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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석열 당선인, 힘 실어줘도 ‘군위군의 대구 편입’은 난항…왜?

    윤석열 당선인, 힘 실어줘도 ‘군위군의 대구 편입’은 난항…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경북 군위군의 현안인 ‘군위의 대구 편입’ 문제를 직접 챙기며 힘을 실어주는데도 난항을 겪고 있다. 군위 대구 편입 법안의 임시국회 통과를 한차례 무산시킨 장본인인 김형동 의원(안동예천)이 윤 당선인의 지원 의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홀로’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이전사업의 전제조건인 ‘군위군 대구시 편입’에 대해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김 의원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법안소위 위원으로 법안 상정의 열쇠를 쥐고 있다. 31일 군위군에 따르면 김 군수는 지난 25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에서 윤 당선인을 만나 현재 국회 입법과정에서 발목이 묶인 군위의 대구 편입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특히 김 군수는 대통령 취임 후에는 여소야대 국회 상황에서 또 어떻게 기류가 변할지 모르니 취임 전 이 문제가 매듭지어질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주문했다. 이에 윤 당선인은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이 조속히 추진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것이고, 편입 문제는 당 차원에서 협의해서 잘 해결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지원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윤 당선인은 앞서 지난 21일 권영진 대구시장과도 만나 “군위 대구 편입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4월 임시국회에서 편입 처리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하지만 윤 당선인과 김 군수 등의 만남이 있는 직후인 지난 28일 김 의원이 이 문제에 대해 또다시 정면으로 반기를 들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그는 이날 안동지역 언론인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군위의 대구편입과 대구경북통합신공항 유치는 다른 문제”라는 기존 입장을 다시 분명히 했다. 이어 “대선 이후 경북 북부지역 4명의 국회의원들이 만났으며, ‘공항이 완벽하게 유치되고 추진되는 과정에서 군위가 대구로 편입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고 덧붙였다. 이로 인해 대구경북 정치권 등에서 군위 대구 편입 4월 국회 처리 난항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김 의원이 지난 2월 군위 대구 편입 법안 상정을 반대할 때부터 국회 행안위에서 강제 교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나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는 김 의원의 해임안에 대한 계획을 지금까지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군위군 통합신공항추진위 관계자는 “윤 당선인이 공약인 ‘대구경북통합신공항 조속 추진’을 위해 군위 대구 편입을 약속한 마당에 김 의원이 계속 사욕에서 비롯된 몽니를 부리고 있다”면서 “김 의원의 일대 각성과 함께 대구경북 정치권이 520만 시도민의 염원인 통합신공항의 성공적인 건설을 위해 군위 대구 편입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 [사설] 장애인 권리 보장, 정부·국회 두 팔 걷어붙여라

    [사설] 장애인 권리 보장, 정부·국회 두 팔 걷어붙여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라며 지난해 말 시작한 지하철 출퇴근 시위를 다음달 20일까지 잠정 중단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지난 29일 전장연 대표 등을 만나 요구 사항을 들었고, ‘시민 불편이 있으니 시위를 멈춰 달라’는 인수위 요청을 전장연이 수용한 것이다. 대신 매일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릴레이 삭발식을 시작했다. 전장연의 요구는 ‘예산 없이 권리 없다’로 요약된다. 이들의 요구는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 2개씩 설치 △장애인이 거주 시설을 나와 자립을 돕는 예산 807억원 편성 △활동지원 1조 2000억원 △평생교육시설 예산 지원 134억원 등이다. 전장연은 자신들 시위를 “시민을 볼모로 투쟁한다”고 폄훼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사과는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시각장애인으로 같은 당의 김예지 의원이 지난 28일 시위대 앞에서 무릎 꿇고 대신 한 사과를 무위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5월이면 여당 대표가 되는 이 대표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발언은 사과해야 마땅하다. 국회는 지난해 말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지만, 예산 배정을 명시하지 않아 이런 문제를 만들었다. 유명무실한 법으로는 장애인 권리를 보장하지 못한다. 시민들도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이용하려다 떨어져 사망하는 일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전장연의 지하철 출퇴근 시위는 과잉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그렇다고 불법도 아니다. 내가 잠시 불편하다고 해서 장애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편익을 무시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기회다. 정부는 장애인의 권리보장 요구 해결을 위해 국회와 노력해야 한다. 2차 추가경정예산안에도 넣을 수 있는지 검토해 보길 바란다.
  • 이 사람도....판 커지는 충북지사 선거

    이 사람도....판 커지는 충북지사 선거

    3선연임 제한에 걸린 이시종 충북지사의 불출마로 무주공산이 된 충북지사 선거가 거물급 정치인들의 대결장이 되고 있다. 중앙 정치무대에서 이름이 알려진 전국구 인사들이 충북과의 연고를 강조하며 속속 선거전에 뛰어들고 있어서다. 일부 인사는 예상밖의 출마로 외인 논란을 자초하며 당내 갈등까지 초래하고 있다. 30일 충북도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현재 국민의 힘에서 보은 출신인 박경국 전 행안부 차관과 4선 의원을 지낸 오제세 전 의원이 충북지사 선거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서울 서초갑 3선 의원 출신인 국민의 힘 이혜훈 전 의원은 이날 예비후보 등록을 마쳤다.  4선 국회의원과 과기부장관 등을 지낸 국민의힘 김영환 특별고문의 출마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국민의힘 박덕흠(보은·옥천·영동·괴산)·이종배(충주)·엄태영(제천·단양) 의원이 김 고문에게 충북지사 출마를 위한 경선 참여를 요청해서다. 박 의원은 “김 고문이 고향(충북 괴산)에 농사를 짓고 살겠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지역을 위해 봉사해 줄 것을 권유하는 차원에서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에 김 고문은 “현재 경기지사 선거에 출마 선언을 한 상태라 동지·가족들과 논의해 조만간 공식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의 힘 충북지사 후보군에 포함됐던 나경원 전 의원은 최근 불출마를 선언했다. 아직 예비후보 등록자가 없는 더불어민주당에선 청주에서 3선의원을 지낸 노영민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28일 출마를 공식화했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위인 곽상언 변호사는 당내 후보자 검증을 신청했다. 곽 변호사는 아버지가 충북 영동군에 살았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곱지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출마가 뜬금없다는 것이다. 박문희 도의회 의장은  “곽 변호사가 당원들 의견을 듣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충북에서 활동하지 않고 출마하는 것은 충북도민들에게 무례한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이혜훈 전 의원의 출마도 눈총을 받고 있다. 이 전 의원이 부친 고향이 제천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당내에서조차 황당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 전 의원은 경남 마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서울 서초에서 17·18·20대 국회의원을 지낸 후 21대 총선 때 서울 동대문에서 낙선했다. 박경국 전 차관은 “도지사는 퇴출된 정치인의 종착지가 아니다”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박 전 차관은 김 고문에게 경선참여를 요청한 의원들에 대해선 ‘부당한 경선개입’이라고 비판했다.  박 전 차관은 “다른 도지사 선거 출마를 선언한 인사에게 충북지사 선거 출마를 종용한 것은 충북도민과 경기도민 모두에게 해서는 안될 부적절한 처사”라며 “지방선거 전반에 악영향을 끼칠 해당행위”라고 비난했다.  공직사회도 일부 인사들의 출마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충북도청의 한 공무원은 “그동안 충북에 관심도 없다가 충북지사 선거에 나오려는 사람들을 보면 충북을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 권영진 시장 불출마 회견장에 나타난 김재원 전 최고-이유는?

    권영진 시장 불출마 회견장에 나타난 김재원 전 최고-이유는?

    김재원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30일 오전 대구시청에 나타났다. 이 시간에는 권영진 대구시장이 3선 불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권 시장 기자회견장 밖에서 김 전 최고위원이 시청 직원들을 대상으로 명함을 돌렸다. 사전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권 시장과 면담을 하지 못하고 시장실 옆 접견실에 잠시 앉아있다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최고위원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찾아온 이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권 시장 지지표를 자신에게로 끌어 땅기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게 나온다. 권 시장의 이탈로 홍준표 의원과 양강 체재를 구축한 김 전 최고위원이 권 시장 지지표를 흡수하면 그만큼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이날 권 시장과 만날 수만 있었다면 은연중에 권 시장과의 단일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전략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지역 정치권관계자는 “권 시장의 지지도가 그동안 여론조사에서 두자리수를 기록했다. 홍 의원과 김 전 최고위원 중 누가 권 시장 지지자들의 표심을 얻는 것에 따라 대구시장 판도가 달려질 것이다. 이 것이 이번 대구시장 선거의 관전 포인트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권 시장은 이날 불출마 기자회견에서 “다음 시장은 대구미래와 성공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호흡을 맞출 수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대구 발전을 주도적을 이끌 능력과 자질 갖고 있어야 한다. 누가 대통령과 호흡 맞추어 대구 이끌어갈 적임자인지 시민 여러분과 당원 동지들께서 현명하게 판단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김 전 최고위원의 이날 시청 방문에 대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느냐”, “불출마 기자회견 중에 출마 예상자가 찾아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시청 내외부에서 나왔다. 한편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로는 홍 의원과 김 전 최고위원, 정상환 변호사, 이진숙 전 대구MBC사장, 권용범 대구경북벤처기업협회 전 회장 등 10여명이 거론되고 있다
  • 권영진 3선 불출마선언 기자회견-대구시장선거 요동

    권영진 3선 불출마선언 기자회견-대구시장선거 요동

    대구시장 선거가 요동치고 있다. 국민의힘에서 출마선언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3선을 도전하는 권영진 대구시장이 불출마를 선언했다. 권 시장은 30일 기자회견을 갖고 불출마를 선언했다. 권시장은 이날 회견에서 “윤석열 정부와 함께 더 큰 발전과 성공 이뤄내야 하는 중차대한 시점에서 제가 어떻게 하는게 대구위한 길인지 고민했다”면서 “3선의 꿈과 소명을 잠시 생각했지만 포스트코로나와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사람이 대구 이끌어갈 수 있도록 기회 열어주는게 대구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대구시정의 남은 과제는 다음 시장이 완수해주길 바란다. 남은 임기동안 코로나로부터 시민을 지키고 하루 빨리 소중한 일상 회복하도록 전심전력 다하겠다. 또 윤석열 정부의 대구공약이 중심과제로 채택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권 시장은 “다음 대구시장이 누가 되느냐가 대구의 미래와 성공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대통령과 호흡을 맞출 적임자가 누구인지 시민 여러분과 당원 동지들이 현명하게 판단해 주길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권 시장은 그동안 3선 도전 의사를 강하게 밝혀왔다. 지난 23일 자청한 기자간담회에서도 본인이 윤석열 당선인과 ‘깐부’라고 내세우며 새 정부와 호흡을 맞춰 지역 발전을 이끌 적임자가 바로 본인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권 시장의 정확한 불출마 결심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점 등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특히 당 공천관리위원회가 중복 페널티 논란이 일었던 ‘현역 10%·무소속 출마 이력 15%’ 감점 규정을 ‘1인당 받을 수 있는 최대 페널티를 10%’로 정리한 것이 권 시장의 결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졌다. 대구시장 국민의힘 경선에는 31일 출마선언을 하는 홍준표 의원과 이미 출마선언을 한 김재원 전 최고위원, 이진숙 전 대전MBC 사장 등 10여명이 뛰어든 상태다. 유력주자였던 권 시장의 불출마가 선거 판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날 김재원 전 최고위원은 권 시장 불출마 기자회견때 대구시청을 방문해 명함을 돌리기도 했다.
  • [시론] 청년고용 지원 강화를 위한 제언/윤동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시론] 청년고용 지원 강화를 위한 제언/윤동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한국 경제가 맞고 있는 가장 중대한 대내외 환경 변화는 빠른 속도의 디지털 전환에 따른 기술 진보와 생산가능인구 감소,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로 요약될 수 있다. 노동시장의 심각한 이중구조로 대기업 및 공공 부문에 쏠림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지역적으로 서울과 수도권에 청년 취업 수요가 집중된다. 지난해 중소기업 미충원 인원은 10만 5000여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79% 증가했고 미충원율도 16%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대기업 미충원 인원 1만명, 미충원율 6.4%와 비교하면 중소기업 기피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수시·경력직을 채용하는 트렌드 변화에 따라 재학 시기 일경험 및 직무훈련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청년들의 노동시장 진입 부담도 가중되고, 구직 의욕이 저하된 청년 니트(NEET)의 비중이 늘면서 확장 실업률도 25.1%로 급증한 상황이다. 구직 단념과 오랜 취업준비 기간으로 불안과 우울 등 심신장애 질환도 증가하고 있다. 청년실업난은 다양한 구조적 요인에서 발생한다. 주요 선진국에서는 이를 해결하고자 인구구조 변화와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정책들을 마련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구직활동지원금, 청년추가고용장려금, 청년내일채움공제 등의 제도를 통해 한시적인 재정 지원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 대책은 청년고용률을 높이고 실업률을 관리하는 등 양적 목표 달성을 우선시하고 단기 금전적 지원을 위주로 대응한 측면이 있다. 우리 경제는 구조적으로 저성장 기조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와 유사한 감염병 등 재난 및 경제 위기가 청년에 대한 고용 충격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청년의 취업준비 기간이 장기화되고, 노동시장이 양극화된 상황에서 고용시장의 구조적 문제 해결과 일자리의 질적 개선을 위한 단계적 노력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청년고용정책은 통합적인 관점에서 고객 중심의 접근성과 서비스의 질적 개선을 통해 실질적인 취업 기회를 보장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혁신해 나가야 한다. 우선 적극적인 조기 개입으로 고교 졸업 및 대학 입학 단계에서 본인이 희망하는 지식과 기술 및 경험을 취득하고 일자리를 매칭할 수 있도록 특화된 청년고용서비스의 플랫폼 구축이 필요하다. MZ세대는 비대면 디지털 기술 활용에 능하고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정보를 취득하는 특성을 지닌다. 이를 고려해 온라인 청년센터 기능을 개선해 실시간으로 양질의 맞춤형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보다 향상된 AI 기반 통합청년고용서비스 플랫폼을 조성해야 한다. 아울러 청년들의 경력 형성을 지원하기 위해 지역 기업과 협력해 현장중심형 일경험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한다. 디지털과 에너지 대전환 시대에 산업수요 맞춤형 혁신 인재를 육성하려면 대학과 지역 기업이 함께하는 첨단기술 전문교육과정을 개설할 필요가 있다. 구직자 맞춤형 프로그램과 함께 일경험을 제공함으로써 고숙련 인력 양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턴십을 실시하는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생산성 강화를 위한 인재 채용 및 근로자 교육훈련 지원, 일터 혁신, 디지털 전환 등 패키지 형태의 정책 지원도 절실하다. 일하는 청년들의 자산 형성을 위한 부처 통합 종합지원 대책도 빠뜨릴 수 없다. 취업난과 더불어 가파르게 상승하는 주거·금융 비용으로 청년층 부담이 갈수록 가중된다. 사회 초년생으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플랫폼 종사자, 1인 자영업자, 한시적 아르바이트 등 취약계층으로 노동법제도 및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노출된 청년들이 많다. 근로·사업 소득이 있는 청년들이 중장기 자산 형성이 가능하도록 전월세 지원 같은 주거 안정 대책을 마련하고 비과세 및 소득공제 혜택을 부여하는 등 중산층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공정한 기회를 제공할 때다.
  • ‘코로나 피해’ 예술인 4만명 최대 100만원 지급

    문화체육관광부는 2022년 1차 추경 예산 400억원을 투입해 4만명 이상의 예술인을 지원한다는 내용의 ‘코로나19 한시 문화예술인 활동지원금’ 사업을 28일 공고했다. 팬데믹 장기화로 피해가 큰 예술계를 돕기 위한 조치다. 신청 대상자는 사업 공고일인 이날 기준 예술인 복지법상 ‘예술활동증명 또는 신진 예술인 예술활동증명’ 절차를 완료하고, 소득인정액이 기준 중위소득 120% 이내인 예술인이다. 한국사회보장정보원 사회보장정보시스템을 통해 산정된 소득인정액이 낮은 순서대로 5월 중순 1인당 100만원씩 지급할 예정이다. 다만 지급 대상자가 고용노동부의 제5차 긴급 고용안정지원금 50만원을 받고 있으면 차액 50만원만 지급한다. 신청은 29일부터 4월 14일까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창작준비금시스템(www.kawfartist.net)을 통해 받는다. 온라인 신청이 어려운 원로·장애 예술인들을 위해 현장 접수도 한다.
  • “이재명 지켜라” 與경기지사 잇단 출사표… 서울은 구인난

    “이재명 지켜라” 與경기지사 잇단 출사표… 서울은 구인난

    6·1 지방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주요 인사들이 ‘이재명 전 민주당 대선후보 지키기’를 명분 삼아 경기도지사 선거에 잇따라 출사표를 던지며 당내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5선의 조정식 민주당 의원은 28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저 조정식은 이재명과 늘 함께했고, 이재명을 지켜 온 ‘이재명의 찐(진짜) 동지’”라며 “민주당과 이재명 지키기가 걸린 경기도지사 사수를 꼭 이뤄 내겠다”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안민석 의원 또한 오는 31일 공식 출마선언을 할 계획이다. 그는 이날 MBC 라디오에서 “이 전 후보가 해 왔던 업적들을 계승시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재명의 오랜 친구인 안민석이가 이 부분을 잘 이해하고 더욱더 발전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염태영 전 수원시장은 지난 21일 일찌감치 출마 선언을 했다. 대선 과정에서 이 전 후보와 단일화한 김동연 새로운물결 대표의 출마 가능성도 남아 있다. 김 대표는 이날 KBS 라디오에서 만일 민주당이 정치교체 연대를 위해 지방선거에서 특정 지역에 출마해 달라고 요구할 경우에 대해 “만약에 합의 정신에 따라서 분명한 의지를 표시하고 실천의 현실적인 모습을 확실히 보인다면 어떤 형태로든 연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열려 있다”고 밝혔다. 이에 경기도지사뿐 아니라 서울시장 등 다른 지역 출마 가능성도 제기된다. 윤호중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비대위 회의에서 새로운물결에 통합 논의를 공개 제안했다. 현재 열세로 꼽히는 서울지역에서 인물난을 겪고 있다. 이에 민주당 일각에선 송영길 전 대표 차출론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CBS 라디오에서 송 전 대표 차출론과 관련, “송 전 대표가 나간다고 하면 오히려 제가 과감하게 붙어 주면서 세대교체론 등을 더 강하게 주장할 수도 있다”며 자신의 출마 가능성을 열어 놨다. 한편 대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서울시장 출마 뜻을 접은 우상호 민주당 의원은 이날 TBS 라디오에서 “지금까지 큰 선거의 패배를 책임지고 물러난 지도부가 바로 그다음 선거의 전략공천을 받아 출마하는 경우는 없었다”며 “경쟁력 조사를 해서 인물이 송 전 대표밖에 없다는 경우가 아니라면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 문체부 업무보고…“청와대 개방시 연간 최소 2000억원 경제적 효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회복지문화분과는 28일 종로구 통의동 인수위 사무실에서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코로나19 확산으로 피해를 입은 문화·체육·관광 분야에 대하여 피해 보상과 국민 여가 및 일상회복을 위해 여행 및 체육업계 일자리 및 재정지원, 피해 예술인 업종별 맞춤형 지원, 국내여행 활성화 및 외국인 방한 유도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 또한 한류를 확산하고 K-컬처를 세계 문화의 미래로 발전시키기 위해 콘텐츠 IP 기반 정책금융 지원 확대, 콘텐츠기업 및 예술인들의 세계시장 진출 지원체계 구축, K-컬쳐 스타트업 지원, 한류 콘텐츠 저작권 보호, 이스포츠 활성화 방안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인수위는 전국민 문화·체육 향유 활성화, 지역중심 문화자치 확산, 장애인·장애예술인 문화 이용환경 확대 및 활동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코로나19 이후 지역관광개발·육성을 통한 방한객 3000만 시대로의 도약 추진방안으로 지역 특화 관광 개발, 관광벤처 육성 및 스마트관광 확산·체류 관광 활성화, 한국관광 브랜드 가치 제고 방안 등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이날 인수위는 청와대 개방이 최소 연간 2000억원 경제적 효과를 가져온다는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분석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었으며, 이번 분석 결과는 보수적인 추정을 위해 외국인 관광객은 데이터에서 제외했다고 밝혔다. 이날 업무보고에는 사회복지문화분과 간사인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과 김도식·안상훈·백경란 위원, 전문·실무위원, 문체부 기획조정실장을 비롯한 실·국장 등이 참석했다.
  • 문체부, 문화예술인 4만명 활동지원…1인당 최대 100만 원

    문화체육관광부는 2022년 1차 추경 예산 400억원을 투입해 4만 명 이상의 예술인을 지원한다는 내용의 ‘코로나19 한시 문화예술인 활동지원금’ 사업을 28일 공고했다. 팬데믹 장기화로 피해가 큰 예술계를 돕기 위한 조치다. 신청 대상자는 사업 공고일인 이날 기준 예술인 복지법상 ‘예술활동증명 또는 신진예술인 예술활동증명’ 절차를 완료하고, 소득인정액이 기준 중위소득 120% 이내인 예술인이다. 한국사회보장정보원 사회보장정보시스템을 통해 산정된 소득인정액이 낮은 순서대로 5월 중순 1인당 100만원씩 지급할 예정이다. 다만, 지급 대상자가 고용노동부의 제5차 긴급 고용안정지원금 50만원을 받고 있으면 차액 50만원만 지급한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창작준비금 지원 사업, 예술인 파견 지원 사업과는 별개 사업이라 이 사업 수혜 여부와는 상관없이 조건에 부합하는 예술인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신청은 29일부터 4월 14일까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창작준비금시스템(www.kawfartist.net)을 통해 온라인 접수한다. 온라인 접수가 어려운 원로·장애예술인들을 위해 현장 신청도 받는다.
  • 사실상 ‘셧다운’된 상하이... 시민들은 채소사려 ‘몸싸움’ 중

    사실상 ‘셧다운’된 상하이... 시민들은 채소사려 ‘몸싸움’ 중

    절대로 도시 봉쇄는 없다며 ‘가짜 뉴스’에 현혹되지 말라고 시민들을 안심시켰던 중국 최대 도시 상하이가 쉽게 잡히지 않는 코로나19 확진자의 증가세에 결국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상하이 전체 도시가 아닌 단계별 폐쇄라고 공식 발표했지만 사실상 상하이시는 ‘잠시 멈춤’이 시작되었고 시민들은 밤새 사재기하느라 잠들지 못했다. 27일 상하이시 정부 언론 홍보실은 웨이보(微博, 중국의 트위터) 공식 계정을 통해 상하이시가 2500만 시민들에 대한 PCR 전수 조사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3월 28일 오전 5시를 기점으로 1차 봉쇄 지역은 상하이 황푸강을 기준으로 동쪽과 남쪽인 푸동(浦东)과 푸남(浦南)이다. 1차 지역은 4월 1일 오전 5시에 봉쇄가 해제된다. 특히 푸동지역은 상하이의 증권가로 봉쇄 전날인 27일부터 거래 정상화를 위해 주요 인력들이 당직 근무를 하고 있다. ㅜ2차 PCR 전수 조사 지역은 서쪽인 푸시(浦西)지역으로 한국 교민이 많이 살고 있는 한인타운도 포함된다. 4월 1일 새벽 3시부터 시작되며 4월 5일 새벽 3시에 봉쇄가 해제된다고 발표했다.봉쇄 기간 동안에 모든 시민들은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사람은 물론 차량까지도 멈춤이지만 기본 생활을 위해 음식 배달, 택배 등은 비대면으로 이용할 수 있고 아파트 단지 내로는 진입할 수 없다. 모든 교통수단도 운행이 중단된다. 지하철, 택시, 공유 자동차, 페리 등도 일시 정지되지만 구급차 및 도시가스 전기 등의 기본 생활을 위한 운행만 허용했다. 모든 직장인들이 재택근무를 해야 하며 예외로 방역 인력과 외식 배달원, 가스 전기 수도 등의 시민들의 생활과 관련된 업종만 출근할 수 있다. 한편 도시 봉쇄 하루 전날 밤 상하이 시민들은 언제 끝날지 모를 ‘자가 격리’를 대비해 대대적인 사재기에 나섰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배송도 가능하지만 워낙 주문량이 폭주해 원하는 시간에 배송을 받지 못하거나 주문 자체에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차라리 미리 쟁이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봉쇄 전날 상하이시의 모든 마트들은 24시까지 연장 영업을 하겠다고 나서자 먹거리를 쟁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최근 상하이의 신선식품 등의 유통은 물론 재고와 배송 인력까지 부족한 상황에서 채소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실제로 상하이에 위치한 일본 백화점인 다카시마야 백화점(高岛屋)에서는 양배추 한 통에 78위안, 한화로 약 1만 5000원에 판매했다. 중국의 체인 슈퍼마켓인 렌화에서도 감자 한 개에 8000원에 판매해 큰 논란이 되었다. 이후에 렌화에서는 “단순한 단가 입력 오류”라며 정정했지만 이미 상하이에서 채소는 명품보다 더 귀한 몸이 되었다.정부에서는 채소 및 식자재 공급에 총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유통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아 시민들의 불안감은 더 커지고 있다. 한편 상하이 이전에 대도시 중에서 처음으로 일주일 동안 봉쇄했던 선전시의 경우 초기 대응 덕분에 감염 확산세가 수그러들자 28일부터 단계별로 일상을 회복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선전과 다른 상하이의 ‘봉쇄 카드’가 통할지 의문이다.
  • 기타 치는 법 배운 ‘기타 노동자 1’… 복직 희망 노래한 언니의 4464일

    기타 치는 법 배운 ‘기타 노동자 1’… 복직 희망 노래한 언니의 4464일

    영화에서 끊임없이 귀를 거슬리게 하는 건 도로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이다. 지금은 주유소로 변해 버린 인천의 옛 공장터에서, 해고 무효확인 소송이 걸린 대법원 앞에서, 오체투지 행진과 천막 농성이 이어지는 광화문과 종로에서, 말소리가 묻힐 정도로 시끄러운 차 소리가 쉴 새 없이 관객의 귀를 때린다. 일터로 돌아가게 해 달라, 법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 외치는 이들은 내내 길 위에 서 있다. 오는 31일 개봉하는 ‘재춘언니’는 대한민국에서 최장기 노동 투쟁으로 기록된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의 4464일을 담은 이수정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다. 콜트·콜텍은 한때 세계 점유율 1위를 차지할 만큼 유명한 기타 브랜드였지만 2007년 경영상 이유로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이후 노조가 결성되며 시작한 복직 투쟁은 노사 합의가 이뤄진 2019년 4월까지 계속됐다. 이 감독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를 다룬 ‘깔깔깔 희망버스’, 세월호 참사 이후 유족들의 진상규명 투쟁을 담은 ‘나쁜 나라’ 등의 다큐를 통해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다. 이번 작품에선 30년 동안 기타 기능공으로 일한 노동자 임재춘씨를 조명하며 소심하고 내성적인 그가 어떻게 복직 투쟁에 나섰는지 돌아본다. 이 감독은 “2012년 촬영 시작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찍게 될 줄 몰랐다”면서 “언제부턴가 조급해하지 말고 싸움이 끝날 때까지 함께하자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말했다. 다큐는 ‘이럴 수밖에 없다’ 또는 ‘이래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비장한 설명을 가미하지 않는다. ‘투쟁’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격한 장면 대신 밴드 연주와 연극, 시, 그림 등 예술 활동을 하며 거대 자본, 법에 맞서는 이들의 모습을 담는 데 집중했다. “노동 운동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버리고 싶었다”는 게 감독의 설명이다. “기타 공장 사람들이 하루 12시간씩 일할 때는 정작 기타를 칠 줄도 몰랐대요. 그런데 회사에서 잘린 뒤에야 투쟁하면서 기타를 배우는 과정이 흥미로웠죠.” 노조 지부장 등 명함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임재춘이란 ‘노동자 1’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임씨는 “쑥스러움을 정말 많이 타고, 남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는데 복직 투쟁을 하며 조금씩 바뀌었다”며 “기타를 실제로 배우고, 연극을 하고, 일기를 쓰기도 하다 보니 매일 노조끼리 집회를 여는 것보다 더 연대가 잘된 것 같다”고 했다. 제목이 ‘재춘언니’인 건 임씨가 2013년 해고 노동자들과 선보인 연극 ‘햄릿’에서 오필리아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요리를 담당하고, 천막 농성장에 오는 모든 사람을 따스히 맞는 것 역시 그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지점이다. 배려와 보살핌이 여성만의 일은 아니지만, 노동계에서 일반적인 ‘형’, ‘동지’ 대신 ‘언니’로 불리는 임씨의 모습에선 멀리 떨어진 노조 대신 우리 주위의 동료가 보인다. 작품은 제46회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회특별상,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비프 메세나상을 받는 등 평단의 호평을 받고 있다. ‘귀족 노조’, ‘강성 노조’라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고 노조 혐오가 극에 달한 이 사회에서 노동자는, 노동자와 연대하는 우리 모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돌아보게 한다. 97분, 12세 관람가.
  • 김수영 양천구청장 “조건 없는 종상향 서울시에 건의할 것”

    김수영 양천구청장 “조건 없는 종상향 서울시에 건의할 것”

    김수영 서울 양천구청장은 지난 23일 목동아파트 재건축준비위원회연합회와 간담회를 갖고 “목동 1~3단지 조건 없는 종상향 등 목동지구 지구단위계획을 조속히 결정해 달라고 서울시에 적극 건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간담회엔 목동아파트, 신월시영아파트 재건축준비위원장 등 13명이 참석했다. 재건축 안전진단 적정성 검토 기관인 국토안전관리원 원장, 한국건설기술원 원장과 김 구청장의 면담에서 논의된 내용을 공유하고, 단지별로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련됐다. 김 구청장은 지역 내 노후 아파트단지 재건축을 추진하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 왔다. 지난해 1월 서울 자치구 중 최초로 특정 아파트단지를 대상으로 한 재건축 전담팀을 구성했다. 지난해 3월엔 더불어민주당 자치구청장들과 함께 당 부동산 특별위원회를 만나 민심을 전달했다. 5월엔 당 차원 부동산특위 긴급 현안 회의를 주도했고, 10월엔 오승록 노원구청장, 박성수 송파구청장과 함께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을 만나 재건축 규제 완화를 요청하기도 했다. 김 구청장은 “재건축 정비사업 단계별 적극적인 행정 지원과 더불어 서울시와 정부, 관계기관과의 긴밀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며 목동아파트 재건축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가난했던 대구 소년, 헌법학에 불멸의 발자취 남기고 떠나다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89세를 일기로 26일 별세했다. 서울신문은 2013년 5월 ‘명사가 걸어온 길’이라는 인물탐구 기획 코너를 통해 고인이 밟아온 삶의 궤적을 2회에서 걸쳐 집중적으로 조명한 바 있다. 고인은 당시에도 만 80세 고령이었지만, 스트레이트로 5시간에 걸친 짧지 않은 인터뷰를 정력적으로 소화해 냈다. 자신의 인생을 채워온 수많은 사건들과 사람들을 대부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인터뷰 전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 [명사가걸어온 길] (11) 한국 헌법학의 태두 김철수 해방·전쟁·좌우 분열… 격동의 시대, ‘책벌레 소년’ 헌법에 눈을 뜨다유신헌법 참여 협박에도 정치권 러브콜에도… 학자의 양심 지켰다열두 살 되던 해 일제가 패망했다. 환희에 천지가 요동쳤다. 해방. 어렸지만 그게 뭔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나 조국의 운명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혼돈과 분열이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찢기고 민중은 좌우로 갈렸다. 얼마 전까지 ‘조국 해방’을 외치며 함께 어깨를 걸었던 동지들이 생각이 다르다고, 처지가 다르다고 원수가 돼 등을 돌렸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좌익 프락치로 몰려 책상을 비웠다. 해방 공간의 극심한 무정부 상태를 보며 소년은 결심했다. 국가 시스템의 뼈대가 되는 헌법을 공부하겠노라고. 그 다짐대로 헌법 연구는 평생의 업이 됐고, 소년은 우리나라 헌법학의 ‘태두’(泰斗)가 됐다. 지난 10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국헌법연구소에서 만난 김철수(80) 서울대 명예교수는 5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에도 피로한 기색 없이 꼿꼿하게 여든 성상의 인생과 철학을 얘기했다. 유복한 친구 둔 덕에 책 실컷 읽고...극렬한 좌우 대립 지켜보며 성장1933년 7월 대구에서 빈농(貧農) 집안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책 읽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유복한 친구를 둔 덕에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책 읽느라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통학 기차 안에서도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다. “친구 아버지가 당시 대구지역 마사회 회장이었어요. 경마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기들 나라에서 가져온 세계 문학대전집, 세계 사상대전집 같은 책들이 그득그득 꽂혀 있었지요. 그때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게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었어요. 강의 중에 ‘레 미제라블’을 말하면 학생들은 ‘아 장발장이 빵 하나 훔쳤다가 탈옥하는 거요?’ 정도의 반응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실 이 책은 대단한 책입니다. 무려 26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형벌, 정치, 법철학 등 다양한 사회 문제와 고민이 담겨 있으니까요.” 책에 빠져 살던 김 교수의 관심이 사회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은 나라가 광복을 맞으면서였다. ‘민주국가 건설’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어떤 민주주의를 택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분열 양상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었지요. 특히 제가 살던 대구는 당시 공산주의의 총본산인 모스크바(소련의 수도)에 빗대어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렸을 정도예요. 좌익의 활동이 국내 어떤 도시보다도 활발하고 강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는 극렬한 좌우 대립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어요. 경찰이 사람을 잡아가고 때리고, 또 반대되는 공공기관 테러가 일어나고. 우리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헌법이었던 것이지요.” 1947년 제헌(制憲) 헌법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법대생이나 학자들이 보던 고시 잡지 등을 읽으며 헌법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때가 우리 나이로 열다섯이었다.시력 나빠 전쟁터 끌려가지 않아...대학 입학 천막 강의실 공부 1950년 전쟁이 터졌다. 고도근시로 고생하던 그는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았다.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전쟁 탓에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피란 온 터였다. 부산의 허름한 판자촌에서 법학 강의를 들었다. 법학도들이 ‘천막 강의실’에서 힘겹게 공부하던 이 시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불법적인 개헌을 추진한다. 이른바 ‘발췌개헌’의 시작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으로 피란 가 있는데 거기에서 임기 4년이 만료됐어요. 이 대통령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고치려 들었는데, 이걸 야당이 반대했고 그 결과로 야당 의원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어요” 이 대통령은 “전시에 부산에 침투한 간첩이 많으니 소탕을 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간첩을 잡겠다던 당초 주장과 달리 야당 의원과 무고한 시민에 대한 검거와 폭력이 이뤄졌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 선생도 잡아넣었어요. 3명 이상 모이면 잡아갔어요. 국회로 출근하는 버스가 있었는데 버스에 탄 채로 계엄사령부에 끌려 가기도 했어요. 옛 경남도청에 무덕관이라고 해서 유도 연습장 같은 곳을 국회의사당으로 썼는데 그 일대에 ‘백골단 깡패’들이 쫙 깔려 있었어요. 이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은 전부 계엄사령부로 소환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김 교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질곡의 상당 부분은 친일파 등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지만 일부 불가피한 대목도 있었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친일파 척결은 예견된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처벌하는 법률도 만들었는데 법률로 처벌하려다 보니까 당시 정부관료, 경찰, 군인 등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걸렸던 거죠. 일제강점기 때는 외국 유학자를 비롯해 능력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이 대통령이 보기에 친일파를 다 쫓아내면 행정이나 정치를 못하겠다 싶었던 거죠. 반민특위에 걸렸던 경찰들을 풀어주고, 결국 그 경찰들이 치안 등 최소한의 사회 시스템을 유지해 전쟁통에 질서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죠. 일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반민특위를 없앴다는 이유로 친일파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당시의 사정도 일부 헤아릴 필요는 있을 겁니다.”이 대통령은 연임에 성공했고 1953년 전쟁이 끝났다. 김철수는 스무 살의 청년이 됐다. 김철수는 한 살 아래 학과 동기를 만나 사랑을 키워갔다. 궁핍과 혼돈의 시대에 서울대 법대 커플의 사랑은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샀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대화 주제가 ‘첫번째 아내’로 옮겨가자 김 교수의 목소리톤이 낮아졌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첫 아내’ 전혜린과 캠퍼스 커플...뮌헨대 유학중 결혼 김 교수의 첫 번째 아내는 한국 문학계와 여성 예술인들 사이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여인’으로 회자되는 전혜린이다. 두 사람은 부산에서 맺은 인연을 서독(독일 통일 전) 뮌헨에서 키워나갔다. 전혜린이 1955년 먼저 뮌헨대 유학길에 올랐고 김 교수는 이듬해 그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이역만리에서 기쁨과 고통을 나눴다. 문학가가 꿈이었지만 아버지의 성화로 법대에 진학했던 전혜린은 독문학과에 입학해 그토록 바랐던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체계적인 법 공부에 목 말랐던 김 교수는 법학 공부를 이어갔다. 하지만 전쟁국가 출신 동양인에게 서독은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은 아니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 너무도 가난했다. 나라를 벗어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받은 삶이 됐던 시절이었다. 대통령의 허가가 있어야만 외국 송금이, 그것도 최고 50달러까지만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장학금과 통·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렸다. 전혜린은 훗날 유학생활의 궁핍에 대해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지구상에 한국,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라고 그러면 아프리카 콩고에서 왔냐고 그랬어요. 그 나라에 기차는 있느냐, 뭘 먹고 사느냐 등 질문을 해대는데, 미개인 취급을 하더군요. 교수들도 저를 보며 전쟁 중인 나라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를 했겠느냐며 일본 학생들과도 크게 차별을 뒀습니다. 약소국 국민의 설움이란 게 뭔지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했다. 1957년 그들은 뮌헨에서 결혼을 했다. 생활은 결혼 전과 다름 없이 곤궁했지만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의지와 위안이 됐다. 그러던 중 전혜린은 1959년 딸을 낳고 한국으로 돌아가 이듬해 성균관대에서 강사로 둥지를 틀었다. 김 교수는 2년 뒤 모교 교수 자리를 제안받고 서울로 돌아왔다.이혼 1년 뒤 전혜린 작가 스스로 목숨 끊어 배 고프고 힘들었던 서독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에 왔지만 서울에서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5·16 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당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무력으로 청와대를 장악했다. 당시 박정희 군부가 취한 여러 조치 가운데 ‘군 미필자는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게 있었다. 시력이 나빠 군대에 못 간 김 교수는 공무원인 서울대 교수에 임용되지 못했다. 서울대는 물론 어디에서도 군 미필자인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내와의 관계도 벌어지기 시작했다. 먼저 입국한 전혜린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서울의 문인들과 어울렸다. 밤 늦게까지 명동에서 삶과 죽음, 예술을 논했다.“아내가 언제부턴가 문인의 죽음을 동경했어요. 처음에는 나는 사회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법학자이고 아내는 사회의 틀보다는 자유와 이상을 갈망하는 문학가라서 서로 다르겠거니 했는데 이 사람이 자꾸 ‘니체도 카프카도 일찍 죽었다’ 이러면서 빨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거예요. 수면제도 많이 갖고 다니고. 그러다 보니 저도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결국 두 사람은 1964년 합의이혼을 했다. 그리고 1년 뒤 전혜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그는 교수 임용 제한이 풀리면서 서울대 법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고교 교사와 재혼...꼬박꼬박 ‘그 사람’ 제사 챙기는 아내 그로부터 2년 뒤 김 교수는 고교 교사와 재혼을 했다. “아내는 지금도 꼬박꼬박 그 사람(전혜린)의 제사를 지내고 있어요.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도 제사에 꼭 참석하라고 그러고. 참 고마운 사람이죠.” 그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반평생 이상을 함께하고 있는 지금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함께 표했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난 그는 다시 연구에 매진했다. 체계적인 헌법학 이론과 정력적인 강의, 활발한 저술활동으로 헌법학계에서 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혀갔다. 이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새롭게 부상하는 법학자에 대해 점차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를 들이대도록 만드는 빌미가 됐다. 드디어 등장한 유신헌법의 시대. ‘학자 김철수’는 어떻게든 이 난국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12월 17일부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스러진 1979년 10월 26일까지 15년 10개월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잘살아보세~”라는 한목소리 외의 다른 의견과 생각은 용납되지 않는 시대였다. ‘지성인의 전당’인 대학에는 사복 경찰과 정보원들이 교수와 학생들을 감시하며 일거수 일투족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런 박정희 정권에도 대학과 언론의 비판이 제한적이나마 가능했다. 적어도 잡아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1962년부터 3년간 서울대 학생과장...‘중정’과 맞서“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학교에서 무급 조교로 일하다가 1962년 9월 취업 제한이 풀리면서 학생과장을 맡았어요. 요즘 같으면 학생담당 부학장쯤 되는데 그걸 만 3년 했어요. 3년 동안 중정(중앙정보부) 사람들이랑 참 많이도 싸웠었죠. 학교에 출입하던 중정 사람 중 훗날 안기부(중정의 후신 국가안전기획부)의 장까지 하고 그랬는데 이 사람들은 어느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뭘 가르치는지, 어떤 말을 하는지 낱낱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했어요. 그때 중정의 한 간부가 ‘당신에 대한 기록이 엄청 쌓여 있다. 중정에서는 당신이 학생들 선동하는 걸로 보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했었죠. 하긴 그땐 법대 학생들이 제일 열심히 데모했고, 그 학생들에게 우리 법이 잘못됐다고 가르친 것도 나였으니….” 교수들로부터 정의와 바른 법치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거리로 나갔다. 김 교수의 말대로 당시 서울대에서는 법대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조직됐다. 이때 서울대 총학생회장도 법대 소속이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실장을 지낸 정정길(71)씨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연합해 정권의 부당함에 맞섰다. 대표적인 사건이 1964년 한일기본 협정 반대 시위다. 박 대통령이 일본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정을 추진하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굴욕 외교’라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시위 세력은 들불처럼 번지면서 그해 ‘6·3 사태’가 터졌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시위 선봉 고려대 이명박-서울대 정정길 박 대통령은 6월 3일 시위대 해산을 위해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서울 시내에 4개 사단병력을 투입해 시위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이때 시위대 선봉에서 정정길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나선 인물이 이명박 고려대 상대 회장이다. 김 교수는 “당시 단과대 회장은 훗날 대통령이 되고 다른 학교 총학생회장은 그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됐는데 어찌 보면 거꾸로 된 거 같기도 하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인연이죠. 노태우 정권에서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13~15대 국회의원)도 시위단 사이에서 격문 쓰고 그랬던 시절이 있었죠”라며 웃어 보였다. 학생들을 거리로 이끈 것은 바른 정치와 민주화를 향한 학생들의 뜨거운 열망과 굳은 의지였지만, 중정에 끌려간 그들을 빼오는 것은 교수들의 몫이었다. 6·3사태로 정정길을 비롯한 수많은 서울대생들이 중정과 경찰 등에 잡혀갔다. 법대 학장이 학생들에 대한 보증서를 써 주고 김 교수 등이 중정 등을 찾아가 사정해 수감된 학생들을 빼왔다. “그땐 시위가 끊이지 않았는데 시위만 했다 하면 학생들이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해서 중앙청(현 경복궁 자리)으로 가곤 했죠. 저는 학생 관리도 제 일이었으니까 관리 차원에서 같이 중앙청으로 따라가고 하면서 치안국 보안과장과 서울 정보분실장과도 자주 마주쳤죠. 한 놈은 중학교 동기고 또 한 놈은 대학 동기였는데 그놈들이 저한테 ‘너는 학생 과장이라면서 왜 학생 선도도 못하냐’고 난리를 피우고 그러면 저는 ‘니들이나 똑바로 해라’며 목소리를 높이곤 했어요.” 정보요원이 수업을 감시하고 학생들이 중정과 경찰서 유치장 등을 드나들었어도 김 교수는 ‘그나마 괜찮았던 시절’이라고 했다. 여기에 더해 1960년대에 몇 없었던 ‘낭만적인 에피소드’도 소개했다.창경궁 통째로 빌려 이대생들과 미팅 주선 “그때라고 해서 학생들이 시위만 하고 돌 던지고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하루는 총학생회장 정정길이 우리가 종합대학이니까 종합대 축제를 하자면서 서울대생 전원과 이화여대생 전원 미팅을 제안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청춘 남녀들에게 좋은 일이겠다 싶어서 제가 창경원(현 창경궁)을 빌려볼 생각으로 창경원장을 찾아갔어요. 창경원장도 학교 선배였거든요. 창경원장도 암울한 시대에 젊은이들에게 좋은 일이라며 흔쾌히 승낙하면서 날을 잡아 ‘창경원 오후 휴원’이라고 걸어놓고 두 학교 학생들만 무료 입장시켰죠. 지금 보면 대규모 미팅 같은 것인데 순 남학생 판에 여학생은 몇 없고 그런 모습도 어찌나 재밌던지… 그래도 훗날 그 만남을 계기로 결혼한 사람이 10쌍도 넘더라고요. 우리한텐 재미고 낭만이었지만 다음 날 청소하시는 분들 애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캠퍼스의 소소한 낭만도, 학자 김철수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도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1972년 10월 박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선포한다. 박정희 정권은 김철수에게 유신헌법에 근거한 탄압에 앞서 유신헌법 제정 공신이 되기를 강요했다. “정권이 유신헌법 만들려고 여러 가지 작업을 했어요. 몇몇 교수는 해외에 보내서 자료 수집을 담당하게 하고 나를 포함한 야당 성향 교수들도 법무부 자문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그걸 하라고 강요했죠. 나는 절대로 못한다고 했더니 정부 쪽에서는 쉽게 말해 까불지 말라는 식이었고 일부는 참여를 거부하면 항명죄라며 협박까지 했죠. 그게 다 나중에 유신헌법이 각계의 자문위원들이 참여해 만든 것이라는, 정당성 부여를 위한 계략이었던 거죠.” 김 교수는 갖은 협박성 설득에도 학자의 양심을 지켰다. 하지만 이어 유신헌법 홍보에 나서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말이 제안이지 명령과 강압이었다. 정권은 중정을 통해 김 교수가 방송과 라디오에서 유신헌법 홍보를 맡도록 압박했다. 유신헌법 찬양 글·홍보방송 안하고 버텨 “하루는 학교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해서 나갔는데 식사 마치고 저를 TBC(동양방송) 앞에 내려주더군요. 방송에 출연하라는 뜻이었죠. 결국 정문으로 들어가 바로 후문으로 빠져나갔죠. 방송은 저 대신 다른 분이 출연했는데 중정에서는 방송 펑크 냈다고 난리가 났고, 그때 제대로 찍혀 저에 대한 탄압도 시작됐습니다.” 당시 김 교수는 한 언론사의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었다. 역시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글을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김 교수는 학자의 양심에 반하는 글은 쓸 수 없었다. 결국 해당 언론사의 정치부장이 찬양 글을 대신 썼다. 이후 김 교수를 대신해 유신을 찬양했던 한 인사는 국회 배지를 달았고, 또 한 인사는 장관까지 올랐다. 반면 김 교수에게는 정권의 보복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저술 활동이 금지됐다. “청와대 쪽 사람들과 법학자들과 저녁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저한테 ‘절대로 책 쓰지 말라. 책 쓰면 큰일 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 이미 제3공화국에 관한 헌법책을 다 써놨고 유신헌법이 나오면서 유신헌법의 문제점까지 다 정리한 상태였거든요. 출간을 강행했죠. 그게 1973년 1월 10일이었습니다.” 저술활동 금지당한 후 미·독 떠돌아 하지만 책은 출간 즉시 전량 몰수됐고 김 교수는 중정에 끌려갔다. 일주일간 회유와 압박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을 ‘독재적인 대통령’, 유신헌법을 ‘현대판 군주제’라고 비판한 대목에 대해서는 북한과 내통한 것 아니냐는 억지도 부렸다. 결국 김 교수는 정권이 문제 삼은 부분의 수정을 약속하고 풀려났다. 1년간 집필이 금지됐고, 연구비도 끊겼다. 김 교수는 더 이상 한국에 머무를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과 독일 등지의 방문 교수를 지원해 국외를 떠돌며 박정희의 시대가, 유신의 시대가 저물기만을 바랐다. 철권(鐵拳) 같았던 박정희의 시대가 저물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유신헌법으로 유린된 헌법을 바로잡을 논의가 시작됐다. 이때 김 교수도 헌법 개정에 참여했다. 김 교수 등이 제안한 개정안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도 만족했다. 그러나 곧 전두환이라는 걸림돌을 만나 헌법도 정치적 의도로 변질됐다. 그래도 김 교수는 1987년 헌법재판소 설치를 ‘유신 이후 헌법적 발전’으로 꼽았다. 대화는 자연스레 헌법재판소에 대한 평가로 이어졌다. 김 교수는 애정 어린 쓴소리를 늘어놨다. “요즘 헌재의 결정을 보면 재판관들이 얼마나 헌법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요. 야간 옥외집회 금지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인터넷 실명제는 위헌 결정을 내렸는데 이런 것들은 또 질서 유지의 관점으로 보면 필요하거든요. 판검사들이 재판관이 되는데 판검사 때는 헌법을 읽을 일이 없어요. 오히려 연구관들이 재판관보다 헌법을 더 잘 알아요. 재판관 임명 시 헌법에 대한 이해도를 반영할 필요가 있어요.” 최근 긴급조치 위헌에 대한 해석 권한을 놓고 헌재와 대법원이 갈등을 빚은 데 대해서는 헌재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독일은 최고 사법부가 헌법재판소입니다. 학자들은 우리나라도 헌법 만들 때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로 둬야 한다고 주장해 법원에서 결사반대했던 건데 헌법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헌법 해석권한을 가진 헌재를 대법원보다 우위에 두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유신시절 정권에 저항했던 모습에 비하면 상당히 보수적으로 변했다는 대중의 평가에 대해서는 ‘공동체 주의’를 강조했다. “30대에 진보적이지 않고 40대에 보수적이지 않으면 이상하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아무래도 젊을 때는 개인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죠. 그런데 나이가 들다 보면 아무리 똑똑하고 잘해도 개인은 모래알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찰을 2만명 증원하겠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면 국민이 질서를 지킨다면 이런 사회 비용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결국 개인주의에서 공동체 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판관 임명시 헌법 이해도 반영 필요”여든의 노학자는 헌법 연구에만 매진한 인생을 조용히 돌아봤다. 그는 학자가 대통령이 될 게 아니라면 정치권에 진출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학자가 정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학자의 소신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교수는 1980년대 여야를 막론하고 정부에서도 관료로 ‘러브콜’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저는 대학교수가 관료나 정계로 가는 걸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어요. 학자나 언론인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할 수 있지만 관료나 정치인이 되면 조직 논리가 우선하거든요. 소신을 지키려면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공직에서 그런 사람은 살아 남기 힘들죠. 정치권은 특히 더 심하고요. 어떤 정치인이 공천권을 쥐고 있는 당수와 싸울 수 있겠어요” 장시간의 인터뷰는 젊은 기자도 피로감을 느낄 정도였지만 김 교수는 여전히 생기가 넘쳤다. 헌법과 사회 질서에 대한 고민에서는 좌익 프락치로 몰려 잡혀가는 친구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소년 김철수의 고민도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인터뷰를 마치며 책장 가득한 그의 저서를 보며 “인세도 많이 받으셨겠다”는 농담 섞인 질문을 던졌다. “옛날엔 꽤 들어오더니만 요즘은 학생들이 책을 안 사긴 참 안 사네요”라며 웃어 보였다. ■김철수가 걸어온 길 1933년 경북 대구 출생(6남 1녀 중 장남)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졸업 1957년 서독 뮌헨에서 전혜린과 결혼 1961년 서독 뮌헨대 졸업 1962년 서울대 법과대학 조교수 1967년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수료 1971년 서울대 법학박사 1972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1998년) 1988년 한국공법학회 회장(~1989년) 1990년 한국헌법연구소 소장(~2001년) 1995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국제헌법학회 이사 1998년 제주 탐라대 총장(~2000년)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1998년~) ■주요저서 헌법학(1972) 현대헌법론(1979) 비교헌법론(1980) 법과 사회정의(1982) 한국헌법사(1988) 법과 정치(1995) 정치개혁과 사법개혁(1998) 헌법정치의 이상과 현실(2012)
  • “노동운동 혐오 여전…‘투쟁’ 고정 이미지 탈피하고 싶어”

    “노동운동 혐오 여전…‘투쟁’ 고정 이미지 탈피하고 싶어”

    4464일. 해가 열두 번 바뀌고 계절이 마흔 번은 바뀌었을 시간 동안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은 길 위에 있었다. 법원에 해고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고 항소와 상고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오는 31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재춘언니’에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이런 투쟁과 연대의 시간이 기록돼 있다. 이수정 감독은 대전 공장에서 기타 기능공으로 일했던 임재춘씨 등 해고노동자들의 길 위의 삶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제46회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회특별상,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비프 메세나상을 받는 등 평단의 박수를 끌어냈다. 이 감독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2012년 촬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복직 투쟁이 이어질 줄 몰랐다”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록 작업을 조급해하지 말고 계속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고 회고했다. 콜트·콜텍은 한때 세계 점유율 1위를 차지할 만큼 유명한 기타 브랜드였다. 그러나 지난 2007년 경영상 이유로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복직 투쟁에 들어간 해고노동자들의 싸움은 노사 합의가 이뤄진 2019년 4월까지 이어졌다. 영화는 노동자들의 격한 투쟁 장면보다는 이들이 밴드·연극·시·그림 등 예술 활동을 하면서 사측과 해고 제도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 감독은 “사람들이 ‘투쟁’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었다”고 이유를 밝혔다. 기타를 만들던 사람들의 복직 투쟁이어선지 많은 예술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고 한다. 뮤지션들은 ‘밴드를 만들자’고 했고 배우들은 ‘연극을 해보자’고 했다. 이 감독은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은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고립되는 걸 매우 두려워했다”며 “연극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게 투쟁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스스로 치유하는 경험 또한 했다”고 말했다. 작품 이름이 ‘재춘언니’인 이유는 임재춘 씨가 동지들과 선보인 연극에서 여자 캐릭터인 오필리아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임씨가 솔직한 마음을 써 내려간 농성 일기도 등장한다. 그를 딸들과 갈등하고 집안일을 하는 평범한 가장으로 그리기도 했다. 이 감독은 “해고노동자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내 아버지’ 같은 사람으로 관객들이 느꼈으면 했다”고 했다. 그는 앞서 희망버스와 그곳에 탄 사람들을 그린 다큐멘터리 ‘깔깔깔 희망버스’(2012)를 통해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던졌다. 2015년에는 세월호 이후 1년여간 유족들의 삶을 기록한 ‘나쁜 나라’(2015)를 선보이는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꾸준히 귀를 기울였다. 이 감독은 “자기 몫이 없고 결함이 있는 존재를 대신해 목소리를 내주는 게 예술”이라고 강조했다.
  • “또 한 번 위대해진 인민”…北, ICBM 발사성공 띄우기

    “또 한 번 위대해진 인민”…北, ICBM 발사성공 띄우기

    북한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시험발사 성공과 이에 대한 주민 반응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26일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면에 게재한 ‘위대한 인민의 긍지 하늘 땅에 차 넘친다’ 제목의 정론에서 신형 ICBM 발사 성공을 “우리도 보고 세계도 보았다”며 “우리 국가는 또 한 번 강대해졌고 우리 인민은 또 한 번 위대해졌다”고 치켜세웠다. 신형 ICBM에 대해서는 “정의로 그어진 화살표 마냥 날아올라 불가역적인 군사적 강세를 과시하며 제국주의 강적들을 눈 아래 굽어본 화성포-17형”이라고 표현하면서 “화성포-17형이 도달한 높이는 우리 조국과 인민의 위대한 존엄의 높이, 명예의 높이”라고 의미를 담았다. 그러면서 자력으로 ICBM을 개발·발사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시작부터 마감까지 조선의 힘, 조선의 지혜로 이루어진 완벽한 우리의 것이어서 그를 바라보는 인민의 긍지는 이처럼 하늘 끝에 넘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누구의 도움으로 마련된 것이라면 이리도 뜨거운 격정으로 차넘칠수 있으랴”라면서 “설사 남의 힘으로 그 어떤 지위를 얻어가진다 해도 그것은 결코 자기의 권리로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또 하나의 거대한 예속이고 그런 나라는 언제 가도 절대로 남의 키를 넘어설수 없다”고 역설했다. 신문은 별도 기사에서 “얼마나 가슴 뻐근하도록 통쾌한 우리의 승리인가”라며 “단순히 첨단과학 기술의 집합체로만 볼 수 없다. 조국과 인민의 존엄과 명예가 비낀 무적의 보검이고 강국건설을 위하여 용진하는 인민의 의지가 응축된 우리식 사회주의의 승리의 상징”이라고 주장했다. 발사 현장에 있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해서는 “위풍당당하신 모습”, “전사들과 함께 주먹을 추켜드시고 역사에 길이 남을 화폭을 남긴 총비서 동지”라고 묘사하기도 했다.이 외에도 화성-17형 탄두부에 그려 넣은 붉은 별과 발사 성공일인 3월 24일, 발사 영상에서 처음 등장한 붉은기중대에 대해서도 찬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신문은 “강력한 힘의 실체에 빛나는 붉은 별”이라며 “강권과 전횡, 횡포한 도전의 먹구름을 헤가르며 솟구쳐 오르는 정의의 불덩어리(…) 그 별에는 응축돼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발사에 성공한 3월 24일을, 화성-15형 발사일인 2017년 11월 29일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승리의 날로 기리고 청사에 새겨넣어야 한다고 했다.
  • ‘왕초보’가 이렇게 많다고?…동네 초보 다 모이는 ‘초보운전 성지’를 가다 [운전은 처음이라]

    ‘왕초보’가 이렇게 많다고?…동네 초보 다 모이는 ‘초보운전 성지’를 가다 [운전은 처음이라]

    위의 그림을 보신 적 있을까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초보운전자의 시점’으로 유명했던 그림입니다. 운전대가 어색한 초보 운전자들에게 차들이 가득한 도로로 바로 나간다는 것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해결 방법은 꾸준한 운전 연습뿐인데요. 초보자들이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 바로 ‘어디서’ 운전 연습을 해야 할지입니다. 온라인에서는 ‘운전 연습하기 좋은 곳’, ‘차 없는 도로’ 등의 검색어로 여러 장소들이 추천되고 있습니다. 그중 모두가 입을 모아 초보들의 ‘성지’라 꼽은 영종도를 지난달 20일 직접 가봤습니다. ● 동네 초보 다 모였다…너도나도 ‘초보운전’에 동질감 느껴직접 가보니 왜 이곳이 초보들의 성지라 불리는지 알겠더군요. 도로정비가 잘 돼 있고 지나다니는 차량이 없어 초보운전자들을 부담스럽게 하는 요소들이 적었습니다. 실제로 이곳을 2번 방문했는데, 갈 때마다 ‘왕초보’를 붙인 동지들이 거북이주행을 하며 운전연습 중이었습니다. 신호등도 잘 돼 있어 ‘우회전’ ‘좌회전’ ‘U턴’ 등 기본적인 주행을 손에 익힐 때까지 반복 연습하기가 좋았습니다. 모두가 ‘초보’이니 주행속도가 느리고 미숙해도 서로를 이해해주는 것도 큰 장점이었죠. 한쪽에는 주차장도 있었습니다. 전면주차, 후진주차, 평행주차 등 평소 하기 어려운 주차연습을 하려는 초보들로 주차장은 꽉 찼습니다. 제대로 주차하기 위해 차를 여러 번 뺐다 넣었다 반복해도 괜찮았습니다. 모두가 초보이니까요.●도로 주행 시험 앞두고 운전 연습하고 싶다면 그런데 ‘초보운전’을 붙인 차들 사이로 눈에 띄는 몇몇 차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차량 앞뒤로 ‘주행 연습’이라고 붙인 차들이었는데요. ‘주행 연습’을 붙인 차량 운전자의 특별한 점을 아실까요. 이들은 운전면허가 아직 없습니다. 차량 통행량이 적고 연습하기 좋은 곳이라 해도 실제 도로에서 아무나 운전연습을 할 수 있는건 아니죠. 당연히 ‘운전면허’가 있는 사람만 운전할 수 있습니다. 간혹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전 공터나 주차장에서 운전연습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도로로 분류된 곳이 아니더라도 무면허자들이 운전하는 것은 장소를 불문하고 모두 불법입니다. 도로교통법 제43조에 따르면 ‘시‧도경찰청장으로부터 운전면허를 받지 아니하거나 운전면허의 효력이 정지된 경우에는 자동차 등을 운전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죠. 면허 없이 운전하다 적발되면, 1년 이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합니다. 단, 한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운전면허 필기시험과 기능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도로주행 시험을 응시하기 전 ‘연습면허’를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몇 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2년 이상 운전경력자가 동승해야 하고 ‘주행 연습’이라 쓴 표지를 차량 전‧후방에 붙이고 운전해야 합니다. ‘주행연습’ 표지는 가로 30cm, 세로 11cm 크기로, 파란색 배경에 ‘주행연습’ 글씨는 노란색으로 해야 합니다. 또 본인이 응시하려는 종에 맞는 차량만 운전할 수 있고, 주행연습 외 사업용 등의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죠. 만약 이를 어긴다면 연습면허를 소지하더라도 무면허 운전이 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도로가 혼잡하면 초보운전자들은 금세 당황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투자해 도로주행에 대한 감각과 운전기술을 익힐 필요가 있는 거죠. 다만 아무리 운전 연습하기 좋은 한적한 장소라 할지라도, 연습장이 아닌 실제 도로라는 점을 잊지 말고 안전 운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 서방정상 모인 날 ICBM 쏜 北… 핵무기 포기로 침공 당한 우크라 영향?

    서방정상 모인 날 ICBM 쏜 北… 핵무기 포기로 침공 당한 우크라 영향?

    우크라 사태로 서방 정상 모인 날 ICBM핵보유국 지위 인정받으려는 의도로 보여미국 추가 독자제재 및 유엔 안보리 소집제재 억지력 크지않고 안보리는 중러 변수“1994년 핵무기 포기한 우크라의 러 침공김정은 핵 프로그램 개발 결심 굳혔을 듯”북한이 지난 24일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7형’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과 장기적 대결을 철저히 준비해 나갈 것이라며 일정 기간 동안 대화가 아닌 도발에 집중할 뜻을 밝혔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이어 북한을 상대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조선중앙통신은 25일 자신들의 전략무기인 “화성포-17형 시험발사가 단행되었다”며 “이번 시험발사를 통해 무기체계의 모든 정수들이 설계상 요구에 정확히 도달되였다”고 주장했다. 지난 16일 발사 실패 이후 8일만에 ICBM 발사에 성공했다는 의미다. 김 위원장은 “비할 바 없이 압도적인 군사적 공격 능력을 갖추는 것은 가장 믿음직한 전쟁 억제력, 국가 방위력을 갖추는 것으로 된다”며 “새로운 전략무기(ICBM) 출현은 전세계에 우리 전략 무력의 위력을 다시 한번 똑똑히 인식시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번에 발사한 화성-17형이 최대 정점고도인 6248.5㎞까지 상승하며 1090㎞를 날았으며 비행시간은 4052초(67분)라고 했다.특히 김 위원장이 “미국과의 장기적 대결을 철저히 준비해나갈 것”이라고 언급했다는 부분이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북한의 대화 참여를 요구하면서도 대화를 위한 유인책 제공에는 선을 그어온 조 바이든 행정부가 향후 획기적인 조치를 내놓지 않는 한 북한은 계획된 도발을 지속할 것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일각에서는 김일성 110회 생일(4월 15일)을 기점으로 북한이 재차 도발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지만 노동신문은 전날 “김일성 동지 탄생 110돌에 즈음에 7차 4월의 봄 인민예술축전이 혁명의 수도 평양에서 성대히 진행된다”고 밝혔다. 축제 주간을 진행하겠다는 의미여서 그보다는 인민군 창건일(4월 25일)을 D-데이로 삼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북한이 전날 바이든 대통령의 유럽 순방에 맞춰 ICBM을 발사한 것에 대해 현지 외교가에서는 ‘빈 집’을 노린 것 보다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와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등을 위해 수십명의 서방 정상들이 모인 상황을 노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의미다. 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란 핵합의 등으로 소외된 자국 상황을 도발로 반전시키려는 포석도 있었던 것으로 관측된다.이에 대응해 미국은 24일(현지시간) 미사일 개발을 주도하는 제2자연과학원을 포함해 북한 국적자 1명과 러시아 기관 2곳, 러시아 국적자 1명을 독자 제재 대상에 추가했다. 또 북한의 ICBM 발사와 관련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가 25일 오후 3시에 열린다. 북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안보리가 공개회의를 여는 것은 2017년 이후 처음이다. 회의 소집은 미국,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알바니아, 노르웨이 등 6개국이 제안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북 제재의 억지력이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안보리 대북 추가 제재도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수미 테리 우드로윌슨센터 한국연구센터 센터장은 이날 트위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김정은 입장에서 핵 프로그램 개발에 대한 결심을 한층 굳히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가 1994년 핵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러시아가 쉽게 침공을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김 위원장이 핵무기 고도화에 나설 이유가 커졌다는 뜻이다.
  • 비장함 대신 환한 미소로… 조국 독립의 ‘영원한 쾌락’을 선택했다[김별아의 도시 기행문 서울을 걷는 시간]

    비장함 대신 환한 미소로… 조국 독립의 ‘영원한 쾌락’을 선택했다[김별아의 도시 기행문 서울을 걷는 시간]

    한 사내가 있었다. 잔인한 20세기가 시작되던 해 유달리 덥던 여름에 세상에 났다. 아버지는 소실을 둘씩이나 거느린 한량이었다. 어머니는 사랑을 잃고 의기소침한 여인이었다. 배다른 형제까지 6남 1녀, 아무도 병약한 둘째 아들을 귀애하지 않았다. 바람과 함께 컸다. 먼지덩이처럼 구르며 자랐다. 귀 얇은 아버지가 교활한 일본인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집안은 몰락했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았다. 열다섯 살에 몰씬한 단내를 좇아 일본과자점에 취직했다. 화과자와 찹쌀모찌는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뻤지만 가난한 점원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열일곱 살의 생일은 말라리아와 함께 왔다. 열병 끝에 관절염이 생겼다. 이후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뼈마디부터 저리고 아팠다. 짧은 생애가 삐걱거렸다.(졸저 ‘백범’ 중에서)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은 후대의 일이다. 민족 혹은 국가, 어떤 공동체가 역사의 인물을 기념하는 것은 과거보다 현재의 의미 때문이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선양 사업은 잘난 자손의 가업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자손이 없거나 한미하면 같은 일을 하고도 역사의 어둠에 묻혀버리기 일쑤다. 고향의 지자체에서 자손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그조차 복불복이다.그래서 더 마음이 쓰였다. 우당 이회영 같은 명문거족 출신은 아니더라도 백범처럼 부모의 총애를 담뿍 받았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윤봉길처럼 고향의 뿌리와 월진회를 조직해 함께 활동한 동지들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복형제까지 더해 7남매 중의 둘째 아들, 용산에서도 일본 오사카에서도 정착하지 못한 떠돌이, 안팎 어디서나 누구라도 그에게 특별한 시선을 주지 않았을 게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으니 빚도 없었다. 그 고독한 바람의 사내 이봉창이 여기 있었다. ‘이봉창 집터: 독립운동가 이봉창(1901~1932)이 살던 집터이다.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명중시키지 못하였고, 그해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효창공원역 1번 출구 귀퉁이 화단에 더부살이했던 부정확한 표석은 철거됐고, 새로운 표석이 2018년 사용 승인된 용산KCC스위첸아파트 102동 3·4호 라인 현관 맞은편 화단에 자리잡았다. 이봉창 의사는 경성부 용산방 원정2정목(현 원효로2가)에서 태어나 경성부 금정(현 효창동) 118번지에서 열한 살부터 스물네 살까지 살았다.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번지수가 불명확해진 탓인지 일부 인터넷 지도에는 집터와 생가터의 표기가 혼동돼 있다. ‘이봉창 집터’ 표석이 있는 102동 앞에서 후문으로 빠져나와 경사진 언덕길을 내려오면 ‘이봉창 역사울림관’이 있다. 거리로는 멀지 않은데 아파트 벽으로 막혀 있으니 아쉽다. 효창공원역 1번 출구에서 접근하면 역사울림관을 먼저 보고 표석을 찾는 동선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역사울림관이 12시부터 13시까지 점심시간에 문을 닫는 걸 모르고 갔다가 1시간을 꼬박 밖에서 기다리게 됐다. 기념관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기에 그냥 돌아갈까 망설였다.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을 적은 패널과 사진, 기념품 몇 점을 전시한 재미없는 공간이 내가 기억하는 기념관의 전부였다. 그래도 2021년 10월에 개관했다니 뭐라도 다를까 궁금하고, 작은 뜰 앞 툇마루에 놓인 푹신한 방석이 마음에 들어서 기다려 보기로 했다. 햇살은 따스하고 사위는 고즈넉하다. 거리를 향해 놓인 벤치에는 두 사람의 실루엣으로 조각이 앉아 있는데, 버튼을 누르니 녹음이 흘러나온다.“군은 무엇인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 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묻는 사람은 백범이고 답하는 사람은 이봉창이다. 쾌락을 말하는 이봉창의 말에는 허무가 묻어 있다. 허랑하고도 방탕하게, 분진으로 가득한 누항을 떠돈 자의 지독한 피로다. 이봉창의 모습은 전형적인 운동가의 그것이 아니었다. 조직은커녕 소개인이나 소개장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청사를 찾아와 일본인들이 부르는 ‘가정부’(假政府)라는 이름으로 임시정부를 찾았다. 일본말과 조선말을 섞어 쓰는가 하면 엔카를 멋들어지게 불러서 ‘일본영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오리 바람에 게다짝을 끌고 청사에 들어오려다 중국인 문지기에게 쫓겨나기까지 했다. 모두가 오해했다. 많은 이가 의심했다. 하지만 백정선이라는 가명을 쓰던 한 사람, 백범만은 그의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비장한 태도와 결기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마지막 자리를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의지는 굳건했다. 그는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단순하고, 선명하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자유로운 이봉창만의 방식이 있었다. 백범의 매서운 눈빛을 어린아이처럼 맞받으며 반달눈으로 빙긋이 웃던 이봉창은 그렇게 한인애국단 1호 단원이 됐다.‘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고, 의심하면 일을 맡기지 않는다!’ 백범의 원칙은 명확했다. 미주와 하와이, 멕시코와 쿠바에 사는 동포들이 보내준 피 같은 돈을 일체의 망설임 없이 이봉창에게 건넸다. 돈은 정직하지만 사람에 대한 믿음은 모험이다. 그러나 그만큼 의미 있는 모험이었다. 이봉창은 난생처음 진정한 믿음을 얻었다. “엊그제 선생께서 속주머니를 뒤집어 천여 원의 거액을 제게 주셨지요. 그 돈을 받고 돌아가서는 온밤을 잠들지 못하였습니다. 눈물이 절로 흐르더이다. 누더기 단벌 장삼에 굶기를 밥 먹듯 하는 형편을 뻔히 아는데, 대관절 저를 어떻게 믿고 이같이 큰돈을 털컥 맡기십니까? 프랑스 조계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달아나 마음대로 써버려도 찾으러 오지 못하실 테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평생에 누가 저를 이토록 믿어 주었겠습니까? 이토록 두터운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기다리길 잘했다. 두 칸짜리 한옥 크기의 이봉창 역사울림관은 평면적이고 지루하다는 기존 기념관에 대한 편견을 깬 작지만 새로운 공간이었다. 바닥에 그려진 발 모양에 맞춰 의사의 흉상을 마주 보고 서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겠다’는 선서문이 들린다. 한인애국단 단원이 돼 사진을 찍는 증강현실(AR) 체험과 1932년 1월 8일 일왕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지는 현장에 함께하는 가상현실(VR) 체험(VR은 기술적 측면에서 조금 더 개선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을 할 수 있다. 이봉창 의거와 사형 집행, 해방 후 삼의사 묘역에 안장되기까지의 신문 기사들을 여닫이창을 화면 삼아 띄워 볼 수도 있다. 직접 가보지 못한다면 인터넷을 통한 3D 체험도 가능하다(https://my.matterport.com/show/?m=T9Wk7zuBySz). 오롯이 이봉창 의사를 기리는 공간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이제는 그 사내도 영원한 쾌락 속에서 편히 쉬리라. 바람 끝이 많이 따뜻해졌다. 바야흐로 봄인가 보다. 소설가
  • 우크라 의용군 ‘세계 최고 저격수’ 살해돼 주장은 거짓

    우크라 의용군 ‘세계 최고 저격수’ 살해돼 주장은 거짓

    우크라이나 의용군에 합류한 세계 최고의 저격수가 자신이 살해됐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다만 러시아군 탱크가 옆방을 포격해 죽을 뻔은 했다고 밝혔다. 22일(현지시간) 캐나다 글로벌뉴스 등에 따르면, 지난주 온라인에서 ‘왈리’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캐나다인 저격수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근처에서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후 왈리는 직접 자신의 페이스북 게시물과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난 살아 있고,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다.왈리는 저격소총을 든 채 볼풀에 누워있는 과거 사진을 공개하면서 “내가 전투에서 죽었다는 소문은 완전 거짓이다. 우리는 적의 진지를 탈환했고 패해서 달아나게 만들었다”며 “물론 동지들도 안타깝게 다치거나 죽은 이들이 있다”고 썼다. 이어 “러시아군은 우리와 접전을 두려워한다. 계속해서 민가를 폭격해 파괴하는 작전을 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언론 인터뷰에서도 “트롤링(화를 내도록 의도적으로 방해하거나 도발하는 행위)인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면 이런 공작은 신뢰를 잃을 것이 뻔한데 왜 거짓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난 충분히 잘 먹고 잘 쉬고 있으며 모든 상황이 좋다”고 덧붙였다.왈리는 2009년 아프가니스탄전, 2015년 이라크전 참전 경험이 있는 최정예 특수부대 출신으로, 특히 저격에 능하다. 왈리는 여러 전장에서 저격수로 활약하다 퇴역했다. 퇴역 후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서 새 삶을 살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 의용군에 합류해달라는 친구 부름을 받고 다시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돌이 지난 아들과 아내가 눈에 밟혔지만, 죽어 나가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게 전쟁터로 돌아간 이유였다. 우크라이나는 그동안 전 세계를 향해 적극적으로 의용군 합류를 호소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우크라이나 수호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우크라이나로 와 달라”며 외인부대 창설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이후 세계 각국에서 지원자가 줄을 이었다. 캐나다에서는 왈리를 포함한 6명의 참전용사가 우크라이나로 떠났다. 우리나라에서는 해군특수전전단(UDT/SEAL) 출신 유튜버 이근씨(예비역 대위)를 포함한 9명이 의용군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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