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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사이에 끼어든 그, 사랑해도 될까

    우리 사이에 끼어든 그, 사랑해도 될까

    “사회가 ‘정상적’이라고 규정하는 관계의 규범은 시효를 다했다. 인간의 감정이 가진 스펙트럼은 하나의 관계로 국한하기엔 너무 다양하고 풍부하기 때문이다.”(톰 티크베어) 독일 베를린의 한나(소피 로이스)와 시몬(세바스티안 시퍼)은 결혼만 안 했을 뿐 첫 키스를 한 지 20년이 지난 커플이다. 한나는 유명 TV 앵커, 시몬은 조각품을 제작하는 엔지니어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누군가 불임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딱히 아쉬움은 못 느낀다. 다만, 조금씩 권태가 찾아올 뿐. 어느 날, 한나는 세미나에서 만난 줄기세포 연구자 아담(데비드 스트리에소브)에게 묘하게 끌리는 것을 느낀다. 우연한 만남이 이어지면서 둘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다. 그 무렵, 시몬도 인생의 고비에 부딪힌다. 어머니의 죽음과 고환암 진단은 그에게 무력함을 남긴다. 늦은 밤 수영장에서 한 사내를 본 순간, 심장이 무섭게 펌프질해 댄다. 평생 이성애자로 살았던 그가 자석처럼 사내를 품는다. 그런데 한나의 그와, 시몬의 그가 같은 사람이라면? 얼개만 듣고 나면 영락없는 치정극이다. 그런데 29일 개봉한 ‘쓰리’의 감독은 톰 티크베어다. ‘롤라 런’(1998), ‘향수’(2006), ‘인터내셔널’(2008)의 연출자. 요리에 빗대자면 한국·일본·이탈리아 요리까지, 궁극의 맛은 내지 못할지라도 맛깔스러울 정도는 만들어 내는 능력 있는 주방장이다. 티크베어가 할리우드 진출 이후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 독일어권 배우와 독일어로 찍은 작품이 ‘쓰리’다. ‘한 남자를 사랑하는 두 남녀’란 주제를 전혀 뻔하지 않게 주무른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40대 후반 전문직 남녀들의 욕망과 갈등, 두려움 등 복잡한 심리를 유머러스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담아낸다. 티크베어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 맺기에 대해 얘기한다. 서로 다른 상황과 시간에 만났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관계인데, 하필 그 타이밍에 만나면서 불꽃이 튄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자유분방한 주인공들 역시 가족, 부부에 대한 사회 규범 때문에 고민한다. 하지만 힘든 시간을 보낸 이들은 끝내 통념을 뛰어넘는 대승적(?) 결론에 도달한다. 프랑스·영국도 아닌 독일영화라고 해서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티크베어 특유의 경쾌한 이야기 전개와 감각적 편집, 위트 있는 대사, 귀에 쏙 들어오는 음악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헤르만 헤세, 제프 쿤스, 데이비드 보위, 비토리오 데시카, 로버트 윌슨 등 영화 곳곳에 숨겨진 유럽 문화·예술의 코드들을 알아채는 재미도 쏠쏠하다. 단 “한 사람과의 관계에 모든 감정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생각은 폭력적”이라는 티크베어의 시각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들을 준비는 돼 있어야 영화가 불편하지 않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유럽 여행에 악센트를 주다

    유럽 여행에 악센트를 주다

    유럽 여행에 악센트를 주다 유럽을 여행하는 방법은 많다. 특히 어떤 항공사를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여정은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그려내기 마련이다. 이번 여행은 벨기에의 브뤼셀로 들어가 독일과 룩셈부르크를 거쳐 프랑스 파리에서 되돌아오는 일정이다. 자칫 일반적인 유럽 여행이 될 수 있는 동선이지만 여기에 특별한 ‘스톱오버’가 전체 분위기에 변화를 줬다. 중동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광활한 사막 그리고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카타르에서의 ‘스톱오버 투어’는 새로운 느낌의 유럽 여행을 연출하게 한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서동철 취재협조 카타르항공 www.qatarairways.co.kr 1 벨기에 브뤼셀의 골목길에서 만난 거리의 악사 2 야경이 더욱 아름다운 그랑플라스는 브뤼셀의 상징과도 같다 3 젊은이들의 낭만으로 가득한 하이델베르크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또 하나의 목적지 Doha도하 늦은 밤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현지 시각으로 새벽 5시 즈음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도하는 온통 모래빛깔이다. 땅도 건물도 모두 사막을 닮았다. 그 옆으로 넘실거리는 페르시아만의 짙푸른 바다가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질 정도. 유럽으로 향하는 길이었지만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동쪽 해안에서 바다를 향해 엄지손가락 모양으로 툭 튀어나온 카타르는 작은 나라다. 면적은 우리나라의 경기도 정도이며, 인구는 외국인을 합쳐도 200만 명에 불과하단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카타르를 무시할 수 있는 국가는 없다. 자그마치 152억 배럴의 원유와 5,700조 배럴의 천연가스를 보유한 ‘부자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척박해 보이는 땅에서 2006년 아시안게임이 개최됐고, 2022년 월드컵이 열릴 예정이다. 도하의 거리로 나서면 이슬람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부국으로서의 자신감을 동시에 감지할 수 있다. 웨스트베이 지역에는 우후죽순처럼 마천루들이 솟아오르고,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은 하나같이 고급 승용차들이다. 건너편 부둣가에서 바라본 웨스트베이 지역은 마치 미래 도시처럼 사막 한가운데 비현실적으로 떠 있는 것만 같다. 이슬람 전통 복장을 한 이들이 값비싼 스포츠카를 끌고 도하시티센터(도하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쇼핑몰)로 달려와 명품 쇼핑을 하는 풍경은 이국적이라는 표현만으론 부족할 지경이다. 하지만 카타르의 매력은 역시나 가장 카타르다운 것에 있었다. ‘올드 수크Old Souq’라 불리는 재래시장에는 중동의 색채가 담뿍 묻어난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그네들의 과거와 현재가 뒤엉킨 채로 여행객을 맞이한다. 여유롭게 물담배를 피우거나 그늘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시커먼 천으로 온몸을 휘감고 장을 보러 나온 이슬람 여성들이 어우러진다. 이름 모를 향신료가 코를 간질이고, 원색적인 양탄자는 올라앉으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처럼 상상력을 자극한다. 일용잡화에서부터 앵무새와 토끼 등 애완동물과 고풍스러운 골동품까지 볼거리들이 즐비하다. 올드 수크와 함께 도하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바로 ‘사막 사파리 투어’이다. 사륜 구동 SUV를 타고 도하에서 약 1시간 정도 달리면 광활한 모래사막이다. 사막에 진입하기 직전, 접지력을 높이기 위해 타이어에서 바람을 조금 빼면 준비 완료.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하는 사막 어드벤처가 시작된다. 거대한 파도와도 같은 사구를 달리는 차는 위아래로 숨 가쁘게 출렁거린다. 차가 뒤집힐 듯한 아찔한 상황을 수도 없이 연출해내면서도 운전기사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경사가 80도에 가까운 사구 정상에서 추락하듯 달려가는 데에 이르면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요동치던 차를 멈추고 사막 한가운데 내려서면 작렬하는 태양 아래 끝없이 펼쳐진 모래언덕이 눈을 아련하게 한다. 그리고 사막 끝에 드러나는 페르시아만의 짙푸른 바다는 사막과 기묘한 대비를 이루며 시선을 붙잡는다. 숨 막히는 사막의 더위를 깜빡 잊을 만큼 장관이 아닐 수 없다. T clip.도하 스톱오버 프로그램 사막 사파리 투어 4륜 구동 SUV를 타고 카타르 남쪽 사막을 달리는 프로그램이다. 요금은 4시간 기준으로 2~3명은 1인당 65달러, 4명은 1인당 55달러이며, 1명의 경우 2명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도하 시티투어 가이드를 겸한 한국인 운전자와 승용차를 타고 올드 수크, 매시장, 웨스트베이 등 도하의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일정이다. 요금은 4시간 기준으로 2~3명은 1인당 75달러, 4명은 1인당 63달러이며, 1명의 경우 2명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카타르 비자는 공항에서 신용카드(30달러)로만 결제할 수 있다. 문의 페가수스코리아(도하 스톱오버 프로그램 예약 대행사) 02-733-3441 1 부둣가에서 바라본 웨스트베이는 마치 신기루 같다 2 상상력을 자극하는 올드 수크의 양탄자들 3 이슬람 전통복장을 한 공예품들이 지갑을 열게 한다 4 사막에서 바라본 페르시아만의 짙푸른 바다 카타르항공 카타르의 수도 도하를 기점으로 하는 카타르항공은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낯선 항공사이다. 하지만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서비스와 안전에 대한 불안감은 씻은 듯이 사라진다. 한국인 승무원이 배치되어 있어 언어에 따른 불편함을 전혀 느낄 수 없으며, 쇠고기와 닭고기로 구성된 메인 요리는 한식 스타일로 조리되어 한국인들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 또 여유로운 좌석이 비행의 피로를 덜어주는 것도 큰 장점이다. 카타르항공은 현재 98대의 항공기로 유럽, 중동, 아프리카 등 세계 102개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특히 도하를 경유하여 유럽 25개 도시를 연결하고 있어 유럽을 여행하려는 한국인들에게 편리하다. 항공 리서치 전문기관인 스카이트랙스Skytrax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6개뿐인 5성급 항공사인 만큼 기내 서비스도 수준급이며, 경쟁력 있는 요금도 매력적이다. 퍼스트클래스나 비즈니스클래스 고객이라면 도하국제공항의 ‘프리미엄 터미널’을 이용할 수 있다. 9,000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지난 2006년 완공한 프리미엄 터미널은 여느 항공사 라운지에서 맛볼 수 없었던 서비스를 제공한다. 줄을 설 필요 없이 별도의 체크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며, 스파, 수면실, 샤워실, 레스토랑 등의 시설을 모두 무료로 즐길 수 있다. 경유지 도하에서의 스톱오버 프로그램은 덤이다. 문의 카타르항공 02-3708-8571, www.qatarairways.co.kr 유럽연합의 작은 거인 Brussels 브뤼셀 카타르 도하를 뒤로하고 다시 비행기에 올라 도착한 곳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이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사이에 자리한 벨기에는 처음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잠시 스쳐가거나 건너뛰는 작은 나라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카타르가 그랬던 것처럼 벨기에 역시 남다른 저력을 발휘하는 국가이다.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본부가 브뤼셀에 자리잡고 있어 벨기에의 수도뿐 아니라 유럽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 수준에 있어서도 여느 유럽 국가들에 뒤처지지 않는다. 와플, 초콜릿, 맥주 등 벨기에의 먹을거리는 유럽에서도 유명하며, 최근 할리우드 극장판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 <개구쟁이 스머프>도 벨기에에서 태어나 세계로 뻗어나갔다.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그랑플라스Grand-Place’는 브뤼셀의 상징으로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을 벨기에로 이끈다. 그랑플라스로 이어지는 구시가지의 풍경은 예스러움과 현대인들의 여유로움으로 가득하다. 거리의 악사들은 흥겨운 음악으로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사람들은 과일과 시럽을 잔뜩 올린 와플을 들고 거리를 활보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달콤함이 느껴지는 초콜릿 가게와 거리 곳곳에 세워진 조각들에 한눈을 팔다 보면 어느새 탁 트인 광장에 다다르게 된다. 1998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대광장, 즉 그랑플라스이다. 직사각형의 그랑플라스를 둘러싸고 있는 고딕과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은 정교한 조각품을 떠올리게 할 만큼 화려함을 자랑한다. 시청사, 왕의 집, 길드하우스 등 건축물 대부분이 15~17세기에 지어진 것들로 광장 한가운데 서 있으면 중세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느낌이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96m의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시청사이다. 그랑플라스의 건축물 가운데서도 가장 섬세한 외벽 조각으로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첨탑 꼭대기에는 브뤼셀의 수호천사인 미카엘 대천사가 황금빛으로 조각되어 있다. 시청사 옆길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브뤼셀의 또 다른 상징인 ‘오줌싸개 동상(마네캥-피스Manneken-pis)’을 만날 수 있다. 사진으로 먼저 동상을 본 여행객들이라면 “애걔!”라는 실망스런 감탄사가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그도 그럴 것이 크기는 60cm에 불과한 데다, 여느 유럽 거리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조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거만한 자세로 오줌을 누고 있는 이 꼬마 녀석에 얽힌 이야기는 자못 대단하다. 프랑스 군대가 브뤼셀에 불을 질렀을 때 이 꼬마가 오줌을 누어 불을 껐다고 하며, 14세기에 한 제후의 왕자가 오줌을 누며 적군을 모욕한 것이 모델이 되었다고도 한다. 어느 것이 정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오줌싸개가 벨기에의 ‘수호 꼬마’인 셈이다. 이 때문에 오줌싸개 동상은 수차례 약탈당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단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벌거벗은 꼬마의 옷이 수백 벌에 달한다는 것. 외국 정상들이 브뤼셀을 방문할 때마다 선물한 옷들로 그랑플라스의 왕의 집에 전시되어 있다. 꼬마의 옷 중에는 한복도 있다고. 1 그랑플라스 시청사의 섬세한 외벽 조각 2 벨기에에 왔다면 와플은 꼭 맛봐야 한다 3 오줌싸개 동상 앞에 모인 여행객들 T clip. 벨기에에 왔다면 꼭 맛봐야 할 것이 바로 ‘와플’이다. 와플이란 이름은 독일어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원조는 벨기에이다. 벨기에 와플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벨기에 수도 이름을 딴 ‘브뤼셀 와플’과 동부 도시의 이름을 딴 ‘리에주 와플’이 그것이다. 브뤼셀 와플은 바삭바삭하고, 리에주 와플을 부드러운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그랑플라스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면 와플 가게를 흔하게 만날 수 있다. 바나나, 딸기, 크림, 초콜릿 시럽 등 상상을 초월할 만큼 푸짐한 토핑을 올린 와플은 여행 중 간식거리로 부족함이 없다. 가격은 1~3유로 정도. 1 웅장하다 못해 보는 이를 압도하는 쾰른 대성당 2 쾰른 대성당의 아치형 중앙 회당 3 오리 한 마리가 유유히 흐르는 네카어강을 바라보고 있다 4 담소를 나누는 하이델베르크의 대학생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웅장한 자태에 반하다 Ko”ln 쾰른 벨기에 브뤼셀에서 동쪽 국경을 넘어 독일의 쾰른으로 달려간 이유는 단 하나, ‘쾰른 대성당Cologne Cathedral’ 때문이다. 시내 중심에 157m의 높이로 솟아 있는 두 개의 첨탑은 웅장하다 못해 압도적이다. 건물 외벽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이다. 1996년 유네스코는 ‘인류의 창조적 재능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작품’이라고 평가하면서 쾰른 대성당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쾰른 대성당이 지어진 것은 1248년부터이다. 1164년 한 대주교가 동방박사 세 명의 유해가 담긴 성물함을 가져왔고, 이를 안치하기 위해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공사가 중단된 시기도 있었지만, 1880년 완공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650년에 이른다. 이 때문에 건물 외벽의 색깔이나 석질이 조금씩 다른 것도 눈에 띈다. 완공 이후 1884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으며, 현재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과 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첨탑이 서 있는 서쪽 입구로 들어서면 아치형의 중앙 회랑이 144m의 길이로 소실점을 그리며 뻗어나간다. 바닥부터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43m이며, 기둥에 조각된 석상들은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고 예수의 열두 제자들이다. 좌우 창가에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엄숙하고 경건하며 신비롭기까지 한 성당 내부에 서면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게 된다. 젊은 낭만의 도시 Heidelberg 하이델베르크 룩셈부르크로 들어가기 전 들른 도시는 독일 남서부에 자리한 낭만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이다. 라인강의 지류인 네카어 강을 따라 달리던 차가 하이델베르크에 들어서자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의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카를 테오도르 다리를 중심으로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학생들과 도도히 흐르는 옥빛 강물 그리고 크고 작은 광장을 연결하는 고풍스러운 하우프트 거리 등이 방문객들을 낭만 여행으로 이끈다. 하이델베르크는 인구가 10여 만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지만 이 가운데 대학생이 약 3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1386년에 설립돼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꼽히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이 있기 때문. 수백년의 세월 동안 학구열을 불태운 이 도시는 칸트, 괴테, 야스퍼스 등 세계적인 학자와 문학가들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네카어강을 건너 독일의 유명 철학자들이 즐겨 걸었다는 ‘철학자의 길’을 걷다 보면 누구나 골똘히 사색에 잠기게 된다. 하이델베르크가 ‘대학도시’로 불리는 까닭이다. 카를 테오도르 다리 중간에 서서 뒤를 돌아보면 ‘하이델베르크 고성’이 눈에 들어온다. 세모꼴에 울긋불긋한 마을 지붕들 너머로 고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이 고성은 하이델베르크의 상징에 다름 아니다. 13세기에 축조되기 시작한 하이델베르크 고성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군주를 거치며 파괴되고, 복원되고, 증축되며 지금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형식의 건축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기도 하다. 고성에 오르면 종탑, 성문탑, 루프레히트 궁, 프리드리히 궁 등 여러 건물들이 있는데, 30년 전쟁과 왕위계승전쟁을 거치면서 훼손된 부분이 적지 않다. 하지만 고성의 아름다움은 세월 속에서 더욱 여물어 여행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요새 Luxembourg 룩셈부르크 파리로 향하는 길에 방문한 룩셈부르크는 유럽 지도에서 찾아보기도 힘들 만큼 작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끼여(?) 있는 듯한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부르고뉴가, 합스부르크가, 프랑스, 네덜란드, 프로이센의 지배를 받아오며 중세 400년 동안 파괴와 복원이 되풀이됐다. 룩셈부르크 독립의 꿈은 1839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지금은 유럽재판소, 유럽의회 사무국 등이 룩셈부르크에 자리하고 있어 브뤼셀과 함께 EU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곳곳에서 아픈 역사의 흔적들을 만나게 된다. 외침에 대항해 단단한 방패를 들듯, 높은 성벽과 포대가 완고하게 도시를 두르고 있는 것이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요새와도 같은 형국이다. 가장 유명한 성채는 ‘복포대Casemates Du Bock’이다. 군사적 요충지는 전망 또한 좋기 마련이어서 복포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알제트 운하가 회색지붕들 사이를 유유히 흘러가고, 숲과 마을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룩셈부르크의 지난했던 역사를 잠시 잊게 한다. 1차 세계대전 때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황금의 여신상이 있는 ‘헌법광장Constitution Square’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장관이다. 페트루세 계곡을 따라 울창한 숲이 이어지고, 그 중간 즈음에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아돌프다리Pont Adolphe’가 멋들어진 아치를 자랑한다. 1903년에 완공된 아돌프다리는 높이 46m, 길이 153m에 이르는 석조 다리이다. 건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아치교로 세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헌법광장에서 길을 건너면 ‘노트르담대성당Notre Dame Cathedral’이다. 유럽의 여느 성당들과 비교하면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지만, 단정하고 간결한 모습이 매력적이다. 성모마리아 조각이 중심에 있는 파사드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단아한 외관과는 달리 화려하고 장중한 내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스테인드글라스와 파이프오르간 그리고 벽면과 기둥의 정교한 조각들이 반전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유럽의 문화 수도 Paris 파리 이번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 파리는 유럽 여행을 마무리하기에 가장 훌륭한 장소였음에 틀림없다. 유럽 여행을 계획한다면 빠질 수 없는 곳일 뿐더러 몇 번을 방문한다고 해도 질릴 리 없고 그리워지기까지 하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1889년 완공된 에펠탑은 여전히 파리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었고, 세계 최대의 개선문으로 꼽히는 에투알 개선문의 당당한 자태는 변함이 없었다. 세계 각국의 유물과 미술품으로 가득한 루브르박물관과 19세기 인상파 작품들로 유명한 오르세미술관 역시 파리를 방문했다면 놓칠 수 없는 명소이다. 유람선을 타고 센강을 따라 명소들을 둘러보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이번 파리 여행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뤽상부르공원Jardin du Luxembourg’과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이었다. 여행의 마지막인 만큼 여유로운 휴식과 느긋한 산책을 즐기기로 했던 것. 뤽상부르공원은 1615년 건축된 뤽상부르 궁전에 딸린 프랑스식 정원이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이며, 파리지앵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식처로 잘 알려져 있다. 화창한 날씨라면 뤽상부르공원은 온통 일광욕을 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공원 곳곳에 놓인 벤치와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며 햇볕을 만끽한다. 스케치북에 공원의 모습을 담는 젊은 미술학도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공원을 거닐다 보면 그늘진 숲길과 넓은 잔디밭, 수많은 조각상들과도 조우하게 된다. 책 한 권과 커피 한 잔을 들고 햇볕 다사로운 곳에 앉아 시간을 보내 보자. 짧은 시간이지만 파리지앵이 되어 보는 것이다. 파리 시내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한 몽마르트르는 그 이름만으로도 낭만이 흘러넘친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언덕 꼭대기에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하얗게 빛나고, 계단 옆 잔디밭에는 햇볕에 취한 사람들이 옹기종이 모여 앉아 있다. 언덕의 높이는 130m에 불과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파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크레쾨르 대성당 오른편으로 가면 에펠탑까지 조망할 수 있다. 언덕 한쪽에는 거리의 화가들이 예술의 향기를 뿜어낸다. 여행객들과 그들의 초상화를 자신의 스타일대로 그려내는 화가들은 몽마르트르의 고유한 풍경이다. 레스토랑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맥주나 와인을 음미하며 이 풍경을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술은 한 잔이면 족하다. 몽마르트르의 독특한 분위기에 먼저 취하기 마련이니까. 1 숲과 마을 그리고 알제트운하가 장관을 이루는 복포대 2 마네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 3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캐리커처를 그리고 있는 화가 4 룩셈부르크의 노트르담대성당의 외관은 단정하고 간결하다 5 헌법광장에서 바라본 아돌프다리 6 뤽상부르공원은 파리지앵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식처다 7 샹젤리제 거리를 오가는 파리지앵들 8 센강에서 바라본 에펠탑과 파리시내의 야경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이름 밖에 몰라”…숲속에서 살아온 미스터리 소년

    “이름 밖에 몰라”…숲속에서 살아온 미스터리 소년

    오랜 세월 숲속에서 살아온 한 소년이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나타나 화제에 올랐다. 이 소년의 이름은 레이(Ray). 소년은 이름 이외에 출생일, 국적 등 자신의 관한 정보는 아는 것이 없었다. 레이가 ‘문명사회’에 나타난 것은 지난 5일(현지시간). 소년은 겨울 옷을 입고 침낭을 메고 베를린 시청 앞에 나타나 경찰은 소년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 조사결과 레이의 모친은 5년전 교통사고로 숨졌으며 이후 소년은 부친과 함께 독일과 체코에 이어져 있는 거대한 숲 속에서 살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레이와 부친은 그간 숲속에서 텐트를 치고 사냥을 통해 먹을 것을 조달해 왔다. 레이가 ‘문명사회’로 나온 것은 부친의 죽음 때문. 지난달 부친을 여윈 레이는 유언에 따라 북쪽으로 2주간 계속 걸어 베를린에 도착했다. 현지 경찰은 의사에 소견에 따라 나이를 17살 정도로 추정할 뿐 아직까지 레이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레이가 자신을 증명할 어떠한 기억과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 그러나 경찰은 레이가 영어를 주로 쓰고 독일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점에 주목해 인터폴 등과 공조해 유럽 전역으로 행방불명된 사람들을 조사 중이다. 베를린 경찰 측은 “오랜 숲속 생활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건강상태는 양호하다.” 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소년의 신원을 알아낼 것”이라고 밝혔다. 또 “소년은 현재 청소년 보호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의 보호자가 될 사람을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신문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쪽빛 데칼코마니 융프라우를 걷다

    쪽빛 데칼코마니 융프라우를 걷다

    얼마전까지 우리가 스위스를 돌아보는 방법은 주로 ‘관광’이었습니다. 기차나 곤돌라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는 것’ 위주였습니다. 최근 걷기 열풍이 불면서는 스위스의 진면목을 걸어서 살피려는 움직임도 부쩍 늘었습니다. 그 중심에 스위스의 아이콘, 융프라우가 있었지요.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는 여정입니다. 이제 여기에 치즈와 초콜릿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탭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스위스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여정입니다. 바로 그렇게 삶과 풍경이 어우러질 때라야 비로소 온전히 스위스를 돌아본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스위스관광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절반보다 작은 스위스 안에 조성된 하이킹 패스(path)가 6만㎞를 넘는다. 지구를 한 바퀴(약 4만 120㎞) 반쯤 돌 수 있는 거리다. 트레일은 2만개 정도 된다. 우리의 둘레길 같은 하이킹 코스들이 거미줄처럼 나라 전체를 촘촘하게 감싸고 있는 셈이다. # ‘유럽의 지붕’ 열차만 타지 말고 걸어보면… 스위스 하이킹의 핵심으로 꼽히는 융프라우 일대에도 76개의 다양한 하이킹 코스가 있다. 저마다의 취향과 산행 능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융프라우 하이킹은 대부분 인터라켄에서 기차를 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터라켄은 ‘두 개의 호수 사이의 마을’이란 뜻으로, 융프라우의 배후지 역할을 한다. 기차는 인터라켄 오스트역을 출발해 라우터브룬넨(796m)과 클라이네 샤이데크(2061m) 등을 경유해 융프라우요흐(3454m)까지 오른다. 시간은 2시간 30분가량 소요된다. 평탄하게 이어지던 철길은 라우터브룬넨부터 궤도 사이에 톱니바퀴가 놓이기 시작한다. 기차를 타고 험준한 산을 오르는 동안 차창은 풍경화가 된다. 슈타우바흐 폭포 등 풍경의 보고들이 벽화처럼 내걸리는데, 입이 쩍 벌어질 지경이다. 오를 땐 기차 오른쪽, 내려올 땐 왼쪽에 앉는 게 풍경을 감상하기 좋다. 클라이네 샤이데크에선 저 유명한 융프라우 산악열차로 갈아탄다. 내년이면 설립 100주년이 되는 유서 깊은 철길이다. 산악열차에 오르면 ‘처녀’란 뜻의 융프라우(4158m)와 수많은 산악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아이거 북벽(3970m), 묀휘(4107m) 등 알프스의 고봉들이 어깨를 맛댄 풍경과 마주한다. 산악열차는 약 2㎞는 초원지대, 7㎞ 남짓한 거리는 아이거와 묀휘의 암벽을 뚫은 터널을 지난다. 소요시간이 50분에 달할 만큼 천천히 오른다. 고산병 증세를 일으킬 수 있는 고도까지 올라가기 때문이다. 터널 구간 중 아이거반트(2865m)와 아이스메어(3160m) 등 두 곳에서 각각 5분씩 정차한다. 아이거 암벽 속에서 알프스 전경을 내려다보는 맛이 각별하다. 종착역은 융프라우요흐다. ‘요흐’는 우리의 ‘재’와 비슷한 뜻으로, 융프라우와 묀휘 두 산자락이 내려와 만난 자리를 뜻한다. 역 밖의 플라토 전망대나 빙하지대로 이어지는 뒷문이 전망 포인트. 역 위쪽의 스핑크스 전망대도 절대 놓쳐선 안 된다.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와 22㎞를 뻗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알레치 빙하가 눈앞에 펼쳐진다. 고산증으로 인한 어지럼증도 이때만큼은 싹 가신다. 융프라우 하이킹은 산악열차나 곤돌라 등으로 고산 지역에 오른 뒤 되짚어 내려가는 형태가 많다. 그 가운데 한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코스는 ‘아이거 융프라우 워크’다. 융프라우요흐에서 열차를 타고 내려오다 아이거 글래쳐(2320m)에 내려서 클라이네 샤이데크까지 걷는다. 융프라우와 아이거, 묀휘 등의 거봉들을 줄곧 등에 지고 내려온다. 앞쪽으로는 알프스의 산자락들이 마루름을 좁히며 다가선다. 스위스 목동들이 만들었을 것 같은 지그재그 코스는 하이킹 초보자들도 즐길 수 있을 만큼 쉽다. 1시간 남짓 걸린다. # 그뤼에르 치즈… 스위스 삶의 정수 스위스를 대표하는 식품은 치즈와 초콜릿이다. 그 둘의 명산지가 프리부르 지역이다. 스위스 연방을 이루는 26개 주(칸톤) 가운데 한 곳이다. 치즈와 초콜릿 생산 농가는 프리부르 지역 가운데서도 특히 그뤼에르 주변에 몰려 있다. ‘치즈 데어리 패스’(Cheese Dairy Path) 등 전통 치즈와 초콜릿을 맛볼 수 있는 하이킹 코스도 그뤼에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인터라켄에서 그뤼에르까지는 ‘골든패스 파노라믹’ 등 기차를 바꿔 타며 이동한다. 스위스는 하이킹 패스 못지않게 철도 시스템도 그물망이다. 46개 철도회사가 총연장 5102㎞의 철로를 통해 스위스 구석구석을 연결한다. 관광객들이 어렵지 않게 4000m 가까운 산을 오르고, 꼭꼭 숨겨진 풍경들과 만날 수 있는 이유다. 1876년 첫 운행을 시작한 ‘골든패스 파노라믹’은 전원마을 츠바이짐멘에서 그뤼에르를 지나 레만호(湖)를 품은 몽트뢰까지 이어져 있다. 스위스 특유의 전원풍경을 차창에 달고 가는 노선으로, 스위스 기차여행의 정수로 꼽힐 만큼 줄곧 빼어난 풍경과 동행한다. 인터라켄이 독일어권 지역이라면 프리부르는 프랑스어권 지역이다. 특히 그뤼에르는 지역적으로 프랑스와 가깝다. 문화 또한 프랑스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당연히 고마움의 뜻을 전할 때 독일어 ‘당케 쉔’보다 프랑스어 ‘메르시 보쿠’가 더 잘 어울린다. 국내 한 포털 사이트는 그뤼에르에 대해 ‘거의 1000년 전부터 만들어온 경질 치즈’라고 적고 있다. 지명이 그 지역의 음식을 뜻하는 고유명사처럼 변한 것이다. 치즈 데어리 패스는 그뤼에르를 출발해 해발 1100m의 몰레종 마을까지 다녀온다. 그뤼에르에서 몰레종 마을까지는 5.7㎞, 왕복 4시간쯤 걸린다. 여기는 그러니까, 예쁜 수직 세상쯤 되겠다. 잣나무와 낙엽송 등이 하늘을 찌를 듯 쭉쭉 뻗어 있다. 그 아래는 들꽃 세상이다. 노란 민들레와 꽃반지 만들던 토끼풀 등 익숙한 녀석들은 물론, 어린아이 손톱보다 작은 들꽃들이 지천이다. 산길에서는 너나 없이 친구가 된다. 꼬장꼬장한 빨강 머리 독일 할머니도, 배불뚝이 스페인 아저씨도 수줍고 정감 있는 눈인사를 건넨다. # 해발 수천m에서 듣는 워낭소리 40분 남짓 산길을 오르면 워낭소리가 들리고 얼룩무늬 젖소들이 눈에 띈다. 스위스에선 이처럼 해발 수천m 고지대에서 소를 방목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저지대 농가들이 싱싱한 풀을 찾아 고원의 초원지대로 올려 보낸 소들이다. 소떼는 봄에 올라와 가을이면 내려간다. 이들이 이동하는 것을 ‘포야’라고 부른다. 가을에 소떼가 내려올 때면 마을마다 축제가 펼쳐진다. 특히 그뤼에르의 중심지인 불에선 만국기를 걸듯 워낭으로 마을 하늘을 장식해 뒀다. 여간 이채롭지 않은 풍경이다. 몰레종 마을까지 가는 산길은 전형적인 스위스 시골 풍경을 담고 있다. 우리와 닮은 듯, 또 다른 풍경에 넋이 쏙 빠진다. 산길 중간의 ‘몽제롱’은 치즈에 식빵을 적셔 먹는 퐁듀로 유명한 집이다. 퐁듀 한 그릇에 17~19스위스프랑(약 2만 1000~2만 3000원)을 받는다. 몰레종 마을에서도 전통 수제 치즈 제작과정을 살펴보거나 다양한 치즈를 맛볼 수 있다. 초콜릿과 함께하는 길은 ‘치즈&초콜릿 트레일’로 불린다. 그뤼에르에서 버스로 10분 정도 떨어진 샤르메가 출발지. 초콜릿 박물관이 있는 브로크(Broc)까지 약 11㎞를 걷는다. 넉넉한 몽살뱅호(湖)와 고전 전쟁영화에서 봤음직한 수력발전소, 그리고 그 아래 펼쳐진 야운바흐 협곡을 따라 걷는다. 글 사진 인터라켄·그뤼에르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 @전기는 220V를 쓴다. 우리와 다른 형태의 콘센트(3점식)를 쓰는 곳이 많다. @산악지대가 많으므로 보온성이 좋은 가벼운 옷과 등산화, 선글라스, 선블록 등을 준비해야 한다. @스위스 패스가 무척 유용하다. 기차는 물론 버스, 유람선까지 이용할 수 있다. 산악철도나 케이블카는 할인혜택을 받는다. 스위스 관광청(www.myswitzerland.co.kr) 참조. @스마트폰 소지자는 스위스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받아 갈 것. 현지에서 여행서적 몫을 톡톡히 한다. @인터라켄 시내는 자전거로 돌아보기 딱 좋다. 인터라켄 서역(west), 호텔 등에서 대여해 준다. 1~2시간에 14스위스프랑(CHF). 1CHF(이하 프랑)는 약 1230원. @음료수 등 잡화를 살 때 ‘COOP’ 매장을 이용하면 싸다. @융프라우요흐에서 컵라면을 맛볼 수 있다. 7.5프랑. @브로크의 카예 네슬레 초콜릿 공장 입장료는 10프랑이다. 초콜릿 생산 공정 등을 들여다보고, 다양한 초콜릿을 맛볼 수 있다. 비교적 싼 초콜릿 매장도 마련돼 있다. @그뤼에르 고성(古城)은 스위스 국민들이 두 번째로 자주 찾는 고성이다. 꼼꼼하게 살펴보는 게 좋다.
  • [2012학년도 대입 수시 가이드] 성신여대-어학능력자 글로벌 인재 1·2전형을

    [2012학년도 대입 수시 가이드] 성신여대-어학능력자 글로벌 인재 1·2전형을

    성신여대는 2012학년도 수시 1차(일반전형)에서 552명, 2차에서 441명 등 모두 993명을 모집한다. 수시모집에서는 일반학생 전형 등 여러 유형의 전형을 실시하는데 논술고사, 학생부, 실기고사, 외국어성적 등 전형마다 다양한 전형요소를 활용한다. 때문에 수험생은 유리한 전형을 선택해 지원할 수 있다. 우수한 학업능력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글쓰기에 장점이 있는 학생이라면 논술고사를 실시하는 수시 1차 일반학생 전형에 지원하는 것도 고려해봄 직하다. 1단계 배수 선발 없이 지원자 모두 논술고사에 응시하게 된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등 공인어학능력시험 성적이 있는 학생은 성신글로벌인재1·2 전형에 지원할 수 있다. 수시 2차 일반학생 전형은 수능시험 이후 원서를 접수하며, 학생부 100%로 뽑는 전형이다. 우선선발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적용하여 모집인원의 50%를 선발하고, 우선선발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일반선발 기준을 적용하여 선발한다. 김종배 입학홍보처장은 “고등학교 이수계열과 관계없이 모집단위에 지원할 수 있는 교차지원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 [2012학년도 대입 수시 가이드] 덕성여대-수시 1회만… 4개 전형으로 499명 모집

    [2012학년도 대입 수시 가이드] 덕성여대-수시 1회만… 4개 전형으로 499명 모집

    덕성여대는 수시모집을 한 차례만 실시한다. 일반학생전형, 글로벌파트너십전형, 지역사회파트너십전형, 사회기여배려대상전형의 4개 전형을 통해 499명을 모집한다. 지역사회파트너십전형·사회기여배려대상전형은 입학사정관전형으로 진행된다. 수시모집 전 전형에서 수능최저학력기준은 적용되지 않는다. 414명의 학생을 뽑는 일반학생전형은 1단계에서 학생부 100%로 모집인원의 3배수를 선발하고 2단계에서 학생부 70%, 심층면접 30%로 최종 합격자를 가린다. 2단계에서 치러지는 심층면접에서는 공통1문항, 전공1문항을 물어본다. 글로벌파트너십전형은 53명을 선발한다. 학생부는 반영하지 않는다. 1단계에서 영어·독일어·스페인어 공인어학점수 100%를 반영해 모집인원의 4배수를 선발한 뒤 2단계에서 공인어학점수 80%, 심층면접 20%로 뽑는다. 입학사정관전형인 지역사회파트너십전형으로 10명, 사회기여배려대상전형으로는 총 22명의 신입생을 선발한다. 학생부 50%, 심층면접 30%, 서류심사 20%를 반영한다. 수시모집 원서접수 기간은 9월 8~15일이다. 1단계 합격자는 10월 12일에 발표한다. 면접은 10월 21~30일 실시된다.
  • “한국생활 즐거워…스페인어 통역 맡았죠”

    “이런 큰 스포츠 행사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자원봉사자로 활약하고 있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 노라 에베르트(45)는 26일 “대구 대회에서는 특별히 스페인어 통역을 맡아 스페인어를 쓰는 VIP와 사진기자들을 도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어와 스페인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노라가 대구대회의 성공적인 개최에 힘을 보태기 위해 나선 것은 지난 2월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싶다.”고 조직위원회에 신청한 것이 계기가 됐다. 같은 달 한국에서 일하는 남자 친구를 따라 대구에 왔다. 대학에서 외국어와 비서학을 공부했다는 그는 스포츠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이어 가고 있다. 한때 요가와 육상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을 따 독일과 인도 등의 사설 학원에서 제자들을 지도했고, 남자 친구도 현재 스포츠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대구에 7개월째 머물고 있는 노라는 “처음 한국을 찾았는데 무척 재미있고 인상적이며, 한국 생활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WHO&WHAT] 인간은 이기적 동물? 이타적 동물?

    [WHO&WHAT] 인간은 이기적 동물? 이타적 동물?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인가, 이타적인 동물인가.’  이 질문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흔히 인간은 이기적이면서 이타적이기도 한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현대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은 ‘순수하게’ 이기적인 동물이다. 1976년 영국에서 출간된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 옥스퍼드대 교수의 이 이론은 여전히 생물학계의 주류로 각광받고 있다. 도킨스의 이론은 결코 이해하기 쉬운 내용은 아니다. ‘인간은 유전자의 꼭두각시이자 기계’ 정도로 요약된다. 모든 생명체가 자기 보존의 원칙이라는 한 가지 목적만을 갖고 있으며 유전자는 이에 맞춰 프로그램돼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흔히 인간을 동물과 다르게 하는, 남을 위한 희생정신과 이타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타성은 수많은 학자들이 진화생물학을 반박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이번 주 가상인터뷰 ‘후 앤드 왓’(Who & What)에서는 ‘인간의 이타성’에 대한 공개재판을 열었다. 피고석에는 역사상 가장 ‘이타적인 과학자’로 꼽히는 러시아의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1887~1943)가 앉았다. 인류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전세계를 떠돌며 종자를 모았지만, 정작 본인은 감옥에서 굶어죽은 비극의 주인공이다. 인간의 근원에 대한 왕성한 탐구욕을 보여 온 영화 ‘혹성탈출’ 속 원숭이들의 영웅 시저가 검사로 나서 바빌로프의 이타적 유전자를 기소했다. 바빌로프의 변호는 그의 후계자로 평가받는 ‘녹색혁명의 아버지’ 노먼 빈센트 볼로그(1914~2009)가 맡았다. 시저 니콜라이 바빌로프. 1887년 모스크바 출생. 작물학자이자 식물유전학자, 수집가, 탐험가. 맞는가? 바빌로프그렇다. 시저법정에 섰는데도 전혀 낯설어하지 않는다. 보통 피고인석에 서게 되면 죄를 지은 사람이나 아닌 사람이나 모두 긴장한 모습이게 마련인데. 바빌로프 2년 정도 수용소와 법정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보다는 오히려 분위기나 의자가 편하다. 시저당신이 왜 여기에 불려 왔는지 죄목을 알고 있나. 바빌로프잘 모르겠다. 시저당신은 유전자의 법칙을 거스른 혐의를 받고 있다. 현대 진화생물학의 핵심 토대인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유전자는 오로지 생존만을 생각한다. 그런데 당신의 일생은 이 이론으로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자리의 배심원 앞에서 그걸 입증해 보이겠다. 당신의 집안은 꽤 부잣집이었다. 당신의 부모는 당신이 섬유공장을 물려받기를 원했는데 왜 따르지 않았나. 바빌로프우리 가족이 부유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난 세 명의 형제들을 어려서 병으로 잃었다. 그 때문에 나를 포함한 나머지 형제들은 당시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던 과학과 의학을 통해 이 같은 불행을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 누나 둘은 의사와 세균학자, 형은 물리학자, 난 식물학자가 됐다. 시저다른 형제들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왜 당신은 식물학인가. 당시에는 식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별 의미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바빌로프사실 의사가 될지 식물학자가 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 입학 직전 러시아에 최악의 흉년이 닥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 시저당신 자신을 위해서였다면 분명 의사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 아니었나. 잘살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식량을 걱정해서 식물학자가 됐다는 사실부터 아이러니하다. 과학적 발견으로 인류의 고통을 덜 수 있을 것이라는 자만에 빠져 있었던 것 아닌가. 바빌로프그게 나의 가장 큰 희망이었다. 난 새로운 발견을 할 때마다 ‘이 발견을 어떻게 농사에 활용할 수 있을까.’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또 작물의 질병과 전염병 때문에 생겨나는 기아, 사망, 이주, 사회불안을 막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시저그래서 결국 당신은 가족조차 버리고 먼 길을 떠났다. 1916년에 처음 파미르 고원으로 ‘페르시아 밀’을 찾아 떠난 이후 1933년까지 115차례나 소위 ‘종자찾기 여행’을 했다. 첫 여행을 떠날 때는 신혼이었고, 아들이 태어났는데 안아 줄 시간조차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게 말이 되나. 도대체 얼마나 숭고한 여행이었기에 가족도 팽개쳤던 건가. 바빌로프작물이 지닌 질병면역력을 찾기 위해 지구상에 어떤 식물이 오랫동안 살아남았는지를 알고자 했다. 농작물이 잘 자라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날씨의 영향도 있고, 병충해가 생겨서 순식간에 초토화되는 일도 많다. 무엇보다 인간이 생산성이 높다거나 하는 이유로 한 가지 작물에만 집착하면 그 작물에 병충해가 생길 경우 모두 굶어 죽게 마련이다. 하지만 다양한 생물을 키울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더위에 강한 작물, 추위에 강한 작물, 생산성은 낮은 대신에 병충해에 강한 작물을 적절하게 섞어서 키운다면 어떤 경우에도 기아를 면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작물의 근원을 찾아야했다. 밀, 벼, 콩 등이 처음 태어난 곳을 찾는다면 그곳에서 가장 강하게 자란 품종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시저그래서 도대체 품종을 얼마나 모은 것인가. 바빌로프정확하지는 않지만 5대륙을 모두 돌면서 나와 동료들이 모은 종자와 덩이줄기가 14만 8000개에서 17만 5000개 정도 될 거다. 당연히 모두 땅에 심는 순간 자랄 수 있는 발아 가능한 종자들이었다. 시저그동안에 당신은 이혼도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인류를 구한다는 목표 아래 결국 가족을 잃은 건데, 만족하나. 바빌로프아내 에카테리나와 아들 올레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종자여행을 위해서 말을 배울 시간도 부족했다. 시저전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몇 개 국어나 할 수 있나. 바빌로프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는 기본이고 에티오피아 공용어인 암하라어나 페르시아어까지 배웠다. 땅과 씨앗의 진정한 주인은 농부들이고, 종자에 대해서는 그들이 가장 잘 안다. 그들의 말로 대화하는 것이 종자여행의 핵심이었다. 시저다시 말하자면 당신은 오로지 씨앗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떠돌았고, 그 결과 가족을 잃었다. 심지어 국가도 당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러시아에 식량이 부족해지자 스탈린 체제의 농업학자들은 당신이 지나치게 많은 종자를 가져와 방치했기 때문에 식량정책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면서 가뒀다. 재판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았고, 물론 다행히 집행되지는 않았지만 결국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량을 모은 당신이 감옥에서 굶어 죽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잖은가. 당신은 뭘 위해 일한 건가.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면, 당신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것 아닌가. 심지어 당신의 제자들은 연구소의 종자에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다가 세계대전 중에 봉쇄된 도시에서 굶어 죽었다. 이 또한 당신의 책임 아닌가. 바빌로프…. 볼로그바빌로프의 성과가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뒤를 이었던 내가 좀 더 보충하고 싶다. 병충해에 강하고, 식량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것이 당신의 목표였다. 맞는가. 바빌로프그렇다. 그것만이 인류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볼로그현재 러시아의 경작지 80%에서 바빌로프가 세운 연구소의 종자에서 개발된 품종을 키우고 있다. 불과 80년이 지나지 않아 수천년을 내려온 농업의 뿌리를 바꾼 거다. 종류는 1000가지가 넘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물다양성은 지금 이 순간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화두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화학비료를 뿌리고, 병충해를 막기 위해 농약을 살포한 덕분에 땅은 피폐해졌고 새로운 병충해에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결국 식물학자와 농업학자들은 80년 전 바빌로프가 주장했던 생물다양성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시저바빌로프의 노력들이 실제로 인류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것인가. 볼로그나 역시 바빌로프의 여행에서 연구의 기본을 얻었다. 밀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결국 밀의 근원을 찾기 시작했고, 병충해에 강한 앉은뱅이 밀을 얻었다. 이 밀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10억명이 넘는 사람들을 기아에서 구했다. 시저그 덕분에 당신은 197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평생 아쉬움 없이 연구를 하고 영광을 누렸다. 그런데 바빌로프는 결국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희생만 한 것 아닌가. 여러 가지 정황상 바빌로프의 유전자는 유죄가 분명하다. 볼로그시저 당신은 ‘이기적 유전자’의 가장 큰 함정에 빠져 있다. 바빌로프가 이타적이냐 하는 질문에 당신은 ‘그렇다.’라고 대답하겠지만 실제로는 바빌로프야말로 가장 이기적인 유전자를 갖고 있다. 이기적인 유전자를 주장하는 유전자 설계론의 핵심은 유전자가 자신이 속한 종이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유전자를 위해 행동하도록 설계돼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로운 행위를 하는 이타주의자들은 결국에는 생존을 위해 교묘하게 이타성으로 위장된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바빌로프는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이익을 위하는 대신 인류라는 종의 생존을 위해 철저하게 프로그램된 유전자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까지 버릴 수 있는 이타성이 바로 지독한 이기적 유전자의 증거다. 오히려 바빌로프야말로 ‘이기적 유전자’ 그 자체가 아닌가. 바빌로프이기적 유전자니 이타적 유전자니 하는 부분은 잘 모르겠다. 난 그냥 내 머리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죽는 순간까지 내가 모은 종자들에 대해 걱정했는데, 그 덕분에 인류가 기아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됐다니 기쁘다는 생각뿐이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참고문헌]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게리 폴 나브한·강경이/아카이브)  이타적 유전자(매트 리들리·신좌섭/사이언스북스)  이타적 과학자(프란츠 부케티츠·도복선/서해문집)  기아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다(스코트 킬맨·이순주/에이지21)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이상임/을유문화사)  생각의 역사2(피터 왓슨·이광일/들녘) 서울신문은 매주 1회 독특한 포맷의 가상 인터뷰 [WHO&WHAT(후 앤드 왓)]을 1개면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반 신문기사로는 다루기 힘든 동서고금의 지식과 역사의 정수들을 만남 또는 대담의 형식을 통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청소년, 어른 모두에게 즐겁고 색다른 지식의 장이 될 것으로 자부합니다. 특히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훌륭한 논술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WHO&WHAT] “퀴즈쇼서 인간에 완승한 슈퍼컴 왓슨(Watson)을 만나다” [WHO&WHAT] 무덤에서 불러낸 독재자 4인의 가상만찬 ‘재스민 혁명’을 논하다 [WHO&WHAT] 천재소년 송유근, ‘우주비행 성공 50주년’ 맞아 유리 가가린을 만나다 [WHO&WHAT]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과 상담하다 [WHO&WHAT] 지구수비대 지원한 인간형 로봇 ‘마루’ “아톰·태권V처럼 지구 지켜서…” [WHO&WHAT] ‘최악’ 통념 B형 男기자, 혈액형의 아버지 ‘란트슈타이너’에 따지다 [WHO&WHAT] ‘전 세계 여성의 로망’ 버킨백을 만나다 [WHO&WHAT] 선택 따라 전혀 다른 결과…”이렇게 검색하면 진리가 밝혀질까?” [WHO&WHAT] “남느냐, 떠나느냐” 희곡으로 본 어느 서재 도서들의 열띤 논쟁 [WHO&WHAT] ‘위대한 유산’ 남긴 간송미술관의 전형필, 그리고 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WHO&WHAT]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그는 왜 라파엘로를 죽이고 싶었을까 [WHO&WHAT] ‘美우주왕복선은 초대형 폭탄이나 마찬가지’ 물리학자 파인먼의 폭로 [WHO&WHAT] 외규장각 도서 귀환으로 본 약탈문화재의 ‘수구초심(首丘初心)’ [WHO&WHAT] “재능만 주고 사랑은 주지 않던 나쁜 부모들” 유명 인사들의 회상기 [WHO&WHAT] 인류역사를 바꾼 ‘억세게 운 좋은 사내들’ 서바이벌 현장…과연 승자는? [WHO&WHAT] 소설 속 영국인 주인공 폴 웨스트 “파리서 1년 살아보니” [WHO&WHAT] 인류 첫 셀레브러티 ‘클레오파트라’… 베일 속의 그녀의 얘기 들어보니 [WHO&WHAT] 유전학의 창시자 수도사 멘델의 고백… “저, 유전학의 아버지 아니에요” [WHO&WHAT] 인간은 이기적 동물? 이타적 동물?…러시아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가 밝힌 유전자의 비밀
  • “재능보다 목표” “감각보다 노력”…비슷한 두 남자

    “재능보다 목표” “감각보다 노력”…비슷한 두 남자

    열살 터울의 두 남자는 여느 클래식 연주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한 명은 스물다섯에 뒤늦게 유학길에 올라 8년 만에 오스트리아 유명 음악원의 교수가 됐다. 퍼커션 연주자 정건영(36)씨다. 다른 한 명은 중 3때 독일로 유학을 떠나 연주자와 과학자의 길을 동시에 걷고 있다. 첼리스트 고봉인(26)씨다. 두 사람은 지난 13일 끝난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과 대관령국제음악제 참가를 위해 각각 모국을 찾았다. ‘늦깎이’와 ‘천재’에게 음악과 인생을 물어보았다. <정건영> 충남 예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은 중학교 때까지는 음악과 담을 쌓고 살았다. 고교 입학식날, 밴드부 선배가 불던 ‘은색 악기’에 반했다. 나중에 트롬본이란 걸 알았다. 다음 날 음악실을 기웃대던 소년에게 선배는 트롬본을 불어보라고 했다. 웬걸, 팔이 짧아서 트롬본 슬라이드를 끝까지 뻗지 못했다. 선배는 트럼펫을 불어보라더니 입술이 너무 두꺼워 안 된다고 했다. 풀이 죽어 음악실을 나가려던 찰나, 마림바를 툭탁거리던 선배가 두드려 보라고 했다. 정 교수는 “화도 났던 터라 미친 듯이 두들겼는데 선배가 재능 있다고 하더라.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동기들도 ‘천재’라고 하며 모두 꾀었더라.”고 회상하며 웃었다. 늦깎이인 데다 시골에서 음대에 진학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지방대를 다녔는데 수업은 딱 7번 나갔다. 대신 유명 타악기 연주자의 공연 비디오와 교본을 구해놓고 혼자 미친 듯이 연습했다. 2000년 오스트리아 린츠로 떠났다. 독일어는 입도 뻥긋 못 했고 나이까지 많은 그는 환영받지 못했다. 두 번이나 시험에 떨어졌고 돈도 떨어졌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빈 국립음대에 응시했다. 18명의 지원자 중 유일하게 합격했다. “‘드럼라인’(미국 대학 밴드부의 드럼 배틀을 다룬 영화)에 나오는 ‘루디멘털’ 장르를 실기시험 자유곡으로 연주했다. 클래식 타악기 테크닉만 구사하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접시닦이, 관광가이드 등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빈 음대에서 8년을 갈고닦았다. “표현할 수 있어야 예술”이라는 지도교수 발터 파이글의 권유로 지휘과정도 이수했다. 2008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빈의 프라이너 콘서바토리움 교수가 됐다. 올 초까지 빈 국립음대 초청교수로도 일했다. 둘 모두 동양인 최초다.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음악을 통한 소통. 유튜브에 레슨 동영상을 올리고 국내 공연에서 애프터스쿨의 곡과 안무까지 소화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관객들이 1시간을 1분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즐거움에 감동과 의미를 더해야 한다.” 재능이 노력보다 중요하다는 게 클래식계의 주된 의견이다. 정 교수는 “타고나야 하지만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다.”면서 “어릴 때부터 음악을 배운 것도, 한국에서 유명한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지만, 최고의 타악기 연주자가 되겠다는 목표가 있어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고봉인> 누이가 바이올린을 먼저 배웠다. 엄마가 누이만 챙기는 걸 보고 질투심이 났다. 소년도 여덟 살 때부터 첼로를 시작했다. 요즘 음악영재들에 비하면 늦은 출발. 불과 1년 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 오디션을 볼 만큼 빨리 늘었다. 그곳에서 은사인 정명화 교수를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심각하게 음악을 하려던 게 아니어서 기교적으로는 정말 별로였다. 그런데 부담 없이 즐기는 모습을 보고 정명화 선생님이 잠재력이 있다고 판단하신 것 같다.” 고향 전주의 초·중학교를 다니면서 주말에는 한예종 예비학교에서 정 교수에게 사사했다. 신흥중 3학년 때 정 교수의 권유로 독일 유학을 떠났다. 여느 유학생처럼 음대에 조기 진학하는 대신 일반 고교에 다니면서 학업을 병행했다. 그런데도 발전 속도는 괄목상대였다. 1997년 차이콥스키 국제청소년콩쿠르에서 우승했고, 2000년 독일 크론베르크 마스터클래스에서 가장 유망한 첼리스트에게 주는 ‘란드드라프 폿 헤센’상을 받았다. 원래는 아버지(고규영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교수)처럼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미국 하버드대와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복수학위 프로그램으로 생물학과 첼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프린스턴대 분자생물학 박사과정(2년 차)에 적을 둔 고봉인씨는 세포와 단백질의 상호 영향 메커니즘을 밝혀 유방암 치료 열쇠를 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실험이 워낙 많아 연주활동을 병행하는 게 쉽진 않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과학자를 꿈꿨고 음악가의 길을 줄곧 걸어왔기 때문에 하나가 없으면 삶의 균형이 깨져 불행해질 것 같다.”는 고봉인씨는 “특별한 연주를 통해 수백 수천 청중의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유방암 치료 방법을 찾는다면 수천 수만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둘 다 매력적”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노력 중 어떤 게 중요한지. “실내악 앙상블처럼 다른 이의 연주에 반응하면서 같이 협연하는 것은 누가 가르치거나 노력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선천적인 재능, 본능적인 감각이 필요하다. 물론 노력은 당연한 얘기다.” 우문이었나 보다. 모두 그를 천재라고 말하는데 자신은 어떻게 생각할까. “난 노력파다. (첼로) 시작도 늦었고,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노력했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은 숱한 실험을 해야 한다. 80~90%는 실패하다 보니 천재성보다는 노력과 인내심, 성실함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나와 맞는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이제는 공공외교다] 유럽서 느낀 일본문화

    [이제는 공공외교다] 유럽서 느낀 일본문화

    독일 남부 하이델베르크 역사에 있는 서점에 들어가면 한쪽에 일본 망가 번역본이 별도 칸에 빼곡하게 진열돼 있는 걸 볼 수 있다. 독일어로 번역된 일본 망가를 펼쳐봤다. 책 자체도 일본식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도록 편집해 놓았다. 일본 문화 대표상품인 망가의 인기는 남미의 브라질 최남단 포르투알레그레에서도 느낄 수 있다. 시내 광장 곳곳에 있는 가판대에서 포르투갈어로 번역된 일본 망가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지금도 여전히 ‘일본은 있다’. 언제부턴가 한국에서는 일본을 ‘지는 나라’ 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1990년대 ‘일본은 없다’가 도발적인 주장이었다면 2000년대엔 알게 모르게 상식처럼 돼 버렸다. 하지만 외국에서 조금만 지내 보면 그 ‘상식’이 사실은 ‘몰상식’이라는 것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깨달을 수 있다. 문화적 자부심이 넘쳐나는 유럽에선 그것을 더욱 더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최근 들어 유럽에 상륙한 몇몇 아이돌그룹의 열풍에 온 나라가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는 ‘한류’에 비해 이미 19세기부터 유럽 중심부에서 열풍을 일으켰던 ‘자포니즘’, 이른바 ‘일류’(日流)는 지금도 차분하게 유럽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일본어 전공자 넘쳐 취업난 헝가리에는 일본어 가이드 자격증을 가진 헝가리인이 15명이 넘는다. 최근 들어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늘고는 있지만 아직 한국어 가이드 자격증을 가진 헝가리인은 없다. 헝가리 최대 명문대인 엘테대 한국학과 초머 모세 교수가 “일본학과보다 한국학과가 취직에 유리하다.”면서 밝힌 이유는 중부유럽에서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학과 졸업생은 취직하기가 힘듭니다. 1970년대 일본학과가 생겨서 지금은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이 이미 너무 많거든요. 한국학과는 2008년 처음 생겼고 올해 첫 졸업생을 배출합니다. 헝가리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올해 첫 한국학과 졸업생들을 스카우트하려고 경쟁할 정도로 수요가 많습니다.” 엘테대 동아시아 도서관은 한국어 장서를 약 3만권 보유하고 있다. 일본과 중국 관련 소장도서 규모를 묻자 사서는 “각각 30만권가량”이라고 답했다. 프랑스 파리 중심가에 위치한 일본문화원에서 만난 다케우치 사와코 원장은 “이곳은 유럽과 아프리카 주재 일본문화원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서도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일본문화원 전체 예산의 10%가량을 일본 재계단체인 게이단렌(經團連) 후원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다케우치 원장은 “게이단렌은 회원기업들이 추렴한 돈으로 기금을 만들어 우리 문화원을 지원한다.”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이라는 면도 있지만 문화외교가 결국 기업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문화의 저력은 바다 건너 남미에서도 절감할 수 있다.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이성형 HK교수는 지난해 국회입법조사처 간담회 발표를 통해 “중남미 문인들은 일본풍에 대해 약간 경이로운 시선으로 접근한다.”며 일본 문학이 차지하는 위상을 소개한 바 있다. 그는 “하이쿠(俳句·일본 전통시 양식)는 이곳 시인들이 즐겨 차용하는 시 양식이다.”면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설국’의 모티브에 매료되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일본 문화가 유행한 것은 17세기 일본도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67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차 만국박람회를 전후로 유럽에선 일본 문화 열풍이 불었다. ‘자포니즘’이란 용어까지 등장했다.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인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피에르 르누아르, 폴 고갱 등이 모두 일본 풍속화에 심취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친동생에게 “내 모든 작품은 일본 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지금도 일본 문화는 전세계에서 사랑받는다. 망가나 게임은 물론이고 스시, 사케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일본 문학계도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두 명이나 배출했다. 일본 문화청은 문화교류사 제도를 통해 해마다 분야별로 교류사를 뽑아 해외로 내보내거나 해외에서 활동하는 문화인사들을 교류사로 임명한다. 교류사들은 활동을 마치고 경험을 보고서로 작성해 발표하는데 이는 문화청 장관이 직접 주재하는 중요행사이다. ●‘자포니즘’ 한류보다 수백년 앞서 일본 문화가 유럽에서 아무 거부반응 없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건 아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중국학과 안나 발터(여)는 일본 문화에 대한 호감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대하는 것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일본이 왜 과거사 청산에 소극적이고 역사왜곡을 계속하는지 납득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는 아시아에선 더 예리하게 일본에 대한 근원적인 반감으로 작용한다. 1990년대 아무로 나미에 같은 아이돌이나 드라마가 아시아를 열광시키고 대형 기획사가 베트남과 베이징 등지에서 직접 오디션을 실시하는 등 한때 반짝했던 일본 대중문화가 빛을 잃어버리는 데 한 원인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글 사진 부다페스트·하이델베르크 파리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류승룡 “악역전문 아녜요. 코미디도 잘해요”

    류승룡 “악역전문 아녜요. 코미디도 잘해요”

    묘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눈빛과 말투다. 가식적인 표정, 불필요한 수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도드라지려 하지 않는데도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영화 속 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2007년 이후 16편을 찍었다. 대부분 조연이었지만 주연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올 여름 100억원 안팎의 제작비가 들어간 한국영화 ‘빅4’(퀵, 고지전, 7광구, 최종병기 활) 중 두 편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리운 류승룡(42)을 두고 하는 말이다. 200만 관객을 돌파한 ‘고지전’에 이어 오는 10일 ‘최종병기 활’ 개봉을 앞둔 류승룡을 지난 3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정당성 있는 악역 만들어 극적 긴장감 고조시키죠”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 ‘최종병기 활’은 청나라에 납치당한 누이동생을 구하려는 조선 최고 신궁 남이(박해일)와 청나라 장군 주신타(류승룡)의 추격전이 뼈대를 이룬다. 굳이 가르자면 주신타는 악당이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남이의 숨통을 조인다. 그런데 미워할 수 없다. 임금에겐 맹장이요, 부하들에겐 덕장이다. 돌아보면 그가 연기한 ‘고지전’의 북한군 장교 현정윤도 비슷했다. 북쪽 사람일진대 우리 편보다 더 인간답고, 끌린다. 악역 캐릭터가 공감을 얻도록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류승룡이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떤 기사에서 저를 악역의 제왕이라고 표현했던데 그건 아닌 것 같다.”고 입을 뗐다. “영화 ‘퀴즈왕’ ‘된장’ ‘7급공무원’에서 코미디를 했고, 드라마 ‘개인의 취향’에서는 남자를 사랑하는 수줍은 재벌 2세 역할도 했다.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고 자부하는데 ‘시크릿’의 조폭 보스 같은 역할이 각인된 모양”이라고 말했다. 이어 “영화의 긴장과 갈등을 극대화하려면 악역의 행동도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이유 없이 잔인하거나 사악한 캐릭터는 하지 않는다.”면서 “‘고지전’ ‘최종병기 활’의 인물들 역시 각자의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개인적으로는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코미디나 우연한 사건에 휘말린 소시민의 이야기에 끌린다고 했다. 앨런 파커 감독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1978)를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런 소시민들을 괴롭히는 역할들을 많이 했는데 역할이 뒤바뀌면 갈등을 고조시키는 악역을 누가 할지 걱정되기도 한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최종병기 활’에서 류승룡의 모든 대사는 전세계를 통틀어 사용 인구가 몇십명밖에 되지 않는 사어(死語)인 만주어다. 운좋게 국내에서 전문가를 찾아 촬영 두달 전부터 ‘열공’했다. 그는 “어법, 발음, 단어 등을 하루 8시간씩 몇 차례에 걸쳐 지도받았다. 어순이 우리말과 같아 다행이었다.”면서 “독일어나 러시아어에서 들리는 ‘크흐~’ 같은 발음들이 많은 남성적인 언어라 잘 맞았다.”라고 털어놓았다. 간단한 회화는 가능한지 물었더니 “‘워이훈자파~’(산 채로 잡아라) 같은 구문들이라 만주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도 써먹기는 곤란할 것 같다.”며 웃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작품이 없을 텐데 ‘고지전’과 ‘최종병기 활’이 극장가에서 맞붙게 됐다. 나막신 장수와 우산 장수 아들을 둔 부모의 마음과 비슷할까. 하지만 “‘퀵’과 ‘고지전’이 같은 날 개봉한 고창석(둘은 동갑내기 친구다)보다는 20여일 간격을 두고 개봉하는 내가 훨씬 낫다.”는 게 ‘쿨한’ 그의 답이다. ●“난타 1기로 전세계무대 샅샅이 훑었죠” 본격적으로 연기를 접한 건 경기 성남시 풍생고 1학년 때 연극반에 들어가면서다. ‘좀 노는 반장’이라 엇나갈 수도 있었지만, 연기가 그를 인도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연극이 없었다면 엄청나게 방황했을 텐데 연기를 하면서 치료가 되고 교화되는 걸 느꼈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렇게 재밌고, 안 하면 미칠 것 같은 일을 평생 해야겠다는 계시를 받았다.” 영화판에 발을 디딘 건 2004년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단역 ‘강도 1’)를 통해서다. 서른 다섯 살 때였다. 꽤나 먼 길을 돌아온 셈.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 연극과 출신인 그는 졸업 후 동랑레퍼토리극단에서 내공을 쌓았다. 인생의 첫 변곡점은 1997년 미국 뉴욕에서 만났다. 전위극 ‘두타’의 공연을 갔다가 ‘스톰프’와 ‘블루맨그룹’의 ‘튜브’ 같은 비언어극을 보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것. 마침 국내에서 ‘난타’ 1기 멤버를 뽑는 오디션이 진행 중이었다. 이후 5년 동안 난타의 핵심 멤버로 미국 브로드웨이와 영국 에든버러 등 전 세계를 샅샅이 훑었다. “국가대표 같은 보람을 느꼈다.”는 게 그의 얘기다. ●“마라톤 같은 연기생활 조급해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해도 당시 그는 연극배우일 뿐. 한국영화의 간판으로 자리매김한 대학동기 황정민, 정재영을 보면 부러웠을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친구들보다 10년 정도 출발이 늦었다. 상대평가 대신 절대평가를 하는 게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연기는 어차피 평생 해야 할 일이니까 마라톤처럼 가는 거다. (친구들의 성공이) 자극은 됐을지 몰라도 부럽거나 조급한 적은 없었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말로 하는 연기가 그리웠다. 연극·영화판을 넘나들며 재주꾼으로 이름을 날리던 대학 1년 선배 장진 감독을 떠올렸다. 인생의 두번째 터닝포인트였다. 장 감독의 연극 ‘웰컴 투 동막골’ ‘택시드리벌’로 감을 되찾은 그는 장 감독의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로 뒤늦게 충무로에 입성했다. 뒤처진 진도를 따라잡는 데는 6~7년으로 족했다. 꾹꾹 밟아 다진 연기력 덕에 지난 3~4년간 1주일 이상 쉰 적이 없을 만큼 시나리오가 꼬리를 물고 들어왔다. 해마다 4~5편씩 ‘다작’을 하는 데 대한 부담은 없을까. 연극배우 출신 중에는 짧은 시간에 이미지를 소진한 뒤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성장통’을 겪는 경우도 있기 때문. 그는 “나는 가장이고, 이것저것 고를 처지가 아니었다.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연기에 대한 목마름도 강했다. 덕분에 짧은 시간에 많은 걸 배웠다. 물론 이제는 조금 숨 고르기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이제는 공공외교다] 3국3색 문화외교

    [이제는 공공외교다] 3국3색 문화외교

    공공외교는 상대 국민의 ‘이해’와 ‘공감’을 얻기 위한 국가 차원의 장기적·전략적 외교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공공외교 가운데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로는 문화외교가 꼽힌다. 문화적 전통이 깊은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독일, 영국이 각각 정부주도형, 비정부기구형태, 혼합형 문화외교를 대표하고 있다. 한국의 문화외교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이들의 3국 3색 문화외교를 살펴봤다. ●프랑스 ‘중앙집중형’ 프랑스 문화외교의 특징은 정부가 주도하고 관리하는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20세기 전반기엔 문화를 통한 영향력 확대를 중시했지만, 1980년대 들어 문화교류와 문화다양성으로 초점이 이동했다. 프랑스 정부가 지난해 정부 조직 간 중복과 연계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랑스 인스티튜트를 설립하면서 프랑스 문화외교는 일대 혁신에 들어갔다. 프랑스 인스티튜트는 외교부 산하이면서도 다른 중앙행정부처 활동을 하나로 조절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기존에 150여개 국가 165곳에 흩어진 프랑스 문화원들을 오는 2013년까지 프랑스 인스티튜트라는 하나의 편제로 묶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로랑스 오에 사무총장은 “장기적인 목표는 브리티시 카운슬이나 괴테 인스티튜트 같은 단일 브랜드로 정착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혼합형’ 독일에서는 1951년 창립한 괴테 인스티튜트가 문화외교를 대표하고 있다. 프랑스와는 달리 독일의 문화외교는 정부 차원에서 큰 그림을 그리고 독립기관이 협업하는 혼합형 구조를 띠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독일 정부가 전권을 쥐고 전면에 나서는 모양새가 상대 국민들에게 부정적 인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크리스티네 레구스 괴테 인스티튜트 대변인은 “독일의 친구를 만드는 것이 우리 조직의 목표”라면서 “독일어 보급과 전파, 독일 관련 정보제공, 국제 간 문화협력 등을 수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슈테판 드라이어 주한 독일문화원장은 “독일 문화원의 업무 수행은 독일 외무부와 맺은 협정에 기반한다.”면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공공재단’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영국 ‘비정부기구 형태’ 영국 정부는 1934년 외교부에 ‘국가 간 관계를 위한 영국위원회’를 설치했다. 이듬해 이 위원회가 ‘국가 간 관계를 위한 영국문화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오늘날 영국문화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영국문화원은 외무부와 협력하고 재정지원도 받지만 운영에서는 독립성을 유지한다. 마크 허버트 영국문화원 공보국장은 “1940년부터 여왕에게 수여받은 ‘왕립헌장’에 따라 외국과의 독자적인 문화교류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론 비영리조직”이라면서 “예술 교류와 영어 교육, 세계 각국과의 우호 관계 형성이 주요 목표”라고 소개했다. 최근 영국 정부가 긴축정책을 펴면서 영국문화원도 향후 4년에 걸쳐 예산의 26%를 삭감할 예정이다. 허버트 국장은 “문화원 전체 숫자는 그대로이지만 역할 조정이나 사무실 이전 등의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진행중”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고민 프랑스와 독일의 공통 고민은 영어의 영향력과 중국어의 부상이다.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이들은 제2외국어로서의 입지 강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로르 쿠드레 로 주한 프랑스문화원장은 “프랑스어는 여전히 제1의 제2 외국어”라고 강조했다. 레구스 괴테 인스티튜트 대변인은 “각국 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많이 선택하도록 유도하고 독일어 교사 재교육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으로 유럽 각국의 문화외교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유럽이라는 하나의 틀로 수렴되고 있다. 그 중심에는 2006년 유럽연합 내 25개국 30개 기관이 참여해 결성한 EUNIC가 있다. 150여개국 2000곳이 넘는 곳에서 각개약진하던 유럽 각국의 문화원들이 EUNIC라는 이름으로 공동 활동을 모색한다는 취지다. 2만 5000명이 넘는 직원과 25억 유로(약 3조 7000억원)를 뛰어넘는 예산을 가진 초대형 문화원 네트워크인 셈이다. 오에 프랑스 인스티튜트 사무총장은 “유럽의 문화활동에서는 더 이상 국경이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한국 이해하는 외국인 늘려야” 문화외교의 방향과 전략에 대해서는 나라에 따라 다양한 의견을 보였지만, 유럽 각국의 문화외교 당국자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이 있다. 국가 차원에서 문화원 확충에 정책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는 점이다. 마크 허버트 브리티시 카운슬 공보국장은 그 이유로 ‘국익’과 ‘더 좋은 세계화’를 들었다. 그는 “문화외교가 단기간에 성과를 내지 않기 때문에 관심을 덜 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한국에 관심을 갖고 한국을 이해하는 외국인이 많을수록 정치와 안보, 경제 등 모든 면에서 한국에 이익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지금은 경제와 안보 모두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는 시대”라면서 “다른 나라를 더 많이 이해할수록 의사소통은 더욱 쉬워진다.”고 강조했다. 베를린·파리·런던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이제는 공공외교다] 하이델베르크大 퓌스 교수 “한국학 과 개설하려 해도 가르칠 교수 없다”

    [이제는 공공외교다] 하이델베르크大 퓌스 교수 “한국학 과 개설하려 해도 가르칠 교수 없다”

    독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의 하랄트 퓌스 일본학과 교수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일본학을 공부한 독일인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독일에서의 한국학 발전을 염원하면서도 현실적인 걸림돌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유럽에서의 일본학 연구 현황은. -전 세계에 박사급 일본학 연구자만 1000명이 넘는다. 일본이 경제적으로 약진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프린스턴대학에서 공부할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제2외국어가 일본어였다. 지금도 일본 문화에 흥미를 느끼는 학생들이 끊임없이 일본학 전공자로 유입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대학에는 한국학과가 없는데. -하이델베르크대학에 한국학과를 만들어 일본학과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리려면 예산이 얼마나 들까 계산해봤다. 연간 350만 유로(약 52억원) 정도가 필요하다. 의지만 있으면 가능한 수준이다. 우리 대학에 한국학과가 생겨서 동아시아 지역 연구가 상호 발전하길 바란다. →한국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무엇이라고 보나. -가장 큰 어려움은 독일에서 한국학과를 개설하려는 곳은 많은데 가르칠 교수가 없다는 점이다. 독일인은 한국어를 못 하고 한국인은 독일어를 못 한다. 내 딸은 의대생인데 한국어 공부를 하고 싶어 하지만 한국어를 배울 방법이 없다. 한국 대학 프로그램은 미국 학생들 위주로 돼 있다. →한국에서 공부하거나 방문한 경험이 한국에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줄까. -긍정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그게 바로 ‘소프트 파워’ 아니겠나. 10대에 일본에서 1년간 공부했던 중국학과 교수가 있는데 그는 지금도 일본어를 한다. 그건 본인과 일본 모두에 이익이다. 일본은 2개월 단기연수나 학교 간 공동 교환 학생제도 등 많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한국도 다양한 교류 프로그램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
  • [WHO&WHAT] 유전학의 창시자·수도사 멘델의 고백… “저, 유전학의 아버지 아니에요”

    [WHO&WHAT] 유전학의 창시자·수도사 멘델의 고백… “저, 유전학의 아버지 아니에요”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쌓았지만, 정작 그 결과물에 비해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유도 다양하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기록이 갖는 한계 때문에, 패망한 국가의 군주는 승자가 지워버렸기 때문에 그렇다. 히틀러가 폴크스바겐의 스테디셀러 ‘비틀’을 만든 주역이라든가, 그가 얼마나 문학적인 인물이었는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은 것은 누구도 말하기 꺼려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상은 자연과학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다만 인류의 삶을 바꿀 만한 발견이나 발명을 해낸 과학자들에 대해서는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천재이거나, 은둔형 외톨이여서 앞으로 나서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17세기의 아마추어 수학자였던 피에르 드 페르마다. 그는 짧은 수식을 적은 후 “나는 이 문제를 풀 놀라운 증명을 찾아냈지만, 여백이 부족해 적지 않는다.”라고 썼다. 인류가 흔히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로 불리는 이 문제를 푸는 데는 그 후로 무려 357년이 걸렸다. 이 밖에도 “다 알 것 같아서”라는 이유로 결과만 내놓거나 “이걸 어떻게 풀었는지 내가 왜 설명해야 하나.”라는 식으로 잠적해버린 천재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남긴 업적과 함께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생물학자들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과학자 중 업적에 비해 본인이 가장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그레고어 요한 멘델(1822~1884)’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근대 유전학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그는 왜 그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됐을까. 가상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 이번주 주인공은 지난달부터 전 세계 네티즌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주목받고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전학자이자 수도사 멘델이다. 놀라운 발견을 한 그는 왜 철저하게 ‘재야의 과학자’로 머물러야 했을까. 그리고 최근 불고 있는 멘델에 대한 관심은 무엇 때문일까. 인터뷰가 진행되자 멘델은 오히려 “오늘날 내가 받고 있는 존경은 사실 어이없는 행운 덕분”이라고 털어놓았는데…. →중·고등학교 생물교과서를 덮은 이후 사실 처음으로 당신을 만나는 것 같다. 최근 전 세계 포털의 과학자 검색 순위에서 당신이 급상승했다. 완두콩도 검색어에 오르고 말이다. -나도 이상해서 좀 알아봤더니, 구글이 깜찍한 짓을 했더구먼. 지난달 20일이 내 생일이었는데 그날 구글이 로고를 ‘완두콩’으로 만들었더라고. 뭐 탄생 189주년이니 딱히 기념할 만한 시점도 아닌데, 워낙 엉뚱한 짓을 많이 하는 애들이니. →거 참 질문에 비해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답변이다. 검색어 덕분에 당신에 대해서 좀 찾아봤는데 의외로 알려진 게 없더라. 뉴턴이나 다윈 같은 과학자들은 몇 페이지가 모자랄 정도인데 말이다. 검색창에 당신 이름을 넣으면 ‘멘델의 법칙’이나 나오지 당신 얘기는 ‘수도사였다’ ‘유전학의 창시자다’ ‘완두콩을 가지고 실험했다’ 이 정도가 고작이던데. 궁금한 점 위주로 개인 신상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자. 무엇보다 수도사가 왜 과학실험을 한 건가. -그게 사실은 거꾸로란 말이지. 난 과수원집에서 태어났거든. 어렸을 때부터 나무 품종을 개량하면서 유전학자의 꿈을 키웠고 아버지도 내 교육에 열성적이었어. 문제는 집에서 내 뒷바라지를 해 줄 수 있는 처지가 안됐다는 거였지. 심지어 여동생 결혼자금까지 다 써버릴 정도였으니. 근데 대학 교수가 나보고 수도원에 들어가 신부가 되면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별로 망설임도 없이 사제 시험을 보고 수도사가 됐지. 마침 내가 있던 성 토마스 수도원 원장은 신학 외에 과학이나 예술을 공부하도록 장려하는 사람이라 다행이었어. →근데 사실 당신 낙제생이었다는, 그것도 생물에서 망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수도사들은 근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했는데, 부끄러운 얘기지만 중학교 교사 자격시험에서 생물과목 과락을 해서 자격증을 못 땄다. 착한 원장님께서 날 밀어준다고 빈 대학에서 특별 과외까지 시켜 줬는데, 또다시 떨어져서 아예 교사의 꿈은 접었어. 근데 대학을 다니면서 당시 유행하던 다윈의 학설을 접했고 그게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은 계기가 됐지. →아 당신보다 유명한 과학자와 동시대를 살았군. 다윈이 당신에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다윈이 주장하는 진화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지 확인해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어. 수도원 안쪽 뜰에 있는 작은 정원에 완두를 심고, 만 그루 넘게 심고 키우고를 반복하면서 하나하나 결과를 기록해나갔어. 생색을 좀 내자면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거든. 완두 꽃가루를 모두 손으로 수분시켰고, 내가 원하는 종끼리 수분시키기 위해서 일일이 다 봉지를 씌웠지. 그 실험만 무려 8년을 꾸준하게 계속했고. 그 결과 1865년에 대를 물려도 변하지 않는 형질이 있다는 것, 형질 사이에 우성과 열성이 있다는 것, 독립적으로 유전이 되는 형질이 있다는 것 등을 밝혀낼 수 있었지.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부모의 형질이 왜 잡종인 자손에게 나타나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내가 그걸 알아낸 거다. 청출어람이라고 해야 하나. →왜 하필 완두였나. -뭐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완두콩이 번식이 잘되고 하나의 가지에 콩이 많아서였다고 해야 하나. 물론 실험이 망하면 먹을 수도 있었고. 근데 결과를 보면, 정말 운 좋게도 유전형질이 딱 갈라지는 재료를 우연찮게 선택했던 것 같다. →근데 당신은 동네 학회에서도 무참히 밟혔다. 허무하지 않았나. -조그마한 소도시에 있는 자연과학협회 회원들이 내 연구결과를 이해나 했겠나. 딱히 큰 학회에 발표하지도 않았고, 다윈한테만 우편으로 보낸 정도였는데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사실 더 열받는 건 내가 다윈한테 보낸 논문이, 다윈이 죽은 후에 방에서 뜯지도 않은 채 발견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였지. 만약에 다윈이 그걸 뜯어봤다면 창조론자들과 맞설 강력한 무기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자기 복이 그 정도였구나 하고 생각해야지 뭐. 근데 나도 몇 년 뒤에 수도원장이 되고, 수도원이 세금 때문에 정부랑 싸우는데 앞장서면서 딱히 과학에 관심을 쓸 시간이 없어졌어. 결국 내 연구는 내 시대에는 개인적인 만족으로 끝난 셈이지. →당신 연구의 존재감이 얼마나 없었으면 당신이 죽은 후에 당신 동료들이 논문하고 연구 자료까지 아무 생각없이 불태웠을까. 근데 이쯤에서 핵심적인 질문을 해야겠다. 당신의 논문에는 ‘유전’이나 ‘법칙’이라는 말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도대체 ‘멘델의 법칙’은 어디서 나온 건가. -그게 사람 운인 것 같다. 내가 했던 연구가 한 35년 정도 아무도 모르게 묻혀 있었는데 말이지. 과학자들도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한지 1900년쯤에 과학자 세명이 나랑 비슷한 실험을 했거든. 그래서 결과를 얻었는데, 누가 먼저인지 당장 싸워야 할 판이 된 거야. 사실 과학자들이 ‘최초’ 어지간히 좋아하잖아. 그 와중에 어이없게 내가 예전에 썼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논문 ‘식물 잡종에 관한 실험’이 도서관에서 발견된 거지. 싸우기 귀찮으니까 그 영예는 전부 이미 죽은 나한테 돌려버리기로 합의를 본 거고. 하긴 내용도 거기서 거기였다고 하더구먼. →당신이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뒤늦게 빛을 본 건가. -근데 그건 또 아니고. 난 잘 몰랐는데, 내가 좀 글을 못 썼던 모양이야. 후대 학자들이 심지어 “멘델은 시대를 앞서간 게 아니고, 19세기의 학자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한 건 글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했겠느냐고. →그래도 당신은 오늘날 위대한 유전학자로 좋은 점만 부각되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베이트슨에게 감사하고 있다고 전하고 싶어. 베이트슨은 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불명확한 대목은 손질하고, 원문도 좀 바꿔놓았지. 그 결과 당시 과학계를 주도하던 영국이나 미국의 연구자들은 절대적으로 시대를 앞서간 것으로 보이는 멘델만을 만나고 칭송하게 된 거지. 오히려 내가 사용한 독일어권에서는 인정받는 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 이를 입증하지. →불운한 학자로 당신을 골랐는데, 듣다 보니 정작 엄청난 행운아 아닌가. -완두콩 1만 그루를 8년 동안 기른 정성은 보답받을 만하다고 생각해. 공부하기 위해서 수도사가 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그런 노력을 하고도 내가 그 결과를 인정받기 위해서 애쓰지 않고 스스로 만족했기 때문에 중학교 교사자격시험조차 떨어진 내가 교과서에 길이 남게 된 것이 아닐까 싶어.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참고문헌 -교과서를 만든 과학자들(손영운/글담) -과학을 배반하는 과학(에른스트 페터 피셔·전대호/해나무) -멘델이 들려주는 유전이야기(황신영/자음과모음) -멘델, 현대 유전학의 창시자(비체슬라프 오렐·한국유전학회/전파과학사) -유전학의 탄생과 멘델(에드워드 에델슨·최돈찬/바다출판사) 서울신문은 매주 1회 독특한 포맷의 가상 인터뷰 [WHO&WHAT(후 앤드 왓)]을 1개면에 걸쳐 연재하고 있습니다. 일반 신문기사로는 다루기 힘든 동서고금의 지식과 역사의 정수들을 만남 또는 대담의 형식을 통해 알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청소년, 어른 모두에게 즐겁고 색다른 지식의 장이 될 것으로 자부합니다. 특히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훌륭한 논술교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WHO&WHAT] “퀴즈쇼서 인간에 완승한 슈퍼컴 왓슨(Watson)을 만나다” [WHO&WHAT] 무덤에서 불러낸 독재자 4인의 가상만찬 ‘재스민 혁명’을 논하다 [WHO&WHAT] 천재소년 송유근, ‘우주비행 성공 50주년’ 맞아 유리 가가린을 만나다 [WHO&WHAT] ‘슈퍼히어로’ 스파이더맨, 정신과 전문의 김상준 원장과 상담하다 [WHO&WHAT] 지구수비대 지원한 인간형 로봇 ‘마루’ “아톰·태권V처럼 지구 지켜서…” [WHO&WHAT] ‘최악’ 통념 B형 男기자, 혈액형의 아버지 ‘란트슈타이너’에 따지다 [WHO&WHAT] ‘전 세계 여성의 로망’ 버킨백을 만나다 [WHO&WHAT] 선택 따라 전혀 다른 결과…”이렇게 검색하면 진리가 밝혀질까?” [WHO&WHAT] “남느냐, 떠나느냐” 희곡으로 본 어느 서재 도서들의 열띤 논쟁 [WHO&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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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W]수도사 멘델의 고백...“저 유전학의 아버지 아니에요”

    [W&W]수도사 멘델의 고백...“저 유전학의 아버지 아니에요”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쌓았지만, 정작 그 결과물에 비해 주인공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유도 다양하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기록이 갖는 한계 때문에, 패망한 국가의 군주는 승자가 지워버렸기 때문에 그렇다. 히틀러가 폴크스바겐의 스테디셀러 ‘비틀’을 만든 주역이라든가, 그가 얼마나 문학적인 인물이었는지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은 것은 누구도 말하기 꺼려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상은 자연과학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다만 인류의 삶을 바꿀 만한 발견이나 발명을 해낸 과학자들은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천재이거나, 은둔형 외톨이여서 앞으로 나서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17세기의 아마추어 수학자였던 피에르 드 페르마다. 그는 짧은 수식을 적은 후 “나는 이 문제를 풀 놀라운 증명을 찾아냈지만, 여백이 부족해 적지 않는다.”라고 썼다. 인류가 흔히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로 불리는 이 문제를 푸는 데는 그 후로 무려 357년이 걸렸다. 이 밖에도 “다 알 것 같아서”라는 이유로 결과만 내놓거나 “이걸 왜 풀었는지 내가 왜 설명해야 하나.”는 식으로 잠적해버린 천재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남긴 업적과 함께 전설처럼 전해내려온다. 생물학자들은 교과서에 등장하는 과학자 중 업적에 비해 본인이 가장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그레고어 요한 멘델(1822~1884)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근대 유전학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그는 왜 그같은 이미지를 갖게 됐을까. 가상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 이번주 주인공은 지난달부터 전 세계 네티즌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주목받고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전학자이자 수도사인 멘델이다. 놀라운 발견을 한 그는 왜 철저하게 ‘재야의 과학자’로 머물러야 했을까. 그리고 최근 불고 있는 멘델에 대한 관심은 무엇 때문일까. 인터뷰가 진행되자 멘델은 오히려 “오늘날 내가 받고 있는 존경은 사실 어이없는 행운 덕분”이라고 털어놓았는데?   중·고등학교 생물교과서를 덮은 이후 사실 처음으로 당신을 만나는 것 같다. 최근 전 세계 포털의 과학자 검색 순위에서 당신이 급상승했다. 완두콩도 검색어에 오르고 말이다. -나도 이상해서 좀 알아봤더니, 구글이 깜찍한 짓을 했더구만. 지난달 20일이 내 생일이었는데 그날 구글이 로고를 ‘완두콩’으로 만들었더라고. 뭐 탄생 189주년이니 딱히 기념할 만한 시점도 아닌데, 워낙 엉뚱한 짓을 많이 하는 애들이니. 거참 질문에 비해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답변이다. 검색어 덕분에 당신에 대해서 좀 찾아봤는데 의외로 알려진 게 없더라. 뉴턴이나 다윈 같은 과학자들은 몇 페이지가 모자랄 정도인데 말이다. 검색창에 당신 이름을 넣으면 ‘멘델의 법칙’이나 나오지 당신 얘기는 ‘수도사였다’‘유전학의 창시자다’‘완두콩을 가지고 실험했다’ 이 정도가 고작이던데. 궁금한 점 위주로 개인 신상에 대해 몇가지 물어보자. 무엇보다 수도사가 왜 과학실험을 한건가 -그게 사실은 거꾸로란 말이지. 난 과수원집에서 태어났거든. 어렸을때부터 나무 품종을 개량하면서 유전학자의 꿈을 키웠고 아버지도 내 교육에 열성적이었어. 문제는 집에서 내 뒷바라지를 해 줄 수 있는 처지가 안됐다는 거였지. 심지어 여동생 결혼자금까지 다 써버릴 정도였으니. 근데 대학교수가 나보고 수도원에 들어가 신부가 되면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별 망설임 없이 사제 시험을 보고 수도사가 됐지. 마침 내가 있던 성 토마스 수도원 원장은 신학 외에 과학이나 예술을 공부하도록 장려하는 사람이라 다행이었어. 근데 사실 당신은 낙제생이었다는, 그것도 생물에서 망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수도사들은 근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했는데, 부끄러운 얘기지만 중학교 교사 자격시험에서 생물과목을 과락해서 자격증을 못 땄지. 착한 원장님께서 날 밀어준다고 빈 대학에서 특별 과외까지 시켜줬는데, 또다시 떨어져서 아예 교사의 꿈은 접었어. 근데 대학을 다니면서 당시 유행하던 다윈의 학설을 접했고 그게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은 계기가 됐지. 아, 당신보다 유명한 과학자와 동시대를 살았군. 다윈이 당신에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다윈이 주장하는 진화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지 확인해봐야 겠다고 마음먹고 곧바로 실천에 옮겼어. 수도원 안쪽 뜰에 있는 작은 정원에 완두를 심고, 1만 그루 넘게 심고 키우고를 반복하면서 하나하나 결과를 기록해나갔지. 생색을 좀 내자면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거든. 완두 꽃가루를 모두 손으로 수분시켰고, 내가 원하는 종끼리 수분시키기 위해서 일일이 다 봉지를 씌웠으니까. 그 실험만 무려 8년을 꾸준하게 계속했고. 그 결과 1865년에 대를 물려도 변하지 않는 형질이 있다는 것, 형질 사이에 우성과 열성이 있다는 것, 독립적으로 유전이 되는 형질이 있다는 것 등을 밝혀낼 수 있었지.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부모의 형질이 왜 잡종인 자손에게 나타나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내가 그걸 알아낸거야. 청출어람이라고 해야하나. 왜 하필 완두였나.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완두콩이 번식이 잘되고 하나의 가지에 콩이 많아서였다고 해야하나. 물론 실험이 망하면 먹을 수도 있었고. 근데 결과를 보면, 정말 운 좋게도 유전형질이 딱 갈라지는 재료를 우연찮게 선택했던 것 같다. 근데 당신은 동네 학회에서도 무참히 밟혔다. 허무하지 않았나. -조그마한 소도시에 있는 자연과학협회 회원들이 내 연구결과를 이해나 했겠나. 딱히 큰 학회에 발표하지도 않았고, 다윈한테만 우편으로 보낸 정도였는데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어. 사실 더 열받는 건 내가 다윈한테 보낸 논문이, 다윈이 죽은 후에 방에서 뜯지도 않은채 발견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였지. 만약에 다윈이 그걸 뜯어봤다면 창조론자들과 맞설 강력한 무기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자기 복이 그 정도였구나 라고 생각해야지 뭐. 근데 나도 몇 년 뒤에 수도원장이 되고, 수도원이 세금 때문에 정부랑 싸우는 데 앞장서면서 딱히 과학에 관심을 쓸 시간이 없어졌다. 결국 내 연구는 내 시대에는 개인적인 만족으로 끝난 셈이지. 얼마나 당신 연구의 존재감이 없었으면 당신이 죽은 후에 당신 동료들이 논문하고 연구 자료까지 아무 생각없이 불태웠다는 얘기는 들었다. 근데 이쯤에서 핵심적인 질문을 해야겠다. 당신의 논문에는 ‘유전’이나 ‘법칙’이라는 말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도대체 ‘멘델의 법칙’은 어디서 나온건가. -그게 사람 운인 것 같다. 내가 했던 연구가 35년 정도 아무도 모르게 묻혀 있었는데 말이지, 과학자들도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한지 1900년쯤에 과학자 세명이 나랑 비슷한 실험을 했거든. 그래서 결과를 얻었는데, 누가 먼저인지 당장 싸워야 할 판인 된거야. 사실 과학자들이 ‘최초’ 어지간히 좋아하잖는가. 그 와중에 어이없게 내가 예전에 썼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논문 ‘식물 잡종에 관한 실험’이 도서관에서 발견된거지. 싸우기 귀찮으니까 그 영예는 전부 이미 죽은 나한테 돌려버리기로 합의를 본거고. 사실 내용도 거기서 거기였다고 하더만. 당신이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뒤늦게 빛을 본건가. -근데 그건 또 아니고. 난 잘 몰랐는데, 내가 좀 글을 못 썼던 모양이야. 후대 학자들이 심지어 “멘델은 시대를 앞서간 게 아니고, 19세기의 학자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한 건 글이 이해하기 어렵거나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했겠냐고. 그래도 당신은 오늘날 위대한 유전학자로 좋은 점만 부각되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영국의 생물학자 윌리엄 베이트슨에게 감사하고 있다고 전하고 싶다. 베이트슨은 내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불명확한 대목은 손질하고, 원문도 좀 바꿔놓았다. 그 결과 당시 과학계를 주도하던 영국이나 미국의 연구자들은 절대적으로 시대를 앞서간 것으로 보이는 멘델만을 만나고 칭송하게 된거지. 오히려 내가 사용한 독일어권에서는 인정받는 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불운한 학자로 당신을 골랐는데, 듣다보니 정작 엄청난 행운아 아닌가. -완두콩 1만 그루를 8년 동안 기른 정성은 보답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공부하기 위해서 수도사가 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노력을 하고도 내가 그 결과를 인정받기 위해서 애쓰지 않고 스스로 만족했기 때문에 중학교 교사자격시험조차 떨어진 내가 교과서에 길이 남게된 것이 아닐까 싶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참고문헌 교과서를 만든 과학자들(손영운/글담) 과학을 배반하는 과학(에른스트 페터 피셔·전대호/해나무) 멘델이 들려주는 유전이야기(황신영/자음과모음) 멘델, 현대 유전학의 창시자(비체슬라프 오렐·한국유전학회/전파과학사) 유전학의 탄생과 멘델(에드워드 에델슨·최돈찬/바다출판사)
  • 쇼 닥터? “공연에 표현력 불어넣고 지루함 날려요”

    쇼 닥터? “공연에 표현력 불어넣고 지루함 날려요”

    공연도 사람처럼 치료를 받고 의사의 처방전을 받는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실제 벌어지는 일이다. 공연계의 의사로 불리는 ‘쇼 닥터’(show doctor)를 통해서다. 쇼 닥터는 공연이 시작된 뒤 극의 구성, 무대 연출, 배우 연기 등 전반적인 문제점을 진단하고 수정해주는 사람을 뜻한다. 연출자나 작가와 달리 한 걸음 떨어져 제3자의 시각에서 보기 때문에 좀 더 객관적인 조언이 가능하다. 국내에서는 아직 낯설지만 공연 본고장인 미국 브로드웨이 등 해외에서는 이미 자리잡은 직함이다. ●“아픈 부위 치료해 주는 공연 주치의” 국내에서도 최근 쇼 닥터를 도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한식 세계화’라는 기치 아래 다양한 재료를 씻고 썰고 볶으며 비빔밥을 만드는 비언어극(넌버벌 퍼포먼스) ‘비밥’. 스페인 출신 연출가 다비드 오튼을 쇼 닥터로 영입했다. 4주 동안 ‘비밥’ 주치의를 맡기로 하고 지난 19일 내한한 오튼은 26일 서울 태평로의 한 카페에서 기자들과 만나 “쇼 닥터란 쉽게 말해 공연의 아픈 부위를 치료해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장기공연을 하다보면 여기저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면서 “이런 컨디션을 점검해 문제점을 수정 보완, 쇼의 완성도를 높이고 지루함을 없애주는 게 쇼 닥터의 핵심 임무”라고 소개했다. ‘비밥’ 처방전도 기본 골격은 이미 잡은 상태라는 그는 “좀 더 날카롭고 빠르게 바꾸고 싶다.”면서 “관객 반응 등을 점검해 더욱 재미있고 풍성한 표현력을 가미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2007년 ‘점프’ 첫 도입… 해외 진출도 한몫 국내에서 쇼 닥터를 맨처음 도입한 공연은 역시 비언어극인 ‘점프’다. 2007년 흥행 여세를 몰아 뉴욕에 진출하기로 하면서 캐나다의 유명 연출가 짐 밀란을 쇼 닥터로 영입했다. 당시 밀란은 한국의 가족관계를 외국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좀 더 정확히 하고 무대 의상에 한국적 색채를 좀 더 가미하라고 조언했다. 이번에 ‘비밥’ 쇼 닥터로 영입된 오튼은 밀란과 함께 ‘점프’ 때도 공연 손질을 담당해 한국 공연계와 인연이 깊다. ●해외서는 ‘애봇 터치’ 신조어 정착 비언어극 ‘난타’, ‘브레이크 아웃’을 비롯해 올해는 국악 뮤지컬 ‘판타스틱’도 쇼 닥터를 도입했다. 내수 시장에 머물던 국내 작품들이 ‘신한류’ 바람을 타고 해외 진출이 늘어난 것도 쇼 닥터 영입 증가의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오튼은 “한국인의 개그 코드나 감성이 외국인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쇼 닥터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브로드웨이 쇼 닥터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조지 애봇(1887~1995)이다. 연출가로서 토니상을 두 번이나 받고 작가 자격으로 퓰리처상까지 받은 그는 1960년부터 쇼 닥터로 활동했다. 대중성과 진실성을 중시했던 애봇은 작품에도 빠른 움직임과 재미를 가미했다. 이로 인해 ‘애봇 터치’(Abbott Touch)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오페라의 유령’ 등 히트작을 다수 연출해 미국 뮤지컬계의 대부로 불리는 해롤드 프린스도 ‘애봇 터치’를 받은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이렇듯 쇼 닥터는 디벨로퍼(developer), 드라마터지(dramaturgy·독일어권에서는 드라마투르기) 등과 더불어 미국이나 유럽권에서는 보편화된 개념이다.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 전에 방향 설정이나 연출진 구성 등에 대해 조언하는 사람이 디벨로퍼라면 쇼 닥터는 막이 오른 뒤 조언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유럽과 미국을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는 오튼은 “연출진과 디벨로퍼, 쇼 닥터, 배우 등 다양한 시각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머리를 맞댐으로써 창의적인 작품이 완성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제2 윤이상’ 재독 작곡가 박 파안 영희 내한 회견

    ‘제2 윤이상’ 재독 작곡가 박 파안 영희 내한 회견

    국내에서는 다소 낯설지만 유럽음악계에서는 꽤 유명하다. 1977년 ‘만남’(Man-nam)으로 스위스 보스일 세계작곡제에서 1등을 차지한 박 파안 영희(66) 얘기다. 이 우승으로 “저작권료만으로도 충분히 먹고살 만큼” 명성을 쌓은 그는 올 3월 정년퇴직할 때까지 독일 브레멘국립예술대 교수를 지냈다. 독일·스위스·오스트리아 등 독일어권을 통틀어 첫 여성 작곡과 교수다. 제2의 윤이상(1917~1995)으로도 불린다. 그의 대표작 ‘만남’과 ‘타령Ⅵ’이 오는 28일 개막하는 제8회 대관령국제음악제 무대에 오른다. ‘타령Ⅵ’은 아시아 초연이다. 디스크 탓에 두 지팡이에 의지해 걸음을 뗄 만큼 불편한 몸이지만, 정명화 대관령음악제 예술감독의 전화를 받고 흔쾌히 한국을 찾았다. 25일 서울 태평로 코리아나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난 그는 독특한 이름부터 설명했다. “박씨가 워낙 흔해 일종의 예명을 생각한 게 ‘파안’이다. 책상 위의 비파(琶案), 즉 음을 생각하는 작곡가란 의미와 함께 파안대소(破顔大笑)의 뜻도 있다.” 대학원(서울대 음대) 졸업 뒤 1974년 독일로 유학 떠나 “눌러앉았다.”는 그는 “중학교(청주여중) 때 ‘연대장’을 지내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니 이해해 달라.”며 80여분 동안 열변을 토했다. →대관령음악축제에 처음 참가하는데. -지난해 12월에 정명화 감독이 대관령축제를 위한 새 곡을 써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다. 새로 작곡하려면 4~5년이 걸린다. 그래서 작곡은 다음으로 미루고 기존에 써놓은 60여곡 중 몇 개를 추천해 드렸다. 두 곡이나 뽑혔으니 정말 브라보~다(웃음). →초연되는 ‘타령Ⅵ’에 대해 소개해 달라. -청주에서 자랐는데 정초에 지신밟기를 숱하게 봤다. 거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타악기(북, 종, 조개껍데기 등)와 함께 플루트, 클라리넷, 비올라, 바이올린, 첼로 등 6개의 악기를 위한 작품이다. 실제 전통 타악기를 쓰는 건 아니고 우리의 장단을 쓴다(그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두들기며 ‘덩덩더 쿵덕’ 장단을 시연해 보였다). →‘만남’에도 타악기가 쓰이나. -아니다. 대신 첼로가 장구 같은 역할을 한다. 신사임당이 대관령을 넘어 시댁으로 가는 길에 강릉 친정엄마를 떠올리며 쓴 한시 ‘사친’(思親)에서 따온 작품이 ‘만남’이다. 보스일 콩쿠르 우승곡이니 이 곡 덕에 밥을 먹게 된 셈이다(웃음). →명성에 비해 한국에는 덜 알려졌다. -한국에서 왜 연주회를 하지 않느냐고들 하는데 중이 제 머리 깎을 수는 없지 않나. 그렇다고 내가 잘났는데 왜 초대를 안 해주냐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고…(웃음). →작품에 순우리말 제목이 유난히 많다. -딱히 애국을 하려는 건 아니다. 말에는 인간의 정서와 민족의 영혼이 담겨 있다. 어떤 분들은 37년이나 유럽에 살았는데 어떻게 한국말을 잘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못하는 게 이상하거나 머리가 나쁜 것 아닌가(웃음). →한국 정서를 모르는 서양인들이 작품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소해서 어렵다는 얘기는 한번도 못 들어봤다. 나는 한국전쟁을 직접 겪고 배고픔을 겪은 세대다. 내 또래의 한국여자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하고 강한 개성을 표현한다. 가장 개성 있는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거꾸로 서양악기로 한국 장단을 만들어 내는 건 어렵지 않은가. -리듬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내 안에 있으니까. 어려운 건 기술이 아니라 정신이다. →한국 정서에 기반한 음악으로 현대 유럽음악 발전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고 했는데. -요새 컴퓨터 음악이 많아졌다. 몇 마디 작곡한 뒤 ‘복사’와 ‘붙이기’ 기능을 써서 30~40분짜리로 늘리는 작곡가들도 있다. 그래서 행복하다면 말릴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며칠 뚝딱 작업해 내놓는 건 청중을 우습게 여기는 행위다. 창작이 아닌 장사꾼이다. 난 한 곡 쓰려면 죽어라고 1~2년씩 하는데…. →한국에서는 유독 현대음악이 외면받는다. -심각한 문제다. 정부가 생각을 바꿔야 한다. 청중들이 선호하지 않아서 현대곡을 연주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건 난센스다. 학교 다닐 때 들을 기회가 없으니 청중들이 선호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교육이다. 어릴 때부터 국악도 가르치고, 현대음악도 가르쳐야 한다. 폴란드나 이탈리아에서는 택시 운전사도 자국 현대음악가들을 줄줄 꿴다. 한국에서는 쏠림현상이 너무 심하다. 잘못된 음악교육을 바로잡을수 있다면 한국에 돌아와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佛 세계문학전집에 한국문학 정식 포함”

    “佛 세계문학전집에 한국문학 정식 포함”

    “지난해 출간 이후 8000부 정도 팔렸는데, 이 정도면 꽤 좋은 반응이라고 봐야죠. 프랑스의 대표적인 세계문학전집 갈리마르에 한국문학이 정식으로 포함되고 있습니다.” ●황석영 장편소설 ‘심청’ 불역 30일 오후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10회 한국문학번역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은 최미경(46) 이화여대 통역대학원 교수와 장 노엘 주테(66) 박사는 프랑스 현지에서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는 한국문학에 대한 평판을 먼저 전했다. 두 사람은 황석영의 장편소설 ‘심청’을 프랑스어로 함께 번역했다. 최 교수는 “불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결국 부족할 수밖에 없는 2%를 주테 박사가 문학적인 차원에서 채워 줬다.”면서 “황석영의 초기 작품 ‘한씨연대기’, ‘삼포로 가는 길’ 등도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주테 박사는 “황석영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며 “그의 초기 작품과 더불어 장편소설 ‘손님’을 가장 좋아한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분단과 통일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 그런지 아직 보편성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심청’에서 드러나는 실존적인 고민이 훨씬 성공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번역상은 양한주씨 등 3명이 받아 번역상은 김영하의 장편소설 ‘검은 꽃’을 독일어로 공동 번역한 양한주(51)씨와 하이너 펠트호프, 소설가 오정희 등의 ‘한국현대단편선’을 영어로 번역한 존 홀스타인(67)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가 받았다. 2001년부터 시상한 한국문학번역신인상은 김제인(28·영어권), 지예구(26·영어권), 이아람(31·불어권), 마이케 실(31·독어권), 파로디 세바스티안(29·스페인어권), 박모란(25·러시아어권), 왕염려(37·중국어권), 후루카와 아야코(36·일어권)가 받았다. 번역 과제로 주어진 작품은 박민규의 단편소설 ‘아침의 문’과 김인숙의 ‘안녕, 엘레나’. 7개 언어권역으로 나누어 선정한다. 상금은 번역대상 2만 달러, 번역상 1만 달러다. 신인상은 500만원. 글 사진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악덕 부모의 항변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1932년 영국 런던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난다. 훗날 ‘세기의 미녀’로 추앙받게 될 아이였지만, 당시 모습은 너무 끔찍했다. ‘다모증’ 때문에 갓 태어난 원숭이 새끼보다 털이 많았다. 엄마에게조차 “지금까지 본 아기들 중 가장 이상한 아기”였으니 말이다. 15개월째 겨우 일어서고, 두 돌이 지나서야 원숭이 같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한 아이는 그때부터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로 변하듯, 아름다운 소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빼어난 외모는 그녀에게서 유년기를 빼앗아 갔다. 이후의 삶 또한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얘기다. 열한 살이 된 ‘리즈’는 1943년 ‘녹원의 천사’라는 영화에서 말을 타고 장애물 경주에 참가하는 ‘벨벳’ 역할을 따낸다. 그러나 체구가 너무 작은 것이 문제였다. 영화사는 이듬해 1월까지 크랭크인을 미뤘는데, 이 사이 극성스러운 엄마 사라 테일러는 호르몬 약제 등을 동원해 불과 4개월 만에 딸의 키를 7㎝나 키워 놓는다. 외모 탓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배우 출신 엄마의 욕망 때문에 리즈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배우로 자라난다. 리즈는 삶과 허구를 혼동할 만큼 배역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면의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무려 여덟 번이나 결혼을 하고, 술과 약물에 의존하기도 했다. 훌륭한 위인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자식들을 끔찍이 학대하거나 혹은 자식에게 광적으로 집착하거나, 반대로 철저히 방치한 부모 밑에서 특별한 재능을 꽃피운 자식들이 나오기도 한다. ‘18인의 천재와 끔찍한 부모들’(외르크 치틀라우 지음, 강희진 옮김, 미래의창 펴냄)은 괴물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천재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저자는 천재의 부모들을 폭군형과 교관형, 집작형, 이기적 부모 등 네 유형로 나눈다. 독일 성직자 마르틴 루터는 ‘폭군형 부모’를 뒀다. 어린 시절 호두 한 알 때문에 피가 나도록 맞기도 했는데, ‘자비로운 아버지’에 대한 루터의 이상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의 배경이 되곤 한다. 모차르트와 마이클 잭슨 등은 교관형 부모 아래서 자랐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어린 아들의 몸이 다 망가질 정도로 혹독한 연주여행을 강요했고, 마이클 잭슨의 아버지는 일곱 살의 어린 마이클을 새벽 2시에 깨워 무대에 세우기도 했다. 독일어 원제를 번역하면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다. 부모들의 항변은 동서가 같고, 고금이라고 다르지 않은 게다. 1만 3000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입시전문가와 함께하는 수시 지원 전략] ③ 서강대·서울대·서울시립대

    [입시전문가와 함께하는 수시 지원 전략] ③ 서강대·서울대·서울시립대

    ■ 서강대학교 학교생활우수자 수능 기준 폐지 논술전형 줄고 반영비율도 축소 수시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전형 통폐합으로 전형 수가 축소되었다(10개→7개). 알바트로스 국제화와 글로벌 과학 인재 전형이 알바트로스인재 전형으로, 가톨릭지도자 추천과 가톨릭고교장 추천 전형이 가톨릭지도자 추천 전형으로, 수시 1, 2차로 나뉘었던 일반전형이 수시 2차로 통합되었다. 둘째, 논술 전형은 올해 577명 모집으로 지난해보다 206명이 줄었다. 셋째, 논술 전형 축소와 함께 논술 반영 비율이 줄었다. 지난해 논술을 시행하던 일반전형(수시 1차)이 폐지되고, 가톨릭지도자추천 전형(수시 2차)에서도 논술이 없어졌다. 넷째, 알바트로스인재 전형(인문사회계열)에서 영어 심층 면접 대신 영어 에세이를 도입했다. ●수시 1차 학교생활 우수자 전형은 재학생과 2011년 2월 이후 졸업생에 한해 279명을 모집한다. 학생부 석차 등급에 따른 기존 지원 자격이 폐지되고, 수능 최저학력기준도 없어 지난해보다 지원율이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 1단계에서 교과성적 75%, 서류(학생부·자기소개서·추천서) 25%로 2~4배수를 선발하고 2단계에서 1단계 80%, 구술면접 20%로 최종 선발한다. 알바트로스인재 전형은 134명을 모집하며 인문, 자연계열로 구분해 선발한다. 인문계열은 모집단위별로 공인외국어 성적을 지원 자격으로 두고 있으나 이는 단순 지원 자격일 뿐 성적에 따라 차등적으로 점수화하지는 않아 고득점을 노릴 필요는 없다. 선발 방법은 1단계에서 영어 에세이 100%로 모집 인원의 2~4배수를 선발하는데, 국제문화계Ⅱ의 경우 독일어, 프랑스어, 중국어 가운데 선택할 수 있다. 2단계에서는 1단계 80%, 서류(학생부·자기소개서·제2외국어 공인외국어 성적) 20%로 최종 선발한다. 자연계열은 ‘수학, 과학 관련 교과 이수단위의 합이 25단위 이상으로 수학과 과학에 재능이 있는 자’로 지원 자격을 두고 있다. 1단계에서 서류(학생부·자기소개서·증빙서류) 100%로 모집인원의 2~4배수를 선발하고, 2단계에서 1단계 60%, 심층면접 40%로 최종 선발한다. ●수시 2차 지난해 수시 1, 2차에서 모집했던 일반전형을 올해 수시 2차만 모집하면서 지난해보다 174명 줄어든 577명을 모집한다. 모집 인원의 50%를 수능으로 우선 선발하며, 학생부 30%(교과 10%+비교과 20%), 논술 70%를 반영한다. 이때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적용되는데 계열별로 차이가 있다. 인문사회계열은 언·수·외 백분위 합 288 이상, 경제와 경영은 언·수·외 백분위 합 292 이상이며, 자연계열은 수리 가·과탐 백분위 합 188 이상이다. 일반선발은 학생부 50%(교과 30%+비교과 20%), 논술 50%를 반영해 선발하며, 역시 계열별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적용된다. 인문사회계열의 경우 언·수·외·탐 중 3개 영역 2등급 이내, 자연계열은 2개 영역 2등급 이내이다. ●지원 Tip 알바트로스인재 전형 인문계열은 심층 면접 대신 영어 에세이 도입으로 논리적인 글쓰기 연습이 필수다. 학교생활우수자와 알바트로스인재 전형(자연계열)은 모집단위별로 선발하기 때문에 교과 및 학업 외 활동이 해당 모집단위와 일치하는지를 고려해 학과를 선택해야 한다. 수시 2차 일반전형은 많은 수험생이 우선 선발을 노리고 인기학과 중심으로 지원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본인의 성적이 수능 최저학력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무리한 상향 지원보다는 중하위권 학과에 안정 지원하는 것이 좋다. ■ 서울대학교 지역균형선발 서류·면접 일괄합산 특기자전형은 인원 늘고 논술 폐지 지역균형선발 전형은 모집 인원이 710명으로 지난해보다 소폭 감소했고 학교별 추천 인원도 줄었다(3명→2명). 단계별 전형을 폐지하고 서류와 면접 일괄합산으로 변경했다. 입학사정관 전형의 원서접수 일정이 앞당겨지면서 8월 17~18일에 원서를 접수한다. 특기자 전형은 논술이 폐지되었으며, 모집 인원은 1173명으로 소폭 늘었다. ●지역균형선발 전형 지역균형선발 전형은 입학사정관 전형이기 때문에 단순히 학생부 성적만 좋아서는 합격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원하는 모집단위와 관련된 성적, 학업 외 활동, 체험, 수상 경력 등을 집중적으로 평가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계항공우주공학부는 수학과 물리, 영문학과의 경우 영어 등이 우수한 학생을 선호할 것으로 전망된다. 원서접수 일정이 지난해보다 보름 정도 앞당겨졌기 때문에 서류 준비 시간이 줄어들 수 있으므로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 학기별 활동사항에 대해 준비 과정이나 느낌 등을 그때그때 메모해 두면 자기소개서 작성 시 도움이 된다. 학교별 추천 인원은 지난해 대부분 학교에서 인문계열 2명, 자연계열 1명을 추천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올해는 추천 인원이 감소해 인문, 자연계열에서 1명씩 추천할 가능성이 커졌다. 따라서 인문계열의 지원율은 소폭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기자 전형 올해 특기자 전형에서 논술이 폐지되었는데, 이는 최상위권 수험생의 논술 변별력이 낮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1단계 통과에 필요한 서류인 학생부, 자기소개서, 추천서와 2단계에서 시행하는 면접 및 구술고사에 대한 부담이 늘었다. 인문계열 학생은 지역균형선발 전형의 추천 인원 감소로 특기자 전형으로 지원이 몰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지원율이 높아질 것을 우려해 학과를 낮춰 지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기자 전형은 지역균형선발 전형과 마찬가지로 학생부 성적만이 아닌 지원하는 학과와의 관련성을 집중적으로 고려해 선발하기 때문이다. 일부 수험생은 특기자 전형에서 공인외국어 점수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판단해 점수 올리기에만 매달리고, 교과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어학 점수는 학생의 우수함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언어적 기능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교내 영어 성적은 우수하지 않은데 공인외국어 성적만 높다면 학교생활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지원 Tip 지난해 지역균형선발 전형 입시결과를 보면 서울대 기준에서 학생부 80점 만점인 수험생의 상당수가 탈락했고, 1단계를 간신히 통과한 수험생은 최종 합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입학사정관 전형 도입으로 단순히 학생부 성적만이 당락을 좌우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성적만 우수하고 지원할 모집단위에 대한 노력이 없었던 수험생이라면 지원을 심각하게 고민해 보는 것이 좋다. 특기자 전형은 자기소개서 작성에 주의를 기울이자. 실적을 나열하는 것보다 자신만의 일화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부각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다. 추천서 또한 학생의 칭찬만 늘어놓는 것보다는 판단 근거를 갖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학생부에 기재되지 않은 자신의 장단점을 서술하는 것이 좋은 평가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 서울시립대학교 고교우수인재 전형 논술 최대변수 전형별 수능 최저학력기준도 강화 수시 일부 전형이 특별전형에서 일반전형으로 전환되었고, 전형의 통합 및 전형 명칭, 전형 방법의 변경 등 몇 가지 변경 사항이 있다. 3차까지 시행하던 수시모집은 올해 2차로 줄어들었으며, 전체 모집인원 중 대부분을 수시 1차에서 모집한다. ●수시 1차 지난해 특별전형이었던 전국고교우수인재 전형은 올해 일반전형(논술형)으로 변경되었다. 모집 인원의 40%를 논술 80%, 학생부 20%로 우선 선발하고 나머지는 논술 50%, 학생부 50%로 선발한다. 논술형 일반전형인 만큼 논술 성적이 당락의 가장 큰 변수다. 다만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적용되는데, 일반선발은 2개 영역 2등급 이내인 데 비해 우선선발은 인문계열의 경우 언·수·외 등급 합 4 이내, 자연계열의 경우 언·수리가·외 등급 합 5등급 이내로 높은 성적을 요구한다. 논술과 학생부는 물론 수능까지도 준비해야 유리하다. 어학특기자 전형인 베세토니안 특별전형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 한문에서 일정 기준 이상의 공인외국어 성적을 지원자격으로 두고 있다. 1단계에서 학생부 40%, 특기적성 60%로 5배수를 선발하고 2단계에서 1단계 30%, 특기적성(재평가) 70%로 최종 선발한다. 단 외고와 검정고시 출신자는 특기적성 100%로 선발한다. 어학특기자 전형인 만큼 해당 언어에 대한 특기적성이 매우 중요하고, 정성평가가 아닌 정량평가를 시행하므로 단순히 지원자격을 충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에 유의하자. 입학사정관 전형인 UOS포텐셜 특별전형은 3단계에 걸쳐 모집 인원을 선발한다. 1단계는 1차 서류평가로 모집 인원의 5배수를, 2단계는 2차 서류평가로 모집 인원의 3배수를 선발한다. 3단계에서는 심화다면평가를 실시해 최종 선발한다. 1, 2단계 모두 서류를 평가하기 때문에 서류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코스모폴리탄리더, 사이언스파이오니아 전형이 통합된 글로벌리더 특별전형은 지원자격을 잘 살펴봐야 한다. ▲국제고, 외고, 과학고 졸업(예정)자 ▲일반고 인문계열 영어 또는 사회교과, 자연계열 수학 또는 과학교과의 전 학년 평균이 1.5등급인 경우에 한한다. 1단계에서 학생부 90%, 서류 10%로 선발하고 2단계에서 1단계 30%, 심층면접 70%로 최종 선발한다. 1단계에서 특목고와 일반고를 각각 3배수씩 선발하기 때문에 학생부보다는 2단계 심층면접에서 당락이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 소재 고교 졸업(예정)자만 지원할 수 있는 서울핵심인재 특별전형은 학생부 100%로 모집 인원을 선발한다. ●수시 2차 유니버시안 특별전형은 학생부 100%로 선발하지만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적용된다. 수리와 외국어 중 1개 영역 이상 1등급, 나머지 영역은 3등급 이내다. 학생부 중심전형이기는 하나 최저학력기준에서 1등급을 요구하는 영역이 있으므로 평소 수리, 외국어 성적을 살펴보고 지원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지원 Tip 서울시립대는 전형별로 핵심이 되는 전형 요소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전형 요소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논술 성적이 우수하다면 전국고교우수인재 전형, 어학에 관한 특기가 있다면 베세토니안 특별전형, 면접에 강하다면 글로벌리더 특별전형 또는 UOS포텐셜전형, 학생부가 우수하다면 서울핵심인재 특별전형이나 유니버시안 특별전형에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 다만 전형별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강화되어 수능 준비도 병행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도움말 진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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