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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9)

    ◎길림시절:8/「유길학우회」 인물·사업 조작/일경문서의 「우상화 저촉」부분 삭제/30년도 기록 27년도 사실로 원문 날조/「항일운동」 부분은 연도뺀채 그대로 기록 조선전사는 일본 경찰이 기록한 조선인류길학우회에 관한 문서에서 김일성 우상화에 저촉되는 부분은 모두 삭제하였다.그런데 이 삭제 부분을 빼면 나머지 문서의 의미란 다음과 같이 된다. ○구체적인 날짜 삭제 「유길학우회는 길림에 사는 중등학교 이상의 한인학생이 조직하고 있다.민족의 기념행사들을 거행하고 중국측에 일제 타도를 선전하고 있는 단체이다」 즉 구체적인 인명·단체명·연도·날짜·사업내용 등을 모두 빼고 이 정도로 문장을 애매모호하게 하지 않으면 1930년의 기록을 가지고 「김일성이 1927년에 유길학우회를 조직했다」는 날조는 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일본 경찰기록은 30년 3월에 작성돼 있다.한편 회고록은 김일성이 29년 가을부터 30년 5월까지 길림감옥에 투옥됐다고 주장하고 있다.필자가 후에 밝히겠지만 김일성은 30년 3월에는 감옥에 있지도 않았다.그러나 전기작가들은 이 기록이 그가 수감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는 기간중에 일제가 작성한 것을 뻔히 알면서 이것을 27년에 가져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찬과 왜곡은 기록 원문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진실을 또한번 왜곡하는 엄청난 죄행을 다시 저지르게 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원문에서 「본년 1월중 선내학생소요사건에 대하여…대일반항운동을 유리케 전개」하려고 했다는 일절은 삭제하지 않고 있다. 전기작가들은 이 기록이 1930년에 작성됐다고 알 수 있는 부분을 삭제하였다.이 때문에 독자들은 이 일절이 27년의 이듬해인 28년 1월에 만주에서 일어난 학생소요사건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26년 4월26일에는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순종이 승하하였다.그 국장의 날을 계기로 하여 유명한 6·10만세사건이 일어났으므로 이 개찬문을 보는 북한주민들은 그 1년반 후인 1928년 1월께 이 반일운동이 만주까지 파급되었다고 착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6·10만세사건은 조선공산당이 활약한 사건으로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슬로건으로 하고 있었다.따라서 전기작가들이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둔 「반 일본제국주의 선언」이란 어구를 보는 북한주민들은 이 「선언」을 당시의 조선공산당이 작성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원문 그대로 읽으면 이 소요사건은 26년의 6·10만세운동이 아니라 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의 영향이 길림까지 파급된 결과 일어난 것이다. 광주학생사건은 한반도 전체를 독립운동의 도가니로 만들었다.그리고 이 반일운동을 길림에서 추진한 것이 유길학우회였다.조선공산당 재건파의 하나인 서울상해파에 속하는 학생들이 이를 지도하였다. 또 「반 일본제국주의 선언」이란 30년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선공산당의 작품일 수가 없다.이것은 1928년에 있었던 코민테른 제6차대회의 방침에 따라 30년에 만주에 탄생하는 반제동맹이 작성한 선언인 것이다. 1927년 전반기에 조선인길림소년회와 조선인유길학우회의 최고지도자였다고 하는 김일성의 주장을 사실에 비추어 검토해 보자. 1930년의 일제기록에 의하면 당시 길림성성에 있었던한인 소학생은 일본 남만주철도(만철)가 경영하는 길림심상소학교에 7명,중국측 소학교에 10명 내외있었다.또 5세부터 8세까지 아동이 4월부터 개교한 친일 서당과 그 반대파인 신개문 밖의 예배당 유치원에 각각 11명과 8명 있었다. 이 기록이 말하는 친일적 서당이란 종래의 영신학교가 1929년 여름 경영난으로 폐교된 관계로 30년 4월 길림성성 대마로에 새롭게 생긴 서당이다.5월 말에는 유길학우회 회원들이 그 해산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이 영신학교는 존속기간 중 10명 내외의 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1926년에 길림성성에는 한인 중학생이 22명,법정학교 학생이 1명 있었다.30년의 조사로는 사립 육문중학교와 문광중학교,성립 제오중학교에 20명 내외,그리고 길림대학에 2∼3명의 학생이 있었다. 소년회의 입회자격은 그 후신인 소년탐험대의 규약으로 보아 8세부터 16세까지로 추정된다.따라서 여기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길림심상소학교와 친일파 서당에 다니는 아동들을 빼고 중국소학교 학생과 예배당 유치원생 중 7세이하를빼면 회원자격이 있는 아동수는 수명에 불과하다.소년회원은 여기에 친일파를 뺀 중학생 10몇명을 더한 합계 20명 정도밖에 안되었다. ○소년회원 20명 안팎 게다가 30년 당시는 소년회가 길림소년회와 길성소년회로 갈라져 있었다.29년에도 분열되어 있었더라면 김일성은 고작 10명정도의 성원을 거느리는 소년회 회장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조선인유길학우회는 중학생 이상이 회원이었다.김일성은 29년에 중학교 3학년으로서 이들 20명 정도가 되는 회원의 중견 정도였던 것이다. 물론 그는 29년 전반기에는 길림에서 소년회장이었지만 27년 전반기에는 이러한 조직에 들어 있지도 않았고 길림성성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①평전 110∼1면 ②평전 115면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5)

    ◎광복과 함께 새출발/오욕의 역사 청산… 공공지로 재탄생/「서울신문」으로 제호바꿔 11월22일 창간/지령 13738호… 대한매일신보정통성 계승/사장 오세창·주필 이관영 등 새 진용 포진 군국주의 일제의 패망은 한국언론계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제도적 탄압장치였던 출판법등 언론계 악법이 미군정에 의해 폐기된데 이어 허가제였던 신문 출판물이 등록제로 바뀌어 갖가지 출판물과 신문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간부진 사표 수리 일제치하 36년동안 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하던 매일신보(이하 매신)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오욕으로 얼룩진 지난날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의 「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된 것이다.개편작업은 1945년9월8일 한반도 진주후 이남지역에 대해 군정을 실시하던 미군정청이 해방전 영업국장이던 이상철 임시관리인으로 임명(10월2일),매신의 간부중 일부를 개편토록하는 조치로부터 시작됐다.매신처리 실무를 위임받은 그는 10월9일 매신중역회의를 열었다.이 회의에서 사의를 표명한바 있는 사장 이성근과 상무 정인익의 사표를 정식 수리하는 한편 10월25일 신문사의 명칭변경이며 새중역진 선임문제등 주요사항을 토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매신의 자치위원회는 신문사의 처리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자치위원회란 9월23일부터 경영간부가 없는 상태에서 매신의 운영을 장악,신문을 만들어온 편집국과 공무국등 사원 6백명이 결성한 단체였다.위원장은 문화부기자 윤희순으로 적지않은 발언권을 행사했다.자치위는 10월23일자 지면에 「매신은 어디로」라는 성명을 통해 이 신문은 『특정 정당의 기관지나 개인의 소유가 절대로 될수는 없고 공정한 민중의 기관으로 개편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견해를 피력했다.이는 자치위가 『불편부당 엄정중립의 보도기관으로 새롭게 발족할것』을 앞서 선언했던것과 일관된 논리였다. 자치위의 이러한 반응속에 주총은 예정대로 10월25일 개최됐다.주총에서 사장에 오세창이 추대됐고 부사장은 이상협,전무취체역 김형원,상무 이상철,주필겸 편집국장 이선근등 간부진용이 결정됐다.그러나 자치위의 강력한 반대의사에 부딪혔다. 주총의 결정이 자치위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았다는것이 표면적 주장이었으나 실상은 간부진용에 우익인사들이 너무 많은데 불만을 품은 때문이었다. 양측의 막후교섭이 시도됐으나 타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이에따라 개편실무를 맡았던 이들은 모두 사퇴하게 됐고 매신은 표류할수밖에 없었다. 매신이 자치위와 개편실무자 사이에 이처럼 표류하고 있을 무렵 매신의 처리문제는 국내 각정당과 사회단체는 물론 언론계 전체의 집중적인 이목을 끌기도 했다.단순한 호기심의 시선이 아니라 차제에 완벽한 인쇄시설을 갖춘 이 신문사를 접수하려는 직·간접의 암중모색이 여러차례 시도된것이다.천도교세력을 뒤에 업은 공진항이 10월초 매신접수를 시도한데 이어 동아와 조선 양지가 매신인수를 한차례씩 꾀한바 있다. ○개편안 싸고 대립 이러한 상황속에 놓이게된 매신에 대해 그동안 관망상태에 있던 미군정청은 새로운 갈래의 매신개편작업의 필요성을 느껴 본격적인 중재를 결심하게 된다.11월10일재산조사를 이유로 매신에 대해 정간명령을 내렸다.그리고 이관구에게 「공정한 언론을 펴는 참다운 신문」을 만들도록 부탁하기에 이른다. 매신에 대한 정간명령은 자치위에게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다.그래서 정간되던날 자치위는 「3천만 민중의 정당한 공기로서의 신문이 새롭게 출현해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재확인한채 일단 한발 물러서게 됐다.증폭된 갈등속에 난항을 거듭하던 매신의 개편작업은 이로써 순조롭게 진행하게 됐다. 매신개편의 대권을 위임받은 이관구는 내외에서 모두 수긍할수있는 인사들로 경영 편집진용을 구성하는등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우선 사장에 위창 오세창을 추대했다.근대 신문계의 선구자이자 3·1민족대표 33인중 하나인 지조높은 항일민족주의자로서 그의사회적 덕망과 이미지는 새롭게 선보일 서울신문에 걸맞는 인물이었다. 위창과 함께 역시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인 권동진과 당시 문단의 원로 홍명희를 상징적인 고문의 위치에 영입함으로써 그 진용을 더욱 강화시켰다.이관구와 함께 매신개편작업에 참여한 하경덕이 부사장에 내정됐다.그는 저명한 교육자요 사회학자로서의 깨끗한 이미지와 함께 탄력있는 자유주의 신념의 소유자였다.중후하고 사려깊은 논조를 감당해 나갈 주필에는 이관구가 선임됐다.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귀중하게 평가받고있는 민족주의자와 좌파계열의 연합체인 신간회에 참여한바있어 좌우 어느 편에서도 무난히 받아들여질수 있는 인물이었다.특히 해방전 동아와 조선에서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던 논객으로서의 경력은 금상첨화였다. 당시 최고의 언론인들을 각부 데스크에 앉히고 이를 지휘할 편집국장에는 어문학계의 권위자인 홍기문이 내정됐다. 그리고 신문경영에 오랜 경험을 가진 원로 이원혁과 조중환이 상무에 실업가 김동준이 전무에 내정,안정된 신문운영을 기할수 있는 진용이 구성됐다. 제호는 이관구의 제의를 간부진이 숙의끝에 받아들여 「서울신문」으로 확정했다.제호의 글씨는 서예가이자 취체역인 김무삼이 썼다. 그리고 매신으로부터의 인수재산 확인도 마무리지어졌다. 우선 자치위산하에 있던 사원 6백명의 인원을 고스란히 흡수하기로 했다.인수받은 재산과 시설은 현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연건평 1천8백30여평 규모의 4층 콘크리트 건물인 구사옥과 그 부속건물을 비롯,부산등 지방에 산재해 있던 당시 35만3천원 상당의 부동산과 독일제 알버트윤전기 4대등 최우수 인쇄설비 일체,지사 지국의 배급망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이 규모는 신문사로서 해방전후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개편,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 위한 이 모든 준비작업은 11월21일 하오2시 5층 옥상에서 오세창초대사장의 취임식을 가짐으로써 매듭을 지었다.그리고 이튿날인 22일 독립한 이 민족의 진실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서울신문이 마침내 그 첫지면을 이땅에 드러냈다.발행일자는 1945년11월23일이었다. 당시 사회적 관심의 열도를 반영하듯 미군정장관 아놀드를 비롯,조선인민당위원장 여운형,국민당당수 안재홍,한국민주당수석총무 송진우등의 인사들이 언론정세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경의와 기대를 보내오는 가운데 혁신된 속간호를 내놓게 된것이다. 『「서울신문」으로 「매신」이 경생』이라는 5단 크기의 컷(1면 중앙)과 함께 속간 첫호의 모습을 선뵌 서울신문의 이날짜 지령은 제13738호로 기록돼 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 지령을 그대로 계승한것으로서 서울신문의 계보가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는가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 카슈미르에 시위/회교도 38명 사망

    【스리나가르(인도) UPI AFP 연합】 인도 카슈미르주 스리나가르에서 카슈미르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회교시위대와 보안군이 충돌한데 이어 11일에도 총격전이 계속돼 최소한 38명이 사망하고 3백50여채의 상점·가옥이 불에 탔다고 관리들이 말했다. 관리들은 회교시위대가 스리나가르 중심가에서 보안군이 최근 카슈미르 분리운동 지도자들과 민간인들을 사살한데 대한 항의시위를 벌이고 보안군 건물·민간 가옥·상점들에 방화하자 보안군이 발포했다고 말했다. 카슈미르 주정부 대변인은 『총격전은 끝났다』고 말하고 경찰이 방화사건에 대해 수사중이라고 말했다.지난 한주동안 스리나 가르시에서는 분리독립운동과 관련,70여명이 사망했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노백린선생(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항일구국” 기개 편 한말 마지막 무인/정미년 군대해산뒤 독립운동 투신/미서 비행단 조직 조종사 40명 양성/“말타고 남대문 입성” 한남기고 상해서 숨져 을사오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1905년. 강제로 조약을 체결한 이등박문은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한국측 고관들을 초청,큰 연회를 주최했다. 연회장에는 「을사오적」 이완용 송병준등도 참석해 일제 앞잡이들과 잔을 부딪치며 간신의 비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때 연회장의 잔잔한 연주를 깨뜨리는 커다란 목소리가 참석자들을 긴장시켰다. 『워리! 워리!』 이완용등 역신들 바로 코 앞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들 앞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6척 장신에 기골도 장대한 사나이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을사오적 등 능멸 오적들은 물론 이등박문등도 개 꼬리 감추듯 숨을 죽이고,상황 전개에 눈치를 살폈다. 자신들을 「나라를 빼앗고 팔아먹은 개같은 놈들」로 매도하는데도,안절부절 못하는 형국이었다. 「개들」이 모인 연회장은 「개판」이 된 채 끝나고말았다. 일제와 그 주구들의 모임을 이렇게 휘저은 사나이는 음식상에 침을 탁! 뱉은 뒤 뚜벅뚜벅 연회장을 빠져 나갔다.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4월의 독립운동가­이 당찬 사나이는 누구인가. 노백린선생은 1875년 1월 10일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하리에서 시골선비 노병균의 3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어릴 때부터 남달리 키가 크고 얼굴이 커 성격이 호탕했으나 마음은 침착했다. 부친은 아들 백린이 장차 무인이 될 것으로 예견하며 내심 그럴 바에야 지장이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학문연마에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황해 송화서 출생 웅지를 품고 서울에 온 선생은 당시 내무대신 박영효의 주창에 따라 세워진 대한제국정부 관비생으로 뽑혀 각도 수재 1백20명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 간다. 도쿄 경응의숙­성성학교를 거친뒤 일육사 11기생으로 입학한 것이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마친 선생의 이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25세 열혈청년으로 귀국한 선생은 당시 원솔부 회계국총장인 민영환의 주선으로 육군참위에 임명된 이후 한국무관학교 교관­노일전쟁 참관­육군무관학교장­헌병대장­육군연성학교장등을 거친다. 무인으로서의 기백과 대쪽 같은 성품으로 나라가 쇠퇴하는 과정에서,선생이 앞서 소개한 일화처럼 울분을 터뜨린 것은 이 무렵인 것으로 추정된다.(독립유공자 고 한철수선생 회고담) 을사오조약이 체결된 2년후인 1907년 8월1일 한국군대는 해산이라는 비운을 맞게 된다.최후의 무인 노백린도 군복을 벗었다.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신민회 활동 틈새에 선생은 고향으로 내려가 광무학당을 설립,교사가 되어 후진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08년에는 김구 최명식 김홍량등과 해서교육총회를 만들어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선각자들의 이같은 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목조르기를 시작했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처럼 선생도 변장을 했다.「황금에 미친 놈」처럼 금광사업에 손을 대는 척도 하고,서울에선 피혁상회·양화점등을 경영하며 등신처럼 굴었다. 『내가 진정한 무인이라면 왜놈들과의 일전을 불사해야 하는데…』 선생의 슬픔과 안타까움은차라리 고통이었다.그만은 유독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1915년 선생은 미국 망명길을 택한다.이후 8년여동안 미국에서의 활동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전투조종사 양성과 항일비행전단의 조직에 전념한 것이었다. 당시 해외에서 조종사를 양성한다는 것은 엉뚱하기까지 했으나,평소 『도쿄를 쑥대밭으로 만들자!』고 호언한 선생은 그같은 불가능한 과업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어려운 재정여건 아래서도 5대의 값비싼 연습비행기를 확보하고 40여명의 조종사를 배출시킨 것은,당시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의 군사상 길이 빛날 일이라 하겠다. 노백린의 말년은 그러나 실의와 좌절로 얼룩져 갔다. 그것은 1919년 4월23일 서울에서 치러진 국민대회와,이어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에의 참여에서 비롯됐다. ○동경 공습이 목표 상해임정까지 이어진 한성임정의 법통 속에서 우리는 독립운동사의 부끄러운 단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 장본인은 여러 독립지사들과 갈등을 빚은 이승만의 등장이다. 대통령 이승만 임정하에서 군무부총장이라는 각료직을 맡은노백린은 자주 의견충돌을 했다. 그때마다 노백린은 『나는 이승만의 군무총장이 아니고 한성정부의 군무총장이다』는 강경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정쟁이 계속되자 선생은 말술을 마시며 『육군정복에 말타고 남대문에 입성하면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선생은 상해시내에서 교통사고를 입은뒤 1926년 1월22일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지난 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8)

    ◎길림시절:7/조선인류길학우회사 날조/“27년 「유길학우회」로 개편 명예회장 취임” 주장/중1때 학생청년조직 최고간부부상은 불가능/안병기 등 지도자명단 일경기록서 삭제 김일성은 1927년 4월10일에 조선인 길림소년회를 조직하고,그 다음달인 5월8일 종래부터 있었던 조선인려길학우회를 조선인류길학우회로 개편했다고 주장한다.회고록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29년 유길학우회로 『우리는 조선인여길학우회 속에 들어가 본래의 합법성을 계속 유지하면서 점차 그 조직을 순수한 친목단체로부터 혁명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자고 하였다.공산주의자인 내가 명예회장으로 되었지만 표면상으로는 민족주의자들을 끼고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중국군벌당국의 주의도 덜 끌었다.나는 조선인여길학우회를 지도하면서 그것을 조선인유길학우회로 개편하였다.조선인 유길학우회는 조선인청년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단체라고 표방하였지만 실지로는 ㅌ,ㄷ의 이념을 실현하는 혁명적인 학생청년조직으로 활동하였다』「주①」 여길학우회는 1926년에 실지로 존재하고 있었다.「주②」그러나 이 친목단체가 유길학우회로 개칭된 것은 29년쯤일 것이며 이 조직에서 김일성이 「명예회장」으로 된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이것보다 더한 것은 김일성의 이러한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북한이 일삼는 대대적인 문건 변조작업이다.이 작업은 우상화를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죄행인데 그 실태의 일단은 아래와 같다. 북한이 이용하는 유길학우회 문건은 1930년의 일본 길림총령사관 경찰기록이다.여기서는 이 기록을 편의상 3단락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겠다. 1)「유길학우회.본회는 길림 지나중등학교 이상의 재학선인 등이 조직하고 있으므로,현재 회원수 등은 불명하나(길림대학생 안병기·김인기·박일파 등이 오이를 잡고①)3·1기념일·국치기념일(한국병합)등에는 기념식을 단독 또는 다른 불령단체와 공동 거행하며, 또 기회 있을 때마다 강연회를 개최하며(민족주의의 고취②),배일선전을 하고 있다」「주③」 이 기록에 필자가 고딕으로 쓴 부분은 「조선전사16」에 나오는 같은 경찰기록의 변조판에서삭제되어 있는 부분이다.「주④」 그런데 삭제된 부분 ①에 따르면 30년 당시 유길학우회의 책임자는 안병기·김인기·박일파였다.당시 안병기는 조선공산당 재건파인 서울상해파의 중앙간부였고 김인기·박일파도 같은 서울상해파의 고려공산청년회 중앙간부였다. 또 29년께,이 유길학우회의 임원으로는 김인기·박일파·신영근·이장청·이석옥등 5명이 문헌에 나온다.「주⑤」 이 중 신영근도 30년에 서울상해파에 들어간 전문학교 학생이고 이장청은 한인 여성교육사업에 종사한 정의부계통의 여성활동가였다.이석옥은 알 수 없으나 이 5명이 유길학우회의 최고지도자였다. ○고작 평회원 자격 그런데 조선전사는 대학생이나 전문학교 학생,그렇지 않으면 사회활동가인 이러한 간부들이 있었다는 것을 모두 은폐하였다.이번 회고록에서는 이러한 은폐작업 끝에 초급중학교 학생에 불과한 김일성을 「명예회장」으로 앉히는 것으로 그 변조작업을 마무리짓고 있는 것이다.그는 27년은 커녕 29년이라도 이러한 간부들을 누르고 학우회의 최고간부는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29년이라도 그는 중학 3학년으로 평회원 이상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②는 유길학우회가 조선공산당 재건파에게 휩쓸려 간 30년 현재라도 표면상은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전술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덮은 것이다. 2)『본년(1930년… 인용자)1월중 선내 학생소요사건에 대하여 지나인 일반의 동정을 구하여③ 대일반항운동을 유리케 전개할 「반일본 제국주의 선언」이라 제한 지나문이로서 과대·날조·중상적 문구를 나열하고④ 중한인 공동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할 취지의 불온 인쇄물(길림려길한인학우회 명의)을⑤ 지나측 관공서,학생간에 다수 배포하였다』 조선전사는 유길학우회가 중국에서 중국글로 삐라를 쓴 것을 「주체사상」에 걸리는 행동으로 해석하였는지 ③④를 삭제하고 있다. ⑤는 유길학우회가 30년 당시에도 「여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그런데 이것도 김일성이 27년 5월에 여길을 유길로 변경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삭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여길학우회란 명칭이 30년에도 사용되었다는 경찰문건을 가지고 생각하면 이 조직이 유길학우회로 변경된 것은 아마도 29년쯤일 것이다. ○중문전단 배포 은폐 3)『본년 3·1기념일에는 재만한인 반제국주의동맹이 발기하여 각 단체 합동기념일을 거행하였는데 이에 참가하였다.⑥』 ⑥은 1930년의 3·1절이므로 27년에 「유길학우회 명예회장」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김일성으로서는 삭제하지 않을 수 없는 기록으로 된다. 이상 일본기록 중에서 북한이 삭제한 부분만을 분석해 보았다.이 부분들은 유길학우회의 성격과 임무를 잘 보여주고 있고 아울러 이 조직에 망라되었을 때의 김일성의 보잘 것 없는 지위와 사상상태를 여러모로 암시하고 있다. 「주해」 ①「세기와 더불어 1」240면 ②「한국독립운동사 5」659면 ③같은 책 748면 ④조선전사 16,76면 ⑤「한국독립운동사 5」718면
  • 「사회주의인사」도 독립유공 포상/95년까지 광복공헌 2만명 발굴

    ◎보훈처 업무보고 이병대국가보훈처장은 2일 광복 50주년이 되는 오는 95년 사회주의계열인사를 포함한 2만여명의 국내외 독립유공자를 정부주도로 새로 발굴,포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이보훈처장은 이날 상오 청와대에서 김영삼대통령에게 93년도 국가보훈처주요업무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같이 밝히고 『앞으로 중국,러시아 등지에 있는 독립운동사료를 바탕으로 숨은 독립유공자를 적극 발굴하고 해외순국선열들의 유해봉환작업을 계속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처장은 이어 국가유공자의 긍지를 높여주기 위한 방안으로 대통령 명의의 국가유공자증서를 제작,호국보훈의 달인 오는 6월에 수여하는 한편 국가유공자가운데 보훈기준에 미달돼 있는 건국포장및 대통령표창자를 별도로 예우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보고했다. 이처장은 이와함께 제조업체의 경쟁력제고와 부담경감을 위해 국가유공자에 대한 법정의무 고용기준을 크게 완화, 법정고용 대상업체를 16인이상에서 50인이상업체로 상향 조정하고 의무고용비율도 현재의 5∼9%에서 1%가량 낮추기로 했으며 지난 3월10일 공포된 「고엽제 후유증환자 진료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조속히 마련,늦어도 5월부터는 고엽제피해자들이 보훈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할 방침이라고 보고 했다.
  • 67개 문화유적 정비·부수공사정착 지원

    ◎문체부 주요업무 보고내용/청소년프로그램 1백50종 개발/도덕성회복 범국민적 운동전개 ▷문화예술분야◁ ◇가치관 재정립과 도덕성 회복 ▲인·의·예·지·신 등 선현의 생활체험을 확산시키기 위한 「고전의 세계」등 교재발간과 「이달의 문화인물」사업 활성화 ▲윤리와 도덕성 회복을 위한 범국민적 문화운동 전개 ▲독서 생활화 사업 등 6개 분야 39개 사업을 전개해 전국민이 적극 참여토록 적극 유도. ◇지역문화의 균형 발전 ▲시·도 단위 종합예술제 등 지역 문화예술행사 70개를 중점 지원 ▲국·공립 예술단의 지방 순회공연 확대▲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해 지방문화원진흥법 제정 추진. ◇민족문화 보존 및 전승 ▲경복궁과 창덕궁 등 일제에 의해 훼손된 문화유산 복원 ▲신라·백제·가야·중원·영산강 유역 등 5대 지역 문화권 67개 유적 정비 ▲오는 4월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복원 완료하는 등 항일독립운동 사적지를 순차적 복원 추진 ▲안재호와 오일도의 생가 등 1950년 이전까지의 근세역사 문화인물 유적 40여건 정비. ◇문화 기반시설확충 ▲예술의전당 운영합리화를 위한 특별법 제정 추진 ▲대구·부여·김해·제주 등 국립지방박물관 건립 ▲시·도 단위의 종합문예회관 계속 건립 ▲96년까지 4백30개의 공공도서관을 세워 선진국 수준인 10만명당 1개의 도서관을 확보하고 도서관 전산망을 확충해 정보의 공급기능을 확대. ▷체육청소년분야◁ ◇청소년 수련터전확충 ▲청소년중앙공원(독립기념관 동쪽기슭)과 한국청소년수련마을(강원도 평창군)을 건립 ▲전국 6천5백20여곳의 문화원 체육관 운동장을 여가공간으로 개방 ▲96년까지 5천1백명의 청소년지도자를 양성,관련 단체등에 의무배치 ▲97년까지 1백50종의 수련프로그램개발 보급,자율성과 책임성함양 ▲문화예술시범학교 30개교 지정및 수련활동과 문화현장학습 학습평가 반영추진 ◇불우청소년복지대책 ▲2백곳의 야간공부방을 올해안에 2백67곳으로 확대 ▲지방청소년 상담실 10곳 설치운영 ◇국민생활체육진흥 ▲누구나 참가할수 있는 생활체육프로그램을 개발,주2∼3회 운동하는 인구를 97년까지 50%까지 확대 ▲시군단위 운동장12곳,체육관 5곳,동네체육시설 5백곳,실내빙상장등 사계절체육시설 5곳 조성 ◇우수선수육성 ▲신인선수8종목 3백명 후보 27종목 1천명을 육성해 올림픽등에 대비 ▲태릉선수촌숙소신축 ◇올림픽성과 확산 ▲「올림픽기념관」등 건립및 한민족체전과 서울평화상 재정립 ◇국제대회유치및 청소년국제협력 ▲태권도의 올림픽종목채택추진 ▲96동계아시안게임및 2002년 월드컵 남북공동개최 추진 ▲중국 쿠바와 체육교류협력추진 ◎공보처 퇴폐언론 자율정화활동 등 강화/종합유선방송 95년초 실시 추진 ◇언론의 자유영역 확대와 발전을 위한 지원 ▲구시대의 잔재인 「규제적 발상」을 완전 청산하여 문민시대에 걸맞는 언론자유를 창달할수 있도록 적극 지원한다.▲기자의 전문성 제고를 위한 연수활동도 적극 지원한다. ◇정부시책 정보의 적극적인 공개관행 정착 ▲주요정책의 구상입안,결정집행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언론의 자유로운 취재기회를 확대한다.▲각부처의 정기·부정기 브리핑제도를 정착하고 기자실 개방등 언론의 취재영역을 확대한다.▲부처내 정책결정과정에 공보관 참여를 관행화하는등 각부처 공보관제도를 활성화한다. ◇언론자유에 조화되는 사회적 책임의 제고 ▲언론사별 자발적 내부윤리강령을 제정 시행토록 권고하는 한편 잡지·주간지협회의 퇴폐언론 자율정화활동을 강화하고 광고의 윤리성 제고를 위한 광고자율심의 기구의 설립을 지원한다.▲언론의 인권침해사례를 고발하고 시정 요구할수 있도록 법개정을 추진,언론중재위의 중재기능을 확보토록 한다.▲신문발행부수공사제도(ABC)의 조기정착을 적극 지원한다. ◇국민과 국가에 유익한 방송의 질적도약 추구 ▲KBS로 하여금 국민에 유익한 보도·다큐멘터리·토론·기획특집·건전드라마및 공익광고 확충에 노력토록하는등 공영방송위상을 강화한다.▲종합유선방송은 국민적 합의도출을 위해 전반적 쟁점사항을 종합점검 보완후 시행토록 하되 93년말 이내 종합유선방송사업자를 선정하며 프로그램 공급업자및 종합유선방송국을 단계적으로 허가해 95년초 종합유선방송을 실시한다.▲대도시 중심의 지방민영TV방송 신설을 추진하고 도별라디오방송은 주파수 범위내에서 신설을 검토하는등 방송의 지방화시대 개막에 따른 지방민영방송(TV 라디오)의 신설을 검토한다.▲종교방송 라디오 지방국의 신설을 추진하되 종교간의 형평을 최우선적으로 고려,주파수 범위내에서 지방국 신설을 추진한다.
  • 새정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7)

    ◎길림시절:6/「조선인 길림소년회」 조직설/민족주의자들이 28년경 만든 단체/“27년 결성주도”… 대조직가로 행세 김일성은 좌익문헌을 읽은 것이 자기 「혁명활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봉건군벌 장작상이 지배하는 중국의 오지 길림에서 그것도 1927년에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을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을 김일성은 전기에서 억지로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독서조 지도 억지 그는 한달에 열람료를 10전씩 내어 오마항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갔고 또 육문중학교에서 두번이나 도서주임으로 되었다고 주장한다.나중에는 몸소 비밀독서조를 조직하고 독립운동가가 경영하는 정미소의 방 한칸을 독서실로 만들어 거기서 좌익서적을 탐독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그가 도서주임이 되었다 하더라도 부유층의 자제가 가는 육문중학교가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구입할 리가 없고 봉건군벌이 경영하는 우마항의 도서관도 그런 책이 있을 턱이 없었다.또 비밀독서조란 것도 29년에 상월선생이 한 독서모임을 자기가 조직한 것처럼 하고 있는데 불과하다. 회고록은 이와같이 별로 좌익서적에 접하지도 읽지도 않았던 그를 대독서가로 만들어 놓았다.그 다음에는 그를 대조직가로 변신시키는 차례인데 그 첫번째가 길림소년회 결성이다. 「우리가 길림에서 처음으로 내 온 조직은 조선인길림소년회였다.그 때 길림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소년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름뿐이고 길림시내의 소년들은 그런 조직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우리는 1927년 4월에 손정도네 예배당에서 조선인길림소년회라는 합법적조직을 무었다. 나는 김원우·박일파와 함께 이 모임을 지도하였다.모임에서는 조직부와 선전부·문화체육부와 같은 소년회의 부서들을 내오고 학교와 지역별로 되는 반도 조직하였다」 여기서는 길림소년회의 조직자가 「우리」로 되어 있고 김원우·박일파의 이름도 보이지만 여태까지의 전기들은 한결같이 김일성 혼자가 길림소년회를 결성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시점조작 들통 조선인길림소년회는 여러가지 증거로 보면 27년이 아니라 28∼29년에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최형우는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서 김일성이 길림에서 「소년운동 지도자의 일인으로 일년유여의 시일」심혈을 짜냈다고 쓰고 있다.따라서 김일성은 28년부터 29년 5월에 퇴학할때까지 1년 남짓 소년회에 있었던 것으로 된다.또 이명영교수는 1917년생인 최진무씨가 13세가량이었을 때 길림소년회 회원이었다는 증언을 소개하고 있다.이 증언에 의하면 29년경 김일성은 길림소년회 회장이었다. 그런데 회고록은 이 기림소년회 이외에 길림에는 민족주의자가 만든 이름뿐인 소년회가 따로 있었다고 하고 있다.김일성이 참가한 소년회는 민족주의 조직이 아니라는 주장인데 이것은 사실을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1930년 당시 길림에는 두가지 소년단체가 있었다.그 하나는 길성소년탐험대로서 공산당의 종파인 ML파의 표현단체 주중한인청년동맹 계열이었다.대장은 김일영,제1반장은 허성,제2반장은 진규삼이었으며 정미소 복흥태를 거점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고록의 상기 인용문에 나오는 「독립운동가가 경영하는 정미소」란 김일성이 있었던 길림소년회가 아니라 이 길성소년회가 거점으로 한 복흥태를 말한다.그는 자기와 그 입장이 반대되는 이 공산주의 길성소년회의 거점을 제멋대로 「길림소년회의 독서실」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김일성은 29년 5월에 길림소년회를 떠났는데 이 조직은 29년 11월에 길림소년탐험대라 개칭하였다.30년의 일본기록은 민족주의단체 국민부산하인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의 지휘를 받는 이 소년조직에 대하여 그 본부도 구성원도 적지 않고 있다.그러나 회고록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조직의 본부는 손정도의 예배당이었다. 이 길림소년회에 대한 1930년의 일본기록은 다음과 같다. 「소년회.예년 5월 제1요일을 소년데이로 정하고 운동회 등을 열고 있다.본년(1930년)은 5월4일이 마침 소년데이에 상당하므로 당일 유길학우회원 김인기,박일파의 사회로 신개문 외 야소례배당에 소년 약20명을 모아서 간단한 기념식을 행하였다. ○29년경 “회원” 증언 그후 소년데이라고 쓴 지제의 수기를 하나씩 배급하여 오후1시부터 강남공원으로 가서 과자를 일동에게 분배하여 유희를 하고 동 5시경 무사히 철수,해산하였다.」 요컨대 조선인 길림소년회란 28∼29년은 정의부,29∼30년은 국민부에 속하는 소년단체였다.김일성은 이러한 소년회에 28년 무렵에 들어가 29년경에 회장으로 되었다.그리고 만약 길림소년회가 27년에도 있었다면 그가 이해 8월경에 입회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소년회가 「27년 4월 그가 결성한」조직일 수는 없다. ▷주해◁ ①「세기와 더불어 1」208면 이하 ②같은 책 238∼9면 ③평전 113면 ④평전 112면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6)

    ◎길림시절:5/육문중 입학경위 날조/“27년 2학년 편입… 29년 중퇴” 새 주장/사실이라면 28년 6월 졸업했어야/27년 1월 아닌 8월 오동진집에 이번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이 길림에가서 육문중학교로 들어간 경위를 전에없이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그 내용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김일성은 1927년 정월 중순에 무송을 떠나 길림으로 왔다.그는 먼저 성내 차루가와 상부가 사이에 있는 오동진의 집으로 찾아 갔다.오동진은 길림으로 온 이상은 여기서 너의 우물을 파라고 격려한 후 그에게 기숙사에 들어가지 말고 자기 집에 있으라고 하였다.거기에서 그는 최형우(최일천)와 만나 그와 「동지」가 되었다. ○다른 전기 없는 내용 그날 하오 오동진은 그를 삼풍잔에 데리고 가서 이 여관에 머물고 있었던 독립운동가에게 인사시켰다.거기에는 김시우가 소개신을 써 준 김사헌도,정의부 경호대장인 장철호도 있었다. 김사헌은 소개신을 보고 그를 길림육문중학교의 한인 교사 김강에게 소개하고 김강은 이 학교 교장 이광한에게 그를 만나게 하였다.이광한 교장은 김일성이 나라를 찾는데 한몸 바치겠다고 하자 1학년을 거치지 않고 2학년에서 공부하게 해달라는 그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그는 길림에 가서 처음에는 오동진의 집에서 학교에 다녔고 그가 체포된 다음에는 장철호의 집에 한 1년,현묵관네 집에서 몇달,그리고 오동진의 후임으로 정의부 사령을 하던 이웅의 집에도 얼마간 가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과거의 그 어떠한 전기에서도 전혀 볼 수 없었던 새 이야기들이다.그러면서 이 이야기들은 당돌하게 나온 것 치고는 또 너무 자세하다.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소설이란 것이 금방 탄로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첫째로 김일성은 조선노동당의 전통을 날조하는데 이용한 「해외조선혁명운동사」의 저자 최형우를 27년 1월에 길림에서 만난 것같이 왜곡하였다.그러나 최형우는 30년에 오가자에서 그를 본 기사를 쓰고 있을 뿐이다. 또 김일성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하여금 살해하게 한 최형우를 파렴치하게도 「동지」였다고 주장하고 있다.그가 김일성의 동지였더라면 해방직후 어째서 그는 월북하지않고 한국전쟁 때까지 이남에 남아 있었겠는가. 둘째로 그는 58년에 중국에서 귀국한 김시우를 평북 전천에 귀양보내다시피 쫓아내 평양에 한번도 부르지도 않고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그런데 화성의숙 시대의 자기를 우상화할 필요가 생기게 되자 그는 이 김시우를 전기에 등장시키고 그의 서재에서 자기가 마르크스 문헌을 읽었다는 산화를 만드는데 이용하였다.이번에는 그를 다시 이용하여 중학교에 들어가는데 그가 마치 중간다리를 놓아준 인물인 것처럼 만들어 놓고 있다. ○김시우소개로 꾸며 셋째로 그는 이왕 거짓말을 꾸밀 바에야 「통이 크게」(김일성,김정일의 평소 입버릇)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그는 당시 정의부에서 활약한 인물 중에서도 최고지도자였던 오동진,현정경(현묵관),이웅 등의 집을 전부 자기의 하숙집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대목에서 어느 정도 신빙성을 감촉할 수 있는 것은 68년 전기 이후 자주 그 이름이 나오는 장철호와의 관계 뿐이다.그러나 그 집에 1년이나 있었다는 것은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넷째로 이 인물들중 중국인 이광한은 육문중학교 교장이었던 것이 문헌에 보인다.따라서 어떤 한일의 중개로 이광한이 김일성과 만난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또 그 사람이 김강이란 선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27년 1월17일은 아니다.앞에 인용한 문장에는 이광한이 1학년이 아니라 2학년에 넣어달라는 김일성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서 그를 2학년에 넣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회고록의 다른 부분에서는 「육문중학교는 정의와 법도를 매우 중시하는 학교」라고 하고 있다. 또 육문중학교가 아니라도 1학년에 넣을 학생을 교장이 독단으로 2학년에 집어 넣을 학교는 없을 것이다. 당시의 중학교 학년학기 일정표를 보면 1월에 2학년에 편입되면 28년6월에는 중학교를 졸업해야 한다.29년 5월에 중퇴한 실지 경력보다 김일성은 1년이나 더 빨리 「졸업」해 버리는 것이다.그가 1월에 1학년생이 됐다고 할 수도 없다.그의 현재 주장은 2학년 전학이기 때문이다. 이상을 보면 이번 회고록의 길림 입성 부분은 어느 모로보나 소설가의 창작,그것도 앞뒤가 너무 맞지 않는 졸작 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 ○교장결정 납득안가 김일성은 실지로 길림에 입성한 27년 8월보다 반년 이상 이전인 1월의 길림을 자신의 「활무대」로 삼았다.실지로 자기가 있지도 않았던 이 길림을 무대 삼아 그는 김시우를 자기의 심부름꾼으로 만들고 최형우와 「동지」가 되며 오동진을 하숙집 주인으로 격하시키고 이광한에게 1학년이 아닌 2학년에 전학시키라고 강박하여 「성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없었던 일을 아무리 있었다고 주장해 보더라도 없었던 것은 없을 수 밖에 없다.김일성은 27년 1월에는 길림에는 없었던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Ⅱ」199∼204면 ②같은책 202면
  • 민족분쟁 해결사/코사크족,옐친에 충성맹세

    ◎맹목적 애국심 유명… 독립운동 진압 선봉/영화 「대장 부리바」서 용맹 과시한 유목민 러시안의 코사크족이 보수파의 공격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려있는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나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코사크족은 옐친대통령이 원할때를 대비하여 그를 도울 군대조직을 뒷받침하는 「코사크 임시 행정부」까지 설치했다. 이같은 코사크족의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다짐은 옐친대통령이 최근들어 이들에게 토지소유권을 되돌려주고 자치권 확대를 허용해준 것에 대한 보답인 것으로 보인다. 영화 「대장 부리바」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용맹스런 코사크족은 독립국가연합(CIS)내 각종 민족분규를 진압하는 선봉대로 나서는가 하면 때로는 분쟁의 「해결사」로서 활약하고 있어 다른 종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코사크족은 루마니아와의 합병에 반대하는 몰도바내 소수 러시아민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몰도바에도 파견돼 몰도바의 독립운동을 진압하고 있다.이들은 또 지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러시아­그루지야 전투에도 참여,그루지야 북부를 장악하는등 그루지야내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의 투쟁을 돕고 있다. 최근 사할린정부는 쿠릴열도 반환을 요구하는 일본세력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코사크족을 불러들였다.쿠릴열도를 개발하는데 일본의 자금이 필수적이라고 느끼면서도 그곳의 많은 관리들은 일본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사크가 방랑자·모험자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처럼 유목생활을 했던 이들은 카자흐를 중심으로 구소련령을 통틀어 6백50만명을 헤아린다.이들은 기마술이 뛰어나고 호전적인 전통을 갖고 있어 소수종족집단 뿐아니라 CIS인구의 반이상을 차지하는 러시아인들조차 이들의 부활을 두려워하고 있다. 코사크족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소련초기에 심한 탄압을 받았으나 지난 90년 코사크 민족운동이 다시 일어나 현재 1백만명이 넘는 청년들이 군대에 입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오늘날의 코사크족의 움직임은 많은 CIS국민들로 하여금 60여년에 걸친 치열한 민족분규였던 카프카스 전쟁의 망령을 되살리게 하고 있다.중앙정부에 대한 코사크의 맹목적인 애국심이 과거 그들이 차르왕실에 바쳤던 충성심과 너무도 비슷하기 때문이다.
  • 서예가 김기승씨(이세기의 인물탐구:21)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 원곡체 창안/한자명체 두루 통달… 독창적 변형경지 도달/고 최현배박사도 “한글 본연성품 표출” 칭송/성경구절 작품화 유명… 도산선생 묘비문 등 명필남겨 글씨를 이루기전 작업대앞에 선 원곡 김기승씨의 모습은 신을 향한 기도처럼 절실하고 경건하다. 눈부신 백지위에 붓길이 닿는순간 율동처럼 이어지는 묵향,어느때는 일필휘지,어느 때는 점 하나에도 혼신을 다해 멈출듯 흐느끼는 ▦황은 그 자체가 이미 통신의 경지다.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니라 신에 의해 움직이는것처럼 힘차게 그어내린 획마다에선 맑고도 밝은 상서로운 향기를 뿜어낸다.그리고 그 몇순간의 긴장은 폭풍전야의 정적인듯 은은히 주위를 압도한다. 원곡의 문향실은 그가 38년간 머물렀던 종로구 적선동에서 이곳 워커힐 아파트로 옮긴지 올해로 만 10년이된다. 요즘도 여전히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독교 방송을 들으면서 하루일과를 시작하고 근처 아차산에 올랐다가 내려와서 바로 작업에 임한다. 그리고 하루 2시간에서 3시간,전날 독서로 구상해두었던명언·명구를 마음속에 새겨 우러나오는 진한감동을 작품속에 담아낸다. 그는 글씨를 이루는데 있어 아름다움은 언제나 「선」이어야함을 전제하고 있다.이른바 선하지 않은 것은 미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기술이 피부라면 인격은 근골이다.티없이 청정한 피와 살과 뼈대가 합일될때만 비로소 미의 영혼이 글씨와 글속에 첩식된다는 것이다.순수한 서체에서의 체삽이나 시속기는 천착스러움의 극치다.글이 뜻하는 바를 거르거나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선 심혼의 혈서로 성자에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글씨 내재의미 중시 「초학자시 불가진형세 선상자성의 재필전」­글씨는 처음 대할때 그 형세를 알수없으니 먼저 글씨가 이루어짐을 생각하면 뜻은 쓰기전에 있게 된다,즉 원곡은 서의 진수는 글씨의 모양에 두기보다 그 내부에 내재된 뜻을 소중하게 여기는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해서·행서·초서·전서·예서등 한자체에 두루 통달하여 일가를 이룬동안에도 그는 한때 중국말로 된 성경을 국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다.막상 이를 내놓았으나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때부터 그만의 독특한 원곡체를 창안,한문각체의 독창적 변형을 한글에 적용시킨 이 서체는 한자와의 대련 작품을 쓸때도 조화와 균형을 깨지않는것이 특징이다. 옛날 궁중에서 궁녀들이 소설을 베낄때 사용한 궁체가 부드러운 반흘림의 반행초의 실용글씨라면 원곡체는 한문보다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구슬을 꿴듯한 우아미보다 먹물이 뚝뚝 듣는 힘의 분출이 돋보이는 서체다. 한글학자 고 최현배박사는 원곡의 한글체를 보고 『산같이 망막하고 강같이 줄기차다.우리의 한글이 제본연의 성품으로 온전히 나타났다』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그의 독창성이 지나쳐 그 자신이 스스로 「전위예술」이라 일컬었던 「묵영기법」은 서예계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묵영기법이란 청묵의 번짐을 사용하거나 먹물의 농담으로 거듭써서 시각효과를 앞세운 일종의 회화적 서예 회화인 셈이었다. 서예계는 『전위예술,즉 묵영은 서예에서는 있을수 없다』고 발칵 뒤집혔고 심지어는 『전통을모르고 전통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난 예술』로 혹평되기도 했다. ○「묵영기법」 논쟁불러 이때도 젊은감각과 시대에 부응하는 예술을 지향해온 원곡으로서는 전통예술을 지키기 위해선 고루하게 전통만을 고집하기 보다 오히려 여러각도의 실험과 시도를 언해 새로운 조형언어를 발굴,전통의 소중함은 물론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살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평생동안 그가 써온 작품은 개인전때마다 40점에서 60점씩 32회.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평소에 아끼는 성경구절들은 그때마다 아름다운 작품으로 담아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육당 최남선의 「삼·일독립선언문」을 비롯,제갈량의 「전후출사표」는 3천자이상,아가서8장 4천여자,무위자연의 노자 「도덕경」5천여언,특히 굴원의 「이소경」의 경우는 사적고증,한자구성·암기 등으로 6개월준비,집묵만도 10일이상 걸린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랜 연륜과 우수사려가 없는 마음가짐으로 인해 그의 글씨에는 향기는 물론 불가사의한 힘이 담겨 있다. 올해나이 84세.그러나 그 음성과 행동에서 연노의 기색은 찾아볼수 없다. 또 서예계 최고 원로의 권위의식 같은것도 없다.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격의없이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한다. 1909년 충남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에서 김정현씨와 김취옥여사의 2남중 차남으로 출생.5세때부터 조부인 동효공이 설립한 한문서당 삼언재에서 글씨와 천자문을 배웠고 홍산소년백일장에 나가 한시짓기 장원,11세때 보통학교 2학년에 들어가면서 신교육을 받게됐으나 공주고보 2학년때 일인체조교사를 배척하는 맹휴의 주동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서울 휘문고보로 전학,그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 문회고급중학과 상해중국공학대학 경제과에 다녔다. 상해유학시절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입단하여 도산 안창호선생을 모신 독립운동에 가담,국내신문의 주요기사를 발췌정리하여 국내정세를 보고하거나 흥사단 행사때마다 글씨를 잘 쓴다고 해서 식순을 쓰는 일 등을 맡아보기도 했다. ○흥사단서 독립운동 그때부터 대학에서 공부한 경제학보다 글씨 쓰는 일에 심취하여 졸업후 고향에 돌아오자 고장의 명필인 산정 신익선선생에게 본격적으로 글씨를 배웠다. 하루종일 쓴 글씨가 집안마당에 흰눈처럼 수북히 쌓였던 기억은 지금도 그에게 불길같은 작업의지를 당겨준다고 한다. 그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소전 손재형선생에게 사사.『재주는 있으나 헛 공부했다』는 혹독한 질책을 받으면서 그는 구양순 안진경 왕희지의 법첩으로 겨울밤이 지새도록 수련을 쌓아갔다. 봉천 문회고급중학교때 남경서 신학대학을 나온 백영엽목사의 영향을 받아 크리스천이 된 그는 조국에 돌아가면 목사가 되려했으나 글자 한자한자의 그 묘한 성자에 빠져 글씨쓰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그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글씨로 전한다는 의도에서 성경구절을 작품에 담게 되었고 성경구절을 쓴 작품만도 6백여점에 이른다. 새문안교회에 다닌지 45년,출중한 건강을 타고난 그는 담배나 커피·술은 입게 대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인 부인 차인실씨(82)와는 1939년에 결혼,외아들인 명호씨(53·미앨라배마에서 병원)와 4녀가 있다. 원곡은 주변을 조금씩 정리해 본다는 뜻에서 지난83년 그가 아끼던 자작품 2백87점을 골라 국립현대미술관에 보내던날,아들 딸을 결혼시켜 내보낼때보다 더 가슴저미는 허망함과 섭섭함에 그날밤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한적이 있다. 지난 90년에는 그가 한평생동안 소장해왔던 추사 김정희의 「고시행서」위창 오세창·김구선생의 글씨,청전 이상범과 절친했던 운보 김기창,청계 정종여의 금물로 그린 「독수리」등 30억 상당의 골동서화를 아들의 모교인 연대박물관에 기증. 1958년 제1회 개인전을 필두로 신세계미술관이 주관하는 개인전이 끝나면 부인과 자녀들이 권유하는대로 이대와 고려대 중앙대등 각 대학에 작품을 나누어 보낸다. ○33회째 개인전 준비 그가 제정한 원곡서예상은 올해 16회째,오는 10월25일부터 제33회 원곡서예개인전을 역시 신세계미술관에서 갖게된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묘비문을 비롯,수백여개의 비문과 동상문 현판글씨 시비등 전국 방방곡곡에 그의 글씨가 산재해 있으나 단 한글자도 그는 허트로 내놓는 일은 없다. 그의 마음가짐은 「논어」에 나오는­ 「불지명이면 무이위군자야요 불지례면 무이립야요 불지언이면 무이지인야라(천명을 알지못하면 군자가 될수 없고 예를 모르면 세상에 나서 행세할수 없고 말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한다)」를 실천하며 앞만보고 살아왔다.분한이 있으면 향기로운 글,빛을 발하는 글에 이를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대덕약곡」(큰덕은 골짜기 같아야 한다)」에서 따온 그의 아호인 원곡처럼 그래서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고 마음을 텅비운 맑고 깊은 골짜기,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포용하면서 묵묵하게 자신의 일에 정진하는 예인의 자세를 지킬 뿐이다. □연보 ▲1909년 충남 부여 홍산출생 ▲1927년 만주 봉천 문회고급중학졸업 ▲28년 흥사단 원동위원부입단 안창호 김구 이동령선생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입당 ▲1932년 중국 상해 중국 공학대학부 경제과 졸업 ▲1936년 소전 손재형선생사사 ▲1939년 조선서도 진흥회 주최 전국서도전 입선 ▲1942년 중국 상해서 전중국서화전 입선 ▲1946년 전국 서화전 이등상 ▲1949년 제1회국전 서예부 특선(문교부장관상) ▲53∼55년 국전 제2·3·4회 특선 ▲〃 대성 서예학원 설립 ▲〃 서울대·숙대·상명여대 출강(15년간) ▲56∼58년 국전 제5·6·7회 추천작가(출품) ▲58년 제1회 원곡 서예전 ▲59·60년 〃 제8·9회 초대작가(출품) ▲61∼82년 국전 제10∼30회 국전심사위원·운영위원 ▲59∼89년 원곡서예전 제2회∼29회 개최 ▲1976년 미국·유럽 미술여행 ▲78년 제1회 원곡서예상 제정 ▲79년 동아일보 주최 원곡서예 회고전 ▲79년 북유럽및 캐나다 미술여행 ▲〃 제1회 원곡 미술상 제정 시상 ▲79∼92년 제2∼15회 원곡서예상 시상 ▲83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자작 대표작(2백87점 기증) ▲84년 주일 한국 대사관 한국문화원 초대 서예전 ▲87년 봄베이·카이로등 유럽지역 여행 ▲기독교 미술인 협최 회장역임 고왕경·김강경·경천애인·시편23편·이소경·삼일독립선언문·애경·전후출사표·1오일삼성오신·불원천불우인·묵시록등 1천여점 은관문화훈장 한국서예사 원곡서문집
  • 영서 폭탄테러/20여명 사상

    【런던 로이터 연합】 영국 북서부 워링턴시의 한 쇼핑센터에서 20일 상오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폭발물이 터져 최소한 2명이 숨지고 20여명이 크게 다쳤다고 소식통들이 밝혔다. 현지 긴급구호대측과 미확인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날 폭발은 점심시간쯤 2차례에 걸쳐서 발생,최소한 2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부상했다. BBC방송은 한 목격자의 말을 빌려 쓰레기통에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 생계에서 복지까지/보훈처의 국가유공자 보상정책(국정탐방)

    ◎18만 보훈가구의 실질생활 보장/무주택 4천가구 올 2백억 지원/유공자·유족 1만명에 직장 알선/병원증설·휴양시설건립 등 노후대책도 펴기로 보훈처는 61년 5·16 직후인 8월5일 당시 박정희대통령에 의해 「군사원호청」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됐다. 우리나라의 보훈제도는 국가의 존립과 유지를 위해 공헌하거나 희생한 국가유공자의 △생활안정을 위한 각종 보상지원과 △그들을 위한 예우시책으로 구분된다. 특히 보상지원은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의 영예로운 생활이 유지·보장되도록 지원하는 제도로서 보훈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 처지이지만,창설 당시에는 국가재정이 빈약해 기본연금이 월5백원으로 쌀 한말이 채 되지않았다.그야말로 보훈제는 명목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후 정부는 기본연금 수준향상을 기하기 위해 80년까지는 쌀 반 가마니,85년까지는 한 가마니를 목표로 인상에 노력했다. 쌀을 기준으로 했던 것은,당시까지의 시대상황이 먹고 입는 데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켜 왔기 때문이다. ○「원호청」으로 발족 그러나 85년 「국가유공자 예우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이후에는 보상금을 현실적으로 생계에 도움이 되는 수준으로 인상을 추진,86년부터는 도시근로자 가계비의 40% 수준을 목표로 추진해왔다. 87년 이후 기본연금은 월3만원이었으나,93년 현재는 28만2천원까지 인상되었다.장족의 발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국가에 공헌한 보훈대상자들은 아직 흡족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보훈처의 93년도 세출예산은 6천2백54억원.이중 87%인 5천3백70억원이 보상에 쓰여진다. 국가유공자및 유족은 현재 △애국지사 3천8백53가구 △전몰·전상군경 12만3천2백33가구 △무공·보국수훈자 4만2백48가구 △4·19혁명 희생자 1만2천4백가구등 모두 17만9천7백34가구에 이른다. 이들에 대한 주요 보상내용은 보상금 지급·교육지원·직업보도·의료지원·주택지원·대부지원사업등 크게 여섯가지로 대별된다. 이중 보상금 지급은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에 대해 국가가 지급하는 금전적 보답으로,생활안정과 복지증진을 위한 보훈제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갖고있다. 지급대상 인원은 11만5천여명.1인당 월지급액은 최저 28만여원에서 최고 1백18만여원에 이른다. ○외국보다 나은편 교육지원은 대학까지 각급학교에 재학중인 유공자및 자녀에게 공납금을 면제하고 학자금·장학금을 지급해 건전한 사회인으로 육성하는데 쓰여진다. 현재의 취학인원은 4만2천여명.창설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졸업자는 45만5천여명에 이른다. 직업보도는 근로능력이 있는 유공자와 그 가족에게 직장을 알선해 생활안정을 도모케 하는 것으로 현재까지의 취업인원은 7만7천여명이다.올 직업보도계획인원은 1만명. 의료지원은 상이군경·공상공무원에게 보훈병원을 통해 의료시혜를 해주는 것이다. 보훈병원은 현재 서울 부산 광주 대구등 4개소에 있으며 이들의 병상규모는 총1천6여 베드.올해 대전에도 병원 건립을 할 예정으로 부지를 물색중에 있다.보훈병원이 없는 여타 지역들은 일반병원에 위탁가료를 시키고 있다. ○노령화추세 대비 주택지원은 집없는 보훈대상자에게 아파트 특별공급·주택구입자금및 신축자금 지원으로 주거안정을 도모케 하는 것으로 4만1천여가구가 대상이다.보훈처는 올해 4천2백여가구에 2백억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대부지원은 근로능력은 있으나 취업이 부적당한 대상자에게 장기저리로 생업자금을 대부해 주거나 각종 금융자금 알선을 지원하는 것이다.대부한도는 1백만원∼1천만원에 연리는 3% 또는 6%에 지나지 않는다.올해 7천8백여가구에 3백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같은 우리나라의 보상제도는 예산상 빈약한 형편이긴 하나,다른 나라에 견주면 좀 나은 편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외국에서는 대부분 지원내용이 보상금지급·상이자 진료에 한정되고 있으나,우리나라는 부수적으로 교육·취업·대부지원등을 병행하여 미흡한 보상금 수준을 보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일종의 복합지원체제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앞으로 보상금의 인상은 국가재정이 허락하는 한 수준향상을 기하도록 노력하되,최소한 현수준의 실질가치가 하락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방침이다. 특히 혼자서는 거동이 불편한 중상이자와 무의탁자등에 대한 보상에 역점을 두고,앞으로 점차 「보훈가족」이 노령화되는 추세를 감안해 보훈병원 증설과 휴양시설 건립등 노후복지대책에 보다 중점을 둘 계획이다. 보상금은 국가유공자및 그 유족의 희생에 대한 보은적 성격으로,어느 정도가 적정수준이냐를 객관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도 각각 현재와 비슷한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를 두었지만,그 당시에도 보상금 지급기준은 들쭉날쭉했다는 기록이 있다.그만큼 국가유공자에 대한 보상이 어려웠다는 점이다. ○조직도 활대 전망 또 정부가 지난 30여년동안 보훈대상자의 생활지원과 병행해 공훈선양등 보훈이념을 확산시켜 왔으나,일반인은 아직도 보훈업무를 6·25이후 대량으로 발생한 전사상자에 대한 사후관리 기능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애로사항의 하나이다. 그리고 「원호」라는 이름 아래 생계지원을 위한 수단으로 사회보장적 방법을 사용함에 따라,구휼이 목적인 사회정책의 일환으로 인식되는 것도 장애가 되고 있다. 생활지원 측면에서도 보상모델을 확립치 못하고 임시적 욕구 관리에 급급함으로써,경제발전과 보훈대상자의 여건변화에 적합한 능동적 대응력도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에따라 정부는 보훈대상자에 대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한편,매년 배출되는 직업군인에 대한 사회정착 지원시책도 펴나갈 방침이다. 이같은 정책추진에 따라 행정대상및 업무량이 대폭 증가하면,이에 발맞춰 보훈처 기능과 조직도 확대 개편될 전망이다. ○편견불식 따라야 또 독립운동사등을 통한 민족정기 선양시책에 있어서는 독립운동과 6·25 관련 유공자의 감소에 대비해 예우의 당위성을 계속 부각시킬 계획이다. 한편 일반국민들의 국가유공자에 대한 인식은 「국가유공자 예우등에 관한 법률」제정과 예우시책 개선으로 많이 개선되었으나,일부에서는 존경보다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야 할 계층으로 인식하는 과거 편견이 남아있어 이를 불식시키는 노력도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미국·캐나다등은 보훈업무를 독자적 영역으로 발전시키고 있으며,영국·독일등 유럽국가들은 일반사회보장 부문에 포함시켜 관리하고 있다는 점도 우리의 보상제도 발전에 참고가 될 수 있다. 우리의 보훈정책은 국가안보와 사회보장의 한가운데 놓여진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상금인상기준 제도화에 최선”/재정난으로 충분히 지원못해 아쉬워/장귀호 보상지원국장(인터뷰) 보훈처 보상지원국장은 4계절중 봄에만 마음이 가장 넉넉하다. 예산안 편성에서 확정단계에 이르기까지 보훈대상자들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이다. 『저희들로선 18만여 가구에 이르는 국가유공자및 그 유족분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드리는게 소망입니다.그러나 국가재정이 어려워 수준향상이 생각처럼 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울산생인 장귀호국장은 투박한 사투리를 쓰며 연신 줄담배를 피워댄다. 보훈처 올 세출예산중 87%나 되는 5천3백여억원을 집행하는 주무국장으로서,그의 고민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지난달 직제개편에 따라 보상지원국에 온 이래 일찍 귀가해본 적이 드물다.업무파악을 못해서가 아니다. 경제기획원에 「구걸」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보상예산을 많이따내는 궁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매년말 예산국회 때도 마찬가지다. 정부내 다른 부처도 마찬가지이겠으나 예산확보 때문에 공무원들은 1차로 기획원이 무섭고,2차론 국회가 두려운 것이다. 더욱이 광복회관에 세들어 있는 보훈처는 코앞에 국회의사당이 있어 직원들은 항상 오금이 저린다. 『보훈처가 창설된 이후 30여년동안 보상지원 수준이 많이 향상된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지원을 받는 입장에선 아무래도 미흡하게 느껴지기 마련이죠.그점이 저희 보훈처 직원들의 고민이랄 수 있습니다』 기획원이나 국회가 무섭긴 하지만,보상지원국장이 그보다 더 무서워 하는 사람은 보훈대상자들이다. 어떤 형태로든 국가에 공을 남긴 「그 분들」이,보훈처를 향해 『실질적으로 공무원 봉급인상 수준에도 못미치는 지원액을 따내면서 매번 국가재정만 들먹인다』고 힐책하기 때문이다. 지난 75년 제16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후 줄곧 보훈처에서만 근무해온 장국장은,「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은 순국선열을 비롯한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므로 이런 희생이 우리들과 우리의 자손들에게 숭고한 애국정신의 귀감으로 항구적으로 존중되고,그에 대응하여 유공자와 유족의 영예로운 생활이 유지·보장되도록 실질적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된다」는 보훈이념을 길게 설명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보상금의 획기적 수준개선은 어렵다고 보여집니다.그래서 저희는 매년 보상금 인상과 관련해 대상자와 예산당국간의 불필요한 행정력과 시간소모등 문제점을 개선키 위해 보상금 인상기준에 관한 사항을 제도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계획입니다』 장국장은 그같은 기준설정은 당연히 물가등 사회지표와 연동시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라가 발전할수록 보훈업무 영역도 넓어질 것』이라고 내다본 그는,또다시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 황병길선생(이달의 독립운동가/다시 새기는 그 충절)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혼춘서 항일투쟁·독립시위 주도/20세때 노령으로 망명… 일 수비대 습격·폭파/대한국민회의 설립 등 일제에 조직적 항거/“수배인물 제1호” 35세 짧은 생애 중국 혼춘지역의 3·1운동지도자 황병길선생은 국민 일반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선생은 1885년4월15일 함북 경원군 양하면에서 출생,20세까지 고향에서 생활했다.1904년 노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가 급격하게 그 세력을 팽창시켜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자행,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노영 연추지역으로 망명했다. ○함북 경원서 출생 1905년 을사5조약이 맺어지기 전후해 많은 애국청년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해외로 망명해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선생은 혼춘지역 일대에서 1908년 노일전쟁전의 우리나라 간도관이사인 이범윤의 사포대에 참가했으며 안중근·최재형이 지휘하는 의병대에 속해 두만강을 건너 회령·온성·경원지방을 여러차례 공략했다. 특히 경원군 신하산 주둔 일군 수비대를 습격했을 때는 혼자서 14명을 사살하는등 큰 전과를 거두어 「혼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노종환·양재구와 함께 거사계획을 수립,혼춘의 전시민이 자진철시하는 가운데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위군중 5천여명으로 3·1독립선언 축하민중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5천여명이나 되는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가행진을 했는데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질서정연하고 평화적인 시위가 이루어졌다. 이어 3월30일에는 혼춘현 한덕자에서,4월1일엔 탑도구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는등 독립운동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과시했다. 1919년3월말에는 대한국민회의를 설립했고 그해 9월엔 혼춘거주 여성들로 하여금 혼춘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단지동맹」을 맺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밖에도 조직들을 활용,군자금 모금과 전상병자의 치료,구제사업등을 전개하는등 총체적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혼춘호랑이” 별명 또한 「급진단」을 영도하면서 노영역에서 무기를 확보하는데 힘써 소총 1백3자루 ,탄환 5천발,군자금 85만6천여루블을 조달하기도 했다. 그뿐아니라 군정사후원회 숭례향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20년에는 군무부장이 되어 국내로 진격,고건원 용당 경흥 일대에서 왜정기관을 폭파하고 왜적을 주살하는등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같이 선생의 독립운동이 치열해지자 일제 영사관측은 『모든 반일투쟁이 황병길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며 『그는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니 체포에 총력을 집중하라』고 전일경에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일제에 있어 「목의 가시」같은 존재가 되었다. 일제는 그들의 앞잡이를 총동원,선생의 은신처를 찾아 헤매다가 토문사 북쪽 숲속에 있는 초막을 발견하고 포위망을 압축시켰다. 이날은 억수같은 폭우가 내렸는데 선생은 칠흑같은 어둠을 이용,포위망을 뚫고 어느 농가에 피신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몸은 이미 쇠약해져 급성폐렴까지 얻게 되었다.병세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이같은 급보를 비밀리에 전해 들은 부인 김숙경씨는 70리 길을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러나 깊은 산속에서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죽음을 감지한 선생은 유언을 남겼다. ○지난해 유해 봉환 『우리나라가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굳세게 싸우시오』 1920년6월1일.선생의 나이 고작 35세였다.너무나 짧은 일생이었다. 선생이 가신지 어언 72년.지금도 혼춘지방에서는 선생이 영웅으로 추앙되고 있으나 국내에는 아는이 드문게 현실이다. 중국과의 수교에 따라 유가족의 희망으로 혼춘 연통립자에 안장되었던 선생의 유해는 모국으로 봉환되었고 지난해 12월10일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선생에게는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 21세기로 가는 길(정근모/과학평론)

    ◎도산선생과 과학기술입국 오늘 3월10일은 민족의 스승이신 도산 안창호선생께서 순국하신지 55주년이 되는 날이다.평생을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신 선생님께서는 흥사단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중 극도로 악화된 간경화증으로 병보석되어 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치료중 돌아가신 것이다.민족의 지도자이신 선생의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모셨다가 1973년 11월10일 선생의 생신 95주년 되는 날에 강남에 마련된 도산공원에 이장되었다.오늘 선생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후예들은 그분의 유훈을 되새김과 동시에 도산공원에 깃드는 첫 봄의 햇살속에서 독립 한국의 도덕적인 거듭남을 다짐하는 것이다. 도산 안창호선생께서는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거짓말하지 않고 정직하라는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도덕성회복운동의 기본과 일치한다.조선 5백년을 지배해왔던 성리학이 지배계급의 통치철학은 제공하였지만 내실보다는 하세에 치중한 나머지 백성들의 실생활을 정직하게유지시키는 사회규범이 되지 못했다.실생활과 가까이선 정직한 사회행동규범을 정립하여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조해야 함을 선생께서는 지적하신 것이다.정직한 사회가 되지 못하면 현대적 자주국가의 건설은 무의미하다는 가르침은 오늘에 와서도 우리가 깊이 명심해야 할 가르침이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는 도산의 말씀을 우리 온 민족이 두고두고 새겨야 할 것이다. 「농담으로도 거짓을 말아라.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동회하라」는 도산의 가르침은 정직과 함께 성실만이 우리 국민이 신뢰받는 민족이 되게 하고 우리나라를 갱생시키고 영광있게 하는 길임을 역설한 것이다.각 개인개인의 철저한 자아혁신을 강조하신 도산께서는 「무실력행」을 민주개조의 대책으로 역설하셨다.「참」을 힘써 「행」함에 온힘을 다하자는 것이다.일상생활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건전한 인격을 가꾸어야 「힘」을 발할 수 있는 개인이 되고 민족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여기서 더 나아가 도산께서는 우리가 1인1기를 갖추어야 함을 주장하셨다.도산은 우리나라의 경제력을 높이려면 모든 사람의 교육과 훈련을 받아 직업기능을 가져야 하며 모든 산업을 과학화하고 합리화하여야 함을 가르치셨다.즉,만민개업의 정신을 받아들여 국민 모두가 생활에 필요한 일기일능을 가지게 하여야 국제 경쟁장에서 민족의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강조하셨다.학자이거나 정치가이거나 심지어 예술가라 하여도 육체노동과 생산기술로 자기생활을 유지할 수 있어야 인격수양도 가능하다고 갈파하셨다.도산은 이미 60년전에 과학기술을 터득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국가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국민모두가 과학기술을 생활화하고 생업으로 연결시킬때 국력이 부강해지고 자주국민으로서의 능력을 갖춘다는 것이다.독립운동을 진정으로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과학기술국」의 의지가 투철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기술을 천대하고 노동을 경시하였던 우리 민족의 사회개념을 혁신하시고자 한 것이다. 도덕성을 회복하고 과학기술입국으로 경제력을 증강시켜야 된다는 안창호선생의 가르침은 바로 오늘 신한국을 건설하는데 핵심이 되어야 하는 기본개념이다.모든 부정부패는 진실성의 결여와 합리성의 상실에서 비롯한다.우리가 갈망하는 새로운 한국은 참답고 건강한 한국이요 여기에는 정직성과 이지성이 주요한 덕목이 되어야 하고 여기에 애인성이 더해진다면 우리나라의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바로 이것이 도산의 꿈이었었다. 55년전 오늘 도산은 이 세상을 떠났다.그의 꿈은 우리와 함께 살아있지만 그가 그처럼 사랑하셨던 조국은 아직도 그의 이상향에서는 떨어져 있는 모습이다.남과 북으로 나뉘고 진정한 자유와 번영은 아직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로 남아있다.우리 후손들은 도산과 같은 위대한 민족지도자를 갖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한편 그 뜻하셨던 바를 하루속히 완수해냄으로써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일궈나가야 할 것이다. 60평생을 지사로서의 절개를 지켰고 공생활이나 사생활에서 추호도 비난받을 점이 없었던 도산은 희망을 갖고 노력한 지도자요 외면적인 허세보다도 실질적인충실을 강조한 진정한 스승이었다.그를 추모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되새겨 본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1)

    ◎오욕의 역사/“내선일체” 표방… 일제지배 합리화/항일독립군을 비적단·불영단으로 비방/언론탄압 항의하자 “민중현혹” 일방매도/경성일보에 경영 예속… 1938년 「신보」로 개제 일제의 손아귀로 팔려 넘어간 대한매일신보는 독립된 한국을 상징하는 「대한」이라는 제호의 두글자는 이내 잘려버렸다.합방 이튿날인 1910년8월30일 매일신보로 개제됐던 것이다.그리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는 운명을 맞았다.이른바 「일선융화와 세도인심의 감화유도」를 앞세운 일제의 선전대변 기관지의 길을 걸어야했다. ○한글판 발행 중단 그러나 지령은 대한매일신보룰 그대로 계승했다.국한문판은 제1642호,한글판은 제939호부터 발행되었다.매일신보는 총독부 기관지가 되는 동시에 9월1일에는 대한제국정부의 기관지격이던 한양신문까지 합병했다.국한문판과 한글판 두가지 신문을 발행하는 유일한 신문으로 남게 된 매일신보는 1912년 3월1일 한글판 신문을 폐지하고 대신 국한문판 제3면을 한글전용으로 제작했다.이에따라 1907년 5월23일 대한매일신보란 제호로 창간에 가서 매일신보로 이어져온 한글판은 5년만에 사라져 버렸다.결국 국한문판만 존속할 수 있었다. 그나마 매일신보는 경영측면에서 독립된 기구로서의 성격을 잃고 만다.왜냐하면 일제가 창간한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에 흡수통합 되었기 때문이다.경성일보의 한 부서의 위치에 불과한 매일신보는 말하자면 경성일보에 예속되어 자매지 성격으로 발행된 셈이다. 이렇듯 초기에 예속기를 거친 매일신보는 1920년에 가서 편집국으로 승격된다. 그러나 매일신보의 「신」자가 「신」자로 바뀐 「매일신보」는 경성일보에서 분리,독립된 신문으로서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그 시기는 1938년 4월16일이다. 그러나 매신이 경일에서 독립되기는 했으나 경일은 매신의 주식 45%를 소유한 대주주로 남는다.여기에 총독부의 소유 주식을 포함하면 매신의 경일예속은 종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논조 또한 변함없이 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일제의 한반도 통치를 합리화 하는데 급급한 것이었다. 매일신(신)보는 일제의 입장에서 「시정의 부연철저,민의의창달,문화의 향상」등의 원칙에 따라 편집되었고 편집방향은 한 마디로 「내선일체」라 요약할 수 있다.이를 위해서 총독정치의 선전과 홍보를 중심으로 제작했으나 식민정책의 모순을 은폐·호도하기 위해 민간지의 논조를 반박하거나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3·1운동의 불길이 아직 가시기도 전인 1919년 3월6일 「민주자결주의의 오해」라는 사설로 이른바 「각지의 소요사건」을 비방하고 이튿날에야 처음으로 이를 「소요사건」으로 보도한 일도 그 실례가 될 것이다.3월8일 「소위 독립운동」이라는 사설로 민족적인 독립운동을 비웃었던 예는 매신의 편집방향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매신은 합방이래 1919년까지 국문신문으로는 줄곧 독점적 위치에 서 있었다.그러다 3·1민족봉기를 계기로 일제는 그간의 무단장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나섰다.그 시기에 나온 신문이 조선일보·동아일보·시대일보등 몇몇 언론이다. 일제는 1920년 민간지의 발행을 허가한데 이어 같은 해 9월 몇몇 잡지를 허가했다.그러나 일제는 바로 폭압적인 언론탄압정책으로 돌아섰다.11월20일 월간 「신천지」를 필두로 하여 22일에는 「신생치」에 대해서 대대적인 수사를 벌여 관련자들이 여러명 구속 또는 기소되는 필화를 입어야했다.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휘두른 본격적인 사법권의 발동이었다. ○독립운동 비아냥 이와같은 강경탄압에 대해 언론계와 한국인 변호사들은 언론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결의문을 채택한 이들은 일제의 언론탄압정책을 맹렬히 규탄하고 나섰다.그러나 매신은 이러한 민족진영의 움직임에 대해 「불온당으로 인□,필화사건에 관한 언론계및 재야법조유지의 결의를 견하고」라는 사설을 통해 일제의 언론탄압을 옹호하고 민족진영을 비난했다. 매신의 이러한 식민주의적 왜곡 논리는 식민통치의 선전에서 민족동화는 물론 사회·경제·문화·교육 그리고 풍습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적용됐다.우선 식민지 정책통치의 선전에서는 주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합리화하고 통치의 모순을 은폐하는 것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식민통치의 성공을 미화시키는데 열을 올렸다.또 식민지 지배질서를 확립하고자 식민지 권력의 정점인 총독의 선전에 주력하면서 식민지 권력에의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기에 이른다.민족동화의 논리는 민족말살을 위한 것으로 한국과 일본을 순치의 관계로 설정하고 「병합」은 침략에 의한 지배가 아니고 과거 신라의 한반도 통일 내지는 일본내 분국의 통일과정과 같은 현상이라면서 침략사실을 완전하게 은폐,호도했다.그리고 동화의 선결과제로는 일본어 교육을 강조하고 일본어를 익히게 되면 10∼20년이면 완전한 동화가 이루어져 황국식민화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광의의 애국심」내지는 「광의적 단합」을 강조하기도 했다.이는 일본왕에 대한 충성논리로 직결되는 것이었다. 사회분야에서는 식민지 통치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식민지 사회의 재편에 역점을 두었다.식민지 사회의 재편은 수작자를 매개로 식민지 사회의 재편을 종용하는 것이었다.아울러 각계각층에 경고사설을 통해 식민지 통치의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거듭 강조했다. 경제분야에서는 식민지 경제수탈을 위한 산업의 개량과 일본경제체제로의 예속화에 중점을 두는 논조를 폈다.특히 농업의 발달을 위해서는 농사개량과 토지개량이 기반되어야 한다는 논리에서 개량사업을 강조했다.한편 식민지 수탈의 기초작업인 토지조사사업을 소위 「근대화」라는 논리로 위장하면서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한국의 경제제도가 확립되었다고 선전했다. 문화면의 경우는 한국의 자주성과 전통적 문화를 단절시키기 위한 문화말살로 일관했다.무엇보다도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심했는데 그중에서도 유교와 기독교에 대한 통제가 집중되었다.이는 식민통치에 대한 이들 종교계의 거센 저항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때문에 매일신보는 종교와 국체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식민지 통치에 위배되는 종교활동을 철저하게 배척한 것이다. 교육부문에서도 식민통치를 위한 논리는 예외가 아니어서 학교와 사회,가정에 이르기까지 「황국신민화」를 위한 식민지교육을 강조하면서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을 역설했다.한국인에게는 고등교육이 필요치않고 식민지통치에 필요한 정도의 보통교육과 실업교육만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논리의 요지였다.매신은 이처럼 정치·사회·경제·문화등 각 방면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또 이를 선전하는데 앞장서는 불행한 세월을 맞아야했다. 매일신(신)보가 36년동안 수행했던 역할을 요약하면 곡필로 일관되었다.온갖 압력수단을 동원해 일제가 빼앗은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이라는 두 글자가 잘려나가면서 오욕의 수렁텅이로 빠져들어 갔던 것이다.국권도 오간데가 없었고,그 서릿발같던 「대한매일신보」의 기상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동사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지음)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2)

    ◎길림시절:1/의문투성이의 체류시점/“27년 육문중 전학”… 「26년 입학」 주장 수정/초기 혁명활동 근거마련 노려 이력 변조/주변선 “28년 무송서 만났다” 회고 김일성은 언제부터 길림에 있었는가. 북한에서는 그가 길림 육문중학교에 들어간 시기를 몇번이나 변경해왔다.해방후 60년대까지 그들은 그가 이 학교에 1926년에 입학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특히 61년에 발간된 「조선근대혁명운동사」에서는 그 입학시기가 「26년 여름」이었다고 암시하기까지 하고 있다. ○68년부터 연도변경 그런데 68년 전기부터 그들은 이 연도를 변경하여 1927년이라고 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이 무렵부터 입학이란 용어가 애매하게 되어 「전학」이 시사되어 나가더니 지금은 전학이 기정사실화 되어버렸다.그 전학시기도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에서 「봄」으로 되고 72년의 어떤 전기부터는 엄동설한인 27년 1월17일이라고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학에 들어간 연도가 26년이었다가 27년으로 바뀌어졌다든가 입학이 전학으로 되었다든가 그 시기가 여름부터 봄,봄부터 한겨울,한겨울이라도 특정된 날짜인 1월17일로 변경되어 나간다면 이것이 보통 서민들의 이력서 같으면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법적 문제로 될 것이다.그런데 북한에서는 일국의 최고지도자가 반세기란 장구한 세월을 이런 경력변조에 허비하고 있다. 김일성은 최근의 북한 주장 같이 27년 1월14일에 길림으로 가서 17일에 육문중학교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우리는 이런 날짜놀음에 놀아나지 말고 그가 27년 상반기에는 길림에 없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그가 이 무렵 길림에 없었다는 것은 북한 문헌을 분석해 보더라도 확실하다.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우상화를 위하여 조선노동당이 해방전에 그의 변두리에 있었던 인물들을 총동원하여 그가 어떤 시기 어떤 공적을 쌓았는가를 증언하는 「회상기」를 쓰게 하고 있다.그리하여 60년부터 이 회상기들을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란 표제 밑에 현재까지 6권을 출판하고 있다. ○경력위조에 반세기 또 이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는 70년부터 4권짜리 연대순으로 재편집되었다.그중 1932년까지의 그의 「초기혁명활동」을 회상한 제1권은 편집이 어려웠던지 77년에 와서야 겨우 출판되고 있다. 그런데 이 제1권의 권두를 차지하는 채규룡의 회상기 「인민대중을 교양각성시키기 위하여」에서는 그가 김일성을 무송에서 만난 날짜를 1928년 1월이라고 하고 있다.이 일은 그의 「초기혁명활동」목격자는 아무리 연도를 거슬러 올라가도 28년 1월보다 전에는 찾을 수가 없다는 말로 된다. 채규룡의 이 회상은 사실은 29년에 무송에서 결성된 국민부 계통의 소년동맹 활동을 노동당이 28년의 일로 왜곡하고 있는 글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왜곡된 사실은 차치하고 28년1월이란 날짜만을 문제로 삼아본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초기혁명활동」을 증언하는 증인을 정력적으로 찾고 있다.회고록에 실린 여성독립운동가 이관린을 예로 들면 그는 중국인과 결혼하여 손자까지 두고 있었고 민족주의자였던 경력 탓에 북한에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그는 20년대 후반,무송에서 만난 강반석의 아들 김성주가 북한 통치자 김일성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노동당은 초야에 파묻혀 살고 있는 이러한 이관린을 찾고 또 찾았다.그리하여 겨우 70년대 초에 찾아낸 그들은 그후 80년대 후반까지 기다린 끝에 가족을 떠날 결심을 한 그를 평양까지 데리고 와서 홀몸으로 살게 하였다.몇년 안가서 죽은 이관린을 그들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하였다. 이 경우를 보더라도 김일성은 자기의 우상화를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는 권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이관린이 과연 26년에 만났는가 어땠는가는 객관적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유일독재를 확립한 후의 김일성은 20년대 후반에 자기와 만난 증인이라면 어떤 수작을 꾸미더라도 기어코 그를 증언대에 세우고야 마는 집념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어떠한 무리수도 마다하지 않는 김일성이 20년대 후반에 무송에 있었던 채규룡으로 하여금 회상을 쓰게 하였다.그리고 채규룡이 쓴 29년1월의 국민부 산하 소년동맹 활동을 일부러 28년1월로 끄집어 올리는 왜곡을 감행한 후에 이 「회상」을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연대순1」의 권두에 가져온 것이다. ○사실 증언자 전무 이러한 곡절을 알고 보면 우리는 누구라도 김일성이 1927년에 했다는 「초기혁명활동」에 대하여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그에게는 27년에 있은 일은커녕 28년에 있었다는 「일」조차도 29년에 실지로 있었던 일을 앞당겨 가져오지 않으면 「증명」해 줄 사람이 없다. 자기를 정당화하는데 있어서 김일성 같이 강한 집념을 가진 인물은 없고 또 그와 같이 이 일에 대하여 막강한 권력을 장기간 행사한 권력자도 없다.그런데도 27년 상반기의 길림시절을 회상해주는 증언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길림에 없었다는 강력한 반증으로 되는 것이다. ①동서 한국판 232면 ②「인류해방의 구성 김일성원수」백봉 저 인문과학사 간 21면 ③평전 255면 이하 ④「세기와 더불어 1」184면 이하
  • 한민족 탄압에 앞장/일제 「조선군」연구 아쉽다

    ◎독립운동사연 채영국연구원 논문서 지적/1904년 러·일전쟁초 무단통치위해 주둔/3·1운동 폭력진압… 한인 405명 살해/편제·역할·탄압실상 등 체계적으로 규명돼야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한국침략에 있어서 3대지주 역할을 했던 기관은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회사 그리고 조선군(주한일본군).이 가운데 3·1운동을 전후한 일제의 무단통치및 민족탄압의 실상을 규명하기 위하여는 당시 실질적 폭력 행사 기관이었던 조선군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채영국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논문 「3·1운동전후 일제 조선군의 동향」에서 일제통치하에서의 조선군의 편제와 배치,조선군의 역할,조선군의 한민족 탄압실상등 조선군의 군국주의적 활동 실체를 체계적으로 구명했다.이 연구에 따르면 일본군이 한반도에 처음 파견된 것은 한국주차군(주차군)이라는 이름으로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였다.증강된 정규1개사단 규모의 주차군은 초기에는 일제의 한국병탄(병탄)과 무단정치 수행에 전위역할을 했다. 1918년 5월에는 2개사단으로 증강되면서 그 명칭도 조선군으로 바꾸고 산하에 국경수비대(19사단­두만강,20사단­압록강)·헌병사령부·요새사령부(해안경비)등의 새편제로 한반도 전역을 완전히 장악했다.체제를 정비한 조선군은 이듬해 비폭력 평화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며 만주지역을 근거로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한국독립군의 소탕에도 앞장섰던 것으로 돼있다. 1919년 3월1일부터 6월1일까지 3개월동안 전국적으로 벌어졌던 1백여회의 시위에서 조선군의 진압내용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사망자는 모두 4백5명.이에비해 조선군의 사망자는 2명에 불과해 당시의 시위가 비폭력적이었으나 진압은 폭력적이었음을 입증했다.특히 일제가 3·1운동 이후 표방한 이른바 문화통치는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시킨후 한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이 다시 일어날 것을 우려,제시한 또하나의 무력진압책이라고 평가했다. 또 조선군 국경수비대는 간도일대를 침입,독립군의 소탕을 기도했으며 나아가 독립군의배후세력으로 있던 간도의 한인사회 붕괴를 위해 경신참변을 야기시켰다.이 참변은 1920년 10월초∼11월말 사이 2개월동안 간도의 훈춘·연길·화룡현등 8개현에서 발생,3천7백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피살되었다.그리고 3천2백채의 가옥과 41개의 학교,16개의 교회가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국경수비대는 또 만주의 관동군과 대등한 입장에서 대륙침략의 첨병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그것은 ▲장작림폭살사건(1928.6) ▲만주사변(1931.9) ▲중일전쟁(1937.7) ▲장고봉사건(19 38.7)등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요약됐다.조선군은 19 45년 2월11일 「제17방면군」및 「조선군관구사령부」로 명칭이 바뀌어 해방때까지 한반도에 주둔했다. 따라서 한국과 만주침략등 일제의 동북아 지배를 위한 침략야전군으로 그 활동이 두드러졌던 조선군은 특히 한민족의 항일독립운동 과정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연구대상.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채연구원은 『일제 식민통치의 폭력정치화를 주도한 조선군의 활동은 일제식민지배의 새로운 성격규정과 한국민족운동의 새조명을 위해 활발한 연구가 전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1)

    ◎소년시절:22/강반석의 「반일부녀회」 결성설/26년 12월18∼19일 마적단 대약탈/“26일 여성단체 결성” 못믿을 주장/아들 우상화에 어머니까지 “악용”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이 「ㅌ ㄷ」과 새날소년동맹을 조직한 경험에 토대하여 그의 모친 강반석을 도와 1926년 12월26일 「반일부녀회」를 결성하도록 했다고 주장한다.강반석은 남편 김형직이 죽은 후 「혁명투쟁」의 길로 나가 무송 도처에 야학을 세우고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면서 그들을 혁명화했다는 것이다.그는 이러한 주장을 68년 전기부터 하고 있다. ○야학까지 개설 강변 김일성은 자기의 우상화를 위하여서는 모친도 그냥 두지 많는 위인이다.그는 무송에서 당시 있지도 않았던 「새날소년동맹」을 날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모친까지 동원하여 26일에 부녀회를 결성했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 1주일 전인 18일과 19일에 무송현성은 무려 5백명이나 되는 대련합마적단에 유린당하였다.1920년대는 만주 일대에서 마적이 창궐을 극한 시기였지만 그들의 이무송현성 습격은 그중에서도 최대라 할 수 있는 대겁략이었다. 당시의 마적은 지방 경찰이나 자위단 따위를 무색케 할 정도의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하나만 예를 들면 22년경의 부두목 강괴무(천중앙)는 돈화현 사하장의 수림지대에서 4백50명의 부하를 데리고 기관총 4정을 포함한 총기 4백80정,총검 3백개,수류탄 1백개,탄약 13만 5천발을 가지고 있었다.1명당 3백발이나 탄약을 가진 이 마적떼는 대지 5백평이상 되는 곳에 큰 병사를 두채나 지어서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마적떼는 26년 경에 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5백명이나 되는 연합마적단이 무송현성의 상점을 3분의1이나 불사르고 재물이란 재물은 몽땅 가져갈 뿐 아니라 퇴각한 후에도 볼모로 잡아간 자의 일가친척들에게 온갖 요구를 다 내놓고 있는 이 때에 강반석은 별스럽게도 「반일부인회」란 공산주의 유사 단체를 결성했다는 것이다. ○명부작성 어불성설 거리에서는 치안을 회복하려고 중국군경이 분주하게 설치고,마적의 방화로 집이 불타서 쫓겨난 사람들이 백두산 북쪽 기슭의 차디찬 칼바람에 떨면서 불탄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 판이었다.마적 습격 1주일 후 같으면 사상자를 낸 가족들의 통곡도 그치지 않았을 것이고 남편이나 자식을 납치당한 부인들이 마적에게 넘겨줄 재물을 구하는데 동분서주하고 있는 시기였다. 이런 북새판에 유독 강반석만은 어디에서 한가한 여성들을 데려왔는지 부인회를 조직하고는 다음과 같이 한가해도 한참 한가한 일을 했다는 것이다. 전기에 의하면 그는 여성의 해방과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싸우자고 해놓은 후 회원명부의 작성에 들어갔다. 「강반석녀사께서는 매 사람의 이름을 물어시었다.그러나 자기 이름을 주저없이 선뜻 부르는 여성이 몇몇 안되었다.그것은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긴 해도 여자라는 죄 아닌로 하여 아름다운 이름조차 못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반석 전기는 68년부터 수종류 발간되고 있는데 여기 인용한 것은 80년판이다.전기로서는 갈고 닦아서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우상화되어 있는 책인 셈인데도 반일부인회에 관한 글이란 고작 이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러한 명부작성 작업은 마적떼가 덮치고 간 직후라는 난리북새통을 생각하면 경황에 맞지 않아도 너무 맞지 않는다. 당시의 마적 규율 속에는 여자를 겁탈하지 않는다는 1항목이 있었다.그러나 이 규율이 1백% 지켜질리가 만무했고 크고 작은 봉변은 수두룩 하였다.이외에도 부녀자들은 금품을 강탈당하고 혈육이 피살되고 집이 불타고 납치당한 가족들의 안부를 알 수가 없어서 벌벌 떨면서도 마적단에게 온갖 치다꺼리를 다 해야했다.이러한 비참한 처지에 놓인 부인들이 과연 이름같은 것에 신경쓰고 있을 틈이 있겠는가 말이다. ○날짜 조정 엄두못내 따라서 「반일부인회」도 마적떼가 무송을 습격한 당시의 참상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김일성만이 할 수 있는 날조로 밖에 되지 않는다. 필자는 평전에서 나의 논문으로 당시의 마적습격 사실이 북한에 알려지더라도 전기의 허구성으로 하여 김일성이 설정한 반일부인회 결성날짜는 바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그런데 이번 회고록을 보니 85년의 필자의 주장대로 그들은 역시 그 날짜를 재조정할 엄두도 못내고 있다. 대신 김일성은 전에 없던 1절을 설정하여 정의부계통의 유명한 여성독립운동가 이관린이 당시 강반석의 집에 머물고 있었고 그와 독립운동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는 새로운 주장을 장황하게 늘어놓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관린이 반일부인회 결성을 도왔다는 명시적인 말은 단 한마디도 없다.이 점으로 보아 그는 80년대 후반에 평양에 돌아와서 잠시동안 김일성의 이용물이 되었지만 「반일부녀회」를 강반석이 결성했다는 그의 주장에는 끝까지 동조하지 않고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①평전 93면 ②「조선의 어머니 강반석여사」 근로단체출판사간 252면 ③평전 98면
  • 「독립운동가 위한 교향곡」 국내 초연

    ◎중국교포 김정평씨 3일 KBS향 지휘,자작곡 연주/열사들의 험난했던 투쟁과 투쟁과 조국에 대한 사랑담아 중국 교포작곡가 김정평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한 열사들을 위해 쓴 「교향곡 제1번」이 국내 초연된다. 현재 중국전영락단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정평은 3일 하오 7시30분 KBS홀에서 KBS교향악단을 지휘해 자작자연한다.이 연주회는 KBS가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것.기념 연주회에는 김정평과 함께 오트마 마가가 지휘자로 나서는 3일의 KBS교향악단에 이어 4일에는 이상규가 지휘하는 KBS국악관현악단이 출연한다. 김정평은 1929년 중국에서 출생했다.부친 김철남은 황해도 출신으로 일찍이 조국 독립을 위해 중국에 망명해 상해 임시정부에서 백범 김구선생의 부관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정평은 어릴때부터 바이올린에 재능을 보였다.그는 당초 남경중앙대학 문학과에 입학했으나 뒤에 음악과로 옮겨 작곡을 전공했다.19 50년 중국가극원의 지휘자 겸 전속작곡가로 활약하다가 1979년 중국전영락단의 예술지도겸 상임지휘자로 임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현재는 이와 함께 중앙민족학원 음악과 교수와 중국음악가협회 교향악애호자학회의 부회장을 맡고 있다. 김정평은 1990년에는 북경 아리랑교향악단을 설립,조선 민족 교향악 작품을 널리 알려 중국사회에 우리 민족음악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그는 조선민족의 정서를 담은 여러 편의 작품을 작곡했다.교향시「장백산의 봄」과 「불사조」,관현악곡「가을의 노래」「고향생각」「천지의 사랑」 「그리움」 등은 높은 평판을 얻었고 일부는 여러 차례 상을 받기도 했다. 이번에 연주될 「교향곡 제1번」은 1990년 완성된 곡으로 진지한 정서로 독립운동가의 험난한 투쟁과 조국에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전곡은 3개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제1악장 「고난과 역정」은 고난의 역사와 독립운동가의 희망을 힘차게 보여준다.제2악장은 「자장가(요람곡)」로 어머니의 조국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근심,희망과 아픔을 암시한다.제3악장은 「분기」로 전민족의 조국 광복을 위한 꺾이지 않는 투쟁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김정평의 작품이 후반부에 연주될 3일 공연의 전반부에는 오트마 마가의 지휘로 멘델스존의 「핑갈의 동굴」서곡에 이어 김혜정의 협연으로 역시 멘델스존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이 연주된다.공연문의 781­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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