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동거
    2026-07-05
    검색기록 지우기
  • 무슬림
    2026-07-05
    검색기록 지우기
  • 온실
    2026-07-05
    검색기록 지우기
  • 투신
    2026-07-05
    검색기록 지우기
  • 풍자
    2026-07-0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8,110
  • 싼타페 ‘정면충돌’ 안전성 최우수

    현대자동차의 싼타페가 올해 정부가 실시한 안전도 테스트에서 비교 대상 5개 차종 가운데 정면충돌 때 가장 안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건설교통부는 기아 프라이드, 지엠대우 젠트라·윈스톰, 쌍용 카이런, 현대 싼타페 등 5개 차종에 대한 안전도 평가결과를 13일 발표했다. 시속 56㎞로 고정벽에 정면충돌시키는 테스트에서 운전자석은 프라이드와 싼타페가 별 5개, 나머지 3개 차종은 별 4개였다. 조수석은 윈스톰과 싼타페 5개, 프라이드·카이런 4개, 젠트라 3개였다. 싼타페는 정면충돌 때 중상을 입을 확률이 운전자석 8%, 조수석 8%로 가장 낮았다. 측면충돌 안전성에서는 운전자석의 경우 프라이드와 젠트라가 각각 별 3개로 평가됐으며, 주행전복 안전성에서는 윈스톰과 싼타페가 각각 별 4개, 카이런은 별 3개를 받았다. 머리 지지대 안전성에서는 프라이드 등 5개 차종 모두 운전자석과 조수석에서 최고 등급인 우수 판정을 받았다. 제동 성능에서는 마른 노면과 젖은 노면에서 젠트라가 각각 42.4m와 46.6m로 제동거리가 가장 짧았다. 카이런은 각각 49.4m와 56.8m로 가장 길었다. 건교부는 1999년부터 올해까지 총 47개 차종의 안전도를 평가, 발표해 오고 있다. 건교부는 “내년에는 보행자 안전성을 평가항목으로 추가하는 등 평가대상 차종 및 항목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보이·프렌드와 즐겁고 황홀하게

    보이·프렌드와 즐겁고 황홀하게

    사랑하는 행복감에 젖어 내 들은 모두 한결같이 나를 순수한 여인으로서 대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몇명의 「보이·프렌드」와 사랑을 나누면서 굉장히 즐거웠고 황홀경에 젖어 있었으며 호강에 넘치는 충만한 행복감을 맛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나의 가장 여성적인 부분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의 행위를 갖고 내가 그것을 즐길 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몸이 그렇지 않다면 남성들쪽에서도 사랑의 기쁨은 사라져버릴 것이 아닌가. 수술을 한 것은 23살때였지만 내가 완전한 여성으로서 살아 갈 수 있게 된 것은 수술 후유증이 나은 뒤였다. 내가 태어났을때 내몸의 아주 작은 부분은 남성이었고 수술을 할 때까지 그 부분은 남성인채 있었으나 나라는 인간의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영혼은 당초부터 여성 내 몸의 훨씬 큰, 그리고 실로 뚜렷한 부분은 내가 여자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데, 어째서 그런 보이지도 않는 곳이 대단하게 생각되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같은 사람들은 남성의 육체라는 덫에 걸려 있는 여자라는 허명(虛名)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나의 몸이 남성의 육체와 닮았다는 것일까. 가슴이 커지기 시작한 18살때부터 내 몸의 99%가 여성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남성의 육체라는 덫에 걸려있다는 말인가. 분별있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간의 가장 소중한 것은 단하나 불멸의 영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고 진찰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마음 역시 육체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것임을 인정할 수가 없단 말인가. 만일 그것을 인정한다면 여성의 마음을 갖고 여성의 모습을 지닌 사람이 문제없이 여성임을 또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지 않겠는가. 이혼은 너무나 큰 불행 나는 외과수술(外科手術)이나 약품의 산물(産物)이 아니다. 「호르몬」이 몸의 모습을 바꿀수는 없으며 마음의 모습을 바꿀수도 없다. 나는 이름을 「에이프릴·애슐리」라고 개명(改名)해 버렸다. 이제까지 영국의 「패스포트」는 성별을 명기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나는 여성의 신분으로 마음대로 여행을 할 수가 있었다. 나는 몇명의 남성들과 동거생활을 하는 경험을 치렀고 그런 뒤에는 아내로서 스스로의 능력을 불안스럽게 생각해 본 일이라곤 없었다. 그러나 불행에 휩쓸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예감은 늘 있었다. 「아더·코베트」씨와의 결혼식은 1963년 9월 10일 「지브롤터」에서 올렸다. 결혼생활은 겨우 2주간으로 끝났으므로 이 결혼은 결국 불행하게 막음을 한 셈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이 결과는 너무나 큰 불행이었다. 스스로 살아가고, 서야 할 땅이 어딘지 새삼스럽게 불안감이 솟는 것이었다. 7년 가까이 끈 재판이 얼마전에 영국 최고재판소에서 판결이 났을 때 이 결혼에는 종지부가 찍혔다. 그리고 이 일은 아마도 나의 일생에서도 가장 굴욕적인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줄곧 신경안정제를 먹어야만 했다. 재판에서 증언하는 사람들의 말을 잘 알아 듣기 위해서 약을 먹어야 했던 것이다. 남자라는 판결 받았으나 그리고 판사는 내가 남자라고 판결을 내렸다. 나는 이제 여자이면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고독의 생활을 선고받은 셈이지만 나는 그것을 단연 거부하겠다. 진짜 고독이란 어떤 것인지를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고독한 생활을 나의 미래로서 받아 들일 생각은 손톱끝 만큼도 없다. 그것은 자연과 법과의 충돌이다. 자연은 항상 나로 하여금 여성일 것을 의도해왔다고 나는 믿고 있다. 나는 판사의 판결에 불복이다. 곧 재심제구(再審諸求)를 할 작정이다.이 판결이 나의 자연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대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마음속 깊이 소망하고 있던 단 한가지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속 깊이 소망하고 있던 것-그것은 남편이었고, 아이(비록 양자일지라도)가 있는 가정이었고, 행복이었다. 판결속의 무서운 의미 영국의 법률은 내가 자신의 인생을 타인과 함께 즐기는 것을 금했고,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을 나에게 금했고, 그리고 여느 남성이나 여성 모두에게서 나를 떼버리려 하는 것이다. 그 판결에는 그런 무서운 의미가 있는 것이다. 10대에서 나는 그런 인생의 고독을 맛보았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여성이면서 딱 한군데만이 남성이었던 그 시절 얘기다. 나는 너무나 여성처럼 보였기 때문에 남자화장실에도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특별한 곳이 남성이었기 때문에 당당한 계집애로서 살 수도 없었다. 나는 남자와도 여자와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하는 수가 없었다. 나는 남녀를 막론하고 동성애(同性愛) 주의자들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서운 옛날 이야기. 수술한 뒤로는 많은 정상적인 남녀가 서로 사랑하듯 껴안고 춤추고, 그리고 같은 방에서 살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첫번 결혼에 실패했다고 해서 다시 결혼할 수 없다는 결론은 너무 가혹하다고 밖에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계속> [선데이서울 70년 4월 19일호 제3권 16호 통권 제 81호]
  • 일본 저출산·고령화시대 새 복지모델 현장을 가다

    일본 저출산·고령화시대 새 복지모델 현장을 가다

    |도쿄 이춘규특파원|지난 8일 오전 9시30분. 도쿄도 에도가와구 주택가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고토엔’. 운동장에서는 어린이 60여명과 노인 10여명이 함께 건강체조를 하고 있다.20분 뒤 아이들은 우르르 달려가 노인들 품에 안겨 응석을 부리거나 가위·바위·보를 함께 했다. 이곳은 보육시설과 노인복지시설이 함께 있다. 노인과 아이들이 어울려 하루를 지낸다. 한달에 2번 정도는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식사한다. 여름에는 4,5세 원아와 노인들이 가까운 지바현 바닷가로 1박2일 여행을 떠난다. 보육시설과 노인시설을 융합한 시스템이다. 저출산·고령화 시대의 새 사회복지시설 모델인 셈이다. 입주 노인은 100명. 별도 통근 치매노인 20명에 대해선 낮시간에 ‘데일리 서비스’시설에서 돌본다.5세 이하의 유아 및 어린이 100명은 낮시간에 맡겨진다. 1987년 정부는 규정에 맞지 않는다고 만류했지만 구청의 끈질긴 설득끝에 노인시설과 보육원을 하나로 만들 수 있었다. 정부는 처음에 노인과 어린이가 같이 생활하는 시설을 허용하는 법규정이 없다고 난색을 표시했었다. 고토엔 산하 ‘케어센터-쓰바키’ 센터장인 스기 게이코는 “한 지붕 아래 노인과 아이들이 동거하면 가족·공동체가 부활돼 서로에게 좋다.”고 강조했다. 이곳에선 노인들이 어린시절 경험을 어린이들에게 전해주고, 어린이들은 노인들에게 활기를 제공하면서 노인세대의 삶의 지혜를 배운다. 출범 때 후생노동성은 어린이와 노인이 움직이는 속도가 달라 어린이가 휠체어 등과 충돌할 위험이 있고, 전염병이 유행하면 차단할 벽이 없다는 이유로 인가를 꺼리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정작 출범 뒤에는 사고가 한 건도 없어, 보육원은 인근 맞벌이 부부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대기자도 있다. 오전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평균 월 2만엔(약 16만원)에 맡길 수 있다. 노인과 어린이의 교류를 넓히기 위한 여러가지 방안이 마련됐다. 매일 오전 9시반에는 원아와 노인들이 함께 체조를 하고, 교류시간을 갖는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최근에는 원아 발표회 준비에 노인들도 참여하고 있다. 운동회, 여름캠프, 축제도 함께 한다. 아이들의 건강한 목소리를 듣고, 직접 볼 수 있도록 1층의 보육원과 노인홈 재활센터의 벽을 없앴다. 아이들의 놀이를 보면서 재활훈련을 한다. 수영장은 2층 노인홈 옆에 배치, 아이들의 활력을 노인들이 느끼도록 했다. 고토엔 보육원의 하야시 요시토 원장은 “점심식사를 함께 할 때는 메뉴에 가시가 있는 고기나 생선을 포함시킨다.”면서 “노인들이 아이들 음식의 뼈를 가려내주면 아이들이 잘 먹는다. 그러면 어르신들도 보람을 느낀다고한다.”고 전했다. 구청은 경제적, 집안사정 등으로 집에서는 살기 어려운 노인들을 주로 선발, 수용 비용은 정부에서 대부분 대준다. 치매 등으로 간병이 필요한 노인들은 주로 보험제도를 활용한다. 간호사 등 정규직원 75명, 비정규직 40명. 세탁이나 급식 등은 연간 누계 2900여명의 자원봉사자의 몫이다. 게이단렌 경제홍보센터 유카와 히데토 연구원은 “핵가족화로 노인과 부모, 어린이 3세대가 동거하는 사례가 드문 시대에 노인과 보육 원아들이 함께 어울려 생활하는 시설은 한국에도 좋은 선례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taein@seoul.co.kr
  • [주말탐방] 세밑 녹이는 구세군 3인

    [주말탐방] 세밑 녹이는 구세군 3인

    ‘땡그렁∼, 땡그렁∼’8일 밤 서울 명동 거리에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퍼지자 팔짱을 낀 커플이 자선냄비 앞에 발길을 멈췄다. 남녀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지갑을 꺼내 들었다. 자신들의 행복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싶었을까. 자선냄비로 향하는 그들의 아름다운 손길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2006년 겨울. 차가운 잿빛 도심에 올해도 어김없이 붉은 자선냄비가 등장해 거리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바쁜 일상에 주위를 둘러보지 못했던 각박한 도시민들의 마음을 열게 만든다. 매서운 추위를 훈훈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종소리. 빨간 사랑을 전하는 구세군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 31년째 종소리를 울리는 양웅철(75)옹 “춥긴요, 더운데요?” 찬바람이 계단을 타고 밀려 들어오는 서울 영등포역 지하 대합실.31년째 겨울마다 종을 울리는 양씨는 코트도 걸치지 않은채 짙푸른 제복만 입고 있었다. 춥지 않으냐는 질문에 손사래를 치며 “예나 지금이나 여기 서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며 활짝 웃었다. 그는 “경제가 나빠지면 사람들 마음마저 각박해진다고 하는데, 자선냄비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나날이 늘어가는 것 같다.”면서 “어제는 한 남자분이 300만원이 든 봉투를 넣고 갔다.”고 말했다. 사실 그에게는 300만원이나 3000원이나 금액 상관없이 똑같이 소중하다.10년 전 시각장애인이 손에 쥐어주었던 돈처럼. “먼 발치에서 ‘여기 자선냄비 어딨냐.’고 소리를 치고 있더군요.‘저 여기있습니다.’라면서 다가갔더니 주머니에서 3000원을 꺼내 ‘이것 좀 냄비에 넣어달라.’고 하더라고요.” 머리에 과일 바구니를 이고 ‘앞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가라.’던 과일행상 아주머니, 크리스마스에 아이들 주려 샀다는 케이크를 냄비 옆에 놓고 가던 아저씨도 있었다.30년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자선냄비 앞으로 나오고, 퇴직을 한 뒤 다시 구세군 모자를 쓴 것도 그 ‘꼬깃꼬깃한 돈’ 때문이었을 게다. 그는 사람들의 훈훈한 마음은 여전하다고 한다. 살기가 좋아졌기 때문인지, 냄비쪽으로 와 ‘이거 날 달라.’며 떼쓰는 사람들이 없어졌을 뿐이다. 적으나마 자선냄비에 모금액을 넣는 사람은 오히려 늘고 있다고 느낀다. “어떤 분들은 적은 돈을 넣으면서 미안한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돈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관심이 점점 늘고있다는 게 중요한 거죠.” 그의 곁에는 빨간 자선냄비와 함께 버스 무인요금 계산기를 변형시킨 ‘디지털 자선냄비’가 있다. 현금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최근 새로 나온 자선냄비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평생 여기 서있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 연봉 4000만원 접고 구세군된 김기석(33)씨 “연봉이 딱 4분의1로 줄었지만 직장다닐 때 느끼지 못했던 기쁨이 있어 행복합니다.” 김 사관후보생은 지난해만 해도 한해 4000만원을 버는 촉망받는 대기업 사원이었다.‘배고파도 의미있는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결심에 구세군의 길로 들어섰다.“허름한 옷차림의 할아버지가 주머니에 구겨넣은 돈을 통째로 털어 냄비에 넣었습니다. 그러더니 폐지가 잔뜩 쌓여있는 리어커를 끌고 가는 거예요. 그게 아마 저녁 값이었을 텐데….” 명동 한복판에서 마이크를 쥐고 진지하게 모금을 하는 젊은 구세군도 그럴 때면 ‘울컥’한다고 한다.“직장인일 때는 노숙자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는 그는 “밑바닥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희망인데 우리는 그것을 주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신세대 구세군답게 그는 모금에 적극적이다.‘오른손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보다는 더 많이 알려 더 많은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왜 여름에는 자선냄비가 나오지 않느냐, 연초에도 구세군이 나와있으면 신년 분위기가 더 좋지 않겠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요. 기본을 지키되 시대의 흐름에 맞게 모금 형태는 다양화해야겠죠.”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기본을 지키는 구세군이 되는 게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소외되고 경쟁에서 뒤처지는 사람들을 위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면서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자선냄비가 밑바닥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라고 자신했다. # 3대째 자선냄비 지키는 여성사관 박은영(38)씨 사당역 자선냄비 옆에 선 박 사관에게 양복을 잘 차려입은 남성이 걸어왔다.“백화점이 어느 쪽이죠?”생긋 웃으며 길을 가르쳐준 박 사관에게 또 누군가가 다가와 “11번 출구가 어디냐.”고 묻는다.“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그만큼 구세군을 믿기 때문 아닐까요.”15살때부터 자선냄비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는 박 사관이 이 길에 들어선 것은 같은 일을 한 아버지 때문이었다. 종로2가로 아버지를 따라가 모금 활동을 하면서 이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취객들이 와서 행패를 부릴 때가 제일 힘들죠.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때는 자정까지 한 시간동안 앞에 서서 주정을 하는 통에 혼이 났죠.”종소리가 시끄럽다는 상인들, “내가 불우이웃”이라면서 모금함을 통째로 들고 가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감동적인 순간이 훨씬 많았단다. “올 들어 처음 모금을 시작한 지난 2일, 목발을 짚고 힘겹게 걸어와 돈을 넣고 가는 장애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봤어요. 택시를 타고 가다가 잠깜 멈춘 뒤 돈을 넣고 가기도 하고, 어떤 분은 따듯한 차와 귤을 건네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에 이어 3대째 구세군 활동을 하고 있는 박씨는 자녀들이 ‘구세군이 되겠다.’고 한다면 어떨까. 그는 “큰아들이 이미 사관이 되고 싶다고 하는데 자랑스럽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아이들의 학교 행사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엄마를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아 너무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글 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105년 역사 구세군 변천사 매서운 겨울 추위를 녹이는 빨간 사랑을 담은 구세군 냄비가 첫 종소리를 울린 지 105년이 흘렀다. 구세군 자선냄비의 은은한 종소리는 올해도 어김없이 도심 곳곳에서 지나가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올해는 지난 2일 오전 11시 시종식을 시작으로 오는 24일 자정까지 전국 76개 지역 230개 장소에서 사랑의 손길을 기다린다. 올해의 목표액은 30억원이다. 빨간 자선냄비가 종소리를 울린 것은 18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당시 도시 빈민들과 갑작스러운 재난을 당해 슬픈 성탄을 맞게 된 1000여명의 사람들을 먹여야 했던 구세군 사관 조셉 맥피 정위가 난민을 구제할 방법을 고심하다가 떠올린 게 바로 쇠솥이었다. “쇠솥을 끓게 합시다.”란 구호와 함께 오클랜드 부두에 내걸린 주방용 쇠솥은 바로 불우한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충분한 기금으로 가득찼다. 현재 전세계 107개국으로 확산된 자선냄비의 시작은 이렇게 작고도 옹골찼다. 자선냄비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28년 12월15일 명동거리다. 당시 한국 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스웨덴 선교사 조셉 바이(한국명 박준섭) 사관이 구세군 운영자금과 불우 이웃돕기의 활성화를 위해 들여왔다. 그 해 명동, 충정로, 종로 등 서울시내에 20여개의 자선냄비를 설치해 당시 화폐로 812원을 모았다. 그 시절엔 나무막대 지지대에 가마솥을 매달았다고 한다. 이어 자선냄비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빠르게 변모해 왔다.10년 전부터 톨게이트 모금, 소형 자선냄비를 통한 모금이 등장했고, 최근 들어서는 ARS, 휴대전화, 신용카드, 교통카드, 인터넷뱅킹 등에 의한 결제로 영역을 확장했다. 이에 따라 기부금 형태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현금 위주였으나 지금은 현금, 수표, 금반지를 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로또복권도 종종 보인다. 온라인상에서는 신용카드 포인트, 싸이월드의 사이버머니인 ‘도토리’도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기부금이다. 이렇게 한푼 두푼 모아진 모금액은 기초생활보호자 지원, 심장병·백혈병 환자 치료지원,AIDS예방 및 말기암 환자 지원 등 여러가지 사회구호 사업에 쓰여진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구세군이 되려면? 구세군 하면 자선냄비 모금원을 떠올리기 쉽지만 구세군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교회다. 구세군 사관학교가 있는데, 신학대학이 목사를 배출하듯 목회자인 사관을 배출한다.2년 기숙사 생활을 이수하면 사관 자격이 생기고, 이후 2년 통신 과정과 대학원 3년 과정을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 구세군은? 1865년 윌리엄 부스가 런던 슬럼가에서 창립했고,1908년 11월에 한국 첫 교회인 서울 제일영이 개영됐다. 현재 우리나라 구세군 규모는 교회 241개, 교인 10만명 정도다. # 구세군은 왜 제복을 입나? 구세군이 준군대식 조직이기 때문이다. 일반 구세군 신도는 ‘병사’로, 성직자들은 다양한 계급으로 나눠진 ‘사관’으로 불린다.
  • 2人의 신부(新婦)중 누가 진짜냐

    3월 28일 하오 3시 경기도 강화군 강화면 강화 예식장에서는 金모씨(31·경기도 김포면 북변리)와 유(柳)모(25)의 결혼식이 막 시작 되려는 찰나였는데 느닷없이 또 한사람의 신부가 나타나서 난장판이 되고 말았는데…. 金씨는 4년 전부터 동거생활을 해온 李모양(23·김포군 양촌면 마송리)을 배반하고 몰래 유양과 결혼하려다 그만 들통이 나고만 것. 김씨와 유양 사이에도 이미 3살 난 딸이 있을 만큼 「역사 깊은」관계이고 보니 결국 두 여인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몇년을 속아 살아온 같은 입장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딱한 처지에 있던 김씨가 경찰로 연행되어 가는 심정은『차라리 잘됐다』가 아니 었을까? [선데이서울 70년 4월 12일호 제3권 15호 통권 제 80호]
  • 10대 유학생들까지 미성년자와 성매매

    10대 유학생들까지 미성년자와 성매매

    “한국 남자들은 자신도 마약을 하고 우리에게도 마약을 권해요. 먹기를 거부하면 화를 내지요.”(태국의 한 유흥업소 여성 종업원 A씨) “한국 남자들은 어린 소녀를 좋아해요. 기꺼이 많은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합니다. 여행 가이드에게 여대생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해 돈을 서너 배 더 지불하기도 합니다.”(필리핀 유흥업소 여성 종업원 B씨) ●일부대학생 ‘동성과 매춘´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류’ 열풍이 거센 가운데 이를 무색케 하는 한국 남성들의 해외 성매매 실태가 나왔다. 사단법인 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는 올해 7∼10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태국과 필리핀에서 실시한 현지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현지 유흥업소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94명 등 모두 116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한 결과다. 3일 서울신문이 단독 입수한 88쪽짜리의 보고서를 보면 한국 남성들이 현지에서 마약을 상습적으로 복용하고 성관계를 갖는가 하면 미성년 여성만을 찾는 등 한국 이미지를 크게 추락시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일여성센터는 오는 7일 국회에서 여성가족위원회와 함께 필리핀 사회복지사가 참석한 가운데 ‘아동·청소년 대상 해외 성매매 실태에 관한 토론회’를 열고 이런 내용을 공개할 예정이다. 조사단의 인터뷰에 응한 태국의 한 여성은 “한국 남성을 비난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마약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는 “마리화나나 아이시 등 구체적인 마약 이름까지 언급하기도 한다.”면서 “특히 배낭 여행객과 개별적으로 반복해서 이곳을 찾는 남자들이 마약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놨다. 보고서는 “주로 나이든 한국 남성들이 어린 여자를 선호하는데 어린 소녀와 성관계를 맺으면 음양의 원리에 의해 회춘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에 기반해 성관계 경험이 많지 않은 ‘순수한’ 여성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현지여성 동물 취급 악명 일부 몰지각한 한국 남성들의 추한 모습도 낱낱이 드러났다. 변태적인 성관계나 월경 중인 여성에게 성관계를 강요하는 등 현지 여성을 동물 취급하는 사례를 비롯, 콘돔을 사용하지 않거나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에 대해 현지 여성들은 울분을 토했다. 최근에는 이 지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대학생들이 늘면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대학생들까지 성매매에 빠져들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보고서는 “어학연수생이나 유학생의 경우 간헐적인 성매매는 물론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거나, 현지처처럼 동거하는 예도 있었다.”면서 “한국인들은 어린 여자나 같은 나이 또래를 좋아하고, 한국 대학생들의 동성애 성매매도 자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조사 책임자인 김경애 내일여성센터 이사장은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시행되면서 태국과 필리핀으로 성매매 관광이 늘어났을 개연성이 높다.”면서 “다른 나라 여성, 특히 미성년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하지 않도록 정부와 비정부기구(NGO)가 함께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며 대책을 촉구했다. 김재천 박정경기자 patrick@seoul.co.kr
  • 대학생들 섹스 연수?… 현지여성과 동거도

    대학생들 섹스 연수?… 현지여성과 동거도

    “학생들의 호기심이라지만 문제가 심각합니다.”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는 한국인 김모(37)씨. 현지에서 어학원을 운영하면서 필리핀에 공부하러 온 한국 대학생들을 많이 만나는 김씨가 털어놓는 실상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필리핀에 오는 대학생들은 90% 정도가 비키니 바나 KTV 바에 가본 경험이 있다고 보면 됩니다. 여대생들은 쇼만 즐기지만 남학생들은 이른바 ‘2차’를 나가는 예가 많지요.” 비키니 바와 KTV 바는 여성 종업원들이 아슬아슬한 옷차림으로 쇼를 보여주는 유흥주점이다. 우리나라에 단란주점이 있다면, 필리핀에는 비키니 바가 있다고 할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고 한다. 쇼를 보고 룸(방)에서 술을 마신 뒤 성매매를 위해 ‘2차’, 이른바 ‘테이크 아웃’(take out)을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이런 비키니 바를 이용하는 손님들이 대부분 필리핀에 공부하러 온 한국인 대학생이라는 점이다.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골프 관광객이나 단체 관광객이 많았지만 요즘은 대학생들이 주를 이룬다. 이들은 영어를 배우러 온 어학연수생들. 김씨는 “같은 반 학생들이나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 가운데 선배들이 새로 온 후배들을 데려가면서 ‘어디 가면 물이 좋다.’는 식으로 유흥업계의 정보를 ‘전수’한다.”고 했다. 현지 여성과 ‘눈이 맞아’ 아예 살림을 차리는 대학생들도 있다.“갑자기 기숙사를 떠나겠다고 해서 알아보면 어학원에서 만난 여성 강사나 비키니 바에서 만난 여성과 동거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김씨는 “어학연수생 가운데는 방학 때면 공부를 핑계로 두세달 일정으로 방문해 현지 여성을 만나고 대학 학기가 시작하면 다시 귀국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대학생도 있다.”고 귀띔했다. 비키니 바에서 일하는 현지 여성들은 대부분 17∼19세로 10대가 대부분이다. 필리핀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고등학교까지의 학제가 10학년제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현지 여성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유흥업소에 취업한다. 반면 사회 분위기는 가톨릭 신자들이 80% 이상을 차지하는 등 낙태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 맘’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김씨는 “이성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만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단지 ‘엔조이’(즐기는)하는 식으로 현지 여성과 교제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젊은 대학생들의 유흥업소 출입이 잦아지면서 마약에 손을 대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고 했다. 불법이지만 강력한 단속이 없는 실정이다. 김씨도 최근 근무 기강을 위해 운전기사와 도우미 등 현지인 직원들을 대상으로 약물검사를 실시한 결과 10명이나 양성 반응이 나와 해고했다. 대학생들은 특히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샤부’라는 마약에 쉽게 빠진다고 한다. 김씨는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대마나 샤부·엑스터시 등 마약이 쉽게 유통되고, 마약을 상습 복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학생들이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함혜리 기자의 프렌치리포트] (7) ‘여성천국’의 두 얼굴

    [함혜리 기자의 프렌치리포트] (7) ‘여성천국’의 두 얼굴

    프랑스의 여류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가 1949년 발표한 ‘제 2의 성(性)’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사람은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여자가 되는 것이다.” 여자의 특색이나 능력을 모두 생리적 조건과 현상에서 설명하며 여자는 결국 남자에게 종속된 존재일 뿐이라고 여겼던 기존의 남성본위 여성론에 대한 반박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프랑스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어떤 수준일까? 프랑스에서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법과 제도가 여성들을 특별히 배려하고 있다. 부부나 연인들 사이에서도 남자들이 쩔쩔매는 것을 보면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 우위의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이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당선, 프랑스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한발짝 가까이 다가선 것만 봐도 여권(女權)이 급격히 신장됐음을 알 수 있다. 미셸 알리오-마리 국방장관, 기업대표자협회(MEDEF)의 로랑스 파리조 회장, 프랑스 국철(SNCF) 안-마리 이드락 사장 등 오랫동안 남성들이 독점해온 자리를 여성들이 차지하는 사례도 점점 늘고 있다. 이제 남성만의 직업이나 금녀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남녀평등 사회의 이미지를 흐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 가정폭력이다. 최근 남녀평등부 발표에 따르면 올들어 발생한 가정폭력 사건으로 여성이 사흘에 한 명꼴로 사망했다.‘여성천국´ 프랑스의 너무나 다른 두 얼굴이다. ●‘프랑스(La France)’는 여성형 경험을 바탕으로 볼 때 프랑스는 여성성이 무척 강한 나라다. 날씨마저 음산한 날이 무척 많다. 음양오행설로 본다면 음의 기운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르 프랑스’가 아니라 ‘라 프랑스’이듯이 프랑스라는 단어 자체도 여성형이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여성들은 덩치는 작지만 성질이 무척 깐깐하다. 남성들은 소심하고 조용한 반면 여성들은 매사에 적극적이다. 특히 프랑스 어머니들의 억척스러움은 우리나라 여성 못지 않다. 파리에서 집을 구하면서 알게 된 메예르 부인의 일상을 들여다 보자. 파리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교외에 살면서 파리시내 고급주택가에 있는 복덕방에서 일하는 그녀는 아이가 여섯이나 된다. 큰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반이고, 막내가 여섯살이다. 프랑스에서는 등·하굣길에 부모들이 자녀들과 동행하는 것은 의무사항이다. 매일 등·하굣길에 아이들과 함께 하고, 직장에 나와서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아이들 뒤치다꺼리하고 살림도 한다. 그야말로 슈퍼우먼이다. 자그마한 체구의 어디에서 그런 파워가 나오는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프랑스 여성들은 4명 중 3명이 직장생활을 할 정도로 사회참여율이 매우 높다. 그러면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낳아 키운다. 과거에는 경제적 필요에 의해 직장을 찾아 나섰고, 제한된 영역에서 활동했던 여성들은 이제 모든 분야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여성들의 자아실현 의지 못지 않게 일하는 여성들을 위한 여러가지 제도적 지원과 시설확충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전히 심각한 가정폭력 여성을 배려해 주는 사회적 분위기와 달리 가정에서 배우자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은 것은 충격적이다. 2003년 여름의 일이다. 여배우 마리 트랭티냥이 리투아니아에서 동거남에게 머리를 수차례 얻어맞고 뇌출혈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정폭력은 저소득층이나 실업자, 알코올 중독자 가정에 국한되지 않았음이 입증됐다. 상류층이나 지식인층 여성들조차도 가정폭력의 피해자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왔다. 이 사건 이후 여성단체들과 정부가 배우자 폭력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배가했지만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남녀평등부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에선 사흘에 한 명꼴로 여성이 배우자나 동거인의 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고 있다.2001년 보건부 조사에선 5일에 한 명꼴로 희생됐었다. 올들어 1월부터 10월까지 발생한 동거인에 의한 살인사건은 모두 113건. 희생자의 83%가 여성이었다. 남성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말다툼(54%), 술(29%), 이별(27%), 질투심(22%), 우울증(10%), 약물과용(8%) 등이다. 다른 통계도 있다.130만명의 여성들이 남편이나 동거인으로부터 신체적 폭력, 욕설, 심리적·성적 모욕을 받고 있으며 4만 8000명은 성관계를 강요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여성폭력 근절의 날인 지난달 25일 ‘여성의 권익향상을 위한 국가연합(CNDF)’ 주관으로 여성 5000여명이 파리에서 폭력을 근절하도록 법 제정을 촉구하며 시위했다. 남녀평등부는 가정폭력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충격적인 영상을 담은 계몽영화들을 제작해 텔레비전과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긴급 신고전화 설치 및 보호시설 확충에도 나설 계획이라고 한다. 가정폭력은 선진국 프랑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국가가 적극 나서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는 모습은 부럽기만 하다.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여권관련 제도 변천사 과거 프랑스에서는 남존여비 사상이 대단히 강했다.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해야 했고, 기혼 여성은 남편의 허락 없이 직업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런 남성우월적인 사회 분위기 탓에 제도적 측면에서 프랑스 여성들의 지위상승은 매우 늦은 편이었다. 프랑스는 1944년에야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여성들이 스스로 결정해서 경구피임약을 사용하게 된 것이 1967년이다. 그 전에는 피임의 결정권이 남편에게 있었다. 결혼한 프랑스 여성이 자기 이름으로 은행에 계좌를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70년대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늘면서 여권은 비약적으로 향상됐다.1975년 낙태가 합법화됐으며,1976년엔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내용의 남녀평등법이 제정됐다.1985년 민법상 여성의 재산권이 대폭 강화됐다. 2000년대 들어서는 더욱 획기적으로 발전했다.2002년 새 정부 출범과 함께 남녀평등 및 사회통합부가 출범하면서 사회 각 분야에 잔존하는 제도적인 불평등을 시정하고 있다. 같은 일을 하고도 여성이 남성보다 적게 받는다는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특별위원회도 설치됐다. 하지만 프랑스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여성의 정계 진출이 뒤진 편이다. 의회 의원 중 여성의 비율이 12.3%에 그친다. 이 분야에서 25개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22위를 기록할 정도로 여성의 정계 진출이 미약하다. 지난달 28일 각의를 통과한 지역정치의 양성평등에 관한 법안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새 조치에 따르면 광역 지방정부 및 인구 3500명 이상 지방 정부의 고위직에 남녀가 고루 기용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각 정당은 지방선거 후보의 절반을 여성으로 채워야 한다. 새 법안은 또 선출직 공무원을 대리할 수 있는 직책을 신설, 반대 성(性)을 가진 사람을 이 자리에 임명하도록 지방 정부에 요구했다. 이 법이 발효되면 4000명의 여성이 정치에 몸담을 수 있게 된다.
  • 대전 철도 쌍둥이빌딩 오늘 첫삽

    대전 철도 쌍둥이빌딩 오늘 첫삽

    ‘철도 메카’ 조성사업이 마침내 첫 삽을 뜬다. 한국철도공사와 한국철도시설공단은 1일 대전역 동광장에서 철도기관 공동사옥으로 사용할 ‘철도 타워’ 기공식을 갖는다. 공동사옥에는 철도의 양대축인 두 기관과 유관·협력업체 관계자 등 2800여명이 입주할 예정이다. 2009년 7월 준공 예정으로 2만 3500여㎡ 부지에 지하 4층, 지상 28층의 쌍둥이 빌딩이다. 초고속 정보통신망과 친환경적인 에너지 절약 시스템을 갖춘 첨단 지능형 건물이다. 정종환 철도시설공단 이사장은 “철도타워는 대전 관문에 위치한 랜드마크로 역세권 및 원도심 개발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며 “철도의 양대 기관이 별거를 끝내고 동거를 시작함으로써 대전이 한국철도산업의 ‘중심’임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강원 조침령도로 1일 개통

    강원 조침령도로 1일 개통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와 양양군 서면 서림리를 잇는 조침령도로(지방도 418호선)가 1일 개통된다. 30일 강원도에 따르면 2001년 2월 526억원을 들여 착공한 진동∼서림간 왕복 2차로의 조침령도로는 1145m의 터널 등 총연장 9.71㎞로 다음달 1일 임시 개통한 뒤 안전시설 등을 보강해 내년 6월 말 준공할 예정이다. 조침령도로가 개통되면 인제∼양양간 통행시간이 현재 1시간 30분대에서 30분대로, 이동거리도 83㎞에서 43㎞로 각각 단축된다. 도로 개통으로 당장 진동리 주민들이 겨울철 폭설로 상습적으로 고립되는 불편이 해소될 전망이다. 또 내설악 관광자원을 활용한 지역경제 개발과 주민 소득 증대는 물론 한계령과 구룡령 사이의 동서 연결도로 확보로 물류비용이 절감되고, 피서철과 관광성수기에 만성적인 교통체증을 겪는 국도 44호선의 대체 도로 역할도 맡게 된다. 강원도 관계자는 “영동과 영서를 잇는 또 하나의 도로가 개통되면서 한계령을 지나는 관광객들의 불편도 많이 덜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인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탈당 안말려” 결별 분위기

    “탈당 안말려” 결별 분위기

    열린우리당의 내부 반란이 심상치않다. 노무현 대통령의 연이은 ‘일방 독주’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결기마저 감지된다. 당내 분위기는 ‘청와대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표현이 적절한 듯하다. 당 지도부는 28일 저녁 김근태 의장 주재로 비상대책위원회의를 열고 논의 끝에 ‘대통령의 책임 있는 국정 운영’을 촉구했다. 회의 결과를 브리핑한 박병석 의원은 “대통령은 정치는 당에 맡기고 국정에 전념해 주길 바란다. 힘들 때일수록 책임있는 자세로 국정에 임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의 요구사항을 밝혔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회의에서 대통령 발언의 부적절함을 성토하며 ‘정기국회 이후 정계개편 논의가 본격화되면 대통령의 탈당을 포함한 당청관계 재정립 논의가 불가피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근태 의장은 이날 입장표명을 자제했지만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한 측근은 “노 대통령의 남은 임기 동안이라도 당청이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정례회동까지 제안해 놓은 마당에 (대통령의) 발언은 여당에 대한 협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이날 오후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열린 주요 당직자회의에서도 대통령에 대한 성토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 핵심 당직자는 “이제는 당청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의원들도 격앙됐다. 당적 포기 발언에 대해 우윤근 의원은 “노 대통령 발언의 진의를 모르겠다.”면서도 “탈당을 하겠다면 우리당이 굳이 말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석현 의원은 “대통령을 빼고 가는 통합에는 반대해 왔는데 굳이 대통령이 함께 가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 아니냐.”며 결별을 기정사실화했다. 김 의장 측근인 정봉주 의원은 “원인 제공자인 청와대가 이혼서류에 먼저 도장을 찍되, 대선까지는 동거 관계를 이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이 직접 나서서 대통령과 갈등을 표출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친노 그룹을 중심으로 나왔다. 친노직계 그룹인 의정연 소속의 이화영 의원은 “집권여당 의장이 한나라당과 전선을 형성하지 않은 채 대통령을 상대로 반사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문제”라면서 “이럴 바엔 의장직을 빨리 그만두고 전당대회를 통해 정통성있는 지도부를 선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구혜영 황장석기자 koohy@seoul.co.kr
  • 임신(姙娠)한 여고(女高)3년생 그로부터 13년

    임신(姙娠)한 여고(女高)3년생 그로부터 13년

    자신이 쓴 수기(手記)가 영화(映畵)로 기획되자 그 영화의 주연까지 맡게 되어 자신의 생활을 「스크린」위에서 재연하게 된 이색여심(女心)- . 『이 여인의 슬픔이』(전조명(田朝明)감독)의 원작자이자 주연배우로 등장하는 김소연씨(金昭延·32·본명 김지연(金志延))『영화보다 더 슬프고 쓰라렸던 13년간의 결혼생활』을 영화 속에서 되뇌어 보려는- 이 한맺힌 여인의 사연을 들어보면- . 순결뺏은 선생님과 결혼…두아이 낳고 2년후 이혼 「이 여인의 슬픔」은 18세때, 춘천(春川)의 모 여고 3학년생이던 김여인이 그녀보다 13세 손위인 수학선생 한테 처녀를 빼앗기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 스승과 결혼해서 13년. 金여인은 세상 여자가 그렇듯 아내가 되고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 다만 다른 여인들처럼 평탄하게 살아오지 못한 데서 「드라머」가 형성된다. 13년간의 결혼생활은 2년간의 동거, 5년간의 별거 그리고 합의이혼 뒤 3년간의 독신생활, 다시 돌아온 남편과의 재결합, 그뒤 오늘까지의 아내의 위치가 기둥 줄거리로 구성된다. 『한 남편에 대한 집념이 여자를 얼마나 슬프게 했는가를 보여주는 거죠』- 김여인은 자신의 과거가 「픽션」이상으로 「드라머틱」하다고 한숨지었다. 3살때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귀국한 게 15살때. 그럴싸해서인지 김여인에게는 일본 여인에게서 풍기는 특이한 분위기가 있다. 지금도 30대여인으로는 볼 수 없게, 더구나 파란곡절을 겪은 여인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게 애잔한 얼굴. 옷차림 역시 「스타」 지망생답게 화사하다. 여고 3년때의 그녀는 학교 안에서 손꼽히는 미녀였단다. 수학선생이 제자를 범한 이유인즉 『졸업하면 남에게 빼앗길것 같아서』. 예쁜게 탈인 소녀는 멋도 모르고 그 수학선생에게 몸을 바쳤단다. 그리고 임신. 졸업하기가 바쁘게 그 스승한테 시집을 갔다. 스승과 제자의 결합이 용납되질 않았다. 직장을 내놓은 남편은 고생을 모르고 자란 아내를 찢어진 가난 속에 빠뜨렸다. 그리고 돈을 벌자 2호, 3호를 얻어 들였다. 영화 속에서 김소연의 남편 역으로 등장하는 게 신영균(申榮均). 신영균은 지사(志士)적인 호탕함은 있으나 아내를 살뜰히 보살필 수 있는 자상한 남편은 아니었다. 하고싶은 일은 무책임할이만큼 늘어놓는 성미였다. 직장을 내던지고 제자와 사랑의 줄행랑을 놓을만큼 대담한 사랑이었지만 그것도 순간뿐. 사업을 벌여 돈이 생기자 2호, 3호를 얻어 들이고 어린 아내를 내동댕이쳤다. 2호는 「호스테스」, 3호는 여비서. 그 밖에 수많은 여자에게 아이를 잉태시켰다. 결혼 2년만에 두 아이를 낳은 김여인은 갓 스물살 때부터 자신의 행복보다 자식의 장래를 위해 의무적으로 살아야하는 여자가 됐다. 남편이 살림을 돌봐주지 않자 자신의 손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몸을 파는 짓 이외는 안해본 게 없다』. 『더욱 기막힌 것은』남편에게 이혼당할 때. 그녀는 2백만원의 빚을 안고 헤어졌다. 유혹도 많았으나 9년만에 다시 만나 위자료 대신 남편의 빚더미를 짊어진 것이다. 집을 담보로 2백만원의 부채를 청산했을 때 김여인에게는 새로운 유혹이 뻗쳐왔다. 담보를 맡은 변호사(지금도 명사급 인사)가 동거생활을 요구해 왔다. 의젓하게 아내를 가진 신사였다. 자신의 불행은 고사하고 『또 한사람의 불행한 여자를 만들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김여인은 그 변호사의 「프로포즈」를 뿌리쳤다. 또하나의 유혹- . 그것은 김여인이 음독자살을 꾀했을 때 죽음에서 구해준 한 착실한 청년(영화에서는 신성일(申星一))의 구혼이었다. 총각이었던 그 청년은 김여인의 과거를 고백받자 한층 더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다. 『사랑이 이런것인가』하고 처음으로 깨우쳐준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구혼에도 고개를 저었다. 고통을 참고 외로움을 견디는 여성의 인고(忍苦). 그 때는 이미 법적으로 남이 되었지만 그녀는 언젠가 있을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남녀가 부부로 맺어진다는 것은 애정보다는 인연의 결과입니다. 그 인연이 끊기지 않았던가 봐요. 여자로서의 자존심 같은건 문제가 아녜요』 2년 전에 남편은 방황을 끝내고 귀가했다. 별거부터 따지면 거의 9년만의 재결합이다. 지금은 행복하냐는 질문에 김여인은 『과거보다는- 』하고 소리를 죽였다. 수기를 쓰게 된 것은 『한 맺힌 과거를 스스로 정리해보려고』69년 봄부터 착수했다. 대학「노트」에 쓴 것을 2백자 원고지에 옮기니까 2천장 가량. 『지금도 더 쓰자면 한이 없다』고 말한다. 그 누구한테도 쏟아놓을 수 없던 괴로움을 독백하듯 수기로 엮었다는 것. 쓰고 나면 조금쯤은 속이 후련해졌단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쏟아 놓을 수 없던 이 여인의 슬픔은 엉뚱하게도 영화가 되어 만인 앞에 공개될 판이다. 노트에 적은 여자의 슬픔 우연한 인연으로 영화화 김여인의 친척뻘되는 사람이 우연히 이 수기를 읽고 소문을 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기획자인 박건태랑씨(朴健太郞·한때 전조명 감독의 조감독생활도 했다)는 김여인의 수기를 입수하자 이의 영화화를 서두르게 됐고 전조명 감독도 바짝 열을 올리게 됐다는 것. 전감독의 말은 『자기를 버린 남자에게 끝까지 쏟는 무서운 여자의 집념』을 「픽션」아닌 실화로서 「리얼」하게 그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화는 허락했어도 출연까지는 『상상도 못했다』고 김여인은 말했다. 김여인을 직접 등장시키자는 「아이디어」는 박씨와 전감독이 김여인을 만난 순간에 떠 오른 것으로 『배우 못지 않은 「마스크」에 맘이 쏠렸다』는 것. 망설인 끝에 남편의 허락을 받고 출연을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이 성공할 경우 어떻게 심경이 변할지는 몰라도 『출연은 이 작품 하나뿐이고 배우될 생각은 없다』는 게 金여인의 말. 「스크린」에서 자기의 과거를 실연(實演)할 김여인은 이를테면 수기로서 못다한 애증(愛憎)의 세계를 영화에서 털어 놓겠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13년간 견딘 슬픈 여인의 사연이 어떻게 작품으로 승화될 것인가가 남아 있는 문제다. [선데이서울 70년 4월 5일호 제3권 14호 통권 제 79호]
  • [주말탐방] 대전역 어제와 오늘

    [주말탐방] 대전역 어제와 오늘

    KTX가 104편 운행되고, 역 이용객만 주말 5만명. 역사내 회의실이 생기고, 새달 철도빌딩을 신축하며 철도 메카 위용을 뽐내지만 때론 아이들의 놀이터… 때론 노인들의 휴식처… 때론 학생들이 시위하던 광장, 그 희미한 옛추억의 블루스가 그립다. ‘역’은 ‘이별’을 연상케 한다. 만남과 새로운 출발의 의미도 있지만 대중가요에 실린 기차역은 아쉬움의 상징으로 표현돼 있다. 3남지방의 관문이었던 대전역.1959년 발표된 ‘대전부르스’의 무대이면서 전국에서 가장 넓은 광장(3500평)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전설(?)이 돼 버렸다. 정치와 시위·집회로 들끓었던 광장은 국내 최초의 대중교통 환승시설로 탈바꿈했다. 대전부르스는 기념비만으로 그 존재를 알리고 있을 뿐이다. 고속열차 개통과 전국 곳곳에 대형 할인매장이 들어서는 시대의 변화속에 교통의 중심지인 대전역을 뒷배경으로 위풍을 자랑하던 중앙시장도 그 위세가 크게 꺾였다.1905년 역사 신축 이후 100년 가까이 모습을 지켜 오던 대전역사는 2004년 지상 4층의 초현대식 건물로 단장하면서 과거와 완전 단절됐다. ●민족의 아픔 간직한 대전역 대전역과 사라진 광장은 일제시대 수탈 물자의 집산지, 광복 뒤에는 교통의 요충지, 6·25전쟁 당시는 피란민들의 이별 현장이라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만큼 넓은 장소가 없다 보니 17대 총선을 앞두고 정당 후보의 옥외연설회가 금지되기 전까지는 각종 정치행사장으로 유명세를 탔다.80년대에는 대학생과 노동계의 시위장소가 됐고 낮에는 아이들의 놀이터로, 저녁에는 노인들의 휴식처로도 애용됐다. “잘있거라 나는 간다….”로 시작되는 불멸의 히트곡 ‘대전부르스’의 배경인 대전발 0시50분 목포행 완행열차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이 노래가 만들어질 당시는 호남선도 대전역을 거쳐 서대전역으로 향했지만 회덕 분기점이 생기면서 필요성이 없어졌다.0시 50분 열차는 1960년 03시 05분 열차로 변경됐지만 수명은 오래가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은 오전 6시 20분 대전역을 출발하는 무궁화호가 목포행 완행열차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지는데 결정적인 소재가 된 새벽녘 역에서의 남녀간 이별은 이젠 영화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추억이 됐다. 대전역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중앙시장이다. 삼남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부상한 대전역 주변 중앙시장은 삼남지역에 생활물자를 공급하는 도매상 역할을 했다. 전국에서 상인과 손님이 몰리면서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과 견줄 만큼 위세를 날렸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오전 6시30분부터 9시까지는 남쪽 택시 진입로를 중심으로 인근 도시에서 보따리를 이고 모여든 노점상들이 좌판을 벌여 과거 화려했던 상권의 현장을 기억하게 만든다. 광장을 가득 메웠던 비둘기도 대부분 사라졌다. 옛 정취라야 홍합과 어묵, 가락국수 등을 파는 역 광장 입구의 포장마차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역을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잡는 정도다. 대전역의 명물 가락국수의 정취도 많이 달라졌다. 열차 정차시간이 짧아지면서 극적인 ‘국수넘기기’가 불가능해졌고 인스턴트화되고 먹을거리가 다양해지면서 국수를 찾는 이들도 중장년층이 주고객이다. 역 구내에 다양한 편의시설이 생기고 교통시설이 역에 가까워지면서 역 주변 상권도 크게 위축됐다.30여년간 역전에서 가게를 열고 있는 낙원다방 여주인은 “열차를 기다리거나 친구를 만나기 위한 손님이 북적거리던 때가 눈에 선하다.”면서 “요즘은 예약이 활성화되고 역 안에 커피숍 등이 생기면서 역 손님보다는 단골 손님들만 자리를 채우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철도의 허브…현대화의 고통도 대전역은 KTX 104편 등 하루 평균 260여대의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10개의 선로 중 2개만 화물선로이고 나머지 8개는 여객열차가 운행된다. 역 이용객은 평일 3만 5000명, 주말에는 5만명에 달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대전역 지하 동서관통도로가 개통되고 택시와 자가용 진입로가 들어서면서 대전역 광장은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과거 시내방향인 동쪽에서만 역으로 진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동서 양쪽이 모두 오픈됐다. 대전역에서는 다양한 경험이 가능하다. 대전 사람조차 호남선은 서대전역에서만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알지만 대전역에서도 하루 2차례 호남선이 시발·종착한다. 오전 6시20분 목포행과 오후 4시40분 광주행 무궁화호 열차가 출발하고 오후 4시5분, 오전 5시45분 각각 도착한다. 바쁜 현대인을 위해 역사내 회의실을 빌려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국토의 중심, 교통의 요충지로서 장점을 한껏 살린 사업으로 회의에 필요한 이동거리나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올들어 11월 현재 1억 6600만원의 짭짤한 부수입을 올렸다. 대전역의 발전은 더욱 가속화될 듯하다.2010년 경부고속철도가 완전 개통돼 열차수 증가가 예상되고 특히 다음달 철도빌딩 신축을 계기로 역세권 개발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철도의 축인 한국철도공사와 한국철도시설공단의 동거는 대전을 명실공히 철도의 메카가 되는 것이고 대전역은 그 관문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장흥진(54) 대전역장은 “대전역의 중요성을 감안해 현재 1만 1417㎡인 역사를 2010년까지 1만 4264㎡로 증축할 계획”이라며 “이용객 편의를 위한 편의 확대뿐 아니라 소규모 공원과 공연장 등도 조성될 예정이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대전역의 개발은 현대화의 고통을 수반하고 있다. 시설이 좋아지면서 노숙자가 크게 증가했다. 열차가 운행하지 않는 오전 3∼5시까지만 역을 폐쇄하다 보니 노숙자 관리의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겨울철이 되면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대전역이 동서로 오픈되면서 역이 시민들의 이동 통로가 됐다. 당연한 서비스로 생각하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대합실이 만남의 장소로, 대화의 장으로 돌변하다 보니 간혹 열차 이용객들의 불만을 사기도 한다. 노점상 문제는 위험수위에 달하고 있다. 도로가에 노점이 펼쳐지다 보니 사고 위험이 상존하는데다 주변 시장 상인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구청에서는 관할권이 철도공사에 있다며 단속을 미루고 있지만 백발이 성성한, 하루 몇천원을 벌겠다며 집을 나선 이들을 대책없이 무작정 쫓아낼 수만도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장 역장은 “아무리 현대화되고 첨단화되더라도 역의 애환과 정취는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전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가락국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은 열차 정차시간이 대부분 2분이어서 후다닥 내려 가락국수를 먹는다는 것이 불가능해요.” 대전역 하행선 매점에서 16년째 국수를 판매하는 박선자(53·여)씨는 운행중인 열차에 탑승한 승객은 대전역에서 가락국수를 먹을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고 야박하게도 경고했다. 대전역과 연상되는 것 중 대표적인 하나가 ‘가락국수’다. 특히 요즘 같이 찬바람이 휘몰아칠 때면 모락모락 따사로운 김이 올라오고, 새빨간 고춧가루가 면발 위에 내려앉은 가락국수는 생각만으로도 군침을 돌게 한다. 그래서 ‘삼순이’마저 가락국수를 먹으러 대전역을 찾았다. 완행열차가 사라지고 최고급 열차가 새마을호에서 KTX로 바뀌었듯 대전역 가락국수의 역사도 변화됐다. 봉지면에 양념, 육수까지 인스턴트화되면서 이론적으론 전국 역내 매점의 국수맛은 동일해졌다. 가락국수라는 이름도 사라지고 우동으로 통일됐다. 유부·튀김 등 삽입 재료에 따라 이름만 다르다. 대전역에는 상·하행선에 각각 1곳씩 우동집이 영업중이다. “여기 유명한 가락국수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상행선 우동집 주인마저 박씨집을 추천한다. 4평 남짓한 작달막한 박씨의 가게안은 의자가 4개뿐이지만 앉고, 선 사람들이 우동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연신 ‘호호’ 불어내느라 밖에서 보면 새벽 안개 낀 들판처럼 희뿌연하다.3000원의 행복가치는 충분하다. 손님도 변했다. 통일호와 무궁화호, 새마을호가 운행될 적엔 열차 탑승객이 주 고객이었다. 열차가 정차하자마자 뛰어내리는 손님이 많아 항상 ‘5분’대기조였지만 지금은 열차를 기다리는 손님이 고객이다. 박씨는 “같은 반죽이라도 끊이는 시간이나 불꽃크기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면서 “옛날처럼 퉁퉁 부은 면은 없지만 국물맛을 잊지 못해 손님이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을철 주말에는 하루에 700여그릇을 팔던 때가 있었다. 요즘은 150∼200그릇이 최고지만 그래도 매출은 KTX 개통 이후 나아지고 있다. 가락국수 손님은 뜨내기가 없다고 했다. 먹어본 고객이 잊지 않고 다시 찾는다. 며칠, 몇달, 몇년 만에 방문한 고객이라도 기억나는 얼굴이 수백명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녀만의 영업 노하우. 플랫폼 영업은 초단위로 움직이기에 계산기나 영수증 사용이 불가능하다. 고객이 1만원이나 5000원을 낼 것을 대비해 항상 잔돈을 준비해 놔야 한다. 대전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함혜리기자의 프렌치 리포트] (6) 동거는 필수, 결혼은 선택

    [함혜리기자의 프렌치 리포트] (6) 동거는 필수, 결혼은 선택

    2007년 프랑스 대통령선거에서 사회당을 대표할 세골렌 루아얄(53)의 프로필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그의 혼인 관계다. 루아얄은 국립행정학교(ENA) 동기생인 프랑수아 올랑드(52) 사회당 제 1서기와 25년째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파트너 관계로 살면서 네 자녀를 두었다. 집권 중도우파의 대중운동연합(UMP) 소속으로 대권 경쟁후보로 지목되고 있는 미셸 알리오-마리 국방장관도 의정활동을 하는 파트릭 올리오와 22년째 동거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애시당초 정치활동을 시작도 못했을테지만 프랑스에서는 이런 것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만큼 동거(concubinage)가 보편화된 사회 현상이기 때문이다. ●70년대 이후 급속 확산 프랑스에서는 동거하지 않으면서 사귀다가 결혼에 골인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거나, 유대교 집안일 경우 동거를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대부분 함께 살아보고 맘이 맞는다고 확신이 서면 결혼을 한다. 국립통계연구소(INSEE)에 따르면 프랑스에선 약 480만쌍(960만명) 정도가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고 있다.6커플 중 1커플은 결혼하지 않고 동거 중이라는 얘기다. 프랑스에서는 동거가 문란하고 복잡한 사생활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과거에는 동거가 상당히 부정적으로 비쳐진 것이 사실이다. 내연의 관계이거나 격식과 절차를 중시하지 않는 노동자 계층에서 동거하는 경우가 많았던 탓이다. 하지만 60년대 프랑스의 지성을 상징하는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커플이 결혼하기를 거부하고 평생을 함께 하면서 동거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완전히 바뀌었다.2차대전 이후 태어난 68혁명 세대들은 결혼이 가부장제를 유지하고, 사회로부터 여성 소외를 야기하는 제도에 불과하다면서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결혼이든, 동거든 개인의 가치선택에 달린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1970년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살아보고 결혼해야 실패도 줄여 프랑스에서 동거가 보편화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풍토인데다 종교(가톨릭)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들이 동거하는 이유를 물으면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거나 “아직 모든 면에서 준비가 안돼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전자의 경우 제도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하는 지식인 계층이나 사고가 자유로운 예술가, 결혼에 실패한 쓰라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해당한다. 알리오-마리 국방장관은 “결혼은 부르주아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는 함께 살면서 좀더 상대방을 알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며 결혼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20∼30대 젊은 커플들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취재차 만났던 세실과 질은 “결혼은 두 집안의 결합이기 때문에 훨씬 신중해야 한다. 동거는 두 사람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개인적인 관계일 뿐이다.”고 했다. 이들은 “결혼이 리스크가 큰 반면 동거는 자신과 파트너와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테스트 기간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동거를 통해 상대의 성격이 자신과 맞는지, 반대로 전혀 맞지 않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동거기간을 거쳐 결혼을 하면 성격차로 인한 불화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결혼하는 커플 갈수록 줄어 동거가 일반화되면서 결혼하는 커플은 계속 하향세를 보인다. 밀레니엄붐이 일었던 2000년 30만 5385쌍을 정점으로 줄어들어 지난 2004년에는 27만 8600쌍을 기록했다. 프랑스 사회에서 결혼은 더 이상 아이를 갖기 위해 의무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 아니다.2004년 기준 전체 신생아(80만 240명) 가운데 47.4%가 결혼하지 않은 커플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생아 둘 중 한명은 혼외출산인 셈이다. 이런 사회적 변화를 제도적으로도 뒷받침하고 있다. 부모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사회보장 혜택을 받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반 부모들이 갖는 친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가족 수당도 소득과 자녀 수에 따라 지급된다. 이전에는 민법상 결혼한 부부사이에서 태어난 아동과 그렇지 않은 아동을 구분했지만 2005년 7월 5일 법령으로 이런 구분을 없애고 모든 아동의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했다.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동거 커플을 유니옹 리브르(union libre), 즉 ‘자유로운 결속’이라고 한다. 법적인 효력을 지닌 부부관계는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하고나 만나 동거를 하거나, 금방 헤어지고, 자유롭게 한눈을 파는 일은 드물다. 짧게는 1∼3년, 길게는 수십년간 함께 산다. 아이도 낳아 기르며 가정을 이룬다. 아이들은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고,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만 부모인 남녀는 서로 아내, 남편이라고 지칭하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상대방을 남에게 소개할때 내 남자친구, 혹은 내 여자친구라고 한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반려자(compagnon)’라고 소개한다.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시민연대계약이란 시민연대계약(PACS·Pacte civile de solidarite)은 두 개인이 공동의 삶을 안정적으로 꾸릴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제도다. 지극히 프랑스적인 이 제도가 도입된 단초를 제공한 것은 필립과 미셸이라는 동성애자 커플이었다. 필립이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이 알려지자 가족은 외면했지만 동거남 미셸은 끝까지 필립을 간호했다. 하지만 필립이 세상을 떠난 뒤 필립의 가족들은 미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필립의 명의로 된 아파트에서 미셸을 쫓아내기에 이른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사회당의 진보적 의원들은 “동성애자 커플도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 줘야 한다.”며 법 제정을 추진했다.1990년의 일이다. 이 법안은 우여곡절 끝에 1999년 10월 의회를 통과했다. 동성애자 커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긴 했지만 지속적이고 안정된 성격의 사실적 결합을 이루고 있는 모든 동거 커플에 적용되고 있다. 시민연대계약은 자유로운 형태의 동거와 구속력이 강한 결혼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일종의 계약 관계를 사회가 인정해주는 것이다. 거주지 관할 시청에서 2명의 증인 참석 하에 신고하면 간단하게 끝난다.PACS 동반자로 신고된 두 사람은 은행에 통합계좌를 열 수 있으며 재산세의 경우 계약에 서명한 날로부터 공동 과세대상이 된다. 계약 후 만 3년이 되면 소득세에 대해서도 공동 과세대상이 된다. 증여세나 상속세율도 낮게 적용 받는다. 주택 계약의 명의 이전도 가능하고 육아휴직 등 사회보장제도의 혜택도 결혼한 부부와 마찬가지로 누릴 수 있다. 1999년 말∼2004년 말까지 14만 5000쌍이 연대계약을 맺었고, 같은 기간 1만 8000쌍이 관계를 해지했다.
  • 美 신생아 37% 엄마는 미혼모

    지난해 미국에서 태어난 신생아 10명 가운데 4명의 엄마는 미혼모였다. 미국에서 유례없는 기록이다. 미국 국립보건통계센터(NCHS)는 21일(현지시간) 지난해 신생아 410만여명 중 37%인 152만 5345명이 미혼모에게서 태어났다고 밝혔다.2004년보다 4% 늘어났다. 미국 혼외출산은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12%가 늘어나는 등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혼외출산율 상승은 결혼보다 동거를 택한 사실혼이 늘고 있는 데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10대 출산율은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15∼19세 출산율은 여성 1000명당 40.4명으로 전년보다 2% 떨어졌다. 최고 기록을 세운 1991년 61.8명보다 크게 낮아졌다.보고서 공동저자인 스테파니 벤추라는 “흔히 10대와 미혼모를 동일시하지만 실제로는 10대가 혼외 출산율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제왕절개 출산율은 30.2%로 연간 기준으로 가장 높았다. 전문가들은 제왕절개가 의학적으로 불필요한 시술인데도 산모와 의사들의 편의상 선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미국인의 초혼 연령은 결혼한 모든 미국인을 일렬로 세웠을 때 중간 나이로 남자는 27세, 여자는 25세로 나타났다.1950년에는 남자 23세, 여자 20세였다.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정인숙(鄭仁淑)-그여자의 일생

    정인숙(鄭仁淑)-그여자의 일생

    3월 17일 밤 11시30분께. 서울 강변3로서 울린 3발의 총성은 죽은 정인숙(鄭仁淑)양의 신원이 밝혀짐에 따라 뜻밖의 파문을 몰고 왔다. 저명인사들과의 접촉이 잦았으며 아버지의 이름이 밝혀지지않은 3살짜리 어린애를 가진 처녀 엄마라고해서 이러쿵 저러쿵 파다한 후문을 일으킨 것. 타고 난 미모 하나로 밤의 요화로 군림, 각계 실력자들과 어지러운 관계를 가졌던 정인숙(鄭仁淑)양. 45구경 권총탄환 2개로 26세의 나이로 비명에 숨져야했던 그녀의 「짧고도 긴 생애」는 어떤 것이었을까? 다음은 가족 ·친구들의 말을 바탕으로 한 「정본(正本) 정인숙전(鄭仁淑)傳).」 옛 이름은 정금지(鄭金枝). 해방되던 해인 1945년 2월 13일 대구시 남산동 681의 2에서 전 대구부시장을 지낸 정도환(鄭道換)씨(65)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인숙(仁淑)양의 아버지 정(鄭)씨는 12살 때 일가 중 후손이 없었던 정남수(鄭南洙)씨의 양자로 입양했다. 그러나 입양한 해에 양부 정남수씨가 돌아가자 정(鄭)씨는 호주상속을 받아 바로 그해 11월 인숙양의 어머니인 전(全)씨(61)와 결혼했다. 당시 정씨가 살던 곳은 경북(慶北) 김천(金泉)군 (금릉군) 개영(開寧)면. 정(鄭)씨 일가는 해방되기 전 해까지 줄곧 이 곳에서 살며 슬하에 4형제를 두었다. 이 4형제 중 4남이 바로 인숙양 살해혐의를 받고 있는 종욱(宗旭)씨다. 생전 인숙양이 주장하던 것처럼 「뼈대있는 집안」은 아니었다는 게 김천(金泉)일대 주민들의 말이다. 정씨는 행정관리로 출발, 대구(大邱)부시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인숙(仁淑)양의 출생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아들만 넷을 둔 정씨의 부인은 어떻게든 딸을 보고 싶어 절에 다니며 『딸자식 하나만 낳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렸다는 것. 과연 불공의 효험이 있었던지 45년 정씨의 아내 전씨는 딸 자식을 낳았다. 그것도 인숙양 하나가 아닌 딸 쌍동이였다. 그래서 바라던 딸을 한꺼번에 둘이나 얻게 되자 「금이야 옥이야」기르며 이름조차 금지(金枝)·옥지(玉枝)로 지어주었다. 아들 4형제의 막내딸로 태어난 금지·옥지 두 쌍동이는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자라났다. 그러나 생후 1년 반만에 옥지는 죽고 금지만 살아 남게 되었다. 옥지가 죽은 다음해 정씨는 자식을 또 보았으나 이번 역시 아들. 그래서 금지의 외동딸의 위치는 변함이 없었고 그녀를 아끼는 일가의 귀여움을 독차지. 특히 어머니 전씨가 금지를 위하는 것은 딴 가족들보다 더 심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난 인숙(仁淑)양이 자존심 강하고 오만한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인숙(仁淑)양이 대구(大邱)서 국민학교 다닐 시절 인숙(仁淑)양에게 몸종이랄 수 있는 여자아이하나를 따로 두었다. 학교 갈때 따라가는가 하면 세수할때, 밥먹을때 등 노상 인숙(仁淑)양의 옆에 붙어 잔심부름과 시중을 들게 했다. 인숙(仁淑)의 성격은 더욱 오만해 졌다. 인숙(仁淑)양의 윗 오빠 네 사람은 이런 인숙(仁淑)양을 가리켜 『어머니가 너무 쟤만 위해 주니까 계집애가 버릇이 나빠진다』며 불평, 이따금 여동생 인숙(仁淑)에게 기합을 주었으나 그때마다 인숙(仁淑)양을 감싸고 도는 어머니 때문에 인숙(仁淑)양의 성격을 끝내 뜯어 고치지 못했다는 둘째오빠 종구(宗九)씨의 말이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인숙(仁淑)양은 대구(大邱) S여중에 진학했다. 이 때 아버지 정(鄭)씨는 경북(慶北)도청의 고급 관리로 집안형편이 넉넉할 때였다. 인숙(仁淑)양의 오만한 성격은 더욱 심해지고 이에 따라 오빠들과의 의는 점점 나빠졌다. 호랑이같은 오빠 4명이 인숙(仁淑)양이 조금만 늦게 귀가해도 때리고 꾸지람하기 일쑤. 이래서 정(鄭)씨집은 오만한 인숙(仁淑)양의 기를 꺾으려는 오빠 4명과 인숙(仁淑)을 편들어 주는 어머니 전(全)씨와 인숙의 두 패로 갈리게까지 되었다. 대구 S여고시절 인숙(仁淑)양의 학교성적은 중 이하. 그러나 영어실력만은 대단해 이때부터 이미 외국손님이 오면 안내역을 맡곤 했다. 인숙(仁淑)양이 영어에 능하게 된 데는 오빠들의 도움이 컸다. 현재 일본「도꾜」 의 「아까사끼」서 전기 부속품상을 하고 있는 큰오빠 종원(宗源)씨나 H무역의 대표로 현재 「인도네시아」에 있는 세째오빠 종인(宗仁)씨가 모두 영어라면 귀신. 이런 오빠 밑에서 익힌 인숙(仁淑)양의 영어실력이 뒷날 요정 「선운각」 에서 외국인들에게 술을 따르며 쓰이게 될 줄이야. S여고에 남은 인숙(仁淑)양의 학적부를 들추어보면 『명랑하고 성실하나 안일하고 책임감이 없다』고 되어있다. 인숙(仁淑)양이 S여중 3학년에 올라갔을 때 4·19가 터졌다. 대구 부시장으로 있던 아버지 정(鄭)씨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가세는 기울기 시작. 이 때무터 인숙(仁淑)양의 집 살림은 어머니 전(全)씨가 계 등으로 꾸려 나갔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실직은 인숙(仁淑)양에게도 심한 충격을 주었다. 낭비벽 심하고 화려했던 인숙(仁淑)양의 생활은 집안 형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살고 있던 대구(大邱) 남산(南山)동 집을 팔고 삼덕(三德)동으로 이사, 집 규모를 줄여야 하는 등 집안형편이 어려워지면서부터 인숙(仁淑)양의 성격도 비뚤어지기 시작. 62년 S여고를 졸업한 인숙(仁淑)양은 E大 영문과에 진학하겠다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서울엔 인숙(仁淑)양의 세째오빠 종인(宗仁)씨가 S 무역에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응시했던 E大 영문과 입시에서 인숙(仁淑)양은 깨끗이 낙방. 세째 오빠 종인(宗仁)씨가 주는 돈으로 M초급대학에 입학했으나 등록금만 내고 학교에는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실직, E大 낙방 등의 겹친 불운은 콧대 센 아가씨 인숙(仁淑)양의 자존심을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집안의 외동딸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자라온 인숙(仁淑)양이 두차례에 겹친 좌절끝에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곤 태어날 때부터의 타고난 미모뿐. 콧대 꺾인 방년 19세의 아가씨 인숙(仁淑)양은 마지막 남은 재산인 미모를 마음껏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요정의 「호스테스」란 생각지도 못했고 『나 정도의 얼굴이면 영화배우가 될 수 있지 않느냐?』하는것. 그래서 인숙(仁淑)양은 등록한 M여대엔 나가지도 않고 서울 충무로 영화가를 기웃거렸다. 이 때 만난 사람이 「시나리오」작가인 장(張) 모씨. 당시 장(張)씨는 KBS에 『태양은 늙지 않는다』란 연속극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인숙(仁淑)양은 친구들을 만나면 자주 『우리 애인은 유명한 작가야』하며 뽐냈다. 張씨 자신도 張씨가 인숙(仁淑)양의 첫 애인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콧대꺾였던 인숙(仁淑)양의 자존심은 유명작가를 애인으로 둠으로써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은듯 했다는게 그녀 친구들의 이야기다. 당시 인숙(仁淑)양은 친구를 만날 때마다 張씨를 자랑했다고. 인숙(仁淑)양은 1년남짓 장(張)씨와 동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친구들에겐 『장(張)씨와 약혼한 사이며 곧 영화에도 출연하게 될 것』이라고 비치기도했다. 장(張)씨와 동거할 때도 인숙(仁淑)양의 타고난 사치벽은 버리지 못했다. 이래서 이따금 장(張)씨와 말다툼을 하고 장(張)씨 집을 뛰쳐나온 인숙(仁淑)양은 친구들 집을 찾아 하룻밤씩 자고 가기도. 그러면서 옛날 외동딸로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것을 잊지 못해 어떻게든 상처입은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 때 인숙(仁淑)양이 알게 된 것이 지금 신촌(新村)모처에서 비밀요정을 경영하고 있는 K「마담」. K 「마담」은 한때 배우 윤(尹)모씨와 동거, 「패션·모델」생활도 한적이 있는 멋장이 「마담」으로 인숙(仁淑)양은 K 「마담」의 소개로 「디자이너」조(趙)모씨를 통해 「패션·모델」로 몇차례 나서기도 했다. 인숙(仁淑)양과 K 「마담」의 관계는 그뒤 줄곧 계속되어 K 「마담」이 경영하는 한남(漢南)동 비밀요정에 인숙(仁淑)양은 1급 「호스테스」로 나갔었다. 인숙(仁淑)양은 몇차례 「패션·모델」로 나가는 한편 동거하던 장(張)씨의 소개로 S영화사와 접촉이 되어 2,3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신촌(新村), 수유리등을 전전하며 하숙생활을 하던 인숙(仁淑)양과 장(張)씨의 동거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숙(仁淑)양의 타고난 허영과 장(張)씨의 사업실패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은 원인이 되었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두 사람의 사이는 동거 1년만에 끝장을 보고 말았다. 그러나 장(張)씨가 인숙(仁淑)양으로선 첫 남자였던 만큼 장(張)씨를 향한 인숙(仁淑)양의 마음은 어지간히 강했었다. 피살되기 한달전 인숙(仁淑)양을 만난 한 친구는 『여러가지로 골치 아픈 일이 많아 못 살겠다』면서 『그래도 장(張)씨가 제일 잊혀지지 않고 그립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장(張)씨와 헤어진 인숙(仁淑)양이 다음에 발 디딘 곳이 바로 요정 선운각(仙雲閣). 타고 난 미모와 영어실력이 그녀를 선운각(仙雲閣)의 1급 「호스테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선운각(仙雲閣)에서 인숙(仁淑)양이 만난 사람이 바로 A씨. 미남이자 이름이 알려져 있는 A씨라 인숙(仁淑)양의 허영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A씨를 만나면서부터 인숙(仁淑)양은 저명 인사들의 노리개감으로 전락, 밤의 꽃으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A씨와 인숙(仁淑)양의 관계는 석달남짓 계속되었다는게 당시 인숙(仁淑)양 동료들의 이야기다. A씨를 알게 될 때 인숙(仁淑)양을 가운데 두고 A씨와 역시 A씨만한 실력자 B씨가 한달 남짓 열띤 각축전을 벌였다는 소문도 있다. 그 뒤 인숙(仁淑)양은 선운각(仙雲閣)을 떠나 활동무대를 비밀요정으로 옮겼다. 전부터 아는 K 「마담」이 경영해 오던 한남(漢南)동 비밀요정을 주무대로 2류급 여배우들을 잘 불러내는 것으로 소문난 S 「마담」집등에 단골로 불려 다녔다. 그러나 비밀요정 「호스테스」로 나가는 동안에도 인숙(仁淑)양은 콧대가 높아 반드시 「마담」들에게 그 날 참석자들을 알아보고 웬만한 이름이 아니면 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밤이면 이름있는 사람들과 접하는 인숙(仁淑)양은 낮이면 필동2가에 자리잡은 집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지냈다. 어렸을 적부터 인숙(仁淑)양 편이었던 어머니 전(全)씨는 남편 정(鄭)씨가 일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도 남편집에서 살지 않고 인숙(仁淑)양과 단둘이 살며 딸의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필동에서 살때 인숙(仁淑)양은 아들(3)을 낳았다. 인숙(仁淑)양의 가족들은 그 아이가 인숙(仁淑)양의 아이가 아니고 인숙(仁淑) 양의 배다른 동생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①가족 주장대로 배다른 동생이며 대구(大邱)서 낳아 서울로 데려다 길렀다면 최소한 5살은 되었어야 하는데 3살이라는 점 ②배 다른 동생이라면 미국 갈때 굳이 인숙(仁淑) 양이 아기를 함께 데리고 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등을 보면 인숙(仁淑) 양의 아이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럼 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시체해부에서도 드러났듯이 인숙(仁淑) 양은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바 있다. 더우기 비밀요정가에선 「호스테스」가 아이를 낳는 것은 「터부」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숙(仁淑)양이 아기를 낳았을 때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 충분한 이유란 사후보장. 처녀(?)가 호적에도 올리지 못할 아기를 낳을땐 어딘가 굳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란건 틀림없는 일이다. 워낙 남자관계가 복잡한 인숙(仁淑)양이라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은 인숙(仁淑)양 자신만이 알 일이지만 항간에선 일본에서 요정을 경영하고 있는 갑(甲)씨, 을(乙)씨, 병(丙)씨등 알만한 이름들이 나돌고 있다. 그러나 인숙(仁淑)양이 아이를 낳은 후부턴 『내 말 한마디면 안되는 일 없다』혹은 『 서교동집도 아기 아빠가 사준 거야』등의 말을 한 것으로 보아 세사람중 한사람일것이라는 소문. 68년 12월 30일자로 발급된 수속서류 없는 회수여권 MA 10647이 발급된 경위만 하더라고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선 어림도 없는 일이란 것. 어쨌든 아기를 낳은 인숙(仁淑)양의 주변은 전보다 눈에 띄게 달라졌다. 우선 본거지인 비밀요정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68년 8월엔 싯가 7백만원이 넘는 단층 석조주택을 사 서교동으로 이사했다. 평소 친하던 K 「마담」 이외엔 좀체로 그녀를 만날 수 가 없었다. 비밀요정 대신 「타워 · 호텔」, 「사보이 · 호텔」, 반도 ·조선 「아케이드」에 자주 나타났다. 69년 봄 일본에 다녀온 인숙(仁淑)양은 그해 5월에 K 「마담」의 소개로 한남동 조(趙)모씨로 부터 문제의 「코로나」를 사들였다. 이 때 부터 인숙(仁淑)양은 다시 남성편력을 시작했다. 이번엔 전과는 달리 주로 돈 잘쓰는 사람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재일교포인 갑(甲)씨 등 적지않은 사람들이 인숙(仁淑)양을 거쳐 갔다. 아마도 『 아이를 낳고 보니 무엇보다 돈 걱정이 앞섰던것 같다』는게 인숙(仁淑)양을 아는 친구와 「마담」족의 중론이다. 지난 69년 10월 10일 인숙(仁淑)양은 아기를 데리고 미국행을 했다. 이 때 인숙(仁淑)양이 친구에게 밝히기론 『 잠시 골치아픈 일이 있어 외국에 나갔다 와야겠다』는 것. 인숙(仁淑)양은 미국서 석달 있다가 되돌아 왔다. 1월21일 다시 돌아온 인숙(仁淑)양의 주변은 의문투성이뿐. 『 곧 미국에 갈테니 차를 팔아야 겠다』는가 하면 『 돈 달라는 사람 많아 귀찮아 죽겠다』고 하기도 했고 한때는 『 이젠 미국 안갈래』하기도 했다. 사건당일만 해도 자동차매매업소에 나타나 「시보레」6기통 짜리 흥정을 했다는데 미국에 갈 생각이었다면 한국에서 차를 바꿀 이유가 없다. 이래서 그녀의 주변에서 『 미국에 가 있으라』는 「그이」의 요구와 이를 선뜻 응낙치 않은 인숙(仁淑)양의 태도에 이번 사건의 수수께끼가 숨어 있지않나 보기도 했다. 어쨌든 3월 17일밤 11시 20분 한강변에 울린 3발의 총성으로 한때의 요화(妖花)정인숙(鄭仁淑)양은 비명에 갔다. 아빠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홀로 남겨 놓은채. [선데이서울 70년 3월 29일호 제3권 13호 통권 제 78호]
  • [일요영화]

    ●인썸니아(SBS 밤 1시5분) 백야에 접어든 알래스카 외딴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이 사건 수사를 위해 LA경찰국 베테랑 형사가 투입되는데, 수사 도중 그만 실수로 동료 형사를 죽인다. 이것도 소녀 살해범의 짓이라 둘러대지만, 진범을 밝혀내기 일보 직전 먼저 연락을 취해온 진범은 동료형사 살인사건을 알고 있다고 되레 역공을 편다. 어떻게 해야 이 진범을 이길 수 있을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후속작이다. 로빈 윌리엄스의 악역 연기는 일품이다.2002년작,118분.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XT M 오후8시20분) 한때 ‘해리 포터’ 시리즈까지 눌렀던, 아동문학가 다니엘 핸들러의 베스트셀러 판타지 연작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소설 가운데 1·2·3권인 ‘눈동자의 집’,‘파충류의 방’,‘눈물샘 호수의 비밀’을 영화화했다. 레모니 스니켓은 다니엘 핸들러의 필명이다. 동화 속 판타지를 그대로 옮기다 보니 제작비만 1억 4000만달러가 들었다. 의문의 화재 사건으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린 보들레르 가문의 세남매 바이올렛·클로스·서니. 이들 앞에는 부모가 남긴 거액의 유산이 있지만, 성인이 되어야만 유산을 쓸 수 있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이들을 곱게 놔둘 리 없다. 고아가 된 그들에게 후견인으로 올라프 백작을 나타나는데, 아이들보다 유산에 더 관심이 많다. 아이들을 어떻게든 없애서 유산을 가로채려 들고, 아이들은 힘을 합쳐 대항한다. 그러고는 새로운 후견인인 몽고메리 아저씨에게로 도망간다. 그러나 올라프 백작도 포기하지 않는다.‘스테파노 박사’로 변장해 착하기만 하던 몽고메리 아저씨를 죽이고 사라진다. 아이들은 다시 조세핀 아주머니 집으로 도망가는데 이번에도 올라프 백작은 ‘샴 선장’으로 변장하고서는 아이들 앞에 나타난다. 아이들과 올라프 백작간 대결의 끝은 어딜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스케일이 크다기보다 정교하게 세공한 듯한 몽환적인 세트와 화면. 그리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동화스럽게 확연한 캐릭터다. 세남매 바이올렛·클로스·서니부터 모든 등장인물이 다 개성 넘친다. 무엇보다 짐 캐리의 변신이 압권이다. 그는 올라프 백작, 샴 선장, 스테파노 박사 3역을 모두 맡았는데 그때마다 분장에서 말투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거들먹대는 연극배우, 다혈질 뱃사람, 영어가 서툰 이탈리아계 박사를 능청스레 소화해낸다.2004년작,97분.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명동도 ‘차없는 거리’로 2010년까지 연차 조성

    서울 명동거리가 2010년까지 연차적으로 차 없는 거리로 조성된다. 서울시는 ‘명동관광특구 제1종 지구단위계획’에 따라 내년부터 2010년까지 명동 일대 거리의 차량통행 제한을 확대해 명동 전 지역을 ‘차 없는 거리’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13일 밝혔다. 시는 먼저 유투존 뒤편 명례방길과 한국전력∼쌍용주식회사 샛길 등 유동 인구가 많은 명동 주요거리 8곳과 명동길을 오전 10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차 없는 거리’로 확대 지정할 예정이다. 현재 명동길(아바타몰∼명동성당)은 주말에만 차 없는 거리로 운영되고 있다. 시는 또 명동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에서 아바타몰,SK본사∼브릿지증권 등 보행로가 없는 6곳에는 횡단보도를 설치해 보행환경을 개선키로 했다. 이와 함께 시는 벚꽃길로 유명한 영등포구 여의도 여의서로 770m 구간과 문구점이 밀집한 종로구 창신동 문구길 280m 구간 등 3곳도 주말에는 차 없는 거리로 운영할 예정이다.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김형효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44)신실사구시(新實事求是)

    [김형효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44)신실사구시(新實事求是)

    동양사상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말을 자주 쓴다. 사실에서 진리를 구한다는 말이 철학적 담론으로 성하게 된 것은 중국의 청대 말 고증학파가 등장하면서 문헌고증에 의거해서 확실한 진리를 구하려는 요구에서였다. 그런 고증학의 정신이 점차로 학문 일반의 이념으로 퍼지면서 현실생활의 이익에 이바지하지 않는 허학(虛學)을 배격하는 실학(實學)의 정신으로 실사구시의 의미가 정착되었다. 그래서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나라의 부국강병에 이바지하는 학문인 실학(기술학과 경세학 등)을 하지 않고, 오로지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하여 사장(詞章)에만 전념하는 학문을 경멸하였다. 다산 사상을 음미해 보면, 그는 단적으로 행사(行事=일함)의 철학으로 일관했다. 그는 자기 시대의 현실을 혁파하는데 도움이 안 되는 주자학의 사변(思辨)을 멀리하고, 현실의 비리와 부조리를 근절하는 원시 유학사상인 공맹학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일함의 정신을 강조하는 그의 행사학은 두 가지의 각도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지성적으로 과학기술적 사고를 권장하는 실용적 지성론과 또 다른 하나는 시대의 도덕적 해이와 타락을 극복하려는 도덕적 의지론을 그의 행사학(行事學)이 각각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관점이 그의 철학에서 세련되게 접목되어 있지 못하다. 그런데 이 글은 다산의 사상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산의 행사학적 초점불일치가 실로 그간 인류의 실학사상의 이대조류를 대변하기에 언급된 것이다. 인류의 실학사상은 첫째로 경제기술적 지성의 강화로 세상을 편리하게 만들어 가는 실용적 지성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그와는 달리 사회도덕적 선의지의 칼날을 예리하게 해서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어가려는 도덕적 의지를 뜻하기도 한다. 서양철학에서 실학정신으로서의 실용적 지성이나 도덕적 의지는 다 근대화의 여명기에 서양에서 일어난 계몽주의적 진보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마도 동양의 실학과 실사구시론도 서양 과학기술문명의 밀물 앞에서 주자학적 사변학에 대한 자각된 반작용이 아닌가 여겨진다. 같은 계몽주의의 자식이면서 실용주의는 세상의 경제기술적 어려움을 일시적으로 해결하는(solving) 도구적 지식으로서의 편리의 진리에 초점을 모았고, 도덕주의는 세상의 사회도덕적 불의를 영구히 해소하려는(resolving) 목적적 선의지인 정의의 진리에 그 이념을 두었다. 이것이 도구주의와 목적주의의 철학사상을 가르는 분기점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실용주의가 경제기술적 편리의 측면에서 세상에 많은 이익을 주었으나, 또한 그 실용주의의 독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편리의 진리가 기능주의와 인간의 끝없는 상품화를 촉진시켜 소유를 위하여 존재를 마멸시키는 부작용을 필연적으로 낳는다는 점이다. 기능주의는 인간을 문제해결의 기능으로만 평가하고, 실용주의는 소유의 증대를 가져오는 성공만을 진리로 간주한다. 소유적 성공의 신화가 인간을 가장 비싼 기능적 상품으로 만들어 준다. 성공적이지 않는 상품은 기능적 가치가 없다. 늙은이와 연약한 이의 상품가치는 점점 줄어든다. 늙지 않게 보이려고 모두 안간힘을 쏟는다. 기능가치가 없는 것은 폐품처리된 쓰레기와 같다. 죽음은 기능이 완전 정지된 가치상실에 불과하다. 죽음에 어떤 존재론적 의미도 없다. 편리의 진리는 동시에 인생에서 소유적 기능과 성공만을 전부인 양 보게 한다. 편리의 진리는 인생에서 고요와 허심의 의미를 지워버리게 한다. 거기에 문명의 병이 생긴다. 다른 한편으로 도덕적 의지론으로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려는 정신적 실사구시는 실학적으로 성공했는가? 세계사에서 자유와 평등이 지배하는 정의사회를 이룩하려는 운동이 1789년에 일어났다. 이른바 프랑스 대혁명이다. 자유와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는 사회정의의 이념은 많은 의식의 긍정적 변화를 수반해 온 게 사실이다. 인류사는 그 혁명 이후로 점진적으로 자유와 평등의 실현에서 큰 족적을 남긴 것은 틀림없다. 계급신분의 불평등 철폐, 성별에 의한 불평등의 폐지, 종교와 인종에 의한 불평등의 부정 등으로 인류가 후천적 억압과 불평등의 요소를 대폭 감소시키거나 제거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겠다. 그러나 자유의 선은 개인주의의 성역화와 함께 방종의 악을, 평등의 선은 사회적 공동체의 명분아래에 질투와 대등의식의 악을 필연적으로 초래했다. 나와 너는 사회생활에서 다르면서 서로 엮어지는 일체적 존재인데, 자유는 다르다는 것만을 강조하는 개별의식의 성채를 쌓고, 평등은 서로 상관적인 상응성을 동등성으로 오해하여 나보다 나은 것을 참지 못하여 시기하고 질투하는 대등의식으로 미끄러진다. 계몽주의 사상은 인류를 진보케 하는 자유-평등이 오로지 선의 진보일 것이라고 낙관했는데, 실제로 인류의 역사에는 그런 일방적 낙관은 허상이고 반드시 좋은 가치에는 나쁜 반(反)가치가 필수적으로 동반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자유와 평등에 의한 정의의 가치도 이기적 방종과 한풀이와 같은 대등의식의 반가치를 동반하는 이 사실(史實)에서 우리는 무엇이 진정 실사구시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일까 하고 다시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기술적 실용적 지성과 사회정의적 도덕적 의지가 실학이고 실사구시라는 생각을 이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적 분기점에 우리가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동양사상에는 불교와 노장사상은 실학이 못되고, 현실도피적 허학으로 간주돼 왔다. 그래서 불교와 노장사상은 사회과학적으로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제 불교와 노장사상이 진정한 실학이고, 새로운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읽혀져야 한다. 불교와 노장사상은 우선 세상을 판단하고 제조하려는 지성과 의지의 철학이 아니다. 인류는 그간 지성과 의지로 세상을 편리하게만 만들 수 있다거나 세상을 정의롭게만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다 계몽주의의 영향이다. 동양의 주자학도 이 점에서 계몽주의와 비슷하다. 그러나 불교와 노장사상은 세상이 일방적인 가치로 발전하지 않고, 늘 대대법(待對法)적인 상관적 관계로 얽혀지는 천짜기와 같다고 주장해 왔었다. 부처와 중생은 이중적이어서 중생이 없으면 부처가 실존하지 않고, 또 부처가 없다면 중생이 생기지도 않는다고 불교는 본다. 노장사상에서 선은 악에 대한 선이고, 악도 선에 대한 악이라서 선악이 항시 양가적으로 발생을 하지, 일방적으로 선의 승리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주 편리한 문명의 이기(利器)로서의 컴퓨터가 동시에 인성을 망가뜨리는 해기(害器)가 된다는 것과 같다. 편리와 정의는 다 지성의 소유론적 철학의 산물이다. 세상을 일시적 진리나 영구적 진리로 바꿔 보려는 의도를 소유론적 철학이 품어 왔었다. 세상에 진/선/미를 설치하고 위(僞)/악(惡)/추(醜)를 걷어 내겠다는 의도가 그 동안의 실학과 실사구시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안 된다. 문명의 이기가 동시에 문명의 해기가 되듯이, 선도 악과 별거하지 않는다. 이익과 선에 집착하면 그만큼 상실과 악도 거세게 덤벼든다. 불교의 아뢰야식(제8식)이 진망(眞妄)화합식으로서 여래종자와 중생종자가 동시에 있듯이(43회 글), 세상에는 늘 양가성이 공존한다는게 불교의 사실론이다. 이런 양가적 사실에 바탕해서 세상을 경영하는 것이 새 실학이고, 새 실사구시겠다. 서산대사(16세기)는 ‘선가귀감’에서 “중생심을 버리려 애쓰지 말고, 다만 스스로 자성을 더럽히지 말라. 정법을 구하는 것도 곧 삿(邪)됨”이라고 밝혔다. 진리를 구하려고 애쓰는 것도 또한 미망이라는 말과 같다. 진/선/미를 가려서 선택하면, 그와 동시에 세상에 위/악/추가 덩달아 함께 온다. 사람들은 전자를 좋아하고, 후자를 미워한다. 후자를 미워하는 것이 정의라고 착각한다. 미워한다고 후자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좋아하는 마음은 미워하는 마음을 곧 닮는다. 정의의 이름으로 수백만이 살상당했다. 현대사의 소련과 중공에서, 독일과 캄보디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불교는 이중적 세상사를 다 환영(幻影)으로 보라고 일렀고, 장자는 그것을 망량(罔兩)이라고 명명했다. 장자의 주석가인 위진(魏晉)시대의 곽상(郭象)은 망량을 ‘그림자를 둘러 싼 엷은 막’이라고 주해했지만, 그 엷은 막(罔)이 둘로 쪼개졌다(兩)는 것은 세상사가 대대법적으로 상반된 차이의 관계로 이루어졌다. 는 것을 의미한다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세상사를 환영이나 망량으로 본다는 것은 종래의 실학에 의하면 허탈하고 초연한 탈속적 심성으로 세상사를 대하는 은둔주의와 같다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세속을 위하여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하나를 필연적으로 잃게 되고, 선(善)을 생각하면 악(惡)이 불청객으로 따라오니, 재래의 실학적인 택일법의 철학은 결국 세상에 ‘이/해’(利/害)의 종자와 선악의 종자를 동시에 흩뿌리는 결과를 빚는다. 이것은 사실에서 진리를 찾는 실사구시의 길이 아니다. 오히려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혜능조사의 생각(43회 글)이 더 실학적이고 실사구시적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사실적으로 선악이 동거하고 있으므로, 선의 생각이 강렬하면 반드시 악의 생각도 그만큼 치열하게 일어난다. 선악의 동거나 동봉의 사실은 선악을 동시적인 이중긍정으로 다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 이중긍정은 바로 선악을 이원적인 실체로 보지 않고,‘환영’이나 갈라진 그림자로서의 ‘망량’으로 보는 사유와 다르지 않다. 이것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를 동일인물의 이중성으로 보는 것과 같다. 두 측면이 다 그림자이므로 환영의 이중긍정은 즉 이중성에 얽매이지 않기에 이중부정의 마음과 같다. 이중부정의 초탈한 마음이 새로운 실학과 실사구시의 참 뜻이겠다. 부처나 성인이 되기 위한 노력이 부처병이나 성인병을 자초한다. 중생의 번뇌를 버리려 애쓴다고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듯, 무선무악한 본성에로 되돌아가는 공부가 바로 가장 세상을 복되게 하고 세상을 크게 이익되게 하는 실학이다. 우리가 경제기술적으로 잘 살되 탐욕의 노예가 안되고, 우리가 불평등하지 않되 차이를 대등의 질투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유로운 회통으로 한마음의 일체감을 형성하도록 가는 길이 신 실사구시의 길이겠다. 그러기 위하여 마음닦기의 국민운동이 가장 빠른 실사구시운동이 아닌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김형효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43)업(業 카르마)

    [김형효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43)업(業 카르마)

    ‘내가 생각한다’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실상이 아닌 허상이라고 나는 여러 번 지적했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이 생각한다’고 지난 글(17회)에서 언명하였다. 좀 어려운 내용인 듯 보이나, 이것의 이해가 인생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보통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유식삼십송’을 쓴 인도의 고승 세친(世親=바수반두)(4~5세기)의 가르침에 의하면, 오감각(前五識)의 지각활동으로 제6식인 의식이 발동하는데, 그 의식의 발동으로서의 생각은 서양철학이 말한 것처럼 이성의 소산이 아니라, 제1차 무의식 상태로 의식되지 않고 있는 제7식인 말나식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말나식은 생각하고 계산하는 사량식(思量識)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말나식이 온갖 의식의 표상(表象)을 무의식적인 자기의 심상(心象)대로 그리게 하는 진원지라는 것이다. 이 제7식인 말나식이 사량하는 대상은 먼저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제7식보다 더 깊숙이 저장되어 있는 가장 심층적인 제8식인 아뢰야식(藏識)이다. 물론 제9식인 순수불심인 아말라식(無垢識)을 말하기도 하나 여기서 중요치 않다. 아뢰야식이 저장식인 것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어왔던 과거의 생각과 행동의 습관들이 저장되어 지금 나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오감의 자극으로 내가 지금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생기된 업의 습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과 기억의 습관이 지금 나의 생각을 결정하는 숙업(宿業)으로 작용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하이데거도 이와 유사하게 인간의 마음을 습기(習氣=disposition)라고 지칭했고, 마음의 습기가 현재완료형(having beenness)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그의 ‘존재와 시간’에서 갈파했다. 현재완료형의 본질은 과거가 지금까지 계속 작용하고 있다는 의미다. 인간의 생각과 느낌도 과거부터 아뢰야식 속에 저장된 습기의 종자가 자아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말나식의 사량으로 현행화(現行化)되어, 그 말나식의 무의식적 심상(心象)이 의식과 오감각식의 표상(表象)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또 요별경식(了別境識=의식과 오감각식)의 새 활동들이 다시 아뢰야식에 종자로 저장된다. 이처럼 아뢰야식과 요별경식은 서로 돌고 도는 윤회의 바퀴를 형성하는 셈이다. 여기서 잠깐 아뢰야식의 종자에 대하여 설명한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삼인칭 단수인 ‘그것’이다. 이 ‘그것’은 특수한 기질(氣質)로서 어떤 성향의 욕망을 지니고 있다. 이 우주는 기(에너지)의 힘이다. 지공무사한 기의 힘이 무(無)의 욕망이다(42회 글). 이 무의 욕망이 곧 부처의 기다. 그 기는 지공무사함으로써 삼라만상에게 존재의 힘을 보시하는 대자대비의 힘과 같다. 그러나 중생의 기는 지공무사하지 못하고 부분적이고 편파적이다. 그 까닭은 중생이 무의 욕망을 잃고 너와 대립된 사회적 분별심인 소유욕으로 채색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의 경쟁과 질투가 이런 아상(我相)을 갖게 한다.‘나’라는 아상은 ‘너’라는 생각이 있기에 생긴다. 이것이 소유적 기의 시작이다. 소유적 기는 말나식의 무의식에서 자란다. 그런데 비록 말나식이 아뢰야식의 종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그것’을 항상 ‘내’ 것이라고 사량하기에 오염되어 있지만, 업을 짓기 전에는 아직 중립의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더구나 아뢰야식에는 선악의 업이 저장되어 있지만, 다 오염이 안 된 중립의 상태로 머물러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결정된 숙업이지만, 또한 마음의 새로운 기획투사에 따라 과거의 종자도 변하게 하는 가변적 존재다. 다만 과거에 선의 종자가 많으면, 비록 그것이 중립의 상태에 있어도 선을 일으킬 수 있는 증상연(增上緣=도와주는 인연)이 큰 만큼 좋은 경향성을 가능성으로 품고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뢰야식에는 결정과 자유가 모순없이 공존하고 있고, 부처종자와 중생종자가 함께 동거하고 있는 셈이다. 중국의 육조 혜능선사(7세기)가 그의 ‘단경’에서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깨달으면 중생이 부처’라고 거듭거듭 밝혔다. 이것은 아뢰야식 속에 저장된 종자가 중립상태이므로 그것을 잘 활용하면 부처고, 그렇지 못하면 중생이라는 말과 같다. 인간은 생각하고 느끼나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 속의 종자가 생각하고 느낀다. 그래서 ‘그것이 생각하고 느낀다’는 말이 옳다.‘그것’이 부처의 길로 생각하기도 하고 중생의 길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의 종자는 곧 욕망의 힘인 기의 다른 이름이다.‘그것’이 어째서 윤회하면서 저장되나? 중생의 기로서의 ‘그것’은 소유론적 욕망이므로 탐욕의 갈망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부처와 같은 존재론적 욕망(원력)인 기는 무의 욕망이므로 소유론적 탐욕이 없다. 그래서 부처는 모든 것을 무한히 보시하려는 대자대비의 기 자체이므로 자기 것이 전혀 없는 허공의 기와 같다. 그러나 중생의 기는 집착으로 엉켜 있다. 이것은 육신이 죽어도 윤회한다. 이 탐욕적 기의 덩어리가 다시 육신을 빌려 태어나고 싶어한다. 인간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삼악도(축생/아귀/지옥)에도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천상의 신(神)들이나 인간이나 축생들도 다 같은 기(氣)의 다양한 욕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옥의 아귀들도 거기가 좋아서 태어나고 싶어 안달하는 기의 욕심이 그랬을 뿐이다. 소유의 욕망을 존재의 욕망으로 바꿔야만 부처가 되어 소유의 탐욕이 갈망하는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는다. 우리의 관심은 이런 불교의 교학보다 오히려 그 철학적 상징이다. 세친은 가르친다. 업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을 바꾸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말나식이다. 의식의 수준에서 우리가 알고 있지만, 우리 마음대로 잘 안 된다. 그 까닭은 의식의 표상이 말나식의 무의식적 심상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나식에 잠재되어 있는 네 가지 번뇌인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애(我愛)와 아만(我慢)에 의식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성적 판단으로 행동하려 해도 이 네 번뇌의 집합인 아상(我相)의 소유욕으로부터 이성적 판단이 자유롭지 못하기에, 그것이 별로 효과를 내지 못한다. 이성적 의식이 무의식을 억압하면, 오히려 말나적인 아상은 더 흥분하여 사태를 악화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숙업의 영향을 지우기 위하여 이 말나식의 영향을 줄이는 길을 가야 한다. 업의 종자는 우리가 공동으로 살아온 삶의 역사적 기록과 같다. 오늘의 우리는 업을 통하여 어제의 우리를 본다. 오늘의 우리는 갈기갈기 찢겨지는 길을 치닫고 있다. 계급으로, 지연으로, 이념으로, 종교로, 성별로, 나이로 서로 등을 돌린다. 이것은 점잖은 표현이다. 토론을 하면 할수록 더욱 멀어져갈 뿐이다. 우리는 아상이 너무 강하다. 각자가 다 살기 위해 모래처럼 분주히 흩어진다. 왜? 나는 들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계급적 차별이 중국보다 우리가 더 심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서자는 우리처럼 극심한 차별을 당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관노의 자식에게도 사회생활을 하도록 벼슬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일본도 우리처럼 계급차별이 심했으나 일본 사회학자인 무라카미 야스스케가 지적했듯이, 봉건영주의 일가(一家)문화에 바탕을 둔 일가계약정신(kintractship)으로 영주가 자기의 봉토 안의 모든 계급들을 철저히 보호하고 생계를 유지케 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행히도 백성들이 국가의 은혜와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버림받아 왔다는 불행한 기억을 길게 간직하고 있다. 문중의식은 있었으나, 그것이 혈연을 벗어난 국가사회의식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그래서 가(家)의 개념이 일본과 한국이 다르다. 우리는 역사적 공동업의 무의식으로 비슷하게 생각한다. 이성적 의식은 허울좋은 장식일 뿐이다. 아상이 강한 우리의 공동 숙업은 국가적 일가를 형성해 보지 못한 마당에서 각자는 자기의 생각을 철저히 옹호하는 자가성(自家性)의 명분을 튼튼히 하고, 옹고집으로 자기를 수호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겠다. 자가성 옹호의 명분은 동시에 자존배타성을 키우는 것과 같다. 이 옹고집과 같은 아상의 극복 없이는 우리가 일심(一心)으로 화쟁(和諍)하는 국민상을 창출할 수 없으리라. 철옹성과 같은 자가성의 역사와 그 숙업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은 혜능선사의 가르침처럼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는’마음에서 가능하리라. 약과 독이 별개의 둘이 아니듯이, 시/비(是/非)와 선/악(善/惡)과 정/사(正/邪)도 본디 아뢰야식이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기에 가능한 대대법에 지나지 않는다. 번뇌를 떠나서 보리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선은 악의 선이고,‘시·정’(是·正)은 ‘비·사’(非·邪)의 반작용에 대한 작용인 것과 같다. 선과 ‘시·정’의 이면이 또한 악과 ‘비·사’인 줄 알아야 한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생기지 않는다. 이 말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결코 지우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세상의 사실이 대대법이라는 것은 아뢰야식이 곧 부처와 중생이 함께 공동으로 동거하고 있는 진망화합식임을 아는 이치와 같다. 혜능조사가 가르친 것은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않고 밝음 때문에 어둡고, 어둠이 스스로 어둡지 않고 밝음이 변화함으로써 어둡고, 어둠으로써 밝음이 나타나는’ 상관적 차이가 세상의 대대법이라는 것이겠다. 그러므로 어느 하나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노릇이다. 왜냐하면 ‘선’과 ‘시’와 ‘정’에 집착한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이 진망화합식이라는 것은 중생과 부처가 동시에 대대법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중생은 이 대대법을 대립투쟁의 마음으로 집착하여 스스로 옳고 타자는 틀렸다고 배척하는 전투의 마음을 갖는 것이고, 부처는 대대법을 택일하지 않고 또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택일하면 말나식이 ‘험해지고’, 험해지면 중생이 되고, 둘을 환영(幻影)으로 보며 어느 하나에도 얽매이지 않으면 곧 말나식이 ‘평온하여’ 부처가 된다. 부처가 된 마음은 그리스도가 된 마음과 다르지 않겠다. 종교는 교세확장에 기를 쓰지 말고, 마음의 공통적 본성을 찾는 데 집중해야겠다. 남북한 통일 이전에 우선 갈기갈기 찢긴 우리의 마음을 화합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과거보다 더 큰 업장을 후대에 또 물려주는 어리석은 선대가 될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