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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차 남북 장관급회담/ 노동신문 6·15선언 6개월 평가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6·15 남북공동선언 6개월만인 15일 ‘자주통일의 21세기로 나아가는 민족의 발걸음은 막을 수 없다’라는 특집기사를 싣고 남북관계에서 문제가 됐던 부분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신문은 서두에서 6개월간의 경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북남선언의 이행에 제동을 걸려는 일부 정치세력들의 책동은 매우 우심하였다’며 대체로 부정적 논조로 일관했다. 연방제 통일 방안,미국과의 관계설정 등 남측 논란에 대해서도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특히 노동당 창건행사에 초청된 남쪽 인원의 일부 불참,대북 지원의 투명성 논란,주적(主敵) 개념 등은 강력히 비판했다. 대북 지원과 관련,“그동안 남조선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성의를다해 도왔다”며 “넉넉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동포애와 인도주의 이념에서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주었다”고 ‘순수함’을 강조했다.4차 장관급회담 막바지 난항의 이유가 됐던 전력지원은 서로 돕는 ‘미풍양속’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은근히 주장했다. 평양 공동취재단·서울 전경하기자
  • KBS2 새 만화영화 ‘검정 고무신’

    학교가 끝나면 친구랑 놀기보다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게임,TV에 온통정신이 팔린 아이들.이런 아이들에게 그 흔한 로보트,괴물도 안나오고 어른들 골려먹는 영악한 아이들도 등장하지 않는 ‘복고풍’ 만화영화를 보여준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15일 오후6시30분부터 매주 금요일 방송되는 KBS2 ‘검정고무신’은아이들은 물론 어른까지도 모처럼 즐겁게 볼 수 있는 가족용 만화영화다. 배경은 30여년전 아직 개발바람이 불지 않은 서울 마포.장난이 심한말썽꾸러기 초등학생 기영이,중학생 형 기철,집에서 키우는 개 ‘땡구’가 주인공들이다. 거기에다 학교와 가정의 주변 사람들이 펼쳐가는 에피소드는 가난하지만 아름다웠던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며 잔잔한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다. 주간 만화잡지인 ‘소년 챔프’에 8년 남짓 연재되고 있는 인기만화‘검정 고무신’이 원작으로 제작비는 KBS와 새한동화가 절반씩 부담했다. 작가 이영일씨는 지난 92년 첫 연재를 시작하면서 표지에 “투박하고질긴 고무신 한 켤레에는 많은 추억이 담겨 있다”며 소감을 밝혔었다. ‘검정고무신’은 지난해 설 특집 프로그램으로 90분간 방영돼 시청자들의 높은 호응을 받았다.“아이들 교육을 위해 비디오테이프 좀구할 수 없느냐”는 해외동포들의 문의도 잇달았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방송대상 애니메이션 부문 작품상과 올해 문화관광부가 주최한 대한민국 만화문화대상 TV시리즈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설 특집 방영분 6개 에피소드와 함께,올해 17개의 에피소드를 추가로제작해 모두 23편(15분짜리 20편,30분짜리 3편)이며 15분짜리는 2편씩 묶어 방송된다. KBS편성국 민영문 PD는 “우연히도 방영 시기가 경제위기와 맞물리게됐다. 어려운 상황에서 정겨웠던 옛시절로 한번 돌아가보는 것도 어른들에게 정서적 위안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허윤주기자 rara@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평양방문기

    지난 11월28일부터 12월5일까지 7박8일간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초청으로 두번째로 평양을 다녀 왔다.순안비행장에 다시 내렸을 때 바로 이 곳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총칼을 든 인민군의 사열을 받는 엄청난 현실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바라보았던 4개월 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고려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나니 안내하는 사람들이 어려워하면서 호텔을 옮길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다.이산가족 북쪽 면회자들이 이 호텔에 모이게 되어 복잡할 테니 조용한 보통강호텔로 옮기자는 것이었다.사정이 그렇다면 협조하지 않을 수 없으려니와 보통강호텔 숙박비가 다소 헐하다는 말을 듣기도 해서 주저없이 옮기기로 했다. 1층 로비로 내려갔더니 과연 말쑥한 신사복으로 차려입은 사람들이웅성거리고 있었다.그 중의 한 사람에게 서울에서 왔음을 말하고 가족면회 때문에 왔느냐고 물었더니 스스럼없이 대해주었다. 내 개인의 이번 여행목적은 북쪽 역사학자들과 만나서 남북간의 역사학 교류 문제를 의논하고 고적을 돌아보는 일이었다.북측에 대해미리 박시형·허종호·전형률 등 역사학자들을 만나고 싶다는 청을했었다.그러나 박시형 선생은 노환으로 기동을 할 수 없다했고,전형률 선생은 4년 전에 작고했다고 했다.그래서 현재 역사학회 회장을맡고 있는 허종호 선생과 전 사회과학원 근대사실장 이종현 선생,현근대사실장인 원종규 선생 등 세분의 학자를 만날 수 있었다.특히 허 선생은 그의 학문적 업적이 남쪽에도 많이 알려진 학자인데,집필을위해 다소 먼 곳에 가 있었음에도 우리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나왔다고 했다. 허종호 선생은 단군릉 발굴경위와 북녘 역사학회가 세계 4대 문명발상지 외에 대동강문명을 넣어 5대 문명발상지로 선포했다는 사실을설명했고,1960년대 남북 역사학계가 정열을 쏟은 자본주의 맹아문제등을 비롯한 북녘 역사학계의 최근 동향을 말해주었다.이에 대해 나도 남녘 학계의 최근 동향과 내 개인의 학문적 관심분야 등을 말해주었다.북녘 학자들과 대화하면서 남북 역사학계가 빨리 서로 가지지못한 자료들을 교환해야 함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6월 정상회담에 수행했을 때는 일정이 너무 꽉 짜여서 고적은동명왕릉밖에 못 가봤다.그러나 이번에는 평양시내의 역사기념관과김규식·조소앙 등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애국열사릉,1948년 김구·김주식 등 남쪽에서 간 정치지도자들이 북쪽 지도자들과 남북협상을 했던 쑥섬에 세운 통일전선탑 등을 가보았고 개성 및 묘향산도 가볼 수 있었다.특히 개성은 서울을 떠나기 전에 미처 방문대상 지역에 넣지 못했고,평양에 가서 추가로 넣었기 때문에 북쪽 식으로 말해서 여행을 ‘조직’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지만,흔쾌히 추가시켜 주어 꼭 보고싶었던 선죽교·공민왕릉 등을 볼 수 있었다. 남북 경제협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각 학문 분야의 교류가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북녘의 어느 고위층과 만났을 때 좀 이상적인 생각이지만 남북정부가의논해서 비무장지대에 통일연구소 같은 것을 세우고 남과 북,그리고 해외 동포학자들이 함께 통일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그는 ‘통일을 굉장히 멀리 잡는군요’하고 말했다. 이 짧은 글에서는 길게 말할 수 없지만,북녘은 왜 통일을 서두르고남녘은 왜 그것을 비교적 길게 잡는가,그 이유를 알 것 같은 것이 이번 여행에서 얻은 중요한 성과라 생각되기도 한다.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대한매일을 읽고/ ‘해외 항일 유적지‘ 민족정신 확립에 보탬

    대한매일 12월6일자 6면에 실린 [해외 항일 유적지를 찾아서…]를 읽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까지 조국독립의 의지를 꺾지 않은 채 투쟁한독립투사들의 강인한 민족혼과 조국사랑을 보았다. 내선일체를 앞세운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과 악랄한 식민정책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적 근간을 유지하며 광복의 날을 맞기까지에는,외지에서도 항일운동에 힘쓰면서 조국 동포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준 항일독립군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크나큰 자랑이 되는 이런 항일유적들이 무관심 속에서 그냥폐허로 변해버린다는 사실은 큰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다. 역사 고찰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선 민족정체성 확립은 기대하기 어렵고,나라가 영속적으로 발전하는 데도 적지않은 지장을 주리라 생각한다. 이런 항일운동 전적지를 찾아 그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는 일이야말로 민족정신 확립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자유언론 정신으로 과거 항일운동 선봉에 선 민족정론지 대한매일의기획의도가 돋보이는 연재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유재범[대전 중구 부사동]
  • 金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노르웨이 공식일정 안팎

    [오슬로 오풍연특파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11일 오전(현지시간) 스톨텐베르그 노르웨이 총리를 면담하고 의회를 방문한 데 이어,저녁 축하음악회를 관람하는 등 노벨평화상 수상과 관련한 공식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전날 저녁에 열린 횃불행진에서는 우리말로 ‘만세’를 외치는 소리와 애국가가 오슬로 시내에 울려퍼졌다. ◆총리 면담 김 대통령은 오전 총리실로 스톨텐베르그 총리를 방문,환담했다.김 대통령은 풍요로운 복지국가를 이끄는 스톨텐베르그 총리의 지도력을 칭송했으며,스톨텐베르그 총리는 남북한 화해·협력과한국의 인권 신장,민주화 달성 등에 경의를 표시했다. 스톨텐베르그총리는 적절한 시기에 방한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의회 방문 김 대통령은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전통에 따라의회를 방문했다.김 대통령은 그뢴달 의장의 영접을 받고 에이나르스텐스나스 위원장을 비롯한 외무의원들과 한반도 정세 등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스텐스나스 위원장은 “김 대통령의 고난의 역정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주(駐)노르웨이 대사 주최 오찬 참석 김 대통령은 숙소인 그랜드호텔에서 박경태(朴慶泰) 주노르웨이 대사 주최 오찬에 참석했다.오찬은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속한 나라의 대사가 노르웨이 노벨위원 등을초청하는 전통에 따른 것으로,노르웨이 정·재계와 문화계 인사 70여명이 참석했다. ◆학생 전시회 및 공연 관람 김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李姬鎬)여사는오후 오슬로 시청에서 열린 학생 전시회 및 공연을 관람했다. 평화를주제로 한 전시회에는 노르웨이 전국의 4∼7학년 학생들의 글짓기 및그림 경연대회 당선작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학생들은 음악과 무용도함께 선보였다. 이 행사는 국제아동구호단체인‘Save the Children’이 노벨평화상 시상식을 기념하기 위해 98년부터 매년 주최하고 있다. ◆축하음악회 참석 김 대통령 내외는 그랜드호텔에서 동포들과 간담회를 가진 뒤,저녁에는 노르웨이 최대 공연장인 오슬로 시내 스펙트럼에서 열린 축하음악회를 관람했다.호콘 노르웨이 왕세자 등 5,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축하음악회는 노벨평화상 시상식과 관련된 마지막 공식행사.축하음악회는 영화 007시리즈에 출연했던 영국여배우 제인 세이모어가 사회를 봤다. 또 소프라노 조수미씨가 시상식에 이어 이날도 노래를 불렀으며,세계적 연주자 브라이언 애덤스의 공연도 펼쳐졌다.공연 도중에 클린턴미국 대통령,푸틴 러시아 대통령,슈뢰더 독일 총리가 보낸 노벨평화상 수상을 축하는 영상메시지가 방영됐다. ◆이 여사 원자력병원 방문 이 여사는 오전 노르웨이 원자력병원을방문했다.이 여사는 요하네센 원장으로부터 현황을 듣고 방사선치료실과 환자들을 위한 실내수영장 등을 둘러봤다.
  • 국회 통과 25개법안 요지

    국회는 8일 본회의를 열고 병역법 개정안 등 25개 법안과 ‘국군의료부대의 서부사하라유엔평화유지단 파견 연장 동의안’ 등 7개 동의안,‘노근리사건 해결 촉구 결의안’등 3개 결의안 등을 처리했다.다음은 요지. ◆병역법 개정안=병역 비리를 통해 면제를 받거나 제2국민역 또는 보충역 처분을 받은 사람을 현역 입영시킬 수 있는 연령을 종전 30세에서 35세로 연장.또 공익근무요원 소집 대상자가 배정인원보다 많을때는 일부를 민방위 등 제2국민역에 편입.공익근무요원 복무 분야에국제협력 분야를 추가하고,한의사 면허를 취득하면 의무장교로 복무할 수 있도록 함. ◆소기업 지원을 위한 특별조치법=개정안 제조업 및 관련 서비스업으로 국한된 소기업의 범위에 소·도매업과 음식업을 포함시키고,상시종업원 10인 이하 사업자 가운데 일정 기준에 해당하는 사람을 소상공인으로 정의,체계적 지원근거를 마련. ◆호적법 개정안=호적 등·초본의 발급·열람 때 일정한 경우 그 사유를 밝히도록 하고,호적을 다루는 관공서의 장은 사생활 침해 등 부당한 목적이분명할 때 발급·열람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함.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 시장·군수·구청장이건설을 요청한 원자력발전소 및 방사성폐기물관리시설의 주변지역 등에 대해 지원사업을 우선 시행하거나 조기에 지원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함. ◆외무공무원법 개정안=특1급∼9급으로 구분된 계급과 이에 따른 승진제도를 폐지하고,외무공무원의 직명을 외무관·외무행정관·외무정보관 등으로 구분.또 대통령령이 정하는 직위를 제외하고는 직위공모제를 실시. ◆국가배상법 개정안=전에는 배상심의회의 결정을 거친 후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으나,앞으로는 배상심의회에 배상신청을하지 않고도 곧바로 소송을 낼 수 있도록 함.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5인 미만 사업장 가입자에게 보험료를 부과할 때 보수(報酬)관련 자료가 없거나 불명확한 경우,보건복지부가 고시하는 금액을 보수로 인정. ◆폐광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폐광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폐광지역진흥지구 내 개발사업자에게 국유림을 매각할 수 있도록 하고,국유림의 대부·사용 허가를 받은 사람이 국유림 안에 영구시설물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안=종전에는 외국인투자가가 출자대상을 완전 구매한 뒤 외국인투자기업으로 등록할 수 있었지만,앞으로는 그이전이라도 일정 조건만 충족시키면 등록할 수 있도록 허용.또 외국인이 투자할 수 있는 출자목적물에 지적재산권을 추가.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국적이 상실된 국가유공자 등도 보상금을 지급받을 수 있도록 함. ◆사법경찰관리의 직무를 행할 자와 그 직무범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 유전자변형 농수산물 표시,무등록 자동차 정비,강제보험 미가입자차량운행,식물방역법 등의 업무를 맡는 공무원에게 단속권 등 사법경찰권을 부여. ◆국군포로 및 납북자 송환 촉구 결의안=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에대한 정부의 분명한 태도 요구.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정확한 숫자 및명단 파악,구체적 송환대책,지원방안을 마련하고,이 문제를 전담할공식 기구 설치를 결의. 이지운 김상연기자
  • “신분 드러내면 후원 중단합니다”

    ‘신분이 드러나면 후원도 중단됩니다.철저히 익명으로 처리해 주십시오.’ 반년 가까이 신분을 감춘 채 망향의 한을 품고 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을 돕고 있는 한 독지가가 있다. ‘홍길동’으로 불리는 이 익명의 후원자는 ‘사할린 동포를 돕는데 써달라’며 지난 6월 800만원을 경기도 안산시에 기탁한 데 이어지금까지 모두 9차례에 걸쳐 성금 4,070만원과 각종 위문품을 보내왔다. 지난달 27일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됐다가 지난 3월 조국으로돌아온 489가구 970여명의 사할린 동포들이 정착해 살고 있는 안산시사동 ‘고향마을’ 노인들의 김장용이라며 배추 13t과 무 5t, 갓 450㎏,파 25상자 등을 보내왔다. 안산시에서 보조하는 매달 52만원의 지원금으로 겨우 생활하고 있는사할린 동포 노인들은 각종 노인성 질환으로 고생하면서도 돈이 없어병원진료에 애를 먹었으나 ‘홍길동씨의 후원금’으로 치료비 걱정을덜고 있다. ‘홍길동’씨는 고향마을을 두 차례 방문했지만 ‘자신이 누구이고왜 후원하는지’ 등에 대해 일절 밝히지 않았다.안산시도 ‘뉴질랜드에 거주하며 안산에 사업체가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시 관계자는 “단돈 10만원을 내고도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는 독지가들이 많은데 ‘홍길동’씨의 행동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며“이 시대 참 의인”이라고 말했다. 안산 김병철기자 kbchul@
  • 제주감귤 북한 간다

    북한동포돕기 제주도민운동본부(운동본부)와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위)는 감귤지원사업 등 민간 교류사업을 추진키로 합의했다. 지역 민간단체가 북측과 교류사업을 펼치기로 합의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3일 운동본부에 따르면 강영석 대표(제주상공회의소 회장) 등은 지난 1일 중국 베이징에서 아태위 량정모 참사 등을 만나 “운동본부는제주산 감귤 3,000t을 오는 20∼30일 3차례에 걸쳐 북한에 지원하고,아태위는 운동본부의 지원실무 사업에 적극 협력한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교환했다. 양측은 합의서에서 ▲감귤은 제주항에서 남포항으로 해상 수송하고▲매회 인도시 운동본부 관계자 2명이 수송선에 승선하며 ▲아태위는감귤 분배상황을 확인할 수 있도록 12월과 1월 각 10명씩 운동본부관계자들을 평양으로 초청키로 했다. 양측은 또 운동본부 관계자들의 평양방문시 제주산 돼지고기 지원문제,한라·백두산 교차등반 등 교류협력사업 등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기로 했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2차 남북이산상봉/ 張忠植 한적총재 거취 주목

    2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자리를 피한 장충식(張忠植) 대한적십자사총재가 4일 일본에서 돌아온다.상봉이 시작되기 전날인 29일 급하게떠난 장총재의 공식 일본방문 이유는 ‘일본 적십자측과 사할린 동포문제 협의’였다.그러나 일적측은 협의된 바 없다고 밝혔고 일본에서의 활동도 드 러나지 않고있어 장 총재의 거취가 주목된다. 상봉기간 동안 북측은 장총재가 없음에도 끊임없이 장총재를 비난했다. 장 총재의 거취문제와 관련,한 고위 관계자는 “적십자 총재 선출은 총회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빨리 이뤄지지 않는다”며 교체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 총재가 남북간 적십자회담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 찬반 여론이 일고 있다.남북관계의 물꼬가 트이는 조심스런시기에 장 총재가 ‘상대를 자극하는’ 북한 비하발언을 했다는 것이장 총재의 사퇴를 바라는 측의 주장이다.반면 남북협상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북한측의 요구나 주장에 대해 너무 저자세라는 지적도 있다. 전경하기자
  • 李亨哲 유엔주재 北대사 강연

    [뉴욕 연합] “통일은 이제 더는 단순한 염원이 아닌 우리 앞에 펼쳐진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형철(李亨哲)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대사는 1일(현지시간) 컬럼비아대 대학원 한인총학생회가 주최한 제80차 코리아포럼 특별초청 연사로 참석,‘남북정상 회담 이후 통일전망’이란 연설에서 남북한간의 통일이 되돌릴 수 없는 대세라는 점을 강조했다.북한대사가 한인학생회 강연회에 초청된 것 자체가 큰 관심거리가 돼 강연장은 참석자들로 가득 찼다. 이대사는 “형제들의 상봉의 자리가 됐으면 하는 심정으로 책임감을갖고 참석했다”며 한인학생회측의 강연초청을 수락한 배경을 설명했다.그는 40여분에 걸친 강연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적대시할 이유가없다는 점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조선동포들끼리 통일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을 전세계에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대사는 또 남북정상회담으로 통일 열기가 최절정에 달해 있으며,통일의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이대사는 강연 뒤 질의응답에서 주한미군 문제에대해 사견임을 전제하며 외국군대의 주둔은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고 밝혔으며,북한을 값싼 노동시장으로 바라보는 남한내의 시각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아주 안 좋은 것으로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을 것으로본다”고 답변했다.
  • [기고] 이벤트성 상봉 이제 그만

    지난번 남북 각각 100명씩의 1차 이산가족 교환방문에 지원인원의한 사람으로 평양으로 들어가 꼭 50년 만에 누이동생을 만나고 돌아온 뒤 나에게는 알게 모르게 묘한 변화가 일어나 있었음을 스스로도일말의 놀라움 섞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걸 한 두마디로 털어 놓기는 매우매우 어렵거니와 가령 이런 식으로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남북관계를 두고 이렇게 짧은 글 하나를쓰는 경우에도 요즘 와서는 지난번 평양에서 50년 만에 만났던 그 누이동생의 얼굴부터 우선 눈 앞에 슬그머니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현북한체제 안에서 누이동생이 이런 내 글을 읽게 될 리는 만무하겠지만 설령 읽게 된다면? 이런 이 오빠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상정(想定)부터 하게 되는 것이다.뿐만 아니라 혹여 지금 내가 쓰는 이 글로 하여 북에 있는 누이동생이 곤혹스럽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거나모종의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등등등등. 사실 지난 50년간 휴전선 넘어 북한이라는 땅은 아주아주 먼 땅이어서 거기 남아 있는 친족들도 아예 마음 속 깊이깊이묻고만 살아 왔었는데,한데 별안간 남북간의 통로가 요만큼이나마 뚫리고 북에 남아있는 친족 상면도 가능해지면서 사(私)적으로 부딪쳐 있는 이런 국면들이야말로 6·15선언 이후 우리 남북관계가 새 패러다임으로 들어섰다고 하는 그 구체적인 실제 상황일 것이다. 이런 짧은 글 하나를 내놓는 경우에도 두 달여 전에 만났던 북의 누이동생부터 떠올리며 되도록 그 누이동생에게 폐가 안 되듯이,혹은지난번 방북 길에는 만나지 못했지만 네살 아래인 남동생이나 거기딸린 조카들 입장까지도 나름대로 헤아리며,더 나아가 현 북쪽 당국의 내 이런 글에 대한 반응 하나하나까지도 큰 품으로 싸안 듯이 대어들게 되는 이것,이런 마음 자세…. 대체 이게 무얼까. 사실은 이런 것이야말로 일단은 사람 사는 가장자연스러운 반응양태이지 싶어진다.그야,보기에 따라서는 나의 이런반응양태야말로 어느 한 구석 이미 북한의 볼모로 잡혀 있는 꼴이 될는지도 모른다.26년 전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로 1년 가까이구치소에 갇혀 있던 나 자신부터가 우선 그 점을 민감하게 곤혹스럽게 의식하게 된다. 요컨대 남북관계는 이렇게 급류를 타고 있는데 우리의 현실 여건이나 의식은 재래의 ‘틀’에 그냥저냥 갇혀 있다.이 어색한 괴리감!운신의 불편함! 하지만 새삼 딱부러지게 밝히거니와 나는 예나 지금이나 결코 공산주의자는 아니고,다만 이 땅에서 지난 50년 가까이 소설을 써온 사람으로서 모든 지혜와 정열을 쏟아부어 우리의 통일에 뜨겁게 동참을하고 싶은 것뿐이다.따라서 현 북한의 누이동생이나 남동생,조카들에게 신경을 쓴다고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 문학까지 저버리면서 내문학적 양심에 배치(背馳)되면서까지 그쪽에 대해 신경을 쓰거나 동조할 생각은 없다.북의 누이동생도 이 오빠가 그렇게까지 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으로 진정으로 믿는다. 세상사 모든 일은 직접 닥쳐보고 나서야 알 일인 것이다.2년 전 98년에 9박10일간 북한을 다녀 올 때는 재북 가족 누구 하나 못 만났음에도,아아 북쪽 산천이며,몇 안되는 북한사람들이며,심지어는 공기알갱이까지도 싸목싸목 뭉클하게 가슴에 다가들었었다.그때 흘낏이나마 친했던 두어 사람은 저번 두번째 방북 길에도 다시 만나 극히 짧은 시간일망정 따뜻한 정분을 나누었다. 달포 전인가,일본의 총련계 동포들이 처음으로 입경했을 때도 적십자사 자문위원 자격으로 워커힐 만찬장에 동참했었는데 그 분위기는매우매우 오순도순하고 시종 따뜻하였다.어쩌다가 일본 땅에서 살게된 그냥저냥 자연인으로서의 70대,80대 노인들,이 사람들이 지난 50년간 몽매에도 잊지 못할 고향 땅으로 어찌하여 올 수가 없었는지,새삼 의아해질 뿐이었다.정작 만나 보면 한 사람 한 사람 이렇게도 따뜻하게 정이 가는 것을,싶어지던 것이었다. 어제 저녁 이산가족 교환방문으로 2차로 내려온 북쪽 손님들과의 만찬 자리에 같이 합석하여 절감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저번 1차때의그 지나치게 극적인 분위기는 벌써 조금 가라 앉아 보였는데, 응당사람 사는 매사가 그렇긴 할 것이었다.같은 일이 거듭되면 어차피 평상의 감정으로 차츰 돌아오며 비로소 제대로 범연하게 터를 잡아가게될 것이었다. 한데 놀랍게도 같은 식탁의 바로 내 옆에 앉았던북한에서 내려온이산가족 60대 노인 한 분이 개구 일성 주절대는 것이 아닌가. “어서 서신 교환하고,면회소를 설치해설란에 해 가야지.이거야 원‥”. 이벤트성 행사로 한껏 통일 분위기가 고조된 속에서 그 이의 이 한마디는 그 이상 신선할 수가 없었다.나는 두 눈을 한껏 벌려 떴을 뿐이었다.남이나 북이나 사람이란 이렇게 똑같은 생각임을 새삼 확인한순간이었다. 이호철 소설가, 경원대 교수
  • 장재언 北赤위원장/ 출생지‘학력 베일에 싸인 대남전문가

    장재언(張在彦·64)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장이 30일 오후 서울에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136명의 방남단을 인솔하고 온 장 위원장은 코트속 정장에 금테안경을 한 여유만만한 얼굴로 비행기에서 내렸다.그는 항공기 탑승구를빠져나와 대한항공 여직원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으면서 “동포의 정을안고 왔다”고 소감을 밝혔다. 1차 이산가족 방남단 단장이었던 류미영(柳美英·여) 천도교 청우당중앙위원장처럼 장 위원장도 종교계(가톨릭)에 몸담고 있다.오래 전부터 남북관계에 관여해온 대남 전문가이지만 출생지,학력 등은 베일에 가려 있다.이번 2박3일의 서울방문에서 그를 둘러싼 궁금증이 어느 정도 풀릴지 미지수다.일본 미국에도 많은 지인을 갖고 있으며 국제감각과 추진력으로 고위층의 신임이 두텁다.93년 일본,95년 미국을방문한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일부에서는 방문단 교환사업에 제동을 거는 일들이 벌어지고있다”고 말해 서울 첫밤의 여운을 남겼다. 홍원상기자 wshong@
  • 2차 남북이산상봉/ 張 한적총재 訪日 ‘자리 피하기’?

    대한적십자사는 2차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총재가 서울에 없는 ‘유고 상태’에서 치르게 됐다.장충식(張忠植)총재가 29일 오후 일본행비행기로 출국했기 때문이다. 장총재의 공식 출국 이유는 일본적십자사의 초청으로 사할린 동포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것.“사할린 동포의 영구귀국 문제,한국내 복지회관 지원,귀국 동포의 일본 방문 등의 논의를 위한 것”이라고 이날한적 관계자는 밝혔다. 그러나 북한측이 장총재가 북한비하 발언을했다고 주장하며 장총재가 이번 행사 전면에 나서지 말아줄 것을 요청한 상태여서 북측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회피전략’으로 보인다. 적십자사의 가장 큰 행사를 앞두고 전격적으로 자리를 피한 것도 상황을 설명해준다. 정부 당국자도 이날 “북측이 장총재가 행사 전면에 나서지 말도록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어 다른 방법이 없다”며 속사정을 말하고 있다.북측은 장총재가 지난 10월호 모 월간지와 인터뷰한 것을 문제삼아이산가족사업 재검토 등을 주장하고,장총재가 있는 한 이산가족 사업을 추진해나가기 어렵다고 주장해왔다. 장총재의 일본행은 사정이야어떻든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경사에 적잖은 티로 남게 됐다. 또 화해와 인도주의적 협력을 주관해나가야 할 한적 총재가 북측의 ‘기피인물’로 남게 되는 난제를 안겨주게 됐다. 이석우기자 swlee@
  • [대한광장] 10차 SOFA협상 주도하라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위한 10차 공식 협상이 29일 시작해12월7일까지 서울에서 열린다. 그동안 한·미간 협상과정을 지켜보면서 논의의 초점이 새로운 국내외 정세 변화에 맞는 한·미간의 근본적인 관계가 아니라,한미주둔군지위협정의 개별조항에만 너무 치우친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렇게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않다 보니 우리정부가 협상의 큰 흐름을 주도하지 못한 것 같다.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SOFA의 본 협정과 합의의사록은 냉전이 극치를 이룬 1966년에 체결된 것이다.그 이전에 있던 대전(大田)협정은 50년 전시중이라는 특수상황에서 미군측에 전용형사관할권을 허용한명백히 불평등한 협정이었다.이 불평등한 대전협정 때문에 한국인 범죄 피해자들은 53년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미국측의 일방적인 형사재판권 횡포에 속수무책이었다.그후에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정통성의 취약성 때문에 미국측에 평등한 한·미 관계를 요구할수 없었다.미국측은 65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일 기본조약을 무조건 체결하고,한국군을 월남에파병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그대가로 시혜적 차원에서 66년 한·미행정협정을 체결해 주었다.다시말해 한·미행정협정에는 60년대 당시 한·미 관계의 일방적 특혜·시혜적인 관계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물론 91년 형사관할권 자동포기 조항 등 그후 몇가지 점이 개정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SOFA의 근본적 불평등의 상징인 본협정과 합의의사록은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상태다.게다가 91년 개정협정에는 주한미군 주둔경비를 새로이 부담하는 방위비특별분담 부속협정까지 끼어들었다.따라서 현행 한·미행정협정에는 한·미간 동등한 상호관계가아닌 66년 당시의 불평등 요소가 형사,민사,시설 및 구역,노무, 환경,통관 관세 등 모든 영역에 깔려 있다.더욱이 SOFA의 모법인 한·미방위조약(1953년)도 이러한 일방적 한·미 시혜관계의 시대적 산물이었다. 더구나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실질적으로 북한을 가상적으로 간주해 체결한 조약이다.그런데 90년 10월 독일통일,동유럽의 개혁과 개방은 국제적 차원에서 탈냉전·탈이념을 향한 역사의 큰 흐름이었다. 한반도는 분단으로 인해 이 국제적 흐름에 유일하게 동참하지 못한지역이었다.그러나 한반도의 전쟁 재발을 막고 민족의 화해와 협력그리고 평화공존의 기반을 합의한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와북·미관계는 극적인 변화를 하고 있다.이에 따라 이제 주한미군의위상도 국내외 정세에 맞게 바뀌지 않을 수 없게 됐다.남북한간에는제2차 국방장관회담이 예정돼 있고 남북 군사실무회의도 구성,가동되고 있다.북·미관계에서도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문제에 대해 이미개발 유보를 선언했고 향후 수출포기 문제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미국도 북한을 테러 대상국에서 해제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고 한다.이렇게 SOFA의 모법인 상호방위조약의 전제조건인 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지난 8월2일 제8차 협상이 끝나고 발표된 공동발표문 제2항은 한·미 군사안보동맹을 지나치게 강조했을 뿐 동북아에서의 지역세력 균형자 내지는 평화유지자로서 주한미군의 변화된 역할에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그러나주한미군의 근본적 위상변화와 한·미 두나라간의 관계정립에 대한 양국간 근본적 이해의 조율 없이 무조건한·미 공조만 강조하는 SOFA협상의 진행은 시대착오적이며,6·15 공동선언의 실현과 변화된 국제정세에도 역행한다.따라서 한국측은 미국측에 변화한 국내외 정세에 맞는 주한미군의 위상 변화를 환기시키고,이에 상응하도록 한·미관계의 기본 틀인 상호방위조약 개정 등근본적 문제의 개선도 요구해야 한다.항상 미국측의 주장이 최선은아니다.당연히 미국 대표는 미국 국익을 옹호할 것이다.우리 대표도이제 행정협정상 개별조항 개정과 더불어 6·15 공동선언 실천이라는민족문제 해결을 위해 동반자 관계 정립이라는 한·미관계의 근본문제에 대해서도 우리의 분명한 입장을 알려야 할 것이다.협상에 임하는 한국측 관계자의 역사의식 제고를 다시 한번 촉구한다. △이장희 한국외대 교수·국제법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7)러시아 우수리스크·수이푼

    아침 일찍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지프를 대절했다.130㎞ 북쪽 우수리스크 시내를 취재하고 서쪽으로 나아가 선열들의 피어린 격전 현장을더듬기 위해서였다. 포장이 잘 돼 있어 지프는 바람을 가르며 내달렸다.한국의 산세를 닮아 마치 시골 국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색다른것은 커다랗게 쓴 러시아어 광고 간판들과 이따금 눈에 들어왔다가물러나는 주말농장 ‘다차’의 러시아식 바라크들이었다. 우수리스크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을 연결하는 철도의 분기점에 있으며 우수리강과 면해 있다.옛날 발해 시대 지명은 쌍성자(雙城子),북경조약으로 러시아 영토가 된 직후에는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라고 불리기도 했다.기사년(己巳年·1869년) 함경도의 대기근으로 유민행렬이 이어질 때 일찌감치 한인 집거촌을 이루었다.국운이 기울자 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홍범도(洪範圖) 등 많은 우국지사들이 찾아와 근거지로 삼았다.그리하여 1917년 고려족회를 열었고 그것은 대한국민회의로 발전했다. 그러나 그 때를 증언하는 흔적은 시내에 없다.군납업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의병대를 조직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최재형(崔在亨)이 일본군에 사로잡혀 처형당한 곳이 우수리스크다.이상설이 숨을 거둔 곳도 이 도시다.취재팀은 두 분의 충혼을 되새기며 거리를 이리저리 달려보고 우수리스크역 앞에 차를 멈추었다.우리 선열들이 무수히드나들었을 3층 역사(驛舍)는 낡았으나 산뜻하게 녹색 페인트로 단장된 채 앉아 있다. 치체리나가(街) 54번지의 사범전문학교도 옛 모습그대로 서 있다.1917년 고려족중앙총회가 4만루불의 기금을 모아 만든 이 학교는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국내에서 카프(KAPF)파로 활동하다가 망명한 시인 조명희(趙明熙)가 강의했던 이 학교는 지금 이과(理科)초급사범대학으로 사용되고 있다. 취재팀은 서쪽으로 차를 돌려 시내를 벗어났다.우수리스크에서 중국국경에 이르는 수이푼(秋風) 지역에는 우리의 항일투쟁 현장이 많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박환(朴煥·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취재팀이 이 곳에 갈 것이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꼬르사꼬프까도 가보고 이상설 선생의 유해를 뿌린 수이푼강도 꼭 보십시오.거기 기념비를 세울 겁니다.” 우리 선열들이 재피거우라고 불렀던 꼬르사꼬프까 마을은 유인석(柳麟錫)이 1910년 6월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한 유서 깊은 곳이다.당시 연해주에는 간도관리사로서 북간도에서 투쟁하다가 온 이범윤(李範允),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갔던 이상설,삼수(三水)갑산(甲山)에서 용맹을 떨친 의병장 홍범도,그리고 안중근(安重根)등이 현지의 대부호인 최재형과 동포들의 지원으로 병력을 조련하고이따금 국내진공을 감행하고 있었다.위정척사파의 거두로서 국내 의병전쟁을 이끌다가 망명한 유인석은 그들을 이 곳에서 하나로 응집시켰다.그리고 꼬르사꼬프까 마을을 포함해 근처의 수이푼강과 뿌질롭까,솔밭관은 1920년대 러시아 혁명전쟁 때 국제간섭군으로 출병한 일본군과 그들이 조종하는 마적단에 맞서 우리 항일유격대가 수차 격전을 벌인 곳이다.당시 지휘자는 ‘백마를 탄 김장군’으로 전설처럼회자되었던 김경천(金擎天)과 채영(蔡英)·김규면(金圭冕)·조맹선(趙孟善)·이중집·황운정 등이었다. 출국하기 전 필자는 그들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 독립기념관 이동언(李東彦) 연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자료를 보내주며 말했다.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니 꼭 신문에 써 주십시오.” 취재팀을 태운 지프는 야트막한 산과 들판이 어우러진 곳을 달리고있었다.우수리스크역에서 눌러놓은 운전석의 타코미터가 3.5㎞를 가리킬 때 차를 세웠다.수청(水淸·현 빨치산스크)에서 활약하던 김경천은 1922년 부하들을 이끌고 이 곳으로 이동해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500명 정도의 대원을 교육시켰다.그 장소가‘우수리스크 서방 7리’라는 기록이니 이 근처인 것이다.일본 육사출신으로 대위 군복을 벗어 던지고 항일전선에 뛰어든 그는 사관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해 이 곳에 장교양성소를 세웠던 것이다.이리저리노인들을 붙잡고 물었으나 아쉽게도 그 현장은 찾을 수 없었다. 나침반을 꺼내 들고 다시 한참 차를 달리는데 길가 수풀 속에서 꼬르사꼬프까라는 간판이 불쑥 나타난다.1869년에 마을이 처음 생겼다는 표시도 있고 ‘1917부터 1967년’이라는 표시도 있다.우리 동포들이 황무지를 개척하여 곳,우국지사들이 십삼도의군을 창설한,그리고항일 유격대의 근거지 구실을 한 유서 깊은 마을은 큰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평온하게 자리잡고 있다.차에서 내려 천천히 마을의 고샅으로 걸어 들어갔다.굴렁쇠를 굴리며 노는 아이들과 체스를 두는 노인들만 보일 뿐이었다.노인들에게 뿌질롭까 마을과 솔밭관 마을,그리고 수이푼강 가는 길을 물어 약도를 그렸다.수이푼강은 이름이 라즈달리니야로 바뀌어 있었다.뿌질롭까는 확인했으나 솔밭관은 알 수가없었다.그리고 홍범도가 수이푼의 다아재골에서 최병준의 집에 무기를 숨겨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진공의 기회를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찾을 수 없었다.1937년 동포들이 강제이주당해지명도 사라지고 우리 노인들도 없고 전설마저 사라진 때문이다.뿌질롭까는 10여분만에 도착했다.마을의 옛 이름은 육성촌(六城村).조명희 시인이 교장을 지낸 ‘육성촌농업학교’가고색창연한 모습으로취재팀을 반겼다.조명희 교장 집에서 하녀로 일한 노파를 만났다.이곳 출신이었다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는 그녀의 짐작대로라면 솔밭관은 북쪽 1∼2㎞.들길을 달려 찾아가니 마을 자리가 남아 있다.강제이주 후 버려져 있는 것이다. 취재팀은 수이푼강을 찾아갔다.폭이 50m쯤 되는 우수리강의 한 지류였는데 포장도로가 나 있는 다리 옆으로 옛 다리가 보였다.이 강을중심으로 벌어진 수많은 혈투를 생각하며 주변의 산야를 휘휘 둘러보는 필자는 가슴이 아팠다.우리 역사의 소중한 일부인데도 지도자들이름조차 묻혀져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채영은 중국 군관학교 출신으로 1919년 ‘혈성단’이라는 항일유격대를 지휘해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다.이중집은 600명 규모의 ‘솔밭관 유격대’와 ‘우리동무군 유격대’를 지휘해 싸웠다.김규면은 기독교계의 지도자로 국내에서 투쟁하다 연해주로 와서 ‘혈성단’의 단장을 맡았다.조맹선은 국내 의병 지도자로 북간도를 거쳐연해주로 와서 채영과 더불어 항일부대를 지휘해 싸웠다.황운정은 최진동과 함께, 홍범도가 지휘한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한 뒤 연해주로와서 이중집 부대에 합류했다. 박환 교수가 말해준 이상설의 기념비를 세울 자리는 오른쪽 교두보에서 활처럼 휘어져 뻗은 작은 둑 위였다.그 곳을 밟아본 뒤 시든 잡초와 관목들을 헤치고 강변으로 내려갔다.강은 오염되지 않아 맑고깨끗했다.이상설의 유해가 화장되어 이 곳에 뿌려진 것은 1917년 3월.강물은 그 옛날의 선각자의 한을,그리고 이곳에 무수히 뿌려진 피의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취재팀은 강물 앞에국산 소주팩을 꺼내 한 잔 부어놓고 절을 한 뒤 차에 올랐다. 우수리스크 이원규 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아세안+3’ 정상회의 결산

    [싱가포르 오풍연특파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동남아국가연합(ASEAN)+3(한·중·일)’ 정상회의참석은 그 어느 때보다 실질적성과를 거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ASEAN+3(한·중·일) 성과 동아시아 지역에서 우리의 ‘위상’을확실히 굳히는 계기가 됐다.‘ASEAN+3’ 회의는 물론 ‘ASEAN+1(한국)’회의를 중국·일본과 함께 나란히 가질 수 있는 데서도 이를 알수있다.25일 고촉통 싱가포르 총리가 발표한 의장 성명에서도 “아세안정상들이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제의한 ‘동아시아 연구그룹’에대해지지를 표명했다”고 밝혀 김 대통령의 ‘이니셔티브’를추인했다. ■메콩강 개발 및 한국 참여 김 대통령은 베트남을 비롯,태국·캄보디아 등 메콩강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들로 부터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받고 지원을 약속했다. 대통령을 수행중인 이기호(李起浩) 경제수석은 “메콩강 유역 지역은 발전잠재성이 있는 데다 우리 경제와의 상호보완성 측면에서도 중요한 전략시장으로 평가되고 있다”면서 “특히 수주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국내 건설업계가 활로를 뚫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메콩강은 중국의 티벳공원에서 발원해 미얀마·라오스·태국·캄보디아·베트남을 관류하는 세계 10대 하천 가운데 하나로 지난 91년부터 아시아 개발은행(ADB) 주관으로 개발사업이 추진중이다. poongynn@. *싱가포르 국빈방문 안팎. [싱가포르 오풍연특파원] 싱가포르를 국빈방문 중인 김대중대통령은 일요일인 26일에도 한·싱가포르 정상회담에 이어 동포간담회,양국 경제인 초청 만찬을 갖는 등 실리외교에 주력했다. ■25일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는 북한 싱가포르 대리대사 자격으로 홍원준 참사(53)가 나와 눈길을 끌었다.홍 참사는 김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북조선 싱가포르 대리대사 홍원준입니다”라며깎듯이 반가움의 예를 갖췄다.김 대통령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홍 참사의 손을 잡고 “반갑습니다”라고 화답했다. 김 대통령이 국빈방문에서 북한 사절단을 접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달선 신임대사는 지난 22일 현지에 도착했으나 신임장을 받지 못해 참석하지 못했다. ■25일 오후 아시아의 두 거인(巨人)인 김 대통령과 싱가포르 리콴유(李光耀)선임장관이 김 대통령의 숙소인 샹그리라호텔에서 만나 국제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혜안을 과시하며 1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김 대통령은 리 장관에게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진전상황에 대한 본질을 물었으며,이에 리 장관은 “전술적이건 아니든 그 결과는북한이 통제하기 어려운 변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金德弘씨 인터뷰

    황장엽(黃長燁)전 북한 노동당 비서와 함께 지난 97년 망명한 김덕홍(金德弘)씨는 24일 대한매일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황장엽 선생과나는 북한 민주화 활동을 계속 지원해 나갈 생각이며 국정원이 활동을 제한할 경우 국정원이 관리하는 안가를 떠나 별도 활동을 벌여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김씨는 그러나 “황선생도 뜻을 같이 하지만필생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회과학논문을 작성중이므로 완성시점인 내년 10월까지는 안가에 머물겠다는 생각”이라고 전했다. ◆계획은. 국정원측에서 북한 민주화 활동을 허용하고 행동을 제한하지 않는다면 안가에 계속 남아 있겠다.그러나 북한 민주화 활동 조건이 보장되지 못한다면 나 혼자라도 나가서 사업을 계속해 나가겠다. ◆북한 민주화 활동이란 무엇인가. 북한 동포들이 안팎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수령에 대한우상과 미신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안가를 나가면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 북한 민주화를 위한 전략적사업을 계속할 것이다.강연활동도 하고탈북자 동지회가 운영하는 회사도 키워 자금기반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정부와의 대북정책 갈등 절충이 가능한가. 정부와 대북정책에 대한목적은 같다.북한의 민주화와 개혁개방이다.그러나 방법론에서 다르다. 북한은 독재체제의 물질적 기반과 한국을 다리로 국제적 고립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다른 쟁점은 다 절충이 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의 민주화 활동을 그만두라”는 국정원의 요구는 수용할 수 없다. ◆황장엽씨는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 정치활동에 끼고 싶지 않아 조용히 생활하려 한다.같은 건물의 옆 방에서 산다.아침을 들지 않고점심·저녁만 들지만 건강하다.책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이석우기자 swlee@
  • 독자의 소리/ 외국인 사망때 자국영사관 도움 받도록

    최근 보도에 의하면 현재 국내 체류 외국인 중 조선족이나 한족 등중국인들이 약 반수인 8만∼9만명에 이른다고 한다.그들은 주로 3D업종의 열악한 환경에서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열성적으로 또는 무리할 정도로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다.그들 대부분이 불법체류자인데다이질문화와 기후풍토에 적응하기 어려운 점,가족에의 그리움 등 갈등이 겹쳐 쉽게 병이 나거나 숨지는 사람이 상당수에 이른다고 한다.따라서 체류 중국인이 사망하면 동료나 처리담당자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 당황하지 말고 제일 먼저 자국민 보호활동을 하는 중국대사관 영사부(전화:02-755-1589,팩스:755-1025)로 반드시 사망진단서 1통을가지고 가기 바란다.그러면 수속절차를 빠른 시간에 마칠 수 있다.담당영사와 상담해 진단서 번역시의 주의사항,공증,외교통상부 영사인증,화장시 진단서 원본 제출 등 수속과정에 대한 설명을 친절히 들을 수 있다.이처럼 신속·정확한 처리가 한·중 우호 및 동포애,영령의 명복과 유가족을 위해서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안병식[서울시 중구 명동2가]
  • 국정원 “北, 黃長燁씨 제거 첩보 입수”

    국가정보원 김보현(金保鉉) 3차장은 23일 “지난 5월 우방국 정보기관으로부터 북한이 황장엽(黃長燁)씨 테러를 위해 정보를 수집 중이라는 첩보를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김 차장은 이날 국회 정보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국회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하고,“비공식 경로를 통해 북한이 친북 중국동포를 활용,황씨 제거를 추진하고 있다는 첩보도 입수했다”고 밝혔다. 그는 황씨의 ‘외부 차단’ 주장에 대해 “국정원은 황씨의 활동을제약하거나 외부 접촉을 차단한 적이 없다”면서 “황씨는 개인 전화와 휴대폰을 갖고 누구와도 원하는 대로 통화를 했고,망명 이후 강연178회, 언론 인터뷰 33회 등을 했고,‘북한의 진실과 허위’ 등 12권의 저서를 펴냈으며,논문을 제약 없이 발표했다”고 소개했다. 한편 황씨는 이날 오후 국정원 회의실에서 강창성(姜昌成),정형근(鄭亨根),김용갑(金容甲)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 9명과 면담한 자리에서 집필이 끝나는 내년 10월까지 안가(安家)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뜻을 밝혔다. 황씨와 함께 망명한 김덕홍(金德弘)씨는 이날 오전 서울 송파구 가락동 탈북자동지회 사무실에서 ‘사상 21세기’(회장 吳制道 변호사)와의 인터뷰에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에는 미국을방문하지 않겠다”면서 “나의 말은 곧 황 선생님의 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내년 3월쯤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북한 관련 세미나에 황씨를초청한 ‘디펜스 포럼’의 수잔 솔티 회장은 “황씨를 면담하기 위해다음달 4일 한국을 방문,7일 황씨를 면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상연기자 carlos@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6)블라디보스토크·빨치산스크

    1910년 국권상실 직후 의병들의 거점이었던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를 돌아본 취재팀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항일투쟁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러시아어로 ‘보스토크(동방)’와 ‘블라디’(정복)를 합성한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연해주의 중심도시.금각만(金角灣)을 껴안은이 곳은 극동에 있는 러시아의 유일한 부동항(不凍港)으로 1860년대이래 러시아 극동진출의 발판이 돼왔다.특히 1903년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개통되면서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우리 항일투쟁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항일투쟁이 응집된 중요한곳이다.일제를 피해 포시에트를 떠난 한인들이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 때문이다. 해삼위(海蔘威)라고도 불렸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먼저 찾아 나선곳은 뽀그라니치나야 스라보카 거리였다.구한말 항일운동의 중심역할을 한 개척리가 세워진 곳이다.남향에다 바다로 향한 전망이 좋아 마을이 없던 당시 이주자들이 정을 붙이고 살기에는 최적지로 보였다. 그러나 개척리는 1911년 러시아 당국이 콜레라 근절을 핑계로 수천여명에 이르던 우리 동포들을몰아낸 뒤 병영을 지었고,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원형극장이 들어섰다.지금은 중국음식점으로 바뀌었다. 한인들은 쫓겨나기 1년전인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이상설 이범윤 홍범도 등을 주축으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9월 11일 러시아 극동공화국 당국이 일본의 요구에 따라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간부 200여명을 체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대동공보’도 이 곳에서 발행됐다.국내 의병장,계몽운동가들이 모여들면서 이 주변은 한인수가 한때 16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90여년의 긴 세월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남김없이지워냈다.기왓장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현실에 취재팀은 안타까움을감출 수 없었다. 개척리를 떠난 동포들은 십여㎞쯤 떨어진 언덕에 새둥지를 틀었다.바로 신한촌(新韓村)이다.그러나 신한촌은 북향의 경사진 언덕이다.따뜻한 남향의 옥토에서 칼바람 부는 황무지로 옮겨온 우리 동포들의심정은 어땠을까. 우리 동포들은 신한촌에서 1911년 8월29일 한일합방 1주년을 맞아반대시위를 벌였다.그리고 조국독립과 계몽활동,민족주의교육 등을주창하는 권업회(勸業會)를 창설했다.이 때 홍범도는 20명의 동지와함께 ‘21의형제 동맹’을 결성했다.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앞서 1912년 신채호 이상설장도빈 등은 ‘권업신문’을 발간했다.1919년 3월17일에는 고국에서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가졌다.이듬해 3·1절에는독립문을 세웠다.이렇게 줄기차게 전개된 투쟁 때문에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은 독립운동사에서 신한촌을 북간도의 용정과 명동보다 앞선것으로 평가한다. 일본군은 1918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위군과 차르의 백군간에 벌어진 내전에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파병해 있었다.1920년4월,일군이 러시아군과 한인부대 연합군과 충돌하자 이를 기화로 신한촌을 기습하였다.주요 지도자들은 탈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최재형이 동포 6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그는 우수리스크로 끌려가서 처형되었다. 취재팀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를 피해 새로 정착한 빨치산스크로 향했다.우리식으로 수청(水淸)이라고 이름지어진 이 곳은블라디보스토크에서 200㎞쯤 떨어진 산세 험한 소 도시이다.백마 탄 김일성장군으로 불렸던 김경천(金擎天) 장군이 이끄는 항일유격대가 치열하게 일본군과 싸웠던 곳이다. 김경천은 창해(滄海)청년단과 수청고려의병대를 이 곳에서 이끌었다. 광복군사령관을 지낸 이청천(李靑天)보다 일본육사 3년 선배로서 조국 독립에 한몸을 던졌던 김경천.그는 1909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육사에 재학 중 조국이 강점당하는 비운을 겪었다.요코하마에서 그는이청천 홍사익 등과 함께 뒷날 탈출하자고 결의했다.1919년 6월 그는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이청천이 중국 땅에 남은 것과 달리 김경천은 1919년 말 러시아로와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1920년 4월 일본군의 신한촌 기습에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면한 그는 수청으로 가서 한인들을 괴롭히는마적들을 제압하고 일본군과 싸웠다.그는 이 때부터 ’백마 탄 김일성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김경천은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때때로 러시아 백군과 싸워 볼셰비키혁명에도 공로를 쌓았지만홍범도가 그랬던 것처럼 강제 이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그리고 1942년 수용소에서 불우하게 사망했다. 광산촌인 빨치산스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자동차는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간신히 3시간만에 도착한 빨치산스크의중심가는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갑자기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한참수소문한 끝에 빨치산스크 시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나탈리아라는여성 관리원의 도움을 얻어 빨치산 사진과 문헌을 샅샅이 뒤졌지만김경천 등 한국식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한인 빨치산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었다.기록에 따르면 이 곳에 있던 빨치산 중 절반이 한인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1936년 강제이주 뒤 자료들이 대부분 멸실된 듯 싶었다.나탈리아는 취재팀의 허탈해 하는 표정을 보고 “수장고에 다른자료들이 있는데 관장이 갖고 외출했고 그는 며칠뒤에야 돌아온다”며 자기가 더 미안해 했다.취재팀은 어쩔 수 없이 벽에 걸린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다 한인으로 보이는 몇사람을 발견한 것을 위안으로삼으며빨치산스크를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 박재범기자 jaebum@. * 빨치산스크의 고려인들. 빨치산스크에는 고려인(카레이스키)이 간혹 눈에 띄었다.1936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전원 강제이주된 한인들의 후손들이다.그들은 최근 몇년새 한둘씩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다.대개 중앙아시아에 가까운 하바로브스크 등 대도시에 자리잡고 있으나 멀리 빨치산스크까지 오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그러나 그들은 이미 선조들의역사를 잊었다.아니 아예 모르고 있었다. 빨치산스크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러 들어온 한 사람을 만났다. 생김새가 한국사람과 똑같아 “혹시 카레이스키가 아니냐”고 러시아말로 묻자 “그렇다.박이다”라고 대답했다.“4∼5년전에 중앙아시아에서 이 곳으로 왔다”는 그는 “예전에 이 곳이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음을 아느냐”는 질문에 ‘처음 듣는 얘기’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바로브스크에는 고려인이 빨치산스크보다 훨씬 많다.고려인들은하바로브스크 시내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 등을 팔거나 구두를 고치는일 등을주로 하고 있다.그들 역시 중앙아시아가 고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바로브스크 등 연해주가 그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뿌리내렸던 곳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역시 극히 드물었다. 박재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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