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 전담변호사制 성과와 과제] ‘충실 변론’ 안착… 보수 현실화 긴요
기존 국선 변호사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지난해 9월 도입된 국선 전담변호사 제도가 시행 5개월째에 접어들었다. 국선 변호사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면서 대법원은 오는 3월부터 본격시행에 앞선 시범실시를 확대키로 했다. 전담 변호사제의 성과와 보완점을 짚어봤다.
●연착륙한 전담변호사제 사례들
#사례1 사기죄로 기소된 30대 피고인 A씨는 구속기간이 길어져 집안이 기울자 보석을 신청했다. 재판부가 보석금 1000만원에 허가했으나 돈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이때 국선변호사가 선뜻 빌려줬다. 도망치면 그뿐이었지만 A씨는 보란 듯 재판에 나와 “믿어줘서 고맙다. 앞으로 정직하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사례2 강도살인죄로 기소된 20대 B씨. 헤어진 동거녀 C씨를 살해하고 신용카드를 훔쳐 1750만원을 인출한 혐의를 받았다. 검찰은 계획적인 살인이라며 사형을 구형했지만 국선변호사는 B씨가 말다툼 끝에 살해했고, 당황해 신용카드를 훔친 것이라고 변론했다. 살해도구가 흉기가 아닌 베개라는 점을 강조했다. 법원은 B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사례3 중국에서 밀반입된 필로폰을 팔다 잡힌 D(33),E(42),F(28)씨.D,E씨는 사선(私選) 변호사를 구했지만,F씨는 돈이 없어 국선변호사를 택해 법정에서 사선, 국선 변론의 한바탕 경쟁이 붙었다.D,E씨는 징역 5년을 받았으나 F씨는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국선변호사가 “어려운 생활형편 탓에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며 적극 변론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사례4 절도죄로 교도소를 들락거린 지 7년이 넘은 G씨. 서른을 갓 넘겼지만, 면회 오는 가족도 없었다. 시름에 빠진 G씨에게 나이 지긋한 국선변호사가 찾아왔다. 그는 “앞날이 창창한데 포기하지 말라.”고 위로했다. 그리고 매주 면회를 신청했다.G씨는 “가족도 외면한 날, 돌봐준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사명감에 불타는 국선 전담변호사들
국선변호사는 성의가 없어 증거자료를 준비하지 않고 구치소 접견도 오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다. 국가는 헌법상 변호사 조력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자 사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는 형사사건 피고인에게 국가가 대신해 변호사를 선임한다. 그러나 ‘때운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형식적 변호가 많은 게 현실이었다. 전담변호사제가 도입되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서울중앙지법 국선 전담변호사인 심훈종(68), 유영근(53), 조현권(50), 이석준(44) 변호사가 지난 5개월 동안 밤낮없이 뛰어다닌 결과이기도 하다.
변화의 움직임을 가장 먼저 감지한 곳은 다름 아닌 구치소다. 시범 실시 중이라 국선변호 신청서 등에 ‘전담’이라 표시하지 않는데도 피고인들이 소문을 듣고 전담변호사만을 골라 신청한다. 한 부장판사는 “국선변호 신청자 10명 중 3명은 전담변호사를 찾는다.”고 전했다.
●여전히 보완점 산적해
새 제도는 연착륙했지만, 과제는 남아 있다. 국선 사건은 증가하는데도 국가 예산은 제자리걸음이란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전담변호사의 경우, 사건당 25만원씩 한달에 25건을 맡으면 세전 월급은 625만원에 달하지만, 서초동 사무실 임대료 등을 제외하면 순수입은 얼마 남지 않는다. 윤영근 변호사는 “전용 사무실을 마련해주는 등 기본적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각 법원에 전담 변호사실을 마련할 계획을 세웠지만, 재판과 변론을 분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취소했다. 변협도 회원들 반대에 부딪혀 사무실을 내주긴 어렵다고 전해왔다. 한 판사는 “국선이 활성화될수록 일반 변호사의 일감이 줄어드는 터라 변호사단체에서 협조 받기가 쉽지 않다.”고 귀띔했다.
사선 변호사가 국선 변호사보다 형을 줄이는 데 효율적이란 편견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지난해 12월까지 국선 전담변호사에게 배당된 270건 중 87건은 사선으로 옮겨갔다. 전담변호사들은 “대부분 담당 판사와의 학연, 지연을 통해 낮은 형량을 받기를 기대하며 사선을 선임한다.”고 말했다. 국선변호사제도가 전관예우란 법조계 고질병폐를 없애고 사회적 약자도 평등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한다는 점에서 사법개혁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일반 국선과의 형평성 문제도 새로 떠올랐다. 전담 변호사가 맡는 사건이 한정돼 있어 “왜 내 사건은 일반 국선이 맡느냐.”는 항의가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중앙지법 민형기 형사수석부장은 “국선제도가 구속피고인, 영장실질심사 대상자로 확대되는 터라 전담변호사의 권리·의무·지위 등을 빨리 법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