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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관순정신 배우자/일 도쿄서 칭송대회

    【도쿄 연합】 「아시아의 잔다르크 유관순의 정신을 칭송하는 도쿄대회」가 9일 하오 도쿄시내 뉴오타니 호텔에서 3천여명의 일본인 주부들과 여대생·재일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됐다.
  • 유관순정신 칭송/도쿄서 대회 개최

    【도쿄 연합】 「아시아의 잔다르크 유관순의 정신을 칭송하는 도쿄대회」가 9일하오 도쿄시내 뉴오타니 호텔에서 3천여명의 일본인 주부들과 여대생,재일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됐다. 이날 대회는 가정주부와 여대생들이 조금씩 기금을 모아 개최한 것으로 참석자들은 대부분 한복차림이어서 이채를 띠었다. 대회는 하오 1시부터 20분동안 유관순 일대기에 대한 슬라이드 상영에 이어 헌가(선구자 독창),발기인 인사,임원소개,이재석씨(한국종교협의회회장)의 기념강연,대회선언등으로 이어졌다.
  • 대학교육 내실화 진통/교수증원·시설확충 재원조달 암담

    ◎정부지원/2천억 건의에 3백억뿐/기여입학/반대여론 높아 성사 의문/“기업이익 사회환원 차원의 기부 확대를” 대학교육의 질적향상을 위한 내실있는 교육투자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는 대학들이 해가 거듭될수록 증원이나 증과등 양적팽창에만 주력해오고 우수교수확보와 시설투자,학술논문및 장서구입 등 교육의 질향상을 위한 투자를 소홀히 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4년제 대학의 74.4%나 차지하는 사립대학의 경우 이같은 현상이 더욱 심해 교육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를 낳고 있다. 13일 교육부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학교수 1명당 학생수는 29.8명으로 일본 동경대학의 9명,영국 옥스퍼드대학의 9.6명,독일 아헨대학의 11.1명,미국 일리노이대학의 12.9명에 비해 2∼3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교수 1명당 학생수는 24개 국립대가 22.6명인데 비해 91개 사립대는 33.3명으로 나타나 사립대의 열악한 교육여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서울대의 학생 1명당 장서수는 48권인데 비해 영국 옥스퍼드대학은 5백93권,일본도쿄대학 2백96권,미국 미네소타대학 2백51권으로 서울대보다 5∼10배이상 많다. 교육부 및 대학관계자는 『외국의 경우 대학운영비의 10∼30%를 기업등이 내는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는데 우리는 기부금의존도가 고작 2·1%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이제는 우리기업들도 일방적으로 교육혜택만 받을 것이 아니라 이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차원에서 대학에 보다 많은 재정지원을 해야 할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립대학은 정부의 재정지원이 1.3%(2백억원)밖에 안돼 나머지는 학생등록금(77.3%),기부금(2.1%),기타전입금(19.3%)등으로 운영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비해 미국은 22%,일본 15∼30%,영국은 80%씩 정부가 지원해 주고 있으며 프랑스와 독일은 대학운영비를 모두 국가에서 지원해 주고 있다. 대학교육협의회는 사학의 이러한 실정을 들어 내년도 정부예산을 편성할때 사학운영비의 10%인 2천억원을 책정,사학에 지원해 주도록 정부와 국회등을 상대로 로비를 벌인끝에 올해보다 1백억원이 늘어난 3백억원의 지원금을 받아내는데 그쳤다.대교협은 이와함께 『산업체의 대학발전 후원제도와 적정수준에서의 기여입학제도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법령을 정비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으나 기업들이 외면하고 기여입학제도 반대여론이 높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외언내언

    유니버시아드는 대학(UNIVERSITY)과 올림픽(OLYMPIAD)의 합성어.글자그대로 대학생들의 올림픽이다.2년마다 한번씩 열리는데 참가자격은 대학재학생이거나 졸업후 2년까지의 아마추어 선수.1926년 프랑스의 장 프리장이란 사람이 유니버시아드를 창설했는데 이 대회가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된 것은 1959년 이탈리아의 트리노대회.그래서 트리노대회가 최초의 유니버시아드로 공인됐다.◆한국이 유니버시아드에 처음으로 참가한 것은 1967년 일본 도쿄대회.8개종목 1백8명이 출전,종합순위 10위를 차지했었다.북한은 이보다 훨씬뒤인 85년 일본 고오베대회에 모습을 나타냈다.이 대회에서의 남북한종합순위는 북한 9위,한국 12위.그러나 이후 남북한은 줄곧 내리막길.한국의 경우 한 대회에 메달 한두개씩을 건져 20위권밖에서 맴돌았고 북한도 마찬가지였다.◆그런데 지금 영국의 셰필드에서 열리고 있는 91유니버시아드에서는 남북한선수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북한이 체조에서 금메달 10개 한국이 1개를 따내 체조에 걸린 금메달 19개중 남북한이 11개를 휩쓸어 세계를 놀라게 했고 테니스남녀복식에서도 한국선수들이 우승했다.또하나 값진 결실은 남자 마라톤우승.한국의 황영조가 2시간12분40초로 금메달을 따내 유니버시아드 사상 처음으로 마라톤을 제패했다.유니버시아드가 올림픽보다는 수준이 떨어지지만 「육상의 꽃」마라톤에서 우승한 것은 쾌거로 평가해도 좋을 듯.◆91유니버시아드에서 남북한선수들이 선전,분투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단일팀을 구성하지 못한 것.21일 현재 북한이 종합순위 4위,한국은 7위인데 남북한의 메달을 합치면 소련을 제치고 3위로 뛰어오른다.이번에는 실패했지만 92년 알베르빌동계올림픽과 바로셀로나하계올림픽에서는 기필코 남북한단일팀을 구성,우리민족의 우수성을 올림픽무대에서도 크게 떨쳤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외언내언

    문화재는 스스로 아끼려는 적극적인 의지없이는 보호되지 않는다. 극히 상식적인 얘기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는 제대로 인식되지 않고 있어 숱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사회건설을 내세워 문화재를 송두리째 망가뜨리거나 함부로 이전하고 무시하는 행위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선진화된 사회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오래된 건물의 벽돌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가능한 한 남기려 애쓰고 있다. 구역을 지정하거나 층수를 제한해 보호에 나서고 조금이라도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전통의 복원에 열심인 것이 그들의 의식이다. ◆일본의 한 경우를 보자. 도쿄대학에는 대학원생들이 조직한 「도쿄 길거리연구회」라는 모임이 있다. 마을의 조직을 연구하고 변천과정,문화의식 조사를 통해 마을을 제대로 보존하자는 의도에서다. 이런 모임은 전국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전국연맹까지 구성돼 있고 관련세미나도 흔하다. 인구 41만의 구라시키(창부)시가 중화학공업도시이면서도 매년 5백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올 정도로 역사적 경관을 갖추게된 것도 우연이아닌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공장을 세우되 기존의 환경을 보호했기 때문. ◆우리에게도 그런 노력이 없지 않다. 서대문구치소 공원조성공사 때 역사적인 유물의 보존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인 것이나 탄광촌인 태백시의 관광지 육성움직임 등이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시키는 새로운 모습이다. 그런 가운데 16일 북한산 등산객들의 「기왓장나르기」는 문화재보호에 시민의 자진참여를 유도했다는 발상 자체가 산뜻하다. 쉽게 운반할 수도 있는 것을 다같이 참여함으로써 문화재보호와 사랑하는 의식을 높일 수 있었고 보람도 안겨준 셈이 됐다. ◆여기에서도 보듯 자발적인 참여의식이 중요하다. 스스로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엄청난 효과를 가져오는 것. 등산로에서의 취사행위가 자취를 감춘 것이 좋은 실례이다. 자연보호운동도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참여가 있어야 된다. 당국이나 관련단체의 할 일이 이것이다.
  • 2백년만에 재분화 운선악현장/강수웅특파원 르포

    ◎일 화산 폭발… 1명 사망·32명 실종/토석류 5㎞까지 흘러내려 곳곳서 산불/5천여 주민 대피·자위대 긴급구조 나서 2백년 만에 분화를 재개한 일본 나가사키현(장기현) 운젠다케(운선악)의 화산활동은 3일 하오 4시 사망자 1명과 20명의 부상자를 내는 등 급격히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 일본 열도를 긴장시키고 있다. 시마바라(도원)반도에 있는 운젠다케의 화산은 이날 검은 연기와 함께 섭씨 5백∼6백도의 열기를 띤 토석류(화쇄류)를 뿜어내려 경계활동을 펴고 있던 경찰관을 사망케 하고 소방대원 주민 보도진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또 보도관계자 13명을 비롯,소방대원 경찰관 택시운전사 등 29명이 이날 하오 11시 현재 행방불명상태이며 화산연구가인 외국인 3명도 이날밤까지 호텔에 돌아오지 않아 생사불명의 상태에 빠져 있다. 이날 발생한 토석류의 사태는 산정에서 4∼5㎞나 흘러내려 온 것으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최대규모였다. 이 불덩이 토석으로 주택 여러 채가 불에 탔으며 곳곳에 산불이 일어났다. 현재 시마바라시와 머즈나시가와(수무천)유역 주민 1천90가구 4천2백22명이 대피권고를 받고 있으며,3백24가구 8백68명은 이미 부근 국민교 등에 피난하고 있다. 시마바라반도는 감자·당근·양배추·잎담배 등 나가사키켄의 농산물 중 약 40%를 생산하는 지역이다. 따라서 이번 분화로 인한 화산재로 막대한 농작물 피해를 입고 있다. 또 운젠다케 일대는 중턱에 운천지대가 있는 관광지로서 연간 4백여 만 명의 관광객이 몰리고 있으며,40여 개소의 숙박시설이 있다. 이들 관광업소도 큰 타격을 입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운젠다케의 최고봉은 후겐다케(보현악)이다. 해발 1천3백59m인 이 산은 1792년 용암분출과 강한 지진을 일으켜 1만5천명의 사망자를 내는 대참사를 빚었다. 이번 분화는 지난해 11월17일부터시작됐다. 이날 후겐다케의 동쪽 약 6백m지점에 있는 구십구도화구와 지옥적화구에서 높이 2백∼3백m의 분연을 내뿜었다. 화산활동은 그 동안 한때 휴식상태였으나 지난달 11일부터 대규모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음이 도쿄대 지진연구소의 데이터 분석결과 밝혀졌다. 지난 23일 하오 4시쯤부터는 땅속에서 솟아오른 바위덩어리들이 동쪽 경사면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때에는 이미 화구의 길이 1백m,넓이 70m,높이 약 40m의 융기가 생겼다. 지하 마그마의 활동으로 인한 바위의 분출량은 약 17만㎡,42만t 정도로 시산됐다. 그러나 이때는 화구에서 불과 70∼80m 정도밖에는 암석이 흘러내리지 않았으나 3일의 분화로는 4∼5㎞나 흘러내려 그 위력을 증명하고 있다 화산의 수명은 약 20만년이나 간다. 규슈(구주)대학 도원지진화산관측소의 시미즈 히로시(청수양) 연구원은 이렇게 말한다. 『2백년 만의 분화로 모두가 놀라고 있지만 화산의 수명은 약 20만년이다. 그렇게 볼 때 2백년이라는 시간은 불과 하루와 같은 것이다. 한숨 쉬고나서 축적된 에너지를 내뿜고 있는 중이다. 이 연구소의 소장 오다가즈야(태전일야) 교수는 『이번 분화는 마그마로 덥혀진 지하수의 수증기 폭발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화산 활동은 장기화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일본은 6월부터 이미 장마권에 들어있다. 비와 구름으로 대폭발을 일으킨 운젠다케의 모습은 관측되지 않는다. 재해대책본부는 앞으로의 분화에 대비,2만6천명의 주민들을 피난시킬 계획을 세워놓고 있으며 3일 하오 자위대를 투입,재해구조에 나서고 있다.
  • “고르비 보수화땐 희생 가능성”/모스크바변혁… 미·일 전문가 분석

    ◎사임보다 사임방법에 더 충격/억눌려온 급진파 과격화 걱정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의 갑작스런 사임발표는 소련 국내에는 물론 전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의 신사고외교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이다. 그의 사임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며 그 파장은 어디까지 미칠 것인지 미국과 일본 전문가의 견해를 모아본다. ▲마이클 돕(미 워싱턴포스트지 모스크바특파원)=셰바르드나제의 사임은 고르바초프에게는 서방의 신임을 받고 있는 외무장관 한명을 잃는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의 사임은 고르바초프가 1985년 소련을 현대사회로 이끌기 위해 구성했던 팀이 해체됐음을 의미한다. 이번 인민대회 분위기를 89년과 비교하면 좋은 대조를 이룬다. 89년에는 개혁파들이 「지역간 그룹」을 결성하고 고르바초프에게 개혁을 가속화시키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개력파가 풀이 죽고 분열된 반면 보수파들은 부지런히 연설을 하고 결의안들을 내놓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과거 좌우의 균형을 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많은 개혁파들은 고르바초프가 보수주의로 너무 깊숙히 들어가 보수파의 인질이 되거나 아니면 다음번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킴 흘름스(헤리티지 재단연구원)=셰바르드나제 장관의 사임은 모든 것을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셰바르드나제 장관에 걸고 미국의 외교파트너로 양인을 적극 지지해온 미 행정부에는 커다란 손실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만약 소련에서 일대 권력재편이 일어난다면 미국의 대외정책은 완전히 파멸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백악관과 국무부에 충격파를 던져준 것은 셰바르드나제 사임 사실자체가 아니라 사임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셰바르드나제 장관의 사임소식이 전해지자 미 관리들은 보다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열을 올렸으며 몇시간 동안의 내부 논의를 거친 후 공식 반응을 나타냈다. ▲마샬 골드먼(하버드대 소련연구소 연구원)=셰바르드나제 장관의 사임발표는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이 미 국민들에게 보라,부시 대통령이 파시스트가 돼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국내외적으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까지 베이커 장관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스스로의 개혁프로그램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으며 소연방내 각 공화국들의 민족주의운동을 무력진압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우려를 일축해왔다. 그는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셰바르드나제 장관은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임을 입증하면서 동구의 공산주의체제 붕괴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소련 국내생활의 민주화를 허용하고 자유시장경제로의 전환의 길을 준비해 왔다고 말했다. 베이커 장관과 셰바르드나제 장관은 올해만도 20번이나 만나 중요한 군축문제를 논의하고 평화적인 독일통일의 길을 열어줬으며 페르시아만 위기와 관련한 양국의 정책조정작업을 벌이는등 상호신뢰 아래서 친분을 다져왔다. 그러나 이제 내년 2월로 예정된 모스크바 정상회담이 제대로 열릴지 혹은 START 협정이 예정대로 체결될 수 있을지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입장이다. 페르시아만 위기와 관련,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대 이라크 노선에서 셰바르드나제 장관보다 훨씬 유화적인 입장을 보이는 예프게니프리마코프 특사를 두번이나 바그다드로 파견했었다. 분석가들은 셰바르드나제 장관이 사임연설에서 자신의 페르시아만 정책이 내부에서 잘려졌으며 자신의 내부 중상운동의 희생자라고 불평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고 말했다. ▲시오카와교수(염천신명·도쿄대)=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셰바르드나제 장관,야코블레프 대통령위원회 위원을 「3인조」라고 칭한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지금까지 개혁노선을 대담하게 진척시키려는 두사람과 보수파간의 균형을 유지시켜 왔다. 그러나 이제 대통령이 보수파와 군부의 압력에 흔들려 셰바르드나제 장관과는 더이상 짝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지난 9월에 급진적인 시장경제 이행을 목표로 하고 있는 샤탈린안에 동의를 표명,급진파에 기우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10월이 되어 여기에 제동이 걸렸다. 보수파와 군부의 굉장한 압력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보수파 가운데서도 군부는 특히 자신들이야말로 연방을 뭉치게하는 핵심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연방해체 위기감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보수파를 배려하면서 개혁을 추진해나간다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수법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우파로부터 압력이 강했기 때문에 셰바르드나제 장관쪽의 손을 끊었을 가능성이 크다. 역시 보수파의 공격이 격해져 앞으로 야코블레프씨의 동향이 주목된다. 그러나 급진파도 잠자코 보수파의 반격을 지켜 보지 않을 것이다. 소련 정쟁이 한층 격화의 길을 걷지 않을까 걱정된다. ▲기무라교수(목촌·홋카이도대)=셰바르드나제씨는 소련정치가로서는 드물게 기골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위기를 넘기려고 하는 권위주의적인 처사이며 페레스트로이카의 본질과 모순되고 있다. 그의 사의표명은 더이상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편이 될 수 없다고 하는 항의의 의미와 경고로서 돌멩이를 던지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정세는 한층 혼미를 거듭할 것이다. 억눌려 있는 급진파가 보다 과격해지는 한편 보수파도 「서방측에 대한 지나친 협조외교」에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지지/노대통령ㆍ그리스 총리 정상회담

    노태우 대통령은 14일 하오 청와대에서 콘스탄틴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와 한ㆍ그리스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 경제협력을 증진키 위해 항공협정을 조속히 체결키로 하는 한편 이미 체결된 과학기술협력협정은 비준 등 절차를 밟아 빠른 시일내에 발효토록 하기로 합의했다. 노 대통령은 남북한 관계개선을 위한 우리의 노력과 통일방안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그리스정부의 협조를 요청했으며 미초타키스 총리는 우리 정부의 북방정책과 남북 당사자간의 대화와 협력을 적극 지지한다고 말했다. 특히 미초타키스 총리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정책을 보편성의 원칙에 따라 지지한다고 밝혔다. 미초타키스 총리는 『지금까지 일본 도쿄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던 주한 그리스대사관을 서울에 상주토록 하겠다』고 밝히고 『한국의 관광객들을 그리스에 많이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미초타키스 총리는 또 노 대통령의 그리스방문을 공식 초청했다. ◎헝가리 대통령 내한 한편 아르파트 곤츠 헝가리 대통령은 이날 저녁 김포공항에 도착,3박4일간의 공식 방한일정에 들어갔다. 곤츠 대통령은 15일 노 대통령과 한ㆍ헝가리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 전쟁의 배경과 준비(새 실록 6ㆍ25:상)

    ◎중국 공산화에 고무… 김일성,남침 서둘렀다/동서냉전 한반도 유입이 「비극의 불씨」로/김일성,스탈린 지원 업고 모의 내약받아/애치슨 발언ㆍ미군철수로 「힘의 공백」초래/여순사건등 사회혼란도 평양오판 불러/소,야크기ㆍ탱크 1백대씩 공급… 북선 통치요원 미리 임명(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지금으로부터 꼭 40년전인 50년 6월25일. 그날에 시작되어 53년 7월27일에 휴전된,37개월에 걸쳤던 한민족의 동족상잔을 흔히 한국전쟁이라고 부른다. 결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우리 근ㆍ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을 3회에 걸쳐 다시 써보려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제1회에서는 한국전쟁의 배경과 준비를,제2회에서는 한국전쟁의 전개를,그리고 제3회에서는 한국전쟁의 휴전성립과정과 그 유산을 각각 다루기로 한다. □약력 김학준 대통령사회담당보좌역 □1943년생. 인천출신 □서울대 정치학과,동대학원 졸업,미켄트주립대 정치학석사 □미피츠버그대서 「아시아 세력균형에 있어 한국통일」논문으로 정치학박사학위 □서울대 정치학과교수,미국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일본도쿄대 국제관계학과 객원교수 □12대 국회의원(구 민정ㆍ전국구) □「한국전쟁 발발에 있어 중공의 비개입」등 한반도 분단,6ㆍ25동란 등에 관한 주요 논문다수. 한국전쟁이 50년 6월25일에 일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 뿌리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45년 8월15일 일제로 부터의 해방직후에 나타난 한반도의 분단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분단이 없었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에 대한 설명이 한반도의 분단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반도의 분단에서는 우선 열강의 권력정치라는 국제적 요인이 짙게 깔려 있다. 지정학적으로 볼때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을 차지하고 있는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이 지역의 화약고로서 주변 강대국들의 수많은 각축을 불러 일으켰던 곳이다. 한말의 청­일 전쟁과 노­일 전쟁이 그 대표적인 보기들인데 여기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점은 이러한 전쟁이 있을 때마다 열강은 한반도의 분할을 협상했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전략적으로 탐나는 한반도의 「독식」을 위해 이전투구격으로 싸우다가 승부가 분명해지지 않으면 「분식」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전쟁 모두에서 일본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면서 한반도는 일본의 「독식」아래 들어가고 말았다. ○세계의 열강들 “눈독”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서,그리하여 일본이 한반도를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열강의 「식욕」은 다시 한번 자극받게 되었다.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중화민국도,그리고 당시는 아직 대륙을 차지하지 못한 중국 공산당조차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감추지 않았으며,영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무력화시켜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 은연중에 한민족의 완전한 독립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새로운 각축이 예견되는 두려워할 만한 상황에서,이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자리를 굳힌 미국은 미ㆍ소ㆍ영ㆍ중의 연합국이 함반도를 「공동관리」하게 되면 4강의 이해관계가 조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미국은 한때 4강에 의한 공동점령 및 공동분할을구상하기도 했지만 마침내는 4강이 함께 참여하는 신탁통치로 기울어졌는데,「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 한민족에게 독립을 주겠다는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은 미국의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라는 원칙적 선언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청사진과 일정표를 연합국이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의 항복을 접수하게 되었다. 일제의 항복이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닥쳤던 셈인데,문제를 더욱 미묘하게 만든 것은 미군은 한반도에 진공할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의 동북부로 진공해 들어오고 있는 숨가쁜 현실이었으니,여기서 미국은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건져야겠다는 절박한 판단에서 북위 38도선에서의 분할점령을 제의했고 이 제의를 소련을 비롯한 나머지 연합국들이 받아들임에 따라 비극의 분단이 이뤄진 것이다. 이 처럼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가운데서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됨에 따라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지는 국제냉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으며,그것은 한국전쟁의 국제적 배경의 틀이되고 만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미국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를,그리고 소련은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각각 군사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 겨레 사이에서 벌어진 이념적ㆍ사상적 대결이다. 즉 일제 치하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운동을 특징지었던 좌ㆍ우익 투쟁이 해방된 한반도에서 재연된 것이다. 그것은 남한에서는 좌ㆍ우익 투쟁의 형태로,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남북한 대결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은 한반도안에서도 냉전이 벌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국내냉전」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국제냉전」과 얽히고 설키면서 48년에는 한반도에 2개의 「국가」가 세워지는 데 이바지하게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50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이 준비되는 과정에는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개입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서 「38선분할」제의 48년 8월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세워졌으며,곧이어 9월15일 북한에서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이때 국가로서 국제적 공인을 받은 쪽은 대한민국이었다. 제3차 국제연합 총회는 48년 12월 대한민국을 국가로서 승인했으며 이를 계기로 많은 국가들이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북한에 대한 승인은 소련권에 국한됐다. 이러한 국제적 조처들이 끝나면서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신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반도에 국제적 힘의 공백이 형성된 상황에서 남한은 북진통일을 부르짖고 북한은 이른바 남조선해방을 외치는 가운데 무력충돌의 위험성은 높아갔다. 이때 남한이 방어적이었음에 반해 북한은 공세적이었다. 우선 남한의 경우 미국의 군사적ㆍ경제적 지원은 많지 않았다. 트루먼 민주당행정부는 북한이 남침할 위험성이 있다는 경고를 무시했으며,그러한 판단에 입각하여 50년 1월에는 애치슨국무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남한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입장을 표명했다. 이 애치슨선언이 소련과 북한의 지도자들에게 정확히 어떻게 해석되었는지에 대한 공식자료는 없으나 대체로 그들을 고무시켰을 것으로 풀이되어 왔다. 국내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다. 48년 가을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은 신생 대한민국의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했으며,그것이 비록 진압됐다고 해도 반정부적 분위기가 차차 확산되면서 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남북협상파를 비롯한 반정부적 중도세력이 승리를 거뒀다. 안팎으로 문제들을 안고 있는 남한으로서 북진통일론은 대체로 미국에 대해 군사원조를 늘려달라는 외교협박용이거나 국민적 단합을 꾀하기 위한 상징조작용에 가까웠다. 이 시기의 대한민국정부의 1차적 관심은 오로지 안보에 있었다는 사실,즉 『어떻게 하면 북한으로부터 있을 수 있는 남침을 막아낼 수 있느냐』에 쏠려 있었다는 사실은 북진통일론이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49년 방소때 구체화 반면에 북한의 경우 소련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이 활발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김일성의 두 차례의 소련 방문이다. 우선 49년 3월의 방문에서 김일성은 「조­소 경제ㆍ문화협력협정」을 얻어냈으며 이것을 계기로 남침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세워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중국공산당의 대륙제패 가능성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그것은 북한의 지도층을 크게 북돋웠다.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듯이 북한이 남한을 석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중국국민당이 쫓겨가도 미국이 아무런 구원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북한으로 하여금 자신이 남한을 침략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북한 지도층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이무렵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신의 인민해방군에 속해 있던 조선인 장교들과 병사들을 대거 북한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으며,이 귀환은 50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는데 실전경험을 쌓은 이들이 이미 48년 2월에 발족한 북한 정규군에 편입되면서 북한군의 병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이 시점에 곧 50년 2월에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의 모택동과 더불어 모스크바에서 중ㆍ소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다. 배후의 두 공산대국이 군사동맹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지도층을 다시 한번 고무시켰을 것이다. 여기서 김일성의 2차 소련방문이 이뤄졌다. 그는 비밀리에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계획을 상세히 보고했다. 하나의 허점이 되어버린 남한은 크게 부풀려진 풍선과 같아서 칼로 한번 찌르기만 하면 그대로 터지고 말 것이라는 점,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잔존세력이 지하와 야산으로부터 호응봉기할 것이라는 점,그리고 미국의 개입이 없을 것이므로 짧은 시일안에 남한 전체를 공산화시킬 수 있다는 점 등등을 역설했다. 스탈린은 이미 귀국한 모택동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계획 전체를 놓고 자세히 상의한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원론적인 수준에서 언급한 것 같다. 당시 3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쳤던 내전을 겨우 끝냈기에 국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모택동으로서 한반도에서의 전쟁계획에 대해 깊이 관여할 수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김일성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아래 「미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을 일으킨다는 데 반대할 수 없지 않느냐고 대답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김일성은 모택동에 밀사를 보내 남침계획안을 원론적인 수준에서 알리면서 군사원조 가능한가에 대해 물었다. 모는 군사원조는 어렵다고 대답하면서도 남침계획안에 대해서는 원칙적인 입장에서 동의했다. 스탈린 스스로와 김과 모 사이의 3각대화를 종합한뒤 스탈린은 김의 계획을 지지하게 되었다. 미국과의 직접적인 군사대결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겠다는 스탈린으로서도 이것만은 승산이 큰 계획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부흥시킴과 아울러 일본을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반공기지로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전승국인 소련을 배제시킨 채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으려 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신속한 군사작전을 통해 미국이 개입하기 이전에 남한을 공산화 해버린다면,그것은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친소ㆍ친공의 길로 굴복하게만들 것이며,그렇게 되면 동아시아에서의 소련의 위신은 크게 올라가고 소련의 정치적ㆍ군사적 발판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었다. ○6월22일 준비 완료 마침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도 남침계획을 적극 지지했다. 소련군의 북한점령 3년동안 북한의 사실상의 지배자였고 김일성의 열성적인 후원자로서 북한주재 초대 소련대사가 된뒤 북한을 사실상 「총독」하던 정치장교 출신의 스티코프가 김의 남침계획을 뒷받침하자 스탈린은 50년 봄 남침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하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지원을 급진전시켰다. 그리하여 49년부터 50년 6월까지 소련이 북한에 공급한 무기는 정찰기 10대,야크전투기 1백대,폭격기 70대,탱크 1백대,중포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원을 받은 북한은 50년 6월 현재 13만5천명의 지상군을 확보했으며 남한과의 접경지대에 대한 정예부대의 배치를 완료했다. 이때 남한의 병력은 정규군 6만5천명,해안경찰대 4천명,경찰 4만5천명이었고 장비는 불충분했다. 그만큼 남북한의 병력 수준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당시 북한 민족보위상(국방상) 최용건은 『비행기ㆍ탱크ㆍ전함과 현대무기로 무장된 인민군은 어떤 전투임무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의 적을 분쇄하기 위해 언제나 전투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호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북한의 구체적인 남침준비는 50년 6월14일부터 22일 사이에 마무리된 것 같다. 이 시기에 북한은 남한에서의 토지개혁과 새로운 법령제정에 대한 준비,그리고 남한의 주요지역의 통치를 담당할 행정요원들의 임명을 완료했다. 민족보위성은 6월15일자로 각 사단에 정찰명령 제1호를,6월22일자로 역시 각 사단에 전투명령 제1호를 내려보냈다.
  • 20세기 마지막 남은 「절대군주」/네팔 비렌드라 국왕은 누구

    ◎하버드대 출신… 72년 즉위 후 전권 장악 50일 가까운 민주화 시위로 사면초가에 빠져들고 있는 네팔의 비렌드라 국왕(44)은 세계유일의 힌두교 국가 국왕이자 마지막 남은 절대 군주중 한사람이다. 네팔 최초의 서구식 교육을 받은 통치자 이기도 한 그는 지난 10여년 동안 갖가지 소요사태로 시달려 왔으며 지난 2월중순부터 시작된 다당제 민주화 시위는 유혈사태로 번지고 있어서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 2차대전 종전직후인 45년 12월28일에 태어난 그는 5살때 국내혁명으로 이웃나라 인도로 피신하는 비운을 맛보았으며 이때 그가 경험한 혼란은 그뒤 그의 인생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55년에 즉위한 그의 부왕 마헨드라의 명으로 59년부터 64년까지 5년 동안 영국 이튼학교에서 수학했으며 그뒤 일본의 도쿄대학과 미국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72년1월 부왕인 마헨드라가 사망하자 네팔 「샤」왕조의 10대 국왕으로 즉위,행정ㆍ입법ㆍ사법에 걸친 절대권력을 잡았다. 비렌드라 국왕은 집권이후 그의 부왕이 도입한 「판차야트」체제(전통적인 촌락회의 형태)의 정당성을 강조,『비록 민주주의가 가장 최선의 통치형태이긴 하지만 규제가 없으면 붕괴되기 쉬운 제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후 비렌드라는 지난 79년 7주간에 걸친 학생들의 반왕정폭동으로 집권후 최초의 시련에 봉착했다. 그는 개혁주의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사상 최초로 「판차야트」존속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으나 국민들은 그에게 절대적인 통치권을 부여해 주고 있는 「판차야트」체제에 55%의 찬성표를 던졌다. 독실한 힌두교 신자들로 부터 비슈누신의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외부세계에는 경건한 이미지를 심어왔다. 지난 88년 자신의 43회 생일을 맞아 30명의 정치범을 포함한 1백77명의 죄수들을 사면하기도 했던 그는 네팔의 제2인자인 아이수와랴 왕비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고 있다. 그의 가족들은 대규모 사업체를 경영,부유하게 살고있어서 국민들의 비난을 받고 있으나 자신은 평범하고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김현철기자〉
  • 북한,일서 첨단군사기술 입수/일잡지 보도/비밀공작ㆍ조총련통해

    ◎핵융합ㆍ반도체ㆍ컴퓨터 중점 【도쿄연합】 북한은 일본의 첨단장비와 기술을 도입하기위해 COCOM(대공산권수출규제위원회)의 규제를 뚫고 군사용으로도 쓸 수 있는 장비를 직접적인 대일기술공작을 통해 수입하거나 재일조총련 조직을 통해 기술정보를 가져가는 두가지 경로를 두고 있다고 일본 문예춘추사의 잡지 「제군」최근호가 보도했다. 문예춘추는 「제군」5월호에서 북한의 첨단기술 도입경로에 대한 특집물을 싣고 이같이 밝히면서 특히 조총련 산하 「재일조선인과학기술협회(과협)」에 소속된 과학자들중 상당수는 일본에서도 초1류급 기술두뇌인데 이가운데 일부가 북한의 기술개발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중 이시구 과협위원장은 도쿄대의 핵융합소립자가속기 전문가이며 층상소기방식이라는 신형 엔진개발로 미국 동력기계학회상을 수상한 기술자와 일본 자동제어학회 기념상을 수상한 학자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이 잡지는 말했다. 또 이 과협위원장은 일본원자물리학 권위자의 직계제자로서 원자핵 분야의 핵심인물이며 다른 위원 가운데는 우라늄 농축 재처리용의 무기불소화합물 합성에 종사하고 있는 기술자도 있었다. 이들은 87년에 각 첨단분야의 학자와 기술자 90여명이 한꺼번에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상당수 최고급일본인 과학자들도 이들의 소개로 북한에 초청돼 북한측에 기술자문을 해주기도 했다. 북한은 특히 조총련계 학자들중에서도 반도체와 컴퓨터 분야의 관련자들과 첨단분야 기업 경영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자료공급을 요청하고 있으며 지난 87년의 경우 2만1천점의 학술서적과 자료들이 북한측에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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