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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음/ 조각가·서양화가 이일영씨

    조각가이자 서양화가인 이일영(李逸寧)씨가 노환으로 별세했다.76세. 고인은 서울 파고다공원의 3·1독립선언 기념탑,대전국립묘지 조각분수탑 등 많은 조각 작품들을 남겼다.또 서울신문(현 대한매일),조선일보,동아일보 등 일간지의 연재소설삽화작가로도 활약했다. 유족은 부인 이희상(李姬相·76)씨와 2남3녀.빈소는 서울중앙병원 영안실,발인 24일 오전 7시30분 (02)3010-2268
  • 옥천서 안티조선 ‘독립군’한돌 행사

    조선일보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조선바보·www.mulchong.com)이 창립 1주년을 맞아 전국에서 활동중인 안티조선 ‘독립군’을 초대,14∼15일 충북 옥천에서 기념행사를 갖는다. 14일에는 세종대 황철민 교수가 제작한 안티조선 영화 ‘물총’시사회를,15일에는 옥천장터에서 조선일보 구독중지 거리 선전행사를 가진뒤 정지용 시비 앞에서 8·15행사를 연다.이 행사에서는 지난해 ‘조선바보’ 창립때 선포한 ‘조선일보로부터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부대행사로 시인·서예가로 활동중인 김성장씨의 걸개그림 전시회를 마련한다.
  • [사설] 민영화로 가는 공익정론지

    대한매일은 오늘 창간 97주년을 맞는다. 풍운이 몰아치는대한제국 시기에 구국언론의 횃불을 들고 창간한 본보가 파란곡절의 근·현대사와 영욕을 함께 하여 3년후면 100주년에 이른다. 올해의 창간기념일은 오랜 숙원이었던 독립언론의 민영화가 임박하고 언론개혁의 폭풍우 속에서 맞게 되어 그 의미와각오가 새롭다. 대주주인 정부가 민영화에 동의하고 실무작업에 착수하여 독립선언은 시간문제로 다가왔다. 정부로서도 큰 결단이고 ‘언론개혁’의 대도를 위해서는 당연한 의무라고 하겠다. 이제는 실무진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행정적 절차를 마무리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본보는 이미 사고를 통해 밝힌 바 있듯이 국세청 세무조사결과에 따른 검찰 고발에 대해 국민과 독자 여러분께 거듭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비록 이같은 잘못이 회계처리 기준해석의 차이와 세법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연유하고 과거 언론사의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우리는 자성과 함께 투명경영의 계기로 삼고자 한다. 본보는 현재 국민의 절대다수가 원하는 언론개혁에 앞장서서 시대적 사명을 다할 것이다. ‘언론권력화’된 일부 족벌신문이 신문시장을 독과점하면서 여론을 왜곡하고 남북화해협력을 훼방하며 지역갈등과 계층간의 위화감을 조성하는 등 횡포가 극에 이르렀다. 이에따라 국민의 신문불신도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본보는 ‘국망지추(國亡之秋)에 선각자들이택한 구국언론’의 정신을 이어받아 시대를 광정(匡正)하고민족화합을 이루는 공익정론지가 되고자 한다. 비록 지난 세월 ‘소유구조’의 한계 때문에 시비곡직을 가리는데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한점 부끄럼이 없는 공정대도를 걸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공익정론지’의 대원칙을 지킬 것이며 이 대원칙에 도전하는 세력과맞서 싸울 것이다. 요즘 일부 족벌신문은 족벌의 이해에 따라 지면을 사유화하는 등 ‘언론정도’를 벗어나고 있다. 이런 변칙 언론을 포함해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어떤 세력과도 맞설 것이다. 창간 97돌에 즈음하여 소회의 일단을 밝히면서 독자제현의 따뜻한 질책에 보답하고자 한다.
  • 美10대 역사지식 엉망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국의 10대 학생중 무려 22%가 1776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는 역사적 사실을모르고 있으며 14%는 영국이 아닌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와 충격을 주고있다. 컬로우니얼 윌리엄스버그 재단이 225번째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전국의 12∼17세 학생 1,0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설문조사에서 학생 10명 가운데 1명은 조지 워싱턴이 초대대통령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으며 17%는 독립 전 13개 식민주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또 15%는 1776년 7월4일 대륙의회가 독립선언서를 채택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4명 가운데 1명은 남북전쟁에서 싸운 주체가 누구였는지 제대로 몰랐고 13%는 북군과 남군이아니라 미국과 영국이 싸웠다고 틀리게 답했다. 그러나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이며 조지 W 부시가 현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거의 모든 학생들이 알고 있었다고. 설문조사를 실시한 윌리엄즈버그 재단의 콜린 캠벨 총재는“이번 설문조사 결과는 500만명 이상의 10대 학생들이 미국독립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hay@
  • [씨줄날줄] 간접 화법

    지난해 8월 미국 방문중 CBS-TV 대담프로에 출연한 장쩌민(江澤民)중국 국가주석이 미국 독립선언서와 에이브러햄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문을 줄줄 암송해 미국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칠순 노정객이 TV 출연을 위해 원문을암기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의 기억력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장쩌민 주석의 이날 TV 출연은 중국의 WTO 가입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미 공화당 소속 상·하 의원들을 설득하는 데 한몫 단단히 했다는 것이 외교가의 평가였다. 장 주석이 이번에는 쿠바 방문중 특유의 간접 화법으로미국을 공격했다.‘강 건너 비바람 미친 듯 거세나,푸른솔의 강직함은 산처럼 굳건하다(隔岸風聲狂帶雨 靑松傲骨定如山).’ 이백(李白)의 시를 개사한 칠언율시다.홍콩 진후이(浸會)대학 황즈롄(黃枝連)교수는 “군용기 충돌 사건과 미국이 쿠바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지 않을 것을 천명한가운데 장 주석의 시는 중국과 쿠바가 함께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시구중의 ‘강 건너(隔岸)’는 대만해협,중국과 미국간의 태평양해협,쿠바와 미국간의 플로리다해협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풀이다.중국과 쿠바가 공동으로 부시 행정부의 패권주의,즉 ‘미친 듯 거센 비바람(風聲狂帶雨)’에 맞서 ‘푸른 솔(靑松)처럼 의연하고 산처럼 굳건하게 임하자(傲骨定如山)’는 뜻이다. 중국 정치 지도자들은 간접 화법에 능하다.1994년 중국을방문한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과 요담하는 자리에서 첸치천(錢其琛) 당시 외교부장(현 부총리)은 난데없이 자기방에 걸린 시 한편을 소개했다.‘산 막히고 물 막혀 길이없는가 했더니,버들잎 푸르고 복숭아 꽃 만발한 마을이 나오네(山窮水盡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중국 남송시대 시인 육방옹(陸方翁)의 명작으로 어떤 경우에도 절망은 없다는 뜻이다.당시 북한 핵을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되고 있을무렵 중국측의 역할을 요구한 우리측에 보내는 간접 메시지였던 것이다.그날 YS가 뭐라고 화답했는지는 알려지지않았으나 첸치천의 말대로 북한 핵 문제는 막다른 길목에서 극적인 해결책을 찾아내 북·미 제네바 핵기본합의로이어졌다.정찰기 문제를 둘러싸고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미·중 관계도 육방옹의 시처럼 잘 풀리기를 기대한다. 김재성 논설위원 jskim@
  • 왜 ‘안티조선운동’인가

    왜 ‘안티조선운동’인가. 거침없는 글쓰기로 ‘성역과 금기’에 도전해온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교수는 ‘안티조선운동을 해야 할 10대 이유’로▲ 사상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제도로서의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극심한 남북대결구도 청산과전쟁방지를 위해 ▲국가안보를 위해 ▲군사독재정권 유산 청산을 위해 ▲지역분열주의 청산을 위해 ▲공적기관이 사회적책임을 지는 풍토조성을 위해 ▲언론인이 윤리적 책임을 지는 풍토정착을 위해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 ▲엘리트계급의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해 등을 들었다. 강 교수는 “안티조선운동은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운동”이라고 정의한바 있다. 2000년대 초 한국 지식인사회에서 또하나의 사회개혁운동으로 자리잡은 ‘안티조선운동’은 1998년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이던 최장집 고려대교수에 대한 조선일보의 ‘사상검증 사건’이 단초가 됐다.조선일보의 반지성적 행태를 비판한 강준만 교수와 월간지 ‘말’의 정지환 기자는 조선일보관계자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돼법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이를 계기로 네티즌들 사이에서 성금모금과 함께자연스럽게 ‘안티조선운동’이 거론됐다. 지난해 1월9일 이들은 인터넷상에 ‘안티조선 우리모두’(www.urimodu.com) 사이트를 출범시켰는데 1년2개월 남짓한 11일 현재 사이트 방문자가 150만명을 넘어섰다.조선일보가 두사람을 고소한 것을 두고 프랑스에 있는 평론가 홍세화씨가‘나를 고소하라’라는 글을 일간지에 발표한 뒤 이에 동조서명한 네티즌도 4,300여명에 이른다. 이처럼 사이버상에서 시작한 ‘안티조선운동’은 지난해 8월7일 진보적 지식인 154명의 ‘조선일보 기고·인터뷰 거부선언’을 계기로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기 시작했다.이들은선언문에서 “과거 독재정권과 유착해 여론을 왜곡해온 조선일보가 극우냉전 논리를 여전히 고수한 채 지식인들을 활용해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언론처럼 국민을 호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달 뒤인 9월20일 제2차 지식인선언을 겸해 참가자들은 ‘조선일보반대 시민연대’(약칭 안티조선연대)를 정식 발족했다.2차 선언에는지식인 153명이 동참했으며,41개 시민단체가 안티조선연대 결성에 참가했다.이날 행사장 입구에는 ‘조선일보기자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내걸렸다.상임공동대표를 맡은 김동민 한일장신대 신방과교수는 “조선일보 거부운동은 단순한 신문개혁 차원을 뛰어넘는 사회운동의 성격을띠고 있다”며 “조선일보라는 한 신문과의 싸움이 아니라조선일보로 대표되는 냉전적 수구·기득권세력과의 대결”이라고 말했다. 지난 연말 MBC ‘100분 토론’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진이 운동은 올들어 더욱 활기있게 출발했다.조선일보 창간 81주년인 지난 5일 안티조선연대 주최로 제3차 지식인 거부선언이 있었는데 서명자 수가 1·2차를 합친 수보다 많은 531명에 달했다. 특히 3차 선언에는 서울대 교수들이 처음으로 참여하였으며법조계·언론계·의사·한의사·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대거 동참했다.주최측은 상반기 주요행사로 ▲조선일보반대1인 릴레이시위 ▲신방과교수 조선일보반대운동 지지선언 ▲‘5·18과 조선일보’ 토론회 개최 ▲조선일보 친일 민간법정 개최 등을 공개했다. 정운현기자 jwh59@. *지식인선언 서명인사들. ‘조선일보 거부 지식인선언’에 서명한 인사는 1차 154명,2차 152명,3차 531명 등 모두 837명에 이른다.이들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취재는 물론 기고도 거부할 것을 선언했다. 서명자의 면면을 보면 분야별로 다양한 지도급 인사들이어서이 운동이 특정 집단·계층의 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주류를 이루는 학계에서는 강만길 상지대 총장을 비롯해 강정구(동국대)강준만(전북대)김동춘(성공회대)김세균(서울대)김의수(전북대)김종엽(한신대)김진균(서울대)오세철(연세대)주종환(동국대)최갑수(서울대)한상권(덕성여대)한상범(동국대)교수 등이 참여했다.문화계 인사로는 소설가 문순태·박태순·송기숙씨,시인 김준태씨,영화평론가 이효인씨,영화감독 변영주씨 등이 동참했다.종교계에서는 문규현·함세웅 신부,진관 스님,김진호·한상열 목사가 나섰다. 시민단체에서는 성유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김용태 민예총 부이사장,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이동연 문화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최문순 언론노조위원장이,법조계에서는 김칠준·금병태·김택수변호사 등이 동참했다. 이밖에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한의사 권태식씨,의사 김미정씨,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김민수 전 서울대 미대교수등도 서명했다. 서명과 관련, 한 참여교수는 “평소 친분이 있는 조선일보기자가 전화를 걸어와 서명 배경·경위 등을 따져 물은 적이있다”고 밝혔고 또다른 교수는 “조선일보가 원고청탁 문제로 애를 먹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지역사회 대표중심 곳곳서 ‘안보기운동’. 조선일보 반대운동인 ‘안티조선운동’이 날로 확산되고 있다.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중앙에서 지방으로 공간차원을뛰어넘어 번져간다.구체적으로 조선일보 절독이란 결과를 가져와 조선일보 판매에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1일 충북 영동에서는 한겨레신문 영동지국장 이주형씨(53) 주도로 ‘조선일보 바로보기 영동시민모임’(약칭 영동조선바보)이 결성됐다. 이 모임은 앞서 인근 옥천에서결성된 ‘조선일보 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www.mulchong.com)에 이어 결성된 것으로 지역 안티조선운동의 ‘세포분열’인셈이다. 지난해 8월15일 결성된 ‘조선일보 바로보기 옥천시민모임’(대표 전정표)은 기미독립선언서를 패러디한 ‘조선일보로부터의 옥천독립선언서’를 제작,배포해 주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들은 참가자를 ‘독립군’으로 부르는데 현재 ‘독립군’수는 330명 정도.군의회의원 9명 전원과 도의원 1명을 비롯해 이 지역 바르게살기협의회·재향군인회·상이군경회 등보수단체 및 대표들이 대거 가입해 지역사회에서 튼튼한 기반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전정표 대표는 “‘민족정론지인줄 알고 그간 구독했는데 속은 게 억울하다’며 조선일보를끊는 독자가 잇따른다”면서 “이 운동을 시작한 지 4개월만에 옥천에 투입되는 조선일보 1,200부 가운데 10%에 해당하는 120부가 줄었다”고 밝혔다. 이밖에 ‘조선일보 반대 광주전남 시민모임’‘안티조선 경남시민연대’ 등이 결성돼 전국 각지에서 안티조선운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정운현기자
  • 탑골공원·남산골 한옥마을 3월의 명소 선정

    서울시는 3월의 명소로 탑골공원과 남산골 한옥마을을 선정했다. 탑골공원은 80여년전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3·1운동의 발생지로 선열들의 얼이 깃든 곳이며 남산골 한옥마을은 우리의전통문화 프로그램이 상설운영되고 있는 전통가옥 밀집지역이다. 서울시는 올해 한국방문의 해와 내년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서울의 산,고궁,유적지 등에서 매달 2∼5곳씩을 ‘이달의 명소’로 선정하기로 하고 지난달 처음으로 경복·창덕·창경·덕수궁 등 4개 고궁을 선정,발표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
  • 프리랜서 아나운서 브라운관 누빈다

    난 아무에게든 갈 수 있어! KBS 아나운서 임성민씨가 프리를 선언,1일부터 ‘자유인’이 됐다.임씨의 독립선언은 시기가 저울질돼 왔을뿐 예견된‘사태’라는 게 방송가 입방아.넘치는 재능을 주체 못해 교양부터 오락,드라마까지 문어발을 뻗쳐온 임씨였기에 ‘조직’이란 압박이 몸에 맞을 리 없었을 거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조금만 떴다하면 ‘프리’를 선언하는 건 공중파 아나운서들의 예사 행로가 돼가고 있다.그 수도 어느덧 기십명을 헤아린다.우리나라 프리랜서 아나운서 1호는 황인용씨.TBC 소속이던 1980년 일찌감치 독립을 선언한 뒤 ‘황인용의 영팝스’‘밤을 잊은 그대에게’등 팝프로그램 전문진행자로 스스로를 각인해왔다.이후로도 이계진 원종배 이숙영 김동건최선규씨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던 아나운서 프리선언이보편화한 것은 90년대 중반이후.케이블 출현을 필두로 한 매체의 무한 증폭, 교양과 오락사이의 경계 허물림, 이를 통해 아나운서도 스타가 될 수 있는 토양 마련과 맞물린 현상이다. 95년 MBC를 ‘박차고’나온 한선교씨,97년 나란히 KBS를 ‘탈출’한 정은아 손범수 오영실씨,99년 SBS에서 독립한 유정현씨,2000년 KBS 차장에서 느즈막히 프리로 ‘개업’한 이금희씨 등.브라운관을 누비는 맹렬 아나운서 절반이상이 프리다.유학중인 KBS 김병찬씨도 프리선언 초읽기라는 전언이며손범수씨 경우는 진양혜씨와 부부 프리 아나운서로 활약중이다.아나운서들이 반(半)연예인이 된 방송환경 변화가 프리선언의 토양이라면 그 결정변수는 아무래도 수입문제.IMF이후방송사마다 외부진행자 예산을 대폭 삭감,그 몫이 고스란히아나운서들에게 떨어져 업무량이 엄청 증폭됐는데도,출연료는 형편없는 제자리걸음이다.한 방송사의 경우 아나운서들의편당 수당은 2만원에 묶여 있는데 프리의 몸이 돼 외부진행자로 분류되면 40만원까지도 받는다.일년치 연봉을 한달만에회수하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CF등 외부활동을 제약하는 엄격한 조직문화도 아나운서 ‘탈출욕구’를 북돋운다.끼넘치는 신세대 아나운서일수록 오히려 이런 제약이 더 근본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91년 KBS탤런트 시험에 합격했다가 집안 반대로 꿈을 접어야 했던 임성민씨의 경우는 기류변화의 대표적 사례가 될 듯하다.임씨는드라마는 물론,벌써 영화출연·음반취입까지 계획하며 죽였던 끼를 되펼쳐 볼 꿈에 부풀어 있다. 손정숙기자 jssohn@
  • 민족대표·애국지사 55인 위패 봉안

    82주년 3·1절을 맞아 기미년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과 애국지사 22인 등 모두 55인의 위패가 부산의 한 사찰에 봉안됐다. 1일 오전 부산시 동구 초량동 대한불교 원효종 금수사(주지법홍스님)에서 손병희·한용운선생 등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과 안중근의사와 김좌진장군 등 순국선열22인의 위패 봉안기념식이 열렸다.민족대표와 애국지사의 위패가 금수사에 봉안된 것은 법홍스님이 한국전쟁때 피란온 초대 부통령 이시형 박사(1869∼1953)와의 인연 때문이다. 금수사는 한국전쟁때 피란민들에게 거처를 제공하는 등 도움을 주면서 이름이 알려졌고, 이시형 박사가 법홍스님을 만나애국지사의 위패를 모셔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 또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 전 국회의원이 김 장군의 제사와 위패를 모셔줄 것을 부탁했고,법홍스님은 이때부터 항일운동으로 순국한 윤봉길 안창호 안중근의사 등 애국독립지사 22인의 위패를 모시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손병희·한용운선생 등 기미년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위패까지 모시게 됐다. 부산 이기철기자 chuli@
  • 日교과서 왜곡·잇단 망언에 분노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전국 곳곳에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과 잇따른 망언 등을 규탄하는 민간단체의 집회가 줄을 이었다. 광복회(회장 尹慶彬) 등 20개 시민·사회단체 회원 1,800여명은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일본 역사 왜곡 규탄대회’를 갖고 최근 일본 정치인들의 잇따른 망언과 역사 교과서의 왜곡 기도에 대해 규탄했다.이들은 대회를 마친 뒤 일본대사관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대표 尹貞玉)도 일본대사관 앞에서 449차 수요 집회를 갖고 정신대 피해 할머니와 전교조 교사 등 150여명과 함께 일본 교과서 왜곡 등에 대해 항의했다.집회에는 미 캘리포니아 주법원에 일제 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을 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회원들도 참여했다. 흥사단도 “전국 26개 지부에서 우리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촉구하는 한편 일본 제품 불매운동,일본대사관 항의전화 등 ‘안티-재팬운동’을 펴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독도향우회(회장 최재익) 회원 600여명도 탑골공원에서 3·1절기념 독도수호 대일 규탄결의대회를 가졌다. 대한민국독립유공자유족회 회원 800명도 종로2가 YMCA 앞에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을 규탄했다.독립기념관(관장 朴維徹) 직원 100여명도 천안 ‘겨레의 집’에서 집회를 갖고▲일본은 과거의 만행에 대해 사죄할 것 ▲역사 교과서의 출판 중지 등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전교조와 한국교총은 2일 개학과 함께 전국 초·중·고교학생들을 대상으로 3·1운동과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례를 주제로 특별수업을 하고 항의집회를 가질 계획이다. 한편 한국담배소비자연맹 직원 33명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 발표를 기리는 뜻에서 탑골공원에서 두루마기 차림으로 손병희 선생 동상 청결작업을 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
  • 독자의 소리/ 청소년에 ‘3·1독립선언서’ 원문 읽게해야

    일제 시대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천명한 독립선언서는 대한독립선언서,2·8독립선언서 및 3·1독립선언서 등 3개가있다. 이 선언문들은 모두 한자를 모체로 해 작성된 것이어서 읽기에 어려움이 없지 않다. 그래서 알기 쉽게 한글로 바꿔 사실상 번역이 되다시피 했는데 3·1선언서의 경우 시류에 따라 여러번 고친 결과 4개의 선언문이 나돌고 있다. 지금 우리가 행사때마다 낭독하는 선언문은 가장 최신의 것으로 문장이 쉬워졌다. 그러나 심오한 내용이 희석되어 흔한 결의문처럼 쇠락하고말았다.한자만 섞이면 청소년의 이해 문제를 거론하면서 쉽게 고칠 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원문을 익혀야 한다.조소앙,이광수,최남선 등 당대의 대문장가들이 기초한 이 선언문들은 읽을수록깊은 뜻을 깨닫게 되는데 당장 어렵다고 쉬운 것만 추구한다면 훗날 청소년들은 못배운 것을 후회할 것이다.억지로라도익히도록 독려하여야 한다. 황현성 [경기 수원시 권선구]
  • 3월의 독립운동가 이승훈선생

    국가보훈처는 27일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선생을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무역업과 운송업으로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었으나 연이은 사업실패를 겪으며외세와 민족문제에 대한 인식과 반일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에 감명받은 것을 계기로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평안북도 총감이 됐다.이후 태극서관을 설립,민족자본 육성에 힘쓰는 한편 초등교육기관인 강명의숙과 중등교육기관인 오산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 운동을 펼쳤다. 1911년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명근의 독립자금 모금사건인안악(安岳)사건에 연류돼 제주로 유배되었다.105인 사건의주모자로 지목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다 1915년 가출옥했다.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천명 등으로 세계정세가 변하자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서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일제에 체포돼옥고를 치르다 1922년 7월 출옥한 선생은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했다.1924년 5월부터 10월까지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다. 1930년 5월 9일 ‘내 뼈를 표본으로 만들어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3·1절 종로엔 색 다른 즐거움이 있다

    서울 종로구는 오는 3월 1일 3·1절을 맞아 종로 일대를 차없는 거리로 지정하고 ‘3·1 만세의날 종로거리축제’를 연다. 이에 따라 종로1가 보신각에서부터 종로3가 서울극장에 이르는 800m 구간이 ‘차없는 거리’로 지정돼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차량통행이 전면 통제된다. 종로구는 그동안 차량의 홍수와 매연으로 찌든 종로거리를시민에게 돌려주고 시민들이 직접 축제의 주인공으로 참가할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단순히 교통을 통제한 뒤 시민들이 구경만 하는 것에서 탈피, 시민들이 즐기고참가하는 축제로 꾸미기로 한 것. 이에 따라 굴렁쇠 굴리기,떡메치기,소원북치기,인절미 만들기,윷놀이 등 가족단위의 프로그램이 마련되며 청소년을 위한 힙합·테크노 경연대회,페이스 페인팅,유관순 열사상 선발대회 등도 열린다. 거리축제 전구간에서는 농악·사물놀이가 펼쳐지고 3·1만세 행사,독립선언서 낭독 등의 행사도 재현된다. 김용수기자 dragon@
  • 2·8독립선언 82주년 기념식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2·8독립선언선포 82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식이 8일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 동시에 열렸다. 서울,도쿄 동시개최는 1919년 2월 8일 재일 한인유학생 400여명이 일본제국의 심장부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조국독립을 선포한 2·8독립선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시도됐다.도쿄기념식은 이날 오전 10시 일본 도쿄 한국YMCA 한국문화관에서 김유배 보훈처장,윤경빈 광복회장,최상용 주일대사,김재숙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 중앙본부단장 등 주요인사와 교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기념식에 이어 신용하 서울대 교수가 ‘2·8독립선언의 역사적 의의’를 주제로 기념강연했다. 오전 11시 서울YMCA에서 열린 서울기념식에는 광복회원 등300여명이 참석했다.지명관 한림대교수가 ‘한국사회에서 바라본 2·8독립선언’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노주석기자 joo@
  • [발언대] 2·8독립선언이 남긴 애국정신 되살리자

    입춘이 지났건만 봄은 아직 멀기만 하다. 정치적 혼란과 경제 위기가 겨울의 늪에서 벗어나려는 우리 마음을 더욱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다. 1919년 2월8일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일이다.대한의 젊은이들이 현해탄 너머 일본 열도의 한복판에서전개한 항일 학생운동으로 그 의미가 실로 크다 하지 않을수 없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일대 사건이 민족 지도자나 세력가가 아닌 평범한 젊은이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이는 참으로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옛부터 청년세대를 일컬어 국가의 동량 또는 초석이라는 말들을 해왔지만 2·8독립선언처럼 그 증거가 되어 준 사건이많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애국과 애족의 마음이 없었던들 오늘의 젊은이들처럼 일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생각하는이기주의가 팽배했던들 꿈꾸기조차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남의 나라인 미국 대통령이 바뀌는데에도 민감하게 영향받는 현실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국권 침탈의 어려운 시절을 산 당시젊은이들에게 바란 것 이상의 몫을 기대하게 된다. 지·덕·체를 근간으로 탁월한 능력과 원만한 인간관계까지를 겸비해 주기를 바라왔다. 근래에는 국가의 총체적 위기를 도덕적 해이나 민족정신 약화에서 찾는 만큼 이러한 부분까지를 채울 수 있는 대한의젊은이가 되기를 기대했다. 언뜻 큰 부담과 무게를 느낄 수도 있으나 2·8독립선언, 광주학생운동,6·25때의 국내외 참전 학도병,4·19혁명의 주역들을 생각하며 면면히 흘러온 강인한 민족정신을 계승한다면그 다음 목표는 순풍에 돛단 듯 쉽게 쉽게 풀려갈 것이다.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이라 하여 그 가치를 소홀히 말고 다시한번 애국선열의 큰 뜻을 이어 조국의 미래와 민족 번영을생각하는 지혜로운 눈을 떠주길 바란다. 애국은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항상심으로자리한다.다만 그것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필요한 것이다.82주년을 맞은 2·8독립선언에 담긴 정신적 의미가 잠들어 있는 애국심을 일으켜 시대 현실에 맞는 새로운 청년 선언으로젊은이 여러분 가슴에 애국의 불을 지펴주길기대한다. 도영미 청주보훈지청 보훈계장
  • ‘대한독립선언’ 82주년 기념식

    만주와 러시아 거주 민족지도자 39명이 1919년 2월1일 중국 길림성에서 선포한 ‘대한독립선언’ 82주년 기념식이 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광복회 주관으로 열린 행사에는 김유배(金有培) 국가보훈처장,윤경빈(尹慶彬) 광복회장,박유철(朴維徹) 독립기념관장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기념식에 이은 학술회의에서는 서굉일(한신대)·신용하(서울대)·한용원(한국교원대) 교수와 일본의 경제평론가인 구보다 요시마다씨가 선언을 기초한 조소앙 선생의 사상을 재조명하는 주제논문 등을 발표했다. 대한독립선언은 조소앙,신채호 선생을 비롯한 항일 독립운동 지도자39명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맞춰 조국독립을 요구한 내용의 선언서로서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의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주석기자 joo@
  • 2월의 독립운동가 윤세복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만주 서간도에서 민족계몽운동을 벌이고 대종교를 통해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한 단애(檀崖) 윤세복(尹世復·1881∼1960) 선생을 광복회,독립기념관 등 유관기관 공동으로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을사늑약 이후 1909년 독립운동 비밀결사 조직인 ‘대동청년단’에 가담,국권 회복에 앞장섰다.합방 이후대종교에 입교한 선생은 1911년 2월 서간도로 망명,환인현에 동창학교를 설립,민족계몽 운동을 펼쳤다. 선생은 일제에 체포돼 18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만주·노령지역 독립운동지도자들과 함께 1919년 2월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3·1운동후 평화적 시위로는 독립할 수 없다고 판단,1921년 대한국민단을 결성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4년 대종교 3대 교주로 취임한 뒤 1933년 만주 동경성에 ‘발해농장’을 설립,독립투쟁을 벌이다 체포돼 1944년 무기형을 언도받고복역하다 광복을 맞았다. 노주석기자 joo@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6)블라디보스토크·빨치산스크

    1910년 국권상실 직후 의병들의 거점이었던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를 돌아본 취재팀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항일투쟁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러시아어로 ‘보스토크(동방)’와 ‘블라디’(정복)를 합성한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연해주의 중심도시.금각만(金角灣)을 껴안은이 곳은 극동에 있는 러시아의 유일한 부동항(不凍港)으로 1860년대이래 러시아 극동진출의 발판이 돼왔다.특히 1903년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개통되면서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우리 항일투쟁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항일투쟁이 응집된 중요한곳이다.일제를 피해 포시에트를 떠난 한인들이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 때문이다. 해삼위(海蔘威)라고도 불렸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먼저 찾아 나선곳은 뽀그라니치나야 스라보카 거리였다.구한말 항일운동의 중심역할을 한 개척리가 세워진 곳이다.남향에다 바다로 향한 전망이 좋아 마을이 없던 당시 이주자들이 정을 붙이고 살기에는 최적지로 보였다. 그러나 개척리는 1911년 러시아 당국이 콜레라 근절을 핑계로 수천여명에 이르던 우리 동포들을몰아낸 뒤 병영을 지었고,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원형극장이 들어섰다.지금은 중국음식점으로 바뀌었다. 한인들은 쫓겨나기 1년전인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이상설 이범윤 홍범도 등을 주축으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9월 11일 러시아 극동공화국 당국이 일본의 요구에 따라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간부 200여명을 체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대동공보’도 이 곳에서 발행됐다.국내 의병장,계몽운동가들이 모여들면서 이 주변은 한인수가 한때 16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90여년의 긴 세월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남김없이지워냈다.기왓장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현실에 취재팀은 안타까움을감출 수 없었다. 개척리를 떠난 동포들은 십여㎞쯤 떨어진 언덕에 새둥지를 틀었다.바로 신한촌(新韓村)이다.그러나 신한촌은 북향의 경사진 언덕이다.따뜻한 남향의 옥토에서 칼바람 부는 황무지로 옮겨온 우리 동포들의심정은 어땠을까. 우리 동포들은 신한촌에서 1911년 8월29일 한일합방 1주년을 맞아반대시위를 벌였다.그리고 조국독립과 계몽활동,민족주의교육 등을주창하는 권업회(勸業會)를 창설했다.이 때 홍범도는 20명의 동지와함께 ‘21의형제 동맹’을 결성했다.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앞서 1912년 신채호 이상설장도빈 등은 ‘권업신문’을 발간했다.1919년 3월17일에는 고국에서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가졌다.이듬해 3·1절에는독립문을 세웠다.이렇게 줄기차게 전개된 투쟁 때문에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은 독립운동사에서 신한촌을 북간도의 용정과 명동보다 앞선것으로 평가한다. 일본군은 1918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위군과 차르의 백군간에 벌어진 내전에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파병해 있었다.1920년4월,일군이 러시아군과 한인부대 연합군과 충돌하자 이를 기화로 신한촌을 기습하였다.주요 지도자들은 탈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최재형이 동포 6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그는 우수리스크로 끌려가서 처형되었다. 취재팀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를 피해 새로 정착한 빨치산스크로 향했다.우리식으로 수청(水淸)이라고 이름지어진 이 곳은블라디보스토크에서 200㎞쯤 떨어진 산세 험한 소 도시이다.백마 탄 김일성장군으로 불렸던 김경천(金擎天) 장군이 이끄는 항일유격대가 치열하게 일본군과 싸웠던 곳이다. 김경천은 창해(滄海)청년단과 수청고려의병대를 이 곳에서 이끌었다. 광복군사령관을 지낸 이청천(李靑天)보다 일본육사 3년 선배로서 조국 독립에 한몸을 던졌던 김경천.그는 1909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육사에 재학 중 조국이 강점당하는 비운을 겪었다.요코하마에서 그는이청천 홍사익 등과 함께 뒷날 탈출하자고 결의했다.1919년 6월 그는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이청천이 중국 땅에 남은 것과 달리 김경천은 1919년 말 러시아로와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1920년 4월 일본군의 신한촌 기습에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면한 그는 수청으로 가서 한인들을 괴롭히는마적들을 제압하고 일본군과 싸웠다.그는 이 때부터 ’백마 탄 김일성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김경천은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때때로 러시아 백군과 싸워 볼셰비키혁명에도 공로를 쌓았지만홍범도가 그랬던 것처럼 강제 이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그리고 1942년 수용소에서 불우하게 사망했다. 광산촌인 빨치산스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자동차는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간신히 3시간만에 도착한 빨치산스크의중심가는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갑자기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한참수소문한 끝에 빨치산스크 시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나탈리아라는여성 관리원의 도움을 얻어 빨치산 사진과 문헌을 샅샅이 뒤졌지만김경천 등 한국식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한인 빨치산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었다.기록에 따르면 이 곳에 있던 빨치산 중 절반이 한인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1936년 강제이주 뒤 자료들이 대부분 멸실된 듯 싶었다.나탈리아는 취재팀의 허탈해 하는 표정을 보고 “수장고에 다른자료들이 있는데 관장이 갖고 외출했고 그는 며칠뒤에야 돌아온다”며 자기가 더 미안해 했다.취재팀은 어쩔 수 없이 벽에 걸린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다 한인으로 보이는 몇사람을 발견한 것을 위안으로삼으며빨치산스크를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 박재범기자 jaebum@. * 빨치산스크의 고려인들. 빨치산스크에는 고려인(카레이스키)이 간혹 눈에 띄었다.1936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전원 강제이주된 한인들의 후손들이다.그들은 최근 몇년새 한둘씩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다.대개 중앙아시아에 가까운 하바로브스크 등 대도시에 자리잡고 있으나 멀리 빨치산스크까지 오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그러나 그들은 이미 선조들의역사를 잊었다.아니 아예 모르고 있었다. 빨치산스크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러 들어온 한 사람을 만났다. 생김새가 한국사람과 똑같아 “혹시 카레이스키가 아니냐”고 러시아말로 묻자 “그렇다.박이다”라고 대답했다.“4∼5년전에 중앙아시아에서 이 곳으로 왔다”는 그는 “예전에 이 곳이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음을 아느냐”는 질문에 ‘처음 듣는 얘기’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바로브스크에는 고려인이 빨치산스크보다 훨씬 많다.고려인들은하바로브스크 시내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 등을 팔거나 구두를 고치는일 등을주로 하고 있다.그들 역시 중앙아시아가 고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바로브스크 등 연해주가 그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뿌리내렸던 곳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역시 극히 드물었다. 박재범기자
  • ‘일본판 쉰들러’ 후세 변호사 재조명

    일본인으로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고,전후에는 재일조선인들의 차별대우 철폐에 앞장선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 변호사를 재조명하는 국제학술회의가 13일 국회 의원회관 소강당에서열렸다.학술대회에서는 한일 양국 학자 등 7명이 후세 변호사의 한국인 독립운동 후원 등에 관한 주제논문을 발표했다.후세 변호사의 직손인 오오이시(大石 進) 일본평론사 사장도 행사에 참석했다. 일본 미야기현 태생으로 메이지법률학교 졸업후 검사 대리를 거쳐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후세 변호사는 일생을 피압박민족·피차별자등 소수 약자를 위해 바쳤다.그는 일본군국주의에 맞서 사법개혁·평화운동 등 민주주의운동을 벌이다 변호사 자격박탈 3회,두 차례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1919년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이 주도한 ‘2·8독립선언’을 비롯해 ‘박열(朴烈)의사사건’,‘의열단사건’ 등에 관련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였으며,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문제를 일본정부에 항의,고발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그는 일제의한국인 토지몰수에 맞서 실태조사,고발에 앞장섰으며,‘형평사(衡平社)운동’등 신분차별 폐지운동을 지원하기도했다. 그의 한국·한국인 사랑은 일제 패망후에도 계속됐다.1946년 그는피압박민족의 신헌법을 구상,‘조선건국헌법초안사고(私稿)’를 발표하였으며,한국전쟁중인 1953년 3월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 주최 행사에서 남북통일의 열망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그는 재일조선인들의 차별철폐운동에 일생을 투쟁하였다. 한편 후세선생기념사업회는 이번 학술대회를 시작으로 후세 변호사의 어록비 건립,한일합작 영화제작,그리고 정부의 훈장추서를 추진할 계획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신유고연방 大選 이틀 앞으로

    24일 치러질 신유고연방의 대통령 선거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있다.발칸반도의 독재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질 지 여부가 국제사회의 관심이다.야당의 승리는 유고 독재의 종식을 뜻하는 동시에 화약고인 남동유럽에서의 평화정착 가능성을 의미한다.때문에 서방 선진국들은 야당 후보를 전격 지원하고 있다.유고 군부도 선거결과에 승복할 의사를 밝혀정권교체의 가능성은 한층 높아지고 있다. ◆판세 분석 밀로셰비치의 독재와 11년 장기집권에 염증을 느낀 유고 국민들 사이에 이번에는 바꿔보자는 분위기가 퍼지고 있다.특히 18개 군소야당 연합인 세르비아민주야당(DOS)의 보이슬라브 코스투니차 후보가 유일하게 부패에 연루되지 않은데다 후보단일화 실패의 책임이 제 1야당인 세르비아쇄신당(SPO)의 부크 드라스코비치 당수에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코스투니차가 급부상하고 있다. 코스투니차는 1차 여론조사에서 43%의 지지를 얻어 21%에 그친 세르비아사회당(DOS)의 밀로셰비치를 여유있게 따돌렸다.2차 조사에서도코스투니차가 밀로셰비치를 52%대 26%로 앞섰다.유고의 진보적인 라디오방송 B92가 실시한 인터넷 설문조사에서는 코스투니차가 무려 77%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1차투표에서의 과반수 이상 승리도 점쳐지고 있다. ◆야권 분열 지난달 초 야권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뒤 대선 레이스에뛰어든 야당의 후보는 3명.미국을 포함해 서방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DOS의 코스투니차,제 1야당인 SPO의 보이슬라브 미하일로비치, 세르비아급진당(SRS)의 토미슬라브 니콜리치 등이다.야권은 반(反) 밀로셰비치 세력의 표가 분산될 것이 예상되자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고있다.DOS에 참여하고 있는 민주대안당은 성명을 통해“어떤 개인이나개별 정당도 국익을 두고 도박을 벌여 국민을 실망시킬 권리가 없다”고 SPO의 야권후보 단일화 불참을 강력히 비난했다. 그러나 SPO는“전체 유권자의 3분의 2가 야당을 지지하고 있다”며 “야당 전체가제 1야당 후보인 미하일로비치를 지지하면 밀로셰비치의 재집권을 충분히 저지할 수가 있다”고 반박했다. ◆서방의 지원과군부의 중립 미국은 지난달 유고에 접한 헝가리에야당 후보 지원을 위한 사무소를 열었다.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밀로셰비치 낙선 지지를 공표했다.미국과 유럽연합(EU)은 유고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선택하면 대(對)유고 제재를 풀고 수백만 달러의 경제지원을 할 것이라고 정권교체를 부추기고 있다. 그동안 침묵을 지킨 유고의 군부도 선거결과에 승복할 뜻을 비쳤다. 네보이사 파브코비치 유고군 참모총장은 국영 TV와의 회견에서 “코스투니차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도 군이 그의 승리를 수용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며 “군은 특정 정당을 지지해 본 적이 없으며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지지할 뿐”이라고 강조했다.정권이양의 최대 걸림돌로 간주된 군부가 대선에서의 중립을 표명한 것. ◆우려되는 부정선거 및 테러 재집권이 여의치 않을 경우 밀로셰비치측이 투표조작이나 후보자 납치 및 테러를 자행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극단적으로는 코스투니차를 살해할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밀로셰비치는 유엔군 관할지역인 코소보에서도선거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코소보에서의 소요 등을 예상하고 이를빌미로 공포 분위기 속에서 부정선거를 치르려는 것.실제 19일 코소보내 세르비아인 거주지인 그라카니카에서 테러음모 용의자 3명이 코소보평화유지군(KFOR)에 체포됐다. ◆유고사태 일지. ●1389년 오스만 튀르크,세르비아로부터 코소보 강점●1946년 구 유고연방 탄생,코소보는 세르비아내 자치주로 편입●1987년 밀로셰비치,세르비아 대통령 취임.코소보 알바니아계 탄압시작●1989년 밀로셰비치,코소보 자치권 강탈.세르비아 대통령 재선●1991년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독립선언.내전 시작●1999년 3월24일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유고 공습 시작●〃 6월9일 유고-나토 세르비아군의 코소보 철수 합의문에 서명.알바니아계 귀환시작●2000년 7월6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유고 상·하원 통과● 〃 9월24일 유고 대선강충식기자 chungsik@. *코스투니차 후보…민족주의 성향 '미스터 클린'. 18개 군소야당연합인 세르비아민주야당(DOS)의 보이슬라브 코스투니차(56) 후보는 유고 정권교체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법학 교수 출신의 코스투니차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유고의 야당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부패에 연루되지 않은 청렴한 이미지 때문이다.부패한 정부에 식상해 있는 유고 국민으로서는 깊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코스투니차 후보는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할 줄 알고 정치적 설득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그는 또 밀로셰비치 대통령과 아직 한번도 만난 적이 없을 정도로 현 정부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으며 서방과의 대화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나토의 유고 공습에 대해서는 강도높게 비판하는 등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학자풍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코스투니차 후보는 정치적 조직 기반이 미약하고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1944년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난 그는 베오그라드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다.89년 정계에 발을 들여 놓은 그는 92년 세르비아민주당(DSS)설립 이후 줄곧 당수직을 맡아 왔으며90년부터 97년까지는 세르비아공화국 의원직을 보유했다.정치에 입문하기 이전에 법학 및 철학 관련 정기간행물의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강충식기자. *밀로셰비치 현 대통령…국민들 독재 염증-서방 기피. 극단적인 극우주의와 권모술수로 정권을 연장시켜왔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신유고연방 대통령(58)이 이번 대선에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1941년 베오그라드 인근 포자레바츠에서 출생한 그는 전력회사와 은행에 잠시 몸담았다가 39세때 정계에 투신했다.80년 요시프브로즈 티토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주목받기 시작,86년에 세르비아 공산당수가 됐다.그는 코소보가 400여년전 세르비아의 10만대군이 오스만 터키군에 전멸당한 ‘성지(聖地)’임을 강조함으로써 세르비아인의 민족감정에 불을 지폈다.89년 세르비아 대통령이 된 그는 가장 먼저 코소보의 자치권부터 빼앗았다. 92년 유고연방이 해체됐으나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과 크로아티아 내전에 개입,각 지역의 세르비아인에게 무기를 지원하는 등 ‘대 세르비아’ 정책을 꾸준히 실천에 옮겨 그해 실시된 대선에서 재선됐다. 밀로셰비치는 90년대 중반이후 코소보 알바니아계에 대한 청소를 가속화,무수한 인명을 무차별 학살해 야당의 거센반발을 샀다.결국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공습을 불렀고 본인은 국제사법재판소에 전범으로 기소된 상태다.지난 7월6일 유고 상·하원에서 대통령 직선제개헌안이 통과됨에 따라 밀로셰비치는 집권연장에 대한 꿈에 부풀었으나 오히려 직선제가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 됐다. 강충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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