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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월의 독립운동가 홍범식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경술국치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의열투쟁을 확산시킨일완(一玩) 홍범식(洪範植·1871∼1910) 선생을 광복회 등 유관기관과 공동으로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충북 괴산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1888년 진사시에 합격,1902년 관직에 들어선 이후 혜민원 참서관을 거쳐 지방관으로 나가 1907년 태인군수,1909년 금산군수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특히 태인군수 재직시 일제로부터 군민을 보호하는 한편,황무지 개척과 관개 수리사업을 펼쳐 민생을 안정시켰다.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 정미7조약에 이어,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조약이 공포되자 선생은 “사방 백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죽는 것만 못하다”며 목매 자결했다. 선생은 순국전 아들들에게 보낸 유서를 통해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하며,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고 당부했다.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노주석기자 joo@
  • 구국의 뜻 되새기자/ 독립유공 이젠 이념의 굴레 벗어야

    일제하 항일독립운동을 벌인 애국지사 가운데는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못한 경우가 상당수 있다.그 이유는대개 두 가지로 압축된다.첫째,조선공산당 등에 가입해 좌익활동을 했거나또는 해방후 월북한 자 둘째,건국후 간첩죄 등의 죄명으로 실정법상 처벌을받은 자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당국의 미포상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우선 독립유공자 포상은 일제하 독립운동 공적에 대한 포상인만큼 해방 이후의 행적을 이유로 포상에서 배제한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다.또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인 경우 좌익활동이 독립운동의 방편이었을 경우 이를이념에 구애없이 포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최근 남북한 관계개선을 계기로 ‘이념의 굴레’에 묶인 독립유공자에 대해 적극적인 포상정책으로 전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3·1의거 10년 뒤인 1929년 11월 발생한 ‘광주학생의거’의 주역으로 의거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 그로 인해 최종선고에서 징역 4년의 최고형을받은 인물로 장재성(張載性)이란 인물이 있다.4·19후 민주당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건국훈장을 주기로 결정했다.그러나 5·16후인 1962년 3월 1일 당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주무부처였던 내각사무처는 돌연 장씨에 대한 국민장(3등급·현 독립장)서훈를 취소한다고 발표했다.내각사무처는 서훈취소 이유로 신원조회 결과 장씨가 “해방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활약하다가 1948년 2월 월북,공산당 대표자회의에 참석했다가 남파된 후 체포돼 7년형을 받고 복역중 6·25 후퇴시 피살된 사실이 밝혀졌다”고 발표했다.동일한 사안에 대해 정권마다 독립유공자 포상에 대한 잣대가달랐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장재성이 반공이데올로기의 희생자라면 죽산 조봉암(曺奉岩)은 정치적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일제 당시 3·1의거 참가 등으로 3차례에 걸쳐 8년여동안 옥살이를 했고,해방후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 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독립유공 공적은 물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도 공이 적지않은 인물이다.그러나그에 대한 독립유공 포상은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그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유공자가 달고 있는 ‘빨갱이’ 꼬리표와는 또 다르다.죽산에게는‘간첩죄’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고 있다.이승만정권 시절 진보당을 창당,급진적 정치노선을 표방했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이승만을 위협하기도 했던 죽산은 ‘국가변란’을 기도한 간첩혐의로 59년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그러나 그가 이승만의 정적으로 몰려 ‘정치재판’에서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사실은 여러가지 정황·증거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한편 죽산 사후 그의 동지 및 유족들은 그의 명예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왔으나 아직까지 그에 대한 사면·복권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그에 대한독립유공 포상 역시 한 발자국도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보훈당국은 ‘국가안전에 관한 죄를 범한 자로서 형을 받은 자는 그 서훈을 취소한다’는상훈법에 의거,그에 대한 포상을 거부하고 있다. 보훈당국으로선 실정법에 의해 사형집행을 받은 자가 사면·복권이 안된 상태에서 포상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그러나 문제는 독립유공자 포상제도가 공적 자체보다는 이념의 굴레와 정치적 잣대에 휘둘려 왔다는 사실이다.현행 독립유공자 포상제도가 적잖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보훈처 관계자들 역시 일부 수긍하고 있다.통일시대를 맞아 독립유공자포상과 관련,일대 정책전환이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라고 하겠다.지난 95년광복 50주년을 맞아 그동안 이데올로기 문제로 포상에서 제외됐던 이동휘(李東輝)선생 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이 실시된 것이 그 첫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달 분단후 첫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계기로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호전되면서 해방후 월북,북한정권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에 대한 포상문제도 검토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임꺽정’의 저자이자 1927년 결성된 민족 단일조직인 신간회(新幹會) 부회장을 지낸 벽초 홍명희(洪命熹·내각 부수상 역임),국어학자 출신으로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돼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이극로(李克魯·조국전선 의장 역임)선생 등이 대표적 인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정치학자는 “통일시대를 앞두고 민족사 차원에서 이들에 대한 독립유공포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이는 남북간 역사적 동질성을 모색하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 *23년 黃鈺사건 주도 金始顯의사. 생전에 무려 일곱 차례에 걸쳐 24년간 감옥살이를 한 초인적인 애국지사가있다.감옥생활 가운데 16년은 일제하에서 였으니 독립유공 공적이 결코 적지 않다.의열단원 출신으로 1923년 소위 ‘황옥(黃鈺)경부사건’의 주모자로체포된 김시현(金始顯)의사가 그 주인공이다. 김 의사는 거듭된 거사-투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해방을 맞은,몇 안되는 지사형 애국지사다.그러나 김 의사에 대한 독립유공 포상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유족측은 “보훈처가 지나치게 신중을 기한 나머지 서훈이 지연되고 있다”며 보훈당국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김 의사에 대한 포상이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은 김 의사의 공적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해방후 김 의사와 관련된 정치사건의 ‘전과딱지’가 김 의사의 독립유공 포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김 의사는 1954년 1월 이승만 대통령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나중에 무기로 감형됨)를 받고 복역중 4·19혁명으로 풀려났다.평소 의협심이 강했던 김 의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헌정질서를 짓밟고 독재정치를 펴자 동지유시태(柳時泰)와 함께 그를 처단하려다 미수에 그쳤다.이 일로 구속된 김의사는 4·19의거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석방되었으며,특별사면(1960.6.25)까지 받았다. 김 의사의 아들 김봉년(金峯年·78)씨는 “부친이 당국으로부터 특별사면을받은 만큼 그 사건과 관련해서는 원인무효가 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 7월의 독립운동가 김한종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항일의병으로 활약하고 비밀결사조직인 대한광복회에서의열독립투쟁을 전개한 일우(一宇) 김한종(金漢鍾·1883∼1921) 선생을 광복회 등 유관기관과 공동으로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83년 충남예산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충남 홍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의병으로참여했고 경술국치이후 충청지역 동지들을 모아 부여를 방문하는 조선총독암살계획을 모의했다. 선생은 1917년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로 의열투쟁이 여의치 않자 비밀결사체인 대한광복회에 가입,충청도지부장을 맡아 조직 확대,군자금 모금,악덕지주 및 친일부호배 처단 등 ‘독립전쟁 준비전략’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듬해 1월 대한광복회 조직이 적발되면서 충청도지부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돼 1919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1921년 7월28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7월의 호국인물 김홍일장군

    전쟁기념관은 29일 ‘7월의 호국인물’로 6·25 전쟁 때 한강 및 낙동강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김홍일(金弘壹·1898∼1980) 육군 중장을 선정했다. 김 장군은 평북 용천에서 출생,일제 당시 한국의용군사령관,중국군사단장,광복군 참모장 등을 역임했으며,이봉창 의사의 항일투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한국군 육군 준장으로 임관돼 6·25 전쟁에 참여했다. 김 장군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실함(失陷)되자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을 맡아 북한군 1군단을 상대로 6일동안 한강전선을 지켰다.이 전투로 국군이 후퇴하고 미국 지상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김장군은 이후 1군단 창설 군단장으로 진천전투,화령장전투,안동전투에서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했다. 51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 후 중화민국 대사,7대 국회의원,신민당 당수,광복회장 등을 역임했다.건국훈장 독립장과 태극무공·을지무공·청조근정 훈장을 받았다. 노주석기자 joo@
  • 5월의 독립운동가 양진여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구한말 전남 광주,담양,장성 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서암(瑞菴) 양진여(梁振汝·1862∼1910)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전남 광산군 서창면 벽진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7년 일제의 만행과 봉건정부의 부패에 분개해 담양군 대치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선생은 이듬해 10월 광주 송정읍에서 일본군 의병토벌대 수백명을 격퇴했고 11월에는 전해산·강판열 의병부대 등과 연합,일본군 광주수비대를 대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선생은 아들 양상기와 함께 부자 의병장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선생은 1909년 8월 일본 군경에 붙잡혀 이듬해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확정받은 뒤 그해 5월30일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선생은 “이 한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유감”이라는 유언을 남겼다.정부는지난 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애국지사 박영준옹 별세

    애국지사 박영준(朴英俊)옹이 27일 오전 8시10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85세. 고인은 1915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 나 38년 한국광복진선회 청년공작대를조직, 항일독립운동에 나선 이후 40년에는 오광심 김정숙 조순옥씨 등과 독립활동을 했다.광복 후 39사단,9사단장을 거쳐 한국전력 사장,백범기념사업회장,광복회 고문을 역임했다.금성화랑훈장(50년)과 건국훈장 독립장(77년)을 서훈 받았다. 유족으로는 미망인 신순호 여사와 아들 천기씨,딸 천민씨(대원예고 교사)와사위 이홍권씨(인천지법 부천지원장)가 있다.장지는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발인은 29일 오전 11시.빈소는 삼성의료원.(02)3410-3153 *언론인·영화평론가 허창씨언론인이자 영화평론가인 허창(許彰)씨가 27일 0시20분 별세했다.72세. 고인은 지난 56년 부산 국제신보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부산일보문화부장,편집부국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영화평론가로 한국예총 부산지부장과 영화진흥공사 전문위원,공연윤리위원회심의위원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제 8대 회장을 거쳤으며 95년부터는 ‘영화정의 실천을 위한 모임' 발기인 대표를 지내는 등 한국영화 발전에 많은 공을 남겼다. 유족으로는 장남 문성(의료인),차남 문영씨(씨네21 취재1팀장)가 있다.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연세장례식장에 마련됐다.발인 29일 오전 7시. 연락처(02)363-9499.
  • [오늘의 눈] 보훈처 보상확대 앞서 공적재심사를

    12일 국가보훈처가 발표한 ‘보훈정책 중·장기발전계획’은 여러가지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우선 국민의 생활속에서 보훈문화를 확산해 가겠다는 정책의지가 그것이다.그동안 보훈처는 정부부처 가운데 10위권 규모의 예산을 쓰는 부처이면서도 국민들로부터 별 주목을 받아오지 못했다.이는 보훈행정이업무특성상 일반국민보다는 일부 특정집단을 주대상으로 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행사 위주의 행정을 펴온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일반국민들은 보훈처를 3·1절,광복절,현충일,6·25 등 역사적 기념일의 행사를 주관하거나 독립유공자 심사 및 포상을 담당하는 주무부서 정도로 인식해 온 것이 사실이다.물론 보훈처의 업무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위국헌신한 국가유공자들의 공적을 자손만대에 길이 전하고 또 이를 우리사회의 ‘중심가치’가 되는 정의실현을 담당하는 부처라는 점에서 보훈업무의중요성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한편 이번 보훈처의 중·장기 발전계획은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인 요소를담고 있지만 동시에 몇가지 지적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 가운데 하나는 건국포장·대통령표창자에 대한 금전적 보상문제이다.그동안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해당자에게만 연금 등 금전적 예우를 해왔다.이번에 보훈처가 독립유공자들에 대해 금전적 예우 대상자를 확대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문제는 대상자가 과연 적절한가 하는 점이다.왜냐하면 현재 건국포장자347명과 대통령표창자 1,028명 가운데는 공적내용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상당수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90년 이전까지만 해도 건국훈장은 1등급(대한민국장),2등급(대통령장),3등급(국민장,현 독립장) 등 3개 등급뿐이었다.그러던 것이 90년 상훈법 개정으로 4등급(애국장),5등급(애족장)이 추가돼 5등급으로 확대됐다.이때 기존 건국포장자와 대통령표창자들은 공적 재심사를 거쳐 상당수 건국훈장 4등급,5등급으로 상향 조정됐다.당시 건국포장자와 대통령표창자 가운데 건국훈장을받지 못한 사람들은 상당수 공적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이들 가운데는 공적을 인정할 만한 관련서류가 전무한 사람,즉 가짜독립유공자들도 더러 포함돼 있었는데 이는 이미 90년 재심 당시 문제가 됐던 사실이다.그런데 이제와서 이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이들의 공적자료 보완이나 재심사가 선행과제임을 보훈처 당국에 지적해 둔다. 정운현 특집기획팀차장jwh59@
  • [의열 독립투쟁](17)박재혁 의사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민족지도자들은 중국 상해와 남·북만주,노령(露領)의 연해주,미주 등 해외로 이주 혹은 망명하여 조국광복을 위한독립투쟁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이들은 자신들이 근거한 지역의 특성과 평소 신조에 따라 외교·의열투쟁·무장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 방략을모색,전개하였다. 이 가운데 의열투쟁은 일제의 침략기관이나 총독부의 일본인 고관,혹은 친일파에 대해 폭탄·총기 등으로 파괴와 암살을 통해 응징한 것으로 의열투쟁은 그 규모나 성패 여부를 떠나 독립운동 선상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이는 의열투쟁을 통해 잔혹한 일제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전체 한민족의 항일의지의 표출임과 동시에 일제 관리 및 친일 주구배 등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엄청난 효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11월 결성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결성 직후 일제의 침략기관 파괴와 일본인 요인·친일주구배 처단을 위한 거사에 착수하였다.1920년 4월중순부터 진행된 제1차 암살파괴계획이 그것이다.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직전에 일제의 정보망에 노출돼 거사를 며칠 앞둔 6월 하순 관련자 20여명이검거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이로부터 3개월 뒤에 발생한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파의거’는 의열단에서 추진한 거사 가운데 최초로 성공한 거사였다. 박재혁(朴載赫·1895∼1921) 의사는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났다.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부산가스전기회사의 전차 종업원을 거쳐 한때 경상북도 왜관 소재 무역상점에서 직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1917년 6월에는 무역상 주인에게 부탁하여 700여원을 얻어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무역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큰 돈을 벌지 못한 채 1918년 6월 귀국한 박 의사는 3·1의거 직후다시 상해를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박 의사는 남양무역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독립지사들과 교류를 시작하였다.1920년 3월 일시 귀국한 박 의사는 7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았다.그러나 당시 박 의사는 가정형편과 외아들인 자신만을 바라보고 노년을지내고 있던 노모 때문에 고민하다가 끝내 김원봉의 권유를 거절하였다.그러나 8월 김원봉으로부터 재차 입단권유를 받자 박 의사는 결국 입단을 수락하였다. 1920년 8월 상해로 건너간 박 의사는 김원봉으로부터 부산경찰서를 파괴하라는 밀명과 함께 거사자금 300원,폭탄 1개를 전달받았다.박 의사는 폭탄과거사자금을 중국 고서적으로 위장한채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9월 6일 부산으로 밀반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나가사키를 떠나기 직전 박 의사가 상해의 동지들에게 보낸 엽서(1920년 9월 4일자)에는 상황(商況),상로(商路),수익 등의 용어가 보이는데 이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암호였다.그리고 ‘다른 길이 있는데,이익이 전에 비해 좋다’는 글은 나가사키에서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부산으로 가려고 했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나가사키에서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가겠다는 내용을 알린 것이다.그러나 이 엽서에서 ‘많은 이익을 볼 수있으나 다시는 동지들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구절은 박 의사가부산경찰서 폭파의거를결행하면서 이미 죽음을 각오했음을 보여준 대목이라고 하겠다. 한편 부산에 도착한 박 의사는 먼저 부산상업학교 동창인 최천택(崔天澤)과 김영주(金永柱·부산진상업학교,25세),오재영(吳載泳·부산상업학교 중퇴,25세)등을 만나 자신의 임무에 대해 의논을 나누고 이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최천택 등의 도움을 받아 박 의사는 곧 거사를 준비하였다.마침내 9월 14일 오후 2시경 중국인 고서적상인으로 변장한 박 의사는 고서적 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짊어지고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찾아갔다. 서장실에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시모토에게 고서적을 구경시켜 주고 있던 박 의사는 고서적에 정신이 팔려 있던 하시모토에게 의열단의 전단,즉 하시모토를 처단해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적은 전단을 내보임과 동시에고서적 보따리에 감춘 폭탄을 터뜨렸다.순간 굉음과 함께 하시모토와 그의옆에 서있던 일경 두 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 졌다.하시모토는 중상을 입고병원으로 긴급히 호송되었으나 이송중 절명하였다.인명피해는 물론 경찰서건물 역시 대파되었다. 박 의사는 폭탄을 터뜨린 직후 혼란을 틈타 탈출하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부상을 입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박 의사는 응급치료만 받은 채 구금돼 온갖고문과 심문에 시달리며 재판을 받았다.부산지방법원은 폭발물단속벌칙위반및 살인미수 등의 죄목을 들어 박 의사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대구복심법원에서는 1921년 2월 박 의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그러나 경성고등법원에서 최종 사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채 일제의 계속된 잔악한 고문에 시달리던 박 의사는의거 당시의 부상이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폐결핵까지 겹치게 되자,‘왜놈들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수모를 당하며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자’고 결심하고는 단식을 계속하였다.일제의 집요한 회유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단식을 계속하던 박 의사는 결국 1921년 5월 11일옥중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그때 박 의사의 나이 27세였다. 1962년 정부는 박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 [조범래 독립기념관 연구원] ** 박재혁 의사, 유족 근황과 기념사업 27세로 순국한 박재혁 의사는 1남1녀를 두었는데 두 자녀 역시 모두 작고했다.장남 기동(基東·76년 작고)씨는 부산 부평동에서 상업을 하다가 30여년전 상경,말년에는 서울서 거주하였는데 생활은 그리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기동씨의 장남 정평(正平·52)씨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현재 서울 미아3동 소재 신일중학교 경비원으로 21년째 근무하고 있다.정평씨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무석(務石·32)씨는 상업을 하고 있다. 박 의사의 기념사업은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박 의사 장녀의 후손들이 중심이 돼 의거현장인 부산서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박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해 롯데그룹과 3·1운동동지회측의 지원을 받아 부산 연지동 소재 성지곡수원지 내에 동상을 건립한 바 있다.박 의사의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78번)에 있다. 장손 정평씨에 따르면 박 의사의 유품은 별로 전해오는 것은 없고 사진 한두장이 전부라고 한다.이는 박 의사가 독립투쟁에 참여한지 얼마 안돼 일경에 체포돼 감옥살이를 시작했고 또 옥중에서 순국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운현기자 jwh59@
  • [의열 독립투쟁] (9)장진홍 의사

    1927년 10월18일 11시20분경 대구시 중앙통에 위치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허름한 옷차림의 한 청년이 나타났다.청년은 곧바로 창구 앞으로 다가가 들고온 보자기를 풀어 네개의 상자 가운데 한 개를 창구로 내밀면서 창구의 직원에게 “이것은 벌꿀인데 우리 여관에 든 손님이 지점장님께 전해달라고 한선물입니다”고 디밀었다. 군대에서 포병대 근무경력이 있는 창구직원 요시무라(吉村)는 상자에서 화약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고 급히 상자를 열었다.아니나 다를까!상자 안에는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들어있었다.깜짝놀란 요시무라는 도화선을 끊고청년으로부터 보자기를 빼앗아 다급하게 나머지 상자를 열었다. 연락을 받고 황급히 달려온 10여명의 순사들이 도화선을 끊으려고 하였으나이미 때는 늦었다. 곧이어 폭탄 하나가 터짐과 동시에 뒤이어 두개의 폭탄이 연속적으로 굉음을 내면서 폭발하며 천지를 뒤흔들었다.이것이 저 유명한장진홍(張鎭弘)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이다.폭탄을 전한 청년은장의사가 심부름을 보낸 덕흥여관 종업원 박노선(朴魯宣)으로 이 사건과 별다른 관련은 없다. 장의사는 1895년 6월6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문림리에서 아버지 장성욱(張聖旭)과 어머니 순천(順天) 김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본관은인동(仁同),호는 창려(滄旅).장의사는 어려서부터 담력이 크고 의협심이 강했다.칠곡소재 인명학교(仁明學校)를 졸업하고 1914년 조선보병대에 입대해군사지식을 배운 장의사는 1916년 고향에서 대한광복회에 가입했으나 일경의감시가 심해 1918년 만주로 망명했다. 동지인 이국필(李國弼)과 함께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가 조선인 청년 100여명을 규합해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나 1917년 러시아혁명의 여파와 일본군의 시베리아출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귀국하였다.1919년 3·1 의거가 일어나자 장의사는 일제의 만행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위하여 동생 진환(鎭煥)으로부터 600원을 받아 전국 각지를 돌며 일제의 만행사실들을 조사,수집하였다.이 해 7월 미국 군함이 인천항에 입항하자 장의사는 경북출신조선인 하사관 김상철(金相哲)에게 이를 영문으로 번역,세계 각국에 배포해줄 것을 부탁했다. 한편 장의사는 일제 통치기관에 폭탄을 투척,일제의 만행을 응징키로 결심하고 대한광복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 이내성에게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이자 폭탄제조 전문가인 호리키리 시게미쯔로(堀切茂三郞)를 소개받아 폭탄제조법을 배웠다. 1927년 8월에 직접 제조한 폭탄의 성능실험을 마친 장의사는 동지들과 경북도청·경북 경찰부·조선은행 대구지점·식산은행 등에 폭탄을 투척하기로하고 10월16일 폭탄 여섯개를 제조했다.이튿날 6개의 폭탄 가운데 5개를 가지고 대구로 향한 장의사는 조선은행에서 가까운 덕흥여관에 숙소를 정하였다.18일 오전 10시40분 장의사는 여관의 사환을 불러 “이것은 조선꿀인데조선은행·도청·식산은행·경찰부 순서로 배달해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어 11시40분경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져 일본인순사 4명과 은행원 1명,행인 1명 등 모두 6명이 부상을 입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유리창 60여장이 깨졌다.그 순간 두루마기 차림에 파나마모자를쓰고네 대의 금니를 한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던 장의사는 말쑥한 양복 차림에 흰 운동화로 갈아신고 상주에서 안동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는 다부원고개를 넘고 있었다. 사건 직후 일본경찰은 철저한 보도통제 속에 범인색출에 나섰으나 단서조차 잡지 못하였다.일본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장의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막내동생 의환(義煥)에게 몸을 의탁하고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히로시마(廣島)등을 왕래하며 1년반 동안을 지냈다. 한편 이 사건의 수사가 미궁으로 빠져들 무렵 엿장수로 변장,장의사 고향집 부근에서 탐문수사를 벌이던 한 형사가 장의사가 오사카에서 안경공장을 경영하는 동생집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일본경찰은 조선인 여자첩자를 오사카로 파견,장의사 동생부부에게 접근하여 마침내 장의사가 2층에 숨어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929년 2월14일 밤 동생 장의환의 안경공장에서는 술자리가 벌어졌다.일본경찰에 매수된 한 조선인 첩자가 안경 1만5,000개를 산다며 계약금조로 30원을 내놓은 것이었다.오랜만에 목돈이 생긴 장의환이 벌인 술자리에는 조선인첩자를 포함해 김해중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하던 장의사도 참석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돌면서 취기가 무르익자 갑자기 일본경찰이 들이닥쳤다.장의사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면서 전등을 손으로 쳐서 깨뜨리고 창문으로 뛰어내렸으나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현장에서 체포돼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장의사는 단독범행을 주장하며 심문하는 일경에게 “일본이 조선을 해방시켜주지 않으면,너희 일본도 망할 날이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취조하던 조선인경찰에게는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호통을 쳤다. 대구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가 확정된 장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인 1930년 7월31일 옥중에서 자결 순국하였다.장의사의 순국소식이 옥중에 퍼지자재소자들은 ‘조선독립만세’,‘장진홍만세’를 외쳤고 이에 당황한 교도소측은 서둘러 장 의사의 사인이 뇌일혈이라고 발표하였다. [김순석 독립기념관 전시부 연구원] *장진홍 의사 후손들 근황 장진홍 의사는 후손으로아들,딸 각각 3형제를 두었는데 아들은 모두 어려운 형편 속에 살고 있다.세아들 가운데 장남만 보통학교 4년 중퇴를 했을 뿐나머지 두 아들은 모두 무학자이다. 96년 83세로 작고한 장남 형옥(衡玉)씨는 생전에 부친 장의사의 기념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나 경제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별다른 성과는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차남 형술(衡述·81)씨는 구미시 옥계동에 살고 있는데 연로해서 현재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다.또 대구에 살고 있는 3남 형태(衡泰·73)씨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행상 이발소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장남 형옥씨는 7남3녀를 두었는데 현재 8명이 생존해 있다.장손 상규(相圭·63)씨는 칠곡에서 전자제품 하청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IMF 사태 후 모기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연쇄부도를 맞아서 살고 있는 집마저 근저당이 설정된 상태. 장의사의 후손 가운데 그나마 그럭저럭 살고 있는 사람은 세 딸이 고작이다.세 딸 가운데 위로 두 딸은 모두 작고하였고 현재 막내딸 형필(衡必·70)씨만 구미에서 살고 있다. 현재 장의사 추모단체나 기념사업회는 특별히 구성된 것이 없고 낙동강 기슭에 서있는 추모비 하나가 고작이다.장의사는 62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받았으며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128번)에 마련돼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의열 독립투쟁](7) 백정기 의사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은 한민족의 민족해방운동 방법론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는 투쟁방략 중 하나였다.그러나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백정기(白貞基·1896∼1934) 의사는 일찍이 무정부주의사상(아나키즘)을 수용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한 선각자였다. 일제하 한국인 무정부주의자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는 물론,소수의 특권계급(공산당 등)이나 일당독재,약탈적 경제제도,사회적 불평등,노예적 문화·사상 등도 타도 대상으로 규정하였다.따라서 이런 한국인들의 무정부주의운동은 독립운동의 주체가 노동자와 농민 등 민중이라고 설파하고,민중이주체가 된 암살·파괴·폭동 등 폭력혁명론적 투쟁방법론을 제창한 사실은주목된다.일제에 대항할만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조직적 기반 등이 별로 없는 식민지의 민중입장에서 자신의 희생을 무릅쓴 의·열투쟁은 오히려 정당한수단이 되는 것이다.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그러나 같은 곳에서 윤 의사와 거의 동시에일제 침략세력을 응징코자 한 영걸이 있었으니,그가 바로 백정기 의사이다.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백의사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공원 출입증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게도거사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백의사는 1896년 1월(음력)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본관은 수원으로 뒷날 호를 구파(鷗波)라 하여 ‘백구파’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활달하여 14세 전후에는 사서삼경에 통달할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또 신학문도 배워 정치·경제·사상사에 대한 식견을 갖추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서울을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의 진전상황을 목격하고 고향의 3·1운동을 주도하였다.이 해 8월 동지 4명과 함께 상경,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일제기관의 파괴를 꾀했으나,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펑톈(奉天,현 瀋陽)으로 망명했다.이곳에서 후일 ‘육삼정 의거’에 같이 참여하게 되는 동지 이강훈(李康勳·전 광복회장)을 만났다. 1920년 겨울부터 1923년 후반기까지는 군자금 조달과 주요 기관·시설파괴등을 목적으로 국내와 일본 도쿄 등지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1923년 말 우여곡절 끝에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간 백 의사는 그곳에서 신채호(申采浩)·이회영(李會榮)·김창숙(金昌淑)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큰 영향을 받았다.특히 이때 이들과 교유하면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그리하여 1924년 4월 이회영·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정화암(鄭華岩)·유자명(柳子明)등과 함께 재중 한인 최초의 무정부주의 조직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게 된다.이 연맹은 중국·일본·대만·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참여한 조직이었다. 1930년 4월에는 유자명·정화암 등과 함께 역시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했으며 그해 10월말 정화암 등과만주로 건너가 ‘한족총연합회’에 참여하는 등 조직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특히 백 의사는 이곳에서 일부독립운동가들의 민중 억압을 비판하는연극을 공연하여 재만 한인들의 갈채를 받기도 했다.지병이 악화로 1931년 5월경 상하이로 돌아온 의사는 몸을 요양하는 한편,영국인 전차회사의 매표원으로 일하며 일정한 직업이 없이 독립운동에 열중하고 있는 동지들을 부양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평소의 소신을 펼칠 좋은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하고 있던 백 의사는 마침 일본 육군대신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항일투쟁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중국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有吉明)에게 4천만 엔(圓)이란 거액을 지원,중국정부의 고관들을 매수하기 위해 상하이의‘육삼정(六三亭)’이라는 요리집에서 모임을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백 의사를 비롯해 정화암·이강훈·원심창(元心昌)등 10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은 1933년 3월5일 상하이에 있는 백 의사의 아파트에 모여 거사를 논의했다.그런데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의거에 나서겠다고 해 제비뽑기로 주동자를 뽑게 되었다.추첨결과 백정기와 이강훈이 결정되자 일본에서 건너온 무정부주의자 원심창도 동행을 자청,최종 3인이 선정되었다. 마침내 운명의 1933년 3월 17일.중국인 동지 왕야차오(王亞樵)로부터 입수한 권총과 수류탄,고성능 폭탄을 품에 간직한 백정기와 이강훈 등은 밤 8시경 육삼정 건너편 송강춘(松江春)이란 음식점에서 아리요시 등이 회합을 끝내고 나오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의거를 눈앞에 둔 순간 미리 거사정보를 입수하고 대비하고 있던 일본·중국 관헌에게 세 사람 모두 붙잡혀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육삼정 의거’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성과는 적지 않았다.거사 직후 ‘상하이시보(上海時報)’를 비롯해 중국 신문은 물론 국내의 주요신문들도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였다. 현장에서 피체된 백 의사는 일본 나가사키(長崎)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이사하야(諫早)감옥에서 복역중 1934년 6월 5일 영양실조와 병고로향년 39세로 순국하였다.백 의사의 유해는 해방 이듬해 김구 선생의 지시로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돼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됐다.그리고 1963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장세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 운동사硏 연구원‘文博 *‘육삼정 의거' 나머지 2人은 ‘육삼정 의거’의 주역 3인 중 나머지 두 동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우선 두 동지 가운데 청뢰(靑雷) 이강훈(李康勳) 선생은 아직 생존해 있는데 생존 애국지사 가운데 최고령자이다. 이 선생은 올해 96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애국선열 관련 행사에는 빠지지않고 참석하고 있다. 금년 백범 50주기 추도식에서도 자필로 쓴 추도문을 낭독했다.젊어서 백야김좌진(金佐鎭)장군을 곁에서 모셨으며 백 의사와 함께 체포된 후 15년형을선고받고 일본감옥에서 복역중 해방을 맞았다.해방후 일본 현지에서 백의사등 3의사의 유해 봉환에 앞장섰으며 60년까지 재일거류민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4·19혁명후 귀국해서는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60년대말부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 편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자서전 ‘민족해방운동과 나’를 비롯,독립운동 관련 저서도 여러권 남겼다.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과 광복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원심창(元心昌,일명 元勳) 선생 역시 백 의사와 같이 체포되어 무기징역을언도받고 복역중 8·15해방을 맞아 투옥 22년만에 일본 가고시마형무소에서석방됐다. 해방후 민단(民團)창립에 참가,11·12대 중앙단장을 지냈다.71년 7월 4일 일본에서 타계후 ‘의사’로 추존돼 재일한국인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두 사람 모두 7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백정기 의사 유족근황과 추모사업 백정기 의사는 의거 당시 기혼자였으나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순국했다.현재 백 의사의 유족으로 등록된 백계현(白械鉉·65)씨는 백 의사의 동생 백진수(白珍守·46년 작고)씨의 아들로 백 의사에게 양자로 입양된 사람이다.백의사의 동생 진수씨도 국내 항일 공적으로 지난 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백 의사의 양자 계현씨는 한 때 공직생활과 개인사업을 하였으며 광복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백의사 추모사업은 고향인 전북 정읍에서 주로 추진되고 있다.정읍시는 수년전부터 시 예산으로 백 의사의 사당과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왔으나 IMF사태 이후 자금난으로 모두 중단된 실정이다.현재 정읍에는 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회장 朴在福·전 정읍시의회의장)가 구성돼 추모사업을 해오고 있으며매년 4월 13일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서 공동추모제가 열리고 있다.기념물로는 58년 전북도민의 성금으로 정읍에 세워진 ‘순국기념비’와 독립기념관경내의 ‘어록비’ 등이 있다. 정운현기자
  • 연금 못받는 독립유공자 후손 “훈장 집단반납” 파란 일듯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빈말이 아닙니다.우리 회원들은선대(先代)가 독립운동을 한 ‘죄’로 물려받은 것이라곤 무식과 빈곤 뿐입니다.해방된 조국에서 거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선대의 훈장이 무슨소용이 있습니까”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비공식으로 구성한 애국선열유족회(회장 孫守光)는28일 정부의 부당한 처우에 대한 강력한 항의의 표시로 회원 226명 전원이선대의 훈장을 국가보훈처에 반납키로 결의,7명이 먼저 훈장을 유족회에 내놓았다. 이들이 대통령 명의로 수여된 훈장을 집단반납할 경우 큰 파란이 일 전망이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의 후손(손자)들이지만 아무도 정부로부터 연금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지난 73년 비상각의에서 관련법을 개정,8·15 광복 이후에 사망한 애국지사의 경우 유족의 연금수혜 대상자를 손자대(代)에서 자녀대(代)로 1대 축소했기 때문이다. 손 회장은 “후손들의 교육·생활정도는 감안하지 않은채 단지 선대의 사망일자를 기준으로 후손들의 연금수혜 가부를 결정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면서 “생활이 곤란한 후손들을 배려해 연금수혜 대상자를 손자대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곽기수(郭琦洙·서울 대치동 거주)씨의 경우 이른바 ‘밀양폭탄사건’의 주모자로 옥고를 치른 곽재기(郭在驥·63년 독립장)의사의 손자로 현재 장례식장에서 염(殮)을 하며 생활을 꾸려가는 등 회원 대부분이 어렵게 살고 있다. 한 독립운동가는 “보훈처가 예산·관련법규를 들먹이며 독립유공자 예우에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직분을 망각한 처사”라면서 “연금을 받고 있는 생존지사·유족이 점차 감소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연금수혜 대상자를 오히려 증손자대까지로 추가확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운현기자 jw
  • [義烈 독립투쟁](5) 안중근 의사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자 일제는 이를 ‘암살’이라고 주장했다.이에 대해 안 의사는 공판정에서자신은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공격, 처단했다고설명했다. 안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의 향반(鄕班)집안에서 태어났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 안 의사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 있는 가문의 재산을 모두 팔아 진남포로 이사한 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였다.두 학교의 교장이 된 안 의사는 애국교육과 신학문 교육을 통해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안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설치하여 자신이 지부장을 맡고 부인과제수의 패물까지 모두 헌납하는 모범을 보였다. 1907년 7월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폐위되고 한국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안 의사는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의병부대를 조직,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범윤(李範允)·최재형(崔在亨)등 연해주 유력자들의 지원을 받아 300여명의 동포 청년들을 모집하여 연추(煙秋·노보키에프스크)에서 의병부대를편성한 안 의사는 당시 이 부대의 실질적 통솔자였다. 안중근부대는 모두 세차례의 전투를 치렀다.1908년 4월 초순 두만강 최하단인 함경북도 경흥군 일본군 수비대 진지를 공격한 안중근부대는 단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는 귀환하였다.이어 1908년 7월 제2차전투에서는 함경북도 신아산(新阿山) 부근의 일본군 수비대를 수 차례 기습공격,10여 명의 일본군 병사를 생포하였다.청년 휴머니스트였던 안 의사는 일본군 포로들을 ‘국제공법’에 의거,무기만 빼앗고 석방하였는데 이것이화근이 돼 제3차 전투에서는 참패를 하고 말았다.석방된 일본군 포로들이 안중근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기습해온 때문이었다.겨우 목숨을 건진 안의사는 부하·동지 몇 명과 연추로 돌아왔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포신문 ‘대동공보’의 연추지국장으로 일하고있던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분할 협의차 만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거사를 도모하였다.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 사장실에서는 총무 유진율(兪鎭律),주필 정재관(鄭在寬),기자 윤일병(尹日炳)·이강(李剛)·정순만(鄭順萬),연추지국장 안중근,회계원 우덕순(禹德順) 등 7명이 모였다.이자리에서 안 의사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이토를 처단하겠다”고 자원하였고 우덕순도 자원하고 나섰다.특공대는 2개조로 나뉘어 안중근·유동하(劉東夏)조는 하얼빈에서,우덕순·조도선(曺道先)조는 채가구(蔡家溝)에서 거사키로 하였다.그러나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채가구에서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함으로써 결국 거사임무는 안중근조에게 넘어갔다. 거사당일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하얼빈역 주위에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안 의사는 러시아 경비병에게 ‘취재차 나온 신문기자’라고 속이고는일본인 환영객 집단 구역까지 깊숙이 진입하였다.이날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자 안 의사는 여섯발의 총탄을 날렸는데 그 중 세 발이이토에게 적중하였다.거사에 성공한 안 의사는 그 자리에서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창하였다. 안 의사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거사는 ‘암살’이 아니라 한국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특공작전을 전개한 결과라고 누차 밝혔다.안 의사의 의거로 일제의 만주침략은 장기간 지연되었다.중국인들이 만주·중국 관내에서의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방임한 것은 바로 안 의사와 한국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신용하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안중근 의사 직계후손 근황 안중근 의사는 부인 김아려(金亞麗)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장남 분도(芬道)는 6세때 사망해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분도보다 3살 위인 장녀 현생(賢生)씨는 백범 김구 선생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황일청(黃一淸·작고)씨와 결혼,은주(恩珠·71)·은실(恩實·68·미국 텍사스 거주) 자매를 두었다.은주씨는 남편 이용문(李容文·작고)씨와 미국으로 이민갔다가 남편 작고후 귀국,경기도 용인 수지에 살고 있다.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안 의사의 유일한 직계후손이다. 항주(杭州) 호강대학을 졸업한 차남 준생(俊生·1951년 45세로 작고)씨는 부인 정옥녀(鄭玉女·91년 작고)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현재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안 의사의 장손격인 준생씨의 장남 웅호(雄浩·67)씨는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은퇴,새크라멘토에 거주하고 있다. 간호대학 출신인 장녀 선호(善浩·70)씨는 한국인 2세와 결혼,4남매를 두었으며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다.차녀 연호(蓮浩·65)씨는 시애틀에거주하고 있다.정운현기자*白凡과 안중근家의 인연 19세의 청년 김창수(金昌洙·김구의 아명)는 1894년 양반사회를 타도하고자 황해도 동학농민전쟁의 해주성 전투에 선봉장으로 참여한다.그런데 당시 황해도에서는 반농민군 세력으로 의병이 조직되는데,그 대표적 인물이 안중근(安重根)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박영효(朴泳孝)가 모집한 해외파견 유학생 70명에 선발되었다.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출세의 길을 버리고,대가족을 이끌고 신천군 청계동(淸溪洞)으로 들어갔다.1894년 황해도 동학군이 일어나자 이에 맞서 안태훈은 안중근 등 그의 아들과처자들까지 편입시킨 의병을 일으켰다.그 위력과 명성이 자자하여 황해도 동학군은 안태훈 부대를 두려워하였고,김창수 부대 역시 청계동을 특별히 경계하였다. 그런 안태훈이 청년 김창수에게 밀사를 보냈다.그 결과 두 진영 사이에는서로 공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공동원조까지 성립되었다.즉 안태훈은 비록 동학군을 토벌하는 입장이었지만 인재를 아끼고 있었고 개화에 뜻을 두고 있었지만 청일전쟁 전후의민족적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창수 부대는 점차 토호화하고 있던 같은 동학접주 이동엽(李東燁)부대에의해 해체되었다.얼마간의 잠적 이후 이듬해 김창수가 찾아 간 곳은 청계동의 적장 안태훈 집이었다.청계동에서 ‘적장(敵將)과의 동거’는 청년 김창수에게 중요한 인연과 계기들을 마련해 주었다.안태훈의 각별한 후원으로 김창수는 부모님과 더불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안태훈가(家)의 식객인 고능선(高能善)은 동학의 꿈이 깨진 청년 김창수에게 새로운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또다른 식객 김형진(金亨鎭)은 같이 의기투합해 청국원정을 떠나사선을 넘나드는 동지가 되었다. 김창수는 청계동에서 스승과 동지를 얻었을 뿐 아니라,안태훈가와도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안중근의 아우 공근(恭根),조카 우생(偶生)은 임시정부 시절 백범의 측근이 되었으며,질녀 미생(美生)은 백범의 맏며느리가 되었다.또한 안태훈과의 화해,고능선의 교도로 백범은 양반이냐,상놈이냐 하는 계급의식 이상의 차원,즉 조국·민족문제에 눈뜨게 되었다.都珍淳 창원대 사학과 교수*安의사 5촌조카 民生씨 편지 발굴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우리 나라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가문으로 꼽힌다.그러면 안 의사 집안의 후손들은 해방후 어떻게 살았을까.지난 8월말 학술행사 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본사 김삼웅(金三雄)주필이 연변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입수한 두 통의 편지에 따르면,안 의사 집안의 후손들 가운데 더러는 해방된 조국에서 대접은 커녕 분단과 독재권력에 맞서 싸우다 ‘한많은 일생’을 마친 것으로드러났다. 김 주필이 중국서 입수한 편지는 지난 88년 한국에 거주하던 안 의사의 5촌조카인 민생(民生·생사불명)씨가 중국 연길(延吉)에 있던 사촌여동생 경옥(京玉)씨에게 보낸 것으로 당시 경옥씨는 70세였다. 88년 1월 27일자 첫 편지에서 민생씨는 “지난 (87년)11월 15일 독립기념관장 춘생(椿生)형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너의 소식을 들었다”며 연락이 닿은 경위를 밝혔다.두 사람은 안 의사의 삼촌인 태건(泰健)씨의 손자녀들로 46년 7월 민생씨가 귀국하면서 서로 소식이 끊겼었다. 민생씨는 편지 서두에서 “해방후 형제·자매들이 귀국하였으나 모두 전재민(戰災民)의 신세를 면할 길이 없어 더러는 눈물을 흘리며 미국으로 떠나버렸다”며 해방후 집안 인척들의 이산을 안타까워 했다. 특히 민생씨는 “1961년 5월(‘5·16’을 지칭함) 조국의 평화통일 이념을주장했다는 이유로 나는 반국가범죄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경근(敬根) 당숙도 7년형을 선고받아 일제때 명근(明根) 당숙이 옥고를 치르시던 서대문형무소 특감(特監)8사(舍)에서 감옥살이를 했다”며 “해방,독립된 내조국에 돌아와서 또 감옥살이를 치러야 함으로써 우리 안씨 가문은 이역과조국에서 선후대(代)에 걸쳐 50여 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고 통탄해 했다. 안 의사 집안 가운데 안 의사의 사촌동생 경근과 5촌 조카인 민생씨는 해방후 유달리 험난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쳤다.두 사람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민주구국동지회를 결성,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으며,장면(張勉) 정권 하에서는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준비위원회(민자통)에 참여하기도 했었다.5·16후 군사정권의 혁신세력 탄압 때 두 사람은 반국가범죄 혐의로 투옥됐으며 경근은 출옥 직후 작고했다. 민생씨의 경우는 ‘최악’이었다.1933년 만주에서 만주군에 붙잡혀 혹독한고문을 당한 후 도주하다가 다시 붙잡혀 양쪽 발끝을 작두로 절단당한 민생씨는 그 몸으로 감옥살이를 한 데다 68년 가석방으로 풀려났으나,업친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말년에는 지팡이와 의족에 의존해야 했다. 편지를 쓸 때 이미 70고개를 넘긴 민생씨는 “헤어진 동료들과 형제들이 그리울 때면 저 머-ㄴ 북녁(만주땅을 지칭한 듯)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가슴 쥐고 나무밑헤 쓸어진다 혁명군/가슴속에 솟는 피는 푸른 풀에 절벅해’… 이 노래를 부른다”고 적은 뒤 “가마귀도 우름을 멈추고 바람만 스치고지나갈 무덤없는 그들의 핏자죽 위에 한 송이 들꽃이라도 받쳐들고 가서 명복을 빌어드릴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며 눈물지었다.현재 민생씨는 생사가불명이다.광복회·국가보훈처·안중근의사기념관은 물론 사촌형인 안춘생씨마저 민생씨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 5월 28일자 두번째 편지에서 민생씨는 “과거 우리들은 안중근의 집안이라는 이유 때문에 왜놈들에게 죽어야 했고,징역을 살아야 했는데 해방후에는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들의 피해는 여전했다”며 역대 권력자 가운데 친일경력자들의 면면을 거론하였다. 정병학(鄭秉學·79)안중근기념관장은 “안 의사 집안의 인사 가운데 민생씨처럼 해방후 불우한 삶을 보낸 인사가 적지않다”며 “이는 해방후 친일·독재정권이 들어선 것이 주원인”이라고 말했다.정운현기자* 안중근家의 독립운동가들 안중근 의사의 가문은 안 의사를 포함,모두 9명이 독립유공 공적으로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현재도 몇 명이 포상 심사중이다. 1909년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 안 의사는 독립유공훈장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인 대한민국장(1등급)을 받았으며,안 의사의 두 친동생 정근(定根)·공근(恭根)은 각각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또 사촌동생 가운데 명근(明根)은 ‘105인사건’으로,경근(敬根)은 임시정부 활동으로 각각 독립장을 받았다. 안 의사의 조카뻘인 ‘생(生)’자 항렬에서도 여러 명이 훈장을 받았다.대표적으로는 광복군 제2지대 구대장 출신으로 해방후 육사교장·국회의원·독립기념관장 등을 역임한 춘생(椿生·87·독립장)을 비롯해 춘생과 친형제로신민부에서 활동한 봉생(鳳生·애국장),그리고 안 의사의 첫째 동생인 정근의 장남으로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원생(原生·애족장)과 둘째 동생공근의 차남낙생(樂生·애족장) 등이 있다. 이밖에도 납북이나 공적서류 미비 등으로 서훈이 보류된 인사도 여럿 있다. 우선 공근의 장남 우생(偶生)은 중경 임시정부 시절 임정 편집부 과원으로활동했으며 해방후에는 백범의 대외담당비서로 활동했으나 그 후 납북돼 포상이 보류돼있다.또 안 의사의 사촌 봉근(奉根)의 자제인 민생(民生)과 그의형 호생(鎬生) 역시 독립운동을 했으나 해방후 ‘반정부활동’을 했다는 이유나 서류미비 등으로 아직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운현기자
  • [義烈 독립투쟁](4)송학선 의사

    일제에 맞서 국권수호와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의병·독립군·광복군·의사·열사 가운데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분들이 의외로 많다.신돌석(申乭石)의병장을 비롯해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洪範圖)장군,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李奉昌)의사 같은 분이 그런분들이다.1926년 순종(純宗) 승하 직후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송학선(宋學善)의사 또한 그러한 인물 가운데한 분이다. 1893년 서울 천연동에서 출생한 송 의사는 13살 때 보통학교를 1년 다닌 것 외에는 별다른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또 극심한 가난 때문에 어려서는가족이 흩어져 방랑생활을 하였으며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구상점·사진관 등을 전전하며 호구(糊口)를 해결하기도 하였다.말년에는 영양실조로 각기병까지 걸려 고생한 송 의사였지만 조국에 대한 애정은 배운 사람 못지않았다. 1926년 ‘금호문 의거’로 체포된 후 일본인 판사가 “피고는 어떤 주의자(主義者)인가,사상가(思想家)인가?”라고 묻자 송의사는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총독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답변하였다.송 의사는 사상·주의는커녕 배후세력이나 후원자조차 없었다.굳이 송 의사를 평가하자면 순수한 애국심에서비롯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송 의사의 의거는 1926년 4월 26일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승하가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으로 망국의 쓰라림을 경험한순종의 승하 소식은 많은 조선인들에게 망국의 슬픔을 절감하게 했던 것이다.이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전국 곳곳에서 머리를 풀고 엎드려 궁성을 향해망곡(望哭)하였으며 서울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창덕궁으로 몰려들어 통곡하기도 하였다.고종 승하후 3·1의거를 경험한 일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군경(軍警) 총동원 채비를 갖춘 채 창덕궁 일대에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평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안중근(安重根)의사를 흠모해오던송 의사는 사이토 총독을 처단키로 결심하고 의거에 사용할 칼을 구입,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그러던 차에 4월 26일 순종이 승하하자 송 의사는 사이토가 조문차 순종의 빈소가 있는 창덕궁을 찾을 것으로 확신하고창덕궁 입구에서 처단키로 작정하였다.이튿날 송 의사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에서 군중들 틈에 끼여 사이토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사이토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장소를 바꿔 돈화문 서쪽 금호문 앞에서 사이토를 기다리고 있던 송 의사는 오후 1시 10분경 고관 차림의 일본인 3명을 태운 자동차가 창덕궁으로 들어가자 그 중 1명이 사이토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다.얼마후 그들이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오자 송 의사는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 올라 왼쪽에 앉은 자의 오른쪽 가슴과 왼편 허리를 찌른 후 다시 중앙에 앉아 있는자의 가슴과 배를 찔렀다.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 송 의사는 차에서 내려 인근 재동(齋洞) 방면으로 내달렸다.현장을 목격한 일경들이 추격하여 송 의사를 에워쌌으나 이들은 송 의사를붙잡기는커녕 오히려 육탄전에서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송 의사는 결국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일경 5,6명은 칼을 빼들고는 달려들지도 못한 채 한참 서서 송 의사를 바라보다가 돌멩이를 집어던졌다고 한다(‘동아일보’,1926.5.2).송 의사는 일경 수 명과 대치 와중에도 의연한 기개를 잃지 않았다. 한편 송 의사가 처단한 자들 가운데 사이토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그들은경성부 평의원 다카야마 다카유키(高山孝行)·사토 도라지로(佐藤虎次郞)·이케다 조지로(池田長次郞) 등 3인이었다.이들 가운데 칼을 맞은 다카야마는 즉사하고,사토는 중상을 입었다.또 육탄전 와중에 송 의사의 칼을 맞은 조선인 순사 오환필(吳煥弼)과 일본인 기마경찰 1명도 중상을 입었다. 일제에 피체된 송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고 거사 이듬해인 1927년 5월 19일서대문형무소에서 3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송 의사의 의거는 비록 목표로삼았던 사이토를 처단하지는 못했지만 그 반향은 실로 대단했다.3·1의거 이후 급격히 활성화되었던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일시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또 일부 조선인들은 사이토의 교활한 ‘문화정치’ 전략에 일시적으로 말려들어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바로 이러한 때 서울 한복판에서 한 순박한 애국청년의 의거를 계기로 조선민족은 다시 민족의식을 회복하게 되었고 비록 3·1의거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이는 다시 6·10만세 의거로 불타오르게 된 것이다. 1962년 정부는 송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송 의사피체 후 보도된 신문기사에는 가족으로 부모와 동생 2명만 언급돼 있을 뿐처자에 대한 얘기는 없는 것으로 봐 의거 당시 송 의사는 미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현재 송 의사 관련 기념사업회나 추모모임이 없는 것은 물론 보훈처에서 유족의 근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나라를 위해 목숨을바친 순국선열이 가신 지 한 세기도 채 못돼 벌써 잊혀지고 있으니 안타깝고 부끄러운 노릇이다. 채영국 독립기념관 연구원·문학박사*의거 현장 금호문 앞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좌우에는 작은 문 두 개가 있다.오른쪽으로는 단봉문(丹鳳門),현대그룹 사옥쪽인 왼쪽으로는 금호문(金虎門)이 있다. 바로 이 금호문 앞이 송학선 의사가 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현장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왕조 궁궐 가운데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지켜본 궁궐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조선조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망국을 맞았기 때문이다.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순종은 황제 즉위 후 덕수궁에서 이곳 창덕궁으로 옮겨 기거하고 있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으로 나라를 잃게 되자 일제는 순종을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시킨 후 ‘이왕(李王) 전하’ 혹은 창덕궁에 기거한다고 해서 ‘창덕궁 전하’라고 부르곤 했다. 일제는 ‘망국의 임금’인 순종을 위로한다는 미명하에 망국 이듬해인 1911년부터 인근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을 훼손하였다.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격하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송 의사의 의거 현장인 금호문 앞 일대는 창덕궁 관광객들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현재 이곳에는 송 의사의 의거현장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물론안내판 하나도 서 있지 않다.창덕궁 관계자는 “최근 일본인 관광객이 부쩍늘었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jwh59@*사이토총독 어떤 인물인가 일제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처단 대상으로 지목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제3·5대 조선총독을 역임했다.재임기간은 10년 1개월로 역대 조선총독 가운데 중임한 사람은 사이토가 유일하다.1856년 일본 이와테(岩手)현에서 태어난 사이토는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25세인 1882년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이후 해군에서 승승장구,41세인 1898년에는 해군차관,1906년에는 49세의 나이로 해군의 수반인 해상(海相)에 올라 8년여 동안 자리를 지켰다.이어 1919년 8월부터 두 차례나 조선총독을 역임했고,1932년 5월 일본 내각의 수상에 취임하였다. 일본 군국주의 체제하에서 정치엘리트로 내각 수반직에까지 오른 사이토는두 얼굴을 지닌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사이토는 3·1의거 후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이 가장 고조되어 있을 때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총독 취임 후 소위 ‘문화통치’라는 슬로건 아래 문관(文官)총독제허용,헌병경찰제 폐지,지방자치제 실시,산미증산계획 등을 내걸었다.그러나이러한 사탕발림식의 제도는 그의 재임기간 내내 거의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강화된 무단통치로 나타났다.즉 문관출신 총독은 해방이 될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임명된 적이 없고,경찰은 이름만 바뀐 채 이전보다 더 늘었으며 증산된 쌀은 한국인의 입으로 들어가는 대신 모두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한편 사이토는 부임 초부터 한국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처단 대상으로 지목됐었다.경성(현 서울)에 부임하는 날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64세의 노 투사 강우규(姜宇奎)의사로부터 폭탄세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24년 5월에는만주의 독립군단인 참의부(參議部) 대원들이 압록강을 순시하는 그와 그의일행을 공격,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결국 귀임 후 1936년 2월 26일 소위 ‘2·26사건’때 후배 청년장교들에게 암살당했다. 채영국 연구원
  • 어제 경술국치 89주년 되새기는 2제

    지난 29일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로 국권을 침탈당한 ‘경술국치’ 89주년 되는 날이다.‘경술국치’에 항의해 단식,순국한 장태수 지사의 유품공개와 ‘을사오적’ 박제순의 후손 박승유씨가 일제말기 광복군에서 활동한 사실 발굴을 계기로 ‘경술국치’의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 본다. *을사오적 후손의‘속죄 항일운동’ 을사오적의 후손 가운데 선대의 친일행각을 속죄하는 뜻에서 항일운동에 나선 후손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화제의 주인공은 을사오적 가운데 한 사람인 박제순(朴齊純·1858∼1916)의 친손자 박승유(朴勝裕·90년 작고·)씨로 박씨의 부인 김춘선(金春仙·68·강원도 춘천시 퇴계동)씨는 최근 남편 박씨의 항일투쟁기 ‘노래부르며 청산(靑山) 가리’를 출간했다. 1924년생인 박씨는 당시로선 출세가 보장된 경성법전(京城法專)을 우수한성적으로 졸업하고도 고등고시 시험을 거부하였다.1944년 일본군에 입대한박씨는 그 해 10월 중국 절강성(浙江省) 의오현(義烏縣)에 주둔중인 일본군횡정(橫井)부대에 배속되었다가 1개월뒤인 11월 부대를 탈출,광복군 제2지대(지대장 이범석)에 합류하였다.이후 박씨는 무석(無錫)·무호(無湖)·남경(南京)등지에서 초모(招募)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씨는 해방 후 조선오페라협회 간사로 활동하다가 6·25때 자진입대,국방부 정훈국 합창단원으로 야전부대 위문공연도 하였다.휴전후에는 원광대 강사 등을 거쳐 75년부터 강원대 음악교육과 교수로 재직했다. 정운현기자 jwh59@*순국 張泰秀지사 유품 ‘지각 공개' ‘경술국치’에 항의하여 24일간 단식 끝에 순국한 장태수(張泰秀·1841∼1920·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지사의 유품이 후손들에 의해 독립기념관에 전달돼 공개를 앞두고 있다. 장 지사의 4대 손부(孫婦) 조정자(曺貞子·61·서울 거주)씨는 장 지사의유품 가운데 관복·패도 등을 비롯해 장 지사가 받은 교지(敎旨)등 총 60여점을 국치(國恥) 89주년(29일)을 앞둔 지난 24일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것. 장 지사는 1861년 문과에 급제,양산군수·병조참의·동부승지 등을 거쳐 1905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오르면서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에 임명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고 이어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장지사는 단식,순국할 뜻을 굳혔다.일본 헌병이 찾아와 일왕의 ‘합방은사금’을 받으라며 온갖 위협을 가하였으나 끝내 일제의 회유를 물리치다가 그해 11월 3일 단식을 시작,24일만인 27일 순국하였다. 한편 독립기념관측은 장 지사의 유품정리가 끝나는대로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정운현기자
  • [대한광장] 기업가와 독립운동

    ‘손녀에게 대학까지의 학자금 1만달러를 준다.딸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000평을 물려준다.나의 소유 유한양행 주식 14만941주는 한국 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아들에게는 대학까지 교육시켰으니 혼자 살아가라’. 이는 지난 1971년에 77세로 별세한 기업가이자 교육가,의약인인 유일한(1895∼1971)이 남긴 감동적인 유언장의 주요부분이다.그는 80평생을 정직한 기업인으로 살아왔다. 오늘날 기업가를 막론하고 앞다퉈 자손에게 엄청난 부를 물려주기 위해 변칙적으로 상속을 한다. 또 현금이다,주식이다,비밀계좌,차가명예금,해외도피 은닉,세금포탈 등 언론을 떠들썩하게 하는 짜증나는 기사를 접할 때마다 유일한을 생각하게 된다. 9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904년 9살때 박장현을 따라 떠밀리다시피미국으로 가 박용만이 이끄는 네브래스카주 커니 헤스팅스 등지에서 교육을받는 한편 한인소년병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할위기에 놓였었기 때문에 심신을 단련해둔 것이다. 이어 고학으로 미시간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3·1운동때 필라델피아에 가 한인자유대회의 대의원으로 이승만,정한경,임병직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독립이 왜 필요한가를 가두에서 역설하는 등 20대 청년답지 않게 중후한연설로 군중을 압도했다.곧이어 태극기를 들고 번화가를 누비며 소수민족의비애와 고통을 달랬다. 1926년 12월 귀국한 그는 기업경영에 눈을 뜨고 ‘유한양행’을 설립했으며 1920년대 말에는 중국·베트남 등지로 기업을 확장,민족기업의 터전을 닦는 등 종업원들에게 프런티어정신을 심어주었다.좋은 상품의 생산,정직한 납세,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을 강조하면서 유한양행 설립때부터 종업원지주제를 도입하였다. 그것은 곧 ‘이익의 균분’이라는 이상적 배분의 정의를 지킨 기업가 정신이다.그는 기업은 사회와 종업원이 소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았다.오늘날 손꼽히는 대기업체가 문어발식 독존적 경영으로 우리나라 1년 예산에 맞먹는 거액의 빚을 지고 있는 현실에 비춰볼 때 그의 경영은 재벌들에게 무모한 경영을 반성하게 해준다. 그는 1940년대 미국에서 게릴라훈련을 위해 ‘냅코작전’이라는 국내 침투조를 직접 만들고 그 조장이 되었으며 이승만 주미외교위원장에게 무력침투를 역설했고 지원도 받았다.그러나 이승만의 독선적 행동을 지적하다가 미움을 산 일도 있었다.그는 정의롭지 못한 일은 끝까지 시정하려는 결백의 사나이기도 하였다. 유일한이 기업가로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은 그 회사의 주요인사들도 몰랐다고 한다.필자는 4년전 유일한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회사로부터 청탁을 받아 미국 기록보존소에서 독립운동 관련자료를 많이 찾았다.그리고 그를토대로 광복 50주년에 건국공로훈장과 독립장을 받도록 했다.필자는 미국에서 찾아온 ‘유일한 독립운동자료’를 토대로 책을 묶은 바 있다. 그는 주변인사가 독립운동에 관해 증언해달라면 ‘내가 뭐 한 것이 있어야지’ 하면서 겸손해 하였다.조그만 항일사실을 크게 부풀려 애국자인 체하는 부류들이 많은 이 때 독립운동가로서 유일한의 행적은 신선한 충격이 아닐수 없다. 그는 생전에 사원들로부터 큰돈이 되는 상품을 새로 개발,시판하자고 제안받았으나 결연히 물리치기도 했다.사원들은 드링크류 생산을 꺼냈다가 꾸지람을 들었고 자동차 생산을 계획했다가 핀잔을 받았다고 한다.건강을 해치고 기업풍토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결핵·간질환 등으로 목숨을 빼앗기는 국민의 보건에 충실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는 것이다.국민이 건강해야 ‘주권’을 지킬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리라. ‘유한양행’은 지금은 그렇게 손꼽히지 않는 기업이지만 친족이 아닌 ‘타성(他姓)사원’에게 회사를 맡겨 족벌체제의 해독을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건전한 기업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친족에게 기업을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 유일한을 기업인보다도 독립운동가로 더 기억하고 싶다.기업은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존재가치가 없다는 그의 말이 생각난다.
  • 대한매일신보 직원출신 임치정·이교담 선생 사진 첫공개

    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직원출신 임치정(林蚩正)· 이교담(李交담)선생의 활동 당시 사진이 후손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15일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李貞園·50)씨는 본지 창간 95년을 맞아언론학자인 정진석(鄭晋錫·신문방송학)한국외국어대 교수를 통해 이 사진을본지에 공개했다. 사진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임치정 선생으로 임선생은 1904년 미국에 건너가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교포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였으며 1907년 귀국하여 대한매일신보의 부총무 겸 회계사무 책임자를 지냈다.이교담 선생 역시 도산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의 인쇄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귀국해서는 대한매일신보의 업무직 사원으로 근무하였다.정진석 교수는 “흔히 대한매일신보라고 하면 발행인 배설(裵說)과한국인 논객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만 떠올리기 쉬우나 임·이 두 선생은 이 분들을 도와 신보의 운영을 이끌어온 행동파였다”며 “이들은 일찍이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거나 외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지식인이자 애국지사”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두 사람의 복장과 사진 하단에 기록된 내용으로 봐 1907년 8월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사진 하단의 ‘한국경성(京城) 천연당사진사(天然堂寫眞師) 김규진(金圭鎭)’이라는 기록은 천연당 소속사진사 김규진이 촬영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20일자 광고란에는 천연당의 개업광고가 실려있다.또 두 사람의 복장은 1906년에 개정된 대한제국 장교의 정장차림으로 앉은 사람(임치정)의 계급은 정령(正領·현 대령),서있는 사람(이교담)의 계급은 부위(副尉·현 중위).군대경력이 없는 두 사람이 어떤 연유로 장교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었는지는 정확히알 수 없다.그동안 이 사진을 소장해온 이교담 선생의 손자 이정원씨는 “할아버지께서 미국서 찍은 다른 사진과 함께 이 사진을 보관해 왔으나 할아버지의 군대경력에 대해서는 할머니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정진석 교수는 “군대해산(1907.8.1) 직후 구 한국군을 기념해 사진관에서 복장을 빌려 촬영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측했다. 두 사람은 언론활동 이외에 항일투쟁사에서도 이름을 남겼다.임선생은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되자 총감독(당수) 양기탁 선생 밑에서 재정간사를 지냈으며,‘안명근(安明根) 사건’,‘105인 사건’ 등에 연루돼 수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됐다. 또 이선생은 1910년 1월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암살미수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으며 양기탁 선생 등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이선생은 후손이 보훈당국에 서훈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정운현기자 jwh59@
  • 金대통령, 스코필드박사 후손접견 안팎

    [오타와 양승현특파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캐나다 방문 일정 중 특이한 것은 6일 새벽(한국시간) 고(故) 프랜시스 스코필드박사(사진) 후손들의접견이었다.에어캐나다 스튜어디스 및 간호사로 일하다 은퇴한 캐서린 스코필드(60·며느리),스위스항공사에 근무했던 리사 크로포드(39·손녀),조경회사를 운영하는 딘 스코필드(37·손자)씨 등 3명이었다. 캐나다인(1889년 영국 출생)으로 온타리오 수의학대학 박사인 스코필드박사는 한국인이 아니면서 국립묘지에 안장된 최초의 인물이다.1916∼20년 경성제대 교수로 재직하던 때 3·1독립운동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1919년 봄부터1년동안 형을 산 뒤 캐나다로 추방됐다.그러나 그는 6·25전쟁 직후인 55년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70년까지 세브란스 의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아원을설립,우리나라 어린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김대통령은 이들과 만나 과거 스코필드박사와 맺은 각별한 인연을 소개했다.스코필드박사가 서울의 한 초라한 아파트에서 병고의 몸으로 몹시 고생할때 그를 직접 찾아뵌 일이있다고 했다.“아파트로 찾아가,아픈 몸을 이끌고 군사독재를 비판하고 우리의 민주화투쟁을 지원해준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서로 다짐도 했었다”면서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털어놓았다.또 스코필드박사는 금세기초 한국국민에게 민족의 자결과 민주주의를 가르쳐 준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스코필드박사는 70년 4월12일 우리나라에서 별세했다.정부는 그에게 60년과 68년 각각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 백범 金九선생 장남 ‘金仁’ 아십니까

    ‘독립운동계의 거물’인 부친에 가려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인물이 바로 백범의 장남 仁이다.백범은 2남3녀를 두었으나 일찍 위의 세 딸을 잃었다.仁·信 두 아들 가운데 장남 仁은 해방되던 해 충칭(重慶)에서 신병으로 사망했다.29일은 바로 그의 54주기. 1918년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재학중조모 郭樂園여사·동생 信과 함께 난징(南京)으로 탈출,임시정부의 피난행렬에 합류하였다.중국 장제스(蔣介石)정부가 운영하던 낙양(洛陽)군관학교를 1년간 다닌 그는 난징 시절 청년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30년대 후반 일제 점령지인 상하이(上海)에서 일제 주요기관 폭파 및 요인암살계획 등 지하공작활동을 하였다.태평양전쟁 발발후 홍콩을 거쳐 충칭에 도착한 그는 ‘청년호성(靑年呼聲)’을 발행,민족정신 함양을 도모하기도 했었다.그의 동생 金信씨(77·전 교통부장관)는 “형님은 선친을 닮아 체격도 크고 성격도 활달했다”고 기억하고는 “그동안 형님의 업적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이 늘 죄스러웠다”고 털어놨다. 90년 그는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뒤늦게 추서받았다.그의 동료들이 대개 독립장(3등급)을 받은 것에 비해 그가 받은 4등급은 훈격 심사가 제대로안된 탓이라는 지적도 많다. 백범과 安重根의사가 사돈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그 ‘연결고리’가 바로 그다.그는 安의사의 친동생 安定根선생의 둘째딸 安美生씨(83·미국 뉴욕 거주)와 충칭에서 만나 결혼,5년 정도 같이 살았다. 현재 그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 소재 백범 가족묘소 내에 있는데 4월 9일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될 예정이다(본보 99년 3월 5일자 참조). 정운현 기자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27) 친일승려 이종욱

    우리 역사에서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로 자리매김돼 있다.평시에는 속세와 떨어져 구도자로 살다가도 국난을 당하면 의연히 일어나 군대를 조직하거나 민족진영에서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우리 불교계였다.임진왜란 때의 서산대사와 사명당이 그랬고 일제강점기에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이 그랬다. 항일운동을 한 승려 가운데는 이종욱(李鍾郁)이라는 사람이 있다.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그는 지난 77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정부로 부터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받고 현재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돼 있다.그러나 그는 지난 93년 국가보훈처가 재심(再審) 대상자로 발표한 8명 가운데 포함됐었다.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지사인 그는 왜 재심대상에 오른 것일까. 임시정부시절 이후 그의 행적 때문이었다.일제말기 그는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동시에 1급 친일승려로 활동한 인물이었다.종교인 출신이었음에도 그는 해방후 참회나 자숙은 커녕 오히려 정치권을 기웃거리며 불교계의 거물로 행세하였다. 이종욱(1884∼1969,창씨명 廣田鍾郁)은 강원도 평창사람이다.일찌기 출가하여 월정사(月精寺) 승려로 있다가 3·1의거가 일어나자 고을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이틀 뒤인 3월 3일에는 이탁(李鐸·건국훈장 독립장)등 27명으로 구성된 ‘27결사대’ 대원으로 매국 역적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1의거’를 계기로 서울에서 이승만(李承晩)을 집정관으로 한성(漢城)임시정부가 구성되자 그는 강원도 대표로 참가하였다.1919년 4월 13일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하이로 망명,임시정부 내무부 참사로활동하다가 이듬해 3월 임시의정원에서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됐다.임정의 국내 비밀연락조직인 연통제(聯通制)조직을 위해 국내로 파견돼 활동하기도 했다.이 무렵까지 그가 독립진영에서 활동한 사실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없다.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국가보훈처가 간행한 ‘독립유공자공훈록’(5권)에 따르면,이종욱은 1920년 6월29일 청년외교단운동으로 대구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그뒤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돼있다.무슨 사건에 관련돼 체포됐는지가 분명치 않아 현재 이 부분은 일단 미확인 상태로 남아있다. 다시 ‘공훈록’에 따르면 그는 출옥후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면서 송세호(宋世浩·건국훈장 애국장)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지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돼있다.그러나 그가 ‘은거’하면서 지하활동을 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1920년대 중반 이후 그는 불교계에 복귀하여 공공연히 활동을 하였다. 여기서부터 얘기는 역전된다.이무렵부터 그는 친일대열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3년 월정사의 사채 정리위원으로 얼굴을 드러낸 그는 26년 중앙교무원의 사무원을 거쳐 27년부터 월정사 감무(監務)로 취임하였다.29년에는 각황사(覺皇寺)에서 열린 승려대회에서 의안심사위원 7인중 1인으로 선출되었고 대회 부의장에 선출되기도 했다.이듬해 그는 31본사(本寺)의 하나인 오대산 월정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본사 주지는 총독이 임명하는 주요 승직(僧職)중 하나였다.이무렵 그는 총독부측의 회유로 이미 친일로 기운 상태였다. 36년 8월 ‘황민화정책’의 사령탑인 미나미(南次郞)가 7대 조선총독으로부임해오자 그는 마침내 친일의 본색을 드러냈다.그는 종회(宗會) 의장및 월정사 주지 자격으로 불교계 인사들을 대동하고 경성역(서울역)으로 나가 미나미를 환영하였다.이듬해 37년에 그는 31본사주지회의에서 다시 의장으로선출되어 총본산 설립을 의결하고 자신은 총본산건설위원회의 31본사주지대표로 취임하였다.이로써 그는 조선불교의 종권(宗權)을 장악,당대 불교계의최고권력자로 부상했는데 그 뒷배경에는 총독부가 있었다. 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전쟁발발 1주일만인 7월15일 남산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참배하고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에 참석했다.이틀 뒤 그는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김대우(金大羽,일제말기 경북도지사 역임)를 찾아가 조선내 사찰에서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를 지내는 문제를 상의하고 며칠뒤 조선내 각 절에서 기원제를 지내도록 하달하였다. 또 8월5일에는 개운사에서 중앙교무원 주최로 대일본제국 무운장구 기원법회를 열었으며 다음날에는 경성 부민관에서 그의 사회로 친일강연회를 개최했다.이밖에도 그는 자신이 주도하여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나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중국으로 출정하는 일본군 송영(送迎)행사에 조선승려들을 이끌고 참석하기도 했다. 40년 2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일본 고노에(近衛)내각의 외무대신히로다(廣田弘毅)의 성을 따 히로다 쇼우익(廣田鍾郁)으로 창씨했다.같은 창씨라도 그의 창씨는 친일성이 짙게 배어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흔히 대다수의 조선인들이 총독부의 강요로 할 수 없이 창씨는 하였지만 그래도 자신이 원래 김(金)씨였다는 의미에서 ‘김(金)’을 ‘김원(金原)’으로 창씨한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종욱은 당시 승려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불교 총본산건설을 완료하여 총본사의 명칭을 태고사(太古寺,현 曹溪寺)로 고치고 그 자신이 종단의 종무총장(현 총무원장)에 취임(41.8.18)하였다.이로써 그는 조선불교의명실상부한 1인자가 되었다.그는 종무총장 취임사에서 “지난 날 이조(李朝)의 압정하에 근근히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일한병합(日韓倂合)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은(皇恩)에 힘입어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사찰령에 의하여 조선불교가 발전되었다”(‘신불교’ 제31집,1941.12월호)며 총독부의‘황도(皇道)불교’ 건설을 찬양하였다. 이 무렵 그는 전시(戰時) 협력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여하여 길거리에서 전쟁채권을 판매하는 등 일제의 전쟁비 조달에도 앞장섰다.또 조선내 사찰과 승려들을 쥐어짜 5만3,000원을 갹출,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전투기 1대 구입대금으로 헌금하였다.1941년 12월8일 태평양전쟁이 다시 발발하자 조선내 1,500여 사찰에 12월15일부터 일본군의 연전연승을 기원하는 법회를 열라고 전국 사찰에 명하였다. 전쟁이 말기로 치닫자 이종욱은 부족한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임시종회를 소집,국방자재헌납을 결의하고 사찰의 범종과 쇠붙이 불구(佛具)를 거두어 일제당국에 헌납했다.42년 5월에는 일본어 상용(常用)을 종용하는일제의 정책에 호응하여 ‘국어(國語,일본어) 전해(全解)운동’을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전국 본사에 하달하기도 했다. 43년 8월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되자 감사법요식에서 ‘검선일여(劍禪一如)의 신생활’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7,000여 승려와 아울러 반도민중은 검선일여의 정신에 투철하여 용약 군문에 달려가 젊은이의 지성과 충성을다하여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학병권유 대열에도 그는 빠지지 않았다. 이밖에 그는 불교관련 매체에 10여 편의 친일문을 남겼다. 해방이 되자 이종욱은 8월17일 종무원 3부장과 함께 종무총장직에서 사퇴하였고 이어 9월22일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친일승려 제1호’로 지목돼 승권(僧權)정지 3년의 중징계를 받았다.그러나 그는 승권정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47년 1월 강원도 교구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반탁세력과 연계해 자신의친일경력을 위장하였다. 50년 5월 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해 강원도 평창에서 당선됐으며 51년 동국대 재단 이사장,52년 7월에는 제4대 중앙총무원장에 취임했다.해방후7년만에 이종욱은 일제때의 ‘위상’을 완전 회복하였고 사후에는 건국훈장과국립묘지 안장의 예우까지 받았다.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이제는 바로잡아야되지 않을까. 鄭雲鉉 jwh59@
  • [정직한 역사 되찾기] (26) 민족대표 33인중 1인 李甲成

    올해로 ‘3·1 만세의거’ 80주년이다.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전민족 차원의독립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는 ‘3·1의거’는 4월 하순까지 조선 8도에서 모두 1,214건의 시위에 참가자는 110만명에 달했다.또 당시 만세시위에 나섰다가 일경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자가 7,500여명,검거된 자는 4만7,000여명에달했다. 구한말 의병항쟁 이후 일제말기의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항일대열에 참가한애국지사는 수십만을 헤아린다.그러나 이들 가운데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받은 사람은 99년 2월 현재 8,524명이다.아직도 상당수 애국지사들이 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보훈당국이 야박해서만은 아니다.독립운동 공적은 인정되나 훈장급에는 미치지 못하거나 독립운동을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거증자료를 찾지 못한 때문이다.독립진영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한 사람들의 경우 증거자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자료찾기가 어려운 것은 일제의 비밀요원인 ‘밀정’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93년 5월 국가보훈처는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재심사 대상자 8명의명단을 국회 비공개회으에서 공개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3·1의거’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이갑성이 포함돼 있었다.그에게 씌어진 혐의는 ‘밀정’으로 요샛말로 하면 일제의 스파이노릇을 했다는 것이다.광복회장까지 역임하면서 81년 사망 당시 사회장이 치러졌던 그가 ‘변절자’였다는 의혹은 62년 이래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그동안 제기된 의혹과 논란을 통해 그의 친일혐의를 추적해보자. 연당(硏堂) 이갑성(李甲成)은 1889년(명치 2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대구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세브란스의전(醫專) 약학과 3학년 재학중 중퇴하였다.이 해부터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으로 일하던 그는 남강 이승훈(李昇薰)의 권유로 기독교계 대표로 3·1의거에 참여하였다.당시 민족대표중 가장 어린 나이였던 그는 외국인및 학생측과의 연락,독립선언서 배부,해외연락 업무를 맡아 의거를 성공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1의거 당일 태화관에서 일경에 체포된 그는 재판과정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잃지않았다고 한다.또 감옥안에서도 3·1의거 기념 만세를 주동하였다. 이로 인해 다른 민족대표들이 가출옥한 뒤인 22년 5월 뒤늦게 출옥했다.출옥후 이듬해 세브란스 의약회사 지배인으로 재직하던 그는 그 해 11월 ‘민립대학 기성발기총회’에서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전국을 돌며 민립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선전·강연하다가 체포돼 다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24년 11월 이승만이 주도한 ‘동지회’의 서울지부격인 ‘흥업구락부’의간사로 피선된 그는 25년 조선중앙기독청년회(현 YMCA) 이사로 피선돼 활동했다.그는 또 좌우(左右) 민족운동세력의 통합체인 ‘신간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 직후 ‘신간회사건’으로 6개월간 복역하였다.출옥후 30년경 경성공업주식회사 지배인으로 있다가 이듬해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그를 둘러싼 친일의혹은 그가 상해행에 오른 후 37년 일경에 체포돼 본국으로 압송될 때까지 7년간의 행적이다.생전에 그는이 시기의 활동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편 이갑성에 대한‘친일논쟁’은 62년 그가 건국훈장을 수훈할 무렵 불거져 나와 65년 광복회장에 취임한 직후,그리고 81년 그의 사망직후 한 잡지에서 그가 일제때 사용하였던 명함을 공개하면서 다시 논란이 됐었다.그의친일경력을 처음으로 공식 거론한 사람은 임시정부 서무국장 출신의 임의탁(林義鐸·건국훈장 독립장)씨.그는 ‘대한일보’(67.5.11)에 게재한 광복회비상총회 명의의 ‘성명서’에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으로 솔선하여창씨개명을 한 점 ▒상해에서 임정에는 출입을 못하고 상해 조선인거류민회회장이자 유명한 친일파인 이갑녕(李甲寧)만 접촉한 사실 ▒총독부 산업국장의 주선으로 일본 미쯔비시(三菱)회사 신경(新京)출장소장으로 임명된 사실▒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의 촉탁을 지냈다는 주장 등 충격적인 내용을 폭로하였다. 또 유관순(柳寬順)열사의 오빠로 3·1의거에 참여했던 유우석(柳愚錫·건국훈장 애국장)씨는 이갑성이 “일제말기 일본인도 하기 어려운 경성공업사(군사공업)의 중역을 지냈다”고 증언하였다.두 사람 모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애국지사들로 이갑성의 친일문제와 관련,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증언하고 있다.독립유공자 가운데는 같이 활동했던 동지들의 증언만으로도 훈장을 받은 사례도 있다.독립운동가들의 증언은 사료(史料)가치를 인정받고있다. 한편 임·유씨의 증언에 대해 이갑성은 반박성명을 통해 두 사람의 증언내용을 모두 부인하였다.그러나 몇 가지 사항을 검토해보면 이갑성의 반박은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선 창씨문제.이갑성은 자신이 이와모토(岩本正一)로 창씨개명한 사실(호적서류 참조)을 두고 당시 자신은 해외에 있어서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창씨는 호주(戶主)만이 할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호주였던 그가 자신의 창씨 사실을 몰랐다는 얘기는 말이안된다.33인 가운데 그를 포함해 정춘수(鄭春洙,禾谷春洙),최린(崔麟,佳山麟)등 3명이 창씨개명을 했다. 다음으로 이갑성이 미쯔비시회사의 신경출장소장을 지냈다는 주장.현재로서는 확인된 바는 없다.그러나 그가 ‘주식회사 일만산업공사(日滿産業公司)전무취체역’을 지낸 사실은 확인됐다.(명함사진 참조) 또 이갑성이 상해 임정에 출입을 못했다는 주장.이에 대해 임정 총무과장 출신 K씨는 “당시 이갑성은 임정요인과 교류가 없었으며 임정 청사에 출입을 못했다”고 증언한바 있다. 독립운동가 김성수(金聖壽·건국훈장 독립장)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어 이갑성이 상해에서 제중(濟衆)약국을 경영하면서 밀정행위를 했다고 사망직전에증언한 바 있는데 이갑성이 약국을 했을 가능성은 크다.우선 그가 약학을 공부했고,서대문형무소 수감시절 일경이 작성한 자료에 그가 상해로 도피하여약종상(藥種商)을 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그가 경무국장 마루야마의촉탁을 지냈다는 주장도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이밖에도 그가 친일을 했다는 증언은 수없이 많다.독립운동가 사회에서는 그의 ‘친일’이 공공연한 비밀로 돼 있다.다만 그가 생전에 역대 정치권력과 깊은 유대를 가지고 독립운동가 사회의 상징적인 인물로 행세해왔기 때문에 나서서 언급하기를 꺼려왔을 뿐이라는 것.해방 직후부터 정치권에서 활동하면서 한때 이승만을 추종하던 그는 1961년 5·16이 발생하자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크게염려하던 군인들에 의한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은 다행한 일로…군사혁명 정부가 완전히 성공하도록 물심양면으로 깊이 협조해 주기를…’ 호소하였다. 이듬해 62년 그는 해방후 첫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았으며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발기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65년에는 초대 광복회장에 취임하였고 이어 3·1동지회 고문,이준열사기념사업회총재 등 민족단체의 대표적 인물로 활동하였다.또 63년 그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도 참여하였는데 당시 이름만 써내면 훈장을 주었다는,소위 ‘백지사건(白紙事件)’에 그가 깊이 관련돼 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이갑성의 일제하 행적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상당수 있다.33인 출신으로 일제당국에 신분이 노출된 상태에서 어떻게 상해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또 거기서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37년 국내에 압송돼 와서 1년만에 가출옥한 배경이나 이후로도 수 차례 투옥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33인중 최후의 생존자로 매년 3·1절이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이갑성은 81년 3월 타계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그의 공과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진실규명 차원에서도 그의 행적에 관한 자료조사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것이다. 鄭雲鉉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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