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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민지시대 한인 아나키즘 운동사’ 펴낸 박환 교수

    ‘식민지시대 한인 아나키즘 운동사’ 펴낸 박환 교수

    아나키즘(anarchism).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된다. 그러나 아나키즘에 애착을 가진 이들은 그런 번역을 일종의 오역으로, 심지어는 일제의 잔재로까지 보기도 한다. 서구에서 수입된 이 단어가 제국주의 일본을 거치면서 ‘정부가 없는 무법·혼란 상태’라는 부정적 의미가 짙게 깔린 무정부주의로 번역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정부주의 대신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an-archi’라는 어원 그대로,‘지배자 혹은 권력집단이 없는’ 자유로운 개인간의 연대라는 긍정적 의미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노엄 촘스키가 아나키즘을 어떤 이론체계나 행동양식이라기보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경향’으로 정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살아남기가 버겁다. 체제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냉전 같은 경우에는 더 그러하다. 자본주의·공산주의 모두에게 ‘체제를 부정하는 자’로 낙인찍히기 때문.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일제시대는 달랐다. 기존 체제를 격렬히 부정했기에 당시 많은 독립지사들은 아나키즘으로 ‘광복 이후’를 상상했다. 잊혀져 가던 이 대목을 정리한 책이 나왔다. 독립운동사 연구로 유명한 한국민족운동사학회장 박환 수원대 교수가 ‘식민지시대 한인 아나키즘 운동사’(선인 펴냄)를 정리해 낸 것. ●제3의 길, 아나키즘 얼마 전 유행했던 말로 치자면 일제시대 아나키즘은 제3의 길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독립운동 진영내 좌우파 대립을 보다 못해 택한 길이 바로 아나키즘이었다는 사실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박 교수는 이들이 왜 제3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집중 조명한다. ‘다물단’‘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남화한인청년연맹’‘한국청년전지공작대’‘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한족총연합회’‘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등 중국·만주·조선에서 1920년대부터 45년까지 활동한 아나키스트들을 통해서다. 이들이 꿈꾼 사회는 ‘자본주의의 착취’도 없고,‘공산주의의 독재’도 없는 국민자치에 의한 연합체였다. 중간에 낀 입장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선택은 다양했다. 사회주의 혹은 민족주의 진영과 힘을 합하는 경우도 있었고, 끝까지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을 유지한 사람들도 있었다. ●잊혀진 운동, 아나키즘 아나키즘은 환영받기 힘들었다. 일단 중간자였다. 우파가 보기엔 체제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좌파와 별 다를 바 없고 좌파가 보기엔 무모한 행동으로 혁명 역량을 분산시키는 어리석은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남북분단 뒤 이승만·김일성은 임정 중심의 일부 우익 세력과 제한적인 사회주의 계열에만 정통성을 부여했다. 또 아나키스트들은 행동력에서도 주목받기 어려웠다. 개인 중심의 저항운동이다 보니 순교자적인 행동을 요구했고, 그러니 숫자도 얼마되지 않았는 데다 그나마도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책에서 아나키스트들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을 추가해 놓았다. 바로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숨결이 녹아 있는 각종 문건들을 번역해 놓은 것. 중국의 대문호로 꼽히는 바진, 뤼신이 아나키즘에 대해 남겨둔 글과 조선 아나키스트 기관지 ‘고려청년’의 발간사 등이 각장 뒤에 달려 있다. 박 교수는 “학계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글이라도 사료 차원에서 참고자료 삼아 번역해 실어뒀다.”고 말했다. ●아나키즘의 현재적 의미 박 교수가 이렇게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지금 한국에도 유효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독립운동으로서 어떤 성과를 냈느냐고 한다면 다소 부족하지만, 새로운 국가 건설론으로 이해하면 의미가 적지 않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다름 아닌 중간자였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아나키즘의 근본적인 목적은 인간성 존중과 풀뿌리 민주주의”라면서 “다른 체제로 살아온 남북이 통일할 때 한 방안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물론 박 교수가 마냥 낙관적인 것은 아니다.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연대라는 것이 현실성 있느냐는 질문은 여전하기에. 그래도 그는 “다소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포기하기보다 하나의 이상향으로서, 미래지향적으로 가능성을 열어 두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박 교수는 책 내용에 조금 불만이 있다.“이번 책은 중국내 한인들의 아나키즘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다음 번에는 한국내 아나키즘의 수용과 전개에 대해 연구해볼 참입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광복60돌 의미’ 다큐로 되새긴다

    ‘광복60돌 의미’ 다큐로 되새긴다

    15일 광복 60주년을 맞아 지상파 방송사들의 다양한 다큐멘터리 특집 프로그램이 쏟아진다. 광복의 의미를 되새김과 동시에 지식과 정보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다. MBC는 특집 2부작 ‘신(新)조선책략’을 16일과 23일 오후 11시부터 1시간 동안 방송한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된 지 100년이 된 지금, 그때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고 한민족이 독립해 살아남기 위한 방안을 살폈다. 근대화 과정에서 극명하게 부각된 일본의 성공과 중국의 실패 이유, 그리고 21세기 동아시아 흐름을 심도있게 다룬다. MBC는 또 15일 한·중·일 3국의 미래를 모색하는 광복 60주년 특별생방송 ‘함께 만드는 평화’에 이어 16일에는 ‘심야스페셜-100년만의 귀향’도 방영한다. 이와 함께 28일과 다음달 4일 방영되는 한·일 공동기획 ‘해방둥이, 개전둥이’는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양국 산업을 세세히 파헤친다. SBS는 15일 ‘천상의 바이올린’과 16∼17일 ‘소난지도의 영웅들’ 등 특집 다큐멘터리 드라마 2편을 준비했다.‘천상의 바이올린’은 일제시대에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간 후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가 된 진창현씨의 삶을 조명한다.‘소난지도의 영웅들’에서는 항일운동을 벌인 의병의 넋이 잠들어 있는 소난지도를 소개한다. EBS는 8·15 특선 다큐멘터리 ‘731부대, 생체실험의 비밀’을 15일 낮 12시에 방송한다. 지난 1983년부터 2차대전 말까지 만주에서 잔혹한 생체실험으로 죄수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일본군 731부대의 만행을 전 부대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낱낱이 공개한다.50년이라는 오랜 침묵을 깨고 이들 부대원들은 전대미문의 비극적 사건에 대해 증언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EBS는 또 특집 10부작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를 19일까지 저녁 10시에 내보낸다. 연출, 출연, 구성과 내레이션을 혼자서 맡은 김용옥이 연해주와 두만강·압록강 및 북간도 등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담았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약산 김원봉/이원규 지음

    약산 김원봉(1898∼1958).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하고,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치열한 한일투쟁을 벌였던 인물이다.1920년대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은 임시정부의 존재는 몰라도 김약산과 의열단은 알고 있을 정도로 그는 항일투쟁의 ‘스타’였다. 그러나 이같은 화려한 이력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약산은 해방 후 남과 북 양쪽 모두에서 거의 잊혀진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북이 분단되면서 북쪽을 선택했던 그는 북한 정권에서 국가 검열상, 노동상 등을 지냈으나, 결국 숙청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선택을 떠나 일제 강점기에서 치열했던 항일 투쟁 업적과 삶의 모습은 제대로 조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소설가 이원규가 쓴 ‘약산 김원봉’(실천문학사 펴냄)은 약산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선택을 넘어 일제 강점기에서 치열했던 그의 항일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삶을 재조명한 책이다.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이 국내외에서 벌였던 수많은 거사를 소설적 상상력을 덧붙여 재구성했다. 책엔 약산뿐만 아니라 의열단선언문을 작성해준 단재 신채호, 약산을 라이벌로 인식하면서 임정을 이끌어간 백범 김구, 남경 금릉대학 선배로서 그를 격려해 주었던 몽양 여운형 등 한국근대사와 독립운동사에 등장하는 무수한 실존인물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1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시론] 광복60년 독립유공자 포상을 말한다/김용달 독립운동사료발굴분석단 수석팀장

    [시론] 광복60년 독립유공자 포상을 말한다/김용달 독립운동사료발굴분석단 수석팀장

    역사는 생물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그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바뀔 수 있다. 작게는 개인에 따라, 크게는 사회나 국가나 민족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역사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고 했다. 매년 광복절을 앞두고 발표되는 독립유공 포상자 명단이 올해도 얼마 전에 발표됐다. 이를 보고 새삼스레 역사는 생물이라는 대목을 떠올려본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올해는 광복 60돌이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을 맞이한 것이다.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면서 잘잘못을 따질 때도 된 나이다. 사실 그동안 한쪽으로 치우친 해석과 평가로 독립운동사를 봐왔다. 한국독립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다양성이라는 사실은 이미 밝혀져 있다. 이념의 다양성, 주체의 다양성, 방략과 노선의 다양성 등이 그것이다. 이는 고대로부터 온축된 한국문화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다. 알고 보면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가장 민주화된 사회를 이룬 것도 여기에 뿌리가 있었다. 민주사회의 최고의 덕목은 다양한 가치의 보장과 존중이 아닌가. 예전의 독립유공자 포상에는 이런 측면이 간과되었다. 사회가 민주화되지 못하고, 정부의 정통성도 허약한 탓이었다. 하지만 문민정부 이래 민주화가 확대되고, 정통성도 강화되었다. 사회와 정부가 건강해지고 튼튼해진 것이다. 자신감을 회복한 사회와 정부는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역사바로세우기와 역사바로잡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의지가 있다고 만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만한 채비가 갖추어져야 한다. 학계는 문민정부 전에 벌써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유신체제와 5공 군사정부의 통제 아래서도 역사발전의 주체를 찾고,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독립운동의 주역들을 찾아낸 것이다. 국가 차원의 공증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광복 50돌의 이동휘 선생 등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은 국가적 공증의 첫 단계였다. 이후 사회민주화의 진척에 따라 알게 모르게 학계의 연구성과를 반영하면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포상이 이루어져 왔다. 광복 60돌의 독립유공자 포상은 그런 작업이 공개된 데에 의의를 찾아야 하겠다. 올해 3·1절 여운형 선생 포상 문제를 둘러싼 논의가 그것을 촉발하였다.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우러러 받들고 뜻을 본받아야 할 애국선열의 포상에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올 초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포상에 대한 반대 여론도 있었다. 민주사회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기 생각만 고집하지 않고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일도 민주사회의 기본이다. 이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포상은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 사회주의자들 또한 별스러운 존재들이 아니다. 그냥 마음씨 좋은 우리의 이웃으로 나보다 남들을,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꿈꾼 사람들로 기억하면 된다. 이번 포상자 명단에는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도 보이고, 그의 라이벌 한위건도 있다. 그런가 하면 미주지역 자유주의 독립운동가도, 만주지역 무장투쟁가도, 임시정부와 광복군 요인도 있다. 독립운동이란 그런 것이다. 다양한 이념과 노선이 어우러져 무지개처럼 피어난 것이 바로 한국독립운동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해석과 평가도 다양해야 한다. 이제 다시는 넓어지는 지평선에 핀 무지개를 흑백으로 보는 과오를 범해선 안 될 것이다. 김용달 독립운동사료발굴분석단 수석팀장
  • EBS 해방60주년 ‘도올이 본 독립운동사’ 제작 김용옥씨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과 중국의 신해혁명을 도운 조선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우리는 왜 풍부한 독립운동사를 잃어버렸습니까?” 도올 김용옥이 이번에는 한국독립운동사에 도전한다.EBS가 해방 60주년을 맞아 준비한 특별 다큐멘터리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가 그것.8일부터 19일까지 2주간 토·일요일을 빼고 매일 밤 10시부터 1시간 동안 진행되는 10부작이다. ●출연·연출·편집·내레이션까지 ‘원맨쇼´ 방영을 앞두고 2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는 ‘도올스러움’으로 넘쳐났다. 이런저런 욕지거리를 섞어가며 열변을 토하는, 낯설지 않은 모습도 연출됐다.1000여권의 각종 자료를 뒤적인 뒤 6개월여 동안 타이완, 러시아 연해주, 중국의 북부지역을 휩쓸고 다니며 촬영했다는 엄살 역시 도올답다. 다큐 형식도 마찬가지.‘1인칭’ 다큐다. 도올이 출연하고, 연출하고, 편집하고 내레이션까지 도올이 맡았다. 이러다 보니 기존 전문 PD들의 컷과는 다른 방식으로 편집돼 파격적인 형식이 꽤 눈에 띌 것이라는 게 제작진의 장담이다. ●“좌·우파 떠나 항일운동사 재조명” 그런데 내용까지 도올스러울 수 있을까. 애초 프로그램 기획취지는 좌·우파를 떠나 민족주의 관점에서 해방운동을 다루어 보자는 것이다.“누가 친일을 했다더라라는 식의 폭로 위주의 접근법은 과거사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립니다. 차라리 찬란하게 빛나는 항일운동의 역사를 써야 합니다.”한데 그 ‘찬란하게 빛나는 항일운동’을 다루려면 좌파 인사가 빠질 수 없다. 도올은 “있는 사실 그대로를 다루면 되지 거기다 왜 이념을 집어넣느냐.”고 강조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항일운동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에게 서훈한다는 소식에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정체성을 들먹이며 발끈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게 한국의 현실이다. 그래서 프로그램 제목에 ‘도올이 본’이라는 구절을 일부러 집어넣었다.“도올의 ‘구라’라면 그래도 조금 봐주는 그런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라는 게 도올 스스로의 생각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문제, 즉 해방 뒤 북한에서 활동한 사람들까지 다룰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열변을 토하던 도올도 즉답을 피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쪽지 통신]

    ●서대문청소년수련관 서울 서대문구 연희3동에 청소년들이 동아리 활동과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 ‘서대문청소년수련관’이 지난달 28일 문을 열었다. 수련관에서는 청소년들이 지역사회 문화와 환경 개선을 위해 스스로 참여하는 ‘청소년 문화기획단’, 청소년들이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고 직업체험을 할 수 있는 ‘청소년인턴십센터’ 등을 운영한다.(02)334-0080.●교육방송(EBS) 세종문화회관과 함께 오는 15일부터 8월 3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에서 ‘EBS와 함께 하는 세계곤충학습체험전’을 연다. 이 전시회에는 820종 9200점의 곤충표본이 동영상자료와 함께 전시된다. 이와 함께 관람객에게는 한국곤충생태다큐멘터리 CD가 무료로 제공되며 경품행사도 열린다.1544-1555.●웅진지식하우스 ‘일곱살부터 하버드를 준비하라’를 펴냈다. 저자인 이형철·조진숙 부부는 교육을 위해 미국에 정착한 뒤 두 아들을 모두 하버드에 입학시켰다. 교육관과 단계별 학습방법, 미국대학 진학안내 및 두 아들이 읽었던 책 목록 등이 실려 있다.●고3전국연합학력평가 14일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4시20분까지 전국 고3 재학생 44만 5000명은 고3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치른다. 이 평가는 올해 세번째이다. 다음 평가는 오는 10월13일 실시한다.●메가스터디(www.megastudy.net) 수시모집에 지원하는 학생을 위한 다양한 무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논술과 구술, 기출문제 풀이, 영어 논·구술 대비강좌 등 모두 130여개 대학별고사 대비 동영상강좌와 경희대와 아주대, 인하대, 한양대의 지원자를 위한 전공적성 모의고사 서비스가 있다. 또한 대학별 입시요강 검색과 내신성적 자동산출, 모의지원 등 복잡한 입시정보를 원스톱 수시지원 서비스로 제공한다. 이외에도 수시모집으로 대학에 들어간 선배 10명의 멘토링 서비스를 개설,8월말까지 1학기 수시지원자의 고민과 궁금증을 1대1 온라인 상담형식으로 해소시켜준다.●청소년독립군사관학교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청소년독립군사관학교 참가자를 16일까지 모집한다. 참가자들은 병영훈련과 유격훈련, 기병훈련, 고난의 행군 등 한국 최초 무관학교였던 신흥무관학교의 독립군훈련을 체험하고 역사문제연구소 신주백 박사로부터 독립군에 관한 강의를 듣는다. 또한 독립운동사와 독도영유권 문제, 고조선과 고구려 역사문제에 대해 함께 토의한다.(041)620-7764.●유니드림 대학입시연구소 수험생들이 심층면접과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최근 시사문제들을 중심으로 엮은 대입구술 심층면접 논술항해지도를 펴냈다. 이 책은 사법개혁과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 개혁, 호주제 폐지 등 각각 선정된 30개의 논제들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제시한다. 또한 논제와 관련된 주요개념과 쟁점을 소개하고 사설과 읽기자료를 제공한다. 또한 대학에 출제됐던 기출문제도 함께 엮었다.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4)태평양전쟁과 남양군도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4)태평양전쟁과 남양군도

    오는 27∼28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종전 60주년을 기념해 남양군도의 사이판을 방문한다.6000여 일본인들도 이때 함께 이 작은 섬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극우 대변지인 산케이신문은 벌써부터 광분하며 기획특집을 쏟아내고 있다. 정말 ‘대단한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원래 일왕은 팔라우와 마셜군도 등 태평양 섬들을 두루 둘러볼 참이었으나 미국령인 사이판만 찾기로 했다는 후문이다. 지난주, 옛 일본 육군 제30사단 소속 야마카와 요시오(87) 중위와 나카우 스스키(83) 상등병이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 인근 산악지대에서 숨어살다가 발견됐다는 오보 사태로 일본 열도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인 일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 1972년 괌의 요코이 쇼이치(당시 56세)에 이어 74년 필리핀에서 오노다 히로오(당시 51세)가 종전 30여년 만에 생환했었다. 당시 요코이는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왔습니다.”라는 귀국 일성을 토해내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열광케 했는데, 이번에 ‘발견’된 이들은 또 무슨 말을 내뱉을까. 이래 저래 일본인들의 해묵은 관심이 태평양에 쏠리고 있다. 그 태평양과 우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머나먼 태평양에 수만의 무주고혼들이 떠돌고 있다. 신혼여행지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이판 같은 곳에서도 수많은 조선인들이 군인과 군속,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죽어갔다. 그들이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몸을 던졌다는 일명 만세절벽은 일본인 참배객의 메카가 되었으며, 일왕은 여기에 세워질 신사 준공식을 겸해 이곳을 찾는 것이다. 2차대전은 곧 태평양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주, 중국, 버마와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전선이 확대되고 있었고, 같은 시기 남양군도에서는 바다의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남양군도란 오늘날 미크로네시아를 가리킨다. 지도를 펼치면, 일본 남쪽으로 괌, 사이판 등이 포함된 북마리아나군도가 있고 그 밑으로 얍과 팔라우 등이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마셜군도가 있는데 이곳을 총칭하여 미크로네시아(Micronesia) 라 부르며, 여기에는 2106개의 섬이 포함돼 있다. 태평양의 일본군 최대 근거지였던 팔라우를 찾았다. 연전에 어느 정신없는 탤런트가 ‘정신대를 기리는’ 누드촬영을 하겠다고 나서 온 사회를 벌컥 뒤집어 놓은 바로 그곳이다. 육·해·공군을 관장한 팔라우 집단사령부와 식민청인 남양청 본청, 법원, 병원 등이 있던 매우 중요한 전략기지였다. 흔히 일본이 2차대전 무렵에 이곳으로 진출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일본의 태평양 진출은 이보다 앞선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콜럼버스의 이른바 ‘아메리카 발견’ 이후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식민지 쟁탈전을 조정하기 위해 태평양쪽은 스페인이 독식하는 것으로 합의된다. 그리하여 필리핀을 위시한 팔라우도 16세기에 스페인에 예속된다. 19세기 중반에는 카이저황제와 비스마르크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이곳에 독일 자본이 밀어닥쳤다. 독일의 스페인에 대한 도전은 1899년에 드디어 성공한다.1898년 미국과 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함에 따라 힘을 잃게 되자 스페인은 파리에서 비밀협정을 맺어 독일에 이 섬들을 팔아넘긴다. 이에 1914년 10월, 일본은 영국과 연대해 독일에 대항하면서 미크로네시아를 넘본다. 사실, 일본의 태평양 탐욕은 훨씬 전부터 드러났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북방 대륙 진출에 여념이 없던 일본으로서는 남쪽 바다를 향한 야욕을 잠시 유보했을 뿐이다.1880년대에 다케코시 요사부로는 “적도를 얻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지 두달도 채 되지 않아 일본 해군은 캐롤라인과 마리아나, 마셜군도의 주요 섬에 상륙한다.1914년 10월7일, 수백명의 일본군이 폰페이섬의 성당에 들이쳤으며, 이곳에 기관단총을 설치하고 팔라우 공격에 나섰다. 1919년에 국제연합은 공식적으로 이곳의 일본 지배를 인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으로 남양군도를 획득했으니, 일본의 태평양 식민사는 이로부터 근 100년에 이르는 것이다. 종교와 교육, 그리고 경제적 개발은 식민지를 건설하는 중요한 축이었다. 남양청을 세우고 식민 관료들이 섬을 지배한다. 일본인 이민이 급증했으며 그들은 전력산업, 알루미늄광산, 진주양식과 카사바 같은 상업적 농업에 종사했다. 일본 정부의 지원 속에 1935년까지 5만여 일본인들이 섬 곳곳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들 대부분은 오기카와로부터 이주해 왔다.1940년에 일본인 인구는 7만 7000명까지 늘었으며,2년 뒤에는 9만 6000명을 헤아렸다.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인·군속들이 속속 집결, 일본인 수는 거의 2배로 불었는데, 팔라우와 사이판이 주요 거주지였다. 일본 식민청은 이곳에서 각 섬마다 이른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한반도에서 하던 방식과 똑같이 원주민의 토지 개인소유는 인정하되, 바닷가나 산의 공유지는 모두 식민청 소유로 돌렸다. 한마디로 ‘털도 벗기지 않고’ 대부분의 땅을 먹어치운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자 이 땅의 대부분은 군사기지로 징발된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것도 기실은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을 둘러싼 이해대립 때문에 생긴 필연적 귀결이었다.2차대전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양국은 서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으며 급기야 미크로네시아에서 태평양전쟁 중 가장 혹독한 전투가 치러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사실이 또 하나 있으니, 괌이 2차대전 때 미국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괌은 1898년에 미국과 스페인 전쟁의 부산물로 미국으로 넘어갔다. 미국은 이 전쟁을 계기로 태평양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1783년에 무역선 차이나호(Empress of china)를 통해 태평양에 본격 등장했다. 배에는 무역 상인과 선교사, 뉴잉글랜드의 포경업자, 해군 장교 등이 타고 있었다. 미국은 괌에 더해 20세기 초반에는 필리핀, 하와이, 사모아제도 등을 추가로 얻는다. 하와이에서는 1893년에 미국 상인과 선교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조를 전복시키기도 했다. 그 후 이곳에서 사탕수수 산업이 시작되었고, 한국인 이민도 비슷한 시점에 이뤄진다. 말이 이민이지 노예수출에 지나지 않았다.1899년에는 미국령 사모아에 미국 해군이 진을 친다. 괌에서도 미국은 ‘어머니 나라(Mother Country)’로 등장했다.1941년 12월7일 일본이 진주만을 때린 것은 이처럼 태평양을 둘러싼 해묵은 패권 다툼의 발화였을 뿐이다. 거의 동시에 일본 육군은 홍콩을 공격한 데 이어 42년 2월에는 영국군 거점인 싱가포르까지 먹어치운다. 이런 일련의 사태로 태평양전쟁은 종말을 향해 치달았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독립기념관) 김도형 연구원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36년,15살 어린 나이의 한국인 위안부 10여명이 처음 팔라우에 끌려온다. 그 후 코롤섬 토목공사를 위해 전라·경상도에서 노무자 200여명이 왔다. 코롤시 동쪽 끝에 위치한 ‘아이고브리지’는 한인들이 다리를 놓을 때 너무 혹독하게 시달린 나머지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해 붙은 이름이라는 내력이 슬프다. 한인 노무자와 더불어 조선총독부는 농업이민도 보냈다. 모두 13회에 걸쳐 1266명이 이주됐다. 중부 태평양의 중심기지인 트럭섬이 궤멸되자 1944년 2월25일 관동군과 조선군에서 선발된 정예부대 29사단이 팔라우에 진주했다. 이때 중국 관동에서 1만 2000여명이 왔는데, 대부분 한인 병사들이었다는 설이 있다. 팔라우의 한인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은 군속이었다. 말이 군속이지 해군에서 토목작업을 시키기 위해 끌고온 노무자들이었다.1943년 5월20일, 부산을 거쳐 팔라우에 800여명의 한인이 도착했다. 이들은 처음에 일본 본토와 남양과의 수송시설 건설에 종사하다가 미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진지 구축에 투입된다. 인근 무인도에서는 남양척식주식회사에서 갈매기 배설물인 인광을 채굴하여 비료를 만드는 일에도 이들이 투입됐다. 1944년 8월, 연합국이 중부 태평양의 마지막 공격지 팔라우에 들이쳤다. 미 제1전대의 공격으로 일본 육군 7212명 중 6766명이 전사하고 466명만 살아남았다. 해군도 3400명 중 단지 10명만이 생존했다. 물론 그 일본군 중에는 징병으로 끌려온 한인들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미군 폭격이 거세지자 일제는 팔라우의 일본인 1만7800여명을 본국으로 강제소환한다. 그렇지만 강제 징용된 한인들은 송환 대상에서조차 제외된 채 전쟁이 본격화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식량보급이 끊기면서 한인들에게는 식량도 주어지지 않았다. 굶주림에 지쳐 식량을 훔치다 총을 맡고 숱한 한인들이 죽어 나갔다. 정신대로 끌려온 조선의 딸들도 곳곳에서 죽어나갔다. 창고에서 건빵을 훔치려다 들킨 한인을 나무에 매단 뒤 귀나 코를 베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만행과 흡사한 짓을 자행했다는 믿기 어려운 증언도 전해진다. 팔라우 주둔 일본군이 미군에 공식 항복한 것은 1945년 9월2일이었다. 총알받이로 수많은 한인들을 끌고 왔다 수세에 몰리자 나몰라라 내팽개친 뒤 자신들만 빠져나간 것도 일제 만행의 일부로 기록돼야 한다. 그 불바다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귀환한 사람이 2만 5773명이었고, 팔라우에서는 3000여명이 귀환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팔라우에서도 ‘천상의 바다정원’으로 소개되는 록 아일랜드로 스피드보트를 타고 나가 무인도에 배를 댔다. 물 속으로 들어가자 ‘물 반 고기 반’이다. 산호섬답게 산호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너무도 아름다워 ‘용궁’이 본디 이런 풍경이었을까 여겨지는 곳. 그러나 물 밑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탱크와 항공기, 선박의 잔해가 즐비하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역사의 시간은 진행 중임을 이 잔해들이 말해주고 있다. 과거, 잠시 적이었고 이후 해양 패권의 든든한 동지로 미국에 보조를 맞춰 온 일본의 왕이 미국의 비호를 받으며 미국령 사이판을 찾는다. 태평양의 바다 속에 잠긴 탱크들이 다시금 포신을 곧추세우기 시작했다.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경의 태평양을 다시 피바다로 만들 작정이다. 이 막막한 타국을 떠돌고 있을 한국인들의 넋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일왕에 의해 지금 다시 시작된 것이다.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3)진해와 포르투갈인 세스페데스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3)진해와 포르투갈인 세스페데스

    진해는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이다. 원래 웅천읍성이 자리했던 곳으로, 그 웅천 바닷가에는 ‘세스페데스 방한 400주년(1553~1993)기념’이란 설명문이 붙은 조각상이 서 있다. 그의 고향인 포르투갈 톨레도의 니야누에다 데알카르데테 시민들이 우정의 정표로 기증한 것이다. 그는 1593년 12월27일에 웅천포에 도착해 1년여를 이곳 왜성에서 묵었다. 그 34년 뒤인 인조 6년(1628)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부산 근처에 표착했고, 그로부터 59년 뒤인 1653년에는 하멜이 표류해 왔다. 그러고 보면 그는 표류가 아닌, 자의로 이 땅에 온 최초의 서양인이다. 그가 머물렀던 웅천 남산왜성을 올랐다. 돌들이 웅장하다. 틀림없는 왜성인데 옛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1593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축성했고 정유재란때 재침해 수축한 것이다. 경상도에는 유난히도 왜성이 많다. 웅천 안골포 양산 영등포 마산 고성 사천 남해왜성 등등 아예 장기 주둔을 염두에 두고 진을 쳤던 흔적들이다. 진해에는 웅천왜성 바로 건너편 안골포에도 왜성이 있다. 사면이 두루 보여 그만한 요새가 없다. 세스페데스가 웅천까지 온 이유를 알자면 조금의 설명이 필요하다. 임진왜란때 평양성을 공격했던 고니시 고니시는 포르투갈 예수회에 의탁한 천주교도였다. 고니시의 딸 마리아는 당시 19대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의 아내였는데, 소오는 임란 직전까지 대마도 병마사로 조선의 녹봉을 받았다. 그 역시 천주교 신자였다. 소오는 조선의 지리를 꿰뚫고 조선말에도 능통해 왜군의 앞잡이로 선봉에 섰다. 세스페데스는 이때 일종의 종군 신부로 온 것이다. 그의 수기에 의하면 조선의 훌륭한 문화재는 모두 고니시와 소오가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었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그들은 문화재 약탈뿐 아니라 사람들도 엄청 붙잡아 갔다. 오죽했으면 강항이 ‘간양록’에서 ‘배 600∼700척이 몇 리에 걸쳐 바다를 메우고 있는데, 배마다 조선 남녀의 통곡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시킬 정도’라고 기록했을까. 고니시도 평양성 전투에서 6살 난 전쟁고아 소녀를 데려가 ‘오타’란 이름을 지어주고 길러 ‘줄리아’라는 세례명까지 얻게 했다. 도요토미가 죽은 뒤 천하의 패권을 두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벌인 대격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는 패하여 처형된다. 줄리아도 이때 외딴 섬으로 귀양가 신앙을 지키며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죽음으로써 하나의 ‘신화’가 됐다. 한편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오는 마리아와 이혼하고 도쿠가와의 가신으로 들어간다. 세스페데스는 1597년 3월에 다시 내한했다가 도쿠가와의 선교사 추방령으로 수박골에 피신해 있다 두달 후 일본으로 되돌아간다. 임진왜란이라는 한·일간의 유쾌하지 못한 전쟁통에 묻어 오기는 했지만 서양인의 첫 방문은 역사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왜성이 위치한 안골포는 임란 전승지로 유명한 곳.1952년 7월 왜 수군의 주력부대가 한산도에서 참패를 당하자 그를 따르던 가토 기요마사의 42척 제2 주력부대가 당황한 나머지 안골포에 옮겨 정박한 것을 이순신이 추격, 격파한다. 한산도해전과 더불어 안골포해전은 왜 수군 주력부대를 격멸한 큰 전공지였다. 이듬해인 1593년 2월부터 한달동안 이순신 함대는 웅포에 무려 7차례나 출격해 해전을 치렀는데, 이때 웅포 남산왜성의 왜 육군이 엄호하여 많은 고초를 겪었다. 세스페데스는 그 해 겨울 웅천으로 들어왔다. 안골포에는 굴강(掘江)이 남아 있다. 방파제와 선착장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전남 여천에 선소(船所)와 굴강이 남아 있을 뿐 거의 사라진 지금 이곳의 해양문화사적 의미는 크다. 이순신의 대격전지에 이같은 해양 유적이 전해지고 있어 감회가 새로운데 머잖아 간척될 계획이라 운명이 풍전등화다. 매립하여 공원을 조성하고 바닷물을 끌어들여도 굴강만은 살릴 계획이라지만 이 희귀한 문화유산이 전해지는 임진왜란 대첩지를 매립해 땅을 얻어 써야겠다는 문화적 반달리즘을 두고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진해는 대마도를 거쳐서 규슈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마산에서 여몽연합군이 후쿠오카쪽으로 진격해 들어갔듯 최단거리에 있는 곳이다. 그래서 조선 초기에는 본디 최초의 왜관이 자리잡은 곳도 또한 이곳 웅천이다. 왜관은 모두 세 군데에 있었으나 삼포왜란 이후에 변란을 걱정해 웅천왜성은 폐지되어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통합됐다. 이같이 일본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진해에 다시 왜인들이 나타난다. 근 300여년 만에 이번에는 왜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로 변신해 나타났으니, 그들은 지형·정서적으로 가장 잘 아는 곳부터 점령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진해만을 동양 제일의 대군항으로 키우기 위해 한반도 최초로 조직적·계획적 도시계획을 입안한다. 진해라는 말부터가 일인에 의해 처음 쓰여졌고, 옛 웅천읍성과 무관하게 신도시로 재탄생했으니 식민지 항구도시 건설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당시 비동 현동 좌천 등 여러 마을을 합해 진해라 부르고 진해만 군항지를 편의상 진해만이라 칭한 것이다. 군항지 경영에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돈인 800만원을 퍼부어 10개년 사업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바닷가 염습지와 황무지를 매립하여 땅을 얻고 농민들의 땅을 강제수용했다.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1월12일에는 해군 함정을 거제도 송진포 연안에 대놓고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내기도 했다. 송진포에 ‘일본제국 해군 가근거지 방비대’를 설치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일제는 1905년 러일전쟁의 여세를 몰아 웅천지역의 토지를 강탈하기에 이른다. 당시 시가지는 12만평이었으며, 계획도시답게 모범적 시가를 만들기 위해 도로는 방사형으로 설계했다. 그래서 오늘날 진해의 중원로터리 등을 보면 사방팔통으로 도로가 교체하는데, 여타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미관을 엄격히 고려하고 토지를 1∼3등으로 3분하여 건축을 제한했다. 건물은 2∼3층을 원칙으로 하고 4층 이상은 허가를 받아 짓도록 했다. 이곳 토지를 불하받은 일인은 히로시마 후쿠오카 도쿄 사세보 사가 조슈 나가사키 출신이 주류를 이뤘다. 한국에 오래 전에 나와있던 용산, 마산, 부산 등지의 일본인들도 이곳으로 몰려 왔다. 이로써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의 신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조선인도 참여할 수 없었으며, 목포나 군산처럼 본래의 조선인촌과 병존하게 하지도 않은 식민도시였다. 그리하여 일제 해군본부가 들어서고, 한국뿐 아니라 극동의 군항으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한국 해군의 본거지로 자리매김했다. 진해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풍경을 읽는다. 방사선으로 뻗어나간 로터리 모퉁이에 고색창연한 진해우체국이 서있어 식민지 시대를 전하고 있다. 도로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영락없는 일장기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충무공 동상으로는 전국 최초인 1951년에 창원 통영 고성 김해 마산 등에서 갹출해 북원광장에 조성한 것이다. 일장기형 도로와 이순신의 동상이 주는 이중창이 묘한 갈등으로 다가온다. 자고로 벚꽃이 유명하여 4월 초순에는 군항제가 열린다. 충무공의 구국의 얼을 추모하고 벚꽃도 즐기는 최대의 행사인데, 일본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벚꽃이 휘날리는 풍경 속에 서 있는 충무공 동상의 이미지는 왠지 좀 거북한 느낌이었다. 제황산정에는 웅장하게 솟은 탑이 있다. 일인들이 세운 러일전쟁 기념탑을 광복 후 철거하고 1967년 해군의 기함사령탑을 상징하는 이 탑으로 교체했다. 시내 로터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진해를 방문했을 때 남긴 기념휘호를 각인한 비석이 있는데 가장자리가 깨져 있다.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을 땜질해 붙여놓았다. 로터리 중심의 나무에 가려져 있어 외부인은 그런 비석이 있는 줄도 모른다. 반면에 진해 바닷가에는 도지정 무형문화재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과 전용 낚시터, 장제스를 만났다는 육각정 등이 잘 보존돼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본디 일본군 통신대가 쓰던 건물이다. 진해 사람들도 나름대로 불만이 많다. 해군기지와 해군사관학교가 있다 보니 도시의 주요 토지들은 모두 군용으로 묶여 발전이 없다. 군사도시인 탓에 규제가 심해 발족 당시의 인구에서 별반 늘어난 게 없다. 게다가 부산시와의 갈등도 내연 상태다. 신항만 건설부지의 80%를 내놓았지만 명칭이 부산신항만으로 결정되는 분위기여서 폭발 일보 직전이다. 부산신항인지, 부산·진해신항인지를 놓고 대격돌을 벌이는 중이라 이래저래 군사도시의 고충이 깊은 요즘이다. 스스로 성장하지 못하고 군항에 의지해 살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 게다가 이웃 거대도시 부산의 밀어붙이기식 행정에 진해 사람들의 시름이 깊어가고 있다. 어찌보면 가장 쾌적하고 맞춤한 인구, 공장이 적은 대신 맑은 숲과 바다를 지닌 천혜의 미항 진해이건만 미래가 투명하게 결정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벚꽃 펄펄 날리는 조건에서도 소작쟁의는 물론 동양제사 노동자들의 대투쟁, 그리고 각종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주기철 목사같이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진정한 종교인을 배출한 곳이 진해 아닌가(황정덕의 ‘진해 항일독립운동사’ 참조). 진해예술촌장을 맡아 군사도시 속에서 문화를 가꾸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박차생 진해문화원장이 망산도로 안내하면서 간절하게 전한 말은 이랬다.“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인 아유타국 허왕옥 공주가 처음 내린 망산도도 진해지요. 역사적으로 손꼽히는 국제 항구도시였으니 부산·진해신항으로 결정돼 사람들 시름 좀 덜었으면 합니다.”
  • “기성세대 가치관 깨버려”

    “기성세대의 편협된 가치관은 깨버려야 해!” 도올 김용옥의 강의는 누구를 대상으로 하든지 거침이 없다.3일 서울 상명고등학교에서 수백 명의 빛나는 눈망울을 앞에 두고도 그의 화법에는 변화가 없었다. 허물도 없었다. 당초 예정과는 다른, 중학교 3학년이 청중으로 나와 의사 소통에 다소 애를 먹기도 했지만 도올의 ‘목이 째지는’ 열강이 체육관에 가득 울려퍼졌다.2일 순천여고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 이어 이틀째. 이 시간을 통해 김용옥은 자신의 공부에 대한 경험담을 솔직하게 털어 놓으며, 한민족이 살아온 역사와 나아가야 할 방향 등 청소년들이 가져야 할 역사 의식에 대해 짚었다. 그는 “철학 부재의 시대를 사는 청소년들은 더 치열하게 공부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더 열심히 생각하는 작은 철학자가 돼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번 강의는 교육주간을 맞아 EBS가 청소년들에게 미래 사회의 건강한 주인공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자 마련했다. 매회 40분짜리로 이틀에 걸쳐 녹화된 특강은 9일부터 5일 동안 매일 밤 8시50분에 ▲공부는 어떻게 잘하나 ▲한국인 그들은 누구인가 ▲여고생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청소년과의 대화 등으로 나뉘어 ‘청소년을 위한 도올 선생 특강’이라는 제목으로 시청자를 찾아간다. 김용옥은 현재 대만 중국 러시아 등 국내외를 오가며 한국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쫓아가는 다큐멘터리 ‘도올의 한국독립운동사에 대한 이야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오는 8월초 EBS를 통해 광복 60주년 기획 10부작 특집으로 전파를 탈 예정이다. 그는 “일제의 침략에 대해 화해할 수는 있지만, 잘못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의식을 고취시키는 게 목표”라면서 “이번 작업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있고, 사명감도 다른 때와 차원이 다르다.”고 말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노블레스 오블리주 모범”

    “경북 안동지역은 독립운동의 출발지이며, 특히 안동사회의 독립운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에 옮긴 전형적인 모범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이만열 위원장은 28일 안동시민회관에서 열린 제86주년 3·1절 및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기념 학술세미나에서 안동지역의 독립운동을 이같이 평가했다. 이 위원장은 기조 발제를 통해 “독립운동은 의병운동을 포함해 1894년부터 1945년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전개됐으며, 그 첫머리를 장식한 것이 1894년 갑오의병”이라며 “갑오의병이 일어난 곳이 바로 안동이므로 이 지역이 한국독립운동의 출발지이자 발상지”라고 피력했다. 그는 “안동은 전국 시·군(평균 30명) 중 가장 많은 260여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고, 순국 자결인사도 60여명 가운데 10명이 안동인”이라며 “안동인은 해방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해 한국독립운동사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고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의병항쟁 이후 많은 유림들이 은둔생활을 했지만 안동 유림들은 자기반성과 자각을 통해 새롭게 거듭나는 길을 선택했다.”며 “이러한 ‘혁신 유림’은 국내외에서 진보적이고 통일지향적인 활동을 전개했다.”고 덧붙였다. 이어 주제발표에 나선 서강대 최기영 교수는 “안동의 독립운동은 강한 선비정신에 뿌리를 둔 지역의 문화적 배경과 무관치 않다.”고 강조했고, 국가보훈처 김용달 연구관은 “안동독립운동은 주체와 양상, 이념 등 모든 면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축소판이자 변화·발전 양상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고구려연구재단 장세윤 연구원은 “안동출신 인사들의 해외 집단망명과 독립운동 기지 개척은 한국독립운동사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면서 “안동지역 독립운동사는 한국근대사뿐만 아니라 세계 피압박 약소민족 독립운동의 모범이 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한편 안동지역에서는 학술세미나를 포함해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기념음악회, 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상황 보고회 등 다채로운 3·1절 기념행사가 열렸다. 안동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무장日軍 학교 난입… 무차별 고문…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에 진주한 일본군이 당초 출병목적은 외면한 채 한인의 독립운동을 짓밟는 데 혈안이 됐었다는 내용을 담은 미군의 정보문서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일본군은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군(赤軍)과 차르의 백군(白軍)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미국, 프랑스와 함께 출병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최근 입수한 ‘미국 시베리아 원정군 정보장교 문서’를 27일 공개했다. 이 문서는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 한인 항일독립운동을 일제가 어떻게 탄압했는지를 담고 있다. ‘일본이 시베리아의 한국인들에게 가한 야만적 가혹행위’라는 부제를 단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군은 1918년 10월부터 1919년 8월까지 에브게네프카, 하바로프스크, 니코리스크, 베리노 등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일본군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무차별 체포해 감금과 고문을 일삼았으며, 한인 학교에 무장한 채로 들어가 교과서를 불태우거나 책상 등의 집기를 부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1919년 3월15일 하바로프스크에서는 미군 병사들에게 영문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던 한인 2명을 체포해 사슬로 묶은 뒤 감옥에 2주 동안 감금하며 고문을 자행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또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한국인을 매수해 동료들을 고발케 하거나 러시아 경찰에게 금품을 대가로 조선인 탄압에 앞장서도록 하기도 했다고 문서는 전하고 있다. 국사편찬위 이상일 박사는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러시아나 일본의 기록에 의존하던 3·1운동 전후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면서 “일반인들에게도 일제의 만행에 대한 경각심과 독립 운동에 목숨을 바친 선열의 뜻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유학과 사회주의는 통한다?

    ‘사회주의와 유학(儒學)은 통한다(?).’ 이번 3·1절에 서훈을 받는 좌파계열 독립운동가 중에는 한국 유학의 본고장 경북 안동 출신이 많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정은(51) 수석연구원은 “유학과 사회주의 사상이 일맥상통하는 것이 한 요인일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어느 곳이든 유학사상이 널리 퍼져 있고 사회주의자도 많이 나왔지만 퇴계 이황(1501∼1570)이 태어난 안동의 유학중시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이번에 서훈을 받는 좌파계열 독립유공자는 54명으로 이 가운데 5명이 안동 출신이다. 남북한 시·군이 500개에 이르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것이다. 서훈자 면면을 봐도 독립장을 받는 권오설을 비롯해 김재봉·권오돈·김남수·안상태 등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들이다. ●명분중시하는 분위기 탓? 이 수석연구원은 유학과 사회주의의 비슷한 측면으로 무신론과 이상주의를 들었다. 그는 “유학이나 사회주의는 내세(來世)를 얘기하지 않고 초월적 존재인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또 사회주의는 유학처럼 현실에서 이상적 이념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학의 기본이념은 대동(大同)과 균분(均分)사회.‘나와 남을 가르지 않고 다같이 나누면서 잘사는’ 사회를 표방한다. 평등을 내세우는 사회주의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 수석연구원은 “유학은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이 균형을 유지하고 향약을 통해 가정에 침투하면서 뿌리를 내렸으나 사회주의는 혁명과정에서 권력화, 중앙집권화, 관료화돼 실패했다.”면서 “마르크스가 주장한 사회주의와 유학은 근본적으로 이념이 비슷해 안동의 명문가 양반 출신들이 좌파로 쉽게 빠졌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연구소 김희곤(안동대 사학과 교수) 소장도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독특한 지역 분위기가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것 같다.”고 거들었다. ●이육사 등 259명 배출 안동에서는 좌파계열 외에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가곡 ‘선구자’의 노랫말에 나오는 일송정의 주인공 김동삼과 김지섭, 이육사 등이 배출됐다.2002년까지 인구 17만명의 안동에서 배출한 독립유공 포상자는 모두 259명으로 전국 시·군 중에서 가장 많고, 광역 시·도인 서울 215명, 인천 44명, 제주 118명 등보다도 많았다. 포상받지 못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안동의 독립유공자는 모두 700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1905년 을사늑약 후 자결한 순국자 68명 중에도 10명이 안동 출신. 김 소장은 “명분을 중시하다 보니 ‘죽어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는 의식이 강했다.”고 덧붙였다. ●퇴계학맥의 결속력이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퇴계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다져진 사제지간과 혈맥관계 등으로 결속력이 매우 강해 한 가족이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떠나면 주변 가족도 따라갔다. 퇴계 학맥이 이어지면서 다른 지역이 한두 번 독립운동을 한 것에 비해 안동에서는 1894년 국내 첫 의병이 일어난 뒤 독립운동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퇴계 학문의 본산인 도산서원 인근 마을인 안동시 도산면 하계리에서는 모두 21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김 소장은 “호남과 충청지역은 마름을 두는 대지주가 많아 계급갈등이 심했지만 안동은 중소지주가 많아 덜 했으며, 명분을 중시하는 분위기는 양반들이 관직 등에 연연치 않고 독립운동에 손수 나서게 했다.”고 설명했다. 이 수석연구원은 “지금도 안동은 사돈의 8촌까지 다 꿰야 양반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상당히 유교적이다.”라고 말했다. 안동 한찬규·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도올, 다큐 연출자로

    도올 김용옥이 다큐멘터리 연출자로 나선다. 도올은 EBS가 8월 방영 예정인 다큐멘터리 ‘한국독립운동사 10부작’의 연출을 맡기로 했다. 도올은 최근 펴낸 책 ‘앙코르와트ㆍ월남가다’의 서문에서 “EBS에서 다큐멘터리의 총연출을 나에게 맡겼다.”고 밝혔다. 이어 “국민의식 속에서 사라져 있던 현대사를 좌ㆍ우 이념이나 남북의 분열과 관계없이 총체적으로 부활시키는 작업을 감행키로 했다.”면서 “한국독립운동사야말로 우리민족의 정체성의 뿌리라고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EBS는 “김용옥씨가 연출을 맡고 출연도 하기로 했지만, 아직 다큐멘터리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구성은 결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EBS는 지난해 12월 2005년 ‘EBS 7대 약속’ 가운데 하나인 ‘광복 60주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나갑니다’의 실천방안으로 다큐멘터리 ‘한국독립운동사 10부작’을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사설] 역사적 의미 있는 여운형 서훈

    국가보훈처가 몽양 여운형 선생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키로 1차 결론을 냈다고 한다. 공적심사 2심 회의 등이 남아있긴 하지만 올 3·1절에는 서훈이 이뤄질 전망이다. 몽양 서훈은 때늦은 감이 있다. 공산주의자로서 그의 활동은 독립운동을 위한 것이었고, 해방공간에서는 좌우합작을 주도한 통일론자였다. 몽양과 같이 좌파 독립운동을 했던 이동휘 선생도 1995년 뒤늦게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국가보훈처는 앞서 공산주의자를 서훈대상에서 제외하는 규정을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목적으로 한 활동에 주력했거나 적극 동조한 자’로 고쳤다. 몽양은 기존 규정에 의하더라도 독립유공자 자격이 충분했다. 그는 투쟁적이고, 비타협적인 박헌영과 달랐다. 이승만 정권 등이 그를 과격 공산주의자로 몰아 역사에서 지우려 한 것은 옳지 않았다. 몽양을 재평가하는 일은 광복 6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사 반쪽을 다시 찾는 작업이 본격화됨을 의미한다. 이념갈등을 넘어 미래로 나아가는 상징적 조치이기도 하다. 그러니 냉전적 발상에서 지레 서훈을 한단계 낮추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보훈처는 개정된 규정에 따라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131명에 대한 유공 심사를 벌이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 좌파 독립운동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언급이 있었다고 해서 졸속으로 심사를 진행해서는 안 된다.100명의 유공자 가운데 자격이 없거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파괴하려 했던 1명이 끼어든다면 전체가 폄훼당하고 정치적 논란을 부르게 된다. 북한정권 수립에 역할을 하거나 자유민주체제 전복을 시도한 사람은 여전히 서훈대상일 수 없다.
  • “안수길은 민족주의에 죄의식”

    소설 북간도. 일제시대 북간도 이주민의 4대에 걸친 고난을 그린 5부작 장편 대하소설로 안수길의 만주문학 걸작. 안수길과 북간도는 항상 이렇게 거론된다. 그런데 이 작품이 사실은 민족주의라는 압력으로 쓰여진 작품으로, 안수길 개인으로 보자면 오히려 혼란스러움이 담겼다는 해석이 나왔다. 동아대 한수영 교수는 3일부터 ‘동아시아 역사와 기억 속의 만주’를 주제로 동아대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에서 ‘만주, 혹은 체험과 기억의 균열’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이 내용을 발표한다. 한 교수에 따르면 이북 출신으로 일제 때는 북간도로, 해방 뒤에는 남한으로 쫓겨갔던 안수길은 항상 ‘이주냐 정착이냐.’는 문제를 안고 살았던 작가다. 안수길의 관심사는 뿌리내리기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북간도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30년대 ‘만주국’은 실제 토지소유에 대한 법적 문제나 조선인 집단부락의 안보 문제 등을 해결해줬다. 일제 괴뢰정부라는 지금의 인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이런 성향은 해방 이전에 쓰여진 ‘목축기’‘원각촌’ 같은 초기작에 드러난다. 그러나 해방 뒤 안수길은 민족주의적 시각을 요구받는다. 이제 만주는 부정되어야 할 공간이다. 이 때문에 북간도는 인물과 일상사가 살아 있던 1∼3부와 만주독립운동사가 전면에 배치되는 4∼5부가 확연히 갈린다. 더구나 안수길이 직접 체험한 30년대 만주국 시절은 10여쪽 분량으로 ‘가볍게’ 정리된다. 이는 민족주의의 의도적인 전진배치라고 한 교수는 읽는다. 정작 왜 우리는 여기로 쫓겨나왔나를 다루지 못한, 민족주의 시각에 대한 죄의식과 만주콤플렉스가 뒤엉킨 책인 셈이다. 이런 콤플렉스는 60년대에 발표한 작품 ‘효수’‘나자 머자니크’에서 해소된다. 여기서는 정착지로서 만주, 독립운동지로서 만주가 아닌 ‘타자’로서의 만주가 그려진다. 한 교수는 소설 북간도가 민족주의적이라서가 아니라 “만주에 대한 허위와 자기기만을 정직하게 반성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훌륭한 성과라고 결론지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기고] 선열들의 희생정신 되새겨야/박유철 국가보훈처장

    서대문 형무소를 향하는 길은 아직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있다. 멀리서 보이는 건물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일제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그 곳에 들어서는 순간, 잔악한 고문 광경에 민족의 비애를 느끼게 됨은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감정일 것이다. 지난 8월 국가보훈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된 재 러시아 독립유공자 유족이 “서대문 형무소에 있는 일제의 고문 기구들을 보면서 우리 증조할아버지들이 얼마나 영웅적이었는지 알게 됐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힌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립하기까지 조국 광복을 위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일본의 온갖 잔혹한 고문으로 옥사했거나 이국의 황량한 들판에서 고군분투하다 순국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분들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는 것이다. 17일은 예순다섯 돌을 맞는 ‘순국선열의 날’이다. 지난 세기 초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하에서 비운을 겪고 있을 때, 선열들은 이 나라 동천 하늘의 어두운 장막을 걷어내고 조국을 찾기까지 국내는 물론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풍찬노숙하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순국선열의 날’은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방법은 각기 달랐으나 자주독립을 이루겠다는 염원 아래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하신 선열들의 위훈을 기리는 정부기념일로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정한 ‘순국선열공동기념일’이 그 기원이다. 의병들은 항일투쟁을 벌였으며, 학생들은 독서회 등을 결성하여 독립운동 역량을 키워나갔다. 온 겨레가 하나되어 일어났던 3·1독립만세운동, 상하이임시정부의 구국활동, 독립군과 광복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우리 민족에게 자주독립의 의지를 심어 주었다. 지식인들은 계몽활동을 펼쳤고, 교육가들은 학교를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박은식 선생이나 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은 고난의 망명지에서 생활하면서도 초지일관 민족사관에 입각한 빼어난 역사서를 저술하여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셨다. 이 두 역사학자들이 집필한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사’ ‘조선상고사’ 등이 나올 때마다 일제 당국은 금서로 지정했으나 이 분들은 대한인의 자존의지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처럼 선열들은 국내외에서 일본의 감시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항일투쟁에 신명을 바쳤다. 거기에 순국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불굴의 의지로 기어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어려웠던 시대를 산 선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지고지순(至高至順)한 삶과 그 순정의 애국혼은 오랜 세월을 넘어 지금 우리들에게 소중한 정신적 가치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라고 한 안중근 의사의 유언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동암 차이석 선생이 “우리는 권력, 재력, 시간, 환경이 모자라서 독립운동이 부족함이 아니라, 우리 겨레 모두의 단결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하여 모든 독립운동 세력의 단합을 호소한 말씀은, 국민화합이 절실한 오늘날 우리 모두 교훈으로 새겨야 한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밝은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지난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일이야말로 희망찬 내일을 만들어 가는 지름길이다.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대의를 위해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오직 나라와 겨레를 위해 하나가 되었던 선열들의 위국헌신 정신을 되새겨 국가발전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하겠다.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 [문학이 머문 풍경] 영일만의 이육사

    [문학이 머문 풍경] 영일만의 이육사

    ● 광복 이후 삼륜포도원을 관리했다는 손호용(87·포항시 동해면 도구1리)옹은 “포도밭을 관리할 무렵 이육사 선생이 이미 수 차례 포도원을 다녀갔다는 것을 주위로부터 전해들었다.”면서 “당시만 해도 포도원 둔덕을 오르면 흰 돛을 단 배들이 영일만을 오가는 모습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고 말했다.영일만과 육사의 만남은 여기서도 더욱 확실히 밝혀진 것이다. 한국문인협회 포항시지부는 이들의 만남을 기리기 위해 1999년 겨울 영일만이 펼쳐 보이는 포항시 대보면 호미곶 해맞이공원 내에 ‘이육사 시비’를 세웠다.가로 3m,세로 1.2m,높이 2.5m 규모의 시비는 영일만을 찾은 고달픈 손님들에게 청포도를 대접하는 듯 서 있다. 이에 앞서 육사가 작고한 지 2년 뒤인 1946년 그의 아우 이원조에 의해 ‘육사 시집’이 엮어져 세상에 나왔다.그 후 여러 곳에서 시 전집의 출판이 이어졌으며,1968년 어린이날 육사의 고향인 안동시 낙동강변에 ‘광야’를 새긴 시비가 제막됐다.안동시는 올해 이육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도산면 원천리 육사의 생가마을 입구 부지 2300여평에 ‘이육사 문학관’을 개관했다.문학관에는 육사의 문학세계와 생애,육필원고,유품,독립운동 내용 등이 전시돼 있다.시는 또 육사를 비롯한 6형제가 살았던 생가인 육우당(六友堂)도 원래대로 복원했다.문학관에서 육사 묘소로 가는 오솔길(3.2㎞)을 ‘육사문학 로드’로 정했고,낙동강변 도로는 ‘육사로’로 명명했다.육사 시문학상 제정 및 시상,육사문학 토론회,독립운동사 학술회의 등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다양하게 열었다. 포항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신임 보훈처장 박유철씨

    노무현 대통령은 20일 신임 국가보훈처장(장관급)에 박유철(66·평택대 겸임교수) 전 독립기념관장을 임명했다. 박 신임 처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 선생의 손자로 지난 61년 보훈처 창설 이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보훈처장으로 기용된 것은 처음이다.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은 “박 처장은 제4·5대 독립기념관장을 지낼 당시 광복회 부회장을 겸임하면서 광복회로부터 지급되는 일체의 활동비를 받지 않는 등 매우 강직하고 원칙에 충실했다.”면서 “건설교통부에 재직할 때도 강직하고 청렴한 공직 생활로 주변의 신망이 두터웠다.”고 발탁 배경을 설명했다.박 처장의 부친인 박시창 선생도 광복군 사령관과 광복회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며, 부인 양준자 여사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양기탁 선생의 친손녀다. 그의 기용은 “좌·우 대립에 묻혀 있는 독립운동사를 밝혀야 한다.”고 밝힌 노 대통령의 언급과 맞물리면서 국가보훈처가 올 연말쯤 본격화할 좌파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선정작업이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박 처장은 “사회 정의가 바로 서야 한다.”며 좌파계열을 포함한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서훈을 내릴 가능성을 시사했다. 정 수석은 “국가보훈처의 부처 위상이 격상되면서 부처 업무도 보훈 대상자와 관련단체를 관리하는 것보다는 보훈대상자를 위한 예우와 복지환경 개선 등 실질적인 ‘보훈 정책’이 강화될 것으로 보여 박 처장의 역할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23) 물질로 기른 탐라여성의 강인한 힘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23) 물질로 기른 탐라여성의 강인한 힘

    ‘해녀’가 아니라 ‘잠수(潛嫂)’다.단일 마을로는 이 잠수가 가장 많아 108명에 이르는 서귀포 법환리의 조계화(65) 잠수회장은 “어릴 적에도 해녀보다는 잠수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고 증언한다.더러 ‘잠녀’라는 말도 쓰지만 잠수가 본딧말.일본에서 건너온 ‘해녀’라는 용어가 지배하고 있으나,‘확실히’ 잠수가 맞다.왜 그런가. 문헌을 살피면 ‘나잠(裸潛)’이라는 말이 보인다.나잠은 남녀를 포함한다.여성 전업은 아니어서 남자들도 물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가거도 같은 오지에도 남자 잠수가 많았으며,요마적에는 동해안에도 남자 잠수가 늘고 있다.이런 사정인데도 근래 ‘해녀’라는 말이 두루 쓰인다.하지만 역사적으로 해남(海男)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상 해녀가 모든 잠수의 대표 명칭은 될 수 없다.교과서부터 고칠 일이다. 천대받던 잠수가 ‘뜨고’ 있다.공민왕 시절 최영 장군이 몽골의 묵호들을 토벌한 마지막 격전지 법환리를 찾아드니 문화관광부에서 아예 역사문화마을로 지정했다는 입간판까지 서있다.지난 여름에는 이곳에서 잠수축제도 열렸다.그러나 잠수로 먹고 살려는 이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어리석게도 ‘잠녀잡녀(潛女雜女)’라고 경멸했던 전근대적 풍조가 잔존하는 데다 같은 제주도에서도 반가(班家)를 표방하는 이들은 물일을 피했다.험한 물일을 하지만 잠수하는 이들도 여자다.늘상 소금물에 몸을 담그니 아무리 가꾼들 피부가 어찌 거칠지 않으랴.요즈음 젊은 여성에게 매일 소금물에 몸을 담그라면,아마 억만금을 줘도 못할 일이리라. ●우는 아기 구덕에 실어두고 바다로 조선 정종 때 신광수(申光洙)는 석북집(石北集)에서 이 잠수의 광경을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했다.“일시에 긴 파람으로 숨을 토해내니,그 소리 비장하게 움직여서 수궁 깊이 스민다.”잠수의 한이 가히 용궁까지 미칠 듯하다.풍덩풍덩 물로 뛰어드는 모습이 마치 필사의 돌격대같다.숨쉬러 올라오면서 고요했던 바다는 갑자기 숨비소리로 충만해진다.매서운 엄동설한에도 우는 애기를 애기구덕에 실어두고 한숨 들이마신 뒤 뛰어드는 바다물질. 세종조 때 기건(奇虔) 목사가 눈보라가 하늬바람에 얹혀 매섭게 휘몰아치던 날,순력에 나섰다.그런데 엄동설한에 발가벗은 여인들이 무리지어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가.목사는 질려버렸고,그로부터 염치지심(廉恥之心)이 용납하지 않아 그네들 손으로 잡아올리는 전복이나 소라 따위를 일절 먹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세월은 바뀌었지만,지금도 전복 따위를 먹을 때는 한번쯤 잠수들을 떠올려 볼 일이다. 법환리에서도 예전에는 16∼17세가 되면 물질에 나섰다.꼬마들은 연습삼아서 얕은 ‘갓’(물가)에서 보말을 잡거나 우뭇가사리를 뜯었다.같이 배운 물질이지만 능력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헤엄 잘치고,채취 잘하고,신체 건장한 여자를 ‘상군’이라고 하고 그 밑으로 ‘중군’과 ‘하군’이 층을 이루고 있다.상군과 하군의 격차는 생각보다 커서 ‘내려갈 땐 한빗,올라올 땐 천칭만칭 구만칭’이란 속담까지 생겨나기도 했다. 범섬 주변은 배를 타고 나가 물질을 하고,‘갓’에서는 헤엄치면서 채취한다.주로 전복 소라 오분재기 보말 성게 해삼 톳 감태 갈래곰보 우뭇가사리 등을 채취하는데,역시나 해중 보물은 전복.봄이 오면 해경(解警),혹은 허채(許採)라 하여 금지했던 작업이 일제히 풀린다.미역은 2∼3월에 베어내며,봄철이 지나면 녹음이 짙어 뻣뻣해지므로 식용이 불가능하다.감태는 여름철에 종괴호미로 베어내 거름으로 쓰는데,이 거름을 한번 뿌리면 삼 년은 비료를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땅이 걸어진다. ●백화현상으로 해초 사라져 환경이 변하면서 전복은 눈을 씻어도 찾아보기 어렵다.소라도 수십 년을 살아 날카로운 돌기가 떨어져 나간 탓에 ‘둥구쟁이’라고 불리는 놈들은 찾아볼 수 없다.5년여 전부터 이 바다에도 백화현상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해초들도 대거 사라지고 말았다.바다가 하얗게 변하는 이른바 ‘갯녹음’이 시작된 것이다. 잠수들은 한달에 10∼12일 정도 물질을 나간다.물질은 물때에 맞춰 시작되는데,법환리 속담에 ‘물싼때랑 나비잠자당 물들어사 돔바리 잡나’란 말이 있다.썰물때는 그럭저럭 지내다가 밀물에 바다에 뛰어들어 일을 한다는 뜻이다.특히나 물이 움직이지 않는 한조금날에는 물질을 피한다.여기에다 파도까지 치면 더욱 힘들다.보통 2m의 파도라도 이런 날에는 2배 즉,수심 4m까지 영향이 미친다.너울이 심하면 전복이 눈앞에 있어도 울렁거려서 잡을 수가 없다. 이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역시 잠수병.머리가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뇌신이나 감기약 같은 것을 무턱대고 먹는다.잠수 복지정책이라며 이곳 종합병원에서 특수진료를 시작했지만 언감생심 완치는 꿈도 못꾼다.이들에게 연간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천차만별이지요.수 천만원에서 수 백만원,지금도 상군 잠수가 일본에 나가서 석달만 뛰면 1000만원은 거뜬하지요.”라고 말한다.그야말로 ‘언더우먼’이다.가사노동에다 물질까지 해서 어렵사리 번 돈으로 밭도 사고 자녀들 대학까지 공부도 시킨다.이곳에서 자란 저명인사 중 잠수 어머니의 손길로 키워낸 사람들이 많다.김계담 서귀포문화원장이 농담삼아 거든다.“그 뿐인가.남편 술값도 보태지.” 70년대부터 잠수복 다운 잠수복이 나왔지 그 전에는 추운 겨울에도 반나체로 바다에 들었다.작가 현기영은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에서,‘해촌의 포작진상은 수량이 월등히 많아 일년 열두달 바닷속 열명길을 들락날락 자멱질하여야 했다.노적가리만큼 큼직큼직한 진상꾸러미를 만들어 전복·미역·청각·우뭇가사리·산호·대모 외에 해중 귀물인 진주와 앵무조개 진상은 나중에 면제되었지만 그 대신 전복의 수량이 엄청 불어났으니 포작인의 고역은 말이 아니었다.남정네 근력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마누라와 딸자식까지 벌거벗겨 물질을 시키건만….’이라며 옛적 잠수 수탈의 역사를 고발하고 있다. ●中·러·日로 원정 잠수도 이들의 행동반경이 제주 바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부산 울릉도 독도 흑산도 등지로 나가는 이가 많았고,심지어는 중국이나 러시아,일본 등 동북아시아 전역으로까지 ‘출가’하였다.봄이면 객지로 떠나 반년 여를 물질만 하다가 가을이면 돌아오는 원정잠수도 있었다.심지어 며칠씩 배를 저어 중국 칭다오(靑島)나 다롄(大連)까지 진출하기도 했다.현지에서는 이들에 대한 착취가 비일비재해 ‘부산 영도 일대에서 (제주 잠수가)짓밟혔다.’는 일제시대의 신문기사가 이를 잘 말해 준다.심지어 선금을 제대로 못갚으면 현지에서 볼모로 잡혀 불귀의 객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한 끼 밥값이라도 아끼기 위해 좁쌀 따위의 양곡을 갖고 다녔으며,근검절약으로 돈을 모았다.아기엄마들은 아이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면서 물질을 다녔다.우도의 신화적인 잠수였던 조완아는 황해도로 물질 나갔다가 뱃전에서 아기를 낳았다.배에서 낳은 배선이,항에서 낳은 축항동이,길에서 낳은 길동이 등 자녀들의 이름을 보면 만삭의 잠수들이 출산 직전까지 물질을 했음을 알 수 있다.그 애환을 지금의 우리가 어찌 다 알 것인가. ●‘바다가 집이요,배 밑창이 칠성판’ 물질은 헤엄쳐 나가서 행하는 갓물질,15∼20명쯤이 함께 배를 타고 나가서 치르는 뱃물질이 있다.가까운 ‘앞바르’를 벗어나 외국까지 가서 오로지 배에서 먹고자면서 떠도는 ‘난바르’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바다가 집이요,배 밑창이 칠성판’이란 노래가 실감난다.용궁을 다녀온 우도 만행이할머니의 전설같은 실화는 죽음이 늘 이들 곁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사례다.그렇게 억척같이 돈을 모아 살림을 키웠으니 ‘위대한 어머니,장한 딸’이 아닐 수 없다. 그녀들은 독립운동사에서도 혁혁한 기록을 남겼다.이야기는 일제시대로 올라간다.잠수들의 권익옹호라는 미명 아래 어업조합이 발족되면서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조합장을 도사(島司)가 겸임한 탓에 제주도내에서 잠수의 권익은 애당초 고려되지 않았다.1931년,구좌면 일대 잠수들이 9개 조항의 진정서를 도사에게 제출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이들의 불만은 1932년 1월24일 세화리 잠수사건으로 폭발하고 만다.하도리의 부춘화(夫春花·당시 22세)라는 여성의 지휘 하에 1000여명이 세화리 주재소 앞에 모여든다. 당시 인구로 볼 때 1000명은 보통 숫자가 아니다.마침 도사가 이곳을 지나간다는 소식에 양손에 비창,호미 등을 들고,머리에 흰 물수건을 동여맨 채 행진가를 높게 부르면서 거리에 운집하였다.도로를 가로막고 항의를 시작하였으나 도사는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분노의 불길은 더욱 높아져 급기야 관용차를 대파했으며,결국 긴급 출동한 경찰과 충돌하기에 이른다. 그 장거(壯擧)는 지금까지 잠수의 역사로 길이 남았거니와 당시에 불려지던 노래말을 들어 보자.‘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잠녀/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추운날 무더운날 비가 오는날/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아침 일찍 집을 떠나 어두우면 돌아와/어린 아기 젖멕이멍 저녁밥 진자/하루종일 해봤으나 번 것이 없어/살자하니 한숨으로 잠못이룬다.’ 노령의 잠수들은 지금도 이 노래를 기억한다.제주 여성의 강인한 힘은 이같은 고통의 산물이리라.최대 20여m 이상의 물속을 헤집는 잠수들의 노역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니,오죽하면 미국무부에서 심해 공사와 해군력 증강을 위해 제주잠수들을 연구하기까지 했을까.잠수를 말하지 않고는 제주바다의 삶에 관한 논의는 애당초 불가능하다.제주민의 바다삶에서 잠수는 알파요,오메가이기 때문이다.
  • “김희선의원 부친 만주국 경찰” 보도 논란

    “김희선의원 부친 만주국 경찰” 보도 논란

    독립운동가 김학규(金學奎) 장군의 손녀라고 주장해온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은 족보상 김 장군과 남남이며,김 의원의 부친은 일제하 만주국 경찰이었다고 17일 발매되는 월간조선 10월호가 보도했다. 이같은 보도에 대해 김 의원측은 즉각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하며 법적 대응 방침을 밝히고 나서 김 의원 가계를 둘러싼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그동안 김 의원은 “증조모 선우순이 의성 김씨 김순옥과의 사이에 할아버지 김성범과 작은할아버지 김학규를 낳았고,이후 안동 김씨 집안에 재가(再嫁)하면서 두 아들을 데리고 갔다.이 때문에 김성범은 ‘의성 김씨’,김학규는 ‘안동 김씨’가 됐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1936년 발간된 ‘의성 김씨 태천공파’ 파보(派譜)와 1992년 제작된 ‘의성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김순옥은 1897년 사망했고 1900년생인 김학규 장군은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다고 월간조선은 보도했다. 이와 관련,김 장군의 큰며느리 전봉애(80)씨는 “김 의원의 증조할머니인 선우순 할머니가,희선이 할아버지인 김성범을 데리고 의사인 안동 김씨 김기섭한테 시집가서 김학규 장군을 낳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전씨는 “시할머니(선우순)가 우리 시어머니(김봉수 여사·김 장군의 처)에게 ‘남편이 죽고 혼자 되니 살 수가 없어 아들 하나를 데리고 안동 김씨 집안으로 시집왔다.’고 늘 말했다는 얘기를 시어머니에게서 들었다.”며 “두 사람(김성범과 김학규)은 친형제가 아니다.”고 말했다고 월간조선은 보도했다. 전봉애씨는 특히 ‘김희선 의원의 아버지 김일련이 광복 전 만주 유하(柳河)에서 경찰로 근무하면서,독립운동가를 색출해서 취조했다.’는 한 제보자의 주장에 대해 김일련씨가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유하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한 사실을 확인해줬다고 월간조선은 보도했다.전씨는 “그건(만주국 경찰 근무 사실) 김희선 의원의 삼촌들도 다 알았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희선 의원은 “확실한 증거 없이 나와 내 가족을 음해하는 세력의 일방적인 진술만을 근거로 사실과 다른 부분에 대해 마치 사실인 양 보도한 비열한 월간조선의 보도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면서 “나와 가족의 명예를 지극히 훼손한 월간조선과 해당기자의 악의적 보도에 대해 법적대응할 것임을 밝힌다.”고 반박했다.이어 “17일 내 가족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가족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김상연 김준석기자 carlo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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