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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 새달 대규모 해상훈련

    【대북 AFP 연합 특약】 중국은 다음달 중국 남동부 해안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이라고 연합보가 24일 군정보소식통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 신문은 중국 인민해방군(PLA)이 이같은 군사훈련 계획을 마무리지었다면서 훈련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빠른 시일 내에 훈련이 이뤄질 것이며 광동성 북부나 복건성 또는 절강성 남부 가운데 한곳에서 훈련이 이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합보는 이어 이 군사훈련이 티베트 분리독립운동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대만방문과 연계돼 이뤄지는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 달라이 라마 대만도착/중 “국민당 연계” 맹비난

    【고웅(대만) AFP 연합】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22일 중국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대만 남부 고웅에 도착,역사적인 첫 대만방문을 강행했다. 달라이 라마는 이날 하오 1시(한국시간 하오 2시)께 싱가포르에서 항공편으로 고웅공항에 도착해 승려 300여명의 영접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6일간의 방문일정에 들어갔다. 대만과 달라이 라마측은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위해 대만 불교단체의 초청으로 이뤄진 이번 방문이 종교적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며 정치적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관영 언론매체를 동원해 달라이 라마의 대만방문이 『국민당 분리주의자와 티베트 독립운동 세력간의 연계를 입증하는 것』으로 조국을 분열시키려는 정치적 운동의 시작이라고 비난했다. 대만당국은 이날 달라이 라마의 경호를 위해 공항주변 등지에 1천여명의 경찰관을 배치해 삼엄한 경계를 폈다.
  • 중 “10여명 부상” 이례적 신속 발표/버스폭발후 북경 표정

    ◎범인에 현상금… 경찰력 5∼6배 증강/소수민족 갈등증폭·후속테러 대비 북경에 테러 비상이 걸렸다.7일 밤 북경 중심가 서단에서 발생한 차량폭발사고로 경찰 등 당국이 북경전역에서 비상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공안경찰은 특히 이례적으로 사고발생 하루만인 8일 중국 국영TV를 통해 이 사건이 사제폭탄 2개에 의한 것으로 10여명이 다쳤으며 범인에 대해 현상금을 건다는 내용의 공식발표를 해 사태에 대한 중국당국의 긴장감을 더해줬다. 특히 동쪽 국제호텔에서 동단,천안문,중남해,서단에 이르는 장안대로변에는 평소보다 5∼6배나 많은 경찰이 배치돼 순찰을 강화하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주요 교차로 주위엔 경찰 기동타격대의 중형버스와 순찰차들이 세워져있고 버스 정류장마다 공안경찰들이 배치돼 불심검문하는 등 긴장된 모습이다. 이 사건은 치안 경계령이 내려진 전인대기간중 하루 58만여명의 시민이 드나드는 시내 중심가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중국당국을 경악시켰다.그러나 무엇보다 중국당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은 이 사건을 신강·위구르자치구에서 발생한 민족분리운동과 연속선상에서 보기 때문이다.90년대초부터 표면화된 위구르족주도의 신강분리독립운동이 갈수록 고조돼 등소평사후 한족과 55개 소수민족들로 구성된 중국의 민족단결을 무너뜨리고 사회불안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게 중국당국의 걱정이다.사고 지점서 1㎞여 남짓 떨어진 청와대격인 중남해주위 경비를 이례적으로 강화하고 주변 통행차량을 일일이 검문하는 것도 요인암살 등 후속 테러에 대한 대비라는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90년초 위구르족과 키르키즈족 지도자 50명이 반혁명역도로 총살당한뒤 92년 우루무치,93년 카시카르의 폭탄테러를 비롯,95년 호탄의 무장폭동,올2월초 카자흐스탄접경의 이닝시 유혈폭동 등으로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등사망직후인 지난달 25일 우루무치에서 차량 폭탄테러로 7명 사망,60여명 부상에 이어 1일에도 경찰건물을 겨냥한 폭탄테러가 있었다.지난해엔 3천명의 위구르족 등이 체포되고 수백명이 처형 또는 사살된 것으로 알려진다. 실크로드의 끝부분에해당되는 동과 서의 접경지역인 신강지역의 민족분규가 끊이지 않는 것은 유전개발등 개발붐속에서 한족들의 유입이 확대되고 옛 소련이 분열과 인근 회교국들의 회교근본주의 등의 영향때문이다.
  • 3·1 독립선언서 등 7점/문화재 지정 사전예고

    문화체육부는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3·1독립선언서(최남선 저) 등 독립운동사료 7점을 문화재지정에 앞서 28일 사전예고했다. 이날 지정예고된 사료는 ▲최남선의 3·1독립선언서 ▲전명운 소장 독립선언서 ▲상해임시정부 발간 대한독립선언서 ▲박치화 등이 작성한 하동독립선언서 ▲미주지역에 배포된 영문독립선언서 ▲간도 애국부인회의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백범 김구의 친필 일기 백범일지 등이다.
  • 독립운동가 이재현 선생

    광복군 간부를 지낸 애국지사 이재현 선생이 24일 상오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향년 80세.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난 이선생은 지난 39년 중국 중경에서 항일공작대를 조직,조장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을 맞기까지 광복군 일원으로 항일 유격·공작활동을 벌여 지난 63년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빈소는 삼성의료원 영안실.발인 26일 상오.장지는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일제 조선인관리는 항일운동 동참하라”/일서「제2독립선언문」발견

    ◎「33인」중 한사람이 작성 일제시대 관리로 봉직하던 조선인 관리들에게 조선독립의 선언적 의미를 전달한 「조선인 관공리에게 경고」라는 문건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발견된 선언문은 일본 교토대 대학원에 파견교수로 나가 있는 김문길 교수(부산외대 일본어과)가 최근 오사카 인권박물관에서 발견한 것.국한문혼용체로 가로 55㎝,세로 20㎝의 창호지에 붓으로 적혀 있다. 선언문 내용은 당시 조선인 관리들에게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관리들 스스로 관직을 버린 뒤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독립선언문이 일본정부를 대상으로 했다면 이 선언문은 조선인 관리를 대상으로 한 제2의 독립선언문인 셈. 이 선언문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33인중 한 사람(성명미상)이 작성했고,부산과 경남지역에서 많이 배부됐다고 기록돼 있다.
  • 중앙집권제 유지될까(등 이후 중국대륙:3)

    ◎개방바람에 커지는 지방 목소리/23개 성 독립국 버금가는 경제자율권 행사/소수민족도 이탈 움직임… 강 체제의 과제로 등소평의 죽음은 중국정치의 마지막 카리스마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비공식적인 인간관계와 인적인 연결고리를 통해 각 지역 및 집단의 이익과 이해를 조정하던 통합의 구심점이 사라진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이제 중앙정부는 저마다 주장과 요구의 강도를 높일 각 지방의 목소리와 행동을 어떻게 수용하고 조화시켜 나가느냐는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강택민이 등소평처럼 강력하게 지방과 군부를 장악할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불안은 커지고 있다. 광동성 등 경제개혁의 선두를 달리는 지방의 목소리는 강택민체제의 대응여하에 따라 불협화음의 정도를 넘어 판을 깨뜨리는 분열의 수준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현재 중국의 23개성은 개혁·개방정책이후 대외무역권,재정권,기업운영권 등 경제적으론 사실상 독립국가에 버금가는 수준의 자율권을 행사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성장 등 지도급인사에 대한 인사권과 공산당의 지방조직,그리고 군부 및 징세권 등의 수단을 통해 지방을 통제해 나가고 있지만 중앙정부 자체도 지역세력과 공산당의 각 계파에 의한 합의와 조정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지방정부를 통제할 수단은 제한적일수밖에 없다. 중국 통합의 근본이 되어온 공산당 조직도 농촌 등 지방하부구조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하고 점차 일반국민들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어 당에 의한 지방통제도 느슨해지고 있다. 중국의 정치구조가 법과 제도화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직 비공식적인 인간관계와 공산당 정치국 중앙위원회같은 권력조직의 결정에 치중해 있는 것도 위기해결에는 약점이다.당의 합의가 깨어질때 중국의 통일을 지속시킬 만한 대안이나 안전판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중국이라는 광대한 지역의 통합성을 유지하는 또 다른 축인 군도 변화하고 있다.전국을 7개 군구로 분할해 주둔해 있는 군대는 공산당과 함께 성 정부의 이탈을 방지할 결정적인 담보이지만 80년중반부터 가속화된 지방주둔군의 이윤추구형 경제참여방식이 군과 지방정부와의 밀착을 가져오고 있다.즉 지방정부는 공장과 농장을 보유하고 있는 지방주둔군에 세수감면,신용대출,기술협력 등의 방법을 통해 군과 긴밀히 연계되고 그러한 경향은 갈수록 더해지고 있다.게다가 등소평과 같은 혁명제1세대의 사망으로 당에 종속적이던 인민해방군은 더욱 독립적이 되고 강택민의 군부인사는 군의 서열과 위계를 혼란시켜 군의 정치화를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다. 중앙정부가 최근 채택한 징세제도에서는 이미 중앙과 지방의 힘겨루기가 나타나고 있다.중앙정부는 지난해 1월부터 기존의 조세청부제 대신에 중앙세·지방세·공유세로 나눠 걷어들이는 분세제를 시행하고 있는데 이중 공유세는 중앙정부의 세금독점 움직임에 지방정부가 강력히 반발,타협안으로 신설된 제도이다. 지난해 2월 30개 행정구에서 실시된 전인대회에서 성급 당위원회 서기중 중앙당이 지명한 일부 현직 대표가 낙선한 것도 지방에 대한 중앙당의 장악력 약화로 해석된다.게다가 신강위구르 자치지역과 티베트 지역의 독립운동 등 55개 소수민족들에 대한 처리문제도 중국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티베트에서는 지난해 수천명이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중앙정부의 허점이 눈에 띨때 이 지역들에서 대규모 봉기가 있을수 있다. 중국대륙에서 개혁개방정책 추진과 더불어 싹트기 시작한 각 지방의 「특색살리기」 또는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움직임과 같은 분열 여부는 강택민정권이 앞으로 닥칠 권위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을것 같다.
  • 김한규 총무처장관에 듣는다(올해 국정 어떻게)

    ◎합동행정타운 건립… 민원 원 스톱 서비스/공무원 내집마련 지원… 3년간 4만5천세대 공급/인력 2천명 감축 버서직·사무보조원 우선 □대담=이경형 정치부장 「경쟁력」이 무엇보다 앞서는 교리로 대두되고 있는 시대에 총무처의 역할은 더욱 커보인다.행정부문의 경쟁력 확보가 곧 국가 경쟁력 회복의 관건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행정이라는 생명체의 극말단까지 퍼져 있는 신경조직을 움직이는 두뇌가 바로 총무처이기 때문이다.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총무처를 맡은 김한규 장관을 서울신문 이경형 정치부장이 21일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10층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지난해 말 총무처장관에 취임한뒤 이제 두달 남짓 지났습니다.그동안 겪은 총무처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놀란 것은 공무원의 수준이 정말 높다는 것이었습니다.또 사무관급 이상은 상당수가 해외연수를 다녀왔더군요.그런만큼 의식수준 또한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입니다.특히 총무처는 각 부처를 지원하고 조정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지요.따라서 하는 일이 일반사업부처와는 달리 외부로 크게 드러나지 않아요.그럼에도 그 어느 부처보다도 각자 맡은 일을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하고 있어 고맙게 생각합니다. ­밖에서 보던 공무원사회와 안에서 겪는 공무원사회가 다른 점이 있던가요. ○공직사회 일관성 유지를 ▲그동안에는 의정활동과 정당활동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공무원사회와 접했었지요.그런데 외부에서는 공직사회의 한 단면만을 보고 일반화시키는 경향이 있어요.제 자신도 마찬가지 였지요.사회가 급격히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중심을 잡고 일관성과 안정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바로 공직사회입니다.이런 측면이 복지부동 등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비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올해 총무처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사업은 무엇입니까. ▲정부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한편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고 행정의 대국민 서비스를 향상시키는 것입니다.올해 업무추진의 기본방향이지만 총무처의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김영삼 대통령은 지난달 「경쟁력 10%이상 높이기」차원에서 공무원을 오는 2000년까지 1만명 감축한다는 방침 아래 올해 먼저 2천여명을 줄이겠다고 밝혔습니다.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셨습니까.감원에 따른 공직사회의 동요는 없겠는지요.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공직사회가 솔선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감축되는 직위에 현재 근무하고 있는 공무원에 대해서는 신분상 불이익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감축방안은 먼저 국장급 간부의 비서를 2인당 1명으로 줄이는 작업을 현재 하고 있습니다.또 사무보조인력은 가급적 1개과에 1명을 넘지않도록 하고,무인경비 및 자동교환시스템을 도입하여 방호원과 교환원 등의 인력을 감축하고 철도·체신 등 현업관서의 경영개선을 통한 인력감축을 추진할 것입니다.결원이 발생한 직위에 대한 신규충원도 유보합니다. ­김장관께서 언젠가 「총무처장관은 90만 공무원의 노조위원장」이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연금복지회관도 확충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공무원들이 재직중에 안정된 생활환경 아래서 직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그런데 현재 공무원의 보수를 비롯하여 후생복지수준은 민간부문과 비교해 볼 때 미흡한 것이 사실입니다.공무원의 보수를 현실화하는 문제는 국가경제와 연관지어 생각할 문제입니다.그러나 공무원들의 집 걱정은 꼭 덜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적어도 10년 이상 근무한 공무원은 집 걱정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죠.그래서 추진하고 있는 것이 「주택마련지원 3개년 계획」입니다.이와 함게 전·현직공무원과 그 가족을 위한 연금복지회관과 체육시설,휴양시설도 중·장기적으로 확충할 것입니다. ­「주택마련지원 3개년 계획」은 획기적으로 들리는데요.구체적 내용을 소개해주시죠. ▲현재 공무원의 주택보급율은 75.6%입니다.전체국민의 주택보급율이 86.1%이니 상당히 뒤져있는 셈이죠.특히 10년 이상 근무하고도 집이 없는 사람이 4만5천여명에 달합니다.이들을 위해 오는 2000년까지 주택건립분양,주택자금지원 등을 통해 4만5천세대의 주택을 공급하겠습니다.또 공급하는 주택의 규모 또한 최근의 수요변화와 소득수준향상에 맞추어 그동안의 소형평수 위주에서 적정규모로 조정할 방침입니다.수도권 지역에는 이미 구리시 토평지역에 7천여평의 택지를 확보하였으며,연차적으로 6만여평을 추가로 매입할 것입이다. ­최근 6급 이하 공무원에 대한 대외직명을 활성화하겠다고 발표하신 적이 있지요.구체적인 구상이 있습니까. ○하위직 대외직명 활성화 ▲5급 이상 공무원은 공식적인 직위명을 사용하고 있지요.그런데 6급 이하는 「주사」나 「서기」로 부르기가 뭣해 「선생님」 등으로 어색하게 부르고 있지요.무엇보다 자기직무의 중요성과 전문성에 걸맞는 직위명이 없어 자긍심을 갖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그래서 담당하는 업무의 성격을 감안해 「전문관」「조사관」 등의 직명을 붙여 사용하게 하여 이들의 자부심을 높여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지방도시의 정부합동청사 신축계획이 나왔습니다.장관께서 특히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이라면서요.재원을 마련하는데는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지방청사 합동화 사업이란 지방도시에 「합동행정타운」을 건립하여 민원인이 여러기관에 걸친 민원을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마련했습니다.행정민원의 이른바 「원 스톱 서비스」를 가능케하자는 것이지요.이렇게 되면 행정기관간의 유기적인 협조체제가 구축되는데다 교통난을 완화하고 경비도 절감되는 등 여러가지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현재 대상지역을 선정하기 위한 기초조사를 하고 있습니다.가능하면 올해안에 내륙 및 해안의 도청소재지급이상의 도시 1곳씩을 대상지역으로 선정할 방침입니다.재원은 현재 각 지방도시 곳곳에 흩어져있는 단독청사를 매각하면 국고부담은 없을 것으로 봅니다. ­외부전문가 채용을 위한 「개방형 임용제도」와 공직사회 내부의 전문가 육성을 위한 「전문분야별 보직관리제」의 성과는 어떻습니까. ▲지난해 외부의 전문인력유치를 위해 중앙부처 5급 이상 1만3천460개의 직위에 대하여 직무분석작업을 완료했고,이 작업을 바탕으로 전문성이 요구되는 201개 직위를 외부에 개방할 수 있도록 지정했습니다.민간전문가를 계약이나 파견 겸임 특채 등다양한 방법을 통해 적극 유치할 것입니다.또 올해부터 통상산업부나 해양수산부같은 몇개 부처에서는 「전문분야별 보직관리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공무원이 적성에 맞는 전문분야에서 장기근무함으로써 전문성을 더욱 향상시켜 나가자는 제도이지요.이들 제도는 앞으로 더욱 활성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정부의 업무도 점차 어느 부처의 영역으로 묶어 둘 수 없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어요.예를 들면 사법시험에 합격,법률에 밝은 사람이 외무부 조약국이나 국제기구국같은 곳에 근무할 수 있도록 하고 외무고시합격자도 통산,대외무역분야에 근무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상호연관성이 많은 분야는 인력충원방식을 대폭적으로 개방해야된다는 것이지요.영국같은 나라에서는 교류가 활성화되어 있다고 들었는데요. ○올 국가공무원법 개정 ▲그렇지않아도 그런 방향으로 올해 국가공무원법을 개정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특히 이 법에는 공무원과 민간기업과의 인사교류도 포함되어 있지요.사회가 갈수록 복잡해지는 만큼 공직사회의 특정 전문분야의 인재가 상당히 부족합니다. ­총무처의 중요업무 가운데 하나가 국가의전이지요.최근 무궁화문양이 넥타이로 만들어져 나오고 태극기에 관한 규정도 국민에게 친근하도록 바뀌는 등 변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미국의 경우는 성조기 문양을 패션에 이용하기도 하죠. ▲그동안은 국가상징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태극기나 무궁화를 활용한 디자인의 사용이 금기시되어 왔지만 이제는 오히려 정부에서 생활디자인에 적극 활용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이를 위해 지난해 「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도 바꾸었지요.성조기 문양을 말씀하셨는데 우리도 무궁화 문양을 활용한 넥타이 30여종이 이미 나오고 있습니다.오는 4월에 있을 「국가상징 디자인 공모전」을 통해 국가상징문양을 활용한 여러가지 생활용품디자인도 적극적으로 개발해 보급할 것입니다.스포츠용품이나 학용품 등에 태극이나 무궁화가 그려져있으면 국민들도 우리 국가상징에 대해 보다 친숙하게 느끼지 않을까요. ­훈장이나 포장을 받는 사람이 너무 많지 않느냐는 지적이 있습니다.일부인사는 훈장을거부하기도 했는데요.이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부포상제 더욱 강화 ▲그동안 포상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과거 독립운동과 정부수립에 기여한 애국지사와 조국수호와 국토방위에 헌신한 전몰·상이군경,경제개발과 농어촌 근대화에 기여한 산업역군,그리고 열악한 여건에서 국가발전에 공헌한 공직자 등 포상해야 할 대상이 많았기 때문입니다.이들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하신 분들입니다.포상거부 문제는 그동안 일부 사례가 있었습니다만,앞으로는 상을 받는 사람이 정말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누구나가 인정할 수 있도록 하여 상의 권위를 높여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심사기준과 절차를 더욱 강화하여 실질적으로 공적있는 분이 선발될 수 있도록 하는 등 정부포상제도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장관의 공직자관을 밝혀주십시오. ▲공무원들은 국민으로부터 선택받은 공복으로 투철한 국가의식을 가져야 합니다.국민에게 서비스하는 봉사자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그런데 그동안 우리 공직자들은서비스하는 「봉사자」와 군림하는 「관료」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요.지금까지는 공무원들이 앞만보고 살아온 측면이 있지만 이제부터는 주위를 둘러보아야 할 것입니다.현재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실시하는 국장급 이상의 교육과정에 장애인과 노인 등을 돌보는 사회봉사 프로그램이 들어있는 것도 공직사회의 변화를 보여줍니다.
  • 계봉우 선생 미공개 자료집 발간

    ◎민족사 연구 큰업적·독립운동에도 가담/독립운동 실상·문학적 열정 그대로 담아 민족주의 사학자 박은식·신채호에 견줄만한 근대 역사가로 학계에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북우 계봉우(1990∼1959)의 미공개 자료집이 나왔다.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가 계선생의 자서전과 문학관계 기록을 정리해 엮은 「북우 계봉우 자료집 1」편이 그것으로 선생의 독립운동 실상과 문학적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자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 함흥 출신인 북우는 민족사 연구에 몰두,자서전 「꿈속의 꿈」(1940∼1944)과 중등 교과서격 저서 「조선역사」(1912)를 비롯해 한국사 개설서인 「조선역사」를 펴내는 등 의욕적인 연구활동을 벌인 인물.30여년을 연해주와 만주,상해,중앙아시아 등지를 전전하며 직접 독립운동에도 참여해 국사·국어학계에서 새롭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애국지사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이번 자료집은 지난 95년 한국을 방문한 계선생의 4남 계학림씨가 독립기념관측과 계선생 관련 책자의 판권을 독립기념관측이 갖는다는데 합의해이루어진 첫 결실이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선생이 1910년 북간도로 망명한뒤 참가한 독립운동 내용이 생생하게 기록된 자서전 「꿈속의 꿈」과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뒤 수집한 문학자료집인 「조선문학사」로 짜여져 있다.이 가운데 「꿈속의 꿈」중에서는 한인사회당과 상해파 공산당의 독립운동 내용,청산리 전투 직후 연해주로 집결한 독립군 상태 등이 눈에 띠는 부분이다.또 「조선문학사」는 당시 선생이 강제 이주된 뒤 탄압속에 다양한 형식의 문학적 자료들을 직접 수집,분류한 보기드문 문학사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 김송죽 소설 「번개치는 아침」(송화강 5천리:17)

    ◎북만일대 조선족 삶과 투쟁 생생히/비적의 약탈에 맞서 결성한 무장지위대/후일 공산군부대 편입… 국민당군 토벌나서/항일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반동으로 찍혀/중국 문혁시기 혹독한 핍박·고초겪어 흑룡강성 화천면 성화향 성화촌에 사는 김송죽 선생(59)은 퇴직교원이다.자식들은 모두 대학을 나와 하얼빈에서 직장생활을 하느라 나가있다.그래서 두 내외가 넓은 한족식 집을 지켰다.그는 80년대 초에 처녀작 장편소설 「번개치는 아침」을 발표한데 이어 90년대 초에는 장편실화 「혈전」을 내놓았다.이미 문명을 얻은 그는 요즘 「관동의 밤」이라는 장편소설을 탈고했다. 처녀작 「번개치는 아침」은 그의 부친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광복직후 조선족부대가 비적과 싸운 투쟁의 역사를 그렸다.국민당군 별동대 성격의 비적은 광복직후 북만일대에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공산당을 적으로 싸워야했던 당시 국민당에 북경에서 먼 북만은 사실상 통치지역 밖이었는지 모른다.그런 탓에 국민당을 돕는답시고 나선 별동대속에는 만주국시절 헌병이나 경찰관도끼여있었다는 것이다. ○피땀어린 농토 등지고 유랑 그리고 실제 국민당 비호를 받았다.국민당 제15집단군 총사령 상장 사문동과 제1집단군 총사령 상장 이화당,국민당 동북 정진군 총지휘 중장 장우신이 별동대를 조종했다.당시 그들의 횡포를 고발한 노래말에 「사(사문동),이(이화당),장(장신우)은 불지르고 살인하니」라는 내용이 들어갈 정도였다.북만일대의 주민들은 이들에게 등을 돌렸다.공산당이 일찍 뿌리를 내린 이유도 이들 때문이었다. 이들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마을이 불타버리고 주검이 들판을 덮었다.더구나 조선족은 늘 사냥의 대상이 되어 무참한 죽음을 맞았다.그런 일로 해서 조선족들은 피땀으로 일군 땅을 버리고 다시금 유랑을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이 무렵 조선족 선각자들이 일어났다.무장자위대를 만들어 마을을 지켰던 것이다.그러고 나서 얼마있다가 공산당 군부대에 속속 편입되었다. 그러한 무장자위대 가운데 맨 먼저 공산당 군부대에 편입한 조선독립대대는 1945년 11월25일 연안에서 주덕해와 손을 잡았다.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개편한 조선독립대대는 다음해 4월28일 하얼빈에서 국민당군과 싸웠다.하얼빈이 국민당군 손에서 떨어져나오자 당기관과 발전소,송화강철교,비행장 경비를 담당했다가 국민당군 토벌에 나섰다.1946년 9월2일 하얼빈시 향방구 사리툰전투에서는 제3지대 소속 조선족 21명이 전사했다. 김송죽 선생의 부친이자 소설 「번개치는 아침」의 모델 김병념은 광복직후 동북민주연군에 참가했다.제1연대 조선족대대인 제2대대 5중대 1소대에 배속되었다.소대에서 3반장 직책을 맡은 그는 1946년 가을 대대를 따라 흑룡강성 화남현 발전소로 이동했다.그해 11월6일 주변정찰을 나갔다가 국민당군 병력과 교전이 붙었다.그 전투에서 김병념은 대대참모 김해정 등과 함께 전사했다.그리고 얼마뒤인 11월20일 국민당 제15집단군 총사령 사문동이 붙잡혔다.사문동은 12월23일 벌리현에서 총살되었다. 김송죽 선생은 소년시절을 부대에서 보냈다.부친 김병념이 전사한 이후에도 모친이 부대 재봉대에서 군복을 짓는 일을 하고 있어서 그냥 영내에서 살았다.그러다 부대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모친과 함께 벌리현에 남았다.할아버지 김석길이 아직 생존해있던 때로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애국계몽운동가이자 교육자요,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엄하게 자랐다. ○소년시절 군부대서 생활 할아버지 김석길은 1884년 평남 수난 태생이었는데,1912년부터 계몽운동에 참여했다.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연고로 지명수배를 받자 제자 9명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다.집안과 휘남을 거쳐 왕청에 와서 대종교에 입교하고 북로군정서의 일원이 되었다.그리고 1925년 신민부에 들어갔다.1928년에는 김좌진 장군이 파견한 의란현에서 이도강 등에 4개의 학교를 세웠다. 김송죽 선생이 스무살 나던 해인 1958년에 할아버지 김석길은 흑룡강성 화남현에서 세상을 떴다.그러나 독립운동에 참가한 민족의사들은 대접을 못받고 있다.항일운동을 했으면서도 공산당이 이끈 투쟁대열에 서지 않은 사람은 모두가 배제되었다.오늘날 흑룡강성 항일열사 가운데 민족독립운동가는 한 사람도 없다.물론 김석길 같은 분들도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 후손들은 오히려 모진 핍박을 받았다.더구나 문화대혁명시기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겪어야했던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김송죽 선생은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이유로 반동민족주의자가 되었다.그의 죄목은 반동민족주의자 말고도 역사반혁명분자의 아들,반혁명집단의 두목,반당분자,반사회주의분자 등 10가지에 이르렀다.부친 김병념이 국민당군과 투쟁한 사실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부친이 광복전 강제로 끌려가 철도경호대에 있었다는 사실만 들추어 혁명열사가 계급의 적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김송죽 선생 자신이 써놓았던 소설 「번개치는 아침」의 원고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비적토벌을 내용으로 한 것까지는 그런대로 넘어갔으나,김동철·김해정이 조직한 조선족부대를 문제로 삼았다.김동철과 김해정은 본래 항일연군 8군에서 일제와 싸웠다.그러다 1939년 군장 사문동이 일제에 투항하자 숨어있다가 광복과 더불어 조선족부대를 창설했던 것이다.그 뒤에 동북민주연군 제1연대 제2대대에 편입되었던 조선족부대가 1949년북한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을 반동으로 몰았다.문화혁명 당시 중국에서는 북한을 수정주의로 보았던 터라 조선족부대는 반동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농사일 틈틈이 습작 그는 옹골진 4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모진 매를 맞고 이른바 돌림투쟁을 숱하게 당했다.그래도 푸른 대나무처럼 곧게 살라는 뜻에서 지어준 자신의 이름(송죽)에 먹칠을 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감옥생활 4년을 버티었다.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소설 「번개치는 아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1965년 탈고하고 하얼빈 조선족문화관에 원고를 보내놓은 상태에서 날벼락을 맞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출판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내 문학수업은 어떤 의무감에서 이루어졌디요.청소년기를 할아버지와 함께 하면서리 독립운동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서 그걸 언젠가 정리한다는 생각을 했습네다.할아버지 유언도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과 비적의 횡포를 역사로 기록하라는 것이었디요.할아버지한테 듣고,어렴풋하나마 어려서 실제 보아왔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의미에서 소설을썼던 것이외다.1957년 벌리중학을 나와 농사일 틈틈이 그런 꿈을 키우면서 실제 습작을 해왔디요.할아버지 유언과 내 꿈은 실로 오랜만에 이루어졌습네다』 김송죽의 「번개치는 아침」은 1983년에 출판되었다.원고를 탈고한지 꼭 18년만에 햇빛을 본 것이다.그에게는 물론 가족사를 문학적으로 정리했다는 뿌듯한 성취감을 안겨주었다.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속에서 차츰 멀어지고 있는 조선족들의 삶과 투쟁을 복원한 대서사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요즘 탈고한 장편소설 「관동의 밤」도 북만의 독립운동사를 형상화한 것이다.자그마치 75만자나 되는 작품을 출판할 길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
  • 평화회담 성공 이끈 독립운동 영웅/마스하도프 누구인가

    45세로 무려 2년여에 걸쳐 계속된 러시아와의 내전기간중 체첸저항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체첸독립운동의 영웅이다.지난해 수개월동안 계속된 레베드 전 연방안보위 서기와의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기간중 체첸협상대표를 맡아 국내외 언론에도 얼굴이 익히 알려진 인물.협상과정을 통해 드러났듯이 러시아측으로부터 체첸지도자들중 그나마 「말이 통하고 실용주의적인 입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고있다.지난 6일 체첸주둔 러시아군이 완전철수하고 이번 선거가 무리없이 치러진 것도 상당부분 그의 이러한 온건적인 입장 덕분이라고 보는 이가 많다.내전기간중 산하에 5천명의 정예 게릴라부대를 이끌었으며 이전에는 러시아군에서 포병장교로 복무했다.협상타결을 위해 체첸독립을 5년유예하는 조건으로 러시아로부터 자치정부수립이라는 타협을 이끌어냈으나 앞으로 주민들의 독립열기와 러시아의 독립불가 입장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쉽지않은 숙제를 안고있다.
  • “동티모르 예비정부 구성”/국내외 독립운동가 망라

    【시드니 AFP 연합】 동티모르 저항운동은 국내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포함된 예비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지난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동티모르의 독립운동가 호세 라모스­오르타가 24일 말했다. 라모스­오르타는 이날 호주 SBS 라디오와의 회견에서 미래를 대비한 대안으로 정부구성문제를 생각해야만 한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 독립운동가의 딸들(송화강 5천리:15)

    ◎“반동”낙인 찍혀 은둔… 90년대 양지로/김좌진 장군 외동딸 한때 「가짜」 오해받아/중국인­부친 옛동지 손에서 불우한 어린시절/문혁때 화입을까 유품 모조리 불태워/흑룡강성 승소운 할머니 마지막 꿈은 고국방문 그 유명한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은 마지막 부인 김영숙과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지금 흑룡강성 목단강시에 살고있는 김산조 할머니가 장군의 딸이다.장군은 1927년 단오를 이틀 앞둔 날 참모들의 간곡한 권유로 당시 19세 처녀를 부인으로 맞았다.그리고 나서 다음해 딸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산조여사의 나이는 올해 69세이다. 산조는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해림(현 목단강시 해림현)에 살던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아버지 김좌진 장군을 만나러 산시로 가다 옥수수밭에서 낳았다.어머니는 뒤따라온 일제 끄나풀 손에 죽음을 맞았으나 산조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당시 상황으로 어쩔수 없었던 장군은 딸을 중국인 집에 주었다.장군이 세상을 뜨자 측근들이 중국인 한테서 찾아다 영안현 해남촌 산골에서 길렀다.해림 일대에서는 산조가 장군의 딸로 널리 알려져 화를 피해 산골에서 키웠던 것이다. 1949년 연수현에 정착한 산조는 위정규와 결혼하고 1953년 지금 사는 목단강시로 나앉았다.지금은 남편과도 사별하고 30㎡가 될까말까 하는 비좁은 아파트에서 외동딸 위련홍(47)내외와 함께 살고있다.자동차 수리공장에 다니는 딸과 전동기정비공장 공정사로 일하는 사위 김재원(48)에게 얹혀서 산지도 꽤 오래되었다.딸 부부가 한달에 버는 돈은 750원에 지나지 않아 살림살이 밑천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일제 앞잡이에 모친 잃어 그녀가 어렸을때 보살펴 주었던 사람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의 측근이었던 김기철이었는데 그도 1946년에 세상을 떴다.양부이기도 했던 김기철은 임종 직전 김좌진 장군에 관한 기록을 딸 산조에게 넘겨주었다.한때는 귀중하게 보관했지만 귀신도 무서워 치를 떨었다는 문화대혁명을 맞아 모두 불태워 버렸다.김좌진 장군의 딸이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죽음을 면치 못할 판국이었거니와 외동딸 위련홍의 장래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장군의 유품이라고는 체력단련을 할 때 쓰던 석마돌 하나가 혜림시 산시진 동광촌 마을 빈터에 남아있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전의 독립운동가들은 반동적 민족주의자로 낙인 찍혀 그 후손들의 처지도 말이 아니었다.그 무렵 세상을 살면서 목이 메도록 고마웠던 일이 하나 있다면 딸 위련홍의 결혼이다.산조는 딸의 혼담이 오갈때 신랑집에 『없던 일로 하자』는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그 이유로 『출신 성분이 나쁘다』고 했더니 신랑집에서 펄쩍 뛰었다.『출신이 무슨 상관인가,사람을 보고 며느리를 삼자는 것인데…』라고 오히려 신랑집에서 우겨 혼례를 치렀다. 그런 사연으로 해서 김산조 할머니는 1990년에서야 비로소 출생성분을 밝혔다.한때 학계가 「가짜 장군의 딸」이라고 한 것은 사실상 당연했는지도 모른다.갑자기 나타난 김좌진 장군의 딸 김산조.그녀의 정체는 끝내 진실로 드러났다.불을 종이에 쌀 수 없듯이 역사의 진실이 밝혀져 지난 1995년 한국에서 열린 「95세계한민족축전」에 초대되었다.그래서 외동딸과 함께 한국을 다녀왔다. 중국에서 한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장원급제 쯤으로 여기기 일쑤다.가난한 살림에 부대끼는 그들 모녀가 축전이 끝나자마자 중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놀랍기도 했다.이어 지난해 7월6일 두번째로 한국을 찾았을 때는 대통령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시계를 선물로 받았다.고국이 자랑스럽기는 했지만 한국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또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다.김산조 할머니는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과 선물 받은 시계를 내보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가난으로 해서리 굶어 죽어도 아버지 이름에 먹칠을 할 수는 없디요.그러지 않아도 불법체류 조선족이 많은 판에 이 늙은이까지 눌러앉으면 무슨 꼴이 되겠습네까.좋은 사이는 좋은 사이로 지켜야디요』 흑룡강성 수분하시 남2조가 17호에 사는 승소운(78) 할머니도 김산조 할머니와 도토리 키재기를 할 만큼 같은 처지의 독립운동가 후손이다.평북 정주군 신안면 안흥동 태생인 그녀는 15세 때인 1934년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승정균을 잃었다.그녀는 흑룡강성 쌍압산시에서 교편을 잡다가 1978년 퇴직하고 지금은 여관업을 하는 딸 주정숙씨(56)와 함께 살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과 기념사진 그녀의 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독립운동가였다.경술국치때 요령성 환인으로 건너와 1913년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1917년에는 배달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 승진(1890∼1931년)이 바로 그녀의 백부다.1920년에는 편강렬·양기탁 등과 의성단을,1924년에는 정의부를 조직한 승진은 동아일보 길림지국장을 맡기도 했다.그러다 일제 끄나풀 권수정 일파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둘째 백부 승병균(1893∼1920년)은 당시 봉천성 통화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군의 습격을 받아 배달학교 직원들과 함께 순국했다. 한국에서는 이들 형제의 독립운동 공로를 기려 백부에게 건국포장을,둘째 백부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는 것이다.북한을 다녀온 승소운 할머니의 딸 주정숙 여사의 말을 들어보면 고향 정주에서도 이들 형제를 알아주는 모양이다. 『할아버지 형제들이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사용했다는 움집터가 남아있습데다.그리고 큰 할아버지(승진)가 춘원 이광수와 오산학교동기동창이라는 말도 정주에 가서 들었디요.삼형제분이 고향을 떠나면서 마을에 전답을 내놓고 조상 무덤을 보살펴달라는 부탁도 했다고 기래요』 승소운 할머니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백부의 힘이 컸다.아버지가 죽음을 맞자 백부가 친분이 두터웠던 중국인 동선교에게 어린 소운을 맡겼다.북경대학 출신의 엘리트였던 동선교는 그녀를 키웠을 뿐아니라 공부도 시켜주었다.그래서 가목사시 화천중학 사범반을 졸업하고 교편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백부 승진과 함께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동선교는 광복이후 가목사시 시장,흑룡강성법원장,길림성 정치협상회의 사무국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녀의 소원은 한국을 한번 가보는 것이다.그래서 지난 1955년 광복50주년때 고국참관을 희망했는데 초청을 받지 못했다.실망이 너무 큰 나머지 풍을 맞고 쓰러진 그녀는 지금 겨우 몸을 움직일 정도가 되었다.그러나 아직도 한국방문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부친 3형제가 독립운동 『아버지 삼형제께서는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습네까.하늘도 무심하시디….그 세분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만 모질게 살아 남았수다.살대로 다 산 몸입네다만,독립한 고국에 가서 독립기념관을 한번 둘러보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디요.그래야디 저승에 가서라도 세분 아버지 형제들께 들려드릴 이야기 꺼리가 생기디…』 김산조와 승소운은 둘이 다 독립운동가의 딸이다.딸네집에 얹혀산다는 것까지 공통점을 가진 비극속의 여인들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이들 여인에게 엇갈리는 명암이 없지도 않았다.그 명암은 그토록 가고 싶은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과 방문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 마이클 콜린스·섀도 프로그램/설 극장가 외국화제작 “밀물”

    ◎마이클 콜린스­아일랜드 독립영웅 일대기 그린 영화/섀도 프로그램­대통령 암살음모… 일급 스릴러·액션물/대부분 할리우드 작품… 몇편은 “수작” 평가 2월8일 설을 앞두고 외국에서 큰 화제를 불러모은 영화가 잇따라 들어온다.이번 주말부터 극장가에 붙는 화제작은 「마이클 콜린스」「섀도 프로그램」「샤인」「에비타」「제리 맥과이어」「러브 앤 워」「조강지처 클럽」 등.이들은 할리우드제품이 대부분으로 몇편은 작품성을 인정받아 아카데미상 물망에 올랐고,몇몇은 미국 현지흥행에서 선두권을 달린다.이 가운데 1월에 선보이는 작품은 세편이다. 18일 개봉하는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 독립영웅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영화.신출귀몰한 활약으로 대영제국으로부터 조국해방을 얻어낸 마이클 콜린스는,그러나 1926년 반대파에게 암살돼 31세로 생을 마감한다.이후 그의 동지인 발레라가 집권,아일랜드 초대대통령에 취임한다. 숱한 독립운동가의 말로가 그러하듯 콜린스도 조국의 역사책에서 삭제될 만큼 아직 역사적 평가에서는 논란의 대상으로 남은 인물이다.이와 상관없이 영화는 젊은 독립투사의 불꽃 같은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북아일랜드 출신 리암 니슨이 콜린스역을 열연했고,「귀여운 여인」 줄리아 로버츠가 그의 연인으로 출연한다.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대상)과 남우주연상을 차지했으며 오는 3월 열리는 아카데미상에서도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25일 개봉작은 「샤인」과 「섀도 프로그램」2편이다.「샤인」은 현존하는 피아니스트의 삶을 실화로 엮은 호주영화.데이비드 헬프갓(51)은 10대에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는 평을 들은 신동이다.아버지의 지나친 집착에 시달린 그는 정신질환을 앓게 되지만 점성술사인 중년여인의 사랑에 힘입어 재기한다는 내용.호주의 연극배우 제프리 러시가 주연을 맡아 일약 세계적인 연기자로 발돋움했다.전미 비평가협회는 이 영화를 96년 최우수작품으로 뽑았고,러시는 이미 뉴욕비평가협회·LA비평가협회에서 남우주연상을 차지했다.역시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남우주연상에 거론된다. 「마이클콜린스」와 「샤인」이 작품성을 앞세운 영화라면 「섀도 프로그램」은 철저하게 재미를 앞세운 액션대작이다.미국 권력층 상부에서 대통령 암살음모를 진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통령보좌관이 온갖 위험을 뿌리치고 이를 저지한다는 간단한 줄거리.그러나 시시각각 다가오는 암살자의 그림자가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일급 스릴러액션물이다. 클린턴 대통령의 일급참모로서 두차례 선거에서 큰 공을 세우고 최근 백악관을 떠난 조지 스테파노플러스가 자문을 맡아 사실성을 높이는데 한몫을 했다.지난해 11월 미국 대통령선거 전에 제작이 끝났지만 백악관의 요청으로 선거후 개봉하게 됐다는 후문이 돌아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 대만,달라이 라마 초청 승인/종교단체 명의

    ◎행정원 “중 정치쟁점 삼지말라” 【홍콩 교도 연합】 대만당국은 한 종교단체가 티베트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달라이 라마를 초청토록 허용했다고 중국시보가 5일 보도했다. 이 신문은 장효엄 외교부장과 임풍정내정부장을 포함한 고위관리들이 4일 모임을 갖고 달라이 라마 초청문제에 대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전했다. 중국은 달라이 라마가 대만을 방문할 경우 양안관계에 좋지못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거듭 경고해왔다. 그러나 장경육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은 달라이 라마가 종교 지도자로서 민간 종교단체의 초청으로 대만을 방문하는 것을 북경당국이 정치적 쟁점으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대만 관영 중앙통신(CNA)이 보도했다.
  • 재러 고려인협회 초대부회장 역임 허진씨 별세

    재러 고려인협회 초대 부회장을 지낸 허진씨(본명 허웅배)가 뇌출혈을 일으켜 그동안 거주해 오던 모스크바에서 지난 5일 숨을 거뒀다.향년 68세.경북 구미출신으로 일제시대에는 중국에 거주하다 47년 북한으로 건너간 허씨는 6·25때 인민군 중좌로 참전했다.종전후 소련유학길에 올랐다 망명의 길을 택한 허씨는 이후 익명으로 유명한 저서 「김일성 평전」을 펴낸 바 있다.허씨는 한·소 수교이후 한국측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북한망명자들의 단체인 구국동맹의 상임위원으로 활약해 왔으며 모스크바 유라시아 국제대학교 이사장을 지내왔다. 유족으로는 독립운동가 후손인 미망인 최선옥 여사(63)와 1녀가 있다.발인은 7일 상오.유해는 귀국한 뒤 왕산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720­7444.모스크바 001­7­095­150­7981.
  • 광복회 회원 조계진 여사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며느리이며 애국지사 이규학 선생의 미망인으로 광복회회원인 조계진 여사가 21일 하오6시30분 별세했다.향년 100세. 조여사는 대원군의 외손녀이자 국민회의 이종찬 부총재의 모친이기도 하다.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의료원이며 발인은 25일 상오 9시.장지는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이다. 유족으로는 아들 종원(재미)·종찬씨,딸 정현씨 등 3남2녀가 있다.
  • 호은 김규식 장군의 딸(송화강 5천리:12)

    ◎박해·모진 가난속 넝마주이로 생 마감/독립운동하던 부친 자객들에 피살/5남매중 홀로 남아 남편도 잃고 “박복한 삶”/“독립운동가 자손” 한때 아들도 억울한 옥살이/어려운 살림에 상지시에서 “가장 유명한 거지”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김규식이라는 두 독립운동가를 만날 수 있다.우사 김규식(1881∼1950년)과 호은 김규식(1882∼1931년)이 그들이다.두 분은 모두 동만주와 북만주,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그러나 우사 김규식은 광복이후 남한에서 건국 기초작업에 참여하는 바람에 널리 알려졌지만 호은 김규식을 아는 이들은 흔치 않다.말하자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수도 있는 독립운동가인 것이다. 호은 김규식은 오늘의 중국 동북지방인 만주에서는 김규식 장군으로 더 유명했다.1910년 경술국치때 만주로 망명한 그는 흑룡강성 주하현 하동에서 최후를 마쳤다.흑룡강성 연수에서 학교를 꾸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인재를 양성하던 중에 교사를 초빙하러 하동에 왔다가 죽음을 맞았다.이붕해라는 사람 집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그 집자리는 지금 온데간데 없고 논으로 변했다.논 한가운데에 콘크리트 전주가 말없이 서있다. 그를 죽인 사람들은 한족총연합회 경비대원 유희춘 등 5명의 흉한들이었다고 한다.그들은 장군의 시신을 마을앞으로 흘러가는 마의하에 던졌다.그는 슬하에 5남매를 두었으나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아들 넷은 모두 죽었다.세째 현이(1912∼1931년)는 아버지 원수를 갚겠다고 집을 나갔다가 주하현 석두자하에서 피살되었다.맏아들 현욱(1901∼1931년)은 밖에 놀러나간 아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나갔다가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둘째인 현성(1904∼1946년)과 넷째인 현윤(1919∼1945년)은 병사했다. 그렇게 아들 넷은 세상을 떴다.장군의 혈육이라고는 딸 하나가 달랑 남게되었다.지난 3월 흑룡강성 상지시에서 80살 노령으로 모진 삶을 마감한 김현태 할머니다.그 할머니를 만난 일이 있다.독립운동가 오수암 의사의 딸 오금손 여사와 연변사회과학연구원 강용권 선생(서울신문 12월5일자 11면)과 동행한 자리에서 만났다.일행은 목단강시에서 기차를 타고상지시로 갔다.상지시 민족사무위원회 책임동지의 안내로 할머니가 사는 집을 찾았다. ○마을앞 하천에 시신버려져 상지시 시교에 있는 집은 낮은 벽돌집들이 촘촘히 들어앉은 줄집이었다.집은 아주 비좁았다.한족식 가옥구조라서 봉당이 크고 온돌이 작은데다 부엌까지 따로 있기 때문에 집은 한마디로 북통만했다.살림이라고는 낡은 식탁과 궤짝 몇개가 있을 뿐 흔한 흑백TV 수상기 하나가 안보였다.김현태 할머니는 손님이 온다는 전갈을 받고 아들 김무위(63)의 부축으로 간신히 서서 우리를 기다렸다.허리가 잔뜩 굽어서 지팡이를 놓으면 금새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도 총기가 좋아서 지나간 일들을 또렷이 기억해냈다.한국에서 찾아온 손님 오금손 여사의 아버지 오수암 의사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있는 판이니 자신의 아버지 김규식 장군의 죽음을 어찌 잊겠는가.이제 눈물도 메말랐을 법한데 연신 눈물을 흘렸다.눈물을 훔치는 손이 삭정이처럼 앙상했다.한참만에 눈물을 거둔 할머니는 옛날을 이야기했다. ○낡은 식탁·궤짝살림 전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을 받고 둘째 오빠와 같이 하동으로 갔디요.마의하 물에서 며칠을 지냈으니 시체가 말이 아닙데다.집을 나가실때 입은 옷을 보고 아버지라고 생각했습네다.얼굴은 못 알아보게 부어있습데다.명주수건으로 얼굴을 싸고 새옷을 갈아 입힌 뒤 입관을 했디요.그리고서리 마의하 버들방천에서 화장하고 유골은 물에 뿌렸수다.묘소도 없디요』 김현태할머니는 광복 이듬해 남편 김순철과 사별했다.지난 1974년에 작고한 어머니(주명수)와 아들(김무위)을 데리고 어렵게 살았다.한국 같으면 독립운동가 자손이면 대접을 받았겠지만 중국은 사정이 달라 오히려 박해를 받았다.아들 김무위는 한때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 나와 이혼녀와 늦장가를 들었다.그리고 쌍둥이 손자를 보았다.그러나 며느리는 쌍둥이를 낳아주고 집을 나가버렸다. 일가는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상지시에서 김규식 장군의 딸로 소문난 연유도 알고보면 가장 유명한 거지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모자는 아침 일찍부터 넝마를 주웠다.장군의 외손자인 김무위는 끼니를 지어 먼저 모친을 대접하고 그 다음 한창 먹성좋은 쌍둥이를 먹이고 나면 자기 배를 채울 것은 늘 없게 마련이었다.한번은 배가 하도 아파서 병원엘 갔더니 창자가 붙어서 그렇다는 진단을 받은 일도 있다. 오금손 여사는 김현태 할머니를 만나고 나서 일가족을 식당으로 불렀다.식당에서 한상을 차려내왔지만 그들 일가족은 음식을 축내지 못했다.난생 처음 대한 기름진 요리가 비위를 거슬렸던 것이다.오여사는 다음날 중국돈 500원과 옷 한벌씩을 건네주고 작별했다.그런데 이듬해 오여사는 김현태 할머니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생전에 한번 더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받자마자 오여사는 부랴부랴 중국을 찾았다.자식도 없이 연금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처지로 버거운 것이었지만 다시 할머니를 만났다.현금도 얼마 내놓고 밀가루와 쌀을 듬뿍 사놓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독립운동 연락책으로 활동 오금손 여사는 김현태 할머니 생애에서 처음으로 생활의 깊은 구석까지를 보살펴준 사람이었다.두 여인의 아버지들이 일찍 이청천장군 휘하의 투사로 한 배를 탔던 동지들이라 할수 있다.특히 김현태 할머니는 어린 시절 오여사의 오수암 의사에게 무기보관장소를 연락해주는 등 실제 독립운동을 도왔다.그래서 두 독립운동가의 딸들은 남다른 애정을 느꼈을 것이다.이러한 사실이 강용권 선생의 글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손자 쌍둥이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아이들의 학비를 감면해주었다. 강용권 선생도 현금 200원과 한국에서 출판한 「만주 항일유적 답사기」를 할머니 아들 김무위에게 보내주었다.그로부터 석달이 지나서 이런 답장이 왔다. 「선생님이 보내신 돈과 책을 잘 받았습니다.아깝고 쓰라린 것은 선생님의 서신을 받기 3일전 불쌍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입니다.사흘만 더 사셨어도 선생님의 저서를 보시고 기뻐하셨을 텐데….선생님,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틈 나시면 소식주시기 바랍니다.그렇게 해주신다면 더 이상 고마운 일이 없겠습니다」 그 김무위의 편지가 오던날 독일국적의 한국인 안풍길씨(65)가 연길 강용권 선생 사무실에 들렀다.그는 독일에 간 한국인 광부 출신이었는데 역시 독일에서 간호원으로 일했던 함청자여사와 동행했다.부부는 편지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그들 부부는 중국돈 1천원을 내놓고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 유가족들이 사회 무관심속에 사는 것은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지금은 좋아졌다고 하나 더 관심을 가져야지요.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여긴 독립유공자들의 후손이 근근덕식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방법이 있으면 도와줘야 합니다』
  • 1898∼1947년 「제국의회 비밀회의」 속기록 공개

    ◎일,조선인 노동자 강제·조직원 동원/다나카 총독부총감 “징병 안된 모든 사람 데려온다”/내무성 적극개입 확인… 소 참전사실 두달전에 인지 일제가 제2차세계대전중 일본 국내의 노동력 확보를 위해 조선인 노동자를 사실상 강제적·조직적으로 동원했던 사실이 6일 공개된 일본 중의원의 1898년(메이지 31년)부터 패전후인 1947년까지의 「제국의회 중의원 비밀회의」 속기록에서 확인됐다. 88건의 속기록중에 포함된 다나카 다케오(전중무웅)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44년 2월 답변에서 다나카는 『(조선인 노동자가 없으면) 내지(일본)의 생산이 중단된다고 말을 듣고 있어 가능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서 『올해는 내무성의 막대한 협력으로 그같은 문제가 해결돼 기쁘다』고 말했다. 다나카는 이어 강제연행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군대에 가지 않은 자는 전부 노동자로 내지에 데려 온다』고 설명,조선인 동원이 징병과 같은 수준에서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뒷받침했다.그는 조선인 노동자의 차별과 관련해서는 『내지인의 태도에 모멸이 거듭되고 있다』면서 『원인을 내지인이 만들고 있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고 말해 일본인들이 차별을 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또 44년 무렵 『조선의 독립운동이 한층 고조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미국 소련 중경세력(국민당정권)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운동을 사주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답변,당시 열강과의 협력하에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음을 증언했다. 한편 침략전쟁 막바지 식량확보방안과 관련,시바야마 육군성차관은 『조선으로부터 식량을 나무통에 담아 해류를 이용해 일본에 보내고 있다』고 말해 마지막까지 조선을 착취해 전쟁을 수행했음을 보여주었다. 한편 소련이 소·일 중립조약 불연장방침을 통보받은 직후인 45년 6월의 전시긴급조치법위원회에서는 도고 시게노리 외상이 이와관련,『조약이 지켜지리라는 것을 절대적이라고 믿기 어려운 사태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해 소련의 참전(45년 8월8일)을 두달전에 각오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같은 판단은 일본군부가 패전이 확실했음에도 불구,전쟁을 계속한 사실등은 외면한 채 소련의 일방적인 중립조약 파기와 대일참전을 패전의 주된 요인으로 돌리면서 러시아를 비난해 온 일부 인식과 관련해 주목된다.‘도쿄=강석진 특파원>
  • 약육강식의 현장(송화강 5천리:11)

    ◎일제 「731부대」 인체실험 만행 생생히…/하얼빈 「죄증진열관」에 마루타의 원혼이…/목단강변엔 일군피해 몸던진 팔녀투강비가/동북3성 곳곳에 항일 유적지/자전거로 역사현장 2만리 답사나선 이도 하얼빈시 민족호텔에서는 유유히 흘러가는 송화강이 한눈에 조망되었다.그 강건너로는 중국 동북지방에서 이름난 위락지 태양도가 보였다.지난해 태양도에는 호랑이를 사육하는 동북호림원을 만들어 호기심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입장료 30원을 내면 지프를 타고 호랑이 무리 사이를 돌아다닐 수 있다.따로 돈을 더 받고 개 따위의 먹거리를 호랑이에게 제공하는 상술까지 동원되었다. 그러니까 약육강식의 현장이 호림원인 것이다.호림원에서 문득 떠오른 것은 약육강식의 세계는 어디 동물에게만 있는 것일까,하는 생각이었다.인간사회에도 분명히 존재했다.그 흔적이 바로 하얼빈시 평방구에 있는 「일본침략군 731부대 죄증진열관」이다.거기를 가보면 일본 침략군의 온갖 만행이 살아서 다가왔다.산 사람을 수술대에 올려놓고 각을 떠서 표본을 만드는장면,추운 겨울날 사람을 알몸으로 밖에 매어놓고 얼어죽게 하는 화면들이 영상으로 돌아갔다. ○과거숨기고 떠돌이 생활 죄증진열관 한효관장을 만났다.그는 일본침략군 731부대에 근무했던 당시 일본인 요원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을 찾은 일도 있는 인물이었다.731부대의 생존요원들로부터 일본에서 들은 여러가지 증언을 소상히 들려주었다. 『지금도 500여명이나 되는 731부대 요원들이 일본에 살고있어요.제가 일본에 갔을 때 100여명을 만날 수 있었지요.그 중에서 양심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과를 인정하더라구요.며칠전에는 여기를 찾아온 사람도 있었습니다.참회하는 기색이 역력합디다』 한효관장이 죄증진열관을 찾아왔다고 말한 장본인은 오바라 다케다루(79)라는 일본인이다.731부대 요원이었던 그는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가 이름까지 바꾸고 한 때는 떠돌이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731부대가 해산할 때 내린 부대장 명령때문이었다.부대장은 731부대에 근무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부대원 서로가 연락을 하지 말라는 명령도덧붙였다.가족에게도 지난날을 속인 그는 나이가 들면서 더 이상 속일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 죄증진열관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는 딸 오바라 바쿠코(44)와 동행했다.그녀는 전후세대여서 부친의 죄상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고 한다.당시는 전쟁기였던 만큼 그 문제로 죄값을 치러야 할지,아니면 징벌을 받지 않아도 되는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그러나 부친 오바라 다케다루 노인은 몇번이고 미안하다는 말로 참회의 뜻을 표했다는 것이 한효관장의 전언이다.절치부심했던 일제의 만행이 속죄만으로 어찌 지워지겠는가….역사는 영원히 기록할 것이다. ○조선족 독립운동 재평가 흑룡강성 목단강시 강변공원에는 팔녀투강비가 서 있다.일본군 포위에 든 8인의 항일여군이 송화강 지류 목단강에 뛰어들어 삶을 마감한 용기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이 8인의 항일여군 가운데 2인은 조선족 여인들이었다고 한다.그렇듯 피로 얼룩진 유적이 중국 동북3성에는 숱하게 널려있다. 그 숱한 피를 뿌린 항일유적지에 최근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다.죽은 이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이들을 끌어들였다.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의 독립운동이 올바로 평가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그 이전에는 민족주의 독립운동은 반동으로 취급되었다.그 세월이 너무 오랫동안 계속되어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많은 선열들의 넋이 대륙을 떠돌았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독립운동의 숨결이 밴 역사현장을 찾아나선 사람이 있다.연변사회과학연구원 강용권 선생인데,자전거로 218일 동안 7천500㎞를 달렸다.그 대장정의 자전거 답사에서 52개 유적을 살펴보고 600여명으로부터 독립운동사의 증언을 이끌어냈다.그의 자전거 바퀴는 길림·흑룡강·요령성 등 동북3성은 물론 멀리 하북성까지 다다랐다.그의 2만리 여정은 지난해 「만주 항일유적 답사기」라는 책으로 나왔다. 그는 책 머리에 이런 글을 썼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로부터 벌써 70년,이 전투에 30살의 청년이 살아있다면 100살이 되었을 것이다.키를 넘는 낙엽을 밟고 역사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는 것은,백년 산삼을 캐러가는 그런 희망 같은 것이었다.백년 산삼은 귀하다.그러나 산에 있는 것은 틀림없다.백년 산삼을 찾는 마음으로 그 어딘가에 남아있을 유적을 찾아나섰던 것이다」 그가 찾아낸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오수암 의사가 있다.한국 대전시 산성동 우성아파트107동 910호에 사는 오금손 여사(67)의 간청으로 오의사의 행적을 밝힌 것이다.그녀는 아버지 오수암 의사를 한 차례도 본 일이 없는 유복녀다.1930년 북경에서 태어난지 1주일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 친구인 국민당 왕진송 장군의 양딸로 자랐다.그러다 1943년 역시 아버지 친구인 오세덕이라는 분이 광복군 3지대에 데려다 주었다.광복이 되어 광복군을 따라 그녀는 귀국하고 말았다. ○600여명 증언 낱낱이 기록 그녀가 아는 가족사라고는 아버지 친구 오세덕으로부터 들은 것이 전부다.아버지는 독립군 오수암이고 어머니는 상해로 아버지를 찾아가다 숨졌다는 사실이 고작이었다.그리고 아버지의 가명만도 오흥삼,오운남등 12개에 이른다는 사실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개혁개방 이후 아버지의 행적을 찾기위해 1991년 중국에 왔지만,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 막막했다.그 때에 연변사회과학연구원 강용권선생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세 노인들로부터 증언을 듣게 되었다.그녀는 맨먼저 길림시에 사는 장인덕 노인을 만났다.만날 당시 92살이었던 노인은 1928년 참의부·정의부·신민부 통합회의때 간부로 일했던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이다.이어 흑룡강성 상지시에서 김규식 장군의 딸 김현태 노인을 만났더니 80살 노령인데도 오수암 의사를 기억해냈다.김규식 장군 장례식날 이청천 장군과 함께 그녀의 아버지 오수암 의사가 장례에 참석했다면서 오의사의 생일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오의사의 최후는 흑룡강성 쌍성시에 사는 퇴직교원 왕정 노인이 증언했다.1931년 이청천 장군의 독립군이 중국군과 함께 쌍성시를 공격하는 와중에 오의사는 중상을 입고 마을 목수집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다.왕노인은 당시 목수집 어린 아들이 동갑내기 친구여서 그 집에 놀러갈 때마다 오의사를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와 목수집을 덮쳤다.그 이후 부상한 오의사는 하얼빈으로 끌려갔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다.일본침략군의 731부대가 창설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니까,오의사는 마루타가 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그래도 지난해 731부대 죄증진열관을 찾은 오금손 여사는 시신을 태웠다는 굴뚝앞에 술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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