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독재 정부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전기차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전북지사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김지수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 매거진
    2026-03-1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389
  • 교통·통신도 힘든 시절 민족 10%가 만세시위… 상상 어려운 대사건

    교통·통신도 힘든 시절 민족 10%가 만세시위… 상상 어려운 대사건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각종 정치 현안을 꿰뚫고 있는 정치인이 맡는 게 지금까지의 관례였다. 1963년부터 현재까지 36명의 비서실장이 거쳐 갔지만, 이낙연 총리의 초대 비서실장이었던 배재정 전 의원처럼 정치인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서울신문 등에서 재직한 언론인 출신이자 역사학자인 정운현(60) 비서실장이 임명됐다. 특히 별다른 친분이 없는 이 총리가 “내게 없는 역사에 대한 지식과 기개를 채워 달라. 길동무가 돼 달라”며 비서실장직을 제의한 사실이 알려지자 화제가 됐다.총리에게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아 ‘실세 총리의 실세 비서실장’으로 알려진 정 실장을 3·1운동 100주년을 하루 앞둔 28일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에서 만났다. 역사 전문가인 그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3·1운동 100주년에 대한 의미를 잔뜩 풀어놨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은 국권이 침탈된 지 9년이 지나면서 한반도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탄압과 감시 때문이었다”면서 “뜻있는 지사들은 거의 망명길에 올라 이 땅에는 소위 민초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 여건에서 뚜렷한 지도자도 없고 교통·통신 수단도 변변찮던 그 시절 인구의 10%가 만세시위에 가담한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대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이런 상황에서도 3·1 거사는 추진 과정에서 철통같은 보안이 지켜졌고, 수십 명이 가담했으나 배신자가 한 사람도 없었고 비밀 누설도 전혀 없었다”면서 “전적으로 하늘이 우리 민족을 보우하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실장은 “3·1 운동은 대한독립 만세만 외친 것이 아니다. 얼음장 밑에도 물고기가 살아 있듯이 일제의 압제하에서도 우리 민족이 굳건히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알린 전 민족적 외침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1926년 6·10만세항쟁,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이어 독재 정권에 항거한 4·19혁명, 광주 5·18민주화운동, 최근의 촛불시위도 3·1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3·1운동 100주년 행사는 이런 정신을 살리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친일파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교체하는 움직임 등 몇몇 교육청이 학교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 청산 작업에 나서는 것에 대해 “만시지탄이나 반가운 일”이라면서 “생활 현장 또는 우리 의식 속에 남아 있는 식민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는 것이 3·1운동 100주년의 참뜻을 되살리는 길”이라고 덧붙였다.그는 3·1운동 100주년 남북 공동 행사가 무산된 점을 못내 아쉬워했다. “북측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을 준비하느라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대사를 앞두고 민족 내부의 일은 잠시 보류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 실장은 최근 ‘3·1혁명을 이끈 민족 대표 33인’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지난해 여름 한 역사 전문가와 민족 대표 33인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이와 관련한 자료가 너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집필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정 실장은 30여년 친일파·독립운동사 분야 등의 책 30여권을 펴냈다. 1년에 한 번꼴로 친일·항일 관련 책을 출간했으니 이 분야 최고 전문가인 셈이다. 경남 함양 출신인 정 실장은 대구고와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고려대 언론대학원 신문학과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 역사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던 그가 친일·항일 전문가가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1980년대 말 한 주간지에서 친일파 연구가 임종국 선생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는 “임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가 대문호요, 민족지사라고 학교에서 배웠던 사실이 허구였다는 점을 알고 배신감, 분노 같은 게 터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등 1차 사료를 뒤지면서 진실을 알게 됐고, 이후 1989년 임종국 선생이 급작스레 타계하면서 친일파 연구를 숙명처럼 이어받았다. 1990년 임 선생 1주기 관련 공저를 낸 뒤 고서점 등을 다니며 친일 관련 자료를 사 모으기 시작했고, 생존자들의 증언들을 수집했다. 30여권의 책 가운데 ‘반민특위 재판기록’(전 4권)과 1990년대 후반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변인들을 인터뷰하며 펴낸 ‘실록 군인 박정희’를 가장 역작으로 꼽았다. 대화는 지난 26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개최한 현장 국무회의에서 유관순 열사에게 독립운동 유공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가로 서훈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옮겨 갔다. 정 실장은 “유관순 열사는 그간 3·1 운동, 3·1절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면서 “유 열사가 과거에 받은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은 3·1운동 당시의 공적으로 받은 것이다. 이후 유 열사가 끼친 교육적 효과 등을 감안하면 충분히 1등급감”이라고 평가했다. 독립유공자 가운데는 공적이 허위로 드러나 서훈이 취소된 사례가 종종 있었다. 그는 “이미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사람들 중에는 친일 행적, 완벽한 가짜(동명이인 포상 등), 자료 미비, 형평에 어긋난 포상 등으로 소위 ‘의심 인물’이 최대 100여명 정도로 추산된다”면서 “국가보훈처가 독립 유공 서훈자 1만 5000여명을 전수조사해 문제 있는 사람들을 가려 내겠다고 하니 다행스럽다”고 말했다. 정 실장은 최근 소셜미디어를 통해 ‘선진국 같았으면 우리의 애국가는 벌써 폐기했을 것’이라는 글을 썼다. 의도를 묻자 그는 “애국가는 안익태가 작곡했다. 문제는 안익태의 행적이다. 그동안 친일파로만 알려져 왔는데, 최근 이해영 교수의 노력으로 친나치 행적마저 확인됐다. 국기(태극기)와 함께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애국가의 작곡가가 반민족 행위자라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민족의 정체성, 과거사 문제 등에 엄정한 입장을 견지하는 유럽의 선진국에서라면 벌써 폐기했을 것이라고 본다. 상황이 이렇다면 애국가 문제도 한 번쯤 진지하게 토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 최악인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시대 상황이 크게 변한 탓”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그들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세계 10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고, G2로 성장한 중국의 급부상으로 일본이 동북아에서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시대는 끝이 났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아베 신조 정권은 진지한 성찰보다는 ‘극우’라는 헌 칼을 다시 꺼내 들었다. 전적으로 일본 국내 정치용이고 자폐적이다”라고 비판했다. 한일 양국이 갈등을 푸는 해결책으로는 “선린의 시작은 가해자인 일본이 과거를 직시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면서 “신문사 도쿄특파원 출신으로 일본 전문가인 이낙연 총리의 말처럼 일본은 과거 앞에 겸허하고, 한국은 미래 앞에 겸허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거론했다. 정 실장은 지난 22일 공개된 고위공직자 재산 등록에서 재산이 7000만원인 것으로 공개됐다. “재산이 왜 이것밖에 안 되냐”며 짓궂은 질문을 던지자 “0이 하나 빠진 게 아닌가요”라며 되받아쳤다. 그는 “재산이 적은 것은 자랑도 아니지만, 수치도 아니다”라면서 “친일파 연구자들은 대학에서 마땅한 강의 자리를 찾기도 어렵고, 책도 대중적 인기를 끌기가 쉽지 않다. 내 주변의 연구자들은 대개 그렇게 지낸다”고 말했다. 그는 “더 큰 문제는 사학과 학생들 가운데서도 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 전공자가 드물다”면서 “역사학계로서도 민족사로서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정치 입문 가능성에 대해 묻자 손사래를 쳤다. 정 실장은 “국회의원 출마 등 정치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국정 고위책임자가 나를 알아주고 도와달라는데 이를 거부할 명분이나 이유가 없어서 돕기로 한 것뿐”이라면서 “나는 정치의 영역에서 일을 할 뿐이지 의도를 갖고 정치적으로 판단하는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정치 얘기가 나오는 걸 보니 인터뷰가 끝난 것 같다”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횡단보도를 건너 집무실이 있는 정부서울청사 쪽으로 발길을 총총히 옮겼다. jrlee@seoul.co.kr
  • WP “트럼프, ‘관습파괴 전략’ 가장 좋은 방식일 수 있어”

    WP “트럼프, ‘관습파괴 전략’ 가장 좋은 방식일 수 있어”

    “미국내 일부 북한 전문가들 트럼프 옹호 합의 이르려고 서두르는 것은 위험 요인” 샌더스 “北서 핵무기 얻어내면 좋은 일” 힐러리 “비핵화 이뤄질지 상당히 의심” 리처드슨 “향후 상세한 협상 틀 마련을”전통적 외교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북 접근법에 대한 옹호론이 미 일부 외교전문가들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2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WP는 “트럼프의 북한 전략이 일부 전문가를 설득시키고 있다”면서 “북한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있는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접근법이 지금 가장 좋은 경기 방식이라고 말한다”고 전했다. 조엘 위트, 로버트 칼린,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 등 트럼프 대통령의 활동을 지지하는 전문가들은 직감적 본능에 따라 ‘외교정책 규정집’을 찢어버리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향이 협상에 장점이 될 수도 있다는 시각으로 이번 회담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WP는 또 트럼프 대통령이 이른바 ‘미치광이 전략’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협상 테이블에 나오게 했다고 분석했다.WP는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합의에 이르려고 서두르는 것이 북한과의 협상에서 위험 요인”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함께 전했다. 마이클 오슬린 미 후버연구소 연구위원은 월스트리트저널 칼럼을 통해 “백악관은 비핵화 대신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줄이기 위한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 정계에서도 2차 북미 정상회담을 두고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옹호론과 비관론이 오갔다. 2020년 미 대선 출마를 선언한 버니 샌더스(왼쪽·무소속·버몬트주) 상원의원은 이번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 “만약 김 위원장의 손에서 핵무기를 얻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고 CNN이 이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저격수’로 통하는 샌더스 의원은 타운홀 미팅에서 자신이 대통령이라면 김 위원장을 만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잔인하고 무책임한 독재자의 수중에 있는 핵무기는 나쁜 생각이고, 사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과의 대면 만남을 통해 그 나라(북한)에서 핵무기 제거에 성공할 수 있다면 그건 매우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반면 지난 대선 경선에서 샌더스 의원과 경쟁했던 힐러리 클린턴(가운데) 전 미 국무장관은 팟캐스트에 출연해 “트럼프 대통령이 무엇을 주장하든 그것이 실제 이뤄질지 의심스럽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언론의 관심을 받기 위해 비핵화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비판했다. 폭스뉴스도 이날 정상회담 의제를 놓고 실무협상을 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너무 앞서 나가 백악관 매파 등 정부 관료들이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한편 여러 차례 대북 협상에 나섰던 빌 리처드슨(오른쪽) 전 미 뉴멕시코 주지사는 이날 하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직접 협상을 선호하는 것을 고려할 때 정상회담은 2∼3개월에 한 번씩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약산 김원봉 조카 “수많은 친일파·민족반역자에 서훈”

    약산 김원봉 조카 “수많은 친일파·민족반역자에 서훈”

    한국 찾은 차남 “기념사업회 11월 발족” 재평가 필요한 독립운동가 1순위 꼽혀무장투쟁단체 ‘의열단’을 조직해 활동하는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 항일 무장독립투쟁가인 약산 김원봉(1898∼1958)의 기념사업회가 사후 61년 만인 오는 11월쯤 발족할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낸 그는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월북했다. 김일성 독재에 반대하다가 숙청돼 남과 북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불운의 독립운동가’로 불렸다. 서울신문이 역사학계 전문가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가장 먼저 재평가와 복권이 이뤄져야 할 독립운동가로 김원봉이 꼽혔다.<2019년 2월 25일자 1면> 지난 24일 약산의 11남매 가운데 막내인 김학봉 여사가 90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미국에 살던 차남 김태영(62)씨가 25일 귀국해 경남 밀양의 모친 빈소를 지켰다. 김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오는 11월쯤 서울에서 (외삼촌인) 약산 기념사업회를 발족할 것”이라며 “이만열·한홍구 교수 등과 의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 속에서 연좌제 고통을 비롯해 모진 가족사를 온몸으로 겪은 김씨는 26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 끝에 맨손으로 사업을 일궈 백인 주류사회의 신뢰를 얻었다고 밝혔다. 그는 “남한에서는 친일파들이 훈장을 많이 받았다. 수많은 민족반역자한테도 서훈했다”고 말했다. 이어 “훈장은 국민을 위해 뭘 했는지, 진실이 뭔지를 보고 주는 것”이라며 “약산이 서훈 된다면 친일파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약산이 월북한 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남쪽에 남겨진 가족 가운데 약산의 형제 4명, 사촌 5명이 보도연맹 사건 등으로 총살당했다. 김 여사의 부친은 연금 상태에서 별세했다. 김 여사의 남편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본인도 경찰에 연행돼 심문을 받았다. 김태영씨 형제들은 고아원에 맡겨져 어렵게 학교에 다녔고 연좌제가 풀린 뒤에야 겨우 미국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보혁 가치 아우른 2·28 민주운동 정신 되살리겠다”

    “보혁 가치 아우른 2·28 민주운동 정신 되살리겠다”

    60년대 고교생·대학생 무능 정권 규탄 최초 민주화 운동… 4·19혁명 전주곡 돼 명덕 사거리~경북도청 상징거리 만들고 기념비 등 흩어진 시설 한곳에 모을 것“우리나라 6대 학생의거인 2·28민주운동이 원래대로 진보와 보수의 가치를 아우르는 용광로 정신으로 되살아나도록 애쓰겠습니다.” 우동기(67)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장은 25일 “59년 전 주역들을 재평가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2·28역사를 보면 1960년 한 번에 그친 게 아니라 1961~1963년 대구 고교생들이 3만명씩 모여 부패한 자유당 독재정권은 물론 무능한 민주당 정권을 규탄했다. 대학까지 연결돼 고교생과 대학생이 연석회의를 갖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당시 까까머리 아이들이 이승만 정부의 불의를 고발하며 달렸던 명덕 사거리에서 경북도청(현 대구시청 별관)까지를 상징거리로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최초 민주화운동인 2·28민주운동은 마산 3·15 학생의거, 대전 3·8 학생의거, 4·19혁명, 광주 5·18항쟁, 6·10전국반독재투쟁과 함께 6대 민주화운동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60년 2월 28일 당국이 야당 유세장에 가지 못하게 일요일에 등교시킨 데 맞서 학생들은 학교에 모여 스크럼을 짜고 “민주주의를 살리자”, “학원 자유를 달라”,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시가를 행진했다. 이후 서울·대전·수원·부산 등지로 학생집회가 확산하면서 4·19혁명의 전주곡이 됐다. 우 회장은 구상하고 있는 2·28민주화운동 관련 사업도 의욕적으로 밝혔다. 우선 “국가기념일 지정에 걸맞은 일을 하고 관련 조례를 말끔하게 정비해야 한다”며 입을 앙다물었다. 현재 대구시 조례는 행사지원 관련 여섯 줄밖에 없다. 2·28에 대한 관심이 과거와 다른 만큼 재정 등 포괄적인 지원방안이 담긴 조례로 개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와 함께 “기념비(달서구 두류공원), 기념회관(중구 남산동), 기념공원(중구 공평동) 등 세 곳으로 흩어져 있는 관련 시설물도 한곳으로 모으는 방안을 검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지난 22일 취임한 그는 내년 60주년을 앞두고 2·28 회원 배가운동을 펼치고 있다. “40주년 때인 2000년 회원이 4만명이었는데 이젠 500명을 밑돈다”고 혀를 찼다. 그는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교육감으로 일하며 2·28과 관련된 사업을 많이 벌였다. 2·28민주운동 기념 고교생 마라톤 대회를 만들었다. 폐교된 신암중학교를 2·28기념도서관으로 탈바꿈시켰는데, 이곳엔 내년 2·28민주시민교육센터를 개관한다. 글 사진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英갑부’ 브랜슨 베네수엘라 자선 콘서트…‘록가수’ 워터스 “정부 전복 시도” 비난

    ‘英갑부’ 브랜슨 베네수엘라 자선 콘서트…‘록가수’ 워터스 “정부 전복 시도” 비난

    영국의 전설적인 록그룹 ‘핑크플로이드’ 출신 가수이자 사회운동가인 로저 워터스(왼쪽·76)가 19일(현지시간) 리처드 브랜슨(오른쪽·69) 영국 버진그룹 최고경영자(CEO)가 베네수엘라 국경 인근에서 주회하는 자선 콘서트에 대해 “사회주의 정부를 전복하려는 미국의 시도”라고 비난했다. 스스로 베네수엘라의 ‘임시대통령’이라고 자처한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을 지지하는 브랜슨은 22일 콜롬비아 국경도시 쿠쿠타에서 자선 콘서트를 열고, 향후 60일간 1억 달러(약 1124억원)를 모금해 베네수엘라의 인도적 구호활동을 지원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워터스는 “이번 콘서트는 인도주의 원조와 전혀 관계가 없으며, 베네수엘라의 정권 교체를 정당화하기 위한 미국의 시도 중 일부”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또 “현재까지 베네수엘라에는 살인과 명백한 독재가 없다”고 주장하며 브랜슨을 향해 “당신은 베네수엘라가 또 다른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가 되기를 원하느냐”고 덧붙였다. 버진그룹은 이에 “베네수엘라 야권의 자금 확보를 위한 것이며 정치적인 행사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한편 베네수엘라 정부는 브랜슨의 자선 콘서트에 대응해 오는 22~23일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국경의 시몬 볼리바르 다리에서 ‘베네수엘라에서 손떼라’는 주제로 맞불 음악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여가부, ‘아이돌 외모 가이드라인’ 수정·삭제 결정

    여가부, ‘아이돌 외모 가이드라인’ 수정·삭제 결정

    여성가족부는 최근 논란이 된 방송프로그램 출연자 외모 가이드라인을 손질하겠다고 밝혔다. 여가부는 19일 논란에 휘말린 ‘성평등 방송프로그램 제작 안내서’ 관련 설명자료를 내고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한 일부 표현, 인용 사례는 수정 또는 삭제해 본래 취지가 정확히 전달될 수 있도록 개선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여가부는 2017년 펴낸 ‘성평등 방송프로그램 제작 안내서’를 보완한 개정판을 지난 12일 방송국과 프로그램 제작사 등에 배포했다. 개정판에는 ‘방송프로그램의 다양한 외모 재현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부록으로 추가됐다. 외모지상주의를 지양하고 다른 외모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을 담았는데 ‘비슷한 외모의 출연자가 과도한 비율로 출연하지 않도록 한다’는 부분이 논란이 됐다. 안내서는 ‘음악방송 출연 가수들은 모두 쌍둥이?’라는 제목의 사례에서 “음악방송 출연자들의 외모 획일성은 심각하다”며 “대부분의 출연자가 아이돌 그룹으로, 음악적 다양성뿐만 아니라 출연자들의 외모 또한 다양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의 외모는 마른 몸매, 하얀 피부, 비슷한 헤어스타일, 몸매가 드러나는 복장과 비슷한 메이크업을 하고 있다. 외모의 획일성은 남녀 모두 같이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정치권과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정부가 방송 출연자의 외모까지 간섭하려는 시대착오적 규제라는 불만이 나왔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군사독재 시대 때 두발 단속, 스커트 단속과 뭐가 다르냐”고 지적했다. 이에 여가부는 “방송에서 보이는 과도한 외모지상주의는 일반 성인뿐만 아니라 아동·청소년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며 “프로그램 제작할 때 이런 요소들을 고려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는 차원에서 부록을 보완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제안을 검열, 단속, 규제로 해석하는 것은 안내서의 취지를 왜곡하는 것”이라며 “방송 제작을 규제할 의도가 없으며 그럴 권한도, 강제성도 갖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임정, 마침내 日에 선전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임정, 마침내 日에 선전포고

    4부. 광복의 여명 : 충칭 시기 ② 일본의 패망1910년 한반도를 차지한 일본은 1931년 중국 만주를, 1937년 중국 대륙을 침략하며 제국주의 팽창 야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까지 점령한 뒤 “독일과 중동에서 만나겠다”며 버마(현 미얀마)·인도 전선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마지막 정착지인 중국 충칭에서 당·정·군 체제를 갖춘 뒤 ‘전쟁 괴물’이 된 일본의 패망을 기다렸다. 해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찾아왔다.●임정, 1945년 2월 28일 독일에도 선전포고 1937년 7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영국과 미국은 자신들이 선점한 중국 내 이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했다.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이후 일본은 제조업 가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41년 12월 미국의 해군기지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석유금수 조치를 풀어 보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당시 두 나라 간 군사력 차이를 감안할 때 진주만 공습은 무모한 결정이었다. 미국은 즉각 일본과의 전면전을 선언하며 ‘태평양전쟁’(1941~1945)에 나섰다. 이 전쟁은 임정이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광복군을 양성해 뒀다가 일본이 중국, 미국과의 전쟁에 나서면 이들을 도와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정은 일제가 진주만을 공격한 직후 주석 김구(1876~1949)와 외무부장 조소앙(1887~1958) 명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3000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해 중국과 영국, 미국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일본을 격패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기에 민주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하한다.” 임정은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포고했다. 194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이 회의에 참가하려면 3월 1일 이전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해야 해 하루 전인 2월 28일 발표했다.●中 통제받은 광복군, 9개 조항 행동준승 논란 1940년 9월 태어난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지원하던 또 다른 한인 부대였던 조선의용대 대원 상당수가 1941년 3~5월 본진을 이탈해 화베이 지역으로 떠나자 국민당 정부는 당황했다. 같은 해 11월 중국은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이라는 9개 조항을 전달했다. 중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 광복군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게 핵심이었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이현희(1937~2010) 전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이 준승은 광복군이 사실상 중국의 고용군이 된다는 것으로 매우 굴욕적인 군사협정이었다. 중국이 임정을 어떤 존재로 여겼는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 영토에서 활동하는 외국 군대를 통제하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당시 한인 독립운동 세력이 중국으로부터 충분히 신뢰를 얻을 만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에 어느 정도 간섭이 불가피했다는 반론도 있다. 임정은 중국의 준승 명령에 분개해 청사를 중국에서 미국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고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1875~1965)과 협의하기도 했다. 결국 중국은 우리 측의 지속적인 요구로 1944년 8월 광복군 통제권을 임시정부에 돌려줬다.●광복군, 한지성·문응국 등 임팔전투 투입 일본은 1942년 1월 영국의 식민지 버마를 침공했다. 인도에 주둔해 있는 영국군이 즉각 대응에 나섰는데, 이를 버마 전투(1942~1945)라고 한다. 영국군은 영어와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다. 광복군은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인면전구공작대’를 꾸렸다. 인도와 버마 전선에서 활동하는 공작부대라는 뜻이다. 이들은 1943년 8월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던 인도 캘커타에 도착했다. 한지성(1913~?)과 문응국(1921~1996) 등 9명이었다. 공작대는 영국군에게서 심리전 교육 등을 받고 1944년 초 임팔전선에 투입됐다. 임팔은 인도와 버마의 접경지역으로 열대밀림 산악 지대다. 광복군은 1945년 7월 일본군이 버마에서 완전히 패해 철수할 때까지 1년 넘게 영국군을 도왔다. 1945년 9월 이들은 충칭의 광복군 총사령부로 무사히 복귀했다. 한지성의 증언이다. “우리 공작대는 언제고 전투할 수 있도록 무장한 뒤 적(일본군)과 가장 가까운 진지에서 일본어로 방송을 했다. 선전문을 제작해 살포하고 일본군 문건을 번역하며 포로를 심문했다.”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도 추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1942~1945)과 함께 한반도와 일본 본토에서 지하공작에 나서는 것이었다. OSS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을 국내에 잠입시켜 여러 활동에 나서기로 했는데, 이를 ‘독수리 작전’이라고 불렀다. 1945년 4월 OSS 요인들이 충칭의 임정 청사로 찾아와 작전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고 김구는 이를 승인했다. 영화 ‘군함도’(2017)에서 독립운동 인사를 구출하고자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섬(군함도)에 잠입한 박무영(송중기 분)이 광복군 소속 OSS 요원이다.OSS는 같은 해 5월부터 광복군 내 엘리트들을 차출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대표적인 이들이 훗날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1920~ 2011)과 사회운동가로 활약한 장준하(1918~1975)다. 이들은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했다. 김준엽은 1987년 개헌 당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조문을 삽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장준하는 박정희(1917~1979)의 독재에 반대하다가 1975년 의문사했다. ●승전국 지위 확보·강대국 간섭없이 독립 목표 임정은 미군의 지시로 국내에 진격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8월이 되자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8일에는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며 만주국을 점령했다. 당시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일본군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보다 소련 참전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주변의 모든 나라가 적이 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본은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도 결국 무산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당시 임정은 한반도에 잠입해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면 강대국의 간섭 없이 한반도 독립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봤다”며 “일본이 일주일만 늦게 항복해 광복군이 한반도에 참전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고 말했다. 일부 학계에서는 광복군이 미군과 공동 작전에 참가했더라도 그 수가 워낙 적어 승전국 지위를 확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그래도 임정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일본과의 전쟁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외세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노력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을 무의미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던 1944년. 임정은 좀더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새 나라의 밑그림을 그려야 했다. 1943년 ‘카이로선언’(미·영·중이 일본 문제 논의)으로 조선 독립을 보장받은 시기였기에 이를 반영해 헌법을 개정했다. 주석(대통령) 중심제를 기본으로 하되 의원내각제를 가미해 절충적 정부를 구성했다. 교육과 직장, 노약자 부양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하고 파업권도 명시했다. 사회민주주의 형태의 국가다. 이는 1941년 임정이 조선민족혁명당과의 합작을 앞두고 좌우를 아우르기 위해 내놓은 ‘건국강령’의 영향이 컸다. 건국강령을 지은 이가 ‘사민주의자’ 조소앙(1887~1958)이다.●조소앙의 삼균주의, 건국 이념 기초로 작용 일본 메이지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1919년 3·1운동 뒤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19년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임정을 정식 국가로 승인해 줄 것을 호소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한독당은 1940년 5월 우파 통합정당의 이름으로 계승돼 임정의 여당이 됐다. 그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가 모두 균등해지려면 정치와 경제, 교육의 세 가지 조건이 동등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삼균주의인데, 훗날 건국강령의 이론적 기반이 됐다.●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한국전쟁 때 납북 해방 뒤 김구와 함께 한독당을 이끌었고, 1948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좌파 정당인 사회당을 창당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전국 최고득표율로 당선됐지만 6·25전쟁 때 납북됐다. 만약 임정의 ‘1944년 헌법’대로 해방 정부가 꾸려졌다면 지금쯤 우리는 독일이나 스웨덴을 모델로 한 사민주의 국가에 살고 있을 것이다. 조석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1948년 제헌헌법은 건국강령의 경제조항을 계승하고 있다. 그것은 장기간에 걸쳐 이룬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 충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5·18 모독 근절하려면… 혁명의 원천 ‘사회적 힘’을 재평가하라

    5·18 모독 근절하려면… 혁명의 원천 ‘사회적 힘’을 재평가하라

    나는 “5·18 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에서 5·18 광주항쟁을 정면으로 왜곡한 지만원씨의 행동이나, 이런 식의 공청회를 개최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정치적 자질이나, 이것이 논란이 된 상황에서 ‘역사 해석의 다양성’이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한 한국당 지도부의 속내에 대해서 따로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대신에 국회와 정부가 법률과 국가정책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사안인 데다 내년이면 40주년이 되는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퇴행적 행동이 대낮에 버젓이 일어나게 되는 우리 사회의 특수한 상황과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방안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할 필요성을 느낀다.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착하고 순수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지상낙원은 없었다. 빛이 있는 만큼 그림자도 있게 마련이다. 우리가 더러 목표로 삼는 유럽에도 나치주의자들이 있고 미국에도 인종주의자들이 존재한다. 문제는 착하지도 않고 순수하지도 않은 사회적 부류의 과잉 확산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지상낙원의 정반대 편에 서게 됐다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유독 우리 사회에서 빈발하는 역사적 퇴행성에 대해서는 별도의 해석이 필요한데 그 성격과 원인을 다음 다섯 가지 관점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사회구조적 해석이다. 과거의 쓰라린 교훈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되돌리고 싶어 하는 퇴행적 경향은 현실에서 극단적 반공주의, 배타적 지역주의, 재벌추종주의, 배금적 황금만능주의, 이기적 부동산투기, 종교적 근본주의, 지역토호, 개발주의, 냉전주의, 부패주의, 사이비 언론집단, 성적제일주의, 정치적 모리배 등 매우 다양한 양태로 폭넓게 존재한다. 일부 영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정치, 경제, 종교, 교육, 언론, 공직을 막론하고 사회 전반에 만연된 구조적인 현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었다고 도취돼 양극화된 사회적 상황과 존재들을 간과한다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둘째는 역사적 해석이다. 우리의 근현대 200년은 고단한 역사적 과정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시대를 살아내는 것 자체가 유일한 목표가 됐다. 생존이 유일한 목표가 되면서 생존을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이 정당화됐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생존투쟁이 절대적인 진리로 자리잡게 됐다. 당연히 생존 및 생존을 위한 수단을 제외한 모든 사회적 가치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되어 포기됐다. 결국 살아남아 생존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역사적 상황이 조성됐고 독재와 쿠데타와 정경유착과 부패를 거듭하면서 ‘천민 자본주의 공화국’으로 고착됐다. 그러므로 오늘의 대한민국은 식민지배의 정서와 분단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천민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결합한 기형적 결과물이다. 셋째는 엘리트주의적 해석이다. 고단한 역사에 대한 사회적 대응은 저항과 굴종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통상 소수는 저항하고 다수는 굴종한다. 이때 저항하는 소수가 굴종하는 다수를 포용하는 정도에 따라 역사의 진로가 결정된다. 소수가 다수를 포용하기 위해서는 모범의 창출이 필요하다. 민족사 전개 과정에서 모범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지는 미국의 워싱턴, 남미의 볼리바르, 터키의 케말 파샤, 유고의 티토, 베트남의 호찌민, 중국의 마오쩌둥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출애굽에서 모세나 켈트족에서 아서왕의 역할도 마찬가지였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것처럼 구슬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보배로 단결시키는 모범의 창출이 필요한데 근현대 200년의 과정에서 저항의 지도자들은 유효한 국민적 모범을 창출하지 못했다. 넷째는 성찰적 해석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개선의 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감스럽게도 기회를 놓쳤다. 해방이 분단과 전쟁으로 역행하는 상황에서 해방정국의 지도자들이 분단을 막고 친일파를 처단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민족적 역량을 결집하기보다는 권력투쟁에 매몰돼 친일파와 결탁해 외려 분단을 조장했다. 다시 1960년 4월 혁명에서는 정권을 장악한 민주당의 분열로 혁명에서 표출된 국민적 여망은 좌절됐고, 이런 경험은 10·26과 6월 항쟁에서도 거듭 되풀이됐다. 민주화의 중대한 과도기에 군부와 야합해 몰락 직전의 군부독재세력에 면죄부를 발급하고 민주화의 방향을 틀어버린 ‘3당 합당’은 실패의 극단이다. 그 결과 우리는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후 다시 군부독재 청산에 실패함으로써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역사청산을 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 다섯째, 분단 기원론이다. 적어도 해방 이후에는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 분단이 존재한다. 분단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아니지만 기왕에 존재하던 문제들을 포함한 모든 상황을 악화시켜 사회적 극단주의를 창출한 원천적 주범이다. 분단은 또한 전쟁과 남북대결로 확장되면서 극단주의를 유지 재생산하는 자양분이 됐다. 분단의 입장에서 분단을 위해서라면 참혹한 전쟁도 마다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분단이 부과한 해악과 고통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고 말한 장준하의 발언이 가진 현재적 의미를 다시금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다섯 가지 해석에는 크고 작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해석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고 모든 역사적 해석은 당대의 실천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므로 결국 누가 책임질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물론 당연하게도 대통령과 정권이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려가 없이는 불완전하다. 민주화가 국가의 민주화와 사회의 민주화를 병행하는 이중 민주화의 과정으로 진행돼야 하는 것처럼 분단을 극복하고, 사회적 극단주의를 해결하면서,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회적 역할이 병행돼야 한다. 일찍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화”로 표현했던 불발된 명제를 다시금 화두로 제기하는 이유는 우리 역사에서 사회가 차지하는 위상 때문이다. 해방 전의 의병운동이나 독립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해방 후의 변화 역시 예외 없이 사회적 힘에 의해 시작됐다. 4월 혁명과 6월 항쟁은 물론 최근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힘은 변화의 유일한 원천이자 동력이었다. 사회적 힘이 혁명을 가능하게 했고 그 혁명은 태풍처럼 홍수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태풍을 구성하는 모든 바람이 한 방향으로 질서정연하게 부는 것이 아닌 것처럼 홍수를 만들어낸 모든 물줄기가 오와 열을 갖추어 흘러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 혁명 또한 크게 일어나 여러 갈래로 움직이면서 빠르게 소멸됐다. 결국 사회적 힘은 혁명의 원천이되 스스로 권력으로 승화되지 못했다. 혁명은 사회가 시작했지만, 권력은 정당의 몫이었다. 혁명은 태풍처럼 기존 권력을 붕괴시켰지만 힘의 분산으로 소진됐고, 권력의 공백은 정당이 장악했지만 이미 태풍은 아니었다. 태풍의 소진으로 정당에 대한 강제력은 상실됐고 혁명의 보조세력일 수밖에 없는 정당은 집권과 동시에 혁명의 대의에서 이탈했다. 이 과정을 반복한 것이 한국 민주화의 특징이자 본질적인 한계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혁명의 원천인 사회적 힘이 재평가돼야 한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도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단언컨대 대한민국에서 미래를 전망하는 작업은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실천됐던 사회적 힘에 대한 창조적 재해석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될 것이다. 사회가 해야 할 일이지만 정권도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이다. 상지대 총장
  • 김현철 “한국당, 아버지 사진 내려주길”…‘5·18 망언’ 비판

    김현철 “한국당, 아버지 사진 내려주길”…‘5·18 망언’ 비판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이 5·18 민주화운동은 ‘폭동’이었다고, 5·18 유공자들은 ‘괴물 집단’이라고 망언하자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씨가 “그런 수구·반동적인 집단 속에 아버지 사진이 걸려있다는 자체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다”고 비판했다. 현재 자유한국당 당사에는 이승만·박정희·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 액자가 걸려 있다. 김씨는 지난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작금의 자유한국당의 행태를 보면 박근혜 정권의 탄핵을 통해 처절한 반성과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보여도 시원찮을 판에 다시 과거 군사독재의 향수를 잊지 못해 회귀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감지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런 수구·반동적인 집단 속에 개혁보수의 상징인 김영삼 대통령의 사진이 그곳에 걸려있다는 자체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빙탄지간”이라고 비판했다. ‘빙탄지간’은 얼음과 숯의 사이라는 뜻으로, 서로 맞지 않아 화합하지 못하는 관계를 이르는 말이다. 김씨는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과거 수구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확인되면 반드시 아버님의 사진은 그곳에서 내려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앞서 지난 8일 자유한국당의 김진태·이종명 의원 공동 주최로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이종명 의원은 “5·18 사태가 발생하고 나서 5·18 폭동이라고 했는데, 시간이 흘러 민주화 운동으로 변질됐다”고 말했다. 이 공청회에 참석한 같은 당의 김순례 의원은 “저희가 방심한 사이 정권을 놓쳤더니 종북 좌파들이 판을 치며 5·18 유공자라는 괴물 집단을 만들어내 우리의 세금을 축내고 있다”고 말했다. 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을 비판하는 여론이 커지자 자유한국당은 전날 이종명 의원을 제명했다. 반면 오는 27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때 실시되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김진태 의원과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한 김순례 의원에 대한 징계는 유예했다. 지난 13일에도 김씨는 페이스북을 통해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의 망언을 강하게 비판했다. 김씨는 “아버지는 문민정부 당시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정부가 문민정부라고 규정하고 특별법을 만들어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세력을 단죄했다”면서 “1983년 아버지가 상도동에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3년째 연금당할 때 5월 18일을 기해 23일 간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통해 5.18을 기념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김영삼 정부로부터 보수의 정통성을 찾겠다는 자유한국당이 5·18을 부정하고 매도하는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인 셈이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10주기 추모도 낮게…약자의 손잡던 바보가 그립습니다

    10주기 추모도 낮게…약자의 손잡던 바보가 그립습니다

    노동 인권·민주화 등 현대사 질곡 관통 ‘세상 속 교회’ 기치로 민주적 가치 실현 분열된 사회, 자비·사랑으로 포용 실천 선종 후 ‘바보 정신’ 재단 통해 유지 이어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둘러싼 자유한국당 일부 의원들의 발언이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다. 여야 4당이 문제 발언을 한 의원 제명을 요구하는 등 강력 반발하는 가운데 역사전쟁으로까지 치닫는 분위기다. 그 와중에 5·18 민주화운동 유족들과 광주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정치적 입장을 앞세운 발언이라지만 민주화운동 폄훼와 왜곡은 많은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그 5·18 민주화운동을 놓고 김수환 추기경은 이런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섭니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어디 5·18 민주화운동뿐인가. 김 추기경은 생전 약자 편에 선 채 불의에 강하게 맞선 쓴소리와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1987년 1월 26일 박종철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강론 중 일부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일들이 생길 때마다 많은 이들은 김 추기경을 떠올린다. ‘김 추기경이 계셨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16일은 김 추기경이 선종한 지 10주기가 되는 날. 그날을 중심으로 추기경의 사랑과 배려 정신을 되새겨 실천으로 옮기자는 행사들이 이어질 전망이다. 추모 미사(16일 오후 2시 명동성당), 추모 사진전(23일까지 명동성당 지하 1898광장), 유품 전시회(16일~6월 20일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기념 음악회(18일 오후 8시 명동성당), ‘내 기억 속의 김수환 추기경’ 토크콘서트(17일 오후 5시 명동대성당 꼬스트홀)…. 그런데 이어지는 그 추모의 몸짓들이 요란하지 않다. 천주교의 최대 지도자, 시대의 사표, 민족의 양심…. 그 막중한 수식어들만 보더라도 성대한 행사가 있을 법한데 영 딴판이다. 그 조용하고 잔잔한 추모 열기를 놓고 천주교 서울대교구 신부들은 귀띔한다. “일회성 행사가 아닙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본받아 우리 삶 안에서 하루하루 살아 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그분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30여년간 서울대교구는 48개 본당 신자 14만여명에서 197개 본당 신자 121만여명으로 무려 8배 넘게 교세가 불어났다. 그 종교적 위업에서 비롯된 존경과 추모만일까. 김 추기경의 어록을 다시 뒤져 보았다. “교회가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한다”(1968년 서울대교구장 취임 미사), “항상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살고 싶은 열망을 갖고 살았지만 그러지 못해 답답했다. 추기경이란 직책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1998년 서울대교구장 퇴임 소견)김 추기경은 그랬다. 인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약자들 편에 기꺼이 서야 한다고 믿었다. 단순히 종교지도자에 머물지 않고 현대 시민사회의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섰으며 각 개인의 양심을 일깨워 주고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 인권과 노동, 생명 사랑의 족적은 너무 혁혁하다. 경제성장이 지상의 과제였던 1960, 1970년대 추기경은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1967년 5월 강화도 심도직물의 노조원 해고 사태 당시 김 추기경의 건의에 따라 주교회의는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교단 공동 성명서을 발표했다. 이 사건은 김 추기경이 처음으로 대사회 메시지를 던진 사건이다. 이것 말고도 유사한 노동 탄압 사건이 있을 때마다 추기경은 노동자 인권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에게 더 적극적인 사목을 펼쳐야 한다.’ 서울 상계동 철거 사태 등 정부 주도의 반강제적 철거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빈민으로 전락하던 무렵 추기경은 스스로 빈민들의 삶의 현장을 수시로 방문했다. 직접 도시 빈민 문제 해결을 위한 공청회에 참가해 당시 정부의 정책이 빈민을 양산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1987년 4월 28일 도시빈민사목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지금의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는 바로 그 추기경의 의지를 담아 탄생한 단체다. 그렇게 현대 한국 천주교회를 이끈 주역이었지만 그는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유신독재,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외면하지 않고 한가운데서 뚫고 나갔다. 1987년 6월 13일 밤 경찰력 투입을 통보하러 명당성당에 들어온 경찰 고위 관계자에게 던진 말은 아직도 쩌렁쩌렁하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그런가 하면 1971년 12월 24일 전국에 TV로 생중계된 성탄 자정 미사에선 이렇게 소리쳤다.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또 1972년 10월 유신 개헌 소식을 로마에서 접하곤 큰소리로 외쳤다. “10월 유신 같은 초헌법적 철권통치는 우리나라를 큰 불행에 빠뜨릴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랬던 추기경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이런 기도를 남겼다.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서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스스로를 ‘바보’라 부르면서 ‘밥이 되고 싶다’고 외쳤던 김 추기경의 아호는 옹기다. “옹기는 먹는 것도 담지만 더러운 것도 담는다. 우리 자신도 여러 가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웃었던 추기경의 유지와 정신을 이은 사랑과 봉사의 물결은 추기경 선종 이후 도도히 흐르고 있다. 박신언 몬시뇰이 설립을 건의해 김 추기경이 사재를 털어 2002년 설립된 옹기장학회와 김 추기경의 바보 정신을 이어받아 2010년 설립된 (재)바보의나눔은 대표적인 단체들이다. 갈라지고 분열된 세상을 사랑과 자비로 포용하려는 김 추기경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옹기장학회는 통일 이후 북녘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제 양성 목적으로 설립됐지만 현재 북한과 중국은 물론 아시아 선교에 뜻을 둔 신학생까지 지원 대상을 확대해 놓고 있다. (재)바보의나눔은 종교와 지역, 계층을 초월해 국내외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지원한다. 형편이 어려운 아동과 청소년 돌봄이 필요한 노인, 편견에 휘청이는 장애인과 다문화가정 등을 돕고 있다.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는 한편 신자와 국민을 위해 눈물 흘리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지도자.’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김 추기경이다. 물신주의 팽배와 경쟁 심화, 고통을 호소하는 가난한 사람들…. 그 어두운 모습 탓에 김 추기경이 더 그리워지는 게 아닐까.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김 추기경의 마지막 유언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노조 결성이 사회질서 문란?… 고강도 탄압당하는 中노동자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노조 결성이 사회질서 문란?… 고강도 탄압당하는 中노동자

    ‘노동자의 천국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노동운동 탄압이 본격화되고 있다. 중국 경제성장이 급속한 둔화세를 타면서 노조 결성과 임금체불 등 근로조건 악화에서 비롯되는 노동 관련 시위 급증은 노사갈등 차원을 넘어 시진핑(習近平) 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정국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은 최근 들어 중국에서 공장 노동자를 비롯해 택시운전사, 건설 인부 등 노동자들의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고 지난 7일 보도했다. 지난해 집계된 노동 관련 시위·분규 건수는 전년(1200여건)보다 500건 이상 늘어난 1700여건으로 추산된다고 홍콩에서 중국 노동인권을 옹호하는 ‘중국노동자통신’(中國勞工通訊·Chia Labour Bulletin·CLB)이 밝혔다. CLB는 분쟁 상당수가 신고되지 않는 데다 중국 당국이 검열까지 강화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드러난 신고 건수는 빙산의 일각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대표적 사례는 지난달 20일 밤 10시쯤 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시에서 활동하는 노동운동가인 우구이쥔(吳貴軍), 노동조직 전문가 장즈루(張治儒), 인권운동가 허위안청(何遠程), 노동자대표 쑹자후이(宋佳慧) 등 4명이 현지 공안(경찰) 당국에 체포된 것이라고 홍콩 명보(明報),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이 전했다. 허난(河南)성에서 활동하는 노동운동가 젠후이(簡輝)도 이들과 함께 체포됐다. 이들은 선전시 바오안((寶安)구의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에게는 ‘군중을 모아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혐의가 적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노동운동가 린둥(林東)은 광시(廣西)좡족자치구에서 검거됐다가 석방된 뒤 베트남으로 출국했다.이번에 검거된 우구이쥔은 2013년 선전에서 일어난 노동자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 등으로 13개월 동안 구금됐다. 당시 검찰은 끝내 그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고 기소를 취하했다. 장즈루와 린둥은 노동운동 지원단체 춘펑(春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데, 2014년 광둥성에서 발생한 노동자 파업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구금되기도 했다. 장즈루의 가족은 “공안에서 통보를 받은 이상 변호사를 선임해 그와의 면담을 추진할 것”이라며 “공안 측에서는 조사 결과에 따라 그의 구금 기간이 달라질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우려했다. 이번에 이들이 일제히 검거된 것은 지난해 중반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선전시의 용접설비 제조업체 자스(佳士)과기공사(JASIC) 노조 사태에 관여해 사회질서를 어지럽혔다는 것이 이유다. 자스과기 노동자들은 지난해 5월부터 노조 결성을 추진했으나 공안 당국의 탄압으로 수십 명이 체포됐다. 이 소식을 전해듣고 노동자와 학생 100명 이상이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몰려들었다. 이에 중국 전역의 노동운동가들은 물론 대학생들까지 나서 이들에 대한 지지 운동을 벌였고 큰 관심과 성원을 받았다. 홍콩의 노동운동가 제프리 크로살은 “자스과기공사 사태에 공안 당국은 매우 당황했다”며 “이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대응책은 노동자들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군다나 베이징대 외국어학원 졸업생 웨신(嶽昕)을 비롯해 베이징대 의학부 졸업생 구자웨(顧佳悅), 중산(中山)대 석사 천멍위(沈夢雨), 난징(南京)농대 졸업생 정융밍(鄭永明) 등 4명은 지난해 8월 당국에 끌려갔다가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이들은 당국으로부터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는 동영상을 찍을 것을 강요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공산당은 1978년 12월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정책을 편 이후 경제 업적을 앞세워 일당 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해 왔다. 2012년 말 권좌에 오른 시진핑 주석은 중국 경제의 토대를 굴뚝 산업에서 첨단기술 산업으로 탈바꿈하려고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연착륙 기대와 달리 중국 경제는 소비자, 기업의 경제 심리가 싸늘하게 얼어붙은 데다 미국과의 무역전쟁도 장기화하는 등 각종 악재가 겹쳐 급격한 하향곡선을 탔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6.6%를 기록했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시위 유혈진압 이듬해인 1990년(3.8%) 이후 가장 낮다. 전문가들은 부동산 거래 감소와 제조업 활동 둔화 등을 지적하며 실제 수치가 훨씬 낮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기 침체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판국에 시 주석은 총리가 관장해 온 경제정책도 총괄하고 있는 만큼 책임론에 휩싸이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중국 경제성장 둔화는 결국 노동자의 불만으로 이어지는 탓이다. ‘피땀’에 걸맞지 않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 노동자들의 시각이다. 지난해 시위에 참여한 선전 전자공장 임금체불 노동자 저우량(40)은 “회사에 건강을 바쳤는데 지금 나는 쌀 한 자루 살 돈도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이에 중국 지도부는 반부패 사정 작업의 핵심인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에 시 주석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게 하고, 인터넷·모바일 콘텐츠에 대한 사전 검열도 사실상 의무화했다. 중국 정부가 체제 안정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권력기관을 직접 동원하고 사이버 공간에 대해서까지 통제를 부쩍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관영 신화통신은 시 주석이 지난달 22일 공산당 중앙당교 세미나에 참석해 지방정부 지도자들과 중앙정부 부장(장관) 인사들에게 ‘중대한 위험’을 경고했다고 전했다. 그는 “당이 장기 집권과 개혁·개방, 시장경제를 유지하는 데 장기적이고 복잡한 시련을 맞았고 외부 환경도 험난하다”며 “경제발전과 사회 안정을 확실히 이룰 수 있도록 솔선수범해서 현재의 주요 위험을 해결하고 예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앙당교 세미나가 예정에 없이 급하게 잡힌 비상회의 성격이었음을 감안하면 경기 둔화가 중국 사회 전반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중국 지도부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 주석은 이를 위해 노동자 3억명 이상이 가입한 친기업 노조인 중화전국총공회(ACFTU)에 대한 당의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노동자들에게 조언하거나 노조의 단체교섭을 도와주는 노동인권 단체들을 해체했다. 제프리 크로설 CLB 홍보이사는 “중국 지도부가 대규모 시위의 재발을 확실히 막는 데 훨씬 더 엄격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8월 이후 노동 관련 시위 때문에 구속된 이들은 150여명에 이른다. NYT는 중국 지도부가 노동시위를 잠재적인 정치적 위협으로 보고 있으며 톈안먼 시위 30주년을 맞는 올해에는 시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 당국은 특히 젊은 공산주의 대학생들이 주도하는 노동운동을 훨씬 더 경계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이 자본주의를 포용해 노동자들을 착취한다며 마오쩌둥(毛澤東)이나 칼 마르크스의 이론을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계속 이런 상황에 내몰리면 시 주석의 국가 비전인 중국몽(中國夢)과 당에 대한 신뢰가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디애나 푸 국제정치학 교수는 “교사가 일하길 거부하고 트럭 운전사가 물품 운송을 중단하며 건설 노동자가 인프라 건설을 그만두면 꿈을 좇을 수 없는 법”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특히 부패한 관리들이 경영자들과 결탁해 노동자들을 학대한다며 중국 남부 지역에서 독립노조의 조직을 시도하기도 했다. 중국 당국은 바로 진압에 나섰고 관련자 50명 이상이 실종되거나 구속됐다. 푸 교수는 “중국 공산당이 마르크시즘을 따르지 않는다고 외쳐 대는 것은 국가 주도 사회주의에 대한 명백한 반항이자 거부로 간주된다”고 설명했다. khkim@seoul.co.kr ■이 기사는 서울신문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 중인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goo.gl/sdFgOq)의 전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서울대 졸업생 6200명은 왜 집단퇴장 했을까 [그때의 사회면]

    서울대 졸업생 6200명은 왜 집단퇴장 했을까 [그때의 사회면]

    고교 졸업식장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막기 위해 경찰이 나선 것은 2011년 무렵이다. 졸업식에 밀가루 세례로도 모자라 알몸 뒤풀이까지 등장하자 공권력이 동원된 것이다. 졸업식날의 일탈은 수십 년 전부터 있었다. 1973년 서울시교육청은 화환과 꽃다발 증정, (오색) 테이프 감기, 밀가루 뿌리기, 모자·교복 찢기를 없애라고 일선 학교에 강력히 지시했다(경향신문 1973년 1월 5일자). 이해만 한 것은 아니고 해마다 그랬다. 어떤 연유로 졸업식날 밀가루를 교복에 뿌리는지, 언제부터 그랬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일본식 검은색 교복(가쿠란)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시작됐다며 반일 감정과 연결하는 것도 그럴듯하지만 막연한 추측일 뿐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힘든 학교 생활을 마친다는 해방감에서 누군가가 밀가루를 뿌린 것이 급속도로 확산됐다고 본다. 근래 대학졸업식은 취업난 때문에 불참하는 학생들이 늘어 썰렁한 분위기다. 심지어 졸업식에 가족조차 부르지 않고 ‘혼졸’(혼자 졸업)하는 학생도 있다고 한다. 요즘 세태와는 다르게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대학졸업식의 파행은 군부독재와 연관 있다. 1987년 서울대 졸업식에서 박봉식 총장의 식사(式辭)가 시작되자 졸업생들은 ‘우’ 하는 야유와 함께 뒤로 돌아서서 ‘아침이슬’ 등의 노래를 불렀다. 이어 손제석 문교부 장관이 치사를 낭독하자 ‘타는 목마름으로’를 합창하며 6600여명 중 6200여명이 퇴장해 버렸다(경향신문 1987년 2월 27일자). 군부정권에 협력한 장관과 총장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고 박 총장은 제5공화국 출범의 산실이 된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을 지낸 전력이 있다. 서울대 졸업생들의 집단 퇴장은 1986년에도 있었으며 박종철군 치사 사건으로 1988년에도 졸업식장이 어수선했다. 서울대는 소란이 계속되자 1989년부터는 대통령상과 외부 인사 초청을 없애고 순수 학내 행사로 치렀다. 서울대 졸업식에는 1974년까지는 대통령이, 1981년까지는 국무총리가 참석했었다. 1985년 고려대 졸업식 시위는 뜻이 달랐다. 정부의 학생 제적 요구를 거부한 김준엽 총장의 반강제 퇴임에 대한 항의였다. 그 뒤에도 서울대 졸업식의 파행은 계속돼 학생들은 따로 ‘민주졸업식’을 열기도 했다. 1994년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모교이기도 한 서울대 졸업식에 20년 만에 참석해 큰 불상사 없이 식을 치렀다. 1999년에는 김종필 총리가 학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찰의 경호 속에 서울대 졸업식에 참석했다. 일부 학생들은 피켓 시위를 벌였고 관용 차량이 훼손되기도 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노동자 탄압을 본격화하고 있는 중국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노동자 탄압을 본격화하고 있는 중국

    지난달 20일 밤 10시쯤, 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시에서 활동하는 노동운동가인 우구이쥔(吳貴軍), 노동조직 전문가 장즈루(張治儒), 인권운동가 허위안청(何遠程), 노동자대표 쑹자후이(宋佳慧) 등 4명이 현지 공안(경찰) 당국에 체포됐다. 허난(河南)성에서 활동하는 노동운동가 젠후이(簡輝)도 이들과 함께 체포됐다. 이들은 선전시 바오안((寶安)구의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에게는 ‘군중을 모아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혐의가 적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노동운동가 린둥(林東)은 광시(廣西)장족자치구에서 검거됐다가 석방된 뒤 베트남으로 출국했다. 이번에 검거된 우구이쥔은 2013년 광둥성 선전(深圳)에서 일어난 노동자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 등으로 13개월 동안 구금됐다. 당시 검찰은 끝내 그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고 기소를 취하했다. 장즈루와 린둥은 노동운동 지원단체 춘펑(春風)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으며 2014년 광둥성에서 발생한 노동자 파업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구금되기도 했다. 장즈루의 가족은 “공안에서 통보를 받은 이상 변호사를 선임해 그와의 면담을 추진할 것”이라며 “공안 측에서는 조사 결과에 따라 그의 구금 기간이 달라질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우려했다. 이번에 이들이 일제히 검거된 것은 지난해 중반 전국적인 크 반향을 일으켰던 선전시의 용접설비 제조업체 자스(佳士)과기공사(JASIC) 노조 사태에 관여해 사회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라고 홍콩 명보(明報),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이 보도했다.자스과기공사의 노동자들은 지난해 5월부터 노조 결성을 추진했으나 공안 당국의 탄압으로 수십 명이 체포됐다. 이 소식을 전해듣고 노동자와 학생 100명 이상이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중국 전역에서 몰려들었다. 더군다나 베이징대 외국어학원 졸업생 웨신(嶽昕) 등을 비롯해 베이징대 의학부 졸업생 구자웨(顧佳悅), 중산(中山)대 석사 천멍위(沈夢雨), 난징(南京)농업대 졸업생 정융밍(鄭永明) 등의 학생 4명은 지난해 8월 당국에 끌려갔다가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이들 4명의 학생들은 당국에 의해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는 동영상을 찍을 것을 강요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에 노동운동 탄압이 본격화되고 있다. 중국 경제성장이 급속한 둔화세를 타면서 노조결성을 비롯해 임금체불 등 근로조건 악화에서 비롯되는 노동관련 시위가 늘면서 이런 움직임이 노사갈등 차원을 넘어 시진핑(習近平) 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정국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7일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최근 들어 중국에서 공장 노동자를 비롯해 택시운전사, 건설 인부 등의 노동자들의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홍콩에서 중국 노동인권을 옹호하는 중국노동회보(CLB)는 지난해에 집계된 노동관련 분규 건수가 전년(1200여건)보다 500건 이상이 늘어난 1700여건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분쟁 상당수가 신고되지 않는 데다 중국 당국이 검열까지 강화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드러난 신고 건수는 빙산의 일각으로 추정된다고 CLB는 덧붙였다. 중국 공산당은 1978년 12월 덩샤오핑(鄧小平) 최고 지도자가 개혁·개방을 천명한 뒤 고도성장에 따른 경제 업적을 앞세워 일당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해 왔다. 2012년 말 권좌에 오른 시진핑 국가주석은 중국 경제의 토대를 굴뚝 산업에서 첨단기술 산업으로 탈바꿈하려고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연착륙 기대와 달리 현재 중국 경제는 소비자, 기업의 경제 심리가 급속히 악화하고 주택시장도 불안한 데다 미국과의 무역전쟁도 장기화하는 등 각종 악재가 겹쳐 급격한 하향곡선을 탔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6.6%를 기록했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시위 유혈진압 이듬해인 1990년(3.8%)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전문가들은 부동산 거래 감소와 제조업 활동 둔화 등을 지적하며 실제 수치가 훨씬 낮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경기 침체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판국에 시 주석은 전통적으로 총리가 관장해온 경제정책도 총괄하고 있는 만큼 경우에 따라선 책임론에 휩싸일 수도 있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중국 경제성장 둔화는 결국 노동자의 불만으로 이어지고 있는 탓이다. 일터에 쏟아부은 ‘피땀’에 걸맞지 않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 노동자들의 시각이다. 선전에 있는 전자제품 공장에서 지난해에 시위에 참여한 임금체불 노동자 저우량(40)은 “회사에 건강을 바쳤는데 지금 나는 쌀 한 자루 살 돈도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당황한 시진핑 지도부는 새해 들어 반부패 사정작업의 핵심인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에 대해 시 주석에 대한 충성맹세를 하게 했고, 매일 수억 건이 업로드되는 인터넷·모바일 콘텐츠에 대한 사전 검열도 사실상 의무화했다. 중국 정부가 정치·사회적 불안 요인을 사전에 제거함으로써 체제 안정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권력기관을 직접 동원하고 사이버 공간에 대해서까지 통제를 부쩍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관영 신화통신은 시 주석이 지난달 22일 베이징에서 열린 공산당 중앙당교 세미나에 참석해 지방정부 지도자들과 중앙정부 부장(장관) 인사들에게 ‘중대한 위험’을 경고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당이 장기집권과 개혁·개방, 시장경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장기적이고 복잡한 시련을 맞았고 외부환경도 험난하다”며 “경제 발전과 사회 안정을 확실히 이룰 수 있도록 솔선수범해서 현재의 주요 위험을 해결하고 예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앙당교 세미나가 예정에 없이 급하게 잡힌 비상회의 성격이었음을 감안하면 경기 둔화가 중국 사회 전반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중국 지도부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 주석은 이를 위해 노동자 3억명 이상이 가입된 친기업 노조인 중화전국총공회(ACFTU)에 대한 공산당의 관리·감독을 강화하고 노동자들에게 조언하거나 노조의 단체교섭을 도와주는 노동인권 단체들을 해체했다. 제프리 크로설 CLB 홍보이사는 “중국 지도부가 대규모 시위의 재발을 확실히 막는 데 훨씬 더 엄격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8월 이후 노동관련 시위 때문에 구속된 이들은 150여명에 이른다. 구속된 이들 중에는 교사를 비롯해 택시운전사, 건설 노동자, 노동조건 개선을 촉구하는 학생들이 포함돼 있다. NYT는 중국 지도부가 노동시위를 잠재적인 정치적 위협으로 보고 있으며 톈안먼 민주화 시위 30주년을 맞는 올해에는 시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 당국은 특히 젊은 공산주의 대학생들이 주도하는 노동운동을 훨씬 더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 활동가는 중국이 자본주의를 포용해 노동자들을 착취한다며 중국 공산주의 사상의 아버지인 마오쩌둥(毛澤東)이나 칼 마르크스의 이론을 거론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이 계속 이런 상황에 내몰리면 시 주석의 국가 비전인 중국몽(中國夢)과 공산당에 대한 신뢰가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디애나 푸 국제정치학 교수는 “교사가 일하길 거부하고 트럭 운전사가 물품 운송을 중단하며 건설 노동자가 인프라 건설을 그만두면 꿈을 좇을 수 없는 법”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이들은 부패한 관리들이 경영자들과 결탁해 노동자들을 학대한다며 중국 남부 지역에서 독립노조의 조직을 시도하기도 했다. 중국 당국은 바로 진압에 나섰고 관련자 50명 이상이 실종되거나 구속됐다. 푸 교수는 “중국 공산당이 마르크시즘을 따르지 않는다고 외쳐대는 것은 중국 정부가 보기에는 자식이 친부모를 공개 비난하는 것과 같다”며 “이는 국가 주도 사회주의에 대한 명백한 반항이자 거부로 간주된다”고 설명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황성기의 시시콜콜]‘지식인 성명’ 일본에서 홀대받은 이유

    [황성기의 시시콜콜]‘지식인 성명’ 일본에서 홀대받은 이유

    지난 6일 일본 시민·지식인들이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촉구한 성명의 보도를 놓고 한·일 간 극명한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한국 언론에는 7일자에 이어 8일자에도 보도됐지만 일본 언론에는 아사히신문 단 1개 신문 만이 두 문장 짜리의 짧은 기사로 7일자에 처리했을 뿐 다른 전국지나 방송, 통신사는 아예 언급조차 없었다. 한국 언론들은 성명 내용을 6일 연합뉴스에 이어 7일자 조간에 일제히 보도했다. 심지어는 사설로까지 언급돼 `한일관계 악화 더 이상 방치 말라는 日 지식인들의 호소’(동아일보 7일자), ‘아베 내각에 식민지배 사죄 촉구한 일본 지식인들’(한겨레신문 8일자), ‘日 지식인들 식민지배 반성 성명, 아베 총리는 새겨듣기를’(한국일보 8일자) 등으로 성명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극심한 한·일 보도의 온도차 성명을 들여다 보자. ‘무라야마 담화, 간 총리담화에 바탕을 두고 식민지지배를 반성·사죄하는 것이야말로 일·한, 일·북 관계를 계속해서 발전시키는 열쇠이다’라는 긴 제목에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함축돼 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우쓰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 명예교수, 다나카 히로시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 등은 이날 도쿄 시내의 중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이종원 와세다대학 교수 등 총 226명이 발기인으로 혹은 서명을 통해 동참 의사를 표시했다. 성명은 “일본과 한국, 일본과 북한 사이에 남은 모든 문제를 무라야마 담화와 간 담화를 바탕 삼아 새로운 마음으로 성실히 협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대처해 나가야 한다”면서 “일·한 간의 이른바 ‘징용공’ 문제인 전시 노무 동원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한 대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호의적인 對韓 보도 어려운 분위기 일본의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는 지식인 성명이 일본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것은 자명하지만 이렇게 일본 언론에서 무관심과 홀대를 받는 것은 드문 일이다. 지난해 10월까지 서울특파원을 지낸 도쿄신문 정치부의 우에노 미키히코 기자는 “한국 신문을 7일에 읽고 성명이 나온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지금 일본에 통계부정 논란, 아동학대 문제가 있어서 기자들이 관심을 안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우에노 기자는 “그러나 그런 이유보다는 일본 여론이 지식인들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는 상태”라고 분석한다. 그는 “이 분들 주장을 역지사지 해보자. 한국 지식인들이 최악인 지금의 한·일관계 타개를 위해 ‘위안부 합의도 잘 지키고 강제 징용문제도 65년 청구권 협정에 따라 해결하자. 일본과 한 약속을 잘 지켜야 미래지향적인 양국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면 한국에서 수용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비교적 진보적인 도쿄신문 독자까지 레이더 사건에 대해 ‘한국은 말도 안되는 주장을 자꾸 하는 나라다. 어떻게 하라’라는 의견을 보내오고 있다. 한국, 특히 문재인 정권에 대해 호의적인 주장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예전보다 훨씬 없어졌다”고 말했다. 오쿠조노 히데키 시즈오카현립대학 교수(한국정치)는 보다 신랄하다. 그는 “성명에 이름을 올린 학자, 언론인들은 항상 한·일관계에서 그런 운동을 하시는 분들인데다 새로운 내용도 없다”면서 “일본 사회 분위기가 새로운 것이 없는 이야기를 뉴스로 다룰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지적했다. 오쿠조노 교수는 “일본에서는 위안부, 징용피해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은지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한국은 도대체 왜 이럴까. 이웃나라여서 이사갈 수도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나’ 하는 단계로 넘어갔다”고 전했다. 韓 ‘조속한 입장 발표’ 日 ‘냉정한 대처’ 주문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20년간 한국을 취재하고 있는 한 일본인 저널리스트는 “진보적 일본 매체조차 보도를 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일본 여론이 한국에 대한 불신감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역으로 한국에서 비슷한 기자회견이 열렸다고 하면 결과가 어떨지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면서 “한국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하고, 일본도 역정만 내지말고 냉정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2010년 한·일 병합 100주년 때에도 양국 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던 일본 지식인들의 ‘2019년 성명’을 둘러싼 한·일의 보도 격차는 갈수록 깊어지는 양국의 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는 점에서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다음은 성명 전문 일본과 한국은 이웃나라로, 협력하지 않으면 양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아 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양국 사이에 1904년 이후 41년간 군사 점령, 1910년 이후 35년간 식민지 지배가 일본 제국에 의해 한반도에 가해졌다. 이것이 양국 역사의 암부(闇部)를 만들었다. 한국·조선인의 역사 기억에서 이것을 지울 수는 없으며, 일본인은 이것에 대해 인간적으로 대처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조선 식민지지배는 1945년 8월 15일로 끝났지만 일본인은 국가, 국민으로서 한국 병합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일본은 독립한 조선의 한 쪽 나라인 대한민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조약을 1965년 체결했다. 그러나 1910년의 병합조약이 처음부터 무효였다는 한국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합의에 의한 병합이었고 식민지 지배는 없었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쌍방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점을 확인한다’라고 명기된 청구권협정이 체결되었지만 근본적 인식의 분열은 극복되지 못한 채 방치됐다.  이런 한·일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은 대한민국과의 국교를 유지하고 경제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다면적 협력을 발전시켜 왔다. 20여 년이 지난 1987년 한국에서는 군부 독재정권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민주혁명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서야 1995년 자민당, 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내각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각의결정을 통해 패전 50년 총리담화를 발표하여 처음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했다. 일본은 “아시아 제국(諸國) 사람들”에게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인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 것이다. 이 반성과 사죄는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한·일 파트너십 선언에서 “한국 사람들”을 향해 표명되었고, 2002년에는 김정일 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북·일 평양선언에서 “조선 사람들”을 향해 표명되었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이러한 반성과 사죄표명은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반성과 사죄 표명의 완성을 위해서는 병합 그 자체에 대한 역사 인식이 추가되어야 한다.  한국병합 100년을 맞은 2010년, 우리 일본의 지식인 500명은 한국의 지식인 500명과 함께 병합의 과정과 병합조약을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들은 “한국병합은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시킨 문자 그대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였다”라고 지적한 다음 병합조약에 대해서는 “힘으로 민족의 의지를 짓밟은 병합의 역사적 진실”을 “평등한 양자의 자발적 합의로, 한국 황제가 일본에 국권 양여를 신청하여 일본 천황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한국병합에 동의했다는 신화”에 의해 덮어 숨기는 것이고, 조약의 전문(前文)도 본문도 거짓임을 명백히 밝혔다. “이리하여 한국병합에 이르는 과정이 불의부당한 것처럼 한국병합조약도 불의부당하다”, 이것이 우리들의 결론이었다.  이 성명은 2010년 5월 10일 발표된 이후 제2차 서명자가 추가되어 7월 28일에 다시 발표됐다. 그리고 이 성명에 답이라도 하듯 일본 정부와 간 나오토 총리는 8월 10일 각의결정을 통해 한국병합 100년 총리담화를 발표했다. 그 담화에는 다음과 같은 일본정부의 인식이 담겨 있는데 반성과 사죄가 재차 표명됐다.  “정확히 100년 전 8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이후 36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3·1 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서도 나타났듯, 정치적·군사적 배경 하에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행해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나라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저는 역사에 대해 성실히 임하고자 합니다. 역사의 사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이를 인정하는 겸허함을 갖고, 스스로의 과오를 되돌아보는 것에 솔직해지고자 합니다. 아픔을 준 쪽은 잊기 쉽고, 아픔을 받은 쪽은 쉽게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다대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재차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간 나오토 총리 담화)  이것이 일본이 ‘한국병합’으로부터 100년, 식민지 지배 종식으로부터 55년이 지나서야 도달한 역사인식이다. 한국 국민의 비판에 스스로의 노력이 더해져 이루어진 반성과 사죄의 새로운 지평이다. 이 총리담화의 성과로 일본 통치 하에서 조선총독부가 빼앗아 일본의 황실 재산으로 삼은 ‘조선왕조의궤’가 담화가 발표된 그 해에 한국 정부로 반환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일본과 대한민국,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사이에 남은 모든 문제를 무라야마 담화와 간 담화를 바탕 삼아 새로운 마음으로 성실히 협의하여 해결해야 한다. 일본 정부와 국민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과거 25년간 여러 노력을 해 왔지만 이 문제는 현재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무엇보다 북한의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이른바 ‘징용공’ 문제, 전시 노무동원 피해자 문제가 큰 문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한·일조약 당시의 협의와 2000년대 한국 정부의 적극적 노력이 있었지만 20만명 정도로 일컬어지는 전시 노무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다시금 한·일관계를 흔들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위안부 문제와 마찬가지로 한층 더 진지한 대처가 필요하다. 북한의 전시 노무동원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대처를 고려해야 한다. 이 외에도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도 존재한다. 전범으로 사형판결을 받은 92세의 이학래 노인은 지금껏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은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를 신속히 실현해야 한다. 일본 정부와 국민은 무라야마 담화, 간 담화를 바탕 삼아 남북한 정부와 국민들의 협력을 얻어 남아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올해는3·1 독립선언이 발표된 지 100년이 되는 기념비적 해이다. 일본에 병합되어 10년 간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조선 민족은 이날 일본인들에게 일본을 위해서라도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설득하고자 했다. 이제 우리들은 조선 민족의 이 위대한 설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동양 평화를 위해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바탕으로 한·일, 북·일 간의 상호 이해, 상호 부조(扶助)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2019년 2월 6일
  • 북미회담에 앞서 기억해야 할 ‘명분없는 전쟁’

    북미회담에 앞서 기억해야 할 ‘명분없는 전쟁’

    2월 6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새해 국정연설에서 베트남에서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밝혔다. 알려진 대로라면,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 기지였고, 19세기 말 프랑스 식민정부의 주요 항구였던, 이제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여행지 다낭으로 곧 세계의 눈과 귀가 몰릴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이 아니더라도 베트남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나라 중 하나다. 베트남전쟁으로 한동안 멀리 있었지만 해외여행 붐으로, 최근에는 베트남 축구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은 박항서 감독의 인기 덕에 마치 형제의 나라처럼 느껴진다. 관련 책들도 많이 출간되었다. 여행서들은 옥석을 가리기 어렵고, 쌀국수로 대표되는 요리 관련 책들도 부지기수다.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몇 권의 책도 눈에 띄는데, 그중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베트남 전쟁’이 읽음 직하다. 박 교수가 베트남 전쟁에 주목한 가장 큰 이유는 우리 현대사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1964년 첫 파병 이후 1973년 철수할 때까지 무려 32만명이 넘는 한국군이 그곳에 갔다. 이 가운데 무려 5000여명이 전사했고, 고엽제 후유증으로 지금도 1만명 이상이 고통 받고 있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의 최대 파병 국가였다. 당시 가장 가까운 우방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도 참전하지 않은 전쟁이었다. 여기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한국의 군부와 대표였던 박정희가 “정권 승인을 받기 위한 조건 중 하나로 한국군 파병을 먼저 제시했다”는 사실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베트남 내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적이 북베트남인지, 베트콩인지, 혹은 베트콩을 지지하는 남베트남 사람들인지 규정하지 못하고 시작한 전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무고한 사람들만 죽어갔다.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민간인 학살은 어쩌면 베트남 전쟁 시작과 함께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박 교수는 우선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미국의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한다. 공산주의의 도발을 막는다는 사명감과 적절한 보상을 받기 위해 참전한 청년들은, 전후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명분 없는 전쟁의 뒷감당은 참전 용사들의 몫이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가해자였을지 몰라도, 그들 역시 고엽제 후유증과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그들에게 싸워야 할 이유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 개개인의 안보도 지켜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안보를 위협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그들 자신과 싸워야 했다.”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우리 청년들도 트라우마와 싸워야 했다. 하지만 정권은 승승장구했다. 전쟁 특수로 안정적 집권이 가능해진 박정희는 곧 유신을 선포했고, 독재의 토대를 쌓는다. 전쟁 특수는 재벌의 기반도 튼튼하게 해주었는데, 이즈음 그들은 부동산 투기를 본격화했다. 청년들이 목숨 걸고 싸운 보상은 정권과 재벌의 몫이었다. 1970년대 한국은 베트남 파병 한국군과 기술자들로 다소 풍요로워진 시대를 맞았지만, 동시에 자유와 권리가 가장 제한되던 시대였다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베트남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면 한반도의 앞날도 좀 더 밝아질 것이다. 이미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돈독하다. 그럼에도 베트남 전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꾸준한 반성만이 우리의 좌표와 나아갈 방향을 정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 트럼프 “과이도 임시대통령 인정”… 마두로 “美와 관계 끊겠다”

    트럼프 “과이도 임시대통령 인정”… 마두로 “美와 관계 끊겠다”

    시민 수만명 “마두로 퇴진”… 7명 사상 과이도 “과도정부 수립 합법선거 시행” 폼페이오 “前대통령은 외교 권한 없다” 러·中 등 불간섭 내세워 “마두로 지지” 美 vs 中·러 ‘신냉전 격화’ 가능성도베네수엘라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퇴진과 재선거를 요구하는 대규모 반(反)정부 시위가 벌어진 데 이어 주변 국가들이 마두로 대통령의 적법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베네수엘라 정국이 극도의 혼돈에 빠졌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남미의 우파 국가들이 야권 지도자 후안 과이도(35) 국회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한다고 선언하자 좌파 국가들이 ‘마두로 지키기’에 나서는 등 국제사회의 좌우 대립 구도도 심화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23일(현지시간) 수도 카라카스에서 시민 수만명이 마두로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시위대 일부가 경찰과 충돌해 최소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날은 1958년 베네수엘라에서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 독재정권이 대중 봉기로 무너진 날로, 마두로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13일 만에 퇴진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시위대의 선봉에 선 과이도 국회의장은 이날 스스로를 ‘임시 대통령’이라고 규정하며 “정권을 불법적으로 찬탈한 마두로를 끌어내고 과도정부를 수립해 합법적 선거를 치르겠다”고 공언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야권 주요 후보가 수감되거나 가택연금 상태라 출마하지 못한 상황에서 열린 대선에서 당선돼 퇴진 요구를 지속적으로 받아 왔고, 경제난의 원흉으로도 지목돼 왔다. 세계 최대 원유 매장국으로 석유 수출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베네수엘라는 국제 유가 하락과 감당하기 어려운 재정적자, 미국의 제재 등으로 지난해 100만%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지난 5년간 살인적 인플레와 생필품 부족으로 고국을 떠난 사람만 330만명이다.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미주의 우파 국가들은 마두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베네수엘라 국회가 헌법을 발동해 마두로 대통령을 불법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대통령직은 공석”이라며 “과이도 의장을 베네수엘라의 임시 대통령으로 공식 인정한다”고 밝혔다. 브라질, 칠레, 페루, 파라과이, 콜롬비아,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등 우파 정부들도 과이도 의장 지지 성명을 냈고, 유럽연합(EU)도 조속한 재선거를 촉구했다. 그러나 좌파가 집권한 쿠바와 볼리비아는 마두로 정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멕시코 또한 불간섭 원칙을 고수하며 간접적으로 마두로를 옹호했다. 베네수엘라의 우방인 러시아와 중국도 외교부 차원에서 서방국가의 잇단 성명을 ‘내정 간섭’이라고 비난하며 마두로 정권을 지지했다. 베네수엘라를 놓고 미국과 중국·러시아의 신냉전이 격화될 가능성도 제기됐다.마두로 대통령은 이날 연설을 통해 “미국과 정치·외교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했고,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전직 대통령인 마두로는 외교 관계를 단절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맞받아치는 등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미국은 마두로 정권을 더 압박하기 위해 추가 제재를 내릴 예정이다. 마두로 정권을 사면초가로 몰아넣은 ‘정계의 샛별’ 과이도 의장은 베네수엘라 중산층 출신으로 대학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은 친미 인사다. 2007년 우고 차베스 정권의 방송 장악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 지도자 출신으로 2011년 국회에 처음 입성했다. 지난 5일 국회의장이 된 그는 베네수엘라 야권에서 강경파로 꼽힌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베네수엘라 군인 27명 반발 불발...혼란 정국 속 23일 대규모 시위 예고

    베네수엘라 군인 27명 반발 불발...혼란 정국 속 23일 대규모 시위 예고

    베네수엘라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군인 27명이 반란을 시도했으나 진압됐다고 엘나시오날 등 현지 언론이 2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친(親)정부 성향의 대법원은 미국과 중남미 우파 국가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마두로 대통령 퇴진을 추진하는 국회 새 지도부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등 정정 불안이 지속되는 베네수엘라에서 마두로 정권의 정적 단속도 거세지고 있다.베네수엘라 국방부는 이날 새벽 수도 카라카스에서 무기를 절취한 27명의 군인을 체포하고 무기를 전량 회수했다고 밝혔다. 체포된 군인들은 두 대의 군용트럭을 타고 빈민가인 페타레 지역으로 이동, 군 초소를 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장교 2명과 병사 2명을 납치했다. 이들은 몇 시간 뒤 미라플로레스 대통령 궁에서 1㎞ 떨어진 코티사 군 초소에서 붙잡혔다. 국방부는 성명에서 “극우 세력의 불명확한 이해관계에 따라 감행된 반역적 행위가 진압됐다”고 강조했으며, 블라디미르 파드리노 로페스 국방부 장관은 트위터에서 “이번 사건에 책임이 있는 자들은 법에 따라 응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군인들의 반란에 앞서 소셜미디어에는 중무장한 군인들이 마두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몇 개의 동영상이 유포됐다. 반란 이후에도 빈민 지역의 일부 주민들이 마두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나 최루탄 등을 발포한 당국의 강경 진압으로 해산됐다고 AP통신은 전했다. 한편 친정부 성향의 대법원은 이날 마두로 대통령의 재임을 불법이라고 선언한 국회의 조치를 무효로 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면서 검찰에 의회 지도부가 공개적으로 헌법을 부정하며 범죄행위를 저질렀는지 수사하라고 촉구했다. 국회는 판결에 앞서 야당 등 반대파 후보들의 대대적인 선거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를 강행한 마두로를 ‘정권 강탈자’라고 명명하고 퇴진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멕시코를 제외한 중남미 국가와 캐나다 등 외부에서도 마두로 대통령을 적법한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성명이 발표됐다.안팎으로부터 퇴진 압박을 받는 형국이지만 마두로 대통령은 ‘21세기 사회주의 건설’을 약속하며 반대 세력을 ‘제국주의자’나 ‘파시스트’로 규정한 채 강경 진압을 이어나가고 있다. 정권 반대 세력은 2014, 2017년에 이어 올해도 오는 23일 대규모 시위를 예고했다. 1월 23일은 1952년부터 6년간 재임했던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 대통령의 군부 독재를 시민의 힘으로 종식시킨 기념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콜롬비아 로사리아대학의 베네수엘라 전문가인 로날 로드리게즈 교수는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그 날(1월 23일)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려는 의도지만,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이 강경 진압의 폭력성을 마주하고 또 희생되는 것을 책임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고 말했다. 베네수엘라의 인플레이션은 100만%를 웃돌아 식품과 의약품을 제대로 구매할 수 없는 국민들은 기근과 질병에 무방비하게 노출돼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베네수엘라 인플레이션이 1000만%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 속에 2014년 이후 300만명이 넘는 베네수엘라 국민이 고국을 등졌다. 유엔은 올해가 끝날 무렵엔 난민의 규모가 530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전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법원 “부마항쟁 때 불법 연행된 피해자에 국가 배상해야”

    법원 “부마항쟁 때 불법 연행된 피해자에 국가 배상해야”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독재에 반대해 일어난 부마민주항쟁(부마항쟁) 당시 집회·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불법으로 연행돼 옥살이를 한 피해자에게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부산지법 민사26단독 이상완 판사는 송두한(65)씨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사건에서 정부가 송씨에게 1500만원을 지급하라고 22일 선고했다. 송씨는 부마항쟁 당시인 1979년 10월 17일 밤 9시쯤 부산 중구 남포동에서 자신의 취업을 축하해주는 저녁 모임을 마치고 일행과 귀가하던 중 경찰로부터 불심검문을 당했다. 경찰은 정장을 입은 회사원인 송씨 선배는 풀어주고 집회·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은 송씨를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연행해 “동주여상(현 동주여고) 앞을 지나가다가 돌을 던졌다”는 날조된 혐의를 기재하고 구속영장까지 신청했다. 그런데 박정희 전 대통령 피격사건 이후 구속영장은 기각됐고, 송씨는 즉결심판에서 선고받은 구류 7일을 포함해 총 18일 간의 불법 구금을 당한 뒤에 경찰서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후 2015년 송씨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로부터 항쟁 관련자로 뒤늦게 인정받았고, 2017년 9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지난해 6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송씨는 “부마항쟁 당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불법 감금되는 바람에 합격한 회사에 출근하지 못해 취업이 취소되는 등 인생에 큰 불이익을 받았다”면서 정부가 4687만원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이날 “부산지법 유사 사건에서 선고한 위자료를 참작해 배상금액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송씨는 “많이 억울하지만 뒤늦게나마 무죄를 받아 명예를 회복했고, 배상을 받게 된 만큼 판결을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벼랑 끝에 선 유권자…‘포퓰리스트’의 역설

    벼랑 끝에 선 유권자…‘포퓰리스트’의 역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영국으로 이주한 유럽 다른 나라 노동자들이 자국 국민의 일자리를 차지하고, 정부의 복지 지출이 늘어난 데에 따른 국민들의 분노에서 촉발했다. 당내 별다른 지지 기반이 없던 테리사 메이 당시 내무장관은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혼란을 수습할 구원투수였다. 결국, 유권자의 불안과 분노를 업고 총리가 된 셈이다.총리가 된 것만 따지자면 메이 총리는 운이 좋았을 수도 있다. 아예 유권자의 분노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대통령이 된 이도 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2008~09년 금융위기 이후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경영에 실패하고도 퇴직금으로 떼돈을 챙기는 CEO를 지켜봐야 했다. 여기에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가 밀려왔다. 유권자 상당수가 워싱턴 정계에 변화가 필요하다며 분노했다. 정치를 해 본 적도 없던 트럼프는 이들에게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웠다. ●‘분노한 유권자’ 노리는 포퓰리스트 두 사례 모두 배경에 ‘분노한 유권자’가 있다. 사람들은 생계가 위태로워지면 공격 대상을 찾게 마련이다. 이를 교묘히 이용해 피해자인 ‘우리’와 문제의 원흉인 ‘그들’을 공격하도록 부추기는 이들이 나타난다. 바로 ‘포퓰리스트’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 28%가 2012년 대선에서 오바마에게 표를 주고 2016년에는 트럼프를 찍었다. 정치학자 리 드러트먼은 이들을 가리켜 “경제 문제에서는 진보적이고, 정체성 문제에서는 보수적인 포퓰리스트”라고 명명했다. 대중의 표만 노려 입맛에 맞는 말을 내뱉는 정치인들 외에 이런 성향의 유권자들까지 모두 ‘포퓰리스트´라는 범주에 넣은 셈이다. 타임지 수석 논평가이자 세계정치 연구가 이언 브레머는 신간 ‘우리 대 그들’을 통해 포퓰리스트를 경고한다. 저자는 보수와 진보, 강대국과 약소국, 가진 자와 없는 자, 기독교와 이슬람교, 도시와 지방처럼 이분법으로 나누기는 쉬운 일이라고 말한다. 이런 일 때문에 분노한다면 ‘우리’는 옳고 ‘그들’은 나쁘다고 선을 긋고, 돌멩이를 집어 그들을 향해 던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저자는 돌멩이를 집어들기 전 잠깐 고민해 보라고 한다. ‘도대체 우리에게 돌멩이를 들게 한 것은 누구인가´.●상류층만 혜택 누리는 ‘세계화의 덫’ 저자의 포퓰리스트 찾기는 ‘세계화’에서 출발한다. 세계가 연결되면서 선진국은 개도국의 값싼 노동자를 데려온다. 선진국의 중산층과 노동자들은 실업자가 된다. 여기에 자동화 시스템과 인공지능이 도입되며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지고 영향의 범위도 넓어진다. 독재 정치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국가를 보자.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고, 수천만 명이 넘는 난민이 생겨난다. 포퓰리스트는 더 높은 장벽을 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다면, 결국 이에 따른 혜택은 누가 누릴까. 당연히 상류층 일부일 것이다. 저자는 이와 관련해 인구가 많고 정치와 경제가 다소 불안한 나라들, 자동화가 불러올 변화에 관한 대응력이 취약한 나라 12곳을 돌아본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나이지리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브라질, 멕시코, 베네수엘라, 터키, 러시아,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이다. 이들 나라에서 문제가 확산할 경우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라 경고한다. 저자는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은 무엇이냐며, 두 가지 선택지를 내민다. 더 높은 장벽을 두르거나, 새로운 방법으로 함께 걸어갈 길을 만들거나. ●취약계층 사회보장으로 장벽 허물어야 저자는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 취약계층을 향한 사회보장 제도를 점차 늘리는 방식의 ‘사회계약 재작성’을 최우선으로 제안한다. 또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교육제도 역시 보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싱가포르 정부처럼 ‘개인학습계좌’를 만들어 25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신기술을 익히는 데 쓸 수 있는 지원금을 지급하는 일이 이런 사례다. 조세 제도 역시 없는 자들을 위한 방향으로 손질해야 한다. 풀타임이 아닌 근무 형태를 의미하는 ‘긱 경제’의 확산과 이에 따른 ‘기본소득보장제’의 조합도 제안한다. 넘쳐나는 실업자와 밀려오는 난민을 앞에 두고 너무 이상적인 제안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이런 아이디어들이 모이면 정책 입안자, 기업가, 선구적 활동가에 의한 혁신이 일어날 수 있다”고. 그리고 새로운 변화 대신 장벽을 치길 바라는 이들에게 경고한다. “장벽이 견고해질수록 포퓰리스트는 흐뭇한 미소를 보일 것”이라고.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마두로, 정적 국회의장 억류… 베네수엘라 내홍 절정

    마두로, 정적 국회의장 억류… 베네수엘라 내홍 절정

    대통령 퇴진운동 주도 野지도자 과이도 당국에 체포됐다 SNS에 퍼지자 풀려나 “정보요원들, 상부 지시로 연행했다 말해” 과이도, 23일 대규모 정권 규탄 시위 촉구 美도 지지… 재집권한 마두로 최대 위기‘좌익 반미(反美) 성향’의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대한 국내외의 퇴진 압박이 거세지면서 베네수엘라 내부 혼란이 ‘시계 제로’ 상태로 치닫고 있다. 대통령 퇴진 운동을 주도한 야권 지도자 후안 과이도(36) 국회의장이 13일(현지시간) 한때 정보기관 요원들에게 억류됐다 풀려난 가운데, 지난 10일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마두로 정권을 둘러싼 혼란상은 오는 23일 최고조를 찍으며 분수령을 맞게 될 예정이다.14일 AP통신 등에 따르면 과이도 의장은 전날 고속도로에서 정보요원들에 의해 제지를 당한 뒤 차에서 끌어내려졌다. 그는 휴일 반정부 시위 참석을 위해 수도 카라카스에서 인근 해안도시 카라발레다로 이동 중이었다. 정보 요원들은 무기를 휴대한 채 과이도 의장을 차량 밖으로 끌어낸 뒤 억류했다. 하지만 당시 억류 소식은 주변 지지자들에 의해 소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전파됐고, 과이도 의장은 곧 석방됐다. 파장을 두려워한 정부 당국이 신속하게 그를 풀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AP통신은 “당시 정보요원들은 상부 지시로 체포한다는 입장을 과이도 의장에게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정보장관실은 “야권 진영의 ‘언론 쇼’를 도와주려는 불법 요원들의 일탈 행동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이날 반정부 시위에 참석한 과이도 의장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면서, 지지자들의 환호와 갈채 속에서 오는 23일 전국적인 정권 규탄 시위 참여를 촉구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23일은 지난 1958년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 독재정권이 대중 봉기로 무너진 날이다. 마두로 정부도 초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2015년 총선 승리로 베네수엘라 의회를 장악한 야권의 과이도 의장은 마두로 대통령의 퇴진과 재선거를 요구해왔다. 지난 11일 과이도 의장은 수도 카라카스에서 집회를 열고 “마두로는 불법 찬탈자이며 헌법은 나에게 재선거를 주관할 과도 정부 구성의 정당성을 부여했다”면서 “마두로를 대신해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마두로 정권에 비판적인 미국의 존 볼턴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은 이에 대해 “과이도 의장의 용감한 결정을 지지한다”면서 마두로 정권에 분명한 각을 세웠다. 미주 최대 국제기구인 미주기구(OAS) 측도 “과이도 의장을 베네수엘라 과도 정부 대통령으로 인정한다”는 입장을 내놓는 등 야권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페루와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캐나다 등으로 구성된 ‘리마 그룹’도 지난 4일 마두로 대통령에게 권력 이양을 요구하면서 국제적인 포위망에 힘을 보탠 상황이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 2015년 총선에서 야권 연합에게 참패, 의회를 잃었지만, 2017년 ‘제헌의회’라는 초법적인 별도 기구를 설립해 의회를 무력화하고 지난해 대선까지 치러 집권을 연장했다. 마두로 대통령의 대중주의적 통치력이 야권의 도전을 어떻게 넘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