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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한도전’ 하시마 섬 “이런 데를 어떻게 찾아오냐” 어땠나 보니?

    ‘무한도전’ 하시마 섬 “이런 데를 어떻게 찾아오냐” 어땠나 보니?

    ‘무한도전’ 하시마 섬 “이런 데를 어떻게 찾아오냐” 어땠나 보니? 무한도전 하시마 섬 ‘무한도전’ 하시마섬을 찾은 하하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숨진 조선인들을 위한 공양탑을 방문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12일 방송된 MBC ‘무한도전’에서 하하는 최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하시마섬을 방문했다. 하시마섬은 일본 나가사키 시에 있는 무인도로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인들의 노동력을 수탈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지옥섬’이라고도 불린다. 최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뒤로 일본 측은 ‘조선인 강제 징용 사실’을 알리지 않아 논란이 일었다. 하하는 나가사키 내륙의 공동묘지를 찾아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숨진 조선인들을 위한 공양탑에 방문했다. 공양탑을 찾기 위해 덤불 속 숨겨진 길을 걷던 하하는 “이런 데를 어떻게 찾아오냐”며 분통을 터뜨려 시청자의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무한도전’ 하시마 섬, 대체 어떤 곳? “이런 데를 어떻게 찾아오냐” 분통…무슨 일?

    ‘무한도전’ 하시마 섬, 대체 어떤 곳? “이런 데를 어떻게 찾아오냐” 분통…무슨 일?

    ‘무한도전’ 하시마 섬, 대체 어떤 곳? “이런 데를 어떻게 찾아오냐” 분통…무슨 일? 무한도전 하시마 섬 ‘무한도전’ 하시마섬을 찾은 하하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숨진 조선인들을 위한 공양탑을 방문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12일 방송된 MBC ‘무한도전’에서 하하는 최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하시마섬을 방문했다. 하시마섬은 일본 나가사키 시에 있는 무인도로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인들의 노동력을 수탈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지옥섬’이라고도 불린다. 최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뒤로 일본 측은 ‘조선인 강제 징용 사실’을 알리지 않아 논란이 일었다. 하하는 나가사키 내륙의 공동묘지를 찾아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숨진 조선인들을 위한 공양탑에 방문했다. 공양탑을 찾기 위해 덤불 속 숨겨진 길을 걷던 하하는 “이런 데를 어떻게 찾아오냐”며 분통을 터뜨려 시청자의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음산한 가을이 시작된다-에버랜드,‘할로윈 & 호러나이츠’ 축제 개최

    음산한 가을이 시작된다-에버랜드,‘할로윈 & 호러나이츠’ 축제 개최

    에버랜드는 4일~11월 1일 가을 대표 축제 ‘핼러윈 & 호러 나이츠’를 연다.  지난해 처음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었던 좀비 분장 체험을 올해 의상 대여까지 확대했다. ‘마담좀비 분장살롱’에서 분장 전문가가 직접 좀비 메이크업을 해준다. 드라큘라, 마녀, 호박유령 등 15종 200여 벌의 귀신 의상도 빌릴 수 있어 좀비로 완벽 변신할 수 있다. 티익스프레스 옆 융프라우 광장에는 대형 공동묘지를 테마로 한 ‘좀비 그레이브 체험존’이 새로 마련된다.  호러 마니아들을 위한 ‘리얼 호러’ 콘텐츠도 업그레이드했다. 사파리 월드는 매일 밤 ‘호러 사파리’로 변신한다. 갑작스레 출몰하는 좀비 연기자들을 피해 사파리 곳곳을 누비며 실감나는 공포체험을 할 수 있다. 호러 조형물과 공포 체험 요소들도 강화됐다. 호러 사파리는 축제 기간 매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운영되며, 이용료는 5000원이다.  지난 7월 오픈한 미로 형태의 공포체험 시설 ‘호러메이즈1’에 이어 ‘호러메이즈2’도 오픈한다. 호러 빌리지 광장 ‘워킹데드 스퀘어’에서는 매일 저녁 6시에 경찰, 군인, 간호사, 여고생 등 다양한 콘셉트의 좀비들이 나타나 플래시몹을 연출한다.  초가을 나들이에 나선 가족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도 풍성하다. ‘뚝딱이 아빠’ 개그맨 김종석과 함께 마술쇼, 동요, 율동 등을 즐기는 ‘핼러윈 키즈 파티’가 12일~10월말 매주 토요일 하루 3회 펼쳐진다. 포시즌스 가든에서는 꼬마 유령 모양의 조형물을 찾아 인증샷을 찍으면 초콜릿을 주는 어린이 체험 프로그램 ‘꼬마 유령 핼러윈 헌트’가 매일 진행된다. 대형 신전 건축물에서 9분간 펼쳐지는 핼러윈 3D 맵핑쇼 ‘고스트 맨션’은 꼬마 해적 유령 등 귀여운 캐릭터가 새롭게 등장하고, 음악·특수효과 등 연출 요소가 한층 업그레이드됐다.  포시즌스 가든에는 가을을 대표하는 1000만 송이의 국화와 억새풀이 1000여 개의 익살스러운 호박 작품들과 함께 전시돼 있다. 핼러윈 추억을 남길 포토 존으로 그만이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73년 만에 유대인 추방 사죄한 모나코 국왕

    73년 만에 유대인 추방 사죄한 모나코 국왕

    “그들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책임이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알베르 2세 모나코 국왕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자국 내 유대인들을 강제 추방해 수용소로 보낸 데 대해 73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진정한 반성에는 시간의 제한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알베르 2세는 27일(현지시간) 모나코의 최고위직 랍비와 다른 유대인 인사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유대인 강제 추방을 사실로 인정한다”며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박해받다 우리에게로 피한 여성과 남성, 어린이를 넘겨줌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면서 “고통에 빠진 유대인들은 우리가 중립적일 것이라 생각해 모나코를 피신처로 삼은 것이었다”고 속죄했다. 이날 모나코의 공동묘지에는 강제 추방된 유대인의 이름을 새긴 추모비가 세워졌다. 이에 대해 모셰 칸토르 유럽유대인의회 의장은 “나치 치하 어두운 시절의 역사를 조사하려는 모나코의 움직임을 환영한다”고 반겼다. 프랑스 남동부에 자리한 모나코는 2차 대전 초기 중립을 표방했지만 1942년 8월 프랑스 나치 협력자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자국 내 유대인 66명을 체포해 수용소로 보냈다. 이들을 포함해 모나코가 수용소행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90명 중 불과 9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목숨을 잃었다. 알베르 2세의 이번 사과는 조세회피처라는 오명을 얻은 모나코를 일신하기 위한 노력으로 평가받는다. 모나코는 현재 재산을 약탈당한 유대인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이날까지 9건의 보상 신청을 승인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바다만 비추기엔 아쉽더라

    바다만 비추기엔 아쉽더라

    한국의 등대가 불을 밝힌 지도 100년을 훌쩍 넘겼다. 풍차, 젖병 등 다양한 형태의 등대가 관심을 끌고는 있지만, 오래된 등대가 주는 세월의 깊이를 넘어서기는 어렵다. 한국관광공사가 ‘불 밝힌지 100년 이상 된 등대여행’을 주제로 9월의 가볼 만한 곳을 7곳 선정했다. 초가을 바람 맞으며 다녀오기 맞춤한 곳들이다. ■인천 팔미도 등대 - 우리나라 최초로 불 밝힌 ‘원조’ 팔미도 등대는 우리나라 최초로 불을 밝힌 등대다. 1903년 4월 조성돼 같은 해 6월 1일 첫 불을 켰다.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면 팔미도까지 약 45분 걸린다. 선착장에서 등대가 있는 정상까지 10여분. 섬 정상에는 등대가 두 개다. 왼편에 보이는 작은 등대가 ‘원조’ 팔미도 등대다. 옛 등대 뒤로 새 등대가 있다. 새 등대에는 팔미도 등대 탈환 당시 상황과 인천 상륙작전을 재현한 디오라마 영상관, 실미도와 무의도, 영종도 등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마련됐다. 울창한 소사나무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인천시 관광진흥과 (032)440-4045. ■부산 가덕도 등대 - 오얏꽃 문양에 새겨진 100년의 역사 1909년 12월 처음 점등한 가덕도 등대는 2002년 새 등대가 세워질 때까지 인근 해역을 오가는 선박들에게 희망의 빛이었다. 단층 구조에 우아한 외관이 돋보이는 등대 출입구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새겨졌다. 등대 건물은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가 높아 2003년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됐다. 등대 아래쪽의 100주년 기념관에서는 등대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다. 가덕도 등대 외길을 따라 나오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외양포마을에 닿는다. 일제강점기에 마을 전체가 군사기지로 사용됐던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지난 6월 개장한 송도해수욕장의 구름 산책로도 걸어 보자. 가덕도 등대 (051)971-9710. ■충남 태안 옹도 등대 - 고래 혹은 옹기 닮은 등대섬 옹도는 태안 서쪽 신진도 앞바다에 뜬 섬이다. 1907년에 세워진 옹도 등대 때문에 등대섬으로 불린다. 2007년 해양수산부가 선정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등대 16경’에 포함되면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일반에 개방된 건 2013년부터다. 옹도 가는 배는 안흥 외항에서 출발한다. 가는 길은 30여분 걸린다. 섬에 체류하는 1시간을 포함해 총 2시간 40분 여정이다. 옹도는 동백꽃이 많아 봄날에 붉고 여름날에 짙푸르다. 안흥 외항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독립문바위, 사자바위, 코바위 등 특이한 바위섬이 해상 유람의 즐거움을 안긴다. 신진도 안흥유람선 (041)675-1603, 674-1603. ■울산 울기 등대 구 등탑 - 송림과 기암 사이 빼어난 자태 울산의 대왕암 송림은 거제 해금강에 버금가는 절경으로 꼽힌다. 수령 100년이 넘는 아름드리 해송 1만 5000여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기암괴석과 짙푸른 바다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울기 등대는 이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해안 산책로 끝자락에서 방문객을 맞는다. 울기 등대는 동해안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등대다. 일제강점기인 1906년 3월에 처음 불을 밝혀 1987년 12월까지 80여년간 사용했다. 2004년엔 구 등탑이 등록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됐다. 울기 등대 옆은 장생포 고래문화특구다. 울산을 대표하는 벽화 마을인 신화마을도 가까이에 있다. 울산시 관광진흥과 (052)229-3893. ■경북 울진 죽변 등대 - 용의 꼬리를 밝히는 100년의 빛 울진 죽변곶은 포항 호미곶처럼 뭍이 바다로 돌출한 지역이다. 용의 꼬리를 닮아 ‘용추곶’이라고도 한다. 1910년 점등을 시작한 죽변 등대는 100년이 넘도록 용의 꼬리와 그 앞바다를 밝혀 왔다. 팔각형 구조로 새하얀 몸체를 자랑하는 죽변 등대의 높이는 약 16m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선형으로 이어진 철계단이 나온다. 등탑에 올라서면 죽변항과 마을 일대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울진 금강송의 자태를 감상하려면 전문 가이드와 함께 금강소나무 숲길을 걸어 보자. 자연 용출하는 덕구온천에서 개운한 온천욕을 즐기고, 2억 5000만년 세월을 간직한 성류굴에서 석회동굴의 신비로움을 맛보는 것도 좋겠다. 죽변 등대 (054)783-7104. ■전남 진도 하조도 등대 - 다도해를 지키는 ‘거룩한 빛’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안에 있는 진도 하조도 등대는 수려한 풍광이 멋스럽다. 바다와 연결된 등대 주변은 온통 기암괴석이다. 절벽 위에 세워진 등대의 높이는 해수면 기점 48m, 등탑 14m에 이른다. 등대에서 내려다보면 조도군도 일대의 섬들이 절벽 바위와 어우러져 아득한 모습을 펼쳐 낸다. 하조도 등대는 1909년 처음 점등됐다. 진도와 조도 일대는 서남 해안에서 조류가 빠른 곳 중 하나로, 등대는 서해와 남해를 잇는 항로의 분기점을 밝히고 있다. 하조도는 조도군도의 ‘어미새’ 같은 섬이다. 하조도와 연결된 상조도의 도리산전망대에 오르면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조망할 수 있다. 진도군 관광문화과 (061)540-3408. ■전북 군산 어청도 등대 - 일제강점기의 아픔 담긴 문화유산 어청도 등대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일본이 대륙진출을 목적으로 세웠다. 깎아지른 절벽 위의 하얀 등대는 입구에 삼각형 지붕을 얹은 문을 달고, 등탑 윗부분에는 전통 한옥의 서까래를 모티브로 장식해 조형미가 돋보인다. 어청도에는 산등성이를 따라 조성된 둘레길이 있다. 어청도 포구와 주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길이다. 주봉인 당산(198m) 정상에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봉수대가 남아 있다. 마을 중앙에는 중국의 전횡을 모시는 사당인 치동묘가 있다. 전횡은 어청도란 이름을 지은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어청도 항로표지관리소 (063)466-4411.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이광식의 천문학+] 온갖 불운을 타고났던 ‘왕따’, 우주의 이정표를 세우다

    [이광식의 천문학+] 온갖 불운을 타고났던 ‘왕따’, 우주의 이정표를 세우다

    -인류의 위대한 거보 내딛은 천문학자 케플러 20세기 천문학의 영웅 허블이 온갖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17세기 천문학의 영웅 요하네스 케플러는 온갖 불행을 껴안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이후 최고의 천재 천문학자로 꼽히는 케플러이지만, 그의 생애는 가난과 질병, 전쟁, 추방으로 점철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었다. 우선 그의 불행 목록을 잠시 요약해보기로 하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발표된 지 28년 후인 1571년 12월 27일, 독일의 작은 도시 바일에서 태어났다. 칠삭둥이인데다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했다. 아버지는 “부도덕하고 거칠고 싸움꾼”인 용병이었고, 어머니는 술집 딸로 “성미가 까다롭고 수다스러운” 여자였다.(케플러의 표현) 양친 누구로부터도 그다지 사랑을 받지 못한 케플러는 4살 때 천연두를 앓아 그 후유증으로 근시에 복시(複視)까지 겹쳐 평생을 고통받으며 살았다. 내장기관도 좋지 않았고, 손가락도 온전하지 못해, 가족들이 보기에 장래에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라곤 성직자밖엔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얼마 후 집을 떠나고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한마디로 모든 불운을 한 몸에 타고난 아이가 바로 어린 시절의 케플러였다. 가족들은 어린 케플러를 성직자로 만들기 위해 수도원 학교에 넣었다. 병약하고 내성적인 케플러가 동급생들에게 인기가 있을 리 없었다. 스스로도 “나는 성격도 별로 안 좋고...” 등등의 부정적인 묘사를 하기 일쑤였다. 아이들에게 왕따 당하거나 매 맞는 적도 드물지 않았다. 한마디로 3류 인생으로 온갖 멸시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재능을 그는 갖고 있었다. 바로 명석한 두뇌였다. 그가 가난한 집안으로부터 거의 학비 지원을 받을 수 없었음에도 대학까지 갔던 것은 오로지 뛰어난 머리 덕분이었다. 항상 장학금을 받아냈던 것이다. 특히 수학에서 그는 발군의 재능을 보였다. 케플러는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지만, 틈틈이 수학과 천문학을 공부하며 과학적 지식을 쌓아나갔다. 수학의 천재였던 케플러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보다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수학적으로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배우면서 완전한 형상과 코스모스의 영광을 엿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의 심경을 케플러는 이렇게 표현했다. “기하학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있었다. 기하학은 신의 뜻과 함께 영원히 공존한다. (...) 기하학은 천지창조의 본보기였다. (...) 기하학은 신 그 자체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 학위 과정에 들어가려 했던 케플러에게 그라츠의 한 개신교 학교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쳐달라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22살의 그는 주저없이 목사의 길을 버리고 신학교를 떠났다. 그라츠에서 케플러에게 맡겨진 임무 중의 하나는 예언과 부합하도록 점성력(占星曆)을 뜯어고치는 일이었다. 당시 이런 일은 관행이었다. 16세기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은 그 경계가 모호했다. 케플러의 첫 달력이 나왔을 때 그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그는 터키의 침공과 추운 겨울을 예견했는데, 두 가지 예측이 모두 들어맞아 예언자로 명성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살면서 궁할 때마다 점성술로 돌아오곤 했지만, 그 자신은 점성술을 믿지 않았다. 점성술에 대한 그의 한탄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점성술은 어머니인 천문학을 먹여살리는 슬픈 창녀일 뿐이다.” 케플러가 우주를 창조한 신의 마음을 알기 위한 기나긴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은 하나의 계시 때문이었다. 천문학의 일대 혁신을 가져온 계시의 순간은 어느 화창한 여름날 그가 학생들에게 기하학을 가르칠 때 찾아왔다. 행성들은 왜 코페르니쿠스가 알아낸 간격의 궤도만을 따라 도는가? 그 누구도 던져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케플러의 생각은 태양계 구조의 근본에까지 닿았던 것이다. 케플러는 행성 궤도와 기하학은 깊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기나긴 여정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윽고 태양계의 비밀을 푸는 기하학적 열쇠를 손에 쥐었다고 확신했지만, 여전히 다른 의문들이 남아 있었다. ‘왜 바깥쪽 행성은 안쪽 행성보다 느리게 태양 둘레는 도는가?’ 이는 케플러 이전의 어떤 천문학자도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였다. 케플러는 이에 대해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빛과 같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행성들을 조종한다고 결론 내렸다. 케플러는 자신의 이런 이론을 담아 '우주의 신비'(1596)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 여러 곳에 보냈다. 갈릴레오도 그 책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였지만, 서문만 읽어보고는 내용은 끝내 읽지 않았다. 반면 튀코 브레헤는 케플러의 이론에 감명받았을 뿐 아니라, 케플러의 ‘천재’를 알아보았다. '우주의 신비'는 케플러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시골 학교의 수학 선생에 지나지 않았던 케플러는 이 책으로 인해 유럽 천문학계에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졌고, 이것을 고리로 하여 황실 수학자이자 우라니엔보리 천문대장인 튀코 브라헤(1546~1601)의 초청을 받아 그와 같이 일하게 되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육안 관측 천문학자로 꼽히는 튀코는 당시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행성 관측자료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요리할 만한 수학적인 밑천이 부족했다. 이에 반해, 케플러는 시력이 나빠 관측에는 약했지만, 강력한 이론적인 무기, 곧 수학을 갖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둘은 어느 정도 궁합이 맞는 짝이라 할 수 있었다. 케플러의 '화성 전쟁' 케플러가 튀코의 조수로 가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튀코가 가지고 있던 풍부한 관측자료에 있었다. 매의 눈을 가진 튀코는 망원경이 발명되기 35년 전부터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측정하는 데 모든 것을 바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가 행한 관측의 정밀도는 당대 최고였다. 54살의 튀코와 29살의 케플러의 만남은 그다지 부드럽지 못했다. 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는 관측의 귀재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제일의 이론가였다. 협력은 쉽지 않았다. 튀코의 경계심 때문이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케플러가 우라니엔보리에서 일한 지 18개월 만에 튀코는 병으로 급사했다. 어느 만찬에서 포도주를 과음한 뒤 소변을 참다가 방광염에 걸렸고, 그것이 악화되어 며칠 후 숨을 거둔 것이다. 브라헤는 숨을 거두기 직전 "내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하소서!" 하고 외친 튀코는 그토록 아끼던 관측자료를 케플러에게 모두 물려준다고 유언했다. 튀코가 죽은 후 케플러는 그 뒤를 이어 황실 수학자로 임명되었고, 튀코의 자료 분석에 밤낮 없이 매달렸다. 케플러가 가장 시간과 정열을 쏟아부었던 과제는 화성 궤도 계산이었다. 지구와 화성이 실제로 태양 주위를 어떤 식으로 운동하기에 화성이 우리 눈에 공중제비를 돌듯이 역행운동을 하는 것일까? 실제로 화성을 관측하노라면, 이제껏 왼쪽으로만 운행하던 화성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엔 이윽고 다시 방향을 틀어 왼쪽으로 운행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화성의 역행운동으로, 고래로부터 수많은 천문학자들로 하여금 머리를 싸매게 한 불가사의한 현상이었다. 기원전 6세기의 피타고라스부터 플라톤, 프톨레마이오스 등 모든 천문학자들이 행성들의 궤도는 원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원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기하학적 도형이므로, 완벽한 존재들인 천상의 천체들은 마땅히 원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갈릴레오, 튀코, 코페르니쿠스도 행성 궤도가 원이라는 데에 티끌만한 의심도 없었다. 케플러 역시 화성이 태양 주위를 원궤도에 따라 돈다고 간주하고 브라헤의 관측자료를 분석하고 궤도계산에 매달렸다. 쉽게 끝날 것 같았던 계산은 8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는 복잡하고 지루한 계산을 무려 70차례나 되풀이했다. 이른바 케플러의 ‘화성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지난한 작업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이 과정을 지루하다고 느낄지도 모르는 독자를 위해 이런 각주를 달아두기까지 했다. “이 지루한 과정이 진력나시거든, 이런 계산을 적어도 70번이나 했던 저를 생각하시고 참아주십시오.” 케플러는 타원공식을 사용해 다시 자료분석을 시도했다. 그 공식은 고대 그리스의 페르가의 아폴로니오스(BC 262~190)가 처음 만들어낸 식이었다. 결과는 브라헤의 관측값과 완전 일치했다! 케플러는 탄성과 탄식을 함께 토해냈다. “자연의 진리가 나의 거부로 쫓겨났었지만, 인정을 받고자 겉모습을 바꾸고 슬그머니 뒷문으로 들어왔으니.... 아, 나야말로 정말 멍청이였구나!” 화성이 타원궤도를 돈다는 것은 이렇게 오랜 노역 끝에 얻어진 것이었다. 다른 행성들도 타원궤도를 돌지만, 화성보다는 훨씬 원에 가깝다. 태양은 타원궤도의 중심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중심을 조금 벗어난 초점에 자리한다. 행성의 공전속도는 태양이 가까울수록 빨라지고 멀어질수록 느려진다. 이런 운동 때문에 행성이 태양을 향해 계속 떨어지는 중이지만, 결코 태양에 곤두박질하지는 않는다. ​우주의 이정표를 세우다 행성운동을 규정한 타원의 법칙과 동일면적의 법칙은 1609년에 그의 책 '새 천문학'에 발표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 '우주의 조화'에서 그의 제3법칙 조화의 법칙을 발표함으로써 케플러의 3대법칙은 완결되었다. 케플러 법칙을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행성의 궤도는 태양을 하나의 초점에 두는 타원궤도이다.2. 태양과 행성을 잇는 직선은 항상 일정한 넓이를 쓸고 지나간다.3.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행성과 태양 사이 평균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케플러는 3대법칙을 완결한 후, 자신이 신이 우주를 설계한 논리를 발견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엄청난 희열감을 느꼈다. 행성운동의 법칙을 최초로 과학적으로 규명한 케플러 법칙은 행성운동의 거리와 시간관계를 밝힘으로써 60년 후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선도한 것이기도 했다. 케플러는 놀랍게도 태양과 행성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작용하며, 행성운동의 근본 원인이 자기력과 유사한 성격의 것이라고 제안함으로써 중력 또는 만유인력을 예견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뉴턴은 만유인력 법칙의 발견에 케플러의 신세를 엄청나게 졌다. 백 번을 감사하다는 말을 해도 모자랄 터인데, 그는 단 한 번도 케플러에게 감사의 말을 하지 않았다." 케플러는 연구가 수행되는 중에도 신변엔 고통이 떠나지 않았다. 1611년, 30년 전쟁의 군인들이 옮긴 전염병 탓에 그의 아내와 가장 사랑하던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후견인이던 루돌프 황제가 폐위됨에 따라 케플러는 졸지에 일자리를 잃었다. 인류를 위한 우주로의 거보를 내디딘 존재였지만, 케플러의 만년은 흐린 겨울날처럼 스산했다. 30년 전쟁이 유럽을 휩쓰는 가운데 케플러는 모든 후원자를 잃고 가난에 내몰렸다. 그의 만년은 돈을 구하고 후원자를 찾는 피곤한 여정으로 메워졌다. 그러던 중 어느 추운 늦가을, 밀린 급료를 받기 위해 노구를 끌고 먼 길을 나섰다가, 독일 레겐스부르크에서 병을 얻어 며칠 고열에 시달리다 숨을 거두고 말았다. 1630년 11월 15일이었다. 향년 59세. 그날 밤 하늘에서 유성우가 내렸다고 한다. 출생에서부터 임종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불우하기만 했던 이 거인의 유해는 성벽 밖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혔다. 빗돌에는 그가 지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어제는 하늘을 재더니, 오늘 나는 어둠을 재고 있다. 나는 뜻을 하늘로 뻗쳤혔지만, 육신은 땅에 남는구나.” 그러나 그의 무덤도 30년 전쟁 와중에 군대에 의해 훼손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케플러가 평생을 바쳐 고난과 싸우며 이룩해낸 그의 업적은 후세 과학사학자들에 의해 ‘과학혁명의 열쇠’라는 평가와 함께 케플러를 그 혁명의 중심 인물로 올려놓았다. 과학사가 제임스 R. 뵐켈은 케플러의 업적이 갈릴레오의 업적보다 천문학적으로 더욱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케플러는 행성운동 법칙 제3법칙을 연구할 당시, 지구에 적용되는 측정 가능한 물리 법칙들이 다른 천체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을 간파했고, 이로써 인류사 최초로 천체 운동에서 신비주의가 배제되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상의 비밀을 보다 확실하게 세상에 내보인 케플러는 행성운동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인 이론인 ‘케플러 법칙’을 정립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우주로 향한 인류의 위대한 거보(巨步)를 내딛었다. 영국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케플러의 삶을 이렇게 평했다. "만약 절대적인 엄밀함을 추구하면서 평생 동안 가장 헌신적인 삶을 산 사람에게 주는 상이 있다면,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그 상을 받았을 것이다.” 2009년, 미항공우주국(NASA)은 케플러의 천문학에 대한 기여를 기리기 위해 우주 망원경에 케플러의 이름을 붙였다. 이것이 케플러 계획이다. 그리고 유엔은 갈릴레오가 최초로 망원경 천체관측을 행하고 케플러가 그의 '새 천문학'을 발간한 지 400주년 되는 2009년을 '세계천문의 해'로 정해 그를 기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후학인 칼 세이건의 다음과 같은 말이 케플러를 위한 최상의 찬사가 될 것이다. “우주 탐사선이 광대한 우주를 가로질러 외계로 달려갈 때, 사람이고 기계고 가릴 것 없이 확고부동한 이정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케플러가 밝혀낸 행성운동에 관한 세 가지 법칙이다. 그의 평생에 걸친 수고로 그는 발견의 환희를 맛보았고, 우리는 우주의 이정표를 얻었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해외여행 | 터키,누군가는 내 뼈 위에서 파티를 즐기리라③History & Heritage

    해외여행 | 터키,누군가는 내 뼈 위에서 파티를 즐기리라③History & Heritage

    ●History & Heritage 관념이 구체화 되는 순간 터키를 여행하면서 오늘날의 국경과 지도적 공간 개념을 허물지 않는다면, 상당히 혼란스러진다. 또한 유럽사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없다면 여행 내내 수도 없이 등장하는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과 아고라, 그리스 양식의 건축물과 신전들, 기독교 성화 위를 덮은 코란의 문구들이 계통 없이 뒤죽박죽된다. 로마를 보려면 터키를 먼저 가라 아나톨리아 반도는 초기 그리스 문명이 시작되고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멸망되기까지 오랫동안 그리스인들이 주인이었던 땅이었다. 그리스 유물을 볼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 서로마가 제국의 이름으로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에는 로마의 속주였던 땅이었으니 로마의 흔적도 남아 있다.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집단거주지, ‘차탈회육’ 이 발견된 곳이고 인류 최초로 철을 만든 히타이트 문명BC 2000년경이 태동한 곳이니 선사시대의 유적을 확인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스 로마 문명을 보려면 터키를 먼저 가라는 말이 과장이 아닌 것이다. 안탈리아에서 동쪽으로 47km 떨어진 곳의 아스펜도스에는 원형극장이 있다. BC5세기에 이미 은화를 만들어 쓸 정도로 번성했던 이 지중해 도시는 이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이슬람의 시대를 바람처럼 거치면서 풍화되었다. 지금은 작은 마을로 남았지만 과거의 영화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는 곳이 바로 원형극장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일찍부터 연극이 발달했다. 그들은 청명한 지중해 기후를 즐기며 야외극장에서 축제를 했고 토론을 했고 비극과 희극의 경연대회를 했다. 호전적인 로마인들은 극장을 검투사 경기장의 용도로 더 많이 활용했다. 그리스는 언덕과 경사면을 깎아 극장을 만들었고 로마는 평지에 아치를 받쳐 극장을 완성했다. 유럽 여행을 가면 성당을 질리게 본다는데 터키 지중해 여행에서는 원형 경기장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경기장이 저마다의 다름으로 다가오는 탓에 성당처럼 질릴 겨를은 없다. 건축물의 형태가 다르고, 훼손의 정도가 다르며, 공명의 상태가 다르고, 주변의 산세가 다르다. 무엇보다 이미 기원전에 ‘보고’ ‘보여지는’ 쌍방향의 문화를 즐겼다는 것이, 여전히 기원전 하면 돌도끼를 든 원시인을 생각하는 내 머리에는 질투 섞인 이질감으로 다가온다. 아스펜도스의 원형극장은 <명상록>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161~180년 재위를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최대 2만명까지 수용하는 거대한 극장이다. 보존 상태도 완벽하지만 특히 오케스트라에서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해도 객석 어디서든 잘 들리는 공명감이 미스터리한 건축 기법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죽음의 모습에서 삶을 읽다. 안탈리아 좌측,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서쪽 끝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곳이 ‘리키아Lycia’다. 그리스어가 아닌 자신들만의 고유한 언어를 사용할 정도로 독창적 문명을 키워 온 땅이다. 리키아의 중심도시 미라Myra의 고대 유적지는 뎀레Demre에서 2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에도 원형극장이 있는데 고대 유적지의 초입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절벽 위의 무덤들이다. 고대의 리키아인들은 죽은 자를 땅에 묻지 않고 수직 절벽에 굴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그 안에 석관을 안치하는 매장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시신을 땅에 묻으면 썩을 것이니 영혼 불멸과 사후 세계를 믿었던 그들은 영혼의 집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지위가 높으면 더 높은 절벽에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늘에 가깝게 다가갈수록 부활도 빨라질 것이라는 순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리키아의 무덤에서는 수천년 전에 살았던 리키아 사람들의 순망함을 보면서도, 정작 그들을 묻었던 사람들의 도시는 무덤 아래 땅 밑에 묻혀 버린 그 기묘한 아이러니를 목격하게 된다. 미라에서 좀 더 남쪽 바닷가로 내려가면 마을 전체가 아예 바다 속에 잠겨 버린 곳도 있다. 케코바Kekova라는 곳이다. 2세기경 지진으로 수몰됐다고 하는데 해안가에는 목욕탕과 집터, 나지막한 돌산에는 당시의 건축물과 석관묘의 흔적이 남아 있고 수심 5~6m의 코발트빛 바다 아래로 수중 도시가 희미하게 들여다보인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Chatting 수다거리 미라Myra의 바닷가 마을, 뎀레Demre가 유명한 것은 바로 산타클로스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에 루돌프 사슴을 타고 와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빨간 옷의 산타클로스. 그 동화 속 할아버지의 실제 인물인 성 니콜라우스270년~346년경가 주교로 있던 곳이다. 산타클로스와 성 니콜라우스 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가 먼저겠지만, 그리스 정교회나 가톨릭, 기독교에서는 대표적인 성인으로서 성 니콜라우스를 숭배한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억울한 사람에게 힘이 돼 준 그의 생전의 업적이 약자와 뱃사람과 여행자의 보호 성인으로서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주교로 있던 미라의 성 니콜라우스 교회는 폐허처럼 남아 있다. 3세기부터 있었던 교회의 자리에 6세기, 현재 모습의 교회가 지어졌고 이후 증축되었으나 이슬람의 점령과 자연 재해 속에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파손됐다. 그리고 이슬람을 믿는 터키의 무관심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성지는 방치되었다. 중앙 홀과 두 개의 회랑이 있는 바실리카 형식의 교회는 입구 바닥에 모자이크 장식이 있고, 현관 벽에 파손된 프레스코 성화가 있다. 니콜라우스 성인에 대한 공경심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이곳을 둘러볼 이유가 있을까 싶게 우중충한 모습이다.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은 죽은 성인을 신화로 포장해서 유통시키는 자본의 힘이다. 성 니콜라우스 생전의 수많은 선행은 2차 대전 후 관광산업 부활의 기치를 내건 핀란드에 의해 산타클로스로 재탄생했고 여기서 굴뚝, 선물, 어린이, 순록과 같은 장치물들이 등장한다. 산타클로스의 빨간 색, 하얀 색의 옷 역시 1930년대 코카콜라 광고가 만들어낸 이미지다. 결국 우리는 자본이 만들어 낸 이미지 속에서 산타클로스를 소비했다는 것인데, 생기 하나 없는 성 니콜라우스 교회를 나오면 그 주변의 기념품 가게들의 활기찬 모습에서 자본의 위력을 실감한다. 아무리 터키의 이슬람을 세속 이슬람이라고 하지만, 십자가를 기념품으로 진열해 놓고 성가를 틀어놓는 그 태연함에 웃음마저 나온다. 여하튼 미라를 갈 때, 산타클로스의 기원 또는 원형을 찾아 간다는 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뭔가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산타의 기원을 찾으려면 코카콜라 공장을 가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라는 성 니콜라우스의 봉사와 희생 그리고 선행의 행적을 기리는 장소로서 더 빛날 것이다. 터키에서 듣는 하루 다섯 번의 ‘아잔’ 이슬람 국가를 여행하다 보면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윙하고 울린다. 하루 다섯 차례일몰 직후, 밤, 새벽, 낮, 오후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방송이고 이를 ‘아잔’이라고 한다. ‘아잔’은 ‘알라는 위대하다’로 시작해서 ‘알라 외에 신은 없다’ 로 끝난다. 터키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비록 터키가 이슬람 국가로서는 거의 유일한 민주국가이자 탈 종교국가이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세속 이슬람주의라고 하더라도 모스크에 모여 기도하는 의식은 철저히 지킨다. 이슬람을 생활이 아닌 뉴스 정도로 접하는 우리에게, 터키와 같은 이슬람 국가를 여행한다는 것은 이슬람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나는 터키를 여행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이비 이슬람교’가 좋았다. 여자들에게 부르카또는 히잡 쓰기를 강요하지 않고, 자기 종교만을 위한 폭력을 성전 ‘자하드’라고 억지 부르지 않는 탈 근본주의가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평화와 평등이라는 이슬람 사상의 중심을 지켜 나가고 있었고, 무함마드 자체가 아닌 그가 추구한 삶을 살기 원하며, 하느님알라 말씀에 복종하고 기독교의 복음과 선지자 예수까지 믿음의 범주로 수용하는 포용성을 지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장미로 유명한 데니즐리의 구네아겐트 작은 마을에서 ‘아잔’의 울림을 들었을 때, 나는 이것도 누군가에게는 소음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자동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한적함, 길거리 햇볕 좋은 곳이나 가게 앞에 나와 앉아 한담을 나누는 많은 노인들의 졸음 같은 평화의 한가운데서 ‘아잔’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 거침 없는 기도 소리가 내 고막에 금을 쩍쩍 가게 하고 신경을 긁기 시작했을 때,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이 누릴 고요함의 권리는 왜 무시하는 것인지 반감이 생겼던 것이다. 나중에 이 생각을 터키 사람에게 말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늘 아잔을 듣다 보면 그 소리에 너무나 익숙해진다.” ●Sentiment 그리고 감상 한 조각 감동은 셔터를 누르게 하고 감상은 볼펜을 찾게 한다. 엽서든, 수첩이든 혹은 빈 종이든, 무어라도 끄적거리고 싶은 욕망을 늘 나는 특별한 여행지에서 경험한다. 그 특별한 장소란 좀 더 쇠락하고, 밀려 있고, 버려지거나 남겨진 곳들이다. 내 뼈 위에서도 파티를 터키의 지중해 여행에서 일행과 떨어져 자발적 고립을 선택했던 곳은 두 군데였다. ‘사갈라소스Sagalassos’는 고원에 세워진 고대도시다. 해발고도 1,450~1,700m 지점에 유적지로 남아 있는 이 도시는 그 잔해만으로도 과거에 얼마나 영화로웠는지를 단번에 짐작할 수 있게 한다. BC333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함락당한 후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BC25년, 로마령이 되면서 절정의 시기를 갖게 된다. 518년의 지진과 이후의 아랍 공격 등으로 폐허가 된 사갈라소스는 1706년 탐험가 파울 루카스에 의해 발견된 이후 1985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하얀 산이라는 뜻을 가진 아크다으산 바로 아래에 아고라, 공회당, 도서관, 대형 분수, 공중목욕탕 들이 도시 형태로 흩어져 있지만 특별한 감상은 원형경기장에서 맞이한다. 터키에서 가장 높은 곳의 고대 극장 무대는 무너졌지만, 9,000석 규모의 객석들은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지금도 눈을 감고 있으면 원형경기장의 풍경이, 그리고 그 함성이 단번에 두루마리 펴지듯 죽 펼쳐진다. 파묵칼레 옆 ‘히에라폴리스’에서는 어떤 이에게 긴 편지를 썼다. 혼자 품고 있기에는 이 감상이 너무 벅찼다. BC190년경 페르가몬 왕국 때 세워진 이 폐허의 도시는 공간적으로 넓고 여백은 충분하다. 원형 경기장을 오르는 언덕에 유채꽃은 만발하고 그 길에서 자유와 해방감과 상상력은 무르익는다. 아스펜도스처럼 보존 상태가 좋으면서도 경치는 압도적으로 더 좋다. 1,200개의 무덤이 있는 헬레니즘 시대의 공동묘지도 히에라폴리스에서 볼 수 있다. 죽은 도시를 바라보며 아래쪽의 관광객들은 수영과 온천을 즐긴다. 고대와 현대, 죽음과 삶, 지止와 동動의 대칭들이 천연덕스럽게 공존하는 곳, 히에라폴리스에서 시간과 공간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어느 해, 내 뼈 위에서 누군가는 파티를 즐길 것이다. ▶travel info Turkey AIRLINE 터키 가는 길 인천에서 터키 이스탄불까지는 비행기로 12시간이 걸리며 터키항공,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이 운행중이다. 이스탄불에서 안탈리아까지는 국내선으로 1시간 20분이 걸린다. 터키는 한국보다 7시간 늦다. 전압은 220V로 한국과 같으며 화폐는 터키리라TL. 1리라는 한화로 약 400원 정도. Hotel Regnum Carya Golf & Spa Resort 안탈리아 벨렉에 위치한 이 호텔은 골퍼들에게 특화된 리조트 호텔이다. 멋진 바다와 해변, 워터 파크와 넓은 수영장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객실도 고급스럽다, 거대한 열대 나뭇잎으로 포인트를 준 리셉션에서의 웰컴 샴페인과 와인, 그리고 디저트 등이 이 호텔의 첫인상을 풍요롭게 해준다. 객실 미니바를 포함해 레스토랑, 바 등에서의 모든 알코올, 음료 등은 무료다. 레스토랑의 메뉴도 매머드급이다. 저녁 8시, 풀장에서의 불꽃 페스티벌도 환상적이다. Kadriye Bolgesi, Uckum Tepesi Mevki, Belek 7500, Turkey fOOD 입이 호강하는 터키 음식 지중해 음식이 대개 그러하듯 터키 음식은 화려하기보다는 소박하고, 눈보다 입을 즐겁게 하며, 덧입힘보다는 날것과 원재료의 향과 맛을 중요하게 여긴다. 잘게 썬 고기 조각을 구워 먹는 전통요리 케밥은 양고기, 쇠고기, 닭고기로 만든다. 케밥의 종류는 수십가지가 넘는데 고기를 꼬챙이에 끼워 굽는 시시 케밥과 도네르 케밥이 잘 알려져 있다. 케밥은 요구르트로 만든 시원하고 시큼한 맛이 나는 아이란과 함께 먹기도 하며 터키식 볶음밥인 필라프와 함께 먹기도 한다. 또한 올리브를 빼놓을 수 없다. 오이, 양파, 올리브 등을 크게 썰어서 올리브유를 넣고 만드는 샐러드는 언제나 편하고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넓게 편 밀가루 반죽 위에 토마토, 마늘, 고추, 쑥갓, 쇠고기와 양고기, 후추와 각종 향신료, 치즈 등을 올린 다음 큰 화덕 속에 넣고 익혀낸 후 한 입 크기로 잘라 내오는 피데도 참 맛있다.홍차 맛 터키 차이 터키 사람들은 차도 많이 마신다. 하루에 보통 열 잔 이상의 차를 마시는데 우롱차를 더 발효한 것이 터키의 차이chai다. 엷은 홍차 맛이 난다. 차이를 파는 차이하네Chaihane나 차이에비Chaievi는 문화와 정보의 사교장이며, “와서 차 하잔 하시오구엘 차이 Guel Chai”는 그들의 관용어다. 실제 물건을 사는 가게에서도 주인은 차를 시켜 손님에게 권하기도 하는데, 뜨거운 차를 호호 불면서 가격을 흥정할 수는 없는 법이니, 이래저래 터키 사람과 차를 마시고 있으면 마음이 느긋해지고, 덩달아 착해진다. 죽음만큼 강렬한 커피 커피도 터키인의 기호품이다. 터키에서는 커피를 ‘카흐베Kahve’라고 부른다. 커피 가루를 넣어서 끓여내기 때문에 잔에 가루가 남는다. 그러니까 터키 커피는 2/3 정도만 마신 후 남겨야 한다. 터키 사람들은 커피를 음식과 차의 향기를 개운하게 씻어 주는 마무리로 생각한다. 또한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는 것은 그 사람의 역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행위로 여긴다. 터키 속담에, ‘한 잔의 커피에는 40년의 추억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내 앞의 사람의 40년 역사를 존중하거나, 또는 40년 동안 나에게 커피를 대접한 사람을 존경하고 기억한다는 중의적 의미이다. restaurant 케바치 카디르Kebapcı Kadir 1851년부터 164년째 영업을 하고 있는 터키에서 가장 오래된 케밥집이다. 장미의 도시 으스파르타 시청 뒤에 있다. 할리우드 배우 등 셀러브리티들이 많이 찾는 탓에 가게 벽에는 유명인들의 사진, 각종 상장 등이 빼곡하다. 염소와 양을 꼬치에 끼운 뒤 대형 화덕에 아침 7시부터 굽기 시작하는데, 당연히 기름이 쪽 빠지면서 고기가 아주 쫄깃해지고 담백해진다. 가격은 1인분에 15~30리라 수준. Ulu Cami Yanı ,Valilik Arkası Kebapcılar Arastası No:8 +90 246 218 24 60 에디터 트래비 글 윤용인 사진 Bar & Dining 김은주, 윤용인 취재협조 터키문화관광부 한국홍보사무소 02-336-3030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지하무덤’ 객실에서 하룻밤을~...성당 개조한 호텔 등장

    ‘지하무덤’ 객실에서 하룻밤을~...성당 개조한 호텔 등장

    성당 지하무덤을 객실로 꾸민 호텔이 등장했다. 성당 무덤을 테마로 한 호텔 객실은 미국에선 처음이다. CNN 등 외신에 소개된 화제의 업소는 최근 미국 메인주 루이스턴에서 문을 연 뷰틱 호텔 '인더아고라'. 호텔은 지하에 마련된 지하무덤 객실로 관심을 끌고 있다. 사장 앤드류 나이트는 "성당의 지하무덤을 객실로 꾸민 호텔은 미국은 물론 아마도 세계에서 처음일 것"이라며 인기몰이를 자신했다. 무덤 객실엔 대형 TV와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어 언뜻보면 일반 객실과 차이가 없다. 하지만 벽쪽에 설치된 잠자리를 보면 머리가 쭈뼛한다. 타일이 떨어져나가 빨간 벽돌이 보이는 무덤자리엔 나무로 만든 관이 설치돼 있다. 뚜껑을 열면 관은 비교적 넉넉한 2인용 침대로 변신한다. 자세히 살펴 보면 객실엔 공포 체험을 위한 도구(?)가 구석구석 숨어 있다. 투숙객이 입맛(?)에 따라 골라볼 수 있는 60편의 공포영화도 그 중 하나다. 호텔 건물은 원래 1800년대에 지어진 성패트릭 성당이었다. 성패트릭성당 초대 성직자로 재임한 몬시뇰 토마스 월러스는 성당건물을 완공하고 1902년 숨을 거뒀다. 2009년 성당이 폐쇄되면서 월러스의 시신은 주면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몬시뇰 월러스의 시신이 100년 이상 안치돼 있던 무덤은 테마객실로 변신했다. 호텔은 최근 이베이에서 지하무덤 객실 1호 숙박권을 경매에 붙였다. 낙찰된 숙박료는 760달러, 우리돈 88만8000원 정도다. 숙박료엔 메인 건물의 별도 객실 사용료가 포함돼 있다. 지하무덤 객실에서 공포를 만끽하고 일반 객실에서 편안한 밤을 보내라는 뜻이다. 실제로 지하무덤 객실엔 화장실이 설치돼 있지 않아 밤을 보내기엔 불편함이 있다. 정상요금은 지하무덤 객실 사용료 290달러(최저)에 일반 객실 사용료140달러를 보탠 430달러(약 50만원)다. 방은 늦어도 오후 2시엔 비워야 한다. 외신은 "월러스는 100년 이상을 지하무덤에서 보냈지만 투숙객은 오후 2시 체크아웃을 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사진=CNN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굶주린 곰들 공동묘지 몰려들어 ‘공포’

    굶주린 곰들 공동묘지 몰려들어 ‘공포’

    "공동묘지에 가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성묘를 자제하세요." 러시아의 지방도시 콤소몰스크는 최근 주민들에게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경고성 권고지만 사연을 알고 보면 고개를 끄덖이게 된다. 콤소몰스크의 공동묘지와 주변에선 곰이 자주 목격되고 있다. 곰이 사람과 마주치게 되면 자칫 공격을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최근 주변 숲에선 흑곰 두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외출(?)을 시도하다가 목격됐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해 공포를 쏘면서 곰을 쫓았다. 당국은 곰들이 공동묘지로 몰래 들어갈 수 있다고 보고 경찰관을 공동묘지에 배치했다. 곰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곰들은 왜 하필이면 공동묘지로 몰려드는 것일까. 공동묘지에 가면 먹을거리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선 성묘를 할 때 먹을거리를 장만해 가는 게 보통이다. 성묘를 한 뒤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바치는 음식이다. 공동묘지에 놓고 나오는 음식은 곰들에겐 진수성찬 먹을거리가 된다. 먹을거리가 풍부해도 곰들이 굶주리지 않았다면 굳이 공동묘지를 찾을 리 없다. 현지 언론은 "숲에서 먹을거리를 찾기 힘들어져 곰들은 주린 배를 쥐고 공동묘지 주변으로 몰리고 있다"며 "최근엔 연어가 강으로 돌아오는 시기마저 늦어져 곰들에게 먹을거리가 더욱 부족해졌다"고 보도했다. 경찰은 "굶주린 곰은 매우 위험하다"며 "안전을 위해 당분간 공동묘지를 찾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다. 콤소몰스크는 인터넷사이트에 "공동묘지 주변에서 곰이 자주 출현하고 있다"며 방문을 자제하라는 권고문을 올렸다. 한편 콤소몰스크의 인근 지역에선 이미 곰의 공격으로 인한 인명피해도 발생했다. 아무르 강어귀에 있는 크라스노예에서 곰의 공격을 받은 남자가 사망한 사건이 최근 발생했다. 사진=자료사진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 [송혜민의 월드why] 그녀는 왜 개·고양이와 결혼할까?

    [송혜민의 월드why] 그녀는 왜 개·고양이와 결혼할까?

    네덜란드에 사는 41세 여성 도미니크 레스비렐은 최근 두 번째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저 평범한 재혼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의 ‘남편들’은 매우 특별합니다. 첫 번째 남편은 고양이, 두 번째 남편은 개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성은 8년 전 자신의 반려고양이와 결혼식을 올리고 정식 부부가 됐습니다. 이 ‘고양이 남편’이 신장병으로 죽자, 이번에는 함께 살던 반려견과 ‘재혼’을 결심한 것이죠. 그녀는 자신이 직접 반려동물과의 결혼을 허가해주는 웹사이트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메리유어펫’(Marryyourpet.com)인데요. 반려동물과 결혼을 원하는 신청자가 사연과 사진을 웹사이트에 올리면 도미니크가 이를 심사하고 통과시킨 뒤 증명서를 발급해주는 방식입니다. 다만, 이들에게는 절대 ‘이혼’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굳이 사람이 아닌 동물과 결혼까지 하려는 이 여성의 사례는 현대 사회와 반려동물간의 관계를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일각에서는 ‘애인보다 반려견이 낫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죠. 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으로 사람이 아닌 동물을 선택할까요. ▲사후 반려견에 재산 증여…반려동물 전용 초호화 공동묘지까지 반려동물이 가족을 구성하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인정’받은 사례는 전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올해 초, 미국 뉴욕에 사는 앤 보라스니(60)는 자신의 반려견에게 10만 달러의 신탁기금과 100만 달러의 별장 등 총 110만 달러(한화 약 12억 원) 상당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녀는 반려견이 자신의 딸이나 다름없다며, 자신이 죽은 뒤에도 부유한 생활을 유지시켜주고 싶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중국에는 반려동물 전용 공동묘지가 성시를 이룹니다. 베이징에 위치한 한 반려동물 공동묘지에서는 화장과 매장, 박제 등 다양한 장례절차를 선택할 수 있으며, 애완견 기준으로 장례비용은 680위안에서 최대 6800위안까지 천차만별입니다. 화장한 유골을 담는 유골함의 가격 역시 수 천 위안에 달하며, 관리비도 등급에 따라 최저 100위안에서 1000위안까지 나눠져 있습니다. 이곳에 죽은 반려동물을 안치한 주인들은 입을 모아 “돈이 아깝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반려동물을 가족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애인·반려자·자식보다 반려동물 선호…1인 가구 증가와 비례 북유럽국가들의 1인 가구 비율은 약 40%에 달하며 미국도 35%대에 육박합니다. 일본의 수도인 동경에서는 혼자 사는 사람의 비율은 45%에 달한다는 조사도 있습니다.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도 꾸준히 늘자 전문가들은 ‘외로움’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혼자 사는 외로움을 달래려 반려동물을 선택한다는 것이죠. 애인이나 반려자나 자식보다 반려동물을 더 선호하는 사람들이 느는 것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공통 현상입니다. 반려동물과 단 둘이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반려동물은 동물 이상의 존재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동거하는 ‘사람 가족’이 없는 1인 가구는 반려동물에게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습니다. 미국 무역협회 뉴욕지부에 따르면 2014년 미국 애완동물 소유주가 애완동물 관련 용품 및 서비스에 580억 달러를 소비한데 이어 올해 606억 달러(한화 68조원)를 지출할 것으로 전망됐습니다. 1인 가구와 노년층 증가 현상을 보이는 일본도 반려동물 시장 규모가 12조원에 달합니다. 왜 그들은 ‘사람 가족’ 대신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선택할까요. 반려견과 단 둘이 10년 넘게 생활해 온 한 30대 여성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 관계는 복잡 그 자체지만, 반려견과의 관계는 단순해요. 반려견은 누구도 배신하지 않아요. 돈 문제가 얽힐 일도 없고,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아니고요. 함께 오래 살다보면 외로움이 사라지고,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기도 하죠.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나요?” ▲한국 반려동물 인구 1000만 시대…동물 유기 등 부작용도 잇따라 최근 한국에는 ‘펫팸족’이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펫팸족은 반려동물(pet)과 가족(family)의 합성어로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는 1000만 명, 이중 1인 가구 펫팸족은 200만 명 안팎으로 추정됩니다. 홀로 애지중지 반려동물을 키우다 보니 ‘개 폐하’, ‘고양이 마마’라는 표현까지 등장할 정도입니다. 반면 동물보호협회 등은 반려동물 숫자가 늘수록 유기동물이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이 가족이었던 동물을 한순간에 짐짝으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것이죠. 현대인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극도의 스트레스와 불안감, 외로움 등 심리적 장애를 겪습니다. 이때 반려동물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감싸고 토닥여주는 훌륭한 카운슬러이자 애인‧친구‧가족이 되어줍니다. 반려동물과 정식으로 결혼까지 하겠다는 네덜란드 여성이 유별나 보일 수 있지만, 절대 이해 못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감동뉴스] ‘75년 해로’ 노부부 마주보며 같은 날 하늘나라로...

    [감동뉴스] ‘75년 해로’ 노부부 마주보며 같은 날 하늘나라로...

    75년 동안 해로한 노부부가 평소의 약속대로 서로 마주한 채 거의 같은 날 함께 저세상으로 떠나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고 미 현지 언론 언론들이 2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미국 샌디에이고에 거주하는 알렉산더 토츠코(95)와 자넷 토츠코(94)는 지난 1940년 결혼식을 올린 이후 75년간 함께 부부로 해후했다. 사실 이들 커플은 1919년 같은 동네에서 태어난 이후 8살 때부터 만나 서로 친구로서 우정과 사랑을 꽃피웠으며 남편인 알렉산더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동안 이외에는 거의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었다고 자녀들은 밝혔다. 결혼 75주년 기념일이 되는 지난달 6월 29일을 앞두고 이들 부부는 죽어도 함께 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밝혀왔고 마침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자녀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했다. 지난달 15일, 남편인 알렉산더가 먼저 세상을 떠나려 하자 부인인 자넷은 자신의 팔은 뻗어 남편에게 팔배게를 해준 다음 알렉산더가 편히 숨을 거두자 "이제 당신이 원하는 데로 되었다"며 "나도 곧 당신을 따라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자녀들은 밝혔다. 이후 채 하루가 지나기 전에 자넷도 남편을 바라보며 마주한 채 편안히 저세상으로 떠나 이들은 서로의 약속을 지켰다. 이를 지켜본 요양원 간호사는 "이들 부부가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숨을 거둔다는 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라고 밝혔다. 이들 부부의 딸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모는 일생 동안 마치 하나의 심장을 가진 것처럼 늘 일심동체를 이뤘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함께 화장되어 같이 공동묘지에 묻혔으며 장례식에 참석한 아들은 이들 부부가 "마치 서로 손을 잡고 함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장례식 당시의 심정을 말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사진= 75년을 해로하고 같은 날 함께 세상을 떠난 노부부 (현지 언론, KGTV 캡처) 다니엘 김 미국 통신원 danielkim.ok@gmail.com
  • ‘힐링캠프’ 황석정, 서울대 국악과 졸업한 뒤 연기한 이유는?

    ‘힐링캠프’ 황석정, 서울대 국악과 졸업한 뒤 연기한 이유는?

    ‘힐링캠프 황석정’ ‘힐링캠프’ 황석정이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연기에 도전했다. 6월 29일 방송된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이하 힐링캠프)에서 황석정은 연극이 자신이 꿈꾸는 세계였다고 말했다. 공동묘지에서 피리를 연습해 힘들게 서울대 국악과까지 간 황석정.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관현악단에 들어가 월급을 받고 레슨을 해야하는 길을 받아들기 어려웠다고. 황석정은 “그런 내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고 말했다. 그때 황석정은 연극을 보고 자신이 꿈꾸는 자유예술세계를 봤다고. 극단으로 들어가 포스터를 붙이는 일부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고 싶어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갔다. 황석정은 자신의 결정에 대한 부모님이 반응에 대해 “부모님이 꿈꾸는 나의 모습은 유학도 다녀오고 음대 교수가 되는 모습이었는데 내가 그 길로 안 갔다. 부모님은 나를 포기하셨다. 내 연극을 보시지도 않았다. 얼마 전에 TV로 내가 연기하는 것을 아시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힐링캠프’에는 배우 황석정 길해연이 출연했다. 황석정은 화려한 싱글녀의 일상을 공개했으며, 길해연은 힘들었던 과거를 고백해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힐링캠프 황석정, 서울대 음대교수의 길 포기 “상상하기 힘들었다”

    힐링캠프 황석정, 서울대 음대교수의 길 포기 “상상하기 힘들었다”

    지난 29일 방송된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이하 힐링캠프)에는 배우 황석정과 길해연이 출연했다. 이날 방송에서 황석정은 “연극은 내가 꿈꾸는 세계였다”고 입을 열었다. 공동묘지에서 피리를 연습해 힘들게 서울대 국악과까지 간 황석정은 학교를 졸업하고 관현악단에 들어가 월급을 받고 레슨을 해야하는 삶을 받아들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황석정은 “그런 내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며 연극을 보고 자신이 꿈꾸는 자유예술세계를 봤다고 말했다. 이후 황석정은 극단으로 들어가 포스터를 붙이는 일부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고 싶어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힐링캠프 황석정, “연극 내가 꿈꾸는 세계였다” 서울대 포기하자 부모님 반응은?

    힐링캠프 황석정, “연극 내가 꿈꾸는 세계였다” 서울대 포기하자 부모님 반응은?

    힐링캠프 황석정, “부모님 음대교수 꿈꿨지만..” 서울대 포기한 이유 들어보니 ‘힐링캠프 황석정’ 배우 황석정이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후 음대 교수의 길 대신 연극인의 길을 걷게 된 사연을 고백했다. 지난 29일 방송된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이하 힐링캠프)에는 배우 황석정과 길해연이 출연했다. 이날 방송에서 황석정은 “연극은 내가 꿈꾸는 세계였다”고 입을 열었다. 공동묘지에서 피리를 연습해 힘들게 서울대 국악과까지 간 황석정은 학교를 졸업하고 관현악단에 들어가 월급을 받고 레슨을 해야하는 삶을 받아들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황석정은 “그런 내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며 연극을 보고 자신이 꿈꾸는 자유예술세계를 봤다고 말했다. 이후 황석정은 극단으로 들어가 포스터를 붙이는 일부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고 싶어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황석정은 “부모님이 꿈꾸는 나의 모습은 유학도 다녀오고 음대 교수가 되는 모습이었는데 내가 그 길로 안 갔다”며 “부모님은 나를 포기하셨다”고 부모님의 반응을 전했다. 이어 “내 연극을 보시지도 않았다. 얼마 전에 TV로 내가 연기하는 것을 아시게 됐다”고 덧붙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사진=SBS 힐링캠프 방송캡처(힐링캠프 황석정) 연예팀 seoulen@seoul.co.kr
  • 힐링캠프 황석정, “부모님 음대교수 꿈꿨지만..” 서울대 포기한 이유 들어보니

    힐링캠프 황석정, “부모님 음대교수 꿈꿨지만..” 서울대 포기한 이유 들어보니

    지난 29일 방송된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이하 힐링캠프)에는 배우 황석정과 길해연이 출연했다. 이날 방송에서 황석정은 “연극은 내가 꿈꾸는 세계였다”고 입을 열었다. 공동묘지에서 피리를 연습해 힘들게 서울대 국악과까지 간 황석정은 학교를 졸업하고 관현악단에 들어가 월급을 받고 레슨을 해야하는 삶을 받아들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이후 황석정은 극단으로 들어가 포스터를 붙이는 일부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고 싶어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황석정은 “부모님이 꿈꾸는 나의 모습은 유학도 다녀오고 음대 교수가 되는 모습이었는데 내가 그 길로 안 갔다”며 “부모님은 나를 포기하셨다”고 부모님의 반응을 전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힐링캠프 황석정 “부모님은 나를 포기하셨다” 왜?

    힐링캠프 황석정 “부모님은 나를 포기하셨다” 왜?

    힐링캠프 황석정 “부모님은 나를 포기하셨다” 왜? 힐링캠프 황석정 ‘힐링캠프’ 황석정이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한 뒤, 연기에 도전한 이유를 밝혔다. 황석정은 지난 29일 방송된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이하 힐링캠프)에 출연해 연극이 자신이 꿈꾸는 세계였다고 말했다. 황석정은 “공동묘지에서 피리를 연습해 힘들게 서울대 국악과까지 갔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관현악단에 들어가 월급을 받고 레슨을 해야하는 길을 받아들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런 내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며 “연극을 보고 자신이 꿈꾸는 자유예술세계를 봤다”고 밝혔다. 황석정은 “극단으로 들어가 포스터를 붙이는 일부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고 싶어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갔다”고 덧붙였다. 황석정은 자신의 결정에 대한 부모님이 반응에 대해 “부모님이 꿈꾸는 나의 모습은 유학도 다녀오고 음대 교수가 되는 모습이었는데 내가 그 길로 안 갔다. 부모님은 나를 포기하셨다. 내 연극을 보시지도 않았다. 얼마 전에 TV로 내가 연기하는 것을 아시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힐링캠프’에는 배우 황석정 길해연이 출연했다. 황석정은 화려한 싱글녀의 일상을 공개했으며, 길해연은 힘들었던 과거와 아들의 희귀병을 고백해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힐링캠프 황석정, 서울대 국악과 갔지만 포기 ‘왜?’

    힐링캠프 황석정, 서울대 국악과 갔지만 포기 ‘왜?’

    지난 29일 방송된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이하 힐링캠프)에는 배우 황석정과 길해연이 출연했다. 이날 방송에서 황석정은 “연극은 내가 꿈꾸는 세계였다”고 입을 열었다. 공동묘지에서 피리를 연습해 힘들게 서울대 국악과까지 간 황석정은 학교를 졸업하고 관현악단에 들어가 월급을 받고 레슨을 해야하는 삶을 받아들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황석정은 “그런 내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며 연극을 보고 자신이 꿈꾸는 자유예술세계를 봤다고 말했다. 이후 황석정은 극단으로 들어가 포스터를 붙이는 일부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고 싶어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힐링캠프 황석정 “부모님은 나를 포기하셨다” 이유는?

    힐링캠프 황석정 “부모님은 나를 포기하셨다” 이유는?

    힐링캠프 황석정 “부모님은 나를 포기하셨다” 왜? 힐링캠프 황석정 ‘힐링캠프’ 황석정이 서울대 국악과를 졸업한 뒤, 연기에 도전한 이유를 밝혔다. 황석정은 지난 29일 방송된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이하 힐링캠프)에 출연해 연극이 자신이 꿈꾸는 세계였다고 말했다. 황석정은 “공동묘지에서 피리를 연습해 힘들게 서울대 국악과까지 갔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관현악단에 들어가 월급을 받고 레슨을 해야하는 길을 받아들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런 내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며 “연극을 보고 자신이 꿈꾸는 자유예술세계를 봤다”고 밝혔다. 황석정은 “극단으로 들어가 포스터를 붙이는 일부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고 싶어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갔다”고 덧붙였다. 황석정은 자신의 결정에 대한 부모님이 반응에 대해 “부모님이 꿈꾸는 나의 모습은 유학도 다녀오고 음대 교수가 되는 모습이었는데 내가 그 길로 안 갔다. 부모님은 나를 포기하셨다. 내 연극을 보시지도 않았다. 얼마 전에 TV로 내가 연기하는 것을 아시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힐링캠프’에는 배우 황석정 길해연이 출연했다. 황석정은 화려한 싱글녀의 일상을 공개했으며, 길해연은 힘들었던 과거와 아들의 희귀병을 고백해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매일 공동묘지에 출몰하는 ‘소년 유령’ 사진 포착

    매일 공동묘지에 출몰하는 ‘소년 유령’ 사진 포착

    소년에게는 무슨 한이 있는 것일까? 아르헨티나의 한 지방도시에서 매일 소년유령이 목격되고 있어 주민들이 공포에 떨고 있다. 소년유령이 출몰한다는 곳은 아르헨티나 코르도바 주의 헤수스마리아라는 곳에 있는 공동묘지 주변이다. 네다섯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은 매일 밤 공동묘지 담벼락에 기대고 선 채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게 유령을 봤다는 주민들의 설명이다. 소년유령을 봤다는 사람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엔 사진까지 돌면서 민심은 더욱 흉흉해지고 있다. 이메일로 돌기 시작한 사진에는 공동묘지 담벼락에 조용히 서 있는 소년유령이 비교적 뚜렷하게 찍혀 있다. 소년유령의 뒤로는 어른으로 보이는 검은 그림자가 있다. 누군가 조작한 사진을 돌린 것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소년유령을 봤다는 사람들은 "매일 나타나는 소년유령이 맞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지역에선 소년유령이 원한을 풀기 위해 부모를 찾고 있는 것이라는 소문이 확산되고 있다. 크로니카 등 현지 언론은 "범죄로 목숨을 잃은 소년유령이 부모를 찾기 위해 매일 밤 공동묘지를 찾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이 많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소년유령과 연관돼 있을 만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은 특정되지 않고 있다. 현지 언론은 "몇몇 주민이 어린이가 억울하게 사망한 사건을 뒤지고 있지만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다"면서 "오래 전에 발생한 사건이면 아는 사람이 없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사진=크로니카 임석훈 남미통신원 juanlimmx@naver.com
  • 비만 심각한 브라질 ‘빅사이즈 전용 묏자리’ 등장

    비만 심각한 브라질 ‘빅사이즈 전용 묏자리’ 등장

    남미 브라질의 한 공동묘지가 빅사이즈 묏자리 판매를 개시해 관심을 끌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공동묘지 페니텐시아는 최근 특별규격 묏자리를 마련해 분양신청을 받고 있다. 비만인 사람을 겨냥해 기획된 빅사이즈 묏자리의 규격은 길이 2.6m, 폭 1.5m, 깊이 0.6로 일반 묏자리보다 훨씬 넉넉하다. 공동묘지 관계자는 "생전에 몸무게가 최고 500kg까지 나간 사람도 문제없이 모실 수 있다."고 말했다. 심각한 비만을 가진 사람도 걱정 없이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규격이 특대인 만큼 가격도 비싼 편이다. 빅사이즈 묏자리의 가격은 1기에 7만5000헤알, 우리돈으로 2750만원에 이른다. 브라질 일반 묏자리보다 4배나 비싼 가격이다. 공동묘지 관계자는 "가격이 다소 비싼 편이지만 수요가 많을 것으로 보인다"며 조기에 분양이 마감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런 자신감 뒤에는 브라질의 심각한 비만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인구 2억의 브라질은 비만이 급속도로 늘어나 고민에 빠져 있다. 브라질 보건부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체중과다는 50%, 비만은 23% 증가했다. 비만이 늘면서 브라질 정부의 의료비 지출 부담도 커지고 있다. 연간 2억5000만 달러가 비만 치료에 쓰이고 있다. 브라질 정부는 2013년 비만과 체중과다 예방을 위해 대규모 캠페인을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페니텐시아 공동묘지 관계자는 "브라질에선 유일하게 빅사이즈 묏자리를 제공하는 만큼 수요가 많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자료사진 손영식 해외통신원 voni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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