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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희대 총동문회장에 김성호씨

    경희대 총동문회장에 김성호씨

    경희대 총동문회는 현 회장인 김성호(71) 제양항공해운 회장을 제28대 총동문회장으로 재선출했다고 24일 밝혔다. 김 회장은 대한민국ROTC중앙회 상임부회장을 지냈고 현재 국민희망포럼 이사,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임기는 2년이다.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통일전략포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는 26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삼청동 연구소 평화관 대회의실에서 ‘유엔 제재 이후 북한 핵 문제의 국제정치’라는 주제로 통일전략포럼을 개최한다.
  • 머리 굳은 꼰대래요…복학생은 웁니다

    머리 굳은 꼰대래요…복학생은 웁니다

    학업·취업 등 의욕은 강하지만 현실은 수업 따라가기도 벅차 64% “혼자 지내는 시간 늘었다” 심리상담 등 대책 ‘걸음마 수준’ “복학하고 대학 동아리방에 갔더니 게시판에 ‘주의 요망-복학생 조○○’이라고 제 이름이 적혀 있는 거예요. 말하자면 뭐 ‘꼰대’ 같은 복학생이다 이런 거죠. 농담이긴 해도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 그날 잠이 다 안 오더군요.” 서울의 한 사립대에 다니는 조모(23)씨는 올 2월 전역한 뒤 1개월 만에 학교에 돌아왔다. 2014년 5월에 입대한 것도 빠른 복학을 위한 결정이었다. 취직을 감안할 때 허비하는 시간을 줄이고 학업에 빠르게 적응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조씨는 지금 학업의 어려움, 단절된 인간관계 등으로 고민 중이다. “인간관계 회복을 위해 동문회에도 나가고 후배들과도 친하게 어울리려고 하는데 ‘내가 불편한 선배인가’ 눈치를 보게 되더라고요. 학비도 벌어야 하니 토요일마다 13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임금은 월 35만원에 불과하고요. 자신감이 아주 바닥입니다.” 대학 캠퍼스 문화가 빠르게 바뀌면서 ‘복학생’의 높은 존재감은 점차 과거 얘기가 돼 가고 있다. 예전 복학생들이 ‘A학점 킬러’, ‘생활 능력자’로 후배들에게 대접받았다면 이제는 ‘이방인’ 정도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커리큘럼은 빠르게 바뀌고 후배들과의 학점 경쟁도 치열해졌다. 후배들은 ‘눈치 없이 같이 놀려고 한다’고 은연중에 눈총을 주지만 어려움을 토로할 곳도 마땅치 않다. 서울대 사회학과 김석호 교수는 20일 “과거에는 복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와도 그들을 품어 줄 동아리나 학생 공동체가 많았지만 이젠 개인화된 사회의 풍토가 정착된 대학에서 ‘낯선 선배’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지방대생 박모(24)씨는 이날 “올 1월에 전역했는데 학점을 따기가 힘들어 취직도 못 할 것 같다”고 푸념했다. “공대라서 문제 풀이가 많은데 똑같이 공부를 해도 후배들 실력이 더 나은 것 같아요. 한 학기 정도 쉬면서 적응 기간을 가지라던 선배들의 충고를 무시한 게 후회되네요.” 한 사립대 경제학과에 다니는 복학생 전모(23)씨는 “교수님의 강의는 바로 전 학기 내용을 기반으로 하지만 복학생들에겐 그게 2~3년 전의 일”이라며 “체면이 깎이는 것을 무릅쓰고 후배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지만 도와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부산대 심은정 심리학과 교수팀이 복학생 226명을 조사한 결과 64.2%(145명)의 학생이 “복학 전보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늘었다”고 답했다. “수업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학생은 4명 중 1명꼴인 24.8%(56명)였다. 심 교수는 “복학생들이 전역 후 학업에 대한 의욕을 보이는 이른바 ‘군 버프(Buff)’ 시기를 맞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홀로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며 “문제는 주변에서 도움도 받지 못한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그는 “군대라는 작은 사회를 겪은 복학생들은 미래에 대한 고민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크게 겪는데, 이런 점이 학교 적응을 한층 힘들게 하는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복학생들을 위한 심리 상담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서울대가 올 1학기부터 ‘형아가 돌아왔다’라는 이름으로 군 복학생 집단 상담을 시작한 게 최초 사례다. 이지연 서울대 상담원은 “불안감을 느끼는 복학생이 많아 처음으로 집단 상담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광명동굴 ‘라스코벽화전’에 오지·불우이웃청소년 초청한다

    광명동굴 ‘라스코벽화전’에 오지·불우이웃청소년 초청한다

    오지 산간과 섬지역에 사는 문화 소외 청소년들이 라스코동굴벽화 광명동굴전에 초청된다. 경기 광명시는 20일 이를 위해 라스코동굴벽화전 조직위원회와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 광명시사회복지협의회 등 3곳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는 초청사업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또 개인이나 기업 기부와는 별도로 동문회와 향우회 등을 상대로 기금 모금을 권장할 방침이다. 광명시는 초청한 청소년들에게 라스코벽화전뿐 아니라 광명동굴과 광명업사이클아트센터, 오리서원, 충현박물관도 보여줄 예정이다. 초청사업에는 한국계 플뢰르 펠르랭 프랑스 전 문화부 장관과 김규리 영화배우가 홍보대사로 활동한다. 후원은 전화가 060-700-0006(1통 3000원)이며, 은행은 농협 301-0102-6051-71, 우리은행 1005-102-959992으로 예금주는 경기공동모금회다. 양기대 광명시장은 “교과서에 나오는 세계적인 라스코동굴벽화 광명동굴전을 보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이 많지만 가정 형편상 도서벽지 학생들은 보러 오기 힘든 형편이다”며 “많은 분들이 기금 모으기에 참여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갖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현장행정] 116개 꿈상자 사회적 약자 미래 쌓기

    [현장행정] 116개 꿈상자 사회적 약자 미래 쌓기

    컨테이너로 7개 공간 마련 다문화·청소년·청년벤처 활용 취약계층의 자립 기반 마련은 중앙과 지방 정부 공통의 숙제다. 그러나 취업 교육이나 지원금 제공 외에 지속가능한 대안을 찾기 어려워 골머리를 앓는 가운데, 성동구가 ‘젠트리피케이션’ 대책에 이은 또 하나의 모범답안을 내놨다. 재활용 컨테이너 박스를 활용한 창조공간 조성으로 의미 있는 실험에 나선 것이다. 성동구의 야심작 ‘언더 스탠드 애비뉴’(Under Stand Avenue, 이하 언더 스탠드)가 서울숲 정문(동문) 입구에 문을 열었다. 구는 지난 18일 롯데면세점,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ARCON·아르콘)와 공동으로 개장식을 갖고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했다. 언더 스탠드는 ‘낮은 자세로 서로를 이해하고 자립을 돕는다’는 뜻이다. 정원오 구청장은 취임 이후 청년층, 경력단절 여성 등의 일자리와 지역 공동체 회복 방안을 고민해왔다. 지역경제에 대한 현황 조사, 관계자 간 협의를 거쳐 지난해 1월 롯데면세점 및 아르콘과 공익공간 조성 협약을 체결했다. 롯데면세점이 사회공헌 기금으로 102억원을 지원하고, 구와 아르콘은 서울숲 입구 유휴 부지(4126㎡)에 컨테이너 116개로 공간을 마련했다. 언더 스탠드는 ▲청소년 역량개발과 취업을 돕는 ‘유스 스탠드’ ▲다문화가정 및 경력단절 여성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맘 스탠드’ ▲감정노동자의 스트레스 감소와 가족관계 향상을 위한 ‘하트 스탠드’ ▲신진 예술가를 위한 창조공간 ‘아트 스탠드’ ▲사회적기업의 문화예술상품 작업실 ‘소셜 스탠드’ ▲청년 창업 허브공간 ‘파워 스탠드’ ▲사회적기업과 청년벤처를 연결하는 ‘오픈 스탠드’ 등 7개 공간으로 이뤄져 있다. 각 스탠드들은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발생하는 수익금 일부를 사회적 약자의 자립 프로그램에 재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로 운영한다. 복합 문화공간으로서 시민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지역 명소로도 손색없을 전망이다. 앞서 개장식에는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박용호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 위원장 등도 참석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 구는 언더 스탠드를 3개월간 시범적으로 무료 운영한 뒤 보완점을 논의, 개선할 예정이다. 개장을 기념해 2주 동안은 조세현 작가 사진전과 홀로그램 별빛 체험, 밴드 공연 등 다양한 행사를 선보인다. 정 구청장은 “구청과 기업, 민간단체가 함께한 최대 규모의 사회공헌 프로젝트로 벌써 벤치마킹 문의도 많다”면서 “지속가능한 세계적 공유경제의 모델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여소야대 정국] 고졸 이하 학력도 4명 ‘금배지’ 출신학교 다양화

    [여소야대 정국] 고졸 이하 학력도 4명 ‘금배지’ 출신학교 다양화

    37명 배출 고려대 가장 큰 폭 상승 새누리 연대↓ 고대↑·성대 약진 국민의당 서울대 출신 전체 42% 더민주 영남권 대학 출신 늘어 6명 20대 총선 당선자의 출신 학교 집계 결과 한국항공대 등 새롭게 현역 의원을 낸 대학이 나오고, ‘고졸 이하’ 의원이 탄생하는 등 출신 학교가 다양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17일 서울신문이 3당 4·13 총선 당선자들의 출신 대학과 고등학교 현황을 분석해 본 결과 서울대 출신은 새누리당에서 21.3%(26명), 더불어민주당에서 27.6%(34명), 국민의당에서 42.1%(16명)를 나타냈다. 서울대 출신 비중은 야권에서 높아진 경향을 보인 셈이었다. 19대 총선에서 서울대를 나온 새누리당 당선자는 26.3%였고, 민주통합당의 서울대 출신은 26%였다. 상위 대학 가운데에는 성균관대의 약진이 눈에 띈다. 각 당 당선자들의 출신 대학 순위를 매겨 보면 지난 선거에서 4위에 머물렀던 성균관대가 27명으로 연세대를 제치고 3위에 올라선 것으로 나온다. 19대에서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의원을 각각 10명씩 배출했던 성균관대는 이번 선거에서 각각 9명, 12명의 졸업생이 새누리당과 더민주의 금배지를 단 것으로 나타났다. 성균관대는 19대 총선에서 21명(7%)의 당선자를 배출했다. 표면적으로 상위 대학에서 국회의원을 다수 배출했지만 비서울권 대학을 나온 의원이 19대 총선 때 60명에서 68명으로 소폭 늘어나는 등 일부 변화했다. 정의당 비례대표 추혜선 당선자와 새누리당 비례대표 문진국 당선자 등 고졸 이하 학력 소유자도 4명이었다.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조훈현 국수의 최종 학력은 중학교 졸업이다. 새누리당은 당선자들의 출신 대학 순위를 매기면 지난 선거에서 2위였던 연세대 출신이 고려대에 밀려 성균관대와 함께 공동 3위가 됐다. 고려대는 19대 당선자 중 7.2%를 차지했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비중이 2배 이상 늘어난 15.6%를 차지했다. 더민주 당선자 중 19대 총선과 비교해 이화여대 출신이 줄어든 것이 눈에 띈다. 4년 전 선거에서는 한명숙 당시 당 대표의 동문인 이화여대 출신이 9명으로 이른바 ‘이대 출신’이 공천에서 우대를 받았다는 논란이 일어난 바 있다. 이번 총선에서 이대 출신은 5명(4%)에 그쳤다. 더민주는 영남권 대학 출신이 다수 들어온 것도 특징이다. 부산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최인호(사하갑) 당선자와 부산외대 출신 박재호(남을) 당선자 등으로 영남권 대학 출신은 영남대와 포항공대 출신 각각 1명씩을 포함, 6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호남권 대학 출신은 전남대 출신 2명으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국민의당은 서울대 출신이 전체 의원 38명 중 절반에 가까운 16명에 이른다. 서울대 의대 출신인 안철수 대표를 비롯해 천정배 공동대표, 이상돈 공동선대위원장, 박주선 최고위원 등이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국민의당의 서울대 편중은 창당 이후 의원 수를 늘리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화제가 된 바 있다. 야권 관계자는 “호남 출신 엘리트 법조인들이 야당으로 많이 편입됐고, 이들이 국민의당으로 옮겨가며 나타난 현상”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원을 처음 배출한 대학도 눈에 띈다. 비례대표로 당선된 국민의당 이태규 전략홍보본부장은 정치권에서는 드문 항공대 출신이다. 더민주 김철민(경기 안산상록을) 당선자는 대전 한밭대 출신이다. 각 당 당선자들의 출신 고등학교를 분석해 보면 새누리당에서 대전고 출신이 경기고 출신을 넘어선 것이 눈에 띈다. 19대에서는 경기고 출신이 8명으로 각각 5명씩의 당선자를 배출한 경복고, 경북고, 대전고를 압도했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는 경기고 출신이 4명에 그친 반면 19대와 같은 숫자의 당선인을 배출한 대전고가 1위에 올라섰다. 호남의 전통 명문인 광주제일고 출신 당선자는 모두 국민의당에서 나왔다. 광주 동·남갑의 장병완, 광산갑의 김동철, 전남 여수을의 주승용, 고흥·보성·장흥·강진의 황주홍 당선자가 광주제일고 출신이다. 반면 더민주는 광주제일고 출신 당선자가 19대 총선에서는 8명이었지만, 이번 20대 총선에서는 1명뿐이었다. 민주통합당 시절인 당시 국회에서 광주제일고가 8명, 경기고가 8명이었다. 반면 이번 총선에서는 금호고, 대동고, 동성고, 서석고, 인성고 등 광주의 다른 고등학교 출신들이 각각 1명씩 배출됐다. 당선자들의 출신 고등학교 중에는 지역 전통의 명문고를 포함, 복수의 당선자를 배출한 고등학교도 있었지만 모두 142개 학교가 당선자를 한 명씩 배출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똑똑하지 인맥 넓지 경험 많지… ‘公’ 들이는 대기업

    똑똑하지 인맥 넓지 경험 많지… ‘公’ 들이는 대기업

    경험·노하우 기업체에 접목 삼성전자 등 일부 대기업이 정부 부처의 ‘엘리트’ 공무원을 대거 영입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금융위원회 등 주요 부처 공무원이 타깃이다. 영입 대상도 국장급 이상에서 과장, 서기관, 사무관 등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다. 일 잘하는 ‘똑똑한’ 공무원을 뽑아 그들의 경험·노하우를 기업체에 접목하겠다는 의도다. 11일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2013년부터 11일 현재까지 삼성그룹이 영입한 공무원 수만 79명에 달한다. 그룹의 ‘맏형’답게 삼성전자는 14명을 영입했다. 검사, 대사, 육군 사단장을 비롯해 기재부 과장도 포함됐다. 다음달 김이태(행시 36회) 전 기재부 국장이 출근하면 한 명 더 늘어난다. 삼성은 필요하다면 초급 간부인 사무관도 데려온다. 지난해 삼성화재와 삼성카드는 금융위 사무관 출신을 각각 부장급으로 영입했다. SK와 두산도 공무원 영입으로 재미를 본 기업이다. SK의 대표적 관가 출신 임원은 차진석(행시 29회) SK이노베이션 재무본부장(부사장)과 박영춘(행시 31회) SK CR(대관)팀장(전무급)이다. 차 부사장은 재경부, 박 전무는 금융위 출신이다. 둘 다 서울대 경제학부 82학번이다. 대학 동문으로 최상목 기재부 제1차관 등이 있다. 두산은 정지택(행시 17회) 두산중공업 부회장을 시작으로 기재부 출신인 문홍성(행시 31회) DLI(두산리더십기구) 사장과 박주언(행시 46회) ㈜두산 상무를 영입했다. 기재부 내에서도 일 잘하기로 소문난 박 상무는 박용만 전 두산 회장이 직접 데려왔다는 후문이다. 현재 그룹 비서실에서 근무한다. 두산중공업은 산업부 공무원(3급)을 전무로 영입한다. 기재부 관계자는 “자신의 능력을 이곳저곳에서 자유롭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인재들이 민간 기업을 택하고 있다”면서 “국제금융국 출신은 해외 경험이 많고 사고가 유연해 기업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무원의 기업행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적지 않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5급 이상 공직자 대부분이 소위 ‘행정고시’를 통해 선발돼 선후배 관계로 묶이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환경 때문에 기업으로 옮겨 간 공무원들이 회사 로비스트 역할을 할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민간 기업으로 옮긴 한 공무원은 “관에서 왔다는 이유로 ‘대관’ 업무만을 요구한다”면서 “다양한 기회를 얻으려고 왔는데 현실은 달랐다”고 말했다. 실적 압박에 시달려 2~3년을 못 버티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등 일부 기업의 성과 중시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낙오되는 것이다. ‘민간행’을 결심했지만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취업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 3년간 삼성으로 이직하려던 5명이 취업제한 명령을 받았다. 서울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세종 장형우 기자 zangzak@seoul.co.kr
  • “北 내부 동요… 中서 용인하면…대량 탈북·정치적 망명 시간문제”

    비슷한 ‘탈북 루트’ 봉쇄 우려 북한 해외 식당 종사자 13명이 한꺼번에 탈북에 성공하면서 추후 이와 비슷한 대규모 집단 탈북이 이어질 수 있을지 관심이 크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번 집단 탈북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 등 대북 압박이 커진 가운데 벌어졌고 중국이 사실상 이를 묵인했다는 점에서 그럴 가능성이 적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반면 이번 사건으로 중국 및 동남아 내의 비슷한 ‘탈북 루트’를 활용하기가 힘들어져 당분간은 추가 탈북이 오히려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이번 집단 탈북 이후 탈북자 숫자는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양 교수는 “이번 사건으로 북한과 중국, 또 북한과 외교 관계가 있는 국가들이 한국행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것”이라며 “이에 해외에 나가 있는 (탈북자 지원) 선교 단체나 비정부기구의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이번 집단 탈북자들의 탈북 루트 보호를 위해 루트를 공식 발표하지는 않았다. 해당 경로가 알려지면 국경 보호나 북한과의 마찰을 고려해 국경 감시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가 집단 탈북 사실을 공개한 이후 대북 소식통이나 현지에서 관련 정보가 계속 나오고 있다. 이번 집단 탈북자들은 중국에서 태국, 라오스를 거쳐 항공편을 활용해 인천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탈북 소식을) 요란하게 발표하면 중국은 제3국으로 가는 루트를 봉쇄할 것이며 제3국도 당분간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해외 북한 노동자들은 외화벌이 목표를 못 채울 경우 받는 문책을 두려워하는데 당국이 이 점을 보완할 수도 있다”며 북한 당국이 추가 탈북 방지책을 내놓을 수 있다고 봤다. 그럼에도 장기적으로는 이번 집단 탈북을 계기로 북한 내부의 동요 등이 커지며 제2, 제3의 대규모 탈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강동완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중국 정부가 용인만 하면 대량 탈북은 시간문제”라고 밝혔다. 그는 “내부 동요가 있게 되면 대량 탈북이나 정치적 망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도 “해외 북한 식당 대부분이 중국에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중국이 계속해서 대북 제재를 이행할 경우 상납에 압박을 느낀 사람들의 탈북이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영화같이 살다간 ‘한국 영화계 풍운아’…신상옥 감독 10주기 추모 행사

    영화같이 살다간 ‘한국 영화계 풍운아’…신상옥 감독 10주기 추모 행사

    한국 영화계의 풍운아 신상옥(1926~2006) 감독의 10주기 추모 행사가 신 감독이 손수 개관했던 서울 종로 허리우드 극장에서 열린다. 1990년대까지 대한극장, 피카디리, 단성사 등과 함께 서울의 대표 개봉관이었던 허리우드 극장은 현재 실버영화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신상옥감독기념사업회는 9일 오후 2시 종로 낙원상가 4층 허리우드 실버영화관에서 10주기 추모행사 ‘난, 영화였다’를 연다. 추모 행사는 거장의 삶을 돌이키는 영상물 상영과 추모식, 신 감독이 이사장으로 있던 안양예고 동문회원들의 추모 공연에 이어 최은희, 남궁원, 도금봉, 남정임이 출연한 ‘여자의 일생’(1968) 상영 순으로 진행된다. 이날 행사에는 신 감독의 반려자였던 최은희를 비롯해 신영균, 신성일, 문희 등 원로 배우, 김수용·김기덕·봉준호·강우석 감독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위원장과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 김종원 평론가 등도 함께한다. 10일부터 21일까지 ‘강화도령’(1963), ‘로맨스 그레이’(1963), ‘쌀’(1963), ‘내시’(1968), ‘성춘향’(1961), ‘다정불심’(1967), ‘대원군’(1968), ‘벙어리 삼룡이’(1964), ‘이별’(1973), ‘이조여자잔혹사’(1969), ‘빨간마후라’(1964), ‘꿈’(1967) 등 대표작 12편이 하루에 한 편씩 상영된다. 1950~60년대 한국 영화계를 대표했던 신 감독은 1969년 허리우드 극장을 개관, 3~4년가량 운영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봄 통영, 백석의 달뜸과 한숨이 묻어 있는 곳

    봄 통영, 백석의 달뜸과 한숨이 묻어 있는 곳

    길은,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삶 사이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대처로 떠나는 자식의 발걸음이 잠시 떨리며 머뭇거렸음을, 옷고름 사이로 떨어진 어미의 눈물방울이 짭짜름했음을 동구밖 길은 아주 오래 기억했다. 동네를 감아 도는 그 길을 걸었다. 1930년대 중반 그 봄, 충렬사 돌층계에 주저앉으면 통영 앞바다가 훤히 펼쳐졌을 게다. 여황산자락 아래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이어진 집들을 지난 눈 속에는 쉴 새 없이 고깃배가 오갔고, 부푼 꿈을 안고 오는 이, 또 다른 꿈을 이고 타향으로 떠나는 이가 엇갈리는 낡은 선창이 비쳤을 테다. 하지만 사랑을 잃은 사내에게는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도 오롯이 아름답기 어려웠으리라. 한참 나중에 호사가들이 통영을 일컬어 ‘한국의 베니스’ 운운하며 아름다운 풍광을 칭송했지만, 스물넷 평안도 출신의 청년시인 백석(1912~1995)에게는 실연의 상처가 훨씬 컸을 수밖에 없었다. 백석은 사랑을 위해 멀리 남쪽 바다까지 헛걸음을 반복해야 했다. 한 번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다른 두 번은 사랑을 기억하며 가슴 먹먹함을 달래기 위해 찾았다. 그러나 한 번 떠난 사랑이 돌아올 리는 없는 법. 통영을 다녀왔던 길은 그의 작품 속 중요한 지역의 하나로 자리매김시키는 것으로 갈무리됐다. ●삼도수군통제영 복판 여황산 끼고 돌아 백석의 발길로부터 80년의 시간이 흐른 봄, 통영을 찾았다. 그가 시 ‘통영1’에서 묘사한 것처럼 통영 여황로에는 마침 ‘김 냄새 나는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차들은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고, 타관의 학생들을 실은 수학여행 버스들은 줄을 지어 여황로 길을 지나고 있었다. 여황로는 174m의 야트막한 여황산(艅山)에서 비롯된 이름의 길이다. ‘여황’은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임금이 아끼던 화려한 배로, 훌륭한 군세를 갖춘 큰 전선을 상징했다. 통영항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산세를 펼치고 있는 삼도수군통제영의 복판에 자리잡은 산이니 딱 걸맞은 이름이다. 통영시 북쪽 여황산 아래쪽으로 4113m 이어지며 문화동, 북신동, 명정동 등을 감싸고 돈다. 통영은 현대문화예술의 보물창고와도 같다. 특히 여황로 하면 일단 백석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여황로 충렬사 앞에는 백석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통영2’라는 시다. 편의상 ‘통영1’, ‘통영2’라고 했지만 발표 당시 원래 제목은 모두 ‘통영’이었다. ‘통영2’는 그가 통영에 대해 쓴 시편 중 가장 길고 유려하며 음율을 잘 살렸다. 그는 ‘통영2’에서 이곳을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라고 했다. 또 ‘난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에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라고 노래했다. 사랑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여황로 길가에 앉아 한껏 달떠서 혼자 히죽거리는 백석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곧 깨지고 말 단꿈이었지만. 여기에 원체 아름다운 통영의 풍광까지 한눈에 들어왔으니 시인의 시심이 절로 우러났을 것임은 짐작되고도 남는다. ●백석 시비 앞 명정샘 박경리가 소설에 써 ‘난’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백석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다. 막 문청을 벗고 등단해 시인이 된 그는 한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통영 출신의 이화고녀 졸업반이던 박경련을 만나고, 첫눈에 반해 사귄다. ‘난’이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그는 박경련의 어머니를 만나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통영을 찾았지만 걸음이 엇갈려 만남이 어긋나게 됐다. 난의 집이 충렬사 근처인 명정동이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 사이 그의 직장(조선일보) 동료이자 친구였던 이가 난과 결혼을 해 버리고 말았다. 사랑과 친구를 함께 잃은 아픔 탓이었을까. 그는 그해 조선일보를 그만뒀다. 그리고 기생 자야(子夜·본명 김영한·역시 백석이 붙여준 애칭이다)를 만나 불 같은 사랑을 나눴고, 고향집 부모님의 성화에 다른 여인과 혼례를 치렀지만 다시 자야에게 돌아갔다. 1940년 자야마저도 떠나 고향땅인 신의주, 정주로 갔다. 그가 통영에 대해 직접 남긴 작품은 ‘통영 1, 2’ 외에 ‘남행시초2-통영’ 등 모두 세 편이다. 특히 ‘남행시초2-통영’ 시편 마지막에는 난의 외사촌 오빠인 ‘서병직씨에게’라고 적었다. 그를 통해 통영 장터며 선창 등을 둘러봤음을 알게 해준다. 백석이 들여다본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골 명정샘은 지금도 여황로 시비 앞에 있었다. 충렬사 문화해설사인 옥복주(47)씨는 “일(日)정과 월(月)정 두 개의 샘이 있어 명정(日+月=明井)이 됐다.”면서 “1670년 만든 이후 몇 년 전까지 330년 넘도록 식수로 썼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은 여전히 맑지만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통영2’ 중)을 찾을 수는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명정골은 통영이 고향인 박경리(1926~2008)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문장 속에도 그 흔적을 흩뿌려 놓았다. 박경리는 명정골에 대해 ‘고을 안의 젊은 각시, 처녀들이 정화수를 길어내느라고 밤이 지새도록 지분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고 했다. 박경리의 생가는 여황로 충렬사 주차장 맞은편 바로 곁의 좁은 골목길인 ‘토영 이야길’을 따라가면 있다. 하지만 현재 다른 이가 살고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표지판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남편과 사별한 시조시인 이영도(1916~1976)에게 2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무려 5000통의 연서를 보냈던 유부남 청마 유치환(1908~1967)의 사연이 남겨진 곳도 그리 멀지 않다. 유치환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보이는/ 우체국 창문 앞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복’ 중)고 노래했던 통영중앙우체국은 여황로에서 서문로를 따라 7~8분 남짓 내려오다가 세병로(청마거리) 오른쪽으로 접어든 뒤 3~4분쯤 걸어가면 있으니 그리 멀지 않다. ●지긋한 뱃사람도 시 한 구절 읊어 이른 아침 여황로 어귀에서 만난, 통영에서 나고 자랐다는 늙수그레한 중년의 김모(58)씨는 “그 사람들이야 먹고살만 하니까 그림도 그리고, 소설도 썼겠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뭐….”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유치환, 이영도의 ‘아름다운 불륜’이며, 시인 김춘수, 화가 김용주,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박경리 등 통영 출신 예술가의 이름들을 줄줄이 들먹였다. 흔히 돈을 잘 버는 동네에서 ‘강아지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들 하는데, 통영이라면 ‘중늙은이 뱃사람도 시 한 구절, 소설 한 토막쯤 읊조린다.’는 말이 좋이 쓰일 법하다. 케이블카를 타고 후딱 오른 미륵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통영시내 쪽으로는 강구안길이며, 여황산이 보이고, 다도해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한산도, 매물도, 그리고 멀리 대마도까지 한눈에 푹 안긴다. 산과 바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것만으로도 과분할 만큼의 통영이다. 이곳의 길 위에서 시집 한 권, 소설 한 권 옆구리에 끼고 그 옛 기억과 향취까지 가져간다면 더욱 어울릴 법하다. ● 역사의 보고 통영의 길들 동피랑·서문까꾸막… 토박이말 길이름 천국 통영은 바다의 왜적들과의 싸움, 그리고 평화에 대한 바람으로 다져진 곳이다. 통영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역사의 현장으로 뚜벅뚜벅 들어감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4년(선조 37)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겨 세운 뒤 ‘통영’이라는 지명이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 통제영의 약칭에서 따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인 충렬사와 통제영의 일종의 객사 역할을 했던 세병관(洗兵館·세병로 27), 그리고 북포루(北樓) 등은 통영 출신 학생들의 단골 소풍 장소이고, 다른 지역 학생들에게는 수학여행 필수 방문지다. 길 이름 역시 이러한 역사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리 없다. 세병로, 충렬로 등은 물론이고 통제영을 굳게 지키던 문들도 이름을 남겼다. 동문로(東門路)와 서문로(西門路)는 모두 옛 통영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였던 동문과 서문의 이름을 그대로 땄다. 두 문 모두 고갯마루의 정상쯤에 위치해 있었으니, 통영 토박이들의 말로 ‘동문까꾸막’(동문고개), ‘서문까꾸막’(서문고개)이라고 불렀던 길들이다. 북신로(北新路) 역시 통영성 북문 바깥에 새로 만들어진 마을길이라는 뜻이다. 또한 세병로와 여황로 사이를 잇는 갈림길인 운주길은 옛 통제영의 관아였던 운주당(運籌堂)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남해안대로에서 갈래져 나온 원문마을길은 통제영 입구였던 원문성(轅門城)에서 따온 마을 이름을 달았다. 이 밖에 통영을 찾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동피랑길은 정겨운 마을 벽화로 유명하다. ‘피랑’은 벼랑을 일컫는 통영 말이다. 통영시의 동쪽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배기로 통영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을 자랑한다. 통영성과 동포루(東樓)의 유적이 있다. 사진=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통영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헷갈리지 마세요…꽃축제 일주일 빨리 활짝

    구로구에서 벛꽃이 가장 흐드러지게 피는 곳인 구로5동 거리공원의 벚꽃축제를 예정보다 일주일 앞당겼다. 개화 시기가 예상보다 빨라 벚꽃을 즐기기 충분한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판단에 따라 과감하게 축제 날짜를 변경한 것이다. 구로구는 오는 10일 구로5동문화축제추진위원회 주관으로 벚꽃축제를 연다고 7일 밝혔다. 축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진행한다. 시작 시간 1시간 전부터 8시간 동안 현대파크빌(공원로 41)에서 애경빌딩(공원로 7)까지 왕복 8차선 중 남쪽 방향 4차로를 ‘차 없는 거리’로 운영한다.축제의 즐거움을 높이기 위해 풍물놀이와 난타, 벼룩시장 등 다양한 부대행사를 준비했다. 먹거리 장터와 구로구 자매도시의 특산품 직거래 장터도 운영, 눈과 입이 즐거운 시간을 만든다. 구 보건소의 금연클리닉 부스도 설치해 금연 캠페인을 펼치고,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이 7세 미만 어린이를 위한 자전거 무료대여소도 운영한다. 구 관계자는 “축제가 열리는 거리공원에선 여느 벚꽃거리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벚꽃을 즐길 수 있다”면서 “차 없는 거리를 만들어 어린이, 어르신 등 남녀노소가 안전하고 여유롭게 꽃구경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다산이 반한 산영루 끼고 도니 김시습 절개 어린 중흥사 눈앞

    다산이 반한 산영루 끼고 도니 김시습 절개 어린 중흥사 눈앞

    고양시, 道와 세계문화유산 추진 경기도와 고양시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북한산성에 문화유적 답사길이 생겼다. 곳곳에 있는 다양한 문화유적과 북한산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길이다. 고양시는 산을 찾는 사람에게 북한산성의 가치 및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북한산 문화유산 답사길’을 만들었다고 7일 밝혔다.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 전문위원은 “연간 1000만명이 북한산을 찾지만, 곳곳에 많은 문화유적과 그 문화유적에 얽힌 이야기 등을 알면서 산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면서 “북한산에 있는 문화유적 및 역사, 이야기 등을 적극 활용해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날 대서문에서 시작해 하창~중성문~노적사~산영루~중흥사지를 거쳐 태고사에 이르는 답사길을 걸어 봤다. 북한산성은 백제 때 축조해 고려시대 때 증축했다. 조선 숙종조에 대대적으로 축성했다. 길이가 12.7㎞인 북한산성은 고양시와 서울시 경계에 쌓은 석축산성이다.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사람이 오르는 산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북한산에 둘러싸여 있다. 북한산의 주통로이며 정문인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여러 출입문 중 가장 먼저 복원한 서쪽 문이다. 현판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 친필로 알려졌다. 대서문에서 무량사를 거쳐 오르면 만남의 광장이 나타난다. 북한산성의 여러 창고 중 가장 아래에 있어 하창이라고 부른다.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조그만 북한동역사관이 있다. 백운대 가는 길과 대남문 가는 길로 갈라지는 곳이라 늘 탐방객들로 넘쳐 난다. 이곳에서 보는 백운대, 영취봉, 만경봉이 일품이다. 하창에서 대남문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범용사 입구를 지나 400여m를 걷자, 나뭇가지 사이로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중성문이다. 북한산성 안쪽에 있는 내성이다. 이곳에는 일부러 찾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시신을 옮기는 수구문이 있다. 중성문을 통과하자마자 왼쪽으로 돌아가면 보인다. 문루에 올라서면 노적봉, 백운대, 북장대가 멋지게 보인다. 숲길을 따라 300m를 오르면 노적사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고 이를 지키는 석사자상은 고양시 문화재다. 내려와서 대남문 방향으로 5분가량 걷자 왼편에 해서체로 백운동 입구라는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 쓴 암각문이 보인다. 한 글자당 폭은 약 1.5m로, 3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한다. 200여m 더 오르자 용학사 갈림길이 보인다. 가파른 언덕길 앞에 서서 고개를 들어 보니 계곡 가장자리에 북한산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누각인 산영루가 보인다. 누각 위로 떠오른 보름달이 산과 함께 계곡물에 비친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북한산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문인이 글을 남겼다. 1925년 을축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고양시가 2014년 복원했다. 몇 걸음 산속으로 들어가면 이름 모를 들꽃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부근에는 조선시대 북한산성 수비를 맡은 총융청 지휘책임자 총융사들의 선정비 30여기가 남아 있다. 일부 공덕내용은 산영루 뒤편 거대한 암반에 새겨져 있다. 5분가량 더 오르면 산수유가 유난히 많이 피어 있는 중흥사가 나온다. 북한산 사찰을 관리하던 큰절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홍수와 일본군 탄압 등으로 훼손돼 복원이 추진된다. 생육신 한 분인 김시습 선생이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거해 과거를 포기하고 전국 유랑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위 태고사에는 보물로 지정한 조계종의 중시조이며 태고종의 중조인 태고 원증국사 보우의 사리를 안치한 승탑(부도탑)과 승탑비 등이 있다. 이 승탑은 고양시에서 가장 아름답고 크다. 승탑비는 고양시에서 가장 소중한 금석문 중 하나다. 목은 이색 선생이 태고 원증국사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했다. 용의 머리를 닮은 거북받침돌을 비롯해 글씨가 비교적 선명하다. 태고사에서는 앞쪽으로 나월봉과 증취봉, 의상봉 등의 빼어난 경관을 볼 수 있다. 승탑 뒤로 이어진 숲길은 가을에 가장 아름다운 북한산 단풍길로 유명하다. 이 길을 따라 산에서 내려올 수 있다. 북한산에는 이처럼 선조들이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들도 남아 있다. 안내판 글을 읽고 산세도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었는데도 1시간 30분가량 걸렸다. 봄을 맞아 가족끼리 찾아가 볼만한 길이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봄꽃과 함께하는 북한산 문화유적 답사길

    경기도와 고양시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인 북한산성에 문화유적 답사길이 생겼다. 절터, 암각문, 보물 등 다양한 문화유적이 산재하고 곳곳에서 북한산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할 수는 길이다. 고양시는 산을 찾는 사람에게 북한산의 아름다움과 북한산성의 가치 및 의미를 널리 알리기 위해 ‘북한산 문화유산 답사길’을 만들었다고 7일 밝혔다.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 전문위원은 “연간 1000만평이 북한산을 찾고 있지만, 곳곳에 산재한 많은 문화유적과 그 문화유적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면서 산행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면서 “북한산에 있는 문화유적 및 역사, 이야기 등이 적극 활용돼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실제 답사길은 많은 옛 이야기를 간직한 다양한 문화유적들을 가장 가까이서 접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산속에 피는 각종 봄꽃과 북한산의 빼어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역사교육의 기회로도 활용할 수 있다. 이날 대서문에서 시작해 하창~중성문~노적사~산영루~중흥사지를 거쳐 태고사에 이르는 답사길을 순서대로 걸어 봤다. 북한산성은 백제 때 축조해 고려시대 때 증축했다. 이후 조선 숙종조에 대대적으로 축성해 오늘에 이른다. 12.7㎞인 북한산성은 고양시와 서울시 경계에 쌓은 석축산성이다. 연간 1000만명 이상의 등산객들이 찾아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사람이 오르는 산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북한산에 둘러싸여 있다. 북한산의 주 통로이며 정문인 대서문은 북한산성의 여러 출입문 중 가장 먼저 복원한 서쪽 문이다. 현판글씨는 이승만 전대통령의 친필로 알려졌다. 대서문 부근에는 큰 벚나무가 있어 4월 중순 절경을 이룬다. 대서문에서 무량사를 거쳐 조금 더 오르면 넓은 만남의 광장이 나타난다. 이곳을 하창이라 부른다. 북한산성의 여러 창고 중 가장 아래에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과거 불법음식점들이 많았으나 모두 공원 내 민가들과 함께 철거됐다.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조그만 북한동역사관이 있다. 백운대 가는 길과 대남문 가는 길로 갈라지는 곳이라 늘 탐방객들로 넘쳐 난다. 이곳에서 보는 백운대, 영취봉, 만경봉이 일품이다. 하창에서 대남문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범용사 입구를 지나 400여m를 걷자, 나뭇가지 사이로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중성문이다. 북한산성 안쪽에 있는 내성(內城)이다. 이곳에는 일부러 찾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수구문(시신을 옮기던 문)이 감춰져 있다. 중성문을 통과하자마자 왼쪽으로 돌아가면 보인다. 문루에 올라서면 노적봉, 백운대, 북장대가 멋지게 보인다. 본래 민간인 통제구역이었으나 1990년대 중반 일반에 공개됐다. 중성문에서 숲길을 따라 300m를 오르면 노적사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고 이를 지키는 석사자상은 고양시 문화재다. 노적사에서 내려와 다시 대남문 방향으로 5분가량 걷자, 왼편에 해서체로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 쓰인 암각문이 보인다. 한 글자당 폭은 약 1.5m로, 30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이 과거 ‘백운동이란 마을의 입구’였음을 알려준다. 200여m를 더 오르자 용학사 갈림길이 보인다. 가파른 언덕길 앞에 서서 고개를 들어 보니 저만치 높은 계곡 가장자리에 누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북한산에서 가장 아름답고 큰 누각인 산영루다. ‘아름다운 북한산의 모습이 물가에 비친다’ 해 이름 붙여졌다. 누각 위로 떠오른 보름달이 산과 함께 계곡물에 비친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북한산의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다산 정약용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문인들이 글을 남겼다. 1925년 을축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고양시가 2014년 복원했다. 등산로에서 몇 걸음 산속으로 들어가면 이름 모를 들꽃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산영루 부근에는 조선시대 총융사(북한산성 수비를 맡은 총융청의 지휘책임자)를 지낸 인물들의 선정비 30여기가 남아 있다. 일부 총융사의 공덕내용은 산영루 뒤편 거대한 암반에 암각돼 있다. 산영루에서 5분가량 더 오르면 산수유가 유난히 많이 피어 있는 중흥사가 나온다. 북한산 내 여러 사찰을 관리하던 큰절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홍수와 일본군의 탄압 등으로 훼손돼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 생육신 한 분인 김시습 선생이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거해 과거를 포기하고 전국 유랑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중흥사 바로 위 태고사에는 조계종의 중시조이며 태고종의 중조 이신 태고 원증국사 보우의 승탑(부도탑)과 승탑비 등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승탑비는 태고사 대웅보전 우측에 있다. 고양시에서 가장 소중한 금석문(쇠나 돌에 새겨진 글) 중 하나다. 목은 이색 선생이 태고 원증국사의 일생과 업적을 비문으로 기록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용의 머리를 닮은 거북받침돌을 비롯해 글씨가 비교적 선명하다. 위쪽 옥개석에는 용과 구름이 새겨져 있다. 태고사에서는 앞쪽의 나월봉과 증취봉, 의상봉 등 빼어난 경관을 볼 수 있다. 대웅전에서 뒤로 약 50m 오르면 보물로 지정된 원증국사의 부도 승탑이 있다. 원증국사의 사리가 안치돼 있다. 이 승탑은 고양지역에서 가장 아름답고 크다. 이곳에서 백운대, 노적동, 용암봉이 보인다. 승탑 뒤로 이어진 숲길은 가을에 가장 아름다운 북한산 단풍길로 유명하다. 이 길을 따라 산을 내려올 수 있다. 북한산에는 나무와 암석뿐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들도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흔적들에는 수많은 옛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안내판 글을 읽고 산세도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었더니 대서문에서부터 1시간 30분가량 걸렸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다산 선생 180주기 묘제 종헌관 맡은 이해식 강동구청장

    다산 선생 180주기 묘제 종헌관 맡은 이해식 강동구청장

    이해식 서울 강동구청장이 7일 ‘다산 선생 서세 180주기 묘제(墓祭)’의 종헌관(終獻官)을 맡았다. 이 구청장은 이날 오전 경기 남양주시 다산유적지 묘역에서 열린 묘제에서 마지막 잔을 올렸다. 다산 선생 묘제는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가르침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매년 실시한다. 올해는 다산총동문회 회원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첫 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을, 다산 선생 차종손인 정호영씨가 두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관(亞獻官)을 맡아 진행됐다. 이 구청장은 “종헌관으로 묘제에 참여하게 돼 소회가 남다르다”면서 “다산 선생이 주창한 목민관 정신은 오늘을 사는 공직자들에게도 최고의 가르침이자 교훈”이라고 말했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사설] 120억 차익 얻은 진경준 수사 나서야

    게임업체 넥슨의 비상장 주식 취득으로 120억원이라는 막대한 차익을 거둔 진경준 검사장에 대한 의혹이 점차 커지고 있다. 진씨에게 넥슨의 주식 투자를 권유한 인물이 김정주 NXC 대표와 친분이 있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이들의 친분 관계가 주식 거래에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씨의 사표로 이번 일을 아무 일 없듯이 덮어서는 안 된다. 검찰은 그가 부당하게 불법 이득을 얻었는지 등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검찰이 나서야 하는 이유는 첫째, 진씨의 주식 매입과 직무관련성 여부 때문이다. 그가 넥슨의 주식을 산 시점은 2005년으로 당시 그는 금융정보를 수집·분석하는 금융정보분석원(FIU) 파견 직후였다. 주식 취득 후인 2009~2010년 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 부장으로 재직했다. 그의 이런 경력만으로 그의 주식 취득 자체를 매도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특수한 지위를 고려한다면 그의 넥슨의 주식 취득 및 보유는 부적절한 게 사실이다. 직무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의혹이 제기된 만큼 수사는 불가피하다. 둘째, 진씨의 주식 투자 과정이 의혹투성이이기 때문이다. 그는 주식 매입 경위에 대해 “친구들과 함께 투자했다”고 했다. 하지만 같이 주식을 샀다는 김상헌 네이버 대표는 “넥슨 주식을 같이 산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둘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누가, 왜 거짓말을 하는지도 밝혀야 한다. 이들은 외국계 컨설팅사에 근무하던 박성준씨의 주선으로 주식을 샀다고 한다. 이들 모두 대학 동문이긴 하지만 박씨가 수많은 동문 중 하필 법조인인 그들에게 주식 투자를 권유한 경위도 석연찮다. 검사 신분에 4억원이라는 거액을 한 주식에 몰방한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확실한 정보가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진씨는 당시 주당 10만원을 줘도 매물이 없던 우량주를 4만원에 1만주를 샀다. 일반인들의 거래가 거의 원천 봉쇄됐고, 주식이 거래돼도 김 회장의 재가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넥슨 주식 매입은 그 자체가 특혜다. 진씨의 특수한 신분과 모종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사건을 검사 개인의 단순한 주식매매 행위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공직자의 신분으로 수사를 받게 해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만화 같은 인생… ‘먼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덕성여대 총장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만화 같은 인생… ‘먼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덕성여대 총장

    지난 1일 서울 도봉구 삼양로 캠퍼스에서 만난 이원복(70) 덕성여대 총장은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의 주인공을 닮아 있었다. 깔끔한 인상이 그랬고, 빠르고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화법이 또 그랬다. 그는 50년 이상 만화를 그려 왔지만, 정해진 마감 시간을 어겨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첫 어린이 신문 연재로부터 55년째를 맞은 그의 만화와 인생 얘기를 들어 봤다. -“원복이라고 했지? 네가 만화를 그렇게 잘 그린다며? 어디 실력 좀 한 번 볼까?” 친구 아버지가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를 탁자 위에 올려 놓으셨다. 같은 반 친구와 함께 찾아간 서울 종로구 중학동의 소년한국일보 편집국. 1962년 당시 나는 경기고 1학년이었고, 친구 아버지는 그 어린이 신문의 주간이셨다. 아들로부터 ‘교내 학보에 만화 그리는 친구’라고 소개받은 그분은 내가 즉석에서 그린 만화를 보시더니 꽤 만족해하셨다. “우리 신문에 만화 연재해 볼 생각 없니?”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나에게 다른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친구 아버지는 당시 유명 언론인이자 수필가, 아동문학가로 활동했던 조풍연(1914∼1991) 선생이셨다. 조 선생은 한국일보에서 문화부장, 사회부장 등을 지내고 이태 전 소년한국일보가 창간될 때 초대 주간으로 왔다. -그때부터 학교 수업이 끝나면 무조건 만화를 그렸다. 솔직히 만화를 ‘그리는’ 것은 아니었고, 미군 부대에서 나와 돌아다니던 명작만화들을 ‘베끼는’ 일이었다. 원본 만화 위에 습자지를 대고 그 아래 비치는 그림의 선을 따라 본을 뜨는 게 나의 일이었다. 내가 작업을 마치면 영어 번역자가 만화 속 말풍선에 한글 대사를 집어넣었다. 나의 첫 연재물은 월터 스콧의 소설을 만화로 만든 ‘아이반호’였다. 이어 ‘엉클 톰스 캐빈’, ‘마르코 폴로’ 등을 차례로 그렸다. -아무리 베낀 그림이라고는 해도 나의 손끝을 떠난 그림들이 많은 학생들이 보는 신문에 실린다는 건 고1 학생에겐 꽤 자부심 가질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를 기쁘게 했던 건 찢어지게 가난한 고등학생의 손에 쥐여진 노란 봉투였다. 처음 받은 돈이 3000원이었는데, 그 돈은 온전히 내 마음대로 처분했다. 1000원을 떼어 형에게 주고, 남은 돈으로 영한사전 한 권 사고 대한극장에서 영화 ‘벤허’를 봤다. 그랬는데도 몇백원이 남았다. 만화가 내 생계수단이 된 출발점이었다. -내가 다섯 살 때 6·25가 터졌는데 그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대전에서 꽤 부유하게 살았다. 아버지가 고무신 공장을 운영하면서 시내에 큰 여관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을 때 그것들은 모두 폐허가 돼 있었다. 아버지는 이것저것 해 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되는 일이 없었다. 서울에 가면 좀 나아질까 해서 7남내 중 막내인 내가 열 살 되던 1955년 가족을 데리고 마포에 정착했다. 하루 세 끼를 다 먹을 수 있는 날은 거의 없었다. 코딱지만한 월세방에 부모님과 4형제가 누우면 몸을 뒤집기도 버거웠다. 우리 7남매 중에 큰누나가 결혼해 부산에서 형을 데리고 살고, 둘째 누나가 돈 벌러 지방에 내려가 있지 않았다면 우리 중 누군가는 한데에서 잠을 자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되는 일 없기는 서울이나 대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옷수선으로 생계를 꾸렸는데, 대전의 부유한 가문 출신이 갑작스럽게 고생을 만난 탓인지 서울에 올라오고 얼마 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셨다. 실의에 빠진 아버지는 몇 년 뒤 낙향하셨고, 내가 스무 살 되던 해 돌아가실 때까지 서울에 올라오지 않으셨다. -부모님은 경제적으로는 7남매에게 물려주신 게 없었지만, 약간의 재능은 주셨다. 대체로 공부 머리가 좋은 편이었고, 그중에서도 나에게는 그림에 대한 재능까지 내려 주셨다. 어렸을 때부터 내 그림 실력은 유명했다. 너댓 살 때부터 영화 같은 걸 보고 나면 그것들을 똑같이 따라 그리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국민학교 5학년 때 동대문국민학교에 전학했는데, 공부는 늘 1등 아니면 2등이었다. 어렵지 않게 경기중학교에 들어갔는데, 2학년 때 미술반에 가입했다. 부잣집 아이들은 외제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난 그걸 살 돈이 없었다. 얼마 후 미술반을 나왔다. -점심이면 식모 아주머니가 자가용차를 타고 와서 따뜻한 도시락을 전달해 주고 가는 애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점심을 굶는 게 일상이었다. 그래도 불행하다는 생각은 안 했다. 절대빈곤의 시대. 내가 사는 동네에 오면 다 우리 집 수준이었다. -고1 때부터 신문에 만화를 연재했으니 학업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전체 석차가 중하위권에 머물렀지만, 내가 경기고 학생이라는 데서 오는 대학입시의 자신감, 이런 것은 좀 있었다. (실제로 우리 경기고 61회 동창 480명 중에 360명이 서울대에 들어갔다) “내가 만화 그리느라고 시간을 빼앗겨서 그렇지, 공부에만 전념하면 서울대 의대는 충분히 갈수 있을 거야.”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정한 목표였다. 하지만, 우연히 병원에서 피투성이가 돼 있는 환자를 보게 됐는데,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바꾼 장래 희망이 건축가였다. 당시 나에게 건축가는 T자와 제도기를 들고 폼 잡고 앉아 ‘언덕 위의 하얀 집’을 그리는 직업이었다. 만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시에는 직업으로서 만화가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 자만했던 걸까, 대학에 낙방을 하고 말았다. -재수를 해서 1966년 서울대 건축학과에 들어갔다. 세계의 유명한 거장들처럼 나만의 랜드마크를 하나 만들겠다는 야심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웬걸.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수업 첫날부터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수학 미적분이라니….’ 의지가 차츰 꺾이더니 얼마 후에는 학교에 가기가 싫어졌다. “나는 좀 어려울 것 같아. 오늘 수업 그냥 빠질란다. 대신에 이따가 저녁에 내가 술 한 잔 살게.” 수업에 빠지는 날이 늘어갔다. 하루 종일 기숙사에서 만화를 그리고 빨리 어둠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달디 단 술이 나와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그곳으로 달려나갈 생각뿐이었다. 만화를 그리다 보니 수중에 돈이 좀 있었다. 그 시절, 나와 안 노는 친구는 있었어도, 나를 알면서 내가 사는 술을 안 마신 친구는 없었을 것이다. -대학생이 돼서는 나름 나만의 그림체와 스토리를 갖게 됐다. 순수한 나의 창작 만화를 그려 소년한국일보에 연재했다. 명랑만화, 스포츠만화, 순정만화 등 분야도 다양했다. ‘야망의 그라운드’, ‘미니 바람 꽃구름’, ‘사랑의 학교’, ‘자마곰 삼형제’ 같은 작품이 그 시절 내 대표작인데, 신문사에서 편집국 한쪽에 내 자리를 따로 만들어 줬을 정도였다. 사실 신문사 입장에서는 적당히 인기 있는 원고 넘겨주지, 마감시간 또박또박 잘 지키지, 원고료 많이 줄 필요 없지 나 같은 보물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한창 때는 소년한국일보에 작품 3개를 동시에 싣기도 했는데, 그걸 다 ‘글·그림 이원복’으로 할 수가 없어서 ‘이상권’, ‘성창경’ 같은 친구들 이름을 필명으로 쓰기도 했다. 상권이나 창경이는 자기 이름이 공짜로 신문에 나가는 것도 모자라 나한테 술까지 얻어먹는 호사를 누렸다. -결국 나는 만화가 생활 때문에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장을 따지 못했다. 1972년 군대에 들어가 1975년까지 만화만 그렸는데, 그러는 사이 형들은 ‘형제들의 다짐’을 속속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공부에 관심이 없던 둘째 형을 제외한 우리 형제들은 1966년 첫째 형(이정복·86·전 한양대 교수)이 독일로 철학을 공부하러 간 뒤 약속을 한 게 있었다. 우리도 학비가 무료인 독일로 유학을 하되 먼저 간 형이 바로 아래 동생의 초기 정착금을 위해 1년간 돈을 벌자는 거였다. -셋째 형(이창복·80·전 한국외국어대 부총장)이 쾰른대에 독문학을 공부하러 갔다. 형은 대학 입학을 1년 동안 미루고 식당에서 일해 넷째 형(이정춘·74·전 한국언론학회장)에게 비행기 티켓을 보내 주었다. 넷째 형은 독일 뮌스터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해 나중에 중앙대 교수가 됐는데, 나 역시 그 형의 덕을 보았다. 1975년 뮌스터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했다. -독일에 도착한 날부터 유럽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창작한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을 ‘새소년’에 6년간 연재했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전편인 셈이다. 그런데 너무 초기에 그린 만화여서 나중에 보니 오류가 많았다. -여행과 독서는 내 창의력의 밑천이자 큰 자산이었다. 사람들은 내 유학생활이 꽤 어려웠을 것으로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른 유학생들이 50만원으로 한 달을 살았다면 난 100만원을 쓰고 살았다. 한국에 그려 보낸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 원고료 덕이었다.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1000달러쯤 주고 사서 1만∼2만㎞ 정도 달리고 버렸다. “내가 여기를 언제 또 올 수 있겠나.” 이곳저곳 다니는 게 즐겁기도 했지만, 내 인생과 내 청춘에 대한 의무감이랄까, 그런 게 느껴졌다. -독일 유학 중에 잠시 한국에 나왔다가 당시 김수남 소년한국일보 사장을 만났다. 그때는 ‘시관이와 병호의 모험’이 끝나 있던 상태였다. 다시 신문에 만화를 연재하자고 했다. “먼나라 이웃나라 어때?” ‘먼나라 이웃나라’라는 제목은 이렇게 탄생했다. 1981년 10월부터 1986년까지 소년한국일보에 5년여에 걸쳐 총 1376회를 연재했다. 이듬해인 1987년 그걸 묶어 책으로 만드니 6권(먼나라 이웃나라 유럽편)이 나왔다. 2012년 전체적으로 새로 그려 재발간을 하고 2013년 스페인편까지 완성했다. -잠시 귀국해 덕성여대 교수 임용을 확정 짓고 1984년 5월에 짐을 싸기 위해 독일에 다시 들어갔는데, 스물세 살의 한국 여학생이 언론학을 공부하기 위해 우리 마을에 와 있었다. 당시 나는 서른 여덟이었다. 3개월간 교제를 했다. 그녀는 유학을 포기하고 15세 연상인 나와 한국으로 돌아와 이듬해 결혼했다. -‘먼나라 이웃나라’는 국내에서만 1700만부가 팔렸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글로벌화라는 세계적인 기조의 순풍을 잘 탄 것 같다. 우리나라에 유럽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것도 책의 인기를 높여 주었다. 유럽편의 내용들은 상당 부분 내 삶에서 느끼고 경험한 것 자체다. 그렇지 않은 중국편과 일본편을 위해서는 공부를 위해 각각 20회와 50회 이상 현지를 다녀왔다. 미국은 1999년 방문교수로 가서 살았던 게 도움이 됐다. -교수를 하는 동안 외부 활동을 주로 했다. 정작 덕성여대를 위해 기여를 못한 게 아쉬워 지난해 3월 총장직을 맡았다. 선거 공약으로 ‘남녀공학 전환’을 내세웠고 장기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젊어서는 ‘기러기 아빠’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지금은 ‘독거 노인’이 됐다. 얼마 전 서울 잠실의 우리 집으로 동사무소 직원이 찾아왔다. 요즘 혼자 살다가 변사하는 노인이 많아서 현황 파악을 하겠다고 했다. 헛웃음이 나왔지만, 내 현실인 걸 어쩌겠나. 내 건강의 비결은 운동을 전혀 안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가장 정밀한 기계이기 때문에 아껴 쓸수록 오래 쓴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것인데, 최대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이원복 덕성여대 총장은 우리나라 교양 만화의 선구자로 불린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해 글로벌 시대 지구촌 각국의 이야기를 만화로 풀어내 한국인의 국제적 시야를 넓혔다는 평을 받는다. 55년의 만화 경력에 더해 일러스트레이터로서도 국제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 독일 뮌스터시·코스펠트시 초청 개인전을 가졌고, 권위 있는 2009 볼로냐 국제 일러스트전에서 한국 일러스트레이터로는 처음으로 심사위원에 선정됐다. ▲1946년 대전 출생 ▲경기중, 경기고, 서울대 건축공학과(수료), 독일 뮌스터대 서양미술사·시각디자인 석사 ▲덕성여대 산업미술학과 교수, 석좌교수, 제10대 총장 ▲한국 애니메이션 만화학회 회장, 법무부 정책위원회 위원장 ▲‘먼나라 이웃나라’, ‘가로세로 세계사’, ‘와인의 세계·세계의 와인’, ‘만화로 떠나는 21세기 미래여행’, ‘세계사 산책’ 등 저서 다수
  • 대구보건대, 직무 교육시설인 보현연수원 개원

    대구보건대, 직무 교육시설인 보현연수원 개원

    대구보건대가 직무 교육시설인 보현연수원을 오픈했다. 대구보건대는 지난 1일 천성봉 밀양시 부시장, 이강호 밀양소방서장, 남성희 대구보건대 총장 등 대학관계자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식을 갖고 운영에 들어갔다. 경남 밀양시 단장면에 있는 보현연수원은 8000㎡에 본관, 보현박물관 등 3개의 건물로 이뤄졌다. 본관은 지하 2층, 지상 4층, 4000㎡ 규모에 17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25개의 객실과 190명을 수용할 수 있는 4개의 세미나실을 갖췄으며 행정실, 매점, 휴게실, 접견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구성된 보현박물관에는 갤러리, 카페, 체육시설 및 놀이시설이 마련됐다. 20개월 공사 끝에 이날 문을 연 보현연수원은 오는 8월까지 30여개 단체에서 2500명이 연수 신청을 하는 등 벌써 관심을 받고 있다. 연수원은 이 대학교 재학생, 교직원, 동문들의 교육과 훈련, 힐링 공간으로서 사용하고 투숙객과 지역주민들을 위한 전시회, 음악회 등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갈 계획이다. 남성희 대구보건대 총장은 “보현연수원은 대구보건대교 45년 역사의 숨결을 담아서 완공됐다”며 “앞으로 시설을 확충하고 양질의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 대학 연수원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김기중 기자의 교육 talk] 아이들 모험심 빼앗는 놀이터

    장모님께서 주말 동안 아이들을 데리고 수원에 사는 처남 집에 다녀오셨습니다. 장모님은 처남 집 근처 정암수목공원 숲속놀이터에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카카오톡으로 보내주셨습니다. 큼직한 나무 기둥 여러 개에 굵은 밧줄이 거미줄처럼 주렁주렁 달린 그곳에서 아이들은 원숭이처럼 여기저기를 쏘다녔습니다. 흥분한 표정으로 나무판 여러 개가 이어진 다리를 건너가기도 했습니다. 행복하게 노는 아이들의 사진을 보니 이제는 변해버린 저희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가 생각났습니다. 당시 놀이터는 10년 넘게 자연 건조한 아카시아 나무 수십개가 모랫바닥에 박혀 있어 숲 속을 연상시켰습니다. 나무 기둥 사이는 통나무들이 외나무다리처럼 연결돼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검정 고무판이 해먹처럼 달렸습니다. 아이들이 누워 있을 때 다른 아이가 고무판을 위로 뛰어내리면 누워 있던 아이들은 위로 솟구치면서 깔깔대곤 했습니다. 굵은 밧줄이 달린 벽의 한쪽에서 아이들은 암벽을 오르듯 밧줄을 타고 벽을 타기도 했습니다. 놀이터 한쪽 구석 팻말에는 한 단체에서 최우수 놀이터상을 받았다고 자랑스레 적혀 있었습니다. 근처 아파트 아이들이 ‘놀이터 원정’을 올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항상 많은 아이가 바글거렸고, 즐거운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웠던 놀이터에 2년 전 가을쯤 갑자기 ‘위험! 출입금지!’라고 쓰여진 빨간 띠가 둘러졌습니다. 지난해 시행된 어린이놀이시설안전관리법 때문이었습니다. 지난해 1월 말까지 모든 놀이터가 정기시설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검사를 받지 않았거나 정기시설 검사에서 불합격된 ‘위험한’ 놀이터는 이용이 금지됐습니다. 전국 6만 4400여개 놀이터 가운데 2000여개 놀이터가 당시 일제히 이용이 금지됐습니다. 불합격된 놀이시설을 개보수한 뒤 재검사를 통해 합격 판정을 받을 때까지 저희 아파트 놀이터도 폐쇄됐습니다. 놀이터는 지난해 봄 모습을 바꾸고 다시 아이들을 맞았습니다. 모랫바닥은 고무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무 기둥들은 모두 뽑혔고, 대신 플라스틱 덩어리의 미끄럼틀, 재미없고 단순한 그네, 쇳덩어리 시소 몇 개만 덩그러니 갖춘 평범한 놀이터로 바뀌었습니다. 너무나 단순하게 바뀐 놀이터를 보는 게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아파트 일에 별 관심 없던 저는 바뀐 놀이터를 보고 ‘동 대표라도 나가야 하나’ 생각도 해봤습니다. 아이들은 ‘말’보다 ‘놀이’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놀이를 많이 할수록 창의력도 늘어나고 감수성과 표현력도 풍부해집니다. 미끄럼틀, 그네, 시소로 구성된 정형화된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단지 놀이기구에 맞춰 놀 수밖에 없습니다. 안전을 우선한 플라스틱 놀이터가 오히려 아이들에게서 ‘안전’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아동문학가 편해문씨는 저서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안전한 놀이터, 지루한 놀이터가 오히려 아이들에게는 위험하다. 아이들은 작게 자주 다쳐야 나중에 크게 안 다친다. 안전한 놀이터에서 놀기만 한 아이들은 정작 큰 위험이 닥칠 때 아무것도 방어할 수 없는 아이가 된다.” 고무와 플라스틱 대신 나무와 흙이 있는 놀이터, 정글 같은 놀이터, 모험을 즐길 수 있는 놀이터가 아이들에게 필요합니다. 눈앞의 안전만 중시한 어른들이 결국 아이들의 모험심을 빼앗아 버린 것은 아닐까요. gjkim@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산을 닮아 있었다… 세계 최초 ‘히말라야 8000m급 16좌 완등’ 엄홍길 대장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산을 닮아 있었다… 세계 최초 ‘히말라야 8000m급 16좌 완등’ 엄홍길 대장

    안나푸르나에서 겸허함 배웠고 히말라야 휴먼 원정대 영화로 남아 2006년 여름에 만난 엄홍길은 전사(戰士) 같았다. 허벅지 인대가 땅긴다며 잠시도 앉아 있지를 못하고 거실을 어정거렸다. 뜨거운 심장과 혈액을 히말라야 고봉 능선의 어디쯤에 두고 온 듯했다. 그때는 로체샤르(8400m) 3차 도전에 실패한 직후였다. 머리에서 산이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편안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 만남이 있고 9개월 후 엄홍길은 4차 도전을 했고, 성공했다. 동시에 세계 최초의 ‘히말라야 16좌 완등’ 주인공이 됐다. 10년이 흘러 다시 만난 쉰여섯 살의 엄홍길은 산을 닮아 있었다. 허예진 머리카락에 여유를 담은 미소. “돌아보니 산이 품을 내주어 내가 그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작은 거인의 깨달음은 ‘겸허함’이었다. -1977년 9월 15일. 네팔 현지시간 낮 12시 50분에 고상돈(1948~1979) 선배가 에베레스트(8850m) 정상에 올랐다. 신문을 보는데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고상돈’이라는 이름 석자는 나에게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고상돈 선배의 세계 최고봉 정복은 고1 우리 반 교실에서도 화제가 됐다. 대부분 친구들은 “뭐하러 그 추운 데까지 날아가서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달랐다. 이미 나는 산을 잘 타는 학생으로 약간 이름을 알리고 있던 터였다. 그걸 아는 한 친구가 말했다. “홍길아, 너도 나중에 한 번 해 봐.”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나 산소마스크를 쓰고 오른손에 태극기를 든 영웅의 모습이 신문 1면에 일제히 실렸다. 정성껏 사진을 오려 내 방 벽에 붙였다.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히말라야 빙벽을 올라가는 내 모습뿐이었다. 당시 나의 산악 등반 능력은 이미 수준급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앞에서 깔아 준 줄을 잡고 암벽을 오르는 게 아니라 내가 선봉에 서서 루트를 개척하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경남 고성에서 농사꾼으로 살던 아버지는 시골살이를 답답해하셨다. 1960년 첫째인 나를 낳고 3년 후 과거에 군 복무를 해서 익숙했던 경기 의정부로 이사를 오셨다. 그런데 하필 터를 잡은 게 등산로였다. 도봉산을 찾는 등산객들을 상대로 작은 매점을 차렸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부모님과 도봉산 망월사와의 인연이 계기가 됐다. -산은 집이기도 했고 놀이터이기도 했다. 호암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아침에 학교에 갈 때는 1시간을 뛰어서 내려갔고, 오후에는 1시간 30분 동안 산길을 올라왔다. 그 어릴 적부터 하루에 2시간 30분씩 산을 탔던 셈인데, 처음부터 힘들다는 불평도 없이 잘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에서 나는 ‘산에 사는 아이’로 통했다. 지금처럼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게 없던 시절, 친구들에게 우리 집은 인기가 아주 많았다. 봄에는 버찌를 따려 벛꽃나무에 오르고, 진달래를 따 먹었다. 여름에는 계곡물을 막아 물장구를 치며 고기나 가재를 잡았고, 가을이면 다래·밤·잣 등을 찾아다녔다. 겨울에는 눈길을 헤치며 토끼를 잡으러 다녔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클라이밍(암벽 등반)에 관심이 생겼다. 주말이면 산악회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도봉산 두꺼비바위에서 등반하던 산악인들에게 클라이밍의 기초부터 배웠다. 그러나 내가 그들보다 더 산을 잘 타는 ‘날다람쥐’로 성장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상에, 어쩜 그렇게 산을 빨리 올라가니.” 어른들은 일주일이 무섭게 늘어가는 나의 빠른 실력 향상에 혀를 내두르곤 했다. -1980년 2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전문 산악인이 되기로 한 이상 대학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한 선배가 대청봉 밑에서 ‘희운각’ 산장을 운영했는데 그 일을 도우며 산을 탔다. 그때 만난 사람이 정양근 형이었다. 그가 1983년 스물일곱 나이에 안나푸르나에서 눈사태를 만나 세상을 뜰 때까지 그는 나에게 정신적 지주였다. 하도 설악산을 헤집고 돌아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능선들이 손금 보듯 훤했다. 일반 등산객들은 대청봉까지 2, 3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1시간이면 올랐다. 5시간이 걸리는 설악동까지의 코스도 2시간 30분이면 충분했다. 사람들은 나를 ‘축지법 청년’이라고 불렀다. 체력이 절정에 달해 어떻게든 발산을 해야만 했는데, 그것이 아무리 험준한 산도 한달음에 내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집에 있는 부모님은 한숨이 늘어갔다. “그렇게 대학도 안 가고 등산만 하면 도대체 나중에 뭘 해 먹고 살려는 거냐.” -그런 걱정과 반대에도 당시 벌이는 꽤 쏠쏠했다. 설악산 등반객들 때문에 산장 운영은 꽤 벌이가 되는 장사였다. 명절이나 휴가철이면 ‘돈을 라면박스에 쓸어 담는다’며 즐거워했다. 군대 가기 전 1년 반 정도의 설악산 산장 생활은 전국 산악인들과의 인연을 맺는 귀한 시간이기도 했다. 일반인 등반객들이 뜸한 비수기가 되면 보름 정도씩 지리산, 오대산, 소백산 등 다른 산을 찾아가 그곳에서 활동하는 산악인들과 만나 등반도 하고 식사도 했다. 얼마 후 전국적인 인맥이 형성됐다. -내가 도달하지 못한 산 정상이 하나씩 둘씩 줄어갈수록 가슴속에 있던 히말라야에 대한 꿈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러기 위해서 꼭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군대였다. 십수년을 산에서 보내서였을까. 몸으로 하는 거라면 뭐든지 자신이 있었던 시절. 육군은 재미가 덜할 것 같았다. 해군에 입대했다. 인천에서 작은 군함을 탔는데 3개월 만에 배의 엔진에 불이 나서 대기발령을 받게 됐다. 그때 지체 없이 해군특수전단(UDT)에 지원했다. 석 달간의 수병 생활도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UDT 훈련은 산악인으로서 나의 능력을 몇 단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엄청난 양의 수영은 폐활량과 근력을 키워 주었다. 경주 감포에서 독도까지 5박 6일 동안 헤엄쳐 가 본 적도 있었다. 6개월 동안 다이빙, 수중 폭파, 수중 침투, 육상 침투, 낙하산 공중침투 등 훈련을 다 견뎌내야 했는데, 1주일간 단 한숨도 잠을 안 잔 적도 있었다. -1984년 9월 제대를 하고 나서 그해 연말부터 에베레스트 원정을 준비했다. 박영배 대장이 나를 원정대원으로 뽑아 주었다. 대원을 선발할 때에는 등반 기술, 체력도 중요하지만 정신력과 인간성도 중요한 심사 요소로 본다. 1년가량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속보 산행을 하며 지구력 훈련을 하면서 암벽과 빙벽에 붙어살았다. -히말라야 도전은 집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1985년 겨울 D데이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저 얼마 있으면 네팔에 갑니다.” 아버지는 펄쩍 뛰셨다. 죽을지도 모른다며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다. “저는 정상까지는 안 가요. 꼭대기는 선배들이 오르고 저는 그냥 심부름 정도만 하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처럼 원정대 스폰서가 흔치 않아서 그동안 모아둔 돈 500만원을 고스란히 털어 넣었다. 그렇게 떠난 첫 도전에서 에베레스트는 나를 품어 주지 않았다. 1993년 초오유(8201m)와 시샤팡마(8201m) 등정 성공을 시작으로 1998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다. 히말라야 16좌 중 10번째 등정이었는데, 고1 때의 다짐으로부터 20여년 만이었다. -많은 사람이 히말라야 16좌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봉우리가 무엇인지 묻는다. 안나푸르나(8091m)다. 네 번을 실패했다. 1998년 네 번째 도전에서는 동료를 3명이나 잃었고 나 자신도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7600m 지점 급경사에서 미끄러지는 셰르파를 구하려다 함께 굴러떨어졌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발목이 완전히 꺾여 돌아가 있었다. 사고 지점에서 4600m의 베이스캠프까지 그 다리를 하고 2박 3일 동안 내려왔다. 유독 그 봉우리만 실패를 거듭한 이유를 떠올려 보면 젊은 날 그 산에서 떠나간 정양근 선배가 떠오른다. 언제나처럼 자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싶었을 것은 아닐까. -어쨌든 안나푸르나 4차 등정 실패 후 병원에서 “다시는 산에 오를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11번째 봉우리를 앞에 두고 평생의 여정이 끝나는가 싶었다. 어둠 속의 고통을 말해 무엇하겠나. 10개월간 고통 속에서 도봉산을 오르내리며 재활했고 다시 몸을 만들 수 있었다. 이듬해 5번째 안나푸르나로 향했고 결국 정상에 섰다. 그곳에서 배운 겸허함은 16좌 완등을 무사히 마치게 해 준 힘이었다. -2007년 16좌 등반을 완료하자 기쁨과 함께 허탈함이 밀려왔다. 주변에서 “이젠 편하게 살라”고 했다. 목숨을 건 사투가 그들에게 꽤나 힘겨워 보였는가 보다. 엄홍길휴먼재단을 만들기로 했다. 네팔의 산골 오지 학생들에게 학교를 지어 주는 프로젝트인데 16개를 건립하는 것이 목표다. 현재 13개가 착공돼 있다. -2013년 말 영화 ‘해운대’, ‘국제시장’을 만든 윤제균 감독이 연락을 해 왔다. 감독이 아닌 영화 제작자로서였다. 에베레스트 8750m 지점에서 조난당한 후배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2005년 휴먼원정대를 꾸린 것을 영화로 만들자는 거였다.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고 자문을 해 달라고 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가까스로 치유한 유족의 상처를 다시 건드리게 됩니다.” 완강히 거절을 했다. 사실 앞서 2005년에도 여러 영화 제작자가 연락을 해 왔다. 그때도 같은 이유로 모두 거절을 했다. 그러나 윤 감독의 집요함은 이전 제작자들과 달랐다. “산과 사람의 역사를 함께 조명하자”고 했다.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마음을 바꿨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메시지를 영화를 통해 전하기로 했다. 초고속 성장을 하면서 추락한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휴먼원정대를 통해 일깨우고 싶었다. ‘배려와 양보가 사라진 이기적인 사회에서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동료애와 희생정신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가. 정신이 황폐화된 채 맞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 영화 ‘히말라야’(2015년·황정민 주연)가 탄생했다. -나는 지금도 히말라야에 오르고 싶다. 도시는 너무 답답하다. 야생마처럼 멋대로 천지를 달리다가 갇힌 기분이다. 열정을 불태우던 시절이 그립다. 체력적으로 아직 8000m 산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간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매월 많게는 10번 정도 강의를 한다. 말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군부대, 경찰, 관공서, 기업체, 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강연 의뢰를 받는다. -지금도 웬만하면 오전 스케줄은 비우고 북한산을 오른다. 내 산책 코스는 북한산 백련사 입구에서 진달래 능선을 지나 대동문까지 오른 후 아카데미 하우스로 내려오는 길(10㎞)이다. 1시간 30분 정도면 완주하는데 요즘은 나를 알아보는 분들이 많아서 이렇게 저렇게 인사를 하다 보면 2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산에 오르는 길은 ‘이러다 죽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의 연속이다. 산은 사람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곳곳에 크레바스가 도사리고 있다. 눈사태도 감수해야 한다. 8000m 고봉에서는 산소가 해수면의 3분의1밖에 안된다. 두세 발짝 움직이고 나서 3~5분간 숨을 거칠게 쉬어야 다음 한 발을 내디딜 수 있다. 유일한 동반자는 시련을 참아내는 내 안의 용기와 인내뿐이다. 정상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내고 완전히 탈진이 된 후 하산을 한다. 오를 때는 정상이라는 결과에 몰입해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내려올 때는 정신이 돌아오면서 겁이 나기 시작한다. 사고도 내려올 때 더 많이 일어난다. 우리들 인생과 비슷하다고나 할까.김태균 사회부장 windsea@seoul.co.kr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사진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엄홍길 대장은 1993년 초오유(8201m)를 시작으로 2007년 로체샤르(8400m) 등정까지 세계 최초로 8000m 이상 히말라야 고봉 16좌를 완등했다. 2005년에는 에베레스트 등반 도중 숨진 고 박무택, 백준호, 장민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휴먼원정대’를 조직했다. 세계 산악계 최초로 동료를 구하러 목숨을 건 등반을 감행해 ‘휴머니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재는 엄홍길휴먼재단을 운영하며 네팔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 건립에 분주하다. ▲1960년 경남 고성 출생 ▲양주고, 한국외국어대 중문학 학사·체육교육학 석사 ▲밀레 홍보팀 기술 고문, 상명대 자유전공학부 석좌교수, 대한산악연맹 대회협력위원장 ▲체육훈장 거상장·맹호장·청룡장, 대한민국 산악대상, 대한민국 창조경영인상 수상 히말라야 16좌 등정 일지 초오유→시샤팡마(1993년·8027m)→마칼루(1995년·8463m)→브로드피크(1995년·8047m)→로체(1995년·8516m)→다울라기리(1996년·8167m)→마나슬루(1996년·8163m)→가셔브룸1(1997년·8068m)→가셔브룸2(1997년·8035m)→에베레스트(1998년·8850m)→안나푸르나(1999년·8091m)→낭가파르바트(1999년·8125m)→칸첸중가(2000년·8586m)→K2(2000년·8611m)→얄룽캉(2004년·8505m)→로체샤르
  • 천안 대단지 아파트 ‘도솔노블시티 동문굿모닝힐’ 시선집중

    천안 대단지 아파트 ‘도솔노블시티 동문굿모닝힐’ 시선집중

    최근 투자자 및 수요자들 사이에서 대단지 아파트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대단지 아파트는 단지 내부 커뮤니티 시설이나 조경이 잘 돼있는 곳이 많은데다 인근에 생활 인프라 확충이 빠르기 때문이다. 또한 대단지 아파트는 호황기에는 가격 상승폭이 크고 요즘 같은 불황기에도 가격 지지력이 상대적으로 탄탄하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내 집 마련을 고민하는 수요자라면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는 대단지를 중심으로 상품을 알아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동문건설에서 분양 중인 천안 ‘도솔노블시티 동문굿모닝힐’도 대단지 아파트라는 점 때문에 수요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2144세대의 대단지 안에 17개의 테마파크가 들어서며, 현재 일부 회사보유분 잔여물량에 한해서만 선착순 분양 중이다. 전용면적 59㎡은 마감이 됐고 72㎡, 74㎡, 84㎡만이 일부 남아 있다. 태조산등산로와 오룡웰빙파크(예정) 등이 가까워 쾌적한 주거생활이 가능하며, 경부고속도로 천안IC와 가깝고 수도권 전철 천안역과 천안종합버스터미널이 인근에 있어 교통 편리하다. 교육과 생활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신안초, 천안중, 천안중앙고 등이 가깝고 신세계백화점, 이마트 등 생활 편의시설이 밀집해있어 다양한 생활인프라를 누릴 수 있다. 여기에 천안,아산 지역에 들어서 있는 여러 산업단지들로 인해 배후수요마저 풍부한 이점이 있다. 한편, 현장엔 현재 이주 및 토공사가 완료 단계로 골조작업 준비가 한창이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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