득/현장 운전수 3년만에 불순자로 낙인/몽고­중아 유랑… 두번 잡혔다 다시 도피/한국망명 신청했으나 “부답”… “서울거리 걸어 봤으면” 러시아 극동지역의 북한벌목장을 탈출한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서울로 가는 꿈을 안고 러시아 전역을 떠돌고 있다. 북한당국의 추적과 지역주민들의 밀고에 쫓기는 불안과 긴장,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돌봐주기는 커녕 무슨 흉물보듯 대하는 이민족들의 멸시,그리고 망명에 대한 한국정부의 어정쩡한 방침 때문에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아예 서울행을 포기하고 러시아에 망명을 신청하기도 한다. 이들의 삶은 그야말로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기만 하다.특히 최근에는 이들의 입을 통해 벌목장의 인권유린등 온갖 비행이 폭로되는 것을 꺼리는 북한당국이 탈출자를 붙잡기 위해 특무대원을 러시아 각지에 파견하고 있어 거의 절망적인 불안속에서 고달픈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 숨어다니며 고려인(한국계 러시아주민) 행세를 하기 때문에 만나보기도 여간 어렵지 않다. ○4명에만 망명 허가 기자는 지난 13일부터 러시아에서 벌목장을 탈출한 북한노동자와의 접촉을 시도한 끝에 1주일이 지나서야,그것도 다섯 단계를 거쳐서야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아르좀의 한 주택가에서 김호라는 탈출노동자를 만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김씨는 지금까지 러시아정부로부터 망명허가를 받은 오직 4명뿐인 북한노동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김씨는 망명허가를 받고도 여전히 계속되는 북한측의 테러위협 때문에 지금도 은신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의 성장과 파란만장한 도피과정,러시아로부터 망명허가를 받은 법적 위상등 북한벌목장을 둘러싼 모든 문제를 한 몸에 안고 사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김씨는 59년7월20일 평안남도 혜산에서 태어났다.3남2녀 가운데 둘째아들이었다.아버지는 혜산일대에서 유명한 교육자였고 누나가 의사,형은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다녔으며,여동생도러시아어 교사를 하는 성분좋은 집안이었다.고등중학교를 마친 뒤 군에 입대,휴전선근처 공군부대에서 복무하다 평안북도 정주의 군관학교를 거쳐 82년 소위로 임관했다.몇년동안 장교생활을 하다 「10만군 축소계획」에 따라 제대를 하게 된다. ○현장 당비서차 운전 사회에 나와 운전을 하던 김씨는 러시아 벌목장으로 돈을 벌러가려고 마음을 먹었다.88년 5월16일 러시아행 열차를 타고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의 북한벌목장 가운데 하나인 튀르마에 도착했다. 러시아에 와보니 세상이 달랐다.튀르마는 지방의 소도시였지만 주민들의 삶은 자유로웠고 상점에는 물건이 가득한,일종의 「천국」이었다.김씨는 벌목장에서 공산당책임비서의 운전사로 근무했다.책임비서는 벌목장에서도 위치가 확고했기 때문에 김씨도 열악한 생활환경이었지만 그런대로 적응해 지낼 수 있었다. 김씨의 운명이 바뀐 날은 벌목장에 온지 3년이 조금 넘은 91년8월24일이었다.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우리도 러시아처럼 민주주의를 해야한다』고 「불순한」 말을 내뱉은 것이 화근이었다.바로 다음날 김씨는 당위원회의 호출을 받았다.안전부에서도 김씨를 찾았다.그는 본능적으로 사태가 심각함을 깨달았다.『산에 좀 갔다오겠다』며 숙소를 나와 그길로 열차를 잡아탔다. 김씨는 러시아에 와서 북한에서의 삶이 허구였다는 것을 어느정도 깨닫기 시작했다.그렇다고 탈출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그러나 당위원회와 안전부에서 자기를 부른 것은 전날밤의 일만을 갖고 따지는 것이 아니었다.이미 그동안의 여러가지 발언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올가미를 씌우는 것이 분명했다.이제 북한으로 돌아간다해도 정치범수용소 신세를 모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결국 서울로 달아나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씨는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하바로프스크로 갔다.시장에서 윤씨라는 고려인 할머니를 만나 그 집에서 며칠동안 숨어살았다.갖고 있던 총재산 1백달러를 주고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 고려인의 신분증을 빌렸다.그리고 9월7일 모스크바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고려인 아내도 맞아 김씨는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한국대사관을찾아가 망명을 요청했다.그러나 한국대사관에서는 김씨에게 이렇다,저렇다 하는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낙담천만이었다.게다가 북한당국의 추적망이 좁혀오는 것을 느꼈다. 모스크바에 더 머무르기가 어려웠다.9월 중순 고려인들이 많아 러시아보다는 신변이 안전한 중앙아시아 카자흐공화국으로 들어갔다.그러나 거기서도 결국 정착지를 찾지 못하고 고민끝에 북한 안전요원의 발길이 미치지 않을 것같은 몽골로 건너갔다.몽골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고려인 청년 한명을 만났다.그 만남이 김씨의 운명을 또한번 바꿔놓았다.카자흐공화국의 타슈켄트 근처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청년은 김씨에게 함께 일하자고 했다. 그는 마침내 청년의 동생인 마야(5월이라는 뜻)라는 아가씨를 아내로 맞게 됐다.곧바로 두사람은 부부가 되고 마야의 친척들이 김씨의 신분증을 만들어주기 위해 관리를 매수할 돈을 모았다.그러나 관리들의 실수로 여권이 2중으로 발급됐고 행정처리 과정에서 그 사실이 드러나 김씨는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경찰은 김씨를 수도인 타슈켄트로 이송해 신분확인 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경찰에 수감된 김씨는 우연히 목공일을 돕다가 만일에 대비해 칼 하나를 훔쳐뒀다. 김씨의 신분확인은 한달만에 끝났다.벌목장을 탈출한 사실이 드러났고 경찰은 신병을 북한측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그러나 그는 죽으면 죽었지 북한에 다시 잡혀갈 수는 없었다.경찰이 호송차에 태우기 직전 품속에 숨겨둔 칼을 꺼내 자기배를 찔렀다.그리고 경찰호송차 대신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다.그는 다음날 밤 의사와 간호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탈출했다. 한 고려인 집에 숨어 치료를 받은 김씨는 마야와 함께 이번에는 우즈베크공화국으로 넘어갔다.우즈베크는 바다가 육지로 변한 척박한 땅이다.탈출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불같이 끓는 모래밭 2정보를 일궈 해바라기를 심고 지게로 물을 지어 날랐다.해바라기가 자랄 때까지 푼돈이라도 벌기 위해 처형이 사는 블라디보스토크 이웃으로 가 중국과의 국경지역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그 때가 92년 여름.국경에서 떠돌이 북한인을 사귀게 됐다.며칠뒤 그를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가보니 러시아 경찰 두명이 다가와 『신분증을 보자』고 했다.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도망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결국 다음날 북한 안전요원들에게 넘겨지고 말았다.안전요원들은 김씨를 차에 태운뒤 팔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우고 받줄로 묶었다.다리에는 마치 부러진 다리를 기브스하듯 철제 족쇄를 두른뒤 40㎏짜리 여행용 가방에 묶었다.하바로프스크의 북한임업대표부를 거쳐 기차로 3시간 떨어진 비르비잔 벌목장의 감방으로 끌려갔다. 부인 마야는 김씨가 잡혀가자 혼자서 하바로프스크의 북한임업대표부로 찾아갔다.몇날며칠을 임업대표부 앞에 앉아 김씨를 풀어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며 하바로프스크주정부등 관계당국을 찾아 남편의 구명운동을 벌였다.러시아 국적을 가진 마야가 독하게 달려들자 북한측으로서는 골치아픈 일이었다.문제가 커지기 전에 김씨를 북한으로 빼돌리기로 했다. 지난해 4월3일 김씨는 북한으로 가는 열차에 태워졌다.그러나 기차를 타고 가는 이틀동안 감방에서 주은 핀침으로 수갑을 풀었다.일행은우스리스크역에서 기차를 바꿔타려고 역사로 나왔다.4명의 안전요원 가운데 2명이 표를 사러가고 2명이 남았다.김씨는 그틈에 2명의 안전요원 가우데 한명은 면상을 들이받고 다른 한명은 수갑을 찬 손으로 머리를 내리쳐 쓰러뜨리고 도망쳤다. 김씨는 북한 안전요원을 피해다니고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다니는 편법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고 결론을 냈다.마야의 친척집으로 숨어들어가 모스크바의 법률가협회에 망명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곧이어 모스크바로 날아가 인권위원회와 유엔,외교성등에도 도움을 청했다.모스크바당국은 김씨의 망명신청을 일단 접수했다.러시아의 법적보호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2년 지나면 시민권 북한은 김씨의 망명을 허가해주지 말도록 각종 채널을 통해 러시아정부에 강력히 요청했다.그러나 지난해 10월4일 러시아공민권위원회는 김씨의 망명을 허가했다.그리고 지난 1월26일 모스크바에서 김씨에게 편지가 날아왔다.그 안에는 특정지역(김씨의 경우 블라디보스토크)의 거주를 인정하는 「비트 나 지제스트로」가 들어있었다.이 거주증은 2년만 지나 본인이 원하면 러시아시민권인 파스포트로 교환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씨의 꿈은 여전히 남한에서 살아가는 것이다.벌목장을 탈출한 순간부터 닥쳤던 가시밭길은 모두가 서울로 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목숨을 걸면서까지 탈출한 것은 가족과 함께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었다.러시아에서는 그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김씨는 그러나 막상 한국측에서 『넘어오는 북한사람을 모두 받아주기만 하는게 능사가 아니다』라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몹시 씁쓸해하고 있다.『떼를 쓴다고 될일도 아니갔디요』라고 계면쩍게 웃는 그의 표정이 꽤나 측은해 보였다.그는 『서울에 대해서는 잘 모르갔디만 아마 가보면 내눈이 뒤집힐 것』이라고 말했다.『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묻자 그는 『그저 서울거리를 걸어보고 싶다』고 했다. 지금 러시아에는 김씨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탈출노동자들이 수백명에 이른다.이들이 벌목장을 탈출했다는 사실은 결코 영예로운일이 아니다.행여 그들이 지나간 삶을 서울에서 보상받으려 해서도 안될 것이다.그러나 결국 누군가는 이들을 끌어안아야 한다.러시아와 북한,그리고 한국 이 세나라가 이들의 관련당사국이다.러시아는 이미 이들을 받아들일 몸짓을 보이고 있다.북한도 이들을 모두 붙잡아가는데 혈안이 돼있다.물론 그 이유는 서로 다르다.그러나 정작 이들이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자유조국」은 아직 문을 열지 않고 있다.
  • 팔순부부교수… 이의철·김갑순씨댁(훈훈한 우리가정:6)

    ◎“주말마다 3대가 모여 이야기꽃 피워요”/자손들에 요구·간섭없이 개성·자유 존중/“모든 문제는 대화로”… 세대벽 허물고 화목/매사 긍정적… “부끄럽지않은 삶이 최고의 가정교육 최근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 셰익스피어」1·2권을 연달아 펴내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김갑순교수(81·전 이대 영문과)의 가정은 토요일이면 언제나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하면서 훈훈한 가족애를 다진다. 『할머니,오늘 성적표받았는데 언니는 상을 다섯개 받았고 저는 여섯개 받았어요.어때요,이번엔 제가 더 잘했지요』 마침 봄 방학이 되어 23일 성적표를 들고 엄마와 함께 과천 본가를 찾은 예령(13)·예은(10)자매­. 이들을 맞은 할머니 김갑순교수와 할아버지 이의철교수(82·전 서울대 심리학과)내외는 늘 언니에게 공부가 밀린다고 생각해온 작은손녀 예은이가 자신있게 내민 학년말 성적표에서 독후감쓰기상·경필쓰기상등 수상내용을 읽어가다 개근상을 발견하곤 『암,공부도 중요하지만 학교생활에선 그래도 개근상이 최고』라며 어린 손녀들을안아주고 격려하는데 조부모의 따뜻한 사랑이 옆사람에게까지 전해진다. 김교수가정에서 가족 모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키는것은 각자의 개성과 자유.따라서 생활전체에서 부모 자식간이라도 어떤 요구나 간섭이 없는것이 특징이다.그러나 김교수는 78년 결혼,분가해 살던 큰 아들이 주말마다 부모를 찾아오기 시작한것이 계기가되어 매주 토요일이나 일요일 하루는 반드시 전 가족이 모여 대화의 시간을 갖는것이 어떤 원칙처럼 굳어져 버렸다고 밝힌다. 슬하에 3남1녀를 둔 김교수 내외는 맏아들 백희씨(48·현대건설)와 막내아들 승희씨(44·삼성반도체)의 경우 가정을 이루고 자식까지 두었지만 제일 맏이인 딸 원희씨(50·대학강사)와 둘째아들인 민희씨(46·광고업)는 아직 독신인 상태.그러나 김교수 내외는 보통 부모들처럼 나이든 자식이 결혼을 하지않는다고 애달파 하지도않고 자신의 내외가 나이가 들었다고 며느리들에게 함께 살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데 이것 역시 각자의 개성과 자유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어머님·아버님은 집안에 행사가있을때도 며느리들이 사정이 있으면 그 사정이 무엇이 됐건 인정을 해주시지 절대 시어머니라고 권위적으로 대하시는 경우가 없습니다.그때문에 저희 자식들도 모든것을 부모님께 솔직히 말할 수 있어 벽이 생기지 않으며 늘 마음이 편하고 아이들도 너무 좋아해요』 방학에 들어간 두 딸을 데리고 본가를 찾은 막내며느리 김인선(39)의 이야기. 김교수는 부부가 모두 내로라하는 대학에서 교수를 했으니 가훈도 거창하고 교육방법도 대단하리라 생각,이따금 주변사람들로부터 그런것들에대한 질문을 받는데 『우리집은 가훈도 없고 특별한 교육방침도 없으며 단지 부부가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외엔 아무것도 없다』고 들려준다. 김교수내외는 특히 주변에서 검소하기로도 소문이 나 있는데 어느자식도 이 부분에대해 불평을 하지 않으며 모두들 매사에 편안하고 긍정적인 성격의 부모를 닮고싶어 할 뿐이라고.그중에서도 원희씨는 『어머니가 처녀적 쓰던 장롱을 자신이 물려받아 쓰고 있다』며 어머니의 손때가 묻고 골동품같아 새것보다 오히려 정감이 가고 좋다며 웃는다. 며느리 김씨는 또 『어머니는 아버님과 똑같이 사회활동을 하시면서도 집안에서 아버님에게 그렇게 다소곳하게 순종하고 잘 하실수가 없다』며 우리가정이 이처럼 검소한것도 어쩌면 변화를 싫어하시는 아버님의 취향을 맞춰 살아온 어머님의 생활철학때문일 것이라고 들려준다.
  • 한밤 가정집에 불/일가족 2명 소사

    【인천=김학준기자】 24일 0시쯤 경기도 옹진군 백령면 북포3리 전종익씨(30·해병 중사)집에서 불이 나 전씨의 부인 임수정씨(28)와 장남 민철군(3)등 2명이 불에 타 숨지고 전씨와 둘째아들(생후4일) 등 2명은 각각 2도화상을 입었다. 경찰은 전기난로과열로 불이 난 것이 아닌가 보고 정확한 화인을 조사중이다.
  • 일가족 4명/가스 질식사

    【수원=조덕현기자】 22일 상오11시10분쯤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원종동 미성아파트1동304호 임환혁씨(35)집에서 임씨와 부인 김미경씨(32)맏아들 성용군(6)둘째아들 성현군(생후 20일)등 일가족 4명이 가스에 질식돼 숨져있는 것을 임씨의 직장동료 서대원씨(32)가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 김 대통령 66회생일… 조촐한 가족모임

    ◎새벽조깅뒤 마산부친에 문안전화/“특별한 행사 마련말라” 사전 당부 김영삼대통령이 15일 음력으로 만66회 생일을 맞았다. 김대통령의 음력생일은 1927년12월4일인 것이다. 청와대에서 처음 맞은 김대통령의 생일은 이전까지 상도동에서 맞은 생일과 다른게 없었다. 아침 일찍 가족들과 함께 케이크를 자른 뒤 식사를 나누는 것으로 조촐하게 생일을 축하했다. 아침식사에는 부인 손명순여사와 둘째아들 현철씨부부,여동생내외,그리고 손자 손녀등이 참석했다. 그밖에 생일과 관련된 행사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대통령은 이날 아침 이회창국무총리를 만나 『국민들과 함께 물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라』고 지시하고 낮에는 민관식 이종근 김명윤 박용만 권오대 이병희 김정례 권익현씨등 민자당 상임고문들과 오찬을 나눴다.저녁에도 별다른 행사없이 지냈다. 김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진들에게 생일이라고 해서 특별한 행사를 마련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 때문에 비서실과 경호실은 의례적인 축하행사도 준비하지 않았다.축하란을 보냈을 뿐이다. 이만섭국회의장과 윤관대법원장,김종필민자당대표및 전두환·노태우전대통령,김대중전민주당대표,이기택민주당대표등도 이날 난을 보내 축하의 뜻을 전했다.그밖의 선물은 접수하지 않았다. 최근 낙동강등 식수원의 오염으로 민심도 좋지 않은데 생일 기분을 낼 분위기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생일잔치를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와 함께 지내온 한 측근도 『특별히 기억날만한 생일 모임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틀 뒤인 17일에는 부인 손여사가 66회 생일을 맞게 된다.역시 별다른 행사 없이 하루를 보낼 예정이라는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생일인 이날도 김대통령은 어김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나 4㎞를 뛰었다. 아침식사에 앞서 마산에 있는 부친 김홍조옹에게 전화를 걸어 문안인사를 올렸다. 이런 김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리며 『YS가 벌써…』라고 새삼 놀라는 국민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의 나이는 들었어도 김대통령의 몸과 마음은 아직 젊다. 그것은 그가 해야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 “사회개혁위해 다시 뛰겠다”/내무 지휘봉 잡은 최형우장관의 새다짐

    ◎「YS의 오른팔」 별명,30여년간 동고동락/자년 입시파동에 좌절… 8개월만에 복귀 최형우의원이 「YS(김영삼대통령의 애칭)의 오른팔」로 돌아왔다. 의지와 뚝심으로 30여년 「김영삼대통령만들기」에 온몸을 바친 그가 21일 단행된 개각에서 내무행정의 지휘봉을 잡게 된 것이다.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집권 민자당의 사무총장으로 개혁을 앞장서 주도하다가 아들의 부정입학문제에 휘말려 좌절을 맛본 지 8개월만이다.그는 사무총장 퇴임직후 스스로를 「실세」라고 했으나 이제는 다시 엄연한 「실세」로 돌아왔다. 최신임내무부장관은 이날 『김대통령이 제2의 건국을 위해 개각을 단행했다는 취지에 부응해 다시 뛰어보겠다』고 굳게 다짐했다.그러면서도 구체적인 포부는 『내무행정이 워낙 방대한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업무를 파악한 뒤 밝히겠다』고 했다. ○투옥 등 고난의 세월 최장관이 22살 새파란 청년에서 백발의 중년이 되기까지 겪은 「YS와의 동고동락」은 고난의 세월이었다. 그는 지난 2월25일 김대통령 취임식석상에서 울음을 터뜨리고말았다.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으로 숱한 투옥과 협박을 이겨낸 끝에 평생소원을 풀었기 때문이다.『이제는 내 할일이 끝났다라고 생각하니 감격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정치생활은 지난 59년부터 시작된다.동국대 정외과 3년생이던 청년 최형우는 농촌봉사활동을 하다가 3·15부정선거현장을 보게 됐다.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민주당에 입당했다.온갖 탄압을 견뎌내며 조병옥박사의 대선운동에 나섰지만 실패로 끝났다. ○71년 총선서 금배지 5·16으로 쫓기는 몸이 되기도 했던 그가 YS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공화당의 3선개헌 때.이를 반대하던 청년조직의 사무장을 맡으면서 이 조직의 실질적인 후원자이던 YS가 됨됨이를 높이 사 중용하게 됐다.이기택현민주당대표와 서석재전의원과 함께였다.그리고 71년 총선에서 울주지역에 출마,금배지를 달게 됐다. 그는 그동안 모두 일곱번의 옥고를 겪었다.부인 원영일씨는 그 때를 돌이켜 『언젠가 고문을 당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피투성이가 된 채 옷과 살갗이 피로 엉겨붙어 알코올로 몇시간을 불린 뒤에 옷을 벗겨낼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큰딸 가출때 슬펐다 최장관은 일생에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일이 세번 있었다고 말한다.그 첫번째가 지난번 부정입학사건에 연루된 둘째아들의 백일 때다.기관에 감금돼 온갖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홍역에 걸려 불덩이같은 아기를 버려둔 채 부인 원씨마저 연행해가려 했다.『왜 정치를 하게 됐나』하며 처음으로 정치생활을 후회했다고 한다.또 한번은 80년이후 엉뚱하게 부정축재자로 몰리는 바람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쓸 때였다.마지막은 사무총장직을 물러난 뒤 큰딸(29)이 가출해버렸을 때다.아버지를 유난히 따르던 딸이 『이런 대접받으려고 그 고생을 해왔느냐』며 울음섞인 항의를 해오자 그냥 말을 잊었다.그 딸은 얼마전 집으로 되돌아왔다. 이 모든 어려움도 부인 원씨의 눈물겨운 내조가 있었기에 극복이 가능했다.최장관은 『상도동시절 3평짜리 분식집을 차린 아내가 돈벌러 나가면 나는 연탄을 갈아야 했다』고 회상하며 아내의 내조를 더없이 고마워했다.
  • 「부농」일군 경기도 파주부곡리 계약재배단지(농산물개방 극복의현장)

    ◎톱밥거름 유기농법… 「무공해」 쌀 생산/「신세계」와 직거래… 판로 안정/값비싼도 많아 찾아… 소득 1.5배로 『UR협상 타결로 쌀시장이 개방되면 값싼 수입쌀이 들어온다고 다들 난리인 모양이죠.하지만 농약에 범벅이 된 수입쌀이 뭐가 무섭습니까.우리 마을 사람들은 걱정 없어요』 서울에서 통일로를 따라 승용차로 1시간정도 달리면 예부터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해 그 유명한 「경기미」를 생산하는 파주군 부곡리가 나온다. ○소량포장해 납품 2만여평의 논에다 2년째 유기농업을 하고 있는 이 마을 이환락씨(44·부곡2리 33의1)는 올해 수확한 3백가마중 2백가마는 신세계백화점에 납품하고 나머지 1백가마는 농협에 추곡수매를 마쳤다.냉해 때문에 지난해보다 수확량은 다소 줄었지만 비싸게 판매한 탓에 소득은 오히려 늘어났다. 중간유통과정을 건너뛰고 산지농가와 직거래하면 질좋은 농산물을 값싸게 공급할 수 있다는 대형유통업체의 전략이 저공해유기농법으로 미국 쌀에 맞서겠다는 억척농부의 고집과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씨가 생산한 쌀은4㎏과 8㎏들이 두 종류로 깔끔하게 소포장된 뒤 재배자이름까지 박아 백화점에 진열됐고 「유기농쌀」이어서 값이 비싼데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씨는 이 때문에 2천만원에 불과하던 연소득이 3천만원으로 늘어나 대학에 다니는 큰아들의 등록금걱정이 없어졌다. 『자식에게는 농사를 시키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는데 고등학교에 다니는 둘째가 가업을 잇겠다고 나서 가슴이 뿌듯하다』고 이씨는 자랑했다. ○둘째가 강업 잇기로 파주공고에 다니는 둘째아들 문식군(18)과 함께 인근 군부대에서 수거해온 콩비지에다 톱밥을 뒤섞어 발효시킨 밑거름을 논에 뿌리는 것이 이씨만의 유기영농비법. 토양이 건강해지자 병충해가 사라지고 거의 씨가 말랐던 메뚜기와 미꾸라지까지 되살아나 가족들의 건강식이 되고 있다. 이씨는 유통업체와 계약재배로 높은 값의 판매처를 확보함으로써 쌀개방의 파고를 어느정도 극복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 소중하다고 말했다. 30가구 8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사는 부곡리에서 생산되는 한해 쌀수확량은 1천가마정도.내년부터 모든 가구들이 유기영농을 실시해 80㎏들이 한가마를 13만원에 전량 신세계측에 공급할 계획이다.신세계측도 이들에게 영농자금을 지원함은 물론 첨단영농법 관련서적과 자체분석한 농작물유통시장정보를 제공키로 했다. 이 마을주민 이상락씨(58)도 『유기농법이 다소 힘든 점은 있으나 질좋은 쌀을 생산해야 판로가 열리고 길게 봐서 땅에도 좋으니 일석이조』라면서 『중간상인들과 다툴 필요없이 적당한 가격에 수확한 쌀 전량을 백화점에서 사가니 한시름 놓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품질좋은 쌀을 찾아 3년째 고생했다는 신세계백화점의 양곡구매담당 이재덕대리는 요즘 얼굴이 활짝 폈다. 얼마전까지 이장을 맡았던 이장호씨(62)는 『당장 쌀수확량이 좀 떨어지더라도 농약 안치고 농사하니 주민들 건강에 좋고 자연보호까지 될 뿐만아니라 미꾸라지·메뚜기를 잡으러오는 서울사람들을 보면 정말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영농자금·서적 지원 이대리는 『내년 3월쯤 부곡2리와 자매결연을 해 이곳 30여 농가에서 유기농업으로 수확되는 쌀 전량을 사들여 판매할 예정』이라면서 『유기농법으로 무농약 영농을 하는 파주읍 부곡2리 주민들과 아침마다 논두렁에서 잡아온 진짜 미꾸라지를 먹는 즐거움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신세계측은 또 이같은 무농약쌀의 수요가 계속 늘어날 것에 대비해 경북 함양군의 함양농협과도 유기농법 재배쌀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이같이 성공을 거두자 전국의 유명쌀 산지직송판매를 해오던 롯데·뉴코아·그랜드 등 대형백화점들도 유기농재배농가를 집중육성해 수입쌀에 대항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 돈으로 못따질일 돈으로 따지니(박갑천칼럼)

    사람들은 돈이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그래서 그것이면 오징어 비늘도 구해올 수 있고 참새눈물도 짜내올 수 있으며 귀신도 부릴 수 있다(유전가사귀)는 말까지 나온다.이건 좀 부픗한 표현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부잣집 자식은 저자거리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천금지자불사어시)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이말은 월왕 구천을 도와 오왕 부차를 멸망시킨 범여가 했다.그는 구천의 야멸친 사람됨으로 보아 함께 있기 어려움을 알고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가서 큰 돈을 번다.그때 그의 둘째아들이 사람을 죽이고 초나라에 갇혀있었는데 그를 구해내려면서 했던 말로 알려진다.오늘에 곱씹어도 그렇게 틀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세상사의 기미 아닌가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매사가 돈으로 다되는 것은 또 아니다.『5월 가뭄은 돈으로도 못산다』(유전란매오월한)는 말이 있듯이 비오고 바람불고 벼락치는 모든 하늘뜻을 돈으로 산다 할 수는 없다.과학의 발달이 돈으로 살수 있게도 만들어 가는 듯하나 억지는 억지를 낳아 결국 혼란으로 이어지게만 할 뿐임을 알아야겠다.하늘뜻만 못사는 것은 아니다.우리 속담에도 있듯이 『돈으로 못 살것은 지개』이기도 하다. 배우고 지체높은 사람도 지조를 판다.그게 귀신부리는 돈의 힘이다.하지만 노류장화 가운데도 팔지않는 경우가 적지않다.귀신한테 이기는 엄청난 힘이다.가령 이희준의 「계서야담」에도 그같은 기생들 얘기는 적혀있다.청백리로도 이름높은 옥계 노진의 그릇을 알아보고 도운 동기하며 잘못된 길에서 허우적거리는 일송 심희수를 바로 인도한 일타홍이 그 사람들이다.절조를 팔지않은 그 기녀들의 일편단심을 어찌 돈으로 따져 말할 일이겠는가. 돈으로는 못따질 일을 두고 굳이 돈으로 따져보려 드는 세상이다.그 역시 돈이 갖는 위력 때문이라고는 하겠지만.예컨대 주부들의 가사노동을 돈으로 따질 일이겠는가.호사가들의 관심거리로 될수 있을진 모르되 그리 강팔지게 숫자적으로 계산한다면 신성성이 가신다.한데 주부들 응답을 기초로 했다면서 「월평균 72만6천원」이라는 대가를 내놓은 곳이 있다.그런가하면 산림청은 산림이 주는혜택도 돈으로 따져 보인다.한해에 27조6천 1백억원어치나 된다면서 말이다.맞는 계산들이라 해야 할것인지. 어허.인제 태양이 주는 혜택의 대가에 부모가 길러준 대가까지 계산돼 나올 판이로구나.그건 과연 얼마일꼬.수학이 어려워져 간다 싶기만 하다.
  • 자녀/성격/지도/성취감·자존심 북돋워주라

    ◎지역사회 교육협 강좌서 연대 이훈구교수 도움말/부모 가치관 강요땐 심리적 안정해쳐/꾸준한 관심·개성 배려하는 자세 중요 『첫 아이는 얌전한데 둘째아이는 개구장이 입니다』 『옆집아이는 발랄하고 성격이 밝아 호감을 사는데 우리 아이는 이기적이고 토라지기를 잘해 주변 사람들이 싫어할 때가 많습니다』 가정마다 자녀가 많아야 둘밖에 안되는 요즘,자녀의 성격문제로 걱정하는 부모들이 많다. 한국 지역사회교육중앙협의회가 이런 부모들을 위해 27일 광화문협의회 강당에서 연대 심리학과 이훈구교수를 초청,「자녀의성격지도」를 주제로 공개강좌를 마련했다. 이교수는 성격이란 한마디로 한 개인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나타내는 독특한 행동특성이라고 정의하고 원만한 대인관계,행복한 결혼생활,성공과 출세의 기본토대가 되는 중요한 심리적 요인이라고 설명했다.성격은 특히 인격과 달라 도덕적으로 「좋다」「나쁘다」고 평가할 수 없으며 건강한 성격­아픈 성격 또는 적응적 성격­부정적인 성격으로 표현하는것이 옳다고 덧붙였다. 따라서자녀의 성격을 부모의 가치관에따라 저울질하며 부모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바꾸려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후 자녀의 성격이 특별히 부적응적이고 아픈성격이 아니라면 고쳐주려 애쓰지말고 오히려 아이의 독특한 성격을 그대로 살려 개성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배려하는것이 좋다고 말했다.예컨대 자녀가 소극적·내성적인 경우 대개의 부모들은 이를 교정하려 애쓰는데 잘 교정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자녀의 심리적 안정에 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개성있게 키운다며 요사이 우리사회 일각에서 젊은엄마들 사이에 일고있는 그릇된 「자녀의 기살리기 교육」과는 확실히 구분돼야 한다고 설명. 성격은 어느때라도 변할 수 있으며 특히 청소년기와 40세 전후에 변하기 쉽다.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자아정체가 불명확했거나 부모와 사회의 가치관과 자기의 가치관 사이에서 갈등을 느낀 사람들이다.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들이 가능하면 어려서부터 건강하고 긍정적인 성격을 갖도록 지도해야 하는데 아이의 성격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은 부모,그중에서도 어머니의 양육태도라고 그 중요성을 밝혔다. 또 아이들의 성격은 출생순위와도 관계가 있어 첫째아이는 대개 지능이 우수하고 공부를 잘하며 둘째아이는 반항적이고 질투심이 많고 셋째 또는 막내는 의존적이고 자립심이 부족하기 쉬운데 이는 부모를 포함한 주변사람들의 각별한 애정과 관심에서 출발한다.따라서 부모는 자녀양육시 아동의 성취동기를 높여주면 공부는 물론이거니와 성장해서도 자기일에서 성공을 하고 출세를 할것이고,계속 꾸지람과 야단을 통해 자녀의 성취심과 자존심을 약화시키면 학교성적이 떨어지고 성인이 되서도 큰 업적을 쌓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밖에도 이교수는 국민학생이나 중학생들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기성세대와는 다른 가치관과 행동규범을 보이는데 부모들은 이것도 걱정하거나 바꾸려들지말고 성인보다 자아가 굳건하지못한 행동특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 고액납세자 1·2·3위 정주영씨부자 독점/올 종소세 상위랭킹을보면

    ○…고액 납세자의 금·은·동메달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가족이 독차지.정명예회장은 재무상태가 좋은 현대중공업으로부터 20%의 배당을 받아 1위를 차지.배당금중 2백64억원은 현대중공업으로부터,나머지 71억1천3백만원은 현대증권,현대상선,현대산업개발,고려산업개발 등으로부터 받은 것이다.국회의원 시절 세비도 1천3백만원이 있다.그는 83∼85년 3년동안 1위를 차지했었다.올해에도 중공업의 배당금만 1백75억원에 이르러 내년에도 1위를 지킬 가능성이 크다. ○정씨가족 7명 랭크 정명예회장의 둘째아들인 정몽구 현대정공 회장과 다섯째아들인 정몽헌 현대상선 부회장도 각각 현대중공업으로부터 60억원의 배당금을 받아 2,3위에 올랐다.여섯째 아들인 정몽준 국회의원은 약 75억원의 배당금 등 모두 80억원이 넘는 소득으로 소득 순위 4위를 기록.그러나 납세순위가 5위로 소득순위보다 낮은 것은 배당금의 경우 세금을 일부 공제받기 때문.국세청이 발표한 대주주의 배당금은 실제보다 17%쯤 많다. 정명예회장 가족으로 1백위권에 오른 사람은 이밖에 정상영 금강그룹 회장(여섯째 동생·16위)·정몽근 금강개발산업회장(셋째 아들·19위)·정세영 현대그룹 회장(넷째 동생·35위) 등.정명예회장 가족 7명의 소득은 총 7백12억4천1백만원,세금은 총 2백53억4천8백만원이다. ○…부동산 경기의 침체를 반영,오피스텔 분양과 사무실 임대 등 부동산 수입을 주 수입원으로 하는 1백대 납세자가 지난 해의 37명보다 줄었다.부동산 관련 고액 납세자는 김효석씨 외에 정병훈 삼일프라자 대표(9위),오세윤 고신개발 대표(12위),최광서 도우실업 대표(14위) 등. ○최수일씨 20위에 ○…(주)새마을신문 주주로 절반의 지분을 보유한 전경환씨가 7위에 올라 눈길.주택공사가 지난 91년 수용한 새마을신문 소유의 강서구 가양동 땅 1만2천여평의 땅값을 받았기 때문. 월급쟁이인 최수일 현대중공업 대표가 20위에 오른 것은 지난해 국세청이 현대중공업을 특별 세무조사하면서 유출된 법인 자금중 출처가 불분명한 22억원을 「상여처분」 형식으로 대표에게 귀속처리했기 때문.88위인 황경로씨는 전 포철 회장과 동명이인. ○…재벌 회장들로는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이 6위,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11위,김석원 쌍용그룹 회장 13위,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17위,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24위,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27위,구자경 럭키금성그룹 회장 94위 등. ○부동산업자 급감 ○…중저가 의류제품을 판매하는 (주)이랜드의 대주주인 박성수씨는 지난 해 1백위권에 처음 진입한 이후 8위로 뛰었으며 동생으로 이사인 박성봉씨도 62위.남양알로에의 대표인 이연호씨도 44위로 올라 사업이 짭짤함을 보여주었다.가족이 함께 1백위에 오른 경우로는 박춘명씨(34위)와 이연수씨(73위)부부,최철성씨(46위)와 최일남씨(77위)부자,정시봉씨(83위)와 정승소씨(33위)부자가 있다.오피스텔 분양수입으로 공동 59위인 홍경선씨와 홍관선씨는 형제. ○…지난해보다 순위가 크게 떨어진 사람은 1위였던 문정렬 뉴삼익건설 산업대표.지난해에는 아파트와 오피스텔 분양 등으로 91억원의 수입을 올려 51억원의 세금을 냈으나 올해 1백위권 밖으로 밀렸다.지난해 1백위에 들었던 사람중 42명이 1백위에서 벗어났다. ○…깜찍한 연기와 외모로 최근 인기를 끄는 탤런트 최진실양은 지난해 모델료 수입이 늘어나 7위에서 1위로 뛰었다.지난해 1위였던 김혜수양은 5위.프로 운동선수로는 일본 기븐골프대회와 스탠리여자 오픈에서 우승한 이영미씨가 1위였다. 자유 직업가들이 신고한 「소득」은 필요한 경비를 빼거나(기장 신고자) 무기장일 경우는 수입에 업종별 표준소득률에 신고기준율을 곱한 것이므로 실제 「수입」은 신고소득의 3배정도이다. ○…세금을 많이 낸 변호사에는 「김 앤 장 법률사무소」(운현합동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가 7명이나 올랐다. 김영무대표변호사는 7억5천7백만원을 벌어 1위,이재후변호사는 5억2천만원으로 2위,공동대표 변호사인 장수길변호사가 4억2천9백만원으로 4위,조대연변호사는 4억1천9백만원으로 5위에 랭크. 7위를 차지한 정계성변호사도 이 사무소 소속으로 사법연수원 6기 수석 졸업생이며 70년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정경택변호사는 8위,서울대 전체수석 졸업과 연수원 7기를 수석으로 졸업한 신희택변호사는 10위를차지.
  • 「쌍재룡이회」 이색화제

    ◎기획원 정재룡국장­외무부 장재룡국장 별난 인연/경기고·서울대 동창… 동명 국장 공직생활/매달 어김없이 모임… 온가족까지 절친 『재룡이냐』 『어,재룡이구나』 한가한 시간,전화기를 들고 이렇게 대화를 나누면 주위의 여사무원이 까르르 웃는다.국장이 무슨 장난전화를 하는 줄 알고…. 경제기획원 정재용물가국장과 외무부 장재용미주국장.아는 사람들 사이엔 이들을 「쌍재용이회」라고 부른다.46년생 개띠,동갑나기인 둘다 소속부처에서 핵심국장인 점 그리고 현안으로 한창 골머리를 썩고 있는 점도 비슷하다.기획원 정국장은 요즘 냉해로 농산물 값이 오름세를 보여 장바구니 물가가 어찌될지 불안스럽게 지켜보고 있다.물가통으로 알려진 그는 매일 출근하면 전날 농산물가격의 오르내림세부터 점검한다. 대미 실무창구인 외무부 장국장도 북한핵문제 때문에 녕일이 없다.최근 미·북한3단계 회담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뉴욕을 다녀오기도 했다. 두 사람은 경기고 61회 동기동창이다.『한번은 학교로 여학생한테 전화가 와 받았더니 전혀 모르는학생이었어요.정재용이 한테 온 것인데,내가 받은 거죠』 같은 반이던 3학년1반 때는 이처럼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고 장국장은 설명했다.담임선생님이 무심코 『재룡이 교무실로 오라고 해』하면 그때마다 서로 바꿔들어가 일이 벌어지곤 했다는 것이다.『모의고사 성적이 나쁘다고 야단을 치는데 이상해요.나중에 알고보니 정국장 성적이었어요』. 졸업후 정국장은 서울대 법대로,장국장은 문리대 외교학과로 진학했다.공무원 생활은 70년 외무고시에 합격,외교관생활을 시작한 장국장이 1년 앞섰다.한해뒤 정국장도 행정고시에 합격,처음엔 노동부에 배치돼 일하다 3년 뒤인 74년 지금의 경제기획으로 자리를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과장승진은 장국장이 앞서 했고,국장승진은 정국장이 먼저하는등 서로 사이좋게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고 있다. 두 사람이 처음 공직생활에 발을 내딜 때부터 「쌍재용이」 모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외무부는 해외공관 근무가 잦아 국내에서 근무하는 시간이 적다.어쩌다 국내에 들어오면 그때나 잠깐 모여 회포를 풀 뿐이다.그러다 지난 90년 6년만에 장국장이 멕시코공관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그해 10월 귀국 환영모임에서 참석했던 동창들이 『쌍재룡이는 이렇게 만날 상황이 아니다』고 제안해 「쌍재용이회」가 결성돼 지금껏 한달에 한번 정도는 꼭 만난다.어쩔 때는 허름한 음식점에서,날씨가 좋으면 등산을 함께 한다.가족들도 무척 친하다. 『모임은 공직생활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지금은 외무부 장국장이 도움을 받는 쪽이라고 한다.장국장은 『주로 변한 국내상황과 시중의 얘기를 전해듣지만,부하직원 다루는 법·정책결정 판단등에 있어 정국장의 조언이 큰 힘이 될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할려고 했던 것도 아닌데 우연인지,장국장의 둘째아들과 10살 아래인 정국장의 둘째 딸 이름이 「우진」으로 똑같다.술은 정국장이 보다 세지만 식당 아가씨에게 질좋은 서비스와 안주를 받는 것은 순전히 장국장의 「국제신사」 감각 때문이라 한다.이런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 남평우의원 땅 누락신고/차남명의 제주도임야등 1백여평

    【제주=김영주기자】 제주도에 배우자와 자녀 명의로 상당 면적의 땅을 소유한 것으로 드러난 민자당 남평우의원(수원 권선 을)이 지난 11일 재산등록 과정에서 자녀 명의의 제주도내 땅 일부를 누락시킨 사실이 16일 뒤늦게 밝혀졌다. 남의원이 누락시킨 땅은 둘째아들 경훈씨(27) 명의의 서귀포시 서호동 1049의9 임야 4백23㎡와 같은 동 1049의10 대지 46㎡등 2필지 4백69㎡다. 이 땅은 1㎡당 공시지가가 11만5천원으로 총 가액은 5천3백93만원에 이른다. 남의원은 지난 87년 5월25일 서귀포시 법환동에 사는 김모씨로부터 당시 21세이던 둘째아들 명의로 이 땅을 사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남의원은 이번 재산등록때 1백14억2천93만6천원을 등록한 재력가로 연고가 없는 제주지역에 부인 명의로 남제주군 대정읍 인성리 지구의 임야·잡종지·밭등 4필지 1만1천4백74㎡,맏아들 명의로 서귀포시 서호동의 과수원 2필지 1만3천6백93㎡를 소유하고 있다. 이밖에도 남의원은 둘째아들 명의로 서귀포시 서호동과 법환동 일대 임야와 밭 7필지 5천9백73㎡를,셋째아들 명의로 서호동 임야 7천4백61㎡를 소유해 투기 의혹을 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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