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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날의 독립정신 93년만에 되살린다

    그날의 독립정신 93년만에 되살린다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봉화시위가 처음 열렸던 충북 청원군 강내면 태성리에서 93년 만에 봉화시위가 재현된다. 강내면 주민들로 구성된 조동식(1873~1949) 선생 추모추진위원회는 1일 태성리 마을 뒷산에 있는 조 선생 묘소 앞에서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제를 열고 봉화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중국에 살던 조 선생의 증손자인 흥연(66)씨가 3년 전 귀국해 조촐하게 추모행사를 가진 게 계기가 돼 민간단체들이 마련한 행사다. 조방형(58) 추진위원장은 “봉화시위를 주도했던 조 선생이 잊혀져 가는 게 안타까워 이 같은 행사를 마련했다.”면서 “앞으로 해마다 3·1절에 봉화시위를 재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조 선생은 1919년 3월 23일부터 3일간 마을 뒷산에서 동네 장정 수십명과 함께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국민들이 독립을 위해 횃불처럼 일어나라는 의미였다. 이 뜻이 전해지면서 첫날에는 인접한 강외·옥산·남이면 주민들이 횃불시위에 동참했고 24일과 25일에는 충남 연기군과 경기도까지 횃불시위가 확산됐다. 조 선생은 횃불시위 주동자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2년간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키 180㎝에 건장한 체격을 자랑했던 조 선생은 출소를 앞두고는 뼈만 남아 잘 걷지도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웃들이 출소하던 날 서대문형무소로 가마를 가져가 그를 모셔 왔다. 흥연씨는 “잘못했다는 각서를 쓰지 않고 저항해 2년 만기를 다 채우고 출소하셨다.”면서 “독립운동 선언에 참여한 33인 가운데서도 2년간 옥고를 치른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출소 후에도 일본 경찰의 괴롭힘은 계속됐다. 결국 조 선생은 일본 감시를 피하기위해 가족들과 중국으로 망명했다. 새우젓 장사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돈을 모아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조 선생은 해방이 돼서야 고향으로 돌아와 7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하지만 조 선생은 오랫동안 독립운동사에 당당히 오르지 못했다. 중국에 남아 있던 손자가 중공군 장교로 6·25전쟁에 참전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1970년대까지 ‘연좌제’로 고통을 받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흥연씨는 공무원 시험에서 이유 없이 낙방했다. 나중에 중앙정보부가 압력을 넣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손자가 나중에 인민해방군 상장을 거쳐 중국 최고 정책자문기구인 ‘전국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1998∼2003년)까지 오른 조남기(86)다. 그는 현재 중국 외교부 산하 우호협회의 명예총재를 맡고 있다. 조 선생은 1990년 가족들이 당시 판결문을 찾아내 정부에 강력히 건의하면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조씨는 “3·1절이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의 삶을 되돌아보는 날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청원 남인우기자 niw7263@seoul.co.kr
  • [독자의 소리] 오늘의 유학생과 ‘2·8선언’/국가보훈처 행정사무관 장정옥

    1919년 2월 8일에 일본 도쿄에서 한국유학생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2·8 독립선언은 독립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날이다. 당시 민족자결주의의 발표로 약소국 독립의 기운이 생겨나고 있음을 간파하고 적의 심장부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하였다. 당시 해외 유학생들은 지사 또는 선각자로서 활동했다. 자료를 보면, 해외로 나가는 학생이 꾸준히 늘어 한국인 유학생이 25만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취업에 대비한 어학연수를 떠났거나 외국 대학과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고자 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유학 환경은 역사 변천사만큼이나 크게 달라졌다. 해외 유학생을 둔 가정의 가장은 기러기 아빠가 되고 환율의 변동 폭에 따라 생활여건이 어려워졌다. 자랑스러운 유학생의 기개와 정신을 되새기고 이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역경을 극복하여 역량 있는 인재가 되어 안정되고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국가보훈처 행정사무관 장정옥
  • 정론직필 언론인 ‘송건호 평전’ 파란과 곡절의 이야기 오롯이

    ‘글 쓰는 사람은 절대로 기분에 따라 이렇게 혹은 저렇게 횡설수설을 해서는 안 된다. 그 글에는 논리가 일관되어 있어야 하고 전에 쓴 글과 다음에 쓴 글 사이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 어떤 때는 이런 소리를 하고 어떤 때는 또 저런 소리를 하는 식의 글을 써서는 안 된다. 글은 사람의 인격 표현이라고 했다.’ 평생 정론직필을 추구하면서 참 언론인으로 살다 간 청암 송건호(1926~2001)는 곡학아세(曲學阿世)를 질타하고 진실한 글쓰기를 요구하고 실천했다. 청암이 언론인으로 활동한 30여년은 이승만·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이어진 독재정권 시대와 온전히 겹쳐 있어 평생을 독재와 싸우느라 많은 수난을 당해야 했다. 30대 초반부터 논설위원으로서 역사와 정세의 맥을 관통하는 사설과 칼럼을 집필하면서 필명을 떨치고 신망을 쌓았다. 그래서 늘 독재정권의 포섭대상 1순위였고 그럴수록 청암은 “나는 분단조국에서는 관리를 안 하기로 결심했다.”는 말로 유혹을 물리쳤다. 충북 옥천 태생인 청암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등을 거쳐 1975년 언론현장을 떠나 본격적인 현대사 탐구와 왕성한 필력으로 ‘민족지성의 탐구’ 등 주요 저서를 잇따라 저작했다. 그러던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고 19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의장에 선임돼 언론자유수호 투쟁의 선봉에 섰다. 1988년 한겨레신문을 창간하고 초대 대표이사를 맡아 언론독립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했다. 1993년 야인으로 돌아간 청암은 애장도서 1만 5000여권을 한겨레신문사에 기증, ‘청암문고’를 개설했다. 이러한 파란과 곡절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담은 ‘송건호 평전’(김삼웅 지음, 책보세 펴냄)이 따끈따끈하게 최근 나왔다. 청암 작고 10주기에 맞춰 출간된 이 책은 그의 정론정신을 기리는 헌사이자 현직 언론인들에게 울리는 경종이기도 하다.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인 저자는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 주필과 제7대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번 책은 저자의 한국근현대인물평전 14번째에 이른다. 2만원.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 [독자의 소리] 이봉창 의사 훈격 상향해야/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연구위원 윤주

    10일은 이봉창(李奉昌) 의사 순국 제79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의사는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 일왕이 도쿄 교외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궁성으로 돌아갈 때 일왕을 향하여 폭탄을 던지고 현장에서 체포돼 그해 10월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민족의 기개를 드높이며 당당한 모습으로 불멸의 길을 가신 의사의 애국혼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의사의 도쿄 의거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안중근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함께 우리나라 항일독립운동사의 3대 의열투쟁인데도 2등급 훈장이 추서됐다.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린 도쿄 의거는 반드시 재평가 작업이 이뤄져야 하고 너무 낮게 추서된 훈장의 훈격도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에게 추서된 훈장과 같은 1등급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현재까지 1등급 훈장이 추서된 30여분의 공훈과 비교해도 의사의 위업은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 정부는 즉시 이봉창 의사의 건국훈장 훈격을 1등급 대한민국장으로 상향 조정하길 바란다.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연구위원 윤주
  • [8·15 66주년] “음지서 독립 투쟁한 여성도 수만명… 정부가 증언·사료 수집해 예우해야”

    [8·15 66주년] “음지서 독립 투쟁한 여성도 수만명… 정부가 증언·사료 수집해 예우해야”

    “들꽃은 늘 조명받지 못했다. 오히려 발에 밟히고 차였다. 그러나 들꽃의 생명력은 강하다. 그들은 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피어있다.” 시인 이윤옥(52·여)씨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들꽃이라고 말한다. 지난 6월 출간된 그의 두번째 시집 ‘서간도에 들꽃피다’는 역사의 뒤편에 묻혀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한 최초의 시집이다. 이씨는 “최초의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 광복군 여성대원들의 맏언니였던 오광심은 물론 밥 짓고, 군복 만들고, 독립자금 조달한 여성들도 모두 독립유공자”라면서 “이들을 기억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워 시로 그들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씨는 “‘(여성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려면 증거를 가져오라’는 정부의 독립유공자 심사체계는 어불성설”이라며 “정부가 직접 여성독립운동 사료를 수집하고 드러나지 않은 여성 유공자들을 발굴해 걸맞은 예우를 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생사를 건 엄혹한 시기에 그들이 독립투쟁의 흔적을 남겼겠느냐.”면서 정부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66돌을 맞은 광복절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신문사에서 이씨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평가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역할이 형편없이 과소평가돼 있다. 남성 독립유공자가 수만명이라면 여성 유공자의 숫자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공인된 독립유공자 1만 2966명 가운데 여성은 204명에 불과하다. 직접 총과 폭탄을 들고 싸운 여성도 적지 않지만 뒷전에서 밥 짓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나르는 등 음지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한 여성들도 모두 독립유공자 아니겠는가. →현재의 독립유공자 심사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말인데…. -스스로 서류를 제출해 독립운동을 증명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려면 직접 증거자료를 수집해 국가보훈처 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안다면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일본군에 쫓겨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일부러 서류 등 흔적을 없앴는가 하면 가명을 서너 개씩 쓰기도 했다. 그나마 명단에 오른 분들은 후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기록을 수집하고 정리해 가능했다. 독립유공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사는 분들도 많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개선해야 한다고 보는가. -간단하다. 정부가 나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국내와 일본신문만 봐도 적잖은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평남도청에 폭발물을 던진 안경신 의사의 경우도 ‘여자폭탄범’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다. 또 백범일지를 보면 연미당·정정화 여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렇게 하나하나 기록을 되짚어 찾는 것이 국가가 할 일 아니겠는가. 생존해 있는 여성독립운동가가 몇 분 안 된다. 그들의 증언이 가장 중요하다. 빨리 그 분들의 구술을 문서로 기록해 둬야 한다. →여성독립운동가를 주제로 한 시를 쓰게 된 계기는. -몇 해 전 강의를 하던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독립운동가를 아는 대로 써 보라고 했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댄 학생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나마 태반이 유관순 열사였다. 그런 현실이 서글펐다. 그때 가까이 두고 읽을 수 있는 시집으로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는 어떻게 수집했나. -기록이 거의 없었다. 국가보훈처 자료도 여성유공자 한 명당 서너줄의 기록이 전부였다. 그때부터 이들의 활동무대를 직접 찾아 나섰다. 중국 상하이, 광저우, 항저우, 충칭 등을 답사했고, 춘천 부산 나주 인천 수원 등을 돌면서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나 생존한 여성독립운동가가 6명에 불과해 자료 수집도 쉽지 않았다. 생가와 묘지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경북 안동에서 김락 지사의 묘소를 찾아가는 데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해야 했을 정도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년 3·1절에는 여성독립운동가를 주제로 두 번째 시집을 내고 싶다. 이미 펴낸 시집도 공공도서관이나 초·중·고교에 보급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만 쉽지 않다. 얼마 전 요양원에 계신 이병희 여사를 찾아가 직접 시를 낭송해 드렸다. 눈물이 쏟아져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앞으로 시를 통해 여성 독립유공자 200여명의 숭고한 일생을 재조명해 보고 싶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그녀들 내조·활약상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녀들 내조·활약상은 기록되지 않았다

    일제 강점에 맞선 독립운동가 가운데 여성들은 많지 않다. 말없이 오직 조국의 독립에 몸을 바쳤지만 역사적 평가는 미미하다. 드러내지 않고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뒷바라지한 데다 공적으로 입증할 사료나 증언을 확보할 수 없었던 탓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정부가 인정한 독립유공자는 1만 2966명이다. 여성은 전체의 1.57%인 204명에 불과할 뿐이다. 유공을 인정받은 여성들의 활동 내역은 3·1운동이 64명으로 가장 많다. 이어 국내 항일 운동 52명, 광복군 활동 24명, 중국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15명, 임시정부 활동 13명, 국내 학생운동이 12명이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으로 서훈을 받은 사람이 132명으로 전체의 64%이고, 해외 독립활동은 72명이다.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의 맏며느리 조계진 여사는 1919년 신혼의 단꿈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편과 함께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구한말 학부 대신을 지낸 조정구의 외동딸이자 영친왕의 외사촌인 조 여사가 보이지 않는 독립운동에 뛰어든 시점이다. 시아버지와 남편 이규학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을 종횡하는 동안 조 여사의 집에는 독립군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저자에서 돈을 빌려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것은 조 여사의 몫이었다. 먹거리를 마련하고 옷도 지었다. 신채호, 김창숙, 이을규 등 내로라하는 독립 운동가들은 모두 한번쯤 조 여사에게 신세를 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는 과정에서 조 여사는 두 딸을 질병으로 잃기도 했다. 조 여사의 아들인 이종찬(전 국정원장)씨는 “상하이 시절 아버지가 마작을 배우자 어머니께서 백범 김구 선생께 일러 혼을 내고 다시 독립운동에 나서게 만드셨다.”면서 “독립에 대한 열의는 그 누구보다 높으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 여사는 정부로부터 훈장은 물론 포장도 받지 못했다. 역사는 이회영 선생과 그의 아들들만 독립투사로 기억하고 있다. 광복 이후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묻혔다. 독립의 초석을 마련하는데 헌신했지만 알려지지도 기억되지도 않은 것이다. 때문에 기억 저편에 머물러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뜨거운 조국애와 숭고한 일생을 치밀하게 복원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뒤늦게 커지고 있다. 204명만 여성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현실 속에서 든든한 독립지원군 역할을 도맡았던 여성들의 활동이 제대로 평가될 리 없다.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이자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 선생의 손자며느리 허은 여사의 삶도 마찬가지다. 1915년 서간도로 이사한 허 여사는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어머니’가 된다. 겨울철 얼음을 깨 시린 손을 불어가며 군복을 빨았다. 아픈 학생들을 손수 간호했다. 수십리를 마다하지 않고 걸어서 군자금을 날랐다. 국내에 남은 독립군의 아내들도 처지는 매한가지였다. 장준하 선생의 부인인 김희숙(85) 여사는 1943년 일본군 위안부인 이른바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17세에 결혼을 했다. 하지만 다음해 장준하가 일본군을 탈영해 독립운동에 몸담자 24시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는 처지에 놓였다. 결혼 전 김 여사는 애국청년회에 가입, 독립운동의 연락책을 맡았던 전력이 있었다. 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만주와 상하이로 떠난 여성들은 독립군의 안살림을 맡아 생활을 돌봤다. 때로는 군자금 마련에도 나서는가 하면 일경의 눈을 피해 위험천만한 연락책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역사에 그들의 이름은 없다. 독립운동사의 한 귀퉁이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국내 독립운동보다 해외의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했다. 이에 따라 국내 독립운동가들보다 해외 독립운동가의 숫자가 더 많아야 하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해외 독립운동의 경우, 발굴이 어려워 해외 활동으로 유공자가 된 여성 비율은 35%에 그치고 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실장은 “3·1운동 이후 국내의 독립운동은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다. 따라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상하이로 떠났고, 여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면서 “현재 국가가 인정한 여성 독립유공자가 전체의 1.5%에 그치는 것은 그만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여성의 발굴이 덜 됐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우당 기념사업회 관계자도 “당시 독립군 일가 모두가 중국이나 다른 곳으로 망명해 활동을 벌였다.”면서 “여성은 지아비를 따라 망명 가는 것이 당연했고 그곳에서 집안일을 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독립군을 뒷바라지했다. 지금도 군에서 지원병이 있지 않나. 이들이 한 역할이 바로 지원병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한 역사학자도 “1920년대 이후 여성들의 활동이 좀 더 활발해진다.”면서 “하지만 당시 정서에도 여성이 어떤 조직이나 단체의 발기인으로 나서는 것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었기에 기록을 찾는 데 한계가 있다.”며 아쉬워했다. 보훈처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발굴이 덜 됐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유공자 지정에는 적잖은 어려움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보훈처 측은 “유공자 지정을 위해서는 1차 사료가 필요하다.”면서 “하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여성이 전면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지원하는 위치에 있었던 만큼 문건이나 자료에 남아 있는 분들이 별로 없다.”고 전했다. 독립유공자 지정을 위한 1차 사료의 부족으로 공을 인정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단국대 한시준 교수는 “역사적인 차원에서 구술이라도 이들에 대해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데 이미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다.”면서 “독립기념관 등에서 이런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대부분이 고령인데다 구술사 정리사업 기간을 장기로 잡고 진행하고 있어 문제다.”라고 말했다. 김동현·김소라·김진아기자 moses@seoul.co.kr
  • [145년만에 돌아온 외규장각 도서] “‘대여’라는 말 없애 영원히 고국에 남겨야”

    [145년만에 돌아온 외규장각 도서] “‘대여’라는 말 없애 영원히 고국에 남겨야”

    “의궤가 한국에 영원히 남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협심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외규장각 도서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린 재프랑스 서지학자 박병선(83) 박사는 11일 외규장각 도서 귀환 대국민 환영식에 앞서 “지금 이렇게 의궤가 한국에 와 우리가 기쁨으로 축제도 하고 하지만, 우리의 의무는 아직도 남아 있다.”며 이렇게 당부했다. 이날 박 박사는 “그 의궤가 영원히 한국 땅에 남아 있게 하고 ‘대여’란 말을 없애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협심해서 손에 손을 잡고 장기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의궤가 다시 프랑스에 가지 않고 한국에 영원히 남도록 노력해 주길 부탁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대한 소감을 묻자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여기다 쓰는 말일 것 같다.”면서 “가슴이 뭉클했고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고 답했다. 외규장각 도서가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우연히 국립도서관의 폐지 놓는 창고 속에서 (존재 사실을) 알게 됐지요. 그것을 찾아서 여러분들께 알려줬다는 것은 개인의 일이 아니라 국민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지요.”라고 답했다. 그는 영구 귀국 의사에 대한 질문에는 “여러 자료가 프랑스에 있기 때문에 완전히 한국에 올 수는 없다.”면서 “그러나 한국에 자주 와서 한국의 여러 역사가들과 그쪽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독립운동사를 완벽하게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경술국치 100년] 60여명 단식·할복·음독으로 일제 항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 따르면 한말의 자결순국은 1905년 5월 주영공사서리 이한응이 처음이었다. 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이 사실상 외교권을 빼앗긴 데 이어 영국의 인도 점령과 일본의 대한제국 점령을 상호 인정하는 내용의 제2차 영·일동맹이 추진되자 영국정부에 항의하다 음독했다. 이후 1919년 칠곡 유생 유병헌이 총독부에 세금납부를 거부한 채 옥중 단식자결을 하기까지 모두 60명이 다양한 방식의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했다. 2007년 작성된 이 기록은 그러나 북한지역의 통계는 제외된 것이다. 또 남한지역에서도 1920년 안동 유생 이명우와 권성 부부가 ‘나라를 잃고 10년 동안 분통함과 부끄러움을 참았으나 이제는 충의의 길을 가겠다.’는 ‘비통사(悲痛辭)’를 남기고 함께 음독한 사실이 최근 새로 밝혀지는 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순절자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국가보훈처도 새로 드러난 15명 안팎의 자결순국자를 유공자로 인정할 것인지 심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앞으로 조사 및 연구 결과에 따라 한말 자결순국자의 숫자는 지금보다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한응이 순국한 1905년에는 영의정 조병세가 음독하고 민영환이 할복한 것을 비롯해 김봉학, 이상철, 홍만식, 송병선, 이봉환, 이봉학 등 9명이 목숨을 끊어 저항했다. 1910년에는 8월29일 강제합병이 공표되어 자결순국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9월29일 퇴직 관원과 군인, 노인 유생 등에게 이른바 은사금을 지급한다는 발표는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해에만 3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 성균관박사 김근배와 전 중추원 의관 송주면은 우물에 몸을 던졌고, 전 궁중내관 반하경은 할복했다. 청원의 김정환은 스스로 목을 베었고, 관인 정동식은 전주 공북루에 목을 매는 자경(自縊)을 택했다. ‘매천야록’으로 유명한 황현은 절명시 4편을 남기고 음독했다. 중추원 의관을 사직한 장태수 등은 곡기를 끊었다. 백정 황돌쇠도 순사했다. 1911년에는 유생 장기석이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식 참석을 거부하여 투옥된 뒤 옥중 단식했고 1912년에는 을사오적을 성토한 ‘토오적문’을 쓴 송병순이 은사금을 거절하고 독배를 들었다. 1913년에는 창릉참봉을 지낸 노병대가 단식했고, 1914년에는 의병장 김도현이 바다에 몸을 던졌다. 1916년에는 대종교 초대 교조 나철이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절했다. 이렇듯 타협을 거부한 우국지사들의 자결순국이 이후 항일운동에 정신적 동력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서동철 부국장 dcsuh@seoul.co.kr
  • [방치되는 독립유적지] 신간회 창립본부 터 기념표석 하나 없이 모텔만…

    [방치되는 독립유적지] 신간회 창립본부 터 기념표석 하나 없이 모텔만…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섰던 선열들의 항일 유적지에 대한 방치는 소중한 역사 자산에 대한 국민적 무지를 드러내고 우리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서울의 파고다공원(변형)·태화관(멸실)·독립문(변형), 충남 천안의 유관순 생가(복원), 충남 홍성의 김좌진 생가(복원), 경남 하동의 무명 의병 공동묘지(훼손) 등 1585곳의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를 3년 넘게 조사해 온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자료를 토대로 유적지 훼손 실상을 살펴본다. ●흔적조차 없는 안타까운 현실 서울 종로구 관수동 143번지. 나이스코리아 빌딩과 S모텔 등이 들어선 이곳은 1920년대 후반 활동했던 대표적인 항일단체인 ‘신간회’ 창립본부 터였다. 지금은 모텔 등이 들어서 신간회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주민 최모(55)씨는 “20년 넘게 이곳에 살았지만, 신간회 창립본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본 적이 없다.”면서 “신간회가 어떤 단체인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관련 자료가 없어 어쩌면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좌우익 세력이 조국 독립을 위해 결성한 신간회 창립본부 자리였던 만큼 최소한 기념표석이라도 설치해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희제 선생이 국외 독립운동지도자들과의 연락망이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부산에 설립했던 ‘백산상회’도 사라진 유적지다. 부산 중구 동광동 3가 12번지의 백산상회 터에는 프라임 원룸이 들어서 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10-2번지에 백산기념관이 마련돼 있지만, 부산지역 독립운동과 관련된 학습장으로 활용하기는 미흡한 실정이다. 또 지리산 기슭인 경남 하동군 화개면 의신마을 인근 ‘항일의병 공동묘지’는 무덤 흔적만 남아 있다. 한·일 강제병합 2년 전 일제에 결사항전하다 최후를 맞이한 의병 30여명이 묻혀 있는 곳이다. 이른바 ‘무명 항일투사 공동무덤’으로 불린다. 과거사정리위워회가 이곳을 복원할 것을 권고했으나, 국가보훈처와 하동군은 계속 내버려 두고 있다. ●“정부·지자체 보전대책 세워야” 1921년 설립돼 경북 영천지역 민족교육의 산실로 불린 ‘백학학원’은 붕괴 직전의 폐가로 방치돼 있다. 백학학원은 이육사, 조재만, 이원대, 이진영 등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잡초가 우거진 텃밭과 방문마저 떨어져 나간 폐가만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서 이육사 등 독립운동가들이 교육을 받았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다. 일부에서는 이곳을 복원한 뒤 표지석과 안내판 등을 설치해 교육현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전남 보성군의 교통 중심지인 복내면 복내리 379 일대는 ‘원봉’ 안규홍 의병부대의 손꼽히는 전투지다. 한말 후기 의병을 대표하는 안규홍 부대는 이곳에서 일본군에 맞서 항일투쟁을 벌였다. 당시 일본군 수비대가 주둔했던 건물은 사라지고 현재 민가가 들어서 있다.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안내판이나 표지석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 동남쪽에 건립됐던 ‘독립문’(1879년 11월·서대문구 현저동 941)도 1979년 성산대로 고가도로 건설로 원래 위치에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졌다. 반면 3·1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 생가’(충남 천안)와 ‘손병희 선생의 유허지’는 복원돼 교육·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밖에 충남 홍성의 ‘김좌진 장군 생가’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역임한 ‘조성환 선생 생가’, 충북 제천의 의병 창의지인 ‘자양영당’ 등도 복원돼 학생과 관광객을 맞고 있다. 이정은 연구위원은 “국내 유적지 가운데 상당수가 후손이나 기념사업 주체가 없어 방치·훼손되고 있다.”면서 “보전 가치가 높은 유적지는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보전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독립유적지 92% 사라지거나 훼손…부끄러운 후손

    독립유적지 92% 사라지거나 훼손…부끄러운 후손

    올해는 광복 65주년, 경술국치 100년인 해다. 치욕스러운 역사에 대한 국민적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가운데 국내 독립운동 유적지 10곳 가운데 9곳이 정부와 국민의 무관심으로 방치돼 이미 사라졌거나 훼손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던지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13일 국가보훈처 용역의뢰를 받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김상기)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수천 곳(추정)의 독립운동 유적지 가운데 우선 보존 가치가 높은 1585곳을 대상으로 벌인 ‘독립운동 유적지 실태조사’에서 밝혀졌다. 조사는 2007년 8월부터 올 1월까지 이뤄졌다. 전국적인 독립운동 유적지 실태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현충시설 지정 1616곳중 독립관련 29곳뿐 조사 결과 조사 대상 유적지 가운데 멸실돼 흔적을 찾기 어려운 곳이 무려 868곳(55%)으로 파악됐다. 521곳(33%)의 유적지는 변형됐고, 9곳도 상당 부분 훼손된 것으로 나타났다. 원형 보존유적지는 125곳(8%)에 불과했다. 나머지 1460곳(92%)이 이미 사라졌거나 심하게 훼손·변형돼 유적지의 기능을 잃었다. 이중 62곳은 그나마 복원됐다. 1920년대 후반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결성한 대표적인 항일단체인 ‘신간회 창립본부 터’(서울)와 1914년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산에 설립된 ‘백산상회’ 등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 생가’(충북 청원)와 ‘김좌진 장군 생가’(충남 홍성) 등 9곳은 다시 복원돼 교육·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역임하면서 한국광복군 창설의 기틀을 마련한 ‘청사 조성환 선생의 생가’(경기 여주)와 충북 제천의 의병 창의지인 ‘자양영당’ 등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유적지다. ●광복 65년되도록 정부차원 조사 안해 연구소는 “유적지 훼손은 광복 65년이 지나면서도 정부가 단 한 차례도 실태조사를 벌이지 않은 무관심과 방치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국내 항일 독립운동 및 6·25 전쟁과 관련된 전국 1616곳의 시설물 등을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이 가운데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는 29곳에 불과할 정도다. 연구소 이정은 책임연구위원은 “이번 조사에서 빠진 미확인 유적지와 1차 조사 대상 가운데 심층조사가 필요한 유적지를 정밀조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방치되는 독립유적지] “유적지들 등급별 지정 교육·관광자원 활용을”

    [방치되는 독립유적지] “유적지들 등급별 지정 교육·관광자원 활용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정은 책임연구위원은 13일 ‘항일 독립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결과를 토대로 유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보전과 교육·관광자원으로 활용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독립운동 유적지 실태조사의 추진 배경과 의미는. -이번 조사는 정부수립 이후 국내 유적지에 대한 첫 종합조사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동안 광복 이후 분단과 6·25전쟁, 빈곤해결 등에 쫓겨 유적지를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또 문헌 중심의 역사학이 이뤄지면서 공간적 배경인 유적지가 소외된 측면도 있다. 특히 유적지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훼손됐고, 이어 산업화와 개발로 사라진 곳도 많다. 조사는 국내의 독립운동과 국가수호 유적지를 체계적으로 관리·보전하는 한편 교육·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실시됐다. →4년간의 실태조사에서 어려웠던 점은. -먼저 문헌자료를 조사한 뒤 이를 토대로 현장조사에 나섰다. 이번에 확인된 유적지의 위치는 5000분의1 지적지도에 표시했다. 또 이런 작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지역에 따라 독립운동사 분야 전문연구자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역사학계가 얼마나 취약한가 하는 것도 실감했다. →유적지 보전을 위해 어떤 대책과 지원이 필요한지. -우선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관리대책이 수립돼야 한다. 이것은 국가적 견지에서 유적지에 대한 중요도에 따라 선정기준을 수립하고, 이에 따라 국가급, 시·도급, 시·군·구급 등 등급별 지정이 필요하다. 정부 공식 기구를 통해 체계적이고 효율적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 →유적지 보전·활용 방안은. -유적지는 현재를 사는 국민들에게 책임감과 양심을 일깨우는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 유적지가 국가와 지역의 자산이라는 인식전환이 우선돼야 한다. 유적지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인근 문화와 함께 연결하는 문화적 전략도 필요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스토리이다. 특히 독립운동 유적지는 거의 자취가 없어서 유적지에 얽힌 스토리를 발굴해야 한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역사학계의 협력도 필요하다.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치밀한 역사왜곡… 후손인 우리가 수치심 느껴야”

    “치밀한 역사왜곡… 후손인 우리가 수치심 느껴야”

    “후손인 우리가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것 아니냐.” 한나라당 노철래 의원은 동북공정의 현장과 마주한 기분을 이렇게 밝혔다. 노 의원뿐 아니라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처음이라고 29명의 국회의원들은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온 반응은 “듣던 것보다 훨씬 치밀하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로 심각한 줄 몰랐다” 지난 4일 이른 오전, 의원들은 백두산 장백폭포의 멋진 경관에 한껏 들떴다가 일순 표정이 어두워졌다. 입구에 놓여진 간이지도 표지판 때문이었다. 백두산 봉우리들을 그려놓고 양 옆에 압록강과 투먼(圖們)강으로 영토 경계를 표시해 놓았다. 국사학을 전공한 한나라당 안형환 의원이 “간도 분쟁을 피하기 위해 우리 영토를 의도적으로 축소시킨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안 의원은 “1712년 조선과 청나라가 세운 백두산 정계비에는 우리 영토의 경계로 표시된 ‘토문강(土門江)’을 우리나라는 송화강의 발원지로 보고 있다.”면서 “그런데 중국은 이를 의도적으로 ‘투먼강’으로 해석해 간도 일대가 조선령이 된다는 역사적 해석을 미리 막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김동성 의원은 “그동안 동북공정이 진행된다는 것은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이진복 의원은 “중국의 이토록 체계적인 접근에 더욱 경악했다.”면서 “이러한 상황이 더 오래가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고 후손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노 의원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남북이 분단되는 과정을 겪고 정치적으로 격동기를 경험하면서 동북 3성에 대한 관심을 가질 기회가 별로 없었다. 너무 소홀했다.”면서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한 데 대해 후손으로서 부끄러움을 갖고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中, 독립운동사 부각 ‘부담’ 비단 고대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중국은 큰 틀에서 우리의 민족성과 역사에 대한 흔적이 부각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다. 5일 청산리대첩 승전 90주년을 맞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린(海林)시 싼스(山市)진에 있는 김좌진 장군 순국지에 개관한 ‘백야광장’도 정작 중국 땅에서는 제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다. 국가보훈처에서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에 예산을 지원해 조성했지만, 정작 중국 당국은 성역화 사업에 대해 거부감을 보였다. 그래서 ‘한·중 우의광장’이라고 이름을 짓고 마을에 광장을 조성해 주민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역시 하이린시에 있는 김좌진장군 기념관(2001년 개관)도 중국에서는 ‘한·중우의공원’일 뿐이다. 이러한 기념 사업도 대부분 개인이 추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좌진장군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한나라당 김을동 의원은 “중국에서 대한민국의 국가유공자를 기리는 사업에 대해 시각 자체가 너무 날카로워 이를 이겨내는 데 한계점이 많았다.”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나마 뒷전이었다.”고 토로했다. 김 의원은 중국땅에서 기념사업들을 진행하기 위해 살던 집을 팔면서 사비를 털었다. 아들인 배우 송일국씨가 힘을 보태는 정도다. 이경재 의원은 “역사를 기리는 일을 이렇게 개인의 힘으로 힘겹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면서 “그러나 당분간은 기념사업회나 역사재단 등에 지원을 더 하면서 중국에 보다 유연하게 다가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갈등 피하려 ‘대접’ 스스로 포기 6일 오전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서 의원들은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가 당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저격한 거사 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5시간 남짓 기차를 타고 도착한 현장이었다. 그런데 의원들의 등장에 중국 공안들은 당황하며 출입을 막았다. 의원들의 몸을 막으며 강하게 제지했다. 다시 역 밖으로 나가서 표를 사서 들어오라는 등 갖가지 핑계를 댔다. 한참의 승강이 끝에 결국 4~5명씩 짝을 지어 조용히 현장을 보기로 하고서야 의원들은 발을 뗄 수 있었다. 이번 일정이 국회의원 신분으로 방문한 게 아니라 철저히 민간인, 일반 해외 여행객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지난 3월에도 김을동 의원이 주최해 15명의 의원이 하얼빈역을 방문했지만 그때에는 아예 역 안으로도 발을 들여놓을 수조차 없었다. 겨우 눈으로 보게 된 거사 현장이라고 해봤자 플랫폼 바닥 안 의사가 서 있던 곳에 삼각형,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을 당한 곳에 사각형으로 각각 표시를 해둔 것이 전부였다. 어디에도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라는 글자는 없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당초 표지판을 세울 계획이었으나 일본의 견제로 중국에서 부정적 의사를 밝혀 도형으로 표시만 할 수 있게 승인해 준 것”이라면서 “중국에서 우리의 역사현장을 보존하는 것에 계속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정치인이나 정부에서 외교적 채널을 통해 양국의 양해를 얻는 방법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중·일 3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동북 3성이 현재는 외교적으로 첨예한 지역이 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애국지사 제대로 평가해야” 특히 일본이 얽혀 있는 일제시대를 비롯한 근대사의 현장은 더욱 민감한 부분이다. 그런 만큼 더욱 전략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책이 필요하다는 게 의원들의 지적이다. 이진복 의원은 앞서 개인 일정으로 중국 연변(延邊) 용정(龍井)에 있는 시인 윤동주 선생의 생가와 그가 다녔던 용정중학교 등을 둘러보고 왔다. 이 의원은 “정부가 관리를 할 수 없는 상황인지, 하지 않는 건지 너무 심각하게 방치돼 있었다.”고 비판했다. 김광림 의원도 “그 당시 재산과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위인들을 우리 스스로가 너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바탕으로 역사인식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하얼빈·하이린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심산 김창숙기념관 일부 개관

    심산 김창숙기념관 일부 개관

    독립 운동과 반독재 투쟁에 평생을 바친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심산기념 문화센터’가 26일 일부 개관했다. 서초구는 반포동 11 4-3번지 반포근린공원 내에 지하2층, 지상3층 연면적 8415㎡ 규모의 기념문화센터를 건립하고, 독서실을 우선 개방해 운영한다고 밝혔다. 김창숙 선생은 단재 신채호, 백범 김구 선생 등과 함께 대표적인 항일지사로 꼽히며 광복 후에는 통일, 반독재투쟁, 유학단체 개혁, 성균관 재건 등에 앞장선 유림 출신의 민족운동가다. 서초구는 지난 2008년 12월부터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재조명하기 위해 국가 보훈처, 사단법인 심상 김창숙선생 기념사업회와 함께 약 198억원을 들여 기념관 설립을 추진해왔다. 기념관은 선생의 활동상 및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와 근현대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과 기념홀, 청소년들을 위한 독서실, 문화센터 등을 갖추게 된다. 먼저 문을 연 독서실은 총 762석 규모로 무선인터넷실과 전용학습 공간으로 구성됐다. 공공독서실 부족으로 불편을 겪어온 주민들의 욕구를 해소해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용 시간은 9시부터 22시, 1일 이용료는 성인 1500원, 청소년 1000원이며 매달 둘째·넷째 주 월요일과 신정·설·추석 연휴에는 쉰다. 5월부터는 어학강좌, 정보화교실, 전통문화강좌, 어린이교실 등 다양한 문화프로그램도 운영될 예정이다. 심산기념홀과 전시실 등은 마무리 작업을 거쳐 오는 8월 정식 개관할 계획이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기고] 좌·우 통합 임정의 자주독립 정신/김양 국가보훈처장

    [기고] 좌·우 통합 임정의 자주독립 정신/김양 국가보훈처장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네가 만일 뼈가 있고 피가 있다면 조선의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의 전승축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진 스물 네 살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처연한 말이다. 이 의거는 일본 열도를 경악시켰다. 국권을 되찾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선열의 거룩한 희생은 조국이 있는 한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소중한 정신적 가치다. 역사를 모르고 국력이 없다면 100년 전과 같은 ‘경술국치’를 다시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올해는 한·일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아직도 되풀이되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 독도 영유권 침탈 문제는 한·일 양국의 미래지향적 관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 천안함 침몰로 온 국민이 침통한 가운데 일본에서는 또 대한민국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반성도 없이 독도를 일본땅이라고 명기한 초등학교 교과서를 검정 승인한 것이다. 이는 명백한 도발 행위다.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만행만큼이나 고통을 안겨주는 행위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란 말이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극복하고 선조들이 지켜온 대한민국을 후손에게 당당히 물려주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 바로 찾기에 국민 모두가 나서야 한다. 어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아흔 한 돌이 되는 날이었다. 91년 전 상하이의 조그만 건물에서 뿌려진 씨앗은 당당한 자주독립국 ‘대한민국’으로 그 결실을 맺었다. 임시정부가 만든 국호 ‘대한민국’이 사용된 지 91년이 된 셈이다. 임시정부는 실로 우리 대한민국의 뿌리요 건국의 시발점인 것이다. 1919년 일제의 암흑 속에서 선열들은 머나먼 이역 땅에서 조국 광복을 향해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희망의 등불을 켰다. 임시정부는 광복을 쟁취하는 그날까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이끈 한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자 대표기관이었다. 또 27년간 단절 없는 외교활동부터 의열투쟁까지 다양한 항일투쟁을 전개해 독립운동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로, 군국주의가 아닌 국민이 주인이고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 헌정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제 임시정부의 자주독립과 민주공화 정신은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살아 민족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겨레의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가 좌·우 이념 갈등을 넘어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통합한 것은 민족 통일을 염원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또한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애국선열들의 항일독립운동은 우리 후손에게 영광된 국가를 물려주기 위한 투쟁이었다. 이제 선열이 물려준 국가를 가꾸고 발전시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다.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본받고 임시정부의 꿈과 염원을 되새기면서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일본의 만행에 대한 우리의 가장 큰 응징이 될 것이다.
  • 경북, 수도권 수학여행단 잡아라

    경북도와 시·군들이 수도권 수학여행단 유치에 적극 나섰다. 지역관광 활성화 등을 위해서다. 경북도는 26·27일 인천지역 초등학교장 60명이 참가하는 안동·포항·경주지역 팸투어를 실시한다고 25일 밝혔다. 이번 팸투어에서는 참가자들이 안동의 유교문화 및 경주의 신라문화를 체험하고 포항 포스코 등의 견학을 통해 우리나라 발전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도록 한다는 것. 앞서 도는 올 들어 지금까지 4차례에 걸쳐 서울·경기 등 수도권지역 초등학교장 240명을 대상으로 영주, 문경, 안동 등지에 대한 팸투어를 마련했다. 도는 이 같은 팸투어로 올해 수도권지역 100여 초등학교 수학여행단 1만 5000여명을 유치할 계획이다. 포항시도 전국학교운영위원총연합회와 수도권 수학여행단 유치를 위한 업무협약을 맺고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고 이날 밝혔다. 학교운영총연합회는 전국 16개 시도 광역단체별 학교운영위원회와 전국 초·중·고 학교별 운영위원회 등의 연합체로 매년 수학 여행지 결정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단체는 올해 수도권지역 초·중·고교생 수학여행단 1만명을 포항으로 보낼 계획이다. 이에 따라 시는 수학여행단에 맞춰 지능로봇연구소, 포항제철소, 시립미술관과 새천년기념관, 국립등대박물관 등 다양한 견학 시스템과 호미곶 상생의 손, 연오랑세오녀 등 코스별 관광상품을 제공하기로 했다. 안동시 축제관광조직위원회도 공을 들이고 있다. 시는 최근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각종 캠프, 역사기행, 생태체험 등 다양한 현장학습을 진행하는 한국체험강사협회 소속 강사 40여명을 대상으로 팸투어를 실시했다. 이들은 초등 교과과정에 맞춘 독립운동사 연계 투어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안동의 오미·가일 마을을 견학했다. 행사기간엔 안동의 체험학습 프로그램과 지역문화 연계 방안에 관한 워크숍을 마련, 수학여행단을 유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 제시와 함께 지역 여행사와의 연계 방안을 논의했다. 시 관계자는 “수도권 지역 수학여행단 유치를 위한 팸투어는 물론 체험학습 프로그램 및 여행코스를 다양하게 개발해 성과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민족종교, 항일독립운동 구심점

    19세기 후반 이 땅에는 대종교·동학·천도교 등 새로운 민족종교들이 발흥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세력이 급감했다. 일본 정부가 1915년 10월 종교 통제안을 공포, 민족성을 일깨우는 민족종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한 결과였다. 당시 민족종교는 단순히 종교 차원을 떠나 민족을 지탱한 구심점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1920년을 전후한 4년은 민족종교의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절정기에 속한다. 대종교의 경우 1대 교주 나철이 비밀결사조직인 유신회를 조직, 기울어지는 국권을 일으키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한·일·청 3국은 상호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를 부조하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일본정계에 전달했다. 이어 일본궁성 앞에서 사흘간 단식투쟁한 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귀국, 이완용·권중현 등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1918년에는 대종교 신도 및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이 만주 동삼성에서 무오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해 북로군정서로 발전시킴으로써 무장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시켰다. 특히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은 일본군 1개 연대를 섬멸하는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경신 대토벌작전을 전개, 대종교 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1919년에는 천도교가 주축이 돼 3·1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천도교는 3·1운동 직후 ‘특별 성미’로 교인 1명당 3~10원씩 모두 30만원을 모아 독립군의 군자금이나 임시정부의 활동비로 조달했다. 천도교는 개신교 신자가 불과 20만명에 불과했던 1920년에 300만명의 신도를 거느릴 만큼 이 땅의 대표 종교였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최린 등 일본 유학생 출신 요인들을 포섭해 천도교를 분열시켰다. 또한 혁신세력을 통해 종교단체에서 사회개혁운동 단체로 전향하도록 유도해 종교로서의 권위를 잃도록 했다. 동학과 단군신앙을 결합한 민족종교인 청림교는 1920년대 무장조직 ‘야단’을 조직, 직접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 대종교의 북로군정서와 합병해 북간도 지역의 반일무장투쟁단체들의 연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청림교도들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 승리를 위해 군자금을 모으고 군수품을 제공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청림교를 ‘가장 극심한 민족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1944년 청림교 사건을 조작, 120여명의 교인들을 체포하고 이 가운데 50~60명을 살해했다. 일본의 강도 높은 탄압에 결국 청림교는 소멸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씨줄날줄] 대암 이태준/김종면 논설위원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대암(大岩) 이태준은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한 의사이자 항일 애국지사다. 안창호 선생이 만든 ‘청년학우회’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하다 1912년 중국 난징으로 망명한 그는 의사로 활동하던 중 처사촌 김규식 선생의 권유로 몽골로 간다. 그곳에서 7년간 머물며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설립, 당시 창궐하던 화류병 퇴치에 앞장서는가 하면 몽골 마지막 황제 보그드칸의 주치의로도 활약한다. ‘몽골의 슈바이처’ ‘몽골의 살아있는 부처’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그에게 몽골 정부는 ‘에르데닌 오치르’라는 국가 최고 훈장을 수여한다. 그러나 그는 1921년 일본과 손잡은 러시아 백군에 의해 38세의 나이에 피살된다. 그가 항일독립운동사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몽골에서의 두터운 신망을 바탕으로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 항일 독립자금 조달 등 폭넓은 외곽지원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1980년에 가서야 뒤늦게 열사의 공적을 인정해 서훈하기에 이른다. 한국보다 몽골에서 더 잘 알려진 그가 광복 64돌을 맞아 우리 기억의 자장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시 중심부 자이산 입구에 있는 ‘애국지사 이태준 기념공원’에서 15일 광복절 기념행사가 열린 것이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광복절 노래가 몽골 초원에 울려 퍼졌고 한·몽 참석자들은 한데 어우러져 ‘40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를 함께 나눴다. 이날 기념식에서 몽골한인회 회장은 몽골 전체 인구가 280만명인데 한인 동포수가 3500명에 이른다며 한국문화원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한다. 우리보다 교민 수가 훨씬 적은 일본은 일찍이 울란바토르 중심가에 일본문화원을 지어 자국 문화 전파의 기지로 삼고 있다. 내년이면 한·몽수교 20돌, 이쯤해서 우리도 한국문화원을 세워 몽골 하늘에 태극기가 휘날리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조국 광복에 헌신한 이태준은 이제 한·몽 친선의 상징적 인물로 부활했다. 이번 이태준 기념공원에서의 광복절 기념식에서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그런 열린 마음, 열린 민족주의야말로 ‘제2의 광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김종면 논설위원 jmkim@seoul.co.kr
  • 일제 의병진압 잔혹사 낱낱이

    1905년 11월17일 대한제국(이하 한국)이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을사늑약이 체결된다. 평민 의병장 신돌석 등 의병으로 나선 백성들은 조약의 폐기와 친일내각 타도를 외치며 일본에 맞선다. 부패한 관료들과 싸움을 벌이다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 등 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할 즈음 아예 일본군과의 의병전쟁으로 확산된다. 그러자 일본은 총 1291명으로 꾸려진 본토의 정예부대인 일본군 보병 14연대를 한국으로 파견한다. 이후 2년 동안 항일 의병을 잔혹하게 진압한다. 한국토지공사 산하 토지박물관은 11일 치열하게 의병활동이 전개되던 1907년 7월~1909년 6월 일제가 벌인 항일의병 진압작전의 기록지인 ‘진중일지’(陣中日誌)를 입수, 공개했다. 박물관 측에서 자체 분석하고 외부 전문가에게 의뢰해 감정을 거친 결과 일본군 보병 12여단 산하 14연대가 한국에서 ‘적도토벌’(賊徒討伐·의병진압 일지의 원래 표기)을 벌인 작전 일지임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일본군의 작전 기록지로는 독립기념관 등에 동일한 표제(진중일지)의 자료가 있긴 하지만 한 권짜리이거나 광복시점에 가까운 종군위안부 관련 후기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진중일지는 모두 14책 2400여쪽으로 이뤄져 있으며 진압작전 지도 50여점이 포함됐다. 의병운동의 활동 상황과 함께 일제의 진압작전 내용 등이 몇시 몇분 단위까지 적힐 정도로 상세하고 방대하게 적혀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 14연대는 1907년 7월25일 일본 모지(門司)항을 출발한 뒤 부산항에 도착, 처음에는 대전에 본부를 두고 예하 중대를 전국 각지에 파견해 의병 진압 활동을 벌이는 한편 현지 약도, 물자, 교통, 위생, 토착민의 정태 등을 기록으로 만들어 보고하도록 했다. 이후 문경과 대구 등으로 본부를 옮기며 개성, 서울, 인천, 공주, 대전, 청주, 군산,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 진압 활동을 벌였다. 1907년 9월15일 문경 근처 전투 보고에서는 ‘적의 수괴’ 이강년(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대승사로 쫓겼다가 적성 방향으로 퇴각했다고 적은 뒤, ‘전투 후 의병이 점령하고 있는 해당 촌락을 소각했다.’는 내용과 ‘대승사가 의병의 소굴이어서 불태워 버리려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이강년 외에도 하동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임봉구(건국훈장 애국장) 등의 이름이 보인다. 특히 의병 3도 도원수 윤영수와 지리산 의병대장인 박동의 등 현재 독립유공에 추서되지 않은 사람의 이름과 나이, 본적 등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다.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김상기(충남대 교수) 소장은 “이 무렵 의병 진압작전에 대한 일본측 자료가 일부 공개되긴 했지만, 이 진중일지는 내용이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희귀한 기록이며, 아울러 독립유공자 등록을 위한 공훈자료로도 활용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안중근 의거 中의 반일 애국주의 교과서”

    “안중근 의거 中의 반일 애국주의 교과서”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하얼빈 의거는 조선의 독립 의지와 일본의 침략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올해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거가 한·중·일 등 국제사회에 미친 영향을 재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안중근 의거의 국제적 영향’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연다. 손염홍 건국대 교수가 미리 배포한 발표문 ‘안중근 의거와 중국의 반제 민주운동’에 따르면 안중근 의거 직후 중국 혁명파와 입헌파의 평가는 엇갈렸다. 그러나 5·4운동이 끝나고 신민주주의 혁명기에 들어가면서 안중근 의거는 반일 애국주의 교육의 상징으로 부상하고 교과서로 활용돼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 혁명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박은식이 1914년에 발간한 ‘안중근’ 전기는 안중근 의거가 단순히 한국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한·중이 연대해 반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사상적 기초가 됐다고 손 교수는 분석했다. 안중근은 1907년 가을부터 1909년 10월까지 러시아 한인사회를 두차례 순방하며 동의회와 동의단지회를 결성하는 등 러시아지역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러시아에서의 안중근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재해석’에서 “안중근의 거사는 한인단체들이나 한민학교의 연설회, 연극 등의 행사에 단골 주제로 등장해 러시아 지역 한인들의 항일의식과 독립의지를 고취시켰다.”고 했다. 안중근 의거에 대해 일본 사회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이규수 순천향대 교수는 “일본 언론계는 안중근에 대해 ‘미친 개’라는 표현을 주저하지 않았고, 안중근으로 상징되는 조선인의 저항에 대해서도 ‘괴물’ ‘마물’이라는 극단적인 멸시감을 유포했다.”면서 “이토 공을 죽인 한국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언론의 비호를 받으면서 더욱 확산되었고, 이후 한국 강점을 주장하는 논리로 발전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안중근 의사의 업적에서 그가 주창한 ‘동양평화론’을 빼놓을 수 없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자서전을 탈고한 뒤 ‘동양평화론’ 집필을 시작했으나 끝맺지 못했다. ‘안중근 의거와 동양평화론의 현대사적 의의’를 주제로 발표하는 윤경로 한성대 교수는 ▲뤼순의 개방 ▲한·중·일 3국 평화회의 구상 ▲공동은행 설립 ▲공동 군단 설립, 교육 ▲상공업 발전 ▲로마 교황으로부터 3국 독립보장 등을 동양평화론의 핵심으로 요약했다. 윤 교수는 “오늘의 유럽공동체(EU)와 같은 아시아 경제공동체를 100년 전에 이미 구상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탁견이자 예지”라면서 “안중근 의거와 동양평화론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를 위한 평화운동이며, 이 점이 안중근 의거의 현대사적 메시지”라고 말했다. 심포지엄에서는 이 외에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가 ‘안중근 의거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기조연설하고, 장석흥 국민대 교수가 ‘안중근 의거의 국제성과 그 영향’을 주제로 발표한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 방광석 고려대 교수, 윤선자 전남대 교수 등이 토론자로 참여하고,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의 주도로 종합토론이 이어진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당찬 세대’ 희망의 시대를 열다

    ‘당찬 세대’ 희망의 시대를 열다

    한국 야구 대표팀이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펼친 ‘위대한 도전’은 결국 준우승으로 끝났다. 하지만 다섯 차례나 치러진 한·일전에서 한국의 젊은 세대는 새로운 한·일 관계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었다. 불행한 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열등감이 아예 없는 젊은세대에게 일본은 더 이상 반드시 넘어야 할 절대적인 대상이 아닌 상대화된 대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선수들은 오히려 일본선수들보다도 경기를 즐기는 모습이었고, TV를 지켜본 국민들도 다르지 않았다. 문화평론가인 이동연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은 “이번 대회는 비장함이 있었다기보다 선수들부터가 경기 자체를 즐기며 최선을 다했다는 게 이전과는 달랐던 것 같다. 시민들도 결승전에서 졌다고 비통함을 느끼기보다, 한국이 잘 싸웠고 세계인을 상대로 수준 높고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주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성숙해진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철학자 탁석산 박사는 과거와는 달라진 신세대 젊은이들의 특성에 주목했다. 그는 “평균 나이 26세로 세계청소년대회 우승 전력이 있는 선수들이 포진한 한국팀은 열등감이 없는 신세대”라면서 “경기를 해도 한·일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메이저리거에게도 주눅들지 않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팀 전체 분위기를 이끌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그는 “반면 일본은 야구가 국기이고, 자존심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우리보다 훨씬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면서 “이번 한·일전에서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긴장했다는 것은 옛날보다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덧붙였다.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씨도“경험의 축적과 세대교체로 과거보다 여유있게 대처하는 것 같다.”면서 “방송이나 쇼비즈니스에서 오히려 한·일전을 부각시키는 면이 있으나 시청자들도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문학평론가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한국의 젊은 선수들은 최근 세계 야구 무대에서 베네수엘라, 멕시코, 쿠바, 미국 등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싸워서 이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굳이 과거의 한·일 특수 관계 속에서 일본만을 이겨야 한다는 식으로 얽매여 있지 않다.”면서 “이미 세계가 우리의 무대이고, 우리의 수준이 세계 수준에 도달해 있기 때문에 역사의식을 스포츠 등에 투사하는 방식은 이미 벗어났으며 이는 팬들도, 선수들도 모두 마찬가지”라고 진단했다. 실력에 기반한 자신감은 사실 경제분야 등에서는 이미 일상화되었으나, 스포츠 부문에서도 뒤늦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설가 성석제씨는 “너무 자주 부딪치다 보니 선수들이나, 관중이나, 또는 젊은이들이 서로 익숙해지고 친해졌다는 느낌이 있다.”면서 “한 대회에서 다섯 차례나 겨루다 보니 상대를 무작정 적대시하기보다는 서로 익숙해진 분위기가 연출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반면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원로급 역사학자인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젊은 세대가 과거의 어두움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올림픽에서 1위를 했을 때 얼마나 많은 국민이 마음속 깊이 눈물을 흘렸는지를 생각해 보면 야구는 물론이고 사회 각 부문에서 일단은 일본을 이겨야 한다는 신념과 집념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홍지민 강병철기자 icar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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