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동지
    2026-07-06
    검색기록 지우기
  • AI TV
    2026-07-0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7,117
  • 러,「보」 파견 나토군 참여/미­러 국방회담

    ◎지휘체계엔 미국과 이견 【제네바 AFP DPA 연합】 미국과 러시아는 8일 제네바에서 열린 양국 국방장관회담에서 러시아가 보스니아에 파견될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군에 참여키로 함에 따라 보스니아 평화정착에 「실질적 진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보스니아에 파견될 나토군의 지휘체계에 대해 미국은 「미국이 지도하는 나토군 단독지휘체계」를 주장한데 대해 러시아측은 「나토와 러시아 간의 합동지휘체계」 혹은 「나토군 전권지휘체계」를 주장,「상당한 이견」을 보였다.
  • 지진공포(외언내언)

    지구촌이 때아닌 지진공포에 휘말리고있다.일본 중국 동남아 알래스카등 주로 환태평양 화산대를 따라 곳곳에서 크고 작은 지진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아직은 큰 피해를 낼만큼 강한 지진이 발생한 것은 아니나 동시다발 내지 군발의 지진들이어서 큰지진의 불길한 전조가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불안해하고 있다. 특히 불안과 공포가 심한 곳은 지진의 나라 일본인 것 같다.관동대지진으로 유명한 도쿄에서 서남 1백여㎞ 떨어진 태평양연안의 세계적 온천관광지 하코네(상근)·아다미(열해)등에 인접한 이즈한토(이두반도)는 배를 타고 있는것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로 연일 땅이 흔들리고 있으며 6일엔 6명의실종자까지 났다. 이웃 중국에서 24만명의 희생자를 낸 76년 당산 대지진이 금년과 같이 불길한 윤8월이었다고 해서 지진공포가 확산되고 있는 점도 일본사람들의 불안을 더욱 자극하고 있다. 고베(신호)시를 페허로 만든 한신(판신)대지진 직후요 관동지진 같은 대지진이 일어나기 쉬운 주기일뿐 아니라 후지산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경고까지 나오던 참이어서 공포심은 더하다.워낙 지진이 많은 나라여서 국민생활 자체가 온통 내진체제를 갖추고 있는 일본이지만 지난번 한신지진으로 그런 준비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력한 것인가도 새삼 실감한 터여서 더욱 그렇다고 한다. 우리 한반도도 지진안전지대는 아니다.우리기록 중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은 통일신라시대인 779년의 경주에서 발생했던 것으로 1백여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한동안 조용하던 지진이 90년대 들어 빈번해지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불길하다.6일밤 동해 속초·울진 앞바다 지진과 8일 아침의 울산 앞바다 지진은 금년들어 백령도 등에 이은 25번째 지진이다.한반도도 점차 지진활동기로 접어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워진다. 우리도 이제는 지진 대비노력이 낭비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 핵 폐기물 처리시설 「러」에 제공/정부 내년초

    ◎특수 컨테이너 등 1백만달러 어치 정부는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발생하는 저준위 핵 폐기물 처리를 위해 특수 컨테이너 등 1백만달러 어치의 전문 기자재를 빠르면 내년초 러시아측에 제공할 것으로 알려졌다. 외무부 당국자는 8일 『러시아측이 자국의 핵처리 시설 부족으로 핵폐기물을 동해에 투기할 수밖에 없다며 협조를 요청해왔다』면서 『동해 오염 방지 차원에서 기자재를 제공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러시아측이 제시하는 협력사업계획서를 면밀히 검토,현재 필요한 기자재를 선정할 것』이라면서 『재정경제원 등 관계부처와의 협의를 통해 지원내용을 최종 결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함북 회령­학송 전철공사 완공(북녘 뉴스라인)

    【내외】 북한은 최근 당창건 50주를 맞아 회령∼학송간 전기철도공사를 완공한 것으로 비롯해 경제대상들을 대거 완공,조업식을 가졌다. 북한은 지난 5일 함북 은성역에서 당비서 한성용,교통위원장 이용무,함북도당책겸 인민위원장 이한모,사로청위원장 최용해 등이 참석한 가운데 회령∼학송간 전철공사 개통식을 가졌다고 중앙방송이 6일 보도했다. 이날 개통식에서는 전철공사에 필요한 설비와 자재를 공급한 공장·기업소에 김정일의 「감사」를 보냈으며 전철공사에 투입됐던 청년돌격대 및 건설자들에게 당중앙위 명의의 축하문을 전달했다. 이 방송은 회령∼학송간 전철공사는 회령에서 중국과의 국경선을 따라 온성을 거쳐 은덕군의 학송리까지 연결되는 구간으로서 지난해 6월 착공이후 올해 2월 1단계 공사로 회령∼남양구간(약80㎞)개통식을 가진 바 있다. ◎김정일,간부층 부정부패 잇단 경고 【내외】 북한의 김정일은 김일성사후 자신의 명의로 발표한 세편의 논문에서 잇따라 간부들의 관료주의와 부정부패 문제를 거론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강조한 것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내외통신 분석에 따르면 관료들의 부정부패에 반대하는 투쟁을 강화해야 한다는 요지의 이같은 김정일의 관심은 지난해 11월과 올 6월에 발표된 두편의 논문에 이어 5일 발표된 「노작」에서도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김정일 체제」등장에 따라 앞으로 가시화될 관련조치들이 주목되고 있다. 김정일은 5일 발표된 노작 「조선노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당이다」에서 『일꾼(관료)들 속에서 세도와 관료주의,부정부패를 철저히 배격하고 겸손하고 소탈한 품성을 가진 청렴결백한 생활기풍을 확립할 것』을 요구했다. ◎각국 공관원들 가을걷이에 동원 【내외】 당창건 50주를 맞아 10월10일 전 추수를 끝낼것을 강조하고 있는 북한은 최근 평양에 주재하는 각국 공관원들을 협동농장의 가을추수에 참여시키며 주민들과의 유대강화 및 노동력 확보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중앙방송이 최근 보도한데 따르면 주북 중국대사 교종회와 공관원들은 지난달 25일 평양시의 「북·주 친선 택암협동농장」에 나가 농장원들과가을걷이를 했으며 이곳 농장원들과 두나라의 노래도 부르고 친선을 다졌다는 것이다. 또 29일에는 인도대사 아난드 자와 대사관원들이 「북­인도 친선 갈천협동농장」에,같은날 이란대사 세이드 모르테자 미르헤이다리는 「북­이란 친선 새날협동농장」에 각각 나가 협동농장 근로자들과 농사일을 하면서 친선의 정을 두터이 했다고 전했다. ◎당 창건 사적관 참관사업 진행 【내외】 북한은 당창건 50주를 맞아 각계각층의 주민들을 동원,당창건사적관 참관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당창건사적관의 전시실을 개편하고 김일성의 「조선노동당」창건과 관련한 각종 자료들을 추가 전시한 이래 매일 1천여명 이상의 각계각층 주민들이 사적관을 참관하고 있다고 중앙방송이 5일 보도했다. 주민들은 당창건사적관 참관을 통해 『당창건 위업을 실현한 수령님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다함없는 경모의 정을 새기고 있다』고 이 방송은 전했다.
  • 연재물 「시베리아 대탐방」을 보고/이창재

    ◎엄청난 시장… 한·러 경협의 핵심/문화·경제 심층보도 시베리아 이해 큰 도움 80년대 말 오랫동안 단절되어 왔던 소련과의 문이 열리자 국내에서 소련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었다.공산주의의 종주국으로서의 소련,천연자원의 보고인 광활한 시베리아 대지는 많은 사람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양국간 왕래가 증대되면서 소련의 실상이 드러나고,또한 소연방이 와해되고 신생 러시아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혼란과 시행착오가 지속되면서,러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점차 확대되었다.러시아의 경제하락,높은 인프레이션 및 마피아 등 온갖 부정적인 면이 언론매체를 통해 부각됨에 따라 경제협력의 대상으로서 러시아에 대한 관심 및 이미지도 함께 저하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와같은 어려움속에서도 한국과 러시아간의 경제협력은 꾸준히 증대하여 왔다. 86년 8천만 달러에 불과했던 한·소교역은 91년 12억달러에 달해 15배로 증가하였고,94년 한·러교역은 22억달러에 이르렀으며 금년들어 8월까지 양국간 교역액은 이미 20억 달러에 기록하고 있다. 사실 양국간 경제협력의 초기부터 양측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분야는 우리 기업의 러시아내 직접투자였다.러시아의 미개발된 풍부한 부존자원 및 거대한 시장을 감안할 때,우리 기업의 대 러시아 진출 전망은 매우 유망시되었기 때문이다.89년 진도가 모스크바에 진출한 이래 우리 기업의 대러투자는 계속 증가하고는 있지만,94년말 현재,우리 기업의 대러시아 투자건수는 44건에 달하며 실제 투자액은 3천5백45만 달러에 이르고 있어,교역에 비해 우리의 대러투자는 아직까지 본격화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 기업의 대러시아 진출 초기에는 모스크바가 주요 대상지역이었으나,점차 우리기업의 관심은 우랄산맥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듯 하다.흔히 우랄산맥 동쪽지역은 시베리아로 통칭되고 있으나,실제 이 지역은 서시베리아,동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으로 구분되는데,우리 기업의 대러투자의 과반수가 우리와 가장 근접해 있는 극동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넓게는 시베리아,좁게는 러시아 극동지역이부존자원의 보고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그러나 동시에 열악한 기후외에도 사회간접자본의 부족,제도상의 미비,중앙정부 및 지방정부간의 책임소재 불확실등 이들 지역의 개발을 위해서 넘어야 할 장애물이 산재해 있으며,특히 러시아의 부존자원을 외국인들이 헐값에 갖고 가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대다수 러시아인의 의식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따라서 시베리아 및 극동지방의 자원개발 및 지역개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균형잡힌 시각과 장기적 안목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된다.첫째,단기적 어려움을 직시하면서도 이 때문에 장기적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는 누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둘째,시베리아 개발은 지역의 방대함과 같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진출계획도 몇년 단위가 아닌 수십년 후를 내다보고 세워야 할 것이다.셋째,흔히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은 자원개발의 대상지역으로만 인식되고 있으나,풍부한 자원에서 나오는 구매력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상품시장으로서도 가능성이 있으며,특히 건설시장으로서의 중요성도 충분히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90년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해 온 러시아 경제도 내년부터는 회복할 것으로 전망된다.물론 오는 12월 총선과 내년 6월로 예정되어 있는 대통령선거가 변수로 남아 있지만,92년부터 추진해 온 러시아 경제개혁이 마침내 열매를 맺어 러시아 경제는 새로이 형성된 시장경제체제하에서 성장하기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한·러 경협도 보다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되며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에서의 자원개발을 포함한 우리 기업의 대러투자도 본격화될 전망이다. 그러나 한·러경협이 그 잠재력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리측의 노력도 요구되며,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러시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하겠다.이러한 맥락에서 러시아내 우리의 최대 관심지역인 시베리아의 역사,문화,경제 및 사회를 폭넓고 심도있게 다루고 있는 서울신문의 장기 기획연재물 「시베리아 대탐방」은 한·러 경협의 발전에 기여하고 우리기업의 진출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지구촌 민족분쟁 비관할때 아니다”/메이네즈(해외논단)

    ◎냉전때보다 잔인성 덜하고 열강 패권의도 없어 냉전 종식과 더불어 고개를 내밀던 지구촌의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민족분쟁등으로 어느새 많이 퇴색해지고 있는게 사실이다.하지만 미국의 계간 외교정책전문지 「포린 팔리시」의 총편집인인 찰스 윌리엄 메이네즈씨는 이 잡지 최근호에서 「비관할 때가 아니다」라는 글을 통해 이같은 비관적 태도와 분위기에 제동을 걸었다.그의 글을 소개한다. 많은 머리좋은 학자들이 미래에 대한 비관적 견해를 강력 표명하고 있다.로버트 카플란은 평화도 법도 없는 무정부의 세계를 전망하고 있고 매슈 코넬리와 폴 케네디는 이민과 인구동태를 바탕으로 이같은 무정부상태를 미국에 국한해 전개하는가 하면 새무엘 헌팅턴은 중국·동양의 황화와 회교과격주의에 대한 서양의 내재된 공포를 증대시켰다.존 미어스하이머에 따르면 냉전이후 국제관계가 한층 불안해져 유럽 주요국들이 모두 핵무기를 개발하는 등 냉전이 더 낫다는 생각이 강해진다는 것이다.그들의 생각이 옳은가. 물론 이런 사상가들은 시대를 이끈다기 보다는 세태를 반영한다.미국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보수적인 시대를 거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비관주의는 잘 살거나 정치적 현상유지를 바라는 계층이 선택하는 정조이다.비관주의는 자포자기할 수 밖에 없는 못 사는 사람들의 곤궁에 대한 상류계급들의 수동성을 정당화해준다.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대신 식량증가는 산술적으로 밖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맬더스나 자기외에는 만인이 모두 적이라는 홉스 등이 가장 고전적인 예라 할 수 있다.여기에다 어떤 것을 덧붙일까. 94년 유엔개발계획은 인간개발보고서에서 89년부터 92년까지 모두 82건의 분쟁이 터졌다고 밝히고있다.세계1,2차대전이나 베트남전에 비하면 소규모이긴 하지만 이중 79건이 내전 성격의 분쟁으로 수천명이 죽었다.비슷한 분쟁이 발발할 소지는 수없이 많은데 이를 방지할 대책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제상황이 심난한 사고덩이로 보이는 것은 우리들의 기대치가 높은 탓도 무시 못한다.지나간 냉전을 너무 좋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탈냉전과함께 갈등을 억누를 수 있었던 두 동맹체제가 사라진 연유로 새 민족분쟁들이 속출한다고 설명하는 정치학자들이 많다.그러나 실은 냉전은 지금 시기보다 훨씬 폭력적이었다.냉전기간 동안 두 초강국은 세계 이곳저곳에서 참혹한 대리전을 벌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편리하게도 망각해버린다.3백만 이상이 한국전에서 죽었으며 베트남전에서는 2백만명 이상이,아프가니스탄에선 1백만명이 죽었다. 이 숫자에 중국내전으로 죽은 수천만명,지난 65년 인도네시아 정부의 공산주의 소탕작전 희생자 30만명,중앙아메리카 여러나라의 내전과 중동지역 국가간 전쟁으로 죽은 수십만명,전쟁과 정부의 고의적 방치로 남부아프리카에서 이름없이 죽어간 수십만명 등이 보태져야 한다. 이들 숫자들을 배경으로 하면 지금의 세계는 참으로 평화스러워 보인다.보스니아 같은 곳에서 잔인한 분쟁이 계속되고 르완다에서 말 그대로의 종족대학살이 일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같은 종족갈등은 냉전의 대리전이 보여준 조직적인 잔인성에는 못 미친다. 냉전의 종식으로 잠재한 종족갈등을 가리고있던 담요짝이 들춰내졌지만 또 모든 인류의 머리 위를 감싸고 있던 공포의 먹구름도 걷혀졌다.더 이상 인간을 흔적없이 휩쓸어갈 청천벽력의 원자 천둥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예전의 백만명대 희생자 시대에 비해 현재의 숫자는 수만,수십만명에 그친다. 물론 쓸데없는 헛된 죽음은 우리를 화나게 하지만 최근래에 우리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대가 겪어야만 했던 끈질긴 살육전을 보지 않아도 된다.보스니아전은 처절한 비극이나 희생자 수는 중앙아메리카나 레바논에서 보다 적은 것으로 여겨진다.또 앙골라와 수단 전쟁은 공포스러운 것이지만 현대전쟁의 사나움과 사정없음은 결여되어 있다. 우리에게 또 다행스러운 점은 전쟁승리의 과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전쟁은 잘하면 이문이 남는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쳐왔다.그러나 아프가니스탄,캄보디아,이스라엘 점령지역 등이 예시하듯 요즘 전쟁은 이겨도 별로 큰 이득이 없다.이해다툼 전쟁이 최근 아주 드물어진 이유를 알수 있다. 패권주의 강국의 시대는 지났다.과거의 헤게모니 다툼은 이데올로기와 세력숭배에서 기인되었지만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설파했듯 적어도 예측가능한 미래에는 이데올로기는 죽은 신세다.세계를 휘어잡으려는 헤게모니 추진력을 주는 이데올로기를 찾기가 어렵다.한창 맹위를 떨치는 이슬람은 공격보다는 방어의 신조다.세력 숭배도 한물 갔다.특히 아시아에서 힘은 내부적 발전에서 오지 외부적 팽창에서 오지 않는다는 점을 여러 성공적 정권이 증명했다.예를 들어 중국은 베트남 필리핀 등과 함께 스프래틀리군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중국이 이 섬들을 힘으로 차지한다고 해서 중국의 아시아대정벌 시대가 도래했다고 볼 사람은 소수다. 많은 시사평론가들은 세르비아를 영토확장에 혈안이 된 히틀러 제3제국의 현대판으로 저주한다.분명 세르비아의 여러 행위들은 발칸반도의 평화를 산산조각 내버렸지만 그렇다고 세르비아가 한때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유럽 전체의 안보를 뒤흔들고 있는것은 아니다.독일의 침략행위는 단지 모든 독일인을 제3제국이란 한 국가에다 결집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력숭배의염을 안고 이 강력한 제국을 이용해 유럽전체의 헤게모니를 잡고자 한 것이었다. 오늘날 표면적으론 더 많은 동란이 불거져 나오고 있지만 강대국중 어느 한 나라도 헤게모니를 움켜쥔 패자가 되고자 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국제간 시스템은 구조적으로 아주 건전하다고 할수 있다.
  • 이념에 밀린 항일 유적(압록강 2천리:7)

    ◎장백진 열사묘역에 항일연군 유해만 안장/일제엔 공동 항거했어도 타계파 푸대접/현지엔 「열사 14명중 12명이 조선인」 수록 길림성 장백현 일대에는 어느 지역 못지않게 항일투쟁의 역사가 어려있다.대한독립광정단,대한독립광복단,대한독립군,동북항일연군이 주로 장백지역에서 활약했다.그러나 다른 항일무장단체들은 동북항일연군에 가려 독립운동의 역사속에서 미미한 존재가 되었다.그도 그럴 것이 항일연군은 중국과 조선이 합작한 무장단체였고 이념도 다른 항일무장단체들과 달랐다. 오늘 날 「장백현지」에 오른 항일열사는 14명이다.이 가운데 12명이 조선족인데,항일전쟁시기 중·조 두나라 인민은 공동의 적 일제를 무찌르기 위해 무수한 생명을 바쳤다고 기록했다.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혁명열사기념비와 묘원이 장백조선족자치현 장백진 탑산에 있다.이 묘원에 있던 항일열사 이계순(1914 ∼1938년)의 골회는 북한에서 묘셔갔다고 한다. 이계순은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헤사즈거 우밀령병원에서 신병을 치료하던 중에 일군토벌대에게 붙잡혀장백현 감옥에 수감되었다.그는 모진 고문을 받았다.그와 같이 체포된 동지들의 목을 베어 보여주면서 위협했지만 항일연군의 기밀을 불지 않았다.그래서 19 38년1월 총살되었다.그의 골회를 뒤늦게 나마 북한에서 가져갔다.북한 나름대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북한서 유해 모셔가 오늘 날 북한은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동북항일연군 빨치산 투쟁에서 찾고 있다.그러한 이념에 밀려 다른 항일무장단체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은 유택마저 변변치 못했다.탑선에 있는 혁명열사묘역에서 내려오다 옥수수 밭 가장자리에 자리한 독립운동가 무덤앞에 발목이 잡혔다.항일운동에 목숨을 바치고도 혁명열사묘역에 들어가지 못한 무덤은 쓸쓸했다.이념을 초월한 민족차원의 항일독립운동사가 하루빨리 정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동북항일연군에 얽힌 일화들이 장백현 쪽에 많이 전해오고 있다.장백현 16도구에서 태어나 현재 장백진에 살고있는 조창원(75)노인의 이야기에도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항일연군의 한 소대장이 압록강을 건너다 일본군의 총에 맞아 떠내려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그러나 부대를 찾지 못해 숨어살다 광복을 맞았다.그 후에 평안북도 협동농장에서 돼지를 치며 조용히 살았는데,우연한 기회에 노동당 세포위원장이 그의 신상을 알고 중앙에 보고했다. 그런 어느 날 김일성의 부름을 받고 평양으로 갔다.김일성은 물론 오진우도 만났다.감격의 상봉이 끝나자 김일성과 오진우가 높은 직급을 줄테니 평양으로 오라고 권했으나 그는 끝내 사양하고 돼지를 치며 살았다는 내용이다.조노인의 말이 전적으로 실화인지,아니면 떠돌아다니는 풍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김일성 생전에 북한 지도부가 평가한 동북항일연군의 위상일 것이다. 일제시대 만주국의 조선인 관리들 중에는 독립군을 봐주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이다.그 조노인이 입담 있게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마치 현장을 보기라도 한 듯이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장백현청 사법계에 오상수라는 주임이 있었디요.한번은 항일군 두 명이 잡혀왔는데 다가 총살감이었다.이 말입네다.오씨가 출근하면서 마누라 한테 이런저런 일을 준비시켰디요.출근을 한 오씨가 순사를 불러 두 항일군을 자기집에 데려가 장작을 패라고 일렀지 뭡네까.순사는 장작 패는 항일군을 지키고 있다가 지루해서 잠깐 자리를 비웠디요.그때 오씨 마누라가 미리 준비한 만두 보따리를 항일군에게 주고 도망치라는 눈치를 했다고 기래요.순사는 그날 탈직죄로 체포 되었디요』 ○김일성,북 체류 회유 압록강 연안을 답사하면서 장백현이 아닌 요령성 관전현 협피구향에서도 항일연군 이야기를 들었다.좀 전설적인 내용이었다.평북 선천군 농연면 태생의 문학근(73)노인의 구술인데 어디까지나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부터 들은 것이라는 토를 달았다. 『데(제)게 먼 촌수로 형뻘이 되는 항일군이 있었는데 이름이 문학빈이었다고 기래요.관전현 포자연에서 주로 활동했다고 들었디요.일본군이 체포하러 오면 집도 날아넘고 밭고랑은 열두어 이랑을 건너 뛰었다지 뭡네까.문학빈이라는 말만 들어도 덕(적)들이 벌벌 떨었다고 하데요.광복후에는 당(장)개석 국민당군 연대당(장)이 되어서리 환인까지 왔다갔다고도 하고 심양으로해서 남한으로 들어갔다는 말도 있디요』 그로 미루어 보면 동북항일연군이라고 해서 모두가 어떤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것은 아닌 듯 싶다.오랫동안 이념적 계급투쟁을 선호하면서 객관적 독립운동 연구가 부족했던 탓에 생동적이고 믿음직한 자료를 찾기가 매우 힘들게 되었다.그런데 장백현에서 조선족 교육사업에 일생을 몰두한 이권수(72)선생에게서 동북항일연군 이외 다른 무장독립운동 단체에 관한 실상을 소상히 전해들었다. ○홍범도 장군도 활약 『장백현 일대의 항일운동은 합방이후 시작됐디요.대한독립광정단과 대한독립광복단,대한독립군이 있었댔습네다.장백현을 근거지로 한 항일독립운동단체들은 압록강을 건너 평북 후창의 주재소나 경찰서까지 습격했댔디요.그중에 홍범도가 영솔한 대한독립군은 17도구 근처에 있었다고 기래요.그래서리 마을 이름도 독립군촌이었디요.독립군들은 낮이면 농사를 짓고 밤이면 훈련을 한 농사꾼 군인였습네다.당시 장백현 조선족들은 너나 없이 살림이 어려웠지만 독립군에게 의무금을 정기적으로 냈디요』 이노인은 「장백 조선족」의 저자인지라 책을 집필하기 위해 독립군의 발자취도 꽤나 추적했다.그래서 의무금 납부액을 정확히 조사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독립군에게 주는 의무금은 빈부에 따라 10∼30원이 부과되었다.당시 밀이 한 섬에 7원50전,하루 품삯이 30전,한 해를 일한 머슴 새경이 30∼50원이었으니까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또 돈량이나 있는 사람들은 의무금 말고 별도의 군자금을 냈다.군자금은 공개할 수 없는 돈이라고 해서 「벙어리 돈」이라고도 했다는 것이다.
  • 일 소니사 TV 수출 연내 중단/장기 엔고 여파

    ◎내수용만 생산키로 【도쿄=강석진 특파원】 세계 굴지의 가전제품 메이커인 일본의 소니사가 올해안에 TV 수상기 수출을 중단할 것이라고 일본의 니혼게이자이신문이 5일 보도했다. 소니사의 TV수출중단은 엔고현상에 따른 것이다. 소니사는 연간 30만∼40만대의 TV수상기를 국내에서 생산,북미지역과 중동지역에 수출해 왔으나 엔고현상으로 해외생산이 증가함에 따라 국내 공장에서는 내수용 TV만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소니사의 컬러TV는 지난 85년 1백50만대를 수출하는등 소니사의 대표적인 수출상품이었다.
  • 해외필진 미 클라크 CSIS 일본 실장(인터뷰)

    ◎“미는 북한에 강하게 나가라”/미국 이익 추구보다 대한지원 앞서야/한반도 안정 동맹관계 강화가 “주춧돌”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등 한반도정책에서 워싱턴의 이익보다는 한국을 지원한다는 큰 차원으로 접근해야하며 북한과의 대화에 있어서는 좀더 강하게 나가야한다고 미국무부 동·아태차관보를 역임했던 윌리엄 클라크 국제전략연구소(CSIS) 일본실장(서울신문지구촌칼럼 필자)이 3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다음은 인터뷰 내용이다. ­냉전체제붕괴이후 새로운 국제질서속의 바람직한 한·미관계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중국은 정치·군사 뿐만아니라 경제면에서도 강대국이 되고 있으며 일본도 이미 지역강대국이 되었다.러시아도 한반도와 극동지역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더욱이 한국은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이러한 복잡한 주변 정세속에서의 한반도 안정을 위해서는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야한다.미국만이 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유지할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아시아에 정치적 이익을 갖고 있는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세력균형 유지를 도와야한다.아시아정세는 급변하고 있지만 그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양국은 확신을 갖고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보다 강력한 동맹관계를 유지해야한다. ­한·미관계에서도 경제문제가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무역마찰이 심화될 것으로 보는가. ▲양국관계에서 경제문제가 점점 중시되는 것은 사실이며 무역마찰도 나타나고 있다.그러나 경제마찰문제는 양국이 충분히 해결할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냉전이후 경제문제가 더욱 중시되고 있지만 경제는 복잡한 양국관계의 한부분에 지나지 않는다.한·미관계는 전체적으로 보아야하며 정치·안보·군사적 동맹관계도 여전히 중요하다. ­미·북한 관계는 어떤가.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에서 좀더 강해져야한다.북한은 취약한 입장에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조금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북한은 벼랑끝외교를 펼치고 있지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고 과거에 쓰던 수법을 되풀이하고 있다.북한은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며 미국도 북한과의 관계에서 한국을 지원한다는 큰 차원에서 접근해야한다.한반도문제에서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남북한이다.미국은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야한다고 생각한다. ­미국기업들의 북한투자 전망은. ▲미국기업들은 북한투자에 관심을 갖고 있다.그러나 서둘러 평양으로 몰려갈 것으로는 생각지않는다.북한의 경제개방 실험은 중국과는 다를 것으로 보인다.중국의 경제특구는 대규모 시장을 배경으로 대만·홍콩을 비롯,많은 나라 기업들을 유치하는데 성공했다.물론 북한의 경제개방실험이 반드시 비관적이라는 말은 아니다.북한이 하기에 달려 있다.하지만 중국보다는 환경이 나쁘다.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할수 있다고 보는가. ▲한국은 경제적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야한다고 생각한다.한국은 물론 베트남 참전의 경험이 있지만 군사적 역할을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중국은 지역강국으로 재등장했다.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미국과의 충돌은 없겠는가. ▲대만문제등을 둘러싸고 양국간의 긴장은 있지만 심각하게 대립할 것으로는 보지않는다.중국이 영토야욕을 버리고 투명성을 높이면 미국과의 관계도 좋아질 것이다.미국은 중국을 봉쇄시킬 것이 아니라 국제무대로 끌어들여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여야 한다.중국을 봉쇄시키려는 것은 잘못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군사대국이 될 것으로 보는가. ▲그렇지않다.일본은 이미 지역강국이지만 군사적이 아니라 경제적 강대국이다. ­아시아로부터의 미군철수를 상상할수 있는가. ▲상상할수 있다.그러나 아시아로부터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정책이다.
  • 17일간의 종착역 블라디보스토크(시베리아 대탐방:40·끝)

    ◎극동 최대 군항 개방화로 산업도시화/경제력 앞세운 일기업 대거 상륙… “작은 일본”/엔화는 「제2화폐」… 한국 기업도 15개업체 진출 러시아에 사는 유대인은 주로 러시아제국이 동폴란드를 합병한 뒤 대거 이주해왔다.기록으로는 1897년 리투아니아,벨로루시,우크라이나 등 유럽쪽 러시아영토에 4백여만명의 유태인이 살았다고 한다.그러나 러시아인들 사이에 전통적으로 반유태 사상이 워낙 강해 이들은 모스크바등 대도시로는 거의 진출할 기회가 봉쇄돼 있었다. 이후 볼셰비키혁명에 유태인들이 적극 가담하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다소 호전됐다.트로츠키,스베르들로프,지노비예프,카메네프 등 쟁쟁한 유태인이 볼셰비키의 지도급 인사로 참여했다.그러던중 스탈린 시절인 1931년 도처에 흩어져살던 유태인을 위해 자치공화국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하바로프스크주 남쪽 현재의 예브로이자치주에 비로비잔시를 건설했다.그리고 자치공화국이 선포됐지만 이 시베리아 오지로 이주를 원하는 유태인이 없었다.초기주민은 3만명 미만이었다.그나마 스탈린이 죽자 대부분 떠났고 이후 이스라엘,미국으로 이민이 허용된 뒤 이곳에 남은 유태인은 2천∼3천명을 헤아릴 정도가 됐다. ○유태인 비율 8% 불과 현재 전체주민에서 유태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7∼8%에 불과하고 주민 대다수는 러시아인이다.그런데도 공식이름은 여전히 「예브레이(유태인)자치주」이니 유태인 없는 유태인자치주가 된 것이다. 예브레이자치주로 들어서며 모스크바와의 시차는 7시간으로 벌어졌다.BAM으로 연결되는 지선이 지나는 이즈베스트코브이역을 지나자 곧바로 주도인 비로비잔에 도착했다.역이름을 러시아어와 유대어로 나란히 써붙여놓은 게 이채롭다.비로비잔은 비로강을 낀 항구도시로 18 9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까지 철도가 건설되자 시베리아화물을 이 철도로 연결하며 크게 성장했다.이후 1915년 아무르철도가 완공되고부터는 철도역 기능만 하고 있다. 하바로프스크시로 접근하며 아무르철교를 지난다.짙은 황토색의 강물은 폭이 한강의 10배는 족히 됨직한 규모이다.이렇게 강폭이 넓은 탓에 철교는 하나 있지만차가 다니는 교량은 아직 없어 페리로 실어날라야 한다.낮1시55분 하바로프스크역에 도착했다.역광장에는 하바로프스크를 세운 예로페이 파블로비치 하바로프장군의 동상이 세워져있고 여행중 처음으로 역사 전광판에 네온사인 광고가 등장했다.일본합작은행인 듯한 「하코뱅크(은행)」광고판이었다.드디어 일본영향권에 들어온 것이다.상점에는 한국의 음료수,초콜릿 등도 즐비하다. ○철로변엔 활엽수 장식 20분 정차한 뒤 남진을 계속하자 산천경계는 완전히 시베리아와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베료자,침엽수림은 사라지고 오직 활엽수만이 철로변을 장식한다.인구 60만명의 하바로프스크는 극동지방의 주도권을 놓고 연해주 주도인 블라디보스토크와 수십년간 경쟁관계를 유지해왔다.혁명직후 볼셰비키들은 오랜전통의 블라디보스토크보다는 하바로프스크를 더 좋아했다.그래서 이곳을 극동의 노보시비르스크로 만들려고 했다.1·2차 세계대전 중간시기에 블라디보스토크는 군항으로 발전됐고 반면 하바로프스크는 극동의 행정수도로 발전됐다.2차대전 뒤 블라디보스토크가 군사도시로 외부와 고립되자 하바로프스크는 극동 제1도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그러다 지난 92년 1월1일을 기해 블라디보스토크가 개방되면서 양자관계는 재역전됐다.하바로프스크에 있던 외국 상사,공관들 대부분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자리를 옮겨갔다. 모스크바를 출발한지 17일만에 마침내 종착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역에 도착했다.역사에 쓰인 모스크바로부터의 거리는 9천2백88㎞를 가리키고 있다.역사는 출발역인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역과 똑 같은 양식으로 지어져있다.「의사 러시아식」으로 불리는 독특한 중세러시아 목조건축양식이다.블라디보스토크는 정복자 모라비요프 아무르스키의 이름을 딴 작은 반도 남단에 세워졌다.그곳의 작은 만을 끼고 양언덕에 도시가 건설됐다.수심이 깊고 파도가 직접 들이치지 않는 이 만 때문에 군항이 됐다. 지난 92년 1월1일 도시가 개방되던 날 취재왔을 때와 비교하니 불과 3년여만에 이렇게 많이 변할 수 있나 눈을 의심할 정도다.한마디로 「작은 일본」이라고 할 정도로 일본의 영향안에 들어 활기에넘친 개방도시가 됐다.이곳은 1919년부터 22년까지 일본이 미·영과 함께 점령했던 곳이다.일본은 이후 70여년만에 경제력을 앞세워 다시 이곳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거리를 다니는 차량은 모두 일제 중고차들이다.백화점의 물건도 일제 투성이고 엔화는 루블에 이은 제2의 화폐로 통용된다. ○한국산 식품류 등 많아 이 틈을 비집고 아이스크림,주스,양말,신발 등 한국산 식품류,생필품들이 진출해 있다.92년 한국총영사관이 문을 열었고 같은해 대한무역진흥공사도 이곳에 무역관을 열었다.현대·대우·고합 등을 비롯해 15개 업체가 현지사무소를 열고 있다.하바로프스크,나홋카 등 나머지 극동지역에 현지 지사나 사무실을 연 한국업체는 모두 30개사가 넘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기차로 꼬박 1주일이 걸리지만 비행기로는 불과 9시간이면 간다.하지만 긴 기차여행을 통해서 듣고보는 이점도 적지는 않다.기차가 가면서 주변의 모든 게 변했다.날씨,토양,사람,심지어 베료자나무의 굴곡까지 달라졌다.철도와 함께 러시아의 역사가 흘렀고 도시의 흥망이 달라졌다. 여행을 마치며 러시아와 관련된 정책을 짜거나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러시아를 상대로 일을 하노라면 짜증스런 일들이 많을 것이다.이곳 사람들이 합리적인 원칙을 갖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사회주의 시절의 일처리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다.이들로 인해 좌절감,실망감에 부딪칠 때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한번 타보라.다소는 위안을 받을 것이다.러시아가 얼마나 위대한 잠재력을 가진 나라인지 조금은 실감케 될 것이다. 모스크바행 아에로플로트기가 블라디보스토크 상공을 날아오르자 다시 북으로 끝 없이 이어진 검푸른 타이가 삼림이 눈아래 펼쳐진다.
  • 사할린 지진경보

    【모스크바 AFP 연합】 최근 잇따라 소규모의 지진이 발생하고 있는 러시아 극동지방의 쿠릴열도와 사할린지역에 1일 경계경보가 내려졌다고 이타르타스통신이 보도했다. 유주노­사할린스크의 지진연구소는 사할린지방에서 30일밤에 리히터규모 5의 지진이 2차례 발생했다고 밝혔다.
  • 클린턴 중동 평화촉진법 서명/팔 자치정부 지속적 지원 다짐

    【워싱턴 AFP 연합】 빌 클린턴 미대통령은 30일 중동지역 평화정착 과정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재확인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원조를 계속하기 위해 「중동평화촉진법」에 서명했다고 백악관이 발표했다. 데이비드 존슨 백악관 부대변인은 이날 클린턴 대통령이 「중동평화촉진법」에 공식서명했다면서 이는 중동평화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공약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지속적 원조를 다짐하는 클린턴 대통령의 의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이사민·현 앨리스 사건(새로 쓰는 한국현대사:38)

    ◎재미교포 부부… 49년 입북후 고위직 올라/북,「미 간첩」 혐의로 체포… 남로당 숙청 이용 한국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남북한 집권세력은 내부투쟁을 통해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남쪽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19 52년 부산정치파동을 거쳐 재집권한데 이어 북쪽에서는 그해가 끝날 무렵 남로당계 숙청을 서둘렀다. 김일성은 52년 12월15일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종파주의 잔재들이 당과 정부기관에서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다』고 경고하고 이들을 남겨두면 적의 「탐정배」(간첩)로 변하고 만다고 강조했다.남로당계를 겨냥한 이 발언을 뒷받침해 19 53년 1월 「문헌토의사업」이 벌어지면서 대대적인 남로당계 검거선풍이 일었다. ○53년 남로당 숙청 시작 3월 들어 박헌영을 비롯,이승엽·이강국 등 주요 간부들이 잇따라 체포됐으며 이 가운데 이승엽등 12명에 대한 재판은 휴전직후에,박헌영에 대한 재판은 55년에 각각 열렸다.이들에게 걸린 죄목은 「미 제국주의를 위한 간첩행위」와 「국가전복 음모」,「남반부 민주역량 파괴」등이다.따라서 이 사건을 흔히 「박헌영사건」또는 「박헌영 미제간첩 사건」이라고 부른다. 박헌영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대표적인 의혹사건의 하나로 꼽힌다.이는 사건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이같은 상황에서 박헌영사건의 성격을 가늠해 주는 또 다른 간첩사건인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은 큰 의미를 가진다.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은 재미동포인 이사민·현앨리스 부부가 북한 정권 수립 후에 입북,고위관리로 일하다 한국전쟁 발발후 소련을 통해 탈출을 기도한 사건을 말한다.남로당 숙청에 앞서 발생한 이 사건은 이승엽등의 재판과 박헌영재판에서 그들의 「미제 간첩」행위를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됐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묻혀 있었다.그러나 이번에 서울신문이 이사민부부에 관한 자료와 당시 그 사건을 취급한 관계자들의 증언을 발굴해 사건 내막을 상당한 부분까지 밝혀냈다. 이사민은 본명이 이경선(미국명 이윌리엄)으로 출신지·나이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그러나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민족혁명당 미주지부에서 일하는등 항일독립운동에 관계 했다.부인 현앨리스는 재미 독립운동가 가운데 거물로 꼽히는 현모씨의 딸로 알려져 있다. 이 부부가 공산주의자가 된 시점은 확실하지 않지만 1947년 초 이미 재미 친북파의 대표로서 자리를 잡았다.이사민은 그해 4월부터 정기적으로 북한에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보고서는 주로 체코 수도 프라하에 머물고 있던 한오수를 통해 북한 당국자들에게 전달됐다. 이들의 미국내 활동은 매우 적극적인 편이었다.미국 공산당에 가입해 한인조직을 결성,한달에 한번 꼴로 모임을 가졌다.그러면서도 평소 이사민은 워싱턴에,현앨리스는 로스앤젤레스에 떨어져 살며 각각 활동한 것을 보면 상당한 골수분자들처럼 보인다. 이와 함께 외부조직으로 민주인민전선연맹과 진보당후원회를 결성해 재미 한국인 단체,미국 좌파단체들과 고리를 맺었다.이들은 민주인민전선연맹을 통해서는 한인 최대 조직인 국민회에 북한에 설립된 인민공화국을 승인하라고 권하기까지 했다.또 「독립」이라는 주간신문을 2천여부 발행하여 국외및 각급단체에 배포했는데 당시 현지에서 발행된 한글 주간신문 4종 가운데 북한 소식을 보도한 것은 「독립」하나 뿐이었다. 이처럼 활발히 움직이던 이사민부부가 갑자기 북한에 들어가 일하겠다는 뜻을 밝힌 때가 1948년 12월이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발굴한 「이사민의 보고서」(별도기사 참고)에서 이사민은 김일성·박헌영에게 동구권 국가를 통해 입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실제로 이 부부는 1949년 1월 체코 프라하로 가 체코정부에 북한으로의 정치망명을 요청했다. ○박헌영이 적극 도와 그러나 북한행이 생각대로 쉽지는 않았다.이들의 망명이 받아들여지기까지는 3∼4개월이 걸렸다.체코정부가 이들의 의도를 의심했기 때문이다.체코 안전기관은 먼저 분명한 정치적 동기가 없다고 판단했으며,게다가 이들은 북한이 부모의 고향이라고 주장했으나 거짓말인 것으로 판명됐다.정체를 의심한 체코 안전기관은 이를 북한 내무성 안전국에 알렸으며 북한당국도 망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고했다. 이때부터이사민·현앨리스와 박헌영이 관련되기 시작한다.당시 외무상인 박헌영은 내무성의 판단을 무시하고 부부에게 입국사증을 내주었다.아울러 이들이 북한에 도착하자 외무성을 동원해 환영행사를 해주기까지 했다.그후 이사민은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조사연구부 부(부)부장으로,현앨리스는 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서 일했다.내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북한 이들이 짧은 기간에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 역시 박헌영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이사민과 현앨리스는 북한에 들어와 5∼6개월 동안 아주 성실하게 일해 주변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그러나 입국을 거부했던 내무성 안전국은 여전히 부부를 주시하고 있었다.이들은 직위를 이용,유럽에 편지를 자주 했는데 일일이 검열을 당했다.따라서 답장은 한차례도 받을 수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이사민부부는 황급히 북한당국에 유럽여행을 요청했다.내무성은 「불가」통보를 했지만,이번에도 외무성이 출국사증을 내주었다.북한을 떠난 이들이 소련 모스크바공항에 도착하자 북한 안전국 요원들은 짐을 수색했다.의심했던대로 그동안 수집한 자료가 쏟아져 나왔으며 그 가운데는 군대관계 비밀자료도 여럿 들어있었다. 그길로 북한으로 강제귀환된 부부는 안전국의 추궁 끝에 미 정보기관으로 부터 정보수집 임무를 띠고 침투했다고 자백했다.마치 한국 땅을 밟았다 사이공으로 탈출했던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을 보는 듯이 북한의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은 아주 드라마틱하다. ○북한판 「이수근 사건」 이 사건의 불똥은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파에게로 튀었다.이사민부부의 북한 입·출국을 방조한 박헌영이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953년 7월30일 열린 이승엽등의 재판에서 이강국은 『50년 7월 미국에서 직접 파견한 간첩분자 이윌리엄(이사민)과 현앨리스를 평양에 있는 집에서 두차례 만나 공화국의 군사기밀을 탐지하여 제공하는데 대한 토의를 했다』고 고발됐다. 또 55년 12월 재판받은 박헌영도 같은 혐의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었다.곧 박헌영은 48년 6월 하지로부터 『이사민등미국 정보원들을 유럽을 통해 북한에 보내겠으니 입국과 간첩활동을 보장해 주라』는 지령을 받았다.이에 따라 이사민등이 입북할 때 입국사증을 내주었으며 현앨리스를 중앙통신사·외무성에,이사민을 조국전선의 요직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과연 미국의 간첩이었을까,아니면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지는 바람에 억울하게 누명을 썼을까.그 진실을 알려줄 것으로 기대되는 이사민·현앨리스 사건이 이제 막 역사의 전면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사민의 대북 보고서/“미 교포 공산당원 26명” 김일성에 보고/47년부터 미 정세 등 탐지… 편지 보내/“곧 동구 경유 입북” 박헌영에도 알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박헌영사건」과 관련해 그동안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구체적인 행적은 베일에 가려 있던 이사민 관계 자료를 이번에 발굴했다.워싱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찾아낸 이 자료는 이사민이 미국에 있던 19 48년 12월 북한 최고 권력자인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직접 보낸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서 「미국 워싱턴주재동지대표」이사민은 ▲당 동지들의 활동 ▲조선인 거류민의 분위기 ▲독립운동 상황 ▲미국의 정세들을 자세히 전했다.당 동지들의 활동에 대해 『현재 당원으로는 로스앤젤레스에 13인,샌프란시스코에 1인,뉴욕에 4인,워싱턴에 2인,기타 지역에 6인을 합하여 26인』이 있으며 이들은 『미국 당부(미국 공산당)의 허락으로 조선인그룹빠를 재조직하고 1개월에 1차 회집』한다고 밝혔다.또 현지의 당원 대표는 『로스앤젤레스의 변준호·김강·현앨리스,워싱턴의 이사민·선우학원,뉴욕의 신두식·곽지순』등 7명이라고 소개했다. 이사민은 이와 함께 동지들 중 일부가 동유럽을 경유하여 북한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그후 이사민과 현앨리스는 체코 프라하를 경유해 북한에 들어갔다.이 대목이 이사민과 박헌영의 연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보고서 수신자중 한명이 박헌영이었으므로 그가 이사민의 입북계획을 미리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박헌영은 이사민의 입북이 어려워지자 적극 도왔으며,북한에 있을 때나 뒷날 출국할 때도 이사민을 옹호했다.박헌영의 이른바 「미제간첩 사건」과 이사민을 직접 연결시킬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의심받을 만한 정황은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보고서에서 이사민은 47년 4월이후 동구권을 통해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이 루트가 이제 불가능한 듯 하다고 밝혔다.그래서 앞으로는 자신에게 직접 연락달라며 미국 주소를 제시했다. 이사민이 보고서를 작성할 무렵은 47년 3월 미국이 「트루먼독트린」을 발표한 뒤 동서냉전이 더욱 격화된 시기라는 점에서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이 시기에 동구권을 통한 북한과의 서신교류나,미국 주소로 연락을 받겠다고 제의한 사실들은 미 정보기관의 양해없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최근 발굴한 「이사민의 보고서」.「박헌영사건」관련인물로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이사민은 이 자료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 1천여명 참석…총선 출정식 방불/민자 동래갑지구당 창당대회 현장

    ◎박관용 신임위원장 “연어가 고향 돌아온 느낌”/김대표 격려사서 부산시민의 주인의식 당부 30일 하오 부산 동래고 강당에서 열린 민자당 동래갑지구당 창당대회는 마치 15대총선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 민자당이 6·27지방선거 패배이후 첫 지구당대회를 김영삼 정부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부산에서,그것도 김대통령의 핵심측근이자 4선의 중진인 박관용 청와대정치특보의 동래갑에서 시작한 것부터가 내년 총선에 임하는 민자당의 「각오」를 읽게 해주고 있었다. 특히 김윤환 대표위원이 이날 대표취임이후는 물론 현정부 출범이후 처음으로 부산에서 공개연설을 갖고 여권의 단합과 내년 총선승리를 다짐한 것도 여권의 「총력태세」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김정수 부산시지부장이 대독한 총재치사를 통해 『우리는 구한말 사분오열돼 외세를 막아내지 못한 수치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면서 『이는 지도자들이 앞다투어 외세와 결탁,세확장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라며 지역할거주의 청산을 당부했다. 김대표는 격려사에서『김 대통령의 분신이요 후원자요 정치적 동지인 여러분이 김 대통령의 남은 임기동안 역사에 남을 업적을 세울 수 있도록 최대한 뒷받침할 의무가 있다』면서 부산시민의 「주인의식」회복을 당부했다. 김대표는 『3김시대를 부활시키겠다는 시대착오적 생각을 막아야 한다』는 말로 김대중 국민회의총재와 김종필자민련총재의 퇴진을 간접요구하는 한편 『6년전 군인정치의 종식과 문민정부 탄생을 위해 TK(대구·경북)의 양보론을 역설했다』면서 TK와 PK(부산·경남)가 문민정부 발전의 공동주역임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박관용 신임지구당위원장은 인사말에서 『연어가 개울을 떠나 망망대해를 떠돌다가 고향개울로 돌아온 느낌』이라고 복귀소회를 피력했다. 박위원장은 특히 『실명제 등 개혁은 국민의 열화같은 요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며 일부 불편을 수반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참고 반드시 완수해야 할 과제』라면서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확고한 소신,정책경륜 등은 21세기 미래정치를 담당할 주역의 필수요건』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대회에는 김윤환 대표,서정화 원내총무,손학규 대변인,통일외무위의 해외국감에 참여하고 있는 최형우·정재문 의원을 뺀 부산지역 모든 의원, 문정수 부산시장, 김혁규 경남지사, 심완구 울산시장, 황영하 전총무처·이충길 전보훈처장관과 당원 등 1천여명이 참석,성황을 이뤘다.
  • 등소평 “대만 독립 저지”/강택민·이붕 예방때 “압력 유지”지시

    【홍콩 연합】 중국 최고 지도자 등소평(91)은 지난 8월22일 강택민 당총서기와 이붕 총리 등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을 직접 만나 대만과 티베트의 조국분열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되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압력을 가해야한다고 지시했다고 홍콩의 대표적 중국계 월간지 경보 최신호가 30일 보도했다. 이날부터 배포되기 시작한 경보 10월호는 등이 이 자리에서 『대만과 티베트문제는 조국을 분열시키려는 자들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막아야하고 경계해야 하며,일정한 압력을 유지해야만 한다』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등은 이때 또 국유기업과 농업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표시하며 『나는 이 두 문제에 대해 줄곧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경보는 전했다. 등은 이어 『강택민 동지가 핵심이며 핵심을 중심으로 단결해야만이 우리의 앞날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면서 당지도자들간의 단결과 화합을 촉구했다고 이 잡지는 전했다.
  • 멕시코 “한국은 독일 식민지”/외국 교과서 한국 역사 왜곡 사례

    ◎스페인­남한 수도 평양/폴란드­6·25는 북침이다/독일­독도는 일본 땅/캐나다­서울 인구 1백만/일본·베트남등선 상당부분 바로잡혀/민간 학술교류 통한 「바로 알리기」 시급 외국 교과서들이 한국 역사를 왜곡 기술한 사례가 비일비재한 것으로 드러나 정부 차원의 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따르면 우리 역사를 잘못 기술하고 있는 국가는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이고 유럽·동남아시아·중동 지역 국가와 미국까지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각국의 왜곡 사례등을 통해 실태를 살펴본다. 다른 나라들의 우리 역사 왜곡사례는 주로 한국전쟁에 관한 것에서부터 수십년전 자료를 그대로 인용한 경우가 많다.이밖에 동해를 일본해라고 표기하고있는 예도 많다. 정부는 최근들어 공보처·외무부·교육부가 공동으로 이런 왜곡된 역사 교과성의 내용을 고치는 작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특히 최근에는 과거 적성 국가였던 국가들과의 수교로 외교 통로가 확보되어 교과서 문제를 거론할 수 있게 되었다.교육부는 외국의 교과서를 입수해 고쳐야할 부분을 찾아 시정자료를 만들고 공보처의 한국바로알리기 위원회나 외무부 등이 자료를 보내주고 잘못된 내용을 고치도록 교섭하는 등의 정책을 펴고 있다. 그러나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어서 단기간에 바로 잡기는 힘들것으로 보인다.교과서를 내는 주체가 외국의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면 시정 요구를 하기가 더욱 어렵다. 한명희 교육부 편수국장은 『정부도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민간 차원의 학술교류를 통한 한국바로 알리기 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이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장은 또 외국에서 한국학이 발전해야 다른 나라들이 한국에 관심을 많이 갖고 올바른 역사를 기술해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본=지난 82년부터 한국 역사 왜곡이 심각한 것으로 지적되었던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우리 정부와 학자들의 노력으로 상당히 고쳐졌다. 대표적인 것이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범죄시 해왔던 태도를 의병투쟁의 지도자로 바꾸었다.또 관동 대지진을 우발적인 사건으로 기술했던 사례도 고쳐 민족적 편견에 가득찬 유언비어 유포와 조선인과 중국인 학살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와함께 아예 빠졌던 신사 참배와 창씨 개명,징병제를 새로 포함시켰고 조선 여성 등을 종군위안부로 동원한 내용도 추가했다. ◇미국=미국을 비롯한 다른 외국은 우리 역사를 잘못 쓰고 있는 예가 많다.미국은 한국의 미술 철학,인쇄술 등 세계사에 기여한 문명을 소개하지 않고 있고 오히려 중국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강조하며 한국은 별로 중요시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특히 한국의 현대사를 냉전체제의 시각에서 기술하고 있다. ◇멕시코=한국을 백인종 지역으로 표시하거나 공산주의 국가에 포함시키는 등의 어처구니 없는 역사 교과서를 내고 있다.또한 서울의 인구를 4백만이 넘지 않는 도시로 표시하고 있고 독일의 식민지라고 쓰고 있다. ◇캐나다=서울은 인구 백만의 도시로 한반도의 가장 큰 농업 지역 중심도시라고 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한국에 관한 내용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한국이 후진국으로 장기간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아래 있었던 국가로 묘사하고있다. ◇중국=1932년 4월 김일성의 영도아래 조선인민은 항일유격대를 조직했다.미국은 조선 남부에 지주나 부르주아 계급의 친미세력을 부각시키고 48년 8월 대한민국의 수립을 선포했다.1950년 6월25일 조선전쟁이 일어났다.트루먼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의 해·공군을 파견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침공할 것을 명령했다.이것이 중국교과서의 한국 역사 내용이다. 최근에는 6·25가 북침이라는 내용을 수정하여 기술하고 있으나 미흡한 형편이다. ◇인도네시아=한일관계 속에서 한국을 취급하고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베트남=분단의 책임을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에 전가시키고 국호를 남조선으로 부르고 있다.그러나 베트남의 역사 교과서는 최근 외교 채널을 통한 시정 노력으로 많이 고쳐졌다.최근 발간된 역사 교과서에는 국호를 대한민국 또는 한국으로 표기하고 있고 6·25가 남침이라는 사실을 명기하고 있으며 신흥공업국의 하나라고 쓰고 있다. ◇인도=19세기말 한국이 중국의 속국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고 청일전쟁 결과 중국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일본 학계의 연구 결과에 편향되어 한국 역사를 기술했다. ◇독일=한국에 관한 내용이 빈약하며 지리부도에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오늘날 한국 기업의 3분의 1은 국영기업이거나 한국인 소유이고 3분의 1은 미국과 관련된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며 3분의 1은 일본 관련자들이 갖고 있다는 엉터리 내용이 교과서에 담겨 있다. ◇스페인=남한의 수도를 평양이라고 하고 있고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2백50달러 이하의 지역으로 분류돼 있다. ◇러시아=러시아 교과서의 잘못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1910년 이전의 항일의병을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빨치산이다.한반도의 분단 책임은 미국에 있고 한국정부는 꼭두각시 정부이며 북한이 민주적 합법정부이다.72년 남북공동성명은 북한이 주도한 것이다.러시아는 그러나 최근에 펴낸 역사교과서에서는 6·25를 남침으로 수정하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폴란드=「1950년 6월 25일 남한 정부는 드디어 북조선인민공화국을 공격했다」는 그릇된 사실을 싣고 있다. ◇루마니아=북한은 정식 국호를 쓰고 있으나 한국은 남한으로 표시하고 현재의 모습이 아닌 옛날 모습이 지리교과서에 실려 있다. ◇중동지역=한국에 대한 정확한 인식부족으로 지명과 내용 등에 오류를 범하고 있다.38도선을 휴전선으로 표기하고 있는가 하면 한국을 남한공화국이라고 하고 있다.
  • 아 코모로 쿠데타 20년동안 17차례

    ◎「반란전문」 불 용병 드나르 수차례 기도/인구 53만명… 70년간 불 통치 75년 독립 28일 쿠데타가 발생한 아프리카 동안도양의 섬나라 코모로는 지난 75년 독립이래 이번까지 무려 17차례에 걸친 쿠데타로 점철된 인구 53만의 소국.흥미로운 것은 코모로의 복잡한 쿠데타 역사의 중심에는 항상 이번 쿠데타의 주역인 용병출신의 프랑스인 봅 드나르(66)가 있었다는 점이다.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코모로는 1904년 프랑스가 군도 전체를 합병한 이래 70여년간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아오다 75년 7월 그랑드 코모로,아주앙,모엘리 등 3개 섬이 일방적인 독립을 선포하고 공화국을 수립했다.독립이후 아흐메드 압달라가 새 공화국 대통령이 됐으나 한달후 용병 드나르의 지원을 받은 알리 소일리 총리에 의해 축출됐다.그러나 78년에는 거꾸로 드나르가 소일리를 타도하고 압달라를 권좌에 복귀시킨채 10여년간 배후에서 실권을 장악했다. 드나르는 다시 89년에 자신이 지휘하던 대통령 경호대를 동원,압달라 대통령을 살해하고 권좌에 올랐으나 프랑스군의 개입으로 3주만에 쫓겨나고 당시 대법원장 모하메드 사이드 조하르가 90년 3월 대통령에 선출됐다.이후 92년 9월에도 일단의 군인들이 조하르 대통령을 축출하기 위한 쿠데타를 감행했다가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 이번에 또한번의 쿠데타를 성공시킨 드나르는 50년대 프랑스 해군 특공대 출신으로 인도차이나반도와 알제리 등지에서 복무한뒤 모로코의 프랑스 식민지 경찰에 투신하면서 아프리카와 인연을 맺었다.드나르는 이후 자이르 내전과 콩고·북예멘·비아프라·앙골라 전투 등에 용병으로 참전하는 등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의 분쟁과 쿠데타전문가(?)로 깊숙히 간여해 왔다. 드나르가 이번 쿠데타를 일으킨 기도한 정확한 의도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모로니의 교도소를 공격해 지난 92년 쿠데타 실패로 체포된 측근들을 모두 풀어준 것으로 보아 자신의 추종세력이 수감돼 있는 것에 반발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있다.
  • 외국교과서 한국사 왜곡 심각/스페인 “남한 수도는 평양” 표기

    ◎일선 “고려·조선이 중국의 속국” 일본과 중국을 비롯,동구권과 중동지역 및 미국 등의 역사교과서가 한국사를 잘못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8일 교육부의 국감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고교 세계사교과서에서 고조선의 건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한 내용을 일부러 뺐으며 특히 고려와 조선을 각각 원·명·청나라의 속국이라고 쓰는 등 한국사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폴란드·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 등 동구권도 한국의 독자적인 문화는 언급하지 않고 중국의 종속문화로 기술하고 북한이 한반도를 대표하는 것으로 기술하는 등 북한 중심으로 역사교과서를 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레바논·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연합 등 중동지역도 6·25전쟁의 발발원인을 국경충돌이 확대돼 발생한 것으로 기술하는 등 오류가 많았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국제교육정보센터」와 같은 전문기관을 설립해 외국 교과서를 분석,왜곡된 내용을 적극적으로 고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최선길 노원구청장 구속적부심 신청

    지난 6·27지방선거때 선거운동지원명목으로 돈을 뿌려 공직선거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서울 노원구청장 최선길(56·새정치국민회의)씨는 27일 김철웅 변호사를 통해 서울지법에 구속적부심 신청을 냈다.
  • 극동의 관문 하바로프스크(시베리아 대탐방:39)

    ◎승무원들,중간역 「반짝 시장」서 돈벌이/차창밖엔 입영행렬… 징집제도 우리와 비슷/아루르주 경계 지나니 어느덧 극동지역에 밤 12시20분,치타역에서 블라디보스토크행 열차를 탔다.노보시비르스크를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로시아호 8번」 특급열차였다.출발지만 다를 뿐 모스크바발 「로시아 2호」와 「로시아 8호」는 같은 특급열차로 하루씩 번갈아 동시베리아를 지나간다. 역에서는 군사도시답게 입영하는 젊은이 수십명이 열지어 기차에 오르고 있다.러시아는 우리같이 의무병제도다.현재 복무기간은 18개월인데 옐친정부는 이를 2년으로 늘리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입대연령은 만 18세.15세가 되면 주거지에 신고를 하고 17세때 1차 신체검사를 받고 입대 직전 한번 더 신체검사를 받는다.징집면제제도도 있어 우리와 비슷한 면제대상기준이 마련돼 있다.부모 한쪽이 없거나 영세민,결혼해 자녀가 3명이상 혹은 어린 자녀가 있을 시,대학생 등은 입영이 면제된다. ○만 18세되면 군입대 간밤에는 계속 비가 내렸다.이튿날아침 7시30분.체르니세프스키역에 도착했다.어느덧 평원이 사라지고 조그만 언덕·강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동시베리아·극동지역의 전형적인 풍경인 「소프키」라고 부르는 낮은 산들이 나타나며 우리여행도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실감시켜주고 있다.차창밖 산천이 우리나라와 흡사한 모습을 띠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기차는 북진을 계속,금광지대인 모고차를 지나 아무르주 경계를 향해 나간다.마침내 시베리아가 끝나고 극동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도중 실카강변에 있는 스레친스크시는 19 15년 시베리아철도의 아무르선이 완공되기 전까지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종착역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당시 모스크바에서 싣고 온 화물과 승객은 이곳에서 실카강의 증기선으로 갈아타고 아무르강을 따라 하바로프스크로 갔다.이후 아무르노선이 완공되며 중요성을 상실,지금은 인구 불과 1만명의 쇄락한 도시가 됐다.하지만 지금도 이 스레친스크에서 모고차까지의 치타 동북부지역일대는 유명한 금광지대이며 식품가공·가구 등 소규모 산업지대가 만들어져 있다. 모고차시는 아무르선 건설 때 만든 도시다.아무르철도는 이 부근에서 아무르강을 따라 거의 나란히 달려 하바로프스크까지 연결된다.한때 모고차시는 시베리아 「금광의 수도」로 불릴 정도로 금광이 많은 곳이다.모고차란 도시이름도 「황금의 바닥」이라는 뜻의 예벵키어다.하오6시20분 마침내 치타주의 마지막역인 말러 코발리역을 지났다.「작은 대장장이」란 뜻의 이름이다.이로써 시베리아와는 작별을 고했다. 북동진을 계속하던 열차는 아무르주의 스코보로디노에서 남쪽으로 급회전해 하바로프스크로 연결된다.특히 치타에서 모고차까지 구간은 지난해 마지막으로 전철화된 곳이다.대시베리아철도중 하바로프스크에서 우수리스크까지는 유일하게 전철화가 안된 곳으로 현재 공사가 진행중이다.우수리스크부터 블라디보스토크 구간은 최근 전철화가 끝났다.실개천·나무·작은 들판등 대자연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식당음식 점점 비싸 식당칸의 음식값은 모스크바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더 비싸지더니 아무르주로 들어서며 똑같은 메뉴가 다시 10%이상비싸졌다.민망한 듯 식당칸 주인은 『중간도시에서 음식재료를 계속 사야 하는데 재료값이 동으로 갈수록 더 비싸지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오지수당으로 임금이 높아지면서 물가도 따라 오른 것이다. 아무르주에 이르러 아무르강은 마침내 대하로 변하며 중·러국경을 이룬다.마찬가지로 하바로프스크부터 아래쪽 연해주 남쪽으로는 우수리강이 양국국경이다.아무르주의 첫번째 역은 예로페이 파블로비치.하바로프스크주를 정복해 건설한 예로페이 파블로비치 하바로프스크장군의 이름을 딴 마을이다. 아무르주의 스코보로디노역은 북쪽 BAM철도의 수도로 불리는 튄다역으로 연결되는 교차역이다.그리고 튄다를 통해 야쿠츠공화국의 금광중심지인 알단지구로 연결된다.이 아무르∼야쿠츠철도는 1925∼37년에 건설됐다. 승객서비스에는 관심도 없던 우리 객실의 승무원 부부는 스코보로디노역에 기차가 도착하자 「본업」인 자기영업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노보시비르스크에서 싣고온 콜라·맥주·치즈·버터 등 각종 물건 수십상자를 웃돈을받고 이곳 상인에게 넘기는 일이다.빈병도 모아 넘기는데 러시아인은 기차를 탔다 하면 내릴 때까지 보드카를 마셔대기 때문에 빈병수입 또한 만만치 않을 것같다. ○동해까지 2천8백㎞ 밤중에 지난 스바보드늬역은 1912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의 아들인 알렉세이왕자의 이름을 딴 알렉세예프스크이던 것을 혁명 뒤 「자유」라는 뜻의 스바보드늬로 바꾼 곳.제야강을 따라 남서쪽으로 블라고비센스크로 연결되며 한때 금광행정본부가 있던 곳이다.블라고비센스크는 아무르 제일의 도시로 중국과 국경인데다 항구도시란 이점으로 인해 활발한 국제무역도시가 됐다.겨울에 아무르강이 얼어붙으면 강을 걸어 양국 무역상이 오가는데 시베리아에서 제일 큰 중국시장이 성행하는 곳이기도 하다.아무르강은 제야강과 합쳐진 지점에서 동해까지 거리가 2천8백24㎞,그 이전의 상류까지 합하면 4천4백㎞를 흐르는 장강이다. 국민학생 수십명이 식당칸으로 우르르 몰려간다.여름방학을 맞아 부리야트·치타주에서 블라디보스토크해안의 사나토리(휴양소)로 가는 학생들인데 각학교에서 우수학생을 선발해 1개월동안 휴양소로 보낸다고 한다.인솔교사는 1개월 경비가 1인당 1백만루블인데 특별히 주정부와 후원하는 보험회사에서 반반씩 부담한다고 설명한다.소련시절에는 청소년동맹이다 해서 방학이면 무조건 국가경비로 단체여행을 보냈는데 이제는 돈 있는 집 자녀가 아니면 이런 장기여행은 꿈꾸기 힘들다. 아무르주를 지나 하바로프스 크라이(대주)로 진입하며 모스크바와의 시차는 1시간이 더 추가돼 7시간으로 벌어진다.곧바로 「유태인이 살지 않는」 유태인자치주 예브레이로 들어섰다.이곳 역시 웃지 못할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