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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bs, 개국 30년 만에 서울시서 독립…방송광고는 불허

    tbs, 개국 30년 만에 서울시서 독립…방송광고는 불허

    방통위, tbs 독립법인 변경 허가 의결서울시 산하 사업소서 출연재단으로 tbs 교통방송이 서울시 산하 사업소에서 산하 출연 재단으로 독립한다. 방송통신위원회는 26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제65차 위원회 회의를 열고 tbs 교통방송의 독립법인 신청을 최종 심의하고 변경 허가하기로 의결했다. 방통위의 변경 허가 의결로 tbs는 지난 1990년 개국 이후 30년 만에 서울시 교통본부 산하 사업소에서 산하 출연 재단으로 독립하게 된다. 사명도 현재 ‘서울특별시 교통방송’에서 ‘서울특별시 미디어재단 tbs’로 바뀐다. tbs는 지난 10월 31일 방송사업을 위한 별도의 재단법인 설립을 위해 ‘법인의 분할에 대한 변경 허가’를 방통위에 신청했다. 방통위가 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심사한 결과 tbs는 총점 1000점 만점 중 736점을 획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tbs가 요청한 방송광고 허용은 불허했다. 방통위는 tbs 1년 예산 440억원 중 서울시로부터 약 375억원의 예산을 지원받는 점, 재단법인으로 나선다고 해도 당분간 이 수준의 예산이 계속 지원될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해 방송광고는 허용하지 않았다. 허욱 상임위원은 “상업광고 허용이 tbs의 재정 안정을 위해 시급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라고 봤다”며 “독립법인 전환 후 성과나 방송 시장의 환경을 보고 추후 재검토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tbs는 6개월 내에 서울시로부터의 독립적 지배구조 및 자립 방안을 마련해 방통위에 제출해야 한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인사] 울산시 동구, 충남 천안시, 광주시교육청

    ■ 울산시 동구 ◇ 4급 승진 △ 경제복지국장 김인로 ◇ 4급 전보 △ 행정지원국장 김일만 ◇ 5급 승진 △ 사회복지과장 오정임 △ 방어동장 김민옥 △ 남목2동장 송옥희 ◇ 5급 전보 △ 해양관광정책실장 조상래 △ 자치행정과장 안정순 △ 일자리정책과장 김권환 △ 경제진흥과장 문병환 △ 환경미화과장 최병선 △ 안전총괄과장 이상범 △ 대송동장 최혜식 △ 전하1동장 김용우 ■ 충남 천안시 ◇ 4급 승진 △ 의회사무국장 박헌춘 △ 건설교통국장 류훈환 △ 서북구청장 이재영 ◇ 4급 전보 △ 기획경제국장 박재현 △ 행정안전국장 박상원 ◇ 5급 승진 △ 사적관리과장 한대전 △ 농산물도매시장 관리사업소장 이교숙 △ 병천면장 김형목 △ 성환읍장 김태현 △ 입장면장 홍승종 △ 성정1동장 윤영기 △ 동남구 환경위생과장 주미응 △ 서북구 환경위생과장 윤상원 △ 동남구 건설과장 김종국 ◇ 5급 전보 △ 홍보담당관 이명열 △ 기업지원과장 한권석 △ 안전총괄과장 심상일 △ 정보통신과장 김진수 △ 교육청소년과장 심해용 △ 의회사무국 전문위원 송재열 △ 시민문화여성회관장 임국환 △ 천안박물관장 장우경 △ 동남구 산업교통과장 한상천 △ 원성1동장 현석우 △ 서북구 세무과장 강복옥 △ 성정2동장 구제병 △ 불당동장 이종택 △ 청소행정과장 윤석기 △ 차량등록사업소장 송종욱 △ 동면장 전대규 △ 서북구보건소 보건정책과장 이기혁 △ 환경정책과장 송태호 △ 건축디자인과장 한원섭 △ 도시사업과장 윤광식 △ 시설공사과장 조창영 △ 서북구 건설과장 권 욱 △ 직산읍장 정연광 △ 농촌지원과장 박달영 ■ 광주시교육청 ◇ 4급 승진 △ 광주시의회 교육문화 전문위원실 전문위원 송영선 △ 감사관 청렴 총괄 담당 선계룡 △ 광주교육연수원 행정연수부장 한홍규 △ 4급 고급관리자 과정 교육 훈련 파견 김용일, 정은남 △ 교육시설과장 정병갑 ◇ 4급 전보 △ 행정국장 직무대리 홍양춘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장 직무대리 최두섭 △ 안전총괄과장 현경식 △ 총무과장 조미경 △ 교육자치과장 안광섭 △ 행정예산과장 강윤석 △ 서부교육지원청 행정지원국장 김빈 △ 광주 창의융합교육원 총무부장 정운용 △ 광주교육연수원 총무부장 안상섭 △ 광주중앙도서관장 신봉호 △ 광주학교시설지원단장 김두환 △ 광주교육연구정보원 총무부장 이랑순 ◇ 5급 승진 △ 광주공업고 행정실장 전형재 △ 광주예술고 행정실장 김혜연 △ 광주전자공업고 행정실장 남광수 △ 신가중 행정실장 이광호 △ 광주송정도서관 문헌정보과장 안현아 △ 광주학교시설지원단 시설지원 3과장 장태원
  • “남북 형성의 뿌리는 홍익인간 정신… 한반도 평화통일 운동에 전념”

    “남북 형성의 뿌리는 홍익인간 정신… 한반도 평화통일 운동에 전념”

    서울신문은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세계평화운동을 펼치고 있는 문현진 글로벌피스재단 의장을 만나 그가 생각하고 있는 남북한 통일방안과 그가 활동해온 글로벌 평화운동에 대해 들어봤다. 글로벌피스재단이 3·1운동 100주년과 광복 74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8월 14일 서울 더플라자호텔에서 개최한 ‘2019원코리아국제포럼’은 국내외 외교·통일·북한 전문가와 각계 단체 관계자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통일의 역사적 기회 : 비전, 리더십 그리고 실천’을 주제로 성황리에 열리기도 했다. -글로벌피스재단(GPF)을 소개한다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하나님 아래 한 가족(One Family under God)’의 비전 아래 어떤 민족이나 국경을 초월해서 초종교적 협력과 봉사연대를 통해 보다 평화로운 사회 실현을 이루고자 만들었다. 인류 보편적인 이 비전은 선친(故 문선명 총재)께서 평생을 통해 실천하신 뜻이자 나의 비전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는 한반도 평화 통일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 ‘코리안드림’에서 “통일을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했는데. “한국인의 참된 정체성은 바로 모든 인류를 평화롭게,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홍익인간의 비전을 가지고 세계를 이롭게 하는 국가를 세우는 것이 한국인들의 그런 섭리적인 운명으로 본다. 민족의 역사라는 것은 바로 민족이 누구인지를 규정 해 주는 흐름이기 때문에 역사를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의 역사를 보면 ‘홍익인간’의 정신이 정수가 되어서 수많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올해가 3·1운동 100주년 되는 해다. 독립운동은 사실 홍익인간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염원을 가지고 진행된 것이다. 조선왕조나 대한제국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고, 홍익인간의 이상을 실현한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거다. 김구 선생의 여러 말씀 중에 잘 나타나 있다. 홍익인간의 그런 이상이 독립운동의 뿌리였고 그것이 남한과 북한을 형성하게 한 뿌리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 국명을 보더라도, 남북한 모두 ‘리퍼블릭(Republic)’이 들어 있지 않나. 5000년 전에 그러한 고귀한 이상을 가지고 세워진 나라나 문명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통일천사(AKU)’에 대해 소개한다면. “국내에서 통일 문제와 관련한 가장 큰 시민사회단체다. 종교, 시민사회, NGO, 정치 등등을 다 초월해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실현하고자 하는 연대단체로서 밑에서 위로, 민초들의 역량과 염원을 묶어서 통일을 지향하는 국민 주도의 풀뿌리 통일운동을 한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동포들로 조직을 확대해가고 있다. 지난 8월 15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2019 통일실천축제한마당’에 참석한 만 명의 사람들이 AKU 지도자들이며, 해외에서도 한 500여명의 지도자들이 참석하셨다. 그분들은 단순히 AKU만의 지도자가 아니라 교포사회에서 굵직굵직한 단체의 장을 맡고 있는 중요한 분들이다.”-종단이나 종파나 정치 성향을 떠나서 이 사람들이 연합할 수 있는 토대는 무엇인가. “비전 ‘코리안드림’의 힘이다. ‘홍익인간 정신에 기초하여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는,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통일된 새로운 국가 실현’에 대한 열망의 힘이다. 대한민국 역사를 놓고, 특히 근대사를 놓고 봤을 때, 이렇게 광범위한 기반을 가지고 통일을 위한 시민사회단체가 형성된 적이 없다. 연대단체 중에 GPF도 있다. GPF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세계의 여러 싱크탱크하고 협력하는데, 전문가들은 “한국통일 문제에 있어 아주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비전을 가지고 실질 기반을 갖춘 조직은 ‘GPF’라고 얘기를 한다.” -파라과이가 지난 10년 동안 남미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로 성장하는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안다. 파라과이 변화 사례가 지금 우리 남과 북에 시사하는 점은 무엇인가. “북한은 어떻게 보면 문제점이 더 적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남한의 경제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사실은 북한이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 비용이 많이 든다”는 말이 있는데 잘못된 관점이다. 남한에 필요한 노동력, 지하자원, 시장 등 모두가 북한에 있다. 남북이 하나 될 때 큰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다.” -남북통일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속마음은 어떻다고 보는지. “트럼프 대통령 측근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하겠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6월) 방한했을 때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공존에 대한 진지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트럼프가 처음 대통령이 됐을 때는 남북한 통일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통일은 남북한 당사자들 문제다. 당시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통일이 당장 가능할 것 같지는 않더라도 마음을 열고 대화를 이어가며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문 대통령의 의지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우리 정부가 통일,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는 새로운 국가를 실현하겠다는 최고 목표를 정하고 통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다는 큰 방향을 세웠기 때문에 미국과 일본도 협조하고 따라올 것으로 생각한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국제적 평화운동가… ‘통일을실천하는사람들’ 창설 문현진(50) 글로벌피스재단(GPF) 의장은 국제적 평화운동가이다. 그는 1987년 美 해클리스쿨을 졸업한 후 국내에서 1992년까지 올림픽 승마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한 이력을 갖고 있다. 1995년 컬럼비아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했고,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미국통일신학대학원(UTS)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1년 서비스포피스(SFP)를 창설하고 2009년에는 GPF를 창설했다. 대표 저서로는 역사와 문화에 근거를 두고 한반도 통일의 비전과 방법론을 제시하는 ‘코리안 드림’이 있다. 저서 ‘코리안드림’은 2018년 미 국방정보국(DIA)이 추천한 한반도 관련 유일한 필독서이기도 하다. 2012년 통일연대 단체인 ‘통일을실천하는사람들’을 주도적으로 설립했으며 2015년부터는 K팝을 활용한 통일문화운동 ‘원케이글로벌캠페인’도 창설해 후견하고 있다. 줄리아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문전숙 씨와 함께 9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김태곤 객원기자 kim@seoul.co.kr ■ 23개국서 세계평화 실현 활동 2009년 문현진 의장이 창설한 글로벌피스재단(GPF)은 워싱턴D.C에 본부를 두고 23개국에서 활동 중인 비영리단체(NGO)다. 세계평화 실현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UN 경제사회이사회의 특별자문단체이자, UN공보국 협력단체다. 2009년 필리핀 종교분쟁지역인 민다나오의 문제 해결을 위해 민다나오 평화구축행동(MINPI)을 결성해 활동 중이다. 케냐에서는 청소년 인성교육과 실천교육을 병행해 종족과 부족간 갈등 해소에 기여한 공로로 UN으로부터 인정서(Certificate of Commendation)를 수여 받았다. 지난해에는 우간다 정부와 함께 동아프리카경제연합국의 항구적 발전을 위한 도덕적 원칙적 가치에 기반한 리더십 빌딩을 추진했다. 2013년 중남미 전직 대통령 21명이 참가하는 ‘중남미대통령사명’를 창설, 중남미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포퓰리즘의 반성과 중남미 균형발전의 발판을 조성하는 활동을 한다. 한·말간 지도자 교류로 말레이시아 수상청으로부터 국가훈장을 받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코리안드림’을 통일한반도의 비전으로 제시하고 950여개 시민사회 단체와 함께 One K 글로벌캠페인 활동 등을 하고 있다. 김태곤 객원기자 kim@seoul.co.kr
  • 별이 된 박완서 길이 되다

    별이 된 박완서 길이 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5차 서울의 문학5-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편이 지난 21일 서대문구 현저동과 종로구 무악동·사직동·필운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독립문역 4번 출구를 출발, 현저동 가파른 언덕배기에 올랐다. 박완서 작가가 어린 시절 놀던 길과 매동보통학교(매동초등학교) 등굣길을 연상하는 코스였다. 독립문~옥살이 골목~무악현대아파트~인왕산 순성길~종로도서관~매동초등학교로 이어진 코스는 단출했지만 명작의 힘은 위대했다. 꼬불꼬불한 골목 귀퉁이마다 작가의 숨결이 느껴졌다. 한 참가자는 “작품 속 등굣길이 궁금했고, 그대로 따라 걸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꿈이 이뤄졌다”는 감동적인 소감을 남겼다. 올해 최종회인 이날 코스에서 서울미래유산은 영천시장이 유일했다. 해설을 맡은 심흥식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서울문학의 현장을 차분하고 깊이 있게 전달했다.박완서(1931~2011)는 서울과 서울사람을 탐구한 대표적 작가이지만 서울 토박이와는 거리가 멀다. 경기 개풍군 박적골에서 태어나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다 8살 때 극성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온 이주민이다. 사대문 밖 대표적 빈촌지대 현저동 46-418번지는 ‘제2의 고향’이었다. 숙명여고를 다니다 개성 호수돈여고로 전학 갈 때까지 6년간의 성장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광복 후 몇 차례 행정동 개편을 통해 의주로 남서쪽은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남고, 북동쪽은 종로구 무악동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지금의 무악동 아이파크아파트가 있는 산 중턱이 옛 집터쯤으로 추정된다. 현저동을 벗어나서는 잠시 신혼살림을 차린 종로구 충신동과 성북구 돈암동 신흥주택 개발지구에서 살았다. 강남개발 이후 주저하지 않고 잠실 장미아파트로 이주, 강남문학을 선보인 이유도 서울의 사대문 안과 사대문 밖을 구분 짓는 앙상레짐이 싫었기 때문이다. 40세 늦깎이 데뷔작 ‘나목’((1970년)에서 거주지를 북촌 계동으로 설정한 것도 현저동 달동네를 벗어나고픈 의도였다.현저동은 박완서의 문학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장소다. 현저동이라는 사대문 밖에 둥지를 틀었지만 언젠가는 사대문 안에 입성하기를 갈망했다. 사대문 안과 밖이라는 분리주의는 남북 분단과정에서 빚어진 오빠의 죽음이라는 가족의 비극과 닮았다. 50~51세에 발표한 ‘엄마의 말뚝1~2’는 분리와 분단의 세계에 세운 작가의 깃발이다. ‘박완서 산문집6: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수(문학동네 2015)’에서 “그러나 막상 내가 도달한 어머니의 서울 살림은 형편없이 궁색한 것이었다. 평지의 반듯반듯한 기와집 동네를 다 그냥 지나쳐 꼬불꼬불한 돌사닥다리 길을 한없이 기어올라가 깎아지른 듯한 축대 끝에 제비집처럼 매달린 초가집의 우중충한 문간방이 어머니 서울 살림집이었다. …서울에서의 첫날밤…나는 이불 속에서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는 구절은 8살 박완서가 서울살이를 시작한 현저동 달동네 어느 문간방의 1938년 풍경이다.세월이 흘러 현저동 산기슭엔 아파트단지가 빼곡하다. 소설에서 “골목은 깎아지른 듯한 층층다리로 변했다, 집들도 층층다리처럼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이상한 동네였다”고 묘사된 곳이라곤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미끈하게 변했다. 현저동은 물이 좋아서 악박골(약박골)이라고 불렸다. 이광수의 ‘흙’에 “…소화불량이 심하기나 해야 악박골 약물에나, 그것도 다른 사람들 오기 전에 이른 새벽에 다녀올까…”라는 대목이 나오고, 심훈의 ‘상록수’에서 주인공 영신과 동혁이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그럼 목두 마른데 악박골루 가서 약물이나 마실까요?”하고 독립문 편짝을 향해서 앞장을 선다. “참, 악박골이 영천이라구도 하는 덴가요?”라고 나온다. 약수로 유명한 이 동네의 진면목과 다양함은 박완서의 작품에 의해 사실화되고 구체화된다. 박완서의 연작 자전소설은 장장 15년 만에 마무리된다. 50세에 쓴 ‘엄마의 말뚝’에 나타난 자전적인 서사를 62세 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다듬었다. 이 작품에는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라는 부제까지 붙어 있다. 65세 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드디어 3부작을 완성했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저서 ‘서울문학기행’에서 “이들 자전적 연작소설을 보면 박완서 가족에게 서울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부역과 전향에 얽힌 가족사 때문에 전쟁 속의 서울이 작품의 주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풀이했다.작가가 경험한 서울은 전쟁의 도시인 동시에 사랑의 도시였다. 해방과 전쟁, 피란살이가 중첩된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살았다. 현저동 ‘괴불마당집’은 서울에 입성한 작가에게 ‘지상의 방 한칸’이었다. 서울사람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자 작가의 길을 마련해준 이야기보따리였다. “우리 세 식구가 처음으로 서울에 장만한 내 집인 현저동 꼭대기 괴불마당집에서의 첫 겨울은 가혹했다. 추위도 예년에 없이 혹독했지만 여름철 장마처럼 눈이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몇 날 며칠 계속됐다. …물보다는 불 걱정이 훨씬 더 심각했다”고 ‘엄마의 말뚝’에서 현저동 시절을 추억했다. ‘엄마의 말뚝’이란 소설 제목은 현저동에 입성했을 때 “드디어 서울에 말뚝을 박았구나”고 안도하는 어머니의 말에서 따왔다. 엄마의 말뚝은 서울의 말뚝이었다. ‘서울탄생기’의 저자 송은영은 “이 말뚝은 드디어 서울에 정착했음을 알게 해주는 장소이다. 말뚝은 지식과 주체성을 갖춘 새로운 여성상에 대한 지향과 그것을 딸에게 투사한 어머니의 욕망을 담고 있다”고 해석했다. 어린 박완서는 등굣길 인왕산 산록에서 싱아를 애타게 찾아다녔다.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아 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 같았다.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박완서의 작품에서 현저동은 ‘바닥 상것들’이 사는 ‘쌈박질이 그치지 않는 동네’로 묘사되고 있다. 현저동의 삶은 ‘서울살이의 법도라기보다는 셋방살이의 법도’부터 익혀야 하는 궁핍한 삶이었다. “오줌과 밥풀과 우거지가 한데 썩은 시궁창 물”이 흐르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박완서는 현저동에서 작가의 길을 찾았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고 썼다. 현저동은 박완서 문학을 잉태한 산실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미래유산 톡톡] 약수터로 이름난 영천, 떡 도매시장으로 인기… 옥바라지 허기 채우다

    [미래유산 톡톡] 약수터로 이름난 영천, 떡 도매시장으로 인기… 옥바라지 허기 채우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영천시장의 명칭은 서대문 경기대 뒷산에서 무악재 고개까지 말안장 모양으로 누워 있는 안산 정상에 속칭 ‘악박골’ 약수터 일명 영천이 있던 데서 유래됐다. 영천 약수는 신기하게도 모든 병에 효력이 있었고, 특히 위장병에 신기한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지명을 딴 영천시장은 서대문구 영천시장길 38일대에 1960년대 형성된 대표적인 떡 도매 재래시장이다. 2011년 7월 전통시장으로 등록됐다. 영천시장의 유래가 되는 것은 영천장이다. 영천장은 지금의 독립문 인근에 존재하던 장으로 고양시의 화전, 원당, 능곡, 일산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장이었다. 이곳에서는 서울의 물품과 경기 서북지역의 농산물과 땔감 등이 주로 거래됐는데,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그 규모가 엄청났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6·25전쟁 시기까지는 야시장이 영천~서대문에 걸쳐 열렸고 포목 제품이 주로 거래됐다. 영천장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지금의 장소인 독립문 사거리에 복개된 만초천 위에 자리잡았다. 지금 영천시장은 도심재개발 지역 및 주택가 인근에 위치해 주변 시민들이 애용하는 서울의 대표적인 골목형 전통시장이다. 주요 취급품목은 식료품과 농축산물, 생활용품 등 시민 생활과 밀접한 품목들이며, 특히 떡과 떡볶이가 유명하다, 서울시 떡 수요의 70%를 영천시장이 공급했던 적도 있다, 과거 서대문형무소, 서울구치소 시절 옥바라지하던 이들이 인근 영천시장 떡가게를 많이 이용하면서 활성화됐고,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던 옥바라지 아낙들이 끼니를 영천시장의 분식으로 채웠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영천시장 독립문 쪽 초입부터 떡볶이, 꽈배기, 순대, 튀김, 어묵 등 간식 집과 칼국수, 순댓국집, 횟집 등이 식당촌을 이룬다. 다양한 식자재 소매점과 함께 시장의 절반쯤이 전통시장 맛집을 꿈꾼다. 옥바라지를 온 이들의 허기를 채워주던 분식형 먹거리 집들이 언론과 블로거들 주목을 받게 되고, 또 도심재개발로 찾는 이들이 다양화되고 있다. 심흥식 정치학 박사·서울도시문화지도사
  • [흥미진진 견문기] 비탈에 다닥다닥 쏟아질듯한 동네… ‘싱아’가 그립더라

    [흥미진진 견문기] 비탈에 다닥다닥 쏟아질듯한 동네… ‘싱아’가 그립더라

    올해 마지막은 박완서 작가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주인공이 학교 가던 길을 따라 걷는 투어였다. 독립문에 서서 소설의 배경이 된 영천시장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현저동(현재 무악동 46번지) 달동네를 빙 둘러봤다. 맞은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가족의 옥바라지를 위해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기거하던 옥바라지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곳은 소설 속 주인공이 살았던 현저동으로 2016년 재개발돼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종로구청 홈페이지에 ‘여관골목’(옥바라지골목)으로 표시돼 있지만 감옥에 맞서는 삶의 기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소설 속 엄마는 아이들이 감옥소 마당에서 노는 것을 질색하며 주소만 사직동으로 옮겨 매동초등학교에 다니게 한다. 인왕산길을 올라 학교까지 가려면 30분 이상 걸린다. 길을 오르다 보니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닌 좁다란 골목들이 나타났다. 골목은 곧 깎아지른 층층다리로 이어지고, 집들도 층층다리처럼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다. 가쁜 숨을 고르고 한양도성 성벽이 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었다. 멀리 선바위와 국사당이 보인다. 바닥의 풀들은 일정한 방향 없이 마구 헝클어져 있고, 싱아는 보이지 않는다. 소설 제목에 나오는 ‘싱아’는 주로 봄에 무쳐 먹거나 데쳐 먹던 풀로 새콤달콤하게 신맛이 나서 먹을 게 없던 시절에 아이들이 간식으로 따 먹던 풀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엄마의 교육열 때문에 넉넉하던 살림과 싱아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고향 땅을 뒤로하고 서울로 왔다. 아무리 멀리까지 봐도 고향은 보이지 않고, 학교에 가면 거짓 주소를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그만 가슴이 더욱 오그라들었을 주인공을 떠올리니 찬바람에 애잔함이 번진다. 한양도성 성벽을 따라 내려와 1895년에 개교한 매동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우리는 각자 편한 교통시설을 이용해 따뜻한 집으로 가겠지만 어린 박완서는 다시 숨 가쁜 인왕산길을 걸어 집으로 가야 한다. 이해할 수 없이 엄격하기만 한 엄마와 각박한 일상에서 어린 박완서를 지탱했던 힘은 고향 할머니의 사랑과 그리움 가득한 평화롭던 시절의 싱아가 아니었을까? 이소영 동화작가
  • 강남·군포·안산 선거구 통합…세종·춘천·순천은 분구 전망

    강남·군포·안산 선거구 통합…세종·춘천·순천은 분구 전망

    하한 13만 9470명, 상한 27만 8940명 인구 줄어든 농어촌 지역은 구제 유력4+1(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 당권파·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 협의체가 공직선거법 개정안 처리를 예고한 26일 본격적인 선거구 획정 논의에 돌입한다. 경기 군포, 서울 강남 등 일부 지역구 의석수는 줄어들고 농어촌 지역은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선거구가 정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선거법 개정안은 현행 지역구 253석을 유지하지만 인구 변화에 따른 지역구 조정이 불가피하다. 선거구 획정은 선거일 15개월 전 인구를 기준으로 가장 큰 지역구의 인구와 가장 작은 지역구의 인구를 결정한다. 2014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인구가 가장 많은 곳과 작은 곳의 편차는 2대1을 넘을 수 없다. 올해 1월 대한민국 인구(5182만 6287명)를 기준으로 상·하한 구간을 산출해 실제 선거구에 대입하면 전북 김제·부안의 인구(13만 9470명)가 하한선이 되고 이곳 인구의 2배(27만 8940명)가 상한선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한에 미달하는 경기 군포갑(13만 8410명)·을(13만 8235명)은 하나로 합쳐질 가능성이 있다. 서울 강남갑(19만 3376명)·을(16만 321명)·병(18만 8457명)은 갑·을로, 경기 안산상록갑(19만 9211명)·을(15만 6308명)과 안산 단원갑(16만 17명)·을(14만 4427명)은 3개 지역구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하한에 근접한 여러 개의 지역구로 이뤄진 강남구, 안산시 등이 자치구 내 통합으로 지역구가 줄어든다. 하한선보다 낮은 전북 익산갑(13만 7710명)은 을(15만 5491명)과의 일부 조정을 해 지역구 의석수를 지킬 것으로 보인다. 조배숙 민주평화당 원내대표는 “26일 4+1 협의체가 만나 선거구 획정위에 농산어촌을 배려해 달라는 권고를 하기 위해 다시 논의할 예정”이라고 했다. 반면 상한을 초과하는 세종(31만 6814명), 강원 춘천(28만 574명), 전남 순천(28만 150명)은 2개 지역구로 나뉠 전망이다. 국회의원의 선거구 획정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내의 독립기구인 국회의원선거구획정위원회에서 정한다. 획정위 관계자는 “국회가 시도별 의원 정수를 정해 전달해 주기를 기다리는 상황”이라면서 “국회가 인구 기준일을 따로 정해 주지 않으면 올해 1월 기준으로 선거구 획정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문 대통령 “예수님 머무시는 곳에서 만세운동 시작”

    문 대통령 “예수님 머무시는 곳에서 만세운동 시작”

    문재인 대통령은 25일 페이스북에 게시한 성탄절 메시지에서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됐고, 자각한 국민에 의해 뿌리내린 민주공화국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의 해가 저무는 성탄절”이라며 “100년 전 예수님은 우리 곁으로 오셔서 평등한 마음을 나눠주셨고 독립정신을 일깨웠다”고 소개했다. 문 대통령은 또 “더불어 사는 것이 식민지를 이기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구세군 자선냄비는 1928년 성탄절 기간에 서울 명동에 처음으로 등장해 가난한 이웃에게 쌀과 장작을 장만해줬다”며 “결핵환자를 돕는 크리스마스 씰은 1932년 캐나다 선교사 셔우드 홀의 주도로 처음 발행돼 오래도록 희망을 나눴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성탄절은 언제나 서로를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깨워준다”며 “예수님이 우리 곁의 낮은 곳으로 오셔서 어려운 이웃과 함께한 것처럼 ‘함께 잘사는 나라’는 따뜻하게 서로의 손을 잡는 성탄절의 마음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오늘도 곳곳에서 묵묵히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국군의 날 알몸 반전 시위’ 강의석, 서울대 재입학 신청

    ‘국군의 날 알몸 반전 시위’ 강의석, 서울대 재입학 신청

    철학과 내부 논의로 입학 여부 결정 지난 2008년 국군의 날 기념 퍼레이드 앞에 알몸으로 뛰쳐나와 ‘군대 폐지’ 시위를 벌였던 독립영화 감독 강의석(33)씨가 9년 전 중퇴했던 서울대에 재입학 신청서를 제출했다. 25일 대학 측에 따르면 강의석씨는 이달 중순쯤 서울대 철학과에 재입학 신청을 했다. 강의석씨는 2005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가 2010년 등록을 하지 않아 제적됐다. 서울대 학칙상 미등록 제적의 경우 1회에 한해 재입학 신청을 할 수 있다. 다만 본래 전공 학과였던 법학과가 로스쿨 설립으로 폐지돼 철학과에 입학을 신청했다. 입학 여부는 철학과 내부 논의에 따라 결정된다. 강의석씨는 2004년 개신교계 미션 스쿨이었던 대광고등학교 3학년 재학 당시 학생들이 교내에서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주장하고 1인 시위와 함께 46일간 단식을 하면서 이름을 알렸다.2008년에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와 군대 폐지를 주장하며 건군 60주년 국군의 날 기념 퍼레이드에 알몸 차림으로 뛰어드는 ‘누드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후 2011년 “신념에 따르겠다”면서 병역을 거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법정 구속된 강의석씨는 구치소 수감 중 수용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을 벌이기도 했다. 2013년 국군의 날에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알몸 시위를 벌였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난자 냉동 거부 당한 중국 미혼녀 “아이나 가지라는 얘기 들었다”

    난자 냉동 거부 당한 중국 미혼녀 “아이나 가지라는 얘기 들었다”

    중국 여성이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난자를 얼려 보관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한 병원을 고발했다. 프리랜서 편집자로 일하는 테레사 수(31)는 당분간 출산을 미루고 일에 집중하고 싶어 지난해 베이징의 한 병원을 찾았다. 난자 냉동을 신청했으나 직원으로부터 결혼해 아이부터 가지라는 말을 들었고, 나중에 의사들로부터는 난자 냉동 처치를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소송에 나선 이유를 밝혔다고 영국 BBC가 24일(이하 현지시간) 전했다. 수는 지난 23일 베이징의 한 법원에서 열린 재판을 마친 뒤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한 개인으로 법정에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많은 다른 싱글 여성들의 기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며 “전문적인 서비스를 받으려고 이 병원을 찾았는데 대신 난 일은 잠시 제쳐두고 아기부터 가지라는 말이나 들었다”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 차오웨이 병원 대변인은 출산을 돕는 기술에 관한 정부의 규제 정책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해명했다고 미국 일간 뉴욕 타임스(NYT)는 전했다. 난자는 나이가 들수록 질이 떨어져 나이가 든 여성의 임신을 어렵게 만든다. 많은 중국 여성들이 일에 집중하고 다음에 나이가 들었을 때 건강한 아이를 가지려고 난자 냉동이란 방법을 찾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허용하지 않아 많은 여성들이 해외로 나가는 실정이다. 2013년 유명 여배우 쉬징레이는 서른아홉에 미국에서 난자 아홉 개를 냉동 보관했다고 공개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수 역시 해외로 나가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으나 너무 많은 돈이 들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대만에서 시술하면 10만 위안(약 1661만원), 미국에서는 20만 위안(약 3322만원)이 든다고 했다. 재판은 몇개월 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이며 소셜미디어에서 다양한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웨이보의 한 이용자는 “출산이 여성들의 유일한 가치가 돼서는 안된다. 어머니가 되는 일과 관계 없이 여러분은 처음이자 지극히 독립된 개체”라고 적었다. 다른 이는 “중국 법을 뜯어 고쳐 미혼 여성들에게 난자은행을 허용하라! 그러면 인구 문제는 조금이라도 해결될 수 있다. 결혼하고 싶어 하지는 않지만 아기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고 했다. 1970년대 출산 통제 정책이 도입된 이후 중국 여성의 몸은 국가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왔다. 한 자녀 정책 대신 두 자녀 정책으로 돌아선 것도 2015년이었다. 하지만 출산 처치와 관련해 아직도 상당한 통제가 존속해 있고 미혼 여성들은 난자 냉동 보관이 허용되지 않는다. 몇몇 웨이보 이용자는 왜 병원을 제소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병원의 일처리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병원을 제소하지 말고 국가 가족계획 연맹을 제소했어야 한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글로벌 In&Out] 북한군의 모체 철도경비대 어떻게 창설됐는가/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북한군의 모체 철도경비대 어떻게 창설됐는가/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북한 정부 수립 역사와 한국전쟁 연구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북한의 조선인민군 건설사다. 북한군이 북한 정부보다 먼저 창설됐으며 1949~1950년의 38도선 무장충돌과 한국전쟁에서 활동한 주요 무장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북한군 건설 과정은 북한 당국뿐만 아니라 소련, 중국 등 외부세력의 영향을 받은 극도로 복잡한 것이며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그뿐만 아니라, 냉전 시기와 사료 부족도 북한 군사(軍史) 연구에 악영향을 미쳤다. 또한 많은 연구자가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료로 확인되지 않은 가정을 사실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실을 잘 보여 주는 것이 북한의 철도경비대 창설이다. 1946년 1월 초에 창설된 철도경비대는 북한의 최초 무장조직 중 하나다. 현재까지 많은 연구에서는 철도경비대 창설의 주요 이유가 소련이 북한의 정규군 창설을 위해 합법적인 위장간판을 만들고 “은밀히 군사 목적의 병력을 확보, 양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과연 그랬을까? 소련 측 자료를 중심으로 북한 철도보안대의 창설 과정을 알아보자. 1945년 8월 소련군은 북한에 주둔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면서 북한 동해안의 일부 도시를 해방시키고 남하해 나갔다. 진격하는 소련군과 해방된 조선인의 복수를 두려워한 많은 일본인 관료들은 가져갈 수 없는 선박, 열차, 궤도 등을 파괴하고 남한으로 도망갔다. 이 때문에 전후, 북한 철도 시설의 상태가 극히 불만족스러웠다. 일제를 격파하고 북한에 진출한 소련군 부대 일부의 철수, 전리품의 소련 운반 등에 바빴던 소련군이 철도 이용권을 독점한 것과 전쟁으로 인한 경제 손실 등의 이유로 경제 생활이 극히 어려워진 북한 주민들이 불만을 품게 됐다. 그 결과 1945년 11월 말 나진시에서 일제 탄약을 소련으로 운반하는 열차 방화(放火) 사건이 발생했다. 그 폭발로 인해 도시가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북한 철도 문제의 심각함을 인식하게 된 소련군은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1945년 12월 북한 민정청 교통국 대표인 예고로프 상위가 민정담당 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에게 만주에서 열차를 보내는 것과 함께 2개 철도운영연대, 그리고 철도경비를 위해 2개 내무인민위원부(NKVD) 철도경비연대를 파견할 것을 요청했다. 2차 세계대전 종결로 인해 대규모의 제대를 실시한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약 5000명 규모의 병력을 추가적으로 북한에 파견할 수 없었다. 1946년 초 조선인들로 구성된 철도경비대를 조직했고 이를 민정청 보안국 경비부 철도과로 편입해 운영하다가 1946년 7월에 보안국에서 철도경비사령부로 독립시켰다. 1946년 3월 백의사 등 테러단체가 소련군인과 북한정치가들을 상대로 일으킨 일련의 테러행위를 계기로 소련이 북한경찰을 준군사화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군사고문단을 파견했으나, 철도보안대는 군사교육을 받지 못하고 철도경비를 계속 수행했다. 1946년 12월 말 북한 부대의 현황조사를 진행했던 소련 군사고문단 정치 담당 고문 카넵스키 대좌는 북한 철도부안대의 상태를 ‘불량’이라고 평가했다. 이 상황에 대해 불만을 느낀 김일성은 1947년 3월에 제25군 사령관에게 직접 보낸 편지에서 철도경비대가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철도경비 임무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철도경비를 위해 북한 철도경비대를 이용해 온 소련군은 진퇴양난이었다. 김일성 요청을 부분적으로라도 수용하기 위해 제25군 사령부는 “조선인들이 경비하는 철도 시설 지도를 준비할 것”을 명령했다. 1947년 중순이 돼서야 북한 철도경비대가 북한군에 편입할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 성탄절 앞두고… ‘복지 사각’ 대구 일가족 4명의 비극

    성탄절 앞두고… ‘복지 사각’ 대구 일가족 4명의 비극

    10년간 생활고… 기초수급자 지정 안 돼 집안에서 번개탄 피운 흔적… 유서 없어 경찰 “자녀 동반한 극단적 선택은 범죄”성탄절을 앞두고 대구의 한 주택에서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들은 10년 가까이 생활고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으나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지 않는 등 복지 사각지대에 있었다. 24일 대구 강북경찰서 등에 따르면 전날 오후 8시 9분쯤 대구 북구 한 주택에서 A(42)씨 부부와 중학생 아들(14), 초등학생 딸(11) 등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집안에는 번개탄을 피운 흔적이 있었지만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우편함에는 지난 10월부터 요금이 체납됐다는 도시가스요금 고지서와 주정차위반 과태료 고지서 등이 발견됐다. 일가족의 죽음은 중학생 아들이 등교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담임 교사의 신고로 밝혀졌다. 담임 교사는 경찰 조사에서 “숨진 학생이 학교에 한 번도 결석하지 않는 모범생이었다. 최근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A씨가 자신의 차량으로 식당에 식자재를 공급하는 일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10년 전 사업에 실패한 뒤 지금까지 계속 경제적으로 어려웠다고 주변에서 말하고 있다”고 밝혔다. A씨 친인척들도 “A씨의 경제 사정이 넉넉지 않았으나 자신들도 도와줄 형편이 아니어서 안타까웠다”고 진술했다. 관할 주민복지센터는 A씨의 경우 복지 지원 대상자 자격이 되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복지센터 관계자는 “복지 지원 대상자가 아니면 생활 형편이 어떤지를 파악할 수 없다”면서 “본인이 센터에 복지 신청 등 도움을 요청했다면 후원자를 연계해 줄 수 있는데 이것마저도 없었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자식은 소유물이 아닌 독립된 인격체”라면서 “자녀를 동반한 극단적 선택은 범죄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정세균 국무총리 후보자 재산 51억원

    정세균 국무총리 후보자 재산 51억원

    본인 명의 19억·배우자 포항 땅 32억원 육군 병장 만기 제대… 장남은 대체 복무정세균(69) 국무총리 후보자의 재산이 51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인사청문특별위원회에 지난 23일 접수된 문재인 대통령의 정 후보자 인사청문요청안 부속서류에 따르면 정 후보자는 본인과 배우자의 재산을 합쳐 총 51억 5344만원을 신고했다. 정 후보자 본인 명의의 재산은 19억 1775만원이었다. 서울 마포구 상수동의 아파트 1채(9억 9200만원)와 자신의 지역구인 종로구에 있는 아파트 전세금(6억 8000만원)이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예금 8571만원과 자동차 2018년식 EQ900(6474만원)이 있었다. 지난 6월 취득한 700만원 상당의 광화문 포시즌스호텔 헬스 연간회원권도 재산 목록에 포함됐다. 배우자 최혜경씨 재산으로는 경북 포항에 있는 땅 6만 4790㎡(32억 62만원)와 예금(3457만원), 호텔 다이닝 연간 회원권(49만원) 등이 포함됐다. 정 후보자는 1978년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으며, 장남은 2004~2007년 ‘알토닉스’라는 전자부품 제조업체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대체 복무를 마쳤다. 2015년 결혼한 장남은 독립생계 유지를 이유로 재산 고지는 거부했으나, 올해 5~8월 로펌 두 곳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6만 5963달러(약 7690만원)를 급여로 받았다는 증빙서류를 제출했다. 전북 진안 출신인 정 후보자는 전주 신흥고, 고려대 법대를 나와 1978년 쌍용그룹 공채로 입사해 17년간 근무하며 상무이사를 지냈다. 이후 정치에 입문해 15~20대 총선에서 내리 당선됐으며 원내대표, 당 대표, 국회의장 등을 거쳤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인사청문특별위원회 위원으로 박병석·원혜영·박광온·신동근·박경미·김영호 의원을 추천했다. 특위는 민주당(6명)·자유한국당(5명)·바른미래당(1명)·비교섭단체(1명) 13명으로 꾸려진다. 특위 위원장은 한국당 나경원 의원이 맡는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대통령 입맛대로” “국회가 이중 검증”… 공수처장 임명방식 논란

    “대통령 입맛대로” “국회가 이중 검증”… 공수처장 임명방식 논란

    “與 1명 추천… 대통령 임명권 가지면 안 돼” “인사청문 거쳐 국회가 선출” 공정 의견도 檢, 공수처 검사에 민변 출신 변호사 경계 “정치적 변질 위험성… 또 다른 檢 조직” 우려 최종안에서 빠진 기소심의위는 이견 적어4+1(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 당권파·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 협의체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합의안을 통해 만들어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대한 평가가 정반대로 나뉘고 있다.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해 온 검찰의 횡포를 견제할 ‘권력 감시기관’이라는 평가와 대통령의 권력을 극대화할 ‘정적 제거기관’이라는 우려가 동시에 나온다. 가장 논란이 되는 지점은 공수처장 임명 방식이다. 합의된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장은 여야·법조계 인사로 꾸려진 추천위원회가 위원 7명 중 6명의 찬성으로 2명을 추천하면 대통령이 그중 1명을 택하고,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임명하도록 했다. 김성천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추천위원회에서 두 명을 추천하더라도 한 명은 여당이 추천한 사람일 것이고, 그러면 대통령이 그 사람을 고르지 않겠느냐”고 설명했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도 “공수처장이 대통령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면 대통령이 임명권을 가지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그러나 공수처법에 설계된 내용만으로도 공정하게 공수처장을 임명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여야가 중심이 돼 두 명을 추천하면 대통령이 한 명을 고르고 이를 국회가 다시 인사청문회로 검증하는 이중구조를 갖췄다”면서 “국회가 실질적으로 선출하고 대통령은 임명장만 주는 형식”이라고 설명했다. 공수처 검사 임명 조건을 두고서는 공수처가 ‘정치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 검사는 ‘검사와 변호사 자격을 보유한 10년 이상의 경력자로 재판·조사·수사 업무를 5년 이상 수행한 사람’이 하도록 정했다. 이 때문에 각종 사회적 기구에서 조사 업무를 담당했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출신 변호사가 공수처 검사로 들어가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온다. 검찰도 이 부분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 전 교수는 “수사 전문가(검찰)가 아닌 사람이 수사를 하면 정치적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고 말했다. 반면 임 교수는 “공수처의 목적은 검찰 일변도 수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며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이 보장되기 때문에 정치적 중립성이 확보될 것”이라고 밝혔다. 바른미래당 권은희 의원이 대표 발의한 공수처법안에 담겼다가 최종안에서 빠진 기소심의위원회에 대해서는 오히려 전문가 사이에서 논란이 별로 없다. 법률 비전문가가 기소 여부를 심의하는 게 맞지 않다는 것이다. 당초 기소심의위원회는 공수처의 무리한 기소를 막기 위해 고안됐다. 김 교수는 “법적 판단은 최종적으로 법률 전문가가 해야 한다”면서 “기소심의위원회가 기소 여부를 결정하면 오히려 왜곡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임 교수도 “검찰에는 기소심의위원회라는 게 없는데, 공수처에만 만든다면 평등 원칙에 위반된다”고 강조했다. 신형철 기자 hsdori@seoul.co.kr
  • 김천대 작업치료학과, 다재다능한 인재 양성에 힘쓴다

    김천대 작업치료학과, 다재다능한 인재 양성에 힘쓴다

    인류사회에 헌신하고 사랑으로 실천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김천대학교(총장 윤옥현) 작업치료학과가 미래 유망직종 ‘작업치료사’의 전문 양성 대학으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작업치료사는 재활 의료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질 높은 보건 및 의료서비스에 대한 수요와 함께 그 수가 증가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미래 유망직업 TOP 50에도 포함될 만큼 사회 필수 인력으로 대두되고 있다.작업 치료란 신체 및 정신적 발달과정에서 어떠한 이유로 기능이 저하된 사람이 최대한 독립적으로 일상생활을 수행하고 능동적인 사회 참여가 가능할 수 있도록 돕는 보건의료의 한 분야로 김천대에서는 치료이론과 현장실습 통해 현장 맞춤형 인재를 길러낸다. 2007년 보건복지부는 장애 아동의 재활 지원 및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장애아동재활치료사업을 도입했다. 이에 2021년부터는 발달재활서비스 제공인력 자격인증을 받은 사람만이 관련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김천대학교 작업치료학과의 경우 해당 자격인증을 받을 수 있는 학과교육과정을 갖추고 있으며 입학 이후 학과 정규교과과정을 이수하였을 경우 발달재활서비스 제공인력 ‘감각발달재활사’ 자격인증을 위한 교과목 인증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졸업 시 자격증을 발급받게 된다. 김천대학교 작업치료학과 관계자는 “재학생들은 이러한 정책에 발맞추어 지난 2017년부터 지속적으로 효동어린이집, 김천시 부속유치원 등에서 지역 주민 또는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전공 연계 봉사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넥슨어린이재활병원, 보바스어린이의원, 세란아동발달센터, 보담아동청소년상담센터, 유앤아이감각통합연구소, 마미정감각통합연구소 등 다양한 아동 관련 서비스 제공 기관으로의 실습을 수행한다”고 전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정세균 국무총리 후보자, 재산 51억원 신고…배우자 32억원

    정세균 국무총리 후보자, 재산 51억원 신고…배우자 32억원

    정세균(69) 국무총리 후보자의 재산이 51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24일 국회 인사청문특별위원회로 전날 회부된 문재인 대통령의 정 후보자 인사청문요청안 부속서류에 따르면 정 후보자 내외는 재산을 총 51억 5344만원으로 신고했다. 정 후보자 본인 명의의 재산은 19억 1775만원으로 마포구 상수동 소재 한 아파트 9억 9200만원, 종로구 한 아파트 전세금 6억 8000만원 등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예금은 8571만원이었고, 자동차는 2018년식 EQ900(6474만원)을 신고했다. 지난 6월 취득한 가액 700만원의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 헬스 연간회원권도 재산목록에 포함됐다. 정 후보자 배우자는 경북 포항에 6만 4790㎡의 땅을 32억원 62만원으로 신고했다. 예금은 3457만원이었다. 지난 10월에는 프라자호텔 다이닝 연간 회원권(49만원)도 사들였다. 정 후보자는 1978년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으며 장남은 2004년∼2007년 ‘알토닉스’라는 업체에서 병역특례제도를 통해 군 복무를 마쳤다. 2015년 결혼한 장남은 독립생계 유지를 이유로 재산 고지는 거부했지만 올해 5~8월 4개월간 로펌 2곳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6만 5963달러(한화 7690만원)를 급여로 받았다는 증빙 서류를 제출했다.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정 의장은 쌍용그룹에서 상무를 지낸 뒤 정치에 입문해 15대~20대 총선에서 내리 당선됐다. 그는 모범적이고 신사적인 의정 활동을 한 국회의원에게 주는 ‘백봉신사상’을 15번 받았다. 문 대통령은 임명 동의 요청사유서에서 “6선 국회의원으로서 국회의장, 당 대표, 원내대표 등의 경력을 통해 쌓은 풍부한 정치적 경륜과 역량을 바탕으로, 국회와의 협력을 통해 산적한 갈등 과제와 입법 현안 등을 원만하게 조율해 나갈 최적의 국무총리 후보자”라고 평가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시론] ‘천만 영화‘의 허울에서 벗어나자/윤성은 영화평론가·영화학 박사

    [시론] ‘천만 영화‘의 허울에서 벗어나자/윤성은 영화평론가·영화학 박사

    몇 년 전, 프랑스 파리 여행 중에 있었던 일이다. 영화관에서 티켓을 파는 청년이 어디서 왔냐고 묻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 등 한국 감독들의 이름을 줄줄이 댄다. 어떻게, 어디서 한국영화를 접하게 됐는지 궁금하던 차, 서점에서 우연히 영화감독 지망생을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영화를 무척 좋아하고, 박찬욱 감독의 팬임을 밝히기도 했던 그는 파리가 전 세계 영화들을 두루 접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했다. 고전영화부터 신작까지, 블록버스터부터 독립영화까지 늘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했던 그가 이렇게 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프랑스 국립영화센터(CNC)는 영화산업에 대한 규제 및 지원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데, 일례로 15개에서 27개 사이의 스크린을 보유한 멀티플렉스의 경우에는 한 영화가 최다 4개의 스크린밖에 차지할 수 없도록 돼 있기 때문에 동시에 많은 작품들이 영화관에 걸리게 된다. 물론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극장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극장이 아니라 관객이 영화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은 영화계를 넘어 문화 강국으로서 프랑스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유지해 나가는 든든한 힘이다. 2019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는 ‘극한직업’, ‘어벤져스: 엔드게임’, ‘알라딘’, ‘기생충’, ‘겨울왕국 2’ 등 무려 다섯 편의 영화가 1000만 관객을 동원했다. 한국영화 100년사에 처음 있는 일로, 밀레니얼 세대가 영화관을 점차 외면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산업적 측면에서는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많은 관객이 들 것으로 예상되는 블록버스터나 화제작이 개봉될 때마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그림자처럼 함께 따라다녔다. 전작들이 크게 흥행했던 ‘어벤져스: 엔드게임’, ‘겨울왕국 2’는 개봉 첫 주에 2000개 이상의 스크린을 가져가면서 각각 58%(이하 최고치), 46.1%의 스크린 점유율을 기록했다. 이 두 작품은 스크린 수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1000만 관객 고지를 밟을 수 있었고, 피해는 고스란히 그 기간에 개봉한 다른 영화들과 관객들에게 돌아갔다. ‘겨울왕국 2’가 개봉한 지 약 한 달, ‘백두산’의 좌석점유율도 개봉 첫날(19일) 50.6%를 기록했다. 반독과점 영화인대책위원회(반독과점 영대위)는 지난 20일 입장문을 통해 올해 스크린 독과점에 포함되는 영화가 13편에 달한다고 지적하면서 국회와 정부가 영화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런데 스크린독과점은 벌써 십수년 동안 1년에도 몇 번씩 제기돼 온 문제임에도 왜 아무런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을까. 해결책은커녕 사실상 어떠한 정책적 시도도 없었다는 점이 의아스럽다. 현재 국회에 관련 법안들이 몇 건이나 발의돼 있음에도 논의가 미루어지고 있는 데는 업계의 입김 외에도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위정자들은 스크린 독과점을 영화계의 밥그릇 싸움 문제 정도로 가볍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먼저,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대기업이나 한 편의 영화가 극장 수입을 독점하는 것 이상의 어젠다를 갖고 있다. 문화 콘텐츠는 나름의 이데올로기를 탑재하고 있으므로 특정한 가치 편향성을 가진 영화가 스크린을 점령한다면 관객들은 부지불식간에 그런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극장가에 다양한 작품들이 존재해야만 하는 궁극적인 이유다. 또한 관객들이 영화를 선택할 권리에 대해서도 추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화 티켓 가격에 포함된 영화발전기금 3%의 일부는 다양한 형식, 내용의 영화 및 독립영화에 대한 제작·배급 지원에 사용된다. 만약 관객들이 보고 싶지 않은 영화를 스크린 독과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게 만든다면 영화발전기금은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 경제 체제에 규제는 독이 될 것이라는 우려에도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 작품은 장기간 일정 상영관 수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수익을 올릴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작품들은 극장가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초반의 쏠림 현상을 노리는 허술한 블록버스터들은 사라져갈 확률이 높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은 소비자 중심으로 유지되면서 콘텐츠의 질은 오히려 향상될 수 있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에 아직 어떤 시도도 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득보다 실을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중소 규모의 영화들과 관객을 위한 영화법 개정이 절실하다.
  • [기고] 국민연금 1000조 시대 이끌 새로운 운용체계로/김강립 보건복지부 차관

    [기고] 국민연금 1000조 시대 이끌 새로운 운용체계로/김강립 보건복지부 차관

    우리 국민의 노후 소득을 책임지고 있는 국민연금이 올해로 서른한 번째 생일을 맞았다. 1988년 5300억원 규모로 시작한 국민연금기금은 올해 8월 700조원을 돌파하면서 명실공히 세계 3대 연기금으로 발돋움했다. 2024년이 되면 1000조원 시대를 맞는다. 지난 9월 기준 국민연금의 연평균 기금운용수익률은 약 5%를 넘고 있으며 총 713조원의 적립금 중 351조원이 운용수익금이다. 국민연금의 양적ㆍ질적 성장을 바라보며 주무 부처 차관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무엇보다 국민연금제도를 통해 국민의 노후를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 더욱 효율적이고 투명하며 공정하게 기금을 운용해야 한다는 고민 때문이다. 정부는 기금운용위원회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해 지난 10월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운영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앞으로 금융·경제 분야 등에서 5년 이상 경력을 갖춘 상근전문위원이 기금운용위원회 안건을 사전에 검토하고 작성 단계부터 참여하도록 해 좀더 전문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지원하게 된다. 상근전문위원은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각 가입자단체(근로자, 사용자, 지역가입자)가 추천한 비공무원으로 구성된다. 기금운용위원회 회의도 월 1회 개최해 전문적인 논의와 의사결정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진다.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의 3분의1 이상이 동의하는 안건은 위원회에 공식 부의하도록 하는 등 위원들의 권한도 한층 강화했다. 과거 정부가 단독으로 기금운용위원회 안건 작성ㆍ검토를 수행했던 체계에서 상근전문위원이 먼저 안건을 검토하고 정부 및 외부 전문가 등의 다양한 의견을 종합해 기금운용위원회에서 독립적으로 결정하는 체계로 변화한다면 일각에서 제기했던 불신과 오해를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스튜어드십코드)에 따른 주주활동 원칙 및 기준도 전문위원회에서 투명하고 공정한 논의를 거쳐 결정하게 된다. 소중한 국민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의 투자의사결정 및 주주활동에 정부를 비롯한 어느 누구도 개입할 수 없도록 차단하는 등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보장하고, 오로지 기금의 장기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운영되는 체계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정부는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새로운 국민연금 기금운용체계를 통해 모든 국민이 신뢰하는 국민연금으로 거듭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조선의 독립, 자유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최후 성공이 있을 때까지 왜적과 계속 투쟁하라! ” 만주를 호령하던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했다.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과를 거둬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았지만 양세봉을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양세봉은 1896년 7월 15일 평북 철산군 세리면 연산동에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마을 서당 문지기로 일하며 귀동냥으로 천자문과 논어, 명심보감 등을 익힌 것이 배움의 전부였다. 훈장의 안중근 의사 이야기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줬다. 양세봉은 죽음을 앞둔 안 의사가 남긴 “슬퍼하지 마라. 대장부로 태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데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는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1912년 아버지가 갑자기 병환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양세봉은 겨우 16세에 가장이 됐고 임재순과 결혼했다.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자 양세봉은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흥경현(현 신빈현) 영릉가를 거쳐 한인 집단 거주지인 홍묘자 사도구에 정착했다. 1919년 4월 홍묘자에 있던 홍동학교 교장 이세일은 3·1운동 지지 시위를 주도했는데 양세봉도 동참했다. 이후 양세봉은 천마산대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1920년 12월 최시흥이 청장년 500여명으로 조직한 천마산대는 경찰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밀정과 일경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던 항일 유격대였다.●“중국인, 관운장보다 유능한 장군으로 흠모” 천마산대는 일제의 공격을 받자 만주 유하현으로 가 광복군총영에 합류했다. 양세봉은 군기 검사관이 됐다. 그 뒤 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은 대한통의부로 통합, 무력 부대를 설치했는데 오동진이 사령장이었고 양세봉도 두령이라는 작은 자리를 맡았다. 1923년 5월 양세봉은 평북 창성을 습격하고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는 등 전투에 참여했다. 그 후 새로 출범한 참의부 소대장이 돼 압록강을 건너가 유격 투쟁을 이어 갔다. 평북 초산과 강계에서 일경 수명을 사살했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을 지나갈 때 저격을 지휘해 일제가 간담을 쓸어내리게 했다. 1924년부터 남만주에는 정의부가, 북만주에는 신민부가 설립돼 참의부와 함께 3부 체제가 됐다. 양세봉은 참의부 중대장으로 승진한 뒤 정의부로 옮겨 갔다. 3부는 1929년 4월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우여곡절 끝에 국민부로 통합됐다. 흥경현 왕청문에 자리잡은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창설했다. 국민부는 선민부 토벌에 나섰다. 조선민회라고도 불렸던 선민부는 한인 변절자들이 이끌고 있었다. 일제의 조종을 받아 독립군을 색출하고 가족을 살해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양세봉은 부사령을 맡아 선민부 지휘부와 지부를 습격해 우두머리와 일당을 모조리 죽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931년 9·18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듬해 1월 조선혁명당과 군 간부 10여명이 회의 도중 습격을 받아 체포되고 이후 두 달 동안 간부 83명이 붙잡혀 혁명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지역 부대장들의 추천으로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양세봉 장군은 부대를 재정비하고 속성군관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직적인 항일 투쟁에 나섰다. 또한 왕동헌, 이춘윤, 양희부 등 중국 지도자들과 협력해 ‘요령농민자위단’을 결성했다. 당취오가 총사령인 ‘요령민중자위군’과도 힘을 합쳐 자위군의 특무대 사령으로서 대일 연합작전을 벌였다. 괴뢰정부인 만주국 군대가 흥경현을 점령하자 연합부대는 20여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여 탈환했다. 일본군은 400여명의 사상자와 500명 가까운 실종자를 냈다. ‘제1차 흥경혈전’이다. 그 중심에 양세봉 장군이 있었다. 다음달 일본군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흥경으로 돌진해 왔다. 2차 혈전에서도 연합부대는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을 물리쳤다. 연합부대는 1932년 8월 청원현을, 다음달에는 석탄 탄광이 있는 무순을 공격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연합부대가 지나갔던 평정산 마을 주민 30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32년까지 한중 연합부대는 일만 연합군과 200여 차례 전투를 벌였고 장군은 그때마다 크고 작은 승리를 거뒀다. 한편으로 멀리 경상도까지 소부대를 보내 경찰서 등을 파괴하고 악질 경찰을 살해했다. 1932~1933년 압록강 주변에서만 26차례 파괴 공작을 벌였고 일본 군경 243명을 사살했다. 1933년 5월 서원준을 황해도에 밀파해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한 것은 신문이 호외로 다룰 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럴수록 일제의 추격은 집요해졌다. 조선인 변절자를 이용해 혁명군을 체포하고 가족과 친구까지 살해했다. 혁명군 수백명을 처형해 머리를 매달았다. 장군의 체포에도 혈안이 돼 현상금을 걸었다. 1934년 3월 장군은 중국 동북인민혁명군 사령관 양정우와 연합했다. 장군은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지만 항일을 위해 신념도 버렸다. 조선혁명군과 인민혁명군은 진주령 일본군 기차 습격, 노구대 격전, 쾌대무자 전투 등 연합작전에서 연전연승, 일본군에 엄청난 타격을 줬다. 그해 9월 18일 일제의 지시를 받던 박창해는 장군과 면식이 있던 압동양을 보내 “저희 부대가 양 사령관께 오려고 합니다. 함께 가서 무기를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며 유인했다. 장군은 경호대원만 데리고 따라나섰고 일행이 소황구에 이르렀을 때 어둠 속에서 압동양이 옥수수밭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매복하고 있던 일군들이 기습 사격을 가했고 장군은 가슴에 총탄 두 발을 맞았다. 장군은 “조선독립혁명을 완성하고 가지 못하는 나는… 민족의 죄인입니다”라고 자책하며 20일 오후 1시쯤 숨을 거뒀다. 15년 동안 풍찬노숙하며 일제와 싸웠던 영웅은 이렇게 희생됐다. 한인들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며 슬퍼했다. 장군의 나이 38세였다.한인들은 시신을 위치가 드러나지 않게 평장(平葬)했다. 같은 달 26일 양세봉의 죽음을 알고 향수하자촌에 일군이 몰려와 한인 70여명을 모아 놓고 시신을 내놓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하는 수 없이 마을 둔장(屯長)이 묘의 위치를 말하자 일군은 시신을 파내 놓고 마을 노인 김도선에게 작두로 머리를 자르라고 했다. 김 노인은 “나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 사람이 어찌 자기 사령관의 머리를 자를 수 있단 말이냐”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김 노인의 머리를 베고 장군의 머리를 가져갔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 없는 장군의 시신을 다시 고구려산성 아래에 묻었다. 장군은 전투에선 호랑이 같았지만 마음은 너무나 따뜻했다. 계급을 불문하고 대원들을 평등하게 대했고 거친 밥을 똑같이 나눠 먹었다. 이불을 덮어 주고 발을 씻겨 주기도 했다. 배움이 부족한 ‘소작농 장군’이었지만 인격으로 감동시켰다. 장군의 비서였던 박윤걸(중국에서 작고)씨는 “중국인 이춘윤은 관운장보다 더 유능한 장군이라며 흠모했다”고 말했다.●김일성 아버지와 의형제… 가족들 평양에 정착 광복 후 북한은 장군의 가족을 평양으로 데려가 정착시켰다. 장군은 김일성의 아버지와 의형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1961년 후손들이 유골을 북한으로 이장했고 장군은 애국열사릉에 옮겨져 묻혔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도 이회영 선생 묘소의 바로 왼쪽에 장군의 가묘가 있다. 남북 양쪽 국립묘지에 묘소가 있는 독립투사는 장군이 유일하다. 우리 정부는 1962년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日·만주군과 전투 200여회 승리… 남북 국립묘지에 모신 유일 독립투사

    “조선의 독립, 자유를 완성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최후 성공이 있을 때까지 왜적과 계속 투쟁하라! ” 만주를 호령하던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말했다.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과를 거둬 군신(軍神)으로 추앙받았지만 양세봉을 모르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양세봉은 1896년 7월 15일 평북 철산군 세리면 연산동에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마을 서당 문지기로 일하며 귀동냥으로 천자문과 논어, 명심보감 등을 익힌 것이 배움의 전부였다. 훈장의 안중근 의사 이야기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줬다. 양세봉은 죽음을 앞둔 안 의사가 남긴 “슬퍼하지 마라. 대장부로 태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데 무엇이 슬프단 말이냐”는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1912년 아버지가 갑자기 병환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양세봉은 겨우 16세에 가장이 됐고 임재순과 결혼했다. 일제의 핍박이 심해지자 양세봉은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향했다. 흥경현(현 신빈현) 영릉가를 거쳐 한인 집단 거주지인 홍묘자 사도구에 정착했다. 1919년 4월 홍묘자에 있던 홍동학교 교장 이세일은 3·1운동 지지 시위를 주도했는데 양세봉도 동참했다. 이후 양세봉은 천마산대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1920년 12월 최시흥이 청장년 500여명으로 조직한 천마산대는 경찰서,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밀정과 일경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던 항일 유격대였다.●“중국인, 관운장보다 유능한 장군으로 흠모” 천마산대는 일제의 공격을 받자 만주 유하현으로 가 광복군총영에 합류했다. 양세봉은 군기 검사관이 됐다. 그 뒤 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은 대한통의부로 통합, 무력 부대를 설치했는데 오동진이 사령장이었고 양세봉도 두령이라는 작은 자리를 맡았다. 1923년 5월 양세봉은 평북 창성을 습격하고 일본군 10여명을 사살하는 등 전투에 참여했다. 그 후 새로 출범한 참의부 소대장이 돼 압록강을 건너가 유격 투쟁을 이어 갔다. 평북 초산과 강계에서 일경 수명을 사살했고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경비선을 타고 압록강을 지나갈 때 저격을 지휘해 일제가 간담을 쓸어내리게 했다. 1924년부터 남만주에는 정의부가, 북만주에는 신민부가 설립돼 참의부와 함께 3부 체제가 됐다. 양세봉은 참의부 중대장으로 승진한 뒤 정의부로 옮겨 갔다. 3부는 1929년 4월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우여곡절 끝에 국민부로 통합됐다. 흥경현 왕청문에 자리잡은 국민부는 조선혁명군을 창설했다. 국민부는 선민부 토벌에 나섰다. 조선민회라고도 불렸던 선민부는 한인 변절자들이 이끌고 있었다. 일제의 조종을 받아 독립군을 색출하고 가족을 살해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양세봉은 부사령을 맡아 선민부 지휘부와 지부를 습격해 우두머리와 일당을 모조리 죽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931년 9·18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듬해 1월 조선혁명당과 군 간부 10여명이 회의 도중 습격을 받아 체포되고 이후 두 달 동안 간부 83명이 붙잡혀 혁명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지역 부대장들의 추천으로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양세봉 장군은 부대를 재정비하고 속성군관학교를 세우는 한편 조직적인 항일 투쟁에 나섰다. 또한 왕동헌, 이춘윤, 양희부 등 중국 지도자들과 협력해 ‘요령농민자위단’을 결성했다. 당취오가 총사령인 ‘요령민중자위군’과도 힘을 합쳐 자위군의 특무대 사령으로서 대일 연합작전을 벌였다. 괴뢰정부인 만주국 군대가 흥경현을 점령하자 연합부대는 20여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여 탈환했다. 일본군은 400여명의 사상자와 500명 가까운 실종자를 냈다. ‘제1차 흥경혈전’이다. 그 중심에 양세봉 장군이 있었다. 다음달 일본군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흥경으로 돌진해 왔다. 2차 혈전에서도 연합부대는 악전고투 끝에 일본군을 물리쳤다. 연합부대는 1932년 8월 청원현을, 다음달에는 석탄 탄광이 있는 무순을 공격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연합부대가 지나갔던 평정산 마을 주민 30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32년까지 한중 연합부대는 일만 연합군과 200여 차례 전투를 벌였고 장군은 그때마다 크고 작은 승리를 거뒀다. 한편으로 멀리 경상도까지 소부대를 보내 경찰서 등을 파괴하고 악질 경찰을 살해했다. 1932~1933년 압록강 주변에서만 26차례 파괴 공작을 벌였고 일본 군경 243명을 사살했다. 1933년 5월 서원준을 황해도에 밀파해 사리원 경찰서 등을 습격한 것은 신문이 호외로 다룰 만큼 큰 사건이었다. 그럴수록 일제의 추격은 집요해졌다. 조선인 변절자를 이용해 혁명군을 체포하고 가족과 친구까지 살해했다. 혁명군 수백명을 처형해 머리를 매달았다. 장군의 체포에도 혈안이 돼 현상금을 걸었다. 1934년 3월 장군은 중국 동북인민혁명군 사령관 양정우와 연합했다. 장군은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지만 항일을 위해 신념도 버렸다. 조선혁명군과 인민혁명군은 진주령 일본군 기차 습격, 노구대 격전, 쾌대무자 전투 등 연합작전에서 연전연승, 일본군에 엄청난 타격을 줬다.그해 9월 18일 일제의 지시를 받던 박창해는 장군과 면식이 있던 압동양을 보내 “저희 부대가 양 사령관께 오려고 합니다. 함께 가서 무기를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며 유인했다. 장군은 경호대원만 데리고 따라나섰고 일행이 소황구에 이르렀을 때 어둠 속에서 압동양이 옥수수밭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매복하고 있던 일군들이 기습 사격을 가했고 장군은 가슴에 총탄 두 발을 맞았다. 장군은 “조선독립혁명을 완성하고 가지 못하는 나는… 민족의 죄인입니다”라고 자책하며 20일 오후 1시쯤 숨을 거뒀다. 15년 동안 풍찬노숙하며 일제와 싸웠던 영웅은 이렇게 희생됐다. 한인들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며 슬퍼했다. 장군의 나이 38세였다. 한인들은 시신을 위치가 드러나지 않게 평장(平葬)했다. 같은 달 26일 양세봉의 죽음을 알고 향수하자촌에 일군이 몰려와 한인 70여명을 모아 놓고 시신을 내놓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하는 수 없이 마을 둔장(屯長)이 묘의 위치를 말하자 일군은 시신을 파내 놓고 마을 노인 김도선에게 작두로 머리를 자르라고 했다. 김 노인은 “나는 조선 사람이다. 조선 사람이 어찌 자기 사령관의 머리를 자를 수 있단 말이냐”며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김 노인의 머리를 베고 장군의 머리를 가져갔다. 마을 사람들은 머리 없는 장군의 시신을 다시 고구려산성 아래에 묻었다. 장군은 전투에선 호랑이 같았지만 마음은 너무나 따뜻했다. 계급을 불문하고 대원들을 평등하게 대했고 거친 밥을 똑같이 나눠 먹었다. 이불을 덮어 주고 발을 씻겨 주기도 했다. 배움이 부족한 ‘소작농 장군’이었지만 인격으로 감동시켰다. 장군의 비서였던 박윤걸(중국에서 작고)씨는 “중국인 이춘윤은 관운장보다 더 유능한 장군이라며 흠모했다”고 말했다. ●김일성 아버지와 의형제… 가족들 평양에 정착 광복 후 북한은 장군의 가족을 평양으로 데려가 정착시켰다. 장군은 김일성의 아버지와 의형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1961년 후손들이 유골을 북한으로 이장했고 장군은 애국열사릉에 옮겨져 묻혔다.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도 이회영 선생 묘소의 바로 왼쪽에 장군의 가묘가 있다. 남북 양쪽 국립묘지에 묘소가 있는 독립투사는 장군이 유일하다. 우리 정부는 1962년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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