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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택 6.13/ 제주지사 후보 정책 집중비교

    제주도지사 선거는 제주에 지역색이 없다는 특성으로 인해 대통령 선거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주목받는다.역대 대선 결과,제주에서의 승리가 곧 당선으로 이어졌던 등식이 이를 증명한다.게다가 이번 선거는 영원한 맞수인 한나라당 신구범(愼久範)후보와 민주당 우근민(禹瑾敏)후보간 ‘용호상박’의 대결이어서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신 후보는 ‘자존과 번영의 제주경영시대’를,우 후보는 ‘강한 제주,당당한 제주인’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국제자유도시= 신 후보는 현재의 국제자유도시 특별법을 고쳐 제주도가 경제권을가져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현재의 특별법으로는 제주도지사의 역할이 제한될 수밖에 없어 제주의 핵심 역량을 활용해 국제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제주개발센터 운용 권한도 제주도가 쥐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우 후보는 현행 특별법에 ‘도민주체 개발사업 우대제도’가 마련돼 있고,도지사에게 개발사업 인·허가권을 주고 있으며,7대 프로젝트 시행에 따라 지역도 균형적으로 개발될 수 있다는견해다.제주개발센터 역시 외자유치 창구로 적극 활용될 것이며,면세점 등의 수익은 전액 제주도에 재투자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감귤= 신 후보는 온주밀감 재배지 2만 4000㏊에 대해 매년 10∼20%씩 품종을 갱신하여 자동적으로 생산량이 조절되도록 하며,100억원으로 육종재단을 만들어 신품종 개발사업 등을 펼치겠다고 밝혔다.또 부적지(不適地)감귤원 1800㏊는 연차적으로 녹차 재배지로 전환하고,생산된 감귤은 3.75㎏당 농가 수취가격이 2000원 이상 보장되도록 하며,비상품 감귤은 농가 자체적으로 유기질 비료로 만들어 쓰도록 재료와 시설비 등을 지원하겠다고 공약했다. 우 후보는 재배면적을 2005년 2만 4000㏊,2010년 2만 2000㏊로 줄여 연간 적정 생산량인 55만t이 유지되도록 하고,감귤 휴식년제에 참여한 농가에 대한 인센티브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또 저온저장 시설을 200곳으로 늘리고,내년까지 3만t 처리능력의 제2감귤 가공공장을 서부지역에 건설해 주스·캔디·초콜릿·술 등 감귤을 원료로 한 2차 가공품 생산을 다양화하겠다고 다짐했다. ●관광= 신 후보는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 동부지역에 건립중인 컨벤션센터와 제주월드컵경기장 사이를 면세지역으로 지정,월드컵경기장에서 연간 2∼4회 정도 ‘세계 면세명품 엑스포’를 열어 관광수입을 증대시키겠다는 복안이다.또 강력한 관광인프라 제공을 위해 제주관광공사를 만들어 미국의 월트디즈니사나 워너브러더스사 등과 접촉해 테마파크가 제주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겠으며,안정·기술·수익·편익성 등에 장애가 많은 지역항공사를 설립하기보다는 일본이나 타이완 등지의 동북아 주요 항공사와 전략적으로 제휴해 제주로의 접근 수단을 확대하겠다고 역설했다. 우 후보는 제주 관광지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국제회의 도시로 지정되도록 하고,국제화 장학재단을 통해 국제회의 전문인력과 회의산업 전문업체를 육성하겠다는 포부다.중국 상하이에 제주홍보관을 개설하고,중국 관광객 유치 전문여행사를 육성하며,한·중·일 크루즈 관광사업도 추진할 계획을 갖고 있다.특히 관광진흥 추진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제주도 관광진흥원을 설립하고종합관광회관도 건립할 예정이다. ●4·3사건= 신 후보는 4·3신고자 중 무장반란 수괴급과 남로당 핵심간부는 희생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그러나 헌법과 국법질서,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희생자 폭을 넓게 잡는 것이 상생과 도민 화합 등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다. 우 후보도 비슷한 의견이다.그러나 우 후보는 수괴급이라고 인정할 만한 확실한 증인이나 증거가 있어야 하며,그러지 못할 때는 희생자에 포함시킬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또 정부 차원의 희생자 명예회복 조치 후에는 정부의 사과가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이밖에 12만평 규모의 4·3평화공원 1차사업을 내년까지 마치고,4·3평화상을 제정할 방침이다. ●청·장년 고용창출= 신 후보는 국제컨벤션센터·제주교역·풍력발전·삼다수·관광복권사업 등을 5대 도민기업으로 육성,주식회사로 전환해 1조 5000억원 규모의 제주 토착자본을 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2006년까지 전략기획 등 ‘고급 일자리 400명,중간 일자리 2200명,보통 일자리 7000명’등 1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했다. 우 후보는 이에 대해 구조조정과 공기업 민영화 추세에 맞지 않는다고 반박하고있다.특히 풍력발전사업 등은 환경친화적이고 상징적 시설인데도 이 사업을 통해 돈을 벌겠다는 엉뚱한 주장을 펴고 있다며,생명공학산업 등을 육성해 2011년까지 9만명의 일자리를 새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종합= 두 후보의 정책기조는 비슷하나 실행방법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공약 중에는 달콤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무지갯빛 청사진’들도 눈에 띈다.‘경제특별자치구 추진’,‘도민자금 1조 5000억 조성’,‘9만명 일자리 창출’등이 그것이다.지난 도지사 선거나 총선 때의 재탕분도 더러 있고,중앙정부의 예산지원이 없으면 이루기 힘든 정책도 많다.문제는 누가 실현 가능한 공약을 많이 내걸었는가 하는 점이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신두원 사라봉 ~ 별도봉간 케이블카 설치 신두완(申斗完·민국) 후보는 무보수 지사로 봉급과 판공비 전액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겠으며,지사의 공관을 도민 자활복지 후생관으로 활용하겠다고 밝혔다.이외에 한라산 중턱에 고품질 약초재배단지 조성,비양도에 카지노장 설치,제주시사라봉∼별도봉간 케이블카 설치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인물평 신구범 후보의 카리스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그것이 때로는 독선과 독단으로 비쳐지기도 한다.그러나 본인은 “추진력을 독단으로 오해한다.”며 “누구보다도 가슴이 따뜻한 남자”라고 주장한다.농수산부 축산분야에서 기획통으로 인정받은 ‘축산 맨’이다. 우근민 후보는 친화력이 강점이다.어느 계층이든 가리지 않고 ‘어머님’,‘아버님’이고 ‘누님’,‘형님’,‘동생’이다.그러다 보니 자연 ‘스킨십’이 과장돼 성희롱 공방과 같은 일도 벌어졌다.자타가 인정하는 마당발로 총무처에서 잔뼈가 굵은 인사통이다. 신두완 후보는 평생을 야당만 하면서 살았다.윤보선 전 대통령 1주기 추도식때 전두환 전 대통령을 혼낸 일은 유명하다.국회의원 도전 4차례,도지사 도전 1차례등의 기록도 제주에서는 진기록이다.돈 안쓰는 선거를 다짐,부인을 선거사무장으로 임명했다.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비사] (9)고종-니콜라이2세 특별한 관계

    ■두帝國 ‘마지막 황제' 친서외교 10여년 고종과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침탈외교사에서 다소 의외라고 여겨질 만큼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고종(1852∼1919)은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강제로 대한제국의 황제자리를 아들 순종에게 양위했지만 조선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다.니콜라이 2세(1868∼1918) 또한 1917년 2월 혁명에 의해 퇴위당한 뒤 유배지에서 처형당한 러시아 로마노프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다.두 사람이 조선과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였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의 정서가 통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가 황제 대 황제의 동격 관계는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꺼져가는 국운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쏟은 고종이 일본을 밀어내기 위해 러시아에 매달리는 입장이었다면 니콜라이 2세는 만주에서의 이익 등 국익에 반하지 않는 수준에서 ‘외교적’으로 고종을 대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밀월관계의 출발은 아관파천(1896년 2월11일∼1897년 2월25일)이었다.초대 서울주재 대리공사로 10년 넘게 서울에 주재하면서 고종과 두터운 친분을 쌓은 베베르가다리를 놓았다.대(大) 러시아제국의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에게는 저 멀리 극동에 위치한 작은 나라의 왕이 자국 공사관에 1년이상 몸을 의탁한 채 도움을 요청하자 애처로움과 동시에 흥미를 느꼈을 수도 있다. 이같은 관계의 성립은 니콜라이 2세의 자상한 성격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해 보인다.니콜라이 2세는 전제군주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잔정이 많았다.해외 각국에 파견돼 있는 외교관들의 상주서에 일일이 답하는 것은 물론 건강까지 체크했다. 이번에 발굴된 문서중에는 고종과 니콜라이 2세가 친서를 주고 받은 사실이 30차례 가까이 등장한다.대부분은 고종이 보내고 니콜라이 2세가 받는 형식이었지만 니콜라이 2세도 여러 통의 친서를 보냈다.비공식 친서로는 1895년 7월 고종이 조선군 병참관 권동수(權東壽)를 연해주 지사 운테르베르게르 장군에게 보내 러시아 황제의 후원을 요청한 것이 있다.그러나 고종은 이후 문제가 야기되자 파견사실을 부인했다. 고종이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첫 공식친서는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閔泳煥) 특사를 통해 전한 다음 친서이다. 짐의 나라는 관습은 물론 언어와 문자도 고유해 외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불행하게도 짐 나라의 동쪽 이웃나라가 일본이다.일본은 섬나라이며 관습은 짐의 나라에서 유래됐고 문자와 제도도 짐의 나라에서 가르쳐주었다.…그 때문에 일본은 짐의 나라를 자기의 조상과 주인의 나라로서 섬겼다.…최근에 일본이 서양의 제도를 흉내내고 배워 동양의 맹주가 되려한다.…짐은 폐하가 짐의 나라의 실정을 동정하고 정의를 토대로 세계 열강제국이 짐의 나라에 대한 일본의 불법적인 행위를 꾸짖고 나라의 독립을 침해하지 못하게 모든 조약규정 위반을 즉시 중지하도록 권고하여 주시길 바라고 바란다.끝으로 짐은 눈물로 폐하께 호소하며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고종의 ‘눈물의 편지’를 읽은 니콜라이 2세의 마음이 움직였는지 러시아는 1896년 10월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을 파견했다.그리고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으로의 국호변경과 황제 즉위 등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선언하자 열강 중 가장 먼저 이를 승인하고 축하전문을 보내왔다.눈치를 보던 일본,미국,프랑스,영국이 줄줄이 뒤를 따랐다.고종은 혹시 러시아가 거부할 지 몰라 노심초사했으며 “승인을 하지 않더라도 곧바로 거부하지 말고 현재의 호칭(대군주 폐하)으로 대해주기를 바란다.”고 연막을 쳤던 터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두 사람간의 밀착관계는 1898년 조선이 러시아 군사교관단 및 재정고문 알렉세예프의 본국소환을 요청하자 금이 가는 것처럼 보였다.고종은 “재정고문과 군사교관단의 소환으로 야기된 일련의 사태가 그동안 베푼 황제의 호의에 아무 영향이 없기를 바란다.”고 조심스러워했으나 니콜라이 2세는 “고종황제 개인에게 변함없이 호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안심하도록 진정시키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일단 무마됐다. 니콜라이 2세는 내심 불쾌했지만 복심(腹心)은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에도 니콜라이 2세는 “고종황제 개인이나 대한제국 정부가 앞으로도 러시아의 지지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지 문의하라.”는 칙령을 내리는 등 고종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하지만 고종을 공사관으로 피신시키겠다는 제2,제3의 아관파천 공작을 서울주재 공사관에서 보고하자 “그런 일은 현재의 정치여건 아래서는 지극히 위험한 사태를 몰고올 수도 있다.”면서 발을 빼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902년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식에 니콜라이 2세가 베베르를 특사로 파견키로 하면서 절정에 올랐다.니콜라이는 고종에게 축하친서와 함께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성 안드레이 사도 1급훈장 등 러시아 최고 훈장을 선물로 보냈다.이에 앞서 고종은 대한제국 최고 훈장인 금척대훈장을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바있다.안드레이 1급훈장은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 최고의 훈장으로 명예는 물론 당시 가격으로 5000루블을 호가하는 최고의 선물이었다.그러나 기념식이 콜레라 창궐로 연기되는 바람에 수여되지 않았다. 고종이 “기념식은 연기됐지만 베베르를 서울에 체류토록 해달라.”고 요청하자니 콜라이 2세는 “폐하의 요청을 받고 짐은 만약 뜻밖의 어려움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폐하의 재위 경축식이 다시 열리는 내년 4월17일까지 베베르의 서울체류에 동의한다.”는 친서를 보내는 등 서로의 돈독함을 공개적으로 내비췄다. 이후 1903년부터 1904년 사이 두 사람은 명헌태후 서거애도 친서,니콜라이 2세의 황태자 득남축하 친서 등을 주고 받았다.고종은 “황제께서 황태자를 생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고자 한다.이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축전을 치는 것이 도리였으나 외부의 방해 때문에 할 수 없이 이제 서한으로 축하를 드리게 됐다.”고 기술했다.니콜라이 2세는 “감사함을 전하라.”고 공사관에 지시했다. 러·일전쟁(1904∼1905)이 일어나자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확신하며 대한제국의 독립을 수호해 주기를 바란다.”는 친서를 띄웠고 “러·일전쟁 발발시 중립준수를 요청한다.”는 니콜라이 2세의 친서를 전달받자 곧바로 중립선언문을 작성,일본을 비롯한 열강에 보내 화답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자 일본은 보란 듯이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했다.이로써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려던 고종의 전략은 한계에 부딪힌다. 러시아는 모든 열강이 대한제국을 독립국으로 승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무력으로 독립과 불가침권을 침탈한 데 대해 견해를 밝힌 바 있다.러시아 외무부는 일본정부가 고종을 일본으로 이송,미리 준비한 비밀장소에 연금시킨다는 계획을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부터 입수했다.러시아는 천인공노할 일본의 계획에 항의하지 않을 수 없다.(1905년 5월10일 외무부가 해외 러시아 공관에 보낸 회람전문) 니콜라이 2세도 이 전문상단에 “일본의 그런 행위는 어떻게든 예방돼야 한다.”고 지시하는 등 고종의 안위를 지켜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덕분에 고종의 일본강제 이송 및 연금계획은 무산됐다. 고종 개인에 대해서는 우정을 유지했지만 기울어진 대세는 니콜라이 2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을사늑약체결 직후 고종이 “일본은 미리 작성해 온 조약문에 국새를 강탈해 날인하고 짐의 서명을 강요하였으나 단호히 거절했다.황제께서는 유럽 문명국에 일본의 만행을 알려 대한제국의 독립을 수호해 주시길 거듭 앙망한다.”고호소했으나 니콜라이 2세는 “국내문제로 더 이상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 없다.”고 냉정하게 거절한 것이다. 이후 헤이그밀사파견(1907) 등 고종의 거듭되는 친서와 러시아에로의 정치망명 요청 등에 대해 러시아는 포츠머스강화조약(1905) 준수와 극동질서를 강조하는 등 계속 딴전을 피웠다.1905년 ‘피의 일요일’사건으로 러시아혁명이라는 폭풍앞에 선 니콜라이 2세로서도 동방의 소국에 더이상의 잔정을 줄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고종황제는 병이 들어 나약하고 병력이 없는 군부대신은 허수아비처럼 서 있고 다른 각부 대신은 일본인에 복종하고 있다.노쇠한 황제는 고통스러운 감금의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대궐안팎은 일본인의 감시와 경비가 삼엄하다. 알현이 제한된 것은 물론 제3자를 통한 연락도 제한을 받고 있다.”는 1908년 12월8일자 소모프 총영사의 고종 및 대한제국에 대한 근황보고서는 두 마지막 황제의 관계가 대한제국의 몰락과 함께 종극(終劇)을 향해 치닫고 있음을 보여준다. 노주석기자 joo@ ■러시아가 본 조선王家 서울에 주재한 제정 러시아의 외교관들은 대한제국의 왕가(王家)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이번에 새로 발굴된 제정 러시아시대의 외교문서를 보면 러시아 외교관들은 고종과 주위의 대신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순종을 비롯해 엄비와 대원군,다음 왕위를 노리는 왕자들을 못마땅해 하는 기색도 역력했다. 오래전에 자주적인 통치력을 상실한 고종은 측근에게조차 권위가 없다.또 우유부단한 상태에서 대한제국 지배계급의 어느 한 집단이나 혹은 끊임없이 교체되는 명칭만 요란한 독립협회,황국협회,만민공동회,친러파,친일파,친미파,친영파 그리고 친독파로 구성되는 대신들에 의지하고 있다.(1901년 파블로프 대리공사) 고종황제 자신은 아주 호감을 주는 인물이나 많이 쇠약해져 있다.황실에서는 고위직과 하위직을 막론하고 음모,뇌물수수,매수가 만연돼 공적과 능력에 따라 관직에 임용되지 않고 뇌물의 액수에 의해서 임용이 결정된다.(1903년 베베르 초대 대리공사) 명성황후의 시해이후 10여년동안 사실상 왕비의 역할을 한 엄비(嚴妃)가 서거하자 “엄비는 평민출신으로 양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당의 굿에 의존했다.(1903년 베베르).”고 힐난한 대목도 나온다. 대원군에 대해서는 실제 이상으로 부정적이다.틈만 나면 고종 암살기도설 등을 정보보고하고 있다.1896년 베베르는 “고종은 부친 대원군을 숙청할 생각을 갖고 있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다.러시아가 대원군을 아무르주 혹은 사할린으로 이주시켜 주기를 바라는 고종의 소망을 실현시키는 것이 바람직스러운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황제의 친모인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민씨가 80세를 일기로 서거하자 “고종은 모친을 몹시 사랑했다.고종은 성품이 선량하고 동정심이 많고 나약한 점이 모친을 닮았다.(1898년 쉬테인)”고 애도하기도 했다. 1898년 대원군이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그로데코프에게 보낸 편지도 흥미롭다.처음으로 공개되는 이 편지에서 대원군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부모와 자식간에는 화목하게 산다.그런데 수십년전 4명의 신하가 고종 임금앞에서 늙은 아비를 비방한 일이 있었다.하늘에 맹세코 말하지만 우둔한 자들이 음모를 꾸며 부자지간을 이간시켜 놓음으로써 나는 지금도 아비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종은 천성은 선량하나 나쁜 신하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면서 러시아에 원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하고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에 대한 러시아 외교관들의 차가운 시선에는 애처로움이 느껴질 정도다. 순종의 즉위식이 8월27일 거행됐으나 고종과 세자는 참석하지 않았다.순종은 카키색의 군복을 입고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꺼렸다.황제의 인상은 침울하고 창백하며 놀란 듯한 두 눈에 얼굴은 병으로 부어 환자처럼 보였다.(1908년 소모프 총영사). 고종황제의 왕위를 이을 후계자에 대해 주목하면서 일일이 인물평을 늘어놓았다. 의화군 이강(李堈·후의 의친왕)을 유럽파견 공사로 임명했다고 조선정부가 통보해왔다.이강은 왕비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궁인(귀인 장씨)에게서 얻은 왕자로 젊고 유능하며 쾌할한 성격이다.일부 사람들은 그가 앞으로 세자로 책봉될 것이며 좀 우둔한 세자(순종)보다는 덕망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하지만 고종은 세자를 더 사랑한다.(1895년 베베르) 또 1906년 1월1일 고종황제와 황실가족과의 신년 경축 알현식에 참석한 플란손 총영사는 “장자인 황태자는 30세로 명성황후의 적자이며 법통 후계자다.의친왕(李堈))은 17세이며 명성황후 생존시 상궁소생으로 미국과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다.삼자 영친왕(李垠)은 9세이며 엄비 소생으로 영특하고 야심만만하다.”라고 평가했다. 노주석기자
  • 월드컵/ “놀랍다 한국” 세계 감탄

    “한국,축구 역사를 새롭게 썼다.”AP,AFP,로이터 등 세계의 통신사와 CNN,BBC 등 방송들은 한국팀의 승리를‘한국팀의 놀라운 변신’,‘한국팀의 실력은 16강 이상’등의 표현을 써가며 긴급 보도했다.특히 한국팀과의 경기를 앞둔 미국과 포르투갈 국민들은 물론 이날 한국팀과 첫 경기를 가진 폴란드의 축구팬들은 한국팀의 깨끗한 승리에 ‘무서운 팀’,‘D조 최강’ 등의 표현을 쓰며 경계심을 표현했다. ●폴란드= “이럴 수는 없다.”한국을 상대로 승리를 장담하던 폴란드 국민들은 믿었던 자국 대표팀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반 초반 폴란드가 잠시 경기의 주도권을 잡았을 때만 해도 여유있는 표정이던 폴란드 국민들은 전반 26분 황선홍의 환상적인 왼발 논스톱 슛으로 선취점을 빼앗기자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하더니 후반 유상철의 굳히기 쐐기포가 터진 뒤 모두 얼이 빠진 모습들이었다. 이날 경기를 중계한 폴란드 TV는 한국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프랑스를 상대로 한 평가전에서 뜻밖의 선전을 했을 때 한국에 대한 경계수위를 높여야 했다면서 축구 강호라는 자만에 빠져 한국 축구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하지 못한 게 아니냐고 반성하기도 했다.이들은 폴란드가 한국에 완패한 것은 폴란드로서는 치욕적인 것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이제는 자만을 버리고 남은 두 경기에 전력을 다해 어떻게든 16강 진출을 이뤄내야만 한다고 요구하기도 했다. 폴란드 국민들은 한국의 빠른 좌우 돌파도 인상적이었지만 폴란드가 자랑하는 스트라이커 올리사데베를 꼼짝 못하게 묶어버린 한국 수비의 저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포르투갈= “한국은 피하고 싶은 팀이다.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다.” 4일 한국이 폴란드를 상대로 첫 승을 거두는 장면을 TV를 통해 지켜본 포르투갈축구팬들은 포르투갈의 16강 진출을 위한 제물쯤으로 만만하게 보았던 한국 축구팀이 ‘유럽의 강호’폴란드를 완전히 압도하며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자 한국을 다시 봐야겠다며 하나같이 경계의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특히 한국팀의 빠른 스피드와 체력을 바탕으로 한 미드필드부터의 강한 압박은 세계 정상급이라면서 어느 팀이 한국과 맞서더라도 쉽게 승리를 자신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이들은 포르투갈이 한국을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만나게 된 것은 포르투갈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라면서 말하고 포르투갈이 미국과 폴란드를 상대로 먼저 2승을 올려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뒤 한국전에서는 본선에 대비해 전력을 비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은 특히 한국 축구의 비약적인 발전에 놀라움을 표시했다.사우디아라비아가 독일에 8점 차이로 대패하고 중국 역시 코스타리카에 완패하는 것을 보며 아시아는 아직 한수 아래라고 생각했다가 74년과 82년 두차례나 월드컵 3위에 올랐던 폴란드를 한국이 2대0으로 여유있게 제치는 것을 보고 아시아의 저력을 볼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과의 경기를 생중계한 포르투갈 TV들은 한국 응원단의 열광적인 응원에 한국팀이 더욱 힘을 내 실력을 100% 발휘한 반면 폴란드팀이 조금은 주눅이 들은 것 같다면서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안은 한국팀과 첫 경기에서 맞붙은 것이 폴란드로서는 불운이었다고 말하고 했다. ●미국= 월드컵 전 경기를 미국에 생중계하는 스포츠 전문채널 ESPN은 한국이 2대0으로 이기자 ‘결코 믿을 수 없는 결과’라고 평가했다.특히 전방에서 공격수들의 움직임이 무척 빠르고 강인한 체력을 지녔다며 미국팀에게는 강력한 상대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 언론들도 인터넷 스포츠 사이트를 통해 한국의 승리를 속보로 전하며 월드컵에서의 첫 승리로 한국민 전체가 밤새 축제에 빠졌다고 보도했다.일본이 벨기와 2대2로 선전한 데 이어 한국이 예상 외로 폴란드에 쉽게 이기자 월드컵 개최국은 지지않는다는 전통을 두 나라가 이어갔다고 보도했다. LA 등 서부지역의 한국 교포들은 현지시간으로 새벽 3시30분부터 시작된 경기를 뜬 눈으로 지켜봤다.15년 전 이민와 오렌지 카운티에서 가전제품 대리점을 운영하는 유모씨는 “한국 축구가 이정도로 발전했는지 상상도 못했다.”며 “16강 진출이 결코 꿈이 아니다.”라고 자랑스러워했다. 미 동부지역에서는 출근 시간대인 오전 7시30분부터 경기가 치러져 많은사람들이 경기를 보지 못했으나 남미와 유럽 출신의 일부 축구팬들은 출근시간을 늦추며 경기를 지켜봤다.메릴랜드에서 자동차 딜러를 하는 브라질 출신의 마이클 키는 “한국이 2골차로 이김으로써 미국의 16강 진출은 더욱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볼티모어에서 내과병원을 운영하는 제임스 자이스는 오전에 진료가 없어 집에서 한국의 경기를 봤는데 선수들의 움직임이 빠른 게 무척 인상적이었다며 미국의 승리를 낙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워싱턴 백문일특파원·리스본·바르샤바 외신종합 mip@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비사] (8)군사교육 지원의 전모

    ***“6000精兵 양성” 러 군사교관단 2차례 파견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한 민영환(閔泳煥) 특명전권공사는 1896년 6월13일 외무장관 로바노프를 만났다.이 자리에서 민영환 특사는 러시아군대 파견,군사교관단 파견,차관제공,재정고문 초빙,전신선가설 등 5가지 요청 사항을 제시했다.이중 러시아군 및 군사교관단 파견요청에 대해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답은 다음과 같다. 고종의 호위를 위해 러시아 군대를 조선에 파견해 줄 수 있는가.(민영환).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러시아 해군이 호위할 것이다.공사관에 체류하고 싶은 만큼 체류할 수 있다.(로바노프).조선군대를 훈련시키는 동시에 왕을 호위할 군사교관 200명을 파견해 줄 수 있는가.(민영환).군사교관은 파견할 것이나 빠른 시일안에는 곤란하다.(로바노프) 당시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아관파천(1896년2월11일∼1897년 2월20일)기간중이었고 러시아가 조선의 국사를 쥐락펴락하던 시기였다.고종은 자신의안위를 보호해줄믿을 만한 군대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러시아군이 그같은 역할을해줄 것으로 여겼다.고종은 일본인 특히 일본 군사고문단의 한반도 진출을 꺼려했다.일본 군사고문단 대신 러시아 군사교관단을 초청하고 싶었다.하지만 군사교관단의 파견은 러시아의 의지만으로 해결될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열강을 동원한 일본과 친일파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러시아로서도 극동주둔 군사력의 대(對)일본 열세를 잘 알고 있었고 당시 군사교관단의 파견은 군대 파견의 전제조건이자 러시아의 확고한 한반도 지배의사로 해석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1896년 2월23일 일본 군사무관 보각 대령은 참모본부 학술위원회에 보낸 전문에서 “조선의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 파견요청에 동의하면 일본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이 경우 일본 정계에서 조선문제에 관해 러시아와 협력을 하려는 분위기를 파국으로 이끌거나 아니면 일본의 적극적인 개입을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등 러시아 군 내부에서도 반대여론이 팽배했다.이 때문에 러시아정부는 파견결정을 차일피일미뤘고 주한 베베르 대리공사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결국 군사고문단의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선에서 ‘생색내기용’파견이 이뤄졌다. 조선의 불안한 정세로 보아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 파견문제를 고종과 협의하기는아직 시기상조이다.(1896년 3월1일 로바노프 외무장관이 스페이예르 서울주재 공사대리에게) 가능하면 신속하게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야 한다.그것이 왕권강화,질서회복 그리고일본견제책의 유일한 수단이다.(같은해 3월20일 베베르가 외무부에 띄운 보고문)국방부에서 검토한 결과 고종의 시위대는 러시아인 장교를 지휘관으로 한인 1개 대대로 구성하고 교관은 위관급 5명,상사 4명,하사관 10명과 소총 1000정이 적합하다고 한다.(1896년 4월28일 외무장관이 베베르에게).고종은 무기와 교관단 파견결정에 감사를 표했다.조선군은 4000명이기 때문에 왕의 시위대외에 서서히 다른 부대의 교육도 위탁하고자 한다.(같은해 같은달 30일 베베르가 외무부에) 1896년 11월22일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민영환 특사와 청국주재 군사무관이던푸차타 대령 사이에 제1차 군사교관단초청 계약서가 체결됐다.계약에 따르면 초청기간은 1년이며,인원은 장교 2명,하사관 10명,군의관 1명,악장 1명 등 모두 14명으로 돼있다.조선측은 장교급에겐 매월 150엔,사병에게 20엔의 월급과 숙소를 제공키로 했다.제물포까지의 여비와 부임수당 등도 별도로 부담하는 조건이었다.이들 중악장을 제외한 13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레마쉬호를 타고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했다. 곡절끝에 13명의 제1차 러시아 군사교관단은 1896년 10월24일 조선땅에 들어왔다.고종이 요청했던 200명에는 턱도 없이 모자란 숫자였지만 군사교관단의 한반도 파견의 의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갖고 있었다. 러시아는 군사교관단의 파견과 함께 푸차타 대령을 군사교관단장에 임명했다.또 1896년 1월 동부 시베리아 제2보병여단 소속 스트렐비스키 중령을 서울주재 러시아공사관 군사무관(軍事武官)으로 임명했다.1895년 6월17일 아무르군관구 참모부장이 외무장관에게 “이제 서울에도 별도의 상주 군사무관이 필요하다.앞으로극동의분쟁에서 조선의 무력이 큰 변수로 등장할 것이 분명하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데 따른 후속조치였다.스트렐비스키 무관은 1902년 라벤 중령과 교체될 때까지 서울에서 근무했다. 조선은 청·일전쟁(1894∼1895)이전까지는 지리적 특성으로 러시아 우수리지방의중요한 국경을 보호해 주는 방벽구실을 했다.현재 독립국가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앞으로는 어떤 운명을 맞게 될 것인지 예상하기 어렵다.그러나 조선의 최근 역사를 분석해 볼 때 아마도 국내의 혼란으로 인해 정치적 욕망이 많은 열강,특히 일본의 세력각축장으로 변하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푸차타 군사교관단장의 1897년 수기)조선은 6000명의 상비군을 보유해야 국내 질서가 안정될 것이다.고종은 유럽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3000명의 정병(精兵)이면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에 맞지 않다.…6000명 정병양성은 조선의 영토나 국민수로 보아 외국의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조선과 병력양성문제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 뒤 일본과 협의를 해야 할것이다.군부에 만연돼 있는 부패를 척결하고 공정한 예산집행이 이뤄져야 한다.(1897년 6월17일 푸차타의 비밀보고서) 푸차타의 이같은 조선군대 증강계획안에 대해 일본은 거세게 항의했으며 러시아 내부에서도 논란이 일었다.증강계획을 포기하든지 일본과의 전쟁을 불사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전쟁은 러시아에 불리하기 때문에 이 계획에 착수하면 돌이킬수 없는 우를 범할 것이라는 경고도 나왔다. 제1차 군사교관단의 대한제국군 군사조련은 일단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1897년6월9일 고종과 각부 대신 그리고 주한외교사절단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조선군 의장대 사열식은 참석자들에게 큰 감격을 안겨주었다.대한제국군중 러시아교관단 산하부대로 들어오려는 경쟁도 치열했다. 당시 서울에는 대한제국군 5개 대대병력 4000여명이 있었지만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30대의 젊은 한국인 대대장이 부대에 출근할 때는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영감행세’를 하기 일쑤였다.병력중 많은 숫자가 ‘유령 병력’이었다.식비를 횡령하기 위해 숫자를 부풀린 탓이다.대부분이 군인 신분을 창피하게 여겨 밖에 나갈 때는 사복으로 갈아 입었다.교관단은 이중 1600여명을 선발해 2개 대대로 조직했다.이들은 궁정을 경비하는 시위대 요원이었다.따라서 훈련과목에는 궁중 예절과 궁중 호칭법 등도 포함돼 있었다. 러시아정부는 대한제국 군대의 개편을 포함,재정지원을 제공하고 제2차 군사교관단을 또다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장교 3명,하사관 10명,사관학교 교관·병기병·군악대지휘자 각 1명,군악대원 3명,위생병 2명 등 총 21명이다.(1897년 5월15일 베베르가 무라비요프 외무장관에게) 1차 군사교관단의 성공에 고무된 러시아가 제2차 군사교관단을 파견했다.2차 교관단의 장교와 하사관 등 13명은 아무르군관구에서 차출됐으며 나머지 기능직은 예비역중에서 선발됐다.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과 친일파의 득세 등으로 인해 대한제국내 정세는 급격하게 반(反)러감정이 확산되고 있었다.급기야 1897년 8월14일 푸차타 군사교관단장이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알렉세예프 중위에게 교관단 통솔권이 위임됐다.푸차타 대령의 야심찬 조선군 증강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는 이후 소장으로 진급,아무르지사로 임명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최근 여러 보고서로 미뤄볼 때 대한제국의 정세가 매우 불안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관직에 있는 사람이나 모든 당파가 러시아에 적대적이며 친러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고종황제 역시 매우 의심스럽게 되었다.이러한 상황 때문에 러시아가 대한제국 국내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것이다.니콜라이 황제께서 고종황제와 대한제국 정부가 향후 러시아의 지원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지 문의하라고 하셨다.대한제국의 요청으로 파견된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이 필요치 않다면 러시아는 마땅히 소환하겠다.(1898년 3월3일 외무장관이 스페이예르 대리공사에게) 대한제국 정부가 공식적인 회답을 보냈다.현재 러시아의 군사 및 재정고문(알렉세예프)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했다.러시아는 모든 외국인 고문의 파면을 요청하고 최근 통역관(김홍륙)살해 음모자 처벌을 요구해야 한다.대한제국 정부가 거부하면 공사관 기를 내리고 원산을 점령해야 한다.(같은해 3월12일 스페이예르의 회신) 평소 거칠고 직선적인 언사 때문에 초대 대리공사 베베르가 10년동안 한국에서 닦아놓은 외교적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은 스페이예르는 ‘공사관철수 후 한반도 북부 무력 점령’이라는 극단 처방을 내놓았다.니콜라이 2세는 1898년 5월4일 대한제국에서 군사교관단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허락했다. 러시아 군사교관단이 철수한 이후 대한제국군의 조직은 일본의 수중에 넘어갔다.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20명의 한국인 장교들이 교관이 되었다.1901년 1월 당시 대한제국군은 장교 372명에 사병 1만 5200명이었고 군대예산은 360만엔이었다. 1,2차 러시아 군사교관단의 한반도 파견과 철수시기를 전후해 일본과 러시아는 1896년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모스크바 프로토콜)체결,1898년 로젠-니시협정(러·일특별협정) 등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협정을 맺었다.러시아가 일본과 일련의 협정체결과 함께 군사교관단을 철수시킨 것은 대한제국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사실상 접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종은 이후 국내외 압력에 밀려 러시아교관단이 철수하도록 등을 떼민 자신의 ‘우둔한’결정을 한없이 후회했지만 때는 늦었고 돌이킬 수 없었다.‘눈엣가시’러시아군이 떠나자 일본의 한반도 점령 프로젝트 추진에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노주석기자 joo@ ■'거문도 사건' 러 대응 1885년 4월15일부터 23개월 동안 영국의 극동함대가 거문도(전남 여수시 삼산면)를 무단 점령한 사건은 러시아의 태평양진출정책을 경계한 열강,특히 영국의 극동에 대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친 사건이었다. 새로 발굴된 러시아문서보관소의 비밀외교문서에 따르면 러시아 군부는 거문도 점령 당일 외무부에 급보를 띄워 대책마련을 촉구하는 한편 서울점령 등 강공책을 제시하는 등 급박하게 움직였다.하지만 영국의 무력시위 앞에 러시아는 다소 유약한 모습을 보였다.이 과정에서 영국과 청의 비밀거래설도 제기돼 주목된다. 블라디보스토크호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귀국하는 길에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거문도를 방문한다.거문도를 점령한 영국의행위는 러시아에 적대적인 것이다.러시아의 태평양함대사령부와 인접한 지역에 위치한 영국의 군사기지를 폐쇄하도록항의해야 한다.영국과의 협상에서 카스피해 동부지역과 조선이나 일본의 항구를 점령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해야 한다.(1885년 4월15일 해군부관리관이 기르스 외무장관에게 보낸 비밀문서). 만일 영국이 거문도를 합병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러시아 순양함대는 동해에서완전히 군사적으로 봉쇄당하게 된다.또한 일본군이나 청국군이 서울을 점령하게 되면 러시아군이 그들을 몰아내고 아예 서울을 점령해야 한다. (1885년 4월18일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코르프가 황제의 시종무관장에게 띄운 암호전문). 러시아는 정보라인을 총동원,영국의 점령의도와 군사력 등을 파악했다.거문도점령 9일후인 4월23일 일본 나가사키에 파견된 코스틸예프가 외무부에 보낸 전문에는“거문도에는 1척의 영국전함이외에 2척의 소형함정이 있다.오늘 식료품을 실은 기선이 거문도로 출발했다.그곳에는 상륙병 50명이 있으며 나가사키에 있는 영국군함에는 200명의 수병이 승선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또 베이징주재 러시아 공사 파포프는 1885년 9월20일 외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청국의 이홍장(李鴻章)은 영국의 거문도점령을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그는 종속국인 조선의 보호를 의무로 여기고 있다.청국의 거문도철수항의를 영국이 수용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거문도 때문에 전쟁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러시아가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하면 영국은 거문도를 떠날 것으로 확신하고 있으며 영국의 거문도점령은 러시아의 남하를 경계한 결과로 분석된다.”라고정확하게 분석했다.청국주재 군사무관 시누에르는 1885년 11월17일 참모본부학술위원회에 보낸 보고서에서 “확증은 없지만 청과 영국의 비밀거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이홍장의 한 측근은 나에게 ‘영국은 러시아와 전쟁시 거문도를 요새로 사용하고 전쟁후에는 시설물 일체를 청국에 팔기로 했다’고 귀띔했기 때문이다.”라고 보고해 영국과 청의 거래관계를 의심하고 있다. 결국 북양대신 이홍장의 중재에 의해러시아는 한국영토의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확약을 했고 영국함대는 1887년 2월27일 자신들이 헤밀턴섬이라고 이름붙인 거문도를 떠났다. 노주석기자
  • “美대통령 전용기 보안 내손으로”

    [워싱턴 백문일특파원] 미 대통령 전용기 ‘에어 포스 원’의 보안은 누가 책임질까.중앙정보국(CIA)이나 백악관국가안보회의(NSC)가 아니라 한 재미 교포가 설립한 시스템 통합업체 STG가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많지 않다. 이수동(사진·53) 회장이 1986년 버지니아에 세운 STG는미 연방정부가 발주하는 보안시스템 계약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미 국방부를 비롯해 CIA,NSC,연방수사국(FBI)등의 음성·지문 인식 시스템이 STG의 작품이다.올해 정부 발주액은 1억 5000만달러에 이른다.직원 1200명 가운데 400명은 국무부에 파견나가 있다. 이 회장은 “전 세계 미 공관의 비자 발급 업무도 우리가 만든 시스템에 의존한다.”며 “신청자의 이름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블랙 리스트’에 올랐는지 여부가 바로 가려진다.”고 밝혔다.반(反)테러리즘 차원에서 이민국(INS)이 새로 발주한 지문·망막 생체인식 시스템 계약도 따냈으나 보안상의 이유로 구체적 설명은 피했다. STG는 올해 워싱턴 포스트가 선정한,정부와 계약한 정보기술(IT) 100대 기업 가운데 62위에 올랐다.지난해에는 미 국무부 수주 실적 1위를 기록했다.미 동부지역에서 연방정부의 예산을 겨냥한 IT 업체가 6만개에 이르는 점을 감안하면 STG의 실력은 자타가 공인한 셈이다. 이 회장의 성공 비결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한다.”는 데에 있다.미국인도 뚫기 힘든 공공시장 진입에 성공한 것도 친구의 소개로 만난 로이 도너휴 전 백악관 컴퓨터 담당 비서관의 힘이 컸다고 했다.그러나 뒷거래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기술과 가격으로승부할 뿐 100달러라도 준 사실이 알려지면 계약은 즉각무효가 된다고 했다. 9·11 테러가 회사에게 도약의 기회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지만 1억∼3억달러짜리 보안시스템 계약에 초점을 맞춰기술을 쌓은 게 성장의 밑바탕이 됐다고 자부한다.이 회장은 지난달 미 8군의 보안시스템을 맡고 있는 ICT와 미 국방부의 정보·전자 보안시스템 사업을 수주한 PSC를 인수,그룹으로의 면모도 갖췄다. 고려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1975년 삼성 계열사였던동양방송에 입사했으나 79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MCI텔레콤의 컴퓨터 분야에서 7년간 근무한 뒤 안정성이 보장된 공공분야 진출을 결정,STG를 세웠다.2년 뒤 기업공개를 목표로 하지만 부채가 없는데다 성장 잠재력이 커 시장에서는 매출액의 6∼7배인 10억달러 선에서의 매수 제의도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한국 IT 업체와 함께 미 공공시장에 진출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mip@
  • 옥천 조씨 ‘문중대결‘ 흥미

    현직 시장 구속으로 무주공산인 순천시는 민주당과 무소속등 3파전으로 압축됐고,문중대결(옥천 조씨)도 보는 재미를더하고 있다. 민주당 조충훈(趙忠勳·49) 후보는 지역에서 사회활동과 사업가로 알려져있다. 도·농 통합도시의 이점을 살려 교육·문화·주거 도시로의 위상구축과 시민참여 확대,순천 종합관광개발계획 수립으로 전남 동부권의 중추도시 도약을 자신하고 있다. “시민 중심의 깨끗하고 투명한 ‘열린 행정’으로 순천을문화·예술의 중심도시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무소속 조보훈(趙寶勳·56) 후보는 4·5대 전남도의원과 부의장을 거쳐 98∼2002년 전남도 정무부지사를 지내며 협상력과 추진력에서 단연 돋보였다는 평가다. 청사 이전과 봉화산 터널공사 착공,도심간 균형발전,순천만 생태공원 조성을 자신하고 있으며,명예스럽지 못한 고장으로 전락해버린 순천의 명예를 되살릴 수 있는 적임자임을 다짐했다. “살기좋은 고장인 순천에 만연된 불신풍조를 뿌리뽑는 게가장 시급하다.”며 “현장을 뛰어 본 행정경험과 중앙과의인맥을 활용해 순천을 동부지역 거점도시로 만들겠다.”고밝혔다. 무소속 안세찬(安世粲·42) 후보는 무소속으로 두번의 시의원에 당선됐고 98년 시장에 도전해 38.5%라는 놀라운 득표로 저력을 보여줬다. 시의원 당시 공무원 대상 설문조사에서 전문성과 청렴도,성실성 등에서 1위로 선정됐다.또 지역내 십여개에 이르는 시민사회단체 간부로 활동하고 있고 현재 ‘우리 순천연구소’소장을 맡고 있다.“시민운동 후보로서 깨끗하고 소신껏 일하는 공무원상을 정립해 순천시민의 자부심을 살리고 살기좋은 복지 순천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순천 남기창기자
  • 버거킹이 미국 햄버거 아니라고?

    “버거 킹이 미국 햄버거가 아니라고?” 버거 킹이 맥도널드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햄버거 체인점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버거 킹이 미국인 입맛에 맞는 햄버거를 만들지만 소유주는 영국의 음료재벌인 디아지오다.미국인들조차 버거 킹을 자기네 상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버거 킹뿐만이 아니다.주유소,패스트 푸드점,숙박업소 등을 비롯해 은행,슈퍼마켓,담배회사,영화사 등 상당수가 유럽 기업의 자회사다.유럽 기업의 직접적인 투자와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소유의 변화가 생긴 경우도 많다. 주말이면 여행객들로 북적대는 대중적 호텔 홀리데이 인은 영국의 식스 컨티넨츠 호텔의 계열사다.미국에서 선두다툼을 벌이는 주유소 쉘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합작기업이며 아모코의 경우 영국 석유회사가 대주주다.켄트나 럭키스트라이크를 미국산 담배로 생각면 틀렸다.런던에 본사를 둔 영국과 미국의 합작기업이 만든 담배다. 미 동부지역의 주택가를 점령한 슈퍼마켓 자이언트 푸드는 네덜란드회사이며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스포츠·레저 자동차가운데 하나인 지프는 다임러-크라이슬러가 생산한다.미국 상표로 알려진 넥타이 브룩스 브라더스는 이탈리아 제품이며 일간지 시카고 선 타임스는 런던의 언론재벌인 콘라드 블랙이 만든다. ‘아메리칸’이라는 상표가 붙었어도 미국의 소유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은 프랑스의 미디어 그룹 비벤디의 자산이다.비벤디는 가장 미국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영화제작사 유니버설 스튜디오도 인수했다. 최근 급성장하는 멜론 뱅크와 올 퍼스트 뱅크는 각각 스코틀랜드와 독일계 은행이다.미국을 대표하는 패스트 푸드점 맥도널드와 커피전문점 스타벅스,의류제품 갭 등이 유럽에 진출했지만 2000년도 투자액을 보면 유럽의 대미 투자는 9000억달러,미국의 대유럽 투자는 6500억달러로 큰 차이가 난다. 워싱턴 포스트등 미국 언론들은 과거 일본 기업들이 콜럼비아 영화사 등 미국의 알짜배기 기업들을 삼켰을 때 “자유의 여신상이 기모노를 입었다.”고 거부감을 표시했다.그러나 유럽 기업의 미국 진출에 대해서는 세계화에 따른기업환경의 변화로 받아들인다는 논조를 보이고 있다. 아시아인과 ‘파란 눈의 크리스천’ 유럽인들에 대해 서로 달리 갖는 인종적 편견의 일단인지도 모르겠다. 워싱턴 백문일특파원
  • 점포 5000개 국내 최대 규모 ‘신도림역 테크노마트’ 건립

    강변역 테크노마트에 이어 서울 영등포에 ‘제2 테크노마트’가 들어선다. 프라임산업㈜은 서울 영등포구 신도림역 부근에 복합전자유통센터 ‘신도림역 테크노마트’를 짓는다고 16일 밝혔다.신도림테크노마트는 지하 5층,지상 25층,건물 연면적 10만평규모로 디지털 가전,컴퓨터,게임,IT,이동통신,패션·잡화 매장 5000 여개가 조성된다.단일 건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크며 강변 테크노마트(연면적 7만8000여평)의 1.3배,63빌딩(연면적 5만평)의 2배에 달한다. 프라임산업은 신도림역 테크노마트가 강변역 테크노마트보다 유리한 입지조건과 상업시설을 갖춰 서울 서남부는 물론안양,안산,인천지역 까지 광역 상권이 형성될 것으로 전망했다.또 신도림역 테크노마트의 건립으로 강변 테크노마트의동부지역과 연계된 수도권 최대 규모의 전자유통벨트를 구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가전,디지털제품 매장과 함께 1층에는 대형 혼수전문 할인매장이 들어선다.또 대형 극장 등 문화시설도 갖출 계획이다.평균 분양가는 구좌당(1구좌 10평) 1억4000만원이며 20일부터 분양을 시작한다.2005년 하반기∼2006년 상반기 입주 예정이다.(02)3424-7800 류찬희기자 chani@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3)러 거주 한인들의 수난과 투쟁사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문제가 표면화된 것은 1860년 러시아와 청국이 북경조약을 체결,광활한 우수리지역이 러시아영토로 편입되면서부터였다.이때 비로소 조선과 러시아는두만강유역을 경계로 국경선을 맞댔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발굴된 러측 극비문서에 따르면 1884년에러시아 거주 한인은 대략 1845가구 9000여명에 달했으며남우수리지방의 포시에트에 15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독신으로 넘어와 품팔이를 하던 것이 점차 가족을 동반한집단이주로 본격화됐다는 것이다.물론 러측 문서에 나타난 이같은 한인이주는 이전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발해유민등 한인 원주민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인이주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1863년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포시에트지역에 가족단위 이주민이옮겨온 이후 이주민 숫자는 매년 증가추세를 보였다.당시상황은 이와 같은 한인 이주민이 크게 도움이 됐다.(1908년 3월8일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운테르베르게르가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한인이주문제는 아무르동부지역 총독부에서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주로 등장한다.이주의 원인으로 대한제국 북부의 토질이 나쁘고 흉년이 계속된 데다 관헌의 파렴치한 착취에 따른 탈출로 분석했다.또 대한제국 국경에서 가까운 남우수리 지방은 습기가 많고 해양성 안개가 자주 끼어 러시아 농민들은 농지로 적합치 않다며 떠나 버렸지만 한인들은 이곳의 기후와 토질이 한반도와 유사해 벼농사에 적합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러시아 행정당국에서도 한인 이민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러시아군대와 도시민들에게 농산물을 재배,공급하는 한편 도로개설과 보수 및 짐마차 부역노동 등에 동원했다.한인 이주가 급증한 것은 1870년 초 조선에 흉년이 겹쳤기 때문이다.많은 국민이 빠져나가자 조선정부에서자주 항의를 해왔다.1884년 한·러수호통상조약체결이전에이주해 온 한인은 러시아국민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민온 조선인은 러시아국적을 소지하고 있으며 정교회를믿었지만 이들이 러시아인화할 것이라는 믿음은 근거없는추측이다.남우수리에 거주하는한 한인가족은 40년을 살았지만 조선식으로 살고 있다.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렇다.러시아가 청국이나 일본과 전쟁을 하게될경우 한인의 충성심을 믿어서는 안된다.이곳은 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이때문에 일본은 한인의 러시아 이민을 장려하고 있다.(상기 문서와 출처동일) 러시아 중앙정부나 지방당국은 한인들의 습관이나 생활풍속이 러시아인에 동화되지 않으며 황인종이 극동지방에 많을 경우 해롭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하지만 우선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는 정책의 시행을 차일피일 연기했을 뿐이었다.1891년 두홉스키 아무르 총독은 오히려 적극 정책을 폈다.한인의 러시아 동화를 독려하는 한편 2년간 러시아잔류허가를 받은 한인이 만기를 넘겨도 추방하지 않았고 새로 오는 이민자도 거부하지 않았다.그 결과 1904∼1905년 러·일전 기간중 한인수는 ▲남우수리 2500명▲하바로프스크와 우드스크에 7500명▲아무르에 3만 3500명에 달했다. 카자흐부대가 관리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18명의 가옥 8채를 철거하지 말고 한인이 경작하는 농토를 몰수하지 말 것.15년간 병역의무를 면제해주고 고국의 가족을 초청,러시아국적을 취득하게 해 줄 것.(1897년 8월16일 타반트 마을 촌장 이성삼외 18명이 카자흐부대 사령관에게 보낸진정서).가족을 초청,농업에 종사한다면 러시아국적취득에 동의하며 국적취득후에는 이들을 카자크관할 마을로 편입시킨다(카자흐 사령관의 회답) 카자흐란 15∼17세기 과중한 세금과 압제를 피해 러시아의 중앙부에서 남방변경지방으로 도망친 농노 및 그 자손들을 총칭하지만 주로 카자흐인들로 구성된 비정규군 둔병(屯兵)을 지칭한다.이들은 정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는 대신 유사시에 징집될 의무를 갖고 있었다.한인 이주자들도카자흐인과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러시아는 한인들에게 미개간지를 개척하게 한 뒤 또 다른 미개척지로 밀어내고 개척지에는 러시아인들을 이주·안착시켰다.1937년에는 이민족을 국경지역에서 소개(疏開)시킨다는 명목아래 중앙아시아의 오지(奧地)로 강제이주시켰다.러시아가 추진한 한인 이주정책의 정체를 알 수 있게하는 대목이다. 이범윤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정치 이민자들이 노보 키예프스크(두만강 넘어 남우수리지방에 있던 소도시)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있다. 일본이 우리의 우방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할지 유보하고 있다.(1908년 4월5일 남우수리지방 국경행정관 스미르노프가 연해주 주지사 플루그에게 보낸 통신문).한인 의병조직에 관심도 갖지 말고 처벌도 하지 말 것.그러나 격려하지는 말 것.(같은해 4월19일 플루크가 스미르노프에게 보낸 답신전문). 러시아 극동지역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17년까지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이후 러시아혁명정부가 빨치산부대를 해체하는 1922년까지는 공산주의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이곳이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우선 만주와 간도,연해주 등 국경을 맞대고 있어 한·러·청 3국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이와 함께 간도와 연해주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이주민들의 풍부한 인적·경제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다. 러시아내 한인들을 한인의용군으로 편성해 러시아에 공헌케 하는 방법으로는 산악지방에서 빨치산활동으로 일본군을 교란하게 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함경남북도에서 6000명의 모병이 가능하며 소총 2300정이 확보가능하다.…부대는 3개 연대로 구성하며 소대장이상 지휘관은 러시아인으로 한다.(1904년 11월3일 코르프 남작이 제안한 러·일전쟁시 한인의용군 편성계획). 일본 외무성이 다음과 같이 전해왔다.조선정부로부터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라는 직책을 부여받은 이범윤은 200명의 동지를 모아 통감부하의 현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이들은 불라디보스토크에서 다량의 무기를구입하고 대한제국으로 침투하기 위해 노보 키예프스크에집결해 있다. 이들중 일부는 육로를 통해 경성(서울)으로 갔으며 또 다른 일부는 선박편으로 대한제국 북부로 떠났다.(1908년 7월9일 도쿄주재 러시아대사 말레비치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만주에서는 상인들이 빨치산 대원을 도와 무기와 돈을 지원해 주었다.총대장은 이범윤이며 그는 4000명의 빨치산을 지휘하고 있다.그중 1000명은 총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나머지 3000명은 길림과 봉천지방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무장을 획책하고 있다.빨치산의 거점지역은 러시아와 청국국경지대에 일부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간도에 있다.(1911년 11월11일 하바로프스크 아무르군관구 참보부가 총참모부 관리본부에 보낸 비밀첩보보고서) 1905년 러·일전쟁의 패배로 타의에 의해 대한제국에서손을 떼게 된 이후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까지 러시아의비밀문서에는 이범윤과 관련된 항일투쟁활동이 유독 많이거론되고 있다.유인석·홍범도 등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러시아는 항일의병을 겉으로는 ‘강도단’‘폭도단’‘빨치산’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위해 활용하거나 일본군의 두만강쪽 국경침범을 저지하는 데 이용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노주석기자 joo@ ■이범진·이범윤·이위종 3인의 항일 역정 러시아 문서보관국에서 발굴된 극비문서에는 이범진(李範晋·1852∼1910),이범윤(李範允·1856∼1940),이위종(李瑋鍾·1887∼?) 3인의 이름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이들이 구한말 한·러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세사람의 관계와 비극적인 인생유전에 대해서는 국내에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세사람은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였다.페테르부르크주재 대한제국 공사였던 이범진과 헤이그밀사로 파견된 3인중 한명이었던 이위종은 부자지간이었다.만주와 연해주땅을 오가며 평생 항일의병활동을 한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이범진의 6촌 동생이었다.이같은 사실은 이범진의 손자 이원갑(李元甲·65)씨에 의해 확인됐다. 또 고종이 같은 전주이씨인 이범진을 ‘조카’라고 호칭한 점으로 미뤄 이들은 이씨 왕가의 먼 일족이었던 것 같다.이범윤은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던 고종을 연해주로 망명시키려는 시도를 한 사실도 문서 곳곳에서 드러난다. 고종의 측근이었던 이범진은 아관파천의 주역이었다.친러내각이 무너진 뒤 주미공사를 거쳐 주러공사로 부임했다. 고종은 “짐은궁중에서 일본의 포로로 잡혀있지만 북쪽러시아를 바라보며 짐과 백성을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희망을 걸고 있다.짐의 사랑하는 조카,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겠지만 그곳에 남아 니콜라이2세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라.짐이 운명한 뒤에도 그곳에 남아있으라.일본이 수입과 지출을 통제하고 있으니 송금할 수가 없다.”(1908년 1월31일)는 서신을 보냈다. 조국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이 끊긴 뒤 이범진은 러시아측이 제공하는 월 100루블의 정치성 생활보조금을 지원받고 연명하면서도 조선정부와 일본의 귀국종용을 거부했다.러시아 외무부차관이 소모프 서울 총영사에게 보낸 1910년 5월의 전문에는 “이범진은 귀국할 경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며 러시아를 떠나지 말라는 고종황제의 어명을 지키느라 귀국을 거부하고 있다.”라고 기술했다. 한일합병이후 ‘친러파’로 낙인찍힌 이범진이 일본에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살이었다.그는 1911년 1월16일 “우리의 조국은 이미 죽었습니다.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처지에 처했습니다.자살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고종에게남기고 목을 매달았다.그의 시신은 페테르부르크 교외 우즈펜스키 묘지에 안장됐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범진의 둘째 아들 이위종의 일생은 더욱 기구하다.그는 7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를 전전하면서 3개 외국어를 익혔다.프랑스 샹생 육군사관학교를 중퇴,러시아로 들어가 주러공사관 참사관으로 일했으며 러시아의 귀족 놀켄 남작의 딸과 결혼할 정도로 엘리트 외교관이었다.1907년 고종의 밀서를 지니고 이준,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만국기자협회에서 행한 일본규탄 연설은 세계에 일본의 잔학상을 최초로 알린 쾌거였다. 그는 생활고와 울분 등으로 러시아인 부인과 이혼한 뒤여기저기를 떠돌았다.1908년에는 군자금 1만루블을 관리하던 최재형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으며 이범윤과 함께독립운동을 꾀했지만 러 당국에붙잡혀 추방당했다.1차대전때 러시아군 장교로 참전한 사실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이름을 바꾸고 시베리아일대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조선인국제공산당원의 한 보고서에 나와있다.이후의 행적은묘연하다. 이범윤은 1903년 조선정부로부터 간도관리사라는 직책을부여받은 뒤 한때 5개 대대의 무장병력을 거느렸다. 대한제국으로의 진격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그는 니콜라예스크에서 검거돼 이르쿠츠쿠로 추방됐지만 이곳에서도 1925년까지 항일운동을 폈다.연해주와 만주를 오가며 평생을 조국을 위해 투쟁했던 그는 노년에 거의 폐인이 돼 비밀리에입국,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주석기자
  • 한국고대사는 ‘四國시대’

    ◇ 미완의 문명 7배견 가야사(김태식 지음/푸른역사 펴냄).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전 3권,김태식 지음,푸른역사)는 우리 고대사를 주도해온 ‘삼국시대’ 논리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다.다분히 신라인의 시각에서 정립된삼국시대라는 개념은 우리 역사 속에서 가야사를 소외시켰고,이는 결과적으로 삼국시대 이전의 천년 세월을 방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이 책의 서설 제목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를 제창하며’는 저자(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이러한 출발점에서독자를 향해 던지는 ‘새로운 고대사 인식’을 위한 명제다. 저자는 왜 한국 고대사가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시대로 설명돼야 하는지에 대한 명제풀이를 통해,가야가 왜(倭)나백제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이 난센스이며, 가야사 복원이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입증하고자 한다.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을 추려보자. 왜 사국시대이어야 하는가.먼저 역사상 ‘삼국시대’는가야멸망(562년)후 백제멸망(660년)까지 98년에 지나지않아 한국 고대사를 설명할 수 없다.때문에 가야 연맹이 등장한 기원전 4세기 경부터 562년까지를 사국시대로 설정해 한국 고대사를 재구성해야 한다. 지배면적으로 볼 때도 가야는 경상남·북도의 낙동강 유역과 그 서쪽 일대를 점유했다.최전성기엔 전라남·북도동부지역까지 지배했다. 이는 전성기의 고구려에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백제나 신라에 비하면 손색이 없다. 가야가 소국 연맹체제에 머무른 채 고대국가를 완성하지못해 하나의 국가로 취급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그러나 가야연맹은 고구려·백제·신라와 관계를 맺을 때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역할을 하였다. 또 출토 유물 등으로 미루어 개별 소국들의 생산력이나 기술수준도 매우 높았다.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1세기부터 700년 가까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독자적인 역사를 유지했다. 고대사에서 가야사가 소외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근대 이후 연구주체가 일본 학자들에게 넘어가면서 가야사가 임나일본부설을 중심으로 한 고대 한일관계사로 변질됐다는 것이다.왜국이 200년가까이 가야를 지배했었다는 이 학설은일제강점기때 일본의 한국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임나일본부설은 그러나 가야지역에서 일본문명의 흔적을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은 물론 일본학계에서도 설득력을 잃고 있다.여기서 가야사 복원은 변질된 한일 고대 관계사를 바로잡는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지난 92년 서울대에서 ‘가야제국연맹의 성립과 변천’이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십수년간 가야사 연구에 매달려 왔으며,학계에서 ‘김가야’란 별명을 얻을만큼 독보적 위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번 책은 지금까지 나온 가야사 관련 자료와 연구성과물을 집대성했다는 점,그리고 관련 지도 58장,유물·유적 실측도 111장,사진 254장 등을 첨부하는 등 우리나라에선 거의 유일하게 일반인의 눈높이에 맞춘 가야사 개설서란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1·3권 각 2만9800원,2권 2만8800원. 임창용기자 sdragon@
  • 남북관계 복원/ 전문가에 듣는다

    임동원(林東源) 대통령 특사의 방북은 한반도 안정의 한축인 남북관계를 6·15 공동선언 상태로 복원시켰으며 동시에 또 다른 한축인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는평가다.고유환(高有煥·북한학) 동국대 교수와 동용승(董龍昇) 삼성경제연구소 북한연구팀장은 7일 대한매일이 마련한좌담에서 “북한은 김대중(金大中) 정권 임기말에 ‘마지막승부수’를 던졌다.”고 평가하면서 “남북 및 북·미 관계에서 북한의 전향적 자세를 기대할 만하다.”고 말했다.고교수는 특히 “경의선 복원 재합의는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답방을 위한 ‘물리적 전제조건’으로 김 위원장의답방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진단했다. [고유환 교수] 남북이 경의선 복원 등 6개항에 합의하고 미국과의 대화를 수용하는 등 전향적 자세를 보인 것은 북한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해결구도에 적극 나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북한은 9·11테러사태 이후 전개된 국제사회흐름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면서,남북관계 진전을 통한 경제 회생을 모색하기로 큰 방향을 잡은것으로 보인다. [동용승 팀장] 남측의 경제지원을 노린 ‘한건주의’라는 지적도 있다.북한은 어려운 경제상황과 국제사회,특히 미국으로부터의 체제 위협을 남한과의 공조를 통해서 돌파하기 위해 이번 특사 방북을 받아들였다. [고유환] 합의의 초점은 민족공조와 6·15 공동선언 이행에맞춰져 있다.북한은 김대중 정권이 말기이고 남북관계가 장기 정체됨에 따라 6·15 선언의 이행에 상당한 위기가 조성됐다는 점을 우려한다.북한은 남한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햇볕정책이 유지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야겠다는 판단을했다.북한은 한나라당의 대북노선을 줄곧 비판해 왔다.특히부시 미 행정부와 일본의 고이즈미 내각에 이은 한·미·일3각 보수연대를 크게 우려하고 있다. [동용승] 북한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입장이 북한체제에 위협적임을 절감하고,남쪽에 부시 행정부와 궤를 같이하는정부가 들어서는 사태를 염려하고 있다.현 정부와 남북관계를 개선시켜 놓지 않은 상태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질 경우 미국의 대북 강경책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판단을했다고 본다.이런 점에서 남한이 한반도 문제를 주도할 수 있는 입지가 생겼다고 볼 수도 있다. [고유환] 6·15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의 큰 흐름은 한·미공조에서 민족공조로 옮겨지고 있다.이번 합의도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남북 공조의 비중이 더 높아지는 촉매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과 임 특사가 5시간동안 한반도 정세에 대해 대화를 나눈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철도 연결에 주목해야 한다.서부지역 경의선은 통일의 상징성 부분에서 우리가 집착하는 것이고 동부지역 동해선은 경제적 의미가 강하다.시베리아 횡단철도 등 금강산 사업 활성화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서부는 남북관계 개선의 상징성 외에 장거리 여행시 열차편을 주로 이용하는,김정일 위원장 답방의 물리적 전제조건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김 위원장의 답방 가능성을 시간적·물리적으로 열어두는 조치로 보인다.김정일 답방은 여전히 유효한 ‘카드’이다. [동용승] 특사교환은 장관급 회담과 성격이 다르다.따라서구체 일정합의 등이 나오는 것은 무리다.물론 2차경협추진위가 열린다 해도 대북 지원 규모 및 시기 등 풀어야 할 난제들이 많다.다만 부시 대통령이 지난 2월 도라산역에서 언급한 이산가족 문제 및 경의선 연결 등 2개 사안에 대해 북한이 이번에 응답을 한 것은 미국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갖는다. [고유환] 북측은 미국의 대북의지를 확인,협상에 나설 시점임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특히 잭 프리처드의 방북을 수용한다며 미국과의 대화의 문을 열었다. 북한은 제네바합의 불이행에 따른 전력보상 문제를 꾸준히제기하며 대화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미사일은 ‘카드’이긴 하지만 쓸 수 있는 카드가 아님을 북한은 안다.경수로 건설과 연계된 핵사찰은 선뜻 받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북한의제의로 이뤄진 지난달 20일의 뉴욕접촉을 북·미 대화 시작으로 봐도 된다.북·일 관계는 북한으로선 부차적인 문제다.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관련,적십자회담 등에 일단은 나섬으로써 50만t 식량공급 중단을 요구하는 일본내 여론을 무마하려고 할 것이다. [동용승] 경협은 지난 10여년간 진행돼 왔지만 한단계 더 올라서지 못하고 있다.이는 북한의 경제운용시스템이 상이하기 때문이다.시장이 좋으면 자본은 자연스레 몰린다.당국간 회담이 선행돼 제도적 장치 및 사회간접시설을 마련해놓고 추진해야 할 문제다.개성공단 건설은 남북경제협력의 성공 사례를 만드는 것으로 의미가 크다. [고유환] 북측이 경제시찰단을 받아들인 것은 자본주의 학습과 개방의지와 연결된다.사상 해방과 지도자의 신사고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북경협이 성공한 사례는 별로 없다. 철도와 관광개방 등은 빠르게 진척될 수 있으나 나머지는 민족경제공동체 실현을 위한 인프라구축의 의미가 있다. [동용승] 너무 빠른 속도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체제 특성상 남북한이 각각 가진 시계가 다르다.경제시찰단의 경우 대규모 공장시설을 보여주기보다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를알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찾아야 한다.북한이 현재 유럽연합 등으로 보내는 유학생을 남쪽으로 오게하는 방안도 적극 모색돼야 할 것이다. [고유환] 사실은 합의가 얼마나 이행될지가 문제다.지난해 5차 장관급 회담때도 유사한 합의를 했으나 다시 정체국면에빠졌다. 미국의 대북 입장과 대선 상황에서의 남남갈등,이에 대한 북측 반응 등 순조로운 이행을 가로막을 수 있는 변수들이 너무 많다.정권차원이 아니라,장기적인 한반도의 안정과 민족경제의 차원에서 남북관계를 이해했으면 한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아차산 생태공원 29일 개장

    서울 동부지역의 명산 아차산에 생태공원이 조성돼 일반에선보인다. 광진구는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서린 아차산에 생태공원 조성공사를 마무리짓고 29일 시민들에게 공개한다. 3450㎡규모의 이 공원은 지난해 3월부터 29억원의 예산이투입돼 생태자료실,습지원,나비정원,자생식물원,만남의 광장 등으로 꾸며졌다. 생태자료실은 아차산에서 자생하는 제비꽃 등 자생초화류와 각종 곤충을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습지원에는 연꽃과 갈대숲사이로 미꾸라지·붕어·개구리 등이 서식할 수 있도록 했다. 나비정원에서는 비비추·부처꽃 등 다양한 봄꽃들이 주변의 많은 나비들을 불러들여 시민들이 새봄의 정취를 만끽하게된다. 공원에는 또 산벚나무·홍단풍 등 교목(키가 큰 나무) 18종 386그루,철쭉·화살나무 등 관목(키 작은 나무) 21종 4905그루,부처꽃 등 자생초화류 70종 3만 4990여포기가 심어져자연학습장으로 손색이 없다. 이밖에 정자 2개동,황톳길 550m,지압보도 30m,7개의 약수터 등이 마련돼 휴식공간으로도 충분하다. 특히 구는 생태공원의 조성으로 아차산일대가 서울 동부의대표적인 시민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오는 5월부터 마당극·고전무용·대중가요 등 다양한 문화공연도 펼칠 예정이다. 아차산의 역사와 문화,자연생태를 전문가와 함께 알아보는‘아차산 숲속여행’도 새달부터 10월까지 매월 2차례씩 실시할 예정이다. 이동구기자 yidonggu@
  • 신세계 중국시장 석권 시동

    97년 국내 유통업체 중 최초로 중국에 진출한 신세계 이마트가 올해 상하이에 점포2곳을 추가 개설하는 등 중국시장 공략에 본격 나선다. 오는 2010년까지 중국에 40여개 점포를 열고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 시장에도 진출하는 등 아시아 최고 유통기업으로 도약한다는 계획이다. 신세계는 25일 “올해 말까지 상하이 포동·서회지구에이마트 점포 2곳을 개설하기 위해 4월 중 현지 합작법인들과 투자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라고 밝혔다.점포별 매장면적이 3000평 규모로 3만여종의 상품을 취급하게 된다.이를 위해 중국 현지법인인 상해상무세계백화유한공사에 3000만달러를 추가 투자할 계획이다. 신세계는 또 2005년까지 상하이에 7∼8개 점포를 갖추고,2010년까지는 난징 등 화동지역에 8개점,선전 등 화남지역에 10개점,베이징 천진 등 북·동부지역에 14개점 등 중국 전역에 40여개 점포를 내 중국 유통시장을 석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신세계 구학서(具學書) 사장은 “이마트 상하이점의 성공을 바탕으로 중국 시장공략에 본격 나서기로 했다.”면서“중국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동남아 시장까지 범위를 넓혀 아시아 소매업계 1위의 초일류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구상”이라고 말했다. 상하이 이마트 1호점은 개설 1년만에 이익을 내기 시작,지난해 매출액 430억원을 기록했다.상하이 이마트점장인김선민(金善民) 총경리는 “이마트는 까르푸·월마트 등에비해 중국 진출은 늦었지만 성공적인 정착을 하고 있다.”며 “빠른 시일내에 시장을 석권할 것”이라고 자신감을보였다. 상하이 홍성필특파원 sphong@
  • 中 다롄 국제무역센터 분양

    국내 부동산개발 회사 ㈜정산엔피아가 중국 다롄(大連)시 ‘다롄 국제무역센터’ 임대·운영권을 따냈다. 다롄 국제무역센터는 지하 4층,지상 50층 규모로 3월 중순 문을 연다.중국 동부지역에 세워진 가장 높은 무역 테마 건물로 빌딩 유동 인구만 하루 5만여명에 이른다. ㈜대우,삼성물산,LG전자의 무역 영업점이 들어서며 KOTRA와 외환은행도 입주할 계획이다.세계 유명 기업과 무역관도 들어설 예정이다.다롄은 중국 동북3성의 관문 도시로무역센터는 이 지역의 금융·무역·물류 비지니스의 중심지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정산엔피아는 빌딩 관리 외에 업무용을 뺀 상업용 시설을 일괄 임대받아 테마 상가와 전문 백화점으로 분양한다.임대 분양하는 2∼7층은 음식백화점,금융기관,무역정보서비스 업체,무역업체 등을 입주시킬 계획이다.46층은 스카이라운지로 활용키로 했다. 이달 중순까지 상업시설 이용·개발계획을 세운 뒤 국내주요 기업 및 일반 투자자에게 임대분양할 계획이다.임대기간은 50년 장기 임대이고 재계약이 가능하다. 양춘산(楊春山)다롄시 한국투자 담당관은 “시가 지분 15%를 갖고 있는데다 건물이 이미 완공돼 투자에 따른 위험이 없다.”고 말했다.(02)541-4530류찬희기자
  • 수도권 동부 하남·남양주 뜬다

    한동안 아파트 공급이 뜸했던 서울 동부지역 물량이 크게 늘었다.하남,남양주,덕소 등에서도 눈에 띄는 아파트가제법 공급된다.서울과 가깝고 주거환경이 쾌적해 서울 동부,강남지역 직장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광주 신현리 대림=지난해 분양이 뜸했지만 올해 이곳에서 1만여가구의 아파트가 분양대기중이다. 대림산업이 오포면 신현리에서 497가구를 분양한다.조합아파트로 34평형과 48평형으로 구성된다.이 가운데 일반분양분 363가구는 48평형이며 평당 분양가는 500만원대로 예상된다. 분당 경계인 태제고개 아래에 있어 분당 편익시설을 이용하기 쉽다. ♠광주 신현리 쌍용=대림산업 아파트 옆에 쌍용건설이 1086가구를 짓는 대단지.오는 5,6월에 분양한다.1차분 33∼62평형 750가구는 오는 5월,2차분 32·46평형 336가구는 6월쯤 각각 분양할 계획이다. 마을버스를 이용하면 분당까지 10∼15분거리이다. ♠하남 신장지구 에코타운=서울 강동권과 하남시 거주자가 손꼽아 기다려온 아파트단지이다. 현대산업개발과 동양고속건설이 시공한다.공급물량은1607가구로 다음달말 분양예정이다.23평형 525가구,33평형 488가구,38평형 320가구,47평형 274가구.이 가운데 23평형은 5년짜리 임대아파트이다. 2004년 입주예정이며 평당 분양가는 500만원 안팎이 될전망이다. 하남에서는 그동안 공급된 아파트가 거의 없다.반면 청약예금 가입자가 1300여명에 이르고 청약저축가입자도 1000여명을 넘어 하남시 거주자 1순위에서 청약이 마감될 가능성이 크다. ♠호평동 한화=46번 국도를 따라 춘천방향으로 가다보면나타나는 마치터널 앞 왼쪽에 들어서는 아파트다.33평형단일평형으로 단지규모는 418가구이다.오는 5,6월경 분양예정이다. 남양주 호평지구는 32만9000평으로 모두 9800여가구의 아파트가 공급되는 미니 신도시.지구안에 학교 6개,공원 및녹지 12개소,철도역사 등이 들어선다.천마산과 백봉산으로 둘러싸여 녹지공간이 많고 주거환경이 쾌적하다.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및 5개 국도가 연결된다. ♠덕소리 현대산업=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일대에 현대산업개발이 35∼47평형 1488가구를 분양할 예정이다.평형별로는 35평형 1030가구,41평형 302가구,47평형 156가구로대부분 30평형대로 구성돼 있다.덕소 일대는 한강을 끼고있어 쾌적한 주변환경을 자랑한다.또 복선화 공사가 한창인 중앙선 덕소역이 가까이에 있어 발전 가능성도 크다. 김성곤기자
  • 수원·안양 득점없이 비겨

    수원 삼성과 안양 LG가 제21회 아시안클럽축구선수권대회동아시아 4강리그 첫 경기에서 득점없이 비겼다. 수원과 안양은 17일 제주 서귀포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맞대결에서 전후반 90분 동안 슈팅수 12대 11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도 끝내 0의 행진을 끊지는 못했다. 앞서 벌어진 일본의 가시마 앤틀러스와 중국 다롄 스더의1차전도 0-0으로 비겨 4팀 모두 승점 1씩 기록했다. 2차전은 19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한편 전북 현대는 16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제12회 아시안컵위너스컵축구 동부지역 4강리그 일본 시미즈 S펄스와의 1차전에서 구보야마 요시키요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박동혁의 골로 1-1 무승부를 기록했다.2차전은 20일시미즈에서 열린다.
  • FRB “美경제 아직 취약”

    [워싱턴 백문일특파원]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16일올들어 처음 발표한 경기분석보고서 ‘베이지 북’을 통해“미국 경제가 1월에도 취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회복의 조짐이 곳곳에서 보여 올해 중반이나 빠르면그 이전에는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보고서는 지난 11월말부터 9일까지 12개 연방준비은행들이 분석한 지역경제상황을 토대로 작성됐으며 29∼30일 금리수준을 결정할 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자료로 활용된다. [소비지출] 소매판매는 연말·연시 반등세를 보였으나 전반적으로 약세를 면치 못했다.가구와 가전제품만 강세를 띄었을 뿐 온화한 날씨 탓에 의류 등 겨울용품들의 판매가 크게감소했다. 공격적인 할인판매로 재고가 줄긴 했지만 소매점의 이윤 폭도 함께 감소했다. 상승세를 유지해 온 자동차 판매는 12월들어 주춤,중고차가격을 떨어뜨렸다.소비자 대출은 12월중 주택대출 이자가상승하면서 증가율이 꺾이기 시작했다. [제조업] 모든 지역에서 취약성을 드러냈다.일부지역에서 12월 들어 신규 주문이 증가하면서 실직된 근로자들을 재고용하기도 했으나 기계공구,금속,섬유,정보통신,비행장비 등의 생산활동 전반에 걸쳐 수요가 부족했다.다만 자동차 생산은 경승용차를 중심으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2·4분기말과 3·4분기 초에는 투자가 증대,생산활동이 활기를 띌전망이다. [서비스 및 건설] 운송,관광,호텔분야는 12월부터 개선됐으나 지난해 평균 매출에는 크게 못미치고 있다.항공업은 2달사이에 고객이 15% 감소했으며 보안검색 강화에 따른 비용증가로 수익구조가 크게 나빠졌다.주택시장은 집값 상승이제약요인으로 작용했음에도 활기를 잃지 않고 있다. [노동시장·물가] 보스톤 등 동부지역에서는 실업률이 더오를 것으로 예상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점차 안정되고 있다. 특히 임금을 삭감하거나 이미 합의된 임금인상을 보류하는방법으로 고용을 유지하는 유연성을 보여줬다. 9·11 테러 이후 수요가 급증한 보안,의료,건강,보험 부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산품과 서비스 분야의 가격이 떨어졌다.이상난동으로 석유와 가스의 수요가 줄면서에너지 가격이 하락했다.
  • ‘천호동 텍사스촌’ 개발안 확정

    강동구(구청장 金忠環)가 서울의 대표적인 윤락가인 천호동 423일대(일명 천호동 텍사스촌)에 대한 개발정비안을확정했다. 구 관계자는 16일 “이 개발정비안은 지구단위계획을 결정하기 위한 전단계로 주민제안 형식으로 짜여 있다.”고말했다. 정비안에 따르면 텍사스촌 일대 1만4270㎡의 용도를 일반주거지역에서 준주거지역으로 변경한 뒤 이곳에 연면적 4만544㎡ 규모의 주상복합건물 4개동과 오피스텔 1개동을짓는 다는 것.준거지지역으로 용도가 변경되면 용적률이 250%에서 400%로 높아진다. 천호동 텍사스촌이 이처럼 개발되면 주변의 천호·광호시장의 재개발과 맞물려 동부지역의 새로운 주거·상업·업무지구로 변모하게 된다. 최용규기자
  • 북부간선도로 내일 오후 개통

    서울 동북권과 경기 동부지역에서 서울시가지로 연결되는 북부간선도로가 16일 개통된다. 서울시는 14일 성북구 하월곡동에서 중랑구 묵동에 이르는 북부간선도로 본선과 월릉 진출·입 램프,하월곡 진입램프 등 3개 진·출입로 개설공사가 마무리됨에 따라 16일 오후 3시 개통식과 함께 차량 통행을 허용하기로 했다. 서울시가 사업비 1,275억원을 투입,7년여만에 개통하는이 도로는 연장 5,175m의 왕복 4차선도로로 수도권 외곽순환도로와 내부순환로,동부간선도로 등과 연결된다. 북부간선도로가 개통되면 중랑구 신내·월릉교에서 내부순환로 길음램프간 소요시간이 지금까지의 30분대에서 7분대로,하월곡동에서 북부간선도로 묵동IC 진입까지는 25분대에서 5분대로 줄어든다. 그러나 북부간선도로에서 화랑로로 빠지는 하월곡 진출램프는 인근 주민들의 반대로 공사가 지연돼 이번 개통 대상에서 제외됐다.이에 따라 마장·종암동 방면 차량은 기존화랑로를 이용해야 된다.하월곡 진출램프는 오는 5월,월릉IC 주변 교통체계 개선사업은 오는 9월 개통 예정이다. 심재억기자
  • 광진 창업센터 내년2월 착공

    서울 동부지역의 벤처요람이 될 광진 창업지원센터가 구의동에 들어선다. 광진구는 19일 구의동 632-9에 연면적 1,414㎡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창업지원센터를 내년 2월 착공,2003년 3월까지 완공키로 했다.이 창업지원센터는 광진구가 자치구 최초로 32억4,000만원의 공사비 전액을 투자해 건립된다. 이곳은 경쟁력 있는 아이디어와 기술은 갖추고 있으나 자본이 부족한 예비창업자 및 초기 사업자들에게 기술개발 공간으로 제공된다. 이동구기자 yidong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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