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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족의 농어업(송화강 5천리:30)

    ◎목단강유역 벌판서 중국 으뜸쌀 생산/무공해 무오염 무화학비료 3무의 향수미 일품/발해시대 「왕의 밥」 호칭,60년대엔 모택동 밥상에/강유역 칠색송어 양식장 즐비… 어업도 날로 번창 조선족의 농·어업 기술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도문시에서는 흑룡강성 목단강시로 가는 열차가 있다.그러니까 두만강변에서 출발한 열차가 얼마동안 북쪽으로 가다가 흑룡강지류 목단강을 만나 강과 어깨동무하는 철도인 것이다.이 열차가 발해의 옛 도읍지 상경용천부 땅인 동경성을 지나고 나서 한참 달리다 보면 강가 벼랑에 돌계단이 나타난다.발해왕과 후비사이에 얽힌 전설을 간직한 돌계단은 제법 가팔랐다. 그 옛날 발해왕이 왕비를 잃고 어떤 인연이 되어 어부의 딸을 후비로 맞았다.목단강에서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했던 어부는 왕을 사위로 삼고나서도 고기잡이를 고집했다.그런데 고기잡이를 하러 다니는 길이 바위벼랑이라서 늘 위험이 뒤따랐다.왕은 보다못해 벼랑에 계단을 내어 어부인 장인이 편하게 다니도록 배려했다.왕비도 백성을 잘 먹게 하고 잘 입히려면 자기부터 일을 해야한다는 고집을 버리지 않고 길쌈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은 부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자 바위벼랑 근처에 뽕나무를 심어주었다.그 전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돌계단과 뽕나무밭이 아직도 강가에 남아있다.전설이기는 하나 어부와 그 딸인 왕비의 근면성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고나 할까.어떻든 오늘날 목단강유역에 사는 조선족들은 중국에서 으뜸가는 향수쌀을 생산하게 되었다.향수는 발해진의 한 조선족촌이다.주변을 흐르는 목단강의 여울물소리가 유난히 울린다고해서 향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향수촌을 중심으로 영안일대에서 생산한 이 입쌀은 1992년 제1차 농업박람회에 이어 1993년 제2차 농업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았다.그래서「동경성표」로 이름난 향수입쌀은 나라가 베푸는 잔치용 쌀이 되었다.「영안현지」를 보면 「노주의 쌀은 공미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발해시대의 노주는 향수였다는 것이다.어떤 학자는 길림성 화룡시 서고성일대를 노주로 보고 있다.쟁론이야 어떻든 명나라 조정은 동경성 언저리를황제의 식량생산지인 황량구로 지정한 사실은 돌아볼만한 일이 아닌가한다. ○발해시대 황량구 그러나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이들 쌀주산지도 인적이 끊긴 봉금구가 되었다.갈대가 무성하게 자라 바람결에 흔들릴뿐 사람 그림자가 얼씬도 하지 않았던 향수일대에 벼꽃은 언제 다시 피었을까.「영안현지」는 1916년 조선족이 서련화포에서 벼농사에 성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조선족들은 오늘의 발해진 향수,강서 일대에 논을 만들고 물을 끌어 벼농사를 지었다」고 기록했다.그리고 7년후인 1923년에는 영안현내 논은 4천683㏊에 이르렀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향수입쌀은 독특한 지질환경에서 수확되었다.논바닥밑에는 화산이 폭발할때 흘러들어온 용암이 10㎝ 정도가 깔려있다.그리고 토층이 얕기때문에 용암이 열을 잘 받아들여 벼의 생육을 한껏 돕게 된다는 것이다.또 청정한 경박호물이 이 지역을 지나면서 수온이 올라가 역시 벼농사에 큰 도움을 주었다.그래서 쌀알이 고르고 윤기가 흘렀다.밥을 지어놓으면 찹쌀처럼 끈기가 있는데다 향기마저 풍겼다. 발해시대 「왕의 밥」으로 호칭되었던 향수입쌀은 1960년대 들어 모택동의 밥상에 올랐다.공량미가 몽땅 북경으로 반출되었다.그럼에도 생산자들에게는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개혁개방이 이루어진 이후 비로소 상품가치가 인정되어 농민들에게 부유한 삶을 안겨주었다.향수입쌀은 향수촌만이 아니라 발해진 전역에서 나오는 쌀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발해진 전체의 경작면적 7천㏊가운데 논이 5천㏊다.1㏊당 생산량도 7천500∼8천㎏에 이르고 있다.향수촌의 경우 40가구만이 한족이고 나머지 160가구는 조선족이다.말하자면 벼농사기술자라 할 수 있는 조선족판인 것이다.그런 탓에 다른 지역 입쌀보다 앉은 자리에서 3.75g당 20전을 더 받는다.향수촌의 임을선씨(41)는 지난해 5㏊의 논에서 4만원의 순수입을 올렸다.이웃 강서촌의 이성일씨(41)는 지난해 0.6㏊에 불과한 논에서 자그마치 8천원의 수익을 올렸다.1㎏당 6원이나 하는 검은 입쌀 흑향미를 재배했기 때문이다. 향수촌과 벼농사로 쌍벽을 이루고 있는 강서촌은 403가구가 사는 농촌마을이다.조선족은 353가구인데 거의가 벽돌집에 살고있다.수돗물이 집집마다 넘치고 모두가 텔레비전을 갖추고 유선방송까지 시청했다.유선TV에서는 한국과 북한,연변 등지의 프로가 방영되었다.그런데 마을주민인 조순애씨(37)는 한국 KBS의 「가요무대」를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으로 꼽았다.그렇듯 「가요무대」는 중국 동북3성 조선족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다. 목단강유역의 벼농사가 벌떡 일어서면서 쌀가공업도 기업화하고 있다.한국의 효림이라는 기업이 들어와 영안시 종묘회사와 합작으로 경박호알곡제품유한회사를 세웠다.이를 효시로 15개의 가공공장이 들어섰다.향수입쌀의 특징을 말할때 흔히 삼무라고 하는데,그것은 무공해,무오염,무화학비료다.아름다운 경박호를 낀 100리 벌판에서 두엄만으로 벼농사를 짓고있으니까 그럴수 밖에 없을 것이다. 목단강유역은 농업 못지않게 어업도 번창했다.저 유명한 한반도 산골물에서만 사는 칠색송어까지 인공사육하고 있다.강원도 두류산 골짜기에 서식한다는 칠색송어는 사철 맑은 샘물이 솟아나오는 하천을 좋아하는 물고기라는것이다.목단강유역은 그런 조건을 갖추어 1초마다 1t 이상의 샘물이 솟고 여름에도 16도 이상 수온이 올라가지 않는 지점이 많았다.그래서 규격화한 칠색송어양식장들이 강가에 즐비했다.칠색송어는 지렁이와 풀이 먹이인지라,이들 먹이 역시 자연산으로 충당되었다. ○1㏊당 8천㎏ 생산 칠색송어가 목단강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59년 주은래수상의 북한방문때 일이다.주은래수상이 칠색송어를 맛있게 드는 것을 보고 김일성이 새끼 6천마리와 알 5만개를 선물했다는 것이다.이들 강원도 송어는 흑룡강성 양어연구원이 인수한 후 동경성 발해궁터 15리밖 구룡천마을앞에 양식장을 차렸다.그러나 양식장을 넘겨받은 칠색송어개발회사가 1995년 4월까지 3백40여만원의 빚을 지고 말았다. 그런 위기에서 칠색송어를 살려낸 사람은 동북농업대학 출신의 김광현씨(31)다.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양식장에 배치되었던 그는 회사를 떠맡았다.1991년 일본 북해도립수산부화장에 가서 6개월동안 연수하면서 칠색송어양식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익혔다.그가 귀국한 뒤에는양식장이 제대로 돌아가 칠색송어가 북경을 비롯한 큰도시로 연간 7만5천㎏이 반출되고 있다.양식장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은 김광현씨는 이제 한숨을 돌리고 칠색송어 양식업의 장래를 낙관했다. 『이 고기는 희귀어종이라 원가가 높디요.그런데 막상 회사가 파산하니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습데다.제가 대들었디요.자신이 있었으니까 뛰어든 것입네다.양식장 주변에 경박호라는 관광지가 자리했다는 지리적 여건을 고려해서 칠색송어양식을 관광항목으로 개발한 것이 주효했디요.낚시질 상품은 물론 동서양 각종 요리로도 개발했던 것입네다.지금은 전국 주문량이 늘어나 없어서 못 팔디요』
  • 이집트 피라미드:중(세계 문화유산 순례:30)

    ◎돌덩이 230만개 입체퍼즐 짜맞춘듯/직선과 각에만 의존하여 영원을 향해 쌓아올린 돌계단/그 완벽한 설계는 불가사의/파라오의 5천년 동행자 「공포의 아버지」 스핑크스는 현대 공해앞에 기력을 잃고… 쿠푸왕의 대피라미드가 안겨주는 불가사의함은 무덤의 내부로 들어가 돌들이 짜맞춰 쌓여진 구조를 보면서 점점 더 생생하게 실감하게 된다.대피라미드에는 북면에 단하나뿐인 입구가 나있다.출입구가 발견된 경위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으나 기원후 9세기 이슬람에 정복됐을 당시 마아문이라는 칼리프(왕)의 명령으로 찾아내 내부통로를 막은 돌들을 치웠다는게 정설이다.현재 이 출입구는 봉쇄돼있고 그밑에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임시출입구가 나있다. 내부에서 보면 피라미드를 쌓은 돌들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은 다음 차곡차곡 쌓은게 아니라 돌의 크기가 제각각임을 알수 있다.서로 크기가 다른 돌들을 사방으로 이가 맞물리듯 짜맞추어서 구조물의 안정성을 크게 높였다.돌의 기울기도 바깥쪽을 안쪽보다 조금 높게 쌓아 바깥으로 무너짐을 막았다.그래서 전체적으로 돌을 쌓은 방식은 마치 입체 퍼즐을 짜맞추어 놓은 것같은 느낌을 준다.그렇다면 퍼즐조각을 준비하듯 애초에 완벽한 설계도를 가지고 일을 시작했다는 말인가.피라미드와 관련된 여러 불가사의중 좀체 풀리지 않는 의문 중 하나이다. 출입구부터 난 통로는 가운데 무덤방인 현실까지 이어진다.가로세로 1.2m쯤 되는 정사각형 통로를 한참 들어가면 통로 높이가 9m정도로 높아진 뒤 이어 「왕비의 방」이라 부르는 작은 방이 하나 나온다.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피라미드에는 현실을 포함해 모두 3개의 방이 만들어져 있다.이 「왕비의 방」은 원래 파라오의 현실로 만들었는데 왕이 예상보다 오래 살게 되자 피라미드를 확장하고 현실 위치도 더 높은 곳으로 옮기며 빈방으로 남게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파라오의 시신이 안치됐던 현실은 지상에서 42m높이에 자리하고 있다. 이 묘실은 「왕비의 방」에서 긴 회랑을 통과해서 올라가게 돼있다.묘실의 천정은 총중량이 400t에 이르는 9개의 석재들이 수직으로 놓여져 있는데 이 엄청난 부하를분산시키기 위해 위쪽에 따로 떨어진 모두 5개 층의 격실을 만들어 놓았다.왕의 석관은 평편한 돌조각을 깐 바닥위에 놓여져 있다.원래 이 석관안에는 쿠푸왕의 미라가 안치됐다. 미라는 값진 목걸이와 보석 장신구들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황금가면을 썼다.주위에는 파라오가 저 세상에서 먹을 식량도 준비했고 가구까지 준비해 두었으나 지금은 모두 도굴당해 뚜껑도 없이 텅빈 석관만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석관이 놓인 위치는 바로 무덤의 모든 기가 한곳으로 모이는 자리라고 한다.종이 따위로 소형 피라미드 모형을 만든 다음 무딘 면도칼을 바로 이 위치에 놓으면 날이 날카롭게 선다는 사실이 실험으로 증명된바 있다고 안내인은 말하나 사실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장례의식이 끝나면 묘실입구는 커다란 바윗돌로 막았다.신관들은 수직 갱을 통해 밖으로 나왔으며 갱은 안쪽에 미리 마련해둔 커다란 바위돌로 차례차례 막아 외부에서는 다시 묘실로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다.피라미드 내부의 미로같은 통로들을 오르내리다 보면 오줌 지린내같은 심한악취가 나는데 관광객들이 내뿜는 숨과 땀등이 돌벽에 부딪쳐서 일으키는 화학변화 탓이라고 한다.돌 표면에 붙은 이 화학물질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수개월에 한번씩 해주는데 이 작업기간중에는 관광객들의 피라미드 내부 출입을 막는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들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인간의 불멸에 대한 자신들의 상상력을 총동원해 만든 돌 구조물이다.이 돌 구조물들은 단순함과 장엄함이 어우러져 흠잡을데 없이 완벽한 조화를 연출해내고있다.직선이 이처럼 완벽히 다스려져 표현된 건축물이 언제 또 있었던가.고대 이집트인들은 오직 직선과 각에만 의존해 차곡차곡 영원불멸을 향해 올라가는 돌 계단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3개의 거대 피라미드를 완성시킨뒤 이집트인들은 이것이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임을 알리고 싶어서였던듯 지상의 존재들을 형상화시킨 거대한 석상을 그 앞에 만들어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스핑크스」였다.가운데 피라미드의 주인공인 케프론왕의 얼굴과 용맹의 상징인 사자의 몸체를 가진 이 돌조각의 일차적인 임무는 피라미드의수호신이었을 것이다.이 수호신은 역사의 여명부터 지금까지 5천여년 동안 파라오의 동행자였고 한편으로는 신의 위치에 있었던 파라오 자신이었다. 스핑크스는 기자 모래언덕의 석회암 바위돌을 깍아 만든 것으로 표면을 장식한 돌 타일조각이 떨어져나가 몸통 곳곳에서 지층이 그대로 드러나있다.원래 무슨 이름으로 불렸는지 기록은 없지만 이곳에 들어온 아랍인들은 「아블 홀(공포의 아버지)」로 불렀고 스핑크스란 이름은 사람과 사자 「둘이 합쳐진 것」이란 뜻으로 그리스인들이 붙였다.지금은 코와 턱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입술도 절반이 짤려나간 흉한 모습이지만 높이 20m,머리에서 다리끝까지의 길이가 78m에 이르는 위풍당당한 수호신이다.얼굴 폭만 4m15㎝에 이른다. 스핑크스가 손상된 첫째 원인은 무엇보다도 서부사막에서 불어오는 세찬 모래바람이었다.이 모래바람에 덮여 한때 스핑크스는 몸체 전부가 땅속에 파묻여 있었는데 후세에 이를 발굴해 지금의 모습으로 보존하게 된 것이다.역설적이지만 스핑크스를 5천년이 넘도록 지켜준 것도 바로이 사막의 모래바람이었다.주위에 쌓인 모래로 하중이 분산돼 무너져내림을 막았고 풍화에 의한 마모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모래를 치운뒤 외기에 노출되고 하중을 수직으로 받으면서 이 돌조각은 급속히 마모되고 곧곧에서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아울러 인근 마을에서 쏟아내는 생활하수들이 지하암반으로 스며들고 관광객들을 실어나르는 자동차의 진동과 매연,그리고 서울 못지 않게 지독한 카이로의 대기 오염이 한번씩 비가 올때마다 내려않아 스핑크스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있다고 한다. 파라오와 함께 5천년을 여행해온 존재.알렉산더,시저,나폴레옹등 기자의 모래언덕을 지나간 숱한 정복자들의 꿈이 낙엽처럼 사막에 나뒹굴 때도 기자 언덕을 지켜온 「공포의 아버지」가 현대의 공해 앞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오늘도 밤이 되면 스핑크스는 화려한 인공조명과 음향속에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장엄하게 버티고 서서 세계 각지에서 모여드는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 파키스탄 탁티바이(세계 문화유산 순례:23)

    ◎가파른 바위산 벼랑끝 성채같은 가람이… 간다라(Gandhara)는 아주 일찍 역사에 등장했다.아키메네스왕조때(BC559∼330년) 페르시아의 속주로 처음 역사에 기록되었다.오늘날 파키스탄 북서변경주 페샤와르현에 해당하는 지역이 옛 간다라 땅이다.역사속에 명멸한 정복자들의 말발굽 소리가 그칠날 없이 이어진 지역이기도 했다.그래도 간다라에서는 불교와 불교미술이 오랫동안 꽃피었다. ○대평원 한복판 우뚝/망망대해 등대인듯 그 간다라에는 불교유적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대표적 유적의 하나가 탁티바이(Takht-i-Bahi)다.가람유적인 탁티바이는 페샤와르현 마르단에 있다.페샤와르시에서 탁티바이까지는 꽤 멀었다.난마처럼 얽힌 카불강과 스와트강줄기를 몇차례 건너서 간다라 첫 수도 차르사다를 지나쳤다.논스톱으로 두시간을 좀 넘게 달렸을까,대평원 한복판에 우뚝한 산자락 하나가 불쑥 시야로 들어왔다. 탁티바이산이다.산은 마치 망망대해에서 만난 등대 같았다.오랜 세월을 두고 탁발로 유랑한 당시 구도승들에게 산은 실제 등대 노릇을 했을것이다.풀 한포기도 눈에 띄지않는 바위너설의 악산인데,가람은 매달린듯 벼랑에 붙어있다.아래서 저만큼 올려다 본 가람 탁티바이는 성채 그것이었다.그많은 정복자들의 난리를 피해서 부러 가파른 바위산을 택했으리라.오르는 길이 무척이나 험했다. 가람 입구에 다다랐을때 기다리던 경비원이 거수경례로 맞아주었다.긴 치마자락처럼 정강이까지 치렁치렁 내려온 고유의상 카미즈 차림의 경비원은 허리에 넓은 가죽벨트를 맸다.벨트에 권총을 매달지 않았을 뿐,어떤 제복같은 느낌이 와닿았다.유적 경비원을 따라 여러개의 수투파(불탑)가 있는 뜰을 지나서,경내에 단 한그루 밖에 없는 보리수나무 그늘에서 우선 한숨을 돌렸다. 탁티바이 가람유적은 기원전(BC)100년쯤부터 터를 잡아나갔다.그리고 나서 기원후(AD)6세기까지 모두 4단계에 걸쳐 가람을 조성하는 동안도 파괴와 건설이 거듭되었다.탁티바이산은 산자체가 돌산이다.그래서 가람의 모든 건조물은 산에 널린 운모편암을 자재로 축조했다.가람은 층서관계가 분명하게 나타나 블럭을 가늠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간다라 불교유적지 성한불상 하나없어 유적의 단면은 대체로 요꼴을 이루었다.그런 단면을 기반으로 불교의 기본 건축물인 수투파와 불당,승원을 지었다.수투파는 네모꼴 기단위에 탑 몸체를 쌓아올리는 형식이었는데,애석하게도 기단만 남아있다.승원의 경우에는 가운데 뜰 중정을 가운데 두고 둘레에 승방을 가지런히 배치했다.이같은 승원축조양식은 간다라지방에서 처음 나타나 인도 내륙으로 전파되었다. 가람 입구를 들어서면 수투파 기단들이 늘어선 좁은 뜰이 나왔다.요꼴 단면에서 보이는 오목한 부분이 바로 뜰이다.그 뜰이 시작되는 오른쪽(북쪽)으로 불상을 봉안했던 닫집(감실)들이 바싹 다가왔다.모두 12개나 되는 닫집을 지나쳤지만,불상 한 두어 구가 겨우 눈에 띄었다.그나마 머리가 아니면 팔이 떨어져 나간 불상 뿐이다.가람 어디에서도 몸이 성한 불상을 만나지 못했다. 간다라 불교유적은 일찍 파괴되었다.당나라 승려 현장의 구도여행기인 「대당서역기」를 보면 7세기 전반의 건태국,즉 간다라 이야기가 나온다.현장은 이책에다 「승가람은 1천여군데에 있으나,모두 부서진채 방치되었다」고 적었다.동서 1천리,남북 800리의 간다라를 여행하면서 적었다는 현장의 기록에서 탁티바이의 퇴락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 식민제국 박트리아의 왕 맨안더(재위 BC155∼130년)의 후광을 업고,또 쿠산왕조의 카니쉬칸(재위 AD78∼128년)을 후원자로 전성기를 맞았던 탁티바이.겨우 600여년을 가람답게 지켰다.지금 탁티바이는 적막했다.탁티바이는 「바위속의 샘」이라는 뜻이다.그래서인지 유적 경비원에게 청해서 얻어마신 양재기 물맛이 무척이나 시원했다. ○정복자 말발굽에 파괴­건설 600년 이 가람의 대탑 메인 수투파는 입구에서 곧바로 만난 뜰 왼쪽(남쪽)에 있었다.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메인 수투파가 있는 마당 가장자리에다 여러 칸의 닫집을 ㄷ자꼴로 앉혔다.닫집의 지붕은 독특했다.네모꼴 지붕을 돌로 올리면서 모서리를 차츰 죄어가는 방식으로 둥글게 쌓았다.그리고 지붕 한가운데에 원심의 구조물을 도드라지게 덧쌓았다.역시 이들 닫집안에서도 불상이 보이지 않았다. 승려들이 머물렀던 승원은 이 가람 북쪽 블럭에 있다.메인 수투파가 있는 마당을 내려와 입구 뜰을 건너서 계단을 올랐다.마당 중간을 비워두고 ㅁ자형으로 빙 둘러지은 승방들이 촘촘히 박혀있다.경전을 외는 소리가 두런두런 했을 승방은 지붕조차 없다.지난 먼 옛날 불교를 그토록 보호했던 왕조 모두가 역사속에 묻혔으니,누가 중창을 하랴.지금 유네스코(UNESCO)가 나서 더 허물어지지 않게 보살피고 있는 것만도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불교가 존재않는 불교의 유적지 구도승들의 고행현장은 정오가 가까운 한낮에 찾았다.가람 입구에서 시작한 뜰을 거쳐 서쪽 마당끝에서 돌계단을 따라 내려갔을때 어두컴컴한 터널이 나왔다.돌을 맞조려 쌓은 천정이 아치꼴을 이룬 터널은 꽤 길었다.터널 오른쪽으로 작은 방들이 붙어있다는 사실은 아주 뒤늦게 알아차렸다.인공의 토굴이었던 것이다. 토굴의 환경은 감방보다 열악했다.승려들이 고행과 명상으로 은둔했을 토굴에는 박쥐떼만 득시글거렸다.세월이 무상했다.생겨나고 없어지는 생멸에 집착하지 않은 탓일까,파키스탄에서 불교가 사라진지는 오래다.제대로 된 불상 하나를 만나지 못하고 탁티바이를 돌아서야 했던 까닭도 불교가 존재하지 않는 불교유적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 가이드/숙박은 페샤와르서/국내선 하루 2∼4편 운항 탁티바이는 페샤와르에서 80㎞ 거리다.페샤와르에서 택시를 타면 90∼100달러가 든다.페샤와르를 거점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숙박은 페샤와르에서 하는 것이 좋다.숙박시설은 딘스호텔,펄콘티넨털호텔 등이 있다. 교통편은 라왈핀디나 라호르에서 오는 파키스탄 국내항공이 하루 2∼4편 정도 운항한다.그리고 이슬라마바드에서 육로를 택할 경우 4시간이 걸린다.페샤와르는 실크로드시대부터 발달한 도시라서 아랍풍의 문물관광도 즐길수 있다.인더스 가이드(92­42­872975)같은 여행사 안내도 고려할만한 일이다.
  • 서울대/아크로폴리스광장 사용논란

    ◎학교­각종집회 공부 방해… 연4회로 제한/학생­“80년대 민주화운동 메카” 강력 반발 서울대 「아크로폴리스」광장의 사용을 놓고 학교측과 학생들의 신경전이 치열하다. 80년대 학생운동의 본산지이며,관악인의 집회 「메카」였던 「아크로폴리스」를 연간 4차례만 이용할 수 있도록 학교측이 제한했기 때문이다. 아크로폴리스는 학교본부와 중앙도서관 사이의 마당과 돌계단에 있다. 학교측은 지난 24일 「학교시설 이용에 관한 규칙」이라는 공고문을 통해 『총학생회의 출범식과 대동제의 개·폐회식,총학생회의 합동선거유세 1회 등 모두 4차례만 이 광장을 이용할 수 있다』고 공고했다. 다만 전체학생수의 10%(2천300여명)이상이 모이거나 학술적인 모임일 경우에 한해 한정적으로 사용승인을 내줄 수 있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학생부처장 백종현 교수는 『평균 2천여명 이상이 공부하고 있는 도서관앞에서 몇백명이 모여 확성기를 틀어놓고 공부를 방해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총학생회는 『대학의 비판정신과 자치를 부정하는 처사』라며 『학교측은 대학자치와 민주주의의 열망을 불태웠던 서울대의 상징을 사장시키고 있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아크로폴리스」를 둘러싼 쟁탈전이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하지만 「지성의 광장」을 공유할 해법은 오리무중이다.〈이지운 기자〉
  • 파키스탄 탁실라:하(세계 문화유산 순례:11)

    ◎거대한 수투파엔 혜초의 숨결이… 그 넓은 고원지대 탁실라의 옛 이름은 탁사실라(Taksasila)다.탁사는 석기를 만들 때 쓰는 돌이고,실라는 도시를 의미했다.굳이 의역하면 「돌의 도시」라고나 할까.탁사실라라는 고유명사는 1918년에 발굴한 은판,새김글씨(명문)에서 확인되었다.은판에는 다르마르지카(Dharmarjika)라는 새김글씨도 함께 나와 탁실라 근본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탁실라의 유명한 수투파(불탑)유적 가운데 하나인 다르마르지카는 은판 새김글씨에 나오는 고유명사 그대로다.은판은 오늘날 다르마지카로 부르는 수투파 유적에서 실제 출토되었다.유적은 탁실라박물관 동쪽 냇물 건너에 있다.수투파 다르마르지카는 아주 거대했다.두 층의 원형돌기단위에 쌓아올린 수투파는 우리나라 경주 천마총만큼 크고 높아서 야산처럼 보였다. 그 수투파 가장자리 공간을 좀 비워두고 자리잡았던 예불당들이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수투파 원둘레 바깥을 따라 빙 돌아간 예불당 건물터들은 정연했다.그 잔영에 불과한 것이었지만,수투파 뒤뜰에는 승려들이 살았던 돌담벽 승방들이 벌집마냥 들어앉았다.촘촘한 승방들을 몇차례나 손가락을 펴고접어 헤아리다 그만두었다.그까짓 폐허를 헤아려 무엇하랴.불교가 융성했던 시절,독경소리가 요란했을 다르마르지카에는 정적이 흘렀다. 다르마르지카는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시대 유적으로 보고 있다.그의 치세기(BC 269∼232년)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수투파 1만8천기를 쌓았다고 한다.물론 전설적 기록이기는 하나,다르마르지카에서 아쇼카왕의 불심을 보았다.다르마르지카를 문자대로 해석하면 「왕의 사원」이다.과연 왕의 사원다운 다르마르지카는 탁실라의 또다른 수투파유적 쿠나라스 등과 더불어 그 위용을 자랑했다. 탁실라고원의 불교역사는 퍽 오래되었다.이는 자울리안산 높은 언덕에서 오랜 세월을 버티어온 사원유적 자울리안(Jaulian)역사를 들추어 보면 알 수 있다.간다라지방을 먼저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대왕 알렉산더가 그토록 깊고넓은 인더스강을 기어이 건너 자울리안을 공략하지 않았던가.서력기원이 아직 멀기만 했던 BC 325년쯤의 일이다.아쇼카왕 이전에 벌써 불교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올리브나무가 무성한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그러고 나서 만난 돌계단을 다시 올라 자울리안에 다달았다.절집 승가람마가 분명한데,여기 사람들은 자울리안대학이라 부르면서 인도 나란다에 비유했다.불교교리나 경전은 물론 다른 여러 학문을 가르친 교육기관이 자울리안이라는 것이다.그래서 정복자 알렉산더는 점성술,수학,의학 따위의 학문적 지식과 심지어는 병법까지 자울리안에서 빼내갔다. 자울리안은 돌을 쌓아 만든 석조건축물 가람이다.가람 자리가 산등성이라서 그런지,앞뜰은 옹색했다.몇 걸음을 걸어서 뜰을 비켜서자 수투파를 봉안한 불당이 나왔다.메인 수투파를 중심으로 키 작은 수투파들이 옹기종기 들러리를 섰다.진흙반죽에다 작은 불상들이 들어갈 감을 조각하여 말린 뒤 대개 세층으로 쌓아올린 수투파는 걸작의 예술품들이었다. 불당에서 승방을 향한 골목 한쪽으로 작은 방들이 따라 붙었다.석굴이 연상되는 방에 불상이 띄엄띄엄 좌정했다.홀로 앉은 이들 불상은 단독불상이 출현한 1세기말 이후 작품일 것이다.그러나 온전한 불상이 거의 없다.어떤 테라코타 불상 하나는 머리가 달아났는데,배꼽이 뚫려있다.성치 않은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깨끗이 낫는다는 속설때문에 배꼽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비록 목이 달아난 부처일지라도 이타행만큼은 실천하는 모양이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의 승려 혜초(AD704∼787년)도 그 옛날 자울리안을 다녀갔다.이 책에 기록한 탁사국은 탁사실라일 것이다.그는 책에 쓰기를,「탁사국에 가면 절도 많고,승려도 많다」고 했다.구도여행에 지쳤던 혜초가 하룻밤 발을 뻗고 누웠을 승방도 자울리안 어디인가에 있을 것이다. 해거름에 탁실라박물관 근처 레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저녁식사 카레라이스에 앞서 요구르트와 쌀가루를 섞어만든 죽 키르가 식탁에 올랐다.고타마 싯달다가 고행에서 나오자,한 처녀가 그에게 바쳤다는 유미죽이 연상되었다.「대장엄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릴리프로 표현한 탁실라 출토품 불전도가 탁실라박물관에 있다. ◎여행 가이드/이슬라마바드서 약 40㎞/승용차 하루 전세 한화 3만원 고대유적이 광범위한 지역에 널린 탁실라는 파키스탄 라발핀디현에 속한다.수도 이슬라마바드로부터 40㎞,현소재지 라발핀디에서는 35㎞가 떨어져 있다. 고대의 불교유적과 도시유적 말고도 국립탁실라박물관이 있기 때문에 하루일정으로 돌아보기가 어렵다.그래서 탁실라에서 숙박을 하든가,아니면 이슬라마바드를 거점으로 유적을 찾아보는 것이 좋다.탁실라박물관 바로 앞에 레스트 하우스가 있으나 소규모다. 이런 현지사정을 고려해서 이슬라마바드에 묵는 사람이 많다.이슬라마바드에서 탁실라를 왕복하는데 드는 승용차대절비는 기름값을 포함,하루 40달러(한화 3만원정도).이슬라마바드에는 국제체인의 관광호텔과 국영호텔 등 숙박시설이 많다.문의는 인더스 가이드(전화 92­42­872975).
  • 학교 불태우고 “집에 가고 싶다”니…/현승일 국민대총장 특별기고

    연세대학교의 본관 오른편 수목이 울창한 종합관 주변은 원래 평화와 진리와 낭만이 가득한 품위로운 장소다.이 대학에 종사하는 모든 이가 이곳을 사랑하고,이 대학을 거쳐간 동문·방문객들이 여기를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로 기억하는 곳이기도 하다.그런데 이곳이 엉망진창으로 깨어진 폐허로 변했다. 점거 학생들이 진압된 다음날,나는 분명히 우리학교 학생들도 가담했을 피해의 이 대학에 대해 사죄와 위로의 말씀을 드리기 위해 연대를 방문했고,이참에 피해현장을 둘러보게 되었다. 나보다 먼저 온 서강대의 박홍 총장은 구슬땀을 흘리면서 벽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써놓은 낙서들을 수첩에 옮겨적고 있었다.박총장은 나에게 전단 한장을 보여주었는데,『팟쇼 앞잡이 박홍은 듣거라!너뿐 아니라 너의 처자까지 엄중히 처치할 것이다­무궁화 결사대­』라는 협박장이었다.나는 『박총장이 처자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지요』라고 농담을 했고 박총장은 껄껄 웃었다. 종합관으로 오르는 돌계단부터 마모되어 부스러졌고,집기와 돌무더기가 흩어진 복도와계단은 점거자가 불지른 여진이 가득히 남아 숨쉬기도 어려웠다.전쟁이 지나간 자리를 돌아보고 『불행중 다행이구나』싶었다.이 모양으로 폐허가 될 지경이라면 우연사고로라도 한 두명의 사망자는 발생할 수 있을 것인데 학생이 죽지않은 것은 하늘이 도운 기적이라 생각된다.어떤 일이 있어도 꽃다운 청춘이 허무하게 죽어서는 안된다. 파괴현장에서 지성의 흔적,양심의 흔적을 찾는다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폐허의 건물안을 살피면서 그래도 점령자가 학생이었으니까 그러한 자취가 없을까하고 목마르게 찾았다.그러나 내눈에 그런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반대의 형국이 눈에 띌 뿐이었다.종합관 3,4층의 언어실습실과 영상실습실,녹음실 등의 녹음기,TV,앰프시설등이 모두 못쓰게 되었는데 하나하나가 쇠파이프로 콕콕 찍어서 망가진 것이 분명했고,벽에 세워진 기둥시계·액자·책상유리들도 일부러 찍어 놓았다.공방전에서 부서진 것이 아니었다.분명 진압이 끝난후에 내걸었을 플래카드에는 「우리의 양심을 믿어주십시오­한총련­」이라고 씌어있었다.남의 대학에 들어가서 구석구석 파괴해 놓고 사과한마디 없이 자신들을 옹호하는 그 플래카드의 양심을 믿기가 어려웠다. 종합관 입구에는 「집에 가고 싶어요!」「아빠 엄마가 보고 싶어요」라고 반듯반듯하게 페인트로 써놓았다.이 문구를 보면서 나는 그들의 옳지못한 간교한 꾀를 여기서도 보게 되어 그야말로 참담한 심정이 들었다.전투를 치르는 마당에 「아빠,엄마」가 도대체 무슨 소리며,남의 대학을 다 때려부순 마당에 「집에 가고 싶어요」가 무슨 말인가?나 역시 대학인으로서 학생들이 이렇게 된데 대해 책임을 지라고 하면 할말이 없다.그리고 학생의 모든 잘못은 우리같은 기성세대의 잘못에 원이 있다고해도 변명할 말이 없다.그러나 그들의 이같은 교활성만은 질책하고 싶다.학생지도에 있어서 가장 난점은 그들의 교활성임을 학생지도를 해본 사람은 다 안다.차라리 『나는 혁명전사요』『공산주의자요』라고 떳떳이 말한다면 대화할 수 있고,고칠수도 있고,서로 사랑할 수도 있다.그들은 젊다.누가 그들을 교활한 거짓의 청년으로만들고 있는가?그런 것을 가르치는 이데올로기나 전략전술은 악이다. 이 악을 물리치기 위해 모두가 합심하여 나서야 할 때이다.
  • 파키스탄/모헨조다로:상(세계 문화유산 순례:5)

    ◎BC 2,500년에 세운 완벽한 계획도시/벽돌 8천만장 소요 추산… “인더스문명의 꽃”/대욕탕에 상·하수시설… 도로는 벽돌포장/기능별로 구역 배치… 요새유적이 중추 인더스문명의 꽃 모헨조다로.파키스탄 신드지방 라르카나에 있다.카라치에서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고 신크리를 우회하여 2시간만에 모헨조다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황토지대에는 벌써 불볕이 깔렸다.그래서 메마른 문명의 구릉모헨조다로는 말 그대로 「죽음의 언덕」처럼 보였다. 비행장에서 4∼5㎞쯤은 될까.그리 멀지 않았다.모헨조다로 초입의 요새유적은 약간 경사진 비탈에 흙을 돋우어 만든 인공언덕 기슭을 깔고 앉았다.작열하는 불볕을 이기지 못하고 고운가루로 바스러진 황토흙과 벽돌이 어울린 모헨조다로의 색깔은 붉었다.인더스강이 범람하면서 밀어붙인 황토흙으로 벽돌을 구워 건설한 모헨조다로는 애초부터도 붉은색 도시였다. 그 요새유적 어귀에 모질게 자란 가시나무 한그루가 무척이나 반가웠다.신드말로 간디라는 가시나무는 그런대로 불볕을 가려주었으나,유적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 곧 시작되었다.높이 21m에 지나지 않는 인공언덕의 벽돌계단이 극악스러운 더위로 해서 코밑으로 바싹 다가왔다.그리고 정상에 올라 진흙과 벽돌을 섞어 만든 거대한 탑파(수투파)를 만났다. 요새유적 정상의 탑파는 모헨조다로를 얼핏 불교유적으로 착각하기 딱 알맞았다.1922년 이 유적을 처음 조사했던 영국 고고학자 RD배너지도 모헨조다로를 불교유적으로 보고 탑파 주변을 발굴했을 정도였으니까….실제 AD 200년쯤 쿠산왕조시대의 동전이 나오기는 했다.그러나 탑파 주변을 더 깊이 파들어가서 생전 보지못했던 인장한 점을 발굴해냈다.그 인장은 바로 세기적 유물로,모헨조다로가 인더스문명 유적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제공한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모헨조다로는 BC2500∼1700년까지 8백년동안 번영을 누렸던 도시다.그러니까 요새유적의 탑파는 모헨조다로가 멸망한 이후 1천9백여년이 지나고 나서 파괴된 모헨조다로 유적지 위에다 쌓아올린 불교유적인 것이다.어떻든 모헨조다로 사람들은 다른 세계가 거의 신석기시대를 살 무렵에계획된 도시를 건설했다.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도시 면적은 어림잡아 4천8백여㎡를 웃돌았을 것으로 보고있다. 오늘날 모헨조다로 유적은 편의상 네 블록으로 나누어 블록마다 고유부호를 붙였다.블록의 부호는 발굴자들 이름에서 약자를 따다 만든 것인데,요새유적은 SD구역으로 되어있다.인공의 언덕,다시 말하면 토루가 있기때문에 요새로 불리는 이 유적은 도시의 중핵이라 할 수 있다.정상에 올라서면 동남과 동북쪽으로 펼쳐진 주변 도시유적이 한눈에 들어왔다. 요새유적(SD구역)에는 아주 중요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중요한 건물은 큰 욕조가 있는 대욕탕이다.길이 12m,너비 6.9m,깊이 2.4m의 벽돌탱크가 설치되었다.욕조바닥 벽돌의 가장자리를 석고로 모르타르한 대욕탕은 방수처리가 완벽했다.욕조의 물은 세 개의 우물로부터 공급받는 상수도시설과 물을 빼내 흘려보내는 배수 및 하수도 시설도 갖추었다.대욕탕에서 조금 떨어진 북쪽에는 작은 욕조가 딸린 방들이 따로 있다.깨끗한 물을 늘상 공급받아 몸을 청결하게 가꾼 성직자들의 전용공간인 것이다. 대욕조를 돌아보고 나서 눈길을 끄는 건물터 하나가 골목 건너에서 기다렸다.네 개의 통로가 난 건물안에는 벽돌 스무남은장씩을 포개 쌓은 주춧대가 늘어 섰다.그 주춧대는 지붕 버팀기둥 자리였을 법한데,건물안 홀 넓이는 26㎡를 헤아렸다.고고학자나 문명사에 관심을 둔 전문가들은 이 건물을 종교집회를 위한 성소로 보았다.이 성소건물은 모헨조다로의 다른 블록 DK지역에서 발굴한 족장의 저택과 함께 도시사회의 통치기능과 체제를 가늠할 수 있는 유적이기도 했다. 모헨조다로를 와서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위대한 도시라는 사실을 느낄 것이다.그까짓 벽돌을 쌓아 건설한 도시가 별 대수로우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겠지만,BC 2500년쯤 도시계획에 의한 완벽한 도시라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모헨조다로 사람들 말고 다른 많은 종족들은 기껏해야 움집 정도를 짓고 살던 시대였기 때문이다.요새유적(SD구역)과 그 밑의 도시유적 DK구역,노동자 거주유적 HR구역 등이 기능에 따라 배치되었다. 이들 구역의 모든 건물은 구워 만든 붉은색 벽돌로 지었다.그리고 우물을 파고 원형으로 벽돌을 가지런히 쌓아 올렸다.우물은 7백개나 되었다.방수처리한 상·하수도에도 역시 벽돌을 사용했다.도로는 오늘날 나침반이 가리키는대로 정확히 동서와 남북을 이었다.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너비가 10m에 이르는 큰 도로에는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도록 벽돌을 모로 뉘어 깔았다.도시계획은 물론 도시토목을 맡은 전문 엔지니어가 설계한 도시가 바로 모헨조다로인 것이다. 이 도시를 건설할 때 엄청난 분량의 벽돌이 들어갔다.고고학자들이 계산해낸 숫자는 자그마치 8천만장이다.벽돌을 일정한 규격품으로 세 종류가 생산되었다.가장 큰 세로 28㎝,가로 16㎝,두께 9㎝짜리 벽돌은 나무로 구웠다.나머지 작은 규격품 벽돌을 굽는 데는 곡물의 껍데기 왕겨를 땔감으로 썼다.이들 벽돌은 건축용도에 따라 사용되었다.오늘날 건축자재용 벽돌강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제품을 대량 생산했으나 벽돌공장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모헨조다로와 버금하는 파키스탄의 다른 문명유적이 수난을 당한 적이 있다.모헨조다로보다 더 상류에 위치한 인더스강 지류 라비강 북쪽 연안의 하라파 유적의 수난이 그것이다.영국식민통치시대 파키스탄 초기철도건설 당시 하라파유적의 벽돌이 공사용 자재로 활용되었다는 이야기다.그 이후 문명유적임이 확인되어 지금은 모헨조다로 유적과 더불어 두 개의 큰 인더스문명 유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정오를 넘긴 구릉지대의 더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그러나 내친 걸음이라 모헨조다로박물관에서 내준 랜드로버로 인더스강쪽을 향해 달렸다.2㎞쯤을 실히 가서 강물이 범람할 때 도시 한 블록을 흔적없이 삼켜버린 폐허지대에 다달았다.비록 폐허라 할지라도 모헨조다로를 보다 분명한 문명유적으로 부각시킨 많은 유물들이 1898∼99년 사이 여기서 출토되었다.파키스탄 독립이후 최대의 발굴성과로 꼽히는 여러 돌인장,소가 끄는 달구지 따위의 테라코타 조각품들,무늬도자기와 민무늬도자기 등이 그것이다. 소 달구지에서 모헨조다로 도시유적의 그 넓은 길이 허세가 아니었음을 실감했다.그리고 돌인장에는 설형문자가 나오거니와 큰 선박 그림을 새겼다.이들 모헨조다로의 인장은 파키스탄보다 먼 서역수메르에서도 출토되었다.모헨조다로 사람들은 아주 일찍 고유문자를 쓰는 가운데 큰 배를 부려 장거리 해상무역로를 개척했다는 증거가 아닌가.그래서 모헨조다로에는 영원한 문명의 빛이 어려있는 것이다.
  • 사람 발길에 채이고… 뽑히고… “훼손 심각”

    ◎“등산로 나무뿌리를 살리자”/돌계단처럼 밟혀 껍질 벗겨져/수목 고사 초래… 자연보호 절실/서울시·서울신문 26일 관악산서 「흙덮어 주기」 행사 서울시내 등산로주변의 나무가 사람의 발길에 수난을 겪는다.북한산·도봉산·관악산·수락산·대모산·청계산·용마산 등 어느 산이나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뿌리가 문제다.알몸을 드러낸 흉한 모습으로 발부리에 채인다.계단처럼,로프처럼 이용된다.뿌리를 밟지 않고는 몇발짝도 떼지 못할 정도로 훼손이 심각하다.몸체도 마찬가지다.이리저리 당겨지고 꺾이기 일쑤다.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고개가 갸웃거려진다.하지만 신경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무심코 밟고 지나칠 뿐이다. 주말마다 하루 10만∼12만명이 찾는 관악산 서울대입구쪽 등산로.제1야영장에서 몇발짝만 떼면 나무뿌리가 흉칙한 몰골로 바닥에 드러누워 등산객의 발길을 기다린다. 제4광장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경사진 곳마다 이리저리 얽힌 나무뿌리가 지천으로 드러나 있다.뿌리가 흙에 덮인 것이 아니라,엉킨 뿌리가안쪽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다.말라 죽은 나무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국립공원 북한산도 예외는 아니다.등산객도 관악산보다 2배이상 많다.정릉입구 북한산국립공원 매표소를 지나 1백여m만 오르면 돌부리가 아니면 나무뿌리를 밟아야 한다. 알몸이 드러난 나무뿌리의 행진은 정상까지 이어진다.싱그러운 5월에도 시들시들 병을 앓는 나무가 많다. 최광빈 서울시 조경기획계장은 『뿌리가 조금 드러났다고 해서 당장 나무가 말라 죽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는 차원에서 근본적인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서울시와 서울신문사는 이같은 훼손실태를 막기 위해 등산로주변 수목보호운동에 나선다. 오는 26일 상오10시 관악산 제1광장에서 「등산로 나무뿌리 흙 덮어주기 캠페인」을 갖는 것을 시작으로 연중 보호활동을 펼친다. 첫 행사에는 조순 서울시장과 손주환 서울신문사장을 비롯,서울신문 환경감시위원·산악연맹회원·관악구 직능단체 회원·중고교 환경봉사활동 희망자·등산객 등 1만6천여명이 참가한다.〈강동형 기자〉
  • “남원 춘향제 등 지역 축전”/김동기(공직자의 소리)

    ◎“세계적 이벤트로 키우자” 34년만에 주민의 손으로 뽑힌 자치단체장이 주민앞에 선서를 하고 자치 단체를 대표하여 지역살림을 시작한지 1개월이 지났다. 지난 1개월 동안 지역 이기주의의 대명사인 광역 쓰레기장 건설계획의 전면 백지화가 검토되는 등 우려되는 대목도 있었지만 자치의 앞날을 밝게 하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곳곳에서 빛을 발했다.지방의 자율성과 함께 능률성의 조화를 통한 지역과 국가발전이 기대되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지방자치를 단체장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정치과정으로 보려는 경향도 적지않아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지방자치란 본질적으로 경제·사회·문화 등 지역과 관련된 모든 분야의 지방화·분권화·민주화를 의미한다.다르게 말하면 생활자치이다.주연급 배우격인 단체장의 활동과 함께 자치단체 구성원 모두가 맡은 소임을 성실하게 수행해 지역발전과 지역화합을 이끌어 내는 총체적인 모습이 강조되어야 한다. 지역경제를 보자.지금까지 주로 국가정책의 흐름위주로 운용되었으나 이제는 달라진다.재정형편을 포함한 탄탄한 지역경제의 뒷받침이 없는 지방자치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많은 민선단체장이 해외 세일즈맨을 자청하고 지방행정에 경영개념의 도입을 외치고 있는 것도 바로 이같은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지역여건을 십분 살려 특화사업을 육성하고 「가장 지방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차별전략에서 세계적인 명품을 만드는 장인정신도 자치시대에 더욱 요구되고 있다. 사회·문화적 측면의 지방자치의 현주소는 어떠한가.열린 사회·문화적인 청사진과 함께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지역의 각종 행사가 지역차원을 넘어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이벤트로 재창조 되어야 한다.문화·예술행사도 굴뚝없는 유망한 지역사업이다. 춘향제와 같은 지역축전이 세계인이 한번 가보고 싶어하는 국제적인 행사로 발전되어야 한다.일본의 어느 산촌 자치단체는 일본에서 제일 긴 3천3백33개의 돌계단을 만드는 등 새로운 관광명소로 개발하여 많은 관관객 유치를 하고 있다. 각종 국제행사나 세미나 등도 지역에 유치하여 외화 획득과 함께 국위선양에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모두 단체장보다는 자치단체 구성원이 주연급 배우가 되어야 할 부문이다.막 꽃피우기 시작한 지방차치가 우리의 토양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주민 자치단체,중앙정부의 지속적이고 특 별한 노력의 경주가 필요하다. 지방차치는 스스로의 피고 지는 야생화가 아닌 우리 모두의 땀과 인내로 가꾸어져야 하는 화초인 것이다.지방화,세계화라는 새로운 도전은 우리에게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방적으로 행동하는 발전 지향적이고 미래 지항적 자세를 요청하고 있다.
  • 투루판분지 고창고성(서역 문화기행:5)

    ◎서한군이 지은 토성… 내·외성 2중구조/성복판에 망루… 인도식 원형불탑 남아/서쪽 사막지대엔 고분 5백여기… 고대문서·미술품 등 유물 20년간 1만여점 출토 아테네가 로마의 폐허에 들어서면 보이느니 돌기둥에 돌계단이지만 서역의 폐허에 들어서면 모두가 흙의 덩어리요 흙의 동굴이다°그 황색의 폐허는 중국의 감숙·섬서는 물론 산서·하북·하남·산동 등 황하가 흐르는 그 언저리였다. 걸핏하면 토성의 자드락길이요,때로는 치열하게 활싸움을 벌였던 보루의 주춧돌이었다.그런 흔적들을 보면 흙은 먼지가 아니라는 사실과 그러한 폐허가 결코 앙상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된다.투루판에는 그러한 역사의 현장으로 두군데의 고성이 있다.하나는 서쪽 13㎞지점에 있는 교하고성이요,다른 하나는 동쪽 40㎞ 지벙에 있는 고창고성이다. 고창고성은 바로 베제크리크천불동이 있는 무르룩계곡을 빠져나와 승금구에서 약간 남쪽의 언덕위,그러니까 멀리 화염산이 병풍처럼 북쪽을 가린 나직한 오아시스에 세워진 성곽이다. 교하고성과 비슷한 역사배경을 지닌 고창고성은 교하보다 1세기,차사왕국에 주둔한 서한둔전부대가 축조한 것이다. 그곳은 적어도 한 두개의 사단 병력이 훈련을 받다가 세워총을 하고 휴식중인 연병장을 방불케 했다.5㎞의 둘레에 2백20만㎡의 넓이,바로 그러한 광장인데 그 유적들은 모두 올망종망한 높이로 유적과 유적사이의 길조차 좁고 꼬불꼬불 하였다.그것은 교하의 토성이 흙 자체의 판축인데 반해 고창의 것은 흙벽돌의 축조라서 무너지기로 말하면 와르르 붕괴되었기게 그렇다. ○외성엔 4개문 설치 그들 설계의 구도도 달랐다.교하의 그것이 남북의 중앙대로를 중심한 동서의 정연한 분포임에 비추어 고창의 그것은 불규칙한 정방형의 외성이 있고 한 복판에 내성이 있는 이중구도로서 그 내성의 주위로 사원이나 민가들,다시 변두리로 무덤들이 산발적으로 분포된 것으로 보였다. 온전한 외성은 12m의 높이며,그 두께도 넉넉했다.그동안 출토된 기록에 따르면 외성 4면에 「현덕문,「금복문」,「금장문」,「건양문」,「무성문」등의 성문이 가설되었다고 한다.과연 외성의 풍모는 당당했다.내성 어디쯤으로 보이는 복판에 국기대나 첨성대인양 높다란 축대가 솟았는데 거기에 규칙적으로 뚫린 구멍으로 보아 당시 둔병을 총지휘하던 교위의 청사나 말대쯤으로 쓰였을지 모른다.보다 분명한 유적은 동남쪽과 서남쪽에 남은 불사의 폐허였다.동남쪽의 그것이 인도식 불탑의 원형층탑이라면 서남쪽의 그것은 사각의 튼튼한 기초위에 원형의 건물이다.그 언저리로 널따란 마당에 우두커니 선 필자에게 적어도 천년전 서로 다른 피부에 서로 다른 언어와 복장들이 오락가락하면서 희희낙락했을 그 소리들이 들리는 듯 했다. 명나라 초엽의 명시인이었던 진성의 「화주성」이란 시가 바로 이 자리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창구치월씨서, 성곽숙조시사희. 유적상존당제도, 거인쟁도한관의. 범궁영락류금상, 신도류량와석비. 정마불지풍토이, 격화유자인시」. (고창은 옛날 월씨의 도성 너녘, 성곽은 썰렁한채 저자도 한산해. 폐헤엔 아직도당나라 법도, 주민들은 다투어 한관을 쳐다보네. 절터엔 스산하게 공부처가 뒹굴고, 신도엔 황량스레 돌비석이누웠네. 전마는 달라진 풍토에 영문 모른채, 꽃 그늘에 사람보고 소리지르네) ○현장법사도 머물러 지금부터 6백년전의 작품으로 보이는데 그때만해도 성곽이나 사원은 무너졌어도 유물은 즐비한데다 아직 주민들이 살았음을 짐작케 한다. 여기서 고창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고창성을 다스렸던 회골의 마지막 고창국왕인 훠츠할(화적합이)이 몽골군의 위공에 못견디어 전사하고 그 전화로 소실되던 1275년까지 고창은 1천4백년동안 때로는 군현의 치소로,때로는 와국의 서울로 그 나름의 번영과 웨세를 부렸던 곳이다. 기원전 1세기는 서한 둔병들의 주둔지로,기원 327년엔 전향(전량)의 군현으로,기원 460년엔 원주의 함·장·마·국씨 등이 서로 번갈아 「고창국왕」을 1백40년이나 누리다가 640년에는 당나라의 군현으로,840년에는 회골족이 와국을 세워 가장 강력한 왕권을 부리다가 훠츠할에 다다른 것이다. 무덥고 낮은 투루판에도 많은 와국이 엎치락 뒤치락 흥망을 반복했지만 가장 오랫동안 흥성했던 와국으로 두말할 것 없이 서로 쿠처(고차),동으로 하미(합밀),북으로 천산의 북록 창지(창길)까지 넓은 영토를 4백년이 넘게 떵떵거렸던 회골의 「고창왕국」을,그리고 가장 흥성했던 군형시기로 한·당(한·당)두 조대를 들수 있겠다.그것은 고창이란 지명이 곧 한나라때 대완국을 원정하던 이광장군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 「지세가 높고 넓은데다 백성이 창성하다(지세고창 인서창성)는 뜻으로 미뤄보아 그렇고,당나라 때인 630년 2월경 현장법사가 인도로 가던중 고창왕 국씨의 요청으로 한달이나 머물면서 불법을 강론했다는 데서도 문물이 성행했음을 알게한다. 당나라와 당나라 이전의 문물이 출토되어 「투루판문서」로 불리는 지하박물관은 바로 고창고성의 서단 하라허줘촌 사막에 있었다.이름하여 「아스타나(아사탑나)고분」.50년대말에서 70년대까지 계속된 발굴탐사에서 드러난 5백여 고분은 10여㎦의 넓은 모랫벌에 묻혀 있었다. 그것은 흡사 우리나라 한강변 고수부지에 쌓아 둔 동그란 모래 둥지 같았다.도시 이토록 삭막한 사막에 무덤은 웬 일이며 더구나 거기서 2천7백여점의 고대문서를 포함한 만여점의 미술품·농기구·생활구등이 쏟아져 나왔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대부분 부부합장 묘 필자가 답사한 세걔의 무던은 그 구조가 대체로 비슷했는데 지상에서 비스듬히 팬 1·20m의 묘도를 따라 묘실에 들어가면 안창에는 묘주의 시신,그 중간에는 두개 혹은 네개의 이실이 사랑방처럼 양쪽에 설시되어 있었다.삼면의 묘벽에 벽화를 두르고 누운 시신은 대체로 부부,그것도 미라로 누웠고 그 미라 가운데로 장난감같은 헌금함,그 뒤로 삶인지 죽음인지 알수 없도록 희미한 불빛에 묘실을 지키는 소년이 졸고 있었다.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소년은 웬걸『시원해서 좋다』며 빙그시 웃었다.하긴 서역 사막에서 미라를 만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건조한 기후와 토질 때문에 시신도 얼른 수분을 뺏긴 채 건시로 남는다 했다. 진나라에서 당나라때까지 고창 주민들의 공동묘지였던 아스타나무덤에는 뜻밖에 북량의 장군으로부터 당나라의 도호같은 고관도 끼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부부합장,혹은 가족합장이었고,관목보다는 초석이나 목판같은 간소한절차를 따랐음에도 그 속에 벽화와 문물을 시설허가너 부장한 것이 특기할만 했다. 특히 필자가 보았던 인물화나 동물화같은 벽화는 진·남북조시기의 사실적이면서 전원적인 생활의 단면이 생동하게 표현되어 있었다.그것들은 어쩌면 무덤의 주인이 살았을 때의 생활이요 윤리였을 것이다. 아스타나고분에서 투루판으로 돌아오는 도중,투루판 동쪽 2㎞지점에 있는 훤칠하고 준수한 건축물인 「에민탑(액민탑),속칭 소공탑을 답사했는데,1777년 투루판 군왕이었던 에민의 수복을 빌기 위해 그의 아들 수라이만(소래만)이 청대의 이름난 위구르족 건축사 이푸라인(이포랍음)을 시켜 세운 높이 37m 72단 사다리의 이슬람식 탑이다. 커다란 강당크기의 예배당 입구에 우뚝 솟은 탑신에는 삼각·물결·꽃잎·마늘덩굴등 열몇가지 무늬가 적갈색으로 새겨져 있는데 얼핏 단조로운듯 하면서도 근엄한 분위기를 뿜으면서 멀리 천산산맥의 만년설을 마주보고 있다.이 탑은 그 탑기에 새긴 비문이 한문과 위구르문자인 것처럼 또 한가지 성공적인 동서 융합이었다.
  • 한강:중/종합개발 4년 대역사로 “새모습”(서울 6백년 만상:5)

    ◎강바닥 파내고 고수부지엔 공원 조성/82년에 착공… 연인원 4백20만명 투입/“한강의 기적” 한국경제 고속성장의 상징으로 고요하게 흐르던 한강에 큰 변화가 온 것은 지난 82년 일이다.그때까지만해도 한강을 보고있노라면 강줄기는 인력으로는 변화시킬 수 없는 대자연의 섭리에 따라 만들어지며 인간은 이에 순응하면서 사는 것이 도리라고만 생각됐었다. 그러나 그 강줄기는 인력으로 다듬어졌고 강바닥은 물의 힘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다져졌다.다름아닌 한강종합개발계획이 바로 그것이었다. 지난 82년 9월28일부터 시작해 86년 9월10일까지 만4년이 걸린 이 대역사로 한강은 유사이래 큰 전기를 맞은 것이다.그로 인해 한강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고속도로인 올림픽대로를 거느리게 됐으며 분류하수관로도 건설돼 더러운 물을 제쳐버릴 수있게됐다.저수로가 정비됐으며 널찍한 고수부지가 만들어졌다. 또 수상이용 계획이 내용에 따라 착실히 진행돼 한강의 모습은 물론 이용도가 크게 바뀌었다. ○강둑 화강암 단장 구불거리던 강줄기는 곧게 펴졌고들쭉날쭉하던 강폭이 짧게는 7백25m(뚝섬)에서 길게는 1천1백75m(마포)로 정비됐으며 강바닥을 파내 수위가 고르게 안정됐다.이와 함께 양쪽의 44.6㎞에 이르는 강둑이 화강암으로 단장돼 조약돌에 찰랑거리던 강변의 한강물은 이제 근대식 돌계단의 안내를 받아 물길을 잡게 됐다. 이 사업에는 연인원 4백20만3천여명이 동원돼 유사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로 기록되는 등 각종 진기록을 남겼다.사업비만도 무려 1조7천억원이란 천문학적 돈이 들어갔으며 장비는 연1백만2천7백여대가 움직였다. 강을 정비하면서 파낸 모래는 남산크기에 버금가는 양이었고 사업비 1천9백여억원은 이 모래를 팔아 충당됐다. 또 한강변 공원부지를 만들기 위해 10t 트럭으로 2백40대분인 1천4백만㎥를 성토했고 이중 1백8만㎥를 연탄재로 이용하는 등 이곳저곳에서 이중의 효과를 거둬 화제를 뿌렸다. 이 공사가 끝난뒤 모든 사람들은 낭만과 한적함이 깃들여져 있던 한강의 모습이 크게 바뀐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으나 그때까지 큰비만 오면 넘쳐 물피해를 겪던 상습범람피해와 70년대이후부터 심각해진 수질오염의 걱정을 덜게 된다는 기대에 차 있었으며 유람선을 타고 한강시민공원을 거닐면서 새로운 현대식 낭만을 즐길 생각에 모두들 기뻐했다. ○70년대부터 오염 사실 한강의 수질오염이 최근 다시 문제가 부각돼 우려를 주고 있지만 이문제는 70년대 초반부터 우리를 괴롭혀 왔었다. 60년대말까지만 해도 우리는 한강 어디서나 물가에 다다를 수만 있으면 멱을 감았고 수영대회까지 열렸는가 하면 겨울에는 잉어낚시대회가 성황리에 열려 얼음구멍에 줄낚시를 드리운 강태공들의 모습에서 겨울철의 한강정취를 느끼곤 했었다. 그러다 한강이 썩어가고 있다는 말들이 서서히 등장했고 어디에선가는 등이 굽은 고기가 잡혀 오염이 심각함을 실체적으로 드러냈다.이처럼 한강물의 오염에 대한 우려는 공식·비공식여론을 통해 계속됐고 실제상황 역시 심각성을 더해갔다.한강을 즐기고 버리기만했던 사람들은 점차 이 사실에 주목하게 됐고 정부도 한강보호에 대해 발벗고 나서기 시작했다. ○선상음식전 폐쇄 지난 78년에는 처음으로 지천인 중랑천에 폐수를 버린 피혁가공업자 2명이 공해방지법 위반혐의로 구속돼 구체적인 정부의 한강보호책이 국민의 눈에 들어왔고 이어 같은해에 서울공단지역업체들에게 폐수정화시설이 의무화됐으며 다음해인 79년에는 한강위에 떠있던 선상음식점이 폐쇄됐다. 또 80년에 들어서는 한강고수부지에서 채소재배를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 배추등 밭작물을 키울 수 없게됐다. 이렇게 한강의 모습이 거대한 공해덩어리로 비춰지고 우려를 더해가던 중 우리나라는 88년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역사적 과제가 주어졌고 이에따라 더 이상 한강을 그대로 놔둘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마침내 대역사인 한강종합개발계획이 시행됐던 것이다. 종합개발계획으로 재탄생할 한강,그 당시로서 그것은 어쩌면 우리나라 경제발전과 새로운 희망의 결집이었다.
  • 만송원 뒷산 종가 묘역(일본속의 한국문화:4)

    ◎32대 7백년 통치 대마도주 집안 묘지/향나무 숲속 자리… 아래부터 웃분모셔 특이/청수산성은 조선 침략군 전진·병참기지로 만송원 원당을 보고 나면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선다.수령 1천년을 자랑하는 향나무 사이로 이끼낀 돌계단이 놓여 있고 좌우에는 석등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대낮에도 어두컴컴한 공동묘지다.혼자 가라면 망설여지는 곳이기도 하다. ○애첩까지 함께 묻혀 바로 이곳이 고려시대 중기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7백여년에 걸쳐 대마도를 지배하면서 한·일 두 나라 사이를 오간 32대에 걸친 대마도주들의 공동묘소다.일본에서도 단 세곳밖에 없다는 종중묘지인데 묘역에는 역대 도주는 물론 그 정실부인과 애첩들,그리고 그 피붙이들까지 모두 한곳에 묻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알고 보면 고려때 우리나라에서 이 섬으로 건너간 송씨일족의 무덤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양식이 모두 왜식이라 우리에게는 전혀 생소한 느낌을 준다.가장 이색적인 사실은 아래위가 뒤바뀐 무덤의 서열이라 할 수 있다.이 공동묘지는 윗무덤(상어령실)과 가운뎃무덤(중어령실),그리고 아랫무덤(하어령실)으로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제일 윗무덤에 19대 의지 이하 32대까지의 후손들이 자리잡고 그보다 아래에 자리한 가운뎃무덤에다 10대부터 18대까지의 선조들을 모셔놓았다.그리고 제일 아랫무덤에 이들 선조의 부인과 아이들을 묻어놓았으니 완전히 선후배가 꺼꾸로 자리한 꼴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대마도 나름의 까닭이 있었던 것 같다.19대 종의지와 그의 아들 종의성은 임진왜란을 이용하여 대마도를 일신해놓은 중흥의 명주로 알려져 있다.이 두 사람이 나오기 이전의 대마도는 먹고 살기도 어려웠고 왜구들이 군웅할거하던 섬이었다.이런 대마도의 사정을 잘 알려주고 있는 기록이 송희경이 쓴 「일본행록」이다.송희경은 세종대왕이 대마도를 정벌한 이듬해인 세종2년(1420) 사신으로 일본 가는 길에 대마도에 들렀다. ○왜군의 길잡이 노릇 그때 대마도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배추빛(채색)으로 떠 있었다고 한다.배추빛이란 굶어서 얼굴이 누르스름하다는 이야기다.대마도뿐만 아니라 일본본토가 모두 가난하여 도처에 해적들이 우굴거려 자칫 잘못하다가는 잡혀 죽을 정도였다.송희경보다 50년 뒤인 1470년(성종2년)에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를 읽어보더라도 마찬가지다.그러나 대마도로서는 일본을 믿고 의지할 데가 없었고 죽으나 사나 조선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6세기말 대마도는 갑자기 조선에서 일본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는데 다름아닌 임진왜란 때문이었다.풍신수길이 일본을 통일하자 종의지는 재빨리 왜장을 찾아가서 전승을 축하하였고 그 자리에서 조선과의 교섭사명을 부여받았다.그러다 보니 결국 왜군의 선봉장으로 나서게 되었고 조선으로부터는 배신자의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종의지는 먼저 대마도를 조선침략군의 전진기지요 병참기지로 제공했다.바로 이곳 이즈하라의 진산인 청수산에 남아 있는 산성지가 그것인데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에 지은 것이다.북구주의 명호옥에서 일기도의 승본을 거쳐 대마도의 청수산성으로 이어지는 침략군 루트가 지금도 생생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셈인데일본에서는 임란사적으로 지정해놓고 있다. 종의지가 다음에 한 일은 대마도민 2천8백명을 침략군 선봉에 나서게 하는 일이었다.2천8백명이었다면 임란때의 왜군 총병력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마도군의 역할이 막중하였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침략 왜군은 크게 세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소서행장이 이끄는 제1번대와 악명 높은 가등청정이 이끄는 제2번대,그리고 마지막으로 흑용장정이 이끄는 제3번대가 그것이었다.이중에서 대마도군은 소서행장의 제1번대,그것도 최선봉군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일로 서울로 북진해갔다. 바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가장 가깝고 서로 믿고 지낼 수 있던 대마도주 의지가 침략군의 앞잡이가 되어 다시 나타났으니 배신도 이만저만 배신이 아니었다.이때만 하더라도 일본 본토의 왜장들은 조선의 지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어떻게 나 있는지 아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아는 사람은 오로지 대마도인뿐.그들은 이미 고려때부터 조선을 내왕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상경로를 훤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만일 이 고려인의 후예 종가놈이 완강하게 길안내역을 거절하였거나 아니면 길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왜군은 삼천포로 빠져 남한일대에서 헤매었을지 모를 일이다.만일 그랬더라면 왜란은 조기에 종결되었거나 그 피해 또한 그토록 극심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임난후 쌀수출 중지 뿐만 아니다.임진왜란이 끝난 뒤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나라가 대마도인의 접근을 금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부산에 있던 왜관이 폐쇄되고 대마도에의 곡물 수출을 일체 금지하게 되자 대마도경제는 일대 공황속에 빠지고 말았다.자업자득이었다고 할 수 있고 배신행위에 대한 당연한 응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대마도주로서는 「한 하늘아래 살 수 없는 원수」로까지 험악해진 조선과의 사이를 또 다시 교활한 속임수로 뚫고 나가기로 했다. 이것이 이른바 국서위조사건이라는 엄청난 사기극인데 임란 이후의 한·일국교정상화는 불과 8년만에 이루어졌다.이를일제침략 종식후 20년만인 1965년에 성립된 한·일국교정상화에 비한다면 배나 더 조기에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그 배후에는 대마도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때 일본의 실권자 덕천가강은 단 한푼 배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단 한마디 사죄하지 않은 상태로 앉아서 통신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공로로 대마도주는 일본 상전에게 두둑한 상을 받게 되었으나 우리나라 조정에 대해서는 다시 배신행위를 하게 된 것이다.대마도가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서 기울어졌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임란 전후였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 고향마을/권문용 한국고속철도공단 부이사장(굄돌)

    천안에서 국도를 따라 10여분간 내려가다보면 구름이 머물고 간다는 운치있는 이름을 가진 운주산 기슭을 돌아가게 된다. 이 산의 남쪽 기슭에는 배일이라는 이름의 아주 고요한 마을이 놓여 있다.어느 시인의 글처럼 황금빛 황소의 게으른 울음소리가 들리고 늙으신 아버님이 엷은 졸음에 겨워 볏베개를 돋워 고이시는 모습이 보이는 듯한 마을.이곳이 세종 이래 5백여년간 20대가 대대손손 이어 살아온 나의 고향마을이다. 이 조용하던 곳에 상전벽해보다 더 큰 변화가 몰려왔다.고속철도가 이곳을 지나가게 되어 10리가 넘는 긴 터널이 뚫리고 마을 앞뜰은 교량이 가로질러 가게 된 것이다. 얼마전 이곳의 공사현장을 둘러보기 위하여 지프를 몰고 갔었다.아주 어렸을때 감나무에서 홍시를 따 주시던 할머니손의 따뜻한 체온이 아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바로 이 마을 뒷동산에 높이가 20m가 넘는 대형 터널이 뚫리고 있었다.『아 바로 여기로구나』하고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각종 중장비가 동원된 것이 마치 기계화 사단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것 같았다. 산길을 내려오다 동양화 한폭같은 운주산을 몇번인가 되돌아 보면서 문득 할아버지,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그분의 할아버지까지 편안히 주무시고 계신 이곳,바로 그 밑에 터널을 뚫고 철마를 달리게 하다니 조용하게 주무시는 조상님들께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나는 소주와 북어를 들고 아무도 살지 않고 2백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소슬대문이 우뚝한 고색창연한 고향집 사랑채로 들어섰다.그리고는 큰 절을 올렸다. 『할아버님들께 죄송스럽습니다.그러나 이 길은 후손들이 앞으로 신의주를 거쳐 북경을 지나고 타슈켄트와 우크라이나 평원을 지나 모스크바,파리,런던까지 우리 민족의 기상을 전세계에 뻗치고자 하는 길이오니 부디 이 일을 도와 주소서』 이끼낀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 조선왕실터 강화서 찾았다/서울대연구팀,1만8천평규모 유적 발견

    ◎17∼18세기 건립… 외침대비,행궁으로 축조/병인양요때 소실된 전각 등 왕실소재 확인 폐허속에 방치돼온 조선왕조의 행궁(행궁·임금의 별궁)등 왕실터가 최근 서울대 규장각 연구팀에 의해 확인됐다. 서울대 규장각(관장 한영우 국사학과교수)연구팀은 지난15일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일대를 답사하고 이지역에서 1만8천여평 규모의 조선시대 왕실터를 확인했다.규장각팀이 확인한 유적은 조선왕조가 잦은 왜란·호란으로 유사시 왕실로 사용하고 국가 주요기밀문서및 자료를 보관할 목적으로 17∼18세기에 걸쳐 건립했던 행궁과 외규장각(외규장각)등 궁전건물터 등으로 돼있다. 규장각팀의 이같은 왕실터 확인은 그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돼온 외규장각등 왕실의 소재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냈을 뿐 아니라 당국의 무관심속에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수확으로 평가됐다. 이지역은 조선조 고종3년인 1866년 병인양요때 건물 내부의 주요 도서가 프랑스 수군에 의해 약탈당하고 건물들이 불에 탄뒤 페허로 방치돼있다가 1977년정부의 강화도 전적지 성역화 사업때 극히 일부인 2천7백여평만이 「고려궁지」로 복원돼 사적133호로 지정됐다. 그당시 당국은 조선시대의 자료는 고려하지 않은데다 구체적 사료없이 구전에 의존하여 고려의 대몽항전을 기념하는 「고려궁지」를 건립하는 바람에 정작 조선왕조의 왕실과 전각들은 「고려궁지」의 울타리밖으로 밀려난 채 방치돼왔다. 현재 「고려궁지」에는 당시 이곳 지방관아건물 2채만이 복원돼있다. 규장각팀이 이번에 발견한 지역에는 조선왕조가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돌계단과 주춧돌,「왕자샘」으로 알려진 우물터가 잡초속에 파묻혀 있고 돌계단 바로 위에는 일제때 민족정기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세운 기술학교건물이 모선교회의 간판을 내걸고 서있다. 한교수는 『강화도는 선사시대이래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로서 각 시대의 유물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조선시대에는 특히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로서 왕실차원에서 대역사를 벌여 왕궁과 전각을 짓는 등 제2의 수도역할을 했던 곳』이라는 점에 주목했다.그러면서 『그당시 강화도수령이 거주하던 전각은 고려궁지내에 복원돼 있는데 정작 왕실터가 내버려져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규장각측은 가까운 시일내 이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등 유적지 조사에 착수키로 했다. 강화도 문화원의 향토사연구위원인 홍재현씨(78)는 『현재의 고려궁지와 그 주변땅에는 왕실과 전각등 10여채의 건물이 조선왕조에 의해 건립됐으나 병인양요때 모두 불타버렸다』면서 『구체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한 이일대 조선왕실터의 조사나 복원작업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문화재관리국은 이에대해 『77년 성역화사업때 고려궁지터에 초점을 맞춰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했다』면서 『현재의 고려궁지터 주변에 조선왕실터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만큼 학술적 검토를 거쳐 사적지로 지정하겠다』고 밝혔다.
  • 시험 끝나자마자 나온 답안지“불티”/’92대입고사장 주변 이모저모

    ◎병상 박찬 수험생,별실시험 배려 사양/“이게 뭡니까” 코미디 인용한 격문도/시각장애자 답안 점역사 2명이 전산입력 ○…교육부는 시험이 시작된뒤 10여분마다 문제지를 입시전문기관에 공개해 오던 관행과는 달리 17일의 학력고사에서는 매교시마다 시험이 끝난 뒤에야 문제를 공개. 교육부측은 이에 대해 『문제를 미리 공개하면 무선호출기 등 통신수단이 발달했기 때문에 부정행위를 유발할 우려가 있어 이를 원천봉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 한편 고려대·성균관대 등 서울시내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제3교시(영어·제2외국어)시험이 끝나기 전인 하오2시50분쯤부터 1,2교시에 치른 「국어·국사」와 「수학·사회」과목의 답안지가 나와 학부모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시내 K학원에서 작성한 이 답안지는 문제지가 공개된지 1시간40분만에 작성된 것으로 8절지 8페이지에 1천원씩 날개돋친듯 팔려나갔다. ○북 동원,선배격려 ○…서울대 정문앞 로터리는 새벽부터 수험생들을 실어 나르는 차량들로 혼잡을 빚다가 상오6시10분쯤에는 차량통행이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체증을 빚었다. 이에 앞서 서울대측은 날이 새기도 전에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몰려들자 지난해처럼 상오4시40분쯤 교문을 개방했으며 정문앞에서 비를 맞으며 기다리던 서울대 재학생과 고교생들 1백여명은 서로 길목을 장악하느라 몸싸움을 벌이기도. 상오6시쯤에는 학생들이 1천여명으로 불어나 교문앞에서 학교안 5백여m 도로를 가득 메우고 「이렇게 많이 붙여도 됩니까,도대체 이게 뭡니까」「커피속에 답이 있다」는 등 격문이 적힌 피켓과 플래카드를 내걸고 선·후배들을 격려했다. 일부 고교생들은 북과 꽹과리·「밴드」등을 동원,동문선배들의 사기를 돋우는 등 치열한 「수험생 격려전」을 펼쳤다. ○…수원∼구로사이 전철1호선 불통으로 서울 및 수도권 소재대학에 지원한 수험생들은 제시간에 고사장에 도착하느라 진땀. 서강대 사학과를 지원한 이정석군(19·경기도 안산시 운암고3)은 전철고장으로 교통이 두절되자 구로공단역에서 서울시의 긴급수송차량으로 상오8시40분쯤 고사장에 가까스로 안착. 뇌성마비로 오른쪽다리가 불편한 이군이 교문에 도착하자 때마침 대입시험현장을 취재하고 있던 K신문 이모기자(25)가 이군을 업고 2백여m 떨어진 고사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단국대 천안캠퍼스에 지원한 서울 한서고 김의수군(18)등 수험생 14명도 이날 상오6시30분쯤 서울발 대전행 제3307호 통일호 열차를 타고 천안역으로 출발했으나 전철고장으로 예정시간보다 1시간 늦은 상오8시39분쯤에야 천안에 도착. 기관사로부터 연착사실을 무전으로 미리 연락받은 천안역과 천안경찰서는 경찰서장 승용차와 순찰차등 4대의 경찰차를 동원,14명의 수험생을 상오8시50분까지 모두 고사장에 입실시켰다. ○촛불켜놓고 합장 ○…이날 궂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자녀들의 합격을 비는 부모들의 간절한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고려대 경영학과에 응시한 조기철군(18·대구 경북고3)의 어머니 권칠란씨(44)는 새벽부터 정문 바로 옆에 촛불 5개를 켜놓고 빗속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절을 하며 아들의 합격을 기원. 권씨는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돼 농사일을 그만두고 대구로 나와조그만 가게를 하며 아들을 교육시켰다』면서 아들이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기를 간절히 기원. ○장애자 20분 더 배정 ○…성균관대 법학과 야간에 응시한 뇌성마비인 신재선군(19·검정고시 출신)과 사회복지학과 야간에 응시한 시각장애자인 윤림훈군(18)은 학교측이 별도로 마련한 문과대 2층 강의실에서 시험을 치렀다. 이들은 지체부자유자 수험규칙에 따라 신군은 정상수험생보다 20분,윤군은 1.5배씩 시험시간을 늘려 시험을 치렀다. 특히 윤군의 시험에는 맹인전용 「점역사」2명이 자원봉사자로 동원돼 윤군의 시험답안을 컴퓨터에 옮겼다.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불구,대구 팔공산 갓바위에는 이른 새벽부터 수험생들의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 5천여명의 학부모들이 몰려들어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 이들은 대구는 물론 부산·경남 등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대입수험생을 둔 학부모와 가족들로 갓바위를 오르는 1㎞이상의 돌계단을 밟으며 자녀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해 합격할 것을 기원하기도. 김인순씨(48·대구시 남구 대명5동)는 『영남대 약대에 응시한 딸이 당황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기를 바란다』며 『집에 있으려고 해도 마음이 불안해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 이곳을 찾게 됐다』며 초조한 심정을 토로. ○병원측,“응시” 결단 ○…대학입시일을 닷새 앞두고 「특발성 기흉」이라는 특이한 병으로 쓰러져 응시여부가 불투명했던 서울 온수고 3년 정상국군(18·서울신문 12월17일자 보도)이 병원측의 결단으로 17일 무난히 시험을 치렀다. 정군에 대해 「2주이내 퇴원불가」라는 판정을 내렸던 서울 상계동 백병원측은 17일 새벽 정군의 딱한 사정을 듣고 퇴원을 허용,정군은 이날 새벽 시험장인 춘천 강원대로 출발했다. 한편 강원대측은 정군의 건강을 고려,시험감독관 휴게실에서 별도로 시험을 보도록 조치했으나 정군은 이를 사양하고 고사장의 자기 자리를 찾아가 시험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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