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에] 헤링 신부님/이동익 신부 가톨릭대 교수
어느덧 계절은 한 해의 복판을 지나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여 푸름은 날로 더해가고 새들도 저마다 다르게 노래 부른다. 해마다 이즈음이 되면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마음도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아름다운 5월,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많은 사랑의 날들을 지내면서 사랑의 기억과 함께 나의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바쁜 일상이지만 내게도 아름다운 사랑의 순간들이 떠오른다. 지금이라도 한 번 꼭 뵙고 싶은 분들도 있지만 긴 세월을 핑계대면서 그냥 추억 속에 묻어두고 있으니,5월에는 이 때문에 늘 부끄러운 마음이 떠나질 않는다.
오늘은 로마 유학 시절 은사이신 헤링 신부님을 기억하고 싶다.1949년부터 40년 동안 로마의 성 알폰소 대학원에서 가르치셨던 헤링 신부님과의 만남은 교수와 학생의 평범한 관계에서 이루어졌지만 내 일생을 통틀어 매우 운이 좋은 일 중의 하나였다. 그 만남은 어설픈 유학생이던 나에게 작은 충격이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부터 그분의 명성을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내가 직접 만나본 그분은 언제나 포근한 마음씨의 할아버지셨다.
윤리신학계의 세계적인 거장이셨지만 그분의 강의에서는 어떤 박식함도, 예리함도 발견할 수 없었고, 다만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하게 여겨질 정도의 복음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세계적인 학자의 강의치고는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신부님의 마지막 은퇴 강연을 들으면서 신부님의 강의는 물론, 신부님의 삶 전체를 아주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마지막 강연은 신부님께서 한결같이 강조하셨던 윤리신학이라는 학문에서 가져야 할 복음주의적 시각에 관한 내용이었고, 신부님의 다음 말씀은 내게 매우 생생한 감명을 주었다.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두 가지 형태의 매우 큰 힘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 지구 전체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도 있는 핵무기로 무장된 물리적 힘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와는 반대로 이 세상의 모든 증오와 반목, 전쟁과 미움을 사랑과 우정으로 한꺼번에 변화시킬 수 있는 복음의 힘입니다. 지금은 핵무기에 의한 물리적 힘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복음의 힘이 이 세상을 이기고 모든 것을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이 변화가 바로 여러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일생동안 헤링 신부님께서는 강단에서, 그리고 수많은 저서들을 통해서 아주 단순하게 ‘그리스도를 닮음’을 가르치셨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아 복음적 사랑을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희망을 심고, 나아가 어두움을 밝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용기와 확신을 주신 것이다.
그렇다. 헤링 신부님께서는 ‘박식함’이나 ‘예리함’도 ‘단순함’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참된 지혜를 가르치셨다. 복음의 단순함을 몸소 학생들에게 보여주셨고, 또 가르치셨던 신부님의 단순하고 포근한 모습에 참된 위대함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학기말에 신부님 과목의 시험을 치르러 갔던 때의 일이다. 시험은 모두 구술시험이었고, 낯선 타국에서의 첫 학기 시험에 잔뜩 긴장하고 앉아 있던 나에게 신부님께서는 “어제 차붐이 한 골 넣었는데, 그 축구 경기를 보셨나요?”하고 물으시는 게 아닌가. 시험 시간의 반은 축구 이야기로 지나갔고, 나머지 시간도 거의 신부님께서 혼자 말씀하셨으니 시험 시간 동안 내가 한 것은 별로 없었다. 시험 시간이 끝나고 방을 나서는 나에게 신부님께서는 “아주 잘했습니다. 다음 시험도 편안하게 잘 준비하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의 단순함을 몸소 내게 보여주신 신부님, 언제나 포근한 마음씨의 할아버지, 예상했던 성적보다 좋은 성적을 받아든 나는 아마 그때부터 헤링 신부님을 존경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동익 신부 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