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독립운동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 오분자기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 AI
    2026-02-1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358
  • ‘민주주의 전당’ 10년째 건립 후보지만 물색

    민주주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정부가 추진 중인 ‘한국 민주주의 전당’(민주전당) 건립 사업이 10년째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의지 부족과 마땅한 후보지를 찾지 못한 탓이다. 13일 행정안전부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정성헌) 등에 따르면 5·18의 근원지인 광주와 ‘3·15 의거 기념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경남 창원 등 일부 지자체가 이미 후보지를 결정해 놓고 유치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정부는 그러나 ‘접근성’을 이유로 지방보다는 수도권 건립에 무게를 두면서 부지 여건과 비용, 민원 문제 등에 부딪혀 표류를 거듭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에 따라 2002년 발족한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이날 “역사성, 상징성, 편의성 등을 고려해 후보지를 물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념사업회는 최근 이런 이유 등을 들어 남산 옛 안기부 터를 후보지로 검토해 줄 것을 서울시에 요청했으나, 시가 주변 건물 이전 등의 어려움을 들어 난색을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남영동 대공분실, 정동 덕수초등학교 운동장 등도 후보지로 떠올랐으나 이들 지역 역시 주민 반대 등으로 무산됐다. 이에 따라 그동안 민주전당 유치를 희망해 온 광주·창원 등은 “언제까지 후보지 결정에 매달려야 하느냐.”며 반발하고 있다. 광주시는 지난해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을 유네스코에 등재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 4·19혁명, 6월항쟁, 5·18 등으로 이어진 ‘민주 도시’의 상징성을 내세우며 전당 유치에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시는 5·18사적지로 지정된 서구 화정동 옛 국군통합병원과 보안대 부지 12만 3000여㎡를 후보지로 지정하고 국방부와 이양 또는 매입 협의에 나서기로 했다. 시 관계자는 “민관 합동으로 구성된 유치 추진위 등이 그동안 청와대, 행안부 등을 70여 차례 방문해 ‘건립 당위성’에 대해 설명했는데도 ‘쇠귀에 경 읽기’ 격이었다.”며 “정부가 건립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문이다.”라고 비판했다. 민주전당 광주유치위원회(위원장 김동원 전남대 명예교수)는 최근 15차 전체회의를 열고 “현 정부의 임기가 끝나가는데도 공약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올 안으로 2기 추진위를 구성해 정부를 압박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창원시도 4·19혁명을 촉발했던 ‘3·15의거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전당 유치에 발벗고 나섰다. 정부가 구상 중인 민주전당은 11만 5000㎡의 부지에 1400억원(부지 매입비 제외)을 들여 민주화운동의 역사 자료관, 상설 전시관, 교육센터, 연구소 등을 갖추고 민주주의 교육장으로 활용한다는 복안이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3·1운동 시발점 봉황각을 아세요

    3·1운동 시발점 봉황각을 아세요

    천도교는 3·1운동의 사실상 출발점인 봉황각(서울 강북구 우이동 254·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호) 준공 100주년을 맞아 오는 19일 오전 11시 성대한 기념식을 연다. 이와 함께 봉황각을 건립한 3세 교조 의암 손병희(1861~1922) 선생의 유물 전시회도 연다. 봉황각은 일반인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천도교에선 빼놓을 수 없는 공간.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손병희는 경술국치일에 교인들 앞에서 “10년 뒤 주권을 되찾겠다.”면서 “계획이 있으니 나를 따라 달라.”고 밝혔다고 한다. 1911년 당시 경기도 고양군 우이동 땅 2만 7900여평을 매입,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훈련시킬 목적으로 이듬해 6월 19일 봉황각을 세웠다. 천도교에 따르면 손병희 선생은 3·1운동을 이곳에서 구상했으며, 1912년 4월 15일부터 1914년 3월 25일까지 7차례에 걸쳐 전국의 교역자들에게 49일 동안 특별연성(練成·몸과 마음을 닦아서 일을 이룸) 훈련인 독공수련을 실시했다. 독공수련에는 483명이 참가했으며 3·1운동 당시 봉황각에서 교육받은 천도교 지도자들은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천도교 임운길 교령은 당시의 독공수련에 대해 “육신은 일시 객체요 성령은 영원한 주체라는 이신환성(以身換性)을 깨닫는 데 목적을 둔 교육이었다.”며 “손병희 선생은 이 교육을 통해 인간의 근본을 찾고 주체성과 자주성을 확립하는 정신개벽을 이룩함으로써 항일 독립운동에 임하는 정신적 자세를 확고히 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천도교는 그동안 손병희 선생의 고향인 충북 청원 의암기념관에 대여했던 유물들을 반환해 봉황각 경내 1층 강당에서 19일부터 7월 10일까지 전시한다. (02)993-2391.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씨줄날줄] 울란바토르 이태준공원/이도운 논설위원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남쪽을 흐르는 강이 있다. 톨강.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청계천 하류보다 조금 넓은 개천이지만, 몽골인에게는 소중한 생명의 젖줄이다. 톨강은 굽이굽이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을 적신 뒤 시베리아 바이칼호수로 흘러들어간다. 울란바토르는 원래 40만명의 인구를 기준으로 설계된 도시다. 그러나 도시화의 영향으로 울란바토르의 인구는 100만이 넘었다. 구시가지가 포화하면서 점차 톨강 남쪽에서 개발이 시작되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의 강남 개발이다. 최근 광산 개발 등으로 몽골 경제가 활성화되고 돈이 풀리면서 울란바토르 강남 지역에는 호화 아파트와 빌라 등이 곳곳에서 건설되고 있다. 몽골에 주재하는 외국 공관들도 이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울란바토르 강남 지역의 한가운데 6600㎡에 이르는 널따란 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태준공원. 일제 강점기에 몽골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한편으로는 몽골인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던 대암(大岩) 이태준 선생의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세브란스 1회 졸업생인 이태준 선생은 몽골인에게 만연했던 매독을 치료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1914년에 몽골 국왕의 어의(御醫)에 오른 인물이다. 몽골 정부는 이태준 선생을 기리기 위해 울란바토르 강남 지역의 땅을 제공했고, 국가보훈처와 연세의료원 등의 지원으로 2009년 기념관과 공원이 조성된 것이다. 이 공원은 울란바토르에 사는 한국인 교민들에게는 자부심과 애국심의 상징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교민들은 울란바토르 강남 개발이 장차 이태준공원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궁금해하고 있다. 울란바토르의 강남 지역도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따라서 확장에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몽골 사람들이 이태준공원을 옮겨 달라는 민원을 제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서울 강남의 대표적인 거리 테헤란로. 1970년대 말 시작된 제2차 석유 파동 당시 산유국 이란과의 유대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우리 정부가 붙여준 이름이다. 이 거리에 한국 정보기술(IT) 업체들이 모여들면서 ‘테헤란 밸리’라는 별칭으로도 불리지만, 일부에서는 이름을 바꾸자는 민원을 계속 제기하고 있다. 그 때문에 서울 주재 이란 대사의 가장 큰 임무는 테헤란로 이름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몽골 주재 한국 대사도 이태준공원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가 될지도 모른다. 울란바토르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 [데스크 시각] 아길라와 빅뱅의 역전/문소영 문화부 차장

    [데스크 시각] 아길라와 빅뱅의 역전/문소영 문화부 차장

    2012년 5월에 찾은 필리핀 마닐라에도 여느 동남아 국가들처럼 한류가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이 아이돌 스타 ‘빅뱅’과 ‘샤이니’ 등의 K팝에 열광하는 모습이었고, 50~60대들은 한국 드라마에 빠져 있었다. 이민호 팬클럽뿐만 아니라 고현정 팬클럽도 있었다. 필리핀의 대졸 초임이 한국 돈으로 30만원 수준인데, K팝 콘서트 좌석 중 최고가인 25만원짜리 티켓이 가장 빨리 매진된다고 한다. 황성운 마닐라 한국문화원장은 지난해 신인급의 어느 아이돌 그룹이 마닐라에서 공연했는데 국내에서는 생각도 못할 ‘빅뱅’급의 환호를 받고는 잔뜩 고무돼 귀국했다고 귀띔해 줬다. 태풍이 몰아쳐 휴교령이 내린 날, 공교롭게 한국어 수강신청을 받았는데 그 악천후에도 새벽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한다. 최근 온라인으로 수강신청을 바꾸고 수강생을 200명에서 400명으로 늘렸는데도 2분 만에 신청이 끝난단다. 그들은 K팝을 따라 부르려고 한글을 배운다. 한류 열풍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필리핀이 이렇단다. 베트남과 태국의 열풍은 더 놀랍다고 했다. 태국의 한 기업 주재원은 최근 원전과 물관리 등 태국의 국책사업 수주를 놓고 한국기업과 유럽의 기업들이 경쟁하고 있는데 ‘한류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태국의 한류 열기 덕분에 우리가 가진 기술 이상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의 한류를 보면서, 문득 30여년 전 한국에서 유행했던 필리핀 노래가 생각난다. 필리핀의 국민가수 프레디 아길라의 ‘아낙’(Anak)이다. 올해 59세인 아길라가 당시 애절하게 불렀던 아낙은 1978년 한국·일본 등 아시아를 강타했고, 미국에선 빌보드 차트 5위까지 올랐다. 당시 24살에 불과했던 아길라는 통기타 반주에 영어도 아닌 필리핀 공용어 타갈로그어로 노래했다. 한국에서는 이 노래를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아들’로 번안해 더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 말까지 필리핀은 한국보다 잘살았다. 세계은행 자료를 보면 1960년 필리핀의 국내총생산(GDP)은 67억 달러로 39억 달러였던 한국의 1.8배였다. 그해 1인당 GDP는 필리핀이 257달러, 한국은 155달러였다. 심지어 1961년에는 필리핀이 270달러로 92달러였던 한국의 3배가 됐다. 그 시절에 필리핀 건축기술도 들어왔다. 대표적인 게 미국이 발주하고 필리핀 기술로 지은 광화문의 쌍둥이 건물인 미국 대사관과 전 문화체육관광부 건물이다. 1963년에 지은 장충체육관도 설계는 한국인이 했지만, 시공·감리를 필리핀 건설회사에서 했다. 필리핀은 미국에 앞서 1975년 중국과 수교를 맺었고, 1976년 아세안독트린을 발표해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아무튼, 1960~70년대의 필리핀은 영향력이 있었다. 마닐라의 밤하늘을 보면서 30여년 전 ‘아길라’를 배출했던 필리핀과 ‘빅뱅’을 낳은 한국의 역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역전의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경제와 정치의 상관관계가 먼저 떠오른다. 경제가 몸이라면 정치는 머리다. 몸이 커지는 속도에 맞춰 두뇌 시스템이 커지고 적절하게 기능하지 않으면, 몸은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필리핀의 경제와 문화에 낙후된 정치가 질곡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존경받는 독립운동가에서 독재자로 전락해 1986년 국외 추방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가족들을 보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독재자 마르코스는 1989년 사망했지만, ‘3000켤레의 구두’로 사치와 허영의 퍼스트레이디로 찍혔던 이멜다 마르코스는 2010년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그의 아들은 상원의원, 그의 딸은 주지사가 됐다. 한국인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하고 경악하겠지만, 그들을 당선시킨 지역은 마르코스 가족의 17세기적 봉건 영지 같다. 지속 가능한 한류를 만들기 위해 정부와 민간에서 갖가지 계책을 내놓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한류란 선진화된 정치시스템, 정치의식 등이 수반돼야 하지 않을까, 필리핀의 한류를 보며 그렇게 느꼈다. symun@seoul.co.kr
  • [만화는 내 사랑] (4) 이효재 한복디자이너

    [만화는 내 사랑] (4) 이효재 한복디자이너

    “여자들은 대개 예쁜 옷, 예쁜 보석, 예쁜 가방을 갖고 싶어 하잖아요. 모든 사물에 ‘예쁜’이라는 말을 차례로 붙인다면 1순위는 바로 만화예요. 밤하늘의 밝은 별과 맑은 보름달, 낮에 나온 반달은 볼 수는 있지만 가질 수는 없잖아요. 제가 볼 수도 있고 가질 수 있는 1순위, 그것도 바로 만화죠.” 서울 성북동 길상사 맞은편 2층집에는 만화방이 하나 있다. 일반에 공개된 곳은 아니지만 내부 공간이나 장서의 규모가 상당한 수준이다. 한복 디자이너이자 보자기 예술가로 유명한 이효재(54)씨의 만화 서재다. 만화가 좋아 하나둘 사 모으다 보니 어느새 서재 벽면 천장까지 채우게 됐다. 그의 만화 읽기는 남다르다. 우선 손을 깨끗이 씻는다. 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다. 다른 사람들은 화장실에서도 읽는다지만 그의 만화책들은 좀체 보금자리를 빠져나가는 법이 없다. “책을 몰래 가져가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꽃과 우산, 만화는 가져가도 도둑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으냐.”며 웃었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도 매우 느리다. 다른 사람이 예닐곱장을 읽을 시간에 한장을 겨우 읽는다. “그림 한칸 한칸, 대사 한줄 한줄, 캐릭터 표정 하나하나를 곱씹어가며 정독해요. 젊었을 땐 소설도 꽤 읽었는데 나이가 든 지금도 제 곁을 지켜주는 건 만화밖에 없네요.” 그에게 어릴 적 만화방에 대한 추억은 없다. 낯가림이 심하고 결벽증까지 있었던 탓에 만화방에 가지 않았다. 만화와의 첫 만남은 집으로 배달되는 어린이 신문을 통해서였다. 그는 신동우의 ‘풍운아 홍길동’과 몇몇 공상과학(SF) 만화들을 떠올렸다. “어린이 신문을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좋았어요. 만화를 보면서 그때는 불가능해 보였던 우주시대를 꿈꾸곤 했죠. 인간의 상상력을 만화로 그려내기 때문에 결국에는 과학이 만화를 쫓아올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만화를 처음 구입한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다. 20년여 전 친구의 부탁이 계기가 됐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너무 보고 싶은데 돈이 없다면서 친한 서점 주인을 통해 빌려 달라고 했다. 그 마음이 너무 절실해 보여 자기 지갑을 열어 통째로 사서 건넸다. 그때부터 틈날 때마다 만화책을 사들였다. 서점에 갈 때마다 차 트렁크를 만화로 한가득 채워 왔다. 마음에 드는 만화를 보면 완결 시리즈를 보관용, 독서용, 대여·선물용 등으로 따로 샀다. 순정 장르와 SF 장르를 즐기는 그가 책을 고르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 그림이 예뻐야 하고 음란하거나 폭력적이지 않아야 한다. 직업상 의상이나 디자인을 소재로 한 만화를 좋아하지 않을까 했는데 고개를 가로젓는다. “직업과 취미는 달라야 해요. 직업 외 다른 세계에서는 제가 편해야 하기 때문에 직업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보지 않아요. 같은 업종 이야기는 외면하게 되죠.” 국내 작품에서는 허영만의 ‘짜장면’과 황미나의 ‘레드문’, 이미라의 ‘은비가 내리는 나라’를 필독서로 추천했다. 외국 작품에선 ‘천재 유 교수의 생활’ ‘캔디 캔디’ ‘마스터 키튼’ ‘팻숍 오브 호러스’를 꼽았다. ‘은비가 내리는 나라’는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고, 그림만 봐도 행복해지는 ‘천재 유 교수의 생활’은 여행길에 꼭 동행시킨다. 그래도 단연 최고는 ‘짜장면’이다. 에피소드와 대사를 줄줄 읊을 정도다. 어깨너머로 같이 보던 남편이 이 작품을 모티브로 곡을 짓기도 했다. 그의 남편은 피아니스트 임동창(56)이다. 세상에는 아직도 만화에 대한 편협한 시선이 많다고 했더니 돌아온 답이 이렇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좋은 점을 발견하겠죠. 그것을 발견하고 안 하고의 차이이기 때문에 독립운동 하듯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요. 만화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무심하기 때문이라고 봐요.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만화를 함부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 해석만 달리하면 세상은 천국이에요.” 글 사진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문화마당] 보수와 진보의 새로운 풍경을 기대하며/신동호 시인

    [문화마당] 보수와 진보의 새로운 풍경을 기대하며/신동호 시인

    반복은 지루하다. 그러나 일상을 구성하는 것은 그 지루한 반복이다. 잠에서 깨고, 일하고, 또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 저녁의 포장마차나 가족들의 단란한 밥상은 그 일상이 주는 선물쯤이라 여겨도 될 것이다. 일상이 켜켜이 쌓여 하나의 삶을 온전히 구성할 때 일탈 또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일상이 없는데 변화가 있을 수 없다. 개인의 삶도 그렇고 집단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변화가 아름답다고 여기던 내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 데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헤겔이 ‘법철학’ 서문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이 되어서야 날아오른다.’고 했을 때 모든 이론은 무력해진다. 인간은 이론으로 살지 않는다. 그냥 산다. 한 시대가 지나간 황혼 무렵에 비로소 그 삶은 의미화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로 상징되는 진리란 그때야 알게 될 터인데, 누군가는 낡은 진리를 가지고 다투느라 일상을 소홀히 하거나 일상의 기본적인 절차를 무시한다. 일상이 반복될 때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 아닌가. 노동자들을 만나면 언제나 숙연해진다. 먼저 그들의 거친 손과 손톱에 낀 기름때 때문에 그렇다. 하루 이틀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손이 아니다. 그 손이 두툼해질수록 더 겸손해지는 것 같다. 대화 도중에도 그들의 손은 망가진 의자를 고치고 망가진 가슴을 어루만져 준다. 노동자의 반복된 버릇은 생산하는 곳에 있지 파괴하는 곳에 있지 않다. 그 일상이 외부에 의해 위협받았을 때 분연히 단결할 뿐이다. 노동자들은 일을 지속하고 일의 가치를 존속하려고 파업하는 것이지 파업을 하려고 노동자가 된 것은 아니다. 일제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부활시킨 홍명희의 ‘임꺽정’을 폄하할 마음은 전혀 없다. 단지 임꺽정이 진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건 최근에 벌어진 통합진보당 사건 때문이다. 젊은 시절 임꺽정은 내게 진보의 아이콘이었다. 낡은 봉건의 틀을 전복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주인이 되는 유쾌한 반란, 임꺽정과 그의 친구들이 모인 청석골은 답답한 시절의 유토피아였다. 그러나 진보는 일상을 외면한 반란에 있지 않다. 제도 안에서 몸부림치는 사람들, 국가라는 거대 조직과 법의 울타리 안에서 반은 감사하고 그 반은 불만인 사람들. 하루에도 몇 번씩 보수와 진보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 안에 진보가 있고, 그 진보가 움직일 때 훗날 시대가 변화했다고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주자성리학이 지배이념이었던 조선시대, 유교경전을 주자를 따라서 해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석한 소위 ‘사문난적’(斯文亂賊)들, 윤휴 같은 이들이야말로 시대의 진보주의자였다. 양반 지주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대동법’을 이루고 만 김육 같은 선비, 종부세 하나 관철하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처지에서 보면 그야말로 혁명적 개혁주의자라 불릴 만하다. 성경의 해석을 독점했던 중세를 벗어나니 르네상스가 열렸고, 주자의 유교 해석 독점에서 벗어나니 진경시대가 열렸다. 그것이 마르크스주의든 주체사상이든 사상에 갇혀 있는 순간 그 누구도 진보라 불릴 수 없는 이유이다. 민영규 선생의 ‘강화학 최후의 풍경’에서 나는 보수의 웅혼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웃나라로부터 부를 구하지 않겠다는 양명학의 거두 이건창, 그가 열다섯일 때 조부 이시원은 병인양요를 목도하고 목숨을 끊었으며 그 또한 장엄하게 무너져 가는 조선과 함께 저물었다. 경술국치가 나자 그의 아우 이건승이 노구를 이끌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날 때였다. 큰조카가 지게에 이불을 얹고 따라나섰다. 숙부님이 한데에서 주무실까, 그것이 걱정되어서였다고 한다. 오래된 가치를 이렇게 내면화시킨 보수는 황혼처럼 아름답다. 수레바퀴 위의 한쪽은 보수 혹은 전통, 다른 한쪽은 진보 혹은 개혁으로 이뤄져 있다. 한쪽이 지나치게 구르면 제자리만 맴돈다. 일상이 구축한 보수에서 진보가 나오고 진보가 이룬 변화 뒤에는 또 일상이 지속된다. ‘수구꼴통’이나 ‘종북’이란 언어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길 기대하는 건, 오늘 아침에도 어제와 다름없이 일터로 나서는 이들의 마음이다.
  • [길섶에서] 세기의 남자/이도운 논설위원

    얼마 전 차를 타고 가다 내가 졸업한 중·고등학교 앞을 지나게 됐다. 서울 용산구 보광동의 오산학교. 한강변 언덕 위에 자리를 잡아서 수업을 듣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을 볼 수 있다. 오산은 1907년 독립운동 지도자 남강 이승훈 선생이 고향인 평안북도 용동에 세운 민족 교육기관이다. 용동을 둘러싼 다섯 개의 산이 학교 이름이 된 것이다. 교가에 ‘네가 참 다섯 메의 아들이구나.’라는 후렴이 나온다. 오산은 용동에서 김소월, 이중섭 같은 인재를 키워냈지만 6·25전쟁 무렵 공산당의 학정을 피해 부산으로 이전했다가 1954년에 다시 서울로 옮겼다. 개교 기념일마다 동문인 함석헌 선생이 하얀 도포를 입고 흰 수염을 휘날리며 오산 정신을 일깨워 주려 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산학교가 세워진 지 올해로 105년이 지났다. 한 세기가 넘는 역사다. 생각해 보니 내가 졸업한 대학도 127년, 내가 다니는 신문사도 108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갑자기 세기의 남자가 된 기분이다.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 [배설 선생 서거 103주기] “기념관 부지 마련에 정부·지자체 협조 있었으면…”

    [배설 선생 서거 103주기] “기념관 부지 마련에 정부·지자체 협조 있었으면…”

    구한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구국의 필봉을 휘둘렀던 영국인 배설이 8일로 서거 103주기를 맞는다.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 당시 국내에서 발행 중이던 모든 신문 부수를 합친 부수보다 많은 발행 부수 1만 3000부를 자랑하던 당대 최고의 신문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비판한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한문과 영문 호외로 만들어 세상에 널리 알린 것도,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해 국민운동화한 것도 대한매일신보였다. 선생은 언론을 통한 항일운동을 펼치다 수감됐고, 옥고를 이기지 못해 세상을 등졌다. 그는 영국인으로 태어났지만, 대한국인으로 죽었다. 선생의 뜻을 펼치는 배설기념사업회는 8일 서울 양화진 선생 묘역에서 103주년 추모기념식을 갖는다. 이수성 전 국무총리, 박원순 서울시장, 박유철 광복회장, 스콧 와이트먼 주한영국대사 등이 참석해 선생의 뜻을 기릴 예정이다. 7일 배설선생기념사업회 김재원(81) 회장을 만나 선생 사후 103년이 지난 오늘에 되새겨야 할 선생의 얼을 탐구해 봤다. →내일이면 서거 103주기를 맞는다. 배설 선생의 항일구국혼을 이 시대에 어떻게 승화시킬 생각인가. -100여년 전 선생이 생각하던 대한제국의 시대정신이 독립이었다면, 오늘의 시대정신은 대한민국이 선진 열강의 중심에 서는 것이다. 이 같은 세계사적 비전을 가지고 국민의식을 한 단계 높이도록 역사문화정신 고취의 중심에 자리하는 사업회를 만들 생각이다. →기념사업회가 발족한 지 7년이 지났지만 선생을 기리는 여러 가지 사업은 지지부진하다는 지적이 많다. 새 사업 발굴과 기존 사업 추진에 대한 구상을 소개해달라. -창립 때부터 기념사업회를 이끌어 오던 고 진채호 초대회장에 이어 지난해 말 제2대 회장의 중책을 맡았지만 미진한 점이 많다. 기념관을 건립해 한국과 영국·일본 등지에 흩어진 선생 관련 자료와 기념품 등을 집대성하는 사업을 최우선으로 추진했지만, 아직 부지도 구하지 못한 상태이다. 선생이 묻힌 마포 양화진 묘역 일대나 면목동 용마산에 기념관을 세우고자 관련기관과 협의에 나설 예정이다. 또 대학생을 비롯한 각급 학교 학생들로 가칭 ‘배설봉사단’을 구성해 선생의 뜻을 우리 사회에 되새기도록 지원하는 사업도 추진 중이다. 선생이 태어난 영국과 우의를 돈독히 하고자 영국 브리스틀대학 등과 정기적으로 친선우호 세미나를 개최하는 방법도 모색해 보겠다. →사업을 시작하려면 재원 마련과 관련 기관과의 협조가 필요한데 어떻게 조달하고 협의할 생각인가. -재원을 생각하면 머리가 띵하다. 회장직을 맡고 보니 사업회는 빚더미에 올라 있었다. 일단 사재를 털어 마포에 작은 사무실을 얻었지만, 사업회 유지비용과 추모식 행사자금 마련에 애를 먹었다. 이번 추모식도 서울지방국가보훈청과 종교단체의 자금 지원으로 준비했다. 다행히 지난해 12월 국가보훈처로부터 기부금 모집 적격단체로 지정받아 앞으로 기부금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다. →기부금은 어느 정도 모였나. -안타까운 일이다.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한 푼도 모금하지 못했다. 대한독립운동사의 큰 스승인 선생을 기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을 쾌척할 독지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기념관 부지 마련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관련 기관의 협조가 있었으면 한다. 김 회장은 광주 태생으로 조선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매일경제신문 창간멤버로 입사해 외신부 기자와 경영기획실 기획부장, 판매·광고국장으로 일했다. 일본경제신문 광고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매일경제 신문이사를 역임했다. 언론계 퇴직 이후 개인사업을 하다 진채호 초대회장과의 인연으로 2010년부터 부회장에 영입됐다. 지난해 말 사업회 성격상 언론인 출신이 적합하다는 이유로 회장에 추대됐다. 노주석기자 joo@seoul.co.kr
  • [열린세상] 건국 아버지들의 공과/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열린세상] 건국 아버지들의 공과/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일제하 독립운동전략은 두 방향에서 추진됐다.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외교를, 그리고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았던 김구는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이루려고 했다. 1941년 6월 김구는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다. 방법론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나 광복을 맞은 조국은 미·소 양국에 의해 분할 점령됐으며,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북한에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승만과 김구가 귀국하기도 전에 이미 남북의 분단은 결정되고 말았다. 1945년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북회담 문제는 세계에서 소련 정책을 아는 사람은 다 시간을 연장해 공산화하자는 계획에 불과한 것으로 간파하고 있는데 한국 지도자 중에서 홀로 이것을 모르고 요인회담을 지금도 주장한다면 대세에 몽매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이승만의 논평(동아일보 1948년 4월 2일자)은 정곡을 찌른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 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 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 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 등을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가능성이 컸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 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해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北行)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은 그가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돼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조언을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 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이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이미 정읍선언 네 달 전인 1946년 2월에 북한은 이미 실질적 정부인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세웠으며, 1948년 2월에는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 ‘헌법’ 초안도 공표한 상태였다.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큰 상처를 입었다. 그때 김구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우(愚)를 범했고 이후 이승만은 독재의 과(過)를 범했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하면 다른 것이 보인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민족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이승만과 김구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로 우리 역사에서 함께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 민중의 삶·풍속으로 풀어낸 ‘격랑의 근대사’

    민중의 삶·풍속으로 풀어낸 ‘격랑의 근대사’

    작가 문순태(71)에게 강은 “본디 모습 그대로 인간이 살아가는 터전이 되고 또 다른 생명과 교섭하면서 힘의 원천이 되는” 존재다. 그중에서도 영산강은 “전라도 사람들의 핏줄이고, 한과 희망,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 빛과 그림자를 안고 흘렀고, 지금도 그렇게 흐르는” 삶의 터전, 그 자체다. 작가가 영산강을 배경으로 격랑의 한국 근대사를 풀어낸 ‘타오르는 강’(소명출판 펴냄)이 전 9권으로 끝을 맺었다. 37년을 이어온 역작이 마무리됐으니 작가의 홀가분함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작가는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40년 가까이 붙들고 씨름해 온 책을 드디어 완간했으니 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면서 “식민사관에 휘둘려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광주학생독립운동까지 많은 사료를 근간으로 마무리할 수 있어서 더욱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타오르는 강’은 1975년 작가가 전남매일신문에 연재한 ‘전라도 땅’에서 시작됐다. 당시 기자였던 작가는 취재차 만난 전남 나주 양반집 할머니에게 노비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노비를 꽤 많이 둔 양반집이었는데, 노비 세습제가 폐지되면서 노비들에게 문서를 나눠 주었더니 매달리면서 ‘제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단 한번도 주체적으로 살아 본 적이 없는 노비들이 갑작스러운 자유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 삶을 따라가 보니 당시 버려진 땅이 많았던 영산강에 몰려 터를 닦고, 한(恨)의 민중사를 만들어 낸 거죠.” 전남매일 연재는 2년 후 중단했고, 1981년 한 월간지로 옮겨 다시 소설을 이어 갔다. 이후 주간지와 일간지를 옮겨 가며 연재하다 198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전 7권으로 묶어 냈다. 1886년부터 1911년까지 이야기로, 노비인 장웅보 가족사를 중심으로 19세기 말 노비 세습제 폐지부터 동학농민전쟁, 개항과 부두 노동자의 쟁의 등 민중운동 속에 휘말린 민초들의 삶을 다뤘다. 8권과 9권은 작가가 그토록 쓰고 싶어 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객관적으로 서술된 것이 불과 몇 년 전입니다. 독립운동 중심 인물이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고, 그나마도 식민사관에 기초해 한·일 학생들 사이에 일어난 우발적 단순 사건으로 비춰졌죠.” 참여정부 들어 이들의 역사적 공적이 인정받았고,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면서 집필이 가능해졌다. “7권까지는 역사적 사실 위에 대부분 상상력으로 채웠지만,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사료를 많이 참고했다.”는 작가는 “이 독립운동이 광주청년학원과 광주고보를 비롯한 학생들이 오랫동안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준비해 온 사건임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소설에 당시 노비들의 질박한 생활과 풍속사도 그대로 녹여 냈다. 특히 “작가는 언어의 채굴자이고 특히 죽어 있는 언어의 활용도를 높여 다시 살려 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전라도 토박이말을 원형대로 살렸다. 소설의 별권으로 이 작품의 우리말 사전을 준비 중이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한국 첫 서양화가 나혜석 희귀 유화 발견

    한국 첫 서양화가 나혜석 희귀 유화 발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였던 나혜석(1896~1948)이 1920년대 프랑스 파리에 머물면서 근교 마을 풍경을 담았던 유화가 발견됐다. 유동준 정월나혜석기념사업회장은 서울 종로구 부암동 나상균(78)씨의 자택에 이 그림이 보관된 것을 확인했다고 28일 밝혔다. 작품을 보관하고 있는 나씨는 나혜석의 둘째 오빠인 독립운동가 나경석(1890~1959)의 아들이다. 나씨는 “육당 최남선의 손녀가 보관 중이던 그림을 재작년 기증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선친과 고모(나혜석), 육당은 일본 유학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다.”면서 “고모가 육당에게 선물한 그림을 3대에 걸쳐 보관해 온 육당의 손녀로부터 기증받았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 ‘신익희 역사마을’ 만든다

    ‘신익희 역사마을’ 만든다

    경기 광주시가 독립운동가이자 제헌국회 의장인 해공(海公) 신익희(1894~1956) 선생을 기리기 위해 ‘해공 역사주제마을’을 조성한다. 시는 신익희 선생의 탄생 120돌을 맞는 2014년까지 초월읍 서하리에 역사마을과 생가 기념관, 기념공원 등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28일 밝혔다. 또 신익희 선생과 관련한 테마거리도 조성되며 생가를 중심으로 청소년들이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현장체험 프로그램도 운영될 예정이다. 더불어 시는 역사마을 인근에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지역축제 등과 연계한 팜스테이도 검토하고 있다. 조억동 광주시장이 적극적인 의지로 신익희 선생 역사마을 조성을 추진했다. 향토 출신 인사의 기념거리가 조성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조 시장은 “신익희 선생이 광주시 출신인 것을 시민들이 모르는 것 같아 항상 아쉬웠다.”며 “때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시는 오는 6월 말까지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 정비활용 및 타당성 조사를 위한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실시한 뒤 조형물과 생가 기념관, 기념공원 조성 등 역사마을 개발 방향을 최종 확정할 방침이다. 신익희 선생은 광주시에서 판서 신단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3·1운동을 지휘하다가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초대 내무차장과 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외무총장 대리, 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천도교 발상지 경주서 문화축제

    천도교 발상지 경주서 문화축제

    오는 31일부터 4월 1일까지 근대 최초의 민족종교 동학(천도교)의 발상지인 경북 경주에서 동학 창도(創道) 153돌을 기념하는 동학문화축제가 열린다. 경주는 동학의 교조인 수운(水雲·1824~1864) 최제우(그림) 대신사(大神師)가 10년간 주유천하하고 돌아와 목숨을 건 정진 끝에 도를 얻었다는 용담정을 비롯해 수운의 생가 등 천도교 태동과 중흥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곳. 이번 축제는 천도교의 가장 중심 성지인 용담정과 그 인근 경주 황성공원, 경주체육관 등지에서 이틀 동안 다채롭게 진행된다. 31일 오후 1시 경주 황성공원 특설무대에서 영화 ‘수운 최제우’가 상영되는 데 이어 부산대 임재택 교수의 강연회와 풍물놀이, 천지인소리의 타악공연, ‘용담성화’ 무용공연, 연등불 밝히기, 우리가락 우리민요 공연, 불꽃 퍼레이드 등이 펼쳐진다. 이어서 1일 경주체육관에서는 천도교의 핵심사상을 담은 ‘궁궁을을 궁을춤’과 오페라 갈라쇼, 용담검무 공연 등이 열린다. 천도교 측은 “최근 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인내천 포럼’을 만드는 등 천도교 교지인 인내천 사상을 다시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며 “이번 경주동학문화축제는 3·1운동의 원동력이자 교지(敎旨)인 인내천(人乃天) 사상과 천도교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02)732-3956. 한편 천도교는 다음 달 15~21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봉황각에서 봉황각 건축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수련회를 개최한다. 봉황각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천도교 제3세 교주인 의암 손병희(1861~1922)가 부지 2만 7900평을 매입해 1912년 건립한 곳. 손병희는 이후 이곳에서 3년에 걸쳐 지도자 483명을 양성해 3·1 독립운동에 대비한 것으로 천도교 측은 주장하고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제 얼굴 찾은 서대문형무소

    제 얼굴 찾은 서대문형무소

    일제 강점기 유관순(1902~1920) 열사를 비롯한 독립 운동가들이 투옥돼 민족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리는 서대문형무소가 2009년 발견된 1936년 건축 원형 도면에 맞게 전면 복원됐다. 26일 서대문구에 따르면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군 출신 형무소장이 냉전 이데올로기에 따라 붉은 색을 꺼려 주요 건물인 보안과 청사(현 전시관) 붉은 외벽에 덧붙였던 흰 타일을 제거하고 원래의 붉은 벽돌 건물을 되살렸다. 또 1987년 서울구치소 이전 직후 철거했던 지상 1층 398㎡(120평) 규모의 취사장을 과거 공사 도면을 근거로 복원했다. 아울러 유관순 열사가 순국했던 여성 옥사와 실외에서 운동하는 수감자들이 대화하지 못하도록 만든 격벽장, 형무소 정면담장 등의 복원작업도 마무리됐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으로 지어졌다가 광복 뒤 ‘서울구치소’로, 1988년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탈바꿈했다. 구는 2007년부터 서울시와 함께 역사관 주변 무질서한 상가지역을 편입해 9만 803㎡(2만 7516평) 면적의 원형 복원 사업을 진행했다. 2009년 1월에는 국가기록원에서 형무소 초기 원형 도면이 발견돼 청신호를 켰다. 현재 서대문형무소는 서울시 지정 제1종 전문박물관이다. 옥사 3개동과 사형장을 포함해 2만 9218㎡(8854평)가 사적 324호로 지정돼 있다. 서대문구 관계자는 “서대문형무소는 외국인 5만명을 포함해 연간 55만명이 찾는 역사적 문화명소”라면서 “원형 복원으로 더 많은 방문객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살아남으려 일본 순사가 됐다”… 친일파의 서글픈 변명

    “살아남으려 일본 순사가 됐다”… 친일파의 서글픈 변명

    “지나고 나면 흐름이 보이지만, 그 시대 속에 푹 파묻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시대를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만으로 힘겨울 수도 있지 않겠나. 일제강점기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는 친일파라면 매장하는 분위기다. 그들을 변호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과 고통이 있지 않았겠느냐, 함께 생각해보자고 쓴 것이다.” 장편 역사소설 ‘북성로의 밤’(한겨레출판 펴냄)을 최근에 펴낸 조두진(45)씨는 잘 팔리지도 않는 일제 강점기의 역사 소설을 써낸 이유를 22일 전화로 이렇게 설명했다. 대구 출신으로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성로는 대구 도심 한복판에는 있는 조선시대 대구성의 흔적을 말한다. 남성로, 동성로, 서성로 등과 한 묶음이다. 대구성은 1590년 왜구의 침략을 우려해 흙으로 축성했다가 임진왜란 때 허물어지자 1736년 돌로 성을 다시 쌓았다.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던 흥선대원군이 1870년 대구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는데, 불과 40여년만인 1906년 경상도 관찰사 서리 박중양의 묵인 아래 일본 상인들이 이 성을 허물었다. 그 성을 허물어뜨린 대표적인 일본 상인이 ‘북성로의 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미나카이 백화점의 창업주 나카에 도미주로였다. 나카에 도미주로는 일본 시가현 곤도에서 반농·반상인의 아들로 1903년에 조선 땅을 밟았다. 1905년 1월 대구에 잡화와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포목점을 열었고, 경부선 열차와 함께 전국으로 지점을 넓혀가던 중 1933년 미나카이 백화점 대구 본점과 경성점을 개장했다. 1941년 중국 남경점까지 연 그는 1945년 해방 직전까지 18개 지점, 종업원 4000명, 연매출 1억엔을 자랑하는 백화점 그룹으로 성장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40년대 일본이 미국에 선전포고한 전후다. 주인공은 미나카이 백화점의 성실한 조선인 배달부인 노정주와 창업주의 딸이자 의전에 진학한 똑똑하고 아름다운 아나코로 설정돼 있다. 마치 청춘소설 같다. 하지만 독자들은 ‘개천의 용’으로 똑똑하지만 일본 순사로 전락한 노태영, 야마모토 쇼시에 더 주목할 것 같다. 소작인의 아들로 일등을 해도 일등 자리를 양반 지주에게 내줘야 했던 태영에게는 설움이 많다. 신분 때문에 인정받지 못한 설움, 가난의 설움, 고문에 이골이 난 악질적인 순사지만 물렁한 일본인 동료에게 승진에서 밀리는 설움 등이다. 가족의 주린 배를 책임져야 할 가장 태영에게 나라 잃은 설움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태영은 독립운동에 나선 친동생 치영을 거론하며, 사촌 동생인 노정주에게 이렇게 말한다. “금 그어진 대로 살아라. 치영은 세상에 금이 잘못 그어졌다고 말하는데, 금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세월에 따라 이렇게도 그어지고, 저렇게도 그어진다.”라고. 또 태영은 “조선 농민은 종일 뼈가 빠지도록 일해도 멀건 죽으로 연명해야 하고, 일본 농민은 쉬어가면서 일해도 쌀밥을 먹는다. 농민의 잘못이 아니라 나라의 잘못이다.”라고. 그는 또한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태평양전쟁으로 조선인 징용과 징병에 열을 올리자 “쓸모가 없어야 살아남는다. 살아남아야 쓸모가 있는 것이다.”고 말한다. 치영이 “신념을 팔아서 배를 채우는 것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추궁할 때도 태영은 “배를 채우는 것이 내 신념이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식민지에서 생활인으로 살아야 하는 태영의 모습은 독재시대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살아온 1970·80년대 산업역군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두진씨는 “북성로에 가끔 70~80세가 된 백발의 일본인들이 찾아오는데, 다가가 ‘어떻게 오셨냐.’고 물어보면 몹시 두려워한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거쳐 중년까지 살았던 일본인들인데, 고향을 잃어버린 불행한 사람들이다.”라고 했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뤄지고 나서 아나코는 대구에 찾아와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조선에서 22년을 살았고, 일본에서 22년을 살았다. 지금쯤 하얀 찔레가 한창이겠지요. 나는 사쿠라 향기를 몰라요. 어른이 돼서 사쿠라를 접한 사람은 그 꽃향기를 알 수가 없다고 해요.” 이 책은 독일 법학자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와 오버랩되는 지점이 있다. 나치 전범이 될 수밖에 없었던 문맹의 한나와 그녀를 사랑한 법학도 마이클의 이야기는 단순 연애담이 아니다. 현대 독일(마이클)이 유대인 학살 등 전쟁범죄를 저지른 구(舊)독일(한나)과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한국도 과거와 화해가 필요하다. 어떤 방식으로 과거와 화해할 것인가는 과거를 청산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북성로의 밤’은 말하고 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조순형 “중구 출마포기… 정계 은퇴”

    조순형 “중구 출마포기… 정계 은퇴”

    ‘미스터 쓴소리’ 조순형 자유선진당 의원이 21일 서울 중구의 국회의원 출마를 포기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조 의원은 이날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서울 중구 총선 출마를 포기한다.”면서 “7선에 이르는 의정생활과 30여년의 정치 인생을 마감하고 초야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조 의원은 “자유선진당이 저를 중구에 전략공천한 취지는 수도 서울의 중심에서 3당 대결 구도를 형성해 제3당 진출의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구에서 3당 대진표가 확정되자 전 언론이 일제히 정치 가문 2세들의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고 보도하며 3당 대결구도가 변질, 왜곡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사태는 중구 유권자들에 대한 모욕이고 도리가 아니며 저의 출마 취지에도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라고 은퇴의 변을 밝혔다. 조 의원은 “민주통합당 정호준 후보의 조부와 저의 선친은 함께 항일 독립투쟁, 대한민국 건국,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국가 지도자였고 저도 정 후보의 부친과는 야당 동지와 동료 의원으로 동고동락한 사이였다.”면서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고 정치 이전에 사람의 도리가 앞선다고 믿으며 살아온 만큼 연장자인 제가 물러서는 것이 옳다.”고 덧붙였다. 조 의원은 독립운동가인 유석 조병옥 박사의 아들로 현역 최다선인 7선 의원이다. 11대 총선 때 무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13대부터 16대까지 서울 도봉·강북 지역구에서 민주당,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내리 금배지를 달았다. 평소에 곧은 소리를 마다 않는 대쪽 같은 성품에다 학구적인 의정 활동을 펼쳐 세 차례 백봉신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중구 선거는 새누리당 정진석 후보와 민주당 정호준 후보의 대결로 압축됐다. 한편 자유선진당 이회창 전 대표도 이날 명예 선대위원장직 사퇴의사를 표명했다. 이 전 대표 측 관계자는 “이 전 대표가 이날 오전 당 지도부에 사퇴 의사를 공식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총선 공천 결과에 대한 불만이 직접적인 이유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재연·황비웅기자 oscal@seoul.co.kr
  • [서울신문TV와 함께하는 구정 인터뷰] 박겸수 강북구청장 “개발…역사·문화·관광 패키지화”

    [서울신문TV와 함께하는 구정 인터뷰] 박겸수 강북구청장 “개발…역사·문화·관광 패키지화”

    “개발이라는 관점으로만 보면 강북구는 낙후된 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눈으로 보면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고 제주도보다 미세먼지 농도가 적습니다. 이런 장점을 살리고 역사·문화·관광을 묶어 서울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박겸수 강북구청장이 취임 이후 줄곧 강조한 ‘역사·문화·관광 중심지’ 실현을 위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있다. 그는 19일 인터뷰에서 열정적으로 구의 역사유산과 문화유산, 관광 입지를 강조하며 서울시 지원과 구민 관심을 호소했다. 그는 “해마다 개최하는 3·1 만세 재현 행사를 더욱 발전시키고 내년부터는 4·19 음악제도 축제로 승화시킬 계획”이라면서 “16위(位) 순국선열 어록을 담은 시비를 세우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서울시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기념관 건립을 위한 연구용역비 5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며 “지난해 자체적으로 연구용역까지 벌였기 때문에 착공을 자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이령 접근성을 높이고 시민 캠핑장을 설치하려 한다.”면서 “우이령과 북한산 백운동 등산로도 정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최근 청자가마터를 발굴하는 등 역사 문화적 가치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 구청장이 역사·문화·관광을 비전으로 앞세우는 데엔 지역 자산을 살려야 한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이준, 손병희, 여운형, 이시영 선생 등 근현대 위인 16위를 비롯해 4·19 민주묘지를 모시고 있다. 화계사·도선사와 같은 유서 깊은 사찰도 품었다.”면서 “빼어난 풍광 속에서 분단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우이령고개, 휴식처인 북한산도 한데 묶어 시민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되뇌었다. 북한산 둘레길 활성화도 호재다. 구에는 모두 4개 구간이 조성돼 있다. 우이령길(6.8㎞)은 1968년 북한 특수부대가 침투로로 사용한 뒤 2009년까지 민간인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에 뛰어난 생태계 보전 지역으로 꼽힌다. 우이동 우이령길 입구에서 솔밭근린공원을 잇는 소나무숲길(2.9㎞)은 지천에 뿌리내린 소나무 향기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솔밭근린공원~이준 열사 묘역 구간인 순례길(2.3㎞)엔 독립운동가 묘역과 4·19 묘지가 손님을 반긴다. 이준 열사 묘역~북한산 생태숲 흰구름길(4.1㎞)을 걷다가 구름전망대에 오르면 서울 도심까지 훤히 살펴볼 수 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산정호수 김일성별장 원형 복원

    산정호수 김일성별장 원형 복원

    경기 포천시가 산정호숫가에 위치한 김일성 별장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주변을 재정비한다. 포천시는 19일 “7년여 전 산정호수 제방 끝 지점에 위치한 김일성 별장 터 주변을 정비하면서 수변 전망대와 정자 등을 설치했으나 역사적 고증을 거쳐 원형을 최대한 다시 복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접한 건물 소유자의 동의를 받아 주변을 추가로 정비하고 전문가 고증을 거쳐 김일성 별장 관련 자료를 수집해 이야깃거리가 있는 관광명소로 만들 예정이다. 소요사업비 6억 6000만원 전액은 시비로 마련할 방침이다. 산정호숫가에 김일성 별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증빙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시는 “별장이 주거 형태로 지어진 건물은 아닐 것으로 추정하고 2006년쯤 수변 전망대와 정자를 신축했으나 최근 산정호수 재정비 사업을 추진하면서 별장 원형 복원도 함께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산정호수는 1925년 축조된 인공저수지이며 한국전쟁 이전에는 3·8선 북쪽에 해당돼 북한 땅이었다. 산정호숫가에서 태어나 현재 식당을 운영 중인 이성범(57)씨는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가였던 김일성 장군이 군사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며칠 묵어갔고, 한국전쟁 직전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다녀간 후 ‘김일성 별장’으로 더 잘 알려졌으나 1978년 국민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산정호수’로 불리게 됐다.”고 말했다. 학계에선 아직 두 김일성이 같은 사람인지에 대한 의견이 엇갈린다. 박진식 시 문화관광과장은 “김일성 별장지는 과거 산정호수를 관리하는 한국농어촌공사 직원들이 숙소로 사용해 오던 곳을 여러 차례 수선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됐다.”면서 “역사적 고증을 거쳐 최대한 원형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상봉기자 hsb@seoul.co.kr
  • “언젠가는 민족의식 담은 음반 낼래요”

    “언젠가는 민족의식 담은 음반 낼래요”

    길고 가냘픈 손가락은 그녀가 피아니스트임을 한눈에 알게 했다. 차수진(30)씨. 그는 각종 뮤지컬과 음반 녹음 때 키보드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를 설명하기 어렵다. 눈빛이 형형한 차씨는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독립운동가 차이석의 손녀입니다.” 그녀를 2일 서울 신도림의 한 쇼핑몰 휴게소에서 만났다. ●임정 수립에 참여한 차이석 선생이 할아버지 동암(東岩) 차이석(1881~1945)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다. 신민회에서 활동하다 1919년 중국으로 망명, 충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과 비서장 등 중책을 역임했다. 차씨는 어린 시절 오빠와 함께 매일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의 연대기를 듣고, 또 외웠다. “1919년 3·1운동 참가, 1928년 한국독립당 조직….” 아버지가 남매에게 시켰던 유일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공부였다. ‘친일파 집안은 대를 이어 호의호식하지만 독립운동가 집안은 삼대가 고생한다.’는 민초들의 인식은 곧 차씨의 현실이었다. 차씨의 할머니는 당시 두 살배기였던 아버지 차영조(68)씨를 품에 안고 고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모자를 기다리는 건 찢어지는 가난이었다. 세상은 여전히 친일파의 것이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게 다예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아버지의 가난은 남매에게로 이어졌다. 집안 형편은 좀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피아니스트 꿈꾸며 매일밤 텅빈 교회에서 연주 차씨에게는 피아니스트라는 꿈이 있었다. 차씨는 “어머니가 ‘밥은 굶고 옷은 못 입어도 피아노는 계속 하라’며 뒷바라지를 하셨다.”고 돌이켰다. 값비싼 레슨 대신 교회 반주자에게서 피아노를 익혔다. 매일 밤 텅빈 교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다 새벽 2시 무렵에야 귀가하곤 했다.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손녀가 음대에 갈 수 있는 길은 피나는 노력밖에 없었다. 결국 숭실대 음대에 입학, 2006년에 졸업한 뒤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당당하게 살아가는 저같은 젊은 후예도 있어요” 차씨는 음악인으로서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미국 유학 때 만난 음악인 권영경(31)씨와 의기투합해 레게 음반을 제작하고 있는 것. 차씨는 ‘M.TySON’(엠타이슨)이라는 예명으로 준비 중인 권씨의 데뷔앨범 제작을 맡았다. 차씨의 설득으로 앨범 수익금의 일부를 위안부 문제 해결이나 독도 지키기 등의 활동에 기부하기로 했다. 차씨는 올여름 발매를 목표로 자신의 피아노 연주 음반도 준비 중이다. 언젠가는 민족의식을 주제로 음반을 발표하는 꿈도 꾸고 있다. “광복절이나 3·1절에는 늘 어렵게 사는 독립운동가 자손들이 조명되지요. 하지만 당당하게 살아가는 저 같은 젊은 후예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차씨는 두 주먹을 꼭 쥐어 보였다. 김소라기자 sora@seoul.co.kr 사진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서울광장] 여야 ‘텃밭’에 여성을 공천하라/최광숙 논설위원

    [서울광장] 여야 ‘텃밭’에 여성을 공천하라/최광숙 논설위원

    최근 새누리당 권영세 사무총장이 4월 총선 공천에서 “대구는 왕창 바뀔 예정”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변신을 모색하는 새누리당이 자신의 텃밭 대구에서 현역의원들을 대폭 물갈이한다는 얘기니 방향은 제대로 잡은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새누리당이 진정한 공천 바람을 일으키려면 대구에서 여성들을 ‘왕창’ 전략 공천하라고 주문하고 싶다. 지금 여야 당수가 모두 여성이다.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여성들의 섬세하고 따뜻한 리더십이 먹히고 있다. 독일·덴마크·호주·태국 등은 여성 총리가 국정을 책임지고 있고, 브라질·아르헨티나는 대통령이 여성이다. 핀란드는 총리·대통령이 모두 여성이다. 이런 흐름에 발맞추는 듯 우리 정치권도 총선을 앞두고 여성들의 공천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겉시늉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공천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 그동안 정치권은 여성 몫으로 지역구보다 비례대표에 더 치중했다. 진정으로 여성들을 미래의 정치 지도자로 키우려면 지역구에서 뛰도록 해야 한다. 현장에서 시민들과 호흡을 같이하고 그들의 삶의 변화를 주도하는 역량을 키우도록 해야 한다. 현실적으론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재력·인맥 등에서 열세인 만큼, 각 당의 텃밭 지역구에서 일정 의석을 여성 몫으로 할당하는 게 최선의 방책이다. 왜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각 당의 텃밭에는 굳이 남성들만 공천을 하란 법이 있는가. 새누리당이 보수의 아성인 대구에서 능력을 갖춘 참신한 여성들을 대거 공천한다면, 국민들에게는 변화와 쇄신의 강력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그것도 계파를 따지지 않고 폭넓게 인재를 중용한다면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나아가 경북·부산·경남 등 영남으로 확대해 여성을 전략 공천하면 더욱 좋겠다. 혹여 보수적인 정서를 내세워 부담을 느낄 수도 있지만 기우에 불과하다. 독립운동가와 교육자를 지낸 임영신(1899~1977)은 이미 63년 전 유림의 고장 경북 안동에서 당선된 바 있다. 그것도 당대의 거물 정치인 장택상과 초유의 성 대결을 벌여서 승리를 거뒀다. 민주통합당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지지기반인 호남에 여성을 대거 공천해야 한다. 제헌국회부터 18대까지 지역에서 선거를 통해 당선된 여성은 모두 29명이다. 이 가운데 여야 텃밭인 영·호남에서 당선된 경우는 영남 6명(임영신·박순천·현경자·박근혜·임진출·김희정), 호남 3명(김윤덕·김경천·조배숙) 등 9명에 불과하다. 현 18대 국회에서는 박근혜(대구 달성·새누리당)·조배숙(전북 익산을·민주당) 의원 등 2명뿐이다. 이는 여성들이 정치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국회는 지역구 의원, 그중에서도 다선(多選) 의원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남성들은 지역구에서 차곡차곡 선수(選數)를 쌓아 국회의장까지 오른다. 하지만 여성들은 대부분 초·재선의원에 머물다가 정치권에서 퇴장한다. 현 여성의원 중 최다선(4선)은 박근혜·김영선·이미경 의원 등 3명이다. 이 중 박 의원만이 지역구에서 4차례 당선됐다. 나머지 2명은 비례대표 2차례를 빼면 지역에서 당선된 것은 두번이다. 박 의원이 대구에서 내리 4차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정치력도 뛰어났지만 여당의 안방인 대구에서 전략공천을 받은 첫출발 이후 정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잡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민주당의 한명숙 대표는 김대중·노무현 등 전직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국회의원 두번, 장관 두번, 총리를 거쳐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이처럼 여성들은 우리 같은 척박한 정치풍토에서는 전략 공천과 공직 임명 등의 배려가 필요하다. 남성들은 역차별이라고 발끈할지 몰라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지적처럼 여성인력 활용이 여성뿐 아니라 사회 전체, 국가 경쟁력 강화에 견인차 역할을 하는 것을 감안하면 더 이상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bori@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