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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우주굴기, 시진핑 달탐사 창어4호 참가자 격려

    中 우주굴기, 시진핑 달탐사 창어4호 참가자 격려

    “위대한 사업은 모두 꿈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실천이 말해주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인류 최초로 달 뒤편에 착륙한 창어(嫦娥) 4호 프로젝트 참여자들을 만나 우주 탐사에는 끝이 없다며 중국의 ‘우주굴기’를 강조했다.21일 신화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전날 오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창어 4호 연구진들을 만나 “인류가 우주를 평화적으로 이용하며 인류 운명 공동체를 구축하는 데 더 많은 중국의 지혜와 힘을 보태야 한다”고 밝혔다. 시 주석은 이어 “중화민족은 용감하게 꿈을 쫓는 민족”이라며 “중국의 달 탐사는 중화민족의 달에 대한 꿈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세계 과학기술 강국을 건설하는 것은 평탄한 길이 아니며, 오직 혁신만이 기회를 선점할 수 있다”며 우주굴기를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을 당부했다. 지난달 3일 창어 4호는 달 뒷면에 착륙하는 데 성공했으며 달탐사로봇 위투(玉兎) 2호는 통신중계위성 췌차오(鵲橋·오작교)를 통해 달 뒷면 관측 자료를 지구로 전송하고 있다. 중국의 우주굴기는 설 연휴를 맞아 개봉한 중국 최초의 공상과학(SF) 블록버스터 영화 ‘유랑지구’의 흥행 성공으로 더욱 가열되고 있다. 중국인이 지구를 구한다는 내용의 ‘유랑지구’는 역대 중국영화 가운데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전랑2’보다 더 빠른 속도로 흥행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역대 최고 수입의 중국 영화가 될 것이라는 전망 속에 개봉 17일 만에 40억 위안(약 6700억원)의 수입을 기록 중이다. 한편 ‘유랑지구’ 원작자로 SF소설에 수여하는 휴고 문학상을 동양인 최초로 받은 중국인 작가 류츠신의 작품도 세계 서점가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지난해 영문판이 나온 류츠신의 소설 ‘구상번개(球狀閃電·Ball lightning)’도 인기몰이 중이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3·1운동 100년, 그날 만세 외친 ‘보통 영웅’들의 숨겨진 이야기

    3·1운동 100년, 그날 만세 외친 ‘보통 영웅’들의 숨겨진 이야기

    “산 자, 죽은 자가 함께 7년의 큰 가뭄에 비를 기다리는 것과 같이 기다려 온 것은 조선 독립의 네 글자인 고로 영험한 하늘이 조선 독립 선언의 기회를 준 것이니 조선민족 중 정신병자 외에 독립만세의 선동을 하지 않을 자 누가 있겠는가.”(서형묵·농업·43세) “나의 조선 독립운동에 대한 목적 및 행위는 정의와 인도에 따른 것이니 죄로 인정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동양인의 조선민족의 당당한 행위이고 공명정대한 목적이므로 죄에 대해 불복하고 상고한다.”(김수영·교직원·37세)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판결문에 담긴 일부 내용이다. 3·1운동 과정에서 체포돼 재판을 받은 평범한 조선인들이 법원에 상고 이유를 밝힌 것이다. 판결문에서 보듯 평범한 시민들의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열망 역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처럼 100년 전 나라를 위해 발벗고 싸웠던 ‘보통 영웅’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마련된다. 22일 개막하는 특별전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보여 주는 자료 200여점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3·1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인생을 보여 주는 1부 ‘1919년을 가슴에 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과 활동 공간을 조명한 2부 ‘임시정부 사람들 조국을 그리다’,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애쓴 한인들과 그 후손들의 모습을 조명하는 3부 ‘고향, 꿈을 꾸다’로 구성된다. ‘1919년 고등법원 판결문’을 비롯해 일제의 탄압 실상을 알리며 전 세계 기독교인에게 지원을 요청한 ‘대한민국 야소교회 대표자 호소문’, 1919년 8월 21일 중국 상하이에서 창간된 임시정부 기관지인 ‘상하이판 독립신문’ 등 다양한 자료를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9월 15일까지 서울 중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계명대 해외 봉사활동 펼쳐

    계명대(총장 신일희)는 이번 동계방학을 맞아 대대적인 해외봉사활동을 펼쳤다. 에티오피아(2018. 12. 30.~2019. 1. 11.)를 시작으로 태국(1. 3.~1. 15.), 콜롬비아(2019. 1. 9.~1. 23.), 필리핀(2019. 1. 13.~1. 25.), 인도네시아(2019. 1. 13. ~ 1. 26.) 등 5개국에 150여 명이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콜롬비아는 최초로 국외봉사활동에 나선 곳으로 중남미에서 유일한 6.25 참전국인 콜롬비아에 나라를 지켜준 것에 대해 보답한다는 의미를 크게 담고 있다. 계명대는 지난해 같은 의미로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봉사활동을 펼친 후 올해 두 번째로 에티오피아에서 봉사활동을 가지기도 했다. 계명대가 콜롬비아에서 봉사활동을 펼 친 곳은 부에나비스타 시이다. 해발 1700m고지에 위치 이곳 작은 마을을 특별히 봉사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6.25참전 용사인 곤잘레스씨가 이 마을에 살기 때문이다. 90세가 넘은 곤잘레스 씨는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였으나, 방문단을 맞이하기 위해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본인의 자택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면서 타 지역에 살고 있는 자녀와 손주들을 모두 불러 계명대 방문단을 환영했다. 곤잘레스 씨의 집은 6.25전쟁 박물관을 방불케 했다. 집안 곳곳 모든 벽면에는 당시의 사진들이 걸려있었고, 태극기와 콜롬비아 국기를 상시 게양하며, 당시의 모습들을 아직도 생생히 간직하고 있었다. 곤잘레스 씨는 “젊은 시절 비록 다른 나라이긴 하지만, 자유와 평화를 위해 피 흘리며 지켜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한국의 젊은이들이 나를 아직 기억해 주고 이렇게 찾아 준 것 만으로도 영광이고 감사한 일이다”며 환대했다. 계명대 국외봉사단은 봉사활동 지역과 조금 떨어진 보고타 지역 국군학교내 참전용사비에 헌화하고 묵념의 시간도 가졌다. 소식을 접한 콜롬비아 군에서는 사관생도들과 의장대를 파견해 사열하고 애국가를 연주하며 계명대 국외봉사단을 맞이했다. 콜롬비아 국외봉사단 학생 대표인 손한슬(남, 26세, 경영학전공 4) 학생은“처음에는 단순히 참전용사비에 헌화만 하고 간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까지 맞이해 주는 것을 보고 오히려 감동을 받았다.”며, “오늘 이렇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 이들이 목숨 바쳐 구해준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숙연해 졌다.”고 말했다. 이곳 참전용사비는 불국사의 다보탑 모양으로 만들어져 더욱 그 의미를 더하고 있었다. 봉사 본연의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인스띠뚜또 부에나비스타 학교에 학생들은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벽화와 교실 환경 개선 등 노력봉사와 함께 한글교육, 태권도, K-Pop 배우기 등 교육봉사도 병행해서 이루어졌다. 고지대에 위치한 학교를 연결하는 계단에 난간이 없어 어린 학생들의 낙상사고가 빈번했는데, 이번에 난간을 설치해 줘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시에라 인스띠뚜또 부에나비스타 학교 교장선생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봉사활동을 한 적은 누구도 없었다”며 “첫 봉사를 한 사람들이 먼 한국의 대학생이라는 것에 감동을 받았고, 그들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감동을 받아 너무 감사하고 모두가 소중한 인연 이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정민주(22·여·유아교육과 3)씨는 “봉사기간 동안 마을 주민들과 너무 친해져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 이름도 다 외울 정도로 정이 많이 들었는데, 헤어지려니 눈물이 절로 났다”며, “이곳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동양인들이 자기들을 도와준다는 것에 신기하게 생각하면서도 봉사활동 기간 내 환대해주며 우리를 맞이해줘 오히려 우리가 접대를 받고 돌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中 ‘애국주의 영화’ 3년째 흥행가도

    中 ‘애국주의 영화’ 3년째 흥행가도

    中 공산당 ‘애국심 고취’ 검열 영향2017년부터 3년째 중국 영화 박스오피스의 수위를 애국주의 영화가 점령하고 있다. 2017년 ‘전랑2’는 무려 56억 7874만 위안(약 8500억원)의 수익을 올렸으며 지난해에는 ‘홍해행동’이 중국 전체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17일 중국 영화계에 따르면 최대 성수기였던 올 설 연휴에는 ‘전랑2’를 통해 중국 대표 배우로 떠오른 우징(吳京)이 특별 출연한 ‘유랑지구’가 20억 위안이 넘는 흥행 수익을 올렸다. ‘유랑지구’는 ‘전랑2’를 뛰어넘는 50억 위안 이상의 흥행을 기대하고 있다. ‘전랑2’와 ‘홍해행동’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테러 위험 속에서 민간인을 구해낸다는 내용이다. 중국 최초의 공상과학(SF) 블록버스터인 ‘유랑지구’는 2015년 동양인 최초로 과학소설에 수여하는 휴고상을 받은 류츠신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휴고상을 수상한 류의 장편소설 ‘삼체’는 한국어로도 번역됐다.‘유랑지구’의 내용은 태양의 노화로 인류가 모두 지하도시에 거주하게 되는데 이어 태양계 최대 크기 행성인 목성과 충돌 위기를 맞은 지구를 중국인의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구해낸다는 것이다. 중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애국주의 영화가 흥행하는 이유는 중국 공산당의 검열 때문으로 분석된다. 영화에 대한 감독 업무가 지난해부터 광전총국에서 공산당 중앙선전부로 옮겨가면서 훨씬 강력한 검열이 이뤄지고 있다. 지난 8일부터 500만 위안 이상 제작비가 투입되는 영화와 인터넷 드라마 제작자는 당국에 장르, 내용, 제작비용 등을 촬영 전 신고해야 한다. 중국 영화를 세계에 알린 5세대 영화감독 대표주자인 장이머우 감독의 신작 ‘일초’는 최근 ‘기술적인 이유’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상영이 취소됐다. 중국에서 ‘기술적인 이유’는 공산당의 검열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관용어법으로, 장 감독의 신작은 중국 공산당이 공과 과가 모두 있다고 규정한 문화대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5세대 감독들의 영화는 1980년대 세계 영화계에서 큰 호응을 받았지만 내부에서는 중국의 궁핍한 현실을 다뤘다는 이유로 탄압 대상이 됐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북한 전쟁고아 기록정리가 남은 일…더 늦기 전에 끝내야”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 “북한 전쟁고아 기록정리가 남은 일…더 늦기 전에 끝내야”

    ‘독일서 韓문화재 발굴’ 김영자 박사가 말하는 ‘북한 전쟁고아’“한반도 현대사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아픔, 잊혀진 이들이 있다. 바로 북한의 전쟁고아야. 남편이 먼저 시작한 일인데 요즘은 그게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6·25 한국전쟁에서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전쟁고아가 많이 발생했지. 이들이 동유럽에서 위탁교육을 받다가 어느 날 하룻밤 새 갑자기 싹 사라졌거든. 이들에 대한 기록 정리가 여생의 일이 됐어.” 독일에 반출된 한국 문화재 발굴과 보존의 중심에 섰던 베커스 김영자(80) 박사가 한국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청했더니 경복궁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만나자고 했다. 김 박사는 “서울 지리를 잘 몰라 다른 곳은 잘 찾아갈 수 없어. 그런데 민속박물관은 찾아갈 수 있어.”라며 “1층 안쪽 커피숍에서 만나자.”라고 했다. 독일에서 50년째 사는 그가 박물관 1층에 커피숍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이력대로 문화재에 조예가 깊어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민속박물관을 찾나 생각하고 설날 연휴인 지난 2일 약속 장소로 갔다.(※독일로 먼저 돌아간 남편이 북한 전쟁고아 사진을 보내주기까지 기사 발행이 미뤄졌다.) “체코의 北전쟁고아, 남편이 먼저 발굴60여명 작은 궁전서 5년간 위탁교육한국 모르는 남편 탓에 이 일에 빠져”‘요즘 어떻게 지내시느냐.’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김 박사는 “나이가 이제 80인데 쉬어야지.”라며 잠시 뜸을 들였다. “남편(베커스 크리스토퍼·76)이 2015년 봄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체코의 어느 제후 궁전에서 북한 고아들이 1953~1958년까지 살았다는 기사를 읽은 거야. 아내의 조국 ‘코리아’라는 단어가 등장하니 솔깃했던 가봐. 남편이 당장에 차를 몰고 달려가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봤대. 60년이 훌쩍 지났으니 동네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렵사리 수소문해서 기숙사 사감을 지냈다는 여성을 만났다고 해. 요양병원에 있는 그 여성이 나이가 많아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힘들 정도였고, 정신이 오락가락했는데, 남편이 그 여성이 돌보고 교육했던 북한 고아들의 사진과 앨범, 이들이 돌아가서 그녀에게 보낸 엽서 등을 전달받았거든. 이 여성이 돌아가신다면 북한 전쟁고아들에 대한 귀중한 자료도 그냥 재로 사라질뻔한 것이지. 그런데 남편이 한국말과 한국 사정을 잘 몰라 한계가 있으니, 내가 이 일에 끌려들어 간 거지.” “北전쟁고아 1958년 하룻밤에 귀국가서 ‘보고싶어’ ‘그곳이 천국’ 편지도1962년 이후엔 서신 왕래도 뚝 끊겨” 팔순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발음은 또랑또랑했고, 말은 박력이 있었고 빨랐다. 기억은 엊그제 한 일처럼 생생했다. 그러더니 대뜸 김 박사가 “남한에선 북한 전쟁고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다. “한국에선 북한 전쟁고아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고, 잘 모르고 있다.”라고 답했다. 사실 기자도 수년 전 여자배우 추상미가 감독한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북한 전쟁고아들을 다뤘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한국 기자들이 우리 집에 많이 왔었어. 그때마다 남편이 북한 고아들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설명하면 기자들이 ‘네, 네.’라고 대답했지. 그런데 기사는 한 줄도 나오지 않아 남편도 거의 포기했어. 북한과의 적대적 관계도 있고 해서인지 한국에선 도통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까웠지. 북한 고아 문제는 외국에서 더 관심이 있었어. 폴란드에서 북한 전쟁고아를 다룬 다큐 영화 ‘김귀덕(Kim Ki Dok)’이 2006년도에 먼저 제작됐거든.” 영화 ‘김귀덕’은 폴란드에서 무덤이 하나 있는데 이걸 파버릴까 하다 동양인 무덤이 여기에 왜 있지 하고 조사를 하다 보니 북한 전쟁고아였다는 이야기다. ‘김귀덕’은 유튜브로 검색하니 나왔지만, 한글이나 영어 자막이 달려있지 않아 보기가 쉽지 않았다.체코에 있던 북한 전쟁고아 이야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 “체코의 작고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궁전인 발리치(Valec Valech)에 북한 고아 60여명이 위탁 교육을 받았어. 이 궁전이 사회주의 체제에서 공공건물로, 보육원으로 쓰였거든. 전쟁고아를 남쪽 한국에선 나쁘게 말하면 선진국에 팔았지만, 북한에선 우방인 동유럽 국가에 위탁교육을 했던 거야. 최근에 한국 PD 한 사람이 취재차 왔었어. 이 궁전에 전쟁고아들이 있었다는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 궁전 정원 한쪽 구석에 세워진 오벨리스크에 전쟁고아들이 위험하게도 올라가 영문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새긴 게 있거든. 글자가 많이 부식되고 상하고 있어 언제 없어질지 모르니 빨리 보존 조치를 취해야 해.” “北전쟁고아, 내 또래여서 더 동질감이들 북한서 어떻게 됐는지 문득 생각위탁 부모도 고령, 구술 정리도 시급” 김 박사의 설명은 계속됐다. 전쟁 직후 여력이 없던 북한은 1951년부터 전쟁고아들은 체코를 비롯해 구동독,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으로 위탁교육 명목으로 보냈다. 정확한 조사가 나오지 않았지만 이런 북한 전쟁고아는 몇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1958년 어느 날 김일성의 명령에 의해 북한 고아들이 어느 날 싹 귀국했어. 주위 사람들도 모르게 밤새 다 데려갔다고 해. 정성 들여 애들을 교육하고 돌본 엄마들은 ‘지금도 보고 싶어서 운다.’라고 해. 그리고 그 아이들이 북한으로 돌아가서 ‘엄마, 보고 싶어요.’, ‘그곳이 천국이었어요.’라는 내용의 엽서를 보냈지. 1962년 이후 편지 왕래마저 끊겼고, 그리곤 사라진 거지. 북한 전쟁고아들을 돌봤던 이들이 아주 고령이지. 더 늦기 전에 이들로부터 구술받지 않으면 전쟁고아의 기록은 사라질 수 있어.”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들이 대개 6~12살쯤 되어 동유럽에 와서 몇 년 살았어. 돌아갈 때 나이가 많은 아이는 스무 살가량 됐고, 유럽 문화를 알고, 한창 정이 들 무렵이었지. 그때 동유럽이 사회주의 체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북한보다는 자유스럽고, 풍족했지.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수용소로 끌려가서 자유스럽지도 못하고 혹사를 당한 것으로 추정돼. 북한에서 적응을 잘한 아이들은 동유럽 언어가 되니 고급 인력으로, 외교관으로 살아남았을 거야. 북한 전쟁고아들의 나이가 내 또래여서 더 동질감이랄까 연민이 느껴져.” “발리치 궁박물관장이 전시실 한 두 개를 내줄 테니 한국관 전시실로 꾸미라고 우리한테 제안했어. 이 궁전이 1976년 화재로 불탔는데, 문화유산이어서 EU가 겉모습은 복원해 줬거든. 내부는 아직 텅텅 비어 있어서 주로 콘서트나 미술관으로 이용해. 여기에 ‘당시 아이들이 입었던 옷, 당시 영상물, 동요 등을 전시하면 좋겠다.’라고 나랑 남편이 이야기하지. 전시관 기획 잘해서 신청하면 (발리치궁이) 자국 문화재청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도 하더라.” 김 박사 부부의 집에서 발리치까지는 차로 3~4시간 거리여서 체코 문화와 맥주를 좋아하는 남편이 종종 놀러 간다고 했다.“1968년 장학금 받는다는 말에 獨유학레겐스부르크大 한국어문화 강좌 맡아직접 쓴 문법책 기초한국어 인기 여전” 베커스 김영자 박사는 어떻게 독일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1939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난 그는 꽃다운 25살 때인 1965년 독일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1년 장학금을 받게 해주겠다는 신부님의 말에 “아무것도 모르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땐 외국 나간다는 말에 무조건 좋았거든. 처음 수녀원에 도착해서 어학연수를 받는 동안 말이 안 통하니 많이 울었지. 뮌헨대학에 서양사와 독문학을 전공하고, 레겐스부르크대학에 입학해 서양사를 전공했지. 건축사인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애를 키우다 1975년에 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지. 1979년부터 레겐스부르크 시립박물관의 학예사로 근무하면서 인맥이 넓어졌고, 그때부터 한국과의 인연이 깊어졌지. 그러다 모교에 한국어문화 강좌가 개설되면서 교수가 된 거야. 1987년부터 정년퇴직한 2005년 9월까지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쳤지. 자매결연을 한 동국대에 독일 학생들을 보내 문화교류도 시키고 했어. 동국대가 독일 대학과 자매결연을 한 첫 한국의 대학일 거야.” 그가 사는 레겐스부르크는 뭔헨에서 동북쪽으로 자동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있다. “대학에서 한국어 강좌를 맡을 사람으로 내가 뽑힐 때 독일어와 한국어가 되니, 한국사람이 한국어 가르치는 것을 처음엔 아주 쉽게 생각했어. 그런데 말은 잘해도 한국 문법을 모르니, 독일 학생들은 문법적으로 명확하게 설명이 안 되면 이해는커녕 공부하려고도 하지 않아. 얼마나 깐깐하고, 황당한 질문이 많이 날아들었는지. 한국에 들어와 시중의 문법책을 다 보고, 한국어학당을 다 가봤지만, 마음에 드는 게 없었어. 오죽 답답했으면 교육부에 들어가 ‘제대로 된 문법책 하나 내 놓으라.’라고 닦달했을까. 나중에 고등학교 국어 문법책을 하나 구해, 문법을 연구하면서 ‘기초한국어’를 썼어. 여전히 인기 좋아 지금도 잘 팔리고 있어. 한국으로 발령나서 가는 독일 외교관들이 ‘이 책을 들고가면 걱정이 없다.’라고 할 정도야. 한국어의 심화 과정과 한국 문화까지 소개하는 ‘한국어 플러스’도 냈어.” ‘삼국유사’ 독일어 번역…도서전서 호평“韓정체성 보여주는 역사책 내고파 번역” ‘삼국유사(국보 306호)를 독일어로 번역한 계기가 무엇이냐?’고 묻자 김 박사는 그 뒷이야기부터 꺼냈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이 ‘한국의 해’여서 삼국유사를 번역해 내겠다고 했더니 한국문학번역원이 글쎄, ‘삼국유사는 문학이 아닌 역사’여서 지원금 지원이 안 된다고 했거든요. 이런 소식을 들었던 당시 경북 군위군의 인각사 주지가 백방으로 뛰고 해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통하니 지원금이 나왔지. 당시 문학 100선이었는데 삼국유사가 더 들어가는 바람에 101선이 됐지. 출판기념회를 도서전에서 했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문학번역원조차도 ‘선생님 번역 책이 최고.’라고 했지. 유럽에선 한국이 일본이나 중국보다 덜 알려진 게 아쉬웠는데, 한국 고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역사책을 유럽에 내보이고 싶었거든. 그게 번역에 나서게 된 계기였어.” 국립민속박물관이 약속 장소로 정한 이유도 나왔다. 김 박사가 한국에서 가장 자신 있게 잘 아는 곳이기에 그렇다. 1906년 한국을 방문해 기록 사진을 남긴 독일군 장교 헤르만 구스타프 테오도르 산더 대위의 사진 기증전시회가 2006년 4월 여기서 열렸다. 당시 김 박사가 사진과 함께 전시된 문서와 관련 자료를 한국어로 번역해 줬다. 또 2008년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의 선교박물관이 소장한 유물 전시회가 민속박물관에서 열릴 때도 김 박사가 깊이 관여했다. 그가 유럽에서 수십년간 수집한 근대조선 사료를 고스란히 민속박물관에 기증했고, 베를린 등 유럽 골동품 가게나 벼룩시장 등에서 취미로 사모았던 인형 600여점을 2009년 기탁하기도 했다. 물론 그가 독일 문화재를 발굴해 정리할 때 민속박물관 학예사들의 도움도 컸다. “겸재 금강산 화첩 발견도 드라마틱수도원 ‘한국에 귀한 것…팔 수 없어’왜관수도원에 영구임대 형식 반환돼”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그녀가 1999년 번역한 ‘수도사와 금강산’(노르베르트 베버 지음)을 꼽았다. “이 책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이 조선시대 미술사를 다시 쓰게 했거든.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장을 지낸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년)는 1925년부터 4개월간 선교차 방한해 금강산을 돌아보고 가면서 ‘금강산을 잘 그린 그림을 하나 사고 싶은데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금강산 등정에 동행한 독일인 헹켈이 나한테 선물을 했다. 수도원 박물관에 두었다.’라는 기록만 남겼지. 어디에서 어떻게 샀다는 말은 남기지 않았어. 어쩌면 이 선물이 금강산 화첩이었는지도 몰라. 그리곤 아프리카 선교를 가서, 그곳에서 선종하셨거든. 그러면서 그림이 책에 실렸어. 원서에 실린 이 그림을 본 한국의 한 미술사학자가 수도원에 편지를 써서 ‘이 책에 나와 있는 그림이 있느냐.’라고 하니 당시 수도원장은 ‘모른다.’라고 딱 잡아뗐다는 이야기 전해. 수년이 흘러, 그런데도 아주 이상하니 국립박물관 학예관 한 명이 직접 가서 보겠다며 수도원을 방문한 거야. 그리고 갔더니 직사광선을 받는 곳에서 그림이 빛바랜 채 다 죽어가고 있는 걸 본거야. 이 학예관이 깜짝 놀라는 것을 본 박물관 신부님이 ‘우리 이런 것 또 있어’하면서 두 폭의 그림을 더 갖고 나왔던 거야. 또다시 놀라자 이번에는 소장한 그림을 모두 갖고 보여준 거야. 이게 모두 21첩, 겸재 정선의 금강산 화첩이 된 거지. 발견 과정이 드라마틱해.” “이 그림들이 우여곡절을 겪다가 2005년 한국으로 돌아와. 국보급 문화재 반환의 모범 사례지. 이 그림의 존재와 가치가 알려지면서 소더비 등 영국과 미국의 경매 회사들이 수도원에 그림을 팔라고, 그 비용으로 선교사업에 쓰라고 했어. 그렇지만, 예레미아스 슈뢰더 수도원 대원장이 ‘한국에 그렇게 귀한 것이라면 팔 수 없어. 돌려줄 거야.’라고 결심하고 자매관계인 경북 칠곡군에 있는 왜관수도원에 ‘국가에는 주지 마라.’는 단서로 영구임대하지. 난 반환된 겸재 화첩을 한국에서 보려고 겨우 날짜를 잡고 방문하기 1주일 전, 왜관수도원에 큰 불이 났어. 그 소식에 가슴이 철렁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하지. 수도원이 거의 몽땅 다 불타버렸지. 다행히도 화첩은 다른 곳에 보관해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던 거야. 이런 보관의 이유로 반환된 겸재 정선의 금강산 화첩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거지.” “韓근대복식 300벌 한꺼번에 나와불상·곤여전도 등 1200여점 보관유럽 최대 한국 유물 소장 박물관”김 박사는 한국과 인연이 깊은 오틸리엔수도원 선교박물관에는 대학을 정년한 2005년부터 10년간 자원봉사직 학예사로 근무했다. “오틸리엔 수도원장이 한국 유물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합디다. 박물관에 가보니 조선시대 갑옷에 일본 사무라이 투구를 씌워 전시해 일본 유물로 착각하게 된 게 많았어. 설명도 엉터리가 부지기수였고. 동양관에는 한국·일본·중국 유물이 뒤섞여 있었던 거지. 선교박물관의 전시품 80%는 아프리카 것이었고, 나머지는 동양 3국의 유물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뒤섞여 있는 거야. 나 혼자 어찌할 수도 없고 해서 민속박물관에 요청하니 학예사 4명이 3주간 파견 나왔지. 우리 다섯이 먼지 속에서 정리했지. 전시실을 정리하니 한국 유물 540점이 나왔지. 다음해에는 지하실 창고를 뒤지니 먼지가 두텁게 쌓이고 거미줄이 쳐진 곳에서 한국 유물이 수두룩하게 나왔어. 17세기 불상과 1869년의 곤여전도(坤輿全圖·세계지도) 등 모두 1200여 점이나 됐지.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2016년 한국관을 별도로 재개관한 거야.” “하루는 수사님이 불러서 수도원에 갔더니 함을 하나 보여주는 거야. 열어보니 좀벌레가 휙 하고 지나가. 신랑 저고리, 신부 치마를 비롯한 근대 복식 300여벌이 나왔어. 전문가도 아니고, 정리할 엄두를 못 내고 있다가 알고 지내던 조우현 교수(성균관대 복식과)에 연락해 사정을 설명했어. ‘비행기 비용도, 작업비도 못 준다. 그래도 숙식은 제공해 줄 테니 와서 도와다오.’라고 부탁했지. 그가 조교 두 명을 데리고 와서 2주 동안 수도원에서 먹고 자면서 정리해 주고 갔지. 이게 1920년대 복식인데 보기보다 귀한 거야. 우리 한국에선 사람이 죽으면 옷을 불태우는 관습이 있어서 근대 복식이 예상외로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거야. 문화재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진 국립민속박물관·서울시립역사박물관의 학예사들과 국외소재문화재단, 문화유산회복재단, 재정 지원을 해준 문화재청 등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야. 감사할 따름이죠.”“내 나이 팔순, 사명감 있는 후배 나서야” “무보수로 선교박물관에서 일할 때 힘들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사명감이 있었어. 훼손되는 귀중한 한국 유물을 복원하려고 독일과 한국의 정부 지원금을 받아내기 위해 정말 동분서주했거든. 이젠 후배들이 나서서 해야 하는데…. 한독 문화교류의 지식과 기반이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자기 분야가 아니면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어서….” 김 박사의 백발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심현희 기자의 맛있는 술 이야기] “내추럴와인은 내가 뭘 마시는지 아는 투명한 한 잔”

    [심현희 기자의 맛있는 술 이야기] “내추럴와인은 내가 뭘 마시는지 아는 투명한 한 잔”

    블라인딩 테이스팅 300잔 시음했을 때 맛있었던 두 잔 모두 내추럴 방식 와인 기존 와인은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지만 내추럴와인은 첨가물에 대해 이야기해 친환경 소비와 함께 꾸준한 성장 기대“사람들은 음식에 들어가는 재료엔 관심이 많으면서 정작 와인에 들어가는 첨가물이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내추럴와인’은 먹거리와 환경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주죠. 우리는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할까요.” 14일 서울 중구 레스케이프 호텔에서 만난 이자벨 르주롱(47)은 세계적인 와인 전문가이지만, 환경 운동가 같기도 했다. 프랑스 최초의 여성 마스터오브와인(MW)이기도 한 그는 최근 글로벌 식음료업계의 ‘대세’로 자리잡은 내추럴와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수년 전 그가 진행을 맡은 영국 트래블 채널의 ‘미친 프랑스 여자의 와인 여정’은 전 세계 120개국에서 20개 언어로 송출돼 세계 식음료 업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지난해 11월 한국에 번역 출간된 그의 저서 ‘내추럴 와인’은 출간되자마자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2주 만에 재쇄를 찍어 한국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MW는 영국 런던에 있는 IMW(와인마스터협회)에서 수여하는 자격증으로 전 세계적으로 약 300명밖에 안 되는 와인 자격증의 ‘끝판왕’이다. 한국인 MW는 아직 없으며 동양인도 드물다. 내추럴와인이 ‘힙하다’곤 하지만 여전히 와인 산업의 주류는 거대 와이너리에서 대량 생산을 하는 일반 와인이다. 일반 와인을 공부해 MW 자리까지 오른 그가 어떻게 와인계의 ‘이단’인 내추럴와인에 빠지게 된 것일까. -와인 인생은 어떻게 시작됐나. “부모님은 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와인 농사를 짓고, 평생 와인을 만들었다. 10대 땐 와이너리의 삶이 지겨웠고 집을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대학에선 당연히 와인과 관련이 없는 경영학을 전공해 런던에서 출판 관련 일을 했다. 바쁘게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어느 날 집과 농장(와이너리)이 너무 그립더라. 와이너리에서 자랐지만 체계적인 와인 지식도, 와인 산업에 대한 이해도 없어 런던에서 6년간 와인을 공부해 MW가 됐다. 당시 프랑스 여성으로선 최초여서 운이 좋게도 큰 주목을 받았다. MW가 되자 강연, 레스토랑 컨설팅 등 일이 쏟아져 들어왔고 프랑스에서도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많이 받았다.” -와인 업계는 매우 보수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MW 출신이 어떻게 기성 와인의 반대 지점에 있는 내추럴와인의 상징적 인물이 됐나. “기성 와인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나와는 맞지 않는 옷’이라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들었다. 나는 와인 농장, 현장을 경험하고 알고 싶었는데 커리큘럼은 이론 공부에 치중되거나 와인 비즈니스 쪽에 집중됐다. 결정적으로 내추럴와인에 관심을 갖게 된 건 TV시리즈를 하면서부터다. 좋은 와인을 소개해 주기 위해 헝가리 와이너리들을 방문해 블라인딩 테이스팅으로 300잔을 시음했던 적이 있었다. 이 가운데 2개가 정말 맛있었는데 같은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하더라. 궁금해서 와이너리를 찾았다. 생산자가 전통 방식, 지금 우리가 말하는 내추럴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고 있었다. 일반 와이너리에서 쓰는 큰 압착기, 온도조절 기계도 없이 140종류의 다양한, 살아 있는 와인이 있더라. 당시 대규모 와인 비즈니스 관련 일을 해야 하나라는 커리어에 대한 기로에 서 있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확신이 생겼다.” -처음 ‘내추럴와인’ 관련 일을 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주변 반응은. “최근에는 내추럴와인이 유행해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사람들에게 런던에 남아 내추럴와인의 길을 걷겠다고 말했더니 대부분 ‘커리어 자살’이라는 반응을 보였다(웃음).” -기성 와인 업계에선 내추럴와인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데. “원래 기득권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웃음). 현재 와인 산업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규모로 성장해 있다. 대량생산과 양조 시 각종 첨가물을 넣어 맛의 일관성, 표준화를 이뤘다. 이를 기준으로 로버트 파커(와인평론가)의 별점 등 마케팅 포인트가 형성돼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대규모 와인 세계에서 와인을 만들 때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무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내추럴와인을 얘기할 때는 양조 시 무엇을 넣고 쓰는가에 대해 투명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바로 기존 와인 산업이 흔들리게 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기성 와인이 공급자 위주의 정보만을 준 셈인데, 이젠 소비자 위주의 정보로 전환 되어야 한다.” -내추럴와인이 와이너리 인근 지역에서 신선한 상태로 소비돼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반박을 위한 반박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음식은 생산지에서 소비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내추럴와인뿐만 아니라 기성 와인도 긴 이동 과정을 거친다. 일본과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내추럴와인 마켓 중 하나인데 문제 없이 잘 소비되고 있지 않나. 음식이든 차든 와인이든 좋은 상태로 마시려면 관리에 신경 써야 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내추럴와인 열풍은 트렌드의 정점일 뿐 지속성이 없을 것이라는 말들도 있는데. “내추럴와인 시장은 점점 더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추럴와인 페스티벌을 런던, 베를린, 몬트리올 등에서 하는데 신기하게 비슷한 사람들이 온다. 주로 30대, 특히 ‘소비를 잘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강한 사람들이다. 이런 경향이 트렌디하게 비칠 수 있지만, 갈수록 ‘내 몸’에 신경 쓰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있다. 산지 특성을 살린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좋은 빵 좋은 차를 고르는 사람들을 위한 가게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지 않나. 무엇보다 내추럴와인이 공통적으로 가진 우아한 산미가 음식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도 대중화에 유리하다. 한국은 이제 시작이지만, 친환경 소비에 대한 관심이 높고 똑똑한 소비자들, 잘 알고 마시는 사람들이 많은 마켓이어서 질적, 양적으로 내추럴와인 시장이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좋은 사람이 좋은 술을 만든다’는 말이 떠오른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 우리가 삶을 살아 가면서 주변의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내추럴와인은 그런 면에서 ‘좋은 사람이 만드는 좋은 술’이다. 대규모 포도 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함부로 경작하지 않고,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땅에서 포도 농사를 짓고, 자연적으로 발효해 와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좋은 와인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나. “내추럴와인이라고 다른 와인과 다르진 않다. 일단은 맛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맛의 바탕에 ‘이 포도가 어떻게 길러졌는지, 밭에서 이뤄진 일’들까지 느껴진다면 완벽한 와인이 아닐까.” 글·사진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내추럴와인 포도 재배부터 와인을 만드는 양조 과정까지 화학적 첨가물를 넣지 않는 와인을 뜻한다. 쉽게 말해 일반 와인에 들어가는 농약과 산화방지제(이산화황), 인공효모 등이 아예 들어가지 않거나 극소량만 첨가된 와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유럽과 미국, 일본에선 트렌드를 넘어 ‘자연주의’라는 라이프스타일의 상징으로 자리잡았지만, 친환경 열풍이 불고 있는 한국엔 3년 전 처음 소개돼 지난해부터 식도락가와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 “고향 철원서 클래식 음악제 열고 싶어”

    “고향 철원서 클래식 음악제 열고 싶어”

    다시 선 뮤지컬 ‘팬텀’ 무대 큰 사명감 “끼 억누르지 마라” 스승 말에 용기 내 3월 ‘돈 조반니’ 체를리나役 본업 복귀 진취적 캐릭터… 비중 적어도 깊은 인상유럽 거장들과 낸 음반 재킷에 쓰인 성(姓) ‘IM’ 두 글자가 외국인들의 긴 이름 사이에서 잘 보이지 않아 속상하기도 했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캐스팅이 취소되기도 했다. ‘고음악 디바’라는 수식어가 익숙한 소프라노 임선혜(43)의 옛이야기다. 올해 유럽 데뷔 20주년을 맞는 그는 이제 클래식뿐만 아니라 뮤지컬, 방송 무대까지 넘나드는 ‘팔방미인형’ 음악인으로 거듭나고 있다. “언제든 다시 (클래식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 판단이 있었기에 뮤지컬 무대에 설 수 있었죠.” 2015년 뮤지컬 ‘팬텀’에 주인공 ‘크리스틴’ 역으로 깜짝 출연해 화제가 된 임선혜는 최근 같은 작품에 다시 서고 있다.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뮤지컬로 돌아온 이유를 묻자 그는 첫 공연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했다. 임선혜는 “당시 한국에서 뮤지컬 공연을 하고, 바로 유럽 무대로 건너가 바흐 수난곡 무대에 선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다 결국 건강에 무리가 왔다. 자신을 너무 과신했던 것 같다”며 “당시 무대에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이번에 다시 출연 제의가 왔다”고 설명했다. 화려한 무대전환, 단 한 번 노래로 관객을 집중시켜야 하는 뮤지컬 넘버(곡)의 특성 등 처음 도전한 상업예술은 스타급 소프라노에게도 쉽지 않았다. 그는 “음악인생 처음으로 한국어 공연을 한다는 점이 즐거웠다”며 “관객을 ‘엔터테이닝’한다는 것에 대한 큰 사명감도 갖게 됐다”고 소회했다. 뮤지컬에 다시 출연하는 사이 드라마 OST 작업, 음악 예능 출연으로 대중적 인지도는 더욱 높아졌고, 그의 뮤지컬 출연을 생소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없어졌다. 주변에서는 순수예술인의 ‘외도’로 보기도 했지만, 그는 스승 박노경 서울대 명예교수와 모든 일을 상의할 정도로 신중했다. 임선혜는 “스승님과 ‘팬텀’의 모든 넘버를 불러보기도 했다”며 “‘너는 다른 성악가와 다른 끼와 재능이 있는데 그것을 억누를 필요는 없다’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웬만한 성악 무대에는 다 서본 베테랑이지만, 그는 아직도 박 교수를 찾아가 레슨을 받는다고도 했다. 임선혜는 독일 유학 2년째였던 1999년 고음악 거장 필리프 헤레베허 지휘의 모차르트 C단조 미사에 ‘대타’로 출연하며 깜짝 데뷔했다. 이후 20년간 레네 야콥스, 지기스발트 쿠이겐, 파비오 비온디 등 유럽 본토의 내로라하는 음악가들과 작업하며 경력을 쌓았다. 헤레베허와의 인연은 우연이었지만, 그다음 행보는 순전히 노력으로 이뤄냈다. 적어도 2개 이상의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야 한다고 다짐한 뒤 3년 동안 한국어 책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양인들과 키를 맞추기 위해 높은 힐을 신고 3시간 이상 무대에서 노래할 때도 많았다.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풍부한 표정 연기는 사실 말 못할 하이힐의 고통 위에서 이뤄지는 셈이었다. 임선혜는 2월 초까지 뮤지컬에 출연하고 곧바로 ‘본업’으로 복귀한다. 한국에서는 3월 1~2일 아트센터 인천 개관 공연 하이든 ‘천지창조’와 같은 달 29~3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 무대에 ‘체를리나’ 역으로 선다. ‘돈조반니’는 ‘코지 판 투테’(2017년)와 ‘피가로의 결혼’(2018년)에 이은 레네 야콥스 지휘의 ‘모차르트-다 폰테 3부작 시리즈’의 마지막 공연이다. 여러 차례 맡았던 ‘체를리나’ 역에 대해 그는 “‘돈조반니’ 속 다른 여성 캐릭터에 비해 진취적이고 무대에서 신선한 공기 같은 역할을 한다”며 “주변에선 비중이 더 높은 역을 권유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체를리나’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강조했다. 임선혜는 유럽 데뷔 20주년을 맞아 고향인 강원 철원에서 클래식 음악 페스티벌을 개최할 계획이다. “철원은 이제 희망의 고장이 됐죠. 제 고향 분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직접 들려주고 싶고, 해외 분들을 초청해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진 제 고향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이진상 한예종 교수 예술의전당 독주회

    이진상 한예종 교수 예술의전당 독주회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인 피아니스트 이진상이 10일 서울 예술의전당 IBK체임버홀에서 리사이틀 ‘뉴 비기닝’ 무대를 선보인다. 서울예고 수석 입학, 한예종 영재 입학 등으로 주목받은 그는 2009년 스위스 게자 안다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하며 국제적으로 인지도를 쌓았다. 독일에서 귀국한 후 지난해 초 한예종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음악원 기악과 교수로 임용돼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이번 무대는 독일을 기반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던 그가 한예종 교수에 임용된 후 갖는 첫 독주회다. 음악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를 담아 ‘뉴 비기닝’이라는 제목으로 연주회를 준비했다. 이번 공연은 멘델스존 ‘엄격 변주곡’과 슈만 ‘교향적 연습곡’을 비롯해 라벨, 슈베르트 등 낭만파 시대 작곡가들의 곡으로 꾸며진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토트넘, 손흥민·동양인 인종차별한 팬 경기장서 추방

    토트넘, 손흥민·동양인 인종차별한 팬 경기장서 추방

    손흥민이 소속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이 손흥민과 동양인 관객을 조롱한 팬들을 경기장에 추방했다. 30일(한국시간)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토트넘은 이날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울버햄프턴과의 경기에서 서포터 2명을 추방했다. 이들이 동양인 팬을 조롱하는 영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것이 추방 이유다. 지난 9월 리버풀전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문제의 영상에서 두 남성 토트넘 팬은 손흥민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 명이 카메라를 향해 “손(흥민)이 달걀볶음밥을 먹었나? 새우볼과 닭고기볶음면을 먹었나?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라고 말한다. 이곳에서 중국음식으로 대표되는 요리를 언급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은 “저기 있네”라고 말하며 카메라를 움직여 그들 뒤에 앉아 있던 동양인 남성팬을 비춘다. 이들은 이 남성을 계속해서 몰래 촬영하며 “그는 벤치에 앉아 있거나 몸을 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매우 진지해보인다. 후반전에 나오려나 보다”, “피곤해 보이는데 에너지를 위해 달걀볶음밥이 필요한 게 아닐까”라면서 인종차별적 언행을 이어갔다. 토트넘은 해당 영상을 올린 팬의 신원을 추적, 확인해 이날 관중석에서 내쫓았으며, 앞으로도 경기장 출입을 금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토트넘의 대변인은 “구단은 어떤 형태의 인종차별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도 용납하지 않는다”면서 “모욕적이고 공격적인 말과 행동을 한 사람에게는 누구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강경하게 밝혔다. 잉글랜드를 비롯해 유럽 축구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고질적으로 인종차별이 자행돼 논란이 되고 있다. 손흥민도 이러한 인종차별에 여러 차례 휘말린 적 있다. 지난해에 손흥민을 향해 상대 팀 팬들이 “DVD! 3개에 5파운드!”라고 조롱해 논란이 됐다. 동양인들이 불법복제 DVD를 판매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나온 인종차별적 조롱이었다. 어느 해설자는 방송에서 손흥민의 태클을 가리켜 ‘가라데 킥’이라고 표현했다고 지적을 받기도 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손흥민 계란볶음밥’ 동영상 토트넘 서포터들 경기 도중 쫓겨나

    ‘손흥민 계란볶음밥’ 동영상 토트넘 서포터들 경기 도중 쫓겨나

    잉글랜드 프로축구 토트넘 구단이 손흥민과 동양인 팬을 겨냥한 인종차별 조롱을 한 서포터 둘을 퇴출시켰다. 일간 ‘데일리메일’은 30일(한국시간) “토트넘과 울버햄프턴의 경기 도중 인종차별 동영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이들이 경기 도중 퇴출당했다. 두 명의 인물이 한 동양인 팬을 가리키며 손흥민과 비교하며 인종차별적 조롱을 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9월 리버풀과의 경기를 앞두고 웸블리 스타디움 관중석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이 동영상에 등장한 두 서포터는 “손흥민, 그는 계란볶음밥을 먹는다. 새우볼도? 닭고기차우멘도? 믿을 수 없다. 그는 어디 있나”라고 아시아 음식을 나열했다. 이어 뒷좌석의 동양인 팬에게 카메라를 돌리며 “저기 (손흥민이) 있다. 그는 벤치에 있거나 워밍업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조롱했다. 그 뒤에도 한참 동안 계란볶음밥과 닭고기차우멘 등의 조리법을 언급한 뒤 다시 화살을 손흥민으로 향했다. 이들은 “손흥민이 경기에 나온다. 더 많은 힘을 위해 계란볶음밥이 필요해 보인다. 조금 피곤해 보인다. 그는 주중에도 뛰었고, 국제대회에도 나가야 한다. 이상하지 않나”라고 조롱을 이어갔다.토트넘은 진작부터 이들을 퇴출시키기로 결정했는데 마침 이날 울버햄프턴과의 경기가 열리는 웸블리 스타디움 관중석에 나타나 즉시 둘을 쫓아내면서 아울러 이들을 앞으로도 출입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게 됐다. 토트넘 구단은 대변인을 통해 “향후 경기에서도 (출입) 금지 조치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해당 동영상을) 알 수 있도록 해준 다른 서포터들에게 감사의 말을 표한다”고 밝혔다. 이어 “어떤 종류의 인종차별, 차별적, 반사회적 행동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폭력적, 공격적, 외설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다짐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트위터서 30초에 한 번씩 여성 혐오… 女 언론인·정치인이 타깃

    트위터서 30초에 한 번씩 여성 혐오… 女 언론인·정치인이 타깃

    여성 언론인과 정치인을 향한 혐오 트윗이 30초에 한 번꼴로 발생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18일(현지시간)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중에서도 트위터에서의 여성 혐오가 심각한 수준이다. 앰내스티는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회사인 엘레먼트AI와 함께 지난해 영국과 미국의 여성 언론인 및 정치인 778명을 향한 트윗 28만 8000건을 분석했다. 이 결과 전체의 7% 약 1450만 건에 여성혐오 또는 학대 등 문제의 소지가 있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시간으로는 일년에 52만 5600분, 30초에 한 번씩 생산된 셈이다. 특히 유색인종 여성을 타깃으로 삼았다. 동양인, 흑인, 라틴계, 혼혈 등 여성은 백인 여성보다 문제가 있는 트윗에 34% 더 노출됐다. 흑인으로 한정하면 백인보다 84% 자주 혐오 발언의 대상이 됐다. 이번 조사와 관련 말레나 마린 앰네스티 선임 연구원은 NBC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트위터 측에 관련 자료를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서 “트위터는 인종차별,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가 근본적으로 번성할 수 있는 곳”이라고 밝혔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09.80’ 아시아 100m ‘미션 임파서블’

    ‘09.80’ 아시아 100m ‘미션 임파서블’

    중국, 유망주들 미국 유학 보내며 투자 9초91 쑤빙톈, 순수 동양인 최고 기록 10초대 벽 깬 지 3년 만에 9초8대 도전 과학적 훈련 통한 능력 극대화 시작 中·日 경쟁 속 도쿄올림픽 이변 기대“이제 목표는 9초8대 진입이다.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아시아의 탄환’ 쑤빙톈(중국)이 18일 중국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9초8대의 벽을 깨겠다는 새 목표를 밝혔다. 아시아 단거리 육상의 전설인 그는 올해 아시아 타이기록(9.91)을 세우며 세계적인 스프린터로 도약했다. 지난 6월 국제육상연맹(IAAF) 마드리드 미팅에서 9초91로 결승선을 통과해 나이지리아 출신 귀화 선수인 페미 오구노데(카타르)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작성한 기록과 동률을 이뤘다. 세계랭킹 공동 5위의 기록이다. 지난 8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선 9초92로 우승해 아시안게임에서 최초로 9초대를 뛴 ‘순수 동양인’이 됐다. 아시아 단거리 육상을 이끌고 있는 국가는 쑤빙톈을 보유한 중국이다. 중국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류샹이 동양인 선수 최초로 110m 허들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아시아 돌풍을 일으켰다. 이후 중국은 유망주들을 육상 강국인 미국에 유학을 보내 선진 기술을 배우게 하는 등 장기적으로 과감한 투자를 했다. 쑤빙톈도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살다시피했다.효과는 2015년 베이징 세계육상선수권대회부터 나타났다. 쑤빙톈이 최초로 동양인 10초 벽(9.99)을 깨고 결승까지 올랐다. 메이저 대회에서 나온 동양 선수 최초의 9초대 기록이었다. 종전 최고 기록은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일본선수 이토 고지가 세운 10초00이었다. 육상계에선 상식을 깨는 사건이었다. 그동안 신체적으로 불리한 동양인은 10초대에 진입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져 왔고, 선수들도 위축돼 있었다. 그러나 신장 173㎝에 불과한 순수 동양인 쑤빙톈이 10초 벽을 깨버리자 아시아에서도 “하면 된다”는 인식이 퍼졌다. “육상 단거리 기록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는 ‘신장’인가”라는 오랜 논란이 종결된 것이다. 신체 조건보다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을 통한 운동 능력 극대화가 더 중요하다는 발상의 전환도 이때부터 이뤄졌다. 이후 아시아 스프린터 기록은 급성장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남자 400m 계주에서 은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룬 일본에서도 이듬해 기류 요시히데가 9초대(9.98)를 기록하며 10초 벽을 깼다. 지난 6월에는 중국의 셰전예가 프랑스 몽트뢰유에서 열린 육상대회에서 9.97을 기록했다. 사흘 뒤 쑤빙톈은 마드리드에서 셰전예의 기록을 0.06이나 앞당겼다. 10초대에 진입한 지 3년 만에 9초8대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성봉주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스포츠과학실 수석연구위원은 “지금 같은 발전 속도라면 머지않아 9초8대를 기록하는 동양인이 나올 것”이라며 “중국과 일본이 치열한 경쟁을 펼칠 2020년 도쿄올림픽에선 아시아 단거리 수준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이창동 ‘버닝’ LA영화비평가협회 선정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이창동 ‘버닝’ LA영화비평가협회 선정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이 LA영화비평가협회(LAFCA)로부터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배급사 CGV아트하우스는 10일 LA영화비평가협회가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으로 이창동 감독의 ‘버닝’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버닝’과 ‘어느 가족’은 지난 5월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놓고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버닝’은 LA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작품상 부분에서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와 경합을 벌였다. 또 토론토영화비평가협회(TFCA)는 ‘버닝’을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으로 선정했으며, 극 중 ‘벤’ 역을 맡은 스티븐 연은 휴 그랜트를 제치고 남우조연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앞서 ‘버닝’에서 주연을 맡았던 유아인은 뉴욕타임스에서 선정한 올해의 배우 중 유일한 동양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CGV아트하우스는 “12월은 각종 해외 비평가협회가 그 해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는 시기”라며 “해외어워드 시즌에 맞춰 ‘버닝’이 반가운 수상 소식을 들려주고 있다”고 밝혔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글로벌 On&Out] 73년 전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과 분단

    [글로벌 On&Out] 73년 전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과 분단

    한국의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국내외 연구자들은 수많은 사실(史實)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다양하지만 의견이 다소 일치하는 부분도 있다. 이 것은 분단이 없었다면 한민족 역사상 가장 큰 비극 중에 하나인 한국전쟁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분단은 언제부터, 무엇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을까? 분단 고착화의 원인은 많고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가 73년전인 1945년12월 미·소·영 3개국의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합의한 “모스크바 결정”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번에는 그 채택과정과 발표 직후 한반도를 점령한 미·소 양군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한다.미·소·영 3개 승전국의 외무장관들의 모스크바 회의는 1945년 12월 16일에서 12월 26일까지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같은 해 9월 런던에서 진행되었던 외상 회의에서 해결하지 못한 나치독일 위성국가 평화조약 채결, 일본 점령 등을 비롯한 많은 문제를 위주로 논의하였는데 그 주변 문제 중에 한국 문제도 있었다. 한국 문제는 회의 첫날에 제기되었다. 미국무장관 번스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에 대해서 이미 합의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미국측 제안을 다음날 제출하겠다고 하였다.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합의한 것으로 알고 있던 소련측은 이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았다. 미국안은 역시 12월 17일에 제출되었다. 미국측은 한국 정부를 수립하기 전에 미·소 양군의 사령관들을 수반으로 하는 통일군정을 과도기관으로 설치하고 이를 통해 미·소·영·중 등 4개국가가 “유엔과 조선인민을 대표하여” 한국에 대한 집행, 입법 및 사법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한국인들의 역할은 고문과 관료에 한정되었다. 미국측은 그 기한을 5년으로 설정하였고 필요에 따라 5년 이하로 연장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미국측의 제안은 “先 5~10년간 신탁통치 後 정부수립”이었다. 소련측은 이 제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고 다음 의제로 넘어갔다.소련측의 대안(對案)은 12월 20일에 제출되었다. 소련은 한국인들로 구성된 ‘임시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한 후 최고 5년 기한으로4개국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제안하였다. 소련안과 미국안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점은 신탁통치의 메카니즘과 기간이었다. 소련은 ‘신탁통치’가 직접 통치보다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를 위한 지원 및 방조의 조치”라고 규정하였다. 그 기간은 최고 5년으로 설정되었으며 그 조치와 ‘임시민주정부’의 구성 제안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미·소 양군 대표들로 구성된 공동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미국측은 소련안을 검토한 후12월 21일 회의에서 사소한 표현 수정의 요청을 소련 외무인민위원장 몰로토프에게 서면으로 제출하였다. 몰로토프는 그 수정안을 검토하고 다음날인 12월 22일에 미국 요청에 동의하였다. 한국문제에 대한 토론이 따로 없었으며 미국측의 사소한 수정이 들어간 소련안은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삼상 회의가 끝나기도 전인 12월 25일, 동아일보가 “소련은 신탁통치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제목으로 회의 의사결정과정을 왜곡한 보도를 발표하였다. 한국에 전해진 이 소식은 하늘땅을 뒤흔들었다. 이 보도가 발표되자 친미적인 우파는 ‘즉시독립’을 주장하면서 ‘반탁운동’의 선봉에 나섰다.이 소식은 북한에도 전해졌으며 북한 사람들이 반탁시위를 시도하기 시작하였으며 12월 29일 철원군 인민위원회 대표들과 공산당원들을 비롯한 한국인들이 남한 라디오 방송을 듣고 그 지역 소련군 위수사령부에 가서 설명을 요구하였다. 예견치 못한 위기에 직면한 소련군은 당황했지만 모스크바 결정을 이행하기 시작하였다. 반탁운동이 북한에서 터진 직후 소련군은 정치장교를 북한의 각지역에 파견해서 강의, 설명회 등을 통해 모스크바 결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고 “신탁통치”가 “위임통치(mandate)”로 오역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여 이를 소련측 제안 의미에 가까운 “후견”으로 바꾸었다. 1946년 1월 3일, 소군정의 실무 담당자 이그나티에프 대좌가 평양에서 북한 신문의 편집부장 회의를 열어 모스크바 결정의 의미를 설명하고 모스크바 회의록의 한국어 번역문을 전달하였다.이와 동시, 소련군은 북한 주요 정치지도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하였으며 다소 성공하였다. 1946년 1월 2일, 북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주요 노동조합 등 사회단체들이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한다는 태도를 밝힘으로써 고조화되어 가던 북한 정치적 위기가 모면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일부의 북한 정치 지도자들이 소련군 설명에 설득되지 못했으며 그 중에 소련측이 통일한국의 지도자로 생각했던 조만식이었다. 소련 대표들이 그를 설득하려고 몇 번 방문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1946년 1월 5일 조만식을 비롯한 일부의 평남도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들을 해임시키고 그 자리에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는 정치가들을 임명하였다. 김일성이 북한 최고지도자가 되는 길이 이 때부터 열렸다는 평가도 있다.소련군과 달리, 미군은 모스크바 결정의 목적과 신탁통치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철저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느낀 소련군 사령부는 스탈린에게 미군 행위를 비판하는 보고서를 보냈다. 스탈린은 1946년 1월 23일 주소(駐蘇) 미국 대사 해리만을 만나서 이 보고서를 낭독하면서 러치 군정장관을 비롯한 미군이 왜 합의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하였다. 해리만이 그 보고서에 등장한 사람들은 미국 정부의 대표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스탈린은 미국측이 미국도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소련이 이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다고 하였으며 소련 국가 매체인 타스社에 한국 문제에 대한 보도를 준비할 지시를 내렸다. 타스의 보도는 1946년 1월 25일 소련의 정부와 당의 주요 매체에 실렸으며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도 한국까지 전해졌다. 이 번에는 미군이 당황할 차례였다.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서울신문을 통해 “타스 보도는 근거없다”고 주장하였지만 1월 26일 번즈 국무장관이 미군정 정치고문 베닝호프에게 보낸 전보에서 타스 보도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정확하다’고 인정하고 하지장군이 첨부한 타스 보도의 영문 번역본을 “대중이나 관심을 가진 인사들에게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번스의 전보는 2월 9일까지 서울에서 받아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내용은 다른 채널을 통해서 미군정에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1946년 2월 2일 맥아더 장군이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국무부를 비판하면서 “타스 성명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한 후, 한국인들은 미국이 또다시 ‘배신하여’ 팔아넘겼다고 느끼고 있는데, 이번에는 일본인들이 아닌 러시아인들에게 팔았다고 느끼고 있다면서 ”여기서 우리가 다루는 상대가 부유한 미국의 교육받은 한국인들이 아닌, … 교육받지 못한 동양인으로써 … 그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완강하고 광신적으로 집착하며 … 합리적으로 판단을 할 수 없는 이들이라는 점을 국무부“가 이해했으면 좋겠다고 함으로써 미군부와 국무부 간의 모순을 들어냈다. 이처럼, 3월 20일에 미소공동위원회가 불신과 모순이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작업을 개시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한반도의 분단이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고착화되고 한민족 현대사상 최고 비극인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물론, 미소공동위원회 실패의 원인은 많고 책임은 합의를 이루지 못한 양측에 있지만, 그 모든 뿌리는 1946년초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글 사진: 바실리 V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
  • 중국인 최초 ‘윙슈트 입고 히말라야에서 점프’ 성공한 여성

    중국인 최초 ‘윙슈트 입고 히말라야에서 점프’ 성공한 여성

    중국인 최초로 윙슈트(wingsuit)를 착용한 채 히말라야에서 수직 하강에 성공한 기록을 가진 여성의 모험기가 소개됐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의 25일 보도에 따르면 중국 국적의 위인(32)은 지난해 11월, 중국인 최초로 윙슈트를 입고 히말라야를 내려오는데 성공했다. 마치 날다람쥐처럼 생긴 윙슈트는 손과 발 사이에 옷감을 붙인 활강용 특수 낙하산 강하복이다. 스카이다이빙을 더욱 짜릿하게 즐길 수 있는 장비로 알려지면서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최고 속력은 시속 25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 씨는 2년 전까지 미국 시카고에서 평범한 마케팅 매니저로 일했다.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스카이다이빙과 같은 익스트림스포츠에 관심을 보였고, 회사를 그만둔 뒤 미국에서 중국인 최초로 패러슈팅(낙하산 타기) 스쿨을 세워 화제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 이후 위 씨는 윙슈트를 입고 히말라야를 내려오는 새로운 도전에 눈을 돌렸다. 그녀는 “이 도전은 매우 큰 위험이 동반됐다. 고도가 너무 높아 산소 부족이 올 수도 있었고, 난기류에 부딪힐 위험도 커서 죽을 수도 있었다”면서 “그럼에도 히말라야에서 윙슈트 도전을 해본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도전 동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결국 그녀는 도전했고, 무사히 성공했다. 위 씨는 “하늘에 떠 있는 동안에는 내 자신이 개미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날개를 펼치고 속도를 올리면 더 이상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한 마리의 새처럼 자유를 느끼고, 이와 동시에 행복해진다”고 소감을 밝혔다. 현재 위 씨는 전 세계에서 2000번이 넘는 스카이다이빙 경력을 가진 베테랑이다. 이중 500회는 윙슈트를 착용한 도전이었으며,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녀는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녀는 “미국에서 스카이다이빙을 배울 때, 나는 학생들 중 가장 키가 작았다. 언어적 장벽도 커서 선생님의 설명을 알아듣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면서 “초보 시절에는 착륙 도중 실수로 손가락 3개가 부러졌고, 3년 전에는 역시 스카이다이빙을 하다 무릎을 크게 다쳐 3개월 간 휠체어 신세를 지기도 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이어 “하지만 역경을 극복하고 베테랑이 됐다. 지금은 나와 같은 동양인들을 위한 스카이다이빙 스쿨도 운영하고 있다”면서 “나는 스카이다이빙을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스키나 암벽등반, 모터사이클 등의 운동보다 훨씬 안전하다고 강조한다"고 덧붙였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돌체앤가바나, 中온라인상거래 퇴출... 중국인 비하 후폭풍

    돌체앤가바나, 中온라인상거래 퇴출... 중국인 비하 후폭풍

    중국에서 인종차별 논란을 불러 일으킨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돌체앤가바나’가 중국의 주요 온라인 상거래사이트에서 모두 퇴출됐다고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가 23일 보도했다. 중국의 주요 럭셔리 온라인쇼핑몰 ‘세쿠’는 22일 돌체앤가바나를 온라인쇼핑몰에서 뺐다고 발표했다. 이 세쿠 관계자는“도덕성과 성실성이 결여된 업체와는 일을 함께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매출 기준 세계 최대의 온라인 럭셔리 사이트인 ‘육스넷어포터’도 중국은 물론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도 돌체앤가바나의 상품을 완전히 뺐다고 밝혔다. 중국의 최대 온라인 상거래업체인 ‘알리바바’와 ‘JD닷컴’에서도 돌체앤가바나 상품을 찾을 수 없다. 이 사이트에서 돌체앤가바나를 검색하면 검색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돌체앤가바나는 최근 ‘젓가락으로 피자를 먹는 중국인들’이라는 광고를 내보냈다. 이 광고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한 중국 여성이 등장한다. 그는 긴 젓가락으로 피자 등 이탈리아 음식을 먹으려 애쓰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는 결국 손으로 피자를 집어 먹는다. 중국 네티즌들은 이 광고를 포크가 아닌 젓가락을 사용하는 동양인들을 비하한 것이라고 간주해 “동양에 대한 반감을 너무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너무도 어리석고 문화적으로 무감각하다”는 등의 댓글을 달며 불매운동을 벌였다. 이후 이 회사의 디자이너이자 공동 창업자인 스테파노 가바나는 한 네티즌과 논쟁을 벌이면서 “(중국은) 똥 같은 나라”라고 모욕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파장은 더욱 확대됐다. 급기야는 21일 밤 개최 예정이었던 돌체앤가바나 상하이 패션쇼에 초대된 장쯔이, 천쿤 등 유명 연예인들이 패션쇼 불참을 선언했다. 가바나는 논란이 확산되자 “내 SNS 계정은 해킹당했다. 나는 중국과 중국 문화를 사랑한다”고 해명했지만 중국 네티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韓유학생 집단폭행에 英경찰 출동도 안해…교민들 촛불 시위 예정

    韓유학생 집단폭행에 英경찰 출동도 안해…교민들 촛불 시위 예정

    “교민 생존 위협 느껴”…공정 수사·사회 변화 촉구 계획영국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최근 한국인 유학생이 집단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한인 여성 커뮤니티가 촛불 시위를 통해 당국의 철저한 수사와 재발 방지 등을 요구하기로 했다. 재영 교포인 A씨 등은 일요일인 오는 25일(현지시간) 런던 중심가인 옥스퍼드 서커스의 마크스 앤 스펜서 앞에서 촛불 시위를 열기로 했다고 22일 밝혔다. 이곳은 영국 캔터베리 대학에 재학 중인 한국인 유학생 B양이 지난 11일 영국인으로 추정되는 10명가량의 청소년으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한 곳이다. 당시 청소년들이 길을 걷던 B씨에게 쓰레기를 던지며 시비를 걸었고, B씨가 이에 항의하자 바닥에 쓰러트린 뒤 구타했다. 특히 외국인 여성을 표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냐는 증오범죄 논란이 일었다. 주변에 수많은 행인이 있었지만 겨우 2명만 이들 청소년을 막아섰을 뿐 대부분 휴대전화로 이를 촬영하기만 했고, 현지 경찰에 신고했지만 런던 경찰은 아예 출동하지 않았다. 앞서 지난해 10월에도 영국 브라이턴 중심가에서 현지 한국인 유학생 C씨(당시 20세)가 영국인 10대 2명으로부터 샴페인 병으로 얼굴을 가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 다만 C씨 사건과 달리 B씨 사건은 인종차별 범죄인지 여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A씨 등은 이번 사건을 전해 듣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촛불 시위를 제안했다. 런던 중심가에서 동양인 소녀가 폭행을 당하는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데다, 영국 경찰 역시 신고를 받고도 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영 한국대사관의 초기 대응에도 부족한 점이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A씨는 “이러한 사건이 계속 이어질 여지가 많아 많은 교민이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면서 “사회 약자인 어린이와 여성, 장애인, 노인들이 범죄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하고, 영국 정부가 인종과 종교, 신체적 장애 여부에 따른 증오 범죄를 강력히 처벌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영국에서는 안전을 이유로 시위에 촛불을 동원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 이에 LED 촛불이나 종이 촛불, 피켓 등을 활용할 예정이라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A씨는 “저를 비롯해 이번 시위를 준비 중인 이들은 모두 자녀가 있는 여성들”이라며 “아이들의 안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 사회 및 경찰의 변화와 함께 주영 한국대사관,재영 한인의 인권보호를 위한 기관 등에서 교민이나 유학생 안전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17세 253일 ‘슛돌이’ 이강인, 韓 최연소 유럽 1군 데뷔 신화

    17세 253일 ‘슛돌이’ 이강인, 韓 최연소 유럽 1군 데뷔 신화

    국왕컵 선발로 왼쪽 미드필더 맹활약 최대 강점인 ‘왼발 킥’으로 골대 강타 83분간 대담한 돌파… 팀은 2-1 승리‘슛돌이’ 이강인(17·발렌시아)이 한국 선수 역대 최연소로 유럽 1군 무대에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기술적 재능뿐만 아니라 그동안 유럽에서 활약했던 한국 선수로는 흔치 않은 포지션(경기 조율형 미드필더)이어서 향후 성장 가능성이 더욱 기대된다.이강인은 31일 스페인 사라고사 에스타디오 데 라 로마레다에서 열린 스페인 국왕컵(코파 델레이) 에브로와의 32강 1차전에 선발 출전했다. 이날 만 17세 253일의 나이로 데뷔한 이강인은 남태희가 프랑스 리그앙 발랑시엔에서 세운 최연소 유럽 프로축구 데뷔 기록을 약 5개월 앞당겼다. 이강인은 1919년 창단한 명문 발렌시아의 100년 역사를 통틀어 처음으로 1군 무대를 밟은 동양인 선수라는 기록도 세웠다. 발렌시아는 “이강인은 1군 경기를 소화한 구단 사상 8번째로 어린 선수이자, 최연소 외국인 선수가 됐다”고 밝혔다. 이날 이강인은 등번호 34가 적힌 유니폼을 입고 왼쪽 측면 미드필더로 나섰다. 주눅 들지 않는 적극적인 돌파로 인상적인 장면을 여러 차례 만들었다. 특히 이강인은 자신의 강점인 ‘왼발 킥’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왼쪽 코너킥 상황에선 전담 키커로 활약했으며 후반 11분엔 아크 정면에서 왼발 중거리 슈팅을 때려 골대를 강타 했다. 볼을 지키고 상대를 제치고 나가는 ‘온더볼’ 능력도 눈에 띄었다. 이강인은 83분을 뛴 뒤 알렉스 블랑코와 교체됐다. 발렌시아가 2-1로 이겼다. 2007년 KBS ‘날아라 슛돌이’에 출연해 ‘축구 천재’로 주목받았던 이강인은 2011년 스페인 발렌시아 유소년팀에 입단한 이후 연령별 팀을 거쳐 마침내 프리메라리가 공식 경기에 나서는 등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뛰어난 재능과 성장세를 보여 2013년 발렌시아와 6년 재계약을 체결했고 지난 7월엔 4년 재계약을 맺었다. 발렌시아는 이때 8000만 유로(약 1035억원)의 바이아웃(최소 이적료) 조항을 삽입했다. 올해 스페인축구협회의 귀화 제안도 받았지만 거절했다. 이강인은 기술이나 포지션에서 모두 전형적인 한국 선수 유형에서 벗어나 있는 선수다. 그동안 ‘레전드’로 인정받아 온 한국 선수들이 대부분 최전방 공격수나 윙어 역할이었다면 이강인은 중앙에서 경기를 조율하면서 공격에 가담하는 유형의 미드필더다. 비교하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유벤투스), 리오넬 메시(FC바르셀로나)보다는 중앙과 측면을 오가면서 팀 전체를 이끌고 찬스를 만들어 내는 안드레스 이니에스타(비셀 고베)나 다비드 실바(맨체스터시티) 스타일에 가깝다.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하면서도 공격에 가담하고, 측면도 소화할 수 있어 멀티성도 갖췄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기술적 재능은 이미 슛돌이 시절부터 압도적이었다”며 “스페인에서 경기 조율, 찬스 메이킹 능력을 키웠다. 이강인의 역할과 축구 스타일이 지니는 가치는 매우 크다”고 말했다. 2003년 한국인 최초로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한 이천수 JTBC 해설위원은 “한 팀에 여러 유형의 선수가 있지만 킥력이 있는 선수는 세트플레이 등을 생각해서도 뺄 수가 없다”면서 “이강인은 기술적인 부분은 문제가 없고 킥력 또한 좋기 때문에 강점을 살린다면 경기를 더 많이 뛸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아직 나이도 어리고, 이제 시작일 뿐이니 잘해야 한다는 조급함만 없으면 스페인 무대에서도 성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조각가 박은선, 이탈리아 ‘조각 도시’ 피에트라산타서 최고조각상 수상...동양인으로 3번째

    조각가 박은선, 이탈리아 ‘조각 도시’ 피에트라산타서 최고조각상 수상...동양인으로 3번째

    조각가 박은선(53)이 이탈리아 서부의 조각 도시 피에트라산타에서 주는 최고 조각상을 받았다. 피에트라산타 시는 도시의 명성을 빛낸 조각가에게 부여하는 상인 ‘프라텔리 로셀리’의 제28회 수상자로 박 조각가를 선정해 28일 시상했다. 알베르토 스테파노 조반네티 시장은 이날 열린 시상식에서 “이제 이곳 시민이나 다름없는 박은선 조각가는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으며 피에트라산타의 문화 대사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도시의 예술적 역동성을 증진하는 데 기여했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25년간 이곳에 거주해온 박 조각가는 1991년 제1회 상을 탄 페르난도 보테로 2회 수상자인 폴란드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이 등 세계적 조각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한국 작가가 이 상의 주인공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동양인으로는 1995년 야스다 칸 등 일본인 조각가 2명에 이어 3번째다. 박 조각가는 이날 시상식에서 “25년 동안 차가운 돌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작업이었는데 큰 상까지 받게 돼 뜻깊고 영광스럽다”며 “피에트라산타를 위해 더 기여할 방법을 찾아보고 한국과 이탈리아의 조각 교류를 위해서도 힘을 보태고 싶다”고 덧붙였다. 경희대 조소과를 거쳐 이탈리아 카라라 국립미술원을 졸업한 그는 피에트라산타에서 생산되는 대리석과 화강석을 이용해 동양적인 곡선과 조형미가 살아있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일구며 이탈리아와 유럽에서 최근 부쩍 이름이 높아졌다. 유럽과 미주 지역을 오가며 굵직한 전시를 잇따라 열어 세계적인 작가로 입지를 다졌다고 평가받는다. 지난 6월에는 서울에서 9년 만에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낭만파로 떠난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 윤홍천

    낭만파로 떠난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 윤홍천

    소니뮤직은 슈만과 슈베르트 등 낭만파 작곡가들의 곡을 모은 피아니스트 윤홍천의 새 독주앨범을 발매됐다고 23일 밝혔다. 이번 앨범은 이들 작곡가와 클라라 슈만, 리스트,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등의 곡을 모았다. 슈만의 ‘유모레스크 op.20’, 슈베르트의 춤곡 ‘Valses sentimentales D779’를 비롯해 리스트가 편곡한 슈베르트 가곡 2곡 등을 함께 연주해 녹음했다. 앞서 윤홍천은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 등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이후 낭만파 작곡가로 다시 관심을 옮기고 있다. 윤홍천은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쇼팽과 리스트의 곡들을 많이 연주했는데,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슈베르트와 슈만의 작품을 좋아하게 됐다”며 “슈만의 곡을 연주할 때는 자유로워지는 것 같고, 슈베르트의 곡을 연주할 때는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고 말했다. 윤홍천은 올해 한국과 독일 등에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프로그램인 ‘친애하는 모차르트’ 공연에 나서고 있다. 지난 7월 두차례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리사이틀을 열었던 그는 11월 1일과 8일 서울 금호아트홀에서 남은 전곡 연주 사이클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독일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홍천은 2011년 독일 바이에른주 문화부장관으로부터 ‘젊은 예술가상’을 받고 독일 빌헬름 캠프 재단의 첫 동양인 이사진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독일 음반사 욈스 클래식스에서 나온 그의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음반은 영국 그라모폰 ‘에디터스 초이스’에 선정됐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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