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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사]

    ■ 교육인적자원부 ◇과장·팀장급 △혁신인사기획관 金永俊△대학구조개혁팀장 金圭泰△대학원개선〃 卞基溶△기획총괄담당관 裵成根△법무규제개혁팀장 全喜斗△정책상황〃 吳碩煥△지방교육재정담당관 成三濟△교원정책과장 姜正吉△교원양성연수〃 薛世勳△교육단체지원〃 李禾馥△지방교육혁신〃 李起鳳△교육복지정책〃 崔震明△유아교육지원〃 朴英淑△학교체육보건급식〃 申榮載△정책총괄〃 金官福△지역인적자원개발팀(팀장) 丘然熙△정책조정과장 承隆培△인력수급정책〃 金善鎬△평가지원〃 李大悅△평생학습정책〃 申正撤△전문대학정책〃 李鎔均△산학협력〃 權五正△여성교육정책〃 徐暎珠△대학정책〃 朴春蘭△대학학무〃 朴隆洙△사립대학지원〃 李成熙△학술진흥〃 盧煥珍△BK추진단(사업기획팀장) 徐裕美△〃(운영기획팀장) 申翊鉉△학자금정책팀장 朴盛珉△지식정보정책과장 鄭鍾澈△지식정보기반〃 崔仁燁△재외동포교육〃 邊光和△교육행정정보화팀장 金斗淵△운영지원〃 金炳五△교육인적자원부 李根雨 金元燦△〃(국무조정실 전출예정) 吳昇炫△〃 (〃 파견예정) 金光豪 丁炳杰△국제교육진흥원 朴東善△서울대 姜永順 柳惠淑△한국방송통신대 宣泰武△전북대 洪元一△순천대 李鉉一△한국해양대 鄭載鉉△창원대 全濟尙△진주산업대 사무국장 金英雨■ 여성가족부 △가족정책국장 양승주■ 건설교통부 ◇본부장 전보 △물류혁신본부장 李聖權△기반시설본부장 南仁熙△균형발전본부장 李宰榮△주거복지본부장 姜八文△생활교통본부장 柳德相△건설선진화본부장 丁鍾均◇기획관 전보△혁신정책조정관 朴相圭△철도기획관 洪淳晩△항공기획관 柳漢準△도로기획관 柳承和△수자원기획관 全炳成△도시환경기획관 李載弘△광역교통기획관 鄭有燮△기술안전기획관 沈爀倫△항공안전본부 관제통신기획관 張宗植 ◇팀장 전보△혁신팀장 金載晶△정책조정팀장 鄭京薰△국민참여팀장 金亨烈△규제개혁팀장 金明運△감사팀장 朴光緖△감찰팀장 朴鍾斗△업무지원팀장 金東洙△고객만족센터장 洪淳年△기획총괄팀장 鄭炳潤△인사조직팀장 都泰鎬△법무지원팀장 曺椿純△홍보기획팀장 김순조△홍보지원팀장 朴性浩△예산총괄팀장 金正烈△투자심사팀장 주현종△정보화·국제협력관 鄭乃三△정보화기획팀장 崔齊恒△국제협력팀장 權赫震△국토정책팀장 崔炳洙△수도권정책팀장 金景旭△지역발전정책팀장 兪炳權△산업입지팀장 朴明植△도시정책팀장 金炳秀△도시환경팀장 具本煥△건축기획팀장 韓昌燮△복합도시기획팀장 崔元圭△복합도시개발팀장 安忠煥△주택정책팀장 朴善皓△주거복지지원팀장 宋錫俊△공공주택팀장 兪成鎔△주거환경팀장 徐明敎△신도시기획팀장 權五烈△신도시개발팀장 金泰鎬△토지정책팀장 鄭完大△토지관리팀장 高七鎭△부동산평가팀장 李忠在△국토정보기획팀장 魚命昭△기반시설기획팀장 張萬錫△철도건설팀장 崔榮運△민자사업팀장 金一煥△남북교통팀장 具滋明△도로정책팀장 宋起燮△도로건설팀장 劉仁相△도로관리팀장 權炳潤△도로환경팀장 尹盛五△수자원정책팀장 洪炯杓△수자원개발팀장 徐奇東△하천환경팀장 李漢世△하천관리팀장 安時權△종합교통기획팀장 徐勳鐸△물류정책팀장 朴茂翊△물류지원팀장 金湘道△물류산업팀장 朴廷熙△고속철도팀장 李鍾國△철도정책팀장 金漢榮△철도운영팀장 黃聖淵△철도안전팀장 孫明先△철도산업팀장 李濟學△항공정책팀장 任周彬△국제항공팀장 吳良鎭△공항개발팀장 金基奭△도시교통팀장 孟聖奎△대중교통팀장 金璟中△교통안전팀장 金東國△교통정보기획팀장 李榮均△자동차팀장 朴賢哲△도시철도팀장 尹旺老△건설경제팀장 孫太洛△해외건설팀장 權容復△건설지원팀장 鄭三町△기술정책팀장 全星哲△건설환경팀장 全壽玹△안전기획팀장 金錫鉉△건설관리팀장 邊鍾賢△공공기관지방이전추진단 종전시설관리팀장 金采奎△〃혁신도시팀장 田炳國△국민임대주택건설기획단 주택건설과장 趙魯永△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실무지원단 기획과장 孫宇準 △〃개발과장 金相權△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개청준비단 安秉勳 朴商範 李年鎬△서울지방국토관리청 도로시설국장 金聖倬△〃건설관리실장 朴墉敎△대전〃도로시설국장 徐廷弼△익산〃 건설관리실장 任泰模△원주〃도로시설국장 姜壯煥△원주〃 강릉국도유지건설사무소장 李元植△부산〃포항국도유지건설사무소장 李相坤△대전〃 충주국도유지건설사무소장 申俊秀△건설교통인재개발원 학사과장 權五善△서울지방항공청 김포항공관리사무소장 柳然東△부산지방항공청 관리과장 洪明浩△영산강홍수통제소장 崔洞植△대전지방국토관리청 예산국도유지건설사무소장 李正晩△〃논산국도유지건설사무소장 崔大塡△익산〃관리국장 尹榮植△〃광주국도유지건설사무소장 鄭光容△국민고충처리위원회 파견 李種培△국무조정실 규제개혁기획단 朴大淳■ 국세청 (복수직 부이사관) △서울지방국세청 납세자보호담당관 許炳翊△중부〃 〃 金明洙 (과장)△국제조사 王基賢△서울지방국세청 개입납세2 趙淵玖△ 〃 국제조사1 洪承世△ 〃 〃2과장 李柄烈△ 〃 〃3과장 徐允植 (복수직 4급)△법인세과 金容均△서울청 납세자보호담당관실(조사상담)朴壽榮△ 〃 법무1과 李鶴粲△ 〃 법인납세과 李鶴永△중부청 법무과 朴興淳△ 〃 법인납세과(법인) 金基正△대전청 감사관 田明秀△광주청 납세자보호담당관 朴喜弘△ 〃 징세과장 宋宇喆△ 〃 법무〃 崔永洛△ 〃 조사1국 1〃 孔奇洙△대구청 납세자보호담당관 申潤鍾△부산청 조사2국 1과장 姜秀求■ 소방방재청 (본부장) △정책홍보 權寧世△재난예방 孔昌錫△소방대응(직무대리) 鄭貞基△복구지원 方基成(팀장)△정책개발분석 崔福洙△행정지원 李炯基△혁신기획관 朴光吉△정책홍보 南德祐△재정기획 權永洙△정보화전략 崔雄吉△통합망구축 吳甲根△재난예방기획 李鍾成△민방위운영 洪性烈△민방위자원관리 孫錫均△안전문화지원 李正述△인적재난관리 柳濟坤△위험물안전관리 文富奎△소방대응기획 朴浩善△소방제도운영 李鉉永△소방전략개발 崔珍鍾△화재조사분석 沈平康△구조구급 申鉉哲△소방시설장비 白圭炯△방재대책기획 金桂助△재해복구지원 張仁錫△재해경감대책 池珉秀△재해영향관리 姜秉和△방재기준관리 朴好券(민방위교육관)△민방위교육관장 延秉均(울산광역시 소방본부)△소방본부장 직무대리 柳海運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실·관장) △기획조정실장 韓基天△정책실장 직무대리 梁孝錫△예술진흥실장 鄭承太△문화협력실장 직무대리 金昌郁△예술극장장 李彰胤△미술관장 직무대리 柳在奉△연수원장 李誠謙△예술정보관장 吳洋烈(팀장)△검사역 閔峻泓△기획조정실 기획예산팀장 梁慶學△〃 경영혁신팀장 黃致峻△〃 경영지원팀장 黃勤夏△정책실 정책연구팀장 朴斗鉉△〃 홍보미디어팀장 金瓚東△예술진흥실 지원총괄팀장 李鍾遠△〃 문학팀장 朴相彦△〃 시각예술팀장 朴明鶴△〃 공연예술팀장 金英中△문화협력실 사회공헌팀장 高俊煥△〃 지역문화팀장 朴天壽△〃 국제교류팀장 張正進△문화공간조성추진반장 宋時慶■ 동양투신운용 △상품전략팀장 신경수■ PCA투신운용 △채권운용팀장 김성현■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 의무원장 남궁성은△기획조정실장 정수교△새병원건립추진본부장 방병기△대학원장 조백기△보건대학원장 박정일△의료경영대학원장 박성학△임상치과학대학원장 최목균△임상간호대학원장 최의순△의과대학장 겸 교학처장 천명훈△간호대학장 김남초△도서관장 이광우△성모병원장 우영균△성모병원 진료부원장 김학기△강남성모병원장 김승남△강남성모병원 진료부원장 강문원△의정부성모병원장 강성학△의정부성모병원 진료부원장 김영훈■ 서울대 △음악대학장 申秀貞△음악대학 부학장 鄭台鳳△박물관장 朴駱圭■ 홍익대 △대학원장 鄭垣杓△산업대학원장 겸 조치원캠퍼스 평생교육원장 洪淳錫△정보대학원장 겸 정보전산원장 金長福△공과대학장 鄭貴榮△법경대학장 白承寬△조형대학장 겸 디자인영상학부장 李一魯△중앙도서관장 金建浩△국제교류센터 부장 겸 기획연구처 국제협력담당 전문위원 朴東旭△문정도서관장 鄭寶鉉△학생상담센터 소장 金榮和△입학전형관리실무단 간사 李政海△공간배치계획 전문위원 朴智憲△환경개발연구원장 金億△과학기술연구소장 鄭準基△서울캠퍼스 공학교육인증지원센터 소장 尹順鍾△조치원캠퍼스 공학교육인증센터 〃 白鉉德△경제연구소장 金東鎰△법학연구소장 李重基△미술디자인공학연구소장 文喆■ 한국예술종합학교 △기획처장 洪淳澈△교학부처장 崔畯皓△기획부처장 朴仁錫△미술원 부원장 朴善宇■ 국민대 (학장) △문과대학장 申大澈△공과〃 權 勳(선임실장)△관재팀장 李炳學(실장)△학사지원팀장 禹永泰△체육대학 및 스포츠산업대학원 교학팀장 朴億鍾△학생지원〃 金東錫(부장)△교원지원팀장 金鎭旭△기획팀장 白允璜△열람〃 張熙玟△비즈니스IT전문대학원 교학〃 李英玉△경상대학 교학〃 崔玄鎬
  • 공무원 산하기관 파견 폐지

    공무원 산하기관 파견 폐지

    타 부처에 파견된 속칭 ‘인공위성’ 공무원이 대폭 줄어든다.2007년 총액인건비제 본격 시행에 앞서 ‘별도정원’ 제도를 손질, 파견인력을 대폭 감축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앙부처의 파견인력 가운데 27.1%인 236명이 줄어든다. 행정자치부는 31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별도정원 운영 개선방안’을 각 부처에 보냈다고 밝혔다. 별도정원이란 정부조직법에 따라 정해진 정원 외에 파견·휴직·공로연수 등에 따른 장기결원에 대해 정원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다. 현재 직무파견(868명)과 교육파견(826명)으로 구분돼 있다. 하지만 직무파견의 경우 해당 정원이 741명인데 실제로는 868명이 파견돼 정원을 127명이나 초과했다.1999년 467명까지 줄어들었다가 2배 가까이 늘었다. ●인건비 수요부처에서 부담 행자부 관계자는 “이번 제도개선은 총액인건비제 시행에 앞서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방만하게 운영된 별도정원을 대폭 줄이는 데 목적이 있다.”면서 “부처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정원은 2007년까지 단계적으로 감축하겠다.”고 밝혔다. 총액인건비제 시행과 함께 별도정원제도도 통제관리방식에서 자율성 강화로 바꾼다는 방침이다. 우선 파견 공무원의 인건비를 파견받는 기관에서 부담토록 했다. 그 동안은 원 소속에서 부담했다. 이럴 경우 인건비 절감을 위해 가급적 파견자를 받지 않을 것이란 예상이다. ●산하기관 파견 원칙적 금지 또한 부처의 산하 및 연구기관 파견이 인사상 편법으로 활용되고 있는 사례가 많다고 보고 원칙적으로 파견을 금지토록 했다. 현재 국내 산하기관 및 연구소에 66명, 국제기구 등 74명을 포함해 140명이 파견돼 있다. 따라서 국내 산하 및 연구기관 파견자도 66명에서 33명으로 절반을 줄이기로 했다. 하지만 파견 기관의 특정 직위를 맡고 있는 등 불가피한 경우는 당분간 파견을 계속하되, 단계적으로 줄인다는 계획이다. 또 행정기관간 파견은 직제상 해당기관 정규정원에 포함된다. 이에 따라 다른 부처에서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 파견 중인 공무원은 위원회 소속으로 바뀐다. 그러나 국회·대법원처럼 파견받는 기관의 직제에 포함시키기 곤란할 경우는 예외로 한다. 반면 국정과제업무 등 여러 부처 합동으로 운영되는 위원회와 기획단 등은 평소대로 허용해 주기로 했다. ●직무파견 27.1% 축소, 교육파견은 ‘실링제’로 직무파견의 경우, 한시적인 국가사무나 특정한 업무를 위해 전문인력을 탄력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 원 소속기관의 인사적체 해소를 위한 수단으로도 악용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타 기관에 파견된 공무원들이 원 소속으로 복귀하게 될 때는 원 소속 기관에서 치열한 자리다툼까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인력감축으로 이같은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부처별 감축인원은 147명의 파견인력을 가진 행자부가 40명을 감원, 가장 많은 인력을 줄인다. 이어 건교부 22명, 재경부와 과기부가 각각 15명씩 감축된다. 직급별로는 1급 2명,2·3급 35명,4급 67명,5급 90명,6급 이하 42명이다. 중앙부처에서 지자체에 파견된 지역협력관 21명도 단계적으로 축소되고 제도 자체도 재검토된다. 교육파견은 각 부처에 연간 한도를 정해 주고 자율적으로 시행하는 ‘실링제’로 바뀐다.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여의도터널 뚫었다

    여의도터널 뚫었다

    서울 지하철 9호선 여의도구간에 국내 처음으로 ‘실드 터널’이 관통됐다. 서울지하철건설본부는 30일 지하철 9호선 국회앞∼여의도정거장 구간의 실드터널 공사를 완료하고 관통식을 가졌다고 밝혔다. 터널공사는 지난해 11월 19일부터 지난 3월 29일까지 국회 앞∼여의도정거장,5월30일부터 이날까지 여의도정거장∼국회 앞까지 진행됐다. 서울지하철 공사에 주로 이용되는 터널굴착공법(NATM)은 암반을 화약으로 폭파한 뒤 콘크리트를 씌우는 방식이다. 그러나 실드터널공법은 원형의 실드 장비로 땅을 파고, 장비의 뒤쪽에서 동시에 콘크리트 구조물을 조립해 굴착과 구조물을 동시에 설치한다. 무진동, 무발파 공법이기 때문에 소음이나 먼지가 발생하지 않는다. 실드터널공법은 공사기간도 단축시켰다. 터널굴착공법으로 했을 때보다 절반 밖에 걸리지 않았다. 금액도 m당 3000만원 드는 터널굴착공법의 절반인 1500만원 정도만 소요됐다. 실드터널공법의 또 다른 특징은 교통 체증을 거의 유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터널굴착공법은 토사를 내보내기 위한 공간인 작업구가 필요하다. 보통 구간에서 도로를 한 차선씩 잡아먹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드터널공법은 흙의 대부분을 물로 걸러내 파이프로 내보내 교통에 거의 지장을 주지 않는다. 실드터널공법은 규모가 작은 하수도 공사에서는 이미 활용되고 있다. 실드기계는 굴착경 7.8m에 장비 길이 78.5m, 중량 590t에 달한다. 가격만 무려 150억여원이다. 지하철건설본부는 11월쯤 시작되는 국회 앞∼당산동 구간 공사에도 실드터널 공법을 도입,2007년 8월 말까지 공사를 마칠 예정이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儒林(422)-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47)

    儒林(422)-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47)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47) 하루는 경춘(景春)이 맹자에게 물었다. 경춘은 종횡가에 속했던 세객. 따라서 경춘은 왕도정치만을 부르짖고 있는 맹자에 대해서 은근히 반감을 갖고 있었다.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야말로 진실로 대장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한번 화를 내면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편안히 조용해지면 천하가 잠잠해집니다.” 경춘의 말은 이상주의를 부르짖는 맹자보다 뛰어난 말솜씨와 계책으로 제후들을 설득하여 서로 공격하여 정벌하게 함으로써 막강한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종횡가들을 대장부라고 평함으로써 은근히 맹자를 마음속으로 비웃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속셈을 모르고 있을 맹자가 아니었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아니다. 이를 어찌 대장부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예를 배우지 않았는가. 장부가 관례(冠禮)를 행할 때 아버지가 훈계를 하고, 여자가 시집을 갈 때에는 어머니가 훈계를 하는데, 갈 적에 문 앞에서 전송하면서 말하기를 ‘너희 시댁에 가거든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조심하여 남편을 어기지 말라.’고 하니 순종함을 정도(正道)로 삼는 것은 첩부(妾婦)의 도리인 것이다.…” 관례란 ‘남자가 20살이 되었을 때 갓을 쓰게 하는 성인식’으로 20살이 넘어 성인이 되면 시집가는 딸에게 어미가 훈계를 하듯 예로써 남을 공경하고 나라에는 충성해야함이 마땅한 정도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맹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천하의 넓은 집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바른 도리를 행하며,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것을 행하여 부귀가 방탕하지 못하고 빈천(貧賤)이 뜻을 바꾸지 못하게 하며, 위무(威武)가 절개를 굽히게 할 수 없는 것. 이를 대장부라고 하는 것이다.” 맹자가 장의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실권자들이었던 종횡가들을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제후들의 야심을 충족시키는 책략을 제시함으로써 이 세상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악인이자 변절자라고 질타하는 이 명백한 대답은 맹자가 얼마나 ‘호연지기의 대장부’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산증거인 것이다. 육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부귀를 얻으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으므로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방탕하게 되며, 빈천하게 되면 그보다 더 큰 고통이 없으므로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으므로 위협이 있을 때에는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갖은 비굴한 짓이라도 하게 되는데, 종횡가들은 오로지 부귀와 권력에만 집착함으로써 절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소인배이지 절대로 대장부일 수는 없다는 것이 맹자의 답변이었던 것이다. 이미 순우곤과의 설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맹자는 세치의 혓바닥으로 천하를 농락하고 있는 세객들과 종횡가들을 얼마나 혐오하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는 장면인 것이다. 이는 맹자의 스승인 공자도 마찬가지였다. 공자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이래서 나는 말만 번지르르한 자는 싫어한다.(是故惡夫者)”
  • ‘아웅산 보복 北폭격’ 소문…워커가 저지했다

    ‘아웅산 보복 北폭격’ 소문…워커가 저지했다

    ●아웅산 보복 막은 리처드 워커 글라이스틴의 후임자인 워커는 직업 외교관이 아니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출신의 아시아 전공 학자였다. 남부 출신인 그에게는 ‘딕시’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미국에서는 남부 주들을 ‘딕시 랜드’라고 부른다.) 워커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공화당 중진인 서몬드 스트롬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의 추천으로 임명됐다. 선거 공신인 스트롬 의원은 출신지역의 인물을 주요 포스트에 앉히고 싶어 친구인 워커에게 “어느 자리를 원하느냐.”고 물었고, 워커는 “한국 대사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워커 대사 재임기간인 1983년 미얀마 양곤을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을 겨냥한 북한 정권의 아웅산 테러가 발생했다. 워커는 전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을 중단하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그를 만났다. 당시 전 대통령이 아웅산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을 폭격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말했다. 워커 대사는 전 대통령에게 “북한에 대한 보복 공격은 동북아 전쟁을 불러올 수 있다.”면서 “그러지 말아달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이에 전 대통령은 “이미 보복 공격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전했다. ●6월 항쟁 때 군 출동 경고한 제임스 릴리 릴리 대사는 중앙정보부(CIA) 출신이었다. 릴리는 글라이스틴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선교사가 아니라 사업가였다. 릴리 대사의 재임 중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수십만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서 민주화를 요구했다. 당시 전 대통령은 군을 동원해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려 했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말했다. 그러나 군이 나서면 파국에 이를 것이란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당시 김경원 주미대사가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달라고 백악관에 요청했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전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여 전 대통령에게 “진압보다는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메시지는 분명했지만 표현은 매우 정중했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말했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갖고 전 대통령을 만난 릴리 대사는 편지 내용보다 훨씬 강력한 어조로 전 대통령에게 경고했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전했다. 릴리 대사는 미군 지도부도 레이건 대통령과 같은 생각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결국 전 대통령은 군을 투입하지 않았다. 그 직후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 선언이 나왔고,87년 대선에서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김영삼의 분열로 결국 노태우가 당선됐다. ●한반도 비핵화 추진한 도널드 그레그 그레그 대사도 CIA출신이다. 그는 1970년대 하비브 대사 시절 CIA한국지부장을 지내며 김대중 납치 사건 때 김대중을 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설명했다. 중국 및 러시아 전문가인 그레그는 1980년대 조지 H W 부시가 부통령일 때 그의 안보보좌관을 지내며 부시와 매우 가까웠다고 한다. 그레그 대사의 주요 임무는 한국에 배치된 전술 핵무기를 철수시키는 것이었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말했다. 그레그 대사 본인이 한국에서의 핵 철수 정책을 강력히 지지했다는 것이다. 오버도퍼 교수는 그것이 노태우 대통령이 추진한 남북협상의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었고, 그 바탕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나왔다고 평가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노 대통령의 ‘북방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 정책은 기본적으로 노 대통령이 주도한 것이며, 미국은 작은 도우미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진단했다. 북한과 화해하고 중국, 러시아와 수교한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과 노무현 현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비슷한 점이 있지만 ▲시기와 주변 상황이 다르고 ▲지금은 북핵 문제가 걸려 있는 점이 다르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말했다. 물론 그레그 대사 시절에도 북한의 핵 문제는 잠재해 있었지만 실제로 표면화된 것은 93,94년이다. ●워싱턴 고위당국자들의 책상을 내려친 제임스 레이니 민주당 출신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임명한 레이니 대사는 외교관이 아니라 대학교수였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머리 대학에서 강의하던 그는 같은 주 출신인 카터 전 대통령과 아주 가까웠다. 젊은 시절 주한미군에서 근무했고 연세대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한국 친구가 많았다고 한다. 레이니 대사 시절 북핵 문제가 터졌다. 그러나 당시 워싱턴에서는 북핵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레이니 대사는 미 정부의 주요 정책결정자들을 만나 북핵 문제가 매우 심각한 사안임을 강조하는 데 주력했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전했다. 레이니는 당시 미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인식이 기대에 못 미치자 주먹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심각성을 설파했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말했다. 94년 들어 북핵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항공모함을 포함한 대규모 미군이 한반도로 향했다. 북한이 유엔 제재에 반발, 군사적 도발을 할지도 모를 상황에 대한 대비였다고 한다. 레이니는 비행기와 선박을 이용, 한국내 모든 미국인을 피신시키려 했다. 일단 무력충돌이 일어날 경우 매우 위험한 전쟁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말했다. 그러나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나면서 문제가 해결됐다. 카터는 레이건 행정부 시절부터 평양을 방문해달라는 북한 당국의 초청을 받아왔다. 카터가 대통령 재임시 김일성, 박정희와 비무장지대(DMZ) 3자회담을 추진하는 등 북한을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인 것 등이 원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레이건과 H W 부시 정부는 “미국의 외교정책 방향과 맞지 않는다.”면서 카터의 평양행을 원하지 않았다. 북핵 위기의 한복판에서 카터가 평양을 방문한 것은 레이니 대사의 권유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말했다. ●목소리 낮았던 스티븐 보스워스 보스워스 대사는 외교관이면서 경제 전문가였다. 주한 미국대사 가운데 실질적으로 경제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인물은 보스워스가 처음일 것이라고 오버도퍼 교수는 평가했다. 경제 전문가인 보스워스 대사 시절 한국이 금융위기를 맞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상황에 들어간 것은 흥미롭다. 보스워스 대사는 외부에 큰 목소리를 내지 않는 ‘로 키’를 유지했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재임 당시 누구보다 한국의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보스워스 재임기간인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보스워스를 비롯한 미 당국자들은 공식적으로 남북 정상회담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워싱턴에서의 평가와 입장은 사람에 따라 달랐다고 오버도퍼 교수는 말했다. 그러나 미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막으려 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고 그는 전했다. 보스워스 대사는 미국이 클린턴 정부에서 조지 부시 정부로 넘어가면서 대북 정책이 바뀌는 과정도 겪었다. ●부시가 지명한 3명의 주한대사 외교관 출신인 토머스 허버드 대사는 북한과 많은 협상을 벌여온 북한 전문가였다. 허버드는 제네바 협상 당시 미국 대표단에 포함돼 있었고,95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후속 경수로 협상에선 미국 대표단을 이끌었다. 이후 다른 협상으로 평양을 자주 방문했다. 오버도퍼 교수는 부시 대통령이 남북관계 전문가인 허버드를 자신의 첫 주한대사로 지명한 것은 논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평양 당국과의 협상이 주요한 한반도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허버드 대사를 포함, 최소한 3명의 주한대사를 지명하는 대통령이 됐다. 오버도퍼 교수는 크리스토퍼 힐 대사와 알렉산더 버슈보 대사 내정자의 인선은 허버드 대사와 달리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입김이 많이 작용한 것으로 평가했다. 힐과 버슈보 모두 유럽 전문가들이다. 힐은 한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지만 폴란드와 발칸반도 등 유럽에서 능력을 발휘했고, 버슈보는 라이스처럼 소비에트 전문가로 나토와 러시아 대사를 지냈다. 오버도퍼 교수는 힐 대사에 대해서는 “너무 짧은 기간 대사로 일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코멘트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오버도퍼 교수는 한국에서 힐 차관보의 인기가 높은 것과 관련,“힐 대사의 인기는 대북 협상이 성공적일 경우 계속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또 힐 차관보는 전임자인 제임스 켈리보다 정부 내에서 힘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오버도퍼 교수는 부시 대통령이 버슈보 같은 거물을 차기 주한대사에 지명하려는 것은 한국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측면도 있다고 평가했다. 오버도퍼 교수는 버슈보가 유능한 외교관이며 그의 역할은 한·미 정부간의 ‘복잡한’ 상황 때문에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오버도퍼 교수는 17년간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국제관계 전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1970년대 이래 모든 주한 미국대사와 한국 대통령·외교부 장관·주미 한국대사를 인터뷰한 경험을 갖고 있다. 포병장교로 한국전쟁에도 참전했으며 1993년 기자를 그만둔 뒤 ‘두 개의 한국’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이 책은 미 정부 한국 담당 관료들의 필독서로 꼽힌다. 현재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가르치고 있다. 워싱턴 이도운특파원 dawn@seoul.co.kr
  • “문화는 시민 누릴 기본권리”

    국민의 문화적 권리를 천명한 ‘문화헌장’이 제정된다. 23인의 문화계 인사들로 구성된 문화헌장 제정위원회(위원장 도정일)는 23일 문화헌장 초안을 공개하고, 공청회 등을 거쳐 오는 10월20일 ‘문화의 날’에 최종안을 공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순수 민간 문화시민단체가 제안하고 문화관광부가 지원하는 형식을 통해 제정되는 문화헌장은 앞으로 모든 시민들에게 보장되어야 할 기본적인 문화권리들을 확인하고, 문화관광부 등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는 문화정책 수립시 이를 가이드라인으로 활용하게 된다. 전문과 10개 항목으로 구성된 문화헌장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할 권리 등 기본인권으로서의 문화적 권리와 함께 평등권으로서의 문화적 권리, 타자의 문화적 차이들을 존중하는 문화다양성,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활용할 권리 등을 담고 있다. 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들은 시민의 문화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을 세우고 문화활동을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지난해 8월부터 작업을 벌여온 문화헌장 제정위원회에는 도정일 경희대 교수와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김현미 연세대 교수, 박명진 서울대 교수,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 이성원 문화관광부 문화정책국장, 김광조 교육인적자원부 인적자원총괄국장, 김종헌 예총 사무총장, 허권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문화팀장, 이영욱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장 등 학계와 문화부, 교육부, 문화시민단체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도정일 위원장은 “이번 문화헌장은 과거의 국민교육헌장처럼 정부가 주도해 상의하달하는 게 아니라 문화시민단체가 주도해 제정한 것이 특징”이라며 “국민의 문화적 권리의식을 높이고, 정부가 제대로 된 문화정책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부 박영대 문화정책과장은 이와 관련, “공청회 등 국민의견 수렴을 거쳐 문화헌장의 취지에 대한 국민적 공감이 확산되면 문화헌장이 구체적 실효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관련 법안 마련 등 다양한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儒林(417)-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42)

    儒林(417)-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42)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42) 맹자가 주유열국에 나섰던 것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대충 38세 무렵. 맹자가 제나라에서 출국하였던 것은 60세 때의 일이었으니 맹자의 천하주유는 이 무렵 20여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맹자는 송나라와 등나라 그리고 양나라를 거쳐 또다시 제나라로 돌아와 한결같이 왕도정치를 부르짖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의 주유열국은 13년 동안 한번도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던 여정이었으나 맹자는 그보다 훨씬 긴 장기외유였음에도 불구하고 두어 차례 고향으로 돌아오곤 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특히 맹자가 56세 되던 해 어머니가 죽는다. 이때 맹자는 제나라에서 경상이 되었으나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와 3년 상을 치른 후 다시 제나라로 재차 입국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맹자의 어머니 급(伋)씨의 무덤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맹자의 묘가 산둥성 쩌우현(鄒縣) 북쪽30리 사기산(四基山)에 있고, 동북쪽 30리의 부촌(傅村)에 맹모지(孟母池)가 있으므로 그 근처 어딘가에 맹자의 어머니가 묻혀있을 것이다. 어머니도 죽고 마침내 제나라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출국하는 맹자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이미 60세의 노인에 접어든 맹자. 더구나 맹자가 찾아가고 있는 송나라는 제나라와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가 작은 나라로 땅은 협소하고 인구는 적었다. 게다가 이웃한 강국들의 위협 때문에 나라가 처한 환경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그러나 송나라의 임금은 분발해서 강국이 되려 하지 않고 온종일 술과 여자에 파묻혀 지낼 뿐이었다. 또한 그의 주위에는 온통 아첨하는 소인배뿐이었다. 희망도 없고 자신의 왕도정치도 펼 수 없는 소국 송나라를 찾아가는 60세 노인 맹자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사마천이 기록하였듯 ‘배추 잎새와 같은 초라한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상갓집의 개’처럼 처량한 몰골이었을까. 그러나 아니었다. 맹자의 모습은 대장부다운 기상으로 당당하고 호연하였다. 한마디로 호연지기의 모습이었다. 호연지기(浩然之氣). 이 말은 일찍이 맹자와 제자 공손추(公孫丑)가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감히 묻겠습니다만 스승께서는 어디에 장점이 있으십니까.’라고 공손추가 물었을 때 맹자가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르니라.’라고 대답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함축하는 이 말은 ‘공손추 상편’에 상세히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자 공손추가 어느 날 맹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선생님께서 제나라의 경상의 자리에 오르셔서 도를 행할 수 있게 되신다면 이로 말미암아 패업을 이루거나 왕업을 이룬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마음이 동요되십니까, 동요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자 맹자가 대답하였다. “아니다. 나는 이미 40세가 되었으니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공자는 나이 40세를 ‘불혹(不惑)’이라 말하였고, 맹자는 나이 40세를 ‘부동심(不動心)’이라 말하였으므로 공손추는 다음과 같이 다시 묻는다. “마음이 동요되지 않도록 하는데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 빗물이용시설 확대 得이냐 失이냐

    빗물이용시설 확대 得이냐 失이냐

    남부 아프리카의 고원에 위치한 보츠와나란 나라는 이색적인 화폐단위를 쓰고 있다. 풀라(Pula)와 테베(Thebe)인데, 둘 다 ‘빗방울’이란 뜻이다. 즉 우리나라에선 100원,200원 셈하는 것을 이곳에선 100빗방울,200빗방울로 부르는 것이다.“빗물을 돈으로 여기는 이유는 워낙 가뭄이 심하기 때문”(서울대 빗물연구센터)이라고 한다. 보츠와나처럼 전형적인 물 부족국가뿐 아니라 인류에게 물은 곧 생명이다. 갈증을 해소하고 논밭 작물을 키우는데 쓰이며, 심지어 배설물을 치우는 데도 없어서는 안될 생존의 필수품이다. 사람 몸의 구성비율처럼, 지구표면의 4분의 3을 덮고 있을 만큼 지구상의 물은 많지만, 쓸 수 있는 물은 극히 제한돼 있다. 유엔환경계획(UNEP) 집계에 따르면 지구에 존재하는 물 가운데 97.5%는 바닷물이고, 인간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물은 0.01%뿐이다. 우리나라도 세계적으로 ‘물부족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한 사람이 1년 동안 이용할 수 있는 물의 양은 2003년 현재 1520㎥로, 유엔 통계에 따르면 180개국 가운데 136번째다. 인구증가와 산업성장 등 요인으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정부도 2000년 ‘물절약 종합대책’을 세우면서 앞으로의 물 부족 사태에 대비해 오고 있다. 누수 수도관을 교체하고 원가에도 못 미치는 수도요금을 점차 올려나가는 한편 중수도 활용 등 절수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역점을 둬 왔다.‘빗물이용시설의 확대’도 주요한 정책 수단 가운데 하나인데, 현재 법령 상으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운동장이나 체육관 건설시에만 의무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빗물이용시설의 설치를 이보다 더욱 확대하도록 독려해 오던 정책은 최근 갑자기 철회됐다. 환경부는 지난 6월 각 지방자치단체에 공문을 보내 “(지자체가 의무적으로 수립해 정부에 제출해야 하는)물수요관리종합계획과 관련,2002년 보낸 지침 중 ‘빗물이용시설의 설치를 확대하는 방안을 세우라.’는 내용을 삭제한다.”고 통보했다. 이 때문에 일부 지자체의 경우 공공·민간건축물에 대해 대대적인 빗물이용시설 확대를 꾀하려다 부랴부랴 이를 철회하거나 축소하는 등 혼선도 빚어지고 있다. 수자원 정책 방향이 선회한 이유는 환경부가 발주한 연구용역에서 “빗물이용시설의 설치는 경제성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20년 이용해도 비용 못건져” 빗물이용시설은 건물 옥상이나 바닥 등에 빗물을 모으는 저류조와 배수관을 설치해 여과 과정 등을 거친 뒤 청소·조경·화장실 용수 등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다. 현재 전국적으로 법적 의무가 없는데도 빗물이용시설을 설치, 활용하고 있는 곳은 30여개에 이른다. 연구용역은 이 가운데 서울대학교 기숙사와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대전월드컵경기장 등 3곳을 대상으로 시설 설치 및 관리비용과 편익을 비교해 빗물이용시설의 ‘경제적 가치’를 측정했다. 결과는 부정적이다. 앞으로 20년 동안 시설을 활용하더라도 3곳 모두가 편익(상수도요금 절감비용)보다 비용(시설설치비+유지·관리비)이 훨씬 커 경제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서울대 기숙사의 경우 비용이 1000만원이라면 편익은 170만원(편익가치=0.17)에 불과했고, 한국건설기술연구원과 대전월드컵경기장도 편익가치가 각각 0.51과 0.2에 그쳤다. 강우량의 70%가 하절기에 집중되는 등 기후 특성상 빗물이용시설의 겨울철 사용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점 등이 경제성을 떨어뜨린 원인으로 나타났다. 연구용역을 수행한 윤주환 고려대 교수(환경시스템공학과)는 “적어도 경제성만 놓고 보면 빗물이용시설 설치를 확대하는 정책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부실 보고서로 정책 성급하게 변경” 환경부 관계자는 “연구용역 결과를 토대로 당초 지자체에 내려보냈던 ‘빗물이용시설 설치를 확대하는 쪽으로 물수요관리 대책을 수립하라.’는 지침을 변경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의 ‘절수 인프라’ 구축을 위한 정책 방향이 경제성 분석이라는 단편적인 측면만 고려한 나머지 진지한 성찰 없이 성급하게 바뀌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빗물이용시설로 인한 상수도 요금 절감 등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성만 감안했지 홍수나 국지성 호우 등에 대비한 ‘방재’ 기능적 측면 등 빗물이용시설 확대 설치로 인한 사회적 가치는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대가 유엔환경계획과 함께 설립한 ‘빗물이용센터’의 관계자는 이 때문에 “환경부 용역결과는 빗물이용의 공익적·환경적 측면 등을 감안하지 않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내용”이라고까지 폄하했다. 그는 “경제성 분석도 빗물이용시설을 설치한 사람이나 단체의 ‘사적 편익’만 감안할 게 아니라 ‘공적 편익’도 계산해야 한다.”면서 “예를 들어 하천 물을 고도로 정수처리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이에 대한 정부 예산을 비롯, 홍수조절에 기여하는 효과 등을 경제적으로 환산해야 하지만 이를 빠뜨렸다.”고 지적했다. 빗물이용센터에 따르면 현재 가정에서 사용하는 고도정수처리된 상수도 물의 50%가 화장실 용수나 세탁용으로 쓰인다. 이를 빗물로 대체 이용해 고도정수처리비용을 줄이고, 빗물이용시설의 홍수조절 기여 효과 등을 감안할 경우 경제성 분석 결과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환경부도 이런 지적에 대해선 어느 정도 수긍하는 입장이다. 관계자는 “이번 연구용역이 물의 생태적 순환 등 환경적 가치를 다루지 않고 개인 측면에서의 경제성만 분석한, 단편적인 측면이 있다.”면서 “앞으로 전문가 검토 등 절차를 더 거친 뒤 빗물이용시설 설치 확대와 관련한 정책 방향을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환경부는 올 연말까지 각 지자체가 수립한 ‘물수요관리 종합대책’을 승인할 예정이다. 하지만 불과 2개월 전에 ‘확대 설치’에 대한 정책 변경을 통보한 상태여서 그 때까지 빗물이용시설 설치 확대와 관련한 정부의 최종 입장정리가 나오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박은호기자 unopark@seoul.co.kr
  • 7·9급 공무원 시험 완전정복

    # 독도가 우리 영토인 근거 (문헌,지도) 1. 삼국사기:(신라본기) 지증왕 13년조와 (열전) 이사부조에 오늘날 우리가 독도로 인정하는 우산도에 대한 기록이 있음. 2. 세종실록지리지: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과 무릉 두 개의 섬이 현(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는 기록이 있음. 3. 신증동국여지승람:강원도 울진현조에 ‘우산도, 울릉도가 현의 정동 바다 한가운데 있다’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잇고 있음 4. 팔도총도(동람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는 우리나라의 전도 -우산도(독도)가 울릉도의 안쪽에 그려져 있음(정상기의 동국지도에서 위치가 수정됨) 5. 장한상 울릉도사적기 -1694년 삼척청사 장한상이 울릉도의 300여리 근처에 울릉도의 3분의 1 크기의 섬을 발견한 기록이 있음. -한국 문헌에 나오는 울릉과 우산(독도)의 지명은 모두 울릉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울릉도와 그 부근에 있던 독도를 우리가 17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 6. 문헌비고, 통문관지, 매천야록 등 # 독도의 역사1.512년:이사부가 신라영토에 귀속시킴(신라 지증왕 13년) 2.930년:고려에 귀속(고려 태조 13년)→백길과 태두가 토산물을 바침(고려사) 3.1401년:공도정책(조선 태종) 4.1407년:대마도주 종정무가 동해 무릉도(울릉도)에 마을을 옳겨 살게해 달라고 간청함에 조의를 거쳐 거절(태종실록) 5.1425년:우산도로 호칭(조선시대에는 독도를 ‘우산도’,‘삼봉도’,‘가산도’,‘가지도’ 등으로 호칭) 6.1693년:울릉도와 독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이 있었으나 안용복의 활약에 의해 일본측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의 문서를 보내옴으로써 일단락(숙종실록) 7.1881년:울릉도 개척령의 반포(고종 18년) 8.1883년:조선 태종 이후 실시해온 공도정책을 폐지하고 54명을 울릉도에 들여보냄. 9.1900년: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키고 울릉도, 죽도, 석도(독도)를 관할하게 함(대한제국 광무 4년) 10.1905년 2월:시마네현 고시로써 일본 영토로 불법 편입(러·일전쟁 때) 11.1906년: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독도’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 12.1914년:경상북도에 편입. 13.1946년:연합군 최고사령관이 항복문서의 시행을 위해 일본정부에 보낸 각서에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통치권에서 제외(SCAPIN 제677호) 14.1953년:독도의용수비대가 창설되어 독도를 수호. 15.1982년:천연기념물로 지정(제336호) 16.1998년:‘신한일어업협정’의 체결(독도를 한일어업공동위원회의 관리를 받는 수역에 포함) 17.2005년:민간인의 출입 허용 ●문제 독도에 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1)‘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에 복속시켰다. (2)‘고려사’에는 우산국 사람들이 고려에 토산물을 바친 기록이 나온다. (3)‘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경상북도 울진현 소속으로 구분하고 있다. (4)일본 막부는 1699년에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하는 문서를 조선 조정에 보냈다. (5)독도가 우리 영토로 표기된 최초의 지도는 팔도총도(동람도)이다. ●풀이 및 정답 정답 3번. 울릉도와 독도는 하슬라주(신라) 또는 강원도(조선)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부터 경상북도에 편입됐다. 심태섭 남부행정고시학원 강사
  • 儒林(412)-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7)

    儒林(412)-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7)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7) 즉 명예와 실적을 중시하여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왕도정치를 펴는 것은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길이며, 그러한 명예와 실적을 버리고 초야에 숨어 초연하여 학문에 정진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수양을 위한 길이다. 그러나 그대는 제나라에 두 차례나 입국하여 오랜 생활을 삼경(三卿)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정치에 뛰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예는 물론 실적 또한 제대로 거두어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실제로 그대가 그처럼 간곡히 설득하였지만 제나라의 선왕은 무단으로 연나라를 공격하여 점령하지 않았던가. 또한 연나라에서 철수하라 극간하였지만 선왕은 이를 철저히 무시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그대는 제나라의 명예에도 실적에도 아무것도 보태준 것이 없다. 그런 허송의 세월을 보냈는데, 이제 와서 홀연히 제나라를 떠나려 한다면 과연 그것이 어진 군자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비겁한 현실도피의 길이요, 도주가 아니겠는가라는 것이 순우곤의 공격이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순우곤은 맹자와의 첫 번째 설전에서 ‘천하가 빠지면 도를 가지고 끌어내고 형수가 빠지면 손을 갖고 끌어내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손으로 천하를 끌어내려 하는가.’라는 답변으로 결정타를 얻어맞지 않았던가. 세치의 혓바닥으로 천하를 구하려는 것은 마치 손으로 천하를 끌어내려 하는 것과 같다는 준엄한 맹자의 답변을 빌려 순우곤은 이처럼 재반격을 시도했던 것이다. 즉 그대가 아무런 명예와 실적을 얻지 못하고 도망치듯 제나라를 떠나는 그것이 과연 천하를 구하려고 도를 펼치는 행위인가를 묻는 다목적 질문이었던 것이다. 순우곤의 질문에 맹자는 대답한다.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어진 입장으로 못난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은 백이(伯夷)였고, 다섯 번 탕(湯)왕에게 나아갔고 또 다섯 번 걸(桀)왕에게 나아간 자는 이윤(伊尹)이었으며, 더러운 임금을 싫어하지 않고 낮은 관직도 사양하지 않은 사람은 유하혜(柳下惠)였으니, 이 세분의 길은 같지 않았으나 그 귀결된 곳은 오직 하나였다. 이 하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인(仁)이라고 하는 것이다. 군자는 역시 어질 뿐이니 어찌 반듯이 같은 길을 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맹자의 대답 중에 나오는 백이와 이윤 등은 평소에 맹자가 존경하여 자주 인용하던 성인들이었다.‘맹자’에는 그들의 이름이 십여 차례 인용되고 있다. 백이는 왕위를 버린 후 서백(西伯) 문왕의 명성을 듣고 그에게 의탁하였으나 아들 무왕이 죽은 문왕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주왕을 정벌하려 하자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효이며, 신하로서 군주를 공격하는 것은 불인(不仁)이다.’라고 말렸지만 무왕이 듣지 않고 은을 멸망시키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지내다가 굶어 죽은 의인으로 유가에서는 이를 청절지사(淸節之士)로 부르며, 공경하는 전설상의 성인이었다. 또한 이윤은 은나라의 탕왕에게 다섯 번이나 불려가서 재상이 되어 천하를 평정하는데 공헌하였고, 또한 걸왕이 불러도 다섯 번이나 나아가 벼슬을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느냐, 누구를 부린 듯 백성이 아니겠느냐.” 이윤은 자신이 ‘하늘이 낸 백성 중에 먼저 깨달은 자’이므로 비록 도랑 속에 빠진 듯 살았으나 천하를 다스리는 중대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성인의 삶을 산 사람이었던 것이다.
  • 儒林(411)-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6)

    儒林(411)-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6)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6) 맹자가 제나라의 선왕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갖고 있었는가는 제나라의 신하 경추(景丑)가 맹자에게 “신은 왕(선왕)께서 선생을 공경하는 것은 보았지만 선생이 왕을 공경하는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을 때 맹자가 정색을 하고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던 것으로 잘 알 수 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나라 사람 중에 인의(仁義)를 가지고 왕과 더불어 말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이는 인의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여겨서가 아닐 것이다. 너희들 마음속에 제나라 왕 같은 사람과는 인의를 말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제나라 사람들이 이처럼 자신의 왕을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요순의 도가 아니면 왕 앞에서 말한 적이 없다. 나는 제나라의 왕이 요순의 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본다. 이것이 왕을 공경하는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대로 말하면 너희 제나라 사람 중에는 내가 왕을 공경한 것처럼 공경하는 사람은 없다.” 이 답변은 맹자가 선왕이야말로 요순의 도인 왕도정치를 펼칠 수 있는 적임자로 보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단적인 예인 것이다. 따라서 맹자가 제나라의 국경에서 3일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던 것은 선왕이 크게 후회하고 자기를 다시 불러들일지도 모른다는 미련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맹자의 환상이었다. 물론 맹자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순우곤이었다. 그러나 순우곤은 선왕의 사신으로 맹자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초라한 모습으로, 말은 자진출국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쫓겨나고 있는 맹자의 모습을 조롱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순우곤으로서는 맹자가 스승 공자처럼 ‘상갓집의 개’가 되어 피로하고 지친 모습으로 출국하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순우곤은 일찍이 맹자와의 설전에서 비참한 패배를 맛보지 않았던가. 일생일대의 유일한 패배를 순우곤은 몽매에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순우곤은 맹자를 위로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맹자의 처지를 비웃고 조롱하며 맹자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맹자도 순우곤의 예방을 받자 정중하게 그를 맞아들였으나 이미 순우곤의 속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두 번째로 날카로운 논전을 벌인다. 전국시대 최고의 말재주꾼 순우곤과 전국시대 최고의 사상가인 맹자의 설전은 오랜 복수를 꿈꾸던 순우곤의 예봉을 다시 한번 여지없이 강타하는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끼게 하는 명장면이다. 이 장면의 시작은 순우곤의 질문에서부터 비롯된다. 이 장면이 맹자의 ‘고자장구하편’에 수록되어 있다. “순우곤이 말하였다. ‘명예와 실적을 중시하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고 명예와 실적을 경시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삼경(三卿)가운데 계셨으나 명예와 실적이 위와 아래에 모두 더해지지 아니하였는데, 그런데도 이처럼 떠나시니 어진사람도 본래 이와 같습니까.’” 순우곤의 말은 촌철(寸鐵)이었다. 비록 작고 짧은 질문이었지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기마저 띤 공격이었던 것이다.
  • 儒林(410)-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6)

    儒林(410)-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6)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6) 곽외는 웃으며 말하였다. “죽은 말의 뼈를 천금을 주고 샀다는 임금에 대한 소문이 천리마 세 필을 불러오게 하였다면, 전하께서 부족한 저부터 신임하여 우대해 주셨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저보다 더 훌륭한 인재들이 모두 전하께 의지하러 오게 될 것입니다. 비록 신은 죽은 말의 뼈에 지나지 않으나 전하께서 저를 등용하여 천리마처럼 아끼신다면 사방에서 살아 있는 천리마들이 올 것이므로 궂이 각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 인재를 찾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곽외의 의견은 탁월한 것이었다. 곽외의 말에서 ‘천금매골(千金買骨)’이란 고사성어가 나온 것. 그리고 “임금께서 궂이 어진 선비를 부르시고자 하신다면 먼저 저로부터 시작하여 주십시오.(王必欲致士 先從如)”라는 말에서는 ‘청자외시(請自始)’란 고사성어가 나온 것이다. 청자외시. 이는 ‘자기 자신을 자기가 추천한다는 말’로 때로는 ‘선종외시(先從始)’라고도 불려진다. 어쨌든 곽외의 작전은 그대로 들어맞는다. 악의(樂毅)라는 무장은 위나라 사람이었으나 소왕이 곽외를 의지하고 새로운 집을 지어주고, 스승인 사장으로 섬긴다는 소문을 전해 듣자 연나라로 와서 상장군이 되었던 것이다. 악의는 조, 초, 한, 위, 연의 연합군을 이끌고 당시 최강국이었던 제나라를 토벌하여 수도 임치를 함락시키고 70여개의 성을 빼앗고 모든 재보를 연나라로 옮겨 버린 것이다. 이때가 기원전 284년. 제나라의 선왕이 연나라를 정벌한 지 불과 34년 후의 일에 불과하였으니, 일찍이 맹자가 ‘지금 어진 정치를 하지 아니한다면 이는 천하의 무기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왕께서 속히 명령을 내리시어 노약자들을 돌려보내고 중요한 제기를 가져오는 것을 중단시키고, 연나라 백성들과 논의하여 임금을 새로 세운 뒤에 철수하십시오.’라고 충고하였던 왕도정치의 경세지략은 34년 후에 그대로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패도정치는 일시적으로 힘으로 정복하여 승리하는 듯 보이지만 한 순간의 영광에 불과하며 왕도정치는 얼핏 보면 무능하고 나약한 통치이념처럼 보이지만 곧 승리하여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니, 제자 베드로가 칼을 빼어 잡으러 온 사람의 귀를 잘라버리자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라고 말하였던 예수의 말과 상통하는 진리인 것이다. 어쨌든 맹자는 십만종의 녹봉과 빈사(賓師)의 대우를 마다하고 제나라를 떠날 결심을 한다. 평소에 맹자는 “나는 맡은 관직도 없고 말한 것에 책임도 없으니 진퇴가 어찌 너그럽고 여유 있지 않겠는가.(我無官守 我無言責也 則吾進退豈不綽綽然有餘裕哉)”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삼경(三卿)의 지위에 올랐으나 이처럼 맹자는 ‘나아가고 물러섬’에 있어 언제나 분명하고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맹자도 제나라에 대한 미련만은 쉽사리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맹자가 제나라의 국경에서 꼬박 3일간을 머물러 있었다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맹자는 마음속에 또 하나의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떠나면 선왕이 크게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자기를 붙잡고 회유하여 다시 불러들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맹자는 제나라의 선왕에게 큰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 儒林(409)-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5)

    儒林(409)-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5)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5) 맹자가 제나라에 두 차례에 걸쳐 머물렀던 것은 5,6년. 그동안 맹자는 선왕을 통해 왕도정치를 이루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선왕이 받아들일 여지가 없음을 깨닫게 되자 맹자는 어쩔 수 없이 제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론적이지만 맹자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된다. 연왕 쾌가 왕위를 상국인 자지에게 넘겨주자 태자 평은 이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제나라의 선왕은 군대를 보내 연나라를 정복하려 하였으나 제나라의 군사들이 공격하는 과정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였으므로 연나라의 군대와 백성들의 저항을 받고 2년 뒤에 연나라에서 철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선왕은 맹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하여 ‘나는 맹자에게 매우 부끄럽다.(吾甚慙於孟子)’라고 말하였다고 ‘공손추 하편’은 기록하고 있다. 그뿐인가. 연나라 사람들은 당시 제나라의 군사들을 자기 나라에서 쫓아버린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태자 평이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되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소왕(昭王). 그는 연나라가 초토화된 뒤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많은 현인들을 초빙하여 제나라에 대해 원수를 갚고 선왕의 치욕을 씻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모사 곽외(郭畏)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 제나라는 우리나라의 혼란을 틈타 공격해 왔소. 우리나라가 지금은 작고 약하기 때문에 널리 인재를 구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선대의 치욕을 씻고 싶소. 이것은 나의 소망이오. 추천할 만한 인재가 있거든 말해 주시오. 내가 직접 모시러 가겠소.” 이에 곽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말을 좋아하는 임금이 있었는데, 그는 천금을 주고 말을 구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습니다. 매일 불만에 차 있는 임금을 본 한 신하가 말하였습니다.‘이 일을 신에게 맡겨 주십시오.’ 임금이 그 일을 맡기자 신하는 천리마를 구하러 길을 떠났습니다.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좋은 말을 찾았습니다. 막상 이 말을 사려고 했을 때 그 말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오백 금을 주고 죽은 말의 뼈를 사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임금은 천리마의 뼈를 보고 매우 화가 나서 그 신하를 꾸짖어 말하였습니다.‘내가 원하는 것은 살아 있는 말인데 너는 무슨 소용이 있다고 죽은 말의 뼈를 사 왔느냐. 오백 금을 낭비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자 그 신하는 웃으면서 대답하였습니다.‘전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오백 금을 낭비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죽은 말의 뼈를 아주 비싼 값에 사들였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 사람들은 전하께서 진심으로 좋은 말을 아끼는 군주로 믿게 되어 반드시 좋은 말을 바치는 이가 있게 될 것입니다.’ 과연 1년이 지나자 어떤 사람이 세 마리의 천리마를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소왕에게 곽외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지금 왕께서는 천하의 인재를 모으고 계시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천금을 주고 천리마의 죽은 뼈를 산다.’는 ‘천금매골(千金買骨)’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천금매골이 천하의 인재를 모으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모사 곽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소왕이 묻자 곽외는 대답하였다. “지금 전하께서 천하의 인재를 모으시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저로부터 시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 儒林(407)-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3)

    儒林(407)-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3)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3) 그러한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연나라의 혼란을 틈타 군대를 동원하여 50일 만에 점령한 선왕의 불의를 지켜본 맹자의 마음은 어떠하였음인가. 마침내 제나라가 연나라를 점령하자 진, 조, 초의 강력한 제후국들은 연합군을 결성하여 제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시작한다. 제나라는 비록 연나라를 정복하였으나 이로 인해 강력한 제후국들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대전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선왕은 뒤늦게 맹자에게 자문을 구한다. 맹자의 나이는 59세, 이때의 장면이 맹자의 ‘양해왕 하편’에 나오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나라가 연나라를 쳐서 이겼다. 선왕이 물었다. ‘어떤 이는 과인에게 (연나라를) 취하지 말라 하며, 어떤 이는 과인에게 취하라 한다. 만승(萬乘)의 나라를 가지고 만승의 나라를 50일 만에 점령, 함락하였으면 사람의 힘으로는 이러한 일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취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하늘의 재앙이 있을 것이니 취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맹자에게 했던 선왕의 질문을 보면 선왕은 다중인격을 가진 복합적 인간처럼 보인다. 선왕은 은근히 맹자의 마음을 떠보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맹자가 선왕에게 ‘이와 같은 소행으로 욕심을 추구한다면 하늘로부터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던 기억을 빗대어 ‘50일 만에 연나라를 정복한 것은 하늘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니, 취하지 않는다면 하늘의 재앙이 있지 않겠는가.’하고 은근히 비꼬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선왕이 꿈꾸는 것은 오직 패도정치의 야망뿐이라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물러서지 않고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대답한다. “취해서 연나라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으면 취하지 마십시오. 옛 사람 중에 그렇게 하신 분이 계시니, 문왕(文王)이 바로 그러한 분이십니다. 만승의 나라를 가지고 만승의 나라를 치는데, 밥을 도시락에 담고 장을 병에 담아서 왕의 군대를 맞이한 것은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는 물과 불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물이 더욱 깊고, 불이 더욱 뜨거울 것 같으면(민심은 다른 데로) 옮겨갈 뿐입니다.” 맹자의 대답은 오직 임금의 눈치를 살피고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재담만을 나누는 순우곤과는 정면으로 대치된다. 맹자는 옛날 문왕은 천하의 삼분의 이를 점령하고 있으면서도 은(殷)나라 백성들이 문왕의 백성이 되기를 희망하지 않았으므로 은을 받들었던 고사를 통해 은근히 선왕의 정복을 꾸짖고 있음인 것이다. 그러자 선왕은 마침내 자신의 다급한 마음을 털어 놓는다. 선왕은 맹자에게 연나라를 쳐서 정복하였음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서 그런 첫 질문을 던진 것이나 맹자가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자 마침내 진, 초, 조의 세 제후국들이 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연합군을 파견하여 정면으로 이 세 나라의 군사들과 대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상황을 설명하고 맹자의 자문을 구하려 하였던 것이다. 선왕은 맹자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 말하였다. “제후국들이 과인을 치려고 논의하는 자가 많으니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그러자 맹자는 대답한다. “신은 70리로 천하의 정치를 한다는 것을 들었으니, 탕(湯)이 그러합니다. 천리를 가지고 남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 儒林(406)-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2)

    儒林(406)-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2)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2) “…빈객은 어리둥절해서 다시 물었다.‘그 이유가 무엇이오.’ 그러자 순우곤은 대답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임금을 뵈었을 때 임금의 마음은 말을 타고 달리는 데 있었소. 두 번째로 임금을 뵈었을 때 임금의 마음은 음악에 끌려 있었소. 임금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설혹 내가 말을 한다 하더라도 이를 귀담아 듣지 않을 것이 아니겠소.’ 순우곤으로부터 말을 들은 빈객은 그 까닭을 혜왕에게 보고하였다. 혜왕은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아, 순우곤은 진실로 성인이오. 선생이 처음으로 찾아왔을 때에는 좋은 말을 바친 자가 있어 그것을 보고 싶어했고, 그 다음엔 마침 구자(謳者:가수)를 데리고 있으므로 음악을 들으려고 하던 차에 선생이 왔던 것이오. 과인은 좌우를 물리면서도 내심은 말과 음악에 끌리고 있었소. 정말 그대로였소.’ 그 뒤에 순우곤이 다시 혜왕을 만나게 되어 한번 입을 열자 사흘 낮 사흘 밤을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되 피곤한 줄 몰랐다. 혜왕은 재상의 자리를 맡겨 대우하려 하였으나 순우곤은 사퇴하고 나라를 떠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안락한 좌석이 있는 사두마차와 비단 한 묶음에 구슬을 덧붙여서 황금 백일을 주었다. 순우곤은 평생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사기에 나와 있는 사마천의 기록을 살펴보면 순우곤은 ‘상대방의 마음을 살펴 그 얼굴빛을 꿰뚫어 보는 최고의 눈치꾼’이자 ‘한번 입을 열면 사흘 낮 사흘 밤을 계속해서 얘기할 수 있는 재담꾼’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순우곤은 평생토록 공식적인 벼슬을 하지 않고 오직 열대부(列大夫)란 명예직에 머물렀으나 세 치의 혓바닥으로 선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유일하게 선왕과 독대할 수 있었던 최측근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순우곤이 한때 선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였던 것처럼 보였던 맹자를 눈엣가시처럼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었을 것이다. 특히 전문적으로 학문한 적이 없었던 콤플렉스를 가진 순우곤으로서는 유가의 맹장이자 공자의 적손이었던 맹자가 자연 증오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물며 1차 설전에서 비참하게 맹자에게 패배하지 않았던가. 언젠가는 맹자에게 통쾌한 복수를 꾀하리라고 절치부심하고 있던 순우곤에게 드디어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기원전 316년, 맹자의 나이 57세 되던 해. 제나라에 이웃한 연(燕)나라에서 전란이 일어났다. 연나라의 왕 쾌()가 대신이었던 자지(子之)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이었다. 그러자 연나라는 극도로 혼란해졌고 내전이 일어나 2년 만에 수만 명이 죽고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그러자 제나라의 선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연나라를 쳐서 50일 만에 연나라를 전부 점령하였던 것이다. 이 전쟁 중에 왕 쾌는 비참하게 죽고, 자지는 행방불명이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 조, 초 같은 나라들이 연합하여 제나라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패도정치를 꿈꾸는 선왕의 속셈을 알고 선왕에게 ‘진나라와 초나라를 점령하고 오랑캐를 복속시켜 천하에 군림하려는 욕망은 나무 위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역설하였던 맹자가 아니었던가.
  • 儒林(405)-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1)

    儒林(405)-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1)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1) 사기에는 순우곤이 자기와 유유상종하였던 신도, 환연, 접자, 추연들의 무리들과 직문학파(稷門學派)를 설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직문학파는 선왕이 만들었던 직하학궁에 머무는 선비들이 결성한 학파였다. 그러나 이들은 사상적으로나 이념적으로 결집된 학파가 아니라 다만 벼슬을 하기 위한 일종의 사적 이익단체인 학벌에 지나지 않았다. 사기에도 이들의 특징을 다만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직문학파였던 이들은 다 책을 저술하여 치란(治亂), 나라의 흥망을 얘기하고 세상의 임금들에게 벼슬을 청했는데, 여기에서 낱낱이 다 언급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직문학파의 선비들은 본능적으로 맹자와 각을 세우며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들은 대부분 황로(黃老)의 도덕을 배운 사람들이었다. 황로란 노자를 말하는 것으로 사기에는 이들이 도가의 추종자임을 다음과 같이 암시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황로의 도덕을 배우고 그로 말미암아 터득한 것이 있어 그 주요한 뜻을 저술하였다.” 그중에서도 순우곤은 이 직문학파의 수장이었다. 선왕은 자기로서는 지키기 어려운 왕도정치를 설법하는 맹자보다는 노자의 도가를 숭상하며 자신의 비위를 좀처럼 거스르지 아니하고 재치 있는 세치의 혀로 즐겁게 하는 순우곤의 무리들을 더 애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마천도 선왕의 이러한 속마음을 ‘맹자순경열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음이다. “…그러므로 선왕은 그들을 칭찬하여 순우곤을 비롯하여 이 모든 선비들을 열대부(列大夫)라고 칭하게 하고, 저택을 번화한 거리에 세워 그들을 높은 문, 큰 집에 들어서 존경하고 천하 제후의 빈객들에게 보여서 제나라가 천하의 어진 선비들을 불러 우대하고 있음을 자랑하게 하였다.” 사마천도 순우곤의 세치의 혓바닥에는 감탄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순우곤을 ‘상대방의 마음을 살펴 그 얼굴빛을 보기를 힘썼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 말은 결국 순우곤은 상대방의 얼굴빛을 보고 남의 마음이나 일의 낌새를 재빠르게 알아챌 수 있는 당대 최고의 눈치꾼임을 암시하고 있음인 것이다. 사마천은 순우곤의 탁월한 눈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재미난 일화를 전하고 있다. “어떤 빈객이 순우곤에게 양나라의 혜왕을 뵙도록 하였다. 순우곤의 소문을 들은 혜왕도 흥미를 느껴서 두 번이나 친견하였다. 그러나 순우곤은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순우곤이 돌아가자 혜왕은 자신에게 추천했던 빈객을 불러 꾸짖으며 말하였다. ‘그대는 순우 선생을 추천하며 옛날의 관중과 안영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였는데, 순우는 과인을 만나고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인은 그와 말할 상대가 못된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된 까닭인가.’ 혜왕의 꾸지람을 들은 빈객은 어이가 없어 순우곤을 만나서 혜왕의 말을 전하고 물으니 순우곤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과연 그렇소. 나는 과연 임금을 뵈었으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소이다.’”
  • 儒林(404)-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0)

    儒林(404)-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0)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30) 맹자는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일정한 생업을 보장해주어야만 백성들의 안정된 마음도 잡아둘 수 있다’고 역설하면서 ‘일정한 생업’을 보장하는 ‘항산(恒産)’이야말로 백성들이 방자함, 편벽됨, 사악함, 사치스러움의 죄에 빠져들지 않고 ‘항심(恒心)’을 지켜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안정된 생업을 만들어주지 않고 백성들이 죄에 빠진 후에야 벌을 준다는 것은 법망에 걸려들도록 그물질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맹자가 현실을 도외시한 채 형이상학적인 도덕만을 부르짖는 세객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맹자야말로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게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경제적 기반부터 닦아야함을 강조한 현실주의자인 것이다. 그러나 맹자의 이러한 간곡한 설법에도 불구하고 선왕은 끝내 맹자의 왕도정치를 수용하지 않았다. 선왕은 맹자에게 객경의 지위를 주고 다른 나라에 맹자를 조문객으로 보낼 때에는 부사(副使)까지 딸려 보내어 존경하는 듯 보였지만 실은 모양새를 갖추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선왕은 직하학궁에 거처하는 천명의 학자들을 우대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포용력을 과시할 뿐 아니라 맹자를 곁에 둠으로서 맹자의 명성을 통해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얄팍한 계산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왕과 맹자와의 괴리감에는 여전히 순우곤이 깊게 개입되어 있었다. 마치 제나라의 경공과 공자 사이에 안영이 개재되어 두 사람의 관계가 소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선왕과 맹자 사이에는 순우곤이 장애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전국시대 최고의 세객이었던 순우곤이 선왕과 맹자의 사이를 이간질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에서 순우곤의 역할에 대해서 강력한 암시를 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우곤은 제나라사람. 박문, 강기하였는데, 전문으로 배운 학문은 없었다. 임금을 간하는 데 있어서는 제나라 안영의 인격을 흠모하고 그것을 본받고 있었다.” 안영은 일찍이 경공에게 ‘지금 공자는 외모와 장식을 성대히 하고 오르내리는 예절과 행동하는 규범을 번거로이하고 있으니, 대를 이어도 그의 학문은 다 배울 수 없고 당대에는 그의 예를 다 터득할 수 없습니다. 임금께서는 지금 공자를 써서 제나라의 풍속을 개량하려 하시나 이는 백성을 위하는 길이 못됩니다.’라고 극간하여 경공과 공자의 사이를 떼어놓았던 대정치가. 그러므로 사기에 기록된 대로 ‘임금을 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안영의 인격을 흠모하고 그것을 본받고 있었던 순우곤’으로서는 공자와 같이 왕도정치만을 주장하고 있는 맹자를 선왕의 곁에서 떼어 놓아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순우곤은 이미 맹자와 예에 관한 설전을 통해 참담한 패배를 맛보지 않았던가. 세치의 혓바닥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던 순우곤은 그 유일한 패배를 통해 ‘전문적으로 학문’을 하지 않았던 학문적 열등의식을 느꼈을 것이며,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수치심을 씻겠다는 강렬한 복수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 儒林(403)-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29)

    儒林(403)-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29)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 (29) 그리고 나서 맹자는 선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전하께서 훌륭한 정치를 펴고 인을 베푸시어 천하의 모든 벼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전하의 조정에서 벼슬하고 싶어 하도록 하며, 경작하는 자들로 하여금 모두 전하의 들에서 경작하고 싶어 하도록 하며, 상인들로 하여금 모두 전하의 시장에서 상품을 팔고 싶어 하도록 하며, 여행하는 자들로 하여금 모두 전하의 길에 나가고 싶어 하도록 한다면 천하에 전하를 미워하던 모든 자까지 다 호소하려 할 것이니 상황이 이와 같다면 누가 감히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패도정치를 꿈꾸는 선왕의 마음을 어떻게든 움직여 왕도정치로 바꾸어 보려는 맹자의 충정은 두 사람의 대화 곳곳에 번득이고 있다. 이에 선왕은 어쩔 수 없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과인은 몽매하여 그대가 말하는 왕도정치에 나아갈 수 없으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뜻을 도와 밝은 지혜로 과인을 가르쳐 달라. 그러하면 비록 과인은 민첩하지 못하지만 장차 시험해 보겠노라.” 그러자 맹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경세지략(經世之略)에 대해서 털어놓는다. 선왕의 질문에 대답한 맹자의 경세철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탁월한 이론이다. 맹자가 2500년 전의 낡은 고인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현대에서도 필요한 현인임을 말해주는 맹자의 경세철학은 21세기에 어째서 ‘유교적 자본주의’가 우리 경제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목표인가를 말해주는 산증거인 것이다. 맹자는 선왕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일정한 재산이 없으면서도 항상 일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직 선비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일반 백성과 같은 경우에는 일정한 수입이 없으면 인하여 항상 일정한 마음이 없어집니다(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 진실로 일정함이 없어지면 방자함, 편벽됨, 사악함, 사치스러움 등을 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니 그리하여 죄에 빠질 지경에 이른 뒤에야 쫓아가서 백성들을 벌준다면 이는 백성들을 그물질하는 것입니다.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그물질하면서 어찌 왕도정치를 하는 거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현명한 군주는 백성들의 생업을 관장하되 위로는 부모 섬기기를 충분히 하며, 아래로는 처자 기르기를 충분히 하며, 풍년에는 1년 내내 배부르게 하고, 흉년에는 굶어죽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백성들을 몰아서 선(善)에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백성들이 따르기가 쉬울 것입니다. 지금은 백성의 생업을 관장하되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부족하며, 아래로는 처자를 기르기에 부족하며, 풍년에는 1년 내내 고생하고, 흉년에는 죽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오직 죽음을 구제하기도 부족할까 우려 될 것이니, 어느 겨를에 예의를 실천할 것입니까. 이제 전하께서 왕도정치를 행하고자 하신다면 그 근본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 맹자가 선왕에게 왕도정치를 펼 수 있는 경세책(經世策)으로 설법하였던 ‘무항산무항심’, 즉 ‘일정한 생산 소득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도 없다’는 이 유명한 명제는 맹자의 핵심사상 중의 하나이다. 맹자가 주유열국에 나서서 첫 번째 방문국이었던 선왕에게 ‘무항산무항심’의 경세지략을 설명하였던 것을 시작으로 예순이 훨씬 넘은 나이로 고향인 추나라로 돌아 왔을 때 이웃나라인 소국 등()에서 문공(文公)이 맹자를 초빙하여 정치고문으로 삼고 맹자에게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합니까.’하고 물었을 때에도 맹자는 여전히 자신의 경세철학인 ‘무항산무항심’을 설법하는 것을 보면 ‘무항산무항심’의 경세지략은 맹자의 사상을 관통하는 핵심철학임을 알 수 있다. 맹자의 ‘무항산무항심’의 경세책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인 것이다.
  • [지금 울진에선] ‘3無’로 친환경농업 메카 만든다

    [지금 울진에선] ‘3無’로 친환경농업 메카 만든다

    경북 울진군이 오지 아닌 오지와 국내 최대의 원전(原電)지역이라는 오명을 벗고 ‘친환경 농업의 메카’로 거듭나고 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를 개최할 만큼 자연친화적 농업을 앞장서서 실천해 나가고 있다. 예로부터 산림이 울창하고 진귀한 보배가 많은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울진은 한반도 동단부에 자리잡은 인구 6만의 미니 자치단체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원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 천혜의 자연조건을 자랑한다. 아울러 푸른 동해의 200리 해안선과 기암괴석, 망양정 등 7개 해수욕장, 성류굴 등 각종 관광자원이 어우러진 관광의 고장이다. ●왕피천에서 푸른 생명의 축제 열리다 이곳에서 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가 열리고 있다. 독일,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네번째다.‘친환경 농업! 인간을 지키는 생명산업’이라는 슬로건으로 오는 15일까지 울진 왕피천 엑스포공원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독일, 프랑스, 미국, 중국, 일본 등 28개국의 친환경 농업 및 관련 단체들과 국내 92개 자치단체 등이 참가해 역대 최고다. 이번 행사는 한국 농업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는 한편 생산자·소비자 모두가 친환경 농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울진농업엑스포의 시작은 김용수 엑스포 조직위원장이 울진군수로 취임한 지난 2002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 위원장이 공약사업으로 농업엑스포 개최를 발표했으나, 주민들은 물론 중앙정부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주위의 이런 냉대에도 불구, 국제 농업 환경이 식량농업에서 생명농업인 친환경 농업으로 급변하는 현실을 직시해 농업엑스포 개최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여기에 울진은 전체 면적(989.07㎢)의 86%가 임야여서 산림 부산물을 퇴비로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데다 전체 농가가 친환경농업을 실천할 수 있는 소규모 경작지 위주라는 이점도 감안됐다. 김 위원장은 “WTO,FTA 체결 등으로 고사 위기에 처한 국내 농업을 살리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농업 엑스포 개최를 구상했다.”면서 “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확신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울진군은 같은 해 12월 엑스포 개최를 위한 기본방향 등을 정한 뒤 2003년 6월 국무총리실로부터 국제행사로 승인을 받아내는 쾌거를 이뤄냈다. 정부의 사업비 보조는 물론 인력·홍보 등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 ●오리·우렁이 등 이용한 특수농법단지 확대 이에 따라 군은 성공적 엑스포 개최를 위해 그 해 9월 조직위 사무국을 출범시키는 한편 친환경농업 기반 조성사업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군은 우선 주민들을 대상으로 ‘3·3·3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이 운동은 ▲3무(無)=무농약·무제초제·무화학비료 농업 실천 ▲3유(有)=메뚜기·허수아비·반딧불이가 있는 들판 조성 ▲3실천=퇴비증산·녹비작물(토끼풀, 풋베기풀 등) 재배·볏집 되돌려주기 등이다. 또 땅심을 높이기 위해 5740㏊ 전체 농경지에 대한 단계적 객토사업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군은 화학비료 및 농약 사용 절감과 오리, 미강, 우렁이 등을 이용한 특수농법 단지 조성을 확대했다. 이런 노력으로 울진군은 2003년 전국 친환경 농업 우수마을 최우수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04년 친환경 농업 대상 자치단체 부문에서 우수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 특히 올해 울진지역 농경지 855㏊에서 생산될 무농약 인증 친환경쌀 ‘울진 생토미(生土米)’ 13만 5000포대(40㎏들이) 중 절반이 훨씬 넘는 8만 포대가 이미 판매 계약된 상태다. ●전체 농지의 15% 친환경농산물 재배 울진군은 농업엑스포 개최를 계기로 올해 말까지 총 74억원의 예산을 들여 친환경 농업 기반조성 면적을 전체 경지면적 5740㏊의 27%인 1549㏊로, 친환경 농산물 인증면적을 경지면적의 15%인 880㏊로 확대 추진할 계획이다. 또 195개 전체 리·동별 토질에 맞는 환경친화형 맞춤비료를 공급하고, 농업인들의 의욕고취를 위해 친환경 농업 실천농가에 ㏊당 60만원의 생산장려금을 지원한다. 울진군은 또 10개 전체 읍·면별 친환경 농업 추진위원회 구성, 농업인 교육, 특수농법 재배단지 등을 추가 조성하는 한편 벼 도정공장을 설치해 농산물의 생산 및 유통 과정까지 일원화시킬 방침이다. 이재동 울진군 부군수는 “농업엑스포의 성공적인 개최와 함께 군의 친환경 농업 육성사업으로 울진은 국내 최고의 친환경 농업지역으로 탈바꿈할 것을 확신한다.”고 자신했다. 울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세계 농업엑스포 현장 가보니 친환경의 땅 울진의 왕피천 엑스포공원을 무대로 펼쳐지고 있는 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는 농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직접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고 있다. 다양한 농업문화 전시 및 공연, 각종 체험행사, 국내외 친환경·유기농산물이 망라돼 있다. 20여만평의 엑스포 행사장에는 ▲친환경 유기농업을 접해볼 수 있는 친환경농업관 ▲조선시대 온실을 재현한 친환경농업문화관 ▲300평 경작지에 미생물을 이용해 과채류를 재배한 유기농 경작지 ▲80여종의 야생화를 심은 야생화관찰관 ▲전통 작물과 오리, 거위, 흑염소 등이 노니는 ‘시골농장’ 등이 마련됐다. 특히 공식행사를 제외하고는 행사기간 내내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하는 체험행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생명·생태환경·문화’를 주제로 한 주제공연과 상설행사가 야외공연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며, 행사장 내에 마련된 전통문화체험마당과 주말농장, 민물고기잡이 체험장 등지에서는 친환경 유기농산물을 직접 수확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전통문화체험장은 짚풀문화, 길쌈, 옹기, 한국의 탈 등 전통농업문화를 되돌아볼 수 있는 학습 프로그램 위주로 짜여져 인기다. 특히 친환경농업관에서는 감자·고구마·옥수수·고추 등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한 작물을 직접 수확하며, 친환경 농업의 중요성을 체득하게 된다. 행사 기간 내내 공연장에서는 친환경을 주제로 한 국내외 공연이 잇따라 열리며, 국방부 취타대 및 전통의장대 시범공연, 미8군 군악대 공연팀 초청공연 등 문화예술행사도 함께 마련된다. 또 매일 오후 2시와 5시 두차례에 걸쳐 친환경농산물 무료 시식회가 열린다. 조직위원회는 효과적인 관람 순서로 정문→울진 금강송 산책로→유기농경작지→친환경농업관→세계관→시골농장→민물고기체험장 건강흙체험관→주공연장→건강먹을거리마당→전통문화체험장→야생화관찰원→바이오산책로를 제시했다. 성인 1만 2000원, 청소년 1만원, 어린이 7000원인 입장권으로는 울진의 관광 1번지인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을 무료 입장할 수 있고, 국내 유일의 자연 용출온천인 덕구온천과 유황온천으로 유명한 백암온천, 신라 고찰 불영사, 향암미술관도 50% 할인받을 수 있다. 조직위는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1일 최대 1만 7000여명의 숙박시설과 행사장 인근 바닷가 1만여평에 24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친환경 캠프촌도 조성해놓고 있다. 군청 전 공무원들은 행사가 끝날 때까지 휴일을 반납한 채 자원봉사에 나서고 있다. 울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김용수 울진군수 “울진친환경농업엑스포에서 인간을 살리는 생명농업인 친환경농업의 모든 것을 체험해 보세요. 분명 인간과 친환경, 유기농법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울진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 조직위원장인 김용수 울진군수는 “올 하계휴가를 자녀들과 함께 친환경농업엑스포가 열리는 ‘땅속까지 깨끗한 울진’에서 보내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며 엑스포 홍보에 열을 올렸다. 김 군수는 “이번 엑스포는 국내외 친환경농산물 재배 및 친환경 농업의 정보, 친환경 제품, 농업문화 체험 등 친환경의 모든 것을 보고, 즐기고, 느낄 수 있는 산교육의 장이 될 수 있도록 알차게 마련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를 통해 생산자·소비자 모두가 친환경농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것을 확신한다.”고 자신했다. 김 군수는 피서철 동해안의 교통이 혼잡하다는 일반인의 인식에 대해 대구∼포항고속도로 및 울진∼영덕 7번 국도 개통으로 서울∼울진 4시간, 대구∼울진 3시간대로 접근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국민들이 농업엑스포를 찾아 식량농업에서 생명농업인 친환경농업으로 전환하는 등 급변하는 국제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침체돼 가는 우리 농업의 활로를 개척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김 군수는 “엑스포에 80만명의 관람객들이 찾을 것으로 전망돼 150억원 이상의 직접적 관광수입이 기대된다.”며 “엑스포 개최로 인한 ‘환경농업 1번지’라는 이미지 구축과 울진의 농·수·축산물에 대한 친환경 제품 인정 등 부수적 효과까지 감안하면 엄청난 효과”라고 설명했다. 친환경 농업에 남다른 열정을 쏟고 있는 그는 국내 최초로 개최되는 농업엑스포를 반드시 성공시켜 울진을 친환경 메카로 육성시켜 나가겠다고 했다. 김 군수는 “엑스포장은 행사가 끝난 뒤에도 친환경농산물 장터 및 전국 친환경 농업 상설교육장으로 운영하는 등 국내 친환경 농업의 중심센터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울진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儒林(402)-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28)

    儒林(402)-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28)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 (28) 왕께서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것은 나뭇가지를 꺾는 일처럼 쉬운 일이라는 맹자의 설명은 ‘실현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왕도정치는 곧바로 실행할 수 있다. 왕도정치는 백성을 위한 정치이므로 선왕에게 짐승까지도 불쌍히 여기는 어진마음이 있는 것을 보면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당연히 있는 것이므로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맹자는 선왕에게 구체적으로 왕도정치를 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내 집 노인을 노인으로 섬긴 뒤 그 마음이 남의 집 노인에게까지 이르며, 내 집의 어린이를 어린이로 사랑한 뒤 그 마음이 남의 집 어린이에게까지 이른다면 천하를 손바닥에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老吾老 以及人之老 幼吾幼 以及人之幼 天下可運於掌)’라는 설명을 통해 모든 사람이 한마음 한뜻이 되는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 왕도정치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라고 말을 덧붙인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선왕은 여전히 마음이 흡족하지 않았다. 선왕은 여전히 패도정치를 꿈꿔 천하의 패왕이 되고 싶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선왕의 마음을 읽은 맹자가 다시 물었다. “전하께서는 전쟁을 일으켜 군사와 부하들을 위태롭게 하고, 제후들과 원한을 맺은 뒤에야 마음이 편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선왕이 대답하였다. “아니다. 어찌 그것이 마음이 편하겠는가. 과인은 다만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구하려 할 뿐인 것이다.” 이에 맹자가 정색한 얼굴로 묻는다. “도대체 전하께서 크게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맹자의 질문에 선왕은 그저 웃기만 했다. 매사에 인의를 강조하는 맹자 앞에서 패왕이 되고자 하려 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겸연쩍었기 때문이다. 맹자는 그런 선왕의 의중을 살피며 짐짓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전하,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과 가볍고 따뜻한 의복이 부족하기 때문이십니까. 아니면 여색이 부족하기 때문이십니까.” “아니다. 과인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선왕이 정색을 하고 고개를 저어 대답하자 맹자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하였다. “그러하시다면 전하의 대망을 알 수 있겠습니다. 진나라와 초나라를 점령하여 천하통일을 하여 사방의 오랑캐들까지 복종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십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무력으로 소원을 이루고자 하신다면 이는 ※‘나무 위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단호한 맹자의 대답에 선왕이 되물었다. “아니 그것이 그토록 심한 일인가.”“오히려 그것보다 더 심한 셈이지요. 나무 위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은 비록 물고기만 구하지 못할 뿐 다른 재앙은 없습니다. 그러나 갑병(甲兵)을 일으켜 천하의 패자가 되려 하신다면 마음과 힘을 다하여 노력하더라도 뒤에는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연목구어(緣木求魚).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어리석음을 비유하는 말’로 맹자가 선왕에게 설법하였던 ‘나무 위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한다.’는 내용에서 유래된 고사성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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