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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인에게 해외 여행은 ‘근대에 대한 동경’이었다

    조선인에게 해외 여행은 ‘근대에 대한 동경’이었다

    근대 조선의 여행자들/우미영 지음/역사비평사/529쪽/2만 5000원 “밤 되어 시모노세키 항에 정박하고 히로시마현에서 아침 해 바라보았지. 해군과 육군을 양성하느라 산자락 바닷가에 길을 내었고 산은 푸르게 숲이 우거졌으니 국방의 위력을 알 수 있었네.”1908년 ‘대한학회월보’에 실린 유학생 옥구생의 글 ‘동도잡시’의 일부다. 그는 당시 선진국이었던 일본에 도착해 군대와 울창한 산림을 마주하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강해지는 일본을 본 그는 기울어가는 조선을 돌아보며 “조국을 크게 세우고 다시금 억만세를 외쳐보리라”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병탄 사이에 놓인 유학생의 일본에 관한 부러움과 조국에 대한 다짐이 이렇게 교차한다. ‘근대 조선의 여행자들’은 당시의 다양한 여행자와 그들의 여행 양상, 그리고 여기에 담긴 여행자들의 시선을 담았다. 학생, 기자, 작가, 학자, 정치인을 비롯해 일반 관광객들의 여행기는 물론 당시 문학작품과 관공서 글 등을 수록하고 분석했다. 지금은 여성 대부분이 여행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지만, 당시엔 교육받은 극소수 여성만 가능했다. 그 시대 여성들의 외국 여행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억압받는 여성에 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여성 운동가이자 교육자인 박인덕이 1928년 한 잡지에 기고한 ‘조선여자와 직업문제’에도 이런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시를 향해 올 때 역장마다 여역원(여성 역무원)들이 간단한 행장을 차리고 일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어디든지 사업이란 명칭이 있는 곳에는 남녀가 같은 권리를 가지고 일을 한다. (중략) 우리 가정 같아서야 일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가정 사업에 헤매이기에 감히 다른 일은 염두에도 못 두게 되고…”라고 지적한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한 수학여행에 관한 내용도 흥미롭다. 수학여행이 학교 정기 행사로 정착된 시기는 1920년쯤부터다. 일제는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 발표 이후 실용주의를 부르짖으며 실업교육에만 치중하다 3·1운동 이후 교육정책을 달리한다. 중등교육과정에 인문교육을 시작했으며, 수학여행은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상 여행은 유흥으로 비칠 수 있다. 동아일보는 1926년 10월 11일자에 “조선의 경제 상태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여행 시기가 농가의 추수기와 맞물려 인력적으로 낭비”라고 지적하기도 한다.책은 1~5부까지 여행과 여행자의 유형에 따른 다양한 여행기를 수록하고 분석했다. 다만 6부에서는 중외일보사 신문기자인 이정섭을 별도로 빼내 분석했다. 중외일보사는 1920년대 국내외 변화에 맞춰 ‘세계 시찰’을 목적으로 그를 중국과 유럽에 파견했다. 일본에서는 보통선거 시행이 가시화하고, 사회주의 운동이 진전될 때였다.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북벌을 전개할 무렵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민족주의운동이 고조되는 등 역동적인 움직임이 보였다. 지금까지 시찰자 대부분이 일본 식민지 시선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반면, 그는 객관적이고 당당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여행기에서 근대 조선의 음울한 분위기가 조금씩 벗겨지는 것도 이즈음이다. 책은 저자가 썼던 논문을 단행본으로 바꾸며 다소 딱딱하게 읽힌다. 그러나 근대 조선에서의 여행은 어땠는지 살펴보는 여정은 그 자체로 즐거운 여행임에 틀림없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한국당, 황교안에 읍소 왜...? “선대위원장 맡아달라”

    한국당, 황교안에 읍소 왜...? “선대위원장 맡아달라”

    자유한국당이 최근 황교안 전 국무총리를 찾아가 6·13지방선거를 위한 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읍소한 것으로 26일 전해졌다.동아일보에 따르면 지난주 한국당 홍문표 사무총장은 황 전 총리에게 ‘험지’로 분류되는 서울 노원병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 의향을 먼저 타진했다. 그러나 황 전 총리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한국당 측은 “당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지방선거를 이끌어 달라”고 다시 부탁하며 삼고초려(三顧草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황 전 총리는 이에 확답하지 않고 숙고 중이라고 한국당 관계자는 말했다. 이 관계자는 “황 전 총리는 보수의 가치를 구현할 싱크탱크 등 다른 차원의 활동을 구상하고 있기 때문에 직접 현실 정치에 뛰어드는 것에 대해 생각할 부분이 많은 듯하다”고 전했다. 황 전 총리는 조만간 거취를 결정해 한국당에 통보할 예정이다. 지난해 초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황 전 총리는 여론조사 지지율이 20%에 육박하면서 대선주자 2위까지 올랐지만 출마하지 않았다. 한국당은 황 전 총리를 영입하면 보수표 결집 효과를 거두는 것은 물론이고 댓글 여론조작 사건 및 남북 정상회담 국면에서 당의 지지세를 크게 확장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당은 이날 6·13지방선거 슬로건(표어)으로 ‘나라를 통째로 넘기시겠습니까?’로 결정했다. 홍준표 대표는 당 회의에서 “(문재인 정부) 1년 동안 한국 사회는 국가사회주의로 넘어가고 있다. ‘나라를 통째로 북에 넘기겠습니까?’ ‘나라를 통째로 좌파들에게 넘기겠습니까?’ ‘지방까지 통째로 좌파들에게 넘기겠습니까?’ 이게 지방선거를 위한 구호”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안희정 경공모 강연 뒤 “회원들 눈빛 이상하다” 측근 조언

    안희정 경공모 강연 뒤 “회원들 눈빛 이상하다” 측근 조언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올해 초 김모(49·드루킹)씨가 이끄는 ‘경제적 공진화 모임’(경공모) 강연을 마친 뒤 한 측근이 조심하라는 조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안희정 전 지사가 경공모에 초빙돼 강연을 한 것은 지난 1월 13일 서울 경희대였다. 당시 경공모 회원 등 500여명이 강연에 참석했다. 당시 안희정 전 지사를 보좌해 강연장을 찾은 한 측근은 “강연에 다녀온 직후 ‘사람들의 눈빛과 행동이 이상해 보인다. 앞으로 (경공모 사람들과) 얽히지 않도록 조심하시라’고 조언했다”고 동아일보에 전했다. 당시 강연은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의 소개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충남도가 준비한 강연자료를 보면 김경수 의원은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드루킹 측을 안희정 전 지사에 소개했다고 한다. 이날 강연 일정은 충남도의 외부 강연 담당자도 모른 채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안희정 전 지사의 측근에 따르면 드루킹은 이날 안희정 전 지사에게 인사 청탁 등의 민감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고 측근은 전했다. 이 측근은 “자신이 요청해 성사된 강연인데도 드루킹은 강연 자체에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대신 같이 있는 사진을 많이 남기려 하는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조양호 수행 매뉴얼 ‘좌측 1보 앞 동행’…현대판 귀족

    조양호 수행 매뉴얼 ‘좌측 1보 앞 동행’…현대판 귀족

    ‘VIP 시야 내 좌측 전방 1보 앞에서 동행’ ‘이동경로 주변 유명 식당 위치, 가격 등 파악’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 총수 일가를 보좌하는 ‘수행 매뉴얼’이 논란이다. 동아일보는 23일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을 비롯해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 조현아 칼호텔네트워크 사장,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 등 총수 일가를 수행할 때 지켜야 할 점을 망라한 이른바 ‘VIP 수행 체크리스트’가 있다고 보도했다. 자료에는 비행기 또는 차량으로 수행할 때 직원들의 행동 지침이 담겨 있다. 지침은 7개 항목별로 돼 있고, 세부 항목은 50여개에 달한다고 보도는 전했다. 내용을 살펴보면 기업 총수에 대한 기본 의전을 넘어서 마치 중세 시대 귀족과 하인, 양반과 노비 관계를 보는 듯하다. ▲좌측 전방 1보 앞서 동행하며 안내할 것▲VIP를 주차장으로 안내하는 것은 결례▲주차 시 VIP 혼자 계시지 않도록 할 것▲운전은 두 손으로 할 것▲이동경로 주변 음식점 정보와 음식 특성·가격 숙지▲호텔 사전 답사▲항공기 출발 후 30분 이상 공항 대기▲VIP 필요를 채워주려는 마음 자세▲잘못된 점 시인하기 매뉴얼엔 이 같은 내용의 이행 여부를 Y(YES), N(NO)으로 표시하게 돼 있다. 자료는 몇년 전부터 팀장을 거쳐 현장 승무원에게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대한항공 현직 승무원은 “제대로 숙지하지 않으면 DDY가 말 그대로 경을 친다”고 전했다. DDY란 조양호 회장을 가리키는 코드명이다. 다른 승무원은 “이런 지침도 아무 의미 없다”고 말했다. 지침을 따라도 총수 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2014년 유럽행 비행기에 조양호 회장의 부인 이명희 이사장이 기내 면세품을 구입했을 때, 한 승무원은 ‘이명희 이사장이 면세품을 사면 결제하지 말라’는 내용대로 결제를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명희 이사장이 버럭 화를 내며 막말과 욕설을 했다는 것이다. 직원들이 과잉 의전 탓에 휴일을 반납하고 심지어 발음 연습까지 한다는 증언도 나왔다. 한 승무원은 “3, 4년 전 삼남매 중 1명이 국내선 항공편을 이용한다는 연락을 받고 쉬는 날인데 불려나가 매뉴얼 암기를 해야 했다”면서 “‘VIP는 콜라를 좋아하고 커피에는 뭘 넣어야 한다’고 말해 속으로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발음까지 교정받았다”고 전했다. 역시나 대한항공 관계자는 이 같은 증언들에 대해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명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물을 달라”… 가뭄 식수난

    [그때의 사회면] “물을 달라”… 가뭄 식수난

    1960년대 서울의 상수도 보급률은 50~60%였다. 10가구 중 네댓 가구는 우물물이나 공동수도에 의존했다는 말이다. 가뭄이 심할 때면 우물도 말라붙고 수돗물도 제한적으로 공급해 시민들은 고통을 겪었다. 특히 마실 물조차 구하기 어려운 고지대 주민들의 고통은 극심했다. 1965년 봄 서울에 6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이 닥쳤다. 기우제도 지냈지만 소용없어 동네 우물은 바닥을 드러냈고 공동수도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독립문 근처에 살던 주민들은 물을 구하러 15리(약 6㎞)나 떨어진 봉원사나 세검정까지 다녔다(경향신문, 1965년 6월 2일자). 자기 땅인지는 모르지만 봉이 김선달처럼 약수를 돈을 받고 팔았다. 홍제동 논골약수터에서는 한 여인이 물 한지게를 2원씩에 팔아 한 달에 400~500원을 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쌀 한 가마 값이 3500원일 때이니 수입이 적지 않았다. 보광동 공동수도는 시간을 정해서 제한급수를 했는데 물을 확보하려고 24시간 주민들이 장사진을 쳤다. 시에서는 급수차를 운영했는데 몇 대에 불과해 급수차 운전기사는 주민들이 모아준 돈을 받는 비리에 엮일 만큼 갑의 위치에 있었다. 도심지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급주택은 수세식 화장실에 물이 나오지 않아 악취가 진동했고 목욕탕은 휴업할 수밖에 없었으며 음식점도 물이 없어 문을 닫았다. 서울시는 군의 도움을 받아 공동우물을 새로 팠지만 물 부족을 해결하지 못했다. 1970년에도 가뭄이 극심했다. 물을 구하려는 경쟁은 범죄를 불렀다. 서울 성북구의 어느 동에서 물을 얻으러 간 아낙네와 물을 못 주겠다는 집주인 사이에 싸움이 붙어 살인사건으로 번졌다(경향신문, 1970년 6월 1일자). 서울 용두동에서는 수도관에 구멍을 뚫어 수돗물을 중간에서 빼낸 사람들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영등포에서는 급수차 물을 받으려고 서 있다 새치기 시비가 붙어 폭행사건으로 이어진 일도 있었다(동아일보, 1970년 5월 23일자). 시위와 농성도 잦았다. 서울 봉천동 주민들은 상도동 배수펌프장으로 몰려가 물을 달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66년 8월 서울 염리동 주민 200여명은 서울시청 2층으로 몰려들어가 “물을 달라”며 집단농성을 벌였다. 1967년 7월 서울 구로동 주민들이 선거 전에 그나마 나오던 물이 선거가 끝난 뒤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며 서울시청 안에서 농성하는 바람에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서울 응암동 시영아파트 주민들도 넉 달째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시청에서 물을 달라며 농성했다. 수도 사정은 점차 나아졌지만 마실 물이 부족한 상황은 1990년대 초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사진은 1968년 5월 서울의 어느 동네에서 급수차의 물을 받으려고 물지게를 지고 줄지어 선 시민들.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부고]

    ●이수근(부산공업고등학교 교사)수성(부산 사하구청 근무)수명(주이탈리아 한국문화원장)씨 부친상 18일 부산동아대학교병원, 발인 20일 오전 7시 (051)256-7070 ●송재봉(충북시민재단 상임이사)씨 부친상 18일 강원 정선장례식장, 발인 20일 오전 9시 (033)562-4444 ●이종국(KBS대전방송총국 전 보도국장)씨 부친상 18일 충북 옥천농협장례식장, 발인 20일 오전 8시 (043)731-4443 ●남상인 상훈(사업)정숙(설렘산후조리원장)미희 금희씨 모친상 최권호(사업)이진녕(동아일보 미디어연구소장)씨 장모상 18일 부산 시민장례식장, 발인 20일 오전 8시 (051)636-4444
  • [길섶에서] 별 같은 산/서동철 논설위원

    충청도 시골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다 고개를 들어 보면 어김없이 ‘세상에 이렇게 별이 많았던가’ 하고 감탄하게 된다. 하긴 서울에서는 하늘을 올려다볼 일도 없지만, 그런다 한들 띄엄띄엄 그것도 고장 난 형광등이 점멸하듯 보였다 말다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자리에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별에 그치지 않는다. 아침 출근길, 옛날에는 ‘국제극장 앞’이라고 부르던 ‘동화면세점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동아일보 쪽으로 광화문 사거리 큰길을 건넌다. 횡단보도 녹색 신호가 몇 초 남지 않았을 때도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중간의 ‘교통섬’에서 다음 신호를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무료하지 않은 것은 물론 재미있다. 광화문과 북악산이 빚어내는 경치 때문이다. 거기 광화문이 있고, 거기 북악산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자세히 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시내의 벚꽃은 이미 다 졌지만, 북악산 정상 부근은 연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지난달 아스팔트에 차가운 봄비가 내릴 때도 산꼭대기는 눈이 내려 하?다. ‘도심의 섬’에 갇히는 재미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삼분(三粉) 파동

    [그때의 사회면] 삼분(三粉) 파동

    쌀이 남아돌고 식료품, 생필품이 넘쳐나는 요즘이지만 예전엔 사정이 달랐다. 불쾌지수가 80을 넘던 1963년 6월 어느 날 서울의 설탕 직매소마다 꼭두새벽부터 설탕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동아일보 1963년 6월 13일자). 원당 수입이 주는 바람에 설탕 공급량이 달려 ‘설탕 파동’이 벌어진 것이다. 설탕 파동의 근본 원인은 미국과 대치하던 쿠바가 서방세계에 원당 수출을 중지함으로써 벌어졌다. 그 여파가 1963년 우리나라에까지 불어닥쳤다. 설탕 품귀로 설탕값은 자고 나면 뛰어올랐다. 사재기가 벌어졌다. 1963년 6월 6일 오전까지만 해도 한 근(600g)에 50원 하던 것이 다음날 75원으로 하루 만에 무려 50%나 뛰었다. 4~5개월 사이에 설탕값은 10배나 올랐다. 설탕은 시중 백화점 등에서도 팔았지만 정부는 직매소를 두어 일종의 배급제를 시행했다. 한 사람당 한 근 이하로 배급량을 제한했지만 직매소에서 파는 설탕은 시중보다 쌌다. 당시 시중 가격은 한 근에 60~70원이었지만 직매소에서는 37원이었으니 거의 반값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래도 싼 설탕을 구하려고 줄지어 선 것이다.설탕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때를 전후해 밀가루와 시멘트도 가격이 몇 배로 뛰어 가뜩이나 힘들고 배고픈 국민 생활을 위협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세 물자의 가격 급등은 ‘삼분(三粉) 파동’이라 불렸다. 1963년에는 그것도 보릿고개 시기에 쌀값도 두 배 반이나 뛰었는데 밀가루값은 4배나 폭등했다. 굶주린 시민들은 폭동이라도 일으킬 태세였다. 부산에서는 1963년 5월 어느 날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밀가루 도매상에 몰려가 문짝을 부수는 등 소동을 벌였다. 정부는 마침 분식을 장려하며 식당에서 쌀밥을 팔지 못하게 했는데 밀가루마저 품귀 현상을 빚어 식당 영업을 중단하다시피 했다. 시멘트도 사정이 마찬가지여서 당시 서울 이화여대 앞에 있던 대한양회 직매소 앞에는 집 수리 등을 위해 시멘트를 사려는 사람들 오륙백 명이 밤샘을 하며 진을 쳤다. 3분의1은 구하지도 못하고 돌아갔다. 시멘트 판매 가격은 출고가의 거의 두 배였다. 시멘트 가격 앙등으로 각종 건설사업이 차질을 빚었는가 하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도 타격을 주었다. ‘삼분’(三粉)의 가격 폭등으로 제조사들은 폭리를 취했다. 파동은 국제적인 원료 공급 부족과 매점매석에 의한 중간유통업자의 가격 조작도 원인이라고 하지만 진앙지는 정치권이었다. 정치권이 재벌, 관료와 결탁해 이런 일이 벌어졌으며 이익 중 일부가 당시 여당인 공화당 등에 정치자금으로 유출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경향신문 1964년 12월 24일자). 풀떼죽으로 연명하던 국민을 고통에 빠뜨리면서 정치권과 재벌은 배를 불린 것이다.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굴하지 말고 달려라-초고속! 참근교대(도바시 아키히로 지음, 이규원 옮김, 북스피어 펴냄)일본 에도시대 막부들이 다이묘(지방영주)들을 통제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에도와 영지를 오가도록 강제한 일종의 인질제도를 일컫는 ‘참근교대’를 둘러싼 일화를 그린 소설. 참근을 마치고 돌아온 작은 지방의 영주 마사아쓰에게 5일 만에 다시 참근하라는 막부의 명령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흥미진진하게 그린다. 388쪽. 1만 4000원.나.36.이승엽(이승엽 지음, 김영사 펴냄)인생에 홈런 한 방이 필요한 이들에게 건네는 한국 야구의 살아 있는 전설 ‘라이언킹’ 이승엽의 이야기.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숨은 노력과 고통, 이승엽을 만든 태도와 사람, 두려움과 고난을 이겨 온 시간을 담았다. 300쪽. 1만 5000원. 애주가의 대모험(제프 시올레티 지음, 정영은 옮김, 더숲 펴냄)술을 통해 세상을 탐험해 나가는 음주 모험가인 저자가 1년간의 음주 여행을 통해 세계사·문화사·지리학을 넘나들며 술에 관한 거의 모든 지식이 담긴 ‘음주 인문학’을 탄생시켰다. 496쪽. 1만 8000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하재영 지음, 창비 펴냄)소설가이자 동물단체 활동가인 저자가 번식장에서 보호소까지 버려진 개들을 추적하고 개산업에 종사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며 한국 개산업의 실태를 고발한 르포. 316쪽. 1만 5000원. 웰빙·웰다잉(박명윤 지음, 라이크출판사 펴냄)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의 최대 욕망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다. 2010년부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건강 칼럼을 게재해 온 저자가 100세 시대를 맞아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데 도움이 되는 칼럼들을 담았다. 366쪽. 1만 8000원. 징검다리꽃(성민선 지음, SUN 펴냄)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지낸 저자가 정년퇴직 후 새롭게 배우는 자세로 수필을 쓰기 시작해 46편의 이야기가 담긴 첫 번째 수필집을 펴냈다. 256쪽. 1만 3000원.
  • 미국, 북한 비핵화 때 대사관-연락사무소 개설 검토

    미국, 북한 비핵화 때 대사관-연락사무소 개설 검토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북한이 북미정상회담에서 비핵화를 위해 구체적 조치에 나서면 대사관 설치 등 반대급부로 제시할 ‘당근’에 대해 검토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12일 동아일보는 정부 소식통을 인용, 미국이 북미정상회담이 잘 진행될 경우 ‘부분적 관계 정상화’에 나서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은 그 동안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밝힌 단계적·동시적 비핵화에 대해 ‘조건 없는 비핵화’를 강조하며 사실상 반대해왔다. 그러나 북미 실무접촉 과정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한 만큼 북한이 실질적 비핵화에 나설 수 있도록 구체적인 미국의 대응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과의 사전 실무접촉에서 ▲워싱턴-평양에 연락사무소 설치 ▲북한에 인도적 지원 개시 ▲양국 대사관 설치 등을 거론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대북제재 완화 등 경제적 지원 방식은 일단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박근혜, 1심 선고 직후 유영하에 ‘격하게 대응 말라’ 당부”

    “박근혜, 1심 선고 직후 유영하에 ‘격하게 대응 말라’ 당부”

    박근혜 전 대통령이 6일 1심 선고 직후 유영하 변호사에게 지나친 외부 대응을 하지 말도록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10일 채널A는 박 전 대통령 측근의 말을 인용해 박 전 대통령이 1심 선고 직후 이뤄진 유영하 변호사와의 접견 중 “(선고 결과에 대해) 너무 격하게 대응하지는 말라”고 당부했다고 보도했다. 유영하 변호사가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4년이 선고된 것에 대해 언론 인터뷰 가능성을 비추자 감정적인 대응을 자제하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이날 접견 내내 박 전 대통령은 특별한 표정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유영하 변호사는 9일과 10일에도 한 차례씩 박 전 대통령을 접견하고 향후 대응을 논의했다고 동아일보는 전했다. 항소 여부와 관련해 박 전 대통령 측은 아직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은 상태다. 이번 1심 선고의 항소 만료일은 13일로, 그때가 돼서야 항소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 측은 국선 변호인들에게는 자체적으로 항소를 제기하지 말라고 전달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만약 항소한다면 사선 변호인을 다시 선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1심 재판에 대한 항의 표시로 항소 포기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광복 후 유명 역사학자들 월북·납북… 남한은 식민사학자들 장악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광복 후 유명 역사학자들 월북·납북… 남한은 식민사학자들 장악

    북한의 역사학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먼저 아래 글을 보자.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에 성공하자 그들의 소위 역사학자들은 조선역사에 대해서 이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들이 입증한 사실의 가장 중요한 것이란 과연 어떠한 것들인가? 첫째 서기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약 500년 동안 오늘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漢)나라 식민지인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이요, 둘째 신라·백제와 함께 남조선을 분거하고 있던 가라가 본래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요….” ‘조선’만 ‘한국’으로 바꾸면 아직도 한국 사학계가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한다고 비판하기 위해 엊그제 쓴 글 같다. 그러나 이 글은 ‘임꺽정’(林巨正)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1949년에 쓴 ‘조선의 고고학에 대한 일제 어용학설의 검토(상·하)’라는 글의 일부다. 윗글은 일제의 식민사학이 두 축으로 되어 있다고 분석한 글이다. 하나는 낙랑군이 서기전 108년부터 서기 313년까지 500여 년간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평양설’이고, 다른 하나는 가야가 임나라고 주장하는 ‘가야=임나설’이다.홍명희는 1948년 4월 백범 김구와 함께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 참석차 방북했다가 내려오지 않은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였다. 아들 홍기문도 훈민정음과 향가 및 이두(吏讀) 등에 정통한 국어학자였는데, 홍씨 부자는 국어뿐만 아니라 국사에도 해박했다. 정상적인 학자들이라면 국어와 국사는 떨어질 수 없다.●北은 ‘낙랑=평양설’ 1949년 이미 비판 홍기문이 1949년에 이미 ‘낙랑=평양설’을 비판한 것은 남한 학계에서 ‘낙랑=평양설’이 100년 전에 논증이 끝난 ‘정설’이라고 우기는 것과 잘 대비된다. 더구나 이때는 김일성 일가 중심의 주체사관이 등장하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이런 글들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다. 북한이 역사학을 남북한 체제 경쟁의 주요한 요소로 설정한 데서 나온 글들이기 때문이다.1945년 10월 10~13일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이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박헌영이 당수인 조선공산당에서 북한 지역을 떼어 독립하겠다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주장했다. 오기섭, 정달현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한 나라에는 하나의 공산당만 존재한다’는 코민테른(제3국제 공산당)의 ‘1국1당주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반대했지만 소련 군정이 지지하는 김일성의 주장이 관철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같은 해 10월 2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치되었다. 이 대회에서 북한을 먼저 사회주의 체제로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남한까지 사회주의화하겠다는 이른바 ‘민주기지론’을 채택한 것은 ‘북조선분국’ 설치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북한에 먼저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고 남한과 체제 경쟁에 나서 통일하겠다는 의미였다. 북한은 이때 역사학을 체제 경쟁의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 ●南선 식민사관을 정설 인정 비난 자초 1946년 7월 3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김일성은 남한에 파견원을 보내 유수한 역사학자들을 초청했다. 박시형·김석형·전석담 같은 마르크시스트 역사학자들이 김일성의 초청에 응해 월북했다. 이외에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였던 역사학자 백남운도 1947년 5월 여운형 등과 근로인민당을 결성해 부위원장을 역임하다가 월북했다. 식민사관에 비판적인 남한의 역사학자 중에서는 국학대학 학장 정인보와 안재홍 등 소수만 남게 되었다. 그나마 이들도 6·25전쟁 때 모두 납북되고 말았다. 그 결과 남한에는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이병도·신석호 등만 남아서 역사학계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들이 북한의 학자들처럼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역사학에 의문을 품고 광복된 조국에 맞는 새로운 역사학 연구 기풍을 일으켰다면 지금 남한의 역사학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북한이 남한을 식민지 등으로 폄하하는 논리가 궁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병도·신석호 등은 조선총독부에서 조작한 역사학을 하나뿐인 ‘정설’로 승격시키고 이를 비판하는 모든 학설을 이단으로 몰아 강단과 국사관련 국가기관에서 내쫓았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가 왜곡한 ‘낙랑군=평양설’이 이미 100년 전에 확립된 ‘정설’이라는 망발이 지금까지 횡행하면서 남한 사학계는 여전히 조선총독부를 추종한다는 비난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패수, 신채호 “요령성에” 이병도 “청천강” 북한은 1947년 2월 17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내에 ‘조선력사편찬위원회’(이하 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회는 “가장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사상에 의거해서 조선민족의 장구한 역사를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옳게 표현”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고대부터 오늘날까지’라는 연속성은 역사학의 가장 기초이다. 그러나 남한은 이른바 전공이란 칸막이로 역사학과 다른 학문을 단절시키고, 역사학 내에서도 각각의 전공으로 서로 단절시켜서 ‘전공이 아니라서…’를 입에 달고 사는 분절적 역사학자들만 양산했다. 위원회의 위원장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투옥되었던 이청원이 맡았다. 이청원은 최익한의 사위였는데, 최익한은 조선 말기 영남 유림의 거두이자 파리장서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곽종석의 제자이자 사회주의자였고 1938년부터 ‘동아일보’에 ‘여유당전서를 독(讀)함’을 연재했던 다산 정약용 전문가였다. 위원회는 1948년 10월 2일 관할 기관을 교육성으로 이관했는데, 위원장은 교육상(敎育相: 교육부 장관) 백남운이 겸임했다. 위원회에는 백남운·박시형·김석형·김광진 등의 역사학자와 도유호 같은 고고학자뿐만 아니라 홍명희·한설야·리기영 등의 문학가들과 최창익 등의 정치가들도 참여했다. 그야말로 범국가적인 위원회였다. 이 위원회의 기관지가 앞의 홍기문의 글을 실은 ‘력사제문제’(歷史諸問題)였다. ‘력사제문제’는 1948년부터 1950년 6·25전쟁 직전까지 만 2년이란 짧은 기간에 18집이나 간행되었다. 고대사에 관한 여러 논문이 실렸는데, 그중 하나가 정세호가 1950년 ‘력사제문제’ 16호에 실은 ‘고조선의 위치에 대한 일고찰’이고, 또 하나가 17호에 실은 정현의 ‘한사군고’(漢四郡考)다. 정세호와 정현의 논리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고조선의 서쪽 강역이 지금의 북경 부근까지 이르렀다가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1000~2000리의 땅을 빼앗긴 이후 지금의 대릉하와 요하 사이까지 밀렸다고 보고 있다. 한사군도 당연히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보았다. 남한에서 고조선의 강역을 평안남도에 국한했던 것에 비교하면 큰 차이였다. 이런 역사인식은 다분히 단재 신채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였던 패수(浿水)의 위치에 대해서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은 압록강(쓰다 소키치)·청천강(이병도)·대동강(이나바 이와기치) 등 한반도 내의 강으로 비정했지만 정세호와 정현은 지금의 요하(遼河) 부근으로 비정했다. 그것도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1000~2000여리의 땅을 빼앗겨 축소된 이후의 패수가 그렇다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패수의 위치를 지금의 요령성 해성(海城)시로 비정했는데, 정현은 ‘한사군고’에서 “(신채호는) 패수를 지금 해성현에 있는 헌우락(軒芋樂)이라고 했는데, 참으로 탁월한 고찰 방법이다”고 높였다. ●신채호를 北 “탁월한 고찰” 南 “또라이”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남한에서는 지지난 정권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장으로 연간 300억원대의 예산을 주무르던 한 역사학자가 공개 학술대회 석상에서 “단재 신채호는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라고 폄하했다. 신채호의 학설을 ‘참으로 탁월한 고찰’이라고 보는 북한학계와 ‘또라이, 정신병자’로 보는 남한학계 사이의 괴리는 클 수밖에 없다. 더구나 북한 학계는 1960년대 초반까지 고조선의 중심지와 낙랑군의 위치를 고대 요동으로 보는 리지린 등의 문헌사학자들과 평양으로 보는 도유호 등의 고고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을 거치며 학설을 정리해 나갔다. 일체의 논쟁을 봉쇄하고 ‘낙랑군=평양설’이 ‘정설’이라는 따위의 비학문적 논리로 문제제기 자체를 막았던 남한 역사학의 행보와는 달랐다.(계속) 中 국공 내전 때 학자 쟁탈전…대만, 지식인들 학문 기반으로 대륙과 겨뤄 중국의 국공 내전 때 국민, 공산 양당은 문화재 쟁탈전만 전개한 것이 아니라 역사학자 쟁탈전도 전개했다. 1948년 12월 북경에서 이륙한 국민당 비행기에는 북경대 총장을 역임한 호적(胡適)과 청화대 역사학과 교수 진인각(陳寅恪) 등이 타고 있었다. 유수한 학자들을 대만으로 이송하는 ‘학자 이송’의 서막이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남경에 기착하자 진인각은 대륙을 선택해 내렸고, 호적은 대만으로 갔다. 다수의 학자가 대륙을 선택했지만 북경대 총장대리를 역임했던 부사년(傅斯年)도 대만을 선택했다. 부사년, 호적 등은 국립 대만대와 중앙연구원(中央研究院) 등을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 성장시켰다. 현 중화민국(대만)이 그 협소한 영토에도 대륙과 정신적으로 당당히 겨룰 수 있는 원천이 대만을 선택한 지식인들이 만든 학문에 있었다.
  • 한미연구소 논란에 청와대의 ‘강경대응’ 기조 속내는?

    한미연구소 논란에 청와대의 ‘강경대응’ 기조 속내는?

    청와대가 한미연구소(USKI) 예산지원 중단 및 이 연구소의 구재회 소장 교체에 개입했다는 의혹과 관련, 어느 때보다 ‘강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청와대는 최초 보도가 나온 즉시 발빠르게 대응하는 등 이번 논란을 정리하는데 주력하고 있는 모습이다.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9일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번 사안과 관련, 지난 7일 최초 보도 뒤 후속 보도를 잇고 있는 조선일보를 향해 “기사쓸 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는 등 불쾌감을 토해냈다. 김 대변인은 이어 “(조선일보가 자신들이) 토요일에 썼던 기사를 ‘우라까이’(다른 기사를 베껴쓴다는 뜻의 언론계 은어) 했더라”, “기초적인 것은 빠뜨리면서 취재하고 기사쓰는 방식이 유감”이라고도 했다. 김 대변인의 언론보도에 대한 유감 표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김 대변인은 지난 2월6일 ‘동아일보 칼럼의 정정을 요청합니다’라는 입장문을 냈었다. 또 4월4일에는 중앙일보의 ‘문(文)코드 등쌀에 외교안보 박사를 짐싼다’는 제목의 보도에 정정보도를 요구했었다. 하지만 이같이 ‘감정을 섞은 듯한’ 목소리를 낸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청와대가 이번 사안을 유심히 보고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앞서 김 대변인은 조선일보의 최초 보도가 나온 7일 즉시 기자들과 만나 해당 보도에 대응했는데 이날이 토요일이었다는 점이 주목됐다. 통상 청와대의 토요일은 ‘최대한의 축소근무’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김 대변인이 직접 춘추관으로 와 기자들을 만난건 이례적인 일로 여겨졌다. 결론적으로 김 대변인이 이처럼 세게 목소리를 높인 건 청와대 내부 분위기가 상당히 반영됐을 것이란 해석이다. 정치권 안팎에서 이같은 움직임은 문재인 대통령이 몸담기도 했던 노무현 정부 당시 ‘언론대응을 기민하게 하지 못했다’는데 대한 후회로도 풀이된다. 당시 정부 인사들은 ‘보수언론에 좀 더 치밀하게 정면 대응했어야 노무현 대통령을 지킬 수 있었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한 것으로 알려진다. 아울러 현 정부는 자신들이 전(前)정부들의 ‘적폐’로 규정한 사안과 동일한 일을 했다는 류의 보도에 대해 강하게 대응하고 있다. 이를테면 지난 4일 중앙일보 보도에선 박근혜 정부를 상기시키는 ‘문재인 정부판 블랙리스트’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이번 건도 인사 등에 청와대의 권한을 이용한 ‘부적절한 개입’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가능한 보도다. 다만 실제로 보도들이 소위 가짜뉴스인지는 진실공방으로 흘러가는 분위기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TV 사자” 장사진 친 인파

    [그때의 사회면] “TV 사자” 장사진 친 인파

    1962년 2월 17일 아침 서울 중구 태평로1가에 있던 한국방송문화협회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일찍 움직인 사람들은 새벽 다섯 시부터 줄을 섰다. 텔레비전 수상기를 신청하려는 사람들이었다(경향신문 1962년 2월 17일자). 3000여명의 사람들을 정리하느라 기마경찰과 ‘백차’까지 동원됐다. ‘웨스팅하우스’, ‘RCA’ 등 미국제와 일본제 도시바 TV 구입 신청을 받았는데 가장 비싼 것은 당시 돈으로 최고 25만 6900환이었다. 당시 작은 TV 한 대가 쌀 70가마 값이었다고 한다. 2차 배급분은 1만 2400대였는데 신청자는 6만 5000여명으로 5대1이 넘는 경쟁률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 것은 면세에 10개월 할부인 데다 몇달 전 KBS TV 방송국이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KBS TV 방송국은 1961년 12월 31일 개국했고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 TV 방송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TV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고 수입된 TV 수상기가 8000대 정도 있을 뿐이었다. TV 없는 TV 방송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정부가 외국산 TV 2만대를 긴급히 무관세로 들여와 보급했는데 그 TV를 사려는 인파가 몰려든 것이다. 월부 면세 TV를 받으려고 다른 사람 명의를 빌려 중복 신청한 사람들도 많았다(동아일보, 1962년 3월 22일자). 1963년 TV방송 운영 임시조치법이 시행되면서 TV를 등록하고 한 대에 100원씩 시청료를 받았는데 처음 등록대수가 3만 2097대였다고 한다(블로그 ‘춘하추동방송’). 우리나라 최초의 TV방송은 KBS가 아니고 RCA 한국대리점을 운영하던 황태영이라는 민간인이 세운 HLKZ TV였다. 서울 관철동에서 1956년 5월 12일 방송국이 문을 열었는데 TV방송을 처음 본 사람들은 “활동사진 붙은 라디오가 나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5번째, 아시아에서 4번째로 TV 방송을 한 나라로 기록됐다. 그러나 광고가 거의 없어 운영난을 겪다 장기영씨에게 양도되었지만 설상가상으로 1959년 2월 방송국에 불이 나 시설이 전소되고 말았다. 이후 이 방송은 AFKN TV 채널을 통해 명맥을 유지하다 KBS TV 개국 직전인 1961년 10월 15일 방송을 중단했다. KBS TV 개국 후 1964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상업 TV방송인 TBC TV가 개국하고 1969년 8월에는 MBC가 TV 방송을 시작함으로써 3대 TV 방송시대가 시작됐다. TV 방송 본격화와 함께 TV 개발에 뛰어든 금성사는 1966년 국내 최초 흑백TV 수상기 ‘VD191’을 만들어 냈다. 그 후부터 TV는 빠른 속도로 보급됐다. 1968년 11만 8000여대, 1970년 37만 9000여대, 1972년에는 90만 5000여대에 이르렀다. 사진은 TV 수상기 신청 계약서를 쓰고 있는 사람들.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정윤회“세월호 7시간의 진실, 다 클리어된 것”

    정윤회“세월호 7시간의 진실, 다 클리어된 것”

    박근혜 중형에 “정해진 운명”지방 모처에서 칩거 중딸 정유라와 연락하고 지내최순실 관련 질문에는 함구 박근혜 전 대통령의 측근이자,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전 남편인 정윤회씨가 박 전 대통령의 중형에 대해 “정해진 운명”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 전 대통령과 같이 있었다”는 의혹을 받아 온 정씨는 최근 검찰 조사결과를 통해 모든 것이 “클리어”하게 밝혀졌다고 말했다.정씨는 지난 5일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젊었을 때는 운명을 믿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그분(박 전 대통령)도 그 사람(최순실)도 나도 이렇게 되는 게 정해진 운명이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박 전 대통령과 최씨가 중형을 선고받는 것과 관련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라면서 “뭐든 지나치면 독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검찰이 밝힌 박 전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과 관련 정씨는 “이제 다 클리어된 것 아니냐”면서 “내가 검찰조사까지 받았고 위치 추적까지 이뤄졌다”며 얼굴을 붉혔다고 동아일보는 전했다. 정씨는 지방 모처에 칩거하며 딸 정유라씨와 연락을 주고받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정씨는 최씨와 연락을 주고받느냐는 질문 등에는 답하지 않았다고 신문은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탈북 기자의 평양공연 관전평... ‘서현, 노래 너무 못 불러’ 무슨 뜻?

    탈북 기자의 평양공연 관전평... ‘서현, 노래 너무 못 불러’ 무슨 뜻?

    탈북민 출신 동아일보 기자가 5일 방송된 남측 예술단 ‘봄이 온다’ 공연에 대한 감상평을 남겼다.주성하 기자는 이날 페이스북에 방북 예술단의 평양공연과 관련해 “발전을 위해서”라며 몇 가지 아쉬웠던 점도 지적했다. 주 기자는 레드벨벳 공연을 두고 “동작 좀 맞추는 정도는 북한에서 전혀 자랑거리가 아니다. 북한은 무려 10만명이 일사불란하게 율동을 맞추는 나라다. 고작 넷이 저 정도 산만한 동작으론 명함도 내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불러줘서 고마웠다”고 했던 최진희의 ‘뒤늦은 후회’에 대해서는 “역시 원곡이 최고”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 곡 ‘푸른 버드나무’를 왜 하필 서현이 불렀냐”면서 “저건 북한 최고 가수의 노래기 때문에 북한 여성 절반이 서현보다 더 잘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과거 평양을 찾았던 남측 예술단과 한국 대중가요에 얽힌 추억을 회상했다. 그가 북한에서 본 첫 ‘남측 예술’은 1985년 9월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 행사’에서 연주된 전통 가야금과 판소리였다. 북한이 1960년대부터 판소리를 금지했기 때문에 어린 그에겐 처음 접한 음악이 낯설고 지루했다. 주 기자는 그때부터 “예술은 북쪽이 훨씬 앞섰다”는 북한의 선전을 확실히 믿었다고 한다.다시 남측 가요를 들은 건 약 10년 뒤 겨울 평양행 열차에서였다. 전력난 때문에 몇백㎞를 가는 데 일주일씩 걸리던 때라 사람들이 지쳐있던 중 한 청년이 ‘홀로 아리랑’을 흥얼거렸다. 사람들은 연신 ‘재청’했고, 주 기자는 전율을 느꼈다. 그 노래를 2005년 8월 조용필이 평양 단독 콘서트에서 불렀다. 주 기자는 “조용필이 함께 부르자고 했을 때 객석의 7000여명 평양 시민 중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다. 하지만 누가 간 크게 호응한단 말인가. 카메라에 포착된 얼굴들은 감동으로 떨렸다”고 했다. 주 기자는 평양이 많이 바뀌고 있다고 평가했다. 약 20년간 지속된 문화교류 때문이다. 주 기자가 만난 한 탈북 청년은 2002년 평양을 찾은 윤도현밴드의 록 버전 아리랑을 듣고 “처량한 줄 알았던 아리랑이 저렇게 신날 수 있구나”라고 말했다. 그는 “한민족 특유의 ‘음주가무’ DNA가 어딜 가겠는가”라며 “평양의 예술혼은 억눌려 있었을 뿐이다. 얼어붙은 가슴을 깨워주는 이 봄이 좋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장맛비에 무너진 부흥주택/손성진 논설주간

    [그때의 사회면] 장맛비에 무너진 부흥주택/손성진 논설주간

    대한민국 사람치고 내 집에 대한 집착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국민소득 3만 달러에 이른 지금 내 집 마련의 꿈은 수십년 전보다 더 멀어지고 있다. 전쟁 직후인 1950년대에 주택 사정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정부는 1955년부터 대한주택영단(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 금융기관 등과 협력해 주택을 지어 공급했다. 서민들을 대상으로 공급한 주택에는 부흥주택(또는 국민주택), 후생주택(또는 재건주택), 희망주택 등의 이름이 붙었다. 최초의 공공주택이라고 할 수 있는 부흥주택이 들어선 곳은 서울의 성북구, 서대문구, 동대문구 등 당시로서는 변두리 지역이었다. 많이 헐리고 본모습을 잃었지만 부흥주택은 청량리2동 홍릉 단지, 정릉동 ‘정든마을’, 이화동 낙산마을에 아직 남아 있다.부흥주택 건설에는 육군 공병대가 동원됐다. 유엔한국재건단(UNKRA)의 지원에다 원자재도 원조에 의존했다. 1955년 12월 청량리 부흥주택 완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각부 장관, 서울시장이 총출동했다. 그러나 부흥주택은 분양가가 너무 높아 처음에는 신청자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곧 상황이 바뀌었다. 1956년 4월 실시된 청량리와 신당동 부흥주택 입주자 모집에는 새벽부터 사람들이 몰려 30분 만에 분양이 완료됐다(경향신문 1956년 4월 12일자). 그러나 부흥주택을 둘러싼 말썽은 끊이지 않았다. 청량리의 부흥주택은 공병대가 맨바닥에 집만 지어 처음에는 전기가 없어 촛불을 켜고 살아야 했고 상·하수도도 없어 입주민들의 불만을 샀다. 서울 신촌 100채의 부흥주택은 장맛비에 지은 지 1년도 못 돼 무너져 내렸다.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고 흙벽돌로 집을 지었기 때문이었다(동아일보 1956년 7월 2일자). 1956년 7월까지 전국에 지어진 흙벽돌 부흥주택 또는 재건주택은 7000여 가구에 이르렀다. 흙벽돌이 문제가 되자 그제야 시멘트로 바꿨다. 1959년에는 입주민들의 집단 청원 사태가 벌어졌다. 융자금 이자가 너무 높고 원금 상환 기간은 짧다는 것이었고, 국회에 특별조사소위원회가 구성되기도 했다. 부흥주택의 구조는 흥미롭다. 마루가 깔린 공간과 아동이 머무는 온돌방에 접해 과할 정도로 넓은 테라스가 있었다. 부엌에서 계단을 두 단 올라야 온돌방과 높이가 같아지는 것은 부엌에 취사와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변소에는 양변기가 있었고 욕실에는 둥근 설비가 눈길을 끌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목욕을 위해 사용했던 커다란 쇠가마다. 재래식 생활공간 위에 일본풍 생활기기가 담기고 위생설비와 외부 공간은 서구식인 복합 양식이었다. 설거지통과 찬장은 입주자가 마련해야 했다(‘거취와 기억’, 박철수). 사진은 부흥주택 입주 경쟁을 풍자한 만평.
  • 1심 선고 앞둔 박근혜 전 대통령 근황···교도관 “놀랄 지경”

    1심 선고 앞둔 박근혜 전 대통령 근황···교도관 “놀랄 지경”

    오는 6일 첫 선고 재판을 앞두고 있는 박근혜(66) 전 대통령에 대한 근황 보도가 나왔다. 박 전 대통령은 운동 시간을 제외하고는 10.08㎡(화장실 포함·3평) 크기의 독방에만 있다고 한다.박 전 대통령은 일과 대부분을 독서에 쏟고 있다고 동아일보가 31일 보도했다. 최근 허영만 작가의 ‘꼴’, 이두호 작가의 ‘객주’, 방학기 작가의 ‘바람의 파이터’ 등 만화책도 즐겨본다고 한다. 법조계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이 뭔가 글을 쓰고 있다”고 이 매체에 전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책을 내려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닷새 앞으로 다가온 국정농단 사건 1심 선고를 앞두고서도 담담한 모습이라고 한다. 법무부 관계자는 “수감 이후 1년 내내 한결같은 모습이다. 담당 교도관들도 놀랄 지경”이라고 말했다고 동아일보는 전했다. 한편 서울중앙지법은 오는 6일 오후 2시10분 박 전 대통령의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등 혐의 선고 기일을 연다. 그동안 재판을 거부해온 박 전 대통령이 피고인석에 앉아 판결을 직접 들을지는 불투명하다. 박 전 태통령은 검찰로부터 징역 30년을 구형받았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남녀 성형 붐

    [그때의 사회면] 남녀 성형 붐

    성형수술은 전쟁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최초의 성형수술을 받은 인물은 ‘월터 여’라는 사람으로 그는 1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이었다. 눈 주위 피부를 모두 잃었던 그는 1917년 8월 8일 ‘성형수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해럴드 길리스 박사에게서 최초로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용 성형에 관심을 가진 것은 먹고살 만해진 1960년대 들어서다. 우리나라에 성형외과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61년 8월 30일이다. 연세대 의대 유재덕 교수가 미국성형외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해 귀국, 세브란스 병원에 외과에서 분리된 성형외과학 교실을 만든 때다. 유 교수의 귀국으로 성형의 개념이 정립되고 성형외과의사들이 배출되었다. 성형외과도 생겨나 남녀 고객들이 병원을 찾았다. “서울 세종로의 성형외과에는 어느 여성이 미국 유학을 가야 한다며 쌍꺼풀 수술을 하러 왔다. 수술비는 ‘한 가족의 한 달 쌀값’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손님 중 남성이 40%다. 코가 낮아 사업이 안된다는 이유였다. 여성 고객의 90%는 여대생이며 배우나 다방 레지도 있다.”(동아일보, 1964년 1월 14일자) 성형 수요는 늘어가는데 의사는 적고 비용도 많이 들다 보니 불법 성형수술이 기승을 부렸다. 병원 조수들이 면허도 없이 수술을 하거나 치과의사가 성형수술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법원이 조수의 무면허 시술과 치과의사의 성형수술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려 파문을 일으켰다. 성형은 치료행위가 아니라는 논리였다.(동아일보, 1972년 12월 23일자) 학계에서 크게 반발하자 대법원은 이 판결을 2년 후 번복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1970년대 말이 되면 성형은 사회적인 붐을 이루게 된다. 쌍꺼풀 수술 위주에서 벗어나 코 수술, 소위 ‘이쁜이 수술’, 복부 지방제거 수술을 받으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이에 따라 70년대 초보다 미용 성형 고객이 10배쯤 늘었다고 한다. 일부 유명 의사들에게는 환자들이 줄을 서 두세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하고 당시 돈으로 100만원의 커미션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돈 많은 부인은 수술이 잘돼 기분이 좋다며 승용차 한 대를 의사에게 선물로 보내줬다는 기사가 있다. 현재 성형외과가 몰려 있는 서울 강남과 같은 곳이 당시에는 종로 일대였다. 성형외과들이 우후죽순 들어서 경쟁이 심하다 보니 치료비 덤핑을 예사로 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 초등학생도 방학을 이용해 수술을 할 정도로 성형은 일상화되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수술을 원하는 중년부인도 늘어났다. 서울의 강남이 발전하면서 강북에 있던 성형외과들은 1990년대 들어서 강남으로 옮겨가 강남은 성형의 메카가 되었다. 사진은 1964년 성형외과 모습을 다룬 기사.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본지 박지환 기자 ‘인간애상’

    본지 박지환 기자 ‘인간애상’

    박지환 서울신문 사진부 기자의 ‘빗속 폐지 줍다 주저앉은 노인’이 대한언론인회가 주관하는 제27회 박용윤 보도사진 인간애상의 최우수상으로 선정됐다. 박용윤 전 동아일보 사진부장의 기부로 제정된 인간애상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인간애를 보여준 사진을 찍은 기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시상식은 4월 5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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