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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 역사·문화공간 늘리자/이문재(공직자의 소리)

    ○망우리 공원묘지 새단장 런던·파리 등 유럽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쯤 저명한 정치가·역사가·예술가들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이들이 잠들어 있는 ‘묘지공원’을 찾아간 기억이 있을 것이다.도심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묘지공원에 대해 유럽인들은 우리와는 정반대로 숲이 우거지고 갖가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묘지공원 주변을 쾌적한 휴식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묘지공원’이라고 하면 음산한 ‘공동묘지’를 떠올리곤 했다.한시바삐 묘지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IMF 시대를 맞아 우울한 소식만 접하고 있는 이 때 중랑구에서는 최근 서울 망우리 공원묘지에 나라사랑에 생을 바친 선열들의 자취를 새긴 연보비를 세우고 산책로를 정비했다.자라나는 2세들의 산교육장이 될 애국지사들의 얼이 살아 숨쉬는 역사의 장이 턱없이 부족해 안타깝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뜻있는 시민들로부터 과분한 격려가 쏟아졌다.시만들은 망우리 묘지공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이 개선됐다고 기뻐했다. 공원및 산책로 이름을 바꾸는 등 부정적인 인식을 씻는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세대별 다목적 활용 공간 애국지사 연보비 건립사업은 나라사랑의 참뜻을 후대에 전하고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한용운·방정환·오세창·지석영 선생 등 7인의 연보비는 지난해에 완료됐다.이번에는 독립운동가 문일평·서병호·서동일·오재영·서광조·유상규 선생,박인환·오긍규 선생 등 8명의 비가 세워졌다.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연보비에 애국지사들의 어록과 명구,약력을 상세히 기록해 누구든지 이들 애국지사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도록 했다. 5.2㎞의 산책로를 따라 각종 나무를 심었으며 휴식공간도 마련했다.산책로를 걸으면 선열들의 자취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망우리 묘지공원은 어린이들의 소풍장소,청소년들에게는 나라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역사의 교육장,문학을 사랑하는 이에게는 사색의 공간으로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주민의 복지증진 사업 말고도 주변에버려져 있는 공간을 역사·문화공간으로 가꿔나가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조금만 더 관심을 갖는다면 얼마든지 버려진 공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 곳곳에 나라사랑의 참뜻을 전하는 역사의 참 교육장이 속속 들어설 수 있게 되길 기대해 본다.
  • 도산 배우기/최홍운 논설위원(외언내언)

    겨레와 나라 위해 한 평생을 열정적으로 살다 간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의 정확한 사망시간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주요한의 ‘도산 전기’에는 “1938년 3월10일 밤,시계가 12시를 땡땡 치는 것과 동시에 도산의 맥박과 호흡이 끊어졌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1938년 3월10일자로 종로경찰서장이 경기도 경찰부장과 경성지방법원 검사정,각 경찰서장에게 보낸 경종고비(경성 종로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제 2468호 ‘안창호의 사망에 관한 건’을 보면 0시 6분으로,그리고 동대문경찰서장이 작성한 경동고비(경성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비밀문서) 제 1070호 ‘정치 요시찰인 사망에 관한 건’에는 0시 5분으로 돼 있다. 1∼6분의 차이가 있어 당시 시계의 정확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겠는가.민족의 큰 별이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에 떨어진 사실만은 분명히 전해주고 있다. 10일 상오,선생의 서거 60주년을 맞아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묘소에서는 신임 김의재 보훈처장과 권쾌복 광복회장,흥사단원 등 200여명이 모여 추모식을 가졌다.비록 조촐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뜻깊은 추모식이었다. 선생께서 그토록 염원했건만 결국 보지 못하고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던 조국의 광복이 이룩된 지 53년,그리고 나라가 세워진지 50년이 되었건만 우리는 지금 6·25이후 최대 국난으로 일컬어지는 IMF관리하의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 “밥을 먹어도 독립을 위해,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외친 민족주의 사상가 도산 선생의 가르침이 이토록 가슴에 와 닿은 적도 없었을 것이다. 선생의 가르침 가운데 특히 되새겨야 할 부분은 ‘서로 돕고 사랑해야 한다’는 뜨거운 민족애와 ‘폭력보다 정신력이 앞서는 독립운동’을 주창하고 실천한 평화주의,수감중 온갖 고초를 겪으며 심문을 받는 중에도 ‘조선민족 독립의 대업을 이루려는 것이 흥사단과 동우회의 목표’라고 분명히 밝힌 용기와 정직성일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때는 결코 자신이 나서지 않고 이승만을 앞세웠던 점도 정부요직 인사철인 요즘 생각해볼 일이다.‘무실역행’. 정신적인 실력뿐아니라 현실적인 실력도 길러 실천하는 길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할 일일 것이다.
  • 봄나들이/가족과 함께 ‘선열의 얼’ 되새기자

    ◎천안 유관순 열사 추모각­봉화대­생가 등 유적지 인접/홍성 한용운·김좌진 장군 생가도… 하루 코스로 적격 79년전 우리 선조들은 3월1일을 시발로 일제에 맞서 근 3달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그래서 3월은 우리들에게 설레임보다는 숙연하게 다가온다. 절기상으로는 봄이지만 봄나들이를 나서기에는 아직 이르다.3월을 맞아 독립투사의 생가 등 항일운동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다. 독립투사들의 생가를 보려면 충남으로 가야한다.유관순 열사는 천안에서 태어났고 윤봉길 의사는 예산,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은 홍성출신이다.충남에 독립운동가들이 많은 것은 충청도가 예로부터 충절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있는 유관순 열사 유적지는 추모각,봉화대,생가가서로 가까이에 있어 순회코스로 안성마춤이다.천안시내에서 독립기념관으로가는 21번 국도로 나가 18㎞정도 가면 아우내장터가 나오고 이 곳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열사의 영정을 모신 추모각이 있다.추모각을 구경한뒤 추모각 뒷편의 매봉산에올라 독립운동 거사를 알리기 위해 봉화를 피운 봉화대를 둘러보고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생가가 나타난다.모두 다 둘러보는데 1시간이면 된다. 김좌진 장군과 만해 한용운의 생가가 있는 홍성은 인근의 용봉산과 천수만 방조제를 연계하면 하루 단위 나들이길로 적격이다.먼저 충남 서부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홍북면 용봉산으로 가 1∼2시간 땀을 흘린다.하산길에 점심식사를 하고 생가터로 발걸음을 옮긴다.갈산면 행산리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생가터에는 24평 규모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기념관에는 국내 및 해외활동과 관련된 유품과 함께 영상자료가 전시돼 있다.이 곳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는 한용운 생가가 있으며 생가를 거쳐 방조제로 가면 된다. 윤봉길 의사는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출생했다.시량리에는 윤의사가 태어나서 4살때까지 살던 광현당,중국으로 가기 전인 23살때까지 지냈던 저한당,윤의사의 사당을 모신 충의사와 유물전시관,충의관 등이 4만2천여평의 경내에 보존,관리되고 있다. 서울에는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종로2가 탑골공원,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이 있다.3·1운동의 발상지인 탑골공원은 189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이다.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운동 기념탑,3·1운동 벽화,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과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서대문 독립공원은 일제시대 유관순,손병희 등 애국지사가 수감돼 있었던 곳으로 지난 92년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조성된 곳이다.감옥 7동,사형장,지하옥사 등이 복원됐으며 독립문,3·1운동기념탑,순국선열 추념탑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의인 대거 배출된 충청도 충청지역은 예로부터 충절의 고향이라고 불려 왔다.이러한 사실은 실제로도 입증된다.1900년부터 1973년까지의 명사 150인을 분석한 한 조사에 따르면 충남은 독립운동가 부문에 6명(유관순,윤봉길,김좌진,한용운,이범석,조병옥)이 올라 10명인 서울 다음으로 2위에 올랐다.조사 당시 서울인구가 충남인구의 두배가 넘는 것을 감안하면 인구비례로는 충남이 서울보다 훨씬 높은 셈이다. 충남에서 의인이 많이 배출된 것은 역사적으로도 뒷받침된다.사육신인 성삼문(홍성),박팽년(대전)을 비롯,북벌론을 주장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이 회덕출신이다.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이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실질적인 고향은 아산이고 구한말 의병운동이 가장 먼저,가장 강하게 일어난 곳도 충청지역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충청지역은 일찍부터 충절 또는 민족의식이 저변에 강하게 깔려 있었고 이러한 전통이 독립운동가 배출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송시열로 대변되는 기호학파가 200여년간 지배세력이었다는 것도 간과할수 없다.즉 나라를 잃은데 대한 책임의식이 그만큼 강할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충청인의 기질을 보면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처럼 대체로 행동이 점잖고 느린 편이다.이 말은 뒤집어 보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행동은 신중한 것으로 해석된다.즉 충동적이기 보다는 심사숙고하며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바로 이러한 요인이 어려운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모범을 보여주게 된 동인이었는지도 모른다.
  • 항일무장투쟁 취지서 첫 공개

    ◎1910년 러 동포 7백여명 단체결성때 발표/유인석 등 서명… 3·1독립선언보다 9년 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항일 무장투쟁을 호소한 러시아지역 독립운동단체의 결성 취지서 한글판 원문이 88년만에 최초로 공개됐다. 국가보훈처 사료연구위원 박종효씨(전 모스크바대학 교수)가 3·1절 79주년을 앞두고 러시아 문서보존소에서 입수해 26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이 취지서는 1910년 8월23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거주하던 동포 7백여명이 한인학교에 모여 항일단체 성명회를 조직한 뒤 발표했다. 그동안 취지서의 내용은 부분적으로 알려졌으나 한글판 원문 전체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취지서에는 ‘오호 통재라,동포여 동포여 오늘도 가히 참을까.이 문제도 가히 용서할까.이 문제는 우리 대동역사의 최종 문제가 아닌가.우리 대한동포의 무장을 입을 날도 오늘이며 피를 뿌릴 날도 오늘이로다’는 등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취지서가 발표된 뒤 러시아 지역은 물론 국내에서도 항일 비밀결사대가 조직돼 일본인 거주지를 습격하는 등 무장독립투쟁의 계기가 됐다. 특히 이 취지서를 바탕으로 이상설 선생을 비롯한 러시아거주 한인 8천624명이 서명한 성명회 선언서가 공식 발표돼 한민족의 독립결의를 세계만방에 알렸으며 이후 국내외 항일운동과 독립선언서 등에도 큰 영향으로 미쳤다. 취지서에는 구한말 대표적인 의병지도자 유인석,이범윤,김좌두 선생을 비롯해 러시아지역 한인지도자 김학만,차석보,김치보 선생 등의 서명이 담겨있다. 박씨는 “이 취지서는 1917년 대동단결선언,1919년 3·1독립선언서 보다 앞선 선구적인 것”이라면서 “특히 7백여명의 한인이 모인 가운데 대중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독립 취지서라는 점에서 독립운동사의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 야당세력의 형성(대한민국 50년:8)

    ◎48년 8월 한민당 “이승만정권에 투쟁” 선포/조각 배분 푸대접 받자 초대총리 지명 인준 부결/보수세력에 지나치게 기대 ‘보수야당’ 성격 고착 이승만정권에 대응한 야당세력의 출현은 바로 한국민주당에서 비롯된다. 한민당은 미군정기인 45년 9월16일 좌우대립속에서 지주세력 등 우익측 인사들로 결성된 보수반공연합체 정당으로 출발했다. 중경의 임시정부를 정통정부로 추대하고,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인민공화국 타도를 모토로 내걸었다. 한민당은 창당 당시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의 임정요인들을 지지하고 이들과 함께 반탁운동을 전개했으나 김구 등 임정세력들과의 노선차이로 결별했다. ○건국까지는 손발 맞춰 그러나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 한민당은 손발을 맞춰 건국까지 이끈다.이승만과 한민당의 관계는 ‘정약결혼’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이승만은 그들의 국내 지지기반이 필요했고 대신 한민당은 이정권에서 권력을 주도하려는 야심이 있었던 것이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이승만은정약결혼속에서도 내심 ‘친일정당’으로 비판받던 한민당과 계속 제휴하는 것은 자신의 노선까지도 손상받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48년 7월20일 제헌국회에서 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꿔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바로 조각작업에 착수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드러냈다. 먼저 한민당이 국무총리로 내세운 당위원장 김성수안을 거부하고 조선민주당 부당수였던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국회인준을 요구했다. 이에 한민당도 기다렸다는듯 즉각 인준을 부결시켰으며,결국 이범석을 총리로 지명해 인준받은 이승만은 김도연에게 재무장관 자리 하나를 주는 것으로 한민당의 조각참여를 제한했다. 한민당은 이 사건을 ‘이승만의 배신’으로 간주하고 자연스럽게 야당의 길로 전향했다.한민당의 이승만에 대한 불만은 48년 8월8일 발표한 성명에 잘 나타나있다. 이 성명은 ‘…본당원으로서 정부에 국무위원으로 입각한 사람은 김도연 1인뿐이어서 극히 빈약하다.본당은 신정부에 대해 시시비비주의로써 임할 것은 물론이거니와…”라고 주장해 이승만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포한 것이다. 한민당은 본격 야당으로 강화하기 위해 대한국민당의 신익희 세력 등을 규합,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한민당은 창당 3년4개월만인 49년 1월26일 자연해체하게 되고 49년 2월10일에는 민국당으로 자리잡게 된다. 민국당은 이어 정부12개부처의 각료중 7명이나 차지해 세를 불려나갔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서는 내각책임제 개헌밖에 없다고 여겨 이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민국당은 50년 1월 79명의 서명으로 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50년 3월14일 국회 본회의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표결에 부쳐졌으나 부결로 끝났다. ○49년 2월 민국당 창당 하지만 민국당은 동조자를 확보해 계속 이정권에 도전하는 공세를 펴나갔다.민국당 신익희의 국회의장직 진출로 민국당이 반 이승만세력을 한창 규합해 갈 즈음 6·25전쟁이 일어났다. 이로써 국회활동도 중단되고 정쟁은 사그러지는 듯 했으나 이승만측의 정권에 대한 욕심은 굳건했다.전쟁중에도 민국당이 차지한 의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선거를 치르기 위한 직선제 개헌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어 청·장년들을 강제징집·수용해놓고 간부들은 돈을 횡령한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겪으며 정부불신임이 팽배해지면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는 마침내 이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야당 국회의원들을 마구 잡아들인 ‘부산정치파동’으로 연결돼 반정부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문헌들에서 한민당은 흔히 기본적인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로,또한 이승만의 독재적인 행정부 권력에 맞서는 의회 특권의 수호자로 묘사돼있다. 그러나 한민당은 사실상 토지와 지방권력등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군림했으며 재원의 분배와 부의 통제를 둘러싸고 중앙 행정권력과 투쟁을 벌일 뿐이었다. ○6·25중에도 개헌 추진 미 중앙정보국(CIA)은 당시 한국 국회를 대한민국 내의 ‘민주주의 정신의 터전’이고 흔히 입법부에서의 논의가 정부관리들과 가열된 공방을 야기시켰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이 국회가 ‘서구의회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며’ 집행부에 대해서는 전혀 효과적인 억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승만의)‘보나파르티즘’(Bonapartism)에 어떤 장애도 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한민당은 민주국민당으로 변신해서도 국가관료의 고위지도부에 계속 참여했다.49년초 도지사,시장,군수등의 명단은 45∼46년 지방관리들의 명단과 놀라울 정도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한민당이 야당으로 자리매김했으면서도 이승만정권의 정책에는 동조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한민당은 이승만의 보수주의적 반공노선에 동조함으로써 혁신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면서도 자기 지분을 늘리기 위해 6·25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의원내각제 개헌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이는 CIA가 50년 당시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경쟁’은 ‘보수지도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했다’고 평가한데서도 알 수 있다. 한민당은 수많은 당명의 교체속에서도 현재까지 한국 야당의 명맥을 이어준 ‘뿌리’로 치부되고 있다.그러나 첫 야당이 보수세력에 지나치게 기댐으로써 지금까지 한국정치에서 야당의 성격을 보수로 규정하게 만드는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야 한민당 관료기구 주도”/49년 미 관리 작성 ‘남한정세 조사’ 보고서 확인 이승만정권시기 관료기구에서 한민당의 주도성과 한계는 1949년 3월 미국관리 맥도널과 로지엘이 직접 대한민국 전역을 여행하며 작성한 ‘남한 정세의 조사’라는 보고서와 미국무부 문서 등 당시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한 정세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각 지역의 도지사·시장·군수 등은 1945∼46년 미군정기 지방관리와 거의 일치함을 보여준다.한민당이 이승만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언했으면서도 관료기구를 주도했던 것이다. 한민당 후신인 민주국민당도 역시 ‘산업가 및 지주들’의 후원을 받는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정당이었다.따라서 이승만정권과 이들 야당세력 사이에는 ‘권력을 향한 경쟁 이외에는 모든 것이 부차적’이었으며 ‘내부 파벌투쟁 또한 강력해 하찮은 자극에도 당을 뛰쳐나가게’ 만들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의 야당은권위주의적 통치권을 획득하려는 노력에 의해 움직여졌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체질적 요소가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미 공문서 기록관리청(NARA) 국무부 일반문서중 50년총선관련자료(Developments concerning the 1950 general election)에 따르면 당시 한국 정당의 정강은 유교체제탓인지 정부에 대해 온정적 시각을 담고 있다고 표현돼있다.게다가 당시 이는 정강자체는 의미없는 것으로 여겨져 부실한 정당정치를 알 수 있다.이들간에 이데올로기의 차이도 권력투쟁에 있어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민국당과 대한국민당 양대정당 사이의 주요한 이슈는 민국당이 행정부에 반대하고 국민당은 지지한다는 차이,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국민당 당수 윤치영도 주한미대사관 관리에게 개인적으로 “우리 당과 민국당의 위치에 큰 차이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 민국당은 자유주의를 공언했으나 산업가,지주 등의 지지를 등에 업어 보수정당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 국무회의(대한민국 50년:6)

    ◎48년 첫각의 단기냐 서기냐 갑론을박/50년대 미 기록 “이승만 독주로 요식행위에 불과”/5·16후 한동안 일요일 빼곤 매일 열어… 시국 반영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기 꼭 열흘전인 1948년 8월5일 중앙청 2층 이시영 부통령실. 이범석 전 민족청년단장을 비롯해 장택상 윤치영 김도연 이인 조봉암 유진오씨 등 당시의 ‘거물’들이 한사람씩 들어섰다.이승만 박사가 7월20일 간접선거에서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뒤 지명한 국무총리와 장관들이었다.신임각료들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이대통령이 들어섰다.장관들은 예를 갖춘뒤 회의에 들어갔다.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로 이대통령이 주재한 사상 첫 국무회의였다. 회의를 하는 동안 이대통령과 각료들은 약간 흥분해 있었다.일제 때의 독립운동,미군정하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초대 11부3처장관 출범 국무회의는 정부가 수립됐다는 감격의 상징이었다.흥분을 삭이고 국무위원들이 다룬 의제는 구미지역에 특사파견문제.신생국가에다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외국의 국가승인을 위한 외교가 절실했던 탓이다.미국과 구라파지역에 특사로는 조병옥 박사와 김활란 여사가 임명됐다.특히 조박사의 임무는 미국의 주한 미군철수계획을 저지하는데 모아졌다.조박사의 노력에도 미국 설득이 여의치 않자 이대통령은 장면 박사를 초대 주미대사로 파견했다. 초대 11부 4처의 장관을 맡은 국무위원들은 각 정파의 분배를 고려한 연립내각으로 이뤄졌다.이대통령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소속은 윤치영 내무·전진한 사회·이청천 무임소장관 뿐이었고 김도연 재무장관은 김성수씨의 한국민주당,임영신 상공은 여성국민당수,김병연 총무처장관은 조선민주당 소속이었다.그외에 장택상 외무장관은 전수도 경찰청장,이인 법무장관은 전검찰청장,민희식 교통장관은 전군정청 운수부장,조봉암 농림 구영숙 보건장관은 무소속이었다.대학별로도 철저한 균분이 이뤄졌다.안호상 문교(서울대교수),유진오 법제처(고려대교수),이순택 기획처(연세대교수),정인보 고시위원장(국학대학장) 등이었다. 연립내각 구성은 국무총리 인준과정에서의 진통때문이다.이대통령은 7월27일 정부 공보 1호로 초당적이고 이북을 대표할 이윤영 조선민주당부위원장을 총리로 임명하는 추천서를 국회에 제출했다.반대세력인 국회의 한국민주당·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은 토의조차 거치지 않고 부결시켜 버렸다.대통령의 직무에 대한 국회의 첫 비토였던 셈이다.한민당은 김성수씨를 국무총리에 임명해줄 것을 기대했으나 이대통령은 이범석 민청단장을 총리로 지명했다.이초대총리는 한민당이 반대했으나 가까스로 인준됐다.국회는 그러나 민희식 유진오씨 등의 신임각료에 대해 친일논쟁을 제기하는 동시에 대통령에게 숙청을 건의해 최초 국무위원들은 첫걸음부터 삐꺽였다. 이대통령은 이런 논란끝에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했으며 미군정은 이날 자정을 기해 군정해제를 선포했다.해가 바뀐 49년의 첫국무회의는 1월3일 월요일 하오 3시30분 부통령실에서 열렸다.이대통령은 간단히 개회만 하고 국무총리와 내무장관이 사회봉을 이어받았다.법원조직법·검찰청법·변호사법 등 3건을 심의했고 이총리는 당시 주한 중국대사가 찾아와 한국을 정식 국가로 승인한다고 통보했음을 알렸다.당시로서는 정부의 체계를 세우고 외국으로부터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국가 승인이 국정의 최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미국인들이 남기고 있는 50년대 국무회의에 대한 평가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이대통령의 독주아래 힘 한번 쓰지 못하는 허수아비 회의라는 얘기다.사실 이대통령 때 뿐 아니라 대통령제하의 국무회의는 의례통과일 수 밖에 없었다. ○고 총리 ‘각의 활성화’ 마련 국무회의 의장인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하는 경우는 외국순방후의 설명,97년 국제통화기금(IMF) 차관도입 동의안 같은 주요사안을 심의할 때 뿐이다.의사봉은 대부분 부의장인 국무총리 몫이 됐다.전두환 대통령 당시에는 직접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경우도 있었다.서슬 퍼런 전대통령 앞에서 국무위원들은 절절 매야 했다.행여 전대통령이 질문을 하면 법안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 장관들은 혼쭐이 났다.결국 국무회의 개최장소는 청와대를 떠나 정부세종로청사 19층으로 되돌아 왔다.국무회의는 헌법(88조,89조)상 국정의최고심의기구이지만 실제 운영은 법령안·조약안을 심의,의결하는데 그친다.법안심의도 이미 차관회의를 거쳐 상정됐기 때문에 토론도 거의 없다.고건 총리가 지난해 3월 부임하자 ‘국무회의 운영 활성화 방안’을 마련한 사실도 국무회의의 무기력함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역대 총리는 이범석 초대에서부터 고건 총리까지 모두 30명.여기다 국회 인준을 받지 못했던 10명의 총리서리까지 합치면 모두 40명이었지만 총리에 따라 국무회의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었다.군·학자·법관·행정관료 등 출신 배경에 따라 국무회의 진행방식도 달라졌다.딱딱한 분위기가 연출됐는가 하면 매끄럽게 회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혼란기때 가치 빛나 국정의 최고심의기구인 국무회의는 혼란기에 더욱 그 가치가 빛났다.4·19의거,5·16혁명,80년 신군부의 등장….합법성을 가지려면 국무회의는 필수불가결한 절차였다.60년 4월19일 상오 9시 중앙청 3층 국무회의실.이대통령과 허정 외무·권승열 법무장관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는 학생데모대 사태가 보고됐다.경비계엄선포·비상계엄선포 등의 안건도 의결됐다.하루만인 4월20일 또다시 국무회의가 열려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반영했다.데모사건 피살자의 장례비를 한사람당 50만환씩 지급하기로 하는 안건이 처리됐다. 5·16 혁명이 일어난뒤 국무회의는 며칠동안 열리지 못했다.23일 하오 5시 국무회의에서는 ‘군사혁명에 따른 정치·도의적 책임을 지고 총사퇴할 것’을 의결했다.총리가 배석자를 나가달라고 주문하면 국무위원 총사퇴 결의를 하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있다.국무회의는 대외관계를 중단하지 않도록하고,성행하던 유언비어 단절을 위해 노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국무회의는 혁명이후 당분간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열려 국정을 다뤘다.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옹/“이 대통령 개별 설득 단기 채택”/“한글전용법 제정 제의했으나 모든 장관 반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문교부장관을 맡아 50년까지 3년간 장관직을 역임한 ‘한뫼’ 안호상옹(96). 안전장관은 대한민국 정부의 기초를 세운 초대내각 11부4처의 국무위원 가운데 한사람으로 국무회의 운영에 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당시 안전장관이 제안한 제도·법 등이 국무회의에서 통과돼 아직도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안장관은 “첫번째 국무회의로 기억하는데 국가 연호에 대한 갑론을박이 치열했어요.갑자을축의 육갑파도 있었고,서기연호를 쓰자는 사람도 있었죠.또 임시정부수립연도부터 쓰자는 이들까지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안전장관은 국무회의가 끝난뒤 이승만 대통령을 따로 찾아가 단기사용을 설득하고 개천절을 국경일로 하자고 제안했으며 이대통령이 이를 모두 받아들여 다음 국무회의에서 결정됐다.그러나 단기사용은 5·16 이후 서기로 바뀌었다. 또 한문세대가 지배적이었던 그 당시 안전장관이 발의한 한글전용문제도 국무회의의 큰 관심거리였다.이 문제로 회의에서는 장관들간에 고성이 오가기도 했다. “국무회의에서 내가 한글전용법을 제정하자고 했더니 모든 장관이 반대했어요.특히 나하고 가까운 사이였던 임영신 상공부장관이 공격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서로 ‘무식쟁이’라는 얘기까지 나왔죠.침묵만 지키고 있던 이대통령이 안되겠던지 ‘과하니 그만하시오’라면서 중단시켰어요”. 이처럼 하나의 안건을 놓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당시 장관들은 나라를 새로 세운다는 생각으로 서로를 많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안전장관은 또 “그때는 가난했던 시절이라 그런지 각료들도 돈이나 권력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초대내각에서 제일 먼저 사임한 민희식 교통부 장관은 철도사고에 책임을 지고 40일만에 물러났으며 전진한 사회부 장관은 공무원노동조합을 금지한데 대해 화를 내고 그만두었다.또 무임소장관이던 이청천씨는 “싹을 보니 틀렸다”는 말만 남기고 각의에서 물러났다.이 모두가 내각 6개월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안전장관은 전했다. □특별취재반 이경형 부국장겸 정치부장 이용원 문화부 차장 김경홍 정치부 차장 최병렬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정치부 기자 서창희 정치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창작악극 ‘눈물젖은 두만강’/일제시대 비극의 한 가족사

    악극의 대명사 극단 가교가 다섯번째 창작악극 ‘눈물젖은 두만강’을 15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다. 일제하인 1930년대 두만강과 만주,상해 등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항일 독립운동과 이에 연루되는 한 일가의 비극의 가족사를 눈물과 진한 감동으로 그린 작품.두만강 백사공의 딸 정애는 독립군 승빈이 총상을 입은채 일경에 쫓겨 집으로 찾아들면서 역사의 격랑 한가운데로 휩쓸려 들어간다.독립군의 정인이 된 관계로 일제의 갖은 박해를 받다 화류계 여성으로 전락,일본 현병대장을 암살하고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는 정애의 인생유전을 중심으로 그녀의 부모,승빈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민우,일경의 앞잡이로 승빈을 밀고 하는 오빠 등 두만강변 한 가족이 겪어가는 불행한 민족사가 구슬픈 노래와 대사로 전개된다. ‘홍도야 울지마라’ ‘울고넘는 박달재’ 등 다수의 악극에서 기량을 쌓은 권소정이 주인공 정애역을 맡았으며 박인환 최주봉 윤문식 김진태 태민영 박승태 등 TV를 통해 낯이 익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눈물젖은두만강’ ‘물새야 왜 우느냐’ ‘청춘 블루스’ 등 흘러간 우리 옛노래와 ‘카르멘 조곡’ ‘인 더 무드’ 등 외국곡을 합해 총 35곡의 노래를 들려준다. 김상열 작·연출.하오 4시·7시30분(월요일은 쉼).369­2911.
  • 달라이 라마­티베트에서 온 편지

    ◎인류의 미래에 보내는 순수한 영혼의 메시지/티베트 문화·피폐한 현실 등 폭 넓게 다뤄 사회가 고도화할수록 우리는 정신적 세계를 동경하게 된다.최근 티베트 혹은 달라이 라마에 관한 책과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인지 모른다.‘티베트의 사랑과 마법’(알렉산드라 다윗 닐 지음)·‘티베트에서의 7년’(하인리히 하러 지음) 등의 소설이 잇따라 선보인데 이어 영화 ‘티베트에서의 7년’이 개봉됐고 ‘쿤둔’ 또한 곧 개봉될 예정이다.이러한 흐름에 맞춰 최근 또 한권의 ‘지혜의 서’가 출간됐다.도서출판 혜윰에서 펴낸 ‘달라이 라마­티베트에서 온 편지’(매튜 번슨 지음,김기홍 등 옮김)가 그 것이다.특히 이 책은 역대 달라이 라마의 소사에서부터 오늘의 피폐한 티베트 현실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달라이는 티베트어의 ‘갸초’에 해당하는 몽골어로 ‘큰 바다’를 의미한다.라마는 티베트어로 ‘무상의 스승’이란 뜻.달라이 라마란 곧 대해와 같이 넓고 큰 덕을 지닌 고승을 말한다.그러나 티베트인들은 정작 달라이 라마라고 부르는 것을 피한다.대신 ‘걀와린포체’ 즉 ‘보석과 같은 승자’라고 부른다.이러한 달라이 라마의 칭호는 3대 종정인 소남 갸초에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이어 초대와 2대에도 이 칭호가 추증됐다.달라이 라마는 5대에 이르러 구파 불교세력을 몰아내고 티베트 전토를 통일했으며 성속양권을 아울러 지니게 됐다.그 뒤 달라이 라마의 정권이 확립됐지만 정국이 불안정해짐에 따라 달라이 라마는 잇따라 희생됐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은 현재 14대 달라이 라마의 생애와 영적인 가르침이다.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초는 1935년 티베트 동북지방의 타크처라는 작은 마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티베트 불교의 전통에 따라 두살 때 달라이 라마의 화신으로 인정받았고,네살 때 티베트의 수도인 ‘금단의 성시’ 라싸의 포탈라 궁전에 모셔졌다.이때부터 그의 특별한 삶의 여정이 시작된다.그는 장난감이나 시계,영사기 등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것을 즐기는 호기심 많은 소년으로 성장했다.하지만 장대한 불교의식에서 영도자의 역할을 다하는 그의 흔들림 없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1951년 중국에 의해 점령당한 티베트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모택동·주은래 등 중국 지도자들과 협상을 벌이는 등 모든 노력을 다했다.그러나 20세기 초까지 고립된 왕국으로 신의 말씀 안에서 살았던 티베트의 발언권은 극히 적을 수 밖에 없었다.결국 1959년 중국의 식민적 수탈과 정치적 탄압에 맞서 티베트 국민들은 일제히 봉기,3천여개의 불교사원이 파괴됐고 1백20만명의 티베트인들이 학살됐다.그해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망명정부를 세웠다. 남녀합환상 부처 앞에 오체투지의 고행객들이 끊이지 않는 곳,정복되지 않은 숨겨진 대지와 순연한 인간의 미소가 스며있는 땅,먼지 알갱이 하나까지 살아 숨쉬는 듯한 신비의 땅….그러나 이 책은 생경한 티베트 문화의 단면들만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지속적인 고립화 정책과 인권탄압 등 식민정책의 현주소를 고발하는 데에도 적잖은 지면을 내준다.중국정부는 1966년 티베트어의 사용을 금했으며,계획적인 이민정책의 여파로 티베트 문화는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됐다.중국은 2020년까지 티베트에 약 6천만명의 중국인을 거주토록 한다는 방침이다.이같은 중국측의 폭압에 맞서 달라이 라마 14세는 일관되게 비폭력 평화주의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벌여오고 있다.그는 소년시절부터 마하트마 간디의 ‘아힘사’라는 비폭력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1989년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티베트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 14세를 ‘아발로키테시바라’ 곧 ‘자비의 부처님’으로 받아들인다.그들은 또한 존경하는 스승을 특별히 ‘쿤둔’이라고 부른다.티베트어로 ‘쿤둔’은 ‘존재’를 뜻하는 말로,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힘과 달라이 라마의 영험함을 동시에 나타낸다.평화와 사랑,종교,동포애,인권 등 인류의 영원한 화두에 관해 영감으로 충만한 메시지를 전하는 달라이 라마.그의 드넓은 지혜의 숲을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된다.
  • 초대 대선과 첫 조각(대한민국 50년:5)

    ◎하지 사령관 서재필 대통령 꿈꿨다/암살 겁내 출마거부… 결국 국회 간선서 이승만 당선/초대총리 이윤영 제청,인준 부결 수모… 이범석으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정치적 지도력과 개성에 관해서는 평판이 극명하게 엇갈렸다.“대한민국을 세운 국부”“운산광산을 팔아먹은 매국노”“프린스톤 사람”(무초) “×자식”(하지)….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 J.R.하지 중장은 애초부터 서재필을 귀국시켜 대통령에 입후보시키려 했다. 그것은 다분히 이승만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강했다.당시 하지의 개인고문으로 일하던 서재필은 이미 암에 걸려 있었다.그는 자신이 살해될 것이라는 피해의식 때문에 입후보를 거절,미국에 돌아간 직후 운명했다. 1948년 7월20일 제헌국회에서 간선으로 치러진 초대 대통령선거에는 결국 이승만과 김구,안재홍 등 3인이 나섰다.이미 예견된 대로 이승만은 196명의 재석의원 중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김구는 겨우 13표를 얻었다.그리고 안재홍은 2표,무효가 1표였는데 무효는 미국 국적의 서재필에 투표한 것으로 밝혀졌다. ○7월24일 중앙청서 취임식 압도적인 다수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1948년 7월24일 중앙청 광장에서 취임식을 가졌다.“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은 나로서는…” 그는 독립의 공을 연합군측에도,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해외독립운동파에도,국내의 항일투쟁 세력 어느 곳에도 돌리지 않았다.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돌렸다. 이승만은 취임후 곧바로 이화장에서 조각에 착수했다.‘조각의 산실’로 등장한 이화장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73세의 이승만은 철저하게 자신이 신뢰하는 측근만을 각료에 임명했다.그러나 그의 건국 내각은 국무총리 인준을 놓고 출발부터 상처를 입었다.이승만은 북한의 조선민주당 위원장인 조만식의 후광을 내세워 부위원장인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제청했다.하지만 이윤영 총리안은 제헌국회에서 인준이 부결되는 수모를 겪었다. 지면이 거의 없는 이윤영을 내세운 것 자체가 당시 정황으로 볼때 무리였다.한민당의 김성수가 국무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회의 공론이었다.그러나 이승만은 자칫 한민당에 업힐 것을 우려한 나머지 이를 애써 무시했다.국회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정치적 발판을 국회에 두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초대내각은 결국 항일독립운동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실마리를 풀었다.그리고 내무 윤치영,외무 장택상,국방 이범석,재무 김도연,법무 이인,문교 안호상,농림 조봉암,상공 임영신,사회 전진한,체신 윤석구,교통 민희식,법제처 유진오,공보처 김동성,무임소 이윤영 등으로 조각을 마무리했다.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인선은 국회에서 친일논쟁이 가열되면서 실패라는 평가를 받았다.1948년 8월15일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은 출범했다.이와 함께 이날 상오 0시를 기해 미 군정은 폐지됐다. 이승만은 모든 관리들을 하향식으로 통제하려고 했다.이와 관련,미 중앙정보부(CIA)는 “이승만은 국무총리를 마치 ‘행정보좌관’처럼 부리고 있다”고 혹평했다.또한 미대사관은 상공부 장관 임영신을 “2다스의 속옷만으로도 매수당하는” 인물로 파악했다.그는 부패로 쫓겨난 최초의 각료라는 오명을 남겼다. 이같은 이승만 정권의 최고 통치방침 가운데 하나는 유엔에서의 승인을 획득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새롭게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미국의 군사적 보호에 계속 의존했던 만큼 합법정부로서의 국제적 승인을 즉각 얻어내지 못했다.1948년 10월19일 재일조선청년단체의 암살 위협 속에 이승만은 일본을 방문했다.목적은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를 만나 대한민국의 방위와 국제적 승인문제를 의논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대 주한미국대사 무초에 의하면 이승만은 맥아더를 특별히 존중했다고 한다.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곤경에 빠질 때마다 맥아더를 찾았다.1945년 10월 미국에 머물던 이승만은 환국과 더불어 그를 만났다.1948년 10월 회담은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미국이 한국을 지키겠다는 계획을 이승만으로 하여금 내외에 공표토록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한민국 수립에 산파역을 맡았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은 1948년 10월8일 유엔에 제출할 최종 보고서를 채택했다.이 보고서에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에 의해 성립된 한국정부는 정부의 기능이 점차 개선되어가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모든 유엔 가맹국들은 한반도 전체의 독립과 통일을 이룩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한다는 권고 내용도 포함시켰다.이 보고서는 제3차 유엔총회에서 심의에 부쳐졌다.1948년 12월12일 마침내 대한민국은 유엔 총회에서 46대 6으로 승인됐다.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된 것이다.그 후 대한민국은 소련과 그 동맹국가들을 제외한,50여개국의 자유진영 국가들로부터 개별적인 승인을 받았다. ○임정 세력 반대속 출범 대한민국의 출범은 민족사적으로 볼 때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진정한 의미의 민족국가가 비로소 출범한 것이다.우리 민족이 주권확보를 위해 장기간 노력해온 결과로,그 자체가 민족 숙원사업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남북에서는 상이한 정권이 출범했다.그것은 무엇보다 미·소 강대국의 서로 다른 한반도 정책에 기인한다.이는 그 연장선상에서 보면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정책에 있다.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의 반소·반공정책에 의한 남한지역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유엔이 결정한 데서 비롯됐다.당시 유엔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그대로 추수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제헌국회가 남북통일특별대책위 설립안을 부결시켰다는 사실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이는 국회가 남북통일문제를 도외시한 뚜렷한 징표라는 점에서 그렇다.국회소집 무렵 김구·김규식 등은 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했다.통일운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하려고 한 이들을 이승만은 공산당으로 몰아부쳤다.그렇듯 대한민국 정부는 김구·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임정세력의 반대 속에서 출범했던 것이다. ◎미,이승만 신뢰하지 않았다/본사특별취재반,미 CIA 작성 비밀보고서 입수/“독립위해 최선 다했지만 재난 불러올 행동 가능”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참된 애국자였다.그러나 그는 독립한국을 자신이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최선을 다했다.……위험이 도사리고 있다.이승만은 증폭된 자아의식 때문에 재난을 불러올 행동을 하거나 적어도 신생 한국정부와 미국의 이해를 상당히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다” 대한민국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국의 직설적인 평가를 보여주는 문건이 발견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워싱턴의 국립공문서보존기록관리청에서 미국 중앙정보부(CIA)가 1948년 10월28일에 작성한 2급비밀보고서 ‘대한민국의 생존전망(PROSPECTS FOR SURVIVAL OF THE REPUBLIC OF KOREA)’을 찾아냈다. 이 보고서는 당시 워싱턴 정책담당자들의 상황인식을 그대로 반영한 자료다.이 문건에 의하면 미국은 결국 이승만을 옹립했지만 결코 신뢰하지는 않았다.따라서 미국은 이승만과 그의 각료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계속했다.또한 미국은 군정이 끝난 후에도 CIC나 G­2,CIA 등을 통해 이승만과 그의 각료들이 행한 부정축재 사실과 같은 부정적인 정보를 모았다. 또 방위와 재원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했다. 이 보고서는 제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이승만은 개인적인 이익과 로비활동도 들추어냈다. 워싱턴 임시정부 한국위원회의 수장이었던 이승만은 그 지위를 상당히 이용했다고 밝힌다.사적인 로비활동이야말로 이승만에게는 전쟁이 끝난뒤의 소중한 정치적 밑천이 되었다는 것이 보고서의 시각이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문화부 기자 서정아 문화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취업보장” 7개 이색 전문대 현황

    ◎IMF 한파속 전문대 인기 ‘상한가’ IMF 한파속에 전문대의 인기가 어느 해보다 높다. 대학 간판보다는 실속을 찾겠다는 수험생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취업대란에도 전문대의 취업률은 85%를 넘고 있다.4년제 대학 취업률 보다 10%포인트를 웃돈다. 전국 158개 전문대는 지난 5일 원서접수를 시작,오는 2월6일까지 원서를 받는다.원서접수 일정은 학교에 따라 다르다. 모집인원은 정원내 27만9천140명,정원외 3만8천29명 등 31만7천169명이다.지난 해보다 3만5천310명이 늘었다. 14일 원서접수를 마감한 철도전문은 240명 모집에 4천913명이 지원,20.47대 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인하공전은 7.9대 1이다.경원전문 등 원서접수를 끝낸 다른 3개 전문대의 경쟁률도 지난 해 전체 평균 경쟁률 5.95대 1을 넘어섰거나 비슷한 수준이다. 특히 취업이 90% 이상 보장되는 인기학과의 경쟁률은 예년처럼 30대 1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취업률 100%인 학과는 철도관련학과를 비롯,농공기술도시행정 산업공예디자인 제지공업 협동조합경영 등이다. 이같은 인기에힘입어 전문대 및 대졸자 가운데 96년 5천121명,97년 5천645명이 전문대에 재입학했다.올해는 더욱 몰릴 것으로 예상돼 전문대 및 대졸자 모집인원도 2만6천589명으로 늘어났다. 전문대학교육협의회 이홍균 사무총장은 “전문대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에 발맞춰 나가기 위해 산학협동을 통해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경북실전/재활공학과 국내 유일·패션디자인과 유명/교수진·교육시설 우수… 정원 자율화 대학 ‘산·학협동으로 중견 전문 직업인을 육성한다’ 경북 경산시에 자리잡은 경북실업전문대의 건학 이념이다. 80년 대일실업전문대로 출발,83년 경북실전으로 명칭을 바꿨다. 교육부가 98학년도 정원자율화 대학으로 지정했듯이 교수 및 교육시설에서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장애인을 위한 재활교육 등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재활공학과는 국내에서 유일하다.‘장애인 먼저’ 우수실천단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세계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 96년에는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와 자매결연을 맺었다.영어 등 원어민 외국인교수를 초빙,회화를 집중적으로 가르친다. 패션디자인·관광·호텔조리·만화사진영상과 등은 인기가 높다.패션디자인과는 서울의 일류 디자이너 업체에서 요청할 정도로 명성이 나 있다. 17년의 전통을 가진 만화사진영상과에서는 1학년때 기초지식을 교육한 뒤 2학년때 심화학습을 실시한다. 장학제도는 모두 28종이며 입학정원의 20%에 이르는 2천1백여명이 혜택을 받고 있다. 지난 해 취업률은 92%였다.올해 졸업 예비생도 80% 이상 이미취업했다. ◎연암공전/전자과 등 총 5개학과 ‘소수정예교육’ 지향/장학·복지제도 최고·개교이래 취업률 90% 경남 진주의 연암공전은 ‘소수 정예교육’을 자랑한다. 정밀기계·기계설비·공업디자인·전자·컴퓨터정보기술 등 5개 학과가 전부이다. 올해 정원내 모집인원도 596명이다.알짜배기 교육을 위해서라는 게 학교측의 설명이다. 취업률은 83년 개교 이래 90%를 넘고 있다.올해도 IMF 한파에 아랑곳없이 졸업예비생 80%가 일자리를 확보했다. 연암공전은 학교법인 LG연암학원이 운영하고있다.재단이사장은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다.LG그룹이 든든한 후원자인 셈이다. 실제 장학·복지제도에 있어 최상급이라는 평가다. 장학금을 받는 재학생은 35%에 이른다.매년 학생 1인당 16만8천여원이 실습비로 지원된다.실험실습시설 및 기자재는 각각 법정기준 대비,125%와 300%를 뽐낸다. 연암공전은 이런 장점 때문에 ‘97년도 전국최우수전문대학’‘우수공업계전문대’로 선정됐다.특히 96년 11월 국내 처음으로 1년 4학기제를 실시한 것도 자랑거리다. ◎두원공전/기계·정보통신·디자인계열과 특정화 역점/개교 4년만에 ‘종합우수전문대학’에 뽑혀 두원공전은 올해로 5번째 신입생을 뽑는다. 94년 두원그룹이 설립한 두원공전은 장차 ‘한국 제일의 공과대학’을 목표로 삼고 있다. 짧은 학교 역사지만 교육부 평가에서 ‘97학년도 종합우수전문대학’으로 선정됐다.교육부가 지난 해 처음 뽑은 12개 ‘우수공업계 전문대’에 들었다.공업전문대로써 당당히 올라 선 것이다. 올 해 일반전형으로 주간 536명,야간 704명을 뽑는다.특별전형에서는주간 344명,야간 655명을 모집한다.전체 모집인원은 13개과 2천240명이다. 일반전형의 경우,학생부 40% 수능성적 60%를 반영한다. 교육설비와 학생복지도 우수하다.첨단 기자재는 교육부 금액기준 대비 140% 이상이다. 95년 개관한 기숙사는 4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다.장학금은 재학생의 34%가 받는다.산업체 위탁생에게는 학비의 30%를 감면해 준다. 교육과정에서는 기계·정보통신·디자인계열의 특성화에 역점을 두고 있다. 모든 학생은 졸업때까지 50시간 이상 학내·외 봉사활동을 하도록 규정하는 등 인성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신성전문/전교생 대상 영어·중국어·컴퓨터교육 ‘독특’/서해안시대 대비 차계열·관광중국어과 이색 충남 당진군에 있는 신성전문은 94년에 설립됐다. 서해안 시대를 이끌 기술 주역들을 양성하자는 게 학교의 목표이다. 특히 독특한 외국어교육을 실시,전문대 사이에 유명하다. 모든 학생들은 매일 정규수업에 앞서 영어·중국어 실전회화와 컴퓨터교육 등 3과목을 1시간씩 받아야 한다.전공에 관계없이 거쳐야 하는 소양교육이다. 중국어는 학교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더욱 강조되고 있다. 또 교육부가 지난 해 11월 직업교육기관으로 육성하기 위해 선정한 ‘우수 공업계 전문대’에 포함될 정도로 교육여건도 좋다.95년에는 교육개혁위원회로부터 특성화 모델대학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올해 입시에서는 23개 학과에 1천599명을 선발한다.일반전형은 학생부 59.4% 수능성적 40% 면접 0.6%를 적용한다. 기계정비·차체정비·시험검사 등 자동차계열과를 특화했다.부근의 현대·기아자동차 생산공장의 인력수요를 겨냥한 것이다. 관광경영중국어과는 중국 관광특수를 내다보고 전문인력을 키우는 이색학과이다.96년 전체 취업률은 94%이다. ◎부천전문/1인1기 실험실습·전원 자격증 취득 역점/공예디자인과·야간 의상디자인과 신설 ‘하면된다.사람다운 사람이 되자’ 78년 부천전문을 설립한 독립운동가이자 원로교육자인 몽당 한항길 선생의 건학이념이다. 1인1기 실험실습교육 실시,입학생 전원의 국가기술자격 취득 등을 통한 전문 기술인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부천전문은 서울에서 가까운 경인공업지역 중심부인 경기 부천시 원미동 심곡동에 서 있다. 올해 입시에서는 16개 학과에서 일반전형으로 주간 1천112명 야간 820명,특별전형으로 주간 368명 야간 540명 등 모두 2천840명을 모집한다. 지난 해와 달리 산업·의상·광고디자인과는 디자인계열로,전자계산·정보통신과는 정보통신계열로 통합해 신입생을 뽑는다.공예디자인과와 야간 의상디자인과는 새로 개설했다. 일반전형 반영률은 학생부 40% 수능성적 60%이다. 야간은 학생부와 수능성적 각각 50%이다.특별전형은 주·야간 모두 학생부만으로 전형한다. 장학제도는 모두 18종으로 입학정원의 4% 가량인 1천2백여명이 혜택을 보고 있다.취업률은 매년 90%를 웃돈다. ◎유한전문/특별전형 야간학과 고2학생부 100% 반영/기계과·기계설비과 등 중화학계열 특성화 ‘인류평화를 위해 봉사하는 자유인이 되자’ 고 유일한 박사의 뜻을 따라 77년에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에 설립된 유한전문의 교훈이다.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라는 유한정신을바탕으로 봉사하는 기술인,책임있는 직업인 육성이 교육의 목표이기도 하다. 올 해 일반전형 모집인원은 주간 932명,야간 672명이다.특별전형은 주간 428명,야간 568명이다. 전형방법은 고교 2년 학생부 40%,수능성적 60%를 반영한다.산업일어과는 고교 2년 학생부만 적용한다. 특히 특별전형을 하는 모든 야간학과는 고교 2년 학생부를 100% 반영하면서도 산업체 근무 연수에 따라 1∼3까지 전형 순위를 정했다.1순위는 산업체 근무 60개월 이상에다 기능사 2급이상 소지자이다. 장학제도는 근로 복지 보훈 관우장학회 등 교내·외 73종이다.재학생의 1천5백여명이 혜택을 보고 있다. 취업률은 94년 89.5%,95년 92.1%,96년 92.7% 등으로 해마다 증가 추세이다. 유한전문은 제조업의 근간인 기계과 기계설비과 금형설계과 등 중화학공업계열과를 특성화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대원전문/교원·교사 확보율 법정기준치보다 높아/95년 개교… 재학생의 25% 기술사 수용 95년 개교한 충북 제천시 신월동의 대원전문은 교육여건이 우수하다 지난 해 7월 교육부가지방 소재 전문대를 대상으로 선정한 ‘8개 정원자율화전문대’에 포함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정원자율화 대학은 교수 1인당 학생수인 교원확보율 및 교사확보율이 각각 법정기준의 55%와 70% 이상인 대학이다. 올 입시에서는 19개 학과에서 일반전형으로 960명,특별전형으로 640명을 뽑는다. 건축설비·환경공업·유통경영·레저스포츠 등 4개 학과는 처음으로 신입생을 받는다. 전형방법은 일반전형의 경우,학생부 40% 수능성적 60%를 반영한다. 특별전형은 학생부 100%를 적용한다. 학생부의 반영비율은 1학년 20%, 2학년 30%, 3학년 50%이다. 특별전형에서 3학년 성적은 절대적이다. 재학생 275명이 10종의 장학금을 받고 있다. 재학생의 25% 정도인 5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는 서울 등 원거리에서 온 학생을 우선적으로 받고 있다.
  • 까레스키 식품의 확산(중앙아시아를 가다:12)

    ◎유목민족의 식탁 점령한 김치/“입맛을 산뜻하게 하는 별미”/양고기·양젖 위주 식사에 적합/신강성­카즈흐­티베트까지 ‘침투’/우루무치 교포 절반이 김치장수 그 끝 없이 멀고 먼 서역에도,어디를 가나 우리 교포들이 살고 있다.그들은 한국의 음식을 먹고 전통식생활에서도 전통을 지킨다.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유학온 카자흐스탄 학생이 밥을 물말아 먹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던 기억이 생생하다.그 학생은 고려인인 자기 할머니도 늘 그렇게 잡수신다고 했다.그들의 식생활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은 물론 김치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도시 큰 바자에 가면 의례히 고려인 까레스키 여인들이 김치와 고사리를 비롯한 각종 나물과 샐러드를 판다.이들은 본래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브스크 지역의 원동에 살던 사람들이다.그러다 1937년 스탈린이 강제로 이주시켜 중앙아시아 곳곳에 고루 퍼져 살게 되었다. 그래서 중앙아시아에서 김치는 까레스키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공산권에 여행이 가능해지던 80년대 말부터 이러한 소식을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터이다. ○88년 봉급자의 20배 수입 그런데 이번에 신강성의 수도인 우루무치에 가서 김치가 지닌 경제적 잠재력에 크게 놀랐다.1986년 중국에서 자영업을 허용하기 전까지 우루무치의 조선족은 불과 20호 정도밖에 없었다고 한다.우루무치의 조선족은 자영업을 허용한 이후 늘어났다.심양에서 처음으로 김치장사에 나섰던 한 아주머니가 하루아침에 큰 거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나고 부터다.중국의 동북삼성에 사는 조선족들은 우리의 전통식생활을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김치장사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자영업이다.그런 점을 고려한 조선족들이 김치장수로 나서 옛날 서역이라 불렀던 신강성까지 왔다. 제일 먼저 우루무치에 온 사람들은 88년과 89년경에는 하루 중국돈으로 약 200원 이상을 벌었다.월수입도 6천원정도나 되었다. 월봉급이 많아야 500원이었던 시절 당시의 수익은 월급의 10내지 20배에 달하는 거금이었다.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90년에는 약 100세대의 김치장수가 우루무치로 몰려들어 조선족이 모두 120세대로 늘어났다.그러나 100여 세대 김치장수가 우루무치시에 있는 네개의 바자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각 세대의 수입이 급속히 줄었다.그래서 그들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전업을 하든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지금도 100세대 가운데 약 50여 세대가 김치장사를 하고 있다.월 1천여원 이상의 수익을 쉽게 올린다.이 정도면 중국에서 괜찮은 수입인데도 그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우루무치를 떠나 세계의 지붕 티베트 라사까지 진출했다.조선족 김치장수들의 생활태도는 참으로 놀랍도록 도전적이다.지금도 김치가 지닌 확실한 상품성을 딛고 일어서서 기적을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신강성에 우리민족이 처음으로 들어간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19세기 중엽 이전에 중국에 이주한 한국인들은 거의 중국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오늘의 조선족들은 그 이후에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또는 일제의 수탈에 못 이겨 떠난 사람들의 후예다.그 가운데는 1959년 신강성 해방군 자격으로 현지에 주둔하다가 제대하고 주저앉은 사람도 있다.1960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파견되어 의사와 병원장으로 근무하다가 몇년 전에 정년퇴직한 원로 의사 한분도 신강성에 자리잡았다. 조선족 의사는 처음으로 우루무치에 올 때,난주에서 트럭을 타고 왔는데,17일이나 걸렸다고 한다.그 때 나이 21세의 총각이었다.우루무치 초행길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물었더니 “다시는 못 돌아갈 것같았다”는 이야기를 했다.그 길에는 김치장사를 하기 위하여 멀리 만주에서 온 조선족 네명이 동행했다는 것이다.어떤 이는 이런 말을 되뇌었다.“집 떠난 사람들이니까 선생님의 그 말을 알지,집 떠나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를 거야”라고…,모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입에 밴 음식 기름기 제거 신강성에는 위글족 이외에 몽골과 카자흐족 등 많은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모두 양고기를 주식으로 하고 낭이라 불리우는 빵을 먹는 민족이다.이러한 식생활은 신강성을 포함한 전 스텝 지역,다시 말해서 투르크와 몽골의 모든 지역이 같다.스텝의 유목민족들은 말이나 양젖으로 치즈와 요구르트는 물론이고,술까지 빚어서 먹는다.이런 점은 곤륜산맥과 에베레스트 산맥으로 연결되는 고원 티베트에서도 마찬가지다.한마디로,유목민들은 양고기와 우유만을 먹고 마시며 살아간다. 유목민족들이 왜 김치를 사먹느냐고 물어보았다.우루무치의 조선족들은 “김치가 산뜻하기 때문”이라고 하나같이 자랑스럽게 말한다.고기와 우유,그리고 치즈만을 먹고 사는 유목민들이 순식물성 발효식품이기도 한 산뜻하고 시원한 김치맛을 한번 보고나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치즈나 마유주도 발효식품이다.하지만 이들 낙농식품은 우유기름 맛을 그대로 담아 입에 밴 육식의 기름끼를 가셔주지는 못한다.그러나 무배추와 파마늘과 고추가루와 생강 등 온갖 양념을 고루 삭혀 발효한 김치는 입맛을 산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시원한 맛은 정신까지 맑게 해준다.김치에는 고추 매운 맛의 톡 쏘는 자극과 파마늘의 짜릿하고 알딸한 뒷맛,무배추의 살에 양념들이 배여서 숙성될 때 나오는 산뜻한 신맛이 모두 어울렸다. ○개방정책 타고 번져 김치는 어느 육류와도 잘 들어맞는다.미국 카우보이들이 즐기던티본 스테이크와 가장 갈 어울리는 식품은 뭐니 뭐니 해도 김치다.한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미국인들의 주장이 그러하다.다만 김치는 가벼운 음식에는 그 양념 맛이 너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육식만 하는 유목민족에게는 안성마춤의 별미인 것이다. 세계의 오지 타클라마칸 사막과 티베트 고원지대에까지 밀어닥친 개방정책은 시장경제를 열었다.김치도 그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김치는 오래지 않아 유목민들 식생활의 총아가 될 수 있다.김치 없이는 못사는 한국교포들이 도전적으로 김치를 팔고 있는 한은 그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 무엇에 말미암은 잔인성인가(박갑천 칼럼)

    10억원대 보험금을 노리고 교통사고인 양 꾸며 제 아내를 죽인 핫아비가 붙잡혔다.가끔 듣는 얘기지만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인면수심이라더니 이쯤되면 짐승과 다를게 뭔가.이사건 무렵 미국의 한병원 남자간호사는 염화칼륨주사를 놓아 입원환자 100명 가량을 죽인 사실이 외신을 타기도 했다. 사람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되는 것일까.비단 아내와 남편뿐 아니라 경제문제 등으로 티격나면 어버이와 자식도 죽이는 세태를 지켜보는 마음은 어두워진다.사람에게는 그런 수성이 어느 구석엔가 잠들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촉발되면 눈을 뜬다는 것인지.지난해 11월 동티모르 독립운동단체가 국제사회에 고발한 인도네시아군의 만행사진도 참으로 참담한 것이었다.그런 참상은 6·25를 전후해서 우리도 겪은 바 있다. ‘이상한 소년’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작품이 생각난다.오스트리아 유젤도르프의 어느 언덕길을 산책하는 세 소년 앞에 나타난 이상한 소년.그 소년은 무소불위의 초능력자였다.이름은 사탄.천지창조도 보고 시저가 죽는 것도 보았단다.나이는 1만6천살인데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했다.그는 손가락 끝으로 꼬마(소인)들을 만들어냈는데 그들이 다투자 문질러 죽이고는 대수롭잖게 손가락의 피를 닦는다.그러면서 하는 말­“우리는 악을 저지를 수가 없지. 왜냐고? 악이 뭔지를 모르거든”.이 사탄과 같이 악이 뭔지를 모르기에 저지르는 그 잔인한 작태들이라 할 것인가. 인간의 본성은 본디 악하다는 것이 (성오편)의 생각이었다.그는 선이란 인위적으로 된 것이라면서 본성을 착하다고 본 의 설을 조목조목 반박한다.나면서부터 제편익과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인 인간은 나쁠 수밖에 없다는 것.니체가 권력과 이익을 쫓는 인간의 잔인성을 표현하면서‘인간수’라고 규탄했던 것도(“도덕계보학”제1·제2논문) 알짬은 같다고 하겠다.짐승한테 있는 것은 야성 아니겠는가.정말 그래서 이리 무작하고도 사막스러운 행태를 보인다는 것일까. 설사 본성이 악하다해도 그걸 바로잡아 선하게 살아가야 함을 아는것이 인간.그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 아니던가.한데 문명화따라 더욱더막가고 있는 양한 사람 마음들.다소의 차이는 있다 해도 니체가 말한 ‘인간수’의 모습을 보여준다.이 병든 정신은 마침내 자멸로 이어지는 것을….
  • 국호·상징물 제정(대한민국 50년:2)

    ◎48년 7월1일 제헌국회서 ‘대한민국’ 확정/제헌국회 헌법기조위원회/대한민국·고려공화국·한·조선 논의/이승만 의장 ‘대한민국’ 상요 대세로 1948년 7월1일 제21차 회의가 열린 제헌국회 본회의장.의원들은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출한 헌법 초안을 놓고 2차 독회에 들어갔다.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신익희 부의장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항목부터 축조심의에 들어갔다.이승만 의장(독촉)이 먼저 발언권을 얻었다. “국호개정이 제일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국호는 차차 국정이 정돈되어 가지고 거게에 민간의 의사를 들어가지고… 그러니까 국호문제에 있어서는 다시 문제 일으키시지를 말기를 또 부탁하는 것입니다”(국회 속기록) 이에 대해 최운교 의원(무소속)이 헌법기초위에서 심의한 국호가 몇가지며 그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반대에 부딪쳤다.이어 1조를 원안대로 통과시키자는 동의를 재청·삼청까지 얻어냈다.이때 조봉암 의원(무소속)이 제동을 걸었다.조의원은 “우리민족이 다 그렇게 만족치 않을 것이니 다음에 제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그는 1차 독회에서도 “대한민국이란 말은 역사적 합리성으로 보거나 체제로 보거나 형식적 법통으로 보거나 천만부당하다”며 반대했었다. ○찬성 163·반대 2로 통과 이승만 의장이 다시 발언에 나서 고칠 필요가 있으면 다음에 하고,일단 원안대로 통과시키자고 무마했다.의회는 거수표결에 들어가 제1조를 재석 188명에 찬성 163명,반대 2명으로 통과시켰다.한민족의 새 역사를 열어 나갈 신생국의 이름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확정됐다.1948년 8월15일 정부가 출범하기에 앞서 한달 보름전 일이다. 새나라 출발에는 국호 제정이 선결과제지만 이승만의 모두 발언에서 알 수 있듯 나라이름을 짓는 데는 많은 진통이 따랐다.국호가 갖는 상징성이 지대한데다,당시 좌우가 갈리고 정당·사회단체가 난립한 상태에서 각기 주장하는 바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미군정 때 장차 수립할 우리 민족의 국가 이름으로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다.좌우대결이 치열해지면서는 남한지역과 우파는 대한민국을,북한지역과 좌파는 조선을 지지하는 ‘남대한·북조선,우대한·좌조선’으로 굳어져 갔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대한제국 때 처음 쓰였다.1897년 고종이 중국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국임을 강조하느라 황제를 칭하면서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1919년 상해에 자리잡은 임시정부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따라서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은 당연한 우리나라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를 부인하는 세력들이 해방후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예컨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1945년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대한’이라는 국호를 부정했다.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는 남북한 각 정치세력에게서 임시정부 수립대강에 관한 답신서를 받았다.이에 따르면 한민당이 결성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와 신익희 주축의 입법의원은 ‘대한민국’을,좌우합작위원회가 주도한 시국대책협의회는 ‘고려인민공화국’을 주장했다.민주주의민족전선은 건준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에 집착했고,건준을 부정하는 북조선노동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국호를 규정했다.각 정치집단은 국호제정을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다툼의 방편으로 이용한 것이다. 제헌국회가 구성된 뒤 헌법기초 위에서 논의한 국호로는 ‘대한민국’‘고려공화국’‘한’‘조선’ 등이 있었다.이때도 일부에서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국호를 제정하자고 주장했다.그런데 5월31일 열린 국회 개원식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사용함에 따라 이 이름은 제헌의원들간에 대세로 자리잡았다. 국호에 관한 찬반 논의는,이승만 행정부가 1950년 1월16일 국무원 고시 제7호인 ‘국호 및 일부 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을 법률로 제정하자 자연 소멸됐다.“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또는 한국)으로 하고,북한 괴뢰정권과의 확연한 구별을 위해 조선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45년 12월 첫 태극기 게양 국호외에 국가의 상징인 국기·국가도 제정과정에서 많은 논의를 거쳤다.태극기는 대한제국이 정식 인정해 상해임정이 이어받은 국기였다.태극기는 1945년 12월24일 처음으로 미군정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성조기와 함께 게양됐다.당시 조선성냥회사 사장인 신창균이 하지 장군의 보좌관에게 부탁해 성사시킨 것이다.미군정은 이듬해 1월14일 군정청 광장에서 태극기 게양식을 가짐으로써 국기임을 사실상 인정했다. 이무렵 만담가 신불출은 공연에서 태극기가 국기로서 적당하지 않다고 비아냥거렸다가 포고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이처럼 좌파세력을 포함한 일부에서 거부하긴 했지만 민심은 태극기 사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다만 그 도안이 다양한 데 문제가 있었다.독립문에 새긴 것,구왕실 소장품,미군정 문교부에서 공포한 도안,우리국기보양회가 제안한 모양 등 여러가지 태극기가 뒤섞여 사용됐던 것이다.현재의 태극기는 1949년 10월15일 문교부고시 제2호로 공포됐다. 그리고 애국가 가사는 1910년쯤 거의 완성됐으며 안익태가 곡을 붙인 현재 애국가는 1946년 5월 ‘임시 중등음악 교본’에 실려 널리 알려졌다.그러나 제헌국회에서는 “국가는 적당한 시기에 남과 북 전체 민족의 의사로서 제정하자”며 논의를 유보했다.따라서 애국가는 사회관행상 국가로서 불릴뿐 아직도 법적으로는 공인받지 못한 상태이다. ◎“성조기와 함께 미군정청에 태극기 게양하자”/45년 하지 장군보좌관에 요구 성사 시킨 신창균옹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지 석달여만인 1945년 12월24일 미군정청 국기게양대에 태극기가 성조기와 나란히 게양됐다.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과연 독립을 이룰 것인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던 그때 이는 국민에게 크나큰 위안을 준 ‘사건’이었다. 그같은 선물을 국민에게 전한 신창균옹(90)은 1940년부터 마카오에서 임시정부의 연락책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45년 4월 귀국한 그는 미군이 진주하자 9월 중순 하지 장군의 보좌관인 윌리엄스 중령을 찾아갔다.중령의 아버지는 선교사로 입국해 공주 영명고교 교장을 지냈고,그 때문에 중령은 한국땅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냈다.신옹은 윌리엄스 교장에게 세례를 받은 인연으로 동갑내기인 중령과 친하게 지냈다. 중령을 만난 신옹은 “미군정청에 성조기가 휘날리는데 이곳은 조선땅 아닌가.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도 함께 게양하자”고 요구했다.중령은 그의 말에 찬성하면서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니니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12월 중순 신옹이 군정청의 연락을 받고 가보니 중령은 이미 귀국했고 후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태극기를 게양하기로 결정했으니 태극기를 빨리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한국사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태극기는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당당하게 국기로서 대우받게 됐다. 신옹은 이후 조선성냥공장의 사장으로 새나라 경제부흥에 힘쓰는 한편 임정 요인들이 귀국해 만든 한국독립당에서 연락부장 등을 맡으며 활약했다.1948년 김구가 남북협상차 평양을 방문할 때 수행하기도 했다.이후 일관되게 진보정치운동을 벌였으며 현재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남측본부 의장을 맡고 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문화부 차장) 최병렬(문화부 차장급) 김종면(문화부 기자) 박정현(정치부 기자) 서정아(정치부 기자) 강선임(DB부 기자)
  • 치치하얼시 조선족중학교(흑룡강 7천리:17)

    ◎1만6천여 민족교육의 산실/48년 개교… 학생 600명·교사 71명/“조선어문시간 단어해석은 한어로…/92년 한·중수교이후 부터 조선어 경시사상 무너졌지요” ‘명문대학에 시골의 한 가난한 선비의 딸이 입학했다. 묵직하던 가슴이 열리면서 무언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식 가진 모든 부모들의 소망이 그러하듯 자식들을 어떻게든 공부시키려는 것이 나의 의지이며 신념이며 숙망이었다’ 이는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향 문화참 강효삼 시인(53)이 올해 딸을 북경대학에 보내고 쓴 수필 ‘염원’의 한 대목이다. 그는 딸을 공부시키려고 시골의 집을 팔아 현 소재지에 와 셋집에 살면서 아내는 타 고장에 가서 식모살이를 하도록 했다. 자식을 위해 인생 후반에 별거해야 했었지만 아쉽지 않았다는 강시인의 마음은 바로 자식을 가진 조선족 부모의 마음이다. 1920년대 김규식박사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흑룡강땅에 구국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를 설립했다. 만주국이 서면서 조선족 학교는 폐교됐다. 1945년 9월 하얼빈에 조선인 북만교육위원회가 세워지면서 민족교육은 다시 살아났다.현재 흑룡강성 조선족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64개소. 그중에서 중학교는 25개소이며 서부지구인 치치하얼시에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가 하나 있다. 1948년 세워진 치치하얼조선족 중학교는 시구역 안에 있는 조선족 1만6천546명의 염원이 꽃피는 장소이다. ○학교 담장안은 조선어왕국 조선족 촌을 제외하고는 흑룡강성 도시에서 유일하게 조선말이 통할 수 있는 곳이 이 학교이다. 학교담장밖이 한어세계라면 담 안은 조선어왕국인 셈이다. 미래 조선사회가 약속되는 요람이다. 소수민족 동화정책을 실시했던 문화대혁명 시절 조선족학교는 철저히 파괴됐다. 탕원현조선중학교 등 7개 중학교는 농촌으로 밀려갔고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는 해산됐다. 당시 중학교를 다니던 사람들은 한족과 조선족 연합학교에서 한어교육을 받았다. 1981년 흑룡강성 민족교육공작회의에서 ‘민족학교에서는 민족의 언어로 강의해야 한다’는 규정이 마련된뒤 점차 조선어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지난 83년 연변대학 조선어과를 졸업하고 모교인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에서 조선어문을 가르쳤던 노만룡씨(43·교도처주임)는 이렇게 말했다. ○95년 오산중학교와 결연 “아이들의 조선말 수준이 연변에 비하면 소학교 수준입니다. 조선어문시간에 단어해석은 한어로 해야 합니다. 연변의 학교에서 한어를 가르치듯이 여기서는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조선어를 가르치지 않으면 저아이들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말에 수긍이 갔다. 학교 정원에 들어서서 유심히 살피던 나는 학생들이 하는 말이 한어였고 체육선생님의 말도 한어였음을 알았다. “선생님들도 조선어교육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었습니다. 조선어 선생님만 빼고는 다른 선생님들은 학과시간에 한어를 사용합니다. 조선말보다 쉽고 학생들의 이해가 빠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들의 회의 용어도 한어입니다. 한중수교이후 조선어 경시 사상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난 95년 4월 한국군 예비역장군인 이정순씨가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를 방문했다. 치치하얼시에서 공부를 했던 이장군은 서울 오산중학교와 자매결연을 추진했다. 한국측에서 매년 1천500달러를 모아 피아노,비디오,음향설비를 갖추게 됐다. 이장군이 오산의 영어선생과 국어선생이 함께 방문했고 이듬해에는 학생대표 13명이 왔다. 올해에는 20명의 학생들이 우호 방문했다. 이들은 조선족 농촌에서 민박을 하면서 우의를 다졌다. 중국측에서도 부시장,교육위원회 주임과 부주임이 인솔하는 대표단이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서 환대를 받은 시 교육관계자들이 조선족 학교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됐다. 김영석 교장(42)은 이렇게 말했다. “청사 뒤에 교원주택을 짓고 있습니다. 교원 아파트가 완성되면 집이 없는 교사는 없게 됩니다. 다른 학교보다 사정이 좋은 편이지요. 교원들 자질도 높습니다. 연변대학 아니면 오상조선족사범학교 졸업생들입니다” 오상사범학교는 흑룡강성 내의 28개 사범학교중 유일한 조선족 사범학교로 졸업생들의 98%가 조선족 학교의 교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600명의 학생에 71명의 교사를 갖고 있는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는 동삼성에서 널리 알려져 길림성에서도 학생들이 찾아 온다고한다. 그것은 한국의강원도 동해시 동해전문대학이 투자한 학교내 홍해직업전문학교가 취업에 유리하기 때문이다.장학금제도가 잘 되어 있는 가목사시 조선족중학교도 조선족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다. ○소·시서도 조선족학교 중시 해마다 흑룡강 조선족 중학생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유명대학에 입학한다. 올해 상지시 하동조선족향에서도 15명의 학생이 대학에 입학했다. 5명은 북경대학과 청화대학 등 명문대학에 들어갔다. 강시인의 딸 강선영도 그중한 사람이다. 대학으로 가는 것은 장원급제를 하는 것처럼 조선족촌의 경사이다. 하동향대성촌에서는 청화대학에 간 박춘걸에게 1천원,그외의 대학 입학생들에게는 300원씩을 장학금으로 주었다. 밀산시 조선족고등중학 졸업생중 김춘범이 청화대학에 입학하자 채득식 향 당서기는 향에서 4천원을 지원하고 학교에서는 1천500원,또 흑룡강조선말방송국의 방송이 나가자 한국의 기업인들도 장학금을 내놓았다. 한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자 성과 시에서도 조선족 중학교를 중시하기 시작해 교직원 아파트와 기숙사 식당등의 학교시설을 건설해주고 있다. 또 한국의 기업들도 조선족 학교의 후원사업에 눈을 뜨고 장학금을 주고 학생들의 모국유학을 주선하는 등 2세교육에 헌신하고 있다.
  • 역경 이긴 반세기…한국혼 다시 일깨운다/정부수립50주년 기념사업

    ◎‘경제50년사’ 등 백서 발간… 고난 극복의 역사 재조명/창작극 ‘대한국 창조’ 순회공연… 국민축제 행사 다양/21세기 걸맞는 정책 수립… 학술대회 통해 비전 제시/‘겨레의 노래’ 재정·보급 등 나라사랑운동 지속 전개 98년은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반세기동안의 발전과 우여곡절을 되돌아보는 한 해이면서 동시에 21세기를 준비하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이기도 하다. 정부는 ‘정부의 회갑’을 맞아 알뜰하고 다양한 기념사업 계획을 범정부적으로 추진중이다.특히 광복 50주년 행사를 이미 3년전 치른 만큼 내실있는 행사 위주로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정부는 연중 기념사업을 펼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 50주년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오는 8월15일에 행사가 절정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정부 수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미 지난해 말 국무총리 자문기구로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위원장 강영훈 전 총리)를 구성,사업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또 기념사업위원회 산하에는 정부 14개 부처 관계자들과 국회·법원 등 범정부적으로기념사업실무위원회(위원장 우근민 총무처 차관)가 구성돼 기념사업 계획의 수립·추진 및 조정작업을 맡고 있다.이와 함께 기획추진반(반장 최석충 총무처의정국장)이 구성돼 부처별 추진계획을 종합지원하고 추진상황을 점검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각 분야별 기념사업 계획안은 다음과 같다. ▷정부수립의 의의 부각◁ ▲세미나 개최=서울 뿐 아니라 미국·캐나다·프랑스·독일 등의 지역을 순회하는 5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를 열어 정부수립의 의의를 재조명한다.통계숫자로 사회변화를 알아보는 통계세미나를 개최한다. ▲독립운동 사료집 발간=해외에서 전개된 각종 독립운동 관련 자료와 문헌을 발굴,보급한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개관=애국지사들의 영혼이 서려있는 서대문 형무소를 역사관으로 꾸며 선열들의 옥중 수감생활과 모습을 재현해 청소년들과 후세들을 위한 역사의 교육장으로 활용한다. ▷역사·기록의 재정리◁ ▲정부 백서 발간=‘교육 50년사’로 교육의 역사를 집대성하는 등 각 부처별로 백서를 발간해 반세기를 정리한다. ▲‘정부조직 변천사’ 발간=확장과 축소를 거듭하면서 50년동안 우여곡절을 겪어온 정부 조직 변천의 모습과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다.또 ‘한국지방행정 50년사’를 발간해 지방행정의 변화상을 알아본다. ▲기념 영상물 제작=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성장을 이룩한 과정을 영상물로 제작하고 사진과 그림 등을 통한 화보집을 발간한다. ▲기념전시회=기록으로 우리나라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는 국가기록물을 전시한다.또 정부수립 이후 발간된 문헌과 자료 가운데 현존하면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을 모아 전시회를 개최한다. ▷정부수립 유공자 발굴◁ ▲유공자 발굴=아직도 가려있는 정부수립 유공자를 찾아내 훈·포장을 하고 생존 애국지사와 제헌의원 및 초대 각료들을 위문해 격려행사를 갖는다. ▲유엔 참전용사 초청=생존해 있는 유엔참전용사들의 방한을 초청해 격려하는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를 갖는다. ▷국민과 함께하는 행사◁ ▲8·15 경축식=국민 각계 각층이 참석하고 정부수립 유공 외국인 및 재외교민을 초청해 국가의 정통성을 부각시키도록 한다.동대문 운동장에서 광화문 사이에서 길놀이 행사를 갖고 국민적인 축제행사로 승화시킨다. ▲문화행사=종합가무극을 열고 표어 및 포스터를 공모해 국민의 참여의식을 높인다.또 지난 반세기동안의 생활용품을 전시한다.한국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한국의 발전과 역동적인 모습을 세계에 소개하는 영상자료를 제작한다. 서울미술제를 개최해 공예대전,서예대전,사진대전,미술대전,도시와 영상전 등의 다양한 문화행사를 갖는다. 특히 충청북도는 정부수립 이후 현재까지의 변화과정을 연극으로 만는 창작극 ‘대한국 창조’를 전국 순회공연할 계획이다.이와함께 봉화올리기 행사를 재현해 시민들의 역사의식을 고취한다. ▲국가상징물의 선양=태극기 거리를 조성하고 건물에는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하는 등 태극기 사랑운동을 전개한다.나라꽃인무궁화 사랑하기 운동을 펼쳐 무궁화 분재·사진전시회·글짓기대회를 개최한다. 또 무궁화를 널리 선양한 남궁억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한다.이와함께 나라사랑하는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겨레의 노래­응원가’를 제정해 보급한다. ▲건군행사=건군 50주년을 맞아 국민과 군의 안보 공감대 형성을 위한 건군 행사를 갖는다.군부대를 공개하고 안보현장에 대한 견학 기회를 넓혀 국민과 함께하는 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국회개원 행사=국회내에 헌정기념관을 세워 헌정에 관련되는 영상물과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대한민국 국회 50년사를 발간한다. ▷새시대를 미래상 정립◁ ▲21세기 정부의 비전 제시=지난 50년을 새롭게 조명하는 과거지향적인 행사와 함께 미래지향적인 정부의 미래상을 정립한다.이를 위해 앞으로 지향해야 할 정부의 좌표를 새롭게 설정하고 부처별 중·장기 계획을 수립한다. ▲학술대회 개최=21세기에 걸맞는 정부 미래상의 의견수렴을 위해 종합학술대회인 ‘21세기 정부의과제와 전망’을 개최한다.학술대회는 정치·행정·경제·사회 등의 분야별로 개최한다.통일에 대비한 해양정책토론회와 태평양 해양과학기술회의를 개최해 해양국가로의 잠재력을 높인다. ▷연중 추진계획◁ ▲1월 기념사업 공식 휘장 선정·보급 ▲2월 기념사업 표어 및 홍보 ▲3월 대한민국 정부50주년 기념사업 세부추진계획 확정 ▲4월 부처 및 단체별 세부추진계획 시행 착수 ▲5월 국회개원 50주년기념 관련행사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의 달 선포 ▲8월15일 정부수립 50주년 중앙경축식 ▲10월 건군 50주년 행사 ▲12월 기념사업 평가 및 정리,결과 보고서 채택 ◎정부조직 개편사/‘11부4처’로 출발… 40차례 변화/50년대 부흥부 전후부흥·경제정책 기획 조정/5·16뒤 경제기획원 신설… 수출드라이브 주도 대한민국 정부 50주년 역사는 정부조직 개편에서 찾을 수 있다.정부조직은 시대 변화와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48년 8월15일 11부4처로 출발한 ‘미니 정부’는그동안 40여차례에 걸쳐 변화를 거듭했다. 광복과 6·25를 겪은 50년대에는 체제형성 및 유지에 초점이 맞춰졌다.총리제의 폐지로 대통령중심의 체제정비와 3차례의 조직개편을 통해 전쟁 이후 부흥과 경제정책을 종합적으로 기획·조정하는 기구로 부흥부가 신설됐다. 60년 제2공화국 출범으로 행정권이 국무원에 소속되면서 정부조직은 또다시 개편을 맞았다.3·15 부정선거를 겪은 직후여서 경찰의 중립 확보를 위해 공안위원회가 구성됐고 공직기강 확립을 위해 감찰위원회가 부활됐다. 5·16 이후에는 경제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조직의 근간이 바뀌었다.부흥부(건설부로 바뀜)가 건설부로 바뀌면서 산업정책기능과 산하 산업개발위원회를 통합한 경제기획원이 탄생했다.공보처와 중앙경제위원회 등이 신설됐다. 60·70년대에는 늘어나는 민원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청 단위의 행정단위가 급격히 늘어난 점이 특징이다.노동·철도·검찰청(63년),국세·수산·산림청(66년),관세·병무청(70년),항만청(75년),특허청(76년) 등으로 행정조직은 확대됐다.또 77년에는 동력자원부가 신설됐고 환경문제가 증가됨에 따라 79년에는 환경청이 새로 생겼다. 70년대 말에 들어서자 경제규모의 급격한 확대와 산업구조의 다변화로 거대한 정부조직은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이에따라 81년 정의사회 구현과 복지사회 건설을 기치로 내건 출범한 5공화국은 행정개혁을 통해 과감한 중앙행정부처의 부서 통합과 인원감축을 단행했다.공무원 숫자가 사상 처음으로 감소한 것이다.신설된 부처는 올림픽 개최 결정으로 인한 체육부 정도에 불과했다. 88년 출범한 6공화국 역시 ‘작은 정부’ 정책을 유지했다.환경청이 환경처로,문화공보부가 문화부와 공보처로(89년) 바뀌었다.문민정부 들어서도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지향해 군살빼기가 계속됐다.집권초기인 93년3월 문화부와 청소년체육부가 문화체육부로,상공부와 동력자원부가 상공자원부로 각각 통합됐다. 대대적인 정부조직 개편은 행정쇄신위원회가 1년10개월 작업한 끝에 이뤄졌다.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재정경제원으로 거대화됐으며 이 과정에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건설부과 교통부가 건설교통부로 합쳐졌으며 상공자원부가 통상산업부로,보건사회부가 보건복지부로,환경처가 환경부로 바뀌었다. 새정부의 출범과 함께 비대해진 경제기획원이 최근의 금융위기의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또다시 정부조직에 또다시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정부조직이 어떤 형태로 짜여질지 주목된다.
  • 중국군 민간인 학살/신강·위구르 180여명

    【알마티 AP 연합】 중국 인민해방군이 지난 2개월동안 신강·위구르자치구에서 2천100명 이상을 체포했으며 분리·독립운동주의자를 포함해 186명을 살해하는 등 ‘인종학살’을 자행하고 있다고 한 분리주의 운동단체가 26일 주장했다. 카자흐스탄공화국 수도 알마티에 본부를 둔 신강·위구르 독립운동단체인 국민혁명전선연합의 무히크딘 무흘리시 대변인은 “이는 명백한 인종학살”이라며 인민해방군의 잔혹행위를 규탄했다. 무흘리시 대변인은 지난달 1일 ‘몰아내고 파괴하자’라는 구호 아래 인민해방군의 대대적인 탄압작전이 시작됐으며 이달 중순에는 11만명의 병력이 추가로 신강지역에 증파됐다고 말했다.
  • 치치하얼시 백두산여관(흑룡강 7천리:16)

    ◎조선족 2,000여명의 ‘사랑방’ 역할/주인 30대 조선족 부부/“91년 한국에 건거가 막노동/4년동안 알뜰히 60만원 벌어 귀국/2층짜리 식당 딸린 여관 인수했디요” 치치하얼시에서 대전그룹에 대한 취재를 마치자 나는 하루 숙박료가 150원씩 하는 눈강호텔에서 싸구려 백두산여관으로 짐을 옮겼다.전날 대전그룹에서 노래방 초대를 받아가던 중 보았던 곳이다. 백두산은 아리랑과 같이 자고로 우리민족의 상징이다.중국의 어디를 가든 백두산이라는 간판이 붙은 상점이나 식당,여관을 들어가면 주인은 조선족이다.시내중심인 건화구에 위치한 백두산여관은 2층 건물인데 1층은 식당이고 식당안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2층에 여관방이 설치되어있다. 온돌방 하나 침대방 여덟인데 방 하나의 숙박료는 60원.나는 하루 15원씩하는 4인 침대방에 들었다.정갈하고 아담하게 꾸려진 방이 마음에 들었다.지난 3월 개업했는데 침대가 비는 날이 없이 고객이 든다고 한다.손님은 거의가 조선족이며 고급방은 한국인이 장기투숙하고 있다. 주인은 이인걸(39)씨,김영란(38)씨 부부.남편은 여관을 부인은 식당을 책임지고 있다.이씨의 할아버지 이희철의 고향은 평북 선천군 용천면인데 부친 응찬이 한 살때 중국으로 이사왔다고 한다.증조부가 선천에서 군수를 한 집안이라 지주였으나 30년대 할아버지가 지하 항일운동으로 가산을 탕진했다.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되자 만주로 도주해서 독립운동을 하다 40년 일본군에 체포돼 사망했다.그의 무덤은 하얼빈 열사능원에 있다. ○고급방은 한국인 장기투숙 아들 응찬은 26살의 청상과부 어머니손에 자라 광복을 맞고 북경에서 군관학교를 졸업,조선전쟁에 참전하고 돌아와 84년 제대할 때까지 군에 복무했다. 아버지의 근무지가 목단강이어서 소학교나마 조선학교를 다닌 이인걸씨는 76년 한족중학교를 나와 철도국직원으로 들어가 근무했다.91년 9월에는 부부가 함께 한국에 갔다. “약 석달동안 막일을 하다가 풍전호텔에서도 일하게 됐습니다.삼성건설에서 부부가 함께 일했는데 일년에 15만원씩 벌었습니다.60만원을 챙겨갖고 94년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가서 큰 돈을만지던 사람들이 중국으로 돌아오면 일손이 잡히지 않듯이 그도 철도국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월급이래야 서울에서 2일간의 수입이어서 사표를 내고 반년을 집에서 놀았다.수입은 없고 돈만 축냈다. 군인아버지한테서 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이씨는 95년 봄에 사업을 하기위해 천진,북경,위해,청도등 전국을 돌아다녔다.96년에는 북경에서 한국인이 차린 회사에 들어가 10달동안 일했으나 월급은 한푼도 받지 못햇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귀중한 사업경험을 쌓았다.2년동안 가족을 떠나 객지에서 얻은 결론은 치치하얼에 돌아가 무언가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이 건물은 면적이 364㎡입니다.60만원에 사서 장식하는데 10만원을 투자해서 여관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흑룡강성에 있는 조선족 기업중 연간 생산량이 1백만원 이상 되는 기업은 200개,1천만원 이상되는 기업은 20개이다.석산린의 창녕그룹,최수진의 성 민족경제기술개발총회사 같은 거물급의 뒤를 이어 오성학의 대전그룹,김인한의 하얼빈쌍령급수설비기술개발유한회사,임홍덕의 대경풍화기업그룹,박성공의 하얼빈유전펌프공장,이승남의 동각구제통신설비유한회사,강관변의 대경시개발구물자회사노광석의 할빈동북계량기,강호규의 오상시천국그룹 등 기업체와 소형개체공상호와 중소형기업체가 많다.할빈과 같이 치치하얼시의 150개 조선족 업체중에서 90%,가목사시 794개 조선업체중 764개,목단강시 3천907개중 90%가 소형개체공상호이다업종은 음식·오락·서비스업이 85%,의류소매업체가 10%라고 한다. 치치하얼시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2천여명.시장경제에 남보다 앞서 뛰어들어 현재 식당업종의 30%가 조선족차지이다.부근의 농촌에서도 조선족들이 시내에 들어와 가라오케와 노래방을 경영하고 있다. ○10만원 들여 장식… 3월 개업 대개 이런 업종은 김치장사가 커서 탈바꿈한 것이다.백두산여관은 이인걸씨가 한국에서 뭉치돈을 마련해서 투자한것이므로 조선족의 식당 여관업종에서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인걸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아산 이씨입니다.한국에 있을때 버스를 타고 아산에 가서 아산 이씨 할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그 집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그 집 아들과 함께 서울에 있는 종친회에 갔습니다.종친회장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그 뒤로는 종친회때마다 중국대표로 참석하고 할아버지 이름을 찾아 가평의 종중산에 가서 제도 올렸습니다” 종친을 위하는 일자체가 결국은 민족을 위하는 일이 된다. “중국에 사는 아산 이씨대표가 가 조상의 이름에 먹칠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백두산여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조선족이다.조선족들은 한족들보다 월급을 100원 이상 주어야 한다.그런데도 그는 앞으로도 조선족만 쓰겠다고 다짐했다.민족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종업원 모두 조선족 채용 백두산여관같은 조선족 기업과 경제발전은 농촌의 인력에게 취업기회를 마련해주고 민족의식을 일깨워준다. 가목사시 조선족 기업취업인원수는 3천970명,전 조선족 인구의 31.7%이며 목단강시에는 1만1천410명이나 된다. “한국에 가보니 경제성장의 혜택을 본사람은 기회를 잘 포착한 사람들이었습니디.지금도 어려운 사람들이 적지 않데요.한국에서 땀흘려 번 돈을 보람있게 써야합니다” 그는 조선족들의 한탕주의를 경계했다.
  • 위구르족의 땅 신강성(중앙아시아를 가다:5)

    ◎중국면적의 17%… 사막과 산맥으로/예부터 세갈래 무역통로의 교차로·요충지/상술 뛰어나 친구사이도 흥정하는 장사꾼 중국 신강성 타크라마칸 사막을 흔히 ‘죽음의 사막’이라 했다.그 죽음의 사막에 이르면 대자연에 압도되어 인간은 왜소해질 뿐이다.타크라마칸사막이 있는 신강성은 북으로 천산산맥,남으로는 곤륜산맥이 에워쌌다.그리고 서쪽은 카라콜룸산맥으로 막혀있다.이들 높은 산자락을 빼고나면 온통 사막인 신강성의 크기는 중국 전체면적의 6분의 1이나 되었다. 그 넓은 땅에는 위그루족과 카자흐족,기르키스탄족과 몽골족이 퍼져 산다.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위그루족이 신강성의 주인이다.투루판에서 신강성 수도 우루무치까지 두번씩 갈아탄 고장난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도 거의가 위그루족이었다.차내 온도가 40도를 웃도는 만원 버스에서 그들과 꼬박 6시간을 함께 지냈다.그들은 불평 한마디가 없다.털털거리는 버스안에서 놀랍도록 인내심을 발휘하는 그들은 외국인에게 더 없이 너그러웠다. ○산자락 빼면 온통 사막 그 버스에는 일곱살 짜리 꼬마 승객이 탔다.로신이라는 사내아이였는데,차안이 덥고 지루한 탓인지 멋대로 딩굴었다.몸을 엄마한테 맡긴 로신이의 몸부림은 대단한 것이었으나 후덕한 엄마는 그 떼를 다 받아주었다.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보였던 그 사내아이의 조상은 본래 투루크의 한 갈래로 몽골지역에서 들어온 위그루라는 설이 있다.투루크,또는 돌궐은 흉노의 후예들로 모두 몽골 알타이산맥이 기원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그루족은 몽골족과 다르다는 사실이 외모에서 드러난다.흉로와 투루크는 제 나름대로 각각 대제국을 세웠던 강력한 세력의 민족이다.그토록 큰 힘을 지녔던 민족이 몽골에서 왔다면,지금 몽골에 상당수의 투루크족이 살아야 할 것이다.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로신이의 선조가 아직은 불분명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비단길 한 목을 맡은 것은 분명하다.중국 서안에서 비단을 싣고 비잔틴에서 짐을 내리자면 반드시 타크라마칸사막을 거쳐야 했다.또 비잔틴과 로마의 공산품과 호탄의 옥을 서안으로 실어가는 길도 타크라마칸사막이었다.그렇듯 대상들이 동서를 오가는 목 좋은 길가에 살았던 위그루족의 상술은 뛰어났다.그것은 가히 체질적이었다. 위그루족을 장사속으로 만나지 않으면 무척 관대하다.그러나 일단 상업적인 거래라면 무자비할 만큼 안면을 바꾼다.친구 사이에서도 이익을 챙긴 흥정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라는 것이다.이슬람이 지닌 공통점이기도 한 위그루족의 상술은 물론 비단길에서 비롯되었다.농업생산에 삶을 의족한 전통적인 경사회 사람들 정서로는 헤아릴 수 없는 대목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타크라마칸은 중요한 전략요충지였다.서역의 유목민들로부터 중원을 보호한다는 것과 중국산 비단의 대외무역 주통로를 지킨다는 두가지 목적이 함축되었다.그래서 한대에 이미 신강성 장악을 서둘렀다.천산북로에는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길이,천산남로에는 오늘의 중동으로 가는 페르샤통로가 존재했기 때문에 타크라마칸을 중시했다.남쪽 사막을 따라 인도로 가는 길을 합하면 신강성은 세 갈래 무역통로를 거느린 물물의 교차로였던 것이다. ○동서문화매개자 역할 세계에 위용을 떨친 징기스칸의 몽골제국 뒤에도 위그루족이 숨어 있었다.그렇듯 위그루족은 동서문화의 매개자 역할을 했다.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동양인들은 위그루족이 이슬람을 대표하는 민족인 것으로 생각했다.중국과 더불어 우리는 옛날에 위그루족을 한문으로 회홀 또는 회골이라 썼다.그리고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교라는 말은 위그루족이 믿는 종교를 뜻하는 것이다. 이들이 사육한 말은 중국에서 첫 손가락을 꼽는 명마였다.한대나 당대에 마(천마)라고 한 명마는 위그루말을 의미했다.그 품종을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비단길을 거쳐 들어온 아랍종 혈통의 말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오늘날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말은 아랍종 피를 받지않은 말이 없다고 할 정도이고 보면 고대 중국인들 역시 위그루말을 선호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 일대가 이슬람으로 편입한 중세 이후 이 지역은 투르크스탄이라는 통합적 개념으로 호칭되었다.그리고 신강성의 위그루는 동투르크스탄이라 불렀다. 볼세비키혁명 이후 스탈린은 범투르크주의운동을 아주 싫어했다.그래서 위그루의 땅 신강성은 급기야 소련과 중국 공산정권 사이의 주도권다툼에 휘말렸다.신강성의 석유와 광물이 두 공산세력의 각출을 유도했던 것이다. ○55년 자치지역으로 선포 그것은 20세기에 재현한 비단길 분쟁이었는지 모른다.1949년 모택동의 대장정은 신강성까지 이어졌다.1955년에는 신강위그루족자치지역으로 선포되었다.어떻든 공산정권의 중국은 1959~60년 사이에 이른바 ‘신강성 해방’을과감히 단행하고 소련과의 국경분쟁을 마무리지었다.오늘도 위그루족의 땅신강성을 가면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민족분열을 절대 반대한다’는 붉은글씨 구호가 곳곳에 널렸다.위그루족의 독립운동을 반대하는 내용이다. 그 표어는 이방인에게 혼돈을 안겨주었다.단일민족으로 살아온 우리에게는 조국과 민족이 얼핏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떼를 내놓았던 위그루족 꼬마 로신이가 어느 틈에 잠이 들었는지 조용하다.로신이가 자라 중국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알게 되는 순간 지금처럼 행복할 것인가.유구한문화와 선천적 상술을 지니고 태어났을 위그루족 장래가 자못 궁금했다.
  • 카자흐 정추 교수 광주학생운동 68돌 맞아 귀국

    ◎59년만에 받은 ‘항일졸업장’/광주서중 재학때 일 장교 ‘군’으로 부르다 퇴학/김일성 독재청산 요구하다 58년 구소로 망명 일제하인 지난 38년 광주 서중 재학중 일본인 배속장교를 배척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던 카자흐스탄 거주 70대 노교수가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68주년을 맞아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주인공은 현재 카자흐스탄의 수도인 알마아티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이자 알마아티 국립종합대학 한국어과 교수인 정추씨(74). 정씨는 이날 광주일고 시청각실에서 광주고보·서중·일고 동창회 주최로 열린 학생의 날 기념식에서 퇴학을 당한지 59년만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정씨는 “서중 3학년때인 38년 10월쯤 학교 배속장교인 구로미야(흑산)에게 ‘선생’이라고 하지 않고 ‘군’이라고 경멸했다는 이유로 심하게 두들겨 맞고 학교에서 쫓겨났었다”며 “그 일로 인해 다시 고향땅에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을 떠돌아 다녀야 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모스크바 국립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학 작곡과에 다니던 56년 김일성 개인 독재의 청산을요구하며 ‘반 김일성운동’을 벌이다 58년 구소련에 망명한 후 카자흐스탄 국립사범대학 음악학부 교수로 활동해왔다.
  • “대선정국 걱정스럽다”/각계원로 시국선언

    ◎국정운영 비전가진 후보 뽑아야 강영훈 전 국무총리 등 각계 원로 20여명으로 구성된 ‘나라를 걱정하는 모임’은 20일 기자회견을 갖고 현 시국에 대한 견해와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날 상오 11시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가진 회견에서 원로들은 ‘대선 정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호소’라는 성명을 발표,차기 대통령이 지녀야 할 구체적인 자질에 대해 ▲국정운영의 비전과 실천방안을 뚜렷이 제시하고 ▲민주적 원칙과 절차를 존중하고 ▲국민과의 약속과 신의를 지키고 ▲음해성 중상모략이나 인신공격을 일삼지 않고 ▲지역감정이나 세대·계층간 갈등을 조장하지 않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제시했다. 또 ▲건국이념에 대한 신념과 차기 정권의 역사적 과제를 인식하고 ▲법치국가를 이끌어야 하며 ▲정치적 노선이나 정책의 현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당간 또는 정치인 간의 야합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선거공영제를 실시하고 무책임한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지 말아야 하며 선거분위기를 혼탁하게 하는 비자금 의혹은 공정하게 규명돼야 한다고 밝혔다. 원로들은 “최근 우리 사회는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전반에 걸쳐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국민·정부·기업 모두가 많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면서 “15대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어지러운 정치현실을 보며 앞날을 크게 우려하지 않을수 없다”고 밝혔다. 국내외 상황과 관련,“경이적인 변혁이 예상되는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우리는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아야 한다”며 “날로 가중되는 경제불황이나 북한에 대한 보도는 우리나라가 아직 불안하고 험난한 현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으며 외국과의 통상마찰이나 4자회담을 보면서 우리나라를 강한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어 “전쟁의 폐허 위에서 산업화를 이루고 민주화를 실현한 우리는 이제 또 다시 민족적 저력을 바탕으로 선진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지적한 뒤 “이번 대선에서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과업을 추진할 수 있는 인물을 뽑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로들은 이를 위해선선거관련 당국자들이 공명정대한 대선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언론은 국민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책임과 역할을 해야하며 유권자들은 사사로운 유혹이나 연고·정실을 떠나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날 모임에는 강 전 총리를 비롯,현승종 전 총리,채문식 전 국회의장,서영훈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대표,고흥문 전 국회부의장,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조완규 전 서울대총장,백낙환 인제대 총장,안병욱 숭실대 명예교수,이세중 전 대한변협 회장,전산초 연세대 명예교수,선우종원 변호사,정진경 목사,송남헌 독립운동가,이원범 3·1운동 기념사업회장 등 15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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