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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전용사·파독 광부·봉제 여공… “헌신한 이들이 대한민국”

    참전용사·파독 광부·봉제 여공… “헌신한 이들이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6·25전쟁 호국영령과 서해를 지킨 용사, 5·18 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의 민주 열사, 한 푼의 외화가 아쉬웠던 시절 낯선 땅에서 젊음을 바친 파독 광부와 간호사, 허리조차 펼 수 없는 곳에서 16시간 노동한 청계천 봉제공장의 여공들.이념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받아낸 영령들과 굴곡진 시대를 헤쳐 온 이름 없는 이들이 6일 국립현충원 현충일 기념식에서 차례로 호명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추념사를 통해 국가가 보듬지 못한 파독 광부, 파독 간호사, 어린 ‘시다’(봉제보조)까지 ‘애국’의 반열에 올렸고, 순국열사와 호국영령의 제단 옆에 민주열사를 나란히 모셨다. 그러면서 “애국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그 모두가 애국자였다”며 애국의 의미를 다시 새겼다. 문 대통령은 “애국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모든 것”이라면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한 분, 한 분이 바로 대한민국”이라고 했다. 식민지, 분단, 전쟁, 가난, 독재로 이어지는 시련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었던 정신적 원동력이 애국이었듯,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가기 위한 원동력 역시 애국임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더 나아가 애국의 의미에 통합의 메시지를 더했다. “애국에는 보수와 진보가 없다”며 애국을 보수진영의 전유물로 여겼던 과거와 선을 그었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공헌한 유공자들에게 이념의 정치, 편 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고 국민을 통합하는 데 앞장서 달라고 호소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상징물처럼 쓰인 태극기의 의미도 되찾아 왔다. ‘독립운동가의 품속에 있던 태극기’,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의 신념이 새겨진 태극기’, ‘파독광부·간호사를 환송하던 태극기’, ‘서해를 지킨 용사들과 그 유가족의 마음에 새겨진 태극기’라는 말로 왜곡된 태극기의 본래 이미지를 바로잡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분단과 전쟁, 사회 갈등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낡은 체제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도 천명했다. 국가유공자와 보훈대상자, 그 가족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마땅한 예우와 지원도 약속했다. 보훈 정책을 국민통합의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국가보훈처를 장관급 기구로 격상키로 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이를 통해 “애국이 보상받고, 정의가 보상받고, 원칙이 보상받고, 정직이 보상받는 나라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증오와 대립, 세대 갈등을 끝내 사회 통합을 이루고, 국민이 애국심을 바칠 수 있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메시지가 원고지 17장 분량의 추념사에 담겼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文대통령 “이념 정치·편가르기 청산”

    文대통령 “이념 정치·편가르기 청산”

    국가 지킨 후손에 예우·보답 약속…“국가보훈처, 장관급 격상하겠다” “애국의 역사를 통치에 이용한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기보다 전쟁의 경험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념의 정치, 편 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습니다.”문재인 대통령은 6일 서울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2회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 “저와 정부는 애국의 역사를 존중하고 지키겠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공헌하신 분들께서 그 애국으로 대한민국을 통합하는 데 앞장서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안보’를 정권 안위에 이용했던 보수정권과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한편 통합의 메시지를 강조한 셈이다. 문 대통령은 추념사에서 “애국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모든 것이며 국가를 위해 헌신한 한 분 한 분이 바로 대한민국”이라면서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지지도 않는 그 자체로 온전히 대한민국”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새로운 대한민국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면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좌우가 없었고 국가를 수호하는 데 노소가 없었듯이 모든 애국의 역사 한복판에는 국민이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오늘 이곳 현충원에서 ‘애국’을 생각한다”며 독립운동가와 6·25전쟁 당시 국군과 학도병 등 호국용사들, 베트남 참전용사의 희생을 기렸다. 동시에 “애국의 대가가 말뿐인 명예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제 국가가 제대로 응답할 차례”라며 이들과 후손에 대한 예우와 보답을 약속했다. 이어 파독 광부 및 간호사는 물론, 산업화시대 청계천변 작업장에서 재봉틀을 돌렸던 여공들을 언급하며 “그분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고, 그것이 애국”이라고 헌사를 보냈다. 문 대통령은 “보훈이야말로 국민통합을 이루고 강한 국가로 가는 길임을 분명히 선언한다”면서 “국회가 동의해주신다면 국가보훈처를 장관급 기구로 격상해 위상부터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가를 위해 헌신하면 보상받고 반역자는 심판받는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면서 “애국이, 정의가, 원칙이, 정직이 보상받는 나라를 만들어 나가자”고 호소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제62회 현충일 추념식…문 대통령 “이념 정치, 편 가르기 정치 청산”

    제62회 현충일 추념식…문 대통령 “이념 정치, 편 가르기 정치 청산”

    6일 제62회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기보다 전쟁의 경험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념의 정치, 편 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 서울현충원에서 추념사를 통해 “애국의 역사를 통치에 이용한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문 대통령은 “애국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모든 것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한 한분 한분이 바로 대한민국”이라며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도 없고 나뉘어지지도 않는 그 자체로 온전한 대한민국”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저는 오늘 이곳 현충원에서 애국을 생각한다. 우리 국민의 애국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라며 “식민지에서 분단과 전쟁으로, 가난과 독재와의 대결로 시련이 멈추지 않은 역사였지만 애국이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해냈다. 지난 100년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뒤집힌 현실은 여전하다. 그 부끄럽고 죄송스런 현실을 그대로 두고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없다”며 “애국의 대가가 말뿐인 명예로 끝나서는 안 되고 독립운동가 한 분이라도 더, 그분의 자손들 한 분이라도 더, 독립운동의 한 장면이라도 더 찾아내겠다. 그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는 동안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찾고자 피 흘렸던 국군이 있었다. 한 구의 유골이라도 반드시 찾아내 이곳에 모셔 명예를 지켜드리겠다”며 “베트남 참전용사의 병과 휴유장애도 국가가 함께 책임져야 할 부채로, 이제 국가가 제대로 응답할 차례이다. 합당하게 보답하고 예우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저는 오늘 조국을 위한 헌신과 희생은 독립과 호국의 전장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하고자 한다”며 “뜨거운 막장에서 탄가루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석탄을 캔 파독광부, 병원의 온갖 궂은일까지 견뎌낸 파독간호사, 그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조국경제에 디딤돌을 놓았다. 그것이 애국”이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은 “청계천변 다락방 작업장, 천장이 낮아 허리조차 펼 수 없었던 그곳에서 젊음을 바친 여성노동자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드린다. 재봉틀을 돌리며 눈이 침침해지고 실밥을 뜯으며 손끝이 갈라진 그분들”이라며 “애국자 대신 여공이라 불렸던 그분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 그것이 애국”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노인이 되어 가난했던 조국을 온몸으로 감당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그분들께 정부를 대표해서 마음의 훈장을 달아드린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독립운동가의 품속에 있던 태극기가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던 수많은 능선 위에서 펄럭였고, 파독 광부·간호사를 환송하던 태극기가 5·18과 6월항쟁의 민주주의 현장을 지켰다. 서해를 지킨 용사들과 그 유가족의 마음에 새겨졌다”며 “애국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그 모두가 애국자였다”고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새로운 대한민국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제도상 화해를 넘어 마음으로 화해해야 한다”며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좌우가 없었고 국가를 수호하는 데 노소가 없었듯이 모든 애국의 역사 한복판에는 국민이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저와 정부는 애국의 역사를 존중하고 지키겠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공헌하신 분들께서 바로 그 애국으로 대한민국을 통합하는 데 앞장서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며 “여러분들이 이 나라의 이념 갈등을 끝내주실 분들이고, 이 나라의 증오와 대립, 세대갈등을 끝내주실 분들도 애국으로 한평생 살아오신 바로 여러분들”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보훈이야말로 국민통합을 이루고 강한 국가로 가는 길임을 분명히 선언한다”며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회가 동의해주신다면 국가보훈처를 장관급 기구로 격상해 위상부터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가를 위해 헌신하면 보상받고 반역자는 심판받는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며 “애국이, 정의가, 원칙이, 정직이 보상받는 나라를 만들어 나가자”고 말했다. 다음은 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예순 두 번째 현충일을 맞아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거룩한 영전 앞에 깊이 고개 숙입니다. 가족을 조국의 품에 바치신 유가족 여러분께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국가유공자 여러분께 충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저는 오늘 이곳 현충원에서 ‘애국’을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의 애국심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입니다. 식민지에서 분단과 전쟁으로, 가난과 독재와의 대결로, 시련이 멈추지 않은 역사였습니다. 애국이 그 모든 시련을 극복해냈습니다. 지나온 100년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만들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지킨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신념이었습니다. 항일의병부터 광복군까지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의 신념이 태극기에 새겨졌습니다. 살이 찢기고 손발톱이 뽑혀나가면서도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조국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독립운동가를 키우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나라 잃은 설움을 굳건하게 살아냈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국가의 예우를 받기까지는 해방이 되고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뒤집힌 현실은 여전합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겪고 있는 가난의 서러움, 교육받지 못한 억울함, 그 부끄럽고 죄송스런 현실을 그대로 두고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애국의 대가가 말뿐인 명예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독립운동가 한 분이라도 더, 그 분의 자손들 한 분이라도 더, 독립운동의 한 장면이라도 더, 찾아내겠습니다. 기억하고 기리겠습니다. 그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는 동안, 목숨을 바친 조국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전선을 따라 늘어선 수백 개의 고지 마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찾고자 피 흘렸던 우리 국군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짧았던 젊음이 조국의 땅을 넓혔습니다. 전선을 지킨 것은 군인만이 아니었습니다. 태극기 위에 위국헌신을 맹세하고 후방의 청년과 학생들도 나섰습니다. 주민들은 지게를 지고 탄약과 식량을 날랐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철원 ‘백마고지’, 양구 ‘단장의 능선’과 ‘피의 능선’,이름 없던 산들이 용사들의 무덤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비극이 서린, 슬픈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전우를 그곳에 남기고 평생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오신 호국용사들에게 눈물의 고지가 되었습니다. 아직도 백골로 묻힌 용사들의 유해, 단 한구의 유골이라도 반드시 찾아내 이곳에 모시겠습니다. 전장의 부상을 장애로 안고, 전우의 희생을 씻기지 않는 상처로 안은 채 살아가는 용사들, 그 분들이 바로 조국의 아버지들입니다. 반드시 명예를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념에 이용되지 않고 이 땅의 모든 아들딸들에게 존경받도록 만들겠습니다. 그것이 응당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베트남 참전용사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조국경제가 살아났습니다. 대한민국의 부름에 주저 없이 응답했습니다. 폭염과 정글 속에서 역경을 딛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이국의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생긴 병과 후유장애는 국가가 함께 책임져야 할 부채입니다. 이제 국가가 제대로 응답할 차례입니다. 합당하게 보답하고 예우하겠습니다. 그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조국을 위한 헌신과 희생은 독립과 호국의 전장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여러분과 함께 기억하고자 합니다. 1달러의 외화가 아쉬웠던 시절, 이역만리 낯선 땅 독일에서 조국 근대화의 역군이 되어준 분들이 계셨습니다. 뜨거운 막장에서 탄가루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석탄을 캔 파독광부, 병원의 온갖 궂은일까지 견뎌낸 파독간호사, 그 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조국경제에 디딤돌을 놓았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청계천변 다락방 작업장, 천장이 낮아 허리조차 펼 수 없었던 그곳에서 젊음을 바친 여성노동자들의 희생과 헌신에도 감사드립니다. 재봉틀을 돌리며 눈이 침침해지고, 실밥을 뜯으며 손끝이 갈라진 그 분들입니다. 애국자 대신 여공이라 불렸던 그 분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이제는 노인이 되어 가난했던 조국을 온몸으로 감당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그 분들께 저는 오늘, 정부를 대표해서 마음의 훈장을 달아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애국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모든 것입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한분 한분이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지지도 않는그 자체로 온전히 대한민국입니다. 독립운동가의 품속에 있던 태극기가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던 수많은 능선위에서 펄럭였습니다. 파독광부·간호사를 환송하던 태극기가 5.18과 6월 항쟁의 민주주의 현장을 지켰습니다. 서해 바다를 지킨 용사들과 그 유가족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애국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그 모두가 애국자였습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은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제도상의 화해를 넘어서, 마음으로 화해해야 합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데 좌우가 없었고 국가를 수호하는데 노소가 없었듯이, 모든 애국의 역사 한복판에는 국민이 있었을 뿐입니다. 저와 정부는 애국의 역사를 존중하고 지키겠습니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공헌하신 분들께서, 바로 그 애국으로, 대한민국을 통합하는데 앞장서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이 나라의 이념갈등을 끝내주실 분들입니다. 이 나라의 증오와 대립, 세대갈등을 끝내주실 분들도 애국으로 한평생 살아오신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무엇보다, 애국의 역사를 통치에 이용한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기보다 전쟁의 경험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념의 정치, 편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국가유공자와 보훈가족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보훈이야말로 국민통합을 이루고 강한 국가로 가는 길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보훈정책은 꾸준히 발전해왔습니다. 군사원호에서 예우와 보상으로,호국유공자에서 독립, 민주유공자, 공무수행 유공자까지그 영역도 확대되어 왔습니다. 국가유공자로 모시지는 못했지만 그 뜻을 함께 기려야할 군경과 공무원, 의인들을 예우하고 지원하는 제도도 마련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분들의 공적에는 많이 못 미칩니다. 국민의 상식과 눈높이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가겠습니다. 국회가 동의 해준다면, 국가보훈처의 위상부터 강화하겠습니다. 장관급 기구로 격상하겠습니다. 국가유공자와 보훈대상자, 그 가족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면 보상받고 반역자는 심판받는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국민이 애국심을 바칠 수 있는, 나라다운 나라입니다. 애국이 보상받고, 정의가 보상받고, 원칙이 보상받고, 정직이 보상받는 나라를 만들어 나갑시다. 개인과 기업의 성공이 동시에 애국의 길이 되는 정정당당한 나라를 만들어 나갑시다. 다시 한 번 순국선열, 호국영령, 민주열사의 애국헌신을 추모하며,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6월 6일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시카고타자기’ 유아인, 까칠→낭만→달콤→애틋 “깊은 여운”

    ‘시카고타자기’ 유아인, 까칠→낭만→달콤→애틋 “깊은 여운”

    ‘시카고 타자기’의 처음과 끝에는 배우 유아인이 있었다. 지난 3일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극본 진수완/연출 김철규)가 16회 방송으로 종영됐다. 앤티크 로맨스라는 이색적 장르, 전생과 현생을 넘나드는 스토리, 매력적 캐릭터가 조화를 이룬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 그 처음과 끝에는 배우 유아인(서휘영/한세주 분)이 있었다. ‘시카고 타자기’ 최종회에서는 전생의 인연을 뛰어넘어 현생에서 해피엔딩을 맺은 한세주와 전설(임수정 분)의 모습이 그려졌다. 전생의 모든 기억을 떠올린 한세주는 소멸을 앞둔 유진오를 자신의 소설 속에 봉인하고자 했다. 유진오가 환생할 수 있을 때까지, 그의 소멸을 막으려 한 것. 유진오는 한세주의 바람대로, 한세주의 소설 속에서 신율의 모습으로 서휘영-전설(임수정 분)과 함께 했다. 현생의 한세주-전설 역시 소중한 벗 신율과 유진오를 떠올리며 해피엔딩을 맞이했다. 한세주로서, 서휘영으로서 시청자와 마주한 배우 유아인 역시, 깊은 여운을 남겼다. 때론 낭만적이고, 때론 아팠던 ‘시카고 타자기’ 속 유아인을 기억해보자. 유아인이 시청자에게 남긴 기억 첫 번째는 ‘낭만’이다. 유아인은 극중 2017년 스타작가 한세주, 1930년 경성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서휘영 두 인물을 연기했다. 그 중 서휘영은 조국을 잃은 슬픔에 고뇌했던 청년의 모습을, 해방된 조선을 꿈꾸는 청년의 감성을 오롯이 보여줬다. 헝클어진 머리, 안경 너머 나른한 눈빛, 타자기를 두드리는 손가락, 여유로운 듯 비밀 품은 표정. 겉모습은 물론 말투, 표정, 눈빛 등 유아인의 모든 것이 아프지만 낭만적이었던 1930년과 조화를 이뤘다. 유아인이 시청자에게 남긴 기억 두 번째는 ‘아픔’이다. 2017년 한세주는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스타작가. 그러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었고,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던 스승에게 처절한 배신감을 맛봤다. 갑자기 단 한 줄도 쓸 수 없는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유아인은 자신감, 예민함 등 폭넓은 표현으로 예술가 한세주의 아픔을 그려냈다. 1930년 서휘영에게도 아픔은 있었다. 조국을 잃은 슬픔, 신분을 숨긴 채 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지, 그 와중에 죽어나간 동지들. 모든 것이 아픔이었다. 그러나 서휘영에게 가장 큰 아픔은 사랑하는 여인 류수현에게 마음을 드러내지도, 그녀를 지켜주지도 못한 것이다. 유아인은 특유의 섬세한 감정으로, 상황에 따른 서휘영의 아픔을 결을 달리해 표현했다. 유아인이 시청자에게 남긴 기억 세 번째는 ‘로맨스’이다. 유아인은 ‘시카고 타자기’에서 전생과 현생, 두 번의 사랑을 보여줬다. 1930년 서휘영의 사랑은 슬프고 아팠다. 반면 2017년 한세주의 사랑은 애틋했고, 한편으로는 귀여웠다. 그간 선이 굵은 캐릭터, 연기로 사랑을 받았던 유아인이 이토록 사랑스러운 로맨스 연기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방영 내내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 귀여운 질투를 하거나 허둥지둥 당황하는 연기까지 유아인만의 색깔로 살려내며, 시청자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유아인의 다음 로맨스 연기가 궁금하다’는 기대감을 이끌어 냈다. 드라마의 처음과 끝에는 까칠한 듯 예민한 모습, 여유 속에 낭만과 아픔을 품은 청춘의 모습, 달콤하고 애틋한 사랑의 감정, 가슴이 아릿한 남자들의 우정까지 모두 담아낸 배우 유아인이 있다. ‘시카고 타자기’ 속 배우 유아인이 남긴 기억은, 한동안 깊은 여운으로 시청자의 마음을 두드릴 것으로 보인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경신참변 취재중 암살…‘6월 독립운동가’ 장덕준

    경신참변 취재중 암살…‘6월 독립운동가’ 장덕준

    일제강점기 언론인으로서 일본을 비판하다 순직한 추송 장덕준(1892∼19 20) 선생이 ‘6월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됐다고 국가보훈처가 31일 밝혔다. 황해도 재령 출신인 장 선생은 1914년 평양 일일신문사에 입사해 언론인이 됐으며 동아일보 창간에도 참여해 창간 다음날부터 ‘추송’이라는 필명으로 일본을 비판했다. 1920년 만주에서 일본군이 조선인 수천명을 학살한 ‘경신참변’이 발생하자 선생은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 일본군의 만행을 취재하던 중 일본군에 암살당해 한국 언론사상 첫 순직 기자가 됐다. ●‘영웅’ 최용남 ‘인물’ 장철부 보훈처는 ‘6월의 6·25 호국영웅’에는 6·25 전쟁 첫날 부산 앞바다로 침투하던 북한군 함정을 격침한 고 최용남(1923∼1998) 해군 중령을 선정했다. ‘6월의 호국인물’에는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독립투쟁을 하고 6·25 전쟁 때 북한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철부(1921∼1950) 육군 중령이 선정됐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탐방 플러스] ‘敬’으로 빛나는 퇴계 종손… ‘살아 있는 교과서’

    [탐방 플러스] ‘敬’으로 빛나는 퇴계 종손… ‘살아 있는 교과서’

    21세기 퇴계 이황의 철학사상과 실천적 삶을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86세 이근필 옹이다. 이 옹은 퇴계 이황의 16대 종손이다. 그런데 이 옹은 노환으로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한다.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청년이 노년이 된 때문이다. ‘만물은 유전하고 변화한다’는 명제를 실감케 한다.하지만 늘 한결같은 분이 계시다. 흔들림의 변화도 없다. 퇴계 종택의 이 옹이다. 이 옹의 퇴계 이황 할아버지가 남긴 유지를 정성과 성심을 다해 봉양하는 정행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무릎 꿇는 퇴계 종손’, 이미 오래전부터 세간에 알려졌다.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도 ‘무릎 꿇는 퇴계 종손’은 변함이 없다. 남녀노소를 차별하지 않는다. 신분의 높고 낮음도 따지지 않는다. 퇴계 종택을 찾는 사람을 맞이할 때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무릎을 꿇는다’. 평생을 지극정성으로 변함없는 한길을 걸었다. 종손으로 산다는 것. 종손은 한 해 서른 번이 넘을 정도의 제사와 수많은 대소사를 치러야 한다. 몸도 마음도 편하게 쉬기 어렵다. 하지만 이 옹은 상상 못 할 피로와 가볍지 않은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옹은 예(禮)를 다해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한다는 경(敬)의 마음으로 인간존중·인간사랑을 실천했다. 그렇다 보니 그 예는 무릎 꿇음이 됐고, 경은 겸손이 되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감동을 일으켰다.86세 퇴계종손의 무릎 꿇는 가르침 퇴계 이황은 성리학적 삶의 표상이다. 그분은 경(敬)으로써 명덕(明德)한 성리철학을 삶에 녹여내는 지행합일의 실천적 삶을 사셨다. 그래서인지 퇴계 이황의 유전자를 받은 16대 종손 이 옹 역시 ‘무릎 꿇는 삶’으로 ‘경’을 실천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병일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은 퇴계 종택을 “퇴계 선생의 아주 검소한 서당”이라고 묘사했다. 퇴계 종택이 500년 전 이황 선생이 사셨던 오래된 옛집이 아니란 뜻이다. 퇴계 종택은 이황 당시에도 그랬듯이 지금에도 여전히 ‘배움의 학교’란 설명이다. ‘서당’은 그래서 훈장만 바뀌었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서당이다. 예전에는 퇴계 이황이었고, 21세기 오늘에는 16대 종손 이 옹이다. 사람은 오고 갔지만 정신과 삶은 그대로이다. ‘무릎 꿇고 공손하게 말하는 86세 종손의 삶’은 그래서 현장이고, 실제상황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책, 교과서’이기도 하다. 퇴계 이황이 빛나는 이유다.퇴계 종택은 살아 있는 책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한 퇴계 종택은 퇴계의 13대 후손인 하정공 이충호가 1926년~1929년에 새로 지었다. 원래의 가옥은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모두 타 없어졌다. 1982년 12월 1일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이 종택은 야산을 등지고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동남방으로 앉았다. 이 종택은 5칸 솟을대문과 ‘ㅁ’자형 정침이 있다. 정침이란 주택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집과 방을 말한다. 오른쪽에 5칸 솟을 대문과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 있다. 그 뒤에 솟을삼문과 사당이 있다. 본채인 ‘ㅁ’자형 정침은 사랑마당을 건너 사랑채와 마주한다. 그 뒤가 안채이다. 이 종택은 근대에 지어졌음에도 사대부가의 공간영역을 구비했다. 대종가로서의 품격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옛 살림살이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퇴계 종택 앞에 논이 있어 씨 뿌리고 거두는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보여 준다.도산서원, 퇴계의 성리학적 자연관 담아 종택에서 10여분 거리에 도산서원이 있다.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이 건립했다. 현재의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과 퇴계 사후에 스승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으로 나눌 수 있다. 앞쪽이 도산서당이고 그 뒤편이 도산서원이다. 도산서당은 3칸밖에 안되는 작은 규모의 남향 건물이다. 서쪽 1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이고, 중앙의 온돌방 1칸은 퇴계가 거처하던 완락재이며, 동쪽의 대청 1칸은 마루로 된 암서헌이다. 퇴계는 이곳에서 자연과 합일하는 퇴계성리학적 자연관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전한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을 마치자 그의 제자들과 온 고을 선비들이 1574년 봄 “도산은 선생이 도를 강론하시던 곳이니 서원이 없을 수 없다”해서 서당 뒤의 두어 걸음 나가 조성됐다고 한다. 그 이듬해인 1575년 8월 낙성과 함께 선조로부터 ‘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576년 2월에 사당을 준공해 퇴계 선생의 신위를 모셨다. 권기창 안동대 교수는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의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일한 현장”이라며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평가했다. 선비문화수련원, ‘오늘의 선비’ 양성 목표 도산서원 부설기관으로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은 퇴계 종택 왼쪽 위에 자리하고 있다. 2001년 11월 퇴계 선생 탄신 500주년을 맞아 설립됐다. 개개인의 바른 인성과 선진 도덕사회 구현, 지와 덕을 겸비한 인재로서 오늘의 선비육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수련원은 150~200명 숙박이 가능하다. 제1원사와 제2원사로 구성돼 있다. 제1원사와 제2원사는 강의실, 실습실, 토의실,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다. 구내식당은 15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다. 수련원은 “선비정신은 21세기 문화의 시대, 우리의 자랑스런 국민정신이다”를 모토로 ▲나보다 남을 위하는 겸손과 배려의 박기후인의 자세 ▲자기인격을 닦고 나서 사회에 기여하는 수기치인의 삶 ▲공동체가 어려울 때 자신을 희생하는 견위수명의 실행을 실천덕목으로 삼고 있다. 권 교수는 “퇴계 이황 선생은 우리나라 최고의 성리학자로 학문연구와 유교문화의 이념을 몸소 실천하신 세계적인 인물”이라며 “각박하게 변하는 지금의 이 시점에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가장 중요한 노력 중의 하나가 퇴계 선생의 삶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권 교수는 “안동은 한국인본정신의 본향이고, 전통문화의 중심지”라면서도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면서도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가장 혁신적인 곳”이라고 소개했다. 우리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바로 안동에 있다는 설명이다. 권용진 객원기자 spangle007@seoul.co.kr퇴계 이황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년)은 한국정신문화 원류의 한 축인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이다. 그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나 조선 지성사에서 사림의 성장기를 살아갔다. 당시 연속된 사화는 사림의 학문에 치열성을 더함으로써 사림의 세를 전국적으로 확장시켰다. 특히 퇴계의 학문은 한국역사를 통해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했다. 퇴계의 학풍을 따른 학자는 당대의 류성룡·김성일 등을 위시한 260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일본유학의 기몬학파와 구마모토학파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개화기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았다.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도의철학의 건설자이며 실천자로 평가받는 이유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하여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제5공화국 때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되었다.
  • 김은숙 작가, 차기작은 ‘미스터 션샤인’..어떤 내용?

    김은숙 작가, 차기작은 ‘미스터 션샤인’..어떤 내용?

    김은숙 작가가 차기작을 집필 중인 것으로 알려져 화제다. 29일 일간스포츠의 보도에 따르면, 김은숙 작가는 1900녀부터 1905년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의병(義兵) 이야기 ‘미스터 션샤인’(가제)를 집필 중이다. 김은숙 작가는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 소재”라며 “독립운동가가 아닌 의병들의 이야기다.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이야기”라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영화 등은 많이 다뤄졌던 만큼 세트도 많지만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하는 세트장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김은숙은 “세트를 짓기 위해서는 대본을 빨리 써야 한다. 현재 대본 작업 중”이라 말한 것으로 알려져 신작에 대한 기대감을 더했다. 지난해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이어 tvN 드라마 ‘도깨비’까지 연속으로 흥행시킨 김은숙 작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드라마를 선보일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진제공=CJ E&M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서울시의회 김경자의원 ‘소파 방정환 공훈선양학술회’ 참석

    서울시의회 김경자의원 ‘소파 방정환 공훈선양학술회’ 참석

    서울시의회 김경자 의원(국민의당, 강서2)은 5월 24일 광복회 주관으로 종로구에 소재한 천도교 수운회관 대강당에서 개최된 「2017 5월의 독립운동가 소파 방정환 선생 공훈선양학술강연회」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김 의원은 축사에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알리고 그 정신을 따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뜻 깊은 행사”라고 말하며, “17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소파 방정환 선생의 ‘의’를 기릴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 라고 감회를 전했다. 또한 김 의원은 “매번 훌륭한 독립운동가를 선정, 그에 대한 학술강연회를 준비하는 광복회 관계자 분들과 이 행사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신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색동회, 한국아동청소년문학학회, 한국아동문학학회, 어린이문화연대 관계자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라고 말한 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함께, 아픔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며 축사를 마쳤다. 한편, 김 의원은 서울시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소속되어 다양한 조례를 발의하고,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의 향유 및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 등 활발한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함혜리 선임기자의 예술산책] 일본 문화 중심지서 만난 1700점 한국 문화재…누구나 찾는 ‘공동의 광장’

    [함혜리 선임기자의 예술산책] 일본 문화 중심지서 만난 1700점 한국 문화재…누구나 찾는 ‘공동의 광장’

    언젠가 일본 교토에 가게 되면 반드시 방문하겠다고 마음먹은 장소가 있다. 고려미술관(高麗美術館)이다. 일본인들이 자부심을 갖는 ‘천년의 고도’ 교토에 우리나라 유물만을 모아 전시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놀라웠다. 그 미술관을 세운 인물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에 우리 문화재로 미술관을 세웠는지도 궁금했다. 5월 초 교토 여행길에 시간을 내어 이 미술관을 찾았다. 교토역 앞에서 시영버스 9번을 타고 교토 시내의 북동쪽 가모가와 중학교 앞에서 내리니 바로 ‘고려미술관’ 방향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가뜩이나 조용한 교토의 주택가, 푸른 하늘 맑은 공기 속에 새소리가 듣기 좋았다. 골목으로 접어들자 낯익은 우리의 돌담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우락부락하지만 맘결은 한없이 부드러울 것 같은 석인(石人)상이 반겨주듯 철문 양쪽에 지키고 서 있는 곳은 의심할 필요도 없는 고려미술관이다.일본 땅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미술관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이나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뮤지엄 등에 설치된 한국유물 전시실을 찾았을 때와는 감동의 질이 완전히 달랐다. 고려미술관은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 혹은 기업의 도움 없이 정조문(1918~1989)이라는 재일동포 실업가 한 사람의 집념과 열정으로 설립된 곳이기 때문이다. 해외의 유일한 한국역사유물 전문 미술관인 고려미술관은 소장품 전시뿐 아니라 연구실을 두고 소장품의 조사연구와 강좌, 일본 내 다른 미술관·박물관과 전시교류 등을 하면서 조선고고학 연구, 민속학도서 자료수집 및 연구자료 출간도 하고 있다. 정부 기관이 하지 못하는 일을 어려운 여건 속에서 해 나가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우러났다.●‘재일동포 실업가’ 정조문의 집념과 열정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왼쪽의 정원으로 들어가자 연둣빛 이끼가 가득 덮인 오층 석탑과 다양한 석인상 등 석물들이 5월의 햇살 아래서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고베 부농의 밭에 흩어져 방치되던 것을 발견한 정조문이 15년 동안 찾아다니고 설득해 2000만엔을 주고 손에 넣은 것이라고 한다. 수백년의 세월을 품고 일본 땅 위에 서 있는 석물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관계를 생각하면 우리 문화재를 기반으로 하는 이 미술관이 1000여년에 걸쳐 일본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 교토에 자리잡았다는 것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고려미술관을 설립한 정조문은 경북 예천군 우망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정건모)가 구한말 과거 급제 후 정삼품대부의 벼슬까지 한 관리여서 집안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으나 37세에 낙마 사고로 별세한 뒤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더욱이 정조문이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정진국)가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바람에 가산은 거의 바닥이 났다. 6년 만인 1924년 상해에서 돌아온 정진국은 일본 경찰의 감시로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와 아내, 큰아들 귀문(당시 8세)과 둘째 조문(당시 6세)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교토에 터를 잡고 베 짜는 일을 시작했지만 경찰의 감시 속에 가난을 극복하지 못했다. 학교에 갈 엄두를 낼 수 없었던 정조문은 소학교 4학년에 겨우 편입해 3년을 공부했다. 그가 유일하게 받은 학교교육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안겼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배달하며 9살부터 다녔던 학교생활 3년간이다. ‘아야어여’도 모르는 나는 갑자기 소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고 학우들을 따라가느라 고생했다. 1년이 지나 어려움은 사라졌지만 역사수업만큼 나를 괴롭힌 것은 없었다. 신라정벌, 조선정벌, 조선병합…. 역사에서 조선은 언제나 약한 입장이었다. 수업이 끝나자 못된 애들이 ‘조선 정벌이야!’ 하면서 나에게 돌을 던지며 때렸다. 그 무렵부터 내 가슴에는 역사에 대한 의문의 뿌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왜 조선은 늘 약할까?” 1937년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후처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정조문은 할머니, 동생들과 함께 오사카에 가서 부두 노동자가 됐다. 그러다 광복을 맞았다. 일본에 있던 한국인들은 귀국하거나 일본에서 다시 국적을 취득해야 했다. 그러나 몇 해 만에 조국이 분단되면서 남한의 민단과 북한의 조총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정조문은 조국은 하나라며 어느 쪽도 취득하지 않고 ‘조선 국적자’로 남았다.●우연히 만난 조선백자의 매력과 상상초월 가치 오사카에서 어느 정도 돈을 모은 그는 교토로 가서 1951년부터 파친코 사업을 시작했다. 선술집, 초밥집, 찻집을 개업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가던 어느 날 교토 시내의 고미술상가를 지나다 ‘야나기’라는 고미술상 쇼윈도에 놓인 백자 항아리를 발견했다. 아무 장식도 없는 하얀 도자기가 지닌 고졸한 아름다움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즐겨 입으시던 하얀 치마저고리를 떠오르게 했다. 빨려들 듯이 가게로 들어간 그는 상상 외로 비싼 가격에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비싼지 물으니 조선 도자기의 가치에 비하면 싼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교에서, 공사판에서 ‘조센징’이라고 놀림받고 따돌림받으면서 살아온 그에게는 그야말로 세상이 뒤바뀌는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는 우리 문화재의 가치가 그렇게 높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고 한다. 1년간 할부로 도자기를 구입한 뒤 다짐했다. “문화재를 수집해 보자. 일본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를 되찾아 미술관을 세우고 자신을 잃은 재일동포들에게 ‘조선의 자랑거리’를 보여 주자. ” 그는 재일동포와 자라나는 2세들이 이유 없이 멸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하려면 문화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돼야 하며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진품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본 전국의 고미술상을 찾아다니며 우리 문화재 수집에 온 힘을 다하는 한편 조선의 역사와 문화 연구 활동을 시작하며 비뚤어진 고대 한·일 관계사를 바로잡고자 했다. 형 정귀문과 도쿄에서 활동하는 재일작가 김달수와 함께 한·일 고대사에 관한 의문점들을 하나씩 풀어 보고자 교토대에 재직하고 있던 역사학자 우에다 마사아키를 찾아갔다. 우에다 교수는 저서 ‘귀화인’(歸化人·1965)을 통해 조선반도에서 고대 일본에 온 사람을 귀화했다고 말할 수 없다며 도래인(渡來人)이 맞다는 주장을 폈던 진보적인 학자였다. 우에다 교수는 비뚤어진 한·일 관계사를 바로잡는다는 뜻에 흔쾌히 동참했다. 사쓰마요를 만든 도래인 심수관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 작가 시바 료타로도 합류했다. 정조문은 일본인 지식인 및 학자들과 조선인 학자들의 공동 연구로 1969년부터 계간지 ‘일본 속의 조선문화’를 발간했다. 조선 고대사 연구에 일대 선풍을 일으킨 이 잡지는 1981년 50호 발간으로 휴간에 들어갈 때까지 한·일 역사학은 물론 조선 고대 불교학, 민속학, 풍속학, 고대 언어학 등에서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잡지는 광고가 한 줄도 들어가지 않았다. 광고를 실으면 의미는 퇴색한다. 북측 기업광고가 게재되면 북측의 읽을거리가 되고 남측 기업광고가 실리면 남측의 잡지가 된다. 일본 기업은 당치도 않았다.●통일된 조국 꿈꾸며 미술관 이름 ‘고려’로 이런 정조문의 사고방식은 고려미술관 건립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미술관 이름을 한반도 최초의 통일왕조 이름을 따와 ‘고려’로 한 것은 남도, 북도 아닌 오직 통일된 조국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누구나 찾아와 선조들이 남긴 아름다운 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는 ‘공동의 광장’을 그리며 그는 미술관 건립에 온 힘을 기울였다. 교토는 그에게 제2의 고향이기도 했지만 일본 문화의 중심지이며 일본인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그런 교토에 미술관을 지어 한국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었다. 장소를 물색하다 여의치 않자 교토의 자택을 헐고 지하 1층, 지상 2층의 미술관을 지었다. ●교토 자택 헐고 미술관 지어… 1988년 10월 개관 1988년 10월 25일 고려미술관이 개관했다. 학교라고는 소학교 3년이 전부인 파친코 사업자가 백자 항아리와 운명적인 만남을 한 지 40여년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그가 각고의 노력으로 일본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되찾은 우리 문화재 1700점이 관람객을 맞았다. 소장품은 고분 부장품부터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 도자기, 회화, 나전 바둑판과 목가구 등 생활도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개관 후 1개월간 미술관 입구에서 늘 관람객을 맞았던 정조문은 개관 후 얼마 되지 않은 1988년 11월 미술관에서 쓰러져 1989년 2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였다. 장례 당일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2000여명의 재일동포와 일본인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온 세계 사람들이 우리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국제인이 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조선이나 한국의 풍토 속에서 성숙한 아름다움은 여기 일본에서도 언어, 사상, 이념을 넘어 이야기합니다. 부디 조용한 마음으로 그 흥취를 느껴 주시기 바랍니다.”(고려미술관 초대이사장 정조문, 고려미술관 리플릿 중) 운영은 어렵지만 고려미술관은 건재하다. 장남 정희두, 차남 정혜윤이 중심이 되어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을 유지관리하고 있고 장녀 정령희의 작은딸 이수혜가 미술관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외할아버지의 뜻을 이어 가고 있다. 글 사진 lotus@seoul.co.kr
  • “국민의 마음 담은 보훈정책 펼칠 것”

    “국민의 마음 담은 보훈정책 펼칠 것”

    문재인 정부의 파격 인사로 꼽히는 피우진 신임 국가보훈처장은 19일 “국민의 마음을 담은 보훈정책”을 펼치겠다고 밝혔다.피 처장은 이날 취임 인사차 국방부 기자실을 방문해 “정책의 주인은 국민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담아 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피 처장은 보훈처 사상 최초의 여성 처장이다. 청와대 출신이나 예비역 장성, 독립운동가 후손, 고위 공무원 출신이 독점하다시피 해 온 보훈처장에 예비역 중령이 임명된 것도 그가 처음이다. 피 처장은 지난 18일 취임식에서 ‘변화와 혁신’을 내세우며 강한 개혁 드라이브를 예고했다. 그는 이와 관련, “보훈이라는 것은 국가안보의 과거이자 미래로, 보훈정책을 어떻게 펼치느냐에 따라 애국심이 생기기도 하고 원망을 듣기도 한다”면서 “보훈 가족을 중심으로 해서 다가가는 따뜻한 보훈정책을 펼쳐 보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또 “국가가 군인 됨을 명예롭고 영광스럽게 해야 한다”며 “군도 저희들도 예우를 다함으로써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펼쳐 나가야 되지 않겠나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피 처장은 아직 업무보고를 받지 않았다며 구체적인 정책에 관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피 처장은 취임식도 하기 전에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치른 데 대해서는 “그렇게 큰 행사를 대통령을 모시고 하다 보니 더 책임감과 사명감이 느껴졌다”고 털어놨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다 외우지는 못하고 있었다”며 “차 안에서 전날 열심히 외우고 했는데도 안 외워졌는데 (기념식장에서) 스크린에 뜨길래 봐 가면서 했다. (약속대로) 씩씩하게는 불렀다”고 답했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이덕일의 역사의 창] 대륙사관, 반도사관

    [이덕일의 역사의 창] 대륙사관, 반도사관

    백암 박은식, 석주 이상룡, 성재 이시영의 공통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라는 점이다. 백암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었고, 석주 이상룡은 임시정부가 1925년 정치체제를 내각책임제로 바꾼 뒤 초대 총리인 국무령을 지냈고, 성재 이시영은 초대 법무총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이들에 단재 신채호를 더하면 다른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역사학자’라는 점이다. 백암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 등을 저술했고, 석주 이상룡은 신흥무관학교의 국사 교재를 썼다. 성재 이시영은 중국학자 황염배(黃炎培?1878∼1965)가 ‘조선’(朝鮮)을 저술하면서 조선총독부와 일본인이 연구한 자료로 한국을 비하하자 1934년 ‘감시만어’(感時漫語)로 이를 논박했다. 황염배가 중국이 제2의 조선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조선’을 저술했지만 왜곡된 내용이 많자 역사서를 저술해 이를 반박한 것이다. ‘조선상고사’의 저자 단재 신채호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네 분의 독립운동가가 역사학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에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내면의 논리가 한국사에 대한 이해와 확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감시만어’에는 무원 김교헌의 저서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김교헌은 고종 때 성균관 대사성과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런데 박은식·이상룡·이시영·신채호·김교헌의 공통점이 또 있는데 모두 대륙사관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조선총독부가 반도사관의 틀에 맞춰 한국사를 왜곡할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이 일관되게 대륙사를 주창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고대사에 대해 저술했는데, 한결같이 현재의 한국 사학계 주류에서 잊혔거나 지워졌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이들이 시간이 남아돌아서 고대사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한국 고대사에 집착했던 것이 현재의 침략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던 것처럼 “한국 고대사는 곧 현대사이자 독립운동사”라는 확신 속에서 고대사를 연구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중요 쟁점의 하나가 고대 한(漢)나라의 식민지라는 한사군의 위치였다. 조선총독부는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이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있었고, 남부에는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철저한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이를 반박했다. 조선총독부는 ‘대동강 유역에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있었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 들어섰다’(‘조선반도사’)라고 주장했다. 즉 기자조선 자리에 위만조선이 있었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 들어섰다는 것인데, 아직도 한국 고대사학계 다수는 이 설을 추종한다. 반면 백암 박은식은 1911년 만주로 망명해 지은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에서 “영평부(永平府)는 기자조선의 경계”라고 서술했다. 지금의 허베이성 루룽(蘆龍)현 지역인 청나라 영평부가 기자조선 자리라는 것이다. 청나라의 역사지리학자 고조우(顧祖禹)는 역대 지리지를 참고해 편찬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영평부’ 조에서 “영평부 북쪽 40리에 조선성이 있는데 한나라 낙랑군 속현이다”라고 했다. 낙랑군 조선현이 영평부 경내에 있었다는 것이다. 1911년 백암 박은식이 “영평부는 기씨 조선의 경계”라고 말한 것이 정확하다는 뜻이다. 낙랑군 조선현은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허베이성 루룽현에 있었다. 사실이 이런데도 아직도 반도사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국 고대사학계 일부가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우기니까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망언한 것이다. 낙랑군이 지금의 허베이성 일대에 있었다는 중국 사료는 계속 쏟아지는 반면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들이 대륙사관을 주창한 것은 중국 고대 사료에 대한 객관적 해석의 결과다. 중국은 국가 주석까지 나설 정도로 역사 강역 문제를 국시의 하나로 다루고 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국가의 존속 문제로 확대될지 모른다. 역사를 빼앗긴 민족이 훗날 강토까지 빼앗긴 것은 역사에서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고은 ‘만인보 안성 서재’ 재현한다

    고은 ‘만인보 안성 서재’ 재현한다

    역사 속 인물 연작시 썼던 작업실, 시인 자료·가구 등 그대로 전시고은 시인이 25년간 만인보를 집필한 서재를 오는 11월 서울도서관에서 재현한다. 서울도서관은 고은 시인의 서재였던 ‘안성 서재’를 서울기록문화관에 80㎡ 규모로 재구성해 ‘만인의 방’으로 공개한다고 16일 밝혔다. 고은 시인은 경기 안성에 30년 가까이 거주하며 만인보를 내놓고 현재는 수원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다. 만인보는 고은 시인이 1986년부터 2010년까지 4001편의 시를 30권으로 엮은 연작시다. 고향 사람들을 추억하는 내용으로 시작해 신라시대부터 불승들의 행적,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인물까지 5600여명을 다룬 대작이다. 만인의 방에는 고은 시인이 기증한 책상, 만인보 육필 원고, 인물 연구자료, 메모지 등이 그대로 전시된다. 만인의 방이라는 이름은 고은 시인이 명명했다. 만인의 방 조성은 서울시가 추진 중인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중 하나다. 시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2019년을 목표로 독립운동 유적을 복원하고 조망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서해성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총감독은 “3·1운동을 통해 한국인은 백성에서 스스로 시민 또는 국민이 됐고, 만인보는 그 가치를 가장 탁월하게 기록하고 형상화한 작품”이라면서 “서울도서관 건물은 일제강점기 식민통치 상징인 경성부 건물이고, 주변이 3·1운동 현장이어서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오는 11월 개관식을 하며 만인보 이어쓰기 등 다양한 시민행사를 할 계획이다. 한편 이날 박원순 서울시장과 고은 시인은 서울도서관에서 만인의 방 조성과 작품 등 기증에 따른 업무 협약을 맺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조국 민정수석 모친 웅동학원 세금완납 “독립운동의 산물임이 자랑인 작은 학교”

    조국 민정수석 모친 웅동학원 세금완납 “독립운동의 산물임이 자랑인 작은 학교”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의 모친이 이사장으로 있는 웅동학원이 3년간 체납된 지방세를 완납했다.웅동학원 박정숙 이사장은 16일 웅동중학교 홈페이지에 “지난 3년간의 지방세 체납으로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사과의 뜻을 표한다. 2013년 별세한 저의 남편인 고 조변현 전 이사장께서 장기 투병했던 관계로 여력이 되지 않아 납세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보도 이후 급전을 마련해 2248만 640원을 납부했다”고 밝혔다. 박 이사장은 “웅동학원이 체납을 하게 된 근본적 원인은 보유하고 있는 수익재산인 산을 매수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수익재산 매각을 통하여 재정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번번이 무산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조 전 이사장도 저도 학교의 실질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학교를 통해 사익을 추구한 적이 없다. 재단 인수 이후 사립재단에서 흔한 이사장용 승용차, 법인카드, 활동비 등을 받은 적 없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웅동중학교는 시골의 작은 학교이지만 약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독립운동의 산물로 건립된 학교임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저희 집안 차원에서는 독립운동을 하신 조상의 얼이 서려 있는 학교이기도 하며 현재 도교육청 행복학교로 지정돼 있다”면서 “제가 팔순이 넘은 노인이지만, 생을 다할 때까지 ‘계광정신’을 잊지 않고 학교 운영에 임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나경원 부친 홍신학원 24억 미납 재조명…나경원 의원실 입장보니

    나경원 부친 홍신학원 24억 미납 재조명…나경원 의원실 입장보니

    자유한국당이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의 모친이 이사장으로 있는 웅동학원의 세금 체납 문제를 두고 “자신의 가족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조국 교수가 공직기강을 바로 세울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이 가운데 자유한국당 나경원 의원의 부친이 운영하고 있는 사학법인 ‘홍신학원’의 법정부담금 미납 문제도 재조명되고 있다. 인터넷 매체 서울의소리는 지난해 3월 홍신학원이 법정부담금 24억여원을 납부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서울시 사학 법정부담금 평균치는 26~32%인데, 홍신학원은 해마다 부담해야 할 금액의 5%만 지급했다. 이 매체는 나경원 의원의 부친 나채성씨가 이사로 등재된 다른 사학법인들의 납부율도 선일학원 0.5%, 인천 상명학원 4.1%, 경기 연풍학원 7.7% 등 각 시·도 평균치를 훨씬 하회하는 납부율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나경원 의원 측은 “사학 법정부담금은 법인이 부담하되 그렇지 않을 경우 학교가 부담을 하며, 이것은 권고조항이기 때문에 법적 효력이 없다. 따라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세금 체납으로 문제가 된 학교법인 ‘웅동학원’은 1년 총 수입이 78만원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열악한 재정 상태 및 독립운동과 학도병으로 나라를 지켰던 과거가 재조명되면서 오히려 동정 여론이 일고 있다. 다음은 나경원 의원실이 밝힌 입장 조국 민정수석 모친 소유 학교법인의 탈세 문제와 관련, 나경원 부친 소유의 홍신학원 법정부담금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전형적인 물타기에 불과합니다. 법정부담금이란 쉽게 말해 학교법인이 교직원 급여 등에 드는 비용 중 일정 부분을 부담하는 금원으로서, 사학의 열악한 재정 상태를 감안하여 법정부담금을 부담하기 어려울 경우 학교에서 부담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립학교교직원연금법 제47조 제1항) 따라서 법정부담금을 모두 납부하지 않은 것은 위법한 행위는 아닙니다. 실제로 법정부담금을 전액 납부한 사학은 전국적으로 9.5%에 불과한 실정입니다(2013년도 기준) 홍신학원은 지난 20대 총선 과정에서 본 문제가 불거져 서울시교육청에 사실관계를 문의한 바 있으며, 교육청은 2016년 4월 8일자 공문을 통해 “홍신학원의 법정부담금 부담비율이 낮은 것은 불법행위 아님”을 확인해준 바 있습니다. 명백한 위법행위인 탈세와, 법정부담금 미납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세금체납 사실의 심각성을 축소하려는 악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일부 언론에서 인용한 ‘서울의 소리’ 기사의 경우 제20대 총선을 앞둔 지난 2016.3.28. 보도된 것으로, 당시 ‘후보자를 폄하하는 내용 및 허위사실 보도에 따른 정정보도 요구’에 따라 ‘인터넷선거보도심의위원회’로부터 ‘주의’ 조치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송혜교x서경덕 교수, 캐나다 토론토 박물관에 한글안내서 제공

    송혜교x서경덕 교수, 캐나다 토론토 박물관에 한글안내서 제공

    배우 송혜교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캐나다 토론토 박물관에 새로운 한글안내서를 제공했다. 12일 서경덕 교수 측은 “전 세계 주요 미술관 및 박물관에 한국어 안내서를 제공해 온 배우 송혜교와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가 이번에는 캐나다 최대 박물관인 로열 온타리오 뮤지엄(ROM)에 새로운 한국어 안내서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캐나다 토론토에 위치한 ROM은 세계 최고의 자연사 및 문화 박물관 중 하나로 6백만점 이상의 유일무이한 소장품들을 전시하고 있어서 세계 관광객들이 토론토를 방문시 반드시 찾아가는 캐나다의 대표 박물관이다. 이번 한국어 안내서는 지난 2015년 말에 제공한 첫 안내서 이후 새로운 디자인으로 두번째 제공하는 것으로 각 층마다의 전시물 소개를 비롯해 박물관의 전반적인 사항에 관해 전면컬러로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번 일을 추진한 서 교수는 “세계적인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을 방문해 보면 아직도 한국어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곳이 참 많다. 이런 곳에 한국어 서비스를 유치함으로써 한국인 관람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또 그는 “아직도 한글 및 한국어의 존재 유무를 모르는 외국인들도 상당수다. 세계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이런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에 한국어 안내서를 비치하게 되면 한글의 존재 유무도 홍보할 수 있어서 좋다”고 덧붙였다. 이번 일을 후원한 송혜교는 “나 역시 해외에 나가게 되면 그 나라의 대표 미술관 및 박물관을 방문하게 되는데 한국어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으면 좀 불편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제공을 위해 더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간 이 둘은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한국어 안내서 제공, 보스턴 미술관 한국실에 비디오 안내박스 설치 등 전 세계 유명 미술관 및 박물관에 한국어 서비스 유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한편 이 둘은 중국 내 임시정부청사, 상하이 윤봉길 기념관, LA 안창호 기념관, 도쿄 내 한국관련 역사지역 등 해외에 위치한 대한민국 독립운동 유적지에도 꾸준히 한국어 안내서를 제공해 왔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웅동학원 세급체납 알고보니 “독립운동, 연수입 78만원, 졸업생 68명”

    웅동학원 세급체납 알고보니 “독립운동, 연수입 78만원, 졸업생 68명”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의 어머니가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법인 ‘웅동학원’이 2000여만원의 세금을 체납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웅동학원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정치미디어 ‘The 아이엠피터’는 12일 중앙일보가 ‘모친 체납 사과, 첫날부터 고개 숙인 조국’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내용에 대해 ‘악의적’이라고 표현했다. 아이엠피터는 그 근거로 웅동학원 2017년 예산 총괄표를 공개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예산표에 따르면 2017년 학교 법인 예산 중 총수입이 78만 9000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78만 9000원의 수입 중 44만원은 정기예금 3000만원에 대한 수입이며 주 수입이던 기부원조금이 2017년에는 0원으로 재정이 열악한 상황이다. 아이엠피터는 “웅동학원 박정숙 이사장이 재산세 등 총 2건, 2100만원을 체납할 수밖에 없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부러 체납한 것이 아니라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웅동학원이 사학재벌이 아닌 “독립운동과 학도병으로 나라를 지켰던 학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웅동학원은 웅동중학교를 경영하는 사학법인으로 1985년부터 조 수석의 아버지 고 조변현 씨가 이사장을 맡았고 2010년 이후엔 어머니 박씨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17년 2월 웅동중학교 제65회 졸업생은 68명이다. 웅동학원의 전신인 계광학교는 1908년에 설립됐으며 1919년 경남 창원 웅동, 웅천 지역 독립만세를 주도했다. 6.25 사변 때는 교사 1명과 학생 46명의 학도병이 출정해 18명이 전사했던 기록이 있다. 이후 1952년 웅동중학교가 설립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데스크 시각] 나와 당신의 가치를 지켜줄, 오늘/최여경 사회부 차장

    [데스크 시각] 나와 당신의 가치를 지켜줄, 오늘/최여경 사회부 차장

    9년하고도 5개월 전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아마 우리는 몇 가지 단어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녹조라테, 큰빗이끼벌레, 불도저정부, 명박산성, 종일편파방송?. 아마도 도심 개발 과정에서 철거민 6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한 용산참사나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반대하며 중고생 1만명이 두 달 동안 서울 청계광장에 모여야 했던 촛불집회를 모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소통하는 대한민국’을 외친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불통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집권 첫해 치열하게 독재정권과 싸우며 민주주의를 외쳤던 6·10민주항쟁 기념일에 청와대 주변과 광화문광장에 컨테이너 박스로 ‘명박산성’을 쌓았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혈세 22조원을 쏟아부어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여름마다 금강 공주보와 백제보에선 지독한 녹조를 겪고, 환경유해 생물이 심각하게 증가했다. 그때 선택이 달랐다면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과 상하이임시정부 정통성 부정, 4·19혁명 폄하 등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는 세력도 등장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공정 보도와 거리가 먼 ‘종일편파방송’이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고, 워치독(감시견)이 아닌 랩독(애완견), ‘기레기’라는 비아냥을 얻는 언론을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혹 4년하고도 5개월 전,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난겨울을 어떻게 보냈을까. 주말마다 차디찬 바닥에서 촛불을 쬐는 대신 따뜻한 실내에서 가족, 친구를 만나면서 가는 한 해를 아쉬워하지 않았을까. 대통령 집권 이듬해 벌어진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슬픔에 빠질 일은 피할 수 있었을까. 참사를 피할 수 없었다 치자. 적어도 304명의 희생을 두고 “지겹다”거나 “그만하라”고 매몰차게 입을 막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피자와 치킨을 먹는 파렴치한 행태를 볼 일은 없지 않았을까.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 확산으로 ‘감염자 186명, 사망 38명’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조류인플루엔자(AI) 발발 석 달 만에 닭과 오리 3300만 마리를 살처분하고 피해 수습에 수천억원을 쓰는 허망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까. 역대 최고의 1분기 15~29세 청년실업률(10.8%), 1433조원 국가부채와 1344조원 가계빚, 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인 노인빈곤율(63.3%)과 자살률(10만명당 25.8명)이 조금은 떨어졌을까. 전 정권에서 호시탐탐 역사왜곡 기회를 찾던 세력들이 국정 역사 교과서 발간을 시도할 수도, 피해자들이 생생 증언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한·일 간 밀실합의로 처리할 수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국민 합의는커녕 국민 설명도 하지 않은 채 경북 상주에 자리잡을 수도 없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40년 지기 평범한 주부’에게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넘기는 미증유의 국정 농단을 맞닥뜨리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역사는 ‘만약에’라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 과거를 바꾸면 현재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시간여행의 역설’은 상상일 뿐이다. 그래도 자꾸 ‘만약에’를 떠올리는 이유가 있다.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후회하거나 아쉬울 때, 반면교사 삼아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와 민주주의 진일보 아니던가. 그래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선택할 수 있는 오늘이 더없이 의미 있는 것이다. 사람이 중심인 나라, 내 능력이 미래의 희망이 될 수 있는 든든한 나라, 노동이 당당한 나라, 변질되지 않은 자유가 보장된 나라, 무엇이든 좋다. 나서자.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곳으로 가자. 후회하지 않기 위해. 나와 당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cyk@seoul.co.kr
  • 3·1운동 참여 기독교인 1968명 DB구축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 혹은 기독교인 추정 인물 1968명의 명단과 약력을 담은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됐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최근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 전수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전수조사는 지난해 2월~올해 4월 자료·인물·문화유산 조사로 진행됐다. 3·1운동과 관련해 기독교계의 참여를 집중 조망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 지역을 포함한 국내, 만주에서 1919년 발간된 신문 잡지 등 문서자료를 정리하고 기독교인으로 확인되는 독립운동가, 유공자 전체를 발굴해 정리한 데이터는 60권 분량 2만쪽에 달한다. 자료는 3·1운동으로 사법부 재판을 받은 기독교인(151명)에게 내려진 판결문이 298건으로 조사됐다. 선교사 문서는 464건이 파악됐다. 인물은 각 교회 연혁과 노회·연회사에 등장하거나 지방지 학교사 기관사 향토지에서 나온 기독교인을 정리했다. 조사 결과 지방지에서는 463명의 기독교인 명단이 확인됐다. 개교회사와 노회사, 연회사를 통해 1080명, 학교사와 기관사에서는 501명의 명단을 확인했다. 이 가운데 이름 중복을 제외하고 기독교인으로 추정된 인물까지 포함하면 총 1968명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송진우 선생 탄생 127년 추모식

    송진우 선생 탄생 127년 추모식

    고하송진우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김창식)는 오는 8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서 송진우(1887~1945) 선생 탄신 127주년 추모식을 갖는다. 고하 선생은 중앙학교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동아일보 사장 등을 지내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수석총무로 활동하던 중 1945년 12월 30일 습격을 받고 서거했다.
  • [사설] 명분·실리 없는 바른정당 13명 탈당

    바른정당 의원의 무더기 탈당에 역풍이 불고 있다. 바른정당 의원 13명은 어제 탈당과 함께 자유한국당 입당, 홍준표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이들 의원의 탈당으로 바른정당 의석수는 창당 당시 33석에서 19석으로, 원내교섭단체 지위도 상실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보수의 기치를 내건 바른정당은 창당 99일 만에 붕괴되기 일보 직전이다. ‘좌파 집권 저지’를 위해 한국당과 힘을 합치겠다는 이들의 정치 행보를 무조건 나무랄 수만도 없다. 하지만 정치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어떤 가치·철학도 없는 이합집산은 구태 정치다. 탈당한 바른정당 의원들 역시 겉으로는 ‘보수 대연합’을 외치지만 영락없이 ‘부잣집에 살다가 가난한 집에는 못 살겠다’는 웰빙 철새 정치인들의 모습이다. 바른정당이 옛 새누리당(현 한국당)을 뛰쳐나온 것은 부패하고 무능력한 ‘친박패권‘ 세력과의 결별, 새로운 보수 재건을 위해서였다. 어떤 분야든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은 어렵다. 개혁보수당도 말처럼 쉽지 않다. 대선 토론에서 유승민 후보가 가장 잘한다는 평을 받고도 지지율 답보 상태인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면모를 보여 주지 못한 바른정당에 대한 실망감과 사표(死票)를 우려하는 유권자 심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그런데도 이들은 유 후보 탓을 하면서 탈당했다. 새로운 노선의 정당, 정치를 하려면 오랜 시간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 그야말로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임해야 한다”.(심상정 후보)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부정하고 떠난 한국당은 여전히 친박 세력이 건재하고 파면당한 대통령도 당원으로 남아 있다. 서청원 등 강성 친박 의원들은 “대통령 탄핵하고 교도소 보낸 바른정당 의원들의 입당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이들의 입당에 반발하고 있다. 탈당 의원들은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될 처지에 놓이게 됐다. 현재 보수 세력이 연대를 한다고 해도 대선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이런 상황임에도 그들이 탈당한 것은 결국 내년 지방선거와 2020년 총선을 염두에 둔 ‘밥그릇 정치’ 에 불과하다. 이미 한국당은 이들 지역구에 당협위원장을 임명했다. 그러니 그들이 더 입지를 구축하기 전에 자신들의 밥그릇을 단단히 챙겨 놓겠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스스로 당을 박차고 나올 까닭이 없다. 이들의 탈당은 명분·실리도 없는 일이다. 남아 있는 의원들만이라도 진짜 새로운 보수의 길을 열어 보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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