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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경원선 4·27 판문점선언서 제외… 경기 북부 중심 복원 여론 높아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경원선 4·27 판문점선언서 제외… 경기 북부 중심 복원 여론 높아

    시베리아횡단철도 연결 가장 유리한 노선최근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가 철도 북측구간 공동조사에 대해 대북제재 대상에서 면제하기로 했다. 29일 통일부 등에 따르면 남북은 30일부터 경의선(개성~신의주 400㎞)과 동해선(금강산~두만강 800㎞)에 대한 철도 공동조사에 들어간다. ‘남북철도 복원 사업 유예’가 아닌 ‘공동조사 면제’지만, 정세에 따라 남북철도 복원이 급물살을 탈 수도 있다. 사단법인 ‘평화철도와 나아지는 살림살이’가 추진할 계획인 경원선(서울~원산) 복원은 4·27 판문점선언에서 제외되면서 이번 공동조사 대상에서도 빠졌다. 그러나 경기 북부 등을 중심으로 경원선 복원도 재개돼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지난 2월 국회에서 경원선 복원 공사 재개를 검토 중이라고 밝히고, 여당의 6·13 지방선거 공약에도 포함돼 있다. 경원선 복원 구간은 강원도 철원에서 월정리역까지 9.3㎞ 구간과 월정리역에서 군사분계선까지 2.4㎞ 구간, 총 11.7㎞ 구간이다. 경원선 복원은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5년 시공사가 선정되는 등 사업이 진행되다가 토지 매입 문제와 남북관계 경색 등에 따라 이듬해 공사가 중단됐다. 경원선은 한반도 서쪽 경의선과 동쪽 동해선 사이 한반도 중앙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철도망이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DMZ) 환경·관광벨트를 연결할 수 있는 노선으로 꼽힌다. 향후 북한과의 철도 연결이 실현되면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의 연결에 가장 유리한 노선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동해선에 비해 서울 수도권에서의 접근성이 뛰어나다. 남측 구간과 더불어 북측의 군사분계선부터 평강까지 14.8㎞만 복원하면 북한의 평라선(간리~나진)과 연결할 수 있고, TSR 출발 지점인 러시아 하산역까지 연계가 가능하다. douzirl@seoul.co.kr
  • 北철도 조사차 南열차 30일 출발…18일간 약 1200km 조사

    北철도 조사차 南열차 30일 출발…18일간 약 1200km 조사

    한반도 종단 철도 완공되면 中일대일로 뚫는 ‘창’ 역할 기대북한 철도 상황에 대한 남북 공동조사를 위해 우리측 열차가 30일 도라산역에서 환송행사를 하고 북쪽으로 떠난다. 조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대북제재와 관련된 국제 환경이 우호적으로 조성되면 남북한 철도 연결을 위한 착공식이 연내에 열릴 수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29일 “내일부터 북한 철도 남북 공동 현지조사가 시작된다”고 밝힌 것으로 연합뉴스가 전했다. 도라산 환송행사는 국토교통부 철도국장의 추진경과 보고,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등의 축사, 기관사에게 잘 다녀오라는 의미에서 머플러를 둘러주는 ‘출무신고’ 등으로 진행될 예정이다.조사 대상 북한 철도 구간은 경의선(개성∼신의주 약 400㎞)과 동해선(금강산∼두만강 약 800㎞)으로, 다음 달 17일까지 총 18일간에 걸쳐 조사한다. 조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남북 정상이 ‘9월 평양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대로 연내 착공식 개최도 가시권에 들어온다. 통일부 관계자는 “일정이 넉넉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정도로 급박하진 않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착공식까지 대북제재 면제 가능성에 대해서는 “착공식을 어디서 하느냐, 가져가는 물품이 제재 저촉되는 물품 있는지, 인원에 제재대상 있는지 등을 우선 봐야 한다”고 답한 것으로 연합뉴스가 전했다. 철도 연결 공사비용과 관련해서는 “처음엔 남북협력기금이 투입될 것 같고 국제금융기구, 민간투자 등 여러 투자 방식이 있다”며 “퍼주기 논란이 되지 않도록 재원조달 방안에 대해 최대한 많은 검토를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엔군사령부에 군사분계선(MDL) 통과를 48시간 전 통보해 우리 열차가 올라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덧붙였다. 남북한 철도가 연결되면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비롯한 자원이 저렴하고 원활하게 공급되고, 우리의 공산품이 유럽까지 신속하게 전달되는 등의 경제적 효과 뿐만 아니라 부산에서 유럽까지 이어지는 기차길이 중국을 거치지 않고도 연결된다는 데 의미가 깊다. 중국이 수년 전부터 야심차게 추진하는 신실크로드인 일대일로(一帶一路)가 완성되면 한국과 일본의 경제마저 종속될 것이란 우려가 높았다. 부산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한반도 종단 철도는 이런 일대일로의 포위망을 뚫는 창의 역할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이와 관련해 대북 제재를 이유로 난색을 표명했던 미국이 북한 철도조사에 ‘강한 지지(strong support)를 보낸다’고 최근 입장을 선회한 이유도 곱씹어볼 대목이다. 미국과 중국 간의 무역전쟁으로 불거진 ‘G2 패권’ 경쟁이 당분간 ‘완화’와 ‘심화’ 사이를 오가겠지만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남측 열차, 분단 이후 처음으로 동해선 금강산~두만강 달린다

    남측 열차, 분단 이후 처음으로 동해선 금강산~두만강 달린다

    南 열차 6량에 北 기관차·열차 연결시켜 2600㎞ 누비며 경의·동해선 시설 점검 통일부 “북측과 연내 착공식 개최 협의” 오늘 재선충병 약제 50t 북측에 전달도남북이 30일부터 경의선·동해선 철도 연결을 위한 북측 구간 현지 공동조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철도 공동조사에 대한 유엔과 미국의 제재가 전격 해제된 데 따른 것으로 남측 열차가 북측을 방문하는 것은 2008년 11월 개성공단 화물 수송을 위한 남측 도라산역과 북측 판문역 간 화물열차의 운행이 중단된 이후 10년 만이다. 28일 통일부에 따르면 남북은 30일부터 다음 달 5일까지 6일간 경의선 개성~신의주 구간 약 400㎞를 조사하고 다음 달 8일부터 17일까지 10일간 동해선 금강산~두만강 구간 약 800㎞를 조사할 예정이다. 남북은 2017년 12월 경의선 개성~신의주 구간을 공동조사한 적이 있지만 남측 열차가 동해선 금강산~두만강 구간을 운행하는 것은 분단 이후 처음이다. 공동조사를 위해 남측 기관차 1량과 열차 6량이 30일 오전 서울역에서 출발해 도라산역에서 환송행사를 진행한 뒤 북측 판문역으로 향한다. 판문역에서 남측 기관차는 열차를 분리해 귀환하고 북측 기관차 1량이 남측 열차 및 북측 열차를 연결해 조사에 돌입한다. 조사 열차는 신의주역까지 경의선 구간 조사를 마치고 평양 인근 택암역으로 내려와 평라선(평양~나진)을 이용해 동해선 원산역을 거쳐 안변역으로 향한다. 이후 안변역에서 두만강역까지 동해선 구간 조사를 마친 뒤 다시 원산, 평양, 개성을 거쳐 서울역으로 귀환한다. 조사 열차는 18일간 총 2600㎞의 거리를 누비게 된다. 조사에는 남측에서 기관사 2명을 포함해 통일부와 국토교통부 등 총 28명이 참여한다. 조사단은 열차에서 숙식하며 북측 철도 시설과 시스템 분야 등을 점검한다. 이후 북측 조사단과 조사결과를 공유하며 실무 협의를 추진할 계획이다. 통일부는 “현지 공동조사 이후에는 기본계획 수립, 추가 조사, 설계 등을 진행하고, 실제 공사는 북한의 비핵화 진전에 따라 추진하게 될 것”이라며 “정부는 철도 연결 착공식을 연내에 개최하는 문제를 북한과 협의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통일부는 29일 소나무재선충병 방제 약제 50t을 경의선 육로를 통해 북측 개성에 전달할 예정이다. 남북은 개성시 왕건왕릉 주변 소나무숲에서 공동방제를 하고 실무 협의도 진행할 계획이다. 북측에 전달되는 약제는 소나무재선충병 예방 및 솔껍질깍지벌레 방제에 사용되는 약제로서 유엔 대북제재에 해당하는 물자가 아니라고 통일부는 밝혔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길섶에서] 아! 박정만/손성진 논설고문

    박용래는 술을 마시면 아무나 붙잡고 울었다. 두만강 철교를 건너며 흩날리는 눈발을 보면서도 울었다. 시인을 울린 것은 가난과 고독이 아니라 생명과 자연에 대한 벅찬 감정이었다. 술은 눈물을 끌어올리는 펌프였다. 펑펑 솟았던 그의 눈물은 시가 되었다. 박정만. 박용래만큼 술과 낭만을 사랑했던 그였지만 ‘필화사건’에 죄없이 연루됐다가 흉측한 고문에 육신(肉神)이 처참하게 망가졌다. 야만의 시대에 살면서 하소연할 데도 없었던 시인을 달래준 것은 술과 눈물뿐이었다. 88올림픽이 끝나던 날, 하늘에선 불꽃놀이가 벌어질 때 그는 단칸방에서 사십을 갓 넘긴 나이로 홀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전 20일 동안 소주 100병을 마시며 시 300편을 썼다. 774쪽이나 되는 ‘박정만 시 전집’을 탐닉하듯 읽었다. 마지막 거친 숨결이 생생하다. “최후의 발악처럼/ 마구잡이 심술로 바람이 불어/ 내 한목숨을 꽃잎처럼 떨어뜨렸어”(‘썩어빠진 잠 속으로’ 중에서), “세상의 물그림자가 수틀처럼 걸려 있어/ 미리내는 한 별을 이 땅에 주고/ 별은 다시 또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지”(‘저 높푸른 하늘’ 중에서). 시인이 떠난 지 30년. 그를 잊어 가는 세상이 어쩐지 야속하다.
  • [세종로의 아침] 다시 달리려고 멈춘다/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다시 달리려고 멈춘다/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그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조차 못 하겠다. 지난해 9월 네덜란드 헤이그를 출발해 16개국 1만 6000㎞를 내처 달려 압록강 너머 북녘이 훤히 보이는 중국 단둥에 지난달 6일 이른 뒤 한 달 넘게 ‘통일 떠돌이’를 자처하고 있는 강명구(62)씨 얘기다. 1년 1개월을 오롯이 두 다리로만 매일 40여㎞를 달려오다 잠시 멈춰 섰는데 정작 북한 입경 허가가 떨어지지 않아 ‘통일 마라토너’란 타이틀을 버렸다.누군가의 말대로 무모했는지 모른다. 그는 헤이그로 떠나기 전 만난 서울 강북구 수유동 이준 열사 묘역에서도 무모했고 한없이 단순했다. 그가 한참 유럽을 관통하던 지난해 가을, 겨울은 특히 더 그랬다. 날 선 미사일 발언이 오갔고, 한반도에는 한 뼘 따스한 기운조차 스며들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가 시작되며 기적과 같은 변화가 찾아왔고 현재 남북은 해방 이후 어느 때보다 많은 접촉과 대화로 갈등과 긴장의 빗장을 풀어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질주를 응원하던 이들은 그가 신의주 땅을 밟고 평양에서 한바탕 신명나는 축제를 벌인 뒤 황해도의 할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고 판문점을 통과해 남녘에 들어선 뒤 경기 파주 임진각부터 서울 광화문까지 내달려 기나긴 유라시아 횡단 마라톤에 마침표를 찍겠다는 염원이 이뤄질 것이란 기대에 부풀었다. 그동안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 이장희 ‘평마사’ 상임공동대표 등이 나서 우리 정부 관계자나 북측과 중국에 강씨의 입경 허가가 떨어질 수 있도록 집요한 노력을 펼쳤고, 평마사 회원 등 30여명이 단둥 등에서 북한 입경 허가를 촉구하는 동반 달리기 등을 했으나 북측은 이렇다 할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강씨는 북한 땅에 발을 들이지 않은 채로 서울에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호했지만 중국 비자가 15일 만료된다. 남북이 해결해야 할 조금 더 커다랗고, 더 민족적인 과제 앞에 어쩌면 그는 너무 나약하고 한없이 무모했던 개인에 불과한지 모른다. 끝내 강씨는 독립과 항일운동의 근거지들을 달려서 돌아본 뒤 14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15일 강원 동해항에 도착하고, 다음날부터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달린 뒤 20일 고성을 출발해 30일 경기 파주 임진각에 이르는 DMZ 마라톤으로 북한 일정을 대체한다. 물론 그 뒤 입경 허가가 떨어지면 다시 북녘 땅을 밟는다는 각오다. 근래 부쩍 마라톤에 관심을 보여 온 박원순 서울특별시장도 그의 여정에 기꺼이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압록강을 따라 걸으며 눈물을 삼키고, 백두산에 올라 울고, 윤동주 생가를 돌아보며 눈시울을 적시며 무오독립선언을 새로 발견한 강씨는 두만강을 따라 동진(東進)한 뒤 고성에서 임진각까지 DMZ을 따라 서진(西進)하며 북녘 땅으로 남하하지 못한 울분을 삼킬 것이다. 해방과 분단으로 가름된 선을 따라 달리는 그의 여정에 북녘을 달리는 것 못지않은 각별함이 묻어난다. 어쩌면 할아버지 묘를 참배하겠다며 한사코 무모했던 개인과 하나 됨을 향해 도도히 흐르는 민족의 기운이 함께 만나는 일일지 모른다. bsnim@seoul.co.kr
  •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풍경…일상의 디테일을 포착하다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풍경…일상의 디테일을 포착하다

    1930년대 모습 남은 군산 정취 담아내 조선족 대하는 한국인 이중적 태도 묘사 “영화는 詩와 가까울수록 에너지 선사”“우리 삶이나 생각에 순서가 있던가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늘 순서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죠. 일상은 오히려 꿈보다 더 질서가 없어요. 무엇보다 일상에서는 다양한 디테일들이 서로 부딪치는데 그걸 유심히 보는 게 중요합니다. 디테일 안에서 사람들 간의 갈등, 서로가 느끼는 불편도 더 잘 포착할 수 있거든요. 그래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할 수 있고요.” 8일 개봉하는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이하 ‘군산’)로 관객들을 찾은 장률(56) 감독을 최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가 대화를 하는 내내 유독 많이 언급한 단어는 ‘일상’과 ‘디테일’이었다. 평범한 하루하루에 현미경을 대면 우리가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거나 혹은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뜻에서였다. 장 감독의 11번째 작품인 ‘군산’ 역시 일상적인 공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보통날의 특별한 리듬을 담아냈다. 전직 시인 윤영(박해일)은 한때 좋아했던 선배의 아내 송현(문소리)이 이혼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술김에 군산에 가자고 한다. 군산에 동행한 송현은 우연히 묵게 된 민박집의 과묵한 주인 남자(정진영)에게 관심을 보인다. 토라진 윤영은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자폐증에 걸린 민박집 딸(박소담)에게 관심을 보인다. 네 남녀의 엇갈리는 감정 사이사이로 일상에 대한 장 감독의 세밀한 시선이 교차한다. 우선 눈에 띄는 지점은 조선족에 대한 한국인의 이중적인 태도다. 윤영은 자신의 집에서 살림을 돌보는 조선족 가정부의 이름도 잘 모르면서 그녀가 윤동주 시인의 후손이라고 하자 유독 반긴다. 중국 동포 등 이주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시위에 참여했던 송현은 거리에서 조선족으로 오해받자 불쾌해한다. 장 감독은 “일부러 한국 사람들의 그런 태도를 꼬집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그런 모습이 보일 뿐”이라고 강조했다.“(조선족이) 한국에서는 소수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평소에 정치적·사회적으로 소수인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이야기하죠. 그들의 평등을 위한 운동도 하고요.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일상의 디테일한 풍경을 영화로 보여 주고 싶었어요. 그래야 ‘평소 (조선족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이렇구나’ 하고 몸으로 마음으로 와닿을 테니까요.” 장편 데뷔작 ‘당시’(베이징)를 시작으로 ‘경계’(몽골), ‘중경’(충칭), ‘이리’, ‘두만강’, ‘경주’ 등 특정 공간에서 받은 인상을 스크린으로 옮겨 온 장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는 일본식 옛 가옥과 정원 등 1930년대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군산 특유의 정취를 작품에 담아냈다. 장 감독은 “(군산처럼) 시간의 흔적이 배어 있는 어떤 공간에 있을 때 인물의 자취가 머릿속으로 그려질 때가 있다”고 했다. 바로 그 순간이 새 작품을 떠올리게 되는 때라고. “미국의 한 대학교에 특강을 하러 간 적이 있어요. 그 대학의 교수들과 산책을 하는데 건물, 조각, 화단의 모습이 딱 평양이더라고요. 그때 ‘미국에서 평양을 한번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참 재밌죠. 미국과 북한은 너무 다른데 말이죠. 이처럼 일상 속에서 우리의 편견을 최대한 없애야 해요. 그래야 새로운 것들이 눈에 보이잖아요. (현재 화해 분위기인) 남북도 마지막에는 결국 국민들이 일상에서 서로 소통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그게 아니라면 뭘 해결해도 마지막에는 늘 갈등이 남을 거예요.” 당나라 시에서 영감을 받은 ‘당시’를 비롯해 ‘경주’ 등 장 감독의 작품 곳곳에는 시적인 요소가 배어 있다. 처음 군산을 방문했을 때 “시의 질감을 느꼈다”는 장 감독은 “영화의 리듬도 시의 리듬과 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시를 좋아해요. 중국의 고전 시를 특히 많이 읽습니다. 저는 영화가 시와는 가까울수록 좋고 소설과는 멀수록 좋다고 봐요. 소설이라는 매체는 너무 많은 걸 흡수하게 해요. 시는 흡수하기보다 오히려 에너지를 주죠. 그래서 어떤 영화를 보고 ‘한 편의 소설을 본 것 같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에요. ‘한 편의 시 같은 영화였다’는 이야기가 최고의 찬사죠.”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의병 홍범도·시인 윤동주가 통탄할 너무 매끈히 덧입힌 ‘그날들의 흔적’

    의병 홍범도·시인 윤동주가 통탄할 너무 매끈히 덧입힌 ‘그날들의 흔적’

    러시아 크라스키노에서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훈춘시로 가려면 러시아, 중국 세관을 차례로 거쳐야 한다. 수백여m를 사이에 두고 두 곳은 극명히 비교된다. 낡고 허름한 러시아 세관에 비해 중국 세관은 최신 지문 인식 기계를 도입했고, 규모 역시 수십 배나 된다. 비포장도로도 중국으로 들어서면 매끈한 아스팔트로 바뀐다. 달라진 중국의 모습을 새삼 느낀다.지난 24일 훈춘시에서 하루를 보내고 투먼시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1시간 정도 더 가면 왕칭현 봉오동이다. ‘봉오저수지’라는 한글과 한자를 함께 적은 간판을 지나 10여분을 더 걸어가니 매끈한 화강암으로 만든 ‘봉오동 기념비´가 나온다. 2013년 투먼시 인민정부가 세운 것으로, 글씨 윗부분에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별 문양이 붙었다. 그 뒤로 100m 정도 떨어진 흙바닥에 1993년 만든 낡은 기념비가 적벽돌 주춧돌을 그대로 드러낸 채 방치돼 있다.두 기념비는 문구가 조금 다르다. 새 기념비는 봉오동전투에 관해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 처음으로 일본 침략군과 맞서 싸워 중대한 승리를 거둔 규모가 비교적 큰 전투”라는 부분을 추가했다. 두 개의 기념비에서 중국의 역사관을 어렴풋이 느낄수 있다. 기념비 왼편 계단을 올라 비탈길을 10분 정도 더 가면 봉오동 전적지를 볼 수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댐을 만들며 많은 지역이 수몰됐지만, 그나마 저수지 너머로 당시 전투지가 남아 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연해주를 비롯해 간도와 만주에서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일어났다.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 정규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다. ‘나는 홍범도´로 불리는 의병장 홍범도가 이끄는 부대와 난무의 대한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가 산에서 매복하다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한 야스가와 지로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19사단의 ‘월강 추격대대’를 격파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독립군 전사 4명, 부상 2명이라고 발표했다. 다만 이 숫자에 관해서는 의견이 여전히 갈린다. 버스를 타고 80㎞를 달려 옌지시로 향했다. 한 식당에서 옌볜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학자로 꼽히는 김성호(67·전 조선력사연구소장) 옌볜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그는 1980년대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에서 근현대사를, 1990년대는 인하대에서 조선근현대사를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은 독특한 이력이 있다. 그에게 봉오동전투 일본군 사상자 수가 왜 불명확한지 묻자 “하나의 역사를 두고 조선, 미국, 중국, 일본이 다 다르게 말했다. 자기 나라에 맞게 부풀리거나 줄이는 사례가 당시에는 흔했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에 관해서도 “당시 독립신문이 일본군 2000명이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장소에 직접 가 봤나. 2000명이 누울 자리 있던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과거와 달리 지금도 정권이 앞장서서 그런 식으로 주장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남북이 갈라진 지금 역사 인식을 통해 분단 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며 “안중근 의사, 일본군 위안부, 항일투쟁 등 남북 역사학계가 함께할 수 있는 주제부터 다뤄야 한다”고 충고했다.옌지시에서 룽징시를 향해 1시간 정도 더 달리면 명동학교가 나온다. 명동학교는 ‘간도 대통령’으로 불린 민족운동가 김약연이 세운 학교다. 그는 1908년 간도 명동으로 이주해 한인 집단 촌락을 건설하고, 명동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윤동주를 비롯해 문익환, 나운규, 송몽규 등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1929년까지 모두 1200여명의 졸업생이 나왔다. 졸업생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윤동주다. ‘명동’, ‘윤동주 생가’라고 쓰인 큰 안내돌을 돌아 마을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윤동주 생가와 마주한다. 1932년 윤동주가 용정 은진학교에 진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팔려 허물어졌던 것을 1994년 복원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편입해 공부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해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릿쿄대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교토 도시샤대 문학부로 전학했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했지만, 항일독립운동으로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다 옥사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게 살기를 바랐던 민족시인의 향취를 이곳에서 느끼긴 어려웠다. 명동촌은 봉오동 전적지와 마찬가지로 ‘연변조선족자치주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돼 관리 중이다. 집 인근에 윤동주의 시가 적힌 금색 조형물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이곳에서 200여m 정도 떨어진 명동학교는 너무 번듯하게 새로 지어놔 어색하기까지 했다. 명동학교에 들어가니 교실에 윤동주 인형을 만들어 사진 촬영용으로 쓰고 있었다. 준수한 얼굴의 인형을 바라보며 실소가 났다. 명동학교의 옛 모습은 간데없고 인공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값싼 관광지를 찾은 느낌만 들었다. 현지 가이드가 ‘중국은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 한다’며 농담을 건넸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명동학교를 나와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된 룽징시 비암산의 일송정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산 정상까지 오르며 조잡한 관광물을 계속 마주쳐야 했다. 일송정 역시 울긋불긋한 정자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보며 울분을 달래고 마음을 다잡았던 해란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흔적만 남은 러시아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중국풍으로 바뀐 중국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보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해를 등지고 산에서 내려오며 ‘우리는 그동안 무얼 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글 투먼·룽징(중국)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전호환 부산대총장, 김일성대학 정만호부총장 통일시대교육협력방안 논의...두만강 포럼서.

    전호환 부산대총장, 김일성대학 정만호부총장 통일시대교육협력방안 논의...두만강 포럼서.

    전호환 부산대학총장이 중국에서 김일성대학 정만호 부총장을 만나 통일시대 교육협력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부산대학은 전 총장이 지난 12일부터 15일까지 중국 연변대학교에서 열린 연변대 접경지역 국립대학 컨소시엄과 두만강 접경 국가들의 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두만강 포럼 행사에 참석했다고 16일 밝혔다. 전 총장은 전국 10개 거점 국립대 협의체인 ‘거점 국립대학교 총장협의회장‘ 자격으로 이들 행사에 참석했다. 연변대 접경지역 국립대학 컨소시엄 행사는 올해 4월 인천에서 열린 ‘인천대 통일통합연구원-연변대 조선한국연구센터 공동 심포지엄’의 연속회의 차원에서 마련됐다. 이날 컨소시엄은 ‘국가차원의 통일대비와 통일 이후의 혼란을 최소화하는 대응’을 주제로,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미래 한반도의 통일을 대비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논의하는 장이 됐다. 두만강 포럼(13~15일)에서는 한국과 북한·중국·러시아 등 두만강 유역 접경지역 국가들의 정부·기업·학계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해 동북아 평화와 발전을 위한 협력 방안을 모색했다. 또 전 총장은 두만강 포럼행사 때 김일성종합대학 정 부총장을 만나 통일한국 시대를 대비한 다양한 교육 및 학문 분야의 협력 방안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두만강 포럼은 두만강 접경국의 경제·법률·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공존과 협력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포럼 행사로, 한국 고등교육재단과 중국 연변대가 지난 2008년부터 매년 개최해 오고 있다. 올해 제11회를 맞아 남·북·중 3국의 경제·법학·철학·문학·문화·역사·언어 등 7개 분야에 걸쳐 동북아 평화와 발전을 위한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전 총장은 “ 최근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분위기를 타고 남·북·중 3국의 민간 교류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번 행사 의의가 컸다”며 “김일성대학 정 부총장을 만나 미래 통일한국 시대 남북의 교육 및 학문적 교류와 발전 방안에 대한 의견도 나눴다”고 말했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 [세종로의 아침] 부산에서 떠나는 대륙행 철도/이석우 국제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부산에서 떠나는 대륙행 철도/이석우 국제부 선임기자

    “닿기만 해도 삭아 부서질 듯 퇴락한 침목들, 무너져 내릴 듯 연약한 지반, 오랜 세월 기관차 한 대 달렸을 것 같지 않은 녹슨 레일…. 노인이 낡은 철로에 다가가 꿇어앉은 채 철로를 끌어안았다….”유엔개발계획(UNDP) 주도로 진행되던 ‘두만강개발계획’(TI)에 참여했던 한 국내 학자가 1990년대 초 나진·선봉 철도 등 북한 기반시설 조사 중에 목격한 일이다. 노인은 TI 조사팀의 일본측 전문가였다. 1930~40년대 제국주의 일본의 남만주철도회사에서 일했던 이 일본인 전문가는 40여년 만에 젊은 시절 관여했던 북한 철도 현장과 해후하던 참이었다. 1990년대 초 동구권 붕괴 속에서 새 길을 모색하던 북한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고, 오랜 빚장을 열고 중국식 개혁개방을 본격화할 것이라는 기대가 넘쳐났다. TI 청사진 속에 중국 훈춘에서 러시아 포시에트에 이르는 북·중·러 국경지대 개발 계획도 활기에 넘쳤고, 북한 당국도 나진·선봉 특구 계획에 속도를 내려 했다. 한국과 주변 국가들도 북한의 국제사회 복귀와 개혁을 위한 환경 조성에 공을 들였다. 제국주의 일본은 1931년 만주 침략을 시작으로 중국 침략을 가속화했고, 점(주요도시)과 선(철도)을 통해 드넓은 중국 대륙의 점령 면을 넓혀 갔다. 철도는 그들에게 침략과 수탈 도구였지만 한반도와 만주, 중국 대륙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교량 역할도 했다. 1930~40년대를 기억하는 세대들은 경성역(서울역)을 떠나 신의주, 봉천(중국 선양)을 거쳐 상하이로 달리던 열차 행렬을 기억한다. 서울과 한반도는 철로로 대륙과 이어져 있었다. 2000년 남북 관계가 진전되자 철도연결사업도 되살아났었다. 지난달 남북 정상회담 이후 잠자던 철도 연결 구상이 다시 힘을 받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뉴욕에서 남북한과 일본, 중국, 러시아, 몽골, 미국 등 7개국이 참여해 교통·물류 공동체를 만들자는 ‘동아시아철도공동체’ 구상을 제시했다. 정부도 경의·동해선 철도 연결을 위한 현지 조사 준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소식이다. 남북 철도 연결 및 전제조건격인 북한 철도 현대화 사업과 관련, 천문학적인 비용, 시기 및 대북 제재 등을 이유로 우려와 반대도 적지 않다. 그러나 기술·재정적 어려움보다는 넘어야 할 정치·외교·정서적 산들이 더 높다. 철도 현대화는 북한의 경제개혁과 변화의 첫발 격이다. 섬이 돼 버린 한반도 남쪽의 대륙을 향한 질주를 위해서도 이는 필요조건이다. 낡은 철로를 끌어안은 일본인 전문가의 모습은 과거를 넘어 미래를 향한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부산을 출발한 철마 행렬이 북한 땅을 넘어 대륙으로 달릴 때 한반도의 평화도 견고해질 것이다. 주적과 민족, 자산과 부채(짐)라는 양면성의 북한 문제는 성장 한계에 빠진 우리에게 위기이자 기회다. 11월 미국 중간선거 이후 트럼프의 변덕이 어떻게 한반도 정세를 뒤집어 놓을지 예측불허의 상황 속에서 중재자를 넘어 당사국으로서 북한 문제를 더 큰 청사진 속에서 더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할 때다. 한반도를 둘러싼 각축은 진행 중이고, 선량한 외세는 없다. jun88@seoul.co.kr
  • 탈북민·실향민, 향토문화의 명맥 유지를 위해 ‘손잡다’

    탈북민·실향민, 향토문화의 명맥 유지를 위해 ‘손잡다’

    북한에 고향을 둔 탈북민과 실향민들이 무형문화제 전승을 위해 손을 잡았다. 오는 12일 부터 제주 성읍민속마을에서 개최되는 ‘제59회 한국민속예술축제’ 중 ‘두만강뗏목놀이소리’ 공연을 위해 남북하나재단과 행정안전부 이북5도 함경북도가 협력했다. 1958년부터 시작된 ‘한국민속예술축제’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민속예술단체가 소속 시·도의 명예를 걸고 참가하는 행사로, 오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해왔다. 이 행사에서 탈북민과 실향민은 함경북도 대표로 「두만강뗏목놀이소리」를 선보이는 것이다. 남북하나재단과 이북5도위원회는 공동으로 참가 대상자를 모집했다. 이 가운데 전통문화 보존에 사명감이 있는 함북(양강도 포함) 출신 탈북민 6명을 선발했고, 이들은 실향민 28명과 함께 공연을 준비했다. 70년이 넘는 분단의 세월 동안 실향민 1세대의 헌신으로 명맥을 이어온 이북5도 무형문화재는 보유자의 사망으로 ‘청자·백자·결자 도공의 기술’이 지정 해제되는 등 열악한 전승환경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두만강뗏목놀이소리’는 함경북도의 풍부한 산림자원인 나무를 벌목, 운송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노동요이다. 벌목한 나무들을 떼를 엮어 두만강 하류지역으로 나르는 긴 여정에서 고되고 외로운 신세를 읊조리던 것이 현재의 ‘두만강뗏목놀이소리’로 전승됐다. ‘두만강뗏목놀이소리’는 함경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지정일 2007.6.11.)로 지정돼 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소월과 육사에 함께 취한 남북… 평양은 역시 멀지 않았다

    소월과 육사에 함께 취한 남북… 평양은 역시 멀지 않았다

    평양은 역시 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수행원, 그리고 기자단을 태운 공군 1호기는 ‘ㄷ’ 자의 서해 직항로 경로를 좌석 앞 모니터에 정확하게 펼쳐 보였다. 나는 비행기의 머리가 항로를 따라 시시각각 순조롭게 순항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서울공항에서 평양국제비행장에 도착하는 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2008년 봄에 평양 근교 역포구역에 어린이사과농장을 만들기 위해 다녀온 뒤로 10년 만의 방북이었다.평양 시내로 들어가는 길가에 환영 나온 시민들이 어마어마한 사람의 파도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가도 가도 끝없이 늘어서서 손을 흔들고 깃발을 흔들고 발을 구르고 있었다. 10만명이 넘을 거라고 했다. 남녀가 따로 없었고 노소가 따로 없었다. 버스 안에서 차범근 감독이 유홍준 교수를 보며 말했다. “이상하네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려고 하죠?” 차 감독의 눈자위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물이 나야 정상이지. 울고 싶을 때는 실컷 울어 버려요. 아무 걱정 말고 울어 버려요.” 이렇게 말하면서 유 교수도 눈가를 훔쳤다.서로 대화 한번 나눈 적 없는 남과 북의 시민들이 버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함께 우는 것으로 만남은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울어 볼 일이 없는 세상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 밥을 버느라, 통장의 잔고를 늘리느라, 오로지 내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비즈니스를 위한 일에 매달리느라 울어 볼 날이 없었다. 고려호텔 2층 뷔페의 메뉴 중 하나로 나온 돌목어식해는 처음 먹어 보는 북쪽 음식이었다. 널리 알려진 가자미식해와 모양과 빛깔은 비슷했으나 식감이 완전히 달랐다. 돌목어는 도루묵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봤다. 북측 접대원에게 물어도 그는 도루묵을 모르고 나는 돌목어를 모르니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걸 입에 넣고 씹으면 비리지 않은 쫄깃한 생선회를 씹는 느낌이 났다.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퀴퀴하고 들척지근한 맛도 없었다. 부드럽고 몰캉한 생선 식해에다 흰 밥을 먹는 것으로 평양 일정은 시작됐다.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옥류아동병원을 방문하는 김정숙 여사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유홍준 교수, 김형석 작곡가, 차범근·현정화 감독,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박종아 평창아이스하키남북단일팀 주장, 에일리·알리·지코 같은 가수들, 마술사 최현우는 소형버스 14호차를 함께 타고 다녔다. 우리 일행이 옥류아동병원에 도착한 직후 북측의 리설주 여사가 승용차에서 내렸다. 리설주 여사는 병원 관계자들과 30분 가까이 병원 입구에 꼿꼿이 서서 김정숙 여사를 기다렸다. 그녀는 한 번도 의자에 앉지 않았다. 남북 정상회담 일정 내내 김정은 국무위원장 부부가 문재인 대통령 부부를 깍듯하게 모시듯 환대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아동병원에 도착한 김정숙 여사는 리설주 여사에게 특별수행원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가까이에서 악수하면서 잡은 리설주 여사의 손은 연약하고 따뜻했다. 저녁에 평양대극장에서 ‘2018 평양 수뇌회담 환영공연’이 열렸다. 평양 시민들은 김정은 위원장이 입장할 때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와 함께 ‘만세’ ‘만세’를 입 모아 외쳤다. 김 위원장이 손짓으로 제지를 해도 그 웅장한 소리는 끝이 없었다. 최고지도자를 향한 그 존경심의 표현은 머리끝이 곤두설 정도로 극적이었다. 공연은 우리도 잘 아는 ‘반갑습니다’를 시작으로 북쪽 노래와 남쪽의 노래를 섞어 진행됐다. 남쪽 가요 중에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아침이슬’ ‘흑산도 아가씨’와 같은 노래들이 들어 있었다. 모두 북한식 편곡과 연주로 우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던져 주었다. 공연에 등장한 배우들의 한복 디자인은 현재 남쪽의 한복 디자인과 거의 비슷했다. 공연의 절정 부분에 한돌이 작사하고 작곡한 ‘홀로아리랑’이 배치됐다. “백두산 두만강에서 배 타고 떠나라/ 한라산 제주에서 배 타고 간다/(…)/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 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평화와 번영을 향해 가는 길이 순조롭고 반듯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남북을 가로막기도 하고 우리의 운행을 방해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듯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 평양은 확실히 변화하고 있었다. 시내를 걸어가는 시민들의 발걸음은 밝고 자신감이 넘쳤고, 여성들의 옷차림도 전보다 훨씬 다양해졌다. 어떤 젊은 여성은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휴대폰(손전화)을 계속 들여다보며 거리를 걸어갔다. 저녁 환영만찬이 목란관에서 열렸다. 이 연회의 차림표를 여기 북한 표기대로 적는다. 백설기, 약밥, 칠면조말이랭찜, 해산물 물회, 과일남새생채, 상어날개야자탕, 백화대구찜, 자신소심옥구이, 송이버섯 편구이와 볶음, 흰 쌀밥, 송어국, 도라지 장아찌, 오이숙장과, 수정과, 유자고, 강령록차김정숙 여사는 첫날 환영만찬에서 ‘동무생각’을 불러 왕년의 솜씨를 뽐냈다. 우리 14호차의 안내를 맡은 여성 두 사람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 일하는 젊은 엄마들이었다. 탁아소에 아기들을 맡기고 나온 이들 중 한 사람은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고 한다. 그녀는 소월과 육사의 시를 이야기했다. 나는 이들이 사용하는 핸드폰을 한번 들여다봤다. 뒷면에 ‘평양’이라고 적혀 있는 이 핸드폰의 앱에는 체계관리(설정), 조선대백과사전을 비롯해 류경바둑, 별찌까기와 같은 게임이 들어 있었다. 십여 년 전부터 북한에서 휴대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사용자가 50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평양 방문은 우리에게 휴대폰으로부터 해방된 여행이었다. 혹시나 진동이 울리나 싶어 무의식적으로 양복 안주머니 쪽으로 손이 간다는 분도 있었다. 9월 19일. 방북 이튿날 일정은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점심 때 옥류관에서 열린 오찬장에 도착하자 남북 공동선언 합의문이 만들어졌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큰 숙제를 끝낸 듯 표정이 밝아 보였다. 평양을 방문한 수행단보다 남쪽의 국민들이 더 빨리, 더 생생하게 뉴스를 접했을 것이다. 옥류관 오찬으로 나온 음식은 평양냉면뿐만이 아니었다. 잉어달래초장무침, 자라탕, 송이버섯볶음 등이 맛있었다. 나는 냉면을 한 그릇 먹고 나서 반 그릇을 더 먹었다. 평양에서 각 장르의 미술가들이 창작하고 그 창작물을 전시, 판매하는 만수대창작사를 들르는 일은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나는 ‘감자꽃 필 때’라는 제목의 유색판화 한 점을 구입했다. 큰 가격은 아니었지만 그림 값을 깎는 ‘가격투쟁’에는 실패했다. 대동강의 능라도에 있는 5·1경기장은 15만명의 평양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집단체조와 예술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가슴이 자꾸 두근거렸다. 카드섹션에 참여하는 경기장 반대편 ‘배경대’는 1만 7490명의 중학생들로 구성됐다고 했다. 남과 북의 양 정상들이 경기장에 막 도착했을 때 15만명이 하나의 목소리로 환호하는 소리를 상상해 보라. 대규모 평양 시민들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에 나섰다. 거의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집단체조 ‘아리랑’의 일부와 남북 정상회담을 축하하는 특별공연이 수만 명의 청년학생과 예술가들에 의해 펼쳐졌다. 공연은 북한식 집단주의가 역사적 경험과 만나면서 어떠한 예술적 영향력을 생산하는지 웅장하게 보여 주었다. 평양 방문단이 백두산을 간다는 소식이 들린 것은 19일 밤 9시쯤이었다. 백두산을 간다는 말에 우리는 들뜨기 시작했다. 방한복을 싣고 공군 2호기가 평양국제비행장에 온다는 말도 들렸다. 공군 1호기 조종사는 삼지연비행장의 활주로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미리 떠났다고도 했다. 젊은 가수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대박!” 새벽 1시쯤 잠이 든 나는 4시에 모닝콜을 받았다. 평양 거리는 불을 켠 곳이 별로 없었다. 5시 30분 비행장으로 가는 길은 어두웠다. 비도 추적추적 내렸다. 그때 버스 창문으로 우리를 환송하러 나온 평양 시민들이 보였다. 불빛 하나 없는 거리에서 그들은 손을 흔들면서 연도에 줄지어 서 있었다. 평양에 도착했을 때보다 숫자는 적었지만 환송 열기는 그에 못지않아 보였다. ‘뭉클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일 것이다. 비행장에서는 남쪽에서 급히 공수해 온 방한복이 두 벌씩 지급됐다. 기자도, 그룹 총수도, 노동자도, 학생도, 성직자도, 교수도, 공무원도, 국회의원도 모두 하나같이 점퍼로 중무장을 마쳤다. 백두산으로 가는 비행기까지 따로 수속 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좌석표도 없었다. 우리에게 배정된 고려항공에 탑승해 빈자리에 앉으면 그만이었다. 마치 수학여행을 가듯이 말이다. 7시 40분 평양에서 한 시간을 날아가 삼지연비행장에 도착했다. 2005년 남북작가대회 때 삼지연에 가본 이후 13년 만이었다. 해발 1300m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삼지연의 공기는 서늘한 가을이었다. 우리는 한두 달 앞당겨 가을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어디 보자기에도 싸갈 수 없는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졌다. 삼지연에서 백두산까지의 길은 32㎞다. 모든 길의 양쪽 갓길에 이끼를 깔아 남과 북의 양 정상을 맞이하려는 노력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갔다. 백두산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난간의 테두리도 대리석으로 새로 단장했고 천지로 내려가는 삭도(케이블카)도 운행을 멈추지 않았다. 장군봉 정상까지 SUV 차량으로 올라간 수행원들도 있었고, 두 정상과 함께 천지로 내려가는 삭도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삭도를 타고 생전 처음 천지 물을 손에 적시는 행운을 누렸다. 꽃은 졌지만 잎이 푸르게 남아 있는 만병초 잎사귀 하나를 따서 수첩에 끼워 넣었다. 두메양귀비는 보이지 않았지만 구절초로 짐작되는 식물의 씨앗을 나는 은밀하게 봉투에 넣었다. 숲에서 발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손가락 길이만 한 가문비나무 어린 새싹을 살짝 뿌리째 뽑아 들었다. 아름드리나무가 내 수첩 속으로 들어왔다. 평양도 백두산도 이제 먼 길이 아니다.
  • 남북 ‘경의·동해선 연결’ 연내 착공 기대감

    “한·미 정상 공감대… 실무협의 작은 문제” 지난 28일 열린 청와대 남북공동선언 이행추진위원회에서 ‘경의선·동해선 철도 연결’과 관련해 10월 중 현지조사에 착수키로 하면서 연내 착공식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이는 향후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등 경협을 위한 인프라이자 향후 동아시아철도공동체로도 발전할 수 있는 시발점이다. 정부 관계자는 30일 “동·서해선(경의선) 철도에 대한 남북 공동 현지조사와 관련해 유엔사와의 협의를 거쳐 구체적인 일정을 마련할 것”이라며 “유엔총회를 계기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감대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남북은 지난 8월 경의선 철도의 북측 구간을 공동 조사하려다 유엔사의 반대에 가로막혀 계획이 무산됐다. 이에 대해 제재 문제로 유엔사가 반대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이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한·미) 두 정상 간에 큰 틀에서 방향이 정해졌으니 실무 협의는 작은 문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0월 현지조사에서는 동해선 철도의 금강산~두만강 구간, 경의선의 개성~신의주 구간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게 된다. 철로, 교각, 터널 등의 상태를 살펴 공사의 윤곽을 잡고 예산 등을 산정하는 과정이다. 시간적으로 10월 현지조사가 진행되면 연내 착공이 가능하다. 다만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완화되지 않으면 착공식은 해도 공사 진척은 쉽지 않다. 유엔 안보리 결의(2397호)에 따르면 철도·궤도용 기관차, 신호 설비, 차량 등 품목의 대북 반출은 금지된다. 이에 대해 한 대북 소식통은 “북·미 간 비핵화 협상에 모멘텀이 기대되니 도로·철도 연결 사업도 신중하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 아니겠냐”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안도현 시인 특별기고]평양은 멀지 않다

    [안도현 시인 특별기고]평양은 멀지 않다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당시 수행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안도현 시인이 서울신문에 당시 감동을 담은 기행문을 보내오셨습니다. 안 시인이 보고 느꼈던, 그리고 언론 매체에선 볼 수 없었던 정상회담 이면의 이야기들을 원문 그대로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듯 생생한 북한의 풍경들을 함께 즐겨 보시기 바랍니다.평양은 역시 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수행원, 그리고 기자단을 태운 공군 1호기는 ‘ㄷ’자의 서해 직항로의 경로를 좌석 앞 모니터에 정확하게 펼쳐보였다. 이른 새벽 해 뜨기 전에 잠을 자지 못하고 나선 길이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비행기의 머리가 항로를 따라 시시각각 순조롭게 순항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서울공항에서 평양국제비행장에 도착하는 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2008년 봄에 평양 근교 역포구역에 어린이사과농장을 만들기 위해 다녀온 뒤로 10년 만의 방북이었다. 순안비행장이라 불리던 평양국제비행장 청사는 현대식 건물로 면모를 완전히 바꿨고, 의장대와 환영 나온 평양 시민들의 함성이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차범근도, 유홍준도…벅찬 감동에 “왜 이렇게 눈물이” 평양 시내로 들어가는 길가에 환영 나온 평양 시민들이 어마어마한 사람의 파도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가도 가도 끝없이 늘어서서 손을 흔들고 깃발을 흔들고 발을 구르고 있었다. 10만 명이 넘을 거라고 했다. 남녀가 따로 없었고 노소가 따로 없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천천히 움직였고 우리는 시민들의 진심 어린 표정 하나하나를 가까이에서 읽을 수 있었다. 버스 바깥도 버스 안도 만남의 감격의 출렁거렸다. 선두에서 남북 정상은 정상끼리, 행렬 뒤쪽에서 같은 동포인 우리는 우리끼리 만나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차범근 감독이 유홍준 교수를 보며 말했다. “이상하네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려고 하죠?” 차 감독의 눈자위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물이 나야 정상이지. 울고 싶을 때는 실컷 울어버려요. 아무 걱정 말고 울어버려요.” 이렇게 말하면서 유 교수도 눈가를 훔쳤다. 서로 대화 한번 나눈 적 없는 남과 북의 시민들이 썬팅 처리된 버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함께 우는 것으로 만남은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울어볼 일이 없는 세상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 밥을 버느라, 통장의 잔고를 늘리느라, 오로지 내 자식 뒷바라지 하느라, 비즈니스를 위한 일에 매달리느라 울어볼 날이 없었다. 누군가가 눈물 타령한다고, 감상적이라고 또 이죽거린다고 해도 평양에서는 울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공식수행원들의 숙소는 백화원초대소, 특별수행원들의 숙소는 고려호텔이었다. 오랜만에 들어선 고려호텔은 별다른 장식 없이 조용히 낡아가고 있었다. 1인 1실로 배정된 방에는 사과, 배, 귤, 바나나로 구성된 과일 한 접시와 과자, 사탕, 껌이 담긴 접시 하나가 ‘당신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는 팻말과 함께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한 내게 재떨이는 또 반가운 선물이었고. 호텔 창밖으로 평양화력발전소 굴뚝에서 희뿌연 연기가 솟아올라 평양 시내 상공을 뒤덮고 있었다. 호텔에서 가까운 평양역 구내로 화물차와 전철이 쉼 없이 오가는 게 보였다.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음식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호텔 2층 뷔페식당의 메뉴 중 하나로 나온 돌목어식해는 처음 먹어보는 북쪽 음식이었다. 널리 알려진 가자미식해와 모양과 빛깔은 비슷했는데 식감이 완전히 달랐다. 돌목어는 도루묵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봤다. 북쪽 접대원에게 물어도 그는 도루룩을 모르고 나는 돌목어를 모르니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걸 입에 넣고 씹으면 비리지 않은 쫄깃한 생선회를 씹는 느낌이 났다.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퀴퀴하고 들척지근한 맛도 없었다. 부드럽고 몰캉한 생선 식해에다 흰 밥을 먹으면서 나는 1930년대 후반 시인 백석을 떠올렸다. ●김정숙 여사 ‘영부인 외교’ 동행한 리설주 여사 ‘깍듯한 환대’ 인상적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옥류아동병원을 방문하는 김정숙 여사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유홍준 교수, 김형석 작곡가와 같은 문화예술계 인사, 차범근·현정화 감독,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 박종아 평창아이스하키남북단일팀 주장 등 체육계 인사, 에일리·알리·지코 같은 가수들, 마술사 최현우는 소형버스 14호차를 함께 타고 다녔다. 14호차 일행이 옥류아동병원에 도착한 직후 북쪽의 리설주 여사가 승용차에서 내렸다. 리설주 여사는 병원 관계자들과 30분 가까이 병원 입구에서 김정숙 여사를 기다렸다. 그녀는 한 번도 의자에 앉지 않았다. 정장 차림에다 하이힐을 신고 부동자세에 가까운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북 정상회담 일정 내내 김정은 국무위원장 부부는 문재인 대통령 부부를 깍듯하게 모시듯 환대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한 국가의 지도자이기 전에 젊은 부부가 웃어른을 모시는 우리의 전통 예절을 잊지 않으려는 자세가 분명했다. 아동병원에 도착한 김정숙 여사는 리설주 여사에게 특별수행원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가까이에서 악수하면서 잡은 리설주 여사의 손은 연약하고 따뜻했다. 이어서 김원균 음악종합대학을 방문했다. 김원균은 북한의 국가와 ‘김일성장군의 노래’ 등을 작곡한 사람으로 북한 정권 초기 앞장서서 음악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했다. 저녁에 평양대극장에서 ‘2018 평양 수뇌회담 환영공연’이 열렸다. 평양 시민들은 김정은 위원장이 입장할 때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와 함께 ‘만세’ ‘만세’를 입 모아 외쳤다. 김 위원장이 손짓으로 제재를 해도 그 웅장한 소리는 끝이 없었다. 최고 지도자를 향한 그 존경심의 표현은 머리끝이 곤두설 정도로 극적이었다. 공연은 우리도 잘 아는 ‘반갑습니다’를 시작으로 북쪽 노래와 남쪽의 노래를 섞어 진행되었다. 남쪽 가요 중에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아침이슬’ ‘흑산도 아가씨’ ‘그대 없이는 못 살아’와 같은 노래들이 들어 있었다. 모두 북한식 편곡과 연주로 우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던져주었다. 남쪽의 대중가요를 선곡한 것도 모두 남쪽 손님들에게 예를 갖추기 위한 거라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그렇지만 나는 귀에 익숙한 노래를 들으면서도 왠지 불편했다. 낯간지러운 가사와 트로트풍의 가요를 내가 모두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국에 나가 북한 식당을 들렀을 때 점점 남쪽 사람들의 입맛대로 음식들이 변화하는 것을 볼 때 느끼는 불편함과 유사한 것이다. ●‘홀로아리랑’에 눈물…“어떤 난관도 아리랑 고개 넘듯 헤쳐 가야” 환영공연에 등장한 인민배우들의 한복 디자인도 현재 남쪽의 한복 디자인과 거의 비슷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북한이 원래의 것을 놓치고 남쪽을 흉내 내는 일로 남쪽을 배려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진행될 모든 남북 관계에서 북한은 원래의 북한을 유지해야만 화해와 협력도 대등한 관계 속에서 진전될 것이 아닌가. 공연의 절정 부분에 한돌이 작사하고 작곡한 ‘홀로아리랑’이 배치되었다. 가사 뒷부분은 이렇다. “백두산 두만강에서 배타고 떠나라/ 한라산 제주에서 배타고 간다/ 가다가 홀로섬에 닻을 내리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해보자/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 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평화와 번영을 향해 가는 길이 순조롭고 반듯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남북을 가로막기도 하고 우리의 운행을 방해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듯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 1980년대 후반에 남쪽에서 만들어진 이 노래가 2018년 평양에서 울려 퍼진다는 것은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뜻이다.평양은 확실히 변화하고 있었다. 시내를 걸어가는 시민들의 발걸음은 밝고 자신감이 넘쳤고, 여성들의 옷차림도 전보다 훨씬 다양한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어떤 젊은 여성은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휴대폰(손전화)을 계속 들여다보며 걸어가기도 하였다.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 내외분의 평양 방문을 환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이신 김정은 동지와 부인 리설주 녀사께서 주최하는 연회”가 목란관에서 열렸다. 이 연회의 차림표를 여기 북한 표기대로 적는 것으로 나는 평양 방문을 한 것에 대해 우쭐거려 보려고 한다. 백설기, 약밥, 칠면조말이랭찜, 해산물 물회, 과일남새생채, 상어날개야자탕, 백화대구찜, 자신소심옥구이, 송이버섯 편구이와 볶음, 흰 쌀밥, 송어국, 도라지 장아찌, 오이숙장과, 수정과, 유자고, 강령록차 이에 화답하듯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는 첫날 환영만찬에서 ‘동무생각’을 불러 왕년의 솜씨를 뽐냈다. 내 옆자리에 앉은 당중앙위 조용원 부부장은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금지의 언어가 아니라 소통의 언어로 말하고자 하였다. 우리 14호차의 안내를 맡은 여성 두 사람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 일하는 젊은 엄마들이었다. 탁아소에 아기들을 맡기고 나온 이들은 찡그린 얼굴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한 한 사람은 소월과 육사의 시를 이야기했다. 나는 이들이 사용하는 핸드폰을 한번 들여다봤다. 뒷면에 ‘평양’이라고 적혀 있는 이 핸드폰의 앱에는 체계관리(설정), 조선대백과사전을 비롯해 류경바둑, 별찌까기와 같은 게임이 들어 있었다. 십여 년 전부터 북한에서 휴대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사용자가 500만 명을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양에서 가장 현대화한 지역은 미래과학거리 구역이었다. 여기에는 전에 없던 현대식 고층빌딩과 아파트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곳에는 과학자, 연구자, 교육자들이 주로 거주한다고 했다. 이 거리의 가로수들은 대부분 메타세쿼이아였다. 북에서는 이걸 수삼나무라고 부른다. 이밖에 평양의 가로수로 많이 심어진 나무들은 살구나무와 버드나무가 있다. 봄이 되어도 평양 거리에 벚나무들이 벚꽃을 휘날리는 일은 없다.9월 19일 이튿날 일정은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점심 때 옥류관에서 열린 오찬장에 도착하자 남북공동선언 합의문이 만들어졌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큰 숙제를 끝낸 듯 표정이 밝아 보였다. 이번 평양 회담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기록될 공동선언은 남쪽에 생중계 되었다. 평양을 방문한 수행단보다 남쪽의 국민들이 더 빨리, 더 생생하게 뉴스를 접했을 것이다. ●웅장한 집단체조…남북 정상을 향한 15만 환호는 ‘지축 진동’ 평양 방문은 휴대폰으로부터 해방된 여행이었다. 혹시나 진동이 울리나 싶어 무의식적으로 양복 안주머니 쪽으로 손이 간다는 분도 있었다. 옥류관 오찬으로 나온 음식은 평양냉면뿐만이 아니었다. 잉어달래초장무침, 자라탕, 송이버섯볶음 등이 맛있었고, 나는 냉면을 한 그릇 먹고 나서 반 그릇을 더 먹었다. 모두 300g이었다. 평양교원대학은 우리의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을 합친 교육기관이다. “어린이들에게 한 컵의 물을 주기 위해 한 동이의 물을 들이키는 심정으로 가르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평양 방문 때 각 장르의 미술가들이 창작하고 그 창작물을 전시, 판매하는 만수대창작사를 들르는 일은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나는 ‘감자꽃 필 때’라는 제목의 유색판화 한 점을 구입했다. 큰 가격은 아니었지만 그림 값을 깎는 ‘가격투쟁’에는 실패했다. 집에 그 판화를 가져와 펼쳐 놓고 다시 보아도 내 선택이 현명했던 건 분명하다.대동강의 능라도에 있는 5·1경기장은 15만명의 평양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보는 집단체조와 예술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가슴이 자꾸 두근거렸다. 카드섹션에 참여하는 경기장 반대편 ‘배경대’는 1만 7490명의 중학생들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남과 북의 양 정상들이 경기장에 막 도착했을 때 15만명이 하나의 목소리로 환호하는 소리를 상상해 보라. 지축을 울린다는 그 상투적인 표현이 여기에 딱 들어맞는 수사일 것이다.대규모 평양 시민들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에 나섰다. 거의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집단체조 ‘아리랑’의 일부와 남북 정상회담을 축하하는 특별공연이 수만 명의 청년학생과 예술가들에 의해 펼쳐졌다. 공연은 북한식 집단주의가 역사적 경험과 만나면서 어떠한 예술적 영향력을 생산하는지 웅장하게 보여주었다. 다들 하나같이 말했다. “남쪽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공연이지. 아이들을 저렇게 동원해서 연습 시키면 가만히 있을 엄마가 한 사람도 없을 걸.” 씁쓸했지만 그게 또 우리의 현실이었다. 1970년대 중반 전국체육대회를 앞두고 중학생이었던 나도 마스게임에 참여해본 적이 있다. 어린 우리는 뙤약볕 속에서 살을 태워가며 연습을 해야 했다. 개인은 없고 집단만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북쪽 안내원이 말했다. “여기 참여하는 어린이들의 엄마는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한답니다.”평양 방문단이 백두산을 간다는 소식이 들린 것은 19일 저녁 9시경이었다. 20일 새벽 4시에 출발한다는 갑작스런 통보가 전해졌다. 평양 방문 내내 우리는 그 다음 일정을 알지 못해 궁금해 하였다. 일정이 정해진다고 해도 남과 북의 안내원 말이 다를 때가 있었다. 대규모 행사를 진행하면서 실무적으로 삐걱거리는 일도 있었던 것 같다. 백두산을 간다는 말에 특별수행원들은 들뜨기 시작했다. 방한복을 싣고 공군2호기가 평양국제비행장에 온다는 말도 들렸다. 공군1호기 조종사는 삼지연비행장의 활주로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미리 떠났다고도 했다. 백두산은 밤에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간다는 말도 들렸다. 어쨌든 젊은 가수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대박!” 9월 20일 새벽 1시까지 큰 짐들을 호텔 로비에 내려놓으라는 전갈이 왔다. 1시쯤 잠이 든 나는 4시에 모닝콜을 받았다. 평양 거리는 불을 켠 곳이 별로 없었다. 5시 30분 비행장으로 가는 길은 어두웠다.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때 버스 창문으로 우리를 환송하러 나온 평양 시민들이 보였다. 불빛 하나 없는 거리에서 그들은 손을 흔들면서 연도에 줄지어 서 있었다. 평양에 도착했을 때보다 숫자는 적었지만 환송 열기는 그에 못지않아 보였다. ‘뭉클하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일 것이다. 비행장에서는 남쪽에서 급히 공수해온 방한복이 두 벌씩 지급되었다. 기자도, 그룹 총수도, 노동자도, 학생도, 성직자도, 교수도, 공무원도, 국회의원도 모두 하나같이 점퍼로 중무장을 마쳤다. 백두산으로 가는 비행기까지 따로 수속 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좌석표도 없었다. 우리에게 배정된 고려항공에 탑승해서 빈 자리에 앉으면 그만이었다. 마치 수학여행을 가듯이 말이다.●남북을 위한 백두산의 환대, 이젠 평양도 백두산도 멀지 않더라 7시 40분, 평양에서 한 시간을 날아가 삼지연비행장에 도착했다. 2005년 남북작가대회 때 삼지연에 가본 이후 13년 만이었다. 해발 1300m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삼지연의 공기는 서늘한 가을의 공기였다. 우리는 한두 달 앞당겨 가을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마음껏 맑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어디 보자기에도 싸갈 수 없는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졌다. 만약에 할 수만 있다면 삼지연의 공기를 팔아 돈을 벌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지연비행장과 그 주변은 말끔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터미널이 신축되었고, 활주로는 깨끗하였다. 백두산으로 가는 포장도로도 손색이 없었다. 이깔나무(냑엽송), 가문비나무, 자작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길을 운전하는 운전기사가 말했다. “남쪽에서 오신 나이 드신 손님들을 위해 속도를 80㎞ 이하로 줄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삼지연에서 백두산까지의 길은 32㎞다. 모든 길의 양쪽 갓길에 이끼를 깔아 남과 북의 양 정상을 맞이하려는 노력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갔다. 백두산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난간의 테두리도 대리석으로 새로 단장했고 천지로 내려가는 삭도(케이블카)도 운행을 멈추지 않았다. 장군봉 정상까지 SUV 차량으로 올라간 수행원들도 있었고, 두 정상과 함께 천지로 내려가는 삭도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삭도를 타고 생전 처음 천지 물을 손에 적시는 행운을 누렸다. 백두산과 천지는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로 우리를 환대해 주었다. 1920년대에 육당 최남선이 쓴 ‘백두산근참기’를 나도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꽃은 졌지만 잎은 푸르게 남아 있는 만병초 잎사귀 하나를 따서 수첩에 끼워 넣는 일이었다. 두메양귀비는 보이지 않았지만 구절초로 짐작되는 식물의 씨앗을 봉투에 넣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나만의 즐거움이었다. 백두산과 천지 주변을 마음껏 걸으며 둘러보고 노랗게 물든 자작나무 잎사귀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는 것, 그것으로 나의 ‘백두산근참기’는 완결편을 갖게 되었다. 평양도 백두산도 이제 먼 길이 아니다.
  • [글로벌 In&Out] 남북에서 모두 잊혀진 1945년 8월의 소일전쟁/바실리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남북에서 모두 잊혀진 1945년 8월의 소일전쟁/바실리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2018년 8월 15일은 광복 73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73년 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한반도는 일제 식민주의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고통받던 한국인들은 광복의 기쁨을 실감했다. 그러나 분단과 냉전을 겪으면서 남북한은 일부 기억을 지워버렸는데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 가운데 유일하게 한반도에서 전투하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무너뜨린 소련에 대한 기억이다.남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해방은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것만 떠올리고 한반도 해방에서 소련의 역할 자체를 부정하거나 축소한다. 필자는 관련 학회에서 “소련이 한반도에서 전투를 한 번도 치르지 않고 ‘그냥’ 들어왔다”는 주장까지 들어 봤다. 이런 인식은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한 평양의 해방탑에 소련군에 의한 해방을 기념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북한 학자들은 해방을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의 활약으로 해석하면서 ‘신화’를 만들었다. 남북의 국가 편찬 공식 역사의 한계를 잘 보여 주는 사례다. 그 뿌리 깊은 신화를 깨뜨릴 수 있는 역사가의 유일한 무기는 사료(史料)이다. 그러면 소련군의 한반도 진출에 대해 사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만주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하였다. 이 작전은 3가지의 하위 작전으로 구성됐는데, 그중 하나가 한반도를 포함한 하얼빈·지린성 공세작전이었다. 북한 해방 작전 수행을 위해 소련 육·해군 연합부대가 결성되었다. 메레츠코프 원수가 지휘하는 제1극동전선군 휘하 제25군의 남측부대와 유마셰프 제독 휘하 태평양 함대의 해병부대다. 소련군의 한반도 전투는 만주전략공세작전 개시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9일, 공군은 함경북도 웅기읍의 일본군 시설에 대한 공습을 실시하였고 육군 부대들은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 지역 주둔 일본군은 소련군 급습에도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8월 9일 밤 소련군 부대들이 경흥군을 해방시켰다. 소련 공군은 일본군 시설에 대한 공습을 지속해 많은 일본 군함과 수송선을 침몰시킴으로써 해병부대의 작전을 가능케 하였다. 메레츠코프는 8월 11일 유마셰프에게 상륙부대를 결성해서 북한 해안 지역을 해방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해군대대와 정찰부대가 웅기에 상륙하여 전투 없이 해방한 후 마침 도착한 육군부대와 합류하여 나진시에 돌격했다. 청진에서는 항구 방어선을 회복하려는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소련 선봉부대는 해병여단이 도착한 15일까지 항구를 고수했다. 15일 정오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포한 ‘옥음방송’이 울렸지만 포성이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 관동군 사령부는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 살벌한 청진 전투는 동해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는 육군사단이 전투에 들어간 16일까지 지속되었다. 청진 상륙작전의 성공과 만주에서의 소련군 승리의 소식을 들은 관동군 사령부는 지속적인 저항의 무의미함을 인정하고 19일 드디어 무기를 내려놓았다. 만주전략공세작전 중에 소련군은 3만 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그중 약 60%가 만주남부와 한반도를 해방시킨 제1극동전선군이었다. 육군부대들도 2000여명, 해군부대들은 1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소련 제1극동전선군의 군사작전은 한반도 북측 지역의 해방 이외에 또 한 가지의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 북부에서 일제식민통치에 치명적인 타격을 줘 일제 관료, 경찰, 군인들은 남쪽으로 도피했고, 그 식민권력의 공백을 조선인 스스로 채워 나갈 수 있게 한 것이다.
  • 한반도 해방에서 사라진 장면- 1945년 8월 북한 국경에서의 소일(蘇日)전쟁

    한반도 해방에서 사라진 장면- 1945년 8월 북한 국경에서의 소일(蘇日)전쟁

    2018년 8월 15일은 광복 73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73년 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한반도는 일제 식민주의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그 아래서 신음하던 한국 사람들은 광복의 기쁨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 후 한국은 분단과 전쟁, 쿠데타와 민주화 운동 등을 겪으면서 오늘의 풍요롭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번영의 출발점인 해방과 광복의 진상은 냉전시대의 정치와 극단적 좌우갈등으로 왜곡되기도 하였다.한국인의 역사적 기억에서 지워져 버린 것에는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르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무너뜨린 유일한 나라 소련의 역할이 있다. 남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해방은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것만 떠올리고 한반도 해방에서 소련의 역할 자체를 부정되거나 축소한다. 필자는 관련 학회에서 ‘소련이 한반도에서 전투 한 번도 치르지 않고 ‘그냥’ 들어왔다’는 주장까지 들어봤다. 이런 인식은 남한만이 아니다. 북한 평양에 있는 해방탑에 소련군에 의한 해방을 기념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북한 학자들은 해방을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신화’를 만들었다. 남북의 국가 편찬 공식 역사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 뿌리깊은 신화를 깨뜨릴 수 있는 역사가의 유일한 무기는 사료(史料)이다. 그러면 소련군의 한반도 진출에 대해 사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살펴보자.소일(蘇日)전쟁과 한반도 진출 과정을 살펴보자. 1945년 8월 9일 새벽,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만주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하였다. 물론 한국에는 잘 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만주전략공세작전은 3가지의 하위 작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반도를 포함한 하위 작전은 하얼빈-지린성 공세작전이었으며 이 작전의 주력 부대 중 하나가 추후 북한 점령을 맡은 소련의 제25군이었다. 이 작전의 주요 방향은 만주와 조선의 국경 지대였고, 북한은 보조 작전 방향으로 설정되었다. 보조 방향이지만, 한반도 군사 작전은 만주전략공세작전 성공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소련군 한반도 군사작전의 목적은 관동군의 후퇴나 보급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 수행을 위해 육해군 연합부대가 결성되었으며, 이 연합부대는 메레츠코프(K. A. Meretskov) 원수가 지휘하는 제1극동전선군 휘하 제25군의 남측부대와 유마셰프(I. S. Yumashev) 제독 휘하 태평양 함대의 해병부대로 구성되었다.소련군의 한반도 전투는 주력 부대의 만주전략공세작전 개시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 공군은 함경북도 웅기읍의 일본군 시설에 대한 공습을 실시하였고 샤닌 (G. I. Shanin) 소장 휘하 소련육군 부대들은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 지역 주둔 일본군은 소련군 급습에도 일본군은 치열히 반격했다가 결국 버티지 못해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8월 9일 밤 제25군의 부대들이 경흥군을 해방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제25군 남측 부대의 일부는 회령시 방향으로 진격을 계속하였고, 육해군 연합부대에 속한 부대는 남하를 계속하였다. 육군이 일본군과의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소련 공군은 일본군의 해안 방어 시설에 대한 공습을 지속하였으며 일본 군함 2척, 수송선 25척을 침몰시킴으로써 해병대 부대의 작전을 가능케 하였다. 작전 개시 2일 후인 8월 11일, 메레츠코프가 태평양 함대 사령부에 상륙부대를 결성해서 청진, 웅기, 나진 등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8월 11일, 해군대대와 소련최고의 훈장인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을 받은 레오노프 (V. N. Leonov) 상위 휘하의 태평양 함대 직속 정찰부대가 웅기에 상륙하여 전투없이 해방한 후 마침 도착한 육군부대와 합류하여 나진시에 돌격했다. 다음날 아침에 나진 해방 작전이 시작되었다. 웅기읍과 달리 나진 시는 웅기를 포기한 부대의 증원을 받은 일본군이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악화된 기후조건에도 12일 나진에 상륙한 소련 해군부대와 북쪽에서 진격하는 육군부대는 일본군의 저항을 받아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가 13일에 상륙한 증원군의 지원을 받은 소련군은 일본군의 저항을 뚫고 14일에 나진의 해방을 완수하였다. 웅기읍과 나진 해방 후 소련군의 다음 목표는 청진이었다. ‘조선을 빨리 해방하라’는 메레츠코프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180여명 밖에 안되는 해군부대가 나진 전투가 끝나기도 전에 어뢰정 6척을 타고 청진에 돌진하고 상륙했다. 뜻밖의 습격을 받은 일본 위수부대는 항구를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항구의 점령을 저지하지 못했으나 그 직후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군은 선봉부대의 완강한 저항을 감수해가며 선봉부대에 큰 피해를 입혔으나, 이를 전멸시키지는 못했다. 다음날 14일에 대대 규모의 증원군을 받은 소련군은 공격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은 장갑열차를 포함한 모든 예비대를 전투에 투입시켰다. 나쁜 기후조건을 이용하고 소련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항구 방어선을 회복하려는 일본군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으면서 커다란 피해를 입은 소련군 선봉부대들은 제13해병여단이 도착한 15일까지 항구를 고수하고 있었다. 15일 정오, 일본 천황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포한 ‘옥음 방송’이 울렸지만, 포성이 멈추지 않았고 관동군 사령부는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살벌한 청진 전투는 동해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는 제393사단이 전투에 들어간 16일까지 지속되었다. 청진 상륙작전의 성공과 만주에서의 소련군 승리의 소식을 들은 관동군 사령부는 지속적인 저항의 무의미함을 인정하고 1945년 8월 19일 드디어 무기를 내려놓았다. 만주전략공세작전에 참여한 소련군은 3만 5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그 중 약 60%가 만주 남부와 한반도를 해방시킨 제1극동전선군이었다. 한반도 해방 작전에 참여한 소련 육군 부대들은 2000여명, 태평양 함대의 부대들은 1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소련의 한반도 해방에 참여한 제1극동전선군의 군사작전은 구체적 지역의 해방 이외에 또 한 가지의 성과를 거두었다. 소련군의 성공적인 상륙작전은 조선 북부에서 일제식민통치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일제 관료, 경찰, 군인들은 남진하는 소련군을 두려워해 북쪽의 주요 도시들에서 남쪽으로 도피하게 되었다.북쪽에서 이런 ‘권력 진공’을 메운 것은 36년 동안 참정권을 박탈당했던 조선인들이었다. 그들은 각지에서 자치위원회를 만들고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물론, 나중에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한반도가 다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어가 분단되고 전쟁을 겪었으나, 이것은 소일전쟁을 평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글: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
  • ‘광장’ 속으로 떠난 한국문학의 거장… “오직 글로 말한 예술가”

    ‘광장’ 속으로 떠난 한국문학의 거장… “오직 글로 말한 예술가”

    분단·현대사에 대해 깊이 고뇌해 온 삶 ‘회색인’부터 ‘화두’까지 작품에 오롯이 소설 ‘광장’ 205쇄 찍은 기념비적 작품남북한 체제와 이데올로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 ‘광장’으로 전후 한국 문학의 지평을 새롭게 연 소설가 최인훈이 별세했다. 네 달 전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던 작가는 23일 오전 10시 46분 경기 고양시 명지병원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84세. 최 작가는 1934년(공식 기록은 1936년) 함경북도의 두만강변 국경 도시 회령에서 태어났다. 목재 상인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해방과 더불어 원산으로 이주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가족과 함께 원산항에서 해군 상륙함을 타고 월남했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6학기를 마쳤지만 전후 분단 현실에서 공부하는 데 갈등을 느껴 1956년 중퇴했다. 생전에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크다”고 말했던 작가는 지난해 서울대 법학과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최 작가는 1959년 군 복무 중 쓴 단편소설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傳)’을 월간 ‘자유문학’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듬해 4·19혁명이 일어나고 7개월 뒤인 1960년 11월 월간 ‘새벽’에 문제적인 소설 ‘광장’을 발표했다. 남한과 북한의 정치 현실에 모두 환멸을 느낀 주인공 이명준의 역정을 다룬 이 작품은 한국 현대문학사 최고의 고전으로 꼽힌다. 작품이 발표된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여전한 분단 현실 앞에서 작가는 낡지 않은 문제의식을 던진다. 2008년 등단 50주년을 앞두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 작가는 이 작품을 두고 “4·19는 역사가 갑자기 큰 조명등 같은 것을 가지고 우리 생활을 비춰 준 계기였기 때문에 ‘광장’은 내 문학적 능력보다는 시대의 ‘서기’로서 쓴 것”이라며 자신을 낮췄다. ‘최인훈 전집’을 낸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의 이광호 대표는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께서 최인훈 작가를 ‘전후 최대의 작가’라고 하셨는데, 전후 뿐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이라면서 “한국이 처한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지닌 의미를 보편적이고 철학적이고 세계사적인 문맥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성찰하게 해 준 작가”라고 말했다. 고인은 그간 시대의 존재론적 고뇌를 그린 ‘회색인’,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파격적 서사 실험을 선보인 ‘서유기’, 20세기인의 운명을 조망한 ‘화두’, 실험적 패러디 기법으로 고전을 새롭게 해석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의 소설과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산문집 ‘유토피아의 꿈’, ‘문학과 이데올로기’, ‘길에 관한 명상’ 등을 남겼다. 동인문학상, 이산문학상, 박경리문학상, 서울시문학상,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 등을 받았다. 이날 최 작가의 별세 소식에 문재인 대통령과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조화를 보내 애도했다. 수많은 동료, 후배 문인들의 애도도 이어졌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작가로서 영향력이 컸지만, 문학권력이라고 할 만한 건 전혀 없었다”며 “오직 글만 쓰고 문학으로만 말한 예술가”라고 말했다. 공지영 작가는 트위터에 “책갈피를 넘기며 생각들이 떡갈나무 이파리들처럼 펄럭이게 했던 선배님 고이 잠드소서. 남은 후배들이 통일의 문학을 할 수 있게 빌어주소서”라고 애도 메시지를 올렸다. 유족으로는 부인 원영희씨와 아들 윤구씨, 딸 윤경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5일이다. 장례는 ‘문학인장’으로 치러진다. (02)2072-2091.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남북경협 넘어 신동북아 경제지도] “한·중·러 철도 연결 땐 압록강·두만강 동북아 경제중심지 될 것”

    [남북경협 넘어 신동북아 경제지도] “한·중·러 철도 연결 땐 압록강·두만강 동북아 경제중심지 될 것”

    동북아시아에서 평화와 경제협력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서울신문은 지난 18일부터 23일까지 4회에 걸쳐 남북경협의 시야를 압록강과 두만강, 중국 동북 3성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몽골, 일본까지도 아우르는 ‘동북아 경제지도’로 넓힐 것을 제안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다. 5회에선 한·중·일·러 4개국 학자들과 함께 동북아 경제지도를 모색하는 지상대담을 싣는다. 이들은 총론에는 동의하면서도 각자 처한 위치에 따라 사뭇 다른 진단을 내놓았다. →동북아 경제지도에서 압록강·두만강 하구가 주목받고 있는데.-임강택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임 위원) 남북협력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압록강·두만강 하구의 중요성이 눈에 들어온다. 현재 북·중 경협의 70%가량이 신의주·단둥에서 이뤄진다. 두만강 하구는 아직까진 취약하다. 정치 바람에 취약하고 북·중·러 협력틀도 취약하다. 단둥은 열려 있는 공간인 반면 연변은 변경이다. 단둥은 돈이 많이 굴러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관광도 꽤 활발하다. 연변은 백두산에 가기 위해 잠깐 들르는 정도다. 연변을 중심으로 한 경제협력에서 관건은 현지 조선족의 마음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이다. 조선족과 동반자 관계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족을 미래 협력 파트너로 생각하고 적극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아르촘 루킨 러시아 극동연방대 국제관계학 교수(루킨 교수) 러시아와 북한 모두 두만강 하구 프로젝트에 한국이 투자하길 바란다. 나진·하산 철도연결 사업을 재개한다면 매우 긍정적일 것이다. 대북 제재와도 무관하다. 농업과 수산업에서 한국의 기술과 자본, 러시아의 토지와 자원, 북한의 노동력을 결합하는 것은 투자가치가 크다.-왕이웨이 중국 인민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왕 교수) 북한은 40년 전 중국처럼 굉장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제재가 풀리면 압록강·두만강에서 경제협력이 급성장할 것이다. 북한 투자에 관심 있는 중국 기업이 많다. 물론 한국과 일본, 러시아도 나서야 한다. 가장 급한 건 서울에서 중국 단둥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직행할 수 있는 철도망이다. 그럼 압록강 하구와 두만강 하구는 동북아 경제지도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중국 국익에도 부합한다. 중국으로선 동북 3성 개발이 국가적 과제다.-미야모토 사토루 일본 세이가쿠인대 특임교수(미야모토 교수) 압록강·두만강 개발을 처음 시작한 건 일본이었다. 압록강철교, 수풍댐을 만들었고 조선총독부 직속 독립행정기관인 나진청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북한 자원을 이용해 동북 3성의 중화학공업을 발전시켰다. 냉전 이후 압록강·두만강은 낙후지역이 돼 버렸다. 가치는 높지만 걸림돌이 많다. 북한에 투자해 성공한 중국 기업이 없다. 북한 투자는 불확실성이 크다. 러시아는 중국을 경계하고 중국은 조선족 문제로 한국을 경계한다. 두만강과 달리 압록강 하구는 좀 쉽다. 북·중 교역이 활발해질 수 있는 조건이다. →동북아 경제지도를 바라보는 각국 입장은 무엇인가. -루킨 교수 대규모 프로젝트에는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다. 한국은 지금까진 말로만 투자했다. 한국 기업들은 연해주에 투자하는 데 위험 부담이 크다고 느낀다. 무엇보다 미국 눈치를 본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다양한 한러 경제협력 사안이 미국 제재 조치에 막혀 있다. 러시아로선 금융, 첨단 기술, 에너지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하고 싶다. -왕 교수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는 남북경제협력과도 접점이 있다. 한반도와 중국 동북 3성, 러시아가 직접 만나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이를 통해 낙후됐던 동북 3성이 큰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동북아경제지도는 5개국 모두에게 기회가 될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한국과 중국이 가장 많은 공동 사업을 할 것이다. 일본은 조금 다를 것이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신중하고 북한은 일본에 호의적이지 않다. -미야모토 교수 일본은 북한과 무역을 했던 경험이 있다. 북한이 일본에 갚지 않은 채무 가운데 경제산업성에서 관리하는 게 4000억엔(약 4조원)가량이다. 북한에 차관으로 준 쌀 30만t도 있다. 일본 기업으로선 금전관계가 분명하지 않아 투자하기를 꺼린다. 국교 정상화하면 경제협력한다는 말은 나오지만 그전에 북한이 빚을 갚아야 한다. 북한은 신용이 없으니까 아무도 투자 안한다.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은 어떻게 평가하나. -임 위원 박근혜 정부가 주장했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북핵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게 결정적 약점이었다. 더구나 북한을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꿔야 하고 바꿀 수 있으며, 그게 안 되면 물리적 수단도 불사하겠다는 접근법이었다. 북한 입장에선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이었다. 오히려 지금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에 주목할 수 있는 국면이다. 문재인 정부는 절실함에서 시작한 정권이다. 그래서 대북정책의 성과가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전쟁만은 안 된다는 데서 출발했으니까 같이 잘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거다. 문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을 거치면서 북한의 변화상을 우리가 전혀 모른다는 점이다. 퍼주기 논란, 불신, 붕괴론 등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 비핵화 이후를 고민할 준비가 우리 스스로 제대로 돼 있는지 의문이다. -루킨 교수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보다 독립적 국가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다. 러시아는 동북아 국가들이 국제무대에서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본다. 러시아 입장에서 그런 시스템이 가장 안정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러시아는 한반도 통일을 가장 순수하게 지지하고 바라는 유일한 국가다. 미·일·중은 남과 북이 따로 있는 게 좋다. 통일 코리아는 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통일 코리아가 자리잡으면 일본과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 이익이다. -미야모토 교수 한국에선 대체로 보수 정권과 진보 정권으로 구분하는데 그걸로는 실상을 다 파악할 수 없다. 박근혜 정부는 핵실험과 미·일의 비판에 직면해 개성공단을 폐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보수 정권은 다 잘못했고 진보정권은 다 잘했다는 건 사실과 맞지 않다. →한국 정부에 조언을 한다면. -임 위원 북한을 경제협력과 공동번영의 동반자로 세우는 것이 관건이다. 북한은 자기들 방식으로 개방할 것이다. 그때쯤이면 핵심은 중국에서 다 가져갈 수도 있다. 중국은 10년 넘게 준비했다. 우리는 10년을 허송세월했다. 지금부터라도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왕 교수 지도에서 한반도를 보면 고대 로마와 닮았다.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구축되면 남북한뿐 아니라 동북아 전체가 새롭게 도약하는 기회를 맞을 수 있다. 밥을 한꺼번에 다 먹을 순 없다는 중국 속담처럼, 아직 불확실성과 위험 부담이 많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상만 앞세울 순 없다. 일부 한국인들은 국제관계를 감정으로 접근한다. 국제관계에서는 어떤 일도 발생할 수 있다. 중립적인 마음으로 길게 보고 통일과 동북아경제지도를 생각하길 권한다. -미야모토 교수 북핵문제가 다 해결된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이란이 미국 등과 핵 합의를 한 뒤 일본은 이란과 관계정상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핵 합의를 파기했다. 국제관계는 언제라도 상황이 급변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한다. 서울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도쿄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블라디보스토크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베이징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광장’ 최인훈 작가 84세 일기로 타계…한국 현대문학 거목

    ‘광장’ 최인훈 작가 84세 일기로 타계…한국 현대문학 거목

    소설 ‘광장’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의 거목으로 우뚝 선 최인훈 작가가 23일 오전 10시 46분 타계했다. 84세. 최인훈 작가는 4개월 전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경기도 고양시 명지병원에서 가족들의 임종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1934년(공식 출생기록은 1936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고인은 고등학교 재학 중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국군을 따라 남쪽으로 왔다. 아버지는 목재상이었고, 집안이 제법 부유한 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 6학기를 마쳤지만 1956년 중퇴했다. 전후 분단 현실에서 공부에 전념하는 데 갈등을 느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58년 군에 입대해 6년간 통역장교로 복무했다. 군 복무 중인 1959년 단편소설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傳)’을 ‘자유문학’지에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듬해 4·19 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7개월 뒤인 1960년 11월 ‘새벽’지에 중편소설 ‘광장’을 발표했다. ‘광장’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정면으로 다루며 그 안에서 실존을 고뇌하는 개인을 그려내 당시 문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고인은 자신의 대표작 ‘광장’에 대해 “4·19는 역사가 갑자기 큰 조명등 같은 것을 가지고 우리 생활을 비춰준 계기였기 때문에 덜 똑똑한 사람도 총명해질 수 있었고, 영감이나 재능이 부족했던 예술가들도 갑자기 일급 역사관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광장’은 내 문학적 능력보다는 시대의 ‘서기’로서 쓴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는 작품이며, 출간 이후 현재까지 통쇄 204쇄를 찍었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최다 수록 작품이며, 대학수학능력시험 지문으로 두 번이나 출제됐다. ‘광장’ 외에도 ‘회색인’(1963), ‘서유기’(1966), ‘총독의 소리’(1967~1968) 연작, ‘화두’(1994),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태풍’,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하늘의 다리/두만강’, ‘우상의 집’ 등 소설과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산문집 ‘유토피아의 꿈’, ‘문학과 이데올로기’, ‘길에 관한 명상’ 등의 작품을 냈다. 고인은 그 문학성을 인정받아 동인문학상(1966),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1977), 중앙문화대상 예술 부문 장려상(1978), 서울극평가그룹상(1979), 이산문학상(1994), 박경리문학상(2011) 등을 받았다. 고인은 2003년 계간지에 발표한 단편 ‘바다의 편지’를 끝으로 새 작품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신판 ‘최인훈 전집’ 발간을 기념한 기자간담회에서 “한 권 분량의 새 작품집을 낼 만한 원고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이듬해 자신의 희곡이 올려진 무대에서 관객들과 만나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은퇴란 없다. 지금도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77년부터 2001년 5월까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많은 문인 제자를 배출했으며 퇴임 이후에도 명예교수로 예우받았다. 대학에서 오랜 세월 후학들을 길러냈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대학을 제대로 마치지 않았던 데 대해 “열악한 환경에서도 최상의 혜택을 줬는데도 누리지 못한 그때의 내가 너무 밉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크다”고 깊이 아쉬워하기도 했다. 결국 2017년 2월 24일 서울대에서 명예졸업장을 수여하며 오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원영희 여사와 아들 윤구, 윤경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02-2072-2020)에 차려진다. 이날 오후부터 조문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장례는 ‘문학인장’으로 치러지며, 위원장은 문학과지성사 공동창립자이자 원로 문학평론가인 김병익이 맡았다. 영결식은 25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내 강당에서 열릴 예정이다. 시간은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발인은 영결식 이후, 장지는 ‘자하연 일산’(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지영동 456)이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남북, 오늘 동해선 연결구간 공동점검… 철도협력 본격화

    남북, 오늘 동해선 연결구간 공동점검… 철도협력 본격화

    남북 철도 협력이 본격화 되는 모양새다. 양측은 20일 동해선 철도 연결구간에 대한 공동점검을 진행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이 철도협력과 관련해 구체적인 이행에 나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황성규 국토교통부 철도국장을 단장으로 한 공동점검단 15명은 이날 오전 동해선 육로를 통해 동해선 철도 연결구간의 공동점검을 위해 방북할 계획이다. 북측에서는 김창식 철도성 부국장 외 6명이 남측 점검단과 함께 공동점검을 진행한다. 공동점검은 동해선 연결구간 중에서도 북측 구간(금강산청년역∼군사분계선)에 대해서만 이뤄질 예정이다. 공동점검 직후에는 남북 공동연구조사단 실무회의도 예정돼 있다. 남북은 동해선에 이어 24일에는 경의선 철도 연결구간 중 북측 구간(개성역∼군사분계선)을 공동점검할 예정이다. 앞서 남북은 ‘4·27 정상회담’에서 ‘동해선·경의선 철도연결 및 현대화’에 합의했다. 이어 지난달 26일에는 철도협력분과회담을 열고 7월 중순 남북 연결구간에 대한 공동점검부터 진행하기로 했고 전날 구체적인 일정이 확정됐다. 남북은 공동점검 결과를 토대로 역사 주변 공사와 신호·통신 개설 등 후속조치를 추진할 계획이며, 경의선 북측 구간(개성∼신의주)과 동해선 북측 구간(금강산∼두만강)에 대한 현지 공동조사도 진행한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남북경협 넘어 신동북아 경제지도] 두만강 따라 4개국 경협 北 다시 정규멤버 됐으면

    [남북경협 넘어 신동북아 경제지도] 두만강 따라 4개국 경협 北 다시 정규멤버 됐으면

    “경제 협력 구조를 만들 때부터 북한은 광역두만강개발계획(GTI·Greater Tumen Initiative) 구상에 포함돼 있다. 북한의 재가입과 일본의 신규 가입을 언제든 환영한다.”지난달 27일 중국 베이징 GTI 사무실에서 서울신문을 만난 투글두르 사무국장은 북한의 GTI 가입이 꼭 필요하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몽골 출신인 투글두르 국장은 지난해 2월부터 GTI를 이끌고 있다. 그는 “GTI는 몇 년 전부터 북한이 다시 정규 멤버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초청 의사를 밝혀 왔다. 지난 22일 열린 총회에서 북한의 재가입을 요청하는 ‘울란바토르 선언’을 채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고 밝혔다. ●한·중·러·몽골 경제통합 추진… 北·日 참여를 GTI는 두만강 유역 주변국(한국·중국·러시아·몽골) 간 경제협력을 도모하는 다자간 협력체다. 1992년 유엔개발개획(UNDP)의 두만강유역개발계획(TRADP)에서 출발해 2005년 지리적 범위를 넓혔다. 투글두르 국장은 “몽골 동부 지역에서 출발해 중국 동북, 러시아 극동 지방, 한국의 부산까지 모두 개발 범위에 포함된다”면서 “특히 국경을 따라 흐르는 두만강은 경제통합의 요람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도 한때 회원국이었지만 핵 실험 관련 국제 제재에 반발해 2009년 탈퇴했다. 일본은 돗토리현 등 지방정부 차원에서만 관여하고 있다. GTI 내에서 논의되던 남·북·러 에너지 협력이 주춤한 사이, GTI는 지역 간 물류·교역·관광 활성화를 위한 인프라 구축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투글두르 국장이 첫손에 꼽은 것은 러시아 자루비노항 개발이다. 그는 “4개국 수출입은행이 참여한 자루비노항 터미널 건설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장춘-훈춘-자루비노-블라디보스토크-동해-사카이미나토를 잇는 새 항로를 개발 중에 있다”고 전했다. 두 가지 모두 실행된다면 환동해권 항로에 큰 혁신이 일어날 것이라는 게 업계 시각이다. ●5개국 연결 새 항로·자유 경유관광도 구상 투글두르 국장은 “다국가 경유 관광프로그램 개발도 구상 중”이라며 “몽골, 중국 동북 3성, 연해주 등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글 사진 베이징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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