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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항래해제 「유방집」/독립지사 조소앙선생의 대표적 서술

    ◎민족수난기 애국선열 81인 전기수록 「유방집」은 항일독립지사 조소앙선생이 19 05년부터 19 32년까지의 민족수난기에 활동한 애국선열 81인의 사적과 당시 독립운동의 목표·행동등 민족정신을 수록한 대표적 저술물. 이 책은 19 32년 5월 중국 남경의 대동학회에서 간행되었으나 그동안 전해지지 못하다가 이번에 국내에 단 한권 남은 유일한 소장본인 조명하의사의 유독자 조혁래씨의 본을 영인해 출판한 것.신라시대 김대문의 「화랑세기」가 있었기 때문에 후세에 화랑정신이 전해진 맥락과 같이 독립의사·열사들의 전기를 남김으로써 이들의 민족투혼을 계승코자한 조소앙선생의 집념어린 산물이다. 이 책의 내용은 ▲중국인들의 서문과선생이 직접 쓴 유방집서 ▲중국인들의 휘호 ▲단군의 사진,의사·열사의 사진등50여장의 사진이 게재된 조편 ▲암살당요목표 ▲사건을 중심한 독립운동일람표 ▲의사·열사의 전기인 유방전등 크게 6부문으로 구성됐다.이가운데 핵심부문은6번째 유방열전으로 민영환,이봉창,조명하등 81인을 다시 9개로 나눠 인물별로살펴보고 있다. 「열전제9」부문중 윤봉길전의 일부와 이회영전이 낙정된 상태여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쉽긴하다.그러나 19 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상실당한뒤 순국한 민영환으로부터 19 32년 윤봉길의 상해홍구공원의거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했다.자결로 항거한 의사·열사·반일의병전쟁을 전개한 인물,헤이그 특사,만주지역의 독립군,일제 요인및 관계당국에 폭탄을 투척한 선열들의 생애와 활동 그리고 업적등을 각 인물별로 정리한 전기가 담겨져 있다. 조소앙선생은 18 87년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군)에서 태어나 성균관과 명치대학을 졸업한뒤 19 13년 중국 상해로 망명,독립운동에 참가한 독립투사이자 이론가.3균주의를 창안하였으며 대한독립선언서등을 기초하였다.임시정부의 외무부장과 한국독립당의 핵심간부로도 활동했다. 특히 이 책에는 지금까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조명하지 못한 독립투사들의 전기가 다수 실려 있어 사료부족에 허덕이는 우리나라 항일민족독립운동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조소앙지음,조항래해제,아세아문화사 1만원.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7)

    ◎유년시절:5/“7세때 3·1운동 참여” 우상화 극치/“총탄속에 짚신 벗어들고 독립만세”/온가족이 함께 육탄투쟁한듯 기술/생부 투옥때 면회내용도 날조 투성이 김일성이 만6세때 만경대에서 행동했다는 「사적」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군함바위:만경대 집 건너편 산 밑에 군함같이 생긴 바위가 있었다.김일성은 이 바위의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같이 탄 아이들에게 대장칼을 휘두르며 『원수 왜놈들을 베어버리자』고 돌격명령을 내렸다.그들은 만경봉 아래에 있었던 일제의 해각까지 돌격하였다.그래도 그는 부친을 투옥한 「왜놈」에 대한 증오를 삭일 수 없었다. ○“평생의 감명” 회고 ②김일성이 평양감옥에 부친을 찾아가서 면회했다는 이야기는 「세기와 더불어」에 나오므로 이것을 발췌해 놓는다. 우리가 들어간 면회실은 햇빛조차 잘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이었다.아버지는 나를 보자 반가워하면서 어머니더러 잘 데려왔다고 말씀하셨다. 수의를 입은 아버지의 모습은 상해서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얼굴 목 손 발 할것없이 살이란 살은 온통 멍이 들고 상처가 나 있었다. 『네가 그새 컸구나.집에 돌아가면 어른들의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잘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예,아버지도 집에 빨리 돌아오세요』하고 대답하였다. 그날 나는 아버지의 불굴의 모습에서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감명을 받았다. 그때 감옥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온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큰 사변이었다.아버지의 상처는 항일혁명투쟁 전기간 잠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1918년 가을에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왔다. 필자는 김일성이 김형직의 감옥살이를 1919년이라 했다가 16년으로 변경한 후 17년이라고 다시 고친 사실을 앞에서 지적하였다.그런데 면회 갈때의 나이까지 몰랐던 그가 회고록에서는 면회실에서의 회화내영까지 선명하게 떠올리고 있다. 이런데서 이 면회극은 역시 창작이라고 밖에 볼수 없지만 어쨌든 북한의 어린이들은 이런 식으로 「원수에 대한 증오」와 「김부자에 대한 효성」으로 자체를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의 유년시절 우상화의 하이라이트는 만7세때 그가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야기이다.「회고록」에서는 일부러 「독립만세의 메아리」라는 1절을 설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월 1일 평양에서는 낮 12시에 종소리를 신호로 수천명의 청년학생과 시민들이 장대재에 있는 숭덕여학교 운동장에 모여들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이 독립국가라는 것을 엄숙히 선언한 다음,「조선독립 만세」「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였다.시위대열이 거리로 밀려나오자 수만명 군중이 이에 합세하였다. ○수만명 시위 주장 만경대와 칠골 인민들도 대열을 지어 평양으로 밀려갔다.우리는 이른 새벽에 조반을 지어먹고 온 집안식구가 독립만세 시위에 나섰다.떠날때 수백명에 불과했던 시위대열이 나중에는 수천명으로 불어났다.군중은 북과 징을 울리고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보통문쪽으로 밀려갔다. 그때 여덟살이던 나도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시위대열에 끼어 만세를 부르면서 보통문 앞에까지 갔다.성안을 향해 노도와 같이 밀려가는 어른들의 걸음을 나로서는 비슷이 따라 잡을수가 없었다.그래서 어떤때는 너덜거리는 신발짝이 거치장스러워 짚신을 벗어서 손에 들고 뜀박질로 대열을 따라갔다.어른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 나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적들은 기마경찰대와 군대들까지 동원시켜 도처에서 군중에게 칼을 휘두르고 총탄을 마구 퍼부었다.숱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그러나 군중은 두려움을 모르고 원수들과 육탄으로 대항하였다.보통문 앞에서도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양철통 두드렸다” 이날은 내가 나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처음으로 본 날이며 우리민족의 유혈을 처음으로 본 날이었다.어린 나의 가슴도 분노로 끓어 번졌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마을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만경봉에 올라가 또다시 나팔을 불고 북을 치고 양철통까지 두드리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런 투쟁이 여러날 계속되었다.나도 형복고모와 함께 어머니를 따라 만경봉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며 밤늦게까지 있다가 내려오곤 하였다. ①무지개 비낀 만경봉 110∼119면 ②「세기와 더불어1」 30∼33면 ③같은책 36∼37면
  • 옐친대통령 국회연설

    한국은 우리와 가까운 나라로서 전통적으로 적대시한 적이 없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지극히 소원한 관계를 유지해왔다.이제 오랜 대립의 시대는 지나갔고 한국과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러시아국민은 러시아 공산주의의 교묘한 통치때문에 인격에 대한 횡포,자유에 대한 우롱을 겪었다.러시아가 공산주의병에 걸렸으며 교묘하게 남은 상처는 조만간 빠르게 완치될 것이다. 그 결실을 거두려는 우리소망은 간절하다.시장경제,성공적인 민주주의,인간의 존엄성,자유와 평화,이것이 우리정치개혁의 목적이다.개혁자가 정치·사회적 안정을 유지하고 만국간의 평화를 유지못한다면 우리는 되돌아 갈길이 없다. 우리는 이 어려운 시기에 민주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는 한국국민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오늘 노태우대통령과 최초로 기본관계조약을 맺었는데 이제 한국은 러시아의 주도적인 파트너로 등장했다. 본인은 호혜적인 33개의 가능한 프로젝트를 제시했다.한국의 민간기업들이 자유롭게 들어와 시베리아 천연개발에 협조하고 있고 러시아의 과학기술과 결부시키는 사업을 하고있다. 우리는 이 모든 부분에 한국에 최혜국대우를 할 것이다.문화·스포츠교류·의원들의 친선교류 등 날이 갈수록 교류의 문이 열리고 있다.양쪽에서 같이 걸어가면 더욱 빨리 목표로 갈 수 있다. 지구차원에서 생활을 안전하게 영위할 수 있도록 국제모순의 해결수단으로 쓰이는 전쟁을 구축해나가겠다. 아·태지역의 역내 균열을 막고 건설을 위해 다자간 교섭기구 마련이 지체없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군사적 긴장 저지와 아·태지역의 분쟁방지를 위한 센터의 설치도 필요하다.러시아는 군사배치 등 군사기밀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 한국을 방문해보니 분단되어 있는 비극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건설적인 남북통일은 시대의 지상명령이다.한반도 통일을 위한 외적인 장애는 모두 무너졌다.이제 남·북 양국의 수중에 달려있다.나는 남북상호 핵사찰이 전개되길 바란다.한반도의 통일은 러시아 극동 국경근처의 상황을 안정시킬 것이다. KAL기 희생자들의 유가족과 한국국민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앞으로는 이런 일이 안 일어날 것이다.소련의 범죄적인 체제는 92년8월 완전히 무너졌다.범죄적인 결정을 내리게 될 사람은 이제는 아무도 없다.KAL기폭파사건의 모든 진상을 끝까지 밝히기 위해 다자간 국제진상조사단 구성을 제의한다.러시아는 모든 문서를 공개하겠으며 비극의 전말을 철저히 밝힐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한국전쟁은 소련의 잘못으로 일어났지만 이제 그 진상을 밝혀야 한다.러시아는 당시의 엄청난 죽음에 대해 아픔을 같이한다.우리는 스탈린 정책의 논리를 거부하며 한국전쟁은 냉전시대의 하나의 아픔이었다.우리는 이런 정책을 규탄한다.연말까지 KGB문서·구공산당중앙위서류들을 공개할 용의가 있다. 1919년 한국 독립선언서는 마음으로서 감동을 주는 문서이다.민족의 자율·민족의 자유·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시대를 움직이는 논리이다.미국뿐 아니라 러시아정부는 한민족의 동질성과 독립성을 확인하고 있다.한민족의 고결한 이상은 다가오는 세계에서도 우호속에서 튼튼한 기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차세대의 발전에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풍요로운 경협을 이 땅에서 바라고 있다. 이번 방문이 한·러시아간 우호친선의 튼튼한 토대가 될 것으로 믿는다.자자손손이 행복하고 편안한 세대로 살수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옐친/“한·러는 이웃사촌…긴밀협력”/노대통령·옐친정상회담 이모저모

    ◎“기본조약은 우호의 나무키울 뿌리”/국회연설중에 20여차례 박수갈채 ○수행원 40여명 참석 ▷만찬◁ ○…노대통령과 옐친대통령은 19일 하오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공식만찬에 참석,우의를 거듭 다지고 민속공연을 관람. 노대통령은 만찬사를 통해 『90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처음 만났을때 옐친대통령의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굳은 신념과 불굴의 용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회상하고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민선대통령으로서 새로운 러시아 건설에 선구적 역할을 하시게 된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라고 찬사. 옐친대통령은 『「클나무는 뿌리부터 돌봐주라」는 현명한 한국속담이 있다』면서 『오늘 서명한 기본조약이 양국과 양국민간 우호협력관계에 생명을 불어 넣어줄 뿌리다』고 강조. 이날 공식만찬에는 우리측에서 3부요인과 3당대표를 비롯해 각계인사 1백30여명과 러시아측에서 수행원등 40여명이 참석했으나 초청된 3당 대표는 다른일정으로 모두 불참. ○모두 기립박수 환영 ▷국회연설◁ ○…이날 하오3시5분쯤 옐친대통령이 연설을 위해 본회의장에 들어서자 의원들이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로 옐친대통령을 맞았으며 옐친대통령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는 러시아식인사로 의원들에게 경의를 표시. 연설에 앞서 박준규국회의장은 경청을 위해 박의장부인 조동원여사와 함께 연단앞에 나란히 앉아있던 나이나 옐치나 옐친대통령의 부인을 향해 『영부인께서 따뜻한 환영에 부응하기 위해 잠시 일어나 달라』고 주문하자 나이나여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원들에게 오른손을 들어 인사했고,이때 의원들도 기립박수로 화답. ○…옐친대통령은 연설 중간중간에 『한국과는 전통적으로 적대적인 적이 없었다』고 강조하고 특히 1919년 우리나라의 3·1 기미독립선언문을 인용하면서 민족의 자유·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해 의원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기도. 또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이웃사촌」용어를 끄집어내 한·러협조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나가자고 강조. 이날 옐친대통령은 연설이 진행되는동안 의원들로부터 20여차례 박수를 받았으며 의원들은 주로 엘친대통령이 한국관계부분과 세계평화를다짐하는 대목에서 박수갈채. ▷3당대표면담◁ ○…이날 하오2시30분 국회에 도착한 옐친대통령은 이광로국회사무총장의 안내로 박준규국회의장과 함께 2층의장접견실에 입장,미리 와있던 김종필민자당대표,김대중민주당대표,정주영국민당대표등 3당대표들과 반갑게 악수. 옐친대통령은 자신과 김영삼민자당총재의 단독면담(20일 상오 예정)을 의식한듯 특히 김대중대표에게만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 옐친대통령은 자리에 앉자마자 박의장과 단원제,국회일정,12월 대선등에 관해 가벼운 얘기를 주고 받았는데 특히 우리나라는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박의장 설명에 『고생이 많겠다.러시아도 단원제라 힘든 일이 많다』고 조크. 이어 박의장은 『여기에는 각당대표와 대통령후보들이 다 나왔으며 한분 후보자는 국회의원직을 사퇴,참석치 못했다』고 참석자를 소개한뒤 『한국민들은 옐친대통령이 보여준 용기와 결단력에 경의를 표한다』고 치하. 박의장은 또 『러시아는 이제 태평양국가로서 우리나라와의 유대관계가 진심으로 발전되기를 바란다』고 희망. ○“방문 연기돼서 죄송” ▷청와대회담◁ ○…노태우대통령과 옐친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단독회담과 확대회담으로 나뉘어 1시간30분간 진행. 노대통령과 옐친 대통령은 먼저 접견실에서 우리측은 김종휘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러시아측에서 유리코프 대통령 보좌관만을 배석시킨 가운데 단독회담에 들어가 최근의 동북아정세와 양국의 경제협력등 공동관심사에 관해 의견을 교환. 지난 90년 12월 노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때 만난 바 있는 두 정상은 회담에 들어가기 앞서 2년만에 다시 만난 반가움을 표시하며 개인적인 우의를 과시. 노대통령이 먼저 『러시아대통령으로서 최초로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된것을 우리국민 모두와 함께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말하고 『2년전 모스크바를 방문했을때 처음뵙고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게 되어 더욱 반갑다』고 인사. 노대통령은 『특히 지난해 8월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민주주의를 위해 몸을 던진 용감한 모습은 저는 물론 전 세계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면서 『러시아의 민주주의 정착과 경제 개혁이라는제2의 러시아 혁명을 주도하는 데 대해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고 언급. 이에 옐친대통령은 『먼저 지난 9월 방문계획이 연기된데 대해 다시한번 죄송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말한뒤 『각하의 모스크바 방문과 저의 이번 서울 방문으로 한국과 러시아는 진정한 동반자 관계로 발전해 나갈 것으로 믿는다』고 답례. ○“서울은 아름다운 도시” ○…대통령부인 김옥숙여사와 옐친 러시아대통령부인 나이나여사는 양국정상들이 회담을 하는 동안 1층 접견실에서 환담. 김여사는 『러시아 대통령내외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것을 환영한다』고 인사를 건넸고 나이나 여사는 『어제 저녁 이태원 남산 등을 산책해보니 서울이 아름다운 도시라는 것을 알게됐다』고 서울에 대한 인상을 피력. 김여사는 이에 『서울거리를 돌아봤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피곤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침에 뵈니 아주 건강해 보여 반갑다』고 친밀감을 표시.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김종휘청와대외교안보수석비서관은 회담이 끝난뒤 청와대 춘추관에서 1시간50분동안 계속된 단독정상회담과 10분동안 열린 확대정상회담의 내용에 대해 설명. 김수석은 『양정상이 폭넓고 솔직하게,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회담을 진행했고 특히 한반도문제와 양국관계문제를 중점 논의했다』면서 『특히 비교적 수식어를 생략해 회담을 진행,회담 시간은 2시간에 불과했지만 내용은 광범위하고 많았다』고 소개. ▷경제단체오찬◁ ○…시내 롯데호텔에서 19일 열린 경제4단체장 주최 오찬에 참석한 옐친러시아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한국기업의 대러시아 투자 저해요인이 되고 있는 러시아의 정치·경제 불안에 대한 의심을 불식하는데 주력. 옐친대통령은 『한국기업인들 사이에 러시아와의 통상이나 투자협력이 위험하고 불확실하다는 분위기가 퍼져있는 것을 느끼게 됐다』고 시인하고 『그러나 러시아지도부는 확고한 결의를 가지고 경제개혁 추진계획을 수행하고 있고 그 무엇도,그 누구도 우리를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고 단언. ○환영식 간소히 치러 ▷환영행사◁ ○…청와대 대정원에서 열릴 예정이던 옐친 대통령 내외를 위한 공식환영식은 우천으로 본관 1층홀에서 간소하게 거행돼 미리 준비됐던 환영사와 답사는 생략. 상오10시 정각 팡파르가 울리는 가운데 본관 현관에 도착한 옐친 대통령과 부인 나이나 여사는 노태우대통령 내외의 영접을 받고 반갑게 악수. 노대통령은 『반갑습니다』 『먼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했고 옐친대통령은 『고맙습니다』고 답례.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신규식선생

    ◎서울신문사·국가보훈처 공동선정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기리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예관(예관) 신규식선생이 선정됐다.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신규식선생이 한·중수교 시점에서 재조명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선생은 단순한 독립운동가로서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을 접목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력배양·민중계몽운동·경제적 자립기반 확충등 총체적 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기 때문이다.신규식선생의 43세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상해 임정수립 주역… 중국승인 얻어내/한·일 합방 직후 망명… 12년간 항일운동 매진/신해혁명 참여… 손문정부와 연계투쟁 길터/22년 임정분열에 통분,병석에서 25일간 단식… 43세로 생 마감 신규식선생이 남긴 명저 「한국혼」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음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고,망국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우리의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다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여겨 소멸되지 않게하여 먼저 각자 자기의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 글에 담긴 선생의 철학은 목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소신찬 행동으로 이어진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 사이 망국의 한을 온몸과 마음 바쳐 투쟁으로 승화시킨 신규식선생의 웅변이 지금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은 무엇을 뜻하는가.우리의 독립이 진정한 의미의 독립이라 할지라도,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것인가. ○충북 문의서 출생 신규식선생은 1880년 1월13일 충북 문의군(현재 청원군)에서 중추원 의관을 역임한 신용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채호 신백우와 함께 「산동삼재」라고 불렸다. 17세때 신학문에 뜻을 세우고 상경,관립한어학교를 거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무덕을 쌓게 되었다.신동으로 불리며 한학등 구학문에 능통하고 문학에도 탁월한 자질을 지녔지만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국력배양에 있다고 생각했다. ○을사년 순국기도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육군참위로서 지방군대와 연계,대일항전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3도 유생들이 조약 철회를 상소하고,장지연은 황성신문에 피를 토하듯 「시일야 방성대곡」을 썼다.민영환 조병세 홍만식등은 자결했다. 민심이 가마솥 끓듯 펄펄 끓을 때였다.청년장교 신규식은 계동·가회동·운니동등의 솟을대문들을 골라 몽둥이로 후려치며 미친듯 소리 질렀다. 『을사오적들은 나오너라!』 신규식은 호랑이라도 잡을 듯 거리를 쏘다녔지만 역부족이었다.운니동 집으로 돌아 왔을 때 그는 자신이 한낱 미약한 존재였음을 확인했을 뿐이다. 사흘을 문걸어 잠그고 굶었다.그리고 결론을 내렸다.민영환등의 순국은 소극적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 투쟁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거름의 역할을 하는 것­내한몸 거름이 되어 무수한 열매를 맺을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한국혼」 참조·26살 신규식의 이같은 생각은 그러나 후일 「치욕을 알면 피로써 죽음을 할 수 있고,치욕을 씻으려면 피로써 씻어야 한다」는 투쟁적 신념으로 바뀐다) 신규식은 독약을 마셨으나 문을 부수고 들어온 가족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구했다.그러나 약기운이 번진 오른쪽 눈은 시신경을 다쳐 애꾸가 되었다.거울을 들여다 본 신규식은 냉소를 지었다. 『애꾸,그렇다.이 애꾸눈으로 왜놈들을 흘겨보기로 하자.어찌 나 한사람만의 상처이겠는가.우리민족의 비극적 상징이다』 이때부터 청년 신규식은 흘겨볼 예(예)자,볼 관(관)자­예관으로 자호를 삼아 끝까지 사용했다. 문동학원·덕남사숙의 설립 또는 지원,중동학교장 취임,공업전습소생들을 중심으로한 「공업연구회」조직,월간 「공업계」창간,윤치성 민대식등 퇴역장교를 규합한 황성광업주식회사 설립·운영,민족종교인 대종교에의 입교,분원자기공장의 설립과 고려자기 재현운동…등등이 선생의 무서운 행동력을 입증한다. 그러나 1910년 「보호」라는 양의 탈을 쓰고있던 일제는 본색을 드러냈다.경술국치가 그것이다.우리나라는 통째로 그들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선생은 다시한번 자결을 생각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1911년 상해로 망명,운명할 때까지 12년여 동안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첫째는 당시세계정세를 능동적으로 이용하면서 독립운동의 2대 조류인 외교중심론과 무장투쟁론이라는 두가지 운동노선을 접목시켰다는 점이다.혁명가적 열정과 선각자적 혜안을 함께 갖춘 선생은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송교인 진기미 손문등과 교류하며 중국신해혁명에 외국인으로 참여하여 나중 중국국민당정부와의 항일연계투쟁의 기틀을 마련했다. 1911년 여름 어느날 선생은 손문과 함께 자리를 했다. 『예관선생이 우리 동맹회를 도와주시니 참으로 장한 일이십니다』 『바로 중국혁명운동이 한국독립에 직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양국 사이는 순치(순치)의 관계였습니다만 중국은 우리를 속국시한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혁명이념으로 볼 때 과거 우리에게 진 묵은 빚을 청산해주리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과연 듣던대로 훌륭한 논객이요.애국자이십니다』 선생과 손문의 혁명적 동지애는 변함없이 지속됐다.이 우정을 바탕으로 선생은 손문의 도움을 얻어 많은 우리 젊은이들을 적성에 따라 교육시켰다. ○3·1운동을 점화 둘째는 3·1독립운동과 상해임정수립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선생은 1917년 조소앙 박용만등 13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선포한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핀란드 폴란드등 당시 피압박민족의 독립을 열거하며 이는 좋은 징조이므로 우리나라도 통일된 최고기관 즉 정부의 조직필요성을 역설했다.또 국내와 일본등에 동지들을 밀파,2·8독립선언에 영향을 끼쳤다. 1919년 3·1운동이 터졌고 상해에서 선생은 프랑스 조계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개설,정부수립을 추진했다.(언론인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인 오세창은 『3·1운동은 예관에 의해 점화되었다』고 단언하고 있으며 당시 일경비밀정보도 『…이 소요를 유발시킨 데에는 상해거주 불령선인들의 선동에 크게 힘입었다』고 쓰고 있다) 상해임정도 수립되었고 5월에는 손문등 중국광동정부로부터 국가승인도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정부수립후 고질적 파벌의식과 지방색·출세욕 등이 뒤엉켜 1921년4월 이후 임정은 혼란에 빠져들었다.선생은 병원에 누워 의정원 회의참석을 거부했다.4월10일 소위 「재미파」이승만이 내각수반이 되었다. 이듬해까지 병석에 누운 선생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국인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을 통탄하면서 25일동안이나 불식·불언·불약을 고집했다. 이튿날인 1922년9월25일.선생은 마지막 남은 숨을 호흡단절법으로 끊고 이승을 버렸다. 『정부…정부…』 희미한 소리가 숨을 거두는 그의 목에서 새어나왔다.단식 25일만에 처음 나온 말은 선생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그 말은 70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에도 남아있을 유언이 아닐는지…. ◎독립운동에 외교적으로 크게 공헌/역사적 평가/신승하 고려대교수·동양사 예관 신규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상 알려져있는 것보다 숨겨져있는 공이 많은 분이다.특히 중국에서 한국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었고 또한 중국정부나 중국인들로부터 중국에서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분이다.그런데 불행하게도 1922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분이다. 구한말 애국계몽운동때부터 구국자강을 위하여 실업과 교육밖에 없다는 신념아래 학교를 세우고 또한 우리나라에선 제일 먼저 실업전문잡지인 「공업계」를 발간하였다.그러나 나라를 잃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에서 중국혁명당 인사들과 접촉하고 동맹회에 가입하였다.그리고 중국이 잘되어야만 우리나라도 잘될수 있다는 생각아래 그들과 함께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이후 중국 혁명당인들과의 교류가 더욱 밀접하게 될 수 있었다. 그는 인재의 양성이 절실하다 보고 우리 젊은이들을 위하여 학교를 세웠으며 또한 중국인의 무관학교는 물론 일반 학교에도 입학을 주선하고 심지어 외국유학까지 보냈다.그리고 독립운동을 널리 알리고 선전하기 위하여 진단이란 잡지를 상해에서 발간하였다. 1921년에 손문이 광주에서 광동호법정부를 수립하자 한국임시정부 의정원은 그를 전권사절로 파견하였다.그리하여 한국임시정부가 호법정부의 승인을 받고 중국의 각 군사학교에서 한국학생의 수용을 허가받아 이후 황포군관학교 광동대학 등에 한국 젊은이들이 많이 입학되었으며 이들은 독립운동의 기간이 되었다. 따라서 신규식의 평가는 단순한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할 것이 아니라 한걸음 앞서 독립운동을 위한 또 이를 전개하는 과정가운데 중국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과 공헌이 있었음을 높게 사야 할 것이다.
  • 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서일선생

    ◎독립군 양성… 청산리전투 대승 이끌어/31세에 만주로 망명… 한인자녀들 가르쳐/항일투쟁단체 규합,대한군정서 총재로/「김좌진전투부대」의 최고지도자… 흑하사변으로 동지 잃자 자결 선열들의 애국·애족사상을 기리기 위해 서울신문사와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백포 서일선생이 선정됐다.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서일선생은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청산리전투의 실질적 주도자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교육자·종교인·언론이기도한 선생은 1921년 소위 흑하사변으로 동지들을 잃자 자결로 민족에 사죄했다.정부는 지난 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했다.백포의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전투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서일선생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일제를 깨부술 수 있는 것은 힘뿐이라고 믿었던 젊은 혁명가,그 힘은 강고한 정신력과 무장을 바탕으로 나온다고 생각한 지휘관이 서일선생이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교단에서 백묵가루를 마시던 약골의 선비 서일을 무장독립운동가로 변신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는 41세의 짧은 생애 강운데 나중 10년을 백두산과 만주벌판을 누볐다.그 마지막 10년동안 흘린 피와 땀과 사자후가 희미하게 역사에 남아 있다. 혁명가 서일선생에 대한 흔치않은 증언과 색깔 바랜 기록들이 아쉽긴 하지만 그의 이름은 청산리전투와 함께 우리 역사에 영원히 남겨질 것이다. 고향과 가족을 등진채 산악과 벌판에서 풍손로숙한 이름 모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저승에서도 서일선생을 떠받들고 있을 것이다. 선생은 1881년(고종18년)2월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희동 농가에서 태어났다.호는 백포. ○월북 경원서 출생 처음 이름은 기학이라 했지만 나중에 일로 바꿨다(대종교·보훈처 기록).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에 있던 성일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로부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나중 그의 행적을 미루어 보아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와 기를 살리는데 앞장섰으리라생각될 뿐이다. 그러나 그의 20대는 날이 갈수록 어두운 색깔로 채색되어갔다.혈기왕성했던 스물다섯에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겪었고 서른에는 망국의 경술국치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와 망명지 만주등에는 사립학교 설립이 급증했다.이는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선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선생역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음에 틀림없다.그러나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망명후 선생이 교육에 정신(대종교)과 힘(무장투쟁)을 융합시킨 사실이 그 증거이다. 31세때(1911년)선생은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의 어려움과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통분해하며 당시 지사들이 많이 망명해있던 동만주 왕청현으로 떠났다.만주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 10년의 시작이었다. 그는 한승점이 설립한 대종교계통의 명동학교(왕청 덕원리소재)에서 물밀듯 이주해오는 한인자녀들을 가르치며 조국독립의 강한 의지를 불붙여 주었다(이 명동학교를 서일선생이 설립했다는 설도 있지만 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듬해 10월 선생은 대종교에 귀의한다.홍익인간의 이념을 추구·실행하는 대종교 정신은 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에게 막강한 정신력을 주게된다.선생이 단순한 무장독립운동가가 아닌 교육자·종교인·언론인으로도 평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두만강을 넘어 망명해오는 열혈청년들이 줄을 이을 때 서일선생은 북간도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노리는 의병들과 규합,중광단을 조직했다.단장에 취임한 그는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위한 체제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대종교의 이념계승에도 몰두했다. ○대종교에 귀의 그는 대종교 입교후 포교에도 나서 3년동안 동만주 북만주 연해주 함경도 일대에서 10여만의 교우를 얻어 「도력이 큰 도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서일선생은 교우들중 젊은 청년들은 독립군으로 편입시키고 일반교우에게는 군량 조달등 다른 직무를 부여했다. 독립군에 편성된 청년들의 강고한 정신무장을 위해 한배검에 귀의케한 탓으로 후일 그가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의 장병은 거의가 대종교인이었다.선생은 교도들을 중심으로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는데 신도 1만5천명을 모아놓고 「독립군 양성기금으로 1인1원씩 거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았음이 틀림없다.이 사이 선생은 「오대종지강연」「도해」「신화강의」「진이도설」「삼문일답」「회삼경」등 경전도 저술했다. 당시 선생은 중광단등을 통해 대일무장투쟁을 추구했으나 재정문제등 조직적 체제가 구축되지 않아 실질적 군사투쟁은 전개하지 못했다.이에 선생은 수많은 독립군및 운동단체 결집을 위해 1918년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손일민 신채호등 39인 연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이와함께 강도 높은 전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일민보」「신국보」등 신문을 발간,『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 밖에 없다』는 논조를 내세웠다. 이듬해 1919년7월부터 청산리전투가 전개된 1920년10월까지 선생은 중광단을 확대·개편한 대한정의단→대한군정부→북로군정서등 독립군단을 이끌었다.정규병력 1천5백여명을 청산리전투주역인 사관으로 양성하고 러시아·체코군으로부터 3만여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이처럼 군정서가 힘을 갖추기 시작하자 일제는 상당히 겁을 먹고 주목했는데,그들은 「북간도지방의 항일단체 상황」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제정규군 3천3백여명이 사살 당하는 청산리전투를 짐승처럼 예감하고 있었다. ○일군 3천명 사살 『…군정서는 서대파구에 근거를 두고 서일이 통솔한 단체로서 대부분 단군교도(대종교)이다.…그들 행동은 극히 흉포하여 부단히 선내지에 대한 무력침습을 양언하고 있다.…총재는 서일,부총재 현천묵,사령관 김좌진,부사령관 김성,참모장 나중소등이다.…일단 유사시에는 명령일하 동원소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산리전투후 여러개의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영 밀산으로 이동한다.여기에서 북로군정서(서일)·대한독립단(홍범도)등 10개 부대는 전만주 3천5백 병력을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고,선생이 총재로 추대되었다.부대편성을 마친 독립군단은 이듬해 정월 우수리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그러나 「소련영토 안에 일본에 대적하는 독립군을 육성하면 양국간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라는 일공사 요시자와의 위협에 소련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소위 「흑하사변」이라는 참변이 발발해 독립군은 힘을 잃었다.여기에 토비들의 습격까지 겹쳤다. 수많은 동포와 청년독립군들이 희생을 당했다.비분강개한 선생은 8월28일 마을 뒷산 산림 속에서 대종교의 폐기법으로 자결순국했다.41세 독립운동가가 남긴 유언은 처절하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차리라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역사적 평가/독립운동가·교육가로 큰 발자취/신재홍 국사편편찬위 부장 백포 서일선생은 그가 민족운동사에서 차지 하고 있는 위상에 비하여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일찍이 민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몸소 이를 실천한 교육자이며 또 민족정신 앙양을 목적으로 한 대종교의 간부일뿐아니라 만주에서 일제와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한 독립군 지도자였다. 그의 학력은 함북 경성군에 위치한 성일학교 사범과를 나온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일찍부터 민족혼을 살리는 길은 교육에 있음을 인식하여 향리에서 교편생활을 하였으며 1910년 일제가 주권을 강탈하자 북만주로 망명하여 그곳에 명동 동일 학성 동신 동화 양성학교를 설립하여 구국인재 양성에 헌신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에 강탈당한 국권을 회복하는 길은 강인한 민족혼의 배양에 있다고 확신하였고 이를 위하여는 국조단군을 숭상하고 홍익인간의 이념을 깨우치는데 있다 하여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귀의 하였다.대종교의 포교가 바로 민주운동이요 독립운동임을 믿어 교리연구과 포교에도 힘써 많은 저술을 남긴 민족종교의 지도자였다. 선생의 활동에서 특기할 것은 무엇보다 무장항일운동에 있었다.선생은 일제를 우리 국토에서 구축하고 주권을 회복하는 길은 오로지 일제와의 혈전에 있다하여 무장항일운동 단체인 중광단 대한정의단을 조직,활동하였고 1919년에는 여러 무장단체를규합하여 북로군정서를 설립하였다.이 단체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대종교 신자가 중심이 된 단체로서 재만 독립군중 최강의 부대였다.따라서 1920년 이 부대가 이룩한 청산리전투의 위업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 지지 않았음을 인식하여야 한다.이것은 선생이 배양한 투철한 민족혼과 강인한 항일의식이 그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민족교육가이며 민족종교가로서 또한 무장항일운동의 지도자로 선생이 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수가 있다.
  • “항일영웅” 김좌진장군 생가 복원/홍성 행산2천5백평 말끔히 단장

    ◎사당 세워 성역화… 국민교육장 활용 만주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3천여명을 궤멸시킨 백야 김좌진장군의 생가가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생가터에 복원돼 26일 준공됐다. 김장군의 생가는 홍성군이 4억6백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2천5백여평의 부지에 지난해 5월부터 본채·문간채·행랑채·외양간 등은 물론 담장·도로·조경까지 말끔히 단장,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군은 민족의 영웅이며 구국운동의 선구자인 김장군의 생가복원에 이어 사당건립등 성역화사업을 벌여 김장군의 독립정신을 계승할수 있는 국민교육장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김장군의 생가는 그동안 돌보는 사람이 없어 허물어져가 충남도에서 지난 89년12월 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하기에 이르렀고 이어 홍성군도 김장군의 애국심과 남아의 기개를 기리기 위해 생가복원에 나섰다. 특히 군은 이 지역성역화사업비로 지난3월 정부에 40억원의 국비지원을 요청내놓고 있다. 이날 생가복원준공식에는 장군의 손자인 김경민·김을동씨등 유족과 이강훈광복회장등 독립유공단체 관계자등 2천여명이 참석했다. 백야 김좌진장군은 1889년 이곳에서 태어나 3세때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16세때인 1905년에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고향에 돌아와 50여가구의 노비들에게 당시 2천석을 추수하던 전답을 나눠주고 그들을 해방시켜줘 민주개화의 선구적 역할을 다했다. 20세때인 1909년에는 이봉창과 경성고아원을 경영하면서 서울 관철동에 이창양행과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설립해 국내외의 연락기관으로 이용하는등 항일운동과 육영사업에 힘을 쏟았다. 29세때인 1918년에는 애국지사 윤치성·신현대등과 광복단을 조직,단장직을 맡은 뒤 중국 길림성으로 가 김동삼·조소앙등 만주지역 독립운동가 39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문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사관양성소를 설립,보병 1개연대를 양성했다. 김장군은 1920년에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이범석·홍범도장군 등과 같이 만주 청산리에서 일본군 3천여명을 궤멸시켜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김장군은 1962년 3월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 크림 최고회의/독립선언 철회

    【심페로폴·모스크바 로이터 연합】 우크라이나 소재 크림 반도는 앞서 선언한 독립 결정을 전격 철회함으로써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복잡하게 얽혀온 영유권 분쟁을 일단락시켰다. 독립선언 철회는 안드레이 코지레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크림반도 영유권과 관련,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유고슬라비아식 내전에 빠져들 수 있음을 경고한 것과 때를 같이해 나왔다. 크림 자치주 최고회의는 지난 20일 앞서 선언한 독립 결정을 철회키로 의결한 것으로 전해졌다.의회는 또한 지난 5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할양한 크림반도의 장래를 묻는 주민 투표 실시 여부에 대한 결정도 연기했다.
  • 몰도바공 비상 선포/러시아계 독립선언… 소요 확산

    【키시네프 AFP 연합】 몰도바의 미르체아 스네구르 대통령은 28일 러시아계 주민들의 분리독립 선언에 따른 민족분쟁으로 몰도바 서부 드니에스테르에서 러시아인과 우크라인들간의 전투가 격화되고 있는 것과 관련,전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고 인테르팍스통신이 보도했다. 대통령공보실은 스네구르 대통령이 비상사태포고령에 서명했으며 이날 저녁 TV를 통해 이를 발표할 것이라고 말하고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국민들에게 『현재 큰 위험에 빠져 있는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 언제든지 행동에 들어갈 준비를 갖추라』고 촉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계 주민이 대부분인 드니에스테르 지역은 최근 루마니아계가 몰도바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후 분쟁에 휩싸여 있으며 이 지역에는 지난 16일 이미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 외언내언

    님은 갔습니다./아 아,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길을 걸어서/차마 떨치고 갔습니다.만해 한용운의 대표작 「님의 침묵」의 첫 구절.사랑의 본질을 노래한 서정시이지만 그 내면에는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한이 서리 서리 맺혀있다.◆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33인중의 한분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을 썼던 만해는 당대의 민주시인이자 「불교유신론」을 제창했던 스님이기도.그러나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할 가장 큰 교훈은 도도한 기개와 지조로 일관했던 투철한 애국정신.◆까까중머리에 검정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검정고무신만 신었던 만해는 3·1운동 거사후 감옥에 갇혔을때 「옥중투쟁 3대원칙」을 철저히 지켰다.첫째 변호사를 대지말것,둘째 사식을 취하지 말것,셋째 보석을 요구하지 말것.◆만해는 서울 성북동에 「심오장」이란 옥호를 붙인 조그마한 기와집을 짓고 살았는데 북향이었다.일제의 총독부쪽은 바라보기도 싫다는 고집때문.그 북향집에서 한겨울에도 장작불을 지피지않고 지냈다.어느날 지조를 꺾은 육당 최남선이 길거리에서 만해를 보고 반가워 하자 『육당은 벌써 죽었어』라면서 침을 탁 뱉고 돌아서 버렸다는 일화.◆만해가 태어난곳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박철부락.이곳에 만해생가가 복원돼 6일 준공식을 가졌다.생가복원을 계기로 4천3백평의 부지에 만해기념관,사당,시비등을 건립하고 서울 망우리묘지에 있는 묘소도 이곳으로 이전,역사공원을 만든다는 소식.반가운 일이다.겉치레가 아니라 전국의 청소년들이 이 공원을 찾아 만해정신을 배우고 기릴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가 있었으면 한다.
  • 보스니아 내전위기/세르비아지도자,독립중단 촉구

    【사라예보 로이터 AFP 연합】 유고슬라비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지난 주말 국민투표로 독립을 확정지은 뒤 소수 세르비아인들이 독립반대 무장투쟁에 돌입,2일 현재 최소한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수도 사라예보가 바리케이드들로 마비된 가운데 전면적인 내전위기에 직면해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내 세르비아민주당(SDP)의 라도반 카라드지치 당수는 이날 사라예보 TV방송과의 회견에서 『민족과 종교대립으로 인한 내전이 불가피한 것으로 우려된다』면서 『주민들은 평화를 원하고 있지만 사태를 되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상황』이라고 말했다. 【사라예보 AFP 연합】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내 세르비아인 정치 지도자들은 2일 공화국 당국에 대해 지난 주말의 독립투표 실시에 힘입어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확정지으려는 움직임을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보스니아 공화국내 다수 세르비아계 공동체를 대변하는 세르비아 민주당(SDP)측도 공화국 당국은 사라예보 시내및 지방 도로들에 2일 아침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지키고 있는 세르비아인들을 공격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보스니아 공화국 독립선언과 연관된 모든 활동을 중지할것』을 요구했다.
  • 외언내언

    1919년 3월1일 정오.민족대표 33인이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3·1운동이 점화됐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그러나 북한에서는 이를 마음대로 왜곡,날조하고 있다.◆『위대한 수령의 아버지인 김형직선생께서 몸소 키우신 애국청년들과 함께 평양에서 대중적인 반일시위에 떨쳐 나선것을 시발로 하여 3·1인민봉기는 삽시에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북한의 「근대조선역사」(84년)가 기술하고 있는 내용.3·1운동을 「3·1인민봉기」로 바꾸어놓았고 민족대표 33인을 김형직으로 둔갑시켰으며 3·1운동의 발원지도 서울이 아니라 평양이라고 우기고 있다.◆그뿐이 아니다.3·1운동이 실패한 원인을 대중을 이끌 탁월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해 놓고는 『모든 인민들이 지도자의 출현을 목마르게 기다리게 되었고 그 절절한 염원을 받들어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께서 민족앞에 나서게 됐다』고 선전하고 있다.◆북한의 역사 왜곡과 날조는 3·1운동에 그치지 않는다.제너럴·셔먼호 격침사건의 주동자를 김일성의 증조부로 변조했고 조부모인 김보현·이보익 부모인 김형직·강반석,삼촌 김형권,전처 김정숙등 일족을 모두 「불요불굴의 혁명투사」「위대한 애국자」로 떠받들고 있다.또 이들을 위한 정례적인 기념행사까지 치르고 있다.◆김일성가계의 혁명전통을 미화하는 한편 김일성부자 세습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어쩔수 없는 궁여지책이긴 하겠지만 이쯤되면 할말을 잃게 된다.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날조하는 것이 얼마나 큰 범죄인가를 김일성은 모르고 있단 말인가.이제 살만큼 살았고 권력세습도 그들 나름으로는 마무리 되어 가고 있는만큼 지금이라도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어떨까.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 CIS 앞날 “불길한 조짐”/「크림」 독립선언

    ◎자치주의회,우크라공서 이탈을 결의/“러연의 모사”… 크라프추크 발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 영유권 분쟁을 일으켜온 흑해 연안 크림반도가 지난 26일 주최고회의 표결을 통해 독립을 선언,두 공화국 관계는 물론 독립국가연합(CIS)의 장래에 새로운 긴장요인으로 등장했다. 서방소식통들에 따르면 크림주최고회의는 크림의 위상을 우크라이나의 통제를 받는 기존 자치주(오블라스치)형태에서 독립공화국으로 승격시키는 내용이 포함된 개헌안을 승인했으며 정식명칭도 「크림공화국」으로 바꾸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소식통들은 크림측이 돌연 독립선언을 한 배경에 대해 일단 『경제적으로 두 공화국의 간섭을 모두 배제,독자노선을 추구하려는 희망』에서 나온 것으로 분석하면서도 정치적 파장에 보다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흑해함대의 모항인 세바스토플을 포함하고 있는 이곳은 구소련이 와해된뒤 함대의 지휘권을 놓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간 분쟁이 시작된 이래 지난 1월에는 러시아가 1954년 우크라이나에 이양한 크림반도 전체의 영유권회복을 주장,두 공화국간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노선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긴 하다.특히 러시아에서는 타타르스탄·체첸 잉구슈자치공화국등이 이미 독립을 선언,탈러시아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공화국 단위의 내부붕괴라는 면에서 이번 사태는 CIS의 장래에 불길한 전조를 드리우는 새로운 사태발전으로 볼수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정부는 이번 사태를 러시아측의 불순의도가 개입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으로 보는 것 같다.레오니트 크라프추크 우크라이나대통령의 한 측근은 『당초 개헌안에 우크라이나내 민주국가로 돼있던 문구가 표결과정에서 돌연 「우크라이나내」란 표현이 삭제됐다』며 석연치 않은 점이 있음을 피력했다. 정치·경제 모든 면에서 국가경영능력이 없는 크림주의 독립선언은 우크라이나의 예속을 벗어나 러시아 통제밑으로 들어가겠다는 의도로밖에 볼수없다는 게 우크라이나측 우려다. 공화국­자치공화국­지방(크라이)­자치주(오블라스치)등의 순으로 돼있는 현행정단위상 자치주가 무리하게 독립선언을 하고 나온 배경에는 이런 측면도 간과할수 없다는 게 현지 소식통들의 분석이다.
  • “두개의 서예대전 불참”/서화웅,독립선언대회

    한국미술협회 서예분과위원회(미협)와 한국서예협회(서협)로 양분된 서단의 화합을 추진한다는 목적으로 지난 연말 출범한 한국서단화합추진위원회(서화추 위원장 김진화)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한국서단 자주독립 선언대회를 갖고 서단의 화합과 공모전의 단일화를 위해 앞으로 두 단체에서 운영하는 서예대전에 일체 불참할 것을 결의했다.또한 서단독립에 필요한 운영기구로서 「한국서단독립집행위원회」(위원장 배길기)를 결성하기로 했다.
  • 고르비/「해빙」을 부르고 「개혁」에 지다

    ◎「영욕의 7년」 집권서 퇴장까지/「통독의 문」 여는등 냉전종식을 주도/냉전장악 실패·「빵」 해결못해 “몰락 길”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고르바초프는 지난 85년 3월11일 최연소 정치국원으로 제8대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돼 6년9개월의 집권기간동안 철저한 현실노선에 입각한 정책으로 「제2의 소련혁명」이라 불릴만한 엄청난 변화를 소련과 국제사회에 몰고 왔었다. 그가 권좌에 오르면서 동토의 소련국민들은 볼셰비키혁명 68년만에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되찾았다. 이어 89년에는 사상최초로 복수정당후보를 상대로 한 선거가 치러졌다. 90년 2월 공산당은 일당독재를 포기했고 고르바초프는 헌법을 개정,대통령에 취임했다.서구민주주의 개념을 도입,당과 정부의 국가경영에 국민들의 의견을 수용하겠다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조치다. 이에 바탕을 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은 국제정치면에선 세계사의 변혁을 주도해 왔다.대외정책에 있어 그는 항상 군비축소와 주권존중이라는 「신사고 외교」를 원칙으로 삼았다. 고르바초프는 집권한지 8개월만인 85년11월 제네바에서 당시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비난하던 레이건 미국대통령을 만나 화해의 악수를 나눔으로써 양국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했다. 87년 중거리핵전력(INF)협정체결을 비롯,88년 동유럽주둔군 50만 감축,91년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등 그의 혁신적인 군축정책은 『탱크를 녹여 쟁기를 만든다』는 말을 유행시켰다. 이 과정에서 지난 45년 얄타협정으로 출발한 미소 양극체제의 동서냉전시대는 종언을 고하기 시작했다.이와함께 고르바초프시대의 최대업적인 독일통일과 동구권의 대변혁이 이루어졌다. 그는 또 88년5월 아프가니스탄주둔 소련군의 철수를 단행했다. 89년12월 몰타에서 열린 미소정당회담에서는 정식으로 냉전시대의 마감을 선언했다. 이런 가운데 한국·중국·이스라엘등 갈등관계 혹은 적대관계에 있던 나라들과도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연 것도 다름아닌 그의 신사고 외교의 결과였다. 고르비는 셰계를 움직인 정치인답게 다양한 별명도 갖고있다. 「철의 이빨을 가진 사나이」「세계의 대도박사」 「기적의 마술사」등 경탄스런 수식어가 붙는가하면 「금세기들어 가장 탁월한 소련지도자」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그는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당시 『고르비가 상을 받은게 아니라 오히려 노벨상에 무게를 더해주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은 「신사고 외교」의 바탕이 되어 탈냉전·군축등에는 괄목할 성과를 거두었으나 정작 「빵」문제는 해결하지못해 그를 몰락의 길로 재촉했다.그 이유는 고르바초프 자신이 사회주의에의 미련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으며 개혁의 속도를 끝내 스스로 통제하려고 했기때문이다.그는 사유화등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거부했다.그리고 경제적인 비상조치를 취할수 있는 포고령 발동권을 갖는등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개혁에는 한계가 있었다. 90년 여름 급진적인 내용의 경제개혁안인 「샤탈린의 5백일 개혁안」을 거부하면서 개혁파인사들과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보수파들이 득세했다.상황이 이렇게 바뀌게되자 그해 12월 그의 측근이었던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독재출현과 쿠데타를 경고하며 사임했다. 급기야는 지난 8월 보수파들의 쿠데타가 발생,고르바초프는 이들에 의해 연금을 당했다. 이 쿠데타는 3일천하로 끝나기는 했지만 고르바초프와 연방정부의 권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혔다.그는 쿠데타이후 공산당 활동도 정지시키고 보수적인 색채의 내각도 물갈이했다.원성의 대상이었던 국가보안위원회(KGB)도 숙정했다.그리고 발트해3국의 독립도 승인했고 각 공화국에 폭넓은 권능을 부여하는 내용의 신연방조약도 제안했다. 그러나 이미 연방정부의 권위는 회복될 수가 없었다.지난 1일 우크라이나의 독립선언으로 소련방과 고르바초프에게 결정타를 안겼다.그 뒤를 이은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국 공동체 구성은 소련연방의 사망신고서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환상적 꿈에서 깨트려 현실적 사회로 되돌리려 했으나 70여년간 경직될 때로 경직된 공산체제의 「현실」의 벽에 부딪쳐 끝내 실각을 자초하고 말았다. 1931년 3월2일 러시아 공화국 남쪽 스타브로폴지역의 프리폴노예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고르비는 학비 때문에 고등학교를 3개월이나 휴학하는등 어려운 청소년기를 경험했다. 그는 고교시절 집에서 16㎞ 떨어진 읍에서 방 한칸을 얻어 자취하면서 주말이면 고향집에 내려가 농사일을 돕는 모범학생이었다.이때만해도 그가 훗날 세계를 움직이는 정치인으로 성장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후 모스크바 국립대학 법대에 입학,마르크스·레닌저작 외에도 로마법,로크의 정부론,루소의 사회계약론 등을 읽으며 사고의 폭을 넓혀 나갔다.심지어 법대에는 미국헌법까지도 열람이 허용됐는데,이같은 서구사상을 담은 「금서」들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스탈린 치하에선 하나의 큰 행운이었다.이때의 지식들이 현실정치와 접목되어 뒷날 페레스트로이카로 체계화 된다. 1954년 대학재학시절에 만난 라이사 티타렌코와 결혼한 고르비는35세의 나이에 고향인 프리폴노예 시당위원장이 됐고 4년후엔 보다 넓은 지역인 스타브로폴지구 위원장으로 승진했다. 이때 그는 다시 대학에서 농업경영학을 공부,학위를 얻고 농업문제전문가로 등장했다. 고르바초프는 1978년 농업담당 당서기가 되면서 중앙무대인 모스크바로 진출하게된다.그가 모스크바로 올라오게된 계기는 농정실패에 책임을 느낀 쿨라코프가 자살함으로써 농업담당 당서기가 공석이 됐기 때문이다.그에게는 확실히 소련 역대지도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관운이 따르고 있다는 평도 받고 있다. 그러나 소련사회에 평화와 자유의 지평을 넓힌 위대한 개혁가 고르바초프의 몰락은 역사의 아이러니임에 틀림없다.동토의 땅에 개혁의 문을 열어젖힌 그는 결국 그 문으로 퇴장한 것이다.
  • 「73년 유고연방」도 해체로 줄달음/독일의 2개공 승인 파장

    ◎민족별독립 조짐 본격화… 붕괴 “초읽기”/“「제4제국」 건설 음모” 세르비아,독 비난 독일이 23일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공화국을 독립국으로 승인함에 따라 6개월간 내전을 계속해온 유고연방이 완전 해체될 조짐이 짙어지고 있다. 독일의 두공화국 승인은 연방유지를 희망하는 세르비아로부터 『제4제국을 세우려는 음모』라는 비난을 받은데서 알 수있듯이 곧바로 유고의 평화정착에 기여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번 승인을 계기로 독립을 인정받기 원하는 공화국들의 독립열기는 더욱 고조될 것이고 마찬가지로 이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입장표명은 좀더 앞당겨질 것으로 보인다.현재 영국 프랑스등 나머지 유럽공동체(EC)소속 회원국들은 당초 인정시한인 오는1월15일까지 독립을 승인할 예정이다.그리고 헝가리도 EC와 같은 조건하에 체코및 폴란드등과 협력하여 오는 1월중으로 독립을 승인할 방침이다. 6개공화국,2개자치주로 구성된 유고연방은 3개 종교,4개 언어,6개의 주요민족으로 구성된 짜깁기국가.이가운데 지난6월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공화국이 독립선언을 한데 이어 9월 마케도니아마저 세르비아공화국에의 흡수·통합을 우려,독립결정을 내림으로써 연방와해작업을 가속화시켰었다.이런상황에서 지난19∼22일 단4일동안에 세르비아공화국내 코소보 자치주의 알바니아인들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공화국 및 크로아티아공화국내 세르비아인들까지 독립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게다가 이번 공화국내 소수민족들의 독립선언으로 마케도니아등 다른 공화국내 세르비아인들이 세르비아공화국으로 집결할 가능성이 커 세르비아중심의 신유고의 탄생을 엿볼수 있게한다. 공화국내 소수민족들의 독립선언이 국제사회의 승인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점이 있다.코소보 자치주내 알바니아인들의 독립선언의 경우,지난9월 세르비아공화국이 불법으로 규정한 국민투표를 통해 나온것이어서 또다른 내전을 예고하고 있다.이들이 동등한 자결권을 주장하며 국제승인을 호소하고 있으나 코소보 자치주가 연방내 공화국이 아니기 때문에 EC등 국제사회가 독립을 인정할지는 불투명하다. 또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공화국 전체인구 4백70만명가운데 32%를 차지하고 있는 세르비아인들은 공화국내 다수인 크로아티아인과 회교도들이 지난20일 EC에 공화국을 독립국으로 승인해 줄것을 요청키로 결정하자 이를 『불법』이라고 비난한데 이어 하루뒤인 21일 세르비아인들의 독립공화국을 오는1월14일까지 세우겠다고 발표했다.세르비아인들이 밝힌 공화국수립날짜인 1월14일은 유럽공동체가 독립공화국인정시한으로 제시한 1월15일보다 하루앞선 시점으로 국제승인과 관련,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있다.즉,세르비아인들이 별도의 공화국수립을 기정사실화할 경우 지난20일 EC에 독립승인을 요청키로 결정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공화국으로서는 이들의 분리독립을 저지하지 않고서는 독립승인을 얻기가 힘들게된다. EC와 유엔이 내전종식을 위해 다각도로 중재를 했으나 지금까지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그리고 유엔군 파견도 당장 실현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결국 73년동안 어렵사리 유지되어온 유고연방사는 천천히 막을 내리고 말 운명에처해있는 것이다.
  • “대혼미”… 「시계제로」의 소 정정

    ◎「독립국 공동체」 싸고 권력투쟁 격화/각 공화국 동참 늘어 대세는 옐친에/개혁파·분열된 군부 향배 주요관건 소련이 혼미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있다. 지난 8월 쿠데타이후 고르바초프소련대통령의 연방유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화국 독립선언 확산과 함께 해체의 길로 접어든 소련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등 3개 슬라브민족공화국지도자들이 지난 8일 독립국가공동체 결성을 전격선언함으로써 회생불능의 치명타를 입었다.그러나 「소련이후」의 모습은 여전히 불투명하기만 하다. 이같이 안개정국이 계속되는 이유는 독립국가공동체를 주도한 옐친러시아공화국대통령이 관철의지는 확고하나 아직 군부등 정권의 요체를 장악하지 못하고있고,고르바초프대통령도 굴복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데다가 군부·공화국·언론의 반응도 분분하기 때문이다. 옐친진영은 샤포슈니코프국방장관의 지지를 얻어내는등 통제권을 장악했다고 주장하고있다.핵무기에 대해서도 민스크에 합동전략군사령부를 설치,3국이 공동관리할 경우 아무런 위험이 없다며 핵무기통제권을 이양하도록 고르바초프에게 촉구하고있다.옐친진영은 약소공화국들이 수는 많아도 우크라이나의 중요성에 비길 바가 못된다고 판단,독립국가공동체 쪽으로 급선회하면서 나머지 군소공화국들도 당연히 따라오고 껍데기만 남은 연방정부는 자연스럽게 공중분해될 것으로 예상한 것 같다. 물론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그러나 옐친과 가까운 포포프모스크바시장조차도 독립국가공동체에 반대하는등 기대됐던 것처럼 마무리작업이 그리 간단하게 끝날 것 같지만은 않다. 사임임박설이 나돌고있는 고르바초프대통령은 이미 세불리가 확연해졌고 자칫하면 자리에 연연해하는 모습으로 비춰질 가능성도 있기때문에 실권도 빼앗겨 버리고 골치만 아픈 연방대통령직을 과감히 던져버릴 수도 있다.그러나 아직도 핵무기통제권을 쥐고있는 군통수권자인 고르바초프가 역사적으로 중차대한 이 시점에서 무책임하게 무대를 박차고 내려올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이제까지 정치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교묘하게 상황을 반전시키곤 하던 경험을 되살려 뭔가 마지막 카드를사용할 것으로 일단 봐야할 것 같다.그 카드는 지난 90년3월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해준 기관인 소련인민대표대회를 소집,연방유지와 자신의 신임여부를 연계시켜 퇴진의 기회나 반격의 도화선으로 삼는 것일 수도 있고 비상사태선언이나 친위쿠데타등 극약처방일 수도 있다.그러나 사회여건이나 그의 성향으로 볼 때 후자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소련의 사태추이에 최대변수로 지목되고있는 군부는 아직 태도를 밝히지 않고있다.소련군기관지인 크라스나야 즈베즈다는 10일 새로운 독립국가공동체에 대한 입장표명없이 포신을 정치지도자에게 겨냥한 탱크사진을 1면에 게제,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르바초프가 10일 국방장관을 포함한 군고위사령관및 공화국군대표들과 회의를 가졌고 옐친도 11일 지역군사령관들과 접촉함으로써 군부의 향배에 대한 정치지도자들의 높은 관심을 노출시켰다.로보프총참모장의 경질에 이어 국방차관 2명이 해임된 것도 최근 들어 끊임없이 나도는 쿠데타설과 무관치않은 것으로 보인다.샤포슈니코프국방장관의 독립국가공동체 지지여부는 확인되지 않고있다. 한편 시간이 흐를수록 공화국들의 태도는 독립국가공동체로 기우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11일 아르메니아공화국과 키르기스공화국이 공동체 가입을 밝힌데 이어 아제르바이잔공화국도 지지를 표명했으며 이날 카자흐공화국도 누르술탄 나자르예프대통령이 전화를 통해 공동체 가입절차등을 문의해옴에 따라 가입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의 반응도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지가 10일 「아침에 일어나니 소련이 없어졌더라」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를 통해 「좋든 싫든 이것만이 살길」이라고 지지한 반면 프라우다지는 「이길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는등 분열된 양상을 보였다. 3개슬라브공화국은 쿠데타이후 과도체제로 넘어오면서 기능을 상실한 인민대표대회의 소집요구는 법적근거가 없으며 회의가 소집되더라도 자국대의원들을 보내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하고있다.인민대표대회가 소집될 수 있을지,어떤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을지 모두 불투명하지만 그 선택의 폭이나 혼란을잠재울 수있는 가능성은 극히 적다.쿠데타가 일어나거나 내전으로 치달아 핵재앙을 초래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 독립국가 공동체란

    ◎국가연합형태 바탕,영 연방 특성 가미/“구성국에 독립국 자격”… 중앙정부 안둬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스등 3개공화국이 8일 결성키로 조인한 「독립국가공동체」(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는 외교정책과 핵문제를 포함한 군사전략에 있어 「합동행정기구」를 설립,공동 관장하게 된다. 또한 관세및 이민정책과 경제정책에 있어서도 협력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기존의 소련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이나 고르바초프가 구상하던 「주권국가연방」(Union of Soverign States)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가장 큰 차이점은 공동체내에 선거로 선출된 국가원수와 의회를 갖춘 중앙정부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제법상 연방(union)은 연합국가(federation)와 대동소이한 개념으로,다수의 국가가 대등한 관계에서 통합,형성된 단일국가이며 구성국은 국제사회에서 독립국가로서의 자격을 갖지 못한다.오직 연방만이 국가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으며 국민 또한 연방의 공통된 국적을 갖는다.또 구성국들은 고도의 자치권을 가지나외교권은 연방이 독점하게 된다. 반면에 독립국가공동체는 원칙적으로 구성국이 독립국가로서의 자격을 갖고 공동체 자체는 국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국제법상 연방보다는 국가연합(confederation)에 가깝다고 할수 있다.여기서 공동체라 함은 과거 영국식민지 국가들로 구성,「독립국가의 자발적 결합」으로 규정되고 있는 영연방(commonwealth)과 유사한 성격으로 볼 수 있다.즉 유·무형의 공통적인 이해관계,역사적 연결성을 바탕으로,서로 협력함이 유리하기 때문에 독립국가들이 자발적으로 결합된 개념인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로루스등이 이같이 국가연합형태에 영연방형태를 혼합시킨 형태인 독립국가공동체 형성에 합의한 것도 슬라브족이라는 민족적·역사적 토대위에 그동안 소련방내에서 취해온 각종 협력관계의 유지가 각각의 독립국가 유지에 더욱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소련 해체 일지 ▲1917년 레닌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11월7일의 혁명에서 정권장악 ▲1922년12월 인민대표대회서소련사회주의공화국연방 창설 ▲1940년8월 몰다비아 발트3국 합병 ▲1985년3월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피선(페레스트로이카정책 실시) ▲1989년5월 대통령제 신설로 고르바초프 대통령에 피선 ▲1990년3월 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등 발트3공화국 독립선언 ▲5월 보리스 옐친,러시아공화국 최고회의의장에 피선 ▲1991년7월 옐친,러시아공 직선대통령 취임 ▲8월19∼21일 소련 강경보수파의 쿠데타 실패 ▲8월24일 고르비,공산당서기장 사임과 동시에 공산당 해체선언 ▲9월 소인민대표대회,발트3국 독립승인 ▲10월 8개공화국 「경제동맹」조인 ▲11월14일 7개공화국 「신연방조약」에 가조인 ▲11월25일 고르비,7개공화국과 「신연방조약」조인에 실패 ▲12월1일 우크라이나공 독립여부투표서 가결 ▲12월8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스공등 3개공화국 대통령,「독립국가공동체」선언 ◎3개공 경제정책/요지 우리 공화국가들 사이의 기존의 긴밀한 경제관계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국가 경제상황을 안정시키고경제회생의 토대를 창설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각국이 합의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시장경제 창설및 소유제도 전환,자유로운 기업가정신 보장을 목표로 한 급진경제개혁을 협력,실행한다. ▲상대에게 경제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는 어떠한 행위도 삼간다. ▲기존 통화의 토대 위에 경제관계를 발전시키고 상호 거래방법을 정착시킨다. 루블화는 각 집단의 경제적 이익의 존중을 보장하는 특별 협정의 토대 위에 전국통화로 기능한다. ▲자금유출을 줄이고 효율적인 통화수급관리및 상호 거래제도마련을 위한 은행간 협정에 서명한다. ▲공화국의 예산 적자를 최소화하기 위한 정책협의를 추진한다. ▲가격 자유화와 시민의 사회보장제도를 위한 정책협의를 추진한다. ▲단일 경제 공간의 통합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 ▲각 집단의 대외경제활동및 관세정책,통행자유의 보장을 협의한다. ▲구연방 소유 기업들의 부채 문제를 조절하기 위한 특별 협정에 서명한다.
  • 「70년 붉은제국」 지도서 사라진다/소 연방 해체되기까지…

    ◎군수산업위주 정책으로 경제파탄 촉발/공화국들의 「독립도미노」에 결국 “두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벨로루스의 3개 공화국이 8일 독립국가공동체를 결성키로 합의하고 국제법의 실체로서 또 지리적 실체로서의 소련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은 중병속에서도 회생을 위해 마지막 몸부림을 치던 소련에 사망선고를 내린 최후의 일격이라고 할수 있다. 이로써 세계공산주의의 종주국으로,또 냉전체제의 한 주역으로 현대사의 기록에서 결코 지울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소련은 이제 공중분해를 거쳐 74년에 걸친 목숨을 마치게 됐다.이와 함께 지난 수년간 세계사의 흐름을 가장 극적으로 변화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던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의 정치생명도 완전히 끝났다고 할수 있다. 15개 공화국(발트 3국의 독립으로 현재는 12개 공화국)에 1백개 이상의 민족으로 구성된 소련의 탄생은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에 따른 「힘의 강압」에 의해서였다.그러나 소련의 탄생을 가져왔던 그 강압적 힘이 결국은 스스로의 심장에 꽂히는 비수로변하고 만 것이다. 소련이 국가로서의 생명을 잃은 것은 최근 식량폭동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서도 알수 있듯이 공산주의 경제체제 실패에 따른 경제파탄과 다민족국가라는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민족분규의 폭발적 분출을 해결할수 없었던데 따른 필연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결과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측됐던 것이다.6년전 54세의 젊은 나이에 소련 공산당서기장에 선출된 고르바초프가 신사고를 통한 정치·경제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을 들고 나온 것도 이같은 결과를 예측,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 그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국내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것도 그의 생각에 소련국민들은 물론 많은 서방국가들이 동조했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 이전의 소련은 오랫동안 군사강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군수산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편데다 미국과의 냉전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무리한 대외원조를 제공함으로써 소련경제를 파탄지경으로 몰아넣었다.이는 민생경제의 도탄을 가져와 핵강국 소련으로 하여금 국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자존심마저 버리고 과거의 적대국이었던 서방국가로의 구걸행각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또 오랜 세월 민족갈등의 분출을 억눌러 왔던 공산독재의 무자비한 탄압이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등장으로 완화되면서 각민족간의 유혈분쟁이 점증하더니 결국은 지난해 3월 리투아니아의 독립선언을 시발로 지난 1일 우크라이나의 독립승인 국민투표에 이르기까지 각공화국들간에 독립선언 도미노현상까지 몰고 왔다. 결국 무리한 힘의 억압으로 빚어진 결과는 이미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돼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개혁반대세력들의 저항과 이에 따른 사회혼란의 조장,어려운 상황속에서 자국의 생존만을 우선시킨 각공화국들의 지역적 이기주의가 이같은 상황악화를 더욱 가속시켰다고 할수 있다.시급한 정치·경제개혁의 필요성엔 다같이 공감하면서도 그 방법론에 대한 의견차를 해소하지 못하고 지금과 같은 공중분해의 길을 선택한 것은 소련으로선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될것으로 보인다. ◎인구 150만… 벨로루스공 수도/「독립국가공동체」 수도 민스크 「독립국가연방」의 수도로 결정된 민스크시는 이들 3개 공화국중 가장 규모가 작은 벨로루스(백러시아)공화국의 수도이자 산업 중심지. 인구 1백50만명으로 러시아공화국 국경으로부터는 2백24㎞,모스크바로부터는 6백90㎞ 거리에 위치해 있다. 스비스로크강을 끼고 있는 민스크시는 1154년 유명한 아랍인여행가인 아부 압둘라 무하메드가 그린 지도에 명기되어 있으며 당시에 이미 대도시로 널리 알려졌다.벨로루스공화국은 50년전 독일군의 침공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며 민스크시는 당시 대부분이 파괴됐다. 전후 소련정부는 널찍한 시가지와 공원을 갖춘 민스크시를 재건했으며 이로 인해 역사적 특징이 많이 손상됐다.
  • 대소 경제협력 전면 재검토/주내 대책회의

    ◎소 정국 혼미·경제난 가중에 대비 정부는 최근의 소련사태와 관련,경제기획원·외무부·상공부등 차관보급이 참석하는 관계부처 대책회의를 갖고 대소경제협력지원문제를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이강두주소대사관 경제공사를 일시귀국토록 7일 긴급지시했다. 이공사는 9일 귀국할 것으로 알려져 대책회의는 9일부터 13일 사이에 열릴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이같은 방침은 최근 소련 우크라이나공화국이 독립을 결정함에 따라 소련정국이 혼미한데다 외화지불중단등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상옥외무장관은 이날 이와관련,『최근의 소련국내사태와 우크라이나공화국의 독립선언에 따른 연방과 각 공화국의 관계와 식량난및 대외 외화지불중단등 심화되는 경제난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해 다음주중 관계부처 대책회의를 가질것』이라고 밝히고 『그러나 이러한 대책회의가 대소경협에 대한 우리정부의 기본방침의 변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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