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동독
    2026-06-27
    검색기록 지우기
  • 변동
    2026-06-27
    검색기록 지우기
  • 6월
    2026-06-27
    검색기록 지우기
  • 2026-06-27
    검색기록 지우기
  • 7월
    2026-06-2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019
  • [나와 통일] (24)셰벤 前 통독 방위사령관

    [나와 통일] (24)셰벤 前 통독 방위사령관

    남북한이 통일된다면 한반도의 군대는 어떻게 될까. 이는 남북한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주변 강대국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민감한 문제다. 21년 전 통일을 이룬 독일 역시 같은 고민에 빠졌었다.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되는 형태에서 동독 인민군은 서독연방군 ‘분데스베어’로 축소, 통합됐고 이 과정에서 정신적, 심리적 혼란을 겪었다. 이 과정을 지켜본 ‘분데스베어’의 베르너 폰 셰벤 예비역 중장은 11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동독 군인들이 갖고 있었던 사상은 통일과정에서 ‘제2의 피부’처럼 벗겨 없어졌다.”면서 “한국에서의 상황이 독일처럼 전개될 경우 북한이 굴욕감이나 공감대 부족을 느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통일부와 베를린 자유대의 ‘독일의 통일·통합정책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셰벤과 이메일을 통해 이뤄졌다. →동·서독 군대 통합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해 달라. -1990년 3월 18일 동독에서 민주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가 있었고, 7월 1일 동·서독의 경제·금융 통합을 위한 협의가 있었다. 군 통합까지는 동·서독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4개 신탁국가 간의 2+4 협상이 있었다. 이 협상에서 서독 46만명, 동독 17만명을 통합해 독일연방군 ‘분데스베어’의 병력을 총 37만명으로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동독의 인민군은 서독의 군복을 입고 ‘분데스베어’의 지휘를 받게 됐다. 계속 군 복무를 할 것인지, 제대를 할 것인지는 철저하게 개인의 결정에 맡겼다. 이 과정에서 특별한 계획이나 청사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과정은 개별적 사안으로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결정에 의해 이뤄졌다. 동독 인민군 해체 작업은 부대에 따라서 3개월에서 최대 2년까지 소요됐다. →1990년 10월 3일 ‘통일의 날’을 기억하나. -‘통일의 날’ 이틀 전인 10월 1일 동독이 바르샤바 조약에서 탈퇴했고, 2일에는 동독 인민군이 해체됐다. ‘통일의 날’에는 동독군의 모든 주둔지와 병영에 독일 연방공화국의 국기가 게양됐다. 독일 전국에서 통일을 자축하는 축제가 열렸지만, 동·서독 군 통합 행사가 열렸던 슈트라우스베르크의 거리에서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동독) 군인들의 가슴 속에는 자신과 가족의 미래에 대해 매우 심각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군 통합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가장 큰 걸림돌은 동독 군인들의 경직된 복종체계였다.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전반적으로 동독군들의 지휘체계에는 진취성이나 유연성이 부족했다. 5만명에 이르는 동독의 직업군인들은 4년 안에 동독 군의 남은 잔재를 없애는 임무에 충실히 협조하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적으로 여겨 왔던 서독군에 입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서독 군인들은 동독 장교들 사이에서 있을지도 모르는 모욕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들은 “독일인으로서 독일인에게”라는 원칙을 갖고 동독군에 다가갔으며, 지휘부 접수는 우호적으로 이뤄졌다. 결과적으로 시민사회와 동맹군으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았다. →통일 후 ‘분데스베어’의 역할과 위상에 차이가 있다면. -냉전시대의 종식은 ‘분데스베어’의 역할과 임무를 10년 안에 바꿔 놓았다. ‘분데스베어’는 국토방어 임무와 함께 세계평화 유지군으로 변모했고 나토(NATO)군의 강력한 회원국으로 편입됐다. 만일 독일이 통일되지 않았다면 유럽이 어떻게 통합됐겠는가. 독일인들은 40년간 서로 떨어져 살았고, 서로 다른 두 군사문화가 한 영토에 존재했다. 구 서독에서는 서유럽과 북대서양의 정체성이 자라난 반면, 구 동독지역에서는 또 다른 정체성이 성장해 왔다. →한반도 상황에 빗대어 본다면. -한반도의 상황은 독일에서 일어났던 과정과는 상당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먼저 국민들이 오랜 분단 뒤에 하나가 되기 위한 굳은 의지를 보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관련국의 통일을 위한 정치적 행보에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둘째, 관련 당사국들 간의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물론 당사국들은 상황이 ‘윈·윈’이라고 여겨질 때 정치적 합의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셋째, 군 핵심간부(엘리트)들은 정치적 합의를 따라야 한다. 이는 정치적 합의가 국가와 가족의 미래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판단될 때 이뤄질 것이다. →동·서독군의 ‘이념의 골’이 깊었을 텐데. -나는 동독 출신 군인들에게 주입된 사상이 마치 ‘제2의 피부’처럼 벗겨 없어지고, 책임감 있는 군인의 모습이 나타나는 과정을 지켜봤다. 북한군에 주입된 사상은 동독의 경우보다 더 큰 작용을 하겠지만 남한에서는 ‘이데올로기적 포장’ 혹은 가면 뒤에 숨겨진 인격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섬세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향후 한국에서의 상황이 독일처럼 전개될 경우, 체제의 붕괴라는 어려움 외에 굴욕 혹은 공감대 부족이라는 추가적 어려움이 더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천안함·연평도 사건 등 북한의 도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공격과 같이 일방적인 적대적인 행위는 평화협상을 지연시킨다. 이 문제는 남북한과 중국, 미국 정부 간의 협상 의제로 다뤄져야 한다. 북대서양에서 일어난 핵 충돌의 역사를 보면 강대국 간의 시행착오로 인해 발생한 충돌을 조용히 해결한 여러 예시를 찾을 수 있다. →남북한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북한은 현실 세계에 대한 인식을 더욱 넓힐 수 있도록 인도돼야 하며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될 수 있도록 안내돼야 한다. 남한은 남북한 국민 모두가 한 국가의 일원이라는 인식과 비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정리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셰벤 예비역 중장 1990년 독일 통일 당시 동독 인민군의 일부를 통합하기 위해 창설된 동부연방군 사령부 부사령관을 거쳐 1991년 4월부터 1994년 9월까지 동부지역 방위사령부 및 군단 사령관을 맡았다. 중장으로 예편한 뒤 2002년부터 2009년까지 ADAC(독일자동차클럽) 부회장을 지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한국국방연구원(KIDA)에서 명예연구원을 지내기도 한 셰벤은 ‘독일 통일 과정과 한국에의 교훈’이라는 프로젝트의 자문위원회에도 참여했다.
  • [나와 통일] (22) 이소자키 아쓰히토 게이오대 교수

    [나와 통일] (22) 이소자키 아쓰히토 게이오대 교수

    21세기에 들어서 일본에서는 ‘한류’로 인해 한국을 가깝게 느끼는 사람이 많아졌다. 한편으로는 납치, 핵, 미사일, 후계자 문제 때문에 북한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내가 처음 한반도에 관심을 가진 20여년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1984년 4월 처음으로 방송됐던 NHK 교육 텔레비전의 ‘한글 강좌’를 봤던 나는 한글의 독특한 형태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주변에 재일 한국인도 없었고, 부모님은 해외와는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채널을 맞닥뜨린 것은 완전히 우연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한국 가요에 빠졌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방송된 후지TV의 심야프로그램 ‘Seoul soul’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한국 MBC의 인기가요 프로그램인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일본어 자막을 입힌 방송이었는데, 가수 정수라와 전영록을 좋아했다. 고교 진학 후에는 여러번 시모노세키나 하카타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건너가 한국을 여행하곤 했다. ●신상옥 감독 책 보고 北에 관심 그러던 중 관심은 한국가요에서 정치로, 남에서 북으로 이동해 있었다. 여배우 최은희씨와 영화감독 신상옥씨의 책 ‘어둠으로부터의 메아리’(한국 발간 제목은 ‘김정일 왕국’)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고 기억된다. 대학생이 되어서부터는 연구자의 길을 생각했고, 서울 유학과 베이징 대사관 근무를 거쳐 대학에서 자리를 얻게 되었다. 나는 현재 게이오대학에서 북한 현대사를 다루는 수업과 연구회를 이끌고 있다.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도는 높지만 정확한 지식이 널리 보급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한국 국민의 여론이 통일에 미치는 중요한 맥(脈)이며, 그 배후에 막대한 통일비용이 상정되어 있다는 것, 일본이 경제제재를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은 대북 무역액을 늘리고 있다는 것, 반세기 전에는 일본에서도 북한을 칭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는 점 등을 얘기할 때 특히 학생들의 반응이 좋다. 또 일본에서는 ‘북한=무서운 나라’라는 이미지가 완전히 정착해 버렸기 때문에 그 체제하에서 사는 일반인들도 피해자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남북통일은 남북한의 주민들이 희구하는 한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의미에서의 통일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본다. 남한은 북한 주도하의 통일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고, 현재 상황에서는 북한체제의 동요를 일으킬 만한 요소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이른바 ‘급변사태’가 발생한다고 해도 실질적인 통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남북한의 현저한 경제격차에 비춰볼 때 형식적, 표면적, 이념적인 통일이 선언된다고 해도 사람들의 왕래의 자유는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北 주민 ‘이등국민’ 취급받아선 안돼” 통일이 되면 일본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을지 우려하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통일의 형식은 한반도의 사람들이 정해야 할 일이지만, 바로 옆에 사는 일본인으로서 정세의 안정화를 바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납치 피해자는 물론이고 1959년 이후 북한으로 건너간 일본인 배우자와 그 손자들의 안전이 확실히 확보되는지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또 한국 주도하에서 통일이 실현됐을 경우 북한의 일반사람들이 ‘이등국민’ 취급을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동유럽의 우등생’이었던 구 동독의 시민조차 통일이 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저소득과 고실업률에 고통받고 있다는 현실은 너무나 무거운 교훈이다. 나는 취미를 일로 전환할 수 있었던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일상사에 쫓겨 사는 평범한 일상이다. 통일이 되어 북한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해진다면 새로운 문헌을 입수, 검증해서 각계각층 사람들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다. 그래서 정치사의 중요한 전환점의 배경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밝히고 싶다. 연구자로서는 작은 알갱이에 지나지 않아 너무나도 미력하지만 언젠가 통일이 될 때, 북한의 일반주민들에게 감사는 고사하고 원망은 듣지 않을 연구자세를 지키고 싶다. 정리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약력 ▲북조선 정치·사회 연구 ▲서울대 박사과정 유학 ▲주중 일본대사관 근무 ▲게이오대 전임강사
  • [나와 통일] (19)조명철 통일교육원장

    [나와 통일] (19)조명철 통일교육원장

    나의 휴대전화 컬러링은 아바(ABBA)의 “I have a dream”이다. 대한민국에 온 것 자체가 나에겐 행운이고 혜택이라 생각한다. 때문에 꿈을 가지고 노력하고, 뭔가 이뤄내겠다는 나의 의지가 담긴 곡이기도 하다. ●나의 컬러링 “I have a dream” 1994년 처음 남한에 왔을 때는 꿈이 있었다기보다는 증오가 가득했다. 중국이나 남한의 발전상을 알게 되면서 북한 김정일 정권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 아니 그보다는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에 분하고 답답해 참을 수가 없었다. 희망을 갖고 뭔가를 꿈꾼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김일성 종합대학 교수 출신인 내가 남한으로 오는 것이 김정일 정권에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다음부터 몰려오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나를 정말 힘들게 했다. 가족, 친척, 선후배,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매일같이 밀려왔다. ‘잘했어. 남한으로 오길 정말 잘했어.’라며 몇 번이고 나 자신을 다독인 뒤에야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사회에 온 것 자체가 혜택이고 기회인데 멋지게 살아가자. 남들보다 몇십 년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한번 잘해보자.’라고. 탈북자 출신으로 통일교육원장에 임명되고 나서 축하 전화도 많이 받았지만 “잘하라.”는 준엄한 격려의 전화도 많이 받았다. 어깨가 많이 무겁다. 이 자리는 개인 조명철에게 준 자리가 아니다. 북한에서 온 2만 1000명에게 준 자리다. 나를 통해 북한 국민들에게 “남한은 기득권도 나누어 주는 곳이다.”라는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국민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들이 그 희망을 찾는 대상이 중국이나 러시아가 되어선 안 된다. 북한 국민들의 희망은 남한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한 국민들이 넓게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탈북자들과 기득권을 나누지 않으면 통일은 요원하다. 이 자리에 지원을 한 이유는 북한과 관련된 갈등의 뿌리를 뽑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동독과 서독이 통일했을 때 양쪽의 경제적 격차는 1대4였다. 통일 후 20여년이 지났지만 동독의 경제 규모는 서독의 80% 수준까지밖에 따라잡지 못했고 여전히 지역 갈등이 존재한다. 이에 비해 남북한의 경제 규모 차이는 38대1이다. 이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공포이기도 하다. ●경제 격차 38배는 기회이자 공포 남한에서 통일에 대한 의식이 많이 희박해졌다는 우려가 많지만 나는 기우라고 생각한다. 몇 차례의 도발이나 경제적 격차 등에서 오는 부담감이 급속하게 확산되어서 소수의 생각이 마치 다수의 의견처럼 비치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통일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전히 다수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한 국가가 선진국이 될수록 정신적·물질적 의식 수준의 성장과 함께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적인 문화가 심화된다. 이제는 통일에 대한 논의에서 과거의 흥분을 덜어낼 때다. 민족의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고, 나는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로 바뀌어야 한다. ●경제통일보다 문화통일 중요 통일은 우리가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주제다. 통일의 비용은 남북한의 경제 수준이 같아질 때까지 발생하지만 통일의 편익은 후대에 무한하게 발생할 수 있다. 통일 교육은 북한 현실을 제대로 아는 데에서 시작돼야 한다. 동·서독이 경제 규모 비율이 1대4라는 현실을 제대로 직시했다면 통일이라는 정치적 결단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공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주관적으로 변형하지 않고 모든 부분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탈북자 출신으로 처음 고위 공무원 자리에 오른 나를 두고 ‘코리안 드림’을 이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에겐 아직 꿈이 남아 있다. 통일이 되어 내 고향 평양 땅을 다시 밟는 날, 북한 국민들의 문화 통일을 위한 사업을 벌이는 것이다. 북한 국민들의 국민성이나 잠재성을 볼 때 물질적으로 잘살게 하는 것은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와 생각, 행동을 바꾼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우면서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통일은 실패한 작품으로 남게 될 것이다. 갑자기 자유를 찾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성장도 사회가 안정을 이뤘을 때 비로소 구가할 수 있는 문제다. 통일 조국이 성장을 지속하려면 북한 국민들을 위해 자유 민주 체제의 질서와 문화를 공유하게 할 교육이 대규모로 이뤄져야 한다. 나는 평생을 교육자, 연구자로 살아왔다. 아직 남아있는 나의 꿈, 그 꿈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정리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중독성 있는 공연… 감정 연기 즐거워”

    “중독성 있는 공연… 감정 연기 즐거워”

    ‘헤드윅’. 남자배우 4명(조정석, 최재웅, 김동완, 김재욱)이 번갈아 주인공을 맡는 뮤지컬이다. ‘미모’도 용호상박이고 연기 색깔도 저마다 개성 있다. 대략 난감. 누구를 인터뷰해야 하나. ‘공연 좀 보러 다닌다.’는 사람들에게 추천을 부탁했더니, 의외로 압도적인 답변이 나왔다. “헤드윅의 정석은 뭐니뭐니 해도 조정석이지.” ●“내가 봐도 예쁠 때 있어… 남성 관객이 엉덩이 만지기도” 인터뷰에 앞서 공연을 봤다. 왜 사람들이 그를 ‘뽀드윅’(뽀얀 피부와 애교 넘치는 발랄함에서 비롯된 애칭)이라고 하는지 단박에 느낌이 왔다. “분장한 모습을 보고 스스로도 예쁘다고 느낀 적이 있다.”는 조정석(31). 동반 캐스팅된 김동완(그룹 신화 출신)이 “헤어진 여자친구와 닮아 깜짝깜짝 놀란다.”고 고백했을 만큼 그는 예쁘다. 몸 동작도 요염하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뿜어내는 에너지는 폭발적이다. 그를 지난달 23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헤드윅’만 벌써 세 번째입니다. 2006년, 2008년, 그리고 올해…. 중독성이 있는 공연이에요. 계속 하고 싶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컨트리나 블루스 등 (극 중) 노래들도 참 좋아요.” 그는 뮤지컬 배우 송용진(200회 이상) 다음으로 ‘헤드윅’을 가장 많이 한 배우다. 헤드윅은 성 전환 수술에 실패한 동독 출신의 트랜스젠더 가수 이름이다. 한마디로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사람들에게 상처받는 영혼이다. 감정 표현이 쉽지 않은 캐릭터라는 뜻이기도 하다. “배우는 감정 노동을 하는 사람이에요. 제가 좀 예민한 편이라 힘든 느낌은 없어요. 작년에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에서 우울한 소년(모리츠) 역할을 맡았는데 그때도 오히려 즐겁고 잘 맞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아픔, 슬픔, 이런 감정선을 관객들이 읽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척 즐거워요.” ●“몰입은 힘의 원천… 양면성 있는 영화 캐릭터 해 보고 싶어” 정작 그 자신은 시원시원하게 얘기하지만 작품 속에서 갖는 헤드윅의 비중은 무겁다. 주인공이 공연 진행과 노래를 도맡아 2시간가량 끌고 가는 콘서트형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은 헤드윅이 웃으면 따라 웃고, 화를 내면 같이 분노한다. 객석을 동화시키는 ‘힘의 원천’을 물었다. “헤드윅이라는 인물에 100% 몰입하는 것?(웃음) 일단 무대에 올라가면 조정석이 아닌, 헤드윅에 철저히 집중합니다. 그러다 보면 버림받은 헤드윅의 분노, 삶의 슬픔, 이런 느낌이 본능적으로 전해져 와요.”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관객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며 야한 몸동작을 하는 대목이 있는데 언젠가 한번은 남성 관객이 제 엉덩이를 만져 무척 당황한 적이 있어요. 지금은 노련해져 웬만해서는 당황하지 않습니다(웃음). 아, 브래지어 속에 넣은 토마토를 끄집어내 던지며 절규하는 장면이 있는데 토마토가 없어져 혼난 적도 있어요.” 그는 2004년 데뷔했다. 8년째 뮤지컬 배우로 살면서 눈물 삼킨 날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家長)이라 늘 뭔가에 짓눌리는 느낌이 있고, 단독 주연(원 캐스팅) 공연을 할 때는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입니다. 가장 힘든 건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입니다.” 그 힘든 시기를 극복하고 뮤지컬, 연극, 드라마를 종횡무진 오가고 있는 조정석. 일흔 넘은 어머니가 “우리 아들이 배우야.”라고 주위에 자랑할 때 무척 행복하단다. 그에게는 목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영화배우다. “원래 꿈이 영화배우였어요. 서울예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제 공연을 본 어떤 기자 분이 트위터에 ‘조정석 심장에는 마그마가 있는 것 같다. 끓어오르는 에너지로 그가 사이코패스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싶다’라고 올렸는데 양면성이 있는 캐릭터로 영화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뮤지컬 ‘헤드윅’은 8월 21일까지 서울 삼성동 KT&G 상상아트홀에서 볼 수 있다. 5만~6만 5000원. (02)3404-4311.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MB “통일재원 부담되지만 길게보면 이익”

    MB “통일재원 부담되지만 길게보면 이익”

    독일 방문 사흘째를 맞은 이명박 대통령은 10일 베를린 시내 도린트 호텔에서 독일 통일의 주역들과 조찬간담회를 갖고 독일의 통일 경험을 들으면서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한 의견을 나눴다. 간담회에는 동독의 마지막 총리로 서독과의 통일 협상을 이끈 로타르 드 메지에르 전 총리, 통독 당시 서독 내무장관으로 통일 조약에 서독 측 대표로 서명한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 헬무트 콜 전 서독 총리의 보좌관으로 통독 프로세스를 설계한 호르스트 텔치크 전 총리 외교보좌관, 통일 당시 서독 육군의 동부지역 사령관으로 동·서독 군 통합을 주도한 외르크 셴봄 전 독일 국방 차관 등이 참석했다. 간담회에서 ‘통독 주역’들은 “당시 독일은 통일에 대해서 가장 큰 부담이었던 구 소련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협력함으로써 마지막으로 외교적으로 통일을 할 수 있었다.”면서 “독일이 구 소련(러시아)과 협력했던 것처럼 한국도 중국과 그런 노력을 앞으로 꾸준히 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했다. 이어 “통일은 언제 어떻게 올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준비하고 생각해야 한다.”면서 특히 통일 재원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독일은 통일이 된 후 몇 개월이 지나서 독일 통일기금을 책정하는 등 재정적으로 통일 이후에야 처음으로 검토하고 대비했다.”면서 “한국은 분단된 상황에서 사전에 경제적 소요를 예측하고 탈북자 문제, 북한 주민의 지원과 교육·복지·의료문제에 대해서 치밀하게 사전 대비를 한다면 독일이 겪었던 많은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독일은 당시 1990년부터 동·서독 경제통합을 위해 향후 4년간 1200억 도이치마르크가 들 것으로 판단했지만, 실제로는 1년마다 1500억 도이치마르크가 들었고, 이 때문에 독일국민들은 지난 20년간 꼬박 통일세를 납부해 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대통령은 통일 재원 문제와 관련, “우리 국민들 중에 워낙 남북 간 경제 격차가 크다 보니까 경제적인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 길게 보면 통일은 긍정적인 면이 많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오는 10월 서울에서 첫 회의가 열릴 예정인 한독 통일자문위원회에 이번 간담회에 참석한 네 명의 ‘통독주역’들을 모두 초청해 통일 문제에 대해 보다 심도깊은 논의를 하기로 했다. 이어 전용기편으로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한 이 대통령은 프랑크푸르트 상공회의소 회의장에서 폴크스바겐, 바스프, 지멘스, 보슈 등 독일 주요 기업의 경영진 19명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는 자동차, 기계부품, 화학·제약, 금융 등 분야별로 양국 간 협력방안에 대해 논의가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한국을 독일 기업들이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해 중국, 아세안, 인도 등 동아시아 신흥시장에 진출하면 매우 유리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부품소재, 녹색산업 분야에서 독일 기업들이 한국 투자를 확대하는 데 앞장서 줄 것을 당부했다. 베를린·프랑크푸르트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북한인권법 제정 지상논쟁

    북한인권법 제정 지상논쟁

    북한인권법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1년 넘게 계류중이다. 북한 주민의 인권이 개선돼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여야가 이견이 없다. 그러나 법안의 취지와 내용에 대해서는 양측이 날 선 공방을 벌이고 있다. 법안은 ▲통일부 산하 북한인권 자문위원회와 북한인권재단 ▲외교통상부 북한인권 대외직명 대사 ▲법무부 북한인권기록보존소 등 정부 내 4개 기구를 설치하는 것을 담고 있다. 북한인권법 제정을 둘러싼 찬반 양측의 주장을 들어 봤다. ◆찬성 “인권 국제공론화로 北 압박 北눈치 안보는 지금이 적기” 제성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북한인권법 제정과 관련, “인권침해사례 수집, 해외 탈북자 지원 등 국내외 활동을 통해 북한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서 “북한의 눈치를 보지 않는 지금이 법 제정의 적기”라고 말했다. →북한인권법 제정이 어떤 의미가 있나. -북한 인권개선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4개 기구를 설립하는 게 골자다. 북한 주민이 대한민국 국민의 일부라는 것을 선언함과 동시에 인권개선에 무관심하지 않다, 노력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매년 투입되는 예산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분명치 않지만 해마다 100억원 정도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다. 매년 국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실제 북한 인권개선에 효과가 있을지 실효성의 문제를 지적한다. -인권이란 시간이 걸리는 문제고, 내외부의 노력과 지원이 시너지를 내서 촉발되는 것이다. 북한인권보고서 작성, 국제사회 공론화, 해외 탈북자 보호·지원 등 국내외 활동을 통해 북한의 눈을 돌리고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당장 실효성이 없다고 속단하는 것은 법 제정을 막기 위해 만들어낸 얘기다. 1970~80년대 우리나라 인권개선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북한에는 이중잣대를 들이대선 안 된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인권도 있는 것 아닌가. -북한은 1950년대 후반부터 정치범 수용소가 있었고, 식량사정이 악화된 것은 1995년 이후다. 식량과 관계없이 인권탄압이 있어 왔다. 반인권적인 법제도와 관행, 보이지 않는 제약을 타파하지 않고는 외부에서 식량을 지원해도 효과가 없다. 인권개선은 인도적 지원과 병행돼야지 이 둘을 대립구도로 몰고가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권기록보존소는 독일의 사례를 참고했나. -1961년 서독의 11개주 법무장관이 니더작센주 법무부 산하에 중앙법무기록보존소를 설치하기로 했다. 동독 내 정치적 폭행, 인권탄압 범죄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보존, 관리하는 기구다. 통일 전 1989년까지 3만~4만건이 축적됐다. 물론 동독은 반발하고 협박했지만 서독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이 기록은 통일 후 과거 청산 자료로 활용되고, 구동독 관리를 채용할 때도 활용됐다. →국가인권위에 이미 기록보존소가 있는데. -법정기구가 아니라 임의기구이기 때문에 형사법상 증거능력을 가질 수 없다. 국가기관이라도 근거와 권한이 없으므로 비정부기구(NGO)들이 만든 자료와 다르지 않다. →인권법 제정이 북한의 심기를 건드려 남북관계를 악화시키진 않을까. -오히려 지금 해야 한다. 지난 10년을 돌이켜 보면 북한이 일시적으로 반발은 하겠지만 결정적인 악영향이 되진 않는다. 법 제정을 안 한다고 북한이 잘해주는 것도 아니지 않나. 노무현 정부 때는 유엔총회에서 북한 인권 결의에 찬성했지만 정상회담도 했다. 당당하게 할 말은 해야 한다. ◆반대 “인권단체들 지원 위한 수단 임기후반 보수층 결집 의도”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북한인권법 제정에 대해 “실효성이 없고 인권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면서 “보수 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고 주장했다. →북한인권법 제정에 반대하는 이유는. -국민의 뜻을 받들어 처음 법을 제정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데 철학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북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여야가 합의할 수 있는 정책적 기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압박을 통한 인권개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압박뿐 아니라 관계개선을 통한 인권개선도 중요하다. 시기적으로 반드시 지금 통과돼야 할 절박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법안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인권재단이 실제 인권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전단살포 등에 앞장서는 인권단체에 정부예산이 공식적으로 지원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인권개선 이전에 남남갈등을 더 심화시킬 뿐, 실효성이 없어 보인다. 국민적 합의를 이끌고 싶으면 공청회를 열고 1~2년에 걸친 여야 간 토론을 거쳐야 한다. 기록보존소도 독일의 경우 인권법으로 만들지 않았다. ‘○○기구 설립에 관한 법’을 만들면 된다. →인권개선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정권에 따라 흔들리면 안 되지 않나. -2005년 12월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이 토론과 공청회 끝에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 법안에 남북관계에 대한 기본적 철학이 담겨 있는데, 이번 정부 들어 이미 휴지조각이 됐다. →법 제정을 반대하는 민주당이 북한 눈치를 보는 것 아닌가. -일각의 지적처럼 민주당이 눈치를 봐선 안 된다. 옳은 것이라면 북한이 기분 나빠해도 해야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인권개선을 위한 철학도 없고 실효성 있는 내용도 없다. 법 제정을 거부하는 쪽을 김정일 추종자로 몰기 위한 정치적 이유가 다분히 있다. 4·27 재·보선 때 분당을 지역에 탈북자가 유권자의 약 0.3%(300여명)였다. 투표율이 낮을 때 0.3%는 큰 숫자다. →그럼 북한인권개선을 위한 대안이 있나. -국회 북한인권 결의안으로도 충분하다. 2006년 인권위에서 북한인권에 대한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 주민에 대한 조사는 권한이 없다고 했다. 이런 것들은 법을 바꾸거나 새로 선언하면 된다. 인권개선을 위한 우리 정부의 입장 등 총괄적이고 상징적인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 →지금이 과연 적절한 시기인가 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 정부가 남북관계를 잘해 왔다면 인권개선의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주던 쌀도 안 주고 북한 붕괴에 혈안이 됐다고 의심받는 정부로서 뜬금없다. 임기 후반 보수진영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계산이 다분히 깔려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북한인권법을 반대하면 김정일 추종세력, 반인권 세력으로 매도하기 위한 색깔론의 무기로 사용될 여지가 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獨 통일 후 무엇이 달라졌나

    독일 통일 후 동독 지역 출신의 기업가들이 서독 출신의 기업가들보다 자본주의에 더 함몰된 경향을 보였다는 분석이 나왔다. 통일부가 독일 통일 20주년을 맞아 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과에 의뢰해 발간한 ‘독일의 통일·통합 정책연구’에 실린 보고서 내용의 일부로, 추후 통일 정책을 수립하는 데 참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에 따르면 동독 지역의 경제 엘리트(기업가 등)는 동독 시절 콤비나트(기업의 지역적 결합체)에서 일했던 엘리트들이 거의 그대로 재취업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초기에 정치 엘리트(고위 공무원, 의원 등) 자리를 서독 출신들이 차지했던 것과 달리 전문 지식으로 무장한 동독 출신 경제 엘리트들이 거의 자리를 보전한 셈이다. 주목할 부분은 동독 출신의 경제 엘리트들이 서독 출신들에 비해 ‘경쟁적 자본주의’ 성향이 짙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2002년 제조업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동독 출신 기업인 61%가 스스로를 “경쟁적 자본주의자”라고 답했다. 통일부 관계자는 “서독 출신 기업인들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적 시장경제’ 성향이 강한 반면, 동독 출신 기업인들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경제 입장을 대변했다.”면서 “뒤늦게 시장경제에 참여하다 보니 더 경쟁적으로 나섰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반면 동독 지역 정치 엘리트들은 동독 시절 하위 엘리트였거나 전문직 종사자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통일 이전에 체제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반(反)엘리트 계급으로, 통일 이후 비로소 요직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보고서는 이를 통해 정치 엘리트 간 순환이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또 통일 직후 동독 지역의 경제가 붕괴되고 일자리가 줄어들자 출생률이 40%나 떨어진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1989~1992년에 일자리 400만개가 없어지면서 결혼 감소, 출산율 저하로 이어진 것이다. 통일 1년 후인 1991년에 출생률이 40%가 감소했고 92년, 93년에도 각각 19%, 8%씩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총 3권 2300여쪽으로 구성됐으며, 독일 통일 후 20년간 독일 정부가 시행한 정책과 결과를 분석, 평가한 논문과 당시 정부의 문건 등이 담겼다. 통일부 관계자는 “독일 사례가 전체를 통째로 따라야 할 모델도 아니고 북한은 동독과 같지도 않다.”면서 “그러나 통일 과정에서의 경험들은 한국을 위해 논의할 가치가 있고 연관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부고] ‘미션임파서블’ 같은 인생 전 美 CIA 요원 페티 별세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주인공을 연상시킬 만큼 파란만장한 첩보요원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진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클레어 에드워드 페티가 지난달 18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요양원에서 숨진 것으로 17일 뒤늦게 알려졌다. 90세. 2차 세계대전에 포병으로 참전한 뒤 전역, CIA에 들어간 페티는 몇 년도 안 돼 서독 정부의 고위 정보요원 하인츠 펠페의 이중간첩 혐의를 적발하는 데 큰 공을 세우면서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다. 페티는 펠페가 동독과 소련 정보를 지나치게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을 의심, 끈질긴 추적 끝에 마침내 펠페가 중요 정보를 소련에 넘긴 간첩 행위를 잡아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마르크스와 역사, 그 지독한 농담

    마르크스와 역사, 그 지독한 농담

    ‘역설’이라 하면 너무 무겁다. 밀란 쿤데라처럼 ‘농담’이라고만 해 두자. 5월 8일까지 서울 소격동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리는 한성필(39) 작가의 ‘이중현실’(Dual Realities) 전시가 딱 그렇다. 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기존 작품대로 트롱프뢰유(눈속임 회화)를 이용한 사진작품들을 선보인다.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독일 베를린에 있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동상 이전 작업을 기록해둔 영상물이다. 이 동상은 1986년 동독이 건재할 때, 아니 위태롭기 직전 세워졌다. 만든 뜻은 당연히 사회주의 동독을 두 영웅에게 ‘봉헌’하자는 것이었을게다. 그러나 동독은 이내 무너졌고, 동상 또한 철거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역사적 유물’이라는 명분으로 살아남았다. 문제는 다음이다. 베를린 지하철 확장 공사가 진행되면서 위치를 옮겨야 했던 것. 그래서 이전 공사를 했는데, 하필 동독 시절 동쪽을 바라보던 동상이 이번엔 서쪽을 바라보도록 방향을 틀었다. 한 작가는 이 과정을 기록한 영상물 두개를 만들었다. 이 작품 제목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countries, Unite!’)다. 만국의 노동자 보고 단결하라 했더니, 노동자들이 정말 일치단결해서는 동상을 옮겨버린다. 그것도 서쪽을 보도록. 다른 작품은 ‘운명애’(Amor fati)다.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해 자신을 옮기는 모습을 보고 있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심정은? 아마 운명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배경음악마저 베토벤의 ‘운명’이다. 여기서 끝났다면 ‘2% 부족’했을지 모른다. 눈치라도 챈 듯 작가가 준비해둔 또 하나의 작업은 이 동상을 고스란히 복원해둔 작품이다. 한 작가는 “2차원적인 영상을 3차원적인 실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동상을 배치해 둔 공간이 눈이 시리도록 하얀 곳이다. 백시(白視)를 노린 것. 그러저러하게 역사의 한 단락이 마무리 지어진 백시현상으로 눈앞이 캄캄해진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일까, 아니면 그 동상을 봐야 하는 우리 자신들일까. 한 작가가 던져 놓은 지독한 농담이다. (02)723-619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통일로 안내하는 내비게이터 되었으면”

    “통일은 반드시 온다. 기회의 창이 열릴 때 이 책이 통일의 종착지로 안내하는 멋진 내비게이터가 되길 기대한다.” 28년째 통일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현직 간부가 독일 통일 과정에 직접 참여한 주역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모아 책을 펴냈다. 양창석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회담대표는 독일 통일 직후 현지에 머물면서 만난 독일 정·재계, 학계 인사들과의 면담 내용 등을 담은 ‘브란덴부르크 비망록’을 펴냈다. 동·서독 경계지역이었던 브란덴부르크는 독일 통일의 현장이자 동서 냉전의 붕괴를 상징한다. 그는 1992년 4월∼1994년 12월, 1995년 3∼9월 각각 주독일대사관 통일연구관과 독일통일연구단 단장으로 현지에서 근무했다. 이 책은 동방정책의 설계자인 에곤바 총리실 장관과 월요 시위를 통해 시민혁명을 촉발한 라이프치히 부시장 등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 통일 정책들을 담았다. 서독 정부는 동독의 반대에도 독일 주민에 대한 ‘유일대표권’을 유지해 동독 탈출민의 정착을 도울 수 있었으며, 콜 총리는 조지 H 부시 미국 대통령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적극적 외교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는 내용도 소개했다. 이 밖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등 독일 통일 과정에 참여한 국가 수반들의 회고담도 담겼다. 양 대표는 “독일 통일은 기적처럼 이뤄졌다.”면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잘됐던 것은 우리에게도 적용하도록 준비하고, 잘못된 것은 교훈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아이돌 1세대 뮤지컬 무대서 제2전성기 꿈꾼다

    아이돌 1세대 뮤지컬 무대서 제2전성기 꿈꾼다

     일단, 1980년대 태어난 소녀(?)들. TV보다 서울 대학로에 주목하자. 1990년대 소녀들의 우상, 10대들의 우상을 표방했던 5명의 전사 H.O.T(High Five Of Teenager) 리더 문희준, ‘으쌰으쌰’의 귀여운 율동부터 ‘퍼펙트 맨’(Perfect Man)의 파워풀한 댄스를 구사한 그룹 신화의 김동완, 육아일기로 단박에 스타덤에 올랐던 그룹 god의 데니안 등이 뮤지컬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노래춤 익숙한 가수들, 뮤지컬에 쉽게 적응  원조 아이돌 그룹 H.O.T 출신 문희준은 다음 달 ‘오디션’을 통해 뮤지컬 배우로 데뷔한다. 문희준은 최고의 뮤지션을 꿈꾸는 ‘복스팝’ 밴드의 리더 최준철 역을 맡았다. 제작사인 이다엔터테인먼트 측은 “문희준이 기타와 보컬을 맹연습 중”이라고 전했다. 문희준은 지난달 그룹 클릭비 출신 오종혁이 출연한 ‘오디션’ 11차 공연을 본 뒤 제작진에게 직접 12차 공연 출연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이후 비공개 오디션을 통해 ‘발탁’됐다.  김동완은 인기 뮤지컬 ‘헤드윅’으로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 2005년 국내에서 초연된 ‘헤드윅’은 조승우, 오만석, 송창의 등 내로라하는 뮤지컬 스타들을 배출한 작품이다. 김동완이 맡은 역은 동독 출신의 실패한 트랜스젠더 록 가수 헤드윅.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 나왔던 김재욱도 함께 캐스팅됐다.  데니안과 여성 그룹 베이비복스 출신의 심은진도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에 출연 중이다.  왕년의 아이돌들이 이렇듯 줄줄이 뮤지컬에 눈 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뮤지컬 장르의 특성에서 그 이유를 찾는 시선이 많다. 뮤지컬은 음악, 연기, 무대, 음향 시설 등 여러 예술분야가 접목된 분야다. 노래와 춤에 익숙한 가수들이 비교적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장르라는 점에서 ‘옛 영광 재현’을 노려보기에 제격인 셈이다.  음반 시장 불황과 뮤지컬계 활황 요인도 있다. 침체된 음반 시장 여건 속에서 앨범을 내기 쉽지 않을 뿐더러 내놓아도 빅뱅, 2PM 등 2세대 아이돌 그룹에 치이기 십상이다.  선(先) 진출 아이돌 출신들의 성공 사례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대 가요계 요정으로 꼽혔던 핑클 출신의 옥주현은 이제 뮤지컬계에서도 인정해주는 스타로 자리잡았다. 그는 단독 주연(원 캐스팅)을 맡은 대형 뮤지컬 ‘아이다’가 막 내리기 무섭게 류정한, 엄기준 등과 함께 ‘몬테크리스토’ 무대에 서고 있다.  핑클과 함께 1990년대를 장식했던 S.E.S의 바다도 뮤지컬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쉽게 주연급 발탁 배우들 상대적 박탈감 커”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뮤지컬 배우는 “수년간 앙상블과 조연으로 실력을 쌓은 뮤지컬 배우들을 제치고 아이돌들이 쉽사리 주연급을 꿰차는 현실에 대한 우려와 불만이 가뜩이나 적지 않은 상황에서 감정 표현이 단련되지 않은 1세대 아이돌들마저 가세하고 나서 (뮤지컬계 내부의)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고 전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분산배치 모델 獨·日 사례 왜곡”

    “분산배치 모델 獨·日 사례 왜곡”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과학벨트)를 충청권과 영·호남에 분산 배치하는 ‘삼각 분산배치설’을 둘러싼 논란이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분산배치의 주요 근거로 활용돼 온 해외사례가 실제 현실과 크게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권과 각 지방자치단체가 해당 연구소들이 여러 지역에 분산돼 운용되고 있다는 점만 부각시키고, 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와 한계는 고의적으로 외면했다는 지적이다. 특히 독일 막스플랑크재단은 통독 이후 지역발전 논리로 의도적인 분산배치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예산 낭비는 물론 학문적 퇴보까지 발생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8일 막스플랑크재단 및 과학자들에 따르면 독일 전역에 산재해 있는 막스플랑크연구소는 개념 자체가 과학벨트와 전혀 다르다. 뮌헨에 재단본부를 두고 79개 연구소로 나뉘어 있는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종합연구소의 개념이 아니라 각기 특성화된 개별연구소에 가깝다. 과학벨트의 핵심인 ‘기초과학연구원’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구상됐다는 것을 감안하면 애초부터 벤치마킹 대상이 아니었던 셈이다. 재단 관계자는 “각기 다른 연구소들은 특성화된 대학 및 기업과 개별적인 관계를 맺고 연구를 진행한다.”면서 “같은 분야에서 중첩되는 연구영역을 가진 경우는 특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돼 있다.”고 설명했다. 과학벨트위원회 A위원은 “오히려 막스플랑크는 과학연구에 지역발전 논리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라고 강조했다. 막스플랑크재단은 통독 이후 낙후된 동독 지역의 발전을 위해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 등에 일부 연구소를 이전하고 새로운 연구소를 건설했다. 그러나 이전 대상 연구소 연구원들의 반대와 이직 등으로 인해 연구원을 새로 뽑는 등 부작용이 발생했다. 막스플랑크 플라스마물리연구소의 유정하 박사는 “결국 비슷한 연구소를 새로 만들면서 예산이 낭비됐고, 새로 뽑은 연구원들의 수준이 떨어지면서 ‘물리 등의 분야에서 독일 과학이 10년 이상 정체됐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고 말했다. 드레스덴에 위치한 막스플랑크 복잡계물리연구소 관계자는 “드레스덴이 최고 수준의 공과대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짧은 시간에 자리를 잡은 것”이라면서 “연구소와 공동연구를 진행할 수준의 대학이나 기업이 해당 지역에 없다면 아무도 찾지 않는 유령 연구소가 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일본 내 5개 지역에 분산돼 있는 이화학연구소(리켄)의 경우도 지역 발전 등의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리켄 본원이 위치한 도쿄 근교 와코시는 주변이 주택가에 완전히 둘러싸인 데다 미군 부대까지 있다. 리켄의 김유수 박사는 “1917년 리켄이 처음 이곳에 세워질 때만 해도, 규모는 큰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확장 자체가 불가능한 지역적 특성 때문에 다른 지역에 분원을 하나씩 세워 나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광주시 등에서 지역 균형발전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 리켄 효고분원도 피치 못할 배경이 있다. 리켄과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국내 대학 교수는 “1995년 한신대지진 이후 이 지역 과학기반이 모두 망가지면서 복구 개념에서 분원이 설치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과학연구 자체가 효고분원을 중심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마치 분원이 지역발전을 이끈 것처럼 착시현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벨트위원회 B위원은 “분산배치의 근거를 찾다 보니 막스플랑크와 리켄 사례를 일부만 활용하게 되는 것”이라며 “세계적인 과학단지를 만들겠다는 논의에서 정작 과학은 배제돼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조목조목 짚어 본 통일 이후 ‘통합’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 치사에서 평화통일 3단계와 통일세 구상을 주요 대북 메시지로 제시한 이후 각계에서 통일에 대한 논의가 터져나왔다. 또 얼마 전 ‘후계자’ 김정은의 급부상으로 촉발된 북한의 정정 불안 때문에 통일이 목전에라도 다가온 듯 철저한 준비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하지만 활발하게 전개된 논의에 비해 통일 이전의 ‘통합’이나 이후의 구체적인 전개 방식 등에 대해서는 아직 체계적인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관념적 시각에서 통일 문제를 보거나, 정치·경제 중심의 좁은 잣대로만 논의가 전개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통일 이후 통일을 생각한다’(박명림 외 6명 지음, 푸른역사 펴냄)는 통일의 준비 과정과 통일 이후 발생될 문제들을 조목조목 짚고 있다. 책은 남북통일이 ‘결론’이 아닌 통일 문제의 ‘시작’이란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를 위해 정치·경제는 물론 교육과 언어,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통일 이전과 통일, 그리고 그 이후를 대비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한다. 박명림 연세대 지역학 협동과정 교수는 “통일이 온전했던 이전으로의 ‘회귀’가 아닌 60여년간 독자적으로 생존해 온 두개의 한국을 단일국가로 새롭게 ‘건설’하는 과정”이라며 “남북이 ‘통합’에 대한 준비 없이 제도통일 과정에 돌입하면 극단적인 사회재분열로 연결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김영윤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남북한의 경제 통합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을 독일 등 외국의 경험을 원용해 살펴보고, 통일을 위해 필요한 비용과 구체적인 조달 방법 등에 대한 방안을 찾는다. 독일이 동·서독 간 화폐 교환비율을 1대1로 상정한 결과와 통일 이후 발생한 소유권 분쟁, 동독의 시장경제체제 전환 과정 등을 우리의 상황과 등치시켜 비교·검토한다. 임홍빈 서울대 명예교수는 남한의 ‘한글맞춤법’과 북한의 ‘조선어규범집’ 등 두 체제의 어문 규정을 통해 분단 이후 남북한 언어의 이질화 과정과 남북 언어의 현황을 점검한다. 아울러 통일 한국에서는 남한을 기준으로 어문 규정을 수립할 것을 제안한다. 김재용 원광대 국문학과 교수는 먼저 북한 문학계의 현실을 이해한 뒤, 이를 바탕으로 남북 문학 교류를 전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도 남북 음악계의 이질성이 향후 ‘문화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북한의 1-4-6-4의 기간학제와 남한의 6-3-3-4 기간학제 등 교육체계의 이질성도 문제다. 이종재 서울대 명예교수는 남과 북이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북한의 교육이 당성, 혁명성, 계급성을 구비한 사회주의식의 인재양성에서 벗어나 보편적 전인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만 7500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나와 통일] (5) 하임숙 한동대 4학년

    [나와 통일] (5) 하임숙 한동대 4학년

    나와 친구들은 지난달 서울 인사동의 가나 아트스페이스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실상을 알리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그곳에는 사랑이 없다’라는 타이틀로 열린 이 전시회에는 12일 동안 무려 2만 5000여명이나 다녀갔다. 예상치 못했던 뜨거운 반응이었다. 지난해 교내에서 열었던 전시회가 반응이 좋아 ‘서울에서도 한번 해 보자’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었는데, 예상 외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정말 깜짝 놀랐다. 사람들은 왜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전시를 기획한 나조차도 사람들이 북한의 인권 같은 일에는 관심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가 없었던 것이었다. 관람객들 가운데는 20~30대의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잔인한 내용인데도 거부감 없이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끔찍한 수용소의 실상을 보고 놀라기도 했지만 전시장을 나갈 때에는 북한 인권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전시장을 두세번씩 들른 사람들도 많았다. 하루는 연인 한쌍이 전시장을 다시 찾아왔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방명록을 쓰고 있는데, 그 전에 함께 들렀던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너희도 다시 왔구나. 그럴 줄 알았어.”라면서 공감이 확산되는 것을 여러 차례 목도했다. 시기적으로도 천안함·연평도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된 것 같다. 통일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나는 통일 문제는, 경제적 이득이나 기회비용을 떠나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역사는 사람들의 선한 마음을 따라 흘러간다고 본다. 같은 민족, 가족, 형제로서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 줘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통일이라고 생각한다. 평양의 특권층 3000명은 잘먹고 잘살지만, 북한 주민들의 삶은 정말 처참하다. 탈북에 한 차례 실패해 북송 집결소에 있었던 언니 또래 여인의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내 또래 20대 가운데에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 친구들도 많다. 그러나 나는 통일이야말로 우리 세대가 이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 세대는 민주화를 위해, 할아버지 세대는 산업화를 위해 인생을 걸었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이념적으로 대립했을 수 있고 서로에 대한 상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위 세대들이 이뤄 놓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세대다. 북한과 정치적으로 엮이지 않고, 아픔도 없기 때문에 통일을 준비할 수 있는 세대다. 당연히 의견은 진보, 보수가 나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진보, 보수가 같이 갈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통일이 바로 그런 문제라고 생각한다. 통일 이후의 정책을 세우는 데에는 가치관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통일을 이루기까지는 우리 세대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어려운 북한 주민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보편적 가치가 아닌가. 나는 남한이 주도해 통일을 이뤄 나갔으면 한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의 성공과 실패는 너무나 분명하게 나뉘었다. 남한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성공을 이뤘다. 서독이 동독과 통일을 할 때 자신감이 있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통일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주도적으로 통일을 이뤘으면 한다. 남한은 이제 보편적인 행복은 퍼져 있는 사회다. 그런 행복을 북한 사회와 나눴으면 좋겠다. 북한 인권을 얘기할 때 미국의 노예 해방을 많이 얘기한다. 노예 해방 문제는 남북전쟁을 일으킬 만큼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었다. 그러나 노예 해방이 이뤄진 후에는 평등, 자유가 보편적 가치가 됐다. 통일도 그렇게 될 거라는 희망이 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떤 미래를 생각해야 하는지 고민해 줬으면 좋겠다. ●약력 ▲24세 ▲한동대 산업정보디자인 학부 4학년·국제기업가정신 전공 ▲한동대 북한인권학회 ‘세이지’ 학회장
  • 피겨퀸 vs 피겨전설 장외 대결

    피겨퀸 vs 피겨전설 장외 대결

    김연아(21·고려대)의 우상은 미셸 콴(미국)이었다. 8세 꼬마 김연아는 TV로 본 콴의 모습에 매료돼 스케이트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세계챔피언이 된 소녀는 우상 콴과 함께 ‘히어로’에 맞춰 아이스쇼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연아가 1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우상은 달랐을 것이다. 바로 이 사람, 카타리나 비트(46·독일)다. ●화려한 기록의 주인공들 비트는 김연아가 등장하기 전까지 최고였다. 피겨 역사상 가장 화려한 기록을 남겼다. 구 동독시절이던 1984년과 1988년 동계올림픽에서 여자싱글 2연패를 달성했다. 이는 비트와 소냐 헤니(1928·32·36년) 둘뿐이다. 세계선수권도 4번이나 우승했다. 완벽에 가까운 스케이팅과 8년간 배운 발레에서 뿜어져 나오는 우아한 자태는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1995년 피겨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뒤에도 ‘비트 신드롬’은 끊이질 않았다. 연예인이 돼 영화에 출연하고, TV 진행도 맡았다.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표지에까지 등장했다. 이미 선수를 넘어선 명사 반열에 오른 지 오래다. 김연아도 만만찮다. 2006~07시즌 시니어무대에 뛰어든 후 줄곧 새 역사를 써 왔다. 2009년 세계선수권, 2010년 밴쿠버올림픽을 석권하며 명실상부 ‘피겨퀸’의 자리에 올랐다. 여자선수 최초로 200점을 뛰어넘었다. ‘교과서 점프’와 얄밉도록 완벽한 표정연기는 압권이다. 비트는 지난해 올림픽을 보고 “김연아와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나를 완전히 뛰어넘었다.”고 극찬했다. 호사가들은 둘의 현역 만남이 불발된 데 때아닌(?) 아쉬움을 보내기도 했다. ●평창 vs 뮌헨 전·현직 여왕이 제대로 만난다. 물론 얼음판은 아니다. 2018년 동계올림픽 유치전이 무대다. 김연아는 삼수에 도전하는 평창의 간판으로 활약하고, 비트는 강력한 후보인 뮌헨의 전면에 나섰다. 비트는 2018뮌헨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집행위원장. 각종 국제대회와 행사에서 프레젠터로 나서 적극적으로 뮌헨을 알리고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현지실사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 평창 홍보대사 김연아는 아직까지는 굵직한 활동은 하지 못했다. 현직 선수인 데다 2011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선수권을 앞두고 훈련에 한창이었기 때문에 ‘짬’이 없었다. 그러나 평창올림픽 유치위원회는 김연아를 가장 강력한 ‘조커’로 생각한다. 압도적인 스케이팅 실력에 유창한 영어실력, 동양적인 신비한 매력까지 더해져 IOC 위원들의 호감을 얻고 있다. ‘네임 밸류’도 결코 비트에 뒤지지 않는다. 총성은 이미 울렸다. 전·현직 여왕은 국제무대 곳곳에서 얼굴을 맞댈 전망이다. 악셀과 살코가 없는 유치대결의 승자는 누가 될까. ‘얼음 전쟁’은 시작됐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나와 통일] (3) 양영희 재일동포 2세 영화감독

    [나와 통일] (3) 양영희 재일동포 2세 영화감독

    나는 재일교포 2세다. 오사카에 살고 있고 어릴 때 조총련계 북한 학교를 다녔다. 부모님은 1971년, 1972년 두 차례에 걸쳐 오빠 셋을 북한으로 보냈다. 그때는 북한이 지상낙원인줄 알았으니 아들들을 위한 선택이었다. 나는 오빠네 가족들을 만나러 평양에 갈 때마다 가족들의 모습을 비디오카메라에 담았다. ‘굿바이, 평양’은 1995년부터 13년 동안 평양을 오가면서 찍은 영화다. 시간이 지날수록 통일을 원하는 사람이 줄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통일이 돼서 남북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면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많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한국, 일본, 중국 입장에서 보면 북한 체제의 안정을 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통일문제를 북한 사람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지금 이 상태로 시간이 흐르는 것은 북한 사람들에게 너무 잔인하다. 평양에 있는 오빠네 가족들은 일본에서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생필품과 먹을거리, 엔화가 없으면 생활이 거의 어렵다. 북한 사람들은 얼굴이 없다. 진짜 목소리도 없다. 나는 평양에 갈 때마다 북한의 어린이들이 나오는 장군님 찬양공연을 본다. 13년간 내용은 똑같다. 나는 평양에 있는 동안 매일 밤 눈물을 흘렸다. 나는 영화 개봉 때문에 한국을 여러번 갔다 왔다. 이어진 땅에서 같은 한국말을 하고 같은 김씨, 박씨가 살고 있는데 남한 사람은 푸짐하게 먹고 북한 사람은 그러지 못한 것을 보면서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일이 되면 문제가 복잡해지니까 한반도의 절반, 너희들 그냥 참고 살아.”라고 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북한 사람들에게도 통일은 잔인한 시기가 될 수도 있다. 분단된 지 워낙 시간이 많이 흘러 과격한 방법으로 통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은 되어야 한다. 통일이 어렵다면 이메일이나 전화, 편지라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선택권이 없이 북한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무관심은 무책임이나 다름없다. 일본 사람들은 남북의 통일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다. 북한은 무섭다거나 밉다는 거부감이 강하다. 간혹 독일 통일 얘기를 하면서 “경제적으로 더 잘사는 한국이 10년은 고생하겠지. 북한은 동독보다도 수준이 떨어지니까 더 힘들지 않겠어?”라고 하는 정도다. 그렇지만 그냥 놔둘 순 없다. 일본에서도 북한에 간 사람이 많다. 1959년 북송사업을 시작으로 9만명 이상을 보냈다. 당시 자이니치(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에 대해 관심을 가져준 것은 일본도, 남한도 아닌 북한이었다. 나의 오빠들이 북한에 갔을 때 나는 여섯살이었다. 당시에 부두에서 만경봉호를 탄 오빠들을 배웅하면서 손을 흔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빠들을 보낸 기억이 개인적인 트라우마이기도 하지만 나는 시대적인 흐름을 목격한 목격자가 됐다. 책임감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목격자로서 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2006년 ‘디어, 평양’이라는 영화를 개봉한 이후 나는 북한에서 입국 금지조치를 당했다. 북한 정부는 나에게 사죄문을 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굿바이, 평양’을 만들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겠다는 의사 표시이기도 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공식적으로 낙인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사죄문 얘기도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있다. 나는 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사회제도나 권력자에 대한 혐오감이 그 땅에서 사는 보통사람들에 대한 편견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 나라가 싫다고 해서 사람까지 미워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요즘 이집트, 리비아에서 일어난 재스민 혁명의 바람이 북한으로 번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한다. 재스민 혁명이 북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모른다. 북한사회가 좀 달라졌으면 하는 생각은 하지만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폭력적인 방법은 절대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만 안 되면 좋겠다. ●약력 ▲47세 ▲도쿄 조선대학교 ▲뉴욕 뉴스쿨대 커뮤니케이션학부 미디어연구과 석사 ▲‘디어 평양’(2006)으로 선댄스국제영화제 다큐 월드시네마 심사위원 특별상, 베를린국제영화제 최우수 아시아영화상 등 수상
  • 분단선 넘어온 눈물…北風 부는 충무로

    분단선 넘어온 눈물…北風 부는 충무로

    2011년 봄, 충무로의 화두는 북한이다. 엄밀히 말하면 북에 살고 있는 사람들, 북을 떠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다. 현실의 남북 관계는 여전히 한겨울 터널 속이지만, 스크린에서는 그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아픔에 주목한 북한 소재 영화가 쏟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상적인 감동 코드 내세운 북한 영화 봇물 한국 영화사에서 ‘쉬리’ 이후 남북 분단을 소재로 한 작품은 꾸준히 제작돼 왔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피해갈 수 없는 소재의 보편성과 현실성 때문에 최근까지도 ‘국경의 남쪽’(2006), ‘크로싱’(2008), ‘의형제’(2010) 등 분단의 아픔을 소재로 한 영화는 계속 만들어졌다. 하지만 올해 선보이는 북한 관련 영화는 이념이나 정치색을 배제하고 일상적인 감동 코드로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한 작품들이 다수를 이룬다. 특히 탈북자, 재일교포, 조선족 출신 감독들이 직접 보고, 겪고, 느낀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시각과 생생한 현실감이 살아 있다. 재일교포 2세 양영희 감독이 만든 ‘굿바이, 평양’은 북한과 일본 오사카에 각각 30년째 헤어져 살고 있는 이산 가족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2006)에서 조총련 간부로 살아온 아버지와의 관계를 그린 양 감독은 이번에는 막내 조카 선화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6㎜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는 “고모!”라고 부르는 앙증맞은 조카 선화와의 첫 만남부터 반복적인 정전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거나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는 등 평양의 한 가족의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을 그린다. 하지만 그 담담한 시선 뒤에는 ‘디어 평양’ 이후 북한 입국이 금지된 양 감독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선화를 통해 바라본 자신의 정체성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난 3일 개봉했다. 탈북자 출신 정성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량강도 아이들’(17일 개봉)도 북한의 량강도 두메산골에 남한에서 날아온 크리스마스 선물 꾸러미가 떨어지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코미디 영화.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제작 및 연출을 맡았던 정 감독은 실제 북한의 어린이들로만 출연진을 구성하고, 억압된 북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념과 국경을 초월한 어린이들의 순수한 동심에 주목한다. ‘두만강’(17일 개봉)과 ‘무산일기’(4월 7일 개봉)는 탈북자들의 실상에 사실적으로 접근한 영화로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조선족 출신의 재중교포 장률 감독의 ‘두만강’은 북한과 국경을 맞댄 연변 조선족 자치구를 중심으로 탈북자와 조선족의 갈등을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 프랑스 파리 국제영화제 2관왕, 러시아 이스트웨스트 국제영화제 2관왕을 차지했다. 박정범 감독의 ‘무산일기’는 행복을 찾아 남한에 왔지만 서로 불신과 상처만 쌓이는 탈북 주민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네덜란드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 2관왕을 차지했다. ●‘레드 콤플렉스’ 약화… 북한에 대한 시각 변화 영화 관계자들은 북한 소재 영화가 쏟아지는 이유에 대해 소재의 다양성 측면도 있겠지만, 사회문화적인 시각의 변화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이전에 북한은 거시적으로 정치적인 이미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미시적으로 그 속에 사는 사람들에 관심을 갖는 사회적인 인식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영화 ‘량강도 아이들’의 홍보를 맡고 있는 영화사 샘의 최혜경 실장은 “북한에 대한 시각이 이데올로기에서 그 체제하의 사람들로 옮겨지면서 인간의 심리와 본성에 초점을 맞춘 다양한 작품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면서 “예전에는 북한 관련 영화가 제작돼도 배급사나 상영관을 잡기가 쉽지 않았지만, 최근에는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고 북한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변화가 생기면서 북한 관련 영화가 늘어난 것”이라고 풀이했다. ‘레드 콤플렉스’가 약화되고 흔들리는 북한 체제를 반영한 결과라는 해석도 있다. 영화평론가인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교수는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가 줄어드는 등 이념적인 문제가 누그러졌고, 영화적으로도 자유분방한 소재가 나오는 추세”라면서 “독일 통일 이후 ‘굿바이 레닌’ 등 동독 관련 영화가 많이 나온 것처럼 최근 북한 체제가 흔들리면서 북한에 대한 모순을 다루고 동시에 남한 사회를 되돌아 보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 소재 영화들은 만든 지 2~3년이 된 작품들로 최근에 빛을 본 경우가 많다. 영화계는 이들 북한 영화들이 코미디 열풍을 잠재운 실화 영화 ‘아이들...’의 흥행과 ‘파수꾼’, ‘혜화, 동’ 등 작지만 강한 독립 영화의 선전과 맞물려 의미있는 성공을 거둘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최혜경 실장은 “북한 관련 영화들은 삶에 밀착되어 사실적이면서도 진정성 있는 공감을 이끌어낼 뿐만 아니라 영화제에서 인정받을 정도로 영화적인 완성도도 뛰어나다.”면서 “스마트폰 확산으로 각종 소셜 네트워크(SNS)를 통해 입소문이 난 독립 영화 선전이 이어지고 있어 그 어느때보다 기대를 걸어 볼 만하다.”고 말했다. 글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그래픽 김선영기자 ksy@seoul.co.kr
  • [글로벌 시대] 동구혁명 관점에서 본 중동혁명/고토 노부유키 홍익대 교양외국어학부 교수

    [글로벌 시대] 동구혁명 관점에서 본 중동혁명/고토 노부유키 홍익대 교양외국어학부 교수

    나는 리비아의 청년과 이야기한 적이 있다. 1989년 1월이었으니까, 벌써 20여년이 지난 옛일이다. 유럽 여행을 갔을 때 브뤼셀의 유스호스텔에서 그 청년과 같은 방에 묵게 되었다. 그때 리비아의 지도자인 카다피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던 그의 모습을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에게 카다피라고 하는 인물은 영웅이었다. 카다피는 구미에 대해 겁내지 않고, 정론을 피력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그렇구나. 대단해. 당신 나라의 지도자는 훌륭하다.”고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후 22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현재 중동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또다시 시대가 크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 나는 1989년 1월부터 2개월간 서유럽 여러 나라와 동베를린, 폴란드를 여행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 무렵부터 동유럽의 공산권이 동독 사람들의 헝가리행 하이킹을 시발점으로 해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후 나는 일본인 친구와 둘이서 1990년 1월부터 2개월간 동유럽을 여행했다. 20세기의 공산주의 국가가 어떤 사회인지를 눈여겨봐 두고 싶었고, 또 그 체제가 붕괴되는 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의 동독은 어쩐지 현재의 북한을 연상시킨다. 1989년 당시 동베를린 사람들은 길을 물어봐도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고 도망쳐 갔다.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된 일이지만, 서방세계의 정보원에게 정보를 제공했다는 혐의를 추궁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과는 말을 주고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90년의 라이프치히에서는 관광객들이 괴테가 즐겨 찾았다는 찻집에 들어가려는데, 찻집 입구에 지켜 서 있는 종업원은 우리를 일렬로 줄을 세워서 들어가게 했다. 종업원은 몸집이 크고, 삼엄한 얼굴을 하고서 미소짓는 얼굴 표정은 한군데도 보이지 않은 중년의 아줌마였다. 열이 흐트러지면 아줌마에게서 곧바로 줄을 서도록 주의를 받았다. 찻집이나 레스토랑에서 동독 사람들은 우리 쪽을 훔쳐 보면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아직 분리되지 않았으며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자유롭고 우호적이며 평화로웠다. 동구 혁명은 공산권의 위성국가로부터 시작되어 종국적으로는 소련마저 붕괴되었다. 이번 중동 국가들의 체제 붕괴도 독재 정권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라고 하는 점에서 그것과 일치한다. 이러한 움직임이 이대로 진행되면, 예멘·바레인·카타르·쿠웨이트 등을 거쳐 마지막에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하는 것은 아닐까? 중동의 체제 변화는 세계의 에너지를 보급하고 있는 석유 이권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치와 경제의 양면에서 세계적인 격동으로 몰아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 체제 붕괴의 움직임이 중동 전역으로 퍼져나갈 경우, 이란과 시아파 정권이 된 이라크, 이집트의 무슬림 연대 그리고 레바논의 헤즈볼라나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처럼 아랍 민중에게서 지지를 받은 조직들의 연계 속에서 중동 지역의 새로운 질서가 잡혀 갈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석유나 천연가스의 이권을 둘러싸고 민족들 사이의 이권 갈등 및 세계 여러 나라 사이에 쟁탈전이 전개될지도 모른다. 이슬람교 내의 종파 간, 민족 간 혹은 부족 간 대립을 부추기는 공작이 외부에서 끼어들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구 혁명 후,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이나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우크라이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익히 보아서 잘 알고 있다. 또 옐친 대통령 집권 시에 러시아의 지하자원 이권을 노리고 쇄도한 금융 마피아에 의해 러시아 경제가 어떤 상태에 놓였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 리비아 청년은 이제는 건장한 어른이 되었겠지만,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을까? 아무튼 중동 지역의 민의를 반영한, 건전한 질서에 의한 체제가 실현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 [씨줄날줄] 재스민 혁명/박대출 논설위원

    영국의 명예혁명(1688년)은 무혈(無血) 혁명이다. 영국 청교도혁명(1640~1660)의 주체는 청교도들이다. 3월 혁명은 1917년 3월 8일(구력 2월 23일) 발발한 러시아 혁명이다. 그해 11월 혁명(구력 10월)은 볼셰비키 혁명으로도 불린다. 전통적으로 혁명은 특성, 주체, 시기 등으로 이름지어졌다. 요즘엔 ‘상징’으로 명명하는 게 대세다. 2003년 그루지야의 장미혁명,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 2005년 키르기스스탄의 튤립혁명 등으로 이어진다.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74) 대통령. 23년간 튀니지를 철권 통치했다. 지난 14일 ‘피플 파워’로 축출됐다. 서구 언론들은 ‘재스민 혁명’으로 이름지었다. 재스민은 튀니지의 국화(國花)다. 아직은 미완성 혁명이다. 약탈, 방화 등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 혁명의 불을 댕긴 건 노점상 분신 사건. 모하메드 부아지지란 26세 청년이다. 소셜 네트워크와 위키리크스가 혁명의 촉매제로 작용했다. 분신 소식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타고 번졌다. 위키리크스는 대통령 일가의 부패상을 폭로했다. 민심은 폭발했고, 혁명을 일궈냈다. 남의 얘기 같지 않다. 오렌지, 장미, 튤립혁명 때와 다르다. 튀니지와 북한엔 닮은 꼴이 있다. 바닥을 헤매는 경제와 장기 독재의 폐해다. 국민은 굶주려도, 독재자는 호사스럽다. 벤 알리는 금괴 1.5t을 갖고 야반도주했다. 김정일 호화 별장은 33개라고 한다. 국민들이 모르면 그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를 수가 없는 세상이다. 벤 알리 정권은 인터넷 사이트를 차단했다. 개인 정보도 해킹했다. 하지만 봇물처럼 터진 사이버 투쟁을 막을 수 없었다. 북한도 이젠 닫힌 나라가 아니다. 북한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한국 네티즌들에게 뚫렸다. 홍보 홈페이지엔 김정일-김정은 풍자가 등장한다. 한류(韓流)도 퍼질 대로 퍼졌다. 위키리크스엔 북한 관련 건이 1000여건 있다고 한다. 일각에선 급변 가능성을 경고한다.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서구 언론들은 뭐라고 이름지을까. 모란혁명이라고 명명할까. 모란봉공원, 모란봉대학, 모란봉 기예단, 모란봉 나무화석처럼. 아니면 국화(國花) 이름을 따서 목란혁명으로 부를까. 2009년 기준으로 남북한 경제력 차이는 37배. 통일 전 서독·동독과는 비교가 안 된다. 그들은 1인당 국민소득 기준으로 2.75배에 불과했다. 통일 21년이 됐지만 후유증은 진행형이다. 우리는 오죽하겠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한반도 긴장 상태에선 더 절실하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열린세상] 중국은 우리에게 소련이 아니라 프랑스다/서재진 통일연구원장

    [열린세상] 중국은 우리에게 소련이 아니라 프랑스다/서재진 통일연구원장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미국을 국빈 방문하여 19일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것에 대해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브레진스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32년 전 덩샤오핑의 방미 이래 가장 중요한 이벤트라고 평가하였다. 중국의 국제적 영향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신경 쓰는 것은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과 영향력이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의 영향력을 너무 지나치게 우려하고 우리 스스로의 역량이나 주도력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거나 망각하는 경향이 크다는 점이다. 중국이 경제적으로는 주요2개국(G2)의 반열에 오른 것은 사실인데 아직 정치적·도덕적 영역에서 그런 역량이 구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국제사회에서 중국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고 있다. 우리 국민들이 과거에는 반미 정서가 컸지만 이제는 어느덧 반미보다는 반중 정서가 더 크다는 사실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가 우리의 예상이나 기대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중국 내부에서도 커져 버린 경제력에 상응하는 대외정책의 방향을 잡지 못하였고, 외교정책에 있어서 군부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크다는 점도 중국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사안별로 정책결정 과정이 다르며, 후진타오 주석이 통제하기 어렵다는 학자들의 증언도 있다. 국내정치에 있어서도 신좌파·신자유주의파·민주사회주의파 등으로 시각이 분화되고 있고,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전통파와 국제전략파로 분화되고 있다. 차기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는 시기에는 이러한 권력분화 추세가 더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유동적인 중국 내부의 분화과정에 우리의 조야 정책전문가와 학자들이 중국 측과 대화를 심화하여 설명하고 공감대를 확산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국민이 중국에 대하여 가장 우려하는 점은 우리의 통일과정에 중국이 개입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과거 동·서독이 통일된 것은 소련의 경제력이 쇠퇴하여 독일통일을 막지 못하였지만, 중국은 떠오르고 있기 때문에 남북통일을 어떤 식으로든 방해할 것이라는 것이 우리 국민 다수의 인식이다. 그럴 가능성에 대비해야 하지만 이 문제에서도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당시 소련은 동독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지만 중국은 북한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지 않다. 동·서독 통일 당시 독일과 국경을 접한 프랑스가 동·서독 통일을 집요하게 반대하였지만 결국 개입하여 저지하지 못하였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국제법적 규제 때문이다. 남북한이 합의에 의하여 통일을 선포할 경우, 중국도 마찬가지로 남북통일을 반대하더라도 개입하여 저지할 명분은 없다. 중국은 우리에게 소련이 아니라 프랑스인 셈이다. 중국의 현재 대북 정책도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의 통일에 유리할 수 있다. 가령, 현재 중국은 대북 정책의 목표로 비핵과 안정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으나 비핵보다는 북한체제 안정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우리의 대북 정책과 충돌하고 갈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중국이 추진하는 대북 정책은 이 두 가지 정책목표의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이다. 중국이 북한체제의 안정을 우선시한답시고 핵실험에 대해서도 묵인하고,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에 대해서도 묵인하고 방조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이러한 태도가 오히려 북한의 정책변화를 지연시키고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제재를 더욱 연장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결국 중국이 북한체제의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악화시키고, 지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중국이 북한의 체제 안정은 물론이고 비핵화도 실패하고 있으며, 비핵화가 지연될수록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도 더욱 연장될 수밖에 없다. 북한체제가 결국 안으로부터 폭발할 수밖에 없도록 조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이 북한에 대하여 취하는 조치들이 과연 중국을 위한 것인가, 북한을 위한 것인가, 우리 한국을 위한 것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답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