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동일본
    2026-02-19
    검색기록 지우기
  • 타짜
    2026-02-19
    검색기록 지우기
  • 동선
    2026-02-19
    검색기록 지우기
  • 어민
    2026-02-19
    검색기록 지우기
  • 학명
    2026-02-1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486
  • [여기는 일본] 동일본대지진 이후 인형탈로 변신한 오쿠토파스 군

    [여기는 일본] 동일본대지진 이후 인형탈로 변신한 오쿠토파스 군

    합격기원의 작은 인형에서 동일본대지진 이후로는 인형탈로 변신한 오쿠토파스 군이 지진으로 피해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 주고 있다. 24일 마이니치 신문 등 현지언론에 따르면 미야자키현(宮城県) 미나미산리쿠 마을(南三陸町)의 인기캐릭터 ‘오쿠토파스 군’이 탄생한지 올해로 10년이 되었다고 보도했다. 작은 인형으로 팔리기 시작했던 캐릭터가 만들어질 당시, 주민단체 안에서는 인형탈로 활동을 넓히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오쿠토파스 군이 어떻게 다가가기 쉬운 캐릭터로서 친숙해졌을까? 오쿠토파스 군이 태어난 것은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나기 전인 2009년. 당초 마을 관광협회는 마을 특산물인 문어를 형태로 한 작은 인형을 고안했다. 영어로 문어를 표현한 ‘Octopus'(オクトパス)와 ‘(책상 등에) 놓으면 (시험에) 합격한다’는 일본어 발음에 맞춰서, 합격기원의 부적으로서 판매됐다. 인형이 점점 팔리기 시작할 때 대지진이 발생했다. 상품의 재고도 인형을 만들기 위한 틀도, 모두 쓰나미로 흘러가버렸다. 이에 마을 안에서는 오쿠토파스 군 판매를 그만두려 했지만 봉사활동가가 우연히 알게되어 부활을 제안했다. 이후 마을 주민 중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미나미산리쿠(南三陸)부흥 문어 모임'을 만들어 2011년 7월 공방을 열어 생산을 재개했다. 이후 오쿠토파스 군은 부흥의 상징으로서 주목되게 되었다. 인형탈의 활동은 인터넷 동영상 방송으로 시작되었다. 여러 복지시설과 유치원 등에서 와달라고 의뢰가 들어오게 되었고, 직접 방문한 오쿠토파스 군은 아이들과 주민들에게 희망의 메세지를 주었다. 다가가기 쉬운 캐릭터로서 정착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합격 부적의 판매도 지속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쿠토파스 군은 대지진 이후로 수험생 뿐만 아니라 부흥을 향한 마을 주민들의 마음을 격려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 강보윤 도쿄(일본) 통신원 lucete1230@naver.com
  • 고이즈미 전 총리, 반핵 운동가로

    고이즈미 전 총리, 반핵 운동가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가 반핵 운동가로 변신해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인 아베 신조 총리와 아베 정부의 원전 재개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지난 11일 후쿠시마 원전 사태 8주기를 맞아 이뤄진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에서 “원자력은 경제적이지도, 필요하지도 않다”면서 원전을 재가동한 도쿄전력과 경제산업성 관계자들에 대해 “그들은 미쳤다”며 비판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그들은 학교에서 모두 뛰어난 성적을 거뒀고 똑똑한 사람들”이라면서 “하지만 원전이 얼마나 많은 돈이 들고 위험하다는 것인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아베 총리의 정치적 스승으로 그를 이끌어 오늘날의 위치에 오게 한 주역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일본 정치인들이 원전 산업을 찬성하는 것은 기득권층의 지지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원전 산업에 많은 돈이 투자되어 (기득권층이) 투자금을 잃는 것을 싫어한다는 설명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원전을 건설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고 많은 다른 산업과 연관되기에 (이와 관련된 이들은) 여당(자민당) 지지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또 전통적으로 노조들은 원자력 산업의 일자리에 눈독을 들이면서 과거에 대부분 원자력을 지지했던 야당(민주당 등)들을 지지했다고 설명했다. 즉 노사와 여야 둘 다 이유는 다르지만, 모두 원전 산업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2011년 사고 이후 야당인 민주당 등은 반핵으로 선회했다. 반면, 고이즈미 전 총리는 “집권 자민당은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아베 총리에게 재생에너지를 훨씬 더 강력하게 수용하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일본이 그 방향으로 갔다면 세계는 우리를 좀 더 존중하면서 다르게 바라봤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제 일본 내에서는 원전 반대 목소리를 내는 전문가들이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원전의 위험성과 지진 가능성 등을 보고한 정부나 학계 전문가들의 의견은 무시되고, 나중에 재계약이 거부되는 등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이런 이유 때문에 일본 국민에게 직접 호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것이 총리 시절 원전산업 로비에 속았던 자신의 의무라면서 “공자의 말대로 실수를 한 뒤에 스스로를 바로잡지 않는 것이 진짜 실수”라고 말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2001~2006년 재임기간 원전정책을 강하게 밀어부쳤지만 8년 전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원전 제로(0)’ 지지자가 됐다. 사고 후 54기 원자로를 모두 폐쇄했던 일본은 2012년 아베 총리가 재집권 한 뒤 다시 원전을 재개하는 등 원전사업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2003년에는 아베를 자민당 간사장에, 2005년에는 관방장관에 발탁했다. 하지만 원전을 두고 두 사람은 이제 정반대 길을 가고 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지역에서 발생한 규모 9.0의 강진과 쓰나미로 후쿠시마 원전은 냉각 시설 등이 작동하지 않으면서 폭발했다. 동일본대지진 및 쓰나미, 그리고 원전 폭발 사고 등으로 1만 5897명이 사망했고, 2533명이 실종 상태이다. 지금도 집과 고향을 잃고 가건물에서 피난민 생활을 하는 사람들만도 5만 1778명에 이른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재일동포 3세 감독이 본 그날 그후 그래도 늘 희망은 태어나고 있었다

    재일동포 3세 감독이 본 그날 그후 그래도 늘 희망은 태어나고 있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진도 9.0의 강력한 지진이 일본 동북 지역을 뒤흔들었다. 일본 역사상 최악의 지진으로 기록된 동일본 대지진 직후 발생한 피난민 수만 약 47만명. 새로운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오지만 가혹한 기억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무너진 땅위에서도 희망의 싹을 보듬는 사람들이 있다. 재일동포 3세인 윤미아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봄은 온다’(14일 개봉)는 재해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윤 감독은 2016년부터 2017년까지 10개월간 지진 피해를 입은 이와테현과 미야기현, 후쿠시마현에서 굳건하게 삶을 일구고 있는 100여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작품에서 참혹한 ‘그날’이 아닌 이재민들의 평온한 ‘지금’을 조명한 건 ‘비참하고 슬픈 동북’을 ‘희망이 태어나는 동북’으로 다시 조명하고 싶다는 바람에서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친 일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거나 화내지 않고, 그 일을 오롯이 끌어안은 채 의연하게 내일을 향해 걷고 있었다. 대부분 “잊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속상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이들은 윤 감독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을 가감없이 들려주었다. 쓰나미로 세 아이를 잃은 엔도 신이치 부부는 지진 당시 함께 지냈던 사람들을 위한 지역공동체를 운영하며 애틋한 마음을 나누고 있다. 미국에 사는 앤디 앤더슨 부부는 지진 당시 일본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던 딸 테일러를 재해로 잃었지만 미국 전역에서 모인 기부금으로 기금을 설립해 매년 ‘테일러 문고’라는 이름의 책장을 기증한다. 결혼 5일 만에 남편을 잃고 뱃속의 아이와 단둘만 남았던 오쿠다 에리카는 주산 공부에 빠져 있는 씩씩한 어린 딸을 보며 삶의 의지를 되새긴다. 윤 감독은 “우리는 누구든지 심각한 고민이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면서 “동북 지역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힘든 인생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본보기를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전했다. 윤 감독은 이 작품이 비단 “일본의 이야기, 재난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나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해마다 4월이면 안타깝게 떠나보낸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는 우리에게 그래서 이 작품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윤 감독은 “일본인들이 재해가 이미 일어난 이상 그로부터 배움을 얻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건 그것이 희생된 사람에 대한 애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분명 자신 만은 아니라는 것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그래도, 희망은 싹튼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내일’을 일구는 사람들 담은 다큐 ‘봄은 온다’

    그래도, 희망은 싹튼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내일’을 일구는 사람들 담은 다큐 ‘봄은 온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진도 9.0의 강력한 지진이 일본 동북 지역을 뒤흔들었다. 일본 역사상 최악의 지진으로 기록된 동일본 대지진 직후 발생한 피난민 수만 약 47만명. 새로운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오지만 가혹한 기억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무너진 땅위에서도 희망의 싹을 보듬는 사람들이 있다. 재일동포 3세인 윤미아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봄은 온다’(14일 개봉)는 재해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윤 감독은 2016년부터 2017년까지 10개월간 지진 피해를 입은 이와테현과 미야기현, 후쿠시마현에서 마을 재건에 힘쓰는 100여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피해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16년 제작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다큐멘터리 ‘꽁치와 카타르 오나가와의 사람들’이 완성됐을 무렵의 ‘분함’이 직접적인 원동력이 됐다. ‘꽁치와 카타르 오나가와의 사람들’은 미야기현 오나가와 마을의 모습을 2년 가까이 촬영한 작품으로, 2016년 2월에 완성해서 5월에 극장에서 개봉했다. 오나가와는 인구수 대비 희생자의 비율이 가장 높았던 곳이다. 거기서 ‘다함께 마을을 부흥시키자’라고 이를 악물고 버티는 사람들을 만났다. 2015년 12월 크리스마스에 영상이 완성되었지만 마을의 부흥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사람들의 초조함도 계속됐다. 한 편의 영화로 전달할 수 있는 것, 남길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것이 분했다. 그래서 끝내고 싶지 않았고, 더욱더 기록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작품에는 아픔과 상실을 겪었지만 서로 연대하고 위로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들을 섭외하게 된 과정은. “다큐멘터리 제작부터 완성까지 10개월이라는 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취재를 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촬영을 하는 과정이 동시에 진행됐다. 처음부터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 그 중에서 몇 사람을 선별한 것이 아니라 촬영을 하면서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선정했다. 인물을 선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지침은 ‘자신이 나서서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었다. 이 작품을 만들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건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나쁜 기억을 남기지 말자’는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비참하고 슬픈 동북’의 이미지를 ‘부흥하는 동북’, ‘희망이 태어나는 동북’으로 다시 쓰고 싶다는 나의 의지를 전달하고 그 다음은 상대방이 이야기해 주는 것에 맡겼다.” -이번 작품을 만들 때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처음에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잘 몰랐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 가보니 그분들이 먼저 나를 신경써줬고, 이야기를 들려줬다. 단지 촬영지에서 촬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과 ‘공간에 함께 있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이벤트가 있으면 돕고, 함께 봉사활동을 하면서 제작진이 (그들에게) 이질적인 존재가 되지 않도록 신경썼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는 화제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슬픈 이야기를 들을 때 울고 있는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 촬영팀이었다. ‘사람의 아픔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렇게 강하고 부드러워지는구나’라는 생각에 또다시 눈물을 짓곤 했다.” -세월호 참사로 힘든 시간을 겪은 한국인에게도 이 작품은 남다르게 다가갈 것 같다.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재해나 사고로 가족을 잃은 분들의 원통함과 억울함,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상처는 마음 속 깊이 자리잡아 없어지지 않는다. 마음 속에 있는 슬픔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슬픔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래도 괜찮아’라는 것을 사회 전체가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연자인 엔도 신이치가 ‘말로 하지는 않지만 모두 각각 무언가를 안고 살아간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라고 말했듯 이 작품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고민이나 문제를 안고 살아간다. ‘힘든 인생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본보기를 동북 지역의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일본의 이야기, 재난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과 다름이 없는, 어쩌면 나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의 이야기로 이 영화를 봐주시면 기쁠 것 같다.” -‘봄은 온다’가 스크린 데뷔작이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계획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도 사람들의 좋은 점을 조명하고 싶다. 혼란스러운 세상이지만 절망 속에서도 희망과 가능성을 찾아내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꿈이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한일 관계가 최악이라는 인식 때문에 ‘재일한국인으로서 한국과 일본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제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도 찾아가고 싶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씨줄날줄] 후쿠시마 참사 8년과 원전 안전/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후쿠시마 참사 8년과 원전 안전/박록삼 논설위원

    숨지거나 종적을 감춘 이는 2만명을 웃돌았다. 직접적인 재산 피해만 81조원이 넘었다. 간접 피해 및 복구 비용은 수백조원을 훌쩍 넘어섰고, 앞으로 몇 배가 될지 가늠조차 쉽지 않을 정도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향 바깥으로 떠도는 이들만 5만명이 넘는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이 남긴 참상이다. 일본 역사상 전례 없던 규모 9.0의 지진은 평온했던 한 세상을 완벽히 붕괴시켰다. 거대 지진과 15m 높이의 해일은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후쿠시마현 바닷가를 덮쳤고, 제1원전 4기를 모두 무너뜨렸으며, 거기에서 유출된 방사능은 태평양을 넘실거리며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문제는 이러한 불안과 공포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다. 후쿠시마원전 운영사인 도쿄전력이 30~40년 뒤를 목표로 폐로 작업을 진행 중이지만 지금 이 시간도 방사능은 계속 유출되고 있다. 고준위 방사능 오염수가 112만톤에 달한 상황에서 원전 주변 물탱크 또한 포화 상태다. 지난해부터 일본은 원자력규제위 위원장이 방사능 오염수의 해상 방출 정당성을 공공연히 말하는 등 분위기를 슬슬 떠보고 있다. 일본 측은 이미 오염수 일부가 외부 바다로 유출됐을 가능성을 시인하기도 했다. 8년이 지나며 약간 무뎌지긴 했지만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공포가 여전한 우리로서는 기함할 만한 일이다. 에너지원으로서 화석연료 대체가 절실한 에너지 전환의 시대다. 하지만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둘러싼 논란 또한 뜨겁다. 신재생에너지의 비용 및 효율성 문제, 국내 원전 기술의 해외 유출, 근본적인 국내 전력난 해소 문제 등이 그 쟁점이다. 여기에 최근 극심한 미세먼지 사태까지 겹치면서 논쟁은 더욱 격화됐다. 탈원전 정책이 예정대로 진행된다 해도 현재 건설 중인 신고리 6호기가 영구 정지하는 2083년에야 ‘원전 제로’가 된다. 논쟁의 결론을 떠나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교훈의 핵심은 최소 60년 이상의 원전 안전이다. 후쿠시마 대참사 직후 일본 민주당 정권은 ‘원전 제로’ 정책을 표방했지만, 아베 자민당 정권은 2013년 ‘신규제 기준’을 만들어 15기의 원자로 재가동을 결정했다. 일본 정부는 2030년까지 원자력 발전 비중을 현재와 같은 20~22%로 유지하기로 했다. 소를 잃고 나서야 외양간을 고치는 이는 어리석은 사람의 표본이다. 하물며 소를 잃은 뒤에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는 이야 말해 무엇하겠나. 옆집 사정을 뻔히 보면서도 소를 잃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은 또 어떠할까. 우리네 외양간을 돌아보게 되는 동일본 대지진 8주년 아침이다. youngtan@seoul.co.kr
  • 8년 지나도 아물지 않는 대지진의 상처들

    8년 지나도 아물지 않는 대지진의 상처들

    이재민 5만여명 아직도 임시숙소 생활 도호쿠 3개 현 주민 64% “심신 괴롭다”100만t 방사능 오염수 처리 ‘최고 난제’미야기, 이와테, 후쿠시마 등 일본 도호쿠 지역 3개 현을 중심으로 1만 5897명이 사망하고 2533명이 실종됐다. 이에 더해 재난에 따른 고통과 질병 및 자살 등으로 3701명이 추가로 목숨을 잃었다. 총 2만 2000여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명피해와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피해를 냈던 동일본대지진이 11일로 발생 8년을 맞았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미야기현 동남쪽 바다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9.0의 지진과 쓰나미(지진해일)는 직접 피해를 본 지역은 물론이고 ‘잃어버린 20년’으로 대표되는 쇠락의 상실감에 허덕이던 일본 사회 전체에 거대한 충격을 몰고 왔다. 최대 20m 높이의 쓰나미가 사람과 육지를 집어삼켰고, 후쿠시마 원전 핵연료가 녹아내리며 폭발이 발생, 방사성 물질이 누출됐다.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미야기현의 경우 사망 9542명, 실종 1219명, 추가 관련사망 985명 등 전체 인구 200명 중 1명꼴로 목숨을 잃었다. 5만 1778명의 이재민이 8년이 흐른 지금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정부에서 지어 준 가설주택이나 친척집 등에서 이재민 생활을 하고 있다. NHK가 8년 사이의 인구 변화를 파악한 결과 직접 재해가 닥쳤던 35개 지방자치단체 중 20곳의 인구가 10% 이상 줄어들었고 7곳에서는 20% 이상 감소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9일 이와테현을 방문해 “정부가 하나가 돼 대응하기 위해 부흥청 후속조직을 설치해 모든 힘을 기울여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복구가 더디게 진행되면서 피해주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NHK가 도호쿠 3개 현 주민 160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65.6%가 “계획대로 부흥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응답했다. 64.3%는 “대지진에 따른 심신의 영향이 남아 있다”고 답했다.후쿠시마 원전 폐로작업은 극히 지지부진하다. 30~40년 후에나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100만t에 이르는 방사능 오염수 처리는 최고의 난제다. 전력당국은 오염수를 바다에 방출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지만 일본 내에서는 물론 한국 등에서도 반발하고 있다. 방사능 오염 제거에 사용된 1400만㎥의 오염토 처리도 문제다. 이런 가운데 일본경제연구센터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수습에 적게는 35조엔(약 357조원), 많게는 81조엔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경제산업성이 2016년 발표한 추산액의 최대 4배에 가까운 규모다. 사고 직후 민주당 정권은 ‘원전 제로’ 정책을 선언했지만 2012년 집권한 자민당의 아베 정권은 원전 재가동 정책을 펴고 있다. 지난해에는 2030년까지 원자력이 전체 발전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기존대로 20~22%로 유지하기로 하면서 우려와 반발을 사고 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아침마당’ 양지원 “일본 진출, 반한감정·지진으로 귀국”

    ‘아침마당’ 양지원 “일본 진출, 반한감정·지진으로 귀국”

    ‘아침마당’ 양지원이 일본 진출 후 이야기를 털어놨다. 6일 방송된 KBS1 ‘아침마당’은 ‘도전 꿈의 무대’로 꾸며졌다. 이날 가수 양지원은 도전자로 출연, 독특한 이력으로 눈길을 끌었다. 양지원은 “4살 때 ‘트로트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9살 때는 ‘아침마당’에도 출연하고 가요제도 휩쓸었다. 13살에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고, ‘트로트계의 보아’를 꿈꾸며 일본에 진출했다”고 말했다. 양지원은 이어 “12시간씩 트레이닝을 받았다. 지하철에서도 노래하고 전단지도 열심히 돌리다 2013년 데뷔 제안을 받았다. 팬미팅도 했다”며 “그런데 일본 내에서 반한(反韓) 감정이 일어났고 동일본 대지진까지 일어났다. 예정된 스케줄이 취소됐고 일도 없어졌다. 아르바이트로 버티다 눈물을 머금고 한국에 돌아오게 됐다”고 털어놨다. 한국에 돌아 온 양지원은 가수의 꿈을 놓지 않았다. 양지원은 판소리, 경기민요를 배우며 발성 연습을 했다고 밝히며 “전역을 했는데 설 무대가 없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퇴직금을 제게 투자하셨고 어머니는 화장품 방문 판매를 하셨다. 저 때문에 집이 어려워졌고 시골로 이사하게 됐다”며 눈물을 보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러면서 양지원은 “저는 지금 고깃집에서 새벽까지 일한다. 오전엔 노래, 춤 연습을 한다. 주변에선 손가락질하지만 저를 응원해주는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노래하겠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사진=KBS1 ‘아침마당’ 방송 캡처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日정부기구 “30년내 ‘규모7’ 대지진 발생 확률 90% 이상”

    日정부기구 “30년내 ‘규모7’ 대지진 발생 확률 90% 이상”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했던 일본 도호쿠 지방 앞바다에서 앞으로 30년 내에 규모 7 수준의 커다란 지진이 발생할 확률이 90% 이상으로 예측됐다.일본 정부 산하 지진조사위원회는 지난 26일 태평양 연안의 수도권 지바현에서 북쪽 아오모리현까지 이르는 지역의 앞바다에서 향후 30년 동안 지진이 발생할 확률을 조사해 발표했다. 도호쿠 지방의 아오모리현·이와테현 앞바다에서 규모 7.0~7.5의 지진이 발생할 확률은 90% 이상으로 파악됐다. 특히 규모 7.9의 지진이 일어날 확률도 최대 30%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미야기현은 규모 7.0~7.5 지진 발생 확률 90%, 규모 7.9 지진 발생 확률 20%로 조사됐다. 후쿠시마현과 이바라키현도 앞바다에서 규모 7.0~7.5 지진이 발생할 확률이 각각 50%와 80%로 예상됐다. 규모 7의 지진이 발생하면 높이 10m 정도의 지진해일(쓰나미)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예측 조사의 대상은 2011년 미야기현 앞바다를 진원으로 발생했던 동일본대지진(규모 9) 피해지역이다. 당시 약 1만 59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진조사위원회는 아오모리에서 지바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규모 8.6~9의 지진이 발생할 확률을 30%로 내다봤다. 그러나 규모 9 이상의 초대형 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日정부 “후쿠시마 원전 오염토, 99% 재사용 가능”...주민들 반발

    日정부 “후쿠시마 원전 오염토, 99% 재사용 가능”...주민들 반발

    일본 정부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폭발한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오염 제거 과정에서 사용했던 흙를 일부 재활용하기로 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는 오염됐던 흙이라도 방사능 농도가 기준치 이하이면 문제 없다는 입장이지만, 후쿠시마현 주민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아사히신문은 26일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오염 제거에 사용됐던 오염토 중 방사능 농도가 기준치 이하인 흙을 최대 99%까지 재사용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후쿠시마현 내 공공사업에 이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8년 전 폭발한 후쿠시마 원전과 인근 지역의 오염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흙은 도쿄돔 11개 부피에 해당하는 1400만㎥에 이른다. 일본 정부는 2021년까지 1400만㎥ 전체를 중간저장시설에 반입해 거치시킨 뒤 20여년 후인 2045년 3월까지 후쿠시마현 외부에 건설될 최종 처분장으로 내보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4년 전부터 오염토의 중간저장시설 반입이 시작돼 현재까지 전체의 17%인 235만㎥가 운반됐다. 그러나 아직 최종 처분장 건설 논의는 시작도 못하고 있다. 오염토를 수용할 후쿠시마현 이외 지역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당국은 “다른 지역에서 오염토 처리장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이해가 필요하다”며 대안으로 최종 처리될 오염토의 분량을 대폭 줄이기로 했다. 하지만 후쿠시마현 주민들은 “정부가 당초 약속을 바꿔 후쿠시마현 내부에서 최종 처분을 하려는 것”, “방사능 피폭이 불안하다”라며 반발하고 있어 정부의 계획대로 방사능 기준치 이하 오염토의 재사용이 가능할지는 불투명하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김복동 할머니 마지막 한마디 “끝까지 싸워줘”

    김복동 할머니 마지막 한마디 “끝까지 싸워줘”

    위안부 피해자면서 여성인권운동 투사… ‘불꽃’ 같았던 삶“끝까지 싸워 줘. 나 대신 일본군 위안부 문제 꼭 해결해 줘.” 암 투병 끝에 지난 28일 눈을 감은 김복동(94)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불꽃’ 같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면서 여성 인권 운동을 위해 평생 몸을 불살라 싸운 그의 삶은 위안부 피해 투쟁사 그 자체였다.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 정부를 향해 진심 어린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했다. 적은 돈이라도 생기면 자신보다 세계 전쟁 피해자들을 위해 쓰이길 바랐다. ●“나 대신 위안부 문제 꼭 해결해달라” 29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 장례식장에서 윤미향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이사장은 “김복동 할머니는 평화 지킴이이자 버팀목이자 바위 같은 분이셨다”고 회고했다. 임종을 곁에서 지킨 윤 이사장은 “은퇴할 나이인 60대에 할머니는 투쟁을 시작했고 94살이 되도록 치열하게 싸워 왔다”면서 “말년에 대장암, 복막암 등을 앓으면서도 일본 정부에 항의했고, 2015년 일본과 (미봉책) 합의를 맺은 한국 정부에도 책임을 다하라고 외쳤다”고 말했다. 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마지막 순간에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힘써 달라’고 하며 떠나셨다”면서 “할머니가 평화로운 세상에서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실 수 있도록 남은 우리가 뜻을 이어받겠다”고 말했다. ●대장암 앓으면서도 日정부에 항의 김 할머니는 ‘생존자’의 상징이기도 했다. 1992년 3월 피해 사실을 공식적으로 신고한 뒤 약 30년 동안 쉼 없이 일본군 위안부와 전시 성폭력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 현장을 노송처럼 지켰다. 남녀노소, 국적 등을 가릴 것 없이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추모하는 이유다. 김 할머니의 공동장례위원장인 이나영 중앙대 교수는 페이스북에 “김 할머니는 지난번 베트남을 방문해 전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에게 조화를 바쳤다”면서 “인권 운동가 김복동 할머니의 뜻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밝혔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어요. 아무 죄 없어요. 하늘나라로 훨훨 날아가서 우리 도와주세요.”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91) 할머니는 29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동지였던 김복동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김 할머니에게 “왜 갔어. 안 간다고 했잖아”라며 애끓는 슬픔을 드러냈다. 또 다른 생존자 길원옥 할머니는 비통함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민들의 추모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서울 은평구 선정국제관광고 학생 정윤지(18)양은 교내 ‘GRG’(소녀가 소녀를 기억한다) 동아리 친구 4명과 함께 빈소를 찾았다. 정양은 “수요집회에서 김 할머니를 뵀었는데 일본의 사죄를 못 받고 눈감게 돼 마음이 편치 않으실 것 같다”면서 “앞으로 저희가 더 열심히 노력해 문제 해결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위안부 피해자 역할을 맡았던 배우 나문희씨도 빈소를 찾아 애도했다. 온라인에서도 남녀노소 가릴 것 없는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정의연 측이 29일 페이스북에 게시한 할머니의 부고 글에는 수백명이 댓글을 달며 명복을 빌었다.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의 변영주 감독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고인의 사진과 함께 “그녀는 세상에 스스로를 밝히고 전선의 앞줄에 힘겹게 섰고, 세상 모든 피해 여성의 깃발이 됐다”며 뜻을 기렸다. 정의연은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다음달 1일 발인하기로 했다. 발인일에는 오전 8시 30분 서울광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일본대사관으로 추모 행진을 한다. 이후 오전 10시 30분부터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영결식이 열린다.김 할머니의 삶은 굴곡의 연속이었지만 의지로 극복해 왔다. 1926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만 14세 때인 1940년 위안부로 연행됐다. 일본 순사가 집에 들이닥쳐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야 된다”고 했다. 안 가면 식구들을 다 추방하고 재산도 빼앗는다고 하니 도리 없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나’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의 침략경로를 따라 끌려다니며 성노예 피해를 겪었다. 하루 5~9시간씩 일본 군인을 대해야 했다. 해방 2년 뒤인 1947년 겨우 고향에 돌아왔지만 결혼과 출산은 포기했다. 할머니는 1992년 3월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하며 인권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전까지 가족조차 피해 사실을 몰랐다. 공개 증언에 나선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이가 먹어도 과거에 당한 건 잊히지가 않아. 머리에 생하게 박혀 있어 잊어버릴 수가 없어. 그래서 증언을 한 거야. 꼭 이것은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싶으니까.” 이듬해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엔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해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2000년에는 ‘일본군 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에 원고로 참여해 피해 실상을 문서로 남겼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는 유엔인권이사회와 미국, 영국, 독일, 노르웨이, 일본 등으로 해외 캠페인을 다니며 전시 성폭력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국경없는기자회는 2015년 김 할머니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세계 100인의 영웅’에 선정했다. 할머니는 국내든 해외든 재난 피해자가 있다면 공감과 연대의 손을 내밀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당시 피해자들을 돕는 모금활동에 참여했고, 2012년 3월에는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나비기금’을 설립했다. 이후에도 재일 조선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포항 지진 피해자를 돕는 일에 아낌없이 후원했다. 할머니는 생전에 “피해자들의 희망이 돼 달라”며 ‘김복동평화상’을 만든 뒤 5000만원을 기부하고, 재일 조선학교에 5000만원을 지원했다. 그렇게 기부한 돈은 모두 2억원. 세상을 등진 할머니 통장의 잔고는 160만원뿐이었다. 2012년 나비기금 설립 기자회견에서 할머니가 보낸 메시지는 원망도 분노도 아닌 사죄와 연대였다. “나도 위안부 피해자이고 아직도 싸움하고 있지만 지금 세계 각지의 성폭력 피해 여성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너무나 잘 알아요. 그래서 돕고 싶어요. 후손과 어린애들은 꼭 전쟁 없는 사회에서 살게 하고 싶습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김복동 할머니 별세]“60대에 시작한 투쟁…삶 자체가 위안부 고발의 역사”

    [김복동 할머니 별세]“60대에 시작한 투쟁…삶 자체가 위안부 고발의 역사”

    윤미향 이사장, “마지막 순간에도 ‘위안부 해결’ 유언 남겨”김 할머니, 동일본 대지진 땐 일본인 피해자 도와“김복동 할머니는 버팀목이자 바위 같은 분이셨습니다. 가시는 길까지 위안부 문제 해결을 부르짖으셨고 전 세계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저희에게 ‘끝까지 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머니 없는 현장이 어떤 곳일지 아직 상상도 안 가요.”(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암 투병 끝에 28일 눈을 감은 김복동(94)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면서 인권 운동가였다. 그의 삶은 위안부 피해자의 투쟁사 그 자체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 정부를 향해 진심 어린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했고, 돈 한 푼도 자신보다 또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쓰이길 바랐다. 29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차려진 장례식장에서 윤 이사장은 “김 할머니는 기력이 쇠해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마지막 순간에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힘 써달라’고 하며 떠나셨다”면서 “평화로운 세상에서 할머니가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실 수 있도록 남은 우리들이 뜻을 이어받겠다”고 밝혔다. 김 할머니의 삶은 굴곡의 연속이었지만, 의지로 딛고 일어섰다. 할머니는 1925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열다섯 되던 해인 1940년 위안부로 연행됐고,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일본군의 침략 경로를 따라 끌려다니며 성노예 피해를 겪었다. 광복 후인 1948년 8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결혼과 출산도 포기하고 1992년 3월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하며 인권 운동에 뛰어들었다. 할머니는 이듬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엔(UN)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하면서 국제사회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2000년에는 일본군성노예전법여성국제법정에 원고로 참여해 피해 실상을 문서로 증언하기도 했다. 김 할머니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른 재난 피해자들에게도 공감과 연대의 몸짓을 보였다. 2011년 3월 일본 동북부 대지진 당시 피해자들을 돕는 모금활동에 참여했고, 2012년 3월에는 정의기억연대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함께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나비기금’을 설립했다.2012년부터 2016년까지는 유엔인권이사회와 미국, 영국, 독일, 노르웨이, 일본 등 각국으로 해외 캠페인을 다니며 전시 성폭력 반대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2015년 7월 미국 워싱턴 방문 당시 “죽을래야 억울해서 죽지 못한다”면서 “아베 일본 총리는 법적으로 사죄하고 우리 명예를 회복시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5년 5월 국경없는기자회는 김 할머니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세계 100인의 영웅’에 선정했다. 전날 할머니의 임종을 곁에서 지킨 윤 이사장은 이날 빈소에서 기자들과 만나 “보통 사람들이 은퇴하는 나이인 60대에 할머니는 투쟁을 시작하고 94살이 되도록 치열하게 싸워 왔다”면서 “말년에 대장암, 복막암 등을 앓으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와중에도 일본 정부에 항의하고 지난 2015년 한일 합의를 맺은 한국 정부에도 책임을 다하라고 외쳤다”고 말했다. 이어 “할머니는 당신 통장에는 마지막에 160만원만 남겨두면서 총 2억원이 넘는 돈을 포항 지진 피해자, 콩고와 우간다 성폭력 피해자,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위해 써달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평화헌법 개정 반대’ 日석학 우메하라 다케시 별세

    ‘평화헌법 개정 반대’ 日석학 우메하라 다케시 별세

    일본의 문화학자이자 철학자로 반전·평화운동에 헌신해 온 우메하라 다케시 전 교토시립예술대 교수가 지난 12일 별세했다. 93세. 14일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고인은 새로운 가설을 통해 일본 고대사의 새 지평을 열었으며 일본문화와 현대문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관련해 역사, 철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를 남겼다. 센다이 출신으로 교토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소장과 리쓰메이칸대 교수, 교토시립예술대 학장 등을 지냈다. 젊은 시절 징병돼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자위대의 해외 파병과 ‘평화헌법’ 조항인 헌법 9조 개정에 반대해 왔다.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등 다른 석학 8명과 함께 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한 모임 ‘9조의 회’를 만들기도 했다. 숲의 소중함을 호소하며 현대문명의 환경파괴에 대해서도 경고해 왔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에 의한 후쿠시마 원전폭발 사고를 ‘문명의 재난’이라고 비판하는 한편 자연과 과학이 공존하는 새로운 ‘인류철학’의 탐구를 주창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박미경의 사진 산문] ‘온빛’이라는 빛

    [박미경의 사진 산문] ‘온빛’이라는 빛

    노모(老母). 1920년 북녘 외딴 작은 섬에서 태어나 뭍으로 왔으나, 이제 늙고 병들어 홀로 방안에 섬처럼 놓인 어머니. 딸은 구순을 넘긴 이 어머니의 남은 날들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보살피면서 자신이 하지 않으면 누구도 기록하지 않을 ‘절박한 다큐멘터리’가 바로 가까이에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사진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사진이 좋아서 늘 일상의 중심에 두고 살아온 그녀였다. 노모를 찍는 동안 어머니와의 정서적 공감이 깊어 갔고, 그렇게 쌓인 사진들은 사진상의 심사를 맡은 여러 사진가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온빛사진상’ 최초 수상작인 한설희의 사진 ‘노모’(老母) 이야기다.69세 여성 아마추어 사진가의 작업을 초대 수상작으로 선정함으로써 기존 상의 틀에 환기창을 낸 ‘온빛사진상’은 결성 자체도 전에 없던 신선함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십시일반 자력으로 힘을 모아 제정한 ‘사진가가 주는 사진상’이었기 때문이었다. 2011년 ‘노모’를 시작으로, ‘대중적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의미 있는 스토리를 발굴, 사진으로 기록하여 사회적 소통과 공감을 이루고자 한다’는 취지의 온빛상에 해마다 수많은 응모작이 줄을 이었다. 매해 연말연시면 수상작을 발표하고 전시로 선보이는데, 어느새 사진계의 행사를 넘어 일반인들조차 기다리는 소식과 전시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2018년에는 어떤 사진이 온빛상의 수상작이 됐을까? 일터에서, 학교에서, 동네 골목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흰 종이를 들고 선 사람들. 올해 온빛사진상 최우수상에 선정된 최우영의 사진 속 풍경이다. ‘이름은 그 사람이 지속적이고 파괴될 수 없는 실체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리자면 이 사진들은 ‘이름을 지킴으로써 스스로를 지켜 가는 사람들’에 관한 기록인 셈이다. 사진가 최우영은 일본에 계신다고만 들었던 친할아버지가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고국을 방문했을 때, 조부의 실체뿐만 아니라 재일교포들의 실상과도 처음 대면했다. 집안이 연좌제로 고통받아 온 사실도, 일본 법률상 무국적으로 간주되는 조선적(朝鮮籍)을 가진 재일교포들의 현실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어려움에 처한 조선학교의 상황도 알게 됐다. 카메라를 들고 재일교포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고, 올해로 광복 73주년이 됐지만, 지금까지도 치유되지 않은 식민 지배의 상흔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온빛이 그런 최우영의 사진을 선정해 ‘수많은 재일교포가 자신의 국적과 한글 이름을 잊지 않고 당당히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싶었다’는 작가의 마음과 작업에 힘을 실어 준 것이다. 이번 온빛사진상에 총 79명이 지원했고, 최우영 등 다섯 명의 수상자가 선정됐다. 신설된 후지 뉴 플랫폼상을 받은 우해미의 ‘분홍 옷 입은 엄마’를 비롯해 권학봉의 ‘로힝야 난민캠프, 1년 후’, 박창환의 ‘동물원’, 신락선의 ‘프레임프레임588’까지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의 한계를 넘어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형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온빛의 확장성이 드러나 보이는 수상작들이다. ‘따듯한 빛’이라는 이름 뜻대로, 연말연시를 온기로 밝히는 온빛상. 1월 전시와 더불어 2019년에는 또 어떤 사진들을 만나게 될지 새해가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다.
  • 아키히토 일왕 “재임 중 전쟁 없어서 안도”

    아키히토 일왕 “재임 중 전쟁 없어서 안도”

    내년 4월 말 물러나는 아키히토 일본 국왕이 자신의 85세 생일을 맞아 가진 재위 마지막 기자회견을 통해 ‘전쟁이 없는 시대’가 지속됐던 점에 가장 안도한다고 말했다.23일 퇴위 전 마지막 생일을 맞은 아키히토 일왕은 앞서 20일 도쿄 왕궁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헤이세이(아키히토 일왕 시대의 연호)가 전쟁이 없는 시대로 끝나게 된 것에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기자회견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궁내청은 밝혔다. 아키히토 일왕은 “(아들에게 물려주는) 양위의 날을 맞을 때까지 계속해서 (국가의) 상징으로서 일상업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5월 1일에는 현 나루히토 왕세자가 새 일왕으로 즉위한다. 아키히토 일왕은 “전후(일본의 2차대전 패전 이후) 일본의 평화와 번영은 전쟁에서의 많은 희생과 국민의 노력으로 구축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전후에 태어난 세대에도 이를 올바르게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키나와, 사할린, 팔라우, 필리핀 등을 방문해 전쟁 희생자들을 추도한 것을 잊을 수 없다”며 “(일왕으로서) 여정을 끝내려는 지금 나를 지지해 준 많은 국민에게 충심으로 감사를 드린다”는 소감을 전했다. 그는 재위 중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등의 막대한 인명 피해에 대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통함을 느낀다”고도 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2차대전 패전 당시 일왕이었던 히로히토(1901~1989) 일왕의 아들로, 부친이 사망한 1989년 1월 즉위했다.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로운 일본을 강조해 온 아키히토 일왕은 아베 신조 총리가 추진하고 있는 헌법 개정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에 대해 여러 차례 반성의 뜻을 밝혀 왔다. 올 8월 15일 패전일에도 전쟁 희생자 추도식에서 “과거를 돌이켜 보며 깊은 반성을 함과 동시에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85세 생일 아키히토 일왕 “역사, 후세에 정확히 가르쳐야”

    85세 생일 아키히토 일왕 “역사, 후세에 정확히 가르쳐야”

    재임 마지막 생일 연설…새해 4월 말 ‘생전’ 퇴위 “재임기간 전쟁 없어 안도”…야스쿠니 신사 찾지 않아‘극우 행보’ 아베 총리와 과거사·야스쿠니 행보 대비“2차대전서 많은 목숨 사라져”…이 대목서 음성 떨려12살 때 일본 패전 지켜봐…평민 여성과 결혼도 화제“개인적으로 한국과 연을 느껴”…‘한국인 피’ 인정내년 4월 말 ‘생전’ 퇴위하는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자신의 재임 기간 “전쟁이 없어서 안도한다”고 말했다고 왕실 업무를 관장하는 궁내청이 23일 밝혔다. 이날 85세 생일을 맞은 그는 지난 20일 도쿄 왕궁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헤이세이(平成·아키히토 일왕 취임 해부터 시작된 연호로 올해가 30년)가 전쟁이 없는 시대로 끝나게 된 것에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키히토 일왕의 생일 연설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궁내청은 밝혔다. 그는 일본 우익들의 압력에도 야스쿠니 신사를 찾지 않았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는 과거사 및 공식 행보에 차이를 보였다. 아키히토 일왕은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목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라졌다는 것, 일본이 전후에 건설한 평화와 번영이 이 수많은 희생과 일본 국민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위에 건설된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라고 말했다. 사전에 녹음된 연설에서 수많은 목숨이 사라졌다는 부분에선 그의 음성이 떨렸다고 AFP가 전했다. 또 “이 역사를 정확히 전후에 태어난 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했다.아키히토 일왕은 취임 이후 자신이 헌법에 따라 정치적 권한이 없는 ‘상징 천황(天皇)’의 바람직한 자세를 추구해 왔다며 “양위의 날을 맞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런) 자세를 추구하면서 일상 업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키히토 일왕에 이어 현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내년 5월 1일 새 일왕으로 즉위한다. 아키히토 일왕은 오키나와(沖繩)나 사할린, 팔라우, 필리핀 등을 방문해 전쟁 희생자들을 추도한 것을 “잊을 수 없다”며 “일왕으로서의 여정을 끝내려는 지금, ‘상징 천황’으로서 나를 지지해 준 많은 국민에 충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아키히토 일왕은 2차대전 당시 일왕으로 전쟁 가해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가 원수’ 히로히토(裕仁·1901~1989)의 아들이다. 그가 11세 때 일본의 패전을 지켜봤다. 선대 왕들과 달리 평민인 쇼다 미치코와 결혼한 그는 히로히토가 사망한 1989년 1월 왕위에 올랐다.아키히토 일왕은 ‘전쟁 책임’이라는 부친의 굴레를 의식한 듯 취임 이후 일본 국민과 고락을 같이하는 모습을 보이는 데 주력했다. 헌법과 법률에 규정되지 않은 상징으로의 역할을 국민에게 다가서는 것으로 해법을 찾은 것이다. 그는 재임 중 국내외 전쟁 희생자 위령이나 재해 지역 방문 등의 일정에 신경을 쏟았다. 아키히토 일왕은 재임 중 발생한 동일본대지진이나 한신(阪神)대지진 등의 막대한 인명 피해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통함을 느낀다”면서 자원봉사 등을 통해 서로 돕는 모습에 “항상 감명받았다”고 말했다. 현재 집권 자민당과 아베 총리가 극우 일변도의 행보를 보이며 침략전쟁이나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는 것과 달리 그는 전쟁에 대한 반성의 뜻도 밝혔다.일본의 패전일인 지난 8월 15일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부도칸(武道館)에서 열린 전쟁 희생자 추도식에서는 “과거를 돌이켜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앞으로 전쟁의 참화가 재차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2015년 이후 4년 연속 반성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자신의 몸에 한국의 피가 흐른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는 2001년 생일 기자회견에서 “내 개인으로서는 간무(桓武) 천황(일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쓰여 있는 데 대해 한국과의 연(緣)을 느끼고 있다”고 말해 한국인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일본산 돌돔, 쓰나미 타고 8000㎞ 떨어진 미국서 발견

    일본산 돌돔, 쓰나미 타고 8000㎞ 떨어진 미국서 발견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에 서식하는 바닷물고기 돌돔이 수천㎞ 떨어진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만의 바다에서 발견돼 화제에 올랐다. 미국 CNN은 지난 13일(현지시간) 흑백 줄무늬 물고기인 돌돔이 몬터레이 만 인근에서 다이버들에게 수차례 목격됐다고 보도했다. 돌돔은 우리나라와 일본 등지에서는 최고의 횟감으로 꼽히지만 미국의 바다에서는 처음보는 외래종이다. 현지 다이버인 니콜라스 타는 "돌돔은 독특한 무늬 때문에 토종 물고기와 오인될 가능성이 없다"면서 "토종 물고기는 주변환경에 어울리지만 돌돔은 한눈에 봐도 눈에 확 띈다"고 밝혔다.그렇다면 어떻게 돌돔은 무려 8000㎞나 떨어진 태평양 반대편에서 살고있을까? 이에대한 의문의 해답은 놀랍게도 지난 2011년 일본을 강타한 대지진 때문이다. 당시 동일본을 강타한 진도 9.0에 달하는 대지진으로 거대한 쓰나미가 발생했고, 여러 잔해에 휩쓸린 돌돔들이 태평양을 건너 흘러흘러 '신대륙'까지 오게된 것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당시 발생한 거대한 쓰나미로 무려 150만 톤에 달하는 잔해와 쓰레기가 바다로 흘러갔다. 실제로 동일본 대지진 발생 2년 후인 지난 2013년 4월 워싱턴 주 롱비치 해변가에서 쓰나미에 의해 미국까지 밀려온 작은 일본 국적의 배가 발견됐다. 놀라운 사실은 이 배 안에서 살아있는 돌돔이 함께 발견된 것. 캘리포니아 모스 랜딩 해양연구소 조나단 겔러 박사는 "쓰나미 발생 후 수년 동안 보트 등 여러 잔해들이 북미 서쪽 해안으로 흘러왔다"면서 "이 과정에서 일본 해안에 사는 총 289종의 해양생물이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몬터레이 만의 수온이 일본보다 5°C 정도 낮지만 돌돔이 사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면서 "다만 새끼를 낳기 힘들어 이곳 생태계에 심각한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돌돔의 대모험…日 쓰나미 타고 태평양 건너 美서 발견

    돌돔의 대모험…日 쓰나미 타고 태평양 건너 美서 발견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횟감으로 각광받는 바닷물고기 돌돔이 태평양 건너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몬터레이 만의 차갑고 탁한 물 속에서 발견됐다. 13일(현지시간) 미국 CNN은 독특한 흑백 줄무늬 물고기인 돌돔이 몬터레이 만 인근에서 다이버들에게 수차례 목격됐다고 보도했다. 돌돔의 발견 소식이 현지에서 관심을 끄는 이유는 원산지가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이기 때문이다. 현지 다이버인 니콜라스 타는 "돌돔이 이 지역에 사는 다른 물고기와 오인될 가능성은 없다"면서 "토종 물고기는 위장을 하고 주변환경에 어울리지만 돌돔은 한눈에 봐도 눈에 확 띈다"고 밝혔다. 흥미로운 사실은 돌돔이 어떻게 태평양을 가로질러 8000㎞나 떨어진 바다에서 발견됐느냐는 점이다. 이에대해 현지 전문가들이 꼽은 원인은 바로 지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발생한 쓰나미다. 당시 발생한 거대 쓰나미에 무려 150만 톤에 달하는 잔해와 쓰레기가 바다로 흘러갔다. 이중 돌돔의 경우 보트 등의 잔해에 '무임승차'해 해류를 타고 흘러흘러 태평양을 건넜다는 것. 캘리포니아 모스 랜딩 해양연구소 조나단 겔러 박사는 "쓰나미 발생 후 몇년 동안 보트, 부두 등 여러 잔해들이 북미 서쪽 해안으로 흘러왔다"면서 "이 과정에서 일본 해안에 사는 총 289종의 해양생물이 하와이와 북미 해안가에서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보도에 따르면 미 서부 해안에서 돌돔은 지난 2015년 이전까지 몇차례 목격된 바 있으나 그후 존재가 확인되지 않다가 지난달 다시 카메라에 포착됐다. 같은 연구소 릭 스타 박사는 "영상 속 돌돔은 건강 상태가 매우 좋은 것으로 보인다"면서 "몬터레이 만의 수온이 일본보다 5°C 정도 낮지만 사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결과적으로 외래종의 침입에 해당되지만 이곳 생태계에 심각한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다른 언어…닮은 우리

    다른 언어…닮은 우리

    각자 모국어로 전하는 대사, 서로 집중하게 해 日만화 ‘세일러문’·홍콩 액션·韓 박찬욱 영화 등 동아시아권 젊은이들의 시대적 관심사 통해 우산혁명·촛불집회 등 정치·사회적 경험도 닮아 “영어 안 써도 소통 가능”…내년 3개국서 초연지난 7일 서울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 한국·홍콩·일본 3개 국적의 배우 6명이 무대에 올랐다. 배우들은 각자의 모국어로 대사를 말하고, 무대 뒤로 통역된 한국어·광둥어·일본어 대사가 보인다. 일부러 객석에 대사의 의미를 늦게 전달하려는 듯, 때로는 통역이 생략된 채 광둥어와 일본어 대사가 오가기도 한다. 이날 공연은 3국의 젊은 연극인들이 공동제작한 연극 ‘나와 세일러문의 지하철 여행’의 쇼케이스 무대였다. 2000년대 초부터 아시아권 연극인들의 협업 프로젝트는 있었다. 하지만 이들 작품에서 사용된 언어는 영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와 세일러문의 지하철 여행’은 각자의 모국어를 있는 그대로 무대에 올리자는 역발상에서 시작됐다. 아시아인들끼리 굳이 영어를 쓰지 말고 작품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다. 유럽에서 서로 다른 국적의 연극인들이 함께 작품을 만들 때 각자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도 이 같은 기획의 배경이 됐다. 과거 국제 연극제 등에서 안면이 있었던 한국 연출가 이경성과 홍콩 연출가 겸 배우 윙 칭 얀 버디, 일본 극작가 겸 연출가 사토코 이치하라가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손을 잡았다.“소리가 먼저 도착하고 의미는 나중에 도착한다.” 극이 시작되고 처음 나오는 이 대사는 서로의 모국어로 전하는 대사가 어떻게 객석에 전달돼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는지를 생각해보라는 화두와도 같다. 이 연출은 “만국공통어이기는 하지만 아시아 사람들끼리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의사소통을 하면서 오히려 부대끼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이번 작품을 준비하며 상대 배우의 모국어를 들으면서 그 사람에게 집중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 소통하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서로 다른 국적이지만, 적어도 동아시아 국가이기에 겪었던 비슷한 경험들은 적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980년대생으로 동시대를 살아온 젊은이기도 한 이들은 어린 시절 일본 만화 ‘세일러문’이나 ‘슬램덩크’를 즐겨 봤고, 홍콩 액션영화나 한국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보고 배우의 꿈을 키우기도 했음을 알게 된다. 결과적으로 3국 연극인들은 3개의 다른 언어를 얘기할수록 오히려 서로의 공통점을 확인하게 된다. 이들이 겪은 정치·사회적 경험 또한 다르면서도 닮았다. 홍콩 행정장관 선거 직선제를 요구하는 2014년 홍콩 우산혁명은 한국의 2016년 광화문 촛불집회를, 동일본 대지진으로 친구를 잃었다는 일본 젊은이의 사연은 세월호 참사로 친구와 가족을 잃은 우리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의 후반부는 홍콩 우산혁명을 배우는 일종의 워크숍과도 같다. 우리가 보는 국제뉴스가 대부분 미국과 중국에 집중되다 보니 이번 작품을 본 관객들은 우산혁명과 같은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 연출은 “객석에 홍콩, 중국 관객들도 있었는데 홍콩 관객은 우산혁명에 대한 얘기를 불편해하기도 했다”며 “입장을 바꿔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에게 세월호에 대한 얘기를 직접적으로 했을 때 느끼는 감정과도 같을 것”이라고 했다. 이번 작품에 참여한 한국 극단 ‘크리에이티브 VaQi’와 일본 극단 ‘Q’, 홍콩의 ‘아토크라이트’는 작품 수정을 거쳐 내년 3국에서 공식 초연 무대를 선보일 계획이다. 일본과 홍콩에서 공연될 때는 각국의 상황에 맞게 수정된 버전을 올리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치하라 연출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일본인끼리도 함께 혁신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인 만큼 3국 연극인들이 정말 어려운 일에 도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정현, 이벤트 대회서 니시코리에 승리

    정현, 이벤트 대회서 니시코리에 승리

    한국 테니스의 간판 정현(22·세계랭킹 25위)이 이벤트 대회에서 일본의 니시코리 게이(28·9위)를 눌렀다. 정현은 25일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드림 테니스 나고야 2018 이벤트 단식 경기에서 니시코리를 6-5로 꺾었다. 정현은 니시코리와 지난해 6월 프랑스오픈 3회전에서 한 차례 붙어 세트 스코어 2-3로 패했었는데 이번에는 승리했다. 드림 테니스 이벤트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를 돕기 위해 매년 개최되고 있다. 그동안 도쿄에서 열렸지만 올해는 경기장 문제로 나고야로 옮겨서 진행됐다. 이번 대회는 모든 경기가 한 세트로만 진행되고 5-5 동점일 때는 타이브레이크로 승부를 가른다. 발바닥 물집 부상으로 일찌감치 시즌을 마친 정현은 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정현과 니시코리 이외에도 오사카 나오미(21·일본), 마이클 창(46·미국) 등도 출전했다. 정현은 경기 초반 1-3으로 끌려갔지만 집중력을 발휘해 4-4까지 따라 붙었다. 타이브레이크까지 가는 승부끝에 정현은 결국 승리를 쟁취했다. 니시코리는 패했지만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정현을 축하해줬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2020 도쿄올림픽 성화는 우리 지역에서”…고민 깊어가는 일본 지자체들

    “2020 도쿄올림픽 성화는 우리 지역에서”…고민 깊어가는 일본 지자체들

    2020년 도쿄올림픽·패럴림픽이 500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성화봉송을 놓고 때아닌 고민에 빠졌다고 아사히신문이 지난 11일 보도했다. 전국 각지를 순회해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으로 향하는 성화봉송의 경로를 짜는 과정에서 “우리 지역을 반드시 포함시켜 달라”는 지역사회의 요청이 빗발치고 있기 때문이다.아사히에 따르면 2020년 도쿄올림픽·패럴림픽조직위원회는 성화봉송 경로를 올 연말까지 확정하기로 하고, 지난 7월 전국 47개 도·도·부·현(광역자치단체)에 지역별로 세부경로를 정해 제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많은 광역단체들은 실제 경로를 짜는 과정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관내 시·정·촌(기초자치단체)마다 성화봉송 루트 유치를 지역 활성화의 기회로 보고 반드시 포함시켜달라고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역단체들은 최대한 많은 기초단체들을 거쳐갈 수 있도록 경로를 짠다는 방침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다. 특히 1964년 도쿄올핌픽 때에 비해 성화봉송 거리가 대폭 줄어들면서 지역별 공평한 배분이 더욱 어려워졌다. 56년 전 대회 때에는 일본 전역 6755㎞를 함께 뛰는 동반주자들을 포함, 10만여명이 약 5분에 걸쳐 1㎞씩 달렸다. 반면 2020년 대회는 3월 26일부터 121일 동안 1만명 정도가 약 200m씩 달리는 것으로 돼 있다. 총연장이 2000㎞ 정도로 과거 대회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 특히 개최지인 도쿄도와 동일본대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 등 3개 현을 제외한 다른 광역자치단체에 대회조직위가 배정한 날짜는 2일씩 밖에 안된다. 대부분 광역단체의 실무 담당자들은 “모든 시정촌을 전부 달리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가장 긴 15일이 배정된 도쿄도는 도서 지역을 포함해 62개 지역 전체를 조금씩이라도 돌게 할 방침이지만, 실무 담당자는 “어느 지역도 불만이 없도록 하기 위해 과연 어떻게 경로를 짜야 할 것인지 너무나도 고민”이라고 아사히에 말했다. 글·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