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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때 자결 애국지사 부부 유서 첫 공개

    일제때 자결 애국지사 부부 유서 첫 공개

    일제 강점기 당시 나라를 잃은 울분으로 자결 순국한 부부의 유서가 나왔다. 전국 70여명의 순국 지사 가운데 부부가 함께 자결한 자료가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대구에 사는 이일환(74)씨는 25일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아 할아버지(이명우·1872~1920)와 할머니(권성·1868~1920)가 자결 직전에 쓴 한글 유서 등을 공개했다. 이 부부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이어 1910년 한일합병으로 자결을 결심했다. 그러나 부모가 생존해 뜻을 미뤘다가 부모가 숨지고, 고종 황제의 상기가 끝나는 1920년 12월20일 이 부부는 함께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부부는 자결에 앞서 나라 잃은 비통한 마음과 후손 및 백성에게 당부하는 내용이 담긴 여러 통의 유서를 남겼다. 이 지사는 유서에서 “나라를 잃고 10여년 세월 동안 분통함과 부끄러움을 참았으나 이제는 충의(忠義)의 길을 가겠다.”며 비장한 각오를 보였다. 부인은 아들 삼형제와 두 며느리에게 보내는 4통의 한글 유서에서 “충의의 길을 따르는 남편을 뒤따르겠다.”는 심정을 보였다. 안동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신경림 누항 나들이] 옷과 밥과 자유 또는 집

    [신경림 누항 나들이] 옷과 밥과 자유 또는 집

    김 소월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에 ‘옷과 밥과 자유’가 있다. 사람의 생존의 기본 조건인 의식주를 빌되 ‘주’ 자리에 ‘자유’를 넣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여기서 자유는 바로 주의 개념이나 같다. “초산 지나 적유령/ 넘어 선다// 짐실은 저 나귀는 왜 넘니?”의 행간에 일제의 강점으로 집을 빼앗기고 자유를 찾아 험한 재 적유령을 넘어 만주로 가는 피난민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생뚱맞은 말로 들리겠지만, 나는 이번 용산 참사를 보면서 나귀에 초라한 이삿짐을 싣고 삼삼오오 적유령을 넘는 피난민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들의 수중에는 남은 돈도 별로 없고 만주로 간다지만 거처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삶의 터전이 되었던 곳에서 대책없이 쫓겨나는 철거민들의 처지나 심경 또한 어찌 이들과 같지 않았으랴. 재개발의 필요성을 덮어놓고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내가 그 입장에 처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도 역시 자해 위협으로 시너를 준비하고 점거 농성을 하는 둥 살기 위한 온갖 몸부림을 다했을 것이다. 적유령을 넘자 해도 노자가 필요하고 만주에 가서도 정착할 최소한의 자금은 있어야 하니까. 이 과정에서 귀한 목숨 여섯을 잃었다. 당국은 사건의 내용을 철저히 밝힌다며 뜸을 들였지만 누구의 눈에도 진실은 너무나 명백했다. 철거민들은 제시된 보상금 가지고는 도저히 이주해 살 길을 마련할 수 없으니까 점거 농성을 벌인 것이고, 농성 벌이고 불과 몇 시간도 안 되어 경찰이 이를 성급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과실치사다. 그런데도 검찰은 가해자인 경찰은 내버려 두고 철거민 농성자만 구속자 5명을 포함하여 20명을 기소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면서 강조한 것이 “공권력은 존중되어야 한다.”였다. 당연히 공권력은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그 공권력이 정당성을 가졌을 때만 존중될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일 제 강점기의 공권력은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명분이 되었으며, 옛 영국 통치하의 남아공화국에서는 당국의 조정에 따라 광부들이 술을 먹고 춤을 추는 이른바 마인댄스를 피하거나 비판하면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다스렸다. 물론 이 비유는 공권력이 국민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을 때 존중되기 어렵다는 극단적인 예로 우리의 경우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연쇄 살인범 강호순 사건이 터졌을 때 당국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마침내 이것을 용산 참사의 여론 무마, 말하자면 국민들의 눈을 딴 데로 돌리는 호재로 삼으려는 어리석은 시도가 있게 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는 이때까지 내세웠던 공권력이 당당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자백하는 것이 되고 만다. 과실치사인 용산 참사를 광주학살 못지않은 국민학살로 과장하는 막말이 등장하고 시정잡배의 싸움질 같은 행태가 정치판을 휩쓰는 데는 이런 그릇된 공권력 행사와 남의 말에는 아예 귀를 막는 벽창호식 리더십이 나무와 넝쿨처럼 얽혀 있다는 사실도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에 계층이나 종교를 넘어 온 겨레가 슬퍼하는 것을 보는 감동은 크다. 1949년 백범 김구 선생 서거 이후 처음 보는 광경이다. 그분이 평소 우리 사회의 약자들, 소외된 사람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과 생각을 같이하고 삶을 같이하지 않았더라면 볼 수 없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생각과 처지가 다른 사람과도 소통하고 보듬는 그분의 통합적 리더십은 바로 여기서 생겨난 것이리라. 문득 공권력도 “밭에는 밭 곡식/ 논에는 물베/ 눌하게 익어서 숙으러졌”(‘옷과 밥과 자유’)지만 나귀에 짐을 싣고 “초산 지나 적유령”을 넘어서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보듬으면서 그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배려할 때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 것이요, 광복 직후처럼 좌우로 갈갈이 찢어져 서로 물고 뜯는 우리 사회에도 화해와 통합의 훈훈한 바람이 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 신경림
  • “민중이 역사 주체로 떠오른 3·1운동 세계 反제국주의 투쟁 선봉장 역할”

    “민중이 역사 주체로 떠오른 3·1운동 세계 反제국주의 투쟁 선봉장 역할”

    3·1운동 90주년을 앞두고 동아시아와 세계사의 맥락에서 3·1운동을 재평가하려는 학계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전세계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 극렬했던 시기에 일어난 3·1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높이 평가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라는 자각의 목소리가 드높다. 이와 함께 3·1운동을 기점으로 역사의 주체로 전면에 나선 민중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논의도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범세계적 이상과 지향점 제시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3·1운동은 세계 반제국주의 투쟁의 선두주자로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범세계적인 이상과 지향점을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동북아역사재단이 새달 9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개최하는 ‘3·1운동 90주년 기념 국제 학술강연회’를 앞두고 미리 배포한 발제문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세계사적 의의를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세계 식민지 해방투쟁사에서 우뚝한 위상을 갖는다. 국가를 세우고 정부 조직을 구심점으로 삼아 무려 27년 가까이 투쟁한 사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며 “3·1운동은 바로 그러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시점이자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세계 개조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나선 출발점”이라고 지적했다. 강연회에선 겅윈즈 중국 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연구원이 ‘중국 근대사와 5·4운동의 역할’, 마쓰오 다카요시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가 ‘일본의 1919년과 다이쇼 데모크라시’, 토머스 녹 미국 서던 메소디스트대 교수가 ‘윌슨의 이념과 세계질서’를 각각 발표한다. 한국근현대사학회가 27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하는 ‘3·1운동의 세계사적 맥락과 해외 한인사회’ 학술대회에서도 3·1운동이 세계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민족운동으로만 평가해선 안돼 3·1운동을 통해 부상한 ‘민중’에 대한 재평가도 주목을 끈다. 김희곤 교수는 “3·1운동은 전통적인 피지배계급이 아니라 민중이 새로운 국가와 정부조직체를 요구했고, 이에 맞춰 임시정부가 조직돼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민주공화정 체제가 등장했다.”면서 “구성원 거의 모두가 참가한 저항은 곧 민중의 결속력을 보여주는 것이자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고 의미를 강조했다.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등이 2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하는 ‘3·1운동, 기억과 기념’학술대회에선 역사의 주체로서 역량을 보여준 민중의 부상과 그들의 기억 속에서 새롭게 탄생한 근대 시위 문화 등에 대해 토론한다. 주최측은 “그간 3·1운동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3·1운동 배경, 전개과정, 영향 등에 국한되어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오로지 하나의 결론, 즉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만 평가했던 점을 극복하고자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학술 심포지엄은 좌와 우, 남과 북이라는 권력 주체의 기억과 기념 방식, 대중적 상징성을 갖는 유관순 영웅 만들기의 역사, 역사 교육을 통해 재구성된 3·1운동의 기억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3·1운동의 기념이 관성화되고, 타성화되는 데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꽃남펌박스⑤] 자유연애 즐기는 천재도예가 ‘소이정’

    [꽃남펌박스⑤] 자유연애 즐기는 천재도예가 ‘소이정’

    대한민국 여심을 제대로 흔들어 놓고 있는 그의 이름은 소이정(김범 분). 자타공인 ‘바람둥이’지만 그의 유혹에 한번쯤은 넘어가고 싶은 여자들이 줄을 섰다. 젠틀한 매너와 철저한 자기관리로 불특정 다수의 여자들을 설레게 하고 있는 그를 서울신문NTN 기자들이 힘겹게 만나봤다. 한번 빠지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그의 매력 속으로 GO GO~ ♡소이정, 넌 누구니? 안녕 걸(girl)들. 난 16살에 비엔날레 최연소로 데뷔하며 신예 천재도예가로 불리는 소이정이야. 난 유네스코가 인정한 인간문화재로, 직접 만든 작품으로 경매에 참가할 정도로 뛰어난 도예실력을 갖고 있어. 또 독립운동가 집안의 자손이기도 하지. 내가 도예로 자수성가 했다고 생각해선 안 돼. 대한민국 우송박물관의 손자로서 아마 너희 서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을 자산으로 갖고 있지. 난 여자를 믿지 않아. 물론 싫다는 건 아니야. 그냥 그 순간을 즐길 뿐이지. 사람들은 나에게 타고난 바람둥이라고 불러. 내가 국경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여자들을 만나고 있지만 그건 내가 박애주의자라서 그런 게 아닐까. 마음에 드는 여자들의 전화번호를 따내는 건 내 취미이자 특기야. 언젠가부터 난 여자의 손만 봐도 직업을 간파할 수 있게 됐어. 뭐 사람들은 내가 이런 게 우리 아빠 영향을 받아서라고 하는데 특별한 이유를 설명하기란 글쎄… 그건 내가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걸. ♡ 스카프와 모자로 센스만점 코디를 난 평소 옷 입을 때 센스 있게 소품을 코디하는 걸 좋아해. 특히 스카프로 코디하는 걸 가장 즐겨하지. 다양한 스타일의 모자를 쓰는 것도 결코 빠뜨리지 않아. 또 내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왼쪽 귀의 블랙 피어싱. 내 분위기와 블랙은 잘 맞아떨어지거든. 물론 셔츠도 색깔에 맞춰서 입어야 직성에 풀려. 내 옷장에는 화이트, 블랙, 핑크, 그레이, 체크까지 없는 셔츠가 없어. 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패션 아이템 중 하나가 바로 타이야. 상황에 따라서 혹은 전체적인 옷 코디에 맞춰서 보타이를 할 때도 있고 어울리는 넥타이 색상을 고르지. 사실 내가 봐도 F4 중에 내가 가장 옷발이 잘 받는 거 같아. 걸(girl)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앞으로도 기대해봐. 내 옷장 속에 있는 옷과 소품들은 아직도 보여줄 게 많으니까. ♡ 너에게 가을이는 어떤 존재야? 가을양? 가을양은 그저 금잔디 친구일 뿐이야. 뉴칼레도니아로 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고 가을양이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통쾌하게 복수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다 단지 호의를 베풀었던 거지. 그런데 가을양이 우리의 연극을 착각한 거 같아. 발렌타이데이때 초콜릿을 만들어 찾아올 줄은 몰랐어. 그런데 자꾸 가을양에게 신경이 쓰여. 아직 어린 가을양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진 않을 런지. 어차피 난 자유연애를 누릴 만큼 누리다 결국 집안에서 맺어준 여인과 결혼할 텐데 말야. 내가 가을양 뿐만 아니라 걸(girl)들을 도예작업실로 불러들이고 그녀들 앞에서 색소폰을 부는 건 그냥 내 일상이야. 어릴 때부터 그랬던 거라… 잘못된 일이라고? 글쎄 과연 그럴까? 난 단지 날 원하는 걸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그 만남을 즐기는 것 뿐. 날 찾아오겠다는 걸 막을 수도 없고 날 좋아하는 마음을 모른 척 할 수 없는 노릇이잖아. 안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난 아빠처럼 살고 싶지는 않아. 절대로. ♡ “목숨 걸 생각도 없었지만 대충할 생각도 없어” 사실 난 준표 녀석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어. 그 녀석이 욱하는 성격도 있고 제멋대로 하는 경향도 있지만 오히려 여린 구석이 많아. 녀석은 여자경험도 부족해. 우리 뉴칼레도니아로 여행 갔을 때 기억하지? 준표가 밤바다 하늘위로 멋진 불꽃놀이를 준비했었던 것. 내가 그날부터 녀석을 선수명단에 올려주기로 했지. 난 살면서 친구들과의 우정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난 지후 녀석이 준표에게서 금잔디를 뺏어갔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어. 친구의 여자를 건드리겠다는 놈은 결코 용납 못 해. 그 때 만큼은 지후 자식 편이 돼 줄 수 없었어. 서운해 한다고 해도 할 수 없지. 그랬기 때문에 준표 대신 출전했던 수영대결에서도 목숨 걸 생각도 없었지만 대충할 생각도 없었던 거고. 지금이야 다행히 교통정리가 잘 됐지만 지후 그 녀석은 지금까지도 도통 속을 알 수가 없어. 사진출처 = 서울신문NTN DB, 그룹에이트, KBS 방송캡쳐, 미니홈피 서울신문NTN 연예부@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부고] 애국지사 탁영의 선생 별세

    일본강점기 광복군에 입대해 민족독립운동을 고취했던 애국지사 탁영의 선생이 13일 별세했다. 87세. 1922년 강원 횡성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3년 일제에 강제로 징집당해 중국 난징(南京)지구 주둔 일본군 부대에 배속됐다. 1944년 5월 일본군을 탈출한 후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했다. 1945년 4월 충칭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 경호부대인 토교대(土橋隊)에 입대하고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에 배속돼 복무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고인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민영순씨와 4남2녀. 빈소는 원주 기독교병원. 발인 15일 오전 7시. (033)744-3969.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선생 기념 대법원 연수관 전북 순창에 착공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선생 기념 대법원 연수관 전북 순창에 착공

    대한민국 초대 및 2대 대법원장이었던 가인(街人) 김병로(1887~1964) 선생을 기념하는 대법원 연수관(조감도)이 전북 순창에 들어선다. 대법원은 12일 가인의 생가인 순창군 복흥면 답동리에서 이용훈 대법원장과 가인의 손자인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윤영철 전 헌법재판소장, 김완주 전북지사, 법조계 인사 등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인연수관’ 기공식을 가졌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축사에서 “오늘 첫 삽을 뜨는 가인연수관이 선생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우리 사법부에 남긴 발자취를 다시 발견하고 널리 전파하는 소중한 터전이 되도록 우리 모두 힘과 지혜를 모을 수 있기 바란다.”고 말했다. 가인의 생가 주변 8만 303㎡ 터에 들어서는 연수관은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5204㎡ 규모로 강의실, 체력단련실, 전시실 등을 갖추게 된다. 총사업비 116억원을 들여 내년 6월 완공될 예정이다. 전시실에는 가인이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무료 변론활동을 펼쳤던 당시의 변론문과 판결문, 유품 등을 진열한다. 가인연수관은 경기 일산에 있는 사법연수원과는 별도로 충청 이남지역 사법부 산하 직원들의 연수시설로 활용된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 연수관에는 법관과 법원 직원이 한꺼번에 130명까지 묵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중국인 1800년대 초부터 쿠바로 이민?

    중국인 1800년대 초부터 쿠바로 이민?

    중국인이 쿠바에 발을 디딘 건 1800년대 초? 1800년대 초부터 중국인이 미주대륙에 살고 있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중국어 문자 메시지가 쿠바에서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중국인의 쿠바이민이 시작된 건 훨씬 이후다. 쿠바 수도 아바나로부터 250㎞ 떨어져 위치해 있는 천주교 대성당에서 중국어로 표기된 메시지가 발견됐다. 벽에 새겨진 중국어 메시지가 발견된 ‘시엔푸에고스’ 성당은 1896년 완공된 건물로 쿠바에선 가장 오래된 종교 건축물이다. 하지만 메시지가 남겨진 벽은 지금의 성당이 지어지기 전 같은 장소에 서 있던 교구성당의 일부분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 교구성당은 1833년에 완공됐었다. 중국어 메시지가 당시 쿠바에 살고 있던 중국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보면 중국인이 쿠바에 살기 시작한 건 1800년대 초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중국어 문자기록이 이후에 새겨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2005년 유네스코 인류문화재로 등재된 대성당의 보수작업을 진행하면서 우연히 중국어 메시지가 발견됐다. 쿠바 당국은 중국인 유학생을 통해 문자를 판독했다. 발견된 중국어 메시지는 “청결을 유지하라.”는 지시내용 등 모두 3개. 현지 관계자는 “내용으로 보아 건축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음식을 만들던 중국사람에게 내린 지시 같다.”고 말했다. 중국인이 교구성당 건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기록을 보면 공식적으로 중국인들이 처음으로 쿠바 땅에 발을 디딘 건 1847년이다. 브로커에 속은 중국인 200명이 팔려와 흑인들과 함께 노예로 전락했다. 적지 않은 중국인이 탈출해 독립운동세력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인포르마도르 서울신문 나우뉴스 남미통신원 임석훈 juanlimmx@naver.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글로벌 시대] 바람직한 한국형 중산층은/남상욱 유엔공업개발기구 서울 투자사무소장

    [글로벌 시대] 바람직한 한국형 중산층은/남상욱 유엔공업개발기구 서울 투자사무소장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풍채 좋은 70대 하숙집 주인은 영국식 주점인 펍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수입이 괜찮고 지식도 상당하였다. 하루는 당신은 재산이 넉넉하고, 아는 것도 많으므로 중산층이 아니냐고 하자 주인은 정색을 하면서 중산층에 낄 자격이 없다고 했다. 영국에서는 단순히 재산이 있다고 중산층이 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중산층은 상류 봉건영주와 하류 농민 사이 중간계급으로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르주아층을 지칭하였다. 오늘날 영국의 중산층은 대학 교육을 받은 전문직종의 화이트칼라로서 보수와 진보, 상하층을 조화하는 절묘한 균형자다. 정치구호나 대중의 요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건전한 양식에 따라 사회를 선도하는 안정 세력이다. 프랑스의 경우 주체의식이 높고 일정한 문화수준에 도달한 시민계층이 중산층이다. 이들은 프랑스혁명을 주도하였고 문화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였다. 예술과 스포츠를 즐기며, 외국어 구사능력과 다양한 소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교양인이다. 이탈리아에서 문화예술인은 주요한 중산층에 해당한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비롯하여 수많은 장인(匠人)들은 르네상스를 창조하였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중산층 형성에 기여하였다. ‘중산층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은 자본주의 본산답게 주로 재산 정도에 따라 분류한다. 대체로 상류 5%와 하류 20%의 중간 소득층에 해당한다. 재산을 주요 기준으로 한다고 하나 정치, 문화적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정치의 근간은 ‘마을회관 집회(tow nhall meeting)’라고 불리는 풀뿌리민주주의에 있다. 미국독립운동의 산실이며, 대통령선거 운동도 여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경우 중산층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는 것 같다. 중위소득의 50∼150%에 해당하는 층, 상위 20%와 하위 20%를 제외한 중간 60%, 1인당 국민소득 기준인 2만 달러 등 다양한 잣대가 있다. 살기가 어려웠을 때는 그저 의식주만 해결해도 중산층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자기 주택에다 상당한 액수의 현금자산과 고졸 이상 학력은 지녀야 중산층이라고 자위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중산층이 계속 줄어든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린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분석에 의하면, 중산층의 비중이 1996년 68.5%에서 2 006년 58.5%로 감소하였다. 특히 당면한 경제위기는 중산층의 붕괴와 사회 양극화를 촉진하고 있다. 중추세력인 중산층이 급격히 감소하면 경제뿐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야기된다. 중산층은 안정성, 대표성, 주도성이라는 3대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산층이 감소하고 양극화가 심화하면 사회적 긴장이 고조된다. 상층이 사회를 대표한다면 봉건제도로 역사가 회귀하며, 하층이 대표한다면 이미 실패한 공산주의로 가자는 말이다. 상층이 주도하면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하층이 주도하면 포퓰리즘의 나락에 빠질 것이다. 따라서 건실한 중산층을 늘리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선진국의 예에 비추어 볼 때 바람직한 한국형 중산층은 무엇일까. 먼저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야 한다. 경제자립 없는 정치사회발전이란 공허하다. 그러나 단순히 잘 먹고 잘 산다고 해서 중산층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주인의식을 바탕으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민주의식을 가져야 한다. 공동체에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지 않는 건전한 비판과 자치 능력을 겸비해야 한다. 나라가 곤경에 처할 경우 자기희생과 용기를 바탕으로 앞장서야 한다. 또한 문화예술을 사랑하고 스포츠를 즐기며, 어려운 이웃을 돕고 국제사회의 문제해결에 동참하는 문화시민이야말로 바람직한 한국형 중산층의 모델이 아닐까. 남상욱 유엔공업개발기구 서울 투자사무소장
  • 2·8독립선언 90주년 7일 도쿄서 기념식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자 재일 유학생들이 도쿄에서 독립을 선언,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2·8독립선언 제90주년 기념식이 7일 오전 11시 재일본 한국YMCA(이사장 김용성) 주관으로 도쿄 한국 YMCA에서 열린다. 기념식에는 정부대표로 김양 국가보훈처장을 비롯, 김영일 광복회장, 권철현 주일대사, 허맹도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중앙본부 부단장 등 주요 인사와 광복회원, 교민 등 25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2·8독립선언은 한국 학생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으로, 재일 유학생들이 임시로 결성한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최팔용, 송계백 선생 등 11명의 대표위원이 서명하고 유학생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919년 2월8일 도쿄 한복판에서 조국 독립을 세계 만방에 선포한 것이다. 2·8선언은 국내 3·1운동의 도화선이 됐으며, 1920년대 청년·학생의 항일투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기고] 2·8독립선언 정신으로 국민통합을/김양 국가보훈처장

    [기고] 2·8독립선언 정신으로 국민통합을/김양 국가보훈처장

    올해로 2·8독립선언 90주년을 맞는다. 우국충정에 불타는 젊은 재일 유학생들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해 침체의 늪에 빠져들어 가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우리 선열들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 2·8독립선언을 선포하기까지 오랜 기간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이 선언을 전후해 선포한 독립선언서에는 ‘대한독립선언서’, 겨레가 하나 돼 외쳤던 ‘3·1독립선언서’가 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음력 1918년(무오년) 11월에 선포했다고 해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하며, 조선의 독립을 최초로 선언한 문건이다. 이는 직후에 이어진 2·8독립선언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2·8독립선언은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한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8년 1월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1919년 2월8일 수백명의 도쿄 재일 유학생들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투쟁의 의지를 선언했다. 적국의 수도 한가운데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최후의 1인까지 영원한 혈전을 불사한다는 대일 항쟁의 자세를 밝혔다. 민족의 자주민임과 조선의 독립국임을 만방에 알린 젊은 학도들의 드높은 기상과 굽히지 않는 정신은 국권회복을 향한 애국청년들의 장쾌한 거사라 하겠다. 선열들은 독립선언을 통해 민족의 주체성, 침략 일본에 대한 항쟁의지, 그리고 평화와 국제정의, 민주주의에 대해 강경한 주장을 펼쳤다. 이러한 2·8독립운동 정신이야말로 세계화를 지향하는 오늘날 진정으로 필요한 가치라 하겠다. 2·8독립운동은 거족적 3·1운동의 도화선이 됐으며, 학생 항일투쟁의 효시가 됐다.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도 됐다. 만주 일대에는 수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돼 무장항일투쟁이 본격화되기도 했다. 2·8선열들이 지녔던 그 투철한 민족자결의 정신과 평화공존의 이상이 오늘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특히 한·일간의 관계 속에서 다시 구현돼야 할 우리의 귀중한 정신적 유산이 되고 있다. 정부는 2·8독립운동이 일어난 역사의 현장인 재일본 한국YMCA에 2·8독립선언기념실을 마련하고 지난해 현판식을 가졌다. 또한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자리인 도쿄의 니시간다 네거리에 기념비를 건립해 독립운동의 역사적 장소임을 알리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앞으로 세계 전역에 분포한 독립운동사적지에 대한 보존·복원사업지원으로 현지 동포사회 결집과 화합의 구심점으로 활용해 나갈 것이다. 이번 세기는 우리 민족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시기다. 지난 세기의 역사적 질곡에서 벗어나 민족통합과 국가발전의 새 시대를 이뤄내야 할 역사적 소명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한 세기 전의 국가 목표가 ‘국권회복’과 ‘조국근대화’였다면 지금은 바로 통일된 세계중심국가, 선진일류국가 건설이라 하겠다. 하지만 우리 앞에는 극복해야 할 많은 과제가 놓여 있다. 대내적으론 각계각층의 갈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대외적으론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 대립과 국제사회의 무한경쟁을 헤쳐나가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더욱이 최근 들어 당면한 세계 경제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처럼 중차대한 과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을 결속시켜 국민통합을 이루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발전을 이뤄나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겠다. 이를 위해선 국권을 회복한 선열들의 애국정신을 계승·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전제돼야 한다. 2·8선열들의 용기와 열정을 거울삼아 우리 내부의 불신과 갈등을 벗어버리고 선진일류국가 건설의 기반을 조성해 나가야 하겠다. 김양 국가보훈처장
  • “시민단체 기득권 포기하고 새출발해야”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가 시민단체에 애정어린 비판을 쏟아냈다.박 이사는 3일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 진행된 ‘2009 새로운 시민운동에 대한 상상력’이라는 주제 특강에서 “시민단체들이 새로운 시대의 화두를 끄집어 내는 데 실패했다.”면서 “일상적 공간에서 반영될 전략을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세상의 변화를 시민단체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흡수했는지 의문이 든다.”면서 “촛불집회만 봐도 네티즌들이 주도한 것으로 시민운동은 주도권을 뺏긴 측면이 크다.”고 지적했다.그는 또 “과거에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사회운동을 하는 구조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사라졌다.”면서 “새로운 운동의 자원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중요한데 과연 시민운동세력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의문이 든다.”며 운동세력의 재생산을 제대로 이뤄내지 못했음을 비판했다.그는 “다시 바닥에서 시작하자.”면서 ▲기득권과 우월의식 포기 ▲시민 속으로 파고드는 사업창출 ▲젊은층과 노년층, 주부 활동가 양성 등을 시민단체의 과제로 제시했다. 하지만 박 이사는 “운동은 늘 독립운동과 같은 외로운 일”이라면서 “절망하지 말고,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전략과 방식을 만들어가자.”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연합뉴스
  • 순복음교회 세포분열 어디까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세포분열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단일교회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모든 지교회의 독립을 선언하고 나서 주목된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 목사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오는 3월 송파, 시흥, 광명 등 지교회 3곳을 시작으로 늦어도 내년 1월까지 17개의 모든 지교회를 독립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순복음교회의 이같은 결정은 대형화 추세로 일관하는 대형 교회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소속된 교회는 지성전 2개와 지교회 17개, 직할성전 4개 등 모두 23개. 여기에 전국 기도처 170개가 달려 있다. 등록 신자 수만 하더라도 78만명에 달하며 최근 들어서도 매달 1200~1500명이 새로 등록하는 등 신규 신자가 매년 1만 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영훈 목사가 밝힌 지교회 독립계획에 따르면 이가운데 1년 내에 17개 지교회를 완전 독립하며 2개의 지성전과 직할성전 4개 등 6곳 중에서도 독립 가능성이 있는 2곳을 추가로 분리한다. 지교회, 지성전이 본 교회에서 분리되면 지역명을 딴 개별 교회로 이름을 바꾸고 재정과 인사, 행정을 철저하게 자체 운용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의 여의도교회 소속 장로 1500여명도 독립된 교회로 모두 분산된다. 단지 교회의 기본재산만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에 소속돼 순복음교회의 큰 틀안에서 유지한 채 해외선교나 사회복지 등 공동목적의 사업만 함께 할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독립계획에 따라 해당 지교회와 지성전에선 각각 담임목사 청빙 작업을 벌이고 있는 상황. 총회법 절차와 규정에 따라 새 목사를 모시기 위한 ‘청빙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개교회에서 이미 ‘독립운동’이 상당히 진전되고 있다고 교회 측은 귀띔한다. 분리 독립이 예정대로 마무리되면 지금 수준에서 볼 때 전체 등록 교인 78만명 가운데 40만명 정도가 독립 교회로 옮겨 본교회인 여의도교회에는 38만명 정도만 남게 될 전망. 교세의 절반가량을 분가시키는 셈이다. 이에 따라 3월 우선 독립될 3개 지교회의 움직임에 개신교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황. 교계 일각에선 은퇴한 조용기 목사의 영향력이 여전히 큰 것을 감안할 때 순복음교회의 세포 분열 흐름이 얼마만큼 안착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같은 관측에 대해 순복음교회측은 “조용기 원로 목사와 이영훈 담임목사의 설교에 집중되는 신도들을 볼 때 신도들이 교회 독립 후에도 여전히 본교회를 찾을 가능성이 적지 않아 당분간 원로목사의 순회 설교를 계획하고 있다.”며 “그러나 결국 담임 목사의 능력과 자질에 따라 독립교회의 성패가 좌우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中 인터넷 단속 속내는?

    │베이징 박홍환특파원│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공안부 등 유관부처 7곳이 합동으로 단속을 벌여 최근 3일간 91개의 저질 사이트를 폐쇄했다고 12일 보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단속 대상이 점점 확대되고 있다. 이른바 ‘불량 소식’ 전달 사이트의 폐해 사례가 보도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내 비판 여론의 주무대인 뉴보왕(牛博網)도 9일 폐쇄됐다. 이같은 인터넷 단속 강화와 관련, 올해의 ‘4대 난제’를 사전에 봉쇄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 올해는 파룬궁 금지 10년(7월), 천안문 사태 20년(6월), 티베트 독립운동 진압 50년(3월)이 되는 해이어서 중국 정부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stinger@seoul.co.kr
  • 주대환 ③ “사회민주주의 떴으면”

     -선거에 다시 나가라고 하면.  “그런 것이 된다는 건 대안 야당이 만들어진다는 것일 테고요.매우 어려운 곳에 총알받이로 나가라 그러면 예를 들어 박근혜 지역구 나가라 그러면 해야지요.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 어디 아주 좋은 곳을 골라 가겠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저희 세대들의 역할 아닌가.”  -지식인 사회에 호소할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어떻게 보면 1900년대식 사고란 비판도 있던데요.또 우리 지식인 그룹이 희생이랄까 사회적 책무를 다할 준비가 돼 있다고 보는지.  “지식인 범위가 참 애매합니다만 우리나라만큼 대학 이상 고학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사회도 없지 않습니까.그런 사람들은 지식인 마인드를 갖고 있습니다.어느 정도 공공의 이익에 대한 관심이 내 개인에 대한 이익과 관심만이 아니라 지식인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결정적 기준이 될텐데.옛날 선비가 그런 사람들이 꽤 있다고 생각을 하지요.하는데 그들이 조직화돼 있거나 많은 역할을 할 것인지는 미지수입니다만 제 한계겠지요.저로선 생각이 거기 밖에 못 미치니까.제가 속한 사회집단에 그외 진보적 세력이 나온다면 또 환영할 일이지요.젊은 세대들에 대해선 제가 잘 모르고.”  -자제분들 얘기가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던데.  “큰 아들은 제대하고 나서 미 플로리다 주립대를 졸업합니다.작은 애는 울산 과기대에 수시 합격했습니다.큰 애는 사업하는 후배가 저하고 얘기를 나누다가 그 친구가 사업을 하게 된 동기가 친일한 사람들의 자손들은 교육을 잘 받아 잘 살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대우를 못 받아 못 산다는 얘기를 역사책에서 보고 사업을 하면서 돈을 벌면 노동운동 하는 선배들 자식들 교육을 시켜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하더군요.그러면서 자기에게 맡겨달라고 해서 제가 전화번호만 적어줬더니 그날부터 그 집 애처럼 미국으로 보내버려 공부를 시켜줬지요.중간에 사업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다행스럽게 공부를 다 마쳤지요.  작은 애는 전액 장학생이거든요.아들 둘이를 고등학교까지 학비를 댄 셈이지요.대학 교육은 각각 다르게 해결했지요.”  -대한민국으로부터 큰 빚을 지신 거네요.(웃음)  “제가 돈을 벌어본 기억이 까마득하거든요.정상적인 월급을 받아본 게 82년도인가 그랬는데.공장을 다니며 돈을 벌긴 했지만 전과자니까 오래 안정적으로 하질 못했지요.수익이란 게 부정기적이고,원고료 강연료 친구들의 후원이라든지 들쑥날쑥한 건데.제 처는 생계를 책임지고 애들 하고 했지만 저 자신은 안 굶어주고 산 것만 해도 감사하지요.곰곰이 생각해보면 한국이란 나라가 전국민의 노력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저같은 사람도 굶어죽지 않았다,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것은 제가 뭐 격렬하게 반정부 투쟁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칠레 같은 데에선 많은 사람들이 죽었잖아요.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죽고 다친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만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언론이라든지 야당의 역할 언론의 역할,그러니까 시끄럽잖아요.우리나라에선.그런 것이 가진 힘.상대적인 얘기다.절대적 미화하자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 북한에선 수용소라든지 인권 문제 라든지 심각하지만 야당이 없고 언론이 없단 말입니다.조용히 처음 세워질 때 북한쪽이 남한보다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분들이 세운 정권인데 불과 몇십년 만에 도대체 인간 자체에 대한 의문이 드는 거거든요.군자가 독재하는 것보다 소인배들이,선의를 갖지 않는 이들이 상호 감시하고 견제하고 그러는 게.소인배들이 선의를 가지지 않는 이들이 그렇게 나쁜 일은 못하지 않느냐 제도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장석준이나 젊은 분들 잘 이해 못한거 같은데 제 깨우침은 인간 본성과 관련된 철학적 문제다.제도는 인간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어놓았다.감시하고 삼권분립해놓고 그것도 부족해 헌법재판소도 있고 언론도 있고 서로 감시해놓게 해놓았다.이런 걸 새삼 깨닫고 발명한 인류의 선조들에 대해 감탄하고 하는 게 요즘 얘기의 핵심이지요.”  -책에서 ‘오래된 미래’를 읽고 이게 무슨 의미일까 굉장히 깊게 생각했는데요.  “고등학교때 교과서에서 정치 경제 국민윤리 교과서에서 3권분립을 예사로 읽었잖아요. 그게 오랜 인류 역사 경험의 누적으로 발명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는 거지요.그런 것을 가볍게 볼 수 없다.그래서 현대 민주주의 제도.삼권분립이나 의원독립,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귀중하게 생각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 형성된 시기를 꼬집는다면.  “아무래도 그런 것은 동유럽 사태 또 소련 공산당이 야당이 된 일들, 말하자면 공산주의 일당 독재체제들이 무너진 시점에 집중적으로 문제의식이 심화된 거겠지요.  이영희 선생님이 1992년 초 연세대 장기려기념관에서 강연하셨는데 인간관을 말씀하셨거든요.그 뒤로부터 매해 그 논문을 읽을 때마다 새롭게 그 의미가 다가와 그런 게 아닌가.그래서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인간관을 달리 하는 것이잖아요. 공산주의는 다소 이상주의적인 인간관에 기초하는 거거든요.”  -책을 보면서 엉뚱하게 생각됐던 게 혈연 지연 학연 등 삼연 얘기였다.단순히 정치적 입지를 위해 그런 것인지.  “솔직히 말하면 모든 정치하는 사람들은 선거에 나가면 제 아무리 좌파고 제 아무리 근본주의자라 해도 혈연 지연 학연을 찾게 됩니다.설사 선거 후에 빠이빠이 할지라도 투표날까지는 찾게 됩니다.현실인데요.그 짓을 하다보니까.처음엔 그냥 했지요.정당화,변명을 하고 싶잖아요.변명이지요.제가 원칙적이지 못한 데 대한 변명인데 학연 같은 경우 저로선 서울대 학연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초등학교 동창생들의 도움을 주로 받았거든요.마산에 서울대 동창생 많지도 않아요.그런데 초등학생 동창생들은 정말 밑바닥,온갖 직업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학벌이 찬란 화려하지 못하기 때문에 초등학교 동창도 의미도 깊은 거거든요.어울리면서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거든요.다른 사람들하고 달라요.비록 힘이 없는 야당의 조그만 지구당이잖아요.굉장히 예의를 차려요.낙선 의원이라고 주 의원이라고 합니다.예의를 차립니다.요즘 고생 많네 권영길 의원하고 잘 지내시죠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서 잘 얘기 안해요.좋은 얘기 해주면 지지하는구나 착각하면 안되지요. 불알친구들하고 자기 마음 그대로 얘기해버려요.소주 두어잔 하면 초등 동창생들은 다른 사람들하고 달라.그렇게 해갖고 온갖 얘기를 하면서 그러면서 대중 마음 읽게 되고 알게 되는 고마움도 있습니다만. 동창생들과의 만남 통해 한국사회가 가진 특징을 봤다고 생각합니다.전국민이 같은날 초등학교에 입학한 동창생 동기들이라 이겁니다.1954년생 전쟁 후 태어난 아이들이 60년인가 61년인가 3월 같은 날에 입학하잖아요.부자가 있고 가난한 집 애가 있어 운동화를 신었냐 고무신을 신었냐 차이는 있겠지만 다 동창생이고 거기다 다 공립학교다.전세계 이런 경우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누가 뭐 큰 차 타고 다니면 “차 샀네.사업 잘 되는가 보네.” 말하자면 그저 그냥 그렇게 나도 뭐 돈벌면 할 수 있는 일이고 하고 싶은 일이고.저 사람은 할 수 있는데 저 사람과 나는 사회적으로 완전 다른 계급에 속해 저 사람 하는 일과 내 일이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잖아요.이게 독특합니다.한국이란 나라는 참 이상한 나라다.계급이 형성되지 않았다. 계급이 없다. 이런 여러가지 생각을 갖게 됐어요. 학연이란 것도 그런 사회의 독특한 현상 중의 하나가 아닌가.그냥 친구라고 어울린다 말이지요.신분이 달랐다면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갑자기 아프가니스탄 출신 작가가 쓴 ‘연을 쫓는 아이들’이란 소설이 떠오르네요.철학적 소신이나 좌우명이 있다면.  “제일 큰 영향은 부처님의 생애를 중학교 2학년 사춘기 초입에 접한 게 인생의 방향을 바꿔버린 겁니다.저로선 부처님 예수님 이런 분들에 큰 영향이 미쳤던 것 같고요.요즘 생각해보면 칸트의 불가지론,말하자면 물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젊은 시절에는 인식 못했지요.참으로 사람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는 거구나 이런 생각을 요즈음 많이 합니다.데카르트적인 사고에서,합리주의에서 경험론으로 많이 넘어가지요.칸트는 대륙 합리주의에서 출발해서 경험론 받아들여 인식론 재구성했거든요.저도 경험론에 많이 관심을 갖고 경험론 사고를 수용하고.거의 그쪽으로 내 사고방식 간다.늙었으니 자연히 그렇게 가야죠.”  -좀 더 쉽게 설명하시면.  “이런 것이 될 것 같습니다.예를 들면 중국 공산당이 당헌에 규정해놓았겠죠.맑스레닌주의를 중국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모택동 사상을 주된 이념으로 한다,그럼 그게 진리란 얘기거든요.진리가 있고 세계는 인식을 한 것이지요.이걸 진리라고 파악한 겁니다.그런데 교과서 있는 대로 해보니까 수백만의 인민이 굶어죽더라는 겁니다.집단 농장하고 인민공사하면 생산력 확확 발전해 엄청난 풍요의 세상 만들어야 하는데 거꾸로 굶어죽거든.등소평이 그래서 울면서 호소한 거지요.이 식량난을 해결하고 인민의 배를 채우는데 책에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떠냐.토지 나눠주자 안 되면 실패하지 않았냐. 이게 경험이란 것. 경험론자의 약점은 설명을 다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합리주의자는 촥~설명해. 딱 떨어지지요.책 보면 맞아. 근데 그게 안 돼. 진리는 밀어놔두고 정치 현실에서는 굶어죽는데 등소평은 우선 나눠주고 보자 .다음에 또 어떻게 하더라도. 우선 안되겠다.배를 채우자. 이게 흑묘백묘론이잖아. 한가한 상황에서 한 얘기가 아니지요.수백만 인민이 굶어죽는 상황에서 한 얘기지요.그런 경험론은 그런 것이 아닌가. 진리와 정치 실천의 문제를 구분짓는 것라고나 할까요.진리의 인식이란 문제를 유보하는 것 아니면 진리 인식에 대해서 내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난 물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이성의 오만을 버린,내가 뭐 똑똑하고 뭐 천재고.우리 선조들 논리가 맞다고 틀림없다 그러니까 우기고.인민이야 굶어 죽던 말던 계속 간다. 이건 아니라는 거지.경험론의 태도는 항상 겸손하게 진리는 잘 모르겠다고. 우선 당장 인민을 살려야 겠다. 그런 태도를, 생각을 40대 후반 50대 넘어가면서 바꾼 것 같애요.처음에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에 공산당 일당독재들이 무너지고 현실 사회주의권 무너지고 그럴 때만 해도 맑스레닌주의 아니구나 라고 많은 생각을 했고 사회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했지만 십수년 흐르면서 더 깊은 철학적인 문제가 있구나 인간간의 문제 인식론의 문제 진리관의 문제까지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거지요.그런 것을 백.  책에서 다못한 얘기.앞으로 이런 방향 준비?  역사를 이런 관점에서 써봐라라고 누가 제안했습니다.며칠 전에 누군가. 역사교과서 가지고 논란 많으니. 뉴라이트와 같다고 하잖아요. 뉴라이트 역사 인식하고 나는 많이 다른데 다른 이들이 같다고 하니 써보라 해서 생각 중입니다.그것에 관해 써볼까. 생각하고 있지요.”  -뉴레프트 운동의 요체를 세가지로 정리한다면.  “뉴레프트라 하면 공산주의,프롤레타리아 독재노선과 분명히 구별되는,확실히 다른,어중간하게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게 아니라 중도좌파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자연히 그래서 대중을 계몽하고 이끄는 게 아니라 대중의 뜻에 따르는 좌파.그 다음에 국가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부정하는 것은 무정부주의고.무정부주의적인 국가를 긍정하고 그 긍정적 역할을 인정하는 좌파가 사회민주주의의 핵심 아닐까.”  -장점을 말씀하시면.  “사회민주주의라는 게 역사 오래됐습니다. 이념은 경험이 풍부합니다.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실천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교과서가 없어요.스웨덴 다르고 덴마크 다르고 독일 영국 호주 뉴질랜 다 다르다.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사회민주주의는 해석의 폭이 넓다. 폭넓은 사람들이 그 깃발 아래 같이 모일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사회민주주의가 한국 대안야당의 깃발 새로운 이념으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사회민주주의는 굉장히 다양한 경험과 이론을 포용할 수 있는,포용력 있는,다양한 경험 가진 그런 것이기 때문에 좁고 편협하고 일직선으로 좍 있는 이념이 아니거든요.사회민주주의가 어떤 지식인들과 대중을 하나의 방향으로 모을 수 있는 정치이념으로 훌륭한 점을 갖고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새해엔 사회민주주의가 떴으면좋겠습니다.사회민주주의가 대한민국에서 부각됐으면 좋겠습니다.”  -약점은 없는지요.  “결함이 있지요.지식인들한테 매력이 없어요. 지식인들에게는 이게 애매하잖아요.뭐 이론도 뭣이 맘에 안 들어요.더 큰 약점은 유럽 선진국에선 이미 현실이 돼버린 겁니다. 그 나라의 사회당 노동당 사민당들은 다 보수정당들입니다.자기들이 1세기 전에 내세웠던 강령을 거의 다 실천해버렸어요.오바했어요.초과달성해버렸습니다.이거 지키는 데 급급하거든.그 나라의 좌파 지식인들은 성에 안 차니까 최첨단의 좌파 이론 내놓고 실천도 하잖아요.녹색당 같은 더 좌익 정당이 나타나고, 그 나라의 뉴레프트란 그런 운동들을 말하는 거거든요.그곳의 사민당이 실현한 것을 기초로 더 나아가는 것이고요.  그럼 우리 지식인 입장에서 보면 세계 최첨단 지식인들이 생산하는 담론을 보고 읽고 참여하고 싶은데ㅡ너 왜 후진국에서 산다고 한다고 다른 나라에선 50년 전의 얘기를 하고.별 재미가 없잖아요.시차가 많이 나잖아요.지식인들에게 신선하게 와 닿지 않아요. 그런데 대중들에겐 그게 가져올 직접적인 혜택 복지제도로서 생활상에서 당장 죽을 판인데 실업급여라든지 모든 것이 당장의 생활상에 절박한 요구인데 반해 지식인에겐 신선하게 다가오지 못하는 게 큰 약점이지요.그래서 뭐랄까 한국사회에서 어려움이 많이 있고,아예 예전의 맑스레닌주의 같으면 이론 정합성 쌈빡함 이런 것이 있고, 유럽의 뉴레프트라고 하면 첨단의 멋진 그런 것도 있는데.이건 밋밋하거든.큰 약점이지요. 그래서 지식인들에게 한국의 현실. 당장 이 겨울에 추운 서민 대중들의 생활상의 요구로 돌아가자,돌아가서 지적인 욕구에 충족이 덜 되더라도. 최첨단 이론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좀 하고, 유학갔다와서 그런 선생들한테 배워와 그런 연구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되,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문턱까지 왔지만 사회정치적으로 후진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현실에 밀착해서 하고 싶은 사람들은 또 하자,그게 지식인들에 대한 호소지요.한국 현실에서 하자.세계 일류 이론을 내놓지 못하더라도 하자.이런 얘기입니다.”
  • 한국 근대사 의미 재조명

    한국 근대사 의미 재조명

    올해는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백범 김구 선생 서거 60주기이다. 우리 근대사에 한 획을 그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기리는 행사들이 잇따라 펼쳐진다. 광복회의 건국훈장 반납의사 표명으로까지 이어진 건국 60주년 논란을 딛고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역사의 교훈을 되새김하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3·1운동의 의미를 세계사적 시각에서 조명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여러 단체에서 준비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3월2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3·1운동과 1919년의 세계사적 의의’(가제)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연다. 한·중·일과 미국·유럽의 전문가들이 참여해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을 비교 분석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베르사유 강화체제 등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 3·1운동을 평가한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도 2월13, 14일 ‘3·1운동과 5·4운동 기념 국제심포지엄’을 연다. ●세계사적 시각에서 조명… 국제학술대회 잇따라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인 4월13일을 전후해 임정 90주년 행사도 다채롭게 열린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는 국제학술세미나, 임시정부 사진전, 대중서적 발간 등을 준비 중이다. 이찬희 사무처장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확고히 알리는 행사들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립기념관은 4월11일 중국측과 공동으로 중국 상하이 충칭에서 ‘중경시기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주제로 국제학술심포지엄을 마련한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안중근(1879~1910)과 그의 동양평화론은 최근 가장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주제다. 안중근의사숭모회는 기념일인 10월26일을 전후해 다양한 행사를 연다. 10월2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가 참가하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비롯해 안중근의사 특별기획전, 연구총서 발간, 창작오페라 등을 준비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은 8월에 한·중·일 3국의 안중근연구자를 초청해 ‘안중근 의거와 독립운동’을 주제로 학술행사를 연다. 6월26일은 김구(1876~1949) 선생이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된 지 60년이 되는 날이다. 김구재단은 임시정부와 백범의 발자취를 좇는 영상물을 제작하는 한편 2005년부터 추진 중인 미국 브라운대 김구도서관 개설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10월에는 세계 석학을 초청해 ‘김구 국제심포지엄’을 연다. 백범기념관도 백범추모음악회와 특별테마전시회 등을 준비하고 있다. ●국권침탈 100주년 집중 조명 2010년은 한·일강제합병 100년이 되는 해다. 동북아재단은 한 해 앞서 한·일강제합병의 부당성을 집중 조명하는 3개년 사업을 시작한다. 6월22일 국권침탈 100주년과 관련해 역사갈등의 본질적 문제를 규명하는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 이어 2010년에는 역사화해를 통한 평화구축 모색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고, 2011년 이 결과물을 국문과 영문, 일문 책자로 발간해 배포할 계획이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수신사 시절 박영효 초상화 첫 공개

    수신사 시절 박영효 초상화 첫 공개

    1882년 일본에 수신사로 간 박영효(1861∼1939)의 초상화(그림)와 박영효가 일본에 도착해 맨 처음 태극기를 내걸었던 니시무라(西村)여관의 전경이 담긴 동판화가 5일 공개됐다. 이 자료는 한철호 동국대 교수가 학술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1집에 기고한 논문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박영효 태극기)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제작 국기의 원형 발견과 역사적 의의’에 소개됐다. 박영효의 초상화는 1883년 아사히(朝日)신문 오사카판 1월10일자에 게재된 것이다. 박영효의 사진은 여러 장 있지만 수신사 시절 박영효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한 교수는 “1874∼1875년 니시무라 여관의 전경이 담긴 동판화를 지난해 일본에서 발견했다.”면서 “박영효가 태극기를 내건 니시무라 여관의 당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고 주장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니시무라 여관은 1931년 대대적인 수리를 거쳤으나 1945년 폭격으로 사라졌다. 동판화에는 당시 여관 앞 마당에 대형 깃대가 있으며, 이 깃대에 여관 이름이 적힌 깃발이 걸려 있다. 이밖에 한 교수는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으로 가는 도중 선상에서 태극기를 그린 일본 배 메이지마루(明治丸)호가 도쿄해양대에 보존돼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 배는 1978년 일본 중요 문화재로 지정됐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백범 수행비서의 절절한 추모와 회한

    백범 수행비서의 절절한 추모와 회한

    역사의 기술에는 좌우가 따로 있을 수 없다.역사적 사실에 대한 엄정한 기록만이 있어야 한다.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이상과는 다르다.최근 뉴라이트 교과서 포럼이 만든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에 따르면 백범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과 무관한 테러범 정도에 불과하다.현 정부 이데올로그 역할을 자임하는 세력의 이러한 역사인식은 10만원권 발행의 무기한 보류 결정이 백범의 초상화 화폐도안 때문이라는 의구심마저 증폭시키고 있다. ●높은 기개·세세한 일상까지 담아 이런 상황에서 백범의 수행비서 선우진(87)씨의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최기영 엮음,푸른 역사 펴냄)이 나왔다.2009년으로 서거 60주년을 맞은 백범에 대한 옛 수행비서가 남기는 절절한 추모와 자책,회한의 기록이자 또 하나의 역사이다. 장준하 등과 함께 한국광복군훈련반 소속이던 선우씨는 1945년 1월31일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가 백범과 첫 인연을 맺는다.그리고 1949년 6월26일 서울 종로구 평동 경교장 집무실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숨질 때까지 꼬박 4년 5개월 동안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백범을 수행했다. 선우씨는 백범이 평생의 염원이던 자주적 통일 독립국가를 만들기 위해 주변의 온갖 만류를 뿌리치고 1948년 4월19일 38선을 넘어가는 순간에도,김일성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과 회담을 진행할 때도,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벌이는 현장에서도 늘 곁에 있었다. 독립운동가로서 백범의 높은 기개만 접한 것이 아니었다.세세한 일상의 기억도 뚜렷하다.당시 유력 기업인(강익하 상공회의소 부회장)이 건네는 정치자금 300만원을 이승만 박사에게 주라며 돌려보낸 일,그러다가 임시정부 요인들이 돈이 없어 점심을 굶는 지경에 이르자 친히 이 박사를 찾아 면박을 받으며 30만원을 받아온 일,북한을 방문했을 때 소풍나온 국민학생과 천진하게 어울리던 일 등에 대한 기록도 생생하다.이밖에 육식보다는 채식을,특히 만둣국과 국수를 좋아한다는 백범의 식성도 엿보이고,아침에 일어나 ‘중국시선’을 읽고 남는 시간에는 각지에서 요청하는 휘호를 쓰곤하는 세세한 일상 등도 기록의 한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凡夫를 자처하며 인간애·검소 실천 꼬박 60년 동안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자책과 회한.1949년 6월26일 일요일 오후 12시 40분쯤 포병 소위 안두희가 백범 면담을 요청했을 때 45구경 권총을 차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적극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점,안두희를 2층 집무실로 안내한 뒤 백범의 점심 만둣국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하식당으로 바로 내려간 점 등은 선우씨에게 결코 잊혀지지 않는 ‘슬로모션’처럼 흐른다.그는 ‘햇볕도 느리게 내리쬐었고,사람들의 발걸음도,목소리도 느리게 스쳐 간다.’고 표현했다. 선우씨는 “선생의 서거는 나의 불민(不敏) 때문”이라면서 “이제는 죄스러움을 넘어 팔십이 훨씬 넘은 내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기억 속에 살아 있는 내가 아는 선생의 모습을 많은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 내 마지막 의무가 아닐까 한다.”고 책을 쓴 뜻을 밝혔다. 그는 서문에서 “백범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조국통일에 헌신한 사람이기 이전에 범부(凡夫)를 자처하면서 따뜻한 인간애와 검소,절제를 몸소 보여 주었다.”고 회고했다.1만 20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친일파 건국공로자 인정에 반발

    광복회가 29일 건국훈장 반납을 결의하고 대규모 시위까지 경고한 것은 문화체육관광부가 ‘건국 60년’ 홍보 책자에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1948년 친일 부역세력 등이 포함된 이승만 대통령 정부 수립 인사들을 건국 주역이자 건국의 가장 중요한 공로자로 인정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광복회는 문화부 의뢰로 만들어진 ‘건국 60년 위대한 국민-새로운 꿈’이란 제목의 책자에서 “건국한 공로는 1948년 8월 정부 수립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부분을 특히 문제 삼았다.일제 치하 민족 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고려 없이 당시 이승만 정부에 참여한 인사들을 건국 주역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 광복회가 “ ‘가짜 훈장’이 되어 버린 독립선열들의 건국훈장을 국가에 반납하겠다.”고 예고한 것도 친일 부역세력을 건국 공로자로 인정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홍보 책자의 논리대로라면 친일파들도 대거 건국훈장을 받고 건국공로자로서 추앙받게 된다고 광복회 관계자들은 지적했다.1948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 정부에는 남북 대치와 반공 분위기 속에 친일 부역세력들이 적지 않게 참여했다. 게다가 “임시정부는 자국의 영토를 확정하고 국민을 확보한 가운데 국제적 승인에 바탕을 둔 독립국가를 대표한 것은 아니었고 실효적 지배를 통해 국가를 운영한 적도 없다.”며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실제 출발 기점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홍보 책자의 기술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광복회 남만호 부회장은 “이같은 논리는 독립운동의 50년 역사를 부정하고 의병투쟁에서 시작해 3·1운동과 해외 무장 독립운동을 거치며 30만명이 순국하고 60만명이 희생된 선열들의 독립운동과 희생의 의미를 헛되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광복회 사무실로 김영일 회장 등 광복회 이사들을 찾아가 “논란이 됐던 책의 서술 부분은 정부 뜻과 다르다.”며 “필자들이 여러 명이다 보니 다르게 서술한 부분을 꼼꼼히 살피지 못했다.”고 이해를 구했다.또 광복회가 추천한 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정리한 책을 내년에 발간하겠다고 약속했다. 광복회 임종선 문화부장은 “광복회가 요청한 책자 회수·폐기 및 정정에 대한 문화부의 후속조치를 지켜 보고 유 장관의 약속을 공문 형식으로 확인한 뒤 훈장 반납 문제 등을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광복회의 반발은 지난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 명칭을 둘러싸고 벌어진 건국절 명칭 논란과도 맥을 같이한다.이명박 정부의 주요 지지세력인 뉴라이트 운동 단체와 학자들은 건국의 기점을 1948년 이승만 정부수립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치고 있어 건국 기점 및 주체 등을 둘러싼 논란과 마찰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석우 선임기자·문소영기자 jun88@seoul.co.kr
  • 독일, 관타나모 중국인 수감자 수용 검토

    독일 정부가 관타나모 수용소 내 중국인 수감자 수용을 검토 중이다.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들의 본국 송환을 강력히 요구해왔던 터라 지원이 결정될 경우 양국간 외교마찰이 불가피할 전망이다.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은 25일(현지시간)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외무장관이 관타나모 수감자들의 독일 정착을 위한 법률적,정치적 검토를 지시했다고 보도했다.현재 수용이 검토되고 있는 수감자 중에는 중국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의 무장 분리독립운동단체인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TIM) 소속 17명이 포함돼 있다.귄터 노케 독일 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이들에 대한 수용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노케 위원장은 중국 밖의 위구르인 단체 중 최대인 ‘세계 위구르 회의’가 독일 뮌헨에 있다는 점을 들며 독일이 이들의 재정착에 가장 적합한 국가라고 강조했다. 독일은 포르투갈에 이어 두번째로 관타나모 수감자 수용에 적극 나선 유럽국이다.앞서 친강(秦剛)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들의 송환을 촉구하며 “제3국으로 보내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미국은 이들이 중국에서 고문을 받을 위험이 있다며 제3국행을 추진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국가가 중국과의 갈등을 우려해 거부하고 있다.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부고] 애국지사 문수열 선생 별세

    일제강점기 광복군에 입대해 민족독립운동을 고취했던 애국지사 문수열 선생이 23일 오전 7시30분 별세했다.85세. 1923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해 작전참모반에 소속돼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또 기관지 ‘빛‘의 편집을 맡아 독립군의 정당성을 알리는 홍보활동에도 앞장섰다.정부는 고인에게 1963년 대통령 표창,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유족으로는 정점돌 여사와 재욱씨 등 2남2녀.발인은 25일 오전 8시.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02)30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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