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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운동 100년]3·1운동, 中·인도 등 전파… 전 세계 식민지국가 ‘횃불’이 되다

    [3·1운동 100년]3·1운동, 中·인도 등 전파… 전 세계 식민지국가 ‘횃불’이 되다

    1918년 11월 첫 번째 세계대전이 끝났다. 당시 인류의 4분의 3 정도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혹은 반(半)식민지 주민이었다. 1919년 1월 우드로 윌슨(1856~1924) 미국 대통령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패전국(독일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 등) 식민지들은 다소나마 독립의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처럼 승전국(영국, 미국, 일본 등)의 지배를 받던 나라들은 열강의 힘에 눌려 해방을 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때 우리 민족이 일본을 상대로 대담하게 독립을 선언했다. 3·1운동을 통해 승전국 식민지 가운데 맨 처음 혁명의 횃불을 들어올린 것이다. ●대한민국 뿌리 되는 임시정부 수립 미국 뉴욕타임스는 3월 13일자 기사에서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운동이 널리 퍼져 나갔다. 수천여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밝혔다. 비슷한 시기 AP도 “조선 독립선언문에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000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한다’고 명시됐다”고 보도했다. 3·1운동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있어 감리교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의 헌신이 컸다. 3·1운동은 한반도 안팎에서 임시정부의 탄생을 이끌었다. 독립선언서 첫 구절에 “이제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한다”고 밝혀 뜻있는 이들이 주권 기관을 세워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춘 곳은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와 중국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 등 세 곳이었다.노령정부는 독립전쟁을 치르기 좋은 위치였지만 일본의 공세에 노출돼 있었다. 상하이정부는 정치 활동이 자유로웠지만 국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한성정부는 민주적 절차를 지켜 정통성이 컸지만 조선총독부가 자리잡은 서울에서 활동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세 정부는 힘을 모으고자 통합에 나섰다. 수개월간의 논의 끝에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3곳의 통합을 선언했다. 앞서 상하이정부는 4월 11일 생겨났는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언했다. 더이상 왕이나 신분제는 우리 민족의 것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상하이정부는 대한민국의 시원(始原)이 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통합 임정’은 끝없는 갈등과 내분으로 여러 번 해체 위기를 겪었다. ‘식물 정부’로 전락해 명맥만 유지하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임정은 우리 역사 최초로 근대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27년간 외교 노력과 의열투쟁을 병행하며 독립운동의 총괄체로 자리매김했다. 독립운동사 거두인 조동걸(1932~2017) 국민대 명예교수는 “왕족이나 정부 계승자도 아닌 이들이 민중의 뜻으로 임시정부를 세워 30년 가까이 제국주의 국가와 투쟁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1875~1965)은 “대한민국이 임정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수차례 밝혔다. 1987년 국회는 9차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의 법통이 임정에 있다고 다시 한번 천명했다. ●中 “3·1운동은 5·4운동 본보기 역할” 우리나라가 올해를 3·1운동 100주년으로 기념하듯 중국도 5·4운동 100주년의 해로 기린다. 1차 세계대전 뒤 일제는 중국 베이징 군벌정부에 패전국 독일이 점령했던 산둥반도를 조차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이를 막아내고 반제국주의·반봉건 투쟁에 나섰는데, 이것이 5·4운동이다. 3·1운동은 5·4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사실은 중국의 문헌자료에도 잘 나타난다.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뒤 베이징에서 발행된 ‘매주평론’(1918년 창간된 문화사상잡지)은 같은 달 16일자를 3·1운동 특집호로 꾸몄다. ‘조선 독립의 소식’을 싣고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서를 소개했다. 3·1운동의 시위 상황을 객관적으로 해설하고 분석했다. 이 내용은 베이징대 학생들을 강타했다. 학생들이 직접 만들던 잡지 ‘신조’(4월 1일자)에 ‘조선 독립운동의 새로운 교훈’과 ‘조선 독립운동의 감상’이라는 논문이 실렸다. 신조는 1919년 1월 창간된 월간지로 훗날 5·4운동의 주동자가 된 푸쓰넨, 뤄자룬 등이 편집책임자였다. 특히 푸쓰넨은 3·1운동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중국인에게 호소했다. 그는 “조선의 3·1운동이 ‘세계혁명사에서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3개의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고 강조했다. 바로 ‘무기를 들지 않은 혁명’과 ‘불가능한 것을 알고도 한 혁명’, ‘순결한 학생혁명’이다. 푸쓰넨의 호소에 마음을 움직인 학생들은 5월 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모였다. 이들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시위에 나섰다. 이날 발표된 베이징학생선언문에서는 “조선이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일어섰다. 일본이 산둥지역을 뺏으려 하니 우리 중국인도 일어서자”고 호소했다. 이날의 운동이 주요 도시에 파급돼 5·4운동으로 퍼져 나갔다. 리궁중 중국 난징대 교수는 “3·1운동은 중국의 거울이 됐다. 독립국가 개념 형성의 중요한 촉매였다”며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의 본보기 역할을 했으며 20세기 전반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동남아시아·중동 민족운동에도 기여 3·1운동은 중국뿐 아니라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동지역 민족운동에도 기여했다. 인도에서는 3·1운동의 비폭력 방법을 적극 채택했다. 인도 국민회의파는 1919년 4월 5일 ‘사타야 그라하 사브하’(진리 수호)운동을 비롯한 비폭력 독립 운동에 나섰다.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남아프리카에 있다가 3·1운동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귀국해 비폭력 투쟁을 시작했다. 1929년 3월 인도 독립운동 지도자인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1861~1941)도 3·1운동의 영향을 잊지 않았다. 그는 ‘동방의 횃불’이라는 시를 써 조선인에게 헌사했다. “아시아의 황금시기에/한국은 횃불이었지/그 횃불 이제 다시 타오르길 기다리네/동방에 광명을 비추기 위해.” 1919년 3월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도 과도입법위원들이 독립선언을 한 뒤 워싱턴DC에 독립사절단을 파견했다. 같은 해 3~6월 이집트에서도 독립시위운동이 일어났다. 학생과 농민을 중심으로 완전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퍼져 나갔다. 이집트에서는 이를 공식적으로 ‘1919년 혁명’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3·1운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 식민지들이 자신들의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기폭제’ 역할을 했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3·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 5·4운동, 인도 국민회의파 독립운동, 필리핀과 아랍지역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이들 운동을 주도하던 정당과 단체가 그대로 성장해 독립국가 재건의 주역이 됐다”고 설명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日, 세계 평화주의 흐름 오판해 동아시아를 수렁에 몰아”

    “日, 세계 평화주의 흐름 오판해 동아시아를 수렁에 몰아”

    진보적 언론으로서도 이례적 보도 평가 아베 개헌 추진·군비 확장에 경종 의미 “조선 전역서 비폭력으로 日군경에 맞서 독립선언서는 아시아의 미래도 통찰” 마이니치신문도 “日에 저항한 독립운동”‘3·1운동에 대한 일본 군경의 탄압은 극도로 가혹했다. 강덕상(재일사학자)의 ‘현대사 자료 조선2편’에 따르면 ‘3분간 사격에 51명 즉사’라는 내용이 군 보고서에 적히기도 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27일 1개면을 할애해 100년 전 한국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의 역사와 의미, 당시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 등을 다룬 특집기사를 실었다. 아사히는 ‘기로의 1919년…동아시아 100년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통해 1919년 1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딛고 세계에는 평화주의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 흐름을 잘못 파악해 오판을 함으로써 동아시아를 수렁으로 몰아넣었다고 지적했다. 아사히가 상대적으로 진보적 색채가 강하다고는 해도 일본 언론으로서는 이례적인 보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헌법에 자위대를 명기하는 방향으로 개헌을 추진하고 막대한 방위비를 지출하며 군비 확장을 꾀하고 있는 아베 신조 정권에 대한 경종의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던 100년 전을 상기시킴으로써 아베 정권에 반성과 각성을 촉구한다는 것이다. 아사히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조선 민중은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빼앗긴 채 헌병의 감시 아래 침묵을 강요당했다”며 “이에 1919년 3월 1일 서울 중심부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고 수십만명이 거리에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전했다. 이어 “독립운동은 조선 전역으로 확산됐고 민중들은 비폭력 정신을 내걸고 일본 군경에 맞섰다”고 소개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무자비한 탄압에 나서 그해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희생자는 사망 7509명, 부상 1만 5961명에 달했다고 박은식 선생의 ‘조선독립운동지혈사’를 인용해 전했다. 아사히는 독립선언서를 일본 정치인과 학자에게 보낸 독립운동가 임규(1867~1948) 선생에 대해서도 다뤘다. 임규 선생은 3·1운동 당일 밤 자신이 일본어로 번역한 독립선언서를 들고 도쿄역에 도착한 뒤 이를 200통 복사해 당시 총리 등 정치인, 학자, 언론사, 대학 등에 보냈다. 아사히는 독립선언서 내용 중 ‘2000만 조선인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다. 4억 중국인들이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하여 결국 동양 전체를 함께 망하는 비극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다’는 대목을 들며 “독립선언서는 아시아의 미래도 통찰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아사히는 “그러나 조선의 이런 외침이 일본 사회에 퍼지지는 못했다”며 ‘역사평론’이라는 잡지가 독립선언서를 게재해 일본의 독자들에게 알린 것은 패전 후인 1948년이었다고 설명했다. 아사히는 동아시아를 전화에 빠뜨린 일본의 책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1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에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고양되고 ‘부전(不戰)조약에 의해 전쟁을 불법화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러한 신조류를 잘못 읽었고 결국 그것이 동아시아를 불행에 빠뜨렸다”고 썼다. 마이니치신문도 이날 문답형 기사를 통해 “한국의 3·1운동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에 저항해 전국적으로 퍼진 독립운동”이라고 설명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KB국민은행 3‧1운동 100주년 기념 ‘대한이 살았다’ 음원‧영상 공개

    KB국민은행 3‧1운동 100주년 기념 ‘대한이 살았다’ 음원‧영상 공개

    KB국민은행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가수 박정현이 부른 노래 ‘대한이 살았다’의 음원과 기념 영상을 은행 홈페이지와 음원사이트에 무료 배포한다고 27일 밝혔다. 대한이 살았다는 3‧1운동 직후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실에 투옥된 김향화·권애라·신관빈·심명철·임명애·어윤희·유관순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독립에 대한 열망을 드높이기 위해 지어 부른 노래다. 국민은행은 올해 초 후손들에 의해 당시 노래의 가사가 100년 만에 발굴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새롭게 곡을 붙여 음원을 제작했다. 지난해 1차 남북정상회담 환송행사 ‘하나의 봄’의 음악감독을 맡은 정재일씨가 작곡을 맡았고, KB금융그룹 모델 ‘피겨여제’ 김연아의 내레이션도 곡 안에 포함됐다. 박정현, 김연아, 정재인의 ‘대한이 살았다’는 KB국민은행 홈페이지, 뱅킹앱 리브똑똑, 멜론, 지니, 벅스, 소리바다 등 음원사이트에서 27일부터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다. 세 사람이 출연한 뮤직비디오 형식의 기념영상도 KB금융그룹과 KB국민은행의 공식 SNS채널(유튜브, 페이스북, 블로그), 글러브엔터테인먼트 SNS채널(유튜브,트위터) 등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 한편 KB국민은행은 해당 영상의 공유 및 좋아요 수 건당 3100원을 기부금으로 조성해 독립선언문이 선포된 태화관 터 ‘3.1 독립선언광장’조성에 최대 1억원을 후원할 예정이다. 기념영상에 응원 댓글을 남긴 참가자 중 31명을 추첨해 사회적기업인 ‘마리몬드’의 숄더백도 기념품으로 제공한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100년 전 외침이 이번 음원을 통해 전해져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작은 울림으로 다가섰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KB국민은행은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담은 기념 영상도 공식 SNS채널에 공개했다. 가수 김도연과 최유정이 각각 유관순 열사와 안중근 의사 소개를 맡았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김포 3·1만세운동-2] 군하리장터 만세운동중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옥살이한 여성 이살눔은 ‘김포의 잔다르크’

    [김포 3·1만세운동-2] 군하리장터 만세운동중 체포돼 서대문형무소 옥살이한 여성 이살눔은 ‘김포의 잔다르크’

    경기 김포 3·1만세운동 전개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체포돼 재판을 받은 인원은 고촌면 6명을 비롯해 양촌면 9명, 월곶면이 13명으로 모두 28명이다. 1919년 3월 23일자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24보)’에 의하면 월곶면 만세시위 상황에 대해 주모자 10명을 연행했다고 기록돼 있다. 판결문을 통해서 22일 성태영·이살눔·백일환·이병린·오복영 등 5명이 재판을 받은것으로 기록돼 있다. 체포된 10명 중 5명만 기소하고 나머지 5명은 훈방처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포에 독립만세운동을 한 사람이 많은데 당시 관련 사진이나 자료가 대부분 사라져 남아있는 대표적인 사례를 들어본다. 이경덕(1886~1948·이살눔)은 김포출신으로 성서학교 학생이었다. 이살눔은 이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한 유일한 여성으로 김포의 잔다르크라 불린다. 월곶면 고양리에서 성태영·백일환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3월22일 군하리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부해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 중 일경에 체포됐다. 7월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언도받고 공소했으나 경성복심에서 기각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이살눔은 옥고를 치르던 중 병을 얻어 10월27일 가출옥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석방됐다. 이후 군하리에서 목회자의 삶을 살다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2003년 8월15일 이살눔이 전도사 몸으로 실천한 뜻을 기리기 위해 박형규 목사 외 17명과 11개 교회가 참여해 현 월곶면 푸른언덕교회 내 ‘이경덕전도사 3·1운동기념비’를 세웠다. 현재 이살눔의 양아들 부인인 며느리가 생존해 있으나 석방이후 삶의 기록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날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남편이 몰래 밤중에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고 한다. 현재 묘소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른다는 전언이다. 임용우(1884~1919)는 당시 통진 창신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2년 27세 당시 덕적도 명덕학교로 부임해 8년간 근무하면서 많은 애국청년들을 길러냈다. 그해 2월하순쯤 천도교회의 연락을 받고 3월1일 상경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에 참가하고 3월3일 고향인 군하리 면사무소 앞에 면민들을 집합시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또 1919년 3월29일 최복석·윤영규 등과 함께 월곶면 갈산리·조강리 일대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이날 정오 갈산리에서 최복경이 만든 태극기를 선두로 만세시위운동을 벌이고 오후 2시 군하리 향교와 보통학교·면사무소를 차례로 행진을 벌였다. 또 4월9일 자기가 재직하는 명덕학교 운동회를 덕적도 해안가에서 개최해 모인 참관들과 학생들이 앞으로 나아가 이재관·차경창 등과 만세를 선창하는 등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됐다. 이해 5월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6개월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일제의 잔인한 고문으로 순직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박충서는 김포출신으로 3월23일 양곡리 장날을 이용해 박승각·박승만·안성환·전태순·오인환·정억만 등과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했다. 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학생으로 3·1운동 파고다선언식에 참석하고 남대문과 대한문 일대에서 시위에 참여하다 귀향했다. 그는 3월19일 안성환의 집에서 박승각·박승만·전태순과 만나 양곡장날인 23일을 정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태극기와 격문·경고문 등을 작성해 오인환과 정억만에게 줘 동리에 배포하도록 했다. 23일 양곡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 앞에 나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고 장터를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됐다. 9월4일 보안법 위반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82년 대통령표창을,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런데 월곶면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 가운데 박용희와 당인표·조남선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지 않았다. 박용희는 22일 만세를 주도한 후 길림성으로 망명해 한림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그는 중국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군자금을 마련해 제공했다. 1933년 7월 일인살해 사건으로 소만교 국경으로 도피생활 중 해방돼 고향 월곶면 고양이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며 6·25전까지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했다. 당인표는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망명했다고 하나 행방을 알 수 없다. 조남선은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망명했으며 4년 후 고향으로 돌아와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조선헌병대사령관이 육군대신에게 보낸 ‘전국 각지의 3월 22일부터 23일까지의 시위 운동상황’ 보고서에 의하면 23일 양촌면 오라리장터 만세시위에서 60여명을 연행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60명 주모자 중 9명을 기소하고 나머지는 훈방처리됐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지 (1955)에 의하면 김포 3·1독립만세운동 과정에서 부상자 120명 체포자 200명으로 파악되고 있고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100년전 3월 30일 군포장 만세운동 재연한다.

    경기도 군포시는 군포역과 군포역전시장 인근에서 100년 전 일어났던 3월 30일 항일 만세운동을 재연한다고 27일 밝혔다.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1919년 3월 31일 군포장에서 독립을 열망하는 인근 지역(현재의 군포, 안양, 의왕) 거주민 2000여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펼쳤다. 당시 만세운동 참여자들은 군포장에서 군포장역(현재 전철 1호선 군포역) 앞의 일본 경찰관주재소로 행진했다. 일제는 경찰 외에도 군 병력까지 동원해 총을 쏘며 폭력으로 군중을 해산했다. 이와 관련 다음달 30일 군포역 일대에서 기념식과 기념공연이 개최된다. 시는 100주년을 맞은 군포지역 내 독립운동의 역사를 널리 알릴 계획이다. 주요 행사로는 시민 200여명이 참여하는 거리극 ‘군포항일독립만세운동 재연공연’이 열린다. 이어 독립선언서 낭독, 3·1 운동 의상 체험, 청소년 나라사랑 플래시몹 진행될 예정이다. 한편 시는 2016년 군포역 광장에 독립만세운동을 펼친 시민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높이 11m의 기념탑을 세웠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독립운동 투쟁 기록, 영·독·일서 잇따라 나왔다

    독립운동 투쟁 기록, 영·독·일서 잇따라 나왔다

    김규식, 英 총리에 보낸 독립청원 서한 영문 국호 ‘Republic of Korea’ 첫 사용 1920년대 주독 日대사관 외교전문엔 獨 유학 한인들 독립운동 사찰한 정황 日 개인 소장 독립선언서 초판 원본도1919년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해외 각지에서 분투한 지사들의 활동상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사료들이 잇따라 발견됐다. 대한민국의 영문 국호 ‘Republic of Korea’를 처음으로 사용한 임시정부 외교문서에 이어 일본이 독일에서 한인 유학생들의 조직적 독립운동을 사찰했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주미 특파원 출신 언론인 모임인 한미클럽은 26일 미국 존스홉킨스대 제임스 퍼슨 교수의 도움을 받아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5월 데이비드 로이드조지 당시 영국 총리 앞으로 전달한 외교문서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문서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논의한 파리 평화회의에 임시정부를 대표해 파견된 김규식 선생이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 국호를 사용한 영문 독립 청원 서한을 1919년 5월 24일 로이드조지 총리 앞으로 전달했고, 영국 정부는 5월 30일 이를 접수했다. 청원 서한에는 국제사회가 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정을 한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정통성 있는 체제로 인정해 줄 것과 임정이 3·1운동 등 일본에 항거한 독립운동의 결과로 창설됐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한미클럽이 발견한 다른 영국 외교문서에는 미 소재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인 안창호 선생이 1919년 4월 초 로이드조지 총리에게 전문을 보내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한민족의 독립이 인정돼야 한다고 강조한 내용도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전문에 첨부된 영국 정부 문서에는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요청을 수용하지 말 것’을 건의하는 의견서도 첨부돼 있어 당시 냉혹한 국제질서를 보여 준다.일본 측이 1920년대 독일에서 한인 유학생들의 조직적 독립운동을 사찰했다는 문서도 처음으로 확인됐다. 독일 본대학 박희석 일본한국학과 교수는 1920년대 일본 외교전문 등을 분석한 결과 주독 일본대사관이 베를린 인근 소도시 포츠담의 건물에서 정기적으로 모인 한인들을 사찰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25일(현지시간) 밝혔다. 이극로·이미륵 선생이 주축이 된 재독 한인 유학생 조직 ‘유덕고려학우회’는 1923년 10월 23일 베를린에서 집회를 열고 일본의 한인 학살과 식민지배에 항거했는데 이 건물에서 사전 모의를 한 것으로 분석됐다. 주독 일본대사가 1925년 일본 외무대신에게 발신한 전문에는 “베를린 근교 포츠담 알테 루이지엔슈트라세 85번지에 한인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 지난번 관동대지진과 관련해 전단을 만드는 등 비밀작업을 하는 곳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다. 한편 일본 아사히신문은 3·1운동 때 국내에 배포됐던 독립선언서의 초판 원본이 일본 나가사키의 한 개인 주택에서 발견됐다고 전했다. 이를 소장한 사람은 전직 교사인 사토 마사오(67)로 3·1운동 당시 평양에서 도자기 가게를 운영하던 그의 할아버지가 당국의 감시를 뚫고 몰래 일본으로 반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사히는 “한국에서도 원본은 박물관과 개인 등 8장만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뮤지컬로 방정환 만나고 유관순 묘역서 만세 행진하는 중랑

    서울 중랑구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다음달 1일 낮 12시 독립유공자 보훈단체, 지역 주민 등 500여명과 함께 망우리공원에서 ‘나라사랑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고 26일 밝혔다. 면목역광장과 망우역광장에서 당시 만세운동 격문을 찍어 배포하던 방정환(1899~1931) 선생의 모습을 재연하는 뮤지컬로 시작한다. 이어 망우리공원 유관순 합장 분묘 묘역에서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영원한 기억봉사단’과 애국지사 묘소의 자매결연식을 갖는다. 유관순 열사 묘역에서 13도 창의군탑까지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고, 항일의병 추모식도 진행한다. 중랑구 관계자는 “이곳에 모신 문일평·박인환·서광조 선생 등 애국지사들의 정신을 기리는 동시에 망우리공원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널리 알리도록 애쓰겠다”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국가유공자 표창 수여하고 청계천서 태극기 드는 동대문

    국가유공자 표창 수여하고 청계천서 태극기 드는 동대문

    서울 동대문구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1902~1920) 열사의 조카 유장부를 비롯한 국가유공자 9명에게 ‘나라사랑유공자’ 표창을 수여한다고 6일 밝혔다. 기념식에는 독립유공자 유족, 보훈단체장, 국가유공자와 구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 등을 함께한다. 이어 동대문구 체육회 주최로 구민 1500여명이 태극기를 들고 청계천 산책로를 함께 걸으며 100년 전 그날의 행보를 재연하는 ‘청계천 산책로 행진’을 한다. 구는 3·1운동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학생들을 재조명하기 위해 청소년과 함께하는 ‘리멤버 1919’ 행사도 갖는다. 유덕열 구청장은 “구민들과 함께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행사를 통해 역사 의식도 높이고 구민 화합 분위기도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3·1운동 100년] 이역만리 美 독립성지 필라델피아서도 태극기 들고 “대한독립”

    [3·1운동 100년] 이역만리 美 독립성지 필라델피아서도 태극기 들고 “대한독립”

    100년 전 4월 리틀극장서 1차 한인회의 서재필 등 150명 모여 독립정당성 선포 상원의원 축사… 시장은 평화행진 동참 미국 내 ‘외교 독립운동’ 조직화 계기 작용 친우회 21개 도시·유럽 확산… 韓독립 지원100년 전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신호탄이자 기폭제였던 3·1운동 당시 한반도 전역을 뜨겁게 달궜던 독립운동의 열기는 이역만리 타국인 미국의 한인들을 흔들어 깨웠다. 미국 내 한인 150여명은 3·1운동 한 달 뒤인 1919년 4월 14~16일 미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 모여 ‘제1차 한인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이어 태극기를 앞세우고 미 독립기념관까지 시가행진에 나섰다. 미 언론들은 당시 필라델피아의 거리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한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전했다. 이는 미국 내에서 독립운동이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필라델피아는 미국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도시다. 미 독립운동이 처음 일어났던 곳이며, 미 독립선언 당시 울렸던 ‘자유의 종’이 지금도 독립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미 독립의 역사를 간직한 필라델피아에는 ‘대한민국 독립의 역사’도 곳곳에 묻혀 있었다. ●영문 ‘코리아 리뷰’ 발간… 독립 호소·日고발 1919년 4월 14~16일 ‘제1차 한인회의’가 열렸던 리틀극장을 찾았다.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약 3㎞ 떨어진 주택가로 들어서니 19세기 말 빨간 벽돌로 지은 예쁜 소극장이 보였다. 여기가 당시 한인회의가 열렸던 리틀극장이다. 현재는 ‘플레이스 앤드 플레이스’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건물의 벽면에 한글과 영문으로 ‘1919년 4월 14~16일, 독립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제1차 한국의회를 열어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선포했다’는 글귀가 당시 뜨거웠던 독립운동의 현장임을 알려줬다. 1919년 4월 14일 미 전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150여명이 미 서부와 동부, 남부 등 각지에서 리틀극장으로 모였다. 이날 1차 한인회의 의장은 서재필이었고, 진행은 이승만과 정한경이 맡았다. 제1차 한인회의 개회식에서는 미주리 출신 상원의원 셸던 스펜서가 축사를 했다. 네브래스카 출신 상원의원 조지 노리스도 참석해 격려 연설을 했다. 마지막 날인 4월 16일 제1차 한인회의를 마치고 150여명의 한인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양손에 들고 필라델피아 중심가에 있는 독립기념관을 향해 시가행진을 벌였다. 독립과 자유의 상징인 필라델피아 대표로 토머스 스미스 시장이 행진에 직접 참여했을 뿐 아니라 군악대까지 보내주면서 태평양의 작은 나라인 한국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염원을 지지했다. 미 독립기념관에 도착한 이승만은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발표됐던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리고 “대한공화국 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다. 당시 서재필은 “한국인이 살아 있는 백성인 것을 알았고, 이런 백성은 반드시 자유독립을 하고 말 것으로 믿는다”며 소감을 밝혔다. 장병기 필라델피아 한인회 회장은 “서재필 박사가 주도했던 제1차 한인대회를 기폭제로 미국 내 독립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했다”면서 “중국이 무장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면 미국은 외교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고 평가했다.●美의회에 한국독립 문제 논의 단초 제공 제1차 한인회의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외교 독립운동이 본격화됐다. 서재필은 현재 해외홍보원 역할을 하는 대한민국통신부와 미국 내 친한파 모임인 ‘친우회’를 조직했다. 1919년 4월 말 활동을 시작한 대한민국통신부에서는 매월 영문잡지인 ‘코리아 리뷰’를 3000부가량 만들어 배포했다. 또 한국과 관련해 여러 영문 책자를 출판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제의 불법 식민통치와 각종 만행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하지만 자신의 사업을 팽개치고 독립운동에 집중하던 서재필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코리아 리뷰는 1922년 7월호를 마지막으로 발간이 중단됐다. 비록 3년여로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3·1운동 이후 미국 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단체로 평가 받는다. 미 친우회도 대한민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플로이트 톰킨스 목사가 회장을 맡은 필라델피아 친우회가 1919년 5월 16일 첫 결성이라는 성과를 내면서 워싱턴DC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뉴욕 등 미국 내 21개 도시에 친우회가 만들어졌다. 파란 눈의 독립투사이자 대한민국 독립을 지지하는 든든한 지원 세력을 확보한 것이다. 셸던 스펜서 상원의원은 1919년 6월 3·1운동을 거론하며 미국이 어떤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는지 미 국무장관이 상원에 보고하라고 요청하는 상원 결의안을 제출했다. 아쉽게도 외교위원회 벽을 넘지는 못했으나 미 의회에서 대한민국 독립 문제를 논의하는 단초가 됐다. 또 톰킨스 목사는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 미 대표단 단장에게 보낸 청원서에서 “우리는 미 시민만으로 구성돼 2만 50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단체”라고 소개한 뒤 “우리는 한국인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기구를 만들고 자신들의 권리인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을 지지한다”라고 밝히는 등 미 정치권에 대한민국 독립 지지를 호소했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지역에도 친우회가 만들어지면서 전 세계의 친한 여론을 형성하기도 했다. 장 한인회장은 “당시 미국 내 친우회가 21곳에 만들어지고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까지 친한 여론이 조성되면서 대한민국 독립과 임시정부 수립 등에 큰 역할을 했다”면서 “당시 서재필 박사 등과 같은 외교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글 사진 필라델피아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대한민국 영문국호 ‘Republic of Korea‘ 사용 외교문서 英서 확인

    대한민국 영문국호 ‘Republic of Korea‘ 사용 외교문서 英서 확인

    1919년 5월 24일 英수상에 보낸 외교문서…30일 접수대한민국의 영문 명칭인 ‘the Republic of Korea’가 처음으로 사용한 외교문서가 26일 확인됐다. 해당 문서는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영국 정부에 보내 공식 회람절차를 밟은 독립청원 서한으로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미클럽은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소속 제임스 퍼슨 교수와 함께 영국 국립보존기록관(TNA)에서 이러한 외교문서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문서에 따르면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지 약 2개월 후인 5월 2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김규식 선생이 ‘대한민국’ 국호를 사용한 독립 청원 서한을 당시 영국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에게 전달했다. 영국 정부는 같은 달 30일 이를 접수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파리평화회의가 한창 진행되던 시점이었다. 김규식 선생은 민족 대표로 이 회의에 파견됐다. 그는 이후 임시정부의 입법기관 격인 임시의정원 국무위원과 부주석을 지낸 인물이다. 김규식 선생은 서한의 첫 장 앞부분에 자신의 소속을 소개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the Delegation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이라고 명기했다. 여기서 쓰인 대한민국의 영문 국호는 외교문서에서 최초로 등장한 것이라고 한미클럽은 밝혔다. 서한에는 대한민국이 엄연한 독립 국가임을 강조한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의 뜻을 파리평화회의에서 환기해달라는 당부가 담겼다.파리평화회의가 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시정부를 한국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정통성 있는 정부로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또 임시정부는 일본의 지배에 항거한 3.1 운동의 결과로 설립됐으며,국제적 합의나 약속,계약은 임시정부를 통하지 않을 경우 한국민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한미클럽이 공개한 문건에는 1919년 5월3일 영국 정부가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로부터 전달받아 로이드 수상에게 보고한 3·1 독립선언문 영어본도 포함돼 있으며, 김규식 대표가 1919년 5월13일에 작성해서 로이드 수상 앞으로 전달한 독립청원 서한 그리고 김규식 대표가 영국 정부를 통해 당시 파리 평화회의 의장인 클레망소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6월11일자 서한도 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하동군 3·1운동 기록물, 군 홈페이지에 전시

    하동군 3·1운동 기록물, 군 홈페이지에 전시

    경남 하동군은 26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100년 전 1919년 하동읍·옥종면 등 군 곳곳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함성과 발자취를 살펴 볼 수 있는 ‘하동군 3·1운동 기록물’을 군 홈페이지에 전시한다고 밝혔다.군 홈페이지에 전시하는 기록물은 하동군기록관에 소장돼 있는 ‘범죄인명부’를 비롯해 독립기념관 소장 하동 ‘대한독립선언서’ 사본, 하동군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된 국가기록원 소장 ‘판결문’, ‘집행원부’, ‘3·1독립운동 피살자 명부’ 사본 등 5종 29건이다. 또 국가보훈처에 3·1운동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하동군 출신 28명 가운데 25명의 기록도 볼 수 있다. 홈페이지 전시는 오는 28일 부터 올해 말까지 할 예정이다. 보안법 위반 등으로 재판을 받은 독립운동가의 판결법원과 판결일자, 형량 등이 기록된 적량면 ‘범죄인명부’, 고전면 ‘범죄인명부’, 화개면 ‘전과자명부’는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기록물이다.군은 독립기념관이 제공한 하동 ‘대한독립선언서’는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작성한 독립선언서로 희소성과 내용면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기록물이라고 밝혔다. 당시 하동군 적량면장이었던 박치화 등 12명이 서명 한 이 독립선언서에는 ‘주저하거나 관망하지 말고 한마음으로 뭉쳐 용감하게 광복의 땅으로 나아가자’는 굳은 독립의지가 담겨 있으며, 민족자결·동양친목·세계평화와 비폭력 독립운동을 추구하는 3·1운동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국가기록원이 제공한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에는 당시 독립만세운동 전개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군은 판결문을 통해 당시 운집한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던 현장과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적 식민지 지배에 맞서 독립투쟁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군민의 민족자결 의지 등을 짐작할 수 있다고 밝혔다. 군 관계자는 “이번 전시는 전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의 큰 물결 속에서 하동군 전역에서 한달여 동안 계속된 3·1운동이 어느 지역보다 뜨겁게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민족자결을 열망하며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하동군민의 용기 있는 투지를 본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동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3·1운동 100주년 맞은 지자체들] 관악선 독립선언서 필사하고

    [3·1운동 100주년 맞은 지자체들] 관악선 독립선언서 필사하고

    ‘민족의 존엄함에 상처받은 아픔 또한 얼마이며 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 얼마인가.’ 박준희 서울 관악구청장이 ‘독립선언서 필사 챌린지’에 동참해 올해 100주년을 맞은 3·1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다. 이는 대한광복회 성북구지회에서 시작한 캠페인으로 3·1 독립선언서에 쓰인 38개 문장 가운데 하나를 직접 필사해 페이스북에 인증하고 다음 참여자를 지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지난 22일 김선갑 광진구청장의 지목을 받은 박 구청장은 독립선언서의 여덟 번째 문장을 필사해 페이스북에 게재했다. 관악구는 또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오는 3월 1일 오후 3시 1분 관악구청 광장에서 기념행사를 연다. 박 구청장은 “역사적인 해를 맞아 구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구민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3·1운동 100년] 100년 뒤 촛불행진… 일본서 뜻있는 평화운동 이어진다

    [3·1운동 100년] 100년 뒤 촛불행진… 일본서 뜻있는 평화운동 이어진다

    지난 24일 오후 2시 일본 도쿄 분쿄구 구민센터 3층 강당.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일본 시민단체들이 주관한 ‘2·24 도쿄집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열기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당초 주최 측은 많아야 300명쯤 모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일반인과 학생을 포함해 500명이나 몰려 일부 참석자들은 앉을 자리를 구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와타나베 겐주 일한민중연대전국네트워크 공동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일본이 평화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직시하고 식민지주의로부터 벗어나 한반도의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행사를 기획한 ‘3·1조선독립선언 100주년 캠페인’은 이날 3·1운동을 비롯해 위안부·징용노동자 피해 등을 다룬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라는 제목의 1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공개했다.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등이 나올 때에는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도노무라 마사루 도쿄대 교수, 와타나베 미나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관장 등이 3·1운동의 의미와 일본군의 전시 성범죄에 대해 강연을 했고, 조선학교 학생들이 일본 정부의 고교 무상화 정책에서 제외돼 차별받고 있는 오늘날 현실에 대한 고발도 이어졌다. 도쿄조선고급학교 합창단 학생들이 ‘고향의 봄’을 부르고 이어 참석자들과 ‘아리랑’을 부를 때에는 모두가 하나가 됐다. 한일 관계가 극도로 얼어붙은 가운데서도 3·1운동 100주년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와 이벤트들이 일본에서 이어지고 있다. 아베 신조 정권의 우경화와 군비 확장 등에 대한 우려가 전후 어느 때보다 팽배해 있는 최근 상황에서 일본의 뜻있는 단체와 학자들은 이번 100주년을 일본의 잘못된 방향에 경종을 울리고 이를 되돌리는 에너지로 활용한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3·1운동 정신을 되새기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아닌, 바로 일본과 일본인의 전쟁 없는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다. 3·1절 100주년 당일인 3월 1일에는 도쿄 신주쿠역 광장에서 ‘릴레이 토크·촛불 액션’ 행사가 열린다. ‘조선학교 차별’, ‘헤이트 스피치’(일본 우익 등에 의한 한국인 혐오 발언), ‘강제징용 피해자’, ‘위안부 피해자’ 등 다양한 과거와 현재의 현안에 대한 릴레이 토크와 촛불행진이 이뤄진다. 100년 전을 생각하고 향후 100년을 생각하자는 의미의 ‘2019년 3·1 100자 선언’ 행사도 마련됐다. ‘3·1운동 100주년에 일본에서 응답한다’는 부제의 100자 선언은 3·1독립선언서를 꼼꼼히 읽어 보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인의 입장에서 앞으로의 새로운 100년을 구상해 100자로 요약해 보는 이벤트다. 3·1독립선언서를 읽고 생각하게 된 것, 과거 침략역사에 대한 반성, 한국인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 등이 주제다. 지난 13~16일에는 일본 학생·사회인과 한국 학생 등이 함께 참여한 ‘역사 스터디 투어’ 행사가 열렸다. 참가자들은 서대문형무소, 탑골공원, 제암리 학살현장 등 3·1운동 및 일제강점기 관련 유적지들을 둘러봤다. 2001년 일본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개관한 도쿄 신주쿠 고려박물관에서는 지난 6일부터 ‘3·1 독립운동 100년을 생각하는 기획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 유관순기념관, 아우내장터, 독립기념관, 제암리순국박물관, 서대문형무소 등을 통해 모은 자료를 분석해 3·1운동 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하고 있다. WAM은 오는 3월 1일부터 내년 3월 말까지 ‘조선인 위안부의 목소리를 듣는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라는 제목의 특별전을 도쿄 신주쿠 니시와세다 전시관에서 연다. 글 사진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3·1운동 100년] 100년 전 촛불혁명… 평범한 민초들이 독립만세 외쳤다

    [3·1운동 100년] 100년 전 촛불혁명… 평범한 민초들이 독립만세 외쳤다

    “우리는 지금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고 조선인이 자주민이라는 점을 선언한다.”(3·1 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손병희(1861~1922)와 이승훈(1864~1930), 한용운(1879~1944) 등 29명이 경성(서울)의 유명 요리집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으로 모였다. 이갑성(1889~1981)은 조선총독부에 사람을 보내 조선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종일(1858~1925)은 참석자들에게 독립선언서 100여장을 펼쳐 보였다. 한용운이 만세 삼창을 하고 독립선언을 마치자 출동한 경찰들이 민족대표들을 모두 체포했다. 이처럼 3·1운동은 대부분 민족대표 33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들이 조선 독립 혁명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3월 1일 시작된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 수개월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분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동자와 학생, 기생 등 평범한 조선의 민초들에게 이념이나 귀천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이들이야말로 3·1운동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서울 만세시위 3만명 참가… 평양서도 수천명 “만인이 죽더라도 백만인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죽음을 불사하겠소.”(만세열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인쇄소 직원 인종익이 경찰 조사에서 한 말이다. 이처럼 독립선언서를 전국에 배포하고 3월 1일 만세 시위를 알린 것은 인종익과 같은 민중이었다. 독립선언서는 2월 11일 기초가 완성돼 20일부터 이종일이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인쇄됐다. 2월 28일부터 함경남도 원산, 전라북도 군산,황해도 해주, 평안북도 평양, 경기도 개성 등 전국 각지로 보내졌다. 3월 1일 새벽 경성에는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집회가 열릴 것’이라는 벽보가 거리 곳곳에 붙었다. 중학생들은 시위가 예정된 오후 2시에 맞춰 학교에서 파고다공원으로 모였다. 이들은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고 행인에게도 배포했다.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을 하고 있을 때 인근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남대문통(중구 남대문로)과 의주통(종로구 의주로)을 거쳐 미국영사관, 대한문으로 거리 행진을 했다. 당시 일제 헌병 자료에는 “시위에 모인 사람이 3000~4000명”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판결문 등에는 “파고다공원 앞 군중 5000”이라는 표현이 나온다.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시위는 해질 무렵까지 이어졌다. 시위대는 파고다공원 앞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졌다. 한쪽은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가 만세를 외치고 독립 연설을 시작했다. 다른 시위대는 미국총영사관 앞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경성우편국 앞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짖었고 의주통에 있는 프랑스영사관에서는 영사관 직원에게 조선 독립이 가능한지를 묻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방향으로 가던 3000명 정도의 시위대는 본정통(중구 충무로)에서 행진이 막혔다. 일제가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를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6시 30분쯤 마포 전차 종점 시위를 마지막으로 서울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는 잠잠해졌다. 질서 정연하게 행진한 평화 시위였다. 경찰서나 각국 영사관 앞에 멈춰 만세를 부르고 독립선언서를 보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날 서울의 만세 시위에 약 3만명 정도가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3월 1일 서울 시위 참가자 규모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일제 군경의 개람표에는 4000명, 일람표에는 1만명으로 기록돼 있다. 헌병대에서 작성한 문서에는 “종로의 3000~4000명의 학생에 군중이 함께해 수만에 이르렀다”고 기술돼 있고, “이날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와 있던 사람들이 십만에 달한다”고도 적혀 있다. 일제는 이날 시위에 참가하거나 인쇄물을 배포한 주동자 134명을 체포했다.이날 만세 시위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데이터베이스(DB)에 따르면 3월 1일 하루에만 전국에서 22건의 단체행동(시위·휴학·휴교·파업)이 있었다. 함경남도 원산과 평안북도 선천, 평안남도 평양·안주·진남포, 경기도 개성 등에서 5만 2000여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평양에서는 2000~5000명이 만세 시위에 참석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총에 맞아 부상당한 이들 가운데 최소 5명이 병원에서 숨졌지만 일제의 명령으로 사인을 총상으로 기재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시위대는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독립가를 불렀다. 일제 소방대원들은 시위대에 물을 쏘고 갈고리를 휘둘렀다. 부상자가 나오자 분노한 시민들이 돌을 던졌다. 평양에서만 112명이 검거됐다. ●수개월 1700여건 단체행동에 103만여명 3·1운동은 단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민중은 단체행동(시위·휴학·휴교·파업)을 이어 갔다. 2일에도 전국적으로 13건이 발생했고, 3일(42건), 4일(23건)에도 계속됐다. 3월 4일 늦은 밤. 서울 시내 각지에 ‘경고 이천만 동포’라는 문서가 붙었다. 5일 남대문 부근에서 시위를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5일 오전 8시 남대문역 앞에서 학생들이 독립 만세 운동을 시작했다. 1만여명이 참여한 시위에서 학생과 시민은 붉은 수건을 팔에 두르거나 구한국기(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남대문시장과 조선은행, 종로 보신각으로 행진했다. 대한문 앞에서 대기하던 경찰이 칼을 휘두르며 돌격해 수백명이 체포됐다. 부상자도 속출했다. 저항의 방법은 시위만이 아니었다. 3월 1일부터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 관립, 공립, 사립학교와 전문학교 학생 다수가 학교에 출석하지 않고 동맹휴교에 나섰다. 또 서울의 전차 차장과 운전수는 3월 8일 오후부터 3월 10일 자정까지 동맹파업을 했다. 학생들은 휴학이나 휴교로,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일제의 폭거에 맞섰다. 3월 한 달(3월 1일 제외)간 민중의 단체행동 1025건, 참여 인원 66만 1311명이었다. 4월에도 저항은 이어졌다. 4월 한 달간 651건의 단체행동에 모두 31만 4778명이 참여했다. 3·1운동 기간 전체로 보면 시위·휴학·휴교·파업 1732건에 모두 103만여명이 참여했다. “조선 사람이니 독립을 하려고 한 것이오.” 3월 5일 서울에서 벌어진 학생 주도의 만세 시위에 참여한 보성법률상업학교(현 고려대) 학생 강기덕(1886~?)은 왜 독립 운동을 하려고 했는지를 묻는 검사의 심문에 이렇게 답했다. 민중이 3·1운동에 참여한 이유 역시 강기덕과 다르지 않았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학과 교수는 “3·1운동을 비롯해 독립 운동 관련 판결문을 살펴보면 대다수가 농민과 학생, 노동자”라고 설명했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도 “지도 세력이 아예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바로 민초 자신들”이라며 “몇 달간 1000회가 넘는 시위를 지속적으로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이름 없는 이들의 헌신 덕분”이라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국민이 지킨 100년의 역사, 새로운 100년의 출발” 광명시, 시민과 함께 준비하는 미래 100년행사 풍성

    “국민이 지킨 100년의 역사, 새로운 100년의 출발” 광명시, 시민과 함께 준비하는 미래 100년행사 풍성

    경기 광명시는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단순한 기념식에서 탈피해 시민과 소통하고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고 25일 밝혔다. 시는 먼저 3·1운동·임시정부수립 100주년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지난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민공모로 광명시 공식 슬로건을 ‘국민이 지킨 100년의 역사, 새로운 100년의 출발’로 정했다. 먼저 기념사업추진단과 광명시 100인 위원을 구성하고 2019년을 역사의미를 되새기고 미래 100년을 준비하는 뜻 깊은 ‘역사의 해’로 삼을 방침이다. ●기념사업추진단과 시민 100인위원 구성 시는 부서별, 산하기관별로 운영되던 기념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부서 간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해 11월부터 시 총무과와 여성가족과·복지정책과 등 관련 전 부서와 광명문화재단·광명문화원·광명시청소년재단 등 산하기관이 포함된 기념사업추진단을 조직해 이번 사업을 준비해 왔다. 뿐만 아니라 세대별로 100명 위원을 모집해 ‘광명시 100인 위원’을 구성했다. 어린이 33명과 청소년 33명, 성인 34명으로 이뤄졌으며 시는 지난 13일 100인 위원들에게 위촉장을 수여하고 본격적인 기념사업 추진에 들어갔다. 100인 위원을 주축으로 3·1운동 정신과 임시정부 가치를 계승하고 올바른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기념식 위주의 획일적인 행사에서 탈피해 시민참여형 사업위주로 기념사업을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미래 주역인 청소년을 위한 특별 사업 ‘33인 청소년, 100일간의 여정 프로젝트’ 추진 광명의 미래를 이끌어 갈 청소년들의 올바른 역사관과 가치관을 세우고자 ‘33인 청소년, 100일간의 여정 프로젝트’를 지난해 12월부터 추진하고 있다. 공개적으로 모집한 33명의 청소년들은 지난 1월 16일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삼창을 시작으로 1월 30일 천안 아우내장터, 2월 20일 도라산 DMZ로 세 번의 역사기행을 다녀오는 등 민족대표 33인의 정신을 계승하는 100일간의 여정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청소년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3·1운동 역사와 의미를 공부하고 직접 기획하고 만든 행사를 선보이는 등 적극적으로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청소년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과 독립운동가의 헌신과 열정을 몸소 체험하고 우리나라의 소중함을 깨닫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프로젝트에 참석한 오윤경 하안북중학교 학생은 “100일 여정을 시작할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여정이 거듭될수록 우리 역사를 알게 되었고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3월 1일, 다양한 시민참여 기념행사 문화행사 개최 시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자유와 독립을 향한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국민의 역사적 자긍심을 고양하는 다양한 기념행사와 문화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1919년 3월 광명에 거주하던 배재고보생과 지역 청년들이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역사를 갖고 있다. 그 현장이 현재 온신초등학교이며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매년 이곳에서 기념식을 개최했다. 오는 3월 1일에도 온신초교에서 기념비 참배 및 33인 청소년의 독립선언문 낭독 등 기념행사를 추진한다. 이어 광명사거리에서 시민회관까지 만세 거리행진을 진행할 예정이다. 시민회관에서 개최되는 기념식에서는 시민문학창작공모 시상식 및 낭송, 33인 청소년 100일간의 여정보고,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시립합창단 공연 등이 이어진다. 같은 날 헌 태극기나 어린이들이 만든 태극기를 새태극기로 교환해주는 ‘헌태극기를 새태극기로!’ 행사가 광명시민체육관에서 12시부터 3시까지 열린다. 이외에도 어린이들을 위한 나만의 태극기 만들기, 태극기 바람개비 만들기와 태극 페이스페인팅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오후 2시부터 광명시민체육관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 독서골든벨 대회가 개최된다. 시는 지난달 우수 아동도서 중 3·1운동 관련 도서 5권을 선정해 5개 도서관과 각 학교에 배부했다. 학교장 추천과 현장접수를 통해 선정한 초등학생 330명이 함께 행사를 진행한다. ●독립유공자·유족 기념사업 추진 시는 현재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독립유공자와 유족을 위한 사업도 추진한다. 독립유공자 공적을 기리기 위해 독립유공자의 항일운동 활동사진과 편지, 유족 인터뷰 등을 엮은 ‘독립유공자 발자취’ 책자를 오는 6월 중 발간하고 독립유공자 가족과 학교·공공기관에 배부할 예정이다. 또 독립유공자 배우자와 자녀들이 중국 상해 임시정부 청사와 홍커우 공원, 서안의 광복군 총사령부 주둔지, 중경 임시정부 청사 등 국외 항일운동지역을 상반기 중 4박5일 일정으로 직접 방문한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독립유공자 가족들에게 독립의 의미를 되새기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9월까지 100주년 기념 시민 참여행사 진행 시는 3·1운동 및 독립정신 관련 시민콘텐츠 발굴을 위해 시민문학창작 공모를 실시했다. 시와 콘텐츠 시나리오 2개 부문으로 나눠 모집했다. 수상작은 오는 3월 1일 기념식에서 시상하고 시 낭송의 자리도 마련한다. 공모한 콘텐츠를 바탕으로 창작공연도 개최할 예정이다. 시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뤄낸 자주독립의 역사를 되새기고 기억하기 위해 7월에는 광명평화의소녀상 백일장을 개최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알리기 위한 UCC제작 공모전도 진행할 계획이다. 오는 8월에는 광명평화의소녀상 건립 4주년 기념행사, 8.15광복절 기념식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개최된다. 오는 27일에는 ‘노온사리의 빛’ 연극 공연이 광명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다. 광명지역에서 일어났던 3·1 독립만세운동과 농민항쟁의 역사로 희생된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는 가슴 적시는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 7월 셋째 주부터 8월 첫째 주까지 매주 금요일 시민회관 대공연장에서 항일 독립영화도 상영한다. 상영 전에는 영화감독과 영화평론가의 영화 소개도 있을 예정이다. 시는 기념사업이 마무리 되는 9월에 그동안 개최된 다양한 기념사업에 대해 세부 평가를 실시한다. 광명시 100인 위원·참여시민과 함께 토론회 자리를 마련해 민·관 협업체계를 통해 추진한 기념사업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 시는 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 가치와 의의를 새롭게 조명하고 의미를 공유해 앞으로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데 올바른 디딤돌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박승원 시장은 “100년 전 3월 1일, 그날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가 없고 오늘의 대한민국도 없다”며 “올해를 역사의 해로 정하고 지난 100년역사를 시민과 함께 공부하고 광명의 미래 100년을 함께 만들어 나가자”고 말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안양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행사 개최

    경기도 안양시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시는 다음달 1일 기억, 미래, 희망을 주제로 시청에서 기념식을 개최한다고 25일 밝혔다. 시립소년소녀합창단과 가상현실(VR)아트 공연으로 막이 오르는 기념식은 광복회와 보훈단체 회원 등 1000여명이 참석한다. 기미독립선언문 낭독, 3·1절 기념 뮤지컬, 만세삼창 등이 이어진다. 국가유공자 10명은 시로부터 표창을 받는다. 청사별관 홍보홀에서는 안양지역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기리는 사진전을 연다. 3·1 독립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디지털화한 기록물도 공개한다. 당시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을 체험해 보는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전시회와 체험코너는 12시까지 3시간 동안 운영된다. 시 31개 동 주요 도로변을 비롯해 범계역과 신촌동 학원가 일대에 태극기가 일제히 게양된다. 시청광장에는 바람개비 태극기가 설치되는 등 안양전역에 태극기가 물결칠 예정이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100년 전 美대통령에 독립선언서 보낸 재미교포들

    100년 전 美대통령에 독립선언서 보낸 재미교포들

    미 특파원 출신 한미클럽 자료 4건 공개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서한 발송 日 조약 위반, 3·1운동 상황 생생히 전달 1919년 3·1운동 직후 재미 교포들이 우드로 윌슨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영문 독립선언서를 보냈고, 미 국무부가 이를 공식 회람한 사실을 보여 주는 미 외교문서가 100년 만에 발견됐다. 주미 특파원 출신 언론인 모임인 한미클럽은 24일 미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제임스 퍼슨 교수의 도움을 받아 3·1운동 관련 외교문서 4건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굴된 외교문서는 재미 교포들이 윌슨 전 대통령 앞으로 보낸 서한과 독립선언문, 당시 상황을 기록한 국무부 외교문서, 조선총독부 공식보고서를 다룬 미 신문 기사 등이다. 특히 당시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가 윌슨 전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여기에 첨부된 독립선언문 영문본이 눈길을 끈다. 1919년 3월 27일에 작성된 이 서한은 같은 해 6월 3일 국무부 극동과에 접수된 것으로 확인됐다. 독립선언문 영문본이 윌슨 전 대통령에게 발송됐으며, 미 정부가 이를 공식 접수해 회람한 사실이 100년 만에 처음 밝혀진 것이다. 서한은 당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을 맡았던 이대위(영문명 데이비드 리·1879∼1928) 선생의 이름으로 작성됐다. 대한인국민회는 서한에서 “회원 150만명과 한국인 2000만을 대표하는 단체”라면서 “일본의 엄중한 조약 위반으로 한국은 독립국 지위를 잃었다. 이는 한국인들의 기대와 열망에 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서한은 이어 “일본은 경제·정치·종교적으로 무자비한 탄압 정책을 이어 가고 있다”면서 “한국 민족을 말살하고 일본과 동화시키려고 한다”고 폭로했다. 서한은 특히 일제의 한국어 사용 금지 정책과 토지 몰수, 한국인의 공직 금지, 일황 숭배 강요 등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같이 발굴된 국무부 외교문서는 3·1운동 상황과 일제의 무차별적 진압, 3월 5일 평양 내 움직임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문서에는 “수천명의 성인 남녀와 남녀 학생들이 낡은 종이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면서 “진압에 나선 일본 경찰과 군인들이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때렸다”고 3·1운동 상황을 자세히 묘사했다. 또 일본 도쿄 주재 미 특파원이 보도한 3월 8일자 미 신문 기사는 조선총독부의 공식 발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3·1운동에서 여학생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한미클럽 관계자는 “앞으로도 퍼슨 교수의 지원을 받아 3·1운동 관련 외교문서를 추가로 언론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3·1운동 100주년 기념 제주올레서 ‘평화의 길’ 걷기

    ㈔제주올레(이사장 서명숙)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서귀포시협의회(회장 송재철)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의 길을 잇는 ‘함께 걷는 100주년, 평화의 길을 잇다’ 걷기 행사를 3월 1일 오전 10시 제주 올레길 8코스(월평아왜낭목쉼터~대평포구)에서 연다. 제주올레는 제주 최대 항일운동이 벌어졌던 ‘법정사 항일 운동’ 현장 인근을 지나는 올레길 8코스 시작점 월평아왜낭목 쉼터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3·1운동의 의미와 역사적 흔적과 상처를 되짚으며 길을 걷고, 종점인 대평포구에서 독립선언문의 3가지 약속을 낭독, 독립만세와 평화올레 만세 삼창을 할 계획이다. 이 행사는 제주올레를 비롯해 지리산둘레길, 부산갈맷길, 내포문화숲길 등 한국의 주요 걷는 길을 운영하는 20여개 단체로 구성된 사단법인 한국걷는길연합이 추진함에 따라 전국 15개 지역에서 3월 1일과 2일에 걸쳐 진행된다. 앞서 제주올레는 지난해 9월 스페인에서 열린 월드트레일즈네트워크(WTN) 콘퍼런스에서 한반도를 비롯한 갈등과 분쟁으로 얼룩진 지역이 길로 이어져 서로 교류와 소통이 이뤄지기를 기대하면서 평화와 공존으로 나아가는 평화의 길 ‘평화올레’ 캠페인을 제안했다. 이번 행사엔 제주 여행객 등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만주서 외친 무오독립선언… 도쿄선 2·8독립선언

    만주서 외친 무오독립선언… 도쿄선 2·8독립선언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기미독립선언)를 읽었다. 이를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한반도 전역과 한인이 거주한 세계 곳곳으로 이어졌다. 이날이 있기까지 2개의 독립선언이 있었다.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대한독립선언)’, 그리고 일본 유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 심장 도쿄 한복판에서 외친 ‘2·8 독립선언’이다. 무오독립선언은 1919년 2월 1일 중국 만주 지린에서 독립운동가 39명이 발표한 독립선언이다. 조소앙이 기초했다. 이날은 음력으로 기미년인 1919년 1월 1일로, 선언서 작성과 서명이 그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고려해 ‘무오독립선언’으로 불린다. 사기와 강박으로 이뤄진 일본과의 병합(한일병합조약)은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조소앙은 무오독립선언 뒤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 이광수, 백관수 등과 만나 2·8 독립선언을 발표하도록 북돋아줬다. 와세다대 철학과 학생이던 이광수는 중국 베이징에서 체류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휴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 소식을 듣고 서울로 와 현상윤, 최린과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이광수는 1918년 11월 와세다대 정경과 학생 최팔용을 만나 결의를 밝히고, 2·8 독립선언 원문을 쓰고 영문으로 번역했다. 한일합방이 한국민의 뜻에 반하는 것인 만큼 일본은 한국을 독립시키고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 합병을 승인한 것에 대해 속죄할 것, 이에 응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이 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내용이다. 학생들은 도쿄 동경조선기독교 청년회관 강당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거리로 나가 시위를 벌일 계획이었지만, 일본 경찰이 들이닥치면서 무산된다. 이 일은 조선을 비롯해 외국에 널리 알려졌고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됐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은 “3개의 독립선언을 발표한 이들의 네트워크, 독립 이후 민주공화정을 지향하는 이념이라는 측면에서 3개의 독립선언은 사실상 연결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스페이스X, 이스라엘 달 탐사선 발사 성공

    스페이스X, 이스라엘 달 탐사선 발사 성공

    미국 전기자동차업체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가 주도하는 민간 우주개발업체 스페이스X가 21일(현지시간) 올해 두 번째로 팰컨 9호 로켓 발사에 성공했다. 미 경제매체 CNBC에 따르면 스페이스X의 팰컨 9호는 이날 오후 8시 45분 미 플로리다주 케이프캐너버럴 공군기지 내 케네디우주센터 40번 발사대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팰컨 9호 로켓은 지난해 두차례에 걸쳐 발사와 회수에 성공해 이번이 세 번째 미션이다. 특히 팰컨 9호가 주목받는 것은 인도네시아 통신 위성과 미 공군 실험용 위성이 함께 실린 히브리어로 창세기를 뜻하는 이스라엘의 첫 무인 달 탐사선 ‘베레시트(Beresheet)’ 때문이다. 이스라엘 스페이스일(SpaceIL)이 제작한 베레시트의 달 표면 착륙 예정일은 4월 11일이다. 달에 도착할 때까지 총 비행 거리는 650만km에 이른다. 베레시트가 임무에 성공하면 이스라엘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에 이어 세계 4번째 달 착륙 국가로 등재된다. 이번 프로젝트는 달에 가는 것 자체가 목적인 만큼 베레시트 탐사선에는 낮밤 기온차가 심한 달의 극한 환경을 견뎌낼 수 있는 장치가 없다. 이 때문에 베레시트의 장비들은 달 표면 기온이 섭씨 100도에 오르기 전 약 3일 동안만 작동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베레시트는 달 표면에 착륙해 달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 타임캡슐도 묻는다. 타임캡슐에는 이스라엘 독립선언문과 성경,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 등이 담겼다. 스페이스일이 베레시트 개발에 투자한 비용은 약 1000만 달러(약 112억원)로 비교적 저렴하다. 민간 우주개발업체 스페이스일은 이스라엘 비영리 기업으로 민간 기부와 국영 이스라엘항공산업의 지원 등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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