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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 한반도… 열강 ‘군사 각축장’

    한·미 양국이 7월 서해상에서 연합훈련을 실시할 예정인 가운데 중국과 러시아가 각각 동중국해와 극동 지역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에 돌입했다. 중국과 미국은 특정 상황을 겨냥한 훈련이 아니라며 선을 그었으나 천안함 사태 이후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실시되는 대규모 군사훈련이라는 점에서 동북아 안보지형의 미묘한 변화 가능성이 점쳐진다. 미국 국방부는 28일(현지시간) 북한의 천안함 공격에 따른 대응조치로 검토돼 왔던 서해상에서의 한·미 연합훈련을 7월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브라이언 화이트 국방부 부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양국 간에 훈련의 세부사항과 관련한 협의가 진행되고 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한·미 양국은 당초 6월에 서해상에서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천안함 사건과 관련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논의가 진행되면서 훈련 일정이 연기됐다. 연합훈련에는 미 7함대 소속 항공모함인 조지 워싱턴호(9만 7000t급)와 핵잠수함, 이지스 구축함, 강습상륙함을 비롯한 한국형 구축함(4500t급·KDX-Ⅱ)과 1800t급 잠수함인 손원일함, F-15K 전투기 등이 참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중국 인민해방군은 30일 0시부터 동중국해 해상에서 실탄사격훈련에 돌입했다. 중국 정부는 이 사실을 저장성 온주만보(溫州晩報)를 통해 공개했다. 7월5일까지 6일간 저장성 저우산(舟山)∼타이저우(台州) 동쪽 8곳의 연안해역에서 펼쳐지는 이번 훈련에는 기뢰제거함, 상륙함, 대잠함, 호위함과 신형 미사일을 장착한 022형 스텔스 미사일 고속정 등이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는 중국 군사전문가들의 분석을 토대로 “중국이 동중국해 연안 해역에서 해군 훈련을 벌인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은 미국에 미묘하지만 주도면밀한 ‘편지’를 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베이징의 한 군사소식통은 “같은 해역은 아니지만 지난해 7월 중순에도 인근 해역에서 실탄훈련이 실시된 적이 있다.”며 통상적 연례훈련을 앞당긴 것이라고 해석했다. 러시아군도 29일부터 시베리아를 포함한 극동 전역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에 돌입했다. 이타르타스통신에 따르면 다음달 8일까지 이어질 이번 훈련에는 태평양함대 사령부와 극동·시베리아 관구 사령부 산하 2만명과 전투기 70대, 전함 30척이 참여한다. 2008년 훈련 당시 8000명만 참여했던 것에 비하면 2배 이상 규모가 커졌다. 러시아 당국은 공식적으로는 이번 훈련이 최근 높아지는 한반도 긴장과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니콜라이 마카로프 러시아군 총참모장(합참의장)은 28일 “이번 훈련은 특정 국가나 군사동맹을 목표로 한 훈련이 아니다.”면서 “순수한 의미의 군사훈련”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강국진기자 kmkim@seoul.co.kr
  • [사설] 한·미 FTA 골격 흔들지 말고 비준 준비해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제 이명박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친 뒤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할 때까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해 상당한 추진이 이뤄지기를 바란다.”면서 “마무리되면 방문 몇 개월 뒤 의회에 비준 동의안을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무역대표부(USTR)에 실무협의를 지시했다.”고 덧붙였다. 오바마 대통령이 FTA와 관련해 구체적인 일정을 제시한 것은 처음이다. 한·미 양국은 2007년 4월 FTA 협상을 타결하고 6월30일 합의문에 서명까지 했으나 그동안 미국 측의 미온적인 태도로 시간만 허비해왔다. 이런 점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전향적인 발언은 매우 긍정적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협상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했지만 문제는 어느 선에서 조정이 마무리될 수 있느냐는 데 있다. 실무협의는 주로 한국의 자동차 시장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그 동안 한국에서 미국 자동차가 팔리지 않는 불만을 표출해 왔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미국차가 일본·유럽차보다 경쟁력이 떨어져서 팔리지 않는 것인데도 장벽이 있는 것처럼 사실을 호도해왔다. 또 미국은 FTA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쇠고기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해왔다. 현재는 월령(月齡) 30개월 미만 쇠고기 수입만 이뤄지고 있다. 우리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면 완전개방하겠다는 약속을 한 상태다. 한·미 양국은 FTA 골격을 흔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실무협의를 해야 한다. 미세 조정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미국이 쇠고기 시장 완전개방을 밑어붙이려고 하면 2년 전의 촛불시위가 재연되면서 반미 감정이 불붙을 수도 있다. 현재 한·미관계는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끈끈하다. 미국은 자동차와 쇠고기에 얽매여 한·미동맹에 악영향을 미치는 우(愚)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을 연기한 것을 놓고 뒷거래가 있지 않느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한·미 정부는 오해받지 않도록 더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한다.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끈을 고쳐 매지 않는 법이다.
  • [한미 전작권 전환 연기] 전작권 略史

    [한미 전작권 전환 연기] 전작권 略史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6·25전쟁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유엔군사령부를 거쳐 한미연합군사령부에 넘겨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하자 다음달 작전지휘권을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했다. 1953년 휴전 이후 한·미 양국은 한국군을 계속 유엔군사령관의 작전통제권 아래 두기로 합의했다. 1978년 11월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유엔군사령관에게서 한미연합군사령관에게 이양됐다. 작전통제권 환수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87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선거 공약으로 ‘작전통제권 환수 및 용산기지 이전’을 제시하면서부터다. 2년 뒤부터 미국 내에서도 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양국은 전작권 전환 연구와 협의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1991년 11월 열린 제13차 한·미 군사위원회회의(MCM)에서 양국은 평시작전통제권을 1993~1995년 사이에 전환하고 전시작전통제권은 1996년 이후 협의키로 했다. 이에 따라 평작권은 1994년 말 한국군에 전환됐으며, 연합사령관은 ‘전작권과 연합권한위임사항(CODA)’만을 행사하게 됐다. 전작권 전환 논의는 2005년 10월 제37차 한미안보협의회의에서 한·미 간에 ‘전작권 전환에 관한 논의를 적절히 가속화’하자는 데 합의하면서 본격화됐다. 이듬해 9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전작권을 전환한다는 기본 원칙에 합의했다. 같은 해 10월 열린 제38차 한미안보협의회의에서 양국 국방장관은 ‘전작권전환 후 새로운 동맹군사구조 로드맵(Roadmap)’에 합의했다. 2007년 1월 한·미 상설 군사위원회(MC)에서 ‘한·미 지휘관계 연합 이행실무단 운영을 위한 관련 약정’을 체결했다. 한달 뒤 한·미 국방장관회담에서 ‘2012년 4월17일’을 전작권 전환 날로 확정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한미 전작권 전환 연기] 찬반 논란

    전작권 이양 시기가 연기되면서 정치권은 물론, 시민단체들 사이에 찬반 논란이 뜨겁다. 특히 전작권 문제는 보수·진보 간 이념 대립이 팽팽히 맞서는 만큼 양측이 날선 공방을 벌이고 있다. 한나라당은 한·미 양국 정상이 전작전 전환시점을 2012년 4월에서 2015년 12월로 3년7개월 정도 더 연장한 것은 적절한 조치이며 환영한다고 밝혔다. 조해진 대변인은 27일 “당초 2007년 전작권 전환 시점을 2012년 4월로 결정했을 때부터 안보 현실을 무시한 졸속합의라는 등 논란이 있어 왔다.”면서 “그 이후로 전작권 전환 준비작업이 진행돼 왔지만 예정대로 2012년 시행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준비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실익도 없고 타당성도 없는 전작권 전환 연기합의로 추후 한·미 양자협상에 직·간접적인 부담을 져야 하는 가능성에 우려를 표명하며, 이번 결정이 공론화 과정도 없이 갑작스레 이뤄진 것은 납득하기 힘든 밀실외교라고 비판했다. 노영민 대변인은 “당초 한·미 양국 국방당국은 가장 보수적인 방법으로 전작권 전환준비 기간을 계산해 2012년 4월을 가장 안전한 날짜로 판단하여 결정했다.”면서 “북한의 핵능력이 전환 연기의 결정적 원인이라면 전환계획 수립 당시 충분히 반영된 사항이므로 정부는 전작권 연기 이유를 보다 명확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어 “이명박 정부 들어서 국방개혁 2020에 의해 수립됐던 첨단군으로의 변모를 위한 군비 확충계획은 축소됐고, 당초 계획된 국방예산은 다른 분야(4대강) 사업에 전용됐던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시민단체들 사이에도 논란이 이어졌다. 김병관 전 서울시재향군인회 회장은 “전작권 이양 시기 연기는 당연한 수순”이라면서 환영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연기된 기간 동안 군 현대화, 남북 통일을 위한 대비 등 전작권을 가져오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고 부족하면 또다시 시기를 연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진보성향 시민단체 평화네트워크의 정욱식 대표는 “전작권 환수 문제는 대한민국의 주권과 한·미동맹의 민주적이고 균형된 발전에 중대한 함의를 갖고 있음에도 어떤 공론화 과정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한 꼴”이라고 주장했다. 유지혜·허백윤·윤샘이나기자 wisepen@seoul.co.kr
  • [열린세상]북한·소련·중국 남침협의 진상과 의미/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열린세상]북한·소련·중국 남침협의 진상과 의미/황병무 국방대 명예교수

    1949년 3월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한 주목적은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승인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제안을 거부한다. 북한군대가 남한군대를 압도할 정도로 우세하지 않다. 남한엔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미국과 합의한 38도선 파기를 소련이 주도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해 6월 주한미군이 완전히 물러가고,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된다. 김일성은 소련의 군사지원으로 전력을 강화하면서 중국 공산군에 편입된 이른바 한인 3개사단을 1950년 1월까지 중국으로부터 돌려받는다고 보장받는다.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한반도 통일 가능성을 북한 주재 소련대사에게 제기한다. “남한에서 미군 철수는 38선을 지킬 명분과 능력을 미국 스스로 없애고 있다.” “왜 우리가 38선에 얽매여야 하는가.” 1950년 1월12일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 극동방위선 발언은 김일성과 스탈린에게는 미국 불개입에 대한 믿음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950년 1월 말 스탈린은 북한대사 슈티코프에게 비밀전문을 보내 “김일성 동지의 불쾌감을 이해하고 있으며”, 대남행동에 대해 “언제고 만나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렸다. 이 전문이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을 간접적으로 승인한 최초의 문건이다. 김일성은 1950년 3월30일부터 4월25일까지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남침조건, 전쟁지원을 논의했다. 스탈린은 네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미군개입의 철저한 평가, 중국의 남침승인, 소련의 직접 참전에 대한 기대 포기 및 철저한 전쟁준비이다. 5월 중순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만나 스탈린의 남침승인을 알리면서 마오의 승인을 얻는다. 미군 개입시 중국은 군대를 보내고 소련은 무기를 보내 북한을 돕는다는 데 합의한다. 놀랍게도 마오쩌둥은 북한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북한이 한반도 통일을 완수할 시 조약을 발효시킬 것에 대해 스탈린의 동의를 얻는다.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싸우게 되면 중국은 소련에 더욱 의존할 것이며 미국은 국력의 손실로 세계적 세력균형이 소련에 유리하게 이동할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1950년 1월과 7월사이 유엔 안보리에 소련의 불참은 계획된 것이었다. 미국이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보다 많은 잘못”을 저지르게 하기 위한 스탈린의 의도는 1950년 8월 체코 대통령 고트아트에 보낸 비밀전문에 보인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참여하는 부대 명칭을 중국인민 “지원군”으로 제시하고 중국인민지원군에 대한 항공지원도 한·만 국경지역에 한정하는 등 중·소동맹조약의 의무가 발동돼 미군과 군사분쟁에 들 수있는 상황을 최대한 회피했다. 김일성은 소련 군사고문단이 만든 “선제타격작전계획”에 따르지만 개전시기를 소련 군사고문단이 주장한 7월서 6월로 앞당긴다. 개전계획도 옹진반도의 진격에 의한 단계적 확전에서 비밀누설 위험 때문에 전 전선 공세계획으로 바꾼다. 중국은 10월2일 한국군이 38선을 돌파한 직후 스탈린과 김일성의 간곡한 파병요청을 받으면서 참전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대다수 정치국원의 반대와 소련 공군력 지원이 불분명해지자 그 결정을 스탈린에 알리지 않고 저우언라이를 협상사절로 모스크바에 파견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이 파병을 재차 거부함을 알리면서 동북지역으로 조속히 퇴각할 것을 지시한다. 10월8일 미군이 북진하고 유엔이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설립을 결정하자 마오쩌둥은 서둘러 파병명령을 내리지만 10월19일 평양이 유엔군에 장악될 때 중국인민지원군은 한·만 국경을 넘는다. 그리고 중국군은 사실상 한국과 유엔의 한반도 통일노력을 저지시켰다. 6·25전쟁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산블록의 세력확장 기도에 적절한 억제책을 적용했다면 예방할 수 있었다. 6·25는 억제의 실패가 아니라 억제의 부재 때문에 발발했다. 휴전이후 한·미동맹과 주한 미군의 역할, 남북한 군사력 균형 및 중국, 소련과의 관계를 계속 점검해야 하는 이유가 억제의 취약점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또 억제를 넘어 한반도에 안정된 평화체제를 만드는 일, 평화통일은 한국전쟁이 남긴 중요한 교훈임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 전작권 2015년 12월 환수

    전작권 2015년 12월 환수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이 오는 20 15년 12월1일 우리 군에 넘어온다. 당초 계획(2012년 4월17일) 보다 3년7개월여 늦춰진 것이다. 전작권은 현재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이 갖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캐나다 토론토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이같이 합의했다고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개막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오는 11월 방한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추가 협의가 마무리되면 내년 초쯤 미 의회에 비준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2007년 6월 협상타결 이후 3년이 지나도록 양국 의회의 비준이 안 돼 발효되지 못하고 있는 한·미 FTA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전작권 이양과 관련, “현재의 안보환경과 양국의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2015년 말까지 이양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서 오바마 대통령이 수락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우리 군의 준비상황 등을 감안해 2012년 4월17일이었던 전작권 전환 시점을 2015년 12월1일로 늦출 것을 공식 요청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반도에 있어서 전작권을 2015년 후반에 전환하는 합의를 했으며, 이것은 한반도뿐 아니라 기존의 안보상황에서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 정상은 새로운 전환시점에 맞춰 실무작업을 진행하도록 양국 국방장관에게 지시했다. 7월 한·미 외교·국방장관(2+2) 회담과 10월 한·미연례안보회의(SCM)에서 후속대책이 마련된다. 전작권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2월 우리 군에 2012년 4월17일 이양하기로 한·미 양국 간 합의했던 것을 다시 연기한 것이다. 평시 작전통제권은 1994년 이미 우리 군으로 넘어왔다. 야권과 일부 시민단체 등은 전작권은 군사주권과 관련된 문제라며 예정대로 이양돼야 한다고 반발하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김성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전작권 전환 연기는 굳건한 한·미동맹 덕분에 가능했으며, 군사주권을 포기했다는 일각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수석은 전작권 전환이 또 연기될 가능성에 대해서도 “일단 이것이 최종적(final)인 것이며, 다음 정부에서 할 일이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연기가 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미 FTA와 관련, “미국을 떠나오기 전 미 무역대표부(USTR)에 한·미 FTA에 대한 실무협의를 지시했다.”면서 “오는 11월 방한할 때 실무작업이 마무리되면 수개월 내에 의회인준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미 FTA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자리 창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27일(현지시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한·중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 대통령은 회담에서 유엔 안보리 차원의 대북 제재 조치에 대해 중국이 적극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토론토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용어 클릭] ●전작권 전시작전통제권(Wartime Operational Control)은 전쟁이 발생했을 때 작전계획이나 작전명령 상에 명시된 특정 임무 또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지휘관에게 위임된 권한을 말한다. 한반도 유사시 한국군과 미군 증원군의 작전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일반적으로 자국 군대의 전시 및 평시 작전권은 각 국가가 갖지만, 한국의 경우 6·25전쟁 이후 유엔군사령부를 거쳐 한미연합사령부(ROK-US CFC)에 전작권이 이양됐다. 평상시에는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행사하지만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면 방어준비태세인 ‘데프콘3’(Defense Readiness Condition 3)가 발령되고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이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게 된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한미 전작권 전환 연기] 한국의 득과 실

    [한미 전작권 전환 연기] 한국의 득과 실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시기의 연기는 군과 한반도에 적잖은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2012년 4월17일 전작권 전환에 맞춰 대내외적인 준비들이 이뤄져 왔기 때문이다. 최근 천안함 사태로 더욱 경직된 남북관계는 전작권 전환 연기로 갈등의 골이 깊어질 전망이다. 군사적으로 북한을 가장 위협하고 있는 존재가 미국인 점을 감안할 때 전작권 연기가 한·미 군사적 동맹의 강화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전작권 연기의 결정적 명분과 배경이 천안함 사건과 북한 2차 핵실험에 있다는 점에서 북한 입장에선 상당히 불만스러울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북한은 과거부터 주한미군 문제에 있어 민감한 입장을 보였던 점 등을 감안하면 전작권 연기는 향후 남북관계에 부정적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우리 군에도 적잖은 변화가 예상된다. 전작권 전환 시기가 늦춰지면서 전작권 수행을 위한 능력보다 천안함 사태로 북한의 침투 및 국지도발에 대비한 전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예산 등의 조정이 뒤따를 전망이다. 또 이 과정에 전작권 행사에 필요한 핵심 능력 확보도 병행된다. 독자적인 정보획득 능력이나 전술지휘 통신체계, 정밀타격능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이와 함께 올해까지 전작권 전환 준비상태를 평가하기 위한 기본운용능력(IOC)을 점검한 뒤 내년 봄과 가을에는 완전운용능력(FOC)을 검증하고 2012년 4월 이전에 최종검증하려던 계획도 연기된다. IOC 점검은 이뤄지더라도 FOC는 2014년으로 미뤄진다. 전작권 전환 연기가 결정됨에 따라 국방부도 후속작업에 나선다. 국방부는 일단 오는 7월 개최될 한·미 양국의 국방 외교 장관 회의의 ‘2+2 장관급 회담’에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국방부는 후속논의에 대해 투트랙으로 준비할 것으로 전해졌다. 먼저 전작권 전환이 한시적으로 연기된 점으로 인해 기존에 준비해온 일정은 그대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특히 전작권 전환 준비를 하며 해마다 하던 한·미 간의 공동 이행평가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보완하기로 했다. 전작권 전환 시기의 연기로 우리는 일단 한·미 동맹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미국을 배경으로 한반도 안전을 보장받은 셈이다. 또 전작권 환수 준비과정에서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됨에 따라 내실 있는 준비를 할 수 있게 됐다. 최종철 국방대학교 교수는 “현실적으로 전작권 환수에 한계가 있었던 게 사실이기 때문에 군 전략 정보 구축 등 국방 개혁이 완성되는 시점에 전작권 환수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전작권 연기 결정은 우리에게 득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양국 국방부 장관 간 합의로도 충분했을 내용을 정상 간 합의로 확대한 점은 우리가 미국에 내줘야 할 것이 많음을 시사한다. 김태영 국방장관도 앞서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초청 강연에서 “없었던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상당히 많은 것을 내놓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면서 전작권 전환 시기의 조정에 대가가 따를 것임을 시사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미군을 위해 방위비를 추가 분담하거나 주한미군의 평택기지 이전에 관련한 비용의 추가 부담이다. 또 그동안 아프간 파병 활동에 제한적이던 우리 군은 미국의 피로도를 해결하기 위해 파병을 확대해야 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오이석·김정은기자 hot@seoul.co.kr
  • 한·미 ‘전작권 유예’ 공식 논의

    한·미 ‘전작권 유예’ 공식 논의

    이명박 대통령이 캐나다·파나마·멕시코 등 북중미 3개국을 방문하기 위해 26일 오전 출국한다. ●SICA 회원국 연쇄 정상회담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26~27일(현지시간) 열리는 제4차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한다. 26일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와 잇따라 정상회담을 갖는다.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유예 문제를 공식 논의할 것으로 알려져 결과가 주목된다. 대북 제재 문제와 한·미 안보동맹 강화 방안, 북핵문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문제 등도 협의한다. 28~30일로 예정된 파나마 방문에서는 리카르도 마르티넬리 파나마 대통령과 정상회담(28일)을 갖고 통상·자원개발·인프라 등 분야에서 협력방안을 논의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이 대통령은 또 중미 8개국의 사회·경제 통합 조정기구인 중미통합체제(SICA) 회원국 정상들과 연쇄 양자회담도 갖는다. 이 대통령은 이어 다음달 1일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멕시코 FTA 협상 재개 문제 등을 협의한다. ●MB “北, 천안함 도발 사과해야” 한편 이 대통령은 25일 6·25전쟁 발발 60년을 맞아 “북한은 더 이상의 무모한 군사도발을 중지하고 7000만 민족이 다 함께 사는 길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6·25전쟁 60주년 행사’에서 이같이 말하고 “이를 통해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회복하고 한민족의 공동번영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평화적 통일”이라면서 “북한은 천안함 도발 사태에 관해 분명하고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 사과하고 국제사회 앞에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대통령은 “우리가 그동안 번영과 평화를 누리면서 전쟁을 잊은 것 아니냐.”면서 “이런 시련을 겪은 것은 평화를 지킬 우리의 힘과 의지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십자군전쟁-9·11테러 문명의 충돌이라고? 역사를 모르고 하는 소리!

    11세기 십자군 전쟁과 2001년 9·11테러의 공통점은 뭘까. 둘 다 복잡한 사정이야 나름대로 있지만, 어쨌든 이들 모두 ‘문명 간 충돌’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점이다. 거기다 16세기 레판토 해전이나 이라크 전쟁까지 얼추 더하고 보면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충돌은 ‘필연적 역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간 ‘십자가 초승달 동맹: 우리가 알지 못했던 기독교-이슬람 연합 전쟁사’(최파일 옮김, 미지북스 펴냄)를 펴낸 이언 아몬드 미국 조지아주립대 교수는 “그런 생각은 서구중심주의에서 나온 허구”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 반례로 지난 800년 동안 유럽에서 존재했던 기독교-이슬람 간의 협력과 군사 동맹의 역사를 제시한다. 아몬드 교수가 신간을 통해 내놓은 예를 보면 놀랍다. 십자군 전쟁으로 두 문명이 첨예하게 대립했을 것만 같은 11세기에도 “토마스 옆에 압둘라가, 드미트리 옆에 알리가” 아무렇지 않게 머물렀다. 당시 유럽에서는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 생활을 했다는 말이다. 예컨데 11세기 에스파냐를 두고 저자는 ‘다문화-민족의 용광로’라고 표현할 정도다. 무슬림 칼리프 체제가 붕괴된 이 시기 아랍인들은 20여개 군소 국가로 쪼개져 살았다. 이때 에스파냐를 점령해 가던 알폰소 6세는 무슬림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쳤고, 이슬람 군소 국가 통치자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는 그의 깃발 아래 기독교인 병사와 무슬림 병사가 호흡을 맞추는 건 예사로운 일이었다고 한다. 14세기 비잔티움과 투르크, 16세기 헝가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잔티움 말기 주변 국가 통치자들은 영토 수호를 위해 이슬람과 거래를 했다. 또 16세기 헝가리 지배층은 합스부르크 제국 통치에 반감을 가지고 스스로 무슬림 통치를 자원하기도 했다. 아몬드 교수는 이런 동맹들이 단지 적을 막기 위해 서로를 의심하면서 맺은 일시적 동맹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동맹은 기본적으로 현실 정치와 이해관계가 얽히지만, 때로는 지도자들 간의 우정이나 인간애를 바탕으로 삼기도 했다. 또 오랫동안 형성된 역사적 일체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유럽이 기독교만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슬람 역시 유럽의 일부였으며 수많은 아랍인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다고 아몬드 교수는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생각하는 ‘문명화된 기독교 유럽’은 단지 환상일 뿐이며, 이제는 그런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나 유럽을 바라볼 것을 독자들에게 요구한다. 1만 6000원.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워싱턴서도 기념식… 한·미동맹 강조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미국 수도 워싱턴은 한국전쟁 추모에 잠겼다. 미 국방부와 의회는 24일 오전 펜타곤 청사와 의회에서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기념식을 갖고 한국전 참전의 의미를 되새겼다. 미 행정부 공식 행사인 국방부 기념식에는 조지프 웨스트팔 육군성 차관과 한덕수 주미대사, 찰스 랭글 하원의원과 참전용사 등이 참석했다. 웨스트팔 차관은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용기를 바탕으로 6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아시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며 세계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면서 “한국은 미국의 중요한 동맹이고 소중한 파트너이자 친구”라고 한·미동맹을 강조했다. 연달아 미 의회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상·하원 지도부가 총출동, 성대하게 치러졌다. 의사당내 유서 깊은 장소인 스테튜어리 홀에서 거행된 행사에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비롯, 하원의 스테니 호이어(민주), 존 베이너(공화) 원내대표와 상원의 해리 리드(민주), 미치 매코넬(공화) 원내대표가 모두 참석했다. 미 의회의 지도부가 한국 관련 행사에 참석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더구나 하원 의장과 상·하원 양당 원내대표 5명이 자리를 함께하는 것은 다른 행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사설] 전작권 전환 연기 당당히 공개 논의할 때다

    내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전시 작전통제권 문제를 의제로 채택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나 김성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이 그제 국회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밝혔고, 백악관 고위 관계자도 확인했다. 최종 성사될지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런 사실이 공개된 자체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물밑에서 논의돼 온 전작권 연기론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이제는 논의 자체를 쉬쉬할 게 아니라 당당히 공개 무대에 올려 해법을 찾을 때다. 전작권 문제는 노무현 정부 때 자주 국방, 군사주권을 확보한다는 명분 아래 추진됐다. 현실적인 반대론도 있었지만 노무현 정부는 ‘국방개혁 2020’을 앞세워 정면돌파했다. 그들은 굳건한 한·미 군사동맹이 뒷받침되면 한국군이 전작권을 주도해도 안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고, 적지 않은 국민들의 공감도 얻어냈다. 하지만 2차 핵실험, 천안함 사태 등 호전성과 도발을 거두지 않는 북한을 보면서, 안보 현실을 냉정히 되짚어 봐야 할 시점에 왔다. 미국은 2차 북 핵실험 이후 연기 필요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유 장관이 밝혔다. 그렇다면 천안함 사태는 우리도 연기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 참사다. 천안함 침몰로 국방개혁 2020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의 국방력이 높아졌다고는 하나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작전권을 행사하는 한·미 군사동맹과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 군사동맹이 같을 수가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빈틈을 메우려면 첨단 군사 장비를 더 보강해야 하고, 엄청난 예산을 들여야 한다는 점도 직시해야 한다. 안보 상황의 변화는 2012년 4월17일로 합의된 전작권 전환의 연기를 진지하게 고민하라는 주문을 안겨줬다. 한·미 양국이 그동안 조심스럽게 접근해 온 것은 민감한 사안인 만큼 수긍이 간다. 하지만 한·미 정상이 논의하는 방안까지 공개된 이상 피할 이유가 없어졌다. 내일 회담을 계기로 떳떳하게 공론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자칫하다간 밀실 추진과 밀실 합의 등 불필요한 논란만 산다.
  • [實錄, 한국전쟁] 이승만 휴전반대·북진통일 주장… 美 친위쿠데타 검토

    [實錄, 한국전쟁] 이승만 휴전반대·북진통일 주장… 美 친위쿠데타 검토

    한국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남한정부는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떻게 평가받을까. 북진통일을 외친 이승만은 한국전쟁 발발을 논하는 장에서 반짝 등장하지만, 한국전쟁 과정에서는 언급이 미미하다. 존재감이 없다. 러시아나 중국, 심지어 미국 자료들도 한국전쟁의 주역으로 이승만을 취급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하고 있던 남한 정부와 이승만은 단지 전쟁을 획책한 북한 김일성과의 비교 대상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러나 휴전협정 국면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이승만의 극렬한 휴전반대가 주요 변수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평양과 모스크바, 베이징 그리고 서울과 워싱턴 사이에 오간 각종 자료를 분석해 보면 ‘이승만’이라는 이름 석 자의 등장 빈도가 갑자기 높아졌다. 특히 1953년 6월18일 반공포로 2만 7000명의 전격적인 석방이 준 충격파는 컸다. 휴전협정 당사자인 미국과 중국은 물론 평양이 발칵 뒤집혔다. 영국의 처칠 총리는 아침에 면도하다 이 소식을 보고받고 얼굴을 벨 정도였다. ●‘미국의 남자’ 이승만 美와 애증 미국은 진퇴양난이었다. 미국 국내의 들끓는 휴전여론과 달리 중국과의 휴전협상은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한국정부와의 관계는 이승만의 휴전반대로 말미암아 담벼락 위를 걷는 아찔한 상태였다.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간행한 ‘한국전쟁’에 따르면 “예측할 수 없고, 변덕스러운 이승만 정부의 자세와 행동이 특별히 어려웠다. 이러한 것들은 회담에 역기능적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협상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이 대통령의 조치는 유엔군사령부의 군사적 입장을 위태롭게 하기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승만은 어떤 종류의 휴전협정도 반대했다.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오로지 남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원했다. 그는 ‘중국군의 완전한 철수, 북한 공산당 해체, 인민군 무장해제’ 등을 협상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승만은 1951년 7월 “유엔군이 한국의 분할에 동의하지 않는 것을 보장해 달라.”라는 서한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냈다. 트루먼은 이 대통령을 비난하면서도 협조를 요청하는 답신을 보냈다. 요구 사항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 합참보고서는 1952년 초 뉴욕 출신의 저명한 천주교 인사인 스펠만이 한국을 방문, 무초 미 대사와 벤플리트 8군 사령관이 함께한 자리에서 이승만이 “미국의 모든 천주교인이 한국에 휴전이 없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정보를 싣기도 했다. 미국입장에서는 수용 불가능한 무리한 요구였다. 미국이 한국의 지도자로 선택한 ‘가장 미국적인 한국인’인 이승만은 그를 키워준 미국을 거역하고 있었다. 소련이 김일성을 북한지도자로 지목한 것처럼 이승만도 미국에 의해 선택되고 키워졌다. 이 시기 이승만을 묘사한 미국 측 자료는 온통 노회, 변덕, 아집, 독선 같은 단어로 도배돼 있었다. 전쟁발발 이전 이승만을 접촉한 한국주둔군 사령관 하지는 “솔직하지 않고, 정서적으로 불안하며, 야비하고, 부패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악평했다. 이승만을 바라보는 미국의 우려가 오래됐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승만은 ‘미국의 남자’였다. 1905년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선발돼 백악관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을 방문해 인연을 맺었다. 미국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중단할 수 있게 도와주길 바랐지만, 그때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으려고 작업 중이었다. 서로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재량권을 인정하는 조약이었다. 이승만은 하버드대학에서 수학하고 나서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훗날 대통령이 된 윌슨의 제자가 됐다. 윌슨은 이승만을 ‘미래 한국의 독립을 위한 구세주’라고 부추겼다. 이승만은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미 국무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지 못했다. 이승만과 미국은 애증의 관계였다. 미국 지도부는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기독교인인 이승만이 미국식 종교와 정치 기조를 따를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마음속에는 미국에 대한 배신과 위선, 불신의 불씨가 자라고 있었다. ●이승만 ‘북진통일’ 정치적 구호 이승만의 또 다른 트레이드 마크인 ‘북진통일’은 남한주민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와 호응을 받았지만 득보다 실이 컸다. 김일성의 남한공격 본능을 자극하는 구실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스탈린으로부터 원조받은 무기와 군수물자로 완전무장한 북한 인민군과 비교하면 남한의 군사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전쟁발발 당시 한국군은 자신을 지키기에도 역부족인 상태였다. 전쟁 열흘 전인 1950년 6월15일 미 국방부에 보고된 군사고문단 보고서에는 ‘한국군은 가까스로 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장비와 무기 대부분은 쓸모가 없었고, 방어능력도 기껏 보름 정도’라고 기술돼 있다. 실제 인민군이 보유한 소련제 T34전차의 위력 앞에 한국군은 맥없이 무너졌다. 구형 바주카포는 무용지물이었다. 치밀하게 계산하고 준비한 김일성의 남침에 비해 이승만의 북진통일은 정치적 구호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은 이승만의 의도와는 달리 종결을 향해 달려갔다. 미국 공화당이 1952년 7월 아이젠하워를 대통령후보자로 지명하면서 대세는 군사적 종결이 아닌 정치적 종결, 즉 휴전 쪽으로 기울었다. 대통령 후보자 아이젠하워는 같은 해 10월 디트로이트 연설에서 “명성을 걸고 한국전쟁을 조기에 명예롭게 종결짓겠다.”고 천명했다. 그는 “새로운 행정부의 정책은 한국전쟁을 끝내는 일에 집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그는 12월2일 극비 한국방문길에 올랐다. 미 행정부 수뇌부는 남한의 정치적 위기는 전적으로 이승만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고 여겼다. 이 같은 위기가 휴전협상뿐만 아니라 38도 상에 진행되고 있는 군사작전마저도 위협한다고 보았다. 실제 이승만은 1952년 국회 간선을 통한 재선이 어렵게 보이자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이른바 ‘발췌개헌’을 꾀했다. 임시수도인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파를 제거했다. 한국군 전투부대를 철수시켜 계엄군으로 사용하려 했다.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나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개인의 군대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이승만은 막무가내였다. 전쟁을 끝내고 싶은 미국에 이승만은 골칫거리였다. 1953년 미국과 중국의 협상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지만, 미국과 이승만 정부와의 사이는 또 다른 고비를 향해 뒤틀려 갔다. 이승만은 4월5일 “판문점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관계없이 우리의 목표는 똑같다. 우리의 변함없는 목표는 한국을 남으로부터 압록강까지 통일시키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유엔군사령부가 중국군이 압록강 이남에 잔류하는 것을 허용하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는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에서 철수시킬 것이며 단독으로 싸울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 통첩장을 보냈다. ●아이젠하워 한때 李 제거 계획 워싱턴은 이승만을 휴전협상의 훼방꾼이자 위협세력으로 간주했다. 특유의 허세라고 판단하면서도 극단적인 조치로까지 몰고 갈 것으로 예측했다. 달래기에 나섰지만 이승만은 클라크 사령관과의 회담에서 “당신들은 모든 유엔군, 모든 경제원조를 철수시킬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우리를 도울 것이라고 의존한 것이 우리의 실수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협력하겠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면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승만은 6월6일 ‘선(先) 한미방어조약 체결, 후(後) 유엔군과 공산군의 상호철군’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우리는 반쪽 휴전이나 평화보다는 싸움을 택한다.”라는 예의 벼랑 끝 외교전을 펼쳤다. 클라크 사령관은 “이 대통령은 송환 불원 한국인 포로를 경고 없이 석방할 수 있다.”는 예언에 가까운 메시지를 워싱턴에 보냈다. 포로경비부대 대부분이 한국군으로 구성됐기 때문에 유엔군은 이를 막을 수단이 없었다. 클라크 사령관의 예언대로 이승만이 반공포로를 석방하자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제거를 검토했다. 미국 수뇌부는 당시 한국에 임시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극비의 군사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 다음날인 6월19일 자 미국 국가안보회의 비망록에 따르면 아이젠하워는 “위험을 없애는 가장 빠르고 유일한 길은 쿠데타”라면서 “이는 확실히 고려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군사자문 기구인 합참은 1952년부터 쿠데타 계획을 세워 놓았다. 합참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6월27일 벤플리트 장군에게 이 계획을 통보했다. 한국육군과 참모총장은 유엔군사령부에 충성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비밀해제된 미국 합참보고서에 따르면 “이 대통령을 어떤 구실을 붙여 서울로 초대한다. 유엔군사령부가 부산으로 이동하여 주요 지지자들을 체포하고, 주요시설을 방호하며 한국육참총장을 통하여 기존 계엄령을 장악한다. 이 대통령에게 계엄령을 종결토록 요구한다. 만일 거부하면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한 채 연금하고, 요망되는 포고령은 협조적인 것으로 예상하는 국무총리가 발표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李 재선 이후 美와 화해모드 다행히 워싱턴의 친위 쿠데타계획은 불발됐다. 현실론을 내세운 참모들의 설득으로 강력한 경고수준에서 그쳤다. 한국 국회도 대통령 직선제 헌법개정을 승인했다. 계엄령은 해제됐고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하면서 화해모드로 전환됐다. 미국은 손을 들었다. 미국은 휴전동의를 얻고, 이승만은 그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보호우산을 제공받는 선에서 양국의 갈등은 마무리됐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의 통일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계속 추구한다. 휴전협정 수락 직후에 상호방위조약을 협상한다. 전후 경제원조를 계속한다.”라는 세 가지 조치를 약속했다. 이승만은 극단적인 휴전반대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를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이끌어냈다. 허물도 컸지만,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한 주춧돌을 놓았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한국전쟁의 산물인 한·미동맹은 단순한 양자동맹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안전판 역할을 하는 지역동맹”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를 저지하고, 중국을 봉쇄하면서, 일본을 견제하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동맹이라는 것이다. 노주석 논설위원·윤샘이나기자 joo@seoul.co.kr
  • “26일 한·미 정상회담서 ‘전작권 논의’ 협의”

    “26일 한·미 정상회담서 ‘전작권 논의’ 협의”

    김성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24일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 출석, “이번 한·미 정상회담때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이양문제가 논의될 수 있느냐.”는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의 질문에 대해 “의제가 합의는 안됐지만, 현재 (미국과) 계속 협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수석은 “외교적으로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말하는 건 적절치 않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 대통령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리는 제4차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기간 중인 26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한·미 안보동맹 강화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한다. 이동관 홍보수석도 전작권 문제와 관련, “(회담에서) 의제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이날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연기 논의의 시작 시점과 관련해 “상황의 변화에 대한 인식이 시작된 것은 미국 오바마 정부가 출범한 이후 북한의 제2차 핵실험이라고 생각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유 장관은 오후 내·외신 정례브리핑에서 “전략적 전환체제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한반도 주변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고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 달라.”며 이같이 말했다. 유지혜·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오늘 한국전쟁 60주년] 美 행정부·의회 한국전쟁 60주년 행사

    미국 행정부와 의회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24일(현지시간) 기념행사를 갖고 한국전쟁의 의미를 기리고 한·미동맹 강화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미 국방부는 이날 오전 9시30분부터 2시간 동안 펜타곤 내부 광장에서 한국전쟁 6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상·하원 의원들과 참전용사, 미 국방부 및 정부 인사 등이 참석한 이 행사는 미 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첫 한국전 기념행사다.  국방부 관계자는 “미 행정부가 한국전 60주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며 “지금까지는 정부 차원의 한국전 기념행사가 없었지만 60주년이기 때문에 특별히 청사에서 공식행사를 진행한다.”고 말했다.  미 의회도 상·하원 합동으로 이날 오전 11시부터 한국전쟁 6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환영인사를 하고, 상원 민주당 대표 해리 리드, 공화당 원내 대표 미치 매코넬 의원,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 스테니 호이어, 공화당 원내대표 존 베이너 등 상·하원 지도부가 모두 참석해 환영연설을 했다. 찰스 랭글, 하워드 코블, 존 콘이어 하원의원, 알렌 스텍터 상원의원 등 한국전쟁 참전 의원들이 참석했다. 이어 한국전쟁 발발일인 25일에는 주미한국대사관 주최로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기념공원에서 미 정부 관계자와 미군 전쟁포로 송환자, 참전용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헌화식을 가질 예정이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천안함, 60년전 보는 듯…한국 지켜낸 건 트루먼

    [한국전쟁 60주년] 천안함, 60년전 보는 듯…한국 지켜낸 건 트루먼

    한국전쟁 하면 떠오르는 미국 대통령이 있다. 참전 결정을 내렸고, 3년 뒤 휴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의 운명을 바꿔놓은 제33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다.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 있는 트루먼대통령도서관의 마이클 드바인(65) 관장과 22일(현지시간) 전화 인터뷰를 갖고 한국전쟁 60주년의 의미와 한·미동맹의 미래 등에 대해 들어봤다.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특별행사들을 많이 준비했는데 트루먼 대통령과 한국전쟁과의 관계는. -한국전쟁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집권 중 가장 어려운 결정 중 하나였다. 유엔 깃발 아래 미군을 처음으로 해외에 파병한 힘든 결정이었다. 전쟁 와중에 인기가 높았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불러들여 전역시킨 것은 어려운 결단이었다. 늘어나는 사망자와 전쟁포로들로 인해 1952년 트루먼 대통령의 지지율은 20% 중반까지 떨어졌고, 이 낮은 지지율은 2008년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20% 초반을 기록할 때까지 50년 넘게 깨지지 않았다. 이처럼 트루먼 대통령에게 중요한 사건이었던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되돌아보는 것은 당연하다. 트루먼대통령도서관은 미국에 있는 13개 대통령도서관 중 하나로 문서 약 1500만쪽과 2만 5000점의 각종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60년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과 바뀌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한반도는 긴장이 여전히 높고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이다. 하지만 1953년 휴전 이후 거의 60년간 남북한간에 전쟁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최근의 천안함 사건은 60년 전 북한의 도발적 행위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휴전협정에 아무도 만족하지 않는다. 3차전쟁을 막은 것과 함께 한국을 자유롭게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남아 있도록 한 것이야말로 트루먼 대통령의 업적이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국들은 군사·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한국도 무력을 통한 통일은 원치 않는다. 주요 국가들은 지역 안정을 해쳐 가면서까지 통일을 추진하길 원치 않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남북한이 스스로 평화적으로 통일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북한 정권의 변화 가능성은. -현 김정일 체제에서는 가능성이 낮다. 북한 지도부는 개방 후 중국의 부와 파워를 부러워하지만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많다. →트루먼은 남북한이 60년씩 분단상태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을까. -아니다. 수년 내에 협상을 통해 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동·서독의 분단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이임연설에서 소련의 독재체제가 내부적으로 붕괴에 이를 것으로 정확히 내다봤다. →추가로 밝혀져야 할 비사가 있다면. -한국전쟁과 관련된 거의 모든 자료들이 공개됐다. 남아 있다면 미국과 중국간에 주고받은 북한과 관련된 외교 서신 정도인데, 이 부분이 공개된다면 한국전쟁과 관련해 보다 자세한 내용이 드러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한국민들의 무관심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했는데. -한국 국민들이 트루먼 대통령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것이 아쉽다. 1970년 평화봉사단원으로 인천에 갔었다. 큼지막한 맥아더 장군 동상은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트루먼 대통령의 자취는 없었다. 맥아더 사령관을 트루먼 대통령이 해임한 데 대해 한국인들의 반감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았다.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해 남북 통일이 안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통일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로 말이다. 한국은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나 평화봉사단원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데 정작 트루먼 대통령에게는 인색한 것 같다. 역사학자로서 한국을 위해 트루먼 대통령보다 더 많이 기여한 개인은 없다고 본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개항 이후 조선전쟁의 연장” “마오·스탈린은 휴전 꺼렸다”

    [한국전쟁 60주년] “개항 이후 조선전쟁의 연장” “마오·스탈린은 휴전 꺼렸다”

    한국전쟁 60주년의 의미를 짚어보는 국제학술대회가 23일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주최로 이 대학 연세·삼성학술정보관에서 열렸다. 무엇보다 박명림(연세대), 와다 하루키(일본 도쿄대), 브루스 커밍스(미국 시카고대), 션즈화(중국 화동사범대), 안드레이 란코프(국민대) 등 한국전쟁 연구 권위자들이 참가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한·일·미·중·러 5개국 입장에서 한국전의 의미를 되짚었다. 첫 발제자 하루키 교수는 한국전쟁을 개항 이후 오래된 ‘조선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청일전쟁 같은 것도 조선전쟁의 하나라는 것이다. 하루키 교수는 “개항 이후 발발한 전쟁은 그 목적이 조선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전쟁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면 피해자인 조선의 입장도 명확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션 교수는 중국의 참전 결정은 합리적이었으나 1951년 UN의 휴전 제안을 거부한 것은 오류라고 주장했다. 미군을 나약한 군대로 잘못 판단, 휴전을 거부하면서 불필요한 희생만 늘었다는 것이다. 러시아 출신 란코프 교수는 이에 대해 스탈린의 국제전략 문제를 지적했다. 미국이 마셜플랜으로 유럽을 장악하자 미국을 동아시아에 붙잡아두기 위해 한국전쟁을 승인했고, 개전 뒤에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 휴전협상 진전 방해해 중국의 국력 소모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한국전쟁의 역설적인 측면에 주목했다. 그는 “단기적으로는 북한에 이로웠지만 장기적으로 남한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개항 이래 한국문제는 계속 불안정했으나 한국전쟁 이후 한·미동맹의 틀에 편입되면서 어쨌거나 안정화됐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에 대한 지나친 종속이라는 문제점도 낳았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의 가장 큰 문제로 북한을 소련이나 중국의 꼭두각시로만 여기는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오해를 꼽았다. 자신의 수정주의는 미국정부의 오판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었다는 얘기다. 지금도 똑같다. 커밍스 교수는 “일본 오키나와 주둔 미군은 유사시 북한에서 핵물질을 찾아 처리하는 훈련을 한다.”면서 “이런 정신나간 짓을 하는 이유는 꼭두각시 북한은 곧 붕괴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국민 안보의식 높아졌다

    국민 안보의식 높아졌다

    지난 한 해 동안 북한에 대한 경계 및 안보 우려의식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성인 10명 가운데 6명은 북한을 경계하고 적대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행정안전부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지난 12~15일 19세 이상 성인남녀와 청소년 각 1000명을 대상으로 국민안보의식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609(60.9%)명의 성인이 북한을 경계·적대해야 할 대상이라고 응답했다. 지난해 같은 조사에서 389명이 이같이 답했던 것에 비해 22%포인트 오른 수치다. ‘선의의 경쟁과 협력의 대상’이라는 응답은 35.4%에 그쳤다. 천안함 피격사건과 관련, ‘북한이 공격했다.’고 답한 비율도 성인 75.4%, 청소년 75.1%로 조사됐다. 여론조사를 수행한 ‘리서치&리서치’ 관계자는 “3월 천안함 사태 등 북한의 위협이 현실화됨에 따라 국민 스스로 안보의식 수준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반면 미국에 대한 인식은 과거에 비해 우호적으로 변했다. 성인 88.6%, 청소년 79%는 우리 안보를 위해 한·미동맹이 중요하다고 응답했고, 주변국 가운데 안보를 위해 가장 협력해야 할 나라로 미국을 꼽은 비율도 성인 63.6%, 청소년 60.3%에 달했다. 특히 청소년은 2008년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346명만이 미국을 선택했던 것에 비해 25.7%포인트나 올랐다. 또 올해 조사에서 최초로 국민 안보의식을 지수화한 결과 100점 만점에 성인 60.23점, 청소년 49.16점으로 나타나 청소년의 안보의식이 성인에 비해 부족한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안보교육이 필요한지 묻는 항목에는 성인과 청소년 모두 90% 가까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행안부는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온라인 이벤트 등을 통한 안보체험·참여기회를 확대하고, 국민들이 비상시 안전행동요령을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교육 및 홍보활동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남상헌기자 kize@seoul.co.kr
  • 60년 지나도 여전한 ‘끝이 없는 전쟁’

    60년 지나도 여전한 ‘끝이 없는 전쟁’

    한국전쟁의 그림자는 여전히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중국과 일본도 수시로 한국전쟁의 여파에 휩싸이며, 미국과 유엔 동맹국들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한국을 침공한 지 60년이 지났지만 한국전쟁은 관련국들에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 전쟁은 1948년 제주와 여수·순천반란에서부터 시작됐다. 반란의 뿌리는 1919년 3월 일본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대규모 만세운동에 있다. 3·1만세운동이 실패하면서 일부는 중국으로 피해 국민당과 공산당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다른 이들은 한국 내에서 은신처를 찾아 숨었고, 일군의 무리는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또 다른 이들은 소련에 의탁했다. 독립된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던 이들은 1945년 광복을 맞자 중국과 일본, 미국에서 물밀듯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한국인들에게는 희생의 경험이 주를 이룬다. 1945~1948년 미국과 소련 군정의 유일한 목적은 한국에서 일본과 이들의 잔재를 몰아내는 데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한(對韓) 정책의 지향점은 같았지만 달성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도 달랐다. 소련은 1904~1905년 러·일전쟁 참패에 대한 인적·물적 배상을 북한에 물어 2차대전의 피해를 충당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 잔존 인물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경제·사회적 개혁을 순탄하게 진행시키길 바랐다. 이처럼 한반도에 들어서는 과도정부는 다양한 목적에 부합돼야 했고, 결국 서로 다른 후원국들에 의해 남북한에 들어선 정부가 서로의 적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모두 흡수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미국과 소련간의 차이점은 미국은(물론 나름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을 위해 싸울 준비가 돼 있었지만, 소련은 직접 관여하기보다 북한과 중국을 앞세워 싸웠다. 한국전쟁이 국제적인 분쟁으로 확대된 1950~1953년은 남북한 상호간에 뿌리깊은 증오를 낳았고, 이같은 적개심을 오늘날 한국의 젊은 세대들과 세계는 이해하지 못한다. 남북한간 증오는 전선을 넘어 광범위하게 자행된 잔혹성에 근거한다. 한국전쟁은 유럽의 30년전쟁(1618~1648) 당시 공포를 연상시킨다. 한국의 민간인 사망자는 한국군 전사자수를 능가했다. 기근과 질병, 유엔군의 무자비한 폭격, 남북한군에 의한 인질과 포로 학살로 최소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에 패배한 북한은 수많은 양민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해 학살했다. 수천명이 집단농장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됐다. 전쟁의 정당성과 김일성의 ‘신성’에 도전하는 사람은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됐다. 남한의 사정도 전혀 다를 바 없었다. 비무장지대에서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공산주의 게릴라들과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공산당 잔당에 대한 토벌작전으로 남한의 인구는 급격히 줄었다. 1950년대 한국의 상황은 잔혹했던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김일성은 1953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휴전할 생각이 없었다.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경제적 재건과 군사적 안보의 열쇠를 쥐고 있었기에 결국 김일성은 이들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았고, 휴전협정에 서명하길 거부했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과의 상호안보조약체결과 10억달러 원조, 한국군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한국·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이 한국을 방위한다는 약속을 얻어낸 뒤에야 휴전을 받아들였다. 한반도 통일이라는 전쟁 목적을 양보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수십억달러를 지불했고, 현재도 지불하고 있다. 3년간의 전쟁으로 남북한을 통틀어 민간인과 군인 2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군이 2차대전에서 입은 인명피해와 맞먹는다. 이 밖에 교전국 인명피해는 50만명에 이르며, 이중 90%가 중국인이다. 휴전협정은 순식간에 한국인들로 하여금 정복이 아닌 전복을 위한 전쟁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 미국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핵전쟁이나 재래식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억지한다는 데 암묵적 합의를 도출해 냈다. 그렇다면 남북한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우선 남북한은 계속해서 주변국들과 미국의 우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한국이 태평양의 주요 국가로 발전해 나가지 않는 한, 역사와 지정학적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의 미래는 다른 여타 포스트모던 시장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밝다. 반면 북한은 이미 실패한 국가이지만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독재체제는 3대를 넘기지 못한다. 다음에 닥쳐올 ‘제국’의 몰락을 국제사회는 준비 없이 맞아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한국인들이 그렇게 열망하는 새로운 통일된 국가를 전쟁 없이 세울 수 있도록 도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오바마, 이번주 한국전 60돌 성명낼듯

    오바마, 이번주 한국전 60돌 성명낼듯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올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이번 주중 한국전 6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20일(현지시간) 알려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캐나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26∼27일)를 계기로 열릴 이명박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한국전쟁과 한·미동맹에 대해 직접 언급할 것으로 전해졌다. 미 행정부 관계자는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한·미동맹의 의미를 되새기고 이를 더욱 공고히 하는 차원에서 대통령이 입장을 밝히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주 초 상·하원에서 각각 통과된 한국전쟁 60주년 결의안이 조정작업을 거쳐 ‘공동결의안’으로 채택돼 백악관으로 송부돼 오면 공식 서명할 방침이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 (1) ‘국제인권의 잣대’ 난민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 (1) ‘국제인권의 잣대’ 난민

    ‘다문화 사회’가 유행어처럼 번지지만 다문화인이 꿈꾸는 대한민국은 아득해 보인다. 한국인의 시각으로 다문화 사회를 설계하기 때문이다. 실천 없는 구호처럼 다문화 정책이 헛도는 이유다. 서울신문은 다문화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당신들과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싣는다. 1회는 ‘국제인권의 잣대’ 난민이다. 국제사회가 다문화 사회에 주목한 것은 전 세계가 난민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부터다. 우리나라도 한국 전쟁으로 유민 사태를 겪었다.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대중 전 대통령….’ 그들도 한때 난민이었다. 정치적, 사상적 차이로 박해를 당해 조국을 탈출해 낯선 땅으로 망명했다. 자유를 향해 떠나온 순례자를 낯선 땅은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일부는 ‘제2의 조국’에 공헌하며 여생을 보냈다.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우리나라에도, 희망을 품고 찾아온 난민들이 있다. 20일 유엔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을 맞아 ‘대한민국에서 난민으로 산다는 것’을 문답으로 정리했다. 난민 신청을 하거나 인정을 받은 마웅저(미얀마) 로넨(방글라데시) 빅토르(가명·나이지리아) 카카나(방글라데시) 코와인(미얀마) 쇼네(가명·토고) 등 6명이 인터뷰에 응했다. 일부는 안전상 이유로 가명을 요청했다. →조국을 왜 떠났나. 전사(戰士)가 아니라 시민(市民)으로 살고 싶었다. ‘인종 청소’를 하는 방글라데시 정부에 맞서 생존을 위해 피 흘리며 싸웠다. 약탈과 방화, 성폭행이 일상인 나라에서 한 살배기 아들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왜 한국을 선택했나. 민주주의를 이뤄낸 나라가 아닌가. 군부 독재를 시민이 무너뜨렸고,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8888 버마민중항쟁’과 비슷해 민주화 과정을 배우고 싶었다. 경제·사회적으로 발전한 국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라는 믿음도 있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김대중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라면 국제인권을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민이 됐나. 난민 지위를 인정받는 걸 우리는 “하늘의 별을 딴다.”고 부른다. 대한민국의 난민 인정률은 8.7%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유엔 난민협약 가입국 가운데 최하위다. 법무부에서 불인정 처분을 받고 행정소송을 냈다. 법원이 승소 판결했는데 법무부가 대법원까지 상소했다. 8년 만에 별을 땄다. →심사가 까다로운가. 무성의하고 무관심하다. 전문 통역인도 없고 난민 국가의 상황도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이주노동자의 불법 체류를 단속하는 법무부 직원들이 면담을 하니까 당연하다. 다른 나라는 외교부가 난민을 인정한다. 직원은 ‘한국에서 일하고 싶으면 그냥 일하다가 잡히면 되는 거지, 왜 난민 신청을 하느냐.’ 이렇게 묻는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박해받을 조국으로 내쫓기지 않으니 내 목숨을, 가족의 삶을 구한 거다. 그게 고맙다. 외국인 차별은 심각하다. 취업지원이나 쉼터 제공이 없어 힘들다. 아인슈타인도 대한민국으로 망명했다면 공장에서 일했을 것이다. 그래도 내 아이는 박해에서 벗어나 평화 속에서 자랄 수 있다. →무엇을 꿈꾸는가. 미얀마 군부 독재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싶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버마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를 만들었다. 작은 불교 사찰을 세워서 민주화 운동에 쓸 자금을 모으고, 국내 이주노동자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강제송환되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놓지 않을 것이다. 정은주·임주형기자 ejung@seoul.co.kr [용어 클릭] ●난민 인종, 종교, 국적, 극심한 빈곤, 정치적 의견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고, 그로 인해 조국을 떠난 사람들을 말한다. 1951년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1967년 ‘난민 지위에 관한 의정서’ 등 국제법으로 국제사회는 난민을 보호한다. 우리 정부는 1992년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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