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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모제·전시회등 행사다양

    국가보훈처는 13일 오전 10시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 등 3부 요인,임정관련 독립유공자 및 유족,광복회원,시민 등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 이날 임정 청사가 있던 중국 상하이(上海)와 충칭(重慶)에서도 현지 거주독립유공자 후손 등의 주관으로 기념식 및 기념논문 발간 행사 등이 열린다. 오후 2시 효창원 의열사(義烈祠)에서는 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 차이석(車利錫)선생과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의사 등 7위 선열의 위업을 기리는 추모제전이 거행된다. 광복회(회장 尹慶彬)는 특히 이날부터 다음달 12일까지 한달간 전쟁기념관에서 임정요인들의 활동사진 및 사료 등 임정 27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있는 각종 자료를 전시한다. 전시회에서는 석주 이상룡(李相龍)선생이 가족에게 보낸 서찰 진본과 무기구입을 요구하는 홍범도(洪範圖)장군의 친필 서신이 처음으로 공개되고 덕수궁 앞 3·1운동 시위군중 사진 및 임정청사사진 등 총 280여점의 사료가 전시된다. 광복회는 또 효창공원 등 전국 10개 지역에서 초·중·고교생 5,000명을 대상으로 임정 수립 80주년 기념 청소년 백일장을 개최한다. 광복군 출신 애국지사 및 독립유공자 후손 등 20명은 오는 27일부터 7박8일간 중국 상하이와 항저우(杭州),충칭,시안(西安),베이징(北京) 등을 돌며 임시정부 유적지를 탐방,선열들의 발자취를 재조명한다. 국가보훈처는 이밖에 임정 법령집 3,000부를 발간,전국 국공립도서관과 독립운동단체,연구기관 등에 배포하고 기념전화카드와 우편엽서를 각각 50만장과 20만장 제작해 발매한다. 광복회원과 동반가족 한명은 13일 하룻동안 전철 지하철 시내버스를 무료로 승차할 수 있으며 13∼14일 이틀간 고궁 능원 독립기념관 박물관 등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 ”臨政 지원” 蔣介石 친필문서 첫 공개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을 맞아 임정과 광복군을 지원한 중국정부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친필서명한 문서가 12일 국내 처음으로 공개됐다. 백범전집편찬위원회(위원장 尹炳奭·인하대 명예교수)는 지난 3월 대만에서 입수한 백범 김구(金九)선생 관련 문건 가운데 장총통이 친필서명한 문건 5건을 비롯해 임정의 김구 주석이 장총통에게 보낸 편지,임정요인들의 환국때 중국정부가 경비·교통편을 지원한 문건 등 임시정부·광복군관련 문건 20여 건을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 가운데 장총통이 친필서명한 문건은 1945∼46년 전후중국정부가 임정과 광복군의 경비지원과 관련한 것.결재란에는 장총통의 본명인 ‘중정(中正)’이라는 서명과 그 앞에 중국말로 ‘(품신한)그대로 허가한다’는 의미의 ‘조준(照准)’이라는 결재내용이 선명히 나와있다. 문건에 따르면,중국 국민당의 우티에청(吳鐵城)비서장이 임시정부 지원금을 매월 5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증액할 것을 품신한데 대해 장총통이“그대로 (이행)하고 군정부(軍政部)를 통해 지급하라”고 지시(44.8.19)했다. 또 45년 3월 6일 결재한 문건에는 광복군의 군사비를 중국정부가(임시정부를 거치지 않고)직접 광복군에 지급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밖에도 이번에 공개한 문서 가운데는 김구 주석이 장총통에게 보낸 감사편지(44.6.21)와 중국정부가 임정 요인들의 환국을 지원하기 위해 비행기 한대와 경비지원을 결정한 문서(45.10.15) 등도 포함돼 있다. 독립운동가 김홍일(金弘壹·전광복회장)장군의 자제로 해방 전 중국군 군사위원회(위원장 장제스)에서 문서장교를 지낸 김용재(金勇哉·72)씨는 “결재란의 ‘중정’은장총통의 친필서명임이 확실하다”고 밝혔다. 백범의 차남으로 3공시절 대만 대사를 지낸 김신(金信·77) 전교통부장관은 “임정시절 장총통의 친필문서는 처음 접한다”며 감격해했다.한시준(韓詩俊) 단국대 교수는 “장총통이 임정과 광복군의 경비지원을 결재한 친필문서가 국내에 입수된 것은 처음”이라며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한편 이 문건은 백범전집편찬위원회 해외자료수집위원인 후천훼이(胡春惠)대만 국립정치대학 교수가 장총통 개인자료철에서 입수,편찬위에 제공한 것으로 금년 6월 발간예정인 ‘백범전집’에 전문 수록될 예정이다.
  • 蔣介石총통과 臨政

    11일 백범전집편찬위원회가 공개한 장제스(蔣介石)총통 친필서명은 장총통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지원한 사실을 입증하는 최초의 공식문서라고 할 수 있다.1919년 상하이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장총통은 45년 일제패망 때까지 근 30년간 물심양면으로 임정을 지원했는데 이는 장총통이 항일투쟁에서 임정을 동지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장총통의 임정·한국광복군에 대한 지원은우선 1925년 전후로 황포군관학교에 20여 명의 한국학생을 입교,정규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한 데서 시작된다.이후 30년대 들어 장총통은 국민당조직부장 진과부(陳果夫)를 통해 임정과 임정요인들을 지원케 하였다.31년 10월에는 난징(南京) 중앙군관학교에서 백범 김구(金九)와 회담을 가진 후 백범의 요청에 따라 그 해 12월 러양(洛陽)군관학교에 한국인 92명을 다시 입교시켜주었다.이들은 훗날 독립운동의 기간요원으로 활동하였다.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사의 의거가 있자 장총통은 “중국의 백만대군도 못한 일을조선의 한 청년이 해 냈다”며 윤의사의 의거를 극구 치하,이후로 임정에 대한 지원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장총통이 임정을 공개적·구체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37년 7월 ‘노구교(蘆溝橋)사건’이 터지고 정식으로 대일전(對日戰)을 선포한 후부터다. 이후 장총통은 임정과 광복군의 활동에 대해 경비·물자 지원을 통해 대일전에서 동맹군으로 인식하였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장총통이 광복군의 위상문제,임정·광복군에 대한 경비지원에 대한 자료가 주류다.45년 3월 14일자로 결재한 문건에 따르면,임정의 김구 주석이 월100만원이던 지원금에 400만원을 증액,500만원을 요청한데 대해 국민당 우티에청(吳鐵城)비서장의 의견을 참고해 200만원을 증액토록결재한 것으로 나와 있다.또 44년 11월 7일 결재한 문건에서는 임시정부 사무실 임대비용 400만원(보증금 200,연간임대비 200만원)의 지급요청에 대해“그대로 지급하라”고 결재했다.특히 광복군의 관할문제를 놓고 한·중간에 갈등을 빚은 ‘한국광복군9개 행동준승(行動準繩)’과 관련,장총통은 “철저하게 취소하라”며 양측간의 유대강화를 강조하였다. 지난 90년 민간인 주도로 대전시내에 장총통의 동상이 건립됐다.윤봉길의사의 의거를 높이 평가한 점을 감안,윤의사의 고향인 충남지역에 자리를 잡았다.53년 정부는 장총통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수여했다.
  • [김삼웅 칼럼] 대한민국 임시정부 80돌

    오늘(13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上海)에서 출범하면서 독립전쟁을 선포한지 80주년이다. “백산(白山)에 이는 바람 천지도 시름짓고 푸른파도 구비치는 곳 구룡(龜龍)이 일어나 춤을 추는구나. 어두운 이밤은 언제나 새이려나.모진 비바람만 휘몰아치는 것을….”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내고 임정에 내분이 생기자 25일간 단식끝에 목숨을 끊은 申圭植선생이 망명지에서 쓴 ‘한국혼’의 서두다. ‘모진 비바람만 휘몰아친’절망의 시대에 애국지사들이 이국땅 상하이에모여 임정을 세우고 나라찾기 전쟁을 벌인지 80성상이 흘렀다. 상하이에 임정이 세워졌다는 소식에 고국의 동포들은 노래불렀다. 자유민아 소리쳐서 만세불러라 임시정부 만세불러라 대통령 국무총리 각부처 장관 국제연맹 여러 특사 만세불러라 우리 이미 이민족의 노예 아니오 또한 전제정치하의 백성 아니라 독립국 민주정치 자유민이니 동포여 소리쳐서 만세불러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세. 망국 9년만에 3·1항쟁의 뜻을 담아 임정을 세우니 ‘일제 36년’은 국권상실의 측면에서 임정이전의 9년일 뿐이다. 임정은 물론 국제법상 통치권이 미치는 국토와 국민이 있어야 하는 일반 정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렇다고 대한제국과는 시간적 연속성이 없고 주체세력과 이념이 달라 ‘망명정부’일수는 없다. 임정은 한민족의 정신적 구심체가 되면서 향후 27년 동안 줄기차게 독립전쟁을 벌였다. 무장·의열·외교등 모든 방법을 동원한 전쟁이었다. 식민지역사상 우리 임정처럼 일체의 타협을 배격하면서 완전독립을 추구한 사례는없다. 자치론이나 위임통치론 따위를 철저히 배격하면서 ‘완전독립’만을추구했다. 임정의 지도자들이 왕조시대 인물들인데도 복벽(復 )을 거부하고 민주공화체제를 지향한 것은 대단히 선각적이다. 임시헌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제1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빈부 및 계급없이 일체평등으로 함”(제3조) 등 ‘헌법’정신과 조항이 민주공화제를 지향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국내외 독립운동단체 460개 중 민주공화제 국가의 건설을추구하는 민주지향형이 244개(53%)인데 비해 계급투쟁형은156개(34%), 왕정복고형은 37개(8%), 군정추구형은 23개(5%)로 나타났다. 한민족의 민주지향성을 살피게 한다. 임정은 욱일승천하는 일제로부터 탄압과 회유, 국제열강의 외면과 냉대, 극심한 생활고와 재정난, 그치지 않는 노선 시비와 사상갈등 속에서도 민주공화제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항일투쟁의 구심체 역할을 맡았다.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도 했다. 예컨대 李東輝중심의 좌파계열과 金元鳳중심의 의열단세력까지 포용, 거국적 항일투쟁 전선을 형성한 것은 임정의 정통성과 대표성을 뒷받침한다. ‘한국독립’의 계기가 된 카이로선언이 가능한 것은 임정의 존재때문이다. 尹奉吉·李奉昌의사의 의열투쟁과 항일전선에 몸을 사른 지사들의 희생이중국을 움직이고 중국정부가 미·영 수뇌를 움직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한 것이다. 임정의 최대 성과라 할 것이다. 해방후 국민사이에 이런 노래가 불려졌다. “따따따 따따따 나팔소리 들린다/쿵 쿵 쿵 북소리 들린다/남대문을 열어라 동대문을 열어라/임시정부 들어온다 광복군이 들어온다.” 그러나 임정은 귀환하지 못했다. 임정의 귀국이 거부되면서 한국현대사는이념대결과 친일파가 득세하는 분단과 왜곡의 시대가 되었다. 임정수립 80주년, 해방 54년이 되는 20세기 마지막 임정 기념일에 독립지사들의 순결한 애국정신이 그립다. 남북이 갈리고 지역을 토막쳐서 이념과 이해로 대립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애국지사들의 영령앞에 부끄러워하면서, 임정정신이 국민통합과 환난극복, 남북화해의 바탕이 되었으면 한다.
  • 韓中학자 공동 심포지엄

    한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 기념 국제학술토론회가 12일부터 이틀 일정으로 20여명의 한·중 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중국 베이징(北京) 복단대에서 열렸다.이들은 ‘한국임시정부와 항일무장투쟁’,‘조선민족혁명당과 한국임시정부’,‘상하이에서의 한국해외독립운동’ 등 10여개의 주제를 놓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를 재조명하면서 열띤 토론에 들어갔다. 한국측에선 이원순(李元淳)국사편찬위원장과 박영석(朴永錫)건국대명예교수,유준기(劉準基)총신대교수,이현희(李炫熙)성신여대교수,김승일(金勝一)동국대교수,조규태(曺圭泰)국가보훈처 연구원 등이 주제발표자로 나섰다.김준엽(金俊燁)사회과학원이사장은 축사를 했다.중국측은 오경평(吳景平)복단대 교수와 석원화(石源華)복단대 한국연구센터 부주임,마장림(馬長林)상하이문서국연구원,패민강(貝民强)상하이임시정부 사적지관리처주임 등 11명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다음은 이현희교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성 연구’의 주요 내용. 1919년 4월 임정의 선포는 혁명적 민간 정통의 공화정부 수립을 알리는 신호탄이다.우리가 군주제를 청산하고 민주공화제의 자유민주주의 개시를 전세계에 알린 것이다. 이동녕 초대임시의정원 의장(국회의장)이 1919년 4월13일 상하이에서 “지금부터 이 나라는 대한제국이 아니라 민간인이 주도하는 대한민국입니다”라며 눈물로써 임정을 선포할 때가 바로 우리나라 법통의 시초인 것이다.그후임시정부는 45년까지 27년간 끈질기게 유지됐다는 점에서 세계인의 독립운동과 차별화해도 좋을 것이다.당시 인도와 월남,아랍국가들이 임시정부를 수립했으나 몇년 지속되지 못하고 좌절 또는 자진 철수했던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중국의 대표적 문호인 루쉰도 “한국인의 희생적인 투쟁은 일제 침략자를 무색케 했고 임시정부의 투쟁은 그 나라 법통을 지킨 쾌거였다”고 극찬했을 정도다. 1919년 4월 임정수립 이후 80년을 맞는 우리는 3·1 정신과 임정의 법통정신인 통일,민족,민주와 자유,정의,진리가 국가발전의 근본 원리임을 새롭게인식해야 할 것이다.
  • [정직한 역사 되찾기](32)춘원 이광수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송욱(宋稶) 전 서울대 교수(80년 작고)는 생전에 ‘사상계’에 기고한 ‘한국 지식인의 역사적 현실’이란 글에서 춘원 이광수의 편린 하나를 남긴 바 있다.문학소년이던 중학생 시절 그는 친구와 함께당대의 대문호이자 우상이었던 춘원 이광수를 만나볼 요량으로 춘원의 부인(허영숙)이 경영하던 산부인과병원으로 찾아갔다.간호사의 안내로 병원의 긴복도를 지나 온돌방에 다다르자 춘원이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황송해하며 춘원에게 큰 절을 올리고 일어설 무렵 라디오에서 일본어 방송이 흘러나왔다.그러자 춘원이 “이 방송은 이세대신궁(伊勢大神宮)에서 올리는 ○○제(祭)의 실황 중계방송이죠”라며 자못 경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춘원은 일본군국주의 종교의식에 방송을 통해서 참가하고 있는 것이었다.의외의 장면을 목도하고 춘원에 대해 실망을 느낀 두 사람은 이내 그와 작별하였다.두 사람의 등 뒤에 대고 춘원은 “이제부터는 작품을 일어로도 쓸 수 있고 우리말로도 쓸 수 있어야죠”라고 권했다.이후로 그는 춘원의 글을 많이읽지 않았다고 적었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창씨명 香山光郞).역사속에서 우리는 그를 어찌 볼 것인가?그의 당대에서부터 사후 반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려 왔다.문학적 업적을 강조한 ‘대문호’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민족반역자 ‘친일파’라는 평가도 있다. 지난 92년 그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유족·추종자들이 기념행사를 하면서작성한 한 자료에 의하면,그를 연구한 석·박사 학위논문이 40여편이나 됐다.그런데 그 논문의 주제는 전부 문학분야였다.그의 일제하 친일행적을 연구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었다.이래놓고 그의 진면목을 탐구했다고 할 수는없다. 이처럼 그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는 생애 전반을 아우르기 보다는 문학분야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없지 않다.그에 대한 평가가 균형을 잃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춘원처럼 ‘시대의 인물’로 활동한 자는 그가 활동할 당시의 시대상황과 당시 민중들이 그를 어떤 인물로 인식했느냐 하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춘원이 문인인것은 분명하다.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민중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2·8독립선언’의 작성자이자 샹하이 시절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을 만든 ‘민족지사’로서의 면모가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춘원의 변절에 대해 민중들이 안타까와 하고 분노해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춘원을 문인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마치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을 군인,만해 한용운(韓龍雲)선생을 스님으로만 평가하는 것과 다름 없다.춘원에대한 평가는 이래서 시각교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민족지사’의 거울에 비춰본 춘원은 어떤 모습인가.한마디로 형체를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진 모습이다.그의 일생을 통해 정신사를 관통하고 있는 ‘친일’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춘원은 1892년 평안남도 정주에서 과거에 실패한 후 술로 세월을 보내던 이종원(李種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아명은 보경(寶鏡).5세 때 한글과 천자문을 깨우치고 8세 때 동양고전을 두루 섭렵할 정도로 총명한 그였지만 10세때 콜레라에 걸린 양친이 사망,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러던중 14세 때 천도교 유학생으로 일본 메이지(明治)학원에 입학하면서처음 신세계를 접하게 됐다.아직 인격적으로 미성숙한데다 별다른 학문적 기초나 바탕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제국주의라는 물결이 넘실대는 일본이라는거대한 ‘바다’에 내던져지게 됐다.그의 비극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주체의식을 키우지 못한데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도일 초기부터 문학에 심취한 그는 메이지학원 동창회보 ‘백금학보’(1909.12.15,제19호)에 일본어로 된 단편소설 ‘사랑인가’(원제 ‘愛か’)를 발표하였다.조선인 소년이 일본인 소년을 신격화하여 연모하는,일종의 동성애를 내용으로 하는 이 소설은 내용보다는 발표시점이 문제다.그가 이 소설을 탈고한 날짜(1909.11.18)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지 23일째 되는 날이었다.동양천지를 뒤흔드는 의거가 조선인 손에서 일어난 그 무렵 그는 하숙방에서 일본어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1917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무정(無情)’을 발표한 후 ‘전조선여성의 연인’ 소리를 듣던 그는 본처와 이혼한 후 허영숙(許英肅)과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으며 1919년 2월 도쿄 유학중 ‘2·8독립선언’을 작성,일약 민족지사의 반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선언’을 자세히 뜯어보면 “…합병 이래 일본의 조선통치정책을 보건대 합병시의 선언에 반(反)하여 오족(吾族)의 행복과 이익을 무시하고…오족에게 참정권,집회·결사의 자유,언론·출판의 자유를 불허하며…”라며 일제가 ‘합병’당시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문제삼고있는데 이는 강도가 한 약속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해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건너가 2년 남짓 활동하다가 애인 허영숙의권유로 ‘독립신문’ 편집을 그만두고 사랑을 찾아 조선으로 돌아왔다.월탄박종화(朴鍾和)는 그의 ‘일기’에서 춘원의 귀순(歸順)은 총독부의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허영숙이 설득한 결과이며 이 일로 허영숙의 첫 애인 진학문(秦學文)은 홧김(?)에 일본여자와 결혼해버렸다고 쓴 바 있다. 귀국(1921.3)도중 춘원은 선양(瀋陽)에서 체포돼서울로 호송됐으나 별다른 조사나 재판 없이 곧 석방되었고 두달 뒤 5월에는 허영숙과 결혼하였다.다시 9월에는 사이토(齋藤實)총독을 면담하는 등 그는 그때부터 이미 당국의비호를 받고 있었다.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이듬해 5월 그는 잡지 ‘개벽’에 일제의 반독립 논리를 민족논리로 위장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그의 동아일보 입사는 그 이듬해 23년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월 300엔이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보수를 받았다.24년 그는 동아일보에 다시 ‘민족적 경륜’이라는 대일 타협노선의 논설을 발표,어용적 민족개량·자치노선으로 기울기 시작했다.위의 두 글에서 그는 조선이 쇠퇴한 이유는 민족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며 민족성 개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기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약소국의 침략·지배를 정당화한 것을 배낀 것이었다. 중일전쟁 발발 1개월전인 37년 6월 그는 소위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이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이 단체 역시 발족 당시부터 총독부와 사전협의하에 조직된 단체이고 보면 독립운동단체라고 할 것도 없다.경기도 경찰부장 지바(千葉)는 “민족본능인지하수(독립사상)가 지표(地表)로 분출했을 때는 극격히 막지말고,버려두지도 말고,자연의 유력(流力)을 이용해서 바다로 흘러가도록 ‘도랑을 설치’하라”고 하였다.친일파연구가 고 임종국(林鍾國)은 “이 ‘도랑’이 바로‘민족개조론’이요,수양동우회요,‘민족적 경륜’이었다”고 분석했다. 한편 중일전쟁 이후 춘원은 전시협력을 위주로 보다 행동적인 친일대열에가담하게 된다.39년 중국에 출정한 일본군 위문단(북지황군위문작가단)결성식의 사회를 맡은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이해 10월 결성된 조선문인협회 결성식에서 그는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듬해 2월 11일 ‘창씨개명령’이 선포되자 그는 그 다음날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는 모범적인(?) 창씨개명을 내놓으면서 일반인들의 동참을 호소하였다.그리고는 외쳤다.“…나는 지금에 와서 이런 신념을 가진다.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매일신보’,1940.9.4) 심지어는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이런 그를 두고 단국대 김원모(金源模)교수는 “민족을 보전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친일을 했을 뿐,그의 심저(心底)에는 독립정신이 살아 있었다”고 변호하고 있는데 공감하기 힘들다. 해방직후 춘원은 향리에 칩거하며 ‘나의 고백’ ‘돌베개’ 등을 쓴 바 있다.그는 인조(仁祖)가 병자호란 때 끌려갔다가 돌아온 조선여인들을 홍제원(弘濟院)에서 목욕시킨 후 정조문제를 거론치 못하도록 한 예를 들어 친일파문제도 이처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수감돼 있던 그는 재산보전을 위해 허영숙과 위장이혼하는 교활함까지 드러냈다.일관된 친일과 타협으로 일제강점기를 산 춘원.그는 공사를 막론하고역사와 민족 앞에 단 한번도 진실한 적이 없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전 13일부터 새달12일까지

    광복회는 임정수립 80주년 기념사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전을 개최합니다. 이 자료전에는 임정요인의 활동상과 백범 김구선생의 겨레사랑·자주독립정신을 담은 화보 및 유물·유품이 전시됩니다.또한 임정 2대 대통령 白巖 朴殷植,독립운동가 石洲 李相龍,友堂 李會榮,趙素昻,石吾 李東寧선생의 친필휘호 자료등이 함께 공개됩니다.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람 바랍니다. 기 간 4월 13일∼ 5월 12일 1개월간 장 소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기획전시실 문 의 전쟁기념관 안내 709-3139 관람시간 오전 9시 30분∼오후 6시(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무 료
  • 金대통령 美‘자유의 메달’수상

    ┑워싱턴 崔哲昊 특파원┑金大中대통령이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에 공헌한 인물에게 주는 미국 ‘필라델피아 자유상’(Liberty Medal) 99년 수상자로 선정됐다. 에드워드 렌델 필라델피아 시장은 7일 기자회견을 통해 金대통령의 수상자선정사실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시와 한인교포 7만명은 미국 독립기념일인 오는 7월4일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홀에서 열릴 시상식에 金대통령이 참석해 주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상을 주관하는 필라델피아협회(GPF)는 金대통령을 아시아의 만델라로 비유하면서 “그는 지난 반세기동안 투옥과 암살기도에도 불구,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신장을 위해 매진,한국적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을 넘어서 실제 민주화를 향한 진전을 이룩한 역사적 인물이 됐다”고 평가했다.또“金대통령이한국 헌정사상 첫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고 많은 정치범들을 석방했으며금융위기 이후 짧은 집권기간동안 한국 경제를 제궤도로 올려놓았다”고 업적을 소개했다. 선정위원장인 마틴 메이어슨 필라델피아 명예총장은 金대통령이 “한국민뿐 아니라 모든 대륙 지도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필라델피아 자유상’은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필라델피아 정·재계지도자 모임 ‘위 더 피플 2000’에서 미국 독립정신을 드높인다는 기치 아래 1988년 제정됐다.세계 도처에서 양심의 자유,압제·무지·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지도력이나 비전을 제시한 조직 및 인물을 기리자는 취지로 ‘리버티 메달’과 10만달러의 상금이 주어진다. 필라델피아는 미독립운동의 발상지로 1790년부터 10년간 신생 미합중국의수도이기도 했던 곳.그만큼 민주주의와 독립정신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남다르다.‘자유상’은 그같은 정신하에 정치적 입김을 받지 않고 인권 기준으로만 엄정하게 선정함으로써,짧은 기간에 권위를 인정받게 됐으며 ‘제2의노벨상’으로도 불린다. 역대 수상자로는 폴란드 자유노조 지도자 레흐 바웬사를 비롯,지미 카터 전(前) 미대통령,바츨라프 하벨 체코 대통령,요르단 후세인 국왕,시몬 페레스이스라엘 총리 등이 있다.
  • 美거주 광복군 출신 尹致源선생 초청 방한

    “이역만리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며 고생했던 동지들의 얼굴이 눈에 어립니다”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와 광복회의 초청으로 8일 오후 6시 미국 LA발 대한항공 018편으로 서울에 온 광복군 출신 尹致源선생(74·미국시카고 거주)은 감회에 젖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선생의 고향은 평안북도 의주.고향을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마음을정하고 중국으로 건너간 것은 16세 때인 1940년이었다.1944년 11월에는 시안(西安)에서 광복군 제2지대(지대장 李範奭장군)에 입대했다. 45년 5월에는 국내정진군에 편입돼 광복군이 미국 전략첩보기구인 OSS와 합작으로 실시한 특수훈련을 받았다.국내에 침투할 정예요원 50명을 선발,실시한 고된 훈련이었다. 광복후에는 약 5개월 동안 중국 산뚱성(山東省) 칭따오(靑島)에서 일본출신의 한국청년들을 교육하는 일에 헌신하다가 46년 1월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목사로 교육사업을 전개하다가 선교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63년에는대통령 표창을,90년에는 국민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한편 이날까지 尹선생을 비롯,李相龍선생의 외증손녀인 허끌라나(67·러시아),安昌浩선생의 외손자 필립 안 커디(44·미 캘리포니아) 등 해외거주 독립유공자 및 후손 32명이 입국했다. 이들은 9일 국립묘지를 참배한 뒤 10∼12일 독립기념관 등 독립기념시설물과문화유적지,민속촌을 둘러보고 14일 출국한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朴殷植 선생

    국가보훈처는 4월‘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민족사학자이자 언론인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白巖 朴殷植 선생(1895∼1925)을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3·1운동 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姜宇奎 의사를 서울로 파견해 일제에 폭탄을 투척하는 거사를 일으켰고 1925년 3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17)

    한국판 ‘주홍글씨’라 평가받는 ‘순애보(殉愛譜)’의 작가 박계주는 기독교적 휴머니즘과 민족주체성의 추구자세를 바탕삼아 대중소설을 계몽의 도구로 활용했다.만주의 간도 용정 출생답게 그는 독립운동과 광복 이후 분단현실을 어느 대중소설가보다 더 많이 다뤘으며,6.25 때는 박영준,김용호,김수영 등과 같은 문인처럼 납북 도중 탈출한 경력이 있다. 장편 ‘여수’는 1961년 6월 11일부터 같은 해 11월 28일 게재 중단 당할때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정치 이데올로기가 문제되어 신문 연재소설이 중단되기는 아마 이 작품이 처음일 것이다.시기적으로는 5·16군사쿠데타 직후의 다소 어수선한 상황이었지만 이 소설이 정면으로 주장했던 남북한 교류와 반공정책의 허울 아래 빚어진 독재권력의 부패상,여기에다 치명적인 쟁점이 된 8·15직후의 모스크바 삼상회담 결정안(세칭 신탁통치안)에 대한 비판은 당시 정치·역사학계에서도 미처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민감한 이데올로기적인 금지구역이었다.문제의 신탁통치에 대한 언급은 11월 28일자에대학교수이자 작가로 자유당 독재를 비판하는 소설을 써서 반정부 작가로알려진 이춘우가 유럽 여행 중 오스트리아에 들렸을 때의 착잡한 사념들을서술한데서 발단되었다.오스트리아는 제2차대전 후 미·영·불·소 4강국의분할통치라는 비운을 맞았으나,한국과는 달리 이를 수용하여 1955년 7월 분단이 아닌 통일 독립국가로,11월엔 영세중립국이 된 나라이다.이런 나라를여행하면서 작가 이춘우는 분단 조국을 떠올리며 아래와 같은 상념에 빠져든다. “춘우는 문득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를 생각했다.그는 신탁통치를 찬성했기 때문에 암살당했던 것이다.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당시 송진우의 의견대로 오년간의 국제신탁통치를 받았던들 오년 뒤엔 국제기구인 유엔에 의해 오스트리아처럼 통일되었을 것이다.국제신탁통치를 하게되면 북한남한으로 양단되지 않은채 몇 개 통치국가들이 남북을 공동감시하며 공동통치하게 되기 때문에 양립된 불가침의 군정은 없었을 것이다.그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신탁통치를 반대한 이승만 김구 이시영 등의 인사들은독립투쟁을한 애국자이기는 하지만 앞을 내다보거나 앞을 저울질할 줄 아는 정치가가못되는 반면 송진우는 독립투쟁은 하지 못하였을망정 앞을 내다보는 구안(具眼)의 정치가라 할 수 있다.대체 해방직후 아무런 경제적 지반도 없고 경찰력도 군대력도 없고 행정적 정치적 훈련도 없고 산업도 마비상태였는데 ‘돈립국가’라는 문패만 붙잡고 어쩌자는 것이었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아닐수 없다” 마지막 부분의 ‘돈립국가’란 ‘독립’의 오자인지 ‘돈으로 나라를 세우려 한다’는 풍자인지는 모르겠으나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이었다.물론 이 서술이 역사적인 진실과 일치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나 그 당시구전되어오던 금기사항을 이렇게 문자화 해 버리자 반격은 의외로 빨랐다.‘동아일보’ 29일자 1쪽에는 아래와 같은 2단 상자 사고(社告)가 실렸다. “ 사고.그간 본지 조간 4면에 연재해 오던 박계주씨 집필인 소설 ‘여수’는 비록 소설이라할지라도 지난 27일자 조간 게재 내용이 본사의 견해와 현저히 상이하므로 본사는 해 소설을금후 게재 중지하기로 결정하였음을 독자 제현에게 알리오며 아울러 사전에 발견하여 시정치 못하였음을 송구히 여깁니다.이 점 독자제현의 양찰을 바라마지않습니다.동아일보사” 이 소설은 비판적인 작가 이춘우의 유럽일대(프랑스·영국·독일·오스트리아 등) 여행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북한에서 모스크바까지 다녀와 최승희 무용단에서 활약 중 6·25 때 서울로 위문공연차 왔다가 도주한 김미전은 고모네 마루 밑에서 몇 달 동안 피신할 때 만났던 이춘우를 사모하게 된다.그녀는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 갔으나 간첩으로 몰리는 등 갖은 수모와 고생을 하면서도 무용가로 활동 중 춘우의 도움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김미전을 비롯한 주변 여인들과 남편의 관계를 의심하던 춘우의 아내 의숙은 홧김에 춤바람으로 놀아나면서 남편의 불륜을 기사화시켜 교수직에서 쫓겨나도록 만드나 후회코 자살을 기도하다 실패하고 정신병원에 수감된다.국내 망명자 신세가 된 춘우는 먼저 프랑스에 들러 미전을 만나야 하지만 미적대다가 6·25때 백마고지에서 전사한 아버지를 둔 파리의 창녀 이본느를 만나게 된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백범 金九선생 장남 ‘金仁’ 아십니까

    ‘독립운동계의 거물’인 부친에 가려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인물이 바로 백범의 장남 仁이다.백범은 2남3녀를 두었으나 일찍 위의 세 딸을 잃었다.仁·信 두 아들 가운데 장남 仁은 해방되던 해 충칭(重慶)에서 신병으로 사망했다.29일은 바로 그의 54주기. 1918년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재학중조모 郭樂園여사·동생 信과 함께 난징(南京)으로 탈출,임시정부의 피난행렬에 합류하였다.중국 장제스(蔣介石)정부가 운영하던 낙양(洛陽)군관학교를 1년간 다닌 그는 난징 시절 청년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30년대 후반 일제 점령지인 상하이(上海)에서 일제 주요기관 폭파 및 요인암살계획 등 지하공작활동을 하였다.태평양전쟁 발발후 홍콩을 거쳐 충칭에 도착한 그는 ‘청년호성(靑年呼聲)’을 발행,민족정신 함양을 도모하기도 했었다.그의 동생 金信씨(77·전 교통부장관)는 “형님은 선친을 닮아 체격도 크고 성격도 활달했다”고 기억하고는 “그동안 형님의 업적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것이 늘 죄스러웠다”고 털어놨다. 90년 그는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뒤늦게 추서받았다.그의 동료들이 대개 독립장(3등급)을 받은 것에 비해 그가 받은 4등급은 훈격 심사가 제대로안된 탓이라는 지적도 많다. 백범과 安重根의사가 사돈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그 ‘연결고리’가 바로 그다.그는 安의사의 친동생 安定根선생의 둘째딸 安美生씨(83·미국 뉴욕 거주)와 충칭에서 만나 결혼,5년 정도 같이 살았다. 현재 그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 소재 백범 가족묘소 내에 있는데 4월 9일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될 예정이다(본보 99년 3월 5일자 참조). 정운현 기자
  • [제2공화국과 張勉]- (9) 신구파 대립과 分黨(상)/비교

    李承晩독재체제에 맞선 통합야당 민주당은 1955년 9월19일 탄생한다.이날서울 태평로 시공관은 하루종일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열기로 들끓었다.전국에서 모여든 민주당 대의원 2,000여명이 오전에는 발기인대회를,오후에는 창당대회를 잇달아 열었다.오전 대회에서 鄭一亨의 경과보고에 이어 張勉의 인사말이 장내에 울려퍼졌다. “대한민국을 구하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일체의 독재를 배격한다고 정강의 서두에 내걸었습니다.우리는 진실한 민주주의를 살려나가기 위해 공정한 선거와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후의 창당대회에서는 申翼熙가 민주당 출범의 의의를 밝히는 인사말을 했고 朴順天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우리는 민주세력의 집결 강화만이 국정쇄신의 방도임을 확신한다”고 선언문을 읽어내려갔다. 창당대회 다음날 민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최고위원 선거에 들어갔다.대표최고위원 투표에서 申翼熙는 234표를 얻어 49표에 그친 張勉을 누르고 선출됐다.이어 연기명으로 실시한 최고위원 투표 결과 趙炳玉(282표)·張勉(278표)·郭尙勳(262표)·白南薰(111표)이 뽑혔다. 이들 가운데 제헌의회 의장을 지낸 申翼熙,내무장관을 역임한 趙炳玉,민국당 최고위원 출신인 白南薰은 구파였고 총리를 지낸 張勉,국회부의장인 郭尙勳은 신파였다.이밖에 중앙상무위 의장은 成元慶(신파)이 맡았다. 집행기구 16부 부장은 尹潽善(원내총무격인 의원부장)·柳珍山(노동부장)·鄭一亨(섭외부장)·玄錫虎(조직부장) 등으로 구성됐다.구파는 대표최고위원을 포함한 최고위원 세 자리와 부장 7석,신파는 최고위원 두 자리에 상무위의장과 부장 9석을 차지해 신·구파는 처음부터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출발했다. 민주당 창당후 처음 맞은 큰 이슈는 다음해 치르는 제3대 정·부통령 후보를 뽑는 일이었다.당시 민주당에서 대통령후보로 거론될 만한 인물은 申翼熙·趙炳玉·張勉 세 사람 정도였지만 대세는 申翼熙에게 기울어 있었다.초점은 부통령후보였다.신파는 張勉을 대통령후보로 민다고 공표했으나 내심은부통령후보를 노리고 있었다.구파는 구파대로 ‘대통령후보 申翼熙’를 기정사실로하는 한편 趙炳玉을 부통령후보로 세우려고 물밑작업을 벌였다. 이 문제는 郭尙勳이 적극 나서 해결됐다.郭尙勳은 趙炳玉을 찾아가 “이번에는 당신이 양보합시다.이번에는 누가 보아도 해공(申翼熙)이 적격이니 그를 시켜야 할 것이 아니오? 차후에 입후보하면 내가 적극 지원하겠오”라고설득한다(郭尙勳 회고록에서). 이에 趙炳玉은 “운석(張勉)이 대통령후보 경쟁에 나서지 않도록 책임져라”라는 조건으로 받아들인다.전당대회에서 申翼熙·張勉을 정·부통령 후보로 뽑은 민주당은 신·구파 구분없이 힘을 합쳐 선거운동에 매진한다. 56년 정·부통령 선거는 민주당이 李承晩정권을 누르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할 절호의 기회였다.52년의 ‘발췌 개헌’과 56년의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어진 李承晩의 영구집권 음모와 자유당의 폭정(暴政)에 이미 많은국민이 염증을 느끼는 상태였다.게다가 申翼熙·張勉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민주당이 내건 선거구호 ‘못살겠다 갈아보자’도 돌풍을 몰고 왔다. 56년 5월2일 한강백사장에서 열린 유세에는 당시로서는 짐작도 못할 30만∼40만 인파가 몰려들었다.그러나 민주당의 손에 들어온 듯하던 대통령 자리는한강백사장 유세 3일 후에 그만 손아귀를 빠져나간다.호남 유세에 나선 申翼熙가 5월5일 열차칸에서 급서한 것이다. 대통령후보 부재에도 불구하고 張勉은 李起鵬을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된다. 이로써 민주당은 창당 9개월 만에 수권 능력을 가진 야당으로서 당당히 자리잡는다.이같은 자리매김은 58년의 제4대 국회의원 선거로 연결돼 민주당은 78석을 확보한다.창당 때의 33석에 비하면 2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민주당 위상 강화와 비례해 신·구파 대립도 점차 심해져 갔다.첫 충돌은정·부통령선거 직후에 찾아왔다.56년 7월 金度演·金俊淵·蘇宣奎 등 구파중앙위원 60여명이 연명(連名)해 최고위원 불신임안을 제출한다.이에 최고위원 전원이 사표를 내고 후임자 선출을 논의하게 된다. 신파는 “국민에게서 압도적 지지를 받은 張勉부통령이 당연히 대표최고위원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구파는 표대결을 요구한다.투표 결과 대표최고위원에는 趙炳玉이,최고위원에는 郭尙勳·張勉·金俊淵·金度演이 뽑힌다. 일부에서 분당을 거론할 정도로 사태가 악화된 끝에 신·구 양파는 다음해부터 대표 및 최고위원을 중앙상무위가 아닌 전당대회에서 선출한다는 등 몇 가지에 타협하고 수습한다.이후 구파는 부통령인 張勉에게 당의 주도권을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에서 그를 더욱 견제하게 됐고,신파는 張勉을 중심으로 더욱 똘똘 뭉치게 됐다. 59년 11월 전당대회에서 신·구파는 다시 한번 격돌한다.60년 정·부통령선거에 나갈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趙炳玉은 483대480 단 3표차로 張勉에게 신승한다.다음날 대표최고위원 투표에서는 거꾸로 張勉이 趙炳玉을 70여표차로 물리친다.최고위원에는 郭尙勳·白南薰·尹潽善·朴順天이 올랐다. 이 전당대회는 신·구파 사이에 메우기 힘든 골을 파놓았다.대회를 몇달 앞두고부터 양쪽의 경쟁은 한계를 넘어서 각종 추태가 난무했다. 趙炳玉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된다고 인신공격한 ‘결격사유 10개조’라는 괴문서가 전국 지구당에 배포되는가 하면,경남도당대회가신·구파 당원 간의난투극으로 중단되기도 했다. 신·구파의 격한 대립 속에서도 민주당은 趙炳玉대통령후보,張勉부통령후보 겸 당 대표최고위원 체제로 1960년을 맞는다.56년 申翼熙의 급서로 이루지못한 정권교체의 꿈을 이번에는 꼭 이룬다는 각오와 함께였다. 李容遠 - 신구파 내력과 특징 비교 민주당(民主黨)창당은 자유당의 ‘사사오입’개헌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자유당(自由黨)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重任)제한을 철폐’하는 내용의 제5차 개헌안을 마련한다. 李承晩에게 영구집권의 길을 터주려는 이 개헌안은 1954년 11월27일 국회에서 찬성 135,반대 60표로 부결된다.그러나 이틀뒤 자유당은 수학의 ‘사사오입’규정을 적용하면 개헌 정족수를 통과한 것이라는 궤변으로 헌법개정을공포한다. 이후 열달동안 반(反)李承晩세력은 통합야당 결성에 노력한다.한민당(韓民黨)의 후신인 민주국민당(민국당,民國黨)과 무소속 의원들은 호헌동지회를 결성해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한다.여기에는 자유당을 뛰쳐나온 ‘탈당파’의원12명도 가세한다. 당시야당으로서는 민국당이 가장 컸지만 원내의석이 15석에 불과해 다른 야당 세력을 흡수,통합하지는 못했다.따라서 민국당의 발전적 해체를 전제로 55년 12월 신당촉진위원회가 구성된다. 그러나 신당추진 세력은 곧 의견대립에 부딪친다.민국당의 申翼熙 趙炳玉과재야의 張勉 등 ‘자유민주파’는 좌익에서 전향한 자,독재 또는 부패혐의가 짙은 자 등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명분으로 혁신계인 曺奉岩과 족청계 李範奭을 배제하려고 한다.반면 張澤相 徐相日 등 ‘민주대동파’는 범야세력의총결집을 주장하며 맞선다. 결국 민주당은 ‘자유민주파’만으로 출발하는데 당시 원내 의석은 33명이었다.이에 비해 자유당은 120여명,무소속은 40여명이었다.‘통합야당’을 표방했는데도 무소속으로 남은 의원이 40여명이나 된 사실은 야당의 분열상을 보여주는 증거이자,민주당의 포용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창당후 민주당은 다시 신·구파로 갈린다.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申翼熙 趙炳玉이 중심인물이었다.한민당을 실질적으로 이끈 金性洙가 55년 2월별세한 뒤여서 구파의 대표성은 申翼熙가 갖고 있었다. 반면 신파는 張勉을 지도자로 鄭一亨 朱耀翰 등의 흥사단계(張勉은 흥사단계로 알려졌지만 흥사단에 가입한 일이 없다),吳緯泳 金永善 李相喆 등의 원내자유당계,玄錫虎 李泰鎔의 자유당 탈당파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됐다. 한마디로 구파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구세력’이고 신파는 이를 제외한,새로 야당에 가입한 ‘신세력’이었다.하지만 더욱 중요한 차이점은 신·구파가 출신 배경,사회활동,이념적 지향에서 어느정도 구분지어진다는 점이다. 구파는 대부분 지주집안 출신에 독립운동가나 지사형이었고 상당히 보수적이었다.이에 견줘 신파는 관료·법관·금융계 출신의 전문인이 주류였다.韓昇洲 고려대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구파 지도자 가운데 80%는 처음부터 정계에나섰으나 신파 지도자는 오히려 60%가 행정·관료직으로 출발했다.韓교수는또 “연령을 보아도 구파 지도층은 평균 51세,신파는 48세로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신파의 지도력이 사실상 명확히 젊었다”고 평가했다. 정치행태에서도 달라구파는 비조직적이고 점잖아 “하나하나가 모두 장성같았지만”,신파는 조직적이고 투쟁적이어서 상부의 명령에 일거수일투족이 움직였다.(구파 출신 閔寬植 회고록에서)민주당 신·구파는 이처럼 이질적인 요소가 강한데도 ‘李承晩정권 타도’라는 공동목표아래 힘을 모았다.초기에는 그래도 단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59년 정·부통령 후보 선출을 놓고 대립이 심해졌다.4월혁명이후 정권장악이분명해지자 그때부터는 치열한 정권쟁탈전에 들어간다. 李容遠
  • 美, 코소보 집착·러-中, 유고공습 반대

    ┑워싱턴 崔哲昊특파원┑클린턴 대통령이 공습개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밝혔듯이 미국이 유고 공습을 주도하는 가장 큰 명분은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배려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단순한 인도주의적 차원 이상의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는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첫째로 발칸반도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발판 마련을 노린다는분석이 있다. 이 지역은 알바니아,불가리아,마케도니아 등 옛소련 영향권 내에 있던 동구권으로,지정학적으로 유럽과 중동 가운데 위치해 있는 중요 지역임에도 러시아의 영향권 내에 머물러 있었다. 이번 전쟁을 승리로 끝내면 이 지역에 새로 들어설 정치권력이나 조직에 미국의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으로 보여 미국 영향력 기반 마련에 유리해진다. 러시아가 미국이 개입한 나토군의 공격을 몹시 반대한 이유도 동구권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란과 이라크 등 골치 아픈 나라들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또 하나의 근거지를 마련,‘중동 다스리기’에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게 된다. 이같은 지정학적 이유 외에 미국은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 새로운 나토회원 국가들 영입 이후 확대된 나토조직을 미국의 구미에 맞게 ‘길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도 한가지 이유로 꼽힌다. - 러-中, 유고공습 반대 이유 나토의 유고 공습에 대해 러시아와 중국이 공동연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고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나토의 유고 공습에 항의,브뤼셀 주재 나토대표부 대사를 전격 소환했다.이보다 앞서 프리마코프 러시아 총리는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가 대서양상에서 갑자기 비행기를 모스크바로 돌렸다. 중국도 마찬가지.친화순(秦華孫) 유엔대사는 나토의 공격은 명백한 국제법위반이라고 맹공했다. 중국과 러시아 두 나라가 나토의 공습에 강경자세를 취하는 주된 이유는 냉전종식 이후 점차 확장돼온 나토의 활동영역과 이를 주도하는 미국의 역할에 대한 우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뒤에는 보다 복잡한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러시아인과 세르비아는 같은 슬라브민족이다.유고슬라비아는 ‘남부 슬라브민족의 땅’이란 뜻이다.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슬라브민족의 맏형임을 자부해왔다.또 종교도 같은 동방정교회.카톨릭 세력의 위협에 대항,공동전선을 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이 나토 비난에 나서는 또다른 이유는 양국이 같은 민족문제를 갖고 있다는 고민이 숨어 있다.중국도 유고가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탄압하는 것처럼 티벳 신장지역의 독립 요구를 탄압,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중국으로서는 독립운동을 벌이는 코소보를 국제사회가 지원하는 게 자못 못마땅할 수 있다.중국 외교부가 “코소보사태는 유고의 내정문제”라고 주장한 것이 중국의 이런 속내를 대변한다. 金秀貞 crystal@
  • [오늘의 눈] 친일고백 玄 前총리의 수난

    玄勝鍾전총리(현 건국대 이사장)의 ‘친일고백’이 학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玄전총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내 이력서에 일제말 학도병으로 끌려가 일본군 소위를 지낸 사실을 쓰지 않았다”며 “독립운동을 하신 조부님과 선친에게 부끄러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3·1절 당일 일부 언론에 보도될 때까지만 해도 이 문제는 원로학자의 ‘용기 있는 고백’ 정도로 넘어 갔다.그러나 지난 5일 건국대 동문교수협의회에서 성명서를 내고 “일본군 장교 출신 인사가 이사장직에 있는 것은 어떤이유로든 용납될 수 없다”며 그의 사과와 퇴진을 촉구하면서 이 문제는 급반전됐다.건국대의 다른 교수들도 여기에 동참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이문제는 의외로 확산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본지에 ‘친일의 군상’을 연재해 온 기자로서 이번 사태에 대해 나름의 의견·소감을 피력한다면,우선 ‘玄전총리는 억울하다’는 점이다.‘친일파’의 기준은 우선 그가 어느 정도 ‘의식적·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느냐,또 친일의 대가로 어떤 이익을 챙겼느냐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본다. 엄밀히 말해 玄전총리는 일제말기 학도병으로 ‘강제입영’된 사람이다.물론 학도병 출신이라는 일본군 경력을 미화할 수는 없다.학도병 중에는 일본군을 탈출,광복군에 가담한 장준하·김준엽·윤경빈 같은 애국지사도 있기때문이다.그러나 같은 일본군 출신 중에서도 학도병은 일본육사나 만주군관학교에 자진 입교,졸업해 일본군이 된 자나 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한 자들과는 구분돼야 한다고 본다. ‘학도병’과 관련해 굳이 ‘고백·사죄’를 해야 할 순서를 따지자면 玄전총리와 같이 ‘끌려간 자’보다는 오히려 학도병 출진을 ‘권유한 자’가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한다.조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끌어내고도 현재까지아무런 사죄 없이 우리 사회에서 ‘원로’ 혹은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다. 玄전총리를 비호할 생각은 없다.그러나 그가 뒤늦었지만 이같은 사실을 고백한 것은 그 나름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보고 싶다.자신의 부끄러운 면을 입에 담는다는 것은 보통사람들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진솔한 고백·참회는 받아주고 용서해 주는 것이 진정한 관용과 화해의 정신이 아닐까. 정운현 문화특집장 차장
  • 동티모르 자치냐 독립이냐…국민투표 날짜 새달 결정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에 강제 합병된지 23년만에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기가 될 자치안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국민투표 절대불가 입장을 고수해오던 인도네시아 정부가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의 중재로 지난 11일 극적으로 국민투표안을 수용함에 따라 빠르면 8월중에 자치안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가 실시될 전망이다. 그러나 동티모르주민 다수는 제한적인 주권을 허용받는 자치가 아니라 완전한 분리독립을 요구하고 있어 국민투표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주목된다. 인도네시아정부는 지난 1월 그동안의 입장을 바꿔 동티모르주민들이 국민투표에서 자치안을 부결시킬 경우 독립부여 문제를 논의할수있다는 입장을 내놓은바있다.그러나 주민들의 의사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국민투표실시는 허용할수없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번의 국민투표허용은 적지않은 입장변화라고 할수있다. 국민투표에 부쳐질 자치안의 내용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자치안 내용과국민투표의 일정등은 오는 4월 13,14일 인도네시아·포르투갈 당국자회담과22일 양국 외무장관 회담에서 결정될 예정이다.그러나 동티모르주민 다수는제한적인 자치를 허용하는 자치안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이어서 어느 선까지자치권을 허용할지를 놓고 논란이 예상된다. 인도네시아는 76년 동티모르를 무력 합병한 당사자로,포르투갈은 1520년부터 이 지역을 지배하다 74년 독립시킨 옛 종주국으로 이 문제를 논의해 왔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 문제에 유연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국내정치상황과국제사회의 압력 때문.지난 75년 11월 인도네시아군의 침략이후 동티모르는학살과 인권탄압의 대명사가 돼 왔다.반체제인사에 대한 탄압,학살로 전체인구의 4분의 1가량인 20만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제사회는 지난 96년 독립운동가 호세 라모스 호르타에 노벨평화상을 안겨주었고 인권 및 여성단체들은 끊임없이 동티모르내에서의 인도네시아 군·경의 인권유린 사례를 고발해 왔다.
  • 石吾 李東寧선생 59주기 추모식

    상해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낸 石吾 李東寧선생의 ‘제59주기 추모식’이 지난 13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묘역에서 열렸다. 石吾 李東寧선생 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한 이날 추모식은 선생의약사보고와 추모사,추념사,추모노래 제창,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姜 회장은 추모사에서 “독립운동에 혼신의 힘을 다하신 선생께서 서거하신 지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도록 우리는 남북대치 구도를 극복하지 못하고4대 강국과의 다원적 관계 속에서 국가생존 전략을 모색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면서 “경제난국을 극복하고 민족통일의 과업을 완수하며 21세기 국제사회에서 모범국가로 건설·발전시키는 민족과업 성취에 선생의 가르침을 받들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추모식에는 선생의 손자인 李奭熙 ㈜대우 상담역을 비롯,尹慶彬 광복회장,생존 최고령 독립투사인 李康勳선생,국민회의 張在植의원,鄭大哲 전 의원,한나라당 李漢東의원,崔圭鶴 국가보훈처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金光旭 천도교 교령,金錫源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全永祐 ywchun@
  • [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의 군상(27) 崔麟

    1949년 3월 20일 서울지방법원(구 대법원 건물)대법정.법정안은 발디딜 틈도 없이 초만원이었다.오후 1시 정각 검찰관과 재판관이 입장하자 재판이 시작되었다.재판관의 뒤로 법정 정면에는 중앙에 태극기를 두고 한 쪽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위창 오세창(吳世昌)이 쓴 ‘민족정기(民族正氣)’라는 휘호가 걸려 있고 다른 한 쪽에는 ‘3·1독립선언서’가 걸려 있었다. 피고인석에는 백발에 수척한 모습의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그의 나이 71세,이름은 최린(崔麟)이었다.‘3·1의거’ 당시 오세창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했던 바로 그 최린이었다.그는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지 5일만인 49년 1월 13일 명륜동 자택에서 체포돼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33인중의 한 사람으로,청장년 시절 항일운동에 몸바쳤던 그가 해방된 조국의 법정에서 민족반역자로 지목돼 심판을 받는 것은 민족의비극이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서성달(徐成達) 검찰관이 그의 죄상을 읽어내려갔다.‘▒죄명:반민법 제4조 2항(중추원 참의),3항(칙임관이상의 고관),10항(친일단체의 수뇌간부)위반.▒범죄사실:피고인 최린은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일본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하여 보성중학교장 및 보성전문 강사를 역임하고,기미독립운동시 33인의 1인으로서 천도교회의 대표로 기독교,기타 종교단체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음으로 인하여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고,그 후 천도교 중앙종리원 등 장로로 있었던 자인 바, 1)1934년 이른 봄부터 1937년까지의 약 2년여,1939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시까지의 약 5년여에 도합 7년여간 조선총독부의 유일한 자문기관인 중추원 칙임 참의로서 조선총독의 자문에 의하여 총독정치에 기여하고, 2)…’.이어서 검찰관이 기소장 낭독을 마치자 사실심리에 들어갔다. 서순영(徐淳永) 재판장이 경력을 물은 뒤에 “기미독립선언을 주도한 피고가 왜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다.그는 “기미년 당시 일제에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들은 그 후 나를 주목하고 위협하고 또 유혹하여 끝내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오직 죄스럽고 부끄러울뿐이다”며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최린(1878∼?,창씨명 佳山麟)은 함경남도 함흥 태생이다.그의 집안은 중인출신으로 상당한 재산이 있었다고 한다.후에 그가 출세와 신분 상승을 위해권력에 집착한 것은 그의 출신 성분이 한 원인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같은중인 출신인 육당 최남선(崔南善)의 변절에 대해서도 이같은 논리를 펴는 견해도 있다. 청년시절 그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애국자임은 사실이나 그 무렵그의 민족의식에 대해서는 회의론을 펴는 견해도 만만찮다.1909년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천도교 인사들과 교류하고 있던 그는 1차대전 종결후 ‘민족자결주의’ 물결과 1919년 2월 도쿄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선포하자 이에 고무돼 ‘3·1독립선언’에 가담하였다. ‘3·1의거’ 당시 그의 민족의식이 투철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그가 이 일로 체포돼 재판정에서 행한 발언을 보면 추측할 수 있다.그는 “조선이 병합된 것은 러일전쟁의 당연한 결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또 당시 조선의 정치는 지독한 악정이어서도저히 조선의 안녕·행복을 유지·증진하기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병합에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피치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1919.7.17 예심조서)고 진술하였다. 또 독립선언서 선포와 관련,“…본래의 의사는 극히 온건한 수단에 의하여선언서를 발표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인민을 선동하는 것 같은 문귀 등은피한 것이므로 우리들의 선언서를 본 사람은 그러한 폭동에 가담할 리 없으리라고 생각한다”(일자 미상)고 진술하였다. 첫번째 진술은 일제의 ‘한일합병’ 논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다.두번째 진술내용은 자신들이 주도한 ‘3·1의거’를 ‘폭동’ 운운하고 있는 그가 과연 ‘민족대표’였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또 재판장이 ‘현재의 조선인의 지모와 실력으로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대해 그는 “일본정부의 도움을 얻으면 독립국으로 설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결국 그가 말한 ‘독립국’은 일제의 통치를 사실상 인정한 범위 내에서의 ‘자치국’ 정도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이는 그가 나중에‘자치운동’에 나서는 것과 무관치 않다. ‘3·1의거’로 의거 당일 일경에 체포된 그는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921년 12월 22일 일제당국의 ‘배려’로 가출옥하였다.‘3·1의거’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齋藤實)총독은 그가 표방한 ‘문화정치’의 전위대로 최린을 이용할 작정이었다.그의 가출옥 배경에는 사이토의 정치참모인 아베(阿部充家,‘京城日報’사장 역임)의 공작이 있었다. 그가 가출옥한 직후 아베가 사이토에게 보낸 편지에 ‘…오늘날의 형세로보아 민원식·선우순 따위의 운동으로는 도저히 일대 세력을 이룩하기는 어렵고,간접사격으로…일을 꾸미자면…여기에는 이번에 가출옥한 위인들 중 최린이 안성맞춤의 친구입니다…’(1921년 12월 29일자)라는 귀절이 보인다.‘기미독립선언서’ 작성자로 최린보다 앞서 가출옥(1921.10.19)한 육당 최남선이 아베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런 내용이 들어있다.‘…이번에 최린군을비롯하여 제군의 출감을 보면서 백열(柏悅)의 정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특히 당사자들도 선생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고있습니다… ’(1921년 12월 25일자,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서 입수) 1926년 9월 그는 일제의 경비지원으로 구미 각처로 여행을 떠났다.당시 파리에 체류중이던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과의 염문이 떠돌던 시기가 바로이 무렵이었다.그 해 10월말 일본에 도착한 그는 다시 아베를 만나 “오늘날 조선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데 확신을 하고 있으며 조선의회 설치가 조선민심의 안정을 꾀하는데 가장 긴요하고,나도 민중의 신임만 얻으면 조선의회의 한 사람이 되기를 사양치 않겠다”며 ‘조선자치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그가 처음으로 ‘친일’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1933년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걸고 일선융합(日鮮融合)을 외치면서 부터다.이듬해 4월 그는 중추원 칙임참의가 되더니 8월에는 ‘시중회(時中會)’라는 친일단체를 만들어 ‘동아(東亞) 제(諸)민족은 일본을 맹주로 하여 매진할 것,특히 조선은 일선융합(日鮮融合)·공존공영이 민족갱생의 길’이라고 외쳤다. 37년 다시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이 해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쟁보도를 적극 독려하였다.이 무렵 그는 총독부의 전시 최고심의기구인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후방지원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등에 참여하면서 전쟁지원에 협조하기도 했다. 또 1941년 8월에 결성된 임전대책협의회 위원을 거쳐 10월 이 단체가 윤치호(尹致昊)계열의 흥아보국단과 통합,조선임전보국단으로 재탄생하자 단장에 취임하였다.징병제 선전과 학병권유에 앞선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일제 패망직전인 45년 6월에는 조선언론보국회라는 친일언론단체를 조직,회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짧은 ‘항일’에 비하면 그의 ‘친일’은 길고 열렬했다.해방후 천도교측은 그의 죄를 물어 은퇴를 권고하였으나 그는 거부하다가 결국은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였다.반민특위에 구속돼 민족반역자로 심판대에 올랐던 그는 49년4월 20일 3회 공판 끝에 병보석으로 석방됐다.재판과정에서 그는 다른 피고인에 비해 비교적 솔직한 참회로 재판부와 방청객들로부터 동정을 샀다.심지어 그는 “민족앞에 죄지은 나를 광화문 네거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여라”고 사죄해 법정안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6·25전쟁 와중에 납북된 이후 그의 행적은 알 길이 없다.반민특위 재판과정에서 그는 친일한 동기를 ‘늙은 노모에게 불효를 할 수 없어 망명도,자살도 하지 못하고 일본 군문(軍門)에 항복했다’고 털어놓았다.결국 그는 부모에 대한 효(孝) 위에 나라에 대한 효,즉 충(忠)이 있음을 몰랐던 셈이다. 정운현
  • 石吾 李東寧선생 오늘 59주기 일대기

    “선생은 재덕(才德)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이었다.”김구선생이 ‘백범일지’에서 石吾 李東寧선생을 기리며 쓴 내용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석오만큼 폭넓고 헌신적이며 종시일관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친 분도 흔치 않다. 그에 비해 평가와 관심이 크게 뒤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석오의 애국심과 포용력으로 유지된 바 크다고 하겠다. 8·15해방까지 임정이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은 석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후계자’백범은 석오에 의해 발탁되고 지도되었다. 두사람은 7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혈맹의 義’관계에서 항상 석오가 백범을 발탁하고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석오가 아니었다면 백범의 존재는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04년 석오는 항일청년단을 만들면서 무명청년 백범을 상동교회 청년회에 가입시켰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혈맹의 동지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지 며칠후 백범은 임정의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석오를 찾았고 그의 노력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안창호 밑에서 경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쓰는” 석오의 인품을흠모해온 백범은 항상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후 백범은 아들 信을 시켜 중국땅에 외롭게 묻힌 석오의 유해를 고국으로봉환하여 서울 효창공원에 안치하였다. 석오의 생애는 국내에서 선각적 개화운동의 전기와 임정을 이끌면서 망명생활로 생애를 마친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잘못된정치를 탄핵하다가 이준·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루고, ‘제국신문’논설위원, YMCA운동, 을사조약 반대 결사대로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 안창호·양기탁등과 신민회조직, 안창호·이회영과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발행 지원, 상동학교 설립 등 37세때까지 국내에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한일합병 뒤 만주로 망명,서간도에서 이회영·이시영 등과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한국군관학교를 세우다가투옥되는 등 만주지역의 항일투쟁을 주도하다가 3·1항쟁후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석오는 망명길에 나서면서 자식들에게“우리가 이제 합병의 참변을 당하였으니 왜놈들은 우리를 금수와 같이 다룰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아버지를따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자. 나라없는 백성은 어디를 가나 서럽고 비참한 것이다. 만리타향 객지에서 고생할 각오를 한 몸,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이상의 더 큰 소망이 없겠다.”고 당부하면서 다시 못올 고국을 떠났다. 석오는 임정의 내무총장, 대통령직무대행, 국무령, 주석 등 요직을 지내고 백범과 함께 임정을 이끌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되어 항일 구국투쟁을 지도하였다. 1940년 3월 13일 중국 사천성 기강현 임시정부 청사의 초라한 이층방에서한 많은 생애를 접을 때그의 나이 72세였다. 임정은 간소한 국장으로 그의장례를 치렀다. 해방은 그러고도 5년 뒤에야 찾아왔고 석오의 유해는 3년 뒤에야 그리던 고국에 안장되었다. 뒤늦게나마 석오선생의 독립정신과 애국혼이 선양되어 정직한 역사가 쓰였으면 한다. 김삼웅주필kimsu@- 李東寧선생 연표 ●1869년 충남 천안서 출생●1892년 국가고시 응제진사에 합격●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 치름●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연좌데모로 2개월 옥고치름●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1910년 만주서 신흥학교 설립,초대소장 취임●1919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국무총리,내무총장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1929년 한국독립당 이사장·의정원 의장●1935년 임시정부 세번째 주석 취임●1939년 임시정부 네번째 주석 취임,전시내각 구성●1940년 급성폐렴으로 치장서 타계,임시정부 첫 국장(國葬)지냄●1948년 유해봉환,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 - 손자 李奭熙씨 및 후손 근황 “어릴 때부터 조부님께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셨다는 얘기를듣고 자랐습니다만 그동안 기업경영에 전념하느라고 손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죄스럽습니다.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조부님의 기념·현창사업에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인 李奭熙(67)(주)대우 상담역은 석오 선생 기념사업에 관한 포부로 말문을 열었다.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55년)후 중소기업체에 근무하다가 68년 대우실업에 입사한 그는 대우개발 사장·대우자동차 회장·대우 부회장·경총 부회장·대우증권 회장·대우통신 회장·대우일본법인 회장 등 대우그룹 주요계열사의 최고경영자를 두루 거친 ‘대우맨’이다. 그의 부친,즉 석오 선생의 아들 李義植씨(1900년생)는 유명한 내과전문의였다.일제때 보성전문학교의 교의(校醫)를 지낸 그의 부친은 미군정 당시 민주의원·한독당 조직부장 등 정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또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으며 이듬해 6·25 와중에 납북됐다. 2남3녀의 형제 가운데 그는 차남이다.그의 형 喆熙씨(75년 작고)는 경기고·보성전문 출신으로 보사부장관비서관,문교부 편수국장·기획관리실장,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그동안 그는 석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널리 알리기위해 소리없이 많은일을 해왔다.우선 그는 ‘이동녕연구’의 일어판(94년)·중국어판(98년)을사재로 출간했다.89년에는 ‘백범일지’의 필사본을 책으로 출간,앞서 출간된 ‘백범일지’가 원본의 상당부분을 누락시킨 사실도 밝혀냈다.또 작년에는 석오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현 국회의장격)을 지낸 사실을 토대로 국회의사당 내에 석오선생의 흉상을 건립하였는데 그는 이를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정운현- '臨政 의 거인' 李東寧 석오(石吾) 李東寧(1869∼1940) 선생은 임시정부 탄생의 주역이자 임정의‘기둥’이었다.임시정부가 공식출범하기 직전인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國號)와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후인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시정부사를 통털어 선생만이 유일한 기록이다. 석오 선생이 임정내 이념·계파간의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 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때문이다.이 때문에 선생은 임정이 내부갈등이나 일제의 탄압으로 난국을 맞을 때마다 중책을 맡아 임정을 위기에서 구하곤 했다.일제는 이러한 선생을 회유,이용하기 위해 조선인 관리 洪承均을 시켜 선생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이를 즉석에서 일축,이 일로 선생의 부친이 원산에서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뤘다. 합리주의자였던 선생은 출신지역·계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기호(畿湖)지방의 양반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던 신민회(新民會)에 황해도 출신의‘무명인사’ 백범 金九를 추천하여 가입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이 일로두 사람은 남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백범은 ‘백범일지’ 곳곳에 선생의 행적과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해놓고 있는데 이는 평소 백범이 선생을 독립운동계의 선배 이상으로 예우한 것으로 보인다.48년 ‘남북협상’차북한을 다녀온 백범이 아들 信을 시켜 모친(곽낙원)과 처자(최준례·김인)의 유해를 봉환해오면서 이 때 같이 봉환해온 분이 바로 석오 선생과 임정 국무위원겸 비서장 출신 車利錫 선생이었다.62년 선생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는데 이를 두고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임정 정부수반급은 대개 1등급을 받았으며 심지어 李承晩의 비서 출신 임병직씨도 1등급을 받았다. 임정요인 출신 趙擎韓 선생은 생전에 “선생은 지위나 돈 따위를 탐내지 않는 순결무구한 분으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으뜸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운현- 李東寧 선생 효창공원 묘소서 오늘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낸 石吾 李東寧 선생의 ‘제59주기 추모식’이 13일 오전 11시 서울용산구 효창공원 석오선생 묘소에서 열린다. 석오선생 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추모기도와 석오선생 약사보고,추모사·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분향의 순으로 진행된다. 행사 진행을 맡은 석오기념사업회 金錫營 부회장(69)은 “3·1독립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을 맞아 거행하는 올해의 추모식은 감회가남다르다”고 말했다.60주기인 내년에는 추모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장학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추모식에는 崔圭鶴 국가보훈처장, 高建 서울시장,尹慶彬 광복회장,朴維徹독립기념관장,국민회의 張在植·李錫玄·鄭漢溶의원,자민련 李東馥의원,한나라당 李漢東·吳世應·徐廷和·朴明煥의원,李奭熙 석오선생 유족회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李榮載 대종교 총전교,金信 백범선생기념사업회고문을 비롯한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상록
  • 精文硏 ‘한국인물대사전’빠진 사람 많고 서술 부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원장 한상진)이 최근 내놓은 ‘한국인물대사전’(전2권)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 있다.이유는 방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마땅히수록됐어야 할 인물들이 대거 누락돼 있고 서술도 부실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97년부터 전문가 800여 명을 동원,민족의 시조 단군에서부터 지난 해 작고한 최종현 전 선경 회장,시인 박두진 선생에 이르기까지 작고 인물 총1만6,000명을 담은 이 사전은 규모로는 단연 국내 최대다.또 ‘부록편’에 수록된단군 이후 조선 순종까지의 왕실가계도,유명인물의 자(字)·호(號)일람표,또 상고시대 이후 1910년대까지의 관직·기구·법제 등에 대한 용어해설 등에는 편집진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정문연측은 “기존 인물사전은 영웅주의에 빠져 공적은 강조한 반면 허물은 감추어 한 인물의 객관적 면모를 이해하는데 미흡했다”고 지적하고 “총체적인 시각과 객관적인 서술을 바탕으로 실로 90년 만에 제대로 된 인물사전을 출간했다”고 설명했다.특히 정문연측은 이번 ‘사전’에서 친일경력자와 현대인물 가운데월북·납북자,북한의 인물까지도 망라해서 수록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전’을 직접 들춰 보면 정문연측의 주장은 ‘눈가리고 아웅’한 것임이 금새 드러난다. 우선 친일경력자 언급문제.‘김활란상’제정 문제로 최근 논란이 됐던 김활란의 경우 여성교육자로서의 화려한 행적을 장황히 언급한 후 맨 마지막에가서 겨우 ‘최근에 와서 친일행적이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정도로언급한 것이 전부다.또 정문연의 초대원장을 지낸 이선근의 경우 그가 만주에서 친일단체인 만주국 협화회(協和會)의 간부를 지낸 사실은 전혀 언급돼있지 않다.또 정문연측은 ‘국군·경찰의 창설및 발전에 특기할만한 업적을남긴 인물’을 포함시켰다고 해 놓고도 ‘민족경찰’로 불렸던 최능진은 빼놓았다.또한 ‘상훈을 받지 않았더라도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사실이 객관적인 자료로 입증된 인물’이라면 포함시켰다는 설명과는 달리 ‘광주학생의거’의 주역으로 4년형을 언도받은 장재성도 누락시켰다.4·19후 민주당 정부는 장재성에 대해 건국훈장 추서를 계획했으나 5·16후 박정권은 장씨가해방후 월북했다며 이를 취소한 바 있다. 이밖에 일제하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평가는 차치하고 아예명단조차 들어있지 않다.또 북한 현대사의 인물로는 김일성·최용건(부주석역임)정도를 다루는데 그쳤다.벽초 홍명희의 장남이자 국어학자인 홍기문,역사학자 김석형은 물론 초창기 북한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일반인들에게도 낯익은 김책·최현·오진우 등도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인물선정에 있어 종래의 보수적 관점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이에 대해 韓원장은 “이것이 우리 정신사의 현주소”라며 “정문연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로 설명을 대신했다. 역사학계의 한 중진교수는 “거액의 정부예산을 들여 만든 사전이 종래의구태를 재연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며 “이는 정문연의 현주소를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혹평했다. 한편 800여명에 이르는 이번 사전의집필진 중에는 진보성향의 학자로 알려진 韓원장은 물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연구의 전문가인 姜萬吉 전 고려대 교수,현대사 전공의 徐仲錫 성균관대교수 등이 빠져있어 필자 선정도 편향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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