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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금의 설연휴」 즐겁게/가족과 「온천 산행」 재충전의 기회로

    ◎1∼2일 코스 가볼만한 곳 안내/주왕산­백암온천/빼어난 산봉우리… 신경통·위장병에 특효/설악산­천산온천/눈꽃 절경… 나트륨 함유된 세계적 희귀천 황금의 설연휴.온가족이 겨울철 최고의 건강법인 「온천 산행」으로 재충전의 기회를 가져봄직하다. 등산으로 굳어진 몸을 풀고 온천욕을 하면 신진대사가 활발해지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연휴 중 하루나 이틀쯤 시간을 내어 온천 산행을 겸할 수 있는 코스를 알아본다. ○수온 70도… 전국 최고 ■용봉산­덕산온천=충남 홍성군 용봉산(3백81m)은 산세가 낮아 가족들이 부담없이 오를 수 있고 오밀조밀한 기암 괴봉들이 덕산온천까지 능선으로 이어져 「금강산의 축소판」으로 불리운다.용봉국교∼산정상∼마애석불∼수암산코스로 3시간 정도 등산을 마친 후 내려오면 덕산온천에 닿는다.덕산온천은 칼슘·나트륨·불소 등이 함유돼 신경통·류머티즘 등 노인성 질병에 좋다고 꼽힌다. ○“노인성질병에 효험” ■화왕산­부곡온천=경남 창녕군 화왕산(7백56m)은 부마고속도로 개통 이후로 인근의 부곡온천과 더불어 각광을 받고 있다.산은 높지 않으나 산세가 아름답고 규모 또한 큰편이다.창녕여중∼도성암∼화왕산성으로 내려오면 된다.하산 후 승용차로 10분거리에 부곡온천이 있다.수온이 70도에 달해 전국 온천 중 가장 높고 유황을 다량함유,관절염·피부병·신경통 등 부인병에 효험이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동굴·폭포도 잘 알려져 ■주왕산­백암온천=주왕산(7백60m)은 청송군과 영덕군에 걸쳐 있다.관음봉·촛대봉 등 산봉들 이외에도 주왕굴·무장굴 등의 굴과 월외·주산 등 이름난 폭포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대전사∼자하교∼제일폭포∼칼등고개∼대전사의 3시간 거리이다.주왕산입구(대전사)에서 백암온천까지는 승용차로 40분거리. 백암온천은 라듐이 많이 함유된 국내 유일의 알칼리성 방사성 온천으로 신경통·위장병에 특히 효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설악산­오색·척산온천=설악산(1천7백8m)은 자연경관과 고찰이 잘 어우러진데다 겨울산행의 절정인 「눈꽃」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는 곳.산자락에 온천이 있어 더욱 안성맞춤이다.매표소∼신흥사∼흔들바위∼울산바위를 왕복,척산온천으로 향하거나 매표소∼권금성∼화채봉∼대청봉∼오색온천,백담사∼수렴동대피소∼봉정암∼대청봉∼오색온천 등 코스가 다양하다.척산온천은 속초시 노학동에 있는 천연 알카리천.나트륨이 함유된 세계적인 희귀천으로 피부병·안질 등에 효과가 있다.오색온천은 한계령 동쪽 밑 금표교에서 북쪽으로 4백미터 거리에 있는 알칼리성 단순천이다.
  • 이슬람교 상륙 거점… 에이티갈시원 웅장(서역문화기행:8)

    ◎동서문물 교류 실크로드의 중심지/중국 서쪽끝 도시 카시갈/녹색돔의 전도사 호오쟈가족묘… 궁전 방불/중국최초의 석굴시원 삼선동도 시외곽에… 생불벽화 유명 호탄에서 중국 최서단 도시로서 이슬람교의 중심지인 카시갈까지 5백9㎞는 필자에게 신선한 체험을 안겨주었다. 그밤이 팔월 한가위 어스름 저녁,고물딱지 장거리버스에 올랐다.승객은 온통 위구르족.꼬박 밤을 새우면서 열두시간을 달렸다.차창의 깨진 창틈으로 몰아치는 고춧바람에 기침이 나도록 맵디매운 담배연기,그리고 양고기 노릿내,그것들이 시간마다 코란의 독경소리와 범벅이 되어 눈과 귀를 찌르는데 창밖의 몽롱한 달빛에 스쳐가는 부연 모래빛,가도 가도 불빛 없는 바다에 뜬 느낌이었다. 카시갈은 옛날 소륵국의 도읍지.우전이나 마찬가지로 한나라 때는 36국의 하나요,당나라 때는 안서사진의 하나였다.「한서」,서역전의 기록대로라면 장안에서 9천3백50리(4천6백75㎞)지점,벌써 2천년전의 호구가 1천5백호에 인구 8천6백여명,거기다 시열,그러니까 오늘의 바자,곧 장을 말하는데 카스갈의 바자는 아직도 전중국을 대표하고 있다. 중국은 한나라 때부터 그들의 국토방위를 위한 최서단 요새로 생각했었다.후한 때의 명장 반초(33∼103)가 파미르고원을 넘어 쳐들어온 쿠샨왕조(대월씨국)를 대파하고 그의 부하인 감영을 무역의 사절로 로마에 파견한 것도 여기였었다.인도의 불교가 동점한 최초의 거점도 여기요,중동의 이슬람교가 상륙한 최초의 거점 또한 이곳이었다. ○로마로 넘어가는 관문 그도 그럴것이 카시갈은 알타이산맥으로부터 시작한 타림분지가 솟아오르면서 파미르고원으로 달려가는 바로 해발 1,294m의 낮은 고원지대라는 지리적 특색을 살린 곳이다.거기서 파미르고원을 넘으면 곧장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이란·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기스탄 등의 관문으로 통한다.그러니까 로마로 넘어가는 실크로드의 중국측 마지막 역참인 것이다. 중국에서 실크로드의 의의를 동서의 교통과 무역외로 서역의 침입을 막고 중원을 지키겠다는 국방에 두지만 그에 못지않은 의의는 예술에 있다.예술의 가시적인 성취는 무엇보다 석굴이다. 석굴은 사실상 「석굴사」 혹은 「석굴암자」의 약칭이다.그것은 벼랑이나 석굴속에 설시한 불교사원으로 초기불교가 「이진수행」을 제창함에 비추어 석굴은 적지였었다.석굴은 속세의 잡음이 들리지 않는데다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한 이점 탓에 불교의 고사와 원리를 벽화로,석가를 비롯한 보살·미륵을 조각하기에 좋았었다. 기원 3세기전부터 인도에서 성행했던 석굴 개착은 그로부터 대략 5세기 뒤인 동한말,그러니까 기원 200년 전후해서 중국에 출현했으니 그 최초의 석굴이요,최서단의 석굴이 카시갈에 있다.바로 「삼선동」. 삼선동은 위구르말로 「투쿠자우지라」.그 이름 그대로라면 세사람의 신선이 사는 동굴이지만 실상은 세개의 석굴을 말했다.카시갈에서 북쪽으로 18㎞지점,차크마크(흡극마극)강을 따라 황막한 사막을 달리다 문득 그 강둑에 멈추었다.대절한 택시기사는 남쪽 벼랑을 가리킨다.파미르고원에서 흘러내리는 설수의 강인데 강폭은 1백50m를 넘을 만큼 넓었다.필자 혼자서 차크마크를 건너서 조금전 택시기사가 가리키는 곳까지 족히 20여분을 헐레벌떡 뛰었다. 삼선동은 하상으로부터 15m쯤 벼랑,그 12m쯤 높이에 1m 남짓의 간격으로 나란히 뚫린 세개의 석굴이어서 필자는 지붕위에 매단 비둘기집 상자를 보는 느낌이었다.중간석굴이 약간 컸지만 대체로 높이 2m 남짓에 너비 2m쯤.거기서 벼랑끝도 3m 남짓 보였다. 그속에 한말 불교미술이 아직도 남았다니 나그네의 속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옛날 인수봉 타던 가락으로 적갈색 그 벼랑을 올랐지만 겨우 4m 높이서 쩔쩔매고 말았다.그 나머지 수직의 암벽은 어쩔 수 없었다.미리 알았더라면 조립식 사다리를 준비하거나 아예 벼랑의 상단에서 자일을 묶고 낙하할 것을. ○전래 불교미술의 원형 자료에 따르면 석굴은 굴마다 전후 2실로 나뉘었다고.서굴과 중간굴은 텅텅 비어 있고 오직 동쪽 석굴만이 진귀한 미술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특히 70여개의 불상이 사방을 벽화로 메운데다 조정(물풀을 그린 천장)에는 연꽃이 그려졌다고.그중에도 미술사적·불교사적 초점의 벽화는 그 벽화중의 좌불한 컷으로 ,그 좌불은 방격무늬의 가사를 입고 거기에 녹색·남색·홍색 등 세가지 색깔이 어울린 채색의 구성이라고 했다.그것은 인도불교가 중국 전래당시 불교미술의 초기적인 원형을 보인 것이다.무엇보다 쿠츠의 키질천불동이나 돈황의 막고굴보다 연대가 앞선데다 간다라의 영향조차 보이지 않는 점에서 주의를 받아왔었다. 삼선동 그 석굴에 발을 디디지 못한 채 돌아서는 필자는 청나라 시인 철보(1752∼1825)가 카스갈의 지방관으로 귀양살이하던 1810년 무렵에 쓴 「유삼선동」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칠십이동천,무지용탁석. 내찬소륵서,착공의암벽. 응고적선인,도명둔공적. 산황운불서,석쇄사여격. 위제고백인,욕상심전탕. 선인불가견,선동차친력. 적환여적선,탑연경수적.」 (세상엔 72동천의 선계가 있다지만,중 하나 설 곳 없네. 카시갈 서쪽으로 숨어,석굴을 파고 암벽에 기댔네. 신선이 여기로 귀양와서,명예를 피한 채 적막세계로 숨은 거지. 산이 거칠어 구름조차 깃들지 못하고,돌이 부서져 모래는 여울처럼 흐르네. 백길되는 아스라한 사다리에,발을 딛자 후들거리는 마음. 신선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고,사람은 여기 삼선굴에 올랐네. 귀양살이 이 사람도 속세의 신선처럼,우두커니 다시 누굴 따를까?) 근 2백년이 지났건만 차크마크강은 예대로 황량했다.예전의 사다리마저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매일 다섯차례씩 예불 카시갈에서 불교의 유적이 삼선동에 상징적으로 남았다면 이슬람교의 유적은 카시갈이 이슬람교의 중심지답게 웅장하고 찬란하다.우선 이슬람의 예배당으로 4백50여년의 역사에 1만7천㎡의 면적을 지닌 맘모스의 에이티갈(애제□이)사원이 있고,이슬람의 일개 무덤으로 아바호오쟈(아파곽가)같은 궁전식 능묘가 그것이다. 카시갈시의 해방북로에 있는 에이티갈사원은 중국 최대의 청진사다.아랍어와 이란어의 복합사인 「에이티갈」은 곧 예배당을 뜻하는데 1426년 당시 카시갈의 통치자였던 사크서즈 미잘의 후예가 세운 것이다. 그 사원은 넓은 땅에 돔과 첨탑을 배합한 예배당·독경당·문루·연못 등의 장엄한 외형이 나그네의 시선을 끌지만 사원의 광장으로부터 중정·본전까지 사원 전역에매일 새벽부터 드리는 다섯차례의 예배,더구나 매주 금요일 하오에 드리는 주말예배의 성황은 열렬하다.신도 모두가 깔개를 깔고 이맘(예배의 인도자)이 암송하는 코란에 따라 무겁게 화창하는 군중의 소리는 파도되어 출렁이고,다시 신도들이 대지에 이마를 조아리며 무엇인가 외치는 장면은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카시갈시 동북쪽 5㎞지점의 하오한(호한)촌에 있는 호오쟈의 무덤은 우리의 상식과 너무 달랐다.작은 개울을 건너 낮은 언덕을 올라 고목 서너그루 아래로 말굽형의 아치를 들어서면 왼쪽으론 줄줄이 높은 기둥의 예배당이요,바른편에는 기다란 담안으로 마치 궁전을 방불케 초록빛 타일의 돔이 우뚝 솟아 있다. 궁궐의 문을 열 듯 대문을 열자 그 안에는 침침한 광선에 무거운 침묵이 덤벼오면서 울긋불긋 현란함을 느꼈다.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것들은 야외의 봉분이 아닌 옥내의 설단식 무덤이었는데 강렬한 채색의 주단이 그 관을 덮고 있는 모습은 마치 1인용 텐트를 치고 있는 야영장을 방불케 했다. 3백50여년전 이슬람교 전도사였던 호오쟈로부터 5대에 걸친 그의 가족 72명의 집단 묘지였다.그 안에는 청나라 건륭황제의 부름으로 궁궐에 갔다가 황제의 구애를 거절하고 자살하였다는 호오쟈의 딸 향비의 묘도 있다.비록 전설이지만.
  • 「2만년전 선사동굴벽화」불서발견/표범·올빼미 등 동물그림 3백여점

    ◎“세기의 고고학적 개가”… 보존상태 완벽 【파리 AP 로이터 연합】 2만년전 빙하기의 동물들을 그린 선사시대 벽화 약3백점이 프랑스 남부지방의 동굴속에서 프랑스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관리들이 18일 밝혔다. 자크 투봉 문화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아르데슈강 협곡의 동굴들을 조사하던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말·사자·들소·곰·표범·매머드·올빼미·야생염소·털많은 코뿔소 등이 그려진 이 원시시대 그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과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속의 그림에 필적하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일부 관리들은 『세기의 희한한 고고학적 발견』이라고 지칭했다. 투봉 문화장관은 『이것은 보기드문 발견이자 인류의 보물』이라고 말하고 동굴벽화들은 대부분이 기원전 2만년∼기원전 1만7천년의 것인듯 하다』고 덧붙였다. 이 벽화들과 조각품이 있는 동굴은 지난달 24일 선사시대 유물을 조사하던 문화부 관리 장 마리 쇼베와 두 보좌관이 발견했으며 그 위치는 파리 남쪽 4백60㎞,아비뇽 서북 50㎞ 떨어진 아르데슈협곡으로 깊이가 약5백m 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길이는 수백m에 이른다. 프랑스 문화부는 이 동굴벽화들의 발견 사실을 발표하면서 『가장 위대한 선사시대 미술작품의 하나로 완벽한 보존상태에 있다』고 말했으며 전문가들은 표범과 올빼미를 그린 선사시대 그림으로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 벽화들은 평균 높이가 약40㎝인 동물들이 서있거나 뛰고 있는 광경의 그림으로 오래전에 멸종된 종류의 몇몇 코뿔소는 뿔을 서로 비비면서 싸우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선사시대 벽화들은 대체로 숯을 기름·물 또는 다른 액체와 섞은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문화부는 그림양식이 비슷해 같은 사람의 솜씨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벽화 발견 사실을 뒤늦게 공표한 것은 구경꾼들로부터 벽화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는데 지난 13일 관리들은 일반인의 이 동굴 출입을 금지하는 비상조치를 취했다. 투봉 문화장관은 18일 이 동굴이 훼손되기 쉬운 귀중한 유물들의 보존을 위해 앞으로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다고 발표했으며 문화부는 비디오,컴팩트디스크,기타멀티미디어기법등을 통해 이 벽화들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 굴업도개발 7백50억지원/정부,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구체계획 마련

    ◎주민운영 감시시설 “절대안전” 역점/주변 임해관광지 개발… 보상 최대한 경기도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의 방사성페기물처분장입지를 확정한 정부는 시설지구개발계획 주민열람,지역협의회구성,공청회개최등 최종적인 부지지정고시를 위한 절차를 추진하는 한편 관리시설지구개발계획(안)및 지역지원사업추진계획을 마련,주변지역주민 설득작업에 나서고 있다. 정부가 13일 마련한 시설지구개발계획및 지원사업계획에 따르면 처분장이 들어서는 굴업도는 절대적으로 안전하고 깨끗한 처분시설로,주변지역인 덕적도등은 전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모범마을의 하나로 가꾼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로 돼 있다. 정부는 오는 2001년까지 총 7천억원을 투입,중저준위폐기물 20만드럼,사용후핵연료 4백MTU(사용후 핵연료의 질량단위·메트릭톤우라늄)를 수용할 수 있는 처분시설을 1단계시설로 완공할 계획을 갖고 있다.이 시설의 사업비(시설건설비 제외)는 1천3백11억4천만원규모로 이중 3.3%인 42억8천만원이 토지매입및 보상비로 책정됐다.그러나 이 액수는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한 것일뿐 정부는 공시지가가 아닌 시가보상을 원칙으로 하고 법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최대한 보상을 할 계획이기 때문에 실제보상비는 대폭 상향될 전망이다. 정부는 또 굴업도및 주변지역에 대해 향후 37년간 총 1천7백50억원을 투입,이 지역을 서부수도권 임해관광지로 개발한다는 계획이어서 지역경제의 활성화가 예상되고 있다. 면적 1백86만㎡(56만3천6백10평)의 굴업도지구에는 ▲폐기물이 들어가는 종합관리시설(7만9천9백94평) ▲항만 전력공급(7MW규모) 정비관리동 등의 공통지원시설(3만9천2백40평) ▲독신료(독신자용 숙소 1백6명분)·사택(10가구)·체육시설·홍보관등의 복지시설(4만6천6백37평) ▲녹지및 기타시설(39만7천7백39평)등 기능별로 크게 4부분의 시설이 들어선다. 종합관리시설중 중저준위폐기물처분시설은 사업부지 서측 바다밑(그림참조)에 지하로 깊이 들어가는 해저동굴처분방식으로 지어지며 섬의 남측 만지역에 건설될 항만시설및 인수검사시설과는 지하터널로 연결되도록 계획됐다.사용후 핵연료저장시설은 경수로형과 중수료형을 구분해서 저장할 수 있도록 2개 부지로 나누어 배치되며 개별시설은 수납및 저장시설 외에 수송차량이동공간및 완충지역으로서 시설물주위에 약 20m정도의 통제구역을 둘 계획이다. 공통지원시설중 항만시설은 2천∼3천t급 전용운반선 2척이 접안할 수 있는 규모로 건설되고 간조때도 수심 6t이상을 유지하도록 준설할 계획이다.전망이 좋은 구릉지에 배치될 홍보센터는 전시관·영화관·휴식공간,주민운영의 환경방사선감시시설을 설치,섬에 상주할 88명의 인원 외에 하루 1백명정도의 방문객을 받는다는 계획이다.정부는 이같은 시설외에도 오수처리시설·폐수처리시설등 환경보전에도 만전을 기할 방침이다. 한편 주변지역 지원금은 올해 상반기중 일시에 출연될 특별지원금 5백억원을 비롯,건설기간 7년동안 연간 50억원씩 3백50억원,시설운영기간 7년동안 연간 50억원씩 3백50억원등 총 1천7백50억원이 소득증대사업및 공공시설사업·육영사업등에 투입된다. 정부는 22일까지 개발계획에 대한 주민열람및 의견제출을 마감하고 25일 인천시 중구 민방위교육장에서 공청회를 가진 뒤 2월중순까지 시설지구개발계획을 최종지정,고시할 계획이다.정부는 방사성폐기물과 관련된 연구소시설의 입지에 대해서는 덕적도·영흥도·대부도중에서 검토,처분장 고시와 동시에 확정키로 했다.
  • “김정일 권력승계 못할 가능성”/성균관대 이명영교수 특별기고

    ◎계엄통치 장기화는 군력암투 증거/일부서 정치국 집단지도체제 요구/당중앙위·최고인민 회의도 못열려 북한은 지금 계엄통치아래 있으며 내부 권력투쟁이 치열한 나머지 김정일의 국가주석및 당총서기 승계가 지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칫 승계자체가 이뤄지지 못할 가능성도 엿보인다는 분석이 나왔다.이는 북한문제 권위자인 성균관대 명예교수 이명영박사(정치학)가 28일 서울신문에 보낸 특별기고의 내용이다.이박사는 이 기고에서 지난 23일 평양에서 열린 「김정일 군최고사령관 추대3돌 중앙보고대회」에서 군총참모장 최광이 밝힌 「전투동원태세」가 바로 계엄상태를 뜻하는 것이며 김정일은 계엄하의 군최고사령관으로 지난달 9일 평상시 같았으면 공식명령권이 없었을 정무원에 건설공사의 자재조달을 맡기는 명령을 내렸다고 풀이했다.이박사는 이어 지난 10일전후에 열려 김정일을 최고권력자로 공식선출했어야 할 북한의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가 열리지 못한 사실등을 김정일유일지도체제를 요구하는 김정일파와 정치국의 집단지도체제를 바라는 반금정일파의 권력암투가 극에 달해있는 증거로 제시했다.이박사의 기고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이 죽은지 다섯달이 넘었다.일당독재의 전체주의국가에서 당과 국가의 최고책임자가 궐석이라는 사태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그래서 관측자들은 늦어도 예년의 경우대로 12월에 있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에서는 모종의 결론이 날 것으로 보고 있었다.그러나 괴이하게도 올해같은 중요한 때에 전원회의도 최고인민회의도 열리지 않았다.최고책임자 자리는 빈 채로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북한에서는 서정백반을 지휘 조정하는 권한은 어떤 형식으로 누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일까.북한의 보도기관들은 「당과 인민의 지도자」는 「김정일동지」라고 쉴새없이 광고하고 있기는 하다.그러나 당의 대외발송 문건은 당중앙위원회 명의로 되어 있고 외국 사절의 접견은 부주석이 맡고 있으며 정부의 대외발송 문건은 중앙인민위원회 명의로 되어 있다.통치권 담당의 주체가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애매 모호한 평양정국을 투시하는데 중요한 길잡이로 되는 것이 실은 지난 11월9일자로 발표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정일」의 「명령 제51호」였다.청류다리 2단계와 금릉 2동굴 건설을 당 창건 50돌이 되는 내년 10월10일까지 마치라는 내용인데 그 명령속에 정무원에 대한 지시가 포함되어 있었다.건설공사는 인민무력부에서 담당하되 거기에 필요한 설비와 자재는 정무원에서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북한 헌법에 보면 각종 건설업무는 정무원 소관사항으로 되어 있다.정무원은 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의 지도를 받게 되어 있다.그런데 주석도 중앙인민위원회도 아닌 군 최고사령관이 정무원에 명령을 내리고 있다.국가 질서를 문란케 하는 월권도 이만저만이 아니다.이것이 불법월권이 아니라면 북한은 일종의 계엄통치하에 있는 것이다.계엄통치라면 군 최고사령관에게 명령권이 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절접견 부주석이… 김 신병설 유포 갈등 은폐 이 계엄통치하에 있다는 이 분석을 뒷받침해주는 확실한 증거가 지난 23일에 열린 「김정일 군 최고사령관추대 3돌 중앙보고대회」에서 나타났다.정무원 총리,부주석 등 당과 정부와 군의 고위간부들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군 총참모장 최광이 기념보고를 했는데 김정일에 대한 충성과 더불어 「전투동원태세」의 견지를 역설했던 것이다.즉 북한이 「전투동원태세」속에 있으며 그것을 더욱 견지해야 한다고 최광은 말한 것이다. 전투동원태세란 무엇인가.우리 말로 한다면 계엄의 한 종류인 것이다.어느 나라에나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장치가 있다.북한은 그것을 여섯단계로 나누어 놓고 있다.가장 경미한 「경계태세」에서부터 「전투경계태세」.「전투동원준비태세」,「전투동원태세」,「준전시상태」,「전시상태」까지가 그것이다.앞의 두가지는 인민무력부에서 발령하지만 뒤의 4가지는 군 최고사령관이 발령하는 것이다. 이들 비상사태는 공개적으로 발령되기도 하고 비공개로 하기도 한다.북한이 김일성의 사망을 비상사태로 보고 대처했을 것은 남한에서 박정희대통령의 사망을 비상사태로 보고 계엄을 선포했던 것과 견주어보면 쉬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지금 북한에서 실시되고 있는 전투동원태세에서는 당 중앙위원회나 정무원이나 인민부력부가 모두 그 업무체제를 최고사령관 중심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태세이다.그래서 김정일은 최고사령관 명의로 정무원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김일성의 사망으로 돌입한 전투동원태세는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대개의 경우 최고통치자의 유고로 실시되는 비상사태는 늦어도 후계자가 결정되면 해체되게 마련이다.지금 북한을 둘러싼 군사적 위험은 없다.후계자만 결정되면 비상사태도 필요없다.그런데 그 후계자는 김정일로 20년전부터 결정되어 있고 금상첨화로 비상사태로 권력이 그에게로 집중되어 있다.빨리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를 열고 선출절차만 밟으면 된다. 그런데 왜 그것을 못하고 있는가.지난 11월27일자 서울신문을 통해 지적했듯이 당 정치국 안팎에서 김정일의 유일지도체제이냐,당 정치국 집단지도체제이냐를 놓고 당론이 일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당론 불일치의 원인은 김일성이 생전에 김정일의 정치국상무위원 자리를 박탈한 데 있었다.물론 일부 관측통은 김정일의 신병 때문에 선출이 늦어진다고들 보고 있지만 비상사태에서 정권을 잡고 있을 정도라면 신병은 신병이로되 결정적인 원인은 아닐 것으로도 보인다. 북한으로서는 내부 갈등으로 김정일이 최고통치자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래서 신병설을 유포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과거에 그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됐다고 허위 정보를 유포시켰을 때를 생각한다면 저간의 사정에 통찰력이 생길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정말로 신병이 문제라면 과거에도 최고의 의료를 받았을 터이므로 이제는 그의 시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징조이다.
  • 투루판분지 고창고성(서역 문화기행:5)

    ◎서한군이 지은 토성… 내·외성 2중구조/성복판에 망루… 인도식 원형불탑 남아/서쪽 사막지대엔 고분 5백여기… 고대문서·미술품 등 유물 20년간 1만여점 출토 아테네가 로마의 폐허에 들어서면 보이느니 돌기둥에 돌계단이지만 서역의 폐허에 들어서면 모두가 흙의 덩어리요 흙의 동굴이다°그 황색의 폐허는 중국의 감숙·섬서는 물론 산서·하북·하남·산동 등 황하가 흐르는 그 언저리였다. 걸핏하면 토성의 자드락길이요,때로는 치열하게 활싸움을 벌였던 보루의 주춧돌이었다.그런 흔적들을 보면 흙은 먼지가 아니라는 사실과 그러한 폐허가 결코 앙상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된다.투루판에는 그러한 역사의 현장으로 두군데의 고성이 있다.하나는 서쪽 13㎞지점에 있는 교하고성이요,다른 하나는 동쪽 40㎞ 지벙에 있는 고창고성이다. 고창고성은 바로 베제크리크천불동이 있는 무르룩계곡을 빠져나와 승금구에서 약간 남쪽의 언덕위,그러니까 멀리 화염산이 병풍처럼 북쪽을 가린 나직한 오아시스에 세워진 성곽이다. 교하고성과 비슷한 역사배경을 지닌 고창고성은 교하보다 1세기,차사왕국에 주둔한 서한둔전부대가 축조한 것이다. 그곳은 적어도 한 두개의 사단 병력이 훈련을 받다가 세워총을 하고 휴식중인 연병장을 방불케 했다.5㎞의 둘레에 2백20만㎡의 넓이,바로 그러한 광장인데 그 유적들은 모두 올망종망한 높이로 유적과 유적사이의 길조차 좁고 꼬불꼬불 하였다.그것은 교하의 토성이 흙 자체의 판축인데 반해 고창의 것은 흙벽돌의 축조라서 무너지기로 말하면 와르르 붕괴되었기게 그렇다. ○외성엔 4개문 설치 그들 설계의 구도도 달랐다.교하의 그것이 남북의 중앙대로를 중심한 동서의 정연한 분포임에 비추어 고창의 그것은 불규칙한 정방형의 외성이 있고 한 복판에 내성이 있는 이중구도로서 그 내성의 주위로 사원이나 민가들,다시 변두리로 무덤들이 산발적으로 분포된 것으로 보였다. 온전한 외성은 12m의 높이며,그 두께도 넉넉했다.그동안 출토된 기록에 따르면 외성 4면에 「현덕문,「금복문」,「금장문」,「건양문」,「무성문」등의 성문이 가설되었다고 한다.과연 외성의 풍모는 당당했다.내성 어디쯤으로 보이는 복판에 국기대나 첨성대인양 높다란 축대가 솟았는데 거기에 규칙적으로 뚫린 구멍으로 보아 당시 둔병을 총지휘하던 교위의 청사나 말대쯤으로 쓰였을지 모른다.보다 분명한 유적은 동남쪽과 서남쪽에 남은 불사의 폐허였다.동남쪽의 그것이 인도식 불탑의 원형층탑이라면 서남쪽의 그것은 사각의 튼튼한 기초위에 원형의 건물이다.그 언저리로 널따란 마당에 우두커니 선 필자에게 적어도 천년전 서로 다른 피부에 서로 다른 언어와 복장들이 오락가락하면서 희희낙락했을 그 소리들이 들리는 듯 했다. 명나라 초엽의 명시인이었던 진성의 「화주성」이란 시가 바로 이 자리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창구치월씨서, 성곽숙조시사희. 유적상존당제도, 거인쟁도한관의. 범궁영락류금상, 신도류량와석비. 정마불지풍토이, 격화유자인시」. (고창은 옛날 월씨의 도성 너녘, 성곽은 썰렁한채 저자도 한산해. 폐헤엔 아직도당나라 법도, 주민들은 다투어 한관을 쳐다보네. 절터엔 스산하게 공부처가 뒹굴고, 신도엔 황량스레 돌비석이누웠네. 전마는 달라진 풍토에 영문 모른채, 꽃 그늘에 사람보고 소리지르네) ○현장법사도 머물러 지금부터 6백년전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그때만해도 성곽이나 사원은 무너졌어도 유물은 즐비한데다 아직 주민들이 살았음을 짐작케 한다. 여기서 고창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고창성을 다스렸던 회골의 마지막 고창국왕인 훠츠할(화적합이)이 몽골군의 위공에 못견디어 전사하고 그 전화로 소실되던 1275년까지 고창은 1천4백년동안 때로는 군현의 치소로,때로는 와국의 서울로 그 나름의 번영과 웨세를 부렸던 곳이다. 기원전 1세기는 서한 둔병들의 주둔지로,기원 327년엔 전향(전량)의 군현으로,기원 460년엔 원주의 함·장·마·국씨 등이 서로 번갈아 「고창국왕」을 1백40년이나 누리다가 640년에는 당나라의 군현으로,840년에는 회골족이 와국을 세워 가장 강력한 왕권을 부리다가 훠츠할에 다다른 것이다. 무덥고 낮은 투루판에도 많은 와국이 엎치락 뒤치락 흥망을 반복했지만 가장 오랫동안 흥성했던 와국으로 두말할 것 없이 서로 쿠처(고차),동으로 하미(합밀),북으로 천산의 북록 창지(창길)까지 넓은 영토를 4백년이 넘게 떵떵거렸던 회골의 「고창왕국」을,그리고 가장 흥성했던 군형시기로 한·당(한·당)두 조대를 들수 있겠다.그것은 고창이란 지명이 곧 한나라때 대완국을 원정하던 이광장군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 「지세가 높고 넓은데다 백성이 창성하다(지세고창 인서창성)는 뜻으로 미뤄보아 그렇고,당나라 때인 630년 2월경 현장법사가 인도로 가던중 고창왕 국씨의 요청으로 한달이나 머물면서 불법을 강론했다는 데서도 문물이 성행했음을 알게한다. 당나라와 당나라 이전의 문물이 출토되어 「투루판문서」로 불리는 지하박물관은 바로 고창고성의 서단 하라허줘촌 사막에 있었다.이름하여 「아스타나(아사탑나)고분」.50년대말에서 70년대까지 계속된 발굴탐사에서 드러난 5백여 고분은 10여㎦의 넓은 모랫벌에 묻혀 있었다. 그것은 흡사 우리나라 한강변 고수부지에 쌓아 둔 동그란 모래 둥지 같았다.도시 이토록 삭막한 사막에 무덤은 웬 일이며 더구나 거기서 2천7백여점의 고대문서를 포함한 만여점의 미술품·농기구·생활구등이 쏟아져 나왔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대부분 부부합장 묘 필자가 답사한 세걔의 무던은 그 구조가 대체로 비슷했는데 지상에서 비스듬히 팬 1·20m의 묘도를 따라 묘실에 들어가면 안창에는 묘주의 시신,그 중간에는 두개 혹은 네개의 이실이 사랑방처럼 양쪽에 설시되어 있었다.삼면의 묘벽에 벽화를 두르고 누운 시신은 대체로 부부,그것도 미라로 누웠고 그 미라 가운데로 장난감같은 헌금함,그 뒤로 삶인지 죽음인지 알수 없도록 희미한 불빛에 묘실을 지키는 소년이 졸고 있었다.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소년은 웬걸『시원해서 좋다』며 빙그시 웃었다.하긴 서역 사막에서 미라를 만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건조한 기후와 토질 때문에 시신도 얼른 수분을 뺏긴 채 건시로 남는다 했다. 진나라에서 당나라때까지 고창 주민들의 공동묘지였던 아스타나무덤에는 뜻밖에 북량의 장군으로부터 당나라의 도호같은 고관도 끼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부부합장,혹은 가족합장이었고,관목보다는 초석이나 목판같은 간소한절차를 따랐음에도 그 속에 벽화와 문물을 시설허가너 부장한 것이 특기할만 했다. 특히 필자가 보았던 인물화나 동물화같은 벽화는 진·남북조시기의 사실적이면서 전원적인 생활의 단면이 생동하게 표현되어 있었다.그것들은 어쩌면 무덤의 주인이 살았을 때의 생활이요 윤리였을 것이다. 아스타나고분에서 투루판으로 돌아오는 도중,투루판 동쪽 2㎞지점에 있는 훤칠하고 준수한 건축물인 「에민탑(액민탑),속칭 소공탑을 답사했는데,1777년 투루판 군왕이었던 에민의 수복을 빌기 위해 그의 아들 수라이만(소래만)이 청대의 이름난 위구르족 건축사 이푸라인(이포랍음)을 시켜 세운 높이 37m 72단 사다리의 이슬람식 탑이다. 커다란 강당크기의 예배당 입구에 우뚝 솟은 탑신에는 삼각·물결·꽃잎·마늘덩굴등 열몇가지 무늬가 적갈색으로 새겨져 있는데 얼핏 단조로운듯 하면서도 근엄한 분위기를 뿜으면서 멀리 천산산맥의 만년설을 마주보고 있다.이 탑은 그 탑기에 새긴 비문이 한문과 위구르문자인 것처럼 또 한가지 성공적인 동서 융합이었다.
  • 굴업도/최첨단 원자력단지로 가꾼다/정부의 핵폐기물 처분장 청사진

    ◎「중저준위」 영구처분시설 2천1년 준공/의료혜택·관광지 개발 등 주민복지 지원 6년간을 끌어온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부지로 굴업도를 최종 확정함에 따라 우리나라도 원자력 폐기물에 대한 국가 종합관리 시대에 들어섰다.정부는 올들어 모든 여건을 감안해 연내 후보지를 선정키로 방침을 정하고 사업을 추진,7개의 임해지역과 3개 도서지역중에서 굴업도를 최종 선택했다. 현재 굴업도는 섬이어서 시설운영이 어려울 뿐 아니라 해상수송에 따른 수송비용이 많이 들고 예기치 않은 기상등으로 위험부담이 크다는 지적도 있다.정부가 이런 비판론에도 불구하고 굴업도를 최종 카드로 낙점한 배경은 울진 등 일부 후보지역 주민들의 심한 반발 등으로 육지에서의 부지결정이 수월치 않아 고육책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정부가 이날 발표한 방사성 폐기물 관리시설지구 개발계획안을 보면 우선 내년 상반기중에 이 지역에 대한 시설 계획안을 승인·고시한 뒤 6∼7년안에 모든 공사를 마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구체적 시설지구는 육지부가 1백만7천㎥,매립부가 14만6백28㎥로 원자력연구소가 사업을 수행한다.주요입지 시설은 중저준위 폐기물영구처분 시설,사용후 핵연료 중간저장시설,부대 항만시설 등이다. 따라서 원자력시설을 위한 부지특성평가와 환경영향 평가를 거쳐 96년 부지조성 공사에 들어가 동굴처분방식의 중저준위 폐기물 영구처분장은 빠르면 2001년쯤 준공될 것으로 보인다.처분규모는 처음 25만드럼이지만 점차적으로 1백만드럼까지 늘려나간다는 방침이다.1만5천t의 저장능력을 가지게 될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 역시 2001년중 준공이 예상되고 있다. 부대시설로는 통신·전력공급시설등 공공지원시설,사택,홍보관,환경방사능감시센터등이 있으며 항만시설은 2천∼3천t 규모의 선박이 접안할 수 있도록 건설된다. 폐기물 관리시설의 배후 지원업무를 맡게 될 연구단지의 경우 굴업도가 면적이 좁다는 점 때문에 인근 도서에 들어서게 되는데 현재로서는 영흥도와 덕적도가 유력한 후보지로 꼽힌다. 한편 「방사성폐기물 관리사업 촉진법」에 의한 지원금은 페기물 시설이 들어설 덕적면에 70%,인접 면에 30%의 비율로 배분될 예정이다.또 5백억원의 지역발전기금은 주민대표로 구성된 이사회를 통해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운영·관리하게 된다. 이밖에 주요지원사업은 ▲서포리 국민관광지 개발지원 ▲영농 및 영어 관리시설 지원 ▲의료시설 설치 ▲주택개량 및 생활환경 개선 지원 ▲주민자녀에 대한 학자금 및 장학금 지급 ▲현지 생산 수산물의 안정적 판로 유지등이 있다.또 방파제 및 선착장 건설을 지원하고 덕적도와 자도간 종선을 운영하며 현지주민 우선 고용혜택도 줄 예정이다. 정부는 이같은 개발계획을 23일부터 내년 1월 22일까지 1개월동안 과기처 원자력개발과와 옹진군청 지역경제과,덕적면사무소에서 열람시키며 의견을 접수한다. ▷동굴식 처분 방식◁ 정부는 천층처분과 동굴식처분등을 고려해오다 가장 안전한 스웨덴의 방사성폐기물 관리방식인 동굴처분방식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이 방식은 천층처분에 비해 2∼3배의 비용이 더 드나 안전성을 고려한 것이다. 현재 스웨덴은 중저준위폐기물을 스톡홀름에서 북쪽으로 2백㎞에 위치한 포스마크 원자력발전소(3기) 근처 수심 50m에 건설된 해저동굴처분장인 SFR에 보관해 오고 있다.지난 88년부터 운영되고 있는 이 해저동굴처분장은 폐기물로 가득 채워지면 입구를 콘크리트로 차단해 더 이상 접근과 감시가 필요없도록 설계됐다. 스웨덴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해저동굴처분방식을 택하게 된 이유는 전국토에 걸쳐 암반이 잘 발달되어 있는데다 세계적인 수준의 암반굴착기술까지 보유하고 있기 때문으로 알려진다.굴업도 처분장이 이 방식으로 건설되는 이유도 섬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지질적 특성때문이다. ▷사용후 핵연료 건식보관◁ 한편 사용후핵연료를 저장할 것으로 알려진 건식저장방식은 사용후원전연료를 저수조에서 꺼내 특수저장용기에 담아 관리하는 기술로 이미 안전성이 입증된 것이어서 세계 여러나라에서 쓰고 있다.게다가 굴업도의 경우는 섬이라는 특성때문에 많은 물과 인원이 필요하지 않은 건식저장방식을 택한 것으로 알려진다.사용후핵연료를 건식으로 저장하기 위한 용기 또는 설비는 우선 방사능을 차단시키기 위한 두터운 금속 및 콘크리트벽이 있으며 그 안을 비교적 열을 잘 전달할 수 있으면서 다른 물질과 반응을 잘 하지 않는 헬륨 또는 질소 등 냉매로 채우고 사용후원전연료다발이 들어가게 된다. 이 용기나 시설의 외벽은 외부공기와의 접촉으로 냉각되며 내부원전연료는 다단계로 밀봉돼 방사능물질의 누출이 없고 자연적인 냉각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따라서 현재 고려중인 건식중간저장시설의 운영기간동안(30∼50년) 도서에서도 염분등에 의한 영향이 없다는 것이다. 처분장건설을 담당할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안전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이들 시설에서 나오는 환경방사선량을 1밀리렘이하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세계기준치가 1백밀리렘이고 X선촬영을 한번 할때 받는 방사선량이 30∼1백밀리렘인 것을 감안하면 이 수치는 거의 방사능이 없다고 봐도 좋을 양이다. ◎어떤 섬인가/덕적도와 13km… 주민10명/풍광 뛰어나 관광객 몰려 굴업도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옹진군 덕적면 서포3리에 속한다.인천에서 서남쪽으로 80㎞ 떨어진 동경 1백26도,북위 37도11분에 위치해 있으며 사람이 구부리고 엎드려 땅을 파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굴업도로 불리게 됐다. 면적 1.722㎦로 5가구 9명이 살고 있다.이중 2가구는 원주민이고 3가구는 실향민으로 반농반어로 생활하고 있다.인천에서 쾌속선 파라다이스호로 50분,일반여객선인 코모도고속으로는 2시간30분이 걸리는 모섬인 덕적도와 13㎞ 떨어진 굴업도는 덕적도에서 행정선인 새마을 6호(44t)가 홀수날만 다니며 40분이 걸린다. 옹진군내 1백35개섬중 39번째로 크며 완만한 야산과 길이 1㎞,폭 50m의 은빛 백사장이 있다.35∼40년생 잡목이 무성하고 대부분 지역은 잡초가 자라는 한편 항포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화강암절벽으로 이뤄져 있다.70년대까지 민어 우럭 광어 등이 잘 잡혀 70여가구가 거주했으며 민어파시까지 열릴 정도였다. 주민들은 땅콩 재배로 큰 소득을 올리다 수입땅콩에 밀리면서 더덕재배로 작목을 바꿨다.교통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섬풍광이 알려지면서 매년 2천∼3천명의 관광객이 몰려 민박 등으로 가구당 연간 4천만원 안팎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김과기처 문답/“인근 섬에 원자력연구·지원시찰 계획”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부지로 굴업도를 최종확정하게 된 배경은. ▲지난 6년간 후보지로 검토돼 온 지역을 대상으로 안전성 홍보와 설득작업을 해보았지만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서 최종결정은 하지 못했었다.경북 울진,강원 양양 등은 입지조건도 좋고 폐기물을 관리하기도 편한 지역이지만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굴업도는 다른 후보지역에 비해 협소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처분장과 사용후핵연료 보관시설을 제외한 다른 연구·지원시설은 어디에 건설할 것인가. ▲기본방침은 굴업도에서 가장 가까운 섬중의 하나로 결정한다는 것이다.관계부처,원자력연구소 등과 구체적인 협의를 거쳐 원자력위원회에서 한달내에 발표하겠지만 현재는 덕적도,영흥도,대부도가 가장 유력하다. ­해당지역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1차적으로 「지역발전기금」 5백억원이 조성돼 주민들의 의사에 의해 운영·관리될 것이다.이밖에 시설 건설기간 중 매년 50억원,운영기간에는 매년 30억원이 지원될 예정이다.현재 이 기금은 시설지역인 옹진군에 70%,주변지역에 30%가 지원되는데 구체적인 범위는 곧 결정될 것이다. ­처분장건설비용과 이용가능시점은. ▲시설을 완공하는데 드는 비용은 약 7천억원정도로 예상되며 앞으로 7년후인 2001년부터 폐기물을 처분할 수 있다. ◎주민들 반응/현지선 “환영… 인근 덕적도선 찬반 양론” ○…방사성 폐기물 관리시설 후보지로 확정된 덕적면 서포3리 굴업도 주민들은 22일 정부의 공식발표를 환영한 가운데 평상시처럼 썰물때가 되자 조용히 바다로 나가 굴을 채취하는 등 생업에 열중하는 모습.마을 이장 고덕현씨(59)는 『정부에서 핵폐기물 처리시설이 안전하고 연구원들도 함께 산다고 하는데다 주민들에게도 많은 혜택이 있다고 해 찬성했다』고 말했다. ○…굴업도의 모섬인 덕적도 주민들은 굴업도의 관리시설 후보지 확정에 대해 찬·반으로 양분.장년층이 『안전성이 보장되고 지역발전에 도움을 준다면 이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찬성하는데 반해 청년층은 「반대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환경단체와 연계투쟁을 선언하기도. ○…이날 정부의 발표가 있자 지난 11월 22개의 환경단체로 결성된 「핵없는 사회를 위한 전국반핵운동본부」측은 즉시 성명서를 발표하고 현지조사를 위해 2차례에 걸쳐 회원을 파견하는등 기민한 대응.이와는 별도로 환경단체들은 덕적도에 관계자들을 파견,주민홍보활동을 지속적으로 펼 것으로 알려져 정부측은 주민반발이 보다 조직화될 것으로 우려하기도. ○…지난 19일부터 항의시위를 벌여온 덕적도 주민 3백여명은 이날 상오 8시부터 진리선착장에서 시위를 벌이다 하오부터는 면사무소로 몰려가 항의농성. ○…경찰은 주민들의 시위가 과격해질 것을 우려해 이날 상오 덕적도에 2개 중대 2백50명을 시위장 외곽에 배치했으나 시위를 적극 저지하지 않아 주민들과의 직접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 굴업도 핵폐기장/해저동굴로 건설/정부 발표

    ◎안정성 높은 스웨덴식… 96년 착공/페기물 25만드럼 영구처리/발전기금 5백억외 연30억∼50억 지원 정부가 방사성폐기물을 종합적으로 전담,관리하는 시대가 열렸다.정부는 22일 상오 종합청사에서 이홍구국무총리 주재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사업추진위원회와 홍재형경제부총리 주재 원자력위원회를 잇달아 열고 경기도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를 방사성폐기물관리시설 부지로 최종 확정,발표했다.이에따라 굴업도에는 미국·일본등의 천층처분방식보다 안전한 스웨덴식 해저동굴처분방식에 따른 25만드럼용량의 중저준위 폐기물 영구 처분장과 사용후 핵연료 중간저장시설, 기타 부대 시설이 들어서며 96년 하반기 공사에 착수한다. 김시중 과기처장관은 이날 발표에서 『굴업도 지역이 방사성폐기물 영구처분에 적합한 응회암을 주암종으로 암반균열이 적은 단일암체로 돼 타지역에 비해 우수한 지질 조건을 갖추었다』며 특히 수심이 깊어 항만건설에 유리하고 거주주민이 10명에 불과하는 등 부지 이용성과 운영 용이성등의 측면에서 효율성이좋은 것으로 분석됐다고 덧붙였다. 지역발전 지원대책과 관련,김장관은 『건설기간중 매년 50억원,운영기간중 30억원을 지원하고 별도로 「지역발전기금」 5백억원을 조성,주민대표로 구성된 재단 등을 통해 주민들이 운영,관리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안전보장책으로 김장관은 ▲각종 시설의 건설계획단계서부터 건설중·후 공개 ▲주민이 지명하거나 동의하는 전문가에 의한 환경영향평가등 주민환경감시체제 운영 ▲주민들이 요구하는 다른 안전보장조치 수용 등을 밝혔다.
  • 핵 폐기장/서해 옹진 굴업도 유력/지층 구조·수송여건 최적

    ◎정부,주민설득 설명회 착수/23일께 건설부지 확정 발표 【인천=김학준기자】 정부는 내년 3월 인천시로 편입되는 경기도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를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의 유력한 후보지로 내정,주민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국무총리실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기획단 김만기 사업지원반장과 최홍식 기술지원반장 등 정부 관계자 4명은 16일 상오 경기도 옹진군청에서 군의회 의원과 군청 계장급 이상 간부 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설명회를 갖고 『굴업도는 화강암의 단단한 지층구조와 해상수송의 편리성,기존 원전과의 거리 등 지질학적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 폐기물처분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정부는 세계적으로 가장 안전하다고 평가되고 있는 스웨덴식동굴 폐기물 처분장 건설을 구상하고 있으며 사업시행전에 자본금 5백억원의 법인을 설립해 주민들이 영구적으로 잘 살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김반장 등은 19일까지 굴업도 모섬인 덕적도에서 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굴업도는 옹진군 외곽 지역인 동경 1백26도,북위 37도15분에 위치한 1.7㎦의 작은 섬으로 6가구 1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유인도 9개와 무인도 32개 등 41개 도서로 이루어진 모섬 덕적도는 36.01㎦에 6백9가구 1천3백98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와관련,환경운동연합 등 사회단체들은 이날 인천환경운동연합 사무실에 「굴업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설치반대 비상대책위원회 상황실」을 설치하는 등 반발하고 나서 난항이 예상되고 있다. ◎항만건설도 용이 국내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후보지로 경기도 옹진군 서포리의 굴업도가 유력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정부는 임시국회가 끝나는 오는 23일경 최종부지를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방사성폐기물 관리사업기획단 한영성단장(과기처차관)은 『굴업도는 우선 주민수가 적어 보상이 쉬운데다 섬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있어 저장시설을 짓기 쉽고 수심이 깊어 항만건설이 용이하다는 점 등에서 우수한 후보지이다.그러나 육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시설운영상에 어려움이 많고 시설 종사원 및 가족들의 거주조건이 열악한 것이 문제』라며 『최종결정은 기획단의 추천과 원자력위원회(위원장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및 방사성폐기물 관리사업추진위(위원장 국무총리)의 결정을 거쳐 발표된다』고 말했다. ◎유치운동 기성면민/굴업도 거론에 반발 【포항=이동구기자】 정부가 이달말까지 확정할 방사성 폐기물처분장 건설후보지 선정을 앞두고 최근 경기도 옹진군 서포리 굴업도가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자 그동안 이의 유치를 추진해온 울진군 기성면 일대 주민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울진 방사성 폐기물처분장 유치추진위 위원장 조홍근씨(50)는 16일 『영구적인 처리장과 연구시설을 갖추기 위해서는 정부가 당초 계획한대로 최소한 1백50만평 이상의 부지가 필요한만큼 후보지로 거론돼왔던 기성면 일대가 최적지』라고 주장했다. 조씨는 건설부지가 최종 확정될 때까지 유치운동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 베제크리크 천불동/허세욱(서역 문화기행:4)

    ◎화염산기슭 석굴 83개… 6세기 불교유적/위구르족 왕가 사원… 당시 생활상 벽화로 남겨/서유기의 무대… 삼장법사­손오공 등 3제자의 조각상 곳곳에 투루판은 그 동서를 관통하는 국도 312번에 놓여있다.그것은 신강의 최서단인 이닝(이령)에서 황하와 황해가 만나는 최동단의 상하이(상해)까지 장장 5천㎞,어쩌면 미국의 동서를 횡단하는 80번 하이웨이에 상당하다. 투루판에서 312번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40㎞쯤 달렸을 때,갑자기 그 왼편으로 빨간 바위산을 만나는데 그 형상은 얼핏 한국전쟁당시 철의 삼각지,아이스크림고지를 방불케하는 타원형으로 마치 험상궂도록 쪼글쪼글한 노인의 얼굴 혹은,여름날 여인의 풍덩한 주름 치마같았다.한 포기의 폴도 없이 세로의 주름살은 차라리 빨간 폭포가 쏟아지는 형상이었다. 그것이 바로 화염산의 남쪽 기슭이었다.그 맹렬한 화염의 섭곡을 보자 놀랍고 반가웠다.그 명성을 들은지 너무 오래라서 그렇다.당나라의 고승 현장(602∼664)의 「대당서역기」를 비롯,당나라의 유명한 변새시인 잠참(715∼770)이 이곳에서 벼슬하는 동안 썼던 경화산」,「화산운가송별」등의 명작,그리고 중국4대기서로 꼽히는 오승은(1500?∼1582?)의 「서유기」등에서 익히 화염산,그 「팔백리에 걸친 불길」을 들어 왔었다. ○홍산에 풀한포기 안나 화염산은 「홍산」혹은 「화산」으로 불렸다.그보다 위구르말로는 「쿠즈로다고」즉 홍산이란 뜻이다.그것은 지구상에서 두번째로 넓고 낮은 동서 1백20㎞,남북 60㎞의 투루판분지에 동서 98㎞의 길이에 남북 9㎞의 폭으로 가장 높은 곳이라야 8백32m,평균 높이는 고작 5백m다.하지만 해발 이하의 분지라서 그 높이는 상당했다.연간 강우량이 겨우 16㎜의 초건조지역에 평균 기온이 섭씨38도 최고 기온이 49도나 된다.그래서 암석표면의 온도는 무려 80도를 넘는다.거기다 지층에 매장된 무진장의 석탄과 석탄에서 배출되는 가스로부터 폭발 연소도 적지 않다고 하니 「서유기」에 묘사한 대로 「화두 불길이 천길의 높이」란 형용도 결코 터무니 없는 말이 아니었다. 필자가 화염산을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은 지금부터 1천2백45년전인 기원749년,이곳에 당도했던 잠참의 「화산을 지나며」란 시에 잘 나타났다. 「화산금시견, 돌올포창동. 적염소로운, 염기증색공. 불지음양탄, 하독연차중? 아래엄동시, 산하다염풍. 인마주한류, 열지조화공」 (처음 만난 화염산은, 포창 동녘에 우뚝하여라. 화염은 오랑캐의 구름을 불지르고, 증기는 변방의 하늘을 찜질한다. 음양의 숯이, 어찌 여기서만 훨훨 타오르는가? 엄동설한에도 산밑엔 삼복의 열풍이. 사람도 말도 땀을 뻘뻘 흘리거늘, 누가 알랴? 자연의 조화를) 화염산 섭곡이 끝나는 승금구에서 312번 국도를 작별하고 좌회전하자 이윽고 빨간협곡이 열리면서 차는 화염산 북록을 휘돌았다.그 협곡의 정면에 보이는 둥근 모자모양의 홍산이 피라미드의 형세로 성큼 다가섰다.그것이 화염산의 주봉이었는데 주봉은 충격적 이라기보다 다소곳한 곡선으로 다만 풀 한 포기 없을 뿐 여느 동리앞을 지키는 안산의 크기였다.거기서 삼장의 길이 막히고 손오공이 파초의 부채로 재주를 부렸다는 곳이다. ○아래쪽 설수도 흘러 그 주봉아래로 기원6세기 고창왕국씨때부터 9세기까지 3세기에 걸쳐 위구르족들 왕가의 사원으로 건설한 석굴의 촌락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있고 천불동아래로는 파란 설수가 콸콸 흐르는 목두구.그리고 천불동 입구 편편한 산기슭엔 최근 「서주천성원」이라는 작은 전시장을 개설 해 놓았다.그 안에는 「서유기」의 주연으로 삼장법사를 비롯,손오공·저팔계등을 조소한 외로도 「팔십일난」을 도해한 동굴,동굴밖 언덕위로는 잠참의 입상과 그의 대표작인 「화산운가송별」을 새긴 시비가 있었다.그 시비에 새겨진 첫 절은 이러했다. 「화산돌올적정구, 화산오월화운후. 수운만산응미개, 비조천리불감래」 화산이 우뚝 적정 어귀에 섰거늘, 오월이라 불꽃 구름 뭉게 뭉게. 불꽃 구름 엉긴 채 풀리지 않거늘, 천리길 나는 새도 얼씬할 수 없네) 필자가 찾은 때는 다행히 쾌청한 9월중순 이어서 인지 불꽃구름커녕 흰구름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 진하디 진한 쪽빛 하늘 뿐이었다.그 쪽빛에 적갈의 산빛,골짜기와 석굴,길가에 굴러가는 돌멩이조차 일색으로 빨갰다. 그런데 그토록 숨 막힌 빨간 모랫벌과협곡에도 서원의 의지는 굴을 파고 예술의 꽃을 피웠었다.바로 베제크리크 천불동이 그것이다. 화염산 주봉 동쪽 기슭엔 광장이 닦여 있었다.그 왼편엔 「서유기」의 일사삼도의 조상을 세웠는데 초입의 서주천성원에서 보았던 그것보다 규모가 큰데다 훨씬 정교하고 생동감이 있었다.그 바른편 계단으로 내려가면 황갈색의 가파른 벼랑이 무르토크강(목두구))을 굽어 보고 있었다.과연 「베제크리크」란 지명이 「산 허리」라는 위구르말을 딸만했다. 기록상으로 석굴의 수는 83개라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50여개이며 그중 벽화를 소유했던 것이 40여개요 벽화의 총면적은 1천2백㎡라고.그것들은 열차의 창을 방불케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었고,그 내부는 대체로 석굴의 길이 20m에 5m의 폭과 5m의 높이의 장방형,거기다 천장은 동그란 궁륭식이라 쿠차의 키질,돈황의 막고굴에 비해 훨씬 넓고 시원했다. ○일부 벽화 손실 아쉬워 기원6세기부터 13세기까지 지금 위구르족의 조선인 고창왕국씨들의 왕가 사원을 비롯,당시 불가의 승려·신도들의 승방,고승을 기리는은굴,혹은 그들이 좌선하던 비가라굴로 쓰였었다.당대의 문헌인 「서주도경」에 고창지역 불교의 승지로 소개한 「영융굴사」가 바로 베제크리크 천불동인 것이다. 여기 벽화는 비록 석가모니 전생의 사적을 선양하는 본생고사를 비롯,서원도·경변도·공양상·인연고사등 불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거기에 등장하는 왕공 귀족과 공양 신도들의 복식·가옥·거마·기악등을 통해 당시 불교를 신앙하던 회골사람들의 생생한 생활과 문화를 볼수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했다. 특히 33호 석굴의 「왕자거애도」에 그려진 여러나라 왕자의 각기 다른 모습과 표정은 마치 오늘날 정상들의 모임을 발불케했고,39호 석굴의 커다란 공양 보살의 풍윤한 얼굴과 굵직한 청화의 무늬,그리고 31호 석굴의 설법도에 그려진 보살의 성장과 복식등은 생생한 역사와 문화가 묻혀 있음을 직감케 했다. 그러나 20호 석굴과 27호 석굴에서 만난 복사물의 대체와 훼손된 잔화를 대하면서 허탈과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특히 20호 석굴의 서원도,회골국왕과 왕후의 형상은 10세기 당시 회골국 복식을 알수있는 증거임에도 절취된 채 지금 영인된 사진만 걸려 있음은 27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필자가 참관한 9호,37호등 석굴에서도 불상의 눈이 뭉개지거나 벽면을 도려낸 칼날의 선이 남아 여기 저기서 수난의 흔적은 완연했다. 베제크리크의 수난은 크게 두번 있었다.13세기말,몽골의 말굽 아래 처음 망가졌고,그를 전후해서 이슬람교가 흥성하면서 불교의 석굴은 쇠락을 거듭하였다.또 한번은 금세기초인 1902년,독일의 그륀베델과 로코크 등이 네차례나 답사를 빙자한 예술품의 절취가 있었다. 그 속에는 20호,27호 석굴의 것 말고도 회골귀족과 몽골인들의 복식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공양도」와 회골문자가 들어 있는 「본생고사도」등이 절취당한 것은 통석할 일이다.더구나 그중 베를린 박물관으로 납치되었던 벽화 일부가 2차대전의 전화에 소실되었다니 서역의 찬란했던 회골문화의 운명도 꽤나 기구한 것이었다.
  • 「금릉 2동굴」은 쌍굴식 터널/중앙방송 보도/청류벽∼모란봉 관통

    【내외】 김정일이 지난 9일 「최고사령관명령」을 통해 내년 당창건기념일까지 건설토록 지시한 「금릉 2동굴」은 대동강 청류벽에서 모란봉을 관통해 모란봉구역 흥부동까지 이어지는 쌍굴형식의 터널인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의 중앙방송은 15일 평양시 도시계획설계사업소 기사장과의 대담프로에서 『금릉 2동굴은 청류벽에서부터 시작되어 수백미터를 모란봉을 뚫고 나가 모란봉구역 흥부동에 가 떨어진다』면서 『이 굴은 쌍굴형식』이라고 언급,이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이어 금릉 2동굴이 끝나는 흥부동부터는 모란봉 기슭을 따라 곡선형의 도로가 시작되어 김일성종합대학 체육관 앞을 경유해 금성거리와 연결된다고 이 방송은 덧붙였다.
  • 평양방송 “중대발표” 해프닝

    ◎「메가톤급」 예측… “청류다리 건설”에 실소/“김정일 권위 과시·「성수대교」 비아냥” 분석 북한 중앙방송이 9일 상오 돌연 이날 정오 「중대발표」를 예고해 북한의 권력개편과 관련해 비상한 관심을 모았으나 일과성 해프닝으로 종결됐다. 통일원 등 정부당국은 김일성사망 다음날인 지난 7월9일과 마찬가지로 북측이 이날 수차례에 걸쳐 중대발표를 사전고지하는 바람에 긴장속에 주시했다.하지만 막상 방송내용은 대동강 청류다리 및 금릉2동굴 건설과 관련한 김정일의 지시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됐다. 정부당국에 따르면 중앙방송은 이날 김정일은 인민무력부와 정무원에 대해 평양 대동강 청류다리 2단계 공사 및 금릉2동굴 공사를 조선노동당 창건 50주년이 되는 내년 10월10일까지 마무리토록 명령했다고 보도했다. 김정일의 이 지시는 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 제51호 「평양시에 청류다리 2단계와 금릉2동굴을 건설할 데 대하여」란 이름으로 하달했다. 정부당국자들은 당초 메가톤급 발표가 있을 것으로 예단했으나 이같은 「평범한」 내용이발표되자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특히 일부 통일원 관계자들은 「김정일 당총비서 선출」발표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북한방송에 신경을 집중하기도 했다.그러나 정작 어이없는 발표가 흘러나오자 『김정일이 뇌를 다쳤다는 루머가 사실이 아닌가』라며 북한당국의 상식이하의 행태에 혀를 찼다. 다수 정부 관계자와 북한전문가들은 북한이 이번에 「중대발표」소동을 연출한 이면에는 그들 나름의 계산이 깔려 있다고 보고 있다. 정부측은 북한당국이 인민군 병력을 대거 투입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앞두고 노력동원 독려 등 경제적 측면 이외에 ▲당정군 최고 지도자로서의 김정일이 권위를 과시하고,북미 협상이후에 평화이미지를 대외적으로 투사하려는 의도로 해석하고 있다.최고사령관 명의로 공사를 담당할 인민무력부와 자재를 공급할 정무원에 이례적인 중대발표 고지까지 하면서 동시에 지시를 내린 점이 이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특히 북한 특유의 지능적 심리전의 일환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이날 방송이 대형 다리등의 건설을 통해북한주민의 생활환경 개선 및 복리증진을 강조한 것은 김정일이 내세우고 있는 슬로건인 이른바 「인덕정치」와 「광폭정치」를 부각시키면서 우리측의 성수대교 붕괴와 대비시키려는 전술이라는 얘기다. 한편 평양 대동강에 자리잡고 있는 청류다리는 당초 흥부다리라는 이름으로 지난 90년초에 착공,최근 1단계 공사가 끝난 길이 4백50m의 현수교로 알려져 있다.또 금릉동굴은 대동강 능라다리 입구 해방탑에서 모란봉극장앞을 거쳐 모란봉구역의 안상택거리까지 연결되는 것으로 단군릉 도로와 연결되어 있다는 첩보도 있다.
  • 「탄광지역 진흥사업」 1년 영장/계획보다 83억 더 투입

    ◎상공부 확정 탄광지역의 활성화를 위한 「탄광지역 진흥사업」이 1년 더 연장된다.국내 처음으로 탄광 박물관이 세워지며 탄광지역의 도로 확·포장과 관광단지 개발,광원 임대주택 건설 등에 당초 계획보다 83억원이 많은 1천9백77억원이 97년까지 투입된다. 상공자원부는 8일 석탄산업 심의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탄광지역 진흥사업 계획」을 이같이 수정했다.당초 계획은 92년부터 96년까지 태백시·정선군·삼척군·영월군에 1천8백94억원을 투자키로 했었다. 수정 계획은 장성∼동정간 3㎞의 도로 등 8곳의 도로를 추가로 확·포장하고 동굴개발 등 관광 휴양지와 광공단지 조성 등 대체산업에 8백26억원을 투입키로 했다.
  • 북의 「승리산 사람」과 「만달 사람」(한국인의 얼굴:3)

    ◎넓은턱에 높은 머리의 후기 구석기인/평남 덕천­평양서 발굴… 얼굴 복원/「만달 사람」은 석기­골기 함께 출토 그 까마득한 옛날을 살았던 구석기인들이 자신들의 몸골을 뼈로나마 남기게된 까닭을 알아보면 지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가 지금 구석기인들의 뼈를 찾아낸 장소는 모두가 석회암동굴이다.이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뼈가 보존되었다.동굴 천장에서 조금씩 흘러내린 알칼리성 석회수가 무수한 시간을 두고 뼈를 화석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석회암동굴 중에는 선사문화를 가늠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유적들이 더러 끼어있다.북한 학자들이 오늘날 한국인의 얼굴 특징을 지녔다고 주장해온 이른바 「승리산 사람」의 뼈가 나온 유적도 석회암동굴이다.지질학적으로 상원계 석회암지대에 속하는 이 유적은 평남 덕천시 승리산에 자리했다.지난 1972년 발굴당시 사람 아래턱뼈가 나왔다.3만5천년전에 시작해서 1만년전에 끝난 후기구석기시대 사람의 뼈로 보고있다. 북한 학계는 이 아래턱뼈를 기본자료로 활용,당시 후기구석기인의 얼굴을 복원했다.학자들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난 얼굴의 주인공이 후기구석기시대를 살았던 승리산사람인 것이다.승리산사람의 아래턱뼈 길이는 현대인과 비슷하지만,넓이는 비교적 넓은 편인 것으로 알려졌다.이러한 특징은 얼굴의 하관이 넓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보탬이 되고있다.그리고 머리가 높았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승리산사람은 그동안 북한학계가 현대인의 조상뻘로 여기면서 그 지혜를 슬기슬기사람(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으로 주장한 인류다.이같은 주장은 승리산사람 얼굴 특징에 나타난 높은 머리와 넓은 하관부가 오늘날 한국인 특징의 일부로 남아있다는 데서 나왔다.머리 생김새는 어떤 민족의 체질인류학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형태요소라 할 수 있다.이는 대개 생체관찰과 머리뼈관찰로 나누어 특징을 가린다.선사인의 경우는 머리뼈관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북한에서는 승리산사람 말고도 또다른 후기구석기시대 사람뼈가 발견되었다.평양시 승호구역 만달리에서 나온 사람 뼈화석은 「만달사람」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1979∼80년 사이에 출토된 뼈화석에는 얼굴을 되살려낼 수 있는 머리뼈와 아래턱뼈가 포함되었다.앞머리뼈에는 현생 인류에게서만 찾아지는 화살융기도 들어있었다.그리고 턱구멍이 현대인처럼 낮은 위치에 자리잡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만달인은 석기와 골기를 사용했다.가공한 흔적이 뚜렷한 석기 13점과 함께 뼈나 뿔로 만든 골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이러한 연모를 만든 수법을 통해 만달인은 후기구석기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체질인류학적 검증을 통해 만달인이 숨질 무렵의 나이를 30살 정도로 가려낸 북한학계는 만달인을 건장한 용모의 청년으로 복원시켜 놓은 바 있다. 그러나 승리산사람이나 만달사람과 같은 후기구석기인류를 오늘날 우리 민족의 직계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구석기인들은 자연환경변화나 사냥거리에 따라 빈번히 이동했다.비록 후기구석기인들이 전·중기구석기인들 보다는 좀더 붙박이 정착생활 쪽을 택했을지라도 어디까지나 선주민에 지나지 않았다.우리는 여기서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학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승리산사람이나 만달사람을 현생신류 즉,오늘의 민족과 연결시키는 이유중에는 정치성이 내재되었다.민족의 뿌리가 평양을 중심으로 뻗어나갔다는 것을 애써 강조하면서 남북대비,역사우위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그리고 실제 평양근처에 잘 발달한 상원계 석회암지대 동굴만을 집중 발굴해왔다.지난해 평양근교에서 발굴했다는 단군유골과 올해 서둘러 축조한 단군릉의 경우도 이같은 선상의 역사오도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사고 1시간 넘게 승선인원 파악안돼/유람선참사 이모저모

    ◎“아내·딸 찾아달라” 30대가장 발동동/소방차 길 잘못들어 조기진화 실패 ○…사고 유람선인 충주5호에 승선한 사람 가운데 63명은 서울시 서대문구 천연동 「3000년 친목회」 회원들로 이중 53명은 생존이 확인됐으나 숨진 1명을 제외한 9명의 생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아 회원들이 발을 동동. 3000년 친목회에 따르면 이날 사고로 회원중 53명은 구조됐으나 차성환씨는 물에 빠져 숨졌으며 김명옥씨(여)등 9명은 이날 하오 늦게까지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 이들 회원은 단양 천동동굴 관광을 마치고 신단양 선착장에서 사고 유람선에 승선,충주로 가다가 변을 당했다. ○…사고 유람선에 승선한 윤한기씨(33·기아자동차 근무)는 이날 하오 딸 해준(7개월) 및 아내 유지원씨(29)와 함께 단양 고수동굴을 관광하고 귀경차 충주호 유람선에 승선했다가 딸과 아내의 생존여부를 확인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윤씨는 이날 기관실 뒤쪽에서 연기가 솟으면서 승선객들이 아우성을 치는 등 아수라장이 되자 가족과 헤어진채 선실 밖으로 나와 물속으로 뛰어들어 긴급 대피했다는 것. 윤씨는 선실에서 어린아이가 숨져 있는 것을 보았다는 생존자들의 말에 따라 딸과 아내가 선실에 숨져있는 것이 아니냐고 울먹여 주위를 안타깝게 하기도. ○…유람선 화재사고가 난 뒤 경찰과 공무원들은 구조작업과 함께 사상자 숫자 파악 작업에 나섰으나 사고 발생 5시간이 지나도록 정확한 사상자 현황 파악을 못하는 등 허둥지둥. 단양군은 사망자 7명을 제외한 부상자 14명이 단양 서울병원(7명)과 제천 서울병원(7명)에 입원해 치료받고 있으며,생존자들은 단양읍내 단양여관(48명),연화봉여관(25명),중앙장여관(8명) 등지에 분산,수용돼 있는 것으로 잠정 집계. ○…유람선 사고 현장에서 사체인양작업과 함께 화재원인을 조사중인 경찰과 소방대원 등은 사고 유람선 선실 밑부분에서 서로 엉켜있는 3구의 사체를 발견했으나 사체인양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우려해서인지 사고발생 6시간가량이 지난 이날 밤 사체 수습을 하지않아 빈축. ○…화재가 난 충주5호 유람선의 기관사와 충주1호 유람선의 기관사가 서로 뒤바뀐 것이 뒤늦게 확인. 화재가 난 5호 유람선 기관사는 당초 이원봉씨(31)로 충주에서 단양쪽으로,1호선 기관사인 최기봉씨(24)는 단양에서 충주쪽으로 각각 운항중이었으나 운항도중 충주5호 기관사인 이씨가 본사로부터 조모가 사망했다는 무전을 받고 마침 충주에서 단양으로 운항중이던 충주1호선을 제천 청풍나루터에서 만나 서로 배를 바꿔탔다는 것. ○…단양군은 사고가 발생후 곧바로 단양군청 2층 회의실에 사고대책 상황실을 마련했으나 사고가 난지 8시간가량이 지난 25일 새벽까지도 사망자 및 부상자,실종자의 신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등 어수선한. ○…충북지방경찰청은 24일 하오 충주호 유람선 화재사고가 발생하자 관할 단양경찰서와 인근 충주·제천경찰서 등을 통해 사고 내용을 파악하느라 분주한 모습. 그러나 경찰은 이날 사고가 난 지 1시간이 넘도록 해당 경찰서에서 유람선 정원과 승선인원조차 제대로 보고가 안되자 유람선 회사측에 연락,직접 이를 알아보는등 사고 내용파악에 진땀. 한편 사고가 난 뒤 1시간 30여분만인 이날 하오 6시쯤되어서야 충주경찰서소속 구조정이 사고 현장에 도착,뒤늦게 인명구조 작업을 벌이는 등 사고수습에도 허점을 노출. ○…화재가 난 관광선을 진화하기 위해 출동했던 소방차가 사고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엉뚱한 방향으로 가다가 뒤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초기진화에 실패. 사고현장은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구 단양교 밑이었으나 소방차가 현장 반대쪽인 단성쪽으로 가다 뒤늦게 길을 잘못든 것을 알고 방향을 돌렸지만 화재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차량 때문에 3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사고 유람선 옆을 지나던 충주호 관광선2호에 탑승했던 승객들 가운데 박명석씨(46·서울시 강동구 천호1동 27의11)와 김윤환씨(46·서울 강동구 천호1동 14의1) 등 2명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승객 20여명을 구조. 또 불이나자 곧바로 달려온 어선 2척에 승선한 신원불명의 어부들은 순식간에 40여명을 구해내기도 했다. ○…충주호 관광선 화재 사고를 수사중인 청주지검 제천지청과 단양경찰서는 사고 발생직후 선장 문세권씨(43)와승무원 등을 소환,사고원인을 조사.
  • 두루봉동굴 머리뼈 복원한 「흥수아이」(한국인의 얼굴:2)

    ◎4만년전 어린이… 뒤통수 나온 짱구형/중기 구석기시대 해당… 5살로 귀여운 얼굴/시신에 흙뿌리고 꽃 장식… 장례의식 엿보여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 맨 먼저 자리잡은 인류는 전기구석기인이다.그 시기는 대략 지금으로부터 70만년전이다.그러나 전기구석기인이 남긴 몸골의 흔적은 아직 찾지 못했다.다만 중기구석기와 후기구석기시대를 살았던 선사인의 뼈가 출토되고 있을 뿐이다.남북한을 통틀어 10여군데 유적에서 이 뻐가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당시 사람모습을 살려내는 데 필요한 얼굴관련 뼈화석은 몇점에 지나지 않는다.4만년전 중기구석기시대 것으로는 충북 청원 두루봉 출토 어린이 머리뼈가 있다.그리고 북한의 평양 북쪽 승리산에서 나온 아래턱뼈와 역시 평양교외 만달리유적 출토 머리뼈는 1만년전에 끝난 후기구석기시대 뼈화석으로 판명되었다.남북한 고고학자들은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뼈화석을 자료로 구석기인의 얼굴을 복원해냈다. 충북 청원군 두루봉 동굴의 어린이는 아주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다.고고학계가 얼굴을 복원하고나서 지어준 이름은 「흥수아이」.죽은 지 4만년만에 얻은 이 어린이의 이름은 두루봉에서 석회석을 채굴해온 한흥광산 현장소장 김흥수씨 이름에서 따왔다.그의 제보로 구석기유적이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에 그 공헌도를 기려 명명된 이름이라 할 수 있다.흥수아이에 대한 체질인류학 분석결과 5살때 이 동굴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아이의 머리크기는 1천2백∼1천3백㏄,키는 1백10∼1백20㎝ 정도로 헤아려졌다.특히 뒤통수가 튀어나와 요즘의 말로 표현하면 짱구형.아래턱도 둔탁하게 보인다.머리뼈를 잰 결과는 현대인과 선사인의 특징을 함께 지닌 것으로 드러났다.학계는 흥수아이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되면 구석기인이 옮겨다닌 발자취와 우리 조상의 기원문제를 풀어줄 고리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흥수아이가 살던 시대에도 구석기인은 문화행위를 발전시켰다.그 같은 정황은 장례의식으로도 나타났다.지난 1983년 발굴당시 흥수아이의 주검은 편편한 석회암 낙반석 위에 누워 있었다.일부러 바로 펴놓은 주검위에다가 고운 흙을 뿌렸다는 사실이 관찰되었다.주검을 아무렇게나 마구 버리지 않고 고이 장례를 치러준 것이다.그 까닭은 구석기인도 영혼이 영생하는 사후세계를 믿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흥수아이의 주검 곁에서는 여러 종류의 식물꽃가루가 채집되었다.이들 꽃가루 분석에서 국화꽃가루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다.그래서 흥수아이가 죽었을 당시 국화꽃이 주검 주변을 치장한 장의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또 국화꽃이 가을꽃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흥수아이가 죽음을 맞은 계절을 가을로 추정했다.꽤 높은 고지대 석회암동굴에 국화꽃이 자생할 리 만무하고 보면 국화꽃을 분명히 의도적으로 꺾어왔을 것이다. 주검을 꽃으로 치장한 실례는 이라크의 구석기유적 샤니다르동굴에서도 발견되었다.이 역시 꽃가루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서 확인된 것이다.구석기인은 장의용 말고도 일상생활을 통해 꽃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그 같은 증거를 남긴 유적은 앞서 이야기한 바 있는 사슴뼈조각 인물상 출토지 청원 두루봉동굴(서울신문 94년10월14일자 11면)이다. 이 동굴에서는 많은 양의 진달래꽃가루가 채집되었다.진달래꽃가루가 집중적으로 검출된 장소는 동굴입구 한쪽 모서리다.진달래는 본래 호산성식물.그런데 두루봉일대는 알칼리성 토양으로 되어 있다.이는 바로 두루봉동굴에 살았던 구석기인은 꽃을 좋아한 나머지 다른데 멀리서 꽃을 꺾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인류는 태초부터 아름다움을 식별하는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 중학생 가수 백동우/「마법의 성」 가요계 강타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그룹 「더 클래식」음반 타이틀곡… 한달만에 12만장 팔려/“학업에 지장” 얼굴 알리지 않고 노래만/미성·동화같은 가사로 여학생에 인기 얼굴없는 중학생 가수가 부른 노래가 가요계를 강타하고 있다. 출반한 지 한달여만에 12만장이 팔릴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있는 그룹 「더 클래식」의 음반 타이틀곡 「마법의 성」.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속 멀리…』 소년인지 소녀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의 미성으로 부르는 동화같은 가사때문에 자칫 동요로 착각할 정도이지만 「마법의 성」은 중·고생들은 물론 20대들에게도 인기를 끌고있는 어엿한 대중가요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15살 소년 백동우군(서울 S중 2년).교회 성가대의 일원인 백군은 변성기가 지나지않은 미성이 워낙 탁월해 「더 클래식」의 객원가수로 발탁됐다. 「더 클래식」은 김광진·박용준이 결성한 그룹으로 「마법의 성」은 이 그릅이 처음 낸 음반.가수 이승환이 객원가수와 공동 뮤직 디렉터로 참여했다. 타이틀곡 「마법의 성」은 얼마전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전자오락게임 「페르시아의 공주」를 소재로 해 만든 노래다.그룹 「더 클래식」은 「마법의 성」을 자신들이 직접 불러 음반의 첫머리를 장식했으나 아무래도 가사의 내용상 미성의 소년이 부르는 것도 필요하다는 판단아래 백군을 발탁해 음반의 중간에 백군이 부르는 「마법의 성」을 삽입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백군의 「마법의 성」이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보다 큰 인기를 얻은 것이다.백군의 노래는 무엇보다도 중·고생들사이에서 인기가 높다.노래가사가 「동요는 유치하고 대중가사는 어딘지 어색한」 청소년들에게 호소력을 갖고있기때문이다.특히 여중·고생들이 『마법에 빠진 공주처럼』 이 음반을 많이 찾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백군은 학업에 지장을 받을 것을 우려해 얼굴을 외부에 알리지않고 있다.백군의 인기가 「마법의 성」을 이끄는 견인차이긴 하지만 이 음반에 수록된 노래가 하나같이 정성이 깃든 작품이란점도 이 음반의 매력이다. 이 음반에는 「머피의 법칙」을 응용해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불운」들을 재미있게 노래한 「오비이락」,전설적인 로큰롤가수인 제리 리 루이스를 추모하는 노래 「제리 제리 고 고」(Jerry Jerry Go Go」,발라드곡 「서툰 이별」등이 수록되어있다.구태여 장르를 고집하지않고 청소년용 노래에서 고고와 발라드곡에 이르는 다양한 노래를 담고있는 것이다. 「더 클래식」 멤버 가운데 김광진은 미국 미시간 주립대 경제학 석사출신으로 현재 회사를 다니는 가수여서 이채를 띠고있다.그는 섬세한 노랫말과 서정적인 멜로디가 뛰어난 작곡가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같은 멤버인 박용준은 편곡실력이 상당해 이승환의 라이브 공연때마다 건반을 담당해왔다.
  • 청원군 두루봉동굴 조각(한국인의 얼굴:1)

    ◎20만년전 사슴뼈에 새긴 첫 인물상/높이 27㎜,가로41㎜의 예술품/짝 눈에 벌린 입… 귀여움이 가득 사람의 얼굴은 감정의 희노애락에 따라 표정이 무한하게 변한다.천의 얼굴이라 말하는 까닭도 여기있다.특히 지역과 민족,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얼굴이라고 한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얼굴을 가진 사람들인가.여기 해답을 던져주기 위해 유구한 역사를 더듬어가며 우리 스스로가 그려낸 얼굴들을 살펴보기로 했다.이는 역사속에 투영된 민족의 자화상이기도 한 것이다. 얼굴에는 눈·코·입이 달려있다.사람의 몸을 대표하는 부분이 얼굴이기도 하다.얼굴은 인격을 상징하거니와 저마다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그래서 원시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얼굴을 신앙의 대상으로도 삼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20만년 이전부터 얼굴을 표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음이 밝혀졌다.그 대표적 유물이 충북 청원군 문의면 노현리 두루봉 동굴에서 나온 구석기시대 인물상이다.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 인물상은 사슴 왼다리 위쪽뼈를 새기개로 쪼아 조각한것이다.비록 코를 만들지 못했을 지라도 눈과 입은 뚜렷이 표현되었다.귀도 어느 정도를 형상화한 두루봉 뼛조각 인물상은 한마디로 귀여운 모습이다. 처음에는 얼굴 전체를 둥굴게 만들 작정을 했던 모양이다.그러나 여의치 않자 관절부분을 다듬어 평행을 이루게 했다.왼쪽 모서리를 떼어내려고 쪼았던 흔적이 본의 아니게 귀가 되어버렸다.눈과 입은 뽀족한 새기개를 가지고 만들었는데 오른쪽 눈은 2번,왼쪽 눈은 1번을 쪼았다.입 만큼은 5번 정도를 쪼아서 벌린 입을 만들어냈다. 눈은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차이를 보인다.입을 중심으로 해서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불균형수법이 적용되었다고나 할까….볼록한 면을 얼굴이 되도록 한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다.아래턱은 약간 길쭉하게 표현했다.예술성이 분명히 들어있다.높이 27㎜,가로 41㎜,무게 49.8g에 불과한 뼛조각 인물상은 품에 넣고 다녔던 지닐 예술품인듯 싶다. 불교가 융성했던 역사시대에 작은 불상을 만들어 품에 지녔다.이같은 호신불 처럼 원시인들은 사람 얼굴을 만들어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늘 몸에 지녔을 것이다.실제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머리숭배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학설도 나왔다.이는 오스트리아의 인류고고학자 요하네스 마링거에 의해 제기되었다.특히 가족일원의 머리뼈에서는 경외심마저 느낄 정도였다는 것이다.조상의 머리뼈를 빌려 수호신의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청원 두루봉은 석회암 동굴지대.인물상 뼛조각이 출토된 동굴은 발굴 당시 명명한 제2굴이다.충북대 이융조(이융조)교수팀이 지난 1976∼8년까지 3차례에 걸쳐 발굴했다.불을 피우는 화덕자리와 숯,열매를 깨는데 썼던 돌망치,짐승의 가죽을 벗기거나 자르는데 사용한 긁개와 자르개 등의 석기도 발견되었다. 이 동굴에서는 지금은 멸종되어 사라질 젓소·쌍코뿔이·큰원숭이·사슴 등의 뼈도 나왔다.모두가 중기 홍적세 더운 시기에 살던 짐승들이다.가장 많이 잡혔던 사슴 이빨의 분석에서 사슴사냥은 9∼10월에 성행했다는 결론도 얻어냈다.인구고고학 방법으로 출토된 뼈를 분석한 결과 5식구가 이 굴에서 2천7백일 살았다는 문화모형이 만들어졌다.
  • 제천의식(백제를 다시본다:24)

    ◎능산리 금동향로 출토지는 제사터/건물규모 크고 고분 이웃… 사직 추정/송산리 개로왕 가묘도 제사터인듯 우리 민족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제천의식을 베풀었다.옛 기록에 나오는 부여의 영고.고구려의 동맹,예의 무천 등이 모두 제천의식이다.특히 국가형태가 완전히 갖추어지면서 국가경영과 관련이 있는 제례가 제도화하는 가운데 사직이나 종묘와 같은 제사유적이 생겨났다.이와 더불어 여느 민간사회에는 마을 주민들의 무병안령,다산과 풍요,풍어 등을 기원하는 제사터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흔적 찾기 어려워 그러나 오늘날 백제강역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제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을 대하기는 쉽지가 않다.이런 상황에서 최근 김동용봉봉래산향로가 출토된 바 있는 충남 부여 능산리 유적이 제사터였다는 국립부여 박물관의 발굴조사결과가 나왔다.이 능산리 유적은 충남 공주 송산리 개로왕의 가묘(1988년 문화재연구소 발굴),전북 부안 변산반도의 죽막동유적(1994년 국립 전주박물관 발굴)과 함께 몇 안되는 백제제사유적으로 떠올랐다. 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출토상황으로 보아 분명히 백제멸망과 관련이 있거니와,제사유적으로 본건물터는 바로 앞에 자리한 능산리고분군(사적14호)과도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다.다시 말하면 이 자리에 세웠던 당초의 건물은 능들을 수호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이나,나라의 태평을 기원한 사직자리일 가능성이 많다.능이 아주 가까운 지역에 건물을 세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같은 가능성을 뒷받침한다.여기서 거두어들인 기와조각이 엄청난 분량이고 보면 건물규모도 대단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금동향로가 나온 능산리유적 건물배치상황을 통해 유사한 다른 유적 하나를 연상하게 된다.그것은 바로 고구려 고토인 중국(만주)길림성 집안현 국내성 밖의 동대자 제사유적(사직)이다.고국양왕 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제사유적에서는 능산리유적과의 유사성이 찾아진다.백제의 출자가 고구려에서부터인 것은 이미 건국신화나 역사사실을 통해 알려졌고,고고학적 유물들도 이를 입증한다. ○고구려 유적과 흡사 그러나이 능산리유적 건물터가 고구려 동대자 제사유적과 유사하다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다만 금동향로와 건물터의 관계와 중요성한 것이다. 충남 공주 송산리에서 발굴된 방단계단형무덤도 일종의 제사터로 볼 수 있는 유적이다.서울 송파구 석촌동 계단식돌무지무덤과 흡사하여 한성시대 백제계 무덤으로 추정되기는 하나 제사유적을 겸한 가묘로 보인다.백제 개로왕은 AD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백제(BC18년∼AD475년)를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다.그 아들 문주왕은 부왕의 시신을 얻지못한채 웅진(공주)으로 천도하면서 일단 가묘로 만든 것이 송산리의 방단계단형무덤이 아닌가 한다.그러나 이 가묘는 개로왕을 위한 제사터 구실을 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백제의 제사유적을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다룰 전북 부안군 죽막동 제사유적은 변산반도 해안절벽에 자리잡고 있다.국립전주박물관이 발굴한 이 유적에서는 구멍이 뚫린 원판(유공원판)과 구리거울(동경),활석으로 모방한 갑옷,굽은옥(곡옥),쇠칼,동물을 형상화한 토제품이 출토되었다.이 유적을 발굴한 국립전주박물관은 죽막동 제사유적은 AD 5세기를 전후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 죽막동 제사유적은 일본 오키노시마(충도)노천유적과 거의 비슷한 조건을 갖추어 주목을 끈다.부안 죽막동은 섬은 아니지만,해안가 절벽에 위치했다는 입지가 우선 비슷한 것이다.유적 형성시기는 부안 죽막동 유적에 비해 훨씬 늦은 AD 7∼8세기경으로 밝혀졌다.그럼에도 출토유물 성격도 비슷한 내용을 보여 백제의 영향을 받은 유적으로 보고 있다. 오키노시마는 일본 규슈(구주)와 한반도 사이의 현해탄 망망대해 속의 섬이다.둘레는 약4㎞이고 해발 2백43m의 산이 우뚝 서있다.절해고도인데다 지형마저 험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상주하지는 않지만,여러 시대의 제사유적이 분포되었다.야요이(미생)시대로 부터 고훈(고분)시대를 거쳐 나라(나양)시대에 이르는 제사유적이 밀집되었다.그래서 사람들은 이 오키노시마를 「바다의 정창원」이니,「섬으로 된 정창원」따위의 호칭을 붙였다. 이 섬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근대화 이전의 에도(강호)시대부터다.그러나 본격적인 고고학 조사는 지난 1953년부터 이루어졌다.현재까지 23개소의 유적이 조사되었다.오키노시마 출토유물로는 굽은옥,철제무기류,토기,활석제 사용품 등이 있다.이들 유물은 거의가 바위 끝자락에 만들어 놓은 제사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오키노시마 제사유적을 좀 장황하게 설명한 감이 없지 않다.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그것은 오키노시마 제사유적은 일본에서 가장 일찍 나타나는 제사유적인 동시에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데 자리잡았다는 점이다.더 설명을 곁들이자면 오키노시마 유적은 우리 부안의 죽막동유적을 원형으로 삼아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의 유물을 수용했다는 사실도 포함될 것이다. 어떻든 한반도계의 유물이 오키노시마에서 나오는 것은 이른바 도래인과도 결부시켜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고,더 흥미로운 것은 고대인의 정신세계 마저도 정확하게 반영시켰다는 점이다.갑옷을 모방한 활석제 제사용품이 부안 죽막동유적 출토품과 같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지만,오키노시마 출토의 김동제용두도 경북 풍기와 강원도 양양 출토품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가야유물도 나와 그리고 우리 가야고토의 여러 고분에서 흔히 출토되는 말띠드리개가 오키노시마에서도 나오고 있다.오키노시마가 극히 좁은 섬이라는 현실을 고려하면,실제 말을 타는 기마용 말갖춤(마구)의 일부라기 보다는 제의용으로 쓰였을 것이다.말갖춤 장식에 불과한 말갖춤까지도 신성시한 당시 오키노시마의 풍속을 엿보는 듯 하다.이렇듯 한반도의 문화는 현해탄 가운데 섬들을 징검다리로 삼아 일본열도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몇몇 백제의 제사유적을 살펴보았다.현재 뚜렷하게 나타난 유적이 3개소에 불과하지만,더 발견 될 수도 있다.이와 더불어 유적연구가 진전된다면 유적의 성격은 물론 백제인들의 기층심성에 깔린 제례의식이 어떠했는가를 어느 정도 규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특히 국가의 사직이나 종묘와 같은 제사유적이 민족의 정신적 구심력을 형성하는데 공헌한 역할론도 제기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제사의식/나라의 평안·풍년 등 기원/하늘·땅 등 자연물이나 조상숭배 고대인들은 우주 자연의 모든 현상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꼈다.그래서 이들 현상을 초월자 또는 절대적 존재로 상정하고 평안을 기원하거나 혹은 감사하는 천제나 제사 의식을 행했던 것으로 믿어진다.이 외경의 대상은 때로는 하늘 땅 해 달 혹은 자연물이 되기도 했다.우리 민족은 아주 먼 옛날부터 하늘을 공경하여 제천의식을 올리고 농경이 시작된 뒤로는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옛 기록에 나타나 있는 부여의 영고,고구려의 동맹,예의 무천 등이 그것이다.이 의식는 뒷날 조상 숭배사상과 합치되어 조상을 추모하고 자손의 번영,친족 사이의 화목을 도모하는 행사로 발전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막상 제사유적이라고 부를 만한 유적은 오늘날에도 지방 곳곳에 남아있는 서낭당이나 장승,당산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숫자는 적은 편이다.선사시대의 제사 유적으로는 울주 반구대와 천전리(국보 147호),고령 양전동(보물 605호),흥해 칠포리,포항 인비동,영천 봉수리,영주 가흥리,여수 오림동,남원 대곡리 등의 암각화가 남아 있다. 역사시대는 백제 유적을 제외하면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제주 용담동 유적(1992년 제주대박물관 발굴)과 수신동굴,그리고 동대자유적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고구려의 옛 수도인 국내성(지금의 집안)동쪽에 위치한 수신 유적은 「후한서」와 「삼국지」에 고구려 왕이 10월에 동맹을 올리던 동국대혈로 불리고 있다. 동대자 유적은 1958년 중국 길림성박물관에 의해 국내성 밖 5백m 지점에서 발견됐다.발굴 결과 이곳은 고구려 중기(18대 고국양왕 9년 또는 광개토왕 2년,392년)에 속하는 「국사」라는 사직과 종묘의 제사유적으로 밝혀진 바 있다.
  • “1조원어치 금괴를 찾아라”/제주 산천단일대 넉달째 박굴작업

    ◎“일군 지하2m 매장설”… 4명이 1년간 계획/21m서 금속성 탐지… 80t행방 밝힐지 주목 「1조원짜리 금괴」 제주시 산천단 곰솔나무(천연기념물 1백60호)인근 지역에서는 「1조원짜리 금괴」를 찾기위한 집념의 지하굴착작업이 연 4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산천단 금괴 발굴작업이 처음 시작된 것은 지난 3월.경기도 부천시에서 소방설비 사업을 해온 이종민씨(50·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등 4명이 제주시로부터 제주시 아라동 392의1과 392의5의 경계지역 6.48㎡에 대한 천연동굴 탐사및 매장물 발굴조사를 위한 토지변경 허가를 얻으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씨등이 1조원짜리 보물을 찾겠다는 야심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것은 1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이들은 발굴지역이 2차세계대전 말기 일본군 주둔지로 당시 이곳에서 주방요원과 잡역부로 일했던 사람으로부터 「일본군이 중국,동남아일대에서 강탈한 80여t의 금괴를 일본으로 가져가기에 앞서 곰솔지역에 몰래 숨겨놓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은 발굴허가를 받기위해 제출한 지하매장물 전자탐사시행 심사보고서를 통해 지난해 9월 전자파자장으로 지하 광속물체를 찾아내는 스웨덴제 전자탐사장비인 「와디」(WADI)를 통해 지하 24m지점에 금속체로 추정되는 매장물이 있다는 사실을 탐지해냈다고 밝혔다. 사실 제주지역에서는 그간 이지역에 금괴가 매장돼있다는 풍문이 이어졌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다.다만 일본군이 주둔했던 사실만이 제주도가 발간한 제주도지(제주도지)등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제주도지에 따르면 일본은 제주도를 본토사수의 최후보루로 설정하고 45년 4월부터 5월까지 관동군 관동군 제111사단(사단장 유천)과 제121사단(사단장 정정)등 중국,북만주등지에서 철수한 7만5천여 병력을 제주에 상륙,주둔시켰다. 이씨등은 산천단에 금괴가 이때 매장됐고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일본군이 10월초부터 11월13일까지 미군 LST에 의해 일본으로 강제 귀환되면서 그 금괴를 미처 일본으로 옮기지 못한게 틀림없다고 이씨등은 믿고 있다. 이때문은 이씨등은 실제로 지금까지 금괴발굴작업에 5백여명의 인력을 투입했고 1억원 이상의 돈을 장비구입및 인건비등에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등의 굴착방법은 「철재가공 수직굴착 방법」으로,지하 24m까지의 굴착목표중 지금까지 21m를 파내려갔다.특히 지하 21m를 파내려가면서 부터는 굴착지점에서 찬바람이 나오는등 인공동굴이 있는듯한 징후가 나타나 발굴팀들을 설레이게 하고있다. 그러나 이씨등의 이같은 야심이 현실로 실현될지는 미지수.이들도 목표지점에 도달하면 금괴는 안나온다 하더라도 철모나 병기,공공문서등이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그러나 병기등의 발굴로는 투자한 본전을 뽑기에는 역부족. 이씨등은 『금괴가 나온다면 더할 나위없이 기쁜일이겠지만 그렇지않을 경우에는 발굴지를 원상회복 시킨뒤 미련없이 손을 털 생각』이라고 속마을을 감추지 않고 있다. 매장물발굴법에 따라 40%는 국고에 귀속되고 나머지 60%는 발굴자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1조원짜리 금괴는 세인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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