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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움켜 쥔 시신의 손엔 독립선언서… 아우내 만세운동 ‘진짜 주역’

    움켜 쥔 시신의 손엔 독립선언서… 아우내 만세운동 ‘진짜 주역’

    옥중 투쟁을 하다 잔혹한 고문을 받고 순국한 유관순 열사가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열사가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주역이었음도 분명하다. 유관순은 3·1운동과 동일시되고 있고 항일의 표상이다. 그러나 유독 유 열사만 부각된 데는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연구 논문이 여러 편 있다. 친일·우익 인사들이 광복 직후 자신들의 과거를 정화하여 정치적·도덕적 권위를 찾으려고 열사를 ‘한국의 잔다르크’로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유관순의 항거는 이화여중 동문 박인덕과 교장 신봉조 등이 기념사업회를 발기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일제에 저항했다가 친일로 돌아선 인물로 광복이 되자 자신들의 행적을 덮으려고 유관순을 이용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우익 인사들의 유관순 기념사업이다. 미 군정하인 1947년 9월 결성된 유관순기념사업회는유관순 기념비, 영화를 만들고 ‘조선의 잔다르크’라는 제목의 전기를 간행했다(정상우, ‘3·1운동의 표상 유관순의 발굴’).그중에는 유관순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맡은 조병옥이 있다. 조병옥은 광주학생운동 배후 조종 혐의로 3년 동안 복역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지만 친일 의혹도 함께 받고 있다. 조병옥은 유관순과 두 집 건너 살던 이웃으로 그의 아버지 조인원도 아우내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대한민국 정부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은 정부의 정통성을 찾는 방편으로 유관순을 한국의 잔다르크, 해방의 여전사로 부각시켰다(전해주, ‘성공회 병천교회의 3·1 아우네 만세운동에 대한 기여’). 이런 연유로 아우내장터 시위를 주도한 다른 인물들의 공적은 거의 파묻혔다. 실제 주동자로 현장에서 총에 맞아 숨진 김구응 의사(義士)도 그런 사람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신한민보는 아우내 만세운동을 유관순이 아닌 김구응, 박종만이 주도했음을 밝히고 특히 모친까지 학살당한 김 의사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천안군 병천시(川市·아우내장터)에서 의사 김구응이 남녀 6천4백인을 소집하야 독립을 선언할 새 일경이 아민(我民)의 기수(旗手)를 자(刺)코져 하거늘 기수는 적수(赤手)로 검도(劍刀)를 집(執)하니 유혈이 임리(淋·뚝뚝 흘러 흥건하게 떨어짐)할 시에…” 김병조 선생이 쓴 ‘한국독립운동사략’에 이렇게 씌어 있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도 거의 똑같이 서술하면서 주모자를 김구응이라고 했다.김 의사는 임진왜란 진주대첩의 명장 김시민 장군의 12대손으로 1887년 7월 27일 천안 병천면 가전리 99번지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한학을 깨우친 의사는 청신의숙, 장명학교를 거쳐 병천 진명학교 훈도(교사)로 일하며 제자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유관순의 오빠 유관옥과 조인원의 아들 조만형은 그의 제자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충청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김 의사는 서울 이화학당에 다니다 3월 13일 고향 병천에 내려온 유관순과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조인원 등과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을 치밀하게 짰다. 유관순과 지역의 학생, 교인들은 진명학교와 교회 등에서 밤낮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일본 관헌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나이 어린 유관순에게 최일선 연락 책임을 맡긴 것도 김 의사였다. 그는 천안 동부 6개 면과 오창, 청주, 진천, 연기 등 각지와 비밀 연락망을 짜고 봉화 신호에 맞추어 일제히 총궐기하도록 밀령을 전달했다. 유관순이 연락과 봉화 책임자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의사는 전체 계획을 짠 리더였다. 조인원은 현장에서 군중을 이끈 행동대장 격이었다. 김 의사의 어머니 최정철 여사도 장년층과 노년층을 설득하고 부녀자를 동원하는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 그믐날 밤 유관순은 매봉산에 올라 봉화를 올렸다. 이를 필두로 천안 주변의 총 24개 봉우리에서 봉화가 타올랐다. 거사 일로 정한 4월 1일 아침 아우내장터에는 전날 밤 타오른 횃불을 보고 장꾼을 가장한 군중 3000여명이 모여들었다. 군중은 점점 불어나 오후 1시가 넘어가면서 6000명을 넘어섰다. 김 의사는 두루마리로 된 독립선언문을 펴 낭독했고 유관순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불과 50보 거리의 지척에 헌병주재소가 있었다. 만세운동은 극히 평화적이었다. 군중이 점점 늘어나고 만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할 정도로 커졌다. 오후 2시쯤 천안헌병분대에서 헌병들이 트럭을 타고 도착했다. 헌병들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유중권을 포함해 여러 사람이 사망했다. 발포에 놀라 군중은 일단 흩어졌지만, 오후 4시쯤 발포와 살인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어져 1500여명이 주재소로 몰려갔다. 김 의사는 독립선언문을 말아 들고 대열의 선두에 섰다. 헌병들은 깃발을 들고 있던 기수를 칼로 찌르려 했고 기수가 맨손으로 칼을 잡자 그대로 찔러 숨지게 했다. 의사는 그들의 잔인무도함을 비난하며 꾸짖었다. 황망한 중에도 정연한 논리로 대응했다. 일본 헌병은 논리에서 밀리자 김 의사를 총으로 쏴 쓰러뜨리고는 총검으로 머리를 짓이겼다. 의사는 시신이 되어서도 독립선언서를 손에 말아 쥐고 있었다. 오후 6시쯤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아들이 참살당한 말을 들은 의사의 어머니 최 여사가 달려왔다. 여사는 헌병의 멱살을 잡아채며 “이놈들아, 내 자식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내 나라 독립을 찾겠다고 만세를 부르는 것도 죄가 되느냐”고 울부짖었다. 그러자 헌병은 사정없이 총을 쏘아 즉사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총검으로 마구 찔렀다. 김 의사의 나이 32세, 최 여사의 나이 66세였다. 아우내장터 시위로 김 의사 등 19명이 죽고 적어도 30명 이상이 크게 다쳤다. 가족들은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병천면 가전리 뒷산에 의사의 시신을 묻었다. 김 의사의 사후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선생의 손자 김운식(70)씨에게 들은 가족사는 비극적이다. 김 의사는 아들 셋을 뒀는데 맏아들이 열 살이었다. 살길이 막막해지자 김 의사의 부인, 즉 김씨의 할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경기 안성 친정으로 갔다고 한다. 의사의 맏아들은 그 후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돌아와 인천에서 조선기계제작소라는 작은 공장에 취업했다. 광복 후에는 좌익 활동을 했다. 김씨는 “아버지는 친일파들은 위세를 떨치고 김원봉 같은 독립운동가는 도리어 빨갱이로 내몰리는 현실에 대한 저항감에 좌익 사상에 빠졌다”고 말했다. 맏아들은 6·25가 터진 후 공장 인민위원장이 됐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공산주의와는 다르다고 판단해 9·28 수복 후 국군에 자수했다. 자수했지만 방면되지 않고 인천감옥에 수감됐다. 몇 달 뒤 1·4후퇴 때 국군이 후퇴하면서 인천감옥의 좌익사범들을 총살했는데 그때 희생되고 말았다. 시신도 찾지 못했다. 다른 후손들도 천안을 떠나 곳곳을 전전하며 가난에 시달렸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날 아우내장터를 찾았다. 두 개의 내(川)를 아우른다(竝)는 뜻인 아우내를 일본인들이 병천(竝川)이라는 한자어로 지명을 바꿨다. 근처엔 유관순기념관도 있고 해마다 만세운동을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그러나 만세운동 현장임을 알려주는 표지도 없고 순댓집 간판만 즐비했다. 단지 시장 입구 헌병주재소가 있던 곳엔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이 있다. “아우내에는 순대만 있고 역사는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계산서 용지에 쓴 일기…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의 또 다른 모습

    계산서 용지에 쓴 일기…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의 또 다른 모습

    “어떤 조선인 경찰이 와서 나의 몸을 수색하였다. 이에 내가 질책을 하면서 물러가라고 하였다. (중략) 이로부터는 단지 한 번 죽을 마음만 있어서 혹 며칠 동안을 밥을 먹지 않기도 하였으며, 혹 대나무 젓가락을 가지고 귀 사이를 스스로 찌르기도 하였다.” “조사를 할 시간이 되면 7권으로 장정된 책자를 펼쳐 놓고서 물었다. (중략) 내가 본국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이후의 사정에 대해서 하나하나 기재되어 있었으며, 항주 및 북경 등에서 한 일에 대해 내가 잊고 있었던 것도 그들은 오히려 기록해 놓고 있었는데 이런 일들은 모두 나로서는 기억할 수 없는 것이었다.”독립운동가 이규채(1890~1947)가 죽기 몇 해 전 자신의 삶의 궤적과 독립운동 여정을 기록한 일명 ‘이규채 연보’에 담긴 내용이다. 1920년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내고, 이후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던 이규채는 만주지역 항일 무장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한 상점의 계산서 용지 32장 분량에 적힌 ‘이규채 연보’는 이규채가 자신의 상세한 기억을 바탕으로 작성한 덕분에 다른 자료에서는 볼 수 없는 현장감이 뚜렷하다. 독립운동 당시 목숨을 수시로 위협받던 일부터 일제의 혹독한 감시를 피해 다니면서 느낀 고단함,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예를 들면 1932년 쌍성보 전투에 참여했던 이규채는 왼쪽 손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는 것을 전투가 끝난 한참 후에 곁에 있던 사람이 알려줘서야 알게 됐다고 적었다. 중국 청나라 말기 민간 비밀결사단체인 대도회(大刀會)를 만나 수색을 당할 당시 ‘일본의 정탐꾼’으로 오인당해 몸이 묶이고, 그 끈을 말 안장에 매달고 말을 달리게 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것만 같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 밖에 공산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생매장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구출된 일, 지난날 함께 활동했던 이민달(李敏達)이라는 자의 밀고 때문에 일본 경찰에 체포된 일, 체포된 이후 일본 영사관에서 조사받을 당시 일본 경찰이 7권 분량 책자를 펼쳐 놓고 신문한 일 등 당시 이규채가 겪었던 역경과 고뇌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은 “그간 독립운동사 자료는 ‘전투에서 누구를 처단하고 거사를 행했다’는 식의 활동 내용이 중심이지만 ‘이규채 연보’는 이규채 자신이 마적을 만나서 물건을 털리거나 목숨을 빼앗길 뻔한 이야기 등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면서 “사람들이 모르는 독립운동의 상세한 여정과 독립운동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규채 연보’에는 이규채가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규채의 손자 이성우씨는 “이 자료에 1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분들이 많다”면서 “민족문제연구소나 독립기념관 등의 기관에서 무명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기념하는 탑을 만드는 등의 실천적인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본지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제50회 한국기자상 수상

    본지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제50회 한국기자상 수상

    서울신문 탐사기획부가 지난해 8회에 걸쳐 연속 보도한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이 한국기자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서울신문의 한국기자상 수상은 ‘2017 대한민국 과로리포트-누가 김부장을 죽였나’에 이어 2년 연속이다. 한국기자협회(회장 정규성)가 주관하는 한국기자상 심사위원회(위원장 배정근 숙명여대 교수)는 28일 제50회 한국기자상 수상작을 발표했다. 기획보도부문에는 서울신문 탐사기획부(유영규·임주형·이성원·신융아·이혜리 기자)의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을 선정했다. 우리 사회 가족 간병의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적 해법을 찾아보려는 이 기사는 단순한 기사 이상의 가치를 담고 있다고 평가받은 바 있다.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은 연재 이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주요 언론상을 휩쓸고 있다. 관훈클럽이 수여하는 ‘관훈언론상’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국제엠네스티 언론상’, 기자협회의 ‘이달의 기자상’ 등을 받았다. 이 밖에 취재보도부문에서는 MBC의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와 JTBC의 ‘안태근 성추행 사건 폭로 및 미투 운동’, 기획보도부문에서는 SBS의 ‘에버랜드의 수상한 땅 값 급등과 삼성 차명부동산’, 지역에서는 부산일보의 ‘한국판 홀로코스트 형제복지원 절규의 기록’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올해로 9회째를 맞은 ‘조계창 국제보도상’ 수상작에는 연합뉴스의 ‘프랑스 내 한국독립운동사 재발견’이 뽑혔다. 시상식은 오는 2월 21일(목) 오전 11시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서울신문,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한국기자상 수상

    서울신문,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한국기자상 수상

    서울신문 탐사기획부가 지난해 8회에 걸쳐 연속 보도한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이 한국기자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서울신문의 한국기자상 수상은 지난해에 이어 연속 수상이다.한국기자협회(회장 정규성)가 주관하는 한국기자상 심사위원회(위원장 배정근 숙명여대 교수)는 28일 제50회 한국기자상 수상작을 발표했다. 기획보도부문에는 서울신문 탐사기획부(유영규·임주형·이성원·신융아·이혜리 기자)의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을 선정했다. 우리 사회 가족 간병의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적 해법을 찾아보려는 이 기사는 단순한 기사 이상의 가치를 담고 있다고 평가받은 바 있다. 취재보도부문에서는 MBC의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등 2편이, 기획보도부문에서는 SBS의 ‘에버랜드의 수상한 땅 값 급등과 삼성 차명부동산’이, 지역에서는 부산일보의 ‘한국판 홀로코스트 형제복지원 절규의 기록’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올해로 9회째를 맞은 ‘조계창 국제보도상’ 수상작에는 연합뉴스의 ‘프랑스 내 한국독립운동사 재발견’이 뽑혔다. 시상식은 오는 2월 21일 오전 11시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한편,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은 이밖에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주요 언론상을 휩쓸었다. 관훈클럽이 수여하는 ‘관훈언론상’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국제엠네스티 언론상’, 기자협회의 ‘이달의 기자상’, 대한언론인회의 ‘대한언론상’을 받았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이해찬 “3·1운동, ‘3·1혁명’으로 불러야”…명칭 변경 추진

    이해찬 “3·1운동, ‘3·1혁명’으로 불러야”…명칭 변경 추진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3·1운동·임시정부 100주년 기념특위 출범식에서 “3·1운동을 ‘혁명’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이해찬 대표는 이날 축사에서 “3·1운동은 대한제국에서 민주공화제로 바뀐 큰 가치의 전환이자 국가 기본의 전환”이라며 “한반도 모든 곳의 국민이 만세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 대표는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일 뿐 아니라 앞으로 100년을 시작하는 첫해라 볼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앞으로 100년은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문화적으로 성숙하고 경제적으로 부강한 민족으로 나아갈 수 있는 100년”이라며 “분단체제를 극복해 한반도가 섬이 아니라 북방으로 나아가는 전초기지라는 나라의 성격을 잘 살려가는 100년을 만들겠다”고 강조했다.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걸 특위 위원장은 “특위의 목표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며 특위의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설명했다. 특위는 기존의 ‘3·1운동’ 명칭을 ‘3·1혁명’으로 변경하는 등 한국 독립운동사의 역사용어 정명(正名)에 나서고, 독립운동사를 매개로 북한과 교류하는 사업도 진행할 예정이다. 특위에는 이종걸 의원이 위원장으로, 강창일·우원식·권칠승·김정우·박경미·박주민·소병훈·전재수 의원 등 29명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고문으로는 이종걸 의원처럼 우당의 손자인 이종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위원회 위원장과 임채정·김원기 전 국회의장 등이 위촉됐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식민지역사박물관 생각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식민지역사박물관 생각

    서울 용산구 청파동이나 남영동, 후암동, 원효로 일대를 걷다 보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주택이나 적산(敵産)가옥을 자주 만난다. 용산고 건너편 후암동 언덕길에는 이곳이 마치 일본의 어느 마을이 아닌가 느껴질 정도로 주변에 십여 채의 일식 주택이 늘어서 있다. 숙대입구역 동편 먹자골목에는 오래된 일본식 가옥과 50년의 전통을 지닌 부대찌개 집들이 여전히 공존한다. 주변에 오랜 세월 동안 존재했던 일본군 사령부와 주한 미군이 남긴 이중 식민의 흔적이리라. 이제 한 해, 한 해가 다르다고 느낄 만큼 이런 적산가옥이 점점 사라져 간다.숙명여대 올라가는 길의 청파동 골목 한 귀퉁이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있다. 서울에서도 전통적인 골목이 많기로 유명한 청파동 골목 안에 있는 이 박물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직 그다지 없는 듯하다. 지난해 여름 개관식을 한 신생 박물관이다. 이곳은 ‘기억과 성찰’을 주제로 식민의 상흔과 항일투쟁의 역사를 되짚는다. 건물 2층 86평의 면적이 일제 침략사, 독립운동사를 아우르는 전시 공간으로 채워졌다. 한국 근대문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땅의 문학과 역사, 제도에 촘촘히 스며든 일본(문화)의 영향을 새삼 생생하게 절감한다. 어찌 문학 연구에 한정되는 일이겠는가. 정치, 경제, 건축, 교통, 법률, 교육, 더 나아가 이 땅의 근현대 자체가 일본의 그림자와 이식(移植)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생각해 보면 일본에 대한 극복과 저항 역시도 ‘네 칼로 너를 치리라’는 문제의식 아래 일본에서 배운 지식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겠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그대로 수용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 땅의 역사, 식민의 모순과 질곡, 그 상처와 저항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도 일본에 관한 면밀한 공부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리라. 그러나 우리는 생각보다 일본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일본을 잘 안다고 착각하거나 무시하기 일쑤다. 소설가 최인훈, 비평가 김윤식 등 일본이 우리 문화와 현실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직접 체험하며 누구보다 일본 문화와 지성사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세대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제는 평택으로 이전한 주한 미군 용산기지 터에는 1200여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이 중 상당수는 식민지 시대에 세워진 근대 건축물이다. 이런 식민지 유산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파악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식민의 흔적을 상징하는 용산 미군기지 터의 옛 건물 한 곳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확대 이전하는 것도 식민의 기억을 응시하기 위한 뜻깊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역사에 대한 기억은 단지 찬란한 전통에 대한 환기나 낙관적 역사 인식에 머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인 김수영이 읊었던바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는 그 슬픔과 분노의 미학을 마음속에 품을 수 있을 때, 그래서 이 땅의 역사와 피에 새겨진 식민의 흔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식민을 넘어서는 전망을 얘기할 수 있으리라. 이즈음 위안부 문제 등을 둘러싸고 최악의 한·일 관계에 봉착해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일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식민의 기억에 대해 정직하게 응시하는 게 필요하겠다.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건립 과정에서 일본 시민사회에서도 1억원이 넘는 성금이 답지했다. 그 마음이 단지 한·일 화해를 위한 움직임만은 아닐 것이다. 양국 간에 존재하는 역사적 상처와 업보를 있는 그대로 응시하겠다는 마음이야말로 성금을 기꺼이 보내게 만들었으리라.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의 세월이 흐른 올해를 식민의 기억을 온전히 인식하기 위한 원년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 용산 곳곳에 새겨진 식민의 흔적을 기억하고 보존하며 탐사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리라. 그러기에는 식민지역사박물관 86평의 공간은 역시 너무 좁은 게 아닐까.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양반·평민 나뉘어 기호·서북파 대립… 내분 중심엔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양반·평민 나뉘어 기호·서북파 대립… 내분 중심엔 이승만

    [2부] 통합과 갈등:상하이 시기 ② 해체위기 몰린 임시정부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생겨난 세 개의 임시정부는 9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됐다. 통합 임정은 행정력과 외교력을 갖춰 독립운동의 중추 구실을 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초심을 잃고 내부 갈등과 분열에 휩싸였다. 한줌도 안 되는 임정 권력을 두고 지역과 이념으로 갈라서 싸웠다. 몇몇은 갑오개혁(1894~1895) 때 사라진 양반·상민까지 거론하며 전근대적 계급의식을 보여줬다. 이 시기 임정은 ‘난파선’ 그 자체였다. ●통합정부 초기 비행대 운영 등 역량 총 동원 지난달 중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를 위해 찾아간 상하이 번화가 화이하이중루. 과거 프랑스 조계(외국인 자치구역)답게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서양식 건물이 남아 있어 젊은 세대와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 일대는 재개발이 마무리돼 도로나 건물이 정비됐지만 여전히 100여년 전 모습을 간직한 골목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바로 우리 역사학계에서 ‘푸칭리(보경리) 청사’로 부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다. 임정이 상하이를 떠나기 전인 1926~1932년 사용하던 곳으로 상하이 임정 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기자와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보경리 청사가 있는 저 구역은 상하이 안에서도 지가가 비싸기로 유명하지만 중국 정부가 임정 청사 보전을 위해 개발을 막고 있다”며 “최근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을 두고 양국 관계가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이들이 여기를 지키는 것은 항일투쟁의 역사를 공유하는 우리나라를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러시아 노령정부와 중국 상하이정부, 서울의 한성정부가 모인 ‘통합 임정’은 설립 초기부터 독립운동 주도권을 쥐고자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국내 곳곳에 지하 행정조직을 갖추기 위해 연통제를 실시하고 비밀 통신망을 확보하려고 교통국도 운영했다. 이들 조직을 활용해 국민들에게 공문을 전달하고 독립전쟁 인력과 자금도 모았다. 파리강화회의(1919~1920)에 외교력을 집중해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알렸고,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해 무장투쟁을 독려했다. 기관지 독립신문(1919~1925)을 발간하고 한인교육기관인 인성학교(1917~1975)도 육성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비행사 양성소를 설치해 비행대를 운영했다.김희곤(65)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은 “이 정도면 초기 통합 임정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했다고 볼 수 있다”며 “특히 국가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다른 나라에 임정을 세워 외교 활동을 펼친 것은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이승만, 행정부·의회 떨어져 미국서 혼자 활동 하지만 일제가 임정의 국내 연결망을 차단하면서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본토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내분도 시작됐다. 가장 큰 문제는 리더 이승만(1875~1965)에게 있었다. 원래 상하이정부는 국무총리제였고, 통합 임정의 법통이 된 한성정부 역시 집정관과 국무총리가 중심인 집단지도체제였다. 이들은 정치권력이 한 사람에게 모이면 조선의 왕처럼 국가를 사유화할 수 있다고 여겨 대통령제에 부정적이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자신을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임정으로서는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대미 외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려고 미국인에게 친근한 표현을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비판 세력은 “늘 1인자이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상 자신이 최고지도자라는 점을 알리고 싶어 의도적으로 오역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승만의 거처도 논란이 됐다. 그는 “대미외교에 주력하겠다”며 임정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미국에 머물렀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난 뒤인 1919년 8월 25일 한성정부 집정관총재 자격으로 워싱턴DC에 대미외교단체인 구미위원부를 세워 그곳에 기거했다. 행정부와 의회가 중국에 있는데 대통령이 혼자 미국에서 활동해 제대로 소통이 될 리 없었다. 임정은 각료 인선이나 주요 정책 시행 때마다 대통령 부재로 어려움이 컸다.이승만은 미국 교민에게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1919년 12월~1921년 8월 지출액은 8만 9321달러였는데, 이 가운데 상하이 임정에 보낸 돈은 1만 6732달러로 전체 지출의 20%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 대부분은 구미위원부 운영비와 이승만 자신의 활동비로 썼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임정은 구미위원부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그가 강하게 반발해 무산됐다. 국무총리 이동휘(1873~1935)는 그를 “독립정신이 불철저한 썩은 대가리”로, 내무총장 안창호(1878~1938)는 “정신병자”라고 비난했다.●이르쿠츠크파, 러 적군 부추겨 상하이파 독립군 학살 임정은 기호파(경기·충청·호남)와 서북파(평안·함경)로 양분돼 있었다. 기호파는 양반계급 출신이 주를 이뤘고 이승만을 지지했다. 서북파는 평민 출신이 많았고 안창호를 밀었다. 이들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기호파는 ‘변방 상놈들에게 임정 주도권을 내 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서북파 역시 ‘한양 양반네’들의 텃세에 지역주의 논리로 맞섰다.임시정부의 핵심 전략인 외교독립론도 성과가 없었다. 임정은 국제사회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나마 임정에 우호적인 곳이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 이끄는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와 쑨원(1866~1925)이 세운 중국 광둥성 호법정부였다. 하지만 이들도 임정의 내분이 심해지자 더 이상 지원에 나서지 않았다. 1919년 임정 통합 작업을 주도한 러시아 출신 문창범(1870~1938)은 상하이정부와의 갈등으로 통합 임정에 합류하지 않고 연해주로 돌아갔다. 그는 같은 러시아 출신임에도 새 임정에 합류한 이동휘를 비난하며 갈라섰다. 이때부터 문창범 세력은 ‘이르쿠츠크파’, 이동휘 계열은 ‘상하이파’라고 불렸다. 양측 간 감정의 골이 깊어진 1921년 6월 28일,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 적군을 부추겨 연해주 알렉셰프스크(자유시)에 머물던 상하이파 한인 독립군 부대를 대거 학살했다. 일본과 맞서기 위해 모인 고려인들이 의견 차이를 참지 못하고 서로에게 총구를 겨눴다. 이것이 한국 독립운동사상 최악의 비극으로 평가되는 ‘자유시 참변’이다. 이후 독립군은 연해주 일대에서 자취를 감췄다.●재정난·파벌싸움으로 재중동포 기반 상실 독립운동사 거두인 고 조동걸(1932~2017) 국민대 명예교수는 “이때라도 임정이 군무부를 만주로 옮기고 교통국(비밀통신망)을 다시 설치해 재만동포를 추스르고 조직 정비에도 나섰어야 했다. 하지만 재정난과 내부 파벌싸움 등으로 기회를 놓쳐 국민적 지지 기반을 잃었다”고 비판했다.임정은 이승만이 대미외교를 위해 워싱턴회의에 참석하려다가 개최국인 미국으로부터 문전박대당한 1922년 4월부터 ‘식물 정부’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은 1925년 3월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탄핵될 때까지 이어졌다. 임정 지사들은 자신들이 표방한 민주공화정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남자들을 모성으로 품고 묵묵히 뒷바라지해준 이가 있었다. 바로 ‘임시정부의 어머니’로 불리는 정정화(1900~1991)다. 임정이 27년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헌신 덕분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1살이던 1910년 김가진(1846~1922)의 3남 의한(1900~1964)과 혼인했다.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던 김가진은 아들을 데리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이듬해 정정화도 “연로하신 시아버지와 남편을 챙기겠다”며 상하이로 따라갔다. 그는 여성이어서 상대적으로 감시가 소홀하다는 점을 십분 활용해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10여년간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에 검거돼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김구는 그를 가리켜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칭송했다.●임정 가재도구마다 손때… 요인들 임종 다 지켜 정정화는 상하이에 온 뒤부터 1946년 귀국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 시간을 임정 요인과 가족을 돌보며 보냈다. 임정 인사 가운데 그가 지어준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고, 임정 가재도구 가운데 그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임정 독립운동가들의 임종도 다 지켰다. 그가 26년간의 임정 생활을 구술한 ‘장강일기’는 당시 독립운동 진영의 사정을 가장 잘 알려주는 사료로 평가된다. 그의 일대기는 연극 등으로도 만들어져 공연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귀국 뒤 그의 인생 행로는 순탄치 않았다. 남편 김의한은 한국전쟁 중 안재홍(1891~1965), 조소앙(1887~1958) 등과 함께 납북됐다. 남한에 남은 정정화는 부역죄로 투옥돼 고초를 치렀다. 이때 ‘옥중소감’이란 시로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남겼다. 나라를 되찾고도 여전히 남과 북으로 갈라져 싸움질만 하던 남자들에 대한 힐난이었으리라. “혁명 위해 살아온 반평생 길인데/오늘날 이 굴욕이 과연 그 보답인가/국토는 두 쪽 나고 사상은 갈렸으니/옥과 돌이 서로 섞여 제가 옳다 나서는구나.” 상하이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 정치·경제·교육 균등이 기초…모두가 평등한 사회 꿈꾸다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 정치·경제·교육 균등이 기초…모두가 평등한 사회 꿈꾸다

    “우리나라는 우리 민족이 반만년래로 공동한 언문과 국토와 주권과 경제와 문화를 가지고 공동한 민족정기를 길러온 우리끼리로서 형성하고 단결한 고정적 집단의 최고 조직임.”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사상가인 조소앙(본명 조용은·1887~1958)이 작성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등록문화재 제740호)의 첫 구절이다. 우리나라 헌법의 뿌리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은 대한민국이 단일한 언어와 국토, 주권, 경제, 문화를 가진 민족국가임을 명시한 것을 시작으로 광복 후 임시정부가 건설할 민족국가에 대한 구체적인 건설 계획을 담았다. 임시정부 수립에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광복 직후까지 주요 지도자로 활동한 조소앙은 광복 이후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국한문을 섞어서 적은 건국강령 초안은 가로 27.1㎝, 세로 36.9㎝ 크기의 원고지 10장 분량이다. 민족국가 건설의 당위성과 원칙을 밝힌 총강(總綱), 독립운동의 과제와 방법을 명시한 복국(復國), 건국 단계에서 실행할 구체적인 정책을 언급한 건국(建國) 등 3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조소앙이 창안한 ‘삼균주의’(三均主義)가 기반이 됐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균등사회를 건설해 국민 전체가 평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이상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천명하고 있다. 조소앙이 기초한 건국강령은 1941년 11월 28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서 약간의 수정을 거쳐 원안대로 통과됐고, 1948년 제헌헌법의 기본적이 바탕이 됐다. 조소앙이 직접 붓으로 작성한 이 문서는 여러 군데 줄을 긋거나 지우고 다시 고쳐 쓴 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가 얼마나 고심하며 글을 작성했는지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종이 바깥 부분에 일부 손상이 있지만 내용은 손상 없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조소앙의 손자이자 조소앙기념사업회 위원장인 조인래씨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와 설계 이후 해야 할 일들을 담은 건국강령은 ‘헌법의 꽃’과도 마찬가지”라고 자평했다. 그는 이어 “수많은 시민들이 촛불혁명을 이룰 때도 그랬듯이 지난날 우리가 외쳤던 가장 뜨거운 단어가 ‘국민주권’과 ‘민주공화국’이 아니겠나”라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정신과 열망이 담긴 이 문서를 통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MBC ‘1919-2019, 기억·록’, 김연아가 전하는 ‘유관순 열사’ 이야기

    MBC ‘1919-2019, 기억·록’, 김연아가 전하는 ‘유관순 열사’ 이야기

    삼일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획된 MBC 특별기획 ‘1919-2019, 기억록’이 오늘(7일)부터 본격적인 방송에 들어간다. ‘1919-2019, 기억록’은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대표하는 100인의 인물을, 이 시대 대표 샐럽 100인의 ‘기록자’를 통해 새롭게 조명하는 3분 캠페인 다큐 프로그램이다. 비와이의 프롤로그와 김연아의 0회차 ‘무명(無名)’에 이어 오늘부터 1회차 방송이 시작된다. 1회차 기록자로 나서는 김연아가 재조명하는 첫 번째 인물은 ‘유관순 열사’다.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사 중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두 가지 행적을 통해 유관순 열사를 재조명할 예정이다. 김연아는 프로그램 촬영에 앞서, 제작진과 함께 유관순 열사에 대한 기록을 검토하고 프로그램에 대해 논의하는 등 열의를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삼일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MBC 특별기획 ‘1919-2019, 기억록’은 MBC를 통해 수시 방송되고, ‘기억록’ 홈페이지를 통해 만나 볼 수 있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세계사 유례없는 민중 주도 임정… 3·1운동 뒤 연해주 첫 ‘깃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세계사 유례없는 민중 주도 임정… 3·1운동 뒤 연해주 첫 ‘깃발’

    <1부>새 역사 임시정부의 형성 ①러시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우리는 헌법 전문을 통해 우리나라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배웠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통해 해방을 맞게 됐는지 제대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대한민국 임정은 1919년 여러 정부가 하나로 합쳐져 세워진 뒤 끝없는 갈등과 내분으로 수차례 해체 위기를 맞았다. ‘식물정부’로 전락해 명맥만 유지하던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임정은 우리 역사 최초로 근대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27년간 외교 노력과 전쟁을 병행한 독립 운동의 총괄체였다. 왕족이나 정부 계승자도 아닌 이들이 민중의 뜻으로 임시정부를 세워 30년 가까이 제국주의 국가와 투쟁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서울신문은 한국과 중국, 러시아에 있는 임시정부 이동 경로를 추적하며 임정의 역사와 인물, 이슈 등을 망라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을 12회에 걸쳐 싣는다. 이번 역사 탐구에는 김원봉(1898~1958년)과 김산(1905∼1938년), 조봉암(1898∼1959년) 평전을 쓴 이원규(72) 작가와 독립운동가 김연방(1881~1919년)의 증손자 김주용(53)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가 함께했다.●신한촌碑, 고려인 독립운동 중심지 일깨워 지난달 초 러시아 프리모르스키(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강추위가 몰려왔다. 서울보다 기온이 10도 가까이 낮았다. 기자를 안내한 교포2세 권세라(27) 가이드는 “그래도 여기는 연해주 다른 도시보다는 따뜻한 편”이라며 “러시아에는 ‘40도 이하 술은 술이 아니다. (영하) 40도가 안 되는 추위는 추위가 아니다’라는 속담이 있다”며 웃었다. 공항에서 남부 루스키섬 쪽으로 50여분쯤 달리자 시내 외곽 라게르산 비탈에 도착했다. 검은색 철 울타리로 둘러싸인 곳에 직사각형 모양 5m짜리 기둥 3개와 네모난 돌 8개가 놓여 있었다. 한국 관광객들이 묶어 놓은 태극기와 노란 리본도 눈에 들어왔다. 신한촌 기념탑이었다. 3개의 기둥은 우리 민족과 친근한 숫자인 3을 형상화한 것이다. 8개의 돌은 조선 8도를 상징한다.1911년 러시아 당국은 페스트 창궐을 명분 삼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있던 고려인 마을 구(舊)개척리를 철거했다. 한인들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새로운 한국’이라는 뜻의 신한촌을 세웠다. 1919년 3월 17일 우리 민족이 세운 첫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한때 1만명이 넘는 고려인이 여기에 살았지만 1937년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1878~1953년)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마을을 모두 파괴했다. 지금은 기념비만이 이곳이 연해주 고려인 독립운동의 구심지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3·1운동은 세계 각지에 임시정부 설립을 촉발했다. 독립선언서 첫 구절에 “이제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한다”고 밝히면서 여기저기서 뜻있는 이들이 주권 기관을 세워 이를 정당화하고자 한 것이다.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춘 곳은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와 중국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 정부), 서울의 한성 임시정부 등 세 곳이었다.●전로한족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1917년 3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정부 수립을 위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다. 300년 넘게 러시아를 지배한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졌다.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년)은 열강의 제국주의 책동을 비난하며 “약소 민족의 자결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연해주 고려인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년)에서 일본이 패배하면 우리도 반제국주의 흐름에 힘입어 독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같은 해 5월 문창범(1870~1938년)과 최재형(1860~1920년)이 중심이 돼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 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열었다. 러시아 전역의 한인을 대표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라는 의미다.이들은 1919년 3·1운동을 준비하면서 2월 25일 중국 간도 지역 동포들과 함께 총회를 열었다. 이때 이름을 ‘대한국민의회’로 바꾸고 연해주와 간도를 기반으로 한 임시정부를 선언했다. 의회 의장에 문창범을 선출하고 외교부장 최재형, 군무총장 리동휘(1873~1935년) 등을 임명했다. 공식 선포는 20일쯤 뒤인 3월 17일에 이뤄졌는데, 이는 3·1운동과 궤를 맞추려는 의도였다. 대한국민의회는 ‘노서아(러시아) 영토에 있던 임시정부’라는 뜻으로 ‘노령정부’라고도 한다.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국가 기능을 한 곳에 모아 집행하는 소비에트제를 채택했다. 단시일 내에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에 나서고자 정부 조직 과정을 다수 생략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대한국민의회는 정부 선포 직후 각국 영사관에 전문을 보내 일본 제국주의와의 혈전(血戰)을 선언했다. 간도 뤄쯔거우(나자구)에 군사 훈련소도 마련했다. 신한촌 옛터에서 이원규 작가는 “전 세계 임시정부의 최종 목표는 독립 전쟁으로 영토를 되찾아 새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노령정부는 이런 임정의 본령을 구현할 최적지에 있었다”고 평했다.다만 이 정부는 상하이·한성 정부와 달리 별도의 헌법을 발표하지 않아 조직 구성이 체계적이지 못했다. 고려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유산계급인 원호인(러시아 귀화자)들이 무산계급인 여호인(미귀화자)들을 차별해 한인 사회가 둘로 쪼개지는 발단이 되기도 했다.●러·韓 어느 곳에도 최재형 추모비 하나 없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00㎞가량 떨어진 우수리스크. 발해성 등 2개의 성터가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쌍성자’로 부르던 곳이다. 민가가 즐비한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 가자 단정히 정돈된 최재형 생가가 나타났다. 추운 날씨에도 러시아 인부들이 기념관으로 리모델링하느라 내부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집은 그가 1919년부터 이듬해 4월까지 살던 곳이다. 권 가이드는 “최재형을 빼놓고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그럼에도 아직 한국이나 러시아 어느 곳에도 추모비 하나 세워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전했다.노령정부 태동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을 들자면 단연 ‘연해주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최재형이 꼽힌다. 안중근(1879~1910년)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1841~1909년)를 저격할 수 있게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을 건넨 인물이다.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조선 최초의 근대인’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재조명될 가치가 충분하다.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였던 아버지 최형백과 기생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9살이던 1869년 가족들이 배고픔과 학정을 이기지 못하고 크라스키노(연추)의 한인마을 ‘지신허’로 이주했다. 11살 때 “밥만 축낸다”는 형수의 구박에 집을 뛰쳐나왔다가 포시에트라는 작은 항구에서 러시아 선장 부부를 만났다. 이들은 최재형을 친아들처럼 보살폈다. 그는 이 부부와 전 세계를 항해하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서양문명을 체험했다.187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최재형은 군수업자로 변신해 성공을 거뒀다. 당시 이 지역 노동자 한 사람의 급여가 월 10~15루블 정도였는데, 그는 포시에트항을 근거지로 여러 사업을 벌여 매달 1만루블 이상을 벌었다. 거부가 되자 그는 자신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고국을 돕고자 발벗고 나섰다. 1909년 10월 안 의사의 하얼빈역 저격을 도운 것이 대표적이다. 최재형의 막내딸인 엘리자베트 표트로브나의 회고록에는 “안중근은 아버지와 함께 거사를 준비했고 실행 전 우리 집에 기거하며 사격 연습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연해주 한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페치카’(러시아식 난로)라는 애칭도 얻었다.●전 재산 독립에 쓰고… 日 헌병대에 총살당해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일본은 1920년 4월 러시아혁명 세력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상륙해 대대적인 체포·학살에 나섰다. 조선 독립에 전 재산을 쓰고 어렵게 살던 최재형은 우수리스크 볼로다르스카야의 자택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돼 4월 5일 처형됐다. 63세였다. 당시 막내딸이 아버지에게 “뒷문으로 도망가라”고 여러 차례 애원했지만 가족들이 고초를 겪을까봐 담담히 앞문으로 나갔다고 한다. 죽음을 맞으러 발걸음을 내딛던 그의 마음은 얼마나 무겁고 외로웠을까. 블라디보스토크·바라바시·우수리스크·크라스키노(러시아)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베델 손녀집에 ‘독립유공자 명패’ 걸렸다

    베델 손녀집에 ‘독립유공자 명패’ 걸렸다

    을사늑약 부당함 폭로 글 게재 등 인정“제 집이 해외에서 처음으로 독립유공자의 명패를 부착하는 곳인 데다 한국의 국가보훈처가 여기서 공식 기념행사까지 열어주니 정말 기쁩니다. 한국인들이 우리 할아버지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에게 얼마나 감사하는지 충분히 알 것 같습니다.” 1904년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항일언론운동을 한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은 22일(현지시간) 영국 스폴딩의 자택에 독립유공자 명패가 걸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처럼 감격스러워 했다. 피우진 보훈처장은 이날 이곳에서 열린 ‘독립유공자의 명패 전달식’에 참석했다. 피 처장과 수전은 문 왼편에 ‘독립유공자의 집’이라고 적힌 명패와 베델의 항일 공적을 설명하는 영문 설명판을 부착했다. 수전은 감회에 젖은 듯 연신 명패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보훈처는 해외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중 첫 명패 전달 대상으로 베델을 선정했다. 그만큼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베델의 역할을 크게 인정한 것이다. 베델은 민족언론을 창간했을 뿐 아니라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글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글을 게재하는 등 독립운동의 ‘촉진자’로 활약했다. 1968년 한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수전은 1995년 베델의 직계 후손으로서 처음 한국을 방문해 훈장을 받았다. 수전은 “할아버지를 기리는 공식 행사 때마다 한국을 자주 찾았는데, 오늘은 한국 정부가 영국을 직접 찾아줘 감회가 새롭다”며 “이 명패로 할아버지가 조선이란 나라에 가서 특별한 업적을 남긴 사실이 이웃에 전파될 것이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교육이 될 것”이라고 했다. 또 “내 조상이 한 나라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사실이 영광스럽다”고 덧붙였다. 서울신문과 대한광복회는 보훈처 후원으로 지난 10월부터 내년 3·1운동·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독립유공자의 명패’ 모금 활동을 벌여왔다. 한편 이날 수전은 베델 부부가 조선에서 사용하다 영국으로 가져간 수납용 가구, 우편엽서, 베델이 촬영한 당시 사진 등을 한국 정부에 기증(영구 임대)했다. <서울신문 8월 3일 27면> 스폴딩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고려인 한 서린 땅… 정부는 왜 연해주 유적 방치하나”

    “고려인 한 서린 땅… 정부는 왜 연해주 유적 방치하나”

    박물관 사실상 버려져… 학계도 무관심 안중근·조명희 기념비 사후 관리 부실 “여행업계, 고증없이 사실화 안타까워… 한국 정부가 직접 유적 발굴·관리해야”“러시아 프리모르스키(연해주) 일대에는 아직도 고려인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요. 1937년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1878~1953)이 고려인 17만여 명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며 크라스키노(연추) 한인마을을 탱크로 파괴했지만 지금도 이곳에 가면 우리 선조들이 쓰던 물건이 발굴됩니다. 올해 5월에도 연자방아와 무너진 초가집을 새로 찾았으니까요. 3·1 운동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대한한국 정부에서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죠.” 고려인 3세로 러시아 내 한인 독립운동사의 최고 권위자인 송지나(67) 러시아 극동연방대 한국어과 교수는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가 연해주 고려인 유적에 대한 발굴과 관리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860년 제정 러시아는 청과 베이징 조약을 맺고 연해주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매서운 추위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이곳에 1864년부터 조선인들이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후 “연해주에 오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한인의 수가 급격히 늘었다. 이렇게 러시아에 정착한 한인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고려인들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에도 공헌했지만 상대적으로 정부나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송 교수는 아쉬워했다. 실제로 서울신문이 ‘임시정부 100주년 기획 취재’를 위해 찾아간 연해주 포시에트(목허우)에는 러시아 학자가 평생 발굴한 고려인 기와와 벽돌, 맷돌 등을 모아놓은 박물관이 있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사실상 버려져 있었다.그는 책임지지 않는 우리의 기념비 관리 문화에도 일침을 가했다. 송 교수는 “독립운동가 기념비는 개인이 임의로 세우게 해서는 안 된다. 사후 관리가 부실해지면 되레 위인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라며 “우수리스크(쌍성자)에 있는 안중근(1879~1910) 의사 기념비나 지난 9월 문재인 대통령이 깜짝 방문해 화제가 된 조명희(894~1938) 작가의 블라디보스토크 기념비 모두 한동안 관리자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안 의사가 손가락을 끊어 독립 의지를 다진 것을 기리는 단지동맹 기념비(크라스키노 소재)가 두 개나 세워져 있는 것도 기념비 관리가 제대로 되고 않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또 “한국 여행업계가 연해주 이곳저곳에 ‘OOO 선생이 살던 집’이라는 식의 유적 표지판을 설치한다. 여행 상품을 만들려고 역사적 고증도 거치지 않은 내용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며 “한국관광공사나 주블라디보스토크 한국 영사관도 이런 현실을 애써 모르는 척해 화가 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송 교수는 “가능하다면 내가 그들에게 고려인 독립운동에 대한 정확한 역사 지식을 강의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서울·포시에트(러시아)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본지 탐사기획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관훈언론상

    본지 탐사기획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관훈언론상

    관훈언론상 심사위원회는 ‘제36회 관훈언론상’ 수상작으로 서울신문 탐사기획부의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서울신문 9월 3~12일자> 등 3편을 선정했다고 10일 밝혔다.서울신문 탐사기획부(유영규·임주형·이성원·신융아·이혜리 기자)의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8회 연속보도는 사회 변화 부문에 선정됐다. 고령화 시대, 핵가족 시대에 간병 문제로 가족이 위기를 맞는 등 그 심각성을 생생하게 알림으로써 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우고 정부의 새 대책도 이끌어 낸 공로를 인정받았다. 권력 감시 부문에선 올해 수상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국제 보도 부문에는 연합뉴스 김용래 파리특파원의 ‘프랑스 내 한국독립운동사 재발견’ 연속보도가, 저널리즘 혁신 부문에는 한겨레신문 변지민·정환봉·최민영 기자의 ‘천안함 살아남은 자의 고통’ 시리즈 보도가 수상했다. 시상식은 오는 27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관훈클럽 주최로 열린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서울신문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관훈언론상 수상

    서울신문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관훈언론상 수상

    관훈언론상 심사위원회는 ‘제36회 관훈언론상’ 수상작으로 서울신문 탐사기획부의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서울신문 9월 3~12일> 등 3편을 선정했다고 10일 밝혔다.서울신문 탐사기획부(유영규·임주형·이성원·신융아·이혜리 기자)의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8회 연속보도는 사회 변화 부문에 선정됐다. 고령화 시대, 핵가족 시대에 간병 문제로 가족이 위기를 맞는 등 그 심각성을 생생하게 알림으로써 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우고 정부의 새 대책도 이끌어 낸 공로를 인정받았다. 심사위원회는 “각 언론사에서 올해 관훈언론상에 모두 57건의 우수한 기사를 출품했으며, 엄정한 예비심사와 본심사를 거쳐 수상작을 뽑았다”며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본심에 오른 다른 후보작 9건도 훌륭한 기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밖에 권력 감시 부문에는 수상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국제 보도 부문에는 연합뉴스 김용래 파리특파원의 ‘프랑스 내 한국독립운동사 재발견’ 연속보도가, 저널리즘 혁신 부문에는 한겨레신문 변지민·정환봉·최민영 기자의 ‘천안함 살아남은 자의 고통’ 시리즈 보도가 수상했다. 시상식은 오는 27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관훈클럽 주최로 열린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안중근 의사 의거일에 불거진 ‘김재규 의사’ 논란...‘적폐 청산 주역’ vs ‘갈등 유발 소지’

    안중근 의사 의거일에 불거진 ‘김재규 의사’ 논란...‘적폐 청산 주역’ vs ‘갈등 유발 소지’

    “김재규 의사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만주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109년이 되는 날인 26일, 인터넷 상에 “김재규 의사를 추모한다”는 글이 잇따라 올라와 논란이 예상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권총으로 살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의사’로 칭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지를 놓고 보수·진보 세력 간 갈등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에 맨 몸으로 저항해 자신의 지조를 나타낸 사람은 ‘열사’, 무력으로 항거한 사람을 ‘의사’로 정의한다. 1970년대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에서 독립운동사 편찬을 앞두고 항일 선열들의 공적을 조사하면서 처음 정해졌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희생 정신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 내린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쏜 안중근 당시 대한의군 참모중장은 무력으로 항거했기 때문에 의사로 불린다. 하지만 비참한 노동자의 현실을 바꾸고자 자신의 몸을 불태운 전태일 ‘열사’처럼 의사, 열사라는 표현이 독립운동가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일부 네티즌들은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박 전 대통령을 총으로 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도 ‘김재규 의사’로 불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적폐 청산에 앞장 선 인물인만큼 역사적으로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날도 일부 인터넷 게시판에는 “39년 전 오늘, 유신의 종지부를 찍은 고 김재규 의사의 명복을 빕니다”란 글이 어김없이 올라왔다. 사형 집행 당일 그가 남긴 마지막 발언 중 일부인 ‘국민 여러분, 자유 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십시요. 저는 먼저 갑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언젠가 복권되고 국립현충원에 모시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라는 글도 있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안중근 의사 의거, 10·26 사태,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 모두 10월 26일이란 점에서 이날을 ‘탕탕절’로 명명하고 탕수육 먹는 날로 기념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실제 일부 네티즌은 탕수육 먹은 사진을 ‘인증샷’이라며 올리기도 했다.이에 대해서는 불편하다는 시선도 없지 않다. 안중근 의사 의거 109주년을 맞아 고귀한 희생 정신을 기리는 날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해 쓰는 표현(의사, 열사)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외부로 드러낼 수는 있지만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은 표현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김포의 항일운동사’ 독립운동기념관 특별기획전 연다

    ‘김포의 항일운동사’ 독립운동기념관 특별기획전 연다

    경기 김포시청소년육성재단의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은 오는 17일부터 11월 30일까지 특별기획전 ‘김포의 항일운동사’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의병재판기록부와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등 항일 관련 사료들을 바탕으로 김포의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들을 살펴볼 수 있다. 김포에서는 의병이 결성되지는 않았으나 인근 지역 의병 부대들이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김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하는 등 보급지 역할을 한 사례들이 나타나 있다. 또 김포 출신이 인근 지역의 의병부대에 참여해 김포를 중심으로 활동한 사례들이 존재하고 있다. 특히 의병재판기록부를 통해 김포 출신 의병인 김경운·이종근·조봉근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의병 후손의 증언에 따르면 김포 지역에서도 의병활동이 있었고 김포 인근 지역 의병 부대에 소속돼 활동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의병항쟁 재판기록이나 판결을 통해 김포에서 의병활동을 일부분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독립운동 특별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자세한 사항은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031-996-6271)으로 하면 된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경쾌하고 젊은 윤봉길·안중근이 뮤지컬로 뜹니다”

    “경쾌하고 젊은 윤봉길·안중근이 뮤지컬로 뜹니다”

    이회영 선생이 세운 독립군 학교 이야기 손자 이 의원 관심… 배우들 격려·조언 지창욱·강하늘·성규 등 출연진도 화려 9~22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무대 공연“교과서가 아닌 역사 속 실제 윤봉길, 안중근, 이회영의 모습을 그려낸 배우들의 연기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공연계 관계자의 홍보성 멘트가 아니다. 뮤지컬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의 말이다. 이 의원이 이 작품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좀더 각별하다. 작품의 배경이자 항일 독립 전쟁의 선봉에 섰던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인 우당 이회영 선생이 그의 조부이기 때문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제70주년 국군의날 기념작인 창작뮤지컬로 육군본부가 기획한 ‘군(軍) 뮤지컬’이다. 현역 복무 중인 배우 지창욱과 강하늘, 아이돌그룹 ‘인피니트’의 멤버 성규 등 스타들이 무대에 오르며 웬만한 상업 뮤지컬을 능가하는 캐스팅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의원은 지난달 14일 제작발표회 때 무대인사 자리에 섰고 광복절 등에는 배우들의 연습 뒤풀이 현장을 찾아 격려하기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우당의 아내이자 이 의원의 할머니인 독립운동가 영구 이은숙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 의원은 앞서 작품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당시 독립운동사의 뒷이야기를 해 주며 시나리오 제작에 ‘간접 참여’하기도 했다. 이 의원은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의 승리 뒤에는 바로 신흥무관학교 출신 교관들의 큰 역할이 있었다”면서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체코제 기관총 등 최신식 무기를 보유한 최정예 부대였다”고 강조했다.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의 헌신으로 희망찬 미래가 올 것이라는 확신과 낙관으로 살았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이런 젊은이들로 가득 찼죠.” 이 의원은 독립운동이라는 주제를 너무 무겁게만 다룰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윤봉길 의사는 이번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보다도 젊은 24세에 순국하지 않았느냐”며 “독립운동을 다룬 작품들이 당시 청년들의 경쾌했던 모습을 재현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어린 시절 이 의원의 집에는 늘 직업도 없고 사는 곳도 불분명한 낯선 남자들이 오가며 밥을 얻어먹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조부·조모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의 후손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속설이 아닌 엄연한 현실임을 이 의원은 어린 시절 목격했다. 이 의원은 “젊은 연예인으로만 생각했던 배우들이 당시 역사적 사실을 상세히 잘 알고 있고 진중한 자세를 보여 놀랐다”면서 “젊은 관객들도 작품을 관람하며 젊고 활기 넘쳤던 실제 독립운동의 모습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앞서 총 20회 공연의 티켓이 매진되는 등 높은 관심 속에 오는 9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 무대에 오른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뉴스AS] 1500만원 호화 시찰에도… 감시는커녕 금배지 눈치보는 권익위

    [뉴스AS] 1500만원 호화 시찰에도… 감시는커녕 금배지 눈치보는 권익위

    피감기관 돈으로 해외 출장을 다닌 국회의원들은 거침이 없었다. 1회 출장에 1000만원이 넘는 금액을 지원받은 사례가 수두룩했다.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지원받은 지방의회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민간기관이나 단체의 지원을 받은 공직자가 여행 목적이나 금액을 밝히지 않는 사례도 부지기수였다. 사실상 혈세로 해외 여행을 다녀왔지만 권력기관 공직자들을 제어할 방법은 없었다.서울신문은 지난 7월 26일 국민권익위원회의 ‘공공기관의 해외 출장 지원 실태 점검’ 발표를 계기로 권익위에 관련 정보 공개를 요청했다. 이를 통해 최근 637쪽에 이르는 2016~2018년 공공기관 해외 출장 지원 자료를 넘겨받아 2일까지 전수조사했다. 공개된 정보에는 큰 허점이 있었다. 우선 권익위의 ‘국회 눈치 보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피감기관으로부터 해외 출장비를 지원받은 국회의원 38명, 지방의원 31명의 명단을 비공개한 것이다. 권익위는 “감사·감독에 관한 사항 또는 내부 검토 과정에 있는 사항으로 공개하면 업무의 공정한 수행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이유를 댔다. 국회는 이미 지난 5월 피감기관 지원 해외 출장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보고 규정을 바꿔 금지한 바 있다. 그런데도 권익위는 ‘자료 검토가 끝나지 않았다’는 궁색한 이유를 들어 정보를 비공개 처리했다. 물론 정보공개법은 관련 조사가 끝나면 모든 내용을 공개하도록 해 ‘시간끌기’라는 인상마저 준다. 정진임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간사는 “국회의원 명단은 비공개 사항에 해당하지 않는 데도 민감한 내용이라는 이유로 제외시킨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시민단체 ‘세금도둑 잡아라’는 지난달 22일 국회의원 38명의 명단을 공개하도록 국회 사무총장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권익위는 또 국방부와 외교부, 통일부, 방위사업청 등이 국회의원에게 지원한 사례도 ‘군사, 외교 사항은 비공개할 수 있다’는 정보공개법 예외 조항을 들어 비공개했다. 대신 나머지 피감기관 명단과 지원내용, 민간기관·단체로부터 출장비를 지원받은 공공기관 정보를 공개했다. 국회의원과 보좌진 등에게 출장비를 지원한 것으로 밝혀진 피감기관은 모두 14곳이었다. 이 가운데 외교부 산하 한국국제교류재단이 12건,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9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국가보훈처, 수출입은행, 대한장애인체육회가 각 4건, 국무총리 비서실 3건, 기획재정부, 재외동포재단 각 2건 등이었다. 수출입은행(1625만원), KOICA(1590만원), 한국국제교류재단(1509만원), 보훈처(1381만원), 기재부(1348만원) 등 5개 기관이 국회의원 또는 보좌진에게 지원한 1인당 출장비는 1000만원을 훌쩍 넘어 ‘황제 출장’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더 큰 문제는 ‘출장의 질’이다. ▲보훈처 ‘독립운동사적지 실태 확인’ ▲기재부 ‘조세정책 개발을 위한 해외 선진사례 연구’ ▲국무총리 비서실 ‘현지 정책 연수’ ▲재외동포재단 ‘미국 지역 한글교육 실태 파악’ ▲‘동포사회 격려와 현안 청취’ ▲수출입은행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사업 현장 점검’ 등은 공식적인 행사로 보기 어려웠다. 심지어 KOICA는 목적이 불분명해 외유성 출장이 의심되는 ‘현지시찰’이 7건, 한국국제교류재단은 ‘국제교류, 의회외교, 현지행사’가 7건이었다. KOICA는 국회의원 해외 출장 지원이 청탁금지법 위반이라는 지적이 일자 내년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방의회를 지원한 공공기관도 15곳이었다. 강원 양구군이 4건으로 가장 많았고 나머지 기관은 모두 1~2건이었다. 내용은 국회의원 해외 출장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현지시찰과 교류 행사였다. 양구군 ‘러시아 알혼시 국제교류’, 울산시 울주군 ‘평화통일 정책 마련을 위한 안보 시찰’, 충북 영동군 ‘민주평통 평화안보지역 연수’, 전남 함평군 ‘해외 안보연수’, 경기 의정부시 ‘선진 폐기물처리시설 견학’, 성남도시개발공사 ‘현지시찰’, 수원시 지속가능도시재단 ‘선진지벤치마킹’ 등이다. 그나마 경남 창녕군은 행사 목적이 분명한 ‘영산 줄다리기 보존회와 일본 센다이 큰 줄 줄다리기 보존회 교류’를 내세웠다. 권익위는 “행사 목적상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해 특정인 선정이 불가피할 때 합리적인 기준으로 지원 대상을 선정했다면 공식적인 행사로 인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갑을 관계’인 민간기관으로부터 해외 출장비를 지원받은 공공기관 중에서는 서울대가 1158건으로 가장 많았고 식품의약품안전처 672건, 한국가스안전공사가 464건 등으로 뒤를 이었다. 특이한 것은 서울대였다. 식약처는 국제회의, 포럼, 심포지엄 참석 사례 25건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해외 기관 의약품 제조·품질관리에 관한 규칙(GMP) 검증을 위한 공식 업무였다. 한국가스안전공사 출장도 대부분 현지기관 검사가 목적이었다. 반면 서울대는 목적이 불분명한 사례가 많았다. 특히 목적란에 ‘기타’라고 표기한 것이 43건이나 됐다. 이 사례들 중 13건만 해외 출장비 지원액을 표기했고 나머지는 아예 금액이 없었다. 민간기관의 지원을 받아 공공기관 담당자가 현지시찰을 나간 사례는 69건이나 됐다. 단순 현지시찰은 국회의원 사례처럼 공식적인 행사로 인정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중앙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2건)뿐 아니라 한국교육개발원(2건), 문화재청(1건) 등의 공공기관도 포함됐다. 그 밖에 대구시(3건), 서울시(1건), 경기도(1건), 제주도(1건) 등 광역지방자치단체와 경기 남양주시(3건)·광주시(2건), 서울강남문화재단(2건), 구로문화재단(2건) 등 지방자치단체와 산하기관이 다수 포함됐다. 김선택 한국납세자연맹 회장은 “피감기관이나 민간기관이 국회의원이나 공직자 해외 출장을 지원하는 것은 법 위반 여부를 떠나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며 “사실상 뇌물과 비슷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1991년 ‘국회의원 윤리강령’과 ‘국회의원 윤리실천규범’을 제정했지만 선언적인 수준에 그쳤다. 반면 미국은 하원 의원이 민간으로부터 해외 출장을 후원받으면 출장 30일 전에 윤리위원회에 신고해 허가를 받도록 했다. 또 출장을 마치고 난 뒤에도 15일 이내에 출장 보고서를 하원 사무총장에게 제출해야 한다. 여기에는 각종 출장경비 사용 내역과 활동 내역이 모두 포함된다. 456쪽에 이르는 하원 윤리지침서에는 출장과 관련한 규정이 빽빽하게 나열돼 있다. 영국 하원도 300파운드(약 43만원)를 넘는 금액을 지원받으면 출장 경비, 출장 기간, 출장 목적 등을 포함한 ‘이해관계등록부’에 등록해야 한다. 김 회장은 “해외 출장에 지원한 금액과 동선, 목적을 모두 공개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이번 자료 공개를 계기로 모든 기관이 투명하게 해외 출장 정보를 공개할 수 있도록 공공기관 윤리규정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독립운동 남편 옥바라지한 부인도 유공자입니다”

    “독립운동 남편 옥바라지한 부인도 유공자입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 발굴 사업 주관 투옥된 가족 보살핀 박애신 여사 찾아 “부족한 기록·증언으로 인정 쉽지 않아”“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을 위해 옥바라지를 하며 평생 희생한 부인은 어떤 포상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한 겁니다.”정부는 지난 15일 202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찾아내 이 중 26명에 대해 서훈을 수여했다. 발굴 사업을 주관한 이정은(64) 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이사장은 28일 “남편이나 시아버지를 포함한 독립운동가를 위해 밥을 하고 옷을 기웠으며, 독립운동을 떠난 남편 대신 만주땅을 개간한 여성의 노력이 독립운동의 중요한 부분”이라며 “한평생 희생한 여성을 독립운동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면 ‘위대한 여성상’을 마련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굴을 넘어 독립운동을 지원하느라 희생한 여성도 사각지대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이사장은 이번 발굴 작업에서 찾아낸 박애신(1900년생) 여사를 대표 사례로 들었다. 박 여사는 1919년 3월 9일 독립운동가 김태규 선생과 혼인했다. 파리평화회의에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데 관여한 시아버지 김병농 목사와 남편이 서대문 형무소에 연이어 갇히면서 옥바라지를 했다. 출옥한 남편은 몇 개월 후 상하이 임시정부의 안동교통부(국내 거점과 비밀 연락 업무)에 들어갔다. 의열단 등에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이 이사장은 “부부의 마지막 만남은 김태규 선생이 갓난아이가 보고 싶으니 미상의 역 플랫폼에 아기를 안고 서 있으라고 기별을 했던 것”이라며 “김 선생이 기차를 타고 가며 먼발치에서 부인과 아기를 바라봤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여사는 독립운동가 인정 기준을 충족하지는 못한다. 그는 정부가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에 나선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 이사장은 보훈처의 용역공모사업에 따라 연구진을 꾸려 지난 1월 12일부터 4개월간 발굴을 진행했고 202명을 찾아냈다. 정부는 지난 15일에 훈장과 포장을 받은 26명 외에도 향후 검증을 통해 오는 11월 순국선열의 날, 내년 3·1절 등에 차례로 서훈을 수여할 계획이다. 이 이사장은 발굴 과정에서 애로사항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여성 독립운동 기록을 들었다. 그는 “문헌이나 증언을 찾고자 4개월 발굴 기간에 2개월은 족히 헤맨 것 같다”며 “전체 독립 유공자 중 여성이 2%에 불과했던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행히 보훈처가 3개월 옥고를 치러야 한다는 독립유공자 기준을 ‘실질적인 독립활동 여부’로 변경하면서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빛을 보게 됐다”고 설명했다. 독립기념관 내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에서 수석 연구위원을 지낸 이 이사장은 2012년 퇴임을 하면서 대한민국역사문화원을 설립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사설] 광복 73년에도 아직 갈 길 먼 독립유공자 발굴과 예우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광복절 경축사에서 “묻힌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의 완전한 발굴이야말로 또 하나의 광복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를 마지막 한 분까지 최선을 다해서 찾아내고, 그 공적을 기리는 일은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무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에도 “독립운동가들을 모시는 국가의 자세를 완전히 새롭게 하겠다”고 했다. 이에 따라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9월 독립운동 사료에 대한 국가 입증 책임을 강화하고, 포상 심사 기준 재검토 등을 담은 ‘독립유공자 발굴·포상 확대 계획안’을 내놓았다. 지난 6월엔 ‘수형(옥고) 3개월 이상’이라는 기준 조항을 없애고, 당시 사회 구조상 관련 공식 기록이 많지 않은 여성은 일기, 회고록, 수기 등 직간접 자료도 폭넓게 인정하는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기준 개선안’을 확정했다. 하지만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조카인 고(故) 안맥결 여사의 사례에서 보듯 현실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만삭의 몸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안 여사는 한 달여 만에 가석방됐다는 이유로 심사에서 탈락해 이번 광복절 독립유공자 포상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조선혁명군으로 활약한 조부의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했더니 70년이 넘은 중국 법원의 재판 서류를 가져오라고 했다는 어느 후손의 한탄은 보훈처가 누구를 위한 기관인지 되묻게 한다. 그동안 소외됐던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도 시급하다. 지난 1년간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이 발굴돼 이 중 26명이 이번에 서훈을 받은 건 다행이다. 하지만 전체 포상자 1만 5000여명 중에 2%에 불과해 갈 길이 멀다. 차별을 딛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여성 애국지사들의 항일 역사가 온전히 복원될 때 광복의 의미가 더욱 빛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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