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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國保法 대폭 손질해야

    국가보안법을 대대적으로 개정하겠다고 법무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제네바 유엔 인권위원회에 참석한 외교통상부장관도 국보법 개정을 대외적으로 천명했다.이로써 국보법 개정은 움직일 수 없는 정부의 방침으로 굳어졌고개정작업도 속도가 붙을 것 같다. 정부가 출범 초부터 국보법 개정을 거론해 왔지만 너무 시일을 끈 느낌이다.남북 분단상황과 변하지 않은 북한의 대남 적화전략 그리고 그에 따른 국민 보수층의 정서를 감안해 국보법 개정에 대한 여론형성을 기다렸기 때문일것이다.그러나 시일을 끄는 바람에 유엔 인권위가 국보법으로 인한 인권침해에 대해 두 차례나 시정을 촉구하고 국제사면위가 한국의 인권상황 개선을내걸고 국제적인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정부의 체면을 구겼다. 국보법을 대대적으로 손질해야 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국보법은 그동안 국민의 인권침해와 관련해 숱한 논란을 불러 왔다.먼저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며 모호한 조항이 많아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또한 역대 독재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해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국민의 의사표시를 국보법을 악용해서 억압해 온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국내적으로 사회 각 부문의 민주화가 진전됐고,세계적으로도 인권이보편적 가치로 존중되는 시대가 됐다.또한 정부 차원에서 북한을 주권을 지닌 국가로 지칭하는 마당이며 빈번한 남북교류는 물론 금강산 유람선이 다니는 상황이다.시대의 진전에 발맞추기 위해서도 국보법은 대폭 손질돼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협력의 대상’으로 보는 남북교류협력법과 충돌한다.그 결과국가보안법이 엄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북 포용정책이 국민들을 혼란하게 하기도 한다.따라서 북한을 새롭게 규정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견해와 국민 일반의정서가 조화를 이뤄야 할 것이다.국보법을 손질하는 데 있어 북한을 이롭게하는 행위 전반을 처벌하던 법 구조를 ‘우리의 안보를 명백히 해치는 행위’에 한정해 처벌하는 구조로 바꾸자는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유엔인권위가 인권규약에 위배된다고 지적하고 있는 ‘찬양·고무죄’ ‘불고지죄’와‘통신·회합죄’ 등은 폐지해야 마땅하고,법 조항의 모호한 용어도 명확히해서 유추·확대해석을 막아야 한다. 정부는 남북환경과 세계의 변화에 발맞춰 국보법을 대폭 손질함으로써 국민의 인권을 한층 더 보장하고 대북 포용정책에도 추진력을 보태기 바란다.
  • [제2공화국과 張勉] (6) 尹潽善과의 갈등(上)/장면·윤보선

    1960년 8월19일 오후 1시24분 ‘張勉총리 인준’투표를 막 끝마친 민의원 본회의장에는 긴장과 흥분이 감돌았다.두번째로 총리 지명을 받은 장면이 인준에 성공해 취임할 것인가,아니면 그마저 실패해 정국이 계속 표류할 것인가. 1시37분 郭尙勳 민의원의장이 결과를 발표했다. “총투표수 225,가(可)에 117,부(否)에 107,기권 1.가가 정족수인 과반수이상이므로 가결된 것을 선포합니다.”4·19가 일어난 지 딱 4개월 만에 민주혁명 수행의 대임(大任)이 장면에게맡겨지는 순간이었다.총리가 된 장면은 곧바로 그를 지명해준 尹潽善대통령을 청와대로 찾아가 취임인사를 한다. 장면과 윤보선의 이날 만남은 유쾌해야 마땅한 자리였다.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한 지 5년 만에 ‘李承晩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정치의 주역이 된 두 사람이었다.같은 당의 오랜 동지인 총리와 대통령은 ‘4·19정신’을현실정치에 구현하고자 서로를 격려하고 협조를 다짐했을 법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는 어색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했다.‘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당 신·구파간 갈등이 앙금으로 짙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4월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진 뒤 정권을 맡을 정치세력으로는 민주당이유일했다.민심도 이를 인정해 7월29일 치른 민의원·참의원(상원)선거에서민주당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민의원 219개 선거구에서 민주당은 무려 172석(78.5%)을 차지했다. 문제는 민주당 신·구파가 우열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팽팽한 의석 분포를이룬 사실이었다.따라서 신·구파 모두 내각책임제에서 국정을 실질적으로책임지는 국무총리를 차지하려고 암투에 들어갔다. 그즈음 민주당 지도층의 면면을 보면 장면이 단연 으뜸이었다.그는 56년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됐고,‘3·15선거’에서는 자유당의 부정 탓에 낙선했지만 민주당의 대표주자였다.게다가 59년 11월부터 당수인 대표최고위원을맡아왔다. 반면 구파쪽은 조병옥 서거 후 명확한 리더가 없었다.당시 구파였던 高興門(국회부의장 역임,98년 작고)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조병옥이 없는 민주당은 곧 신파인 장면의 천하가 될게 분명해 보였다.민주당 내에서 국민적 인기로 보아 그에 맞설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평소 말이 없는 윤보선과 고집이 센 金度演이 있었으나 장면의 맞수는 아니었다.”국민 여론이나 당내 인식이 이같았는데도 구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김도연을 총리로 밀어 두 자리를 독점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그 까닭은 국회 부의장선거에서 표대결로 신파를 누른 적이 있어 자신을 가진 데다 구파 내 세력이 윤보선·김도연으로 양분돼 양쪽을 함께 배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신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추대해 구파에게 일단 한 자리를 준 뒤 총리는 자파의 장면이 차지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8월12일 열린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윤보선은 208표(재석 259명)를 얻어당선된다.이제 관심은 윤대통령이 누구를 총리로 지명할 것인가에 쏠렸다.신파의원들이나 국민 대다수는 ‘설마 구파가 총리까지 차지하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고 구파 내에서도 鄭憲柱·閔寬植의원 같은 이들은 정치 도의를 내세워 독점에 반대했다. 8월16일 윤대통령은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한다.통보를 받은 민의원의장 곽상훈은 장면을 지명하리라는 믿음이 깨지자 즉시 청와대로 쫓아가 항의한다.윤대통령의 해명을 들은 그는 “아마 김도연씨는 안 될거요” 라고 말하고는물러나와 김도연의 총리 인준을 적극 방해한다(회고록에서 발췌). 김도연은 다음날 총리 인준 투표에서 정족수보다 3표 모자라게 득표해 인준에 실패한다.8월18일 윤대통령은 장면을 총리로 2차 지명했고 장면은 다음날 인준을 받는 데 성공한다. 60년 8월 민주당의 선택은 마땅히 장면이어야 했다.그런데도 당내 파벌의 이익을 앞세워 김도연을 1차로 총리 지명하는 바람에 신·구파의 갈등은 깊어졌다. 그렇다고 신·구파 갈등이 장면총리와 윤보선대통령에게 그대로 옮겨갈 이유는 없었다.내각제 하에서 대통령은 당적(黨籍)을 떠나 국내정치에 초연하게끔 자리매김돼 있었다. 하지만 윤대통령은 이후에도 구파의 지도자처럼 행세하며 장면총리와 팽팽한긴장관계를 유지한다.그리고 그 긴장은 정치불안의 주요소로 작용한다. 이용원- 張勉과 尹潽善 장면과 윤보선은 제2공화국의총리와 대통령으로 만날 때까지 외형상 비슷한 삶을 살아온 듯 보인다.둘 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해외유학을 다녀오고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서 차근차근 위상을 높여나간다.그러나 그같은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장면은 인천세관 간부인 張箕彬의 맏아들로 출생해 21살때 카톨릭측의 주선으로 도미,뉴욕 맨해튼대에서 교육학·종교철학 등을 공부한다.귀국해 잠시카톨릭 평양교구 일을 보다 서울 동성상업학교에서 교직을 시작,그 학교 교장으로서 광복을 맞는다. 윤보선은 구한말 중추원 의관을 지낸 尹致昭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다.본인말고도 6촌 이내에 집권당 당의장서리,장관,서울대총장 등 장·차관 이상만 13명이 나온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이다.영국 에든버러대에서 고고학을 배웠다. 둘은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장면만 당선된다.윤보선은 54년 3대 의원 선거때 비로소 국회에 진출한다.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장면은 UN총회 한국수석대표,초대 주미대사,제2대 국무총리를 잇따라 하며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 큰 공을 세운다.이 기간 윤보선은 4대 서울시장,2대 상공장관을 지내지만 각각 재임기간이 1년도 안돼 물러난다. 두 사람은 55년 출범한 민주당에서 한식구가 된다.장면은 처음부터 최고위원 5명 가운데 하나였고 신파의 지도자였다.56년 부통령으로 당선된 데 이어 59년 전당대회때는 대통령후보 경쟁에서 조병옥에게 지지만 대표최고위원 선출에서는 조병옥을 누른다.윤보선은 이 대회에서 조병옥의 구파 몫을 이어받아 처음으로 최고위원이 된다. 60년 8월 제2공화국이 출범할 때까지 정치적인 경력에서 장면은 단연 윤보선을 앞선다.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다른 데 있다. 장면은 삶의 어느 시점에서 무슨 일을 했건 ‘성실하고 근면했다’는 점에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반면 윤보선은 달랐다.이는 66년에 발표한 회고록(‘사실의 전부를 기술하다’에 수록)에서 스스로 밝힌 심경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고밝혔으며,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고 회상했다.심지어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찾은 민원인들로부터 들은 여러가지 하소연 내용을 설명하고는 “이같이 되풀이되는 고통은 하루빨리 청와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굳혀줄 뿐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던 그가 5·16쿠데타 후에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열달 동안 대통령직을유지한다.청와대를 떠난 뒤 반(反)朴正熙 투쟁의 선봉에 서지만 박정희 사후 또 한차례 변신한다.全斗煥정권을 인정하고 87년 대선에서 盧泰愚를 지지한 것이다. 이같은 윤보선의 정치역정을 두고 학자들은 ‘명사(名士)정치’의 한 행태로 풀이한다.劉載一 대전대 정외과교수는 “명사정치의 특징은 시대적 과제를고민하기 보다 권력 획득,품위유지에 더 집중하는 데 있다”면서 “따라서명사 정치인들은 종종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비슷한 궤적을 걸은 듯한 장면과 윤보선의 삶에는 이처럼 본질적인 차이가있었다.이는 제2공화국 붕괴의 책임을 재조명할 때 필히 고려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이용원
  • 李富榮총무 발언 파문 확산

    한나라당 李富榮총무가 연이틀째 金大中대통령을 원색적으로 공개 비난하면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李총무는 12일 구로을지구당 임시대회에서 “DJ정권의 정책혼선,도청 등 반민주적 작태,당 지도부를 민주적으로 뽑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정권 말기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과거 독재정권을 답습,도청과 사찰 등 야만적 정치행태와 말기 독재 증상을 보이는 DJ정권을 심판해야 한다”고 전날에 이어 金대통령을 직접 공격했다.李총무는 앞서 기자들에게 “할말이 많지만 그래도 자제하는 편”이라며 여권의 사과 요구를 일축했다. 이에 국민회의 韓和甲총무는 “살다보면 사람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도 상대해야 되는데 어쩌겠느냐”며 “과거 통추를 하던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던 인사가 李富榮총무”라고 맞불을 놓았다.당내 ‘열린정치포럼’은 성명을 통해 “지난 시절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 李총무의 발언에 큰 충격과 아픔을 느꼈다”며 李총무의 발언 취소와 사과를 요구했다. 국민회의는 그러나 諸전의원의 미망인 申明子씨가이날 “고인의 뜻은 더이상 정치에 있지 않다.고인이 평화롭게 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보도자료를 통해 李총무에게 완곡한 항의의 뜻을 피력한 점을 감안,공식 논평은 내지 않았다. 박찬구 ckpark@
  • 金三雄 칼럼-장면박사 출생100년

    “자기의 명성이 자기의 진실보다 더 빛나지 않는 자는 축복이다”―인도시인 타고르의 말을 올해 출생 100주년을 맞는 제2공화국 張勉총리에게 드리는 헌사로 삼으면 어떨까. 격동의 현대사에서 장면박사처럼 잘못 평가된 정치지도자도 흔치 않다. 그가 이끈 야당과 시민 학생에 의해 타도된 독재자나 합법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한 군사독재자가 ‘존경받는 인물’의 상위를 차지하는 반면 인격적이고도덕적인 품성과 자질로써 ‘단군 이래의 자유’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동시적으로 추진하다 좌절한 민주지도자는 망각되고 있다. 이것은 5·16이래 거듭된 군사쿠데타와 그 아류 정권에 의한 ‘승자의 기록’의 결과이지만, 진실을 탐구하고 가르치는 학자·교사·언론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한국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4월 시민혁명으로 출범한 장면정권은, 프랑스대혁명이 입헌군주주의자와 시민계급, 온건파와 과격파싸움으로 나폴레옹쿠데타를 불러오고, 독일 바이마르 공화정이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로운’사회를 구현한다면서 극좌·극우싸움의 혼돈끝에 히틀러 나치스를 맞았듯이, 집권8개월만에 박정희쿠데타로 붕괴되었다. [인간 장면의 인품] 역사상 대부분의 시민혁명이나 개혁이 쿠데타나 반동세력에 의해 좌절된 것처럼 장면정권 역시 5·16쿠데타를 겪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그는 무능과부패의 상징으로 낙인찍혔으며, 독재자들이 역사인물로 격상되는 가치전도현상이 나타났다. 우리 현대사나 국민정신면에서 대단히 부끄러운 모습이다. 장면박사는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한 분으로 평가된다. 한없이 온후하고 어진 분으로서 인자하면서도 강직하며 사려깊은 분이었다. 외유내강의 독실한신앙인이고 지식인이었다. 그는 ‘각하’의 호칭보다 ‘장박사’로 불리기를 원했으며 집권 8개월 동안‘단군 이래의 자유’로 불릴만큼 민주주의를 허용했다. 물론 무질서와 정치사회적 혼란이 따르기도 했지만 오랜 억압구조에서 시달리던 국민에게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의 처단등 4·19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 너무 미온적이었다는 비판도 따른다. 그러나 독재정권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정권으로서의 시대적 한계와, 민주정치 제도에서 가장 운영이 어렵고 높은 민도와 양식있는 국회의원들을 전제로 하는 의원내각제에 발이 묶여서 과단성있는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제도적 한계도 따랐다. 여기에 야당의 사사건건 발목잡기와 이상주의적 조급성에 기운 혁신계와 일부 지식인·학생들의 급진적 통일론도 장면정권 좌절의 요인으로 지적된다. [재평가와 교훈찾아야] 장면은 비록 군인들에게 탈권당한 비운의 정치인이지만 그가 한국현대사에남긴 족적은 너무 크다. 무엇보다 제3차 유엔총회 한국수석대표로서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 합법정부로 유엔의 승인을 받는데 기여한 일이다. 또 6·25전란 당시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참전을 위해 발휘한 역량도 큰 업적이다. 특히 민주당을 결성하여 이승만정권으로부터 암살 저격까지 받으면서 끝까지 반독재투쟁을 벌인 것이나, 집권기 혼란속에서도 일관되게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고 경제개발계획을 착실히 마련한 것등은 큰 업적이다. 그러나 교과서적 민주주의나 미온적인 시국 대처는 프랑스혁명기와 독일 바이마르공화정 시기처럼 반동세력에게 기회를 주게 되고 결국 역사를 후퇴시킨 행위로서오늘의 김대중정부에도 교훈으로 남는다. 곧 시작될 대한매일의 ‘제2공화국과 장면’연재는 장면박사의 재평가를 통해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고 제2공화국 좌절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자는데 있다.
  • 대한광장-음력 설은 한국에만 있다

    한달 전에 양력 설을 지냈는데 며칠 후에는 또 음력 설을 맞아야 한다.설은 새해가 시작되는 날,1월1일을 가리킨다.그 1월1일은 음력이나 양력이나 생활력의 1월1일을 말한다.음력으로 생활하면 음력 1월1일이고 양력으로 생활하면 양력 1월1일이 설이다. 그런데 우리는 양력으로 생활하면서 음력 첫날을 설이라고 한다.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는가.우리는 원래 음력 설을 지냈는데 일본의 식민통치때 양력으로 고쳤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그래서 1990년이던가.음력으로 설을 뒤집을 때 언론기관에서 우리의 설을 찾았다고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우리의 양력은 1896년부터 실시한 것이다.그래서 그해 연호를 양력을 세운 해라고 해서 ‘건양(建陽)’이라 했다. 일본도 오랫동안 음력을 사용하다가 우리보다 23년 전에 양력으로 고쳤으므로 관습상의 설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 이중과세를 방지하기 위해 양력 설을 강요했던 것이다.그러니까 그것은 식민지적 강요가 아니었다.혹은중국이 음력 설을 쇤다고 할는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중국도 설 즉,원단(元旦)은 양력 1월1일이고,음력 1월1일은 춘철(春節)이라 하여 봄맞이축제로 신명나게 노는 것이다. 우리도 관습을 존중하려면 음력 1월1일을 설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여 노는 것은 몰라도 설이라 일컫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이것이 왜 중요한가하면 생활에서 합리성을 잃으면 올바른 판단력이 서는 풍토가 조성되지 못하기때문이다.새해를 맞았다고 온통 야단을 피우고도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이 설이 아니라니 무슨 궤변인가.1월2일 정부 각 부처에서는 신년인사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새해덕담을 무엇이라 했는지 모르겠다.거기의 신년인사란 무엇인가.그것이 바로 설 인사가아닌가.그런데 신년인사를 나누고 한달 반 뒤에 또 무슨 설이란 말인가.조상 제사는 음력 설에 지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제사를 양력으로 지내면 안될 이유가 있는가.본인은 새해를 맞아 연하장도 보내고 신년인사도 나누면서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에게는 신년인사 즉,설 차례는 왜 미루는가 말이다.윤리로 말해도 불효다. 필자는 정부방침을 거부하고 양력 설에 차례도 지냈다.올해는그렇다 치고내년 21세기를 맞으면서도 새해 1월1일이 설이 아니라고 할는지 궁금하다.21세기 새해맞이를 세배와 차례도 없이 맞으려 하는가.불쌍한 사람들의 불쌍한 나라로다.6공때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약속한 그 약속을 지키기에 앞서 환심을 사려고 설을 뒤집어버린 것을 민주주의 정권이 왜 지키고 있는가.공동정부이기 때문인가? 필자는 당국자들이 설을 뒤집을 때 필자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욕을 퍼부으며 비판하였다.그때도 양력 1월2일을 공휴일에서 제외하려는 음모가 있었다.그런데 어찌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는 국민의 정부 정권이 양력 과세를봉쇄하는 조처를 취하는가 말이다.민주주의는 합리주의에 기초한다는 교과서적 교훈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양력이 생활력이면 양력 과세가 합리적이다.민주주의가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것처럼 큰 덩어리로도 나타나지만,그런 큰 덩어리는 일상생활에서 합리성의 축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모르는가.새해와 설이 다른 그런 사회가 어떻게 합리성을 수립해갈 수 있다는 말인가.백보를 양보해서 양력 1월1일에연휴를 없애도 좋으니 음력 1월1일에 놀고 싶으면 이름을 바꾸어 놀도록 하자.설은 놀든 안 놀든 양력 1월1일이다.
  • 금지문화 금지인생 이제야 말한다(17회)-’해방전후사의 인식’

    역사는 늘 권력을 잡은 자의 기록이 되기 쉽다.권력자는 때로 역사를 왜곡해 왔다.그 결과 세계사의 적지 않은 부분이 정직하지 못한 역사로 얼룩져있다.한국의 현대사도 독재권력에 의해 왜곡됐다.그러나 엄혹한 독재상황에서도 민족의 일그러진 역사현실을 극복해 보려는 의식있는 지식인들의 행동은 끊이지 않았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을 낸 것도 진실을 밝혀 역사의 시계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데 작은 동력이 되고자 하는 시도였다.송건호 선생 등 12명이 쓴 이 책은 1979년 10월 15일 한길사에서 펴냈다.당시 시대상황에서 이러한 책을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독재권력은 해방후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했다.그러나 어려운 시대의 어둠을 논리적으로 밝히는 일이 필요했다.올바른 역사를 기록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을 내기로 했다”고 그 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송건호 선생은 ‘8·15의 민족사적 인식’이라는 글에서 분단의 비극을 안타까와 했다.민족의 비극이분단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분단의 현실은 극복의 대상이었다.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남북갈등과 막강한군사력의 대립으로 언제 또 6·25보다 더 파괴적인 동족상잔이 빚어질지 모르는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민주주의는 시련을 겪고 민족의 에너지는 새로운 군사력을 위해 소모 되고 있는 암담한 상황이 이른바 해방된 이 민족의 현실이다”. 그는 친일파가 다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는 부끄러운 현실과 분단을 권력유지에 이용하는 독재권력을 비판했다.“친일파 사대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애국자를 짓밟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분단의 영구화를 획책하여 민족의 비극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는 또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민족의 참된 자주성은 광범한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때에만 실현되며 바로 이러한 여건하에서만 민주주의는 꽃피는 것”이라며 대중이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송건호 선생의 글을 비롯한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은 해방후 역사현실을 식민사관이나 독재권력의 ‘분단고착화’ 시각으로 보지 않고 분단을 악용하는독재권력,친일파 숙청작업의 좌절 등 해방전후의 역사적 사실과 그 전개과정을 사실적으로 썼다.그것은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역사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이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세상에 나올 때는 유신독재가 말기현상으로 사회적 긴장과 불안을 고조시키며 비극적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던 상황이었다.책이 나온 다음날 부마사태가 터졌다.유신정권의 억압이 한계상황에 도달한 것이다.불안한 긴장 속에 책은 빠르게 팔려나갔다.열흘만에 초판 5,000부중 4,500부가 팔렸다.사회과학서적이 그것도 500쪽이 넘는 책이 이처럼 폭발적으로 팔린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유신독재가 10월26일 궁정동의 총성으로 비극적인 막을 내리며 이책도 비운을 맞았다.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출판물이 군의 검열을 받게됐다.당연히 군 당국은 이 책을 판매금지시켰다. 김언호 대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79년 10월 28일 문공부로호출됐다.‘당신을 구속해야 하지만 처음이니까 관용을베풀겠소.다시는 이런 책 내지 마시오’라고 계엄사에서 파견된 한 문관이 말했다”. 판매금지 사유는 현실 왜곡·부정이었다.그러나 현실을 왜곡한 것은 책이아니라 독재권력이었다.역사를 제대로 보자는 책을 현실 왜곡·부정이라는억지 이유로 ‘금서’로 규정하는 현실은 일그러진 현대사의 부끄러운 한 단면이었다. 이 책은 80년 ‘서울의 봄’이라는 짧은 민주주의 실험때 판매금지에서 해제됐다.민주주의 실험은 강경 군부의 등장으로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냈다.그러나 ‘광주의 비극’과 그 이후의 민주화투쟁은 민주주의라는 찬란한 결실을 맺었다.80년대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이 책은 대학생들이 올바른 역사인식에 눈을 뜨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많은 대학생들이 이 책을 찾았다.베스트셀러가 됐다.80년대 30만부나 팔렸다”고 김언호 대표는 말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1970년대는 민족적 자각이 지식인 사회에서 크게 고양되는 시대였다.깨어있는 지식인들은 한반도의 모든 비극의 근원적 원인은 민족의 분단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분단현실은 남북의 군사대결로 우리 민족의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들었다.친일파들은 반공이데올기라는 가면을 쓰고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복귀했다.친일파와 기회주의자들이 활개치는 현상은 민족의 양심을 파괴하고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왔다.독재권력은 분단을 권력유지에 악용했다.독재로 민주주의는 꽃피지 못했다.의식있는 지식인들은 친일파와 독재권력이 이러한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것을 분단으로 합리화하려 했다고 비판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책이라고 할수 있다.독재정권은 집권동안 이러한 역사인식을 박제하여 낡은 역사의 창고에 강제로 묻어두려 했다. 그러나 독재권력도 무너지고 그들이 왜곡했던 역사의 진실도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한 때 판매금지됐던 ‘해방전후사의 인식’도 해방전후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었다. 한 시대를 올바르게 정리해야 그 이후의 역사도 정직하게 씌여진다.정직한역사를 통해 역사의 시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 국정홍보 과소평가-여론 어떤가

    국정홍보 기능은 크게 국내와 해외로 나뉜다.국내 국정홍보는 국무총리 직속의 공보실이,해외 국정홍보는 문화관광부의 해외문화홍보원이 맡고 있다.그러나 국내외를 막론하고 국정홍보기능은 지나치게 평가절하되어 있다는 것이 정부 안팎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과거 공보처는 다른 부처보다 한 차원 높은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그만큼 국정홍보 기능이 권위를 유지하고 있었다.그러나 현재 정부안에는 이 기능을 맡고 있는 부처는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공보실의 경우 국정홍보와 총리공보관으로서의 기능이 혼재해 어느쪽이 먼저인지 잘 알 수 없이 운영되고 있다는 지적이 무성하다.국정홍보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국정홍보와 총리 공보 기능이 분리돼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새정부는 ‘공보처 폐지’를 지난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공보처는 권위주의 정권의 필요악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그러나 지난 1년 동안정권을 운영하다 보니 국정홍보는 정권의 정통성과는 관계없이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기능이라는 인식이 자리를잡은 것 같다. 해외 국정홍보는 해외홍보문화원이 맡고 있다.홍보문화원은 지난해 제1차정부조직개편 당시 공보처에 있던 해외공보관이 문화부에 통폐합되면서 신설됐다.해외문화홍보원 업무의 주축은 해외주재관에 의한 국가 및 문화 홍보와 국내 주재 외국특파원에 대한 공보 기능이다.그러나 해외주재관의 국가홍보 기능이 취약해지면서 한국에 비판적인 언론보도에 대한 교정기능도 함께 약화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한 관계자는 “국가의 이익을 지키는 것은 권위주의 시대는 물론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국정 홍보기능은 더욱 문제가 크다.국내 국정홍보는 사실 언론사들 사이의 기존의 취재관행을 무시할 수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정부는 이같은 관행에 대한 무지로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었던 것이 사실이다.대표적인 경우가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이다.제2건국은 새정부의 역점사업인데도출범 초기 홍보창구를 제대로 정하지 못해 혼선을 빚기도 했다.제 2건국 운동이 출범 초기 언론의 대대적인 비판에 직면했던것은 여기에 한 이유가 있다. 과거 권위주위 정권때처럼 언론을 조종하고 독재정권을 대변하는 조직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국정 홍보기능을 현재보다는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지배적이다.조직의 크기는 지금처럼 유지하더라도 해외 국정홍보와 국내 국정홍보를 연결하고,각 부처와 긴밀한 협조가 가능하도록 상위기관 소속을 바꾸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기고-‘법조개혁’ 국민이 나설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다.그런데 여기에 덧붙여서 ‘법은멀고 돈만 판친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요즘이다.이번 대전 법조비리사건을 반성하는 뜻에서 대법원장은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원생들에게 ‘법률상인’이 되지 말라고 했지만,문제는 ‘법비(法匪:법을 악용하는 도적)’가 되니까 문제이다.변호사가 아무리 사회정의와 인권의 수호를 내세워도 넓은 의미의 장사인 것은 틀림없다.장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얼마나 공정한 장사를 하는가가 문제다. 이번 대전 법조비리사건은 의정부사건이 있은지 얼마 안돼 터져서 충격도크다.그렇지만 알만한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다.1993년 김영삼정권 당시 사법개혁을 한다고 요란스러웠다.그 당시도 ‘전관예우’가 문제되고,문턱높고 패쇄적인 사법부의 권위주의와 관료주의 및 법조인맥의 연고-파벌주의가 문제로 떠올랐다. 사법제도와 관련되어 일어나는 모순과 부조리는 그 특수 패쇄사회 속의 오랜 폐습에 서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밖에선 알기도 어렵고,또 알아도 당장어쩌지 못해왔다.더욱이 그 제도나,그 운영주체인 전문직종의 법조인은 일제하로부터 특수한 분위기 속에서 육성되어 왔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건국을 맞아 세상이 바뀌어도 일제하에 생긴 일부 전통과 관례를 철벽으로 고수하는데 성공해온 특정 전문직종의 엘리트 계층이다.그래서 사법제도에는 일제 잔재도 많이 있다.그중에서 관료주의,연고주의와 선후배의 서열에 따른 의리관계 및 특권직종으로서 폐쇄주의의 독특한 세계를 이루어 왔다. 한편 법조인이 독재에 항거하고 사회에 소금역할을 해온 사회 기여와 인권수호의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그런데 독재정권의 법기술자로 전락한 일부 법조가 실세화되면서 법조 분위기는 일각으로부터 급속도로 변질된 것도 사실이다.정의고 사명이고,별볼일 없다는 분위기를 부채질한 것은 독재하 법기술자들의 출세이고 그들에게 주어진 황금방석의 보장이었다.최고법원의 법관을 역임한 자가 대기업을 위해 상고이유서를 한장 써주고 얼마의 수임료를 받았다는 말이 나돌아도 그럴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수긍하는 딱한 세상이 된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까? 법을 믿지 못한 지는 오래다.그러나 이번 사건에서처럼 서민이 법을 전면적으로 불신하고,법치란 제도에 대해 허무해한 적도 없을 것이다.서민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무법자인 ‘마피아’의 그늘에라도 들어가야 살아 남는다.그러한 서민을 비웃을 수만 없다.그러한 무법사태의 종결을 위해 우리는 자구적 차원에서 일대 결단을 내려야 한다.문제 당사자인 법원,검찰 및 변호사회 등 3주체는 각기 자기 나름으로 공정엄정하게 처리하라.시간을 더 이상 끌다간 마지막 기회마저 놓친다.다음에국회는 국정조사권을 응당 발동,진상 규명과 대안 제시를 해야 한다.그런데지금 국회가 돌아가는 꼴을 봐선 당장에 기대할 수 없다.그러니 정당은 국회와 사정이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나름대로 정책을 제안하는 등 애를 써라.결국 시민 사회단체가 나서서 진상을 따지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이 나서는 것이다.시민단체를 통하든,개개인으로서든 법을 지키는 온갖 방책을 강구하도록 공개요구,감시,비판,규탄,대안 제시 등을 해야 한다.결국 피해자는 누구인가? 우리 국민이다.그리고누구의 사법제도인가? 국민의 것인데 이토록 국민을 배반하는 지경에 이른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이번 기회에 사법과정에 얽힌 부패 먹이사슬의 연결고리인 연고주의에 서식하는 정실과 뇌물구조를 부숴버리는 것을 비롯해 철저히 개혁해야 한다.1993년 개혁 드라이브의 헛바퀴 돌리기가 되풀이된다면 우리 장래는 암담하다.서민이 지금 얼마나 분개하고 죄절해 가슴을 치고 피를 토하고 있는지 아는가?
  • 鍾哲이가 그리던 세상은 언제…

    “정권이 바뀌고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지만 종철이가 그리던 세상은 아직오지 않았습니다.” 14일 오후 3시 서울대 인문대 ‘박종철 기념비’ 앞. 지난 87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끝에 숨진 朴鍾哲씨(당시 23세)의 12주기 추모식이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다. 잿빛으로 흐린 날씨 속에 열린 추모식에는 아버지 朴正基씨(71)를 비롯,87년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李韓烈씨의 어머니 裵恩深씨(민족민주열사유가족협의회장),金勝勳신부(60·기념사업회장),白泰雄씨(36·전 서울대 총학생회장) 등 200여명의 추모객들이 참석했다. 아버지 朴씨는 추모제를 알리는 검정색 플래카드 사이로 아들의 흉상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글썽였다. “종철이가 떠난 지가 벌써 12년이 지났지만 당시 그 기막힌 심정은 변하지 않는다”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새 정부가 출범한 뒤 첫번째로 열린 추모제였지만 아쉬움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金신부는 “우리가 바라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지만 역대 독재정권 아래서 자행된 의문사와 이들의명예회복 등의 조치는 아직도 취해지고 있지 않다”면서 “朴鍾哲열사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은 아직도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특사로 풀려난 白씨는 “朴鍾哲열사는 ‘대학문화연구회’ 후배로 누구보다 열정적인 꿈을 가진 청년이었다”고 회상하고 “이제 독재정권의 암흑에서 벗어난 만큼 장기수 문제 등 우리의 인권상황과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이 하루빨리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40여분 남짓한 추모식이 끝나자 朴鍾哲씨를 위한 추모곡 ‘그날이 오면’이 쓸쓸한 기념비 사이로 메아리쳤다.
  • 고문후유증 치료전문가 잉게 게네프케

    고문 치료에도 전문의가 있다는 걸 아십니까.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11일 99년 ‘올해의 유럽인’으로 선정·발표한 덴마크의 잉게 게네프케는 고문치료를 의학의 한 이슈로 자리매김케 한 의사.전세계 100여곳에 그가 세운 치료센터에서 수만명의 고문 희생자들이 악몽없는 잠자리를 되찾았다. 유복한 중산층 출신의 촉망받던 신경과 전문의 게네프케가 고문치료라는 미증유 분야에 눈뜬 건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청원으로 그리스 독재정권정치범 진찰을 맡으면서부터.잔인하고 교묘한 고문수법에 치를 떨던 게네프케는 고문 후유증 및 치료를 위한 연구가 꼭 필요함을 절감하고 매달리기 시작한다. 그가 최초의 고문 치료 전문클리닉을 문 연 79년 무렵만 해도 고문을 일부미개국가의 전유물로 여기는 무지가 팽배했다.하지만 아시아,아프리카,동유럽,남미 등에 고문클리닉 지부들이 속속 생겨나자 세계는 문명화의 한가운데서 얼마나 잔인한 야만이 날뛰는지 목도하게 됐다. 게네프케는 노벨 평화상 단골 후보다.하지만 어느덧 신변 안전 문제로 혼자 여행을 다니지 못할 처지가 됐다. 고문 피해 가운데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는 사실이라고 못박는 게네프케.그는 날로 늘어나는 고문 피해자 앞에서 “때때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힘들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여사는 선행의 공적이 자기 개인에게 모아지는 것을 우려해 나이는 물론 자신의 신상에 관한 일체의 정보를 밝히지 않는다. 孫靜淑jssohn@daehanmail.com
  • [동서를 껴안고 통일로 가자 2]-지역할거주의 타파

    지역감정이 위험수위를 넘어섰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선거철만 되면 전국이 동·서·남·북으로 분열돼 한바탕 홍역을 치른다. “우리 지역사람을 뽑아야 차별을 안 받는다”,“236236도 사람이 당선되면 큰일난다”는 등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이 공공연하게 난무한다. 지역감정이 선거에 미치는 가장 큰 부작용은 유권자들의 합리적인 선택을가로막는다는 사실이다.능력보다는 출신지역을 기준으로 당선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이로 인한 피해는 유권자인 국민에게 돌아간다.하지만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의 선동에 휩쓸려 이같은 악순환은 늘상 반복된다. 지난해 치러진 6·4지방선거는 61년 이후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했다.서울 등 대도시는 투표율이 50%를 밑돌았다. 정치판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이 선거 자체를 외면했기 때문이다.당연히 뿌리깊은 지역감정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역사적으로 따진다면 지역주의의 뿌리는 깊고도 깊다.오늘날 문제가 되고있는 영·호남 대립은 3공화국 때 朴正熙 당시 대통령이 박빙의 승부 상황에서 金大中후보를 꺾기 위해 지역감정에 호소하면서 표면화됐다.그럼에도 87년의 ‘6·29선언’ 전까지만 해도 ‘민주 대 반민주’라는 또 다른 구도가두드러졌기 때문에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87년 대선을 기점으로 지역주의가 심화되면서 지역감정은 정책이나이념까지도 능가하는 판단기준으로 자리잡게 됐다.문제는 지역감정에 뿌리를 둔 지역할거주의가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까지도 전혀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역감정을 타파하려면 지역감정의 전제조건인 지역차별의식부터 타파해야한다.기업체,정부 등 모든 부문에서 공정한 인사관행이 자리잡아야 한다.또시민단체의 적극적인 감시활동이 있어야 한다. 경실련 河勝彰정책실장(39)은 “지역감정을 볼모로 생존해온 정치인들을 선거로 심판하겠다는 공감대부터 형성돼야 한다”면서 “따라서 정치인들을 탓하기에 앞서 지역성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국민의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YMCA 시민사회개발부 李允熙간사(31)는 “지역감정의 뿌리가 워낙 깊어 쉽게 치유되지는 않겠지만 선거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평소에도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발언으로 지역정서에 기대는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시민단체가 앞장서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충남대 정외과 趙燦來교수(45)는 “지역에 기반을 둔 정치구조가 나쁘다기보다는 이를 악용하는 정치인이 문제”라면서 “정치인들이 지역감정을 악용할 수 없도록 유권자들의 의식개혁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정외과 李信行교수(56)는 “지역감정을 정치에 이용하는 것은 정치집단이 정치적 자원을 창조적으로 생산할 능력이 없다는 의미“라면서 “정치집단마다 정체성(Agenda)을 확고히 정립함으로써 지역이 아닌 정책으로 유권자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연세대 사회학과 宋復교수(61)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역감정 해소를 외쳤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심화시켰다”면서 “지역감정을 없애려면 정치인의 지역감정 조장발언이 무색해지도록 지역정서에 무관심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가 하면 지역을 기반으로하는 기존의 정치틀을 새롭게 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지역구도가 아닌 개혁­보수의 이념대결이라든가,정책내용 면에서의 대결구도 등으로 정치판을 정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도적으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정치개혁시민연대 孫鳳淑공동대표(55)는 “전국단위로 하든,권역별 단위로하든,정당명부제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면서 “영·호남을 넘나드는 방식으로 정치인 선출방식을 바꾸면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정치인도 사라지게 될것”이라고 말했다. 공동문화 행사 개최 등 지역간의 경제 및 문화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것도지역감정 해소에 도움이 된다.영·호남,충청권 등 권역별로 주민들이 함께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각별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전문가 진단-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외교학/정당명부제·중선거구제 도입 지역격차와 지역감정은 엄연하게 구분돼야 한다.지역격차는 일제 때 시작됐다.영남위주의 개발정책으로 영·호남의 격차가 벌어졌으며,이런 지역격차를 정치집단이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이 지역감정이다.71년 대선에서 朴正熙 전 대통령이 당시 金大中후보를 누르기 위해 사용하면서 표면화됐다. 지역감정은 특히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때 심화됐으며 87년 민주화투쟁 이후 범국민적으로 확산됐다.다만 독재정권의 폭압으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이다.민주화투쟁에 따른 ‘6·29 선언’도 지역감정을 이용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그후의 정치판 구도도 지역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90년 3당합당은 지역감정을 정치에 이용하겠다는 극명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게다가 金泳三 전 대통령이 집권에 성공함으로써 지역감정을 이용하면 득이 된다는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됐다. 지역감정을 타파하려면 먼저 정치구조부터 바꾸어야 한다.이 때문에 정당명부제의 도입은 필요하다.선거구를 중선거구 이상으로 조정하고 나머지는 정당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이렇게 돼야만 전라도에서경상도 출신의원이 나올 수 있다.다만 당의 총수가 마음대로 명부제의 순번을 정하면 안된다.당내 민주화는 선결요건이다.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도 고려해 볼 수 있다.말하자면 도(道)를 없애고 일본처럼 현단위로 행정구역을 구분하는 방식을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의식의 문제도 고려돼야 하지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있다.여론을 호도하려 한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도가 바뀌면 의식개혁은 필수적으로 뒤따른다.좋은 제도로 바꿈으로써 의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권력구조 측면에서 내각제는 지역할거주의를 타파할 수 없다.3金이 사라지면 지역감정도 약화될 가능성이 있는 게 사실이다.그러나 내각제를 실시하면 여전히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세력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려 들 것이라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 대한광장-200년만의 도약

    힘겨운 1998년은 가고 1999년의 새해가 밝았다.새해는 20세기를 마감하는 해이다.그리고 민주화의 개혁을 정착시켜야 하는 해이다.지난해에는 경제파탄을 수습하느라고 민주화 개혁은 문제 제기나 부분적인 것에 그쳤다.이제는농업협동조합을 농민에게 돌린다든지,유신체제의 산물들을 개폐한다든지,본질적으로 인간주의를 고양할 민주화 개혁을 정말 구조적으로 정착시킬 차례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인간을 발견하고 인간을 위한 근대적 개혁을 시도했던 것은 18세기 조선후기의 개혁에서 비롯되었다.그때 사회경제적 변동이나 실학이 대두했듯이 괄목할 변화와 개혁이 추진되었다.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정확히 말해서 1801년부터 보수적 반동인 세도정치가 등장하여 봉쇄 당하고 말았다.그후 각종 개혁운동 및 계몽운동으로 새롭게 시도되었으나 결국에는 일제의 침략으로 짓밟히고 말았다.독립운동을 통하여 다시 근대화를 일으켜 역량을 성장시키기는 했으나 자갈길의 달구지처럼 한계가 많았다. 독립운동을 계승한 해방후의 개혁운동은 미·소의 군사점령과남북분단,그리고 6·25남북전쟁으로 난도질 당하고 그 위에 남북 공히 왕조시대를 방불할 독재정권을 맞아 갈기갈기 찢기고 말았다.남한에서 4·19혁명으로 극적인 전환을 보는듯 하였으나 군사정권의 엄습으로 또 파탄의 운명을 맞아야 했다.하지만 민주화의 물줄기는 흩어지는가 하면 모이고,숨는가 하면 솟아올라 대하(大河)를 이루는 법,사라질수는 없었다. 4·19정신이 운명을 다한 것 같았지만 다시 솟아올라 60년대의 6·3항쟁과3선개헌 반대투쟁,70년대의 유신 반대투쟁과 부마민중항쟁,80년대의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으로 발전하면서 이 땅에 민주주의의 줄기찬 전통을 심었다.세계에서 드물게 보는 아래로부터 민주화를 달성한 전통인 것이다.그것은 처절한 희생의 대가였지만,처절하고 숨막히는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오늘의 민주주의를 쟁취하였다.위로부터 민주화를 이룩한 이웃나라들에 비하면얼마나 자랑스러운 한국현대사인가? 그렇게 보면 1801년부터 지금까지,200년래의 과제였던 개혁을 오늘 우리가달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21세기를 맞는 세계인의 자세이고 21세기우리의 최대과제인 통일을 준비하는 채비이다.다만 공동정부로 말미암아 보수화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어 마음에 걸린다.민주화의 용광로를 믿는다.98정권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불을 지펴라.국민이 93년에 김영삼을 택하고 98년에 김대중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의 독단과 카리스마적 매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개혁의 창조자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93정권은 가시적 개혁을 이루고도 군사정권의 핵심적 독버섯을 도려내지 못하여 그 독에 감염돼 경제파탄에 이르고 말았다.그 독버섯이란 정경유착과 군사독재를 비호하던 권위조직들의 발호였다.그렇다면 98정권은 정경유착을 분쇄하면서 모든 사회조직을 점검하여 교수들의 모임도,의사·변호사·세무사·관료·농민들의 모임도 뒤집을 것은 뒤집어라.부정부패의 온상도거기에 있다.바로 그러한 개혁이 1999년의 정의이다.앞을 가로막고 있는 통일의 길도 더욱 훤하게 열어 젖히면서 말이다.기묘년의 토끼처럼 민첩하게뛰자.그리하여 ‘200년만의 도약’이란 영광을 안지 않으려는가?
  • 나아갈 길-버려야 할 국민성, 세워야 할 참가치

    [姜 萬 吉]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경남 마산·65세 ●고려대 사학과졸·문학박사 ●고려대 중앙도서관장 ●월간 ‘사회평론’발행인 ●주요 저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한국민족운동사론’ ‘통일운동시대 의 역사인식’ 절충하고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나는 그것을 수렴이라고 부릅니다.우월성 으로 통일의 기반을 삼는 견해는 우려스럽고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姜교수 통일문제는 한반도에서만 유일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냉전구 도는 다 무너졌는데 한반도에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역사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지정학적 위치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력통일이나 독일식 흡수통일이 지정학적 으로 어렵다는 점입니다.한마디로 남북이 대등한 위치에서 평화통일 방법론 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국민의 정부는 이 점에서 방향은 옳게 잡고 있습니 다.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말고 서해안에 간첩선이 출몰하더라도 왜 동해안 에서 금강산 유람선이 뜰 수밖에 없는지,그리고 왜 흡수통일이 아닌 평화통 일이 이뤄져야하는 지를 국민에게 분명하게 설명해 줘야 합니다. ●李교수 남한사회에서는 북한은 모든 것이 이질화됐다고 말합니다.남한의 거울에 비춰 같지 않은 것은 이질화라고 봅니다.그러면 남한은 이질화되지 않았는지 남한 자체를 객체화시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姜교수 지역대결 문제에도 역사적 원인이 있습니다.일제는 한반도 강점을 쉽게 하기 위해서 분열 요인이 별로 없는 우리를 두가지로 분열시켰습니다. 하나는 계급적 차이를 이용한 것이고,다른 하나가 지역갈등 문제였습니다.일 본이 지역갈등의 씨앗을 심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후 해방이 되면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분출되면서 지역문제는 그다지 불 거지지 않았지만,일본군 출신의 朴正熙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악용하기 시 작했습니다.정통성없는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역대립을 조장한 것입니다.그같은 지역대립조장의 결과가 절정에 이른 게 광주민주항쟁이었습 니다만,문민정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고질화돼 있는 형편입니다.최근에 겪은 하나의 어이없는 사례를 들겠습니다.제고향(마산)에서 한 관리가 부정 을 저질러 막상 사법처리되자,부정한 사실 그 자체는 간 곳 없어지면서 아무 개 정권이 우리 지역을 탄압하고 있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부패 관 리 징치보다 지역감정이 우선하는 이런 일이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지역감정 문제 해결은 과거 피해를 입었던 쪽이 정권 차원에서 이것을 푸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봅니다.과거 정권의 틀을 벗어나 모든 부문에서 공정하 게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젊은 층이 지역감정이 희박하다는 점입니다.동서문제는 젊은 층이 민주사회의 주인으로 자리잡으면서 자연히 해소될 것으로 여겨집 니다.기성세대 중에서도 양심적 지식인들이 시민운동을 통해서 지역대립 문 제를 풀어가는 적극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李교수 남한사회의 지역 대립은 근대사회 들어 사회에서 피해적 존재를 만 들어내기 위한 파쇼의 통치전략입니다.19세기 말과 20세기초 독일,폴란드 등 에서 이같은 일이 일어났는데,이 과정에서 600만여명의 유태인이 나치에 학 살당했습니다.유태인은 유럽에 동화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그러나 파쇼 집단은 백인 부르주아사회의 반인간성을 유태인에 투영시켰습니다.유태 인으로 하여금 사회적 카타르시스의 역할을 하도록 강요한 것입니다.이같은 원리와 전략이 朴정권에 의해 호남에 적용됐습니다. 나는 철이 든 나이로 일제시대를 살아 잘 아는데,일제시대에는 지역 차별이 없었습니다.해방 뒤와 민주당 정권 때도 지역 차이 없이 정당을 구성했습니 다.지역 차별은 71년 대통선거를 계기로 구조화된 것이 분명합니다.유럽 파 시스트체제 생성과정의 유태인의 존재를 호남에서 찾은 것이지요.●姜교수 역사 교육 쪽으로 화제를 돌려보지요.현대사 교육을 제도교육 쪽에서 보더라 도 지금 2가지 문제가 잘못됐습니다.중·고 국사 교과서가 아직도 朴정권 때 결정했던 그대로 국정교과서 상태로 남아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사실입니다. 이래선 일본에 역사교육이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곤란할 지경입니다. 그중 국사교과서에서 현대사 부분이 대단히 약합니다.정권의 정당성 문제에 대한 서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남북대립적 입장에서 주로 역사를 기술하다 보니 남북화해적 교과 내용이 없습니다.통일된 독일의 경우 옛날 서독 교과 서를 동독지역에서 그대로 쓰고 있어도 문제가 안될 정도입니다.그만큼 객관 적으로 썼다는 얘깁니다.남북의 역사 교과서가 해방 이후 천양지차로 서술돼 있습니다만 민족 화해적인 내용이 더 크게 부각되도록 방향을 잡아가야 합 니다. ●李교수 역사교육의 잘못은 원죄에 속하는 부분이 있습니다.그리고 원죄는 해방 직후 일제 잔재를 토대로 한 새 국가 건설에서 출발합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45∼48년 군사정부를 만들어 통치하면서 일제시대 독 립운동가,혁명가,애국지사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친일 반역행위를 한 개 인을 모아 요직에 배치했습니다.그리고 李承晩정부가 그것을 이어 12년간 통 치했습니다.李承晩 개인은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지만 그 정권은 친일 반역자 에 업혀 새 국가를 건설하고 통치한 추악스러운 정권입니다.정부 수립 직후 반민특위법을 만들었지만 한 명도처단하지 못하고 거꾸로 애국지사가 처단 됐습니다.그래서 이같은 사실들이 국정교과서에 들어가지 못하고,또 ‘국정 ’으로 교과서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朴正熙는 제 발로 일본군에 입대해 천황에게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 나라의 국정교과서가 어떻게 진실을 기술할 수 있겠습니까.朴正熙는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지성의 요구를 반공(反共)이라는 적대적 긴장을 조성해서 무마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늦었지만 교육을 다시 해야 합니다. ●姜교수 역사교과서를 국사편찬위에서 국정교과서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민 주주의 국가에서 어불성설이고 창피한 일이지요. ●李교수 21세기는 스스로 승리했다는 자본주의 안에 사회적,도덕적,인간적 가치를 재생시켜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나는 자본주의는 절반만 승리 하고 절반은 패배했다고 생각합니다.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는 끝났다” 고 말했지만 나는 21세기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고 봅니다.IMF는 자본 주의의 발작이자 경련입니다. ●姜교수 20세기에서 자본주의가 살아남게 된 것은 이른바 ‘케인스 혁명’ 이후 사회주의에 약간의 양보를 했기 때문입니다.케인스의 신이론에 따라 자 본주의가 계획경제의 장점을 일부 받아들인 것입니다.반면 국가사회주의는 7 0년대를 지나면서 무너져갔습니다.이제 21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신자유 주의가 풍미하면서 각종 비인간적인 측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그러나 신자 유주의 체제하에서 비인간적인 사회적 상황이 점점 확대되면서 새로운 (경제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려는 노력도 더욱 적극화될 것으로 보입니다.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21세기에는 그런 새로운 것을 찾아낼 것입니다.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그런 일에 당연히 관심을 가져 야 하며,그렇게 되기 위해선 우리 정치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남다른 역사의 식을 가져야 합니다. ●李교수 여기서 올바른 언론의 자세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미국 수정헌법 1조는 “의회는 종교,언론자유(Freedom of Speech),출판(Pres s),집회,청원권을 제한하는 법을 제정할 수 없다”고규정하고 있습니다.이 는 오늘날 세계의 모든 문명국가가 헌법 전문에 규정하고 있는 문명사회의 원칙으로,호치민의 북베트남 헌법에도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서열에서 출판의 자유가 언론의 자유 다음이라는 것입니다.언론의 자유는 시민과 개인은 무엇이든 책임질 수 있는 범위에서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뜻합니다.또 언론기관보다 개인의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고 존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것이 언론기관의 자유로 둔갑돼 있습니다. ●姜교수 崔章集교수 문제가 일어나는 과정을 보고 참 불쾌했습니다.한 학자 가 자기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연구,이론구성을 해놓은 것을 가지고 언론 이 즉흥적으로 평가,시비를 거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학술적 결과 물은 학계 내에서 소화하거나 비판해야 합니다.어떤 이유에서건 학자를 걸고 넘어져 학문을 어렵게 하는 것은 언론기관이 할 일이 아닙니다. ●李교수 우리는 역대 개발독재정권이 경제 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그동안 쌓 아온,권력집단의 노획물 같이 수탈할 수 있었던 가치구조와 관습 등 모든 면 을 수술해야 합니다.毛澤東정권이 제도를 혁명적으로 바꾸고 鄧小平이 모든 체제를 바꿨던 예를 본받아 혁명적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우리 국민은 타 락하고 부패한 지도자 밑에서도 뭔가를 이뤄냈습니다.하물며 새 지도자 밑에 서 혁명하는 마음가짐으로 해 나가면 무엇이든 이루어내지 않겠습니까. ●姜교수 12월31일과 1월1일의 24시간은 다를 게 없는데도 굳이 구분하는 것 은 마음을 새로이 하자는 뜻일 것입니다.(시간의 흐름 위에서)마디를 만들어 새롭게 다짐하면 그것이 역사를 바꿔나가는 일이기도 하겠죠.앞서 언급했듯 이 국민의 정부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정통성을 갖는 정권입니다.새 정부는 올해 역사적 전환점에서 서서 이 정권의 성립 기반을 다시 돌아보고 이를 확실히 정착시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기성세대가 가진 역사관을 젊은이들이 다시 이어가게 하면 그 민족 은 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젊은이들의 역사관이 기성세대와 달라야 그 민족사회가 전진할 수 있습니다.기성세대들은 이 점을 인식하면서 젊은 층과 부딪쳐야 조화가 서로 이뤄질 것입니다. 나는 통일을 과정으로 보지 결과로 보지 않습니다.열매를 따려면 나무에 올 라가야 하고,첫 발을 내디디면 두번째 발을 옮기고,그러다가 가시에 찔리기 도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과 같은 통치체제,또는 이념이나 인민의 자유,권리,창의력을 당이 독점 하는 흘러간 공산주의식 체제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그렇다고 남한식으로 통 일의 기틀을 잡는 것도 찬동할 수 없습니다.남한도 해방 후 반세기 동안 친 일파,범죄,부패,타락,잔인성,비인간성,빈부 차이,자본주의가 가지는 주기적 경기변동으로 인한 인간의 재난과 불행 등을 청산하면서 새로운 국가를 지향 해야 한다고 봅니다.우리는 물신주의(物神主義)에 빠져서 인간 위에 돈이 있 고,모든 가치 위에 돈이 있다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돈을 소유하기 위해 인간의 이기심을 전면적·극단적으로 발동시켜 생산을 극대화시킨 것이 우리 사회의 우월성입니다.그런데 그것은 인간 파괴를 가져옵니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민주열사 열전(20회)

    민주열사열전 시리즈가 20회로 막을 내린다.어두웠던 시대에 조국 민주화를 위해 치열하고 고단한 싸움을 벌이다 생을 마감한 이들의 진실은 무엇이었을 까.그들은 굴절된 현대사에서 희망의 빛이었고 그들의 희생적 투쟁이 밀알이 되어 오늘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그들의 진실 밝히기가 현재와 미래를 더 욱 의미있게 하기 위한 과거의 재창조 행위라는 인식에서 시리즈를 이어갔다 .그동안 독재정권에 의해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났던 이들을 제자리로 돌려야 한다는 작은 소망의 표현이기도 했다.시리즈를 마무리하며 그 의미와 성과 를 짚어보는 좌담을 마련한다.가톨릭대 安秉旭교수와 李相勳변호사,전국민족 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金學喆사무국장,대한매일 金三雄주필이 자리를 같이했다. 金三雄주필:8월7일 장준하선생편을 첫 회로 시작된 시리즈가 5개월만에 마 무리하게 됐습니다.제도언론 매체로서는 처음으로 반독재투쟁에 몸을 불사른 인물들의 행적과 사상,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역사적 의미,유족과 동지들의 근황 등을 총체적으로 담는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安秉旭교수:언론뿐만이 아니라 유관단체를 포함해서도 처음이라고 봅니다. 민주화투쟁을 하다 희생된 분들의 증거로 그분들의 업적은 중요합니다.이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뒤늦은 감은 있지만 대한매일이 어려운 여건 에서 이러한 작업을 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金學喆국장:이번 시리즈는 하나의 사변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진실이 뒤집어진 상태에서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과감히 밝힌 것이 언론 계의 ‘사변적 사건’이란 의미입니다. 李相勳변호사:한 건의 의문사를 해결한 것만큼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시리즈는 과거 군사독재에 의해 저질러진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법 률 제정 등에 가장 강력한 압력수단의 역할을 했습니다. 安교수:더 이상 잘못된 50년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 중요합 니다.과거역사를 청산하고 정리해 새로운 역사를 위한 디딤돌의 의미가 깊다 고 봅니다. 金주필:‘항일운동을 하다 산화한 이들에게 붙였던 ‘열사’라는호칭이 부 적절하다,과거지향적인 것을 꺼내어 국민분열을 부추기는 행위다’라는 지적 이 있었습니다.하지만 민주화를 위해 몸을 불사른 사람들은 열사로 불리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봅니다.또 역사적으로도 두번 다시 잘못됨을 되 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에 연재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金국장:보훈처 관계자의 열사호칭에 문제가 있다는 기고를 보고 제가 반론 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항일정신이나 반독재의 민주화 정신은 구국의 의미 에서 맥을 같이합니다.과거를 덮어두고 어떻게 제대로된 미래가 나오겠습니 까.밝은 미래와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올바른 청산이 꼭 필요 합니다. 安교수:민주화 정신은 항일정신만큼 높이를 같이한다고 봅니다.아직 민주화 에 대한 인식이 덜 보편화되어 있어 항일정신과 민주화정신을 구분하려는 것 같습니다.더이상 희생자가 나오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이러한 논란이 나오 지 않을 것입니다.과거에 대한 진실이 허심탄회하게 밝혀졌을 때 미래지향적 인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金주필:우리 역사를 보면 가장 투철했던 시대정신이 있습니다.신라의 화랑, 조선시대의 의병·승병,한말의 의병,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이 그 정신을 주도했습니다.해방 후 그 대를 잇는 것이 바로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이라고 봅니다.그들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지탱될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아직 그들 에 대해 의미부여가 덜 되어 있습니다.현 정부도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세 워졌는데 그들을 홀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李변호사:민주열사 예우와 보상 관련 법안 작성에 민족민주운동의 개념문제 가 불거졌습니다.보상과 명예회복을 전제로 한 민족민주운동 개념의 실례가 부족하고 사회적 일치점도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金주필:해방후 반민족행위자 규정처럼 민주화운동 유공·희생자들과 관련해 역사·사회학계 등의 주도로 전 국민적인 토론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또 활발한 학술토론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安교수:민족민주운동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는 밀렸던 숙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입니다.개념 설정과 인물의 구체적 선정과정에서 큰 논란이뒤따를 것입 니다.하지만 우리 민주화에는 큰 희생이 있었다는 큰 틀에서 볼 때 그러한 논란은 지엽적인 문제일 뿐입니다.공개적인 논의과정에서 문제를 하나씩 충 분히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金국장:열사들이 유공자 대우를 바라고 민주화투쟁을 한 것은 아닐 겁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결국 그 혜택이 돌아가는 것입니다.중요한 것은 독재정 권에 맞섰던 민주화투쟁의 정당성 획득의 의미입니다.폭압적 공안기구와 정 권의 부도덕성이 낱낱이 파헤쳐져 그러한 행태가 줄어들고,장기적으로 없어 져서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데 법 제정의 의미가 있습니다. 金주필:나치 치하에서 함께 저항하던 사람들과 함께 죽지 않고 살아남은 죄 를 야스퍼스는 ‘형이상학적 죄’라고 했습니다.군사독재 치하에서 살아남은 우리들도 야스퍼스가 말한 ‘형이상학적 죄인’에 해당될 것입니다.마땅히 희생된 이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봅니다.관련 법률안을 만 들어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진실을 규명해야 합니다.기념관을 세워 그들의 뜻을 기려야 하고 묘역을 조성해 민주성지로 만들어야겠지요.또 어렵게 살 고 있는 그 유족들을 국가가 책임져야 합니다.조선왕조시대에도 병자·정묘 호란 희생자들의 자손들을 7·8대까지 돌봐준 예가 있습니다. 安교수:민주열사 관련 법안은 다음 세 가지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더이상 독재하에서 저질러진 반민주적 행태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는 징 계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둘째는 그들의 행적을 조사·정리해 기념관 등을 조성해 모아놓고 학교와 국민교육에 적절히 활용하게 하는 것입니다.셋째는 그 유족들에 대한 적절한 배상과 보상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李변호사:현재 국민회의가 내놓은 최종 법률안인 ‘민주유공자에 대한 명예 회복과 예우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 법사위에 상정돼 있습니다.이 법안이 통과되면 가해자 측면에서는 진상규명,피해자 측면에선 명예회복과 예우 및 보상에 직접 당사자가 될 것입니다.하지만 시기와 적용대상이 처음 작성할 당시의 원안에서 많이 축소됐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安교수:정당별로 이해관계에 따라 이견을 보이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항력 적인 면이 있습니다.보훈대상자 선정이 아직도 계속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 주유공자 선정문제도 장기적으로 해결해나가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역사속으로 사라져간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장차는 이런 분들까지 발굴해 숭고한 정신을 기릴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金주필:이승만정권 이후 최근까지를 포괄하는 법률안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이번 기회에 촉구해야하지 않을까요. 金국장:처음엔 1945년 이후로 잡아 법안 작성을 추진했습니다.하지만 집권 여당에서도 부담을 갖고 반대했습니다.보수 기득권층의 반발을 감당하기 힘 들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그래서 절충한 것이 3선 개헌을 기준으로 잡은 6 9년 8월7일 이후입니다.하지만 이 문제는 법안 개정을 통해 장기적으로 개선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安교수:전거가 없어 법률안을 만드는 데 어려움이 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법률안이 다른 나라에도중요한 선례로 작용할 수 있는,자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국회의원들도 자신이 국회의원일 때 역사적인 법률을 만들 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눈앞의 위기 탈출에만 급급하지 말고 한달이 아닌 1 0년 앞을 내다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金주필:일각에서는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로 생각하고 위기감을 갖는 사람들 이 많은 것 같습니다.하지만 진실규명 차원에서 참여기회를 주고 적절한 배 상과 보상을 통해 화해의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金국장:유가족도 진상규명을 원합니다.처벌이 아니라 진상규명을 통해 진정 한 고백과 사과를 받으면 용서한다는 입장이지요. 李변호사:예우·보상은 진상규명의 전제 위에서 가능합니다.결코 떨어질 수 없는 문젭니다.진상규명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출발점입니다. 金국장:국회에 상정된 법안은 늦었지만 의미 있습니다.‘형이상학적 죄’를 짓고 있는 우리들이 열사들의 뜻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대한매일은 이 러한 것이 가능하도록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습니다. 安교수:민주열사들에 대한 공적인 자리매김을 대한매일이 했습니다.시리즈 에서 다룬 인물들은 우리 자랑스런 역사의 출발점이고 굴절된 50년 역사를 그나마 빛나게 한 분들입니다. 金주필:필리핀의 호세 리잘은 스페인 침략시절에 ‘나는 조국의 밝은 새벽 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그러나 밝은 세상의 사람들은 밤사이 스러져간 사람 들을 잊지 말라’라고 했습니다.우리는 바로 밤사이 스러져간 열사들의 희생 위에 지금의 민주화를 누리고 있습니다.그들의 뜻을 기리고 희생을 생각하 는 것은 우리 전부의 의무입니다. 金在暎·任昌龍 kjykjy@daehanmaeil.com [金在暎·任昌龍 kjykjy@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金三雄칼럼-최규하 생가복원이라니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워싱턴의 기념관을 비롯하여 제퍼 슨, 링컨, 매드신, 루스벨트의 기념관과 케네디센터등 역사적으로 존경받고 업적을 남긴 정치지도자들의 기념관이 즐비하다. 이곳은 미국인들은 물론 많은 외국인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기념관에 가보면 잘 설계된 건축물에 그들 생전의 활동상을 담은 각종 자료와 유품을 전시하여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의 관광코스가 되고 민주주의와 평화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된다. 특히 링컨대통령의 기념관이 많은 관광객의 발길을 모으는 것은 노예해방과 남북전쟁의 마무리를 지혜롭게 하여 ‘아메리카합중국251을 이룬 업적을 높 이 평가한 때문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경우 고향인 보스턴에도 거대한 기념 관이 마련되어 세계적 인물을 배출한 주민들의 자존심을 한껏 부풀린다. 우리의 헌정사는 반세기가 지나도록 역대대통령의 기념관을 세우자고 나서 기가 낯부끄러울만큼 불행한 역정이었다. 이러한 부끄러운 역정을 고치려는 ‘충정251에서인지 최근 원주시에서 최규하 전대통령 생가복원 문제가 꽤 시 끄러운 양상으로 지역현안이 되고 있다. 이것은 지역문제와 함께 국민적 관심사다. 최씨가 전직대통령이고, 과거 우 리 사회가 역사적 검증과 국민적 합의과정 없이 함부로 동상이나 건조물을 세웠다가 정세가 바뀌면 철거하는 따위의 시행착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원주시는 몇해전부터 시립박물관을 건립하면서 박물관 부지 안에 이곳 출신 최전대통령의 생가를 복원하다는 계획을 추진해왔다. 시당국은 최씨 생가복 원문제가 물의를 빚을 것을 우려하여 ‘전통한옥 복원251이란 구실을 대고 실제로는 6·25전란때 소실된 최씨의 한옥을 복원하려는 계획이라 한다.시민 단체와 종교인들의 반대운동이 거세다. 내세우는 반대 이유와 명분도 명료하 다. 첫째, 최씨는 일제때 친일관료로 출발하여 역대 독재정권에서 고위직을 지 냈으며 특히 10·26후 과도정권을 맡아서는 집권욕에 사로잡혀 민주화를 지 연시키다가 신군부세력에게 기회를 주고, 5·18광주항쟁을 폭도로 단정하는 등 반민족,반민주 인사라는 것. 둘째, 이은찬, 민긍호선생등 원주권 의병·독립운동 지도자의 기념사업은 전무한 상태에서 친일 행적의 최씨 생가 복원은 반역사적 행위라는 것. 셋째, 60∼70년대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의 정신에 배치되며, 원주 민주화 고장의 명예와 정신을 훼손하는 사업이란 것. 넷째, 12·12, 5·18광주민주항쟁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 증언을 거부 하여 헌법과 국회법,그리고 국회에서 증언 및 감정에 관한 법률을 위반함으 로써 민주주의 원칙과 민의를 외면했다는 것. 다섯째, 최씨의 생가는 당시 그 지역에 흔했던 일반가옥으로서 문화재적 가 치가 전혀 없으며, 이 가옥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당시 주민의 기억을 되 살리는 정도의 고증으로 집을 지어서 무슨 의미를 찾겠는가라는 지적이다. 객관적으로 살펴봐도 최씨의 생가를 복원할 이유나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다 . 굳이 복원하겠다면 개인땅에 개인돈으로 지으면 될 것이다. 왜 국민의 세 금으로 국민과 역사에 어긋진 인물의 생가를 복원하려는가. 박정희 전대통령 의 생가는 그의 문중에서 복원한 것, 그것까지 국민이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미국 부시전대통령의 기념관도 개인 모금을 통해 텍사스의 한 대학 안에 건립했다. 최씨 생가복원 문제는 우리 현대사에 많은 교훈을 던진다. 특히 지도자의 삶의 궤적을 살피게 하는 계기가 된다. 생가를 복원하고 동상을 세우고 흉상 을 남기려거든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다. 파리 나폴레옹기념관 대리석 묘비가 지금도 백면(白面)인 것은, 그만한 인 물도 찬반론으로 갈려 비문을 쓸수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주필 kimsu@daehanmaeil.com] **끝** (대 한 매 일 구 독 신 청 721-5544)
  • 민주열사 열전:19/前 성균관대생 崔東(정직한 역사 되찾기)

    ◎노동운동 헌신… 고문 후유증 시달리다 분신/‘인노회’ 관련 구속… 수면기능 망가져 정신분열증세/‘인간 파괴’ 절망의 벼랑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선택 ‘어찌하여 감옥에 들어서자마자 죄를 지었노라고 자백하지 않았느냐? 고문자들 앞에 서거든 유죄임을 인정하고 죽어라.결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횡행하던 16세기초 독일의 프리드리히 슈페 폰 랑엔펠트 신부가 했던 말이다.그는 종교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된 죄인들과 처형장까지 동행했던 참회신부였다.죄없는 사람들이 고문에 버티다 결국 절망의 나락까지 떨어진 끝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수없이 보았다.그가 말하고자했던 것은 무엇일까.바로 고문 앞에 한없이 무력한 인간과 고문이 가져오는 인간성 파괴였다. 수십년 독재정권을 겪었던 우리 사회도 고문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고문은 정권수호를 위한 강력한 도구였기 때문이다.그리고 그 최대 피해자는 결국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정권에 도전한 사람들이었다. ○법정진술서 “도덕적 승리” 주장 전 성균관대생 崔東(80년 입학)도 그들중 하나였다.그는 10여년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앞장섰다.그러나 어느날 공안기관의 조사를 받은 뒤 정신분열현상을 보이다 황폐한 삶을 마감했다. 최동은 90년 8월7일 한양대의 한 강의실에서 분신자살했다.하지만 그의 유서에는 시국관련 분신자들이 흔히 남기는 ‘독재타도’나 ‘외세타도’ 등 정치적 내용은 없었다.‘저들의 목적은 인간을 파괴시키는 것이었습니다.지금의 저는 폐인이나 다름 없습니다’란 절망적 몸부림의 흔적이 있을 뿐이었다.이는 그가 걸어왔던 노동자와 민주주의를 위한 길을 더이상 갈 수 없다는 점을 자인하는 것이었다.그리고 분신은 그런 길을 걸을 수 없는 자신의 존재 부정이었던 것이다. 朴炯圭 목사는 장례식 조사에서 이렇게 그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했다.“지배자들은 사람들에게 굴복할 것을 강요합니다.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육체적·정신적으로 불의에 맞설 힘이 없었던 최동 열사는 무릎을 꿇기보다는 마지막 싸움의 무기로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최동은 대학1학년때부터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80년 5월 문무대 병영집체교육 거부운동을 주도적으로 벌였고 2학년때는 공개적 이념동아리인 ‘심산연구회’ 결성을 주도했다.심산(心山)은 성균관대 설립자이고 반독재운동가인 金昌淑 선생의 호이다.최동은 여기서 1학년 후배들 뿐만 아니라 2학년 동기들에게까지 학습을 지도했다.그리고 4학년때 광주항쟁 진상규명 등을 촉구하는 학내시위를 주도했다가 처음으로 구속된다.이때 재판에서 그는 최후진술을 통해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인간적 승리,도덕적 승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해 신념에 가득찬 민주투사로사의 면모를 보여준다. 9개월 복역후 출소한 최동은 정부의 복학허용을 개량화 조치라며 거부하고 84년 노동운동에 뛰어든다.부천의 삼창정밀 동광정밀 등에서 프레스공으로,(주)세일에서 재단사로 일한다.수형전력이 발각될까봐 주로 소규모 작업장을 전전하며 동료 노동자들의 노동의식을 일깨우는데 주력했다.외부에서는 다른 노동운동가들과 연대작업에 힘을 기울였다.그러나 활동가 중심의 노동운동이 현장과의 유리라는 한계를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현장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노동운동’을 표방하는 인천·부천 민주노동자회(인노회)는 그런 한계를 넘어보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최동은 88년 3월 인노회 결성에서 산파역할을 했다. ○기각된 영장 재청구해 발부 받아 89년 2월 검찰은 국가보안법 이적단체구성죄를 적용해 인노회 관계자 6명을 구속했다.최동도 4월 부천 심곡동 자취방 앞에서 붙잡혀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된다.하지만 관련자들은 인노회가 공개적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이라고 주장했다.담당판사도 인노회가 노동운동을 위한 단체임을 인정해 구속영장을 기각했다.그러나 검찰은 강성의 다른 판사에게 재신청하여 영장을 발부 받는다. 최동은 동료들에게 시간을 벌도록 처음에는 묵비권으로 버티었다.또 고문조작 수사를 막기 위해 취조실 욕조에 머리를 찧어 자해를 기도한다.그러나 경찰병원에서 7바늘을 꿰매는 응급치료만을 받고 다시 20여일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구치소 수감 직전에도 그는 극도의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리다칫솔대를 부러뜨려 목을 찌르는 자해를 한다.하지만 이때도 외상만 치료받고 하룻만에 구치소에 수감되고 만다. 최동은 출소후 조사기간 내내 거의 잠을 못자며 취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수사관들이 교대로 취조를 했고 취조를 안할 때는 밝은 조명과 괴상한 소음을 이용,잠을 못자게 해 수면기능을 파괴했다고 말했다.고문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수많은 고문중에서도 잠을 안재우는 고문이 가장 참기 힘들다고 말한다.어머니 金順玉 여사(62)는 “동이가 구치소 수감 직전부터 이미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경찰병원 의사도 주의깊은 관찰과 치료가 요구된다고 진단했다”고 밝혔다. 그는 구치소에서도 조사 때의 수면기능 파괴로 인한 불면에 계속 시달렸다. 그리고 7월 초부터 심한 발작과 실어증세를 보인다.의도하지 않은 말 등 의식과 행동이 따로 작용하는 증세도 뒤따랐다.책이나 신문도 전혀 못 보는 등 상태가 악화되자 종로신경정신과에서 외래진료를 받았는데 ‘정신분열증’ 진단이 나왔다.하지만 이런 비정상적 정신상태에서도 수감된 채 재판이 계속 진행됐다.9월18일 선고공판에서 집행유예가 결정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비정상적 정신상태서 재판 출소후 종로신경정신과에서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적들이 나를 무능하게 만들었다” “AIDS균으로 나를 죽이려 한다” “계속 감시당하고 있다”고 하는 등 극도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보였다.그리고 90년 4월 부천의 한 자취방에서 연탄가스로 자살을 시도한다.이후 그는 수영장에 가거나 집에서 가까운 한양대로 산책을 나가며 건강회복을 위해 힘쓴다.정치이념이 철저하고 논리가 ‘칼’같아 마오쩌뚱에서 이를 따 ‘마동’으로 불렸던 최동.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와 노동현장에서 인정받았던 이러한 탁월함을 되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하지만 노력도 헛되이 스스로 한많은 세상을 뒤로 하고 말았다.8월 7일 아침 평소처럼 “운동하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던 그는 잠시후 검게 탄 시신이 돼 있었다. □약력 ●1960 서울 정동 출생 ●80 서울 환일고 졸업.성균관대 국문과 입학 ●81 학내 동아리 심산연구회 창립●83 광주항쟁 진상규명 요구시위 주도.9개월 복역 ●84 부천에서 노동운동 투신 ●88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 결성 ●89 인노회사건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90 한양대에서 분신.한양대 부속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곧 운명 ◎崔東 가족들/“치료만 제때 받았어도…” 회한/4남매중 셋이 학생운동/아버지 홧병으로 사망 “제때 치료만 받았어도 그렇게 가지는 않았을 텐데…” 최동의 어머니 김순옥 여사가 가슴에 묻고 있는 안타까움이다.대공분실 조사때부터 입원치료를 애원했으나 거절당했다고.구치소에서도 ‘충분한 휴식과 요양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소견을 계속 무시했다고 한다.결국 출소할 때까지 제대로 손도 못쓴 채 아들의 증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는 것이다.김여사는 아들이 노동운동을 할 때도 부천에 전세방까지 얻어주고 밥도 해주는 ‘후원자’였다.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자 기왕 할거라면 굶지 말고 하라는 모정때문이었다.그런 아들이 제때 치료를 못받아 죽은 것이다. 김여사의 비극은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아들의 49재가 끝나자마자 남편 최수호씨(당시 56세)까지 잃은 것이다.여자인 자신과 달리 슬픔과 분노를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기만하다가 홧병으로 가고 말았다고 했다. 4남매중 셋이 학생운동을 한 ‘덕’에 김여사는 구치소라면 치가 떨린다고 했다.장남인 최동의 바로 밑 여동생 숙희씨(35)는 서울여대 재학시절 야학문제로 1주일간 유치장 신세를 지고 나왔다.오빠가 구치소에 있을 때는 거의 매일같이 어머니와 함께 옥바라지를 했다.출가했지만 친정어머니인 김여사와 함께 사는 그녀는 “면회때면 제게 항상 귀엣말로 동료들을 조심시키라고 당부했다”며 “오빠이기 이전에 동지로서 존경의 대상이었다”고 고백한다. 둘째동생 재동씨(34)도 민정당연수원 점거사건으로 영등포구치소에서 6개월간 복역했고 2년간 수배생활을 하기도 했다.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현재 일본 도쿄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 한국불교 다시 서야 한다/여익구 전 민중불교운동연합 의장(기고)

    ◎불교 내부문제 사법부에 맡겨/종교적 위신 스스로 내팽개쳐/불자의 ‘화합 염원’ 겸허히 수용/개혁·발전의 힘찬모습 보여야 불교신자들이 많이 읽는 불서(佛書) 가운데 ‘보왕삼매론’이 있다. 이중에서 특히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는 구절은 ‘세상살이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말라’는 말씀이다. 곤란이 없으면 나태해지기 마련이니 인간은 그 곤란을 약으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경책이다. 하긴 세상살이에 다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고려시대의 국사였던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수심결’에서 비유하였듯이 ‘모래를 삶아 밥을 지어먹으려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 곤란이나 다툼을 사전에 예방하던가 혹은 사후에라도 올바른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할 것이다. 영화 ‘소림사’에나 나올 법한 모습으로,아니 그보다도 더 적나라하고 다이내믹하게 폭력적 장면을 연출하여 세계적인 뉴스를 제공하더니,드디어 조계종은 지루한 법정다툼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법을 다루는 판사가 종교적 권위보다 우위에 서는 비극을 스스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 어느쪽 주장이 옳든 그르든 불교내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부의 판단에 맡겼다. 신도의 애환을 들어주고 해결해주어야 할 스님들이 스스로의 종교적 위신을 내버린 결과가 되고만 것이다. 4년전 조계종은 불교신자와 국민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고 새롭게 태어났었다. 대중의 열화같은 염원과 열정을 뒷받침으로 독재정권과 야합하고 정권의 시녀역할을 하면서 불교의 종교적 위엄을 상실했던 서의현체제에서 서의현의 3선출마를 저지하고 불교자주화와 민주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개혁불사를 성공리에 성취한 것이다. 그 성과로 출범한 것이 ‘송월주원장체제’이다. 그러나 개혁의 성과는 미진한채 송원장체제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날로 커졌다. 그의 3선출마가 종헌에 위배되느냐 아니냐는 본질이 아니다. 여러가지 종단운영상의 문제점으로 인해 지도자로서의 대중적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그런 상황에서 종권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종단을 파국으로 몰아가게 만든 것이다.무엇보다도 종단 최고어른인 종정의 ‘3선불출마’라는 질책을 ‘불순한 세력의 사주’라고 비하한 것은 실로 전대미문의 독선인 것이었다. 최소한 대중의 여론과 어른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면 차기총무원장선거는 종단운영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정책과 인품의 대결로,개혁의 성과는 한층 발전하고 불자는 불자라는 자긍심에 기꺼워했을 것이다. 여론과 가풍을 무시한 결과는 너무도 참담하게 나타났다. 송원장 자신도 불명예스럽게 퇴진해야 했고 그후 종권을 둘러싼 물리적 공방은 4년전의 감동을 완전히 땅에 떨구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종권다툼에 재가자들 마저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종단운영을 감시하고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이끌어갈 책임이 재가자들에게도 있다. 바로 4년전 부패한 종권을 개혁하는데 헌신적으로 앞장을 섰던 모습이 진정한 재가불자들의 전형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광란의 현장을 연출하고 있는 무리들의 현장에 서서 분규를 부채질하는 것은 진정 올바른 불자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선과 정의는 어디에도 없다. 어느 편도 싹쓸이는 있을 수 없다.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정당한 절차가 아니면 조계종의 내분은 끝이 없게 된다.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모든 당사자들의 대표가 자리를 함께 하여 타협과 화합의 길로 가서 원융한 종단으로 일어나 개혁과 발전의 힘찬 모습을 국민앞에 보여야 한다. 그래야 불교는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역사앞에 굳건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경찰의 ‘존안자료’/李慶衡 논설위원(外言內言)

    경찰이 민간인에 대한 사찰활동을 재개하고 있다고 한다. 경찰청은 지난 10월 각 경찰서별로 관내 주요 인사와 단체에 대한 ‘인물존안(存案)자료’와 ‘단체자료’를 작성해 시·도지방경찰청별로 관리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 인물자료란에는 성명,주소,생년월일 등 기본인적사항 외에 특기·취미와 성격 및 사고방식,취약점,정책에 대한 선호도,그리고 배경인물,교제인물을 기술하고 주요 동향을 별도 양식으로 첨부하게 되어 있다. 경찰이 특정 인물이나 단체에 대한 관련정보를 수집하여 존안카드로 만들어 비치해놓고 수사 등 필요할 때 참고로 사용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일것이다. 경찰당국도 “통상적인 정보수집활동의 일환이지 결코 과거와 같은 사찰용이 아니다”라고 해명은 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당국은 여기서 두가지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첫째는 인물존안자료의 대상이 무차별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점이다. 학원·노동계의 집회시위 주동인물,정·관·재계 및 노동·종교·언론계 인사들이 망라되어 있고 사회단체,기업까지포함되어 있다면 이는 통상적인 정보수집활동의 범주를 벗어난다고 봐야 한다. 경찰의 정보수집활동은 어디까지나 사회안전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간첩혐의자나 주요범죄혐의자 등 요주의 인물에 국한해야지 그범위를 무리하게 넘어서면 민간인 사찰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둘째는 인물자료의 체크리스트 항목이 일반적인 신상정보의 범위를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대상인물의 개인적인 취약점이 무엇이고 정책에 대한 선호도는 어떠하며 배경인물은 누구이고 또 교제인물은 누구누구인가 하는 등의 항목은 정치적 이용목적이 개재돼 있지 않느냐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이같은 항목란을 메우기 위해서는 필경 대상자를 잠복감시하거나 미행을 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도청까지 하지 않으면 필요한 정보가 획득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을 돌이켜 보면 특정 정치인이나 주요 인사를 탄압하거나 회유할 때 이러한 존안카드를 주요 근거자료로 우려먹던 경우가 허다했다. 지난 90년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에 대한 대법원의판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존안카드의 작성은 명백한 인권침해라는 점을 깊이 인식,무차별적인 존안자료 수집은 즉각 중단하고 해당 자료도 폐기해야 할 것이다.
  • 노벨상금은 총구서 나온다?/매년 1천억원 무기회사 투자 충당

    【런던 AFP 연합】 세계 평화에 공헌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노벨상 상금이전 쟁무기를 판 수익으로 충당돼온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압제 정권에 살상무기를 팔아온 업체들도 다수 포함돼 있는 것으로 밝혀져 노벨상 윤리 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국 주간지 옵서버는 13일자에서 노벨재단이 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해마다 뉴욕·런던 등 해외기업에 5,000만파운드(약 1,092억원) 이상을 투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상 기업에는 호크 제트기를 만드는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물대포를 만들어 인도네시아에 판매해온 영국 GKN 등의 군수업체 등이 포함돼 있다. 또 미얀마 독재정권 아래서 활동하고 있는 기업들도 적지않게 올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평화상은 인도네시아나 미얀마의 독재에 맞서 싸워온 민주인사들에게 수차례나 돌아가기도 했다. 96년에는 동티모르 민족자결주의자 카를로스 벨로주교와 망명한 동티모르 대변인 호세 라모스 호르타,91년에는 미얀마 민주화투쟁의 상징 아웅산 수치 여사가 받았다. 수상자들은 결국 자기 민족에게 총구를 겨눈 정권으로부터 돈을 받아 챙긴 셈이 됐다.
  • 인권법의 중심과제(사설)

    세계인권선언 50돌이 되는 12월10일에 맞춰 제정하려던 인권법이 이 법의 핵심사항인 인권위원회의 법적 지위에 관한 논란이 해소되지 않아 내년으로 넘어가게 됐다.국민회의와 시민단체들은 인권위를 국가기구로 설치하자고 주장하는 데 반해,법무부와 자민련은 인권위를 특수법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팽팽히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金大中 대통령은 지난 9일 이 문제와 관련해서 “인권법은 유엔 권고결의안에 충실히 따르면서 인권국가의 이미지를 손상하지 않도록 인권보장이 철저하게 이뤄지는 방향으로 제정하라”고 지시했다. 인권위를 국가기관으로 설치해야 하는지 특수법인으로 만들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정설이 없다.각국의 형편에 따라 다르고 그 운영 결과도 각기 다르다.인권위를 국가기관으로 설치했지만 그 기능이 유명무실한 나라가 있는가 하면,특수법인으로 설치했음에도 국민의 인권보호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나라도 있다.따라서 국민의 인권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권위가 독립적인 국가기구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나,인권기구를국가기구로 만들 경우 자유로운 입장에서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기 어려워 독립성을 유지하기가 오히려 힘들다는 주장은 각각 그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닌다. 법무부는 인권위에 대한 법무부의 통제 가능성을 우려하는 시민단체들의 의견을 대폭 수용해서 통제를 배제하는 쪽으로 시안(試案)을 수정했다.정부가 인권위 이사회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소지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이사회제도를 폐지하고,인권위가 순수한 민간법인이 아닌 공공적 성격의 특수법인임을 고려해서 주무관청의 감독규정을 배제하고,인권위 정관변경에 대한 법무부장관의 인가권을 폐지한 것등이 그것이다.국민회의도 인권위에 대한 법무장관의 ‘입김’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면 민간특수법인 형식을 채택한다해도 국가기구에 버금가는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인권위의 법적 지위가 ‘민간특수법인’쪽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권법의 중심과제에 대한 기본적 인식을 다시 한번 환기할 필요를 느낀다.과거 역대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투쟁 혹은 인권투쟁은 집권여당과 법무부를 상대로 한 힘겨운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의 정부는 그 어떤 정권보다 인권보호에 관심이 크다.그러므로 집권 여당과 법무부는 인권보호에 관한 발상 자체를 바꿔야 한다.인권위의 법적 지위를 검토하는 데 있어 부처 이기주의나 민심 영합의 차원을 떠나 어떤 방안이 국민의 인권을 더욱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인간특수법인’쪽인 것으로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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