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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또 불거진‘언론문건’시비

    여권의 두뇌집단이 만들었다는 ‘언론대책 문건’이 불거져나와 정치권은 물론 언론계가 벌집을 쑤신 꼴이 됐다.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이 단독 입수 보도한 이 문건을 보면,10개 중앙지의 성향을 ‘반여(反與)’‘친여(親與)’‘중립’으로 분류하고 비판적 언론에 대해서는 정공법으로 대처할것을 촉구하고 있다.한나라당은 “여권의 비판적 언론 죽이기가 드러난 이상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사과해야 하고 국정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고강도 공세로 나오고있다.한편 민주당은 “확인 결과 우리 당에서 그런 문건을만든 사실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며 “우리와 무관한 만큼 일절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야 공방전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가뜩이나 일제히 실시되는 세무조사와 공정거래위 조사에 반발하고 있는 언론사들,특히 ‘반여 그룹’으로 분류된 신문사들이 잠자코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이 문건을 둘러싼 시비는 한동안 뜨거운 쟁점이 될 것으로예견된다.우리가 우려하는바는 어렵사리 착수한 언론사들에대한 세무조사와 공정거래위 조사가 이 문건 시비가 빌미가돼 중동무이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결코 그런 일이있어서는 안된다.국민들이 열망하는 언론개혁마저 물 건너가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번 언론대책 문건 사태를 지켜보면서 정치와 언론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다.정치는 정치인의 말(생각)로 이뤄지고 정치인의 말(생각)은 언론을 통해 보도됨으로써 비로소 정치화된다.그리고 언론은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그 속성으로 한다.따라서 정치와 언론은 팽팽한 긴장 속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며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하면 안된다.문제는 이 균형이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다. 또 하나 고려할 것은 정당의 언론대책에 관한 문제다.정치가 언론을 통해 이뤄지는 이상 정당이 언론대책을 수립하는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다만 정당의 언론대책이 ‘공작성’을 띠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지난번 논란이 됐던 한나라당 언론대책 문건도 언론인들을 ‘우호적’ ‘적대적’으로 분류하고,적대적 언론인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비리를조사해서 축적한다는 그 ‘공작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정당의 언론대책이 지니고 있는 이같은 음습한 측면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언론대책 수립을 위한 논의가 밀실에서 이뤄지지 않고 의원총회나 세미나 등 공개된 장에서 이뤄져야 한다.각 당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 소설가 황석영, 어른용 동화 ‘모랫말‘출간

    소설가 황석영이 어른을 위한 동화 ‘모랫말 아이들’(문학동네)을출간했다. 언제부터인가 형식은 아이들이 읽는 동화이되 성인 독자를 더 염두에 두고 있음을 공공연히 밝히는 이같은 장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황석영의 이 최신작은 어른을 위한다는 한정어가 있긴 하지만 동화라기엔 담고 있는 인생과 역사의 진실이 너무 무겁다. 다른 작품을 쓸만큼 쓴 베테랑 작가가 모든 걸 다 걸러내고 어린이도 이해할 수 있는 수정같은 인생의 진리를 읊자고 쓴 동화가 아니다. “아이들에게 내 유년 시절을 이야기해주려고 썼다”는 작가의 말에서 이 작품의 피치 못한 무거움이 이해된다.보편적 인생이란 추상을수정처럼 갈고닦는 작가의 노력이 아니라 황석영 개인의 구체적 기억이 이 작품의 보석이다. ‘모랫말 아이들’은 1943년생으로 열살 안쪽에 해방과 전쟁을 맞은작가의 문학 이전의 기억이 최대로 복원되어 있다. 작가는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하는 문학적 형상화는 최소로 억제한다. 이처럼 기억에다 쓸데없는 분칠을 삼가지만 10편의 짧은 이야기들은인물과 사건들의 문학적인 효과가 뛰어나다. 한국전쟁 직전·직후에 서울 한강변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들은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에서 연유된 것도 있고 그 당시 우리 마을에서 흔히일어난 비역사적 일들도 있다. 움막집 거지,양공주의 트기 딸,전쟁에서 반편이가 된 상이군인,화교할머니,상둣도가 아저씨,양공주가 어머니인 같은 반 여자동무,곡마단남매, 그리고 주인공을 돌봐주는 식모 누나의 연애와 전쟁으로 인한비극 등. 글쓰는 작가의 여러 얼굴 중 기억의 흙더미에서 꽃을 피워내는 모습이 아니라 부스러진 기억의 흙 알갱이들을 소중하게 그러모으는 모습이 다가오는 작품이다. 김재영기자
  • 14세 소녀가수 보아 日 진출

    깜찍한 댄스가수 보아(14)의 팬들은 섭섭할지도 모르겠다.지난해 데뷔와 동시에 가요계에 ‘로우 틴(Low Teen)열풍’을 몰고온 그가 조만간 일본으로 무대를 옮긴다.이번 주말까지 1집 활동을 마무리짓는보아는 18일 일본으로 출국해 새 음반작업에 들어간다. 해외진출용 스페셜 앨범에 들이는 공력은 예사롭지 않다.일본과 미국 영국을 바쁘게 돌며 한달동안 현지 최고의 프로듀서와 스태프와 공동작업할 예정이다.SES의 일본 발매 앨범 작업을 도운 현지 최고의댄스레이블 에이백스(Avex)가 이번에도 주축이 된다.에이백스의 명프로듀서 맥스도 다시 프로듀서로 참여한다. 보아의 해외진출은 진작부터 예정된 수순.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는그를 발굴해 가요계 데뷔 훈련을 시킬 때부터 최종목표를 해외시장공략으로 잡아두었다.“1집 발매 전부터 뛰어난 가창력과 댄스실력을 탐낸 일본내 굴지의 음반사들이 스카웃 제의를 해왔다”는 게 SM측의 귀띔이다. 국내팬들은 일본에서 만들 보아의 첫 싱글앨범을 3월에 만날 수 있다.이후 약 한달동안만 국내활동을 한 뒤 4월부터는 다시 일본으로 활동무대를 옮길 계획.일본시장을 타깃으로 아예 거주지를 옮기는 사례는 N세대 가수로는 보아가 처음이다. 황수정기자 sjh@
  • 경제 어려워도 동포돕기는 계속

    어려워지는 경제사정과 더불어 대북지원 민간단체들의 한숨도 늘어간다. 북한 지원문제와 관련한 긍정적 보도가 늘어나면서 “왜 지원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정상회담 이후 대북지원은 정부가 전담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도 부담이다.한 단체의 사무총장은“최근 들어 후원금이 30% 정도 줄어든 것 같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그래도 북한이 아직도 힘들다는 보도를 내는 것에는 반대다.민족의 장래와 화해·협력이라는 큰 틀에서 바라보자는 호소에만 의존하는 형국이다. 대북 지원단체들은 올해 계획을 일단 알차게 세웠다.지난해부터 대북지원이 ‘백화점식’ 지원에서 특정 분야 지원으로 가닥을 잡고 있고 올해는 그런 추세가 정착될 전망이다.특히 ‘퍼주는’ 지원에서벗어나 북한이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에 몰두하고 있다.식량 위주의 지원에서 벗어나 북한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 중심의지원도 특징이다. 남북어린이어깨동무는 ‘북한 어린이의 안정적 영양공급’이 올해목표다.지난해 샘플 형식으로 보낸 두유에 대한반응이 좋아 유휴설비를 이전,북한에서 자체 생산하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중이다.두유재료인 콩도 처음에는 지원하지만 북한에서 생산할 수 있게 도울 방침이다.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다른 단체들과는 달리 대북지원 창구로서 사회 각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올해 주력분야는 양잠과 의료협력.외화벌이 측면에서 ‘누에고치’의 가능성을 인정한 북한이 각종검사장비와 생산장비를 부탁해왔다.약사회·의사회 등 보건의료분야6개 단체와 함께 의료협력문제에 대해 2∼3월중 북한과 의논할 계획이다. 기독교북한동포후원연합회(남북나눔)는 어린이용 의류에서 성인용의류로 활동영역을 넓혔다.각 교단과 교회를 중심으로 성금모금에 들어갔는데 여유가 되면 밀가루와 분유도 함께 보낼 계획.국제옥수수재단은 올해도 비료에 치중할 계획이고,천주교민족화해위원회는 생필품중심을 유지할 방침이다. 의료지원전문인 한 단체는 올해 피부연고제에 중점을 뒀다.“북한 주민들이 영양상태가 안좋아서 조금이라도 다치면 크게 덧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지원이유다.반면 국제단체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식량부분에 치중할 듯하다.다만 세계식량계획(WFP),유엔 등을 중심으로 이뤄진 지원이 북한의서방국가 수교가 늘면서 국가별,다양한 분야별로 넓어질 전망이다. 올해 대북지원단체들의 꿈은 컴퓨터.북한은 오래 전부터 원해 왔지만 컴퓨터는 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COCOM)을 대체한 바세나르협약에 의해 지원이 자유롭지 않다.정부도 486급 이상 컴퓨터의 지원은불허한 상태.올해 북한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빠지면 지원이 가능할것으로 보고 일단 준비를 하고 있다. 전경하기자 lark3@
  • 제일銀 회사채인수 거부

    제일은행이 정부가 자금안정화 대책으로 내놓은 ‘회사채 신속인수방안’을 거부했다.이에 따라 제일은행을 주채권은행으로 하는 기업들의 경우,회사채 만기가 일시에 몰리더라도 회사채를 산업은행이 인수하지 않는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4일 “지난해말 자금시장 안정화대책의 하나로산업은행이 올해중 일시에 만기도래하는 회사채의 80%를 인수한 뒤이중 20%를 채권은행들에게 채권보유 비율별로 넘기기로 했으나 제일은행이 이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제일은행을 주채권은행으로 하는 기업들은 회사채 만기도래시 유동성 악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해당기업은 동국무역,삼보컴퓨터,일동무역,신호제지,SK의 일부계열사 등이다. 박현갑기자 eagleduo@
  • 백지영 콘서트 성황

    ‘섹스 비디오’파문으로 활동을 잠시 중단했던 인기가수 백지영이지난달 31일 서울 센트럴시티 밀레니엄홀에서 성황리에 ‘굿바이 콘서트’를 마쳤다. 오후10시 시작해 새해 첫날 0시10분까지 이어진 공연에는 객석 2,200석이 매진됐고 입석 관객까지 넘치는 등 모두 3,000여명이 찾았다. 예전과 다름없이 화려하고 관능미 넘치는 무대의상을 차려입은 백지영은 백댄서들과 라틴댄스를 정열적으로 추며 ‘선택’‘트라이앵글’‘새드 살사’‘부담’‘대쉬’등의 히트곡을 불렀다. 이 공연은 비디오 파문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등의 논란으로 두차례나 연기된 끝에 열렸다.백지영은 팬들에게 “고맙다”“그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울지 않겠다”는 등의 인사를 건네며 시종 밝은표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당초 백지영은 고별무대 후 활동무대를 타이완으로 옮길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번 무대에서 인기를 재확인해 계획을 바꿀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황수정기자 sjh@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9.끝)일본 도쿄

    도쿄시내를 동서로 가르는 지하철 유라쿠초센(有樂町線)의 중간지점에는 사쿠라다몬(櫻田門)이라는 역이 있다.이 역의 3번 출구는 경시청 입구로,4번 출구는 사쿠라다몬으로 나온다.황궁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사쿠라다몬에서 바라보면 왼쪽으로는 고색창연한 법무성 건물이,오른쪽으로는 멀리 일본 의회의사당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바로 정면,불과 80m 정도의 거리에는 일본 치안의 총본산인경시청 건물이 위압적인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기자가 이곳에 도착한 시각이 마침 점심시간이었다.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인근 관공서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사쿠라다몬을 지나 황거(皇居·황궁)앞 광장에서 조깅을 하고 있었다.일본사람들이길조(吉鳥)로 여기는 까마귀는 떼를 지어 날아다녔고,그 아래로 일본의 상징 일황이 거주하는 황거가 적막에 갇혀 있었다. 일제하 항일 독립투사들의 의열투쟁은 조선 땅이나 중국·러시아 등망명지는 물론 적지의 중심부인 일본 본토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1932년 1월8일.일황 히로히토(裕仁)는 도쿄시내 서북부에 위치한 요요기(代代木)연병장에서 신년 관병식을 마치고 황궁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일황이 탄 마차가 황궁 입구의 사쿠라다몬에 다다를 무렵 난데없이 폭탄 하나가 날아들었다.폭탄은 일황이 탄 마차 뒷편에서 굉음을 내며 터졌다.순간 일장기를 든 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마리가거꾸러졌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폭탄의 위력은 일황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하였다.폭탄을 만든 김홍일(金弘壹·전 광복회장,작고)은 회고록에서 “군중과 일황의 거리가 100m 정도가 될 것을 고려하여 폭탄을 멀리 던지도록 가볍게 만들었다”고 했다.가볍게 만들다보니 상대적으로 위력이 약했던 것이다. 거사의 주인공인 이봉창(李奉昌·1900∼1932)의사는 의거후 현장에서 체포돼 그해 9월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0월10일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백범 김구 선생이 이끈 한인애국단 소속인 이의사는 의거에 앞서 “물품(폭탄)을 1월8일 방매하겠다(터뜨리겠다)”는 내용의 전보를 백범에게 보내 거사일을 미리 알렸다.당일 이의사는 일황이 관병식을 마치고 경시청을 지나 사쿠라다몬을 통과하여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본인으로 가장해 기다리다가 거사를 성공시킨 것이다. 의거후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식민지 백성인 조선인이 도쿄 중심부,그것도 일본 치안의 총지휘부인 경시청 앞에서 일황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진 ‘사건’은 충격적인 일이었다.일본은 이 사건을 ‘사쿠라다몬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최서면(崔書勉)국제한국연구원장은 “엄격히 말해서는 ‘경시청앞 사건’으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나 ‘사쿠라다몬사건’역시일황과 관련된 표현이므로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이의사의 의거현장인 경시청 정문 오른쪽에는 ‘경시청 창립 100주년 기념식수’라는 자그마한 기념표석이 서 있으나 이의사의 의거를 알리는기념물은 어디에도 없었다.일본 경찰로서야 ‘수치스런 기억’이겠지만 이는 또 하나의 역사은폐가 아닐까. 경시청 앞에서 사거리를 지나 황거를 에워싼 해자(垓子,궁성 주위에방어용으로 파놓은 연못)를 건너 사쿠라다몬으로 들어서면 황거의 분위기가 완연히 느껴진다.도쿄 시내 한가운데 위치하면서도 마치 외떤 섬과 같은 분위기가 든다.문 안으로 들어서면 거목과 잘 포장된 길이 황거로 안내한다.포도((鋪道)가 끝나는 지점에 작은 자갈이 깔린길이 나타나는데 넘실거리는 해자의 물결과 함께 황거가 모습을 드러낸다. 도쿄 시내 치요다(千代田)구에 위치한 이 궁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의 손자인 3대 쇼군 이에미쓰(家光)시대에 만든 것으로 해자가 이중으로 조성돼 있다.황거의 면적은 총30만평 규모로,제122대왕인 메이지(明治)가 황거를 교토(京都)에서 옮겨온 뒤 도쿄성으로불린다.자갈밭 중간지점 쯤에는 이중으로 된 돌다리가 나타나는데 흔히 이를 니주바시(二重橋)라고 부른다.바로 황거를 연결하는 다리로,길이는 약 29m,폭은 약 7m정도다. 지방에서 도쿄 관광을 온듯한 일본인들이 니주바시를 배경으로 무리를 지어 기념사진을 찍곤 했다.기념사진 촬영용으로 만든 계단식 간이의자가 있었고 전담 사진사도 두 명이나 됐다.이곳에서 관광객들에게 사진을 찍어주는 다나카 아키코(田中明希子·22·국제관광사진주식회사 소속)씨는 “관광객이 니주바시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즐겨찍는다”고 말했다.사진값은 2장 1세트로 2,100엔(송료 별도)이라고했다. 니주바시 입구에는 3명이 경비를 서는데 근처까지 관광객의 접근이가능했다.회청색이 감도는 황거 건물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었다.사진 몇장을 찍고는 다시 기념사진 찍는 곳으로 내려와,잠시짬을 내 쉬고 있는 다나카씨를 찾아갔다. 기자는 일제강점기때 이곳에서 발생한 ‘조선인 폭탄투척’사건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봉창의사의 사쿠라다몬사건은 물론 김지섭(金祉燮·1884∼1928)의사의 니주바시폭탄투척 사건도 전연 몰랐다.학교에서 그런 내용을 배우지 않았다고 했다.더러 한국인 관광객이 찾아와 기념사진을 찍곤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고 했다. 1924년 1월5일 오후7시쯤 한 조선인이 니주바시에 던진 폭탄사건으로 일본은 소용돌이에 빠졌다.신(神)으로 받드는 일황의 궁성에 조선인이 폭탄을 들고 뛰어들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내무차관견책에 이어 경시총감·경무부장·국성 경비책임 경찰서장 등 치안책임자가 줄줄이 파면되었다. 의열단 소속 김의사는 1924년초 도쿄에서 일본총리를 비롯해 조선총독 등이 참석하는 제국의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폭살할목적으로 23년말 상하이 포동(浦東)부두에서 일본으로 향했다.그러나 제국의회가 갑자기 연기됐다는 소식을 접한 김의사는 계획을 변경,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황 궁성을 폭파키로 결정하였다.그러나 접근이 불가능하자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궁성 입구인 니주바시에폭탄을 던진 것이다. 아깝게도 김의사가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다.타고온 배가 습기 많은화물선이어서 도쿄로 오는 동안 폭탄이 모두 젖어버린 탓이었다.김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돼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복역중 고문 후유증으로1928년 2월20일 뇌일혈로 지바(千葉)형무소에서 순국했다. 76년전 김의사가 목숨을 내놓고 폭탄을 던진 니주바시 아래로 백조들이 무리를 지어 쌀쌀한 초겨울 날씨를 한가로이 즐기고 있었다. 도쿄 글 정운현기자 jwh59@. *연재를 마치며. 구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정신을 되살려 민족정론지로 거듭 태어난 ‘대한매일’이 금년 7월초부터 매주 수요일(일부화요일)자에 장기기획물로 연재한 ‘해외항일전적지를 찾아서’는 일제강점기하 선열들의 항일투쟁 현장을 관련자료와 현지 전문가들의도움을 받아,현장답사를 통해 생생히 복원한 점에서 평가할만 하다. 금년초 대한매일은 김삼웅 주필과 편집국 특집기획팀 소속 취재기자와 사진기자,외부전문가 등으로 특별취재반을 편성해 해외에 산재한항일유적지 실태를 파악한 뒤 구체적인 지역선정과 일정확정에 들어갔다.논의 끝에 최종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 4개국을 답사대상지로 선정했다. 무장투쟁 본거지인 중국의 동북3성을 첫 답사지로 결정했다.중국은지역이 광범위한데다 항일운동 주무대였다는 점에서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벌인 동북3성과,임시정부·광복군의 활동무대인 관내지역을 2차로 나눠 답사했다.이어 미국 러시아 일본의 항일유적지 현장답사와취재 순으로 이어졌다. 이번 기획연재는 ‘청산리전투’등 항일투쟁사에서 찬란한 전과로 기록된 독립투쟁의 현장을 기자가 직접 답사하여 딱딱한 논문 형태가아닌,재미있고 현장감있는 신문기사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학계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그러면서도 관련자료와 현지 역사학자·주민 증언을 토대로 해 학술적 가치도 결코 적지 않다고 인정받았다. 특히 답사과정에서 보존가치가 크나 방치된 유적을 현장사진과 함께실감있게 보도함으로써 관계당국이 적극적으로 발굴·보존하는 방안을 마련토록 자극을 주었다.또 독자들에게는 선열의 위업을 현창하고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음을 자부한다. 아울러 취재반은답사과정에서 북한 김일성주석이 소년시절 다닌,중국 길림시 소재 육문(毓文)중학을 남한 최초로 취재하였으며 박정희 전대통령의 만주군관학교 졸업 당시 사진을 발굴하는 등 과외의 성과도 거두었다.취재반은 이번 답사를 통해 취재·보도한 내용을 보완,내년초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 출간할 계획이다. 정운현기자
  • 金大中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노벨상 상장·메달·상금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금메달과 디플로마(증서),900만크로네(한화 12억원 상당)의 상금을 함께 받았다. 지름 6.6㎝,무게 200g의 메달은 앞면에 노벨의 초상과 함께 그의 출생·사망연도가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뒷면에는 3명의 남자가 형제애에 기초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모습과 함께 라틴어로 ‘Pro pace et fraternitate gentium(인류의 평화와 인류애를 위해)’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또 33㎝×20㎝ 크기의 디플로마는 신낭만주의 표현기법을 사용하는노르웨이 화가 엘링 라이탄이 제작한 것으로,한쪽 면은 그림으로 채우고 다른 면은 상 수여 사실을 명기해 예술작품처럼 보인다. 상금은 900만크로네로 역대 최고액이다.노벨기금 운용에 따라 매년달라지며,시상 첫해인 1901년 15만800크로네로 시작됐다.지금까지는지난해 790만크로네가 최고액이었다. 상금은 시상식 1주일 뒤 달러로 환산돼 김 대통령에게 송금된다.김대통령은 상금을 노벨상 취지에 맞게 사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오슬로 오풍연특파원
  • 실종선원 7명 극적 구출

    “하늘이 도왔습니다” 뒤집힌 배 밑 침실에 갇혀 있다 11시간여 만에 기적처럼 구조된 선원 김철호(金喆浩·26·부산시 남구 야음3동)씨는 극적인 생환을‘천우신조’로 돌렸다. 김씨 등 12명을 태운 꽃게잡이 어선 23천왕성호가 완도항을 눈앞에두고 다른 선박과 충돌하면서 전복된 시각은 지난 28일 오후 3시30분. 동중국해에서 24일 동안 작업끝에 꽃게를 5,300상자(2억여원)나 잡은 만선의 기쁨도 잠시 ‘쾅’하는 굉음과 함께 배는 거꾸로 처박혔고 배밑 침실 등만 수면위에 겨우 떠 있었다. 당시 가로 1m,세로 5m,높이 1.5m의 1평 남짓한 침실에서 잠을 자던 김씨 등 7명은 순간 ‘이제는 죽었구나’하고 위기를 직감했다.특히 배가 서서히 가라앉아 모두 수장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해왔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추위가 엄습해 오자 김씨 등은 어깨동무로한기를 이겨냈고 산소를 아끼느라 라이터불도 켜지 못했다. 이들이 깔판 판자를 뜯어내 배를 두드리며 신호를 보낸 지 1시간이지났을까.헬리콥터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살았구나’.30여분 뒤밖으로부터 신호가 왔다. 목포해경 특수기동대원들은 사고 5시간40분 만인 밤 9시10분쯤 기관실에 매달려 있던 기관사 고호산씨(50)를 먼저 구조했다. 이후 특수기동대원이 사고 선박이 더이상 가라앉지 않도록 크레인에 고정하고 공기부양을 하기까지 5시간이 더 흘렀다.마침내 이튿날 새벽 3시쯤 경비정과 어선 등 10여척과 100여명이 동원돼 이중으로 된두께 3㎝짜리 배밑 철판을 산소용접기로 잘라내는 데 성공,김씨 등 6명을 구조했다.사고가 난 지 11시간여 만이다. 완도 남기창기자 kcnam@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7)러시아 우수리스크·수이푼

    아침 일찍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지프를 대절했다.130㎞ 북쪽 우수리스크 시내를 취재하고 서쪽으로 나아가 선열들의 피어린 격전 현장을더듬기 위해서였다. 포장이 잘 돼 있어 지프는 바람을 가르며 내달렸다.한국의 산세를 닮아 마치 시골 국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색다른것은 커다랗게 쓴 러시아어 광고 간판들과 이따금 눈에 들어왔다가물러나는 주말농장 ‘다차’의 러시아식 바라크들이었다. 우수리스크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을 연결하는 철도의 분기점에 있으며 우수리강과 면해 있다.옛날 발해 시대 지명은 쌍성자(雙城子),북경조약으로 러시아 영토가 된 직후에는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라고 불리기도 했다.기사년(己巳年·1869년) 함경도의 대기근으로 유민행렬이 이어질 때 일찌감치 한인 집거촌을 이루었다.국운이 기울자 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홍범도(洪範圖) 등 많은 우국지사들이 찾아와 근거지로 삼았다.그리하여 1917년 고려족회를 열었고 그것은 대한국민회의로 발전했다. 그러나 그 때를 증언하는 흔적은 시내에 없다.군납업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의병대를 조직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최재형(崔在亨)이 일본군에 사로잡혀 처형당한 곳이 우수리스크다.이상설이 숨을 거둔 곳도 이 도시다.취재팀은 두 분의 충혼을 되새기며 거리를 이리저리 달려보고 우수리스크역 앞에 차를 멈추었다.우리 선열들이 무수히드나들었을 3층 역사(驛舍)는 낡았으나 산뜻하게 녹색 페인트로 단장된 채 앉아 있다. 치체리나가(街) 54번지의 사범전문학교도 옛 모습그대로 서 있다.1917년 고려족중앙총회가 4만루불의 기금을 모아 만든 이 학교는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국내에서 카프(KAPF)파로 활동하다가 망명한 시인 조명희(趙明熙)가 강의했던 이 학교는 지금 이과(理科)초급사범대학으로 사용되고 있다. 취재팀은 서쪽으로 차를 돌려 시내를 벗어났다.우수리스크에서 중국국경에 이르는 수이푼(秋風) 지역에는 우리의 항일투쟁 현장이 많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박환(朴煥·수원대 사학과) 교수는 취재팀이 이 곳에 갈 것이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꼬르사꼬프까도 가보고 이상설 선생의 유해를 뿌린 수이푼강도 꼭 보십시오.거기 기념비를 세울 겁니다.” 우리 선열들이 재피거우라고 불렀던 꼬르사꼬프까 마을은 유인석(柳麟錫)이 1910년 6월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한 유서 깊은 곳이다.당시 연해주에는 간도관리사로서 북간도에서 투쟁하다가 온 이범윤(李範允),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갔던 이상설,삼수(三水)갑산(甲山)에서 용맹을 떨친 의병장 홍범도,그리고 안중근(安重根)등이 현지의 대부호인 최재형과 동포들의 지원으로 병력을 조련하고이따금 국내진공을 감행하고 있었다.위정척사파의 거두로서 국내 의병전쟁을 이끌다가 망명한 유인석은 그들을 이 곳에서 하나로 응집시켰다.그리고 꼬르사꼬프까 마을을 포함해 근처의 수이푼강과 뿌질롭까,솔밭관은 1920년대 러시아 혁명전쟁 때 국제간섭군으로 출병한 일본군과 그들이 조종하는 마적단에 맞서 우리 항일유격대가 수차 격전을 벌인 곳이다.당시 지휘자는 ‘백마를 탄 김장군’으로 전설처럼회자되었던 김경천(金擎天)과 채영(蔡英)·김규면(金圭冕)·조맹선(趙孟善)·이중집·황운정 등이었다. 출국하기 전 필자는 그들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 독립기념관 이동언(李東彦) 연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자료를 보내주며 말했다.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니 꼭 신문에 써 주십시오.” 취재팀을 태운 지프는 야트막한 산과 들판이 어우러진 곳을 달리고있었다.우수리스크역에서 눌러놓은 운전석의 타코미터가 3.5㎞를 가리킬 때 차를 세웠다.수청(水淸·현 빨치산스크)에서 활약하던 김경천은 1922년 부하들을 이끌고 이 곳으로 이동해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500명 정도의 대원을 교육시켰다.그 장소가‘우수리스크 서방 7리’라는 기록이니 이 근처인 것이다.일본 육사출신으로 대위 군복을 벗어 던지고 항일전선에 뛰어든 그는 사관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해 이 곳에 장교양성소를 세웠던 것이다.이리저리노인들을 붙잡고 물었으나 아쉽게도 그 현장은 찾을 수 없었다. 나침반을 꺼내 들고 다시 한참 차를 달리는데 길가 수풀 속에서 꼬르사꼬프까라는 간판이 불쑥 나타난다.1869년에 마을이 처음 생겼다는 표시도 있고 ‘1917부터 1967년’이라는 표시도 있다.우리 동포들이 황무지를 개척하여 곳,우국지사들이 십삼도의군을 창설한,그리고항일 유격대의 근거지 구실을 한 유서 깊은 마을은 큰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평온하게 자리잡고 있다.차에서 내려 천천히 마을의 고샅으로 걸어 들어갔다.굴렁쇠를 굴리며 노는 아이들과 체스를 두는 노인들만 보일 뿐이었다.노인들에게 뿌질롭까 마을과 솔밭관 마을,그리고 수이푼강 가는 길을 물어 약도를 그렸다.수이푼강은 이름이 라즈달리니야로 바뀌어 있었다.뿌질롭까는 확인했으나 솔밭관은 알 수가없었다.그리고 홍범도가 수이푼의 다아재골에서 최병준의 집에 무기를 숨겨놓고 동지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국내진공의 기회를 기다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찾을 수 없었다.1937년 동포들이 강제이주당해지명도 사라지고 우리 노인들도 없고 전설마저 사라진 때문이다.뿌질롭까는 10여분만에 도착했다.마을의 옛 이름은 육성촌(六城村).조명희 시인이 교장을 지낸 ‘육성촌농업학교’가고색창연한 모습으로취재팀을 반겼다.조명희 교장 집에서 하녀로 일한 노파를 만났다.이곳 출신이었다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는 그녀의 짐작대로라면 솔밭관은 북쪽 1∼2㎞.들길을 달려 찾아가니 마을 자리가 남아 있다.강제이주 후 버려져 있는 것이다. 취재팀은 수이푼강을 찾아갔다.폭이 50m쯤 되는 우수리강의 한 지류였는데 포장도로가 나 있는 다리 옆으로 옛 다리가 보였다.이 강을중심으로 벌어진 수많은 혈투를 생각하며 주변의 산야를 휘휘 둘러보는 필자는 가슴이 아팠다.우리 역사의 소중한 일부인데도 지도자들이름조차 묻혀져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채영은 중국 군관학교 출신으로 1919년 ‘혈성단’이라는 항일유격대를 지휘해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다.이중집은 600명 규모의 ‘솔밭관 유격대’와 ‘우리동무군 유격대’를 지휘해 싸웠다.김규면은 기독교계의 지도자로 국내에서 투쟁하다 연해주로 와서 ‘혈성단’의 단장을 맡았다.조맹선은 국내 의병 지도자로 북간도를 거쳐연해주로 와서 채영과 더불어 항일부대를 지휘해 싸웠다.황운정은 최진동과 함께, 홍범도가 지휘한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한 뒤 연해주로와서 이중집 부대에 합류했다. 박환 교수가 말해준 이상설의 기념비를 세울 자리는 오른쪽 교두보에서 활처럼 휘어져 뻗은 작은 둑 위였다.그 곳을 밟아본 뒤 시든 잡초와 관목들을 헤치고 강변으로 내려갔다.강은 오염되지 않아 맑고깨끗했다.이상설의 유해가 화장되어 이 곳에 뿌려진 것은 1917년 3월.강물은 그 옛날의 선각자의 한을,그리고 이곳에 무수히 뿌려진 피의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취재팀은 강물 앞에국산 소주팩을 꺼내 한 잔 부어놓고 절을 한 뒤 차에 올랐다. 우수리스크 이원규 소설가·동국대 겸임교수
  • [문화도시 문화거리](17)’도자기의 고장’ 이천시

    이천하면 쌀을 연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오죽하면 시내에서 가장쉽게 찾을 수 있는 간판이 ‘이천쌀밥집’일까.그러나 상차림에서 ‘이천만이 갖고 있는 무엇’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런 이름이 내걸린 것이 채 몇년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래도 일단 ‘쌀은 이천’이라는 오래된 고정관념을 최대한 노린 밥집주인들의 광고전략이 맞아떨어진 ‘히트상품’이 아닐 수 없다. 현재는 이천시가 밥맛을 보증한다는 ‘시 지정 쌀밥집’만 8개.‘임금님표 이천쌀’로 밥을 짓는다는 것이 지정조건이다.‘임금님표’역시 ‘진상(進上)하던 쌀’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밥집주인들의 속셈과 다르지 않다. 이렇듯 이천은 여전히 쌀의 고장이고,전통은 지금도 확대 재생산된다.그럼에도 요즘 이천을 찾는 사람들은 쌀이 더 이상 이 고장의 대표상품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이천 도자기’의 기세는 그만큼 무섭다.320곳의 가마(窯)와 120곳의 판매장이 시내 곳곳에 들어차 있다.내용에서도 우리 도자기 전통을 잇고 있다는 데 이의는 별로 없는 것 같다.소나무 장작을 때 그릇을 굽는 전통 가마(登窯)만 지금도 30개에 이른다.이곳 도공(陶工)들의 장인정신(匠人精神),나아가 작가정신(作家意識)을 상징하기에 모자람에 없다. 여기에 지역의 청강문화산업대에서 도자기 전문인력이 배출되고 있고,터파기 공사가 한창인 이천도예고등학교가 문을 열면 전문인력의 조기발굴 및 양성 체제까지 갖추게 된다. 이천이 도자기의 고장으로 부각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다양성’인 것 같다.한국 ‘도자기 문화’의 양상을 파악하는 데는 이 고장을 둘러보는 것 만으로도 크게 부족하지 않다. 해강도자미술관은 고려청자의 재현에 일생을 바친 해강 유근형선생이세운 자기 전문 박물관이다.도자 역사를 체계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천이 도자기의 고장으로 부각되는 데 크게 기여한다. 해강요가 과거를 재현하는 데 몰두할 동안 이천의 대표적 생활도자기가마인 광주요는 과거를 바탕으로 앞날을 개척하는 데 힘을 쏟았다. 전통이 살아있으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에 작품성까지 갖추었다는 점에서는 어쩌면 가장 장인정신에 투철한 가마인지도 모르겠다. 나아가이천 도자기는 한국도요·동국요가 청자,조선도요·청파요가 분청,한도요·항산도요가 백자 하는 식으로 전문분야에 따라 각 가마가 역할분담을 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도자기들은 단지화되어 있는 전시장에서 쉽게 소비자들과 만난다. 해강도자미술관과 광주요·고려도요·한국도요 등이 몰려있는 수광리는 이천의 관문에 해당한다.어림잡아 100여개의 크고 작은 가마와 전시장이 흩어져있다. 그러나 이천 도자기는 이름부터 도자기 고을다운 사기막골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산길을 따라 50여개의 가마와 40여개의 전시장이 들어차 있는데다,수천만원짜리 ‘작품’에서 천원에 두개짜리 술잔까지어떤 취향,어떤 용도도 만족시켜준다. 관광객들이 직접 도자기를 만들어보는 ‘체험 프로그램’은 최근 주요 가마들이 다투어 마련하고 있다.도자 박물관과 함께 이천의 ‘도자기 산업’을 ‘도자기 문화’로 발돋움시키는 요소 가운데 하나일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천은 분명 ‘도자기 문화도시’이다.그러나 19만명에이르는 시민들 쪽에서 보면 이천은 ‘도자기가 거의 유일한 문화’라는 점에서는 문제가 없지 않은 것 같다. 소설가 이문열씨는 1986년 이곳에 집필실을 마련하여 이천시민이 된뒤 97년 부악문원(負岳文院)을 지어 후배문인들을 키우고 있다.그는“터놓고 말해 이천은 기반이 되는 문화가 보잘 것 없다”면서 “다만 신흥(新興)하는 기세는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신흥하는 기세를 도자기 뿐 아니라 시민들도 실감하는 문화로 연결시켜야한다는 충고가 아닐 수 없다.최근에는 도자기 문화쪽에서도 문제가 나타나고있다.국적불명에다 기계로 찍어낸 싸구려 그릇들이 범람한다.이천 도자기의 이미지를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위기다. 마침 2001년 이천에서는 ‘세계 도자기 엑스포’가 열린다.그래서 지금은 이천이 여러가지 장애물을 헤치고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도자기 문화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을지,아니면 그저 ‘도자기 생산지’로 주저앉을 것인지를 좌우할 중요한 시점이다. 이천 서동철기자 dcsuh@. *이렇게 가꿉시다- “세계 도자기 엑스포 준비를” . 우리나라 산천 어느 곳 하나 우리 마음에 정겹게 와닿지않는 곳이 없으되,특히 이천은 그 이름 만큼이나 정겹다.광주산맥에 자리 잡은 진산 설봉과 복하천,송곡천,청미천,그 유명한 이천 쌀과 복숭아와 함께온천이라는 천혜를 누리고 있다. 이천은 특히 스러져버려 우리를 아리게한 조선백자의 전통을 1960년대 들어 화려하게 되살려냈다.‘세계 도자기 엑스포’가 내년 8월10일부터 10월28일까지 80일 동안 이곳에서 열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아니다. 우리 도자기가 중국의 고궁,일본의 세토,프랑스의 세브르,영국의 브리티시와 빅토리아알버트를 비롯한 세계 박물관의 명품들과 자리를함께 한다.21세기를 빛내는 세계적 명작도 우리 최고작가들의 명품과한자리에서 아름다움을 뽐낸다.생활 속의 각종 산업도자기는 물론 현대 우주문명을 가능케한 첨단도자기도 입체적으로 선보인다.한마디로이천은 세계의 도자가 우리나라로, 우리의 도자기가 세계로 교차하는문화예술의 전진기지가 되는 것이다. 제1회 세계 도자 비엔날레와 제39차 국제도자기구 집행위원회,전세계석학들이 참여하는 국제도자술회의도 함께 열린다. 비엔날레는 세계도자의 흐름을 실시간대로 파악하게 해주는 창구가 될 것이다.전통을지키되 현대와 고립되지 않으며,이 땅에서 창작활동을 하되 세계적작가들과 호흡하는 가장 경제적인 활동무대로 우리 도자계에 새로운도약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새로 건립되고 있는 이천 세계도자센터가 바로 그 주무대이다. 그러나 지금은 장미빛 환상에만 안주할 때는 아니다.세계 도자기 엑스포의 성패는 이천시민의 준비하는 자세에 달려 있다.자신의 고집과관행을 고수하기보다는 모든 기준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는 열린자세가 중요하다.오늘의 작은 이익보다는 내일을 위해 준비하는 현명함이 살아 있다면 도자기 마을 이천의 미래는 밝다. △김종민 세계 도자기 엑스포 조직위원장
  • 클릭 아셈/ ASEM과 NGO

    지난 20일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는 ‘화해할 수 없는’ 두 세력이맞섰다. 26개국 아시아·유럽 정상들은 동양 최대 규모라는 코엑스 컨벤션센터에서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개막식을 갖고 두 대륙간의 경제협력과 평화정착 방안을 논의했다. 같은 시간 코엑스에서 2㎞ 남짓 떨어진 올림픽공원에서는 한국의 노동·시민단체들이 해외 비정부기구(NGO)와 어깨동무한 채 “이윤보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들자”고 외쳤다.아셈이 절정에 다다를수록 ‘반(反) 아셈’의 함성도 높아갔다. 아셈 기간에 진행된 NGO 포럼과 집회에서의 주된 화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였다. 정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아셈은 정치·경제·문화 지역협력체로,신자유주의를 가속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두 대륙간 모든 분야를 논의하는 기구”라고 설명한다.미국 주도로 경제협력 문제를 논의하는 아태경제협력체(APEC)나 국제통화기금(IMF),무역장벽의 완전 철폐를 추구하는 세계무역기구(WTO)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NGO들은 “아셈 역시 초국적 자본중심의 무자비한 경제 침탈과 착취를 가속화하는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는 또 하나의 기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아셈에서 논의되는 정치·사회적인 의제들은 선언적 의미에 불과하고 핵심은 WTO 중심의 다자무역체제 강화,자본이동의 규제 완화,노동시장 유연화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서울 아셈은 회의 내용과 행사 진행 등에서 많은 성과를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아쉬운 점이 있다면 정부와 NGO간 드리워진 장벽은 끝내 걷어내지 못한 채 21일 폐막됐다. 2년 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릴 제4차 아셈에서는 NGO와 각국 정상이 머리를 맞대고 ‘자본’보다는 ‘사람’을 더 고민하는 모습이연출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이창구 사회팀기자 window2@
  • 내년은 ‘지역문화의 해’ 열린 문화축제의 場으로…

    2001년은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지역문화의 해’다.지역 문화예술인들은 정부의 결정에 박수를 보내고 있고,어느 때 보다 기대도 큰 것같다.‘지역문화의 해’의 바람직스러운 추진방향을 점검해본다. ‘지역문화의 해’는 어디로 가야할까.해답은 지역문화가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 출발점이 될 것이다. 현재 지역문화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외화내빈으로 요약할 수있을 듯 하다.웬만한 기초자치단체도 어디에 내다놓아도 손색이 없을 문예회관·미술관·박물관을 갖고 있다.또 축제 붐이라고 할 만큼화려한 문화예술제가 전국에서 매일이다시피 벌어진다. 그러나 겉모습이 그럴듯한 공연장은 대부분 가동율이 50%에 못미친다.그것도 결혼식이나 민방위훈련을 빼면 30% 선에 그친다.지역주민들의 문화욕구는 매우 높지만 축제라는 ‘판’을 벌여도 찾는 사람은소수에 불과하다.대부분의 축제가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보다는,어떻게 하면 관광객을 끌어들여 수입을 올리느냐에 촛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문화의해’는 지역의 문화투자를 정상화시키는 해가되어야 한다.사실 ‘지역문화의 해’가 수백억원의 예산을 확보하는것도 불가능하지만,확보한다 해도 전국의 16개 광역자치단체와 232개 기초자치단체로 나누면 액수는 보잘 것 없어진다.그런만큼 ‘지역문화의 해’ 조직위원장은 많은 돈을 써서 화려한 이벤트를 벌이기 보다는,중앙과 지방의 협조·지원체계를 구축하는 스타일이 바람직스럽다. 과거회귀적인 지방자치단체의 문화투자도 문제다.지역 축제는 대부분 역사나 전통을 주제로 삼는다.그 고장 출신 예술가들의 기념관이나시비 건립도 경쟁적이다.물론 역사와 전통을 되살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그러나 단순한 과거사의 재현이나 과거 인물을 기념하는데 머무르는 것은 생각해볼 일이다.예를 들어 경남의 한 시는 지역출신 대중가수와 작곡가를 기념하는 향토박물관을 지을 계획이다.그러나 한때일세를 풍미한 사람들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40∼50대가 아니면 이들을 알지못한다.20∼30년 뒤,시민 대부분이 이들을 모르는 시점이됐을 때 이 기념관이 어떤 기능을 할지 고려해야 한다. 문화투자가 과거지향적이다 보니 젊은이를 위한 문화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지방자치단체 관계자나 장년층 이상은 ‘예향’이라고 자랑이 대단해도 젊은층은 전혀 실감할 수 없다.몸과 마음으로 즐기는 문화가 아니라 머릿속으로만 자부심을 강요당한다. 지역문화가 파행을 면치못하고 있는 데는 ‘전문인력의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지적한다.물론 각 지역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깨닫고는 있지만,폐쇄성이 적지않은 걸림돌이 된다. 공연예술계의 한 인사는 “속된말로 동네 텃세가 사라져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외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문제를 ‘밥그릇 지키기’차원에서 대응할 것이 아니라,자신들에게 도움이 되고 능력을 갖춘사람이라면 찾아가서라도 모셔가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중앙에서 영화 및 문화행정에 30년 이상 경험을 쌓은 인물이 집행위원장을 맡은 데 상당한 이유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결국 이들 외부 전문가가 장기적으로 지역의 전문가도 길러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역문화의 해’는 문화예술계와 정부가 지역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는 해가 되어야 한다.그러나 이른바 중앙의 인식 변화에 못지않게 지역에서도 열린마음을 갖고 문화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것 같다. 서동철기자 dcsuh@. [기고] ‘지역문화의 해'에 바란다‘. 언제부터인지 ‘지역’은 ‘주변’과 유사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서울이 중심이라면 지역은 변두리 정도에 머물러 왔다고나 할까. 문화를 말할 때 적어도 선진국의 것을 상위로,후진국의 문화를 하위로 인식하던 때를 벗어났다면 지역에 대한 생각도 분명 달라져야 한다.문화는 그 자체로서 가치가 인정되어야지 무엇과 비교하여 순위를 매긴다는 것이야말로 극복해야 할 하위문화이다.표준이 미덕이던 시절 지역문화는 중앙을 닮기에 급급했지만 70∼80년대를 지나면서 지역은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했다.새천년의 첫해를 마무리하는 지금여전히 ‘정체성’에 대한 회의를 떨치지 못하면서도 지역문화는 활발한 개화의 몸짓을 하고 있다. 2001년 ‘지역문화의 해’는 진정한 지역문화의 표상을 보여주는 해가 되어야 한다.중앙정부가 굳이 지역문화의 해를 지정하지 않아도고장마다 가장 치열한 화두는 바로 이 문제다.그런만큼 각 지역마다이를 기회로 삼아 진지하게 자기 문화의 정체성을 고민해보고 지향점에 대한 비전을 얻는다면 더없이 값진 수확이 될 것이다. 중앙은 중앙대로 의존도만 높이고 수명은 짧은 일회성 지원이 아니라,예술인들이 창작에 열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개성있는 문화권을 개발하는 등 기반 조성에 힘써주길 기대한다. 우리 고장을 예로 들자면 전통적인 문화와 예술의 보고(寶庫)를 자임하는 전주는 전통을 지켜가며 그 뿌리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모색에분투하고 있다.‘지역문화의 해’에는 이 넘치는 욕구를 잘 담아내는 일에 중앙정부가 힘을 보태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중앙의 시각이 아니라 지역의 시각에서 ‘지역문화의 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중앙이 지역이라는 상대를 주체로 인정하는 순간 ‘지역문화의해’는 상쾌하게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김 선 희 전주시 문화관광과 문화팀장. *음악평론가 탁계석씨“대학교수의 지역공연 활성화 필요”. “지역문화의 해를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지역대학의 참여가 무엇보다 절실하다”음악평론가로 공연예술정책 전문가이기도 한 탁계석씨는 “지역문화의 해에 공연예술분야의 학과를 갖고 있는 대학이 참여하면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탁씨는 공연예술 교수는 공연실적을 연구실적으로 인정하는 제도를최대한 활용하자고 말한다.예를 들어 음악교수는 연구실적 점수를 쌓기 위한 연주회를 가질 수 밖에 없다.이 연주회를 대도시가 아니라중소도시나 농어촌지역에서 갖도록 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적지않은 음악교수들이 연구실적을 쌓기위해 사재를 털고,어렵게 대관하여 연주회를 갖고 있다.그러나 연주회를 지역에서 갖는다면,지역주민과 음악교수 모두에게 큰 이익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현재 지방자치단체들이 갖고 있는 문예회관 등 공연시설의 가동율은평균 30% 정도.지역주민을 위한 음악교수들의 연주회라면 얼마든지무료대관이 가능하다.자치단체쪽에서 보면 수준높은 연주회를 돈들이지 않고 유치할 수 있고,교수쪽에서 보아도 경제적 부담 없이 연구실적을 쌓고,장기적으로는 ‘지역시장’ 활성화에 따라 활동무대도 넓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런 구상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각 대학이 교수들의 지역연주회를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등에서 갖는 연주회에 버금가는 연구실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필수적.레퍼토리도 학구적이기보다는 청중이 즐길 수 있도록 대중적일 수 밖에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한다고 탁씨는 덧붙인다. 서동철기자
  • 유고 피플혁명 이모저모

    베오그라드는 밤을 잊었다.밀로셰비치 철권통치의 상징인 연방의회건물을 점거한 수십만명의 베오그라드 시민들은 5일밤을 꼬박 새우고도 6일에도 거리 곳곳에서 어깨동무를 한채 춤과 노래를 부르며 승리를 자축했다.6일 오후에는 의사당 밖에 운집한 15만여명의 시위대가이틀째 대규모집회를 갖고 “세르비아,세르비아!”와 야당후보 보이슬라브 코스투니차의 애칭인 “보요,보요!”를 외쳐댔다. ◆새 대통령 선언 야당지도자 보이슬라브 코스투니차는 6일 새벽 국영 TV에 출연해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사람이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안은 채 직무를 수행해 갈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라 선언하고 “나의 임기는 매우 짧을 것이며 길어도 1년 6개월 이내에 새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자유선거를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코스투니차는 이어 “선거에 의해 권력이 바뀌는 새로운 역사가 오늘 시작됐으며 우리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이뤄진 신유고연방의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펼쳐야 한다”면서 국민들에게 평상 회복을 촉구했다. ◆의사당 진입 코스투니차를 비롯한 야당 지도자들은 승리를 선언하면서도 밀로셰비치측이 무력을 동원해 마지막 반격을 시도할 가능성에 대비 시위군중들에게 6일낮에도 계속 거리에 남아있어 달라고 호소.이들은 “밀로셰비치 일당이 베오그라드 외곽에서 반격을 준비중이며 아직 중대고비는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의사당 진입은 5일밤 폭동 진압경찰이 시위대의 의사당 출입구 접근을 막기 위해 최루탄을 발사하면서 시작됐다.이 과정에서 수십명의경찰이 대열을 이탈해 방패와 헬멧 등을 버리고 시위대에 동참했다. 시위대가 의사당에 진입한 뒤 1층에서는 바로 불길이 치솟았고 시위대는 밀로셰비치의 초상화를 부수고 의자와 컴퓨터 등을 건물 밖으로내던지기 시작했다. ◆밀로셰비치,베오그라드에 은신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베오그라드 시내 모처에 은신해 있다고 그의 동생인 보리슬라브 밀로셰비치 주러시아 유고대사가 6일 밝혔다.그는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이날중으로 베오그라드를 방문중인 이고르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날 것이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한편 블라디미르 예르모신 벨로루시 총리는 이날 벨로루시는 밀로셰비치가 망명을 요청해올 경우 이를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케네스 베이컨 미국 국방부 대변인은 5일 밀로셰비치가 부인과 함께 국외로 탈출했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아직 베오그라드에 머물고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베이컨 대변인은 “현단계에서 그가 유고를 떠났다고 확인할 만한 물증이 없다”면서 “우리가 아는 한 그는 베오그라드에 있다”고 말했다.유고의 베탄 통신은 유고 연방군이야당세력의 봉기에 맞서 이에 개입하기 위해 병영을 떠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5일 군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 ◆군부 반격 가능 지난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유고 공습 당시나토사령관을 지낸 미국의 웨슬리 클라크 예비역 장군은 5일 유고 사태가 끝난 것이 아니며 곤경에 빠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이최후의 수단으로 특수부대들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 그러나 유고 관영 탄유그통신은 군 소식통의 말을 인용,유고 군부는현 정국상황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헌법의 테두리안에서 행동하게될 것이라고 보도. 유고 탄유그통신은 이날밤 시위도중 2명이 사망했고 65명이 부상했다고 보도.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한발의 총성도 들리지 않은 평화 혁명이었다고 평가했다. ◆밀로세비치 대통령이 베오그라드에서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과만나는 장면이 6일 YU-Info TV에 방영됐다고 유고의 베티통신이 보도했다.이날 두사람의 만남에는 지바딘 조바노비치 유고 외무장관이 함께 참여했다.그러나 밀로셰비치가 어디에 있는지는 여전히 알려지지않고 있다.
  • [‘6.15’이후의 북한] (6)평양 중앙동물원

    평양 중앙동물원은 평양시 북동쪽 대성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바로 옆에 붙은 식물원·유희장과 함께 평양시민들에게 인기 높은 휴식공간이다.중앙동물원은 1959년 4월30일 건립됐는데 부지는 100정보(30만평),수용 동물수는 약 600종 6000여 마리 정도다. 9월5일 오전 중앙동물원을 찾았다.정문을 들어서자 오만근(63) 동물원 기술부원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 졸업후 40년 동안 동물원에서 근무해온 동물원의 산증인인 오부원장의 안내로 동물구경을 나섰다. 침팬지 사(舍)에는 새끼 네마리가 놀고 있었다.그중 제일 큰 침팬지가 기자 일행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이름이 ‘꼬마’라고 했다.옆 우리에는 ‘꼬마’‘금동이’의 부모가 있었다.엄마 침팬지에게 오부원장은 “너 돌 안 가지고 왔지?”라고 물었다. “관람객에게 돌도 던집니까?” “저것은 르완다에서 수령님께 선물로 보내왔는데 사로잡기가 어려우니까 군인들이 가서 어미를 총으로 쏘고 새끼만 빼앗았답니다.지금 나이가 설흔살이 넘었는데도 그때 충격을 잊지 못하고국방색옷 입은 사람만 보면 돌이나 흙을 가지고 와 던집니다.” 중앙동물원에 갈 때는 절대 국방색 옷을 입고 가지 말 일이다. “동물들이 새로 오면 적응을 잘 합니까?” “상당한 기간이 걸립니다.산에 있는 동물을 잡아서 수송할 때 충격으로 생기는 병을 ‘수송병’이라고 부릅니다.성질이 급하고 메마른것,겁이 많은 것일수록 빨리 죽습니다.” 동물들이 재주를 부리는 동물 교예극장은 계단식 노천극장이었다.책상과 칠판이 설치된 무대에 여성 조련사가 나타났다. “지금부터 동물들의 간단한 재주를 보여드리겠습니다.‘자,동무들!’” 조련사의 말에 푸들·스피츠·발발이 등 여섯마리의 개가 멍멍짖으며 뛰어 나왔다.개들은 책상에 가서 앉았다.조련사가 말했다.“수학문제 풀이입니다.” 조련사는 칠판에 ‘2+3=’ 이라고 썼다.“자,둘 더하기 셋! 누가 맞힐까요?” 흰색 푸들이 앞발을 들고 얌전히걸어나와 칠판 앞에 서더니 ‘멍!멍!멍!멍!멍!’하고 다섯번을 짖었다.“잘 맞췄습니다.다음은 덜기(빼기) 문제입니다.” 순간 앞발에양말을 신은 강아지가 나와서 칠판에 쓰인 글씨를 지웠다.‘강아지학생’들은 기자가 낸 문제도 너끈히 맞혔다.개 중에는 수업시간에슬그머니 빠져나가 무대옆 잔디밭을 배회하는 ‘땡땡이 강아지’도있었다.평양교예단을 연상시키는 원숭이의 원통굴리기 재주,강아지들의 회전마차 뛰어넘기 재주들이 이어졌다. “재주 부리는 강아지는 특별히 선발하나요?” “영리한 개를 고르되 주로 숫놈을 택합니다.암놈은 새끼를 배면 공연을 못하게 되는데 사람과는 달리 다른 개가 대신해줄 수가 없습니다.” 호랑이사 앞에는 관람객이 와글와글 했다.남쪽과 꼭 같았다.“조선의 백두산범,중국의 동북범,소련의 우수리범이 모두 같습니다.하룻밤 사이에 국경을 넘나드니까요.조선범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범입니다. ” “지금도 백두산에 호랑이가 있습니까?” “예,있습니다.우리 동물원에서 야생동물 조사도 하는데 눈 위나 빙판 위에 발자국 찍힌 것으로 확인됩니다.” 지난 3일 서울대공원에서 공개한 백두산 호랑이는 이곳 중앙동물원에서 보내온 것이다. 코끼리사에는 어린 송아지만한 새끼 코끼리가 놀고 있었다.올 5월에 태어났다고 했다.1960년 베트남의 호치민 주석이 전쟁 시기에 군수물자를 많이 날라 영웅 칭호를 받은 코끼리를 선물했는데 그 증손자라고 했다. 스웨덴 스칸센 동물원장이 기증했다는 열대동물관을 거쳐 마지막으로 구관조의 일종인 ‘금댕기새’를 보러 갔다.동물원에 오면 그놈의 작별인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여성 조련사가 나와 먹이를 주면서선창을 하자 마침내 금댕기새가 입을 열었다.중성 목소리였는데 발음은 앵무새에 비할 수 없이 정확했다.“안녕하십네까? 안녕하십네까?” “천리마,천리마”“우리의 소원은 통일!우리의 소원은 통일!”신준영기자 junyoung@
  • 장애인 사이트 ‘네오이드’ 개설…유인근 사장

    돈을 벌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장애인 복지 향상을 위해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장애인사이트 네오이드(www.neoid.net)를 운영하는시스컴 정보기술의 유인근 사장(40세).그는 국내 최초로 지난 5월부터 시범실시하던 이 사이트를 새롭게 단장,최근 포털 사이트로 ‘큰집’을 지었다. 유 사장은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이 집에만 있으면 소외되기 쉽다”면서 “이들을 바깥 사회로 끌어들일 수 있도록 장애인 사이트가그 연결고리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하루 400여명이 방문할 정도인 이 사이트는 140만 장애인들에게 ‘정보 보고(寶庫)’가 되고 있다.경제,법률,문화,의료,레크레이션,학술,교육 등의 분야에서 장애인들에게 꼭 필요한 콘텐츠가 빼곡히 담겨져 있다.장애인 구인회사와구직자를 연결해주기도 하고 직업재활을 시행하는 기관,장애병원,장애교육시설 등을 소개하기도 한다.농아를 위해서는 ‘뽀뽀뽀’등 동요를 수화(手話)로 알려주는 등 수화배우기 코너도 있다. 뭐니뭐니 해도 장애인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은 법률·취업·교육상담실.변호사인 한나라당 오세훈 의원과 특수학교 은광학교김송석 교사, 한빛맹아학교 김두영 교사 등 5명이 상담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상담이 30분 이내에 신속,정확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신청이 줄을 잇고 있다”면서 “앞으로 결혼을 원하는 장애인 구혼 사이트 개설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 사장은 특히 온라인 교육에 관심이 많다.“꽃가꾸기와 동물키우기 등 장애인들의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다”면서 “이들이온라인 교육을 통해서 원하는 직업교육을 받고 취업을 할 수 있도록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네오이드의 활동무대는 온라인(On-line)에 머물지 않고 오프라인(Off-line)으로 영역으로 연결시키고 있다.올 여름과 추석 3차례에 걸쳐250여명의 중증장애인과 함께 동강에서 래프팅을 하는 등 장애인 캠프를 열었다.또 장애인의 실질적인 ‘눈과 발’이 되기 위해 서울에‘장애인지원센터’ 5군데를 세울 계획이다. 최광숙기자 bori@
  • [‘6.15’ 이후의 북한] (3)북한 대학생들

    9월3일.평양에서 맞는 두 번째 일요일이었다.며칠전부터 안내선생들을 졸라오던 대로 대동강 유보도(강변공원)에 나가 소풍나온 시민들을 만나보기로 했다.오전 9시30분 대동강변에 우뚝 서 있는 높이 170m의 주체탑에 올랐다.주체탑 일대는 널찍한 강변공원으로 꾸며져있어 휴일이면 많은 시민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놀러 나온다.주체탑에서 내려다본 대동강에는 양쪽으로 높이 150m의 분수가 치솟고 있었고 보트와 오리배들이 가득 떠다니고 있었다.맞은편의 김일성광장에서는 당창건 55돌 기념 카드섹션 연습이 한창이었다.총지휘자의 목소리가 주체탑 위까지 들려왔다.“다음은 ‘자력 갱생!’ 오자 내지 말아야 겠습니다…”. 어디선가 육중한 종소리가 들려왔다.10시 종이라 했다.카드섹션 연습이 끝나고 시민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유보도로 내려와 강변을 걷는데 통기타 소리가 들려왔다.남녀 대학생들이 여기저기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다가갔다.처음 말을 붙이자 다소 낯설어 하는 표정들이었으나 안내선생들이 기자 일행을“비전향 장기수 송환을 취재하러 온 남조선 기자들”이라고 소개하자 이내 얼굴이 환해졌다.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4학년 학생들인데 전날밤 당 창건 55돌 횃불행진 야간훈련을 성공리에 마친 기념으로 놀러나왔다고 했다. “정치경제학부에는 어떤 과들이 있습니까?” “정치경제학과,계획경제학과,경제조정학과,재정금융학과,무역경제학과 등 5개 학과가 있고 학생수는 1,000명쯤 됩니다.” 가만 보니 유난히 붙어앉은 남녀 학생이 있었다.남학생에게 물었다. “옆에 앉은 친구와는 특별한 관계입니까?” 폭소가 터졌다.남학생은 얼른 대답했다.“기자선생님이 아주 예리하게 보셨습니다”.그러나 옆의 여학생은 “아닙니다”하면서 연신 손을 내저었다.순간 남학생이 여학생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소리쳤다.“넌 내것이야!” 모두들 웃어대다가 한 남학생이 말했다.“난 없습니다.통일되면 남쪽 처녀에게 장가가겠습니다”.그는 정치경제학과 4학년 한명철(25)이라고 했다. “말나온 김에 하나 물어봅시다.북에서는 여학생들이 남학생들 마실물도 떠다준다는데 사실입니까?” 다시 웃음보가 터졌다.남학생들이 말했다.“그런 거야 여동무들이직접 말해야지 뭐.” 기자옆에 앉은 한 여학생이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는 평범한 일 같은데 선생님이 새삼 물으시니 뭐라고 답해야할지…남동무들이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교실청소 깨끗이 해놓으니까수고했다고 물 떠다주는 건데….” “그럼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을 위해 하는 일을 한 번 대보세요.” 한 남학생이 호기있게 입을 열었다.“우리 학급에 여자가 6명 되는데 3·8부녀절 때는 꽃다발도 갖다주고 식당 조직도 하고….” 다른 학생들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어댔다. “왜 웃어요?” “저 동무 말하는 거 좀 보라요.아니 부녀절에 처녀들한테 뭘 준다구?” 웃음소리에 인근에 있던 다른 학생들도 구경왔다.김형직사범대학과김책공과대학 학생들이었다.대동강 위를 떠다니던 유람선이 선착장에들어왔다. 모두들 유람선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비용은 1원이었다.이번에는 학생들의 질문공세에 기자가 답변하는 입장이 되었다.경제학부 학생들이어서인지대학등록금,대졸초임,집세,취업문제 등 남한의 경제분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남한 대학생들이 ‘북녘산하답사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자 “남녘 학우들이 언제쯤 평양에 오는가”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6·15 공동선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명철 학생이답했다.“이번 6월 김대중 대통령께서 평양에 오신 것도 반갑지만 북과 남의 두 수뇌분들이 역사적인 북남공동선언을 채택하신 데 대해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우리 청년학생들도 북남공동선언을 이행하는데 모든 것을 다 바칠 결심으로 있습니다”. 그는 “남의 청년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잊지 않았다. 점심은 염치불구하고 학생들이 저마다 싸온 도시락을 얻어 먹기로했다.김밥,물이 많은 열무김치,계란말이,오리불고기,타조고기,도라지무침,고사리무침,삶은 달걀 등 오랜만에 먹는 가정식 음식들이었다. 타조고기가 이색적이었다.평양에 타조목장이 있는데 타조 한 마리는120㎏,알도 1∼2㎏이나 나가 하나면 한 가족이 먹는다고 했다. 점심이 끝나자 오락회가 벌어졌다.‘콩깍지놀이’였다.양손으로 무릎 치고 손뼉 치고 세 번째 박자에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콩’‘깍’‘지’를 돌아가며 외치는데 굉장히 빠른 속도로 돌려 박자나 가사가 틀리면 걸리는 놀이였다.세 학교 학생이 섞여서 놀다보니 학교마다 특색이 있었다.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은 말이 기본이라,걸려도 말 한마디 하고 노래를 불렀으며 김형직사범대학 학생들은 재기발랄하고 재주가 다양했다.김책공대 학생들은 총명해 보이는 얼굴들이지만다소 순발력이 떨어져 맡아놓고 걸리는 축이었다.그들이 걸려들 때마다 김형직사대 학생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러댔다. “어서어서 나오세요! 안 나오면 졸장부!”.여학생들이 집단으로 나와 “여성은 꽃이라네,나라의 꽃이라네…”라는 노래를 합창하자 남학생들이 슬그머니 나와 백코러스를 넣었다.“할머니는 떼놓고,할머니는 떼놓고…” 한바탕 춤판을 벌인 후 유람선이 선착장에 닿았다.헤어질 시간이었다.학생들은 저마다 술병을 들고 이별주를 권하고 공책을 꺼내 말 한마디 남겨 달라고 했다.배에서 내려 오랫동안 악수를 나누었건만 학생들은 승용차까지 따라와 눈물을 글썽였다.“통일되는 날 꼭 만납시다”를 거듭 외치는 깨끗한 얼굴들을 뒤로 하고 떠나면서 기자는 서울의 얼굴들을 떠올렸다.한번 만났다 하면 1차,2차,3차,4차를 거듭하면서 새벽녘까지 헤어지지 못하고 몰려다니곤 하는 그들.정 많고 흥많은 면에서도 남과 북은 지독하게도 닮아 있었다. 신준영기자 현지르포 junyoung@
  • [‘6.15’이후의 북한] (2)북한의 사회상

    9월 5일 황해도 구월산을 향해 달렸다.평양에서 약 48㎞.평양∼개성간 고속도로에서 황주를 지나 신천쪽으로 꺾어든 차는 은율쪽으로 달렸다.연백평야 넓은 벌에는 누런 벼이삭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군데군데 나타나는 옥수수밭에는 온통 누렇게 말라들어간 옥수수들이서 있었다.안내선생은 “가뭄 때문에 올해 농사가 큰 일”이라고 했다.며칠전 황주에 다녀왔다며 “올해는 작황이 안좋다”고 고개를 내젓던 김순권 박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구월산은 지난 97년부터 해외동포,외국인들에게 개방됐다.1150년전에 건립된 고려시대의 사찰 월정사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월정사관리인 길병호씨는 함흥화학공업대학에서 원유화학을 전공했으나 평생 월정사를 관리해온 아버지의 유지에 따라 평양을 떠나 산에 들어온 보기드문 인물이었다.그는 “월정사 극락보전은 북남을 통틀어 유일한 두공식 건물”이라며 “오대산 월정사도 이곳과 건립 연대가 유사한데 같은 월정스님이 지은 절이 아닌지,통일되면 꼭 가보려 한다”고 했다.부속건물인 명부전에는 주불인 지장보살 만이 휑뎅그렁하게 앉아있었다.주불을 보좌하는 금속제 부처 10쌍을 일제가 약탈해갔다는 것이다. 북에는 지금 ‘열대메기’ 열풍이 불고 있다.열대메기는 남아프리카원산의 민물고기로 4월에 부화하면 9,10월까지 최고 3㎏까지 성장한다.아무것이나 잘 먹고 고기맛도 좋아 각급 학교나 직장,기관들에서양어장을 만들어 키우고 있다.올해 3월 조성한 평양시내 서산호텔 양어장에도 어른 팔뚝만한 열대메기들이 우글우글했다. 호텔 부지배인 전룡운씨는 “호텔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를가공해 사료로 쓰고 있다”면서 “앞으로 호텔손님들이 양어장에서낚시도 즐기고 잡은 고기는 요구대로 요리해 먹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몇 마리를 얻어다 숙소에 와서 구이와 매운탕을 해먹었는데 가물치 맛과 비슷했다.농촌에서는 모내기 후에 논에 열대메기를 풀어 키우는데 메기들이 벼뿌리를 들춰주고 벌레를 잡아먹어 농사도 잘되고 배설물은 거름이 된다고 한다.가정에서도 봄에 비운 김장독에 열대메기를 키워서 이제 잡을 때가 다 됐다는 얘기였다. 조선중앙TV는 맹렬한 금연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었다.그런데 슬로건이 ‘금연’이 아니라 ‘담배조절’이라는 것이 흥미롭다.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강제로가 아니라,건강에 폐해가 있고 부인들 앞에서 담배 피우는 것이 실례라는 것을 자각해서 스스로 끊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김 위원장 자신은 재미언론인 문명자씨와의회견에서 담배를 끊었음을 밝힌 바 있다. 조선중앙TV가 권하는 담배 끊는 방법을 보면 “무 200g을 채 썰어서물은 짜버리고 설탕을 쳐서 먹은 후 담배를 피우면 담배맛이 없다”는 등 효과가 의심스러운 방법도 있다. 보통강호텔 식당에는 올해 29세의 처녀 접대원이 있다.모습도 태도도 아름다운 여성이다.왜 시집 안 가느냐고 했더니 “남자는 나이들수록 금값이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안타까운 마음에 같은 식당의 28세 총각 접대원에게 “동무에게 장가 들면 어떠냐”고 했더니 “어린 처녀도 많은데 하필…”하면서 시큰둥한 표정이다.어찌된 일인지 북에는 처녀가 더 많다고 한다.명태가 넘쳐나던70년대에는 ‘조선에 많은 게 명태하고 여자’라고 했다니 말이다.남쪽에는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곧 처녀 기근현상이 심각해지리라는데이 문제도 통일로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번 취재중 가장 놀라웠던 점 가운데 하나는 대동강변에서 다운증후군 중학생을 목격한 일이다.학생은 행사연습을 하러 가는 듯 손에꽃을 들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걸어가고 있었다.매우 즐거운 표정이었다.다운증후군 장애인의 얼굴은 세계적으로 모두 같다.남쪽언론은 지금까지 “평양에는 장애인이 없다.미관상 이유로 모두 이주시켜 버렸다”라고 보도해왔다.기자는 안내인에게 물었다. “평양에도 장애인이 있는가요?” “장애인이오? 아,불구자 말입니까? 있습니다.우리 동네 이발사가벙어리인데….그런데 왜요?”남쪽 언론의 ‘정설’을 알 리가 없는 안내인이 되물었다.그 대답은못하고 다시 물었다. “불구자들은 어떻게 사나요?” “인민학교,고등중학교까지는 정규학교에 같이 다닙니다.그 후에는불구자에 맞는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거쳐 사회에 진출하는데주로앉아서 하는 직업을 많이 갖습니다.대학시험에 붙으면 대학 측에서끝까지 공부할 수 있게 보장합니다.몸이 불편하면 교원이 집에 가서가르쳐 줍니다”평양에 ‘장애인’은 없다. 그러나 ‘불구자’는 있다.남쪽 언론의정설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신준영기자 junyoung@. *평양서 만난 허혁필 민족화해협 부회장. 196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지도원을 시작으로 조평통 부국장을 지낸 민족화해협의회 허혁필 부회장.현재 범민련 중앙위원과 민족대단결 잡지사 사장을 겸하고 있다.김일성종합대학 외문학부 러시어학과를 졸업한 허 부회장은 99년에는 민화협 부회장으로서 남측의전국어민연합회와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한 공동어로 합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방북취재 마지막날인 8일 허 부회장은 기자일행을 위해 청류관에서오찬을 베풀어 주었다.그는 식사중 10여분간에 걸쳐 ‘톨스토이가 그린 구원의 여인상’에 대해 분석해 주기도 했다. ■평생을 통일문제와 씨름해 왔는데 6·15공동선언에 대한 소감은. 우리같은 통일일꾼 몇 천명이 40년 동안 노력해도 이루지 못할 일을두 분 수뇌께서 단 3일만에 이루어내었다.감격스럽다. ■6·15공동선언에 대한 북측 인민들의 반응은. 신 기자도 이번 취재 중 느꼈을 것이다.우리 인민들은 이번 공동선언에 대해 진심으로 기대와 자신감에 충만해 있다.공동선언후 북남관계가 나같은 사람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급진전되어 왔다.5개 조항중 적지 않은 조항이 이미 실현되었고 나머지 조항의 실현을 위해서도 우리는 모든 성의를 다할 것이다.그것이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현실 속에서 확인하고 있다.
  • 남북 국방장관회담 제주도 2박3일 뒷얘기

    2박3일 동안 제주도에서 열린 남북 국방장관회담은 많은 뒷 얘기를남겼다.이번 회담의 성공의 단초는 ‘승용차 밀담’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은 당초 대표단 입국 일시와 회담 장소 등을 비공개로 하자고강력히 주장했다.그러나 우리측이 “이런 큰 행사를 비공개로 치르는것은 무리”라면서 “고집을 부린다면 회담 자체가 성사될 수 없다”고 버텨 공동보도문을 발표하는 등 ‘반공개 회담’이 이뤄졌다고 한관계자는 설명했다. ■김일철(金鎰喆)인민무력부장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는 등 부드러운모습을 보였지만 회담때는 특유의 명료하고 핵심을 찌르는 말로 우리측을 긴장시켰다.9살 연하의 조성태(趙成台)장관에게는 “그건 제가조 장관선생과 의견을 달리합니다”라고 하는 등 깍듯한 존대말을 썼다.중요한 발언을 한 뒤에는 북측 대표단을 둘러보며 “동무들 맞지요,이상없지요?”하고 묻는 신중함을 보였다. ■우리측 관계자는 이번 회담의 성공요인은 ‘승용차 밀담’이었다고평가했다. 조 장관은 24일 저녁 회담장에서 상대 대표를 맞는 관례를깨고 제주공항까지 직접 영접을 나가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한 회담 관계자는 “특히 제주공항에서 숙소인 롯데호텔까지 1시간20분에 걸쳐 승용차에서 밀담을 나누면서 회담의 ‘큰 줄거리’나 ‘감(感)’을 잡은 것 같다”고 전했다.25일 제주도 관광때도 조 장관과 김 부장은 한 승용차에 타 5시간 이상 많은 얘기를 나누며 ‘신뢰감’을 쌓았다. ■롯데호텔 11층에 마련된 숙소에서 북측 대표단은 ‘군인다운 절제된 모습’을 보였다. 오전 6시 무렵 잠자리에서 일어나 정각 7시에 정복 차림에 머리 단장까지 마치고 아침식사를 들었다.숙소에서도 호텔측이 마련한 음료수 가운데 독한 술에는 손을 대지 않고 맥주나 음료수만 한두병 마셨다. 방에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조심스러움’도 잊지 않았다. 전영우기자 ywchun@
  • [김삼웅 칼럼] ‘개판 언론’의 수치와 자책

    케르베로스는 3개의 머리에 뱀의 꼬리를 갖고 주로 하데스(저승)의나라에서 도망을 시도하는 주민을 붙들어 잡아먹는 역할을 하는 신화상의 괴견(怪犬)이다.그는 죽은 자가 저승에 들어오는 것은 환영했으나 살아 있는 사람이 자기가 지키는 나라에 오는 것은 용인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오르페우스(최고의 시인)는 음악으로 이 개의 마음을 다른 데로 돌려야 했고 시빌레(신탁을 고하는 무녀)는 그 곁을 지나기위해 소프(잠자는 약을 탄 술에 적신 빵)를 던져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헤라클레스도 이 개와 격투했다.그리스 신화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인 헤라클레스의 과업의 하나는 케르베로스를 저승에서 지상으로데려오는 일이었다.케르베로스는 엄청나게 무서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본 자는 돌로 변했다. 지옥을 지키는 이 번견(番犬)은 오로지 저승의 지배자 하데스의 명령에 충실할 뿐이다.그래서 헤라클레스도 이 개를 지상으로 데려왔다가 결국 다시 저승으로 되돌려 보냈다.괴력을 가진 개의 힘 때문이다. 하데스에 못지않는 자가 중국춘추시대의 큰 도적 도척(盜척)이다. 현인 유하혜(柳下惠)의 아우로 수천명의 도당을 거느리고 천하를 횡행하면서 사람의 간을 꺼내어 회쳐먹었다는 인종지말(人種之末)이다. 어느날 도척의 개가 요(堯)임금이 지나가자 사납게 짖고 옷깃을 물어찢었다. 도척의 밥을 먹고 사는 개는 아무리 자기 주인이 악당이라도 주인이하라고 하면 요와 같은 성인군자에게도 서슴지 않고 짖어댄다. 척구폐요(척狗吠堯)의 고사다. 작고한 김경탁(金敬琢)교수의 글에 ‘견공(犬公)의 윤리’가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첫째,이 개라는 놈이 ‘빈자기자(頻자其子)’하니부자유친이다.제 새끼 귀엽다고 자주 혓바닥을 핥아주니,이것은 아비와 새끼 사이에 ‘친(親)’이라는 윤리가 있다.둘째는 개가 ‘불폐기주(不吠其主)’하니 군신유의이다.자기를 길러준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여 제 주인 보고 짖지를 아니하니,이것은 임금과 신하사이에 ‘의(義)’의 윤리가 있다.셋째는 개가 ‘교미유시(交尾有時)’하니 부부유별이다.언제나 함부로 달려들지 않고 일정한 시기에만 교미를 하니,이것은 암놈과 수놈 사이에 ‘별(別)’이라는 윤리가 있다.넷째는개가 ‘소부적대(小不敵大)’하니 장유유서이다.젊은 개는 늙은 개를 상대로 싸우지 아니하니,이것은 큰놈과 작은놈 사이에 ‘서(序)’의 윤리가 있다.다섯째는 개가 ‘일폐군응(一吠群應)’하니 붕우유신이다. 한 놈이 멍멍 짖으면 온 동네 개가 다 같이 여기에 호응하여 응원하니,이것은 동무와 동무 사이에 ‘신(信)’의 윤리가 있다는 것이다. 해방 전후의 언론인 설의식(薛義植)은 ‘돼지의 대덕(大德)’이란글에서 개와 관련하여 이렇게 썼다. “개는 영역감(領域感)에 민첩한 동물이요,영지욕(領地慾)에 탐락(貪락)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자령(自領)을 편수(偏守)하기에 사력을다하며 덮어놓고 배타를 일삼아 짖기를 잘한다.침경(侵境)은 고사하고 접경(接境)도 못할 정도로 날뛰고 야단이다.그리고 뼈다귀만 만나면 으르렁거리고 싸움을 잘 한다.냄새도 잘 맡지만 꼬리도 잘 흔든다.한 술 밥에도 꼬리를 흔들고 한 덩이 고기에도 아양을 부린다.이렇게 쓰다가보니 개 이야기가 아니라 작년 1년간 걸어온 우리 자신의자화상 같아서 붓이 저절로 멈추어진다.자긍과 자책을 느끼는 까닭이다.” ‘자긍과 자책’이 와닿는다.얼마 전 여당대표가 우리 정치를‘개판’이라 표현하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그런데 개판인 것은 정계뿐일까.어느 면에서 언론계야말로 ‘개판’의 상징이 아닐까 싶다. 사주가 물으라면 물고 짖으라면 짖고 세게 물라면 세게 물고 적당히짖으라면 그렇게 한다.독재로부터 해방된 언론이 사주로부터 독립될날은 언제일까.요즘 일부 언론의 ‘반언론적' 행태를 지켜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올곧은 언론인이 적지 않을 것이다. 고려가 망하자 선비 조윤(趙胤)은 “나라가 망했는데 죽지 못하니나는 개다”라고,이름을 견,자를 종견(從犬)으로 바꾸고 산 속으로들어갔다.개보다 못한 인간의 삶이 부끄러워서이다. 사마천은 ‘사기(史記)’ 혹사전(酷史傳)에서 ‘구불이선폐위량(狗不以善吠爲良)’ 즉 “개는 잘 짖는다고 좋은 개가 아니고 도둑을 알고 짖는 개가 좋은 개다”라고 썼다. 김삼웅주필 kim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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